포쾌 연우혁 (1)
-이것은 실제로 있었던 이야기이다.
'텍스트 게임 시작 문구치고는 너무 과한 것 아닌가?'
연우혁은 화면을 보며 그렇게 생각했다. 매번 봐도 텍스트 게임 주제에 참 거창한 시작이었다.
-대환국, 천덕 15년.
-한경(漢京) 동쪽으로 이십 리 떨어진 장원에서 살인사건이 벌어졌다.
-피해자 안 장주의 시체는 장원 외곽의 누각에서 발견되었으며, 피해자의 발걸음을 제외하고는 어떤 발걸음도 발견되지 않았다.
-근처 담장까지의 거리는 세 장하고도 두 척, 인근의 용의자들은 낭인 적면삼구(赤面三狗), 화산파의 철심철검(鐵心鐵劍)...
다 읽기도 전에 연우혁은 정답을 입력했다.
-사건이 해결되었습니다.
-명성이 오릅니다.
-선업으로 영기(靈氣)가 쌓입니다.
'너무 많이 했나?'
정답을 맞췄음에도 불구하고 연우혁의 얼굴은 밝지 못했다.
방금 나온 사건은 분명 몇 번이고 풀었던 사건이었던 것이다.
텍스트로만 주어지는 정보로, 무림에서 일어나는 무작위 사건의 범인을 맞추는 추리 게임 <대환국의 명포쾌>.
최첨단 게임이 즐비한 시대에 어떻게 보면 시대퇴행적인 면이 있었지만 연우혁은 이 게임을 정말 좋아했다.
무협지를 연상시키는 배경에, 온갖 다양하고 특이한 사건들과 트릭들. 포쾌가 되어서 용의자들의 발언을 체크하고 알리바이를 확인하며 진범을 찾는 재미는 다른 게임에서 줄 수 없는 재미였다.
문제는 너무 많이 한 탓에 이제 어떤 사건이 나와도 범인과 수법을 알 수 있게 됐다는 점이었다.
방금도 장원 외곽, 누각, 발걸음은 피해자 본인, 담벼락 등 이런 말만 듣고서 바로 범인을 맞추지 않았던가.
이제 게임에서 제공하는, 단서나 범인에게 숨겨진 정보를 추가로 파악하는 특수능력도 의미가 없을 정도였다.
'정말 아쉽군. 이런 게임이 다시 나올 거 같진 않은데.'
그리고 그 생각을 마지막으로, 연우혁의 의식은 끊겼다.
* * *
"연 포쾌. 듣고 있나?"
"예? 예."
연우혁은 무언가 홀린 것처럼 고개를 끄덕였다.
그 모습에 오 포두는 못마땅하다는 듯이 혀를 찼다.
"자네. 내 자네를 좋게 봐서 요패(腰牌)를 줬는데 벌써부터 이러면 어떡하나? 이 한경에서 포쾌를 하고 싶어 하는 놈들이 얼마나 많은지 아나?"
포두, 오충이 못마땅해 하는 것도 당연했다.
포쾌란 무엇인가?
판관의 명령을 받아 죄 지은 악인들을 체포하는 이들이 바로 포쾌였다.
위로는 천자를 받들어 섬기며 아래로는 민초를 위해 악인들을 체포해 명성을 떨치는 일이니 이 얼마나 선망 받는 일이란 말인가.
물론 전도유망한 젊은이들이 그것 때문에 포쾌를 하진 않았다.
악인을 잡으며 조금씩 들어오는 푼돈이 생각보다 쏠쏠했던 것이다.
일단 악인에게 당한 사람에게 일을 열심히 하겠다는 수고비로 몇 푼을 받고, 악인이 가족이 있다면 찾아가서 연좌하지 않는 대신 감사비로 몇 푼을 받으며, 또 거기까지 찾아온 만큼 배도 출출해졌으니 끼니 값으로 몇 푼을 받고, 생각해보니 신발도 좀 닳았을 테니 신발값도 받고...
얼핏 들으면 파렴치한 탐관오리 같았지만 근면 성실한 포쾌들은 탐관오리와는 거리가 멀었다. 만약 저기서 '전낭을 잃어버렸는데 전낭값도 물어내라'하면 탐관오리였지만 포쾌들은 그러지 않는 것이다.
하여간 이렇게 명예롭고 부수입도 있는 포쾌는 당연히 아무나 할 수 있는 게 아니었다. 게다가 여기는 나름 번영한 도시 아닌가. 포쾌를 하고 싶다는 젊은 놈들은 수두룩했다.
그런 만큼 오 포두가 연우혁에게 포쾌임을 증명하는 요패를 건네준 건 실로 파격적인 일처리라고 할 수 있었다.
대단한 가문 출신도 아니고, 이 도시 출신 토박이도 아닌 흔해 빠진 떠돌이 아닌가. 몇몇 포쾌들은 '오 포두의 먼 친척인가?'같은 말들을 하고 있을 정도였다.
하지만 연우혁은 오 포두의 먼 친척이 아니었고, 뇌물을 바친 것도 아니었다. 오 포두가 연우혁을 포쾌로 임명한 건 소문 때문이었다.
-참 신통하우. 말을 듣자마자 내가 잃어버린 촉대(燭臺)를 찾아냈다우. 그 청년에게는 신통력이 있는 게 틀림없수.
-정말 신기한 일입니다. 포두님. 작년 내내 뼈 빠지게 일해서 번 은자가 사라졌는데, 그 젊은 놈이 누가 가져갔는지 한 번에 맞추지 뭡니까? 감사한 일이긴 합니다만, 어떻게 맞춘 건지 아직도 궁금합니다. 설마 그 젊은 놈이 타심통(他心通)이라도 있는 걸까요?
'뛰어난 놈도 필요하긴 하지.'
오 포두는 기본적으로 친인척이나 혹은 은자로 성의를 보여줄 줄 아는 전도유망한 젊은이들을 포쾌로 뽑았지만, 이 전통적인 방식에도 문제가 있었다.
포두 밑의 포쾌들이 너무 무능하면 포두까지 같이 싸잡혀서 처벌받을 수 있는 것이다.
물론 도시에서 벌어지는 대부분의 일들은 발로 뛰고 곤봉을 휘두르면 대체로 해결되었지만 가끔씩 몇몇 일들은 그걸로도 해결되지 않는 법.
이 때 오래 해결하지 못하고 질질 끌면 재수 없을 경우 지부 어르신한테서 날벼락이 떨어지는 수가 있었다.
노련한 오 포두는 이럴 때를 대비해 똘똘한 놈 몇 명 정도는 밑에 있어야 한다는 걸 잘 알았다. 만약 그 똘똘한 놈이 신통력이라도 있다면 더더욱 믿음직스러우리라.
그래서 연우혁을 찾아가 요패를 주고 영광스러운 포쾌의 자리를 건네줬는데, 이놈이 첫 사건부터 비실대며 마치 홀린 것마냥 멍하니 있자 살짝 후회가 되었다.
'소문을 너무 믿었나?'
한 명의 입에서 나오는 소문은 믿기 힘들어도 여러 명한테서 나오는 소문은 나름 믿을 만하다고 생각했는데 벌써 이러다니.
물론 포쾌로서 맡게 된 첫 사건이 너무 큰 사건이긴 했다. 무려 장원의 장주나 되는 사람이 칼에 찔려 죽은 사건이었으니까.
하지만 포쾌라면 배짱이 두둑해야 하지 않겠는가.
오 포두는 엄한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
"자네. 북자다점(北子茶店)의 찻잎 찌는 마 파파가 잃어버린 촉대를 찾아준 거 기억하나?"
* * *
"...!"
연우혁은 눈만 깜박였다.
앞에서 오 포두가 뭐라고 떠들었지만 귀에 들어오지 않았다.
당연한 일이었다. 방금까지만 해도 추리게임을 하고 있었는데, 눈 감았다 뜨니 처음 보는 무림의 포쾌가 되어 있었으니.
허리춤에 차고 있는 요패나 곤봉도, 가볍게 걸친 경장도, 주변을 스치고 지나가는 물지게 진 일꾼도, 그 일꾼에게 술잔을 권하며 목청껏 외치는 점포의 상인도 다 현실감이 없게 느껴졌다.
"자네. 북자다점의 찻잎 찌는 마 파파가 잃어버린 촉대를 찾아준 거 기억하나?"
"예?"
"그래. 기억하나보군. 그 때도 신통력을 써서 찾지 않았던가? 지금도 자네의 신통력이 꼭 필요한 때네. 정신을 차리게! 포쾌는 배짱이 두둑해야 한단 말일세."
연우혁은 그제야 자신이 포쾌가 됐고, 눈앞의 건장한 근육질의 중늙은이는 본인의 상사인 포두라는 걸 떠올렸다. 마치 원래부터 알고 있었던 것처럼 자연스러웠다.
집도 절도 없는 떠돌이 출신에, 주변의 몇몇 사건들을 해결해준 것으로 운 좋게 포쾌가 됐고...
...지금이 바로 포쾌가 된 다음 처음으로 맡는 사건이었다.
실패하면 바로 쫓겨날지도 모르는 상황. 연우혁은 현재 상황을 빠르게 파악했다.
갑자기 전혀 모르는 세계에 떨어진 것도 황당했지만 그렇다고 맨몸으로 쫓겨날 수는 없었다. 포쾌로 녹봉을 받고 따뜻한 집에서 머무는 것과, 아무것도 없는 부랑자로 길가에서 노숙하는 건 천지차이였으니까.
'방금 뭐라고 했지?'
북자다점, 찻잎 찌는 마 파파, 잃어버린 촉대...
연우혁의 머릿속에서 언젠가 해결한 적 있었던 사건이 번뜩였다.
"기억납니다."
"응?"
"마 파파가 잃어버린 촉대 말입니다. 어떻게 해결했는지 기억하고 있습니다."
"오. 그런가?"
오 포두는 반색했다.
반신반의하고 있었는데, 신통력으로 어떻게 해결했는지 기억하고 있다는 걸 보니 이번에는 자신이 있는 모양이었다.
사실 신통력이나 술법을 다루는 이들은 변덕스럽고 괴팍한 부분들이 많아 어제까지는 멀쩡하게 점을 치더라도 오늘은 갑자기 치지 못하겠다고 뻗대는 놈들도 수두룩했다.
오 포두가 보기에는 사기꾼들도 비슷한 핑계를 댈 것 같았지만 어쩌겠는가. 뛰어난 재주를 가진 놈들은 언제나 대접을 받는 법이었다.
"그 날 등잔에는 물기가 없었습니다."
"뭐라고 했나?"
"등잔에 물기가 없었다고 했습니다."
"...??"
오 포두는 이 젊은 포쾌가 중압감에 귀신이라도 들렸나 싶어서 쳐다보았지만 연우혁은 진지하게 말했다.
"마 파파가 쓰던 등잔의 구조를 아십니까? 윗잔에는 기름이, 아랫잔에는 찬물이 들어갑니다."
등잔은 보통 기름을 채우고 그 위에 심지를 넣어 불을 붙이는 식이었는데, 이 때 기름을 채운 잔 밑에 이중으로 잔을 하나 더 만든 다음 찬물을 채워서 기름의 온도를 조절하곤 했다.
이럴 경우 귀한 기름을 아낄 수 있는 것이다.
"마 파파는 밤에도 찻잎을 손질하는 사람인만큼 등잔에 불을 켜놓고 일을 하는 게 다반사였습니다. 그런데 조는 사이 촉대가 사라졌고, 심지어 남은 등잔에는 찬물이 없었다니. 이상하지 않습니까?"
"실로 이상하군!"
오 포두는 자신도 모르게 젊은 포쾌의 말에 집중하게 되었다. 이 젊은 포쾌의 화술은 오 포두도 마치 그 자리에 있었던 것처럼 느끼게 만들었다.
"그 이유는 미리 찬물을 빼놓고 기름의 양을 줄여놓은 사람이 있기 때문입니다. 등잔이 꺼지면 안이 어두워지니 들어가서 쉽게 촉대를 가지고 나올 수 있지요. 마 파파는 그 날 밤 보초를 섰던 하인을 의심했지만, 저는 아침에 등잔을 관리했던 하인을 의심했습니다. 등잔에 수작을 부린 사람이 범인일 가능성이 높으니 말입니다."
"대단해, 대단해!"
오 포두는 자신도 모르게 길거리에서 크게 박수를 쳤다.
"혹시 그게 스님들이 말하는 육신통(六神通)인가?"
"예? 아닙니다. 그냥..."
"아. 물론 아니겠지! 내가 불법에 대해 잘 알지는 못하지만 육신통은 정말 대단한 경지일 테니까. 하지만 그 발끝만 따라가도 훌륭한 건 마찬가질세. 잠깐. 혹시 불법이 아니라 도술인가?"
"그건 저도 잘..."
"타고난 신통력인가보군. 요술(妖術)은 아니라 믿네. 하긴 그런 술법이었다면 벌써 몇 명은 죽어나갔겠지."
오 포두는 연우혁의 등을 두드렸다. 나름 단련된 내공을 갖고 있는 포두의 손길에 연우혁이 비틀거렸다.
"사실 이번 일은 어떻게든 핑계를 대서 한 발 빼려고 생각했었네. 아무래도 장원의 장주씩이나 되는 사람이 죽은 만큼 나 같은 포두는 잘못 건드렸다가는 훅 날아갈 수 있거든. 하지만 자네의 신통한 재주를 보니 생각이 바뀌는군."
"과찬이십니다."
"아니야. 정말 뛰어난 재주일세. 뭐라도 떠오르는 게 있다면 나한테 편히 말해주게나."
오 포두는 만족스럽게 수염을 쓰다듬었다.
멍청한 부하들만 두고서 헛소리를 지껄일 다른 포두들을 생각하니, 벌써 이 포쾌를 뽑은 게 뿌듯할 지경이었다.
포쾌 연우혁 (2)
'통한 건가?'
연우혁의 등에서 식은땀이 흘러내렸다.
방금 마 파파의 잃어버린 촉대 사건을 어떻게 해결했는지 숨 한 번 쉬지 않고 말할 수 있었던 건, 연우혁이 실제로 풀어본 적 있던 사건이어서였다.
처음 해결했을 때 얼마나 고생을 했던가.
'등잔 밑에 물기가 없는 게 단서인 걸 어떻게 알아.'
그 때는 그렇게 욕을 했었는데 이게 이렇게 도움이 될 줄이야.
"뭐하나? 안 따라오고."
오 포두가 기대 가득한 눈빛으로 연우혁을 쳐다보았다.
기억 속에서 오 포두는 이렇게 자상한 사람이 아니었다. 뇌물을 주거나 친인척인 포쾌여도 말을 안 듣거나 일처리가 시원찮으면 욕설 섞인 호통을 내뱉거나 손찌검을 하는 사람이었다.
그런데 이렇게 기대 가득한 눈빛을 보내다니.
눈앞의 위기는 벗어났지만 연우혁으로서는 긴장이 될 수밖에 없었다.
'부디, 내가 아는 사건이 나오길.'
* * *
동쪽의 안가장은 견사(繭絲) 장사로 크게 번 안 장주의 장원으로, 장주의 말에 따르면 가히 도원경을 연상시키는 장원이라고 했다.
"물론 그 정도는 아닐세. 손님에게 싸구려 술을 대접하더군. 그래서야 쓰나."
오 포두는 세 달 전 장주가 싸구려 술을 대접했던 게 아직도 가슴에 응어리로 맺혀 있었는지 볼멘소리를 내뱉었다.
물론 도시의 유력자들은 저잣거리의 평민들처럼 포두에게 굽신거릴 필요가 없다지만, 그렇다고 해서 싸구려 술을 대접할 것까지는 없지 않은가.
"안 장주께서 혹시 원한을 사신 적은 없으십니까?"
"원한?"
오 포두는 말하기 전에 주변을 한 번 두리번거리며 확인하더니 목소리를 낮추고 말했다.
"사실 장주는 견사 장사뿐만 아니라 염왕채(閻王債)로도 크게 한 몫 벌었네."
"염왕채 말입니까?"
염라에게 진 빚, 즉 고리대금을 말하는 일이었다.
불법은 아니었지만 도시에서 어깨에 힘 주고 거드름피우는 유력자들이 당당하게 밝히고 다닐 만한 일도 아니었다. 애초에 염왕채를 전문적으로 빌려주는 곳은 사파나 흑도라고 불리는 이들 정도였다.
"그래. 물론 장주 본인이 직접 한 건 아니고, 장원의 아랫사람들을 시켜서 빌려주긴 했다지만... 알 사람들은 다 알았지."
"빚을 진 사람이 많았습니까?"
"죽은 사람이 몇 있지. 친족들은 죽이고 싶을 테고."
연우혁은 고개를 끄덕였다.
현실은 앉아 있으면 편하게 정보가 굴러오지 않았다. 정보가 필요하면 직접 묻고 발로 뛰어야 했다.
아직 어떤 사건인지 파악하지 못한 만큼 최대한 물어볼 수밖에.
그런데 그런 태도를 오 포두는 더욱 좋게 본 모양이었다. 만족스럽게 고개를 끄덕이며 웃음지었다.
"질문이 아주 날카롭군. 내 조카 놈은 장주가 넘어진 게 아니냐는 헛소리나 하던데. 그래. 누군가 죽었으면 의심가는 놈부터 찾아야 하지."
"아닙니다. 과찬의 말씀이십니다."
물론 아직 적응이 덜 된 연우혁 입장에서 오 포두의 칭찬은 부담 그 자체였다. 이번 사건에서 어떤 모습을 보여줄 지 본인도 모르는데 긴장을 풀 수가 없었던 것이다.
"도착했군. 저기가 장주의 장원일세."
오 포두는 자신만만한 태도로 장원의 하인들을 불렀다.
그러나 그 태도는 얼마 가지 못했다.
장원 안에는 이미 먼저 온 선객들이 있었던 것이다.
* * *
사 포두의 성씨는 사(謝)를 썼지만 인상을 보면 차라리 사(巳, 뱀 사)가 어울릴 것 같았다.
허리춤에는 철편(鐵鞭)을 차고, 붉은색 가죽신을 뽐내듯이 앞뒤로 반복해 왔다 갔다 하며 하인들을 노려보는 모습이 마치 먹이를 노리는 뱀 같았다.
물론 오 포두는 상대가 뱀이든 용이든 아랑곳하지 않았다.
"사가 놈아, 여기는 뭔 낯짝으로 얼쩡거리는 거냐! 썩 꺼지지 못하겠느냐? 당장 꺼지지 않으면 이 어르신께서 네놈의 낯짝을 두들겨 주마!"
오 포두의 고함에는 은은한 내공이 담겨 있었다. 연우혁은 포두가 무공을 익혔다는 걸 깨닫고 놀랐다.
중죄를 짓는 이들 중에 무림인들이 많은 만큼 포두나 포쾌가 무공을 익히는 건 그리 놀라운 일이 아니었다.
하지만 포두나 포쾌의 무공이 뛰어난 건 놀라운 일이 맞았다.
하루의 대부분을 무공에 쏟아 붓는 무림인들과 달리 대부분을 공무에 시달리는 포두나 포쾌는 무공을 수련할 시간 자체가 부족했으니까.
게다가 환경은 또 어떤가.
어렸을 때부터 벌모세수를 통해 근골과 혈맥을 단련하고 각종 영약으로 내공을 충만하게 하는 명문 무림세가의 자제들과 포두, 포쾌는 그 시작부터가 달랐다.
그런 점에서 오 포두의 실력은 연우혁을 놀라게 만들기에 충분했다. 마치 짐승이나 맹수의 그것처럼 몸을 저릿저릿하게 만드는 함성이었던 것이다.
사 포두는 무공이 한 수 아래였는지 순간 움찔하며 눌린 기세를 보였다. 그러나 이내 정신을 차리고 킬킬 비웃음을 얼굴에 드러냈다. 그 자신감 있는 태도에 오 포두도 움찔했다.
무언가 믿는 구석이 없다면 포두들끼리 서로 구역을 침범하는 일은 드물었다. 포두의 구역이란 자존심이나 마찬가지라 함부로 건드렸다가는 칼부림도 서슴지 않았다.
"판관 나으리께서 명령을 내리셨다!"
"뭐라?"
"포두란 자가 사건 하나 쉽게 해결하지 못하고 꾸물거리고 있으니 판관께서도 화가 날 만 하지."
오 포두의 턱 옆으로 굵은 힘줄이 솟았다. 그만큼 세게 이를 악문 것이다.
이 도시 주변의 사법과 관련된 대소사들을 모두 관장하는 판관에게, 살인 사건이 오래 끌리는 건 자신의 체면과도 상관이 있는 문제였다. 시간이 끌린다면 재촉을 하는 것도 당연했다.
하지만 오 포두는 그리 시간을 끌지도 않았고 최근에 커다란 실수를 저지른 적도 없었다. 판관이 오 포두의 체면도 생각하지 않고 다른 포두를 부를 사람은 아니었다.
결론은 하나.
저 사가 놈이 판관 앞에 가서 아첨을 떤 게 분명했다. 오 포두는 해결할 능력이 없어서 질질 끄는데, 자신은 해결할 수 있다고.
'치열하군 정말.'
연우혁은 옆에서 덩그러니 서서 포두 사이의 치열한 싸움을 지켜보고 있었다. 칼이 휘둘러지지도 피가 튀지도 않았지만, 서로 지독할 정도로 진심이었다.
이럴 때 새로 들어온 포쾌가 할 수 있는 건 하나밖에 없었다. 가만히 서서 시체마냥 있는 것.
"그래서 네놈은 해결할 자신이 있다는 것이냐?"
"물론이지! 자. 지켜봐라. 여봐라. 귀빈들은 모시고 왔느냐?"
"예!"
사 포두 밑에서 일하는 포쾌들이 오 포두의 눈치를 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알고 보니 먼저 와서 여러 준비를 한 모양이었다.
"모시고 들어 오거라! 하하! 내가 이 살인에 엮인 내막을 아주 시원하게 풀어드리겠다!"
* * *
장원에서 일어난 살인 사건.
피해자 안 장주의 시체는 장원 외곽의 누각에서 발견되었고, 피해자의 발걸음을 제외하고서는 어떤 발걸음도 발견되지 않았다.
시체에 남은 흔적은 하나. 등에 깊숙이 박힌 단도뿐이었다.
장주의 얼굴은 평온했고 어떤 다른 상처도 없었기에 이걸 본 몇몇 포쾌들은 안 장주가 귀신에 홀렸다느니, 요괴가 술법을 써서 단도를 날렸다느니 괴상한 추측을 해댔다.
그러나 사 포두는 이걸 보자마자 이게 어떻게 된 영문인지 알아차렸다.
장원 외곽의 누각에서 시체가 발견됐는데 근처 부드러운 흙에는 피해자의 발걸음 말고는 어떤 발걸음도 없었다?
이런 묘기를 보여줄 수 있는 건 귀신도 요괴도 아니었다. 귀신이었다면 장주의 얼굴이 공포에 질려 있어야 하고 요괴였다면 자신의 광포함을 이기지 못하고 다른 상처를 입혔을 것이다.
범인은 바로 무공의 고수였다. 그것도 꽤 높은 경지의.
멀리 떨어진 담벼락을 디디고 경공을 펼쳐 누각 위로 착지한 다음 일격에 장주를 죽이고, 다시 경공을 펼쳐 담벼락을 넘어 빠져나온 것이다.
"무슨 허튼 소리를 지껄이느냐! 거리가 얼마나 되는데!"
"하. 오 포두. 오 포두. 일류의 무인이라면, 그 중에서 경신법(輕身法)에 뛰어난 무인이라면. 그래도 불가능할 것 같나?"
오 포두는 신음소리를 내며 입을 다물었다.
확실히 일류의 경지에 도달한 무인이라면 이야기가 달라졌던 것이다.
만약 일류의 경지에 도달한 무인이, 그것도 상승의 경공과 신법을 깊게 수련했다면?
그런 자라면 담벼락을 박차고 날아올라 누각까지 도착했을지도 몰랐다.
상대가 입을 다물자 사 포두는 기세가 한층 올라 히죽 웃었다.
"자. 이제 귀빈들이 들어오시니 아까처럼 소리 지르는 일은 피하도록 하는 게 좋을 거다. 하찮은 무공을 보면 귀빈들의 심기가 불편해지실 수 있으니!"
포쾌들이 굽신거리며 손님을 모시고 들어오자 오 포두는 깜짝 놀랐다.
귀빈이라고 지껄이길래 대체 어느 대인을 모셨나 했는데, 놀랍게도 안뜰로 들어오는 자들은 무림인이었다.
'철심철검(鐵心鐵劍) 평일원!'
검의 손잡이에 새겨진 작은 매화문양을 보자 오 포두는 가슴이 덜컥 내려앉는 것을 느꼈다. 상대는 무려 화산파 출신의 무림인이었던 것이다.
대부분의 무림인들은 관을 조심하며 어지간해서는 대놓고 거역하려고 하지 않지만, 무림인들 중에서도 명문세가나 거대 문파는 이야기가 달라졌다. 이들의 권세는 포두 하나 정도는 쉽게 짓누를 만큼 강력했다.
그뿐만이 아니었다. 권세를 쓰지 않아도 저 평일원이라는 무인은 이 자리를 시산혈해로 만들 수 있었다.
무려 절정의 경지에 도달한 무인!
화산파 내에서도 저 정도 되는 고수는 몇 없었다.
그 뒤에 들어오는 무림인은 평일원보다는 명성이 떨어졌지만 악명이 만만찮았다.
적면삼구(赤面三狗) 중 첫째 정일. 객점에서 투패만 벌어지면 끼었다가 잃기라도 하면 온갖 행패를 부리는 자로 인근에는 악명이 드높았다.
무공도 만만치 않은데다가 다른 형제들의 손속도 악랄해 당한 흑도의 무림인들도 이를 갈 뿐 쉽게 건드리지 못하는 놈이었다.
마지막으로 들어온 것은 삼절객(三絶客) 담풍호였다.
이들 중 명성이나 악명으로 따지면 가장 뒤떨어졌지만 괴팍하기로는 만만치 않은 인물이었다.
비파를 타며 술잔을 기울이다가도 심사가 뒤틀리면 망설이지 않고 검을 뽑아서 찌르는데, 대체 무슨 곡절로 검을 찌르는지 알 수가 없어 사람들이 이를 두려워했다.
"빈객들께서 이 하찮은 사 모의 간절한 부탁을 들어주시니, 감사하기 그지없습니다."
사 포두는 손님들이 모두 들어오자 포권을 하며 입을 열었다.
"감히 제가 이렇게 빈객들을 부른 까닭은, 어느 천인공노할 자가 안 장주를 죽이고 도망쳤기 때문입니다!"
자리에 있는 무림인들은 별다른 변화를 보이지 않았다. 묶여 있던 하인들은 고개를 슬쩍 들어 올리며 무림인들을 구경했다.
"평 대협. 대협을 이 자리에 부른 것은 백 번 사죄하겠습니다. 하지만..."
"됐네. 장주를 죽인 게 무림인인가?"
평일원은 냉정하게 대꾸했다. 태연한 걸 보니 연우혁은 사 포두가 미리 설명한 게 아닌가 의심이 들었다. 저 정도 되는 사람을 부르면서 그냥 오라고 하진 않았을 것 같았다.
"그렇습니다!"
"난, 난 아니야!"
정일은 얼굴을 붉게 물들이며 외쳤다.
"요 포두 놈. 감히 내게 누명을..."
"적면삼구는 장주를 죽일 수 없었네. 장주가 죽은 날 내 일을 돕고 있었으니."
"맞, 맞아!"
오 포두는 믿기 힘들다는 듯이 되물었다.
"아니, 적면삼구 네 녀석이 화산파의 일을?"
"..."
정일은 부끄러웠는지 입을 꾹 다물었다. 평일원은 귀찮다는 듯이 손을 내저으며 설명했다.
"하여간 정일은 아니네."
"그렇습니다. 평 대협. 자. 다들 들어보십시오. 철심철검 평 대협께서는 감히 살인을 저지를 분이 아니십니다. 그리고 정일은 평 대협의 일을 돕고 있었고요. 그렇다면..."
자리에 있던 이들의 시선이 담풍호에게 쏠렸다. 평일원은 도포의 옷자락을 옆으로 치우며 검으로 손을 뻗었다.
오 포두는 그제야 사 포두의 속셈을 알 수 있었다.
애초에 삼절객 담풍호를 범인이라고 확신하고 다른 무림인들에게 부탁해 이 자리를 만든 것이다. 혼자서 삼절객을 잡으려고 했다가는 비명횡사할 수도 있으니.
오 포두는 가슴이 쓰라렸다. 사 포두의 추측이 너무나도 완벽했던 것이다. 자신이 멍청한 조카 놈을 보살피는 동안 사 포두는 독사처럼 그의 발꿈치를 물어버렸다.
"내가 범인이란 말인가?"
"꼭 그렇다는 건 아닙니다. 죄가 없으시다면 판관 나으리께서도 풀어주실 겁니다."
"퍽이나 그렇겠군."
삼절객 담풍호는 그냥 잡혀가지 않겠다는 듯이 기세를 올렸다. 철심철검의 기세와 맞부딪치자 장원 안이 살기로 팽팽해졌다.
한바탕 피바람이 불 것 같자 연우혁은 더 이상 기다릴 수가 없었다.
"그러실 필요 없습니다."
"?!" "!"
"이 장원에 총관이 있습니까?"
"있... 는데."
오 포두는 당황해서 말도 제대로 하지 못했다.
무림인들이 칼을 휘두르기 직전인 상황에 한낱 신임 포쾌가 무슨 생각으로 끼어든단 말인가?
"그 자가 범인입니다."
"...!!!!!"
포쾌 연우혁 (3)
"허튼 소리!"
가장 먼저 고함을 내지른 건 사 포두였다. 뱀처럼 번들거리는 눈으로 연우혁을 노려보며 살기를 드러냈다.
"감히 이 자리가 어디라고 네깟 애송이 놈이 지껄이느냐? 혓바닥을 뽑히고 싶은 것이냐?"
"정신이 나간 포쾌인가?"
평일원마저 무심하게 말을 얹었다. 오 포두도 당혹스러운 눈으로 연우혁을 쳐다보고 있었다. 부하가 지금 같은 상황에 무모하게 뛰어들 거라고는 생각하지도 못했던 것이다.
'대체 무슨 생각으로...'
부하를 쳐다보던 오 포두는 멈칫했다.
이런 상황인데도 연우혁의 얼굴이 표정 변화 하나 없이 냉정했던 것이다.
그걸 보자 여기 오기 전에 연우혁이 보여준 신통한 능력들이 생각났다.
설마 이번에도?
'믿겠다. 연 포쾌! 아까처럼 신통한 재주를 보여다오!'
* * *
'젠장. 실수했다.'
연우혁은 등에서 식은땀이 흘러내리는 것을 느꼈다. 지금 압박감에 표정이 흔들리지 않도록 필사적으로 정신줄을 붙잡고 있었다.
표정이 흔들리는 순간 더 위험해진다는 확신이 들었던 것이다.
장원 외곽의 누각에서 발견된 시체, 피해자의 것밖에 없는 발걸음, 등에 깊숙이 박힌 단도, 주변에 있던 무림인들.
이걸 직접 듣는 순간 연우혁은 바로 모든 걸 알아차렸다.
잃어버린 촉대도 연우혁이 전에 해결했던 사건과 완전히 일치했던 것처럼, 장주의 살인도 연우혁이 전에 해결했던 사건과 완전히 일치했던 것이다.
문제는 현실이 범인의 이름을 말한다고 그냥 끝나는 게 아니라는 점이었다. 다른 사람들이 '무슨 소리냐'하고 콧방귀를 뀌면 진실은 아무 의미가 없어졌다. 진실을 알더라도 남들을 설득해야 진짜 진실이 됐다.
'살기 때문에...'
연우혁은 후회했다.
당장이라도 피바람이 불 것 같자 마음이 조급해져서 범인부터 지목하는 실수를 저질렀다.
하지만 이렇게 된 이상 엎지른 물을 주워 담을 순 없었다.
'기호지세다.'
연우혁은 목청을 가다듬고 최대한 오만하게 주변을 둘러보았다. 이런 상황에서 건방지게 구는 포쾌의 모습에 주변은 한 번 더 술렁였다. 마치 목숨을 내놓은 광인으로 보였던 것이다.
'내게 신통력이 있다고 믿게 해야 한다.'
이 세계에는 무공뿐만 아니라 특이한 신통력들도 있었다. 오 포두가 육신통이니 도술이니 이야기를 한 걸 보면 알 수 있었다.
아무리 일개 포쾌라 하더라도 그런 능력이 있다고 알려지면 주변에서 그 말을 무시하기 힘들 터.
그렇다면 어떻게?
'설득하는 거다!'
"제 목을 베든, 혀를 뽑든, 제가 한 말씀 올린 다음에 해도 늦지 않을 겁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어느 자리라고 감히 궤변을..."
"됐네. 들어나 보도록 하지."
평일원은 흥미가 생겼는지 손을 뻗어 사 포두의 입을 막았다. 이 자리에서 권세로든 무공으로든 가장 무게감이 있는 화산파의 무인이 못을 박자 다들 입을 다물었다.
"먼저 담벼락 위를 디디고 경공을 펼쳤다는 사 포두님의 고견에 대해 말씀드리겠습니다. 아무리 일류의 무인이라 하더라도, 저만한 거리를 발걸음 하나 없이 날아드는 게 쉬운 일이겠습니까? 정 대협. 정 대협께서는 자신이 있으십니까?"
갑자기 자신의 이름이 불러지자 정일은 당황했다.
"길, 길고 짧은 것은 대어 보아야 알지 않겠느냐? 하지만 저 정도라면..."
"철심철검 대협께 묻겠습니다. 대협께서는 자신이 있으십니까?"
평일원은 잠깐 생각하더니 대답했다.
"열에 한 번은 실패할지도 모르겠군."
"아, 아니. 대협?!"
사 포두가 당황했다. 평일원 정도의 고수가 자신 없다고 할 줄은 몰랐던 것이다.
정일도 당황했다. 정일은 눈치를 보더니 입을 다물었다.
"보십시오. 철심철검 대협도 열에 한 번은 실패할지도 모른다고 하셨습니다. 그럼 대협보다 경지가 낮은 다른 무림인들은 얼마나 어렵겠습니까? 그런 방법을 믿고 장주 어르신을 죽이러 왔겠습니까?"
"그... 그건, 그건 평 대협의 이야기다! 삼절객이 특수한 상승의 경신법을 익혔을 수도 있지!"
연우혁은 '그걸 주장하는 쪽이 증명해야 하지 않습니까'라고 하지 않았다. 어차피 쓸데없는 입씨름만 하게 될 걸 알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대신 다른 쪽을 찌르고 들어갔다.
"대협! 감히 여쭙겠습니다. 누각으로 날아서 들어가려면, 아무리 뛰어난 경공이라 하더라도 담벼락 위를 밟아야 하지 않습니까?"
"그렇지."
"담벼락 위를 밟을 때, 발바닥에서 기운을 뿜어내야 하지 않습니까?"
"보통 용천혈(涌泉穴)에서 내공을 발(發)해야 하지."
"그러면 담벼락이 무사할 수 있습니까?"
평일원은 연우혁이 무슨 이야기를 하는지 알아차린 모양이었다. 귀찮다는 태도를 버리고 살짝 흥미로워하는 시선을 던졌다.
"불가!"
"알았다!"
오 포두는 자신도 모르게 끼어들었다. 뒤늦게 끼어든 오 포두는 민망해하며 평일원에게 사죄의 뜻을 밝혔다. 평일원은 신경 쓰지 말라는 듯이 손을 내저었다.
"예. 그렇습니다. 오 포두님께서는 이미 다 알고 계십니다."
"???"
갑작스러운 연우혁의 말에 오 포두는 당황했다.
아직 어떻게 된 건지도 모르겠는데 갑자기 이 포쾌 놈이 무슨 소리를 하나 싶었다.
"허나 포두님께서는 제게도 기회를 주셨습니다. 최선을 다해 설명해보도록 하겠습니다."
오 포두의 입가에 잔잔한 미소가 걸렸다. 부하를 제대로 골랐다는 만족감이 진하게 담긴 미소였다.
"아무리 경공이 뛰어나다 하더라도 담벼락 위를 차고 날아가려면 담벼락 위에 부서진 흔적이 있어야 합니다. 하지만 그런 흔적이 있습니까?"
자리에 있던 포두들과 포쾌들, 그리고 적면삼구의 정일도 담벼락으로 우르르 달려갔다.
연우혁은 그 모습을 보자 갑자기 불안해졌다.
혹시 연우혁이 모르는 사이 누군가 담벼락에 부딪치기라도 했다면? 날짐승이 오고 가기라도 했다면?
바로 그 순간, 연우혁은 약한 두통을 느꼈다. 동시에 눈앞에 담벼락의 윗모습이 선명하게 들어왔다.
멀리서 보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마치 가까이 얼굴을 들이대고 세세히 관찰하는 것마냥 정보가 몰려왔다. 연우혁은 숨을 거칠게 토해내며 고개를 들었다.
'이게 대체!?'
"없습니다! 아무런 흔적도 없어요!"
"다시 찾아봐라!"
"그, 그렇지만..."
"됐네. 그만하게."
평일원은 사 포두의 발악을 멈추게 만들었다.
범인을 잡고 싶은 것이었지 무고한 양민에게 누명을 씌우고 싶은 게 아니었다.
"계속 들어보도록 하지. 담벼락으로 넘어온 게 아니라는 건 이해했네. 그런데 그게 왜 총관이 범인이라는 게 되는가?"
연우혁은 혼란스러워하다가 강철 같은 목소리에 정신을 차렸다. 지금 정신을 놓고 있을 때가 아니었다.
"...마저 설명 드리겠습니다. 여러분, 혹시 누각으로 이어진 장주 어르신의 발자국을 확인해보셨습니까?"
모두의 시선이 발자국으로 쏠렸다.
연우혁은 발자국의 너비와 깊이가 원래 얼마였는지 기억을 더듬었다. 그 순간 방금 느꼈던 두통이 다시 찾아오더니 발자국의 너비와 깊이가 머릿속으로 들어왔다.
"장주 어르신의 신발은 위아래로 여덟 치가 살짝 넘습니다. 하지만 저 발자국은 가볍게 봐도 아홉 치를 넘깁니다. 또한 장주 어르신의 몸은 그리 살찌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저 발자국은 세 치 가까이 깊숙이 파여 있습니다. 그게 무엇을 의미하겠습니까?"
"장주가 중추공(重錘功)을 익혔나?"
정일은 무심코 중얼거렸다. 평일원은 짜증스럽게 적면삼구의 첫째를 노려보았다. 정일은 기세가 죽어 눈치를 봤다.
"누군가 장주의 발걸음 위로 다시 한 번 걸어간 거군!"
평일원은 오늘 처음으로 높은 목소리를 냈다.
연우혁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습니다."
진실은 다음과 같았다.
장원에서 오랫동안 일한 총관이 장주의 대우에 불만을 가지고 살의를 품은 것이다.
장주만 죽으면 장원의 여러 재산들은 총관이 떡 주무르듯 주무를 수 있었으니...
물론 아랫사람이 윗사람을 죽이는 건 자칫했다가는 극형에 처할 일이었다. 총관은 오랫동안 준비하고 또 준비했다.
다행히 총관이라는 위치는 장주에게 접근하기 쉬운 위치였다. 게다가 장주는 성질이 난폭해 누각에서 머무를 때는 별다른 부름 없이는 하인들도 얼씬하지 않았다.
잘 갈린 단도를 품고 장주가 남긴 발자국을 따라 누각으로, 대담하게, 그리고 푹!
연우혁은 장주의 등을 찌르는 시늉을 했다. 총관은 얼굴이 푸르게 변하다 못해 보랏빛으로 변해있었다. 자리에 있던 사람은 홀린 듯 연우혁의 입만을 쳐다보았다.
"이렇게 된 겁니다."
"허튼 소리! 허튼 소리입니다!!! 제가 어르신을 무엇하러 죽이겠습니까??!"
처음에 총관을 지목했을 때는 여유롭게 가만히 있었지만, 이번에는 총관도 발악하듯 외쳤다. 아까 사 포두보다 몇 배는 절박한 목소리였다.
"그깟 족적 길이 때문에 제가 어르신을 죽였다니요!? 말도 안 되는 소리입니다!"
"발을 대보면 아실 겁니다. 이 장원에서 총관 말고는 저만한 발자국이 나오지 않을 겁니다."
"허튼 소리! 네깟 포쾌 놈이 뭘 안다고!"
평일원은 흥미로워하며 연우혁을 쳐다보았다.
이 포쾌의 재주는 실로 놀라웠다.
단순히 머리가 비상한 게 아니라, 무언가 신통력이 있는 것 같았다.
그렇지 않다면 방금 막 도착한 포쾌가 담벼락의 위는 어떻게 확인했으며 흙 위에 남긴 족적의 너비와 깊이는 어떻게 쟀단 말인가?
게다가 이 장원에서 일하는 자들의 발 중 맞는 건 총관밖에 없을 거라니. 마치 이미 대보기라도 한 것 같았다.
무슨 신선이 이 주변의 귀신을 불러 어떻게 된 것인지 듣고 온 것처럼 설명을 하니...
내버려뒀어도 사람들은 이미 연우혁의 말을 믿고 있었지만, 연우혁은 쐐기를 박고 싶었는지 다시 입을 열었다.
"그렇다면 제가 한 가지 맞춰 보겠습니다."
"!"
연우혁은 총관에게 묻지 않았다. 하인들을 보더니 물었다.
"혹시 장주 어르신이 돌아가신 그 날, 평소와 다르게 총관이 찻잔을 확인하지 않으셨습니까?"
"...헛! 맞, 맞습니다! 맞아요! 다기(茶器)를 꼼꼼히 확인하라고 꾸지람을..."
"요 포쾌 놈. 진짜 기가 막히는구나! 네놈은 뒤통수에 눈이 달리기라도 한 거냐!?"
정일은 크게 외쳤다. 옆에서 듣기만 했는데도 몸을 주체할 수가 없을 정도로 신기했다.
"장주 어르신께서는 평소에 누각에 차를 직접 갖고 가시는 습관이 있으셨을 겁니다."
"맞습니다!"
"총관은 찻잔을 점검하는 척 안에 몽혼약을 바른 겁니다. 이렇게 바르면 남은 찻물에는 아무런 이상이 없게 되지요."
"육시랄 놈 같으니!"
정일은 총관을 노려보며 외쳤다. 평소 적면삼구라고 정일과 형제들을 불렀지만, 이 선량해 보이는 낯짝을 달고서 주인을 찔러 죽이는 총관 놈에 비하면 그들 삼형제는 정인군자 그 자체였다.
"죽엇!"
"헉!"
정일은 다급히 무기에 손을 뻗었지만 총관이 노리는 건 정일이 아니었다.
총관이 노리는 건 그의 원대한 계획과 삶을 모조리 망가뜨린 건방진 포쾌 놈이었다.
'무공을 익혔구나!'
아무리 장주가 무저항이었어도 깔끔하게 죽였다 했는데 무공을 익혔었다니. 연우혁은 원래 나오지 않았던 사실에 한탄했다.
총관의 품속에서 비수가 튀어나오더니 사납게 포쾌를 노렸다.
이런 와중에 아까와 같은 두통이 몰려왔다.
총관이 발을 디디고 많지 않은 내공을 움직이며 뻗는 게 머릿속으로 들어왔다. 비수가 투로를 따라 연우혁의 목줄을 노리는 게 머릿속으로 들어왔다.
...그리고 삼절객 담풍호의 검이 번뜩이며 총관의 양팔을 노리며 날아드는 게 머릿속으로 들어왔다.
먼저 알았지만 연우혁의 몸은 머리와 달리 둔하고 느렸다. 피하지도 대응하지도 못하는 사이 총관의 비수는 더욱 앞으로 뻗었고...
담풍호의 검이 총관의 양팔을 날려버렸다.
"크아아아아악!"
끔찍한 비명과 함께 총관은 나뒹굴었다. 담풍호는 총관을 붙잡고 점혈로 피를 멈춘 다음 연우혁을 보며 말했다.
"...이 은혜는 잊지 않겠다."
"잊, 잊으셔도 됩니다!"
삼절객 담풍호 (1)
연우혁이 말했지만 담풍호는 무시했다. 검집에 검을 넣더니 아무 일도 없었다는 것처럼 물러섰다.
평일원은 담풍호에게 다가오더니 쓰러진 총관은 보이지도 않는 것처럼 담담하게 말했다.
"무례를 사과하지. 빚을 졌군."
"상관하지 않는다."
무례한 삼절객의 태도에 적면삼구가 발끈했지만 평일원은 여전히 담담했다.
"상관하지 않는다 하더라도 빚은 빚. 기억해두지. 언젠가 쓸 일이 있으면 찾아오게."
말을 끝낸 평일원은 연우혁을 쳐다보았다. 연우혁은 덜컥 긴장되는 것을 느꼈다. 여기 있는 사람들을 굴러다니는 돌멩이처럼 취급하던 사람이 관심을 보이니 뿌듯하기보다는 긴장이 앞섰다.
"포쾌라고 했나?"
"...예!"
"신통력이 제법 뛰어나군. 덕분에 죄 없는 무인을 베지 않을 수 있었네. 그 이름을 기억해두지."
"대협께서 그렇게 말해주신다니 실로 영광입니다!"
연우혁이 긴장해있자 오 포두가 등짝을 갈기며 대신 외쳤다.
"사실 판관 나으리께서도 걱정을 하셨습니다. 이 비리비리한 놈이 좋은 포쾌가 될 수 있을까 하고 말입니다. 하지만 대협께서 이렇게 말해주시니, 소개한 저도 부끄럽지 않게 되었습니다. 연 포쾌 또한 영광일 것입니다. 철심철검 대협께서 이름을 기억해주시는 포쾌가 얼마나 되겠습니까? 판관 나으리의 걱정도 씻듯이 사라지셨을 겁니다!"
"그래. 판관에게도 말을 전하도록 하지."
평일원은 오 포두의 말에 담긴 속뜻을 이해했다.
판관을 두 번이나 언급한 걸 보니 저 새로 들어온 포쾌는 영 미심쩍은 시선을 받은 게 분명했다.
촉석봉정(矗石逢釘)이라고 어느 곳이든 간에 뛰어난 재능을 가지고 뾰족하게 튀어나온 자는 정을 맞기 마련.
이번 일에서 보여준 활약을 생각해보면 판관에게 칭찬 몇 마디 던지는 건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가지."
평일원은 정일을 데리고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장원을 떠났다. 적면삼구는 연우혁에게 투패의 패도 읽을 수 있냐고 물어보다가 평일원의 눈치를 보고 허겁지겁 따라갔다.
"평, 평 대협! 대협!"
그제야 사 포두는 뒤늦게 정신을 차리고 평일원을 불렀다.
차라리 꾸짖고 떠나면 모를까 아무 말도 없이 저렇게 떠나니 더 오싹해졌다.
"잠깐만 기다려주십시오! 저도 속았..."
평일원은 가만히 사 포두를 쳐다보았다. 뱀과 같은 눈빛을 가진 사 포두였지만 평일원의 눈빛을 마주하자 심장이 덜컥 내려앉는 기분이었다.
사 포두는 아무 말도 하지 못하고 조용히 비켜섰다.
그 모습을 본 오 포두는 킬킬 웃으며 연우혁의 어깨를 두드려줬다.
"앞으로 잘 부탁함세. 연 포쾌."
* * *
원래 사건을 해결하면 영기(靈氣)와 명성만 주고 끝냈지만 현실은 달랐다.
포쾌가 사건을 해결하면 판관에게 보고하고 확인을 받았다.
때에 따라 가끔씩 쇄은(은 조각)을 포상으로 받았지만 그건 정말 드물고 드문 일이었다. 판관은 인색하기 짝이 없는 인물이었으니...
"그러니 이 포상에 너무 기대하지 말게. 다음에도 나오란 법은 없으니."
"예."
연우혁은 전낭에 은 조각을 넣고 고개를 끄덕였다.
정말 드물고 드문 일이었지만 판관은 포상으로 쇄은을 하나씩 선사했다.
동시에 새로 들어온 포쾌, 연우혁의 재주를 침을 튀겨가며 칭찬했다. 칭찬 내용에 철심철검의 별호가 다섯 번 들어간 걸 보니 어지간히 평일원의 눈치가 보였던 모양이었다.
"포쾌는 정직하게 벌어야 하는 직업일세."
오 포두는 매우 기분이 좋았다.
당연한 일이었다.
건방진 사 포두 놈은 망신을 당해서 얼굴이 푸르죽죽해졌고, 본인은 판관의 치하로 체면이 오를 대로 올랐으니, 인근의 다른 포두들도 오 포두의 눈치를 안 볼 수 없으리라.
그런 만큼 오 포두는 연우혁에게 '포쾌란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에 대해 설명해 줄 요량이었다.
원래라면 새로 들어온 포쾌는 다른 포쾌들의 비위를 맞춰가며 일을 배워야 했지만, 이 연우혁은 직접 가르침을 들을 자격이 있었다.
"정직하게 말입니까?"
"그래. 가끔 간 덩어리가 배 밖으로 튀어나온 놈들이 자신의 본분을 잊었다가 크게 다치곤 하지."
포쾌는 죄인에게 다치는 일보다 저지른 죄가 발각 나서 처형 받는 일이 더 잦았다.
그만큼 받는 은자에 비해 눈독들일 수 있는 일이 많았던 것이다.
"정직함. 그래서 포쾌는 오래 살려면 정직함을 기억하며 살아야 하네. 자네가 철전이든 은자든 받아내는 건 오로지 삼인(三人)에게서만 받아야 한다 이 말일세."
"삼인... 말입니까?"
연우혁은 포두가 무슨 소리를 하는지 알아차리지 못했다.
"그래. 죄 지은 자, 죄 지은 자의 친족, 그리고 죄 지은 자에게 당한 자. 이렇게 삼인."
"...아, 그렇군요."
연우혁은 표정 관리를 하느라 얼굴에 힘을 집중해야 했다.
그러나 오 포두는 놀랍게도 진지했다.
포두 기준으로 죄 지은 자나 죄 지은 자의 친족, 혹은 이들을 고발한 자에게 은자를 받는 건 당연한 대가였던 것이다.
"...그래서 또 중요한 것이, 가끔씩 장신구를 잃어버렸다고 돈을 뜯어내려는 포쾌들이 있는데 이건 선을 넘은 일일세. 이런 원한은 쉬이 사라지지 않지. 안 그래도 자네를 죽이려는 자들이 몇몇은 생길 텐데 굳이 더 늘릴 필요는 없지 않나."
"저. 오 포두님."
연우혁은 '포쾌, 어떻게 양민들을 털어 먹는가'가 지겨워서 화제를 바꿨다.
"혹시 두통에 대해 아시는 게 있습니까?"
"두통? 두통은 의원한테 가야 하지 않나?"
"그게 평범한 두통이 아니라..."
연우혁은 조심스럽게 설명했다.
자신에게 신통력이 있는데, 이 신통력이 멋대로 써지고 두통이 몰려오는데 대체 무슨 일인지 모르겠다...
그 말을 들은 오 포두의 얼굴이 심각해졌다.
"으음! 어려운 일이군. 신통력에 관한 일이라면 도사나 술사(術士)가 알지, 평범한 의원은 잘 모를 가능성이 높네."
"포두님께서는 짐작가시는 바가 없으십니까?"
"나는 기껏해야 무공을 익힌 무부일 뿐일세. 그런 신통력은 잘 모르지. 두통, 두통이라..."
오 포두는 딱한 눈으로 연우혁을 쳐다보았다.
"재인박명(才人薄命)이라더니, 젊은 나이에 참으로 안타깝게 됐네."
"...아, 아니. 심각한 겁니까?"
"신통력을 갖고 있는데 두통이 있다면... 나도 좋게 말해주고 싶네. 하지만 아주 불길한 징조야."
오 포두는 매우 진지했다.
신통력을 가진 사람들은 대부분 불우하고 짧은 삶을 살았다. 떠들기 좋아하는 호사가들은 그 이유를 귀신들에게 사랑받고 원귀들이 홀리기 때문이라고 말했지만 그게 맞는지는 오 포두도 알 수 없었다.
하지만 오랜 경험으로 봤을 때 불길하다는 것만은 확실했다.
'...아니. 아니.'
연우혁은 당황했다.
그렇게까지 심각하게 걱정하지 않았던 것이다.
원래 사건의 정보나 증거는 알아서 정리가 되어 나왔었다.
그걸 이제 그냥 자기 자신이 해야 하는구나, 정도만 생각하고 있었는데...
"의원들에게 물어보겠네. 하지만 너무 기대하지는 말..."
말하던 오 포두는 멈칫했다. 앞에 낯익은 무림인이 서있었던 것이다.
삼절객 담풍호였다.
"...연 포쾌. 조심하게."
오 포두는 언제라도 주먹을 뻗을 수 있게 자세를 잡았다.
삼절객이 포두나 포쾌들에게 유쾌한 감정을 갖고 있을 리 없었던 것이다.
"담 대협. 무슨 일인지는 모르겠으나, 원한을 갚으러 왔다면 잘못 찾아왔소! 당신에게 누명을 씌운 건 나나 연 포쾌가 아니오!"
"은혜를 갚으러 왔다."
담풍호는 오 포두의 말에 따지거나 지적하는 대신 자신의 할 말만 차갑게 읊었다.
"...은혜를?"
담풍호는 대답 대신 가만히 서서 기다렸다. 오 포두는 상대가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 건지 알 수가 없었다.
"괜찮은 건지 모르겠군."
"괜찮을 겁니다. 포두님. 포두님이 말하신 대로 누명을 씌운 건 사 포두님이잖습니까."
"저런. 자네에게 말해주는 걸 하나 잊었군. 무림인들은 모두 광인이라고 생각하는 게 좋을 걸세. 은혜를 베풀면 은혜를 베풀었다고 지랄, 누명을 씌우면 누명을 씌웠다고 지랄하는 자들이거든."
"...그래도 이번에는 괜찮을 것 같습니다만..."
담풍호는 계속 기다리다가 둘의 대화가 끝나지 않자 입을 열었다.
"두통이 있지 않나?"
"!!"
"!!!!"
둘 다 깜짝 놀랐다.
"어떻게... 연 포쾌. 설마..."
"삼절객 대협은 이게 어떻게 된 건지 알고 있는 모양입니다. 재주가 많은 무인이라고 하셨는데, 그래서 그런 거 아닙니까?"
"나는 삼절객이 자네한테 독을 먹인 거냐고 물으려고 했는데 그건 아닌가보군."
'이 사람. 상대가 화산파가 아니면 정말 사람 취급을 안 해주는군!'
연우혁은 오 포두가 무림인을 매우 싫어한다는 걸 알 수 있었다.
* * *
결국 연우혁은 담풍호를 따라나섰다. 오 포두는 걱정했지만, 연우혁은 별로 걱정하지 않았다. 상대방에게서 악의나 적의가 느껴지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느티나무 아래 공터에서 멈춰선 담풍호는 앉으라고 손짓했다. 연우혁은 엉거주춤하게 앉았다.
"두통이 왜 있는지는 아나?"
"모릅니다."
"그럴 것 같더군. 은혜는 이유를 알려주는 걸로 갚겠다."
"그래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어차피 부담스러운 은혜라 거절하고 싶었는데, 이유와 교환한다면 나쁜 장사가 아니었다.
"상단전에 대해 아나?"
"...!"
흔히들 무공을 익힐 때 단전에 내공을 쌓는다고 하지만, 사실 그 단전은 배꼽 아래의 하단전을 말하는 것이었다.
하단전이 있다면 다른 단전도 있는 법.
사람의 뇌가 바로 상단전이었다.
하단전에 내공을 쌓는 것도 보통 힘든 일은 아니었지만, 그보다 더 어려운 일은 상단전을 여는 일이었다. 이건 일반적인 방법으로는 여는 것 자체가 불가능했다.
무공의 심법이란 것도 하단전에 내공을 쌓는 것이지 상단전에 내공을 쌓는 게 아니었다. 보통 그런 짓을 했다가는 대번에 광증이 뇌로 올라가 미쳐버렸다.
하지만 가끔씩 선천적으로 상단전이 열려서 기운이 쌓이는 사람들이 있었다. 이런 사람들은 감히 남들이 따라할 수 없는 특이하고 비범한 신통력들을 보여주곤 했다.
"너는 상단전에 기운을 축기하더군. 그걸 보고 상단전이 열려 있다는 걸 알았다."
"제가 기운을 모으고 있었단 말입니까? 어떻게?"
"나도 모른다. 애초에 난 상단전이 열려 있지도 않으니."
담풍호는 냉정하게 설명했다.
연우혁이 총관을 지목하고 다른 사람들을 설득하는 순간, 주변의 영기가 연우혁의 백회혈로 몰려들었던 것이다.
"도사 중에는 의식적으로 선업을 쌓는 도사들이 있지. 그들은 선업을 쌓음으로서 자기 안의 영성을 올린다고 했다. 그런 것 아닌가?"
"!"
그걸 듣는 연우혁의 머릿속을 스치고 지나가는 건 원래 사건의 정답을 맞혔을 때 나오던 보상이었다.
실제로는 이런 식으로 보상이 주어졌던 것일까?
"그럼 제 능력은 상단전 때문에?"
"그렇겠지. 신통력은 보통 상단전이 열려서 생기는 힘이니. 하지만 네 신통력은 잘 모르겠군. 사람의 마음을 읽고, 있었던 일을 귀신에게 물어보고, 보이지 않는 것을 보고... 타심통(他心通), 담귀(談鬼), 영안(靈眼)... 이 정도면 벌써 피를 토하고 죽었을 텐데."
"..."
삼절객 담풍호 (2)
매우 불안해진 연우혁은 담풍호가 방금 말한 능력들을 자세히 캐물었다.
원래 이런 지식들은 비전에 해당되는 것이라 처음 본 포쾌한테 말해줄 이유가 없는 것들이었지만, 담풍호는 거절 한 번 하지 않고 흔쾌히 설명해줬다.
타심통은 불교의 육신통에 들어가는 능력이지만 꼭 스님만 쓸 수 있는 건 아니었고, 도사들이나 술사들 중에서도 비슷한 신통력을 보여주는 사람이 가끔씩 나왔다.
"사람의 마음을 샅샅이 읽는 겁니까?"
"그럴 수 있다면 사람이 아니라 부처겠지. 내가 만난 사람 중 가장 뛰어난 타심통을 갖고 있던 사람은 불승이었다. 그 자는 말을 하면 거짓말인지 아닌지를 알아낼 수 있었지."
'생각보다 만능은 아니군.'
하긴 눈 하나 마주치는 것만으로 상대의 마음 속 깊이 읽을 수 있다면 그건 인간보다는 신선에 가까운 존재였다.
"담귀는 귀신하고 이야기하는 신통력... 영안(靈眼)은 뭡니까?"
"보이지 않는 것을 보는 신통력이다. 불문에서는 혜안(慧眼)이라고도 하지. 나도 실제로 본 적은 없다."
영안, 혹은 혜안이라고 불리는 이 능력은 가장 막연하고 희귀한 능력이라고 할 수 있었다.
보이지 않는 것을 본다고 기록되어 있었지만 애초에 그게 무엇을 의미하는지 알 수 없는 것이다.
당장 무림인들도 단련된 이들은 안력(眼力)이 일반인들보다 강해져 날아오는 화살의 궤적을 보고 피하는 게 가능해지지만, 이걸 영안이라고 하지는 않았다.
'그럼 내 능력은 영안인가?'
연우혁은 생각에 잠겼다. 타심통이나 담귀는 아니었고, 영안이 그나마 가까운 것 같았다.
정신을 집중하면 원래라면 보기 힘들거나 알아내기 힘든 것들까지 세세하게 읽어낼 수 있었으니까.
"상단전과 신통력은 무림에도 아는 사람이 적다. 차라리 고서를 찾는 걸 추천하지."
"아, 그, 피를 토하고 죽는다는 건 무슨 소립니까?"
"사람의 몸은 원래 하나였다."
담풍호는 나뭇가지로 흙에 모양을 그렸다.
"하지만 어쩔 수 없이 태어나면서 정(精), 기(氣), 신(神) 이 셋으로 나눠지게 된다. 원래 무인은 정을 단련해 기로, 기를 단련해서 신으로 합쳐야 한다."
무공에 대해 잘 모르는 연우혁에게는 상당히 복잡한 이야기였지만 목숨과 관련된 일이라 최대한 집중할 수밖에 없었다.
"여기서 정은 하단전. 기는 중단전. 신은 상단전이다."
"그러니까... 어... 무공, 그러니까 내공을 쌓아서 하단전을 탄탄하게 만들고, 그 다음에 중단전을 탄탄하게 만들고, 마지막으로 상단전을 탄탄하게 만드는 겁니까?"
"...탄탄하게 만드는 것과는 좀 다르지만 비슷하다. 하지만 너는 상단전이 먼저 열렸지. 이는 역행이다. 당연히 몸에 좋지 않고, 신통력을 쓰는 자들은 이런 이유로 단명하지. 정과 기가 받쳐주지 못하는데 신이 발달됐으니 피를 토할 수밖에 없으니."
연우혁의 얼굴이 시퍼렇게 변했다.
한마디로 지금 무공도 없고 몸도 튼튼하지 않은데 영안이 있어서 죽게 됐다는 소리 아닌가?
'내가 얻고 싶어서 얻은 것도 아닌데?'
"살 수 있는 방법은 없습니까!?"
"있다. 지금이라도 무공을 익혀서 하단전과 중단전을 단련해라."
"어..."
너무나도 당연하지만 막막한 방법에 연우혁은 당황했다.
"들어보니 평범한 경지로는 못 버틸 것 같은데 가능성이 있겠습니까?"
"나도 모른다. 하지만 다른 방법은 안 떠오르는군."
"..."
한마디로 살고 싶으면 익히라는 소리였다.
담풍호는 연우혁을 한 번 훑더니 말했다.
"무공의 기초는 익힌 것 같은데, 맞나?"
"포쾌들에게 주는 무공을 익히긴 했습니다만, 겉핥기로 배운 수준이라..."
"그래 보이는군. 삼류 수준이니."
'수련할 시간도 없었는데.'
갑작스레 무림에 떨어지고 나서 연우혁의 손에 들어온 건 포쾌의 요패뿐만이 아니었다. 포쾌들한테 주어지는 묵곤(墨棍)이라는 몽둥이 하나(시커멓기만 하고 별다른 능력은 없었다), 철전 몇 푼, 그리고 포쾌들에게 지급하는 무공서 한 권 등이 들어왔다.
그리 두껍지는 않고 글자가 어렵지도 않았다. 겉장에는 거창하게 위국(爲國)신공이라고 적혀 있었다. 몸이 한 번 익혀놓은 상태였는지 심법도 권법도 한 번에 따라할 수 있었다.
"한 번 책을 봐주시겠습니까?"
"...포쾌라 잘 모르나보군. 다른 무림인에게는 절대 이렇게 무공을 알려주지 말도록."
담풍호는 살짝 당황했지만 연우혁은 별로 신경 쓰지 않았다.
애초에 포쾌들 전원에게 나눠준다는 것부터가 이 무공의 수준을 짐작하게 해줬던 것이다.
'내가 무공에 대해 아는 건 적어도, 이 무공이 저잣거리에 굴러다니는 수준이라는 건 알겠다.'
당장 길 가는 포쾌 한 명 잡고 술만 먹여도 무공에 대해 알 수 있는데 뭘 숨기겠는가.
담풍호는 위국신공 책을 한 번 훑어서 읽어보더니 혀를 찼다.
"금강선공이군. 그것도 어려운 부분들을 다 빼버린."
"금강선공이라면 대단한 무공 아닙니까?"
"삼백 년 전 무공이지."
"그렇게 대단한 무공을 포쾌들한테 알려줘도 되는 겁니까!"
"삼백 년 전이라는 뜻을 오해했나보군. 삼백 년 전 무공을 누가 익히겠나. 낡은 무공이다."
"..."
민망해진 연우혁은 입을 다물었다.
담풍호는 친절한 목소리는 아니어도 나름 자세히 설명해줬다.
내공심법이란 무릇 정순한 내공을 얼마나 빠르게 쌓느냐에 따라 그 가치가 결정되는데, 금강선공은 낡은 심법인 만큼 결과가 느리고 둔했다.
대신 불문의 무공인 만큼 안정적이고, 운기조식 중에 어지간해서는 내상을 입지 않는다는 장점이 있었다.
이 위국신공은 그나마 금강선공에서 어려운 부분들을 전부 다 빼버린 무공서였다. 까막눈인 포쾌들도 몸을 단련하고 쥐꼬리만한 내공을 쌓아서 건강하게 해주는 목적에 실로 충실한 책이었다.
"같이 있는 권법과 보법도 어려운 부분들을 다 빼버렸군."
"..."
담풍호는 다시 책을 연우혁에게 던졌다. 그리고 말했다.
"이 무공을 수련하는 걸 도와주겠다. 그걸로 보답을 갈무리하지."
"아, 그래주신다면 감사하겠습니다. 그런데 이 무공으로도 괜찮으십니까?"
"조악하지만 어쩔 수 없지."
"..."
연우혁은 '내가 혹평했지만 사실 장점도 있는 무공이다'란 대답을 살짝 기대했지만, 상대 무림인은 실로 냉정했다.
* * *
저잣거리에서 주먹을 휘두르는 왈패를 '아 저 자는 그래도 최소한 삼류의 무인은 되겠구나!'라고 하지 않듯이, 무공을 익힌 자와 익히지 못한 자의 구분은 엄격했다.
고수들의 눈에나 삼류의 경지가 우스워 보이는 거지 대부분의 양민들에게는 엄연히 무공을 익힌 무림인인 것이다.
사실 연우혁처럼 포쾌가 무공을 익힌 것만 해도 나름 대단한 일이었다.
무공 수련에 아예 관심이 없는 포쾌들도 있었으니까.
'이 정도면 제법 괜찮은 편 같은데.'
실제로 연우혁은 현재 자신의 몸 상태를 보고 가볍게 기대했다.
군살 없이 적당히 근육이 잡혀 있는데다가 단전에는 내공이라고 불리는 힘이 조금이나마 깃들어있었다. 제대로 무공을 배우지 못했다는 걸 감안했을 때 이 정도면 꽤 준비가 잘 되어있는 편 아닌가 싶었다.
하지만 담풍호는 냉정했다.
"무림에서 흔히 말하는 이류의 경지는 초식 하나의 형(形)을 온전히 따라할 수 있는 경지를 말한다. 그걸 머리에 담아두고 수련하도록."
"제가 이류의 경지에 도달하려면 어느 정도 걸릴까요?"
담풍호는 손가락 하나를 폈다.
"일 년입니까?"
"십 년. 그것도 어느 정도 재능이 있을 때다. 나이 들어서 수련할수록 근골이 굳고 내공이 쌓이는 속도가 느려진다."
"..."
무림을 떠도는 소문에는 일류의 고수들이 즐비했지만 실상은 이류의 경지도 만만치 않았다. 평생 수련해도 이류에 도달하지 못하는 무림인도 있었다.
제대로 된 스승도 없이 무공서만으로 무공을 익히는 경우, 자신이 펼치는 초식이 제대로 된 초식인지 비뚤어진 초식인지 구분하기가 힘들기 때문이었다.
삼절객은 그래서 자신이 시범을 보여주고, 연우혁을 따라하게 만들 생각이었다. 이 금강권ㅂ... 아니, 위국권법의 형을 완전히 익힐 때까지.
"보고 따라하도록. 이 금강... 아니. 위국권법의 첫 초식이다."
"진충보국(盡忠報國)입니다."
"뭐?"
"첫 초식의 이름 말입니다."
"...그래."
'괜히 말했다.'
담풍호가 한심하게 쳐다보자, 연우혁은 괜히 말했다고 후회했다.
이름이 잘 기억 안 나는 것 같아서 말했는데 생각해보니 초식들 이름이 좀 많이 거창하긴 했던 것이다.
"두 번째 초식 이름은 뭐지?"
"어... 충군애국(忠君愛國)입니다."
"그냥 이초식이라고 하겠다."
"예."
연우혁은 어디 가서 주먹 뻗을 때 절대 초식 이름을 말하지 않겠다고 다짐했다.
쉭!
담풍호는 가만히 서더니 주먹을 뻗었다. 순간 공기를 가르고 주먹이 허공을 타격했다. 연우혁은 담풍호가 주먹으로 허공을 때리고 그 주먹을 원래대로 돌릴 때까지도 보지 못했다.
'빠르다!'
진짜 고수의 무공을 처음으로 본 연우혁이었다. 위력도 위력이지만 빠르기가 차원이 달랐다.
"못 봤어도 상관없다. 원래 그런 법이니까. 몇 번 반복하고 팔성의 위력으로 펼치겠다. 최대한 집중해서 보도록."
처음에는 완전한 초식을, 그 다음에는 좀 더 힘을 뺀 초식을, 또 그 다음에는 더 힘을 뺀 초식을...
이런 식으로 반복해서 마지막에는 가장 느리게 초식을 보여주는 건 여러 명문정파에서 사용하는 수련 방법이었다. 다양한 위력의 초식을 반복해서 봄으로서 몸에 익숙하게 만드는 것이다.
다시 한 번 주먹이 허공을 쳤다. 연우혁은 이번에야말로 놓치지 않겠다는 일념으로 최대한 집중했다.
그 순간 두통과 함께 담풍호의 주먹이 천천히 보였다.
단순히 주먹만 천천히 보이는 게 아니었다. 담풍호의 뒤쪽 발이 살짝 밀려나서 바닥을 잡고 있는 게 보였다. 다른 쪽 팔은 언제든지 다음 초식을 펼칠 수 있도록 준비하는 게 보였다. 단전에서 뻗어 나온 내공이 기맥과 혈도를 따라 유려하게 흘러가는 게 보였다.
쉭!
"봤... 봤습니다."
두통 때문에 인상을 찌푸리며 연우혁이 말했다. 담풍호는 무슨 소리를 하냐는 듯이 연우혁을 쳐다보았다.
"보라고 했을 텐데."
"그, 그게 아니라. 초식을 어떻게 펼치신지 제대로 봤다는 겁니다."
"!"
평범한 무인이 저런 소리를 했다면 건방진 소리를 했다고 화를 냈겠지만, 담풍호는 연우혁이 상단전이 열린 특이한 포쾌란 걸 알고 있었다.
"뭘 봤나?"
연우혁은 자신이 본 걸 최대한 열심히 설명했다. 담풍호는 오늘 처음으로 인상을 찡그렸다.
"영안이 이런 능력인 줄 몰랐군."
"...어, 좋은 게 아닙니까?"
"남의 무공을 보는 것만으로 그렇게 깊숙이 파악하는 무인을 무림에서 좋아하겠나."
영안이 없는 무인들한테도 쉽게 절초나 비기는 보여주지 않는 게 무림이었다. 한 번 보여지는 순간 그 때부터 파훼가 쉬워지는 것이다.
그러나 눈앞의 포쾌는 보는 순간 그 무공을 파악해버리는 무시무시한 신통력을 갖고 있었다. 어디 가서 칼침 맞고 죽기 쉬운 신통력이었다.
"..."
이해한 연우혁이 침을 삼켰다. 고민하던 담풍호는 어쩔 수 없다는 듯이 어깨를 으쓱거렸다.
"안 들키면 되겠지."
"아니..."
"무공에는 도움이 되겠군. 신통력이 무공에 도움이 될 거라고 생각은 못 해봤는데. 그 눈은 계속 쓸 수 있나?"
"의식적으로 써본 건 처음입니다만, 두통 때문에 많이 쓰긴 힘들 것 같습니다."
"길들이도록. 초식에 익숙해지듯이 신통력도 마찬가지다. 아마 기운을 너무 많이 사용해서 그럴 가능성이 크다. 조절하는 법을 익히면 줄어들겠지."
담풍호는 손가락을 뻗었다.
"덕분에 시간을 아낄 수 있겠군. 첫 초식을 펼쳐봐라."
연우혁은 고개를 끄덕이고 자세를 잡았다. 거의 텅텅 빈 단전에서 내공을 끌어올리고, 아까 담풍호가 보여준 것과 거의 비슷한 자세를 취한 뒤, 똑같은 투로로 내공을 뻗으려고 노력했다.
물론 그 결과는 천지차이였다. 담풍호의 내공은 거대한 강처럼 막힘없이 뻗어져 나왔지만 연우혁의 내공은 가뭄에 바짝 말라서 쩍쩍 갈라진 저수지의 물마냥 잘 나오지 않았다.
연우혁은 더욱 내공을 끌어올리려고 노력했다. 그 순간 머리 쪽이 열리는 느낌과 함께 온몸의 힘이 쭉 빠지며 주먹에 내공이 실렸다.
그걸 본 담풍호의 눈이 크게 떠졌다. 깜짝 놀란 담풍호는 검을 뽑아들어 번개처럼 연우혁의 혈도를 점혈했다.
점혈당한 연우혁은 쓰러지면서 중얼거렸다.
"팔, 팔을 자르시면 안 됩니다..."
"..."
미식가 오 포쾌 (1)
다행히 팔은 잘리지 않았다. 담풍호의 시선이 아까보다 조금 더 서늘해진 것 같아서 연우혁은 다급히 변명했다.
"제가 무공을 잘 몰라서 제 팔을 자르는 줄 알았습니다."
"상단전의 내공을 썼군."
"예?"
담풍호는 변명을 무시하고 연우혁의 완맥을 잡고 진맥했다.
"상단전의 내공이라면 위험한 거 아닙니까?"
연우혁의 목소리가 높아졌다. 담풍호는 자기 목숨이 아니라 그런지 여전히 냉정하게 말했다.
"그렇다."
원래 무공은 하단전에 쌓은 내공을 기경팔맥과 혈도에 퍼뜨리며 움직임으로서 초인적인 힘을 발휘하는 무예였다.
당연히 하단전에 쌓은 내공을 사용하는 걸 기준으로 무리(武理)를 잡았지, 상단전의 내공을 사용하는 걸 기준으로 잡지 않았다.
상단전의 내공을 끌어온다는 것은 백회혈에서 내공을 끌어오는 것과 비슷했으며 이는 역(逆)이자 무공에서는 금기되는 이치에 속했다.
내공은 단전에서 사지의 말단으로 뻗어져나가야 하지 정수리에서 뻗어져나가는 게 아닌 것이다.
"원래 이렇게 마음대로 쓸 수 있는 겁니까? 혹시 무공에 무슨 문제라도 있는 겁니까?"
"당연히 아니다. 아마 상단전이 열려서 그런 것 같군. 어떤 일이 일어나도 놀랍지 않은 게 상단전이니."
담풍호는 내공을 흘려보내서 포쾌의 상태를 확인했다.
상단전의 내공을 끌어내서 내지르다니. 크게 내상을 입었어도 놀랍지 않았다.
다행히 내상은 심하지 않았다. 단전과 주변의 혈도가 조금 상하긴 했지만, 상단전에서 내공을 끌어온 것치고는 싸게 먹힌 것이었다.
"더 이상 내공을 끌어내지 말고 정양하도록. 내상이 다 나을 때까지."
담풍호는 한 가지 사실을 더 깨달았다.
지금 이 포쾌는 아혈까지 점혈당했는데도 말을 하고 있었던 것이다.
'확실히 상단전에 축기한 내공을 무의식적으로 쓰고 있군.'
하단전에 한 줌만의 내공을 갖고 있는 삼류 무인이 일류 무인이나 내지를 권격을 찔러대지 않나, 점혈을 해도 풀리질 않나.
불가사의한 일이었지만 상단전을 타통한다는 건 원래 이런 일이었다.
그만큼 희귀하고, 어떤 일이 일어날지 예측하기 힘든 일. 상단전에 쌓인 내공 또한 그랬다.
'상단전에 기운을 얼마나 축기한 거지?'
하단전이 아니라 상단전에 기운을 쌓는 건 원래 훨씬 더 어려운 일.
만약 상단전이 쉬웠다면 무림의 무학은 상단전 위주로 흘러갔을 것이다.
그런데도 이 포쾌는 상단전 쪽 내공이 비정상적으로 축기되어 있었다. 마치 오랫동안 계속해서 기운을 쌓은 것처럼.
"앞으로 상단전의 내공은 가능한 끌어다 쓰지 말도록. 운이 좋았지만 요행이 반복되리란 법은 없으니."
"명심하겠습니다. 그런데 상단전의 내공을 옮길 수는 없습니까?"
"있다."
"예? 그게 정말입니까?!"
연우혁은 당연히 안 된다는 대답을 생각하고 던진 질문에 긍정적인 대답이 돌아오자 놀랐다.
만약 옮길 수 있다면 훨씬 수련이 수월해질 것이다.
쓸데없이 발달된 상단전의 내공을 하단전으로 돌려서 육신을 단련한다면...
"하단전과 중단전을 단련해 초절정의 경지에 도달해라. 말했듯이 정(精), 기(氣), 신(神)을 하나로 합칠 수 있다면 단전끼리의 구분은 의미가 없어진다."
"..."
자기도 못 오른 경지를 저렇게 말하는 담풍호의 모습에 연우혁은 어이가 없었다.
만약 상대가 자기보다 훨씬 강한 무림인만 아니었다면 욕도 조금 했을지 몰랐다.
'장난하나.'
"힘이 돌아왔다면 일어나라. 초식을 보겠다. 내공을 쓰지 못해도 초식의 형태는 잡을 수 있겠지."
* * *
이런 저런 소란들이 있었지만 담풍호는 이 포쾌의 자질이 꽤 뛰어나다고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애초에 무공의 초식을 보는 것만으로 이해하는 자질은 어디 가서도 쉽게 찾을 수 없는 천부적인 재능이었다.
만약 나이가 조금만 더 어리고 근골이 뛰어났다면, 그리고 상단전이 열려서 단명할 운명을 타고나지 않았다면 명문정파에서도 이 포쾌를 제자로 탐냈을 것이다.
만약 담풍호가 참견하기 좋아하는 무인이었다면 안타까워하거나 동정했을 테지만 담풍호는 그러지 않았다. 상단전이 열린 게 이 포쾌의 운명이라면 그걸 짊어지는 것 또한 이 포쾌가 해야 할 몫이었다.
그리하여 배운지 삼일 째 되는 날, 담풍호는 고개를 끄덕였다.
"이대로 꾸준히 수련하도록."
"감... 감사합니다!"
연우혁은 땀에 젖어서 털썩 쓰러졌다.
원래 다음 경지로 가기 위한 초식의 형태를 정확히 잡아주려던 담풍호였지만 그건 포쾌의 영안으로 단번에 끝났다.
대신 담풍호는 이틀을 더 사용해 근골을 가다듬고 내공을 확인했다. 워낙 기묘한 체질이라 놓친 게 있을지 몰라서였다.
"계속해서 내공을 쌓고 무공을 수련해라. 신통력도 통제할 수 있어야 한다. 상단전에 두텁게 내공을 쌓고 신통력을 통제해라. 통제할 수 없는 신통력은 더욱 수명을 깎을 거다. 그리고 더 좋은 무공을 찾아라. 네 금강선공은 너무 단순해 한계가 금방 드러날 거다."
"더 좋은 무공을 어디서 찾습니까?"
"돈을 모아서 서관에 가라. 아주 상승의 무공은 당연히 구할 수 없겠지만 네 무공보다 괜찮은 무공은 찾을 수 있을 거다. 아니면 명문정파에 은혜를 베풀고 무공을 부탁해라. 비인부전의 무공은 불가능하더라도 속가제자들에게 가르치는 무공 정도는 얻을 수 있을 거다."
연우혁은 열심히 고개를 끄덕이며 기억했다. 말을 끝낸 담풍호는 검을 허리에 차더니 바로 돌아섰다.
"앗. 제가 술이라도 대접하려고 했습니다만."
"필요 없다. 어디 가서 내게 가르침을 받았다는 말도 하지 말도록. 쓸데없는 은원에 휘말릴 수 있으니."
"...대협의 가르침에 진심으로 감사드립니다!"
연우혁이 아직 무림에 대해 잘은 몰라도, 이 삼절객이라는 무인이 친절을 베풀었다는 건 확신할 수 있었다.
마음만 먹으면 얼마든지 악용할 수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연우혁이 누명을 풀어줬다는 이유만으로 참을성 있게 모든 것을 설명해준 것이다.
담풍호는 뒤도 돌아보지 않고 가버렸다. 연우혁은 담풍호가 떠난 자리에 고개를 숙였다.
* * *
오 포두에게는 조카가 있었는데, 이 조카 또한 포쾌의 일을 하고 있었다.
나름 포쾌들 중에서는 무공의 고수 축에 속하는 오 포두와 달리 이 오 포쾌는 무공에는 별 관심이 없었다. 그보다는 저잣거리에서 파는 화화작(禾花雀, 참새 요리)이나 당과에 더 관심이 많았다.
처음에 오 포쾌를 봤을 때 그 중후한 덩치에 연우혁은 상대가 중(重)을 중시하는 무공을 익힌 건가 싶었을 정도였다.
물론 오 포쾌는 그냥 덩치만 큰 거였다.
"숙부께서 널 돌봐주라고 하셨으니, 내가 널 돌봐주겠어. 자. 저길 봐라."
"?"
연우혁은 오 포쾌의 말에 눈을 가늘게 떴다.
그냥 번성한 시장거리였다. 유삼을 걸친 상인들이 제각기 구성진 가락을 붙여가며 물건을 사라고 유혹했고, 웃옷을 벗은 일꾼들이 구슬땀을 흘려가며 짐을 옮기고 있었으며, 근처 주루에서 나온 하인들은 화려한 깃발을 휘둘러가며 자신의 소속을 자랑해댔다.
시골에서 갓 올라온 촌뜨기라면 이런 광경을 보고 눈이 어지러워질 수도 있었지만 연우혁에게는 그냥 번성한 정도였다.
"다른 구역의 포쾌들은 여기 오면 뭐가 맛있는지 모른다. 하지만 나는 속속들이 알고 있지. 자. 저기 노점이 보이냐? 두 노인의 소면은 다른 소면보다 훨씬 더 실하다. 따라와라."
오 포쾌는 노인 앞에 털썩 앉더니 국수를 받았다. 많이 받아본 듯 익숙한 태도였다. 연우혁 앞에도 나무그릇이 하나 놓였다.
'아니. 맛있잖아?'
연우혁은 살짝 감탄했다.
오 포쾌가 떠드는 걸 보고 살짝 얕잡아봤었는데, 나름 뛰어난 재능이 있었던 것이다.
숙소 주인이 아침 저녁으로 한 개씩 던져주는 속 없는 퍽퍽한 만두와 소채(蔬菜) 한 그릇은 배를 채우는 용도였지 맛은 별로 없었다.
그에 비해 이 국수는 국물을 뭘로 냈는지 칼칼하고 깊은 맛이 났다. 오 포쾌는 연우혁이 한 젓가락 뜨는 순간 그릇을 비우고 탕 내려놓았다.
"느린데?"
"...아, 죄송합니다."
"됐어. 천천히 먹어."
말은 그렇게 해놓고 오 포쾌는 연우혁이 다 먹을 때까지 발로 바닥을 탁탁 치며 기다렸다. 다 먹는 순간 오 포쾌는 벌떡 일어섰다.
"어, 오 포쾌님. 값을 안 치르셨습니다?"
연우혁은 만약 상대가 '신입이 내야지'같은 소리를 했다가는 주먹질까지 불사할 생각이었다.
아무리 오 포두의 조카라지만 이렇게 얕보일 수는 없었던 것이다.
"뭔 소리를 하는 거야? 값을 왜 치르는데?"
"예?"
"이봐. 네 허리춤에 단 게 뭐야? 포쾌의 요패 아냐? 양민들을 지키는!"
"그렇죠?"
"그런데 왜 값을 내? 당당하게 나와야지."
"..."
'도둑놈이었구나!'
연우혁은 미친 놈 보듯이 오 포쾌를 쳐다보았다. 더 놀라운 건 국수 파는 노인이 별로 놀랍지도 않다는 듯이 가만히 있는다는 점이었다. 표정을 보니 빨리 꺼져주길 바라는 것 같았다.
"그... 그렇군요. 하나 배웠습니다."
"그래. 그래. 숙부한테 꼭 말해달라고."
오 포쾌가 돌아선 사이 연우혁은 철전을 하나 꺼내 노인에게 건넸다. 아무리 생각해도 그냥 무전취식을 하자니 양심이 찔렸던 것이다.
두 노인은 철전을 받자 깜짝 놀라서 연우혁을 쳐다보았다. 마치 처음 보는 희귀한 짐승을 바라보는 눈빛이었다. 연우혁이 더 민망해질 지경이었다.
'미친놈들...'
연우혁은 괜히 얼굴이 화끈거리는 걸 느끼며 오 포쾌 뒤를 쫓았다. 어쩐지 저잣거리 상인들의 시선이 불가근불가원을 연상시키는 미묘함이 있었는데, 이제 이유를 알 것 같았다.
연우혁이 상인이었어도 포쾌들이 싫을 것 같았다. 그렇다고 티를 내면 달려와서 지랄을 해댈 테니...
'돈을 벌긴 해야 하는데, 이렇게 벌긴 싫다!'
무림에 떨어지고 목숨까지 위험한 상황이었지만 아무리 생각해도 주변 포쾌들처럼 상인들 볼 때마다 돈 내놓으라고 닦달하는 건 좀 아닌 것 같았다.
연우혁이 보기에는 아무리 봐도 원한을 차곡차곡 쌓는 일이었던 것이다.
'수명 좀 늘리려다가 등 뒤에서 칼침 맞을 것 같다.'
그러나 연우혁의 그런 생각에도 불구하고 오 포쾌는 저잣거리의 노점들을 돌며 맛있는 음식들만 속속들이 챙겨 먹었다. 그릇이 쌓이고 쌓일 때마다 상인들의 눈빛이 사나워졌다.
"...저긴 안 갑니까?"
연우혁은 이 저잣거리에서 빨리 벗어나고 싶어 선배 포쾌를 잡고 손가락을 뻗었다. 그러나 오 포쾌는 깜짝 놀라서 크게 외쳤다.
"이런 큰일 날 사람을 봤나, 저건 번루(樊樓)잖아!"
한경은 나름 번성한 곳이었고 그런 만큼 시장도 한 군데뿐만이 아니었다. 강 근처에는 어류를 파는 시장, 북쪽에는 쌀과 고기를 파는 시장, 동쪽에는 야채와 약재를 파는 시장...
지금 포쾌들이 돌아다니는 것처럼 노점들이 즐비한 저잣거리는 세기 힘들 정도로 많았다.
그 중 중앙의 번루는 도시에서 가장 번영하고 호화로운 구역이라고 보면 편했다. 도시에서 내로 하는 주루(酒樓)들이나 다점, 귀금속점 등들이 다 저쪽에 몰려 있었다.
"번루에 가면 안 됩니까?"
연우혁은 의아해했다.
분명 오 포두가 말한 포쾌의 순찰 영역에는 번루도 어느 정도 들어가 있었던 것이다.
"번루 놈들은 도둑놈들이라, 양민을 지키는 포쾌에게 싸구려 황주 한 잔도 주지 않는 놈들이야. 괜히 말을 해봤자 흠씬 두들겨 맞기만 하지!"
"..."
한마디로 권세가 드높은 상인들이라 포쾌 같이 하찮은 말단의 말은 안 통한다는 소리였다.
'두들겨 맞은 적이 있는 것 같은데.'
씩씩대며 말하는 걸 보니 번루에 가서 공짜 술을 요구했다가 두들겨 맞은 적이 있는 것 같았다.
"음. 그럼 저는 저기 가서 순찰이라도 하겠습니다."
"뭐? 내 말을 뭘로 들은 거냐?! 갈 이유가 없다니까?"
"아니. 오 포쾌님. 오 포쾌님이야 쌓은 공이 많으시고 명성이 높으셔서 여기 계셔도 되지만, 새로 들어온 저 같은 포쾌가 여기 있으면 포두님께서 뭐라고 생각하시겠습니까?"
연우혁의 말에 오 포쾌는 헤벌쭉 웃은 다음 생각에 잠겼다.
"으음. 너는 눈치가 보일 수 있겠구나!"
"예. 그렇습니다."
연우혁도 딱히 번루에 관심이 있진 않았지만 그냥 최대한 빨리 이 자리에서 벗어나고 싶었다.
'대충 도는 척만 하면 되겠지.'
"어쩔 수 없지. 가자."
'아니 이런.'
오 포쾌는 포두에게 부탁받은 것 때문에 마지못해 일어섰다. 연우혁 입장에서는 예상 밖의 일이었다.
"저 혼자 순찰해도 됩니다만..."
"아냐, 아냐. 길도 잘 모를 텐데. 나만 따라오도록. 길은 잘 아니까."
그렇게 발을 디디려는 순간 옆 전장(錢莊)에서 고함 소리가 터져 나왔다.
"헛소리 하지 마라. 네놈들을 모두 거꾸로 매달아서라도 은자를 찾아낼 테니까! 사라진 은자를 찾기 전에는 아무도 나가지 못할 거다. 물 한 모금이라도 마시고 싶으면 어느 놈이 은자를 훔쳐간 건지 이실직고를 하란 말이다!"
"!"
돈을 빌려주고 받는 전장 점포에서 저런 소리가 나오는 건 보통 일이 아니었다. 연우혁이 깜짝 놀라는 사이 오 포쾌가 고개를 푹 숙이더니 속삭였다.
"연 포쾌. 요패 숨기고 돌아서라. 우린 여기 온 적 없는 거다."
"..."
미식가 오 포쾌 (2)
선배 포쾌의 뛰어난 능력에 연우혁이 감탄하는 사이, 전장 점포의 문이 거칠게 열리더니 비단 장포를 걸친 남자가 씩씩대며 걸어 나왔다.
"여봐라! 이리 들어와서 빗장을... 잠깐. 포쾌들 아닌가!"
"아, 아닙니다."
선배 포쾌의 뛰어난 위장에 연우혁이 다시 한 번 감탄하기도 전에 남자가 성큼성큼 걸어왔다.
"일 좀 도와주게. 어서!"
"어... 음... 어..."
오 포쾌는 그 덩치에 걸맞지 않게 쩔쩔맸다. 연우혁은 이해가 가지 않았다.
물론 귀찮은 일에 휘말리고 싶지 않은 건 이해했지만 지금 이 반응은 조금 과했다.
저 쪽 전장에서 무슨 은자라도 빌리기라도 했단 말인가?
"왜 그러십니까? 물론 엮여서 좋을 게 없지만, 이렇게 불린 이상 갈 수밖에 없지 않습니까."
연우혁의 말에 오 포쾌는 원망스러운 눈동자로 아무것도 모르는 신입을 쳐다보았다.
"너는 아무것도 모른다. 보아하니 어느 종놈이 돈을 훔쳐간 거 같은데, 우리가 그걸 찾아내지 못하면 어떻게 되겠느냐?"
"어떻게 됩니까?"
"번루에 점포를 차릴 정도의 전장이라면 판관 나으리한테 고자질할 거다. 그럼..."
포쾌는 손바닥을 세게 내려치는 시늉을 했다. 호되게 곤장을 맞는 포쾌의 모습이었다.
"그럼 찾아내면 되지 않습니까?"
'미친 놈 아니야 이거?'
오 포쾌는 연우혁을 정신 나간 사람 보듯이 쳐다보았다.
아무리 포쾌라도 범인을 잡는 건 생각보다 어려운 일이었다.
특히 지금처럼 커다란 점포에서 일하던 하인들 중 돈을 훔친 범인을 찾는 건 더더욱 그랬다.
오 포쾌는 이런 번루에서 일하는 자들이 얼마나 영악하고 닳아빠진 놈들인지 잘 알았다. 여기서 일하는 하인들은 포쾌 하나 정도는 그냥 녹여먹을 놈들이었다.
그런 놈들이 쉽게 꼬리를 잡힐 만큼 멍청하게 돈을 훔쳤겠는가. 절대 아니었다. 그랬다면 이미 전장에서 알아서 돈을 찾았을 것이다.
"알겠냐? 포쾌로서 중요한 능력은 해결할 수 있는 일을 잘 고르는 거다. 누가 봐도 범인이 뻔한 치정 사건이나, 혹은 시골뜨기 도둑이나 소매치기 같은 거 말이다. 나 참. 숙부만 아니었다면 이런 비전은 절대 알려주지 않는 건데 말이야."
"하지만 어차피 이렇게 불려진 이상 가야 하는 거 아닙니까?"
연우혁의 말에 오 포쾌의 어깨에 순간 힘이 빠졌다.
맞는 말이었다.
지금 전장에서 나온 남자를 무시하고 도망쳤다가는 분명 둘의 인상착의를 포두한테 말할 것이고, 좋은 꼴은 보지 못할 것이다.
"그렇지..."
"걱정하지 마십시오. 제가 해결하겠습니다."
"???"
오 포쾌는 앞서 걸어가는 신입 포쾌의 뒷모습을 당황해서 쳐다보았다.
'내가 잘못 들었나??'
* * *
다행히 방가전장의 점포에서 나온 공 총관은 오 포쾌의 능력에 대해서 잘 알고 있었다. 총관은 오 포쾌에게 창고에서 은화를 훔친 범인을 찾아달라는 터무니없는 요구는 하지도 않았다.
"여기 있는 하인 놈들이 도망치지 못하도록 지켜주게!"
점포 뒤쪽에 연결된 커다란 뒤뜰에는 창고로 사용되는 건물들이 여럿 있었고, 가운데 공터에는 하인들이 주눅 든 얼굴로 무릎을 꿇고 앉아 있었다.
"아! 그냥 도망치지 못하도록 지키고만 있으면 됩니까?"
"그래! 계속 세워놓으면 언젠간 말하겠지."
"맡겨만 주십시오! 하하!"
오 포쾌는 얼굴에 화색이 돌아 가슴을 탕탕 두드렸다. 그 옆에 서있던 연우혁은 의아해했다.
'포쾌 일이 이런 게 아니지 않나?'
포쾌는 순찰을 돌고 범인을 잡는 게 일이었지 남의 전장 일을 대신하는 게 아니었다.
하지만 연우혁은 신입 포쾌로서 선배를 존중하는 모습을 보일 때라고 생각했기에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포쾌들이 감시하고 있으면 불평을 덜 하겠지. 건방지게 구는 놈이 있으면 한 대 갈겨주게."
"걱정하지 마십시오! 까부는 놈이 있다면 제 몽둥이 맛을 보게 될 겁니다!"
"조금 여쭤봐도 되겠습니까?"
"어?"
"?"
오 포쾌도, 공 총관도 당황했다. 설마 포쾌가 하인들을 지키는 대신 질문은 던질 줄은 몰랐던 것이다.
"물어보게. 뭐가 궁금한가?"
포쾌를 공짜로 부려먹는 만큼, 공 총관은 화를 내는 대신 조금이나마 설명을 해주려고 했다.
아무래도 그냥 무시할 수는 없었던 것이다.
"무슨 일 때문에 이러시는 겁니까?"
"보면 모르나! 여기서 일하는 놈들 중에 도둑놈이 있네. 괘씸한 놈들. 내가 그렇게 잘 대해줬는데!"
공 총관은 아직도 분통이 터지는지 수염을 떨며 있었던 일을 설명했다.
뒤뜰에 있는 창고들을 보면, 가장 깊숙한 곳에 위치한 창고가 따로 있었다.
이 창고는 보자마자 다른 창고들과 다르다는 걸 알 수 있었는데, 주변에는 몸을 숨길 나무 한 그루 없었고 담벼락 주변에는 해자까지 파여 있었다.
누가 봐도 귀중한 물건, 그러니까 전장의 은자를 보관하는 창고라는 걸 짐작 가능했다.
매달 아흐렛날 총관은 창고의 은자를 확인하고 장부에 기록해서 별 문제가 없다고 위에 보고를 해야 했는데 이번 달은 조금 달랐다.
기록보다 은자가 훨씬 적었던 것이다.
충격 받은 총관은 점포에서 일하는 하인들을 모두 불러서 무릎을 꿇린 다음 훔쳐간 놈이 나올 때까지 닦달을 하고 있었다.
묵곤을 들고 탁탁 바닥을 두드리던 오 포쾌는 총관의 분노에 공감하며 소리쳤다.
"얼마나 상심이 크시겠습니까! 요 도둑놈들 같으니. 당장 튀어나오지 못하겠냐! 죄인을 숨기는 것도 똑같이 국법에 의해 죄인으로 처벌받는다!"
"저, 저희는 정말 모릅니다!"
"그래, 그래! 죄를 지은 놈들은 모두 그런 소리를 하지. 빨리 토해내라. 아니면 수상쩍은 짓을 한 동료 놈이 있으면 그 놈이라도!"
오 포쾌가 하인들을 윽박지르는 동안 연우혁은 총관에게 몇 가지 질문을 더 던졌다.
"창고에 접근한 적 있는 다른 사람은 없었습니까?"
"글쎄, 나 말고는 없다니까. 원래는 하인 놈들도 접근할 수 없네. 내가 없는 사이 개금(開金, 열쇠)의 모양을 본따서 몰래 열었겠지."
"정말 다른 사람은 없었습니까?"
"...?"
총관은 멈칫했다.
상대 포쾌가 마치 확신이라도 하는 것마냥 말하고 있었던 것이다.
총관이 놓치고 있는 게 있다고!
원래라면 이 건방진 포쾌한테 으름장을 놓아야 했겠지만, 총관은 그러지 못했다.
어쩌면 포쾌와 눈이 마주쳐서일지도 몰랐다. 이상하게 자신의 마음속이 낱낱이 캐내지고 있는 기분이 들었다.
"음... 전장에서 일하는 보표 몇 명도 창고에 접근한 적이 있었지. 밖으로 보내야 할 은원보가 있어서."
보관하는 귀물들이 많은 전장은 당연히 그 귀물들을 지킬 호위들도 있어야 했다. 전장의 점포에서 은자를 옮길 때 보표가 직접 옮기는 것도 이상한 일은 아니었다.
하지만 이런 상황에서 보표는 의심하지 않는다니?
오 포쾌는 당황해서 물었다.
"그 보표들은 확인한 거 맞습니까?"
"보표들은 훔쳐갈 수가 없다니까!"
총관은 짜증스럽게 외치며 설명했다.
원래 창고에서 은자를 갖고 나오는 보표들은 가장 우선적으로 의심해야 할 사람들이었다. 총관도 그 정도는 알았다.
하지만 총관이 그러지 않는 이유도 확실했다. 보표들이 은자를 몰래 훔쳐가는 건 불가능했던 것이다.
"보표들은 창고에 들어갔다 나오면 모든 옷을 벗고 검사를 받네. 입 안, 귀 안, 심지어 엉덩이 안까지 확인하지. 그런데 어떻게 은자를 숨겨 갖고 나온단 말인가. 어쩌다 한 번 창고에 들린 보표보다, 한 달 내내 여기서 일한 하인들이 창고에 몰래 접근했을 가능성이 훨씬 높지 않겠나!"
오 포쾌는 설명을 듣자 이해가 갔는지 고개를 주억거렸다.
확실히 저 정도로 확인을 하면 보표를 의심하지 않는 것도 납득이 갔다.
아무래도 은자를 한 번 옮긴 보표들보다는 여기서 계속 일한 하인들이 몰래 창고에 접근했을 가능성이 높지 않겠는가.
"총관 어르신의 말씀이 맞..."
"아닙니다. 은자를 훔쳐간 건 보표 중 하나일 겁니다."
"?!"
"???!"
총관도 오 포쾌도 당황해서 말문이 턱 막혔다.
"뭐라고?"
"몇 가지만 더 여쭤보겠습니다. 저 창고에 혹시 진법도 걸려 있습니까?"
"...맞네."
"진법이 걸린 곳에는 몇몇 특이한 현상이 일어난다고 들었는데, 창고 안이 춥습니까?"
"맞, 맞네. 그걸 어떻게?"
총관은 당황했다.
은자를 보관한 창고에 기문진법을 설치해놓는 건 흔한 일이라 예측할 수 있다지만, 창고 안이 이상할 정도로 춥다는 건 그냥 예측할 수 있는 게 아니었다.
이 진식을 설치해 준 제갈세가의 무인도 예측하지 못한 결과에 사과하지 않았던가.
"옷을 벗고 들어가면 더 검사가 쉬울 텐데, 옷을 입고 들어가서 그럴 거라고 생각했습니다. 조금만 더 물어보겠습니다. 혹시 보표 중에 물이 담긴 수통을 갖고 들어간 사람이 있습니까?"
"수통을...?"
총관은 연우혁의 말에 홀린 듯 집중했다. 그러고 보니 보표 중에 목이 마르다고 허리춤에 조롱박으로 만든 수통을 갖고 들어간 놈이 있었다.
"있, 있었다!"
"그 자가 범인..."
"알겠다!"
오 포쾌가 고함을 질렀다.
"이런 교활한 보표 놈 같으니! 은자를 물과 함께 꿀꺽 삼켜 뱃속에 숨겨갖고 나온 거구나!"
"...축골공을 익히지 않았다면 주먹만한 크기의 은자를 삼키기는 쉽지 않을 것 같습니다."
"아니냐???"
오 포쾌는 자신의 생각이 빗나가자 당황했다. 이것 말고는 답이 없었던 것이다.
총관도 이해가 가지 않는다는 듯이 되물었다.
"왜 수통을 갖고 들어간 보표가 범인이라는 거지? 혹시 은자를 그 안에 담아놨단 건가?"
"맞습니다."
"당연히 수통 안도 확인을 하네. 거꾸로 들게 하고 몇 번은 흔들게 하지. 은자가 들었다면 바로 나왔을 텐데."
"총관 어르신. 물은 얼면 거꾸로 흔들어도 나오지 않습니다."
"...!!!!!"
총관은 뒤통수를 세게 얻은 것 같은 충격을 받았다. 연우혁은 마치 그 자리에 있었던 것마냥 담담하게 말했다.
"추운 곳에 물을 두면 생각보다 금세 업니다. 아마 보표는 안에 들어가자마자 병 안에 은자를 최대한 넣고 얼렸을 겁니다. 시간을 끌면 끌수록 물은 단단히 얼었을 테니..."
"그, 그러고 보니 가장 뒤에 나왔던 거 같아. 그 놈!"
"여기서 일하는 하인들이 총관 어르신이 갖고 계신 열쇠에 손을 대는 건 쉽지 않을 겁니다. 설령 손을 댔다 하더라도 다른 하인들의 눈을 속이고 저 창고까지 접근해서, 은자를 빼낸 다음, 그걸 숨기고서 밖으로 나가는 일은 어렵지 않겠습니까. 아마 그 보표가 훨씬 범인일 가능성이 높다고 생각합니다."
"자... 자네는 대체 누군가???"
"이번에 새로 요패를 받은 포쾌입니다."
연우혁은 정중하게 포권하며 말했다.
지낭 제갈규 (1)
사흘 후.
공 총관은 포쾌들이 머무르는 관아에 직접 찾아왔다.
오 포쾌는 그 모습에 기겁했다. 얼마나 기겁했는지 오전부터 진흙과 연잎으로 곱게 싸서 굽던 닭을 던지고 도방(倒防) 건물로 피신할 정도였다.
그러나 공 총관은 분노하거나 멱살을 잡는 대신 만면에 웃음을 띠며 다가왔다.
"고맙네. 고마워!"
"은자를 훔쳐간 사람을 잡으셨습니까?"
"그래!"
오 포쾌는 상황이 괜찮게 흘러가는 것 같자 슬며시 기어나왔다.
"총관 어르신. 정말 보표 놈이 훔쳐갔단 말입니까?"
"그렇다네."
"허!"
오 포쾌는 귀신을 본 것처럼 연우혁을 쳐다보았다.
숙부한테 새로 들어온 포쾌가 비범한 능력을 갖고 있다고는 들었지만, 아무래도 귀로 듣는 것과 직접 보는 것은 달랐다.
직접 보니 정말로 믿기 힘들었던 것이다.
'귀신을 부리나? 혹, 혹시 내 마음을 읽는 거 아닌가?'
"선배님. 저는 마음을 읽을 줄 모릅니다."
"허어어어억!"
오 포쾌가 뒤로 넘어지더니 허겁지겁 물러섰다. 연우혁은 생각보다 너무 효과가 극적이자 당황했다.
"정말 마음을 읽을 줄 모릅니다."
"거, 거짓말하지 마라! 신통력이 있다고 들었다! 그 신통력으로 내 마음 속을 엿보고 있는 거겠지!"
"그냥 추측해봤을 뿐입니다. 신통력이 있긴 한데, 그렇게 마음까지 읽진 못합니다."
"정, 정말이냐?"
오 포쾌는 옷에 묻은 흙을 털며 일어섰다.
그 소란에 다른 곳에 있던 포쾌들 몇몇이 무슨 일인가 싶어 다가왔다.
-무슨 일인가?
-아. 그 새로 들어온 놈 있잖나. 그 놈이 정말로 은자를 찾았다고 하던데.
-진짜 신통력이 있나보군...
포쾌들은 호기심과 경외심, 그리고 두려움이 살짝 섞인 눈으로 연우혁을 쳐다보았다.
신통력이라는 것은 고명한 불승이나 도사에게나 어울리는 일이었지 저잣거리를 뛰어다니는 포쾌한테 어울리진 않았던 것이다.
마음 같아서는 점이라도 쳐달라고 하고 싶으면서도, 또 괜히 신통력이 있는 자에게 불손하게 굴었다가 천벌이라도 내려올 것 같아서 두려웠다.
"정말 고맙네."
공 총관은 포쾌들과 달랐다.
총관은 여러 지역을 돌아다니며 세상 물정에 밝은 만큼 신통력에 대해서도 포쾌들만큼 불확실한 두려움을 가지지 않았다.
물론 총관이 본 사람들 중에서도 눈앞의 포쾌만큼 대단한 신통력을 가진 사람은 없었다. 앉은 자리에서 천 리를 내다보듯 훔쳐간 사람을 찾아내다니. 지금 생각해도 소름이 돋는 재주였다.
"몰래, 조용히 보표의 집을 수색해보라고 했지. 그 기름에 튀겨 죽일 놈이 안뜰 깊숙한 곳에 은자를 파서 묻어놨더군. 정말 고맙네. 자네가 아니었다면 애꿎은 하인들을 계속 의심했을 거야."
"아닙니다. 운이 좋았을 뿐입니다."
연우혁의 말은 반쯤 진심이었다.
애초에 전장, 창고, 은자 유출, 보표를 듣는 순간 어느 누가 가져갔는지 바로 떠올랐던 것이다.
이미 정답을 알고 있는데 저렇게 칭찬을 계속 듣는 것도 민망한 일이었다.
"보답을 하고 싶네."
"!"
연우혁은 총관의 말에 놀랐다.
아무래도 상대의 말이 예상 밖이었던 것이다.
'어떻게 대답해야 하지?'
여기 무림에 떨어지고 나서 얼마 되지 않았지만, 연우혁은 빠르게 적응해나가고 있었다. 이런 상황에서 아무 생각 없이 대뜸 대가를 요구해서는 안 된다는 것도 그 중 하나였다.
너무 빨리 받아들여서도, 너무 과한 걸 요구해서도 안 됐다. 포쾌로서 탐욕스러운 사람이라는 낙인이 찍힐 수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러면 기껏 문제를 해결해줬음에도 불구하고 현령이나 포두한테 불려가서 처벌을 받을 수 있었다.
"녹봉을 받는 사람으로서 당연한 일을 했을 뿐입니다."
연우혁의 말에 공 총관의 입가에 걸린 미소가 더욱 짙어졌다. 실로 마음에 드는 대답이었던 것이다.
이 주변의 포쾌들은 온통 승냥이 같은 놈들이라 빈틈만 보이면 시체 파먹듯이 달려들어 댔는데, 이 새로 온 포쾌는 뭔가 달랐다.
일을 해결하는 능력도 그렇고 눈빛에는 정기(正氣)가 가득한 것이 이런 포쾌라면 믿고 일을 맡겨도 될 것 같았다.
"아니야. 정말로 고마워서 그래."
"하지만..."
"어르신께서 말하시는데 자꾸 거절하는 것도 예의가 아니야. 연 포쾌!"
오 포쾌가 연우혁의 등짝을 철썩 때렸다. 때마침 좋게 끼어들어주는 선배의 모습에 연우혁은 속으로 감사했다. 이럴 때는 오 포쾌가 참 든든했다.
"그래. 오 포쾌가 좋은 말을 했네."
"감사합니다. 어르신. 이봐. 주루라면 무조건 금장루야. 이유는 나중에 말해줄 테니까..."
오 포쾌가 속삭였지만 연우혁은 못 들은 척 말했다.
"어르신. 그렇다면 혹시 무공서를 받을 수 있겠습니까?"
"?!"
"!!!!"
서로 다른 충격을 받은 뒤, 공 총관은 흥미로워하며 물었다.
"무공서는 어째서인가? 포쾌들은 이미 무공을 배우고 있을 텐데?"
"부끄러운 말씀이오나, 아직 무공에 모자람이 많습니다. 좀 더 좋은 서책을 얻는다면 도움이 되지 않을까 싶습니다."
"자네는 정말 좋은 포쾌로군! 이 한경에 자네 같은 포쾌가 새로 들어오다니. 보통 복이 아니야."
오 포쾌는 이해가 가지 않는다는 듯이 혀를 찼다.
포쾌는 죄인의 자택에 찾아가 명을 전달하고, 혹은 가끔 도망치는 죄인을 잡으면 그만인 일이었다.
이런 일에 상승의 무공이 무엇하러 필요하단 말인가.
무림인들은 밤낮 구슬땀을 흘려가고 잠을 줄여가며 무공을 수련한다지만, 결국 그 끝에 뭐가 남는가? 대다수는 입신양명도, 천금을 마련하지도 못하고 비참하게 무림의 사체로 발견될 뿐이었다.
"좋네. 무공서... 내가 무공에 대해 잘은 모르지만, 내가 찾아줄 수 있는 가장 좋은 책을 한 번 구해보겠네."
"대인께 감사드립니다!"
"하지만 한 가지 조건이 있네."
"?"
"혹시 창고에 다시 와줄 수 있겠나?"
* * *
공 총관이 말을 꺼냈을 때, 연우혁은 창고에 사건이라도 다시 일어났나 싶었다.
'같은 창고에 두 번 사건이라면 뭐였지? 독살이었나?'
그러나 다행히 그런 일은 아니었다. 공 총관이 연우혁을 창고에 다시 데려가려는 이유는 좀 더 의외인 이유였다.
"저 창고는 참 튼튼하고 단단하네. 그건 십 년 동안 지켜본 내가 보장할 수 있지. 이번 일을 제외하면 어떤 신투도 들어오지 못했었고 말이야. 하지만 한 가지 단점은, 그 안이 너무... 춥다는 걸세."
"어르신. 저는 도사도, 술사도 아닙니다만..."
창고의 추위.
그게 바로 공 총관이 연우혁을 창고에 데려가려는 이유였다.
고작 창고의 추위 때문에 이 난리를 피우냐고 할 수 있겠지만 의외로 진지한 문제였다. 창고의 추위가 생각보다 혹독해서 보표들만 해도 옷을 두텁게 입고 들어가야 했다.
가끔씩 총관도 들어갈 때면 각오를 하고 들어가야 할 정도였으니...
"아네. 알아. 만약 해결하지 못한다 하더라도 걱정하지 말게. 이것 때문에 불평하는 일은 없을 테니까. 무공서도 꼭 성의를 다해서 찾아주겠네. 다만 자네 같은 사람이 한 번 보면 무언가 알아낼 수 있지 않을까 싶어서 그런 걸세."
"최선을 다해보겠습니다만, 제갈세가의 무인도 알아내지 못했는데..."
연우혁은 솔직히 자신이 없었다.
물론 영안이라는 능력이 있긴 했지만, 이 진법을 설치한 제갈세가의 무인도 해결하지 못했다는 말이 마음에 걸렸던 것이다.
쉽게 찾아낼 수 있다면 상대가 먼저 찾아내지 않았을까?
"부담 갖지 말게."
"그보다 창고에 이렇게 접근해도 되는 겁니까?"
"자네가 도둑질을 할 사람이었다면 보표한테 찾아가서 은자를 나눠달라고 요구했겠지."
공 총관은 성큼성큼 걸어가더니 열쇠를 돌려 창고 문을 열었다. 자물쇠가 몇 겹은 있었는지 열쇠를 돌리는 것만해도 시간이 걸렸다.
모든 빗장을 치운 총관이 창고 문을 열었다. 어둑어둑한 창고 안에서 냉기가 휘몰아쳤다.
"...!"
연우혁은 기겁했다. 이건 그냥 추운 정도가 아니라 마치 한겨울의 칼바람 같았다.
'어떤 미친 놈이 진법을 설치한 거야?'
아무리 외부인을 막으려고 설치했다지만 이건 좀 아니다 싶었다. 창고에 들어올 때마다 거의 얼어 죽을 각오를 하고 들어와야 할 수준이었다.
'집중하자.'
연우혁은 집중했다.
담풍호가 말했던 것처럼, 연우혁은 무공을 수련하면서 영안을 통제할 수 있도록 노력하고 있었다.
원할 때, 원하는 것만 볼 수 있도록.
그게 지금 연우혁의 목표였다.
"!"
창고 안의 정보들을 확인하기 위해 집중하자, 그 안에 있는 것들이 머릿속에 강제로 들어오기 시작했다. 차이점이 있다면 이번에는 두통이 없다는 점이었다.
'조금씩 익숙해지고 있다.'
담풍호의 말이 맞았다.
처음에는 쓸 때만 해도 두통이 올라오던 영안이었지만, 이제는 어지간해서는 두통이 올라오지 않았다. 힘을 조절해서 짧게 사용하는 요령을 익힌 기분이었다.
게다가 들어오는 정보들도 점점 더 늘어나고 자세해졌다.
'확실히 원래도 능력이 성장했었지.'
능력이라고 해봤자 얻는 정보들이 늘어나고 자세해지는 정도였지만, 확실히 영기와 상단전의 능력은 연관이 깊어보였다.
내공은 지지리도 안 쌓이는데 상단전의 기운은 이렇게 쉽게 쌓이다니.
'정말 상단전의 내공을 어떻게 돌릴 순 없나...'
마제은(馬蹄銀) 한 상자, 화섭자, 야명주, 침입자를 살해하기 위해 벽 안에 자리 잡은 기관진식, 진법을 유지하기 위해 배치된 돌과 나무와 빙석...
어지러울 정도로 많이 들어오는 정보를 파악하던 연우혁은 창고 안에 기운의 흐름이 있다는 걸 깨달았다.
사건을 해결하면 연우혁의 상단전으로 주변의 영기가 흡수되듯이, 이 주변의 기운이 창고의 한 곳으로 흘러가고 있었던 것이다.
연우혁은 창고 안으로 조심스레 발걸음을 옮겼다. 진법을 구성하는 빙석(氷石) 중 하나가 살짝 금이 가 있다는 게 머릿속으로 들어왔다.
'진법이... 망가진 건가?'
냉기가 이 주변으로만 비정상적으로 몰리는 거 보니, 진법을 구성하는 빙석에 금이 가서 그런 게 아닌가 싶었다. 육안으로는 알아보는 게 불가능할 만큼 희미한 금이었다.
연우혁은 확인하기 위해 금이 간 빙석 앞에 섰다. 그러자 빙석 앞에 고인 냉기가 사납게 달려들었다. 당황한 연우혁은 손을 뻗어 앞을 막았다.
'아차!'
실수였다. 손으로 막는다고 저런 기운이 막아지겠는가.
연우혁은 멍청하게 멋대로 진법을 돌아다닌 스스로를 탓했다. 아무리 창고에 설치된 진법이라 하더라도 얕봐서는 안 됐었다.
그러나 그 순간 냉기가 멈췄다.
"...??"
연우혁은 당황해서 기운을 확인했지만 냉기는 멈춘 채 움직이지 않았다. 마치 연우혁의 뜻으로 조종하고 있는 것 같았다.
'설마.'
정신을 집중해서 명령을 내리자 냉기는 왼쪽으로, 오른쪽으로, 또 위쪽으로 움직였다.
진법 내의 기운을 이렇게 멋대로 조종할 수 있다니?
그런 게 가능했다면 무림에서 진법은 예전에 사라졌을 것이다. 갇힌 사람이 멋대로 기운을 다스릴 수 있다면 무슨 의미가 있겠는가.
'이것도 상단전 덕분인가?'
연우혁도 본인이 특이하단 것 정도는 알았다. 상단전이 열려있을 뿐만 아니라 그 안에 다량의 영기를 쌓고 있고, 또 희귀한 신통력까지 있지 않은가.
그게 지금 같은 일에도 영향을 준다면...
'일단 밖으로 내보낸다!'
연우혁은 다급히 밖으로 냉기를 쏘아 보냈다. 점점 몸이 얼어붙는 것 같아 오래 버틸 수가 없었다.
창고 안에 바람 소리가 더욱 거세졌다. 공 총관은 깜짝 놀라서 물었다.
"무슨 일인가?!"
"그러니까 이게..."
연우혁이 변명하기도 전에 귀가 찢어질 듯한 바람 소리가 끝이 났다. 그리고 창고 안의 냉기도 모두 사라졌다.
"죄송합..."
"대단해, 대단해! 일각도 안 되어서 이렇게 해결할 줄은 몰랐네, 정말!"
지낭 제갈규 (2)
'다... 행인가?'
연우혁은 당혹스러움과 안도감을 동시에 느꼈다.
당혹스러움은 진법에 쌓인 기운을 멋대로 날려버려서였고, 안도감은 공 총관이 그 사실에 전혀 화를 내지 않아서였다.
오히려 공 총관은 연우혁이 해결해줬다고 기뻐하고 있었다.
"자네, 정말 대단하군 그래. 제갈세가의 사람도 해결 방법을 찾지 못했는데."
"정말 운이 좋았을 뿐입니다."
연우혁은 기겁해서 공 총관의 말에 대답했다.
겸손을 떠는 게 아니라 진심으로 위험해서였다.
무림인들에게 자존심은 어떻게 보면 목숨보다 중요한 가치였다. 스스로의 이름이나 명성이 더럽혀질 바에는 죽음도 불사하는 이들이 흔했다.
실제로 연우혁이 해결한 사건들 중에 무림인과 관련된 사건들은 동기에 명예나 자존심이 들어가 있는 경우가 상당히 많았다.
자신의 무공을 모욕해서, 자신의 별호를 모욕해서, 자신의 실력을 모욕해서, 자신의 사문을 모욕해서...
이런 무림에서 만약 공 총관이 '한경의 포쾌 하나가 신통력이 있는데 그 재주가 제갈세가보다 뛰어나다더라'이딴 소리를 지껄이고 다니면 어떻게 되겠는가?
공 총관이야 좋은 의도로 말하더라도 제갈세가의 무인들 중 한 명만 발끈해서 찾아오면 그 날로 연우혁은 명포쾌가 아니라 시체 포쾌가 될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공 총관은 연우혁의 속마음도 모르고 감탄의 눈빛으로 쳐다볼 뿐이었다.
'이런 젊은이를 본 적이 없는데.'
견문이 넓은 만큼 공 총관은 신통력을 가졌다고 호언장담하는 사람들을 여럿 봤었다. 대부분은 수상쩍은 사기꾼이었지만 그 중에는 정말 그럴듯한 재주를 갖고 있는 자도 있었다.
그런 자들은 오만하고 불손하며 신통력을 가지지 못한 남들을 업신여기기 일쑤였다. 공 총관은 그게 신통력을 타고난 사람들의 어쩔 수 없는 숙명이라고 생각했었다.
수명이 짧은 만큼 오만하고 불손해질 수밖에 없는 것이다.
그러나 눈앞의 포쾌는 그들을 압도하는 재주를 보여주면서도 한 점의 오만함도 없었다. 오히려 겸손하게 고개를 숙였다.
공 총관의 입장에서는 마치 도통(道通)한 신선 같다고 느낄 수밖에 없었다.
"어르신. 제 재주를 칭찬해주시는 건 감사한 일입니다만, 너무 거창한 칭찬은 질시를 살까 두렵습니다."
"아, 아. 그건 걱정하지 말게."
포쾌의 말에 공 총관은 쓰게 웃었다.
모난 돌이 정 맞는다는 말은 무림에서만 통하는 말이 아니라 어디에서든 통하는 말이었다.
이 포쾌가 왜 저런 말을 하는지, 노련한 공 총관은 바로 이해했다.
"자네가 쓸데없는 걱정을 하게 했군. 이거 미안하네. 이 일을 직접적으로 언급하지는 않겠네. 아무래도 그게 좋겠지?"
"감사합니다."
"그래. 자네가 재주 있다고, 훔쳐간 은자를 찾아놨다는 이야기 정도만 주변에 하도록 하지."
생각보다 상대는 말이 잘 통했다. 연우혁은 상대의 배려에 감사해하며 몸 안을 점검했다.
다행히 진법의 냉기를 멋대로 조종했다고 내상 같은 건 입지 않았다.
하단전에 내공을 쌓아서 무공을 펼치는 건 심법의 이치를 깊게 이해하고, 온몸에 기를 쌓으며, 소주천으로 단전에 끌어 모은 한 줌의 내공을 전력을 다해 활용해야 하는데 상단전의 신통력은 왜 이리 쉽단 말인가?
'신통력을 단련하는 것도 좋지만, 최대한 빨리 무공서를 찾아야한다.'
지금 연우혁에게 필요한 건 신통력을 더욱 갈고 닦는 게 아니라, 무공을 갈고 닦아 하단전을 단련하고 중단전도 강화시키는 것이었다.
"총관 나으리!"
"무슨 일이냐? 손님이 와있는데."
하인이 급히 달려오자 공 총관은 떨떠름한 표정으로 대꾸했다.
"제갈세가에서 손님이 오셨습니다."
"...!"
"..."
신통력을 굳이 발휘하지 않아도 연우혁은 일이 꼬였다는 걸 직감할 수 있었다.
* * *
제갈규는 눈을 감고 공 총관을 기다리고 있었다.
여기가 피 튀기는 전장도 아닌데, 제갈규는 마치 앞에 상대가 있는 것마냥 적잖게 긴장하고 있었다.
공 총관이 숨겨진 무림의 고수여서도, 혹은 방가전장이 숨겨진 고수들이 득시글거리는 마굴이어서도 아니었다.
제갈규 본인이 저지른 실수 때문이었다.
-죄송합니다. 당주님.
-스스로 저지른 잘못은 스스로 수습할 줄 알아야 한다. 너는 네가 저지른 잘못을 남에게 넘기는 무인이느냐? 아니면 스스로 수습하는 무인이느냐?
-당연히 후자입니다. 당주님.
-그 의기에 한 번만 더 기회를 주겠다. 진법의 빙석을 찾아봐라. 냉기가 날뛴다면 빙석이 그 원인일 테니.
-하지만 당주님. 빙석은 분명 멀쩡...
-다음으로 뱉는 말은 주의해야 할 것이다. 대 제갈세가의 무인으로서 하는 말로 평가할 테니까. 자. 말해봐라.
-...아닙니다. 제가 잘못했습니다. 다시 확인해보겠습니다.
제갈세가는 무림의 명망 높은 오대세가 중 하나이자 인근에 따라올 자가 드문 권세를 자랑하는 호족집단이었으나, 그렇다고 양의 머리를 걸어 놓고 개고기를 팔 수는 없었다.
제갈세가의 무인이 설치한 진식(陣式)이 약속한 것과 다르다는 소문이 퍼져나간다면?
오대세가 중 진법으로는 으뜸간다는 명성에 금이 갈 수도 있었다. 이런 명성은 한 번 더럽혀지면 다시 복구하기 쉽지 않았다.
게다가 방가전장은 멋대로 무시해도 될 만큼 작은 세력이 아니었다. 진법의 효과가 제대로 작동해서 망정이었지, 진법의 효과마저 작동하지 않았다면 일이 훨씬 커졌을 수도 있었다.
때문에 제갈규는 본가의 장로에게 가르침을 듣자마자 서둘러 경장을 꾸려 출발했다. 오래 내버려뒀다가 진법이 예상치 못한 변화라도 일으킬까 두려웠기 때문이었다.
"...총관께서 늦으시는군."
"죄송합니다. 대협."
하인 한 명이 바닥에 엎드릴 것처럼 자세를 낮추며 사죄의 말을 올렸다.
무림인의 성질이 얼마든지 난폭해질 수 있다는 걸 알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하인들의 표정에는 초조함이나 곤혹스러움 같은 게 보이지 않았다. 지금 그들의 주인이 늦게 오는 데에는 합당한 이유가 있다는 자신감 없이는 불가능한 일이었다.
'무슨 일이지?'
제갈규는 인근의 대상(大商)들의 회동에 참가했거나 혹은 고관대작한테 불려갔나 싶었다. 그런 이유라면 하인들이 저렇게 어쩔 수 없어하는 것도 말이 됐으니까.
"무슨 일이 있었나?"
"예. 실은 창고에 도둑이 들어서..."
"컥!"
제갈규는 하인들이 내온 찻잔에 담긴 찻물을 뱉어내며 기침했다. 갑작스러운 소식이 제갈규의 심장을 단단히 조였다.
"설마... 설마 진법에 문제가 있었는가?"
"죄송합니다. 대협. 어르신의 허락이 없다면 감히 말씀드리기 어렵습니다."
제갈규의 눈썹이 노한 성미를 따라 위로 휘었다. 그러나 제갈규는 이런 상황에서 난동을 피울 만큼 멍청하지 않았다.
만약 제갈규가 설치한 진법이 문제가 되어 도둑이 들었다면 이건 보통 일이 아닌 것이다.
마침 총관이 뒤뜰에서 걸어 나왔다. 저번에 봤던 것처럼 매사에 빈틈없고 꼼꼼한 이목구비를 갖고 있는, 누가 봐도 타고난 상인 같은 인상을 가진 사내였다.
그 옆에 있는 것은 조금 특이한 사내였다. 훤칠한 체격에, 어딘가 평온하고 고요한 느낌을 주는 인상. 가장 신기한 것은 눈빛이었다. 누군가를 노려보거나 위압하려고 들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무언가 꿰뚫는 듯한 안광이 일렁거렸다.
제갈규는 저런 눈빛을 어디선가 본 적 있었다. 떠올려보니 놀랍게도 그건 제갈세가를 이끄는 가주가 가문의 무인들 앞에서 보여주던 눈빛이었다.
어떤 불호령이나 꾸지람, 혹은 내공으로 인한 위압 없이도 제갈세가의 가주는 좌중에 앉은 무인들을 눈빛만으로 조용히 제압할 줄 알았다.
'내가 미쳤나?'
제갈규는 퍼뜩 정신을 차렸다. 웬 처음 보는 놈의 눈빛에 제갈세가 가주를 떠올리다니. 초조하고 심란해서 정신이 나간 모양이었다.
다시 훑어보니 놈은 어디선가 많이 본 복장을 하고 있었다. 그건 포쾌의 복장이었다.
'아. 도둑이...'
그제야 제갈규는 포쾌가 왜 왔는지 알 수 있었다.
도둑이 들었다는 소문을 듣자 인근의 포두가 포쾌를 보낸 모양이었다.
아마 이런 사건을 해결하지는 못할 테지만, 포쾌라도 보내지 않으면 체면이 서지 않을 테니까.
'건방지거나 주제를 모르는 포두로군. 직접 오지 않고 포쾌 한 명만 달랑 보내다니?'
제갈규는 의아해하다가 입을 열었다. 지금 중요한 건 제갈세가의 명성이었다.
"도둑이... 나타났다고 들었습니다."
"그렇습니다. 대협."
공 총관과 제갈규는 부자(父子)라고 해도 틀리지 않을 만큼 나이 차이가 났다. 총관은 나이가 지긋했고 제갈규는 아직 혈기 넘치는 젊은이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공 총관은 제갈규를 꼬박꼬박 대협이라고 부르며 공손하게 대했다. 제갈규는 이런 상인이 더 심지가 굳다는 걸 잘 알고 있었다.
"혹시... 진법이 기능하지 않았습니까?"
"아닙니다. 대협. 진법은 제대로 기능했습니다. 조금 춥긴 했습니다만..."
제갈규는 속으로 가슴을 쓸어내렸다.
다행히 최악의 상황은 면한 모양이었다.
"그럼 도둑은 그 자리에서 잡혔습니까?"
"아닙니다. 도둑은 은자를 훔쳐서 나갔지만, 여기 이 포쾌 덕분에 잡을 수 있었습니다."
연우혁은 영 불편했지만 표정을 바꾸지 않았다.
'설마 진법 때문에 귀찮은 일이 생기진 않겠지.'
원래 무공의 수준이 낮은 무인은 자신보다 높은 사람의 수준을 알아볼 수 없었다.
그러나 연우혁은 정신을 집중하자 눈앞에 있는 제갈세가 무인의 실력을 그대로 느낄 수 있었다.
평일원이나 담풍호보다는 훨씬 떨어졌지만 오 포두와 얼추 비슷한, 그보다는 살짝 뛰어난 실력이었다.
'그럼 이류쯤 되는 건가?'
오 포두는 포두들 중에서 가장 뛰어난 무공 실력을 갖고 있었고, 또 본인도 꾸준히 무공을 수련하는 사람이었다. 포두가 이류의 경지에 도달하는 건 쉽지 않았다.
그런 아버지 뻘 되는 무인을 뛰어넘는 실력을 벌써 가졌다는 점에서 과연 명문세가의 무인이라고 할 수 있었다.
'오 포두는 이류 중입, 이 사람은 이류 말입 정도인가.'
"도둑을 추격해서 잡은 겁니까?"
"아닙니다. 놀랍게도 여기 포쾌는 도둑이 지나간 자리만 보고서 어느 놈이 훔쳐갔는지 알아맞혔습니다."
공 총관은 노련한 상인답게, 있었던 일들을 적당히 각색하여 늘어놓았다.
물론 그것만 해도 제갈규에게는 믿기 힘든 허황된 말이었다. 듣는 동안 제갈규의 눈썹이 미묘하게 꿈틀거렸고, 그 꿈틀거림은 영안으로 제갈규를 관찰하던 연우혁에게 그대로 정보로 변해 들어왔다.
'믿지 않고 있군.'
사건 현장의 정보를 모으는 것처럼 눈앞에 앉아 있는 사람의 정보를 모으는 것도 가능했다. 연우혁은 상대가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그리고 자신을 죽이려고 하지는 않는지) 유심히 관찰했다.
제갈규는 침착하게 총관의 말을 들었다. 믿지는 않았지만 총관의 의도를 파악하기 위해서였다.
'무슨 생각이지? 나를 망신주려는 건가?'
진법 때문이라고 하면 너무 노골적이고, 제갈규 본인이 진상을 확인하려고 할 수 있으니, 웬 이름 없는 포쾌를 데리고 와서 일을 해결했다고 갖다 붙이는 것일까?
하지만 제갈규는 이게 어떻게 제갈세가의 이름에 모욕이 되는지 이해가 가지 않았다. 결국 진법은 제대로 작동했고, 도둑은 총관의 실수에 가깝지 않던가.
'내가 뭘 놓치고 있는 거지?'
"참. 대협. 진법의 문제는 찾아서 해결했습니다."
"뭐라고요?!"
제갈규는 평정심을 잃고 고함 비슷한 소리를 질렀다. 자신의 실책을 깨달은 제갈규는 얼굴을 붉혔다.
"죄송합니다. 놀라서... 원인이 무엇이었습니까? 또, 어떻게 해결하신 겁니까?"
"빙석에 금이 가 있었습니다."
"!!!"
"그리고 해결은..."
총관은 연우혁에게 눈빛을 보냈다. 걱정하지 말라는 눈빛이었다.
"저희 전장에 신세를 지신 분 중에 실력이 고명하신 도사님이 계십니다. 그 분께 부탁했습니다."
'무당? 화산인가? 이럴 수가...'
"제, 제가 다시 보게 해주십시오."
"그건 좀..."
총관은 곤란해했다.
도사의 핑계를 댔는데 괜히 제갈규의 진입을 허락해주면, 그 도사의 체면을 무시하는 일이 되는 셈 아닌가.
그러나 연우혁이 조심스럽게 끼어들었다.
"총관 어르신. 괜찮으시다면 한 번 허락해주시면 어떻겠습니까? 아무리 뛰어난 도사님이라지만, 제갈세가의 신기묘산한 지혜를 따라가기는 힘들지 않겠습니까? 놓친 걸 찾아내주실 지도 모르는 일입니다."
진법의 기운만을 날려버리기만 하고 빙석의 금이 간 건 해결하지 못한 만큼, 연우혁은 그냥 넘어갈 수가 없었다.
이대로 내버려뒀다가는 나중에 문제가 또 생길지 모르는 일이었으니까.
어떻게든 제갈세가의 무인을 들여보내야 했다.
그러나 제갈규에게 이 포쾌의 발언은 반갑기 그지없는 일이었다. 게다가 고명한 도사를 두고서도 제갈세가의 이름을 더 높게 평가하다니.
포쾌란 족속이 아첨에 능하다는 걸 머리로 알고 있어도 이렇게 겪으니 고마울 수밖에 없었다. 제갈규는 눈짓으로 감사를 표했다.
'반드시 후사하겠다.'
'뭐지? 이상할 정도로 감사하는데?'
지낭 제갈규 (3)
두 무인이 서로 다른 생각을 하는 동안 고민하던 공 총관이 입을 열었다.
"알겠습니다. 하지만, 도사님의 체면도 존중해주셨으면 좋겠습니다."
"...명심하겠습니다."
제갈규는 속으로 공 총관이 모셔 온 도사의 배분이 보통이 아닐 것이라고 짐작했다.
그렇지 않다면 이렇게 몇 번이고 신신당부를 할 이유가 없었으니까.
'배려해주는 건 감사한데 괜찮은 거 맞나?'
연우혁은 공 총관의 말에 등줄기에 땀이 솟아나는 것을 느꼈다.
물론 이렇게 못을 박아놓지 않으면 이 제갈세가의 무인이 쓸데없는 고집을 세워서 도사의 신분을 캐묻거나 만나게 해달라고 할 수 있었으니 말 자체는 문제가 없었다.
다만 제갈세가의 무인이 도사의 정체를 우연히 알게 될 경우를 생각하니 땀이 자연스레 솟아나왔다.
그럴 경우 땀방울만이 아니라 붉은 핏방울도 몸에서 새어나올 수 있었으니까.
공 총관이야 전장에서 보호해준다지만 연우혁은 그냥 찌르고 판관한테 은자를 바치면 넘어가줄 가능성이 높았다.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