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화. 공작하는 편돌이 (1)
아침이 됐다고 해서 진상이 없지는 않다.
술 취한 진상들 얘기는 아니고. 그 양반들은 술기운에 취해 실컷 진상을 피우다가도 아침 해가 떠올랐다 하면 우웃, 피부가 타오르는 것 같군…! 하며 자기들 집 안으로 스멀스멀 기어들어 가는 흡혈귀 같은 성질을 지녔다. 따라서 아침에는 거의 안 보인다.
내가 말하려는 건 직장인들. 정확히는, 시간에 쫓겨 어쩔 줄 모르는 직장인들에 대해서다.
오전 8시 30분 이후에 찾아오는 이 직장인 양반들은 자의 반, 타의 반으로 순한 맛 진상이 되고는 한다.
외모야 이종족들이니 당연히 다르고, 행동 패턴이나 성별 등도 다 제각각이었으나 한 가지 공통점이 있다면….
"손님, 계산은 어떤 걸로…."
"네? 아, 카드예요. 지금 정신이 없어서…."
이 양반들은 대체로 정신이 없다.
"3,000원입니다. 담아드릴까요?"
"네?"
"담아드릴까요?"
"아, 아뇨. 아뇨. 괜찮아요. 죄송해요, 정신이 없어서 못 들었네."
"손님, 카드 가져가셔야죠."
"네? 어, 아, 죄송해요. 진짜 정신이…."
대충 이런 식이고, 이외에도….
"계산해 주세요!"
리트리버 귀때기가 달린 여자 손님이 계산대 위에 허겁지겁 도시락, 샌드위치, 우유 같은 것들을 올려놓았다. 칫솔 찾던 그 치와와랑 비슷한 종족인 것 같긴 했는데, 외견은 거의 사람에 가까웠다.
순도 10% 코볼트쯤 되겠거니 생각하며 바코드 찍고 가격을 말해줬더니, 바로 만 원을 내밀어 온다.
"9,600원입니다. 담아드릴…."
"거스름돈 안 주셔도 괜찮아요. 수고하세요!"
거슬러주는 3~5초조차 기다리기 힘들었는지, 계산한 것들을 품에 한 아름 안고는 총총 편의점을 뛰쳐나갔다. 꼬리가 축 늘어져 있던 걸 보건대, 지각한 듯했다.
외에 이런 경우도 있었다. 편의점 문 앞까지 달려와서는 폐문 손잡이를 부여잡고 몇 번이나 쾅쾅대는 손님이 있었는데, 대체 왜 저러나 싶어 쳐다봤다가 눈이 마주쳤다. 손잡이를 가리키며 입 모양으로 말하더라. 문이 안 열린다고.
다가가서 옆문을 열어줬다. 머쓱한 표정으로 들어와서는, 똑같이 후다닥 물건 고르고 나가버렸다. 근데 이 양반이 자기 카드를 안 갖고 갔네?
"이런 씨…."
이 시간대에 오는 손님들 대부분이 이렇게 정신줄을 놓고 오는 탓에, 나라도 정신을 차려야 이런 상황이 안 생긴다.
근데 나도 슬슬 졸려서 정신이 없어. 밤샘근무 한 게 얼마 만인지….
포스트잇을 꺼내 메모지에 손님이 왔던 날짜와 시간을 대충 적어 카드에 붙여놓고 포스기 위에 올려놓았다. 점심시간이나 퇴근 전엔 안 찾아올 테니 난 못 만날 것 같고, 인수인계 사항으로 넘겨야 될 것 같다.
이렇게 9시가 딱 지나고 나니, 편의점은 거짓말처럼 조용해졌다.
사거리는 서부극의 회전초가 굴러다닐 법한 황량한 광경으로 변해버렸고, 돌아다니는 차도, 행인도 거의 없다. 억지로 훑어보아도 취객이 부쳐놓은 부침개나 널린 담배꽁초, 캔 쓰레기나 간간이 볼 수 있는 정도다.
행인이 없으니 편의점도 당연히 한산해질 수밖에. 새벽 언젠가부터 점장과의 전화도 끊고 손님만 받았는데, 의자에 앉아 스마트폰을 보니 문자가 와있었다. 8시 50분에 온 문자였다.
[ 안 졸리니? ]
돗자리 깔아주면 바로 누워 잠들 수 있다. 그래도 티는 안 냈다.
[ 괜찮아요 ]
답장은 바로 왔다. 깨어계셨나 보다.
[ 밤샘근무 오랜만일 텐데 고생했어 ]
[ 평소에도 밤에 잠을 잘 안 자갖고, 좀 버틸 만했던 거 같아요 ]
[ 잠 꼬박꼬박 자야지. 나중에 몸 상해. 내가 할 말은 아니지만 ]
[ 저도 알죠. 근데 잠이 안 왔어서…. ]
그간 취직 걱정 때문에 잠을 거의 못 자고 살았으니까. 물론 오늘이라고 꿀잠 잘 자신도 없다. 혈액팩이랑 편자로 저글링하는 꿈꿀 것 같아.
[ 그럼 잠 잘 오는 포션이라도 하나 만들어 줄까? ]
[ 잠 잘 오는 포션요? ]
[ 우리 편의점에서도 팔고 있긴 한데, 효과가 좀 약하거든. 다 대량생산품이고 그래서. ]
이 문자를 받을 즈음, 편의점 정문의 벨이 짤랑이는 소리가 들렸다.
고개 슬쩍 들어 정문을 바라봤는데, 손님이 보이지는 않았다. 왜인지는 몰라도 편의점 벨이 가끔 제멋대로 짤랑이는 경우가 있긴 했던지라, 이번에도 그런 거겠거니 하고 다시 스마트폰 문자에 집중했다.
[ 듣기로는 수면제 비슷한 것 같은데, 처방받아야 먹을 수 있는 거 아녜요? ]
[ 찬이 너희는 그러니? 왜? ]
나 사는 세계는 수면제를 잠깐이 아니라 영원히 잠드는 용도로 사용하는 사람들이 하도 많아서 그렇다. 근데 여긴 이세계잖아?
[ 저 사는 곳은 수면제가 다른 용도로 쓰이고는 하거든요. 그, 영원히 잠드는 걸로. ]
[ 어… 그 생각은 못 해 봤네. ]
[ 저희도 생각만 가끔 하지 실천은 거의 안 해요. 저한테 통할지도 모르겠고. ]
내 체질이 괴상하다는 건 어제 경험으로 잘 알았고, 포션도 마법적인 가공이 되어있을 테니 나한테 먹힐 것 같진 않았다. 헌데 이 얘길 하고 나니, 점장은 오히려 흥미가 돋은 듯했다.
[ 음, 통할지 아닌지는 먹어보면 알 수 있지 않을까? ]
[ 진짜 만드시게요? ]
[ 걱정 안 해도 돼. 오래 안 걸리니까, 교대 전에 하나 만들어서 가져가 볼게. ]
살짝 점장의 편린을 본 듯한 느낌이 든다. 사실 호기심이 왕성한 성격이 아닐까….
"저기여…."
누가 날 부르는 소리가 들렸다. 살짝 코맹맹이 소리였다.
앉은 채로 고개를 들어 다시 한번 정문을 바라봤으나 여전히 아무도 없었다. 잘못 들은 것 같진 않아서 두리번거리다, 계산대 앞에 웬 뿔 두 개가 돋아나 있는 게 눈에 들어왔다. 이게 뭐냐?
일어나서 내려다보자, 꼬마 여자아이 하나가 긴장한 표정으로 날 올려다보고 있는 채다.
그런데 이 꼬마가… 새하얬다.
머리카락도 새하얬고 피부도 새하얬으며, 눈썹은 옅은 흰색이긴 했으나 도드라진 속눈썹은 여지없이 하얀색. 등에는 조그만 날개가 돋아있었는데 이것도 하얀색이었고, 체구에 어울리지 않게 늘어진 큼지막한 꼬리도 하얀색.
복장은 그렇지 않았는데, 빨간색 구두를 신고 옆구리엔 분홍색 파우치 가방이 매여져 있었으며, 신고 있는 양말은 검정색이었다. 이것들까지 다 하얬으면 밀가루 뒤집어쓴 줄 알았을 거다.
"어…."
말을 더듬던 꼬마는 우선 내게 꾸벅 인사를 해왔다. 눈동자는 호박색이었다.
"안녕하새여."
"어… 안녕."
인사를 받아줬는데, 여전히 긴장한 기색이 역력했으며 내게 말을 거는 것도 굉장히 어려워하는 눈치였다. 낯을 가리는 것 같다.
"어… 그게…."
"찾는 게 어떤 거니?"
존대를 썼다간 애가 더 어려워할 것 같아서 말을 편히 했다. 잠깐을 망설이던 꼬마는 용기가 생긴 듯 내게 물어왔다.
"혹시 색종이 잇서여…?"
그건 문방구에서 찾는 게 맞지 않겠냐?
그런데 신기하게도, 색종이를 본 기억이 떠오르긴 하는데 말이다. 기억을 더듬어 세 번째 코너를 가리키며 말했다.
"저기 세 번째 코너 위쪽에 한번 찾아볼래?"
"내."
대답하고 세 번째 코너 안쪽으로 걸어 들어가고는, 30초가 넘도록 나오질 않았다. 왠가 싶어 가봤더니, 색종이가 있긴 했는데 위치가 진열대 꼭대기라 놓인 위치에 키가 닿질 않고 있는 것이었다.
까치발을 한 채로 끙끙대며 손을 뻗다가, 날 보고는 살짝 울먹이는 소리로 말해온다.
"제송해여, 손이 안 닿아여…."
"그러냐…."
색종이를 집어 든 뒤, 카운터로 함께 걸어와서 바코드를 찍었다. 1,500원이란다. 꼬마는 분홍색 파우치를 한참 동안 뒤적거리다 꼬깃꼬깃 5,000원짜리 한 장을 꺼내 내게 내밀었다.
그러고는 또 주저하기 시작한다. 난 나대로 꼬마를 내려다보고 있다가, 스쳐 지나가듯 뭔가를 깨달았다.
이 꼬마, 드래곤인 것 같다.
샐러맨더와 드래곤이 분류상으로 같은 파충류이긴 할 텐데, 샐러맨더랑은 느낌이 좀 달랐다. 샐러맨더가 뱀이랑 비슷했다면, 이 꼬마는 딱히 뭐랑 비슷하다 정의를 내리기가 좀 애매했기 때문이다.
실사 사진보다는 그림에서 공통점을 찾기가 더 쉬울 듯한, 그런 애였다. 곤란하다는 표정으로 안절부절못하던 꼬마가, 침을 꿀꺽 삼키고는 다시 내게 물었다.
"그… 혹시, 가위도 있나여."
"있을걸? 잠깐만 여기 있어 봐."
커터칼은 확실히 봤는데, 가위가 있었는지는 가물가물하다. 커터칼이 있는 코너로 가서 찾아보려 했는데, 꼬마는 여기 있으란 말을 못 들었는지 내 뒤를 쫄래쫄래 따라왔다.
그래서 같이 찾아봤다. 커터칼 옆에 가위가 진열되어 있긴 했다. 3,600원짜리.
"여기 있네."
"내. 근데… 3,600원이내…."
아까 꼬마가 5천 원짜리를 내밀던 걸 떠올렸다. 색종이랑 가위 합쳐서 5,100원. 얘가 가져온 게 딱 5천 원이라면, 100원이 모자라서 이건 못 산다.
"돈이 모잘라여…."
"미안하다, 꼬마야. 내가 가격을 매기는 게 아니라서."
내 추측이 맞은 듯 꼬마는 굉장히 난감한 듯한 눈치였다. 잠깐 생각해 보다, 100원이라면 내가 줘도 되지 않을까 싶은 생각이 문득 들었다. 손님들이 안 가져간 거스름돈이 제법 됐으니까.
"100원이면 내가 그냥 줄 수 있는데."
"아녀, 안 주셔도 대여."
"안 주면 안 될 것 같아서 그렇지."
"엄마가, 다른 사람 돈은 함부로 받는 거 아니랬서여. 큰일 난다구."
"어머니께서 뭐 하시는 분이길래?"
"회사 다니구 계세여."
"그러냐."
내가 밤에 팔 집어넣은 드래곤 비늘이 귀농한 드래곤들 거라고 해서, 난 이 세계 드래곤들은 다 밀짚모자 쓰고 괭이질하고 다니는 줄로만 알았다.
근데 정상적으로 회사 다니는 드래곤들도 있나 보다. 확실히 자가용 없어도 날아다니면 되니까 출퇴근 편하긴 하겠다.
이후에 내가 졸려서 그랬던 건지, 애가 난감해하는 게 측은해서 그랬던 건지는 몰라도, 내 입에서는 의도치 않게 질문이 계속 튀어나왔다.
"그런데, 색종이랑 가위로 뭐 하려고?"
"제가여, 어제 유치원에서 배운 게."
"어. 배운 게."
"어린이날 말구, 어버이날이라는 것두 있대여."
그러고 보니 다음 주부터 5월이다. 난 어린이도, 어버이도 아니어서 신경 안 쓰고 산 지 꽤 됐지만.
"어린이날은 알구 있었는대, 어버이날이 있는 줄은 처음 알아서, 신기했어여."
"신기해할 만하지."
"근데여, 어린이날에는 엄마가 맨날 선물 주셨는대, 저는… 어버이날에 엄마한테 선물을 해드린 적이 없어서여… 그래 갖구…."
이 꼬마가 색종이랑 가위를 사려는 이유가 이것인 듯했다. 카네이션을 만들어 어머니께 드리고 싶다는 것.
그런 거면 딱히 가위가 없어도 종이접기를 하면 되지 않냐고 넌지시 물어봤으나, 꼬마는 자기 손을 내밀며 대답했다.
"저어가여… 종이접기를 잘 못해여…."
조막만 한 손에는 새하얗게 발톱이 돋아나 있어, 이래서야 종이를 접기는커녕 발톱으로 다 찢어먹지나 않으면 다행일 듯싶었다. 염병, 이 세상은 내 상식이 좀 통할만 하다 싶으면 이런 어처구니없는 상황이 튀어나와.
"내가 미안하다…."
"아니애여, 저어가 못하는 건대여 머…."
그러고선 잠시 정적.
꼬마는 고민하는 듯했다. 어머니께 선물을 해드리고는 싶은데, 돈이 없어서 가위를 살 돈이 없다. 근데, 매장에서 가위를 팔지는 않아도 쓰는 건 있었던 것 같은데….
"꼬마야."
"내."
"가위 빌려주는 건 괜찮냐?"
11화. 공작하는 편돌이 (2)
유치원 다니는 꼬마가 어머니 선물 만드는 걸 도와주는 게 편돌이의 업무냐 묻는다면, 아니다. 그냥 돈 없으면 가라고 말한 뒤에 스마트폰 마저 하면 돼.
사실 손님한테 가급적이면 뭘 해주지 않는 게 오히려 좋다. 받는 사람 입장에선 그게 당연한 줄 알기 때문이다. 컵라면 사가는 단골한테 꼬박꼬박 젓가락 챙겨주다가, 어느 날 안 챙겨주면 왜 젓가락을 안 챙겨주지? 하며 내 얼굴 뚫어져라 쳐다보고 있고 그래. 호이가 지속되면 둘리인 줄 안다.
근데 난 지금, 씨….
"그런대, 엄마가 어떤 꽃을 좋아할까여?"
"잠깐만 있어 봐. 일단 꽃이 뭐뭐 있나 좀 보고…."
유치원생 드래곤 여자아이가 색종이로 카네이션을 만들려는 걸 도와주고 있다. 일이 어쩌다 이렇게 된 거지?
지금으로부터 딱 5분 전에, 난 가위만 빌려주고 말 생각이었다. 그런데 미처 생각을 못 했던 게, 물건을 빌려주면 반납을 받아야 한단 말이다. 얼마나 걸릴지도 모르는 마당에 집에서 종이 다 오리고 가져오라 할 수도 없고.
이걸 떠올렸을 땐 이미 늦은 뒤였다.
"아조씨, 여기서 잠깐 쓰고 드려두 되나여…?"
이것 자체는 문제가 없다. 어쨌든 색종이 사긴 샀잖아. 손님인데, 손님이 있겠다는 걸 내가 뭘 어쩔 수 있겠는가.
"엄청 빨리 할깨여…."
"안 서둘러도 돼. 대신 여기에 어디 사는지랑 전화번호 좀 적어주련?"
"내."
"그리고 나 아조씨 아냐, 꼬마야. 아직 20대라고."
"그럼 오빠애여…?"
코맹맹이 소리로 오빠라 말하는 걸 듣는 순간, 귀가 달다 못해 썩어 죽을지도 모르겠단 생각이 들었다. 귀 호강해서 좋기는 한데, 내가 일찍 결혼했으면 이만한 애가 있었을 거 아냐…?
이런 씨, 내가 늙긴 늙었네….
"그냥 아저씨라고 해라."
"내, 아조씨."
이후에 명찰 같은 걸 꺼내서는 번갈아 바라보며 명부에 서투르게 글씨를 적는다. 쥐뿔 알아볼 수는 없었지만 적어줬다는 데에 의미를 두기로 했다. 그러고는 내게 다시 한번 꾸벅 인사.
"감사해여."
이후 아이가 테이블 구석에 자리를 잡고 앉자, 앉은 의자의 등받이 밑으로 큼지막한 꼬리가 불쑥 튀어나와서는 까딱거린다. 의자에는 어떻게 앉나 했는데 너는 다 계획이 있구나?
어쨌든 내 할 일은 다 끝났다.
퇴근까지 50분. 그동안 스마트폰이나 들여다보려 했는데, 뭘 보려 하든 도저히 집중이 되질 않았다.
왜 집중이 안 될까, 아이를 바라보며 논리정연하게 생각을 해봤다.
저 색종이는 15장짜리다. 즉, 15번밖에 기회가 없다는 뜻이다. 그 15번의 기회를 아이가 잘 살릴 수 있을 것 같지도 않았다. 당장 밑그림도 안 그리고 있었으니까.
게다가 시간도 오래 걸릴 거고. 50분 뒤에 점장과 교대해야 하는데, 저 애가 있으면 점장님이 근무하면서도 아무래도 신경이 쓰이지 않겠는가.
다 떠나서, 유치원 애가 종이를 오려봐야 얼마나 잘 오리겠어? 다 찢어먹고 울지나 않으면 다행이지. 우는 애를 달래는 것보단, 차라리 내가 지금 도와주고 끝내는 게 훨씬 편하지 않을까?
논리정연하게 생각을 마친 뒤, 30cm 자와 연필을 꺼내 들고 아이에게 다가갔다.
"꼬마야."
"아. 내, 아조씨."
"그런데 너, 잘 만들 자신 있냐?"
내 물음에 이 꼬마 용 소녀는 고개를 푹 숙이려는 듯하다, 다시 들고는 대답했다.
"저, 저 잘해여. 유치원에서, 도장 많이 받았어여."
"그렇다기엔 밑그림도 안 그리고 있잖어."
"밑그림이 뭐애여…?"
"종이 오리는 선을 미리 그리는 거야. 그거 보고 오리면 더 잘 되거든."
말하며 슬쩍 옆에 앉았다. 될 대로 돼라. 내가 앉혀놨으니 내가 보내고 만다.
"저, 괜찮아여. 안 도와주셔도 대여. 혼자 할 수 있어여."
"그냥 그림 그리고 싶어서 그런 건데? 내가 그림 그리면, 네가 오리면 되잖아. 이것도 도와주는 건가?"
"글…쌔여…."
"네가 오리는 건데도?"
"그른가…?"
유치원생 애 다루는 거야 쉽지, 내가 나이가 몇인데. 내가 네 나이 때에는 말이야, 어? IMF가 터지고, 다리가 무너지고 그랬어. 알어?
아이가 긴가민가하며 끙끙대는 사이, 난 나대로 그려야 할 꽃이 뭘까를 생각해 봤다. 어버이날 드리려고 만드는 거니 빨간색 색종이로 카네이션 만들면 될 것 같고, 나머지는 뭔 꽃을 만들어야 되나….
"너는 어떤 꽃이 좋냐."
"카네이션 만들려구 그랬는대여…?"
"카네이션이 녹색, 파란색이면 좀 이상하잖아."
"어… 아, 그렇내여."
"그러니까 녹색으로는 이파리랑 줄기 만들고, 파란색으로는… 음, 물망초?"
"물망초두 꽃이애여?"
"사실 나도 잘 몰라. 이름에 물 들어가니까 파란색 아니겠냐?"
"음… 그런대, 엄마가 좋아할진 잘 모르겠서여…."
물망초를 넘어, 엄마가 무슨 꽃을 좋아하시는지를 잘 모르겠단다. 자기는 벚꽃이 좋지만, 엄마 드리는 거니 엄마가 좋아할 꽃을 만들어 드리고 싶다고.
그런 이유로 뭘 그려야 될지를 검색하고 있는 게 현 상황이다. 물론 더 쉬운 답이야 있다. 5만 원짜리를 잔뜩 접어 꽃다발을 만들어 드리는 거지. 분명 입이 귀에 걸리실걸?
근데 재료비가 모자라서 그건 못 만들 것 같고. 인터넷으로 종이 색깔별 꽃들을 찾아보자, 온갖 해괴한 이름의 꽃들이 우후죽순 튀어나왔다.
그중 적당히 이뻐 보이는 걸 하나씩 골라, 색종이에 밑그림을 그리기 시작했다. 참고로 물망초는 파란색이 맞았다. 색종이 색이랑은 좀 다르긴 했지만….
대략 3분쯤 걸려 적당히 데포르메한 그림을 건네자, 아이는 바라보며 똘망똘망 눈을 빛냈다. 어두운 배경에 그린 탓에 난 잘 보이지도 않았는데, 드래곤은 시력이 좋은가보다.
"마음에 들어?"
"내에. 저기, 그. 잠깐만여."
갑자기 뭐가 떠올랐는지, 벌떡 일어나서는 쪼르르 과자 코너로 달려간다. 그림 두어 장을 더 그리는 사이 아이가 가져온 건 제법 큰 초콜릿이었다.
"이거 얼마애여?"
"그거 2천 원인데. 사게?"
"내."
"돈 주면 바로 계산하고 올게."
2천 원을 받아 계산한 뒤 다시 건네자, 아이는 주섬주섬 초콜릿을 뜯어서는 반을 뚝 나누려 했다. 허나 힘 조절이 잘못된 탓에 초콜릿이 대각선으로 뿍 부러져 버렸다.
아이는 망설임 없이 둘 중 큰 조각을 내게 내밀었다.
"저이, 먹으면서 해여."
허어… 싶었다.
"네가 큰 부분 먹어. 네가 산 거잖냐."
"아조씨 키가 더 큰대, 아저씨가 큰 부분 먹어여."
"한창 클 나이인데 네가 먹는 게 낫지 않겠어?"
"아녜여, 이거 많이 먹으면 이빨 썩는대여."
그럼 내 이빨은 괜찮고?
난 도저히, 차마 이걸 넙죽 받을 수가 없었다. 7살 꼬마의 전 재산의 2/3를 털어 산 초콜릿의 2/3을, 대체 어떤 맛으로 먹어야 하냐. 자본주의의 참맛?
그래도 이 꼬마는 내가 꼭 초콜릿을 먹어줬으면 하는 듯했다. 거절할 방법이야 산더미처럼 떠오른다만, 결과가 감당이 안 됐다.
그래서 받았고, 내친김에 한입 베어 문 뒤에 말해줬다.
"달달하네."
그제야 만족스러운 얼굴로 환하게 웃는다.
"달달하져?"
그래, 꼬마야. 달아 죽겠다.
* * *
이후로 이렇다 할 대화는 없었다. 나는 금방 밑그림을 다 그려 여유로웠으나, 아이가 가위질에 워낙 집중한 탓에 말을 하질 않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옆에서 가만히 지켜만 봤다. 해가 더 떠올랐다 싶었을 즈음 블라인드 쳐주고, 간간이 새 지저귀는 소리들도 좀 들어주고.
그러다 마침내 점장이 왔다.
"찬아, 나 왔어."
교대 시간인 10시보다 조금 이른 시각에 오긴 했는데, 얼굴을 보고는 잠깐 저게 대체 누구지…? 하며 얼을 탔다. 목소리 듣고 나서야 겨우 점장인 줄 알았고. 한 오만 년 만에 보는 것 같아.
"오셨습니까."
"어유, 그새 얼굴이 반쪽이 됐네."
"진상들이 제 얼굴을 반으로 쪼갰습니다…."
"다른 세계 온 것도 서러운 일이었을 텐데, 진짜 고생했어. 얼른 집에 들어… 응?"
사각사각 종이 잘려 나가는 소리에 점장이 고개를 갸웃했다. 주변을 두리번거리다 테이블을 바라본 점장은, 소녀의 형상을 한 흰색 덩어리를 뚫어져라 쳐다보다 내게 물어왔다.
"저 애는 누구야? 손님?"
"인수인계하면서 말씀드릴게요."
편의점 인수인계는 특별한 건 없다. 포스기 잔고 확인한 후에 영수증 뽑아놓고, 담배 개수 세고.
외에는 후번 근무자가 알아둬야 할 내용들을 적당히 말해주면 된다. 뭘 반품해야 한다든지, 누가 외상하고 튀었으며 언제쯤 온다 했으니 오면 외상값 받으라든지, 뭐 이런 거.
지금은 카드 분실 외엔 별것 없어서 편했다. 손님 한 명이 카드를 찾으러 올 수도 있다는 걸 일러준 뒤, 드래곤 요조숙녀가 왜 저기서 공작 숙제를 하고 있으며, 그걸 내가 왜 도와주고 있었는가를 설명했다.
이에 대한 점장의 반응은 심플했다.
"?"
"그, 저도 이상하단 건 아는데요. 어쩌다 보니 이렇게 됐…."
"아냐, 그건 이해가 돼. 이해가 되긴 하는데… 저 애, 낯 엄청 가리지 않았니?"
아예 확신하듯 내게 물어온다. 확실히 낯을 가리긴 했는데, 저 나이대 애들은 보통 어른한테 말 거는 걸 무서워하잖아. 난 그런 건 줄 알았다.
"저 아이, 내가 보기에는 순혈 드래곤인 것 같아서."
"그게 딱 보면 보이는 건가 봅니다."
"보통은. 혼혈일 경우에는, 음… 저렇게 머리카락이나 피부가 뚜렷하진 않거든. 다른 색이 섞여 있고 그렇지."
"전 처음 봐서 잘 모르겠긴 한데… 그게 왜요?"
"순혈 드래곤, 그것도 어린 여자아이면… 낯을 진짜, 엄청 가릴 텐데…."
이후에 점장이 설명하길, 드래곤은 알에서 태어난단다.
알 안에서 거치는 성장기가 3년. 그 3년간을 깜깜한 어둠 속에서 보내며 신체의 여러 부위 외에 자연스럽게 발달하는 기관이 하나 더 있는데, 바로 마력을 감지하는 기관이다.
"그게 어딘데요?"
"뿔. 엄청 예민한 부위라, 건드리면 브레스 뿜고 그래."
"저도 딱히 건들 생각은 안 드네요. 그런데 그게 낯을 가리는 거랑 상관이 있나요?"
"어린 드래곤은 그게 제어가 잘 안돼서, 다른 종족의 마력을 무의식적으로 감지하게 되는 거야. 주로 색의 형태로 말이야."
마력에도 여러 종류가 있나 본데, 이건 당장 물어볼 건 아닌 것 같고.
"그 색이 어떤 색이길래."
"감지한 마력의 주인의, 어… 마음이 보인다고 보면 돼. 짙은 회색 마력을 가진 고블린은 말 그대로 속이 시커먼 거고, 분홍색 마력을 가진 서큐버스는… 좀… 개방적인 마인드인 거고."
좀 이해가 될 듯하다. 쉽게 말하면, 저 애는 길 가다 행인을 마주치면 그 행인의 성격이 보인단 거잖아. 인사과 취직하기는 쉽겠네.
"그런데 문제가, 어린애는 그걸 봐도 잘 모른단 말이야. 색이 보이긴 해도, 그걸로 성격을 판단하는 건 인생 경험 문제거든."
"그러니까, 색이 밝다고 '저 사람은 마음씨가 착할 거야' 하는 게 아니라, 색 밝은 사람이랑 지내다 보면 '아, 색 밝은 사람은 마음씨가 착하구나'라고 알아서 깨닫게 된다, 이런 얘기시죠?"
"그거지. 이해가 빠르네."
칭찬받으니 기분이가 참 좋다. 잠깐 아이를 바라보던 점장이 말을 이었다.
"밝은색 마력을 지녔다 해서 다 착한 게 아니기도 하고."
"그래요?"
"예를 들면, 범죄를 저지르면서도 그게 범죄라는 걸 모르고 자기가 정당하다 생각하는 이종족이 있다고 치면, 그 이종족이 하는 짓은 몰라도 마력색은 밝을 거야. 성격이 잘못된 게 아니라 사고관이 잘못된 거니까."
들어도 잘 모르겠어서 나름대로 생각해 봤다.
한 조폭이 피 흘리는 동료를 끌어안은 채로 다른 조직 조폭의 머리를 도끼로 후려쳐 반 토막 내는 상황이라면, 그 조폭은 성격이 착한 걸까 나쁜 걸까? 동료를 아끼니 착한 건가, 사람을 죽이고 있으니 나쁜 건가.
적어도 하나는 짐작이 됐다. 마력 감지로 마음을 보는 게 판별에 도움은 줄 수 있어도, 절대적인 기준까지는 못 된다는 것.
"혼혈 드래곤은 발달이 좀 덜해서 괜찮은데, 순혈은 뿔이 진짜 엄청, 엄청 민감해."
"그건 좀 피곤하겠습니다."
"그래서 가정교육도 엄청 엄격하게 하고. '어떤 색의 마력을 보든 간에 함부로 따라가지 말고, 말도 쉬이 걸지 마라.' 이걸 태어나서부터 계속 듣고 살았을 테니, 당연히 낯을 가리게 될 수밖에."
"분별력이 생기기 전까지는 계속 듣고 사는 거고요?"
"아무래도 그렇겠지…?"
"아조씨, 다 오렸어여―"
막 색종이를 다 오린 듯한 아이가 계산대로 다가왔다. 나풀대는 종이꽃을 양손으로 쥐며 헤헤 웃다가, 점장을 보고는 그대로 굳어버렸다.
"으… 아, 안녕하새여."
"안녕?"
점장이 웃으며 인사를 받아줬으나, 아이는 불안한 듯 이리저리 두리번거리기만 했다. 숨을 곳을 찾으려는 듯했다. 그러다 마침내 찾아낸 곳이, 하필이면 내 등 뒤였다.
내 바지를 꽉 붙들고는 고개만 빼꼼 내밀어 점장을 바라본다. 숨는 건 좋은데 발톱 때문에 다리가 따갑다.
아이를 바라보던 점장은 내게 시선을 돌리며 말했다.
"그런데 찬이 너는 마력이 없잖아?"
"제 생각에는요."
"그리고 이 아이 엄마는 색이 없는 이종족을 따라가지 말라고 교육하진 않았을 테니, 그게 낯을 덜 가린 이유가 되지 않았나 싶어. 이 세상에 마력 없는 사람들 중 건강한 건 찬이 너 하나뿐일 테니까."
그게 그렇게 연결이 되나? 궁금해서 물어봤다.
"꼬마야. 네 눈엔 내가 어떻게 보이냐?"
"어… 깨끗? 음…."
저 두 글자 말고는 도움 되는 말은 못 들었다. 더해서 묻지는 않았으나, 아이는 좀 더 나아가 점장을 뚫어져라 바라보며 어휘를 떠올리기 시작했다.
"그리고여. 아주머니는, 으음… 어…?"
"꼬마야."
점장이 중간에 말을 가로막았다. 내 앞으로 와서는 몸을 숙이고 앉아, 인자하게 웃으며 말을 건넸다.
"일단 난 아주머니가 아냐."
목소리엔 뼈가 실려있었고. 이젠 농담으로라도 나이는 못 물어보겠다.
"그럼 언니애여…?"
"응. 언니. 그리구 이 오빠가, 잠을 한숨도 못 잤어."
"그럼 안대는대. 키 안 큰다구 햇는대…."
"괜찮아, 이제 집에 가서 잘 거거든. 그러니까, 나중에 다시 올래?"
점장 말에 꼬마가 날 올려다보았는데, 표정이 어째 죽을병 걸린 사람이라도 보는 듯했다. 손에 들려있는 색종이를 내려다보며 대답했다.
"오린 건 이제 도화지에 붙이면 될 것 같다, 꼬마야."
"내."
"근데 들고 다니면 상하니까, 나한테 맡기고 일단 집에 가. 아침에 올 수 있을 때 오고."
"그래두 대여…?"
점장 얼굴을 슬쩍 쳐다봤다. 괜찮다는 얼굴이었다. 상사가 괜찮다니까 괜찮겠지, 뭐.
고개를 끄덕이자, 꼬마가 테이블로 달려가 주섬주섬 종이를 모아서는 내게 내밀었다. 대부분 삐뚤빼뚤하긴 했지만, 내가 부모라면 이 점에 더 감동할 것 같다. 수제인 거잖아.
"저어가여, 내일은 피아노 학원 가야대서 못 와여. 죄송해여."
"죄송할 거 있냐."
"그 대신여, 다음에 오면 과자 살깨여."
"괜찮아. 마음만 받을게."
"마음만…? 어뜨캐여…?"
"관용적인 표현이야, 꼬마야."
"과뇽적…?"
아이는 몇 번이나 고개를 갸웃하다, 점장의 얼굴을 슥 바라보고는 꾸벅 인사를 했다. 그러고는 나한테도 꾸벅 인사를 하고는.
"안녕히 주무새여."
말하고 나가버렸다. 그래, 드디어 퇴근한다. 퇴근한다고! 안녕히 주무시러 간다!
싶었으나 점장은 곧바로 블라인드를 하나씩 치기 시작했고, 이어서 편의점 문까지 잠가 버렸다.
"점장님, 문은 갑자기 왜 잠그십니까?"
"지금부터…."
이어서 계산대로 들어간 점장이 내게 손짓해 온다. 다가가니, 밑의 서랍장을 열어둔 채였다. 안에는 버튼이 가득했고 말이다.
"공간이동 할 거거든. 좀 도와줄래?"
12화. 돌아가는 편돌이
자, 이제 집에 갈 시간이다.
그런데 문제가 두 개 있다. 하나는 난 집에 가는 방법을 모르겠다는 점이었고, 다른 하나는 점장도 역시도 정확한 방법을 모르는 눈치였다는 것이다. 미칠 노릇이다.
이 탓에 내가 집으로 돌아가는 방법은 오로지 추측으로 이뤄질 수밖에 없었는데, 다행히도 점장이 생각해 둔 게 있다고는 했다. 새벽에 전화 끊은 뒤로 반나절 가까이 나 집 보내는 방법만 고민했다고.
"반나절 넘게 제 생각만 하셨다니 감개가 무량합니다, 점장님."
"찬이 퇴근은 시켜야지. 아니면 여기서 계속 지내게?"
계속 지낼 생각 없고, 그럴 수도 없다. 내 집도 없는 딴 세상에서 뭘로 어떻게 버텨?
다 떠나서, 노트북 인터넷 검색기록도 다 지워야 된다. 나 진짜 무조건 집에 가야 돼, 안 그러면 큰일 나….
"근데 제가 뭘 도와드려야 되는 거예요?"
"일단 여기에 집 주소 좀 적어볼래?"
말하며 점장이 내민 건 작은 수첩이었다. 검은 수첩 표지에는 작은 문양이 그려져 있었는데, 사무실 CCTV 근처에서 보고 마법진이라 추측했던 문양들과 똑같은 모양이었다. 이게 마법스크롤 같은 건가 보다.
받아 들어 주소를 적은 뒤 건네자, 점장은 고개를 갸웃했다.
"확실히 처음 보는 주소긴 한데… 이게 맞는 거지?"
"도로명 말고 번지로 적을까요?"
"번지?"
"농담이구요. 그거 제 집 주소 맞아요."
"헷갈리게 하지 마, 찬아. 나 진지하단 말야."
말하며 뾰로통한 표정을 짓는 점장. 보고 있자니 더 긴장이 안 되는데 말야.
투덜대면서도 점장은 내가 집 주소를 적은 용지를 뜯어 손에 쥐고는, 이마에 맞대고 잠시 눈을 감았다. 그런 뒤 눈을 뜨고 손을 펴자, 손에 쥔 용지는 온데간데없이 사라져 있었다.
"오…."
"이제 좌표 등록은 끝냈고, 버튼만 누르면 이동할 텐데… 아마 내가 눌러봐야 제대로 작동 안 할 거야."
"그것도 원리가 있나 봅니다."
"공간이동에 세 가지 요소가 들어가거든. 좌표, 계산식, 시전자. 좌표는 여기가 네 집 주소가 맞다면 정상적으로 작동할 거고, 계산식도 수천 번은 써온 계산식이니 문제는 없을 거고…."
소거법으로 보면 시전자에 문제가 있겠다 싶었다.
"시전자가 공간이동을 시전할 경우엔 목적지에 대한 명확한 정보, 이동하고자 하는 의지가 필요해. 그런데, 이 세상에 너 사는 곳에 대해 제일 잘 아는 사람이 누구겠어?"
"저겠죠."
"그러니 버튼도 찬이 네가 누르는 게 맞는 것 같아."
내 세상에 대해 제일 잘 아는 게 나라서 그 시전자도 내가 되어야 한다, 점장은 이렇게 결론을 내린 듯했다. 여기까지는 나도 이해가 됐다. 이해는 됐는데….
"이거… 마법이잖습니까."
"응."
"그리고 전 마법이 안 통하는 체질이고요. 제가 한다고 제대로 될 것 같진 않은…."
"그것도 나름대로 추측해 봤는데, 드래곤 비늘 정화했을 때 기억나?"
"네."
"찬이 네가 아예 마법이 안 통하는 체질이었으면 단순히 정화만 되고 끝나진 않았을 거야. 비늘에 담겨있던 마력까지 다 증발해 버렸겠지."
듣고 나서 잠깐 멍해졌다가, 등골에 오한이 싸악 밀려왔다. 자칫 잘못했다간 그 비늘이 다 못 써먹게 됐단 소리 아냐?
"점장님, 그때 무슨 확신이 있긴 하셨던 거예요?"
"있었지. 조금."
"세상에. 뭔 확신 조금 가지고 수천만 원을 태우십니까."
"그땐 신경 안 썼어. 어차피 네가 정화 안 해줬으면 못 쓸 물류였는걸."
"것도 그렇네."
"그때 느꼈던 게, 네 체질이 너나 내가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복잡할지도 모른다는 거. 그걸 네가 여기에 알바하러 온 거랑 엮어서 한번 생각을 해봤는데…."
잠시 말꼬릴 늘이던 점장이 날 올려다보며 물었다.
"혹시 여기 알바하러 올 때 무슨 생각 하고 있었어?"
알바 구하는데 뭔 생각까지 해, 그냥 답답했지.
코로나로 회사 박살 나고, 다른 회사들도 박살 나고, 알바할 곳들도 죄다 박살 나서 먹고 살길이 막막해져서, 이러다 집세에 보험료도 못 내게 되는 거 아닌가 하며 미쳐버릴 지경이었다.
교통비도 아껴야 했기에 집 근처 알바를 구하려 한 거고, 무슨 일이건 근무 시간이 어떻게 되어 먹었건 상관없으니 어쨌든 일을 해야만 한다는 마음만 가득했던 것 같다. 이것도 생각이라면 생각인가.
짧게 요약해 답했다.
"절박했어요."
"…이상한 거 물어봐서 미안하구, 찬이가 여기 오게 된 것두, 어찌 됐든 찬이 의지가 섞여 있을 거란 얘기야. 비늘 정화한 것도 그랬을 거고. 어떻게 생각해?"
"뭐든 되면 좋겠다 생각하고 있긴 했습니다."
"그치. 그걸로 생각해 본 게 찬이 체질은 찬이 의지에 따라 조절이 가능하다는 거. 찬이가 집에 가겠다는 생각을 하고 있으면, 어… 체질도 잠깐은 얌전히 있어 주지 않을까 싶어."
내 속마음은 글쎄, 였다. 태양인 소양인 같은 사람 체질이 억누른다고 억눌리는 그런 게 아니잖아. 드는 걱정이 있어 물어봤다.
"얌전히 안 있으면 어떻게 됩니까."
"작동을 안 하겠지. 최악의 경우엔… 장치 자체를 아예 못 써먹게 될 거고. 마력이 사라질 테니까."
"점장님은 이게 제대로 될 거라 생각하세요?"
"내 생각은 그래."
난 자신 없었다. 집 가려다 점장 생계마저 박살 내게 생겼네.
"…그래도 한번 해볼게요. 괜찮으시겠어요?"
"응."
장치 주인이 허락했으니 해볼란다. 이거 아니면 내가 집엘 못 가는데 어떻게 해?
"근데 의지란 걸 어떻게 가져야 하는 겁니까?"
"찬이가 집에 가고 싶은 이유가 있을 거잖아. 좋은 추억이라든가, 뭐 그런 거."
"그런 걸로 돼요?"
"뭐… 집 가는 데에 특별한 이유가 필요하진 않잖아?"
그렇긴 하네.
근데 내 세상이 어떤 곳인지는 나도 잘 모른다. 최소한, 30줄도 안 들어선 풋내기가 쉽게 정의 내릴 수 있는 곳은 결코 아니다.
그러니 내 식대로 생각하기로 했다. 29살 먹은 백수 청년에게 있어, 지금 세상은….
거지 같은 곳이었다.
직장은 진즉에 망해버렸고, 난 일자릴 못 구해 주 84시간 근무하는 편돌이가 되어버렸다. 뭔 망할 놈의 세상이 사람을 찔러 죽이려는 것도 적당히 하질 않는 탓에, 나날이 모난 가시만 늘어 발 디딜 틈조차 보이질 않는 곳.
어른이 된 이후로 좋은 일보단 힘든 일이 배로 많았고, 어렵게 쌓은 모래성마저 훅 불어내는 허망한 곳. 힘들게 일하고 돌아온 날 기특하다며 반겨주는 대신, 6평 단칸 원룸에 처박아 버리는 그런 곳. 내가 느끼기에 세상은 그런 곳이었다.
그래도, 그래도 말이다.
살면서 행복했던 순간도 분명 있었던 세상이었다.
어렸을 적, 초등학교 여름방학 방학식 날. 방학식 끝나고 문방구에서 친구들이랑 200원짜리 아이스크림 사 먹던 기억. 문방구 뒤편의 메달 뽑기 기계에서 대박이 터져버렸고, 난 영웅이 되었다.
아이스크림 들고 여럿이서 비포장도로를 걷다가, 한 친구가 자기 집에서 놀자고 하길래 아무 생각 없이 놀러갔었지.
친구 어머니께서 수박을 대접해 주셔서, 수박 먹으면서 너는 수박씨를 먹니 안 먹니 얘기하고, 발라먹는 거 귀찮은데 왜 씨를 굳이 발라먹냐며 말씨름도 하고, 이러다가도 금방 풀려서는 공 차고 놀고 그랬어.
매미 우는 소리, 선풍기 돌아가는 소리, 친구 어머니께서 그릇 설거지하는 소리 외에는 들려오지 않았으며, 안방에 누워 낮잠을 잤었던 아무런 목적의식도, 의미도 없었던 하루.
짧았던 그 하루가 내겐, 정말 미치도록 그립다.
억지로 의미부여 하는 걸지도 모른다. 그 친구들 중 몇은 이미 결혼을 해버렸고, 몇은 연락이 끊긴 지 오래니까.
아니면 벌인지도 모른다. 그 순간을 그때에는 아무렇지도 않게 여겼기 때문에, 지금 와서 그만큼 더 소중한 순간이 되어버리고 만 거다.
하지만 그날이 내게 딱 한 가지는 각인시켜 줬다. 내게도 행복했던 순간이, 그리워할 수 있는 순간이 있긴 했었다. 분명 있었단 말야.
그러니 돌아갈 거다.
행복했던 순간이 분명 있었기에, 어떻게든 버텨나가다 보면 분명 행복해질 순간이 다시 찾아오지 않겠냐는 믿음을 주는 곳이라, 지금은 돌아간다.
당장은 그 각이 전혀 보이지 않긴 하지만… 이럴 때면 다들 으레 하는 말 있잖은가. 인생 길다, 뭐, 어쩌고.
공감한다. 삶은 길다.
그러니 살다 보면, 분명 한 번쯤은 또 좋은 날이 오겠지….
"...."
"끝났니?"
"대충은요."
이쯤 생각하면 되겠다 싶어 버튼을 눌렀다.
아무런 소리도 빛도 나지 않아 점장을 바라봤으나, 문제가 있다는 표정은 아니었다. 십수 초가 더 흐른 뒤, 점장은 정문의 블라인드를 슬슬 걷었다.
그렇게 정문 밖에 펼쳐진 광경은… 내 집 근처의 사거리였다. 드디어.
"어때?"
"잘 된 것 같아요."
"이걸로 두 개 알았네. 찬이 체질은 찬이 의지에 따라 컨트롤이 가능하다는 거."
"나머지 하나는요?"
"내가 납치범이 되진 않겠다는 거."
말하고는 해맑게 웃길래, 나도 따라 웃었다. 점장이 잠금쇠를 풀어 열어준 문으로 나가려다, 제법 괜찮은 생각이 떠올라 입에 담았다.
"잠깐 구경이라도 해보실래요? 점장님도 다른 세계는 처음이실 것 같은데."
"나중에. 30분 넘었는데, 자리 너무 오래 비우면 신용 떨어지잖아."
"그건 그렇네요. 아, 그리고 또…."
"응."
"나중에 제가 다시 여기 올 수 있을까요?"
묻자, 점장은 고개를 갸웃했다.
"안 오게?"
"와야죠. 하루 일한 것도 아깝고, 저 금일봉 받고 나를 만큼 양심 없는 놈 아닙니다."
"내 생각도 그래."
"그냥 어떻게 오냐, 이거죠."
"나야 모르지. 내가 찬이를 부른 게 아니라, 찬이가 날 찾아온 거니까."
이후, 점장이 갑자기 떠오른 듯 기다려 보라 하고는 계산대로 가서 뭘 가져왔다. 작은 유리병에, 내용물 색이 좀 밝았다.
"찬이 집 보낸다고 주는 걸 깜박했다. 이거 포션."
"허어, 이걸 진짜 만드신 거예요?"
"그럼 가짜로 만들겠니. 적당히 큰 소리를 들으면 알아서 깨어나도록 만들었으니까, 알람 맞춰 놓고 자기 전에 마셔. 엄청 상쾌할 거야."
"뭔 원리예요?"
"설명하면 알아?"
"알 리가 있겠습니까. 그래도 효과가 있으면 좋겠네."
"뭐… 최소한 맛은 좋을 거야. 설탕도 좀 넣었거든."
그렇다니 그런 줄 알기로 했다. 점장에게 마지막으로 인사했다.
"저녁에 올게요."
아직도 웃고 있는 점장에게 고개를 꾸벅이고, 밖으로 나왔다.
* * *
집에 돌아와서는 곧바로 씻고 이불에 누웠다.
저녁 9시에 알람을 맞추긴 했는데, 바로 잠들진 못했다. 도저히 잠이 안 와서 그랬다. 졸려 죽겠는데 눈 감으면 정신이 오히려 또렷해지는 딱 그 상황이야.
차라리 구인 사이트라도 좀 뒤져볼까 했으나, 관뒀다. 지금 심정으로는 좋은 직장이 생겨도 바로 이력서 넣을 생각은 못 할 것 같아서였다.
이 알바가 페이가 좋잖은가. 찾아오는 손님 손놈들 대부분이 외견상 짐승 놈들이긴 했지만, 점장도 사람은 좋았고.
편돌이 일을 평생 하지는 않겠지만, 당장은 할만하다 봐도 좋지 않나….
머리가 잘 안 돌아간다. 때가 됐다 싶어 점장이 준 포션의 병뚜껑을 열었다.
이것도 마법으로 만든 걸 테니 원래는 내 몸에 안 통하는 게 맞을 거다. 근데 아까 점장이 말했고, 경험도 해봤잖은가. 내 체질은 내 의지로 어느 정도 컨트롤이 가능하다고.
포션병을 바라보며 생각했다.
내가 지금 더럽게 졸리고 개꿀잠이 자고 싶어. 그리고 점장이 이거 먹으면 개꿀잠 잘 수 있다니까 내 말 좀 들어줄래, 내 몸통아? 이러면 되나?
생각하며 들이켰고, 1분 동안은 별 느낌이 없었다.
"이게 뭐 하는 짓이야, 도대체."
하긴, 그게 그렇게 쉽게 될 리가….
....
....
[ 띵딩딩~ 굿모닝~ 띵딩― ]
뭐… 뭐야.
[ 빰빠빠 빰, 빰, 빰빰빰빠― ]
아니, 왜 벌써 9시야?
13화. 2일 차의 편돌이 (1)
시간 가는 줄도 모르고 개꿀잠을 잤다. 얼마나 개꿀잠을 잤는지, 어젯밤 근무하며 겪은 경험들 모두가 백일몽처럼 느껴질 정도였다.
그럴싸한 추론이기도 했고 말이다. 아니, 세상에 뱀파이어나 드래곤이 어디 있냐고. 없으니까 만화로도 만들고, 애니메이션으로도 만들고 그러는 거 아니겠어?
근데, 꿈은 아니었다. 결코.
왜냐면 증거가 버젓이 있어서 그렇다. 어제 자기 전에 마신 포션병이 덩그러니 바닥에 굴러다니고 있었으니까.
병을 집어서 입구에 대고 냄새를 맡아봤다. 솔솔 단내가 나고 있다.
"…약빨 죽이네."
조금 남아있던 잠기운마저 다 날아가 버린지라, 한번 생각을 해봤다. 지금 시간이 9시 10분이고 남은 시간 동안 뭘 하냐.
컴퓨터는 그래픽카드 터져서 방치해 둔 지 오래고, 있는 노트북은 지뢰찾기도 렉이 걸리는 똥컴이다. 피시방 가서 게임 한두 판 하면 딱 적당할 시간이지만, 게임은 죄다 접은 지 오래고….
못하는 것들을 하나씩 지우다 보니 할 게 출근밖에 남질 않았다. 그래서 양치하고, 머리 감고, 적당히 말린 다음에 밖으로 나왔다.
4월 말의 밤거리는 살짝 서늘하게 느껴졌다.
옷을 좀 얇게 입고 나오긴 했다. 편의점 일하다 땀 차면 찝찝해서 그렇다. 몸 쓰는 일이 아니라 땀 찰 일도 없는 게 정상이긴 한데, 이 편의점엔 하도 괴랄한 양반들이 많이 오다 보니 식은땀 흘리는 경우가 좀 잦더라.
더해서, 거리에 사람이 없었다.
내가 사는 곳이 수도권이긴 한데, 사람들이 다 빠져나간 동네라 유독 사람이 적다.
편의점은 그 동네 안에서도 특히 사람이 적은 사거리에 위치해 있었는데, 근처에 새로 도로가 뚫려서 상가며 사람이며 다 그쪽으로 몰려갔기 때문이다.
그래서 편의점 주변 거리엔 특히나 행인이 없다. 행인은커녕, 사람 쓰라고 만들어진 도보 위를 길고양이 두 마리가 유유히 걸어가고 있을 뿐이다.
편의점 앞에 잠깐 멈춰서서 생각해봤다. 여기 나만 보이는 건가?
점장에게 물어볼 수 있는 건 점장에게 물어보고 말 텐데, 이 문제는 점장이라 해도 답을 알 것 같진 않았다. 여기서 일하기로 마음먹은 이상 여기가 이 세상 사람들 눈에 어떻게 보일지 정도는 내가 알아둬야 하지 않겠는가.
근데 거리에 붙잡고 물어볼 사람이 없다. 길고양이 놈들은 관심도 없는 것 같고. 당장 풀 수 있는 의문 같지도 않아서 일단 들어갔다.
들어섰는데, 매장 상태가 좀 이상했다.
"이 모든 게 다― 잠깐 생각해 보면 막상~"
"?"
"어, 찬이 일찍 왔네?"
점장이 해맑게 웃으며 인사를 건네왔는데, 이게 대체 뭔 소리냐? 이 모든 게 다 뭐?
"아무렇지도 않았던 일 같아~"
"왜 이렇게 일찍 왔어?"
"할 게 없어서요. 근데 이 소리 뭡니까?"
"너는 뭐랄까, 한 마리 나비와 같아~"
"응, 손님이 물건 고르면서 노래 부르고 있어."
왜?
대답하는 점장의 목소리는 느긋했다. 별 신경 안 쓰는 눈치라 나도 일단은 가만히 있어 봤다.
얼마 안 있어 노래를 부르던 손님이 카운터로 캔커피 하나를 가져왔는데, 손님은 여자 하피였으며, 털이 수북한 귀 안쪽에 선이 이어져 있었다. 이어폰 꽂고 있나 보다.
더해서 이 하피 여편네는 멀쩡히 팔이 달려 있다. 어제 날아다니던 하피들은 팔이 있어야 할 위치에 날개가 달려 있었던지라 의아했다. 탈부착 식인지 뭔지….
"날아가버린 넌 요즘 뭘 할까―"
"1,100원이세요. 담아드릴까요?"
코앞에서 노래를 부르는 하피를 마주하면서도 점장은 아무렇지도 않은 듯했다. 작은 봉투에 캔커피를 담아 카드와 함께 들려주자, 하피는 귀에 꽂은 이어폰을 한번 매만지고는 나가버렸다.
문이 닫힌 걸 확인한 뒤 점장에게 물었다.
"얼굴 보면 취한 거 같진 않았는데, 여기가 노래방도 아니고 왜 저런답니까?"
"하피분들이 좀 자유분방하시거든. 하늘을 날아다녀서 그런가 봐."
"저 손님은 날개는 안 달려 있던데 말입니다...."
"하피분들이 항상 날개 달고 다니시진 않지. 안 그러면 일상생활 못 하잖아."
"그럼 탈부착식인 건가?"
"신체 변환. 중학교 필수 과목이야."
확실히 피타고라스의 정리보단 저게 훨씬 도움될 것 같긴 하다. 생각하고 있자니, 점장이 약간 걱정된다는 얼굴로 날 올려다보며 물었다.
"그런데 찬아, 올 때 별문제는 없었어?"
"네? …아, 네. 별문제 없었어요. 그냥 들어왔는데."
"사람들이 눈치는 안 줬구?"
"아예 사람 없는 동네라 눈치 볼 사람도 없었어요. 점장님께서 뭐 하신 게 아니세요?"
"난 한 거 없는데? 지금 밖에 한번 봐봐."
보래서 봤다. 내가 왔던 사거리는 이미 사라진 지 오래고, 이종족들이 돌아다니는 그 도심지 사거리의 그 광경이었다. 들어올 땐 내 세상이었는데, 들어와서 보니 딴 세상이야. 이게 뭔?
"찬이 출근하겠다 싶을 즈음 뭘 해보려고는 했어. 잘됐을진 모르겠지만… 아."
점장이 말을 멈췄다. 손님, 아니. 손놈이 와서였다.
드워프였는데, 어제 그 양반들이랑 비슷하게 생기긴 했으나 수염 땋은 모양새가 달랐다. 그러니 똑같은 담배를 피우지도 않을 거고. 또 스무고개 하게 생겼다.
"담배 줘."
첫 번째 힌트. 일단 담배다.
"네, 어떤 걸로 드릴…."
"찬아, 일찍 왔는데 앉아서 잠깐 쉬고 있어. 내가 받을게."
점장이 날 만류하고는 드워프의 얼굴을 슬쩍 보더니, 담배 진열대에서 담배를 집어 내밀며 말했다.
"이거 드리면 될까요?"
점장이 집은 게 골든 리프. 담배 중에서도 몇 없는 6,000원짜리 고가 담배인데, 왜 비싼지는 나도 펴본 적이 없어서 모른다.
받아 든 드워프는 살짝 고개를 갸웃하다 끄덕이고는 손가락 세 개를 펼쳤다. 담배 두 갑을 더 꺼내 주고는 아무렇지도 않게 거스름돈을 계산하는 점장. 방금 본 광경이 하도 신기해서 물어봤다.
"점장님. 저 손님 담배 뭐 달라는지 어떻게 아셨어요? 이것도 마법인가?"
"에이, 마법을 왜 써. 마력 아깝게."
"그럼 팁이라도 있으신 거예요?"
"별건 없고, 담배 사는 손님이 말이 없다 싶으면 그 손님의 눈을 한번 봐봐."
눈은 또 뭔. 타짜야?
"담배 사러 카운터 오는 손님은 진열대에서 자기 담배 어딨나부터 찾으니까. 슬쩍 보면 딱 시선이 고정되는 곳이 있어."
"어제 드워프 한 분은 자기가 피우는 담배 이름도 모르시던데, 그런 경우엔요?"
"그런 경우는 어쩔 수 없고. 그래도 드워프 손님들이 돈이 많아서, 대체로 비싼 담배들을 많이 피셔. 좀 더 넓게 보면, 얇은 담배들."
아저씨 손님들이 얇은 담배 많이 태우기는 한다. 얇아서 피우기 좋은가 봐.
외에도 군인들은 PX에서 싸제 담배 못 산 게 한이 된 건지, 휴가 외박 나올 때마다 해외산 담배는 다 털어가는 편이고.
점장이 갑자기 떠올랐다는 듯 씨익 웃으며 말했다.
"아. 어제 담배 사 간 드워프 손님 담배 한번 맞춰볼까?"
"굳이?"
"나 심심하단 말야. 12시간 내내 여기에만 있었다구."
나이는 모르겠지만 참 주책이시다. 점장은 양손 검지를 옆머리에 각각 가져다 대고는, 텔레파시를 하는 시늉을 내다 중얼거렸다.
"스페셜 골드?"
"두 분이셨는데, 다른 한 분은 뭐 사가셨게요."
"…그렇다고 무조건 얇은 것만 피우는 것도 아니니까… 혹시 저거 아니야?"
진열대를 손가락으로 가리켰는데, 어제 사 갔던 담배가 맞았다.
"오메. 이제야 점장님이 마법사라는 게 실감이 납니다."
"이게, 너 혼날래."
꿀밤을 때리려고 하길래 쫄아서 몸을 움츠렸다. 씨익 웃은 점장은 계속해서 말을 이었다.
"그리고 뱀파이어분들은 거친 담배 좋아하시구. 원체 고통을 잘 안 느끼시는 손님들이라, 자극적인 게 좋으신가 봐."
"허어…."
"외에도 코볼트분들은 향 독특한 것들 많이 피우시구, 고블린분들은 신상만 찾구. 신상 피우는 게 이득이라 생각하시는 것 같아."
계속 듣고 있으면 꿀팁이 되겠다 싶었다. 내 세상에서 어떤 사람이 어떤 담배 피울지는 나도 때려 맞출 수 있지만, 이 동네는 손님들이 사람이 아니잖아.
생각하는 와중에 또 손님이 왔다. 호랑이도 제 말 하면 온다더니.
"마침 오셨네요. 고블린 손님."
이번 고블린은 동전 300개를 가져와 진상을 부리진 않았고, 담배 사러 온 것도 아니었다. 들어와서는 얌전히 도시락 코너를 뒤적거리다가, 샌드위치며 햄버거며 품에 안아 잔뜩 들고 와서는 카운터 위에 올려놓았다.
누가 봐도 봉투 없이 들고 가긴 힘들 물량이었다. 바코드를 다 찍은 점장이 고블린에게 물었다.
"12,800원이세요. 봉투에 담아드릴까요?"
물었으나, 고블린은 딴청을 부리며 카드만 내밀어 온다.
점장이 재차 물었으나 고블린은 대답하지 않았고, 점장은 어깨를 으쓱하고는 계산을 끝마쳤다. 그때서야 고블린이 말해온다.
"봉투에 담아줘."
이런 경우 꼭 있어. 담아주냐고 몇 번이나 물어봐도 대답 없다가, 계산 끝나고 나면 봉투 달라고 그러는 거.
이 경우에 계산하기가 참 난감해진다. 봉툿값이 20원인데 10원짜리를 들고 다니는 손님이 있을 리도 없거니와, 카드로 20원 결제하는 것도 우습잖아. 메시지에 '어디어디 편의점 결제 20원'이라 찍힐 텐데.
정말 잠깐 까먹어서 그런 경우도 있지만, 이렇게 재차 물어봐도 대답이 없었을 경우엔 보통 음습한 의도가 숨어있다.
"봉툿값 20원이세요."
"20원짜리 없는데. 그냥 주면 안 돼?"
"카드 결제하셔도 괜찮아요."
"카드 20원을 결제하기도 그렇잖아. 그러게 미리 물어보지."
"여쭤봤답니다, 손님. 두 번 정도."
"난 못 들었어."
옆에서 보는 내가 암이 걸릴 지경이다. 허나 점장은 미소를 띤 얼굴 그대로였다. 저게 짬에서 나오는 바이브인가 뭔가 하는 그건가.
"여쭤본 거 맞아요, 손님. 저도 옆에서 들었고."
암 걸리기 싫어서 옆에서 거들었다. 고블린은 흐리멍텅한 건지 예리한 건지 모를 눈빛으로 날 바라보다, 못마땅한 듯 품에 한 아름 산 물건을 안고는 중얼거렸다.
"쩨쩨하게, 그놈의 20원이 뭐라고."
지금 그 20원 주기 싫어서 수작 부리는 거 아니야? 내 눈엔 그런데.
고블린이 투덜대며 나간 뒤, 점장에게 물었다.
"점장님은 봉툿값 같은 건 신경 안 쓰실 줄 알았습니다."
"나도 원래는 잘 신경 안 써. 근데, 저 손님은 좀… 얄밉잖아. 속도 빤히 보이고."
"고블린 하면 속 좁은 놈들이다― 라는 이미지였는데, 이런 건 이세계라고 크게 다를 건 없네요."
내 말을 들은 점장은 제법 놀란 얼굴이 되었다.
"어? 찬이 네 세상에도 고블린이 있어?"
"없죠. 대신 사람들이 상상으로나마 생각한 이미지가 좀 있는 편이라서."
그런 거 있잖은가. 고블린은 대체로 욕심 많고 성격 더러운 놈들이고, 켄타우로스들은 별자리 보고 사주팔자 잘할 것 같고, 엘프들은 오래 살고, 오만하고, 이쁘고 멋지고 그런 거.
"와. 신기하네."
"저도 직접 보니 신기하긴 해요. 그렇게 상상하는 데에 다 이유가 있나 봐."
"얘기하니까 재미있네. 그런 이미지들이 다 들어맞는 편이야?"
"다는 아니고요. 가령…."
말 도중에 손님이 들어와, 또 중간에 말을 멈춰야 했다.
이번 손님은… 어제 본 손님이었는데, 어제 했던 소리를 또 하기 시작했다.
"소주 어딨어?"
"저쪽 주류 코너 한번 보시겠어요?"
술 취한 엘프, 그 놈이다. 어제도 주류 코너 위치가 어디라고 알려줬던 것 같은데, 그새 까먹은 모양이다. 비틀비틀 걸어가는 엘프를 바라보던 점장이 나지막이 중얼거렸다.
"저 손님은 딱 봐도 취하신 것 같네…."
"제가 받을게요."
어제 비록 욕을 처먹긴 했지만 나름 잘 대처했다고 생각한다. 그러니 이번에도 내가 받지, 뭐.
잠시 후 엘프가 집어 온 게 소주 한 병. 계산대에 올려놓고 묻는다.
"사장님, 오늘은 마시고 가도 되지?"
"어제도 말씀드렸지만 안 됩니다, 손님. 불법이라니까요."
"아니. 내가 산 거 내가 먹고 간다는 게 대체 왜 불법인데!"
"이것도 어제 말씀드린 거지만, 여기가 어른분들만 오는 곳이 아니잖습니까?"
"해가 진 지가 언제인데, 뭔 애가 오냐고 지금 시간에!"
그야 모르는 일이지. 야자 끝낸 애들이 잠깐 들를 수도 있잖아?
외에 엘프가 여러 말을 씨부렁댔으나, 흘려들었다. 흘려들으며 느낀 게, 말이 제법 유창했다는 점.
어제보단 덜 취한 것 같긴 했지만, 덜 취한 정신으로 똑같은 소릴 하고 있으니 더 열이 뻗쳤다. 내 머릿속 이종족들 중에 그나마 이미지가 좋은 게 엘프였는데, 이 머리 벗겨진 엘프가 그걸 다 박살 내고 있다.
"차라리 어제처럼 하시는 건 어떻겠습니까. 컵 받으시고…."
"싫은데? 이거 나 무시하는 거잖아, 엘프라 무시하는 거 아니냐고!"
"제가 엘프를 왜 무시합―"
"너 임마, 옛날이었으면 너네 인간 놈들은 숨도 못 붙이고 살았어, 알어?"
"예?"
어째 이야기가 점점 이상한 방향으로 새는 것 같다?
이후에도 엘프의 입에서 좀 이상한 이야기들이 연달아 튀어나왔다. 먼저 시비를 건 건 네놈들이면서 왜 우리가 더 피해를 봐야 하냐느니, 너희 같은 놈들은 전쟁에서 다 죽어버렸어야 한다느니, 등등.
왜 내가 이딴 소릴 들어야 되는지 쥐뿔 모르겠어서, 답답한 마음에 점장을 힐끗 쳐다봤다. 점장은 포스기에 손을 올리고 꾹 뭔가를 누르고 있었다.
"손님, 잠깐만 기다리십쇼. 점장님, 뭐 누르고 계신 겁니까?"
"응, 신고 버튼."
"…예?"
순간 정적이 흐르고, 점장은 무슨 일이냐는 듯이 대꾸했다.
"왜?"
14화. 2일 차의 편돌이 (2)
편의점 POS기의 구석에는 따로 빨간색 신고 버튼이 있어, 3초간 꾹 누르고 있으면 112에 자동으로 신고가 된다.
더해서 왜 신고 버튼이 POS기에 달려 있는지도 추측이긴 한데, 아마 알바생이 진상 상대로 보일 수 있는 제일 덜 수상한 짓이 포스기 만지는 거라 그런 게 아닌가 싶다. 작정하고 진상 부리러 온 놈이 알바생 슬쩍 봤는데 손이 계산대 밑에 있으면 당연히 의심할 거 아냐.
난 신고 버튼이 쓰이는 걸 본 게 이번이 처음이라, 일단 확인차 점장한테 물어봤다.
"진짜 경찰 부르셨어요?"
"오지. 버튼 눌렀으니까. 장난으로 신고하면 경찰분들께 민폐야."
"아뇨, 전에는 진상들 귀여워서 그냥 적당히 하고 돌려보낸다― 하고 마셨던 기억이 나서 말입니다. 저 면접 볼 때."
"그랬나?"
점장은 가물가물하다는 듯 입을 우물거리다, 대머리 엘프의 표정을 슬쩍 바라보고는 답했다.
"이건 농담으로라도 귀엽다곤 말 못 하겠다."
나도 마찬가지다. 경찰 불렀다는 소리를 들은 엘프의 얼굴이, 이젠 엘프인지 귀 큰 홍익인간인지 분간이 안 될 정도로 시뻘게진 상태가 됐기 때문이다.
"뭐어? 경찰? 니미, 내가 뭘 잘못했다고 짭새를 불러?!"
"그렇게 됐네요. 아, 혹시라도 지금 나가실 생각은 마시구요. CCTV에 삿대질하고 욕하신 거 다 녹화되어 있으니까, 자리 벗어나셨다간 일이 더 커질걸요?"
점장이 능글맞게 건네는 말을 들은 엘프는, 하려던 말을 까먹은 듯 버벅대기만 했다.
나는 나대로 옆에서 감탄했다.
자리를 벗어난다 해서 일이 더 커지진 않는다. 어지간해선 깽판 치다 도망간 진상을 경찰이 잡아줄 리가 없을뿐더러, 그럴 수도 없기 때문이다.
작정하고 잡는다 하면 이 앞 사거리 CCTV를 다 뒤져보는 것부터 시작해서 몽타주 그려서 뿌리거나 해야 할 텐데, 그런 여유가 있는 경찰이 세상에 어디 있겠는가. 관할이 도심지 사거리면 신고 전화도 하루 몇십 통씩 올 텐데.
그래서 점장이 일부러 말을 꺼낸 것이다. 당장 여기 증거 있으니 도망가지 말라고. 조금만 생각해 보면 그게 증거가 될 수 없단 걸 빤히 알겠지만, 그 조금을 생각할 수 있었으면 아예 여기서 깽판 칠 생각을 안 했겠지.
"너… 너이, 씨…."
"그리고 종족차별 발언도 처벌 대상인 거 아시죠? 하신 말씀도 다 녹음했으니, 경찰분 오시면 들려드릴게요."
"내가 언제 그런 소릴 했어! 그리고 차별한 건 늬들이야, 늬들!"
"그건 경찰분께서 듣고 판단하시겠죠. 아, 혹시 모르겠네요. 더 화 안 내시고 얌전히 계신다면, 제가 마음이 좀 약해질지도…?"
누가 봐도 약을 올리겠다는 의도가 빤히 보였다. 화가 머리끝까지 오른 엘프는 뒤쪽 커피머신이라도 엎어버리겠다는 기세였으나, 실천하지는 않았다.
얌전히 씩씩대는 엘프 몰래 점장에게 물어봤다.
"언제 녹음까지 하셨대요?"
"안 했는데?"
허어.
"전 뭐 마법 같은 걸로 녹음하신 줄 알았습니다. 특별히 뭘 건드리신 것 같지도 않아서."
"마법은 부렸지."
"언제요?"
"버튼 하나 눌러서 주정뱅이를 얌전하게 만들었는데, 이게 마법이 아니면 뭐겠니."
그건 그래. 공권력 세 글자에 신묘한 힘이 깃든 건 이 동네도 마찬가지인가보다.
"그리고 저 엘프, 찬이 너한테 욕했잖아."
"하긴 했죠."
"웬만하면 넘어갔을 텐데, 그거 들으니까 갑자기 열받더라구. 찬이가 잘못한 거 하나도 없는데."
잠깐 생각하다 답했다.
"뭐… 쓰레기통에 쓰레기 버려지는 게 쓰레기통이 잘못해서 그런 건 아니잖습니까."
나는, 아니. 편돌이는 취객들의 감정 쓰레기통이 아니다.
편돌이도 욕할 줄 몰라서, 받아칠 줄 몰라서 맞서서 욕 안 하는 게 아니다. 얼굴 맞대고 욕해봐야 상황이 좋아질 리가 없을뿐더러, 진상 부리는 거 빨리 보내고 다른 손님도 받아야 해서 그렇다.
이해해 주는 게 아니라 참는 것일 뿐인데, 이걸 보고 우월감을 느끼려는 양반들이 꼭 있어. 야, 내가 손님이고 내가 왕이다! 나는 편돌이의 감정을 지배할 수 있다! 여기다 쓰레기 버려야지!
그게 그놈들이 수십 년 살며 일궈낸 사고관일 텐데, 한낱 편돌이인 내가 그 생각을 어떻게 바꾸겠는가. 그러려니 해야지.
그래서 쓰레기통으로 비유를 들었던 건데, 점장은 영 못마땅하다는 얼굴이었다.
"그런 생각 하지 마, 찬아. 쓰레기통이라니…."
"진상 부리는 양반들은 그렇게 생각하는 것 같아서요."
"만약에 또 그런 손님 오면, 음… 그냥 말로 받아쳐 버려. 내 얘기 꺼내거든 매장 영업방침이라 하고."
"진짜요?"
"그럼 안 할 거야? 점장이 시키는 건데?"
이것도 그렇네. 점장이 까라면 알바생이 까야지 뭘 어쩌겠는가?
"그래도 물리적으로는 말고. 빨간 줄 그이니까."
"저도 떡대 치와와나 엘프 상대로 주먹질할 생각은 안 드네요. 매출에 영향 안 가는 선에서 적당히 받아치는 정도면 괜찮겠습니까?"
"응."
3분 정도 이러고 있자니 경찰이 왔다.
"신고접수 받고 왔습니다."
오토바이를 타고 온 듯 헬멧을 뒤집어쓰고 있어 얼굴은 볼 수 없었으나, 목소리를 들어보니 여성인 것 같았다. 더해서 허리춤에 음주측정기가 매달려 있다. 음주단속 하다 왔나 보다.
먼저 말을 꺼낸 건 중년 엘프였다. 한껏 키운 목청으로 울분을 토하듯 주절대기 시작했다.
"이보쇼, 경찰 양반! 이놈들이 먼저 잘못했어! 술 한 병 사 가려고 했을 뿐인데 저 인간 놈들이 당최 팔지를 않어, 내가 귀쟁이라서 그렇대!"
"제가 언제 귀쟁이라는 말을 했…."
"발뺌하지 말고!"
이 귀쟁이 참, 얼굴에 철판 까는 게 예술이네.
녹음됐을 리가 없단 건 스스로 깨달은 듯하다. 외에도 중년 엘프는 자기가 엘프이기에 받는 차별이 얼마나 심한가에 대해 늘어놓았는데….
자기가 취직이 안 된단다. 엘프라서.
어딜 가든 일이 터졌다 하면 일단 자신을 의심한단다. 엘프라서.
그래서 사는 게 힘들단다. 엘프라서.
"그러니, 어! 저놈들이 잘못한 겁니다, 이게 제 잘못이라 하면, 경찰 양반도 종족차별 하는 거예요!"
내 상상 속의 엘프는 이렇지 않았는데 말이다. 저 엘프 입에서 대체 왜 저런 소리가 나오냐고 점장에게 물어보려 했으나, 점장은 흥미롭다는 듯이 경찰을 바라볼 뿐이었다.
그래서 나도 바라봤다.
여경은 막 헬멧을 벗은 참이었는데, 무척 아름다워 보이는 얼굴이었다. 확신을 못 하겠는 건, 아름답다는 느낌에 더해 섞인 피폐함 때문이었다.
피부는 새하얬으나 눈 밑에 다크서클이 두 겹 깔려있었고, 눈동자는 녹색. 외에 머리 색도 특이했는데, 금발과 흑발이 반반 섞여 있어 어떤 색이 원래 머리 색이었을지 짐작하기가 힘들었다.
더해서 가장 큰 특징. 이 경찰도 귀가 뾰족했다.
"죄송하지만…."
엘프 경관이 조용히 읊조렸다.
"역차별 발언도 종족차별 발언에 해당됩니다. 그러니 조용히 하시길."
이 말 한마디에, 중년 엘프가 바로 꿀 먹은 벙어리가 되어버렸다. 엘프 경관이 계산대 앞으로 터벅터벅 가까이 다가와서는 나지막이 물었다.
"순경 이루엘입니다. CCTV 잠깐 볼 수 있겠습니까."
"물론이죠. 조작 도와드릴까요?"
점장이 답했으나, 엘프 경관은 고개를 가로저었다.
"위치만 알려주시면 됩니다."
"저쪽 사무실 안이에요."
"감사합니다. 어르신은 따라오시고."
"나, 난 왜…."
"인도에 응하지 않으신다면, 공무집행방해죄로 입건하겠습니다."
이건 명목이고, 우리와 중년 엘프를 계속 가까이 둘 수 없다는 의도에서일 것이다.
중년 엘프는 보이지 않는 포승줄에라도 묶인 마냥 고개를 푹 숙인 채 경관을 따라 사무실로 들어갔고, 계산대 앞엔 점장이랑 나 단둘만 남았다. 저 대머리가 소리를 빽빽 질러댄 탓에 손님들이 죄다 나가버렸기 때문이다.
이제야 좀 물어볼 수 있겠네.
"점장님. 저 사는 동네는 엘프가 고귀하고 아름답다는 이미지가 있는데, 여긴 아닌 것 같습니다."
"엄청 긍정적인 이미지인가 보네?"
"꼭 그렇진 않구요. 오만하거나 성격 더럽다는 이미지도 있긴 해서."
반반이다. 어떤 매체에서는 싸가지 없고, 어떤 매체에서는 착하고 그래.
"음… 고귀하고 아름답긴 했지. 옛날에는."
"뭔가 계기가 있었나 봐요."
"이 세상에 사람이 좀 적다고 했었던 것 기억나?"
"네. 기억나요."
전쟁이 일어나서 수십 수백 이종족들이 박 터지게 싸웠고, 그 과정에서 사람이 무진장 죽어 나간 탓에 사람이 적어졌다고 했었다.
"그 전쟁을 일으킨 게 엘프들이거든."
"어…."
이후 점장의 설명은, 역시나 그랬듯 아리달쏭했다.
이 세상의 과학이 발달하기 시작한 게 수십 년 전. 그걸 주도한 건 인간들이었는데, 대부분의 종족들은 인간 종족들이 발달시키는 기술들을 별 무리 없이 받아들였다고 한다.
왜냐면, 편했기 때문이다. 날개 달린 종족들도 먼 거리를 며칠씩 날아다니기보다는 비행기 타는 게 편했고, 드워프들도 구식 대장간보다는 신식 공방에서 대장일하는 게 훨씬 질이 좋았을 테니까.
그렇게 이종족들 모두가 시대의 흐름에 적응해 가는 중에도 딱 한 종족이 그걸 탐탁지 않아 했는데, 그게 엘프들. 공장 짓겠다고 숲 밀어버리고, 강에 쓰레기 버리고 그러는 게 자연친화적 종족인 엘프로서는 죽도록 싫은 일이었다나 뭐라나.
결국 참다 못한 엘프들이 선택한 것이 공장을 비롯해 환경에 해롭다 싶은 것들은 죄다 때려 부수는 것이었는데, 문제는 이 엘프들의 수가 더럽게 많았다는 것이다.
"엘프가 많았다구요?"
"응. 이건 추측이지만, 아마 세상에 심어진 나무 수만큼 있었을걸?"
둘에 어떤 상관관계가 있는 건가 싶었으나, 일단은 마저 들었다. 하여튼 엘프들이 머릿수로 싸움도 밀어붙이고, 종족들 간의 외교 관계도 머릿수에서 나오는 파워로 밀어붙이고….
이 상황이 몇 년 유지되며 분위기가 점점 험악해지다가 기어코 전쟁이 터져버렸고, 수많은 이종족들은 둘 중 하나를 선택해야 했다고 한다. 엘프를 따라 현상 유지를 택하는가, 인간을 따라 발전을 택하는가.
그 결론이 어떻게 나왔는지는 네온사인이 휘황찬란한 바깥의 사거리가 증명해 주고 있다. 솔직히 나도 연락방법으로 스마트폰이랑 전서구 중 택하라 고르라면 당연히 전자 고른다. 폰 없이 어떻게 살아?
"그래서 엘프분들이 전범민족인 동시에 소수민족이 되어버렸지. 전쟁 끝난 직후에는 엄청 탄압받았는데, 최근에는 그런 풍조가 좀 줄어들긴 했어. 엘프분들도 엄청 반성하고 있고."
"방금 진상 부린 엘프는 반성하는 기미는 안 보이던데요."
"뭐… 저런 분들도 간혹 있지. 오래 살았으니 적응하기도 힘든 게 아닐까?"
"이해는 가는데, 납득은 못 하겠습니다."
반포자이 살다가 반지하로 쫓겨난 셈이니 삐뚤어지는 거야 당연하다. 근데, 편의점에서 술 못 먹게 했다는 이유로 꼬장 피우는 건 시절을 따지기 이전에 그냥 성격 문제 아냐?
"나도 모든 엘프분들이 저럴 거라고는 생각 안 해. 적응하고, 바뀌려고 노력하는 엘프분들이 훨씬 많으니까."
"사무실 들어간 저 경관분처럼요?"
"응. 아마 노력 엄청 했을 거야."
"확실히 피곤해 보이긴 하던데."
"머리 색도 탈색 엄청 됐잖아, 검은색으로. 스트레스 엄청 받아서 그런 거야, 그거."
아까 남았던 의문이 이제야 해소됐다. 디폴트가 금색, 스트레스 받으면 검정색. 여기서 더 심해지면 저 진상 엘프 놈처럼 탈모가 오는 거고.
"확인 끝났습니다."
막 CCTV 검증이 끝난 듯 경관이 사무실 안에서 걸어 나왔다. 중년 엘프는 조금 더 죽을상이 되었는데, 안에 들어가서 꺼냈을 변명들이 통하지 않은 모양이다.
"일단 이분은 서로 데려갈 겁니다. 처벌 수위는 사정청취 후에 결정될 것 같고."
"고생하시네요."
"외에는… 접근금지 조치 취하겠습니다."
이후 자기 주머니에서 담뱃갑을 슬쩍 꺼내 보고는 다시 닫는다. 작게 한숨을 한 번 쉰 뒤.
"협조에 응해주셔서 감사합니다."
거수경례를 하고, 대머리 엘프 데리고는 나가버렸다. 슬쩍 시간을 확인한 뒤에 점장에게 물었다.
"점장님. 슬슬 퇴근하셔요."
"어… 아, 벌써 10시 10분이네. 나 돈이랑 담배 못 셌는데, 그거만 세고 갈게."
"제가 할게요. 졸리실 텐데."
어차피 근무교대 하고 나면 나도 돈 세고 담배 검진해야 한다. 굳이 일 두 번 할 필요는 없잖은가.
"음… 그럼 일단 퇴근할게. 문제 생기면 연락 줘."
"네."
그러고는 점장도 퇴근. 이제 편의점에 나 혼자 남게 되었다.
이런 씨, 근무 시작도 전에 진상 받은 탓에 벌써부터 정신이 피곤했다. 진상이 안 오지야 않겠지만, 최소한 한두 시간은 좀 이상한 놈 안 왔으면 좋겠는데….
생각하고 있자니 첫 손님이 왔다. 아는 얼굴이었다.
"씨발, 치약 어디 있어?!"
15화. 2일 차의 편돌이 (3)
동물 심리학자 스텐리 코렐의 연구 결과에 의하면, 치와와의 지능 지수는 약 100여 마리의 견종 중 67위. 빈말로라도 좋다고 말하기는 힘든 순위다.
물론 사실이 아닌 연구 결과이니만큼 완전히 신뢰할 수야 없겠다만, 최소한 67위라는 치와와의 지능 지수만큼은 믿어도 되겠다 싶었다. 왜냐면 말이다, 이 치와와 지능이 평균 이상이었다면 어제 칫솔 사갈 때 치약도 같이 사 갔을 테니까!
"치약 어딨냐고!"
"어제 칫솔 사신 곳 한번 찾아보시겠어요?"
그래도 첫날을 겪어봐서 그런지 그때보단 여유가 좀 있었기에, 한번 추측을 해봤다.
이 치와와는 양복을 입고 있고 목에 사원증을 걸고 있다. 즉, 이 근처에서 회사생활을 하고 있다는 뜻이다.
이런 복장의 손님이 한 번 다녀가고 이후 또 방문을 해온다면, 어지간해선 단골이 될 확률이 높다. 단골이 늘어나는 게 분명 기뻐해야 할 일이긴 한데, 왜 하필이면 내 근무 시간대에….
"그게 어딘데?"
"네 번째 코너 뒤편에 있었…."
"그렇게 말하면 내가 알아?"
대체 얼마나 더 잘 설명을 해주라는, 아. 모르겠다.
전처럼 다시 일어나서 치약 있는 곳까지 같이 가줬다. 이번에는 술 냄새가 그리 심하진 않았는데, 그럼에도 하는 짓이 똑같다. 그냥 분노조절장애가 있는 거라 생각하기로 했다.
네 번째 코너 뒤편에 도착한 뒤, 몇 종류 되는 치약을 빤히 내려다보던 치와와가 물었다.
"이 중에 어떤 치약이 좋냐?"
"글쎄요?"
"여기서 일하면서 그것도 몰라?"
이런 경우가 자주는 아니어도 간혹 있다. 알바생한테 이건 어떠냐 저건 어떠냐 물어보는 거.
그리고 내 대답은 항상 똑같다. 나도 몰라. 내가 써보고 파는 게 아닌데 어떻게 알아?
알바생이 그나마 아는 게 있다면 도시락 맛 정도다. 폐기로 나온 거 한두 개 주워 먹다 보면 이건 왜 잘 팔리는지, 이건 왜 안 팔리는지 대충 감이 오거든. 특히 소스 부어 먹는 종류의 도시락이 폐기가 자주 발생한다. 이런 것들은 폐기여도 번거로워서 손이 잘 안 가.
"제가 상품 성능을 다 아는 게 아니라서요."
"그래도 대충은 알 거 아니야."
"제가 아는 건 이게 다 1+1 상품이라는 것들뿐이에요. 이번 달 이벤트 상품이라."
"두 개는 필요 없는데."
"그래도 하나 공짜인데요. 그냥 가져가시는 게?"
그냥 가져가지 말고 제발 가져가. 나중에 치약 사러 또 오지 말고….
잠시 고민하던 치와와가 집어 든 건, 가장 비싼 치약 두 개였다. 카운터로 가져와서는 치약 두 개를 내려놓고, 카운터 위의 숙취해소제를 가만히 내려다보다가 불쑥 내게 묻는다.
"이거 효과 괜찮냐?"
숙취해소제도 난 먹어본 적이 없다. 가격이 더럽게 비싸기 때문이다.
3개들이가 5,500원인데, 그 돈이면 싼 계란 한 판을 사 먹을 수 있다. 이거 먹을 바에 그냥 계란 한 판 부쳐 먹는 게 숙취 해소에도, 건강에도 훨씬 도움이 되지 않을까?
"에이 씨, 한번 먹어보지 뭐. 이것도 줘."
"이것도 1+1이에요, 손님."
"근데 이거 어떻게 쓰는 거냐?"
이것도 내가 당연히 모르는 거라, 하나 집어서 뒷면을 한번 살펴봤다. 술 먹기 전에 한 번, 술 먹은 뒤에 한 번 먹으면 술 잘 깬다고 적혀있다. 그렇게 읊어주자, 치와와가 곧장 말했다.
"너 가져. 난 두 개는 필요 없다."
"네?"
"치약도 가지고."
"아니, 이걸 왜 절 주십…."
"내 알 바냐고. 나중에 돈 달라 안 할 테니까 그냥 가져, 새끼야."
내가 돈 달라 할까봐 무서워서 이러는 게 아니라, 치약이랑 숙취해소제를 알바하면서 대체 어디에 어떻게 써먹으라는 건데….
아까 점장이 한 말이 떠올랐다. 손놈이 날 사람으로 안 보면 나도 손님 대우해 줄 필요 없다고.
이놈 상대하면서 그 말이 계속 떠오르긴 했는데, 이 치와와는 손놈 손님 분류로 나눌 수 있는 게 아니라 그냥 미친놈 같아서 말이 나오질 않았다.
계산을 마친 치와와는 짧게 중얼거린 뒤.
"나 간다."
가버렸다.
계산대 위에 올려진 숙취해소제와 치약을 치운 뒤, 치와와라는 견종이 대체 왜 인기가 있는 건지 잠깐 고민을 해봤다. 물론 답은 나오지 않았다.
대신 다른 고민을 했는데, 이건 답이 바로 나왔다. 오늘 근무도 거지 같을 게 분명하다는 것.
근무 30분도 안 되어 어제 온 손님 중 둘이 방문했으니, 어제 왔던 손님들 중 대다수가 오늘 다시 방문할 것이라 추측해도 무리가 없겠다 싶어서였다.
그리고 어제 온 손님들 대부분이 정상이 아니었고. 난 알바 첫날에 취객이 토해놓은 오바이트 치우게 될 줄은 생각도 못 했다. 내 인생의 스토리 담당이 누군지는 몰라도 일 참 더럽게 못 하는….
"싸장뉨."
이건 또 뭔 소리야.
벌떡 일어나서 앞을 바라봤다. 이 말 어눌한 손님이 상당히 특이했는데, 전체적인 신체 구조는 사람이었으나 얼굴 생긴 것은 인형에 가까운 모양새였다. 굳이 비유하자면, 기계로 된 인형?
또한 공장 작업복을 입고 있었는데, 몸이 온갖 더러운 무언가에 절여져 있었고. 뭐 도축이라도 하다 왔나.
"네, 손님."
"이거…."
말하며 손님이 스마트폰을 건네왔다. 일단은 받아 들어 화면을 살펴봤는데, 어디 문화권인지 짐작조차 힘들 정도로 꼬부라진 글씨들이 가득했다.
"어… 이게 뭡니까?"
"쑤얏."
쑤얏은 또 뭔, 이 기계인형 외노자라도 돼?
편의점에 외노자들이 엄청나게 찾아오긴 한다. 편의점이 의외로 할 수 있는 게 많기 때문이다. 공과금 납부도 가능하고, 택배도 보낼 수 있고, 잠깐 점심 먹으러 올 수도 있지.
이 기계인형 양반도 그런 이유에서 찾아온 것인 듯한데, 글씨를 알아먹을 수 없는 탓에 뭘 하려는지도 짐작이 안 됐다.
답답함에 화면을 위아래로 슬라이드 해보니, 지폐와 비행기가 새겨진 로고 같은 게 보였다. 이걸 보니까 뭔가 떠오를 것 같기도 한….
"혹시 해외송금 하시는 겁니까?"
"네! 쑤얏! 쑤얏!"
놀랍게도, 편의점에서는 무려 해외 송금이 가능하다. 내가 직접 해 본 적은 없고, 몇 년 전에 알바하던 친구가 '넌 누가 해외송금 해달라고 하면 안 된다고 해라'라며 귀찮아하던 걸 겨우 떠올렸을 뿐이긴 하지만….
난 일 걸러 가며 할 생각은 없다. 이것도 일이니만큼 해줘야 할 것 같긴 한데, 아무리 들여다봐도 눈만 어지러울 뿐이라 글을 읽어서는 답이 안 나오겠다 싶었다. 이럴 때 방법은 하나뿐이지.
"잠깐만 기다려 보십쇼."
임기응변. 글을 읽어서 해결이 안 되면 아이콘을 보고 판단할 수밖에.
우선, 화면에는 동전이나, 달러, 등등. 총 여섯 개의 아이콘이 그려져 있다.
그중 건물 모양 아이콘이 있길래 눌렀더니, 이번엔 지폐 다발과 편의점 브랜드 로고가 나타났다. 이 지폐 다발이 은행이고, 편의점 브랜드 로고가 편의점 아닐까?
편의점 로고를 누르자 빈 공백란 하나가 나타났으며, 오른쪽에는 금액을 입력하라는 문구가 적혀 있었다. 기계인형 양반에게 물었다.
"얼마 송금하시는 거예요?"
"?"
"하우… 하우 머치?"
"아. 오쓉마넌, 오쉽마넌."
"오케이, 오쉽마넌."
이게 대체 뭐 하는 짓이야….
금액은 내가 50만 원 입력해 줬고, 다음에는 밑에 파란색 버튼과 회색 버튼이 나타났다. 보편적으로는 파란색이 확인, 회색이 취소 버튼이니까….
파란색 버튼을 누르자, 이번엔 비밀번호를 입력하라는 듯한 창이 나타났다. 스마트폰을 돌려주자 기계인형이 화면의 글을 읽고는 고개를 갸웃해왔다.
"입력, 캐야 해요? 캐인정보?"
"예."
의아해하면서도 손으로 화면을 가리고는 비밀번호를 입력하더니, 다시 스마트폰을 내게 내밀어왔다. 이번엔 바코드 찍는 화면이 떠오른 상태다.
바코드기로 찍자, POS기 화면에 잘못된 바코드라는 에러문구가 출력되더라. 이걸 바로 찍을 게 아니라, 미리 추가적인 조작을 해놓으라는 것 같다. 이런 경우엔 어지간하면 서비스 항목 눌러서 들어가 보면 있던데….
"쏴장님. 잘 되구 잇쒀요?"
"잠깐만요. 해봐야 알 거 같아서…."
"?"
"낫 슈어. 웨잇… 웨잇 어 세컨."
또다시 고개를 갸웃해온다. 나도 영어 잘한다곤 말 못 하지만 이 기계인형은 나보다 가방끈이 더 짧은가 보다. 일단 계속 해보자고.
POS기 터치스크린의 버튼 십수 개 중 서비스 항목을 찾아 이것저것 눌러보는 와중, 아까 화면에서 봤던 편의점 로고와 비슷하게 생긴 아이콘이 보였다.
눌러보자, 아무튼 바코드를 찍어보라는 화면이 떴다. 바코드를 찍었더니, '현금 결제만 가능합니다. 결제하시겠습니까?'라는 문구가 떠올랐, 오?
"뭐야, 이거 진짜 된 거야?"
"예? 쏴장님?"
"아, 손님. 일단, 어. 그… 돈 주십쇼."
"네."
5만 원짜리 10장을 내밀어 온다. 받아서 센 뒤, 확인 버튼을 누르고 금액을 입력하자 영수증이 출력되었다. 매출액 액수는 딱 50만 원이 늘어나 있었고. 하면서도 긴가민가했는데 잘 풀린 모양이다.
"된 거 같습니다. 영수증 나왔어요."
"이거… 이거."
허나 기계인형은 영 불안하다는 얼굴이었다. 안절부절못하며 문자 화면을 켜서는 내게 내밀어왔기 때문이다. 송금이 제대로 되면 문자메시지가 날아오는 구조인 듯한데, 아직까진 수신된 메시지가 없다.
"해외 송금하시려는 거면 시간이 걸릴 테니 좀 기다리셔야 되지 않을까요. 제가 잘은 모르겠지만…."
"네?"
"결제 잘 된 거 같으니까, 저기 앉아서 잠시만 기다리셔요."
편의점 테이블을 가리키자, 기계인형은 얌전히 테이블로 가 앉으면서도 걱정스러운 듯 고개를 까딱이고 있었다. 그러길 2분.
"쑤얏!"
벌떡 일어나서 소리치고는, 내게 다가와 연신 고개를 숙여댔다. 잘됐나 보다.
"쏴장님, 조아요. 조아요!"
"좋으시다니 저도 기분이 좋네요…."
그러니까 이제 가주면 안 될까?
허나 기계인형은 내게 손바닥을 내밀어 보이더니, 편의점 밖으로 문을 활짝 열고 나가서는 한쪽 방향을 향해 외쳤다.
"쑤얏! 베르떼 까뚬!"
"쑤얏??"
"쑤얏! 뽀르뚜 베르떼 까뚬! 까뚜움!"
동시에 우르르 발걸음 소리가 들려오기 시작했고, 이어서 편의점 쇼윈도 밖으로 보이기 시작한 기계인형이 5명, 10명… 아니, 대체 몇 명이야.
빈말이 아니라, 정말 미친 듯이 기계인형들이 몰려들기 시작했다.
당장 들어온 게 다섯 명, 이후에 또 다섯 명. 계산대 앞이 점점 메워지기 시작하는 와중에도 기계인형들이 서로 뭐라 뭐라 씨부리며 서로 밀치듯이 들어오고 있었다.
"쑤얏! 쑤얏!"
"쑤야앗!"
그리고 난 몹시 혼란스러워졌다. 야이 씨, 그만 좀 들어와! 너희들 목적이 뭔지 알아. 날 엉망진창으로 만들려는 거지?!
제발 그만 좀 들어오라고 속으로 수십 번을 빌어도 기계인형들의 행렬은 멈출 줄을 몰랐다. 그렇게 꾸역꾸역 편의점에 들어온 기계인형들의 수가, 대충 세어봐도 40명. 자리가 없어서 과자 진열대 뒤로 넘어간 양반들도 제법 됐으니, 실제로는 더 많을 것이다.
이제야 정황이 대충 짐작이 됐다.
이 기계인형들 이거 해주는 곳 찾아서 이리저리 몰려다니고 있었던 거다. 근데 보여준답시고 내미는 화면이 꼬부랑 글씨 천지니, 알 리가 있었겠는가? 여기서 안 된다고 내쫓았겠지.
근데 그걸 내가 해 줘버렸네…?
기계인형들은 일사불란하게 자기들 스마트폰을 꺼내 내게 내밀어 오기 시작했다. 어이가 없어서 스마트폰을 뚫어져라 쳐다보다, 맨 앞의 기계인형에게 물었다.
"혹시 무슨 일 하세요?"
"네?"
"왓 유얼 잡?"
"아. 슬래터. 몬스터 슬래터."
아. 몬스터 도축 일 하신다고….
16화. 2일 차의 편돌이 (4)
[ 기계인형분들은 독립하신 지 얼마 안 됐고… 집단으로 움직이는 성향이 강해. ]
스마트폰에서 점장의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뭐로부터 독립을 한 거예요?"
[ 원래는 기계 잘 다루는 종족들이 수공예로 만드는 사역마에 가까웠는데, 성능을 향상시키기 위해 이런저런 마법이 고안됐거든? 그 과정에서 어떤 계기인지는 몰라도 자아가 생겨났고, 감정을 느끼시기 시작했지. ]
"어… 그래서요…?"
[ 이후에 이분들을 하나의 지성체로 인정해야 하느냐 아니냐로 논쟁이 좀 있었어. 몇 년쯤. 그러다가 지성체가 맞다는 방향으로 굳어졌고… 아. 독립된 시기가 오래되진 않으셨으니까, 기계인형분들 만나면 막 사회에 적응하고 계시겠구나― 라고 생각하면 돼. ]
어째 아이로봇과 미래의 티벳―희망편―이 반반 섞인 것 같단 느낌이 든다.
들으며 오히려 의문만 쌓여갔으나, 오래 대화할 수 있는 상황이 아니었기에 딱 한 가지만 더 물어보기로 했다.
"점장님. 마지막으로, 쑤얏이 대체 무슨 뜻이에요?"
[ 좀 두루뭉실하지만, 긍정한다는 뜻이야. 근데 왜? ]
"지금 편의점 상황이 이래서요. 잠깐만요."
전화를 끊은 뒤, 맨 앞의 기계인형 손님에게 손짓하며 물어봤다. 사진 찍어도 되냐고.
"쑤얏."
곧바로 기계인형 48명에 나 포함, 49명의 단체 인증샷을 한 장 찍어 점장에게 보냈다. 점장은 전화 대신 카톡 메시지로 답장해 왔다.
[?]
[???]
[해외 송금 하러 오신 분들인데, 이제 일할게요]
피할 수 없다면 차라리 쑤얏하기로 했다. 살면서 언제 이런 경험 할 수 있겠어.
일단 첫 번째 기계인형 손님의 스마트폰을 받아, 기기를 조작하며 물었다.
"하우 머치?"
손가락 두 개를 펼쳐오길래, 20만인 줄 알고 입력해서 줬더니 고개를 가로젓는다. 200만이었나 보다. 처음부터 액수가 좀 센데.
200만 원을 입력해 보려 했더니, 이번엔 창 테두리가 빨간색으로 변했다. 밑에는 숫자 1과 500,000이 적힌 문구가 한 줄 떠올랐고.
"이거 한 번에 50만밖에 안 되는 것 같아요, 손님."
"?"
"워… 원 트라이, 오십만. 오케이?"
"쑤얏. 쑤얏."
긍정하며 돈뭉치를 계산대 위에 툭 내려놓은 기계인형 양반은, 띠지를 뜯고 한 움큼을 집어 손으로 한 장씩 세다 10장가량을 내게 내밀어왔다.
받아서 나도 똑같이, 두 번 셌다. 이거 한 장이 내 5시간 시급인데, 눈앞에서 세는 거 봤으니 맞겠지― 하고 넘어갔다가 나중에 한 장 펑크 나 있고 그러면 5일 동안 잠 못 잘 게 뻔해.
당장 건네받은 돈은 액수가 맞길래, POS기를 조작한 뒤 출력된 영수증을 건넸다. 이 짓거리를 네 번. 돈을 계산대에 넣은 뒤, 다음 손님을 불러 물었다.
"하우 머치."
"이백오쓉만."
"넵, 이백오십…."
이 과정에서 좀 여러 문제가 생겼다.
일단 첫째, 이 양반들이 전부 5만 원권을 가져온 게 아니었다. 만 원짜리 50장을 내밀어오는 양반도 있었거든.
사실 만 원권이 오히려 더 많았다. 오밤중에 은행 문이 열려있을 리가 없을 테니 이 돈이 죄다 ATM에서 꺼내 온 것일 텐데, ATM 안의 5만 원권을 다 털어도 모자라서 만 원권을 털어온 모양이었다.
이 때문에 돈다발이 많이, 속된 말로 진짜 존나게 많이 쌓여가기 시작했다.
이게, 진짜 존나게라는 말로밖엔 표현이 안 됐다. 포스기 금고를 닫을 수가 없어, 닫을 수가 없다고. 만 원권 자리가 꽉 차서 오천 원권 자리, 천 원권 자리에 집어넣는데 여기마저 꽉 차서 돈을 넣을 수가 없었다.
이렇게 돈이 쌓일 경우엔 보통 사무실 안쪽의 금고에 별도로 보관을 하는데, 그 짓거리를 하겠다고 왔다 갔다 했다간 날을 꼬박 새울 게 분명했다. 그래서 계산대 밑에 돈다발 짱박고, 계산대 근처에 굴러다니던 장바구니에도 돈을 담았다.
이러면서 두 번째 문제가 생겼는데, 다른 손님을 받기가 힘들었다.
"사장님, 담ㅂ… 어?"
정문에 달린 벨소리가 들리자마자, 48명의 기계인형이 일제히 편의점 정문을 바라보았다.
난 한창 돈 세는 중이라 바로는 못 봤고, 돈 다 세고 나서 바라보니 켄타우로스 손님이었다. 배달의 민족 조끼 입고 있던 그 손님.
얼이 빠진 듯 입구 앞에서 기계인형들을 바라보다가, 내 쪽을 바라보고는 아예 입을 떡 벌려온다. 확실히 어이없는 광경이긴 할 거다. 편의점 계산대에 몇천만 원 쌓아놓는 광경이 흔한 광경이겠어?
외치듯 물었다.
"손님, 카드세요 현금이세요?!"
"현금이요!"
"5천 원짜리?"
"네!"
기계인형들이 매장에 꽉 들어찬 탓에 저 켄타우로스도 못 들어오고 있고, 나도 나갈 수가 없는 상황이다. 담배 진열대에서 세븐 한 갑을 꺼내 바코드를 찍고, 앞의 기계인형 손님에게 내밀며 물었다.
"이거 저 사람 좀 건네주실 수 있으세요? 제가 저기 갈 수가 없어서요."
"어… 아, 쑤얏. 쑤얏."
기계인형도 내 말뜻을 이해했는지 담배를 받아 뒷사람에게 건네고, 그 사람은 또 뒷사람에게 건넸다. 뒷자리에 중간고사 시험지 건네듯 말이다.
그렇게 담배가 건네지고, 켄타우로스는 오천 원을 꺼내 역순으로 똑같이 해왔다. 이제 500원을 거슬러줘야 했기에, 500원을 앞 손님에게 건네 다시 한번 반복.
그 외에도 켄타우로스가 뭘 사려는 낌새를 보이긴 했으나, 의욕을 잃은 듯 어깨를 으쓱하고는 말했다.
"편자는 딴 데 가서 사야겠네. 고생하세요, 사장님."
고맙다….
마지막으로 세 번째 문제. 눈이 너무 아파.
10명쯤 보냈을 때부터 머릿속으로 얼추 평균을 내봤는데, 한 손님이 송금하는 금액이 대략 200만 원 정도 됐다. 내가 2,000만 원을 셌다는 소리다.
이러고 있자니 엄지 지문은 닳아 없어질 것 같았고, 눈도 함부로 못 깜박였다. 세던 거 까먹기 싫어서. 25명쯤 마무리 지을 때부터는 현기증까지 밀려오더라.
내가 정상이 아니란 걸 눈치챘는지, 기계인형 중 한 명이 피로회복제 한 병을 가져와 내게 내밀어왔다. 덕분에 세던 돈의 액수가, 삼십… 삼십사…? 내가 얼마까지 셌더라?
"쏴장님. 힘내요."
힘줘서 세면 세기 더 힘들다. 그러니까 힘 안 낼 거야.
그나마 천만다행인 게, 이후로 손님이 더 오진 않았다. 오지 않았다기보다는 내부 광경 보고 엄두를 못 낸 것이겠지만.
그래서 나도 아예 신경 안 쓰고 무아지경으로 돈을 셌다. 5,000… 7,000….
마지막 손님을 마무리 짓고 난 뒤, 주변을 둘러보았다. 계산대 주변에는 돈다발이 가득 쌓여 개판이 난 상태고, 포스기에 찍힌 금액은 9,500만이 좀 넘어갔다. 이거 혹시 9999만 9999원 넘기면 다시 0원으로 돌아가나?
"쑤얏. 쑤얏, 쏴장님, 정말 고생하셨서요."
"네… 잠깐만요…."
5만 원권 한 장 떨어진 걸 실수로 밟았다.
떨어진 위치에 올려놓은 뒤, 마지막 기계인형에게 손짓해 계산대로 불렀다. 계산대 위에 스마트폰을 올려놓은 뒤, 눌러야 할 아이콘을 가리키며 말했다.
"히얼."
"쑤얏."
"앤 히얼."
"쑤얏. 쑤얏."
"마지막으로 여기에 하우 머치. 오십, 삼십, 뭐든 간에… 그리고 이거 보여주시구요."
"네, 쏴장님."
"이러고도 몰라서 못 해주겠다 하면 아예 카운터 들어오셔서 직접 조작하시면 될 것 같습니다. 이거, 다음엔 이거, 다음엔…."
고개를 끄덕여 오긴 하는데 정말 이해했는지는 잘 모르겠고, 이 중 절반만 이해했어도 다른 곳에서 쫓겨나진 않겠지….
아무튼 난 이거 이상은 못 해준다. 설명까지 다 끝내고 나니, 맨 앞의 손님부터 수십 명은 되는 손님들이 내게 연신 목례를 해왔다. 다들 사이좋은가 보다.
"쏴장님. 착해요, 차캐."
"캄사합니다."
"싸장님 이거, 받아줘요."
그중 유독 말이 유창한 한 명이 내게 뭔가를 내밀어왔는데, 명함이었다.
"이걸 왜…?"
"저희 작업장. 제가 싸장이에요."
"아."
아까 누군가가 몬스터 도축업 한다고 했었던 게 떠오른다. 이 손님이 작업장 사장인 것 같은데, 다 똑같이 생겨먹어서 사원 사장 분간을 할 수가 있어야지.
명함을 왜 주는지도 의아했으나 일단 받긴 받았다. 기계인형은 손으로 수화기 모양을 만들어 귀에 가져다 대고는 말했다.
"언제든 불러요, 싸장님. 쑤얏, 쑤얏."
"그럴 일이 있을지 모르겠네요…."
"저희 일 잘함니다. 돈 워리."
"땡큐. 땡큐, 쏴장님."
"마니 파세요 싸장님."
저마다 나한테 인사 한마디씩을 하며, 우르르 편의점을 빠져나갔다.
기계인형 손님들이 나간 정문을 멍하니 바라보다 의자에 털썩 주저앉았다. 안구건조증이 도질 것 같아.
그래도 일은 끝내야 했기에, 계산대 사진을 한 장 찍어 점장에게 보냈다. 바로 전화가 걸려왔다.
[ 어. 찬아, 사진 봤어…. ]
"점장님. 힘들었습니다. 진짜로."
[ 수고했어. 진짜로. 그런데, 이거 총 얼마야? ]
"사진에 있는 건 5,000만 정도 되고, 밑에 4,500만 더 있어요. 그런데, 점장님."
[ 응. ]
"이거 금고에 다 들어가긴 해요?"
금고가 대충 성인 남성 몸통 정도 크기인데, 다 들어가리란 생각이 도저히 안 들어서 그랬다. 점장은 좀 길게 고민하다 답했다.
[ 다 들어가긴 할걸…? ]
"그럼 지금부터 넣을게요. 근데 문 잠깐 잠가도 됩니까?"
[ 응? 왜… 아. 에이, 걱정 안 해도 돼. CCTV에 찍힐 텐데. ]
"제가 안심이 안 돼서 그래요."
[ 그렇겠네. 그럼 그렇게 해. ]
허락 맡았다. 당장 문을 잠근 뒤, 계산대로 돌아왔다.
일단 돈을 100만 원씩 나눴다. 금고 지폐 투입구가 2cm가 채 안 되기 때문에 한 번에 100만 원 이상은 넣을 수가 없기 때문이다.
그래도 5,000만 원까지는 쉬웠다. 중간중간에 고무줄로 묶어가면서 했거든. 문제는 남은 4,500만 원인데, 중간에 고무줄이 다 떨어져서 장바구니에 죄다 처박아 버렸다. 그래서 다시 세야 한다. 돌겠네, 진짜.
"점장님, 매장에 고무줄이 없어요."
[ 칫솔 치약 있는 곳 근처에 고무줄 포장된 거 있을 거야. 그거 뜯어서 써. 영수증 끊어놓구. ]
"네."
시킨 대로 해서 고무줄을 다시 보급한 뒤, 100만 원 세는 족족 금고 보관 누르고 용지 뜯어서 고무줄로 묶었다.
중간에 눈물이 두 방울 흘렀는데, 돈 세다가 눈이 충혈돼서 그런 건지 슬퍼서 그런 건지는 스스로도 알 수 없었다. 이거 안과 쪽 건강보험 적용되냐? 되겠지?
이렇게 겨우, 진짜 겨우겨우 돈 다 꾸역꾸역 처넣고 시간 보니까 새벽 2시였다. 나중에 점장한테 지폐계수기를 갖다 놓자고 건의를 하든지 해야겠다.
이후 5분 정도 눈 질끈 감고 의자에 앉아 퍼져있었는데, 정문을 똑똑 두드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문 잠금 푸는 것도 까먹고 있었다.
문을 열러 다가가니, 또 아는 손님이었다. 구겨지려는 안면근육을 겨우 펴고 잠금장치를 풀자, 분홍빛 머리의 서큐버스가 비틀거리며 내게 물었다.
"사장님. 혹시 여기, 사직서 있나요…?"
있겠냐고….
17화. 상담하는 편돌이 (1)
편의점에서는 사직서를 팔지 않는다.
애초에 사직서가 돈 주고 사고팔 만큼 복잡한 양식으로 되어있는 게 아니잖아. 그냥 '함께해서 더러웠고 다신 보지 말자' 한 줄 써서 직장 상사한테 집어 던지고 휘파람 불며 걸어 나오면 되는 거 아닌가? 앞으로 볼 일도 없는 양반인데?
사실 사직서 내본 적이 없어서 잘 모르겠다. 나 다니던 회사는 내가 사직서 내기도 전에 지가 알아서 망해버렸거든. 일단 매뉴얼대로 대답했다.
"없는데요."
"그럼 뭐가 있어요…?"
"담배, 주류, 견과류, 유제품, 그 외에도 여러 가지 있죠."
"저 배는 안 고픈데…."
그래 보인다. 술 냄새가 제법 났으니까, 뭐 안줏거리도 같이 먹긴 했겠지.
비틀대는 서큐버스를 정문에 세워놓기도 뭣해서 일단 테이블로 데려와 앉혀놨다. 여기가 편의점인지 취객 임시휴게소인지 모르겠네.
"...."
앉혀놓자, 서큐버스는 다리를 좁혀 조신히 앉은 채로 날 뚫어져라 쳐다보기 시작했다. 눈물이 글썽한 눈동자로 추측건대, 기분이 굉장히 우울한 듯했다. 그러니까 사직서를 찾겠지.
물론 내 알 바는 아니었고, 내 일이나 하련다.
카운터로 돌아와 손님들 적는 명부를 챙기고, 저주 검진기도 같이 챙겨 돌아왔다. 지금 상태가 메롱인 게 상사병보단 술이 원인인 듯하지만, 혹시 모르잖은가.
"손님. 매장에 계시려면 이거 써주셔야 되거든요."
"아… 어제 그거네…."
"그리고 저주 검진할 테니 잠깐 팔 좀 내밀어 주세요."
순순히 팔을 내밀어온다. 이 서큐버스는 꽤나 복잡한 알고리즘의 술버릇을 가지고 있는 것 같다. 편의점에서 사직서 찾는 거 보면 제정신은 아닌 게 분명한데, 말은 꼬박꼬박 잘 들어.
팔에 대고 찍어봐도 별 반응은 없었다. 이번엔 약 찾아다 먹일 일은 없을 것 같다.
"네. 감사합니다."
"사장님. 그런데 사직서 정말 없나요…?"
"사직서는 정말 없고, 이력서는 있긴 합니다."
"이력서는 회사 그만두면 사러 올게요…."
그러든가….
우울해하는 서큐버스를 내버려 둔 채 카운터로 돌아와, 새벽 2시를 맞은 바깥 거리를 한번 바라보았다. 쌀쌀한 광경이 펼쳐져 있었다.
출근 직후만 해도 그럭저럭 북적거리던 사거리는 한산해진 지 오래고, 행인은 억지로 훑어봐야 간간이 있는 수준이다. 제법 한가해졌으니, 오늘 근무는 이 한가한 분위기 그대로 끝이 날 듯싶었다.
저 서큐버스만 집에 보낼 수 있다면 말이야. 막차도 이미 끊겼을 텐데 집엔 어떻게 가려나 모르겠다. 또 택시 불러줘야 되나?
10분이 지나도 도저히 일어날 기미가 없길래, 아까 치와와가 던져주고 간 숙취해소제를 집어 서큐버스에게 돌아갔다.
"손님, 속 괜찮으십니까?"
"아파요…."
"이거 드십쇼. 술 드신 분들 이거 많이 찾더라고."
"아… 네. 그런데 이거… 어떻게 먹어요…?"
그야 물이랑 같이 먹, 아. 괜히 가져왔네.
편의점엔 정수기가 없다. 즉, 숙취해소제를 먹이려면 물도 같이 사다 먹여야 한다는 것이다. 물 사다 먹으라고 하면 간단한 일이지만….
내가 먹으라고 건네준 거고, 줄 거면 물도 같이 갖다주는 게 맞지 않냐는 생각이 들더라고. 냉장고에서 600원짜리 미네랄워터 사다가 결제하고, 일회용 커피컵에 물 따라서 건네줬다.
"이것들 얼마인가요…?"
"그냥 드리는 거니까 신경 쓰지 말고 드세요. 저도 마침 목말랐고."
"…감사합니다."
서큐버스는 느릿느릿 고개를 꾸벅인 뒤, 피로회복제 포장을 뜯어 가루를 입에 털어 넣고 물 한 잔을 벌컥 들이켰다.
이어 찬물에 머리가 띵한 듯 눈을 질끈 감았다 뜬다. 찬물 기운에 술이 좀 깼는지 살짝 또렷해진 목소리로 내게 물어왔다.
"저, 사장님. 그런데 저, 여기 오래 있어도 되나요…?"
안 된다.
명분은 없다만, 술 취한 손님을 편의점에 가만두는 게 영 내키질 않았기 때문이다. 이 서큐버스의 경우엔 특히 더 그랬고. 계산대에 부침개 부쳤잖아.
"그건 좀 그런데. 콜택시 불러드릴까요?"
"그… 제가 이번 달 돈이 빠듯해서, 택시 탈 돈이 없어요…."
"그럼 술은 뭔 돈으로 드셨답니까."
"직장 동료랑 같이 먹고… 걔가 샀어요. 걔는 금수저라서."
"좋은 동료 두셨네."
이후, 살짝 머뭇거리던 서큐버스는 내게 재차 고개를 꾸벅이며 말해왔다.
"그, 죄송해요."
"어떤 게요?"
"계산대에서 제가, 그… 그, 그거 한 거…."
자기 입으로 말하긴 어지간히도 부끄러웠는지 말을 엄청 더듬어댔다.
"부침개 부치신 거?"
"어… 네…."
얼굴이 새빨간 게 홍당무 같다. 그래도 그걸 기억하고 사과해 올 줄은 몰랐던지라 내심 놀랐다. 이렇게 나오니 속으로 떽떽거리기도 뭐하네….
"진짜 죄송해요, 다신 그럴 일 없을 거예요…."
"마음 쓰지 마요. 직장생활 하다 보면 그럴 수도 있지."
"사장님도 직장 다니셨었어요?"
"다녔었죠. 망해버린 탓에 편돌이 하고 있지만."
"에고… 어쩌다가요?"
그걸 설명하기엔 내 출신이 좀 그런데. 그나저나 왜 내가 이 서큐버스랑 대화를 하고 있냐?
편의점에서 손님이랑 이렇게 잡담 나누는 일이 자주는 아니어도 분명 있긴 있다. 대체로 나이 지긋하신 분들이 편의점 와서는 라떼는 말이야~ 이러거나, 날씨 좋쟈? 나가 막 글씨, 벚꽃을 보고 왔는디… 하며 이야기보따리 풀어놓고 그래.
이해는 한다. 외롭고 서러워서 그렇겠지. 몸도 마음도 점점 늙어만 가는데, 세상 풍경은 자신에 맞춰 늙어주질 않으니까.
세상에 대고 왜 따라 늙어주지 않냐며 하소연해 봐야 들어먹질 않으니 사람을 붙잡고 하소연을 해야 하는데, 상담에는 돈이 들잖는가?
그러니 싸고 만만한 편의점을 찾아오는 것일 터다. 물론, 사회초년생이 술 먹고 찾아와서 이러는 경우는 거의 없긴 하지만….
개의치 않기로 했다. 말에 어울려주다 보면 술도 깰 거고, 그때면 집도 알아서 찾아가겠지.
"말씀드리긴 좀 그렇네요. 좋은 추억은 아니라서."
"아, 네… 죄송해요. 괜한 걸 물었네."
"그런데 집에는 어떻게 가실 생각이세요? 막차도 끊겼을 텐데."
"그러게요…."
난 택시비 못 내준다. 생각하며, 바깥 광경을 다시 한번 바라보았다.
시커먼 하늘 아래, 광원이라고는 사거리 삼색 신호등의 빨간불 몇 개가 전부다. 저 멀리에 불 켜진 술집들 간판이 몇 보이긴 했지만, 저런 데서 시간을 때울 돈이 있었으면 진즉에 택시를 탔겠지.
이런 상황에서 나가라고 내보냈다간 몇 시간 거리를 배회하는 것 말고는 방법이 없을 것이다. 에라 모르겠다는 심정으로 권했다.
"아예 첫차 올 때까지 있다 가셔도 됩니다."
"그래도 되나요…?"
"부침개만 또 안 부치시면요."
"아, 안 그래요. 아이, 참…."
서큐버스는 부끄러운지 몸을 숙였는데, 양복 등 쪽이 얕게 씰룩거리는 게 보였다. 날개가 파닥거리나 보다. 어차피 어울려 주기로 한 거, 궁금한 점이나 좀 물어볼란다.
"그런데 무슨 직장 다니십니. 아, 이런 거 여쭤보면 좀 그렇나?"
"괜찮아요. 저, 제약회사 다녀요."
어제 점장이 추측했던 게 맞았네.
"제약회사면 좋은 곳 아닌가. 그런데 그만둘 생각을 하세요?"
"그게, 여기가 첫 회사고, 일한 지 얼마 되지 않긴 했는데요."
"네."
"아무래도 일이 생각한 거랑 좀 달라서…."
"어떤 약을 만들길래."
"묘약을 만들어요. 사랑의 묘약."
잠깐 멍해졌다. 뭘 만든다고? 묘약?
"그런데 사랑에 대해서 상사분들이나 동료들이 얘기하는 게, 도저히 저랑은 맞질 않아서요…."
이걸 내 나름대로 이해해보려 했다. 쌍화탕 만드는 곳은 사람의 소화기관에 대해 잘 알아야 할 거고, 감기약 만드는 곳은 감기 바이러스에 대해 다는 몰라도 최소한 바이러스가 어떻게 생겨먹었는지는 알고 있을 거고….
사랑의 묘약을 만들려면 사랑에 대해서 알아야 하겠지. 여기까진 이해했다. 근데, 사랑이 도대체 뭔데?
"직장에 다른 분들은 어떻게 얘기를 하시는데요?"
"각양각색이죠. 저처럼 어렵게 생각하는 서큐버스도 있고… 쉽게 생각하는 서큐버스도 있고…."
서큐버스들은 사랑에 대해 이렇게 생각을 한단다.
키우는 반려견이 집에서 홀로 자신을 맞이해 줄 때 느끼는 감정을 사랑이라 생각하는 서큐버스도 있고, 쉽게 쉽게 '사랑은 게임이다'라 생각하는 서큐버스도 있고.
"직장에 서큐버스분들이 엄청 많은가 봅니다."
"아예 서큐버스들밖에 안 뽑거든요. 아무래도 만드는 약이 약이라서."
잠깐 상상을 해봤다. 각양각색의 오피스룩을 입은 서큐버스들이 몇 층은 되는 회사 건물 내에 바글바글하면 어떤 광경일까. 눈 호강은 실컷 하겠다 싶었다. 오피스룩 좋아.
어쨌든 이 소리들을 꾸역꾸역 다 듣는 걸 해낸 지금 내 심정은… 쥐뿔 모르겠다는 것이었다. 이걸 내가 어떻게 이해하냐고, 29년을 모쏠로 살았는데.
근데 더욱 웃긴 게 말이다.
"그런데, 문제가요…."
"네."
"제가… 사랑을 해본 적이 없어서요…."
이 서큐버스도 모쏠이란 점이었다.
이 말을 할 때는 귀가 불이라도 난 마냥 새빨개졌으며 얼굴은 양손에 파묻은 채였는데, 서큐버스 입장에선 모쏠이란 게 수치에 가까운 듯했다. 이건 우리 세상도 마찬가지이긴 하다만.
이걸 어떻게든 받아들여 보려고는 했다. 회사에 입사했는데 회사 업무에 도저히 적응을 못 하겠단 거잖아. 생각했던 거랑 달라서.
정리해보니, 내가 위로를 해줘야 할 상황 같다. 뭐라도 말을 꺼내 봤다.
"손님도 모쏠이실 줄은 생각도 못 했습니다."
"예…? 왜요…?"
"아니, 그… 예쁘시잖습니까. 맨정신으로 말하기 부끄러운 소리긴 한데."
왜 모쏠인지 이해가 안 되기도 했고. 이세계에서 서큐버스들을 이종족들이 어떻게 보는지는 난 모르지만, 내 주관으로 봤을 땐 이 서큐버스는 도내 탑클래스 미소녀 같아서 그랬다.
반면 내가 모쏠인 이유는 심플하다. 모쏠이어야 할 얼굴이라서 그렇다. 서큐버스는 여전히 얼굴을 손에 파묻은 채로 대답해왔다.
"…고마워요, 사장님."
더 얘기했다간 낯뜨거운 소리들만 나올 것 같아, 바로 말을 돌렸다.
"그러니까 너무 염려 마십쇼. 원하기만 하면 금방 남자친구 생기시지 않겠습니까."
"…그, 사장님."
"네."
잠깐 말꼬리를 늘여 묻는 게 수상쩍긴 했으나, 일단 대답했다. 이후, 서큐버스가 진지한 표정으로 내게 물어왔다.
"사장님께서는 그, 사랑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세요?"
아 글쎄, 나 모쏠이라니까??
18화. 상담하는 편돌이 (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