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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

184.

#질문이 틀렸다

혈교라니. 조양악은 눈이 튀어나왔고, 지대호는 입이 떡 벌어졌다.

"어디서 그딴 말도 안 되는 소리를 지껄이는 것이냐!"

"까먹었나 본데 내가 출신이 방첩대야. 첩자라면 아주 이골이 나 있는 몸이지. 설마 아무 증거도 없이 이럴까. 생각해 봐. 도라옥의 죄인들이 무슨 재주로 밖에 나와 자객을 자처하지? 만났을 때 이상함을 못 느꼈나?"

"그, 그건 그냥... 본교만의 어떤... 능숙함이랄까...."

능숙은 무슨. 어차피 악행을 저지르는 건 서로 일상다반사이니, 용인하고 넘어갔겠지.

하나 그게 너희의 패착이다.

"틀렸어. 도라옥이 곧 혈교의 근거지이기 때문이다."

"말도 안 된다!"

"날 없애는 대가로 그들에게 주기로 한 게 뭐지?"

"주긴 뭘 준단 말이냐! 우리는 그냥 눈만 감아준 게 다다. 놈들이 뭘 하고 다니는지는...."

"주긴 준 것이군."

"아니, 그게...."

"그럼 거래가 성사된 것이다. 원래 첩자라는 게 그렇다. 모르고 당하기도 하고, 그 순간을 못 이겨 넘어가기도 하지. 하지만 그건 지나버린 시간에 대한 씁쓸한 독백일 뿐. 중요한 건 너희는 이미 혈교와 거래를 했다는 거다. 알고 했든, 모르고 했든."

장이서의 말이 끝나자 육장로 마의가 시퍼렇게 눈을 뜨고 노려본다.

이에 조양악은 식은땀을 흘리며 생각했다.

'x됐다.'

진짜 도라옥이 혈교냐, 아니냐는 중요치가 않다. 하지만 장이서의 발언은 실로 위험했다.

어차피 도라옥은 만행이 까발려졌으니 곧 진압될 거다. 한데 거기에 장이서가 혈교라는 소금을 뿌린다면?

'이소궁은 전멸이다!'

조양악이 다급히 외쳤다.

"정말 몰랐다. 난 아무것도 몰랐단 말이다. 모든 건 다 그놈들이 문제 아니냐!"

그래. 그런 것 같아서 다행이야. 아직 이소궁까지 마수가 뻗친 건 아닌 거 같으니까.

"근데 왜 위에 보고 하지 않았지? 네 말대로 그들은 문제가 있었다. 한데도 너희는 그걸 묵인했지."

장이서가 더없이 차가운 표정으로 물었다. 이에 조양악은 아연실색한 얼굴로 말을 더듬었다.

"그, 그건...!"

"욕심 때문이겠지. 혈교도 그래서 너희를 찾은 거다. 자신들의 제안을 받아들이고, 암중비약을 가려줄 수 있는 존재라고 판단한 거지. 저들과 똑같은 놈들이라고 본 거야."

"아니야.... 우리는 다르다!"

"다르다고? 하지만 너희는 혈교와 거래를 했고, 그들을 숨겨주었다."

"아니야! 아니다! 그럴 리 없다. 그놈들은...."

그때였다. 조양악은 제 앞에서 태연하게 웃고 있는 장이서를 보며 생각했다.

자신이 뭐라 떠들든 그가 파놓은 함정에선 벗어날 수가 없음을....

'이놈은 그냥 악독한 수준이 아니라.... 악귀구나.'

자신과 이공자가 힘들게 쌓아 올린 성탑을 무너뜨릴 악귀.

허탈함이 밀려들었다.

'이놈을... 죽여야 한다.'

조양악의 얼굴에 사신의 그림자가 서렸다.

이대로면 개죽음이다. 아니, 어쩌면 죽음보다 못한 최후를 맞게 되리라.

그것만은 죽어도 안 된다.

'저놈만은 반드시 이 자리에서 죽여 입을 막아야 한다. 반드시!'

조양악의 눈동자가 빠르게 좌우를 살폈다.

장이서와 저와의 거리는 고작 세 걸음.

이 정도면 호룡당주와 육장로가 끼어들기 전에 놈을 없앨 수 있다.

단 일격이면 된다.

단 일격이면.

그리고 그건... 지금이다!

"죽어라-!"

팟! 조양악의 손아귀에 새하얀 수기(手氣)가 서림과 동시에 독사처럼 앞으로 쏘아졌다.

오로지 너만은 죽이고 가겠다는 필살의 수!

이에 호룡당주와 아신은 흠칫 놀라고, 육장로의 눈이 크게 떠졌다.

그리고 장이서는....

"내가 말을 하나 안 한 게 있는데 말이야. 내가 장호에서 살아남은 진짜 이유는...."

지척까지 날아든 조양악을 무심히 바라보며 이렇게 말했다.

"네가 날 잘못 알았기 때문이야."

쐐애애액!

심장을 노리고 들어오는 조양악의 손톱!

그 순간 장이서의 신형이 번쩍하고 사라지더니, 그대로 품 안으로 들어와 일장으로 아래턱을 올려 쳐버렸다.

빠악!

"크악!"

쾅! 그대로 몸이 뒤집혀 뒤통수가 바닥에 꽂힌다.

고통보다도 이해할 수 없는 전개에 정신이 아득해지는 그 순간.

퍽!

"카학!"

벼락처럼 쏘아진 비수가 흥분한 조양악의 머리 옆을 관통했다.

"어, 어떻게...?"

"나도 말로 하는 것보다는 이쪽이 더 편하거든."

촤아아악! 장이서의 손끝으로 다시 빨려 들어가는 백뢰. 조양악은 불신 가득한 눈으로 그를 살폈다.

"너는...."

처음부터 완전히 잘못 알고 있었다. 검노쌍살이 실패한 건 다른 변수 때문이 아니었다.

그저....

장이서가 생각한 것보다도 훨씬 더 강했을 뿐이었다.

애초에 기습은커녕 제대로 붙어도 승부를 장담하기 어려운 고수였던 것.

이 간단한 걸 이제야 깨달아 버렸다.

"지금부터 내가 제안을 하나 하지."

"장이서...."

"서로 공생할 수 있는 아주 좋은 제안이니까, 거절은 사양하마."

"무, 무슨...."

"도라옥에 대해 아는 거 전부 넘겨."

"...!"

조양악의 얼굴에 지독한 공포가 서렸다.

무얼 해도 절대 이길 수 없는 천적을 바라보듯. 아마 여기서 헤어 나오기 위해선 오랜 시간이 걸릴 것이다.

아주 아주 긴 시간이.

*

어느덧 달마저 구름에 가려진 시간.

상황이 진정되자 장이서와 지대호. 그리고 마의와 조양악은 동서남북으로 마주 앉았다. 아신은 장이서 뒤로 물러섰다.

"도라옥에서 무슨 일이 벌어진 거지?"

"그전에... 내가 먼저 한마디 해도 되겠나."

"해라."

끝까지 반말이군. 건방진 놈. 조양악이 얕게 한숨을 뱉고는 입을 열었다.

"무슨 근거로 도라옥이 혈교라고 말하는지는 모르겠지만, 오해다. 분명히 그럴 리 없다."

"아직도 정신을 못 차렸군."

장이서가 눈매를 좁히고 노려보자 그가 손을 들어 보이며 답했다.

"아, 알았다. 물어라. 답해주지."

"도라옥에 무슨 일이 벌어진 거지?"

"무슨 일이 벌어졌느냐고? 질문이 틀렸다."

"뭐?"

"도라옥은 달라진 게 없다."

도무지 이해할 수 없는 말. 달라진 게 없다니. 당장 죄인들이 거리를 활보하고 있거늘.

"그가 달라졌을 뿐이지."

장이서가 바라보자 조양악은 침을 꼴깍 삼키곤 나지막이 말을 이었다.

"도라옥에 왕이 탄생했다."

왕이라니.

"모두가 그를 뇌옥왕(牢獄王)이라고 부르더군."

"누군가 도라옥을 점령했다는 말인가?"

"애초에 본교의 누구도 도라옥의 질서에 관여하지 않으니. 만일 그곳을 통치하는 자가 있다면 능히 왕이라 불러 마땅하지 않은가."

너무나도 황당무계한 얘기. 하지만 지대호도 일부 공감 가는 부분이 있는지 말을 보탰다.

"도라옥은 간수 없는 뇌옥. 그들 사이에 무슨 일이 벌어지든 신경 쓰지 않는다네. 도라옥으로 떨어진다는 건... 지상에 인간으로서의 모든 권리를 내려놓고 가는 것이니까."

쉽게 말해 인간이 아니니 인간의 통제를 받을 필요도 없다는 얘기.

솔직히 도라옥 내부에 대해선 장이서도 자세히 알진 못했다. 한번 들어가면 나오는 이 자체가 거의 전무했고, 또 알 필요도 없었기 때문.

"통제가 없다면.... 그들이 반역을 꾀할 수도 있는 일 아닙니까."

"짐승처럼 저들끼리 서열을 가릴 순 있겠네만.... 반역은 꿈도 꿀 수 없는 일이네."

"어째서입니까."

"절정 이상의 경지를 이룬 자가 안으로 들어갈 땐, 천마전에서 직접 단전을 봉하기 때문이지."

천마전! 그래서 안심할 수 있었던 거구나.

그럼 이해가 갔다.

천마전이 나선다는 건 광명사자가 나선다는 것.

"봉인을 풀려면 광명사자에 준하는 경지에 오르거나, 아니면 그만한 고수가 풀어주지 않는 한은 불가능하네. 평생 내공을 쓸 수 없다는 얘기지."

절로 고개가 끄덕여졌다.

광명사자라면 흑야와 백야. 모두 극마에 오른 절대자들이다. 정파로 치자면 입신지경인 화경의 고수여야만 가능하다는 얘기.

"하지만 갈문천과 검노쌍살은 분명 내공을 되찾은 상태였습니다."

"나도 그게 의문일세."

지대호도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리고 세 사람은 자연스레 조양악에게로 시선을 돌렸다.

그러자 그가 마지못해 입을 연다.

"사면자(赦免者). 힘을 되찾은 자들을 사면자라고 부르더군."

"그 말은...."

"맞다, 도라옥이 달라진 게 아니지. 뇌옥왕. 그가 달라진 거다."

그럼 뇌옥왕이란 자가 도라옥에서 극마의 경지에 올랐다는 것인가?! 말도 안 되는 일. 내공이 금제된 상태에서 어떻게 입신지경까지 다다를 수 있단 말인가.

모두가 충격에 빠지자 조양악은 픽 웃고는 말했다.

"아까 내가 분명히 말했지. 도라옥은 혈교일 수 없다고. 왜? 뇌옥왕은 그곳에 가장 오랫동안 갇혀 있던 죄수. 그런 그가 혈교라니. 말이나 되는가?"

"그럼...."

"천악수라 운광. 그가 바로 뇌옥왕이다."

천악수라라면 사씨 형제의 사부. 그리고 벌써 사십 년이 넘도록 도라옥에 갇혀 있는 자였다. 혈교의 하수인이라고 보기엔 너무도 긴 세월.

"좋아. 그럼 그들이 하려는 건 뭐지? 그저 콧바람이나 쐬려고 너희와 손을 잡은 건 아닐 텐데."

"그걸 내가 어찌 아느냐. 이상한 낌새가 있었으면 우리도 가만히 보고만 있진 않았을 거다. 하지만 놈들은 분명 도라옥으로 얌전히 돌아가 있었다."

"짐작 가는 것도 없는 건가?"

"모른다. 뭐, 서쪽을 주로 다녔다는 것밖에는."

"서쪽?"

장이서가 되묻자 이에 대해 지대호와 마의가 동시에 입을 열었다.

"탈출을 계획한 것이군."

"빠져나갈 생각이로구나, 끌끌."

그럴싸한 추론. 서쪽은 드넓은 황야로 이어져 추격이 어렵다. 또한 험지가 많아 지키는 이들도 다른 곳에 비해 미미한 곳.

"아는 건 그게 다인가?"

"여기까지가 내가 아는 전부. 더 알고 싶다면 그건 직접 가서 알아보거라."

조양악이 자리에서 일어섰다. 이에 마의와 지대호가 경계하듯 따라 일어선다.

이에 장이서는 괜찮다는 듯 손을 저으며 말했다.

"이공자께는 오늘 일을 함구해라."

"흥, 내가 왜 네놈의 말을 더 따라야 하지? 그리고 말 놓지 마라."

"널 위해 해주는 말이다. 도라옥이 네가 입을 열어서 무너졌다는 걸 알면 이공자께서 가만히 있을까?"

조양악의 뱀 눈이 부릅떠졌다. 하나 딱히 반박할 수가 없었다. 도라옥은 이공자가 준비한 숨겨진 검.

만일 저 때문에 망한 걸 알기라도 하는 날엔....

'조 보좌. 잘하면 보상이 따라. 하지만 그 반대도 생각해야지. 나 두 번은 용납 안 해. 내 말 무슨 말인지 누구보다 잘 알 거야.'

제 목숨도 보장 못 한다. 분한 마음에 치를 떨며 물었다.

"지금 날 협박하는 것이냐?"

"협박이라니. 서로 돕자는 거지. 돌아가면 이렇게 말해. 칠소궁과 동맹을 맺는 게 좋을 것 같다고."

"끝까지 날 농락하겠다는 거구나!"

"그럴 리가. 알잖아. 뒤에 선 자들의 경쟁은 무의미하다는 것을. 서로 뜻만 맞으면 큰 벽 하나 치우는 것쯤이야. 칠소궁의 실력은 이미 봐서 잘 알 테고."

"...대공자를 치우자는 것이냐?"

조양악의 두 눈이 흔들렸다. 이는 아까 자신이 그에게 했던 말이지 않은가.

다른 점이 있다면 갑을이 바뀌고, 주객이 전도된 것.

"잘 생각해. 어차피 우리는 이제 한배를 탄 몸. 어떻게 가는 것이 가장 현명하고, 득이 될지를. 앞으로 내 연락 잘 받도록 하고."

장이서가 악귀처럼 웃는다. 조양악은 허망한 눈으로 하늘을 살폈다.

오늘따라 어둡고 멀게만 느껴지는 건 착각일까.

그야말로 완벽한 패배의 날이었다.

185.

#도라옥

솨아아아-

늦은 밤 호숫가에 물살이 밀려든다.

철퍽, 철퍽.

그리고 뭍을 향해 어깨를 축 늘어트린 채 걸어 나오는 사내. 고작 반 시진도 안 됐거늘, 그사이 수십 년은 더 늙어버린 조양악이다.

"보좌님, 괜찮으십니까?!"

수하들이 달려와 안부를 묻자, 발작하듯 매섭게 눈알을 부라렸다.

"이 멍청한 것들...!"

괜찮냐고? 검노쌍살이 나타난 것도 모르고, 저 배 위에서 제가 무슨 꼴을 당했는지도 모르고.

도대체 이것들은 하는 일이 무엇이란 말인가!

마음 같아선 이것들이고, 저것들이고 싹 다 찢어 죽이고 싶지만....

힐끔 뒤돌아 호수를 바라본 조양악의 눈이 미세하게 떨렸다.

"돌아간다."

이내 묵묵히 걸음을 옮겼다.

오늘따라 유난히 피우고 싶은 곰방대를 떠올리며.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그렇게 떠나갔다.

그리고 먼발치 떠 있는 배 위에선 그런 그의 뒷모습을 지켜보는 이들이 있었다.

"이대로 그냥 보내도 괜찮은 건가. 아직 저자가 도라옥과 무관하다고 볼 수는 없네."

"지 당주 말이 맞다. 얼굴만 봐도 알지. 배신하기 딱 좋은 이리 상이야. 도라옥에 당장 연통을 보낼 수도 있다!"

지대호와 마의가 이구동성으로 탐탁지 않은 우려를 표했다. 이해는 갔다. 하지만 장이서는 고개를 저었다.

"괜찮을 겁니다. 그로서도 손해 볼 것 없는 거래일 테니."

"그게 무슨 말이더냐. 종일 네놈한테 끌려다니다 너덜너덜해져 기어가는 놈한테. 표정을 보니 너한테 복수만 할 수 있다면 혼이라도 갖다 바칠 기세던데?"

그 정도까지는 아니고.

"조양악이 감정적인 것처럼 보이지만, 보기보다 영리한 자입니다. 이미 도라옥에 대해 장로회와 호룡당이 알았으니 미래가 없다고 판단했을 겁니다."

"흐음.... 해서 놈들이 먼저 절연할 것이다?"

"예. 그리고 이공자에게 신임을 회복해야 하는 그로서는 칠소궁과의 동맹은 절대 포기할 수 없는 패일 겁니다. 그러니 당분간은 제 눈치를 살피려 들 겁니다. 말도 곧잘 따를 거고요."

"허, 해서 그런 말을 했던 것이냐?"

장이서가 씨익 웃자 마의는 고개를 절절 저었다. 뭐 이런 놈이 다 있는가.

"가만 보니 네놈은 혹 주변을 다 장기 말처럼 생각하는 것 아니냐? 말해보거라. 난 대체 네놈에게 무엇이냐."

"앱니까. 그런 질문을 하게."

"어서 말해보래도!"

"됐습니다."

장이서가 손사래를 치자 지대호가 불쑥 끼어들었다.

"그럼 나는 무엇 같은가. 아무래도 나이로 보나, 인상으로 보나. 저기보다는 내가 더 형님 같지 않은가? 오늘 일도 자네를 믿고 이렇게 나서지 않았나."

"뭐라는 게야, 이 호랭이 놈이."

"저도 장 보좌와 한 번 해볼까 합니다. 호형호제. 장로께서만 하라는 법 없지 않습니까."

"누가 네놈을 허락한단 말이냐! 어림도 없다."

"허락을 왜 장로께 받습니까. 장 보좌한테 받아야지."

"내가 저놈의 큰형이다! 내가!"

"그럼 마음껏 하십시오, 큰형. 저는 가장 친한 형 할 테니."

"가아아알!"

두 영감의 유치한 싸움을 뒤로한 채, 장이서는 아신과 함께 계단을 내려섰다.

'뇌옥왕 천악수라.... 당신은 대체 누구지?'

여전히 지워지지 않는 묘한 안갯속.

하나 생각은 잠시뿐이었다.

이 정도 밝혀냈으면 할 일은 다 했다.

나머지는 마교가 알아서 할 일.

그러니까....

「돌아가자.」

「존명.」

* * *

어둑한 어느 지하 공동.

투박하고 비좁은 길목이 개미굴처럼 넓게 퍼져 있다.

대체 뭐 하는 곳인가 싶겠지만, 엄연히 사람 사는 곳.

물론 그리 좋은 주거환경은 아니다.

"흐으으으으."

괴이한 신음이 귀곡성처럼 밤낮없이 울리고, 간간이 내걸린 횃불은 꽉 막힌 천장만 드러내니.

열흘만 채워도 갑갑함에 미치지 않으면 다행이다.

하나 그보다도 더 괴로운 것은 영영 나가지 못할 수도 있다는 망연함이었다.

그렇다.

한 번 들어오면 천운에 천운이 닿지 않는 한 나갈 수 없는 마교의 지하 감옥.

들어올 때 몸 가릴 천 조각 하나 없이, 인간이 누리던 모든 호사를 지상에 내려놓고 와야 한다는 바로 그곳.

도라옥(度裸獄)이었다.

그리고 지금 이곳에 머리까지 덮은 피풍의를 쓰고 들어서는 이가 바로 곱슬머리를 가진 광기의 사내.

월하촌을 불태운 사호정이다.

"크크큭."

이로써 충격적이지만 도라옥에 입출로가 열렸다는 것이 증명된 셈.

하나 놀랄 일은 이게 다가 아니었다.

"사호정. 분명히 내가 독단 행동하지 말라고 경고했을 텐데?"

들어선 사호정의 앞을 가로막은 자. 일자로 감긴 두 눈에 무심해 보이는 용모.

그는 발가벗겨진 죄인의 모습이 아니었다.

허리춤에 검을 차고, 역시나 머리까지 덮은 서역의 피풍의를 두른 마인의 모습이었다.

"고작 인사 조금 한 거 가지고 뭘 쪼잔하...."

캉!

어둠 속에 일순 불꽃이 튀며 마찰음이 일었다. 순식간에 발도한 검과 이를 막아낸 손도끼로 인해 벌어진 일.

"큭!"

얼핏 보면 수가 비슷해 보이겠지만, 실상은 아니었다.

무심해 보이는 사내는 벨 마음 없이 뻗은 것이고, 사호정은 신음을 뱉으며 정말 간신히 막아낸 것.

여기서 한 수만 더 이어졌어도 목이 베였을 거다.

"말은 살아 있기에 하는 것이다. 죽으려고 하는 게 아니라."

사내의 노곤하지만 섬찟한 경고에 사호정은 인상을 찌푸렸다. 닥치라는 말을 고상하게도 하네. 네 x이다, 이 새끼야.

"알아듣겠나?"

"...충분히."

한데 사호정이 성질을 죽이곤 두 손을 들며 웃는다. 척! 그러자 상대가 우아하게 납도하곤 휙 몸을 돌렸다.

"왕께서 찾으신다. 따라와라."

"그러지."

사호정은 애써 아무렇지 않은 척, 욱신거리는 손목을 어루만지며 얌전히 뒤를 따랐다.

정녕 놀라운 일이다.

그가 누구던가. 악명 높던 사씨 형제의 둘째이자, 한번 눈 뒤집히면 뵈는 게 없던 광기의 소유자다.

독한 거로 치자면 제 형인 사도철보다 한 수 위.

한데 그런 그가 이런 수모를 겪고도 꼬리 내린 개마냥 조용하다니. 하지만 지상이라면 모를까, 이곳에선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최소한 인간으로 남고 싶다면 말이다.

이 안에는 딱 두 종류만이 존재했다.

인(人)과 충(蟲).

말 그대로 인간은 옷도 걸치고, 식사도 하며, 대화도 할 수 있는 존재인 거고.

벌레는... 뭐. 콰직!

"끄아아악!"

그냥 아무것도 허용되지 않는 존재였다. 지금처럼 단지 가는 길목에 발이 놓여 있었다고 짓밟혀 짜부라지는 신세처럼.

죽을 때까지 발가벗고, 비좁은 길 벽면에 꼭 붙어야 하는 벌레.

그리고 이는 간수 없는 뇌옥이 만든 오래된 위계질서였다. 누군가가 편해지려면 누군가는 불편해야 하기에.

다만 예전과 달라진 게 있다면 과거엔 그냥 약한 놈이 벌레였는데, 지금은....

'누구든 왕한테 밉보이면 벌레 되는 거지.'

그랬다. 도라옥은 지금 전제군주제의 시대였다.

천악수라가 광명사자의 봉혈을 풀면서 무공을 되찾았고, 충성을 맹세한 이들에게만 죄를 사하여 준다는 말과 함께 힘을 되찾아 주었다.

그로 인해 새로운 지배 구조가 시작된 것이다.

인간과 벌레. 그리고 그 위에 군림하는 신(神)!

바로 뇌옥왕(牢獄王)과 사면자(赦免者)들의 시대가 열린 것이다.

그리고 제 앞에 가는 저 맹인처럼 눈을 감은 검객은 사면자 중에서도 최측근인 군자검귀(君子劍鬼) 주사라는 자였다.

굳이 서열을 따지자면 이곳의 이인자.

그러니 도살방의 광견도 고개를 조아릴 수밖에. 물론 그도 입장이 조금 특별하기는 했다.

"사호정을 데려왔습니다."

미로 같은 길 끝에 당도한 드높고 거대한 굴.

어둡고 척박하던 앞서와는 달리, 밤하늘의 별처럼 빛나는 야명주와 투명한 지하수가 흐르는 지하 낙원.

"왔느냐."

묵직한 목소리에 주사는 천연의 돌로 만들어진 울퉁불퉁한 태사의 앞에 서서 깊숙이 고개를 조아렸다.

그가 이 안에서 이리 예우를 갖추는 존재는 오직 하나뿐.

수십 년 전 이곳에 들어와 봉인을 해제하고 왕의 자리까지 오른 사내.

뇌옥왕(牢獄王) 운광이다.

그리고 그가 바로....

"다녀왔습니다... 사부님."

유년 시절 이곳에 들어온 사씨 형제에게 직접 무공을 가르쳐 준, 전전대의 대마두 천악수라(天惡修羅)였다.

길었던 과거의 인연이 재회하게 된 것.

'늙은이. 뭘 먹었길래 갈수록 커지는 거야?'

사호정은 한없이 거대한 체구를 올려다보며 내심 긴장을 드러냈다.

이는 아부가 아니라 누구라도 마주하면 그럴 만했다.

핏기 없는 피부에 풀어 헤쳐진 백발. 백색 도포에 큼직한 붉은 보석이 박힌 금장 목걸이. 반면 호랑이도 피해 갈 만큼 장대한 기골.

이것이 바로 뇌옥왕의 모습이었다.

"월하촌에 다녀왔다지."

용모에 걸맞은 중후한 목소리가 천둥처럼 장내에 울렸다.

"그게... 죄송합니다, 사부님. 그저 보기만 하고 온다는 것이 참을 수가 없어... 커헉!"

사호정이 말하다 말고, 제 목을 움켜쥔 채 앞으로 털썩 쓰러졌다. 오체투지하듯 엎어진 상태에서도 이마에 땀이 줄줄 쏟아졌다.

뇌옥왕의 몸에서 공력이 흘러나온 것도 아니었다.

그저 눈빛에 살의만을 품었을 뿐이었다.

한데 그것만으로도 사호정은 인간의 발아래 놓인 벌레처럼 생사의 갈림길에 섰다.

의기상인(意氣傷人).

의념 하나만으로 그를 죽음의 문턱에 올려세운 것이다.

그리고 뇌옥왕이 이를 펼쳐냈다는 건....

그가 극마(極魔)의 힘을 사용하는 절대자라는 얘기다.

"사, 사아아알려...."

사호정은 눈물, 콧물, 침까지 다 쏟아내며 살려달라고 애원했다.

두근, 두근, 두근, 두근.

이러다 심장이 먼저 터질 기세.

하나 뇌옥왕은 모든 게 태평했다.

"너는 어릴 때부터 네 형보다 많은 게 부족했다. 자질도, 머리도, 참을성도. 그저 경박하기만 했지."

"끄으으...."

"하지만 숱한 모자람 속에서도 단 하나 나은 것이 있었다."

"살려줘.... 살려달라고오오오, 이 개새끼들아아아아-!"

고개를 번쩍 들고 소리치는 사호정.

두 눈은 실핏줄이 다 터졌고, 뵈는 것도 없는지 동공은 따로 돌아다닌다.

그리고... 뇌옥왕은 이를 보며 웃었다.

"그래. 바로 그 악독함이다. 원하는 걸 얻기 위해서라면 절대 포기하지 않는 그 모진 마음이 널 죽이지 않은 이유이다."

툭.

들끓던 살의가 잔바람처럼 사라지고, 사호정은 쓰러진 채 오들오들 떨었다.

"강해지고 싶으냐. 그럼 견디거라. 견디고 또 견디어 네 형이 닿지 못한 경지에 오르거라."

뇌옥왕이 일어선다. 그러자 목걸이에 박힌 붉은 구슬의 색이 더 짙어졌다.

이내 앞으로 손을 뻗어내자.

슈슈슈슈슉-!

수백 갈래로 뻗쳐 나온 붉은 빛줄기가 사호정의 단전을 향해 비수처럼 내리꽂혔다.

"으으으... 끄아아아아아아-!"

참는다는 것 자체가 오만이라고 할 수 있는 끔찍한 고통.

비명은 오랫동안 울려 퍼졌다.

사호정이 완전히 혼절하는 그 순간까지.

"데려가라."

군자검귀 주사가 나지막이 명을 내리자, 피풍의를 뒤집어쓴 죄인들이 들어와 그를 데리고 사라졌다.

그러자 장내에는 딱 네 사람만이 남았다.

도라옥의 서열 2위 군자검귀 주사.

곰처럼 우직해 보이는 서열 3위 우호법, 붕산권(崩山拳) 대산홍.

흡사 악선이 아닌가 싶은 용모의 서열 4위 좌호법, 팔괘사령(八卦死靈) 악복조.

마지막으로 이들의 왕인 서열 1위 뇌옥왕 천악수라.

바로 이곳 도라옥의 수뇌부들이었다.

그리고 원래는 여기에 한 명이 더 있었다.

"아무래도 사혼검귀가 당한 것 같습니다."

"으으으으음!"

186.

#뇌옥왕 천악수라

뇌옥왕의 입에서 격노에 찬 침음이 뱉어졌다. 예정보다 복귀가 늦어져 불안하긴 했다.

아니, 검노쌍살은 당했을 수 있다고 여겼다.

하지만 도라옥 서열 5위이자 마지막 간부인 사혼검귀 갈문천은 계산에 없었다.

"아무래도 장이서. 그자에게 역으로 당한 것 같습니다."

"장이서... 장이서... 장이서...!"

뇌옥왕이 자리에서 벌떡 일어서며 원한의 외침을 토했다.

쿠구구구!

그러자 그저 서 있는 것뿐임에도 어찌나 기세가 강렬한지 지축이 흔들리며 투둑, 투두둑! 위에서 돌 부스러기가 떨어져 내렸다.

실로 엄청난 공력. 앞에 서 있는 것 자체가 곤욕이다.

"감히 내 제자를 없앤 것도 모자라, 사혼검귀까지 죽음에 빠트리다니.... 감히.... 감히!"

뇌옥왕은 수십 년의 구금 생활로 세상에 달관하여 냉혈이 흐르듯 차분하고 과묵한 자였다.

그가 이토록 대로한 건 이곳에 갇힌 후로 딱 두 번.

하나는 유년기부터 제 손으로 기르다시피 한 애제자 사도철이 죽었다는 소식을 들었을 때. 그리고 나머지가 바로 지금이다.

"사지를 찢고 찢어 원혼까지 불태워 버릴 것이다-!"

한마디로 한 번도 만난 적은 없지만, 장이서는 이미 불구대천의 원수로 등극해 있었다.

물론 장이서 입장에선 억울한 부분이 있다. 먼저 공격해 온 건 그들 아닌가. 심지어 갈문천은 의뢰받고 암살하러 온 자객이었다.

하지만 원인 불문하고 피가 피를 부르는 것은 강호의 이치.

"어찌할까요."

"당장 놈을 제단에 바쳐 피육(皮肉)을 벗겨도 모자란 일. 하나 그것보다도 우리의 존재를 알게 되었다는 것이 더 큰 문제이다."

"하오면...."

"대업을 앞당겨야겠다."

"괜...찮으시겠습니까."

주사는 떨리는 목소리로 물었다. 이들에게 대업이란 두 가지.

하나는 천하를 혼란에 빠트리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마교의 신을 죽이겠다!"

만마의 신. 천마!

바로 그를 죽이겠다는 것이다.

아무리 그가 극마에 오른 고수라 할지언정 이는 현실적으로 불가능한 일.

도대체 무얼 믿고서.

이에 뇌옥왕은 제 목걸이에 박힌 영롱한 붉은 구슬을 내려다보며 답했다.

"이 혈옥(血玉)에는 수십 년간 이곳을 스쳐 간 수많은 죄인의 혈(血)과 기(氣). 그리고 한(恨)이 담겨 있다. 그 가치는 무려 5갑자에 육박하지."

5갑자라니. 이 정도면 과장을 넘어 허황이다. 정상적인 방법이라면 300년을 수련해야 하는 양.

심지어 독마가 지니고 있던 내공도 그보다 낮은 4갑자였다.

하나 지금까지 그가 죄인들의 봉해진 단전을 풀어주고, 더 강한 힘을 부여해 준 것을 생각하면 이는 결코 거짓은 아니었다.

게다가 이보다 더 충격적인 건 따로 있었다.

"물론 이것으로도 천마와 싸워 이길 수는 없다."

시작도 전에 패배 선언!

그랬다. 5갑자의 내공을 손에 넣는다고 해도 이길 수 없는 절대적인 존재. 그것이 바로 천마였다.

그리고 그 이유는.

"천마란 존재가 아무리 뛰어나다고 해도 결국은 인간의 육신일 뿐. 분명 빈틈은 있다. 하지만 천마귀는 아니지.... 그건 인간이 아닌 마귀다. 그리고 그것이 바로 5갑자의 내공으로도 그를 죽일 수 없는 이유!"

천마귀. 시작은 천마신공이 만들어 낸 피조물에 불과하지만, 흡수한 내력이 커질수록 점차 독자적인 존재로 거듭나는 신의 하수인.

"오직 신이라 불리는 천마만이 다룰 수 있는 힘이지."

그리고 당대의 천마가 지닌 천마귀는 고금을 통틀어도 손꼽힐 만큼 강했다.

하여 그가 천마를 죽인다는 말은 숨통을 끊어놓겠단 뜻이 아니었다. 아무리 자신이 날아올라 봤자 천장일 뿐. 천외천의 존재에게는 닿을 수 없음을 너무나 잘 알고 있기에.

"이 혈옥에 담긴 공력에는 죄인들의 광기와 혈기가 고스란히 녹아 있다. 누구든 영향을 미치지 않을 수 없을 만큼. 그리고 천마귀는 무엇보다도 내기를 탐하는 괴물이지. 하여 난... 이것을 천마귀에게 선물로 줄 것이다."

충격을 넘어 경악에 빠질 만한 말이 뱉어졌다. 뇌옥왕은 입가에 참을 수 없는 미소를 지었다.

5갑자에 달하는 엄청난 공력. 그리고 그 안에 담긴 광기와 혈기. 이를 취해 숙주보다 더 강해진 미친 천마귀. 그리고 그걸 마주하는 천마.

상상만 해도 전신이 짜릿하고, 희열에 사로잡혔다.

그렇다.

천마를 죽이겠다는 말은 곧 그의 천마귀를 폭주케 하겠다는 것. 하여 숙주인 천마를 광기와 혈기에 굴복시키겠다는 것.

이것이 그가 말한 대업 중 하나였다.

"어쩌면 마교 놈들은 내게 고마워해야 할지도 모른다. 평화를 택한 천마보단 미쳐 날뛰는 천마를 더 원하고 있을 테니. 하하하하!"

뇌옥왕의 광소가 터져 나오고, 주사는 파르르 떨며 고개를 숙였다.

"사면자들을 모두 불러들이거라! 마침내 때가 되었다고. 피의 복수를 시작하겠노라고."

"...따릅니다."

마교 중심의 지하 깊은 곳.

위험한 칼날이 꿈틀거리기 시작했다.

뇌옥왕 천악수라에 의해.

* * *

- 월하촌 칠소궁.

창틈 사이로 여명의 빛줄기가 스민다.

보이지 않던 작은 먼지가 너풀거리고, 그와 함께 가부좌를 틀고 앉아 있던 장이서의 눈도 슬며시 떠졌다.

"후...."

잠들었던 건 아니다. 어젯밤 조양악을 떠나보내고, 곧장 돌아와 운기조식을 취했고. 이제 세 시진 정도가 지났다.

사실 이렇게 길게 할 필요까진 없었다. 이미 진기를 더 쌓을 수 없는 몸이고, 고작해야 머릿속이 개운해지는 정도.

하지만 마가에서 천마귀의 정체를 알게 된 이후부턴, 잠 대신 명상을 택하기로 했다.

그래야 마음이 조금은 더 편해졌기 때문.

잠들었다가 심장에 자리한 괴물한테 잡아먹힐지도 모른다는 불안감 탓이었다.

그만큼 천마귀와 조우했던 그날의 기억은 선명했고, 강렬했다.

'녀석에 대해 더 알아내고 싶긴 한데....'

물끄러미 심장을 내려다봤다.

두근, 두근.

박동도 일정하고, 아무 일도 없다는 듯 잠잠했다.

혹시 몰라 불사독과 천마기를 골고루 심장에 보내도 봤지만, 천마귀는 처음 본원진기마저 탐내던 것과 달리 아무 반응이 없었다.

'사숙이나 번천검객의 내기가 들어왔을 땐 득달같이 아귀를 벌리던 놈이....'

이미 잡은 물고기라 생각한 탓일까. 아니면 타인의 기운에만 반응하는 것일까.

모르겠다.

하지만 무엇이든 기분이 썩 좋지만은 않았다. 마치 심장에 진천뢰 하나 박아두고 살아가는 기분.

'근데 내기를 먹을수록 더 커지는 건가?'

독마의 내공 중 빠져나간 일부를 고려한다고 해도 예상되는 건 최소 3갑자 이상.

이미 자신의 공력을 훨씬 더 상회했다.

그리고 내면에서 보았던 크기가 고개를 한껏 올려다봐야 했으니, 만일 그보다 더 커진다면....

'나중엔 스치기만 해도 잡아 먹히겠군.'

그렇게 생각하니 더 등골이 서늘해진다. 어떻게든 방법을 찾긴 해야 할 텐데.

'정말 정공 심법이라도 알아봐야 하나.'

답답함이 목젖까지 차오른다.

그리고 한편으로는 이런 무자비한 괴물을 다루는 그의 존재감이 다시금 새겨졌다.

'이것이 천마귀(天魔鬼)다.'

흑화의 불씨를 흩날리는 괴신을 다루던 절대자.

천마 진우광.

그는 대체 얼마나 강한 것일까.

보고 싶다.

그가 펼치는 천마신공의 진짜 모습을....

'물론 만나는 순간, 내 목이 날아갈지도 모르지만.'

후, 부풀던 가슴이 푹 꺼졌다.

독마 사숙의 말대로 이제 천마와의 만남은 최대한 지양하는 것이 현명했다.

우선 사부와의 악연이 있고, 또 진짜 천마귀를 깨울 줄은 몰랐을 테니 본교 질서에 위해가 된다며 죽이려 들 수도 있었다.

'현실을 직시하자. 난 무인이기 이전에 첩자다.'

고개를 휘휘 젓곤 일어섰다.

일단 당장 급한 불부터 끄자.

*

별채에서 나와 곧바로 칠소궁의 주역들을 소집했다.

자리는 정원에서 가졌고, 협탁엔 홍란이 가져온 다과가 놓였다. 마의와 지대호는 불참했다.

'장로회에 다녀오도록 하마.'

도라옥에 대한 진실을 알았으니, 가만히 있을 수만은 없는 노릇. 호룡당주인 지대호와 함께 어젯밤 마해산으로 길을 나섰다.

장이서는 어제 있었던 일에 대해 상세히 설명했다.

이공자가 도라옥과 손을 잡았으며, 그들을 자객으로 써먹으려 했다는 것.

그리고 덜미가 잡힌 조양악의 목줄을 우리가 잡게 되었다는 것까지 말이다.

"...해서 그는 당분간 시키는 대로 할 수밖에 없을 겁니다. 제가 한 짓이 있으니."

물론 앞으로도 놔줄 마음은 없고 말이다. 설명을 마치자 마오는 이빨을 드러내며 으르렁거렸다.

"근데 이렇게 빠져나가게 둬도 되는 거야? 도라옥이랑 손잡았다며. 그럼 같이 벌을 줘야 하는 거 아니냐고."

물론 도리상 그게 맞겠지만.... 고개를 저으며 답했다.

"그래봤자 조양악만 책임지고 끝날 겁니다. 이공자는 미꾸라지처럼 빠져나가겠죠. 그럴 거라면 차라리 첩자로 심어두는 쪽이 더 낫습니다."

"쳇.... 좋아. 그럼 우리는 뭘 하면 되는데? 뇌옥왕인지 사오정인지 게네 잡으러 갈까? 아니면 밖에서 숨어 있다가 나오는 놈들을 노려?"

마오가 두 눈을 활활 태우며 묻는다. 나머지도 내심 기대하는지 의기가 상당하다.

하긴, 마가에서 승리하고 사기가 제대로 올랐으니, 아주 몸이 근질근질할 거다.

하지만....

"얌전히 집에 계시면 됩니다."

"뭐야?!"

계획이 바뀌었다.

"도라옥은. 안 쳐들어가? 가서 혼쭐 내줘야지. 내 마을 사람들이 다쳤어. 게다가 혈교일지도 모른다며."

"광의와 한통속인 자들이라면 절대 용서할 수 없다."

"맞아, 형님. 그리고 마가에서 우린 제대로 힘도 못 썼지 않소."

마오부터 구유. 그리고 과평까지. 모두가 이구동성으로 외쳤다. 아신도 고개를 크게 끄덕이며 동참했다.

모두 맞는 말이다.

굳이 혈교나 복수가 아니더라도 이번 도라옥 건은 칠소궁이 제대로 업적을 쌓을 수 있는 절호의 기회.

확실히 그냥 놓치기엔 아쉽다. 하지만 예상치 못한 변수가 생겼다.

"현재 밝혀진 바에 따르면 뇌옥왕은 극마의 고수. 이건 저희끼리 해결할 문제가 아닙니다."

극마(極魔). 그건 이미 인간의 경지를 넘어선 영역. 아무 대책도 없이 그를 상대하겠다는 건 부나방과 다를 게 없었다.

칠소궁의 책임자로서 이들을 이끌고 간다는 건, 절벽 낭떠러지로 안내하는 것과 마찬가지.

"그자가 그렇게 강한가?"

물론 구유로서는 그게 얼마나 대단한지 모르니 탐탁지 않을 수 있다. 하지만 알고 나면 생각이 달라질 수밖에 없다.

"극마는 곧 대국(大國)."

"무슨 뜻이지?"

"말 그대로. 단신의 힘으로 대국의 천군만마와도 능히 겨룰 수 있다는 얘기지."

"그... 정도인가?"

관무불가침의 이유가 무엇이겠는가.

무림 세력이 두려워서? 천년 무림의 가치를 보존하기 위해?

틀렸다.

황실에도 고수는 모래알처럼 많고, 그들에게 무림은 법전을 어기고 사병을 일으킨 도적 떼와 다를 바 없다.

그런데도 가만히 놔두는 이유는 오직 하나.

"무림에는 늘 신이 있었으니까."

187.

#숙청의 날

신. 참으로 거창하고, 성스러운 말이다.

"흔히 입신지경이라고도 하지. 신의 영역에 발을 들였다는 얘기야. 패배가 확실한 전쟁도 그들이 나서는 순간 결과는 뒤바뀌지. 그들에겐 계획이 없어. 모든 게 간단해. 유유히 적진으로 걸어가 적장의 목을 갖고 나오면 돼. 대군이 막아도 어림없지. 손짓 한 번이면 파도에 휩쓸리듯 모두 죽어 나갈 테니. 막는다는 게 무의미한 일이야."

구유는 믿기 힘들다는 듯 고개를 저었다.

자신도 전장의 용이라 칭해지며 수많은 전쟁을 승리로 이끌었다. 하지만 장이서의 말처럼 혈혈단신으로 대군을 휩쓸고 다닌 건 아니었다.

싸우다 보면 지치고, 지치면 틈이 생기는 게 인간이다.

한데....

"그러니까 신의 영역이라는 거겠지."

장이서는 씁쓸한 미소를 지으며 부언했다. 다른 이라면 모를까, 그의 말을 부정할 순 없는 일.

"그럼 뇌옥왕을 막을 방법은 없는 것인가?"

"그럴 리가."

다른 곳도 아니고 이곳은 마의 총본산인 천마신교.

광명좌우사자인 흑야와 백야만 하더라도 극마의 고수이고, 아직 힘을 전부 되찾은 건 아니겠지만, 독마 사숙도 입신을 이루었었다.

장로회의 수장인 마일성도 그에 근접했다고 알려져 있고, 나머지 장로들도 초절정을 넘어서는 극강의 고수들이다.

무엇보다도....

'그런 극마마저도 짓밟아 버리는 천마가 있지.'

후, 생각할수록 그의 터무니없는 강함에 한숨이 절로 나왔다.

가만 보면 혈교한테도 고마운 게 있다.

그들이 아니었다면 진우광이 평화 협정을 할 일도 없었을 테고, 그랬다면... 그만 상상하자.

"어쨌든 그런 이유로 이번 일은 윗선에 맡기는 게 좋겠습니다."

장이서의 이야기가 끝이 나자 모두가 입맛을 다시며 고개를 끄덕였다. 더 나서는 건 용기가 아닌 객기니까.

"그럼 우린 맘 놓고 광의 쪽 소식만 기다리면 되는 거야?"

마오가 김샜다는 듯 묻는다. 이에 바로 답하지 못하고 잠시 망설였다.

솔직히 마음에 걸리는 게 한 가지 있긴 했다.

도라옥의 죄인들이 서쪽을 드나들었다는 것.

지대호와 마의는 탈출을 모색한 것이라 단정했다. 물론 가장 가능성도 크다.

하지만....

"무슨 생각을 그렇게 해?"

상념에서 벗어나 정신을 차리자 모두가 장이서를 바라본다. 이에 고개를 살짝 젓고는 나지막이 답했다.

"조만간 불문객잔에서 연락이 올 겁니다. 그때까지 수련에 매진하시죠."

어차피 이제는 손 떠나간 일. 더 생각할 필요 없다.

"좋아. 안 그래도 요즘 이 녀석하고 부쩍 친해지는 중이었거든? 도룡아, 인사해. 알지? 장이서. 어, 쟤도 반갑대."

뭐라는 거야. 마오가 제 얼굴에 창룡도를 갖다 붙이곤 히죽히죽 웃는다. 어이가 없어 쳐다보자 구유가 대신 해명해 줬다.

"저렇게 하면 초식을 가르쳐 줄지도 모른다더군."

"누가."

"도룡이가."

"심각하네."

"...그래도 실력은 늘고 있다."

그럼 다행이고. 다시 마오에게로 고개를 돌리자 칼을 번쩍 들고 우하하 웃으며 연무장으로 달려 나갔다.

참, 속이 편해서 좋다. 좋아.

"그럼 도라옥에는 누가 가는 건가요?"

잠자코 있던 홍란이 고개를 갸웃하며 물었다.

글쎄. 그것까지는 모르겠다.

하지만 아마 지금쯤이면 시작됐을 거다.

죄인들을 향한 징벌의 시간이.

* * *

그날 밤.

원형으로 움푹 파인 어느 황량한 산봉우리.

지금은 꺼진 화산이지만, 먼 옛날 폭발과 함께 만들어진 폭렬 화구다.

보통은 물이 고여 화구호가 되지만, 이곳은 조금 특별했다.

"빠져나가는 자가 있다면 가차 없이 참하여라!"

"예-!"

메마른 땅엔 물 대신 수백에 달하는 호룡당 무사들로 가득했고, 이들이 경계하는 가운데 바닥엔 거대한 구멍을 막아둔 것처럼 전(田)자 모양의 철판이 놓여 있었다.

그것도 은은히 청색과 녹색이 비추는 만년한철(萬年寒鐵)로 이루어진 철문.

이곳의 이름은 도라옥.

오직 죄인들로 가득한 지하 마교로 통하는 출입구였다.

그리고 오늘이 바로 반역을 꾀한 죄인들을 숙청하는 결전의 날이었다.

*

크하아아앙!

호피 무늬 무복을 입은 지대호가 출입문 앞에 우뚝 섰다.

"근 40년간 도라옥에 들어간 죄인은 수천에 육박하며 그중 단전이 봉해진 절정 이상의 고수는 삼백여 명으로...."

줄줄이 읊어지는 부관의 보고. 얼핏 들어도 도라옥이 얼마나 위험천만한 곳인지 잘 알겠다.

그럴 리는 없겠으나 만일 절정 고수가 단 한 명도 죽지 않고, 단전의 봉인이 모두 풀렸다면 정사를 합친 세력과도 다름없는 일.

이 정도면 만약을 대비해 대군이 나서야 할 만큼 중차대한 상황이다.

하나....

오늘은 이들 둘이라면 충분했다.

"그만."

지대호가 손을 들어 불필요한 부관의 보고를 막고는 고개를 숙이며 예를 갖춰 말했다.

"두 분을 예까지 모시게 되어 송구합니다. 상황이 상황인지라."

천하의 호룡당주가 이토록 겸손해질 때는 다 이유가 있다.

술사를 떠올리게 하는 기다란 모자에 화려한 법사복(法師服).

다른 것이 있다면 하나는 온통 흑색이고, 또 하나는 백색이라는 것.

천산에서 이런 오랜 복식을 멋들어지게 갖춰 입는 자들은 하나뿐이다.

교주를 보필하며 만마 위에 군림하는 1급귀.

우사(光明右使) 흑야, 좌사(光明左使) 백야.

바로 광명사자가 이곳에 당도했다. 도라옥의 죄인들을 벌하기 위해!

"내 봉혈(封穴)을 풀어냈다니 궁금해서 견딜 수가 있어야지."

백야는 특유의 간드러진 목소리로 갈증을 드러냈다.

파괴적인 마공을 일삼는 흑야와 달리 그의 주특기는 지법(指法)과 술법(術法).

본래 도가인 전진교에 몸담았던 자로 그가 익힌 지법이 바로 창시자인 왕중양의 성명절기 일양지(一陽指)였다.

한 번 혈도를 찔리면 화타가 와도 못 풀어낸다고 할 만큼 오묘하고도 난해한 무공.

한데 이를 풀어냈다니 어찌 참을 수 있겠는가.

"열거라."

물론 그게 아니더라도 감히 죄인 주제에 지존께 이빨을 드러냈다는 건 참을 수 없는 일.

흑야가 섬찟한 눈매로 개전을 선포했다.

이에 지대호가 고개를 끄덕이곤 천둥처럼 커다랗게 외쳤다.

"개문하라!"

쿠구구구!

이에 각기 서른 명에 달하는 무사들이 문고리에 걸린 네 개의 쇠사슬을 붙잡고, 동서남북으로 동시에 끌어당겼다.

그러자 천천히 아귀를 벌리는 지하 감옥.

"기다리거라."

"기다리거라."

흑야와 백야가 수백의 무사들을 돌아보며 나지막이 말을 내뱉곤 안으로 사라졌다.

"충(忠)!"

지대호를 비롯한 호룡당이 일시에 포권을 취하며 고개를 숙였다.

* * *

한편 광명사자가 도라옥과의 전쟁을 떠난 그 시각.

마해산 천마전 정상에는 한 사내가 고고한 자태로 밤하늘을 바라보고 있었다.

백발을 가진 천하절색의 미공자.

천하제일인 천마 진우광이다.

"재밌구나."

한데 대체 무얼 보고 재미를 느낀 것인가.

보이는 것이라곤 별밖에 없거늘.

하나 그의 경지쯤 되면 남들이 보지 못하는 것들도 보이곤 했다.

가령 절대 알 수도, 알아서도 안 되는 천기(天機) 같은 것 말이다.

"남두 천량성(天梁星)의 빛이 바랬다는 건 이 땅의 평화도 오래 남지 않았다는 것."

실로 놀라운 일이었다.

범부에게는 구름에 가려 별조차 제대로 보이지 않겠지만, 그는 신이라 불리는 천마.

그의 두 눈엔 명확히 보였다.

생명을 관장하는 남두육성의 기가 쇠하고, 죽음을 다루는 북두칠성의 기세가 등등해졌음이.

그중 천량성은 무병장수와 중재를 뜻하는 별.

물론 성세를 누리다 난세가 되는 것은 해가 지고 달이 뜨듯 지극히 당연한 순리였다.

영원한 것은 없는 법이니.

하나....

"이미 작금의 평화는 진작 무너졌어야 했다. 그걸 막은 것이 나이지. 한데 아직 내가 죽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혼란이 도래하고 있다는 것은...."

쿠구구구구!

천마의 입꼬리가 비틀려 올라가고, 마른하늘에 천둥이 울린다.

"감히 나 몰래 누군가 흉계를 꾸미고 있다는 것이로구나."

콰과과광! 벼락이 내리친다.

그랬다. 그는 역천(逆天)의 기운을 타고난 자.

이유는 지극히 개인적이었으나, 결론적으로는 천기를 거스르고 전란과 암운으로 뒤덮였을 천하에 평화와 안식을 가져왔다.

그러니 그가 살아 있는 한 평화는 절대 깨질 수 없다.

그게 가능하다면 그 이유는 단 하나.

"탐랑성(貪狼星)의 가호를 받은 자가 있구나."

북두의 제일 흉성(凶星)이 기승을 부릴 때뿐.

천마가 코웃음을 치곤 허공에 떠오른다. 그러곤 서서히 비상했다.

"누구든 상관없다. 잠시라도 내게 즐거움을 줄 수 있다면 그것으로 충분한 일이니."

콰과과광!

하늘엔 오래도록 벼락이 내리쳤다.

천마가 구름 너머로 사라질 때까지.

* * *

천산에서 천마가 천기를 읽을 무렵, 중원에도 하늘을 보며 불길한 기운을 점치는 이가 있었다.

그의 이름은 제갈상.

암각의 각주이자 제일뇌로 불리는 자다.

"허어... 어찌 이리도 혼탁한가."

그는 천마처럼 천기를 뚫어보거나 거스를 역량은 없으나 적어도 흐름을 유추할 수 있는 지혜가 있었다.

그리고 지금 그가 느끼는 기분은....

"무릎 시려요?"

"무릎이 위험... 갈!"

"앗, 깜작이야! 왜 소리는 지르고 그러세요!"

"어디 감히 인기척도 없이 다가오는 것이냐?! 누가 널 그리 가르쳤더냐! 내 공과 사를 분명히...!"

"여기 우리 집이거든요?"

고함을 치던 제갈상이 눈썹을 휘리릭 말고는 숨을 후 뱉으면 말했다.

"그래.... 밥은 먹은 게냐?"

히유. 제갈소미가 길게 한숨을 뱉었다. 화가 날 법도 하지만 그녀는 암각의 부각주이자 제갈상의 손녀.

조부가 저리 정신없는 반응을 보일 땐 분명 뭔가 큰 사달이 났을 때뿐이었다.

"왜 그러시는데요. 무슨 일 있으세요?"

"으음...."

제갈상은 절 헤아려주는 손녀가 기특한지 짐짓 고민하고는 고개를 저었다.

"아니다. 본디 나이가 들면 탁한 하늘만 봐도 마음이 뒤숭숭하고 그러는 게지."

그의 말에 제갈소미도 고개를 들어 하늘을 살폈다.

"엄청 맑은데요. 비 온 뒤 갠 하늘 같아요. 별도 잘 보이고. 하나도 안 탁한데. 혹시 눈이 좀 뿌옇게 보이세요? 설마 백내장?!"

"갈-! 눈에 보이는 게 다가 아니다!"

맨날 혼만 내고. 제갈소미가 입술을 빼쭉 내밀었다. 이에 제갈상은 헛기침을 터트리곤 나지막이 물었다.

"서녘은 요즘 어떠하더냐."

서녘. 신강의 마교를 뜻하는 은어다. 해가 저문다는 의미로 서녘. 암각 내에선 상관없지만, 밖에선 늘 대화에 조심해야 하기에 만든 것이다.

어쨌든 마교의 이야기가 나오자 언제 입술을 내밀었냐는 듯, 제갈소미가 눈을 반짝 빛내며 입을 열었다.

"대단하다는 말로도 부족하죠! 이러다 정말 욕심 많은 고양이가 먼저 지붕에 올라가겠어요."

욕심은 칠정(七情)의 마지막 일곱 번째. 지붕은 태양을 제하면 가장 높은 자리. 해석하자면 칠공자가 소교주에 오를 수도 있다는 얘기다.

이는 절대 괜한 소리가 아닐 터.

"음...."

제갈상은 길게 침음하며 다시 하늘을 살폈다. 그럼 저리 혼탁한 이유가 설마 그 때문이었는가? 마교의 후계 문제라면 능히 그럴 수도 있는 일.

여리게만 생각했던 칠공자가 사실은 누구보다 커다란 흉성이 될 팔자라면.

혹은 그 별을 키우는 103호의 뜻이 변질한 것이라면....

아무래도 확인이 필요하다.

"부각주에게 명하노라."

"갑자기요?!"

그래, 오밤중에 갑자기. 주변에 기막까지 쳐진 걸 확인한 제갈소미는 울상을 짓고는 털썩 무릎을 꿇었다. 그리고 가슴팍에 팔을 척 올리고 답했다.

"부각주, 각주의 명 받듭니다."

"천산북로로 넘어가 103호와 접선토록 하라."

"뭐, 뭐라고요!"

너무 놀라 소리치자 제갈상이 부리부리한 눈매로 노려본다. 이에 화들짝 놀라며 다시 고개를 푹 숙였다.

103호와 접선하라니. 임무를 위해 혁혁한 공을 세우는 그를 대체 왜. 포상이라도 주려고? 아니, 그럴 리가.

"가서 그의 사상을 확인하거라."

이는 장이서가 아직 정도인이 맞는지. 그 믿음을 확인하기 위한 조치였다.

제갈소미의 머릿속이 새하얘졌다. 이내 제갈상은 허리춤에 달린 꾸러미에서 작은 패 하나를 풀어 건네주었다.

"사천으로 먼저 가거라. 당가로 가서 네 신분과 그 패를 건네면 함(函)을 줄 것이다. 그 안에 103호를 없앨 방도가 있으니, 만일 변하였다면...."

꼴깍. 침을 삼키고 제갈상을 살폈다.

"103호를 폐기하거라."

쿵! 청천벽력과도 같은 명이 떨어졌다.

심장이 쿵쾅거리고, 정신이 혼미했다.

드디어 꿈에 그리던 103호를 만난다.

그리고.

"명... 받듭니다."

어쩌면 그를 죽여야 할지도 모른다.

새로운 임무가 주어졌다.

목표는 103호. 그의 사상을 검증하라.

188.

#긴급회의

"끄아아아아아!"

지하 깊은 공동에서 끔찍한 비명이 메아리처럼 울린다.

개미굴 같은 미로로 되어 있는 이곳은 도라옥.

죄인들이 살아가던 지하 마교이자, 이제는 악몽이 되어버린 지옥이다.

"사, 살려... 꺼억!"

전라의 죄인들에게 그들은 사신과 다를 게 없었다.

마주치는 순간 스멀스멀 올라온 그림자가 숨구멍을 뒤덮고, 도망이라도 가려고 하면 핑! 손끝에서 쏘아진 지풍이 심장을 관통했다.

털썩, 털썩, 털썩.

마치 전염병이 번지듯 그들이 걸어가는 길엔 죽음만이 남겨졌다.

항변도, 저항도. 아무 소용 없었다.

그저 그들이 마음을 먹었으면 그것으로 끝이었다.

그렇게 모두가 죽어 나가던 그때.

그들이 문득 의문을 품게 된 건 뒤에 남은 이들에게는 그야말로 실낱같은 기적이었다.

"이상한데."

"...없다."

아무리 살피고 다녀도 보이는 것이라곤 일류 이하의 죄인들뿐. 자신들이 봉했던 절정 고수들이 없었던 것.

그마저도 수가 현격히 적었다. 이쯤이면 수백은 죽어야 했거늘, 기껏해야 수십.

의문은 의심으로 바뀌고, 세 갈림길 앞에 멈춰 서 있던 그때.

"죽어라-!"

"키야아아앗!"

어딘가에서 한 맺힌 외침과 함께 부나방들이 달려들기 시작했다.

"흐음."

"...사라져라."

좌사와 우사가 방향을 틀고, 저들에게 달려드는 죄인들을 섬멸했다. 멈춘 발걸음이 다시 움직여지고 끊임없이 달려드는 그들을 향해 걸어 나갔다.

"크학!"

"컥!"

물론 벌거벗은 죄인들과 크게 다를 건 없었다. 그저 옷을 입고, 무기를 들고, 의욕 넘치게 덤벼드는 것뿐.

하지만 딱 거기까지.

죽음까지의 시간은 공평했다. 순첩(?睫). 눈 한 번 깜빡할 시간.

그렇게 두 사람이 부나방들을 쫓아 들어간 곳은 태사의가 놓인 커다란 공동이었다.

그리고 그때 깨달았다.

"으음!"

"...이것들이 감히!"

자신들이 함정에 빠졌다는 사실을.

치이이익!

곳곳에서 심지가 타들어 가는 소음이 빗발치고, 주변을 둘러보자 사방 벽면에 쇠구슬이 잔뜩 박혀 있었다.

바로 진천뢰였다!

『암영귀혼공(暗影鬼魂功)』

『건곤팔괘진(乾坤八卦陣)』

콰과과과광-!

엄청난 폭발이 동시다발적으로 터지고, 좌사와 우사의 손에선 각자의 절기가 펼쳐졌다.

그리고....

거대한 화염과 흙먼지가 두 사람을 덮쳤다.

*

쿠구구구궁!

도라옥의 붕괴는 지상에서 대기 중이던 지대호와 호룡당에게도 영향을 미쳤다.

"무, 무슨!"

발밑에서 느껴지는 엄청난 진동에 모두가 혼비백산했다.

"당장 여기서 빠져나가라!"

심상치 않음을 느낀 지대호가 서둘러 지시를 내려보지만 이미 늦었다.

쿠우우우웅!

화구호가 와르르 무너져내리기 시작했다.

"으아아악!"

거대한 굉음과 함께 화구호는 푹 꺼지고 흙먼지는 하늘 높이 솟아올랐다.

마교 사상 초유의 붕괴 사고!

지대호와 호룡당마저 흔적도 없이 사라져 버렸다.

*

한편 도라옥이 무너져 내릴 그 시각.

이를 비웃듯 천산 서쪽의 관문 하나가 활활 불타오르고 있었다.

"크하하하하!"

"키히히히!"

이유는 하나. 불현듯 들이닥친 미치광이들 때문이다.

이들은 죄악에 굶주린 것처럼 무인들을 해치며 관문을 쑥대밭으로 만들어 놓았다.

걸린 시간도 고작해야 일각(15분) 남짓.

당연했다.

이곳에 들이닥친 자들의 수가 헤아릴 수 없을 정도였으니. 그야말로 메뚜기 떼가 농가를 덮친 수준.

"주사."

뒤에서 절 부르는 묵직한 목소리에 맹인처럼 눈을 감은 사내가 답했다.

"정리 끝났습니다."

보고를 올리자, 태산처럼 거대한 백발의 노인이 앞으로 걸어 나와 고개를 끄덕였다.

그의 이름은 운광.

도라옥의 왕, 천악수라다.

그리고 그의 뒤에 몰려 있는 수십 명의 절정 고수들이 바로 좌사와 우사가 찾던 사면자들이었다.

그들이 도라옥에 함정을 설치하고, 이미 한발 먼저 밖으로 빠져나와 있던 것.

"들어라."

그의 입에서 중후한 목소리가 흘러나오자, 불타는 성벽 앞에 죄인들이 일시에 무릎을 턱 꿇고 고개를 조아렸다.

"이들은 긴 세월 우리를 지옥에 가둬둔 채, 지상에서 기쁨과 행복을 누려왔다."

솨아아아아-!

대답 대신 구름마저 찢을 섬찟한 살기가 쏟아진다.

"하나 이제부터는 바뀔 것이다. 그들이 살던 이곳이 곧 지옥이며, 마교는 우리의 발아래 놓이게 될 것이다!"

우우웅!

뇌옥왕이 두 손을 펼친 채 공중으로 서서히 떠오른다.

이윽고 목걸이에 박힌 혈옥의 색이 더 진해지고, 그의 몸에서 수백 갈래의 붉은 빛줄기가 죄인들에게로 쏘아졌다.

끄아아아아아아!

으어어어어!

이에 화답하듯 비명이 쏟아지고, 이내 모두가 더 강렬해진 기운을 뿜어냈다.

그야말로 믿을 수 없는 경이적인 광경.

이후 뇌옥왕은 만족스러운 미소를 지으며 선포했다.

"지금부터 혈전(血戰)을 시작한다."

화르륵!

성루에 불길이 치솟아 오르고, 뇌옥왕 천악수라와 수십 명의 사면자들. 그리고 수백의 죄인들이 천산을 활보하기 시작했다.

마교에 초비상사태가 발생했다.

*

도라옥의 소식은 가장 먼저 장로원으로 향했다.

본래는 천마전부터 향해야 옳겠으나, 이를 전달해 줘야 할 광명사자가 사라진 상황.

무턱대고 아무나 들어가 고할 수는 없으니 긴급회의가 먼저 소집된 것이다.

"사장로께선 밖에 나가 있어 불참하였고.... 뭐 나머진 다 오신 것 같구려. 상황은 이미 들으셨을 테니 본론부터 말하리다."

둥그런 협탁에 앉은 여섯 명. 그중 육장로 마의가 침통한 얼굴로 먼저 입을 열었다.

"지금 붕괴된 곳을 파내는 중이오. 다행히 호룡당주와 당원들이 빨리 발견되었지만, 상태가 그리 좋진 않소."

마의의 말대로였다. 수많은 이가 매몰되었고 독산각의 의생들까지 동원돼 구조작업을 펼쳤지만, 시간이 흐를수록 상황은 악화했다.

물론 모인 이들은 마교의 장로들. 뼈 아픈 소식에도 눈 하나 깜짝하지 않는다.

하지만 그다음 얘기엔 반응이 달랐다.

"그리고... 아직 광명사자께선 소식이 없으시오."

음. 동시에 침음이 여럿 뱉어졌다. 광명사자가 누구인가. 자신들보다 윗세대 인물이자 극마지경에 오른 절세 고수들.

그제야 장로들의 표정이 사뭇 진지해졌다.

"폭음이 울렸다는 것으로 봐선 아무래도 광명사자께서 가실 걸 알고 기관진식을 설치해 뒀던 게 아닌가 싶소. 일부러 터트린 게지."

"그게 말이나 되는가!"

삼장로 맹철용이 일갈하며 반문했다. 전에 봤을 때보다 더 수척해진 얼굴이다. 하나 불같은 성미는 여전했다.

하지만 어쩌겠는가, 이미 정황이 그리 가리키고 있는데.

"못 믿겠으면 직접 가서 땅이라도 파보시든가."

마의는 코웃음을 치며 아니꼽게 반응했다. 비룡당주와 맹철용은 장이서를 죽음 직전까지 몰아세운 자들. 그땐 생각 없이 웃으며 대했지만, 지금 돌이켜보면 아주 괘씸하기 짝이 없다.

"자네...!"

뭐. 마의가 눈을 위아래로 부라렸다. 이에 마일성이 자중하라는 듯 입을 연다.

"좌사와 우사시네. 귀식대법(龜息大法)만 펼쳐도 족히 백 일은 버티실 일."

일장로의 혜안에 모두가 고개를 끄덕였다. 광명사자가 이리 쉽게 죽는다는 건 말도 안 되는 얘기.

이번엔 도인처럼 긴 수염의 이장로 천우산이 물었다.

"하면 죄인들은 어찌 되었나. 마무리는 된 것인가?"

"시체들은 계속 나오고 있다고 하더이다. 한데...."

"한데?"

"수가 부족하오. 뭐, 더 파봐야 알겠지만, 절정 이상의 경지를 가진 자들이 아직 하나도 발견되지 않았소. 그로 보아 아무래도 미리 탈출을 한 게 아닌가 싶소이다."

장로들의 입에서 탄식이 뱉어졌다. 그럼 놈들이 판 함정에 완전히 놀아난 꼴이 아닌가.

이건 절대로 있을 수 없는 일.

탕!

일장로 마일성이 협탁을 내리치곤 서늘한 목소리로 말했다.

"해서. 그놈들은 지금 어디 있는가."

마의는 입맛을 다시곤 말했다.

"서쪽. 아마 그쪽으로 향하고 있을 것이오."

드르륵! 의자가 밀려나고 마일성이 자리에서 일어섰다.

이를 따라 이장로 천우산, 삼장로 맹철용, 오장로 광교, 육장로 마의, 칠장로 이두쌍마까지.

당대의 마교 절대자들이 동시에 길을 나섰다.

사라진 도라옥의 죄인들을 잡기 위해.

*

누군가는 말했다. 위기는 곧 기회라고.

도라옥에서 시작된 불길이 천산 전역으로 번지자, 발 빠르게 움직이는 이들도 있었다.

"천 장로께서 보내오신 급보입니다!"

바로 대공자가 머무는 일소궁 흑화원이었다.

"그게 무슨 말이더냐. 광명사자가 실종됐다니."

"정확히는... 무너진 도라옥에 갇히셨다고 합니다!"

대공자 천무기는 너무도 믿기 힘든 말에 선을 그리다 멎었고, 보좌인 유령마군은 붕대로도 당혹감을 숨기지 못했다.

"하나도 아니고, 둘 다 말이냐?"

"그렇사옵니다."

광명사자란 말이 땅속에 묻힐 만큼 그리 쉬운 이름이던가. 하나 다른 이도 아니고 천가의 수장이자 이장로인 천우산의 전보다.

게다가 이야기는 여기서 끝이 아니었다.

"한데 더 큰 문제가 있습니다."

"이보다 더한 게 대체 무엇이냐."

"아직 확실시된 건 아니나 도라옥의 죄인들이 모두 탈옥한 것 같다고 하셨습니다."

천무기가 벌떡 일어섰다. 어지간하면 놀라도 티 내지 않는 성미거늘. 이번엔 도저히 숨길 수가 없었다.

바꿔 말하면 광명사자가 그냥 묻힌 게 아니라 죄인들에게 당했다는 얘기 아닌가.

"...큭."

한데 바로 그때,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반응이 나타났다.

"대공자님...?"

유령마군이 고개를 돌리자 천무기의 어깨가 흔들렸다.

그리고....

"크큭... 크하하하하하!"

도저히 참을 수 없다는 듯이 대소를 터트렸다.

대체 왜 이런단 말인가.

하나 곧 이어진 그의 말에 유령마군은 경악했다.

"이건 기회다."

"기회라니요. 본교의 위기 상황이 아닙니까."

"그러니까 기회인 것이다. 아직 모르겠느냐? 좌사와 우사가 해결하지 못한 일을 내가 해낸다면. 그럼 아버님께서 날 어찌 보시겠느냐."

"...!"

"그래, 이번 일만 해결하면 그 누구보다도 나는 소교주에 가까워지게 될 것이다."

유령마군은 전율이 일었다. 역시 생각 자체가 달랐다. 감히 누가 이 상황을 기회로 바꿀 생각을 할 수 있겠는가.

"놈들은 지금 어디에 있느냐?"

"아직 정확히 확인되진 않고 있사오나, 본래 서쪽으로 도망갈 계획을 세우고 있었다고 합니다."

"서쪽이라.... 그럴싸하구나. 드높은 봉우리가 많아 몸을 숨기기가 용이하고, 서문(西門)은 협곡에 자리해 지키는 이들도 월등히 적으니... 크크큭."

"예, 장로회에서도 그렇게 판단하고 서쪽 관문으로 향하는 중이라고 합니다."

"장로들에게 전령을 보내거라. 이제부터 이 일은 내가 직접 지휘할 것이라고. 또한 나 이외에 그 어떤 후계도 들여선 안 된다고 말이다."

"존명!"

드르륵!

그의 말이 끝나자 일렬로 쭉 늘어선 복도에 장지문이 차례로 턱턱턱 열리고, 좌우에 시립한 일백의 흑화위가 나타난다.

대공자는 그사이를 거침없이 나섰다.

기회는 먼저 움직이는 자가 잡는 것이다.

그리고 이번 일로 자신은 다른 그 어떤 후계보다도 더 높이 날아오를 것이다.

반드시.

천무기의 야욕 어린 미소가 음산하게 번졌다.

189.

#가설

- 월하촌 칠소궁.

천산이 들썩이던 그 시각.

"으랴아아아아!"

이른 아침 칠소궁 연무장에선 기합성이 울려 퍼졌다.

그 주인공 마오! 그가 창룡도를 양손에 움켜쥐고 용수철처럼 도약했다.

족히 일 장(3m)은 될 법한 높이. 그리고 온 힘을 다해 바닥을 내리친다.

콰앙!

하나 소리만 요란할 뿐, 대련 상대는 이미 한 발 옆으로 피한 뒤다. 이내 개구리처럼 앉아 있는 마오의 이마를 찰싹 밀어 쳤다.

"억!"

뒤로 벌레처럼 발라당 넘어지자 상대의 발이 가지런히 목젖을 누른다.

태양을 등지고 씨익 웃고 있는 사악한 보좌.

장이서다.

"큭...."

마오는 오만상을 찌푸리며 침통함에 빠졌다.

그간 수련에 수련을 거듭하여 이젠 좀 해볼 만하다고 생각했거늘.

'장이서, 나랑 딱 세 판만 붙자! 삼판일승제 알지?'

'그럼 한 판만 하면 되지. 왜 세 판이나 합니까?'

'덤벼, 이 자식아!'

그리고 19전 19패.

"어째서...!"

심지어 한 대도 때려보지 못하고 완패했다.

도저히 이길 수 없는 상대.

그런 점에선 구유랑 비슷한데, 느낌은 전혀 달랐다.

구유가 넘을 수 없는 철옹성처럼 느껴졌다면, 장이서는 묘하게 만만해 보이는데 엇? 하면 패배해 있었다.

꼭 지렁이인 줄 알고 밟았는데 알고 보니 천년 묵은 뱀 같은 느낌.

'장이서, 저 자식. 가만 보면 별거 아닌 거 같은데, 허투루 움직이는 법이 없다니까.'

까막눈이던 때는 몰랐던 게 이제는 조금 보였다. 장이서의 수준이 얼마나 대단한지.

분명 내공만 놓고 보면 별거 아닌데, 움직임과 수 싸움은 그저 혀를 내둘렀다.

하도 당하다 보니 이제는 장이서의 움직임 하나하나가 끌어들이려는 허수인지. 아니면 진짜인 건지 분간도 되지 않았다.

차라리 몰랐을 땐 마구잡이로 덤비기라도 했는데. 이젠 제대로 공격도 못 해보고 움찔하다가 끝이 났다.

"무작정 상대를 본다고 다가 아닙니다. 나의 움직임도 봐야 합니다. 내 공격이 실패했을 때. 어디가 비는지, 어떤 문제가 생기는지를 알아야 대처할 수 있습니다. 창룡도는 동작이 큰 만큼 빈틈도 큽니다. 그러니 한 번에 끝낼 거란 생각은 버리십시오. 머릿속으로 다음 수를 생각하고, 연계(聯繫)해야 합니다."

장이서가 다정히 웃으며 가르침을 내렸다.

"연계...."

마오는 과거와 달리 한껏 진지한 눈빛으로 생각에 잠겼다. 뭔가 알 듯, 말 듯 한 기분.

그리고 그런 마오를 살피는 장이서는 내심 흡족했다.

얼마나 열심히 수련했는지 손바닥에 갑옷처럼 서린 단단한 굳은살만 봐도 짐작할 수 있는 일.

"근데 장이서. 이 발은 언제 치울 건데. 나 숨이 잘 안 쉬어지거든?"

마오가 모기 같은 목소리로 장이서의 발목을 탁탁 두드렸다. 그리고 그때 덜컥! 대문이 열리고, 과평의 호위를 받고 온 홍란이 질린 얼굴로 다급히 외쳤다.

"광명사자께서 도라옥 정벌에 실패했고, 죄인들은 지금 서쪽으로 도주 중이라고 합니다! 그리고... 호룡당주께서 위독하시대요!"

"뭐?!"

칠소궁에도 닿았다.

먹구름으로 가득한 천산의 소식이.

"꺼흑...!"

숨넘어가는 마오의 처절한 비명과 함께.

*

정원 협탁에 둘러앉은 칠소궁의 식솔들.

다들 표정이 썩 좋진 않았다. 고작 하루 만에 마교의 패전 소식을 듣게 될 줄 누가 알았겠는가.

게다가 호룡당주 지대호는 칠소궁에 우호적인 몇 안 되는 지인 중 하나. 그가 위중하단 소식은 장로들의 반응과 달리 어두웠고, 침울했다.

"빌어먹을 자식들. 그래서. 지금 다들 서쪽에 모여 있다고?"

상석에 앉은 마오가 묻자 홍란이 차분히 대답했다.

"처음엔 장로회만 움직였지만, 대공자께서 지휘권을 잡으신 뒤로는 대주들까지 속속들이 모이고 있다고 합니다."

"큰형님이?"

"예. 아무래도 광명사자께선 아직 생사가 불분명하고, 교주님마저 자릴 비우신 터라 가장 서열이 높은 대공자께서 직접 나서신 듯합니다."

"쳇, 그래도 한 식구라고 화는 나나 보지? 이럴 땐 큰형 같네. 어쨌든 잘됐어. 우리도 가서 돕자."

마오가 주먹을 불끈 쥐고 결사를 다진다. 나름 순수한 의협심이다. 하나 대공자도 이와 같을까? 아니. 그건 아닐 것이다.

장이서가 차분한 어조로 말했다.

"어차피 들여보내 주지도 않을 겁니다."

"왜?"

"광명사자 두 분과 호룡당주께서 당한 일입니다. 그들이 하지 못한 걸 자신이 해냈다는 공을 세우고 싶은 거겠죠. 대주들을 불러 모으는 동안, 저희한텐 아무 연통도 없었던 것 역시 같은 맥락일 겁니다."

"에이, 설마.... 라고 말하고 싶지만, 그 인간은 그러고도 남지."

마오가 미간을 와락 좁혔다. 이미 마가에서 한 번 겪지 않았는가. 졸렬하게 마가칠객과 싸움이나 붙이고.

"어쨌든 도라옥 놈들을 잡을 수만 있으면 됐어. 그 정도면 잡겠지. 근데 천산에 있는 건 확실하대? 벌써 도주한 거 아니야?"

홍란이 고개를 저으며 대꾸했다.

"서쪽에 있는 관문과 마을 하나가 새벽에 불타올라 멸문지화를 당하였어요. 수를 예측하기 힘들 만큼 현장이 어지러웠던 반면, 아직 서문 쪽은 잠잠한 것으로 보아...."

"다른 곳으로 빠져나간 게 아닌 이상 천산 안에 있는 건 확실하다는 거군."

장이서가 답하고 홍란은 고개를 끄덕였다.

"예. 더구나 관문에서 다수가 서문 쪽으로 향한 건 이미 확인이 되었고, 근처에 산봉우리가 많아 숨을 곳도 많으니.... 아마 근처에서 기회를 엿보고 있는 게 아닐까 싶습니다."

가장 합리적인 추론이다. 이에 잠자코 듣던 구유가 고개를 갸웃하며 물었다.

"근데 숨은 놈들을 어떻게 찾지?"

일리 있는 얘기. 멀리서 봐도 천산은 끝이 안 보이는 산맥이다. 아마 찾으려면 드높은 서쪽 봉우리 수백 개를 다 뒤져야 할 판. 보통 일은 아니다.

하지만.

"아마 대공자는 찾을 생각이 없을 거다."

장이서는 고개를 저었다.

"그게 무슨 말인가."

"황야로 이어지는 서문은 협곡 사이의 외길. 나머지는 까마득한 절벽이라 나가려면 반드시 그곳을 지나야 하지. 들어오는 길도 마찬가지야. 그들이 부순 관문을 지나야만 해."

"그럼...."

상황이 훤히 그려졌다.

대공자는 입구인 관문과 출구인 서문에 병력을 둘로 나누어 배치했을 거다.

흩어져서 산을 뒤지는 것보다 입구와 출구를 막아 굶주린 죄인들이 알아서 기어 나오게 만드는 것.

이른바 봉쇄 작전이다.

장이서의 설명에 홍란이 감탄한 표정을 지으며 마저 답했다.

"예. 대공자는 시간을 끌려고 하는 듯했어요. 이미 금룡당에 한 달 치 식량을 가져오라고 지시도 해놓았다고 합니다."

"대주들까지 다 모아 놓고 한 달 치라니.... 설마 대곡고(大穀庫)의 문이라도 열 셈인가?"

"아무래도 그런 것 같습니다."

장이서의 이마가 찌푸려졌다. 대곡고는 만일을 대비한 초대형 곡식 창고.

천산 자체가 워낙 험지이고, 운이 나쁘면 끝없이 폭설과 폭우가 몰아치는 터라 대량의 곡식을 쟁여둬야 했다.

그래서 만들어진 것이 바로 대곡고.

최후의 보루인 만큼 꼭 필요한 상황이 아니면 누구도 문을 열 수 없다고 알고 있거늘....

"막무가내군."

장이서가 탐탁지 않다는 듯 중얼거렸다.

솔직히 지대호를 생각하면 당장 도라옥의 죄인들을 깡그리 잡아 처넣고 싶은 심정이다.

아무리 첩자로 사는 처지라 하나 그는 제게 진심으로 호의를 베푼 몇 안 되는 지인이었으니.

한데 상황을 보아하니 대공자가 맥을 한참 잘못 짚고 있는 듯했다.

"무슨 문제라도 있는 것인가?"

장이서의 표정에 의아함을 느낀 구유가 물었다. 이에 장이서가 고개를 끄덕였다.

"아무래도 이상해."

"음?"

"대체 왜 지금일까."

모두가 의문에 휩싸이고, 마오는 눈을 동그랗게 떴다.

"왜 지금이냐니. 지금이 지금이니까 지금인 건데."

아니, 그딴 뜻이 아니고.

"도주는 속전속결이 생명이지. 한데 뇌옥왕이 지금 하는 짓은 그것과는 거리가 멀어."

그랬다. 이공자와 손을 잡았을 때 빠져나갈 기회는 얼마든지 있었다.

"에이, 그거야 죄인들 모두를 데려가려다 보니 신중을 기하다 늦어진 거겠지."

그래, 그럴 수도 있다. 하지만.

"왜요."

"어?"

"뇌옥왕이 죄인들을 모두 데려갈 이유가 무엇이냔 말입니다."

"그거야... 같은 죄인으로서 오래오래 함께한 초록동색의 마음?"

퍽이나.

"인정이라곤 쥐뿔도 없는 본교에서. 그것도 죄인들만 모아 놓은 도라옥에서 말입니까?"

다들 말문이 턱 막혔다. 맞는 말이다. 뇌옥왕이 진짜 왕도 아닐뿐더러, 성군일 리 없는 일. 한데 뭣 하러 나약한 다른 죄인들까지 다 살리려 한단 말인가.

"마을을 공격한 것도 그렇습니다."

장이서는 자신의 생각을 가감 없이 털어놓았다.

"생각해 보십시오. 한밤중에 도둑놈이 나 여깄다고 불 지르고, 소리 지르면서 도망가는 것 본 적 있습니까?"

듣고 보니 그것도 그렇다. 간신히 도주해놓고, 왜 불을 지른단 말인가.

"뒤쫓는 일을 하려면 그들의 마음도 알아야 합니다. 이 와중에 불을 질렀다는 건...."

장이서가 말끝을 흐리자 구유가 눈을 번뜩이며 답했다.

"일부러 이목을 끌었다는 건가?"

"그래, 맞아."

장이서처럼 총명한 건 아니나, 그는 전장의 용. 적들에게 둘러싸였을 때 탈출을 강행한 경험이 두루 있었다.

한데 도망치는 자가 저리 요란을 떤다는 건 의도가 없고서야 불가능한 일.

"특히 마을은 더더욱 건드릴 이유가 없었어. 오랫동안 도주로를 모색하고, 숨어서 동태를 살필 만큼 신중한 녀석들이 벌였다기엔... 모순적이잖아."

"와."

마오가 손뼉을 친다. 모두가 그제야 수긍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확실히 생각할수록 이상한 일이긴 하다.

"그럼 그렇게 하는 이유도 알고 있나?"

"도주하는 자가 요란을 떨 때는 뻔한 일이지."

장이서가 검지 하나를 추켜세웠다.

"혼선. 처음부터 목적은 탈출이 아닐 수도 있다."

"...!"

모두의 안색이 파리하게 굳어졌다. 탈출이 목적이 아니라니. 마오가 믿을 수 없다는 듯 물었다.

"그럼 대체 이렇게 일을 크게 벌인 이유가 뭔데."

"그건 이제부터 알아봐야죠."

"하...."

"하지만 상황이 좋지 않습니다. 대공자가 불렀다면 대부분의 세력이 모두 서문으로 갔을 것이고, 이는 곧...."

"서문은 안전하다?!"

"본산이 위험하다는 겁니다."

"이럴 수가!"

물론 그들이 노리는 게 본산에 있다면 말이다.

"한데 형님, 너무 과한 것 아니오? 아까 루주도 그랬잖소. 다수가 서문 쪽으로 향한 흔적이 발견됐다고. 이미 정황도, 심증도 확실한 일 같은데?"

과평이 맹점을 찔렀다. 이에 장이서는 부정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어디까지나 가설일 뿐이다."

게다가 가능성도 작았다. 이 가설이 맞아떨어지려면, 뇌옥왕은 언젠간 저들이 발각될 것도, 광명사자가 도라옥에 찾아올 것도, 하다못해 대공자가 서문으로 세력을 모으는 것까지도.

모두 사전에 치밀하게 계획된 것이어야만 가능한 일이었으니.

그리고 무엇보다도 그들이 목숨보다 더 중히 여기는 무언가가 있어야만 했다.

그게 복수든, 아니면 혈교든.

"어차피 서문 쪽은 우리가 안 나서도 충분해. 지금은 다른 쪽을 알아보는 게 나아. 일단 홍란은 각 관문에 수상한 자들이 없었는지...."

바로 그때였다.

콰아아아앙-!

굳게 닫힌 대문이 굉음과 함께 터져나갔다.

모두가 흠칫 놀라며 고개를 돌렸고, 그때 깨달았다.

"크큭, 여기 다 모여 있었네?"

어쩌면 장이서의 가설이 맞을지도 모른다는 것을.

히죽 웃으며 두 개의 손도끼를 들고 나타난 곱슬머리의 장신.

"너...."

"내가 말했지. 또 보자고. 오늘을 얼마나 기다렸는지 알아? x발 기다리다 돌부처 될 뻔했다."

사씨 형제의 둘째.

광견, 사호정.

"그간 잘 살았냐, 이 뱀 새끼야!"

쐐애애애액!

그가 내던진 손도끼가 맹렬히 회전하며 장이서를 향해 날아들었다.

콰직! 이에 구유가 협탁을 뒤집어 이를 막아낸 순간.

"싹 다 조져!"

키히히히히히!

키하하하하!

살의에 빠진 도라옥의 죄인들이 칠소궁에 들이닥쳤다!

190.

#회개해라

"아무래도 상황이 잘못 돌아가고 있는 것 같습니다."

장이서가 차분히 일어서며 달려오는 이들을 살폈다.

대체 몇 명을 끌고 온 것인지 쉴 새 없이 안으로 밀려들어 온다.

신도들을 해하고 뺏은 건지 복색도 각양각색. 눈빛의 광기만 봐도 틀림없는 도라옥의 죄인들이다.

"뭐가 어떻든 일단 저 새끼들 치워버리면 되는 거잖아. 안 그래?"

스릉! 옆에 선 마오가 창룡도를 뽑아 들며 묻는다.

"마을에 불을 지른 놈들이군."

뒤집힌 협탁을 옆으로 내던지는 구유.

"분부만 내려주십시오."

「따르겠습니다.」

과평과 아신도 살기를 드러내며 장이서 주변에 선다.

"키하아아아-!"

이윽고 광기 어린 표정으로 칼을 휘두르며 달려드는 적들.

"옵니다!"

솨아아아-!

홍란이 백발의 마녀로 변모하며 외치는 그 순간.

장이서가 허리춤에서 단도를 스릉! 뽑아 들며 말했다.

"다치지 마십시오."

"누가 할 소리를. 가자!"

"존명."

짤막한 대답과 함께 서 있던 장이서의 신형이 순식간에 빛살처럼 쏘아져 선두의 적을 시원하게 갈랐다.

촤아아악!

"칵!"

그리고 시작된 난전.

"죽여라-!"

"키히히히히!"

도라옥의 죄인들과 칠소궁의 격전이 펼쳐졌다.

사호정은 뒤편에 서서 소 떼처럼 달려 나가는 수하들을 느긋이 살폈다. 손도끼로 제 손톱을 긁으며 여유까지 부렸다.

자신이 있었다.

도라옥에서 얻은 힘이면 모조리 다 박살 내 줄 자신이. 어차피 장이서만 빼면 나머진 볼 것도 없는 칠소궁의 벌레들 아닌가.

"x같은 새끼들. 너희 때문에 내가 인생이 x발, 말이 아니야. 어? 형 새끼 뒈지고, 집이며 직장이며 싹 다 날아가고. 나는 x발 또 그 거지 같은 지하 굴에 처박혀 늙은이 비위나 맞추고. 그러니까... 음?"

손톱을 다듬고 고개를 든 사호정의 눈썹이 꿈틀거렸다. 그러곤 점점 눈이 커졌다.

앞에 보이는 상황이 생각과는 조금. 아니 아주 많이 달라 보였기 때문.

"뭐야, x발."

마치 힘차게 쏘아졌던 파도가 모래사장을 찍고 맥없이 돌아오듯, 죄인들이 뒷걸음질 치며 돌아오고 있었다.

크아아악!

컥!

심지어 비명까지 내지르면서.

"뭐, 뭐냐고!"

분명 죄인들이 뱉어야 할 건 광기 어린 웃음이지, 저런 끔찍한 비명이 아니었다.

한데....

"카학!"

죄인 하나가 제 옆까지 날아와 철퍼덕 바닥에 쓰러진다. 고개를 떨궈 내려다보니 눈도 못 감고 즉사다.

사호정의 고개가 다시 앞으로 향했다.

그리고 보았다.

자신이 벌레라고 얕봤던 칠소궁의 식솔들이 죄인들을 압제하는 모습을.

하나도 아니고, 둘도 아니고 전부 다. 모두 절정을 넘어서는 진짜 고수들임을.

"오랜만이다. 너지? 내 마을에 불 지른 새끼."

"치, 칠공자...."

"철영이랑 장득이 만나면 안부 좀 전해라. 사과도 하고."

그제야 알았다.

옛날의 칠소궁이 아니라는 것을. 지금의 이들이라면 도살방이 백 번을 다시 살아나도 절대 이길 수 없다는 것을.

왜? 그만큼 강하니까.

"x발...."

『염화표풍(炎火飄風)』

화르륵!

거센 불길이 사호정을 덮쳤다.

"크아아아아악!"

*

죄인들의 습격은 다행히 큰 피해 없이 마무리 지어졌다.

아찔했던 건 칠소궁만 공격한 것이 아니라 월하촌에도 또다시 불을 지르려 했다는 것인데....

"이 새끼들. 내가 또 온다고 했지. 얘들아, 뭐 하냐! 조져라!"

"예, 형님!"

다행히 용태와 식구들을 비롯해 마을을 순찰 중이던 칠무위의 손에 불도 제대로 못 붙이고 모두 제압되었다.

그리고 불길에 휩싸였던 사호정은....

"다 죽여버린다-!"

전신에 붉은 힘줄이 도드라지더니, 흉포한 기운을 방출했다. 그러자 배후의 공간이 뒤틀리고, 복잡 미묘한 색으로 뭉개졌다.

"저건...!"

사도철과 갈문천이 펼쳤던 바로 그 마공이었다. 심지어 폭증된 기운만 놓고 보면 사도철보다도 한 수 위. 결코 만만히 볼 상대는 아니었다.

단지....

"죽여도 되나."

대진운이 나빴을 뿐.

"입은 남겨 둬. 아직 들어야 할 말이 있으니."

"그러지."

얘기를 듣던 사호정이 발끈해서 고장 난 광산 수레처럼 내달렸다.

"키아아아아!"

하지만 상대는 전장의 용, 구유.

이전보다 훨씬 강해지긴 했으나, 나락과도 비등했던 그와 감히 상대가 되겠는가.

"칵!"

호기가 무색하게도 몇 합이 지나기도 전에 나가곤드라졌다. 비현실적인 상황에 벌떡 일어나보려 했지만, 휘청거리며 다시 털썩.

"어, 어?"

문득 생각에 잠겼다. 혹시 주먹에 쇳덩이를 심었나. 고작 몇 대 맞았을 뿐인데 다리가 후들거리다니.

"자, 잠깐만."

잠시 후 발 앞에 그림자가 서리고, 그때부터 사호정은 무자비하게 처맞는다는 것이 뭔지를 알게 되었다.

"어, 어떻게 이런...?"

이제 와 이유를 찾기엔 너무 늦은 일. 열심히 처맞다 정신을 차려보자 어느새 그는 장이서와 별관에 의자 두 개를 놓고 마주 앉아 있었다.

"이 장면. 익숙하지?"

오랜만에 다시 찾아온 독대였다.

물론 방식은 조금 더 거칠어졌다.

"하나, 둘... 열."

"끄아아아악-!"

십초통(十秒痛)의 악몽은 아직 유효했다. 잊기엔 너무 강렬했고, 묻어두기엔 너무 최근의 일이었으니.

덕분에 대화는 빨라졌다.

"말한다고.... 말한다고! 이 x발 새끼야. 흑...."

성질머리는 여전하고.

"내공은 어떻게 되찾은 거지?"

"그건...."

"하나."

"사부! 아니, 왕에게 돌려받았다."

"천악수라를 말하는 거군. 그럼 아까 펼쳤던 괴이한 힘도 그에게 받은 건가?"

"그건...."

"열."

"x바아아아아아아알-!"

쾅! 쾅! 사호정이 두 발을 바닥에 내리찍으며 고통에 절규했다. 그러곤 넋이 나간 사람처럼 답했다.

"사부가... 준 게 맞아."

"그럼 너도 혈교의 사람인가?"

"뭐?"

떠보듯이 던진 질문에 사호정은 생전 처음 듣는 얘기라는 듯 반응했다.

"x발, 뭔 개소리야. 혈교가 왜 나와?"

흔들림 없는 동공과 울대, 느려지는 심장박동. 의문에 가득 찬 주름. 거짓은 아니다. 그럼 정말 모르는 건가.

"설마... 그 안에 혈교가 있었어? 하, x발, 이거 재밌네? 그러네. 갑자기 왕 놀이하는 것도 말이 안 되지. 그럼 누가 혈교인데. 사부? 아니면 그 새끼?"

"네가 말을 쉽게 하는 게 빠를까, 내가 열을 세는 게 더 빠를까."

x발 새끼.... 사호정이 애써 웃으며 말했다.

"군자검귀 주사라고. 맨날 눈 쳐 감고 다니는 새끼가 있다. 머리는 좋은데 하는 짓이 재수 없어. 이번 일도 다 그 새끼가 계획한 거야. 혼자 잘난 척은 x나게 해서 얼굴을 뭉개주고 싶은데, 사부가 싸고도니 건들 수가 있나."

군자검귀라. 계속해 보라는 듯 고개를 까딱였다.

"나 어릴 땐 그 새끼가 없었거든? 사부도 그냥 꼬장꼬장한 늙은이였단 말이지. 근데 이번에 가 보니까 그 새끼랑 같이 왕 놀이를 하고 있더라고. 노망났나 싶었는데, 지금 보니 맞네, 혈교. 그 새끼가 사부를 꼬드긴 거네."

눈매가 좁혀진다. 저리 말하는 걸 봐선 뭔가 있긴 한 건데. 솔직히 다 믿진 않는다. 애초에 사호정처럼 입이 가벼운 자들의 말은 오 할이 착각이나 거짓.

"그럼 여기에는 왜 온 거지?"

"내가 그걸 어떻게 알아, 병신아."

"열."

"끄아아아아아! 이 개새야아아아아! 어으... 흑...."

사호정이 고통에 발광하다 눈물범벅이 된 채 축 늘어졌다.

장이서는 턱을 괴고 노곤한 눈으로 지그시 바라봤다. 사호정 입장에선 그게 고통보다 더 무서웠다.

'저... 악귀 새끼. 지옥 가서도 잘 살 새끼.'

별별 욕이 다 떠올랐다. 물론 입 밖으로 나온 건 욕이 아닌 진실이었다. 살기 위한 투항.

"군자검귀가 기회를 준 거다. 널 죽일 기회. 사부의 진짜 제자는 내가 아니라 형이었어. 근데 네가 죽여버렸지. 그리고 사혼검귀도 없앴다며. 걔도 도라옥의 간부였다고. 그러니 널 살려두고 잠이 오겠어? 크큭."

어처구니가 없는 얘기. 저들이 덤볐다가 당해놓고 원망을 해? 치졸하기 짝이 없구나.

아무튼.

"근데 그들이 뭘 믿고 널 보낸 거지? 기세만 강하지, 실력은 네 형보다도 별론데."

"나 도살방의 광견이야!"

"언제 적 도살방이냐. 패망한 주제에."

"뭐, 이 새끼야?!"

잠시 고민에 잠겼다. 그러곤 픽 웃고는 답했다.

"내가 답해볼까. 그들은 널 내게 보낸 게 아니야."

"뭐? 크큭, 뭔 개소리야."

"날 원망할 수는 있어도, 하는 걸 보면 그리 멍청이들은 아닐 거 같거든. 내가 보기엔 다른 마을로 가라고 했는데, 네 멋대로 여길 온 거야. 너 원래 그런 애잖아. 말 더럽게 안 듣는 청개구리."

"...!"

사호정은 정신이 멍했다. 이 새끼 혹시 아까 같이 있었나. 순간 제 머릿속을 들어갔다 나온 줄 알았다.

맞다. 장이서의 말이 전부 맞다.

x발 새끼.... 사호정은 혀를 내두르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맞다. 군자검귀 그 새낀 처음부터 날 안 믿었거든. 내가 널 상대할 수 없을 거라고 이죽거리더군. 크큭. 건방진 새끼!"

충분한 사실 같은데. 무심히 바라보자 사호정은 군자검귀를 떠올리며 격분하더니 묻지도 않은 말을 술술 뱉었다.

"그 새끼가 나 말고도 사면자들을 불러다 일을 맡겼다. 마을을 태우라고. 일곱이었나? 몰라, 씨."

"그들은 어디로 갔지?"

"몰라. 그냥 흩어져서 아무 데나 태우라 그랬으니까. 이건 군자검귀 그 새끼도 모를걸? 나한테 여기만 가지 말라던데. 뭐, 그래서 왔지만. 크크큭."

장이서의 미간이 좁혀졌다. 수하들이 어디로 갔는지 알 필요도 없다는 건가.

그렇다면 이건 무조건 혼선을 주기 위한 작전이다.

하지만 이미 서문으로 모든 시선을 모아 놓고서 굳이 또 왜....

"좋아. 믿어주지."

장이서가 손을 탁탁 털고 일어섰다. 어쨌든, 그에게 알아낼 건 다 알아냈다.

사호정이 고개를 번쩍 든다. 그러곤 들뜬 얼굴로 웃으며 물었다.

"그, 그럼 풀어주는 거냐? 나 살려주는 거야? 그래야지. 풀어주면 내가 아는 게 또 떠오를지도... 어?"

투둑툭. 그때였다. 장이서의 검결지가 비수처럼 그의 혈을 짚었다. 사호정은 영문을 모르는 표정으로 코피를 주르륵 흘렸다. 그리고 서서히 몸이 굳어갔다.

"너...? 뭐야, 이거. x발. 뭐야?"

"사혈이다. 기혈을 막아놨으니 오래 견디진 못할 거다."

"x발! 재미없거든? 풀어. 뭔데, 이거!"

"마지막으로 할 말은?"

"야, 이 미친 새끼야! 말할게! 다 말한다고! 어! 사부가 가려는 곳이 어디인지 알아! 궁금하지? 궁금하잖아! 그럼 풀어. 풀라고, 이 뱀 새끼...!"

고함을 내지르던 사호정이 갑자기 석상처럼 굳는다. 그러곤 핏줄 서린 눈에 초점이 흐려지고, 고개가 픽 고꾸라졌다.

장이서는 무심히 내려다보며 말했다.

"회개해라."

사씨 형제의 둘째, 광견 사호정.

그의 허망한. 아니, 어쩌면 퍽 어울리는 최후였다.

별관 밖으로 나서자 입구 앞에는 식솔들이 궁금한지 옹기종기 모여 있었다.

"어떻게 됐어. 뭐래?"

191.

#지금 바로, 간다

마오가 어서 말해보라는 듯 재촉했다.

"별로 아는 게 없는 듯합니다."

"그럼 더 알아내야지. 나와봐. 내가 얘기해 볼 테니까. 야! 사오정! 내 말 들리냐? 쟤 반응이 왜 저래. 설마... 죽었어?!"

문 안쪽에 축 늘어진 사호정을 흘깃 보더니 눈이 동그래진다. 고개를 끄덕이자 입까지 벌려졌다.

"아니, 벌써 죽이면 어떡해!"

"알아낼 건 다 알아냈으니까요."

"아깐 아는 게 없다며."

"하나는 있었죠."

"뭔데, 그게."

"처음부터 다 계획된 일이라는 거."

"어...?"

방첩대에서 숨은 첩자들을 찾아낼 때 조원들에게 늘 하던 말이 있다.

상대의 앞에 서려면 흔적을 쫓지 말고 흐름을 봐라.

서문으로 탈출하기 위해 이공자와 손을 잡고, 서쪽을 탐방했다는 건 혼선을 주기 위한 거짓으로 판명됐다.

그 말인즉, 도라옥에 판을 짜는 녀석이 있다는 거다.

'그러니 처음부터 모든 걸 지우고 다시 생각해야 한다.'

애초에 그들은 누구의 도움도 없이 도라옥에서 탈출했었다.

이공자와 손을 잡은 건, 이미 빠져나온 이후.

조양악은 자신들이 도라옥을 숨겨줬다고 말했지만 틀렸다. 그들은 애초에 도움 따윈 필요가 없었다.

그러니까....

"놈들은 처음부터 다른 의도를 품고 이공자에게 접근한 겁니다."

"...!"

그렇다. 애초에 그들이 원한 건 다른 데에 있다.

"이공자는 오룡당을 등에 업고 있어 누구보다 정보력이 우세하죠. 덕분에 서쪽을 주시한다는 행적도 자연스레 들통나게 된 겁니다."

"그랬지. 근데 그게 왜."

"그게 이유입니다."

"뭐...?"

"자신들의 행적을 은밀히 노출하는 것. 그걸 노린 겁니다."

덕분에 마교는 그들이 서문으로 탈출할 것이라고 확정해 버렸다.

이소궁의 정보력을 믿었으니까. 대공자가 아무런 의심 없이 전력을 서쪽으로 배치한 것도 같은 이유.

"이공자를 만나기 훨씬 전부터 이미 놈들은 바깥을 활보하며 모든 준비를 마쳤을 겁니다. 그리고 준비가 끝나자마자 이공자와 접선해 저들을 알린 것이죠. 바로 지금과 같은 상황을 만들기 위해."

"미친놈들... 대체 무슨 짓을 벌이려고! 이러고 있을 때가 아니야. 놈들을 찾아야 해!"

마오가 파르르 떨며 입술을 질끈 물었다. 하지만 장이서는 놀랍도록 평온했다. 구유는 이를 보다 헛숨을 뱉었다.

"장이서.... 넌 놈들이 어디 있는지 이미 알아냈나 보군."

"지, 진짜야?!"

장이서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들의 계획은 완벽했다. 하지만 변수가 생겼다.

조양악이 상황을 불어버린 것.

그로 인해 일정이 당겨진 것.

하지만 무엇보다도 가장 큰 변수는....

하필 그걸 알게 된 자가 암각 최고의 요원 장이서라는 것이다.

"서문으로 시선을 끈 게 함정이라면 그들은 성공했어. 대공자가 모든 세를 끌고 와 진을 쳤으니. 한데 그런 상황에서 굳이 마을을 또 습격할 이유가 있었을까?"

확실히 이해가 안 되는 일. 이미 서쪽으로 충분히 시선을 끌었거늘. 굳이 왜?

홍란이 고운 손으로 제 입술을 만지며 말했다.

"이상하긴 하네요. 오히려 서문에 몰려가 있던 자들이 회군을 해올 텐데요."

"맞아. 좋을 게 하등 없는 일이지. 아무리 신중을 기한다지만 과해."

"그럼...."

"이 정도 계략을 짜낼 만한 자가 이리 나오는 경우는 하나뿐이지."

모두가 침을 꼴깍 삼키며 장이서의 말에 귀를 기울였다. 그리고 그가 말했다.

"이미 꺼내진 패를 감추려는 것."

"그게 무슨...."

"그들이 어디로 향했는지 이미 답이 나왔었다는 얘기야."

이게 대체 무슨 말인가. 모두 다 어안이 벙벙했다. 마오가 답답하다는 듯 물었다.

"그럼 뇌옥왕이 어딨는지 우리가 이미 알고 있다는 거야?"

"예."

"진짜 자신 있어서 그래?"

장이서가 지그시 쳐다보자 마오가 헛숨을 뱉으며 말했다.

"확신이네."

맞다. 만일 이 모든 게 계획된 일이고, 그 주최가 바로 혈교라면. 그리고 지금까지의 흐름에 그들의 진짜 행적이 숨어 있다면.

그렇다면 놈들이 노리는 건 오직 하나.

"본래라면 굳게 닫혀 있어야겠지만, 예기치 않게 문을 열어버리게 된 곳."

"설마...."

"대곡고(大穀庫)."

마교의 여분 곡식이 담긴 바로 그곳. 바로 그곳이 뇌옥왕이 노리는 곳이다.

"대곡고엔 기관진식이 설치되어 있어 정해진 이가 아니면 절대 열 수 없다고 들었는데...."

"놈들이 바로 그걸 노린 거야. 홍란, 지금 당장 서문으로 전서구를 보내. 당장 회군해야 한다고."

"예!"

"그리고 우리는... 지금 바로 대곡고로 간다."

칠소궁이 움직이기 시작했다.

도라옥의 왕.

뇌옥왕 천악수라를 막기 위해.

*

두두두두!

칠소궁에서 백여 필의 말이 모래바람을 일으키며 뻗쳐나간다.

장이서와 마오. 그리고 칠무위다.

그리고 월하촌을 벗어나면서 한 필은 갈래를 달리하며 다른 곳으로 향했다.

'부디 무운을 빕니다.'

멀어져가는 무리를 바라보며 가슴 깊이 기도를 올리는 여인. 머리까지 덮은 흑포(黑袍)를 걸친 홍란이었다.

그녀는 서문에 소식을 전하고자 전서구가 있는 곳으로 향했다.

본래라면 여기서 한 시진 거리에 있는 마을의 구사방(鳩舍房 - 전서구를 기르는 곳)을 가는 것이 맞겠지만....

'그건 너무 늦어.'

이제부터는 시간 싸움. 상대는 무공을 되찾은 도라옥의 죄인들이다. 그중 뇌옥왕은 극마로 추정되는 자.

만일 원군이 조금이라도 늦었다간....

'주인님이 위험해지신다.'

그것만은 절대 있어선 안 될 일. 홍란은 말머리를 돌려 빠르게 치고 나갔다.

그리고 오래지 않아 도착한 곳은.

"멈추어라!"

다름 아닌 가장 가까이에 있는 관문이었다. 먼발치서 거침없이 달려오는 그녀를 발견한 무사들이 소리쳤다.

"머, 멈춰!"

하나 설명하기엔 부족한 시간.

히이이잉!

거리가 가까워지자 안장을 박차고 그대로 성벽을 향해 경공을 펼쳤다.

무사들의 고개가 하늘로 들어 올려지고, 그녀는 이를 비웃듯 척! 성벽 위에 착지했다.

검은 머리의 미녀가 백발의 마녀로 화한 채로.

"치, 침입자다!"

삐이이이이!

무사들의 경보가 울리고, 삽시간에 포위하듯 모여든다.

스릉!

빼 든 무기를 겨누고 조금씩 그녀를 압박하지만, 누구도 쉽사리 덤비진 않았다.

이미 보여준 신위만으로도 저들 상대가 아님을 직감했기 때문.

"비켜라."

홍란이 섬찟한 말과 함께 휙! 팔을 휘젓자 그대로 강풍이 몰아쳐 무사들을 서너 걸음 뒤로 밀어냈다.

"어억!"

"윽!"

툭. 이어 그녀가 난간에서 바닥으로 내려서자 자발적으로 다시 두 걸음을 뒤로 물러섰다.

고수다. 그것도 절정의 고수.

"비키지 않으면 죽는다."

이어진 경고에 모두가 침을 삼켰다.

그야말로 일촉즉발의 순간.

"무슨 일이냐!"

무사들을 가르며 한 사내가 들어섰다. 이곳 관문의 책임자이자 수문장인 황지홍이었다.

그리고 그는 번번이 취선루에 도움을 받는 자 중 하나.

"루주?!"

그가 화들짝 놀라며 달려왔다. 이에 홍란은 눈을 질끈 감고 피어오르는 살욕을 간신히 억눌렀다.

오직 장이서를 구해야 한다는 일념으로.

그리고 언제 그랬냐는 듯 머리를 덮은 흑포를 걷어 올리며 앞으로 나아갔다.

본연의 모습인 흑발의 아름다운 미녀가 되어.

"아니, 대체 이게 무슨 일입니까? 여긴 어떻게 올라오신.... 다들 뭣들 하는 것이냐! 당장 칼 내려놓지 않고!"

그의 격노한 음성에 무사들이 황급히 납검 후 길을 열었다.

"루주께서 어찌 예까지.... 미리 말씀을 주셨으면 제가 마중을 나갔을 터인데. 허허."

홍란은 그의 입가에 손을 들어 올리곤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

"수문장님. 부탁 하나만 드려도 되겠습니까?"

"받은 것에 비하면 백 가진들 못하겠습니까. 말씀만 하십시오."

"지금부터 제가 말씀드리는 곳에 전부 전서구를 보내주십시오."

"당장 말입니까?"

"예. 당장."

동이 터 흑색 성벽이 회색으로 물들어가던 그 시각.

비둘기 다섯 마리가 드높은 창공으로 날아올랐다.

그녀의 염원을 가녀린 발목에 묶고서.

*

한편 마른 바닥을 다지듯 쉴 새 없이 새벽길을 달려온 장이서와 마오. 그리고 칠무위는 어느덧 대곡고 인근 남부 마을에 다다랐다.

"또...?"

그곳에서 할 말은 그저 '또'라는 말밖에는 없었다.

제 몸이 활활 타오르고 있음에도 아무 반응이 없는 쓰러진 사람들.

쩌적!

불길에 부서지는 가옥들.

"도대체...."

천산이 불타고 있었다.

벌써 폐허가 된 마을만 두 번째. 끔찍했다. 가슴 속에서 천불이 일었다.

그나마 다행인 것은....

"사, 살려주십시오!"

여긴 아직 살릴 사람들이 남았다는 것.

말에서 뛰어내린 마오가 용수철처럼 튕겨 나갔다.

그러곤 쓰러진 신도를 향해 칼을 든 죄인의 가슴을 갈랐다.

"키히히...힉?!"

촤아아아악!

핏물이 터져 나오고, 그대로 양분된 죄인이 뒤로 벌러덩 넘어간다.

이에 실실 웃으며 악행을 일삼던 살쾡이들이 모두 마오를 향해 고개를 돌린다.

"빌어먹을 새끼들."

마오는 제 가슴 깊은 곳에서 끓어오르는 살기를 느꼈다.

저 새끼들은 사람이 아니다. 어떻게 이런 짓을 벌이고 저리 웃을 수 있을까.

과거라면 아무것도 하지 못한 채, 그저 이빨만 물고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지금은 아니었다.

"구유-!"

분노가 서린 외침이 터져 나오자 파파파팟! 구유와 붉은 무복의 칠무위가 말을 탄 채로 거침없이 불타는 마을로 진입했다.

굳이 더 긴 설명은 필요 없었다. 주인이 원하는 건 하나.

「멸하라.」

마오오오오오!

칠무위가 함성과 함께 수십 갈래로 뻗쳐나간다.

끄아아악!

그리고 도라옥의 죄인들 입에선 더는 광기의 웃음소리가 들리지 않았다.

저들이 괴롭힌 마을 사람들과 똑같은 비명만을 뱉을 뿐.

*

한참의 시간이 흐르고.

"흐윽, 흑...."

곳곳에서 생자들의 곡성이 울렸다. 마오는 파르르 떨었다.

보면서도 믿기지 않았다. 이곳이 어디인가. 마의 종주라는 천마신교다.

한데 다른 곳도 아닌 천산에서 이런 참극이 벌어질 줄이야.

옆으로 다가온 장이서가 씁쓸한 어조로 말했다.

"...천산은 지금 무주공산과도 같습니다. 관문을 피해 부지불식간에 기습하는 저들을 막아낼 방도가 없는 거죠."

게다가 늦은 새벽이고 대부분이 서쪽으로 가 있어 소식 전달이 늦다. 사실 이게 제일 문제였다. 마을 하나만 불태우고 끝낼 자들이 아니기에.

"그럼 이 새끼들 잡을 방법은 없는 거야? 이대로 다 죽는 걸 알면서도 내버려 둬야 해?!"

솔직히 쉽지 않은 일이다. 어디로 갔는지도 알 수 없고, 무엇보다도 지금은 대곡고가 우선이다.

하지만....

장이서는 마오의 지금 마음이 분노에 찬 악심이 아니라 정대함으로 남기를 바랐다.

어찌해야 할까.

지그시 눈을 감고 생각에 빠진다.

"장이서...?"

이상함을 느낀 마오가 그를 부르자, 잠시 후 눈을 번쩍 뜬 그가 말에서 내려 단도로 바닥에 선을 긋기 시작했다.

"천산에 존재하는 마을의 수는 서른일곱 군데. 그중 아무 마을이나 노리진 않을 테고, 최소 백 명이 넘게 거주 중인 곳을 생각하면 딱 스물다섯 곳이 나옵니다. 그중 서부를 거르면 열아홉...."

마오의 입이 조금씩 벌려졌다.

약도였다. 지금 장이서는 죄인들의 동선을 추측하며 약도를 그리고 있었다.

192.

#그냥 두거라

"북부로 향했다면 집하촌. 하지만 그곳엔 소오가 있으니 괜찮습니다. 동부도 마찬가지. 지나려면 주마지를 넘어야 하는데 거긴 오공녀와 육공자가 머물고 있죠."

술술 뱉어지는 장이서의 말에 마오는 넋을 잃고 귀를 기울였다.

"남은 건 중부와 이곳 남부인데.... 중부 쪽은 그냥 지나쳤을 공산이 큽니다."

"왜?"

"마해산이 바로 앞에 있으니까요."

오룡당과 천마전이 자리한 그곳에 어느 죄인이 가고 싶겠는가. 그들의 복수심 이면에는 분명 공포심이 자리하고 있을 터. 그러니 남는 곳은 하나.

바로 이곳 남부다.

"대부분 이 근방에 몰려 있을 겁니다. 사호정과 출발한 시간도 비슷할 테니 멀리 가진 못했을 터. 예상컨대 이곳에서 1리밖에 있는 소촌, 3리 떨어진 웅주, 두을산 중턱에 있는 원연촌으로 향했을 가능성이 가장 농후합니다."

마오가 고개를 크게 끄덕였다. 문득 든 생각인데 도대체 장이서가 모르는 게 뭘까 싶었다. 솔직히 기대하고 물은 것도 아니었는데....

"그럼, 거기만 막으면 되는 거야?"

"확신은 아닙니다. 하지만 피해를 줄일 순 있을 겁니다."

마오가 표정을 굳히고 고개를 돌렸다. 수많은 신도의 통곡이 다시 귓가에 박힌다.

그리고 어느새 상황을 정리한 구유와 칠무위가 다가온다.

손끝이 파르르 떨리고, 이내 꽉 움켜쥔 채 마음을 굳혔다.

"지금부터 구유와 칠무위는 남쪽 마을로 가서 죄인들을 쫓아."

구유의 눈이 번뜩였다.

"무슨 말이지? 함께 대곡고로 가려던 게 아니었던가."

"거긴 나랑 장이서가 간다."

"...!"

"구유 넌 놈들을 찾아. 분명 인근 마을에 있을 거야. 못 찾겠으면 흔적이라도 찾아. 어떻게든 찾아서 전부 막아."

구유가 깊은 눈동자로 마오를 바라본다. 그러곤 시선을 장이서에게로 옮겼다.

진심인 것 같은데, 정말 그래도 되냐는 물음. 잠시간 시선을 맞추고 이윽고 그가 말에 올라탔다.

장이서가 그린 약도를 제대로 이해하기엔 천산에 있어선 문외한.

하지만 근방에 있는 걸 안 이상.

「아신! 놈들의 흔적을 찾아라.」

「예.」

전장의 화신인 저들만의 방식으로 찾아내면 그뿐이다.

칠소궁에 있는 기둥은 장이서만이 아니었으니.

"가자, 장이서."

그렇게 마오와 장이서. 그리고 구유와 칠무위가 각자의 방향으로 말을 타고 쏘아져 나갔다.

동이 트는 새벽.

천산을 구하기 위한 이들의 활약은 지금부터가 진짜 시작이었다.

* * *

한편 칠소궁이 천산을 지키기 위해 동분서주 중이던 그 시각.

대공자 천무기는 서문에 지어진 막사에 들어앉아 깊은 고심에 빠져 있었다.

'묘하구나.'

놀랍게도 돌아가는 상황에 그가 이상함을 느낀 것이다.

누가 말해준 건 아니었다.

그냥 느낌이 그랬다.

사실 장이서한테 번번이 당해서 그렇지. 독사처럼 예민하고, 영민한 게 바로 그다.

'정황은 확실했다.'

서문으로 향한다는 정보는 사전에 입수된 것이며, 실제 흔적도 다수 발견되었다.

'계획도 완벽했다.'

관문부터 서문까지 모든 입출로를 봉하였고, 천천히 숨통 조이듯 기다리기만 하면 되는 일이었다.

이보다 더 쉬운 일이 어디 있을까.

한데 바로 그게 문제였다.

'광명사자가 당했다. 천운이 따른다고 할지언정 그게 쉬운 일은 결코 아니지.'

그런데 그런 놈들이 너무도 허술하다. 이리 쉽게 포위되다니.

그 괴리감이 천무기의 신경을 자극했다. 마치 중요한 무언가를 하나 빠트린 기분.

'관문을 불태우고, 뒤이어 안쪽의 마을까지 불타 사라졌다. 남겨진 흔적만 보더라도 놈들의 머릿수가 헤아리지 못할 만큼 많다.'

하여 당연히 모든 죄인은 이 안에 있다고 단정을 지었다. 하나.

'오히려 수가 많으면 떨어져 나가는 부스러기는 눈에 안 드는 법이지. 만일 놈들 중 일부가 이곳이 아니라 천산으로 간 것이라면....'

생각이 깊어지던 천무기가 픽 웃고는 고개를 저었다.

괜한 생각이다. 쓸데없는 기우다.

놈들이 아무리 복수심에 눈이 멀었다 하더라도 이건 아니다. 뭐 하러 천산에 남겠는가.

그건 자멸의 길을 가겠다는 것인데. 겨우 얻은 자유. 하루라도 더 누리고 싶은 게 인간의 본능.

게다가 기껏해야 약해 빠진 도라옥의 죄인들.

무림은 수로 싸우는 게 아니었다. 한 명의 고수가 전쟁을 좌지우지하는 것이지. 걱정할 것 없다.

그렇게 다시 마음을 다잡고 얕은 숨을 뱉어내던 찰나였다.

"대공자님!"

그의 보좌인 유령마군이 다급히 들어섰다.

"음?"

이에 천무기는 그를 보자마자 고개를 갸웃했다. 둘은 서로 눈만 봐도 속내를 꿰뚫는 사이. 한데 그의 눈빛이 평소와는 조금 달랐다. 혼란스러워하고 있으며, 초조해하고 있었다.

"무슨 일이냐."

나지막이 묻자 그가 뒤를 한 번 흘기곤, 손에 들린 서신 한 장을 건넸다.

힐긋 살피곤 이를 받아 들자 그가 부언했다.

"아무래도 이곳에서 천산으로 빠져나간 자들이 있는 듯합니다."

"뭐?"

"제12 관문에서 급히 날아든 서신입니다."

12관문이라면 칠소궁 인근. 천무기가 고개를 갸웃하며 서신을 빠르게 훑어내렸다.

"이건...!"

그리고 경악에 휩싸였다. 월하촌에 죄인들이 출현했고, 다수가 대곡고와 다른 마을을 노리고 있다는 것.

하지만 무엇보다도 가장 간담을 서늘하게 한 것은....

[혈교 개입 유력.]

혈교. 바로 이 두 글자였다. 뒤통수를 퍽 후려 맞은 기분이었다.

머릿속에 경종이 뎅뎅 울렸다.

"누가. 누가 보내온 것이냐?!"

천무기가 매서운 눈매로 묻자 유령마군이 주저하듯 입을 열었다.

"그것이... 칠소궁입니다."

"뭐?!"

와락! 손안에서 서신이 구겨지고, 천무기의 이마에 짙은 노기가 서린다.

"또 장이서... 그놈이라는 말이냐?"

"아무래도 그런 것 같습니다."

장이서. 장이서. 장이서!

도대체 어쩌다 그딴 보잘것없는 놈의 이름이 번번이 제 귀에 박힌단 말인가.

"이미 일부 마을이 불탄 것도 확인되었습니다. 다만, 그저 살욕에 빠진 몇 놈만이 빠져나간 것은 아닐는지요."

그럴 수도 있겠지.

"무엇보다 장이서가 보내온 것이 마음에 걸립니다. 대공자님의 업적을 방해하려는 모략일 수도 있습니다."

그것도 맞다. 장이서는 그러고도 남을 놈.

하지만 천무기는 보좌의 말에 쉬이 호응하지 못했다.

왜냐하면....

'이건 장이서가 옳다.'

혈교라는 단어가 머릿속에 들어오는 순간부터 내내 불쾌했던 안개가 개운하게 걷혔기 때문이었다.

지금 상황이 이리 쉽게 느껴지는 이유? 간단하지 않은가. 그건 그렇게 짜인 함정이기 때문인 거다.

천산의 세를 이곳으로 모으고, 대곡고를 열게끔 하기 위한 함정!

"...."

분위기가 서늘해지고, 침묵이 길어지자 유령마군은 제 생각에 힘을 더했다.

"무엇보다도 그들이 굳이 대곡고를 노릴 이유가 없지 않습니까. 본진이라 할 수 있는 천산채나 마해산이라면 모를까. 얼토당토않은 억측입니다."

한데.

"정말 그리 생각하느냐."

대공자가 팔꿈치를 팔걸이에 걸치곤 턱을 괸 채 물었다.

"무슨 말씀이신지...."

"놈들이 대곡고를 노리는 이유가 정말 없다고 생각하느냔 말이다."

유령마군의 눈이 의문으로 가득 채워진다. 이유랄 게 뭐 있는가. 곡식이 날아가면 힘들기야 하겠다만, 다시 구하면 그만인 것을.

하나 천무기의 생각은 달랐다.

"척박한 신강에는 십만 신도를 먹여 살릴 식량을 구하기가 어렵다. 본교의 천년 역사에 중원을 침공한 이유 중 대다수는 이에 해당이 되지."

맞다. 하지만 19년 전, 당대 천마인 진우광이 평화 협정을 펼치면서 이 문제는 해결되었다.

중원에서 평화의 증표로 매년 대량의 곡물을 거래할 수 있게 보증해 주었으니.

"대곡고가 불타면 당장 돌아올 겨울이 고비다. 신강에선 이를 얻어낼 방도가 없고, 그럼 어찌해야겠느냐."

"중원에서라도 구해야겠지요."

"그래. 하지만 그도 쉽지 않은 일이다. 자그마치 십만 명이 짧게는 반년에서 일 년을 버텨야 할 양이다. 그 많은 걸 갑자기 어디서 구하겠느냐. 분명 말도 안 되는 값을 요구하거나, 불가능하다 말하겠지."

"하나 정파에서 이를 거절하면 지존께서 결코 가만히 계시지 않을 겁니다."

"그렇겠지. 하지만 놈들은 분명 거절할 거다."

"어째서입니까."

"작금의 평화가 신주오절 때문이라고 믿는 천치들이니까. 돌아서면 저들이 얼마나 나약했는지 새카맣게 잊고 짖어대는 놈들 아니냐."

유령마군의 붕대 사이로 눈이 번뜩였다. 이제야 진의를 깨달은 것.

그러니까 대곡고가 사라진다는 건 단순히 곡식이 부족해지는 게 아니라....

"전쟁이다. 19년의 평화가 깨지고 중원에 다시 피바람이 시작되는 것이다."

바로 이것이었다. 그리고 장이서 또한 단번에 이를 깨닫고, 대곡고로 서둘러 달려 나간 것이다.

최악의 상황만은 반드시 막아야 하므로.

"당장 회군하라 이르겠습니다."

유령마군이 고개를 숙이고 말했다. 하나 천무기는 입가에 미소를 드리운 채 고개를 저었다.

음? 이에 의구심을 품고 바라보자, 그가 노곤한 어조로 말했다.

"그냥 두거라."

"...!"

"장이서는 이미 날 속인 전례가 있는 놈이다. 그놈의 말을 내가 어찌 믿겠느냐."

유령마군은 순간 제 귀가 잘못된 줄 알았다. 방금까지 실컷 장이서의 말에 힘을 실어놓고, 이제 와 뭔 뜬구름 잡는 소리인가.

이에 따져 물으려는 찰나.

'설마!'

그의 음험한 미소를 보곤, 진짜 속내를 깨달아 버렸다.

"천하가 너무 오랫동안 조용하긴 했지."

전쟁이다. 천무기가 전쟁을 바라고 있는 것이다.

대곡고가 불타고, 그걸 빌미로 중원을 불태울 생각인 것이다.

혈교와 이 순간만은 뜻을 함께하겠다는 얘기!

"그 누구도 내 허락 없이는 관문 밖으로 나가지 못하게 하거라."

유령마군은 흔들리는 눈빛을 갈무리하곤 답했다.

"...존명."

그리고 홀로 남겨진 천무기는 입가에 비릿한 미소를 지으며 생각했다.

'장이서, 어디 한번 잘 막아보거라. 물론 네 말대로 진짜 혈교가 개입한 것이라면... 이번엔 알량한 머리만으론 살아남기 힘들겠지만 말이다. 크크큭.'

* * *

-사암산(蛇巖山) 대곡고.

비좁은 오르막길을 드높은 성벽이 우뚝 막아선다.

좌우에는 비탈진 숲이 놓여 난공불락처럼 느껴지는 이곳은 산 중턱에 자리한 거대한 요새, 대곡고.

히이이잉!

드디어 두 사람이 이곳에 도착했다.

얼마나 오래 달렸는지 먼지투성이가 되어버린 적발의 미공자.

"놈들... 아직인 거 같지?"

그리고 이에 막힘없이 답하며 내리는 사내.

"예. 다행히도요. 관문을 피해 오느라 늦어지는 모양입니다."

칠공자와 그의 보좌. 마오와 장이서였다.

"좋았어. 그럼 빨리 소식만 전하고 가자."

"무슨 오자마자 갈 생각부터 합니까."

"뇌옥왕은 극마라며. 늑장 부리다 나타나면 어떡해."

"참나. 아깐 멋이란 멋은 다 부리시더니. 불같이 화내던 분은 어디 갔는데요."

"오는 동안 식었어. 여기 산이라 추워."

"시끄럽고 따라오십시오. 대곡고가 불타면 이번 겨울은 둘 중 하나일 겁니다. 동사하거나, 아사하거나."

장이서가 대문 앞으로 걸어 나가자 마오가 인상을 찌푸리며 투덜거린다.

"겨울은 무슨. 그전에 나부터 전사하게 생겼구만."

말은 그렇게 하면서도 몸은 나란히 옆에 섰다. 장이서는 속으로 픽 웃으며 답했다.

"어차피 그것까지 각오하고 오신 거 아닙니까."

마오는 움찔하더니 쳇, 볼멘소리를 뱉고는 당당하게 말했다.

"후, 좋아.... 가보자고!"

이에 장이서가 고개를 끄덕이곤 대문을 향해 큰 소리로 외쳤다.

"보좌 장이서다! 칠소궁에서 나왔다. 문을 열어라!"

그러자 잠시 후 끼익하는 소음과 함께 천천히 양 문이 안으로 열렸다. 이어 금룡당을 상징하는 황색 무복의 무인들이 부복하며 일시에 외쳤다.

"칠공자님을 뵙습니다!"

193.

#대곡고

큼직한 창고로 가득한 산 중턱의 요새. 대곡고 안으로 들어서자 예상외의 인물이 두 사람을 맞이했다.

"껄껄, 이게 누구십니까. 안 그래도 한번 찾아뵈려 했거늘. 여기서 다 뵙는군요."

두툼한 손으로 포권을 취하는 넙데데한 사내. 눈꼬리가 선한 용처럼 시원시원하게 휘어진 자.

금룡당주 만금수였다.

마가에서 스치듯 마주했던.

"당주께서 여기 어떻게...?"

장이서가 마주 포권을 취하며 묻자 그가 크게 웃으며 답했다.

"껄껄, 그건 본인이 해야 할 말 같소만. 대곡고는 엄연히 금룡당에서 관리하는 곳 아니오. 두 분이야말로 이른 시간에 예까진 어쩐 일로 오신 겁니까. 설마 본인을 보러 온 건 아니시겠지요."

만금수는 저보다 아래인 장이서에게도 말을 높였다. 본디 성향이 친화적이기도 했고, 그에게 지대한 관심을 품은 탓도 있었다.

'보좌 장이서. 참으로 기묘한 자다. 어쩌다 떨어진 낙엽처럼 바람에 실려 날아갈 줄 알았거늘....'

만금수는 세상에 우연은 없다고 믿는 필연론자였다.

하여 이해할 수 없는 상황을 맞닥뜨리면 인과 관계를 밝혀내는 걸 참 좋아했다.

그리고 그런 의미에서 장이서는 그의 눈에 아주 재밌는 사내였다.

누군가는 그가 노군과 왕우를 쓰러트렸다고 하고, 또 누군가는 그의 총명함이 지금의 칠소궁을 만들었다고 했다.

반대로 그저 운 좋게 출세한 뜨내기라는 말도 있었다.

더구나 직접 번천검객을 쓰러트리는 것까지 봤음에도 믿을 수가 없었다.

한마디로 소문은 무성한데 실체가 없는 자. 한데 어찌 관심이 생기지 않을 수 있으랴.

"당주께선 혹 대공자께서 지시하신 일 때문에 오신 겁니까?"

장이서의 물음에 만금수는 정신을 차리고 호탕하게 답했다.

"오! 잘 아시는구려. 예, 그리되었습니다. 대곡고는 아무나 열 수 있는 곳이 아니니까요."

예상한바. 하지만 눈으로 보기 전에는 믿기 어렵다.

"대곡고는 어디 있습니까."

"껄껄, 갑자기 찾아오셔서 이리 묻기만 하시니. 무슨 연유로 그러는지 자초지종을 좀 설명해 주시지요."

"도라옥의 죄인들이 지금 이곳을 노리고 있습니다."

"음?!"

만금수가 깜짝 놀라 수하들을 둘러 살폈다. 하나 영문을 모르기는 모두 마찬가지.

"그들은 지금 서문에 있지 않습니까."

"성동격서입니다. 대곡고의 문을 열도록 상황을 만든 겁니다."

"...!"

주변에서 수하들과 짐을 나르던 쟁자수들이 멈칫거리곤 웅성거리기 시작했다. 이에 금룡당주가 싸늘히 주변을 훑고는 근엄하게 명했다.

"소란 떨지 말고 마저 하던 일들을 하거라."

그의 명에 다시금 멈췄던 시간이 돌아간다. 하나 이리 여유 부릴 때가 아니다.

"전서구를 보내고 싶었으나 이곳까지 직접 오는 것이 없고, 인근 마을로 보내기엔 발각이 걱정되어 쉬지 않고 달려온 것입니다."

"으음...."

"대곡고의 문은 아무나 쉽게 열 수 없다고 들었습니다. 아직 문이 열려 있다면 이를 닫고 모두 대피해야 합니다."

만금수의 휘어진 눈매가 일자로 펴졌다.

이곳이 어디인가.

본교의 중요지 중 하나인 대곡고다.

이 안을 지키는 금룡당의 무인들만 수백이오, 요새는 철옹성과도 같다.

어디 그뿐인가. 자신과 함께 온 최정예 당원들은 그 수는 적을지언정 모두 절정의 고수들이다.

무엇보다도 당주인 자신이 있지 않은가.

한데 도망을 치라니.

"금룡당을 너무 우습게 보는 것 아니...."

"혈교가 개입했습니다."

"크, 크흠?!"

금룡당주가 너무 놀란 나머지 기침을 터트렸다. 혈교라니. 별안간 이 무슨 황당한 소리인가.

하나 그의 말에 쐐기를 박듯 마오가 쌍심지를 켜고 윽박질렀다.

"이봐, 당주. 우리가 지금 놀러 온 줄 알아? 똑바로 들어. 지금 천산 텅 비었어. 여기 오는 동안 놈들 손에 불탄 마을만 두 군데야. 지금 무혈 사태가 벌어진 거라고!"

"으음?!"

유혈 사태겠지. 나와. 놀래키지 말고. 장이서가 마오의 소맷자락을 잡아끌었다.

"단도직입적으로 말씀드리겠습니다. 지금 이곳으로 오는 무리는 공력을 되찾은 도라옥의 고수들. 그중엔 극마의 고수가 함께하고 있다는 정황도 있습니다. 그러니 최선은 그들이 당도하기 전에 어떻게든 이곳을 막고, 대피하는 겁니다."

"그, 극마...!"

만금수의 휘어진 뱀 눈이 크게 출렁였다. 극마라면 이곳에 몇이 있든 다 죽은 목숨. 그래서 더 놀라웠다.

'그럼 칠공자와 장 보좌는 이리 위험한 걸 알면서도 이곳까지 찾아왔단 말인가? 대곡고를 지키기 위해?'

물론 직책만을 놓고 보면 그럴 수 있다. 천산을 책임질 후계 중 하나였으니. 하나 이곳은 희생의 가치를 존중하지 않는 천마신교.

한데 도대체 왜....

"우선 무공을 익히지 않은 신도들만이라도 밖으로 내보내시죠."

장이서가 다시금 진정 어린 말을 꺼내자 만금수는 침음을 길게 삼켰다.

"알겠습니다."

이내 부관에게 무어라 명을 내리는 듯하더니 앞으로 나서며 말했다.

"따라오십시오. 대곡고로 안내해 드리겠습니다."

장이서와 마오는 그제야 안도의 웃음을 짓곤 뒤따랐다.

이윽고 요새 가장 안쪽에 다다르자 드높은 절벽. 그리고 그 안에 박힌 거대한 철문이 모습을 드러냈다.

한데 그 모습이 아주 낯이 익다.

"저거, 천마전하고 똑같잖아!"

분명했다. 홈이 파인 초대형 철문. 이는 천마전과 천마고의 마벽과 유사했다.

"껄껄, 역시 알아보시는군요. 맞습니다. 이 또한 운철로 만들어진 본교의 보물이지요."

신물의 원재료인 운철. 본래 이 땅에 없어야 할 천외(天外)의 보물.

놀란 눈으로 바라보자 만금수는 자랑스레 설명했다.

"운철은 극히 귀하여 구하기도 힘들지만, 구한다고 하더라도 각기 고유의 힘이 달라 누구도 다룰 수 없다고 하지요. 한데 수백 년 전 구야자(歐冶子)의 후손이 본교에 나타나 지금의 신물들과 문을 만들었다고 합니다."

구야자. 들어본 바 있다. 천몇백 년 전 월나라의 인물로 야장의 시조 격으로 불리는 자.

그의 후손이 본교에 있었다니.

"그리고 저 문은 겉보기엔 천마전과 똑같아 보이지만, 실상은 정반대입니다. 내기에 반응해 문이 열리는 것이 아니라, 도리어 닿으면 문이 닫히지요. 하여 열쇠가 없는 한 그 누구도 이 문을 열지 못합니다. 설령 극마의 고수라 할지라도 말입니다."

"그, 그게 진짜야?"

"예. 이미 광명사자께서도 확인하신 일입니다."

이것이었구나. 대곡고의 문을 열 수 없는 이유가.

그렇다면 천만다행이었다. 열쇠만 숨기면 안전하다는 얘기.

"좋았어. 그럼 열쇠는 누구누구한테 있는데?"

"단 하나밖에 없습니다. 그리고 그건 제가 가지고 있지요."

"아깐 아버님도 열 수 있다며."

"그야... 지존이시니까요."

만금수가 머쓱하게 입꼬리를 길게 올린다. 이해하면 혀를 내두를 말.

극마의 공력도 삼켜버린다는 저 괴물 같은 문도 천마 앞에서는 무용지물이라는 뜻 아닌가.

도대체 그 인간은 못 하는 게 무엇일까.

고개를 휘휘 내젓고 말했다.

"그럼 아무 문제가 없는 거군요. 얼른 이곳을 빠져나가...."

그때였다. 만금수의 눈에서 모든 걸 내려놓은 듯한 막막함이 느껴진 것은.

어째서.

이내 무수한 발걸음 소리가 뒤에서 울렸다. 뒤를 돌아보자 쟁자수와 신도들이 포위하듯 지척에 모여든다.

"저들이 왜 아직 여기 있는 겁니까?"

대피하라고 한 자들 아닌가. 의문을 던지자 금룡당주가 뒷짐을 진 채 문을 바라본다. 그리고 씁쓸한 어조로 말했다.

"대곡고의 문은 한번 열리면 열두 시진(24시간)이 지나야만 다시 힘을 되찾게 됩니다. 그리고 이제 다섯 시진(10시간)이 지났군요."

뭐라고?! 휙 고개가 돌아갔다.

"지금 그 말씀은...!"

"도라옥의 죄인들이 오고 있다고 하셨습니까? 그렇다면 대피할 곳은 없습니다. 어차피 이곳을 잃으면 모두가 그 책임을 물어야 할 일. 죽더라도 이곳에 묻혀야지요."

쿵! 청천벽력이 떨어졌다. 충격에 빠져 두 눈은 갈대처럼 흔들렸다.

"그럼 맞이하는 수밖에 없다는 말이잖아!"

마오가 비명을 내질렀다. 그리고 만금수는 곱게 휘어진 눈으로 포권을 취했다.

"당주로서 예까지 알리러 와주신 두 분께 진심으로 감사드립니다. 이제 두 분은 그만 돌아가 주십시오."

축객령이다. 해탈한 눈빛. 책임은 자신들의 몫. 둘이라도 살아 도망치라는 얘기다.

하지만 본래 불안은 현실이 되고, 악재는 연달아 이어지는 법.

둥! 둥! 둥!

웅장한 북소리가 울려 퍼지고.

적이다! 적들이 나타났다!

먼발치 성문에서 커다란 고함이 떨어졌다.

이히히히히!

크하하하!

그리고 합창처럼 들려오는 광기의 웃음소리. 장이서가 인상을 찌푸리며 말했다.

"가기엔 이미 늦은 것 같습니다."

만금수는 가슴이 철렁였다.

그들이다. 도라옥의 죄인들. 그들이 이곳에 나타났다.

"부관! 당장 칠공자님과 장 보좌를 지하로 모시게."

어수선해진 상황. 만금수는 인자하고 여유 넘치던 목소리를 갈음하곤, 단호히 외쳤다.

"서쪽에 술을 저장해 둔 넓은 지하 창고가 있습니다. 입구를 찾기 어려우니 저들도 쉽게 알아채진 못할 겁니다."

"지금 나더러 거기 숨어 있으라는 얘기야?"

"칠공자님께서 잘 모르실 수 있으나, 저들이 정말 혈교라면 이건 실로 위중한 일입니다. 더구나 극마의 고수까지 함께하고 있다면... 목숨을 장담할 수 없는 일. 어서 가십시오. 장 보좌. 모시고 가게!"

만금수가 다급히 외친다. 이에 장이서는 심각한 얼굴로 마오를 보며 물었다.

"어찌하시겠습니까. 선택은 칠공자님의 몫입니다."

"내 몫?"

"예. 영웅처럼 장렬히 싸우다 죽든가. 아니면 시궁창 쥐새끼처럼 비굴하게 숨어 있다 죽든가."

"선택지가 왜 그따윈데! 사는 건 없는 거냐?!"

"어차피 각오하고 온 거 아닙니까."

"악담을 퍼부어라! 내가 이럴 줄 알았다니까. 일이 쉽게 풀릴 리가 없지. 싸우면. 방법은 있고?"

"어떻게든... 버텨봐야죠."

솔직히 아직 최악의 상황까진 아니다. 아직은 지킬 게 남았으니.

암울한 침묵 속에 마오가 신경질적으로 외쳤다.

"어이, 부관!"

"예? 예!"

"지하 창고 넓다고 했지. 그럼 당장 여기 신도들부터 데리고 가."

"예? 하, 하지만...."

부관이 슬그머니 넋 나간 당주의 눈치를 살핀다. 이에 마오가 불같이 화를 내며 말했다.

"누가 더 위인지 몰라? 뭐 해! 빨리 안 움직이고."

"예, 예!"

부관이 다급히 고개를 끄덕이곤, 신도들을 이끈다. 신도들은 눈물을 흘리며 감사하다고 고갤 숙였다.

마오는 어서 가라며 손을 휘휘 저었다.

"허어...."

그리고 만금수는 벌어진 상황에 입을 떡 벌렸다. 칠공자는 개망나니가 아니었나?

지금 뭐 하는 것인가. 정파 흉내라도 내는 것인가? 아니면 그저 치기 어린 자존심?

모르겠다.

하나 연장자로서 바라볼 때 이건 절대 옳은 선택이 아니었다.

특히 이를 흐뭇하게 바라보는 장이서는 더더욱!

"장 보좌. 지금 아주 큰 실수를 한 것이오."

"뭐가 말입니까."

"칠공자께서 죽을 수도 있다는 말이오!"

그럴 수도 있다. 인정한다. 하나.

"신도들을 두고 물러서는 자는 결코 본교의 지존이 될 수 없는 법입니다."

"...!"

"그러니 당주께서도 포기하지 마십시오."

뭘까. 이 어처구니없는 객기는. 애송이들의 허언이다. 그것도 목숨을 내던질 만큼 멍청한 망언.

하나 만금수는 말로 형용할 수 없는 기분에 휩싸였다.

심장이 말도 안 되게 뛰었고, 고뿔에 걸린 것도 아닌데 갑자기 목은 간질거렸다.

그리고 그 이유를 깨닫는 건 그리 오래 걸리지 않았다.

멋.

그저 말뿐인 게 아니라 당장 신도들을 위해 목숨을 걸고 싸우겠다는 저 두 사람에게서 사내로서 멋을 느낀 것이다.

신도를 등지지 않는 주인.

이 얼마나 당연하면서도 가슴이 저릿해지는 말인가.

세월에 찌든 자신으로서는 도저히 납득하기 어려운 말이기도 했다.

그래서 더더욱 가슴이 크게 울렸다.

"좋아. 이제 신도들은 무사할 거고. 장이서! 이제 뭐 하면 되는데?"

칠공자는 어찌 저리 환히 웃는가.

또한.

"뭘 묻습니까. 막아야지."

장 보좌는 대체 뭘 믿고 저리 당당한가.

만금수의 가슴에 돌덩이가 떨어져 내렸다.

부끄러웠다. 너무 부끄러워 고개가 숙어졌다.

의심과 불신. 그리고 기대와 희망.

이내 고개가 들리고, 포권을 취하며 가슴이 시키는 대로 외쳤다.

"신 금룡당주 만금수! 두 분께 진심으로 감복했습니다! 소신, 목숨 바쳐 이곳을 지키겠나이다! 명을 내려주십시오!"

19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