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8화 보내 준다고 할 때 갔어야지. (2)
펜리스 성에 도착한 일행들은 처참한 광경을 마주했다.
거지와 다를 게 없는 사람들의 모습.
삶의 희망을 포기한 듯, 그들의 눈은 꼭 죽은 생선의 눈처럼 보였다.
지셀은 눈살을 찌푸렸다.
"생각보다 상태가 나쁘군."
지나쳐 온 마을 상태를 보고 예상은 했지만, 설마 영주성 주변까지 이 모양일 줄은 몰랐다.
이건 영지의 잠재력까지 박박 긁어 빼 먹었다는 뜻이었다.
성을 지키고 있던 병사들도 별다를 건 없었다.
장비는 해어졌고 의욕이라고는 눈곱만큼도 보이지 않는다.
'반란을 일으킬 힘도 없는 거지.'
반란도 어느 정도 힘과 의욕이 남아 있어야 시도하는 거다.
죽기만 기다리는 사람들은 반항할 기운도 없어 보였다.
신임 영주가 온다는 소식을 들었을 텐데도 이들의 눈에는 절망만이 가득했다.
착취당하며 살아온 세월이 너무 길어, 누가 영주가 되든 믿지 않는 것이다.
페르디움도 가난하지만, 최소한 사람들이 이렇게 좌절해 있지는 않았었다.
다른 일행들도 혀를 차며 고개를 저었다.
전 영주가 얼마나 착취했는지 아무리 봐도 사람 사는 곳이 아니었다.
펜리스 영지는 쓸 만한 자원도, 특산품도 없다. 경작하기에 좋은 땅도 아니다.
영주가 풍족하게 지내려면 계속 영지민들을 쥐어짤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우리 영주님이 아니라 다른 사람이 영주가 되었으면 그대로 말라 죽었겠네.'
벨린다가 혀를 찼다.
그나마 룬스톤을 손에 쥔 지셀이 온 덕분에 희망은 생겼다.
영지민을 먹여 살리고, 영지를 발전시키는 데 가장 중요한 건 역시 돈이니까.
클로드도 그 사실을 깨닫고 마음을 다잡았다.
'영지를 발전시키려면 시간은 오래 걸릴 수밖에 없다. 그나마 영주가 돈이라도 많아서 다행이야. 버티기는 어렵지 않겠네.'
클로드는 지금까지 손에 넣은 정보를 다방면으로 가늠해 보았다.
'충분히 해 볼 만하다. 도전할 만한 가치가 있어.'
그는 이왕 이렇게 된 것 자기 능력을 보여 줄 기회라고 여겼지만....
지셀의 속마음을 알았다면 은혜고 뭐고, 목숨 걸고 도망쳤을 것이다.
아직 클로드는 지셀이 원하는 목표가 얼마나 큰지, 얼마나 빨리 달성하기를 바라는지 알지 못했다.
델파인 공작가가 지셀의 적이라는 사실도.
최측근인 벨린다와 길리언에게도 일부러 숨기고 있는 사실이었다.
당연히 만난 지 얼마 안 된 클로드에게도 전부 알려 줄 생각은 없었다.
증거도 없는 이야기를 꺼내서 괜히 혼란을 줄 필요가 없다는 이유가 제일 컸다.
차라리 델파인 공작가를 무너뜨리는 야망을 품었다고 하는 게 더 설득력이 클 터였다.
'아직은 아니야.'
지셀은 생각에 잠긴 클로드의 얼굴을 바라보다 이내 고개를 돌렸다.
어차피 공작가는 언젠가 그 모습을 드러낼 것이다.
진실은 그때 가서 알려 줘도 될 것이다.
* * *
지셀은 성으로 들어가자마자 바로 모든 관료를 소집했다.
수는 얼마 되지 않지만, 그나마 영지가 완전히 마비되지 않도록 최소한의 행정력을 유지시키고 있던 자들이었다.
관료들은 지셀을 보자마자 허겁지겁 고개를 숙였다.
"영주님을 뵙습니다. 언제 오실지 몰라 환영회를 준비해 두지 못했습니다. 잠깐만 시간을 주시면 금방...."
신임 영주가 부임하면 성대하게 연회를 여는 것이 관례였다.
관료들은 자존심이 상한 귀족에게 해코지당할까 봐 겁을 먹고 일단 머리부터 조아렸다.
"됐다. 그런 걸로 피곤하게 할 생각 없다."
지셀의 대답에 관료들은 당황했다.
진심으로 하는 말인지, 화가 나서 비꼬는 건지 파악할 수가 없었다.
그는 혀를 끌끌 차며 말을 이었다.
"이참에 말해 두지. 당분간 영주 성에서 연회를 여는 건 금지한다. 개인적인 행사까지는 막지 않겠지만, 영지민들에게 피해가 가는 건 용납하지 않겠다."
눈치를 보는 사람들을 내버려 두고 지셀은 바로 업무 지시에 들어갔다.
뜻은 확실히 전했다.
일일이 설명하고 이해시켜 가며 시간을 허비하고 싶지 않았다.
조금이라도 빠르게 영지를 안정시키는 게 급선무였다.
"영지 상태가 안 좋아 보이니 일단 영지부터 정상화해야겠다. 다소 강압적으로 느껴질 수도 있겠지만 잘 따라 주길 바란다. 언제든지 좋은 의견이 있으면 편하게 말하고."
모두가 고개를 숙이며 명령을 받들었다.
전쟁에 참여했던 자들은 이미 지셀의 손에 죄다 목이 날아갔다.
그걸 알고 있는 관료들은 감히 말대꾸할 엄두도 내지 못했다.
"기존 직책은 모두 폐지하고, 자문회도 새로 구성하겠다."
모여 있던 이들이 긴장해서 얼굴을 굳혔다.
관직이 어떻게 분배되느냐에 따라 지금까지 쥐고 있던 권력을 유지할 수 있을지가 결정될 터였다.
잠시 뜸을 들이며 사람들의 표정을 살핀 지셀은 곧 클로드를 가리키며 말했다.
"앞으로 여기 있는 클로드가 맡아 총관 자리를 맡아 정책을 세우고 시행할 것이다. 내 명령이라 생각하고 무조건 협조하도록. 행정 업무에 필요한 서기관 등도 클로드에게 임명권을 위임한다."
예상하지 못한 사람이 등장하자 관료들은 조금 놀랐지만 금세 수긍했다. 측근을 주요 자리에 앉히는 건 흔한 일이었다.
클로드도 당연하다는 표정을 짓고 있었다.
지셀은 처음부터 그에게 영지 관리를 맡기고 싶다고 했었다.
영지 상태까지 감안하면 총관 자리 정도는 줘야 클로드도 뜻대로 일을 진행할 수 있다.
지셀이 다시 말을 이었다.
"출납원의 재무관 또한 클로드가 맡는다."
이 말에 몇몇 사람이 놀라서 저도 모르게 소리를 냈다가 급히 입을 다물었다.
한 사람이 고위 직책을 두 개 이상 맡는 경우는 거의 없었다.
클로드도 조금 놀라긴 했지만 이내 금방 납득했다.
'하긴, 돈 관리까지 내가 직접 하는 게 더 빠르고 편하겠지.'
바쁠 때 재무 관리를 맡은 자와 실랑이하느니 일이 늘어나는 게 차라리 나았다.
그 정도는 처리할 자신이 있었다.
어차피 도망도 못 가는 상황에 권한이라도 많이 받으면 좋겠지.
하지만 지셀의 말은 끝난 게 아니었다.
"첩보관 또한 클로드가 맡는다. 산하 관료들도 알아서 뽑아 쓰도록."
클로드는 슬슬 안 좋은 예감을 느끼고 표정을 굳혔다.
그의 이마에 식은땀이 맺히기 시작했다.
'그, 그래. 정보는 중요하니까. 전쟁이 난 뒤에 부랴부랴 준비하느니 미리 알고 대비해 두는 게 좋지.'
하지만 지셀은 아직 끝낼 생각이 없어 보였다.
"외교부와 그 수장은 클로드가...."
"영지의 치안관은 클로드에게 맡긴다. 병사는 상황을 보고 충원...."
"전쟁 시 작전 참모로 클로드...."
"영지를 빠르게 발전시키기 위해 특수개발부를 신설한다. 그 수장으로 클로드를...."
"영지의 법을 새로 정비한다. 대법관은 클로드가...."
"물자 관리와 군수관의 업무는 클로드가...."
"영지의 상단을 창설할 것이다. 상단주는 클로드가...."
지셀의 말이 이어질수록 자리에 있던 사람들은 얼굴이 새하얗게 질렸다.
클로드는 부들부들 떨기 시작했다.
갑자기 오스턴에서 떠나기 전에 지셀이 했던 말이 생각났다.
― 걱정하지 마라. 뽑아 먹을 방법은 많다.
아, 그때 그 말이 지독할 정도로 진심이었구나.
'귀찮은 건 다 나한테 맡기겠다는 말이잖아! 도대체 얼마나 굴릴 생각인 거야!'
사실 영지를 관리하는 데에는 그냥 총관 자리 하나만 있어도 충분하다.
그런데 굳이 온갖 자리를 가져다 맡기는 건 모든 일에 직접 관여해서 확실히 처리하라는 뜻이다.
그런 사람이 있다. 뭐든 확실하게 결과를 봐야 직성이 풀리는 사람.
이 망할 젊은 영주는 안타깝게도 그런 쪽에 속한 모양이었다.
그런데 그걸 전부 직접 하기에는 매우 귀찮으니 자신을 끌고 와서 다 떠넘긴 것이다!
사람이 저렇게 일을 하면 죽는다. 그러니 영주도 떠넘길 사람을 데려온 거겠지.
영주보다 체력도 약한 자신이 버틸 수 있을 리가 없다.
클로드는 진지한 표정으로 읍소했다.
"남은 인생은 안나와 함께 보내고 싶습니다. 허락해 주십시오. 저는 여기서 살기 안 맞는 거 같습니다. 공기도 안 맞고 물도 안 맞고... 일도 안 맞고."
지셀이 시큰둥하게 물었다.
"같이 있으면 마음이 아프다며?"
"그런 건 다 시간이 해결해 줍니다. 그냥 멋있는 척해 본 겁니다. 아프니까 청춘이죠."
한 입으로 두말하는 꼴이 된 건 조금 창피하지만, 일하다 죽을 바에는 잠깐 쪽팔리는 게 낫다.
하지만 상대는 그렇게 만만한 사람이 아니었다.
"이미 늦었어. 네가 떠날 방법은 이제 한 가지밖에 없다."
"어떤...?"
지셀이 상냥하게 웃었다.
"돈 갚아. 그럼 바로 보내 주지."
"으으...."
클로드는 아무 대답도 하지 못하고 주먹만 쥐었다.
그놈의 돈 때문에 몇 년을 도박장에서 허비했다.
간신히 도박장에서 빠져나왔는데, 여기서도 돈 때문에 인생을 저당 잡혀 버렸다.
'이대로 물러날 수는 없다!'
클로드가 이를 악물었다.
어차피 죽을 거라면 할 말이라도 하고 죽자고 마음먹은 찰나, 뒤쪽에서 벨린다가 바락바락 따지기 시작했다.
"도련님! 무슨 일을 그렇게 많이 맡겨요!"
클로드는 눈을 빛내며 벨린다를 돌아보았다.
말로 사람을 패는 얄미운 여자이지만, 지금은 무척이나 고마웠다.
"저 사람은 도박 중독자에 폐인에 인생 포기자에 멍청이에 도망자에, 여자 마음도 몰라주는 한심한 놈이라고요! 변소 청소도 못 할걸요?"
'아니, 그 정도는 아닌데....'
편을 들어주는 게 맞기는 맞는지 모르겠다.
클로드가 웃는 듯, 우는 듯 미묘한 표정을 지었다.
그는 주변을 슬쩍 둘러보았다.
기존 관리들도 자신을 의심스럽게 바라보고 있었다. 무슨 일을 해 보기도 전에 선입견이 생길 지경이었다.
클로드가 벨린다를 말리려고 할 때, 이번에는 길리언의 묵직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영주님, 아직 능력이 검증되지 않은 인물입니다. 차근차근 하나씩 맡겨 보는 게 어떠신지요."
'그렇지, 저렇게 말해야지.'
역시 연륜이 다르다. 길리언은 그를 깎아내리지 않고 적당한 선을 지키며 지셀을 설득하고 있었다.
하지만 분위기가 나쁘지 않다고 안심하기가 무섭게, 길리언이 덧붙였다.
"도박에 빠졌던 자입니다. 도박이 머리를 망가뜨린다는 건 잘 알려진 사실이지요. 어쩌면 글도 잊었을지 모릅니다."
'야!'
클로드가 거멓게 죽은 눈으로 길리언을 노려보았다.
길리언은 아랑곳하지 않고 말을 이었다.
"그 정도까지는 아니더라도, 몸과 머리가 안 따라 줄 겁니다. 몇 년간 공부도 일도 안 한 상태이니까요. 권한을 많이 줄수록 그 힘을 악용해 도박이나 하면서 놀 게 뻔합니다."
벨린다보다는 정중한 어조였지만, 진지하게 돌려서 까는 게 기분이 더 나쁘다.
클로드가 당황해서 다시 주변을 둘러보았다.
이제 모두의 눈빛은 완전히 의심으로 물들어 있었다.
이리저리 흔들리던 클로드의 시선이 한 사람에게 꽂혔다.
붉은 머리에 건들건들하게 생긴 놈 하나가 고개를 삐딱하게 기울이고 서서 그를 노려보고 있었다.
'이름이... 카오르라고 했나?'
카오르는 지셀이 오스턴에 갔다 오는 동안 펜리스 영지에서 치안을 담당하고 있었다.
클로드와 만난 건 오늘이 처음이었다.
그런데 카오르의 눈빛은 처음 만난 사이에 보이기엔 너무....
'왜 저렇게 도전적으로 쳐다봐?'
그는 기선 제압이라도 하려는 듯 눈 하나 깜박하지 않고 클로드를 노려보았다.
그 모습을 본 클로드는 헛웃음을 내뱉고 말았다.
그는 도박장에서 건달들과 매일 구르며 살았고 반역까지 연루됐었다.
겨우 눈빛 하나에 기죽기엔 너무 파란만장한 삶을 살아왔다.
'이거나 먹어라.'
클로드는 남들 몰래 가운뎃손가락을 살짝 들어 올렸다.
그러자 카오르는 얼굴을 일그러트리며 허리춤에 찬 검에 손을 가져다 댔다.
하지만 당장 뛰쳐나갈 듯 부들부들 떨면서도 지셀의 눈치를 힐끔힐끔 보느라 움직이지 못했다.
'약 오르지? 영주 앞이라 못 움직이겠지?'
클로드는 아예 한술 더 떠서 엄지를 손가락 사이에 넣고 까딱까딱 흔들었다.
"이 새끼가!"
결국 카오르가 화를 참지 못하고 검을 뽑으며 뛰쳐나갔다.
99화 보내 준다고 할 때 갔어야지. (3)
"으헉! 뭐야?"
다짜고짜 달려드는 카오르를 보고 클로드가 깜짝 놀라 뒤로 물러섰다.
설마하니 진짜 달려들 줄은 몰랐다.
'이놈의 영지는 정상인이 없어.'
지셀은 말할 것도 없고, 그 밑의 수하들도 다 제정신이 아니다.
검이 클로드의 팔 하나쯤은 단번에 자를 기세로 날아들었다.
카앙!
하지만 언제 꺼내 들었는지, 길리언의 도끼가 검을 가로막았다.
"뭐야! 영감, 안 비켜? 저 새끼 버릇 좀 고쳐 놔야겠다고! 영감도 한 방 맞고 싶어서 그래?"
"까불지 마라. 감히 영주님 앞에서 검을 뽑다니, 죽고 싶나?"
"염병, 도끼는 괜찮고?"
"너를 막으려고 그런 거니 괜찮다."
두 사람이 으르렁대기 시작했다.
벨린다는 손으로 입을 가리며 놀란 척 내숭을 떨어 댔지만, 눈이 웃고 있었다.
클로드는 두 사람을 보며 헛웃음을 지었다.
그들은 어느새 자신에 대해서는 잊어버리고 자기들끼리 옥신각신하기 시작했다.
"그만."
지셀이 조용히 내뱉으며, 맞붙은 두 사람 쪽으로 검 하나를 날렸다.
파악!
두 사람은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동시에 뒤로 물러났다.
검은 그들이 있던 자리에 깊숙하게 박혔다.
"사람도 많잖아? 싸움은 나중에 밖에 나가서 해."
두 사람을 타박하면서도 지셀은 웃음을 감추지 않았다.
영주로서 권위를 지켜야 하니 일단 말리기는 했지만, 사실 그는 지금의 자유분방한 분위기가 무척이나 마음에 들었다.
전생에 함께 지냈던 용병단이 생각나기 때문이었다.
지셀은 힐끗 클로드를 바라보았다.
'저놈도 슬슬 원래 성격이 나오나 보네. 전생에도 나한테 손가락으로 욕하다가 얻어맞은 게 한두 번이 아니었지.'
클로드는 자기 능력에 자부심이 강했다.
그만큼 내뱉는 말에도 거침이 없는 자였다.
성질 더럽고 무식한 용병들과 얼마나 많이 부딪쳤는지 모른다.
'아, 그때 참 재미있었는데.'
클로드가 깐족거리며 용병들을 놀리고, 카오르처럼 발끈한 이들이 달려들었다.
그러다 보면 다른 단원들도 하나둘 끼어들어 주먹다짐을 하다가, 또 언제 그랬냐는 듯 같이 술을 퍼마시고 잠들었다.
지셀은 뒤에서 그 꼴을 보고 낄낄대며 술을 마셨다. 몸이 근질거리면 싸움에 끼어들기도 하고.
예의와 질서라고는 찾아볼 수 없었지만, 그때만큼은 아무 생각 없이 웃을 수 있었다.
'그래도 이제는 그때와 같을 순 없겠지.'
지셀은 씁쓸한 기분이 들어 고개를 저었다.
그는 옛 추억을 떠올리고 별말 없이 넘어갔지만, 펜리스 영지에서 일하던 관료들은 그러지 못했다.
'이, 이게 무슨 개판이란 말인가? 영주님 앞에서 칼을 뽑고 싸우다니!'
'수하들이 죄다 용병이라고 그랬었나? 천박하기 이를 데가 없구나.'
'저걸 그냥 웃으면서 넘어간다고? 영주님도 미쳤어!'
언제나 딱딱한 예법에 갇혀 살아온 이들은 지셀과 수하들이 보이는 자유로운 태도를 도무지 이해할 수 없었다.
전에 있던 영주는 영지민들을 쥐어짜기는 했지만 최소한의 품격은 지켰다.
다른 가신들도 서로 우아하게 말싸움하며 영주를 상대했지, 이렇게 막되어 먹은 자들은 없었다.
'산적 떼 같은 놈들이 왔구나. 영주도 용병 나부랭이랑 다를 게 없다니.'
'이, 이 영지는 이제 정말 끝이다.'
다들 아무것도 못 본 척 고개를 숙이고 식은땀만 흘렸다.
이미 몇 명이나 목을 날린 영주에게 예법을 따질 용기는 없었다.
지셀은 관료들이 심란해하는 이유를 오해하고 차분히 말을 이었다.
"아직 능력이 검증되지 않은 인물에게 많은 일을 맡기니 걱정이 큰 건 이해한다. 하지만 잘할 거니까 다들 걱정하지 마라. 그렇지, 클로드?"
"끄응...."
클로드는 자리에서 일어나 엉덩이를 털면서 주변을 둘러보았다.
대전에 있는 모든 사람이 안 그러는 척 자신을 훔쳐보고 있었다.
어쩐지 막막해져서 그는 눈을 질끈 감았다.
어디서부터 잘못된 걸까?
분명 지셀은 멋지게 말했었다.
― 루타니아의 펜리스 영지로 와라. 네가 능력을 발휘할 수 있게 날개를 달아 줄 테니.
날개를 달아 주긴 했다. 그 날개가 조금 많이 무거워서 문제지.
'젠장, 여기서 못 하겠다고 뺄 수도 없고.'
도박 중독자니, 멍청이니, 머리가 망가졌다는 소리까지 들었는데 이제 와서 못 한다고 하면 자기 꼴만 우스워진다.
평생의 빚을 진 건 사실이니 죽어라 한번 해 보는 수밖에.
클로드는 울상을 지으며 고개를 숙였다.
"열심히... 해 보겠습...니다...."
지금 당장은 어쩔 수 없지만, 상황을 봐서 하나씩 일을 덜어 내면 어떻게든 될 것 같았다.
그러자 지셀이 웃으며 한마디 덧붙였다.
"그래, 일이 좀 많은 거 같지만 초반이라 그래. 너라면 충분히 할 수 있을 거야."
진심으로 하는 말이었다.
전생의 클로드는 이 정도 일쯤이야 매일같이 해냈다. 때로는 이보다 더 힘든 일도 했었다.
가뜩이나 망할 대로 망한 영지라 꼼꼼하게 모든 걸 확인하고 키워야 하는 상황이다.
지셀이 생각해 둔 큰 틀 안에서 세부적인 사항들을 채우고, 갑작스러운 상황에도 빠른 판단을 내려 자체적으로 대응할 수 있는 사람은 많지 않았다.
"그 정도 능력은 되잖아? 안 그래?"
당장은 좀 막막해하는 것 같지만, 금방 적응하겠지.
지셀은 속 편하게 웃으며 클로드를 바라보았다.
결국 클로드는 한숨을 푹 내쉬며 고개를 끄덕였다.
영주가 저렇게까지 말하는데 대충 일하는 것도 자존심이 상한다.
"뭐, 일단 해 보고 힘들면 다시 말씀드리겠습니다."
"좋아. 더 필요한 건 없나?"
"아니요. 제발 가만히 계셔 주세요. 뭐 더 얹어 주려고 하지 말고요."
클로드가 기겁하며 손사래를 쳤다. 지셀은 영지를 관리하던 기존 행정관에게 영지 상태를 물었다.
"기사는 몇 명이나 남았지?"
"전쟁 중에 거의 다 죽고, 그나마 살아남은 사람은 영지에서 떠났습니다."
충성을 맹세한 영주가 죽고 자유가 된 자들이 이런 척박한 영지에 남을 리가 없었다.
아쉬운 일이지만, 지셀도 이미 짐작했던 일이기에 별다른 말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병사들은?"
"죄다 전쟁에 끌려가는 바람에 서른두 명만 남았습니다."
지셀은 잠시 고민하다 한숨을 내쉬었다.
"병력이 워낙 부족하니 군권을 맡을 자는 나중에 정하겠다. 벨린다는 집사장을 맡아 사용인들을 관리하도록. 가정 교사는... 이제 그런 건 안 하는 게 나을 거 같아."
"알겠어요."
벨린다는 생글생글 웃으며 대답했다.
'가정 교사 일에서 손을 떼는 건 좀 아쉽지만, 영주님을 모시는 사람들을 관리하는 일도 중요하니까.'
지셀은 길리언과 카오르에게도 당분간은 지금까지처럼 용병들을 훈련시키고 관리하는 일을 맡겼다.
이들을 위해서는 따로 생각해 둔 게 있었다.
가까운 수하들까지 챙기고 나서 지셀이 클로드를 돌아봤다.
"그러면 바로 일을 시작하지."
"네? 벌써요? 저 아직 영지 사정도 파악하지 못했는데요?"
"그거야 일하면서 파악하면 되지."
"아니.... 뭘 알아야 일을...."
클로드가 뭐라 말하기도 전에 지셀이 명령을 내렸다.
"인구 조사부터 시작한다. 오랫동안 수탈받은 영지이니, 산으로 숨은 화전민들이 많을 거다. 하나도 빠짐없이 찾아서 마을로 내려보내도록."
"아, 네...."
"영지민들이 굶고 있으니 식량도 대량으로 수입해야지. 최소 6개월은 먹일 수 있게 준비해라."
"인구 조사가 끝나야 6개월 치가 어느 정도인지 알 텐데.... 얼마나 사야 할까요?"
"그건 네가 파악해야지."
"제가요?"
"그럼 내가 하리?"
"...."
저렇게 말하면 클로드도 할 말이 없었다.
행정 업무는 전적으로 자신의 소관이 되었으니까.
지셀은 방향성만 제시해 주면 되는 일이었다.
다 언젠가는 해야 하는 일이 맞으니 클로드는 한숨을 내쉬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런데 그게 끝이 아니었다.
지셀의 입에서 온갖 명령이 와르르 쏟아졌다.
"식량 수급도 개선할 계획이다. 경작지를 파악하고 추가적으로 확보할 수 있는지 알아봐라."
"노후한 시설물들을 파악해 먼저 정비해야 할 것들을...."
"성벽과 성문을 보강할 테니 준비해라. 오면서 보니 엉망진창이더군. 군사들의 진입로를 우선으로...."
"영지의 각 도시와 마을들을 잇는 도로를 정비한다. 페르디움에 있는 마수의 숲까지 연결...."
"군수 물자의 현황을 파악하고 낡은 장비를 교체...."
"멀쩡한 우물이 몇 개나 있는지 파악하고 수로를 건설할 거다. 저수조를 채우고...."
"영지의 위생 상태도 개선해야지. 화장실도 다 뜯어고치고, 배수로를 확인해. 구덩이의 규격도 정해라. 지정된 자리에만 설치할 수 있게...."
"창고를 건설하고... 룬스톤을 비롯해 약재와 광석, 자재들을...."
"이것도 하고... 저것도 하고...."
끝도 없이 늘어나는 일에 클로드는 안색이 창백해졌다.
듣고 있던 다른 관리들도 마찬가지였다.
혹시나 자신에게 불똥이 튈까 봐 다들 고개를 푹 숙이고 있었다.
지셀은 지금 영지를 처음부터 끝까지 완전히 뜯어고치라고 명령하는 것이다.
그것도 클로드 단 한 사람에게.
지셀의 말은 끝날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클로드는 생존 본능에 따라 번쩍 손을 들며 영주의 말을 끊었다.
일에 치여 죽느니 지금 매 맞는 게 낫지!
"저 혼자 하기엔 일이 너무 많은데요!"
지셀이 황당해하며 한쪽 눈썹을 들었다.
"인사권 줬잖아? 사람 뽑아서 시켜."
"오."
클로드는 주변을 둘러보았다.
조금 전만 해도 그를 쓰레기 보듯 하던 사람들이 지금은 하나같이 그의 눈을 피하고 있었다.
클로드는 아무나 한 명 짚고 물었다.
"원래 뭐 하셨어요?"
"저는 그냥 군마 관리를...."
"아, 그래요? 그럼 군수 물자 관리도 하실 수 있겠네! 저랑 같이 일을...."
"제가 지병이 도져서, 슬슬 은퇴하려고.... 쿨럭! 쿨럭!"
클로드는 다른 사람들을 둘러보다 고개를 저었다.
지셀은 필요한 사람을 뽑아 쓰라 했지만, 뽑을 인물이 없었다.
고위 관료들은 전쟁에 참여한 죄로 지셀이 죄다 목을 날려 버린 지 오래였다.
그렇다고 하급 관리들을 윗자리로 올려서 쓸 수도 없었다. 모르는 일을 맡겨 봤자 소용이 없기 때문이다.
그들이 비운 자리도 어차피 다른 누군가로 채워야 하고.
'하긴, 쓸 만한 사람이 있었으면 날 여기까지 끌고 왔을 리도 없지!'
지셀이 직책을 잔뜩 맡길 때만 해도 일이 많을 건 예상했다.
하지만 이건 상상을 넘어서는 수준이었다.
어느 왕국의 재상이 와도 지셀이 맡긴 일은 다 못 할 것이다.
결국 클로드는 참지 못하고 버럭 소리를 질렀다.
"젠장! 결국 나 혼자 다 해야 하잖아! 못 해!"
그러자 지셀이 방긋 웃으며 말했다.
"에이, 해 봤어? 할 수 있다니까. 해 보고 말해."
"동시에 진행해야 하는 일이 너무 많잖아! 하나씩 시키라고, 하나씩! 나도 사람이야!"
"안 돼, 그럴 시간 없어."
지셀은 딱 잘라 말했다.
델파인 공작가가 왕실에 집중하는 지금 최대한 빨리 세력을 키워야 했다.
그러나 그 속사정을 모르는 클로드는 한번 해 보겠다는 마음이 싹 사라져 버린 뒤였다.
"나도 안 돼! 일에 치여 죽긴 싫다고! 죽일 거면 차라리 깔끔하게 목을 베라!"
클로드가 호기롭게 외쳤다. 지셀이 눈을 가늘게 뜨고 그를 보다 카오르에게 고갯짓했다.
카오르가 신이 나서는 검을 빙빙 돌리기 시작했다.
"어, 어? 진짜 베려고?"
클로드는 주춤주춤 뒷걸음질 쳤다.
도움을 청하려고 다급하게 주변을 둘러봤지만, 관료들은 하나같이 눈을 피하고 용병들은 오히려 도망갈 길을 막아섰다.
'장난이 아니구나! 미친놈, 저거 사람 새끼 맞아?'
이미 몇 번이나 진짜 미친놈이라고 감탄한 거 같은데, 계속 더더욱 미친 짓을 한다.
저런 자에게 빚을 졌으니, 그의 인생은 여기서 끝난 거나 다름없었다.
평생 노예처럼 이 거지 같은 영지에서 일만 하다 죽게 생겼다.
퍽!
그 생각에 이르자 클로드는 머릿속에서 무언가 터지는 걸 느꼈다.
'이 영지는 글렀어. 내 인생도 글렀고.'
충격적인 현실과 마주한 클로드는 그만 정신을 잃고 말았다.
100화 보내 준다고 할 때 갔어야지. (4)
클로드는 뿌옇게 흐려진 시야에 눈을 끔벅였다.
눈물 때문이었는지, 몇 번 눈을 비비자 금세 세상이 밝아졌다.
다행히 정신을 놓은 사이에 목이 잘리지는 않은 모양이었다.
그는 슬그머니 고개만 돌려 주변을 둘러보았다.
방 안에는 클로드 말고는 아무도 없었다.
'아, 진짜 일하기 싫다.'
클로드는 침대에 걸터앉아 한숨을 내쉬었다.
"아니, 적응 기간이라도 줘야 하는 거 아냐? 갑자기 일을 그렇게 많이 주면 어떻게 하냐고. 여기 살던 사람도 아닌데."
한동안 판판이 놀다가 갑자기 일하게 되니 영 의욕이 나지 않았다.
어떻게 그 많은 일을 해야 할지 걱정도 되었고.
"돈도 척척 주기에 마음씨 고운 영주님인 줄 알았는데. 악마네, 악마야. 아무리 급해도 그렇지, 그걸 다 한꺼번에 하라니 제정신이 아니야! 적당히 좀 시키지!"
소심하게 투덜거리던 클로드의 목소리가 저도 모르게 점점 커져 갔다.
"사람 귀한 줄 모르고 말이야.... 두고 보자. 나 없으면 일이 안 돌아가게 해 놓고 바로 따져 줄 테다. 아니다, 어차피 일할 사람도 나밖에 없는데 그냥 지금 확 도망가 버릴까?"
그때, 방문이 달칵 열렸다.
클로드는 기겁하며 침대 위로 뛰어올랐다.
"누, 누구신지?"
차분하게 생긴 하녀가 고개를 살짝 숙였다.
"안녕하세요, 총관님. 집사장님의 명령으로 총관님을 모시게 된 웬디라고 합니다. 호위까지 제가 맡게 되었습니다. 잘 부탁드립니다."
"집사장? 아, 벨린다."
이번에 새로 집사장에 임명받은 벨린다가 전속 하녀를 보내 준 모양이었다.
그런데 호위라니. 클로드는 입가에 비웃음을 띠고 물었다.
"시중이야 그렇다 쳐도, 호위라고? 일개 하녀가 영지의 총관을 호위한다니, 사람이 없긴 없는 모양이네."
웬디는 비꼬는 말에 대꾸하는 대신, 살짝 손을 흔들었다.
파앙!
무언가가 귀 옆을 빠르게 스쳐 지나가는가 싶더니, 등 뒤의 벽에서 퍽 하는 소리가 났다.
클로드는 식은땀을 흘리며 천천히 고개를 돌려 보았다.
벽을 지나던 바퀴벌레 하나가 단검에 꽂혀 바들거리고 있었다.
웬디는 여전히 차분한 표정으로 말했다.
"성이 낡아서 벌레가 많습니다. 총관님께서 이 문제도 해결해 주시기 바랍니다."
"...네."
하녀라며....
'이 영지는 어떻게 평범한 게 없어.'
클로드는 속으로 눈물을 삼켰다.
"깨어나면 바로 일을 시작하라는 영주님의 명령입니다. 이제 움직이시지요."
"...네."
아, 호위가 아니라 감시였구나. 도망도 못 가겠구나. 하녀도 나한테 일을 시키는구나!
클로드는 도살장에 끌려가는 소처럼 느릿느릿 일어났다.
나가려나 했는데, 웬디가 문득 생각났다는 듯 덧붙였다.
"집사장님께서 전달하라는 말씀이 있었습니다."
"뭔데?"
"일하기 전에 먼저 씻으라고 하셨습니다. 영주님에게 벼룩 하나라도 옮기면 죽여 버리겠다고요."
"...그래."
오스턴에서 여기까지 오는 며칠 동안 제대로 씻지 못했다.
찝찝했던 참이니 씻는 건 좋지만....
말이라도 좀 예쁘게 하면 어디 덧나나?
이게 총관인지 노예인지 모르겠다.
'어휴, 죄다 나를 못 잡아먹어서 안달이구나. 누가 안 한대? 하면 될 거 아니야. 확 다 부숴 버릴까 보다.'
...라고 속으로만 투덜거렸다. 단검에 꿰이고 싶지는 않다.
씻고 준비된 집무실로 이동하는 와중에도 웬디는 별말이 없었다.
눈치를 보던 클로드가 조심스럽게 물었다.
"저기.... 여기 사용인들이 다 너처럼 눈 하나 깜빡 안 하고 칼 잘 던지고 그래?"
"아닙니다. 집사장님께서 어렸을 때부터 데려다 가르치신 사람이 몇 명 있습니다. 저는 원래 엘레나 아가씨를 모시다가 이번에 교대해 온 겁니다."
"엘레나 아가씨? 아, 영주님 동생. 어쨌든 전부 다 그런 건 아니라니 다행이네."
하녀들이 죄다 이 모양이면 밥 먹을 때도 눈칫밥 먹다가 체할 게 뻔했다.
무거운 마음으로 집무실에 도착한 클로드는 주변을 둘러보며 한숨을 내쉬었다.
책상 위에 서류가 산처럼 쌓여 있었다.
하급 관리들이 그동안 밀린 일들을 올려놓은 것이다.
심지어 이걸로 끝이 아니다. 지셀이 시킨 일들도 추가해야 한다.
'에휴, 어쩌겠어. 죽어라 해 보는 수밖에.'
* * *
클로드는 반 억지, 반 자의로 시작한 일에 치여 며칠 만에 살이 쏙 빠져 버렸다.
그는 퀭한 눈으로 서류를 뒤적이다가 고민에 빠졌다.
"으음, 이거 정말 살릴 수 있는 거 맞나? 완전히 망한 영지인데. 윗대가리 하나는 제대로 된 사람이지만 그것만으로는...."
지셀이 시킨 일들은 전부 영지가 부강해지는 데 필요한 것들이었다.
귀족이 어떻게 이런 걸 알고 시켰는지 놀라울 정도였다.
제 영지가 어떻게 돌아가는지도 모르는 영주들이 태반이다.
관심 있어 봤자 돈이나 군사력 정도?
하지만 지셀은 정말 꼼꼼하게도 많은 일을 시켰다.
이건 영지가 어떻게 돌아가는지 모두 파악하고 있다는 뜻이다.
지셀이 시킨 일들은 대부분 돈을 갈아 넣으면 되는 것들이었다.
건설 쪽도 시간이 조금 걸릴 뿐, 마법사들이 도와준다면 어렵지는 않을 것이다.
그러나 펜리스 영지는 밑 빠진 독이나 다름없었다.
돈을 쓴 만큼 어디선가 다시 벌어 와야 할 텐데, 지금 펜리스 영지에는 돈을 벌 수 있는 수단이 전혀 없었다.
"돈이 될 만한 건 영주님이 가진 룬스톤뿐이지."
그러나 룬스톤도 무한히 나오는 것은 아니다.
지금 당장은 문제가 없지만, 지속적인 자금줄이 없다면 몇 년 뒤에는 현상 유지조차 힘들어질 것이다.
하지만 몇 번이나 다시 검토하고 영지를 둘러봐도 도무지 방법이 없었다.
"돈.... 돈을 벌 방법이라."
클로드는 깊은 고민에 빠졌다.
영지가 망할 게 뻔히 보이는데, 총관으로서 무시할 수가 없었다.
절대 끝이 안 보이는 일거리의 늪에서 도피하고 싶어서가 아니다.
순간, 클로드가 눈을 빛내며 미소를 지었다.
"이 방법이 좋겠군. 흐흐흐."
돈을 벌 거면 화끈하고 편하게 벌어야 한다.
그리고 그는 확실한 방법을 하나 알고 있었다.
"어차피 보고할 것도 있으니까.... 이왕 가는 김에 한꺼번에 밀어붙이자. 좋아할지도 몰라."
클로드는 구상한 것들을 정리해서 품에 안고 회의장으로 향했다.
'후, 주인공은 언제나 늦게 나타나는 법이지.'
그는 일부러 느릿느릿 걸었다. 그러자 뒤에서 조용히 따라가던 웬디가 말했다.
"총관님, 걸음이 너무 늦습니다. 영주님께서 이미 도착해 계실 겁니다."
"...알았어, 재촉하지 마. 걷는 것도 마음대로 못 해? 나 힘들어 죽겠거든? 이럴 때라도 좀 쉬자!"
말하다 보니 울컥해서 목이 멘다.
웬디는 울먹이는 클로드를 조금 애잔한 눈으로 바라보았다.
영 인상이 좋지 않은 사람이지만, 요 며칠 일이 많아서 잠도 제대로 못 자는 걸 봤다.
조금 불쌍하기는 했다.
"...아, 예. 편하게 걸으세요."
클로드는 작은 승리에 의기양양해하며 천천히 걸었다.
느릿느릿 걸어 도착한 대전에는 이미 지셀을 비롯해 가신들이 전부 모여 있었다.
가신들은 클로드가 나타나자 모두 고개 숙여 인사를 건넸다.
클로드는 턱을 치켜들며 그 시선을 즐겼다.
'캬, 이래서 다들 권력을 쥐려나 보다. 일 많은 건 짜증 나지만 이건 괜찮네.'
이러니저러니 해도 영지의 총관이다.
지셀이 클로드에게 얹어 준 다른 직위까지 더하면, 적어도 펜리스 영지 안에서만큼은 일인지하 만인지상의 자리에 오른 것이었다.
거기다 인사권까지 넘겨받았으니, 다들 혹시라도 꼬투리가 잡힐까 봐 몸을 사렸다. 자칫하면 일을 떠맡게 될 테니까.
그래도 모두가 인사를 한 건 아니었다.
카오르는 클로드와 눈이 마주치자 보란 듯이 얼굴을 일그러트렸다.
기회만 난다면 가만두지 않겠다는 속내가 그대로 드러나는 표정이었다.
클로드는 솔직히 좀 심정이 미묘했다.
'으음, 저놈은 건드리면 진짜 위험해. 인내심이 개미 다리털보다도 작은 거 같던데.'
영주가 대놓고 그의 뒷배를 봐주고 있는데도, 영주가 있는 자리에서 서슴지 않고 칼부림을 하던 놈이다.
'친하게 지내는 게 좋겠지.'
클로드는 온 마음을 담아 한쪽 눈을 깜박였다.
"저 새끼가?"
불에 기름을 끼얹은 꼴이었다.
카오르가 번개처럼 검을 뽑으며 달려들자, 웬디가 재빨리 단검을 꺼내며 클로드의 앞을 막아섰다.
벨린다도 웬디의 옆으로 이동하고, 길리언이 도끼를 쥐고 카오르를 노렸다.
대전을 지키던 병사들은 무슨 일인지도 모르고 일단 영주 옆으로 달려갔다.
가신들만 혼비백산이었다.
'이 미친놈들이 또 영주 앞에서 무기를 꺼내 들다니!'
'도대체 영주님은 어디서 이런 꼴통들만 모아 왔단 말인가!'
그 순간, 지셀이 가볍게 발을 굴렀다.
살기 어린 묵직한 마나가 방 전체에 퍼져 나갔다.
모두 얼어붙은 듯 움직임을 멈췄다.
지셀이 무미건조한 목소리로 말했다.
"적당히들 좀 해라. 회의장에서 무슨 짓이야."
그 말에 다들 무기를 집어넣고 본래 있던 자리로 돌아갈 수밖에 없었다.
카오르는 마지막까지 씩씩대며 클로드를 노려보았다.
그가 고개를 돌리고 나서야 클로드는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와, 친하게 지내자고 해도 지랄이네. 저 새끼 친구 없다는 데 내 머리카락 건다.'
어수선하던 분위기가 가라앉자, 지셀이 클로드를 바라보며 물었다.
"일은 어떻게 되어 가고 있지?"
"네, 그게.... 일단 식량과 자재들은 차근차근 사 모으고 있습니다. 인부들도 모집 공고를 냈고, 화전민들도 찾고는 있습니다. 다만...."
"다만?"
"영주님이 시키신 일들은 전면 철회하고 새로 계획을 잡으셔야겠습니다."
가신들의 얼굴이 새파랗게 질렸다.
이미 돈을 잔뜩 써 가며 이것저것 일을 벌여 놓았는데 전부 철회하자니?
심지어 그건 모두 지셀이 직접 시킨 일이었다.
지금 클로드는 대놓고 영주가 틀렸다고 지적하고 있었다.
하지만 정작 그 말을 들은 지셀은 흥미로운 표정을 지으며 되물을 뿐이었다.
"왜? 무슨 문제가 있나?"
"당연히 있죠! 그냥 있는 수준을 넘어서 아주 많습니다."
지셀이 눈을 가늘게 뜬 채 계속해 보라며 고갯짓했다.
클로드는 침을 한 번 삼키고 입을 열었다.
"일단, 이 영지는 땅이 너무 척박합니다. 농법을 개선하든 뭘 하든 생산량을 늘릴 수가 없어요. 먹을 게 없으면 사람도 안 늘고, 그러면 당연히 세금도 안 늘겠죠."
지셀이 선선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서?"
"그래서라뇨, 지금 영주님 명령으로 온갖 시설을 짓고 있잖습니까. 세금이 안 들어오는데 유지비는 어디서 마련하시려고요?"
"흐음."
"그냥 농사가 어려운 수준이라면 모를까, 자원이 아예 없습니다. 사람이 없으니 수공예품 같은 걸 특산품으로 낼 수도 없고, 교통의 중심지도 아니니 상업을 일으킬 수도 없고요. 정말로, 개털만큼도 돈을 벌 수단이 없습니다."
"듣기만 해도 처참하네."
"제 말이 그 말입니다! 너무 처참해서 뭐 할 수 있는 게 없어요."
펜리스 영지에서 살아온 가신들은 무심코 고개를 끄덕였다.
이전 영주들이라고 영지를 살리려는 노력을 안 한 건 아니었다.
선대부터 별의별 방법을 써 봤지만 다 실패했다.
이번 전쟁도 전 영주가 어떻게든 돌파구를 마련하려고 시도한 거였다.
결국은 패배하고 목숨까지 잃고 말았지만.
사람들이 동조하자 자신감을 얻은 클로드가 더 힘차게 말했다.
"몇 가지 시설은 꼭 필요하죠. 저도 인정합니다. 그런데 나머지는 당장 쓸모가 없습니다. 하물며 그걸 이렇게 대규모로 지어야 할 이유가 없어요. 애초에 개털인 영지에 이런 시설을 잔뜩 지어 봤자 무슨 소용이 있습니까."
"왜 우리 도련님 기를 죽이고 그래요!"
벨린다가 빽 소리를 질렀다.
"아니, 욕하는 게 아니라 현실이 그렇다고요."
"우리 룬스톤 많잖아요. 그거 쓰면 되지!"
"아까도 말했잖아요, 유지비가 문제라고. 룬스톤이 뭐 새끼라도 친답니까? 지금 돈 많다고 덩치를 무작정 키웠다가 나중에 룬스톤 떨어지면 개털도 안 남는 거예요."
"그거 해결하라고 당신 데리고 온 거잖아요!"
클로드가 황당해하며 헛웃음을 흘렸다.
"아니, 제가 신이에요? 황무지에 손만 갖다 대면 옥토가 됩니까? 땅만 파면 광산이 막 나오고 그러냐고요. 이건 진짜 신이 와서 갈아엎지 않으면 답이 없어요!"
"왜 신이 아닌 건데!"
"...그러게요, 왜 나는 신이 아니지? 이런 영지는 그냥 싹 다 날려 버리면 좋겠는데...."
저도 모르게 진심을 내뱉던 클로드가 흠칫 놀라 지셀의 눈치를 보았다.
"아니, 영주님. 꼭 그렇다는 게 아니라...."
지셀이 피식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나도 너한테 불가능한 걸 이뤄 달라고 한 건 아냐. 그래도 이렇게 말하는 걸 보면 뭔가 다른 방법을 떠올린 거겠지?"
"그렇습니다. 결국 문제는 고정 수입이 없다는 거죠. 쓸데없는 곳에 돈 쓰지 말고 안정적인 벌잇거리를 마련해야 합니다. 그래서 제가! 쉽고 빠르게 돈을 벌 수 있는 방법을 생각해 냈습니다. 영주님도 들으면 무릎을 탁 치실걸요?"
"뭔데?"
클로드가 자신만만하게 외쳤다.
"도박장을 차리는 겁니다!"
그 순간, 허공으로 뛰어오른 벨린다의 발이 클로드의 안면에 직격했다.
101화 나랑 내기 한번 할까? (1)
"꺄울!"
클로드가 괴상한 비명을 지르며 나가떨어졌다.
"아니, 왜 때려요! 웬디, 뭐 해!"
클로드가 바닥에 엎어진 채 외쳤다.
호위라던 웬디는, 정작 벨린다가 공격하니 한 발도 움직이지 않았다.
클로드가 억울해하든 말든, 벨린다는 그에게 삿대질하며 크게 외쳤다.
"어디 감히 우리 도련님 땅에 그런 천박한 시설을 지으려고 해요!"
금이야 옥이야 돌봐 온 지셀이 처음으로 받은 영지다.
그런데 뭐? 도박장?
지셀의 전 가정 교사로서 그런 시설을 짓는 건 절대 용납할 수 없었다.
"저거 봐요! 저거 완전히 머리가 도박에 절었다니까요? 총관 자리에 오르자마자 도박장부터 차리려고 하잖아요!"
"아니, 아니! 잠깐 내 말 좀 들어 봐요! 내가 도박을 하겠다는 게 아니라고요! 끊었다니까?"
"끊기는 뭘 끊어! 끊었다는 사람 입에서 도박장 차리자는 얘기부터 나와? 차라리 개가 똥을 끊겠다!"
벨린다의 말에 가신들의 얼굴에도 의심이 서렸다.
클로드가 다급하게 손을 휘저었다.
"그게 아니라! 들어들 봐요. 이곳을 오스턴처럼 유흥 도시로 만드는 겁니다. 열심히 홍보하면 귀족들이 몰려와서 돈을 엄청나게 쓰고 갈 거라고요!"
"...."
여전히 미심쩍은 얼굴이었지만, 벨린다도 그 말에는 입을 다물었다.
확실히 오스턴에는 놀러 오는 귀족들이 많았다. 그 덕분에 오스턴 남작도 떼돈을 벌었지 않은가.
사람들이 솔깃해하는 듯하자 클로드는 신이 나서 빠르게 말했다.
"좋게 말하면 문화생활 도시이자 관광지란 말이죠. 영지민들도 손님을 응대하면서 돈을 벌 수 있을 거고요."
"나름대로 그럴듯하네요."
벨린다가 턱을 쓰다듬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확실히 잘만 하면 돈을 쓸어 담을 수 있을 것 같았다.
아무리 그래도 도박이 문화생활이란 건 동의할 수가 없지만.
"알아보니 루타니아 왕국에는 그런 도시가 없습니다. 우리가 처음부터 더 크고 화려하게 계획도시로 만드는 겁니다. 오스턴은 자연스럽게 커진 도시다 보니 좀 조잡한 면이 있었죠."
오스턴도 원래는 펜리스와 사정이 비슷했다.
특산품도, 자원도 없고 척박한 땅.
그 아무것도 없던 땅에 도박을 즐기던 사람들과 불법적인 일을 하는 사람들이 알음알음 모여 우연히 발전한 것이다.
어떠한 정책도 없이 자연스럽게 성장한, 대륙에서도 유례가 없는 천박한 곳.
그곳이 바로 향락의 도시 오스턴이었다.
"귀족들은 점잔 빼는 척해도 사실 뒤에서는 언제나 놀 거리를 찾습니다. 귀족뿐만 아니라 용병들과 모험가들도 잔뜩 올 겁니다. 사람이 많이 드나들면 그만큼 돈도 많이 오가고, 정착하는 사람도 늘겠죠."
클로드가 자신만만하게 내뱉었다.
처음에는 아연해하던 가신들도 일리가 있다는 표정을 지었다.
여론을 확보한 클로드가 지셀을 바라보았다.
"어떻습니까? 일단 도시 정비만 해 두면 이후에는 놀면서도 돈을 벌 수 있습니다. 돈이 복사가 된다고? 아, 그건 못 참지."
잠자코 듣기만 하던 지셀이 픽 웃으며 의자에 등을 기댔다.
"뭐, 재미있는 의견이었다. 나중에 작은 도시 하나 정도는 생각해 보지."
"나중에라니, 그럼 지금은요?"
"당연한 걸 뭘 물어? 원래 계획대로 진행한다."
"아니, 영주님! 돈을 쓸데없이 쓰지 말자니까요!"
다른 영주들이었다면 충분히 구미가 당길 만한 제안이었다.
룬스톤을 모두 쓴다면 오스턴 못지않은 도시를 만들 수 있을 테니까.
하지만 언젠가 왕국 최강의 공작가와 싸워야 하는 지셀에게는 그리 좋은 선택지가 아니었다.
"영지에 문제가 많은 건 나도 알아. 그중에서 지금 뭐가 제일 급하지?"
"당연히 죄다 문제긴 하지만.... 역시 가장 급한 문제는 식량입니다. 당장 지금도 먹을 게 없어서 사 오고 있으니까요. 계속 식량을 사다 먹을 수는 없잖습니까? 돈 떨어지면 다 굶을 텐데요."
"식량이라.... 그렇지 않아도 생각해 둔 게 있는데 잘됐네. 식량은 내가 해결할 테니, 개간할 땅이나 확보해 놔."
"아, 진짜...."
클로드는 짜증 섞인 눈빛으로 지셀을 바라보았다.
땅이 척박해서 생산량을 늘릴 수 없다고 지금까지 설명했는데!
이 인간, 얘기를 제대로 듣긴 한 건가?
"저기, 영주님. 이 땅은 애초에 작물이 자랄 수 없는 땅이라고 계속 얘기했잖아요. 누가 와도 여긴 못 살려요. 농사의 신이라도 오지 않는 이상은.... 아니, 여신도 이 땅은 더럽다고 포기할걸요?"
"충분해. 내가 해결하도록 하지."
클로드의 표정이 점점 불손해지기 시작했다.
"...영주님, 농사 지어 봤어요? 농법이나 뭐 그런 거 잘 아세요?"
"아니, 잘은 모르지."
내내 싸움질만 해 댔으니 농사를 지어 봤을 리가 없다.
"...사실 농사의 신인 거예요? 출생의 비밀?"
"그럴 리가 있나."
"그런데 대체 무슨 방법으로 식량 생산을 늘리시려고요? 다른 영주들은 뭐 하기 싫어서 안 하는 줄 아세요? 안 하는 게 아니라 못 하는 겁니다! 그러니까 일단 돈부터 잔뜩 벌자고요!"
클로드가 끝까지 자신의 주장을 밀어붙이자 지셀이 씨익 웃으며 답했다.
"너, 내가 그 문제 해결하면 어떻게 할래?"
"예?"
"나랑 내기 한번 할까? 내가 식량 생산을 늘릴 수 있는지 없는지."
"하, 영주님이 무슨 수로요?"
"그건 알 거 없고. 어때? 내가 이기면 앞으로 찍소리 말고 시키는 대로 하는 걸로."
클로드가 코웃음을 쳤다.
도박 전문가인 자신한테 감히 내기를 걸어오다니! 그것도 승부가 뻔한 내기를!
"돈도 안 건 내기가 무슨 내기입니까?"
"너 돈 없잖아. 아, 그러면 내가 이기면 10년간 무급 노예가 되는 걸로 하자. 먹여 주고 재워 주기는 할게. 대신 군소리 없이 뭐든 시키는 대로 해야겠지?"
지셀에게 2천5백 골드를 빚지기는 했지만, 클로드도 급여는 받는다.
어쨌든 개인 생활은 해야 하고 살다 보면 조금씩 소비하는 게 있기 마련이니까.
지면 그런 것들까지 다 포기하고 진짜 맨몸으로 구르라는 뜻이었다.
어처구니가 없다는 표정을 짓던 클로드가 갑자기 의미심장한 미소를 지었다.
"기간은요? 너무 길면 곤란한데."
"넉넉하게 3개월."
"...잘 못 들었슴다?"
클로드는 황당해서 입을 떡 벌렸다.
3년이 아니라 3개월 만에 결과를 보여 주겠다고?
지금은 한겨울이었다. 뭔가를 심어 봐야 싹이라도 나면 다행인 수준이다.
웃음을 꾹 참으며 클로드가 내기 조건을 확인했다.
"그럼, 제가 이기면요?"
"원하는 게 뭐지?"
클로드는 심장이 마구 뛰었지만, 최대한 티 내지 않고 점잔을 떨었다.
"글쎄요.... 아무래도 제가 영주님에게 빚을 진 게 있어서 제 입으로 말씀드리긴 좀 그런데. 아이참, 잘 아시면서."
"그럼 5천 골드를 주지. 다시 안나를 만나러 가는 건 어때?"
5천 골드라는 말에 주변에 있던 사람들이 놀랐다.
5천 골드면 클로드가 평생 놀고먹으면서 살 수 있는 돈이었다.
"아니, 또 이러시네! 하지 말아요!"
"영주님, 이건 너무.... 말도 안 되는 내기입니다."
벨린다와 길리언이 급히 나서서 말렸다.
지셀에게도 나름대로 생각이 있겠지만, 기간이 겨우 3개월이었다.
아무리 그라도 죽어 있는 땅을 기한 안에 살릴 수는 없을 터였다.
영주가 그런 불공정한 내기를 하도록 내버려 둘 수는 없었다.
"어허, 지금 영주님께서 큰일을 하시겠다는데 방해하시는 겁니까? 다들 가만히 계시죠."
클로드가 부러 근엄한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
뺀질뺀질한 그 모습에 벨린다가 벌컥 주변 사람들에게 화를 냈다.
"다들 뭐 해요? 영주님 안 말리고!"
그녀의 박력에 밀려 가신들이 하나둘씩 앞으로 나섰다.
"영주님, 무리한 내기입니다. 지금이라도 생각을 거두셔야 합니다."
"총관의 말이 맞습니다. 이 영지는 대부분이 바위투성이에, 흙이 있어도 거칠고 메말라 작물이 제대로 자랄 수가 없습니다."
다들 말리는 와중에도 카오르는 나설 기미도 없이 히죽거리고만 있었다.
그로서는 어느 쪽이 지든 재미있는 상황이었다.
벨린다가 노려보았지만, 카오르는 내가 말한들 저놈이 듣겠냐는 듯 어깨만 으쓱였다.
지셀은 말리는 사람들을 무시하고 클로드를 보며 다시 물었다.
"할 거야, 말 거야? 쫄리면 뒈지시든가."
"하!"
클로드는 바로 대답하지 않고 헛웃음을 내뱉었다.
'왜 저렇게 자신만만하지? 분명 방법이 없는데.'
질 거라는 생각은 전혀 안 든다.
하지만 상대방이 너무 당당하니 기분이 찜찜했다.
나름대로 도박판에서 수년을 굴렀던 클로드는, 지셀의 태도가 불안을 감추려는 허세는 아니라는 걸 알 수 있었다.
진심으로 이길 자신이 있는 것이다.
'뭘 믿는 거지. 3개월 안에 자랄 수 있는 작물이 뭐가 있더라?'
클로드는 오래전 아카데미에서 배웠던 지식들을 머릿속에서 끄집어냈다.
3개월 안에 자랄 수 있는 작물은커녕, 겨울에 잘 자라는 작물도 없었지만.... 그래도 혹시 모르니까.
"작물은 뭘 키우실 거예요? 역시 밀이죠? 뭐 먹지도 못하는 이상한 거 심어서 억지로 먹이시는 건 안 됩니다."
"그럼, 밀이 최고지."
클로드가 주먹을 불끈 쥐었다.
'됐다, 그러면 정말 방법이 없다. 밀이면 절대로 3개월 안에는 못 키워.'
클로드는 저절로 치솟는 입꼬리를 애써 눌렀다.
지셀이 무슨 생각인지는 모르겠지만, 이건 따 놓은 당상이다.
'내가 우리 영주님을 너무 과대평가한 건가? 밀을 어떻게 키우는지도 모르는 거 같은데. 아, 설마 내가 영주님 체면 생각해서 져 줄 거라 기대한 건가? 만난 지 얼마나 됐다고.'
클로드는 지셀을 바라보며 살짝 미소 지었다.
"아, 나 도박 끊었는데.... 콜."
"좋아, 내기는 성립됐다. 여기 있는 모두가 증인이다. 내가 이기면 넌 10년 동안 무급으로 일한다. 내가 지면 5천 골드를 받고 고향으로 돌아가는 거고."
클로드는 해맑은 웃음을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지만, 다른 이들은 인상을 찌푸렸다.
도대체 영주는 왜 저런 미친 내기를 한단 말인가?
벨린다는 지셀을 말리지도 못하고 이만 갈다가, 웬디를 바라보고 손으로 목을 스윽 그었다.
알아서 밤에 처리하라는 뜻이었다.
웬디가 어두운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당연히 클로드도 가만히 있지 않았다.
그는 유독 얄미운 목소리로 지셀에게 말했다.
"저기.... 그런데 말입니다. 이게 이겨도 신변 보호가 안 되면 좀.... 돈을 들고도 떠날 수가 없다면 내기를 하는 의미가 없지 않습니까?"
지셀이 픽 웃었다.
"클로드는 영지의 총관이니 그의 신변에 모두 신경 쓰도록 해라. 만약 무슨 일이 생긴다면 모두에게 책임을 묻겠다."
그 말에 웬디가 벨린다를 보고 어깨를 으쓱였다.
벨린다는 애꿎은 바닥을 발로 차며 외쳤다.
"아악! 열 받아!"
일이 이상하게 흘러가면 손을 쓰려고 마음먹었던 길리언도 언짢은 표정을 지었다.
영주가 직접 명령을 내렸으니 그로서도 손을 댈 수 없게 되었다.
이제 와서 내기를 철회하면 지셀의 꼴이 우스워진다.
클로드는 얼굴에 웃음꽃이 피었다.
"으하하하! 그럼 저는 개간지 확보를 하러 가 보겠습니다. 아, 빈 땅 많으니 금방입니다."
기뻐하며 돌아서는 클로드에게 지셀이 낮은 목소리로 경고했다.
"단, 3개월이 지나기만 기다리면서 일을 대충 한다면 내 승리로 하겠다. 확실히 확인할 테니 요령 피울 생각은 말도록."
"아, 그럼요. 저 그렇게 치사한 사람 아닙니다. 걱정하지 마시지요. 으하하하!"
클로드는 거의 춤을 추며 자리를 떠났다.
웬디가 한숨을 쉬며 그를 따라 나갔다.
남은 자들은 황망한 얼굴로 지셀을 바라보았다.
도무지 영주가 무슨 생각인지 알 수 없었다.
남들 속도 모르는 지셀이 느긋하게 자리에서 일어났다.
"이제 나도 슬슬 움직여 볼까?"
102화 나랑 내기 한번 할까? (2)
영주에게 총관이 내기를 걸었다는 소문은 금세 퍼졌다.
자세한 사정을 들은 사람들은 다들 고개를 저으며 혀를 찼다.
"쯧쯧, 영주님이 무리했네."
"총관도 참 성깔 있어. 그래도 영주님인데, 져 주는 시늉이라도 하지. 영주님 측근들이 엄청나게 벼르고 있던데."
"영주님이 건들지 말라고 했으니 이제는 측근들도 못 건드려. 총관한테 무슨 일이 생기면 영주님 명예만 더 떨어지는 거니까. 그러면 누가 영주님을 믿고 일하겠어?"
사람들의 말대로, 벨린다는 차마 클로드에게는 손을 대지 못하고 온종일 베개만 때리며 화를 삭이고 있었다.
"아오! 도련님은 왜 그런 내기를 해 가지고! 농사는 쥐뿔도 모르면서 무슨 억지야! 그 성질머리는 언제 고쳐지는 거야?"
클로드의 말마따나, 수백 년 동안 아무도 해결하지 못한 문제였다.
그런 문제를 아무것도 모르는 지셀이 해결할 수 있을 리가 없었다.
마법사나 사제들에게 부탁해 잠깐 지력을 끌어올릴 수는 있을 거다. 하지만 그 효과는 오래가지 않는다.
차라리 그 돈으로 식량을 사는 게 더 싸게 먹힐 터였다.
"아아악! 열 받아! 그 도박쟁이 놈도 그래, 영주가 막 나가면 좀 양보해야지! 그걸 날름 받아들여? 꼴에 감은 좋아서, 신변 보호까지 요청하고.... 잔망스러운 새끼!"
벨린다가 죄 없는 베개를 퍽 내리쳤다.
집사장인 벨린다가 총관에게 이를 가니, 성안 분위기도 어수선해졌다.
바네사는 이리저리 눈치를 보며 고민에 빠졌다.
'영주님이 이기셔야 하는데. 마법으로 지력을 잠깐 끌어올려야 하나? 그 넓은 땅을 나 혼자 관리하는 건 무리인데. 유지하려면 마력을 엄청나게 쏟아부어야 하고... 나는 마나가 없고... 룬스톤도 없고....'
바네사의 마력으로는 지셀이 계획한 개간지 전체는커녕, 손바닥만 한 밭뙈기 하나도 감당할 수 없었다.
'알포이 님과 다른 마법사님들 마력을 뺏어 오면 될까?'
마법사들이 잠을 잘 때 기습해 볼까 생각했지만, 그녀 혼자 그들을 제압하기는 불가능했다.
'영주님 죄송해요. 저는 쓸모없는 인간이에요....'
날이 갈수록 걱정으로 말라 가는 바네사는 주변 사람들의 걱정을 샀다.
반면 카오르는 날이 갈수록 얼굴이 반질반질해졌다.
벨린다가 두문불출하는 틈을 타서 켈베로스 용병단 단원들과 술을 퍼마신 탓이었다.
"큭, 영주가 져도 재미있고... 총관이 지면 더 재미있겠네. 그럴 일은 없겠지만."
"그러게, 그 괴물 같은 영주가 지면 무슨 표정을 지을지 너무 궁금한데?"
단원 중 하나가 내뱉은 말에 카오르가 코웃음을 쳤다.
"이번에는 영주가 실수했지. 질 수밖에 없는 내기잖아. 그 고집이 언젠가 문제가 될 줄 알았어."
지셀은 지금까지 다들 반대하고 불가능하다는 일에 도전해 왔다.
그리고 매번 성공시켰다.
뛰어난 감각과 강력한 힘으로 안 될 일을 억지로 되게 한 것이다.
매번 그러다 보니 주변 사람들도 웬만하면 지셀이 하자는 대로 따라왔지만, 이번만큼은 그러지 못했다.
"이번에는 힘이 아니라 전문적인 지식이 필요한 일이니까."
낄낄대며 웃던 카오르가 갑자기 표정을 굳혔다.
멀리서 길리언이 다가오고 있었다.
"이런, 꼰대 영감 오시네. 야, 다들 해산! 빨리빨리 움직여라, 자식들아!"
지셀이 클로드와 내기를 시작한 이후로, 길리언은 내내 언짢은 표정으로 돌아다녔다.
클로드가 일부러 도박장 얘기를 꺼내서 지셀을 도발했다고 생각한 것이다.
저렇게 기분이 안 좋으니, 괜히 이렇게 술판을 벌인 걸 들켜 트집이 잡혔다가는 길리언에게 온갖 잔소리를 들을 게 뻔했다.
카오르는 용병들과 함께 후다닥 주변을 정리하고는, 길리언의 눈치를 살피며 슬금슬금 자리를 피했다.
* * *
성안 분위기가 날카로워질수록 클로드는 열성적으로 일했다.
이상하게 잠을 안 자도 힘이 솟았다.
"후후후, 난 곧 자유다."
여전히 일은 끔찍할 정도로 많지만, 3개월만 버티면 된다 생각하니 갑자기 할 만해졌다.
아예 끝이 보이지 않는 일과 끝이 보이는 일은 이렇게나 다른 법이다.
"가기 전에 일은 깔끔하게 해 놓고 가야지. 괜히 책잡히면 안 되니까."
뒤에서 단검을 꺼내 이리저리 돌려 보는 웬디가 무서워서 그런 건 절대 아니었다.
"너 혹시 뭐 갑자기 뒤에서 찌르거나 그러는 거 아니지? 음식에 독 넣거나."
갑작스러운 말에 웬디가 당황하며 단검을 품에 집어넣었다.
"그런 거 안 해요."
"나 죽으면 영주님이 더 크게 망신당하는 거야. 알지?"
"...알고 있습니다."
"그래, 그러니까 나 잘 지켜. 요새 나 노리는 사람들이 좀 있는 거 같더라."
클로드는 스물세 번째로 경고하고 후련한 얼굴로 일을 시작했다.
웬디가 다시 단검을 꺼내고, 클로드가 똑같은 질문을 스물네 번째로 반복하기까지는 얼마 걸리지 않았다.
* * *
지셀은 클로드가 처리한 업무들을 살펴보고 용병들을 소집했다. 화전민들을 찾아서 끌고 오는 일은 그가 직접 해결하는 편이 빨랐다.
"길리언은 주변 영지의 협조를 얻어서 도망간 영지민을 찾아와. 카오르는 북쪽을 뒤지도록. 숨어 있는 화전민들은 싹 다 찾아서 끌고 오고. 나는 남쪽으로 가겠다."
클로드가 여기저기 뒤지고 다닌 탓에 영지민들은 불안에 떨고 있었다.
무장한 병사들이 사방을 뒤지고 다니니 조만간 큰 사달이 일어날 거라 생각한 것이다.
그런데 이제는 영주가 직접 병력을 이끌고 잡으러 다닌단다.
이에 영지민들은 공포에 떨었다. 민심은 바닥을 쳤고 지셀의 인기는 끝도 없이 내려갔다.
새로 온 영주가 전임 영주보다 더 지독하고 무섭다는 소문이 흉흉하게 돌았다.
관리들이 걱정스러워하며 천천히 진행하자고 건의했지만, 지셀은 눈 하나 깜짝 안 했다.
"상관없다. 천천히 진행할 여유는 없어. 강압적이더라도 최대한 빠르게 진행해라."
지셀은 순식간에 산에 숨어 살던 화전민들을 찾아냈다.
물론 발견된 사람들이 순순히 그를 따라올 리는 없었다.
"영주님, 제발 여기서 살게 해 주십시오. 아니면 며칠만 정리할 시간을 주십시오."
"세, 세금은 어떻게든 내겠습니다."
"내려가면 땅도 없습니다. 먹고살 식량도 없습니다."
사람들이 사정사정했지만, 지셀은 냉정하게 고개를 저었다.
시간을 주면 분명 다른 곳으로 다시 도망갈 것이다.
"식량도, 일거리도 줄 테니 걱정하지 마라. 시간 없으니 당장 내려간다."
여기서 나올 세금이라 해 봐야 쥐꼬리만 했다.
일할 사람이 부족해서 찾아온 거지, 돈 몇 푼 뜯어내자고 온 게 아니었다.
지셀의 단호한 태도에 화전민들은 서로를 바라보며 눈짓했다.
시간을 벌려는 시도도 통하지 않았다. 영주가 아예 작정하고 온 모양이었다.
그들을 찾아온 병력은 영주까지 고작 열 명. 상대할 만해 보이는 숫자였다.
중년 남성 하나가 몽둥이를 들고 외쳤다.
"시발! 어차피 내려가면 전처럼 뜯어먹을 거잖아!"
"나 그런 사람 아니다. 내가 얼마나 착한 사람인데. 내 주변 사람들은 세상에 나 같은 비폭력 평화주의자가 없다고들 한다고."
주변 사람들이 들었다면 고개를 갸우뚱할 말이었다.
심지어 지셀과 함께 온 용병들도 못 들을 말을 들었다는 듯 표정을 구기고 있었다.
화전민들이 믿을 리가 없었다.
"안 가! 우리 좀 그냥 내버려 둬!"
독이 오른 몇몇 화전민들이 다른 사람들을 부추기기 시작했다.
"여러분, 그냥 싸웁시다! 어차피 내려가면 지옥이라고요!"
"그러자! 자유를 달라!"
"우리끼리 그냥 여기서 살 거야!"
지셀은 사람들의 격렬한 반응에도 너털웃음을 지었다.
그는 구차하게 말을 길게 하는 사람이 아니다. 누군가를 설득한 적도 없었다.
그는 용병들에게 살짝 턱짓했다.
"그냥 죄다 체포해."
용병들은 그러면 그렇지, 하는 표정을 지으며 화전민들에게 달려들었다.
"그럴 줄 알았다! 무슨 비폭력 주의자야!"
"모두 무기를 듭시다!"
"와아아아! 더 이상 착취당하지 않겠다!"
화전민들의 기세는 놀랍도록 사나웠다.
수탈을 피해 도망쳐 온 사람들이 강압적인 명령에 순순히 따를 리가 없었다.
"자유가 아니면 죽음을 달라!"
화전민들은 찾아온 자들을 모조리 죽이고 도망칠 각오를 했다.
영주에게 잡혀가서 서서히 말라 죽든, 지금 반항하다 칼에 맞아 죽든 죽는 건 마찬가지다.
찾아온 용병들보다 화전민들의 수가 두 배를 넘으니 해볼 만하다는 심산이었다.
하지만 그들의 희망이 산산조각 나는 데에는 그리 오래 걸리지 않았다.
"으악!"
용병들이 한두 대씩 툭툭 치면서 지나가니 화전민들은 실 끊어진 인형처럼 모조리 땅바닥에 누워 버렸다.
"으으으...."
고통스러운 신음을 내뱉는 화전민들을 앞에 두고 한 용병이 지셀에게 물었다.
"어떻게 할까요?"
영주한테 덤빈 자들은 반역죄를 물어 죽이는 게 보통이다.
하지만 지셀이 화전민들을 찾아온 이유를 알기에 용병들은 바로 손을 쓰지 못했다.
지셀은 천천히 주변을 둘러보았다.
쓰러진 남자들의 가족인 듯, 아이들과 여자, 노인들이 주저앉아 덜덜 떨고 있었다.
"이거 완전히 내가 악덕 영주 같잖아?"
지셀은 너털웃음을 내뱉으며 사람들에게 손짓했다.
"안 죽일 거니까 겁먹지 마. 비폭력 평화주의자라니까? 바로 영지로 내려갈 테니 꼭 필요한 짐만 챙겨라."
저항할 의지를 잃은 화전민들은 주섬주섬 일어나 짐을 챙겼다.
사람들이 대충 짐을 챙기고 모여들자 지셀이 용병들에게 명령을 내렸다.
"집은 모두 부숴라. 범죄자들이나 첩자들이 숨어들 수도 있으니까."
용병들은 바로 도끼를 들고 움직였다.
화전민들이 어설프게 세운 판잣집들은 강한 힘에 버티지 못하고 빠르게 박살 나기 시작했다.
조금 전까지 지내던 마을이 부서지는 걸 눈앞에서 지켜본 화전민들은 안색이 어두워졌다.
이제 다시는 이곳으로 돌아올 수 없다는 걸 새삼 깨달은 것이다.
울먹거리는 어린아이를 보고 지셀이 상냥하게 말했다.
"걱정하지 마라. 나처럼 착하고 상냥한 영주는 세상에 또 없다고. 봐라, 영주한테 덤볐는데도 아무도 안 죽었잖아?"
물론 씨알도 먹히지 않았다.
아이에게 지셀은, 아비를 때려눕히고 집을 부숴 가며 자신들을 강제로 끌고 가는 악덕 영주에 불과했다.
아이는 차마 뭐라고 하지는 못하고 새빨개진 눈으로 이를 악물었다.
그 표정을 본 지셀이 어깨를 으쓱였다.
어차피 불신이 가득한 이들에게 구구절절 설명해 봤자 소용이 없었다. 직접 보여 주는 수밖에.
"자, 다 됐으면 내려가자. 밤에는 춥다고."
오늘도 마을 하나를 박살 낸 지셀이 뿌듯한 미소를 지으며 돌아섰다.
지셀에게 덤볐던 사람들은 생선 엮이듯 묶인 채 끌려갔다.
절망 어린 표정으로 고개를 숙인 그들을 나머지 가족들이 뒤따랐다.
화전민들은 산에서 내려가는 내내 앞으로의 삶을 걱정하며 훌쩍였다.
이럴 줄 알았으면 조금 더 멀리 도망갈 것을.
험하고 깊은 산속까지 이렇게 열심히 뒤질 줄은 정말로 몰랐다.
"오늘은 꽤 많이 찾았네. 마흔 명이나 넘게 모여 있을 줄이야."
신나 하는 지셀을 보며 화전민들은 이를 갈았지만 할 수 있는 게 아무것도 없었다.
얼마 후, 성에 도착하자마자 보이는 광경에 지셀이 휘파람을 불었다.
"오, 제법 많아졌네."
화전민들은 깜짝 놀라고 말았다.
103화 나랑 내기 한번 할까? (3)
영주성 앞에는 천막들이 수없이 많이 세워져 있었고, 사람도 그만큼 많이 지나다녔다.
돌아다니는 사람들의 면면이 눈에 익었다. 모두가 예전에 영지에 살던 사람들이었다. 소문대로 사방에서 잡아 온 모양이었다.
그런데 잡혀 온 것치고는 다들 표정이 밝았다. 화전민들은 영문을 알 수 없어 어리둥절해하며 지셀에게 끌려갔다.
바쁘게 움직이던 클로드가 지셀을 발견하더니 질색하며 혀를 찼다.
"오늘은 좀 많군요. 정말 기가 막힐 정도로 잘 잡아 오시네요. 낚시꾼도 아니고."
"추격, 기습, 섬멸이 내 장기거든. 매복도 잘하지."
"네네, 노예 상인 하기에 딱 좋은 재능이네요. 진작 그 길로 나섰으면 대륙에 이름을 떨치셨을 텐데요. 아얏!"
깐족거리던 클로드는 한 대 얻어맞고 나서야 후다닥 뒤로 물러났다.
분위기 파악 못 하고 꼭 한마디씩 더 해서 매를 버는 것도 어떻게 보면 재능이었다.
"헛소리 말고 이쪽도 빨리 처리해. 바쁘다."
"알겠습니다!"
그는 재빨리 화전민들의 인적 사항을 기록하고 단숨에 읊었다.
"당분간 이곳에서 머문다. 원하는 자는 원래 살던 곳으로 돌려보내 주고, 그렇지 않다면 새로 세우는 마을에 집을 마련해 줄 거다. 건설에 참여할 인부들도 뽑고 있으니 관심 있으면 언제든 지원해라."
화전민들은 일단 고개를 끄덕였다.
어차피 돌아갈 집은 이미 부서졌고, 가져온 짐도 얼마 없다. 그런데 집을 그냥 준다니, 얼씨구나 하고 절을 해도 모자란 마당이었다.
"식량도 당분간 배급해 줄 것이다. 영주님께서 개인 재산으로 베푸시는 거니 감사히 여기도록."
빠르게 말을 쏟아 낸 클로드가 병사들에게 고갯짓했다.
곧 병사들이 밀을 비롯해 고기와 채소들이 가득 든 포대를 지고 왔다.
화전민들이 눈을 휘둥그렇게 떴다.
산에 숨어 지내며 먹던 것과는 비교도 안 될 정도로 풍족한 음식이었다.
침을 꿀꺽 삼키는 그들을 보며 클로드가 말을 이었다.
"영주님 명령이다. 떨어지면 또 줄 테니 제발 아끼지 말고 배부르게 먹어라. 괜히 아껴 먹는다고 깨작이다가 상한 거 먹지 말고. 너희가 배탈 나면 나만 골치 아파져."
클로드가 한쪽을 가리켰다. 화전민들의 시선이 그 손짓을 따라 움직였다.
그가 가리킨 쪽에는 식량 포대가 수도 없이 쌓여 있었다.
그마저도 부족하다는 듯 새로운 포대가 쉴 새 없이 실려 들어왔다.
화전민들은 어안이 벙벙한 표정으로 지셀을 돌아보았다.
정말 집도 주고 일자리도 주고 식량도 준다고?
"진작 얌전히 따라왔으면 안 맞았을 거 아니냐."
지셀이 혀를 차며 손짓했다.
병사들이 묶여 있던 화전민들을 풀어 주자, 그들은 바닥에 납작 엎드려 연신 감사 인사를 올렸다.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 영주님."
"다시는 그러지 않겠습니다."
"열심히 일하겠습니다."
목이 잘릴 줄 알고 공포에 떨던 화전민들은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아직 완전히 믿을 수는 없지만, 다른 귀족들과는 조금 다르다는 생각이 들기 시작했다.
"그래, 곧 새로 살 마을로 안내해 줄 거다. 그때까지 사고 치지 말고 얌전히 지내도록 해라."
하급 관리 중 하나가 화전민들을 임시 거주용 천막으로 안내했다.
얌전히 이동하는 화전민 무리 안에서 아이 하나가 뒤를 돌아보았다. 조금 전, 산속에서 이를 악물고 울음을 참던 그 아이였다.
아이와 눈이 마주친 지셀이 장난스러운 표정을 지으며 윙크했다.
"이거 봐, 나 좀 착한 사람이라니까? 내 말 맞지?"
옆에서 듣고 있던 클로드가 환청이 들리는 거 같다며 귀를 후볐다. 지셀은 콧방귀를 뀌며 무시했다.
쭈뼛거리던 아이가 허리를 깊게 숙였다. 지셀은 들고 있던 사과 하나를 아이에게 던져 주며 웃었다.
"이건 너 혼자 먹어라. 남 주지는 말고."
아이는 다시 꾸벅 인사하고 어른들 뒤를 쫓아갔다.
이후로도 같은 일이 반복되었다.
도망쳤던 영지민들을 찾아다가 집을 마련해 주고, 식량을 꾸준히 나눠 주었다.
기존 영지민들의 집도 보수를 하거나 새로 지어 주니 불평은 나오지 않았다.
새 영주가 좋은 사람인 거 같다는, 기대감이 섞인 소문이 조금씩 퍼져 나갔다.
그 소문에 답하듯 지셀은 바쁘게 움직였다.
산더미처럼 쌓인 서류와 싸우면서도 하루도 빠짐없이 수련하고, 영지를 둘러보았다.
"도련님, 좀 쉬세요! 진작 공부를 좀 그렇게 하시지!"
내일이 없는 것처럼 일하는 모습에 벨린다가 기겁하며 말렸다.
건강이 걱정되기도 했지만, 다른 이유도 있었다.
"농사는 어쩌고 다른 데만 신경 쓰시는 거예요? 벌써 한 달이나 지났다고요!"
열심히 일하긴 하는데, 정작 중요한 내기는 뒷전으로 미뤄 둔 느낌이 들었다.
한 달 동안 한 일이라고는 사람들을 잡아 와서 집 주고, 밥 주는 것밖에 없지 않은가?
"아, 그거? 시간은 충분하니까 걱정하지 마. 사람도 적당히 모였겠다, 안 그래도 곧 시작하려고 했어."
영지민들도 기력을 차리고 살 곳도 마련됐으니 슬슬 중요한 작업을 시작할 때였다.
"경작지를 개간할 거다."
인부를 모집한다는 소식에 영지민들이 잔뜩 몰려들었다.
집을 짓는 데 참여한 사람들이 짭짤한 보수를 받았다는 소식이 퍼진 덕분이었다.
노인과 아이들까지 하겠다고 지원해서 돌려보내야 할 정도였다.
영지민들의 활기찬 표정을 보며 지셀도 기분 좋은 웃음을 지었다.
"오, 다들 힘이 넘치네. 좋은 현상이야. 금방 끝나겠어."
새로 개간할 경작지의 위치도, 개간에 쓸 농기구 수급도 클로드가 이미 다 처리해 두었다.
지셀은 그저 영지민들을 끌고 다니기만 하면 되는 상태였다.
영지민들은 지셀의 뒤를 따라 땅을 갈아엎으면서도 의문을 감추지 못했다.
"아니, 못 쓰는 땅을 왜 개간하는 거지?"
"이거 나중에 괜히 작물 안 자란다고 우리만 경치는 거 아냐?"
평생 농사를 짓고 살아온 그들은 펜리스 영지가 어떤 땅인지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
전에 있었던 영주들이라고 새 농지를 개간해 보자는 생각을 안 했겠는가?
지력이 약해서 들인 공보다 얻는 게 적으니 개간하지 않고 포기했을 뿐이다.
"그냥 일단은 시키는 대로 하자고."
"농사를 아는 사람이 주변에 없는 모양이야. 쯧쯧.... 하지 말자고 할 수도 없고."
"돈하고 먹을 걸 주니까 한다마는.... 솔직히 좀 무섭네. 나중에 무슨 소리 들을까 봐."
"소문 들었어? 이거, 영주님하고 총관님하고 서로 내기한 거래. 여기서 작물이 자라나 안 자라나 말이야."
"어이쿠, 우리 영주님 큰일 났구먼. 여기는 작물이 안 자라는 땅인데 그걸 모르셨나 봐."
인부들은 불안한 표정으로 숙덕거렸다.
내기에서 지면 영주가 괜히 해코지하지는 않을까 걱정이 된 것이다.
그래도 먼저 나서서 영주에게 조언할 만한 용기는 없었다.
다들 일단 영주가 시키는 대로 땅을 파기 시작했다.
굶고 살던 사람들에게 돈과 식량을 준다고 하면 열심히 일하는 건 당연했다.
영지민들이 경쟁적으로 달라붙으니 개간 작업은 며칠 만에 끝났다.
이제 계절이 돌아오고 씨를 뿌려 보면 영주가 한 일이 헛짓이었다는 사실이 밝혀질 것이다.
곧 다가올 미래를 예상한 영지민들은 안색이 어두웠지만, 개간지를 둘러보는 지셀의 입가에는 웃음이 떠나지 않았다.
"쓸모없던 땅들이 이제야 쓸 만해지겠군."
영지민들은 그 웃음을 보면서도 안절부절못했다.
왜 영주님은 쓸모없는 땅을 뒤집어엎으면서 저렇게 좋아하는 걸까?
자기 생각이 틀렸다는 걸 깨달으면 화를 내지 않을까?
걱정에 같이 웃지도 못하고 먼 곳만 바라볼 뿐이었다.
그러나 불안함도 잠시, 작업이 끝나고 지셀이 사람들을 불러 모으자 영지민들은 기대 섞인 눈빛을 내비치며 서로를 바라보았다.
"수고들 했다. 갈수록 열심히 하니 정말 보기가 좋네."
생각보다 작업 속도가 빨라 만족한 지셀이 인부들의 어깨를 두드리며 웃었다.
사람들은 서로 바싹 붙어서 수군거리기 시작했다.
"오늘도?"
"그렇겠지. 기분 좋아 보이시잖아."
평범한 사람들에게 영주와 함께 일한다는 건 꽤 부담스러운 일이다.
그런데도 영지민들은 클로드나 다른 사람들보다 지셀이 감독하는 구역에 우선 지원했다.
그럴 만한 이유가 있었다.
클로드는 일하는 내내 옆에서 쉬지 않고 잔소리를 하기에 영지민들이 가장 꺼리는 상관이었다.
떠나기 전에 일은 다 하고 가야 한다나?
어찌나 까탈스럽고 투덜거리는지 지겨워 죽을 지경이었다.
벨린다는 의기소침하게 앉아서 멍하니 인부들이 일하는 걸 구경하다가 갑자기 혼자 짜증을 부리곤 했다.
도무지 기분을 종잡을 수가 없어서 벨린다 쪽에 간 인부들은 최대한 모른 척하고 일만 했다.
자꾸 누군가를 죽이겠다고 중얼거리는데, 가까이에서 들은 사람들이 말하기로는 아무래도 총관이 원한을 산 거 같다던가.
길리언이나 카오르는 분위기부터가 위압적이었다.
옆에 있기만 해도 숨 쉬기 힘들 정도로 존재감이 강해서 영지민들은 티 나지 않게 그들을 슬슬 피해 다녔다.
영주란 분명 영지에서 가장 무서운 존재인데도, 같이 일하기에 가장 편한 사람이라니 아이러니한 일이었다.
물론 영지민들이 지셀과 함께 일하기를 선호하는 결정적인 이유는 따로 있었다.
"이걸로 술이라도 마시고 푹 쉬어라. 다음에도 지금처럼 열심히 하도록."
열심히 일하면 지셀이 사람들에게 화끈하게 보상해 주었기 때문이다.
그는 빨리 일을 끝냈다며 인부들에게 기존 보수에 몇 실버씩 더 붙여 지급했다.
영지민들은 화색을 띠며 돈을 받아 갔다.
"감사합니다. 영주님."
"잘 쓰겠습니다!"
"언제든지 불러만 주십시오!"
정해진 보수가 있었지만, 지셀이 열심히 한 자들에게 추가 수당을 지급하는 데는 분명한 이유가 있었다.
적절한 보상이야말로 사람들을 움직이는 가장 큰 힘이라는 걸 알기 때문이었다.
실제로 그와 함께 일하는 영지민들은 다른 이들보다 더 열심히 일했다.
기뻐하는 영지민들을 보며 지셀이 살짝 미간을 좁혔다.
'다들 돈 좀 팍팍 쓰라니까 왜 이렇게들 아껴? 시간이 중요한데 말이야. 쯧쯧....'
다른 사람들에게도 열심히 하는 사람에게는 추가 수당을 주라고 예산까지 책정해 줬건만, 다들 잘 쓰지 않았다.
가난이 몸에 배어 그런 모양이었다.
영지 돈을 아껴야 한다는 인식이 너무 강해서 돈으로 시간을 살 생각은 못 하는 것이다.
돈보다 작업 속도가 중요한 상황인데, 이래서야 영 손발이 맞지 않는다.
'계속 잔소리를 할 수도 없고. 에잉.'
하나하나 붙잡고 잔소리하면 고쳐지기야 하겠지만, 좋은 방법은 아니었다.
일을 맡겼으면 믿어 주는 것도 중요하다.
애초에 지셀은 수하들에게 무언가를 친절하게 가르쳐 주는 성격이 아니었다.
그저 가끔 한 번씩 강조해서 상기시키는 수밖에.
지셀은 돈 안 쓰는 수하들 몫까지 자기가 쓰겠다는 듯, 쉬지 않고 영지에 돈을 풀었다.
"자, 다들 바쁘게 움직여라. 일이 많다."
영지에는 일거리가 끊임없이 쏟아졌다.
워낙 방치되고 낡아 못 쓰게 된 시설물들이 많았기 때문이다.
손봐야 할 시설들을 고치고, 농지를 넓혀 갈수록 불안에 떨던 영지의 분위기도 활기차게 바뀌어 갔다.
못 먹고 살던 영지민들에게는 이 정도만 해도 감지덕지한 일이었다.
"우리 영주님이 농사나 이런 건 잘 모르지만 그래도 어떻게든 여기 살리려나 봐."
"망나니였다는 소문도 있던데? 엄청 사고뭉치였대."
"에이, 어렸을 때나 그랬겠지. 지금은 이렇게 돈도 많이 풀고 일도 주시잖아. 망나니였으면 술 마시고 놀기만 하지 이런 걸 하겠어?"
배가 불러야 인심이 좋아지는 법.
처음에는 지셀을 두려워하던 영지민들도 새로운 영주에 대해 급격히 호감을 보였다.
영지민들이 입을 모아 새 영주를 칭찬하기 시작할 즈음, 지셀은 마법사들을 불렀다.
104화 나랑 내기 한번 할까? (4)
알포이와 마법사들은 여유로운 웃음을 지으며 나타났다.
그들도 영지에 널리 퍼진 소문을 들었다.
지셀이 절대로 이길 수 없는 내기를 했다는 소문이었다.
마법사들은 클로드가 내기에서 이길 거라고 확신했다.
'후후후, 이 악귀 같은 놈이 드디어 개망신을 당하겠구나. 잘했어, 총관. 믿고 있었다고!'
알포이는 웃음을 감출 생각도 하지 않았다.
지셀이 크게 망신을 당하게 생겼는데 어찌 기쁘지 않을까.
이럴 줄 알았으면 클로드에게 좀 잘해 줄 걸 그랬다며 알포이는 속으로 낄낄댔다.
다른 마법사들도 안색이 좋은 것은 마찬가지였다.
오직 바네사만이 우울한 표정으로 고개를 숙이고 있을 뿐이었다.
알포이는 헛기침을 두어 번 한 뒤 지셀을 당당하게 마주 보았다.
"크흠, 무슨 일로 부르셨는지요?"
영주가 됐으니 전처럼 반말을 지껄이며 까불지는 못했다.
마탑의 후계자라고 해도, 탑주나 장로처럼 귀족 대우를 받는 건 아니었으니까.
지셀은 대수롭지 않은 표정으로 답했다.
"왜 부르긴, 마법을 쓸 일이 있으니까 불렀지. 아주 중요한 일이니까 신경 써서 해야 해."
"소문은 들었습니다. 설마 마법으로 지력을 끌어올리려고 하는 건 아니겠지요?"
"뭐?"
지셀이 인상을 찌푸렸다. 알포이가 다급하게 말을 이었다.
"그 많은 개간지를 우리끼리만 처리하는 건 무립니다! 지력을 강제로 끌어올리면 다음에는 땅이 더 척박해지는 건 아시죠?"
강력한 마법이나 신성력을 이용하면 지력을 순간적으로 끌어올릴 수 있다.
하지만 실제로 그 방법을 쓰는 영주는 없었다.
한 번만 써도 땅이 엉망이 되어 버리기 때문이다. 생명력을 강제로 뽑아 쓰는 대가였다.
부작용을 해결하려면 매번 주변 마나를 끌어와야 하는데, 그것도 수준 높은 마법사나 사제가 있어야 쓸 수 있는 방법이었다.
그들을 고용할 바에야 그 돈으로 식량을 사 오는 게 훨씬 이득이다.
물론, 알포이는 지셀의 땅이 엉망이 되든 말든 상관없었다.
설령 그런 부작용이 없더라도 힘을 써 줄 생각도 없고.
"애초에 그런 마법은 익히지도 않았습니다. 그리고 편법을 쓰는 건 공정한 내기에 어긋나는 겁니다."
"뭔 소리야? 성 뒤편 공터에 마법진을 만들 거다."
"마법진이요?"
알포이는 속으로 혀를 찼다.
개간지도 아니고 성 뒤편에 만든다는 걸 봐서는 다른 쓸데없는 짓을 할 모양이었다.
"그래, 룬스톤을 써서 마나 집속진을 만들 거다. 재생 마법진을 중첩하고, 추가로 다른 마법진도.... 아니, 됐다. 너희들한테 말해 봐야 뭐 하겠냐. 더 이상의 자세한 설명은 생략한다."
설명을 들은 마법사들이 고개를 갸우뚱했다.
설명이 너무 성의 없기도 했지만, 태어나서 처음 듣는 형식의 마법진이었기 때문이다.
알포이가 짐짓 거들먹거리며 물었다.
"아니, 대체 이게 무슨 마법진인데요? 마법이 뭔지는 아세요?"
"아주 중요한 거. 일단 준비해. 하나하나 설명할 시간 없다. 꼼꼼하게 확인할 테니까 신중하게 해라. 빠르고 확실하게. 알지?"
"쳇, 마나 집속진이 중심인 거 보면 뻔하네요. 내가 이 정도도 모를 줄 압니까?"
룬스톤을 이용해 인위적으로 마나를 한곳에 모으는 마법진을 마나 집속진이라 한다.
그 안에서 마나 연공법을 수련하면 평소보다 조금 더 빠르게 마나를 쌓을 수 있었다.
기사든 마법사든 마나를 쓰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꿈꾸는 마법진이었다.
하지만 아무나 쓸 수는 없다.
집속진 하나를 만드는 데 룬스톤을 몇 개나 써야 하는데, 그럼에도 마법진 지속 시간이 일주일을 넘지 못해서였다.
며칠만 지나도 룬스톤이 모두 힘을 잃고 깨져 버리는 것이다.
부유한 영지에서 대단히 촉망받는 기사라면 모를까, 보통 기사들은 평생을 살아도 한 번 경험해 볼까 말까 한 게 바로 마나 집속진이었다.
물론 룬스톤을 가진 지셀의 경우는 얘기가 좀 다르겠지만.
'델파인 공작가의 소드마스터 발자크 백작도 젊었을 때 지원을 받아서 한 달 정도 쓴 게 전부라지?'
부유하기로 유명한 델파인 공작가도, 정말 재능 있는 자들만 모아서 잠깐 경험시켜 주는 게 전부였다.
"영주님이 직접 쓰실 겁니까?"
"내가 이걸 왜 써?"
지셀이 황당해하며 반문했다. 알포이는 턱을 치켜들며 물었다.
"직접 쓸 게 아니라면.... 혹시 여러 개를 만들어야 합니까?"
"오, 나름 날카로운 질문인데. 어디다 쓸 건지 감이 오나 봐?"
"흥, 그 정도야 당연하지요. 그럼 몇 개나 만들까요?"
"한... 200개?"
"예?"
지셀의 말에 마법사들은 모두 기겁했다.
마나 집속진을 200개나 만들려면 들어가는 룬스톤의 양이 어마어마할 것이다.
모르긴 몰라도 예전에 마탑에 팔았던 분량 정도는 들 게 분명했다.
하지만 알포이는 이내 이해했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확실히... 그 정도는 필요하겠죠."
현재 용병들이 삼백여 명에 가깝다.
그 인원들이 다 들어가 수련하려면 그 정도는 필요할 것이다.
"돈을 들여서 빠르게 키우는 건 좋지만.... 이렇게 돈을 많이 쓰면 오래 유지하지는 못할 텐데요?"
지셀이 조금 놀라서 답했다.
"한 번이면 충분해. 그래도 눈치가 제법인데? 벌써 파악했다니, 내가 널 너무 우습게 봤군."
알포이가 더 칭찬하라는 듯 어깨를 으쓱였다.
"지금까지 영주님이 보인 행보가 있는데, 모르는 게 이상하죠. 항상 뭔가 급하게 움직이고 있으니까요."
"잘 알고 있네. 어쨌든 바쁘니까 알아서 빨리 준비해 달라고. 모르는 거 있으면 바네사한테 물어봐. 우리 영지에서 마법진을 제일 잘 아는 게 쟤니까."
"그런데 도대체 다른 마법진은 왜 중첩하는 겁니까? 이런 건 본 적이 없는데.... 어느 마탑의 방식이죠? 검증되지 않은 마법진은 무척 위험합니다. 자신 있으세요? 게다가 이렇게 복잡한 건 작업 시간이...."
"아, 누가 배운 놈 아니랄까 봐 참 말 많네. 토 달지 말고 그냥 빨리 진행해."
마법사답게 잔뜩 호기심을 품고 따져 대던 알포이는 지셀의 험악한 표정에 입맛을 다시며 뒤로 물러났다.
궁금하긴 하지만 괜히 더 따지다가는 한 대 칠 기세다.
"뭐, 그렇게까지 부탁하시니 힘 좀 써 보죠."
"검사할 거니까 확실히 만들어. 그래도 오늘 조금 다시 봤어. 하는 짓에 비해 머리가 똑똑한 놈이긴 하구만."
지셀은 칭찬인지 욕인지 모를 말을 던지고 자리를 떴다.
알포이는 왠지 모르게 뿌듯한 마음이 들어 으스댔다.
"바네사, 들었지? 마법진 만들 준비 해. 며칠은 지속해야 하니 제대로 새겨 넣자고."
"네, 넵! 알겠습니다."
바네사는 놀란 표정을 감추지 못했다.
자신은 왜 마법 집속진을 만드는지 전혀 모르겠는데, 듣자마자 영주님의 뜻을 짐작하다니.
이러니저러니 해도 역시 마탑의 후계자이기는 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알포이는 마법사들을 지휘해 공터에서 바로 마법진을 새겨 넣기 시작했다.
마법사들은 자신만만하게 작업을 시작했지만, 그 기세는 오래가지 않았다.
"아, 이거 어떻게 하는 거였지?"
"이러면 마법 회로가 연결이 안 되는데."
"이건 내 분야가 아니라서...."
마법진은 제대로 그리려면 오래 연구해야 하는 분야다.
조금이라도 틀리면 마법진이 발동하지 않고, 때로는 폭발하는 등 위험한 효과가 나오기도 한다.
그런 마법진을, 더군다나 처음 보는 중첩 마법진을 200개나 그려야 한다니.
알포이와 다른 마법사들은 어찌할 바를 모르고 쩔쩔맸다.
"아이씨, 어떡하지? 이거 잘못되면 우리 다 뒤지는데. 그 새... 영주님 성질 더럽잖아."
알포이가 불안해하며 손톱을 깨물었다.
마법사들이 하는 꼴을 보며 안절부절못하던 바네사가 얼른 끼어들었다.
"저, 제, 제가 이 부분을 고, 고쳐 볼게요."
"어, 그래. 한번 해 봐. 기회를 줄게."
바네사는 한 치의 오차도 없이 마법진을 새겨 나갔다. 마력이 부족하니 시간이 오래 걸리긴 했지만, 아주 작은 선 하나도 놓치지 않았다.
다른 사람들이 미처 짚어 내지 못하는 부분까지 확인하니, 바네사에게 권위가 실리게 되는 건 당연한 일이었다.
바네사는 금세 마법사들 사이에서 주도권을 쥐게 되었다.
은근하게 뒤로 밀려난 알포이는 민망한 표정을 지으며 연신 헛기침만 해 댔다.
"아, 얘 공부 많이 했네. 열심히 했네. 빨래하면서 언제 그렇게 공부했대?"
다른 마법사들도 감탄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마력은 없어도 지식이 제법이란 건 저번 전쟁을 통해 알고 있었다.
하지만 지금 보니 그냥 제법 정도가 아니었다.
마법진을 그리는 데 전혀 막힘이 없는 게, 마법 지식만 따지면 마탑의 장로 이상인 거 같았다.
바네사 덕분에 한숨 돌린 알포이는 아예 그녀를 옆에서 도와주다 말고 중얼거렸다.
"그런데 도대체 이 마법진은 뭘까. 나도 처음 보는 건데, 제대로 된 마법진은 맞나? 대체 어디서 구해 온 거지? 그냥 좋은 거 다 집어넣는다고 효과가 있는 게 아닌데."
"그, 글쎄요? 영주님이 이렇게 하라고 하셨으니까 그대로 하고 있긴 한데...."
"페르디움 가문의 비전 같은 건가? 그 집안에 마법사가 있었다는 말은 못 들었는데."
알포이는 이런저런 추측을 하다 결국 고개를 저었다.
"에이, 그냥 하라는 대로 하자. 사고 나도 영주가 책임지겠지. 나 참, 내기에서 질 거 같으니까 별걸 다 하네. 이걸로 용병들의 환심이라도 사겠다는 건가? 쯧쯧... 사람이 참 구질구질하네."
옆에서 다 들은 바네사가 뾰로통한 표정을 지었지만, 알포이는 미처 눈치채지 못했다.
"네, 네. 그러면 저쪽에 회로를 다시.... 아니, 뭐 하세요. 거기 아니라 여기요.... 아, 이거 모르세요? 공부 안 하셨어요?"
"어, 어? 미안. 여기 맞지?"
그녀가 알포이나 마법사들에게 건네는 말에 은근히 핀잔이 섞이기 시작했지만, 아무도 눈치채지 못했다.
* * *
마나 집속진이 설치된다는 소문은 빠르게 퍼졌다.
그것도 무려 200개나!
소문으로 먹고사는 용병들이 모를 리가 없었다.
어느 순간 도박이나 술 얘기는 쏙 들어가고 다들 마나 집속진에 대해서만 떠들었다.
"대장이 마나 연공법도 가르쳐 주겠지? 모르는 사람이 태반이잖아?"
"우리를 정예로 만들겠다고 몇 번이나 말했으니 그러지 않을까?"
"아, 이러면 최소한 장기 계약을 해야겠네."
용병들도 계속 일 년짜리 계약을 갱신하면서 버틸 수 없다는 건 이제 알고 있었다.
분명 조만간 새로운 제안이 올 거고 그때는 좋든 싫든 한쪽을 선택해야만 했다.
아마도 마나 연공법과 마나 집속진을 미끼로 장기 계약을 유도하겠지.
용병들의 기대 속에서 며칠이 지나고 드디어 마나 집속진이 완성되었다.
"내가 만든.... 아니, 바네사와 함께 만든 마나 집속진이다! 너네는 살면서 이런 거 처음 봤지? 으하하하!"
알포이가 으스댔지만 용병들은 신경도 쓰지 않고 우르르 지셀에게 몰려갔다.
마법진이 제대로 새겨졌는지 하나하나 확인하던 지셀은 용병들이 들이닥치자 조금 놀란 표정을 지었다.
"갑자기 왜 이렇게 우르르 찾아왔어? 내가 안 불렀는데. 무슨 일 있어?"
대답은 길리언에게서 나왔다.
"마나 집속진이라고 하니 다들 관심이 많은 모양입니다."
호기심과 기대가 어린 눈빛을 보고 지셀이 피식 웃었다.
"다들 차례대로 기회가 올 테니 너무 걱정하지 마. 괜히 욕심부리지 말고."
그 말에 용병들은 확신했다.
이 마나 집속진은 정말 자신들을 위해 준비한 것이다!
성미가 급한 고든이 못 참고 나섰다.
"그럼 누구부터 들어갑니까? 마나 연공법은 어떻게 하고요?"
"누구부터는 무슨.... 얘네부터 들어갈 거다."
지셀이 시큰둥하게 내뱉으며 옆으로 손을 뻗었다.
얼굴에 피곤한 기색이 가득한 클로드가 그 손 위에 주머니를 툭 올려놓았다.
지셀은 주머니를 안에 들어 있던 것을 한 움큼 꺼냈다.
튼실하고 윤기가 잘잘 흐르는 밀알이 모습을 드러냈다.
다들 눈만 껌뻑이고 있는 가운데 고든이 다시 물었다.
"설마... 먼저 들어간다는 게 그겁니까?"
"응."
"그거 밀알이잖아요?"
"그렇지."
"혹시... 걔들도 마나 연공법을 익혔나요?"
"그게 뭔 개소리야?"
고든이 침을 꿀꺽 삼키고 마지막 질문을 던졌다.
"저 엄청난 돈이 들어간 마나 집속진에... 밀알들이 제일 먼저 들어간다고요? 제가 아니고요?"
"아, 그렇다니까! 몇 번을 말해. 아니, 그리고 왜 네가 제일 먼저인데?"
지셀이 짜증스럽게 내뱉었다.
그제야 농담이 아니라는 걸 깨닫고 사람들은 표정을 일그러트렸다.
저 비싼 룬스톤을 사람도 아니고 밀알 따위에 태우다니!
105화 나랑 내기 한번 할까? (5)
고든이 분을 못 참고 소리를 질렀다.
"아니, 말이 안 되잖아요! 왜 사람도 아니고 밀알이 먼저 들어가요!"
"네가 먼저 들어가는 건 말이 되고?"
하긴 길리언에 카오르, 다른 선배 용병들이 있는데 고든이 먼저 들어갈 수 있을 리가 없다.
할 말이 없어진 고든이 괜히 목을 긁었다.
지셀은 얼빠진 용병들을 보며 웃었다.
"나중에 기회를 줄 테니 오늘은 가서 하던 일들이나 마저 해."
기대가 클수록 실망도 큰 법. 고든은 미련을 버리지 못하고 억지를 부리기 시작했다.
"아, 저 한 번만 먼저 들어가 보면 안 돼요? 진짜 이거 해 보고 싶었어요."
왕국에서도 손꼽히는 재능을 가진 기사도 겨우 맛이나 볼 수 있는 게 마나 집속진이다.
그런 게 눈앞에 있는데, 씨앗에 쓸 거라 인간은 못 넣어 준단다. 답답해 미칠 지경이었다.
"나중에. 마나 집속진은 제대로 된 마나 연공법 없으면 몸이 터져 죽는다."
"아, 제발요. 저 아는 거 있어요. 예전에 조금 배웠다고요."
사실 그가 익힌 건 마나도 못 뿜어내고, 쌓이는 양도 미미한 최하급 연공법이라 조금 건강해지는 효과 정도밖에 없었다.
집속진에 들어가도 목숨을 부지할 수 있을지 확실하지 않았다.
그래도 평생 다시 오지 않을 기회라면 죽으나 사나 한번 시도라도 해 보고 싶은 게 사람 욕심이다.
길리언이 인상을 쓰며 뒷덜미를 붙잡았지만, 고든은 계속 징징댔다.
안나를 데려다주고 돌아온 지 얼마 안 되어서 해이해진 마음이 아직 원래대로 돌아오지 않은 탓이다.
다른 용병들은 저러다 혼날 거라고 혀를 차면서도, 혹시나 지셀이 허락해 주지 않을까 하는 기대에 고든을 말리지 않았다.
턱을 쓰다듬으며 곤란한 표정을 짓던 지셀이 길리언을 돌아보았다.
"요새 좀 쉬니까 다들 힘이 남아도나 봐. 길리언."
"네."
"모두 연병장을 200바퀴 돌고, 자기 전까지 충격 전술을 훈련시켜."
"알겠습니다."
그 말에 용병들이 사색이 되어 뒷걸음질 치기 시작했다.
하지만 이미 늦었다.
다른 급박한 사정이 생기지 않는 이상, 지셀은 한번 내린 명령을 절대 철회하지 않는다.
게다가 길리언은 지셀의 명령을 우직하게 실행하는 자다. 말 안 듣는 부하들은 때려 가면서.
용병들은 뒤늦게 후회하며 울상을 지었다.
최근에 지셀이 영지 일에만 신경을 써서 그들과 엮일 일이 없었는지라 잊고 있었다. 본래 이런 사람이라는 걸.
용병들은 고든을 쥐어 패며 황급히 주변을 둘러보았다.
"카, 카오르는 어디 갔지?"
훈련은 어쩔 수 없이 하게 됐지만, 빨리 카오르를 찾아야 했다.
카오르가 길리언과 투닥거려야 그 틈을 타 훈련 강도를 낮출 수 있기 때문이다.
"뭐야! 어디 갔어?"
카오르는 어디로 숨었는지 이미 자리에 없었다.
자기는 그 자리에 없었다고, 훈련하라는 말 같은 거 못 들었다고 오리발을 내밀 모양이었다.
길리언은 용병들에게 한심한 눈빛을 보내며 낮게 말했다.
"지금부터 훈련을 시작한다. 여기서부터 바로 뛴다. 실시."
용병들이 울상을 지으며 사라진 뒤, 지셀은 피식 웃으며 다시 마법진을 점검했다.
멍하니 그를 보던 알포이가 갑자기 배를 잡고 웃었다.
"으하하하! 빨리 키운다는 게 용병이 아니라 밀알이었어? 아니, 거기 사람이 안 들어가고 밀알이 들어가면 강해질 거라 생각한 겁니까? 와, 발상의 전환 뭐야."
사람이 들어가면 마나를 쌓아서 금세 강해지니, 밀알도 마나를 흡수해 강해지면 척박한 땅에서 버틸 줄 알았나 보다.
그야말로 마법에 대해 하나도 모르는 무식한 자나 할 수 있는 발상이었다.
"사람도 마나 연공법을 익히지 않은 채로 들어가면 몸이 터지는데, 밀알이 어떻게 버티겠냐고요. 아니, 작으니까 운 좋게 버틴다 해도... 밀알은 마나 연공법을 못 쓰는데 마나를 어떻게 활용하겠어요? 푸하하핫!"
알포이가 옆에 있던 바네사를 붙잡고 낄낄댔다.
"아이고, 배꼽 떨어지겠네. 바네사, 여기 어디 내 배꼽 떨어지지 않나 잘 좀 봐 줘. 푸하하하하!"
바네사가 뭐라고 답해야 할지 몰라 당황했지만, 알포이는 신경도 쓰지 않고 웃기 바빴다.
얼마나 내기에 이기고 싶었으면 저 아까운 룬스톤을 저렇게 날릴까?
차라리 그걸 마탑에 파는 게 영지에 더 도움이 됐을 텐데!
'하이고, 아까워라. 멍청이가 보물을 쥐니 감당을 못 하는구나.'
겉으로는 정신없이 웃으면서도, 알포이는 내심 룬스톤이 아까워 혀를 찼다.
하필 저런 미친놈에게 룬스톤이 들어가서는!
겨우 내기 하나 때문에 피 같은 룬스톤이 눈 녹듯이 사라질 걸 생각하면 울화병이 날 지경이었다.
알포이의 생각을 읽은 것처럼, 지셀이 의미심장한 미소를 지었다.
"너도 내기할래?"
"뭐라고요?"
"내가 이기면 너도 10년 무급에 찍소리 말고 열심히 일하기. 내가 지면 5천 골드도 주고 마탑으로 돌아가게 해 줄게."
'기회다!'
알포이는 혹여나 지셀이 무를세라 콧구멍을 벌렁거리며 고개를 끄덕였다.
"아, 콜!"
그러자 옆에 있던 다른 마법사들도 손을 들었다.
"우리도 하겠습니다!"
지셀은 흔쾌히 고개를 끄덕였다. 마법사들은 희희낙락하며 돌아갔다.
"우리는 자유다!"
바네사가 안절부절못하며 발만 동동 구르다가 다급하게 말했다.
"여, 영주님! 안 돼요. 마법사들이 있어야 대규모 공사를 할 수 있어요."
마탑이 지부를 차리면 지부를 관리할 마법사들이 더 오기야 하겠지만, 지금 있는 마법사들이 떠난다면 그것도 의미가 없다.
"괜찮아. 나 못 믿어?"
"아니, 그게 아니고...."
이건 믿음의 문제가 아니라 상식의 문제인데요!
바네사는 속으로 비명을 질렀지만, 차마 지셀에게 따지지는 못했다.
결국 그녀는 벨린다에게 상황을 알리러 잽싸게 자리를 떠났다.
주변이 조용해지자 지셀은 쯧쯧 혀를 찼다.
"이제야 좀 조용해졌네. 다들 참 힘이 넘쳐."
클로드가 퀭한 눈으로 지셀을 보다가 헛웃음을 지었다.
떠나기 전에 최대한 일을 많이 '해 주고' 가겠다고 밤낮없이 일하다 보니 미라가 따로 없는 몰골이었다.
"아니, 여기다 쓰려고 밀알을 준비시킨 겁니까?"
"그래, 종자를 개량해서 끝내주는 놈을 만들 거야."
"하아...."
클로드는 애잔한 눈으로 지셀을 보며 한숨을 내쉬었다.
종자를 개량한다니, 그건 좋은 놈들만 골라 심어 가며 몇 세대를 키워야 하는 일이다.
마법사들이 달라붙어 몇 년을 연구해도 성공을 장담할 수가 없다.
종자를 개량하는 게 그렇게 쉬웠으면 진작에 왕실에서 지원해 새 품종을 만들었을 것이다.
'분명 바네사도 당황하는 눈치였어.'
마법 지식만 따지면 영지 최고의 마법사인 그녀까지 저런 반응을 보이는 걸 보면, 정말 헛짓거리라고밖엔 할 수가 없었다.
"저기, 영주님. 뭐든 시도해 보시는 건 좋은데... 내기 기한이 얼마 안 남았어요. 이제 한 달하고 보름 정도 남았는데 그 안에 성과를 낼 수 있겠습니까?"
걱정되어 묻는 건 아니었다. 내기는 어차피 자신이 승리할 테니까.
그래도 지셀의 행동이 뭔가 조금 찝찝하고 수상스러웠다.
"문제없어. 그 정도 기간이면 충분하지."
"밀알을 여기서 얼마나 키워야 하는데요?"
"한 달 정도?"
클로드는 웃음을 참느라 표정이 이상하게 일그러졌다.
알포이의 말처럼 밀알이 터지지나 않으면 다행이었다.
백 보 양보해서, 지셀의 생각대로 밀알이 터지지 않고 무사히 완성된다고 하더라도 고작 보름밖에 안 남는다.
도대체 보름 동안 뭘 할 수 있겠는가.
"크흠, 그냥 패배를 인정하시는 게 어떻습니까? 이렇게 룬스톤을 날린 게 알려지면 내기에 진 것 이상으로 욕을 먹을 겁니다. 어휴, 룬스톤 아깝게 이게 뭡니까?"
그래도 지셀은 안나를 구해 준 고마운 사람이었다. 클로드도 지셀이 그렇게까지 망신당하는 건 바라지 않았다.
"뭐, 지금이라도 부탁하시면 제가 무승부로 해 드릴 수는 있는데."
무승부를 한 글자 한 글자 강조하는 클로드의 말에 지셀이 안쓰러워하는 표정을 지었다.
"뭐야, 벌써 쫄았어? 뭘 무승부야, 무승부는. 시작했으면 끝까지 가야지! 지금 고오급 노예가 잔뜩 생길 판인데."
"하하하, 이것 참. 영주님을 생각해서 드린 말씀인데 그렇게 말씀하신다면 어쩔 수 없지요. 뭐, 온 김에 밀알이 터지는지 안 터지는지나 구경하고 가겠습니다."
"좋은 구경시켜 주지."
지셀은 씨익 웃으며 밀알을 조금씩 나눠 마법진에 넣었다.
가동 술식이 적힌 룬스톤에 마나를 조금씩 집어넣자, 곧 마나가 마법진에 모여들기 시작했다.
마법진에 푸른 빛이 돌더니 조금씩 마나가 쌓여 갔다.
그에 따라 마법진 안에 흩어 놓았던 밀알들이 조금씩 떨리기 시작했다.
알포이가 장담했던 게 무색하게도, 터지는 밀알은 하나도 없었다.
꼼꼼하게 모든 마법진을 살펴본 지셀이 미소 지었다.
"성공이군."
이제 이 밀알들은 놀라운 생명력을 가지게 될 것이다.
전생에는 이 방법도 널리 퍼져 모르는 사람이 드물었지만, 지금은 오직 지셀만의 지식이다.
대륙이 황폐해지고 사람들이 죽어 나가자, 수많은 마법사와 학자가 모여 찾아낸 해결책이다.
마나를 이용해 종자를 강화하는 방법. 미래를 아는 지셀이 했으니 간단해 보이지만, 사실은 수십, 수백 번의 실패 끝에 정립된 지식이었다.
의미심장한 미소를 짓는 지셀을 보고 클로드가 조금 찝찝한 듯 말했다.
"뭐, 다행히 터지지는 않네요. 설마 예상하신 겁니까?"
"당연하지, 아무것도 모르고 만들었을까."
살짝 불안한 마음이 들었지만, 클로드는 이내 고개를 저었다.
'그냥 우연이겠지. 아니면 그런 효과가 있는 마법진이거나. 바네사가 몰래 힘을 썼을지도 몰라.'
지식인들이 모여 있는 아카데미에도 밀알에 마나를 주입해서 생산량을 늘리는 방법을 아는 사람은 없었다.
마탑 출신 마법사들도 모르는 모양이고.
'설사 그런 방법이 있다 해도, 아무도 모르는 걸 영주님만 알고 있을 리가 없다.'
시골 촌구석에서만 살아온 지셀이 학자나 마법사들보다 정보에 밝을 리 없잖은가.
'마법도 모르는 영주님이 직접 만들어 낼 수도 없지. 이건 100% 블러핑이다.'
클로드는 확신했다.
도박에도 이런 상대들이 자주 보인다.
안 좋은 패를 쥐고서도 허세를 부려 상대가 먼저 항복하게 유도하는 것이다.
'후후, 허세도 어지간해야 속지요. 밀알이 정말 마나를 머금더라도, 애초에 땅이 받쳐 주지 못하는데 어쩌려고요?'
아무리 생각해도 지셀이 내기에서 이길 가능성은 없었다.
그렇게 결론을 내린 클로드는 한결 편안해진 표정으로 툭 내뱉었다.
"뭐, 잘 봤습니다. 결과 기대하겠습니다."
클로드는 부리나케 자리를 피했다.
괜히 주변에서 얼쩡거리다가는 지셀이 일을 더 시킬지도 몰랐다.
모두가 떠나고, 혼자 남은 지셀은 고민에 잠긴 채 괜히 주먹을 쥐어 보았다.
당장 해야 할 일은 모두 처리했다.
잠깐 여유가 생겼으니, 계속 마음에 걸렸던 문제를 해결해야 할 때였다.
'내 몸 문제인데 더 미룰 수는 없지.'
시간이 날 때마다 꾸준히 신체를 단련하고 마나 연공도 게을리하지 않았지만, 여전히 마나의 성질이 변한 이유를 알 수 없었다.
회복력이 좋아진 이유도.
'아무리 생각해도 그것 때문인 거 같은데....'
마수의 숲에서 블러드 퓌톤과 싸우다 죽을 뻔한 뒤에 벌어진 현상이니, 분명 블러드 퓌톤의 독과 관련이 있을 것이다.
"죽으려면 곱게 죽지, 새끼가."
지셀이 짜증 섞인 한숨을 내뱉었다.
"확인은 해 봐야 하는데."
불확실한 힘을 몸에 품고 있는 건 그의 성정에 맞지 않는다.
하지만 확인할 방법이 하나밖에 없어 그동안은 차마 시도하지 못했다.
'한창 바쁠 때 쓰러지면 곤란하니까....'
지금까지는 일이 바쁘다는 핑계로 확인을 미뤄 왔지만, 앞으로는 더 바빠지게 된다.
개간지 작업도 끝났겠다, 종자 개량만 끝나면 또 할 일이 몰아칠 것이다.
잠깐 여유가 생긴 지금이야말로 무언가 시도해 보기에는 최적의 타이밍이었다.
한참을 고민하던 지셀은 결국 실험을 해 보기로 했다.
목숨이 위험해질지도 모르는 실험을.
106화 무승부로 해 드리겠습니다. (1)
그간 나름대로 수련을 해서 마나에 스며든 음습한 기운을 제어하려 했지만 실패했다.
의식하지 않으면 알지도 못할 정도로 그 기운이 미미했기 때문이다.
"마나의 성질이 변한 건 분명한데 말이지."
그는 툴툴거리며 연무장으로 향했다.
마나를 몸에 둘렀는데도 블러드 퓌톤의 독은 결국 그 마나의 벽을 뚫고 지셀의 몸에 들어왔다.
아무리 소량이라도, 고작 해독초 몇 번 씹은 걸로 그 강력한 독이 다 사라질 리가 있나.
블러드 퓌톤의 독과 자신의 마나가 알 수 없는 상승효과를 일으킨 게 분명했다.
"역시 그 방법밖에 없나."
확인하는 방법은 간단했다. 바로 블러드 퓌톤의 독을 직접 마셔 보는 것.
그때와 같은 조건을 만들어서 마나가 어떻게 반응하는지 확인하는 것이다.
"내 생각이 맞는다면 이건 새로운 기회나 마찬가지야."
지셀은 창고에서 몰래 가져온 작은 병을 슬쩍 흔들어 보며 마른침을 삼켰다.
지금은 모두 잠든 새벽 시간.
일부러 다른 사람의 눈을 피해 몰래 나왔다. 만약 일이 잘못되어도 아침에나 발견이 될 것이다.
지금 자신이 쓰러지면 펜리스 영지도, 페르디움도 순식간에 적들에게 짓밟힐 터.
함부로 목숨을 걸면 안 되는 상황이지만, 그대로 내버려 둘 수도 없는 일.
지셀도 몇 번이나 신중히 고민하고 수도 없이 마나를 확인하며 성공할 가능성을 가늠해 보았다.
"양을 적당히 조절하면 죽진 않을 거야. 내 가설이 맞는다면 더 빠르게 강해질 수 있으니, 해 볼 만한 도박이지."
분명히 시간을 거슬러 돌아왔는데도, 전생보다 시간이 부족했다.
미래를 안다 해도 그건 그저 가능성에 불과할 뿐. 언제 무슨 일이 생길지 모른다.
조금이라도 더 빨리 강해져야 한다.
그런데 마침 새로운 기회가 제 발로 찾아왔다.
엄청난 위험이 도사리고 있지만, 지셀은 이 기회를 놓칠 생각이 전혀 없었다.
"세상에 쉬운 일이 어디 있어?"
그의 직감은 지금 이 순간에도 끝도 없이 강렬하게 외치고 있었다.
이 독이야말로 너를 더욱더 강하게 만들어 줄 것이라고.
"에이, 설마 죽기야 하겠어?"
지셀은 불안감을 억누르며 약병의 뚜껑을 열었다.
작은 병에 담긴 독을 아주 조금 혀에 떨어뜨리자 지셀의 얼굴이 퍼렇게 질렸다.
하지만 그는 지체하지 않고 병의 내용물을 모조리 입 안에 털어 넣었다.
"크윽!"
그의 안색은 순식간에 보랏빛이 되었다가, 곧 거무죽죽하게 타들어 가기 시작했다.
지셀은 이를 악물었다.
배 속을 칼로 난자하는 듯한 고통이 느껴졌다. 근육도 마비된 듯 팔다리가 마음대로 움직이지 않았다.
금속이든 돌이든, 재질을 가리지 않고 대부분의 물건을 부식시키는 강력한 독이다.
특수한 마법 처리를 한 병도 간신히 버티는 독을 몸 안에 생짜로 집어넣었으니....
의지, 육체, 마나 중 하나라도 모자라면 죽을 수밖에 없는 상황이었다.
'정신 차려야 한다!'
마나로 한번 걸러 받아들이는 것과 직접 마시는 건 차원이 달랐다.
지셀에게 마나가 없었다면 독이 혀에 닿는 순간 즉사했을 것이다.
구우우웅!
지셀의 마나가 몸을 가득 채운 독의 기운과 싸우기 시작했다.
세 개의 코어가 맹렬하게 돌아가며 마나를 뿜어내었지만, 독은 오히려 그 흐름을 타고 전신으로 퍼져 나갔다.
마나와 독은 서로를 잡아먹으려는 듯 지셀의 몸 안에서 격렬한 싸움을 시작했다.
"크으으윽!"
지셀이 눈을 부릅떴다.
두 눈에서 핏줄이 터지고 피눈물이 흘러나왔다.
내장이 상한 듯 입가에서도 피가 새어 나오기 시작했다.
온몸의 혈관은 터질 듯이 부풀어 올랐다.
"꽤... 제법인데?"
피눈물을 흘리면서도 지셀은 웃었다.
고통스럽지만, 그 이상으로 기대감이 차올랐다.
이거다. 바로 이 힘이다. 이 힘을 소화하기만 하면 그는 몇 배나 더 강해질 것이다.
"크으윽!"
새롭게 들어온 기운은 몸 안에서 발버둥 치며 밖으로 뻗어 나가려 요동치고 있었다.
혼미한 정신을 부여잡고 지셀은 마나 연공을 계속했다.
세 개의 코어가 기운을 어떻게든 통제하려 하는 지셀의 의지와 맞물려 맹렬하게 돌아갔다.
구우우웅!
독을 휩쓸고 소용돌이치던 마나는 어느새 독과 하나가 되었다.
지셀은 아주 조금이지만 마나의 양이 늘어난 걸 확실히 느꼈다.
쓸모없는 건 모두 타 버리고 순수한 힘의 정수만 그의 몸에 남은 것이다.
"역시 내 생각이 맞았어."
예상대로 그의 마나는 블러드 퓌톤의 독과 융화되어 독의 기운을 흡수했다.
흡수된 기운이 그의 회복력이 높아진 것에 일조한 모양이었다.
독은 어떻게 쓰느냐에 따라 약이 될 수도 있으니까.
"늘어난 건 좋은데...."
마나 양이 늘어난 것도, 회복력이 높아진 것도 당장 몰아치는 기운을 가라앉히지 못하면 아무 소용이 없다.
'조금만 더 버티면 된다! 조금만 더!'
폭발적으로 몰아치던 마나는 점점 독과 융화되며 그 성질이 변해 갔다.
언제 정신을 잃어도 이상할 게 없는 고통스러운 상황에서도 지셀이 희망을 잃지 않는 이유였다.
구우우웅!
얼마나 지났을까, 시간의 흐름도 잊은 채 고통을 버티던 그의 안색이 조금씩 원래의 빛을 찾아 가기 시작했다.
'성공...인가?'
마나에 남아 있던 독의 기운도 완전히 사라진 듯, 마비되었던 몸도 자유롭게 움직이기 시작했다.
지셀은 밖으로 뿜어져 나오는 마나를 최대한 몸 안으로 갈무리하며 서서히 마나의 흐름을 가라앉혔다.
독 기운이 사라졌다고 안심하고 기절했다간 폭주하는 마나에 그대로 온몸이 찢겨 나갈 것이다.
모든 힘이 가라앉고 나서야 그는 그대로 자리에 쓰러졌다.
'됐다.... 성공했어!'
성공했다는 확신이 들자 긴장이 확 풀려서 손가락 하나 까딱할 수 없었다.
희미해져 가는 정신을 붙잡아 둘 기력도 없었다.
지셀은 연무장 한가운데에 누운 채 그대로 의식을 잃고 말았다.
* * *
'얼마나 지났지?'
지셀이 서서히 눈을 떴다. 기다렸다는 듯 벨린다가 울먹이며 외쳤다.
"도련님! 도대체 무슨 일이에요? 완전히 시체 꼴이잖아요! 얼굴 핼쑥해진 것 봐!"
벨린다는 항상 이른 아침부터 연무장을 점검하고 지셀이 수련에 전념할 수 있게 준비한다.
연무장에 쓰러진 지셀을 제일 먼저 발견한 모양이었다.
지셀은 힘겹게 눈을 떠 주변을 둘러보았다.
자신은 침대에 누워 있고, 영지의 주요 인물들이 죄다 그 주변에 모여 있었다.
"뭐야, 무슨 큰일이라고 다들 모여 있어?"
길리언이 심각하게 되물었다.
"영주님, 혹시 블러드 퓌톤의 독을 마시셨습니까? 연무장에서 독이 담겨 있던 병을 발견했습니다."
"어, 그렇지. 좀 짜릿하더라고. 매운맛이야."
지셀이 별거 아니라는 어조로 내뱉었다.
그 대답에 방에 모인 모든 이들이 입을 쩍 벌리고 황당해했다.
본래도 블러드 퓌톤의 독은 강력하기로 유명하다.
마수의 숲에 살던 놈의 독이니 알려진 것보다도 훨씬 더 독성이 강할 터.
그걸 무슨 음료수 마시듯 마셔 놓고 맛 평가까지 해 대다니.
벨린다가 화를 참느라 부들부들 떨며 물었다.
"대체 왜 그러신 거예요?"
"그냥 수련한 거야, 수련."
"독을 마시는 게 무슨 수련이에요! 페르디움 가문의 마나 연공법은 독 같은 걸 쓰지 않는다고요!"
세상에는 독을 마시며 수련하는 마나 연공법도, 독을 사용하는 마법사들도 있기는 있다.
보통 독 내성을 기르고 그 기운을 사용하는 자들이 그런 식으로 수련한다.
하지만 독을 쓰는 사람들도 강력한 독부터 무식하게 마시는 게 아니라, 아주 미약한 독부터 단계를 올린다.
지셀처럼 극독을 홀라당 삼키는 게 아니라.
말도 안 되는 변명에 결국 벨린다는 참고 참았던 말을 내뱉었다.
"도련님, 설마 죽고 싶어서 그래요?"
"뭔 소리야."
"죽고 싶은 게 아니면 그걸 퍼다 마실 리가 없겠죠! 요새 일이 좀 많아서 갑자기 머리가 홱 돌아 버린 거예요? 아니면 아멜리아 아가씨가 그리워져서 세상 살기가 싫어졌어요?"
"아니, 거기서 그 여자 이름이 왜 나와? 나 이제 그 여자 안 좋아한다니까!"
"그럼 뭔데요! 진짜 내기 때문에 그러는 거예요? 쪽팔릴 바에는 차라리 죽겠다는 거냐고요!"
"뭐? 내가 왜 내기 때문에 죽어?"
지셀이 당황하며 주변을 둘러보았다.
모두가 벨린다의 말에 동의하는 듯 심각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다들 영주가 내기에서 질 거 같으니 창피함을 견디지 못하고 독을 마셨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클로드가 흐느적거리며 사람들 사이를 비집고 나왔다.
그는 분한 표정을 지은 채 어렵사리 입을 열었다.
"이렇게까지 고심하고 계실 줄은 몰랐습니다. 무승부로 해 드리겠습니다. 없던 일로 할 테니 일이나 조금 줄여 주시죠. 그래도 은인인데 죽음으로 몰아가다니, 마음이 불편해서. 어휴."
"이게 뭔 개소리...."
지셀이 황당해하며 험한 소리를 짓씹었다.
그런데 다른 사람들은 다들 눈빛이 촉촉해져서는 고개를 끄덕였다.
심지어 알포이도 우거지상을 하고서는 주절거렸다.
"영주님이 죽으면 저도 곤란하니 그냥 없던 일로 해 드리죠. 에잉."
어처구니가 없어진 지셀은 너털웃음을 지으며 손을 휘저었다.
"아니, 다들 무슨 말도 안 되는 소리야? 지금 결과가 코앞인데 무슨 판을 엎어?"
벨린다는 속상하다는 듯 가슴을 쳤다.
"괜히 자존심 세우지 말고 받아들이면 좋잖아요. 왜 이렇게 고집을 부리세요? 답답해 죽겠네!"
고구마를 먹은 것처럼 숨이 턱 막혀 와 지셀은 한숨을 내쉬었다. 답답한 건 자신이었다.
"아, 됐다고! 다들 가서 일이나 해! 내기는 그대로 진행한다!"
그러자 클로드는 사람들을 둘러보며 변명조로 말했다.
"난 할 만큼 했다? 영주님이 거절한 거야."
알포이도 옆에서 고개를 끄덕였다.
"나도 분명 말했다. 내 탓 아니야."
꼴을 보아하니, 여러 사람이 돌아가며 내기를 취소하라고 협박한 모양이었다.
하긴 영주가 독을 마셨으니, 그 죄를 덮어쓸까 봐 무서웠겠지.
지셀은 헛웃음을 지으며 손을 휘저어 사람들을 내쫓았다.
"자, 나 일어났으니까 이제 돌아들 가. 시간은 금이라는 말도 못 들어 봤어?"
"도련님, 그래도 조금만 더 쉬고 생각해 봐요. 네? 지금 독 기운이 안 빠져서 머리도 잘 안 굴러가죠?"
벨린다가 달래듯 말했다.
독을 마신 후유증으로 제정신이 아니라서 내기를 포기하지 않는 거라고 생각한 것이다.
"영주님, 집사장의 말이 맞습니다. 조금 더 쉬시는 게 좋겠습니다. 몸이 많이 안 좋아 보이십니다."
길리언도 나서서 말렸지만, 지셀은 자리에서 일어나 다시 일을 시작했다.
누워 있을 시간도 아깝다. 움직일 수 있을 때는 최선을 다해 움직여야 한다.
"끄응, 이거 몸이 말이 아니군. 독이 어지간히 강했던 모양이야."
그는 해골이 저리 가라 할 정도로 삐쩍 마른 몰골이었다.
마치 생명력을 무언가에 뺏긴 것처럼.
지셀은 삐거덕거리면서도 영지를 돌아다니며 진행 상황을 점검했다.
갑자기 변한 영주의 모습을 보고 영지민들이 놀랐다.
"뭐, 뭐여? 영주님 얼굴이 왜 저래?"
"일을 너무 많이 해서 그러는 거 아냐?"
"죽을병에 걸린 거 아냐? 우리 영주님 갑자기 죽으면 어떡하지."
영지민들은 걱정이 이만저만이 아니었다.
지셀이 죽은 뒤에 올 다음 영주는 아마 절대 지셀처럼 잘 베풀지 않을 테니까.
영지민들의 걱정과 달리 지셀은 힘든 몸을 간신히 가누면서도 싱글벙글 웃었다.
"힘이 느껴져. 내 안에서 강대한 힘이 넘쳐흐르.... 콜록! 콜록! 으... 피도 넘치네?"
"도련님, 좀 쉬시라고요! 피곤하니까 헛소리도 나오잖아요! 왜 그렇게 말을 안 듣는 거예요!"
벨린다가 지셀 뒤를 졸졸 따라다니며 잔소리를 쏟아 낸 것은 물론이었다.
107화 무승부로 해 드리겠습니다. (2)
벨린다는 맡고 있던 일도 미루고 지셀 곁을 지켰다.
혼자서는 제대로 걷지도 못하는 사람을 그냥 내버려 둘 수는 없었으니까.
"괜찮아. 금방 나을 거.... 쿨럭! 크윽!"
아니나 다를까, 지셀은 각혈까지 하며 헛소리를 늘어놓았다.
벨린다는 푹푹 한숨을 내쉬며 피를 닦아 주었다.
"낫긴 뭘 나아요! 그런 강력한 독이 쉽게 사라질 거 같아요? 지금도 죽어 가면서!"
끊임없는 잔소리에도 지셀은 그저 웃었다.
남들이 보기에는 병자 같아도, 그에게는 몸 안에 흘러넘치는 기운이 선명하게 느껴졌기 때문이다.
예상한 대로, 고작 이틀 만에 망가진 몸이 완전히 회복되었다.
새벽부터 지셀의 방문 앞에서 기다리고 있던 벨린다는, 멀쩡하게 걸어 나오는 그를 보고 깜짝 놀랐다.
"어? 진짜 괜찮아졌어요? 이게 무슨 일이래."
지셀은 어깨만 으쓱했다.
몸은 여전히 해골처럼 말라 있었지만, 눈빛이 살아나고 움직임이 가벼워지니 그녀도 괜찮다는 말을 믿을 수밖에 없었다.
"역시 내 예상이 맞았어."
독을 마시기 전보다 마나 양이 늘어나고 회복력이 놀라울 정도로 향상되었다.
효과를 본 이상 독을 마시는 걸 포기할 수가 없었다.
그 후로도 창고에 보관해 놓은 독은 계속 줄어들었다.
지셀이 그걸 가져다 마신다는 게 뻔히 보일 정도였다.
연무장에서 혼자 독을 마시고 쓰러진 채로 발견된 것이 몇 번.
급기야 클로드가 제대로 항복하지 않으니 영주님이 화가 나서 저런다는 소문이 돌기 시작했다.
"총관님은 왜 고집을 부리는 거야! 우리 영주님을 왜 내기 따위로 압박하는 거냐고!"
"영지를 발전시킨다고 좋아하던 사람이 갑자기 왜 죽으려고 하겠어. 이게 다 총관님 때문이야!"
"우리 영주님 못 잃어! 절대 못 잃어!"
영지민들은 어디서 구해 왔는지 클로드와 알포이의 초상화를 가져다가 송곳으로 마구 찔러 댔다.
영지민들의 저주 때문인지, 지셀이 떠넘긴 일 때문인지 클로드는 눈 밑이 더욱 시커메졌다.
그는 매일 지셀을 찾아와서 말렸다.
"아, 영주님 그냥 그만하자고요! 무승부로 해 드리겠다니까요? 지금 영주님 몰골이 어떤 줄은 아세요? 해골이 와서 형님 하겠어요!"
"야, 쫄았냐? 질 거 같아서 그래? 콜록!"
"와, 미치겠네! 쫀 건 영주님이잖아요! 지금 겁먹고 이러는 거 아니에요?"
"겁먹긴 누가 겁먹어? 아, 됐고. 쿨럭! 마침 잘 왔어. 이것도 좀 확인하고 진행해 봐. 끄응...."
지셀은 혀를 차며 서류를 건넸다. 클로드의 얼굴이 왈칵 일그러졌다.
"에이 씨... 괜히 왔어. 내가 진짜, 곧 떠나니까 너그럽게 봐 드리는 겁니다."
괜히 왔다가 일만 더 받는 상황이 몇 번 더 반복되자, 클로드는 더 이상 지셀을 찾아오지 않았다.
지셀은 귀찮은 잔소리가 줄었다고 기뻐하며 다른 사람들에게도 클로드처럼 일거리를 안겨 주었다.
수하들이 일에 치여 신경 쓰지 못하는 사이, 지셀이 쓰러지는 횟수는 눈에 띄게 줄어들었다.
"이걸 이런 식으로 다 쓸 줄이야."
지셀은 마지막 남은 독 병을 들어 보며 헛웃음을 지었다.
블러드 퓌톤의 독은 며칠 만에 바닥났다.
애초에 물에 희석해서 군사용으로 쓰려고 챙겨 둔 것인데, 모조리 지셀의 배 속으로 들어가 버린 것이다.
"어차피 사용하기도 어려운 거 이렇게 쓰는 게 낫지. 이게 다 투자다, 투자."
지셀은 독을 병째로 입에 털어 넣었다.
처음에 조심스럽게 몇 방울만 슬쩍 털어 넣던 때와는 완전히 다른 모습이었다.
지금은 한 병을 모조리 다 마셔도 혀가 약간 찌릿할 뿐 아무런 이상이 없다.
웬만한 독은 앞으로 그에게 어떠한 영향도 끼칠 수가 없을 것이다.
그건 지금처럼 독으로 마나를 늘리는 편법을 더 이상 쓸 수 없다는 뜻이다.
"이 짓도 오늘로 끝이네."
지셀은 자리에 앉아 천천히 마나를 움직이기 시작했다.
몸에 들어온 독은 빠르게 마나와 섞여 하나가 된 뒤 온몸으로 퍼져 나갔다.
무아지경에 빠져 마나를 연공하던 지셀이 몇 시간 만에 눈을 떴다.
그의 눈동자에 순간 검붉은 빛이 스쳐 지나갔다.
"이제 독이라면 지긋지긋하긴 하지만.... 조금 아쉬운걸."
독을 모두 흡수하니 마나의 총량이 비교도 안 될 정도로 늘어났다.
마나의 양만 따진다면 이전의 두 배 이상은 되는 거 같았다.
"정말 운이 좋았어."
지셀이 아무리 마나를 다루는 데 능하다지만, 많은 마나를 쌓으려면 오랜 시간이 필요하다.
그런데 독의 기운이 강력하면서도 지셀의 마나와 궁합이 잘 맞은 덕분에 시간을 많이 단축했다.
'이 정도 효과를 내는 영약은 거의 없는데 말이지.'
지셀은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나 단검으로 손바닥을 얕게 베었다.
길게 베인 손바닥은 순식간에 상처 하나 없이 매끈하게 아물었다.
새어 나온 피 몇 방울만이 그곳에 상처가 있었다는 사실을 알려 주고 있었다.
"마음에 드는군."
지셀은 손을 몇 번 쥐어 보며 만족스러운 웃음을 지었다.
* * *
독을 마시는 수련이 끝나자 지셀의 몸에는 빠르게 살이 붙기 시작했다.
피부도 좋아지고 눈에서는 정기가 뿜어져 나왔다.
몸 쓰는 법을 전혀 모르는 사람이 봐도 차이가 단번에 느껴질 정도였다.
"도련님, 왜 이렇게 건강해 보여요? 설마 죽기 전에 잠깐 반짝하는 거예요?"
"왜 자꾸 멀쩡한 사람을 죽이려고 해. 그냥 좋은 거 먹어서 그런 거지."
"좋기는 무슨, 독 먹어 놓고 그런 소리가 나와요?"
하지만 실제로 몸이 좋아진 게 눈에 보이니 반박할 수가 없었다.
"진짜 좋아요? 나도 먹어 볼까?"
벨린다가 의미심장한 눈빛을 보이며 지셀을 위아래로 뜯어보았다.
지셀은 그 시선을 피하며 슬쩍 내뱉었다.
"이제 독 안 마실 테니 걱정하지 마."
옆에 있던 클로드가 어이없다는 듯 고개를 저었다.
"안 마시는 게 아니라 못 마시는 거겠죠. 창고에 남은 게 없던데요."
독을 한 방울도 안 남기고 모조리 털어 가 놓고 이제 와서 안 마신다고 해 봐야 무슨 의미가 있는 건지.
그래도 그런 기행은 이제 안 한다 하니 클로드는 내심 한시름 놓았다.
온 영지 사람들에게 눈총을 받는 건 아무리 뻔뻔한 그라도 부담스러운 일이었다.
"창고에 가 봤어? 그럼 밀알 상태도 봤겠네."
"보기야 했죠. 심으면 몬스터라도 나올 것처럼 생겼던데요."
전에 지셀이 마나를 불어넣었던 밀알들을 보고 클로드는 깜짝 놀랐다.
장정의 엄지손톱 정도로 크기가 커졌고, 낱알 하나하나가 은은하게 푸른 빛을 내뿜고 있었다.
겨우 밀알 주제에!
확실히 예사롭지 않은, 상당히 수상한 생김새였다.
"잘 자란 모양이네. 그럼 이제 다음 준비를 해야겠군."
"정말 그 이상한 걸 심을 겁니까? 이제 보름밖에 안 남았는데 그거 심어 봐야 무슨 소용이 있겠어요. 고집은 그만 부리시죠."
클로드가 미심쩍은 듯 지셀을 위아래로 훑어보았다.
"아니, 혹시 이길 자신 없으니까 뭐 괴물 같은 거 키워서 복수하려는 건 아니죠?"
지셀은 콧방귀를 뀌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2차 개간 작업을 시작한다. 인부들을 모집하도록."
'어휴, 진짜 단단히 망신당해야 저 성격이 고쳐지지. 지는 게 쪽팔려서 독까지 마셨으면서 무슨 배짱이래. 마음대로 하쇼, 망해도 영주님 책임이지!'
클로드는 살짝 약해졌던 마음을 다시 다잡았다.
그가 인부를 모집하는 동안 지셀은 마법사들을 호출했다.
"으, 이번에는 뭡니까?"
얼굴에 짜증을 한가득 담고 나타난 알포이가 오자마자 퉁명스레 내뱉었다.
지셀이 독을 마시는 쇼를 한 뒤부터 사람들은 알포이에게도 내기를 포기하라고 압박해 왔다.
요새 들어서는 심장도 쿡쿡 쑤신다. 누군가 저주를 하는 게 틀림없다.
그런 와중에 일은 또 얼마나 많은지.
영주는 툭하면 마법사들을 불러내서 인부들이 하기엔 시간이 오래 걸리는 일들을 대신 시켜 댔다.
이제는 노동자인지 마법사인지 스스로도 헷갈릴 지경이었다.
"룬스톤에 마법을 좀 새겨야 하거든. 어려운 마법은 아닌데, 조금 많이 필요해."
"무슨 마법이요?"
"주변을 따뜻하게 유지하는 마법, 마나 흐름을 바꾸는 마법. 그리고 습도를 일정하게 유지시키는 마법.... 대충 이 정도?"
모두 어려운 마법은 아니다.
마나 집속진이야 마나를 대량으로 끌어와 한 곳에 고정해야 하니 룬스톤이 오래 버티지 못하지만, 단순히 마나 흐름을 바꾸는 정도라면 반영구적으로 유지할 수 있었다.
"그 비싼 룬스톤에 그딴 싸구려 마법을.... 아니, 좋습니다. 그렇게 만들어서 어디에 쓰시게요?"
"개간지에 박을 거야. 이제 슬슬 밀알을 심어야 하니까."
지셀은 여상스럽게 대답했다. 알포이는 저도 모르게 인상을 확 찌푸렸다.
"아직도 포기를 안 하셨어요? 아니, 그건 그렇다 치고. 룬스톤을 박으면 어떻게 되는데요?"
"땅의 성질을 바꿔 버릴 거야."
"하...."
알포이는 어처구니없는 웃음을 짓다가 벅벅 마른세수를 해 댔다.
마법에 대해 아무것도 모르면서 마법을 쓴다고 나대는 꼴을 봐 주기가 힘들었다.
'이놈한테는 뭐 하냐고 안 물어보는 게 차라리 속이 편하겠다.'
그 순간, 알포이는 옛 현인이 남겼다는 말씀을 떠올렸다.
'마음의 평화를 얻고 행복하려면 어떻게 해야 하나요?'
'바보들과 다투지 않아야 합니다.'
'저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습니다.'
'네, 당신 말이 옳습니다.'
알포이는 깨달음을 얻었다.
그는 저도 모르게 눈을 감고 자리에 앉았다.
마나가 살랑거리며 그의 주변을 천천히 감싸기 시작했다.
주변에 있던 마법사들은 깜짝 놀라 후다닥 뒤로 물러섰다.
지셀도 황당하다는 표정을 지었다.
"뭐야? 갑자기 왜 깨달음을 얻고 지랄이야?"
아무리 깨달음이 불쑥 찾아오는 거라 해도, 온도 유지 얘기를 하다가 깨달음을 얻는다고?
머릿속으로 뭔가 괴상한 생각을 한 게 분명했다.
잠시 후, 알포이가 눈을 떴다. 그의 눈에 살짝 이채가 스쳐 지나갔다.
아주 작은 깨달음이라 경지도 겨우 개미 눈곱만큼 올랐지만, 그의 마음은 어느 때보다도 편안했다.
'그래, 바보와 다퉈서 무엇하겠는가? 옛 현인 말씀에 틀린 점 하나 없다. 그냥 네가 옳다고 하고 무시하면 그만인 것을. 자유가 얼마 안 남았는데 굳이 얼굴 붉힐 필요 없지.'
어차피 지셀이 하는 말은 모두 헛소리일 뿐이다.
본인이 틀렸다는 생각조차 못 하는 자를 뭐 하러 고쳐 주겠다고 열을 내겠는가.
내버려 두면 실패하고 알아서 얌전해질 터.
룬스톤이 조금 아깝긴 하지만, 어차피 내 돈도 아닌데.
알포이는 부드러운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말씀하신 대로 작업하지요. 개간지 크기에 맞춰서 필요한 수량만큼 준비하겠습니다."
지셀은 갑자기 순순하게 변한 알포이의 태도가 꺼림칙해 미간을 좁혔다.
영지의 일꾼, 그것도 무급 노예인 놈의 경지가 오른 건 아주 좋은 일이지만....
상대가 상대인지라 무작정 좋아할 수가 없었다.
하지만 그렇다고 왜 말을 잘 듣냐고 따지기도 어렵다. 지셀은 떨떠름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어.... 그래, 최대한 빨리 해 줘."
"그러지요."
마법사들에게 룬스톤 작업을 맡긴 뒤 지셀은 길리언을 필두로 용병 백 명을 소집했다.
명령에 따라 완전 무장을 하고 말에 올라탄 용병들은 흥분을 감추지 못했다.
오랜만에 싸울 일이 생겼다 생각하니 벌써 몸이 근질거리기 시작한 것이다.
인부들이 다가오더니 용병들의 말에 큰 수레를 한 대씩 묶었다.
수레에는 철로 만든 삽이 하나씩 묶여 있었다.
왠지 불안한 마음이 든 용병 하나가 물었다.
"저기 수레와 삽은 왜 챙깁니까?"
지셀은 뭐 그런 당연한 걸 묻느냐는 표정으로 답했다.
"당연히 삽질하러 가는 거겠지?"
"어디로... 가나요?"
가장 선두에 있는 말에 올라탄 지셀이 씨익 웃으며 말했다.
"마수의 숲으로 간다."
108화 언제든지 도전해도 좋다. (1)
용병들은 어리둥절한 표정을 지었다.
마수의 숲이라면 룬스톤을 캐러 가는 것부터 떠오르지만, 그렇다기에는 수레가 너무나 많다.
곡괭이가 아니라 삽을 챙기는 것도 이상했다.
"준비 다 됐으면 출발해!"
하지만 언제 지셀이 구구절절 설명해 준 적이 있었던가.
용병들이 할 수 있는 일이라고는 항상 그랬듯 앞서 달려 나가는 지셀을 따라가는 것뿐이었다.
바람처럼 달린 그들은 이틀 만에 페르디움에 도착했다.
마수의 숲을 지키던 스코반은 멀리서 달려오는 지셀 일행을 보고 고개를 갸우뚱거렸다.
가끔 룬스톤을 캐러 온 적은 있지만 수레를 저렇게 많이 끌고 온 적은 처음이었기 때문이다.
"이번에는 싹 다 쓸어 가려고 그러시나?"
하지만 그의 예상은 바로 빗나갔다.
지셀과 용병들은 룬스톤이 있는 지역이 아니라 엉뚱한 방향으로 말머리를 돌렸다.
스코반은 화들짝 놀라며 소리 질렀다.
"대공자님! 아니, 남작님! 지금 어디 가십니까! 거기는 길이 아닙니다!"
지셀이 기존에 낸 길은 새로 도로를 깔고 양옆에 목책을 세워 두었다.
하지만 개척되지 않은 지역에는 여전히 몬스터가 우글거린다.
스코반이 놀라 쫓아갔지만 이미 지셀과 용병들은 숲속으로 사라진 후였다.
"와, 미치겠네. 갑자기 왜 저래?"
그가 뒤통수를 벅벅 긁으며 한탄했다. 곁에 있던 리카르도가 맞장구를 쳤다.
"그러게요. 왜 저기로 들어가죠? 뭐 다른 거 발견한 거 아닙니까?"
"모르겠다. 저분 생각을 우리가 어떻게 알겠냐. 그냥 모른 척하는 게 제일 편하다."
스코반이 고개를 저으며 혀를 찼다.
저를 욕하는 걸 아는지 모르는지, 지셀은 질풍처럼 말을 달려 마수의 숲 안쪽으로 들어갔다.
깊이 들어갈수록 우거진 나무들이 진로를 방해했다.
지셀은 속도를 줄일 생각도 하지 않고 뒤따라오는 용병들에게 외쳤다.
"수레를 끊어라!"
지셀의 명령에 말을 타고 달리던 이들은 수레를 바로 끊었다.
움직임이 조금 자유로워진 군마들이 지셀의 뒤를 따라붙었다.
조금 더 진입하자 숲 외곽을 둘러싸고 있는 거대한 나무, 디루스 엔트들이 보였다.
이미 모두가 경험해 본 몬스터다.
지셀은 얌체처럼 나무인 척하고 있는 그것들을 향해 쏘아져 나갔다.
"뚫어라!"
"와씨! 갑자기 이게 뭐야!"
용병들은 욕을 내뱉으면서도 창을 들어 올렸다.
마수의 숲과 전쟁을 겪었고, 그간 훈련을 쉬지 않았던 덕분에 지셀의 지휘에 즉각 반응할 수 있었다.
지셀 일행은 숲 사이사이에 있는 장애물들을 절묘하게 피하며 그대로 돌격을 감행했다.
콰아아아아앙!
쿠오오오오오!
디루스 엔트들은 고통과 경악이 섞인 비명을 내질렀다.
디루스 엔트는 천천히 다가오는 사냥감을 기습하는 방식으로 공격하는 몬스터였다.
그런데 지셀 일행이 빠르게 달려와 창을 꽂아 넣으니 대응할 방도가 없었다.
가속력이 더해진 창은 강력한 외피를 뚫고 깊숙하게 박혔다.
처음 마수의 숲에 들어왔을 때 무기도 제대로 겨누지 못했던 것을 생각하면, 용병들이 얼마나 달라졌는지 알 수 있는 모습이었다.
히이이잉!
하지만 피해를 입은 건 디루스 엔트들만이 아니었다.
용병들은 창을 꽂을 때의 충격을 완전히 흘려 내지는 못했다.
말들이 울부짖는 소리와 함께, 몇몇 용병들이 말에서 떨어졌다.
간신히 말 위에서 버틴 자 중에도 무기를 놓친 사람이 꽤 있었다.
앞을 가로막던 디루스 엔트의 몸을 산산조각 낸 지셀이 크게 외쳤다.
"말이 죽으면 연병장 500바퀴다! 셋이서 하나를 상대해라!"
"아니, 대장! 미리 말이라도 좀 해 주지!"
한 용병이 억울해하며 투덜거리자 지셀이 크게 웃었다.
"적이 미리 말해 주고 찾아오냐? 언제나 긴장해야지!"
콰아아앙!
지셀은 말하는 와중에도 디루스 엔트를 하나씩 박살 냈다.
예전에도 지셀은 디루스 엔트들 대부분을 혼자 쓸어버렸다.
마나의 양만 해도 그때보다 두 배 이상 늘어났는데, 디루스 엔트 따위가 지셀의 상대가 될 리가 없었다.
그렇지 않아도 새로운 힘을 얻고 몸이 근질근질하던 차였다.
지셀은 아예 창까지 집어 던지고 말에서 뛰어내렸다.
바로 2단계까지 코어를 활성화하자 지셀의 눈이 붉게 빛났다.
콰앙! 콰아앙!
쿠오오오오!
주먹질 단 두 번 만에 디루스 엔트의 몸이 세 조각으로 쪼개졌다.
지셀은 사방을 휘젓고 다니며 용병들이 방어진을 짜서 잡아 두고 있던 몬스터들을 학살했다.
쿠오오오....
얼마 지나지 않아 마지막 남은 디루스 엔트까지 모두 쓰러졌다.
사실 용병들이 해치운 건 몇 되지 않고, 대부분은 지셀과 길리언이 처리했지만....
마나 연공법이야 나중에 제대로 가르치면 될 일.
실전을 통한 훈련이라는 목적은 충분히 달성했다.
지셀이 주변을 한번 슥 훑어본 뒤 말했다.
"죽은 사람?"
아무도 대답하지 않았다. 죽은 자는 없는 모양이었다.
"그러면 말이 죽은 자들은 옆으로 열외."
스무 명 정도의 용병이 울상을 지으며 대열에서 빠져나왔다.
솔직히 이런 난전에서 말을 지키면서 싸우라니, 말도 안 되는 명령이었다.
그렇지만 실제로 말이 멀쩡한 사람도 많으니 항의하기도 힘들었다.
"영지로 돌아가면 연병장을 500바퀴 돌고 특별 훈련에 참여해라. 지금은 일단 페르디움에서 말을 빌려 와. 오는 길에 아까 놓고 온 수레들도 모두 끌고 오도록. 나머지는 그동안 휴식을 취한다."
잠시 후, 말을 잃은 용병들이 말과 수레를 끌고 돌아왔다.
지셀은 용병들에게 각자 수레를 하나씩 맡기고 자신도 삽 하나를 챙겨 들었다.
"이제부터 이 주변의 흙을 수레에 퍼 담는다. 수레가 가득 찰 때까지."
용병들은 대놓고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기껏 마수의 숲에 와서 전투까지 했는데 전리품이 겨우 흙이라고?
항상 그랬듯 이번에도 이해할 수 없는 명령이었지만, 익숙해진 몸이 반사적으로 움직였다.
용병들이 수레에 흙을 퍼 담는 모습을 보던 길리언이 지셀에게 조심스럽게 물었다.
"영주님, 흙은 왜 담아 가는 겁니까?"
지셀은 어떻게 설명해야 할지 잠시 고민하다 답했다.
"마수의 숲은 아주 오랫동안 사람의 손이 닿지 않았잖아. 그러니 지력이 살아 있을 거야."
"그렇습니까?"
지셀은 바닥에서 흙을 한 움큼 쥐어 들었다. 흙은 검은색에 가까울 정도로 짙은 색을 띠고 있었다.
"이것 봐. 우리 영지 흙하고는 색부터 다르잖아?"
"그냥 위치가 달라서 그런 것 아닙니까?"
"아니지. 일단 숲이 오래된 만큼 낙엽 같은 것도 계속 쌓였을 거고.... 몬스터의 사체도 썩고 나면 영양분이 될 테니, 계속 농사를 지어 온 땅보다 비옥할 게 분명해."
"허어...."
길리언은 조그맣게 감탄했다.
지셀이 하는 말 자체는 그다지 새롭지 않다.
하지만 그 말이 지셀의 입에서 나왔다는 것 자체가 놀라웠다.
싸움만 잘하는 줄 알았는데, 이런 건 도대체 어떻게 알고 있는 걸까?
"이 숲은 생명력이 엄청나. 풀과 나무들, 몬스터 크기만 봐도 감이 오지. 여기 흙을 파서 개간지 흙과 섞으면 부족한 지력을 채울 수 있을 거야. 나중에 시간 나면 이곳에 경작지를 만들어도 되고."
두 사람이 대화하는 사이 용병들이 수레에 흙을 가득 채웠다며 다가왔다. 다들 힘이 좋아서 작업이 금방 끝이 났다.
지셀과 용병들은 다시 말에 수레를 묶고 마수의 숲을 떠났다.
두두두두두!
흙을 잔뜩 싣고 바람처럼 사라지는 뒷모습을 보며 스코반과 리카르도는 눈만 껌뻑거렸다.
"비싼 것도 아니고 그냥 흙을 왜 저렇게 많이 퍼 가는 걸까?"
"생각하지 말자면서요."
"...그러자."
* * *
지셀은 영지에 도착하자마자 인부들을 소집했다.
"자, 이걸 새로 만든 개간지에 골고루 섞어라! 기존 흙과 새 흙의 비율은 일 대 이로 한다."
인부들은 어리둥절한 표정을 지었다.
갑자기 어디서 가져온 흙이기에 개간지에 섞으라는 걸까?
한 노인이 조심스럽게 물었다.
"이 흙이 무슨 흙인지 알 수 있겠습니까?"
"아주 오래된 흙이야. 그러니까... 퇴비 같은 거지."
퇴비라는 말에 노인은 걱정스러운 듯 미간을 좁혔다.
"으음, 영주님. 비료도 이미 여러 번 뿌려 보았습니다."
이곳의 흙은 거칠고 너무 메말라서 아예 작물이 자랄 수가 없었다.
그걸 해결하기 위해 몇 번이나 분뇨를 뿌려 봤지만, 그것도 큰 효과를 보지는 못했다.
너무 많이 뿌리면 땅에 흡수되지 않고 그냥 썩어 버리기 때문에 양을 늘릴 수도 없었다.
"거기다... 흙의 두 배나 되는 퇴비를 섞는다니요. 너무 많습니다."
"아니야, 그 정도가 딱 좋아."
"땅을 따뜻하고 촉촉하게 하는 마법도 걸었다고 들었습니다. 그런 상태에서 이 정도로 퇴비를 많이 섞으면 작물까지 죄다 썩어 버릴 겁니다."
"괜찮아. 그 정도로 강력해야 잡초가 못 자라고 벌레들도 안 올 거 아니야?"
"아니, 그게...."
지셀을 설득하던 노인은 말문이 막혀 한숨을 내쉬었다.
잡초가 못 자랄 정도인데 작물이 어떻게 자란다는 말인가?
말도 안 되는 논리를 내세우며 괜찮다고만 하니 인부들은 황당할 따름이었다.
지셀이 영지에 온 뒤 벌인 일들은 대부분 다 그럴듯하고 필요한 일들이었다.
그런데 유독 농사 쪽에서만 이상한 고집을 부리고 있었다.
그래도 영주가 시키는 일이다. 돈도 많이 주니 안 할 수가 없었다.
"그, 그럼 바로 작업을 시작하겠습니다."
"그래, 충분히 섞고 파종 작업도 확실히 하도록."
"알겠습니다."
지셀이 떠난 뒤 다들 불안한 표정으로 작업을 시작했다.
"총관님은 아직 항복 안 한 거야? 곧 내기가 끝나는 날짜라던데."
"저주 효과가 조금 부족했던 게 아닐까?"
영지민들은 회의적인 표정으로 일단 파종 작업을 시작했다.
식량이 늘면 좋다. 영주가 힘 써주는 것도 고맙기는 하지만....
그래도 안 되는 건 안 되는 거다.
농사가 말처럼 쉬웠으면 굶다 못해 산으로 도망가는 사람이 나오지도 않았을 것이다.
그간 베풀기만 한 영주에게 고마운 마음이 있으니 오히려 더 안타까웠다.
자존심 때문에 쓸데없이 돈과 시간을 쏟는다니.
곳곳에서 영지민들의 한숨이 깊어질 때, 벨린다도 손톱을 깨물며 불안해하고 있었다.
'이제 시간이 일주일밖에 안 남았잖아.'
돈과 노동력은 있는 대로 날리고 기껏 영입해 온 사람도 도망가게 생겼다.
그런 손해야 그렇다 치더라도, 지셀이 크게 망신을 당할 것이 더 문제였다.
만약 가신과 내기했다가 져서 돈을 뜯겼다는 소문이 퍼진다면 귀족 사회에서 얼굴도 못 들고 다닐 것이다.
망나니 이미지를 전쟁에서 활약해서 겨우겨우 없앴는데.
호구라는 이미지를 회복하려면 또 얼마나 큰 업적을 세워야 할지.
'그냥 총관 놈을 납치할까? 아으, 미치겠네!'
각자의 우려와 걱정, 분노와 한숨 속에서 다시 시간이 흘렀다.
그리고 마침내 약속한 날이 하루 뒤로 다가왔을 때.
클로드는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미소 지었다.
'그러면 그렇지. 괜히 쫄았네.'
워낙 지셀이 자신만만하게 구니 클로드도 조금 긴장하기는 했다.
하지만 예상대로 별다른 일은 없었다.
이제 하루만 지나면 내기는 끝난다.
자신은 돈을 받고 떠나면 그만이었다.
그날, 대전에서 진행된 회의에서 클로드는 마지막 보고를 올렸다.
"...여기까지입니다. 그동안 힘들었지만 즐거웠습니다. 영주님이 안나와 저에게 베푸신 은혜는 절대 잊지 않겠습니다."
클로드의 인사에 지셀이 심드렁한 표정으로 답했다.
"인사가 너무 빠른 거 아니야? 아직 하루 남았잖아."
"고작 하루 만에 무슨 일이 생기겠습니까? 뭐, 그래도 짐은 챙겨야 하니 내일 확인하고 떠나도록 하지요."
가신들은 눈치를 보며 아무런 말도 못 했다.
불편한 표정으로 입을 다문 사람들 사이에서 카오르만이 실실 웃고 있었다.
클로드는 연신 미소 지으며 다른 사람들에게도 인사를 건넸다.
"안녕히 계세요, 여러분! 전 이 영지의 모든 굴레와 속박을 벗어던지고 제 행복을 찾아 떠납니다. 여러분도 행복하세요!"
대전이 침묵으로 물들었다.
클로드는 신이 나는지 팔을 벌리며 크게 외쳤다.
"클로드는 자유예요!"
그때, 개간지를 점검하던 하급 관리 하나가 사색이 되어 급하게 들어왔다.
그가 더듬거리며 내뱉었다.
"개, 개간지에... 싸, 싹이 났습니다. 이, 이게 왜 벌써 자라죠? 싹이 아닌 걸까요?"
"뭐?"
클로드가 무슨 개소리를 하냐는 표정으로 관리를 돌아보았다.
지셀은 얄미운 미소를 지으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다 같이 가 볼까?"
내기 결과를 확인할 시간이었다.
109화 언제든지 도전해도 좋다. (2)
앞장서 가는 지셀의 뒤를 따르던 클로드가 손톱을 깨물었다.
'말도 안 돼. 진짜 싹이 났다고?'
지셀이 내세운 논리 자체는 꽤 그럴듯해서 솔직히 조금 찝찝하기는 했다.
농사를 지어 본 적도, 농업 기술을 연구한 적도, 마법을 배운 적도 없는 사람이 하는 말이라 안심하고 질렀는데!
'아, 안 돼. 진짜라면 나는 이제 찍소리도 못하는 노예가 된다! 관리가 잘못 본 거여야 해!'
그는 불안한 마음을 숨기고 허세를 부리며 성큼성큼 걸음을 옮겼다.
성에서 가장 가까운 개간지에는 이미 사람들이 많이 몰려 있었다.
소문이 금세 퍼졌는지 다른 지역에서 일하던 사람들은 물론이고 심지어는 마법사들까지 와 있었다.
한데 모여 얼빠진 표정을 짓고 있던 사람들은 영주가 나타나자 주춤주춤 물러났다.
지셀은 그들이 터 준 길을 지나 밭 가까이 다가갔다. 기대감에 가슴이 두근거렸다.
"오, 멋진데?"
경작지를 덮은 푸른 새싹들을 본 지셀이 탄성을 내뱉었다.
한 치의 오차도 없이 오와 열을 맞춰 솟아 있는 밀의 싹이 꼭 군대처럼 보였다.
흐뭇하게 웃는 지셀과 달리, 주위에 있던 사람들은 경악에 찬 눈빛으로 지셀을 바라보았다.
죽은 거나 마찬가지였던 땅에서 이렇게 금방 싹이 트다니!
알포이도 그 곁에서 얼굴을 새빨갛게 붉힌 채 주먹을 꾹 쥐었다.
깨달음을 얻어 편해졌던 게 언제였냐는 듯, 그의 마음에는 풍랑이 휘몰아치고 있었다.
알포이는 엄한 새싹을 향해 손가락질하며 화를 냈다.
"니가 왜 거기서 나와!"
안 된다. 이건 꿈이다. 꿈이어야만 한다.
노예라니! 마탑의 후계자인 자신이 10년간 무급 노예라니!
그의 몸을 감돌던 마력이 안정되지 못하고 폭주하기 시작했다.
며칠 전 얻은 깨달음과 현실 사이의 괴리감을 버티지 못한 것이다.
높은 자존심에 무급 노예로 지내게 된 충격 또한 만만치 않았다.
부들부들 떨던 알포이는 급기야 피를 토하며 엎어졌다.
"쿨럭!"
지셀이 황당해하며 혀를 찼다.
"아니, 이놈은 또 왜 이 지랄이야? 이게 마나 역류까지 일어날 일인가. 깨달음 얻은 지 며칠이나 됐다고.... 하여간 신기한 놈이야. 거기 너희들, 빨리 이놈 데리고 가서 안정을 취하게 해라. 소중한 노예인데 아프면 안 되지."
쓰러진 알포이는 주변 사람들에 의해 급하게 병상으로 옮겨졌다.
그러나 알포이가 받은 충격은 클로드의 절망에 비하면 별것도 아니었다.
'아니, 씨... 이게 되네?'
그가 지금껏 믿어 왔던 모든 상식이 파괴되는 순간이었다.
'생산량이 복사가 된다고? 이거를? 영주님이?'
대륙 어디에서도 이런 방법으로 농사를 한다는 말은 들어 본 적이 없다.
이게 다 지셀이 스스로 생각해 낸 방법이라는 뜻이다.
생각이야 누구든 할 수 있지만, 그게 진짜로 효과가 있다면 이야기가 다르다.
클로드는 아무것도 모른다고 생각했던 지셀이 이렇게 단번에 성공했다는 사실 자체를 믿을 수 없었다.
"내가 졌다고? 세이론 왕립 아카데미 수석 출신인 내가? 에이, 그럴 리가 있나!"
클로드는 급기야 현실을 부정하기 시작했다.
"요즘 일을 너무 열심히 해서 기가 허해졌나 봐. 헛것이 다 보이네. 안나 보고 싶다...."
"이런, 클로드!"
지셀은 넋이 나간 클로드의 양어깨를 붙잡고 다급하게 흔들었다.
"괜찮아? 정신 차려! 너는 이런 데서 끝날 놈이 아니야!"
"...예?"
"앞으로 10년 동안 일해야 하는데, 벌써 정신을 놓으면 어떡해!"
"...."
...살짝 감동할 뻔한 게 더 빡친다.
지셀이 히죽 웃으며 그의 어깨를 툭툭 두드려 주었다.
확인 사살이나 다름없는 발언에 클로드는 충격을 더 버티지 못하고 그대로 거품을 문 채 기절해 버렸다.
다행히 옆에 있던 웬디가 가볍게 그의 몸을 잡았다.
"오늘은 푹 쉬게 해. 내일부터 훨씬 바빠질 테니까. 시킬 일이 정말 많거든."
"알겠습니다."
웬디가 고개를 꾸벅 숙이고는 클로드를 질질 끌고 갔다.
"그럼 다른 곳도 한번 둘러볼까?"
지셀은 휘파람을 불며 느긋하게 영지를 돌아보았다.
파종한 시각이 달라 밭마다 조금씩 차이는 있지만, 모든 개간지에서 싹이 났거나 날 기미가 보였다.
웃으며 성으로 돌아갈 만큼 만족스러운 결과였다.
전생... 미래의 지식을 훔쳐 온 거지만 어쨌든 가장 중요한 식량 생산에 성공했다.
이제 이 영지는 엄청난 속도로 발전할 것이다. 식량이야말로 영지 발전의 근간이니까.
"도련님! 대체 이게 어떻게 된 거예요? 어떻게 알았어요?"
"으음, 뭐 종자가 마나를 흡수해서 튼튼해지면 강한 지력도 버틸 수 있게 되는 거지."
벨린다가 꼬치꼬치 캐물었지만 지셀은 대충 얼버무리며 넘어갔다.
사실 지셀도 원리를 정확히 설명할 수가 없었다.
이건 자신이 아니라 미래의 마법사와 학자들이 머리를 맞대고 만들어 낸 방법이었으니까.
그는 단지 그 결과만 알 뿐이다.
설명하는 사람도 듣는 사람도 제대로 이해하지 못했지만, 다들 그러려니 하고들 넘어갔다.
가문의 비전이거나 설명해도 이해할 수 없을 거라 여긴 것이다.
애초에 원리 따위는 중요한 게 아니다.
중요한 건 정말로 식량 생산량이 늘어나게 되었다는 결과였다.
* * *
지셀은 밀이 잘 크는 것을 확인한 뒤부터 다른 일에 집중했다.
그에게는 이번 일도 장기 계획의 일부, 거쳐 가야 하는 과정일 뿐이었다.
클로드와의 내기는 소소한 덤이고.
하지만 영지민들에게는 달랐다. 이번 일은 그들의 삶을 바꿀 중요한 사건이었다.
"정말 우리 영지에서 이렇게 작물이 잘 자란다고? 보면서도 믿을 수가 없네."
"우리 영주님은 하늘이 내리신 분이야! 농사의 신에게 축복을 받으신 거라고! 무조건 믿고 따르자!"
영지민들은 진심으로 기뻐했다.
펜리스 영지 전역에서 영주에 대한 칭송이 끊임없이 이어졌다.
사실 그동안은 영주가 한껏 베푸는 것을 보면서도 마음 한쪽에 불안감이 남아 있었다.
영지 시설을 뜯어고치는 건 좋지만, 그것도 결국 돈이 있어야 할 수 있는 일이니까.
언젠가는 영주님의 돈이 떨어지지 않을까? 다시 예전처럼 가난해지지 않을까? 그러면 다른 영주들처럼 우릴 수탈하지 않을까?
영지에 돈 나올 구석이 없으니 모든 게 불안할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이제는 그럴 필요가 없었다.
나이를 먹은 노인들은 개간지를 보며 눈물을 글썽거렸다.
"이제 굶지 않아도 되겠구나. 내 자식, 손자들은 이제 안 굶어도 돼. 흐으윽."
"영주님, 감사합니다. 정말 감사합니다."
"영주님을 잘 모셔야 한다. 영주님만이 우리의 희망이다."
굶주리며 살아온 지난 시절이 거짓이었던 것 같다. 새로 온 영주는 몇 달 만에 영지의 모든 문제를 해결해 주었다.
영지민들의 충성심이 날이 갈수록 하늘을 찔렀다.
지셀은 대전에 가신들을 모아 놓고 거만하게 앉아 잘난 척했다.
"내가 말했지? 된다고 했잖아. 또 나랑 내기하고 싶은 사람은 언제든지 도전해도 좋다."
가신들은 모두 입만 꾹 닫고 아무런 말을 못 했다.
분명 상식을 벗어난 일인데, 실제로 결과가 나오니 반박을 할 수가 없었다.
당분간은 얌전히 영주의 말을 들을 수밖에.
지셀은 우거지상을 한 가신들의 표정에 콧방귀를 뀌고는 길리언을 돌아보았다.
"아직 싹이 자라는 중이니 관리를 잘해야겠지? 야생 동물이나 미친놈들이 짓밟지 못하게 개간지에 병력을 배치해."
그러자 길리언이 웃으며 대답했다.
"이미 영지민들이 자발적으로 나서서 교대로 지키고 있습니다."
"오, 그래?"
"그들도 필사적인 모양입니다."
"그거 좋네. 무언가를 지키고자 하는 사람은 강한 법이지."
영지민들이 자발적으로 나서서 개간지를 지키는 건 정말 좋은 현상이다.
그 땅이 영지의 희망이라는 걸 이제 모두가 알고 있다는 뜻이니까.
지셀은 속 시원한 웃음을 지었다.
자신만 확신하고 있던 희망이, 드디어 영지 곳곳에 퍼져 나가기 시작했다.
* * *
"그래, 땅에 묻어 놓았던 룬스톤을 한꺼번에 터뜨렸다 이거지? 그걸 주도한 놈이 지셀 페르디움.... 이제 펜리스 남작이군."
데스몬드의 백작, 해럴드가 보고서를 들춰 보며 중얼거렸다.
피곤한 듯 목소리가 잔뜩 가라앉아 있었다. 얼굴도 예전과 다르게 무척이나 핼쑥했다.
머리카락은 희게 세었고, 눈 밑은 퀭한 것이 잠도 제대로 못 자는 모양이었다.
"그렇습니다."
"...미친 새끼."
처음에는 해럴드도 보고를 믿을 수가 없었다.
하지만 페르디움에서 흘러나온 소문도 그렇고, 공작가에서까지 그게 사실이라고 검증하니 이제는 믿을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믿는 것과는 별개로, 여전히 지셀의 행동을 이해할 수 없었다.
그깟 페르디움을 지키겠다고 영지 전체를 팔아도 못 살 만큼의 룬스톤을 터트리다니.
"상대가 산수도 못 하는 미친놈인 줄은 몰랐군. 하긴, 그러니 내가 예측을 못 했겠지."
어쩐지 이름을 듣는 순간부터 찝찝하더라니.
해럴드는 혀를 차며 부관을 돌아보았다.
"그놈이 지금 뭘 하고 있다고?"
"토지 생산량을 늘리겠다면서 영지를 헤집고 있습니다. 기반 시설을 새로 짓거나 고치기도 하고요. 영지를 개발하기 위해 엄청난 돈을 쓰고 있습니다."
"...토지 생산량을 늘린다고?"
해럴드가 관자놀이를 문지르며 생각에 잠겼다.
디갈드가 전쟁에 패배하면서 그 영지는 모두 페르디움에 귀속되었다.
그중 절반을 지셀이란 놈이 가져갔다.
그것만으로도 놀라운데, 지셀이 펜리스 영지를 뒤엎고 있다는 소식은 훨씬 더 당황스러웠다.
"대체 왜 그런 짓을 하는 거지? 그 지역 땅을 경작지로 쓸 수 없다는 건 놈도 알고 있을 텐데."
"생산량이 너무 적으니 그러는 거 아니겠습니까? 관리만 잘한다면 지금보다는 나아지긴 할 겁니다."
"아무리 그래도 너무 과한데. 룬스톤으로 벌어들인 돈을 죄다 밀어 넣은 수준이군."
그러자 부관이 조심스럽게 자신의 생각을 밝혔다.
"젊은 나이에 처음 받은 영지니까요. 남들이 뭐라 하든 이것저것 시도해 보고 싶을 겁니다. 꼭 직접 해 봐야 직성이 풀리는 사람들이 있지 않습니까? 망나니였던 과거를 생각하면 그리 이상한 것도 아닙니다."
해럴드는 고개를 끄덕였다. 일리가 있는 말이었다.
헛된 꿈에 젖어 영지를 발전시키겠다고 돈을 잔뜩 쓰는 사람은 지셀 외에도 많았다.
보통 제대로 후계자 교육을 못 받은 초보 영주들이 그런 실수를 하곤 했다.
"고작 함정 하나로 전쟁에서 이겼다고 자만하는 모양이군."
해럴드는 지셀을 인정하지 않았다. 아니, 인정할 수 없었다.
사람이 갑자기 달라졌다고 해도, 망나니로 살던 과거가 사라지는 것은 아니지 않나.
해럴드의 드높은 자존심과 지셀에 대한 편견이 그의 눈을 가렸다.
지셀의 과거를 낱낱이 조사했던 것이 오히려 그에겐 악수가 된 셈이었다.
해럴드에게 지셀은 그저 운이 좋아 살아남은 애송이일 뿐.
다음번에 반드시 목을 베면 그만이었다.
"잘됐다. 어차피 당분간 저기 신경 쓸 여력도 없는데, 알아서 자멸해 주면 이쪽은 환영이지. 그냥 내버려 둬라."
"알겠습니다."
"지금은 더 중요한 일이 있으니까."
페르디움 공방전에서 패배한 이후 그는 공작에게 엄청난 질책을 들었다.
그간 세운 공이 아니었으면 목이 날아갔을지도 모른다.
그러니 이번 일은 절대 실패해서는 안 된다.
페르디움 영지를 차지하는 것보다 훨씬 중요한 일이었다.
"북부의 일을 마무리할 때가 왔다."
현재 왕국은 북부를 제외하고는 모두 델파인 공작이 의도한 대로 흘러가고 있었다.
하지만 반란을 완벽하게 성공시키려면 북부도 평정해야만 했다.
해럴드는 날카로운 눈으로 곁에 모인 참모들을 둘러보았다.
"회유되지 않은 영지는 몇 남지 않았다.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말고 밀어붙여라. 그리고 특히 아멜리아의 반란 준비를 더 서둘러라. 레이폴드의 기사단장을 상대하는 방법은 따로 고민해 보겠다."
레이폴드의 기사단장은 북부의 최강자, 북부제일검이라 불리는 남자다.
그자를 상대하기 위해 빅토르를 키웠건만.... 지난 전쟁 때 죽었으니 다른 방안을 찾아야 했다.
'지셀.... 그놈만 아니었어도. 레이폴드를 정리하고 난 뒤에는 네 차례다. 목을 씻고 기다려라.'
지셀만 떠올리면 이가 갈렸지만 당장은 그쪽에 신경 쓸 겨를이 없다.
공작가와 해럴드는 지셀을 처리하는 것보다 레이폴드를 손에 넣는 일이 더 중요하다고 생각해 계획을 변경했다.
지셀이 아무리 발버둥 쳐 봐야 공작가가 마음만 먹으면 언제든 쓸어 버릴 수 있다고 생각했으니까.
그들은 펜리스가 어떻게 발전할지 상상조차 하지 못하고 있었다.
110화 뭘 또 만들어요? (1)
"자, 손바닥 확실히 찍어라."
지셀이 노예 계약서를 내밀었다. 굵게 쓰인 '10년'이라는 글자가 유독 눈에 들어왔다.
클로드와 알포이, 마법사들은 바들바들 떨리는 손으로 계약서를 받아 들었다. 여기 서명하면 그때부터는 진짜 노예가 된다.
클로드는 눈물을 글썽이며 말했다.
"무, 무승부로 하지 않으실래요?"
"뭔 개소리야, 내가 이겼는데. 얼른 찍어라."
"아니, 그냥 무급으로 열심히 하면 안 돼요? 꼭 노예 계약서를...."
무급이면 노예나 마찬가지라는 뜻으로 그렇게 말한 줄 알았지, 진짜 노예 계약서를 가져올 줄은 몰랐다.
정말 상상을 초월하는 사람이었다.
"어허, 찍소리 말고 열심히 하기로 했잖아? 그러자면 이게 확실하지. 못 견디겠다면서 도망갈 수도 있는데."
"크흑...."
겁도 없이 영주와 내기를 했으니 책임을 져야 한다.
이제 와서 거부했다가는 목이 날아가도 할 말이 없었다.
클로드는 나라 잃은 표정으로 천천히 계약서 위에 손을 가져다 대었다.
"아오, 내가 진짜 도박을 끊어야지. 더러워서 정말. 찍는다, 찍어. 사람이 울면서 사정하는데 봐주지도 않고!"
콰앙!
클로드는 손바닥 도장을 찍자마자 금세 눈물 연기를 접어 버렸다.
"됐죠? 에잉, 어쩐지 영 찝찝하더라. 영주님 도박 좀 하시네. 다음에 두고 봅시다."
클로드는 도박에 지는 데 익숙한 만큼 포기도 빨랐다.
하지만 마탑의 후계자로서 고고하게 살아온 알포이는 달랐다.
이런 끔찍한 취급을 받게 된 건 태어나 처음이었다. 그것도 고작 내기에 졌다고.
저절로 눈물이 흘렀다. 연기가 아니라 진심 어린 눈물이었다.
"나, 난 못 찍어! 싫어! 싫다고!"
알포이는 자리에서 일어나 주춤주춤 뒤로 물러섰다.
클로드가 옆에서 깐족거리며 혀를 찼다.
"원래 도박이 그런 겁니다. 손모가지 잘리고 발모가지 잘리고.... 그러고 나서야 죽을 때까지 후회하는 거지. 내가 그때 왜 그랬을까? 하지 말걸! 하면서 말입니다. 으하하하!"
"이 새끼야! 내가 너랑 같아? 너랑 같냐고! 너는 원래 도박쟁이고! 나는 아니었다고!"
"그러니까, 누가 처음부터 이렇게 판돈이 큰 내기에 끼어들랬나. 이런 건 고수들이나 하는 거라 초보자가 낄 판이 아니었다고요."
"너 때문이잖아! 네가 자신만만하니까 믿었지! 네놈이 이길 줄 알았다고!"
"몰?루?"
클로드는 어깨를 으쓱이며 얄미운 표정을 지었다. 자신에게는 책임이 없다는 뜻이었다.
뻔뻔한 태도에 알포이는 더 열이 뻗쳐 발악하기 시작했다.
"난 잘못 없어! 다 총관 때문이라고! 난 몰랐단 말이야! 난 사정이 다르다고! 봐줘! 봐 달란 말이야!"
"아, 도박장에서 이러면 진상인데."
"닥쳐! 너 때문이잖아!"
클로드는 지셀에게 진 빚이 있으니 어차피 반은 노예나 마찬가지인 상황이었다.
하지만 마법사들은 다르다.
벌써 이곳에 온 지도 반년이 지났다. 앞으로 반년만 더 있으면 마탑으로 돌아갈 수 있었다.
그런데 10년씩이나 이 거지 같은 곳에 버려지다니.
"죽어도 못 해!"
지셀이 고개를 끄덕이며 답했다.
"그럼 죽어."
"싫어어어억!"
우당탕!
도망가려는 알포이를 옆에 있던 용병들이 붙잡고 억지로 눕혔다.
바닥에 깔려서도 바둥거리던 알포이는, 용병들이 목에 검을 들이대고 나서야 몸부림을 멈췄다.
"야! 이건 너무하잖아! 나 마탑의 후계자라고! 나한테 이러면 안 되는 거야!"
바락바락 악을 쓰는 그에게 지셀이 사악한 웃음을 지었다.
"내가 왜 너 깝죽댈 때 가만히 있었는지 알아?"
"뭐?"
"내가 거기서 두들겨 팼으면 그냥 죄송하다고 하고 물러났을 거 아냐. 그러면 안 됐거든."
"너, 너 설마...."
알포이는 얼굴이 창백해졌다.
그러고 보니 까불면 다짜고짜 매타작부터 하던 영주 놈이 내기를 할 즈음부터는 줄곧 조용했다.
요 근래 지셀은 알포이가 아무리 비웃고 놀려도 미소를 짓기만 했다.
알포이는 지셀이 아주 체념해 버린 줄 알았다.
묘하게 여유로운 태도가 좀 찜찜하기는 했지만, 그것도 허세라 여겼다.
그런데 설마....
"너.... 설마 일부러 날 내기에 끌어들였냐?"
"이제 좀 알겠어?"
지셀이 히죽 웃었다.
알포이와 마법사들은 땅을 치고 후회했다.
저 성질 더러운 놈이 평소와 다르면 한 번쯤 의심해 봐야 했는데!
내기에 이길 거라는 기대감에 정신이 팔려 지셀의 의도를 알아채지 못했다.
내기를 취소하지 않는 것도 그저 자존심을 세우는 줄로만 알았다.
정말로 질 것 같았으면 그냥 다 쥐어패고 닥치라고 했을 놈인데. 그 생각을 못 했다.
지셀은 아쉽다는 듯 입맛을 다셨다.
"솔직히 좀 기대했는데, 걸려드는 놈이 별로 없더라고. 그래도 총관 하나에 마법사 여섯이면 꽤 성적이 괜찮지?"
"으으으, 악마...."
"무슨 소리야. 나처럼 양심적인 사람이 어디 있다고. 내가 내기하자고 강요한 것도 아니잖냐. 정당한 결과일 뿐이다. 자, 어서 찍어라. 어차피 비밀 유지 계약서도 썼어야 했는데 잘됐네."
이번 작업을 진행하면서 지셀이 걱정한 건 딱 하나였다.
마법사들이 이번 작업에 쓰인 술식과 마법진들을 다른 데 퍼트릴지도 모른다는 것.
하지만 마법사들이 노예가 되었으니 최소한의 억제는 될 것이다.
노예가 주인의 비밀을 누설하면 무조건 목이 베이니까. 목숨이 아깝다면 입을 열지 않을 거다.
"싫어! 싫다고!"
알포이가 끝까지 버티자 지셀은 한숨을 쉬더니 허리춤에서 손도끼 하나를 꺼냈다.
"그래, 그렇게 싫으면 할 수 없지. 그간 도움도 됐고 정도 들었으니 손목 하나로 대신하마."
"어? 자, 잠깐! 굳이 그래야겠어?"
"그래도 영주인데 그냥 넘어가면 체면이 구겨지잖아. 명예가 떨어진다고."
"체면? 명예? 그런 거 원래 신경 안 썼잖아! 관심도 없잖아! 무슨 영주가 손도끼를 들고 다니면서 그런 소리를 해!"
"이제부터 신경 좀 쓰려고. 슬슬 다른 귀족들하고 친분도 쌓아야지. 손 하나 없어도 마법 쓰는 데는 문제 없지?"
클로드가 깐족거리며 옆에서 끼어들었다.
"그렇죠. 손목 하나는 날아가야 도박을 끊죠. 그래도 못 끊으면 다음은 발목이지."
"넌 닥치라고오!"
"자, 그럼 손목 하나 날아갑니다."
지셀이 무시무시한 표정으로 도끼를 들어 올렸다.
알포이는 얼굴이 창백하게 질렸다.
이놈은 일단 결정하면 주저 없이 밀어붙이는 미친 새끼다.
지셀이 도끼를 내려치려는 순간, 알포이가 울먹이며 외쳤다.
"찍을게! 계약하면 되잖아!"
* * *
지셀은 나머지 마법사들에게도 계약서를 받아 내고는 잘 챙겼다.
알포이는 지셀이 서류를 어디에 두는지 눈을 빛내며 지켜보았다.
'저걸 찢어야 해.'
마법적 제약이 없는 계약서더라도 기록은 남는다.
마탑의 후계자인 자신이 노예 계약을 했다는 증거를 남길 수는 없었다.
알포이가 꿍꿍이를 꾸미는 사이, 지셀은 클로드에게 새로운 서류를 건넸다.
"자, 이거 받아."
"이게... 뭡니까?"
"추가로 해야 할 일."
"농담이시죠? 지금도 일 개많은데요!"
"아니야. 보니까 잘하고 있어. 그러니까 이것도 더 해 봐. 금방 끝날 거야."
"...끝나면 어떻게 되는데요?"
"새 일이 시작되지."
클로드는 그러면 그렇지, 하는 표정으로 콧방귀를 뀌었다.
하지만 지셀이 주먹을 들어 올리자, 바로 고개를 숙이고 서류를 훑어보았다.
"이건 뭡니까? 사람 이름만 잔뜩 적혀 있는데...."
"어, 거기에 쓰여 있는 사람들 좀 찾아서 우리 영지에 데리고 와. 오기 싫다는 사람은 절대 강제로 끌고 오지 말고. 돈이 필요하다고 하면 얼마든지 줘도 돼. 중요한 사람들이니 최대한 조심스럽게 대해야 해. 알겠지?"
명단에 적힌 예상 위치를 확인하며 클로드가 눈을 끔뻑였다.
"정말 이 사람들을 다 데리고 오라고요? 위치는 정확한 거예요?"
"아마도. 뭐 지금은 다른 데 있는 사람도 있을 거야. 그런 사람은 어쩔 수 없고."
지셀이 준 서류는 그가 전생에 데리고 있던 수하들의 명단이었다.
수천이 넘었던 수하들을 모두 찾아낼 수 있다면 좋겠지만, 역시 그건 쉽지 않은 일이었다.
그래서 기억을 더듬어 재능이 있고 영지에 꼭 필요한 사람만 추렸다.
그의 기준으로는 아주 소박하게.
"백 명이 넘는데요?"
"응. 얼마 안 되지?"
클로드는 화를 참으려고 이를 악물었다. 손에도 힘이 들어가 쥐고 있던 서류가 구겨졌다.
사실 사람을 찾는 것 자체는 그다지 어려운 일은 아니다.
강제로 데리고 오는 것도 아니고 자리에 없으면 억지로 찾을 필요도 없다고 하니까.
문제는 그 일을 할 사람 자체가 없다는 거다.
"우리 영지에서 일할 사람도 부족하다고요! 다른 나라에 있는 사람들을 어느 세월에 다 찾아옵니까? 보낼 사람이 없는데!"
"다른 영지에서라도 구해서 써. 정보 길드를 쓰든가. 돈은 얼마든지 들어도 좋다니까?"
"아오... 씹!"
클로드는 욕을 하려다가 입을 닫았다.
노예가 되기 전에도 기분 나쁘면 주먹부터 들던 인간인데, 노예 계약까지 했으니 대놓고 때려도 막을 수가 없었다.
'하, 피곤해 죽겠는데.'
가뜩이나 일이 많아서 잠도 못 자고 죽을 거 같은데 끊임없이 일을 던져 준다.
이렇게 지독한 놈인 줄 알았으면 은혜고 뭐고 절대 따라오지 않았을 거다.
걸려도 단단히 잘못 걸렸다.
'시간을 돌릴 수도 없고.... 그냥 최대한 피해 다니는 수밖에.'
클로드가 지셀의 눈치를 보며 한 걸음 슬쩍 뒤로 물러섰다.
일을 떠맡기 전에 도망치려는 심산이었다.
하지만 지셀이 혼잣말처럼 내뱉은 말에, 클로드는 그 자리에 붙박인 듯 멈춰 버렸다.
"흠, 식량은 해결됐으니 이제 돈을 벌 만한 사업을 시작해야겠다."
"또 무슨 짓을 하려고요! 마나 집속진인지 뭔지로 밀도 잔뜩 키웠잖아요. 영지민들한테 먹고살 만큼 나눠 줘도 많이 남습니다. 그거 팔면 되지, 뭘 또 시작합니까? 이 거지 같은 땅에 팔 만한 게 있기나 해요?"
"그건 건드리지 마. 최대한 비축했다가 나중에 필요할 때 쓸 거야."
"와, 답답해 뒤지겠네."
클로드가 천장을 올려다보며 한숨을 내쉬었다.
가장 근본적이고 중요한 문제가 해결됐다.
이제 그걸 이용해 돈을 벌면 끝나는 일인데, 갑자기 왜 구두쇠 흉내를 내는 걸까?
"비축하기에는 양이 너무 많아요. 밀이라는 게 그렇게 오래 묵힐 수 있는 작물이 아닙니다. 그거 다 썩으면 어떻게 하시려고요?"
어느 영지에서나 흉년이나 전쟁에 대비해 식량을 비축해 둔다.
하지만 지셀이 개량한 밀은 양이 많아도 너무 많았다.
한 번만 수확해도 몇 년을 버틸 수 있을 정도다.
다 먹지도 못할 텐데 그걸 뭐 하러 비축한다는 말인가?
지셀은 심드렁하게 말했다.
"우리 식량은 쉽게 안 썩어. 그냥 창고에 박아 놔도 몇 년 정도는 버텨."
"그게 말이 됩니까?"
"비축해 놓다가 썩기 직전에 싸게 팔거나 나눠 주면 된다. 알이 크니 그때 가서 팔아도 잘 팔릴 거야."
클로드는 무심코 반박하려다가 말을 삼켰다.
그 미친 밀알에 대해 아는 게 없으니 섣불리 말을 얹기도 어려웠다.
어차피 몇 년이 지나면 알게 될 일이다.
"그래요, 뭐 좋습니다. 하지만 식량을 비축하면 결국 룬스톤을 계속 가져다 팔아야 하는 건 마찬가지인데.... 뭐로 돈을 버시게요?"
"자원을 만들 수는 없으니.... 특산품을 만들어야지. 그걸로 돈을 벌자."
"우와, 역시 우리 영주님 못 하는 게 없으셔...라고 할 줄 알았습니까? 특산품이 뭐 만들자 하면 바로 나오는 건 줄 아십니까!"
자원도 없고 기술도 없는 곳에서 뭘 만들 수 있겠는가. 따로 확보해 둔 기술이 있는 게 아니고서야, '특산'은커녕 '생산'도 안 될 게 뻔했다.
클로드는 눈을 가늘게 뜨고 지셀을 노려보았다.
"밀 그거야, 마나를 써서 가능했던 거라고 칩시다. 하지만 뭘 만드는 건 그거하고는 전혀 다른 얘기입니다. 기술도 있어야 하고 사람도 있어야 한다고요. 그런데 지금 우리 영지에 그런 게 있어요?"
"아직은 없지."
"그런데 만들긴 뭘 만들어요! 쓸데없이 시간 낭비, 돈 낭비 하지 말고 그냥 식량이나 팝시다. 제발 좀 상식적으로 살자고요!"
그러자 지셀이 다시 사악하게 웃으며 말했다.
"내기할래? 이번에는 20년 걸고."
"코.... 엇! 잠시만요. 어휴, 씨."
콜이라고 외치려던 클로드는 오싹한 예감에 간신히 말을 끊었다.
도박쟁이의 머릿속에 제동 장치가 생겨나는 순간이었다.
111화 뭘 또 만들어요? (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