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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

***

형사들이 딥어스테크를 찾아갔다. 그들은 비서실로 쳐들어가 정동진의 자리에 있는 모든 걸 압수했다.

주말인데도 출근한 직원이 몇 명 있었다. 형사들은 그들에게 정동진에 관해 질문했다.

"전무님 비서라서 저는 잘…."

신동욱에 대해서도 물었다.

"형사님. 전무님에 대해 제가 함부로 말하면 저 잘립니다."

장호철의 비서 김태훈은 집에 있다가 체포됐다. 그는 반항했다.

"나를 왜 또 체포합니까? 이게 도대체 몇 번째야!"

"김태훈 씨가 그동안 무슨 짓을 했는지는 정동진 씨가 다 자백했습니다."

"그거 다 정동진이 거짓말한 겁니다! 나를 음해하려고 거짓말한 거라고요!"

"자세한 건 가서 이야기하시죠."

신동욱 전무에게도 형사들이 찾아갔다. 체포영장을 가져간 건 아니었다.

신동욱이 느긋한 얼굴로 말했다.

"정 비서가 그런 말을 했어요? 그 사람 참. 나한테 불만이 많았나? 왜 그런 거짓말을 해?"

"그런 지시를 한 적이 없다는 말씀이십니까?"

"이봐요. 나 딥어스테크 전무입니다. 그런 음지에서나 일어나는 일을 내가 왜 지시합니까?"

"그러면 같이 가서 설명해주실 수 있겠군요."

신동욱은 경찰서로 같이 가자는 말에는 민감하게 반응했다.

"가긴 어딜 가! 할 말이 있으면 내 변호사하고 해! 난 안 가!"

***

회사는 난리가 났다.

홍성준 부사장은 주말에도 출근해 회의실에서 임원들과 대책을 의논했다.

임원들은 각자 인맥을 동원해 상황을 파악했다.

경찰 쪽에 인맥이 있는 이사가 말했다.

"제가 알아보니까 이번 일은 신 전무 쪽에서 벌인 거더군요."

"맞습니다. 정동진이라고 신 전무의 비서가 있는데 현장에서 체포됐답니다."

"회사에 찾아온 형사들도 정동진이 어떤 놈인지 집중적으로 물었답니다."

"이거, 이거. 이러면 신 전무는 이제 나가리 된 거 아닙니까?"

송 이사가 아부했다.

"홍성준 부사장님. 아니지. 이제 사장님이라고 불러야겠습니다. 하하하."

심각한 표정으로 앉아 있던 홍성준은 그 말을 듣고는 웃음을 감추지 못했다.

"뭘 벌써 그렇게까지. 허허."

다른 이사들도 맞장구를 쳤다.

"강력한 경쟁자가 나가리 될 판인데 당연하죠."

"남들 눈이 있으니까 아직은 말조심해야 하지만, 주총은 해보나 마나 아니겠습니까?"

"맞습니다. 신 전무는 체포될 걱정부터 해야죠."

모두 웃기만 한 건 아니다. 현실적인 문제를 꺼내는 임원도 있었다.

"부사장님. 아직 변수가 남아 있잖습니까?"

"변수라니요?"

"사덕리소스 말입니다. 거기 보유 지분이 상당하던데요. 그 문제가 아직 해결이 안 났습니다."

송 전무가 끼어들었다.

"정동진이 조폭을 동원해서 사덕리소스 차 이사를 노렸다면서요? 그거 신 전무가 시킨 게 뻔하잖습니까?"

"그건 그렇습니다만."

송 이사가 홍성준을 부추겼다.

"부사장님. 이러면 차 이사의 조건을 그대로 들어줄 필요는 없잖습니까?"

"그런가?"

"차 이사는 이제 부사장님 손을 들어줄 수밖에 없을 겁니다. 자기를 노린 신 전무 손을 들 수는 없을 테니까요."

홍성준의 귀가 팔랑거렸다.

"당연히 그렇겠지요? 그럼, 슬슬 차 이사를 만나서 대답해야겠군요. 물론 우리한테 유리하게."

***

홍성준은 월요일에는 당면한 문제부터 수습해야 해서 차우진을 만날 시간이 없었다.

차우진과 홍성준은 화요일에 만났다.

간단한 인사가 오간 후에 홍성준이 말했다.

"아시겠지만 상황이 변했습니다."

"모릅니다만?"

"뉴스에도 나오고, 형사들이 차 이사님한테도 연락했을 텐데…."

"회사로 찾아와서 몇 마디 묻고 가긴 했습니다. 서 사장님이 대답하셨죠."

"그럼 대충 아시겠군요. 그래서 말인데. 험험."

홍성준이 헛기침한 후에 말했다.

"저번에 말한 조건을 다 들어주기는 그렇고, 대신에 이사 자리는 보장하겠습니다."

차우진이 씩 웃었다.

"이야. 우리 홍 사장님. 한결같으십니다."

"예?"

"불리해지면 찾아오시고, 유리해지면 태도를 바꾸시고. 그래도 이번에는 직접 오셨네요."

홍성준이 헛기침을 또 했다.

"험험."

이사들의 말을 듣고 오긴 했는데, 말을 또 바꾸려니 조금 무안하긴 했다.

그래서 핑계를 댔다.

"상황이 이렇게 변하니까 임원들이나 투자자들을 설득하기가 어렵더군요. 이해를 좀 해주시죠."

"그렇게 말해주시니 저도 마음이 편하네요. 상황이 변하면 조건도 변해야죠."

홍성준이 웃었다.

'그러면 그렇지. 어차피 거래가 가능한 사람은 나밖에 없잖아.'

그래도 예의상 인사는 했다.

"이해해주셔서 고맙군요."

"고맙기는요. 우리 조건도 또 변했는데."

"예?"

"이건 안 꺼냈으면 더 좋았겠지만."

차우진이 미리 작성해온 서류를 내밀었다.

"새 제안입니다. 저번 제안보다 권한을 강화했습니다."

홍성준이 미심쩍은 얼굴로 서류를 꺼내 확인했다.

"무슨 제안…. 어? 아니, 이러면…. 연구소 전체 인사권도 대놓고 가져가겠다는 겁니까?"

전에는 팀 하나의 인사권에 영향력을 행사하는 정도였다면 이번 제안은 그것보다 훨씬 강력했다. 팀 하나가 아니라 연구소 전체의 인사에 개입할 수 있었다.

차우진이 말했다.

"뭘 그리 놀라십니까? 경영권을 달라고 한 것도 아닌데."

홍성준 부사장이 인상을 쓰며 물었다.

"이런 조건을 받아들일 것 같습니까?"

"저쪽에서는 받아들이겠다던데요."

"예? 저쪽이요?"

홍성준은 당황했다.

"아니, 차 이사님. 그런 일을 당하고도 신 전무와 손을 잡겠다는 겁니까?"

당연히 신동욱이나 그쪽 투자자와 손잡을 생각은 없다. 기왕이면 홍성준을 밀어줄 생각이다.

그런데 홍성준은 그걸 모른다.

차우진이 말했다.

"난 당한 게 없습니다만?"

"네?"

"미수에 그쳤다고 들었습니다."

공식적으로는 그렇게 알려졌다. 그래서 형사들도 기본적인 것만 물어보고 돌아갔다.

"저쪽에서는 자기들은 몰랐다면서, 신 전무만 쳐내겠다더군요. 그럼 뭐, 우리야 조건 들어주는 쪽과 손잡아야죠."

"저, 저쪽 누구…."

"신 전무를 밀던 투자자들 말입니다. 예전 장 사장의 지분도 그 투자자들이 나눠서 인수했다면서요?"

"그, 그래도…. 신 전무가 마약조직을 동원해 차 이사님을 노린 건 사실인데…."

홍성준은 그것 하나만 믿고 오늘 협상장에 나왔다. 하지만 씨도 먹히지 않았다.

차우진이 당한 게 아니다. 오히려 성구파와 천수파가 조직이 무너질 정도로 박살 났다.

차우진이 자신과는 상관없다는 듯이 말했다.

"뉴스에 나온 마약조직 놈들은 얼굴도 못 봤습니다만?"

62. 겸직

딥어스테크 홍성준 부사장은 당황했다.

"아니, 그래도 이건 너무 일방적인 조건…."

"아. 그 이야기도 해야겠구나."

차우진이 몸을 앞으로 조금 기울였다.

"주가가 많이 내려서 우리가 산 주식의 평가 손실이 크길래, 그거 희석하려고 물을 탔습니다. 싱거워질 때까지."

"예?"

"우리가 금광이 있거든요. 주식을 하도 많이 샀더니 이젠 우리가 손잡는 쪽이 경영권을 장악할 수준까지 왔다고 보는데, 확인해보시죠."

"자, 잠시 전화 좀."

홍성준이 자리에서 일어나 창가로 간 후에 전화를 걸었다.

그는 회사 담당자들과 한참을 통화한 후에 조금 창백해진 얼굴로 돌아와 자리에 앉았다.

"설마 회사 경영권을…."

"경영권은 부사장님 쪽에서 가지시고, 연구소는 우리가 결정권을 갖고. 그런 조건이죠."

홍성준이 머리를 굴렸다.

'일단 이 조건을 받아들이고, 연구소 쪽은 계열사 형태로 분리한 다음에 연구소를 하나 더 만든다면?'

차우진이 경고했다.

"홍 사장님. 워낙 한결같은 분이라 하는 말인데, 다음에도 말을 바꾸시면 그때는 저도 선 넘습니다."

홍성준은 선을 넘는다는 말이 무슨 뜻일지 고민했다.

'저쪽 투자자와 손을 잡고 차 이사가 직접 사장 자리에 앉을 거란 소리인가? 아니면 경영에 사사건건 간섭한다는 말인가?'

어느 쪽이 됐던 좋을 건 없다.

'둘 중 하나겠지?'

차우진이 말한 건 물리적인 해결이라는 세 번째 선택지다.

홍성준은 그 두 가지 선택지만으로도 고민이 됐다. 입에서 신음이 나왔다. 하지만 결론은 이미 나와 있었다.

홍성준이 앞으로도 경영권을 안정적으로 유지하려면 사덕리소스와 차우진이 가진 지분이 필요하다.

'이상한 구조이긴 한데, 역시 경영권이 더 중요하지. 연구소 쪽은 차 이사와 좋은 관계를 유지하면 어떻게든 해결되겠지.'

그가 마지막으로 물었다.

"그럼 연구소의 연구 결과는…."

"개발비나 연구원 월급이 전부 회사에서 나와야 하니까, 당연히 회사 소유이지요."

연구비를 차우진이 낼 이유는 없다. 그에게 필요한 건 연구 결과물이다.

어차피 그 연구 결과로 회사가 돈을 벌면, 회사 지분을 많이 가진 차우진이나 사덕리소스의 몫도 같이 늘어난다.

홍성준이 마음을 정했다.

'차 이사가 연구 성과를 쏙 빼먹는 것만 아니면 돼. 자기도 투자한 게 있으니까 회사에 이익이 되는 방향으로 연구하겠지.'

"알겠습니다. 차 이사님의 제안, 받아들이겠습니다."

"결정하려면 이사들과 투자자들을 설득하셔야 한다더니?"

홍성준은 여기서 미적대면 다음 기회는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 사람들은 제가 책임지고 반드시 설득하겠습니다."

차우진이 씩 웃었다. 홍성준의 반응이 지난번보다 적극적이었다.

그래서 그때는 알려주지 않았던 정보를 꺼냈다.

"송 이사가 반대할 텐데."

"예?"

"전에는 제안을 거절할 때 송 이사를 저한테 보내셨지요? 그때 송 이사가 대놓고 시비를 걸더군요."

"예? 시비까지 걸었습니까? 허, 이것 참. 제가 대신 사과를 하겠습니다. 그 친구가 그럴 사람이 아닌데 의욕이 앞서서…."

"사과받으려고 하는 말이 아닙니다만?"

"그럼…."

"송 이사가 그때 왜 그랬을까요? 나를 언제 봤다고?"

"예?"

"내가 나중에라도 부사장님 편을 못 들게 하려고 일부러 시비를 걸었다는 생각이 들던데요."

홍성준은 그 말을 듣자마자 생각나는 게 있었다.

지난 주말 회의 때 홍성준 앞에서 앞장서서 아부한 사람이 송 이사다. 그런데 차우진이 제안했던 조건을 일부만 받아주자고 부추긴 것도 송 이사다.

"소, 송 이사가 왜 그런다는 겁니까?"

"신 전무가 심어놓은 프락치겠죠. 내가 부사장님과 손을 다시 잡지 못하게 미리 약을 친 거겠지요."

홍성준의 얼굴이 심각해졌다.

"증거는 있으십니까?"

차우진이 피식 웃었다.

"그거야 직접 찾으셔야지, 떠먹여 달라고 하시네?"

***

홍성준 부사장은 이틀 만에 이사와 투자자들을 모두 설득했다.

차우진은 연구소의 개발 방향과 인사, 예산권을 받기로 했다.

그러면 그의 힘은 연구소장보다 강해진다.

홍성준이 구체적인 사항을 합의하는 자리에서 제안했다.

"연구소장은 장호철 사장의 사람인 데다가, 문제가 된 비리에도 개입한 정황이 있습니다. 그래서 사표를 받기로 했습니다."

"그러시군요."

"그러니까 차 이사님이 그냥 신임 연구소장으로 취임하시는 건 어떠신지…."

"저는 다른 일이 바빠서 사양하겠습니다."

지구 멸망을 막아야 한다. 굳이 연구소 하나에 매달릴 이유가 없다.

"연구소의 운영이나 실무에 일일이 개입할 생각은 없습니다. 그건 새 연구소장님이 하셔야죠."

"하지만 연구소의 예산권과 인사권을 차 이사님이…."

"그건 필요할 때만 개입할 겁니다."

차우진은 일단은 마그마 탐지기 개발에 필요한 사람과 예산만 신경 쓸 생각이다.

홍성준의 표정이 밝아졌다.

"그러면 신임 연구소장을 빨리 뽑아야겠군요. 사실 생각해둔 사람이 있긴 한데…."

차우진이 거절하면 다른 사람을 찾아야 한다.

차우진이 말했다.

"부사장님이 알아서 잘 고르셨겠죠."

"하하하. 시원하십니다."

사덕리소스와 차우진이 가진 지분이 적대적 세력으로 변하면 홍성준은 자리가 위험해진다. 그러니 충돌할 일은 가능하면 만들지 않아야 한다.

그런데 차우진은 강력한 권한은 가져갔지만 일일이 간섭할 눈치는 아니었다.

홍성준은 차우진이 이러는 이유가 궁금했다.

"이렇게까지 연구소에 신경 쓰시는 걸 보면, 회사를 키울 좋은 연구 계획이 있으신 거겠지요?"

차우진이 진심을 담아 대답했다.

"10년쯤 후에는 전 세계가 환호할 걸 만들어야지요."

멸망급 재난 중 하나를 막으면 전 세계가 환호한다. 그러려면 딥어스테크의 연구소 탐지기 개발팀이 필요하다.

홍성준은 그 말을 다르게 받아들였다.

"역시 차 이사님은 국내가 아니라 세계 시장을 목표로 하시는군요. 10년이면 불가능한 일은 아니지요. 하하하."

***

차우진이 집에 돌아와 소파에 누웠다. 그가 TV를 켜고 배를 긁었다.

"요즘 너무 바쁘게 움직였어. 살이 빠지는 거 같다. 빠지면 안 되는데."

차유리가 집에 들어오다가 그 꼴을 보고 말했다.

"너 살 안 빠졌어. 배가 그대로야."

"아니야. 분명히 빠졌어."

"체중계에 올라가 보든가."

"살이 근육으로 바뀌면 체중은 그대로겠지."

"퍽이나."

차우진이 물었다.

"바쁜 거 끝나서 집에 온 건가?"

"끝날 뻔했지. 어떤 놈 때문에 망했어."

"응?"

TV 뉴스에 성구파와 천수파가 싸우다 전멸한 사건이 나오고 있었다.

"저 새끼들이 저 난리를 쳐 놨잖아. 대한민국에서 조폭이 총을 쏴대면서 싸워? 죽고 싶어서 환장한 놈들이지."

"저건 누나네 관할이 아니잖아. 경기도에서 일어난 사건인데?"

"저 현장에서 딥어스테크 전무의 비서가 잡혔어. 청부하려고 찾아갔다가 싸움에 휘말렸대."

차우진이 소파에서 몸을 일으켰다.

"타깃이 누구인지도 들었어?"

정동진은 차우진을 납치하라는 청부를 하러 그곳에 찾아갔었다.

"남의 관할에서 일어난 사건인데 내가 그것까지 알아야 하냐? 내 사건만 해도 바쁘다."

차우진이 안심하며 도로 소파에 누웠다.

"딥어스테크도 누나네 관할은 아닐 텐데?"

"그 회사의 죽어버린 사장이 저놈들하고 엮여 있어. 그 전무도 사장 쪽 사람이고. 근데 그 회사 사장이 예전에 청부한 놈들이 우리 관할에서 사고 친 적 있잖아."

그때 차유리의 팀이 그 사건을 조사했다.

차우진이 물었다.

"그 정도면 몇 단계 건너뛰어야 연결되는 거 아닌가?"

차유리가 짜증을 냈다.

"저 위에서 저 사건하고 손톱만큼만 연관되어있는 사건이라도 샅샅이 훑으란다. 괜히 그 불똥이 우리한테 튀었다. 그 사건도 재조사하래."

"너무하네."

"그치? 너무하지?"

지금 뉴스에 나오는 놈들을 쓸어버린 건 차우진이다. 그 결과 차유리의 일이 늘어났다. 조금 미안해졌다.

"맛있는 거 해줄까?"

"많이 해라. 나갈 때 가져가게."

"대형 밀폐용기에 꽉꽉 담아줄게. 수연이하고 나눠 먹어."

"응? 왜 나눠 먹어?"

"어? 수연이 거는 빼?"

"무슨 소리야? 수연이 거는 따로 싸야지? 밀폐용기 하나면 우리 팀 먹을 것도 모자라."

"수연이 핑계 대고 두 통 가져가서 혼자 다 먹지 마라. 하나는 꼭 전해줘라. 나중에 확인할 거다."

"나한테 속고만 살았냐?"

"어."

차우진이 재료를 넉넉히 사다가 요리를 만들었다. 차유리가 고생하러 가는 원인을 차우진이 만들었기 때문에 군소리 없이 맛있게 만들었다.

차유리는 씻은 후에 소파에 누워서 쉬었다.

그녀는 차우진이 맛보기로 가져다준 요리 몇 개를 집어먹으며 말했다.

"그런데 누굴까?"

"뭐가?"

"성구파와 천수파가 싸울 때 습격한 놈. 그놈이 다 쓸어버렸잖아."

"총 쏜 놈들은 두목이라며."

"그건 어떻게 알았냐?"

"인터넷 검색?"

"어쨌든 난입한 놈이 누군지 알 수가 없다네?"

"CCTV는?"

"저기가 성구파가 마약 공장을 차려놓은 곳이야. 그놈들이 주변에 CCTV가 있는 곳에 공장을 차렸겠냐?"

"그건 그렇더라고."

차우진도 주변에 CCTV가 없다는 걸 확인하고 빠져나왔다.

차유리가 아쉬워했다.

"그놈을 잡으면 특진인데 말이야."

그놈이 말했다.

"꿈도 꾸지 마시지."

"왜 시비냐?"

"밥이나 먹어. 많이 먹고 살쪄라."

"내가 좀 마르긴 했지?"

"형사가 구라를 치네?"

차유리가 말했다.

"그런데 진짜 궁금하네. 그놈은 왜 성구파와 천수파가 싸우는 곳에 쳐들어간 걸까?"

그놈들 때문에 일이 틀어져 멸망급 재난을 막지 못하면 수십억 명이 죽는다.

그래서 성구파는 처리해야만 했다. 천수파는 마침 그때 거기에 있어서 같이 처리한 것뿐이다.

차우진이 말했다.

"지구 멸망을 막기 위해서 그랬겠지."

"뭔 개소리야?"

"요리 다 됐다. 먹어봐."

***

신동욱 전무는 결국 구속됐다. 김태훈과 정동진도 마찬가지였다.

성구파와 천수파는 조직이 궤멸됐다. 그날 현장에 없었던 놈들도 체포되거나 도망쳐서 숨었다.

홍성준은 딥어스테크 사장에 취임했다.

송 이사는 잘렸다.

홍성준은 장호철과 신동욱이 저지른 짓에 대해 공식적으로 사과하고, 회사를 제대로 경영하겠다고 선언했다.

차우진은 딥어스테크의 이사 자리를 받았지만 아직 출근은 하지 않았다. 회사에는 그의 얼굴을 아는 사람이 거의 없었다.

전임 사장과 같이 해먹던 이사 여럿이 사표를 쓰고 임원진이 많이 바뀌었다.

그래서 직원들은 그냥 이사 한 명이 더 온다고만 생각했다.

***

형사가 차우진을 찾아왔다.

"차우진 씨?"

"누구신지?"

형사가 경찰 신분증을 보여주고 소속을 밝혔다. 이 동네가 아니라 다른 지역 형사였다.

"형사님이 무슨 일입니까?"

"이게 길거리에서 할 이야기는 아닙니다만…."

"저는 커피 마시러 카페에 가던 길인데, 거기서 이야기하시죠."

두 사람은 동네 카페 야외 테이블에서 커피를 앞에 두고 앉았다.

형사가 질문했다.

"전에 딥어스테크 연구소에서 전기 기술자로 일하셨지요?"

"그랬지요. 지금은 그 일은 그만뒀지만요."

"그때 방화 사건도 막으셨고요."

"표창장은 사양한다고 말씀드렸습니다."

"알고 있습니다. 그런데…."

형사가 커피를 한 모금 마신 후에 말했다.

"이번에 딥어스테크 이사님이 되신다던데요."

"그렇죠? 아주 합법적으로."

다른 건 몰라도 이사가 되는 것 자체는 정상적인 절차를 거쳤다.

"아시다시피 최근 딥어스테크에 심각한 사건이 꽤 있었습니다. 그런데 전기 공사를 하던 분이 갑자기 이사님이 되시니까 저희가 확인을 해야 해서요."

"아아. 그래서 의심하시는구나."

"어…. 꼭 의심한다기보다는 확인을…."

차우진이 명함을 내밀었다.

"제가 사덕리소스의 이사도 겸임하고 있습니다."

"네?"

"다른 형사님이 사덕리소스로 찾아와서 서준석 사장님이 만나셨다던데요. 제가 청부 대상이었다면서요. 그건 왜 모르시지? 소속이 다르신가?"

"이번 사건이 워낙 커서, 수사를 두 팀이…. 아, 그 새… 친구. 정보 공유 좀 하라니까. 죄송합니다. 회사가 달라서, 당연히 다른 분인 줄 알았습니다."

차우진이 물었다.

"그럼 사덕리소스가 최근에 딥어스테크 지분을 많이 인수했는데 그건 아십니까?"

"그건 알고 있습니다."

"딥어스테크 공사장에서 잠깐 일했던 건 지분을 인수하기 전에 현장 실사를 나간 겁니다."

"그걸 왜 공사장에서…."

"딥어스테크에서 모르게 조사해야 했습니다. 우리가 지분을 인수하려 한다는 걸 알리면 안 되니까요."

"아…. 현장에 직접 가서 기술자로 일하는 척하면서 실사를 하신 거군요."

"제가 전기 기술자라서, 일하는 척이 아니라 진짜로 일했습니다만?"

"그럼 개발이사가 되신 건…."

명분은 충분히 있었다.

"새 경영진이 제대로 하는지 지켜보려고요. 사덕리소스의 지분에 제가 개인적으로 확보한 지분을 더하면, 그 정도 요구는 당연한 거지요."

***

차유리가 소속된 형사팀의 팀장이 그녀에게 물었다.

"차 형사 동생이 어느 회사 이사라고 했지?"

"사덕리소스요."

형사팀에서 그걸 아는 사람은 팀장뿐이다. 팀장이 물었다.

"진짜 잘 나가나 보다. 이번에 딥어스테크 이사로 취임한다며? 두 회사에서 겸직하는 거야?"

"네? 어디요?"

63. 정찰

형사팀장이 대답했다.

"딥어스테크 말이야."

차유리가 말했다.

"회사는 알죠. 그 사건 때문에 야근 많이 했는데."

"동생이 그 회사 이사가 됐다던데? 몰랐어?"

몰랐다.

"모르긴요. 당연히 알았죠. 그런데 팀장님이 그걸 어떻게 아셨어요?"

"그 사건 수사팀에 아는 놈이 있는데, 전화로 알려주면서 이것저것 묻더라고. 그래서 차 형사 동생이라고 했지."

"아하."

차유리는 그날은 일찍 퇴근했다.

차우진은 나갈 준비를 하고 있었다.

"일찍 왔네?"

"야근을 그렇게 했는데 일찍 오는 날도 있어야지. 그런데 말이야."

그녀가 물었다.

"너 딥어스테크에서도 이사가 됐냐?"

"어."

"그럼 그렇다고 말을 해야 할 거 아냐!"

"안 물어봤잖아."

"야. 너는…. 아니다. 안 물어본 내가 잘못했지. 암. 그렇고말고."

차유리가 컵에 냉수를 한 잔 떠서 차우진의 앞 테이블에 내려놓았다.

"야. 노느라 힘들지? 물이라도 마셔가면서 놀아."

"뭐지? 이 수상한 태도는?"

그녀가 방실방실 웃으며 물었다.

"그 회사는 월급은 많이 나오냐?"

"몰라."

"무슨 소리야? 왜 월급이 얼만지도 모르면서 일하는데?"

"주식이 많아서?"

"어?"

"저번에 그 회사 주식 샀다고 했잖아. 사덕리소스가 보유한 주식까지 생각하면 이사 자리 하나는 받아야 하더라고."

"오!"

"오?"

"우진아. 우리 그럼 더 좋은 아파트로 이사 갈 수 있어?"

"여기도 아파트야."

"막 고층 아파트에 한강 보이는 곳 말이야."

차우진이 물컵을 내려놓았다.

"꿈 깨라. 난 우리 집이 좋다. 이사 안 간다."

"아! 왜!"

이 집은 단거리 공간이동 스킬로 흔적 없이 빠져나가기 딱 좋은 위치에 있다. 출입구에는 CCTV가 있어서 알리바이를 만들기도 좋다.

차우진이 생각했다.

'고급 아파트단지로 가면 CCTV가 더 많을 테니까 들킬 확률만 올라가지.'

"이사 안가. 포기해."

"독한 놈. 그럼 밥이나 내놔!"

"나 그 회사 가니까 알아서 먹어라."

"이 시간에 출근해?"

"출근은 내일부터고 오늘은 정찰."

***

차우진이 딥어스테크 연구소로 향했다.

"그게 벌써 누나 귀에 들어갔네."

차우진은 회사의 운영에는 개입할 계획이 없다. 그런 일에 시간을 쓰고 싶지도 않았다.

하지만 마그마 탐지기 개발은 그가 적극적으로 개입해야만 한다. 그가 개입하지 않으면 개발이 중단된 상태로 사장됐다가, 멸망급 재난이 터질 때가 되어서야 그 사실이 알려지게 된다.

차우진은 퇴근 시간이 다 되어서야 연구소 앞에 도착했다.

그가 휴대폰을 꺼내 주소록에서 박효정의 이름을 찾았다.

"박효정 씨는 언제 퇴근하려나. 물어볼 게 많은데. 어. 나왔다."

개발 2팀 연구원 박효정이 연구소를 나오고 있었다. 그녀는 차우진이 이곳 공사장에서 일할 때 도시락을 나눠 먹던 사람이다.

"2팀은 역시 정시 퇴근이구나."

개발 2팀은 방화 사건을 겪은 후부터 야근을 그만두었다. 팀원들은 특별히 급한 일만 없으면 정시에 퇴근했다.

박효정이 차우진을 발견하고 손을 흔들었다.

"어머! 차우진 씨!"

"오랜만입니다."

그녀가 활짝 웃었다.

"다시 여기서 일하시는 거예요?"

"예. 뭐, 매일은 아니고 가끔."

"잘됐네요."

연구동은 완성됐지만 그 옆 건물은 아직도 공사가 끝나지 않았다. 그녀는 차우진이 다시 전기 공사를 하러 왔다고 생각했다.

박효정이 제안했다.

"요즘 이 근처에 식당이랑 술집이 더 생겼어요. 제가 밥 살게요."

"난 맛있는 거 좋아합니다."

"맛집이에요."

차우진이 박효정과 식당으로 향했다.

그가 오늘 여기 온 건 그녀를 만나 개발팀 내부 분위기를 물어보기 위해서였다. 밥과 술을 먹으면 자연스럽게 그런 이야기를 꺼낼 수 있다.

***

개발 2팀장 곽수혁의 딸 곽민지가 연구소로 찾아왔다.

"오늘은 아빠한테 밥도 얻어먹고, 용돈도 받아야지. 코인 노래방에서 돈을 너무 썼어."

곽수혁이 연구소 근처 식당에서 저녁을 사주며 말했다.

"민지야. 그런데 말이야. 너 지금 학원 갈 시간 아니냐?"

"와. 엄마인 줄."

"학원은 또 쨌냐?"

"응."

"야. 그래도 그건…. 아니다."

곽민지는 예전에 학원에 가다가 곽수혁을 노리던 놈들에게 납치된 일이 있다.

그때는 무사히 구출되긴 했지만 그 후로 공부에 관한 압박은 줄어들었다.

특히 학원은 가끔 째도 뭐라고 하지 않았다.

원래도 공부하라고 하는 역할은 엄마가 맡고 곽수혁은 용돈 챙겨주는 좋은 아빠 역할을 맡았다.

그는 곽민지가 납치됐다가 구출된 후로는 공부하라는 소리를 대놓고 하지는 않았다. 지금은 학원이 중요한 게 아니라 멘탈 케어가 더 중요하다고 판단했다.

곽민지는 학교 수업은 꼬박꼬박 받았다.

그런데 학원은 째는 날이 많았다. 곽수혁이 아는 것보다 훨씬 자주 째고 놀았다.

납치당했을 때는 무섭긴 했는데, 그 직후에 화끈하게 구출된 덕분에 트라우마는 딱히 남지 않았다.

그래서 더 신나게 놀았다.

곽민지가 밥을 먹으며 말했다.

"아빠. 나 이번에 내가 하고 싶은 일이 뭔지 깨달았어."

"그래? 하고 싶은 일이 생겼다니 다행이다. 그게 뭘지 두렵긴 하다만."

"나중에 나쁜 놈들을 잡는 사람이 되는 건 어떨까?"

곽수혁의 표정이 밝아졌다.

"경찰이나 검찰이 되게? 그것도 좋지. 그러려면 공부 열심히 해야겠다. 학원도 다시 열심히…."

"아니. 히어로."

"응?"

그녀가 진지한 얼굴로 말했다.

"나 히어로가 되는 거 어떠냐고."

곽수혁이 곽민지를 빤히 쳐다보다가 물었다.

"혹시 머리가 아픈 건 아니지?"

"아빠는 지금 딸을 미친 애 취급해야 속이 편해?"

"아니, 내 말은…."

옆에서 목소리가 들렸다. 박효정이었다.

"어머. 곽 팀장님."

"응? 어. 효정 씨구나."

곽수혁은 말을 돌릴 기회가 왔다 싶어서 반갑게 물었다.

"여기는 어쩐 일이야?"

"아는 분하고 저녁 먹으러 왔어요."

"아는 분? 아. 혹시 남자친구…."

"전에 우리 아래층 화재 났을 때 불 꺼준 분이요. 우리 사무실 문도 열어주셨잖아요."

"아. 그분이시구나. 그때는 워낙 경황이 없어서 미처 못 알아봤네."

곽수혁이 자리에서 일어나 인사했다.

"그때는 정말 고마웠습니다. 덕분에 살았습니다."

차우진이 말했다.

"뭘요. 마침 불 끄기 딱 좋은 장비가 있어서 불을 끈 건데요."

박효정이 곽민지를 보며 말했다.

"따님?"

"어떻게 알았어? 닮았어?"

"여고생하고 같이 밥을 먹으니까 알죠."

"아. 그렇구나."

곽민지는 말이 없었다. 박효정이 아니라 차우진을 빤히 쳐다보았다.

차우진과 박효정은 그 식당의 다른 자리로 이동했다. 곽민지의 고개가 두 사람이 움직이는 방향을 따라갔다.

곽수혁이 물었다.

"오늘은 내가 아니라 엄마 닮았다는 말을 안 하네?"

곽민지가 차우진을 보며 대답했다.

"엄마는 다 고친 거잖아."

"으응? 어떻게 알았어?"

"저번에 외갓집에 갔다가 엄마 옛날 사진 발견했어."

"아…. 네 엄마가 다 없앴는데도 남은 사진이 있었구나."

곽민지가 물었다.

"누구야?"

"박효정 씨. 우리 팀 연구원이야."

"아니. 그 옆에 아저씨."

"저번에 회사에서 불났다고 했잖아? 그때 불 꺼준 사람."

"소방관?"

"아니. 지나가다 화재를 발견하고 껐다더라."

곽민지의 눈이 반짝였다.

"지나가다가?"

"왜?"

"맞는 거 같은데…."

"뭐가 맞아?"

곽민지는 차우진을 두 번 보았다.

차우진은 납치된 곽민지를 구출할 때는 얼굴에 마스크를 쓰고 있었다. 그때는 얼굴이 노출되지 않았다.

그런데 곽민지는 차우진의 진짜 얼굴을 본 적이 있다.

'예전에 골목에서 본 아저씨.'

차우진은 오메가 바이러스 치료제 개발자인 이선정 박사를 처음 만났을 때, 상황을 파악하려고 골목을 통해 이동하며 그녀를 따라갔었다.

그때 골목에서 덤비는 남자 고등학생 둘을 때려서 쫓아낸 일이 있다. 그 골목에 같이 있던 여자애 중 한 명이 곽민지였다.

곽민지는 그때 차우진의 얼굴을 봤다. 얼마나 잘 싸우는지도 그때 보았다.

'그 골목 아저씨랑 나 구출해준 아저씨랑 느낌이 되게 비슷했는데.'

체형을 보고 비슷하다고 생각하는 게 아니다. 둘 다 놀라울 정도로 잘 싸우는 걸 보고 비슷하다는 생각을 했다.

그녀가 손가락을 꼽으며 상황을 정리해보았다.

'내가 그 골목에서 본 고수 아저씨가 아빠랑 아는 사이야. 내가 납치됐을 때 나를 구해준 고수 아저씨가 아빠도 구출했어.'

공통점이 있었다.

'그러니까 둘 다 무술 고수이고, 둘 다 아빠랑 관계가 있잖아.'

그녀가 작게 말했다.

"우연 아닌 것 같은데. 맞는 것 같은데…."

곽수혁이 물었다.

"뭐가 맞는데?"

곽민지가 손뼉을 쳤다.

'아! 정체를 숨기긴 해야겠다.'

곽민지는 요즘 히어로 이야기에 푹 빠져 있었다.

'그날 다친 개…. 강아지들이 엄청 많다고 들었어. 저 아저씨 정체가 알려지면 곤란해질지도 몰라.'

곽민지가 차우진을 쳐다보며 생각했다.

'저 아저씨가 누군지 내가 말해봤자 믿어줄 사람은 없겠지만.'

어차피 증거는 없다.

'그래도 맞는 것 같아.'

***

박효정이 말했다.

"여기 맛있는 게 없겠다. 다른 식당으로 가요."

"이 식당이 맛집이라더니?"

"옆집이 더 맛있어요."

박효정은 곽수혁과 같은 식당에서 차우진을 만나고 싶지 않았다. 곽수혁이 싫어서가 아니다.

'팀장님이 봤으니까 내일 내가 데이트했다고 소문 쫙 퍼질 거야. 여기서 먹으면 뭘 먹었는지, 분위기가 어땠는지까지 알려질걸? 부담스러워. 그런데 이거 데이트 맞나?'

두 사람은 옆집으로 이동했다. 그곳은 음식을 팔긴 하지만 술집에 더 가까웠다.

차우진은 그곳에서 술을 곁들인 식사를 하며 탐지기 개발팀에 관해 물었다.

"연구는 잘 돼요? 연구팀은 문제없고요?"

"웅…. 보안 이슈가 있어서 자세한 건 말씀드릴 수 없어요. 요즘 그런 쪽으로 까다로워졌거든요."

"아. 그건 말하지 않아도 괜찮아요. 분위기만 묻는 겁니다."

연구 내용은 어차피 정식으로 출근해서 자료를 요구하면 다 알 수 있다. 지금 그가 알고 싶은 건 개발팀의 분위기다.

마그마 탐지기의 상태도 알고 싶긴 했다.

'지금은 마그마 탐지기가 아니라 다른 이름이겠지. 아니면 그냥 식별 코드만 있을 수도 있고.'

인사권과 예산권을 가진 개발이사 타이틀을 달고 가면 뭐든 다 물어볼 수 있다.

그런데 그렇게 듣는 이야기는 지금 이렇게 편안한 분위기에서 듣는 것과는 다를 수 있다.

박효정이 말했다.

"아무래도 회사 분위기가 뒤숭숭하니까 연구소 분위기도 안 좋죠."

"요즘 사건이 자주 터지긴 했죠."

"이번에 또 전무 비서랑 무슨 마약조직이랑 커넥션이 있었대요. 그래서 형사들이 회사에 찾아왔었어요."

"개발 2팀에도?"

"네. 그 마약조직의 창고에서 전임 사장이 횡령한 장비가 발견됐다더라고요. 장비 횡령을 처음에 신고한 사람이 우리 팀장님이잖아요."

"아. 그거."

"그래서 다들 걱정이 많아요. 이 사태에 휘말려서 팀이 없어지면 우리 자리가 남아있을지 모르잖아요."

차우진이 장담했다.

"자리는 확실히 보장될 겁니다. 팀도 안 없어질 거고요."

"요즘은 예산이나 장비를 신청해도 잘 안 나와요. 일단 상황이 정리될 때까지 기다리라고 하네요."

"예산이든 장비든 필요한 건 전부 다 지원될 겁니다."

박효정이 웃으며 손을 흔들었다.

"에이. 뭐예요. 우진 씨가 결정하는 일이 아니라고 너무 쉽게 말하는 거 아녜요?"

그녀가 속으로 생각했다.

'그래도 잘 될 거라고 말해주니까 기분은 좋다.'

차우진이 말했다.

"음. 그거 결정하는 사람이…."

그들의 대화에 새로운 사람이 끼어들었다.

"어? 효정 씨. 여기서 술 마셔?"

차우진이 말했다.

"연구소 근처라 그런지 아는 사람을 많이 만나는군요."

그녀가 어색하게 웃었다.

"밥집이 아직 많지 않잖아요."

그녀가 말을 건 사람을 돌아보며 인사했다.

"이 과장님. 안녕하세요."

이현호 과장이 술에 취해 벌게진 얼굴로 말했다.

"우리 테이블로 가서 같이 마시자."

"아니요. 저는 괜찮아요."

"요즘 같은 때는 효정 씨도 우리 인사팀하고 친하게 지내야 좋잖아."

"괜찮다니까요."

이현호가 그녀의 손목을 향해 손을 내밀었다.

"빼지 말고 같이…."

차우진이 이현호의 팔을 덥석 잡았다.

"어?"

"싫다잖아."

이현호가 팔을 흔들어 빼내며 목소리를 더 키웠다.

"너 뭐야!"

"일행."

"일행? 일해앵? 너 우리 회사 직원이야?"

"거기서 일하긴 하지."

"그런 놈이 나한테 감히? 너 내가 누군지 알아?"

"꼭 알고 싶다. 네가 누군지."

이현호가 삿대질을 했다.

"요즘 회사 분위기 몰라? 폭풍이 불 때는 알아서 눈치껏 행동해야지!"

"오늘은 분위기나 좀 보러 왔더니."

차우진이 이현호를 보며 말했다.

"회사가 개판이구나."

64. 업무보고

술에 취해 얼굴이 벌게진 이현호 과장이 화를 벌컥 냈다.

"이 새끼가! 너 진짜 잘리고 싶어?"

이현호와 같이 술을 먹던 사람들이 뒤늦게 쫓아와 그의 팔을 잡았다.

"과장님. 여기서 이러시면 안 됩니다."

"놔! 이 새끼가 열 받게 하잖아!"

"이쪽으로 가시죠. 저희랑 술 드셔야죠."

이현호가 끌려가면서 차우진을 향해 손가락질했다.

"너 이 새끼! 내가 지켜본다!"

이현호 과장의 일행인 김 대리가 남아서 차우진에게 말했다.

"저희 과장님이 술을 많이 드셔서 실수를 좀 하셨네요. 하, 하하."

이현호가 자기 테이블에 가서도 큰 소리로 말했다.

"왜? 내가 틀린 말 했어? 사실이잖아!"

차우진이 말했다.

"시끄럽네."

김 대리가 말했다.

"술 취해서 저러시는 건데, 서로 좋게좋게 넘어가죠."

"서로? 좋게? 그냥 넘어가면 우리에게 좋은 게 있긴 합니까?"

"하하. 우리 인사팀입니다. 저분은 인사팀 과장님이시고요."

"그래서요?"

"그쪽이 불이익 안 당하시게 제가 잘 지켜보겠습니다."

"불이익이라…."

차우진이 한숨을 푹 쉬었다.

"윗물이 썩으면 아랫물도 썩는 법이지. 장호철을 보고 배웠나? 이러니까 그 중요한 개발 프로젝트가 중단됐지."

인사팀 김 대리의 표정이 굳었다.

"지금 뭐라고 했습니까?"

"개판이라고. 인사팀에 있으면 권력이라도 쥔 것처럼 굴잖아."

"이 사람이 진짜. 당신 소속이 어디야?"

"알아내 보던가."

직원이 차우진을 노려보았다. 저쪽으로 간 사람들이 그를 불렀다.

"김 대리! 뭐해? 빨리 와!"

김 대리가 차우진을 쏘아본 후에 일행에게 가면서 말했다.

"후회할 거다."

박효정은 당황했다. 그가 차우진에게 사과했다.

"저기, 죄송해요."

"효정 씨가 죄송할 일이 뭐가 있습니까?"

"인사팀에서 방해하면 우진 씨 앞으로 여기서 일 못 하실 수도 있어요. 공사장 쪽에 연락하면 거기서…."

"방해하고 싶으면 하던가."

박효정이 눈치를 보았다.

"우리 그냥 식당을 옮길까요? 우진 씨가 누구인지 모르게요."

"아예 옆 동네로 갑시다. 이 동네에는 효정 씨를 아는 사람이 많아서 진지하게 이야기하기 어렵겠네."

"네? 지, 진지하게요?"

"진지하게 회사와 연구팀 상황을 물어보고 싶어서."

"아. 회사 이야기였군요. 네. 진지한 거 좋죠."

***

박효정은 이튿날 아침에 스마트폰 알람 소리에 눈을 떴다.

"너무 피곤…. 아?"

그녀가 몸을 일으켰다. 누워 있는 곳은 그녀의 방 침대인데, 집에 어떻게 들어왔는지 생각이 나지 않았다.

"나 어떻게 집에 온 거지?"

그녀가 거실로 나갔다. 그녀의 어머니가 산발한 머리의 그녀를 보고 한마디 했다.

"살아는 있네?"

"엄마. 나 어떻게 들어온 거야?"

"남자가 너 부축해서 데려왔더라."

"나, 남자? 아. 차우진 씨…."

그녀의 어머니가 눈을 반짝이며 물었다.

"누구야? 애인이야?"

"뭐래? 아니야. 그런 거."

"그럼 직장 동료?"

"어…. 동료라고 하면 아주 틀린 말은 아닌데, 곧 잘릴지도 모르는 동료…."

반짝이던 눈빛이 순식간에 꺼졌다.

"그럼 만나지 마라."

"그런 거 아니라고!"

"그런 사이 아니면 다행이고."

그녀가 정수기에서 냉수를 받아서 벌컥벌컥 마셨다. 정신이 들면서 기억도 조금씩 돌아왔다.

"술 마시면서 회사 욕 실컷 한 건 기억이 나는데…. 회사 시스템이 개판이라는 거에 맞장구도 많이 치고…."

기억 중간중간에 구멍이 나 있었다.

"나 어제 도대체 얼마나 마신 거야?"

기억이 다 나지 않으니 걱정이 됐다.

"이 과장 욕이랑 인사팀 욕은 실컷 한 것 같은데, 그것 말고는 뭐 실수한 건 없겠지?"

***

인사팀 이현호 과장이 아이스 아메리카노를 마시며 말했다.

"어우. 어제 술을 너무 많이 마셨어."

김 대리가 같이 커피를 마시며 맞장구쳤다.

"그러게요."

"어제 그 새끼 때문에 기분 나빠서 더 마신 거 같아."

"맞습니다. 그놈 때문이죠."

이현호가 차가운 커피를 빨대로 쭉 빨아 마신 후에 말했다.

"김 대리. 그놈 누군지 좀 알아봐. 우리 회사에서 일한다잖아."

"얼굴만 아는데 어떻게 찾겠습니까? 사원 명부 사진을 다 뒤진다고 해도, 술 마시고 잠깐 본 거라서 기억이 잘…."

"박효정이 알잖아. 그 근처에 있는 사람이겠지."

"아! 그러면 찾을 수도 있겠네요."

인사팀 부장이 회의실에 들어왔다.

"오늘 새 이사님이 연구소에 오신다."

이현호 과장이 물었다.

"갑자기요?"

"갑자기 오시는 게 처음도 아니잖아. 요즘 우리 회사에 태풍이 휘몰아치는 시기니까. 어쨌든 오신다니까 업무보고가 필요한데, 자료는 있어?"

"요즘 이사님들 자리가 많이 바뀌어서 그때 쓴 업무보고 자료가 있습니다. 일단 그걸로 때우고, 구체적인 건 나중에 요구하시면 만들면 어떻겠습니까?"

"그걸로 되겠어? 이번에는 연구소의 인원 배치와 예산권을 가진 이사님이라는데."

"예? 인사와 예산의 최종 결정권은 사장님한테 있을 텐데요?"

"사장님도 무리한 것만 아니면 반대 안 하실 거라더라. 왜인지 알아? 이건 소문이긴 한데."

인사팀 부장이 손가락으로 위를 가리키며 말했다.

"부사장님이 사장님 되시는 데 백기사 역할을 한 사람이 새로 오시는 차 이사님이라더라."

"어우. 실세 이사님이네. 잘 보여야겠습니다."

***

차우진이 탐지기 개발팀을 찾아갔다.

문 위에는 딥어스테크 연구소 개발 2팀이라고 적혀 있었다.

"이 단계까지 오는 거 힘들었다."

장호철 사장을 날렸더니 신동욱 전무까지 설쳤다. 방해되는 놈들을 다 처리하고 팔랑귀 홍성준 부사장을 사장으로 만들어야 했다.

차우진은 이제야 개발이사가 돼서 목표로 한 2팀을 찾아왔다.

"지구 멸망을 막는 건 역시 쉬운 일은 아니구나."

이 연구소는 개발팀마다 주로 맡는 분야가 다르고 규모도 다르다. 2팀에서 진행하는 프로젝트가 탐지기만 있는 것도 아니다.

개발 2팀의 보안 철문은 방화 사건 이후로 교체됐다.

문은 이제는 철문이 아니라 반투명 강화유리로 바뀌었다. 강화유리가 꽤 튼튼하긴 하지만 안에서 작정하고 깨면 못 부술 정도는 아니다.

차우진이 유리문 옆에 있는 호출 버튼을 눌렀다. 안쪽에 있던 연구원이 유리문을 열고 차우진을 확인했다.

"어떻게 오셨…."

마침 근처를 지나가던 박효정이 고개를 돌렸다가 후다닥 다가왔다.

"우, 우진 씨. 여기는 왜…."

"어? 아는 분이세요?"

"몰라요? 전에 아래층에 불났을 때 불 꺼준 분인데."

"아! 전에 그분! 못 알아봐서 죄송합니다. 그때 진짜 고마웠습니다."

연구원이 인사한 후에 박효정을 보며 실실 웃었다.

"이분하고 개인적으로 아시는구나."

박효정이 차우진을 보며 사과했다.

"죄송해요. 안쪽은 외부인 출입이 안 돼서요. 휴게실로 가요."

"난 오늘부터는 외부인이 아닙니다만."

"네?"

그녀의 얼굴이 살짝 달아올랐다.

"아니, 사적으로는 몰라도, 회사에서는 외부인이 맞…."

홍성준 사장의 비서가 뛰어와 그들의 대화에 끼어들었다.

"벌써 오셨어요?"

차우진이 대답했다.

"조금 여유를 두고 왔습니다."

그녀가 사과했다.

"죄송합니다. 사장님께서는 정부 관계자와의 미팅이 안 끝나는 바람에…. 일단 제가 먼저 왔어요."

"괜찮습니다. 오늘은 몇 가지만 확인하면 되니까요."

박효정이 눈을 동그랗게 떴다.

그녀는 사장 비서의 얼굴은 안다. 사내 행사에서 몇 번 봤기 때문이다.

"저기, 우진 씨와 어떻게 아는 사이…."

"어머. 차 이사님과 개인적으로 아세요? 그러니까…. 박효정 연구원님?"

박효정의 눈이 동그래졌다.

"네? 이사님이요?"

"개발이사로 새로 오신 차 이사님이세요. 아시는 거 아니었어요?"

"네?"

차우진이 박효정에게 말했다.

"자세한 이야기는 나중에 하고, 지금은 2팀 안내를 좀 부탁해도 될까요?"

"네?"

"내가 개발 2팀에 관심이 많아서."

"네? 네! 그럼요!"

***

2팀 회의실에서 개발 2팀장 곽수혁이 당황한 얼굴로 물었다.

"개발이사님이셨습니까?"

"오늘부터?"

"그럼 어제 식당에서 말씀을 하시지."

"어제까지는 정식으로 출근한 건 아니었으니까요."

차우진이 찾는 게 2팀에 있다. 그가 말했다.

"여기서는 뭘 개발하는지 봤으면 하는데요."

"아. 업무보고 준비를 할 시간이…."

"괜찮습니다. 그냥 간단히 설명해주시죠. 자세한 건 나중에 제대로 확인할 테니까."

곽수혁이 연구원 두 명과 함께 현재 2팀의 상황을 설명했다. 주로 잘 진행되는 개발 프로젝트의 위주였다.

그 설명에는 차우진이 모르는 전문용어들이 섞여 있었다. 각종 도표가 화면에 떴지만 그것도 복잡했다.

'이것만 봐서는 모르겠네.'

차우진이 방법을 바꿨다.

"시간이 없으니까 요점만 이야기하시죠. 오늘은 간단히 연구 목적만 듣는 거니까요."

"아, 예."

화면에 띄우는 자료는 그대로였지만 곽수혁의 설명은 더 간단해졌다. 차우진도 이공계라 이제 좀 알아들을 수 있었다.

그런데 진행 중인 프로젝트 중에는 차우진이 찾는 게 없었다.

'역시 그건 중단된 상태야.'

차우진이 질문했다.

"연구하다 성과가 안 나온 것, 그리고 중단한 것들도 있지요?"

"예? 아. 물론 있습니다."

"그것도 좀 보죠."

연구원들이 서둘러 자료를 가져왔다. 몇 가지 연구가 더 나왔다.

그중에 탐지기 개발 프로젝트가 차우진의 눈에 들어왔다.

'찾았다.'

찾았다는 건 설명을 듣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 차우진이 뉴스에서 봤던 그 탐지기가 화면에 떠 있었다.

곽수혁 팀장이 화면에 자료를 띄워놓고 간단하게 설명했다.

"이 탐지기는 지하로 충격파를 쏘고 그 반사파를 확인해 광물을 탐색하는 방식을 씁니다."

이 탐지기의 원래 개발 목적에는 마그마 탐지 기능은 들어 있지 않았다.

그런데 미래에는 이 탐지기와 똑같은 원리의 마그마 탐지기가 다른 회사에서 개발된다.

차우진이 물었다.

"충격파 외에도, 지표면 아래의 지질활동이나 지구 자기장 등에서 발생하는 신호를 수집하고 분석해서 광물을 찾을 수도 있겠군요."

"예? 아, 물론 이론적으로는 가능한데…."

"실제로도 가능할 겁니다."

차우진은 멸망 초기에 과거에 개발이 중단된 그 탐지기에 관한 기사를 여러 번 보았다.

'저게 일찍 개발됐으면.'

저 탐지기를 조금 개선하면 멸망급 재난 중 하나인 마그마 폭발을 대비할 수 있다.

차우진이 물었다.

"저건 왜 개발이 중단된 겁니까?"

곽수혁이 조금 긴장했다. 오늘 보고 내용 중에 차우진이 따지듯이 묻는 건 이거 처음이었다.

"기술적인 문제가 많아서…."

"내가 보기엔 거의 다 만들었는데요."

"네?"

10년 후 뉴스에서는, 개념을 바꿔 접근하면 어렵지 않게 성공했을 개발이라고 했다. 성공까지 겨우 몇 걸음만 남은 상태에서 중단됐다고 안타까워하는 전문가들도 있었다.

"기술적인 문제는 개념만 조금 바꾸면 해결되겠군요."

"개념을 어떻게…."

"그건 개발팀에서 직접 찾아보시죠. 힌트는 줄 테니까."

미래의 전문가들이 했던 이야기를 그대로 전해주면 힌트는 충분히 된다.

"아니, 그것 외에도, 예산도 없어서…."

"예산이라."

"주어진 예산으로는 기술적인 문제를 해결하긴 어렵다는 판단이 나왔습니다. 연구비가 너무 많이 들어갑니다.

"얼마면 되겠습니까?"

"예?"

"필요한 예산은 모두 신청하시죠. 아니, 필요한 것보다 많이 신청하는 게 낫겠군요. 장비도 원하는 건 다 지원하겠습니다."

"저희 2팀에 말입니까?"

"아니요. 저 탐지기 개발에 지원하는 겁니다. 다른 개발보다 저게 중요합니다."

"왜…."

"저건 성공할 수 있으니까요. 성공만 하면 대박이지 않습니까?"

"그야 그렇습니다만, 이 프로젝트 하나에 그러는 건 효율이…."

"효율은 고민하지 마시고요."

곽수혁은 망설였다.

회사에서 예산을 충분히 준다면 결과도 좋게 나와야 한다. 예산만 쓰고 결과가 나쁘면 팀장이 책임져야 할 수도 있다. 딥어스테크에서는 그게 상식이다.

그는 이 프로젝트가 중단될 때 영업에서 주장한 이야기를 꺼냈다.

"이건 설사 성공한다고 해도 상업적으로 성공한다는 보장이 없습니다. 제품이라는 게 성능은 물론이고 가격 경쟁력도 중요한데, 그걸 장담할 수가 없어서…."

"내가 장담하는데, 이건 성공만 하면 가격은 문제가 안 될 겁니다."

"예? 아니, 우리 탐지기가 그 정도로 대단한 건 아니…."

"대단한 거 맞습니다."

차우진이 마그마 탐지기의 설계도 원형을 보며 말했다.

"뭘 상상하든 그 이상일 겁니다."

65. 인사팀

차우진이 말했다.

"여러분이 만들던 탐지기는 정말 대단한 겁니다. 자부심을 가지셔야 합니다."

이 탐지기는 무려 멸망급 마그마 폭발을 막는 데 사용되는 핵심 장비다.

차우진이 단서를 달았다.

"물론 개발에 성공한다면 말이지요."

정수찬 팀장은 가격 경쟁력을 우려했다.

이 탐지기로 멸망급 재난을 막을 수 있다는 게 알려지면 그때부터는 가격은 문제가 안 된다.

게다가 탐지기 자체의 성능이 워낙 훌륭해서, 잘만 쓰면 지하 광물 탐색에 큰 도움이 된다.

차우진이 물었다.

"그런데 이거, 예산과 인원을 충분히 지원하면 만들 수 있겠습니까?"

곽수혁 팀장이 대답했다.

"예? 그야…. 개발비를 더 쓰면 성공 확률도 올라가니까…."

"확률을 높이려면 개발비를 쏟아부어야겠군요."

멸망급 재난을 이 탐지기만으로 막을 수 있는 건 아니다. 대체 불가능한 조건이 하나 더 있다.

그렇지만 다른 것이 다 준비된다 해도, 이 탐지기가 없으면 시작조차 할 수 없다. 모든 조건 중에 이게 제일 시급하다.

차우진은 이 탐지기 하나를 위해 장호철 사장과 신동욱 전무, 청부업자들과 성구파, 천수파까지 처리하고 지금 이 자리에 왔다.

차우진이 선언했다.

"진행하시죠."

곽수혁이 손으로 이마를 만졌다. 식은땀이 났다.

'기세가 장난 아닌데, 이거 개발 실패하면 나 잘리는 거 아냐?'

예산이 쏟아져 들어온다고 해서 개발이 턱턱 되는 건 아니다. 예산이 많으면 성공 확률은 올라가지만, 그렇다고 100%가 되는 건 아니다.

그렇다고 강력한 권한을 가진 신임 이사가 전폭적으로 밀어준다는데 못한다고 할 수도 없다.

"저희 2팀이 최선을 다해 개발하겠…."

"서둘러야 합니다."

"밤낮을 가리지 않고 일해서라도…."

"아. 인원이 모자라서 그러시구나. 다른 팀에서 필요한 인원 있으면 지원받으세요."

"예?"

"신규 채용이 필요하면 하시고."

곽수혁이 눈을 껌뻑였다.

"저 프로젝트 하나 때문에요?"

"그만큼 중요한 개발입니다."

"알겠습니다."

차우진이 탐지기 설계도와 자료가 떠 있는 화면을 보며 생각했다.

'지금 상태로는 내가 기억하는 것과 조금 차이가 있어.'

넉넉한 예산이 개발 프로젝트에 영향을 줄 수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필요한 기능을 빼거나 엉뚱한 기능을 넣는 건 막아야겠지.'

차우진은 뭘 만들어야 하는지 안다. 멸망 초기의 방송에서 본 기술을 입으로는 설명할 수 있다.

차우진이 말했다.

"개발 과정에서 제가 참견할 게 많을 겁니다."

"말씀만 하시면 적극 반영하겠습니다."

차우진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2팀에서 오늘 알아볼 건 다 확인했다.

"오늘은 인사나 하러 들른 거니까, 여기까지 하시죠."

"예. 알겠습니다. 다음에는 업무보고를 제대로 준비하겠습니다."

"그럴 시간에 이걸 개발하는 게 더 좋은데…."

"예?"

"알겠습니다. 절차라는 게 있을 테니까요."

차우진이 2팀 사무실을 나갔다. 2팀 연구원들이 우르르 따라왔다.

차우진이 박효정에게 말했다.

"우린 휴게실에 가서 이야기 잠깐 하죠. 전달할 게 있어서."

"아, 네."

곽수혁은 문앞까지 따라가서 떠나는 차우진에게 인사했다.

그가 2팀 자리로 돌아온 후에 이마의 땀을 닦았다.

"후우. 폭풍이 몰아친 것 같다."

"그러게요."

"효정 씨가 차 이사님하고 아는 사이지?"

다른 연구원이 말했다.

"그렇다더라고요. 그런데 전에는 전기 공사 하러 온 기술자라고 들었는데…. 이번에는 이사님으로 오셨네요?"

곽수혁이 나름대로 답을 추측했다.

"전기 공사 일은 언더 커버 느낌으로 한 거겠지. 회사 돌아가는 분위기를 밑에서부터 파악하려고 말이야."

"와. 새 이사님 무서운 분이시네."

"불도저 같은 분이시겠지. 우리가 폐기한 프로젝트를 도로 살리는 방식을 봐. 돈을 쏟아부어서 해결하라잖아."

"그럼 좋은 거 아닌가요?"

"돈을 쏟아붓는데 우리가 놀게 놔두겠냐? 실패하면 대충 넘어갈 거 같아?"

"네?"

"너네는 몰라도 팀장인 난 갈려 나갈 것 같은 기분이 든다."

***

차우진의 다음 목적지는 인사팀이었다. 2팀 프로젝트에 연구원을 추가로 지원하려면 인사팀과 이야기할 필요는 있다.

차우진이 사장 비서를 먼저 인사팀으로 보냈다. 그런 후에 박효정과 휴게실로 갔다.

"당황했어요?"

박효정이 가슴에 손을 얹었다.

"많이요. 갑자기 이사님이 되어서 오실 줄은 몰랐거든요."

"미리 말해줬으면 좋았겠지만, 그동안 상황이 좀 복잡했습니다."

어젯밤에는 그녀에게 말해줄까 하는 생각을 잠깐 했었다. 그런데 그때 하필 인사팀과 시비가 붙었다. 그러면서 그 이야기는 그냥 넘어갔다.

박효정이 머리를 좌우로 살짝 흔들었다.

"괜찮아요. 이해해요. 중요한 일이니까 그러셨겠죠. 그래도 정 미안하면 저녁때…."

인사팀 이현호 과장이 휴게실로 들어오다가 두 사람을 발견했다.

"어? 너!"

차우진이 이현호를 쓱 돌아보았다.

"술이 깨고서도 너라고 하네? 이러면 변명의 여지가 없는데."

휴게실에는 세 사람밖에 없었다.

이현호가 두 사람을 번갈아 본 후에 얼굴을 구기며 다가왔다.

"이봐. 당신. 정말로 우리 회사 직원이었습니까? 난 또 그거 거짓말인가 했네."

"뭐지? 이 존대하는 척하면서 말을 슬쩍 까는 건?"

"이 사람이. 지금 회사 분위기 몰라요? 이 시기에 인사팀에 찍히면 곤란할 텐데?"

"이 회사는 인사팀이 권력이라도 쥐었나 보다?"

"진짜 분위기 파악 못 하는 사람이네. 당신 그러다 큰일 나."

"나한테 날 큰일이 뭐가 있을까? 잘리나?"

이현호가 대놓고 협박했다.

"너. 이 업계 좁다. 여기서 나가도 우리 인사팀에서 평가를 조져놓으면 너 취업 못 한다."

차우진이 피식 웃었다.

"우물 안 개구리는 자기가 보는 하늘이 전부인 줄 안다더니."

"뭐야?"

"이 회사 인사팀이 대한민국 경제계를 주무르는 것처럼 이야기하네?"

이현호가 인상을 일그러뜨리며 주변을 보았다. 휴게실에는 그들 외에는 없었다.

이현호가 대놓고 욕을 했다.

"너 이 새끼. 내가 사원 명부 다 뒤져서 너 찾고 있다. 이제 네 인사 평가는 시궁창에 처박힌다는 것만 알아둬라."

"그래. 수고해라. 사원 명부 다 뒤지려면 야근이라도 해야겠네."

"이 새끼가 아직도 상황을…."

이현호가 더 협박하려는데 전화가 걸려왔다. 부장의 전화였다. 안 받을 수가 없다.

"예. 부장님."

- 이 과장! 지금 어디야! 빨리 회의실로 와! 차 이사님이 곧 오신다는데 준비해야지!

미리 보내놓은 사장 비서가 인사팀에 도착해 차 이사가 온다는 걸 알렸다.

"예. 지금 갑니다."

이현호가 전화를 끊은 후에 차우진을 보며 말했다.

"내가 너 누군지 꼭 찾아낸다."

이현호가 경고까지 날리고 휴게실을 나갔다.

박효정은 하도 어이가 없어서 입을 벌린 채로 그 모습을 보고 있었다.

그녀가 끼어들기도 전에 이현호가 휴게실을 나갔다.

어제도 비슷한 일이 있었다. 그때는 그녀가 차우진을 걱정했다.

그때만 해도 그녀는 차우진이 전기 공사하러 온 기술자인 줄 알았다. 그래서 신분 보장이 전혀 안 되는 줄 알았다.

그런데 상황이 변했다. 이제는 그럴 필요가 없다는 걸 안다.

그녀가 말했다.

"지금 일개 과장이 이사님을 자르겠다고 한 거네요?"

"그러게요. 저 사람이 홍 사장님 아들인가?"

"그럴 리가요. 성부터 다른데요."

"홍 사장님한테 실망할 뻔했네."

***

딥어스테크 인사팀 중 다섯 명은 본사가 아니라 연구동 사무실에서 일한다. 그들이 연구소 쪽을 담당했다.

홍성준 사장은 연구동 옆에 새로 짓는 건물이 완공되면 본사에 있는 부서를 그곳으로 옮길 계획이다.

이 다섯 명 규모의 인사팀 파견 조직도 마찬가지다. 일단은 연구동에 있다가 지금 건설 중인 건물이 완공되면 그곳으로 오는 인사팀에 합류할 예정이다.

이 연구소 인사팀의 리더는 부장급 직원이다.

회의실에 인사팀 부장과 직원 네 명이 모였다. 그중 한 명이 질문했다.

"부장님. 연구소 개발이사님한테 우리가 이렇게까지 할 필요가 있습니까?"

"이사님이잖아. 군대에서는 스타라고."

"우리가 연구동에 있긴 하지만 개발이사님은 우리 직속상관도 아니잖습니까?"

"차 이사님은 연구원 인사권도 가지고 있고 예산권도 가지고 있다더라. 실세 이사야. 실세."

"그래도 외부에서 온 사람인데…."

"소문으로는 백기사라더라."

"네? 기사요?"

부장이 손가락으로 위쪽을 가리켰다.

"사장님의 경영권을 지지하는 우호지분 중에서 가장 강력한 백기사래."

"어우. 그 정도면 우리도 찍히면 안 되겠네요."

"당연하지."

밖에서 웅성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왔나 보다."

인사팀 부장이 회의실 문을 열고 마중을 나갔다. 밖에서 부장이 인사하는 목소리가 들렸다.

"오셨습니까? 차 이사님. 이쪽으로 오시죠."

차우진이 부장과 함께 안으로 들어왔다.

이현호 과장은 다른 직원들과 함께 안에서 기다리다가 움찔했다.

'어? 저 새끼가 왜?'

그가 재빨리 머리를 굴렸다.

'새 개발이사가 데려온 놈인가? 아! 그래서 내가 얼굴을 몰랐던 거구나.'

그가 속으로 불평했다.

'젠장. 연구소 인사권을 가진 이사의 직계면, 내가 평가 서류에 고춧가루를 뿌려놔도 의미가 없는데….'

딥어스테크의 실세 이사는 직속 부하직원의 자리를 정할 힘이 있다.

이현호의 얼굴이 조금 일그러졌다.

'쪽팔리게.'

조금 전에 휴게실에서 했던 대화가 생각났다.

'저 새끼가 나를 비웃었겠지? 나도 그냥 넘어갈 수는 없지. 뭔가 손을 쓸 방법이 있을 거야. 개발이사가 인사권에 개입한다는 걸 우리 팀은 다들 싫어하니까….'

인사팀 부장이 직원들에게 말했다.

"뭣들 해? 차 이사님한테 인사하지 않고."

"예?"

"이 과장은 왜 그리 놀라?"

이현호의 눈이 흔들렸다.

"이, 이사님이요?"

"젊어 보이셔서 놀랐지? 그만큼 능력이 있으시다는 거지."

차우진이 말했다.

"인사차 들렀습니다만, 온 김에 몇 가지는 확인하고 가야겠군요."

인사팀 부장이 깍듯이 말했다.

"최대한 협조하라는 사장님의 지시를 받았습니다. 어떤 것이 필요하십니까?"

차우진이 이현호를 쓱 본 후에 말했다.

"지금 여기 계신 인사팀 직원들의 사원 정보요."

"예?"

"어떤 분들과 일해야 하는지 알아야지요."

"아니, 그건 외부에 유출하기가 좀…."

"인사팀 직원은 심심하면 전체 사원 명부를 마음대로 조회해도 되던데, 난 왜 안 되는 겁니까?"

조금 전에 휴게실에서 이현호가 한 말은, 결국 인사팀 직원은 마음대로 사원 정보를 볼 수 있다는 뜻이었다.

"예?, 그, 그건…."

그래서 차우진도 같은 걸 요구했다.

"나도 인사권이 있으니까, 인사팀 사원 정보를 봐야겠습니다. 그 정보는 어차피 회사에 제출된 자료잖습니까?"

"그…."

인사팀 부장이 머뭇거리다가 회의실 밖을 가리켰다.

"출력은 어렵고, 제 자리에 가서 보시면…."

"그러시죠."

인사팀 부장이 차우진을 그의 자리로 안내했다. 그는 이곳에 있는 인사팀 직원들의 사원 정보 서류를 조회해 모니터에 띄웠다.

차우진이 그 자리에 앉아서 방금 회의실에 있던 직원들의 정보를 확인했다.

"부장님 것까지 보려는 건 아닙니다."

부장의 얼굴이 밝아졌다.

"아! 그러십니까? 그럼 제 건 해제하겠습니다."

인사팀 부장의 것을 제외하면 네 명의 사원 정보가 남는다.

차우진이 화면을 넘기다 이현호의 사원 정보에서 멈췄다. 그가 이현호를 돌아보며 말했다.

"이현호 과장님. 유부남이셨네?"

이현호의 얼굴이 창백해졌다.

그는 어제 박효정의 손목을 잡고 자기네 술자리로 끌고 가려다가 제지당했다.

차우진이 말했다.

"유부남이 그러면 안 되지."

"그, 그게…."

"아니지. 유부남이 아니라도 안 되는 건 안 되는 거지."

인사부장이 물었다.

"무슨 일이신지…."

차우진이 이현호의 사원 정보 서류를 모니터에 띄워놓은 채로 물었다.

"부장님. 어느 직원이 사원 정보를 언제 얼마나 조회했는지 확인할 수 있습니까?"

"예? 가능은 한데…."

그 조회 이력 관리 기능은 회사 시스템에 기본으로 설치되어 있었다.

"이현호 과장이 어떤 사원의 정보를 조회했는지 확인해야겠습니다."

인사팀 부장은 일이 이상하게 돌아간다는 걸 눈치챘다.

'이 과장이 사고 쳤나?'

그가 일단 변명을 해보았다.

"저기, 차 이사님. 우리 팀이 일을 제대로 하려면 원래 사원 정보 조회는 기본이라서…."

씨도 먹히지 않았다.

"계속 기다려야 합니까?"

사장이 직접 비서를 보내 차우진에게 최대한 협조하라고 지시했다.

인사팀 부장이 어쩔 수 없이 관련 정보를 찾아 띄웠다.

이현호가 그동안 조회한 사원 정보 목록이 떴다.

차우진이 말했다.

"이현호 과장은 젊은 여자 사원 정보를 참 자주 조회했군요. 취미 생활인가?"

"그, 그건 이현호 과장이 담당하는 일이…."

"부장님. 구라 치시면 목 날아갑니다."

66. 인사팀 II

인사팀 부장이 자기도 모르게 손으로 목을 만졌다. 둘러댈 말이 입에서 나오지 못했다.

그가 옆을 슬쩍 확인했다. 사장 비서는 눈이 동그래져서 상황을 보고 있었다.

부장은 인사팀이 엿 됐다는 걸 깨달았다.

'외부에서 미리 조사라도 하고 온 건가? 혹시 감사팀? 거긴 요즘은 이런 거 조사할 여유가 없을 텐데.'

딥어스테크의 감사팀은 원래는 장호철 전 사장의 친위대 성격이 강했다.

그런데 그 팀은 조직이 개편되면서 쪼개지고 날아갔다. 기존 팀원은 대부분 다른 부서로 전출됐다.

홍성준 사장은 감사팀에 자기 사람을 배치했다.

새로 감사팀 업무를 맡은 직원들은 원래 하던 일이 아니라 숙련도가 다소 떨어졌다.

일부는 감사팀 경험이 있었지만, 그들만으로 모든 일을 해결하는 건 무리였다.

그래서 현재 딥어스테크 감사팀은 큰 건만 처리하기도 바빴다.

'감사팀에서 인사팀을 조사했다면 나한테 귀띔은 해줄 텐데….'

딥어스테크의 새 감사팀에는 인사팀에서 넘어간 사람이 있다.

'그 친구도 모르게 진행했나? 차 이사는 도대체 얼마나 강력한 권력을 가진 거야?'

인사팀 부장이 긴장한 채로 말했다.

"어떻게 된 일인지 제가 꼭 확인하겠습니다."

차우진이 서늘한 표정으로 말했다.

"그래야 할 겁니다."

"예, 예!"

차우진이 표정을 풀었다.

"이제 연구소에 파견 온 인사팀이 무슨 일을 하는지 들어볼까요? 오늘은 그거 들으러 온 건데."

"예? 아. 예. 다시 회의실로 가시죠."

이 사무실은 파견 나온 인사팀 몇 명만 쓰는 게 아니다. 다른 부서의 직원들도 많았다.

회의실로 돌아간 건 인사팀 직원 네 명과 부장 한 명뿐이다.

다른 부서의 직원들은 사무실에 남아있었다.

그중에는 방금 차우진과 인사팀 부장 사이에 오간 대화를 들은 사람들이 있었다.

그리고 그중에는 즉시 메신저로 소문을 퍼트리는 사람이 두 명이나 있었다.

***

개발 2팀 연구원이 박효정에게 물었다.

"그거 들었어?"

"뭘?"

"새로 오신 차 이사님이 인사팀에 가서 이현호 과장을 박살 냈대."

박효정의 얼굴이 확 밝아졌다.

"진짜?"

"완전 진짜. 유부남이 인사팀 권한을 남용해 젊은 여직원들 정보나 조사하고 다닌다고 아주 대차게 깠대."

"어머. 이 과장이 여기저기 들이댄다는 소문은 많이 들었잖아. 그게 미리 대상을 찍어놓고 한 짓이야?"

"술만 마시면 더했지. 다른 팀에 내 학교 후배가 있는데, 걔한테도 들이댄 적 있다니까?"

동료가 고개를 갸웃했다.

"그런데 이상한 게 있어. 차 이사님이 처음부터 이현호 과장을 대놓고 저격했대. 왜 그랬을까? 미리 소문 듣고 오신 건가?"

박효정은 멈칫했다. 어젯밤에 술을 너무 마셔서 필름이 조금 끊겼는데, 그중 일부가 지금 기억났다.

'내가 어제 이 과장을 욕하면서 이런 이야기들을 했었네?'

그녀의 눈이 반짝거렸다.

바로 어제 술집에서 이현호가 박효정의 손목을 잡으려다가 차우진에게 제지당했다.

"혹시 나를 위해서?"

"응? 차 이사님하고 아는 사이라고는 했지만, 그 정도는 아니라고 하지 않았어?"

박효정의 귀에는 그런 말이 들리지 않았다. 그녀가 김칫국을 마셨다.

"우진 씨가 이러는 건, 역시 목적은 난가?"

***

차우진이 홍성준 사장을 만났다.

"개발 2팀의 프로젝트를 따로 지원하겠습니다."

"아. 개발 2팀. 실력 있는 사람들이죠. 그 팀의 개발 프로젝트들을 지원하면 좋은 성과가…."

"제가 고른 건 2팀 개발 프로젝트 전체가 아니라 하나입니다."

"예?"

"지하 광물 탐지기 개발 프로젝트 하나만 지원할 겁니다."

차우진이 마그마 탐지기 자료를 보여주었다.

"이겁니다."

딥어스테크는 연구소보다 토목 사업의 규모가 더 크다.

홍성준은 토목 사업 전문가다. 탐지기의 기능은 알지만, 개발 과정까지 알지는 못한다.

"어…. 이게 그러니까…."

"지하에 충격파를 보내 그 반사파를 측정하거나, 자연적인 지질활동 정보를 감지해서 지하 깊은 곳의 상태를 파악하는 장비입니다."

"우리 회사에 이런 탐지기가 있었습니까?"

"아니요. 개발하다가 중단됐습니다."

"중단 이유가…."

"성공 확률도 낮고, 예산은 많이 잡아먹고, 상업성도 부족해서 윗선에서 중단시켰다더군요."

홍성준 사장은 당황했다.

"예? 그러면 문제가 많은 거 아닙니까? 다른 좋은 프로젝트도 많은데 왜 굳이 여기에 지원을…."

"그 판단이 틀렸거든요."

차우진이 장담했다.

"이 지저 탐지기의 개발에 성공하면 이쪽 시장은 딥어스테크가 장악할 겁니다."

홍성준은 걱정했다.

"이쪽은 경쟁이 심한 분야이고, 이미 자리를 잡은 회사도 많습니다. 그게 가능하겠습니까?"

"물론입니다."

멸망 초기에 방송에 나온 전문가들은 이 시기에 그 탐지기 개발에 성공했으면 히트 상품이 됐을 거라고 말했다.

이유는 두 가지였다. 하나는 탐지기의 성능이 뛰어나고 활용 분야도 넓다는 점이었다.

다른 이유도 있었다.

'마그마로 인한 멸망급 재난을 탐지할 수 있는 유일한 탐지기. 그 사실이 공인되는 순간, 기술력에 관한 신뢰, 홍보, 회사의 인지도, 그리고 탐지기의 실제 수요. 그 모든 것에서 대박이 날 테니까.'

예산을 쏟아부어서라도 이걸 개발하면, 그리고 멸망급 재난을 미리 찾아내는 것까지 성공하면 대박은 난다.

차우진이 말했다.

"시간이 필요하긴 하지만, 이건 성공할 수밖에 없는 상품입니다."

홍성준은 떨떠름했다.

멸망급 재난이 다가오고 있다는 걸 모르는 사람에게는 차우진의 말이 허풍으로 들렸다.

"아니, 그래도 이 개발팀에 예산을 너무 많이…."

"제 권한으로 가능한 일이죠."

"연구원까지 추가 배치를 하라니, 이것 참…."

"그것도 제 권한으로 가능한 범위이고요."

홍성준도 안다. 그렇게 합의했다.

그렇지만 그는 이 말도 안 되는 것처럼 보이는 계획을 말리고 싶었다.

"차 이사님의 첫 번째 행보는 무난한 거로 가는 게 이사들을 설득하기 좋습니다."

차우진은 그럴 생각이 없다.

"홍 사장님. 첫 번째 개발 이슈부터 제 결정에 반대하시는군요. 우리 합의는 이런 게 아니었을 텐데요."

홍성준은 침을 꼴깍 삼켰다.

그는 차우진이 어려웠다.

'송 이사가 신 전무의 스파이라는 걸 알려준 사람이 차 이사였지. 난 옆에 두고서도 몰랐는데.'

그런 정보력만 신경 쓰이는 게 아니다.

'사덕리소스만이 아니라 차 이사 본인도 우리 회사 지분을 많이 가지고 있고….'

차우진이 홍성준의 손을 들어주지 않았으면 그는 사장이 되기 어려웠다.

게다가 지금 차우진의 표정은 차가웠다.

'이거 진심인가 본데?'

홍성준은 차우진과 굳이 적이 되고 싶지는 않았다.

'어차피 모든 개발 예산을 그 프로젝트 하나에 쏟아붓는 건 아닐 테니까….'

경영권은 아직 안정된 상태가 아니다. 홍성준이 사장 일을 편하게 하려면 차우진의 지지가 계속 필요하다.

'다시 생각해보니 이 정도는 받아들일 수 있겠어.'

홍성준이 항복했다.

"알겠습니다. 이사들이 반발하면 제가 해결하겠습니다."

"고맙습니다."

"그런데 재무나 인사 쪽 실무진과의 관계는 차 이사님이 해결하셔야 합니다. 차 이사님을 달가워하지 않을 수 있습니다."

"아. 인사팀."

"오늘 인사팀에서 문제가 좀 있었다고 들었습니다만."

"개판이더군요."

홍성준은 당황했다.

"그래도 개판까지는…."

"홍 사장님께서는 취임하신 후에 회사 조직을 개편하는 중이시죠?"

홍성준이 고개를 끄덕였다.

"장호철 전 사장의 측근들이 비리를 워낙 많이 저질러서, 일부는 정리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게 명분인 건 알지만, 차우진은 그 말을 다 믿지는 않았다.

'그러면서 요직은 홍 사장의 측근으로 교체하겠지.'

"그 실무 작업을 인사팀을 통해서 하고 있으실 테고."

"그렇죠."

차우진이 말했다.

"인사팀 직원들은 자기들이 권력자라고 생각하더군요."

"아니, 그건 그 친구들이 실수를…."

"실수가 아닙니다. 적어도 연구소에 파견 와 있는 직원들은 그렇게 믿고 있더군요."

"예?"

"그래서 의심이 들었습니다. 왜 과장이나 대리가 그렇게 믿을까? 혹시 장호철 사장이 연구소를 통해 비리를 저지를 때 사냥개로 뛴 건 아닐까?"

"아…."

"그러다 자기가 사냥꾼이라고 착각하게 된 건 아닐까? 그런 의심 말입니다."

홍성준의 표정이 굳었다.

그는 비서를 통해서 오늘 인사팀 파견 부서에서 무슨 일이 있었는지 보고는 받았다.

차우진의 이야기까지 듣고 나니까 상황이 심각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차 이사님. 오늘 일은 당연히 철저히 조사해서 처리할 겁니다."

"그 조사도 인사팀에 맡기시고요? 자기가 자기 자신을 참 잘 조사하겠습니다."

"예? 아, 그게…. 감사팀은 새 인물로 교체하는 중이라 여력이…."

차우진이 말했다.

"서두르셔야겠던데요. 반대파에서 치고 들어올 때 인사팀이 앞잡이가 되면 어떻게 하시려고."

홍성준은 우호지분을 다 모아도 회사를 완전히 장악할 만큼 주식을 확보하지는 못했다.

차우진의 사덕리소스가 지지해준 덕분에 경영권 싸움에서는 이기긴 했다.

하지만 상황이 완전히 끝난 건 아니다. 분위기가 나빠지면 이번에 패배한 세력이 또 싸움을 걸 수도 있다.

홍성준은 긴장했다.

서로 신뢰를 쌓았다면 사소한 오해는 넘어갈 수 있는데, 아직은 신뢰를 쌓은 적이 없다.

오히려 홍성준 쪽에서 차우진의 제안을 매몰차게 거절하고 말도 바꾸었다가, 도로 매달려서 겨우 다시 손을 잡은 상태다.

홍성준과 차우진 사이의 연결은 너무 가늘어서, 언제 끊어져도 이상하지 않았다.

홍성준이 정신을 차리고 말했다.

"교차 검증 수단부터 마련해야겠군요. 외부 감사 인원을 확보해서라도 인사팀을 갈아엎겠습니다."

***

인사팀에 피바람이 불었다.

특정 학교의 특정 학과 출신이 특정 부서에 몰려 있는 케이스가 발견됐다. 그런 부서가 하나가 아니라 몇 개나 있었다.

그걸 조사했더니 그들과 같은 학과 출신인 인사팀 직원이 나왔다. 케이스 하나당 한 명씩 몇 명이나 찾아냈다.

돈을 받고 경력사항을 조작해준 것도 있었다. 그건 여러 건이 나왔다.

그게 다가 아니었다.

비서가 홍성준에게 보고했다.

"연구원 중에 마음에 안 드는 사람은 조직적으로 배제하고, 맘에 드는 사람은 밀어주고 있었습니다."

홍성준이 보고서를 보며 말했다.

"이래서 차 이사가 인사팀부터 찾아가서 저격한 거야. 연구원 인사 문제는 차 이사에게 맡기기로 했는데, 그걸 인사팀에서 건드리니까 기분이 나빴겠지. 역시 차 이사의 정보력은 대단해."

"사장님. 이유가 그게 다가 아닐 수 있습니다."

"응? 그게 무슨 소리야?"

비서가 서류를 내밀었다.

"장호철 전 사장이나 신동욱 전 전무 쪽에서 비리를 저지를 목적으로 진행한 프로젝트들이 있잖습니까?"

"그거 전부 다 재검토하고 있잖아. 책임자에게 문제가 있으면 처벌할 예정이고."

"프로젝트 참여자 명단이 조작됐습니다."

"뭐?"

"원래 참여했던 사람의 이름을 빼고 평소 마음에 들지 않았던 사원을 대신 넣어 머릿수만 맞추는 식으로 조작했습니다."

홍성준의 표정이 심각해졌다.

"내가 취임하고 나서?"

"예. 급하게 조작한 흔적을 찾았습니다. 총 참여 인원은 변하지 않는데, 참여한 직원 명단만 살짝 바뀐 상태라 이번처럼 제대로 조사하지 않았으면 모르고 넘어갈 수도 있었습니다."

홍성준의 입에서 욕이 나왔다.

"어떤 새끼들 짓이야?"

"인사팀만이 아니라 다른 부서까지 몇 명이 연루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또 놀랄 게 있나?"

"차 이사님이 지적한 인사팀 이현호 과장도 거기 포함되어 있습니다."

"뭐?"

"이 사건은 이현호 과장을 집중적으로 조사하다가 알아낸 겁니다."

홍성준은 당황했다.

"그럼 차 이사는 그걸 알고 이현호를 일부러 찍은 건가?"

"그럴 수도 있습니다."

홍성준이 옷깃을 조금 풀었다. 목이 답답했다.

"차 이사. 평범한 사람이 아닌 줄은 알고 있었는데, 정말 무서운 사람이었네. 어떻게 우리 회사 내부 사정을 우리보다 더 잘 알 수가 있지?"

비서가 물었다.

"어떻게 할까요?"

"다 잘라. 책임자는 고발하고, 적극 가담자는 당장 사표 쓰고 나가라고 해. 버티는 놈이 있으면 그놈도 고발해."

"그러면 위에서 시키니까 한 단순 가담자는…."

"그건 차 이사와 이야기해보고 결정하자."

67. 정수찬

차우진은 딥어스테크에서 열심히 일하려고 이번 일을 진행한 게 아니다.

그는 사덕리소스에서도 가끔 서준석 사장을 만날 뿐 출근은 거의 하지 않는다. 딥어스테크도 마찬가지다.

차우진이 일주일 후에 딥어스테크에 출근했다.

"너무 오랜만에 왔나? 밖에서 홍 사장님을 한 번 보긴 했는데."

차우진의 목적지는 개발 2팀이지만, 그 전에 인사팀에 들러서 받아갈 게 있다.

***

인사팀의 연구소 파견 직원은 부장을 포함해 다섯 명이다.

그중 두 명이 쫓겨나고, 두 명이 그 자리에 새로 보충됐다.

본사 인사팀에서 연구소로 온 두 사람이 탕비실 앞에서 커피를 마시며 말했다.

"이현호 과장은 선을 많이 넘겨서 경찰에서 조사 중이라더라."

"김 대리는 알아서 사표를 썼어."

"쓰란다고 그냥 써?"

"더 버티면 자기도 경찰 조사를 받게 생겼거든. 찔리는 게 워낙 많나 봐."

직원이 남은 두 사람을 슬쩍 보며 물었다.

"저 두 명은?"

"이현호 과장이 시키는 대로 한 거라서 살아남았어."

"여기도 본사처럼 단순 가담자는 그냥 징계만 하고 끝났구나."

"비서실에서 나온 이야기인데, 그거 차 이사가 그러자고 했다며?"

"그래?"

인사팀 자리로 차우진이 다가왔다.

"어? 누가 왔는데?"

"누구지?"

기존에 이곳에 있던 직원이 깜짝 놀라 말하는 소리가 들렸다.

"차, 차 이사님!"

"헉!"

커피를 마시던 직원 두 명은 급히 컵을 내려놓고 뛰어갔다.

차우진이 인사팀 직원에게 말했다.

"자료가 좀 필요합니다."

"말씀만 하십시오!"

인사팀 사람들은 얼굴 한 번 본 게 다인 차우진을 저승사자처럼 무서워했다. 일주일 전에 차우진이 인사팀을 방문한 후에 피바람이 불었기 때문이다.

그 피바람은 연구소 파견팀만 덮친 게 아니다. 본사의 인사팀도 같이 갈려 나갔다. 몇 명은 법적 책임까지 지게 생겼다.

다만 위에서 시키는 대로 한 사람들은 적당한 징계만 받고 넘어갔다. 차우진이 그 정도 선에서 넘어가자고 했다는 소문이 돌았다.

그 피바람의 중심에 있는 차우진이 일주일 만에 출근해 자료를 요구했다.

인사팀은 다른 일은 다 중단하고 최우선으로 그것부터 처리해 제출했다.

차우진이 말했다.

"빠르네요."

"감사합니다!"

차우진에게 중요한 건 인사팀이 아니라 개발 2팀이다.

그는 그 자료를 가지고 2팀에 방문해 곽수혁 팀장을 만났다.

곽수혁은 전에도 차우진을 본 적이 있어서 그와 대화하는 게 어렵지는 않았다.

게다가 그는 차우진이 연구소에 와서 한 일이 마음에 들었다.

"차 이사님이 인사팀을 거하게 털어버리셨다던데요."

"개판이길래요."

"우리 회사 인사팀이 좀 그렇긴 하죠. 다른 회사는 이렇지는 않다고 들었는데요."

"다른 회사는 관심 없고요. 여기서 그러면 내가 하는 일에 방해가 돼서."

차우진이 회의실 자리에 앉았다.

"저번에 이야기한 탐지기 개발은 어떻게 됐습니까?"

"개발 문서들을 다시 확인하고, 장비도 새로 세팅했습니다."

이미 폐기한 프로젝트를 다시 살리고, 기존에 진행하던 프로젝트 중에 미뤄둘 것을 고르려면 일주일의 시간이 필요했다.

그래서 차우진은 일주일만인 오늘 출근했다.

곽수혁이 말했다.

"다만, 부족한 장비가…."

"사야지요. 필요한 예산은 신청했습니까?"

"했습니다. 통과될지는 모르겠지만요."

"제가 통과시키겠습니다."

"예? 얼마짜리인지 아직 들어보지도 않으셨잖습니까?"

"아. 그렇죠. 얼마면 됩니까?"

곽수혁이 화면에 관련 자료를 띄웠다.

"일단 신규 장비와 부품, 테스트 비용 등이 필요합니다. 사실 예산이 10억쯤 있으면 좋지만 그건 꿈 같은 소리고, 필수적인 것만 하면…."

"20억 쓰시죠."

"네?"

"예산 아끼려다가 개발에 실패하면 다 망합니다. 팍팍 쓰시죠."

곽수혁은 당황했다.

"우리 회사에서 20억짜리 개발…. 결재를 받을 수 있을까요?"

"재무에서 막으면 사장님과 직접 이야기하겠습니다."

"아! 그러면 뭐…."

"또 필요한 거 있습니까?"

곽수혁이 눈을 반짝이며 말했다.

"연구원 말입니다. 저희 2팀에서 예전에 이 개발에 참여한 연구원이 다른 부서에 있습니다. 한직으로 쫓겨난…."

곽수혁이 말하다 말고 손을 흔들었다.

"아. 무슨 큰 잘못을 해서 쫓겨난 게 아닙니다. 청바지 입고 돌아다니다가 예전 사장님을 못 보고 인사를 안 했는데, 그것 때문에…."

"장호철 전 사장다운 짓이네요. 사람 죽인 것만 아니면 도로 데려와야죠. 제가 처리하겠습니다."

그는 사람을 죽인 놈이라 해도 이번 개발에 꼭 필요하다면 도로 데려오고 싶다.

'수갑을 찬 상태에서도 일은 할 수 있겠지.'

현실적으로는 경찰에 체포된 놈을 데려다가 일을 시킬 수는 없다. 그래야 하는 이유를 설명할 수 없기 때문이다.

차우진이 인사팀에서 받아온 자료를 뒤적여 한 사람을 찾았다.

"이민희 연구원이지요?"

"아. 예. 맞습니다."

"2팀에 복귀시키겠습니다."

이민희의 의견은 묻지도 않았다. 설사 오기 싫다고 해도 끌고 와야 한다.

차우진이 말했다.

"그 외에도 이 탐지기 개발을 위해 필요한 건 다 이야기하시죠. 생각나는 건 뭐든지요."

곽수혁이 조심스럽게 이야기를 꺼냈다.

"아. 그럼 재충전을 위한 휴가…."

"그것만 빼고요."

"역시 그건 안 되는군요."

"대신에 개발에 성공하면 인센티브는 확실하게 나갈 겁니다."

***

차우진이 홍성준 사장을 만났다.

홍성준이 이야기를 듣고 고개를 끄덕였다.

"장 사장이 인사 안 한 직원을 시범 케이스로 자르려 했다는 이야기는 저도 들었습니다. 일단 한직에 보내놓고 나중에 자르려 했다더군요."

"제자리로 돌려보내야죠. 그 직원만이 아니라 비슷한 케이스의 다른 직원들도 각자 자리로 돌려보내시죠."

"당연히 그래야죠. 이런 건 제가 먼저 신경을 썼어야 했는데 말입니다."

"2팀에 연구원을 더 배치해야 합니다."

"서류가 올라오면 모두 결재하겠습니다."

"예산도 더 필요합니다."

"그것도 약속했으니 차 이사님이 정하신 금액 그대로 지급될 겁니다."

"20억입니다."

"예?"

"20억."

홍성준이 눈을 껌뻑였다.

"아니, 그건…."

"한 번에 20억을 다 쓰는 건 아닙니다. 다만, 일단 20억까지는 즉시 결재가 나야 합니다."

홍성준이 당황한 얼굴로 물었다.

"개발하다가 중단된 프로젝트인데 이렇게까지 할 가치가 있습니까?"

"물론입니다."

그 탐지기가 없으면 멸망급 재앙 하나가 터진다.

차우진이 말했다.

"이건 너무 중요해서, 가치 계산이 불가능한 프로젝트입니다. 20억이면 정말 싸게 먹히는 겁니다."

***

한직으로 쫓겨났던 연구원 이민희가 개발 2팀으로 돌아왔다.

그녀가 두 팔을 활짝 펼쳤다.

"내가 돌아왔도다!"

그녀의 동기인 박효정이 손뼉을 마주치며 환영했다.

"여기 네 자리 치워놨어!"

"내 자리! 이제 창고에서 먼지 안 먹어도 되는 내 자리!"

"아. 너 창고로 발령받았었지."

"응. 거기 일 진짜 힘들어. 나 막 팔에 근육 생길라 그래."

"차 이사님한테 고마워해야겠다."

"응? 차 이사님?"

"몰랐어? 팀장님이 너 필요하다고 하니까, 새로 오신 개발이사님이 바로 사장님한테 이야기해서 처리했어."

이민희가 눈을 반짝였다.

"누구셔? 찾아뵙고 인사라도 드리고 싶다!"

"으응? 아. 그게…."

"왜?"

"회사에 출근을 잘 안 하셔."

"응?"

"가끔 오셔. 가끔."

"왜?"

"몰라. 바쁘신가 봐."

***

차우진이 집에서 손가락으로 식탁을 톡톡 두드렸다.

"사덕리소스는 활동 예산이 필요해서 주식을 산 거고."

그 회사는 망하기 직전에 금광이 발견된 덕분에 겨우 살아났다. 이제는 금광의 예상 매장량이 점점 늘어나고 있어서 자금 동원력도 같이 늘어나는 중이다.

차우진은 그 돈으로 딥어스테크의 지분을 인수하게 했다.

"이제 딥어스테크에도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게 됐는데."

딥어스테크는 마그마 탐지기 개발에 돈과 인력을 적극적으로 투입하기로 했다.

그런데 멸망급 재난을 막으려면 탐지기 하나만으로는 안 된다.

탐지기가 없으면 재난을 막을 수 없지만, 재난을 막으려면 탐지기 외에도 필요한 게 있다.

차우진이 인터넷으로 검색한 사람의 사진을 보며 말했다.

"마이클 정."

그는 지질학자이다. 미국 회사 스톤파인더의 사장이기도 하다.

그는 미국에서 지질학자로 활동하다가 스톤파인더를 설립했다. 그 회사는 지금은 딥어스테크보다 큰 회사가 되었다.

멸망급 재난인 마그마 폭발을 막기 위해서는 한국에서만 움직여서는 안 된다. 외국에서 움직일 사람도 필요하다.

"한국 이름 정수찬."

정수찬은 미국 영주권을 가진 한국 국적의 교포다.

멸망 초기 방송에는, 과거에 다른 선택을 했다면 재난을 막을 수 있었다는 이야기가 많이 나왔다.

그때 나온 이야기 중에는 마그마 탐지기와 정수찬에 관한 것도 있었다.

"지금부터 시작하면 마그마 폭발은 막을 수 있어. 미래에는 너무 늦게 시작해서 못 막았던 거니까."

문제는 정수찬이 사는 곳이다. 그는 미국 영주권자이고 사업체도 미국에 있다.

정수찬의 회사인 스톤파인더는 사덕리소스나 딥어스테크에 썼던 방식으로 지분을 확보할 수 없다. 그 회사는 이미 주가가 너무 높았다.

게다가 스톤파인더보다 더 중요한 건 정수찬 본인이다.

차우진이 지금 미국으로 간다고 해서 정수찬을 만나 설득하는 건 어렵다.

"낯선 뉴욕이 아니라 내 영역에 정수찬이 들어왔을 때 일을 성사시켜야 해."

지질학자 정수찬의 이론이 완성돼야 멸망급 마그마 폭발을 막을 수 있다.

"이 사람이 은퇴하지 못하게 해야 하는데…."

꿈속 미래에는 후회와 안타까움, 아쉬움을 담은 영상이 많았다.

[만약 이선정 박사가 10년 전에 죽지 않았다면 오메가 바이러스의 치료제를 개발했을 텐데.]

[만약 딥어스테크가 탐지기를 개발했다면 마그마 문제를 더 일찍 파악했을 텐데.]

[정수찬이 그렇게 일찍 은퇴하지 않았다면, 마그마 폭발을 막거나 적어도 피해를 최소한으로 줄일 수 있었을 텐데.]

차우진이 정수찬의 가족을 검색했다. 그는 가족이 없었다.

그런데 차우진은 인터넷에 나오지 않는 정보를 알고 있다.

"오윤서."

오윤서는 인기 여자 배우다. 영화나 드라마에 주연급으로 활동한다.

차우진은 박창수에게 들은 이야기를 떠올렸다.

***

박창수가 낡은 잡지를 보며 말했다.

"정수찬 박사. 내가 이 사람 데려오는 작전에 참여했었어."

"형이 직접 데려왔다고?"

"참여했다고 했지 데려왔다고는 안 했다."

"뭐야. 그게. 그럼 얼굴도 못 봤겠네."

"아쉽다. 정수찬 박사가 그렇게 일찍 은퇴만 안 했으면 마그마가 터지는 건 막을 수 있었을 거야."

차우진도 동의했다.

"당연하지. 정수찬 박사가 대책회의에 참여한 후에 마그마 폭발을 막을 이론도 완성하고 압력 저하 실험도 성공했잖아."

"그렇지. 그런데 그때는 이미 너무 늦었어. 결국 다 터졌으니까."

마그마 탐지기가 다른 회사에서 개발된 후에, 특이 형태의 마그마가 멸망급 재난을 일으킬 수 있다는 게 알려졌다.

당황한 각국 정부와 학계는 문제를 해결할 방법을 찾기 위해 총력을 기울였다.

그러다 이미 은퇴한 정수찬이 예전에 발표한 논문에서 단서를 찾았다.

정수찬이 과거에 연구한 지질학 이론이 문제 해결의 열쇠라는 게 밝혀졌다.

각국 정부가 움직여 세상에서 사라진 채로 조용히 살던 정수찬을 찾아냈다. 그리고 그를 다시 세상으로 데려와 연구소를 맡겼다.

정수찬은 예전에 만들었던 이론을 완성해 특이 형태로 발견된 마그마의 압력을 줄이는 방법을 찾아냈다.

하지만 그때는 너무 늦었다. 압력은 한순간에 낮출 수 있는 게 아니다. 터트리지 않고 감압하려면 몇 년의 시간이 필요했다.

감압 기술이 완성됐을 때는, 재난을 막기엔 이미 너무 늦은 상태였다.

박창수가 아쉬워했다.

"우진아. 나는 말이야. 멸망 초기에서 5년쯤 전에만 감압 작업을 시작했어도 마그마 폭발을 막을 수 있었다고 본다."

"정수찬 박사는 언제 은퇴했는데?"

"멸망 초기보다 10년 전."

"그럼 아예 10년 전부터 대응을 시작하면 더 좋잖아."

"그랬으면 모든 마그마 폭발을 확실히 막았겠지. 하지만 그건 정수찬 박사가 은퇴하지 않았다 해도 불가능한 일이야."

박창수가 말했다.

"10년 전이면 마그마 탐지기가 없었으니까."

***

차우진이 모니터 속 사진을 보며 말했다.

"창수 형. 지금이 그 10년 전이야. 마그마 탐지기도 다시 개발 중이야. 딱 좋지?"

그가 모니터로 오윤서의 정보를 확인했다. 정수찬이 아니라 오윤서를 조사하는 건 둘의 관계 때문이다.

"정수찬 박사와 결혼할 예정인 오윤서. 그런 기사가 없는 걸 보면 비공개 연예 중인가?"

그건 중요하지 않았다.

"오윤서 쪽으로 접근해서 정수찬을 만나야겠다. 어디 보자. 오윤서의 요즘 스케줄이…."

오윤서는 최근에 영화를 찍고 있다.

"아. 이 영화, 그 영화네."

68. 영화

"운명의 풍차."

차우진은 이 영화를 안다.

멸망 초기에는 현대 문명 시스템이 살아있었다. 그때는 TV로 영화를 볼 수 있었다.

멸망한 후에도 영상 파일과 장비를 찾아내면 영화를 보는 건 가능했다.

차우진은 멸망 초기가 아니라 현대 문명이 무너진 후에 영화 '운명의 풍차'를 보았다.

"이 영화에서 사고 터지는데…."

영화 내용보다 더 잘 기억나는 건 결말 이후에 나오는 추가 영상이었다.

"그 사고로 오윤서 씨가 다치는 건 아니지만."

차우진이 인터넷을 더 검색했다.

"이거 촬영 일정이 어떻게 되지?"

영화사 촬영 일정을 알려면 인터넷 검색만으로는 한계가 있었다.

"직접 찾아가서 알아봐야겠다."

차우진이 딥어스테크 연구소 개발 일정도 확인했다.

"마그마 탐지기의 테스트 버전은 더 빨리 만들어야겠어. 서두르라고 해야지."

***

딥어스테크 곽수혁 팀장이 팀원들을 모아놓고 어렵게 입을 열었다.

"차 이사님이…."

박효정이 물었다.

"오늘 오세요?"

"아니. 전화를 주셨는데."

"격려 전화?"

"독촉 전화. 탐지기를 테스트라도 할 수 있는 상태로 빨리 만들라더라. 실험실에서 하는 거 말고, 야외 현장 테스트가 가능하게."

"그건 이미 개발 스케줄에 있잖아요."

"그 일정을 당기래."

"네? 지금도 빠듯한데요?"

곽수혁이 팀원들에게 말했다.

"예산과 사람은 더 줄 수 있는데 시간은 못 주신단다. 필요한 게 있으면 시간만 빼고 다 요구하래."

"그걸 왜 전화로 하세요? 와서 직접 채찍질하는 건 부담스러우셨나?"

"내 생각인데, 두 회사에서 이사로 일하시니까 많이 바쁘시겠지."

***

차유리가 소파에 누워 있는 차우진에게 물었다.

"넌 또 노냐?"

"일 할 거야."

"어디서?"

"영화 촬영 현장."

"왜? 영화에 투자하게?"

"영화는 뭘 알아야 투자하지. 결과 나오는 데도 오래 걸리고. 난 단기 수익이 나는 게 좋아."

차우진은 10년 후에도 망하지 않는 회사를 여럿 알고 있다. 모두 멸망 초기까지 이름을 들어본 회사들이다.

하지만 차우진은 10년 후를 바라고 자금을 넣어둘 수는 없다. 그러면 몇 년 후에 돈을 벌지는 몰라도 지구가 망한다.

차유리가 물었다.

"그럼 배우라도 하게?"

그녀는 자기가 말해놓고도 코웃음을 쳤다.

"네 얼굴에 영화배우가 가당키나 하냐? 악당 배역도 얼굴에 개성이 있어야 한다."

"나 그 영화에 출연하는 건 맞는데?"

"응? 어떻게? 흉악범 역할이냐?"

"엑스트라 알바 하러 간다."

차유리가 웃었다.

"그러면 그렇지. 산적 1 같은 거?"

"지나가는 사람이나, 옆에서 밥 먹는 사람 같은 거."

차유리가 고개를 갸웃했다.

"응? 옆에서 밥 먹는 사람도 얼굴 보고 뽑지 않나?"

"도시락 필요 없냐?"

"아니. 이해가 안 가서 그렇지. 너 돈 많이 벌었잖아. 엑스트라 알바를 왜 하는데?"

차우진이 둘러댔다.

"영화 촬영 현장을 구경하고 싶어서? 엑스트라는 출근하는 날을 내 마음대로 정하고 경력도 따지지 않더라고."

영화판 스태프 자리는 일하는 시간을 차우진 마음대로 정할 수는 없다. 영화 스케줄에 자신의 시간을 맞춰야 한다.

그 촬영장에 접근하는 가장 간단한 방법은 엑스트라로 참여하는 것이다.

차우진이 말했다.

"톱스타를 만나려면 엑스트라 알바로는 어려울 것 같기는 한데, 지금은 이게 최선이지. 적어도 같은 공간에서 볼 수는 있으니까."

차유리가 그의 말을 나름대로 이해했다.

"그러니까 배우가 보고 싶어서 하는 거야?"

스톤파인더 사장 정수찬의 여자친구인 오윤서가 그 영화의 주연급 배우 중 한 명이다.

"일단은 그래."

***

차우진이 영화 '운명의 풍차' 촬영 현장에 도착했다.

오늘 촬영에는 엑스트라 배우가 십여 명 출연한다.

영화 촬영은 주연급의 스케줄에 맞춰 진행됐다. 엑스트라들은 한쪽에서 순서가 올 때까지 기다렸다.

엑스트라 배우 몇 명이 한쪽에 모여 있다가 주연급 배우를 보고 감탄했다.

"와. 오윤서다."

"이제 30대인데도 미모가 여전히 쩌네."

차우진도 그들 사이에서 오윤서를 확인했다.

"실물은 처음 본다."

인터넷으로 수집하는 정보에도 오윤서의 사진은 있다. 오윤서가 출연한 영화나 드라마로도 그녀의 모습을 볼 수 있다.

그런데 실제로 보는 오윤서는 느낌이 달랐다.

차우진이 말했다.

"사람이 참 분위기 있게 아름다워. 저러니까 정수찬 박사가 그렇게 사랑했지."

주연급 배우들만으로 영화를 찍는 건 아니다. 조연 배우들도 있었다.

엑스트라 배우들이 말했다.

"정예지도 왔다."

"정예지가 저번 드라마에서 조연으로 나와서 좀 떴지?"

"미모 되고 연기도 되니까."

차우진은 엑스트라다.

엑스트라들은 한쪽에서 기다리다가 나오라고 하면 나오고 빠지라고 하면 빠졌다.

차우지는 지나가는 사람 3으로 한 번 출연했다.

다음에는 옷을 갈아입고 다른 지나가는 사람 역할을 맡아야 한다. 그 순서가 오려면 한 시간쯤 기다려야 한다.

"좀 지루하다. 이 방법이 맞나 싶기도 하고."

일단 촬영장에 오긴 했는데, 주연급인 오윤서와는 말 한마디 섞을 기회가 없었다.

그 정도는 예상했다. 그런데 오윤서는 고사하고 조연인 정예지와 이야기할 상황도 오지 않았다.

"이게 아닌가? 다른 접근방법을 찾아봐야 하나?"

아직 마그마 탐지기가 개발되지 않았다. 그게 없으면 정수찬을 만나도 할 게 없긴 하다.

영화 촬영 도중에 작은 문제가 생겼다.

오윤서가 오토바이 퀵서비스로 봉투를 하나 받는 장면을 찍을 차례였다.

윤성준 감독이 인상을 구기며 짜증을 냈다.

"이게 무슨 소리야? 오토바이를 몰 사람이 없다니?"

조감독이 보고했다.

"퀵 역할을 맡기로 한 배우가 개인 오토바이를 타고 잠깐 나갔다가 사고가 났다고…."

"어? 사고? 아이고. 많이 다쳤대?"

"아니요. 넘어진 정도라 크게 다친 건 아니랍니다. 그런데 팔을 접질려서 오토바이를 몰 수가 없답니다."

"많이 안 다쳤다는 거지? 그럼 말이야."

윤성준이 다시 짜증을 냈다.

"왜 오토바이는 몰고 나가서 사고를 내는데! 그것도 하필 오늘! 촬영 어떻게 하라고!"

"다음에 다시 촬영…."

"그 장면 하나 때문에 여기 다시 세팅하라고? 스케줄은? 제작비는 네가 낼 거냐?"

"아니요."

감독이 손을 휘저었다.

"다른 배우로 바꿔!"

"배우 중에서 오토바이를 타는 사람이…."

"아니다. 그냥 엑스트라 중에서 찾아봐. 어차피 얼굴은 헬멧 씌우면 되니까."

"알겠습니다."

조감독이 엑스트라들이 모여 있는 곳으로 왔다.

"오토바이 몰 줄 아는 분? 헬멧을 쓰니까 얼굴은 안 나옵니다. 대사도 없으니까 그냥 하면 됩니다."

엑스트라들이 서로를 보았다.

오토바이를 탈 줄 아는 사람이 한 명 있긴 했다. 그런데 그는 얼굴도 안 나오고 추가 수당도 없는 일에 굳이 나서지 않았다.

차우진이 손을 들었다. 얼굴이 안 나온다는 부분이 마음에 들었다.

조감독이 물었다.

"잘 타요?"

"좀 탑니다."

멸망한 세계의 도로는 상태가 좋지 않은 경우가 워낙 많았다. 그래서 그때는 연료가 남아있더라도 차량을 이용한 장거리 이동은 어려웠다.

반면에 오토바이는 차보다 갈 수 있는 곳이 훨씬 많았다. 산악오토바이를 타면 도로 상태가 다소 안 좋은 곳도 어찌어찌 달릴 수 있었다.

그래서 차우진은 멀쩡한 도로보다 폐허나 산악 지역, 황무지 등을 오토바이로 이동한 경험이 많았다.

차우진이 말했다.

"산을 탈 수 있습니다."

"그냥 퀵 역할만 하는 건데 산악 주행까지는 필요 없고요. 이쪽으로 오세요."

차우진이 조연출과 함께 윤성준 감독을 만났다.

조연출이 설명했다.

"감독님. 산악 주행이 가능할 정도로 잘 탄답니다."

"산을 왜 타? 그냥 도로에서 몰기만 하면 돼."

윤성준이 차우진을 보더니 고개를 끄덕였다.

"얼굴이야 뭐 안 나오니까 상관없고, 배가 적당히 나왔으니 느낌이 더 살겠네."

차우진이 배를 내려다보았다.

'요즘 전투가 너무 잦아서 그런지 확실히 빠졌어. 열심히 먹어야겠다.'

차우진은 소품 담당자에게 가서 미리 준비된 가죽 재킷을 받았다. 지퍼가 쉽게 잠겼다.

"역시 배가 너무 많이 빠졌어. 원래는 지퍼가 걸려야 하는데."

"에이. 그 정도는 아니신데요."

"그렇죠? 왜 아닐까요?"

"네?"

차우진이 가죽 재킷을 입고 오윤서를 만났다.

그녀와 대사가 오가는 건 아니다. 촬영 전에 동선을 맞춰본 것뿐이다.

그래도 드디어 오윤서와 접촉할 수 있게 됐다.

차우진이 말을 걸어보았다.

"오윤서 씨. 팬입니다."

오윤서가 방긋 웃었다.

"고마워요."

대화가 그걸로 끝났다.

이 장면은 오토바이가 등장하기 때문에 시나리오대로 동선을 이동해보는 절차가 필요했다. 배우도 한 명 더 등장한다.

정예지는 차우진의 오토바이를 붙잡으려다 놓치는 역할을 맡았다.

윤성준은 동선을 체크하고 정예지에게 가볍게 뛰어보라고 한 후에 인상을 찌푸렸다.

"정예지 씨가 뛰는 코스가 마음에 들지 않는데?"

"그럼 어쩌죠?"

"각도를 좀 바꿔서 저쪽에서 뛰어오는 거로 하자."

"저기서부터 오면 좀 먼데요?"

"더 빨리 뛰면 돼. 한 번에 찍자고."

정예지가 차우진에게 다가와 대본을 보여주며 설명했다.

"제가요. 저기서 저쪽으로 뛰어갈 거거든요? 그러다 기사님을 놓치는 거예요."

"이미 확인했습니다."

"동선이 아까랑 달라졌는데요?"

"감독님과 정예지 씨가 이야기하는 거 들었습니다."

"어머. 귀가 좋으신가 보다."

귀로 들은 게 아니다. 입 모양과 손짓을 보고 무슨 대화가 오고 갔는지 알았다.

정예지가 방긋 웃으며 말했다.

"그래도 저랑 또 맞춰보면 좋잖아요. 촬영할 때 헬멧 벗으시면 얼굴도 나오고 더 좋았을 텐데, 아쉽다. 그쵸?"

차우진이 정예지를 가만히 바라보았다.

그녀는 최근에 드라마에서도 봤지만, 멸망한 세계에서도 그녀의 모습을 영상으로 봤다.

그녀의 모습은 멸망 초기의 다큐멘터리에 나온다.

멸망한 후의 폐허에서 그녀가 출연한 영화가 들어 있는 태블릿 PC를 찾아낸 적도 있다.

정예지는 차우진의 시선에서 묘한 느낌을 받았다.

'왜 나를 안타까워하는 눈빛으로 보는 거지?'

"왜 그렇게 보세요?"

차우진이 말했다.

"친절하시네요."

그녀가 방긋 웃었다.

"어머. 아니에요. 제가 윤서 언니보다 연기력이 딸리니까 이렇게라도 준비해서 수준을 맞추는 거죠."

예행연습이 끝나고 진짜 촬영이 시작됐다.

오윤서가 스마트폰을 귀에 대고 심각한 표정으로 통화하는 장면을 먼저 찍었다.

그 다음에는 차우진이 오토바이를 오윤서의 바로 앞으로 몰고 가는 장면을 촬영했다.

오윤서가 놀란 얼굴로 물었다.

"뭐죠?"

차우진은 대답 없이 봉투만 넘겨주었다. 그런 후에 오토바이를 출발시켰다.

오윤서가 봉투를 열어보지도 않고 소리를 질렀다.

"잠깐만요! 이거 누가…. 야! 저거 잡아!"

조금 떨어진 곳에서 걸어오던 정예지가 그 말을 듣자마자 오토바이를 향해 달렸다.

그녀가 도로에 도착하기 전에 오토바이가 지나가야 한다. 그러면 그녀가 뒤에서 놓쳤다면서 화를 내는 장면이 이어져야 한다.

문제가 생겼다.

차우진의 오토바이는 조금 전 예행연습했을 때와 같은 속도로 달렸다. 그 정도만 해도 속도가 상당히 빨랐다.

그런데 정예지는 이번에는 진심으로 달렸다.

그녀의 달리는 속도가 너무 빨랐다. 감독의 예상보다 훨씬 더 빨랐다.

그대로 가면 정예지가 오토바이보다 조금 먼저 도로에 진입하게 된다.

그녀는 실수했다는 걸 뒤늦게 깨닫고 급히 멈추려 했다.

실패했다. 신발이 운동화가 아니라 구두라는 게 문제였다. 급히 멈추려다가 구두가 걸렸다.

그녀의 몸이 앞으로 날아가 도로 위에 철퍼덕 넘어졌다.

"아야!"

문제가 또 생겼다.

그녀가 도로 한복판에 넘어지면서 오토바이의 진행방향을 정확히 가로막았다. 거리가 너무 가까웠다.

그녀의 눈에 달려오는 오토바이를 보였다. 눈이 동그래졌다.

"꺅?"

이대로면 오토바이가 그녀를 밟는다. 브레이크를 당겨서 멈추기엔 늦었다.

윤성준 감독도 놀라서 벌떡 일어나며 비명을 질렀다.

"안돼!"

차우진이 시간 가속 스킬을 사용했다.

주변의 모든 움직임이 느리게 느껴졌다. 가속 스킬이 적의 사격을 피할 때보다 두 배는 더 강하게 사용됐다.

차우진이 오토바이를 일부러 옆으로 미끄러뜨렸다.

오토바이가 도로 위를 미끄러지면서 넘어질 것처럼 기울어졌다. 짐칸에 설치한 금속 받침대가 도로를 긁으며 불꽃을 뿌렸다.

차우진의 몸도 도로에 닿을 것처럼 아래로 내려갔다. 가죽 재킷이 바닥을 살짝 스쳤다.

차우진의 헬멧과 그녀의 얼굴이 겨우 두 뼘 차이로 스치듯이 지나갔다.

차우진의 눈에 정예지의 동그란 눈동자가 선명하게 보였다.

69. 사고

오토바이가 옆으로 미끄러졌다.

차우진과 정예지는 얼굴이 맞닿기 직전까지 가까워졌다가 멀어졌다.

문제는 아직도 끝나지 않았다.

이대로면 오토바이가 넘어진다. 굳이 그런 피해를 감수할 이유가 없다.

차우진이 가속 핸들을 당겼다. 오토바이 바퀴가 맹렬히 회전했다. 타이어가 미끄러지는 소리와 함께 하얀 연기가 피어올랐다. 넘어지려던 오토바이가 벌떡 일어났다.

오토바이는 균형을 회복하자마자 앞으로 튀어나갔다. 앞바퀴가 바닥에서 떨어져 위로 들렸다.

차우진은 위험 반경을 벗어난 후에 속도를 줄이며 방향을 틀었다.

오토바이 뒷바퀴가 다시 미끄러지면서 앞바퀴가 바닥에 닿았다.

차우진은 정예지의 근처까지 돌아온 후에 오토바이의 시동을 끄고 내렸다. 그런 후에 그녀의 앞으로 걸어가 한쪽 무릎을 굽히고 헬멧을 벗었다.

그가 정예지의 얼굴 상태를 확인하며 물었다.

"괜찮아요?"

"네? 네? 저, 저요?"

"네."

정예지는 이제야 정신을 차렸다.

"아! 저, 괜찮아요! 안 죽었어요!"

"압니다."

차우진이 손을 내밀었다. 정예지가 그 손을 잡고 일어났다.

뒤늦게 윤성준 감독이 소리를 질렀다.

"커, 컷!"

모든 일은 너무 순식간에 일어나서 스태프들이 끼어들 틈이 없었다.

정신을 차린 스태프들이 정예지를 향해 달려갔다. 감독도 같이 뛰었다.

윤성준 감독이 그녀의 몸을 살펴보며 물었다.

"괜찮아? 안 다쳤어?"

"네. 안 죽었어요."

"무슨 그런 무서운 말을 하고 그래? 죽다니!"

배우가 촬영 도중에 죽으면 감독도 책임을 피할 수 없다.

"안 다쳤어요. 근데 지금 무릎도 아프고 팔꿈치도 아프고, 도로에 나가떨어졌더니 여기저기가 아프긴 한데…."

"헉! 아프면 병원에 가야지! 야! 누가 예지 씨 병원에 데려가!"

"아뇨. 괜찮아요. 촬영 계속할 수 있어요."

"지, 진짜야?"

그녀가 팔을 위로 들었다.

"당연하죠! 그냥 엎어진 것뿐이에요. 오토바이에 치인 건 아니잖아요."

감독이 기겁했던 건 그녀가 오토바이에 밟힐 뻔했기 때문이다.

윤성준이 한숨을 크게 내쉬었다.

"아. 그렇지. 내가 너무 놀라서. 휴우."

차우진은 오윤서의 근처로 가서 상황을 지켜보았다.

그가 이 영화에 엑스트라로 참여한 건 오윤서 때문이다. 그래서 일부러 그녀의 옆에서 상황을 지켜보았다.

오윤서가 차우진의 바로 옆으로 다가와 말을 걸었다.

"오토바이 잘 타시네요? 묘기 수준이던데요?"

이런 수준의 오토바이 전술 기동은 멸망한 세계에서 많이 했다. 오토바이 위에서 총을 쏴야 할 때도 있었다.

게다가 방금은 시간 가속 스킬을 평소보다 강하게 썼다.

"보기보다 어렵지 않습니다."

"아뇨. 엄청 어려워 보여요. 예지가 죽을 뻔했잖아요."

"못 피했어도 안 죽었을 겁니다. 몇 군데 부러졌겠지만."

오윤서가 웃었다.

"어머. 그 말이 더 무섭네요. 진짜 같아서."

윤성준 감독이 자리로 돌아와 가슴을 쓸어내렸다.

"어휴. 간 떨어지는 줄 알았네."

촬영감독이 물었다.

"감독님. 오늘 촬영은 어떻게 할까요?"

"뭘 어떻게 해? 예지 씨도 괜찮다니까 다시 찍어야지. 여기 다시 세팅 못 한다고 했잖아."

"그럼 방금 찍은 건…."

"버려야지."

"정말로요?"

윤성준이 잠깐 생각하다 말했다.

"아니다. 일단 좀 보자. 중간까지라도 건질 수 있는지. 방금은 내가 너무 놀라서 모니터를 못 봤거든."

"그러시죠."

"건질 건 건지고, 나머지는 예지 것만 따로 찍어야겠어."

모니터에 방금 촬영한 장면이 나왔다.

차우진이 오윤서와 만나는 부분은 감독도 이미 봤다.

그런데 그는 사고가 날 때부터는 모니터를 보지 않고 현장을 직접 눈으로 봤다. 그래서 그때 모습이 어떻게 찍혔는지 알지 못했다.

"어?"

방금 촬영에는 카메라를 두 대 동원했다.

"이거…."

그가 두 대에 찍힌 영상을 번갈아 확인했다.

촬영감독이 말했다.

"그림은 기가 막히게 나왔죠?"

"그러게. 특수효과라도 동원한 것처럼…. 그것도 아주 자연스럽게 나왔는데?"

"하지만 이 장면은 시나리오와는 다르죠."

"그치. 그게 문제지."

시나리오에는 당연히 이런 장면이 없다. 오늘 촬영분에도 없고 앞뒤 대본에도 없다.

윤성준이 말했다.

"한 번 나오고 사라지는 퀵이 저런 묘기를 보여주면, 관객이 중요한 장면인 줄 알고 기대하잖아. 그런데 영화 끝날 때까지 안 나오면 실망할 거야."

"그럼 이 영상은 제가 따로 소장해야겠네요."

"아니, 잠깐…."

윤성준 감독이 잠시 고민했다.

"이거 버리기엔 너무 아까운데? 이쪽이 임팩트도 더 강하고."

"시나리오와 다른데요?"

"살짝 고치면 어떻게든 되지 않을까?"

정예지는 넘어질 때 부딪힌 곳에 스프레이 파스만 뿌렸다. 그런 후에 차우진을 찾아왔다.

그녀가 고개를 꾸벅 숙였다.

"고맙습니다. 살려주셔서."

"아직 살려준 건 아닌데요."

옆에서 오윤서가 설명했다.

"오토바이에 치여도 죽진 않았을 거래. 몇 군데 부러지긴 했겠지만."

"어머. 그거나 그거나요."

그녀가 코를 만지며 말했다.

"안 좋은 쪽으로 부러지면 큰일 나잖아요."

"그치."

윤성준 감독이 다가왔다. 그가 활짝 웃으며 차우진에게 말했다.

"이야아. 정말 고맙습니다. 덕분에 예지 씨도 괜찮고, 우리 영화도 괜찮고. 어떻게 거기서 그렇게 피할 생각을 하셨습니까? 하하하."

"정예지 씨가 갑자기 넘어지는 바람에 다른 선택지는 없었으니까요."

"이거 자주 불러야겠어. 조감독. 이분 앞으로 자리 나면 계속 불러드려."

"엑스트라…로요?"

"아니지. 단역이라도 맡겨야겠지? 오토바이 탄 김에 단역 어때요? 대사도 좀 추가할 생각인데."

차우진이 대답했다.

"아뇨. 괜찮습니다."

"어? 영화에 출연할 기회인데, 배우의 꿈을 이루려면…."

"오늘 엑스트라는 알바로 온 거라서요."

윤성준 감독은 당황했다.

"아니, 이게 아닌데…. 그래도 기왕이면 영화에 얼굴이 나오면…."

"연기가 전혀 안 됩니다. 제가 연기를 배운 적 없는 일반인이라서요."

"아…."

차우진은 그의 얼굴이 사람들에게 익숙해지는 건 원하지 않았다. 얼굴이 알려지면 목격자가 쉽게 생긴다.

윤성준이 고민했다.

"이게 아닌데. 아! 이러면 되겠네."

감독이 대안을 생각해냈다.

"오토바이 헬멧을 벗고 찍는 추가 장면은 다른 배우를 써야겠군요. 방금 그 영상을 살리고 싶어서…."

다른 때라면 통보 없이 그 영상을 영화에 쓰고 배우도 바꿀 수 있다.

그런데 방금 차우진이 정예지를 구하면서 영화도 구하고 윤성준 감독의 경력도 구해주었다.

그래서 차마 통보 없이 그럴 수가 없었다.

"어떻게 생각해요?"

차우진이 물었다.

"오늘 촬영한 영상에 제 얼굴이 나왔습니까?"

"헬멧 벗었을 때요? 뒷모습만 나왔는데. 와서 볼래요?"

그들이 모니터 앞으로 갔다. 오윤서와 정예지도 따라왔다.

영상 속에서 차우진이 정예지의 앞을 스쳐 지나갔다.

정예지가 손뼉을 치며 감탄했다.

"대박! 그림 진짜 장난 아니게 나왔다!"

윤성준 감독이 웃었다.

"그렇지? 장난 아니지? 그래서 내 이걸 못 버리고…. 누가 예지 씨까지 데려왔어? 본인이 다칠 뻔했는데, 이런 거 봐도 괜찮아?"

"왜요? 멋있는데. 제 표정도 진짜 실감 나게 잘 찍혔죠? 저게 연기가 아니라 실제 상황이지만, 관객들은 연기로 알겠죠? 아싸아. 개꿀."

"어? 그, 그래. 그럼…."

윤성준이 차우진에게 물었다.

"성함이?"

"차우진입니다."

"차우진 씨는 어때요?"

차우진은 일부러 카메라를 등지고 정예지의 손을 잡았다. 그의 얼굴은 노출되지 않았다.

윤성준이 감독이 말했다.

"다른 배우를 쓰려면 얼굴이 노출된 장면이 있어도 잘라내야 하는데, 다행히 없단 말이지."

"그러네요. 그럼 그냥 쓰시죠."

윤성준이 말을 슬쩍 놓았다.

"하하하. 고마워. 대신에 우리 영화 촬영 끝나는 날까지 엑스트라 자리를 새로 만들어서라도 팍팍 불러줄게. 조감독. 차우진 씨 최대한 써드려."

"넵!"

차우진이 단서를 달았다.

"얼굴 제대로 안 나오는 엑스트라가 좋겠습니다. 그래야 더 자주 나올 수 있으니까요."

"하하. 그거 좋은 생각입니다."

촬영이 다시 시작됐다.

차우진은 멸망한 세계의 폐허에서 이 영화가 설치된 태블릿 PC를 찾아낸 적이 있다.

멸망한 세계는 방송국이 무너져서 TV가 나오지 않았다. 그때는 따로 저장된 광고 영상이나 개인 너튜브 촬영 영상만 봐도 재미가 있었다.

그런 시대에 작동하는 태블릿 PC가 생겼다. 영화도 들어 있었다.

그래서 그는 지금 촬영 중인 '운명의 풍차'를 이미 여러 번 봤다.

'오늘 찍은 걸 보니까 알겠네. 그때 본 영화는 정예지가 나온 장면을 하나도 버리지 않고 다 썼나 보다.'

감독은 시나리오를 수정하기 전에 일단 오토바이 역할을 맡을 배우부터 찾았다.

"지금 당장 올 수 있는 배우가 필요해."

조감독이 옆에서 말했다.

"감독님이 부르시면 올 사람은 많죠. 그런데 시나리오는 어쩌죠?"

이 영화는 윤성준 감독이 시나리오를 직접 썼다. 그렇다 하더라도 시나리오를 고치려면 시간이 필요하다.

"오늘은 정예지의 손을 잡고 일으켜주는 장면 이후부터 떠날 때까지만 찍고, 시나리오는 나중에 촬영분에 맞춰서 수정할 거야."

새로운 배우는 한 시간 후에 그곳에 도착했다. 단역이 아니라 주조연급으로 활동하는 서준영이었다.

"감독님!"

"어. 준영이 왔냐? 바쁜 데 불렀지?"

"요즘 휴식기니까 놀러나 오라면서요. 뭔데요?"

윤성준이 제안했다.

"너 단역 한 번 해라."

서준영이 손을 흔들며 웃었다.

"에이. 감독님. 제가 이제 단역 하는 레벨은 아니죠."

"카메오는?"

"그건 좋죠."

"두 개가 뭐가 다른데?"

"느낌이?"

"실없는 놈. 와서 이것부터 보고 이야기하자."

감독이 오토바이 사고 영상을 보여주었다.

서준영은 오토바이가 정예지의 옆으로 미끄러지는 모습을 보며 감탄했다.

"어우. 쩌네요. 스턴트맨 실력이 장난 아닌데요?"

"스턴트 아니야. 실제 사고 장면이야."

"예?"

"정예지가 오토바이를 못 쫓아갔어야 하는데, 너무 빨랐어. 육상 선수인 줄 알았다. 그러다 도로 위에 넘어졌지. 그것도 달려오는 오토바이 바로 앞으로."

"그럼 저 상황이…."

"오토바이가 아슬아슬하게 피했다. 그때는 정말 내가 시껍했다."

"실제 상황이라 그런지 영상이 더 쩌네요."

"어때?"

"뭘요?"

"저 배역 네가 해라."

배우가 영상을 다시 돌려보면서 입맛을 다셨다.

"어떤 캐릭터인데요? 시나리오 좀 볼 수 있어요?"

"시나리오에는 저 장면이 없어."

"네?"

"저거 실제 사고 영상이라니까?"

"아니, 그래도 시나리는 있어야…."

"이제부터 고쳐 쓰려고."

서준영이 윤성준을 돌아보았다.

"감독님?"

"영상 봐봐. 필이 딱 오잖아. 그림은 이미 머릿속에 그렸거든? 원래 대본에 저 캐릭터 추가로 넣을 수 있어. 그러면 영화가 더 좋아질 거야."

"제 배역, 좋은 거 맞죠?"

"짧지만 강렬하지."

"뭐, 그러면 해야죠."

윤성준이 활짝 웃었다.

"오케이. 오늘은 지금 저 장면에서 얼굴 나오는 부분만 찍어. 대사도 녹음된 거랑 똑같이 해. 촬영 스케줄 때문에 나중에 여기 와서 다시 촬영할 순 없으니까."

"예압!"

***

차우진이 입었던 소품용 옷을 서준영이 받으며 인사했다.

"오토바이 실력 쩔던데요?"

"실제로는 더 쩝니다."

"하하하. 감독님이 시나리오 수정하신다던데, 오토바이 장면이 또 나오면 스턴트 맡으시면 되겠네요."

"글쎄요. 오늘은 엑스트라 알바로 온 거라서요."

서준영은 멈칫했다.

"예? 알바요? 스턴트맨 아니세요?"

"아닙니다."

"와…. 그냥 스턴트 하셔도 될 것 같은데."

윤성준 감독이 서준영을 불렀다.

"서준영! 시간 없어!"

"네. 갑니다!"

서준역이 옷을 들고 윤성준이 있는 곳으로 갔다.

정예지가 차우진의 옆으로 슬그머니 다가와 말을 걸었다.

"진짜 아쉽지 않아요? 저 배역을 직접 할 수도 있었는데."

"전혀요. 난 연기가 안 됩니다."

"저 같으면 배역 빼앗기면 너무 아까워서 잠이 안 올 거예요."

"연기 계속하고 싶지요?"

"당연하죠! 아주 오래오래 하고 싶어요."

"오래 사셔야겠네."

"네?"

70. 어린이날

정예지는 이튿날은 스케줄이 없었다.

그녀가 백화점에 들러 옷을 고르면서 말했다.

"오토바이 탈 때는 가죽 재킷이 잘 어울리겠지?"

매니저가 옆에서 다른 의견을 내놓았다.

"평소에 오토바이 안 타는 사람이면 어쩌려고?"

"그럴 리가 있어? 난 레이싱 경기에서 선수로 뛰던 사람인 줄 알았는데?"

"어…. 그렇긴 하지. 그때 불꽃 튀기면서 휙 하고 피하던 모습…. 어휴. 어제 생각만 하면 아직도 두근거리네."

"사고당할 뻔한 건 난데 왜 오빠가 두근거려?"

"너 많이 다치면 난 회사에서 잘려서?"

"매니저 바꿔달라고 해야겠다."

"당연히 농담이지."

정예지가 가죽 재킷을 하나 골랐다. 갈색이 살짝 들어간 가죽 재킷이었다.

"이거 어때?"

"그 재킷은… 배 나온 사람에게는 안 어울릴 것 같은데? 너무 슬림하잖아."

정예지가 고개를 갸웃했다.

"그런가? 뱃살만 빼면 완전 어울릴 것 같은데."

매니저가 주변을 둘러보며 걱정했다.

"예지야. 너 남자 선물 사는 거 팬들이 알면 난리 난다."

"내 목숨 구해준 분한테 이거 하나 사주는 게 난리 날 일인가?"

"원래 소문이라는 게 어떻게 날지 모르니까."

"그럼 소문 안 나면 되겠네."

"그게 마음대로 되는 거냐고."

***

며칠 후에 영화 조연출이 차우진에게 연락했다.

"오늘 엑스트라 한 자리 있는데, 가능하세요?"

차우진이 대답했다.

- 지금 출발하겠습니다.

차우진이 영화 촬영장에서 대본을 받았다. 뒷모습만 나오는 배경 엑스트라였다.

대본은 전체가 아니라 그 부분 한 페이지만 따로 출력된 것을 받았다.

차우진은 단순히 뒷모습만 나올 뿐이라서 대본 없이 말로 상황을 전달받아도 충분했다. 그런데도 그 한 페이지를 챙겨준 건 조연출이 나름 신경을 쓴 것이다.

차우진이 그걸 보는데 정예지가 활짝 웃으며 다가왔다.

"어머. 차우진 씨. 오랜만이에요."

"겨우 사흘 만입니다."

"그 정도면 오랜만이죠. 자. 이거요."

그녀가 종이가방을 내밀었다.

"뭡니까?"

"선물이요. 사흘 전에 촬영장 사고 때 구해주신 게 고마워서 샀어요. 다른 의미는 없어요."

"압니다."

"네?"

"다른 의미 없는 거."

"아. 네."

차우진이 가방을 열어보았다. 어두운 갈색 가죽 재킷이 들어 있었다.

"옷이네요?"

"오토바이 타실 때 입으시라고요."

"오토바이 안 타는데."

그녀는 당황했다.

"네? 저 구해주실 때는 탔잖아요."

오윤서와 접촉하기 위해서 탔다.

"그거야 카메라 앞이니까 오토바이 타는 연기를 한 거고요."

"어머. 잠깐만요. 연기 못 한다면서요? 그래서 단역 제안도 거절했잖아요."

"오토바이 타는 연기만 할 줄 압니다."

***

차우진은 카페에 앉아 있는 사람 1로 출연했다. 뒷모습만 나와도 출연료는 제대로 계산된다.

"출연료는 쏠쏠한데…."

원래 목적이던 오윤서는 오늘 촬영장에 오지 않았다. 정예지만 몇 번 말을 걸었다.

차우진이 집으로 돌아온 후에 가방에서 가죽 재킷을 꺼냈다.

"뭘 이런 걸 다. 좋은 건가?"

그는 가죽 재킷을 입고 거울 앞에 서 보았다.

"이만하면 꽤 어울리는데? 하긴. 내가 살만 빼면 남부럽지 않게 생기긴 했지."

차유리가 집으로 들어오다가 그 모습을 보고 비웃었다.

"야. 그 옷 뭐냐? 딱 봐도 날씬한 사람용인데, 배 나온 네가 왜 입어? 어디서 그런 걸 샀냐?"

"산 거 아니야. 선물 받았어."

"응?"

"내가 날씬해 보이나 봐."

"여자야?"

"어."

"예쁘냐?"

차우진이 정예지를 떠올렸다.

"예쁘지?"

차유리가 다가와 재킷의 상표를 확인했다.

"이거 나도 비싸서 못 산 건데?"

"어쩐지 나한테 잘 어울리더라. 사람이 명품이라서 그러나?"

그녀의 표정이 심각해졌다.

"야. 이거 분명히 네 장기 노리는 거다. 백 퍼다. 아니면 예쁜 여자가 이런 비싼 옷을 너 같은 뚱땡이한테 사줄 리가 없어."

"꺼져."

"너 지금 형사의 감을 못 믿냐?"

"안 믿는 거야."

***

차우진은 딥어스테크에 가끔 출근한다.

그가 출근하면 비서실에서 전담 직원이 나와 업무를 지원했다.

송미소가 말했다.

"차우진 이사님. 사흘 만에 오셨네요."

"너무 자주 왔나요?"

"아뇨. 다른 이사님들은 매일 출근하세요."

보통은 그게 정상이다.

차우진이 어깨를 으쓱했다.

"난 뭐, 와봤자 할 일이 없어서."

차우진이 출근할 때만 비서실에서 오는 송미소가 물었다.

"연구소 개발이사님이신데요?"

"내가 개발하는 것도 아니고, 나와 봤자 할 일도 없고."

"연구소 인사와 예산에 결정권을 가지고 계신데요?"

"그거야 나도 뭐라도 하는 게 있어야 할 것 같아서."

"네?"

"농담입니다."

송미소가 어색하게 웃었다.

"농담이시구나. 호, 호호. 진담이신 줄 알고 당황했어요."

"앞으로는 자주 올 겁니다. 새 탐지기를 만들어서 1차 테스트를 할 때까지는 그래야죠."

송미소가 들고 있는 태블릿 PC를 이사실의 대형 스크린에 연결하며 말했다.

"그럼 지난 사흘간 업무보고를…."

"간단하게."

"네. 평소처럼 최대한 심플하게 요약했어요. 길가는 사람을 붙잡고 설명해도 알아들을 수 있을 정도로요."

차우진이 지난번에 그렇게 해달라고 말했다.

송미소는 그동안 회사 상황과 연구소 상황을 간단히 설명했다. 설명은 간단했지만 내용은 핵심만 요약되어 있었다.

그녀는 간략한 보고를 마친 후에 차우진의 질문을 기다렸다.

차우진이 말했다.

"좋네요."

그게 다였다.

"네? 저 지금 이사님이 질문하시면 구체적인 걸 설명하려고 기다리고 있는데요?"

"미소 씨 요약이 워낙 좋아서 그거면 충분해요."

차우진은 지난 며칠간의 업무보고 요약을 듣고 연구소로 이동했다.

송미소는 비서실로 돌아왔다.

그녀의 상관인 비서실 과장이 물었다.

"차 이사님은 출근을 계속 이렇게 띄엄띄엄하실 거래? 결재하실 거 많은데?"

"당분간은 자주 오실 거래요. 개발 2팀에 시킬 일이 있으시대요."

"그거 다행이네. 그동안은 일을 너무 쉽게 하셨지."

"대신에 연구소장님의 업무에 태클을 걸지 않으시잖아요. 하나하나 다 반대하면 바지 소장으로 만들 수 있는데도요."

"소장님도 그래서 마음을 놓으신 것 같긴 하더라. 다만…."

"왜 그러세요?"

비서실 과장이 말했다.

"차 이사님 방침대로면 연구소의 인원과 예산을 2팀에 너무 몰아주잖아. 그럼 당연히 불만이 나올걸?"

"다른 팀에서요?"

"다른 팀도 그렇지만, 2팀에서 먼저 나오지 않겠어?"

"네? 왜요?"

"지원을 빵빵하게 한 대신에 개발 일정 압박도 심하게 들어가나 봐. 이제 출근도 자주 하신다니까, 압박이 더 세게 들어가겠네. 개발 2팀은 큰일 난 거지."

***

차우진이 개발 2팀장 곽수혁에게 말했다.

"인력, 예산. 달라는 대로 다, 아니, 달라는 것보다 더 많이 지원했으니까, 테스트 장비도 뚝딱 개발할 수 있을 줄 알았습니다만?"

곽수혁은 등에서 식은땀이 났다.

"예? 아니, 그게, 장비 개발은 그렇게 금방 되는 게 아니라서…."

"양산을 기대하는 게 아닙니다. 기존에 개발하던 것을 보완해서 현장 테스트가 가능한 수준으로 만들자는 거지요. 그건 오래 안 걸릴 텐데요?"

"그렇기는 한데, 확인해야 할 게 또 많아서…."

차우진이 달력을 가리켰다.

"5월 5일 어린이날."

"예?"

차우진은 이선정 박사가 살해당할 예정이었던 날짜는 정확히 기억하지 못했다.

그건 꿈속 미래 기준으로 너무 오래전 일이라서, 대충 언제쯤인지는 알아도 며칠인지까지는 기억나지 않았다.

그런데 올해 5월 5일은 기억한다. 올해 어린이날에 탐지기를 테스트하기 딱 좋은 지진이 발생한다.

차우진이 말했다.

"5월 5일에 장비를 테스트해야 합니다. 그러니까 곽 팀장님은 저랑 일하러 가시죠."

"네? 그날은 어린이날인데…."

"민지는 고딩인데 그게 문제가 되나요?"

"아, 그게 아니라, 그때까지 남은 기간이 너무 적어서…."

차우진이 말했다.

"곽 팀장님은 할 수 있습니다. 곽 팀장님도 스스로 그렇게 믿고 있습니다."

"제가요?"

곽수혁이 한 말은 아니다. 10년 후 방송에서 곽민지가 그렇게 말했다.

차우진이 멸망 초기에 곽민지가 했던 말을 떠올렸다.

'아빠는 예산과 인력만 충분했으면 어린이날 이전에 탐지기를 개발할 수 있었다고 말했어요. 그때는 그게 무슨 뜻인지 몰랐죠.'

차우진이 말했다.

"팀장님 말고 민지가요."

"우리 딸은 이게 뭔지도 모를 텐데요? 집에서 예전에 푸념한 걸 들었나?"

"민지가 그렇게 말할 수도 있다는 말이었습니다. 아직은 민지가 그런 말을 한 건 아닙니다."

"예?"

이 프로젝트가 엎어지고 멸망급 재난이 터지면, 곽민지는 연예인 민지가 돼서 10년 후에 그렇게 말할 예정이다.

곽수혁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무슨 말씀이신지 도무지 이해가…."

차우진이 말을 돌렸다.

"그럼 신형 탐지기가 어디까지 만들어졌는지 좀 보죠."

탐지기는 기존에 개발하다 중단된 것을 다시 만드는 중이다. 그래서 새로 시작하는 것보다는 연구 진척이 빨랐다.

지금도 연구소 내부에서 간단한 테스트는 하고 있다.

곽수혁이 말했다.

"그래도 5월 5일 현장 테스트 스케줄은 무리입니다. 할 수는 있는데, 해봤자 좋은 데이터를 얻을 수는 없을 겁니다."

차우진은 전기 분야의 전문가다. 탐지기의 세부 설계는 전문분야가 달라 모른다.

그런데 그는 이 탐지기를 다큐멘터리나 기사에서 많이 보았다.

10년 후 미래에 마그마 탐지용으로 사용한 건 다른 회사에서 개발한 탐지기다.

지금 이 탐지기는 그 미래 탐지기에 적용된 기술의 원형이다.

'스톤파인더의 정수찬 사장이 지금부터 준비하면 마그마 재난은 막을 수 있어.'

멸망한 세계에서는 마그마 폭탄이 하나 터지고 나서야 대응을 시작했다.

그러면 너무 늦는다. 시간이 부족해진다.

오메가 바이러스 치료제는 아직 시간이 많다. 그건 이선정 박사만 살아있으면 해결된다.

그런데 마그마 탐지기는 빨리 만들면 더 좋다. 이번 현장 실험은 놓치기 아까운 기회다.

지금 개발 중인 탐지기는 방향은 잘못되지 않았다.

'미래에 전문가들이 이 탐지기가 개발 중단됐던 걸 아쉬워할 만큼 설계는 훌륭해.'

그렇다고 지금 설계가 완벽한 건 아니다.

차우진은 미래에 완성된 탐지기들의 영상과 기사를 많이 보았다. 그래서 지금 개발 중인 것에서 부족한 걸 지적할 수 있었다.

차우진이 그 부분을 언급했다.

"여기 이 부분, 다른 방식의 센서는 없습니까?"

"후보에 올랐던 센서들이 있습니다만, 여러 문제로…."

"좀 봅시다."

그중에는 눈에 익은 센서도 있었다.

"이 미국산 센서는 왜 탈락했습니까?"

"그건 미국 회사에서 새로 개발한 센서입니다. 추가로 달면 좋긴 하지만…"

"좋은데 왜 안 다셨습니까?"

"성능 향상은 얼마 안 되는데 가격이 너무 비싸서…."

예전의 부족한 예산으로는 그걸 선택할 수가 없었다.

차우진이 말했다.

"이걸 추가로 달고 기존 시스템과 통합시키시죠. 예산은 신청하는 대로 나갈 테니까 가격 신경 쓰지 말고요."

"예? 아. 예."

그렇게 해도 차우진이 바라는 것보다 성능이 떨어졌다.

"실내 테스트 결과가 생각보다 부실하군요. 뭐가 문제입니까? 센서인가?"

"이 업계에서 많이 쓰는 센서들을 사용했는데 정밀도에 한계가 있습니다."

"왜 그걸 썼습니까?"

"양산도 고려해야 하니까요.

"양산 무시하고 더 좋은 거로 바꾸시죠. 아니, 그냥 전부 다 제일 좋은 걸 넣으세요."

곽수혁이 망설이다가 말했다.

"차 이사님. 좋은 부품을 쓰면 저희도 편합니다. 개발 기간도 단축할 수 있을 겁니다."

"좋네요."

비싼 게 좋은 걸 몰라서 안 쓴 게 아니다. 비싸고 좋은 부품을 쓰면 결과는 더 잘 나온다. 그러면 개발 기간도 줄어든다.

곽수혁이 말했다.

"그런데 그러면 판매 단가를 맞출 수 있겠습니까? 영업에서 자꾸 연락이 와서…."

"비싸게 팔면 됩니다."

"우리 회사 브랜드로 어떻게 비싸게…."

"안 팔리면 말고요."

"예?"

"농담입니다."

"노, 농담이시군요. 하, 하하."

차우진이 말했다.

"아무리 비싸도 국가 예산으로 못 살 정도는 아닙니다."

71. 주작

차우진이 딥어스테크 연구소에 며칠 연속으로 출근해 개발 2팀과 일했다.

2팀이 풍족해진 만큼 연구소 다른 부서는 예산도 줄어들고 연구원도 빼앗겼다.

다른 팀에서 불만의 소리가 나왔다.

"연구소에 폭군이 왔어."

"차 이사보다 더 위쪽에 항의해야 하는 거 아냐?"

결국 딥어스테크 연구소장이 차우진을 찾아왔다.

"차 이사. 이야기 좀 합시다."

"인사나 하러 오신 분위기는 아니네요."

"연구소에서 2팀에 리소스를 너무 몰아준다는 말이 나옵니다."

"그러겠죠. 사실이니까요."

"다른 팀에도 신경을 좀…."

"소장님. 제 권한 내에서 한 겁니다만?"

"아니, 그건 알지만…."

"억울하면 사장님한테 말씀하시죠. 사장님이 반대하시면 뭐…."

"사장님이 반대하시면 마음을 바꿀 겁니까?"

"아니요."

"커흠."

연구소장은 차우진과 홍성준 사장 사이의 합의를 안다. 지분 관계도 안다.

그가 연구소장에 취임할 때 홍성준이 충돌하지 말라고 신신당부까지 했다.

차우진이 말했다.

"그리고 연구소는 5월 5일까지만 자주 오려고요."

"아니, 무슨 이사가 일을 그렇게 하다 말다…."

"제가 매일 출근해서 이것저것 간섭하는 것보다 이렇게 가끔 오는 게 편하실 텐데."

"어? 어. 그거 뭐, 내가 꼭 그런 걸 바라는 건 아니고…."

"그럼 이 문제는?"

"차 이사 뜻대로 하세요. 연구원들은 내가 다독이겠습니다."

박 이사도 홍성준 사장을 찾아갔다.

"연구원들 사이에서는 차 이사가 폭군이라는 소리까지 나오고 있습니다."

홍성준 사장이 말했다.

"회사 자산 빼돌리는 것도 아니고 연구 우선순위 좀 바꾼 건데. 그럴 수도 있지."

"사장님. 아무리 그래도 이건…."

"차 이사의 조건은 저쪽에서도 들어줄 수 있어. 그런데도 나를 지지하잖아. 그럼 나도 주는 게 있어야지."

차우진이 상대 세력에게 붙으면 홍성준 사장의 자리가 위태로워진다. 그러다 사장이 바뀌면 박 이사의 자리도 사라진다.

"그리고 그 개발이 성공할 수도 있잖아."

홍성준은 이미 말을 몇 번이나 바꾼 이력이 있다. 그래서 말을 또 바꾸면 차우진과의 관계가 틀어진다는 걸 안다.

"차 이사가 이 정도만 하는 게 차라리 다행이야. 회사 경영을 하나하나 따지고 들면 우리도 힘들어. 그러니까 서로 자기 분야를 확실히 하자고."

윗선을 움직여 상황을 바꾸려던 연구원들은 실패했다는 소리만 들었다.

"차 이사님이 밀어붙이는 건 사장님이 무조건 오케이 한다잖아."

"다른 이사님들도 움직이면 어떻게 안 되나?"

"되겠냐? 사장님의 경영권을 지지하는 백기사인데."

"차 이사님이 우리 회사 지분을 직접 가진 게 아니라 사덕리소스가 가진 거라며."

"아니야. 차 이사님 개인 지분도 꽤 돼. 사덕리소스의 2대 대주주이기도 하고."

"폭군을 막을 방법이 없구나."

"얼마나 대단한 걸 개발하려고 2팀에 예산을 몰아주는지 내가 지켜볼 거다."

***

차우진이 출근해서 주로 하는 건 2팀에 가서 지적질하는 것이다.

차우진이 개발 중인 장비를 보며 말했다.

"그거 그런 형태로 만들면 안 되는데."

곽수혁 팀장이 요청했다.

"이사님. 그냥 구체적으로 말씀해 주시면 안 되겠습니까?"

"당연히 안 됩니다."

차우진은 기사나 다큐멘터리에서 본 것과 다른 부분을 지적하는 중이다. 영상을 본 덕분에 개념 정도는 알지만, 디테일한 것까지 설명할 수는 없다.

"난 그냥 의견만 내는 겁니다."

곽수혁은 그렇게 생각하지 않았다. 차우진이 지적한 것들은 나중에 확인해보면 모두 맞는 소리였다.

"디테일한 부분까지 생각이 있으신 것 같은데요."

"아니요. 그런 거 없습니다."

현대의 평범한 사람이 자동차 엔진 관련 다큐멘터리를 보면, 4기통과 6기통의 장점과 단점을 설명할 수는 있다. 어떤 부품이 어떻게 작동하는지도 대충은 말할 수 있다.

하지만 전문가가 아니라면 피스톤을 어떤 기술로 만들어야 하고 엔진 출력은 어떻게 제어해야 하는지까지는 모른다.

이 경우도 마찬가지다.

차우진은 그 탐지기가 어떤 원리도 작동하는지는 알지만, 제작하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지는 모른다.

곽수혁은 그 말을 믿지 않았다.

"아닌 거 같은데…."

질문이 더 쏟아지기 전에 차우진이 슬그머니 일어났다.

"오늘은 다른 팀도 좀 가봐야겠군요. 어쨌든 5월 5일 전까지는 야외 테스트가 가능한 장비가 만들어져야 합니다."

"그 일정은 농담 아니셨습니까?"

"어린이날에는 선물이 있어야지요."

"차 이사님은 어린이가 아니잖습니까?"

***

개발 1팀은 불만이 많았다.

1팀장이 차우진에게 말했다.

"차 이사님. 저희도 진행 중인 프로젝트들이 있습니다. 그런데 예산을 2팀에 몰아주시는 데다가, 저희 연구원도 파견 보내는 바람에…."

"아. 그래서 개발이 늦어지시는구나."

"솔직히 2팀의 지저 광물 탐지기보다는 저희 프로젝트가 회사에 더 도움이 되잖습니까?"

"음…. 여러분의 실력을 폄하하는 건 아닙니다. 이건 아이템 선정의 문제입니다. 2팀의 그 아이템이 더 낫습니다."

"아니, 어떤 이유로…."

"딱 보니까 느낌이 왔습니다."

"예?"

"어쨌든, 1팀 문제는, 프로젝트 일부는 마감을 늦추고, 급한 건 예산은 더 받아오면 되는 거지요?"

"우리 예산은 2팀에 몰아줬는데 어디서…."

"사장님을 만나서 다른 부서 예산을 줄여서라도 달라고 해야겠군요."

"예? 다른 부서라고 해서 예산이 넉넉할 것 같지는 않…."

"쥐어짜면 다 나옵니다."

1팀장이 슬그머니 말을 바꾸었다.

"그렇게 해주시면 저는 불만 없습니다."

***

박 이사가 화를 벌컥 냈다.

"이사들의 법인 차량을 회수한다니!"

"그렇게 절약한 돈은 연구소로 보낸답니다."

"난 그럼 내 차로 다니라는 거야? 내가 이러려고 이사가 된 줄 알아?"

정 이사가 불쾌한 얼굴로 말했다.

"사장님 차도 자차로 돌린다고…. 아, 그리고 유류비 지원도 끊…."

"차 이사 진짜 너무하는구만!"

"이 긴축 재정은 당분간만 적용되는 임시 조치라고는 하는데요."

박 이사의 목소리가 부드러워졌다.

"아. 그래? 임시야?"

"예?"

"임시라면야 뭐…."

"이것 말고도 예산을 쥐어짤 수 있는 곳은 다 짜달라고 합니다."

"그것도 임시지?"

"예. 그건 그렇지만…."

"됐어. 그럼 괜히 나서서 척지지 말자고."

"아니, 박 이사님?"

박 이사는 홍성준 사장과 했던 이야기가 생각났다.

"차 이사는 계속 아군이어야 해. 저쪽에 붙으면 우리 자리가 다 날아가는 수가 있어."

***

차우진은 딥어스테크에 며칠 더 출근하며 다른 곳의 예산을 쥐어짜서 연구소에 넘겼다.

연구소 내부 반발이 가라앉았다.

"예산을 너무 잘 주시는데?"

"개발 일정도 늦춰주셨어."

"이러면 우리가 토목 부서보다 더 대우받는 건가?"

"전체 예산은 그래도 토목이 많지. 하지만 돈을 어디서 끌어왔냐가 중요한 거 아니겠어? 이사님들까지 털어서 가져왔다잖아."

"다음엔 우리가 2팀보다 관심받으면 되지 뭐. 아이템 선정 문제라고 했으니까, 더 좋은 프로젝트가 있으면 되는 거 아니야?"

***

며칠 후에 차우진은 영화 촬영팀의 연락을 받았다.

"자리가 생겼어요? 그럼 가야지요."

차우진은 며칠에 한 번 정도 영화 촬영장에 들렀다.

감독은 차우진에게 자리를 계속 만들어주려고 했다.

그렇다고 같은 엑스트라가 스크린에 반복해서 나오면 영화가 이상해진다. 그래서 며칠에 한 번 가는 게 한계였다.

오늘 촬영장은 야외에서 진행됐다. 주변에 전기를 끌어올 곳이 없어 발전차가 동원됐다. 한쪽에는 밥차도 있었다.

차우진은 점심시간에 도착했다. 그가 밥을 타서 자리에 앉았다.

정예지가 식판을 들고 다가오면서 반가워했다.

"차우진 씨. 오랜만이에요."

"이번에도 오랜만은 아니고 나흘 만입니다."

"에이. 그 정도면 오랜만이죠. 그런데 제가 준 옷은 왜 안 입었어요?"

"아끼느라?"

"어머. 진짜요?"

"당연히 농담입니다."

두 사람에게 서준영이 다가왔다.

"내 배역을 만들어낸 분이 엑스트라를 하니까 괜히 미안해지네요. 그냥 직접 출연하시지."

서준영은 차우진 대신에 오토바이를 타고 온 남자 역할을 맡았다.

나름 잘나가는 배우라서 카메오 정도는 해도 그만 안 해도 그만이다. 그런데 이번 배역은 달랐다. 출연 장면은 짧지만 마음에 들었다.

서준영이 말했다.

"내가 그 멋진 오토바이 액션에 진짜 팍 꽂혔다는 말을 했나요?"

"액션이 아니라 사고였습니다만."

"잘 수습했으면 그게 그거죠. 하하하."

정예지와 서준영은 밥을 먹다가 감독에게 불려갔다.

차우진이 혼자 밥을 먹으며 말했다.

"오윤서 씨와 접점을 만들어야 하는데, 왜 다른 배우들하고만 접점이 생기지?"

오윤서의 촬영은 매일 있는 게 아니다. 차우진도 며칠에 한 번 온다.

차우진이 촬영장을 보며 말했다.

"내가 너무 띄엄띄엄 오니까 그런가? 이러면 곤란한데…."

그는 영화 촬영장에서 오윤서와 접점을 만들어야 한다. 그래야 스톤파인더 사장이면서 지질학자인 정수찬과 연결될 수 있다.

차우진이 이곳에 도착한 건 그의 출연까지 한 시간 정도 남았을 때였다. 그래서 오래 대기할 필요가 없었다.

그건 감독이 일부러 신경 써준 것이다. 하지만 그것 때문에 오윤서와 만날 기회가 더 줄어들었다.

"오윤서 씨 스케줄이 있을 때만 올 방법이 필요한데…."

옆에서 밥을 먹는 사람들의 대화가 들렸다.

"조명 고장 난 거 겨우 고쳤다. 두드리니까 되더라고."

"다행이다. 그거 못 고쳤으면 스케줄 망칠 뻔했잖아."

"근데 스태프 중에 수리 기술자 한 명은 있어야 하는 거 아닐까? 또 고장 나면 어쩌라고."

차우진이 작게 말했다.

"그거 좋은데?"

그가 옆을 보았다. 발전차가 보였다.

지금은 발전차 작동이 멈춘 상태였다. 그 옆에 전력을 분배하는 장비가 보였다.

그 장비에 문제가 생기면 모든 촬영이 불가능해진다.

차우진이 말했다.

"저거 고장 내야겠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