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0장. 프롤로그
정신차리자, 멈추지 말자.
화살의 비가 다시 쏟아진다.
칼을 휘둘러 몇몇은 막았고 몇몇은 맞았다. 앞으로 달려나가 칼을 내질렀다. 두 명을 꿰뚫은 칼을 돌려잡아 또 하나를 벤다.
쓰러지면 안 된다.
오늘이 세크리티아의 마지막이어선, 안 된다.
누군가 앞으로 달려왔다. 습관처럼 칼을 휘두른다.
놈이 실드로 막았다. 그리고 묻는다.
"기억하마. 이름이 무엇이냐?"
"잊었다."
나는 그저 오롯이 왕을 섬기는 칼이다.
하나 남은 팔을 다시 움직였다.
놈의 손짓에 나의 칼이 부서진다.
"아······ 그래, 네가 체이스의 아우로구나. 만나보고 싶었다."
대답 대신 손잡이만 남은 칼을 휘둘렀다. 놈은 피하지 않았다.
놈이 얼음의 창을 보냈다.
나는, 막지 못했다.
- 콰직!
생을 가르는 소리가 귓가에 들린다.
숨을 이어나가기가 힘들어진다.
"나는 카이리스 마법사단 발칸의 군단장. 아르센 헤르츠다. 세크리티아의 왕제, 베른. 기억하겠다. 그대는 충분히 싸웠다."
눈을 들어 먼 곳을 좇았다.
나의 형님, 전하께서 계신 곳을 찾으려 했다.
그러나 흐려진 눈은 그 무엇도 보여주지 않았다.
"그러니 이제 쉬어라."
빛이,
사그라든다.
* * *
그것이 내가 가진 마지막 기억이었다.
다시 눈을 뜬 것은 그 날로부터 10년 전.
하필이면 내 조국 세크리티아를 멸망시킨 카이리스에서, 하필이면 3왕자인 칼리안의 몸을 가진 채였다.
칼리안.
용의 후손이라는 핏줄이 아까웠던 나약한 왕자.
놈은 겁이 많았고 배경 세력도 없었으며 스스로를 지킬 능력조차 없어 일생을 숨죽여 살다 15세가 되기도 전에 암살당했다.
그것이 나에게 닥쳐 올 미래였다.
그러니 이제 어찌 할 셈이냐고, 거울 속의 칼리안이 묻는다.
나는 답했다.
"당연히."
살아야지.
제1장. 이거 정말 멍청하게 살았군 (1)
시녀들의 손이 바쁘게 움직인다.
두꺼운 커튼이 열리고 아스라이 밝아오는 새벽 하늘이 침실을 비췄다. 곧 왕자의 전속 시종이 들어와 아직 앳된 얼굴의 소년이 잠든 침대의 옆에 섰다.
왕족을 깨울 때 손을 대선 안 된다.
큰 소리를 내서도 안 된다.
때문에 시종은 조심스러운 목소리로 말했다.
"왕자님, 일어나실 시간입니다."
항상 문 열리는 소리에 경기를 일으키듯 일어나 앉던 소년이었다. 헌데 오늘은 어떻게 된 일인지 좀처럼 일어날 생각을 하지 않았다.
'피곤하셨나?'
이런 생각에, 시종은 뒤에 서 있던 시녀로부터 작은 종을 건네받았다. 곧 이른 아침을 알리는 은은한 종 소리가 울려 퍼졌다.
- 딸랑, 딸랑.
그제야 소년의 눈이 가늘게 떠졌다.
소년은 잠시 눈을 깜빡이며 정신을 차리는 듯 하더니 와락 몸을 일으켰다. 갑작스러운 움직임에 놀라던 시종이 허리를 살짝 숙이며 인사했다.
"좋은 꿈 꾸셨습니까, 왕자님. 이만 일어나셔야 합니다."
그리고는 준비한 모닝 티를 소년에게 내밀었다. 소년은 언제나 차의 강한 향기로 정신을 먼저 깨운 뒤 세수를 해왔기 때문이다.
'내가 언제 아침 차를 마셨다고?'
소년. 아니 베른은, 이런 생각을 하면서도 무의식적으로 찻잔을 집어들려 손을 뻗었다. 그러다 손의 생김새가 굉장히 낯설다는 것을 보게 됐다.
가득했던 상처와 굳은살은 온데 간데 없는 하얀 손과 가늘고 긴 손가락. 그 모습이 불러온 이질감에, 베른은 저도 모르게 고개를 돌려 왼팔을 쳐다봤다.
깡마른 팔뚝에는 작은 흉터조차 없다.
아니, 그것이 문제가 아니다. 왼팔이 보이는 것부터가 문제였다.
"팔이 잘렸었는데······."
그렇게 중얼거리던 베른이 황급히 입을 다물었다. 자신의 것이라 하기엔 너무 앳된 목소리가 새어 나왔기 때문이다.
"무슨 그런 끔찍한 말씀을 하십니까. 혹시 악몽을 꾸셨습니까?"
악몽.
세크리티아의 멸망, 그보다 더한 악몽이 또 있을까!
시종의 말에 대꾸 할 틈이 없었다.
잘린 팔이 어째서 다시 붙었는지는 나중의 일이다. 당장 확인해야 할 것은 그의 형이자 국왕인 체이스의 생사였다.
"형님께서는 어디 계시지?"
다급한 표정의 베른을 본 시종은 조금 이상하다는 표정을 지어 보이며 대답했다.
"두 분 모두 아직 방에 계십니다."
"······ 둘?"
이번에는 베른의 얼굴에 시종과 같은 표정이 생겼다. 그의 형은 단 한 명, 오로지 체이스 뿐이었으니까.
"란델 왕자님께서는 이미 의복을 갖추셨을 겁니다. 플란츠 왕자님께서도 마찬가지시고요."
란델, 그리고 플란츠.
낯설지만 너무나 잘 알고 있는 이름.
특히 그 중 한 명의 이름은 뼈에 사무치도록 증오하는 이의 것이 아니던가.
'카이리스.'
카이리스의 왕, 플란츠.
당장 죽여 없애도 시원치 않은 이름을 들은 베른의 눈이 가늘게 변했다.
그런 베른을 보던 시종이 다시 한번 입을 열었다.
"왕자님, 어서 준비부터 하셔야죠."
그가 여전히 잠에서 깨지 못한 것이리라 여긴 시종이 뒤에서 세숫물을 들고 있던 시녀를 불렀다. 그 모습을 보고 있던 베른이 혼잣말처럼 중얼거렸다.
"······ 얀."
"네, 왕자님."
자신의 이름이 불리자, 시종이 고개를 돌리며 대답했다.
다시 생겨난 팔과 처음 보는 시종.
그리고 카이리스.
베른은 더 말하지 않았다. 입을 다문 채 생각을 시작했다.
오늘 저 시종을 처음 보았다.
주신 세렌티의 이름으로 맹세하건대 단 한번도 본 적 없는 얼굴이었다. 하지만 그 이름을 알았다.
그 뿐인가?
베른은 지금 함께 있는 시녀들의 이름까지도 모두 '알고' 있었다.
베른이 이 말도 안 되는 상황에 혼란스러워하는 것도 모르는 채, 시종은 물 흐르는 듯한 동작으로 세숫물을 내려놨다.
'악몽이다.'
얀이라 불렸던 시종의 말을 떠올린 베른이 대야에 손을 가져갔다. 지금까지의 상황을 설명할 수 있는 것은 우습게도 꿈을 꾸고 있다는 것 외에는 생각나지 않아서였다.
베른이 반짝이는 은 대야에 얼굴을 가져갔다.
아무리 끔찍한 현실이었다 하더라도 이렇게 엉뚱한 상상 속으로 도망치다니. 그답지 않은 일이었다.
하지만 물에 비친 모습을 본 베른은 다시 한 번 손을 멈춰야 했다.
물에 비친 붉은 눈. 그것은 베른의 것이 아니었다.
베른이 낮은 목소리를 냈다.
"거울을."
"거울 말씀이십니까?"
베른은 대답하지 않았다.
평소답지 않은 모습 때문에 저도 모르게 되묻는 실수를 저지른 얀이 빠르게 사과했다.
"죄송합니다. 바로 가져다 드리겠습니다."
그리고는 등 뒤로 손을 넘겨 시녀들을 향해 손짓했다. 거울을 가져오라는 뜻이었다.
왕자의 방에는 거울이 없었다.
때문에 얀의 뒤에 서 있던 시녀 중 한 명이 서둘러 밖으로 달려나가 거울 하나를 가져왔다.
그것을 받아 든 얀이 베른의 얼굴을 비췄고, 베른은 고맙다는 말을 전할 새도 없이 거울 속의 자신과 마주하게 되었다.
"······."
거울 속에는 흑발의 어린 소년이 있었다.
긴 앞머리 사이로 루비 빛의 두 눈이 베른을 노려보고 있었다.
베른이 고개를 들었다.
시종의 옷자락에 새겨진 문장. 그것은 분명 카이리스의 것이었다. 그것을 본 뒤에야 시종이 자신을 왕제가 아닌 왕자라 부르고 있었다는 것을 상기했다.
입술이 바짝바짝 타들어가는 느낌이 든다.
"칼리안 왕자님."
얀이 말도 없이 거울을 보며 앉아있는 베른을 불렀다.
'아니야. 나는 왕제 베른이다.'
베른은 자신을 잃지 않으려는 듯 자신의 이름을 되뇌었다. 그러자 그에 반발하는 것처럼, 마치 누군가 속삭이는 것 같은 기억이 머릿속에 떠올랐다.
'아니야. 내 이름은,'
그리고 외워놓지 않았던 긴 이름이 저도 모르게 입 밖으로 흘러나왔다.
"칼리안 레인 카이리스."
카이리스의 3왕자 칼리안.
베른이 아니라, 그것이 내 이름이다.
베른이 미간을 찌푸렸다. 그리고는 인상을 찌푸린 채로 얀에게 물었다.
"내 이름이, 무엇이라고 했지?"
베른이 장난을 친다고 생각하는지, 얀이 살짝 웃으며 대답했다.
"칼리안 왕자님이십니다. 참고로 저는 왕자님을 지금 당장 조찬 자리로 모셔야 하는 왕자님의 시종 얀이고요."
그러자 얀의 이 대답을 기다린 것처럼 생소한 기억들이 머릿속으로 물밀듯이 흘러들어왔다.
카이리스의 왕궁, 예법, 날씨, 일정, 기마, 화원, 마법, 왕비, 국왕. 그리고 두 명의 형.
얀의 말이 맞다. 조찬에 늦으면 안 된다.
그의 기억은 그리 외치고 있었다. 당장 일어나라고. 다른 두 왕자보다 늦으면 안된다고.
이제는 칼리안이라는 이름이 되어버린 그가 조용히 물었다.
"오늘 날짜는?"
"4월 28일이지요. 날씨가 아주 좋습니다, 왕자님."
이 말을 들은 칼리안이 잠시 주변을 둘러봤다. 어느 곳을 보아도 세크리티아와 전쟁을 치르는 분위기가 아니었다. 때문에 칼리안이 다시 물었다.
"몇 년인지도."
"522년입니다."
칼리안의 눈빛이 크게 흔들렸다.
카이리스력 522년이라면 세크리티아력 525년이다. 그가 눈을 감았던 그 날이 아니었다.
'10년 전이다.'
10년 전. 그리고 카이리스의 3왕자.
빨리 준비하고 나가기를 종용하는 듯 계속 떠오르는 다른 두 왕자에 대한 기억들.
생각에 잠긴 칼리안이 움직이지 않자, 더 기다리지 못한 얀이 팔을 뻗었다. 옷 소매라도 잡아 일으켜 세울 셈이었다.
- 타악!
그러자 칼리안의 손이 반사적으로 얀의 팔을 쳐냈다. 얇은 손바닥에 맞은 팔이 빨갛게 달아올랐다. 평소 이런 식으로 사용되지 않았던 칼리안의 팔도 아릿하게 아파왔다.
얀이 울상을 지으며 말했다.
"무엇 때문에 이러십니까."
"아. 미안하네. 나도 모르게 실수하였네."
칼리안의 말투가 확 달라졌다는 것을 눈치채지 못할 만큼 놀란 얀이 빠르게 대답했다.
"아닙니다, 왕자님. 그보다 어서 일어나셔야 합니다. 안 그러시면 제가······!"
칼리안은 얀의 말을 끝까지 듣지도 않은 채 고개를 휘휘 가로저으며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그 '형님들'보다 늦으면 안된다며 머릿속을 울려대는 기억 때문에 우선은 움직이기로 한 것이다. 일단은 저 얀이라는 시종을 좀 떼어놓고 생각을 할 필요가 있을 것 같기도 했고.
곧 칼리안은 물에 머리를 박다시피하며 세수를 마쳤다. 정신을 차리려 양 볼까지 탁탁 때린 칼리안이 말했다.
"준비하겠네."
- 말투가 이상해. 나는 그렇게 말하지 않았어.
이렇게 말하는 것처럼 또 한 번 기억이 밀려들어왔다. 때문에 칼리안은 잠시 숨을 들이키듯 기억을 되새기며 다시 말했다.
"아니. 준비할게. 미안해."
"오늘 따라 안 하시던 사과까지 계속 하시고······. 우선은 의복부터 준비해 드리겠습니다."
그렇게 말한 얀이 또 다른 두 명의 시녀를 보며 손을 움직였다. 곧 양 손 가득 옷가지를 든 시녀들이 와서 칼리안에게 옷을 입혔다. 그 후에는 또 다른 시녀가 다가와 머리를 빗겨주기 시작했다.
새까만 머리가 두 눈을 치렁치렁 가리는 것이 보였다.
본래 그는 청은색의 긴 머리를 하나로 묶길 좋아했기에, 눈을 가린 검은 머리가 답답했다. 머리카락을 마음에 들어하지 않자, 기억 속에서 그 이유가 떠올랐다.
- 플란츠 형님께서 싫어하시니까.
그의 형인 두 명의 왕자.
그 중 플란츠는 이 붉은 눈을 병적으로 싫어했다. 그래서 칼리안은 이렇게 머리카락을 내려 눈을 가렸다.
형이 무서워서 눈을 가리다니.
칼리안이 저도 모르게 혀를 쯧 찼다.
'적당히 들은 적 있었지만 이거 정말 멍청하게 살았군.'
그리고는 저도 모르게 실소하며 누군가를 떠올렸다.
'플란츠 따위가 이 눈을 싫어했다라.'
원수 중의 원수. 미친 왕 플란츠.
그는 카이리스의 왕이었다. 아니, 10년 전이라 하니 지금은 왕자일 터.
그가 바로, 세크리티아를 공격하게 한 장본인이었다.
'플란츠······. 나는 네가 숨을 쉰다는 사실이 끔찍하다.'
증오 가득한 이 말을 입 밖으로 꺼내 놓을 수가 없었다.
이 곳은 카이리스의 왕궁이다.
아직도 꿈 속을 헤매고 있는 것 같지만 아무튼 자신은 지금 카이리스의 3왕자인 칼리안이다.
때문에 칼리안은 마음 속으로 같은 말을 몇 십 번이고 반복하고 있었다.
'혹시 놈을 보더라도 지금은 죽이면 안 돼. 참아야 한다.'
만약 꿈이 아니라면.
말도 안되지만 정말로 과거로 돌아온 것이라면.
섣부르게 움직이다가 칼리안의 목이 떨어지는 일이 일어나면 안됐다.
칼리안이 그런 생각을 하고 있다는 것을 알 리 없을 시녀들이 옷매무새를 다듬고 마지막 정리를 해주고 있었다. 과연 아침을 먹으러 가는 사람의 준비가 맞을까 싶을 만큼 철저한 손길이다.
옷차림으로 인해 얼마나 시달렸으면 이렇게까지 하는지 의문이 들 정도였다.
곧 모든 준비가 끝났다.
칼리안이 문 앞에서 살짝 심호흡을 한 뒤 밖으로 나섰다. 그리고는 낯설게 익숙한 중앙 계단을 내려가 오른쪽 끝에 위치한 식당으로 향했다.
가는 도중 아무리 나이를 떠올리려 해도 기억이 상기되지 않았다. 나이조차 세지 않고 살았던 것일까. 결국 칼리안은 얀의 도움을 받기로 했다.
"얀."
"네, 왕자님."
"내가 몇 살이지?"
얀으로서는 뜬금 없는 질문이었다. 아침부터 참 별스러운 질문들을 한다는 생각을 한 얀이 답했다.
"14세이시지요. 성인이 되시려면 아직 네 달이 남았으니까요."
"그래. 그랬었군."
어쩐지 어린 것 같더라니.
이런 생각을 한 칼리안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런 칼리안을 향해 얀이 걱정스러운 목소리를 냈다.
"왕자님. 혹시 지난 밤에 기사가 나오는 소설이라도 보셨습니까?"
말투가 평소와 달랐기 때문에 하는 말이었다.
본래의 칼리안은 말에 오르는 것을 무서워했다.
그런데 내일 말을 타야 하는 기마 수업이 있었다. 때문에 수업에 따라가지 못할 것을 우려해서 기사가 나오는 소설이라도 보고 따라하는 것이라 생각하고 이렇게 묻는 것이었다.
칼리안이 고개를 가로저으며 대답했다.
"아니야. 내가 신경쓰지. 아니, 신경 쓸게."
이렇게 말한 칼리안은 곧 식당으로 들어섰다.
안에는 시종들만 있었지 왕자로 보이는 인물들은 없었다. 칼리안의 시선이 잠시 얀에게 닿았다.
'둘이 당장 출발할 것처럼 그렇게 호들갑을 떨더니.'
아마 칼리안이 조찬에 늦지 않도록 지레 닥달하느라 한 거짓말일 터였다.
커다란 창가에 놓인 동그랗고 큰 식탁이 보였다. 국왕 르메인의 권유로 매일 세 명의 왕자들이 아침 식사를 함께하는 곳이었다. 옛 칼리안에게 있어 가장 끔찍한 장소이기도 했다.
식당의 시종 중 한 명이 한쪽 자리의 의자를 빼주는 것이 보였다. 그 곳이 자신의 자리임을 알게 된 칼리안이 자리에 앉았다. 그리고는 창 밖의 낯선 풍경을 바라봤다.
'듣던대로 정말 대단한 규모구나.'
시스테라 대륙의 4개국 중 가장 넓은 영토를 지닌 카이리스의 왕궁은 그 거대한 크기로도 유명했다. 하나의 큰 건물과 두 개의 별관으로 이루어진 세크리티아 왕궁과 달랐다.
왕족이 거주하여 '궁'이라는 이름이 붙어 있는 건물의 수만 무려 6개였다. 그 외의 용도로 사용되는 건물들과 수많은 정원, 인공호수 등이 모두 카이리스 왕궁 안에 있었다.
지금 칼리안이 있는, 왕자들이 머무는 체르밀 궁은 왕궁에서도 그리 크지 않은 편에 속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궁 앞의 인공호수와 그 뒤로 이어진 정원이 상당히 넓었다.
물에 비친 햇살이 창문을 넘어 들어왔다.
그 모습을 보며 잠시 상념에 빠진 채로 10여분을 기다리니 1왕자 란델이 왔고, 30여분이 지나자 2왕자 플란츠가 도착했다.
말 없이 뚜벅뚜벅 걸어와 자리에 풀썩 앉은 플란츠를 본 칼리안의 눈이 벌어졌다.
'대체 저것이······.'
저게 대체 무슨 꼬락서니란 말인가?
상상도 못할 모습을 본 칼리안의 미간이 크게 찌푸려졌다.
제1장. 이거 정말 멍청하게 살았군 (2)
플란츠는 의복도 갈아입지 않은 채였다.
풀어헤쳐진 상의 안으로 맨살이 그대로 보였다. 그것이 어떤 나라인지와는 상관 없이 왕족은 결코 저런 모습을 보여서는 안된다.
다행인 것은 이런 무례하기 짝이 없는 행실에 놀라는 바람에 플란츠의 목에 나이프를 꽂아 넣는 실수를 저지르지 않았다는 사실이었다.
칼리안은 티가 나지 않도록 주의하며 짧은 한숨을 쉬었다.
플란츠의 행색에 란델이 살짝 눈살을 찌푸렸다. 하지만 곧 아무 것도 보지 못했다는 듯 고개를 돌렸다. 칼리안은 그런 란델의 모습을 놓치지 않았다.
'1왕자가 2왕자를 건드리지 못한다.'
이유를 알 만 했다.
세 왕자는 전부 다 이복 형제였고 지금의 왕비 실리케는 2왕자 플란츠의 모친이었다. 때문에 란델이 아무리 1왕자였다 하더라도 플란츠의 윗사람 노릇을 하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
'왕비 집안의 권력이 참으로 대단하였으니.'
이런 생각을 하며 소리 없이 혀를 차는 사이, 그들의 앞에 잘 만들어진 음식이 차례로 놓이기 시작했다.
향 좋은 스프와 고소한 냄새를 풍기는 구운 빵, 아침에 먹기 적절한 스크램블드 에그와 얇게 저민 햄. 거기에 신선한 채소만 가득한 샐러드와 갖가지 종류의 과일까지.
갑작스런 전쟁에 시달리던 베른에게 있어 이보다 훌륭한 식단이 또 있을까. 그러니 만약 혼자 있었다면 모두 남김 없이 먹어치웠을 터였다.
하지만 음식에 손이 가지 않았다.
체이스에 대한 걱정이 첫 이유였고, 생의 원수 플란츠를 앞에 둔 것이 두 번째 이유였다. 이 식당에 감도는 냉랭한 분위기도 한 몫을 했다.
'살얼음판이 따로 없군.'
카이리스의 세 왕자는 분명 형제였으나 이 자리에서 그 어떤 대화도 나누지 않았다. 아무리 이복 형제라 하나 그것 만으로는 이 침묵의 이유가 될 수 없었다.
체이스와 베른 역시 이복 형제였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서로 웃고 떠드느라 요리사가 음식을 다시 데워다주기 일쑤였던 둘이었다. 언제나 베른을 챙기던 체이스의 목소리가 귓가를 맴돌았다.
- 기사가 되겠다니. 말만 들어도 듬직하구나.
- 베른. 걱정하지 말거라. 아무 걱정 말아.
세크리티아의 왕이자 목숨을 내어주어도 아깝지 않을 형 체이스가 절실하게 생각났다.
하지만 이 곳에서는 그 누구에게도 그에 대한 소식을 물을 수 없을 터였다. 때문에 더 걱정이 되고 그리웠다. 당장이라도 달려가 만나고 싶었다.
그런 생각의 끝에 플란츠에 대한 분노가 다시 치밀어 올라서, 칼리안은 애꿎은 물잔을 들어 한번에 다 비워냈다. 그러자 비웃음이 가득 담긴 목소리가 들렸다.
"경박하기는."
하필. 플란츠의 목소리였다.
옷을 입다 만 것인지 벗다 만 것인지도 구분되지 않는 차림을 한 놈의 얼굴이 보였다. 플란츠는 한쪽 입술을 끌어올리며 말을 덧붙였다.
"제 어미를 닮아서 품격이라고는 찾아볼 수가 없지."
평민 출신인 칼리안의 모친을 두고 비아냥거리는 소리였다.
결국 칼리안의 눈이 차갑게 식었다.
채 갈무리하지 못한 증오가 담긴 칼리안의 붉은 눈을 플란츠가 보았다. 플란츠의 눈이 일순간에 날카롭게 변했다.
이런 상황인데도 란델은 둘에게 눈길 한번 주지 않은 채 식사에 집중하고 있었다.
그야말로 완벽한 방관자가 아닌가.
칼리안이 고개를 돌려 란델을 쳐다봤다. 여전한 눈빛을 한 채였다.
그 때.
플란츠의 입에서 위협적인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감히······."
칼리안의 시선이 다시 플란츠를 향했다.
둘의 시선이 맞닿았고 누구도 먼저 눈을 돌리지 않았다. 그 지경이 되어서야 란델이 조용한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그만하거라."
플란츠는 칼리안에게 고정한 시선을 여전히 치우지 않은 채로 말했다.
"재수 없는 피눈깔 때문에 입맛이 떨어져서. 먼저 갑니다."
란델의 허락이 떨어지지 않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자리를 박차고 일어난 플란츠는 곧장 밖으로 나갔다.
차라리 잘 된 일이다. 놈을 오래 마주해도 괜찮을 만큼 칼리안의 인내심이 많지는 않았으니까.
"몸가짐에 주의하거라. 전하의 탄신 기념일 행사도 얼마 남지 않았으니."
그런데 이렇게, 칼리안의 인내심을 줄이는 목소리가 들렸다.
무미건조한 표정으로 이런 말을 한 것은 란델이었다. 칼리안에게는 시선도 두지 않은 채였다.
'문제가 되는 것이 나란 말인가? 방금 나간 놈의 꼬락서니는?'
그 말이 너무 기가 찼던 탓에 칼리안이 실소했다.
죽음을 맞이한 다음 날 다른 몸을 가진 채 다시 눈을 뜨게 된 말도 안되는 상황만 아니었다면 칼리안은 분명 참지 않았을 것이다.
당연히 란델은 이 곳에 함께 자리한 동생이 살의를 감추느라 얼마나 애를 쓰는 중인지를 알지 못했다. 때문에 란델은 칼리안의 반응을 살필 생각도 하지 않은 채 자리에서 일어서 밖으로 나갔다.
"하루도 그냥 넘어가질 않으시니······."
뒤에 서 있던 얀이 혼잣말을 하는 것이 들렸다.
칼리안이 의자에 등을 기대고 긴 숨을 나누어 내쉬며 화를 가라앉혔다. 그것이 구박 받는 막내의 서러운 숨소리로 들렸던지, 뒤에서 얀이 안타까워 하는 것이 느껴졌다.
곧 칼리안이 소리 없이 일어났다.
곧장 다가온 얀이 의자를 마저 빼 주고 흐트러진 의복을 꼼꼼히 정리하기 시작했다. 이렇게 무시 받는 꼴을 매일 볼 텐데도 그 손길이 참으로 조심스럽고 정중하다. 다른 두 왕자의 시종도 이 정도로 정성을 들이지 않았던 것을, 칼리안은 분명히 보았다.
얀의 손바닥에 깊이 남은 손톱 자국이 보였다.
오히려 얀의 눈이 칼리안보다 더 일그러져 있었다. 칼리안보다 조금 더 나이가 많은 시종의 이런 모습에, 끓어올랐던 마음이 서서히 가라앉았다.
"고마워."
그 말에 놀라 칼리안을 쳐다본 얀의 눈이 동그랗게 떠졌다. 칼리안이 울고 있지도, 침중한 표정을 짓지도 않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 뿐만이 아니었다.
그 얼굴에는 심지어 작은 미소까지 걸려 있었다.
칼리안으로부터 생전 처음 받게 된 감사 인사에 어찌 대답할지를 골라내기도 전에, 칼리안의 말이 이어졌다.
"다음 일정은?"
"한 시간 뒤에, 양신전쟁에 대한 수업이 있습니다."
"그 때까지 잠깐 혼자 있을게."
얀은 걱정스러운 얼굴로 그리 하시라 답했다.
본래의 칼리안이 지니고 있던 기억은 제 할 일을 충실하게 했다. 덕분에 칼리안은 조금도 헤매지 않고 건물 밖으로 나와 인공호수 옆의 산책길로 발을 옮길 수 있었다.
다른 사람은 없었다. 칼리안과, 칼리안으로부터 멀리 거리를 두고 따라오고 있는 얀이 있을 뿐.
"하."
호숫가로 걸어간 칼리안이 발 아래의 물을 보며 참았던 숨을 토해냈다. 그런 칼리안의 눈에 호수 한 가운데 놓인 작은 조각상이 보였다.
검은 용이 하늘을 향해 날개를 펴는 모습. 용의 두 눈에는 붉은 색의 보석이 박혀 있었다.
'시스파니안인가.'
카이리스의 초대 왕비이기도 했다는 고룡 시스파니안의 조각상이다.
그녀가 고요한 밤과 같은 검은 머리와 신성한 불을 담은 붉은 눈을 가졌다던 말이 생각났다.
검은 머리, 붉은 눈. 그것은 칼리안도 마찬가지였다.
'재수 없는 피눈깔.'
플란츠의 목소리가 다시 떠올랐다.
몸이 어려지니 정신까지 여려지는 것인지. 고작 그런 말을 다시 상기한 스스로의 모습에 칼리안이 실소했다.
베른은 홀로 성문 앞을 막아선 채 버티고 버티다 죽음을 맞이한 기사이자 왕제였다. 불과 어제까지만 해도 잘린 팔을 대충 지혈한 뒤 온 몸에 무수한 화살을 꽂은 채 검을 휘두르지 않았던가.
이성을 잃지 말아야 했다.
당장 급한 것은 눈 앞의 플란츠를 죽이느냐 살리느냐가 아니다. 어떻게 이런 일이 생겨났는지, 그것부터 따져보아야 할 일이니까.
그리하여 칼리안은 잠시 눈을 내리 뜬 채 머릿속을 가득 메운 상념을 집어넣었다. 그리고 다시 한 번 마음을 다잡으며 이 일의 원인이 되었으리라 생각되는 것을 떠올렸다.
'······ 시간의 축.'
시간의 축.
어느 날 갑자기 세크리티아 왕궁에 나타났던 것. 커다란 모래시계 같이 생긴, 그리고 단 한 번 시간을 되돌리는 힘을 지녔다던 그것.
바로 그 시간의 축이 이 일의 원인일 터였다. 세크리티아와 카이리스의 전쟁도 시간의 축으로 인해 발발했으니까.
전쟁이 시작되기 전, 카이리스에서 시간의 축을 요구했다. 세크리티아에서는 그것을 거절했다. 위험한 물건임이 분명했기 때문에 국왕 체이스가 강경하게 맞섰다. 정신 나간 플란츠가 그 물건을 어디에 쓸 줄 알고 내어 주겠는가.
따라서 거절의 의사를 밝히니 기다렸다는 듯 대군이 쳐들어왔다.
협상은 고사하고 선전포고조차 건너뛰었다.
플란츠는 개념의 크기까지 남다른 놈이었다.
그렇게 시작된 전쟁에서 세크리티아는 결국 패배했다. 그 결과가 지금 이 모습이다.
'형님께서는 내 죽음을 지켜보셨겠지.'
체이스는 살아있던 마지막 기사인 베른이 결국 죽는 모습을 고스란히 보았을 터였다. 때문에 칼리안은 체이스가 시간을 되돌렸으리라 생각했다. 그 결과가 이리 나타날 줄은 몰랐겠지만 체이스라면 베른을 살려내려 했을 것이라 여겼다.
칼리안이 한탄하듯 작게 말했다.
"원인이 시간의 축이라면······. 돌아가는 방법이 없다는 소리인데."
시간의 축은 단 한 번만 사용할 수 있을 물건이었으니까. 시간이 이미 뒤틀렸다면 다시 예전으로 돌아갈 방법이 없었다.
허면 어찌 할 것인가, 하고 칼리안이 잠시 중얼거렸다.
만약 이것이 정말 꿈이 아니고 지금 떠올린 것이 맞다면 이것은 분명 두 번째로 주어진 생이다.
체이스가 준 기회를 허투루 보낼 수는 없었다. 때문에 칼리안은 돌아가기 위한 것이 아닌 살기 위한 것으로 생각의 방향을 바꾸었다. 우선은 살아야 다른 길을 찾을 테니까.
칼리안이 다시 생각에 잠겨들었다.
* * *
14세의 칼리안은 곧 죽는다.
왕비 실리케를 독살하려다 실패하고 처벌이 두려워 목을 매 자살했다.
물론 그것을 사실이라 믿는 이는 아무도 없었다.
때문에 '자살'로 퍼져나온 이야기를 모두 '암살'로 걸러 들었다. 실리케라면 충분히 칼리안을 죽이고도 남을 위인이었기 때문이었다.
프레이야.
바로 칼리안의 친모와 연관된 일 때문이었다.
후궁 프레이야는 아름다운 외모로 유명했지만 평민 출신이었다. 국왕의 총애를 입고 칼리안을 낳았으나 오래지 않아 '출산의 후유증'으로 죽었다.
왕비가 보낸 차를 마신 뒤 부글거리는 검은 피를 토하고 죽는 출산의 후유증 말이다.
이렇게 칼리안은 모친을 잃었다.
그랬으니, 칼리안에게 조력자가 있으리라는 것은 상상할 수도 없는 일이었다. 흔한 독초조차 구하기 어려웠을 왕자가 국왕보다 큰 권력을 가진 왕비를 죽이려 했다는 것은 말이 안된다.
게다가 칼리안은 태어나서부터 지금까지 쭉 왕비 실리케와 2왕자 플란츠의 멸시를 받으며 지냈다 했다. 이런 상황에서 자란 옛 칼리안은 제대로 숨도 쉬지 못했을 것이다.
아무리 맹수라 해도 새끼 때부터 우유를 먹여 키워내면 주인의 발을 핥고 배를 보이는 법이 아니던가. 그러니 칼리안은 누군가를 죽인다는 것을 상상도 하지 못했을 만큼 나약하게 자랐을 터였다.
칼리안이 쓴웃음을 지었다.
"그냥 보기 싫어서 치워버린 것이지."
칼리안은 머리 색을 빼고는 프레이야를 그대로 닮았다고 들었다.
왕비는 칼리안의 얼굴에서 죽은 프레이야를 떠올리기 싫었을 것이다. 때문에 칼리안을 살해하고 이야기를 지어냈을 테고, 국왕은 묵과했으리라.
왕실 친위대 중 국왕 직속의 1개 기사단을 뺀 나머지 3개를 모두 왕비가 틀어쥐고 있었으니까.
칼리안은 15세가 되기 두세 달 전에 죽었다 했다.
"앞으로 네 달 뒤가 내 15번째 생일이라 했으니······ 누구든 나를 곧 죽이러 오겠군."
칼리안이 '목을 매 죽은' 것으로 위장된 죽음을 맞이하기까지 남은 시간은 한 달에서 두 달이다.
물에 비친 칼리안의 붉은 눈이 예리한 빛을 냈다.
그들의 손에 곱게 죽어 줄 생각은 눈꼽만큼도 없었으니까.
제1장. 이거 정말 멍청하게 살았군 (3)
참으로 낯설고도 기이한 하루가 지났다.
혹시라도 눈을 뜨면 다시 세크리티아에 와 있거나 혹은 저승에 가 있지 않을까 했는데. 기대를 저버리는 얀의 종 소리가 칼리안을 깨워낼 뿐, 달라진 것은 없었다.
"좋은 꿈 꾸셨습니까, 왕자님."
칼리안은 자리에 앉아 얀이 내미는 모닝 티를 즐긴 뒤 빈 잔을 얀에게 돌려주었다. 그 후 멀끔하게 세수와 양치를 하고 나서 이렇게 말했다.
"머리 자를 거야."
그 말을 들은 얀이 큰 눈을 꿈뻑였다. 잘못 들은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을 하는 것이 빤히 보였기 때문에 칼리안이 다시 한번 말했다.
"내 머리. 자를 거라고."
칼리안의 두 손가락이 앞머리를 반으로 자르는 시늉을 했다. 얀이 칼리안의 말을 잘못 들은 것이 결코 아니라는 소리였다. 얀은 이게 무슨 일인가 싶은 마음을 곧바로 치워내며 대답했다.
"네, 왕자님. 바로 준비하겠습니다."
오래지 않아 왕족 전담 미용사가 칼리안의 방을 찾아왔다. 가위를 조심스레 손에 든 그가 칼리안에게 물었다.
"정말로, 잘라내도 괜찮으시겠습니까?"
칼리안의 미간이 찌푸려졌다.
대부분의 기사가 그렇듯이 그는 두 번 말하는 것을 좋아하지 않는 성격이었다. 그래서 지금 머리를 자르라는 말만 연거푸 세 번을 반복해야 하는 상황이 썩 마음에 들지 않았다. 대체 이것이 뭐라고 그리 벌벌 떤다는 말인가? 칼리안이 가위를 가리켜보이며 말했다.
"내가 잘라야 해?"
"아닙니다, 왕자님. 죄송합니다."
그제야 가위질이 시작됐다.
사각사각 소리가 몇 번 들린 뒤, 답답하게 얼굴의 반을 가리고 있던 검은 머리를 떨쳐낼 수 있었다.
칼리안이 눈을 들어 거울 속의 얼굴을 쳐다보았다. 비로소 자신의 얼굴을 제대로 살펴보게 된 것이다.
'호오.'
칼리안의 입이 미소를 만들어냈다.
여신의 환생이라던 프레이야를 그대로 닮았다는 말이 거짓이 아니었다는 것을 깨달은 까닭이다.
'이 얼굴, 프레이야가 남긴 매우 훌륭한 유산이 아닌가?'
칼리안이 흡족한 듯 고개를 끄덕였다.
"정말 잘 어울리십니다, 왕자님."
그 모습에 얀 역시 좋아하는 얼굴로 말을 건넸다. 다만 얀은 한편으로 드는 불안함 때문에 점점 수그러드는 목소리로 말했다.
"헌데 혹시라도 플란츠 왕자님께서 가만히 넘어가실지 모르겠네요."
"눈만 마주쳐도 그렇게 성질을 부리셨으니 가만히 넘어가지는 않으시겠네."
"그래서 걱정입니다. 오늘 아침 식사에 어떤 반응을 보일지······."
"잘 어울린다며. 그럼 됐지."
칼리안이 빙긋 웃으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싫어한다고 계속 멍청하게 지낼 수는 없잖아."
그것이 얀의 눈에는 생글거리는 것으로 보였다. 칼리안 답지 않은 표정과 말에, 얀이 놀란 얼굴을 했다.
그 때 칼리안의 얼굴에 드러난 것은 지금껏 단 한번도 보여진 적 없던 자신감이었다. 얀은 칼리안의 이런 갑작스러운 변화가 불안했다. 물론 너무나 반가운 일이었지만, 그래도.
"그래도 혹시라도 더 큰 화를 입으실까 걱정이 되어서요."
"걱정하지 마."
식당으로 향하는 길에 안절부절 못하는 얀을 향해 칼리안이 안심하라는 듯 말했다.
"내가 알아서 할 거야."
그렇게 도착한 식당으로 가 앉아있으니, 오래지 않아 플란츠가 들어왔다. 특유의 흐린 눈으로 식당 안을 쳐다 본 플란츠의 시선이 란델의 빈 의자를 향했고 그 뒤로 칼리안의 얼굴을 봤다.
가늘게 떠진 연두색 눈이 칼리안의 붉은 눈동자를 물끄러미 내려다봤다. 칼리안은 그 눈을 피하지 않았다. 더 이상 가리는 것이 없어진 얼굴로 플란츠를 똑바로 쳐다봤다.
플란츠의 얼굴에 확연한 조소가 떠올랐다.
그 뒤 플란츠는 칼리안의 얼굴에서 시선을 뗐다. 얀이 놀란 표정을 급히 지웠다.
'끝이야? 비웃으시고 끝난 거야?'
정말 믿을 수 없게도 플란츠는 단 한마디도 하지 않고 제 자리에 가 앉았다. 그리고는 더 이상 칼리안을 쳐다보지 않았다.
칼리안의 미간이 살짝 찌푸려졌다.
칼리안 역시 얀과 똑같은 생각이었다. 저 미친 왕자가 얌전히 자리에 앉은 것이다.
'대체 무슨 변덕인지 알 수가 없군.'
당장이라도 사달이 나야 할 것 같은 적막함 속에 란델이 들어왔다. 언제나 그렇듯 란델은 칼리안의 얼굴을 본 체 만 체 자리에 앉았다.
식사가 올려졌고 셋은 어김 없이 각자의 음식에 집중했다.
이대로 아무 일 없이 조찬이 끝날 것 같다는 생각에 얀이 안도 할 때 쯤.
"······ 야."
결국 일이 터지고 말았다.
플란츠가 그렇게 입을 열어 부를 만한 상대는 이 곳에 단 한 명 뿐이었다. 그리고 그 한 명은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는다는 듯 완벽한 예법으로 식사를 계속했다.
칼리안이 자신을 쳐다보지 않자 플란츠의 입술이 씰룩였다. 그 성질머리가 폭발하기 직전에 항상 보여지던 모습이었다. 얀의 심장이 이번에는 배꼽으로 쿵 하고 떨어지는 소리를 냈다.
하지만 당사자인 칼리안의 표정은 평온하기 이를 데 없었다. 자신의 일이 아니라는 듯한 얼굴이었다.
"야. 피눈깔."
플란츠가 다시 한번 씹어 뱉듯 말했다.
한번 더 무시해볼까 고민하던 칼리안이 조금 늦게 플란츠를 쳐다봤다. 플란츠가 그런 칼리안을 향해 무어라 말하려 할 때, 칼리안의 입이 먼저 열렸다.
"칼리안."
조용히 자신의 이름을 말해 준 칼리안이 썰어 둔 빵 조각을 포크로 찍은 뒤 좀전과 똑같은 목소리로 말했다.
"······ 입니다."
이 말에 대한 반응은 란델에게서 나왔다.
고요하게 움직이던 양 손이 딱 멈춘 것이다. 란델이 고개를 들어 하루 아침에 태도를 바꾼 칼리안을 쳐다봤다. 허나 그 뿐이었다. 딱히 무어라 끼어들 생각을 할 성격이 아니었던 탓이다. 란델은 곧 다시 손을 움직이며 식사를 이어갔다.
"아아."
플란츠의 입이 비틀려 올라갔다. 그가 아주 천천히 눈을 감았다 뜨며, 지금 자신이 들은 소리에 대해 어떤 반응을 보여야 할 지 잠시 고민했다. 그리고는 오른손에 들린 나이프를 쳐다보며 낮은 목소리를 냈다.
"그래. 불러야지. 이름으로."
"네."
칼리안의 대답이 곧바로 흘러나왔다.
곧 칼리안이 물을 마시기 시작하자, 톡 하고 플란츠가 들고 있던 나이프 끝이 테이블에 닿는 소리가 났다.
그리고 얀의 얼굴에서는 핏기가 사라졌다.
'알아서 하신다는 것이 이런 것입니까, 왕자님? 어디서부터 어디까지가 '알아서' 인데요?'
플란츠가 다시 한번 웃었다.
어린 아이 같은, 그래서 더 섬뜩한 웃음이 그린 것처럼 떠올랐다.
그 뒤 플란츠는 오른손에 들려있던 나이프를 그대로 얀을 향해 집어던졌다.
- 쌔액!
칼리안에 대한 화풀이를, 칼리안의 시종에게 하는 것이다.
찰나의 순간. 얀의 팔이 얼굴로 올라오다 멈추었다.
막는다면, 다음은 칼리안에게 그 화가 향하리라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얀은 얼굴을 가리는 대신 눈을 감았다.
그와 동시에 칼리안의 팔이 움직였다.
- 탁!
손에 들린 물잔을 내려놓고 다시 팔을 뻗어 날아오는 나이프를 콱 움켜잡은 것이, 얀이 눈을 감는 것보다 빨랐다. 플란츠의 시선이 잠시 식탁 위의 물잔에 머물렀다.
급히 내려놓았음에도 물이 흔들리지 않고 있었다.
뚝, 뚝, 뚝.
나이프의 무딘 날을 세게 감아쥔 손에서 붉은 핏방울이 떨어졌다.
그 모습을 본 플란츠가 말했다.
"이런."
얀의 눈이 칼리안의 뒷모습과, 칼리안의 손과, 그 손에 들린 나이프와, 나이프를 타고 흘러내리는 피와, 플란츠의 웃는 얼굴을, 마치 시계 초침처럼 돌아가며 살폈다.
정신이 혼미해지는 느낌이었다.
칼이 날아왔던 것 때문이 아니라 지금 이 상황이 걷잡을 수 없이 커질까봐서였다.
칼리안이 일어났다. 피묻은 나이프를 들어 플란츠의 앞에 조용히 내려놓았다. 그리고는 플란츠를 보며 생긋, 마주 웃었다.
"괜찮습니다."
그 말의 의미가 참으로 묘했다.
다친 손을 걱정하지 말라는 '괜찮다'인지, 플란츠의 무례를 용서하겠다는 '괜찮다'인지.
혹은 둘 다인지.
몇 방울의 피가 플란츠의 옷에 떨어졌다.
칼리안이 그대로 식당 밖으로 걸어나갔다.
* * *
왕자의 손에 상처가 생겼다며 엉엉 우는 열 일곱의 소년, 얀을 달래놓느라 혼이 쏙 빠진 채로 오후가 되었다.
말을 탈 수 있다 하여 플란츠를 보는 것을 참고 기마 수업에 왔더니 조랑말이 기다리고 있었다. 동글동글한 눈으로 칼리안을 쳐다보는 그 눈이 참으로 순하여, 칼리안은 얼굴을 잔뜩 찌푸렸다.
칼리안은 아직 자신의 말이 없었다. 이전의 칼리안이 말을 굉장히 무서워했기 때문이다. 그런 기억이 떠오르자, 칼리안이 부끄러움에 손바닥으로 자신의 얼굴을 가렸다.
"그걸 타기엔 자존심이 상하시나, 칼리안 아우님?"
플란츠.
칼리안이 플란츠의 목소리가 들린 쪽을 쳐다보았다.
딱 보기에도 좋은 혈통임이 분명한 은백색의 말 위에 앉은 플란츠가 칼리안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칼리안이 표정을 지우며 예를 보였다.
플란츠의 눈이 칼리안의 손에 감긴 붕대를 슬쩍 훑었다. 그리고는 다시 피식 웃었다. 그 모습을 보던 칼리안의 미간이 움찔했으나 그의 도발에 더 넘어가지 않기 위해 시선을 돌렸다.
그러자 눈을 사로잡는 말 한마리가 보였다. 플란츠가 끌고 나온 두 번째 말이었다. 자연스럽게 말의 모습을 살핀 칼리안이 크게 감탄했다.
'아주 좋은 말이다.'
오른쪽 앞다리의 발목 부분에만 하얀 털이 있는 흑마였다. 잘 관리된 갈기와 꼬리털이 한올 한올 흩날렸다. 제대로 잡힌 근육이며 날렵한 몸집이, 지금 플란츠가 타고 있는 것보다 더 좋은 말이라는 것을 알려주고 있었다.
"고집이 지독한 놈이라 선생에게 조련을 맡기려 했는데."
지금껏 제대로 타고 내린 적 없을 정도의 난폭한 놈이었다. 헌데 칼리안의 눈이 말에게서 떼어지질 않았다. 이를 본 플란츠의 입꼬리가 다시 올라갔다. 그가 칼리안을 향해 말했다.
"탈 수 있다면 주겠다. 대신 못한다면, 칼리안 아우님에게 아침의 일에 대한 사과를 받지."
그러자 얀이 저도 모르게 한 발 나섰다. 자칫 낙마하기라도 할까 걱정한 탓이다. 그 모습에 플란츠의 눈에 다시 불이 튀었다.
거슬렸기 때문이다.
아침에 나이프를 막으려다 만 것도. 지금 자신의 앞에 나서려는 것도.
마치 제가 칼리안의 보호자라도 되는 양, 시종 주제에.
그것을 눈치챈 칼리안이 슬쩍 얀의 앞을 가로막고 섰다. 그렇게 플란츠의 시선을 다시 가져온 뒤 침착하게 대답했다.
"알겠습니다."
곧 칼리안이 놈의 앞으로 천천히 걸어갔다.
칼리안이 천천히 놈의 곁으로 걸어갔다. 플란츠의 성격을 보고 배우기라도 한 것인지, 놈의 눈에 화난 기색이 역력했다. 절대 등을 내어주지 않겠다는 확고한 의지가 보였다.
그런 놈을 보는 칼리안의 입에는 진한 웃음이 걸렸다.
부드럽던 눈매가 순식간에 바뀌었다.
살기.
누군가의 생명을 수 없이 끊어내 본 이가 지닐 수 있는 살기를 담은 눈빛이었다.
자신을 한마리가 아니라 몇 십 인분으로 보는 듯한 그 소름끼치는 시선은, 좋은 환경에서 곱게 자란 세 살짜리 말이 견딜 수 있는 것은 아니었다.
도도하던 말의 눈빛이 매우 흔들렸다.
곧 놈의 눈빛이 조금 전의 조랑말처럼 동글동글하게 변했다. 그제야 칼리안의 눈도 다시 호선을 그렸다.
결국 놈은 칼리안이 안장에 오르는 것을 거부하지 못했다. 놈의 성격을 아는 플란츠만이 믿을 수 없다는 표정을 애써 지웠다.
칼리안이 말을 타는 법 따위를 연습한 적이 눈꼽만큼도 없음을 잘 아는 얀은 이렇게 생각하며 감격에 겨워 했다.
'우리 왕자님, 기마술을 글로 배우셨어!'
여전히 칼리안이 기사 소설을 봤다고 믿는 얀이었다. 그러니 그냥 아무 생각이 없다고 해야 맞을 것이다.
칼리안이 얌전해진 말의 목을 툭툭 치며 말했다.
"레이븐이다. 네 이름."
검은색. 그리고 큰 까마귀.
이름의 뜻을 아는지 모르는지, 레이븐이 새 주인의 말에 푸르륵 하는 소리를 냈다. 그것을 보며 씩 웃은 칼리안이 고개를 돌려 플란츠를 쳐다봤다.
"감사합니다."
어느 정도는 진심이었다. 과정이야 어찌됐건 이렇게 좋은 말을 얻었으니까. 그 좋은 기분에 칼리안이 한 마디를 덧붙였다.
"플란츠 형님."
다분히 의도된 말이었다.
플란츠의 얼굴이 딱딱하게 굳었다.
제2장. 그리 많이 자라지 않았습니다 (1)
카이리스의 왕족은 용의 후손이다.
정확히는, 양신전쟁에서 악신을 봉인한 8인의 영웅에 속했던 하츠아라와 시스파니안의 후손이었다.
지그문트 칸 시스파니안.
태초를 함께했다 알려진 태고의 고룡인 시스파니안은 '유희'의 맥락이 아니라 천고를 살아온 그 생애의 일부로서 하츠아라와 결혼했다. 즉 하츠아라가 시스파니안을 왕비로 맞은 것이 아니라 시스파니안이 하츠아라를 용의 반려로 선택했다는 뜻이다.
시스파니안은 하츠아라와 자신의 자손이 아주 조금 특별하길 바랐다. 때문에 카이리스의 왕과 그 직계 자녀에 한해 주어지는 핏줄의 힘을 선물했다.
치유의 힘과 마법적인 재능.
'시스파니안의 축복' 이 그것이다.
"상처가 그대로고."
축복의 힘을 가진 칼리안의 상처는 이미 거의 나았어야 했다.
하지만 플란츠가 집어던진 나이프에 다친 손이 저녁이 다 되도록 조금도 아물지 않았다. 혹시라도 칼리안이 르메인의 친자가 아닌 것인지를 의심하니, 과거에는 정상적으로 상처가 아물었던 기억이 떠올랐다.
그러니 이것은 갑작스레 생긴 증상이라는 뜻이었다.
그런데 문제는 그것만이 아니었다.
"칼리안······ 마법사였어?"
베른은 기사였다.
그것도 대륙을 통틀어 고작 6명 뿐인 소드 마스터 중 한명이었다. 반면 옛 칼리안은 운동과는 담 쌓았을 마른 몸을 지니고 있었다. 때문에 '이런 몸으로도 오러를 발현할 수 있는가' 하는 궁금증이 생겼다.
그래서 마나에 집중해보았고 그제야 자신의 심장 부근에 세 개의 마나 서클이 있었다는 놀라운 사실을 깨달았다. 마법에 대한 생소하고도 방대한 지식이 물밀듯 흘러들어왔다.
옛 칼리안이 마법사였다는 이 중요한 사실을 이틀이 지나서야 깨달은 것에 실소하며 마나를 운용하려는데 심장의 통증이 느껴졌다.
"마나를 쓰려 할 때 심장이 아팠는데······."
사실 플란츠가 집어던진 나이프를 잡았을 때도 가슴 통증을 느꼈었다. 날붙이를 잡기 위해 무의식적으로 몸에 오러를 두르려 했을 때의 일이다. 덕분에 저도 모르게 손에 힘을 주어 그 무딘 날에도 이렇게 상처가 생긴 터였다.
혹시나 하는 마음에 다시 한번 마나를 운용했다.
어김 없이 심장이 아팠다. 칼리안이 저도 모르게 가슴을 움켜쥐었다.
낫지 않는 상처와 심장의 통증.
없어야 할 두 가지를 마주한 칼리안이 인상을 찌푸렸다.
답답한 점은 이런 증상에 대한 기억이 전혀 없다는 것이다. 아마도 베른이 칼리안의 몸으로 들어온 이후 혹은 최근에 생긴 문제인 듯 했다.
"큰일이네. 이래서는 오러든 마법이든 사용할 수가 없는데."
곤란하다. 아니, 매우 위험하다.
그냥 두고 볼 일이 아니라는 것을 깨달은 칼리안이 깊은 고민을 시작했다.
이 상황에 대해 물어볼 사람이 필요했다.
당연하겠지만 카이리스 왕궁 내에 칼리안에게 조언을 해줄 만한 사람이 있을 리 없었다. 신중하게 기억을 되짚으며 그에게 도움이 될 이가 없을지 생각하기 시작했다.
- 우웅!
어느새 물이 식었는지 온도 조절을 위한 마법 장치가 물을 데우는 소리를 냈다. 그것을 듣던 칼리안의 눈이 반짝 빛났다.
"마법사······. 그래, 마법사."
칼리안이 저도 모르게 목욕 물을 한 번 튕겼다. 찰박, 하는 경쾌한 소리가 났다.
"앨런 마나실."
대마법사 앨런 마나실.
현재의 앨런은 3인의 7서클 마법사 중 한 명이었다.
그 중에서도 가장 젊고 실력이 뛰어나 마법사 대부분의 우상이나 다름 없는 자였다.
베른의 기준으로 10년 전, 그러니까 지금.
국왕 르메인의 탄신 기념일 축제에 초대된 앨런이 카이리스를 방문했었다. 모종의 일로 왕궁에 들어오지 못하고 문전박대를 당한 앨런은 그 길로 리베른 왕국에 돌아갔다. 그리고 10년이 지난 뒤, 앨런은 대륙 유일의 8서클 대마법사가 되었다.
"마나에 대한 지식으로는 대륙에서 그를 따를 자가 없다 하였지."
칼리안이 나지막이 중얼거렸다.
분명 이 문제에도 도움을 줄 수 있으리라는 확신이 들었다.
"그러니 이 기회에 내 사람으로 만들어 두면 더 좋겠는데."
능력 있는 마법사에 대한 마법사들의 지지는 기사의 충성과 맞먹는다. 따라서 앨런이 칼리안과 함께 한다면 그 순간 카이리스의 모든 마법사가 칼리안의 편에 서게 될 터였다.
"그리 되면 소리 없이 개죽음 당할 위험은 줄겠네."
그 누구도 2왕자 플란츠의 목숨을 가지고 장난치지 못하는 것은 왕비 실리케가 가진 기사 세력의 힘 때문이었다. 1왕자 란델은 또 어떤가. 병으로 죽은 카이리스의 전 왕비이자 란델의 모친인 아이샤는 신성국가 텐실의 공주였다. 따라서 텐실의 왕족이기도 한 란델의 목숨 역시 함부로 노려질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
칼리안은 가지지 못한 세력의 힘.
앨런을 끌어들이면 칼리안에게도 그런 힘이 생기게 될 것이다.
물론 앨런이 불러올 가장 큰 변화는 따로 있었다.
칼리안의 눈이 가늘어졌다.
"왕위 계승 후보에 내 이름이 추가될테고."
카이리스는 용의 후손이 다스리는 나라임에도 불구하고 마법사에 대한 처우가 매우 나쁜 곳이었다. 기사 가문을 손에 쥔 실리케의 영향이었다. 때문에 마법사들은 이 상황을 벗어나게 해 줄 왕세자를 원했다.
앨런을 손에 넣으면 그런 마법사들이 칼리안을 지지하게 될 것이다. 지금부터 칼리안이 그 어떤 가문을 등에 업더라도 그만큼 큰 세력을 얻지는 못할 것이 분명했다.
칼리안이 다시 한 번 마나를 운용해보았다.
욱씬, 명확한 통증이 심장을 찔러왔다.
"일단 앨런 마나실부터 만나야 되겠군."
그래야 다음 일을 할 수 있을 것이다.
칼리안이 생각한 다음은, 아이 한 명을 찾아오는 것이었다. 앨런이 칼리안을 구해줄 수 있을 이라면 그 아이는 칼리안이 구해줘야 할 사람이었다. 구해내어 그의 '검'으로 만들어야 했다.
르메인의 탄신 기념일까지 한 달.
칼리안의 사망 예정일도 빠르다면 그 즈음.
시간이 재미있게 겹친다.
- 찰박.
칼리안이 다시 한번 물을 튕겼다.
* * *
- 툭!
칼리안을 본 의상 담당자 섀틴 슬레이크의 손에 들린 줄자가 바닥으로 떨어졌다. 섀틴이 깜짝 놀라며 떨어뜨린 것을 치우더니 새로운 줄자를 꺼냈다. 바닥에 닿은 것을 왕족의 몸에 댈 수 없기 때문이었다.
고개를 돌려 칼리안을 다시 쳐다본 섀틴이 잠시 먼 곳을 회상하는 눈을 하다 칼리안을 향해 시선을 되돌렸다.
어쩐지 얀이 불안한 표정을 지어 보이는 사이 섀틴의 입이 열렸다.
"왕자님을 뵈니 프레이야 후궁님이 생각나서,"
"슬레이크."
불안해 하던 얀이 곧바로 섀틴의 말을 막았다. 그제야 말 실수를 깨달은 듯, 화들짝 놀란 섀틴이 칼리안을 향해 허리를 깊이 숙여 보였다.
"죄송합니다. 왕자님."
갑자기 변한 분위기에 칼리안은 당연히 더 놀랐다. 얀을 쳐다보니 얀도 어느새 허리를 숙이고 있었다.
"죄송합니다. 곧바로 다른 사람을 들이도록 하겠습니다."
칼리안의 얼굴이 복잡해졌다.
그들이 사과하는 이유를 몰랐다.
심한 답답함을 느낀 칼리안이 서둘러 예전 기억을 뒤졌다.
'이 기억은 왜 굳이 생각하려 해야 떠오르는지!'
오래지 않아 이 일과 관련되었을 기억들이 머릿속에 떠올랐다. 그림 가득한 책을 읽어나가는 기분으로 빠르게 기억을 훑은 칼리안이 침음을 흘렸다.
"아······."
옛 칼리안은 프레이야를 닮았다는 이야기에 치를 떨었다. 거울로 제 얼굴을 보는 것도 질색했다. 태어나 본 적도 없는 이를 닮았다며 그 오랜 기간 동안 시달려야 했던 까닭이다.
칼리안의 몸에 처음 들어와 거울을 달라 했을 때 시녀가 밖에 나가서 거울을 구해온 이유와 얀이 그렇게 당황했던 이유도 이제야 이해되었다.
제 얼굴을 보지 않고 살았는데 갑자기 그 난리를 피웠으니.
'안 들킨 게 신기하네.'
짧은 한숨을 내쉰 칼리안이 입 속으로 말을 골랐다.
물론 지금이야 프레이야에 대한 감정이 없지만 그 정도의 트라우마를 하루 아침에 극복했다 하면 의심을 살 수 있을 테니 예전보다는 나아졌으나 여전히 꺼리는 정도의 반응을 보여야 했다.
곧 적당한 답을 찾은 칼리안이 섀틴을 향해 입을 열었다.
"하려던 것 계속 해. 하려던 말은 굳이 안해도 돼. '어머니'를 닮은 건 나도 잘 알아."
"네, 네. 바로 시작하겠습니다."
칼리안의 말에 둘 다 놀란 얼굴이 되었으나 의심을 하는 눈치는 아니었다.
쫓겨날 뻔 했던 섀틴이 엉거주춤 몸을 일으키고는 조심스럽게 칼리안의 신체 치수를 재기 시작했다. 함께 온 듯한 하인이 섀틴이 불러주는 치수를 바쁘게 받아 적었다.
잠시 후, 치수를 모두 잰 섀틴이 조심스레 말을 건넸다.
"더 많이 드셔야 할 것 같습니다, 왕자님. 너무 왜소하셔서 걱정이 됩니다."
칼리안이 웃었다.
걱정해서 하는 말이니 왜소하다는 말을 기분 나쁘게 들을 이유가 없었다. 키가 작은 것은 아니었으나 마른 것은 사실이었으니까.
"그래."
치수를 재는 일이 생각보다 빨리 끝났기 때문에 이제 조금 쉬었다 저녁을 먹으면 되겠거니 하는 생각을 하고 있는데 하인이 두꺼운 책들을 가지고 왔다. 섀틴은 그것을 건네 받은 뒤 테이블 위에 놓고 하나씩 펼쳐놓기 시작했다.
"······ 뭐야?"
한 권은 여러 모양의 예복 그림을 모아둔 것이었고 또 한 권은 소재와 색이 모두 다른 천의 샘플을 묶은 것이었다. 각종 레이스 묶음, 그리고 온갖 장신구 그림이 그려진 책이 추가로 올라왔다. 전부 비슷하게 생긴 것 같은 수많은 단추가 주렁주렁 매달린 책도 있었고 수백 켤레의 구두가 그려진 책도 눈에 들어왔다.
그것으로 끝이 아니었다.
하인 쪽을 쳐다보니 또 다른 책 두 권을 들고 오고 있었다.
저게 다 뭐냐는 얼굴로 멀뚱멀뚱 쳐다보니 섀틴은 이제부터가 진짜라는 듯 말했다.
"이제 디자인을 정해야 합니다, 왕자님. 총 네 벌을 정해주시면 됩니다."
"몇 벌?"
질렸다는 표정을 짓고 있자 기억 속에서 답이 나왔다.
준비 해야 하는 옷은 총 다섯 벌이었다. 또 한 벌은 왕자의 정복이었기 때문에 고를 필요가 없을 뿐이다.
칼리안의 얼굴이 하얗게 질렸다.
'저것을 다 골라야 한다고?'
베른의 생에서는 겪어보지 못한 일이었다.
어린 시절에는 베른의 어머니였던 왕비가 대신 했던 일이었고 기사가 된 뒤에는 무조건 기사의 제복만 입었으니 옷을 고를 필요가 없었다. 게다가 세크리티아에는 한 번에 다섯 벌의 옷을 준비해야 하는 큰 행사도 없었다. 어떤 행사도 이렇게까지 성대하게 치르지는 않았으니까.
아무튼 이제는 옷을 대신 골라줄 사람도 없고 제복도 없었다. 때문에 난감한 얼굴을 하고 있으니 옆에서 얀이 말했다.
"요즘 왕자님께서 많이 달라지셨지 않습니까. 그런데 이번 달은 행사 준비 때문에 귀족들과의 일정도 없습니다. 그러니 왕자님께서 이렇게 변화된 모습으로 다른 이들의 앞에 처음으로 나서게 되는 자리가 바로 국왕 전하의 탄신일 행사가 되지 않겠습니까."
"잘 꾸며입고 나가서 바뀐 첫인상을 제대로 심어 주라는 소리인 건 알아."
"네. 맞습니다, 왕자님."
"그래. 이해는 되는데······."
칼리안이 테이블을 빼곡하게 채운 책자를 쳐다봤다. 보기만 해도 피곤해지는 느낌이 든다. 마나 하나 못 쓰는 몸뚱이를 가지게 될 판에 옷이 눈에 들어오겠는가.
"난 저걸 뒤적거릴 자신이 없어. 아니면 너희가 골라."
'너희'라는 것은 얀과 시녀들을 말하는 것이었다. 포기하라고 한 말이었는데 얀의 얼굴에 화색이 돌았다.
"정말 그래도 괜찮으시겠습니까?"
"그래. 괜찮아."
고개를 끄덕이며 대꾸한 칼리안이 소파로 가 앉았다.
그리고 전쟁이 시작됐다.
그들이 매우 불타올랐다.
이틀 동안 칼리안의 앞에서 단 한마디도 하지 않고 조용히 따라다니던 시녀들이었는데 어떻게든 칼리안을 돋보이게 해주려 목소리를 내기 시작했다.
의도치 않게 오고 가는 이야기를 듣게 된 칼리안이 간간히 자신의 의견을 냈다.
"왕 리본 안돼. 작은 리본도 안돼."
잠깐 실망한 분위기가 돌더니 다른 아이디어가 나왔다.
칼리안이 다시 말했다.
"프릴 많이 안돼."
그들은 포기하지 않았다.
"······레이스는 될 것 같아?"
대체 뭘 만들려는 거야? 방울 뭐야?
결국 칼리안도 그들 사이에 들어가 같이 말싸움을 시작했다.
마나고 나발이고 일단 '프릴 많이'는 막아야 했으니까.
제2장. 그리 많이 자라지 않았습니다 (2)
차의 향기로 잠을 깨고 완벽한 준비 후 아침을 먹고 각종 수업을 들어가며 정신 없이 일주일을 보냈다.
그 사이 플란츠와 세 번을 더 붙었다.
검술 수업 중 또 프레이야를 들먹거리기에 실수인 척 죽여버릴 뻔 한 뒤로는 어느 정도 조용해졌다.
정말 의외였던 것은 플란츠의 검 실력이었다.
물론 칼리안의 근력이 형편없었다고는 하지만 플란츠 역시 공격을 꽤 훌륭히 막아냈던 것이다.
'기사 가문이라는 이름이 괜한 것은 아니었나보지.'
어찌됐건 그 후 플란츠는 칼리안을 볼 때마다 비웃는 듯한 눈을 하는 것은 여전했지만 입을 여는 횟수가 확연히 줄어들었다. 그것만으로도 칼리안은 일단 만족했다.
조찬에 가기 위해 거울 앞에 앉아 시녀들이 머리를 빗기는 것을 멍하게 보고 있으려니 얀이 다가와 하루 일정을 얘기해주었다.
"······ 마지막으로 왕비님 및 브리센 자작과 석찬이 있습니다."
"아."
레넌 브리센 자작.
실리케 왕비의 오빠이며 브리센 후작의 차남인 자였다. 유서 깊은 기사 가문에서 태어났으나 소질이 없어 일찌감치 검에서 손을 놓은 뒤 카이리스에서 가장 큰 상단인 브리센 상단을 이끌고 있었다.
'상단을 운영할 수 있을 재목도 아니어서, 거금 주고 고용한 상단 관리인에게 전권을 맡기다시피 했다고 했지. 하긴······ 그럴 돈이 있는 것도 능력은 능력이지.'
"다른 귀족 없이 브리센 자작만 참석하는거야?"
"네. 전하의 탄신 기념일 축제 마지막 날의 축하 공연을 준비하기로 했었는데 사정이 생겨 다른 곳에서 대신 진행하게 되었다고 합니다. 그 일로 전하께 사과 드리려 왕궁에 들었다가 온 김에 왕자님들을 뵙고 가려는 것 같습니다."
"그런 일이라면 플란츠만 가도 될 텐데."
직접 플란츠의 이름을 언급하는 모습에 얀의 얼굴이 살짝 경직되었다. 얀의 입장에서 대답할 말을 찾기 어려울 것이 분명했으므로 칼리안이 금방 다시 말했다.
"아무튼 알았어."
그러자 얀이 다시 입을 열었다.
아무래도 오늘은 일정 외에 다른 이야기가 남은 것 같았다.
"그리고 말씀 드릴 것이 있습니다."
칼리안이 살짝 고개를 끄덕이자 얀이 잠시 주저하는 듯 하다 말했다.
"왕자님 금고를 잠시 열어야 하는데 이번에도 제가 할까요?"
'금고? 나 그런 것도 있었어?'
뭣도 없는 왕자인 줄 알았는데 돈은 있었던 모양이다.
칼리안이 재빨리 기억을 뒤졌다. 그리고 침실 구석에 있던 용도 모를 은색의 화려한 가구가 바로 금고였음을 알게 되었다.
"금고는 왜?"
"그것이······."
웬일로 얀이 말을 얼버무렸다.
그럴 때 이유는 딱 하나다. 프레이야와 관련된 일인 것이다. 얀이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휘트린 영지의 관리인이 수익금을 올려보냈습니다."
'모친 이름이 프레이야 휘트린이었지. 그럼 프레이야의 영지인가보네.'
아마도 프레이야를 후궁에 올린 르메인이 영지를 하사했던 모양이다. 그것이 그녀 사후에 다른 귀족에게로 넘어가지 않고 칼리안의 소유로 상속된 것 같았다. 생각지 못했던 소득을 확인한 칼리안이 말했다.
"이따 같이 해. 얼마나 모였는지 궁금하네."
"네, 알겠습니다. 그리고,"
전해 줄 말이 또 있다는 뉘앙스에 조찬에 갈 준비를 마친 칼리안이 다시 고개를 끄덕끄덕 했다.
"아시겠지만 왕자님께서 15세가 되시면 시종을 두 명 더 들이실 수 있지 않습니까?"
몰랐다.
"올해 왕자님의 탄신일이 지나면 15세가 되시기 때문에 내정 담당관이 시종 두 명을 어떻게 구하실 요량인지 물어왔습니다. 정확히 탄신일이 지나지 않더라도 두 세 달 정도 앞당겨서 데려오실 수 있으니까요. 그리고 만약 염두에 두신 인사가 없다면 담당관이 직접 배정해 줄 수 있다고도 했습니다."
그에 대해 대답할 내용을 정리하는데 얀의 말이 이어졌다.
"두 분 왕자님처럼 호위를 쓰시는 것은 어떨까요?"
란델과 플란츠의 뒤에 항상 붙어다니던 시종들의 모습이 생각났다. 검이 없었기 때문에 그들이 그냥 시종인 줄로만 알았던 칼리안이 그제야 이해했다는 표정으로 대꾸했다.
"호위였구나. 어쩐지 덩치들이 좋더라니."
카이리스는 세자가 아닌 왕자들에게 따로 개인 호위 기사를 붙이지 않았다. 재밌는 사실은 목숨이 왔다갔다하는 혈전은 왕세자가 아닌 왕자들끼리 치르는 경우가 더 많았다는 것이다.
때문에 왕자들은 개인적으로 호위 기사를 고용했는데 이것이 또 카이리스에서는 허락되지 않는 일, 즉 불법이었다. 그래서 호위를 시종으로 위장하여 동행하는 것이 관습이 된 상태였다. 물론 검을 지닌 것이 눈에 띄지 않도록 암기를 사용하는 이들이 주로 고용되었다.
이 부분은 칼리안도 알고 있던 사실이었다.
15세가 되어야 시종 셋을 둘 수 있다는 것만 몰랐을 뿐.
'그럼 본래의 칼리안도 호위를 두었을까?'
얀이 이렇게 먼저 얘기했고 호위 기사를 고용할 돈도 있었다면 고용을 했을 가능성이 높았다.
'마법도 쓸 줄 알고 호위도 있었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암살을 당했다는 건데. 허면 적어도 3서클의 마법사를 제압할 실력의 암살자였다는 소리인가.'
이런 생각을 하던 칼리안이 저도 모르게 심장 부근을 손으로 쓸어내렸다.
'아니지. 자살로 위장했다면 주변이 깨끗했을 것이다. 마법사였다면 공격이든 방어든 흔적이 남았을 터. 그러니 옛 칼리안도 나처럼 마법을 사용하지 못하던 상태에서 당했을 가능성이 높다.'
어쨌든 칼리안은 생일을 맞이하기 두세 달 전에 죽었고 호위는 생일 두세 달 전부터 구할 수 있다 한다. 묘하게 맞아떨어지는 부분이 생긴다.
'호위가 그 암살자를 막지 못했거나 막지 않았거나. 혹은 호위가 암살자였거나.'
여러 가능성이 떠올랐다.
무엇이 정답이든간에 칼리안에게 득이 될 것이 없었다.
"고용하지 않는 게 좋을 것 같아. 생각해 둔 사람도 있고."
얀이 믿을 수 없다는 표정을 지었다. 칼리안의 인간관계를 뻔히 알고 있을테니까. 하지만 칼리안은 그에 대해 더 설명하지 않았다.
물론 칼리안이 염두에 둔 이는 일전에 데려오겠노라 생각했던 그 아이였다. 그런데 문제가 하나 있었다.
"정확하지는 않지만 아마 평민일거야. 괜찮겠어?"
얀도 엄연한 귀족이었다. 그러니 칼리안의 말은 곧, 귀족인 얀이 평민과 동등한 입장으로 일할 수 있는지를 묻는 것이었다.
얀은 대체 그런걸 왜 묻느냐는 얼굴이 되었다.
항상 느끼지만 얀은 얼굴에 모든 것이 드러나는 타입이었다.
"지금 중요한 것은 호위로 올 사람의 신분이 아니라 호위를 해 줄 사람이 있다는 사실이니까요. 당장 달려나가 모셔와도 모자랄 판에 신분이 중요하겠습니까."
"그래."
얀의 말을 들은 칼리안이 씩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왕자님의 호위니 왕자님께서 괜찮으시다면 되는 일이죠. 굳이 귀족만 왕자님의 시종을 맡을 수 있는 것도 아니니까요. 그리고 기사로서 필요한 인재라면 우선 시종의 신분으로 두시고 기회를 보아 기사 작위를 직접 내리셔도 되고요."
"그렇게 해도 괜찮겠네."
칼리안이 아무리 왕족이라 하더라도 마음대로 작위를 줄 수 있는 것은 아니었다. 특별한 공이 있지 않은 이상 함부로 신분을 올려줄 수는 없는 것이다. 때문에 이런 경우에는 시종으로 데리고 다니다 때를 보아 작위를 내리는 것이 보편적이었다.
"당장 데려올 수 있는 것도 아니니 일단 내정 담당에게는 내가 알아서 하겠다고 전해."
당장 데려오는 게 문제가 아니라 어디에 있는지부터 찾아야 했다. 카이리스의 수도인 이곳 카이리시스에 있는지도 확실치 않은 상황이니 말이다.
"알겠습니다. 그리 전하겠습니다."
"그럼 끝?"
"아뇨. 한 가지 더 있습니다."
칼리안의 고개가 다시 위 아래로 움직였다.
아마도 가장 중요한 얘기인 듯, 얀이 마른침을 한번 삼키고 입을 열었다.
"운동이요, 왕자님. 일주일 전부터 하시는 체력 단련은 계속 하셔야 합니까?"
"단련이라 하기도 어렵지. 궁 앞의 인공호수 주변을 서너 바퀴 달리는 정도인데."
"지금은 그것만으로도 힘에 벅차 하시지 않습니까. 힘들어 보이셔서 드리는 말씀입니다."
그간 지나치게 운동을 하지 않았던 탓인지 운동을 하기 전보다 오히려 더 힘에 부치는 느낌이 들고 살도 더 빠져버리는 바람에 얀의 걱정이 이만저만이 아니었다.
"계속 하려고. 꾸준히 하면 괜찮아 지겠지."
그런 대답이 돌아올 줄 알았다는 듯 얀이 낮은 한숨을 쉬었다.
"요리사에게 얘기해서 특별히 식단에 신경쓰도록 하였습니다. 조찬은 어쩔 수 없어도 점심과 저녁 식사는 남기지 말고 모두 드셔야 합니다."
"알았어. 고마워."
이제 칼리안의 고맙다는 말이 조금 익숙해진 얀이 살짝 웃어보였다. 그리고는 한 손을 내밀어 밖으로 나가는 문을 정중히 가리켰다. 조찬에 가자는 제스처였다.
으으. 가기 싫어.
* * *
여전히 익숙해지지 않는 침묵 속의 식사를 마친 칼리안은 14년간 한 푼도 쓰지 않고 차곡차곡 모인 영지 수익금의 엄청난 금액에 화들짝 놀란 뒤 조금 가벼운 차림으로 밖에 나왔다.
오전에 수업이 시작되기 전에 운동을 할 생각이었다.
지난 일주일간 이런 식으로 운동을 했다. 물론 혼자는 아니었고 대체로 얀이 함께했다.
다만 가끔 얀이 시종들간의 회의에 가느라 자리를 비우는 시간과 겹치면 얀을 대신해 메를린이라는 이름의 시녀가 칼리안을 따라왔다. 칼리안의 거울을 가져오고 미용사를 불러왔던 바로 그 시녀였다. 놀랍게도 메를린은 호수 주변 서너 바퀴 쯤은 숨도 한번 몰아쉬지 않고 달렸다.
지금도 메를린이 칼리안의 뒤를 따르고 있었다.
'프릴 많이'를 주문했던 것이 바로 메를린이었음을 상기한 칼리안이 얼른 자세를 잡고 뛰어가기 시작했다.
아무리 앞으로 달려나가도 뒤를 돌아보면 같은 거리를 유지하며 달려오는 메를린이 있었다. 칼리안이 울상을 지었다.
'무섭다!'
나중에야 안 사실이지만 메를린은 카이리시스 외성을 수비하는 수도 기사단 단장의 둘째 딸이었다. 검을 배운 적은 없어도 어려서부터 단장과 함께 카이리시스 외곽의 타룬 산을 매일 뛰어다녔다고. 그러니 이 정도 쯤이야.
결국 세 바퀴 반 만에 완전히 지친 칼리안이 그대로 주저앉았다. 땀이 비오듯이 흘렀고 입술이 바짝 타들어갔다. 그 모습을 본 메를린의 눈썹이 살짝 찌푸려졌다. 땀 흘리는 모습이 보기 싫다는 이유는 당연히 아니었다.
칼리안이 처음 운동을 시작했을 때에는 네 바퀴 반을 달렸고 사흘째가 되던 날에는 네 바퀴를 뛰었다. 그리고 이제는 세 바퀴 반. 문제가 있는 것 같았다.
"왕자님."
"응?"
일반적인 시종과 시녀들은 왕자에게 직접 말을 하지 못하고 상급 시종 혹은 상급 시녀를 통해야 했다. 때문에 메를린도 칼리안에게 할 말이 있다면 얀을 거쳐 전하도록 되어 있었다. 다만 칼리안의 시녀들은 이전에 예복을 맞추는 과정에서 한번씩 칼리안과 얘기를 나눈 이후로 가끔 말을 걸어오곤 했다. 칼리안이야 당연히 그것을 기분 나빠 하거나 문제 삼지 않았고 오히려 대화할 사람이 많아졌다며 좋아했다.
"치유사를 부르시는 것이 어떠시겠습니까."
"치유사라."
칼리안이 손을 다쳤을 때 얀이 부르려다 말았던 텐실에서 온 신관. 그런 치유사를 왜 부르라는 것인지 칼리안도 물론 알고 있었다. 점점 체력이 떨어지는 문제 때문이리라.
하지만 치유사를 찾을 수 없는 이유가 있었다.
'서클이 바로 들통나겠지.'
옛 칼리안이 해왔던 온갖 답답하고 멍청한 행동 중 유일하게 잘 했다고 여기는 것이 있었다. 바로 마법사임을 숨겼다는 것이다. 그것은 얀도 모르는 비밀이었다.
얀에게야 알려도 좋았으리라 생각하지만 누군가를 믿을 만큼의 여유조차 없던 처지였으니 이해가 되었다.
만약 칼리안이 마법을 쓸 수 있다는 것이 알려졌다면 베른이 칼리안의 몸으로 들어오기도 전에 이미 죽었을 것이다. 함부로 다루지 못할 만큼 힘을 키우기 전에 없애려 했을 테니까.
같은 이유에서 지금의 칼리안 역시 당장은 서클을 숨겨야 했다. 마나 운용을 못하는 상황이니 더더욱 그리해야 했다.
생각을 정리한 칼리안이 조금 늦어진 대답을 전했다.
"아니야. 괜찮아."
메를린이 탐탁지 않은 표정을 지었지만 다른 말을 더 하지는 않았다.
칼리안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리고는 기어코 한 바퀴를 더 달린 뒤 방에 돌아갔다.
제2장. 그리 많이 자라지 않았습니다 (3)
석찬을 위해서는 다른 건물로 이동해야 했다.
따라서 칼리안은 일찌감치 준비를 마치고 체르밀 궁 앞에 세워져 있던 두 대의 마차 중 한 대에 올랐다. 남은 한 대는 당연히 란델이나 플란츠 중에 아직 출발하지 않은 왕자를 위한 것일 터. 그러니 한 명은 이미 출발을 한 모양이었다.
'하도 넓어서 다른 건물에 어떻게 가나 했더니. 궁 내 이동 용 마차까지 있을 줄이야.'
좁은 곳에서는 못 산다는 시스파니안의 말에 하츠아라가 이런 말도 안되는 규모의 왕궁을 지었다는 기억을 떠올린 칼리안이 고개를 절레절레 가로저었다.
마차는 체르밀 궁을 둘러싼 긴 회랑을 지나쳐 거주 공간과 집무 공간의 경계를 이루는 분수 정원을 통과했다. 그 후 국왕의 집무를 위해 마련된 아르피아 궁, 왕실과 관련된 일을 하는 귀족들의 업무 공간인 나르실 관을 지나 조금 더 달린 뒤 멈췄다.
귀족들과의 작은 행사가 있을 때 사용하는 세뉴 관 앞이었는데 금박 된 기둥으로 꾸며진 하얀 대리석 건물에 석양이 비춰 상당히 아름다운 모습을 자아내고 있었다.
"왕자님. 도착했습니다."
마차 입구에 간이 계단을 놓은 얀은 칼리안이 마차에서 내릴 때 옷자락을 밟지 않도록 도왔고 세뉴 관의 시종이 마중나와 석찬이 진행될 곳으로 안내했다.
세뉴 관의 뒤에 만들어진 정원.
날이 어두워질 것을 대비한 마법 등불이 준비되어 있었다.
정원을 가로질러 간 칼리안이 시종이 빼주는 의자에 앉았다. 란델은 이미 와 있었고 칼리안이 도착한 이후에 플란츠가 저벅저벅 걸어와 앉았다. 그리고 언제나와 같은 정적이 한동안 흘렀다.
그러다 문득, 짙은 향수 냄새가 느껴졌다.
일 년에 단 하루만 피었다 지기 때문에 그 가치가 남다르다는 르니에리 꽃의 향이었다. 실내가 아니었음에도 손 끝이 아릴 정도로 풍겨오는 향기.
'실리케.'
칼리안은 실리케를 보거나 르니에리 향을 맡아 본 적이 없었다. 하지만 그 향기를 느낀 순간 그녀가 도착했다는 것을 바로 알 수 있었다.
칼리안이 고개를 돌려 레넌 브리센 자작과 함께 걸어오는 왕비 실리케를 쳐다봤다. 실리케의 시선도 칼리안을 향했다. 그리고 곧 약속이라도 한 것처럼 동시에 서로에게서 눈을 돌렸다. 잠시 그 모습을 쳐다보던 란델이 시선을 옮겼다.
실리케는 아무 일도 없다는 듯 자신의 것으로 마련된 자리에 가 앉았다. 플란츠의 옆 자리였다. 둘을 본 플란츠는 별다른 예를 보이지 않고 그대로 앉아 있었다.
그런 모습을 본 실리케가 살짝 인상을 찌푸렸으나 그 곳에 있던 칼리안과 란델을 의식해서인지 별 말을 하지는 않았다.
"오랜만에 뵙습니다, 세 분 왕자님들."
레넌이 간단한 인사를 건넸다.
그리고는 다소 낯설게 변한 칼리안의 얼굴을 쳐다봤다. 레넌은 아마 이전에도 칼리안을 본 적이 있었던 듯 놀란 것 같은 표정을 한 채였다. 그가 칼리안을 향해 입을 열려 할 때 실리케의 손이 움직였다.
- 차르륵!
보라색 실크로 만들어진 부채가 펼쳐지며 다소 큰 소리를 냈다.
"흠흠!"
실리케의 불편한 심정을 눈치 챈 레넌이 어색한 헛기침과 함께 입을 다물었다.
곧 에피타이저를 시작으로 저녁 식사가 진행되었다. 간간히 레넌이 말을 하고 실리케가 짧게 대답하는 정도의 대화가 오가던 중, 실리케의 시선이 칼리안을 향했다.
"많이 자랐구나."
자신을 향한 질문임을 곧바로 알아차린 칼리안이 실리케를 쳐다봤다. 이런 시점에 정말로 '키가 컸다'는 의미로 한 말은 아닐 터.
"그리 많이 자라지 않았습니다."
약간의 시간을 흘려보낸 뒤 담담하게 대답한 칼리안이 여유로운 웃음을 지으며 말을 더했다.
"앞으로 더 많이 자라겠지요."
실리케의 눈빛이 변했다.
예전의 칼리안은 결코 저런 식으로 웃지 못했다. 그것이 영 마음에 들지 않았다.
그 때 눈치 없는 레넌이 둘의 사이에 끼어들었다.
"맞습니다, 왕자님. 아직 성장기시니 키도 더 크셔야······!"
- 촤르륵!
실리케가 오가는 말의 뜻을 이해하지 못한 레넌의 입을 다시 한번 막았다.
'그것 참. 너무 소문 대로라 신기할 지경이네.'
상단을 운영하려면 필요한 많은 능력이 있다.
그 중 판단력은 기본 중의 기본이다. 최소한 눈치 정도는 있어야 한다. 방금 전의 한 마디로 레넌은 자신에게 그 두가지가 확실히 없다는 것을 여실히 증명한 셈이다.
'상단 관리인이 고생 좀 하겠는데.'
실리케가 매서운 눈초리로 레넌을 보며 말했다.
"주방장이 특별히 신경을 썼다 합니다. 충분히 즐기시지요, 오라버니."
닥치고 먹으라는 노골적인 표현이다.
이제야 말을 알아 들은 것인지 아니면 눈빛에 겁을 먹은 것인지. 이번에는 실리케의 뜻을 제대로 이해한 레넌이 입을 닫고 스테이크에 열중했다. 옆에서 그 모습을 보던 플란츠가 숨김 없이 웃음 소리를 냈다.
실리케의 눈이 플란츠를 향했다.
어차피 칼리안과의 대화가 중간에 끊어졌으니 이번에는 플란츠를 향해 입을 열었다.
"네 말이 너를 따르지 않았다는 이야기를 들었단다."
란델이 살짝 칼리안을 쳐다봤다.
플란츠로부터 얻어낸 말 레이븐을 말하는 것일까 아니면 칼리안 자신을 말하는 것일까 하는 생각에 잠겨 있던 칼리안은 란델의 시선을 느끼지 못했다.
'하긴. 말 한 마리가 성질이 사나운 걸 신경 쓸 사람이 아니지.'
그러니 실리케가 언급한 '말'은 레이븐이 아니라 칼리안일 것이다. 칼리안이 플란츠를 대하는 태도가 바뀐 것을 뜻하는 소리이리라.
"나에게 미리 알려주었다면 좋았을 것을."
플란츠가 고개를 삐딱하게 움직였다.
자신의 것과 똑같은 실리케의 연두색 눈을 쳐다본 플란츠의 비틀어진 목소리가 뒤를 이었다.
"무엇을요."
무엇을 이야기했어야 하는지를 묻는 것이 아니었다.
숨죽여 살다 제 어미의 뒤를 따라 조용히 사라질 티끌이 극명하게 달라진 것. 그리하여 실리케에게 목 안의 가시처럼 거슬리고 있는 것. 이런 의미임을 플란츠도 이해했다.
"이미 다 전했을 텐데요."
다만 플란츠의 시종들이 그의 일거수일투족을 모두 실리케에게 보고하는 것을 알고 있었다. 따라서 칼리안에 대한 무엇을 '더' 이야기해야 하는지를 묻는 것이었다.
물론 실리케도 칼리안이 달라졌다는 것을 모르고 있진 않았다. 머리를 잘랐던 바로 그 날 이미 온 왕궁에 소문이 퍼졌다. 뿐만 아니라 식당에서의 사고와 기마 수업의 일을 포함한 그간의 상황을 낱낱히 전해들어 알고 있었다.
플란츠의 반응에 실리케가 실망한 말투로 이야기했다.
"완전히 네 손을 벗어났다는 것을 말해주지 않았잖니."
실리케를 마주하는 붉은 눈에 더 이상은 두려움이 담겨 있지 않았다. 칼리안이 달라진 것이 비단 외양만이 아니라는 것을, 그래서 더는 플란츠가 붙들어두지 못하리라는 것을 실리케에게 알렸어야 했다.
하지만 플란츠는 그러지 않았다.
"네가 어떻게 할 생각인지도."
"그것도 이미······."
플란츠의 입에 조소가 어렸다.
"말했을텐데요."
"나는 기억이 나지 않는구나."
플란츠가 더 이야기하기 귀찮다는 듯 의자에 몸을 기댔다. 그런 아들의 모습을 보는 실리케가 조용히 웃었다.
곧 실리케의 웃음이 조금 다르게 변했다.
마치 어린아이 같은 맑은 웃음이었다. 그것은 플란츠가 얀에게 나이프를 집어던지기 직전에 보였던 것과 완전히 닮아 있었다.
"플란츠. 너는 항상 그래왔지. 허나 너무 심려하지는 마렴. 놓칠 일도, 되찾아올 일도 더는 없을 테니."
칼리안의 입가에 미미한 웃음이 걸렸다.
'내가 죽어서 사라지면 도망 갈 일도 없겠지.'
칼리안은 아무렇지 않은 척 물잔을 들어 한 모금 마시고 내려놓았다. 그리고 식사를 이어나갔다. 그러자 실리케가 다시 입을 열어 말을 이었다.
"오래 걸리지 않을 거란다."
플란츠는 마음대로 하라는 것처럼 고개를 돌리며 눈을 감아버렸다. 자연스럽게 나이프를 움직이던 칼리안의 눈빛이 조금씩 서늘하게 변했다.
대체 얼마나 우습게 보았으면 본인을 앞에 두고 저런 이야기를 태연히 꺼낸다는 말인가.
란델이 조용히 고개를 돌려 플란츠를, 그리고 칼리안을 쳐다봤다. 그 뒤 놀랍게도 칼리안에게 말을 건넸다.
"피곤해 보이는구나. 먼저 가서 쉬거라."
생각지 못한 란델의 말에 플란츠까지도 놀란 눈으로 그를 쳐다봤다. 하지만 란델은 그 외의 말을 더 꺼내놓지는 않았다.
이 끔찍한 식탁에서 벗어날 수 있도록 해준 그 한마디가 어찌나 반갑던지.
칼리안은 곧바로 고개를 끄덕이며 일어섰다. 실리케의 미간이 좁아졌으나 란델의 행동에 대해 딱히 다른 말을 하지는 않았다.
"식사 즐거웠습니다."
레넌에게 말한 칼리안이 고개를 틀어 실리케를 똑바로 쳐다봤다.
칼리안은 실리케에게 죽은 여자를 완전히 닮은 그 눈으로 실리케를 응시하며 생긋 웃었다. 부디 이 모습도 죽은 프레이야를 빼닮았기를 간절히 바라는 마음으로.
"다음에, 또 뵙지요."
잠시 인상을 찌푸리던 실리케가 아무렇지 않은 얼굴로 돌아와 무어라 답하려 할 때 칼리안이 몸을 휙 돌려 그 자리를 빠져나갔다. 부채를 쥔 실리케의 손에 힘이 들어갔다.
란델이 눈을 내리 뜬 채 디저트를 입으로 가져갔다. 실리케가 좋아하기 때문에 만들어진, 르니에리 꽃을 넣은 소르베였다.
르니에리 꽃 향이 란델의 입 안을 맴돌다 사르르 녹아 사라졌다.
* * *
3주일이 더 지났다.
국왕의 탄신 기념일 축제를 앞두고 카이리스의 수도인 카이리시스 전체가 들썩였다. 자신의 영지에 머물던 귀족들이 하나 둘 카이리시스의 자택으로 모여들었다. 각국의 사신들이 찾아와 왕궁의 귀빈을 위해 마련된 루비아 관에서 여독을 풀었다. 이틀 전 카이리시스에 입성한 엘프들의 모습을 구경하려는 인파로 한동안 소란이 일기도 했다.
누군가는 손님을 맞이하고 누군가는 연회를 준비하고. 또 누군가는 안전을 지키기 위해 다들 눈코 뜰 새 없이 바빠졌다. 모두가 성대한 축제를 앞두고 들뜬 표정을 지우지 못했다.
하지만 얀의 안색은 눈에 띄게 나빠졌다.
얀 뿐만 아니라 칼리안의 시중을 돕는 여섯 명의 시녀들도 표정이 좋지 않았다. 심지어 한 달 만에 칼리안을 다시 찾아온 의상 담당자 섀틴도 굳은 얼굴을 했다.
"왕자님. 어떻게 더 마르셨습니까?"
"그렇게 됐어."
칼리안이 걱정 가득한 섀틴의 얼굴을 보며 겸연쩍게 웃었다.
태평한 얼굴과 말투로 대답했지만 칼리안 역시 문제를 실감하고 있었다. 마력을 쓰려 할 때마다 심장이 아픈 것과 몸이 계속 나빠지는 것을 보아 아무래도 몸 속의 마나가 심장에 좋지 않은 영향을 주고 있는 것은 분명한 듯 했다.
얀은 그런 칼리안을 보며 하루가 멀다하고 치유사를 불러오겠다는 말을 했다. 결국 칼리안은 얀에게만 마법을 쓸 수 있다는 사실과 서클을 숨겨야 하는 사정을 설명했고 국왕의 탄신일 축제까지 기다려야 하는 이유도 함께 이야기했다.
물론 앨런이 온다는 것을 알고 있다고 할 수는 없었으므로 그 부분은 적당히 감추어 말했다.
'전하의 탄신일 축제에 분명 저명한 마법사들도 올 거야. 믿을 만한 사람을 찾아 문제를 확인해볼 테니 그 때까지만 기다려.'
마법을 익혔다면 치유사의 신력이 오히려 좋지 않은 영향을 줄 수 있었으므로 얀은 그제야 고개를 끄덕였다.
칼리안이 그 때의 일을 생각하고 있는데 섀틴의 목소리가 들렸다.
"예복을 수선해야 할 것 같습니다."
처음에는 옷 이곳 저곳에 핀을 꼽아 가며 줄여야 할 곳과 그대로 두어도 될 곳을 구분하려 했다. 하지만 그것으로 해결 될 문제가 아니라는 것을 깨닫고는 줄자를 다시 꺼내들었다.
"치수를 새로 재겠습니다, 왕자님."
옷을 모두 조각내어 줄인 뒤 다시 이어 올 생각인 것 같았다.
칼리안이 어쩐지 미안한 마음이 되어 순순히 따랐다. 한참동안 치수를 다시 잰 섀틴이 문제 없다는 듯 말했다.
"그래도 시간이 있어 다행입니다. 내일 오전까지 수선하여 다시 오겠습니다."
"예복 두 벌은 어차피 둘째, 셋째 날에 입을테니 시간이 부족하면 그것들은 조금 늦게 가져와도 괜찮아."
"네, 왕자님. 알겠습니다."
곧 칼리안이 마차를 내어 섀틴을 데려다 주도록 일렀다. 그것이 그나마 섀틴을 도와줄 수 있는 일이었다.
그렇게, 국왕 르메인의 탄신일이 다가왔다.
제3장. 처음 뵙겠습니다. (1)
카이리스 왕궁의 정문은 카이리시스를 통과하는 왕도와 곧바로 이어졌다.
왕궁의 앞에는 왕도를 중심으로 대칭을 이룬 두 개의 광장이 있었다. 동쪽의 하츠아라 광장, 서쪽의 시스파니안 광장이 그것이었다.
하츠아라 광장의 분수대에는 인간의 모습을 한 시스파니안이, 시스파니안 광장의 분수대에는 하츠아라가 멀리 떨어진 서로를 바라보는 모습으로 세워져 있었다.
본래 두 조각상은 왕궁을 향해 선 형태로 만들어졌으나 하츠아라 사후 드래곤의 모습으로 찾아온 시스파니안이 두 조각상을 서로 바라보게끔 돌려놓고 떠났다는 이야기가 전해졌다.
그러다보니 이 두 개의 광장은 평상시에도 연인이나 관광객이 많이 찾아오는 카이리스의 대표적인 명소였다.
그런데 새벽부터 광장을 찾은 사람들이 두 유명한 분수대에는 시선조차 두지 않고 가능한 왕궁과 가까운 곳에 설 수 있도록 자리 경쟁을 벌였다.
오늘이 바로 국왕 르메인의 탄신 기념일이었기 때문이다.
아직 이른 새벽.
왕궁 정문을 뒤로한 왕도의 위에 르메인이 서게 될 화려한 단상이 세워졌다. 단상이 보이지 않을 이들을 위해 두 분수대 앞에 얇고 커다란 수정 판도 세워졌다. 국왕 일가의 모습을 수정 판에 투영시켜 뒤에서도 잘 볼 수 있도록 해주는 마법 장치였다.
카이리시스의 치안을 담당하는 경비대가 광장 곳곳에 서서 혹시라도 발생할 지 모를 사고에 대비했다. 뿐만 아니라 왕궁에서 사람들이 나와 단상 위를 청소하고 기념 선물을 쌓아놓는 등 정신 없이 움직이기 시작했다.
물론 왕궁 안에서도 행사 준비가 한창이었다.
"후우."
칼리안이 긴장한 듯 긴 한숨을 내쉬었다.
오늘이 얼마나 중요한 날인지 새삼 실감했기 때문이다. 축제 기간 동안은 조찬도 없었다. 그만큼 모두 바쁘게 축제를 준비한다는 의미이기도 했다.
가볍게 샤워를 마치고 나오자 섀틴이 딱 맞추어 찾아왔다. 아직 칼리안이 외부인을 맞이할 준비가 되지 않은 탓에 침실 커튼을 내린 얀이 섀틴을 방 안으로 들였다.
덕분에 칼리안 쪽에서만 섀틴을 볼 수 있었는데, 섀틴은 옷을 줄이느라 그대로 밤을 새웠는지 하룻밤 새 많이 수척해져 있었다. 칼리안이 고마움과 미안함을 담아 다시 한번 마차를 보내주었다.
"준비하시는 동안 오늘의 일정을 다시 한번 말씀드리겠습니다."
섀틴이 나간 뒤 커튼을 걷은 얀이 말했다.
긴장 때문에 굳은 찰흙처럼 딱딱해 보이는 얀을 본 칼리안이 웃는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오전 9시에 전하께 축하 인사 올리시고, 10시에는 광장에서 치뤄지는 행사에 참석하시게 됩니다. 12시부터 국왕 전하, 왕비님과 함께 하는 오찬이 있고,"
"오후 2시 중앙 귀족들과 모임, 5시 지방 귀족들과 모임, 8시 연회, 11시 끝. 다 외웠어."
칼리안이 얀의 말을 가로채자 그 동안 일정을 얼마나 많이 얘기해줬었는지 깨달은 얀이 멋쩍은 얼굴을 했다.
"내일은 사절들과 만남도 있으니 귀족들의 대화를 잘 들어 두시면 도움이 될 거예요."
칼리안이 기대하는 것은 오로지 연회가 시작된 이후였다. 앨런이 연회가 끝나갈 때가 되어서야 찾아왔다는 이야기가 있었으니까.
덧붙이자면 칼리안은 각국 사절과의 만남, 정확히는 세크리티아에서 오는 사절에 대해서는 큰 기대를 하지 않았다. 당연하겠지만 사절단에 체이스가 포함된 것도 아니었고 사절단으로 오는 세크리티아 귀족 중 칼리안이 보고 싶어 할 만한 인물도 없을 것이기 때문이다.
'혹시나 아는 사람이 온다고 해도, 요즘 체이스 왕자님 잘 지내시는지 물을 수도 없는 일이니.'
사실 지금 시점의 베른은 세크리티아 귀족들과의 관계가 매우 좋지 않았다.
후궁의 아들인 체이스에게 왕세자의 위를 양보하겠다는 베른의 의견에 너나 할 것 없이 반대들을 해왔기 때문이었다. 이유는 단 하나, 왕비의 아들인 베른이 세자가 되는 것이 당연하다는 것이었다. 어떤 말도 통하지 않았다.
그래서 베른은 체이스에게 기사 서임을 받았다.
'형님한테 충성 서약 할 때 놈들 표정이 볼 만 했지.'
오랜만에 과거의 일을 회상하며 실소하는 칼리안의 귀에 얀의 목소리가 다시 들렸다.
이번에는 주의사항이었다.
물론 이미 지겹도록 들은 것이었다.
"귀족들과 인사하실 때에는 제가 뒤에서 이름을 일러드릴 겁니다. 그 외에는 따로 말씀을 나누실 일이 없을 거예요. 그래도 만약 그들에게 하실 말씀이 있다면,"
"상대방 이름을 잊어버렸으면 얀을 쳐다봅니다. 유능한 상급 시종 얀이 다시 말해줄 겁니다. 인사는 내가 먼저 해도 되지만 내 이름은 직접 말하지 않습니다. 나는 왕족이니까요."
걱정 가득한 얀의 얼굴을 보고 있으니, 어느새 과거에서 벗어나와 장난꾸러기 같은 웃음이 눈에 그려졌다.
"왕자님. 말씀 낮춰주세요."
깜짝 놀란 얀이 고개를 숙이며 말했다.
"그런데 내 이름 모를 사람이 있나? 다들 나를 좀 특별하게 부르는 것 같던데. 아, '그' 칼리안! 하고."
빙글빙글 웃는 얼굴로 꺼내놓는 말이었으나 당연히 좋은 의미가 아니었다. 때문에 얀은 대답할 말을 찾지 못한 채 쓴 표정을 지으며 칼리안을 쳐다봤다.
"아무튼 그것도 오늘이 지나면 달라질테니 너도 걱정 그만해. 실수 안 할 거니까."
왕자 노릇을 너무 오래 했다.
뿐만인가? 왕제 겸 기사 생활까지. 사람들 앞에서 완벽한 왕자로 탈바꿈하는 것은 누구보다 자신 있는 칼리안이었다.
'암살자는 어차피 올 테니 이 기회에 실리케 속을 실컷 뒤집어 놓는 게 낫겠지.'
그러다보니 축제를 기다리는 동안 이런 생각이 자연스럽게 들었다.
눈에 띄게 행동하든 눈에 보이지 않게 행동하든.
실리케는 그런 것과 상관 없이 그냥 칼리안의 존재 자체가 싫은 여자다. 그러니 아예 눈에 띄어 버릴 생각이었다. 눈에 들어간 고양이 털처럼 완전히 거슬려 버리겠다고 작정을 했다.
그런 생각을 모를 얀은 고개를 주억거리며 칼리안을 한참 쳐다봤다. 여전히 걱정이 가시지 않은 얼굴을 한 얀의 진지한 목소리가 칼리안의 장난스런 웃음을 붙들었다.
"왕자님.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왕자님의 건강입니다. 그러니 혹시라도 오늘 일정을 모두 참석하시기 어려울 것 같다면 참지 마시고 제게 바로 말씀해주셔야 합니다. 꼭이요."
칼리안의 몸 상태가 좋지 않아 덧붙이는 말이었다.
얀에게 이야기해야 무엇이 달라지겠나 싶다가도 얀이라면 정말 어떻게든 할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알았어. 걱정하지 말아."
얀의 어깨를 툭툭 두드린 칼리안이 잠시 고개를 숙여 입은 옷을 살폈다.
왕자의 정복을 입은 모습이 낯설다.
하얀 셔츠와 검은 바지를 입고 금색 단추가 두 줄로 박힌 검은색의 타이트한 재킷을 입었다. 목을 반쯤 가리는 넥칼라가 달린, 허리 아래까지 오는 길이의 재킷이었다.
그리고 그 위에 무릎까지 내려오는 붉은 색 망토를 둘렀다. 망토를 재킷에 고정한 시녀들이 두 줄의 금색 끈과 태슬이 달린 망토 이음 장식이 비뚤어지지 않았는지 살폈다.
마지막으로 칼리안의 머리부터 발 끝까지 옷 매무새를 점검한 시녀 메를린이 만족한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
"준비가 다 되었습니다, 왕자님. 정말 잘 어울리십니다."
칼리안이 가볍게 고개를 끄덕였다.
마른 것이 조금 흠이기는 했지만 메를린의 말처럼 왕자의 정복이 잘 어울리는 모습이 비춰졌다.
재킷 상의에 황금색으로 새겨진 오망성과 드래곤의 모습을 형상화 한 카이리스의 문장이 보였다. 실제로 이 문장이 수놓아진 옷을 입은 것은 처음이었던 탓에 거울 속 모습에서 한참동안 눈을 떼지 못했다.
'이제 카이리스 문장이 낯설지 않다는 게 이상하네.'
오히려 세크리티아의 문장이 낯설어지는 것은 아닐까.
이런 생각을 하며 거울을 쳐다보는 칼리안이 계속해서 움직이지 않자 얀의 눈에 불안함이 어렸다. 이제는 그러지 않겠지만 만에 하나 거울을 또 깨뜨릴까봐서였다.
"왕자님. 혹시 마음에 들지 않으시는 부분이 있습니까?"
조심스러운 얀의 질문을 받은 뒤에야 칼리안의 눈이 거울에서 떨어졌다. 다행히 칼리안은 얀이 걱정하던 우울한 상태가 아니었다. 아니, 오히려 그 반대였다.
칼리안이 생글생글 웃으며 이렇게 대답한 것이다.
"벌써부터 너무 잘생겨서."
얀의 표정이 재미있게 변했다.
칼리안이 그런 얀을 두고 밖으로 나갔다. 자꾸 새로운 모습을 보여주는 칼리안의 태도에 멍한 표정을 짓던 얀이 재빨리 따라나섰다.
* * *
작은 마차가 체르밀 궁 앞에 세워져 있었다.
마차가 한 대 뿐인 것을 보니 웬일로 란델과 플란츠 둘 모두 이미 출발한 모양이었다.
'란델은 그렇다 치고. 플란츠까지?'
의외의 상황이었으나 그렇다 해도 칼리안이 늦은 것은 아니었다.
칼리안과 얀이 탄 것을 확인한 마부가 느린 속도로 마차를 움직이기 시작했다. 왕궁을 찾은 손님들이 많아서인지 왕궁 내를 오가는 마차들이 굉장히 많았다.
곧 마차가 르메인이 있는 아르피아 궁에 도착했다.
본래는 국왕의 집무 공간인 아르피아 궁이 아니라 국왕이 거주하는 카밀리아 궁에서 진행해야 하는 일정이었다. 그러나 일이 너무 많다는 관계로 형식은 다 없애고 집무실에서 간단히 인사만 전하게 되었다.
칼리안은 매우 좋아했다.
가장 어려울 것 같은 일정이 가장 간단한 것으로 바뀌었으니까.
그러나 애석하게도 그 좋은 기분은 그리 오래 가지 않았다.
"두 형님들은 이미 와 계셔야 하는 것 아닌가."
칼리안이 난처한 얼굴로 얀에게 물었다.
분명히 이미 와 있어야 할 란델과 플란츠가 없었기 때문이다. 얀의 눈동자가 불안하게 흔들렸다. 모른다는 뜻이었다.
칼리안이 싱긋 웃었다.
"그래. 너도 모르는 게 있어야지."
얀이 당혹스러운 마음에 어쩔 줄을 몰라 했다.
그 때 누군가 그들에게 다가왔다. 국왕 르메인의 시종장인 이였다.
하얀 머리에 중후한 인상을 한 시종장이 칼리안에게 정중히 인사했다.
"안녕하십니까, 칼리안 왕자님."
"형님들께서는 어디에 계시지?"
살짝 고개를 끄덕이는 것으로 인사를 받은 칼리안이 묻자, 칼리안을 지그시 쳐다보던 시종장이 대답했다.
"이미 체르밀 궁으로 되돌아 가셨습니다. 오늘 전하께서 급히 진행하셔야 할 업무가 있다 하시어 잠시 간단한 인사만 올리는 것으로 일정이 변경되었습니다. 같은 이유로 오늘 오찬 역시 취소되었습니다. 미리 언질을 드리지 못해 죄송합니다."
"형님들께서 전하를 따로이 만나 뵈었다는 말인가?"
"네, 왕자님. 그렇습니다."
뒤에서 얀이 숨을 들이키는 소리가 들렸다.
그 얼굴을 보지 않아도 무슨 생각을 하는지 뻔했다.
'왕자님께 전하를 독대할 때 어떻게 해야 하는지는 일러드리지 못했는데!'
국왕 르메인과의 독대.
그것을 신경 쓰는 것이리라. 예절 교육을 따로 받는데도 저렇게 신경을 쓴다.
"한꺼번에 만나시기에 시간이 부족하여 따로 보시겠다니."
이해가 되지 않는 일이다.
누가 생각해도 한꺼번에 셋을 보는 것이 시간이 더 짧을 테니까.
시종장은 대답하지 않았고 칼리안은 알겠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이유가 무엇이건 국왕이 변덕을 부렸다 하니 따라야지 별 수 있겠는가.
"알겠네."
'독대라. 정말 처음인데.'
옛 칼리안의 아버지를 처음 만나는 자리.
그런 첫 만남이 이렇게 어려운 자리일 줄은, 또 이렇게 갑작스러울 줄은 생각하지 못했다.
살다 살다 란델과 플란츠가 보고 싶어질 줄은 몰랐다.
풀어졌던 긴장감이 한꺼번에 몰려왔다.
집무실을 향해 걸어가던 칼리안이 티나지 않도록 심호흡했다.
옛 칼리안도 르메인을 독대한 기억이 없었다.
심지어 그는 베른일 적에도 아버지인 국왕과 사이가 좋지 않아 단 둘이 만난 적이 없었다. 그가 독대했던 국왕은 형인 체이스가 유일했다. 그리고 체이스와의 독대는 그저 형제 간의 만남이었지 결코 이런 분위기가 아니었다.
"나도 지금 들어가면 되겠나?"
"네, 왕자님. 바로 드시지요."
겉으로는 침착했지만 마음 속은 체르밀 궁의 호숫가를 다섯 바퀴는 달린 것처럼 숨가빴다. 르메인을 보며 무슨 말을 해야 할지 수십 가지의 인사가 한꺼번에 떠올랐다 사라지기를 반복했다.
마치 호수 위를 헤엄치는 백조가 된 기분이다.
칼리안이 진중한 표정으로 집무실에 들어섰다.
제3장. 처음 뵙겠습니다 (2)
르메인은 집무실의 소파에 앉아 서류를 보고 있었다.
르메인 역시 검은 머리였다.
르메인은 국왕의 덕목을 가르치던 책의 표지에서 바로 튀어나왔다고 해도 좋을 만큼 완벽한 국왕의 외형을 갖춘 남자였다. 표정은 신중했고 눈은 깊었다.
그 모습이 누군가를 떠오르게 했다.
'란델을 보는 것 같군.'
광막한 바다를 생각나게 하는 짙은 푸른 빛의 눈동자와 얼굴 생김새는 물론이고 눈을 내리깐 표정이며 말 없이 사람을 짓누르는 분위기까지. 란델의 모든 것이 르메인을 닮아 있었다.
'방관하길 좋아하는 성향까지 닮았어.'
프레이야와 칼리안의 죽음을 모르는 척 했던 비정한 왕. 그것이 르메인에 대한 칼리안의 사적인 평가였고 그 생각은 아직 조금도 바뀌지 않았다. 르메인에게 느끼는 이 본능적인 거북함은 앞으로도 결코 사라지지 않을 것 같았다.
칼리안은 르메인의 앞으로 걸어가며 든 이러한 생각을 비워내기 위해 애썼다. 만에 하나라도 표정으로, 혹은 입으로 튀어나올까 겁이 났기 때문이었다.
그리하여 르메인의 곁에 도착했을 즈음 복잡한 감정을 간신히 감추는 것에 성공한 칼리안이 흠 없는 몸가짐으로 예를 올렸다.
그리고 조용하지만 명확한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국왕 전하를 뵙습니다."
르메인이 손에 들고 있던 서류를 테이블에 내려놓았다.
그 옆에 거의 다 마신 홍차 잔과 또 다른 서류 뭉치들이 있는 것으로 보아 줄곧 소파에서 일을 했던 것 같았다.
서류를 내려놓았으니 이제 칼리안을 쳐다볼까 했는데 르메인은 곧바로 다른 서류를 집어들었다.
'······ 서류를?'
칼리안의 얼굴에 황당함이 어렸다.
물론 르메인은 그런 칼리안의 표정을 눈치채지 못했다. 아예 보지도 않았으니 알 수 있을 리가 없었다. 칼리안의 눈이 곧 사납게 변했다.
"이리 와 앉거라."
정말 어울리지 않게도 그렇게 화가 난 와중에 웃음이 났다.
르메인의 목소리가 플란츠와 비슷했기 때문이다.
말투는 당연히 달랐지만 목소리는 나이 든 플란츠를 연상시켰다.
참 골고루 나눠받았다는 생각이 든다.
칼리안이 이런 잡생각으로 애써 사념을 접어내며 르메인의 맞은편에 앉았다. 그리고 가라앉은 목소리로 르메인을 쳐다보며 말했다.
"서른 여덟 번 째 탄신일을 맞이하신 것을 경하드립니다."
"그래. 고맙구나."
르메인이 고개를 끄덕였다. 높낮이 없는 음색이 서류 뒤에서 흘러나왔다.
그렇게 감정 없는 말투로 화답한 뒤 찻잔을 들어 한모금 마신 르메인이 손을 올려 미간을 주물렀다. 꽤나 피곤한 것 같았다.
"잘 지내고 있는 것이냐."
"네."
칼리안은 생각할 것도 없이 곧바로 대답했다.
"아주 잘 지내고 있습니다."
르메인은 칼리안이 급격히 야위었다는 것을 알아 차리지 못한 것이 분명했다. 칼리안의 말에 이렇게 대답했기 때문이었다.
"다행이구나."
하기사.
좀 쳐다봐야 알아 차리든 말든 할 것이 아닌가?
"지내는 중에 불편한 것이 있다면 말 하거라."
칼리안의 한쪽 입꼬리가 미약하게 올라갔다.
'내가 지금 불편한 게 한 둘이 아니라서.'
그쪽의 두 아들과 함께하는 침묵 속의 조찬에 아직도 적응을 못했다고 해야 할지. 조만간 그쪽 부인이 보낸 암살자가 찾아올 것 같다고 해야 할지. 알 수 없는 병으로 점점 말라가고 있는데 잘못하면 죽을지도 모르겠다고 해야 할지.
'그도 아니면, 내가 사실 그쪽의 아들이 아니라고 해야 할지.'
······ 그렇게 말하면 쳐다봐 주시려는지.
"잘, 지내고 있습니다."
결국 칼리안은 똑같은 말을 반복했다.
대답이라기 보단 성의 없는 대꾸였다. 그럼에도 르메인은 고개만 끄덕였다.
이제야 알았다.
셋을 한꺼번에 보는 것보다 하나씩 세 번을 보는 것이 빠른 이유. 셋을 앞에 앉혀놓고는 저런 짓을 할 수 없기 때문이었다. 하나씩 앞에 두면 일을 하면서 입만 열면 되니 이 얼마나 효율적인가.
'아들에게 단 5분을 할애하는 것도 아깝다는 말이군.'
칼리안이 냉소했다.
르메인은 여전히 미간에 올린 손을 내리지 않고 있었다.
그 뒤로 르메인과 무슨 대화를 나눴는지 기억도 나지 않았다. 기억할 필요도 없을 것 같았다. 정확히 5분만에 르메인을 만나고 아르피아 궁 밖으로 나온 칼리안이 마차에 오르며 말했다.
"차라리 '처음 뵙겠습니다' 할 걸 그랬어."
걱정 가득한 얼굴로 기다리고 있던 얀이 조용히 웃었다.
집무실의 일을 전해들은 것은 아니었으나 르메인이 왕자들을 어떻게 대하는지는 알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마차가 출발했고 오래지 않아 체르밀 궁 앞에 세워졌다. 마차에서 내린 칼리안이 숨을 푹 내쉬며 주변을 돌아봤다.
호수에 바람이 들어 잔물결이 일고 있었다.
"10시까지 시간이 조금 있습니다. 돌아보고 오세요."
답답한 마음을 읽은 얀의 말에, 칼리안이 고맙다는 듯 고개를 끄덕이며 호수를 향해 발을 옮겼다. 그리고 호수 근처를 천천히 돌아 장미가 심겨진 정원으로 갔다.
'양산 같은데.'
잠시 뒤, 정원 한가운데 검은 색 양산이 펼쳐져 있는 것을 본 칼리안이 발을 멈췄다.
'이런 날 누가 정원에?"
호기심에 양산 근처로 걸어간 칼리안이 급하게 발을 멈췄다.
양산 밑에서 장미를 돌보고 있는 사람이 바로 란델이라는 것을 알아챘기 때문이다.
그의 취미가 장미 정원을 가꾸는 것이라는 사실은 칼리안도 알고 있었다. 참으로 란델 다운 취미라 생각했었다. 그런데 지금 란델의 모습은 취미를 즐기는 것으로 보이지는 않았다.
굳은 표정을 한 란델의 시종이 칼리안이 두른 것과 똑같이 생긴 빨간 망토를 팔에 걸친 채 양산을 받쳐들고 있었다. 그 앞에, 정복 차림을 한 란델이 정원에 무릎을 굽히고 앉아 장미의 곁가지를 잘라내고 있었다.
칼리안이 허탈하게 웃었다.
란델이 굳이 장미 손질이 바빠 이런 날 저런 옷으로 정원에 들어선 것은 아닐 테니까.
'참 대단한 르메인이다. 란델을 저렇게 흔들어놓다니.'
칼리안이 죽고 몇 년이 지나 본격적인 왕좌 쟁탈전이 시작된 뒤, 세렌티의 신전에 다녀오던 텐실 국왕과 왕세자가 탄 마차의 축이 부러지며 마차가 절벽 아래로 떨어지는 대형 사고가 있었다.
그 사고로 신성왕국 텐실의 왕과 왕세자가 한꺼번에 명을 달리했다.
그때 남아있는 텐실의 왕족은 란델 뿐이었다. 그리고 란델은 카이리스를 떠나 텐실의 왕위를 이어받았다. 조금도 고민하지 않고 결정을 내렸다는 이야기를 들은 기억이 났다.
'르메인까지 저랬으니 카이리스에 미련이 없지.'
충분히 이해되는 선택이었다.
만약 칼리안이었다 하더라도 머뭇거리지 않고 똑같이 이 나라를 떠났을 것이다.
"칼리안 왕자님."
퍼뜩 들려온 목소리에, 칼리안이 예언 같은 회상에서 급히 빠져 나왔다. 난처한 얼굴로 칼리안을 부른 것은 란델의 시종이었다.
어느새 자리에서 일어난 란델이 칼리안을 보고 있었다.
"죄송합니다."
사과의 뜻을 전한 칼리안이 란델을 향해 가볍게 고개 숙여 예를 보였다.
손에 낀 장갑을 벗어 시종에게 건넨 란델이 칼리안을 조용히 바라봤다. 타오르는 듯한 붉은 눈과 완전히 대비되는, 깊이 가라앉은 푸른 눈이 칼리안을 향했다.
란델은 칼리안을 나무라지 않았다. 칼리안이 이 곳에 혼자 와 있던 이유를 그 역시 모르지 않을 테니까.
"그래."
란델은 그저 그 한마디만 내려놓고 체르밀 궁으로 돌아갔다.
* * *
르메인은 공평했다.
세 아들을 모두 똑같이 취급했다.
옆에 선 플란츠에게서 풀풀 풍겨오는 술냄새가 그것을 증명하고 있었다. 정신이 아찔해진 칼리안이 플란츠에게서 고개를 돌리며 미간을 찌푸렸다.
'저 정신 나간 어린 놈이, 나도 참고 있는 술을!'
원래도 흐린 편이었던 플란츠의 눈빛이 더 흐릿해진 것 같았다.
왜 그랬는지 알고 있었지만 그렇다 해서 플란츠의 경솔한 행동을 너그럽게 이해해줄 수 있는 것도 아니었다.
왕실 외부의 사람들 앞에 나서는 자리.
물론 국왕의 뒤에 서서 한 마디 하지 않고 손인사를 하고 가만히 서 있기만 하면 되겠지만 혹시라도 무슨 일을 저지르는 것은 아닐까 걱정되었다.
그래도 다행히 카이리스 왕실의 외부 행사에서 왕자가 난동을 부렸다는 세작의 정보를 받아 본 적은 없었으니 일단 놈에게 이성이 남았으리라 믿어 보기로 했다.
마치 칼리안의 마음 속을 들여다 보기라도 한 것처럼 플란츠가 고개를 힐끗 돌려 칼리안을 쳐다봤다. 칼리안의 인상이 찌푸려진 것을 본 플란츠가 피식 웃었고, 칼리안은 그런 모습을 알아채지 못했다.
"10분 전입니다. 곧 행사가 시작됩니다."
왕실 행사 담당자가 국왕 일가를 향해 말했다.
정문 근처에 마련된 의자에 앉아있던 칼리안이 마음의 준비를 했다. 다른 이들에게는 이미 익숙한 자리겠지만 칼리안은 아니었다. 때문에 조금쯤 긴장이 되는 것은 어쩔 수 없었다.
광장에는 더 발디딜 곳이 없을 만큼 많은 사람들이 모여들었다. 광장 안에서 사람들의 사이에 섞인 경비대와 광장 주변을 둘러싼 카페나 레스토랑 건물에 올라 있는 왕실의 기사단 파벨의 기사들이 사람들 사이에 의심스러운 움직임이 없는지를 감시하고 있었다.
곧 두 개의 대형 수정판에 불이 들어오며, 아직 비어있는 단상의 모습을 투영하기 시작했다. 행사 시작이 임박했음을 느낀 사람들의 기대감 어린 소리가 광장을 가득 메웠다.
"이제 왕궁의 문을 개방하겠습니다."
그 말과 함께, 왕궁의 정문이 양쪽으로 서서히 열렸다.
정문 중앙에 크게 새겨진 카이리스의 문장이 반으로 갈라지며 문이 열리자 조금씩 드러나기 시작하는 왕궁 내부 모습을 본 사람들이 벌써부터 환호했다.
오래지 않아 평상시 굳게 닫혀 있는 왕궁의 문이 활짝 열렸다. 저 문은 이제 사흘간 닫히지 않을 것이다.
"5분 전입니다."
국왕 직속 기사단 카에라의 의장 사열이 시작됐다.
시간은 길지 않았으나, 오로지 국왕 한 명만을 위해서만 움직이는 이들의 사열식을 본 사람들이 숨을 죽이는 것이 느껴진다.
칼리안을 포함한 국왕 일가가 자리에서 일어섰다.
시종들이 바쁘게 움직였다. 얀 역시 빠르게 다가와 칼리안의 정복을 점검해주고는 멀찍이 물러났다.
"1분 전입니다."
왕궁의 정문부터 단상까지 붉은 카펫이 깔렸다.
기사들이 붉은 카펫 위를 비워두고 두 줄로 길게 늘어섰다. 그들의 사이로 국왕 일가가 지나가게 될 예정이었다. 기사들의 검이 하늘을 찌르듯 곧게 뻗어 올라갔다.
날씨가 매우 맑았다. 기사들이 들고 있는 검에 햇빛이 반사되어 날카로운 기세를 보였다.
그리고, 10시.
국왕 일가의 행차를 알리는 카에라 기사단장의 우렁찬 목소리와 함께 르메인의 발이 움직였다. 그 뒤를 이어 실리케가 천천히 걸음을 옮겼다. 그리고 란델과 플란츠가 움직였다.
'이제 내 차례.'
그들의 뒤를 바라보던 칼리안이 잠시동안 눈을 감았다 떴다.
허리를 세웠다.
고개를 들었다.
주변을 감싸고 있던 분위기가 순식간에 바뀌었다.
사람들의 눈이 있을 곳으로 시선을 내리고 미소를 지었다.
그렇게 완벽한 모습을 갖춘 카이리스의 왕자가 된 뒤.
밖으로 향하는 첫 발을 내딛었다.
제3장. 처음 뵙겠습니다 (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