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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67.

#오흉의 정체

적아린은 입이 다물어지지 않았다. 하지만 그게 아니라면 도첩을 준비한 이유가 설명되지 않는다.

애초에 상대가 의심할 걸 알고 있었다는 것.

'잠깐. 그럼 아까 뿌린 가루는 뭔데.'

천리미향은 아니다. 생선 썩은 비늘이 목서로 둔갑할 수는 없는 일.

'설마 독인가? 아니지. 그랬으면 이미 나부터 당했겠지. 대체 뭐야?'

모르겠다. 하나 장이서의 표정을 흘깃 살피자 볼일 다 봤다는 듯 아무런 미련도 없어 보였다.

분명 이 종이에 뭔가 수작을 부려놓은 게 틀림없거늘.

수 하나를 알아도, 바로 다음 수에 막혀 버린다.

적아린은 널뛰는 심장을 진정시킨 채 금세 표정을 갈무리했다.

그녀는 혈교의 기린아. 천치처럼 속내를 다 드러낼 만큼 어수룩한 여인은 아니다.

"시체는 이미 불태워 강물에 뿌렸고, 이거면 되겠느냐?"

능청스레 종이를 다시 접어 수하에게 건넸다.

그러자 이를 받아 든 수하는 내용을 보고 화들짝 놀라더니 황급히 품에 갈무리했다.

"추, 충분하오."

"그럼 이제 저 배 위에 올라 오흉을 만나도 되겠지?"

"오흉께선...."

수하가 난처한 듯 침묵했다가 조심스레 말을 이어갔다.

"사천지부에 계시오."

"뭐? 설마 나를 속인 것이냐?"

적아린이 죽일 듯한 기세로 노려 살핀다. 이에 수하는 부정 없이 고개를 숙이며 포권을 취했다.

"아뢰길, 대업이 막바지에 다다라 있으니 당분간은 서로 거리를 두어 조심하는 것이 좋겠다 하시었소이다."

"감히 나를 두고 말이지."

"대신 반드시 대업을 성공시키겠다 하시었소."

말문이 턱 막힌다. 결과로 보여주겠다는데 무슨 말을 더 할까.

적아린이 입을 꾹 다문 채 침묵하자 수하는 다시금 인사를 올리곤, 나룻배에 몸을 띄웠다.

그렇게 두 사람은 한참을 자리에 서 있어야 했다.

배가 사라지고, 숲에 숨은 이가 말을 타고 사라질 때까지.

"이거 어쩔까. 아무래도 만날 방법이 사라져 버린 것 같은데."

난처한 표정을 짓는 적아린. 하지만 속으론 입꼬리가 말려 올라갔다.

사실 오흉을 잡게 해주겠다곤 했지만, 그렇다고 장이서한테 마냥 유리하게 해줄 마음은 없었기 때문.

이를테면 오흉의 정체를 알면서도 묵인하고 있는 것처럼 말이다.

그러니까 이건 오흉과 장이서의 수 싸움이었다.

적아린이라는 구경꾼을 가운데 두고 치열하게 겨루는 공방전.

그리고 그 결과는.

'장이서. 나름 선방한 듯하지만 역시 이번엔 오흉의 승리야. 아쉽게 됐어.'

갈 길을 잃은 장이서의 명명백백한 패배.

'이제 어쩔 거지?'

그녀가 흥미로운 눈으로 다시 장이서를 살폈다. 그러자 그는 하늘을 무심히 올려다보곤 가볍게 툭 말을 뱉었다.

"사천지부로 간다."

"뭐...?!"

적아린은 어이가 없어서 헛웃음을 터트렸다. 너무 말 같지도 않은 소리이기 때문.

그곳에 오흉이 없어서가 아니다.

이건.

"내가 제대로 들은 거 맞지? 사천지부가 어디 있는지는 알고 하는 말이지?"

"성도에 있겠지."

"그러니까. 지금 사천의 수천 관군을 뚫고 성도에 들어간 다음, 삼문이 우글거리는 사천지부에서 누군지도 모를 오흉을 찾아 만나보겠다는 거잖아. 그렇지?"

"잘 아는군."

"미쳤어?"

그야말로 답도 없는 소리. 차라리 지금이라도 떠나가는 저 배의 뒤꽁무니를 쫓는 게 더 낫겠다.

한데 장이서는 태연자약했다.

"해 지는 시간에 맞춰 도착하려면 서둘러야 할 거다. 움직여."

"도대체 무슨 생각인 거야? 야, 장이서!"

적아린은 한숨을 길게 내쉬곤 결국 총총 그의 뒤를 쫓았다. 이젠 궁금해서라도 끝까지 가보고 싶은 심정.

물론 어떤 결과이든 큰 상관은 없었다.

누가 이기더라도 혈교가 손해 볼 일은 없을 테니.

* * *

한편 장이서가 오흉을 향해 점점 거리를 좁혀 갈 무렵.

마찬가지로 첩자를 찾기 위해 고군분투 중인 이가 하나 더 있었다.

객잔에 홀로 앉아 술잔을 들이켜는 노부.

암각의 주인 천하제일뇌 제갈상이었다.

얼핏 보면 진척도 없이 시간만 때우는 것처럼 보이겠으나 천만에.

'대체 어찌하여 그런 짓을 벌인 겐가....'

그는 장이서보다 한발 더 앞서 있었다. 그가 이미 오흉의 정체를 알아내 버린 것.

당연했다. 제갈상이 누구인가.

무림맹의 전대 군사이자 천하제일뇌로 통하는 신주오절이다.

더구나 이미 그에겐 제갈소미를 통해 얻은 정보와 곳곳에서 움직여 줄 요원들이 수두룩했다.

심지어 이곳 객잔을 나가 조금만 걸어 나가면 그곳이 바로 첩자가 머무는 장원이었다.

노왕야를 죽게 만들고, 천하를 혼란에 빠트린 바로 그 역적 말이다.

한데도 제갈상은 쉽사리 자리를 털고 일어설 수가 없었다.

마음에 동요가 일었기 때문.

이는 단지 첩자가 알던 이였기 때문이 아니었다.

"사천에서 이런 일이 벌어질 때까지 대체 무림맹은 뭘 한 것인가? 그간 막을 기회가 한두 번이었나!"

"이리 머뭇거리니 뇌마 같은 놈들이 날뛰는 걸세. 평화협정은 무슨. 그냥 마교 놈들한테 굽신거린 꼴밖에 더 되는가?!"

"무림맹에서도 반드시 책임을 져야 할 일일세!"

객잔 곳곳에서 들려오는 천하의 세론이 한파처럼 매섭기 때문이었다.

최근 일어난 일련의 사건들로 인해 마교에 대한 분노가 무림맹에 대한 차가운 문책으로 옮겨가고 있었던 것.

한데 능가경에 관한 모든 일의 시초가 정파에 숨어든 첩자로부터 벌어졌음이 알려지기라도 하면....

그럼 그땐 어찌 되겠는가.

정파가 신뢰를 잃는 순간 천하는 질서가 무너지는 거였다.

'천하의 모든 원망이 우리에게로 향하게 된다면 그럼 혈교의 역풍을 막아낼 자는 없다.'

바로 이것이 제갈상이 차마 움직이지 못하는 이유였다.

또한 적아린이 오흉을 팽해도 혈교에는 문제가 없다고 자신하는 이유이기도 했다.

그야말로 이면에서도 치열한 수 싸움이 벌어지고 있던 것.

하지만 언제까지고 이리 머뭇거릴 수는 없는 일.

"잘 먹었네."

마침내 제갈상이 결단을 내렸다.

그의 거동이 시작됐다.

끼이이익!

문을 열고 나가며 나지막이 말했다.

"사천지부로 갈 것이다."

스스스스!

주변 곳곳에서 신분을 위장한 채 모여 있던 이들이 일시에 자취를 감췄다.

* * *

- 무림맹 사천지부.

어느덧 해가 저물어 가는 오후.

"음...."

장원에서는 짙은 푸른색 도복에 장자건을 쓴 중년의 도인이 난색을 보이고 있었다.

도호는 화평자(華平子) 구자기.

서검 여중악의 제자인 화산칠진(華山七眞) 중 일인이며 무림맹의 신임 군사.

본래 성품이 온화하여 군자라 불릴 만큼 의젓한 자였으나, 오늘은 편치가 못했다.

불쑥 찾아온 이들 때문이었다.

사천삼문을 대표해 나온 세 사람.

아미의 효진사태와 청성의 천사도인. 그리고 당가의 천외당주 당기륭이다.

"군사. 더 시간을 끄는 건 불가합니다. 당장 가서 놈들을 추궁해야 합니다! 허가해 주시오."

"사태.... 왜 또 이러십니까. 아직 확인된 바가 없다고 하지 않았습니까."

"들어주지 않으면 이 자리에서 한 발짝도 벗어나지 않을 것입니다."

털썩. 효진사태가 별안간 무릎을 꿇고 앉아 진언과 함께 염주를 굴렸다.

이에 당황한 구자기는 황급히 몸을 낮춰 그녀를 일으키려 했다.

하지만 돌부처처럼 꿈쩍도 없다.

"대체 왜 이러십니까. 이러지 마십시오. 천사도인. 천외당주. 두 분이라도 좀 말려주십시오!"

"소용없습니다. 삼문은 모두 뜻을 함께하기로 하였으니."

"어찌!"

구자기가 당황하여 천사도인과 천외당주를 살폈다.

"아니, 거 적당히 들들 볶아야지. 사문까지 찾아와서는.... 장문인이 아미파의 뜻대로 하라더이다. 미안하게 됐소, 군사."

"천사도인!"

"살해이든 실종이든. 사천에서 벌어진 이상 묵과할 수 없지 않겠소."

"천외당주!"

"이제 아시겠습니까? 삼문은 더 이상 참지 않습니다."

마지막 효진사태의 말을 끝으로 구자기는 짙은 한숨을 뱉어야만 했다.

결국엔 이렇게 되었단 말인가.

"제가... 당장 혼자 결정할 수 있는 문제가 아닙니다."

"맹주께는 삼문에서 정식으로 상서를 올릴 겁니다. 군사께선 그저 지켜만 보시면 됩니다."

"사태...."

"그럼, 허락하신 것으로 알겠습니다. 아미타불."

효진사태가 차갑게 노려보곤 일어나 돌아나간다. 이에 천사도인과 천외당주도 그 뒤를 따랐다.

"후...."

하늘을 바라보며 짙은 한숨을 뱉는 구자기.

"확실하지 않은 일엔 늘 화가 뒤따르는 법이거늘. 어찌 그리들 성급하시오."

진심 어린 일언이 흘러나온다.

한데 뭔가가 이상했다.

우려 섞인 모습이 아니라 어딘가 서늘한 분위기.

슥. 잠시 후, 그의 뒤에 그림자처럼 한 사내가 나타나 부복했다.

검은 복면에 죽립. 아무런 문양도 없는 검.

그다.

장이서가 도첩을 넘긴 바로 그 오흉의 수하!

그리고 그 말은 곧....

"흑혈이 이걸 전해달라 하였습니다."

"원담대사의 것이 확실하구나. 더는 저들을 말리지 않아도 되겠어."

그랬다. 화평자 구자기.

무림맹의 군사였던 그가 바로 오흉의 정체였다!

"내일 삼문과 함께 마교 청해지부를 세상에서 지울 것이네. 그리하여, 더는 마교에 휘둘리지 않는 진정한 평화를 찾아낼 것일세. 당장 전군 준비하라 이르시게."

"존명!"

그의 수하가 결의에 찬 외침과 함께 밖으로 나섰다.

그야말로 믿을 수 없는 일.

그리고 무엇보다도....

"사부님...?"

잠시 후, 뒤에서 들려오는 목소리에 무섭도록 굳어져 있던 구자기의 입꼬리가 환하게 올라섰다.

그러곤 돌아서서 다정히 말했다.

"깨어났느냐, 선유야."

그가 바로 선유의 사부였다.

*

구자기는 제 방에 들어가 느긋하게 차를 따르며 다정히 웃었다.

"그래, 잘 쉬었느냐. 몸은."

그의 물음에 선유는 붕대로 감긴 제 팔을 힐긋 살피곤 고개를 끄덕이며 답했다.

"괜찮습니다. 한데 어찌 된 것입니까."

"다친 채 청해의 의원으로 실려 간 너를 맹원이 우연히 발견했다. 천운이었던 게지."

우연. 정말 믿기 힘든 이야기지만, 의심은 없었다. 그게 아니라면 자신이 이곳에 있는 이유를 설명할 수 없을 테니.

"그럼 제갈소저는...."

"청해에 있다는 연통을 받았다. 염려 말거라. 무사하니. 그보다 네가 잘못되는 줄 알고 이 사부가 얼마나 걱정했는지 아느냐. 시간이 흘러도 깨어날 생각을 하지 않으니 내내 마음을 졸였다."

"죄송합니다, 사부님."

"아니다. 이리 무사하니 되었다."

구자기가 다정히 웃으며 선유의 어깨를 쓰다듬었다.

"본디 강호는 어디에나 고수들이 있으며, 권모술수가 난무하는 곳이다. 이번에 큰 가르침을 얻었다 생각하고 당분간 푹 쉬거라. 무사한 것만으로도 원시천존께 감읍할 따름이니."

"예, 사부님."

"그래. 아직 다 나은 것이 아니니 당분간 여기 머물며 치료에 전념하거라."

완고한 표정. 그가 이런 표정을 지을 땐 진심으로 자신을 걱정할 때. 선유는 이를 잘 알고 있었던 터라 차마 거절하지 못한 채 고개를 끄덕였다.

"알겠습니다, 사부님."

웃음과 함께 감사의 인사를 올리고 물러서는 선유.

"녀석."

구자기는 그의 뒷모습을 바라보며 씁쓸한 미소에 잠겼다.

오래전 전쟁에서 단전을 다치고, 가족마저 잃어 폐인처럼 살아가던 그에게 단비처럼 내려온 아이였다.

처음 제갈상이 화산파에 아이들을 데려왔고, 그중 장문인이 선유를 맡으라고 했을 때만 해도 이렇게 오래 함께하게 될 줄은 꿈에도 몰랐거늘....

"계시는가."

흐뭇한 미소를 지으며 생각에 잠겨 있던 그때. 밖에서 인기척과 함께 낯익은 인사가 흘러들었다.

이에 밖으로 나가보자 인자함과 근중함이 동시에 느껴지는 백발의 노부가 서 있었다.

"어르신?"

암각의 주인.

천하제일뇌 제갈상이다.

268.

#몰랐는가?

"잘 지냈는가."

제갈상의 방문에 구자기가 금세 화색을 띠며 포권을 취했다.

"아니, 이 시간에 예까진 어쩐 일이십니까. 어서 들어오시지요."

엄밀히 따지면 제갈상은 그의 사부인 서검과 형제나 다를 바 없으니 사숙과도 같았다.

자주 보진 못해도 당연히 가까울 수밖에.

"안 그래도 조금 전 선유가 다녀가 어르신 생각을 하던 참이었습니다."

"그랬는가."

"예. 한데 무슨 일로...."

두 사람이 협탁 앞에 나란히 앉는다. 제갈상은 담담히 입을 열었다.

"내 벗이 큰일을 당했다는데 어찌 가만히만 있겠는가."

"음, 신승께선...."

"다 들었네. 몹쓸 친구. 가면 간다고 말이라도 해주지."

제갈상이 서글픈 표정을 짓자 구자기가 고개를 숙였다.

"송구합니다. 제가 미리 막았어야 했는데...."

"아닐세. 자네가 고생이 많다 들었네. 하여 술이라도 한잔하며 이야기나 들어보고자 들른 걸세."

"예, 그러시지요."

제갈상이 호리병을 협탁에 올려놓자 구자기가 애써 웃으며 잔을 가져왔다.

"그간 어찌 지내셨습니까."

"전부터 천기가 혼탁하여 걱정이 많았거늘. 어쩌다 이런 일이 벌어진 것인지...."

"너무 안일하였습니다. 설마 마교가 이렇게까지 나올 줄은.... 모두 제 탓입니다."

또르르. 제갈상이 잔을 채우면서 물었다.

"그 원흉이 뇌마라 하였던가."

번뜩이는 제갈상의 눈빛. 이에 구자기는 태연히 답했다.

"예, 맞습니다. 그자가 신승과 원담대사를 해하였습니다."

"그렇군...."

씁쓸한 미소를 짓는 제갈상.

"이미 증거를 확보했고, 내일 동이 트는 대로 사천삼문과 함께 그들을 쫓을 것입니다."

"바로 말인가?"

"예. 이대로 마교를 놓칠 순 없지 않겠습니까."

"전쟁이 벌어질 수도 있네."

"알고 있습니다. 하지만 먼저 시작한 건 마교가 아닙니까."

그러한가. 제갈상은 아직 가득 채워져 있는 술잔을 바라보며 물었다.

"자네 그거 아는가?"

"예?"

"서검 그 친구가 자네를 어찌나 아끼던지. 제자 중에 인품과 자질이 가장 좋다며 장차 화산을 이끌 장문인이 될 거라 늘 말하곤 하였다네."

"하하, 옛이야기지요...."

"아쉬운 일이지. 자네가 마교와의 전쟁에서 그 일만 겪지 않았더라면."

그 일. 참으로 기억하고 싶지 않은 날의 기억.

하필 마교가 침범한 곳이 제 고향이었고, 부모와 아우를 위해 주변의 만류를 무시한 채 무턱대고 찾아갔다.

다행히 가족들은 집을 비운 상태. 하지만 구자기는 적들에게 둘러싸인 신세가 되어버렸다.

긴 투쟁 끝에 단전까지 잃고 만신창이가 되어 살아 돌아왔으나....

'자네가 떠났다는 말을 듣고 자네 가족들이.... 미안하네.'

저를 찾아 떠났다가 봉변을 당한 가족들의 싸늘한 시신만이 기다리고 있었다.

한순간의 엇갈림에 모든 걸 잃은 것이다.

전쟁이란 그런 것이었다.

"그때 만일 선유가 없었다면, 전 이미 이 세상에 없었을 겁니다."

구자기가 세월의 웃음을 지으며 술잔을 털어 넣었다. 그러자 제갈상이 물었다.

"그럼 잘 살면 될 것이지. 왜 그랬는가."

"무슨 말씀이신지?"

"그냥 선유하고 잘 살면 되지. 어째서 그들과 손을 잡았느냔 말일세!"

버럭 일갈을 내지르는 제갈상.

구자기의 얼굴이 사색으로 변모한다.

"어르신?"

"이 못난 사람아.... 그리 마음이 아팠으면 말을 했어야지. 그리도 마교가 싫었던 겐가."

"지금 무슨 말씀을 하시는지...."

"다 알고 있네. 자네가 혈교와 함께 이 모든 사태를 계획했다는 것을."

"...!"

구자기의 눈이 튀어나올 듯이 커졌다. 도대체 그걸 어떻게...!

"이건 몰랐는가. 뇌마, 그 아이가 선유의 친형인 것을."

"무슨!"

"암각의 요원이란 말일세."

구자기의 머릿속이 혼란으로 가득해진다. 그게 무슨 말인가. 뇌마가 요원이라니. 선유의 형이라니!

그럼 혈교의 대업을 막아낸 게 마교가 아니라....

그때였다.

챙그랑! 구자기가 들고 있던 술잔이 떨어지고 산산조각으로 비산한다.

"큭...?"

이내 흉부를 움켜쥐고 꼽등이처럼 몸이 휘어진다.

입가에서 흐르는 검은 피.

"어째...서...?"

사혈(死血)이다.

다시 협탁을 살피자 제갈상의 술잔은 여전히 꽉 채워져 있다.

술이 아니라 독주였던 것.

"...선유는 염려 마시게. 내가 잘 돌볼 것이니."

"커헉!"

와당탕! 비틀거리며 일어나 피 토하며 쓰러지기를 반복하는 구자기. 해독제를 찾으려는 듯 보이나 늦었다.

내공도 없는 그가 견뎌낼 수준이 아니다.

"어르...신...."

망연자실한 눈동자.

"잘 가시게."

제갈상의 착잡한 음색만이 자욱이 흘러나오는 씁쓸한 저녁이었다.

* * *

- 사천성 성도(成都).

무법지대인 청해의 서녕과 달리 늦은 시각임에도 사천의 성도는 경계가 삼엄했다.

관군이 사마외도의 출입을 엄격히 금하였기 때문.

하여 적아린은 장이서가 안으로 들어갈 대단한 묘수가 있는 줄 알았다.

한데.

"들어가지."

"정말 그냥 들어간다고? 저기 저 성문으로? 당당히?"

"왜. 겁나?"

"아니, 그럴 리가. 무서울 건 없지. 근데 알지? 여기 관군이 얼마나 모여 있는지. 어마어마해. 그리고 걔들 요즘 번왕 죽었다고 아주 예민해."

"그렇겠지. 너희가 죽였으니까."

"그렇지. 그 죽인 애는 또 네가 죽였고."

장이서가 코웃음을 치며 허리춤에 있는 호리병을 건넸다.

"무서우면 술이나 한잔 들든지."

뭐야, 갑자기. 원래 남이 주는 거 잘 안 먹는데, 저리 웃어주니 또 마음 약해진다.

적아린은 헛웃음을 지으며 꼴깍꼴깍 마시곤 몸을 부르르 떨었다.

"넌 정말 미친 거 같아서 좋아. 그래. 들어가자. 가서 다 죽여보자. 근데 그러다 오흉을 놓치면?"

"그럴 일 없어."

그러니까 어떻게. 적아린은 답답해하며 장이서를 따라 걸었다.

어느새 성문 앞에 다다른 두 사람.

성벽 위의 나돌아다니는 횃불이며, 성문 앞에 장창을 든 채 모인 관군 무리며.

당장 보이는 것만 해도 셀 수 없을 지경.

적아린은 오랜만에 샘솟는 긴장감에 입꼬리가 올라가고, 손아귀에 땀이 서렸다.

이내 작정하고 앞으로 나가려는 순간.

"참, 아까 도첩에 뿌린 가루가 뭔지 궁금하다고 했나?"

이제 와서? 너무 뜬금없는 말이지만, 궁금하긴 하다.

"응, 뭔데?"

"어육에 흑철독을 발라 어두운 곳에서 삭히면 빛을 발하는 균이 만들어지지."

"빛?"

아깐 그런 거 없었잖아. 그녀가 고개를 갸웃하자 장이서가 픽 웃으며 설명을 이었다.

"그냥 빛은 아니야. 어둠 속에서만 빛을 발하는 특이한 녀석이지. 야광균(夜光菌)이라고 들어봤나?"

그게 무슨.... 그제야 그녀가 제 손바닥을 살피자 푸른색 빛이 별처럼 은은히 묻어나 있었다.

"너 설마...."

"도첩도 지금쯤 오흉에게 전달이 됐겠지. 그리고 그 정도면 찾아낼 수 있다."

적아린은 그제야 깨달았다. 애초에 장이서는 이 상황을 모두 예견하고 있었다는 것을.

애초에 싸움이 되지 않았다는 것을 말이다.

"근데 그걸 왜 지금 말해주는 건데?"

"별거 아니야. 그래야 네가 조금 덜 억울할 것 같아서."

"뭐?"

그 순간, 그녀의 몸 안에 이상 증상이 나타나기 시작했다.

"잠깐, 이거 왜...."

당황하며 심법을 운용하자 돌아야 할 내기가 바스러지는 낙엽처럼 사라져 버린다.

"설마... 아까 먹은 술...!"

산공독이다. 그것도 겪어 보지 않은 독한 녀석! 그녀의 얼굴이 백지장처럼 하얘지고, 이내 서둘러 혈을 짚었다.

그러자 툭. 장이서가 별안간 그녀의 손아귀에 작고 묵직한 쇳덩이 하나를 얹어준다.

뭐야, 이게.

"진천뢰다."

"...!"

이런 미친! 너무 놀라 기절할 뻔했다. 하지만 사실이다. 그것도 정교하게 만들어진 소형 진천뢰였다.

"가서 죗값 받아라. 그게 네가 살 수 있는 마지막 길이니."

"이게 뭔...."

그녀가 일순 당황에 빠진 그 순간.

장이서가 그녀의 뒤에 숨어 또 다른 진천뢰를 휙 내던졌다.

"아, 안 돼!"

그러자 포물선을 그리며 날아가더니.

콰아아아앙!

성벽에서 울리는 거대한 폭발.

"으허억!"

"꺄아아악!"

한순간에 성문 앞은 아수라장으로 변하고, 횃불들은 어수선히 빨라졌다.

그리고....

"저 여인이 진천뢰를 가지고 있다!"

어느새 한참 떨어진 장이서가 그녀를 손가락질하며 외쳤다.

웅성웅성!

이에 곳곳에서 소란이 커지고, 횃불들이 모여든다.

손에 떡하니 진천뢰가 들려 있으니 반박할 방도도 없는 일.

"하하하하. 나 당한 거야?"

그제야 현실을 깨달은 적아린.

어느새 관군들은 창끝을 들이밀며 사방에 가득히 모여들었고, 장이서는 소란을 틈타 유유자적하게 성벽을 타고 올랐다.

애초에 그는 관군을 상대할 마음 따윈 없었던 것.

절 이용하고 버릴 생각이었던 거다.

물론....

"진짜... 마음에 든다니까."

그래서 더 마음에 들지만 말이다.

*

한편 무사히 성도까지 잠입에 성공한 장이서.

그가 그늘진 성벽을 지나 도심에 나타났을 땐, 어느새 짐꾼의 모습은 사라지고, 무림맹의 하급 무사가 되어 있었다.

이에 관군들은 아무런 의심도 없이 그를 지나쳐 성문으로 달려 나갔다.

그야말로 완벽한 잠입.

물론 잠입이라는 말엔 조금 어폐가 있긴 했다.

그가 나고 자란 곳이 이곳 사천이기 때문.

여기서 제갈상과 처음 만났고, 그를 따라가 암각의 요원이 되었다.

한데 이제는 허락받지 못한 밤손님 신세라니. 솔직히 썩 편한 마음은 아니다.

'임무를 끝마치고 나면 달라질까?'

아마 그럴 거다. 본래 여기가 자신이 있어야 할 곳이었으니.

그렇게 생각하니 조금은 마음이 편해진다.

"성문에 괴한이 나타났다! 어서 지원을 요청해라!"

콰아아앙!

관군들의 어수선한 목소리와 함께 제법 멀어진 성문에서 굉음이 터져 나왔다.

장이서는 고개를 절레절레 저으며 앞으로 걸어 나갔다.

보아하니 적아린은 고이 죗값 치를 마음이 없는 모양.

'제법 독한 녀석으로 준비했는데, 벌써 내공을 되찾은 건가. 확실히 보통이 아니야.'

물론 그래봤자 홀로 수천의 병사들을 상대하는 게 쉽진 않을 거다.

지금 신경 쓸 건 그쪽이 아닌 이쪽.

조화문(調和門)이라는 현판 하나만 달아둔 채 위풍당당하게 훤히 뚫려 있는 대문.

무림맹 사천지부.

바로 이곳이다. 장이서는 마음을 굳히곤 거침없이 안으로 발을 들였다.

지금도 언뜻언뜻 소란이 빗발치는 성문 쪽과 달리 이곳은 모두가 잠이 든 것처럼 잠잠했다.

장원의 크기가 산서에 있는 본원(本園) 다음으로 크다던데.

이렇게 무사들이 없을 수가 있나 싶을 정도. 하나 의문은 잠시.

장이서는 본분에 충실하듯 천마의 기운을 바깥으로 퍼트렸다.

핑!

천마안이다. 수많은 기운이 그의 머릿속에 담기고, 그중엔 불사독마공을 구성하는 요소 중 하나인 야광균도 자리했다.

'저곳이구나.'

그리고 어렵지 않게 수많은 전각 중 하나를 찾아낼 수 있었다.

그곳에서 야광균의 빛이 무성히 뿜어져 나왔다. 원담대사의 도첩이 있는 곳이 틀림없었다.

장이서는 곧장 걸음을 옮겼다.

이 안에....

능가경 사태를 일으킨 오흉이 있다.

끼이익.

이내 문을 열고 안으로 조용히 들어섰다.

촛불 하나 없이 어두운 방.

한데.

'무슨...?!'

장내엔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상황이 펼쳐져 있었다.

269.

#새로운 임무

장이서의 표정이 딱딱하게 굳어졌다.

사방 곳곳에 푸른 빛의 손바닥 자국이 어지러이 닿아 있었기 때문.

야광균이었다.

도무지 이해할 수 없는 상황.

이내 열린 문을 지나 방 안까지 들어서자.

"...!"

난장판이 된 집무실 구석에 얼굴이 피로 가득한 채 쓰러져 있는 사내가 있었다.

"이런...?!"

장이서가 다급히 달려가 부축하자 몸이 얼음장처럼 차갑다.

그리고 느껴지는 익숙한 기운.

'빙모독(氷毛毒)?!'

불사독마공을 익히기 위해 장이서가 접했던 수많은 독 중 하나.

천산 만년설봉에 사는 독거미에게 물린 쥐가 오랜 세월 얼어붙어 만들어지는 극독이다.

내공이 있는 무림인에겐 그리 강한 독은 아니지만, 무색, 무취라는 점과 서서히 장기가 얼어버린다는 점에서 일반인에게는 실로 사악한 독.

'이미 죽어 있다.'

대체 누가. 천하의 사천지부 안에서 독살이라니!

하지만 그것보다도 더 놀라운 것은....

"오흉...?"

바로 이자가 제가 찾던 오흉이라는 거였다. 그게 아니고서야 야광균이 이리 강하게 뿜어져 나올 이유가 없을 테니.

품을 뒤져보자 아니나 다를까 빛으로 가득한 원담의 도첩이 있었다.

도무지 이해할 수 없는 상황.

바로 그때.

"왔느냐."

뒤에서 근엄한 목소리가 귓가에 울렸다.

무려 14년 만에 듣는 거였지만, 단 한 번도 잊어본 적이 없는 목소리.

"당신은...!"

고개를 돌린 장이서는 경악을 금치 못했다. 인자함과 진중함이 동시에 묻어나는 백발의 노부.

"각주...."

암각의 주인.

천하제일뇌 제갈상이었다.

"오랜만이구나. 103호."

그리고 그 역시 단번에 장이서를 알아봤다. 하급 무사로 분장하고, 인피면구를 쓰고 있었음에도.

그 뜻은 곧....

"내가 올 걸 알고 있었소?"

그렇다. 이미 장이서가 오리라는 걸 알고 있었던 거다.

"잊었느냐. 이곳이 어디인지."

"중원...."

절로 고개가 끄덕여졌다. 이곳은 중원. 그것도 정파의 성지인 사천이다. 천하제일뇌 제갈상의 무대나 다름이 없는 곳.

쫘악.

장이서는 쓸모없어진 인피면구를 벗어내곤 일어섰다.

"윤이. 아니 선유는?"

"무사하다."

후. 안도의 숨이 뱉어졌다. 활화산 같던 머릿속이 차분해지고, 이내 그를 보며 물었다.

"당신이 한 짓이야?"

"여긴 왜 온 것이냐."

장이서의 미간이 일그러졌다. 모르고 물은 건 아닐 것이기 때문.

아니나 다를까, 이어진 말은 반가운 마음조차 뚝 떨어트렸다.

"암각은 네게 혈교를 쫓으란 임무를 주지 않았다."

장이서는 그 순간 제갈상을 다시 살폈다.

선도 악도 느껴지지 않는 눈가의 주름.

혼자만 모든 걸 다 안다는 듯이 다물어진 입술.

오래전 짜증 났던 기억들이 새록새록 떠오른다.

그리고 깨달았다.

"당신 그대로네. 여전히 재수가 별로야."

"넌 많이 컸구나. 시키지도 않은 일까지 하다니."

"잔소리는 집어치워. 요원이기 전에 정파인으로 할 일을 한 것뿐이니까. 이자를 죽인 이유나 말해."

오흉은 혈교로 배신한 것도 모자라 능가경 사태를 일으킨 자. 당연히 죽어 마땅하다.

하지만 이렇게는 아니었다.

적어도 살려서 배후를 알아내야 했고, 몰랐던 사실들을 밝혀내야 했다.

한데 왜.

"그가 누구인지 아느냐?"

장이서의 시선이 다시 시신에 닿았다. 피범벅이 된 자라 봐도 모르겠다.

"화평자 구자기."

"...!"

그때 제갈상의 입에서 도저히 믿기 힘든 말이 뱉어졌다.

"서검의 제자이자, 네 아우의 사부. 그리고 무림맹의 군사다."

장이서의 눈이 더 할 수 없이 커졌다.

그리고 머릿속의 모든 조각이 맞추어지기 시작했다.

'맹주께서 직접 노왕야께 청을 올렸다고 하였지요.'

맹주를 옆에서 움직일 수 있고.

'청해에 능가경이 있다는 소식을 듣고 움직이게 된 것이지요.'

'누굽니까. 그걸 말해준 자가.'

'서검입니다.'

화산의 전설인 서검 여중악에게 거짓된 정보를 흘릴 수 있는 자.

그리고.

'적아린. 그 아이들은 건드리지 마라.'

선유를 데려갈 이유가 확실한 자. 그건 오직 군사 화평자 구자기.

그뿐이었던 것이다.

하지만 그렇기에 더더욱 이해가 가지 않았다.

"그럼 이렇게 죽여서는 안 되는 거잖아."

그것도 마교의 빙모독까지 써가면서. 장이서의 시선이 제갈상에게 닿았다. 너무나 차갑고도 차분한 그의 눈빛.

"설마...."

느껴진다. 불길한 기운이.

제갈상은 자신이 올 걸 알고 있었다. 그리고 그에 맞춰 첩자인 군사를 죽였다.

"아니지?"

장이서가 헛웃음을 지으며 애써 부정했다. 하지만 불안한 느낌은 빗나간 적이 없다.

"구자기는 첩자가 아닌 군사로서 소임을 다하다 명예롭게 죽은 것으로 기억될 것이다."

다리에 힘이 풀리고, 머릿속이 새하얘졌다. 설마.

"103호. 네게 임무를 내리겠다."

그만. 애타게 제갈상을 살핀다. 하지만 그의 입에선 일말의 자비도 없이 통보가 내려졌다.

"천하의 평화와 안녕을 위해... 군사를 없앤 뇌마로 죽어다오."

"...!"

뇌리에 광망이 번뜩이고 가슴 한쪽이 도려지는 기분을 느꼈다.

"왜...?"

"그것만이 모두를 구할 수 있는 방안이다."

이거였다. 이것이 바로 제갈상이 내린 종착지였다.

군사인 그가 혈교의 첩자로 밝혀져 능가경 사태의 원흉으로 드러난다면, 천하의 화살은 모두 무림맹으로 향하게 될 거였다.

그것만은 절대 있어선 안 될 일.

해서 바꾸기로 했다.

구자기는 첩자가 아니었고, 오직 무림맹을 위해 헌신했던 위대한 군사로 남기기로!

또한.

"이것으로 네 사상이 변하지 않았음을 증명하거라."

"뭐...?"

뭘 증명하라는 것인가. 혈교를 쫓아 여기까지 왔다. 만악의 근원을 막아내, 천하의 무사를 지키기 위해!

한데 사상이라니.

장이서의 눈에서 불길이 치솟던 그 순간.

"부교주."

제갈상의 입에서 생각지 못한 단어가 뱉어졌다.

"뭐...?"

"부교주가 될 뻔하였음에도 넌 이를 암각에 알리지 않았다. 이유가 무엇이냐."

그걸 어떻게....

"천산에 있는 암각의 요원은 너 하나가 아니다. 이미 12호에게 들었으니 속일 생각은 말거라."

12호...? 장이서의 머릿속에 맨 처음 임무를 주고 간 자의 모습이 스쳤다. 그자인가.

"내가 너에게 맡긴 임무는 칠공자를 소교주로 만들라는 것이지. 너더러 부교주가 되라는 것이 아니었다."

"그건 교주가 하라고 한 거지. 내가 하겠다고 한 게...!"

"그러니까."

"뭐...?"

"어째서 그리 커 버린 것이냐."

제갈상의 눈빛에 설핏 아쉬움이 담겼다.

음지에 숨은 그림자로 끝났어야 했다. 결코 양지로 나와 주역이 되어서는 아니 됐다.

그것이 요원의 삶이었다.

한데 장이서는 너무 커져 버렸다.

"이젠 천하 어디를 가도 네 얘기가 나온다. 중원의 긍지를 짓밟은 마교의 악적이라고."

"그래서 나더러 죽어서도 원수가 되라고?"

"너희 희생으로 모두가 무사할 것이다."

"이 미친 새끼가!"

달려든 장이서가 와락 멱살을 움켜쥐었다.

"당신 미쳤어. 알아? 완전히 미쳤다고."

"미안하다."

슥. 제갈상이 하찮은 사과와 함께 품에서 사신의 문양이 새겨진 함을 꺼냈다.

"하...."

바로 장이서가 삼킨 고독의 모고가 담긴 옥함이었다. 이를 터트리는 순간 요원의 심장도 함께 터져 버리는 필살의 한 수.

"당신 제정신 아니야. 내가 여기서 죽으면. 마교는 가만히 있고?"

"천마에겐 때가 되면 네가 첩자였음을 밝힐 것이다. 그럼 그도 더는 나서지 않겠지."

"야, 이 x발!"

와르르! 장이서가 그를 벽으로 밀쳐 보내곤, 당장 이마에 백뢰를 출수할 것처럼 손을 당겼다.

"지금 큰 실수하는 거야. 잘못한 놈은 감싸주고, 잡으러 온 나를 죽이는 게. 이게 당신들 정의야?"

"...대의다."

"그걸 왜 네가 정해!"

"더 큰 희생을 막기 위한 최선임을 정녕 모르는 것이냐."

"닥쳐! 그냥 뒷감당할 자신이 없는 거잖아. 그래 놓고선 알량한 자존심에 빠질 생각도 없이 버티고 서 있는 거잖아. 천하제일뇌? 웃기지 마. 당신, 그냥 무능한 위선자야. 지금이라도 못 하겠으면 빠져. 내가 할 테니까."

"미안하다."

제갈상이 가차 없이 옥함을 쥔 손을 들어 올린다.

장이서는 울컥했다. 눈시울이 붉어지고, 헛숨만이 계속 뱉어졌다.

대체 무얼 위해 여기까지 온 것인가. 자신은 무엇을 지키려고 한 것인가.

이렇게 죽으려고 마교에서 악착같이 살아온 게 아닌데.

지나온 모든 삶이 부정당하는 기분.

넋 나간 얼굴로 체념하듯 말했다.

"...그거 누르면 당신 후회할 거야."

"너를 잊지 않으마. 103호."

망연자실한 눈으로 쳐다보는 장이서. 그리고 달칵! 끝내 옥함을 누르는 제갈상.

퍽!

섬뜩한 음색과 함께 옥함의 틈 사이로 고독의 핏물이 새어 나온다.

뚝, 뚝, 뚝.

제갈상의 손을 적시고 바닥에 떨어지는 피.

끝났다.

모든 게 끝났다.

모고가 죽었으니 자고를 가진 장이서 역시 심장이 터져 죽는 것은 당연한 일.

계획대로 군사는 뇌마에게 죽은 것으로 기억될 것이다.

한데.

어째서.

죽어야 할 장이서가 아직도 시퍼렇게 눈을 뜨고 저를 노려보고 있는 것인가.

"어, 어떻게...?!"

제갈상은 사신의 칼날이 등골을 베고 지나간 기분을 느껴야 했다.

이건 뭔가가 잘못됐다.

그리고 그때.

"고독 따위는 없어. 이미 예전에 사라졌으니까."

"말도 안 되는...!"

꽈앙! 제갈상의 가슴팍에 꽂히는 벽력 같은 일장!

"커헉!"

그대로 두 눈이 튀어나올 것처럼 커지고, 고통에 체액이 분사된다.

이를 악물고 맞서보려 하지만....

파파파팍!

장이서의 폭발적인 움직임에 또다시 가슴에 일장을 허용해야 했다.

꽈앙!

"크아아악!"

콰직! 날아가 부딪친 벽에 거대한 원금이 서리고, 털썩! 무릎이 꿇어진다.

충혈된 두 눈은 사정없이 흔들린다.

"이, 이게 무슨...?!"

아무리 무(武)보다 문(文)을 중시해 왔다곤 하나, 엄연히 신주오절로 통하는 무림의 절세 고수.

비록 벗들처럼 신의 경지에 다다른 건 아니지만, 요원한테 허망하게 쓰러질 실력은 결코 아니었다.

더구나 구규지체의 천형을 가진 103호라면 더더욱 말이 되지 않았다.

하나.

"내가 말했지. 후회할 거라고."

아쉽게도 커져 버린 건 장이서의 몸과 악명뿐만이 아니었다.

"도, 독공...?!"

제갈상이 고개를 떨구자 제 가슴팍에서부터 지독한 독기가 퍼져 나간다.

"부단히 몰아내야 할 거야. 살고 싶으면."

장이서가 말없이 걸어 나가자 제갈상이 악에 받쳐 소리쳤다.

"군사의 죄를 만천하에 고하겠다는 것이냐?!"

"이제 내가 알아서 해."

"그럼 네 동생은...!"

우뚝. 멈추어지는 걸음.

"네 동생 선유가 어찌 되든 그건 상관없단 말이냐? 모든 걸 밝히면 네 동생은 혈교에 붙은 배신자의 제자가 되는 것이다! 그래도 괜찮냐는 말이다!"

"이 미친 새끼가!"

쐐애액, 퍽!

빛살처럼 날아든 백뢰가 정확히 제갈상의 귀 끝을 스치고 벽에 박힌다.

"그럼 내가 윤이의 원수가 되는 건 괜찮고?"

안 괜찮겠지.

하지만.

"적어도 너처럼 악적이 되게 할 수는 없지 않으냐. 선유는 너와 달라야 하지 않겠느냐는 말이다."

270.

#괴물

장이서는 파르르 떨리는 눈으로 꽉 막힌 천장을 살폈다.

세상 이렇게 잔인할 수가 없다.

환멸이 날 지경.

도대체 어쩌다 이렇게 되어버린 것인가.

청해로 온 게 잘못이었을까.

아니면, 천산으로 갔던 게 잘못이었을까.

그것도 아니면....

처음부터 제갈상을 따라나서지 말았어야 했는가.

오늘.

모든 게 무너졌다.

"103호."

"난 이제 더 이상 103호가 아니야. 그러니까...."

서서히 내려오는 고개.

제갈상은 그 순간, 심장이 멎을 뻔했다.

마신(魔神)이 이러할까.

지독히 어둡고도 섬찟한 눈빛.

"그따위로 부르지 마."

그리고 그때 바깥에서 무사들이 몰려들기 시작했다.

"군사-!"

"어르신!"

팍! 장이서는 백뢰를 회수하곤 나지막이 말했다.

"임무는 여기서 끝이야. 당신은 윤이를 지켜. 그게 지금 사는 이유니까. 만일 윤이한테 무슨 일이라도 생기면 그때는...."

장이서는 말끝을 흐리곤 앞으로 걸어 나갔다.

그리고.

『진 뇌전법(眞 雷轉法) 뇌신화(雷神化)』

파직! 전신에 퍼지는 경천동지할 뇌기!

동시에 막대한 흑뢰가 파장을 일으키며 번진다.

"큭!"

"커억!"

이를 정면에서 맞닥뜨린 무사들과 제갈상은 전신이 마비되는 기분을 느끼며 순간적으로 몸의 제어력을 잃었다.

그리고 보았다.

"으, 으으으으!"

자신들을 먼지처럼 대하며 무심히 걸어 나가는 뇌마(雷魔)의 모습을.

이건 막을 수 있는 수준이 아니었다.

단순히 몸이 마비되어서가 아니라, 무너진 천장에 갇힌 것처럼 꼼짝도 할 수가 없었다.

한낱 일개 무사 따위가 범접할 수준이 아니었으니.

"어, 어르신!"

뒤늦게 달려온 무사들이 제갈상에게 놀라고, 숨을 거둔 군사에 기함을 토했다.

"비키거라...!"

끄아아아악!

제갈상이 힘겹게 홀린 듯 몸을 일으키자 바깥에서 비명이 터졌다.

그는 망연자실한 얼굴로 비틀거리며 바깥으로 향했다.

그러자 그곳엔....

"커헉!"

"크아악!"

홀로 수많은 무사들에게 둘러싸인 채, 도리어 그들을 압도하는 마교의 새로운 전설이 탄생하고 있었다.

뇌마(雷魔)라는 전설이.

제갈상은 문득 오래전 맹주가 했던 말이 뇌리를 스쳤다.

'구규지체만 아니었다면 내가 거뒀을 걸세. 무신이 되었을 테니.'

그때 깨달았다.

"103호...."

어쩌면 자신이 무림에서 가장 위험한 마귀를 탄생시킨 걸지도 모른다는 것을.

"큭!"

그리고 희미해지는 정신에 털썩 쓰러지는 제갈상.

그의 머릿속에 장이서가 한 마지막 말만이 섬찟하게 되뇌어졌다.

'만일 윤이한테 무슨 일이라도 생기면 그때는....'

무림맹이 내 원적(怨敵)이다.

*

"미쳤구먼, 미쳤어. 여기가 어디라고 지금.... 허이고, 원시천존이시여...."

"군사가 당했다. 그것도 이곳 사천지부 앞마당에서."

"어, 어찌...."

청성의 천사도인. 당가의 천외당주. 그리고 아미의 효진사태.

어느새 사천지부에 나타난 세 사람은 맹수처럼 미쳐 날뛰는 장이서를 멍하니 바라만 보고 있었다.

이는 군사와 무사들의 죽음을 가볍게 생각해서도, 그저 신중하기 위함도 아니었다.

압도(壓倒).

절로 침이 삼켜지고, 두 발이 쉬이 떼어지지 않는 경이적인 신위를 목도했기 때문이었다.

평생 무예를 익혔고, 천재가 그득한 날고 기는 대문파 안에서도 치열한 승부 끝에 현재의 자리까지 올라선 자들이었다.

한데도 식은땀이 줄줄 흐르고, 목젖은 꿀렁였다.

이걸 뭐라고 표현해야 할까.

움직임은 그저 빛.

"끄아아악!"

콰아앙!

일권에 네다섯 명을 전각까지 날려 보내 쓰러트리는 성난 황소.

"컥!"

쉬쉬쉬쉭!

사방 어디에서 공격을 하든, 최소한의 수로 제압하는 노련한 이무기.

이건 그냥....

"괴물이구먼. 허이고, 원시천존이시여. 어째 저런 괴물들은 꼭 마교에서 나온단 말이오이까."

천사도인이 고개를 저으며 한탄했다.

굳이 누군지 듣지 않아도 훤히 알겠는 그 이름.

뇌마(雷魔).

지금 그가 눈앞에 있었다.

그리고 그의 위용은 여기서 끝이 아니었다.

"저자... 독공을 익혔다. 그것도 만독불침(萬毒不侵)이다."

"뭬, 뭬야...?!"

당기륭의 폭격 같은 발언에 천사도인이 버럭 비명을 내질렀다.

그게 말이 되는 소리인가.

만독불침에 오른 독공의 고수는 무림에서도 당가의 가주뿐.

한데 저리 어린 자가 어찌....

하지만 고개만 슬쩍 떨궈도 당기륭의 말이 거짓이 아님은 금세 알 수 있었다.

이미 그의 손에서 흘러내린 짙푸른 독기가 바닥을 타고 장이서에게 닿아 있었으니.

한데도 발끝에 닿는 순간, 소리 소문 없이 연기만 내뿜고 사라져 버렸다.

"신승과 원담대사가 당한 게 거짓이 아니었나 보군."

"원시천존이시여...."

"두 분, 지금 중요한 건 그게 아니지 않습니까!"

효진사태의 일갈에 두 사람이 고개를 끄덕였다.

평가는 여기까지.

군사가 죽었다. 그것도 현장에서 잡은 범인이다. 이대로 절대 놓쳐서는 안 될 일.

더구나 장이서의 사기적인 행보를 생각해 보라.

고작 이립도 안 된 나이에 신승과 원담을 꺾고, 사천지부까지 쳐들어 와 군사를 없앴다. 그리고 만일 살아서 천산으로 돌아간다면?

역대 최악의 마두가 탄생하는 것이다.

"어떻게든 오늘 우리는 저 뇌마를 없애야 합니다. 무슨 수를 써서라도 반드시...."

효진사태의 말에 고개를 끄덕이는 두 사람.

이내 그들이 각자 신호를 보내자 뒤에서 세 무리가 일시에 무기를 빼 들었다.

사천당가 천외당을 지키는 일백의 고수 백독령(百毒靈).

청성파에서도 온통 비밀에 싸여 있다는 상청궁(上淸宮)의 백색 도사들.

붉은 염주와 검 한 자루로 아미파의 이름을 널리 떨친 복호승들.

이른바 사천삼문의 정예들이었다.

일대일도 삼대 일도 아닌, 정예들까지 모조리 투입해 초장에 끝을 내겠다는 것.

호흡을 가다듬은 효진사태가 눈을 부릅뜨고 외쳤다.

"뇌마를 섬멸하라!"

"와아아아아!"

파파파파팟!

기합성과 함께 삼문의 고수들이 장이서를 향해 쏘아져 나간다.

장이서는 범상치 않은 이들의 등장에 눈매가 좁혀졌다.

그리고 시작된 일전.

파파파파팍!

조금 전까지의 무사들과는 차원이 다른 움직임이다.

"사천삼문?!"

"이야아아아-!"

사내보다도 더 우렁찬 기합성과 함께 바위도 쪼갤 기세로 떨어져 내리는 다섯 개의 합검(合劍).

카앙! 백뢰를 들어서 막아내자, 뒷발이 주춤 밀린다.

역근경이 아니었다면 버티지 못하고 무너져 내렸을 중검(中劍)!

아미파다.

효진사태와 복호승들이 합격을 펼친 것.

"막았어...?!"

장이서에게 그녀들의 경악을 받아줄 틈은 없었다.

쉬쉬쉬쉭!

뒤에서 날카로운 풍음(風音)이 섬찟하게 들려왔기 때문.

핑그르르!

팽이처럼 회전한 뒤 바닥에 착지하자. 바닥엔 날카로운 침들이 우수수 떨어져 내렸다.

당기륭을 비롯한 당가 살수들이 내던진 독침이다.

"만독불침...."

믿기 어려운 장이서의 경지를 다시 확인한 당기륭의 눈썹이 심하게 떨려온다.

하지만 역시나 장이서가 이에 반응할 여력은 없다.

"방선도술(方仙道術) 마귀통제(魔鬼統制)!"

와아아앙!

천사도인과 상청궁의 도사들이 도술을 읊자 장이서가 선 자리에 네 개의 반투명한 막이 생기고, 귀가 먹먹할 만큼의 굉음이 울렸다.

범인에겐 별 소용없는 도술이지만, 마(魔)기가 있는 자에겐 전신을 짓눌러 기지도 못하게 만드는 최악의 술법이었다.

한데.

『음양일원(陰陽一元)』

장이서의 표정이 잠시 찌푸려지는가 싶더니, 금세 태극의 기운이 자리하며 벽을 부수고 빠져나왔다.

"허...?"

그 순간 사천삼문은 모두가 얼어붙은 것처럼 굳어졌다.

당연했다.

자신들이 누구인가.

구파일방과 오대세가.

그중에서도 사천을 지배하는 최강의 삼문.

사천삼문이다.

한데 삼문의 정예들과 세 사람의 합격이 깨져버린 것이다.

그 뒤로 보여준 모습은 이젠 더 놀라기도 지칠 정도였다.

무수한 잔상을 남기며 몰려든 열댓 명을 와르르 쓰러트리는 신위.

모두가 또다시 얼어붙어 버렸다.

"장이서 이쪽으로-!"

그리고 그 찰나의 망설임은 뼈아픈 실책을 낳았다.

전각의 지붕 위에서 그의 아군이 나타난 것.

"적아린?!"

비록 소속이 혈교이긴 하지만 말이다.

얼마나 관군과 심각한 혈투를 거쳤는지 피투성이가 된 꼴만 봐도 알겠다.

그리고 무슨 운명의 장난인지.

그 순간, 또 한 사람이 모습을 드러냈다.

"형...?"

저를 보며 넋이 나간 듯 서 있는 아이.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은 하나뿐인 핏줄.

장이윤.

목젖까지 쏟아 뱉고 싶은 말들이 가득 차오른다.

하지만 현실은 자비롭지 못했다.

"뇌마가 군사를 죽였다! 절대 놓치지 마라!"

"사부님...?"

장이서는 그 순간 바닥에 주저앉아 망연자실에 빠진 윤이의 표정을 평생 잊지 못할 거라고 생각했다.

아득한 슬픔과 배신감이 가득 느껴지는 저 표정을 말이다.

'윤아....'

아니다. 내가 그런 것이 아니다. 그자는 네가 생각하던 그런 사부가 아니다.

보기만 해도 오장육부가 쓸려 내려가는 기분.

그리고 그때 다시금 적아린의 목소리가 힘차게 울렸다.

"후후, 다들 피하는 게 좋을걸? 안 피하면 더 좋고."

휘익!

이어 포물선을 그리며 사천삼문 사이로 떨어지는 쇳덩이.

"진...천뢰?!"

콰아아아앙!

당기륭의 깨달음과 함께 막대한 폭발이 휘몰아쳤다.

한순간에 앞뜰은 아수라장이 되고, 수많은 이의 비명과 신음이 들끓었다.

잠시 후 연기가 걷히고, 전경이 드러났을 땐.

"원시천존이시여...."

장이서는 온데간데없이 사라졌다.

셀 수 없는 부상자들만이 그의 흔적으로 남아 기억될 뿐.

*

함께 장원을 벗어난 두 사람.

성도 시내의 어둑한 골목에 숨고 나서야 적아린이 입을 열었다.

"장이서. 괜찮아?"

그제야 멍해진 초점을 바로 잡고 장이서도 싸늘히 답했다.

"내가 분명히 말했을 텐데. 죗값 치르라고."

"그게 구명지은을 입어 놓고 할 말은 아니지 않아?"

"네가 아니었다면 적어도 관군들까지 상대할 일은 없었겠지."

장이서가 대로변을 향해 고갯짓했다.

"멀리 가지 못했을 것이다! 샅샅이 뒤져라!"

횃불을 든 관군들마저 무리 지어 수색이 한창이다.

목소리에 패기가 넘치는 게 아주 약이 바짝 올랐다.

적아린은 배시시 웃으며 머쓱하게 답했다.

"그러게 왜 혼자 가고 그래. 정 없게."

그걸 말이라고. 길게 한숨이 뱉어졌다. 얘랑 아옹다옹해서 뭐 하겠는가.

지금은 제갈상의 배신과 군사의 죽음. 그리고 윤이의 오해. 생각할 게 너무 많아 머리가 터져버릴 지경이었다.

어디부터 어떻게 풀어야 할지. 당장 한 치 앞도 짐작이 되지 않았다.

"근데 진짜 괜찮아?"

아까부터 자꾸 뭘 묻는 것인가. 짜증스레 쳐다보자 그녀가 담담히 말을 이었다.

"기분 말이야."

"뭐?"

"맞아. 엿들은 거."

빌어먹을! 죽여야 할 이유가 하나 더 늘었다. 장이서의 눈에서 시리도록 차가운 살기가 뿜어졌다.

"왜 그렇게 봐. 그거 화풀이다? 너한테 실수한 거 나 아니야. 무림맹이지."

"너희는 존재 자체가 제거 대상이야."

"알지. 근데 그런데도 내가 다 마음이 애잔해지네. 네 잘못 아니잖아."

또다시 빌어먹을이다. 어쩌다 혈교한테까지 위로를 받게 된 건지.

"화나겠지. 나라도 날 거야. 너 잘했어. 원칙대로 마교에서 잘 살았고, 잘 견뎠어. 고생했어."

"...시끄러워. 네가 뭘 안다고."

"알아. 나도 너처럼 버려져 봤으니까."

"뭐?"

흘깃 곁눈질로 바라보자 그녀의 얼굴에 답지 않은 공감의 빛이 설핏 서렸다.

"혼자 남겨진 듯한 그 배신감이 얼마나 힘든지 나도 잘 알아."

네가 안다고?

"이럴 때일수록 우린 스스로를 지켜야 해. 넌 절대 혼자가 아니야. 우리 곁엔 언제나 신이 함께하고 계시지. 어때. 가서 혈교 말씀 좀 들어볼래?"

"아, 꺼져!"

"하하하!"

저딴 소리를 진지하게 듣고 있던 내 자신을 반성한다.

인생 참.

우울할 틈을 안 준다.

271.

#한계

"아, 왜. 진짜라니까. 가서 한번 들어 봐. 이럴 땐 신앙심이 있어야 해. 신의 허락하에 그냥 다 죽여버리는 거야. 하하! 어때. 생각만 해도 짜릿하지 않아?"

모골이 다 송연해진다.

"닥치고 아까 말한 대로 넌 가서 그냥 죗값이나 받아. 죽고 싶지 않으면."

"왜 이래. 어차피 이제 나한테 그럴 이유 없잖아. 소속이 무림맹도 아니고, 마교도 아니고."

"혈교는 더더욱 아니야."

"고집스럽기는. 뭐, 어쨌든 좋아. 하지만 저자들하고 싸우고 싶은 건 아닐 거 아니야."

적아린이 피식 웃으며 하늘을 향해 고갯짓했다.

그러자 지붕 위로 날아다니는 수많은 무림인들이 눈에 담겼다.

사천삼문이다.

자신들을 찾아 나선 것.

땅이고, 하늘이고.

그야말로 천라지망(天羅地網)이다.

"그래도 어제까지는 동료였잖아. 그러니까 적어도 저들한테 잡혀서 죽는 것보다는 빠져나가는 게 좋지 않겠어? 아니면 네 삶이 너무 억울할 거 같은데."

너무 정확해서 뼈가 다 시큰하다.

당연히 억울했다.

그냥 살면서 겪은 가장 x같은 일이다.

"내가 빠져나가게 해줄게."

"뭐?"

"나한테 방법이 있어. 성도를 나가 서남쪽으로 가. 10리 정도를 가면 작은 강이 나와. 거기에 거북이처럼 생긴 섬 하나가 보일 거야. 거기서 붉은 기와집을 찾아. 그리고 이걸 건네줘. 그럼 널 안전한 곳으로 데려가 줄 거야."

적아린이 씨익 웃고는 품에서 핏빛처럼 붉은 패 하나를 건넸다.

한 면에는 동방(東方). 뒷면에는 일혈(一血)이라고 인각된 신패.

"잘 보관해. 귀한 거니까."

얼떨결에 이를 받아 들고 물었다.

"넌 어쩌겠다고."

"어쩌긴. 내가 누군지 잊었어? 혈교잖아."

"그게 뭐."

"후후, 혈교면 혈교답게 파멸해야지."

적아린의 눈에 핏빛 광채가 번뜩였다. 순간 이해가 되지 않았다. 말이 그렇다는 거지, 이건 스스로 미끼가 되겠다는 것 아닌가.

"무슨 속셈인 거야?"

"그냥 너한테 잘 보이고 싶다는 거? 너 지금 몸담은 곳 없잖아. 그럼 우리한테도 아직 기회가 있다는 거 아니겠어?"

"아니, 없어. 그딴 거."

"서운하네. 그래도 그 패는 넣어 둬. 다시 만날 때 꼭 돌려주고."

"다시 만나면 넌 내 손에 죽어."

"그것도 나름 괜찮고."

장이서의 표정이 일그러졌다. 반면 적아린은 방긋 웃으며 말했다.

"그럼 또 봐, 장이서."

팟! 뒤이어 그녀의 신형이 눈앞에서 바람처럼 사라졌다.

그리고 잠시 후.

콰앙! 콰과과광!

"저쪽이다-!"

굳이 보지 않아도 그녀의 활약이 느껴질 만한 소음이 빗발쳤다.

장이서는 제 손에 들린 혈패(血牌)를 내려다보며 사색이 되었다.

신념으로 따르던 무림맹은 자신을 역적으로 만든 것도 모자라, 죽이려고 하였고.

자신이 죽이겠다며 뒤쫓던 혈교는 두 번이나 목숨을 구해주었다.

급기야 그 와중에 떠오르는 생각은 마교로 돌아가고 싶다는 생각뿐이니.

"빌어먹을."

정말 빌어먹게도 꼬여버린 하루였다.

* * *

며칠 후.

서녕 패검문 안가.

"장이서가 뭐 어떻게 됐다고?!"

마오의 고함이 쩡쩡하게 울려 퍼졌다. 사천에서의 소식이 서녕까지 닿은 것.

때마침 황야를 질주하고 돌아온 묘채경이 가지고 온 정보였다.

"장이서가 사천에서 군사를 살해 후 도주 중이라는군요. 지금은 삼문이 뒤를 쫓고 있답니다."

맙소사. 모두가 기함을 토했다.

대체 누가 누굴 죽였단 말인가. 그야말로 기절초풍할 내용.

"그게 사실이야?! 당주는 그걸 어떻게 알았는데."

어떻게 알긴. 다 아니까 알지. 묘채경이 콧숨을 뱉으며 말했다.

"길만 다녀도 압니다."

"뭐어?"

그랬다. 마오를 비롯한 원담과 수뇌들은 칩거 중이라 몰랐지만, 이미 근방에선 이 소식을 모르는 자가 없었다.

관군과 사천지부의 무사들이 야밤에 시내를 종일 활보하며 그 난리를 피웠는데 어찌 모를 수가 있겠는가.

지금 뇌마는 신승과 원담대사에 이어 사천지부로 홀로 들어가 군사까지 참하고 나온 대역죄인이었다.

물론 일부 사마외도들 사이에선 뇌마를 신성시하며 떠받드는 종자들도 있긴 했다.

'뇌마께서 썩은 무림을 모조리 숙청해 주실 것이다!'

대체로 상태가 안 좋은 녀석들이었지만.

어쨌든 지금 뇌마가 위험천만하다는 건 분명한 사실.

"근데 장이서는 혈교 새끼들 잡으러 간 거잖아. 아니, 그럼 무림맹 군사가...."

마오가 경악한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이에 모두의 얼굴이 사색이 됐다.

뭔가가 있다.

지금 이 일의 이면엔 엄청난 음모가 도사리고 있는 거다.

묘채경도 뭔가가 떠오르는 게 있는지 심상치 않은 얼굴로 중얼거렸다.

"그러고 보니 소문이 이렇게 퍼졌는데도 무림맹에선 아무런 입장을 밝히지 않고 있군요. 청해에는 얼씬도 하지 않고 있고요."

"그게 왜?"

마오가 다급히 묻자 옆에서 암울한 대답이 흘러나왔다.

"아무래도.... 놈들도 뭔가를 아는 것 같습니다."

사색이 된 사내. 패검문주 만세극이다. 그의 말대로였다.

보통 이런 사건이 터지면 대서특필하여 방을 붙이고, 명분을 취하는 게 우선.

한데도 이리 조용하다는 건, 켕기는 게 있다는 뜻이다. 어떻게든 장이서를 먼저 죽이고 보겠다는 것.

"이 새끼들이!"

쾅! 결국 마오가 분을 참지 못하고 바닥에 진각을 내리찍었다.

드넓게 갈라지는 바닥만 봐도 그의 내공이 얼마나 중후한지 알 수 있는 부분.

"원래가 그런 놈들이지요. 진실을 숨기고 무고한 자에게 죄를 덮어씌우는 아주 악질적인 놈들입니다."

묘채경을 비롯한 모두의 시선이 애꿎은 원담에게로 향했다.

"무량수불...."

하지만 그로서도 군사의 죽음은 당혹스러울 수밖에 없는 일.

마오는 눈을 부릅뜨고 결단을 내렸다.

"됐고. 땡중. 넌 지금 당장 무림맹으로 가. 가서 장이서 털끝 하나라도 건드리면 전쟁이라고 전해! 그리고 우린...."

지금 해야 할 일은 단 하나.

"장이서한테 간다."

* * *

한편 적아린의 희생으로 무사히 성도를 빠져나온 장이서.

그는 사천 북부 고산지대에 다다라 있었다.

적아린의 말대로 거북이 섬을 찾아가 볼까도 생각해 봤지만, 금세 고개를 저었다.

그들이 말하는 안전한 곳이 대체 어디인지도 모르겠지만, 혈교의 도움을 더는 받고 싶지 않았기 때문.

고집으로 보일 수도 있으나, 이는 중심을 잡기 위한 발악이었다.

"하아...."

덕분에 꼴은 말이 아니었다.

암석에 걸터앉은 그의 숨소리는 거칠었고, 의복은 만신창이였다.

내기는 이제 거의 다 고갈되었으며, 정신은 피폐해졌다.

사천삼문의 추격은 집요했고, 영악했다.

몰이사냥을 하듯 길목을 차단하며 한 곳으로만 도망치도록 유도했고. 일시에 공격하는 것이 아니라 서서히 기력이 쇠하도록 쉴 틈 없이 압박을 가해오는 방식을 수일 째 고수했다.

바로 지금처럼.

피잉!

날카로운 파공음에 고개를 뒤로 젖히고, 앞으로 내민 손아귀엔 척! 독화살이 잡혔다.

콰득!

이내 화살을 반으로 부서트린 장이서가 일어서는 순간.

찌르르릉!

사방에서 방울 소리와 함께 묵중한 청동검이 날아든다.

술법이 담겨 소리로 방향을 짐작하기 어렵다는 상청궁의 청령검(靑鈴劍)이다.

하나 장이서는 음양일원을 깨우친 자.

도술이고, 사술이고 안 통하는 건 매한가지.

"크악!"

쳐다도 보지 않은 채 일권으로 쓰러트렸다.

나머지도 크게 다를 것 없었다.

"컥!"

찰나에 열댓 명이 쓰러졌다.

하지만 이번엔 장이서의 몸에도 상처가 생겼다.

더불어 턱 끝까지 차오른 숨은 한계에 다다랐음을 방증했다.

오는 내내 수없이 생각했다.

이제 자신은 어떻게 해야 하는지에 대해.

솔직히 답을 내리진 못했다.

하지만 적어도 무림맹에 붙잡혀 최후를 맞이하고 싶지는 않았다.

지금은 오로지 그것만 생각하기로 했다.

그러니까.

'반드시 살아 돌아간다.'

장이서는 이빨을 꽉 깨물곤 다시금 산을 올랐다.

*

그리고 오래 지나지 않을 무렵.

그 자리에 한 무리가 도착했다.

그에게 천라지망을 펼친 장본인들.

사천삼문을 대표하는 청성의 천사도인과 아미의 효진사태. 마지막으로 당가의 당기륭이다.

"허이고, 원시천존이시여."

"아미타불...."

천사도인과 효진사태는 박살이 난 추격대를 살피며 눈살을 찌푸렸다.

다행히 죽은 자는 없으나, 하나같이 인사불성이다.

벌써 열두 번째.

자연스레 시선이 당기륭에게 향했다.

평소엔 늘 과묵하고, 돌 같은 면모 탓에 나서는 일이 극히 적었으나, 누군가를 추적하고 사냥하는 데엔 그만한 인물이 없다.

하여 이번 천라지망도 그의 주도하에 이루어졌다.

"어떤가, 뭐가 좀 보이는가?"

천사도인의 물음에 조사를 마친 당기륭은 나지막이 입을 열었다.

"뇌마는 괴물이다."

가슴을 후비는 단평.

천사도인과 효진사태의 입에서 패배감 짙은 탄식이 뱉어졌다.

그간 알아낸 사실들만 나열해도 부정할 수 없었기 때문.

"도검이 통하지 않는 금강불괴이자, 만독불침을 지녔다. 벼락같은 움직임은 뇌마라는 별호가 아깝지 않으며, 그의 암기는 한철마저 찢는다. 익힌 무공은 세 가지. 하나는 여태 본 마두 중 가장 위협적인 마공이며, 또 하나는 정심함이 느껴지는 정공이다. 그리고 다루는 독으로 짐작건대... 독마의 불사독마공을 이어받은 것으로 보인다."

"허이고...."

그저 한숨밖에 안 나오는 일.

모두가 함께 추격하며 알아낸 바였지만, 이렇게 당기륭의 입으로 공식적인 판정이 이루어지자 가슴이 갑갑했다.

이게 인간인가.

금강불괴와 만독불침을 가진 육신에 뇌기를 다루며 한철도 찢는 비수를 쓴다.

여기다 독공에, 마공에, 정공에. 아주 닥치는 대로 심법을 다루니 이젠 뭐가 나올지 짐작도 안 된다.

솔직히 외에도 더 많았다.

은신에 능숙하고, 지리에 밝았으며, 일부러 틈을 보여 기습을 유인하기도 하고, 지형을 이용해 박살 내기도 했다.

무예만 뛰어난 게 아니라 두뇌도 뛰어나다는 것.

그러니까 그의 말이 맞았다.

괴물(怪物).

장이서는 괴물이었다.

이젠 숨겨진 천마의 제자라고 해도 놀라지 않을 것이다.

"그래서. 결론은 무엇인가. 이제 마지막 고개만 넘으면 청해일세."

그리고 청해로 넘어가면 사태가 걷잡을 수 없이 커진다.

이에 당기륭은 승기에 찬 목소리로 답했다.

"사천에서 당문의 추적을 피할 자는 없다."

"그 말은 곧...!"

"정상에서 괴물을 잡는다."

드디어!

"그의 육신이 이곳에서 처음으로 칼에 베였다."

당기륭이 찢어진 천 조각을 주워 들었다. 안쪽 면에 아직 피가 흥건하다.

"괴물도 한계에 다다랐다는 것이겠지."

실로 정확한 분석.

장이서의 육신을 이루는 소단전들마저 마침내 공력이 동나기 시작했다.

바꿔 말해 호신기(護身氣)가 사라져 금강불괴가 깨졌음을 의미했다.

당기륭은 의미심장한 눈초리로 산 정상 방향을 가리켰다.

"어차피 갈 곳은 이곳 정상뿐. 그러니 우리는 계곡 길을 가로질러 먼저 가서 뇌마를 기다린다."

그야말로 완벽한 계획.

그렇게 세 사람과 삼문의 정예들은 서둘러 길을 나섰다.

추격전이 끝을 고해가고 있었다.

272.

#최선의 방안

제갈상의 눈이 찬찬히 떠졌다.

"으음...."

지끈거리는 두통에 신음이 뱉어진다.

장이서가 삼문의 무사들을 상대하는 모습을 마지막으로 보고 기억이 끊겼다.

몸 안에 불사독이 퍼져 혼절했던 것. 한데 밝은 천장을 보니 아직 죽진 않은 모양이다.

"크음."

몸을 일으키려 하자 온 신경이 고통을 호소했다.

하나 이러고 있을 시간은 없었다. 어떻게든 이번 사태를 정리해야 한다.

아픔도 무시한 채 몸을 일으키려는 순간.

"누워 있게."

중후한 목소리가 귓가에 박혔다.

제갈상의 고개가 천천히 옆으로 돌아가자 협탁에 앉은 백색 도포의 사내가 눈에 담겼다.

백발 노부인 제갈상과 달리 흑발의 중년인. 한데도 하대가 낯설지 않다.

당연했다.

그의 절친한 벗이자 칼 한 자루로 중원을 평정한 정도의 지존.

"현청...."

그 이름도 찬란한 무림맹주 현청이었으니.

그가 직접 이곳 사천까지 찾아온 것이다.

하긴, 군사가 죽었다는데 가만히 있는 것도 이상한 일.

"운이 좋았네. 자네 명운이 조금만 더 짧았어도 결코 살아 있지 못했을 걸세."

운이 좋았다는 듯 말은 했지만, 제갈상을 살리기 위해 가장 노력한 건 맹주였다.

직접 그의 독기까지 몰아내 주었으니.

그만큼 위독한 상황이었다는 것.

제 몸 상태를 기억하던 제갈상은 단숨에 상황을 깨닫곤 얕은 숨을 뱉었다.

"미안하네."

"그러게, 책만 들여다볼 것이 아니라 평소에 수련도 좀 하지 그랬나. 늘그막에 이 무슨 고생인가."

"상관이란 작자가 백날 일을 시켜대는데 시간이 나야 말이지."

"이제 보니 휴가를 받고 싶어 벌인 게 아닌가 심히 의심되는군."

피식 웃는 두 사람. 오랜 지기지우의 정이 느껴진다.

하지만 그도 잠시.

현청은 금세 표정을 굳히곤 미리 따라놓은 독주를 한입에 털었다.

과거엔 북개와 함께 술을 달고 살았지만, 맹주가 되고 나서는 완전히 끊었다.

하지만 오늘은 참을 수가 없었던 모양.

자신의 최측근인 군사 구자기가 죽었으니 말이다.

"어찌 된 일인가. 삼문이 천라지망을 펼쳤네. 내게 나흘만 시간을 달라더군."

"으음...."

힘겹게 자리에서 상체를 일으킨 제갈상이 찌푸린 인상을 갈음하곤 답했다.

"군사가 죽었네."

"알고 있네. 서검이 온다는 것을 간신히 말리고 내가 온 걸세."

제갈상이 고개를 끄덕였다.

애제자가 죽었는데 가만있을 양반이 누가 있겠는가.

만일 서검이 왔다면 천산까지 칼을 물고 쳐들어갔을 거다.

그를 말린 건 잘한 일.

"정말 마교의 아이가 죽였는가?"

현청이 술잔을 내려놓곤 서늘한 눈매로 묻는다.

서검 대신 중리성이라.

뭐 딱히 더 좋은 상황은 아니다.

맞다고 답하면 당장 저 협탁에 걸쳐 둔 싸구려 철검이 천하제일검으로 둔갑하게 될 테니.

나뭇가지라도 그가 작정하고 휘두르는 순간엔 그리되게 되어 있다.

그것이 정도 지존의 품격.

제갈상은 잠시 천장을 바라보다 나지막이 답했다.

"마교의 아이가 죽인 게 아닐세."

"그럼 누구인가."

"군사를 죽인 건 나일세."

"자네...!"

청천벽력과도 같은 소리. 제갈상은 단번에 자신의 죄를 이실직고했다.

물론 이유까지도 함께.

"군사가 혈교에 몸을 담고 있었더군. 이미 물증까지 모두 확보하였네."

또르르. 현청이 다시 술잔을 채운다.

그의 두 눈을 보니 얼마나 혼란스러운지 잘 알겠다.

한 잔. 그리고 두 잔. 마지막 세 번째 잔까지 넘기고서야 다시 입을 열었다.

"한데 어째서 삼문은 마교의 아이를 쫓고 있는 것인가."

"그들은 아무것도 모르니까."

"그럼 이제라도 말려야지!"

"그럴 수 없네."

점입가경. 이 인간이 대체 지금 무슨 말을 늘어놓고 있는 것인가.

너무 놀라 바라보자 제갈상은 태연히 이어갔다.

"그 아이에겐 미안한 일이지만, 군사의 치부를 밝히기엔 사태가 너무 크네."

"그렇다고 아무 죄도 없는 자에게 덮어씌우자는 것인가?! 그딴 소리 집어치우시게. 무림맹은 그렇게 썩지 않았네."

현청이 일갈하며 기세를 끌어 올렸다.

고오오오오!

그러자 온갖 집기들이 아주 느릿하게 공중으로 떠오른다. 첨예한 기운을 뿜어내며.

실로 압도적인 신위.

하지만 그런 건 중요하지 않다.

중요한 것은....

"왕야께서 돌아가시지 않았는가."

"...!"

왕야의 죽음. 바로 이것이었다. 제갈상이 결단을 내리게 된 결정적인 이유.

"군사의 죄가 드러나면 황실에선 자네에게도 책임을 물으려 할 걸세. 군사의 말에 속아 왕야를 사지로 내몬 것이 바로 자네였으니."

"어찌...."

투두두둑!

떠올랐던 집기가 다시 제자리로 덜컥 떨어진다.

현청은 떨리는 손을 감추려 빠르게 술을 입에 털었다.

하나 마실수록 가슴 속에 화(火)만 커진다.

"어차피 황실에선 여전히 마교를 역적 무리로 보고 있지 않은가. 이게 최선일세."

"해서... 아무 죄도 없는 마교의 아이에게 덮어씌운 것인가?! 그게 정도의 기둥인 자네가 할 일은 아니지 않은가!"

노한 음색이 쩡쩡하게 울렸다.

아무리 정도의 수장으로서 수많은 권모술수를 접했다지만, 그래도 이 정도는 아니었다.

하나 제갈상은 뻔뻔하리만치 태연했다.

아니, 더 했다.

"마교의 아이가 아닐세."

"뭐?"

"암각의 요원이네."

점입가경. 맹주의 눈이 절망으로 물든다.

"기억 안 나는가. 구규지체를 가졌던 아이."

"설마...."

"맞네. 103호. 14년 전, 마교로 보냈던 우리 암각의 요원일세."

"제갈상-!"

현청이 고함을 내지르며 벌떡 일어섰다. 이건 아니다. 어찌 이런 천인공노할 짓을...!

"도대체 지금 무슨 짓을 하고 있는 것인가! 미쳤네. 어찌 모두를 위해 희생해 온 아이에게...."

"그럼 어찌하는가! 무림이 무너지는 걸 두고 보란 말인가? 그게 혈교의 함정임을 어찌하여 모르는가!"

"지나친 억측일세. 나 하나 사라진다고 무너질 만큼 정도는 나약하지 않아."

"그래. 그럴 수도 있겠지. 혈교가 없다면."

"...!"

"첩자가 설마 군사 하나일 것 같은가?"

거듭되는 충격. 현청이 다시 털썩 자리에 주저앉았다.

사실 구자기가 죽기 전 제갈상에게 남긴 말이 있었다.

'어르...신.... 저 혼자라고 생각하십니까...? 제가 죽는다고 막을 수 있는 일이 아닙니다. 전쟁은... 벌어질 겁니다.'

'그리 놔두지 않을 걸세.'

'그들은 강하고... 무섭고. 또 어디에나 있습니다. 주변을... 잘 살피십시오.'

그리고 군사 구자기는 웃으며 눈을 감았다. 그 웃음의 뜻이 무엇인지는 아직도 알지 못했다.

비웃음인지, 아니면 미안함인지. 그도 아니면 후련함인지.

하지만 확실한 건 이미 무림맹의 가장 깊은 곳까지 뚫렸다는 것이다.

이젠 아무도 믿을 수 없다는 얘기.

"모든 걸 밝히면 황실은 그걸 빌미로 자네뿐만 아니라 무림맹 전체를 무너뜨리려 들 걸세."

제갈상은 확신했다. 번왕을 죽음에 이르게 한 사건이었다.

한데도 황실은 잠잠했다. 마치 거대한 벽에 막힌 것처럼.

이는 둘 중 하나였다.

물증이 확보될 때까지 이빨을 감추고 있는 거든가, 아니면 황실에도 혈교가 깊이 숨어 있는 거든가.

경험상 이 경우는 후자일 확률이 높았다.

본래 작은 일에도 호들갑 떠는 것이 황실이었으니.

"적어도 혈교의 손에 무림이 무너지는 것은 막아야 하지 않겠는가."

"...."

현청은 아무런 말도 하지 못한 채 술만 들이켰다.

먹으나, 안 먹으나 가슴이 뜨거운 건 매한가지.

그만큼 갑갑했다.

대체 어찌해야 하는가. 103호라면 현청의 기억에도 선명한 아이였다.

누구보다 총명했고, 또 누구보다 자질이 뛰어났던 아이. 하여 후기지수들을 볼 때마다 늘 빼놓지 않고 떠오르는 아이였다.

'그 아이가 이곳에 있었다면 어땠을까.'

이런 미안한 생각을 종종 하면서 말이다.

한데 그 아이에게 모든 걸 덮어씌우겠다니.

"103호는 교주의 총애를 받고 있었네. 부교주 자리까지 받았었다지. 한데 그런 그가 중원에서 뇌마라는 이름으로 신승과 원담. 그리고 사천지부를 꺾고 돌아간다면. 그럼 어찌 되겠는가."

"...!"

"우리에겐 사상 최악의 적이 될 걸세."

제갈상이 눈매를 굳히곤 말을 이어갔다.

"그러니 자네는 그냥 모른 척해주게. 모든 책임은 내가 안고 갈 것이니. 화평자는 혈교의 첩자가 아닌 군사로서 죽음을 맞이한 걸세. 그렇게 마무리하세."

현청은 다시 술잔을 채워 들었다. 흔들리는 잔처럼 마음도 흔들린다.

정녕 그 방법뿐인 것인가.

다른 방도는 없는 것인가.

수많은 의문이 뇌리를 스치고, 이내 굳게 마음을 먹고 술잔을 입에 가져가려는 찰나였다.

"모른 척한다고 될 일이 아니외다-!"

입구에서 정갈한 일갈이 터졌다.

이에 두 사람이 고개를 돌리자 붉은 가사의 노승.

또 하나의 신주오절.

"맹주, 당장 천라지망을 거두지 않으면 소림을 먼저 밟고 가야 할 것이외다!"

"자네...!"

남신승 영오.

그가 살아서 나타났다.

소림의 조사를 위해.

*

"살아 있었던 겐가?"

현청은 놀란 표정도 지우지 못한 채 신승을 맞이했다. 분명 죽은 줄 알았거늘, 이리 멀쩡히 살아 돌아오다니.

반가움에 얼싸안고 싶지만, 아쉽게도 그럴 상황이 아니다.

"왔는가."

제갈상은 덤덤히 그를 맞이했다.

그 모습에 신승은 크게 노했다. 자신이 살아 있음을 안다는 건 역시나 장이서와 이미 만났다는 얘기.

'전부 다 알면서도.... 정녕 조사께 모든 죄를 덮어씌우겠다는 것이오?!'

참을 수 없는 배신감과 실망감이 두 눈에 서늘한 막을 덧씌운다.

"어찌... 신주오절이라는 자가 우리의 과오를 죄도 없는 이에게 떠넘기려 하는 것이오. 정녕 내가 아는 동현(東賢)이 맞는 것이오?"

제갈상은 흘깃 신승을 보고는 대꾸했다.

"103호와 이야기를 꽤 나눴나 보군. 다 알고 있는 듯하니 편히 말하겠네. 모두를 위한 어쩔 수 없는 선택일세. 이해해 주시게."

"모두?"

"그래, 모두. 천하의 안녕을 위한 최선의 방안 말일세."

"최선이라는 말은 그럴 때 쓰는 것이 아니외다!"

일어나지도 않은 일에 지레 겁먹고 원치도 않는 누군가를 희생시키는 것이 최선인가? 천만에. 그건 오만과 독선이다.

신승은 일평생 화내 본 적이 손에 꼽히는 자. 하지만 오늘이 그중 하나가 될 듯하다.

제갈상의 입가에 비소가 서렸다.

"그럼 곤마(困馬)가 살아나올 방도라도 있는가? 있다면 부디 알려주게. 경청할 터이니."

곤마(困馬). 제갈상은 작금의 무림맹을 살기 어려운 상황에 빠진 곤마라고 결론지었다.

천하제일뇌라는 그의 머리로 생각하기에는 군사를 첩자로 인정하고 간다면, 치고 들어올 혈교의 다음 수를 막을 방도가 없기에.

하여 선택한 것은 말을 바꾸는 거였다.

군사는 살리고, 103호는 버리는 것.

그것이 바로 최선이었다.

한데.

"오만하오. 너무도 오만하오. 어찌 먼 훗날의 일은 그리도 염려하는 자가 당장 제 옆의 사람은 볼 줄을 모르는가!"

여전히 신승의 일갈이 터져 나왔다.

"무슨 뜻인가."

"그대에게 방도가 없다고, 다른 이 또한 그러리라 어찌 그리 자신하시오?!"

"다른 이는 방도가 있다는 말인가? 그게 누구인가."

누구겠는가.

"장 대협."

"...!"

신승이 격노하며 우렁찬 일갈을 내질렀다.

"그대가 버린 장 대협이라면 분명 방법을 찾아냈을 것이외다!"

273.

#끝을 보겠다

제갈상의 표정이 일그러졌다.

103호라면 저도 못 찾은 방법을 찾아냈을 것이라고?

"지금 날 폄하하려는 것인가?"

"폄하가 아니라 애초에 혈교를 쫓은 것도, 혈교를 알아낸 것도. 모두 장 대협께서 하신 일이거늘. 어찌 불쑥 끼어든 그대가 멋대로 심판한단 말인가!"

"...!"

날카로운 일침이 가슴에 박힌다.

제갈상은 당황하며 흠칫 물러섰다.

일순 장이서가 했던 말이 뇌리를 스쳤다.

'그냥 뒷감당할 자신이 없는 거잖아. 그래 놓고선 알량한 자존심에 빠질 생각도 없이 버티고 서 있는 거잖아.'

아니다.

'천하제일뇌? 웃기지 마. 당신, 그냥 무능한 위선자야.'

이건 모두를 위한 불가피한 선택인 것이다.

'못 하겠으면 빠져. 내가 할 테니까.'

나는....

제갈상이 두 눈을 질끈 감곤 파르르 떨었다. 이내 그의 입이 찬찬히 열리려는 순간.

"사천삼문에서 온 전갈입니다!"

소식이 전달되었다.

"설보산(雪寶山) 정상에서 마침내 뇌마를 포위하였다고 합니다!"

청천벽력과도 같은 소식이.

* * *

눈이 수북이 쌓인 편평(扁平)한 정상.

장이서는 반사되는 햇빛에 눈살을 찌푸리며 사박사박 절벽으로 걸어 나갔다.

끝자락에 다다르자 구름 사이로 드넓은 황야의 풍경이 눈에 담긴다.

청해다.

이제 이곳을 돌아 내리막길을 따라 내려가면 지긋지긋한 사천도 끝이다.

"후...."

한데 많이 지친 탓일까. 아니면 지난 고행에 가슴이 벅차오른 탓일까.

웬일인지, 장이서는 정지된 것처럼 미동도 없이 서 있었다.

당장 한시가 급하거늘. 도무지 이해가 안 되는 일.

하지만 오래되지 않아 그 이유를 알 수 있었다.

사박, 사박, 사박.

오십 보 뒤에서 순서 없이 들려오는 무수한 발걸음 소리.

새하얗던 정상에 다양한 색이 입혀진다.

"허이고, 드디어 잡았구먼."

청성파의 천사도인과 상청궁의 도인들.

"여기까지요, 뇌마."

아미파의 효진사태와 복마승들.

"끝이다."

마지막으로 당문의 당기륭과 먼발치에서 일시에 활을 겨누는 백독령.

그들이었다.

사천삼문!

그들이 학익진을 펼치듯 후방을 완전히 포위한 채 나타났다.

먼저 와서 기다리고 있던 것.

장이서도 이에 반응하듯, 천천히 몸을 돌렸다.

한데 놀라는 기색이 없다. 오히려 너무 태연해 세 사람이 당황했다.

하나 의미 없는 일.

"다 끝났네. 얌전히 우리와 가세."

천사도인이 표정을 갈음하곤 힘주어 말했다. 이에 장이서가 물었다.

"어디로."

"...!"

예의상 던진 말이 질문으로 돌아오자 표정이 굳어지는 천사도인.

어디긴 어디겠는가. 황천길이지. 한데 그걸 입 밖으로 꺼내자니 도사의 면이 안 산다.

"그것이...."

"알아. 내가 여기서 죽어줘야 마무리도 편하겠지. 청해로 넘어가면 죽어도 곤란할 테니."

"으음...."

세 사람이 침음을 뱉으며 놀란 속내를 감춘다.

'무섭도록 차분하구나....'

'저 나이에 나올 반응이 아니다.'

'역시 쉬운 상대가 아니구먼.'

그간 지켜본 행적이 너무 위압적이라 그런지 압박을 가하면서도 역으로 주눅이 든다.

겉만 보면 한참 어린 후기지수이거늘.

하긴, 그게 중하겠는가.

상대는 뇌마.

이미 신승과 사대금강. 그리고 사천지부로 홀로 들어와 군사까지 없앤 희대의 대마두다.

얕잡아 보면 그게 오히려 자만이다.

"이런 얘기 나눌 상황 아닌 거 아네만, 하나 물음세."

천사도인이 단호한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

"대체 왜 죽였는가."

왜 죽였냐라....

"질문이 잘못됐어. 그건 내게 물을 게 아니야."

"군사를 죽이고 도주한 건 자네일세."

"당신들 눈엔 그렇게 보이겠지."

그게 참 엿 같은 거다.

제 발로 들어가 완벽한 증거를 만들어 주고 나온 셈이니.

"그럼 아닌가?"

당연히 아니다.

하지만 장이서는 침묵했다. 반면 두 눈은 분노로 가득했다.

반면 그 모습이 삼문에게는 더 없이 위협적으로 느껴졌다.

'엄청난 살기. 역시 뇌마인가....'

장이서도 알고 있었다. 뭔 말을 하든 이들이 믿어줄 리 없다는 것을.

이들에겐 그저 자신이 정도의 주요 인물들을 살해한 살귀에 불과하다는 것을 말이다.

"이미 신승과 원담대사를 해한 자다. 무슨 대답을 듣든 결과는 달라지지 않는다."

침묵하던 당기륭이 잘라내듯 일언했다.

더 이상의 대화는 불필요하다는 얘기.

천사도인도 이에 동조하듯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우릴 너무 원망하지 말게. 다 자네가 자초한 일이니."

천사도인이 손을 들어 올리자, 사박. 정예 무사들이 한 걸음을 내디뎌 더 강하게 압박해 온다.

머릿수도 문제지만, 상대는 삼문에서도 날고 기는 세 사람.

제대로 주먹 쥘 힘도 없는 장이서가 이길 확률? 전무(全無)다.

하지만 장이서는 여전히 태연했다.

그게 당기륭의 내면을 할퀴었다.

'살기를 포기한 건가. 대체 뭘 믿고 저러는 것이지.'

천라지망은 완벽했다.

상대를 쉴 새 없이 압박했고, 일부러 달아날 구멍을 열어두었다.

사냥개가 토끼를 정상으로 몰아가듯.

도망칠 곳이 한정되도록 유도한 것.

그 결과가 지금이었다.

조금씩 거리는 좁혀졌고, 마침내 청해를 넘어가기 직전에 따라잡았다.

더구나 비장의 수도 준비한 상태.

그러니까.

"자네 혼자서는 아무것도 할 수 없네."

당기륭은 마음을 굳히곤 등허리에서 암기를 꺼냈다. 이제 잡기만 하면 끝.

그런데 그때, 마치 바람이 스쳐 지나듯이. 노곤한 목소리가 귓가에 스몄다.

"맞아. 근데 그거 알아?"

"무슨...."

"당신의 의도를 몰라서 이곳까지 도망쳐 준 게 아니야. 그냥 따라준 거지."

그게 무슨 뜻인가. 그럼 뻔히 여기로 몰아가는 걸 알면서도 왔다는 것인가? 대체 왜.

"이렇게 요란하게 움직이는데 그 인간이 날 찾지 못했을 리 없거든."

장이서가 힘없이 웃는다.

그러자 그 순간.

"오호호호!"

천박하면서도 매혹적인 목소리가 하늘 위에 울려 퍼졌다.

"설마!"

당기륭의 눈이 크게 휘청인다.

그리고.

쉬이이익!

이내 날카로운 소음과 함께 파파파팍! 삼문의 무사들 앞에 비수가 날아와 꽂혔다.

정확히는 날붙이가 아니라....

"깃털?!"

천산의 새하얀 매.

만리신조 묘채경이다!

"꼴이 말이 아니구나."

장이서 앞에 척! 하고 떨어진 그녀.

밉기만 하던 모습이 이렇게 반가울 수가 있을까.

"비룡당주?!"

그녀를 알아본 당기륭은 경악을 토했다.

그리고 깨달았다.

장이서는 저에게 쫓긴 게 아니라 일부러 자신의 흔적을 마교에 알렸다는 것을.

"주군을 모셔라-!"

"다 나와, 이 새끼들아!"

와아아아아!

함성을 지르며 좌우 측면에서 올라오는 자들.

패검문주 만세극과 만광. 그리고 청해지부의 간부들이다.

그리고 마지막은....

"내 보좌 건드리는 새끼는 다 뒈진다-!"

파아아앗!

절벽을 타고 올라와 장이서의 머리 위에서 떨어져 내리는 장신의 미공자.

『진 염화참(炎火斬)』

쐐애애액!

"피, 피해라!"

콰아아아앙!

새하얀 눈밭을 불구덩이로 만들어 버리는 칠공자. 아니, 염제(炎帝) 마오였다.

이들 일곱 명이 장이서를 구하기 위해 나타난 것.

"야, 장이서. 괜찮아?"

"칠공자님...."

"다친 데는. 하여튼 너, 진짜. 자꾸 걱정시킬래?"

"주군, 괜찮으십니까."

"하여튼 여기저기 안 물고 다니면 미친개가 아니지."

돌아가며 한마디씩 하는 마교인들.

아무래도 너무 고단했던 모양이다.

이 뭣도 아닌 말들에 코끝이 찡한 걸 보면.

"왜 이렇게 늦습니까. 기다리다 죽을 뻔했네."

"야, 이 씨! 그러게, 골라도 뭐 이딴 산을 골라! 올라오느라 힘들어 죽는 줄 알았네."

마오의 말에 피식 웃었다.

설보산은 사천에서도 손꼽히는 고산 중 하나. 오기 쉬운 길은 결코 아니었을 거다.

한데도 온 것이다. 절 구하기 위해. 이렇게 비교가 되면 어떡하라고.

가슴이 계속 먹먹해진다.

물론 감성에 오래 빠질 만큼 그리 여유로운 상황은 아니다.

"그 와중에도 판을 짜고 있던 것인가. 뇌마.... 정말 적으로 상대하고 싶지 않은 자로군."

당기륭은 대놓고 들으란 듯이 말했다.

이건 감탄을 넘어선 극찬이었다.

하지만 그만큼 두 눈에선 지독한 살기가 서렸다. 반드시 죽여야 할 이유가 하나 더 생겨버린 것.

하지만 이젠 이쪽도 만만치만은 않다.

묘채경이 비웃으며 자신만만하게 툭 말을 던졌다.

"그리 노려보면 어쩔 것이냐. 여기 계신 분이 누구인지 아느냐? 바로 본교의 칠공자님이시다!"

"끄응, 골 아프게 돌아가는구먼."

칠공자는 생각도 못 했다. 천사도인이 앓는 소리를 뱉자, 희비가 갈린다. 이에 효진사태가 재촉했다.

"뭘 망설이는 겁니까. 뇌마를 이대로 놓치기라도 하겠다는 겁니까?"

"누가 그렇다나.... 거, 만만치가 않으니 그렇지."

웅성거림이 커지고, 혼란이 가중되는 사이.

"예정대로 진행한다."

이번 천라지망의 결정권자인 당기륭이 결단을 내렸다. 그의 결단에 묘채경의 표정이 과하게 구겨졌다.

"네놈이 지금 우릴 다 죽이겠다는 것이냐? 이곳에 계신 분이 본교의 칠공자님이래도? 감당할 수 있겠느냐!"

감당? 당기륭이 서늘한 눈매로 읊조렸다.

"이곳 설보산은 엄연히 사마외도의 침범을 금하는 사천의 영역. 땅이 무너진 자리에 사마외도가 깔려 있다고 문제 될 것 없다."

그게 뭔 소리인가.

의문은 잠시.

당기륭은 어떻게든 오늘 끝을 보겠다는 듯 거침없이 호령했다.

"벽력시(霹靂矢)를 준비해라."

그러자 후열에 있던 당가의 무사들이 시위에 둥그런 통이 달린 화살로 바꿔 걸었다.

"저건...!"

이를 알아본 묘채경은 기함했다.

"왜, 뭔데?"

"화전(火箭)입니다. 화약통을 단 화살이지요. 저 당가 놈이 아예 이곳을 무너뜨릴 생각인가 봅니다!"

"야, 이 씨! 장난해!"

마오가 격분하듯 소리쳤다.

그럴 만도 했다. 이곳 설보산 정상이 해발 백오십 리(5,900m)다.

더구나 이름처럼 눈으로 가득해 이대로 무너지면 눈사태와 함께 시체도 못 찾는다.

바꿔 말해 정상을 무너뜨려 아예 사고사로 만들어 주겠다는 얘기.

"천외당주의 술수가 사악하기 그지없다더니. 정도를 모르는 녀석이로구나!"

"그런 말을 마교의 당주에게 들을 줄은 몰랐군."

당기륭은 자비 없이 척! 번쩍 손을 들어 올렸다.

빠아아악!

그러자 당가의 무사들이 활시위를 거세게 당겼다.

이대로 손만 떨구면 일백 개의 진천뢰가 떨어져 내릴 거다.

이 정도까지 준비해 왔을 줄이야. 이건 장이서도 예상치 못한 일이었다.

그야말로 절체절명의 상황.

차라리 이제라도 말해야 한다. 자신이 남겠다고. 이들은 모두 돌려보내라고.

이에 앞으로 나서려는 순간이었다.

"야, 장이서."

제 앞에서 불러 세우는 마오.

"거기 있어라. 어떻게든 막아줄 테니까."

"칠공자님...?"

"저도 마찬가지입니다. 어차피 주군께서 주신 목숨. 언제 죽어도 아쉬울 것 없는 일이지요. 전부 주군을 지켜라."

"존명!"

"존명!"

만세극을 비롯한 청해의 간부들.

"오호호! 미친개 따라왔다가 별 이상한 곳에서 죽게 생겼구나."

호탕하게 웃는 비룡당주 묘채경.

마교의 사람들이 모두 죽음을 각오한 채 장이서를 감싸듯이 앞에 선다.

도대체 왜.

왜 마교 주제에 쓸데없이 의리가 깊은 거냐!

274.

#전환

장이서는 울컥했다.

"시작하지."

그리고 당기륭의 입에선 잔혹한 호령이 떨어졌다.

"미안하네. 방선도술(方仙道術) 마귀통제(魔鬼統制)!"

와아아앙!

그러자 천사도인과 상청궁의 도사들이 일시에 도술을 펼쳤다.

사방에 거대한 반투명한 막이 생기고, 요란한 굉음이 빗발친다.

"크윽!"

"아아악!"

이에 장이서와 마오. 그리고 만세극을 제한 나머지가 고통을 호소했다.

청성파 최고 도사의 술법.

도력(道力)의 소모가 크긴 하나 초절정 고수가 아니라면 찰나 동안 잡아두는 덴 문제 없다.

어차피 일을 벌인 것 확실하게 끝내겠다는 얘기.

"멈춰! 당신들이 노리는 건 내가 아니었던가?"

장이서가 처음으로 절망적인 목소리로 외쳤다. 한데 바로 그때. 옆에서 확 깨는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하, 나 진짜 소교주 한번 해보고 싶었는데."

그게 이 와중에 할 말이냐?

"쏴라."

그 사이 당기륭의 마지막 명이 뱉어졌다.

단두대의 칼날처럼 훅 떨어져 내리는 손길.

"안 돼...."

피이이잉!

하늘을 시커멓게 수놓으며 백 발의 화전이 날아든다.

종말을 마주하듯 망연자실한 눈으로 모두가 이를 살폈다.

도망칠 수도, 도망갈 곳도 없는.

그야말로 누군가는 죽음을 맞이할 수밖에 없는 최후의 순간.

"근데 장이서."

마오가 다시금 그를 불렀다.

"그래도, 우리 재밌었지?"

장이서가 날아드는 화살에서 눈을 떼고 고개를 돌렸다. 그리고 예상 밖의 모습에 넋을 잃었다.

저를 보며 아쉬울 거 하나 없다는 듯 환하게 웃는 마오의 얼굴.

지금 저 때문에 이리 허망하게 죽게 된 주제에 왜 그렇게 웃는 거냐.

"고마웠다."

이런 미친 새끼.

그렇게 말하면 저는 뭐가 되는가.

챙그랑!

장이서는 처음으로 자신을 감싸고 있던 유리막이 깨지는 기분을 느꼈다. 세상에 발가벗겨진 채 홀로 선 기분.

그때 깨달았다.

더는 첩자 103호가 아니라, 인간 장이서로서의 삶을 살아가야 한다는 것을.

이들을 이제야 비로소 꺼풀을 벗고 바라보게 되었다는 것을 말이다.

자신을 감싸주고, 진정으로 위해주는 자들.

그게 비록 마교일지언정 말이다.

그걸 인정하고 나니까 너무 미안해져서.

차오르는 서글픔을 애써 누르고 또 눌러야 했다.

그리고 결심했다.

"너... 안 죽어."

이 녀석을 살리기로.

피이이잉!

다시 하늘을 바라보자 이윽고 떨어져 내리기 시작하는 화살.

"뭐라고?"

마오 너는 살아서 나가게 될 거다.

그러니까 소교주, 해. 꼭 살아남아서 해라.

화르륵!

그 순간 어둠 속에 불꽃이 튀듯 장이서의 몸속에 진기가 꿈틀거리기 시작했다.

역근경에 단전까지 텅 비어버린 몸이었다. 하지만 아직 쓸 수 있는 내기가 하나 남아 있었다.

선천진기(先天眞氣).

목숨을 담보로 마지막 불꽃을 열렬히 태우기 시작한 것이다.

용이 승천하듯 솟아오른 불꽃은 단숨에 심장을 거침없이 두드렸다.

[퀴아아아아!]

그러자 내면에서 호응하듯 그 녀석이 비명을 질렀다.

혈마귀(血魔鬼).

내기를 탐하는 그에게 선천진기는 절대 거부할 수 없는 천상의 과실이었다.

불꽃은 순식간에 화마가 되고, 죽어 있던 육신에선 다시금 압도적인 힘이 뿜어져 나오기 시작했다.

살린다. 반드시 살려낼 것이다.

설령 목숨을 잃을지언정.

저들 손에 죽게 하지는 않을 것이다.

이것이 바로 103호가 아니라 장이서로서 내린 최초이자 최후의 결심.

"장이서?!"

파아앗!

장이서는 마오의 부름을 흘린 채 창공을 향해 날아올랐다.

무더기로 떨어지는 화살들.

어설픈 수로는 막아낼 수 없다.

확실하게 한 번에 날려버려야 한다.

마음을 굳게 다잡았다.

그리고 내면의 절대마귀(絶代魔鬼)를 발현하려는 그 순간!

[거기까지.]

웅장하고도 영롱한 음색이 머릿속에 울려 퍼졌다. 그건 마치 신의 목소리처럼 느껴지기도 했다.

곧이어 벌어진 상황은 더더욱 신묘했다.

떨어져 내리던 화살들이 일제히 멈춰 선 것. 장이서도 마찬가지였다.

마치 시간이 멎은 것만 같았다.

육신은 제어력을 잃었고, 뛰쳐나오려던 혈마귀는 여명에 사라지는 그림자처럼 심장부에 숨어들었다.

육신은 서서히 내려가 어느새 땅에 가볍게 착지했다.

"이게 무슨...."

장이서도. 이를 바라보는 일행도. 모두가 영문도 모른 채 어리둥절했다.

"아미타불...."

상대라고 다를 것 없었다.

명을 내린 당기륭도, 술법을 펼치던 천사도인도. 하다못해 묵묵히 지켜보던 효진사태마저도.

아니, 이곳에 있는 모두가 당혹감에 빠졌다.

대체 이게 무슨 상황인가.

화살 백 발이 하늘에 저리 멈춰 서 있다니.

그야말로 듣지도, 보지도 못했던 괴사(怪事)였다.

만일 누군가의 인력이 작용한 것이라면, 그게 가능한 건 세상에 오직 단 하나.

"왜 이리 늦나 했더니, 꽤 귀찮은 일을 벌이고 있었구나."

좌우로 갈라지는 구름 너머로 태양 빛을 등지고 하늘에 서 있는 절대지존(絶代至尊).

"마, 말도 안 돼...!"

천산의 신(神).

천마 진우광.

오직 그뿐이리라.

그가 나타났다.

비로소 진정한 마교인이 될 준비를 마친 자신의 사제.

장이서를 만나기 위해!

*

천마는 세상의 중심이다.

몇 명이 있든, 누가 있든,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었든. 그런 건 하등 중요하지 않았다.

그저 그 앞에선 모두가 사색이 된 채 벌벌 떨어야 했다.

"...."

삼문의 무사들도 마찬가지. 그들은 혼비백산했다. 하지만 천둥벌거숭이처럼 나돌아다니진 않았다.

오히려 숨을 죽인 채 조용히 있었다. 본능이었다. 그래야만 잠시라도 더 살아 있을 수 있다는 생존의 본능.

당기륭과 천사도인. 그리고 효진사태도 넋을 잃은 채 멍하니 바라봤다.

백 발의 화살은 멈추었고, 천마는 허공에 머물고 있었다.

선 넘은 격공섭물이다.

이를 과연 인력(人力)이라고 말할 수 있는가? 그렇다면 아마도 자신들은 벌레일 것이다.

천마 진우광.

오직 그만이 인간일 것이다.

지금도 자신들을 벌레처럼 거들떠보지도 않고 있지 않은가.

"제법 쓸만해졌구나."

천마는 모든 이의 시선을 무시한 채 장이서에게 말을 건넸다.

"...지존을 뵙습니다."

그리고 장이서는 빠르게 부복하며 천마를 알현했다.

꺼풀을 벗고서 적이 아닌 아군으로 마주한 그는 어떤 모습일까.

전까지는 몰랐는데, 이제 보니 알겠다.

사람이 이렇게 안도할 수가 없다는 것.

그 든든함에 가슴이 평안해지고, 진심으로 웃음이 나올 만큼 말이다.

"음...?"

그리고 그런 장이서를 본 천마는 고개를 갸웃했다.

제 사제가 저를 보며 이리 앳되고 다정한 미소를 보인 적이 한 번도 없기 때문.

이를 본 기분은 무어라 정의하기가 어려웠다. 다른 자가 그랬다면 단번에 목을 베었을 텐데. 묘하게 싫지는 않다.

"소란을 피웠구나."

진우광이 다정히 말하자 장이서는 숙연한 얼굴로 고개를 숙였다.

혈교를 잡겠다는 일념에 스스로를 과신했고, 아둔했다.

그래서 조약을 어긴 채 사천을 침범했고, 함정에 빠져 일행을 위험에 빠트렸다.

변명의 여지가 없는 자신의 책임.

이를 기회라고 느꼈는지, 삼문에서도 뒤늦게 정신을 차리고 거들었다.

"그자는 사천으로 넘어와 맹의 군사를 죽이고 달아난 자요! 천마께서 전쟁을 바라는 게 아니라면, 그를 우리에게 넘겨주시오."

천마의 시선이 삼문에게 닿았다.

삼문은 당당했다.

천마라는 존재가 두렵긴 하나, 그도 사람이다. 더구나 지금 보니 소문만큼 잔혹해 보이지도 않았다.

더구나 이곳은 무림맹의 구역, 사천.

명분으로 보나, 상황으로 보나.

상식이라는 것이 있다면 당연히 자신들의 말을 무시하지는 못할 터.

한데....

고오오오오오!

"전쟁이라고 하였느냐?"

천마에게서 지금껏 보이지 않던 지독한 악귀의 기운이 풍기기 시작했다.

"그, 그렇소! 저자를 넘기지 않는다면 분명 무림맹과 천마신교 사이엔 더 큰 오해가 쌓이게 될 거요. 그럼 전쟁이 벌어질 수밖에...."

"틀렸다."

무엇이 말인가.

"전쟁은 그렇게 정해지는 것이 아니다."

"그게 무슨...."

"시작도, 끝도. 모두 내가 정하는 것이다."

이게 뭔.... 너무 얼토당토않은 소리에 말문이 턱 막혔다.

전쟁이 무엇인가.

세력 간의 다툼이오, 명분의 싸움이다.

한데 동네 개싸움도 아니고, 시작과 끝을 뭔데 본인이 다 정한단 말인가.

상식적으로 어이가 없는 헛소리.

하지만....

그래서 천마인 거였다.

방법도 간단했다.

상대가 유리한 고지를 점하였는가?

아군을 궁지에 몰아넣었는가?

적들이 승리를 확신하는가?

상관없다.

"화, 화살이 이쪽으로...!"

천마가 손바닥만 뒤집어도 판은 바뀌는 거다.

공중에 멎어 있던 화살이 일제히 뒤로 돌아 삼문을 향해 날 끝을 바꾸었듯이.

전쟁은 그렇게 하는 것이다.

평화가 너무 길었다.

주제도 모르고 감히 벌레들이 천마를 협박하였으니.

또한.

"너희가 넘볼 아이도 아니지."

"자, 잠깐...!"

"가서 전하거라. 전쟁을 원한다면 얼마든지 다시 치러주겠노라고."

천마의 살벌한 입꼬리가 말아 올라가는 그 순간.

쐐애애애액!

허공에 떠 있던 백 발의 화전이 유성처럼 삼문을 향해 쏘아져 나갔다.

콰과과과과광!

자비 없이 터져나가는 무차별한 폭발.

"으아아아악!"

구르르르르르!

삼문은 무수한 비명과 함께 눈사태에 휩쓸려 사라졌다.

남겨진 건 아주 비좁은 봉우리에 우두커니 선 장이서와 일행뿐.

그야말로 존엄 그 자체.

모두가 입을 떡 벌린 채 석상처럼 굳어버렸다.

"천산으로 복귀하거라."

그리고 천마는 다정히 한마디만을 남기곤 늘 그랬듯 홀연히 하늘로 사라졌다.

휘이이이잉!

몰아치는 눈보라가 새삼 이리도 무안하고 허망할 수가 없다.

지금까지 있었던 일이 다 별거 아닌 일이었던 것처럼.

"...근데 우린 어떻게 내려가냐?"

그러게.

그렇게 사천의 천라지망은 끝이 났다.

*

구르르르르!

설보산 정상에서 눈사태가 일었다.

"으, 으아아악!"

이에 산을 오르던 약초꾼들은 기겁을 하며 도망쳤다.

반면 정상 부근에 다다라 있던 중년인은 그저 고개를 들어 이를 무심히 흘기기만 했다.

"바위 뒤에라도 피하시오! 어서!"

일부 선량한 이들은 안타까움에 소소한 조언을 붙이곤 달아났다.

하지만 처마 밑에 숨는다고 장마가 비껴가는가. 피한다고 될 일이 아니었다.

구르르르르르!

이미 정상에서 시작된 새하얀 해일이 코앞까지 닥쳐왔으니.

"이것이 그대의 경고인가."

중년인은 안타까운 목소리로 바닥에 놓인 나뭇가지 하나를 주워들었다.

그러곤 진중히 이를 훑었다. 차디찬 설산에 어울리는 마른 가지. 조금만 힘을 줘도 바스러질 수준.

하지만 장인은 도구를 탓하지 않는다. 그에게도 이 정도면 충분했다.

목전까지 다다른 저 눈사태 따위를 멈춰 세우기엔.

수와아아아아악!

그의 일검에 바람이 불었다.

겁 없이 날뛰던 무수한 설결정(雪結晶)이 행군을 멈추고, 봄꽃처럼 흩어져 사라질 만큼 거대한 역풍이!

잠시 후 햇빛에 반사된 결정이 반짝거리며 아스러진다.

눈사태는 신기루처럼 사라지고, 그 자리엔 인사불성이 되어버린 무수한 인파만이 꼴사납게 남겨졌다.

사천삼문이다.

도저히 믿기 힘들지만, 나뭇가지 하나만으로 그들을 구해낸 것.

그야말로 인간의 영역을 벗어난 압도적인 신위.

하나 그의 신분을 알면 당연히 고개가 끄덕여질 수밖에 없었다.

검 하나로 정도의 정점에 올라선 자.

"매, 맹주...?!"

무림맹주 현청.

바로 그였으니 말이다.

275.

#여정의 끝

"어떻게 여길...."

비틀거리며 일어선 천사도인과 효진사태. 그리고 당기륭이 믿을 수 없다는 눈초리로 다가섰다.

"천마가... 나타났습니다. 그가 뇌마를 데려갔습니다. 크윽!"

이미 부러진 뼈가 한두 군데가 아닌지 당기륭이 고통에 신음하며 털썩 무릎을 꿇었다.

천마.

맹주는 놀라지도 않은 채 천천히 고개를 들어 하늘을 살폈다.

이미 알고 있었다.

설보산을 오르는 순간부터 하늘은 지독히도 불길하였고, 곳곳에선 악귀가 끊이질 않았으니.

그리고 천마 또한 알고 있었을 거였다.

자신이 이곳에 와 있다는 것을.

첨예한 검(劍)의 성역을 느꼈을 테니.

그렇게 두 사람은 서로를 바라보고 있었다.

'가서 전하거라. 전쟁을 원한다면 얼마든지 다시 치러주겠노라고.'

이미 정점에 선 그들에겐 서로의 존재를 느끼는데 충분한 거리였으니.

하여 현청은 이 눈사태를 천마가 제게 보내는 경고로 느꼈다.

다시는 뇌마를 쫓지 말라는 지엄한 경고. 그게 너무도 마음이 쓰리고, 안타까웠다.

꼭 천마도 진가를 알아본 아이를 저들 스스로 걷어차 버린 것만 같아서.

너희가 놓친 이 아이는 이제 마교에서 잘 키우겠다는 말처럼 들려서.

"맹주...."

멍하니 서 있는 그에게 모두가 의문스러운 시선을 담았다.

이에 현청은 장고 끝에 파르르 떨리는 목소리로 명했다.

"천라지망은 여기서 멈추시게."

"...!"

그가 결단을 내렸다.

"군사를 죽인 건 뇌마가 아닌 혈교의 짓이네."

제갈상의 편도, 신승의 편도 아닌 새로운 답안이었다.

"그, 그게 무슨...!"

"뇌마는 혈교를 잡으러 온 것일 뿐이었네."

삼문의 사람들이 모두 닭 쫓던 개처럼 입을 벌렸다.

지금까지 목숨 걸고 쫓아온 뇌마가 군사의 죽음과 아무런 연관이 없다니.

"아니, 아무리 그래도 신승과 사대금강께서 당하지 않았습니까! 이대로 놓칠 수는 없습니다!"

효진사태가 기함하며 외쳤다. 하나 그건 더더욱 무의미한 일.

"소림에서 그의 처벌을 원치 않는다네."

"예?"

삼문의 고수들은 넋을 놓은 채 무너져 내렸다.

그리고 현청은 제 말만을 끝내고선 스륵 몸을 돌렸다.

'부디 잘 지내시게....'

정파에서 떠나보낸 103호의 안녕을 기원하며.

* * *

며칠이 흘렀다.

장이서와 일행은 설보산에서 우여곡절 끝에.

"천재 귀환-!"

마오의 외침을 끝으로 무사히 청해로 돌아왔다.

여정을 마친 것뿐이지만, 그 사이에 세상은 많은 것이 바뀌어 있었다.

먼저 죽은 것으로 알려졌던 신승과 원담대사가 만천하에 생존 소식을 알렸다.

수많은 질문이 쏟아졌으나 두 사람은 두문불출하며 침묵했다.

딱 하나. 다시 겨룰 생각이 있느냐는 질문에만 이렇게 한마디를 남겼다고 했다.

'뇌마.... 그분은 저희가 결코 이길 수 없는 분입니다.'

차라리 죽였다고 떠들 때가 더 나았다. 이젠 갑론을박할 것도 없이 희대의 대마두가 되어버린 것.

연이어 다른 소식도 이어졌다.

[사천에서 벌어진 군사의 죽음은 신원 미상의 여인이 벌인 일로 마교와는 일절 연관이 없음을 밝히는 바이오.]

놀랍게도 방을 붙인 건 무림맹이었다.

"이 새끼들! 사람을 궁지까지 몰아넣고 이제 와서 오해였다고? 아버지가 무서워 꼬리를 만 거겠지! 헹!"

마오는 자신만만하게 얘기했지만, 장이서는 속으로 고개를 저었다.

그가 아는 암각주 제갈상은 마(魔)에 고집을 꺾을 위인이 아니었다.

'신승께서 움직이셨구나.'

제갈상의 폭주를 막을 수 있는 건 역시나 신주오절뿐.

덕분에 정파에서 반드시 쳐 죽여야 할 불구대천의 원수에서는 벗어날 수 있게 되었다.

하지만 그도 오래가지는 않을 것이다. 사태가 잠잠해지면 제갈상은 반드시 후환을 남기지 않으려고 수를 쓸 테니.

자객을 보내오든, 제 정체를 만천하에 밝히든. 하지만 기대가 없으면 실망도 없는 법. 괘념치 않았다.

어차피 십수 년을 달려온 제게 남은 것은 허허벌판뿐이었으니.

그보다 군사를 죽였다는 신원 미상의 여인에게 마음이 더 쓰였다.

'적아린....'

그녀가 분명했다. 무림맹은 그녀가 왕야의 죽음과 능가경 사태에도 연관이 있다고 공표했다.

성문에서 관군들과 소란도 피웠으니 엮기에도 딱 좋은 구색이었을 터.

더구나 틀린 말도 아니었다.

혈교인 군사를 없애고, 그 죄를 같은 혈교에게 묻는 건 더할 나위 없는 묘수.

하지만 배신을 당했기 때문일까, 아니면 도움을 받았기 때문일까.

그리 썩 기분이 좋지는 않았다.

비슷한 감정이 들었던 일은 하나 더 있었다.

제 조부에게 모든 걸 듣고선 그렁그렁한 눈으로 홀로 절 찾아왔던 아이.

'죄송해요.... 정말 죄송해요.'

암각의 부각주 제갈소미.

그녀였다. 그녀는 모든 걸 알고 있는 듯했다.

그 표정이 너무도 서글퍼 보여 차마 화도 내지 못했다.

해줄 수 있는 말은 하나뿐.

'돌아가.'

'103호....'

'가서 기다려. 너희를 어떻게 할지. 내가 정할 때까지.'

제갈소미는 그렇게 벽에 숨어 한참을 울다가 돌아갔다.

역시나 썩 기분이 좋지 않은 일.

"오호호호! 그래도 이번 중원행은 뇌마의 시대를 알리는 진정한 강호 출사가 아니었느냐. 이제 누구도 널 쉽게 보진 못할 것이다. 장하다, 장이서."

"주군, 경하드립니다."

경하드립니다! 지부장과 간부들을 비롯한 청해지부의 무사들은 일제히 포권을 취하며 축하했다.

웃어야 할 일인가. 울어야 할 일인가.

모르겠다. 정말로.

어쨌든 청해에서의 여정은 그렇게 끝이 났다.

많은 걸 얻고, 많은 걸 잃은 채.

"이제 가시는 겁니까."

다가온 만세극의 물음에 장이서는 고심하다 나직이 고개를 끄덕였다.

날이 좋다. 하늘이 푸르고, 먼발치가 선명하다. 미련 하나 남기지 않을 만큼.

어차피 천산이 아니라면 이제 갈 곳도 없는 몸.

"지부장만 믿고 갑니다."

"후후, 주군께서 불러주시는 날까지 각골난망의 마음으로 칼을 갈고 있겠습니다."

농담도 참.

"누굴 잡으시려고."

"누구든, 언제든. 주군께서 부르시면 바로 달려가 목을 벨 것입니다."

장이서가 흠칫 눈을 크게 떴다. 농담이 아니구나. 그의 진심 어린 충(忠)이 느껴졌다.

흘깃 뒤를 살피니 청해지부의 무사들도 모두 턱을 당긴 채 어깨를 폈다.

무엇이든 할 수 있다는 의지.

뇌마라는 악명은 이들에겐 무엇보다도 값진 선물이었나 보다.

어느 누군가에겐 죽여야 할 대상이었겠지만....

"특별감찰관의 역할은 여기까지입니다. 이젠 그리 따르지 않으셔도 됩니다."

"그럴 수가 있겠습니까. 제가 살아 있는 한 지존은 오직 주군뿐이십니다."

"혹 천마께서 그냥 그리 가셔서 서운하셨던 겁니까?"

"천만에요."

만세극은 씨익 음흉한 미소를 지었다.

며칠 전 잠시나마 천마를 만났을 때 전음을 받았기 때문.

[비로소 벽을 부수었구나.]

단 한마디였으나 눈물이 맺힐 만큼 감복하였다.

또한 장이서를 대견하다는 듯 바라보는 그의 눈빛에서 깨달을 수 있었다.

누구보다도 아끼고 있으며, 청해로 보낸 이유가 자신들을 만나게 해주기 위함이었음을.

그러니 평생토록 충성을 다해야 할 건 이제 장이서뿐이다.

"그나저나 이번에 가시면 또 언제 뵙게 될는지. 벌써 아쉬워지는군요."

만세극이 한숨 섞인 웃음을 지었다.

충성을 맹세하는 것도, 서서히 잊히듯 기다리는 것도. 결국엔 자신들의 몫이었으니.

한데.

"지부장."

"말씀하시지요."

"기다릴 생각은 이제 그만하고, 지부장의 꿈을 한번 키워보는 게 어떻겠소."

장이서가 웃으며 말했다. 지나가듯 그냥 하는 말은 아니었다.

"제 꿈 말입니까?"

그런 게 있나. 없는데? 만세극이 눈을 모은 채 고개를 갸우뚱했다. 제 나이가 몇인데 간지럽게 꿈이란 말인가.

청해지부의 무사들도 모두 표정이 기이하다.

하나 장이서의 눈엔 보였다.

"누구보다 청해를 아끼지 않습니까. 그러니 더는 혈교든, 무림맹이든, 사도련이든. 어디에도 휘둘리지 않게. 무법지대 소리 듣지 않게 발전시켜 보라는 얘깁니다."

"...!"

"상단도 꾸리고, 무사들도 들이고. 이곳의 백성들과 함께 일궈나가 보세요. 또 압니까. 머물다 떠나는 황야가 아니라 모두가 살고 싶어 하는 명지(名地)가 될지."

"주군...."

"자금은 내가 대줄 테니 걱정하지 말고. 저쪽에선 모아봤자 쓸 곳도 없거든. 그러니 잘해 보시오. 소림에서 보내올 소환단은 인재를 키우는 데 쓰시고."

만세극의 얼굴이 형용하기 어려울 만큼 벌겋게 일그러졌다. 그건 간부들도 마찬가지.

설마 저들을 위해 이런 말까지 해줄 줄은 상상도 하지 못했다.

천마를 닮았다고 생각했는데, 아니었다.

그는 수하를 부리는 자가 아니라 품어주는 자였다.

그것도 진심으로.

이러니 어찌 반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반드시... 청해를 중원 최고의 땅으로 만들어 놓겠습니다."

네 사람은 충성을 다해 부복했다.

그리고 다짐했다.

언제고 다시 돌아올 장이서. 아니 청해의 주인을 위해 뼈까지 갈아 넣어 보겠다고.

이젠 그 누구도 이들의 충심을 시험할 수 없는 견고한 관계가 이루어지는 순간이었다.

"저기 분위기 깨서 죄송한데 저는 여기 말고 천산에 데려가 주시면 안 될까요?"

그리고 그때. 만광이 달려와 넙죽 엎드린 채 간청했다.

"천산이 얼마나 강한 곳인지 직접 가서 겪어보고 싶습니다. 받아만 주시면 뭐든 다 하겠습니다!"

만세극의 입꼬리가 올라가 있는 걸 보니 서로 얘기는 다 된 모양.

"교외자라 어려울까요...?"

만광이 조심스레 묻자 뒤에 서 있던 마오가 인상을 와락 찌푸리며 툭 내뱉었다.

"교외자가 문제면 칠소궁은 진작에 문 닫았지."

"예?"

"짐이나 들어, 인마."

"예, 예!"

만광이 활짝 웃으며 벌떡 일어나 달려 나갔다.

그리고 청해지부를 훑으며 장이서가 말했다.

"가시죠."

"좋았어. 가자!"

"오호호!"

"예!"

언제 다시 돌아오게 될지는 모르겠지만, 그때까지 부디....

'잘 지내거라, 윤아.'

돌아간다.

천산으로.

이젠 첩자가 아닌 장이서가 되어.

*

- 하남 숭산 소림사(少林寺).

"천산으로 떠나셨다고 합니다. 무량수불."

한편 청해와 멀리 떨어진 어느 사찰에서는 비록 함께하지는 못했으나, 마음으로 그들을 배웅하는 이들이 있었다.

정갈하게 붉은 가사를 걸친 승려들.

소림사의 신승과 원담이다.

일자로 가지런히 놓인 웅장한 암벽 앞에서 수일간 절을 올리던 신승은 비로소 행동을 멈추고 자리에서 일어섰다.

그의 눈빛엔 씁쓸함과 미안함이 가득했다.

당장 달려가 붙잡고 싶은 마음이 간절했으나, 그러지를 못했다.

그를 감싸주고 보호해 줬어야 할 무림맹이 무슨 짓을 했는지 이미 다 알아버렸으니.

아무런 뉘우침도 없이 대체 무슨 낯으로 그를 다시 보겠는가.

"...조사께서는 언제고 꼭 다시 돌아오실 거다. 그때를 위해 심용(心勇)을 품고 인내하며 기다리자꾸나."

"예, 스승님."

두 사람은 천산으로 향하고 있을 장이서를 생각하며 다시금 면벽수련에 들어섰다.

그리고 신승은 깊이 다짐했다.

반드시 그를 정도의 품으로 돌아오게 만들겠노라고.

'조사이시여....'

장이서가 뿌려둔 씨가 청해를 넘어 숭산에 깊이 안착하는 순간이었다.

276.

#영웅

- 흑룡강 오대련지(五代?池).

다섯 개의 호수가 자리한 신비의 수림(樹林).

푸른 숲엔 맹독을 품은 녀석들이 가득하고, 미로처럼 안개가 가득하다.

워낙 험지인 터라 누구든 들어서면 겁에 질리기 마련이겠거늘.

사박, 사박.

흑발의 미녀가 제집 앞마당처럼 당당히 들어선다.

스르르륵!

심지어 나무를 타고 다가오던 매서운 독사들도 그녀의 날 선 기세에 줄행랑치듯 도망쳤다.

당연했다.

그녀의 이름은 적아린.

사천의 포위망을 뚫고 기어코 이곳까지 살아 돌아온 혈교의 기린아였으니.

"후."

하지만 그녀도 멀쩡해 보이는 건 아니다.

얼핏 봐도 당장 병상에 누워 한 달을 요양해야 할 수준.

한데도 이 머나먼 동부 끝자락까지 온 이유는 하나였다.

바로 이곳이 그녀의 집이기에!

"제 발로 죽으려고 찾아왔구나!"

스스스슥!

안개로 가득한 숲속에서 하나둘씩 모습을 드러내는 흑색 무복의 고수들.

수는 채 백이 되지 않으나, 하나하나가 범상치 않은 그들의 이름은 흑혈(黑血).

모두 혈교에 속한 자들이다!

그중 적아린을 마주한 이는 눈썹 대신 동그란 문신 두 개가 자리하고, 등에는 몸보다 긴 날이 달린 태도를 찬 백발의 미녀였다.

전신에도 악귀 형상을 한 문신이 가득한 걸 봐선 동영(東瀛)에서 온 여인.

다섯 개의 호수 중 백룡호(白龍湖)의 주인인 혈나비다.

"대업을 그리 망쳐놓고 여길 다시 돌아와? 아주 뻔뻔하구나! 잘 왔다. 지금 바로 죽여주마."

척! 혈나비의 손이 등 뒤의 기다란 도파(刀把)로 옮겨진다.

이내 무릎을 살짝 굽히고 언제든 발도할 자세를 취했다.

일도만 휘둘러도 반경 십 보는 뭐든지 싹 다 도려낼 기세.

하나.

"자신 있어? 나야."

한없이 가벼운 어투이지만 나라는 말. 그 말 한마디에 혈나비의 기세가 움찔했다.

분명 수중에 창도 없고, 이제는 좌천 당한 말단에 불과함에도 불구하고 그랬다.

본능이었다.

흑혈 내에서도 최고로 평가받던 흑룡호의 주인. 적아린을 향한 본능적인 두려움.

그녀뿐만 아니라 사방의 흑혈 모두가 그러했다.

하지만 그래봤자 대업을 망친 죄인.

고도의 긴장감이 서리고, 접전이 벌어지려는 그 순간.

"가서 동방왕(東方王)께 전해. 새로운 성혈(聖血)을 찾아냈다고."

"뭐...?!"

경악에 찬 외침. 혈나비의 얼굴에 도저히 믿을 수 없다는 불신이 서렸다.

그리고 바로 그때.

솨아아아아-!

숲속에 음산한 바람과 함께 서서히 안개가 걷히기 시작했다.

그러자 신기루처럼 길목 끝에 모습을 드러내는 분화구!

아니, 분화구로 오르는 면을 가득 메운 붉은 기와의 마을이 나타났다.

혈나비는 놀란 표정을 갈음하곤, 도파에서 손을 뗀 뒤 돌아섰다.

진법이 걷혔다는 건 오직 하나뿐.

"...따라와라."

허락이 떨어졌다. 동방왕이 직접 그녀를 만나겠다고 선언한 것이다.

적아린은 진득한 미소를 갈무리하곤 뒤따랐다.

어쩌면 혈교에 새로운 바람이 되어줄지도 모를 그 사내와의 만남을 고대하며.

'또 보자, 장이서.'

그가 중원에 뿌려놓은 씨는 아직 끝난 게 아니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