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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01.

#소오의 한숨

- 천산 집하촌 불문객잔.

소오는 매대에 기대서선 한숨을 깊게 내쉬었다.

장사가 잘되던 것도 옛말. 객잔은 그저 의리로 찾아와 술이나 깨작이는 손님들이 전부였다.

여기만 그런 것도 아니었다.

집하촌 전부가 그랬다.

기상천외한 물건들을 내어놓던 시장통은 텅 비었고, 손님 대신 험상궂은 녀석들로 가득해졌다.

이를테면.

"비우라고 한 지가 언젠데 아직도 장사질인 것이냐?"

예의 없이 문짝을 걷어차고 들어와서는 성질부터 부리는 이놈들.

산왕가(山王家)의 졸개들 말이다.

"다들 놀라지 말고 먹던 거 마저 먹으라고. 그래도 의리로 와줬는데 빈속에 보낼 순 없지. 마셔."

소오가 손님들을 진정시키곤 산왕가의 무사들을 마주했다.

"이봐, 형씨들. 시비도 좀 상황 봐 가면서 거는 게 어때. 이게 지금 장사하는 거로 보여? 파리 날리는 거 안 보이냐고."

"흥, 그러게 대 오군장(五軍匠)이신 문충 님께서 친히 밑으로 들어오라 기회를 주셨거늘. 뭐 잘났다고 뻗대느냐? 뻗대기를."

"하아."

딱 봐도 좋은 관계는 아니다. 절로 한숨이 뱉어지는 상황.

설명하자면 길지만, 요약하자면 간단했다.

3년 새에 집하촌 북부를 담당하던 부족 산왕가가 마교에 완전히 흡수된 것.

해서 산왕가가 이곳을 전부 관리하게 되었다.

비단 이들뿐만도 아니다.

마교는 근래 인근 세력들과 고수들을 닥치는 대로 천산에 끌어들였다.

말로는 세의 확장이나 실상은 아수라장.

색마고, 마적이고 가리지 않고 받은 탓에 사건 사고가 끊이지 않았고, 강하기만 하면 자리까지 내주어 체계는 엉망이 됐다.

오죽하면 이젠 진짜 마교(魔敎)가 되었다는 말까지 돌았다.

이곳 집하촌도 같은 맥락으로 별반 다르지 않았다.

설치는 산왕가와 피해받는 신도들.

딱 그 정도로 정의하면 간단했다.

그리고 하필 웃대가리 중 하나가 소오의 실력을 눈여겨보곤 이 난리를 피우는 것이고.

물론 마교가 이 꼴이 난 데엔 분명한 이유가 있었다.

"형씨. 말했잖아. 이미 난 충성을 맹세한 사람이 있다니까?"

"누구. 크큭. 3년 전 무책임하게 실종된 부교주 말이더냐?"

"...!"

"뭐, 덕분에 우리는 천산에 들어와 편해졌지만."

장내가 싸늘히 얼어붙는다.

"왜. 내가 틀린 말이라도 했느냐?"

"아니, 맞아."

확실히 시작점은 그게 맞다.

3년 전.

교주와 부교주가 사이좋게 증발하듯 사라져 버렸다.

덕분에 마교 지휘 체계는 엉망진창이 됐다.

살았는지 죽었는지라도 알면 좋겠거늘.

이 사달이 나도록 도대체 어디서 뭘 하고 있는 건지.

생각하니까 또 열받네.

"알면 죽었는지 살았는지도 모를 부교주는 그만 잊고 너도 대세를...."

"근데!"

소오가 정색한 채 검은 색안경을 올려 쓰며 말했다.

"내 앞에서 장형 얘기 꺼내고 멀쩡히 기어나간 놈이 없는데. 그건 알고 있나?"

솨아아아아!

그러자 음산한 어둠의 살기가 그의 몸에서 자욱이 퍼졌다.

"흐, 흣!"

산왕가의 졸개들이 진땀을 흘리며 뒤로 물러섰다.

그들이 감당하기엔 너무도 강한 기백.

객잔 주인이기 이전에 시체 먹는 까마귀. 백오문의 소문주다!

"죽고 꺼질래? 그냥 꺼질래."

"히이익!"

졸개들이 사색이 된 채 뛰쳐나가려던 그 순간.

"오군장이신 문충 님께서 행차하셨다! 불문객잔의 주인은 당장 밖으로 나와 맞이하라!"

...빌어먹을.

"흐, 흐흐. 하하하하! 이 새끼가 어디서 갑자기 무게를 잡느냐? 깜짝 놀랐네. 냉큼 밖으로 나오거라!"

졸개들이 안도의 땀을 닦아내며 밖으로 후다닥 달려 나갔다.

소오는 안쓰럽게 바라보는 손님들을 애써 달래주고는 밖으로 나섰다.

*

오군장(五軍匠).

산왕가를 이루는 다섯 기둥이자, 실력이 당주에 버금간다고 알려진 강자들.

그중 문충은 마지막 다섯 번째이자 청동대장(靑銅大將)으로 불리는 자였다.

별호에 걸맞게 외관 역시 실로 위압적.

웬만한 장정보다 머리 두 개는 더 컸고, 청동 갑주로 무장한 채 긴 곱슬 장발을 풀어헤쳤다.

두툼한 입술과 단단하고 큰 아래턱. 여기에 매부리코와 부리부리한 눈매를 더하면 얼핏 기괴함까지 자아냈다.

한마디로 무섭게 생겼다는 얘기.

하지만 더 무서운 건 그가 입을 열었을 때였다.

"오랜만이로군요. 나의 소오 군."

속이 다 메스꺼울 만큼 느끼한 음색과 과도한 손짓.

소오는 속에서 올라오던 아침 식사를 간신히 돌려보내곤 답했다.

"한참 자리 비운다더니 어쩐 일로 여기까지 오셨나."

"후후후. 아닌 척하면서 내 소식을 모두 꿰고 있었군요. 나의 소오 군?"

"그쪽이 직접 말하고 간 거거든?!"

"내 말을 그리 오랫동안 잊지 못하고 계셨습니까? 귀엽군요, 소오 군."

아, 이 새끼 그냥 한 번 뜰까.

소오가 이마를 척 짚고 잠깐 고민에 빠졌다.

하나 역시 그건 아니다.

주변만 봐도 이미 그의 수하들만 일백이 넘고, 문충은 진짜 힘을 쓰지 않으면 상대하기 어려운 고수.

더구나 집하촌은 그의 관리구역.

문제 생기면 저만 골치 아프다.

"됐고. 밑으로 들어오란 얘기 하러 온 거면 돌아가. 그럴 생각 추호도 없으니."

"후후후. 그 말을 하러 온 게 아닌데. 소오 군도 속으론 원하고 있었나 보군요."

"뭐야. 아니야? 그럼 뭔데."

"오늘부로 소오 군이 나 문충의 부관이 되었음을 통보하러 왔습니다."

"더 최악이잖아!"

소오가 소리를 빽 내지르자 문충은 변태처럼 웃으며 답했다.

"후후훗! 이미 위에서 내린 결정이니 토 달지 마시길. 오늘부터는 어딜 가든 내 옆에 함께 하는 겁니다."

"장난쳐? 직책이 없는 거지, 나 너랑 같은 3급귀야. 근데 누구 마음대로 통보를 해?"

"누구겠습니까. 대 천마신교의 주인이신 교주님께서 명하신 거지요."

소오의 미간에 주름이 깊게 파였다.

확실히 지난 3년간 마교의 지휘체계가 엉망이 된 건 수장인 장이서와 진우광이 사라졌기 때문이다.

그건 부정할 수 없는 분명한 사실.

하지만 아수라장이 된 건 그들 때문이 아니다.

진짜는.

"교주님이 아니라 교주 대행이겠지."

봉문을 깨고 가장 윗자리까지 치고 올라간 대공자 천무기 때문이었다.

두 사람이 사라지고 한동안 텅 비어있던 왕좌를 숨죽이고 있던 그가 신분을 들먹이며 꿰차버린 것.

이후 따르지 않는 요직은 모두 좌천됐고, 후계들은 새외 정벌을 빌미로 전장을 떠돌았다.

반면 충성을 맹세한 새외 세력은 무혈입성하여 천산의 권력을 쥐었다.

그 결과가 바로 지금이었다.

"이번엔 빠져나갈 수 없을 겁니다, 소오 군."

"빌어먹을...."

"또한! 오늘부터 부관이 되어 내 방에서 불침번을 서십시오, 소오 군."

"x발! 누가 봐도 제일 안전해 보이는 새끼 방에 무슨 불침번이야! 그리고 자꾸 내 이름 뒤에 군 붙이지 마!"

"소오 군을 모시거라. 깨끗이 씻겨 내 방에 데려다 놓도록."

"이 미친놈이?!"

소오가 당황하며 좌우를 살폈다.

하나 무정하게 길을 좁혀오는 산왕가의 무사들.

"오지 마. 오면 내가 가만히 있을 것 같아?"

"거부하면 본교의 명을 어기는 것! 그럼 그땐 부관이 아니라 내 노예로 오게 될 겁니다. 아니, 어쩌면 그걸 원했던 걸까요, 소오 군? 후후훗."

"제발 좀 닥쳐!"

소오의 낯빛이 사색으로 물들고, 주변을 살피며 경계 자세를 취했다.

결국 이렇게 진짜 힘을 쓰게 되는 건가.

낭패감에 진땀이 흐른다.

한데 바로 그때.

탕!

불문객잔의 문이 활짝 열리며 새하얀 멱리를 쓴 장신의 공자가 모습을 드러냈다.

"음?"

일순 모두의 시선이 그에게로 쏠리고, 이어 가장 먼저 객잔에 들이닥쳤던 졸개들의 눈이 띠용 커졌다.

"저런 놈은 없었는데?"

"그러게요."

아무리 생각해도 객잔 안에는 별 볼 일 없는 놈 서넛이 전부였기 때문.

물론 반대편 문에서 들어왔을 수도 있겠으나 거긴 교외의 영역.

저들의 허가 없이는 절대 불가능하다.

뭣보다 저렇게 허우대가 좋은 자라면 눈에 띄어 몰랐을 수가 없다.

"뭐 해? 치우지 않고."

"예!"

하나 뭐든 뭔 상관이랴.

중요한 건 지금 이 자리에서 주목받을 놈은 아니라는 것.

"거슬리지 말고 꺼지거...라아악!"

퍽! 공자를 밀쳐내려던 무사 하나가 역으로 내지른 일장에 얻어맞더니 빛줄기처럼 날아가 담벼락에 처박혔다.

와르르. 그대로 무너진 돌 더미에 깔려버린 무사.

모두의 눈이 띠용 커졌다.

'보통 놈이 아니구나!'

'누구지?'

꿀꺽. 마른침을 삼키며 무언의 긴장을 표했다.

가볍게 친 일장에 이 정도 위력이면 최소 오군장 급.

슬그머니 졸개들이 청동대장 문충의 눈치를 살핀다. 어찌하냐는 물음.

이에 문충은 한심하다는 눈초리로 답하곤 걸어 나가며 말했다.

"이런. 소오 군에 이어 또다시 흥미로운 소자(少者)가 나타나 버린 걸까요? 하지만 내 수하를 건드린 대가는 꽤 가혹하답니다. 후후훗."

우우웅!

문충의 눈이 무섭게 더 커지고, 몸에선 막대한 양기가 뿜어져 나왔다.

어느새 몸 주변 공기는 이글거리고, 차갑던 기온은 뜨거워졌다.

이에 수하들도 움츠러들었던 어깨가 쫙 펴졌다.

청동대장 문충을 오군장에 앉을 수 있게 해준 그의 성명절기!

설산의 눈보라도 그에겐 닿지 못한다는 북두양공(北斗陽功)이기 때문.

이 정도면 상대도 지레 겁먹을 수밖에 없는 일.

한데.

"아, 쫑알쫑알 되게 시끄럽네."

하얀 멱리의 사내는 경박하기 그지없는 말투로 코웃음을 치며 다가섰다.

"지금... 내게 한 말일까요?"

문충의 커다란 하관이 파르르 떨리고 눈은 더 무섭게 떠진다.

한데.

"어이, 객잔 주인. 잘 있었냐?"

그의 물음은 철저히 무시한 채, 소오에게 다가가 인사를 건넨다.

"어, 어...."

소오도 아는 눈치인지 오만 표정이 다 드러났다. 기쁨과 서러움. 그리고 무한한 반가움. 그냥 너무 좋다는 얘기.

"감히 나도 받아보지 못한 소오 군의 마음을...?!"

덕분에 문충의 분노는 극에 다다랐다.

고오오오!

북두양공의 열기는 더 강해져 그의 수하들은 신음을 뱉으며 열 걸음을 물러섰고, 소오도 인상을 찌푸리며 소매로 얼굴을 가렸다.

하나 정작 하얀 멱리의 공자는 태연하기만 하다.

"소오 군? 야, 객잔 주인. 너 쟤랑 그런 사이냐?"

"무슨 그런 망언을 하십니까. 전혀 아닙니다. 남입니다. 아니, 남보다 못한 사입니다."

"소오 군! 교주님께서 내린 명을 잊은 겁니까? 당신은 내 부관을 명 받았습니다!"

"아, 그런 거야? 그 인간이 나 없는 동안 또 행패를 부리고 있었구만."

하얀 멱리의 공자가 다 알겠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곤 문충을 보며 일언했다.

"어이, 쭉정이."

"쭈, 쭉정이...?!"

"오늘은 내가 기분이 좋으니까 그냥 가라."

나름 배려해 준 말이지만, 문충은 마침내 참을성이 한계에 다다랐다.

이내 성큼성큼 걸어가 한 걸음을 앞에 두곤 우뚝 섰다.

"소오 군. 아무래도 우리의 첫날밤은 조금 미뤄야겠습니다. 오늘은 먼저 손 봐줘야 할 소자가 생겼군요."

"후회할 텐데?"

후회? 그딴 건 애송이 들이나 하는 것. 문충의 눈에 시린 살기가 서렸다.

"후후후, 나 청동대장 문충. 소자께 세 수를 양보해 드리지요."

"세 수는 무슨. 넌 한 수면 돼."

"나 청동대장 문충의 몸은 양기로 다져져 강철보다 단단한...."

"다."

그때였다. 공자의 주먹에서 거침없는 열기가 터져 나오기 시작한 것은.

"뭐지요?"

이해할 수 없는 상황에 일순 당황에 빠졌다. 하나 물어봤자 들려오는 대답은 하나였다.

"다."

302.

#바뀐 것들

화르륵!

"으헉!"

공자의 주먹에 불꽃이 서린다. 심지어 주변에선 너무 뜨거운 열기에 다들 뒷걸음질을 치며 물러섰다.

양공을 익힌 문충마저도 두 눈이 벌게질 정도로 뜨겁다.

"후후훗, 어디서 사술이라도 익힌 것일까요?!"

하나 백날 물어봤자 다음에 들려올 답은 하나뿐.

"익."

우우우웅!

전신을 짓누르는 가공할 기세!

문충은 땀을 뻘뻘 흘리며 그제야 깨달았다. 자신의 힘이 반딧불이라면 상대는 태양이었음을.

"세, 세 수가 끝났군요! 양보는 여기까지!"

"세 마디 말한 게 다잖아!"

소오가 어이가 없어서 소리쳐 봤지만, 이미 늦었다.

"키요호오오옷!

문충은 거침없이 허리춤에서 칼을 뽑아내곤 전력을 다해 기습 공격을 내질렀다.

쐐애애액!

빠르다!

하지만 하얀 멱리의 공자는 더 빠르게 왼손을 들어 척! 검날을 잡아냈다. 그러곤 칼날을 챙! 깨트리곤 씨익 웃으며 마지막 한 마디를 뱉었다.

"권."

이라고.

"자, 잠깐...."

꽈아아앙!

"끼요오오오오옷-!"

이내 저 머나먼 길 끝을 지나 보이지 않는 지평선을 향해 유성이 되어 사라지는 문충.

"...!"

"어, 어떻게...."

도저히 보고도 믿을 수 없는 결과가 벌어졌다.

그의 수하들은 그저 입만 떡 벌렸다.

문충이 누구인가.

가장 뒤늦게 합류한 막내이긴 하나 명색이 산왕가의 오군장이고, 천산의 주인에게 이곳 집하촌의 관리를 명받은 자다.

한데 그런 그가 떠나버렸다.

그것도 아주 멀리.

"이, 이놈! 네놈이 지금 무슨 짓을 저지른 줄 아느냐?!"

"당장 저놈을 포위해라!"

스릉! 일백에 달하는 무사들이 모두 칼을 빼 들고 하얀 멱리의 공자를 에워싼다.

도망 안 간 것만 봐도 어설픈 잔챙이들은 아니라는 얘기.

하나 이럴 땐 한마디면 충분했다.

"구유."

"...!"

그러자 산왕가의 무사들 표정이 한순간에 공포에 휘감겼다.

그들이 아는 구유는 오직 하나뿐이기 때문.

자신들을 패망 직전까지 몰아넣었던 흉노족의 괴물.

"저, 전장의 용?!"

아니, 그건 3년 전에나 통하던 얘기.

이제는 칠소궁의 수호룡(守護龍).

권마(拳魔) 구유다!

콰아앙!

하늘에서 포물선을 그리며 유성처럼 떨어져 내린 적안의 사내.

"불렀는가, 주인."

그를 본 무사들은 혼비백산한 얼굴로 바들바들 떨기 시작했다.

이는 단순히 구유가 두렵기 때문만이 아니었다.

그와 철천지원수였던 건 다 옛날얘기.

그저 알아버렸기 때문이었다.

구유가 주인이라고 부르는 저 하얀 멱리 공자의 정체를 말이다.

그건....

마오오오오오오-!

좌우 건물 지붕 위에 우뚝 선 일백 명의 괴물들.

칠무위의 수장.

"여, 염제(炎帝)...."

염제 마오.

바로 그라는 것을 말이다.

그렇다.

지난 3년간 바뀐 건 비단 마교뿐만이 아니었다.

혼란의 격변기에서 가장 많이 변한 건, 교주 대행직을 차지한 대공자 천무기도.

새로운 권력의 중심이 된 산왕가도 아니었다.

염제(炎帝) 마오.

천무기가 죽으라고 보낸 새외 정벌을 번번이 기적처럼 승리로 이끌며, 이제는 천산을 넘어 새외의 절대 강자로까지 자리매김한 바로 그였다!

망나니였던 과거?

누가 감히 지금 그를 보고 그리 말할 수 있겠는가.

목숨이 두 개여도 감히 꺼낼 수 없는 말이다.

휙!

하얀 멱리의 공자. 아니, 마오가 모자를 벗어 던졌다.

그러자 붉은 머리의 미공자가 모습을 드러낸다.

얼굴엔 어느새 앳된 모습이 사라지고, 완벽한 절세 미남이 자리했다.

"가주한테 가서 똑똑히 전해. 한 번만 더 내 사람 건드리면 가만 안 둔다고."

"히, 히이이익...."

챙! 마오의 섬찟한 기세에 잔뜩 눌린 무사들은 결국 칼을 떨구곤 바닥에 무릎을 꿇었다.

망했다.

절망감이 머릿속을 가득 메운다.

하나 어쩌겠는가.

아무리 대공자 천무기와 적대 관계라 하나 마오는 태생부터가 다른 1급귀.

몰라보고 한 짓이라도 칼을 뽑은 순간부터 대역죄인이다.

천하의 염제에게 죽지 않고 살아남은 것 자체가 기적.

물론.

"칠공자님...."

"우하하하! 잘 있었냐? 대체 꼴이 이게 뭐냐?"

여전히 제 식구들에겐 한없이 천진난만한 소년이지만 말이다.

근 일 년 만에 정벌을 마치고 돌아온 마오와 소오가 재회했다.

*

"그동안 어떻게 지내신 겁니까?"

불문객잔으로 돌아온 소오는 2층에서 귀한 백사주(白蛇酒)를 품고 내려와 따르며 물었다.

"나야, 잘 지냈지."

이에 마오는 여행 다녀온 것마냥 호탕하게 웃으며 답했다.

하지만 소오는 물어놓고 아차 싶었다.

뒤에 시립한 구유. 객잔 안 곳곳을 살피며 경계하는 과평과 아신.

이외에도 보이진 않지만 바깥을 철옹성처럼 지키고 있는 칠무위의 기백.

그리고 무엇보다도....

웃는 모습과 달리 무섭도록 정제된 마오의 눈빛.

이는 그의 지난 시간이 얼마나 매서웠고 고되었는지를 말해주는 방증이리라.

차마 무용담으로 늘어놓을 수도 없을 만큼 피비린내가 가득한 시간 말이다.

"자자, 한잔해!"

마오의 속 좋은 제안에 소오는 애써 웃음을 지으며 술을 받았다.

"그나저나 여기는 어때. 보아하니 역시 썩 좋아 보이지는 않지만."

남의 안부만 묻는 모습에 절로 마음이 대견해진다. 다 컸네, 우리 칠공자님.

"다들 죽지 못해 삽니다."

"왜. 그 개자식이 못살게 굴어?"

이젠 큰형에서 개자식이 되어버린 천무기 얘기다.

"그거야 뭐 당연하죠."

"그럼 뭐가 더 있어?"

"이번 겨울엔 폭설이 많이 내려 다들 곡식 마련이 힘든 상황입니다. 하루에 한 끼 먹는 것도 다행이랄까요."

마오가 눈살을 찌푸렸다. 오면서 어렴풋이 보기는 했다. 나무며 땅이며 죄다 새하얀 눈으로 옷을 입고 있었으니.

"대곡고는 어쩌고. 거기라도 열면 되잖아."

그래 주면 너무 고맙겠지만, 그것도 쉽진 않았다. 일단 교주 대행인 천무기의 허락이 있어야 하기 때문.

"금룡당주는 가능하잖아. 그 양반하고 얘기해 봤어?"

"당연히 해봤죠."

하지만 만금수는 건의를 올리자마자 당주직에서 경질되었다.

"장난쳐?"

마오가 분개하며 벌떡 일어섰다. 하지만 딱히 놀라울 일도 아니었다.

만금수가 늦은 거지, 장이서와 조금이라도 연이 있는 자들은 이미 진작에 물갈이된 지 오래.

심지어 방식도 과거와 달리 아주 교활했다.

만리신조 묘채경은.

'부교주님을 첩자로 몰아세운 죄. 정직으로도 부족하다. 당원으로 좌천이다!'

'이게 무슨 개 짖는 소리야?! 내가 일등 공신인데!'

징그럽게도 과거의 죄를 물고 늘어졌다.

흠잡을 게 없던 영리한 호랑이 지대호는.

'도라옥 관리 미흡에 대한 죄로 잠시 가주셔야 되겠습니다.'

'크하아아앙!'

그보다도 더 오래전의 죄를 물었다.

마오가 사라진 취선루도 천무기의 먹잇감이 될 뻔하였으나....

'여기 술맛 왜 이래? 지금부터 전수 조사를 진행하... 커헉?!'

'뱉지 말고 삼키거라. 그게 네 삶의 마지막 독주(毒酒)일 테니.'

감히 범접할 수 없는 무시무시한 존재로 인해 무사히 넘어갔다.

다만 손님도 끊겨 문을 닫아야 했지만.

그나마 다행인 건 용태와 메기는 만광과 청해지부로 보내 화를 피했다는 것.

"최악이네."

"최악이죠."

챙! 탄식을 뱉으며 두 사내가 술잔을 부딪친다.

"오늘따라 술이 참 쓰다. 써!"

쓴 게 아니라 사실 백사의 독이 조금 남아 있는 것이지만 알게 무엇인가.

이토록 세상이 야속한데.

"그냥 내가 가서 확 들이받아 버릴까?"

솔깃한 말이다. 지금의 염제 마오라면 해볼 만도 할 터.

하지만.

"대신 칠공자님은 역모죄로 뎅겅뎅겅 목이 잘리시겠죠?"

"어째서!"

"잊으셨습니까? 우사와 좌사께서 대공자를 교주 대행으로 인정한 거. 신패도 받았지 않습니까. 칼 겨누면 역모입니다."

그랬다. 이것이 바로 그 누구도 천무기에게 대항할 수 없는 이유였다.

돌연 천마전의 문을 열고 나타난 광명사자가 천무기의 정변을 인정해 버린 것.

오죽하면 이 일로 인해 일장로 마일성과 장로들은 스스로 봉문을 선언하며 문을 걸어 잠그기까지 했다.

"최근에는 아예 천마전으로 들어갈 거라는 소문도 돌더라고요. 대놓고 자기가 교주하겠다는 거지."

"젠장! 하여튼 그 자식 사라지고 남은 사람들만 생고생이지. 빠져 가지고."

그 자식.

이제는 듣기만 해도 그리워지는 그 말.

"대체 어디서 뭘 하고 있는 걸까요."

"글쎄."

마오와 소오를 비롯해 구유 또한 한숨을 삼킨다.

그리운 그 자식, 장이서.

대체 그는 어디서 무얼 하고 있는 것일까.

* * *

어느 이름 없는 숲.

한 사내가 자그마한 연못 가운데 놓인 암석 위에 가부좌를 틀고 앉아 있다.

옷가지는 벗은 것이나 다름이 없고, 수염도 덥수룩한 게 그야말로 자연인이다.

햇살마저 그를 평온히 비추니 지상 낙원이 따로 없다.

한데 누가 그랬던가.

시점에 따라 희극도 비극이 될 수 있다고.

멀리 보면 지금이 딱 그랬다.

"크르르."

황색 빛 고운 털에 날렵한 검은 줄무늬.

부리부리한 눈매에 심상치 않은 이빨.

산군이라 불리는 호랑이가 하나도 아니고 십여 마리나 연못으로 모여들고 있던 것.

본디 범은 소수 무리를 짓거나 홀로 사냥 생활을 하는 것이 원칙.

하나 동족에 대한 관용성이 높아 이곳 연못은 함께 공유하곤 했다.

한데 감히 그 신성한 연못에 겁도 없이 인간 따위가 기어 올라가 있으니 열이 받나, 안 받나.

이걸 참아내면 범이 아니라 개다.

"크르르르!"

가장 덩치가 큰 범이 대표로 첨벙! 연못을 디디곤.

"크허어어엉!"

거친 포효와 함께 사내를 향해 날아들었다.

한데 바로 그때.

사내의 눈이 번쩍 떠지자.

"깨갱!"

날아들던 범이 천박한 비명과 함께 바닥에 나동그라졌다. 뭐 한 것도 없었다. 그저 사내와 눈이 마주친 게 다였다.

한데도 혼자 널브러지더니, 겁에 질린 개마냥 고개를 바닥에 낮추고 슬그머니 올려 뜬 눈으로 눈치를 살폈다.

다른 범들은 영문도 모른 채 혼란에 빠졌다.

대장이라는 새끼가 지금 뭐 하는 짓인가.

호랑이가 자존심이 있지.

하나 그도 잠시뿐.

이어 사내를 바라본 순간 깨달았다.

"...!"

대장은 살기 위한 최선을 다하고 있다는 것을.

범들은 굳어진 석상처럼 자리에 멈춰 서서는 슬그머니 고개를 피했다.

일부는 아무것도 못 본 것처럼 배를 까뒤집고 앞발로 세수를 했다.

살기(殺氣).

사내에게서 빛줄기처럼 사방으로 번져 나오는 이 지독한 살기가 그래야만 산다고 알려주고 있기 때문이었다.

심지어 사내와 눈이 마주친 것도 아니었다.

그의 시선은 공허하리만치 담담했고, 그저 먼발치 숲속을 바라보는 게 전부였다.

정확히는 어둠 속에서 제게로 다가오는 이를 지켜보고 있었다.

"이제 조금은 봐줄 만하구나."

세월이 얼마나 흐르든 절대 변하지 않을 백발의 미공자.

그 이름도 찬란한 천산의 신.

"썩 성에 차지는 않지만."

천마 진우광을 말이다.

털북숭이 사내는 자리에서 일어나 얕게 한숨을 삼키곤 인사했다.

"오셨습니까, 사형."

그렇다. 믿을 수 없지만 이 지독한 살기의 주인이 바로.

3년 전 사라져 버린 부교주 장이서였다!

303.

#오랜만입니다

"여기서 평생 있고 싶은 게 아니라면 그 같잖은 꼴부터 정리하고 따라오거라."

진우광은 뒷짐을 진 채 다시 돌아 사라졌다. 이에 장이서는 픽 웃고는 중얼거렸다.

"거, 오랜만에 만난 사제한테 말 좀 곱게 하시지."

부아아앙!

말이 끝나기 무섭게 숲속에서 거침없이 날아드는 지풍!

하여튼 귀도 밝다니까.

이에 장이서는 한 손의 검결지로 탕! 쳐내고, 다른 한 손은 뒤로 쭉 뻗었다.

쐐애액!

그러자 어딘가에서 옷가지가 화살처럼 날아와 스륵 손에 잡힌다.

지풍을 날려버림과 동시에 제 옷을 격공섭물로 잡아낸 것.

쿠구구궁!

반면 방향을 잃은 천마의 지풍은 나무 수십 그루를 박살 낸 뒤에야 홀연히 사라졌다.

남들이 봤다면 기절초풍했을 일.

대체 3년간 어떻게 살아온 건지 감히 짐작도 안 된다.

장이서는 단숨에 옷을 환복하고, 단도로 수염을 쳐낸 뒤, 머리를 올려 묶었다.

그러자 숨겨진 번듯한 용모가 드러났다.

조금은 더 마른 듯하나 훨씬 깊어진 눈매에 사내다움이 더 강해진 모습.

"얼마나 더 기다리게 할 셈이냐!"

"갑니다!"

살짝 굽어진 그의 다리가 펴지는 순간.

팟!

햇살이 비추는 평온한 연못만이 남겨졌다.

겁에 질려 벌벌 떠는 범들과 함께.

*

천마가 기다리고 있는 곳은 층고가 매우 높은 커다란 동굴이었다.

정확히 말하자면 두 개의 석상이 마주 보며 놓여 있는 곳.

그렇다.

3년 전, 장이서가 그의 손에 절벽에서 떨어져 처음 왔던 바로 그곳이었다.

초대 천마와 천마귀의 석상이 놓인 혈교의 유일한 기록.

애초에 장이서는 멀리 있던 게 아니었다.

처음부터 지금까지 쭉.

이곳에 있었던 거다.

천마전 뒤편에 놓인 금역에!

"이제 곧 혈교가 다시 움직일 것이다."

천마의 뒤에 다가서자 그의 입이 나지막이 열렸다.

드디어! 자그마치 3년이었다. 음지에 숨어든 놈들이 고개를 빼꼼 내밀고 기어 나오기를 기다린 시간 말이다.

"준비가 꽤 길었네요."

"그만큼 놈은 더 강해졌겠지."

장이서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놈. 아직도 기억이 생생했다. 붉은 면류관을 쓰고 마을 사람들을 학살하던 괴물.

그리고 무자비한 검기를 날리던 흑백모(黑白毛)의 중년인과 사술을 부리던 맹인.

3년간, 그들을 단 한 번도 잊은 적이 없었다.

"물론 강해진 건 너 역시 마찬가지지만."

천마가 고갤 돌려 마주 보곤 씨익 웃는다.

마치 자신의 업적을 바라보듯.

이어 선언했다.

"준비는 끝났다."

장이서는 보다 진중한 몸가짐을 하고선 귀를 기울였다.

"본교와 네게 해가 되는 존재가 있다면."

천마는 섬찟한 미소와 함께 말했다.

"부숴라."

대상은 중요치 않았다.

"그게 혈교이든, 중원이든."

혹은.

"본교이든."

그 무엇도 가리지 말고 부수라고.

"그것이 바로 나 천마의 사제인 너만이 걸을 수 있는 길이니."

그러니까.

"가서 너의 소임을 다하여라."

이에 장이서는 부복 대신 포권을 취하며 진심을 다해 답했다.

"그간 감사했습니다, 사형."

휘이잉!

동굴 속에 잔잔한 바람이 불고, 둘이 있던 석상 사이에는 천마 진우광만이 홀로 남겨졌다.

"우선 본교부터 제자리로 돌려놓아야 할 것이다. 널 위한 선물을 마련해 두었으니. 후후후."

천마의 음산한 웃음소리가 자욱이 동굴 안을 타고 흘렀다.

* * *

- 일소궁 흑화원.

3년 전 봉문에 처했을 때.

세상은 모두 그의 미래가 안개로 가득 찼다고 생각했다.

이후 흑화위가 독살당하고 밤마다 비명이 울려 퍼졌을 땐, 더는 재기할 수 없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아무도 예상하지 못했다.

색바랜 검은 불꽃만이 가득했던 그의 장원이.

흑화위가 파묻혀 있는 그의 무덤이.

이리도 화려한 궁궐로 탈바꿈하게 될 줄은.

고작 3년.

그사이 장원에는 대전처럼 거대한 전각이 자리했고, 텅 비었던 연무장엔 거친 패기로 가득한 산왕가의 무사들로 가득 채워진 것이다.

어디 그뿐인가.

그를 찾아오는 이들은 수 배로 늘었으며, 그의 위상은 더욱 높아졌다.

과거의 치욕을 딛고, 명실상부 무소불위의 권력자가 되어 돌아온 사내.

대공자. 아니, 이제는 교주 대행이 된 천무기였다.

물론 그냥 돌아오기만 한 건 아니었다.

예전엔 다소 인간적인 면모가 보였다면, 지금은 수틀리면 물어뜯는 독사 그 자체.

"끄아아아악!"

푸걱!

부복한 채 보고를 올리던 대주의 어깨에 칼이 깊숙이 박혔다.

긴 머리를 풀어 헤치고 단상에서 내려온 천무기가 직접 꽂아버린 것.

"다시 지껄여 보거라."

이유는 별거 아니었다.

요즘 신도들이 끼니를 굶는 일이 잦아 약탈이 끊이지 않고, 살인 사건도 빈번하다는 실정. 하여 대책이 시급하다는 그런 보고였다.

한데.

"약자는 빼앗기고, 강자는 빼앗는 것. 그것이야말로 본교의 뿌리이고, 근본이거늘. 대책? 무슨 대책 말이냐."

"끄으... 소인의 생각이 짧았습니다...."

"그래. 짧다. 너무도 짧다. 하여 이제 널 믿고 일을 맡길 수가 없구나."

"예?"

당황한 대주가 고개를 번쩍 든 그 순간.

수아아악!

그대로 머리가 잘린 채 바닥을 데구루루 굴렀다.

장내엔 서늘한 기운이 감돌았다.

챙그랑!

천무기는 칼을 바닥에 내던진 채 피 묻은 몸으로 단상 위 태사의에 올랐다.

"물려라. 오늘은 여기까지 하겠다."

이내 폐회를 선언하자.

"천마지존 만마앙복."

"천마지존 만마앙복."

수뇌들이 부복한 채 교령을 읊고는 빠르게 물러갔다.

그 누구도 대주의 죽음에 대해선 묻지도, 놀라지도 않았다.

그만큼 천산에서 천무기가 얼마나 거리낄 것 없는 무소불위 권력을 품게 됐는지 새삼 깨닫게 해주는 일례.

하지만 그런 그에게도 분명 거슬리는 존재는 있었다.

"염제가 귀환했다고 합니다."

"...!"

천무기의 눈썹이 꿈틀하고 몸은 경직됐다. 굳은 고개를 옆으로 떨구자 맹수처럼 삭막한 인상의 중년인이 서 있었다.

천무기가 기존 충신들을 뒤로한 채 최측근으로 삼은 산왕가의 가주, 파군성이다.

"다시 말해보거라."

"염제가 명하신 거룡산 일대를 모두 제패하고 귀환했다고 합니다."

빌어먹을.

"이번에도 막내의 이름만 드높여 준 꼴이 됐구나!"

"구유와 칠무위까지 함께 하고 있으니.... 새외에 그들을 상대할 자는 그리 많지 않을 겁니다."

콰르르! 천무기가 움켜쥔 단단한 돌 손잡이가 가루가 되어 부서졌다.

"이게 다 그 새끼에게 물든 탓이다. 주제도 모르고 기어오르고 또 기어오르는 버러지 새끼."

생각만 해도 경기가 일어날 만큼 분노하게 만드는 자.

"장이서...."

그를 그리는 건 칠소궁의 식솔들만이 아니었다. 천무기도 간절히 기다리고 있었다.

그날의 뼛속까지 찼던 수모를 되갚아 주기 위해!

'네놈이 어떻게 부교주 자리까지 올라갔는지 몰라도 본교는 힘이 모든 걸 좌우하는 곳. 더 이상 네놈이 설 자리는 없다. 이미 모두가 다 내게 충성을 맹세했으니. 그러니 어서 돌아오거라. 너와 나의 차이를 알려주마!'

우우웅!

천무기의 두 눈이 시뻘겋게 물들고 전신에 붉은 기운이 감돈다. 동시에 막대한 기파가 사방으로 뻗쳐 나갔다.

구구구구!

지축이 흔들리는 엄청난 기세.

과거에도 강했지만, 지금의 그는 차원이 다르게 더 강해져 있었다.

비단 산왕가의 힘과 명분만으로 어찌 이 자리에 오래 머물 수 있겠는가.

그게 가능한 건 힘이 있기 때문이었다.

수모를 잊고 다시 태어나기 위해 손에 넣은 이 힘 말이다!

"막내가 공을 세우고 돌아왔다면 환영해 줘야지."

천무기의 입가에 사악한 미소가 서렸다.

"환영식을 준비하거라. 백날 염제라 떠받든다 할지언정 수뇌들이 칭송하는 자가 누구인지 내 명확히 가르쳐 줄 것이니."

바야흐로 대공자의 시대였다.

* * *

한편 모두의 간절한 기다림을 한 몸에 받는 장이서는.

"흐음."

동굴 밖으로 나와 잠시 사색에 잠겨 있었다.

눈앞에 보이는 꽉 막힌 절벽.

하늘은 쾌청한데 고개를 아무리 들어 올려도 끝이 보이지 않는다.

그만큼 높다는 의미.

문득 이곳에 처음 떨어졌던 날이 떠올랐다.

'이 미친 새끼야!'

그땐 정말 죽는 줄 알고 사형인 천마에게 처음으로 욕지거리를 뱉은 날이었다.

사실 지금 생각해 보면, 참으로 멍청한 짓이었다.

떨어져 죽을 확률보다 사형한테 맞아 죽을 확률이 더 높았을 테니 말이다.

살아남은 걸 생각하면 실로 간담이 서늘한 일.

아무튼 바닥엔 그때의 균열이 여전히 선명했다.

마치 신화 속의 거대한 인면지주(人面蜘蛛)가 바닥에 거미줄을 쳐 놓은 것처럼.

이게 벌써 3년 전이라니.

"다들 잘 지내고 있겠지."

분명 지옥 같은 3년이었으나 생각하면 여전히 입가에 미소를 짓게 하는 이들.

'빨리빨리 안 와? 빠져 가지고! 몇 년째야?!'

이젠 그들을 만나러 갈 시간이다.

"가볼까."

한데 어떻게.

아무리 봐도 나갈 길이 보이지 않는다.

그 순간 장이서의 무릎이 살짝 굽혀졌다.

설마.

맞다. 바로 그 설마.

파아앗!

빛줄기가 하늘 위로 쏘아졌다.

*

사시사철 천마전에서 지내는 좌사와 우사의 일상은 어떠할까.

간혹 하는 일 없이 빈둥대며 심심하게 지낸다 생각할 수도 있겠지만 천만에.

그들의 일과는 몹시 바빴다.

쓸고, 닦고, 정리하고....

천마전이 오죽 넓은가.

수많은 보고(寶庫)에 만마분총이라는 무덤까지.

아무나 들일 수도 없고, 천마가 할 수도 없으니 결국 둘이 하는 수밖에.

하여 오늘도 어김없이 가장 꼭대기 층부터 청소를 시작하려는 찰나였다.

"오랜만입니다."

뒤에서 자연스레 들려온 인사에 반사적으로 두 사람이 고개도 안 돌린 채 답했다.

"오랜만이군."

"오랜만이다."

그러곤 잠시 후 뭔가 이상함을 느꼈는지 하던 빗자루질을 멈추고 서로 천천히 눈을 마주쳤다.

이내 경악 어린 표정으로 휙! 뒤를 돌아 살폈다.

"어, 언제...!"

그러자 난간에 없어야 할 인물이 서 있었다.

3년 만에 다시 돌아온 부교주 장이서다!

좌사와 우사는 헛것이라도 본 것마냥 넋을 잃었다.

"대체 어디서...?"

절벽을 타고 올라왔지만, 뭐 굳이 설명할 필요는 없는 일.

지금 그게 아니라 이거다.

"잘 지내셨습니까."

활짝 웃으며 반갑게 인사를 건네자, 이윽고 두 사람도 허탈한 웃음을 지으며 환대했다.

"어서 오십시오, 부교주님!"

"오랜만에 뵙습니다, 부교주님!"

마침내 천마전으로 다시 돌아왔다.

*

3년 만에 돌아온 천마전은 그대로였다.

"이쪽입니다."

좌사는 마저 남은 청소를 하러 떠났고, 우사는 방을 안내했다.

"교주님께서 언제든 편히 와 머물라고 특별히 준비하신 선물입니다. 마음에 드시는지요."

이게 선물이라고? 대체 어디를 봐서!

벽까지 온통 시커먼 건 둘째치고, 마귀들이 인각된 저 의자는 꼭 앉는 순간 악의 근원이라도 될 것 같이 생겼다.

취향 참... 천마답다.

하지만.

"잘 쓰겠습니다."

이제 이곳이 제가 머물 곳인데 어쩌겠는가. 땅바닥보다는 낫겠지.

피식 웃으며 수긍하자 우사는 눈을 번뜩이며 고개를 갸웃했다.

"3년 동안 어딘가 좀 변하신 듯합니다."

갑자기?

304.

#교주의 선물

"제가 변했습니까?"

"예."

한두 가지도 아니었다.

일단 일전에 새어 나오던 거센 기운은 이제 온전히 갈무리되어 자칫 평범해 보이기까지 했다.

반면 눈빛에선 묘하게 알 수 없는 위화감이 느껴졌다.

전에는 조금 순해 보이는 구석이 있었다면, 지금은 빈틈이 느껴지지 않는 기분.

그리고 무엇보다도.

"훨씬 편해 보이십니다."

우사가 활짝 웃으며 말했다.

지금 보니 알겠다. 과거엔 장이서의 마음에 그늘이 서려 있었다는 것을.

"3년간의 수련이 헛되진 않으셨나 보군요."

장이서는 한 층 밝아진 웃음으로 답했다.

"아마 그랬다면 살아서도 못 왔을 겁니다. 워낙 자비가 없는 분이시라."

"후후후."

우사도 공감이 가는지 웃음을 흘리며 고개를 크게 끄덕였다.

그러곤 아차 싶었는지 흠칫 뒤를 돌아 살피며 물었다.

"설마 같이 오신 건 아니겠지요?"

"염려 놓으시죠. 한동안 안 오실 겁니다."

"제 웃음은 우리의 첫 번째 비밀로 해주시지요."

"앞으로 비밀이 많이 생기겠는데요."

장이서가 피식 웃음을 터트리자 우사도 다정히 마주 웃었다.

보지 못한 게 3년이거늘, 어째 천마전이라는 소속감으로 한결 더 가까워진 기분이다.

"이야기는 전해 들었습니다. 앞으로 부교주님께서 큰일을 해나가셔야 한다고요."

"하하.... 그냥 해야 할 일인 거죠."

"후후, 아직도 겸손이 남아 계신 걸 보니 기질은 바뀌었어도, 여전한 면모도 있으신 듯합니다."

"그렇습니까."

우사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곤 옆으로 손짓하며 말을 이었다.

"거기 협탁에 놓인 상자를 열어보시지요."

"상자요?"

옆을 바라보니 협탁 위에 정말 검은 옥으로 된 상자 하나가 놓여 있다.

"교주님께서 내리신 진짜 선물입니다."

달칵. 태사의에 실망한 탓일까. 별다른 기대 없이 상자를 열었다.

한데 보자마자 눈이 휘둥그레졌다.

두꺼운 검은 옥반지와 허리에 다는 검은 구슬 장신구. 그리고 멋들어진 칠흑빛 완갑이 놓여 있던 것.

그리고 그 안에 담긴 가치는 천문학적인 수준이었다.

"첫 번째는 천마전을 자유로이 드나들 수 있는 천마환(天魔環)입니다. 이 안에 있는 어느 곳도 출입이 가능하지요. 설령 3대 보고라 할지라도 말입니다."

3대 보고. 온갖 영초가 가득한 영생고(永生庫), 무구가 가득한 보화고(寶貨庫), 장신구와 신비한 물건이 가득한 신령고(神靈庫)를 말함이다.

천하의 마교가 모아둔 천년의 보물들.

이는 곧 천하를 움직일 자금을 손에 넣은 것과 마찬가지다.

"두 번째는 천마전에 소속된 부대에 절대 엄명을 내릴 수 있는 천마령(天魔鈴)입니다. 앞으로 부교주 활동을 하시려면 수족이 필요할 거라고 하셨지요."

천마전의 직속이라면 몸담았던 방첩대(防諜隊)와 자객 단체인 살혼대(殺魂隊). 그리고 마호궁대(魔護弓隊)와 본교 최강이라 일컬어지는 광명천마대(光明天魔隊)다.

이 정도면 넘치다 못해 과분한 수준.

하지만 가장 놀랐던 건 마지막 세 번째였다.

"그건 부교주님께서 가장 잘 아실 거라고 하더군요."

어찌 모를 수가 있을까.

'이건 백뢰다!'

분명했다. 완갑 안쪽에 부착된 검은 날붙이며 얇은 쇠줄이 이어진 것까지.

분명 백뢰를 보고 만들어낸 모조품이었다.

오히려 진품보다도 더 공이 들어간 모조품.

"오래전 지존께서 가장 품질이 좋은 운철을 아껴두어 만들어두셨던 것이지요. 흑뢰(黑雷)라 하셨습니다."

흑뢰. 정말 천마다운 이름이다.

사부를 그리며 만든 것인가.

참 이럴 때 보면 그도 인간은 인간이다. 아주 가끔. 아니, 몹시 희미하게. 어쩌면 평생에 한 번 보기 힘들 만큼이지만.

'잠깐 그 정도면 인간이 아닌 건가?'

모르겠다. 하지만 한 가지는 정확히 알고 있다.

"대신 이걸 다 가지려면 조건이 있겠죠?"

"어찌 아셨습니까?"

장이서가 씨익 웃으며 상자를 닫았다.

천마와 3년을 같이 살면서 깨달은 거지만, 뭐든 그냥 주는 법이 없었다.

한번은 내공이 봉해진 채 맨손으로 사흘간 밤새워 드높은 봉우리를 오르던 때였다.

정상을 목전에 두고 너무 허기가 져 미칠 것 같았는데, 천마가 직접 먹을 걸 가져다줬다.

눈이 돌아가 절벽에 매달린 채 허겁지겁 먹었는데 그 대가가....

'으아아아악!'

추락이었다.

다시 기어 올라와야 했던 것.

고오오오!

생각하니까 살기가 치솟는다.

"크흠!"

이에 화들짝 놀란 우사가 얼른 말을 이었다.

"맞습니다. 교주님께선 자신의 자리를 지키는 것도 부교주의 소임 중 하나라고 하셨지요."

후. 살기를 털어내곤 답했다.

"그래서요?"

"하온데 너무 오래 자릴 비우셔서 지금은 대공자께서 교주님의 대행을 맡고 계시는군요."

"하하."

절로 웃음이 뱉어졌다.

'또 사형 짓입니까?'

보나 마나 천무기의 횡포를 알면서도 묵인해 준 걸 테다.

후후, 어디 한번 이겨내 보거라. 역천의 핏줄답게.

뭐 이런 음산한 혼잣말을 중얼거리면서.

"아마 이번엔 쉽지 않으실 겁니다. 이미 오룡당을 비롯해 수뇌부 모두가 대공자님의 뜻을 따르기로 한 상태이니까요."

이어진 우사의 말은 다소 의외였다.

3년이 길다고 볼 수도 있지만, 천산을 장악하기엔 부족한 일.

"장로회가 도와준 겁니까?"

"아닙니다."

그것도 아니라면....

"대공자께서 새외의 세력들을 취합하셨습니다."

"교외의 세력을 안으로 불러들였단 말입니까?"

우사가 의미심장한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이건 더더욱 이해가 안 되는 일.

교외자를 기피하는 것이 본산의 생리. 천무기는 그중에서도 천산의 성혈인 자다.

누구보다도 경멸했을 그가 외부의 세를 품다니.

"이제 어찌하시겠습니까."

"음... 우선은...."

의문은 잠시 지워두고 우사를 지나쳐 나가며 말했다.

"벗들을 만나 회포를 좀 풀어야겠습니다."

"예?"

"안 본 지 너무 오래돼서요."

"아니, 지금 제 말을 들으신 겁니까?"

당장 이곳을 나가 호룡당만 들러도 장이서를 보면 이유를 막론하고 잡으려 들 거였다.

여기서 나가는 순간 천산은 적진이라는 얘기.

하지만.

"어차피 제가 움직이면 대공자도 반응을 보이지 않겠습니까. 그를 벌할지 말지는 그때 가서 결정하도록 하죠."

아. 우사는 뒤통수를 세게 후려 맞은 기분이었다. 그제야 깨달았다. 자신이 크게 착각했다는 것을.

장이서는 지금 본교의 상황을 제게 닥친 시련으로 보는 것이 아니었다.

그저 자신이 벌을 내릴지, 말지.

그것만 결정하면 되는 아주 사소한 지렁이의 꿈틀거림 정도로 보고 있는 거다!

그리고 이는 우사에게 너무도 익숙한 기질이었다.

생사여탈을 오직 자신이 관장한다는 절대적 존재.

천산의 신.

천마.

바로 천마의 기질이었던 것!

이것이 바로 장이서에게서 느껴지는 위화감의 정체였다.

"다녀오겠습니다."

장이서는 포권을 취하며 웃었다.

이를 보고 우사는 길쭉하게 입꼬리를 말아 올렸다.

'본교에 실로 괴이한 존재가 태어났구나. 지존의 기질을 가진 인간이라....'

우사는 마주 포권을 취하며 답했다.

"무운을 빌겠습니다."

*

끼이이이익!

천마전의 거대한 문이 수년 만에 활짝 열렸다.

"쓰으으으읍, 하아."

이게 얼마 만에 맛보는 마교의 공기인가. 흙먼지가 한가득 물리는 것이 떨고 쓰다. 전형적인 마교의 맛.

"근데 왜 반갑냐."

입꼬리가 씨익 올라섰다.

우사의 말이 맞았다. 지난 3년의 시간은 강해지기 위한 지옥 같은 시간이기도 했지만, 모순되게도 마음을 편히 만들어준 시간이기도 했다.

처음엔 혈교를 막아야 한다는 생각과 무림맹을 떨쳐내고 싶은 마음에 조급함으로 가득했었다.

하지만 천마의 수련은 고되었고, 매번 생사의 갈림길에 서게 되자 점차 모든 생각이 단 하나로 귀결되었다.

생존.

오직 살겠다는 마음으로.

그렇게 1년, 2년, 3년.

어느덧 죽음마저 초연해졌을 때 깨달았다.

마음이 굳게 아물었음을.

어쩌면 천마와 함께 지낸 시간 중 가장 강해진 건 무공이 아니라 마음일지도 모른다고 말이다.

그런 의미에서 지금은 몹시 편안했다.

물론 너그러워졌다는 얘기는 아니고.

그러니까.

"나와."

삼천계단에 도착하자 일련의 무리가 길을 막아섰다.

흑색에 붉은 자수가 수놓아진 피풍의.

백색 가면을 쓴 마교 최강의 부대.

광명천마대다.

보나 마나 또 사형의 장난질일 터.

시간 아깝다.

"나와. 마지막이다."

표정에 웃음기가 사라지고, 눈빛은 서늘해졌다.

그러자.

"...!"

천마대원들이 흠칫거리며 떨기 시작했다.

기세를 끌어올린 것도 아니었다.

오히려 기감으로 보려고 하면 범부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다.

한데도 어깨는 벌벌 떨리고, 두 다리는 굳어졌다.

존재 자체에서 새어 나오는 살기(殺氣)에 압도된 것!

죽는다. 반드시 죽는다.

하지만 명이 떨어지지 않는 한 죽어서도 움직일 수 없는 것이 바로 천마대의 지조.

모두가 죽음을 각오한 그 순간.

"열어라."

구세주처럼 뒤편에서 청아한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이와 동시에 대원들이 고개를 숙이고 좌우로 길을 열었다.

장이서는 눈매를 살짝 좁히곤 열린 길목을 살폈다.

황금 가면을 쓴 자.

구 마교 서열 2위였던 광명천마대주다.

"뭐 하는 짓이지?"

"교주님께서 부교주님의 뜻을 확인하라 명하셨습니다."

"무슨 뜻."

"저희를 베고 갈 의지가 있는가를 보라고 하셨습니다."

미친. 뭐 그딴 명을....

"어떨 것 같은데."

"전부... 베이는 상상을 했습니다."

이에 장이서는 고개를 끄덕이며 계단을 내려섰다.

"잘 아네."

목소리가 시리도록 차다. 길을 막아선 게 한 번도 아니고 이번이 두 번째. 악감정이 쌓일 법도 하다.

하나 명을 받은 대로 행한 것뿐.

두 번이 아니라 백 번이라도 똑같이 따를 것이다.

한데.

"앞으로도 오늘처럼 해."

"예?"

"대원들 죽지 않게 재량껏 잘 살피라고."

뭐지? 너무 당황해서 살짝 입을 뗀 채 그를 흘겼다.

그러자 압도적이던 살기는 온데간데없고, 입꼬리만 시원하게 올라서 있다.

"저희 목숨을... 걱정해 주시는 겁니까?"

"당연하지."

"부교주님께서 왜...."

"왜긴. 내 사람이잖아."

뭐, 아직은 아니지만. 장이서가 피식 입꼬리를 올리자 천마대주를 비롯한 대원들의 차가운 심장은 순간 움찔했다.

자신들은 천마를 위해 쓰이고, 천마를 위해 멸해야 하는 검(劍)의 운명이다.

한데 제 사람이라니....

단 한 번도 들어본 적 없는 얘기라서 순간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말문이 턱 막혔다.

"수고해."

심지어 장이서는 픽 웃으며 대주의 어깨를 툭 치고 내려갔다.

황당한 눈으로 고개를 돌려 내려보자 손까지 흔든다.

도대체 뭘까. 이 다정한데 무서운 괴종(怪種)은.

"이런 경천동지할 살기는 오랜만에 보는군요."

잠시 후 그가 완전히 자취를 감추자 우람한 신장의 부대주가 가면을 벗고 다가와 말을 건넨다.

"...특별한 분인 거다."

이에 대주도 황금색 가면을 벗어냈다.

그러자.

스르륵.

금발이 흐트러지듯 떨어지고, 청안(靑眼)의 미녀가 모습을 드러낸다.

천마대주 금사월.

색목인과 한인 사이에 태어나 여인의 몸으로 대주까지 올라선 마교의 절세 고수였다.

"살귀의 기질에도 종류가 있다."

"그게 뭡니까?"

살의만으로 사람들을 겁에 질리게 만드는 자는 인살(人殺).

사람을 넘어 같은 살귀들마저 떨게 만드는 것이 바로 귀살(鬼殺).

"그럼 저분은 귀살이신 겁니까?"

금사월은 부대주를 힐긋 살피곤 다시 장이서가 사라진 길목을 바라보며 답했다.

"용살(龍殺)."

"그게 뭡니까."

"나도 모른다. 나 같은 자는 감히 품어본 적도, 품을 수도 없는 것이니. 다만 한 가지 분명한 건...."

하늘 아래 이만한 살을 품을 수 있는 자는 오직 천마와....

천마의 선택을 받은 자뿐이라는 것.

"준비해라."

"예?"

천마가 그녀에게 당부한 말이 하나 더 있었다.

'만나보고 네 스스로 결정하거라. 네가 따를 만한 녀석인지. 아닌지.'

금사월은 다시 가면을 쓰곤 말했다.

"이제부턴 저분이 우리의 지존이다."

"...!"

"지존을 따른다."

"조, 존명!"

장이서의 행보에 천마대가 합류했다.

305.

#복직

- 마해산 호룡당.

"누가 옵니다!"

"뭔 헛소리냐. 천마전에서 올 사람이 누가 있다고."

"저, 저기...!"

"누군데, 헉! 광명천마대?!"

둥! 둥! 둥! 둥!

성벽 위에서 북소리가 다급히 울리며 호룡당 무사들이 허겁지겁 움직였다.

"대체 이게 무슨 일이더냐! 천마대가 왜!"

이내 신임 당주까지 내려와 당혹감을 드러냈다.

당연했다. 천마의 명이 없이는 죽어서도 결코 움직이지 않는 망부석들이 그들이었으니.

"설마 교주님께서 오신 것인가?!"

그럴 리가.

"당주님, 저기 맨 앞에 선 자는... 뇌, 뇌, 뇌마입니다!"

"무어라?!"

당주가 기겁하며 눈을 부릅떴다.

비록 3년 전의 일이었지만, 그도 분명히 기억하고 있었다.

홀로 회당까지 쳐들어가 천라지망을 뚫고 부교주까지 올라섰던 전설적인 사내의 모습을.

조금은 달라진 듯했으나 분명 그였다.

뇌마 장이서!

"어, 어떻게 부교주가 천마대를...."

당주의 입에서 깊은 의문이 뱉어졌다. 아무리 부교주라고 해도 천마대를 움직일 권한은 없기 때문.

'왜 따라오는 건데?'

'모시겠습니다.'

'아니, 그러니까 왜.'

물론 이해가 안 되는 건 당사자도 마찬가지지만.

잠시 후 당주를 비롯한 무사 수십 명이 우르르 내려와 장이서 앞에 당도했다.

안쪽 문 너머에 몰려든 것까지 생각하면 일백 이상.

장이서는 나지막한 목소리로 말했다.

"지 당주를 뵈러 왔는데."

꿀꺽. 호룡당주의 목젖이 꿀렁인다.

장이서는 입가에 섬찟한 미소를 지으며 다시 말했다.

"어디 있지?"

*

호룡당 지하 뇌옥.

빛 한 점 없는 곳에 새하얀 수의(囚衣)를 입은 호랑이가 가부좌를 튼 채 앉아 있다.

꽤 오래 갇혀 지냈을 텐데도, 여전히 기골이 장대하다.

그럴 만도 했다.

"오늘은 빨리 드셔야 합니다. 저 이러다 진짜 잘립니다. 아시잖아요."

크하아아아앙!

부관인 그의 매제가 보자기에 돼지 뒷다리를 챙겨왔기 때문.

"꼴랑 다리 하나 가져와 놓고 생색이더냐!"

"이것도 걸리면 당주님이나 저나 둘 다 죽은 목숨입니다."

"흥, 이런 겁쟁이 같은 놈에게 내 누이를 맡겼다니. 천추의 한이로다!"

"그 누이가 챙겨준 겁니다. 어서 드십시오."

"고얀 놈."

배고픈 호랑이가 못마땅한 듯 곁눈질을 주고는 이내 돼지 뒷다리를 입에 물었다.

한데 그 순간.

콰아아아앙!

벽이 와르르 부서져 내린다.

이에 호랑이와 부관의 눈이 띠용 떠지고, 입은 떡 벌어졌다.

저벅, 저벅.

그리고 먼지 사이로 들어서는 한 남자.

"흐이이익...?"

"크하아앙...?"

같은 사내인데도 눈물이 왈칵 날 것처럼 세상 이렇게 반가울 수가 없는 사내.

"잘 지내셨습니까."

"장 보좌.... 아니 부교주님!"

"인사드릴 겸 들렀는데, 제가 방해한 건 아니겠죠?"

크하아아아앙!

호랑이의 눈물이 쏟아졌다.

천무기의 천하가 시작된 지 어느덧 3년으로 접어들던 어느 날.

그의 철옹성 같던 권세에 금이 서리기 시작했다.

호룡당주 지대호 복직(復職)이다.

*

- 마해산 비룡당.

흡사 뇌옥이 아닐까 싶을 만큼 비좁고 어두컴컴한 지하 방구석.

이마에 녹색 보석이 박힌 여인이 촛불 하나 놓고 깨알 같은 글귀가 적힌 문서를 살피고 있다.

노안인지 마음의 병인지 눈이 갈수록 침침해진다.

그녀의 이름은 묘채경.

구 비룡당주이자 부교주라는 줄을 잡고 장밋빛 미래를 꿈꾸던 것도 잠시.

한순간에 지하 밑바닥까지 추락한 말단 당원이었다.

"하아. 당주였던 내가 암어 해독이라니."

절로 한숨이 뱉어지는 서글픈 나날.

작업을 마치고 터덜터덜 걸어 나가는 길엔 하필 신임 당주 고길상이 쪼개면서 서 있다.

"크큭, 이게 누구신가. 전임 당주 아니시오. 아, 이제는 당원님이신가."

어제도 봤다, 이 새끼야.

"어허! 어디 당원이 감히 당주님께서 말씀하시는데 그냥 가?! 건방지게."

"뭐? 근데 고길상 이 새끼가...."

"무서워라. 됐고. 내일 처리해야 할 일이 많으니 일찍 일찍 나오시오."

"지금 집에 가는 거 안 보이느냐?"

"그러니까 하는 말이지. 이따 술시(19~21시)까지 출근하시오."

이 미친 새끼가!

"지금이 술시인데 뭔 헛소리냐?"

"아니, 그러니까. 지금 가서 일하시라고."

"뭐?"

"뭘 못 들은 척 되물어? 아, 싫으면 나가든가."

빠득. 묘채경의 이빨이 부서질 듯 갈렸다.

"알았다."

이내 씁쓸히 걸음을 돌리자 뒤에서 고길상의 뒷말이 희미하게 들렸다.

"하여튼 주제도 모르고. 아직도 낄 때 안 낄 때 구분을 못 해요. 쯧."

툭. 이성의 끈이 끊어지는 듯한 기분.

언젠가 장이서가 돌아왔을 때 그래도 도움이 될까 싶어 남아 있으려 했거늘.

생각해 보니 답지 않게 너무 오래 참았다.

입가가 섬찟하게 올라서고 손끝에 살기를 쏟아내려는 그 순간.

"오랜만입니다."

바로 뒤에서 도저히 믿기 힘든 목소리가 스며들었다.

우뚝, 움직임이 멈춰 세워지고 이내 눈시울이 살짝 붉어졌다.

설마. 이젠 너무 고생하다 보니 환청까지 듣는 것인가.

한데도 미련을 버리지 못해 천천히 고개를 돌렸다.

그리고 보았다.

"너...!"

흑립을 쓰고 3년 만에 찾아와 괘씸하게 씨익 웃는 사내.

기다리고 기다렸던 바로 그 자식.

장이서.

"도, 돌아온 것이야?"

"설마 웁니까? 그새 많이 약해지셨네."

"미친놈. 넌 그대로다. 여전히 싹수가 밥맛이고, 웃는 것만 봐도 약이 올라."

"많이 힘드셨습니까?"

"힘들긴!"

묘채경이 고개를 돌린 채 눈물을 훔쳤다.

예전엔 그리 모질더니, 이젠 정말 식구 다 됐다.

한데 회포를 풀기엔 썩 좋은 상황은 아닌 모양이다.

"아주 지랄들을 하고 있네. 비룡당 꼴 잘 돌아간다. 늙어빠져선 사내한테 홀랑 빠져 가지고 아무나 안에 들여? 넌 끝이야. 여봐라!"

고길상의 고함에 비룡당 무사들이 우르르 몰려든다. 적지 않은 수.

이에 묘채경이 당황하며 장이서를 호위하듯 막아서는 순간.

"크하하하! 잘 지냈는가, 묘 당주!"

뒤에서 기운찬 호랑이가 나타났다.

"지 당주?"

"자네도 오래 쉬었으니 이제 일해야 하지 않겠는가."

그리고 우르르 몰려 들어와 입구를 막아서는 호피 무늬의 무사들!

"호, 호룡당이 왜...!"

하나 그들뿐만이 아니다.

진짜는 머리 위.

"쳐라!"

매처럼 날아 들어오는 검붉은 피풍의의 최강 부대.

광명천마대가 비룡당을 급습했다.

"이, 이게 어떻게 된...."

"길상아."

"뭐? 감히 당주에게 길상아? 이년이 근데! 커헉!"

스르륵!

순식간에 귀신처럼 움직인 묘채경의 손이 당주의 목을 움켜쥐었다.

"길상아. 내가 낄 때, 안 낄 때 구분하라고. 몇 번을 가르쳐줘야 도대체 알아 처먹을 것이냐?"

"사, 살려... 꺽!"

푹!

묘채경의 모은 손이 고길상의 복부를 그대로 뚫어버렸다.

"저승 가선 자중하거라. 오호호호!"

털썩.

비룡당주 고길상 사(死).

천무기의 아성에 또 하나의 금이 서렸다.

묘채경도 복직(復職)이다.

* * *

널따란 공터에 세워진 전당(殿堂).

인근에 무수한 인파가 몰려들었다.

사방엔 호위하는 무사들과 구경하는 신도들이 즐비했고, 전당 중심부에 꾸며진 자리에는 마교의 수뇌들이 대거 참석했다.

비파 연주도 흐르고, 좌우 길게 꾸며진 식탁에 왁자지껄 웃는 분위기가 다소 밝다.

친히 대공자가 막내인 칠공자를 위해 차려준 환영식이었다.

한데 뭔가가 이상했다.

정작 주인공인 마오는 병풍처럼 거들떠보지도 않고, 굳이 마련된 태사의에 앉아 있는 천무기에게만 모두가 몰렸다.

"이리 불러주시니 진심으로 감읍할 따름입니다."

"앞으로도 충성을 다하겠습니다."

줄지어 인사를 올리는 수뇌들.

뻔한 수작이다.

참으로 유치하지만, 누가 위이고 주인인지를 보여주기 위한 저열한 수단.

'보았느냐. 네놈이 아무리 염제라 떠받들어져도 이것이 현실이다.'

흘깃 곁눈질로 마오를 살피자 뭐 씹은 표정을 짓고 있는 게 썩 유쾌하다. 천무기는 능청을 떨며 말했다.

"웃거라. 모두 널 환영하기 위해 온 자들 아니더냐."

"고마워서 눈물이 나네. 충분히 재미 다 본 거 같은데. 이만 가도 되지."

"크큭, 새외를 떠돌더니 그새 경어도 잊은 것이냐? 나 네 큰형 천무기다."

어쩌라고. 형이 형 같아야 말을 높이지. 마오가 딴청 피우며 귀를 후비자.

"감히...!"

천무기 앞에 서 있던 산왕가주 파군성과 네 명의 오군장이 앞으로 나섰다.

고오오오오!

기골이 장대한 장수들에게서 막대한 기세가 쏟아져 나온다.

최근 마오의 손에 막내가 당했다는 소식은 들었다.

허락만 떨어지면 당장이라도 칼부림을 하고 싶은 심정.

확실히 신강의 부족들을 일통한 자들다운 기세다.

하나 마오의 수신호위 역시 새외에서 이름 날린 거로 치자면 만만치 않은 자.

아니, 굳이 개개인으로 치자면 산왕가의 누구보다도 뛰어났다.

바로 전장의 용 구유!

그가 맞상대하듯 나섰다.

"주인들의 대화다. 개들은 빠져라."

뭐? 시작부터 도발적인 언사.

파군성의 눈에서 시퍼런 안광이 뿜어진다.

"많이 컸구나, 구유."

심지어 산왕가와 구유는 오래전 악연으로 묶인 사이. 웃어야 할 잔칫날에 일촉즉발의 열기가 불타올랐다.

"되었다. 좋은 날 아니더냐."

이에 천무기가 웃으며 손을 젓자 파군성과 오군장도 뒤로 물러선다. 마오도 괜찮다며 고개를 끄덕였다.

"네 형과 누이가 어떻게 됐는지 모르진 않겠지."

왜 모르겠는가. 삼공녀는 청해로 보내졌고, 이공자는 남만으로 떠밀렸다.

사공자 한은 흔적도 없이 사라졌으며, 맹휘와 맹원원도 새외를 떠도는 중.

한마디로 집에는 오지도 못하고 바깥만 전전하는 처지다.

"너도 하루라도 천산에 더 머물고 싶다면 적당히 까부는 게 좋을 거다. 그게 싫으면 당장 내일 다시 떠나게 해주지. 환영식 대신 송별식도 나쁘진 않을 테니. 후후."

이 새끼가. 마오의 눈매가 와락 좁혀졌다. 마음 같아선 들이박고 싶지만, 솔직히 다들 많이 지쳐 있었다.

오죽하면 칠무위는 월하촌에 두고 구유와 단둘이 왔겠는가.

또 떠나면 언제 돌아올지 기약도 할 수 없는 일.

슬쩍 눈을 떨구자 천무기가 승자의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알았으면 까불지 말고, 특별히 준비한 네 자리에서 끝까지 머물다 가거라."

마오가 인상을 찌푸린 채 뒤를 돌아보자 가운데 덩그러니 홀로 놓인 자리가 눈에 담겼다.

좌우에 정렬된 고급스럽고 우아한 식탁과 달리 보 하나 없이 낡은 나무 식탁.

심지어 자리에 있는 음식도 녹두즙 한 그릇이 전부.

이건 대놓고 만인 앞에서 눈요깃거리나 되라는 소리다.

"마오. 그만 가지."

구유도 이건 아니다 싶었는지 정색한 채 입을 열었다.

"됐어. 밥 하나 먹는데 소란 떨 것 없잖아."

"하하하! 그래. 그래야지. 그게 천박한 아랫것들이 살아가는 방법인 것이다. 주면 주는 대로 먹고. 기라면 기는. 그런 인생 말이다."

천무기가 태사의에서 일어선다.

"그럼 처먹고 가거라. 방립."

천무기가 걸어가며 이름을 부르자 오군장 중 붉은 갑주를 걸친 사내가 고개를 숙인다.

오군장 중 넷째인 화염대장(火焰大將) 방립이다.

탄탄한 체구에 번들번들한 이목구비가 제법 미남이다.

"지금부터 네가 내 대행이다."

천무기는 가볍게 말을 뱉음과 동시에 품에서 패 하나를 꺼내 던졌다.

툭. 방립이 이를 받아 들자 둥그런 은색 패에 불꽃이 그려져 있다.

천마전에서 발급한 교주 대행 패다!

306.

#상봉

방립은 넙죽 엎드려 공손히 패를 올렸다.

그러자 천무기는 실로 대범한 척 씨익 웃으며 몸을 돌렸다.

"태사의에 앉아 칠공자가 끝까지 자리를 지키는지 날 대신해 지켜보거라."

"뭐...?"

그야말로 치욕적인 일.

이건 대놓고 아랫것들 앞에서 수모를 겪으라는 것 아닌가.

"왜 싫으냐?"

"아니, 차려준 밥은 먹어줘야지. 성의가 있는데."

하나 마오는 아무렇지 않다는 듯 입꼬리를 올렸다.

이깟 시선 따위.

망나니로 살 때는 숱하게 겪었다.

"후후후. 그럼 맛있게 처먹거라."

천무기가 비소를 흘리며 떠나간다. 그리고 방립은 서늘한 눈빛으로 태사의에 오르며 말했다.

"뭐 하십니까. 자리로 안 가시고."

곳곳에서 조소 어린 눈길이 쏟아졌다. 성대한 환영식이 수모로 가득 채워지는 순간이었다.

*

한편 천무기가 떠나가고.

밖에선 산왕가에 밀려 보좌에서 하수인으로 전락한 유령마군이 수하의 보고를 받고 있었다.

당주들의 사망 소식이 마침내 이곳까지 전해져 온 것.

"지금 뭐라고 했느냐...?"

"호룡당주가 사망했다고 합니다."

"어디서?"

"그게 아직 자세히 알려진 것은 아니나 본원에서 죽은 듯합니다."

유령마군의 붕대 너머로 안광이 번뜩였다.

뭐 이런 기막힌 일이 다 있단 말인가.

세상천지 천산 내에서. 그것도 호룡당 본원에서 당주가 죽었다는 게 말이 되는가.

"복상사라도 한 것이냐?"

여색을 워낙 밝히던 놈이었으니 그럴 수도 있다.

"아직 그것까진 확인이...."

"이런 얼빠진 놈!"

제대로 아는 것이 하나도 없지 않은가.

실없는 일이라 생각하고 나가라 손사래를 치려는 찰나였다.

"비룡당주 고길상이 사망하였다는 전갈입니다!"

"뭐?!"

유령마군의 두 눈이 번쩍 떠졌다. 하나 아직 끝이 아니었다.

수하는 침을 한번 삼키곤 떨리는 눈으로 정점을 찍었다.

"그리고 새로운 당주가 임명되었다고 합니다."

"그게 무슨 헛소리냐! 대공자님께서 허한 적이 없는데 누가 감히 그딴 짓을!"

하나 대답을 듣기도 전에 소식은 또다시 들려왔다.

"급보입니다! 금룡당주였던 만금수가...."

"그러니까 왜-!"

유령마군이 저도 모르게 고성을 내질렀다.

이에 시끌벅적하던 주변이 일시에 조용해지고, 유령마군은 분노에 덜덜 떨며 눈을 부라렸다.

그러자 수하가 절망적인 목소리로 이렇게 말했다.

"돌아오셨습니다."

"뭐...?"

"부교주께서 돌아오셨다고 합니다!"

유령마군의 머릿속이 휘청거렸다.

이야기를 들은 주변 곳곳에선 커다란 술렁임이 일었다.

"뇌마(雷魔)께서 돌아왔다고...?"

"제대로 들은 거 맞아?"

"분명 부교주라고 했는데...."

유령마군이 섬찟한 눈으로 주변을 흘겼다.

흔들린다. 대공자 천무기를 향한 충성의 철옹성이 무참히 흔들린다.

고작 부교주가 돌아왔다는 말 한 마디에.

"닥치거라! 고작해야 운이 좋은 놈일 뿐이다."

유령마군이 언성을 높였다.

하나 3년 전 이를 직접 목도한 이들은 그의 말은 귀에도 들리지 않았다.

오히려 두 다리가 덜덜 떨리고, 간이고 심장이고 쪼그라들 수밖에 없었다.

홀로 천라지망을 뚫고 회당까지 들어가 부교주 위에 오른 전설적인 사내.

시간이 지났다 해도 어찌 그를 잊을 수 있겠는가.

웅성거림은 더욱 커지고, 귀는 먹먹해졌다.

"빌어먹을."

유령마군은 끝내 진정시키기를 포기한 채 생각을 정리했다.

당장의 혼란은 둘째치고 당주 셋이 바뀌었다. 이건 결코 우습게 볼 일이 아니다.

천무기는 산왕가를 등에 업고 자신의 시대라 자부하고 있지만, 명분만 놓고 봐도 부교주가 위다.

언제든 빼앗길 수 있는 자리라는 얘기.

전해야 한다. 산왕가의 멍청이들은 이런 기본적인 정치조차도 모르는 머저리들.

당장 대공자의 옆으로 달려가 이 모든 사실을 알려야 한다. 어서 대책을 마련해야....

그때였다.

웅성거리던 소음이 거짓말처럼 뚝 끊어지고, 서늘한 바람 아래 발걸음 소리만이 귀에 들려오기 시작했다.

저벅, 저벅.

유령마군의 떨리는 고개가 천천히 옆으로 움직였다.

그리고 보았다.

먼발치서 이쪽으로 걸어 올라오는 한 사내의 모습을.

또한 그를 뒤따르는 엄청난 무리의 행렬을!

"x발...."

유령마군의 입에서 절망이 뱉어졌다.

*

그 시각 마오는 덩그러니 놓인 낡은 자리에 앉았다.

주변에서 수군대며 조롱하는 시선이 가득 느껴졌다.

염제 마오.

그의 명성이 드높아졌음을 부정하는 건 아니었다.

하지만 잘나봤자 무엇 하는가.

신하란 무릇 왕을 따르는 것. 아무리 날고 기는 명장이라도 천무기가 배척을 명했다면 그냥 배척당하는 거다.

"이놈들이...."

노골적인 무시에 구유가 살기를 드러내며 나서려 하자.

"됐어. 하루 이틀도 아니고. 똥이 더러워서 피하냐."

그럼 왜 피하는 거지?! 구유가 당혹에 빠진 사이, 마오는 식사를 시작했다.

"그래도 밖에서 먹는 것보단 낫네. 피 맛은 안 나. 구유. 너도 먹어 봐."

참 속도 좋다. 구유는 얕게 숨을 뱉고는 고개를 저었다.

밖이라면 모를까, 어디 수뇌들이 가득한 자리에서 감히 주인과 겸상을 할 수 있겠는가.

여기서 더 웃음거리가 되게 할 순 없다.

꼿꼿이 서서 비웃는 자들을 하나하나 기억해 주는 것이 지금 자신이 할 수 있는 최선.

언젠가는 꼭 되갚아 주리란 다짐과 함께 인내하던 그때였다.

끼이이이익.

닫혀 있던 문이 조용히 열리더니.

저벅, 저벅.

이상하게 북적이는 장내임에도 누군가의 걸음 소리가 유독 귓가에 크게 박혔다.

그리고 그건 구유만 느낀 것이 아닌지 하나둘씩 모두의 시선이 입구 쪽으로 향했다.

저벅, 저벅.

그러자 흑립을 눌러 쓴 우월한 태의 사내가 유유히 다가오는 것이 보였다.

"누구지?"

"처음 보는 것 같은데...."

수뇌들은 의견이 분분했고.

"음?"

화염대장 방립 역시 낯선 이의 모습에 고개를 갸웃했다.

하나 고민은 오래가지 않았다.

또 인사를 올리러 온 수많은 수뇌 중 하나일 테니.

뻔하지 않은가.

지금은 자신이 천무기의 대행.

이내 오만한 미소를 지으며 턱을 괸 채 그가 다가오기를 기다렸다.

한데.

"음?"

사내는 방립이 아니라 정신없이 먹는 데 집중하던 마오 앞에 우뚝 섰다.

이게 무슨 경우인가. 수뇌라면 자신을 모를 리 없을 텐데.

오군장 중 넷째인 화염대장 방립이다.

한데 제게 인사를 와야 할 수뇌가 왜 마오 앞에....

눈치가 없는 놈인가.

"뭐야?"

정작 마오도 이해가 안 되는지 제 앞에 서린 그림자에 신경질적으로 고개를 들었다.

그러자.

"뭘 또 혼자 드십니까. 정 없게."

흑립을 벗으며 그가 자연스레 마주 앉는다.

"어...?"

"환영식이 있다길래. 그래서 왔습니다. 축하해 주려고."

마오는 생각했다.

지난 3년 동안 참 많은 일이 있었다고.

수많은 적과 싸웠고, 또 생사의 고비도 수차례 넘겼다.

그럴 때마다 힘도 들지만, 늘 생각하던 게 있었다.

그 자식 오면 꼭 자랑해야지.

내가 얼마나 강해졌는지 제대로 보여줘야지.

그래서 그런가 한시도 잊어본 적이 없었다.

하긴 어떻게 잊겠는가.

그 자식이 곧 제 혈육이고, 또 절 여기까지 오게 만든 녀석인데.

그러니까 이 녀석은 아주 괘씸한 녀석이다.

이런 식으로 어물쩍 나타나 사람들 앞에서 쪽팔리게 눈시울이나 붉히게 만들다니.

빠져 가지고.

"장이서. 이 빌어먹을 자식아-!"

벌떡 일어선 마오가 파르르 떨리는 목소리로 소리쳤다.

장이서는 씨익 웃으며 구유를 향해서도 눈인사를 건넸다.

'잘 있었어?'

'그럭저럭.'

무려 3년 만에 상봉이었다.

물론 길게 회포를 풀 만한 상황은 아니다.

"뇌, 뇌마다!"

"부교주가 나타났다-!"

수뇌들도 하나둘씩 알아보곤 밥 먹다 말고 벌떡 일어선 채 그를 연호했다.

순식간에 장내는 아수라장으로 변했다.

뇌마 장이서.

3년 전 천산을 뒤엎고 사라져 버린 전설의 부교주!

그가 나타났다.

누구도 환영해 주지 않는 칠공자의 환영식에.

유일하게 그를 환영해 줄 첫 번째 손님이 되어.

"저자가 뇌마라고?!"

뒤늦게 그를 본 방립도 입을 떡 벌린 채로 경악했다.

자그마치 3년이라고 들었다.

그사이 아무리 찾아도 코빼기도 비추지 않던 자가 뜬금없이 여길 찾아온 것.

한데 그건 그거고.

방립은 고개를 갸웃하며 새로운 의문에 빠졌다.

'여긴 어떻게 들어온 거지?'

입구에 진을 치고 있는 무사들만 수백이오, 그중엔 유령마군도 포진돼 있다.

비록 저들에게 밀려 좌천된 자이나 실력 하나만큼은 산왕가주에 버금가는 자.

한마디로 허락받지 않은 자는 절대 들어올 수 없다는 얘기다.

하나 상관은 없다.

"후후후.... 생각지도 못한 대어를 여기서 잡게 되는구나."

자신은 화염대장 방립.

어차피 제 손에 무릎 꿇게 될 것이니.

부교주의 목이라면 그 어느 것보다도 큰 공이 될 터.

"그대가 뇌마인가?!"

방립이 쩌렁쩌렁한 목소리로 일갈하듯 물었다.

그러자 수뇌들은 합죽이처럼 입을 다물었다. 방립은 천무기의 대행. 실상 그가 왕이라는 얘기.

"이야기는 익히 들었다. 난 방립이다. 교주님께 대행 권한을 위임받았으니 하대를 해도 되겠지?"

딱 봐도 어이가 없는 말.

제깟 놈이 뭔데 감히 주제도 모르고 부교주에게 하대를 친단 말인가.

심지어 새외 부족 출신에 정식으로 입교한 자도 아니다.

하나 수뇌들 중 누구도 입을 열지 못했다.

왜? 천산의 왕은 천무기니까.

한데.

"아는 놈입니까?"

장이서가 지나가는 개를 보듯이 묻는다. 이에 마오가 우하하! 박장대소를 터트렸다.

세상에 지금 본교에서 오군장을 모르는 건 아마 장이서뿐일 거다.

순식간에 모르는 놈이 되어버린 방립은 화염대장이란 별호에 걸맞게 얼굴까지 시뻘게져서는 격노했다.

"감히 겁도 없이 까부는구나! 당장 요절을 내주마!"

방립이 벌떡 일어나 칼을 뽑아 들자 수뇌들도 뒤따르듯 거센 투기를 일으켰다.

그야말로 일촉즉발의 상황!

"이 새끼들이, 구유!"

이에 마오와 구유가 장이서의 앞뒤를 보호하듯 막아섰다.

확실히 3년이란 시간이 길긴 했는가 보다.

마오가 이리 대견해진 걸 보면.

그간 얼마나 많은 사투를 벌여왔는지 눈빛만 봐도 알겠다.

그야말로 감개무량.

이에 묵묵히 앉아 있던 장이서가 미소 짓고는 자리에서 일어섰다.

그러고는 춘풍이 일 듯 나지막이 한마디를 뱉었다.

"칠공자님."

"어? 왜!"

"그동안 고생 많으셨습니다."

"갑자기?!"

"예. 그리고 무사히 돌아오신 것을 경하드립니다."

이내 허리를 숙이며 포권을 취하는 장이서.

"...!"

이에 모두가 어안이 벙벙해졌다.

지금 이게 뭐 하는 짓인가.

분위기 파악이 안 되는 건가.

맥락이 안 맞지 않은가.

다 죽게 생긴 마당에 환영 인사라니.

"크큭... 크하하하하하!"

결국 방립이 대소를 터트리고, 수뇌들도 낄낄 웃음을 뱉었다.

이런 병신이 다 있나.

방립은 고개를 저으며 역시라고 생각했다.

'이런 놈이 부교주? 하긴 천산의 머저리들이 추켜세우는 게 뻔하지. 오늘 네놈의 부풀어진 허명을 끝장내주마.'

방립이 자신만만하게 코웃음 치며 싹 다 죽이라고 말하려는 순간이었다.

콰아아앙!

한순간에 문짝이 부서지며 주르륵! 사내 하나가 바닥을 쓸 듯이 밀려왔다.

"...!"

장내가 얼어붙고, 눈이 부릅떠진다.

이 중 가장 놀란 건 화염대장 방립이었다.

"유령마군?!"

붕대로 휘감은 유령마군이 흰자위만 남긴 채 미동도 없이 쓰러져 있었다.

307.

#환영식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상황.

아무리 퇴물이라도 장로들에 견준다는 유령마군이다.

한데 그가 이리 허망하게 당하다니.

그리고 잠시 후.

사박, 사박.

황금 가면을 쓴 검붉은 피풍의의 여인이 안으로 들어섰다.

그제야 모두가 탄식을 뱉으며 수긍했다.

유령마군이 쓰러진 이유.

아무리 그가 강하다 한들 어찌 그녀를 이기겠는가.

마일성을 제하면 장로들마저 내려다본다는 괴물.

"과, 광명천마대주!"

발작하듯 수뇌들이 비명을 질렀다.

그녀는 장이서 앞에 멈춰 서서는 고개를 조아리며 모두를 한 번 더 뒤집었다.

"밖은 모두 정리하였습니다."

"...!"

정리하다니. 설마!

수뇌들이 황급히 놀라며 밖으로 달려 나가려는 순간.

"흐익!"

천마대원들이 칼을 겨누며 무섭게 들어서기 시작한다.

그리고 그들 뒤로 언뜻 바깥의 풍경이 눈에 담겼다.

장원을 뒤덮을 만큼 모조리 쓰러져 있는 수하들의 흔적 말이다.

"이곳은 어찌할까요."

하지만 아직 다 놀라기엔 일렀다.

곰곰이 생각해 보면 모든 것이 섬찟했다.

도대체 삼천계단에 있어야 할 그녀가 어째서 이곳에 있는가.

또한 왜 천마가 아닌 장이서에게 고개를 조아리며 보고를 올리고 있는 것인가.

천무기가 그렇게 회유하려고 해도 대화조차 하지 않던 그녀가!

이 뜻은 딱 하나였다.

'천산의 왕이 바뀌었다-!'

기회주의적인 수뇌들의 눈빛이 희번덕거리며 빛났다.

이어 장이서는 그런 수뇌들을 찬찬히 살피며 일갈했다.

"칠공자님의 환영식이다. 축하해 주러 온 자들을 그냥 죽일 수는 없지. 아니라면 모를까. 안 그런가?!"

그러자 수뇌들은 두 눈을 번쩍 뜨고는 가지런히 두 손을 모았다.

자신들이 지금 무얼 해야 하는지 단박에 깨달았기 때문.

털썩, 털썩.

수뇌들이 하나둘씩 바닥에 엎드린다.

그리고 장내가 떠나갈 듯이 외쳤다.

"칠공자님의 무사 귀환을 경하드립니다!"

"칠공자님의 무사 귀환을 경하드립니다!"

마오와 구유는 어리둥절한 눈으로 주변을 훑었다.

보고도 믿기가 힘들었다.

자그마치 3년이었다.

저들은 늘 칠소궁을 무시했고, 조금 전엔 칼까지 뽑아 들려고 했었다.

한데 그런 그들이 한순간에 태세를 바꿔 넙죽 엎드렸다.

차이는 하나.

"장이서...."

자신의 영원한 보좌.

장이서.

그가 존재하느냐, 아니냐다.

"감히 이것들이! 지금 뭣들 하는 것이냐-!"

물론 수뇌들이 잊고 있던 존재가 하나 있긴 했다.

산왕가 오군장 중 넷째.

화염대장 방립!

이글이글 끓어오르는 공기에 수뇌들은 숨을 훅 들이 삼켰다.

방립이 겉은 번들번들해 보여도 실력은 확실했다.

오군장 중에서도 최근 들어온 막내 문충과 다르게 넷째인 방립까지는 과거 당주들에 필적한다고 알려진 초고수.

"깡그리 다 불태워 주마!"

화르륵!

방립의 몸에서 짙은 화염이 뿜어졌다.

"꼭 눈치 없이 나대는 것들이 있다니까. 장이서 넌 가만히 있어. 내가 얼마나 달라졌는지 보여줄 테니까."

이에 맞서듯 마오가 앞으로 나선다. 그러자 방립은 눈썹을 꿈틀하며 이죽거렸다.

"지금까진 칠공자란 이유로 대우해 줬으나 이 패를 지닌 이상, 네놈은 그냥 애송이일 뿐. 죽어도 너무 억울해 말거라."

스릉! 방립이 발검하곤 자세를 잡는다.

그야말로 불과 불의 대결!

그간 분분했다.

염제와 화염대장 중 누가 더 양기의 고수인가.

모두의 관심 속에 방립이 먼저 기합성과 함께 칼을 휘두르며 날아들었다.

"하이야아아앗!"

마오는 그때까지도 창룡도를 어깨에 걸쳐놓고선 목을 까딱였다.

"야, 네가 아까 장이서 죽인다고 했냐?"

방립은 이를 무시한 채 눈을 부릅뜨고 칼을 휘둘렀다.

화르륵!

새빨간 불꽃에 휩싸인 엄청난 일격!

한데도 마오는 여전히 움직이지 않는다. 설마 싸우는 걸 포기한 것인가.

그럴 리가.

"근데 그거 알아? 내 앞에서 장이서 건드는 새끼는... 다 뒈지는 거야-!"

방립의 칼이 코앞까지 떨어져 내린 그 순간.

마오의 눈에서 짙은 안광이 뿜어지며 방립보다도 수 배는 더 빠른 움직임으로 광망이 되어 앞으로 쏘아져 나갔다.

『염화룡섬(炎火龍閃)』

번쩍!

"크아아악!"

화르르륵!

그대로 불꽃에 휩싸이는 방립.

털썩 무릎을 꿇은 잿더미가 되어버렸다.

"병신."

마오는 씨익 웃으며 말했다.

수뇌들은 식겁한 채 숨이 멎었다.

염제가 강해졌다는 소문은 익히 들었지만, 오군장을 일격에 보내버릴 정도라니.

'염제와 뇌마. 그들이 돌아온 이상 천무기의 시대도 끝이구나.'

수뇌들은 침을 꼴깍 삼키며 깨달았다.

그리고 이러한 분위기에 심각한 위기를 느끼는 자도 있었다.

'한 놈이라도 죽여야 한다. 하다못해 칠공자라도. 안 그러면 대공자님이 위험하다.'

어느새 정신을 차린 유령마군.

바로 그가 숨을 죽인 채 기습을 준비하고 있던 것!

"우하하하!"

이내 승리에 도취한 마오를 향해 소리 없이 튀어 나가려는 그 순간.

장이서와 흘깃 눈이 마주쳐 버렸다.

"...!"

그러자 목젖까지 올라온 숨이 가시가 걸린 것처럼 턱 막혀 뱉어지지 않았다.

손발의 감각은 희미해지고, 지금 자신이 뭘 하려고 했었는지도 망각했다.

끓어오르던 내기는 환관의 몽정(夢精)처럼 헛되이 날아갔다.

그냥 눈이 마주쳤을 뿐이었다.

'마귀...?!'

한데 장이서의 모습에서 범접할 수 없는 마귀가 느껴졌다.

의문은 오래 품지 못했다.

덜덜덜덜.

볼품없게 아래턱이 미친 듯 떨리기 시작한 것.

"큭!"

유령마군은 소스라치게 놀라며 우악스레 제 턱을 손으로 감쌌다.

수치심에 얼굴은 벌겋게 달아오르고, 금세 충격적인 결론에 도달했다.

'내가 겁을 먹었다고?'

자신이 누구인가.

보좌만 아니었다면 대마두로서 장로에도 올라섰을 존재.

한데 다른 사람도 아닌 장이서에게 겁을 먹었다니.

'그럴 리 없다!'

하지만 불신과 달리 몸은 끝내 움직여지지 않았다.

"그만 가시죠, 칠공자님."

"어? 어. 우하하하하! 가자고, 부교주!"

비소를 지으며 떠나가는 모습을 보면서도 끝내 아무것도 하지 못했다.

그저 할 수 있는 것이라고는.

"으아아아아아악!"

모두 떠나가고 난 이후에 터트린 광기뿐.

유령마군의 괴성은 한참 동안 계속되었다.

오랫동안.

쭉.

* * *

한편 밖으로 나온 장이서와 마오.

바깥엔 반가운 얼굴들이 더러 보였다.

"오호호! 오랜만에 뵙습니다."

"잘 지내셨습니까."

"칠공자님께서 무사히 돌아오셔서 다행입니다."

만리신조 묘채경과 영리한 호랑이 지대호. 그리고 황금 거북이 만금수다.

복직한 세 명의 당주가 장이서를 따라 이곳까지 쫓아온 것.

"뭐야. 다들 어떻게 된 거야!"

마오는 반가움에 얼굴이 활짝 피었다.

그들의 사정을 알고 내내 마음이 불편했거늘.

물론 대답은 필요치 않았다.

그들의 미소 짓는 시선이 장이서를 향해 있었으니.

그거면 말 다 한 거다.

"하여튼 장이서 이 자식! 만나면 내가 한 소리 퍼부어 주려고 했는데 꼭 이렇게 사람 감동시킨다니까."

하하하하! 모두가 호탕하게 웃었다.

뭔가 이제야 제자리를 찾아가는 기분.

"근데 이대로 괜찮은 것인가?"

구유가 힐긋 뒤를 살피며 물었다. 유령마군을 이대로 살려둬도 괜찮겠냐는 뜻.

이에 장이서는 의미심장한 미소를 짓고는 말했다.

"오늘은 칠공자님 환영식이니까."

이런 속 좋은 소리가 다 있나.

하나 금세 피식 웃었다.

왜일까. 분명 아침까지만 하더라도 많은 게 불안하고, 내내 갑갑했거늘.

이상하게 장이서가 오자마자 맑게 갠 하늘처럼 다 별거 아닌 듯이 느껴진다.

그게 사람들이 이 녀석 주변으로 모이게 만드는 힘이겠지만.

"아, 됐고! 환영식은 무슨. 난 1년 만에 온 거지만 넌 3년이거든? 그러니까 가자! 오늘 월하촌에서 장이서 환영식이다!"

마오가 주먹을 불끈 쥐며 외쳤다.

"오호호호! 그거 좋군요. 가시죠!"

"이거 거절할 수가 없군요. 크하하하!"

"비용은 제가 다 대겠습니다."

이에 당주들도 환호하며 뒤따른다.

장이서와 구유도 서로 마주 보고 웃고는 걸어 나갔다.

*

거대한 호수를 둘러싼 아름답고 작은 마을, 월하촌.

노을이 질 무렵.

하늘에서 눈이 스르르 떨어져 내렸다.

홍란은 오늘도 어김없이 굳게 닫힌 취선루 2층에 앉아 밖을 살폈다.

'잘 계시나요.'

그치지 않는 눈을 하염없이 쓸어내리듯.

언제고 돌아올 그만을 기다리며.

같은 기대를 품고, 늘 같은 실망을 하고, 또 내일을 고대하며.

그렇게 하루하루를 보냈다.

그리고 오늘.

"오랜만이야."

기적처럼 그가 제게로 왔다.

"주인님...."

홍란. 그녀가 눈시울을 붉히며 선녀처럼 난간에서 내려와 그의 품에 안겼다.

떨리는 손끝. 얼마나 애태우며 기다렸을지 너무도 잘 알겠다.

늘 저를 기다려 주는 고마운 여인.

"이번엔 조금 길었어. 미안."

"아닙니다. 아니에요."

홍란은 애써 눈물을 참아내곤 말했다.

"무사히 돌아오실 줄 알고 있었습니다."

"고맙다."

"주인님...."

그간의 애절함이 가득 묻어나는 눈빛.

보통은 남녀 간에 이 정도 밀착하면 그 뒤도 있기 마련이지만.

아쉽게도 오늘은 아니다.

"산통 깨서 미안하다만, 순서가 밀려 있어서 그런데 뒷사람 생각도 좀 해주는 게 어떻겠느냐?"

"다, 당주님!"

홍란이 뒤의 묘채경을 보곤 화들짝 놀라며 걸음을 물렸다.

그리고 저와 똑같이 눈시울이 붉어진 다른 이들이 있음을 깨닫곤, 배시시 입가에 웃음을 지었다.

"장형...."

흐어어엉! 범처럼 포효하며 달려드는 소오.

한걸음에 달려와 장이서를 끌어안고 울음을 터트렸다.

"잘 지냈나."

"아주 엉엉! 그냥 흐엉!"

요약하자면 서러웠지만, 어찌어찌 잘 지냈다는 얘기.

"우하하! 나는 안 반갑냐? 아주 주객도전이지!"

마오와 함께 온 일행들도 씨익 웃는다.

드디어 다시 모였다.

칠소궁의 식솔들이.

그리고 장이서가 인사를 마치고, 앞으로 걸어 나가자 타인에겐 누구보다도 냉혹하나 저에겐 한없이 다정한 이가 서 있었다.

"다녀왔습니다, 사숙."

언제나 제 편이 되어주는 가족.

"왔느냐."

독마 양대헌.

3년이 흘러 다시 만났다.

*

와하하하하!

취선루의 불이 켜지고, 오랜만에 화기애애한 웃음꽃이 가득 피었다.

3년 만의 재회였으니 오죽하랴.

"난 장형이 올 줄 알았다니까. 원래 제일 힘들 때 꼭 혼자 멋있게 등장하잖아."

"오호호! 아무렴. 하루 이틀이더냐!"

그의 귀환을 두고 즐거움을 만끽하고 또 만끽했다.

물론 마냥 좋기만 한 건 아니었다.

과거에 비해 빈자리가 많았기 때문.

청해로 떠난 용태네와 봉문한 마의. 그리고 새외를 떠도는 맹휘가 자리하지 못했다.

더구나 취선루까지 문을 닫는 바람에 다들 영 상태가 좋지 못하다.

무구는 날이 상했고, 옷도 다 헤진 상태.

그만큼 당면한 마교의 실정이 썩 좋지 않다는 얘기.

"한데 대체 무슨 일이 있었던 것이냐?"

묘채경의 물음에 모두가 귀를 쫑긋 세웠다.

모두가 가장 궁금해하는 내용.

그때 소오가 눈치 없게 훅 치고 들어온다.

"근데 부교주님한테 이렇게 막 하대해도 되는 거야? 당주 주제에?"

"끄, 끄응."

묘채경의 얼굴이 벌게진다.

아무래도 아직은 좀 더 즐길 때인 듯하다.

하하하하!

다시 장내엔 웃음이 피었다.

308.

#충분한 시간

회포를 풀던 이들이 하나둘 술에 취해 잠이 들고.

어느새 식탁엔 장이서와 홍란 둘이 남겨졌다.

그러고 보니 대각선 끝에 널찍이 떨어져 앉아 대화 한 마디 제대로 못 나눴다.

흘깃 살피자 얼굴이 홍당무처럼 발그스름해 있다.

"괜찮아?"

조심스레 물어보자 그녀가 힘 있게 고개를 끄덕이며 답했다.

"네!"

취했네. 얘 취했어. 원래 이렇게 먹는 애가 아닌데. 누가 먹였냐.

"아."

얼씨구. 비틀거리는 게 예삿일이 아니다. 주변을 둘러보자 마오는 식탁에 나자빠진 지 오래고, 당주들은 1층 밖에서 서로 어깨동무한 채 빙글빙글 돌고 있다. 저 인간들이네. 저 인간들이 먹였어.

"같이 걸을까?"

헛웃음을 뱉고 다정히 웃으며 말하자.

"네?"

홍란의 얼굴이 더 빨개졌다.

*

두 사람은 취선루에서 나와 함께 홍예교를 걸었다.

3년 만이었다.

변한 게 많았다. 왁자지껄 붐비던 길목은 한산해졌고, 활짝 웃던 신도들의 표정은 어두워졌다.

마교답지 않게 활기차던 모습이 취선루의 상징이었기 때문일까.

"죄송해요...."

홍란은 죄책감이 큰 듯했다. 말도 안 했는데 고개부터 푹 숙여 사과하는 걸 보면.

"근데 거긴 나 아니고 난간인데."

"아?"

화들짝 놀라 고개를 들다 넘어지려는 그녀의 어깨를 뒤에서 살포시 잡았다.

"괜찮아?"

"네? 네. 아니요!"

홍란이 당황하며 휙 돌아 밀어내며 뒤로 주춤 물러선다.

근데 거기 난간이라니까.

"아!"

뒤로 넘어지려는 그녀의 허리를 휙 감싸 안았다.

"주, 주인님...."

그러자 부끄러워 어쩔 줄 몰라 하는 홍란. 목선이 붉게 물든다.

"홍란."

지그시 살피자 그녀의 속눈썹이 크게 떨린다.

하나 금세 저의 시선이 보다 아래에 있음을 깨닫곤 황급히 고운 손으로 이를 가렸다.

근데 소용없다. 이미 봐 버렸으니까.

목덜미에 유난히 푸르고 커진 힘줄.

독공(毒功)의 여파다.

사숙을 따라 독을 취하면서 힘줄이 커지고 혈에도 독이 서린 거다.

독에 있어선 상승 경지로 평가받는 독혈인(毒血人)에 올라선 것.

그 짧은 시간에 대체 얼마만큼 노력을 한 것인가.

만독불침인 자신과 달리 그녀는 오롯이 맨몸으로 극독을 견뎌내야 했을 텐데.

짐작건대 상상도 할 수 없는 고통의 시간이었을 거다.

표정이 굳어지자 홍란이 어느새 취기를 날려 보내곤, 슬픈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이상하죠...."

"그럴 리가."

진심이었다. 왜 그녀가 이렇게까지 수련에 매진했는지. 그 마음을 너무도 잘 알기에.

한 번도 앓는 소리 없이 기다려 준 여인임을 알기에.

그 마음이 너무도 예뻐서.

그녀의 손을 붙잡아 내리곤 말해 주었다.

"예뻐."

그러니까 안 숨겨도 된다고. 괜찮다고. 이에 홍란은 글썽이는 눈으로 가장 환히 웃으며 답했다.

"보고 싶었습니다."

보고 싶었다고.

그 말이 얼마나 진심인지 잘 알기에 가슴이 떨렸다.

구름이 스쳐 지나고, 둥그런 만월이 월광호 위에 떠오른다.

그리고 바로 그때.

"장이서가 가출했다-!"

잠에서 깬 마오의 호들갑이 어색한 밤공기를 깨운다.

"푸훗."

"하하."

이내 마주 보며 크게 웃음을 터트리는 두 사람.

"가자."

"네."

조금 더 가까워진.

어느 날의 밤이었다.

*

만찬이 끝나고 늦은 저녁.

장이서는 오랜만에 칠소궁의 제 방으로 돌아왔다.

홍란이 꾸준히 관리를 해준 탓인지 어제 머물렀던 것처럼 깨끗했고 변함이 없었다.

마음도 그랬다.

오랜 시간 후에 들른 곳인데도 그 어느 곳보다도 편안했다.

아마도 여기가 진짜 제집이기 때문이리라. 물론 한 가지가 더 있긴 했다.

'사형과 지낸 3년이 너무 고되긴 했지.'

생각하니까 식은땀 맺힌다.

"한결 편해 보이는구나."

바로 그때 뒤에서 사숙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이에 활짝 웃으며 답했다.

"예, 사숙도 많이 건강해지신 것 같습니다."

"후후, 란이가 많이 챙겨 준 덕분이지."

란이. 애칭에 저리 다정한 표정이라니. 그새 홍란과 사숙이 얼마나 가까워졌는지 잘 알겠다.

하긴 독혈인에 오르는 동안 늘 함께였을 테니.

훈훈한 웃음을 지으며 어깨를 으쓱이는 찰나.

"네 짝을 찾는다면 멀리 보지 말거라. 란이만 한 아이도 없으니."

컥! 숨만 쉬었는데 사레가 들렸다.

"크흡. 설마 아까 다 보신 겁니까?"

"안 보고 싶어도 보이더구나. 그 아이가 널 많이 기다렸다."

하하....

"어지간히 마음에 드셨나 봅니다."

"3년을 옆에서 지켜보았다. 단언컨대 널 제하면 내 그만큼 뛰어난 아이는 보지 못했다."

그 정도 자질인가. 하긴. 고개가 끄덕여지긴 했다. 본디 모용세가에서도 빼어난 기재였으니.

근데 혼처를 찾는데 무슨 자질 타령인가.

"그만큼 란이의 노력이 간절했다는 얘기다."

사숙의 말은 짧았지만, 간절이라는 말의 여운은 길게 남았다.

점점 멀어지는 절 보며 조금이나마 도움이 되겠다는 일념으로 묵묵히. 꾸준히 달려온 그녀의 마음을 너무도 잘 알기 때문.

하지만 혼인은 생각해 본 적도 없는 데다가 또....

'혼인하지.'

이 와중에 그녀의 얼굴은 왜 또 떠오르는 건지.

'잘 지내고 있으려나.'

청해로 갔다고 들었는데.

어느 순간 머릿속에 홍란과 사해령의 얼굴이 동시에 떠오르고 가슴이 묘하게 떨리는 그 순간.

이내 현실을 깨닫곤 픽 헛웃음과 함께 고개를 절절 저었다.

야밤에 이 무슨 청승인가.

제 삶에 여인은 무슨. 어울리지 않는 사치다. 이내 눈매를 좁히곤 장난치듯 답했다.

"한데 조금 서운해지려고 그럽니다. 저입니까, 홍란입니까."

그러자 독마는 잔뜩 당황한 채 헛기침을 토했다.

"쓸데없는 소리! 아무튼 잘 생각하거라. 네 짝이 안 된다면 내 수양딸로 삼을 것이니."

입꼬리가 저절로 씨익 올라섰다. 어쨌든 자신이 아끼는 사람들이 서로를 좋아하고 챙겨준다는 게 이리 기쁜 일인 줄은 처음 알았다.

좋은 일이다.

"그나저나."

사숙이 목소리를 갈음하곤 말했다.

"대체 무슨 일이 있었던 것이냐."

지난 3년. 다른 이들에게는 별다른 말은 하지 않았다.

믿지 않아서는 아니다. 단지 모처럼 만나 회포를 푸는 자리에서 산통을 깨고 싶진 않았다.

하나.

"혈존을 만났습니다."

독마는 자신과 천마처럼 사부와 깊이 연관된 인물. 숨김 없이 토했다.

"놈이 살아 있었던 것이냐-!"

분노에 찬 고함이 터졌다.

"잘은 모르지만 놈도 사부님을 알고 있는 듯했습니다."

장이서는 자신이 만났던 이들에 대해 최대한 빠짐없이 이야기했다.

마을 사람들이 일시에 몰살당했고, 또 얼마나 위험한 사상을 지니고 있었는지도.

이에 독마는 이를 들으며 때론 놀라기도 했고, 침음을 삼키기도 했다.

"...진우광이 있는 곳을 알아낼 수 있다고 하였느냐. 하여 일부러 모습을 드러내지 않은 것이고?"

나직이 고개를 끄덕였다.

"확실히 대단한 놈들이긴 한가 보구나. 진우광. 그 자존심 강한 녀석이 가만있을 정도라면."

솔직히 그것에 대해선 잘 모르겠다.

정말 잡지 못해서 저에게 맡긴 것인지. 아니면 그냥 그러고 싶어서인지는.

하나 중요한 것은.

"이제부턴 제가 찾아낼 겁니다."

자신이 의지를 품었다는 것이다.

"잘 해낼 것이라 믿는다."

독마는 신뢰 가득한 눈빛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진우광과 장이서.

자신이 아는 두 사람이라면, 준비가 안 됐다면 아예 나오지도 않았을 테니.

한 가지 신경 쓰이는 점은....

"사부님이 걱정되시는 거죠."

독마는 눈을 크게 떴다가 이내 픽 웃었다.

저만 장이서를 읽을 수 있는 게 아니다. 장이서도 저를 읽을 수 있다.

"그래. 혈존이 정말 살아 있는 거라면...."

어쩌면 한무영도 당했을지 모른다. 하지만 장이서는 고개를 저었다.

"사부님께선 혈존이 불사의 존재라고 하셨습니다. 잘은 모르지만, 아마 사부님께 당했던 자가 되살아났다고 보는 쪽이 더 맞을 겁니다."

그게 아니고서야 붉은 면류관의 괴인이 절 보고 그리 분개하진 않았을 것이니.

'뇌신의 망령 따위에게 감히 본좌가 당할 것 같으냐!'

독마는 그제야 편안한 웃음을 지으며 말했다.

"하긴, 네 사부를 당해낼 자가 있을 리 없지."

도대체 얼마나 강했길래. 장이서는 문득 궁금해 물었다.

"사부님과 사형은 어떤 분들이었습니까."

사형. 천마와 사형제지간임을 처음으로 공언했다.

하나 이미 다 아는 일.

독마는 흠칫 놀랐지만, 이내 괘념치 않는다는 듯 이렇게 비유하며 답했다.

"진우광이 천마의 환생이라면, 그분은 천마를 베는 천신이셨다."

천마와 천신이라.

말만으로도 가슴이 웅장해진다.

대체 두 사람은 어떤 사제지간이었을까.

"진우광은 오만하였고, 독선적이었다. 타고나길 그런 놈이었지. 마(魔) 그 자체였다. 미천한 출신이었음에도 모두를 아우를 만한 재능과 실력을 지니고 있었지. 살혼대 살수일 때 이미 장로를 벨 정도였으니."

정말 신분과 상관없이 태생부터 유아독존이었구나. 절로 고개가 끄덕여지는 일.

"반면 그분은 소교주인데도 다정하였고, 인간적이었다. 아닌 척하면서도 모두를 돌볼 줄 아는 그런 분이셨지."

"정반대였군요."

"후후, 아마 진우광이 그분의 제자가 되지 않았더라면 이미 천하는 그놈 발아래서 고통받고 있었을 거다. 그분의 가장 큰 공은 진우광이라는 절세 마귀(魔鬼)에게 일말의 인심(人心)을 심어둔 것이니."

그렇구나.

생각해 보니 등골이 오싹해졌다. 일말의 인심도 없는 천마라.

만일 그랬다면 지금 세상은 어떻게 되었을까.

단언할 수는 없으나 아마 끔찍한 지옥이었을 거다.

'잘해야겠구나, 사형한테.'

장이서가 처음으로 사제로서의 책임을 인지하는 순간이었다.

"그래도 둘 사이가 나쁘진 않았다. 늘 언제 터질지 모르는 화약고처럼 싸우곤 했지만, 그래도 위험한 순간이 오면 누구보다 서로 등을 맡길 수 있는 사이였지."

솔직히 잘 체감이 되지는 않았다.

천하의 천마 진우광이 누군가에게 등을 맡기고 함께 싸우는 모습이라니.

"한데 세 분에게 위험한 순간도 있었습니까?"

"후후, 왜 없겠느냐. 교내부터 사방이 적이었던 전란의 시대였다. 늘 위험이 잇따랐지."

사숙의 눈빛을 보니 그날의 회상에 빠진 듯했다.

다시는 돌아오지 못할 순간에 대한 그리움이 가득한 표정.

이 순간만큼은 더 일찍 태어나 그 시대를 바라보지 못한 게 아쉽다고 느껴졌다.

뇌신와 천마. 그리고 독마.

세 절대자가 위험천만한 전란의 시기를 평정하던 바로 그 시대를 말이다.

"한데 놈들을 찾아낼 방법은 있는 것이냐. 진우광 그 독한 녀석에게도 안 잡히는 놈들 아니냐."

독마의 말에 상념을 깨고선 답했다.

"...3년이면 벌레들이 기어 나와 활보하기에 충분한 시간이죠."

그게 중원이든, 본교든.

"짐작 가는 게 있는 것이구나."

"아직 확실한 건 아닙니다."

다만 뒤가 구린 녀석들일수록 조금만 빈틈을 보여도 스멀스멀 움직이기 마련.

장이서가 씨익 사악한 웃음을 지었다. 이에 독마는 속으로 생각했다.

저 웃음의 대상이 누구든 미래가 그리 편치만은 않겠노라고.

"도움이 필요하면 언제든 말하거라."

독마가 덤덤한 목소리로 말했다.

"예, 사숙."

세상 이보다 든든할 수가 있을까.

돌아오길 잘했단 생각이 드는 하루였다.

309.

#천무기의 결단

월하촌이 화기애애한 분위기로 무르익을 무렵.

수치심과 분노로 물든 이도 있었다.

"다시 지껄여 보거라."

태사의에 흐트러진 자세로 앉아 씩씩대는 사내.

마오를 위한 진정한 환영식을 열어준 꼴이 되어버린 대공자 천무기였다.

"송구합니다. 광명천마대와 당주들이 들이닥쳤고, 무사들이 겁에 질려 미처 막아낼 수가...."

"닥쳐라!"

팔걸이에 장식된 용머리가 떼어져 날아가 부복한 유령마군의 머리를 가격했다.

퍽!

붕대가 시뻘겋게 물든다. 억울할 법도 하거늘 묵묵히 침묵한다.

그의 충심이 엿보이는 자세.

하나 천무기의 눈엔 그런 건 일절 보이지 않았다.

"장이서가 돌아온 것도 모자라... 감히 내 꼴을 우습게 만들어?! 도대체 네놈은 그렇게 될 때까지 무얼 한 것이냐!"

또 사군장이 당했고, 수뇌들은 모두 무릎을 꿇었다.

그것도 자신이 자리를 비우자마자!

세상 이런 치욕이 어디 있단 말인가.

하나 더 이상의 문책은 무의미한 일.

옆에 서 있던 산왕가주 파군성이 충언했다.

"중요한 것은 장이서를 결코 이대로 두면 안 된다는 것입니다."

천무기의 눈에서 서슬 퍼런 살기가 스쳤다 사라진다. 맞는 말. 유령마군 따위 잡아 족쳐봐야 뭐 하겠는가.

"장이서...."

지금 처리해야 할 놈은 바로 그놈이다.

3년 전, 그에게 패하여 봉문에 처한 뒤. 도대체 얼마나 그를 생각했는지 모른다.

감히 단언컨대 누군가를 극도로 사모해도 이 정도까지는 아닐 것이다.

자면서도 늘 그의 꿈을 꾸었고, 밥을 씹어 삼킬 때에도 생각했다.

"더 늦기 전에 바로 죽여야 합니다."

산왕가주 파군성이 거침없는 제안을 던졌다. 이에 유령마군은 기겁하며 말렸다.

"대공자님, 그리 쉽게 판단할 일이 아닙니다. 염제의 실력도 생각보다 훨씬 뛰어나고 그리고 장이서에겐 알 수 없는...."

솨아아아.

유령마군은 말을 마치기도 전에 생명의 위협을 느꼈다.

저를 향해 떨어지는 스산한 시선.

당장 찢어 죽이기 전에 입 다물라는 점잖으면서도 과격한 신호.

꿀꺽. 끝내 마른침과 함께 말을 삼켰다.

이에 천무기는 눈을 부라리며 명했다.

"죽고 싶지 않으면 당장 내 눈앞에서 꺼지거라."

"대공자님...."

"꺼져."

유령마군은 파르르 떨고는 끝내 자리에서 일어섰다.

보좌였던 자신이 도대체 어쩌다 이 꼴이 된 것인가.

슬쩍 곁눈질로 옆의 파군성을 살피자 비열한 몰골로 입꼬리를 올리고 있다.

'저 찢어 죽일 놈....'

구와 현 실세의 처지가 너무도 극명하다.

유령마군은 끝내 힘겹게 걸음을 돌렸다.

'장이서... 그놈을 조심하셔야 합니다.'

끝내 그의 기이한 살기(殺氣)에 대해선 입도 뻥긋 못한 채로.

유령마군이 나가자 파군성이 승자의 비소를 짓는다.

"너무 노여워 마시지요. 아직 쓸모가 있는 자입니다."

"보좌라는 작자가 저 모양이니 내가 3년 전 그런 꼴을 당한 것이다. 장이서 그깟 놈이 뭐라고. 그놈은 강해서 날 이긴 것이 아니다. 교묘한 술수에 당한 것뿐이지."

"지당하신 말씀입니다. 그러니 더더욱 장이서를 없애야 합니다. 만일 이대로 두면 그가 어디로 갈 것 같으십니까."

"...장로회겠지."

천무기가 이빨을 질끈 물었다.

교칙상 장로회는 부교주의 직속 산하 기관이 된다.

그리고 마일성은 이를 빌미로 자신의 제안을 거절하고 봉문을 택했다.

그깟 교칙 따위 바꾸면 그만인 것을.

시대에 뒤떨어진 무능아들!

심지어 그중엔 제 숙부인 이장로 천오산도 있었다.

'뇌마는.... 아니, 부교주님은 결코 이길 수 없을 겁니다.'

아주 개 같은 저주만을 남기고 사라져 버렸지만.

"그러니 지금 치셔야 합니다."

"하지만 광명천마대가 나섰다는 건 아버님께서 돌아오셨단 얘기가 아니더냐."

"아닙니다. 천마전의 문은 여전히 굳게 닫혀 있다고 합니다."

"음...."

"생각해 보십시오. 시간이 흐를수록 명분을 쥔 장이서의 세는 더욱 거세질 겁니다."

빠득. 천무기의 이빨이 세게 갈린다.

수뇌들을 제 밑으로 모아두기까지 자그마치 3년.

한데 공들인 성탑이 장이서의 등장만으로 흔들렸다.

광명천마대에 구(舊) 당주들. 그리고 염제와 칠무위까지.

이 정도면 마교 전력의 3할은 들이부어야 승산이 있는 수준.

더구나 박쥐처럼 무릎을 꿇은 수뇌들에게 무얼 더 기대하겠는가.

하지만.

"제가 힘이 되어드리겠습니다."

천무기의 입꼬리가 길게 올라섰다. 그래. 지금 제게는 그가 있다.

지금의 절 있게 만들어 준 산왕가주 파군성.

이들과 함께라면 못 할 것도 없는 일.

이내 음산한 목소리로 말했다.

"월하촌에는 괴물이 살고 있다."

지금껏 마오가 염제라 신도들에게 떠받들어지며 치고 올라오는 동안에도 죽일 수 없었던 이유.

그건 바로 월하촌에 사는 괴물.

독마 양대헌 때문이었다.

천마대주든, 당주들이든, 염제든, 장이서든!

자신이 다 상대할 자신이 있었지만 그는 아니었다.

몇 년 전 취선루를 없애는 데 실패하고, 처소에서 잠이 들 무렵.

가위에 눌려 침음을 뱉다 눈을 번쩍 떴더니 청록빛의 운무가 스산히 바닥에 깔려 있었다.

이에 화들짝 놀라 벌떡 몸을 일으키자 귓가에 섬찟한 목소리가 들렸다.

'월하촌에 발도 들이지 말거라. 지난번엔 네 수하들이었지만, 이번엔 너다.'

그제야 천무기는 양대헌의 존재를 깨달았고, 그가 흑화위를 없앤 진범임도 알게 되었다.

'찢어 죽여버릴 것이다-!'

이에 격노하여 복수를 꿈꾸기도 했으나 제 밥상에 49일간 독이 올라오는 걸 보곤 그 뜻을 접었다.

그에겐 도저히 이길 수 없는 장벽이었던 것.

만일 독마가 아니었다면 마오는 영영 못 돌아올 서역으로 보내버렸든가, 아니면 진작 죽여 없앴을 것이다.

한마디로 지금 월하촌으로 간 장이서를 없애려면 우선 그 괴물부터 치워야 한다는 얘기.

"염려 마십시오. 괴물을 상대하려면 똑같이 괴물을 붙이면 됩니다."

"음...."

파군성의 말에 천무기가 침음을 뱉었다.

독마는 입신의 경지에 오른 자.

그와 같은 괴물은 역시나 화경. 또는 극마에 오른 절대자라는 얘기다.

그리고 그는 천무기도 이미 마주했었다.

거대한 대검(大劍)을 패용한 채 세상을 내려다보던 사내.

천마전의 괴물들을 제한다면 자신이 본 이들 중 가장 강했던 자다.

생각만 해도 오싹하고, 자신에게 둥지 밖에 천외천을 깨닫게 해준 자.

"그자라면 믿을 만하지. 도와만 준다면 말이다."

"염려 마십시오. 혈교는 언제나 대공자님 편이니까요."

혈교(血敎)!

파군성의 입에서 충격적인 말이 뱉어졌다.

그 말인 곧....

"내가 본교의 교주에 오르는 날. 혈교와 너희 산왕가의 공로는 잊지 않을 것이다."

그렇다. 천무기가 혈교와 손을 잡았던 것이다.

장이서의 예상대로 3년이란 시간은 이들이 음지에서 기어 나와 활개치기 충분한 시간이었다.

"독마는 그믐날이 되면 만년설산 정상으로 향하지요. 그리고 거긴 곤륜산맥의 초한봉(初寒峰)과 아주 가까이에서 마주하는 곳. 그날 독마가 죽어 사라져도 아무도 알지 못할 것입니다."

파군성이 스산한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숙였다. 그야말로 하루 이틀 준비한 계획이 아니다.

더구나 이게 끝이 아니었다.

"그리고 우리에겐 이것이 있지 않습니까."

이것. 파군성의 말에 천무기가 음산한 미소를 짓는다.

그러곤 품에서 무언가를 꺼내 들었다.

영롱한 빛을 발산하며 음산한 기운을 내뿜는 어딘가 낯익은 핏빛 구슬.

혈옥(血玉)이다!

"그래. 이 혈옥만 있다면 상대가 누구든 날 넘어설 수 없을 것이다. 후후후."

우우우웅!

천무기의 몸에서 거침없는 기세가 뿜어져 나왔다.

그러자 이에 동하듯 혈옥이 번쩍거린다.

그렇다.

천무기는 지난 3년간 그저 세만 키운 것이 결코 아니었다.

혈교의 마공을 익히지 않고도, 혈옥의 힘을 쓰는 법을 배운 것이다!

하여 신도들의 원한과 고통으로 혈기(血氣)를 가득 채웠다.

뇌옥왕의 것에 비할 바는 아니었지만, 지금의 그를 한 단계 더 올려주기엔 충분한 일.

"당장 혈교에 내 뜻을 전하거라. 마침내 시기가 도래했다고."

마침내 천무기의 결단이 내려졌다.

"존명!"

3년간 쌓인 지독한 악연이 끝을 향해 달려가기 시작했다.

* * *

고즈넉한 이른 아침.

장이서는 당주들과 천마대까지 각자의 위치로 돌려보낸 채 창가에 앉아 명상에 잠겼다.

3년 새 풀벌레 소리가 가득한 자연이 편해진 줄 알았거늘, 확실히 집은 집이다.

심신이 편안한 게 집중도 더 잘 되는 느낌.

우우웅!

곧장 운기조식을 취했다.

그러자 층층이 쌓인 각양각색의 내기가 차례로 움직인다.

흑색의 천마신공부터 녹색의 불사독마공. 황색의 남천능가경을 지나 주황색을 띠는 역근경까지.

하나만으로도 천하를 뒤흔들 네 개의 기운이 신룡(神龍)처럼 몸 안을 주유한다.

이중 과거와 달라진 것이 있다면 다섯 번째 층이 생겼다는 것!

그것도 죽음의 강처럼 짙은 회색빛의 기운.

천마 진우광이 창안한 귀천살마공(鬼天殺魔功)이다.

솨아아아!

기질을 바꿔야 한다는 그의 지론에 따라 이를 대성하면서 다섯 번째 천공을 막아내는 데 성공했다.

이 광오한 마공에 대해선 두 글자로 정의할 수 있었다.

최악(最惡).

천마신공처럼 폭발적이지도 않고, 불사독마공처럼 독하지도 않으며, 남천능가경처럼 현묘하거나, 역근경처럼 강인한 것도 아니었다.

이건 그냥 악(惡)했다.

내기 자체가 살(殺)로 이루어져 조금만 운용해도 머리털까지 살의로 가득 채워졌다.

고오오오오!

지금도 그저 운기조식만 취했을 뿐이거늘, 장내가 살의로 물들었다.

이 정도면 평범한 범인은 호흡이 멎어 죽음을 맞이할 수도 있는 수준.

이러니 어찌 최악이라 말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특히 나중에야 알았지만, 귀천살마공을 익히는 것 자체가 굉장히 위험한 시도였었다.

사형은 본래 천살성(天殺星)을 품고 태어난 자로 날 때부터 살(殺)이 강했다고 했다.

산모가 죽고 태어났음에도 울지 않았고, 처음 발견한 이가 아기의 눈빛이 너무 섬뜩해 마교에 팔았다는 설은 유명했다.

그런 사형이 자신의 살을 녹여 만든 무공이 바로 귀천살마공이었다.

애초에 천살성이 아니면 익힐 수가 없는 무공이었던 것.

그러니 몸이 버티겠는가.

그야말로 살(殺)에 미친 살귀가 될 수도 있는 일이었다.

심지어 사형은 그것도 이미 알고 있었다.

그래서 따지듯 물었더니.

'그것마저 이겨내는 것이 바로 역천이다.'

아주 천마만 아니었으면 살(殺)이 뭔지 제대로 보여줬을 것.

어쨌든 결과적으로는 성공이었다.

귀천살마공을 대성한 후에도 이성을 잃지 않고 살의에 빠지지 않았던 것.

우우웅!

심장부에서 몰아치는 녹색의 기운.

항마의 기운을 가진 남천능가경 심궁의 힘이 반사적으로 정신을 보호해 준 것이다.

물론 그로 인한 문제도 생겼다.

기질을 완전히 바꾸려 했던 천마의 목표가 반만 성공하고, 반은 실패한 것.

쉽게 말해 귀천살마공으로 살(殺)을 일으키지 않으면 달라진 게 하나도 없다는 거였다.

덕분에 살기등등한 사제의 모습을 기대한 사형의 표정은 썩 볼만했다.

입을 벌린 채 넋이 나간 표정을 지었으니.

그 후로 달마 조사의 무공을 익히게 된 배경부터 줄줄이 토해내야 했고.

'크아아아악!'

한 달간 대련을 빙자한 고문을 겪어야 했다.

그래도 괜찮았다.

평생 못 볼 사형의 표정을 볼 수 있었으니. 그건 평생 못 잊지.

그리고 얻은 건 하나 더 있었다.

310.

#회포는 여기까지

귀천살마공이 강해질수록 남천능가경의 힘도 덩달아 거세진 것.

그러다 대성에 이르며 극에 다다르는 순간.

스스스스!

몸 안의 모든 기운이 갈무리되며 본의 아니게 반박귀진(返璞歸眞)의 상태에 이르게 됐다.

극도의 살을 막아내기 위한 남천능가경의 기운이 아예 몸을 감싸버린 것.

덕분에 지금은 기세를 드러내지 않으면 남들이 볼 땐 그저 평범한 범부처럼 느껴졌다.

한마디로 멀쩡해 보이는 자가 속에는 마와 정. 그리고 살과 독이 함께하는 괴종이 되어버린 것.

한 가지 아쉬운 점은 과거 부교주 선거 때 소림의 무공으로 느꼈던 미지의 힘을 아직도 깨우치지 못했다는 것.

깨달음이란 찰나의 기적과도 같기에 이미 지나가 버린 기회는 안갯속 허상처럼 잡히지 않았다.

그나마 남천능가경이 강해지면서 조금 실마리가 보이는 듯했으나, 정체되며 다시 오랜 세월 답보 상태.

'소림이라도 한번 들러야 하나.'

픽. 우스갯소리다.

아무튼 귀천살마공을 익히는 데는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길게 잡아 일 년 정도.

천마와 매일 보며 살았더니 생각보다 살기에 금세 익숙해진 것.

중요한 건 그 후였다.

귀천살마공을 익혀 기질을 바꾸려고 했던 진짜 이유.

퀴아아아아!

음산한 울음과 함께 몸 주변을 배회하는 붉은 기운.

지난 3년간 얻은 가장 큰 수확!

바로 이 녀석, 혈마귀다.

귀천살마공을 풀어내자 식탐을 부리듯 뛰쳐나와 날뛰기 시작한 것.

'지금은 때가 아니니 얌전히 있어라.'

퀴아아아아!

사납게 읊조려 주자 더더욱 기승을 부린다.

한동안 꺼내지 않고 가둬뒀더니 참지 못하고 성질을 부리는 거다.

원하는 대로 날뛰게 해주면 잠잠해지겠지만.

'조금만 더 참아. 여긴 네가 날뛸 곳이 아니니.'

여기서 힘을 드러냈다간 놀랄 사람이 한둘이 아니다.

퀴아아아악!

거절을 표하자 괴성을 지르며 방 안을 휘젓는다.

챙그랑! 화병이 깨지고, 쿵! 의자가 뒤로 넘어간다. 이러다 죄다 박살 낼 기세.

하여튼 성질머리가 지랄이다.

'알았다. 그럼 잠시만이다.'

녀석의 노호에 마지못해 뜻을 굽혔다.

그리고 심궁의 힘을 누르고, 귀천살마공을 다시 운기했다.

고오오오오!

그러자 차오르는 살(殺)의 기운.

기질이 바뀐다.

심장은 차지고, 혈마귀는 물 만난 고기처럼 천천히 몸 안으로 스며 들어갔다.

두근, 두근, 두근.

그러자 핏줄이 요동치고 불그스름한 기운이 체외에 서린다.

이내 서서히 자리를 잡아가는 마귀의 형상.

과거 혈마귀가 등 뒤에 서리던 것과는 달랐다. 이는 마치 혈마귀와 하나가 되어가는 듯한 모습.

그리고 눈을 부릅뜨며 마침내 완성 지으려는 그 순간!

벌컥!

"야, 장이서!"

마오가 들이닥쳤다.

이런 젠장!

우우웅!

무리해서 혈마귀와의 실타래를 끊어내자 기혈이 뒤틀린다.

"칵!"

그대로 피를 토하며 옆으로 꼬꾸라졌다.

"장이서! 정신 차려, 인마! 이 자식은 왜 자꾸 픽픽 쓰러지는 거야. 야, 장이서-!"

시끄럽다.

시야에 암전이 닥쳤다.

*

다시 정신을 차린 건 해가 떨어질 무렵이었다.

"장이서 괜찮아? 하, 이 자식. 혼자 놔둘 수가 없다니까. 어떻게 된 게 더 약해져서 돌아왔어."

옆을 바라보자 마오를 비롯해 구유와 과평이 신생아 보듯이 몰려와 있다.

동그랗게 뜬 눈들이 아주 걱정 돼 죽겠다는 얼굴.

"괜찮습니다."

그냥 혈마귀가 심통이 나서 그런 거지. 다행히 내상은 없다.

"괜찮긴! 자, 이거 내가 독마 영감 방에서 몰래 가져온 약초거든? 빨리 먹어. 그래야 나으니까."

병 주고 약 주냐. 그리고 이건 독초다. 먹으면 바로 죽는 극독. 뿌리 달렸다고 다 약이 아니란 말이다.

"이건 또 어떻게 가져온 겁니까?"

"몰랐어? 오늘 독마 영감 산에 가는 날이잖아. 원래 이맘때쯤 되면 산에 가고 그래. 그 나이 때가 외로우면 산 찾고 그러는 거거든."

뭔 소리야. 한숨을 내쉬자 구유와 과평이 걱정 가득한 목소리로 속삭인다.

'3년 동안 기가 더 약해진 거 같군.'

'저 형님 교주님 수발든다고 고생만 하다 온 거 아닙니까.'

다 들린다. 그리고 수발든 건 맞다. 고개를 휘휘 젓고는 몸을 일으켰다.

"그냥 잠깐 피로했던 겁니다."

"그럼 조금 더 쉬는 게 어떤가."

구유가 걱정 어린 눈으로 말한다.

어쩌다 보니 순식간에 병약한 놈이 되어버렸어.

"괜찮아. 별거 아니니까 걱정들 말고...."

애써 모두를 달래려는 찰나였다.

벌컥! 문이 열리고, 소오가 다급히 뛰어 들어와 외쳤다.

"큰일이야! 지금 대공자가 무사들을 이끌고 오고 있어!"

"...!"

모두의 눈이 경악으로 물든다.

"이 개자식이 여기가 어디라고 찾아와!"

마오는 격분하며 벌떡 일어섰다. 그러곤 나가려다 말고 당부했다.

"장이서. 넌 절대 나오지 마."

"아니, 왜요."

"일단 몸부터 추슬러. 너 지금 상태 안 좋아."

"괜찮습니다."

"말 들어. 지금은 네가 그 자식 마주해서 좋을 것 하나 없어. 그러니까 넌 꼼짝 말고 있어."

뭐야, 이 어른스러운 말은. 다소 놀라 눈을 크게 뜨고 쳐다보자 마오가 진중한 어조로 말했다.

"3년이야."

뭐?

"지금 망가진 천산을 바로 잡을 수 있는 건 부교주인 장이서 너밖에 없다고. 그러니까 몸 사려."

"칠공자님."

"그리고 오늘은 어차피 나 때문에 온 거라고. 우하하! 그때 봤잖아. 내가 그 자식 똘마니 박살 내는 거. 너무 걱정 마. 내가 어떻게든 조용히 집에 돌려보낼 테니."

마오가 씨익 웃고는 밖으로 나간다.

이를 따라 마찬가지로 웃음을 지어 보이고 따라 나가는 식솔들.

손 위에 들려진 독초만을 바라본 채 멍하니 홀로 남겨졌다.

"이거 참...."

미안하면서도 고맙고, 대견하다. 그런데.

"대공자가 그냥 돌아갈 녀석이 아니니까 그렇지."

헛웃음을 지으며 독초를 뜯었다.

아무래도 회포는 여기까지.

이제 할 일을 해야 할 차례인 듯하다.

*

웅성웅성.

신도들이 잔뜩 겁에 질린 얼굴로 길을 열고 수군댄다.

바로 이들 때문이었다.

살벌한 기세를 흩뿌리며 지나가는 대공자 천무기와 산왕가의 무사들.

심지어 가는 길목마다 오군장들이 수하들을 이끌고 합류하니, 월하촌에 다다랐을 땐 그 수가 무려 수백에 달했다.

천무기는 느긋하게 홍예교 위를 걸어 올랐다.

그리고 취선루에 다다른 순간.

"치워라."

짤막한 명을 시작으로 비명이 울려 퍼졌다.

으아아아악!

모여 있던 신도들을 산왕가의 무사들이 칼을 휘두르며 몰아내기 시작한 것.

이에 아수라장으로 변모하고, 신도들이 부리나케 도망치기 시작했다.

하나 미처 도망치지 못하고 넘어진 어린 여섯 살짜리 여아.

"혜이야!"

애 엄마가 소리치고, 여아는 울먹이는 눈으로 저를 향해 다가오는 험상궂은 무사들을 바라본다.

그리고 그 순간.

"지금부터 누구 하나라도 건드리면 다 뒈진다-!"

쩌렁쩌렁한 외침과 함께 반대편 홍예교에서 구세주처럼 일련의 무리가 등장했다.

월하촌의 주인.

"여, 염제님이시다!"

"염제님이 나타나셨다!"

마오와 칠무위.

그들이 나타났다.

"크큭."

천무기가 비소를 흘리자 산왕가의 무사들도 위협을 멈추고 뒤에 시립했다.

한순간에 대치하는 두 무리.

원래부터 앙숙이어서 그런지 일촉즉발의 분위기가 물씬 흐른다.

마오가 가운데 주저앉아 있는 여아를 보며 늠름하게 외쳤다.

"어이, 꼬맹이. 내 뒤로 온다, 실시!"

"으아아앙!"

그러자 울음을 터트리며 달려와 마오의 다리에 안기는 여아.

이에 머리를 쓰다듬고 뒤로 보낸다.

와아아아!

신도들이 환호하며 어깨를 활짝 펴고 무리 뒤에 선다.

그간 숱한 위기에 처했던 월하촌.

이제 마오는 망나니가 아니라 이곳의 주인이자 왕이다.

"이게 뭐 하자는 수작이야? 이건 선 넘는 거지."

마오가 날렵한 눈썰미로 전방을 살폈다.

천무기는 그렇다 치고, 산왕가주 파군성에 이어 오군장 중 남은 셋이 전부 모였다.

황금대장(黃金大將) 곽용기.

강철대장(强鐵大將) 극철.

질풍대장(疾風大將) 풍진.

딱 이름과 별호처럼 생긴 자들.

사실상 전력을 이끌고 온 것이나 다를 바가 없다.

구유와 칠무위도 과거 그들과 붙어본 전력이 있기 때문인지, 곧바로 세력 차이를 느끼곤 표정이 굳어진다.

설마 시답잖은 대화나 하자고 다 끌고 온 건 아닐 터.

"막내야, 선은 네가 넘은 것이다."

"뭐?"

"감히 나의 충신 중 둘을 해하였지 않으냐."

산왕가의 무사들 사이에서 섬찟한 살기가 풍겨 나온다.

화염대장 방립과 청동대장 문충을 뜻하는 것.

이미 예상은 한 바. 마오는 도리어 큰 소리로 외쳤다.

"먼저 덤빈 게 누군데!"

"그건 중요한 게 아니다. 방립은 내 권한을 위임받았던 자. 한데 그런 이를 해하였으니. 너는 역모를 저지른 것이다."

"그게 말이 돼!"

"된다. 내가 그렇게 정한 이상 변명의 여지 없이 네놈은 참형이다."

"여기가 어딘지 잊었어? 월하촌이야. 이딴 협박이 통할 것 같아?"

마오의 당당한 일갈.

칠소궁에 수호룡 구유가 있다면, 월하촌에는 수호신 양대헌이 있다!

뒷감당이 두렵다면 충분히 알아먹고 물러갈 터.

한데.

"이딴 보잘것없는 곳이 뭐 어쨌다고."

천무기는 능글맞게 웃으며 한 걸음을 더 내디뎠다.

"야! 너 지금 제정신이야? 독마 영감 잊었어?!"

"곧 죽어 사라질 퇴물까지 내가 알아야 하느냐."

"뭐...?"

"네 앞가림이나 걱정하거라. 어차피 네놈도 오늘 이곳에서 죽게 될 테니."

"잠깐!"

"왜. 더 할 말 있느냐?"

"여기 신도들 있는 거 안 보여? 일단 신도들부터 내보내고 얘기해."

"내가 왜. 역모를 일으킨 네놈을 지금껏 따른 자들이다. 그것만으로도 모두 죽어 마땅하다."

그야말로 청천벽력 같은 소리.

신도들의 얼굴이 새하얗게 물들고, 마오는 난처해하며 물었다.

"야, 이 씨. 개소리 집어치우고! 좋아. 지금 뭐 자존심 때문에 이러나 본데. 어떻게 해줄까. 내가 어떻게 하면 얌전히 물러가 줄 건데?"

크큭. 천무기는 입가에 사악한 조소를 지으며 답했다.

"글쎄. 네놈이 지금 내 앞에 무릎이라도 꿇는다면. 그럼 한 번은 고려해 줄 수도 있겠지."

안 됩니다!

듣지 마십시오!

곳곳에서 용기 내어 외쳐대는 신도들이 보인다. 구유 역시도 이건 아니라며 말렸다.

하나 마오는 도리어 픽 웃음을 흘렸다.

"그건 어렵지 않지!"

망나니로 살던 자신이다. 술 처먹고 시비 걸고, 수없이 땅바닥을 나뒹굴며 살았다.

남한테 피해 끼칠 땐 그리도 쉽게 굴러다니던 것이 인간답게 살겠다는 지금.

제 사람들을 위해 꿇는 게 뭐 그리 어렵겠는가.

고작 이거 하나에 신도들을 구할 수 있다면 백 번. 아니 천 번도 가능하다.

그러니까.

"약속한 거다."

마오가 당당히 웃으며 제 바짓가랑이를 잡았다.

희비가 엇갈린다.

천무기와 산왕가의 입꼬리가 올라선다. 반면 신도들은 절망 어린 표정으로 고갤 돌리고, 구유와 칠무위의 눈엔 짙은 살기가 뿜어졌다.

그리고 두 무릎이 바닥으로 떨어지는 그 순간.

"내 사람을 위해 굽히는 무릎은 무엇보다도 숭고하고 값진 쓰임이죠. 하지만...."

저벅, 저벅.

뒤편에서 가슴을 들뜨게 하는 목소리가 흘러들었다.

이에 마오가 어정쩡한 자세로 뒤를 돌아보자 그가 다가오고 있었다.

자신의 영원한 보좌이자 스승.

"장이서...."

등장이다.

311.

#가짜 명분

그의 등장은 참으로 기이했다.

"저런 쓰레기들한테까지 그럴 필요는 없습니다. 어차피 그런다고 달라지지 않을 테니까요."

타이르는 듯한 말은 모두의 심금에 울림을 주었고, 홀로 걸어오는 모습은 모든 공기가 그를 중심으로 흘러가게 하는 듯했다.

하여 모두가 할 말을 잊은 것처럼 침묵에 빠졌다.

이는 분위기 때문이었다.

한없이 든든하고 다정해 보이면서도, 묘하게 섬찟함과 무게감이 같이 느껴지는 기분.

흡사 과거 천마가 나타났을 때처럼 말이다.

이에 마오는 괜히 울컥한 마음을 찡그려 숨기곤 말했다.

"왜 나왔어. 잠이나 더 자라니까."

"내 집 앞에 웬 발싸개 같은 놈이 짖어대는데 어떻게 잡니까."

내 집. 칠소궁을 말함이다.

장이서가 씨익 웃자, 마오도 애써 웃음을 지었다.

3년이고, 부교주고.

칠소궁이 제집인 건 여전하다는 마음의 표현.

그게 뭐라고 참 쓸데없이 감동이다.

"그리고 저 자식 칠공자님 때문에 여기 온 거 아닙니다."

"뭐? 그럼 왜 온 건데."

왜긴. 저 때문이지. 지금도 충혈된 눈으로 저만을 노려보고 있지 않은가.

꼭 평생을 기다려 온 원수라도 만난 것처럼.

"장이서... 오랜만이구나."

삐뚤삐뚤 올라가는 입꼬리. 장이서는 이를 보곤 비웃으며 말했다.

"억지로 웃을 필요 없어. 우리가 그럴 사이는 아니잖아."

훅 들어오는 직언. 이젠 말을 높이지도 않는다. 천무기의 표정이 썩은 생선처럼 일그러졌다.

"겁대가리 없이 까부는 건 여전하구나."

"피차 오래 봐서 좋을 것도 없는데 용건이나 말해."

"못 들었느냐. 역모를 저지른 놈들을 벌하러 온 것이다."

"그 자리엔 나도 있었어. 방립이라고 했나? 별거 아닌 놈이던데. 고작 그런 자가 널 대신한다니 실망인데."

이 새끼가 뚫린 입이라고. 천무기는 간신히 분노를 다스리며 말했다.

"상대가 누구였든 나의 패를 지니고 있었다면, 목숨을 걸어서라도 섬겼어야 한다. 그것이 본교의 법도인 것이다."

"아, 법도. 혹시 이 패를 말하는 건가?"

장이서가 품에서 패 하나를 꺼내 들었다. 은색에 불꽃이 새겨진 신패.

천무기의 표정이 와락 일그러진다.

자신이 화염대장 방립에게 주었던 교주 대행 신패였기 때문.

"네놈들이 스스로 역모를 인정하는 꼴이구나! 아니면 내 패를 주웠으니 명분이 있다고 우기고 싶은 것이냐? 뭐든 참으로 천박한 생각이 아닐 수...."

툭. 천무기가 말을 다 끝내기도 전에 장이서는 천무기 앞에다 패를 집어 던졌다. 마치 너나 처먹으라는 듯이.

"가져가라."

"이 새끼가 감히 이게 무엇인 줄 알고!"

천무기의 눈에 열불이 터졌다. 감히 교주 대행의 패를 던지다니. 그것도 땅바닥에!

서둘러 몸을 숙여 패를 주웠다. 그러곤 후후 불어 먼지를 털어내려는 찰나.

"법도가 그리 중하다면 그럼 이건 어때."

슥. 장이서가 다시금 품에서 패 하나를 꺼냈다.

다른 화려한 불꽃 문양의 황금빛 신패!

"처, 천마신패-?!"

이를 가장 먼저 알아본 천무기가 경악을 터트렸다.

천마신패야말로 곧 교주를 뜻하는 절세 신패!

"천마지존 만마앙복!"

"천마지존 만마앙복!"

신도들이 넙죽 엎드린 채 목청껏 외쳤다.

마오와 칠무위도 뒤늦게 이를 깨닫곤 더 보란 듯이 무릎을 꿇고 소리쳤다.

"천마지존 만마앙복-!"

반면 천무기와 산왕가는 당황한 채 석상처럼 굳어졌다.

이건 제 꾀에 제가 당한 격.

설마 장이서가 천마신패를 가지고 있을 줄은 상상도 못 했다.

이에 장이서는 의아한 표정으로 물었다.

"왜 그러고 서 있지? 그새 법도를 잊었나?"

이런 개새끼가! 천무기가 영혼까지 탈탈 흔들린다.

"어, 어디서 모조품을 가져와 개수작을 부리는 것이냐! 천마신패는 오직 아버님만이 갖고 계신 것이다. 한데 너 따위가...."

"말 더듬는 걸 보니 썩 당황한 모양이야. 하긴 여태 부교주가 없었으니 뭘 지니고 있는지도 몰랐겠지. 하지만 명색이 대공자라면 잘 알 텐데. 이게 가품인지, 진품인지."

"그건...."

천무기가 입술을 옴짝달싹한다. 왜 모르겠는가. 저렇게 황금에 불꽃이 생생하게 인각된 건 진품 외에는 있을 수 없다.

'어떻게 저놈이 천마신패를....'

천무기는 정신이 혼미했다. 장이서의 내리까는 눈빛은 마치 이렇게 말하는 듯했다.

이것이 명분이다. 너처럼 가짜 주제에 말로만 지껄이는 게 아니라.

그야말로 참을 수 없는 모멸감.

천마전에서 교주 대행의 패를 받았을 때 얼마나 희열에 젖었던가.

제 분신처럼 아끼고 귀중히 다루었다. 품에 지니고 것만으로도 천마의 선택을 받은 것 같았다.

한데....

'처음부터 내가 가짜였단 말인가? 나 천무기가?!'

도저히 참을 수 없는 배신감이 밀려들었다. 이에 후후 불던 패를 꽈득 움켜쥐었다.

스스스스.

가루가 되어 흩날릴 때까지.

이것이 뜻하는 바는 간단했다.

"전부 죽여버리겠다!"

역모(逆謀)를 추궁하러 온 그가 반대로 역모를 일으키겠다는 것.

"천무기. 이제라도 얌전히 일소궁에 돌아가. 그게 내가 주는 마지막 기회니까."

"크크큭. 기회? 그건 모든 걸 가진 나 같은 자만이 줄 수 있는 것이다. 네놈처럼 미천한 들개 새끼가 아니라! 뭣들 하느냐!"

천무기가 고개를 까딱인다.

그러자 흉흉한 기세를 내뿜으며 다가오는 산왕가의 무사들.

대화는 끝났다.

이제 남은 건 결전이다.

"죽여라."

와아아아아아!

드디어 오랜 악연의 종지부를 찍을 마지막 대결이 시작되었다.

*

홍예교 위에서 벌어진 산왕가와 칠무위의 접전은 그야말로 난전이었다.

"크악!"

첨벙! 물 아래로 빠지고, 핏방울이 비산하고. 외나무다리에서 만난 원수들처럼 거침없었다.

그럴 만도 했다.

산왕가와 칠무위는 이미 그들 자체만으로도 오래된 악연.

서로 좋게 끝낼 사이가 아니다.

그리고 산왕가주 파군성은 오늘의 승리를 확신했다.

'네놈들에 대해선 이미 잘 알고 있다.'

과거 구유와 흉노족이 산왕가를 궤멸 직전까지 몰고 간 적이 있다.

당시 오군장 중 막내가 구유에게 당했고, 흉노족의 단합력과 끈질긴 투기에 혀를 내두르기도 했었다.

하지만.

그때는 본인들이 혈교임을 숨겨야 했던 시기.

전장의 용은 인정하지만, 세력전에선 밀릴 이유가 하등 없었다.

한마디로 막상 까보면 외공밖에 안 익힌 그저 그런 놈들이라는 얘기.

그러니 당연히 결과는 산왕가의 압승이었다.

수로 보나, 실력 차로 보나.

분명히 그래야 했다.

그런데.

"오늘만 기다렸다, 이 새끼들아!"

물 만난 고기처럼 날뛰는 과평과 적진 사이를 누비며 거침없이 쓰러트리는 아신.

그리고 일당백의 무사들처럼 산왕가를 거침없이 날려버리는 칠무위까지.

'도대체 어떻게...?'

막상 까고 보니 그저 그런 건 자신들이었다.

'그사이에 모두가 다 강해졌단 말인가?!'

어느 쪽이든 믿고 싶지 않은 일. 표정이 싹 굳어지고, 이내 바로 다음을 지시했다.

"용기야."

그의 부름에 황금 갑주를 걸친 늠름한 전사를 필두로 세 사람이 앞에 나섰다.

황금대장(黃金大將) 곽용기.

강철대장(强鐵大將) 극철.

질풍대장(疾風大將) 풍진.

이들이야말로 힘든 시절부터 혈교의 수족이 되기까지.

자신의 발자취를 함께한 가족과 다름이 없었다.

또한 지난 3년 새 영약과 온갖 지원으로 이전과는 비교도 안 되게 강해진 상태.

질풍대장 풍진의 움직임은 가히 바람과 같고, 강철대장 극철의 몸은 만년한철과 같았다.

황금대장 곽용기는 저를 제하면 가장 강한 완성체.

그러니 이들이라면 상황을 뒤엎기엔 충분하고도 남을....

"끄아아악-!"

"요, 용기야!"

바로 그때 믿을 수 없는 비극이 눈앞에 연이어 펼쳐졌다.

제 앞에 주르륵 밀려온 황금대장 곽용기를 시작으로 세 사람이 순식간에 작살이 난 것.

눈이 번쩍 떠지고, 머릿속의 사고 회로는 멍해졌다.

대체 이게 어찌 된 일인가.

다시 전방을 살피자 정확히 그들 앞에 세 사람이 서 있었다.

창룡도를 든 채 풍진을 숯불구이로 만든 염제 마오.

한철로 만들어진 갑주를 누더기로 변화시킨 권마 구유.

마지막으로 제 앞까지 밀려와 눈도 못 감고 즉사한 황금대장 곽용기.

어떻게 당했는지는 보지도 못했다.

그저.

"뇌마...."

아무것도 모른다는 듯 이쪽을 보며 서 있는 장이서.

그와 마주했다는 것밖에는.

3년 새에 달라진 건 자신들뿐만이 아니었던 거다.

"쓸모없는 것들."

결국 옆에서 모든 걸 지켜본 천무기의 비릿한 목소리가 새어 나왔다.

이에 파군성은 흠칫하며 고개를 숙였다. 면목이 없다는 뜻.

하지만 괜찮다.

결국 무림인의 전쟁은 수 싸움이 아니다. 진정한 강자가 누구냐를 가리는 것.

최상위 포식자의 싸움이란 얘기다.

그러니 진짜 싸움은 이제 시작이다.

"전부 치워라. 내가 직접 처리할 것이니."

천무기의 참전 선언에 파군성이 쩌렁쩌렁한 목소리로 외쳤다.

"모두 물러서라-!"

그러자 접전을 벌이던 산왕가 무사들이 하나둘씩 퇴보한다.

칠무위도 마오의 손짓에 더는 쫓지 않고 이를 기다렸다.

사이가 벌어지자 전황의 추는 더욱 확연히 드러났다.

바닥에 쓰러져 신음하는 무사들 태반이 산왕가의 옷을 입고 있던 것.

살아서 퇴보한 이들의 눈빛도 마치 지옥에 발을 들였다 온 것처럼 사색이 되어 있었다.

반면 칠무위의 투기는 더 거세게 달아올랐다.

산왕가가 밀린 것이다.

오군장도, 전사들도. 모두 다.

저 빌어먹을 칠소궁 녀석들에게.

"네놈들은 늘 이런 식이다. 미천한 놈들이 주제도 모르고 이빨을 들이밀지."

천무기는 물린다는 듯 경멸의 눈빛을 띠고는 앞으로 나섰다.

이 정도면 악몽의 재현이다.

흑화위가 당했던 3년 전처럼. 이번에는 산왕가가 당한 것.

하지만 다른 점도 한 가지 있었다.

"이번엔 아버님께서 네놈들을 지켜주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렇다. 더는 자신을 막아줄 존재가 없다는 것.

그러니까.

고오오오오오!

"모조리 상대해 주마."

천무기의 검에서 시커먼 아지랑이가 뿜어져 나오기 시작했다.

그의 성명절기인 파천흑마공(破天黑魔功)이다.

과거에도 살벌했지만 이젠 완전히 검을 감싸다 못해 길게 솟아난 것이 확실히 더 강해진 모습.

이를 지켜보던 마오가 나지막이 제안했다.

"장이서. 그때 우리 설롱산에서 했던 말 기억 나?"

설보산이겠지.

"그때 내가 소교주 되고 싶다고 했잖아."

기억난다. 죽음을 앞둔 상황에서 그렇게 말했었다.

"나 그거 여전해. 지금도."

안다. 눈빛만 봐도 진짜라는 걸 모를 수가 없다. 가벼움 속에 무게가 서려 있으니.

"근데 하나가 달라졌어. 처음엔 너 때문이었거든? 근데 이젠 아니야."

"그럼 뭡니까."

"못 지키니까. 힘이 없으면 내 식구들도 그리고 내 신도들도. 전부 지켜낼 수가 없잖아."

"...!"

"그래서 나 소교주 하려고."

이렇게도 웃을 수 있는 놈이었나. 입가는 가벼우나 눈빛이 너무도 진중해 차마 마주 웃을 수가 없다.

"갑자기 그 말을 하는 이유가 뭡니까."

"저 자식... 나한테 넘겨."

예상치 못한 말에 흠칫 놀라 마오를 다시 살폈다. 지금 대공자 천무기를 제가 맡겠다고 한 것인가.

"마이신도 그렇고, 저 자식도 그렇고. 어쨌든 빌어먹을 내 형이잖아. 어쩌겠어. 나라도 말려야지."

너....

"그리고. 이제는 저딴 자식한테 질 것 같지가 않거든."

처음이었다. 이렇게 자신감 넘치고 든든해 보이는 모습은.

강해졌구나, 마오.

312.

#착각

끝내 고개를 끄덕였다.

원래라면 겁 없이 찾아온 천무기를 직접 벌해주는 것이 옳겠지만.

후계 간의 대결이라면 백 번이고 양보해 줄 수 있다.

"지지 마십시오."

"딱 봐. 누가 이기나."

장이서가 픽 웃고 물러서자 천무기는 어이가 없다는 듯 헛숨을 뱉었다.

"지금 뭐 하자는 것이냐."

"생각해 봤는데 말이야. 나만 당하는 건 괜찮은데, 지난 3년간 내 주변 사람을 너무 괴롭혔어."

"그래서?"

"갚아주려고. 이제 너한텐 명분도 없는데. 더 망설일 이유가 없잖아?"

"하, 지금 네놈 혼자 날 상대하겠다는 것이냐?"

"왜 쫄리냐?"

"미친놈."

무시도 정도껏이다. 이 정도면 절 모독하는 수준. 셋이 함께 덤벼도 모자랄 마당에. 뭐? 제깟 놈이 감히 절?!

"아, 쫄리면 꺼지시든가."

천무기의 눈이 무섭게 부릅떠진다. 오금이 저릴 듯한 살기!

"오냐. 너부터 죽여주마!"

"헹! 누가 할 소릴."

고오오오오!

두 사람에게서 막대한 기파가 뿜어져 나오고 삽시간에 공기가 달궈진다.

그리고.

파앗!

두 형제의 맞대결이 시작됐다.

*

콰과과광!

두 사람의 검과 도가 맞물리자 엄청난 풍압이 사방으로 뻗쳐 나간다.

이미 주변은 한참을 뒤로 거리를 물렸고, 숨 막히는 긴장 속에 대부분의 신도들은 이렇게 생각했다.

'아무리 그래도 상대가 대공자인데....'

'이렇게 겨뤄볼 수 있는 것만으로도 대단하신 거야.'

이길 수 없다고.

이건 끝이 보이는 싸움이라고.

염제라며 떠들썩하긴 하나 그건 어디까지나 새외에서의 이야기라고.

마오가 이기기를 누구보다 염원했으나, 현실은 절망일 것이라고 말이다.

하지만 그를 3년간 지켜본 구유와 칠무위의 생각은 달랐다.

마오가 전장을 돌며 어떤 일들을 겪었는지 너무도 잘 알고 있었다.

동료들을 하나둘 떠나보낼 때마다 늘 겉으론 웃으며 아무렇지 않은 척을 했지만, 늦은 밤 얼마나 많은 피눈물을 흘렸는지.

저희를 재우기 위해 본인이 잠을 줄였고, 하나라도 더 구하겠다고 한계까지 몰아치며 수련에 임했다.

마오는 그렇게 3년을 보냈다.

그러니 이제는 모두가 알아야 했다.

망나니였던 그가 작정하고 돌아온 지금 얼마나 달라졌는지를.

꼴찌의 반란이 얼마나 무서운지를 말이다.

그러니까.

'보여줘라, 마오.'

구유의 미소와 함께 마오의 창룡도가 거침없이 천무기를 몰아쳤다.

"으랴아아아아!"

화르륵!

거침없이 솟아오르는 불꽃.

"큭...!"

천무기는 칼을 휘둘러 막아내며 속이 새까맣게 타들어 갔다.

'뭐지 이 자식...?'

강해졌다는 소문은 익히 들었다.

일장로의 자식이며, 천마이신 아버님께서 거둔 녀석이고, 만마분총까지 다녀왔다.

이 정도는 당연한 수순이라 여겼다.

그마저도 안 되면 형제라는 이름마저 용납이 되지 않을 테니.

하지만 허용해 줄 수 있는 건 딱 제 발끝까지였다. 제 머리 위가 아니라!

한데.

'어째서 죽지 않는 것이냐!'

이건 납득할 수 있는 범주를 훨씬 상회하는 실력이었다.

강한 정도가 아니라 챙챙챙! 수백 합 동안 저를 밀어내고 있었다.

감히 막내 주제에.

망나니 마오 주제에 말이다!

심지어 지치지도 않는지 갈수록 그의 불꽃은 더 거세지고, 위력도 더 강해졌다.

"으랴아아아아!"

카아앙!

지금도 불꽃이 서린 신물로 내려친 것뿐이거늘.

주르륵!

두 발이 다섯 걸음이나 뒤로 밀렸다.

그야말로 넋을 잃게 하는 힘.

"우하하하하! 어떠냐?!"

그때 처음 느꼈다.

어쩌면 이 싸움, 제가 질 수도 있다는 것을.

이는 상상만 해도 피가 거꾸로 솟는 기분.

"어째서. 어째서 버러지들 따위가 감히 내게 기어오른단 말이냐! 태생부터 천박한 놈들이 감히.... 내 평생 눈에 들지도 못했던 주제에 어떻게-!"

천무기는 격분하며 현실을 부정했다.

하나.

"아직도 모르겠어? 바보냐. 난 잘 알겠는데."

마오가 창룡도를 털어내며 조롱하듯 웃는다.

"예전에 너 같은 멍청이가 하나 있었는데 내가 그때 이렇게 말해줬거든? 내가 앞서가는 게 아니라, 그냥 너 새끼가 계속 같은 자리에 머무는 거라고. 알겠냐? 이 과거에 파묻혀 사는 망종 새끼야!"

"...!"

천무기는 뒤통수를 둔기로 얻어맞은 것처럼 멍해졌다.

너무도 기억에 생생한 말이었기 때문.

왜 모르겠는가.

저도 그 자리에 있었거늘.

무혈공 마이신.

분명 막내가 그에게 했던 말이었다.

'내가 그 자식처럼 과거에 머물고 있던 거라고?'

아니다. 그럴 리 없다.

난 그놈처럼 패배한 머저리가 아니다.

언제나 승리하며 나아가고 쟁취하는. 천명을 받고 태어난 나는 대공자 천무기다!

그러니까.

"난 다르다. 너희 같은 버러지가 아니라 만마 위에 군림할 존재란 말이다-!"

살광을 번뜩이며 내리긋는 일검.

수아아아악!

아지랑이가 가득 핀 섬뜩하고도 강한 검기가 쏘아졌다.

칠소궁까지 모조리 다 집어삼키고 날아갈 엄청난 기세!

하나.

"그건 군림이 아니야. 그냥 네 사욕이지."

마오가 이를 가로막고선 핑그르르 돌기 시작했다.

그러자 뿜어져 나오는 불꽃 회오리!

『진 염화표풍(炎火飄風)』

콰과과과과!

날아들던 검기가 거대한 화풍(火風)에 가로막혀 끝내 가지 못하고 산화되어 소멸한다.

"말도 안 되는...."

여기서 끝이 아니다.

태풍 속에서 돌연 튀어나오는 불꽃!

『진 염화진천룡(炎火振天龍)』

천무기의 눈이 부릅떠지고.

콰아아아아-!

거대한 화룡이 단숨에 그를 집어삼켰다.

"크아아악!"

처절한 비명과 함께 불길에 휩싸이는 천무기.

파군성과 산왕가는 얼어붙었고.

마오오오오!

칠무위는 주먹을 꽉 쥔 채 환호했다.

장이서 역시도 감탄을 금치 못했다.

'공력이야 원래 대단했지만, 활용하는 수준이 월등히 좋아졌구나.'

마오의 최대 장점은 가타부타 할 것 없이 천양지체를 갖고 태어난 압도적인 양의 공력.

저력까지 고려하면 끝이 보이지 않는 바다와도 같은 수준이었다.

하지만 그만큼 이를 응용하는 걸 무척 어려워했었다.

'우선 호흡을 천천히. 아주 천천히 하는 것부터 성공시키세요.'

오죽하면 처음 가르친 게 내기를 다루는 법이겠는가.

네발로 기는 법부터 알려준 것과 마찬가지.

더구나 염제의 무공은 초식 하나하나가 압도적인 공력이 소모되어 연이어 펼치기가 더더욱 어려운 일이었다.

한데 그걸 마오가 해냈다.

아니, 마오이기에 가능했다.

이제야 드는 생각이지만, 사형이 이리 딱 맞는 무공을 골라 전해준 걸 보면, 마오를 퍽 아꼈던 걸지도 모르겠다.

어쨌든 장족의 발전.

이젠 천하 어디에도 밀리지 않을 진짜 고수가 된 것이다.

"장이서 봤냐? 봤지! 나야, 인마! 우하하하하!"

물론 아직도 배울 게 많이 남은 듯하지만.

피식 웃고는 천무기를 살폈다.

"하아, 하아...."

장기까지 다 그을린 채 탄내 가득한 숨을 뱉는 게 서 있기도 벅차 보이는 모습.

이 상태로는 결코 마오를 이길 수 없다.

무엇보다도 천무기의 파천흑마공은 무엇이든 불태워 버리는 마오의 천양지체와는 상극이었다.

수준이 확연히 차이가 난다면 모를까, 비등한 상태에선 백날 덤벼봤자 무의미하다는 얘기.

"천무기. 지금껏 네가 한 악행들. 이제라도 모두한테 진심으로 사과해라."

마오의 최후통첩에 천무기가 살광을 뿜어내며 으르렁댔다.

"사과...? 내가 왜. 그건 너희 같은 약자들이나 하는 것이다. 나 같이 존귀한 이가 하는 것이 아니라!"

하. 이 정도면 치료 불가한 오기.

이 지경까지 와서도 큰소리를 치겠다는 것인가.

누가 봐도 싸움은 끝났거늘.

"너 안 되겠다."

이에 마오가 더는 안 참겠다는 듯 앞으로 나서려는 찰나였다.

"잠시."

장이서가 안색을 굳히곤 그의 손목을 잡았다.

"아무래도 후계 간의 대결은 여기까지인 듯합니다."

"그게 무슨 말이야?"

그 물음에 대한 답은 눈짓으로 대신했다. 천무기가 품에서 꺼내 든 붉은 구슬.

"저건... 뇌옥왕이 갖고 있던 거잖아!"

마오도 한눈에 알아보곤 소리쳤다.

혈옥(血玉)이다.

굳이 자세히 뜯어보지 않아도 확실했다.

두근, 두근, 두근.

지금도 혈마귀가 탐욕에 젖어 사정없이 요동을 치고 있었으니.

"어떻게 쟤가 저걸 가지고 있는 건데. 저건 혈교 놈들 거잖아!"

상황을 깨달은 마오가 경악을 뱉었다. 그래, 맞다. 혈교의 것이다. 그 말인즉슨....

"아무래도 대공자가 혈교와 손을 잡은 모양입니다."

"말도 안 돼!"

충격적인 사실에 모두의 눈이 불신으로 번뜩인다.

장이서만이 불길한 예감이 들어맞은 것처럼 씁쓸한 표정을 지었다.

사실 처음부터 의아했었다.

천마 진우광.

그가 제게 말도 안 되는 조건을 내걸었을 때부터.

'교주님께선 자신의 자리를 지키는 것도 부교주의 소임 중 하나라고 하셨지요.'

비록 사제를 벼랑 밑으로 밀어 버리는 미치광이 사형이지만, 그래도 원칙은 확실한 자였다.

아무런 이유도 없이 절대 일을 벌이지 않는다는 것.

아무리 천무기가 내놓은 자식이라고 해도 엄연히 본교의 대공자다.

그런 그를 저와 대립하게 만든 것이 납득이 가지 않았다.

진작 막을 수 있었을 텐데.

새외의 세력을 끌어들이고, 본교를 엉망으로 만들도록 둔 이유가 무엇이겠는가.

혈교(血敎).

사형은 천무기가 혈교와 손을 잡았단 걸 이미 알고 있었던 거다.

그러니까 이건 제게 내리는 선물의 대가이자 천무기에게 주는 엄벌인 거였다.

"내가 네놈들 따위에게 패할 것 같으냐! 천만에.... 모조리 다 죽여주마! 이것이 바로 내가 취한 새로운 힘이다-! 크하하하하!"

『파천혈마공(破天血魔功) 12성 극성(極成)』

우우우웅!

혈옥이 번뜩이고, 천무기의 파천흑마공은 이에 반응하듯 검에 번진 아지랑이를 붉게 물들여 갔다.

변질한 그의 마공이 극에 다다른 것.

놀라운 점은 한 가지 더 있었다.

그의 어깨 위에서 뻗쳐 올라간 한 줄기 아지랑이가 하늘 위에 거대한 태양처럼 피어난 것.

마치 주변을 모조리 다 집어삼킬 것처럼 말이다.

다른 이들은 볼 수 없겠지만 장이서의 눈에는 명확히 보였다.

천무기의 성역(聖域)이.

그렇다. 저 하늘에 떠오른 눈인지 태양인지 알 수 없는 괴이한 구체는 분명 입신지경에 올라야만 나타난다는 그의 성역이었다.

깨달음을 얻어 경지에 오른 건 아니지만, 뇌옥왕처럼 혈옥의 힘을 빌려 일시적으로 신의 경지에 다다른 것.

이 정도면 확실히 자신감을 가질만했다.

"느껴지느냐? 이것이 나의 힘이다! 이제라도 빌어 보거라. 살려달라고 간청해 보란 말이다! 크하하하하!"

그의 저열한 외침도 이해가 갈 만큼.

이건 독마 사숙이나 광명사자가 아닌 한 누구라도 막지 못했을 테니.

하지만.

"천무기. 넌 혈교와 손을 잡지 말았어야 했어."

아쉽게도 그의 운명은 혈옥을 꺼낸 순간 결정지어졌다.

바로 자신과 사형의 손에!

"크크큭, 왜. 두려운 것이냐? 혈교를 벌하는 것도, 그들의 손을 잡는 것도. 그건 모두 만마의 주인이 될 내가 정하는 것이다."

"과연 그럴까."

"뭐?"

"이젠 나도 더 참기가 힘들거든."

뭔 개 같은 소리냐. 참기가 힘들다니. 천무기가 붉어진 눈을 부라린다.

하나 궁금해하지 않는 것이 정신에 이로울 거다.

왜냐하면.

퀴아아아아아!

지금부터 악몽을 보게 될 테니.

313.

#탐닉의 시간

"흡?!"

천무기는 순간 귀청을 때리는 굉음에 화들짝 놀라며 주변을 두리번 살폈다.

분명 마귀의 포효가 들려왔기 때문.

'내가 잘못 들은 것인가?'

일순 착각인 줄 알고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리고 바로 그때.

덜덜덜.

"무슨...?"

제 몸이 미친 듯이 떨리고 있음을 뒤늦게 깨닫게 되었다.

손끝부터 시작된 떨림은 벌레처럼 타고 올라와 어느새 턱 끝까지 흔들렸다.

'독?'

그럴 리가.

"왜...?"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눈빛으로 고개를 들었다.

그리고 그 순간 깨달았다.

퀴아아아아아!

제 앞에 자신 따위는 감히 마주할 수 없는 절대마귀가 서 있다는 것을.

"어, 어으으으...."

천무기는 초점이 풀린 채 넋이 나갔다.

"왜 그러십니까?"

당황한 파군성이 달려와 묻자 덜덜 떠는 손으로 손가락질하며 말했다.

"안 보이느냐. 저 마귀가... 네겐 보이지 않는 것이냐?!"

"무슨...."

뭐가 보인단 말인가. 도저히 이해되지 않는 말에 파군성이 고개를 돌렸다.

하나 그곳엔 장이서가 미소를 지은 채 서 있을 뿐. 마귀 같은 건 일절 없었다.

"뭐야, 왜 저래."

마오와 칠무위도 이해가 안 되는지 모두 어리둥절했다.

그럴 수밖에.

지금 이 안에서 장이서의 진짜 모습이 보이는 건, 혈옥의 힘을 빌려 일시적이나마 입신지경에 오른 천무기밖에 없었으니.

'퀴아아아아아!'

바로 눈앞에서 포효를 내지르며 날뛰고 있는 거대한 혈마귀의 성역(聖域) 말이다!

저벅, 저벅.

이윽고 걸음을 떼기 시작하는 장이서.

고오오오오!

그럴수록 그의 눈빛도 점점 살기로 가득해진다.

귀천살마공이다.

"무, 무슨."

그제야 파군성도 이상함을 느끼곤 당황에 빠졌다.

성역은 볼 수 없어도 살기는 느낄 수 있기 때문.

그리고 그건 압도적이라는 말로도 부족했다.

날 때부터 전쟁터를 휩쓴 자신을 범 앞에 선 열 살배기 꼬마로 만들 만큼 폭력적이었고, 무서웠다.

마치 공기와 함께 사지가 얼어붙고, 세상의 모든 색이 바래 회색빛으로 변모하는 기분.

"으으으으... 오, 오지 마!"

천무기는 완전한 공포에 휘감긴 채 뒷걸음질을 쳤다.

하나 늦었다.

그 말은 혈옥을 꺼내기 전에 해야 했다.

혈옥으로 빚은 혈기(血氣)는 혈마귀에겐 그 무엇보다도 달콤한 영약.

참아내기엔 너무 오래 굶주려 있었다.

하여 귀천살마공은 이미 펼쳐졌고.

혈마귀는 문을 열어 달라 아우성쳤으며.

장이서가 이를 수용해 주었으니.

그러니까.

'탐닉의 시간이다.'

어느새 앞에 다다른 장이서가 섬찟한 눈으로 바라본다.

"으아아아아아아!"

천무기가 비명을 내지르며 일검을 그었다.

과아아앙-!

그러자 하늘에 서린 붉은 핏빛 태양에서 붉은 섬광이 수십 갈래의 포물선을 그리며 장이서를 향해 쏘아져 내렸다.

그야말로 신의 영역에 걸맞은 엄청난 힘!

"장이서-!"

뒤늦게 엄청난 기운을 느낀 마오가 다급히 소리친다.

하나 이미 막기엔 늦었다.

콰과과과광!

굉음과 함께 장이서의 육신에 동시다발적으로 꽂히고, 이내 붉은 아지랑이가 가득한 일검이 정수리 위로 떨어져 내린다.

'역시 네놈에게 내가 겁을 먹었을 리 없다! 하하하하!'

동시에 천무기의 입꼬리는 크게 올라섰다.

그리고 이제 끝이라고 생각한 그 순간!

"어...?"

천무기는 보았다.

분명 혈기에 구멍이 숭숭 뚫려 있어야 할 장이서가 아주 멀쩡히 서 있다는 것을.

그것도 마귀처럼 불그스름하고 거대한 기운으로 가득한 손 하나만 뻗친 채 말이다.

'어... 어떻게?'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일.

하나 너무 뒤늦은 물음이었다.

내리친 검이 장이서의 머리에 닿기도 전에.

파아아앗!

손아귀에 흡수되었던 혈기가 역으로 일장이 되어 쏘아졌다.

그것도 훨씬 더 강한 폭풍 같은 힘으로!

"카아아악!"

그대로 전신을 강타당한 채 한참을 날아가 버리는 천무기.

"커, 커헉...."

와당탕! 한참 바닥을 뒹굴더니 새우처럼 굽어 연신 피를 토한다.

"대, 대공자님!"

뒤늦게 장이서의 살(殺)에서 벗어난 파군성이 눈을 부라리며 외쳤다.

"쳐라!"

하지만 실로 어리석은 판단.

퍽-!

차륜으로 달려드는 순간, 실로 끔찍한 결과가 벌어졌다.

투두둑.

"끄아아아아악!"

파군성을 비롯한 수하들의 팔이 그대로 잘려 나간 채 바닥에 떨어진 것.

칼도 놓지 못한 채로 말이다.

심지어 이를 제대로 본 사람도 없었다.

그나마 만안을 가진 전장의 용 구유만이 장이서의 두 팔이 움직였다는 걸 목격했을 뿐이었다.

물론 그마저도 귀신처럼 잔상만 흐릿하게 보인 것이지만 말이다.

저벅.

장이서가 고통에 움츠러든 산왕가를 무시한 채 앞으로 나아간다.

"으으으으...."

이에 바닥에 쓰러져 있던 천무기는 지독한 겁에 질린 채 신음을 뱉었다.

도대체 어쩌다 이런 상황이 오게 된 것일까.

분명 자신은 3년 동안 오늘 이 순간만을 수만 번. 아니 수천만 번을 상상했었다.

하지만 이런 악몽 같은 결과는 그 어떤 상상 속에도 없었다.

늘 이기는 건 자신이었고, 울면서 비는 건 장이서였으니까.

그런데 왜....

"사, 살려다오."

어째서 자신이 애처로이 빌고 있는가.

"제발...."

어째서 제 눈에서 이리도 끔찍한 눈물이 흐르고 있는가.

어째서....

어째서 자신이 아닌 장이서가 섬찟한 미소를 짓고 있단 말인가!

모르겠다. 정말 모르겠다.

하지만 이것 하나는 분명했다.

지금 손을 뻗고 있는 저자는 자신이 알던 장이서가 절대 아니라는 것.

저건.... 절 잡아먹을 마귀라는 것을 말이다!

"으, 으아아아아아악!"

장이서가 손을 뻗치자 천무기의 몸에서 붉은 혈기가 뽑혀 나온다.

솨아아아아!

하늘에 서려 있던 태양 같은 성역도 예외는 아니었다.

모조리 집어삼키듯 그의 손안으로 흡수되기 시작했다.

3년을 준비해 온 노고가 한순간에 사라져 버리는 순간이었다.

그렇게 억겁 같던 찰나의 시간이 흐르고.

"꺼어...."

천무기는 생령이 다 빠져나간 목내이처럼 변해버렸다.

힘이 넘치던 흑발은 백색이 되었고, 젊기만 하던 피부는 중년을 넘긴 것처럼 주름이 가득해졌다.

"어으...."

탁해진 눈빛은 누가 봐도 정신이 나가버린 모습.

혈기가 뇌수까지 뻗친 상태에서 본래 지니고 있던 기력까지 모조리 빼앗긴 탓에 벌어진 대참사였다.

대공자의 실로 허망하고도 참담한 최후.

반면 장이서는....

씨익. 희열에 찬 표정으로 무섭게 웃고 있었다.

뇌옥왕 때 이후로 처음이었다.

이처럼 강한 혈기를 흡수한 것은.

"마음에 들어."

덕분에 지금 장이서는 완전히 혈마귀와 하나가 된 상태.

아니, 원래보다 더 강해져 버렸다.

그리고 그 파장은 고스란히 주변에 드러났다.

고오오오오!

귀천살마공의 살기가 요동을 치자 마른하늘에 먹구름이 서리고, 스산한 바람이 휘몰아치기 시작한 것.

천마의 존재에 하늘이 노하듯이, 장이서한테도 반응하기 시작한 것이다.

마치 세상의 질서를 무너뜨릴 마귀의 탄생을 예고라도 하는 것처럼.

"장이서...?"

이에 이상함을 느낀 마오가 그의 이름을 부른다.

평소와 너무도 다른 섬뜩한 분위기.

그에게서 이런 모습은 처음이었다.

웃고 있는 표정은 딱 이렇게 말하는 듯했다.

모조리 다 죽이리라.

전부 없애주리라.

하나도 남김없이 모조리 다.

"마오 물러나라."

오죽하면 구유조차도 위기감을 느끼고 마오의 앞을 가로막았다.

고오오오오!

그렇게 알 수 없는 긴장감이 고조되던 그 순간.

"큭...?"

장이서가 일순 야차처럼 표정을 일그러트리며 제 심장을 움켜쥐었다.

두근, 두근, 두근!

심장부에서 청록빛의 영롱한 기운이 태동을 시작한 것.

남천능가경이다!

"안 돼-!"

장이서가 다급히 소리쳤다.

아직 제대로 시작도 못 했는데.

아무도 죽이지 못했는데!

우우웅!

장이서의 손아귀 위로 혈마귀의 붉은 혈기가 손톱처럼 희미하게 자리 잡는다.

뭐든지 다 찢어버릴 것 같은 엄청난 기운!

이내 살광을 번뜩이며 겁에 잔뜩 질린 산왕가 무사들에게로 시선을 돌렸다.

그리고 단숨에 휩쓸어 버리려던 그 순간.

'여기까지다.'

내면에서 정대한 목소리가 심판의 못처럼 심장에 박혔다.

"크윽...!"

장이서가 휘청거린다. 깨질 것 같은 두통에 관자놀이를 붙잡았다.

그리고 그사이.

"마, 막아라! 무조건 막아야 한다!"

팟! 파군성이 수하들과 천무기를 뒤로한 채 몸을 날려 도주했다.

"이 새끼들이...! 잡아!"

와아아아아!

마오의 명에 다시금 시작되는 무사들의 난전.

"야, 장이서 괜찮아?"

마오가 한숨을 내쉬곤 가까이 다가와 조심스레 묻는다.

그러자.

"...예. 다행히도요."

장이서가 힘없이 웃으며 고개를 들었다.

살기로 가득하던 눈빛은 사라지고, 어느새 단단한 원래의 눈으로 돌아와 있다.

이에 마오가 숨을 뱉으며 웃었다.

"놀랐잖아. 도대체 어떻게 된 거야?"

말하자면 길다. 혈마귀가 흡수한 힘이 생각보다 커서 잠깐이나마 이지(理智)가 흔들린 것.

남천능가경이 금세 바로 잡긴 했지만 그래도 위험할 뻔했다.

아무도 다치지 않아 천만다행.

아무튼 그것보다도.

"산왕가주를 잡아야 합니다. 그자가 혈교의 첩자일 가능성이 높습니다."

장이서의 말에 마오도 고개를 끄덕였다.

"구유가 갔으니까 걱정 마."

마오는 말을 마치곤, 슬쩍 넋이 나간 채 체액을 흘리며 앉아 있는 천무기를 살폈다.

"저 자식은...."

아마 죽지는 않을 거다. 잘 먹고 쉬다 보면 기력도 금세 회복될 테고.

다만.

"제정신으로 돌아오긴 힘들 겁니다."

혈옥은 타인의 선천진기를 모아 만든 원한의 결정체.

한데 이를 혈마공도 제대로 익히지 않은 자가 다루다 탈이 났으니....

"멍청하게 혈교랑 손이나 잡고. 참 지랄 같은 최후네."

마오가 시원섭섭하다는 듯 말한다. 어찌 됐든 제 형제였던 자. 썩 편치는 않을 거다.

"아, 맞다. 독마 영감!"

잠시의 침묵 끝에 마오가 떠오르는 게 있는지 손뼉을 치며 소리쳤다.

"저 자식이 독마 영감이 곧 죽을 거라고 했었어! 아깐 대수롭지 않게 생각했는데 혈교랑 손을 잡은 거면 이거 위험한 거 아니야?"

장이서는 정신이 번쩍 들었다.

평소라면 그저 코웃음 치며 반응했을 거다.

천하에 독마를 해할 수 있는 자가 얼마나 되겠는가.

거의 없다고 봐도 무방한 일.

하지만 천무기는 혈교와 손을 잡았다. 그리고 혈교에는 놈들이 있다.

'혈존....'

자신이 만났던 혈존과 서패왕.

그들이 나선다면 독마 사숙이 위험할 수도 있다.

"가봐야겠습니다."

"잠깐, 나도 같이 가!"

"아뇨. 칠공자님은 여기 남아 뒷수습을 해주십시오."

마오가 이를 꽉 깨물곤 주변을 살폈다.

신도들은 겁에 질린 채 벌벌 떨고 있고, 월하촌은 난장판이 되어버렸다.

"젠장.... 알았어. 조심해."

마오가 인상을 찌푸리며 고개를 끄덕인다. 이에 장이서도 마주 고개를 끄덕이곤.

파앗!

순식간에 자취를 감춰버렸다.

마오는 황당한 표정으로 그의 빈자리를 살피곤 이내 당당하게 외쳤다.

"혈교의 잔당들이다! 한 놈도 빠지지 말고 싹 다 조져-!"

마오오오오오-!

칠무위의 함성과 함께 다시금 피 튀기는 접전이 시작되었다.

314.

#도발

- 천산(天山) 만년설봉(萬年雪峰).

새하얀 눈보라가 몰아치는 봉우리.

독마는 오늘도 어김없이 이곳을 찾아 홀로 외로이 놓인 바위를 살폈다.

용건은 바위의 갈라진 틈새 안쪽에 한 방울씩 맺혀 고이고 있는 물.

정확히는 만년설산의 냉기(冷氣)가 월영석(月影石)의 음기(陰氣)와 마주하며 수년에 한 방울씩 고인다는 절대 영약.

바로 미타성수(彌陀聖水)였다!

퐁! 그리고 오늘 두 번째 물방울이 떨어져 내렸다.

독마는 눈보라 따위는 아랑곳없이 눈을 크게 뜨며 흡족한 미소를 지었다.

그러곤 격공섭물로 조심스레 바위를 들어 가져 온 호리병에 따랐다.

도대체 누굴 위해 이만큼 지극정성인가.

당연히 스스로를 위한 건 아닐 테다.

그렇다면 역시.

"홍란이가 좋아하겠구나."

장이서, 의문의 1패다.

쿵.

독마가 미타성수를 챙기곤 월영석을 다시 제자리로 내려놓던 찰나였다.

"음?"

무언가를 느낀 것인지 자못 좁혀진 눈매로 고개를 돌렸다.

휘이이잉!

눈에 보이는 건 그저 휘몰아치는 눈보라뿐.

하지만 입신지경에 오른 그의 심안(心眼)은 달랐다.

솨아아아-!

마치 비상하는 매가 세상을 널리 살피듯.

단숨에 눈보라를 해치고, 설봉을 지나 까마득한 벼랑까지 시야가 닿았다.

그러자 저 멀리 마주 보이는 우뚝 솟은 푸른 봉우리 하나.

천산과 가장 가까이에서 마주하는 곤륜산맥의 초한봉(初寒峰)이다.

그리고 그곳엔....

오직 기(氣)로 이루어진 엄청난 크기의 거검(巨劍)이 우뚝 서 있었다.

정확히 표하자면 검이 아니라 성역(聖域)!

그리고 그 주인은 등에 거대한 검을 패용하고, 머리카락은 백색과 흑색으로 나누어진 독특한 용모를 지닌 자였다.

"설산이 독무(毒霧)로 가득하구나."

그다.

물경 길이만 오십오 장(165m)에 달하던 미친 검기(劍氣)의 소유자!

서패왕(西覇王).

혈교의 절대자 중 하나인 그가 이곳에 있었다.

똑같이 반대편 설봉에 서린 독마의 성역을 바라보며!

그리고 그의 옆에는 편복산(??傘-박쥐우산)을 든 맹인 여인도 함께했다.

천기를 읽어 천마의 위치를 확인하고, 술법으로 모두를 신기루처럼 사라지게 했던 바로 그 여인 말이다.

장이서의 우려대로 이들이 이곳에 나타난 것!

한데 어딘지 모르게 두 사람의 표정이 자못 진중했다.

겁을 먹은 것 같기도 했고, 크게 긴장한 듯 보이기도 했다.

물론 독마 양대헌은 당대 기준 '혼란의 1세대'라 불리는 전전대 살아 있는 마교의 전설.

엄밀히 따지면 '전란의 2세대' 해당하는 이들이 우습게 볼 상대는 아니다.

하지만 그래봤자 다 늙은 호랑이.

초라해진 과거의 명성에 주눅 들 이들이 아니다.

이들쯤 되는 신인(神人)들이 두려워할 만한 존재는 오직 하나뿐.

저곳 천산의 주인.

천마뿐이다!

그를 생각한다면 이곳에 올 일은 죽어서도 없었을 것.

하지만 자그마치 3년이었다.

천마가 소리 소문 없이 실종되어 버린 시간이.

"아직도 천마의 기운은 느껴지지 않는가."

"예. 아무것도 느껴지지 않습니다."

천마가 어디에 있든 그의 존재를 귀신처럼 읽어내던 그녀도 고개를 저었다.

"그사이 정말 등선(登仙)이라도 한 것인가?"

서패왕은 제가 말을 뱉고서도 고개를 저었다.

천마가 누구인가.

하늘을 조롱하고 짓밟으며 살아가는 자.

그런 이가 한낱 말단 신선이나 되겠다고 천로(天路)를 밟겠는가.

무너뜨리러 가는 것이라면 모를까.

"말씀드렸다시피 천산은 마기(魔氣)가 강해 하늘에서도 읽기가 쉽지 않습니다. 천마가 숨으려고 작정한다면 얼마든 숨을 수 있는 곳이지요."

여인의 말에 서패왕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게 가장 유력한 가설이었다.

이유는 알 수 없으나 천산 어딘가에 감쪽같이 숨어 있는 것.

"하여 그 진의를 알아보려고 예까지 오신 것 아닙니까."

여인은 눈이 보이지 않음에도 모든 속내를 다 꿰뚫는 것처럼 물었다.

서패왕은 숨김 없이 고개를 작게 끄덕였다.

그녀의 말대로였다.

천무기가 독마를 처리해 달라고 청해서 온 듯 보이지만 틀렸다.

고작 그딴 놈의 부탁에 움직일 서패왕이 아니다.

그가 이곳에 나타난 이유는 오직 하나.

천무기의 모반에 독마의 죽음이 잇따른다면. 어쩌면 천마의 생존 여부를 알 수 있지 않을까 싶었기 때문이다.

이른바 위험한 도발.

이런 일을 겪고도 가만히 있다면 어디 그게 천마겠는가. 농마(農馬)만도 못한 놈이지.

"후."

서패왕이 길게 숨을 뱉고는 등 뒤의 대검을 한 손으로 가볍게 꺼내 든다.

이 검의 무게만 해도 자그마치 일백관(375kg).

그냥 바닥에 떨궈도 땅이 울릴 정도다.

한데 이를 마치 깃털을 쥔 것마냥 머리 위로 가볍게 돌린다.

푸화아악!

한 번의 손짓에 거친 풍압이 인다.

아마 지금쯤이면 독마 역시 자신의 존재를 깨달았을 터.

하나 상관없다.

1세대 때는 날고 기던 자였을지 모르나, 이제는 그저 상처 입은 늙은 맹수일 뿐.

"독마 양대헌. 한 시대를 풍미한 그대와 나누는 인사가 이것뿐이라는 게 아쉽군."

우우웅!

서패왕의 대검에 서리는 새하얀 검기!

"잘 가시오."

이내 거침없는 가속도가 붙으며 그의 검이 대각선으로 내려 베어졌다.

수와아아아악!

그러자 반원으로 뻗쳐 나가는 상상 초월의 미친 검기!

드디어 시작됐다.

신들의 싸움이!

*

"시간이 많이 흐르긴 한 모양이로구나. 애송이 따위가 감히 내게 발톱을 드러내다니."

서패왕의 예상대로 독마는 벼랑 끝까지 걸어와 날아드는 검기를 고스란히 바라보고 있었다.

그리고 단숨에 깨달았다.

"네놈들이구나. 이서가 말한 놈들이."

저들이 바로 혈교라는 것을.

그게 아니라면 감히 제게 이런 같잖은 도발을 보내올 수는 없을 테니 말이다.

"그만한 실력을 기를 때까지 여태 숨어 있던 것이냐. 확실히 인정하지 않을 수 없구나. 너희가 혈충(血蟲)이라는 것을."

콰아아아아아!

독마가 손바닥을 펴고 우수를 들어 올리자 사방에 가득 서린 그의 독무가 서서히 머리 위로 구름처럼 몰려든다.

"네놈의 인사 받아 주마."

이내 손을 앞으로 뻗는 순간.

과아아앙!

쩌렁쩌렁한 굉음과 함께 뭉치고 뭉쳐 운석처럼 단단해진 독 구름이 날아드는 검기를 향해 마주 쏘아졌다.

쐐애애액!

물경 오십오 장(165m) 길이의 미친 검기와 이를 압도하는 독 운석의 대결.

그야말로 상상도 할 수 없는 전대미문의 승부가 펼쳐졌다!

그리고 그 결과는.

콰아아아앙-!

하늘이 비명을 지르고, 우레가 번쩍이듯 빛무리가 커다랗게 퍼졌다.

쿠화아아악!

그리고 이어지는 여파. 부서진 검기와 찢어진 독무의 기파가 사방 천지로 퍼져나갔다.

부딪친 곳이 두 봉우리 사이의 허공이었기에 망정이지, 지상에서 싸웠다면 반경 수백 보는 초토화되어 먼지도 남지 않았을 것이다.

그리고 이러한 결과는 두 절대적 존재 모두에게 충격을 안겨주었다.

설마 첫 대결이 무승부가 날 줄은 상상하지 못했던 것.

'병환으로 쓰러져 있던 게 아니었나?'

'감히.'

까마득히 먼 거리지만, 각자 봉우리 위에서 두 사람은 서로의 존재감을 확연히 느꼈다.

첫수의 대결은 막상막하(莫上莫下).

서패왕의 입꼬리가 올라가고, 검을 가지런히 머리 위로 올린다.

설마 자신의 일격이 막힐 줄이야.

하나 거기까지다.

조금 전 격전으로 설봉에는 더 이상 독무 따윈 존재하지 않는다.

그러니....

"찢어주마."

두 번째 대결이 시작됐다.

솨악!

이번엔 서패왕이 검을 천천히 베어냈다. 오히려 아까보다 현저히 낮은 위력.

대체 무얼 하려는 것인가.

의문은 오래 가지 않았다.

솨악!

바로 이어진 두 번째 검격.

솨악! 솨악! 솨악!

그리고 점점 빨라지는 검의 환영.

솨솨솨솨솨솩!

그러곤 순식간에 잔상으로 가득 채우며 쉴 새 없이 허공을 베어내기 시작했다.

연격이다!

검기의 위력과 크기는 절반으로 줄었으나 날아간 개수가 무려 일천 개!

이 정도면 병든 늙은이 따윈 흔적도 없이 날려버리고도 남을 터.

승자의 미소가 드리워진다.

한데 그 순간!

"음...?!"

과아아아앙!

반대편 설봉에서 굉음과 함께 심상치 않은 기류가 포착된다.

분명 일전의 공격으로 사라졌던 독무가 다시 생겨나기 시작한 것!

그것도 심지어 순식간에 불어나기 시작하더니, 어느새 하늘마저 집어삼킬 것처럼 거대해졌다.

아까보다 두 배. 아니 열 배는 더!

"어떻게 이런...?!"

서패왕의 당황한 음색이 흩날린다.

하나 이는 몰라서 하는 말.

"본디 독의 본질은 번식(繁殖)과 발산(發散)."

독마 양대헌이 독무를 뿜어내며 중얼거린다.

"고작 일천 개의 검기 따위로 베어낼 수 있을 줄 알았더냐!"

이내 하늘 위로 한 손을 휘젓자 거대한 독무가 가늘고 길게 뭉쳐진다.

그리고 자태를 이루는 신창(神槍)의 위엄!

『불사독마공(不死毒魔功) 응축(凝縮) 불사신창(不死神槍)』

독마의 입꼬리가 무섭게 올라가고, 가볍게 앞으로 지목하듯 손을 떨궜다.

과아아아앙!

그러자 거대한 신창이 서패왕의 검기를 향해 날아간다!

카카카카캉!

그리고 속절없이 터져나가는 일천 개의 검기!

낙엽 천 장으로 어찌 독마의 신창을 막아내겠는가. 아서라. 어불성설이다.

"하...."

서패왕은 제게로 날아드는 청록빛의 창을 바라보며 헛숨을 삼켰다.

착각했다. 그저 죽어가던 노인으로 생각했거늘 아니었다.

그는 혼란의 1세대에서도 뇌신과 함께 전설로 치부되던 절대오마(?對五魔) 중 일좌.

전설은 전설이었다.

하지만.

"진심으로 상대해 주지."

전력을 다하지 않은 건 그도 마찬가지.

검을 한 손으로 든 채 정확히 날아드는 창을 향해 겨냥하자.

우우우우웅!

그의 등 뒤에 서려 있던 성역의 거검(巨劍)이 서서히 앞으로 기울어진다.

이내 허공을 가르며 날아오는 창을 향해 뻗쳐 나간다.

그리고.

구아아아아앙-!

압도적인 폭발!

화아아아아악!

이내 거침없는 풍압이 쏟아져 초한봉 정상의 나무와 암석까지 뿌리째 모두 날려버렸다.

멀쩡히 서 있는 건 바닥에 칼을 꽂은 채 팔짱을 끼고 있는 서패왕과 편복산으로 제 앞을 덤덤히 가로막은 맹인 여인뿐.

하나 표정은 썩 좋지 못하다.

여파가 이쪽으로 날아들었다는 건 어쨌든 막아내긴 했지만, 힘에선 밀렸다는 것이니.

"독마.... 확실히 대단한 자입니다."

"나중을 위해서라도 반드시 없애야 할 자다."

두 사람이 진심으로 침음을 삼키며 긴장했다.

그러곤 동시에 자세를 잡는다.

이젠 머뭇거리지 않고 합공을 펼치겠다는 것.

반면 설봉 위에서는.

"크음...."

독마가 입가에 사혈을 흘리며 침음을 뱉고 있었다.

분명 우위를 점한 건 그이지만, 아직 과거의 힘이 전부 되돌아오지 않은 상황에서 너무 무리를 한 탓.

여기서 한 번 더 승부를 펼치면 결과와 상관없이 중상에 빠질 수도 있는 일.

하나 신의 대결은 냉정했다.

초한봉 위에서 또다시 성역의 거검이 움직이기 시작한 것.

"독마. 이번엔 반드시 끝내주지."

서패왕이 가슴 앞으로 칼을 가져와 내기를 일으키자 성역의 거검이 물아일체가 되어 그의 손짓을 따라 움직여진다.

이번에야말로 전력을 다한 최강의 일검을 보여줄 차례!

이대로 베어내기만 하면 설봉 전체를 날려버릴 수 있으리라.

이내 눈에서 짙은 안광을 뿜으며 베어내려는 그 순간!

"멈추십시오!"

맹인 여인이 다급히 소리쳐 그를 말린다.

천마라도 나타난 것인가?!

서패왕이 애써 모은 내기를 헛되이 날려 보내곤 쿵! 칼을 땅에 떨어트렸다.

하지만 그녀에게 왜 말린 것이냐고 묻진 않았다.

물을 필요가 없었다.

고오오오오!

첨예한 살기가 예까지 느껴졌기 때문.

먼발치 봉우리에 새로운 존재의 등장이었다.

'천마인가? 아니다. 천마가 아니다.'

이 먼 곳까지 피부로 느껴질 만큼 경천동지할 살기는 분명 천마와 유사했다.

하나 뭔가가 달랐다.

그의 성역은 어둠에 물든 하늘이오, 천하를 뒤덮는 마(魔).

하지만 지금 나타난 이는 그런 게 아니었다.

이건 뭐랄까. 살아 있는 거대한 마귀 그 자체인 듯했다.

실제로 보이는 성역도 그러했다.

거대한 마귀가 독무 사이로 흐릿하게 서려 있었다.

어쨌든 범상치 않은 존재인 건 분명한 사실.

"대체 누구지?"

서패왕의 질문에 여인은 고개를 저으며 답했다.

"알 수 없습니다. 하지만 분명 천마의 냄새가 납니다. 피해야 합니다."

"음...."

서패왕의 입에서 답답한 침음이 뱉어졌다.

이 기운은 아무리 봐도 천마가 아니기 때문. 굳이 따지자면.

소천마(小天魔).

딱 그 정도가 적당해 보였다.

하나 끓어오르는 가슴과 달리 머리는 현명했고 냉정했다.

만일 상대가 진짜 천마라면 한순간의 판단이 죽음으로 이끌 수 있다.

"아쉽지만 어쩔 수 없군."

서패왕의 눈매에서 핏빛 안광이 번뜩이고, 이내 부웅! 다시금 칼을 머리 위로 돌렸다.

그리고 봉우리를 향해 대각선으로 베어 넘기는 일검!

수와아아아악!

"언제고 다시 보게 될 것이다."

스스스스.

이내 여인과 함께 신기루처럼 사라진다.

미친 검기만을 쏘아 보내고서.

315.

#혼자가 아니다

맞은편 만년설봉에는.

"사숙...!"

고오오오오오!

그 어느 때보다도 짙은 살기를 흩뿌리고 달려온 정체불명의 존재.

장이서가 격노한 채 서 있었다.

그럴 만도 했다.

예까지 쉴 새 없이 달려와 처음으로 본 모습이 하나뿐인 사숙이 입가에 피를 흘리고 있는 거였다.

그리고 이는 과거 동생 윤이가 위험에 처했을 때만큼 참기 어려운 분노였다.

이때 처음 알았다.

암각 최고의 요원으로서 누구보다도 참는 것에 능숙한 그가 유일하게 참지 못하는 것.

그건 바로 제 가족을 건드리는 일이라는 걸 말이다.

심지어 이렇게 만든 자가 누구인지도 알고 있었다.

'서패왕.'

도저히 잊을 수 없는 기운.

혈존과 함께 나타났던 그가 확실했다.

그가 사숙을 노렸다.

그것도 자신이 천무기에게 정신이 팔려있는 사이에.

이걸 어찌 참을 수 있겠는가!

퀴아아아아!

덕분에 혈마귀는 다시금 기승을 부리고, 두 눈엔 살광이 번뜩였다.

그리고 이를 지켜보던 독마의 심안에는 선명히 보였다.

오로지 파괴욕만이 가득한 거대한 마귀의 모습이.

눈보라마저 수증기로 날려버릴 강력한 그의 성역이 말이다.

가까이 가는 것 자체가 실로 위험천만한 일.

하지만.

사박, 사박.

"이서야."

덥석! 독마는 아무렇지 않게 걸어와 그의 손을 붙잡았다.

"나는 괜찮다."

그러곤 다정히 웃음을 지으며 말했다.

이에 살기로 가득하던 장이서의 눈빛이 서서히 원래의 색을 찾는다.

"사숙...."

고개를 끄덕이며 손을 꽉 잡아주는 독마.

가빴던 호흡이 원래대로 돌아오고, 하늘까지 닿았던 살기는 바람에 흩날려 사라졌다.

장이서는 못난 꼴을 보인 듯한 자책감에 고개를 떨구었다.

숨길 마음은 없었으나 혈마귀의 기세가 너무 강했다.

귀천살마공에 사로잡혀 살의에 빠진 모습을 보였으니 당연히 놀랄 법도 한 일.

한데.

"괜찮은 것이냐."

독마는 늘 그렇듯 그의 안부를 물었다. 고마움과 미안함에 장이서는 힘없이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그 순간.

쿠구구구구!

땅에 지진이 일기 시작했다.

눈사태다!

서패왕의 미친 검기가 설봉의 정상이 아닌 허리를 가격한 것.

"일단 여기서 나가시죠."

두 사람은 고개를 끄덕이곤 동시에 신형을 날렸다.

* * *

"막아라-! 저 괴물을 막으란 말이다!"

한편 집하촌까지 도주한 산왕가주 파군성은 산발이 된 채 헐떡이며 내달리고 있었다.

두 눈은 이미 공포에 젖었고, 얼굴은 땀으로 범벅이다.

이유는 하나.

"파군성-!"

"흐윽!"

우렁찬 고함과 함께 수하들을 쓰러트리며 쫓아오는 붉은 눈의 괴물.

전장의 용 구유 때문이었다!

'도대체 언제 저리 강해진 것이냐!'

팔 한 짝이 날아간 탓도 있지만, 멀쩡했어도 제 처지가 달라지진 않았을 거다.

과거엔 자신이 반수 정도 위였다면, 지금은 그와 일백 합도 겨루기 힘들 듯했다.

이건 마치 운철이라는 원석을 갈고 닦아 신검으로 재탄생시킨 느낌.

당연했다.

3년 전, 만마분총에서 그가 익힌 무공은 까마득히 먼 옛날 초대 권마(拳魔)라 칭해지던 자의 붕산폭멸권(崩山暴滅拳).

꽈과과광!

그의 주먹이 닿을 때마다 산왕가의 무사들은 폭발하듯 쓰러졌다.

"끄아아악!"

파군성은 그간 자신이 쌓아온 성탑이 무너지는 소리를 들으며 처참한 후회에 잠겼다.

'애초에 그놈의 말만 듣고, 범의 아가리로 들어오는 게 아니었다.'

사실 그가 천무기에게 접근해 마교로 들어온 것은 본인의 의지가 아니었다.

'천무기를 도와 마교를 손에 넣어라.'

붉은 악귀의 가면.

흉신팔주의 수장!

일흉 모용소.

바로 그의 뜻이었다.

처음엔 불안함에 이를 거절하려 하였으나.

'천마도 사라졌다던데. 언제까지 변방의 이인자로 남아 있을 생각이지?'

그의 달콤한 일언에 결국엔 뜻을 수락하였다. 하지만 역시 마교는 마교였다.

고작 3년도 채우지 못하고 궤멸해 버릴 줄이야.

"문을 잠그고 놈들을 막아라!"

"예!"

어느새 산왕가의 전각까지 들어선 파군성은 빠르게 안가로 향했다.

이곳이라면 어느 정도 시간을 벌 수 있을 터.

그 안에 일흉에게 연통해 어떻게든 도움을 청해야 했다.

단단히 마음을 먹고 제 거처로 들어서는 순간.

"늦으셨군요."

안에선 한 사내가 그를 기다리고 있었다.

머리카락도, 눈썹도. 심지어 눈동자마저도 새하얀 백색의 기이한 사내.

"자네는...?!"

파군성의 눈이 부릅떠지고, 기다리던 사내는 씨익 음산한 미소를 지었다.

"주인님의 뜻을 전하러 왔습니다."

스릉!

서슬 퍼런 칼을 꺼내 든 채로.

"제기랄...."

파군성의 마지막 유언이었다.

수와아아악!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