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0화 악당 (6)
강철과 강철.
검과 검.
혹은 의지와 의지.
그것이 전력으로 맞부딪치는 소리는 언제나 많은 영감을 준다.
챙-
검과 검이 부딪치고 그중 한 자루가 멀리 날아간다.
승자와 패자가 갈린 순간이었다.
* * *
"후… 이제 한 시간으로는 턱도 없군. 이러다 하루 종일 대련해도 결판나지 않는 날이 오겠어. 아타올프."
흐르는 땀을 훔치며 활짝 웃는 비탈리아누스.
다만 그 얼굴은 지금과 달리 앳된 것이었다.
별의 칭호를 얻기 이전, 그것을 향해 달려 나가던 시절의 기억.
그를 마주하고 있는 아타올프 역시 마찬가지였다.
얼굴에 자리한 기다란 상처도, 고막을 긁는 듯한 거북한 목소리도 아닌 평범한 모습.
"마헬. 역시 너는 못 이기겠다니까."
멀리 날아간 자신의 검을 바라보던 아타올프가 비탈리아누스를 보며 씨익 웃었다.
팽팽한 대련 끝에 승리하는 것은 언제나 비탈리아누스.
그럼에도 아타올프는 조금의 거짓 없이 미소 짓는다.
"어찌 그리 검을 귀신같이 잘 쓰나?"
비탈리아누스의 강함은 아카데미 내에서 모르는 이가 없을 만큼 이미 유명했기 때문이다.
그런 비탈리아누스와 팽팽하게 맞서는 아타올프가 오히려 대단한 것이었다.
"약한 소리 해 봐야 소용없어. 기를 다루는 것은 네가 더 뛰어나잖아 아타올프."
검과 육체를 다루는 비탈리아누스의 재능은 인간의 영역을 아득히 벗어난 것이었지만, 기를 다루는 아타올프의 재능은 그에 못지않았다.
그러니 이대로 시간이 더 흐른다면 승패를 장담할 수 없을 거라 비탈리아누스는 말하는 것이다.
"어쨌든 확실한 건 최고의 기사가 될 거라는 거지. 우리 둘 모두."
그것만큼은 확실했다.
인재가 별처럼 많다는 이메니아 내에서도 가장 빛나는 별은 둘뿐이었으니까.
하지만 너무도 밝게 빛났음인가.
아니면 너무도 낮은 위치에서 빛을 내어 버린 것이 문제였을까.
그들을 시기, 질투하는 자들은 더없이 많았고 그 모든 악한 감정은 아타올프만을 향한다.
흠잡을 곳이 없는 비탈리아누스에 비해 그는 무척이나 치명적인 결함이 존재했으니.
언제나 발목을 붙잡는 것은 그의 출신이었다.
* * *
룩센 왕국.
서쪽의 반도이자 제국과 국경을 마주하고 있는 작은 왕국.
제법 역사가 깊었던 이 왕국은 쇠퇴를 거듭하다가 아타올프가 어렸을 시절, 완전히 패망해 버렸다.
외세의 침략이 있던 것도 아니었다. 그저 내부에서부터 썩어 문드러지다 못해 풀썩 주저앉아 버린 것이다.
내전과 반란. 죽음이 두려웠던 왕은 국가를 상징하는 모든 것을 제국에 바쳤다.
제국은 이를 받아들이고 분란을 종식시켰으며 룩센 왕국은 공식적으로 제국의 영토가 되었으나, 문제는 이를 받아들이지 못한 자들이 많았다는 것이다.
반란분자들. 제국에 편입된다면 결코 살아남을 수 없을 자들을 중심으로 뭉친 그들은 없던 애국심마저 끌어올리며 룩센 왕국의 해방을 부르짖었다.
어차피 왕국이 부활한다고 한들 얼마 가지 못해 망할 것이 분명했음에도 그들은 조국을 위한다는 명분으로 각종 테러 활동을 감행한 것이었다.
그러니 제국민들은 룩센 왕국 출신을 좋게 볼 수가 없는 것이다.
절대다수의 룩센 왕국 출신은 그러한 테러와 아무런 연관이 없음에도 원망을 쏟아붓는 것이다. 배척하는 것이었다.
그리고 그것은 아타올프에게 더욱 거대하게 쏟아졌다.
룩센 왕국 출신주제에 감히 빛난다는 것이 그 이유였으리라.
"더러운 룩센이 주제도 모르고 이메니아에 기어들어 와?"
아타올프는 그런 모든 모욕을 인내했다.
자신이 더욱 강해지면 해결될 일이라 여겼다.
강해지고 유명해져서 모르는 이가 없는 사람. 영웅이 되어 해결하고자 했다.
이름을 떨칠수록 더욱 강해지는 능력을 타고났으니 말이다.
영웅이 되어 수도에 상경한 자신의 가족들과 핍박받는 룩센 출신 모든 이들의 오명을 씻어 주고자 한 것이다.
묵묵히 견디고 견뎠다.
비탈리아누스와 함께 있을 때는 한마디도 못 하는 것들이 홀로 있을 때 찾아와 모욕적인 언사를 건네는 것도.
가족을 싸잡아 욕하고 도를 넘은 장난을 치는 것도 모두 인내해 내었다.
자신이 발끈하고 반응하는 순간 돌아올 반응은 너무도 뻔한 것이었으니.
저것 봐라. 역시 룩센 놈들은 저 모양이다.
저럴 줄 알았다. 사악한 놈들. 씨도 남기지 말고 모두 멸족을 시켜야 한다.
뭐, 그런 말이 나오지 않겠는가.
그러니 참고 또 참아야 한다.
언젠가는 알아줄 것이 분명하니. 언젠가는 분명 영웅으로 불리며 출신은 아무 상관이 없다는 것을 증명할 수 있을 테니 말이다.
그렇게 인내하고 인내하는 와중에도 끝내 견딜 수 있게 해 주었던 것은.
"내 앞에서 한 번만 더 출신을 입에 담으면 네 녀석의 출신부터가 얼마나 하잘것없는지 몸소 느끼게 해 주지."
역시나 비탈리아누스.
가문의 위상도. 그 품행과 카리스마. 타고난 재능과 그것을 활용하는 노력까지.
그야말로 영웅이 되기 위해 태어난 존재.
아타올프는 그런 비탈리아누스의 곁에서 함께 꿈을 키웠다. 영웅이 되어 룩센의 오명을 씻어 보이겠다 다짐했고 그 길을 함께 걸어가고자 약속했다.
"아타올프, 자네는 명성을 얻을수록 강해지는 능력이 있으니 시간이 지날수록 나 같은 건 상대도 안 되겠어. 하하하!"
아카데미를 졸업하는 시점에서 이미 5위계에 오른 괴물 중의 괴물, 비탈리아누스.
그의 입에서 그런 말을 듣는다는 것은 꽤 괜찮은 기분이었기에 아타올프 역시 마주 웃어 보인다.
"앞으로도 잘 부탁하지. 내 친구."
아타올프의 명성은 졸업 후 기사단에서 더욱 커져 가기 시작했다.
검은 안개의 아타올프.
검에 관해서는 비탈리아누스에게 뒤떨어지나 검은 안개를 자유로이 다루는 스킬 각성자.
점차 유명해지고 실적을 쌓아 나가자 사람들의 시선 또한 조금씩이나마 바뀌어 갔다.
룩센 출신의 아타올프가 도바흐 지역의 참사를 막았다더라.
그가 살린 목숨이 상당하다는 이야기가 있다.
황궁 기사단장의 인정을 받았다더라.
조금씩 이름이 알려지고 느리지만, 천천히 인식이 개선되고 있었다.
그런 명성에 힘입어 아타올프의 무력은 더욱 강력해졌다.
이렇게… 이대로만 간다면 그의 꿈도, 그들의 약속도 마냥 멀리 있는 것만은 아니리라.
비탈리아누스는 그리 생각했고 아타올프 역시 비슷하게 생각했을 터였다.
미래란, 함부로 예측해서는 안 된다는 것을.
불행이란, 예상할 수 없기에 불행이란 것을 깊게 깨닫지 못했던 시절이었다.
* * *
"룩센 테러 집단이 수도 근방에서 일을 꾸미고 있다는 정보가 들어왔네."
그렇게 박멸했음에도 꾸역꾸역 살아남아 테러를 벌이는 자들.
룩센 왕국은 이제 재건될 수 없음을 알면서도 악에 받쳐 행하는 것이다.
그들이 하는 행동에 더 이상 명분은 없었다.
이는 가만히 있는 룩센 출신인들을 불행하게 만드는 범죄일 뿐이다.
그것에 고통받는 친구의 모습을 알기에 비탈리아누스는 망설임 없이 나섰다.
"내가 가지."
본래 그들에게 주어진 임무는 그것이 아니었다. 이는 그 과정에서 우연히 얻은 정보였으며 결코 그냥 지나칠 수 없는 정보이기도 한 것이다.
그렇기에 비탈리아누스가 직접 나서서 빠르게 해결하고자 했으나.
"아니, 내가 가겠다."
그를 만류하고 아타올프가 나섰다. 의견에 반대하는 이는 없었다.
수색과 진압을 동시에 해야 하는 이런 상황에서는 비탈리아누스보다 아타올프의 능력이 더욱 훌륭할 것이기에, 그와 함께 임무에 나섰던 이라면 그 실력을 모를 수 없었기에 반대할 이유가 없었고.
또… 룩센이지 않은가.
룩센이 벌인 일이니 룩센이 해결해야 한다는 생각이 은연중에 깔려 있는 것이었다.
"괜찮겠나."
다만 비탈리아누스만이 그를 향해 걱정 섞인 말을 건넬 뿐이었다.
동향인을 위하는 그의 마음을 잘 아는 까닭이었다.
"걱정 말게."
아타올프가 이끄는 분대는 지원을 위해 곧장 움직였다.
녀석들의 무력은 별 볼일 없는 것. 정보 또한 있으니 순식간에 제압할 수 있을 터였다.
그렇게 도착한 현장은.
콰아앙-!
"끄아아악!"
"사, 살려줘!"
"룩센, 룩센 놈들이다!"
각종 폭발음과 비명이 난무하는 아수라장이었다.
정보가 잘못된 것인지. 아니면 테러 집단 쪽에서 눈치를 챈 것인지.
예정된 시간보다 빠르게 거행된 무차별 테러.
고대의 아티팩트라도 얻은 것인지 도시 곳곳이 폭발하며 거센 불길이 휘몰아친다.
"주동자를 잡아라!"
다만 현장에 도착한 것이 아타올프이지 않은가.
그가 펼치는 검은 안개는 순식간에 주동자를 색출해 내고 피해를 최소화했다.
이미 희생된 자들과 번져가는 불길을 막지는 못했지만, 최선의 대처인 셈이었다.
"…왜 이런 짓을 하는 건가."
사로잡은 주모자 중 대장격인 이에게 그리 물으니 녀석은 고개를 푹 숙였다.
"네가 아타올프구나. 룩센 출신의 기사."
"룩센은 이미 돌이킬 수 없음을 잘 알고 있지 않나. 이건 우리를 더욱 불행하게 만드는 짓거리에 불과해."
"알지… 아는데 어떡하란 말이냐."
고개 숙인 사내와 뚝뚝 흐르기 시작하는 눈물.
그러더니 머리를 번쩍 치켜들고는 한 맺힌 울분을 토해낸다.
"가족이 전부 죽었다! 단지 룩센 출신이라는 이유만으로! 우리가 무얼 그리 잘못했단 말이냐!"
아타올프는 차마 대답하지 못했다.
그도 겪었지 않았던가. 룩센 출신이라는 이유만으로 참아야 했던, 당해야만 했던 울분을.
"…그래도 여기 있는 자들은 아무 잘못이 없지 않은가. 이건 옳지 않아."
"그렇다면 나는? 나는 무슨 잘못이 있었지? 몰매 맞아 죽은 우리 가족은? 응? 대답해 봐!"
이번에도 대답하지 못했다.
죄 없는 이들이 죄를 쌓아 가고 있다.
그 시작은 무엇이고 이들은 무엇을 원망해야 하는가.
"…그래. 아무 의미가 없지. 됐네. 됐어."
사내는 체념하며 다시 고개를 숙였다.
아타올프는 어떤 말을 건네야 할지 한참을 고민했지만, 결국 아무런 말도 건네지 못했다.
그 말마따나 위로를 건넨다 한들 무슨 의미가 있겠는가.
심정을 이해한다는 말조차도 기만으로 느껴질 것이기에 아타올프는 침묵하는 것이다.
"나는 제국 치안대에 넘겨지나."
"그렇겠지."
"고문이나 실컷 받다가 살해되겠네. 우리 가족을 죽인 놈들과 같은 놈들에게 말이야."
자신의 팔다리를 봉인한 검은 안개.
테러에 가담한 모든 이들은 사내와 같은 꼴이었다. 범인들은 감히 벗어날 생각조차 못 할 정도로 강하게 잡혀 있는 것이다.
"품에서 종이 한 장만 꺼내 줄 수 있겠나. 가족들 얼굴이라도 마지막으로 보고 싶은데."
그에 아타올프는 검을 집어넣고 사내를 향해 다가갔다.
이는 그가 해 줄 수 있는 최선의 행동이자 최대한의 위로였으니.
"이리 쉽게 잡힐 줄은 몰랐는데… 과연 검은 안개의 아타올프가 유명하다더니 허명이 아니었어. 참… 대단하군."
모든 것을 포기한 듯 말하는 사내에게 다가가 그 안쪽 주머니에 손을 넣자 과연 그 말대로 종이 한 장이 잡혔다.
아직 어린 두 명의 아이와 한 쌍의 부부가 활짝 웃고 있는 초상화.
그리고 그때.
"그래… 이 모든 건 망할 제국 놈들의 탓이지."
멍한 눈으로 사진을 보며 중얼거리는 사내의 말.
"모든 제국민들은 죽어 마땅하지. 그리고...."
그 모습에서 알 수 없는 위화감을 느꼈으나.
"제국에 붙은 더러운 배신자 놈들 또한! 모두 죽어 마땅한 것이야!"
이미 목 앞에서 번뜩이는 투명한 칼날.
가까스로 피해 내긴 했으나 목이 위험할 정도로 베여 피가 솟구쳤다.
"검은 안개의 아타올프! 더러운 배신자! 제국의 개가 되어 짖는 모습이 참으로 우습구나!"
사내가 숨기고 있던 스킬이었는지 무차별적으로 퍼붓기 시작하는 투명한 칼날 세례.
허나 그런 발악은 채 몇 초도 이어지지 못했다.
"네놈들 때문에...! 우리가 왜! 왜! 왜! 무엇을 그리 잘못했느냐! 무엇을...!"
아타올프의 뒤에 서 있던 기사에 의해 순식간에 목이 잘려 떨어진 사내.
치솟는 피와 목이 잘리고도 무엇이 그리 원통한지 뻐끔거리는 입. 부릅뜬 눈.
그에 답하지 못한 것은 비단 목에 입은 상처 때문만은 아니었다.
"괜찮으십니까. 어서 돌아가 치료하시죠."
그것을 뒤로한 채 아타올프는 몸을 돌릴 수밖에 없었다.
그 역시 부상이 심각했기에.
목이 완전히 잘리는 것은 면했지만, 피가 철철 흐를 정도로 부상이 심각했기에 서둘러 치료를 받아야 할 터였고.
그렇게 어정쩡한 분위기에서 진압은 완료되었다.
81화 악당 (7)
"괜찮은가 자네."
비탈리아누스의 물음에 아타올프는 고개를 끄덕였다.
목에는 하얀 붕대가 칭칭 감긴 채로 애써 짓는 웃음.
"괜...."
"어허. 말하지 말게. 마침 교단이 근처에 있어서 망정이지, 하마터면 영영 목소리를 잃을 뻔했어."
가까스로 피해 내기는 했으나 룩센 해방 운동가(를 빙자한 테러 집단의 사내)의 마지막 발악은 아타올프의 성대를 깊게 베어 버렸다.
그래도 이대로 쭉 치료받으며 휴식한다면 목소리는 낼 수 있을 것이라고 한다.
제법 큰 도시였던 만큼 교단이 있었고 마침 신성력을 사용할 수 있는 주교급의 사제가 있었기에 이 정도로 끝난 것이지, 정말로 위험했던 것이었다.
"당분간은 훈련도 없을 테니 푹 쉬게."
비탈리아누스는 그대로 등을 돌린다.
거의 다 잡은 상대의 마지막 발악에 허무하게 죽을 뻔했다니.
그답지 않게 방심했다는 말이 튀어나올 뻔했으나 가까스로 참아 내었다.
그답지 않다는 게 무엇인가.
어쩌면 이러한 것이야말로 지극히 그다운 것일지도 모른다.
정이 많고 마음이 여린. 영웅이 되고자 하는 이유도 개인의 영광이 아닌 타인의 오명을 위한 것이 아니었던가.
"누가 뭐라 해도 자넨 이미 영웅일세."
그러니 할 수 있는 말이라고는 그것뿐이었다.
* * *
치료를 받고 붕대를 새로 갈아 끼고 나면 아타올프는 성을 나선다.
테러로 인해 엉망이 되어 버린 도시를 돌아다니고 자신의 힘이 필요한 곳이라면 거리낌 없이 능력을 사용했다.
상처가 아물 때까지는 가급적 힘을 사용하지 말라 충고를 받았음에도 망설임은 없었다.
룩센으로 인해 벌어진 참사가 아닌가.
원망의 골이 더욱 깊어지고 증오의 고리가 그 길이를 더 늘여가기 전에 자신이 해결해야 할 터였다.
더욱 노력해야 할 것이었다.
상처가 벌어지고 아물고, 피가 새어 나온 붕대를 다시 갈아 끼우기를 며칠.
공식적으로 아타올프의 이름이 도시에 퍼져 나갔다.
그가 알린 것은 아니었다. 제국 차원에서 이번 테러 진압의 책임자가 아타올프였음을 공표한 것이다.
그를 치하하고 많은 이들로 하여금 칭송받게 하기 위함이었다. 분명 그의 기사단, 특히 비탈리아누스가 힘을 실은 것일 터.
하지만 상황은 그들의 생각처럼 돌아가지 않았다.
"아타올프? 그 룩센 출신의 기사?"
"이번 테러도 빌어먹을 룩센 놈들이 벌인 짓인데 그걸 막은 게 룩센 출신의 기사였다?"
"그게 말이 되는가! 이 자식들 분명 서로 작당해서...."
"어쩐지 너무 늦게 도착한다 했어! 내가 건너 듣기로는 미리 정보를 입수했다고 했었는데...."
"불길한 검은 안개를 다룬다더니 역시...."
영웅적 행보에 돌아온 것은 의심이었다.
의심이 여럿 뭉치자 그것은 확신이 되었다. 확증 편향이란 이름이었다.
물론 그런 목소리를 대놓고 높일 수는 없었다.
"비탈리아누스 마헬. 나의 이름과 나의 목숨을 걸고 맹세하지."
그의 친우가 나섰기 때문이다.
"아타올프의 행보에는 어떠한 거짓도 없었으며 그는 무차별 테러로부터 도시를 구한 영웅. 누구도 그의 명예를 더럽혀서는 안 될 것이다."
제국의 유서 깊은 가문, 마헬 가.
그중에서도 떠오르는 신성 비탈리아누스의 존재감은 대단한 것이었으니.
"고맙네. 내 친구."
아타올프는 그런 비탈리아누스를 향해 웃어 보였다.
제법 비참한 기분이었지만, 자신을 향한 친구의 마음을 알기에.
한없이 넓은 그의 그릇 앞에서 썩어 들어가는 자신의 마음을 차마 내보일 수 없기에 애써 웃어 보였으나.
"뭘, 약속했지 않나. 함께 영웅이 되기로 말이야."
그런 비탈리아누스의 말에는 자신도 모르게 그만 고개를 돌려 버리고 말았다.
도저히 미소가 지어지지 않은 까닭이었다.
* * *
목의 상처가 완전히 아물고 아타올프는 다시 임무에 투입되었다.
룩센 해방 운동이란 이름의 테러 활동은 그날을 기점으로 더욱 심각해졌다.
그들이 자행하는 테러에는 룩센이라는 이름조차 들려오지 않았다. 그저 증오에 찬 학살인 것이다.
명분은 오래전에 사라졌고 남은 것은 끝없이 이어진 증오의 사슬.
제국인은 룩센인을. 룩센 출신은 제국민을 증오하는, 너무도 복잡하게 꼬여 버린 증오.
셀 수도 없이 많은 증오로 뒤엉킨 그것을 풀 수 있는 길은 이제 하나뿐이리라.
한쪽의 일방적인 학살. 꼬인 줄을 풀 수 없으니 아예 다른 쪽 줄을 없애 버리는 것이다.
그리고 당연하게도 없어지는 쪽은 룩센, 없애는 쪽은 제국이었다.
"죽여! 이 더러운 제국의 버러지들!"
"죽어! 죽어!"
증오로 멀어 버린 눈. 아타올프가 할 수 있는 건 하나뿐이었다.
검은 안개로 그들의 눈을 감겨 주는 것.
"검은 안개!"
"아타올프! 이 더러운 배신자!"
허나 그들은 죽어 가며 아타올프를 저주했다.
"제국의 개, 아타올프!"
"네놈은 결코 편히 죽을 수 없을 것이다!"
"너 역시 결국 우리처럼 비참한 꼴을 당하고 버려질 것이다! 아타올프!"
아타올프는 동요하지 않았다.
묵묵히 할 일을 할 뿐이었다.
머릿속에는 그저 사내의 물음만이 메아리쳤다.
- 우리가 왜! 왜! 왜! 무엇을 그리 잘못했단 말이냐!
평생 답을 알 수 없을 물음이었다.
"감사합니다. 기사님."
테러를 진압한 후에 한 아이가 쭈뼛쭈뼛 다가와 고개를 꾸벅 숙여 왔다.
그 작은 손에는 들꽃이 한 아름 쥐어져 있었는데 그것을 불쑥 내미는 것이 아닌가.
아타올프의 입가에는 아주 오랜만에 희미한 미소가 걸렸다.
그렇기에 꽃을 향해 손을 뻗으며 아이를 향해 말했다.
"고맙구나."
솜털이 곤두설 만큼이나 기괴한 목소리였다. 쇠로 쇠를 긁는 듯한 소름 끼치는 목소리.
도시 하나를 구해낸 영광의 상처이자 한 점 부끄러움도 없을 명예의 상징이었으나.
"으, 으아아앙!"
아이는 울음을 터트리며 풀썩 주저앉는 것이다. 새하얀 들꽃이 떨어져 바닥에 널브러지고 목적지가 사라진 아타올프의 손은 허공에 우뚝 멈춰 섰다.
순간 그의 주위를 항시 맴돌던 검은 안개가 출렁인다.
"하, 하넬!"
아이의 엄마가 빠르게 다가와 아이를 데리고 도망치듯 물러난다.
힐끗 돌아보는 그 눈에 담긴 것은 영웅을 보는 동경이나 감사 따위가 아니었다. 오직 두려움만이 가득한 것이다.
"...."
아타올프는 아무렇지도 않게 낮췄던 몸을 일으킨다.
희미하게나마 걸렸던 미소는 흔적조차 남지 않았고 시선은 오직 정면만을 향한 채 걷는 걸음.
그가 내딛는 한 걸음에 새하얀 들꽃이 즈려밟힌다.
별다른 생각은 들지 않았다.
그의 머릿속에는 이름 모를 사내의 절절한 물음만이 다시 되풀이될 뿐.
- 우리가 무엇을 그리 잘못했단 말이냐!
되풀이되는 그 소리가 사내의 것인지 자신의 것인지 이제는 잘 구분이 되질 않는다.
"...."
조금 떨어진 곳에서 그 모든 것을 지켜보고 있던 비탈리아누스 역시 어떤 말도 할 수 없었다.
무슨 말을 할 수 있을까. 어디서부터 무엇이 잘못된 것일까.
아이를 탓할 수도, 그 어미를 질책할 수도 없다.
그럼에도 분명 답은 있을 터였다.
생각, 생각을 해 보자.
시간을 들여 천천히 생각해 본다면, 분명 잔뜩 꼬여 버린 이 상황을 해결할 수 있을 테니까.
* * *
조금의 세월이 지나고 비탈리아누스와 아타올프. 두 사람의 명성은 더욱 높아져 갔다.
물론 아타올프에게는 룩센 출신의 기사라는 꼬리표가 늘 따라붙은 채였다.
커진 명성만큼이나 강해진 힘. 검은 안개는 아타올프의 상징이 되었고 그 농도는 더욱이 짙어졌다.
소름 끼치는 목소리와 더불어 불길해 보이는 검은색의 안개.
자연스레 소문이 나돈다.
아타올프의 검은 안개는 사람의 감정을 먹으며 성장한다.
아타올프의 검은 안개는 불행을 먹으며 자라난다.
아타올프의 검은 안개는 죽음을 양분으로 강해진다.
당연히 사실은 아니었다. 불길하지도 않았고 사이한 힘을 쓰는 것도 아니었다.
그저 스킬 중 하나, 명성을 얻으며 커져가는 힘일 뿐이었다.
비탈리아누스가 오해를 바로잡기 위해 발 벗고 나섰으나 먹히는 기색은 아니었다.
사람들은 아타올프의 내면이 사악할 것이라 수군거렸다.
그가 못된 속내를 감추고 언젠가는 터트릴 것이라 호언장담하는 이도 있었다.
어쩌면 그러기를 바라고 있는 것일지도 모르겠다.
불길하기 그지없는 검은 안개와 기괴한 목소리. 거기에 룩센 출신이라는 꼬리표까지.
그린 듯한 악당의 표본이지 않은가.
"녀석들의 규모가 생각 이상으로 커졌어."
그런 상황 속에서 테러 집단의 규모는 상상 이상으로 커져 버렸다.
대부분이 룩센 출신으로 구성된 그것은 이제 거대한 범죄 집단이 되어 똘똘 뭉쳐 버린 것이다.
"작정을 한 모양이야. 제국 각지에 출현해 무차별적인 테러를 벌이고 있어."
그렇게 탄생한 것이 바로.
"스스로를 흑아(黑兒)라 칭한다더군."
범죄 집단, 흑아였다.
"조무래기들이 모여 봤자 쓸어버리기 좋을 뿐이지."
다만 그들이 상대해야 하는 것은 비탈리아누스와 아타올프를 위시한 제국군.
마음만 먹으면 언제든 쓸어버릴 수 있는 것이었다.
제국은 흑아를 위험 분자로 판단하고 전쟁을 선포했다. 비탈리아누스와 아타올프가 그에 참전한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비명과 원망과 증오가 난무한다.
제국은 해일이오 그 앞에 선 흑아는 한낱 모래성이었으니. 하나로 뭉쳐 집단을 형성한 것이 그들에게는 오히려 독이 된 셈이었다.
오랜 증오의 사슬도 비로소 끝이 보이는 것 같지 않나.
…허나 누가 그랬던가.
불행에는 눈이 없다고. 누구나 겪을 수 있는 것이라고.
그 말은 틀렸다.
불행에는 눈이 있다.
그것은 아타올프만을 향하는 지독한 눈.
그렇지 않고서야 이럴 수는 없었다.
긴 원정을 끝내고 돌아온 아타올프의 앞에 나타난 것은 싸늘하게 식은 가족의 주검이었으니.
"발견했을 때는 이미...."
이미 저택은 불타고 가족은 모두 처참하게 살해당한 후라고 한다.
누가 저지른 것인지 특정할 수도 없다고 한다.
룩센을 증오하는 제국민의 짓인지.
아타올프가 없는 틈을 탄 흑아의 짓인지 알 수가 없다고 한다.
그것이 말이 되는가.
수도 한복판에서 일어난 일이다.
아니, 사실은 별 관심조차 없는 게 아닐까.
안타깝긴 하지만 뭐, 룩센 출신이 겪은 일이 아닌가.
"하하하...."
아타올프는 웃음을 터트렸다.
도시를 구했다.
돌아온 것은 모욕이었다.
한 가정을 구했다.
돌아온 것은 두려움이었다.
나라를 위해 나섰다.
돌아온 것은 가족의 처참한 시신이었다.
영웅이 되어 오명을 씻어 내고자 했다.
이젠 그럴 필요가 없어졌다.
내가 무엇을 그리 잘못했는가.
내가 뭘 어떻게 했어야 했는가.
"하하...."
그런 물음에 답을 찾는 행위 따위, 상관이 없어진 그날.
- 우리가 무엇을 그리 잘못했단 말이냐!
그간 계속 머릿속에서 울리던 사내의 목소리가 처음으로 들려오지 않던 그날.
아타올프는 모습을 감췄다.
동시에 남은 흑아의 잔당 역시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
그것을 대신해 목격되는 것은 검은 안개.
지독하게도 짙은, 증오로 점칠 된 검은 안개였으니.
사람들은 입을 모아 말하는 것이다.
쯧쯧, 내 뭐라 했나. 저럴 줄 알았지.
처음 봤을 때부터 불길하고 사악해 보였다니까.
에라이 더러운 룩센 놈 같으니라고.
영웅은 무슨, 역시 악당이지 않은가.
그렇게 아타올프는 모두의 바람을 이루어 주었다.
영웅이 될 수 없었던 사내는 결국 악당이 된 것이다.
무엇을 원망해야 할지 몰랐던 사내의 증오가 세상을 향해 버린 것이었다.
* * *
강철과 강철.
검과 검.
혹은 의지와 의지.
그것이 전력으로 맞부딪치는 소리는 언제나 많은 영감을 준다.
아주 오래된 기억을 끄집어낼 정도로 말이다.
챙-
검과 검이 부딪치고 그중 한 자루가 멀리 날아간다.
승자와 패자가 갈린 순간이었다.
비탈리아누스는 말한다.
"미안하네."
그 입가에는 피가 가득 고인 채였다.
82화 악당 (8)
"어떤가. 내 친구의 과거는 들어줄 만했는가?"
모니터 화면 너머에서 비탈리아누스가 말했고 나는 심드렁하게 채팅을 두드렸다.
어비스 몬스터가 쏟아져 나오는 벤타이얼의 세상 속, 아직 희망의 상징이 살아 있을 때의 이야기였다.
"글쎄."
돌이켜 보면 게임 속 NPC가 어찌 이런 채팅을 이해하고 대화를 이어갈 수 있었는지 신기한 현상이지만, 당시에는 그 누구도 이를 이상하게 여기지 않았었다.
"그냥 평범한 악당의 이야기네. 가엾긴 하다만, 그렇다고 녀석이 한 짓이 없어지는 것도 아니고."
아타올프의 과거를 전해 들은 첫 소감이었다. 사정이 있었다는 건 알겠지만, 그래도 그가 한 짓이 정당화되는 건 아니지 않은가.
그 말에 비탈리아누스는 웃음을 터트렸다.
"자네 말이 맞아. 그래서 나도 녀석을 참 많이 미워했지. 그 악행을, 방향성 없는 증오를 막기 위해 흑아가 나타났다는 곳이라면 곧장 뛰쳐갔다네."
아타올프를 쫓는 비탈리아누스와 그를 피해 악행을 저지르는 아타올프.
악당을 쫓는 영웅과 영웅을 피하는 악당.
그렇게 수십 년이 지났다.
"그 세월 동안 많은 일이 있었지."
최고를 꿈꾸던 기사는 기어이 검으로 별의 칭호를 얻어 내며 최고가 되었다.
황제의, 제국의 수호 기사가 되어 만민의 존경을 받았다. 누군가의 목표가 되었고 꿈이 되었으며 희망이 되었다.
"그런데 문득 이런 생각이 들더군."
그리 긴 세월이 흘렀으니 응당 많은 것이 변했다.
함께하던 동료들은 진작에 은퇴하여 모습을 보기가 힘들었다. 어느새 흰머리가 희끗한 그들과 자신의 모습에서 괴리감이 느껴지는 것이다.
진심을 다해 충성하던 황제 역시 이젠 없다.
최고가 되겠다는 일념하에 검을 휘두르던 열정 역시 사라지고야 말았으니.
"외롭구나."
문득 주위를 둘러보니 곁에 아무도 없는 것이었다.
"그제서야 깨달았지. 내 친구는 오죽했을까."
썩을 대로 썩어 스스로 몰락한 왕국의 소년.
스스로 영웅이 되어 모든 룩센민의 오명을 씻어 내고자 했던 소년.
허나 배신자라 손가락질받고 불길하다 여겨졌으며 싸늘한 가족의 주검 앞에서도 그 누구에게 위로받지 못한 가여운 내 친구.
"긴 원정의 끝에 도달한 것은 가족의 시신 앞이었네. 누구보다 힘들었을 그 순간에 내가 곁에 있었다면 이야기가 달라졌을까."
어쩌면 지금 내 곁에 네가 어깨를 나란히 하고 있을 수 있지 않았을까.
너의 목소리에 아이가 놀라 울던 그날.
아이에게 다가가 네 목소리에 담긴 영광스런 비밀을 설명해 주었다면, 아이는 활짝 웃으며 네 손에 하얀 들꽃을 쥐여 주지 않았을까.
그것으로 네 얼굴에도 웃음이 피어나지 않았을까.
하지만 그러지 못했고 그는 언제나 혼자였으니.
"얼마나 외롭고 쓸쓸했는가."
제국에 흡수되기 전, 룩센 상황은 최악이었다. 하루가 멀다 하고 벌어지는 전쟁, 보호받지 못한 채 굶어 죽어 가는 아이들.
귀족은 백성을 가축 취급하며 제 뱃속을 불리기에 여념이 없었고 그 작은 땅덩이를 차지하고자 끊임없이 싸워댔다.
왕국의 재건을 부르짖는 자들은 그런 자들이었다. 룩센의 귀족들. 제국과 합쳐진다면 자신들은 결코 살아남을 수 없음을 아는 자들. 그렇기에 왕국의 부흥을 핑계로 발악하는, 한낱 범죄자.
아타올프는 그런 놈들 때문에 모든 룩센 출신들이 핍박받는 것을 원치 않았다.
그렇기에 제 스스로 영웅이 되어 이미지를 바꾸고자 한 것이다. 죽을힘을 다해 노력한 것이었다.
허나 그 누구도 그런 아타올프를 이해하지 않는다. 이해할 노력조차 하지 않는다.
룩센에게는 배신자라 손가락질 당하고 제국민들에게는 룩센인이라 경계당한다.
목소리를 잃어 가며 지켜낸 도시에서는 그를 의심한다. 왜 더 빨리 구하러 오지 않았느냐고.
그렇게 점점 마모되어 가는 감정 속에서 너는 얼마나 외로웠는가.
그리하여 기어이 가족마저 살해당한 그날, 너는 어찌나 서글펐는가.
"할 수만 있다면 이야기라도 제대로 나눠 보고 싶은데 아마 받아 주지 않겠지."
이미 너무 많은 세월이 지났다. 서로가 쌓았던 신뢰와 우정 위에는 세월과 함께 온갖 것들이 퇴적되어 파묻혀 버린 것이다.
"그래도 나는 이야기해 보고 싶다네. 이 쓸모없는 목숨이 끊어지는 한이 있더라도 말이야."
그리 말하는 비탈리아누스의 분위기가 심상치 않았기에 나는 말할 수밖에 없었다.
"…허튼 생각은 하지 말고."
세상이 멸망해 가는 지금, 제국의 황금 사자는 희망의 상징이다.
제국의 모두가 바라보고 의지하는 황금빛 오러. 위대한 검성.
그가 목숨을 헛되게 잃는다면 사태는 걷잡을 수 없게 되는 것이다.
그에 비탈리아누스는 언제 그랬냐는 듯 씨익 웃어 버린다.
"걱정 말게. 나도 내가 짊어진 무게 정도는 알고 있다네."
그 표정이 어찌나 생동감이 있는지 현실과 크게 구분 가지 않을 정도였다. 물론 당시에는 의식하지 못했지만 말이다.
"새로운 희망이 나타나지 않는 이상에야 내가 어리석을 선택을 할 일은 없을 걸세."
은근 그러기를 바라는 듯한 표정과 말투였지만, 아쉽게도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았다.
비탈리아누스는, 제국의 위대한 검성은 마지막까지 희망의 상징이었고 그것은 유일한 것이었으니.
"혹, 나중에라도 나를 대신해서 내 친구에게 말을 전해 줄 수 있겠는가."
그는 어쩌면 끝끝내 자신의 친구를 만나지 못할 것임을 예견한 것일지도 모르겠다.
"곁에 있어 주지 못해 미안했다고. 못난 친구를 용서해 줄 수는 없겠느냐고."
결국 그 말대로 되었지 않은가.
그런 대화를 나눈 이후로 얼마 지나지 않아 검성은 죽어 버렸으니까.
세상의 법칙을 무시하는 괴이 앞에 영웅의 오러는 닿지 못했고 그 검은 산산이 부서졌으며 위대했던 검의 별은 그대로 저버렸으니 말이다.
그러니 나는 검성이 죽은 이후 아타올프를 찾아갔다.
검성의 이야기를 전했다.
그의 마지막과 그의 생각을 전해 주었다.
그에 아타올프는 웃음을 터트렸다.
어쩌면 울었던 것일지도 모르겠다.
그 뒤로는 뭐, 이야기했다시피 그런 것이다.
자신이 사용하던 낡은 검을 거꾸로 쥐고 제 심장을 겨눈 채.
- 나는 사실 영웅이 되고 싶었다네.
그렇게 벤타이얼 속 아타올프의 이야기는 끝이 났다.
악당의 시나리오는 거기까지인 것이다.
물론, 현실이라고 해서 크게 다르지는 않았다.
* * *
다른 점이 전혀 없는 것은 아니었다.
우선 히오를 통하지 않고 비탈리아누스가 아타올프에게 직접 이야기한 것.
곁에 있어 주지 못해 미안했다고. 용서해 줄 수 없겠느냐고 말이다.
그리고.
"...."
말을 전한 비탈리아누스는 새빨간 피를 한없이 흘리며 바닥에 쓰러진 것이다.
옛 친구에게 자신의 진심을 전하기 위해 왼쪽 가슴 정도야 거리낌 없이 내어 준 것이었으니.
아타올프는 바닥에 쓰러진 비탈리아누스를 멍하니 내려다본다.
검과 검을 맞댄 이상 그가 위대한 검성을 이길 가능성은 없었다.
금빛의 검과 흑색의 검이 부딪치기 직전의 순간, 비탈리아누스가 자신의 오러를 꺼트린 것이다. 그렇지 않았다면 심장이 꿰뚫린 건 틀림없이 아타올프가 되었을 터였다.
아니, 그보다 더 어처구니가 없는 것은.
"…옆에 있어 주지 못해 미안하다니. 이 어찌나 오만한 말인가."
곁에 있었다면 달랐을 거라니.
그의 존재가 자신에게 그 정도가 된다고 확신하는 꼴이지 않은가.
얼마나 광오한 말인가.
"그리고 지금이라도 바뀌어 보자니, 바뀔 수 있다니. 머릿속이 얼마나 꽃밭이어야 가능한 말인가. 어리숙하고 한심한 비탈리아누스."
멍하니 중얼거리는 말. 시선은 여전히 쓰러진 비탈리아누스를 향한 채였다.
"하지만 그렇기에 지극히 자네다운 것이겠지."
그러니 영웅이 될 수 있는 것이겠지.
"그렇지 않나?"
아타올프의 고개가 천천히 돌아간다.
그 시선이 향한 곳에는 히오가 서 있었다. 정확히는 그 손에 들린 낡은 검을 바라본 것이다.
아타올프는 히오에게 다가간다.
아니, 자신의 것이었던 검을 향해 다가간다.
"이제 와서 영웅이 되어 보자니. 하마터면 웃음을 터트릴 뻔했지 않은가."
그렇게 말하는 눈에는 초점이 잡혀 있지 않았다.
회색 성의 가장 높은 첨탑.
예상했던 대로 전망이 좋다. 안개가 걷힌 숲의 모습이 한눈에 보인다.
사방을 둘러싼 채 성을 향해 진격해 들어오는 은빛 갑주. 번뜩이는 칼날.
그렇게나 많은 사람들 중에서 그를 위하는 이는 한 명도 없었다.
언제나처럼 말이다.
"한 때는 나도 영웅이 되고 싶었지."
히오의 손에 들린 낡은 검을 향해 손을 뻗는다.
히오는 그것을 순순히 건네주었다. 그가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 아는 까닭이었다.
멍한 눈으로 그것을 거꾸로 쥐고 제 심장을 겨누는 아타올프.
언제나 함께 하던 검은 안개는 마지막 순간에 그의 곁에 있지 않았다.
"이젠 아무 의미가 없지만 말이야."
조금의 망설임도 없이 스스로를 향해 찌르는 검. 심장을 관통하고 등 뒤로 튀어나오는 낡은 검.
뿜어지는 붉은 피. 허물어지는 몸까지.
과정은 조금 달랐을지언정 그 결말은 변하지 않았다.
게임 속에서 그랬듯이 그는 스스로 목숨을 끊는 것을 택한 것이다.
심장이 부서진 이상에야 제아무리 공포의 상징으로 군림하던 아타올프랄지라도 즉사였다.
굳이 확인하지 않더라도 충분히 느껴지고 있었다.
거대한 죽음의 기운이. 높은 격의 영혼이 육신을 빠져나오는 느낌이 말이다.
그러니 아타올프는 죽은 것이 분명했다.
…하면 왜.
그를 상징하는 검은 안개는 아직도 남아 있는 것인가.
아타올프를 지켰어야 할 검은 안개는 왜 그의 곁이 아닌, 비탈리아누스에게 붙어 있는가.
비탈리아누스의 상반신을 감싼 채 마치 붕대처럼 왼 가슴을 압박하고 있는 것이냔 말이다.
안개의 주인이 죽었음에도 여태껏 남아, 마지막 명을 수행하는 그 의념은 얼마나 대단한 것인가.
심장이 부서졌다면 8위계의 기사든, 대륙 최악의 범죄자든 죽을 수밖에 없다.
그 말인즉, 심장만 부서지지 않았다면 초인의 육체는 웬만한 상처를 버텨 낼 수 있다는 말이었다.
아타올프는 마지막 합을 나누던 순간.
비탈리아누스가 자신의 오러를 스스로 꺼트리고 심장을 들이미는 순간, 본능적으로 검을 비틀어 그 심장을 비껴 내었으니.
「특성 - '유령의 눈'이 발동됩니다」
히오는 고개를 들어 거대한 영혼을 올려다본다.
여태 본 그 어떤 영혼보다도 검게 점칠된, 죄 많은 영혼.
격이 높은 혼답게 죽은 직후 발생하는 기억의 혼란에서 벗어나 똑바로 아래를 내려다보는 아타올프의 거대한 혼.
그것과 눈을 마주한다.
- 마법사가 맞긴 한가 보군. 혼이라는 것을 어렴풋이 느끼고는 있었지만, 이런 세계가 있을 줄이야.
히오에게 덤덤히 묻는 아타올프의 목소리는 거북하지 않았다. 오히려 지극히 평범해서 낯설었다.
- 마법사. 혹시 지옥이란 곳도 있나?
히오는 고개를 작게 가로저었다.
"글쎄. 그것까진 모르겠네. 죽어 보지는 않아서."
- 그런가.
그것도 그다지 궁금해서 묻는 눈치는 아니었다. 아무래도 상관없다는 듯한 태도였다.
그저 묵묵히 아래를 내려다보며 떠나지 않고 남아 있는 것이었다.
"살아서 영웅은 되지 못했지만, 죽어서 못 할 건 없지."
히오는 그런 아타올프의 혼을 향해 말한다.
"네가 동의만 한다면 죽음에서 돌아오게 만들 수도 있어."
숲 전역에 짙게 배인 죽음의 기운.
혼의 격이야 테오르도보다 높으니 그가 동의만 한다면 못 할 것도 없다. 사신을 이용해 죽음의 기운을 몽땅 때려 박는다면 말이다.
그도 어떠한 미련이 있기에 곧장 떠나지 않고 남아 있는 것이 아니겠는가.
하지만 그런 히오의 말에 아타올프의 검은 혼은 고개를 가로젓는다.
- 내게 참 잔인한 말을 하는군. 마법사.
그리고 그 순간.
"쿨럭!"
들리는 숨통이 트인 소리.
붉은 선혈과 함께 다시금 박동하기 시작하는 심장 소리.
잠시나마 멈췄던 비탈리아누스의 심장이 다시 뛰기 시작한 것이다.
- 내게 지옥은 이 세상이었네.
인간의 한계를 벗어난 초인의 육신은 엄청난 생명력을 품고 있는 것이기에 죽지 못하고 또다시 살아 숨 쉬는 것이었다.
- 이보게 마법사. 미련한 내 친구에게 말 좀 전해 주겠나.
그리고 그것을 확인함과 동시에 미련 없이 등을 돌리는 아타올프의 혼.
비탈리아누스를 감싸던 검은 안개 역시 서서히 소멸해 간다.
- 영웅의 삶은 어떠했는지 궁금하니.
온갖 죄악으로 점칠된 혼은 이제 조금의 미련도 남지 않은 것인지 빠르게 멀어진다.
- 내 몫까지 실컷 즐기다 와서 이야기를 들려 달라고 말이야.
게임 속이나 현실이나 악당의 결말은 같은 것이라 생각했으나.
- 약속을 지키지 못해서 미안하네. 친구.
어쩌면 조금은 다를지도 모르겠다.
83화 악당 (9)
제국과 흑아의 전쟁. 아니, 제국과 아타올프의 전쟁이라는 말이 더 맞겠다. 그것은 이제 전투라기보다는 일방적인 학살에 가까워졌다.
그들을 지켜주던 안개는 사라졌고 세뇌 수준으로 그들을 지배하던 영향력 역시 일거에 사라졌으니.
남은 세력들은 혼비백산하여 도망치려 했지만, 도망칠 곳이 어디 있단 말인가. 주위에 가득한 것은 안개 속에서 인내하던 제국군의 비정한 칼날뿐일진대.
마인이 괴수화되어 날뛴다 한들 시야와 감각이 온전한 이상에야 제국의 기사단을 막아설 정도는 아닌 것이다.
숲의 전역을 포위한 채 무서운 속도로 진격해 들어오는 제국군. 그들의 목적지는 숲의 중심에 위치한 회색의 성. 그 안에서도 가장 높은 첨탑.
숲에서 조금만 들어오면 눈에 들어오는 높은 첨탑의 꼭대기에는 한 명만이 오롯이 서 있었다.
천장은 진작에 날아가 버렸고 벽 또한 너덜해서 야외나 마찬가지인 그곳에 서 있는 마법사.
히오 파블렌코였다.
고개를 꺾어 시선은 하늘을 향한 채 중얼거리는 히오.
"정말 가 버렸네."
아타올프의 거대한 혼은 정말이지 뒤도 돌아보지 않고 사라진 것이다.
비탈리아누스가 살아 있음을 확인하자마자, 마치 이 지옥에 조금이라도 남아 있고 싶지 않다는 듯이 그렇게 가 버린 것이었다.
히오는 하늘을 한동안 올려보다 천천히 고개를 내린다.
그렇다면 이제 비참한 주변 상황이 눈에 들어오는 것이다.
혼이 빠져나가 껍데기만 남은 아타올프의 육신은 심장이 낡은 검 한 자루에 꿰뚫린 채로 바닥에 놓여 있다.
그리고 그 옆에는 비탈리아누스가 몸을 뉘인 채였다.
미약하게 들리는 숨소리. 정말로 간신히 살아 있는 것이다.
초인이라 한들 심장의 바로 옆에 아타올프의 검이 꽂히지 않았던가. 심지어 철로 만들어진 보통의 검도 아니다.
검은 안개의 힘이 압축되고 압축되어 만들어진 대륙 최강자 검은 안개의 검.
그것이 심장 바로 옆에 꽂힌 채로 하고 싶은 말을 잔뜩 전했으니 살아 있는 것만으로도 가히 비탈리아누스답다 할 수 있겠다.
어쨌든 두 사람은 가슴에 검을 관통당했다는 공통점이 있긴 했으나 외관은 비교적 멀쩡했다.
남은 한 사람에 비한다면 말이다.
무너진 벽의 틈바구니에서 얼핏 보이는 피투성이가 된 얼굴.
"…아이라이츠."
자신의 이익을 위해 아타올프와 손잡은 두 번째 악당. 아이라이츠.
그녀는 잔해에 파묻힌 채 텅 빈 눈으로 하늘을 올려다보고 있었다.
그 아래로 드러나지 않은 몸뚱어리가 어떤 형태를 취하고 있는지는 굳이 말하지 않아도 될 터였다.
몹시 끔찍한 까닭이었다.
아타올프를 상대로 1초도 되지 않을, 찰나의 시간을 벌어 준 대가였다.
아이라이츠의 능력은 자신의 위치를 숨겼을 때 극대화되는 능력.
반대로 말하면 본체의 위치가 드러난 이상, 하물며 아타올프의 눈앞에 놓인 이상 저항할 능력은 전무하다시피 한 것이었으니.
그것을 모를 리가 없음에도 아이라이츠는 기꺼이 나섰고 그 대가로 처참한 꼴을 한 채 잔해에 파묻힌 것이다.
조금의 미동도 없다. 언제나 선홍빛이 반짝이던 눈동자는 텅 비어 있었고 여우처럼 짓던 눈웃음 역시 더는 볼 수 없을 터였다.
아이라이츠의 심장은 진작에 멈췄으니....
그냥 그렇게 죽어 버린 것이었다.
감춰 두었던 비장의 수도, 반전도 없었다.
허무할 것도 없었다.
죽음이란 그런 것이지 않은가. 수도 없이, 이곳 세계에 떨어지기 전부터 수없이 겪어 보았지 않았던가.
특별한 죽음이란 없다.
특별한 건 죽음이 아니라 언제나 사람이었다. 그것을 혼동해서는 안 될 터였다.
게다가 아이라이츠는 악당이지 않은가.
자신의 이익을 최우선으로 하며 타인의 죽음을 아무렇지도 않게 입에 담던 여자.
그러니 이리 허망하게 죽어 버렸다고 한들 이상할 건 없어야 정상이었다.
…하지만 이상한 점은 있었다.
- 자네… 분명 장담했지 않았나?
여지껏 조용하던 푸르넬의 목소리가 들려왔을 때 히오 역시 그런 이상을 눈치챌 수 있었다.
- 빙의자들은 모두 영혼이 텅 비어 있다고 말이야.
"…그랬지."
빙의자들은 하나같이 영혼이 텅 비어 있다.
그건 의심할 여지없는 사실이다. 실비아를 통해 확인까지 했으니 말이다.
히오 자신을 제외한 모든 빙의자들의 영혼은 결코 찾아볼 수 없었다.
- 허면 저것은 왜 존재하는 건가?
그렇다면 느껴지는 저것은 무어란 말인가.
「특성 - '유령의 눈'이 발동됩니다」
아이라이츠의 머리 위에 존재하는 것은, 몸을 잔뜩 웅크린 채 기억의 혼란에 파묻혀 있는 것은 분명 혼이었다.
의심할 여지없는 아이라이츠의 영혼.
- 빙의자가 아니었나?
"빙의자가 맞아."
랭킹 3위. 아이라이츠.
정확한 닉네임은 I like you.
나머지 유저들이 대강 뭉뚱그려 말하기를 아이라이츠.
벤타이얼에서 유명 랭커였던 그녀가 빙의자가 아닐 가능성은 전혀 없다. 사칭했다는 생각 또한 들지 않았다.
허면… 어찌 된 일일까.
있는 힘껏 몸을 웅크리고 있는 혼을 향해 다가가며 유령의 눈에 영력을 더욱 집중한다.
그러면 혼을 구성하는 것들이 조금씩 보이기 시작한다. 아주 잘게 나뉘어 부드럽게 이어진 그것은 혼에 새겨진 기억.
그곳에서 발견한 것은 서럽게 울고 있는 한 소녀의 모습이었다.
* * *
내게 아버지는 없었다.
어찌 됐건 세상에 태어나긴 했으니 생물학적으로 어딘가에는 존재하겠으나 6살이 되던 무렵에 더 이상 나타나지 않았으니 애초에 없었던 것으로 치부해도 상관없지 않겠는가.
뭐, 술에 취해 부수고 때리고 욕지거리를 내뱉던 이를 아버지라 말하기도 애매하니 말이다.
어쨌든 나는 6살 이후로 엄마와 둘이 살았다.
사람들이 나를 이상하게 바라보기 시작한 것도 그즈음이었다.
"반사회성 성격장애… 흔히 말하는 소시오패스의 성향을 보이고 있습니다."
엄마에게는 그야말로 청천벽력이었을 그런 진단.
과연 그것을 증명이라도 하듯이 온갖 문제를 일으키고 다녔다. 아니, 정확하게는 다른 아이들이 내 행동에 경악하며 벌어지는 소란이었다.
나 역시 그런 아이들이 이해 가지 않았지만, 언제나 잘못한 것은 내 쪽이었다.
공감을 못하기에 벌어진 일이었다. 또래 아이와는 너무도 다른 행동이 문제였다.
자기방어적으로 자신만을 위하는 행동.
그것이 선천적인 것인지, 환경에서 기인한 후천적 요인인지는 알 수 없었다.
"그러면… 그러면 안 돼. 다른 사람을 사랑할 줄 알아야 해."
질질 우는 또래 아이 한 명이 너무 시끄러워 손등을 발로 밟아 버린 날의 저녁. 엄마가 나를 끌어안으며 했던 말이었다.
"사랑이 뭐야?"
"내가 아닌 다른 사람을 아끼고 위하는 마음이지."
처음으로 사랑이란 것에 관심을 가졌던 날이었다.
이해는 전혀 가지 않았지만, 어쨌든 학습에는 성공했다.
수많은 시행착오와 몇 번의 이사 끝에, 남들과 비슷한 표정과 감정을 느끼는 척 연기 정도는 할 수 있게 된 것이다.
문제를 일으키는 날이 줄었고 이사를 더 이상 가지 않아도 되었다.
꾸준한 학습의 효과이지 않았을까.
어쩌면 조금씩 나아지고 있는 것이었을지도 모르겠다.
굳게 닫혔던 마음의 문이 조금씩 열리고 타인의 감정이란 게 조금씩이나마 이해될 것도 같았으니까.
하지만.
"…사고였습니다."
하나 남은 가족마저 기어이 떠나 버렸을 때.
"술을 조금 마시긴 했지만, 취하진 않았었고… 아니, 비가 그렇게 오는데 갑자기 튀어나온 사람 잘못이지!"
엄마가 더 이상 집에 돌아오지 않게 된 그날.
조금씩 열려가던 마음은 언제 그랬냐는 듯 다시 닫혀 버렸다. 이전보다도 훨씬 단단하게 말이다.
엄마의 장례식은 나의 생일이었다.
물론 그것을 아는 이는 아무도 없었다.
"쯧쯧… 제 어미가 죽었는데 눈물 한 방울 흘리지 않는 것 좀 봐."
"소름 끼친다니까...."
"그거라지? 사이코패스?"
"자식 때문에 얼마나 고생을 했는데...."
그런 수군거림에도 별다른 생각은 들지 않았다.
그 말에 틀린 것은 없었기에.
눈물은 정말로 나오지 않았기에 저들의 말대로 나는 소름 끼치는 아이인 것이다.
그런 말은 실제로 꽤 자주 들었으니 딱히 상관없었다.
다만.
- 다른 사람을 위하고 사랑할 줄 알아야 해.
비로소 확실하게 깨달았을 뿐이다.
'…사랑이 뭔데.'
누구도 나를 사랑하지 않는다는 것을.
배운 대로라면 가족은 서로 아끼고 사랑해야 하는데 그것과 너무 다르지 않나.
아빠는 6살 때 떠나갔고 엄마 역시 결국에는 곁을 떠났으니.
나는 누구에게도 사랑받지 못했고 누구도 사랑하지 않았던 것이었다.
그러니 집에 틀어박혀 버린 것은 어쩌면 당연한 일이었다.
겉으로나마 친분을 유지하던 이들 역시 나의 본래 성향을 알고 나자 순식간에 떨어져 나갔다.
역시 나를 사랑하는 이는 아무도 없는 것이다.
아니, 사실 그게 뭔지도 잘 모른다.
누구와도 교류하지 않은 채.
누구의 관심도 받지 못한 채 방에 틀어박혔음에도 여전히 궁금했다.
사랑은 어떻게 하는 것이며 어떻게 받는 것일까.
그것은 어떤 느낌일까.
알 수 없기에, 겪어 본 적 없는 것이기에 그것에 대한 결핍은 커져만 갔고 어느새 사랑이란 삶의 목표와도 같아져 버린 것이다.
사랑이란 뭘까.
길을 걷다 보면 들려오는 것은 하나같이 사랑을 담은 노래였다.
사랑을 갈구하고, 사랑을 원망하고, 사랑을 그리워하는 노래.
창가에 앉아 밖을 바라보고 있노라면 보이는 것은 사랑을 속삭이는 사람들.
사랑이라는 이름하에 평생을 함께하는 가족과 연인들.
TV를 틀면 나오는 것은 언제나 사랑에 관한 이야기.
사랑 때문에 울고, 행복해하고, 즐거워하는 이야기.
사랑을 찾아 나온 남자와 여자.
사랑하면서 겪은 이야기. 재밌어하는 사람들.
온 세상이 사랑을 노래하고, 사랑을 이야기하며 사랑을 나눈다.
자신만 빼놓고 말이다.
그러니 궁금해하고 찾아 헤맬 수밖에 없는 것이었다.
* * *
실마리는 전혀 예상치 못한 곳에서 발견할 수 있었다.
벤타이얼 온라인.
목적 없는 삶의 유일한 일과.
이곳에서만큼은 소름 끼치는 아이가 아니었다.
전혀 다른 사람이었고 그러길 바라는 마음에서 지은 이름이었다.
그렇게 벤타이얼 세상에 빠져들었다.
다른 이들에게는 한낱 게임이었을지 모르겠으나 내게 이것은 또 다른 삶.
게임에서 나오면 보이는 것은 텅 비어 버린, 어두컴컴한 공간뿐이었으니 나의 모니터에서 불이 꺼지는 일은 없었다.
그러니 랭커에 오른 것도 퍽 자연스러운 결과인 것이다. 이것은 나의 자부심이었다.
또 다른 삶에서 이뤄낸 쾌거.
허나 아무리 밤낮으로 벤타이얼에 몰두해도 더 이상 위로 올라갈 수가 없었다.
랭킹 3위. 그것이 한계였다.
그 위의 두 녀석과의 격차가 좁혀지기는커녕 날이 갈수록 벌어지기만 했으니 의아한 것이다.
나는 그 누구보다 진심으로 임하고 있는데 저들은 어찌 나보다 더 높은 명성, 더 대단한 업적을 쌓는 것일까.
그런 호기심으로 시작되었고 그 끝에서 만날 수 있었다. 내가 몰입한 세상의 압도적인 1위, 지존천마.
뛰어넘고 싶었다. 게임에 임하는 마음가짐 자체가 다르다는 것을 증명하고 싶었다.
그렇기에 그를 따라다니고 그를 흉내 냈다.
그를 분석하고 약점을 찾아 뛰어넘고자 한 것이다.
그것이 나의 방식이었다.
그리고 단 며칠의 미행만으로도 알 수 있었다.
지존천마는 나보다 더한 놈이라는 것을.
"…뭐야. 왜 이렇게까지 하는 거야?"
이해하지 못할 장면은 셀 수도 없을 정도였으니.
NPC하나를 살리겠다고 그란디나 산맥의 중심부까지 들어가고, 별다른 보상도 없어 보이는 NPC의 부탁을 들어주기 위해 며칠 밤낮으로 이곳저곳을 돌아다닌다.
자신과는 반대되어도 너무나 반대되는 방식이었다.
보상이 적은 것은 피하고 가능성이 낮은 것 역시 피한다. 가장 높은 효율로 움직이는 것이 아이라이츠의 방식이지 않았나.
"제정신이 아닌 건 확실한데… 다른 비밀이 있나?"
저런 비효율의 극치가 압도적 1위의 비결이라는 건 말이 안 되니 그 비밀이 궁금해서라도 계속 따라다녀 보겠다 결심한 것이다.
그렇게 며칠은 몇 달이 되었고 몇 달이 쌓여 연 단위가 되었을 무렵. 나는 인정하고야 말았다.
지존천마는 나만큼이나, 혹은 나보다도 더 이 세계에 몰입하고 있다는 것을.
어디선가 들은 말이 생각난다.
사람은 자신과 반대되는 사람에게 끌린다는 말이었던가.
갖고 싶었다.
지존천마의 생각이. 저 사고방식이 궁금했다.
대체 어떤 생각을 가지고 저런 행동을 하는지, 그런 것을 추측하고 있노라면 왠지 모르게 신이 났다.
"이게… 사랑인가?"
아마 그렇지 않을까?
갖고 싶고, 무슨 생각을 하는지 궁금하고, 뛰어넘고 싶고.
뭐, 그런 게 사랑이라고 분명 들은 적 있었다.
그러니 이건 사랑이 맞을 터였다.
그 이후부터는 사랑이라는 이름 아래 줄곧 쫓아다녔다. 그를 따라 세상을 구하기 위해 움직이고 그의 행동을 따라 하며 다른 이들에게 호감을 쌓았다.
왜, 사랑하면 닮는다는 말이 있지 않은가.
그 말이 꼭 맞는 것 같다는 생각에 기분이 좋았었다.
결국 세상의 멸망을 막아 내지 못하고 서버가 종료된다는 말을 들었을 때, 그 어떤 것보다 아쉬웠던 것은 지존천마를 더 이상 보지 못한다는 것.
사실은 서버가 종료되고 나면 그냥 죽으려고 했다. 아무리 생각해 봐도 더 살 이유가 없었으니까.
하지만 보란 듯이 게임 속 세상으로 끌려와 버렸다. 꿈도 아니었다. 엄연한 현실이었다.
원래의 세상으로 나갈 수 있는 방법을 찾아봤지만, 그런 것 따위 없었다.
…오히려 좋았다.
또 다른 삶이 하나의 삶으로 합쳐졌을 뿐이다.
그렇다면 이제 목표는 하나. 지존천마를 찾는 것이다.
그것뿐이었기에 가장 효율적이고 빠르게 명성을 올리는 방법을 택했다. 범죄 집단을 이용해 악명을 쌓는 것.
그렇게 된다면 뒤로 갈수록 힘이 빠지고 제약이 상당하겠지만, 무슨 상관인가.
나는 하루라도 빨리 지존천마를 직접 만나서 사랑한다고 말하고 싶었다.
삶의 목표는 오직 사랑하고 사랑받기. 그것뿐이었으니까.
하지만… 어찌 된 영문인지 2년이 지나도록 지존천마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그로 의심된다는 인물들을 모두 찾아가 봤지만, 절대 지존천마가 아니었다. 하나같이 쭉정이들뿐이었다.
사랑했으니 알 수 있는 것이다.
그 압도적인 힘. 어느 누구보다 세상을 진중하게 바라보는 태도.
그들에게는 그런 것이 일절 보이지 않았으니.
그렇게 시간이 지나고 지존천마를 발견한 것은 아주 우연이었다.
도시 사우어.
그곳에 미완성된 마인을 풀 것이라는 소식을 전해 듣고 정보를 얻기 위해 타인의 눈으로 바라보고 있던 그곳에서.
- 말을 정정해야 할 거야 검성. 나는 광대가 아니라.
한 소녀를 위해 대륙 최강자 중 하나인 검성에게 맞서는 사내를 발견했을 때.
- 위대한 마법사지.
그 머리 위에서 작열하는 푸른 태양을 보았을 때.
- 이 세상에 남은 마지막 마법사.
전율하는 것이다. 확신하는 것이다.
어두운 방 한켠에서 미소 지으며 저도 모르게 중얼거리는 것이었다.
"찾았다. 지존천마."
84화 악당 (10)
- 우리는 황녀를 황제로 만들 거야.
내전이 시작됨과 동시에 시르베르트가 남긴 말이다.
지존천마를 제외한 네 명의 랭커.
그들의 목표는 가장 세력이 약한 황녀를 승리자로 만들어 시르베르트를 황제의 최측근으로 만드는 것이었다.
- 황녀의 곁에 믿을 만한 사람을 붙여 놨으니 가능성이 대폭 올랐을 테고.
시르베르트가 말한 사람과 도시 사우어에서 본 그 사람이 동일 인물이라는 것은 쉬이 추측할 수 있었다.
그 즉시 따로 계획을 만들었다.
1황자 군단을 장악해 황녀의 진영에 위기를 조장해 보자는 계획.
어려울 건 없었다.
매혹된 한 명을 풀어 놓으면 그를 통해 전염병처럼 번져 나가는 것이 매혹의 무서움이었으니.
몸소 나서 정보까지 차단하고 계획을 실행한 것이다.
나도 안다.
이건 결코 지존천마가 좋아할 만한 짓이 아니라는 것을.
하지만 어쩌겠나.
그를 찾아 무려 2년을 헤맸다.
의미 없는 삶의 유일한 목표였다.
내게는 확실하게 해야 할 의무가 있는 것이다.
계획은 완벽했다.
황녀의 군단은 철저하게 궁지로 몰렸고 빠져나올 길은 오직 정면 돌파밖에 없었으니.
감춰 놓은 힘이 있다면 드러내 보일 수밖에 없는 것이었다.
그것도 어중간한 힘으로는 통하지도 않을 압도적인 힘.
가령 시르베르트가 아무런 대비 없이 이 상황에 맞닥트렸다 생각해 보자.
녀석의 염동은 분명 훌륭한 스킬이기는 했으나 결코 혼자서 전쟁을 승리로 이끌 정도는 되지 않는다.
다수의 병력에게는 효과적이겠지만, 군단의 정예를 모조리 뚫고 황자의 목을 취하기에는 모자라다는 말이다.
시르베르트가 그 정도이니 나머지 랭커들은 말할 필요도 없을 터.
언제나 나의 위에 이름을 올려놓던 압도적인 두 명. 그 두 사람 정도나 되어야 가능하다는 말이었다.
그중 2위였던 놈의 위치는 알고 있으니 남은 것은 한 명. 이 위기를 극복할 수 있는 것은 오직 지존천마뿐.
먹구름이 몰려온다.
콰아아앙-!
공기가 터져 나가는 듯한 우레. 눈을 뒤덮어 버리는 새하얀 섬광.
수십, 수백, 도대체 몇 번이 중첩되었는지 알 수 없는 벼락의 세례.
- 황자의 목을 베어라.
첫 벼락 이후 황자의 목이 떨어지기까지 걸린 시간은 몇 분이 채 되지 않았으니.
"아아...."
나는 전율할 수밖에 없었다.
* * *
"사랑해. 아이라이츠."
그러한 과정 끝에 얻어낸 과실은 얼마나 달콤한 것인가.
그 이유야 어찌됐건 지존천마가, 히오 파블렌코가 곁에서 내게 사랑을 속삭이고 있지 않은가.
안긴 품은 따스했고 속삭이는 사랑은 너무도 부드럽다.
평생 파묻혀 있고 싶을 만큼 말이다.
"응! 나도 사랑해!"
너울너울 잔잔한 파도에 휩쓸려 가듯 흘러가는 기억의 흐름도 이제 얼마 남지 않았음이 느껴진다.
"사랑해."
그만큼이나 강렬했던 기억.
행복했다.
비로소 사랑이란 것을 알게 된 것 같았기에.
왠지 모르게… 조금 익숙한 느낌이기도 하지만, 무엇이 중요할까.
평생을 사랑받지 못했다. 사랑을 해 본 적이 없었다.
사랑이란 내게 존재하지 않았던 결핍이었다.
그렇기에 갈구했고 충족을 위해 헤맨 것이다. 삶의 목표가 된 것이었다.
평생의 결핍이 충족되는 그 감격스러운 기분을 어찌 설명할 수 있을까.
하지만 그것은 마치 기분 좋은 꿈과도 같아서 정신 차려 보면 어느새 깨어날 때가 되어 버린다.
"찾았어."
회색 성 첨탑의 지붕 위에 꽂힌 아티팩트를 기어이 발견하고야 만 것이었다.
문득 치밀어 오르는 것은 불안함.
이 행복이, 이 충족감이 다시는 영영 돌아오지 않을 것이라는 직감.
본능적으로 알 수 있었다.
아주 오랫동안 지켜봤기에 알 수밖에 없는 것이다.
내게 사랑을 알려 준, 그것을 겪게 해 준 히오가 여길 벗어나면 과연 나를 사랑해 줄까.
내 이름을 부르며 사랑한다고 다시 속삭여 주는 일이 있을까. 꼭 안아 주고 손을 잡고 거니는 일이 과연 있을 것인가.
심장이 덜컥 내려앉는 것은, 그럴 리가 없다는 것을 너무도 잘 아는 까닭이었다.
그는 주변의 모든 이를 위하면서도 정작 자신의 곁은 내어 주지 않는다.
아무리 사소한 부탁일지라도, 작은 약속일지라도 외면하지 않고 온 힘을 다하기에 한 사람만을 바라볼 수가 없는 것이다.
그러니.
"히오 파블렌코."
어쩔 수 없지 않나.
"내 곁으로 와."
이 순간은 내가 평생을 그려 오던 순간인 것을. 도저히 놓고 싶지가 않은 것을.
"내게 사랑한다고 말해."
사랑이란 것이 이렇게나 달콤한 줄 알았다면.
혼자 하는 사랑이 이렇게나 마음 아픈 것인 줄 알고 있었다면 시작도 하지 않았을 것을.
내게 사랑을 속삭이는 히오 파블렌코의 목소리. 눈빛. 온기.
함께 손을 잡고 걷던 거리는 안개 속이었지만, 상관없었다.
"사랑해. 아이라이츠."
세상에 이렇게나 행복한 감정이 있었던가.
사람들은 모두가 이런 행복 속에서 살고 있었다는 말인가.
이건 너무 불공평하잖아.
나는 평생에 처음으로 겪는 것인데.
그렇기에 결코 벗어나고 싶지 않았던 것인데.
그들은 어찌 그리 쉽게 사랑하고 헤어지고 다시 사랑하는 것일까.
나는… 정말로 처음 겪는....
…처음이 맞나?
모르겠다.
어쨌든 확실한 것은 이렇게 커다란 충족감은 헤어나오기 힘들다는 사실이다.
"사랑해. 사랑해."
그러한 행복은 삼 일 정도 이어졌다.
그리고 삼 일 간의 사랑에 대한 대가는, 목숨이었다.
* * *
"이제 너랑 그 마법사도 적극적으로 전투에 나서라."
아타올프의 말.
그에 하찮은 저항을 해 보지만.
"떠나기 전에, 히오 파블렌코는 내가 반드시 죽이도록 하지."
애초에 이길 수 없는 싸움이었다.
각오는 했다만, 정해진 비극이었다.
매혹에 걸린 히오를 앞세워 전쟁에 나갈 수는 없었으니.
그랬다가는 정말로 영영 미움받을 것이 분명했으니.
사랑이란, 내게 허락된 것이 아니었음에도 그것을 탐했던 대가.
부모에게도 버려진 주제에, 소름 끼치는 사람인 주제에 사랑을 하고자 했던 욕심.
그 과욕에 대한 대가를 치를 때가 온 것이었다.
그대로 뒤돌아 히오의 품에 안긴다.
그를 옥죄고 있는 매혹을 풀어야 하리라.
그는 그 즉시 아티팩트를 향해 갈 테고 자신은 아타올프의 손에 목숨을 잃겠지.
그 정도를 예상하는 것쯤이야. 별로 어려운 것도 아니었다.
죽는 것 따위 무서운 것도 아니었다.
"진짜 못되게 말한다. 그치 히오."
"…그러게."
품에 안긴 채 말을 건넸는데 뭔가 이상하다.
히오를 끌어안은 손에 힘이 들어간다.
"역시 흑아의 수장. 최악의 악당다운 협박이지 않아? 어떻게 우리 사이를 갈라놓으려고 할 수가 있지?"
"그러게."
심장이 철렁 내려앉는다.
대답하는 그 말이 따스하지 않았기에. 더는 달콤하지 않았기에 나도 모르게 흠칫 몸이 굳어 버렸다.
매혹을 해제하려 했건만....
그건 이미 풀려 있는 것이었다.
"나… 사랑해?"
이 마지막 질문은 발악이었다.
불가능한 것을 갈구하는 추한 발악.
그리고 그에 돌아온 대답은.
"응. 사랑하지."
더 이상 달콤하지 않았다.
따스하지도 않았고 부드럽지도 않았다.
왠지 눈물이 날 것만 같은 기분에 고개를 들 수가 없었다.
그 상태 그대로 히오에게 묻는 물음.
"왜 바로 움직이지 않고 가만히 있었어?"
그런 물음에 돌아온 것은 걱정이었다.
"너 죽을 거야."
히오 파블렌코는 그런 사람이었다.
이렇게나 못된 짓을 해도 걱정해 주는 따뜻한 사람.
"있잖아."
그렇기에 결코 가질 수 없는 사람.
"내가 하는 거, 사랑 맞지?"
그렇게 묻고는 곧바로 후회했다.
혹시 아니라고 할까봐.
어떤 대답이 돌아올지 가늠할 수가 없었기에 두려웠다.
죽는 것 따위보다 그것이 훨씬 두려운 것이다.
"아니야. 대답 안 해도 돼."
그렇기에 품에서 벗어나 몸을 돌렸다.
스스로에게 하는 다짐을 마치 확신처럼 꾸미며 내뱉는 것이었다.
"이거 사랑 맞아."
콰아앙-!
그 직후 들리는 벼락의 소리. 히오가 어디로 향할지는 뻔한 것이기에 시간을 벌어야 한다.
「스킬 - '매혹'이 발동됩니다.」
가진 바 최대한의 힘으로 아타올프를 향해 스킬을 시전했다. 물론, 통하지 않으리라는 것쯤은 알고 있다.
"결국 멍청한 선택을 하는구나. 아이라이츠."
필요한 것은 아주 찰나의 시간.
아타올프의 시선이 나를 향하고 그 검은 안개가 내 목숨을 취할 정도의.
그 정도의 아주 짧은 시간이 필요했으니.
콰앙!
순식간에 몸이 꿰뚫리고 벽에 처박혔으며 정신이 아득해진다.
죽음이었다.
* * *
- 울지 마라.
문득 들려오는 목소리.
- 너무 서글프게 울고 있지 않나. 울지 마라.
정체가 무엇인지는 모르겠지만, 울고 있다니. 내게 하는 말인가?
- 그래. 아이라이츠.
그 말이 우습다.
생전 울어 본 적도 없는 내게 울지 마라니.
내가 감정이 없는, 소름 끼치는 사람인 것을 모르는 모양이다.
- 그렇다면 내가 본 것은 무엇이냐.
뭘 보고 하는 말인지는 모르겠는데 헛소리고, 헛수고다.
- 외면하지 마라. 아이라이츠. 죽을 듯이 아프고 힘들고 외로웠겠지만, 그래도 외면하지 마라.
뭘… 외면했단 말인지.
도통 이해할 수가 없다.
이해할 수는 없는데 이상하게 머리가 어지럽다.
- 스스로를 학대하지 마라. 이제 괜찮으니까. 다 끝났으니까. 지독한 자기혐오는 이제 멈춰도 된다.
그 말이 어쩐지 따뜻해서 어지럽던 머릿속이 차분하게 가라앉는 느낌이었다.
- 눈을 크게 뜨고, 외면하지 말고, 똑바로 봐. 네가 건너뛰었던 기억을.
영혼을 구성하는 가장 밑바닥.
최초의 기억부터 다시금 거슬러 올라간다. 찬찬히 훑어본다.
다섯 살.
엄마를 때리는 아빠의 바짓가랑이를 붙잡고, 나는 울고 있었다.
그러다 발에 차여 날아갔는데 엄마는 미친 듯이 달려와 그런 나를 감쌌다.
그 품에 안긴 채 나는 하염없이 울고 있었다.
…이상하다. 처음 보는 기억이었다. 겪은 적 없는 것이었다.
하지만 분명 나의 기억이었다.
열여덞.
엄마의 장례식에서 멍하니 앉아 있는데 사람들이 수군거린다.
소름 끼치는 아이. 눈물 한 방울 흘리지 않는 아이. 부모를 잡아먹은 아이.
모두 맞는 말이라 생각했다. 나는 그런 아이였으니까.
그렇게 밤이 찾아왔다.
나는 텅 빈 장례식장을 멍하니 둘러보다 화장실로 향한다.
화장실 문을 잠그고 변기 뚜껑을 닫고 그 위에 쪼그리고 앉는다.
그렇게 펑펑 울기 시작했다.
숨이 넘어갈 듯 꺽꺽대며 울다 기절하듯 쓰러지고 일어나면 다시 울었다.
밤새도록 울고 나면 아침이 찾아온다.
나는 아무렇지도 않게 화장실 문을 열고 나와 다시 엄마의 사진 앞에 앉아 멍하니 천장을 바라본다.
그러고 있노라면 다시 사람들이 찾아와 수군거리는 것이다.
소름 끼치는 아이. 사이코패스. 감정이 없는 아이.
틀린 말은 없다고 생각했다. 정말 나는 눈물 한 방울 나오지 않았으니까 말이다.
…지금 보고 있는 기억과는 너무도 다른 생각이었다.
장례식이 끝나고 텅 빈 집에 혼자 돌아왔다.
어두컴컴한 식탁 위에는 케이크가 포장된 채 놓여 있었다.
- 사랑하는 우리 딸.
그렇게 시작하는 편지와 함께 말이다.
그것을 읽는 나는, 또 울고 있었다.
한 글자도 빼놓지 않고 가장 아래까지 꼼꼼히 읽은 다음, 다시 맨 위로 올라와 처음부터 읽어 나갔다.
눈물은 끝도 모르고 흐르는 채였다.
열아홉.
벤타이얼이란 게임을 알게 됐다. 자연스레 빠져들었다.
자는 시간 외에는 오로지 모니터 화면만 들여다봤다.
아니, 사실 잠도 컴퓨터 앞에서 자는 시간이 더 많았다.
나는 그것이 게임이 재밌어서인 줄로만 알았다. 집에서는 할 게 없으니, 어차피 어두컴컴할 뿐이니 게임이라도 했던 것으로 기억하고 있었다.
다시 한 번 자세히 보니 그게 아니었다.
무의식적으로 방을 벗어나려 하지 않았던 것이다.
식탁에는 여전히 케이크가 포장조차 뜯지 않은 채로 놓여 있다. 그 위에 올려진 편지 역시 마찬가지였다.
집에는 모든 흔적이 고스란히 남아 있었다.
엄마가 주방에서 요리를 준비하던 흔적. 엄마의 옷, 화장품, 슬리퍼.
방을 한 발자국만 벗어나면 그 모든 흔적을 마주해야 했기에. 도무지 그것을 치울 수가 없었기에.
무의식적으로 외면한 것이다. 벤타이얼에 빠져들 수밖에 없도록 스스로를 다그친 것이었다.
벤타이얼을 하지 않았다면 글쎄… 그냥 죽지 않았을까.
그렇게 시간이 흘러 마지막, 죽기 직전의 기억.
"있잖아."
히오를 꽉 끌어안고 있다가 고개를 들어 간신히 묻는 물음.
목소리는 하염없이 떨려 오고 있다.
"내가 하는 거, 사랑 맞지?"
눈에는 눈물이 가득 고인 채였다.
그것을 마주하는 히오의 눈동자는 당황한 듯 크게 흔들리고 있었다.
히오는 대답을 하지 않은 게 아니었다. 대답하지 못한 것이었다.
어쩌면 그것을 알았기에 본능적으로 몸을 돌린 것일지도 모르겠다.
히오가 마음 약해지기 전에, 어서 네가 해야 할 일을 하길 바라는 마음으로. 그것을 반드시 이루길 바라는 마음으로.
…그래. 언젠가 엄마가 내게 해 줬던 말처럼.
사랑이란, 내가 아닌 타인을 위하는 마음.
그것을 본능적으로 깨달았기에 확신을 담아 말한 것이었다.
결코 꾸며낸 말이 아니었다.
"이거 사랑 맞아."
…나는, 사실 사랑을 알고 있었다. 충분하다 못해 넘쳐 날 정도로 겪어 본 것이었다.
너무 과분한 사랑을 받았기에, 그것을 잃었다는 사실을 받아들이지 못한 것이다.
- 사랑해. 우리 딸. 세상 무엇보다도 사랑해.
어쩌면 내가 사랑을 찾아 헤맸던 것은 그것을 다시 한 번이라도 느껴보고 싶어서.
아니, 그냥 엄마가 보고 싶었던 것뿐일지도 모르겠다.
- 나도 사랑해. 엄마.
이 말을 하지 못한 것이 사무치는 한이 되어, 그토록 사랑을 부르짖은 것일지도 모르겠다.
* * *
"세상에… 이게 무슨...!"
"단장님!"
"마헬 경! 괜찮으십니까!"
로열 나이츠 데이먼과 맬리사가 가장 먼저 회색성의 첨탑에 도달하고 그 뒤로 무수히 많은 이들이 허겁지겁 올라온다.
성의 주위에는 모든 제국군이 모여들고 있는 상황이었다.
아타올프와 비탈리아누스가 나란히 쓰러져 있다.
한쪽 구석에는 처음 보는 여인이 잔해에 파묻혀 죽어 있었다.
"사제! 사제를 빨리 데려와!"
"단장님! 정신을 좀...!"
"대체 무슨 일이...."
첨탑에 오른 모두가 비탈리아누스의 곁으로 모여든다.
온힘을 다해 걱정하며 그를 치료하기 위해 황급히 움직인다.
그 누구도.
단 한 명도 검에 심장이 꿰뚫린 사내나, 잔해에 파묻힌 여인을 신경 쓰는 이가 없다.
"길을 터라! 검성께서 위독하시다!"
"길을 비켜라!"
그러니 히오 파블렌코는 혼이 빠져나간 두 구의 시신을 가만히 내려다본다.
대륙 최악의 범죄자. 흑아의 수장이자 희대의 악당 아타올프.
오로지 자신의 이익을 위해 수많은 사람을 죽음으로 몰고 간 소시오패스, 아이라이츠.
머지않아 두 악당의 죽음이 온 세상에 공표될 것이다.
그 소식에 사람들은 환호하고 기뻐하며 열광할 터였다.
드디어 죽었다고. 잘 죽었다고.
노래를 부르고 축제를 벌이는 곳도 있을 것이다.
악당의 말로란, 대개 그런 것이니.
악당의 죽음이란, 그게 당연한 것이었으니 말이다.
어쩌면 그 많은 사람들 중 한 명 쯤은 이리 물을 수도 있겠다.
- 그런데 그들은 어쩌다 악당이 된 걸까?
그럼 상대는 아주 잠시 고민하다 이리 답할 테지.
- 글쎄? 상관없지 않나? 어차피 나쁜 놈들이었을 게 뻔해.
그러니.
"수호 기사님… 괜찮으십니까?"
그러니까 말이다.
"괜찮네."
나 하나쯤은 너희의 시작을 기억해도 되지 않겠는가.
나 하나쯤은 너희를 가여워해도 되지 않겠는가.
"대체… 무슨 일이 있었던 겁니까?"
나만큼은 너희의 죽음에 슬퍼해도 되지 않겠느냔 말이다.
"그냥… 뭐, 별일 없었네."
악당의 흔한 결말이었다.
[히든 특성 : 폭력은 안 돼! (인내력 : 914 / 1000)]
85화 회색 성 (1)
본래 용병들이란, 조금 나쁘게 이야기 하자면 칼 든 강도나 다름이 없었다.
힘없는 일반 백성이 대부분인 세상 속에서 칼을 들고 그것을 업으로 삼아 살고 있지 않나.
양떼 사이에 도사린 늑대.
치안이 좋은 도시에서 조금만 벗어난다면, 깽판치고 있는 용병을 심심치 않게 목격할 수 있던 것이다.
하지만 그것도 이제는 옛말이 되었다.
정신 차린 모험가 길드의 주도하에 체계가 잡혔고 상벌이 확실해진 덕이었다.
모험가와 용병을 대표한다는 명목하에 야심차게 발족한 길드였지만, 사실상 유명무실했던 길드. 그랬던 길드에서 전 대륙에 영향력을 행사하는 하나의 거대한 길드가 되어 버린 것.
모든 건 모험가 길드장이 바뀌고 시작된 일이었다.
"세상 좋아졌다니까. 나 때는 어비스 던전 서로 클리어하겠다고 싸우고 난리도 아니었는데."
크리톤은 모험가 길드 본부의 용병이다.
'금' 등급의 최상위 용병.
그 정체는 빙의자였다.
"그땐 그게 콘텐츠인줄 알았지. 한정된 보상, 제한된 시간. 서로 얻기 위해 물고 뜯고 싸우라는 의미의 콘텐츠."
그와 나란히 걷고 있는 프랑코 또한 그와 같은 금 등급의 용병이다.
물론 그 역시 빙의자였다.
"지금은 공략은커녕 쥐새끼 한 마리 보이지 않네."
"하긴 누가 오고 싶겠냐. 이 끔찍한 곳을."
두 사람이 있는 곳은 이름 모를 산의 중턱. 그리 크지 않은 자그마한 동산의 중턱에서 멈춰서며 그 앞을 바라본다.
허공이 세로로 쩍 갈라진 채 벌어져 있었고 그 사이를 짙은 어둠이 일렁이고 있는 괴이한 공간.
이곳이 바로 어비스의 입구였다.
"그러니까 그 끔찍한 괴물들이 이 안에 바글거리는데 목숨 귀한 줄 알면 얼씬도 안 하는 게 정상이지."
"그래도 아직은 초반이니까 쉽잖아."
이 동산 자체는 길드 본부에서 나온 이들로 철저하게 통제되고 있었다.
"소식 들어 보니 이제 곧 흑아도 무너질 것 같던데?"
"그 뭐냐, 지존천마가 직접 나섰다잖아. 헛소문인지는 모르겠다만, 어쨌든 제국이 전쟁을 선포했으니 완전한 몰락은 어렵더라도 크게 타격을 받겠지."
"그럼 당분간 이 근처도 조용하겠네. 흑아에 붙어먹은 놈들 땜에 계속 짜증났었잖아."
"그랬지. 하여간 미친놈들 같으니라고."
그런 대화를 나누며 어비스의 어둠을 향해 발을 성큼 내딛는 두 사람.
그들에게는 이제 제법 익숙해진 일상인 까닭이었다.
훅- 순식간에 암전되는 시야. 무거워진 공기. 마치 물속에 들어온 듯 가슴이 갑갑해진 느낌.
어비스에 들어온 것이다.
"씁… 찝찝하다니까. 빨리 공략하고 가자고."
현재 공략해야 하는 층은 지하 10층. 아직 초반 단계였다.
반면에 빙의자들은 3년 전부터 들어와 강해졌지 않나. 그것으로도 모자라 이미 여러 빙의자들의 기억을 토대로 공략본까지 만들어진 상황이 아니던가.
그러니 지하 10층 정도야, 크리톤과 프랑코 두 사람이면 충분한 것이다.
"그런데 이번에는 진짜 지존천마가 나타났대?"
"그렇다는 것 같은데… 확실하진 않아."
"여태 가만히 있다가 이제 슬슬 활동하려는 건가."
"아무리 지존천마라 해도 흑아는 거슬렸겠지. 흑아만 없어져도 앞으로 일이 훨씬 수월해지잖아."
"그건 그래."
눈앞에 놓인 조각상에 손을 올리자 나타나는 메시지.
「갈 수 있는 지역은 총 열 곳 입니다.」
「목록」
「심연의 지하 - 1층」
「심연의 지하 - 2층」
「심연의 지하 - 3층」
....
「심연의 지하 - 10층」
망설임 없이 지하 10층을 선택한다.
「심연의 지하 - 10층을 선택하였습니다.」
「포털이 가동됩니다.」
빨려 들어가듯 쑥 가라앉는 정신. 찰나간 정신을 잃었다 차려 보면 어느새 어비스의 지하 10층에 도착해 있는 것이다.
"단일 몬스터니 금방 마무리하고 가자."
지하 10층을 담당하고 있는 것은 단일 어비스 몬스터. 속칭 보스 몬스터라 불리는 놈이다.
일반 어비스 몬스터에 비한다면 강한 것은 사실이지만, 그래봤자 초반 몬스터.
문제될 건 없었다.
녀석의 특성과 스킬까지 고려해서 온 것이 크리톤과 프랑코, 두 사람이었으니 말이다.
"…이게 원래 이렇게 길었나?"
이상함을 느낀 것은 10층에 도착하고 얼마 걷지 않았을 때였다.
"단일층이면 바로 나왔었지 않아?"
오직 한 마리의 몬스터만 잡으면 공략이 끝나는 단일층. 넓은 공간에 덩그러니 몬스터 한 마리만이 있기에 무력만 충분하다면 금방 공략할 수 있는 층이고 그렇기에 크리톤이 금방 마무리하자고 말한 것이었다.
허나 제법 걸었음에도 몬스터의 기척조차 느껴지지 않았다.
저층의 몬스터 특징 중 하나가 과시라도 하듯이 자신의 존재감을 드러내는 것임에도 말이다.
"돌아가자."
크리톤과 프랑코는 만용을 부리지 않았다.
조금의 이상을 발견한 즉시 그 자리에서 더 나아가지 않고 돌아가는 것을 택했다.
그것은 방침이기도 했지만, 본능적으로 느낀 불길함.
"그러지. 돌아가서 보고하자고. 느낌이 좋지 않아."
그렇게 두 사람은 곧바로 몸을 돌렸으나.
"입구가...."
"…망했군."
입구는 이미 씻은 듯 사라진 채였다.
그리 길게 걸은 것이 아님에도 심연에 집어삼켜지기라도 한 듯이 어둠에 휩싸여 찾아볼 수가 없는 것이었다.
"이거 혹시… 그거 아닌가?"
"그거?"
믿기 힘들다는 듯 입구 쪽을 바라보며 나지막이 말하는 프랑코.
"미궁 말이야."
"…그게 말이 되나?"
크리톤은 고개를 홱 돌려 프랑코를 쳐다본다.
잔뜩 찌푸려진 얼굴. 그럴 리 없다고 과하게 단언하는 말투.
하지만 스멀스멀 피어오르는 불안함.
"그건 50층 이상에서나 나오는 어비스잖아."
못해도 일 년 뒤에나 등장할 어비스의 패턴이 나와 버린 것이다.
초반 단계여야 할 어비스의 난이도가 이상하게 꼬인 것.
예정된 미래가 다시 한 번 어그러진 것이었다.
* * *
「업적 달성! - 바알 숲의 안식.」
「업적 달성으로 47포인트를 획득합니다.」
제국군의 수뇌부는 빠르게 철수를 결정했다. 뒷정리를 위한 병력만을 남겨 놓고 이오스를 통해 빠르게 돌아가기로 한 것이다.
이유라면 첫째로 비탈리아누스의 상태가 위독하다는 것.
둘째로 안개 속에서의 전투가 길어지며 병사들의 심적, 육체적 피로가 상상 이상으로 쌓였다는 것이었다.
"나는 할 일이 남아 있으니 나중에 돌아가지."
히오의 말에 고개를 끄덕인 것은 로열 나이츠 소속, 데이먼이었다.
"그리 전달하겠습니다."
고개를 꾸벅 숙이고는 멀어지는 데이먼.
회색 성의 수색까지 마치고 성의 창고에 가득했던 재화와 아티팩트는 당연하게도 몰수되었다.
그 외에도 성의 이곳저곳을 철저하게 조사하고 이제 회색 성에서 철수하려는 것이다.
물론 이곳 지하에 있을 마법사의 집은 누구도 발견하지 못했지만.
"생각보다 아티팩트를 많이 건지지는 못 했어."
회색 성에 다시 홀로 남은 히오가 중얼거렸다.
제국군이 아티팩트를 회수하기 전에 이미 히오의 손을 쓴 것이다.
- 어찌 보면 당연한 거지. 긴 세월을 관리 받지 못한 채 방치된 아티팩트가 대부분이니… 그리고 자네 수준에 도움될 만한 아티팩트가 그리 흔한 것도 아니야.
"그것도 그래."
마법적 경지는 둘째 치더라도 최상위 스킬을 무려 세 개나 보유했지 않은가.
그런 스킬을 펑펑 쓰지 않는 이상 마력이 크게 모자란 것도 아니다.
얻은 명성 포인트를 꾸준히 마력에 투자하고 있었으니.
히오의 눈에 찰 만한 아티팩트가 많지 않다는 말이었다.
"그러니까 지금 이것들이 그만큼 대단한 아티팩트라는 말이지."
그런 만큼 제국군의 손에 들어가기 전, 히오가 슬쩍한 아티팩트가 대단한 것들이란 의미였다.
- 그런데 어차피 자네가 말하면 황제가 기꺼이 내어 줄 듯한데… 굳이 이렇게 몰래 슬쩍할 필요가 있나?
"…낭만 없는 유령 같으니라고."
푸르넬의 정당한 의견을 일축한 다음, 첫 번째 아티팩트를 착용했다.
「화염 수호자의 팔찌 (유니크)」
「화염 보주를 수호하던 일족의 팔찌. 그들의 멸족과 함께 화염 보주의 힘이 팔찌에 새겨졌다.」
「화염 속성 마법 시전 속도 +10%」
「화염 속성 마법 위력 +7%」
「착용자의 위험을 스스로 판단하고 보호합니다.」
손목에서부터 시작해 온몸을 감싸는 화기(火氣). 무언가를 지키는 따스한 느낌이 몸에 차오르고 화염의 기운이 주변을 배회하며 붉은색의 오라가 은은하게 비춰진다.
- 화염의 보주, 그것을 신성시하며 수호하는 부족이 있다고 들은 적이 있네만, 멸족했었군. 나름 신성시하던 물건이니 효과는 확실할 게야.
"그래 보여서 골랐지. 아무래도 방어 스킬이 부족하니까 말이야."
- 그렇긴 해. 자네는 공격 수단에 비해 방어 수단은 전무하니까. 여태 어찌 살아 남았나 신기할 정도라네.
"어쩌다 보니...."
게임이 아닌 현실이다.
제 목숨 귀한 줄 알면 방어 수단을 먼저 마련하기 마련.
한데 어쩌다 보니 공격 수단만 잔뜩 진화해 버린 것이다.
"이번 진화는 보조 수단으로 진화해야겠지."
거의 목표치에 도달한 인내력.
이제 공격 스킬을 늘리기보다는 다른 보조 마법을 진화시켜야 할 테다.
"어쨌든 메인은 이건데...."
주머니를 뒤적이자 잡히는 두 번째 아티팩트.
앞선 화염 수호자의 팔찌도 충분히 훌륭한 아티팩트지만, 이것에 비교할 수는 없을 정도.
- 그게… 여기 있을 줄은 몰랐네.
푸르넬의 감탄과 함께 등장한 아티팩트는 호박빛의 랜턴이었다.
「영혼 수확자의 랜턴 (에픽)」
「인외의 물건.」
「영혼 흡수 : 영혼을 흡수하여 능력치를 영구히 올릴 수 있습니다. 혼의 격에 따라 상승폭이 달라집니다.」
「영혼 보관 : 손상 없이 혼을 보관할 수 있습니다. 랜턴에 오랜 시간 보관되어 있던 영혼은 사용자가 조종할 수 있습니다.」
「영혼 회복 : 보관된 영혼을 소모하여 영력을 회복하거나 생명력을 회복할 수 있습니다.」
「영혼 추출 : 혼에서 가장 순수한 어둠을 추출하여 어둠 속성 마력으로 전환할 수 있습니다. 이는 모든 흑마법의 근원인 기운입니다.」
무려 에픽 등급의 아이템.
효과도 효과지만 그보다 놀라운 것은 푸르넬의 설명이었다.
- 나의 시대보다도 훨씬 이전에 존재했던 물건일세. 모든 네크로맨서와 흑마법의 시조라 불리는 대마도사의 상징. 크뢰츠발트의 랜턴이라고 불렀었지. 그런 물건이 이런 작은 성에 있었다니....
영혼 수확자의 랜턴, 푸르넬이 말하기를 모든 네크로맨서와 흑마법의 시조인 크뢰츠발트의 신물 중 하나.
이것을 발견한 직후부터 줄곧 의심하던 것이 있다.
- 어쩌면 이곳은 마법사의 집이 아니라.
흑아가 대륙 전역을 울리는 공포의 상징이라 하여도 어찌 유독 이곳에만 이러한 아티팩트가 모여 있을까.
바알 숲 전역을 뒤덮는, 인지와 감각에 혼란을 주는 안개의 아티팩트부터 영혼 수확자의 랜턴까지.
어쩌면 이곳은.
- 흑마법사의 던전이 아니겠나.
현재는 물론, 게임 속에서조차 그 누구도 알지 못했던 숨겨진 던전.
- 그것도 과거, 현재, 미래를 통틀어 다신 없을 위대한 흑마법사이자 네크로맨서, 대마도사 크뢰츠발트의 던전 말일세.
뭐가 됐든 확인해 보면 될 터였다.
"영혼 수확자라...."
호박빛의 랜턴을 눈높이까지 들어 올려 안쪽을 들여다보면, 자그마해진 혼 하나가 오직 히오의 눈에만 비친다.
랜턴의 능력 중 하나인 영혼 보관.
그것을 활용해 그 속에 고이 잠들어 있는 영혼.
"이 녀석을 어찌해야 할지 그 해답이 있으면 좋으련만."
울다가 지친 것처럼 잠들어 있는 혼.
어찌나 미련이 많은지 꿈쩍도 않고 있던 그것은 아이라이츠의 영혼이었다.
- 내버려두고 오자니까. 어차피 시간 지나면 자연스레 사라질 혼이었어. 언데드로 만들어 봐야 애매한 스펙터나 밴시 정도가 한계였을 테고.
그 말대로 아이라이츠의 혼은 기억의 혼란에서 벗어난 즉시 히오의 곁을 맴돌기 시작했다.
그렇다고 언데드로 만들 수도 없는 것이 테오르도의 혼처럼 고귀하지도, 아타올프의 혼처럼 격이 뛰어나게 높은 것도 아니라 그리 대단한 언데드가 될 수 없는 까닭이었다.
물론 아이라이츠의 영혼 정도면 격이 낮은 건 아니었으나 히오의 네크로맨시 경지가 낮기에 벌어진 일이었다.
어쨌든 방법은 없었기에 자연스레 혼이 승천할 때까지 놔두려 했는데 그런 중에 영혼 수확자의 랜턴을 발견했고, 아이라이츠의 동의하에 혼을 보관해 둔 것이었다.
뭐, 동의했는지 확실하진 않지만, 느낌이 그렇다는 말이다. 느낌이.
- 쯧쯧… 쓸데없이 정이 많다니까. 자네는.
"뭐… 언젠가 도움 될 때가 있겠지. 일단 성의 지하로 내려가 보자고."
회색 성의 지하.
이곳이 수많은 마법사의 집 중 하나였을 뿐인지.
아니면 푸르넬의 말처럼 대단한 흑마법사의 던전일지.
답을 확인하기 위해 입구를 향해 움직였다.
86화 회색 성 (2)
지하로 내려가는 입구는 여느 마법사의 집과 다르지 않았다.
"던전은 아닌가?"
그렇기에 그냥 마법사의 집인가… 생각했지만, 지하 1층에 내려서자마자 평범한 마법사의 집이 아님을 바로 알 수 있었다.
- 넓군.
여태 본 그 어떤 마법사의 집보다 넓은 지하. 얼룩진 바닥. 퀴퀴한 냄새.
그리고 한쪽 구석에 쌓인 뼈무덤까지.
"일단 흑마법사나 네크로맨서의 집인 건 확실해 보이네."
- 네크로맨서의 지부는 아니야. 그렇다면 내가 모를 리가 없으니.
"네가 모르는 지부가 있을 수도 있지 않을까?"
- 절대 아니네.
"…확고하구만."
푸르넬이 단언했지만, 2층으로 내려간 후에 의심은 더욱 짙어졌다.
누가 봐도 음침해 보이는 공간이었다. 널브러지고 부식된 종이 뭉치. 깨진 시약병과 정체 모를 액체에 보관되어 있는 여러 생물의 신체까지.
일단 흑마법 쪽 마법사가 살았던 곳은 확실하다.
그리고 지나치게 넓은 감이 있지만, 어쨌든 마법사의 집과 구조가 똑같지 않나.
계단의 입구를 여는 방식이라든가, 그것을 찾는 방식이라든가.
어쨌든 생각했던 던전은 아니다. 몬스터도 없고 함정 역시 없으니 던전을 목적으로 제작된 환경이 아닌 것이다.
그렇다면 뭐, 마법사의 집 말고 없지 않은가.
- 아니야.... 내가 모르는 네크로맨서 지부가 있을리가....
그래도 푸르넬이 끝까지 현실을 부정하고 있으니 면박 주기도 애매했다.
모르는 지부가 하나쯤은 있을 수도 있지. 왜 저렇게까지 단언하는 건지.
"그나저나 뭘 연구하고 있었던 걸까. 알아볼 수가 없네."
종이는 너무 오랜 세월에 작은 진동에도 바스라지는 수준이었다.
- 아직 지하 2층일 뿐이니 신경 쓰지 않아도 될 게야. 진정 중요하게 생각한 연구였다면 보존 마법을 걸어 놓았겠지. 마법사의 연구에 있어서 보존 마법은 기본 중의 기본이라네.
"그래? 아무튼 2층까지는 생각보다 별 게 없네. 유례없을 대마도사의 던전 어쩌고 하면서 잔뜩 기대하게 만들더니...."
기대에 비해 성과가 없지 않나.
물론, 그것은 지하 2층까지의 이야기였다.
지하 2층에서 입구를 다시 열고 내려간 지하 3층은 이전 층과는 확실히 달랐다.
정돈된 방. 중앙에 위치한 너른 단상.
그 위에 놓인 것은 지팡이 하나와 망토였다.
피가 흐르는 듯이 기괴하게 생긴 지팡이와 주변의 빛을 모조리 흡수하는 칠흑의 망토.
그것을 발견한 푸르넬이 언제 풀죽어 있었냐는 듯 잔뜩 흥분하며 목소리를 높인다.
- 내, 내 뭐라 했나! 말이 맞았지 않은가! 크뢰츠발트의 나머지 두 신물이 틀림없네! 크뢰츠발트의 지팡이와 망토, 그리고 랜턴까지! 후욱, 후욱. 이건… 대박이야!
거친 숨을 몰아쉬는 푸르넬의 숨소리가 심히 거슬린다.
내쉴 숨통도 없는 주제에… 지독한 네크로맨서 덕후 같으니라고.
- 뭐하나! 빨리 가서 확인해 봅세! 거 내가 뭐라 했나. 보통 마법사의 집이 아니라 했지!
"…그래그래."
중앙으로 다가가자 확실히 범상치 않은 마력이 느껴지는 두 개의 아티팩트의 정보가 눈에 들어온다.
어찌나 새카만지 묵빛이 흐르는 것만 같은 망토와 괴상하게 비틀린 새빨간 지팡이.
「크뢰츠발트의 존엄한 망토 (에픽)」
「아홉 밤을 거쳐 홀로 왕국을 무너트린 위대한 네크로맨서 크뢰츠발트를 위해 제작된 망토. 죽음과 관련된 힘에 특화되어 있다.」
「착용 시 언데드 제작에 필요한 사기의 총량이 대폭 감소합니다.」
「데스 오라 : 소환된 모든 언데드의 스탯 강화 +30%」
「병사의 품격 : 소환된 모든 언데드는 방어막을 지닌 채 소환됩니다. 방어막의 강도는 소환자가 사용한 마력량에 비례해 강력해집니다.」
「암흑 권위자의 지팡이 (???)」
「흑마법의 개척자이자 시조, 위대한 흑마법사 크뢰츠발트를 위해 제작된 지팡이. 사용자의 능력에 따라 천차만별의 위력을 자랑한다.」
「스탯 '마력' +15」
「마법 시전 속도 +15%」
「사용자의 마력 서클에 따라 순차적으로 능력이 개방됩니다.」
「3서클 : 스킬 - '어둠의 통찰' 사용 가능.」
「5서클 : 잠김.」
「7서클 : 잠김.」
「스킬 : 어둠의 통찰」
「암흑을 꿰뚫어 보는 눈.」
「어둠 속에서도 본질을 파악하는 눈을 발동합니다.」
「감각 상실과 인지 저하, 혼란 등에 걸리지 않습니다.」
「주의하십시오. 때론 들여다보지 않는 것이 좋을 때도 있습니다.」
"…미친 성능이네."
흑마법은 아직 잘 모르겠다만, 적어도 네크로맨서에게는 이보다 더 좋은 아티팩트가 있을지 장담할 수 없을 정도의 성능이다.
- 과연 크뢰츠발트의 삼신기. 내 살아만 있었다면 이걸로 가히 대륙을 제패하는 것도 헛된 꿈만은 아니었을....
"대륙을 제패하는 게 꿈이었어?"
- 말이 그렇다는 거네. 말이.
어쨌든 어마어마한 것임은 틀림없다.
영혼 수확자의 랜턴에 크뢰츠발트의 망토와 지팡이.
"이거 완전 네크로맨서 세트네."
그것도 최상위, 거의 종결급이라 칭해도 될 정도의 세트였다.
네크로맨시가 5서클만 되어도 무한히 증식하는 언데드 군단을 만드는 것도 충분히 가능하리라.
거기에 서클이 더 오른다면 데스 나이트 같은 상위 언데드로 이루어진 부대도 가능할 테고.
- 자네는 죽음을 다루는 사신까지 있지 않은가.
그 말대로 낑낑이까지 있으니 이제 성장만 하면 된다는 말이었다.
- 모자라. 너무 모자라네. 3서클에 오른 것도 경이적으로 빠른 속도이기는 하지만, 5서클까지는 그래도 빨리 올라야지 않겠나. 그 이상은 뭐… 단순 마력에 대한 재능만으로는 오를 수 없는 영역이니 말이야.
"그렇지 않아도 4서클이 머지않았어."
인내력이 900대가 넘었고 그동안 얻은 명성 포인트와 아이템에 붙은 마력 스탯으로 마력 스탯 또한 400에 거의 근접했다.
최대치인 500이 머지않았다는 의미였고 4서클 역시 금방이라는 말이었다.
"빠른 성장도 5서클까지겠네."
마력 스탯을 전부 올려도 마나 호흡법이 있으니 한계 이상으로 마력을 더 늘릴 수 있긴 하다.
하지만 명성 포인트를 이용해 스탯을 구매하는 것에 비한다면 속도는 비교할 수도 없이 느릴 터.
그래도 뭐, 마력 스탯을 다 찍고 나면 영력도 있고 다른 육체적 스탯을 높일 수 있으니.
그것까지 다 올리고 나서야 비로소 최상위 랭커다운 육체를 가지게 되는 것이다.
- 그건 그렇고 파블렌코의 목걸이는 반응하나? 지하 4층이 있어?
푸르넬의 물음에 시선을 아래로 내려 목에 걸린 목걸이를 바라본다.
첫 번째 스승, 베르가 파블렌코가 남긴 유품.
여기가 정말 마법사의 집이라면 이 파블렌코 가문의 목걸이는 어김없이 지하 4층으로 향하는 길을 알려 줄 것이다.
가장 중요한 포털이 있는 곳.
"있네."
그리고 이번에도 역시 녹빛의 목걸이에서 마력으로 된 실이 뻗어 나와 길을 알려 주었다.
이곳은 의심할 여지없는 마법사의 집이라는 뜻.
"왔는데 4층까지는 확인해 보고 가야지."
굳이 마탑으로 가지 않더라도 4층에 다른 게 있나 확인은 해 봐야 할 것 아닌가.
여태 모든 마법사의 집 지하 4층은 오직 포털만 덩그러니 있는 형태이긴 했지만, 여기까지 와서 그 모습을 보고 가지 않는다는 것도 상당히 찝찝했으니 말이다.
그러니 목걸이가 가리키는 방향으로 가 아래로 내려가는 입구를 열었다.
쿠궁- 소리를 내며 갈라지는 바닥. 드러나는 계단.
별다른 긴장 없이 저벅저벅 내려간 지하 4층의 모습은.
"...."
예상과는 많이 다른 것이었다.
- 포털이… 부서졌군.
중앙에 무너져 내린 돌무더기는 분명 익숙한 모양. 본디 포털의 역할을 하던 육면체의 조각상이었다.
그리고 그 주변에 널브러진 몇 장의 종이.
위층에서 보았듯 천 년이 훌쩍 넘는 세월에 바스라지는 종이가 아니라 빳빳한 새 종이.
보존 마법이 걸려 있는 종이였다.
그 속에 적힌 것이 고대어만 아니었다면 방금 전에 작성했다고 해도 믿을 정도.
물론, 그럴 리가 없겠지만 말이다.
"연구 기록인가?"
연구 기록을 남긴 것이라기에는 너무 대충 놓여진 것 같지 않나.
- 가까이 가 보세. 연구 기록이라기보다는… 어떤 전언을 남기고자 한 것 같은데.
"전언이라면… 네가 말한 크뢰츠발트인가 하는 그 사람이?"
- 그럴 확률이 높지 않겠나. 그러니 어서 읽어 보세나.
그 말에 적지 않은 호기심이 일었기에 서둘러 다가가 가장 가깝게 놓인 좋이 하나를 집어 들었다.
정갈하게 쓰여진 고대어. 제법 복잡했으나 걱정할 건 없다.
자동 고대어 번역기 푸르넬이 있었으니 문장을 확인한 푸르넬이 그것을 읽어 내려간다.
- 나는 심연을 들여다보았다. 심연 역시 나를 발견하였다.
종이에 적힌 말은 그것이 끝이었다.
그 옆에 놓인 다른 종이를 집어 들면, 푸르넬이 다시 빠르게 읽어 내려간다.
- 마법의 상실을 보았다. 그것을 넘어 세상의 멸망을 보았다.
다음 종이를 집어 든다.
- 세상의 법칙에 구애받지 않는 괴이(怪異). 다음 단계로 가는 길을 본 것 같다.
- 필요한 것은 불멸(不滅). 혹은 영생(永生). 그에 한낱 기물 따위는 필요 없으니.
- 나는 기꺼운 마음으로 심연으로 걸어 들어간다. 괴이와 맞서 싸울 것이다.
- 긴 싸움이 될 터이다. 아니 이미 긴 싸움이었다.
- 썩 괜찮은 녀석들이 하나둘씩 합류한다. 모자란 점이 제법 보인다만, 혼자 보다야 낫지 않은가.
종이는 일정한 간격으로 무너진 포털을 방향으로 놓여 있다.
- 세월이 흘렀음이 느껴진다.
- 쓸 만했던 녀석들이 믿을만한 동료가 되었음에도, 그렇지 못한 놈들이 영혼까지 집어삼켜졌음에도. 새로 합류하는 녀석은 없다.
- 마법의 상실이 뼈에 사무치는구나.
남은 종이는 두 장.
남은 글귀 또한 두 개.
- 나는 아직도 이곳에 있다.
종이를 하나씩 줍다 보니 어느새 무너진 포털의 바로 앞까지 도달한 후였다. 어쩐지 무기력하게 무너진 채 널브러져 있는 포털의 무덤.
그리고 히오는 마지막 남은 한 장의 종이를 든 채로 굳어 버린 듯 한참을 서 있을 수밖에 없었으니.
"...."
그 마지막 종이에는 분명 보존 마법이 걸려 있지 않은 까닭이었다.
그럼에도 너무도 멀쩡한 것이 그 이유였다.
- 너는 언제 오는가.
마치 조금 전에 작성이라도 한 것처럼 말이다.
* * *
지하의 모든 문을 닫고, 크뢰츠발트의 삼신기를 주머니에 고이 넣은 채 다시 회색 성으로 올라왔다.
그대로 반나절 정도 기다리면 바로 옆에 갑작스레 나타난 누군가가 말을 걸어오는 것이다.
"이제 가십니까."
황실 소속의 공간 이동 능력자, 이오스였다.
언제나 일에 찌든 듯한 퀭한 눈. 피곤에 절은 목소리와 딱히 감정을 내비치지 않는 얼굴.
"돌아가야지."
"황성으로 가십니까."
"그래. 부탁하지."
고개를 짧게 끄덕이고는 하늘 위로 손을 뻗는 이오스.
정확히 필요한 말만 한 후에 할 일을 하는 모습이 참으로 그다운 모습이라 할 수 있겠다.
이윽고 하늘 위에서 내려오는 빛무리.
환한 빛으로 시야가 물들어가는 와중, 다크서클이 짙게 내려온 이오스의 눈이 히오를 향한다.
시야가 완전히 멀어지기 직전, 희미하게 들려오는 말.
"고생하셨습니다."
빛이 서서히 사그라들고 눈을 떴을 때는 이미 웅장한 황궁이 눈앞에 서 있는 상태였다.
히오는 즉시 고개를 돌려 이오스에게 물었다.
"자네 마지막에 내게 뭐라 말했나?"
그에 이오스는 피곤에 찌든 얼굴로 히오를 바라보며 답한다.
"예?"
그 짧은 단어 안에 함축되어 있는 의미는 '피곤해 죽겠는데 무슨 소리하는지도 모르겠고 그냥 더 말하지 말고 빨리 돌아갔으면 좋겠는데' 정도가 아닐까.
그걸 느꼈기에 히오는 고개를 가로저었다.
"아니네. 피곤해 보이는데 들어가지."
"예."
그렇지 않아도 생각할 거리는 차고 넘쳤으니까.
* * *
지구에서 넘어온 빙의자.
과거 벤타이얼을 플레이했던 일만의 랭커들은 모두 이 세상에 영혼이 빠진 채로 들어왔다.
그렇기에 자유로이 로그아웃이 가능한 것.
반면에 히오 자신은 영혼 채로 넘어왔기에 로그아웃이 쉽게 가능하지 않는 것.
그리고 그것은 히오 혼자만 그런 것이라 추측했었다.
여태 본 다른 빙의자들은 모두 혼이 존재하지 않았으니까 합당한 생각이었다.
허나 아이라이츠는 어떤가. 분명 영혼이 존재하는 채였지 않은가.
게다가 혼에 새겨진 기억을 읽어 봤을 때, 그녀 역시 로그아웃을 하지 못했다.
그 말인즉 로그아웃이 불가능한 이유가 랭킹 1위의 어떤 특별함 때문이 아니라는 말이었다.
아이라이츠와 자신 사이에 어떤 공통점이 있을까.
사실 이제 와서 돌이켜 본다면 그닥 어려울 것도 없는 질문이었다.
사랑받고 싶었던 소녀의 기억을 모두 읽었지 않았던가.
세상과 단절한 채, 사랑받지 못했고 사랑하지 못했다 굳건히 믿은 채, 오직 벤타이얼에만 몰입했던 소녀.
지인도, 친구도, 동료도, 다리 한 짝도 잃은 채 무의미한 삶을 이어 나갈 뿐이던 자신.
공통점을 찾는 건 그리 어렵지 않은 것이었다.
생각이 거기까지 미쳤을 때.
똑똑- 노크 소리와 함께 조심스레 열리는 문.
"파블렌코 님. 비탈리아누스께서 의식을 회복하셨습니다."
히오는 즉시 자리에서 몸을 일으켰다.
나눠야 할 이야기가 제법 있을 테니 말이다.
87화 미궁 (1)
비탈리아누스는 침대에 상반신을 일으킨 상태였다.
풍성한 금발과 그 아래로 드러나는 강철과도 같은 육체. 붕대로 둘러싸여 있지만, 그다지 효과가 있어 보이지는 않았다.
초인의 육체는 이미 상처의 대부분을 회복했으니 말이다.
넓은 방 중앙에 놓인 호화스러운 침대의 주위로 사람이 바글바글했다.
그의 몸을 관리하기 위한 치료사만 셋에 그를 보좌하기 위한 시종과 시녀가 수십. 그럼에도 몇 사람 모이지 않은 것처럼 실내는 조용했다.
누구도 섣불리 입을 열지 않는다. 내딛는 발걸음 한 번을 신중하게 행했고 행여나 옷깃 스치는 소리라도 날까 조심스럽게 움직이는 것이다.
실비아 베르덴.
대륙의 가장 높은 권력가이자 제국의 지배자.
여황제가 검성을 위해 친히 행차한 까닭이었다.
그 외에도 수호 기사 히오 파블렌코나 이번 전쟁의 총사령관이자 귀족 세력의 핵심 로베룬 공작, 비탈리아누스 휘하의 로열 나이츠 등 한 명 한 명의 존재감이 막대했기에 행동 하나하나를 조심하는 것이었다.
"몸조리 잘 하시게 검성. 그대를 걱정하는 이가 많아."
실비아의 말에는 제법 황제다운 품위가 서려 있다.
그에 비탈리아누스는 태연히 답한다.
"쓸데없이 튼튼한 이 늙은이를 걱정하다니, 제가 너무 조용히 있긴 했나 봅니다. 허허."
"가장 쓸데없는 걱정이 검성에 대한 걱정이지. 허나 그래도 몸을 조금 더 소중히 할 필요가 있어. 검은 안개의 아타올프는 쉬운 상대가 아니었지 않은가."
"하하하. 그래도 결국 마법사가 해결했지 않습니까. 결과가 좋으니… 다행입니다."
비탈리아누스는 죽기 직전까지 갔던 사람이라고 믿기 힘들 정도로 평온한 모습으로 실비아와 대화를 나누었다.
누구도 그것에 이상함을 느끼지 못했다.
좋은 일이지 않나.
검성은 결국 살았고 대륙 최악의 악당을 물리쳤으니 가히 전 대륙이 칭송해 마지않는 영웅적 행보라 말할 수 있겠다.
머지않아 공식적인 발표가 있을 것이고 대대적인 축제가 벌어질 것이다.
사람들은 최악의 악당과 맞서 싸운 검성과 수호 기사를 칭송할 테지.
그러니 비탈리아누스는 모인 이들과 함께 웃음을 터트리기도 하며 밝은 표정으로 담소를 나누는 것이다.
크게 다쳤고 회복하는 중에 있음에도 모두가 즐거운 마음으로 그에게 축하를 건네는 것이었다.
"...."
다만, 히오만큼은 아무런 말없이 그런 비탈리아누스를 가만히 바라보고 있을 뿐이다.
"이만 가 보겠네. 아픈 사람을 너무 오래 붙잡고 있었군."
실비아가 먼저 등을 돌려 방을 빠져나갔다.
붉은 망토가 펄럭이고 그 뒤를 십여 명의 시녀와 한 명의 데스 나이트가 따른다.
"나도 그럼 가 보겠네."
"가 보겠습니다. 단장님."
뒤를 이어 로베룬 공작과 로열 나이츠까지 차례대로 방을 빠져나간다.
그들을 웃으며 배웅하는 비탈리아누스.
그리고 나갈 생각이 없는 듯 꿈쩍 않고 있는 히오 파블렌코.
그들이 나간 문을 응시하며 비탈리아누스는 천천히 입을 연다.
"나를 걱정해 주는 이가 이렇게나 많다네. 행복한 삶이 아닌가."
입가에 걸려 있던 옅은 미소는 어느새 지워진 채였다.
"어떤가 마법사. 자네도 그리 생각하는가?"
히오는 대답 대신 주위를 둘러보며 말했다.
"잠시 자리 좀 비켜 주겠나."
그에 시종과 시녀, 비탈리아누스의 곁에 있던 치료사까지 고개를 숙인 채 일사불란하게 방을 빠져나간다.
순식간에 둘만 남은 넓은 방.
서서히 시선을 돌려 히오와 눈을 마주하는 비탈리아누스.
사자를 닮은 금안은 어쩐지 텅 비어 있었다.
"그래, 마법사. 내 친구의 마지막은 어떠했나."
회색성 첨탑에서 마지막까지 서 있던 것은 오직 히오 파블렌코뿐이었으니.
전쟁의 결말이 어찌 끝을 맞이하게 되었는지 아는 것도 그뿐이라는 말이었다.
그리고 아타올프가 어떻게 최후를 맞이했는지 히오는 누구에게도 말하지 않았다. 누가 묻든 별일 없었다는 말로 일축한 것이다.
황제의 수호 기사에게는 그만한 자격과 힘이 있었다.
황제가 직접 묻지 않는 이상 답해야 할 의무가 없는 것이었고 실비아는 히오가 원하지 않는 것을 억지로 캐낼 위인이 아니었다.
물론 아타올프의 최후는 너무도 초라하기 그지없는 것이었지만.
악당의 결말은 뻔하디 뻔해 말할 필요도 없을지 모르겠다만.
적어도 그를 구하고자 했던 유일한 친구에게는 알려야 할 의무가 있었으니.
"스스로 심장을 찔렀어."
더하지도, 모자라지도 않게 있는 사실을 그대로 전하는 것이다.
"…그렇군."
덤덤하게 고개를 끄덕이는 비탈리아누스를 향해 그의 마지막 말을 전한다.
"약속을 지키지 못해 미안하더군."
"…약속이라. 그랬었지."
함께 최고의 자리에 오르자고, 함께 영웅이 되어 보자고 아직 많이 어린 시절에 했던 약속.
그것을 여전히 기억하고 있었구나.
비탈리아누스는 몸을 천천히 침대에 누인다.
자연스레 천장을 향하는 시선.
"영웅은 무엇이고 검성은 또 무엇인가. 나는 인간이라네."
"인간이고 영웅이며 동시에 검성이기도 하지."
"목표했던 바는 이뤘네. 영광을 함께했던 이들은 모두 죽거나, 죽을 예정이지. 하나뿐인 친구 역시 구하지 못하고 내 앞에서 스스로 죽어 버렸어. 내겐 무엇이 남았는가."
중얼거리듯 덤덤하게 내뱉는 말.
"나는 무엇을 위해 다시 검을 들어야 하는가."
비탈리아누스에게 육체의 상처란, 죽지만 않는다면 금방 회복해 버리고 마는 것이다.
외려 위험한 것은 가슴 깊숙한 곳에서 크기를 키워가는 것. 지독한 마음의 병.
고독과 허무라는 이름이었다.
"나는 무엇을 목표하며 살아야 하는가."
깨어남과 동시에 축하를 건네는 사람들 사이에서 비탈리아누스는 어떤 심정이었던가.
그 축하 속에서 삶의 마지막 목표마저 기어이 떠나 버렸음을 알았을 때, 그는 어떤 심정으로 미소를 지은 것일까.
그것은 알 수 없었으나 확실한 것은 하나 있었으니.
"이봐. 비탈리아누스."
비탈리아누스 마헬.
검을 든 희망의 상징. 초인 위의 초인.
대륙에서 가장 고강한 기사는 결코 여기서 무너져서는 안 된다는 것.
"세상엔 믿기 힘든 일이 참 많아."
게임 속에서 아타올프가 죽는 것은 한참 뒤였다. 어비스가 발발하고 그것이 세상에 퍼져 나간 시점.
오히려 비탈리아누스가 아타올프보다 먼저 죽었던 것이다.
그것이 뒤바뀐 세상에서 비탈리아누스가 어찌 변할지는 알 수 없으니 비탈리아누스를 향해 조용히 읊조리듯 말하는 것이다.
"난 말이야. 이 세상이 처음이 아니라네."
그에게는 미안하지만, 검성은 여기서 무너져서는 결코 안 된다.
세상을 위해 다시 한 번 무거운 검을 들어 올려야만 한다.
"너는 원하지 않아도 검을 들어야만 할 거야."
비탈리아누스에게 필요한 것은 확실한 목표. 그가 계속 검을 들어야 하는 이유.
"그렇지 않으면 세상은 멸망하니까."
꺼져 가는 검의 별에 다시 한 번 불을 지피는 것.
"황성은 불타오르고 왕국은 무너져 내렸으며 너도 나도 서쪽 바다의 지배자도 그 어느 누구도 멸망을 막진 못했지."
알 수 없는 그 말에 무심히 천장을 올려다보던 비탈리아누스의 시선이 히오를 향한다.
"…그러니까 마법사. 그 말은 자네가 지금 시간 역행이라도 했다는 말인가?"
"뭐, 비슷해. 너와 아타올프 둘 사이의 일을 어찌 알고 있을 거라고 생각하는 건가? 전부 네 입을 통해 직접 전해 들은 거라고."
비탈리아누스의 금색 눈에 의혹과 혼란이 가득 담긴다.
말의 진의를 파악하기 위해 히오의 눈을 들여다보지만, 그 눈은 진중하기만 했으니. 거짓의 기색은 조금도 찾아보기 힘든 것이다.
"무엇을 위해 검을 들어야 할지 모르겠다고? 그게 얼마나 배부른 소리였는지 알게 될 날이 온다는 말이야."
"대체… 무엇에 멸망한다는 건가."
혼란과 의문이 크기를 키워 가고 그에 못지않게 커져 가는 것은 역시나 강한 호기심 혹은 호승심.
"어비스라는 이름이지."
"그것이 그렇게나 강하다는 말인가?"
서서히 몸을 일으키는 비탈리아누스.
"세상의 법칙을 무시하는 존재들이야."
눈 깊은 곳에서 금빛 안광이 번뜩이니.
"자세히 말해 보게. 마법사."
꺼져 가던 검의 별에 불이 붙은 것이다.
* * *
비탈리아누스와 이야기를 마친 후, 쉴 틈도 없이 실비아와 마주한 히오.
실비아는 무거운 복장과 갖가지 장신구를 훌훌 벗어 버리고 편한 차림으로 마주 앉아 있었다.
"세상에 어찌나 성화인지. 하루에도 몇 번씩 말이 나온다니까?"
아까의 근엄한 말투와 품위는 어디에 갖다 버렸는지 쉬지 않고 와다다 말을 쏟아 내는 실비아.
"국혼(國婚)을 서둘러야 한다고 계속 난리지 뭐야. 지금도 충분히 늦었다고 서둘러 후계를 준비해야 한다나 뭐라나… 참 어이가 없어서. 그치?"
다름 아닌 결혼 때문이었다.
오직 실비아와 제국의 앞날만을 생각하는 충성스러운 신하들의 입장에서 보자면 당연한 것.
결혼을 하고 아이를 낳아 후계를 이어 가야 하는 것이고 실비아의 나이라면 가장 적합하고 건강한 시기인 것이다.
"나 참, 결혼이라니. 한 번도 생각해 본 적 없는데 말이야. 응? 어떻게 생각해?"
그렇게 말하는 실비아의 표정은 왠지 모르게 상기되어 있었고, 그에 멍 때리고 있던 히오가 어리둥절해하며 되물었다.
"음? 뭘?"
"아니 결혼 말이야. 히오는 생각해 본 적 있어?"
엉뚱한 질문에 김이 새어 버린 듯 소파에 등을 기대며 고개를 가로젓는다.
"전혀 생각도 안 해 봤지. 내가 결혼은 무슨, 연애할 시간도 없다."
"아하하하! 응, 역시 그렇지? 나도 그렇게 생각해. 아하하...."
황급히 손부채질하는 실비아의 얼굴은 불그스름했다.
덥나?
"...."
뒤에 선 데스 나이트가 굉장히 아니꼽게 쳐다보고 있는 것도 이상했지만, 뭐 하루 이틀 일도 아니었기에 대충 무시하고.
"그나저나 전에 이야기 했던 건 어떻게 됐어?"
그 말에 혼자 아하하하 웃던 실비아가 정신을 차리고 자세를 바로 고쳐 앉았다.
"응. 그렇지 않아도 히오 말대로 모험가 길드에 공문을 보냈어. 어비스와 관련해서 협조를 부탁한다고."
동시에 실비아의 분위기가 급격하게 바뀐다.
우아하게 찻잔을 들어 올리는 은발의 여황제를 보고 있노라면, 조금 전 순수한 소녀의 모습은 찾아볼 수가 없는 것이다.
"뭐래? 순순히 협조하겠다지?"
히오 역시 더럽게 큰 모자를 잠시 옆에 내려놓고 여유롭게 찻잔을 들어 올린다.
이제 어비스 공략을 제국 차원에서 하기 위함이었다.
즉위식을 위해 황궁에 방문했을 때 실비아와 이야기가 된 것이었고 실행하기만 하면 될 일.
"처음에는 무슨 말인지 모르겠다며 발뺌하더니 히오 네 이름을 언급하니까 바로 협조하겠다던데?"
현재 어비스에 관한 것은 빙의자들이 관리하고 있고 그것의 총 책임자가 현 모험가 길드장이다.
그녀 역시 빙의자.
심지어 시르베르트보다 높은 4위의 랭커였다.
그러니 가장 중요한 어비스 입구를 관리하는 것에 부족함이 없을 터였는데.
"협조를 넘어서 가능하면 빨리 와 줄 수 있겠냐고 묻더라고."
"빨리 와 달라고? 왜?"
빨리 가야 할 이유가 어디 있단 말인가.
어비스는 이제 고작 10층 정도의 난이도. 그들을 괴롭히던 흑아의 세력 또한 무너졌으니 공략을 반대하는 세력 또한 그 위세가 많이 죽었을 텐데.
"미궁이 나타났대."
"…미궁?"
"응. 예상치 못한 변수가 생겼나 본데… 잠시만."
실비아가 책상에서 서류 하나를 가져와 읽어 내려가기 시작했다.
"중반부에나 등장해야 할 미궁 형태의 등장. 미궁에 대한 대비가 전혀 없었기에 관련된 스킬이 절대적으로 부족하고 공략 시간 또한 얼마 남지 않았음. 히오 파블렌코와 연락이 닿는다면 최대한 빨리 지원을 요청함. 뭐, 대충 이런 내용이 아주 정중하게 와 있네."
히오의 표정이 심각하게 가라앉는다.
"미궁이… 나왔다고."
어비스의 형태는 아래층으로 내려갈수록 다양하게 나타난다.
그중 까다롭기로는 한 손가락에 꼽히는 것이 바로 미궁의 형태.
다른 층과는 달리 바깥으로 되돌아갈 수도 없다. 한 번 들어가면 둘 중 하나가 끝나야만 하는 것이다.
죽거나, 공략하거나.
길을 찾아야 함은 물론이고 각종 어비스 몬스터와 함정. 방향 상실과 시야 축소는 항시 깔고 들어가야 한다.
그런 와중에 남은 시간도 얼마 없다고 하니.
이런 변수가 왜 발생했는지는 둘째 치고 최우선으로 빠르게 클리어해야만 하는 것이다.
그렇지 않다면 온 세상에 어비스 게이트가 나타날 테니까.
"바로 가 봐야겠어."
머뭇거릴 시간은 없다.
"이오스 좀 빌릴게."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며 말하니 실비아가 눈을 휘둥그레 뜨며 따라 일어났다.
"벌써 가게? 차 한 잔은 마시고 가지."
"다음에!"
그대로 뒤도 돌아보지 않고 히오는 뛰쳐나가 버렸고 황제의 넓은 침실에는.
"…에휴."
작게 한숨을 내쉬는 실비아와.
"...."
히오가 박차고 나간 방문을 한심하게 쳐다보는 테오르도만이 남아 있을 뿐이었다.
88화 미궁 (2)
랭킹 1위.
지존천마가 벤타이얼 속 세계로 들어오며 얻은 혜택은 히든 특성이었다.
랜덤으로 얻은 세 가지의 특성을 종합하여 가장 어울리는 히든 특성이 주어졌고 그것이 '폭력은 안 돼!'라는 특성인 것이다.
랭킹 3위.
아이라이츠의 혜택은 특성 선택권이었다.
스킬 '매혹'이 상위 스킬이기는 하나, 거리와 인원 제한 없이 퍼져 나갈 수 있었던 이유는 그녀가 직접 특성을 선택했고 그것이 '매혹'과 너무도 잘 맞아떨어졌기 때문.
그 말인즉, 아이라이츠는 처음부터 매혹 스킬을 계획하고 있었다는 말이었다.
그것의 시너지는 생각보다 더 뛰어난 것이어서 그녀가 작정하고 모습을 드러내지만 않았더라면 매혹은 끝도 모르고 번져 나갔을 터.
어쩌면 아타올프를 뛰어넘어 대륙을 쥐락펴락하는 악당이 되었을 수도 있는, 그런 능력이었다.
허나 아이라이츠는 그 의미 없는 삶을 연명해 나가기보다 평생 목표로 하던 것을 위해 기꺼이 모습을 드러내었고 죽음을 맞이하였다.
가엾으면서 동시에 죄 많은 그녀의 혼은 히오의 랜턴 속에서 고이 잠들어 있는 것이다.
랭킹 5위는 시르베르트 반 에른헴.
한국에서는 남태민, 태룡 길드장으로 유명한 이.
그가 얻은 혜택은 기본 스킬 세 가지 중 하나가 중위 스킬로 시작한다는 것이었다.
그렇게 얻은 것이 지금의 시르베르트를 상징하는 '염동'의 하위 스킬 '사이코키네시스.'
그것 역시 사용하기에 따라서 대단한 혜택이었다. 출발선이 다르다는 의미였으니 활용만 잘 한다면 원하는 것들을 독점하며 시작할 수 있는 것.
허나 1위부터 4위까지의 상위 랭커가 얻은 혜택에 비한다면 고점이 낮은 것 또한 사실이었다.
그들이 얻은 것은 하나하나가 세상의 정점에 오르기에 부족함이 없는 것들이었으니.
그렇다면 랭킹 4위의 다프네.
이곳 세상에서는 모험가 길드장으로 유명한 그녀가 얻은 혜택은 무엇인가.
* * *
어비스의 입구가 자리 잡은 동산.
게임 속에서는 멸망이 시작된 곳이라 하여 지옥 동산이라 불렸던 그곳은 지금 모험가 길드의 정예들로 완벽하게 통제되고 있었다.
한 명 한 명이 강력하기 그지없는 길드의 정예. 그들 전부가 빙의자였다.
지구에서는 이름만 대면 모르는 이가 없을 유명한 이들. 최초의 각성자라 추앙받으며 존경과 동경을 받는 영웅들.
다프네는 그런 이들의 정점이자 구심점이었다.
그들 사이에서도 유독 압도적인 강함, 카리스마. 특유의 냉철한 분위기와 어우러지는 미모까지.
모험가 길드가 이토록 빠르게 영향력을 키운 것은 그런 다프네에게 매료되어 모여들고 뭉친 빙의자들의 힘인 것이다.
다프네는 지옥 동산의 중턱에 서서 어비스의 입구를 가만히 들여다보는 중이었다.
짙은 남색의 긴 머리가 바람에 휘날림에도 조금의 미동 없이 그저 어비스의 입구를 가만히 쳐다본다.
무저갱과도 같은 입구. 언제 세상을 지옥으로 물들일지 모르는 그 입구를 말이다.
주위는 조금의 잡음 없이 고요했다.
다프네의 성정을 잘 아는 길드원들이 그녀의 사색을 방해하지 않기 위해 거리를 두고 있는 까닭이었다.
"다프네 님."
그런 다프네의 뒤로 한 명의 길드원이 조심스레 접근하며 그녀를 불렀고 그제서야 다프네의 고개가 천천히 움직였다.
깊은 바다를 닮은 청색의 눈동자가 자신을 향하자 다프네를 부른 길드원이 고개를 깊이 숙인다.
"히오 파블렌코가 도착했다고 합니다."
듣던 중 제법 반가운 소식이 아닌가.
지푸라기라도 잡는 심정으로 보낸 협조 요청이었으니.
"지존천마."
"예. 수호 기사를 상징하는 패를 지니고 있으니 히오 파블렌코라는 것은 확실합니다."
"들여보내."
히오 파블렌코.
그의 정체는 전 서버 랭킹 1위, 지존천마.
거의 3년에 가깝도록 어떠한 소식도 들려오지 않았기에 그를 겁쟁이라 판단했건만, 그런 다프네의 생각을 비웃기라도 하듯이 최근 행보가 심상치 않은 자.
멸망의 큰 문제 중 하나였던 황위 계승 전쟁에서 첫 등장하여 제 손으로 황제를 직접 세우고.
이메니아의 습격을 막아 냄과 동시에 기세를 몰아 흑아와의 전쟁까지 일으켰으며 대륙 최강자 중 하나인 아타올프를 쓰러트렸다는 소문마저 은근하게 퍼지고 있었으니.
물론 검성과 함께였겠으나 그것만으로도 그의 힘은 증명하고도 남은 것이었다.
다만 의문인 것은 여태 어디서 뭘 하고 있었는지.
명성 포인트 없이 힘을 키우기란 불가능할진데 어찌 힘을 키운 것인지. 정말 시르베르트의 말대로 게임 속 지존천마의 능력을 그대로 이어받은 것인지.
아니, 그것을 다 떠나서 대체 어떤 사람일지. 그게 가장 궁금했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산 아래에서부터 올라오는 한 사람의 모습이 보이기 시작한다.
주변의 빛을 모조리 흡수하는 기이한 흑빛의 망토. 손에는 금방이라도 피가 뚝뚝 흐를 것만 같은 지팡이, 머리에는 커다란 고깔모자를 쓴 채 저벅저벅 올라오는 사내의 모습은 뭐랄까.
"…저딴 게?"
모두가 찾아 헤매던 1위의 품격이라기에는… 상당히 애매한 것이다.
지적해야 할 게 너무 많지만, 우선은 지팡이.
뭐, 겉보기엔 제법 그럴싸하긴 하다.
피가 뚝뚝 흐르는 듯한 살벌한 외형.
하지만 게임 속에서 지팡이란 겉멋 부리기 좋아하는 이들이나 차고 다니던, 말하자면 허세용 아이템이었다.
그걸 저리도 당당히 쓰고 있다는 것은 정신 상태를 의심해 봐야 할 정도.
몸에 걸친 로브는 또 어떤가.
아니, 로브를 걸치고 싶으면 망토를 빼든가 망토를 걸쳤으면 로브를 벗든가. 둘 다 입고 있는 건 대체 무슨 심보이며 어떤 패션 가치관을 가지고 있는 것인지 가늠조차 가지 않는다.
머리에 쓴 광대 같은 고깔모자는 말할 필요도 없으리라.
그야말로 색 조합도, 옷의 종류나 효율도 뒤죽박죽인 최악의 행색.
그것이 히오 파블렌코의 첫인상이었다.
"오, 네가 다프네구나. 실물로 마주하는 건 처음이네."
그런 주제에 살갑게 말을 걸어 오는 게 아닌가.
만약 길가다 마주쳤으면 가볍게 무시하며 지나쳤을, 어쩌면 조금 경멸했을지도 모를 그런 행색이었지만, 어쨌거나 상대는 지존천마.
정말 지존천마가 맞는지 의심이 들었으나 지금은 그딴 것을 묻고 있을 때가 아니었다.
지켜보는 시선이 많다.
양옆으로 갈라진 채 이곳을 주시하는 수많은 빙의자들. 자신은 그들을 이끄는 리더이자 이 지옥 동산을 관리하는 책임자였으니.
자신의 앞까지 걸어온 지존천마를 향해 다프네의 입이 천천히 열린다.
그녀를 닮은 냉랭하면서도 고운 음색이 바람을 타고 번져 나간다.
"상황은 들었겠지. 지존천마."
어비스의 지하 10층에서 발생한 미궁.
다프네 역시 게임의 마지막까지 있었던 최상위 플레이어로서 미궁이 얼마나 까다로운지는 잘 알고 있기에.
남은 시간이 얼마 없음을 알고 있기에 서둘러야 하는 것이다.
"들었어. 50층 이후에나 등장하는 미궁이 벌써 나타났다고."
"다른 층에 이상은 없다. 이변이 발생한 건 10층부터야."
"미궁인 것은 확실해?"
다프네가 고개를 끄덕인다.
"프랑코와 크리톤이 확인했고 두 사람 다 100위권 랭커였으니 믿어도 좋아."
"그 둘은?"
"미궁에서 길을 잃고 로그아웃한 채 대기중이지."
미궁이 왜 미궁인가. 길을 찾기 어렵기에 미궁인 것이다.
거기에 어비스의 미궁은 마치 아타올프가 지배하던 바알 숲처럼, 아니 그 보다도 더 감각을 상실케 하는 공간이었으니.
게임 속에서도 미궁의 형태가 나타나기 시작한 이후로 공략 성공률이 급감한 것이었다.
"하긴, 관련 스킬을 상급까지 익힌 사람은 아직 없을 테니까."
미궁의 진득한 어둠을 헤치고 길을 찾기 위해서는 길 찾기 관련 스킬이 적어도 상급에는 도달해야만 한다.
허나 대체 누가 그런 보조 스킬을 상급까지 올리겠는가.
과거에야 게임일 뿐이었으니 재미 삼아 올리는 이들이 간혹 있었지만, 이곳은 게임이 아닌 현실.
기껏 얻은 능력이지 않나. 모두가 주인공이 되고 싶어 하지 남의 길잡이 따위가 되고 싶어 하는 이는 없는 것이다.
"미궁에 대비해서 길잡이 스킬을 올리고 있는 이들은 있었지만, 기껏해야 중위 등급. 저게 진짜 미궁인 이상 도움은 되지 않겠지."
그러니 다프네의 시선은 히오를 향한다.
깊은 심해와도 같은 눈동자는 그에게 묻고 있는 것이다.
너에게는 이 위기를 헤쳐 나갈 능력이 있느냐고.
그에 히오는 답한다.
"대충 알겠으니까 빨리 들어가자."
대답함에 있어 별다른 고민조차 없다.
상황은 파악했고 그냥 들어가기만 하면 해결된다는 듯이. 자신에게 다 방법이 있다는 듯 아무런 망설임 없이 움직이는 것이다.
"…방법이 있는 거겠지?"
"생각은 있지."
확인차 묻는 것은 그 정도면 충분했다.
정말로 공략까지 남은 시간이 얼마 없었기 때문이다.
공략에 실패한다면 이곳은 물론 본래의 세계까지 어비스 게이트가 풀리고, 또 그렇게 풀려난 어비스의 난이도가 혹, 50층의 난이도라면....
상상하기도 싫은 일이 무차별적으로 벌어지리라.
그러니 다프네 또한 망설임 없이 등을 돌린다.
세로로 입을 쩍 벌리고 있는 무저갱을 향해 걸음을 내딛는다.
"공략대는?"
뒤에서 들려오는 지존천마의 물음.
다프네는 걸음을 멈추지 않으며 오른손을 옆으로 뻗는다.
"달리 더 필요할까."
그렇게 뻗어진 손을 중심으로 나타나는 빛의 가루.
그런 빛이 뭉쳐 커다란 형태를 구성해 나가기 시작했으니.
"지존천마. 너는 길만 찾아 주면 된다."
그것은 하나의 거대한 활.
다프네의 손에 들린 채 푸르게 빛나며 신성한 냉기를 뿜는 활.
그것은 눈과 얼음의 왕국, 피어리어의 상징이자 전설로서 전해져 오는 신의 무구.
신궁(神弓) 라플리시아.
과거 화염을 자유로이 다루던 지존천마와 능력의 대척점에 섰던 빙하의 지배자.
"나머지는 알아서 할 터이니."
빙신(氷神) 다프네의 특전이었다.
* * *
벤타이얼의 세상 속에서 전설급 무구란, 말 그대로 전설이었다.
실제로 보기가 전설처럼 어렵다는 말이었다.
서버가 끝장 날 때까지 풀린 것이 단 두 개뿐이었으니 오죽하겠는가.
지존천마가 가지고 있던 것 하나와 그 아래의 랭킹 2등이 가지고 있던 것 하나. 그렇게가 끝이었다.
신궁(神弓) 라플리시아는 풀리지 않은 전설급 무기였다.
그리고 과연 그 이름값을 하는 무기이기도 했다.
끼이익-
활시위가 온 힘을 다해 내는 소리.
제 몸통보다도 큰 활, 라플리시아를 당기고 있는 것은 다프네였다.
허나 그렇게 당긴 활시위의 끝에는 화살이 매여 있지 않다.
그 대신 푸른 활의 주위로 그보다 더욱 푸른 네 장의 꽃잎이 활짝 펼쳐져 있을 뿐.
한계까지 활을 당긴 다프네가 손을 살짝 놓자,
콰아앙-!
꽃잎의 중앙에서부터 잘 보이지도 않는 속도로 무엇인가 쏘아져 나가 가로막는 모든 것을 초토화시킨다.
사방에 자욱한 어둠을 밀어내는 신성한 냉기.
이내 곧 드러난 광경은 미궁 속에서 몰려오던 어비스 몬스터의 처참한 잔해뿐이었으니.
다프네의 뒤에서 그것을 지켜보던 히오는 작게 손뼉을 친다.
"역시 빙신...."
솔직히 말하자면 냉기의 화살이 쏘아져 나가는 모습을 놓쳤다.
민첩 스탯이 너무도 낮은 탓이었다.
확인한 것은 전설급 무기가 가진 강력하디 강력한 힘.
심지어 다프네는 어떤 스킬을 사용한 것도 아니었다. 조금 다르긴 하지만, 게임으로 친다면 저것은 그저 평타를 치는 것이다.
다프네가 익힌 스킬, 그리고 라플리시아에 내장되어 있을 스킬. 그런 것들을 모두 사용하는 다프네는 얼마나 강할 것인가.
시르베르트가 다른 최상위권 랭커에 비한다면 무력이 약하다는 것을 여실히 보여 주는 광경이었고 이것이야말로 진정한 최상위 랭커의 무력이었다.
"그리 추켜세워 주지 않아도 된다. 그래봤자 네 눈에는 부족해 보일 텐데."
타국 출신인 다프네는 빙신이라는 말을 처음 들었고 얼음의 신이라는 뜻을 설명해 주자 저렇게 겸양의 말을 내뱉는 것이다.
벤타이얼의 게임 속, NPC들 사이에서 퍼진 다프네의 이명은 따로 있었다.
그녀가 나타나는 모든 곳은 온통 얼음으로 뒤덮였으며 그 아름답고도 잔혹한 광경에 모두가 경외하며 부르기를 빙하의 지배자.
빙신(氷神) 다프네라는 이명은 히오 혼자 부르던 이명인 것이다.
입에 짝짝 달라붙지 않은가.
"어쨌든, 길은 여기가 맞나?"
"잠시만."
히오가 이 지독한 미궁 속에서도 자신 있게 길을 찾을 수 있는 이유는 별게 아니었다.
「'암흑 권위자의 지팡이' 스킬 - '어둠의 통찰'이 발동됩니다.」
동시에 동공이 눈 끝까지 확장되며 진득한 어비스의 어둠이 세상 무엇보다 편안하게 느껴진다.
어둠은 곧 햇살이 되었으며 자신은 그러한 가운데 핵심으로 가는 길을 바라보기만 하면 될 뿐이었으니.
"그래. 이대로 쭉 가면 돼."
길만 확실하게 알 수 있다면 미궁도 그리 어렵지 않은 것이다.
"알겠다."
빙하의 지배자 다프네가 함께하고 있지 않나.
과거 그녀가 자유로이 다루던 능력과 꼭 닮은 신궁 라플리시아가 있지 않은가.
제아무리 50층 난이도의 몬스터가 튀어나온다고 한들, 다프네에게는 1층이나 50층이나 크게 다르지 않은 것.
콰아아앙-!
재차 벌어지는 푸른 꽃잎. 그 중앙에서 쏘아지는 지독한 한기의 화살.
남은 것은 그저 초토화된 현장뿐이었고 히오는 그저 그 뒤를 쫄래쫄래 따르기만 하면 되는 것이었다.
목적지는 보이고 가는 길을 꿰뚫는 화살은 너무도 강력하다.
거칠 것은 없었고 이대로만 간다면 시간 내에 공략하는 것은 무척이나 쉬워 보였으니.
히오는 다프네의 뒤에서 손뼉을 치며 응원하는 것이다.
"역시 빙신!"
그러면 다프네는 냉랭함이 뚝뚝 떨어지는 얼굴로 이리 말한다.
"과한 칭찬은 성장에 방해될 뿐이다."
그러고서 다시 등을 돌리는 다프네의 입가에 희미한 미소가 스치고 지나간다.
"어서 이동하도록 하지."
히오의 칭찬이 제법 마음에 드는 모양이었다.
89화 미궁 (3)
다프네는 지금 의심하는 중이다.
"역시 빙신!"
다름 아닌 히오 파블렌코, 지존천마를 의심하는 중이었다.
"이대로만 가자. 저기서 오른쪽으로.... 그렇지 빙신!"
아무리 좋은 칭찬이라도 그렇지. 얼음의 신이라는 말을 너무 자주하지 않나.
계속 듣다 보니 기분이 묘해지는 것이 꼭 비꼬는 것 같기도 하고....
"어어...? 저기 몬스터 오는데? 가자, 라플리시아!"
게다가 지존천마는 단 한 번도 자신의 능력을 드러내지 않았다.
오직 혼자의 힘으로 전쟁을 종식시켰으며 아타올프와 맞서 이메니아를 지켜 냈다는 그 힘.
물론 다프네의 무력만으로도 미궁을 돌파하기에는 충분했지만… 그가 나선다면 조금 더 빨라지지 않겠는가.
그럼에도 끝까지 나서지 않는 것이다.
"...."
그런 태도와 처음 만났을 때 느꼈던 첫인상 등이 합쳐져 의심은 무럭무럭 자라나고 있었다.
사실은 지존천마를 사칭한 가짜라든가. 수호 기사의 패를 모방한 사기꾼에 길드원이 속아 넘어간 것이라든가.
뭐, 한낱 사기꾼이 그렇게까지 할 이유가 없긴 하다만, 그렇다고 지존천마가 확실하다기에도 이상한 점이 상당히 많았으니.
하지만 다프네는 우선순위를 분명하게 하는 인물이었다.
하나의 세상을, 본인의 고향을 멸망케 할 수 있는 어비스의 관리자이며 지옥 동산의 책임자였다.
그러니 지금은 그저 저 자가 하는 말을 믿고 그가 가리키는 길을 향해 나아갈 수밖에 없는 것. 그 외에는 미궁을 공략할 방법이 달리 없었으니 말이다.
"좋아. 얼마 남지 않았어."
허나 제아무리 냉철한 다프네라도 중간쯤에서는 묻지 않을 수가 없었다.
"지존천마. 원래는 좀 더 과묵했지 않았나?"
히오 파블렌코라 주장하는 저 자가 특별히 말이 많고 방정맞은 것은 아니다.
하지만 이미지라는 것이 있지 않나.
벤타이얼을 플레이했던 유저라면 공통적으로 가지고 있는 이미지.
압도적인 1위 지존천마가 가지고 있던 그 이미지.
언제나 묵묵히 멸망을 막기 위해 동분서주하며 최선을 다하던, 압도적인 힘을 가지고 있음에도 그것을 과시하지 않던 그런 자.
과묵하고 냉철하지만, 사실 속은 따스하고 공과 사는 구별함과 동시에 은근히 사소한 것까지 잘 챙겨 주면서도 엄청나게 강하지만 티내지 않고 할 일을 해내는 사람.
모두가 예상하는 지존천마의 이미지가 다 이렇지 않을까?
다프네는 일반 유저들에 비해 지존천마를 자주 만났지만, 그녀의 내면 속 지존천마는 그런 모습을 하고 있던 것이었다.
저렇게 망토 안에 로브를 억지로 껴입고, 이상한 고깔모자에 허세용 지팡이를 짚고 다니며 '파이팅 빙신!'을 외치는 모습은 전혀 예상하지 못했다는 말이다.
"뭐, 환경이 사람을 만든다잖아."
누가 어떻게 생각하든 자유라지만, 히오 입장에서는 억울할 만했다.
우선 국적이 달랐고 그렇기에 대화할 일이 없었다.
그리고 당시의 히오, 이현승은 절망 속에서 허우적거리며 방구석에 틀어박혀 있을 뿐이었으니.
지금과는 다른 게 당연한 것이다.
"…알겠다."
물론 그런 사실을 알 리 없는 다프네는 무럭무럭 자라나는 의심을 거두지 않았지만 말이다.
* * *
다프네와 함께 미궁의 중심을 향하며 다시금 확인한 사실이 있다.
아티팩트에 내재된 스킬에는 특성의 효과가 발동하지 않는다는 것.
게임 속의 경험으로 이미 알고 있던 사실이기는 했다만, 확실하게 해야지 않겠는가.
지팡이에 담긴 스킬, '암흑의 통찰'에는 이펙트가 화려해지는 '간지 없이는 못 살아!' 특성이 발동하지 않는다.
그러니 히든 특성의 페널티 또한 적용되지 않는다.
어찌 보면 당연한 말이었다. 특성이란, 개인이 가진 능력이지 아티팩트가 가진 능력이 아니었으니 말이다.
「'어둠 권위자의 지팡이' 스킬 - '암흑의 통찰'이 발동됩니다.」
스킬 발동과 동시에 지팡이로 빨려 들어가는 마력. 그것을 게걸스레 먹어 치운 지팡이에서 자체적인 마법이 발동되고 히오의 눈이 검게 물든다.
이윽고 주변이 환하게 밝혀진다. 물론 히오에게만 보이는 것이었다.
그 검게 물든 눈에 들어오는 것은 뚜렷한 목표 지점. 사방에 자욱한 어둠 속에서도 유난히 어두운, 정말로 심연 그 자체인 듯한 곳.
볼 것도 없이 저곳이 미궁의 중심이리라.
"이번에는 앞으로 쭉 가면 되겠다."
다프네에게 그리 말하고는 암흑의 통찰을 끄려고 했다.
지팡이가 먹어 치우는 마력의 양이 심상치 않았으니 말이다.
뭐, 그만큼의 값어치를 하는 스킬이기는 하다. 웬만한 상위 등급의 길잡이 스킬과 흡사하지 않은가.
어비스의 어둠을 비롯한 온갖 방해를 물리치고 길을 들여다볼 수 있었으니.
그렇게 마력의 흐름을 끊으려는 순간.
"...."
걷던 발걸음이 뚝 멎고 만다.
고개는 홱 돌아간 채 빳빳이 굳어 버렸고 팔을 비롯한 목덜미에는 소름이 오소소 돋아난다.
암흑의 통찰, 시야의 한구석에 어떤 괴이한 것이 보인 까닭이었다.
언제부터 있었는지 모를 그것은 마치 사람의 눈과도 같은 모양으로 정확하게 히오를 응시하고 있는 탓이었다.
「정신 공격이 감지되었습니다.」
「특성 - '간지 없이는 못 살아!'가 발동됩니다.」
허나 그것은 짧디 짧은 찰나.
히오가 고개를 돌렸을 때는 이미 사라지고 난 후였다.
착각은 아니다. 그것은 분명 자신을 들여다보고 있었고 히오 또한 그것의 존재를 알아차렸으니.
- 나는 심연을 들여다보았다. 심연 역시 나를 들여다보았다.
문득 떠오르는 것은 크뢰츠발트가 남긴 전언의 첫 문장.
그리고.
- 주의하십시오. 때론 들여다보지 않는 것이 좋을 때도 있습니다.
그 뒤를 잇는 것은 스킬, 암흑의 통찰 가장 마지막에 적혀 있던 한 줄의 경고.
돋아난 소름은 가라앉지 않고 멈춘 두 다리는 굳어 버린 채 꿈쩍도 하지 않는다.
아주 짧은 순간이었지만, 분명히 보았다.
가로로 길게 쭉 갈라진 거대한 눈.
무어라 불러야 할까. 심연의 눈이라고 하는 게 어울릴까.
생각이 꼬리에 꼬리를 물고 늘어진다. 암흑의 통찰을 끌 생각도 하지 못한 채 온통 검게 변한 눈으로 한 곳만을 응시한다.
단순 스치듯 눈을 마주친 것만으로 이만한 위화감이다.
그것만으로도 정신 공격을 방어하는 특성이 발동되었다.
그렇게 이어지는 생각은 더욱 속도를 더해 어느덧 제법 시간이 지난 기억까지 도달해 버린 것이다.
- 게이트에 휘말려 사라진 사람들 중 극소수만이 극적으로 돌아오곤 해요.
그것은 언젠가 어비스 1층의 공략에 실패했을 때, 지구에서 들었던 게이트 생환자에 대한 이야기.
- 그리고 그들은 백이면 백, 반드시 미쳐 버리죠. 대체 그곳에서 무엇을 본 것인지는 모르겠지만....
알 수 없는 공간에서 살아 돌아온 생존자들의 이야기.
그 결말은 모두 하나였다.
- 종내에는 살려 달라 부르짖으며 스스로 목숨을 끊어 버렸어요.
그들은 혹, 심연에 다녀온 것은 아닐까.
크뢰츠발트가 들여다보았다는, 여전히 싸움을 이어 나가고 있다는 그곳을 조금이나마 본 것은 아닐까.
그렇다면 방금 자신이 보았고 자신을 보았던 그것은....
「'어둠 권위자의 지팡이' 스킬 - '암흑의 통찰'이 해제됩니다.」
상념을 끊고 암흑의 통찰을 곧바로 해제한다. 게걸스레 빨려 들어가던 마력의 이동이 멈추고 눈동자를 전부 장악했던 검은 동공이 원래의 크기로 돌아왔으니.
"갑자기 왜, 뭔가 이변이 있나?"
다프네의 물음에 히오는 눈을 감고 고개를 가로젓는 수밖에 없었다.
"아니야. 빨리 가지. 공략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잖아."
"…알겠다.
섣불리 대답할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었으나 다만 조심스레 전달할 수 있는 것은.
"조금은… 긴장하면서 가자."
미궁의 끝이 쉽게 날 것 같지 않다는 근거 부족한 직감뿐이었다.
* * *
중심에 가까워질수록 어비스 몬스터의 숫자가 줄고 조금 더 강한 놈들이 나오기 시작했다.
뭐, 그래 봤자 미궁의 몬스터.
이전에 말했듯 미궁이 까다로운 이유는 길을 찾기가 어려우며 감각이 혼란한 와중에 튀어나오는 몬스터와 함정 때문이지 몬스터가 특출나게 강한 것은 아니었다.
그 대신이라고 해야 할까.
어둠은 더욱 진하게 눈을 가리고 다른 감각에도 혼란이 찾아온다. 길잡이의 스킬이 아니고서야 미궁의 중심으로 가는 것은 요원하다는 의미였으며 길잡이 역할을 맡은 이는 본인의 스킬을 더욱더 자주 사용해야 한다는 말이었다.
「'어둠 권위자의 지팡이' 스킬 - '암흑의 통찰'이 발동됩니다.」
암흑의 통찰을 발동하고 짙은 어둠 속을 훤히 들여다보며 길을 찾는다.
물론 길만 찾는 것은 아니었다. 아까의 그 눈.
마주하는 것만으로도 소름이 돋고 발걸음을 멈추게 했던 그것을 재차 찾아보려 했으나 어디로 갔는지 다시 나타나는 일은 없었다.
다만 어둠의 통찰을 사용할수록 이유 모를 위화감만이 커져 갈 뿐.
"이 정도면 중심까지 얼마 남지 않았겠어."
게임이 아닌 현실의 미궁은 처음 겪는 것이지만, 중심에 가까워졌다는 것이 느껴졌다.
어비스에 진입하고 고작 한나절 만에 이뤄낸 쾌거.
길을 똑바로 알고 망설임 없이 곧장 움직였기에 가능한 속도였다.
"끝까지 전투에는 참여하지 않는군. 지존천마."
그렇게 빠르게 이동한 만큼 전투는 거의 쉼 없이 이루어졌고, 히오는 단 한 번도 전투에 참여하지 않은 것이다.
"아니, 지존천마가 맞긴 한가?"
점차 크기를 불려가던 다프네의 의심이 입 밖으로 나와 버릴 정도로 말이다.
아무리 미궁의 몬스터를 다프네 혼자 처리 가능하다고 해도 전혀 나서지 않는 것은 너무 이상하지 않은가.
그나마 길은 맞는 듯 했기에 여기까지 온 것이지 그게 아니었다면 진작에 추궁했을 터였다.
"내 입으로 말하는 것도 이상한데 지존천마가 맞긴 해."
"그렇다면 증거를 보여."
이제 곧 중심에 다다른다.
중심에는 해당 층의 구슬이 있고 그것을 지키는 보스격인 몬스터가 있으니.
그곳에 도착하기 전에 확실히 해 두려는 것이었다.
"증거라면 이미 보였지 않나."
히오가 수호 기사의 패를 꺼내 들었다.
빙의자라면, 아이템의 정보를 볼 수 있는 빙의자라면 세상에 단 하나뿐인 이 훈장의 가치를 알아볼 수 있을 터.
하지만 다프네는 고개를 가로젓는다.
"세상엔 다양한 능력자가 있지. 나는 아이템의 정보를 속이는 능력자도 알고 있어. 공략이 우선이었기에 올 수밖에 없었지만, 네가 누군지, 어떤 이유로 온 것인지 알아야겠다는 말이야."
확인에 그리 어려운 것도 없는 일이다.
지존천마가 맞다면 증명해 보일 테고 그가 아니라면 어떤 식으로든 빠져나가려 하겠지.
"…그냥 빨리 공략이나 마무리 짓지?"
그래.
저런 식으로 말이다.
"처음엔 그저 가벼운 의심이었는데 이젠 정말로 이상하군. 네가 지존천마가 맞다면 그 힘을 내어 보이면 되지 않나? 왜 그렇게 감추려고 하는 거지?"
도무지 속을 알 수가 없는 것이다.
이상할 정도로 전투에서 물러난 채 구경만 했지 않은가. 한 손 거들어 줄 상황 정도야 셀 수도 없이 많았음에도.
마치 힘을 사용하지 못하는 사람처럼.
다프네가 활시위를 조금씩 당겨 나간다.
목표는 히오 파블렌코였다.
"억울하다면, 증명해라. 그뿐인 일이다."
그 위명에 걸맞은, 전해져 오는 최근 행보에 걸맞은 힘을 보여 주기만 한다면 그것이 곧 증명이었고 이건 사소한 해프닝이 될 뿐일 테니.
히오는 작게 한숨을 내쉬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지 뭐."
가볍게 들어 올리는 지팡이.
모여드는 마력과 움직이는 의지.
「스킬 - '청염(靑炎)'이 발동됩니다.」
사이한 어둠 속. 더욱 빛을 발하는 푸른 불꽃이 지팡이의 끝에서 하염없이 뿜어져 나온다.
히오의 의지에 따라 닿는 모든 것을 태워 버릴 수도, 그러지 않을 수도 있는 신비한 불꽃.
다프네라면 청염의 막대한 힘을 충분히 느낄 것이다.
어비스 속에서 넘실거리는 푸른 태양의 힘을 인정할 수밖에 없을 터였다.
"이건...."
예상대로 청염을 올려다보며 넋이 나간 듯 중얼거리는 다프네.
그녀의 손에서 힘이 조금씩 풀리고 팽팽하게 당겨진 활시위가 자연스레 느슨해진다.
"충분한가?"
최상위 스킬답게 빠르게 사라지는 마력.
그나마 아무것도 하지 않을 때는 마력 소모가 적은 청염이기에 망정이지.
최상위 스킬의 마력 소모량은 엄청난 것이다.
여기까지 오며 어둠의 통찰을 사용하느라 소모한 마력량도 상당했기에 히오는 최대한 빨리 청염을 해제할 생각뿐이었다.
그리고 다프네가 별다른 이견 없이 고개를 끄덕이려는 순간.
- □□□□-!
등 뒤에서 들려오는 낯선 소음.
듣는 순간 알 수 있었다. 이 세계의 생명체가 낼 수 있는 소음이 아니라는 것을.
어비스 지하 50층을 관리하는 관리자이자 층의 구슬을 지키는 보스 격 몬스터.
그것이 어떤 이유에서인지 구슬이 있는 방을 벗어나 다프네와 히오, 두 사람에게 다가오고 있는 것이었다.
이전까지와는 다른 존재감.
허나 크게 문제될 건 없었다.
중반부 어비스 몬스터이기는 해도, 그래봐야 미궁의 보스 몬스터.
미궁이 까다로운 것은 제한 시간 내에 길을 찾아 공략을 완료해야 하는 것 때문이지 몬스터의 강함이 이유는 아닌 까닭이었다.
하지만 다프네의 시선이 보스 몬스터가 아닌, 히오 파블렌코를 향한다면 제법 문제가 되어 버린다.
"이번엔 네가 나서라."
그대로 라플리시아를 소환 해제하며 뒤로 물러나기까지 해 버렸으니 상당히 난감해진 것이다.
"네가 정말 지존천마가 맞다면 어려울 것도 없겠지."
히오의 입가에 어색한 미소가 걸린다.
폭력을 종용하는 빙신이라니.
"…곤란한데."
상당히 곤란했다.
[히든 특성 : 폭력은 안 돼! (인내력 : 935 / 1000)]
90화 미궁 (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