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0화. 우물 밖을 보여주마
시야 전체가 흑백으로 미친 듯이 점멸한다. 몸이 제멋대로 경련하는 것은 물론 다루던 마나마저 지리멸렬하여 뿜어내던 회색 기운이 끝내 스러진다.
죽지 않은 게 기적이다.
박세룡은 전신을 휩쓰는 마비감과 통증의 상반된 느낌 속에서 문득 생각했다. 하나 위기는 끝이 아니라 진행 중이었기에 그는 아득해지려는 정신을 간신히 붙잡았다.
'도망쳐야 해.'
오직 그 생각뿐이었다. S급 헌터가 된 이후 이렇게까지 필사적이게 된 적이 거의 없다. 아니, 그냥 처음이다.
하나 늦었다.
마구 점멸하면서 뭉개지던 시야가 겨우 정상으로 돌아오려는 차에 웬 손아귀 하나가 불쑥 다가오는 것이 보였다. 그리고 뭔가 반응하기도 전 멱살을 붙잡아선 그를 아파트 외벽에서 가볍게 떼어냈다.
자신의 목줄을 틀어쥔 그 팔뚝을 반사적으로 붙잡으며 박세룡은 상대의 모습을 눈에 담았다.
사이코패스가 분명한 20대 애송이.
제대로 실력을 검증한 적 없고 그럴 기회도 없었을 놈이 그를 가볍게 제압하고는 한심하다는 표정으로 쳐다보고 있었다.
놀랍기 짝이 없게도, 허공에 뜬 상태로 말이다.
'비행 능력까지?'
인간이 원래 날개 따위와는 전혀 연이 없기 때문인지 비행 능력은 매우 희귀했다. 희귀도만 따지자면 그 유용성이나 강력함과는 별개로 S급 헌터와 비슷했다.
한데 그 자신을 이처럼 가볍게 제압한 놈이 비행 능력까지 갖추고 있다니.
상황에도 불구하고 세상이 이렇게 불공평할 수가 있나 싶은 강렬한 감정이 차올랐다. 그건 특정할 수 없는 무언가에 대한 억울함이자 스스로에 대한 확신이 통째로 부정당한 무력감이기도 했다.
"죽··· 여라."
그래서 박세룡은 자신도 모르게 그런 말을 내뱉었다.
오감이 빠르게 회복되곤 있다지만 전신의 마비감과 통증은 여전했고, 지리멸렬한 마나의 흐름도 여전히 엉망진창으로 꼬인 채 제대로 다룰 수가 없었다.
이 순간 그는 상대의 도마 위에 올라간 생선 꼴이었다. 도저히 외면할 수 없는 현실에 마지막 오기가 발동해 버린 것이다.
하나 상대의 반응은 전혀 심각하지 않았다.
"지금 스스로 죽을죄를 지었다고 반성하는 건가? 근데, 내가 보기엔 그 정도까진 아닌데?"
그런 태연한 말에 박세룡은 분노보단 어이없음이 치밀어 올랐다.
"이런 짓을 저지르고··· 날 살려주겠다고?"
그럴 거면 어떻게 감히 이런 테러 행위를 벌일 수 있단 말인가?
꾸구구궁······!
생각하는 그 순간, 붕괴할 듯 위태롭던 아파트 건물의 상층부가 묵직한 굉음과 함께 그들 쪽으로 기울며 그림자를 드리웠다.
"그러게 왜 가만히 있던 나를 건드렸어."
한유진이 혀를 차며 안타깝기 짝이 없다는 듯 말했다.
"뭐, 공감은 안 가도 머리로는 이해가 간다. 권력이란 게 얼마나 사람을 병신처럼 미치게 만드는지는 이미 역사가 수없이 증명했으니."
"······."
"한데 나는 그런 거에 관심 없었어. 네가 건들지만 않았으면 조용히 서로 잘 지낼 수 있었을 거라고."
말도 안 되는 소리.
박세룡이 내심 부정하는 때 상대의 말이 이어졌다.
"왜 관심이 없었는지 알아? 내가 소탈해서? 무소유 정신을 깨달아서? 다 아니야. 그냥······ 비좁은 우물 안에서 아웅다웅하는 꼴을 보고 어떻게 욕심이 나겠냐고."
그게 정확히 무슨 뜻인지 되물을 시간 따윈 없었다. 그림자를 드리우며 기울어졌던 아파트 건물이 더 큰 굉음과 함께 머리 위로 떨어져 내리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 잘 봐라, 이 개구리야. 지금 네가 가진 그 힘과 거머쥐려던 권력이 얼마나 하찮은지를.
기겁해야 마땅할 다급한 상황 속.
이상하게도 한유진의 목소리가 더없이 선명하게 울려 퍼지며 그의 머릿속을 강타했다.
그리고 하늘의 철퇴처럼 떨어져 내리던 아파트 건물 덩어리가 한순간 분홍색 꽃잎 폭풍으로 돌변해 격렬히 휘몰아쳤다.
파스스스스슥-!!
날카로운 소음들이 천둥보다 더 크게 귓가를 울린다.
그 세상천지를 휩쓸어 버릴 듯한 꽃잎의 폭풍이 박세룡을 경악시키며 전부 다 스쳐 지나간 때.
주변 광경은 완전히 돌변해 있었다.
익숙한 지구 도시의 전경은 온데간데없이, 웬 거대한 성벽 위의 치열한 전쟁터가 펼쳐져 있었던 것이다.
무심코 고개를 돌리자, 성벽 바깥을 지평선까지 가득 메우며 해일처럼 몰려들어오고 있는 낯선 괴물들의 모습이 보였다. 그 괴물들에 맞서 인간이지만 매우 예스러운 복식을 한 자들이 용감하게 맞서 싸우는 모습도 눈에 들어왔다.
쩌렁쩌렁한 고함과 비명, 번쩍이는 섬광과 땅을 진동시키는 폭음, 곳곳에서 터져 나와 휘몰아치는 강렬한 마나의 파동까지.
그야말로 신화 속 전쟁터가 따로 없다.
외형만 봐도 강력해 보이는 괴물들은 물론, 용감하다 못해 흉포하게까지 느껴지는 기세로 맞서 싸우는 사람들 전부가, 그 어느 누구도 박세룡 자신보다 약한 이가 없었다.
그보다 강한 자를 찾기가 오히려 더 쉬웠고 비슷한 자들은 소수였다.
'이게, 무슨?'
그렇게 언제 땅에 내려섰는지 모를 상태로 잠시 상황 파악을 못 하며 얼타고 있던 때.
갑작스레 거대한 충격이 덮쳐들었다. 흡사 머리 위로 바위가 떨어져 내리는 듯 무시무시한 위압감을 주는 마나의 기운이었다.
- 이제 죽을 시간이다, 인간 버러지들아.
직후 모든 생각을 통째로 짓눌러 으스러뜨리는 듯한 의문의 정신파가 머릿속에 울려 퍼졌다.
생존본능에 따라 저절로 움직인 고개가 한쪽 하늘을 향한다. 굉장히 먼 거리일 텐데도 어찌나 덩치가 큰지 아주 잘 보이는 웬 익룡 한 마리가 보였다.
그냥 평범한 익룡이 아니었다. 몸 곳곳을 귀금속 따위로 장식한 채 단지 쳐다보는 것만으로도 눈이 타버릴 것 같은 어마어마한 마나의 오오라를 두른 괴물 중의 괴물이었다.
그 익룡 괴물이 입을 벌리자 앞쪽으로 찬란한 금빛 구체가 나타나더니 곧, 빠르게 덩치를 불리며 전쟁터로 떨어져 내려왔다.
그 순간 박세룡은 주변 대기의 수분이 모조리 날아가는 것을 느꼈다. 아직 닿으려면 멀었는데도 끔찍한 열기가 사방을 잠식하며 그를 산채로 불태워버리는 듯하다.
박세룡은 자신이 비명 질렀다고 생각했다.
하나 정말로 그랬는지 확신할 수가 없었는데, 바로 그 순간 전쟁터의 모든 소음을 집어삼키는 굉음이 터져 나왔기 때문이다.
인간 형상의 누군가가 빛살처럼 그 익룡 괴물을 향해 쏘아져 나가는 것이었다.
이어 떨어져 내리던 금빛 구체와 충돌하고.
형용할 수 없는 수준의 폭음이 재차 울려 퍼졌다.
고리형 충격파가 하늘의 모든 구름을 찢어발기며 지평선을 뛰어넘을 기세로 퍼져 나간다. 공간 자체가 마구잡이로 일그러지며 하늘이 폭풍을 만난 바다처럼 이리저리 뒤집어지는 것 같다.
'···신?'
끔찍한 열기 속에서도 무심코 그런 생각을 떠올리는 때.
사마귀와 전갈을 뒤섞어놓은 듯한 웬 괴물 한 마리가 박세룡을 노리며 매처럼 내리꽂혀 왔다. 그는 본능적으로 저항하려 했으나 놈의 낫 같은 팔이 날아드는 속도가 훨씬 더 빨랐다.
죽는다.
그렇게 확신하는 순간 무언가가 벽력음을 동반하고 쏘아져 그를 노리던 공격을 쳐냈다.
- 아직 구경할 게 남았어.
선명하게 울려 머릿속을 강타하는 듯한 한유진의 목소리였다.
우악스레 뒷덜미를 붙잡혀 전신이 휘릭 뒤집어졌다 싶은 순간, 주변이 어둠으로 물들더니 곧 다시 낯선 장소에 서게 됐다.
"허흑···!"
박세룡은 문득 느껴지는 소름 끼칠 정도의 현실감에 신음하며 휘청였다. 방금까지 느껴지던 열기는 물론, 그 이전부터 누적돼 온 모든 타격이 그를 고통스럽게 만들었지만.
속 편히 쓰러지기엔 주변 광경이 너무나 심상찮았다.
그나마 익숙한 현대 도시의 모습이었으나, 마치 종말 후 수십 년 이상 방치된 듯한 풍경으로 그 흔한 잡초조차 찾아볼 수가 없었다.
유리창이란 유리창은 모조리 깨졌으며 녹슬지 않은 금속이 없다. 우중충한 하늘 아래 이상할 정도로 싸늘한 기온이 그의 몸을 으슬으슬 떨리게 만든다. 들이쉬고 내뱉는 숨결에 따라 새하얀 김이 뿜어져 나왔다.
"이게······! 이게 무슨 귀신놀음이냐!"
박세룡은 두려움을 분노에 찬 고함으로 승화시켰다. 적어도 겉모습만은 그렇게 보이도록 만들었다.
"나와라, 한유진! 이건, 이건······!"
몇 차례 말문이 막히던 그가 무언가를 퍼뜩 떠올렸다.
"이건 다 환상이야!"
- 그래?
여상한 반문 이후.
- 아아아아아아······!!
갑작스레 뒤편 멀찍이서 한유진의 것과는 완전히 다른, 영적 메아리 같은 아우성이 들려왔다.
무언가에 극심한 고통을 받는 것처럼도 느껴지고, 매우 안타깝고 절박한 자의 구원요청처럼도 들리는, 희미하면서 또한 거대하여 그밖에 모든 소음을 다 잡아먹는 느낌을 주는.
반사적으로 고개를 돌린 박세룡은 웬 정장 남자가 더없이 기괴한 움직임으로 멀리서부터 달려오는 장면을 목격했다.
- 환상이라고 믿으면, 그냥 아무것도 하지 말고 죽든지.
아무래도 좋다는 듯한 한유진의 목소리가 재차 머릿속을 울린다. 계속해서 달려오는 그 의문의 정장 남자를 확장된 동공으로 보던 박세룡의 전신이 사시나무처럼 떨리기 시작했다.
다시금 소름 끼칠 정도의 현실감이 덮쳐들었다.
그리고 그 현실감 속에서 상황은 멈추지 않고 흘러갔다.
좀비처럼 연신 상체를 비틀어대는 정장 남자의 매 달음박질에 주변 광경이 일렁이면서 거리가 빠르게 좁혀진다. 그 움직임에 따라 근처 건물들에서 알 수 없는 공포에 질린 비명들이 은은하게 울려 퍼진다.
마치 그곳에 숨어있던 다른 수많은 귀신 같은 존재들마저 그 정장 남자를 두려워하여 도망치는 것 같았다.
그렇게 판단한 순간.
박세룡은 자신도 모르게 몸 돌려 미친 듯이 달리고 있었다. 컨디션이 정상일 때와 비교해 너무나 느린 속도였지만 다행히 정장 남자도 그렇게까지 빠르지는 못했다.
마치 무언가에 극심한 괴로움을 느끼는 듯 때때로 느려져선 울부짖는 덕이었다.
"어디··· 어디로···?!"
헐떡이는 박세룡은 자신도 모르게 그런 도움을 요청했다.
도무지 한유진의 모습은 보이지 않고 목소리만이 들려왔지만, 지금 이런 상황에 빠트린 것이 놈인 만큼 그를 구해줄 수 있는 것도 놈뿐이었다.
- 그냥 달려, 살고 싶으면.
안 그래도 그러고 있었다.
박세룡은 연신 등골을 타고 흐르는 전율 이상의 극심한 두려움에 거의 미칠 것 같은 느낌을 받으면서 젖 먹던 힘까지 끌어냈다.
열심히 달리다 보니 문득 어느 학교 건물이 눈에 들어왔다. 체력이 한계에 달한 상황이었는지라, 그는 이것저것 재볼 틈도 없이 무작정 그 학교 건물로 향했다.
혹시나 건물 안에서 추격자를 따돌릴 수 있지 않을까 싶었던 것이다. 딱히 구조가 복잡한 건물도 아니었으니 유사시 탈출하기도 쉬울 터였고.
한데 그렇게.
학교 건물의 유리문을 부수다시피 열고 들어서는 순간, 뒤편의 메아리 같은 아우성이 뚝 끊어졌다.
"헉···! 허억···! 헉···!"
기괴할 만큼 무겁게 내려앉은 고요 속.
거친 숨을 몰아쉬며 두터운 먼지 쌓인 복도를 몇 초 정도 더 달리던 박세룡이 천천히 멈춰 섰다. 그리고 안도감과 의아함을 반씩 담아 뒤편의 동정을 살폈다.
- 야.
그때 한유진의 목소리가 들려와 박세룡은 순간 눈물이 날 뻔했다. 필시 불구대천의 원수처럼 느껴져야 할 텐데도 그렇게 반가울 수가 없었다.
한데, 그 반가움을 팽팽한 긴장감으로 돌변시키는 말이 이어졌다.
- 너 거기 왜 들어갔어? 죽고 싶어서?
"···여, 여기가 왜?"
- 거기서 왜 추격이 끊겼을까?
짧은 순간.
박세룡은 머릿속으로 온갖 상상을 떠올렸다. 그리고 어떤 생각이 명확해지기도 전 본능적으로 다시 달리기 시작했다.
그렇게 달리기 시작한 직후.
- 아아아아-!!
- 아아아···!
위쪽에서 수십 이상 중첩되어 울리는 영적 아우성에 반사적으로 고개를 들어 천장을 보자.
머리가 기괴하게 꺾인 채 어두운 기운으로 휩싸여 몸 곳곳에서 피를 흘리는 수많은 '학생 귀신'들이 벌레를 연상시키는 움직임으로 그를 추격해 오는 무시무시한 광경이 보였다.
"흐아아아악-!!"
박세룡은 결국 참지 못하고 비명을 내질렀다. 그러면서 거의 이성을 잃고 전력으로 달렸다. 다행스럽게도 그때쯤 마나 운용이 살짝 가능해져서 움직임에 속도가 붙었다.
- 끄허어어···!
- 가지 마-!!
학생 귀신들은 두렵기 짝이 없는 움직임과 속도로 그런 박세룡을 맹추격했다. 천장에서부터 벽과 바닥 사방으로 퍼져나가며 아귀도 속 아귀들처럼 미친 듯이 쫓아오는 악몽 같은 광경이었다.
다행히 앞쪽에 밖으로 향하는 듯한 탈출구의 모습이 보였다. 덕분에 잠시 끊어질 뻔했던 정신줄을 겨우 붙잡은 박세룡이 끔찍한 공포 속에서도 희망의 불씨를 피워올리는 그때.
- 끼야아아아악-!!
- 원희가···!
- 원희···! 원희가 온다···!!
그를 맹추격하던 학생 귀신들이 역으로 비명 지르며 멈춰 서는 듯했다. 아니, 단순히 멈춰 서는 정도를 넘어 반대편을 향해 필사적으로 도망치는 모습이었다.
고개를 돌려 그 정황을 확인한 박세룡이 본능적인 두려움에 의해 멈춰 서는 그때.
그가 탈출구라고 여겼던 문이 열리며 한 여학생이 모습을 드러냈다.
정확히는 여학생 귀신이었다.
전신이 시커먼 어둠으로 물들었음에도 시야에 박혀들 듯 새빨간 핏물을 흘려내는, 무저갱같이 두려운 칠흑빛 두 눈으로 그를 가만히 바라보며 선.
훅 끼쳐오는 혈향이 어찌나 진한지 순간 폐가 핏물로 가득 차버린 듯했다. 안 그래도 심하던 냉기가 단순히 괴로운 정도를 넘어 전신 감각을 마비시키고 그의 움직임을 굳게 만드는 수준으로 폭증한다.
형언할 수 없이 압도적인 느낌이 들어, 극한의 공포를 느끼면서도 그 여학생 귀신의 두 눈에서 시선을 뗄 수가 없었다.
무언가.
단순한 귀신 따위가 아닌, 어느 초월적 존재를 마주하여 공포와 경외심에 쪼그라들다 못해 짓눌려 으스러지는 듯한 감각이다.
그렇게 박세룡이 완전히 정신을 놓아버리기 직전.
여학생 귀신에게서부터 뻗어져 나와 주변 어둠으로 녹아든 머리카락이, 한없는 예기를 품고 사방에서 파도처럼 그를 난도질하기 위해 들이닥치고.
동시에 어떤 손아귀가 그의 뒷덜미를 낚아채 훅 잡아당겼다. 이어 전신이 뒤집히며 위쪽으로 쑥 치솟는 듯한 이상한 감각이 덮쳐든다.
세상 전체가 하얗게 물들었다가 곧 원래대로 돌아왔다.
"······."
그는 숨조차 제대로 쉬지 못하면서, 미약하게 떨며 몸이 굳은 채로 간신히 눈동자만 굴려 주변 광경을 확인했다. 그렇게 눈동자가 움직이는 위쪽 이마에서부터 식은땀이 흠뻑 배어 나왔다.
너무나 다행스럽게도 그 안전가옥의 광경이었다.
한유진이 난데없는 기습을 가하기 직전의 바로 그, 지극히 정상적이며 안온한 광경.
"다 거짓으로 꾸며진 환상이라고 생각한다면, 어디 한번 계속 네 마음대로 행동해 봐라. 하나 만약 조금이라도 그렇지 않다면······."
앞에 자리한 한유진은 더없이 담담한 태도로 말해 왔다.
"내가 보여준 우물 밖 광경을 되새기면서, 앞으로 뭘 어떻게 해야 할지 고민해 보는 게 좋을 거다."
이어 그는 턱짓으로 현관 쪽을 가리키며 나가라는 뜻을 표했다.
박세룡은 언제 몸이 굳어있었냐는 듯 반사적으로 일어나 그쪽으로 향했다. 중간중간 매우 위태롭게 휘청였지만, 어떻게 겨우 쓰러지지 않으면서 현관문을 나섰다.
그렇게 전신이 식은땀으로 흠뻑 젖은 비참한 꼴이 되어 도망치듯 떠나갔다.
* * *
박세룡이 비루먹은 개처럼 쫓겨난 지 채 한 시간도 안 지났을 때.
한유진은 그가 '공식 사죄' 기자회견을 여는 모습을 스마트폰으로 보며 피식피식 웃고 있었다.
41화. S급 헌터 데뷔
과연 박세룡은 생각이 없는 자가 아니었다.
여길 떠난 지 얼마나 되었다고 이런 신속한 움직임을 보여주다니, 한유진 자신을 견제하기 위해 보여줬던 신속함보다 더 빠르다. 필시 본인에겐 결코 쉬운 결정이 아니었을 텐데도 말이다.
기자회견의 내용은 사실 별거 없었다.
자신의 부주의한 실수로 원래 드러나선 안 될 시기에 새로운 S급 헌터가 드러나게 됐다는, 당사자에게 진심으로 미안하며 앞으로 꼭 이 실수를 만회할 기회가 있었으면 좋겠다는, 그런 이야기에 불과했다.
일의 배경을 모르는 사람이 본다면 뭐 이런 짧은 내용으로 기자회견까지 열었을까 싶을 터다. 사정을 아는 이라면 저 사람이 왜 이런 후퇴를 선택했을까 놀라우면서도 의아할 터였고.
'확신 같은 건 없었을 텐데 말이지.'
그때 충격을 크게 받은 모습이긴 했지만 그게 환상의 내용을 믿을 이유는 못 된다.
'내용이 사실이든 아니든 일단 물러서는 게 맞다고 판단한 건가. 정면으로 싸워 진 것과 마찬가지인 상황이니까.'
그렇게 생각하는 때, 스마트폰이 울렸다. 사무관 오태민이었다.
"네, 전화 받았습니다."
한유진은 담담한 태도로 전화를 받았다. 사무관은 주무관과 비슷하게 매우 미안해하며 사과부터 건네왔고, 일의 정황을 얼추 파악한 채로 그것을 설명해 줬다.
내용은 담당 주무관이 했던 추측이 사실로 드러난 정도였다. 이능관리국의 부국장 김재훈 차관이 핵심자로서 연관된 듯하다던 바로 그것 말이다.
대략적인 이야기를 마친 그는 대체 한유진과 박세룡 둘 사이에 무슨 일이 있었는지를 조심스레 물어 왔다.
"제 정체를 드러나게 만든 게 대균열에서의 압박 해소를 위해서였다더군요. 그래서 순수하게 그런 목적이었으면 기자회견 열어서 사과하라고 했습니다."
- ······순순히 그러겠다고 하던가요?
"당연히 아니죠. 서로 잠깐 실력을 검증하는 일이 있었습니다."
한유진은 딱히 자세하게 이야기해 줄 생각이 없었다. 나중에 그렇게 하더라도 지금 전화로 말하긴 애매한 느낌이다.
사무관도 대략 이해한 듯 다른 세세한 정보들이 더 밝혀지는 대로 알려주겠다며 통화를 마무리하려는 듯했다.
바로 그때, 그가 다른 누군가에게서 뭔가 급한 보고를 듣는 것 같더니, 조금 혼란스럽다는 기색으로 한유진에게 내용을 알렸다.
- 지금 박세룡 씨가 한유진 씨와 통화하고 싶다는 의사를 전해 왔습니다.
잠깐 말을 끊은 그가 덧붙여 물었다.
- 차단할까요?
"아니요. 괜찮으니 전화하라고 하세요."
과연 무슨 용건일까.
사무관과의 통화를 마무리하고 채 일 분도 지나지 않아 낯선 번호로 전화가 걸려 온다.
"전화 받았습니다."
- 선생님, 미리 전달받으셨겠지만 저 박세룡입니다.
한유진은 순간 스마트폰을 귓가에서 떼며 눈으로 그걸 쳐다봤다. 그리고 다시 원래 자세로 돌아가며 말했다.
"제가 왜 선생님이죠?"
- 존중을 담은 호칭입니다. 어색하시다면······ 상황에 맞게 후배님으로 부르겠습니다.
아주 무난한 호칭에 절로 고개가 끄덕여진다.
"그러세요. 한데 용건이?"
- 제가 혹시 후배님을 도울 일이 없겠습니까?
한유진은 잠시 침묵하며 생각에 잠겼다.
'이게 그 이길 수 없다면 합류하라는 그건가?'
태세전환이 빨라도 너무 빠르다.
물론 완전한 합류라고 보긴 어렵고 잠시 대립각을 누그러뜨리려는 의도일 뿐일지도 모르지만, 어쨌든 확실히 평범한 반응은 아니었다.
본인의 기반이 흔들리지 않으리라는 확신이 없고선 불가능한 행동이기도 했다.
"있습니다."
다행히 이런 비슷한 상황을 경우의 수 중 하나로 떠올려 두긴 했는지라, 한유진은 막힘없이 말했다.
"제가 한 차례 습격당했던 일은 아실 겁니다. 영원의 여신교라는 사이비종교이자 마약범죄 조직이기도 한 놈들이 범인인데, 아마도 중국 베이징과 모종의 연관이 있는 듯합니다. 이미 이능관리국에 말해두긴 했지만 따로 조사해 볼 수 있겠습니까?"
- 그건 이미 국정원에서 움직이고 있는 걸로 압니다. 저보다 그 요원들이 훨씬 유능할 겁니다.
"흠, 정말로요? 어떻게 아셨죠?"
- 제가 정부 곳곳에 인맥이 좀 있습니다.
권력에 욕심내며 아직 S급 검증이 끝나지도 않은 한유진 자신을 견제하려고도 했었으니, 그의 능력과 위치를 고려했을 때 딱히 놀라운 일까지는 아니다.
"그러면 원희를 한 번 조사해 보세요."
- 원희······ 말씀이십니까?
되묻는 박세룡의 목소리가 잠깐 떨렸다. 거의 본능적인 반응이었다.
"10년 뒤에 영원고등학교 학생이려면, 지금 나이가 적게는 6살에서 많게는 10살일 겁니다. 1년 빠르게 입학하거나 1년 꿇을 경우까지 고려해서 말이죠."
- 10년 뒤······?
"그 나이대의 원희라는 이름을 가진 서울··· 아니지, 전국의 여자아이를 다 조사해 볼 수 있겠습니까? 중간에 귀화했거나 이름을 바꿨을 가능성은 일단 배제하고요."
꽤 긴 시간을 침묵하던 전화 건너편의 박세룡이 물어 왔다.
- 거기가······ 10년 뒤의 미래라는 뜻으로 이해하면 되겠습니까?
"네."
- ······영원의 여신교, 그놈들과 연관이 있을 테고요?
"어쩌면요."
- 조사해서 만약 찾아낸다면, 바로 제거합니까?
그에 한유진이 화들짝 놀랐다.
"무슨 큰일 날 소리를! 우선 지켜보면서 저한테 알려주세요. 아마 천영··· 엄청난 재능을 가졌을지도 모르니까, 혹시 찾았는데 위험하거나 너무 열악한 상황이라면 구조해야 합니다."
- 알겠습니다. 출생 미등록 같은 경우만 아니면 그리 오래 걸리진 않을 겁니다.
"든든하네요. 부탁합니다."
의례적인 게 아닌 진심이 담긴 말이었다. 괜한 이유를 꾸며내지 않고도 이런 조사를 맡길 수 있는 일종의 '동료'가 생겨 반갑기까지 하다.
이후, 막 통화를 끊으려던 한유진은 무언가를 떠올리곤 재차 입을 열었다.
"대균열에서 압박이 심하다고 하지 않았나요? 저는 사실 그걸 부탁하려고 전화한 줄 알았는데요."
- 한번 의사를 여쭤보려고는 했습니다. 한데, 더 중요하고 바쁜 용무가 있으신 듯하니, 그냥 제가 어떻게든······.
"아닙니다. 어차피 상황이 이렇게 된 거, 검증만 끝내면 바로 대균열로 가도록 하죠."
- 정말이십니까?
"저도 거기서 중요하게 할 일이 있습니다. 서로 도우면 되겠네요."
- 감사합니다 선생··· 아니, 후배님.
박세룡은 매우 기꺼워하는 태도로 통화를 마무리 지었다.
어쨌든 한유진으로서도 나름 일이 잘 풀리게 된 터라 기분이 나쁘지 않았다.
'원희를 조사하면서 환상의 진위를 살피려는 생각도 들겠지.'
그런 만큼 더 진지하게 조사에 임할 테니 오히려 좋다.
몇 번 다시 상황을 되짚어보며 문제가 없는지 점검하던 그는, 슬슬 스마트폰에 하나둘씩 도착해 쌓이기 시작하는 여러 잡다한 메시지를 보며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신상이 공개된 만큼 피할 수 없는 재난이다. 그나마 아직 검증이 안 끝났기에 이 정도지, 오늘이 지나면 본격적으로 지인들에게서 온갖 연락이 쏟아질 터였다.
'피할 수 없다면 즐겨야겠지.'
하지만 당장은 그럴 마음이 잘 안 든다. 그는 중요하지 않은 사람들의 메시지를 모두 무음으로 돌렸다.
* * *
S급 검증은 예정대로 진행하기로 했다.
중간에 사무관이 연락하여 정치인과 기자 등을 포함한 많은 불청객들이 찾아오게 될 듯하다며 혹시 날짜를 바꾸겠냐고 물어 왔으나, 한유진은 거절했다.
날짜를 바꾼다고 그들을 완전히 피할 수는 없을 것 같았다. S급 헌터의 위상을 생각하면 계속 피하면서 안 만나려는 것도 모양새가 좀 이상했고 말이다.
'이참에 그냥 다 해치워버리자.'
하여 그는 예정대로 외출했고.
사무관의 차를 얻어 타고 도착한 야외 이능훈련장 입구 근처에서부터 예상을 훌쩍 뛰어넘는 인파를 마주할 수 있었다.
그들은 아무리 봐도 정치인이나 기자 등이 아니라 그냥 일반인들이었다.
- 온다···!
- 저거다! 저 차다!
- 꺄아악-! 왔다, 왔어!
대체 뭘 보고 어떻게 알아챘는지, 곧바로 엄청난 이목이 집중된다. 그리고 사람들이 무슨 공항에서 연예인을 마중하듯 난리를 치기 시작했다.
환호하고, 비명 지르고, 손을 흔들고, 몇 과격한 이는 도로에 뛰어들어 차를 가로막으려고까지 하고.
미리 배치된 경찰 인력이 아니었더라면 바로 차가 멈추면서 둘러싸였을 것이 분명하다.
난생처음 겪는 경험인 데다가 그런 사람들의 행동이 좀처럼 이해가 가질 않아, 한유진은 법혼기 수사임에도 대략 정신이 멍해지는 기분이었다.
- 꺄아아악-! 여기 좀 봐주세요!
창밖으로 스쳐 지나가는 웬 비명 지르는 여성 무리의 모습에 그가 반사적으로 물었다.
"저 사람들 왜 저럽니까······? 오늘 무슨 다른 연예인이라도 온대요?"
"아니요, 전혀······."
사무관도 좀 당황한 듯 그냥 말을 흐린다.
"그냥······ 원래 그런 사람들 아닐까요? 막상 찾아보면 이런 비슷한 경우가 은근히 있긴 하거든요."
담당 주무관이 궁색하게나마 답했다.
"그, 왜, 헌터들 중에 팬카페 있는 사람들도 많지 않습니까?"
한발 늦게 사무관이 할 말을 찾은 듯 입을 연다.
"저는 아직 한 번도 활동한 적 없잖아요."
"거의 25년 만에 새로 등장한, 대한민국 역사상 셋밖에 없는 S급 헌터시지 않습니까. 그냥 그 사실만으로도 사람들이 호감을 갖고 몰려들 법도 하지요."
"음······."
슬슬 충격도 좀 가라앉았고 사무관의 말도 꽤 그럴듯하게 들리는지라, 한유진은 묵묵히 고개를 끄덕였다.
다행히 이능훈련장 안쪽으론 아무나 출입할 수 없기에, 생면부지의 일반인들이 미친 듯이 호응하는 광경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하나 대신 마주하게 된 건 진을 치고 있던 수십 명의 기자들이 연신 터뜨려대는 플래시 세례였다. 한쪽에 있는 주차장으론 딱 봐도 고위 정치인들이 타고 왔을 검은색 리무진들이 대거 주차된 상태였다.
'이게 S급 헌터의 위상인가.'
머리로만 대략 이해하고 있던 그것이 이제서야 슬슬 피부로 체감되는 것 같다.
'내가 S급 헌터가 되긴 했구나.'
주차가 끝난 후.
그는 조금 마음의 각오를 다지면서 문을 열고 내렸다. 다행히 인터뷰 시간이 따로 잡히기라도 했는지, 함부로 다가와서 카메라 따위를 들이대는 자는 없었다.
대신 다가온 것은 이곳 이능훈련장의 직원들이었다.
그들은 예전에 한번 봤을 때보다 훨씬 더 격식을 차리는 태도로, 또한 평소보다 훨씬 더 증원된 것이 분명한 모습으로 한유진을 안내했다.
그렇게 안내받으며 이동하는 와중 한 무리의 정장을 입은 사람들이 웃으며 그를 쳐다보는 광경을 볼 수 있었다.
그중 여럿이 매우 익숙한 얼굴이었다.
대통령 박준형, 국무총리 강도석, 여당과 야당의 대표인 강무현 의원과 진명호 의원, 글로벌 대기업 한성 그룹의 회장 윤재혁, 마찬가지로 글로벌 대기업인 엑시온 그룹의 회장 오승재 등.
정장을 입은 사람들만 있는 게 아니라 군인 정복을 입은 사람들도 몇 보였는데, 나이가 많고 어쩐지 얼굴이 익숙하면서 어깨에 달린 계급장이 최소 별 3개부터 시작하는 이들이었다.
게다가 한국인만 보이는 것도 아니었다. 통역인지 경호원인지 모를 이들을 한두 명씩 곁에 둔 외국인들도 십여 명에 달했다.
'그냥 검증만 하려던 날이 무슨 데뷔일처럼 돼버렸군.'
한유진은 생각하면서 애써 표정 관리를 했다.
너무 주목을 받는지라 하마터면 법혼기 수사의 몸을 가지고도 걸음걸이가 부자연스러워질 뻔했다.
하지만 어쨌든 행동거지의 자연스러움을 지켜내는 데 성공해서, 새삼 법혼기 수사가 된 보람이 느껴졌다.
42화. 대균열 신고식
본격적인 화력 테스트를 위한 자리에 서면서 한유진은 빠르게 안정을 되찾았다.
너무 갑작스레 한 번도 생각해 본 적 없던 광경의 주인공이 되어 좀 당황스럽고 어색했을 뿐, 이런 대우에 막 가슴이 벅차오른다거나 영광스럽다거나 한 건 아니었다.
'우물 안에서 좀 먹어주는 사람이 됐구나.'
정리되고 보니 딱 그 정도 감상에 불과했다.
그 역시 이곳 우물 출신이긴 하지만 이미 바깥세상의 광경이 대략 어떠한지 안다. 한 번 깨우쳐 높아진 안목은 원래대로 낮아지기가 매우 어렵다.
"준비 끝나시면 말씀해 주십시오."
"네, 바로 시작하죠."
하여 옆에 선 훈련장 직원에게 말하는 그의 목소리는 더없이 담담해진 상태였다.
"그럼······ 가까운 표적물부터 파괴하시면 됩니다."
직원이 무전으로 다른 이들에게 시작 사인을 주며 말했다.
화력 테스트를 위한 자리는 일종의 참호였다. 전방으로 얕은 구릉지대가 쭉 펼쳐져 있으며 일정 거리마다 금속체 표적물들이 자리해 최대 1km 밖 거리까지 펼쳐져 있는.
표적물은 고정된 것도 있고 움직이는 것도 있다. 어떤 것은 특수기술이 적용되어 평범한 사람이라면 가까이서도 식별하기 어려울 만큼 주변과 동화돼 있다.
그런 은신 표적물은 당연히 관찰 능력 테스트를 위해 특별히 준비된 것들이다.
손에서 한 번에 서너 개의 화탄을 만들어 내며 문득, 한유진은 지금 여길 찍고 있는 카메라의 수가 거진 세 자릿수에 달하지 않을까 싶었다.
그런 잡념과 함께 고속으로 쏘아진 불덩이들이 가까운 금속 표적물들을 강타했다.
꽈과과광-!!
콰쾅-!!
우르르릉······!
섬광과 폭음이 발생하고, 땅이 울리는 진동과 함께 멀리서도 그 흉포함이 느껴지는 충격파의 확산이 피어오르는 흙먼지를 통해 선명히 드러난다.
'화령조술 정도는 지금 공개하는 게 낫겠다.'
생각한 즉시 손에서 만들어지려던 화탄들이 화령조들로 변화했다.
그것들은 살아있는 것처럼 날개를 펄럭이면서 이전보다 더 빠르고 변화무쌍한 궤적으로 각자의 목표물을 향해 날아갔다.
다시금 섬광과 폭음이 터져 나온다.
은은히 전해져 오는 땅의 울림은 폭발력을 몸으로 가늠할 수 있게 만들어 줬으며, 한순간 크게 피어올랐다가 이리저리 흩어져 사라지는 흙먼지 구름은 시각적인 충격을 선사했다.
'이왕 하는 거니까 제대로 증명해야지. 누가 귀찮게 굴지 못하도록.'
생각하며 그는 다시금 제대로 법력을 불어넣은 화령조들을 만들어 냈다. 가장 먼 거리인 1km 거리의 표적물까지 모조리 박살 낼 심산이었다.
그 어떤 장애물이나 방해도 없는 이런 환경에선 결코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 * *
검증은 금방 끝났다. 몰려온 사람들의 수나 면면을 봤을 때 이렇게 빨리 끝나도 되나 싶을 정도였다.
그렇지만 상황이 상황인지라, 실질적인 메인 행사는 한유진의 S급 능력 검증이 끝난 이후로 바뀐 지 오래였고, 그는 꽤 긴 시간을 여러 사람들과 인사하는 것으로 보내야 했다.
하나 딱 거기까지였다.
이후로 누가 책임자로서 준비했는지 모를 만찬 및 인터뷰 등은 제대로 진행되지 못했다. 당연히 이 자리의 주인공이어야 할 한유진이 전부 거절한 탓이었다.
"아쉽지만 피곤해서 좀 쉬어야겠습니다."
그는 붙잡으려는 사람들을 전부 그런 성의 없는 말로 떨쳐내며 바로 자리를 떴다. 상당수의 이들이 떨떠름한 표정을 짓는 게 보였지만 크게 신경 쓰이진 않았다.
저들과 함께함으로써 얻게 될 권력과 명예 등에 전혀 관심이 없었기 때문이다.
'별 대단찮은 일에 같이 호들갑 떨어주는 것도 고역이지.'
결단기나 원영기에 오른 것을 축하하는 자리라면 또 모를까, 고작 법혼기에 올라 우물 안에서나 인정받는 S급 헌터가 된 것을 축하할 뿐이었으니 흥이 나고 싶어도 날 수가 없다.
딱히 이곳에 온 사람들을 무시하려는 건 아니었지만 정말로 어쩔 수가 없었다.
'박세룡한테 그 환상을 보여줘서 참 다행이야.'
현재로선 함께 우물 밖을 바라볼 수 있는 거의 유일한 동지가 아니겠는가?
'···아님 말고.'
생각하며 사무관의 차에 올라탄 그는 마침내 귀찮은 일을 다 끝냈다는 감상으로 한숨 쉬었다. 따라서 차에 탄 사무관과 담당 주무관은 잠시 얼을 타는 기색이었다.
"여기, 제 마나 관련 지식입니다."
"아."
한유진이 건네는 USB를 반사적으로 받아 든 사무관이 조금 늦게 정신을 차렸다.
"이게 그······ 정리를 다 끝내신 겁니까?"
"네. 특허등록 끝나고 보급이 시작되기까지 얼마나 걸릴까요?"
그 질문에 잠시 생각하던 사무관이 답했다.
"일반적으로는 반년 이상 걸립니다. 일 년이 넘을 수도 있고요."
"······너무 느리네요. 더 빠르게는 안 됩니까?"
"원하신다면 안 될 것도 없지요. 이제 명실상부한 S급 헌터이신 한유진 씨의 지식 아니겠습니까?"
그는 말하면서 새삼 보물을 바라보듯 손에 들린 USB를 쳐다봤다.
거기에 담긴 지식은 영혼을 법혼으로 승화시키는 법결이 빠진 절반의 회원공, 그리고 일곱 가지 기초 법술이었다.
'화탄술, 옥피술, 풍운술, 어물술, 치유술, 은영술, 영안술.'
회원공에 포함된 정화술과 청심술까지 더하면 공격, 방어, 회피, 치유, 유틸에 이르기까지 생존에 필요한 거의 모든 방면의 지식이 포함되는 셈이다.
"얼마나 빨리 될까요?"
"서너 달이면 될 겁니다."
"그보다 더 빠르게는요?"
"더 빠르게는······ 특별한 이유가 있을까요? 이유에 따라선 절차를 좀 많이 생략할 수도 있습니다."
사무관도 이제는 알 터였다. 한유진이 그저 돈이나 명예를 위해 그 지식을 보급하려는 게 아님을.
만약 그런 걸 원했다면 지금처럼 만찬이나 인터뷰 등을 거절하고 이렇게 차에 탔을 리가 없다.
"저 말고 박세룡 씨도 이 일을 강력히 추진한다면 얼마나 더 빨라지겠습니까?"
한유진은 이유를 알려주는 대신 그렇게 질문했다.
"어······ 그러면, 음······ 두 달 안에도 될 것 같습니다."
"그거 좋네요."
그 정도면 기다릴 수 있다. 더 빨리하라고 재촉해 봤자 될 것 같지도 않았고 말이다.
곧장 스마트폰을 꺼낸 그는 박세룡에게 메시지를 보내면서 말했다.
"이제 집으로 가죠. 계속 이렇게 있다간 저기 기자들이 다가올 것 같네요."
"알겠습니다."
"아 참, 아직 말씀을 안 드린 거 같은데, 제가 최대한 빨리 대균열에 갈 계획입니다."
"예?"
"어쩌다 보니 박세룡 씨한테 먼저 말하게 됐는데, 제 쪽에서 처리해야 되는 절차 같은 게 있겠죠? 뭐 서류 작성이라든가, 저번에 말씀하신 그 관리 지원 계약도 하면 좋을 테고요."
"제가 설명해 드릴게요."
담당 주무관이 운전자인 사무관을 대신하여 나선다. 사무관은 조금 얼떨떨한 눈빛으로 한유진을 보다가 곧 차에 시동을 걸었다.
필시 오늘 그의 마음속에서 한유진의 이미지가 여러모로 격변했을 터였다.
* * *
이틀.
대균열에 가기 전까지 한유진이 보낸 시간이었다.
S급 헌터 자격증을 발급받고, 대균열 통행증도 발급받고, 각종 동의서 따위를 작성하고, 이능관리국과 관리 지원 계약을 맺는 등.
아주 바쁜 이틀이었다.
여담으로 그렇게 바쁜 와중 잠시 미뤄두었던 지인들의 연락을 처리하기도 했다.
대학 동기 친구 박희원을 포함하여 중고등학교 동창은 물론 기억도 잘 안 나는 초등학교 동창마저 연락을 취해 왔는데, 조금 재미있게도 그렇게 연락해 온 이들 중 한유진 자신의 각성 계기일 수 있는 '그 녀석'이 포함돼 있었다.
유준석.
분명 고등학교에 입학할 즈음 녀석이 헌터 전문학교로 들어가면서 연락이 끊겼고 번호까지 모르게 됐는데, 우습게도 녀석 쪽에서 한유진의 번호를 계속 갖고 있기라도 했던 모양이다.
'아니면 설마, 자기 여자친구한테 물어봐서 안 건 아니겠지?'
자연스레 각성 당시의 기억을 떠올리면서도 한유진은 녀석에게 답장하지 않았다. 딱히 그러고 싶은 마음이 안 들었다.
부가적으로, 그렇게 지인들의 연락을 처리하면서 저절로 대중의 반응을 알게 됐는데, 짧게 요약하자면 '열광에 찬 국뽕'이라고 할 수 있을 터였다.
마이튜브에 들어가면 한유진 자신의 화력 테스트 영상을 바로 찾아볼 수 있었다. 아니, 찾아보기도 전에 그냥 알고리즘 추천으로 메인에 떴다.
단지 정부 쪽 공식 채널이나 뉴스 채널 등에서만 그 영상을 찾아볼 수 있는 게 아니었다. 대체 언제 생겼는지 모를 자칭 '팬'이라는 사람들이 온갖 화려한 이펙트와 웅장한 BGM을 넣어 만든 영상들도 상당수였다.
그중 일부는 손발이 다 오그라드는 유형의 BGM을 넣고 편집해 놔서 한유진을 기겁하게 만들었다.
'이건 팬이 아니라 안티잖아······.'
할 수만 있다면 바로 신고해서 내리고 싶은 마음이다.
어쨌든, 덕분에 이틀을 바쁘면서도 심심하지 않게 보낼 수 있었고.
그렇게 대균열로 가기로 한 당일이 됐다.
* * *
원래대로였다면 이번에도 평범하게 사무관의 차를 얻어 타고 전방 대균열로 향하게 됐을 터다.
한데 꼭두새벽부터 박세룡에게서 연락이 왔다.
"예, 전화 받았습니다."
받기 무섭게 박세룡은 조금 다급한 어조로 말을 쏟아냈다.
- 오늘이 오시기로 한 날이지요?
"네. 무슨 특별한 일이라도?"
- 그 안전가옥 아파트로 헬기를 한 대 보내 놨습니다. 옥상에 헬리포트가 있는데 기다리다가 타고 와주실 수 있겠습니까?
"헬기를···? 무슨 일인데요?"
- 난데없이 웨이브가 발생할 조짐이 포착됐습니다. 현재 여기 모든 인원이 긴급 동원된 상태입니다.
웨이브.
균열 속 괴물들이 알 수 없는 이유로 대규모 무리를 이뤄 공격해 오는 것을 뜻한다. 당연히 일반적인 균열에서는 찾아볼 수 없는 매우 희귀한 현상이며, 또한 그만큼 위험한 현상이기도 하다.
- 후배님이 일찍 와주신다면 내부 방어선을 지킬 수 있을지도 모릅니다. 혹은 밀리더라도 피해가 많이 줄어들 테고요.
"옥상에서 기다리겠습니다."
박세룡은 감사를 표하고는 즉시 전화를 끊었다. 통화 내내 주변이 시끄러웠던 걸 보면 확실히 매우 다급한 상황인 듯했다.
'웨이브라.'
첫날부터 신고식을 제대로 치르게 생겼다.
'카르마를 얻을 수 있을 테니 그건 좋지만, 혹시 위험할까?'
살짝 우려하면서도 그는 빠르게 외출 준비를 마치곤 옥상으로 올라갔다. 그렇게 가면서 무용이를 빼놓지 않았다.
전투를 위해 가는 마당에 웬 팔자 좋게 애완동물인가 싶겠지만, 녀석이 대략 B급 헌터와 비빌 수 있는 능력을 갖췄단 사실을 잊어선 안 된다.
게다가 대균열에서는 하루하루 출퇴근을 하는 게 아니라 그곳 숙소에 머물게 될 텐데, 그동안 녀석을 이 안전가옥에 내버려둘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사람들이 토끼 족제비를 보며 품을 이런저런 의문은 그냥 S급 헌터의 권위로 찍어 누르면 된다.
그런 생각을 하며 기다리길 잠시.
채 10분도 지나지 않아 하늘 한쪽에서부터 헬기의 모습이 보였다.
금방 가까워진 헬기는 옥상 헬리포트에 착륙하기 시작했는데, 영화 같은 데서나 보던 장면을 실제로 보자 꽤 색다른 기분이었다.
"한유진 헌터님-!!"
열리는 헬기 문 안쪽에서 프로펠러의 굉음을 뚫고 누군가가 그를 부른다. 한유진은 딱히 군말하지 않고 바로 다가가 탑승했다.
그를 불렀던 30대 남성 헌터 안내자의 시선이 문득, 한유진의 품에 안긴 무용이에게로 향한다. 그는 곧바로 표정이 괴상해졌으나 감히 무어라 지적하진 못했다.
"안전벨트 매십시오!"
설령 추락하더라도 비행할 수 있는 한유진이었지만 순순히 지시에 따라 벨트를 맸다. 그러는 사이 헬기는 일분일초가 급하다는 듯 휙 떠올라 방향을 틀고 있었다.
생전 처음 헬기를 탄 감상은 짧게 요약할 수 있었다.
진동이 심하고 엄청나게 시끄럽다.
영상 등에서 볼 때마다 왜 사람들이 헤드셋을 착용한 모습이었는지 바로 알 수 있었고, 누가 말해주지 않았는데도 저절로 찾게 될 정도였다.
조금 더 말해 보자면 속도가 변하거나 방향이 바뀔 때마다 꽤 스릴감도 느껴졌다. 아무래도 바로 옆 창문으로 펼쳐지는 생생한 허공의 풍경 때문에 더 그런 것 같았다.
한유진은 품에 안은 무용이의 두 귀를 손수 막아주고 있었는데, 그 꼴을 보는 맞은편 헌터 안내자의 표정이 참으로 볼만했다. 처지상 뭐라고 할 수는 없지만 만약 가능하다면 온갖 말을 다 내뱉을 듯한 기색이다.
'왠지 좀 웃기네.'
긴급한 상황이 아니었더라면 낄낄 웃었을지도 모르겠다.
그렇게 대략 15분 정도 후.
이제 반 정도 왔으려나 생각하는데, 헬기가 급하강하는 느낌이 들더니 착륙하려는 기색이었다.
"벌써 도착한 겁니까?!"
한유진이 소리높여 맞은편의 헌터에게 묻자 그가 용케도 잘 알아듣고는 고개를 끄덕였다.
이어 펼쳐진 상황은 간단했다.
헬기에서 내리고, 함께 온 안내자의 뒤를 따라 주변을 둘러볼 새도 없이 잘 포장된 도로 위를 내달렸다.
그렇게 대균열의 모습을 발견할 수 있었는데, 높이가 어지간한 상가 건물만 하고 가로 폭이 백여 미터에 달하는 초자연적 '균열'이 무지갯빛을 흘려내는지라 도저히 못 보고 넘어갈 수가 없었다.
사진이나 영상을 통해 볼 때와는 느낌이 확 다르다.
'과연 대균열이구나.'
절로 그런 생각을 하는 때.
안내자는 뒤에서 한유진이 제대로 따라오는지 확인도 하지 않고 바로 균열에 진입했다. 주변의 모든 이들이 그렇게 다급히 움직이고 있는 터라 그도 머뭇거리지 않고 바로 따라서 진입했다.
이전에 한 번 경험해 봤던 예의 그 불편한 감각이 덮쳐들었다.
흡사 거센 물살을 강제로 헤치고 나아가는 듯한, 주변 모든 광경이 몽환적으로 일그러지면서 방향감각이 사라지는 것 같은.
십여 초가 더 지나고서야 그는 불쾌한 느낌에서 벗어나 멀쩡한 공간에 발 딛고 설 수 있었다.
찍-! 찌직-!
품에 안겨있던 무용이가 살짝 놀란 듯 울음소리를 내면서 몸을 꼼지락댄다.
"이쪽입니다!"
기다리고 있던 안내자가 다시금 몸 돌려 달리기 시작했다. 일반인이 전력 질주하는 것보다 훨씬 빠른 속도였지만 한유진은 여유롭게 따라갈 수 있었다.
주변은 전체적으로 울창한 숲의 풍경이었다. 그가 수련하던 원시림만은 못했지만 그 반 정도는 되는 수준이다.
또한 현재 달리고 있는 길은 임시로 만들어진 흙길이었고, 좌우 상당한 폭으로는 벌목된 나무의 흔적이 가득했다. 그 나무가 벌목된 공간에서 꽤 많은 수의 헌터들이 바삐 움직이며 상황에 대처하는 모습이기도 했다.
한데 그렇게 움직이던 와중.
캬아아아악-!!
갑자기 좌측 숲속에서 포효성과 함께 상당한 소란이 일었다. 무언가 위험한 것들이 몰려오는 기척에 주변 사람들이 전부 화들짝 놀라는 기색이 됐다.
한유진이 보기에 여기 있는 헌터들은 별로 강하지 못한 후방지원 인력들이었다.
"뭐, 뭐야? 여기에 왜···?!"
"탱커-! 탱커 앞으로-!"
"여기 이것 좀 같이 옮겨줘! 빨리!"
제각각 다른 말을 외치면서 허둥대는 꼴을 보니 전투 경험이 풍부한 것 같지도 않았다.
그런 사실을 안내자도 모르지 않는 듯, 그는 자신의 임무에 우선해야 하는지 아니면 여기서 괴물들을 저지해야 하는지 순간 혼란에 빠지며 멈춰 선 모습이었다.
"지금 여기가 더 급할까요, 아니면 원래 목적지로 가는 게 더 급할까요?"
침착하다 못해 태평하게까지 느껴지는 한유진의 질문에 안내자도 조금 정신을 차렸다.
"아무래도··· 여기를 막지 않으면 피해가 좀···?"
"그럼 잠깐 기다리세요."
한유진은 말한 즉시 점점 더 가까워지며 뚜렷해지는 그 소란을 향해 움직였다.
한 줄기 바람이 휘몰아쳤다 싶은 순간, 그의 신형이 거의 잔상이 남을 듯한 속도로 쏘아졌다. 뒤늦게 그 속도에 반응한 안내자의 눈이 휘둥그레 뜨였다.
풍둔술이었다.
짧은 거리에선 뇌둔술이 더 빠르긴 하지만 그건 너무 요란하다. 지둔술도 모습이 땅으로 스며들어 사라져 버리는 터라 굉장히 눈에 띌 테고 말이다.
무엇보다 풍둔술이면 충분했다.
거의 쏘아진 화살처럼 벌목 지대를 통과해 멀쩡한 숲속으로 진입한 그는, 채 십여 초를 더 나아가기도 전에 이쪽으로 달려오고 있는 일단의 괴물 무리를 눈에 담을 수 있었다.
그렇게 목격한 즉시 손이 움직이고 화령조 여섯 마리가 생성되어 제각각 다른 궤적으로 쏘아져 놈들에게 직격했다.
학살의 시작이었다.
43화. 드래곤 목격
대균열은 괜히 대균열이라고 불리는 게 아닐 만큼 그 내부가 넓다. 비록 온갖 위험이 도사려 탐사가 어렵다고는 하나 수십 년이 지난 지금에서도 전체 넓이를 가늠조차 못 하고 있을 정도다.
또한 그렇게 넓은 만큼 입구가 하나가 아닌 여럿이며, 눈에 띄는 모든 입구는 한중일 세 국가가 주축이 되어 한두 개씩 전담해 맡고 있다. 입구마다 대균열 내부 개척을 위한 거점요새들이 여럿 지어져 있는 건 물론이다.
거점요새는 인간을 상대하려고 만들어진 것이 아닌 만큼 그 형태가 성과 비슷하면서도 조금 달랐다.
철조망 지대와 가시 함정이 깔린 해자 등을 포함한 장애물 중심의 다중 방어가 핵심이며, 그 아래로는 방어자인 헌터들의 후퇴를 위한 좁은 지하통로 등이 마련돼 있고, 유사시 그 통로들을 폐쇄할 수 있는 수단도 여럿 존재하는 식이다.
한국에서 전담 중인 대균열의 입구는 크게 두 개다. 각각 황해남도 동북부와 황해북도 동부에 존재하는데, 현재 웨이브가 발생해 위기에 처한 곳은 황해북도 대균열 내부 제3거점요새였다.
"여기 지원!"
"젠장, 힐러 어딨어?!"
"후, 후퇴는? 우리 후퇴 안 해?!"
온갖 종류의 이능력들이 허공을 날아다니며 섬광과 폭발이 일고, 괴물들의 포효와 비명이 배경음처럼 뒤섞여 소란스럽기 그지없는 거점요새 방어선.
꽤 넓은 폭으로 깔린 철조망 지대는 이미 괴물들의 시체로 뒤덮이거나 곳곳이 끊어져 제 기능을 상실한 지 오래였다. 그 사이사이 마련된 가시 함정 깔린 해자도 마찬가지였다.
요새 장벽 위에서 고지대의 이점을 살려 방어에 나서고 있는 헌터들은 점점 더 거세지는 웨이브 공세에 사기가 빠르게 떨어지는 중이었다.
몰려들고 있는 괴물들은 종류가 여럿이었지만 주축이 되는 한 종이 존재했는데, 들개처럼 생겼지만 네 다리의 관절이 많아 매우 변화무쌍하게 움직이고 꼬리에서는 가시를 발사하기도 하는 놈들이었다.
놈들은 심지어 모든 발가락이 잘 발달했고 억센 발톱마저 가졌기에 암벽을 타거나 나무를 오르는 일에 능하다. 당연히 방어하는 입장에서 벽에 발톱을 박아 넣으며 올라오는 놈들의 공세는 매우 위협적이었다.
날아드는 가시를 막거나 피하면서 벽을 타고 오르는 놈들을 떨쳐내야 하고, 그 뒤에서 몰려드는 놈들도 처리해야 하는 것은 물론 간간이 섞여 접근해 오는 더 크고 강력한 괴물들도 내버려둘 수 없다.
모든 헌터들이 분전하고는 있었지만 점점 더 상황이 어려워짐을 피부로 체감하고 있었다.
이럴 때 S급인 단장과 부단장은 대체 어디에 있는지, 물론 두 명 다 각자 필요한 위치에서 최선의 역할을 하고 있겠지만 슬슬 도움이 간절해진다. 아니면 후퇴 명령이라든가.
바로 그렇게 상황이 나빠져만 가던 어느 순간.
"어?"
한 헌터가 모종의 마나 파동을 느끼고는 고개를 들어 하늘을 봤다.
그리고 목격했다.
누군가가 은은한 연둣빛 번뜩이는 바람을 휘감은 채 허공에 떠 있었다. 이어 그자의 뻗어진 손에서부터 작은 불씨 세 개가 떨어져 내렸다.
그 불씨들은 떨어져나왔다 싶은 순간 급속도로 덩치를 불리더니 어지간한 트럭을 뒤덮을 정도로 거대해져선 각자 다른 궤적으로 전장을 덮쳤다.
"으와아악···!"
"흐어억-!"
곳곳에서 헌터들이 기겁하여 놀라는 소리가 터져 나온다. 그 불새들에게서 뿜어지는 강렬한 빛 때문만이 아니었다. 상당한 거리에도 불구하고 화상을 입을 뻔한 끔찍한 열기 때문이었다.
하나 헌터들에겐 그 정도에서 끝났을 뿐인 피해가 괴물들에겐 재앙으로 작용했다.
푸화아악-!!
한 마리 불새가 요새의 방벽을 살짝 떨어진 간격을 두고 스쳐 지나간다. 그러자 방벽에 갈고리발톱을 박아 넣으며 흉포하게 오르고 있던 모든 괴물이 찢어지는 비명을 지르며 떨어져 나갔다.
일부는 불타오르고 대부분은 가죽 내부의 근육과 장기까지 바짝 익어 김을 모락모락 피워내며 추락했다. 한순간 전장의 소음이 확 잦아들면서 고기 익는 냄새가 그 빈자리를 채웠다.
한 마리 불새가 그렇게 방벽을 맡는 사이.
남은 두 마리는 요새를 향해 몰려들던 놈들을 잿더미로 불태워 버리고 있었다.
날개를 거세게 펄럭이면서 지나가는 뒤편으로 화염이 폭풍처럼 휘몰아치며 대기가 끓어오른다. 그 아래 자리하던 괴물들의 태반이 구워지다 못해 까맣게 불타올라 부서져 내리는 모습이었다.
그 불새 중 한 마리가 문득, 멀리서도 눈에 띄는 덩치를 가진 한 고릴라와 곰을 뒤섞어 놓은 듯한 괴물에게 날아갔다. 괴물은 자신에게 불새가 날아오자 기겁하며 즉시 몸 돌려 달아나려고 했으나 금방 따라잡히고 말았다.
불새가 놈에게 충돌하다 못해 품으로 끌어안으며 잠시 멈춰 섰다 싶은 순간.
꽈과과광-!!!
사방을 되레 어둡게 만드는 듯한 눈부신 섬광이 터져 나오고 무시무시한 폭음이 뒤를 이었다.
화염 구름이 작은 거인의 형상처럼 으르렁대며 일어섬과 함께 대지가 뒤흔들리고 그 열기가 급속히 퍼져 나가며 근처 모든 괴물을 비명 지르게 만든다.
"오 마이 갓······."
방벽에서 방금까지 치열한 전투를 치르던 한 헌터가 자신도 모르게 그런 소리를 중얼거렸다. 다른 많은 헌터들도 상황을 잊고 펼쳐지는 상황에 정신이 빠져 입을 쩍 벌린 상태였다.
수없이 죽어 나가면서도 미친 것처럼 돌진해 오던 괴물들이 사방으로 도망치는 광경이 보인다. 대체 여태까지와는 무엇이 다르다고 느꼈기에 저리 한순간에 겁에 질렸는지 모를 광경이다.
격이 다른 힘.
차원이 다른 폭력.
모든 헌터가 공포인지 경탄인지 모를 충격에 잠겨 좀처럼 정신을 차리지 못했다. 저 강대한 힘이 자신들의 편이라는 것에 무한한 안도감을 느끼면서 그에 비례하는 희열이 차오른다.
방금까지만 해도 자신들과 죽고 죽이는 싸움을 벌이던 놈들이 개미처럼 불타오르며 떼로 죽어 나가는 광경인데, 그 누가 환희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분명 인간과 괴물의 치열한 공성전이었던 전투 양상이 일시에 돌변했다. 그저 사냥꾼이 사냥감을 쫓는 정도가 아닌, 귀찮은 벌레를 쫓아 박멸해 버리는 듯한 전투로.
"정신 차려! 남은 놈들을 처리하고 추후 전투에 대비해야 한다!"
몇 정신력 뛰어난 전투대장들이 그렇게 고함치며 다른 이들을 일깨우는 사이.
한유진은 여전히 허공에 뜬 상태로 영안술을 통해 도망치는 괴물들을 일일이 파악하고 있었다.
법결을 조작하자 남은 화령조 두 마리가 작은 화령조 여덟아홉 마리로 분열되더니 제각각 다른 방향으로 날아간다. 이어 몇 초 후 곳곳에서 폭발이 일어나며 각 폭발에 최소 서너 마리의 괴물들이 산산조각 났다.
법혼기 수사의 지능으로 이 정도 컨트롤은 충분히 가능한 일이었다.
하나 아직 많이 남았다.
'내 카르마들···!'
방금 5할이 넘는 힘을 한 번에 쏟아내면서 좀 무리했지만, 아직 5할가량의 여력이 남은 셈이니 당장 물러나서 휴식해야 할 정도는 아니다. 완벽축기를 통해 법혼기에 오른 만큼 특히 회복력이 좋기도 하다.
그는 남은 법력을 가늠하면서 본격적인 추격을 시작했다.
드래곤 하트를 위해서, 그 오행종 유적의 동천 보물을 위해서, 오행진령거석과 깃발 통천령보를 위해서, 그 이후의 다른 모든 성장을 위해서.
눈에 보이는 저 카르마 덩어리들을 그냥 포기할 수는 없었다.
* * *
대균열 내부의 영기 농도는 원시림의 3할 정도였다.
고작 3할이라고 치부할 게 아닌 것이, 지구의 3배 정도인지라 결코 낮은 농도가 아니다. 덕분에 한유진은 법력 소모로 인한 피로를 빠르게 회복하면서 상당히 오랜 시간 추격과 전투를 이어갈 수 있었다.
그렇게 한나절 이상에 걸쳐 수백 마리가 넘는 괴물들을 불태워 죽이고서야 한유진은 제3거점요새로 돌아왔다.
이 대균열에도 지구와 비슷하게 낮밤이 바뀌는지 슬슬 하늘이 어두워지는 때였다.
허공을 날아오는 그를 발견한 헌터들이 분분히 경계 태세를 취했지만 딱히 오인공격은 벌어지지 않았다.
관찰계 능력을 가진 이가 적이라고 식별해 주지도 않았는데 대뜸 공격을 쏘아낼 만큼 경솔한 이는 여기에 없었다. 한유진이 특별히 위협적으로 날아온 것도 아니고 말이다.
그가 방벽 위에 내려서자 주변 헌터들의 시선이 화살처럼 날아와 꽂혔다. 전부 직접적으로 드러나지 않았을 뿐 굉장한 경의가 담긴 시선이었다.
누가 특별히 알려주지 않아도 저절로 그런 사실을 알 수 있었다.
'아, 이거지.'
한유진은 이전에 야외 이능훈련장에서와는 전혀 다른 감상을 받으며 매우 흐뭇해졌다.
그때도 사람들이 주목하며 시선을 보내오는 것은 같았지만 지금 이 상황과는 여러모로 다르다.
"박세룡 씨가 어디 있는지 아십니까?"
그는 가장 가까이 선 어느 남자 헌터를 향해 물었다.
여기저기를 급히 지원하느라 그 헌터 안내자하고는 진즉 헤어졌다. 그래서 이렇게 물어볼 수밖에 없었는데, 마침 때가 좋았다.
"저기 상황실에 계시는데, 제가 안내해 드리겠습니다!"
왠지 군기가 든 것처럼 느껴지는 대답과 함께 그 남자 헌터가 한유진을 안내했다.
따라서 도착한 곳은 중심부 건물의 2층이었다. 내부는 꽤 넓었고 곳곳에 지도 따위가 걸려 있었으며 많은 이들이 자리해 분주한 느낌이었다.
하나 그가 도착한 순간.
모두가 행동을 멈추고 그를 보며 명백히 상급자를 맞이하는 태도로 고개를 숙였다. 내심 분위기를 즐기던 와중에도 살짝 당황스러울 정도였다.
"후배님, 덕분에 피해가 거의 없이 위기를 넘겼습니다."
그때 박세룡이 격식을 차려 하는 말에 모두가 살짝 놀란 기색으로 둘을 번갈아 쳐다봤다.
"여기 앉으시지요. 피곤하시겠지만 급히 아셔야 할 게 많습니다."
박세룡이 상석까지 양보하며 일어서자 살짝 놀라던 기색이 이제는 확연해진다. 아무래도 그가 이런 태도를 보이는 사람이 거의 없는 모양이었다.
같은 S급 헌터이면서 연장자인 최강백을 빼면 아예 없을지도 모른다.
'그 사람은 여기 없겠지?'
S급의 중요성을 생각하면, 그리고 상황의 중요성을 생각하면 다른 장소에서 만일의 사태를 대비하고 있을 것 같다.
생각하며 한유진은 박세룡에게서 몇 가지 급한 이야기를 들었다. 대략 이번 웨이브를 어떻게 방어해 냈고 현재 상황이 어떤지 등에 대한 이야기였다.
"잠깐만요, 저는 아직 여기 개척단의 구성이나 배치에 대해 잘 모릅니다."
"아, 그건······."
중간에 나온 그 한유진의 말에 박세룡이 설명을 시작했다.
내용은 전혀 간단하지 않고 매우 복잡했다.
약 2300명의 인원이 전투대, 탐사대, 채굴대, 지원대, 특임대 유형으로 분류되고 각 대에서 다시 전투조, 정찰조, 지원조, 정보조, 경호조, 물류조, 구축조 등으로 분류되는 식이었다.
유형별로 적게는 여섯에서 많게는 열여덟에 이르는 번호의 대가 존재했고, 평시 2교대로 근무하면서 두세 달 정도 되는 근무 기간동안 인원별로 휴가까지 내줘야 했기에 그 체계가 간단하려야 간단할 수가 없었다.
'어우.'
법혼기 수사의 지능으로 한 번에 다 기억하면서도 내심 고개가 저어진다. 설명하는 박세룡조차 이걸 한 번에 완전히 이해하리라곤 전혀 기대하지 않는 느낌이다.
각 대와 조가 어떤 식으로 임무를 펼치는지까지 설명이 들어가면, 이건 며칠 날 잡고 강의를 들어야 할 수준이다.
그럼에도.
한 번 설명을 듣고 다시 본론으로 들어가자 얼추 느낌을 파악할 수 있었다.
"그러니까, 일단 급한 불은 껐지만 내일 여기서부터 본격적인 소탕에 들어가야 할 거란 이야기네요. 안 그러면 2차 3차 웨이브가 발생할지도 모르니까."
"그렇습니다."
"나아가 여기, 7레벨 마나스톤 노천광산도 우리의 정리가 늦어질수록 중국이나 일본에서 소유권을 강하게 주장할 테고요."
"바로 그겁니다."
그가 지도를 짚으며 하는 말에 박세룡이 연신 고개를 끄덕였다.
"알겠습니다."
한유진은 다 이해하고서 고개를 끄덕였다. 한데 문득, 박세룡의 시선이 여태 그가 품에 안고 있던 무용이에게로 향하는 게 느껴졌다.
"그거······ 애완동물입니까?"
"네."
"······지금껏 그렇게 데리고 전투에 임하신 거고요?"
"네."
모두가 애써 무시하던 점을 박세룡이 꼬집어 물은 것이었는데, 한유진은 전혀 문제 될 게 없다는 태도로 당당히 답했다.
찌직-!
이어지는 무용이의 울음소리가 잠시 조용해진 상황실을 울린다.
잠시 할 말을 잃은 박세룡을 보며 거의 웃을 뻔했던 한유진이 입을 열었다.
"그러면 내일을 위해서라도 좀 쉬고 싶은데, 여기 숙소가 있습니까?"
"아, 지금 바로 안내해 드리겠습니다."
"1인실이면 좋겠습니다. 내일 아침까지 절대로 방해받지 않았으면 하고요."
"문제없습니다. 오늘 아주 큰 도움을 주셨으니, 어떤 일이 있어도 방해하지 않겠습니다. 아예 뒤쪽 제1거점으로 가시죠. 거기가 훨씬 안전하니까요."
당연히 거절할 이유가 없는 한유진은 고개를 끄덕였다.
* * *
대균열 황해북도 입구의 제1거점 중심부.
요새 지하 한곳의 1인실 고급 숙소에서 한유진은 단출하게 자리 잡았다. 저물대와 정화술에 힘입어 괜히 번잡스러울 일이 없었다.
다만 아무리 고위층을 위한 고급 숙소라고는 해도 안전을 위한 요새인 만큼 그리 넓거나 쾌적지 못했는데, 무용이는 이런 분위기가 확실히 마음에 안 드는 모양이었다.
영액주로 녀석을 달래주다가 괜히 장난기가 동해서 좀 골려주고, 다시 달래주고, 쓸모없는 녀석 때문에 쓸데없이 시간을 보내다가 그는 침대에 누웠다.
법혼기 수사가 수면이 필요 없다는 점을 생각하면 당연히 각성 능력을 발동하려는 것이었다.
그렇게 잠시 후.
그는 어둡고 공허한 대기 장소에서 눈을 떴다.
이어 모든 준비를 마치고 천변만화하는 문 앞에 서서 두 가지 선택지를 고민하다가, 오늘은 일단 원래 떠올려두었던 발상을 시험해 보기로 했다.
'내가 원하는 유형의 드래곤 하트를 가진, 동시에 내가 조우할 수 있는 가장 위대하고 강력한 드래곤의 모습을 보고 싶다.'
그 발상을 기초로 한 다른 세세한 요소들을 머릿속으로 되짚으며, 그는 천천히 손을 뻗었다.
차가운 감촉과 함께 문의 형상이 성공적으로 고정됐다.
새하얀 돌을 주재료로 유리 보석 등의 치장이 더해진 문이었다. 상당히 화려한 느낌을 주면서 장식에 새겨진 문양에 은은한 빛까지 흐른다.
위쪽으로 떠오른 은빛 문자는 '군림하는 용들의 발할드락스 판게아'였다.
'군림하는 용들의······?'
꽤 거창한 느낌이자 동시에 명백히 판타지스러운 느낌이다. 괜히 두근거리기 시작한 가슴을 안고서 그는 과감히 문을 열고 나아갔다.
그렇게 이세계에 발 딛기 무섭게 주변이 매우 소란스러움을 느꼈다.
뒤편에서 통과해 나온 문이 사라지는 장면을 확인하며 주위를 살핀다. 어느 새하얗고 거대한 성의 성벽 위였는데, 안쪽의 도시가 얼마나 드넓은지 한눈에 다 담을 수가 없었다.
성벽을 이루는 새하얀 암석은 완전한 통짜로 만들어진 듯 이음새 따위가 전혀 안 보였으며 은은한 빛을 품은 것 같았다. 또한 일정 간격으로 드높은 첨탑들이 자리해 그 최상부에서 별처럼 빛을 뿜어내는 모습이었다.
그냥 딱 봐도 마법사임이 분명한 로브 입은 자들이 분주하게 그 첨탑 주변에서 무언가를 하고 있었고, 백금빛 갑옷과 검 따위를 착용한 기사와 병사들의 모습도 엄청나게 많이 보였다.
한유진 자신의 복장은 그들 중에서도 마법사의 복장이었다. 겉은 하얗지만 안감은 푸르고, 곳곳에 은실과 금실이 수놓아져 상당히 화려하면서도 세련된 디자인이다.
그렇게 복장을 살피면서 주변의 소란스러움이 매우 긴박하다는 점까지 파악했을 때.
문득.
어떤 불가해한 느낌과 함께 시선이 저절로 성벽 밖 평야 위 하늘로 향한다. 비단 한유진만 그렇게 행동한 것이 아니라 일대의 수많은 이들이 똑같이 행동했다.
다음 순간.
도저히 형용할 수 없는 굉음이 쩌렁쩌렁 울려 퍼지며 하늘 한쪽이 제멋대로 깨져 나가기 시작했다.
그 광경을 보던 한유진의 눈이 부릅떠졌다.
'균열···?!'
지구에서 볼 수 있는 균열들과 느낌이 똑같다.
그런 생각을 하는 때, 급속도로 만들어지는 균열 속에서 무언가의 커다란 머리가 불쑥 나타났다.
가장 먼저 목격한 것은 블랙홀처럼 어두우면서 쳐다볼 수 없이 환한 빛을 후광처럼 두른 몇 쌍의 위엄 가득한 뿔이었다.
그다음으로 목격한 것은 우주의 성운과 은하를 담아놓은 듯 찬란하기 그지없는 세로 동공의 눈이었다.
- 너희가 감히 역겨운 아스테리온 놈들을 불러들이다니.
진언(眞言)이라 불러 마땅할 거대하고 압도적인 의지가 영혼에 칼로 새겨지듯 울려 퍼진 직후.
- 다 찢겨 죽어라, 이 벌레들아.
마지막으로 목격한 것은 그 분노에 찬 신적 의지가 세상의 모든 빛을 꺼트리듯 광범위한 현상으로 화해 급격히 휘몰아치는 장면이었다.
뭐가 다가온다는 느낌도 없이, 그 현상의 어두움에 휘말려 한유진이 보고 느끼는 세상도 완전한 암흑에 잠겨 들었다.
- 당신은 죽었습니다.
곧, 어둠 속에서 은빛 문자들이 신비롭게 떠오르는 것을 보며 그는 한동안 얼떨떨한 채 가만히 서 있어야 했다.
44화. 새로운 카르마 획득처
애초부터 빠르게 죽을 가능성이 높다고는 생각했다. 그래서 무용이를 데려갈 생각조차 하지 않았다.
하지만 전혀 욕심이 없었느냐 하면 그건 또 아니었다.
'내가 조우할 수 있는 가장 위대하고 강력한 드래곤의 심장을 얻을 가능성이 혹시라도 보인다면······.'
아주 미세한 각이라도 있진 않을까, 싶었던 요행심은 이번에도 산산조각 났다. 그냥 나타나서 말 한마디 내뱉는 거에 아무것도 느끼지 못하고 죽어버릴 줄은 몰랐다.
하지만 어쨌든.
이전에 천원성에서 화신기 수사의 전투를 구경한 적 있는 터라 방금 목격한 드래곤의 강함을 대략 짐작해 볼 수 있었다.
'아무리 낮아도 합체기급.'
사실 이 견적만으로도 이번 이세계 방문의 최소 목적은 달성한 셈이다. 드래곤이라는 종족의 고점을 봤으니까.
'종족값이 반드시 높아야만 하는 건 아니지만, 높을수록 좋은 게 당연하지.'
외단법에서 가장 중요한 건 그릇의 수준이 원영기급 이상인지 아닌지다. 그릇이 그 정도 질적 변화를 마친 상태여야만 추후 수사가 원영을 잉태할 때 문제가 없기 때문이다.
만일 거기에 종족값마저 좋다면 추가적인 이득을 누릴 수 있다. 가령, 그가 수선경지경요 책에서 봤던 것처럼 특별한 신통과 체질을 얻게 되는 식으로.
'즉, 내 경우 원영기급 드래곤의 심장을 얻기만 하면 된단 뜻이다.'
그러면 진단법을 이룬 자들만큼이나 손해가 없는 것은 물론 몇 가지 작은 이득을 누릴 수 있을 터다.
'운 좋게 화신기급 심장을 얻을 수 있다면······.'
그때는 진단법을 이룬 자들보다 훌쩍 앞서감과 동시에 몇 가지 큰 이득을 누릴 수 있을 터다.
'만에 하나 합체기급 심장을 얻게 된다면······.'
망상이 점점 발전한다.
고개를 흔들어 그 망상을 떨쳐낸 한유진은 대기 장소에서 벗어나며 속으로 헛웃었다.
정말로 천운이 따라줘서 어찌어찌 합체기급 심장을 얻게 된다 해도, 그걸 현실로 가져오는 카르마를 감당할 수 없을 게 뻔했다.
그만한 카르마를 쌓을 때까지 어떻게든 버틴다는 계획은 고려할 가치가 없었다. 현실이 그만큼 여유롭지 못했으니까.
확인한 종말의 시기는 10년 후지만 그걸 막으려면 더 이른 시간 안에 무언가를 해내야 할 수도 있다. 괜히 여유 부리다가 불현듯 이미 내리막길에서 브레이크 고장 난 트럭 꼴임을 깨닫는다면 큰일이지 않겠는가?
따라서 현실적으로 노릴 수 있는 가장 높은 목표는 화신기급 드래곤 하트였다.
'그래도 카르마가 문제구나.'
그는 탄식과 함께 침대에서 눈을 뜨며 일어났다. 옆에서 함께 자고 있던 무용이가 얼결에 깨어나 하품하는 모습이 보인다.
"가자."
말하면서 그는 잠이 덜 깬 무용이를 품에 안았다.
어디로 가자는 건지는 명확했다. 당연히 오늘 소탕 작전을 수행하기 위해서, 그렇게 카르마를 벌기 위해서였다.
* * *
푸화아악-!
화령조 두 마리가 쏜살같이 스쳐 지나간 자리로 주먹만 한 모기인지 벌인지 모를 것들이 우수수 불타오르며 추락한다.
두 마리가 그렇게 주변을 휩쓰는 사이, 다른 두 마리 화령조는 놈들의 둥지인 거목을 통째로 불살라 버리는 중이었다.
우우우웅-!!
괴물 벌레 놈들의 날갯짓 소리가 매우 다급하다. 그럭저럭 지능도 있는지 이 재앙의 원인이 한유진임을 파악하곤 필살의 공격을 가해오는 놈도 제법 보인다.
하나 당연히 전부 소용없었다. 자금광휘를 두른 한유진은 정신의 반 이상을 다른 생각에 쏟고 있을 만큼 여유로웠다.
'괴물 한 마리를 처리할 때마다 들어오는 카르마가 평균적으로······ 이전에 그 사이비종교 놈들 제보 때만큼의 카르마를 얻으려면······.'
적게는 사천 마리, 많게는 오천 마리.
엄청 많은 듯해도 어제 대략 이삼백 마리 정도 죽였음을 생각하면 의외로 금방 채울 수 있는 숫자다.
웨이브라는 특수한 상황이었던 만큼 매일 그 정도로 쳐 죽이긴 어렵겠지만 그래도 한 달 정도면 충분할 것 같다.
'원영기급 드래곤 하트를 얻는 데 통천령보만큼의 카르마가 필요하다고 가정하면······.'
생각하던 한유진은 화령조 한 마리를 폭발시키고 추가로 한 마리를 만들어 내며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아무리 짧아도 반년 이상 걸릴 듯하여, 그 정도 기간이면 작은 오차만으로도 결괏값이 크게 요동치기에 지금처럼 가늠해 보는 일이 전혀 의미가 없었다.
심지어 수확물 선택의 카르마 소모값은 고정돼 있는 게 아니었다. 같은 물건이라도 그 자신의 상황과 수준에 따라 효용이 전혀 달라지기 때문이다.
'그래, 사실 뭐······ 반년이 아니라 일이 년이라고 해도 결코 길다고는 할 수 없지.'
수선계의 어느 한 수사에게 '너 일이 년만 고생하면 원영기급 요족 내단 줄게'라고 약속한다면, 절대다수가 환장해서 달려들 것이다. 거의 미친개처럼 거품을 물어도 이상하지 않다.
또한 그는 이 헌터 활동 말고도 카르마를 버는 다른 수단이 있었으니.
바로 지식 보급이었다.
비록 몇 달 걸린다는 소리를 듣긴 했지만 그 정도는 충분히 기다릴 수 있다.
처음 일을 계획했을 때도 한번 고려했던 바, 괜히 서두른답시고 인터넷 등지에 지식을 푸는 행동은 손해였다.
온갖 쓰레기 정보가 넘쳐나며 오염과 왜곡이 쉬운 인터넷의 특성상 풀어낸 지식이 제대로 보급된다는 보장이 없으며, 라이선스 계약을 통해 돈을 벌어두면 그걸로 나중에 다시 카르마를 쌓는 모종의 활동을 할 수도 있는 것이다.
그러니 여기서 더 서두르기도 어려운 셈이었다.
'너무 조급해하지 말자. 세상사 원래 다 차근차근 밟아나가야 하는 단계가 있는 법이니까.'
마음을 다스리면서 그는 계속 학살에 열중했다.
말 그대로 학살이었다. 그는 자신의 공적을 제대로 기록할 생각도 별로 없었다. 아득바득 챙기지 않아도 뒤따라올 특임대가 어련히 잘 기록해 줄 것이 분명했기 때문이다.
그렇게 몇 시간 후.
마주치는 모든 종류의 괴물을 자비 없이 불태워 죽이면서 이동하던 그는, 바로 그 7레벨 마나스톤 노천광산 근처에 도달하게 됐다.
그리고 마침 이전에 채굴해 놓았던 물자를 긴급히 운송하던 채굴조 인원 스무 명과 우연히 마주쳤다.
"어어···?"
"한유진 헌터님? 맞죠?"
각자 배낭을 멘 채 조금 특이한 구조의 수레 하나를 끄는 모습이었는데, 그들은 대체 어떻게인진 몰라도 한유진을 즉시 알아봤다.
"네. 어떻게 아셨어요?"
그는 딱히 풍둔술을 시전한 상태도 아니었고 화령조를 부리고 있지도 않았다. 그냥 생김새만으로 대체 어떻게 알아봤을까?
정답은 그가 품에 안고 있는 무용이었다.
"그··· 애완동물을 데리고 다니신다고···."
"아."
스스로 생각해 봐도 확실히 특이한 점인지라 금방 소문이 퍼질 만도 했다.
'살짝 또라이라고 소문난 건 아니겠지?'
반사적으로 무용이의 머리를 쓰다듬으면서 문득 한유진의 시선이 채굴조가 끌고 오던 수레로 향했다.
생각해 보니 이렇게 마나스톤, 영석을 보는 것은 처음이었다.
"잠깐 구경해 봐도 될까요?"
"물론이죠."
그래서 그는 실례인 줄 알면서도 마나스톤을 구경하기 시작했다. 하급도 아닌 중급이었던 터라 더 참기가 어려웠다.
마나스톤은 형태가 제각각이었지만 부피는 달걀 정도로 비슷했다. 일반적인 광석과 전혀 다른 원리로 생성되기에 채굴할 때부터 다 이런 식이다.
또한 밝은 회색빛을 띠면서 가만히 지켜보면 내부에 흡사 구름이 흐르는 듯했는데, 순간순간 무지갯빛을 흘려내 상당히 매혹적인 느낌을 줬다. 아마도 중급인지라 더욱 그런 듯했다.
그렇게 중급 영석을 들고 한창 구경하던 때.
'어······?'
그는 불현듯 느껴지는 어떤 새롭고 신비로운 감각에 참지 못하고 그걸 발동해 버렸다.
그 즉시 영석이 흙먼지처럼 완전히 부서져 내렸다.
"엇···?"
"어어···?"
지켜보던 채굴조가 깜짝 놀랐다. 그들의 임무가 이 7레벨 마나스톤들을 무사히 거점요새로 옮기는 것이었기 때문이다. 아직 웨이브 뒷정리가 다 끝나지 않은 상황에서도 움직였다면 그만큼 가볍지 않은 임무라는 뜻이다.
"아이고, 죄송합니다."
한유진은 즉시 사과하면서도 수레에 실린 나머지 마나스톤들을 이글거리는 눈으로 쳐다봤다.
"제가 훼손한 마나스톤은 제 공적에서 차감하라고 하십시오."
"아, 아니요. 하나 정도야 뭐··· 임무 중에 어쩔 수 없이 분실할 수도 있는 거 아니겠습니까."
"궁금한 게 있는데, 혹시 헌터가 이 마나스톤을 공적으로 구매할 수도 있습니까?"
"예?"
채굴조 인원들은 그런 건 딱히 생각해 본 적 없다는 듯 반응했다.
수련조차 주먹구구식으로 하는 마당에 헌터 개인이 마나스톤을 활용하는 방법을 알 리 없다. 헌터들에게 있어 마나스톤이란 단지 매우 중요하고 비싼 산업자원에 불과할 따름이다.
하나 수선자인 한유진에겐 전혀 그렇지 않았고.
방금 처음으로 영석을 접하게 되어 깨달은 새로운 활용법을 고려한다면 더더욱 그랬다.
'영석을 카르마로 전환할 수 있다니···!'
실로 충격적인 사실이자 새로운 돌파구처럼 느껴지는 일이었다.
지금 이 순간, 헌터 활동과 지식 보급 로열티로 벌게 될 돈을 제대로 써먹을 곳이 생겼다.
* * *
한유진은 오늘도 아주 열심히 괴물들을 쳐 죽였다. 보기에 흡사 부모의 원수라도 갚는 듯한 기세였다.
당연하지만 그런 행동은 개척단 입장에서 무조건 좋았는지라, 모르긴 몰라도 그의 평판이 한층 더 훌쩍 치솟았을 터였다.
만약 지금도 박세룡이 한유진과 대립각을 세우는 중이었다면 단지 이런 객관적인 공적만으로도 상당한 위협을 느꼈을 터다.
'사실 그건 지금도 비슷하겠지만.'
박세룡의 권력지향적 가치관이 변하지 않는 한, 한유진 자신의 입지가 넓어질수록 관계가 틀어질 가능성도 커지는 셈이다. 사람이란 원래 많은 경우에서 이성과 감정을 일치시킬 수 없기 때문이다.
'그래도 시간이 지나면 저절로 깨닫겠지. 내가 진정으로 권력 따위에 관심이 없다는 걸.'
부디 혼자 망상하면서 의심암귀에 사로잡히지 않길 바랄 뿐이다. 오늘 나눈 마나스톤에 대한 이야기를 포함하여 앞으로도 그의 쓸모가 상당했으니까.
그렇게 지금의 협력적인 관계가 잘 유지되길 바라는 마음으로 한유진이 숙소에 돌아왔을 때였다.
그의 눈이 저절로 살짝 가늘어지며 어물술이 발동한다. 직후 문틈에 보이지 않게 꽂혀있던 웬 작은 종이카드 하나가 뽑혀 나와 손에 잡혔다.
- 새롭고 위대한 질서 속으로, 당신을 초대합니다. Neo Dominion.
그 명함인지 뭔지 모를 작은 종이카드 한쪽에 인쇄된 QR코드가 보인다. 법혼기 수사의 지능으로 짧은 시간 여러 가지를 추론하던 한유진이 피식 웃었다.
'참 전형적이기도 하지.'
그렇지만 없으면 또 이상할 그런 성격의 비밀조직이기도 하다.
이능력을 각성한 자신들이 다른 수많은 평범한 이들보다 명백히 더 우월하다고 믿으면서, 그러한 자신들이 마땅히 사회 지배층으로 올라서야 한다는 야망을 품는 이들이 어떻게 안 생겨날 수 있겠는가?
감히 이 보안 철저한 자신의 숙소 문틈에다가 이런 명함을 꽂아놓은 걸 보면 마냥 맹탕인 조직도 아닌 것 같다.
그렇지만 당연히 한유진은 관심 없었다.
'싹 다 잡아 와서 박세룡 때처럼 우물 밖을 보여주고 싶네.'
원희 앞에서 오줌이나 안 지리면 다행일 것들이, 네오 도미니언인지 뭔지 거창한 이름까지 지어놓고 자기들끼리 흡족해할 것을 생각하면 그냥 가소롭기만 했다.
'설마 여기에 최강백이나 박세룡 같은 S급 헌터가 포함돼 있는 건 아니겠지?'
꼭 대한민국뿐만이 아닌 다른 국가에도 이 조직이 퍼져있을 가능성도 있다. 인쇄된 QR코드를 사용해 보면 뭔가 접점이 생기면서 대략 정보를 파악할 수 있겠지만······.
'이능관리국에 넘겨줘야겠다.'
이런 귀찮은 일은 관리 지원 계약을 맺은 정부 기관에 넘기면 된다. 그러면 국정원으로 넘어가서 조사가 잘 이뤄질 것이다.
그는 이런 잔챙이들과 놀아줄 마음의 여유가 없었다.
한데 막상 방으로 들어와 오늘도 각성 능력을 사용하려고 생각해 보니, 비록 신식으로 확인한 결과 놈들이 안쪽까지 들어온 흔적은 전혀 없다지만, 일단 문 앞에 도달했다는 사실 자체가 거슬렸다.
'아오, 이 새끼들이 진짜.'
지위 높은 인사를 위한 고급 숙소인 만큼 문짝이 전혀 허술하지 않고 매우 튼튼하다. 애초에 요새 지하인 터라 어디 통과하기 쉬운 얇은 벽이나 창문 따위도 없다.
그럼에도 다음번에 놈들이 뭔가 수작질을 부리지 않으리란 보장이 없었다.
목표물이 반응하지 않는다는 걸 확인하면 자신들의 힘을 증명하겠답시고 무언가 짜증 나는 짓거리를 해 올지도 모른다.
'원래는 심장을 얻어낼 만한 드래곤이 있는 세계를 탐색해 보려 했는데······.'
일단 여기서 각성 능력을 사용할 때의 안전 확보가 더 시급한 듯하다.
그냥 한 번 더 자고 일어나면 그만인 일이었지만, 체감하는 시간은 전혀 그렇지 못했기에 은근히 짜증이 났다.
그는 잠시 무용이를 쓰다듬으면서 안정을 찾았다. 과연 애니멀 테라피의 힘은 위대해서, 녀석에게 영액주를 먹이면서 그걸 구경하는 것만으로도 기분이 매우 나아졌다.
이후 그는 천원성에 갈 마음과 함께 침대에 누웠다.
안전 확보에 제격인 진법술 강의를 들을 생각이었다.
45화. 진법술 천재
천원성 전선계, 전투의 흔적이 역력한 거대하고 웅장한 성벽 위.
한유진은 눈을 감고 잠시 생각했다.
'무용아, 자면서 꿀이나 빨고 있어라. 널 여기 데려오면 너무 눈에 띈다.'
저번과 달리 법혼기에 오른 만큼 고작 소졸에 불과한 연비원의 신분을 다시 사용하기가 애매해졌다. 언젠가 다시 쓸 일이 생길지 모르겠지만 적어도 지금은 아니다.
이렇게 신분 불안정한 상황에서 속 편하게 무용이 같은 애완동물을 데리고 다닐 수는 없었다. 어차피 여기서 길게 머물 계획도 아니었고.
주변을 둘러보던 한유진은 문득, 기억에 남아 있는 한 법혼기 수사와 짧게 시선이 마주쳤다. 예전 그에게 빨리 움직이지 못하겠냐고 소리쳤던 그 눈 부리부리한 수염쟁이였다.
'이번엔 아무 말도 안 하는군.'
계속 더 가만히 있으면 어떤 반응을 보일지 궁금했지만 진짜로 실험해 볼 마음은 없다.
그는 전투의 뒤처리에 열중하는 척하며 주변을 샅샅이 훑었다.
가벼운 전투가 아니었던지라 적당한 신분 옥패 하나를 줍는 건 쉬웠다. 이번의 것은 '병 87대 졸장, 동은주 운곡문 이곤'이었다.
'역시 법혼기 수사면 최소 졸장이겠지.'
방금의 그 눈 부리부리한 수염쟁이도 슬쩍 확인한 바 졸장 신분 옥패를 허리춤에 달고 있었다. 그러니 한유진 자신도 졸장으로 신분을 맞추는 게 무난할 터다.
그는 계속 주변 눈치를 살피면서 움직였다. 하나 그 와중 좀 만만하고 어리숙해 보이는 입문기 수사를 발견하면 괜히 시비 걸듯 묻기도 했다.
"너 소속이 어디지?"
"예? 저는 을 77대 소속···."
"그게 아니라, 숙소가 어디냐고!"
"예? 수, 숙소는 저쪽 영강구 동쪽···."
"누가 네 숙소 위치를 물어봤어? 엉?!"
대략 그런 식으로 살짝 미친놈처럼 윽박지르면서 자잘한 정보를 캐냈다. 당연히 너무 의심받지 않게끔 한 명에게 던지는 질문의 수는 많지 않았다.
'어차피 중앙정보처리 시스템 역할을 하는 정중 금제가 무력화된 지금, 내가 너무 유별나게만 굴지 않으면 괜찮다.'
지금 이렇게 정보를 캐내는 건 앞으로 몇 번을 다시 오게 될지 모를 이곳의 사정을 조금이라도 더 파악해 두기 위함이다.
동시에 그는 졸장급 신분 옥패를 몇 개 더 챙겼다. 만약 여건이 된다면 이 옥패들의 신분을 조사하여 어느 것이 가장 안전한지 파악해 둘 요량이었다.
'아무래도 종문 소속이라는 게 걸리는데······.'
하나 획득한 모든 신분 옥패들에 종문이 있었다. 법혼기 수사 정도면 어지간해선 떠돌이로 살지 않는 듯했다.
그렇게 자잘한 정보들을 파악하면서 무난하게 시간이 흘러가, 어느덧 밤이 됐다.
밤이 되고서도 그는 저번처럼 인적없는 장소에서 조용히 시간을 보내는 대신 성 내부를 적극적으로 돌아다녔다. 여기에 통금 같은 제도는 없었고 법혼기 수사인 만큼 딱히 시비 같은 게 걸릴 우려도 매우 적었기 때문이다.
결과적으로 날이 밝기 전까지 짭짤한 정보를 여럿 건져냈다.
그중 하나가 바로 '교류회'에 대한 것이었다.
정중 금제에 문제가 생겨 공적치 교환이 중지된 상황이다. 언제 또 요족들이 공격해 올지 모른다는 점을 고려하면 모종의 법기나 영단 따위가 급한 이들이 다수 존재할 만도 하다.
꼭 그렇게 급한 이들이 아니더라도, 원래 같은 경지의 수사들끼리 모여 필요한 물건을 교환하는 행사는 언제나 환영받는 일이다.
교류회는 어디 한 곳에서 크게 열리는 것이 아니라 여러 곳에서 소소하게 열리는 것이었고, 그중 많은 곳이 한유진 자신도 참석할 수 있을 것처럼 느껴졌다.
그는 이번 천원성 방문의 두 번째 목표를 많은 교류회 참가로 설정했다.
꼭 뭔가를 얻지 못하더라도 그냥 구경함으로써 안목을 키울 수 있을 터였다.
* * *
진법술 강의는 천원성 북쪽 구역의 천학전이라는 큰 건물에서 열렸다.
풍둔술을 통해 빠르면서도 눈에 띄지 않는 상태로 그곳에 도착한 한유진은, 예상보다 더 운치 있는 천학전의 모습에 내심 감탄을 금치 못했다.
청옥색과 흰색 벽돌을 주재료로 하여 유리인지 수정인지 모를 구슬들이 곳곳에 장식된 건물은 아주 멋졌다. 주변을 둘러싸고 조성된 푸른 정원과 연못들이 어우러져 더욱 그랬다.
작은 해자처럼 조성된 연못을 가로지르는 석재 다리를 건너 안으로 들어서자, 단지 자연광만으로 이런 밝기와 분위기를 만들어 낼 수 있다는 사실에 또 한 번 감탄하게 됐다. 웅장한 벽화 역시 빼놓을 수 없는 감상 포인트였고 말이다.
안쪽의 단상 위에는 진법술을 강의할 결단기 수사가 이미 도착한 채 눈을 감고 조용히 서 있었다.
덕분이랄지 때문이랄지 사람들은 대전에 들어서는 족족 입을 다물고 엄숙해졌다.
'수는 대략······ 연단술 강의의 2할 정도밖에 안 되는군.'
동시에 입문기 수사는 거의 안 보이고 법혼기 이상이 대부분이다. 진법술의 난해함을 생각하면 그리 특이한 일은 아니었다.
잠시 후.
올 사람은 다 왔다고 느꼈는지 단상 위 결단기 수사가 눈을 떴다.
백발 수염이 긴 노인의 모습을 한 그는 구름이 수놓아진 은빛 도포를 걸치고서 청록빛 옥장을 들어 매우 학자다운 분위기를 풍겼다.
'이름이 송자문이었던가.'
생각하는 때, 그 송자문이 입을 열었다.
- 반갑습니다, 도우들. 아시다시피 제가 오늘부터 진법술을 강의하게 됐습니다.
담담하면서 듣기 좋은 목소리가 모두에게 뚜렷하게 들린다.
- 진법술의 심오함을 이 며칠의 짧은 강의로 전부 설명하기란 불가능하겠지요. 하나 어쩌면, 대략적인 윤곽 정도를 그려내는 일은 가능하지 않을까 싶습니다.
이어서 그는 이번 진법술 강의의 목표를 마저 설명했다.
요약하자면, 교양 있는 수선자로서 마땅히 알아야 할 기초와 함께 흔히 쓰이는 진법 금제의 유형과 원리를 알려주겠다는 이야기였다.
'좋아, 좋아.'
딱 한유진이 원하는 것이었다. 아마도 진법술을 처음 접할 다른 많은 수사들도 비슷할 터였다.
- 그럼 바로 강의를 시작하지요. 우선 진법의 가장 큰 특성이자 약점을 짚고 넘어가야 할 겁니다. 수사의 의념이 포함되지 않은 영기와 법문 조합만으로 어떻게 원하는 효과를 잘 끌어낼 것인가?
말하면서 송자문이 손을 들어 올리자, 그의 위쪽으로 빛이 나타나 여러 선명한 문양들을 그려냈다. 각 문양이 전부 다양한 법문들로 구성된 법결 덩어리였다.
- 여기 진법술에 쓰이는 가장 기초적인 법결식 열 가지가 있습니다.
허무, 혼원, 음양, 삼재, 사상, 오행, 육합, 칠성, 팔괘, 구궁.
한유진도 오행종 유적에서 얻은 서책들을 통해 한번 보기는 했던 개념들이다. 당연히 그것들을 어떻게 활용하는지는 잘 모르는 상태였는데.
바로 그 부분을 지금 송자문이 딱 짚어서 가르쳐 주기 시작했다.
강의는 한 마디 한 마디가 실로 금과옥조였다.
문득, 집중하던 한유진의 시선이 점점 멍해지는 것처럼 보였다.
하나 실은 그 이상 더 집중할 수 없는 상태로, 모든 중요한 정보를 받아들임과 동시에 스스로의 지식과 경험을 바탕으로 새로운 깨달음을 탄생시키는 일종의 '돈오'에 빠진 것이었다.
예의 그 초월적인 이해력에 경지가 오름으로써 향상된 지능이 더해졌고, 흡사 결정타처럼 진법술 대사의 가르침까지 더해지자 그 효과가 매우 놀라웠다.
이것이 무슨 무협 소설에서나 나오는 그런 무시무시한 깨달음은 아니었다.
하나 기존에 그냥 알고만 있던 죽은 지식들이 전부 생명력을 얻어 살아나는 정도의 깨달음이긴 한지라, 평범한 입문기 수사가 지금 한유진의 이해를 따라잡으려면 족히 몇 년은 걸릴 수도 있었다. 경지가 같은 법혼기 수사라고 해도 몇 달 이상 걸릴지 몰랐다.
그만큼 지금 그의 머릿속에서 폭발적으로 성장 중인 진법술에 대한 이해는 대단했다.
그 범위가 단지 기초에 불과하다지만, 원래 뭐든지 기초가 중요한 법 아니겠는가?
한참 후.
강의가 끝났을 때.
한유진은 잠에서 깨어나듯 돈오 상태에서 빠져나오며 감동과 아쉬움에 푹 젖었다.
'내가······ 이 정도로 똑똑했었나?'
겨우 하루 강의를 들었을 뿐인데 대체 얼마나 큰 이득을 얻었는지 모르겠다.
지금도 그의 머릿속을 떠돌아다니는 진법술 관련 지식들이 너무나 생기 넘치고 뚜렷해서, 마치 세상을 보는 시야마저 조금 달라진 것 같았다.
바로 그때.
강의가 끝난 터라 대전을 빠져나가는 이들 사이에 섞여, 강의자이자 결단기 수사이며 진법대사이기도 한 송자문이 어느샌가 다가와 한유진 앞에 섰다.
"후배는 이름이 어찌 되나?"
그리고 언젠가 다른 누군가에게서 들어본 듯한 질문을 던져 왔다.
당연한 수순으로 아직 주변에 남아있던 모든 이들의 시선이 확 쏠렸다. 한유진은 조금 당황하면서도 즉시 답했다.
"이곤이라 합니다."
"이곤······ 어디 종문의 제자인고?"
"운곡문의 제자입니다."
"그래? 운곡문이란 말이지."
수염을 한 번 쓰다듬은 그가 다시 물었다.
"거기 초광 도우는 별일 없는가?"
아마도 운곡문 소속인 어느 결단기 수사의 이름일 것이다. 송자문과 약간의 친분이 있을.
'좆됐다.'
속으로 탄식하며 한유진이 일 초 정도 침묵하는 때.
그는 시선이 마주친 송자문이 빙그레 웃고 있단 사실을 새삼 깨달았다.
명백히, 얼핏 눈치를 챘는데 별 개의치 않는 기색이었다. 마치 이런 일 정도야 흔하다는 것처럼.
"오늘 내 강의를 듣는 자네 모습이 매우 인상 깊었다네."
"감··· 사합니다."
"감사는 무슨, 내가 할 소리지. 사실 의욕이 별로 없었거든. 이 짧은 기간에 진법술 강의를 한다고 해서 무슨 의미가 있겠는가 싶었는데······."
이어 그는 무언가 굉장히 마음에 드는 소리를 듣기라도 한 것처럼 고개를 끄덕거렸다.
"자네, 나이가 어떻게 되지?"
"서른이 좀 넘었습니다."
한유진은 원시림에서 보낸 시간까지 대략 합산하여 답했다. 그에 송자문은 더욱 만족스러운 기색이 됐다.
"그 나이에 법혼기에 올랐으면 재능도 부족하지 않겠군. 혹시 우리 태청궁의 외문제자로 승문(昇門)할 생각이 있는가?"
흥미로운 상황에 장내를 떠나지 않고 있던 수사들에게서 경악하는 기색이 드러났다. 동시에 그들의 시선에 질시와 부러움이 들어차는 것이 느껴졌다.
"계속 외문제자로 남아있으란 소리가 아니야. 약간의 검증··· 그게 끝나면 즉시 내문제자로 올려주겠네. 내가 직접!"
게다가 이어지는 말에 그 시선들에 섞인 질시의 농도가 급증했다. 한유진으로선 거의 찔리는 느낌이 들 지경이었는데, 이 역시 언젠가 한 번 겪어본 일이었다.
'태청궁······.'
벌써 두 번째로 제자가 되지 않겠느냔 제의를 받았다. 무려 합체기 태상장로가 자리 잡고 있는 초거대 초강력 수선종문에 말이다.
실로 기분이 묘할 수밖에 없었다.
"어떤가?"
하여 조금 멍해져 있던 그는 곧 정신을 차렸다. 그리고 별 어렵지 않게 답했다.
어차피 들킨 것 같은 상황에 망설일 이유가 없다. 상대가 어째서인지 호의를 보이고 있다면 더더욱.
"그럴 수만 있다면 제겐 큰 영광입니다."
"허허허, 그래."
송자문의 시선이 힐끔, 한유진이 허리춤에 매달고 있는 신분 옥패를 스쳤다. 그러면서 빙그레 웃는 것에 한유진도 어색함을 감추며 마주 웃을 수밖에 없었다.
46화. 천원성의 새로운 가치
한유진은 송자문에게 신분 위장을 들킨 일이 별로 걱정스럽지 않았다.
혹시나 일이 최악으로 잘못된다면?
'응~ 자살하면 그만이야~.'
그 악마 추종자들의 이카파 판게아에서 엄청나게 험한 꼴을 당했었지만, 요행심의 결과가 좋지 않다는 교훈을 얻으면서 결국 멀쩡해지지 않았던가?
심지어 상대에게선 뚜렷한 호의가 느껴졌다.
만약 그게 다 연기라면 실로 남우주연상감이 따로 없을 것이며, 결단기 수사가 그런 연기를 펼칠 이유도 좀처럼 떠오르지 않았다.
뭔가 악의적인 짓을 하고 싶었다면 그냥 '이 자식 첩자네' 하며 잡아가면 될 일이었으니까.
어쨌든.
송자문은 추후 다시 얘기하자면서 순순히 그를 놓아주었고, 하여 그는 살짝 어수선한 마음으로 무사히 대전을 떠날 수 있었다.
영입 제의를 해놓고 구체적인 이야기가 전혀 없었던 걸 보면 당연히 후속 강의에 계속 나오라는 의미일 터였다.
'그건 원래 그럴 생각이었으니 상관없지.'
필시 그 자신이 돈오에 빠진 광경을 보고 싹이 보인다 싶어서 일단 침을 발라놓은 모양인데, 만약 이후로 몇 번 시험해 보고 성에 안 찬다 싶으면 바로 없었던 일이 될 것 같다. 어쩌면 바로 그때가 신분 위장이 문제 삼아지는 순간일 수도 있다.
물론 앞서 생각했듯 별로 우려스럽지 않은 일이었다.
상념에 잠겨 이동하길 잠시.
그는 어제 파악해 두었던 한 소규모 교류회가 열리는 장소에 도착했다. 평소 수사들의 휴식 장소로 쓰일 것이 분명한 아담한 정원 속 어느 정자였다.
적당한 곳에 앉아 기다리자니 참가할 의사가 있는 법혼기 수사들이 하나둘씩 나타나 자리했다. 주최자인 중년 여수사는 그저 들어오는 사람들에게 웃으며 눈인사할 뿐, 본격적인 교류회 시작 전까지 나설 생각이 없어 보였다.
그렇게 대략 서른 명 정도의 수사들이 도착하여 방석에 앉았을 때.
"이제 오실 분은 다 오신 듯하네요. 다들 반갑습니다."
주최자가 나서며 교류회의 시작을 알렸다.
그녀는 아주 짧은 자기소개 이후, 이번 모임이 대략 어떤 식으로 진행될지를 간략히 설명하곤 시범을 보이기라도 하듯 먼저 물건을 꺼내놓았다.
희미한 분홍빛이 도는 작은 옥병이었다.
"요혼기 요수의 정혈입니다. 청기환이나 속유단 세 알로 교환했으면 합니다. 영석으로 교환하시려면 값을 먼저 제시해 주시면 되고요."
요혼기란 수사의 법혼기와 같은 경지다. 요괴의 정혈은 부적술이나 연단술 등에 주로 쓰이며 연기술에서도 심심찮게 쓰인다.
"청기환 두 알은 어떻소?"
한 수사가 흥정을 시도하고, 몇 번 대화가 오간 후 거래가 금방 이뤄졌다.
이어서 다른 수사가 나서며 계속 거래가 이뤄졌고, 대략 다섯 차례 정도 지났을 때 한유진의 관심을 끄는 물건이 등장했다.
물건을 내놓은 이는 젊고 잘생긴 남자 수사였다. 현실의 어느 유명한 배우를 많이 닮아서 한유진은 자못 신기했다.
"제가 거래하려는 이 부적은 가위부라는 겁니다."
"가위부···?"
누군가가 작게 중얼거리는 것을 보아 그리 흔한 부적은 아닌 것 같았다.
"사용하면 잠시 결단 중기 수사의 기세를 내뿜을 수 있지요. 상황에 따라 매우 유용하게 사용될 겁니다. 중급 이상의 공격용 법기와 교환하고 싶습니다."
이후로 잠시 침묵이 흘렀다. 서로 눈을 마주치며 고개를 젓는 수사들도 있는 것을 보아, 딱히 쓸모를 느끼지 못하는 듯했다.
충분히 그럴 만도 하다.
이곳은 천원성 전선계로, 요족들과의 목숨을 건 대규모 전투가 주기적으로 벌어지는 곳이다. 단지 기세를 위장하는 것만으론 상대를 물러나게 만들기 힘든 환경이란 뜻이다.
최악의 경우 되레 강력한 요괴의 이목을 끌지도 몰랐다.
'같은 사람을 상대로 써먹기도 애매하지.'
왜 애매한지는 굳이 설명할 필요가 없다.
하나 한유진에겐 아니었다.
그는 각성 능력으로 온갖 세계를 돌아다닐 수 있고, 그러다 보면 허세가 필요한 순간이 최소 한 번쯤은 있을 터였다.
"용도가 애매한 부적 하나에 중급 이상의 공격용 법기라······."
하여 그는 곤란하다는 식으로, 하나 흥정할 여지는 있다는 느낌을 담아 말을 이었다.
"내게 안 쓰는 중상급 법기가 있긴 한데, 뭐 더 꺼내놓을 거 없으시오?"
그에 미남 수사는 표정엔 별 변화가 없었지만 명백히 움직임이 급해졌다. 저물대에서 일고여덟 가지 물건을 한 번에 꺼내 늘어놓은 것이다.
전부 싸움과는 별 연관이 없는 물건들인지라 미남 수사의 목적이 전투력 보강임을 분명하게 알 수 있었는데, 어쨌든 그중 한유진의 시선을 잡아끈 것은 웬 백옥 호리병이었다.
난을 닮은 영초의 모습이 청록색으로 멋들어지게 그려져 있어 상당히 고급스러워 보이는 물건이었다.
"그 호리병은 무엇이오?"
"옥로주병이라 하는데, 효과가 좀··· 미약하지만, 법혼기 수사에게도 영육을 자양하는 효과가 있소."
"영육을 자양한다? 한 번 살펴봐도 되겠소?"
"얼마든지."
허공을 날아온 그 옥로주병을 받아 든 한유진은, 마개를 열고 어수술로 내용물을 한 방울 끌어내 살폈다.
마치 옥처럼 영롱한 빛을 띠면서 굉장히 향기로운 액체였다.
문제가 없다는 점을 파악하고 직접 마셔 보자 좀 더 분명하게 효과를 알 수 있었다.
'영액주병의 업그레이드판 법기구나.'
영액주병이 중급 법기였다는 점을 고려하면 이건 못해도 중상급 법기거나 어쩌면 상급 법기일 수도 있다.
하나 이런 유형의 법기는 아무래도 전투용 법기보다 그 가치가 낮을 수밖에 없었다. 효용이 거의 기호품 수준에서 그치는 탓이다.
"한 번 보시오. 마음에 든다면 교환합시다."
그럼에도 한유진은 호쾌하게 오행검을 꺼내 미남 수사에게 건넸다. 그 오행검을 받아 신중하게 살피던 미남 수사의 표정이 활짝 폈다.
"받으시오."
그는 가위부를 마저 건네주곤 오행검을 자신의 저물대에 즉시 수납했다. 행여나 상대가 거래를 무르자고 할까 봐 우려하는 듯한 태도였다.
다행히 그건 가위부라는 부적이 가짜여서가 아니었다. 그저 크게 이득 본 거래를 했다고 여기는 자의 경박스러움일 뿐이었다.
모든 정식 부적은 그 표면의 법결을 자세히 살핌으로써 진위를 파악할 수 있도록 만들어진다. 당연히 그 표면 법결을 살핀다고 하여 따라서 제작할 수 있는 것은 아니며, 진위를 판별하는데도 최소한의 지식이 필요하다.
하나, 초월적 이해력을 가진 한유진에겐 진위 판별쯤이야 매우 쉬운 일이었다. 심지어는 제작 방식에 대한 부분까지도 왠지 감이 오는 느낌이었다.
'내가 부적술에도 재능이 있나 보구나.'
이후 진행되는 다른 수사들의 거래를 보며 그는 속으로 마저 상념을 이었다.
오행검을 건네준 것은 전혀 아깝지 않다. 당연히 이번 방문이 끝나면 저절로 그 대기 공간으로 돌아올 것이기 때문이다.
그의 각성 능력은 일종의 시뮬레이션과 같았다. 시뮬레이션 내에서 초기 설정값으로 주어진 물건을 어떻게 사용하든, 시뮬레이션이 끝나면 다시 원상태로 돌아오는 것이 당연했다.
요컨대 이번 거래에서 그는 사실상 아무것도 잃지 않았다는 뜻이다.
하나 그게 공짜 이득을 얻었다는 뜻은 아니었다.
'결국 이 가위부와 옥로주병을 얻으려면 카르마를 소모해야 하니까.'
가위부는 정말로 언젠가 최소 한 번쯤은 요긴하게 쓰일 듯했다. 하나 옥로주병의 경우는 전적으로 무용이 때문이었다.
아까 살짝 맛을 본 바, 왠지 녀석이 매우 좋아할 것 같았다. 그래서 일단 얻었다.
'너무 비싸지만 않으면······.'
아까운 카르마를 살짝 낭비하게 되겠지만, 그건 무용한 녀석을 들일 때도 그랬으니 상관없다.
사람이 어떻게 항상 계획적인 소비만 하겠는가?
잠시 후.
다시금 한유진의 관심을 끄는 물건이 등장했다. 바로 이번 천원성 방문의 목적이기도 한 진법과 연관된 법기였다.
"기련종에서 만든 미환진 금제 법기요. 이 진판을 중심으로 여덟 개의 깃발을 자유롭게 배치할 수 있지. 영석 없이도 잘 발동하지만 있다면 위력이······."
성마른 인상의 중년 남수사는 상당히 빠르게 설명을 늘어놓았다.
미환진은 적을 환상에 빠트려 제압하는 유형의 금제였고, 영석을 끼워 넣어 발동한다면 같은 법혼기 수사에게도 위협적인 살상력을 보인다는 모양이었다.
"요혼기 요족을 산 채로 제압할 수 있는 법기, 혹은 법술과 교환하고자 하오."
모든 설명이 끝나고 하는 말에 몇몇 수사들이 나서 거래를 제안했다. 진법류 법기는 있어서 나쁠 것이 없는 물건이었기 때문이다.
하나 모두 마음에 들지 않는 듯 그 중년 남수사는 연신 고개를 저었다. 심지어 한유진의 봉령삭 법기도 거절당했다.
'음.'
잠시 생각하던 한유진이 오행종 유적에서 얻은 환몽심탈 법술서를 꺼내 들었다.
"이건 어떠시오?"
어물술로 부드럽게 날아간 서책을 받아 든 그 중년 남수사는, 초반 내용을 가볍게 읽어보더니 한유진을 힐끗 쳐다봤다.
"···어디서 얻은 법술인지 알 수 있겠소?"
"오래된 유적에서 주웠으니 출처 걱정은 할 필요 없소."
"흠."
그는 조금 더 내용을 읽어보고는 곧 고개를 끄덕였다.
"거래합시다."
한유진은 허공을 날아 자신의 손에 들어온 미환진 법기를 보며 내심 미소 지었다.
* * *
천원성 강의가 시작된 지 여드레째.
이전에 연단술 강의 때도 그랬듯, 이번 진법술 강의에서도 비슷한 현상이 나타났다. 도저히 진도를 따라가지 못한 이들이 줄줄이 나가떨어진 것이다.
특히 진법술 강의는 그 정도가 더 심했다.
송자문은 마치 따라올 테면 따라와 보라는 식으로 강의를 진행했고, 그런 탓에 강의에 참석한 몇 결단기 수사마저도 조금 버거워하는 기색이었다.
당연히 그런 와중 꿋꿋하게 출석하는 한유진은 매우 눈에 띄었다. 이제 살아남은 법혼기 수사는 몇 없었는데, 그중 내용을 완벽히 이해하면서 따라오는 자는 그가 유일했기 때문이다.
송자문은 강의 도중 대놓고 그에게 여러 질문을 던져댔다. 한유진은 그런 기회 아닌 기회를 조금도 마다하지 않으며 자신의 지식을 최대한 풀어놓았다. 몇 번은 궁금한 점을 역으로 묻기까지 했다.
'이런 학생들한테 교수들이 껌뻑 죽는다지.'
과연 그 생각이 틀리지 않아, 송자문은 연신 웃음을 터뜨리며 그를 더욱 적극적으로 활용해 강의에 임했다.
- 오늘은 여기까지입니다.
그렇게 오늘도 알차기 그지없는 진법술 강의가 끝나고.
한유진은 다른 이들이 장내를 떠나는 와중에도 여전히 남아 있었다. 떠나가는 이들 중 상당수가 그런 한유진을 질시와 부러움에 찬 눈으로 힐끔댔다.
'오늘이 바로 요족이 쳐들어오는 날이지.'
개의치 않으며 생각하던 한유진은, 마침내 송자문과 둘만 남게 됐을 때 그에게 공수하며 예를 표했다.
"선배님, 후배가 사적인 질문이 있습니다."
"일단 이거 받게."
송자문은 웬 옥간 하나를 그에게 건네며 말했다.
"내가 예전에 만들어 둔 옥간 진도강해(陣道講解)인데, 자네는 이걸 받을 자격이 있어 보이는군."
"아······."
그 이름에서 대략 유추되는 바는 이전에 연단술 강의 때 원백령에게서 받은 연단초해와 비슷했다.
"진심으로 감사합니다, 선배님. 제게는 정말 큰 도움입니다."
"허허허, 그래. 내게 물어볼 것이 있다고?"
한유진은 마음의 각오를 다지며 과감하게 물었다.
"제가 신분을 위장한 일을 아시면서, 왜 문제 삼지 않으시는 겁니까?"
"그게 궁금했나? 난 또, 언제 외문제자로 받아줄지를 물을 줄 알았더니."
완전히 별것 아니라는 태도로 그가 이어 말했다.
"자네 같은 친구들이 간간이 보여. 잔머리 굴리는 종문 제자의 병역을 대신하는 산수들 말이야."
순간, 한유진은 모든 것이 명쾌하게 이해되는 느낌을 받았다.
여담으로 산수(散修)란 소속 없는 떠돌이 수사를 뜻했다.
"사실, 서로의 이해가 맞아떨어지니 이런 비리가 안 생기기도 어렵겠지. 힘 있는 종문의 제자는 보상 따위야 아무래도 좋으니 안전을 원할 테고, 산수는 비교적 안전한 이곳 천원성에서 공적을 쌓고 싶을 테고, 그런 이들을 은밀히 연결해 주며 이득을 챙기려는 자가 있을 테고······."
조금 머뭇거리다가 한유진이 다시 물었다.
"그, 제가 요족 첩자일지도 모르는 일 아닙니까?"
"당연히 그럴 수도 있겠지. 요족이 아닌 마문의 첩자일 수도 있겠고. 하나 자네, 여기 오면서 자세한 이야기를 별로 듣지 못한 모양이군? 이곳 천학전에 어떤 금제가 펼쳐져 있는지도 모르다니."
아, 하는 소리가 절로 나올 뻔했다.
요족 혹은 마문과 연관된 사람에게 무언가 안 좋은 효과를 내는 금제가 깔려있다면, 송자문이 이곳에서 그를 발견하고서 딱히 경계하지 않았던 것이 바로 이해가 된다.
정중 금제가 무력화되었다고 성의 모든 금제가 무력화된 것은 아니지 않겠는가?
"그리고 우리 태청궁의 태명심경에 대해 못 들어봤나? 내가 처음 말했던 그 검증이 대체 뭐였겠는가?"
"태명심경··· 그렇군요. 다 이해가 됐습니다."
그게 정확히 어떤 물건인지는 당연히 모른다.
하나 이름에서 대략 유추되는 바, 무언가 속마음을 비춰 거짓을 판별해 내는 거울류 보물인 듯했다.
"후배가 겁도 없이 잘못을 저질렀습니다."
"알았으면 되었네. 설령 자네에게 다른 이유가 있었어도 괜찮아. 태명심경 앞에서 우리 태청궁에 악의가 없다는 것만 증명되면 다 괜찮을 일이지."
"그 점에 대해선 자신 있습니다."
한유진은 그렇게 말한 후 자신의 허리춤에 매달린 신분 옥패를 힐끔 쳐다봤다.
"그, 이 옥패의 원주인은······."
"태청궁의 외문제자가 되는 순간부터 그런 사소한 일은 신경 쓸 필요 없네. 그놈이 추후 어떤 처벌을 받든, 진법술에 재능이 있는 자네와 무슨 상관이겠는가? 혹시 친한가?"
"그렇지 않습니다."
빠른 대답에 송자문은 만족스럽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대략 보름 후에 여길 떠날 테니 준비하게."
"예."
"혹시 모르니 그 옥패의 공적치는 쓰지 말도록 하고."
"알겠습니다."
어디로 떠난다는 건지는 명확했다.
그리고 공적치에 대한 건, 오늘 정중 금제가 회복되리라는 것을 알고서 하는 말이겠지만, 그게 함정이고 요족의 대대적인 공세가 있으리란 사실까지는 당연히 모를 터였다.
'태청궁이라······.'
송자문과 작별하고 대전을 나서면서, 한유진은 이 천원성 전선계의 새로운 루트가 뚫린 느낌을 받았다.
언젠가 그럴 필요가 생긴다면, 지금과 비슷한 방식으로 태청궁이라는 초거대 초강력 수선종문의 제자로 들어갈 수 있을 것이다. 좀 더 깔끔하고 세련된 다른 방식도 찾아보면 물론 있을 터였고.
하나 지금 체험해 볼 일은 아니었다.
'이번 방문의 목표는 달성했다.'
진법술을 배웠고, 송자문이라는 진법대사에게서 관련 옥간까지 받았으며, 법혼기 수사들의 작은 교류회에서 몇 쓸 만한 물건을 얻기도 했다. 안목을 키울 수 있었던 것은 덤이다.
'어차피 태청궁에 들어가봤자 뭔가를 더 얻을 수가 없어.'
수련 성과는 물론 다른 어떤 물건을 얻더라도 카르마가 소모되니, 드래곤 하트를 얻으려면 그런 낭비를 피해야 할 상황이다.
'다행히 현실에서 영석을 카르마로 변환할 수 있단 사실을 알았으니······.'
정체의 기간은 생각보다 길지 않을 것이다. 이번에 진법술을 배운 것처럼, 다른 방면으로 실력을 갈고닦기에도 빠듯한 시간일 수 있었다.
'그럼 마지막으로, 내 실력 점검이나 해 볼까.'
곧 요족이 쳐들어올 것이다. 놈들을 상태로 마음껏 싸우면서 저번과 얼마나 달라졌는지 체험할 수 있을 터였다.
자연스레 그는 저번에 자신을 죽였던 그 전갈 사마귀 요괴를 떠올렸다. 놈과 다시 맞붙는다면 과연 어떻게 될지 썩 궁금했다.
그는 전투를 앞둔 사람답지 않게 경쾌한 발걸음으로 성벽으로 향했다.
47화. 드래곤 하트 탐색
"우와아아악-!!"
한유진은 한쪽 팔이 날아가고 두피 가죽이 반 이상 녹아내린 상태로도 승리의 함성을 내질렀다. 머리는 치유술에 의해 회복되곤 있었지만 명백히 중상이었고, 팔이 날아간 것은 말할 필요도 없었다.
그런 그의 발밑으론 웬 사마귀와 전갈을 뒤섞어놓은 듯한 요족 시체 하나가 전신이 불타오르고 절단나고 짓뭉개진 채 놓여 있었다.
과거 그를 순살시킴으로써 엿 같은 무력감을 선사했던 바로 그 요족의 시체였다.
"내가 이겼다-!! 이 개 같은 놈아-!!"
정말로 쉽지 않은 싸움이었다.
도중에 죽을 뻔했던 적이 십여 차례가 넘었고, 어찌나 교활한지 자잘한 심리전에는 절대 걸려들지 않아 오히려 손해를 보기 일쑤였다.
하나 결국 이겼다. 굉장히 어렵게 거머쥔 승리인 터라 도무지 흥분을 가라앉힐 수가 없었다.
그는 심지어 이 요족과 싸워 이기기 전, 어느 삼두육비의 요족을 물러나게 만들어 아군 법혼기 수사 한 명을 지켜내기까지 했다. 예전에 그 수사의 머리통을 산채로 씹어먹으면서 물러났던 바로 그놈을 말이다.
'예전의 내가 아니라고!'
완벽축기를 통해 법혼기에 올랐으며 수준에 맞는 법술도 다수 익혔다. 오행환이라는 최상급 법기를 가져 템빨 측면에서도 부족함이 없다.
예전과 달리 그보다 더 나은 전투력을 선보이는 법혼기 수사가 거의 없었다. 아니, 아예 없었다. 어딘가에는 있을지 모르겠지만 적어도 지금 한유진의 눈엔 안 보였다.
이번 천원성 방문의 부가적인 목표까지 전부 이뤘다는 성취감에 푹 젖어드는 순간.
- 그것참 인족치고 호탕한 녀석이로구나!
다른 법혼기, 아니 요혼기 요족이 한유진에게 달려들었다. 이족보행 호랑이 같은 외형을 가진 놈이었다.
"생긴 대로 콘프로스트나 처먹을 것이지, 감히 내게 덤비려고?!"
한유진이 그렇게 대담히 외치면서 놈과 마주하는 때.
- 네놈의 실력을 인정하니, 나도 함께 상대해 주겠다!
- 흐히히히···! 네놈의 피와 살은 내 것이야!
다른 요혼기 요괴들도 마치 그를 더없이 매력적인 먹잇감처럼 여기며 달려들어왔다.
"하하하하···! 그래, 다 덤벼라!"
어차피 더는 살 생각이 없었던 한유진은 호쾌하게 웃으며 그런 요족들과 맞붙어 갔다. 어차피 죽을 거 다수와 싸우는 경험이라도 쌓을 요량이었다.
그렇게 대략 일 분 후.
그는 머릿수의 힘을 이기지 못하고 사지가 다 찢긴 채 심장이 부서져 나가면서 속으로 온갖 욕설을 내뱉었다.
각오했던 것보다 조금 더 많이 아픈 죽음이었다.
* * *
무엇을 수확물로 선택해야 할지는 너무나 뻔했다. 교류회에서 얻은 가위부와 옥로주병과 미환진기, 그리고 송자문에게서 얻은 진도강해 옥간 등이었다.
예상보다 카르마가 덜 소모돼서 그는 꽤 아팠던 죽음에도 불구하고 즉시 기분이 나아졌다.
침대에서 깨어난 그는 짧은 준비를 마친 후 어제처럼 무용이를 품에 안고 숙소를 나섰다. 당연히 소탕 작전을 위해서였다.
열심히 일해서 카르마를 쌓고 추후 영석을 구매할 공적도 쌓아야 한다.
"좋은 아침입니다."
"예, 좋은 아침입니다."
이동하는 와중, 마주치는 이들 모두가 한유진을 보며 더없이 공손한 태도로 반갑게 인사했다. 마주 인사해 주면서 절로 기분이 좋아지는 일이었다.
겨우 이틀의 활약이었을 뿐이고 오늘이 사흘 차에 불과한데, 이미 그에 대한 소문을 듣지 못한 사람이 없는 것 같았다.
'명망 얻기가 참 쉽네.'
문득 든 생각에 그는 피식 웃었다.
명망을 얻기가 쉬운 이유? 당연히 그만한 실력을 갖췄기 때문이다. 치밀하고 정교한 계획 같은 건 실력이 부족할 때나 필요한 것들이다.
세상을 지배하는 것은 결국 힘이다, 누가 처음 생각해 냈는진 몰라도 참으로 옳은 말이었다.
잠시 후.
밖으로 나온 그는 즉시 거점요새를 떠나 소탕 '작업'을 시작했다.
풍둔술을 통해 빠르게 이동하면서, 신식과 영안술 등을 통해 괴물을 발견하면 그게 무엇이든 일단 죽여 버리는 작업이었다.
퍼버버버벅-!
검결지에서 쏘아진 금색 빛줄기들이 도망치던 들개 비슷한 놈들을 모조리 꿰뚫어 쓰러트린다. 빠르게 마저 접근한 그는 아직 살아서 고통에 발버둥 치는 놈을 편히 보내주며 머릿속으로 딴생각을 했다.
'다음 세계는 어디를 가볼까······.'
진법술을 배웠고 미환진 법기까지 얻은 이상 안전에 대한 문제는 해결된 셈이다. 이제 원래 계획대로 심장을 얻을 만한 드래곤이 있는 세계를 탐색해 보면 된다.
하나 동시에 하루이틀 정도는 완전히 다른 세계를 탐색하는 데 써도 되지 않을까 싶었다.
가령, 뛰어난 기술력을 가졌을 SF적 느낌의 세계라든가, 귀신을 부리거나 제거하는 데 특화된 세계라든가.
'무작정 선협 세계만큼 강한 곳을 바라면서 문을 열어볼 수도 있겠지.'
할 수 있는 게 너무 많아서 고민이다. 그렇지만 잠시 후 그는 고개를 저으며 원래 계획부터 실행하기로 했다. 모든 일엔 우선순위라는 게 있었으니까.
다른 세계를 방문해 보는 건 뭔가 수단의 부족함을 느꼈을 때로 미뤄도 된다.
바로 그때.
퉤-!
불현듯, 품에 얌전히 안겨 있던 무용이가 입에서 금색 빛줄기 하나를 쏘아냈다.
통명어수결로 전수해 준 경금검기술로, 목표한 것은 근처 나무둥치에 붙어있던 웬 주먹만 한 크기의 풍뎅이류 벌레였다.
기가 막히게 명중한 경금검기는 그 벌레를 자비 없이 반갈죽냈다. 얼결에 멈춰 섰던 한유진은 품속 무용이를 마구 쓰다듬으며 칭찬했다.
"아이고 잘했다!"
찍-! 찌직!
주인의 칭찬에 신이 난 무용이가 개도 아니면서 꼬리를 마구 흔든다. 저 나름대로의 흥을 표현하는 모습이다.
"내가 너 주려고 엄청난 손해를 감수하면서 옥로주병이라는 걸 가져왔는데, 어떻게 알고 이런 이쁜 짓을 다 하냐? 응?"
고작 풍뎅이 한 마리 처리했을 뿐인 일에 한유진은 신기할 정도로 기분이 좋아져서는 녀석을 계속 칭찬했다.
"앞으로 괴물 만나면 네가 좀 공격해 봐라. 소심하게 저런 벌레만 죽이지 말고."
찍-!
그는 무용이한테 법술로 적을 공격하는 경험을 쌓게 해주는 것도 썩 나쁘지 않겠다고 판단했다. 슬슬 단조로워져가던 이 소탕 작업에 한 줄기 재미를 더할 겸 말이다.
다시 소탕 작업을 위해 움직이는 한유진의 표정에 미소가 가득했다.
* * *
갑작스레 발생했던 웨이브의 여파를 모두 정리하는 데는 거진 일주일 정도가 소요됐다. 원래 더 걸려야 했을 일을 한유진이 미친놈처럼 열심히 움직여준 덕에 그 정도로 줄어든 것이었다.
또한 덕분에 7레벨 마나스톤 노천광산을 두고 벌어지던 한중일 세 국가의 신경전에서 한국이 전혀 밀리지 않게 됐다.
비록 S급 헌터의 수가 중국과 일본이 더 많다고는 하지만 노천광산의 위치는 엄연히 한국 측 영역과 매우 가까웠다. 애초에 중국이나 일본 쪽에서 일부 소유권을 주장하던 것 자체가 반 이상 억지였다는 뜻이다.
얼마나 억지였는가 하면 국가 간 알력 다툼 따위에 별 관심이 없던 한유진조차 상당히 어이없어질 정도였다.
'뭐······ 생각해 보면 이런 비슷한 일이 참 많기도 하지.'
뭐가 어떤 식으로 얼마나 많은지는 굳이 설명할 필요가 없으리라.
그나마 박세룡의 부탁을 받은 한유진이 의도적으로 노천광산 근처를 자주 왔다갔다 하지 않았더라면 상황이 더 심각해졌을지도 모른다.
어쨌든.
그렇게 활약한 바를 바탕으로, 그는 좀 더 강력하게 자신의 보수를 마나스톤으로 받기를 요구할 수 있었다. 동시에 추후 돈으로 마나스톤을 구매할 권한까지도 요구했다.
'나중에 다른 마나스톤 광산이나 찾아내 볼까.'
그는 내심 그런 생각까지 품었다. 원래 돈으로 받기 마련인 발견 보상을 마나스톤으로 요구하면 더 빠른 카르마 쌓기가 가능할 터였으니까.
현실에서의 카르마 확보 작업과 계획이 그렇게 무난히 진행되어 가는 와중.
각성 능력을 통한 드래곤 하트 찾기는 살짝 지지부진했다. 물론 겨우 일곱 번밖에 시도해 보지 않았다지만 그래도 영 마음에 들지 않는 일이었다.
두 번의 시도는 대상이 겨우 원영기에 걸친 수준인지라 고민 끝에 일단 보류하기로 했다.
나머지 시도에선 대상이 화신기급 수준이긴 했는데, 전부 다 좀처럼 각이 안 나와서 포기하게 됐다. 시체나 유적 같은 데서 드래곤 하트만 쏙 얻어내는 식의 바람이 모두 실패해 버린 점이 컸다.
'욕심을 좀 버려야 하는 건가, 아니면 욕심을 더 크게 부려봐야 하는 건가.'
미환진 법기로 안전을 확보한 채, 오늘도 무용이와 한바탕 놀아준 후 침대에 누우며 그가 생각했다.
'이제 겨우 일곱 번 시도해 봤을 뿐이야. 더도 말고 덜도 말고 딱 화신기급으로만 계속 탐색하다 보면······.'
각성 능력을 발동하기 직전 문득, 한 가지 색다른 발상이 떠올랐다.
'혹시 모르니 연허기급 드래곤 하트를 한 번 탐색해 볼까?'
일반적으로 수선자의 경지는 원영기 이후 화신기 이후 합체기다. 한데 공법의 특성 등에 따른 이유로 화신기와 합체기 사이 연허기라는 특수한 경지가 존재하는 경우도 있다.
'연허기 정도면 어찌어찌 카르마를 감당할 수 있을지도.'
곧.
각성 능력을 발동한 한유진이 공허한 대기 공간에서 눈을 떴다.
무용이는 당연히 데려가지 않으면서 준비를 마친 그는, 여태까지의 경험을 바탕으로 잘 정리된 바람을 떠올리며 천변만화하는 문에 손을 뻗었다.
성공적으로 고정된 문의 형상은 역시나 판타지스러운 느낌을 풍기는 석문이었다.
문 중앙에 둥근 백색의 수정이 박혀있고, 그 양옆엔 백금으로 조각된 천사 비슷한 존재들이 서 있어 꽤 신성한 느낌을 풍기기도 했다.
- 별에 굴종하는 해방의 아스트라디아.
위쪽에서 나타난 은빛 문자를 보던 그는 간단한 추측을 세워봤다.
'굴종하면서 해방된다는 건, 주인님을 갈아탄다는 뜻인가?'
불현듯 떠오르는 건 그 처음 목격했던 최소 합체기급 드래곤의 분노에 찬 진언이었다.
'감히 역겨운 아스테리온 놈들을 불러들였다면서 화냈었지······.'
아스트라디아와 아스테리온, 딱 봐도 연관성 있어 보이는 유사한 이름이다. 게다가 초월적 이해력으로 해석되는 바 그 두 단어 모두 별과 연관된 고유명사였다.
왠지 아스테리온이라는 존재들이 드래곤들과 싸우는 걸 이용해서 뭔가를 얻어 낼 수 있을 듯한 느낌이다.
힘주어 문을 밀고 넘어가면서 그는 피식 웃었다. 지난 일곱 번의 탐색 동안 항상 느낌은 그럴듯했으나 막상 수확이 없었던 탓이다.
그렇게 문을 통과해 이세계의 땅에 발 딛고 섰을 때.
- 와아아아아아-!!!
족히 수만 명이 내지르는 거대한 함성이 그를 맞이했다.
뒤편에서 통과해 나온 문이 사라지는 걸 확인할 새도 없었다.
푸른 하늘 아래 거대하기 짝이 없는 성의 성문이 묵직한 굉음을 내며 열린다. 그 성문의 안쪽, 대오를 갖춘 채 모여 서 있던 수많은 이들이 재차 함성을 내지르며 사기를 북돋는 광경이 펼쳐졌다.
장내의 주역으로서 자리한 모든 이들이 갑옷이나 로브를 갖춰입은 모습이었다. 갑옷을 입은 자들은 들고 있는 무기를 포함해 광택이 번쩍거리면서 아주 단단한 느낌을 줬고, 화려한 로브 입은 자들은 각자 큼지막한 보석이 달린 스태프를 들어 신비로움을 드러냈다.
천천히 출발하기 시작한 선두에 의해 묵직한 발걸음 소리가 울려 퍼졌다.
치켜올린 창대에 걸린 무수한 깃발들이 펄럭이면서 눈을 현혹시킨다. 주변은 물론 평소라면 허락되지 않았을 성벽 위에까지 가득 들어찬 시민들이 환호성과 함께 꽃잎 따위를 뿌려대며 이들의 출정을 축복하고 있었다.
- 우리는 마침내 이 유구한 압제에서 해방될 것이다-!!
성문 위쪽 허공에 떠 있던 마법사에게서 어마어마한 성량의 목소리가 터져 나왔다. 여태 모종의 연설을 하고 있던 것 같았고, 방금의 말이 연설을 마무리하는 대사인 듯했다.
한유진은 자신의 로브 차림을 확인하면서 얼결에 그들과 맞춰 움직이기 시작했다. 대오의 가장자리에 있었기에 눈치를 살펴 움직이기가 별 어렵지 않았다.
'뭔가 출정식인 모양이군.'
갑작스러운 상황이었지만 워낙 스케일 웅장한 광경인지라 절로 가슴이 뛰는 것을 느끼며, 그는 이번 방문이 부디 잘 풀리기를 기원했다.
48화. 해방을 위한 전쟁
행군은 며칠에 걸쳐 이어졌다.
단순히 걷기만 한 게 아니라, 놀랍게도 중간중간 공간과 공간을 잇는 '게이트'를 사용했기에 실질적으로 이동한 거리가 어마어마했다.
그런 와중 다른 성에서부터 출발해 온 다른 군대와 합류하기도 하면서 이 출정의 규모가 미친 듯이 불어났다.
덕분에 한유진은 그 누구의 의심도 받지 않고 상당히 자유롭게 돌아다니면서 여러 정보를 수집할 수 있었다. 무리의 규모가 커질수록 세세한 부분에선 둔감해질 수밖에 없는 법이었으니까.
심지어 그는 이 대규모 공세의 우두머리급 인물들을 꽤 가까이서 관찰할 기회도 있었다.
파악한 바 총 여섯 명이었고 전부 마법사였다.
이 세계에서 기사는 아무리 강해 봤자 그 고점이 마법사보다 낮을 수밖에 없는 모양이었다. 마치 수선계에서 육신을 단련하는 연체술이 결국 사장돼 버린 것처럼 말이다.
어쨌든.
그 여섯 마법사는 전부 대마법사이자 각 마탑의 주인이라 불렸으며, 은근히 느껴지기론 최소 원영기급 힘을 가진 듯했는데, 수집한 정보에 의하면 모두 백 살 내외의 아주 젊은 나이였다.
한데 문제가 있었다.
'왜 저렇게 다 늙은 모습이야?'
겨우 백 년 내외의 짧은 시간 만에 최소 원영기급 힘을 거머쥔, 수선계의 사례로 따져봐도 절세 천재임이 분명한 그들의 모습이 당장 쓰러져 죽어도 이상하지 않을 만큼 노쇠했다.
단순히 겉모습만 그런 게 아니었다. 모든 행동거지에서 도저히 숨길 수 없는 쇠약함이 묻어나 보는 사람이 다 힘들어질 정도였다.
'영혼의 힘을 육체가 따라가질 못하는구나!'
결국 그런 판단밖에 내릴 수 없었다. 어떻게 저런 극단적인 성장을 이루게 됐는지 실로 불가사의할 지경이다.
그렇게 여섯 대마법사의 단점을 파악하고 보니, 대기사라 불리면서 아슬아슬하게 결단기에 걸치는 기세를 내뿜는 이들 역시 약점이 명확했다.
아무리 봐도 영혼이 영 부실한 듯하여, 약간의 위험을 무릅쓰고 슬쩍 신식으로 찔러보기까지 했는데 그냥 바보처럼 어리둥절해하는 모습이었다.
'저런 힘을 가지고도 이렇게까지 영적 방면에 둔감할 수가 있다니?'
아무리 수선계에서 연체술이 사장돼 버렸다고는 하나 저런 엄청난 약점을 갖고 있진 않았다. 단지 경지를 올리기가 너무 힘들면서 특별한 강점조차 없었을 뿐이다.
한데 이 기사라는 족속들은, 심지어 대기사라는 자들조차 겨우 법혼기 수사에 불과한 그 자신이 마음만 먹으면 환몽심탈술로 갖고 놀 수 있을 것 같다.
관련하여 조금 더 정보를 모아보던 그는 놀라운 사실을 알고 이마를 칠 뻔했다.
'소위 마법의 조종이라 불리는, 드래곤들에게서 유래된 수련법의 결과물이구나!'
그러니까 이 기형적인 성장은 전부 드래곤 종족이 의도한 작품이라고밖에 설명이 안 된다.
'과연 원래 주인님을 배신하고 새로운 주인님으로 갈아탈 만도 하다!'
사정을 알고 보니 새롭게 눈에 들어오는 부분이 있었다.
행군하는 중간중간 휴식을 취할 때마다, 대마법사들은 웬 커다란 조형물을 설치하곤 그 아래에서 명상에 잠겼다.
그 조형물은 마치 뼈대만 남긴 반구형 텐트 같았는데, 대마법사들이 명상에 잠기면 위쪽으로 신비한 남청빛이 서려 그 속에서 무수한 별빛이 쏟아져 내렸다.
그 별빛을 받는 대마법사들은 매우 평온한 표정이 되어 아주 느린 속도로나마 젊어지는 모습이었다. 극심하던 육체와 영혼의 불균형이 조금씩 해소되어 가는 것이다.
결국 이 '해방 전쟁'은 드래곤 종족의 업보처럼 보였다.
미물이라고 입맛대로 사육할 게 아니라 진즉에 잘해줬더라면, 인간이 어찌 아스테리온이라는 미지의 외부 존재들과 손을 잡았겠는가?
어쨌든 덕분에 한유진에겐 기회가 될지 몰랐다.
대마법사와 대기사의 그런 약점은 이 군대의 모든 이들이 공유하는 문제였지만, 그렇다고 이 군대가 약하다고 보긴 어려웠다. 일단 머릿수부터가 어마어마했으니까.
'직접 눈으로 본 것만 이삼십 만 정도.'
가장 약한 병사조차 D급 헌터 수준의 기세를 풍기고 있음을 고려하면, 또한 이 군대에 비전투 인원이 거의 없다는 점을 고려하면 실로 무시무시한 숫자다.
아무리 진정한 강자 앞에선 머릿수가 무의미하다지만 그것도 상황에 따라 다른 법이었다.
우두머리급 전투에 직접 힘을 보태진 못할지라도, 주변 상황을 깔끔하게 정리해 주는 것만으로도 사실 무시할 수 없는 도움이다.
그리고 중간 라인이 부실하지도 않았다.
여섯 대마법사와 스물넷 대기사의 제자들만 하더라도, 결단기급 고위마법사가 대략 백 명이었고 법혼기급 고위기사의 수는 그들이 구성한 기사단의 수로 파악하건대 최소 네 자릿수였다.
결정적으로 이 모든 군대가 딱 한 마리의 드래곤을 상대하기 위해 모인 것이었다. 이곳 아스트라디아 대륙을 압제하는 악룡 '카사르녹스'를 처단하기 위해서.
'그냥 결과를 지켜보는 것만으로도 재밌겠어.'
수집한 정보대로라면 그 악룡의 둥지에 도착하기까지 얼마 안 남았다. 한유진은 내심 기대를 억누르지 못하면서 그들 사이에 녹아들어 움직였다.
* * *
공격은 도착한 즉시 이뤄졌다. 이미 도착하기 전부터 그러기 위한 준비가 끝난 상태였다.
- 공격 개시-!!
한 대마법사의 명령이 천둥처럼 전장에 울려 퍼지고, 곳곳에서 웅장한 뿔피리 소리가 터져 나옴과 함께 대군이 움직이기 시작했다. 서로 진군 속도를 맞춰 크게 포위하려는 움직임이었다.
목표는 평아 지대에 외로운 섬처럼 우뚝 솟은 어느 산이었다.
굉장히 높으면서 모양이 좋은 산으로, 그 산 곳곳에 인공적인 건축물이 보이고 주변으로도 온갖 건물과 방벽과 첨탑 등이 세워져 있어 매우 화려하면서 웅장한 느낌을 선사했다.
과거 용족의 지배가 굳건하던 때엔 감히 아무나 접근할 수 없는 성지 중의 성지였겠지만······.
지금은 모조리 부숴 없애야 하는 압제자의 본거지일 뿐이었다.
- 이 버러지 같은 놈들이···! 감히 주인님의 은혜를 배신하다니!
공격에 대응하여 그 압제자의 본거지에서도 반응이 있었다.
가장 먼저 여기저기 솟아나 있던 첨탑들이 빛을 번쩍이며 매서운 광선을 쏘아냈다. 하나 그 광선들이 군대를 타격하기 직전 앞을 가로막으며 푸른빛 보호막이 치솟아 방어에 성공했다.
다음으로 산 곳곳에서 흡사 뇌전처럼 정신없이 빠지직대는 커다란 빛의 구체 십여 개가 포물선을 그리며 쏘아져 왔다. 긴 꼬리를 남기면서 허공마저 일렁거리게 만드는 모습이 매우 위협적이었다.
'오, 저건 제법···?!'
구경하던 한유진이 조금 놀라며 대비하는 그때.
대마법사 한 명이 허공을 날아 나서며 사람 머리통만 한 보석이 달린 스태프를 내밀었다.
그 즉시 어마어마한 영기 흐름이 발생하며 그 스태프를 중심으로 찬란한 빛이 뿜어졌다.
무수한 법문들이 모여 법결을 이룬 빛의 고리가 아홉 겹이나 펼쳐진 뒤, 전방 허공을 통째로 우그러트리는 듯한 현상을 만들어 낸다.
그 우그러지는 현상 속에서 더없이 날카로운 느낌의 빛줄기들이 수백 이상 나타나 제각각 다채로운 도형을 그리고, 그것들이 그물망처럼 서로 연결되어 날아들던 십여 개의 투사체 덩어리를 하나씩 감싸안은 직후.
거짓말처럼 반전된 투사체들이 더 빠른 속도로 되돌아갔다. 빛의 도형들에 둘러싸여 완전히 제어권을 빼앗긴 모습이었다.
'저래서 9서클이라고 불리는 거구나!'
한유진의 입이 떡 벌어졌다.
최소 원영기급이라고 추정하긴 했으나 방금의 실력 행사는 거의 화신기급 느낌을 풍겼다. 게다가 그 수단이 매우 복잡하고 정교하여 감탄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비록 그것이 취향이나 선택의 문제가 아닌 것처럼 느껴졌지만 말이다.
애초에 그런 방식으로밖에 못 싸우는 것처럼 느껴졌단 뜻이다.
- 같잖은 재주로다!
되돌아오는 빛 덩어리들에 산 곳곳에서 십여 명의 인영이 튀어나와 각자 방어에 나섰다. 다시금 대량의 영기가 휘몰아치고 빛이 번쩍이면서 폭음이 일대를 쩌렁쩌렁 울렸다.
나타난 십여 명의 인영은 기묘하게도 인간과 용을 섞어놓은 모양새였다. 한 쌍의 뿔과 날개, 그리고 꼬리, 피부 여기저기에 돋아난 비늘까지, 마치 수선계의 반인반요를 보는 듯하다.
그들에 대응하여 나선 것은 대마법사들의 제자들이었다.
백여 명에 달하는 결단기급 마법사들이 대기사들을 앞세운 채로 온갖 이로운 축복을 부여하면서 전진해 간다. 방어자 입장에서 도저히 무시할 수 없는 전력이었다.
그사이.
부우우웅······!!
부우우우웅······!!
연신 울리는 뿔피리 소리와 함께 산을 여섯 방면에서 포위한 수십만 군대가 천지를 진동시키는 함성을 내지르며 순차적으로 공격해 들어갔다. 그건 머릿수를 고려했을 때 거의 불가능하게 느껴지는 속도와 연계였다.
이제 외롭게 솟은 산의 모습은 흡사 수많은 적병의 해일 속 위태롭게 표류하는 조각배처럼 느껴졌다.
여섯 방면으로 공격해 가는 각 군대의 선두에서 무수한 섬광이 번쩍인 직후, 마법이 부여된 화살들이 하늘을 전부 가릴 기세로 치솟아 오르자 더욱 그런 느낌이 들었다.
바로 그때.
산의 정상에서 어느 한 궁전이 산산조각 터져 나가며 거대한 드래곤이 모습을 드러냈다.
─!!!
이어 형용하기 어려운 포효성이 전장의 모든 소음을 집어삼키며 퍼져 나갔다.
기세 좋게 쏘아졌던 모든 화살이 일거에 튕겨 나가고 치솟아오른 푸른빛 방어막마저 와장창 깨져 나가는 모습이 너무나 파괴적이다.
나타난 드래곤의 모습은 한유진이 보기에 실로 아름다웠다.
거울처럼 모든 상을 반사시키는 비늘들에서 몽환적인 보랏빛이 흐른다. 활짝 펼쳐진 날개가 마치 세상과 융합하듯 그 경계가 불분명한 모습으로 온갖 색채의 빛무리를 두른 채 펄럭인다.
극한까지 응축된 보랏빛 어둠으로 물든 여러 쌍의 뿔이 은은한 후광을 발하며 위엄을 더하고, 뜨인 세로 동공의 눈에서 흐르는 은하성운을 닮은 빛무리가 경외를 불러일으킨다.
드래곤, 연허기급 존재, 아스트라디아의 지배자, 카사르녹스.
그 존재는 나타난 이후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단지 보호막이 무너진 군대를 슥 훑어보며 날개를 크게 펄럭였을 뿐이었다.
휘황찬란한 빛무리가 터져 나오고, 그것이 무수한 보랏빛 칼날들로 화해 세상천지를 뒤덮을 듯 뿜어져 나갔다.
심지어 한 번에서 그치는 게 아니라 그 빛무리가 구체를 이뤄 허공으로 떠오르면서 몇 차례 더 칼날들을 폭풍처럼 발출해 냈다.
굉음을 동반한 무시무시한 파괴가 일대를 통째로 갈아엎기 시작한다. 그에 휘말린 인간 군대가 걸레짝처럼 찢겨나가는 모습이 펼쳐졌다.
시간과 여유만 주어진다면 그 혼자서 수십만 인간 대군을 모조리 도륙내 버릴 기세였다.
- 아스테리온 예즈알이시여-!!
그때 여섯 대마법사가 허공 높이 떠오른 채로 무언가를 중심에 두고 그것을 발동시켰다.
마치 무수한 고리들이 중첩되어 만들어진 듯한 금속 조형물이었다. 그 백색 금속에선 맑고 푸른 별빛이 무한히 뿜어져 나오는 느낌이었고, 대마법사들의 힘을 받아들이자 또 다른 태양처럼 환하게 빛났다.
순간, 더 높은 위쪽 하늘로, 얼핏 인간과 비슷하나 명백히 다른 어느 존재의 거대한 투영이 드러났다.
한유진은 그걸 스치듯 보았을 뿐인데 전신에 소름이 돋고 등골을 타며 전율이 흘렀다.
인간처럼 사지가 달렸고 머리도 하나이고 이족보행을 할 듯한 체형이었으나, 그 몸이 흡사 해파리처럼 반투명하고 무수한 빛으로 이뤄진 촉수들이 달려 하늘거리는 모습이었다.
그 무수한 촉수들에서 반짝이는 헤아릴 수 없이 많은 별빛이 전부 모종의 시선처럼 느껴져 두려운 느낌을 주기도 했다.
'아니, 저런 걸 새로운 주인님으로 모시겠다고···?'
겉보기보다 친절한가? 라는 의문보단 그 최소 합체기급 드래곤이 내뱉었던 '역겨운 아스테리온 놈들'이라는 표현에 더 공감이 간다.
그런 그의 감상이야 어쨌든.
나타난 아스테리온 '예즈알'은, 과연 이 대륙의 지배자다운 막강한 폭력을 흩뿌리던 드래곤을 향해 두 손을 뻗었다.
그 뻗어진 손에서 반짝이는 빛이 하나 떨어져 내린다 싶더니, 그것이 새장 비슷한 형태로 확장되며 가공할 빠르기로 일정 공간을 봉쇄해 갔다.
한유진은 그 순간 직감적인 판단을 내리고는 뇌둔술과 풍둔술을 연이어 발동하며 그 안으로 진입했다.
'아마도 대상의 힘을 억제하며 탈출을 막는 공간류 금제.'
외부에서의 공격엔 취약하지만 내부에서 벗어나기란 거의 불가능한, 인간 군대의 입장에선 급에 맞춰 공간이 격리된 채로 각자 최선의 전투를 벌일 수 있을 회심의 한 수.
들어가지 않으면 결과가 어떻게 되는지를 전혀 구경할 수 없을 것이다.
과연 그 판단은 틀리지 않았다.
그가 아슬아슬하게 진입한 직후, 새장처럼 내려앉은 그 공간 봉쇄 금제가 주변의 모든 빛과 소음을 완전히 차단해 버렸다.
덕분에 안쪽은 한순간에 확 조용해지면서 상당히 어두워졌다.
얼결에 휘말린 잔챙이들을 제외하면 이 봉쇄된 공간의 주역은 단연 여섯 대마법사와 한 마리의 드래곤이었다.
- 꽤 준비를 했구나.
그때 드래곤의 의지가 목소리처럼 화해 모두의 머릿속을 울렸다. 듣기 굉장히 좋은, 젊은 남자처럼 느껴지는 미성이었다.
- 결국 이런 식으로 처리되는 게 내 운명인가······.
뜻밖에도 그 드래곤은 뭔가 전투적인 기세나 분노 따윈 전혀 드러내지 않았다. 오히려 올 게 왔다는 듯 담담한 기색일 뿐이었다.
- 카사르녹스.
한 대마법사가 냉혹함과 결의가 뚝뚝 묻어나는 마법적 목소리로 말했다.
- 오늘 너를 죽이고··· 우리는 해방될 것이다!
- 그래.
드래곤 카사르녹스는 여전히 담담하게 답했다.
- 어디 한 번 최선을 다해 보아라, 이 벌레들아.
그의 전신으로 꿈결 같은 보랏빛이 진득하게 피어오르고 두 눈에서 우주적인 색채가 빛을 발했다.
- 그래야 애써 거머쥔 그 '해방'이 값지지 않겠느냐.
은은한 비웃음 섞인 어조 이후.
여섯 대마법사가 동시에 스태프를 내밀며 주문을 시전하고 드래곤은 입을 벌리며 브레스 공격을 뿜어냈다.
동시에 한유진은 지둔순을 발휘해 땅속 깊이 숨어들었다.
저들의 공세에 자칫 스치기라도 했다간 문자 그대로 뼈와 살이 분리되고 말 터였다.
49화. 드래곤 카사르녹스
뿜어진 브레스는 대마법사 셋의 협력에 의해 그대로 공중에서 분해되듯 사라져 버렸다.
단지 사라지는 것에서 그치지 않고 그 여파가 역이용되어 그들이 만들어 내는 마법진에 힘을 더했다.
빛을 머금은 아홉 중첩의 마법진들이 곳곳에서 나타나 주변 마력을 미친 듯이 빨아들이며 덩치를 불린다. 그것들이 서로 조합되어 입체적인 마법진으로까지 화한 후, 세 대마법사의 조작에 따라 불가해한 현상을 펼쳐냈다.
퍼져 나가는 파동과 함께 허공이 무채색으로 물들며 얼어붙는다. 드래곤 카사르녹스가 뿜어내는 보랏빛 기운이 그 현상과 잠시 힘 싸움을 벌이는가 싶더니 곧 잡아먹히는 모습이었다.
마침내 카사르녹스 본인마저 그 무채색 시간의 동결에 사로잡혀 박제됐다. 그 틈을 노려 다른 세 대마법사가 각자의 공격을 날리려던 순간.
- 조심-!
공격을 준비하던 한 대마법사가 놀라며 황급히 다른 마법을 시전했다.
한 차례 무너졌다가 재구축된 아홉 중첩의 마법진에서 섬광이 폭발하고, 그 섬광이 훑고 지나간 범위 안에 모든 것이 거울처럼 깨져 나간다.
그렇게 벗겨진 환상 아래에서 시간 동결에 전혀 영향받지 않은 카사르녹스가 날개를 활짝 펼치는 중이었다.
찬란한 섬광 아래 수많은 마법문들이 저절로 나타나 합쳐지기를 반복하며 몇 차례의 승화를 거친다. 그 광경을 목격했다 싶은 순간 수십이 넘는 광선이 쏘아져 여섯 대마법사를 노렸다.
휘몰아치는 후폭풍만으로도 그 광선의 위력을 짐작할 수 있었다. 하나 대마법사들은 몸에 걸친 갖가지 아티팩트에 힘입어 거의 피해 없이 그 공격을 막아냈다.
오색찬란한 보호막이 끝없이 부서져 나가면서도 재생되며 사방으로 빛무리를 흩뿌리고, 그 안에서 초인적인 집중력으로 마법을 짜낸 대마법사들이 다시 반격을 가한다.
한 대마법사의 스태프에서부터 진녹색 광선이 쏘아졌다. 카사르녹스가 그 큰 덩치에도 불구하고 유려하게 몸을 움직여 피하자, 아슬아슬하게 목표를 스친 광선이 뒤편 땅에 부딪히며 반경 십여 미터를 흙먼지처럼 만들었다.
다른 대마법사는 극도로 압축된 청백색 화염 덩어리를 만들어 내 그것을 밀어내고, 또 다른 대마법사는 카사르녹스의 마법에 간섭하면서 반격을 지연시켰다.
가장 뒤편에 자리한 대마법사가 스태프에서 마법문을 만들어 냄과 동시에 주문까지 읊으며 주변 그림자를 요동치게 만들고, 다른 두 대마법사 역시 제각각 모종의 위험한 효과를 품은 광선과 투사체를 쏘아냈다.
그 순간 카사르녹스의 전신을 휘감고 있던 보랏빛이 무수한 다른 빛깔로 번쩍이면서 주위 공간이 제멋대로 뒤흔들렸다.
아스테리온의 봉인에 의해 한정된 공간이던 전장이 끝없이 확장되면서 거울에 비친 상처럼 어지럽게 분열되기까지 한다.
날아들던 마법 공격들이 전부 속도를 잃은 듯, 혹은 계속 나아가고 있으나 공간이 끝없이 늘어지면서 그것들을 붙잡아 두는 듯 목표물에 닿지 못한다.
- 라드, 크라테시아-! 씨시마- 테, 르오리아-!
그때 뒤편에서 주문을 시전하던 대마법사의 거대한 영창음이 무한한 메아리처럼 중첩되면서 요동치던 그림자 어둠을 폭발시켰다.
한없이 늘어나며 중첩돼 가던 환상적 공간들이 그 어둠에 물들어 부식되고 무너진다. 잠시 붙잡아 두었던 공격들이 재차 들이닥쳐와, 카사르녹스는 마법의 효과를 급히 자신에게로 집중시키며 몸을 피해야 했다.
단순한 회피가 아닌 시공간이 함께 출렁거리는 회피였고, 그것이 실제적인 현상인지 아니면 카사르녹스의 환상이 만들어낸 현상인지는 불분명했다.
이어지는 전투에서도 세상천지를 뒤흔드는 굉음이나 일대를 진동시키는 폭발 같은 건 없었다.
하나 충분히 그런 여파를 만들어 낼 수 있을 힘들이 극도로 집중된 채 오가는 공방의 향연은, 수준 떨어지는 자들이 재대로 이해하기가 불가능했다.
안타깝게도 지하에 숨어 신식으로 상황을 살피는 한유진 역시 마찬가지였다.
무언가 엄청나게 대단하고 위험하다는 건 알겠지만 딱 그 정도에서 그쳤다. 위력을 따지기 이전에 그냥 신비의 발동 원리부터가 격이 달라서, 아무리 견문을 채우더라도 지금 경지에선 전부 이해하지 못하는 게 당연했다.
수선자가 원영기에 오르면 시공간에 대한 새롭고 고차원적인 감각이 트인다. 그것 없이 지금의 이 전투를 완벽히 이해하려는 건 마치 장님이 어느 조각상의 예술성을 완벽히 느끼려는 것과 같다.
시각 없이는 아무리 열심히 더듬어 봐도 한계가 명확하다는 뜻이다.
어쨌든.
그들의 공방이 너무 수준 높았던 덕에 오히려 살아남기가 쉬웠다. 효과가 없으리라 생각하면서도 그는 은영술을 최대로 발휘하며 계속 기회를 살폈다.
온갖 섬광과 구체가 서로를 향해 쏘아지고 스러졌다가 다시 뭉쳐들어 번쩍인다. 시공간이 마구잡이로 일그러지면서 한유진이 보는 전투 광경이 몇 번 되돌아갔다가 재차 펼쳐지기도 했다.
그러던 어느 순간.
끝없이 부서져 나가는 보호막을 두른 한 대마법사가 허공을 찢는 듯한 빛줄기를 스태프에서 흩뿌리며 기습적으로 공간을 뛰어넘었다.
의도가 너무 명확한 공격이었다. 전투의 반 이상을 이해하지 못하는 한유진조차 그것이 카사르녹스의 움직임을 제한하려는 견제임을 바로 알 수 있었다.
한데.
그 견제에서 그쳤어야 할 공격이 카사르녹스의 한쪽 날개를 절단내고 몸통에까지 깊은 상흔을 만들어 냈다.
은하수처럼 흩뿌려지는 빛의 파편들 사이로 선명한 붉은빛 용혈이 함께 섞여 흩뿌려진다. 그 속에서 공격을 성공시켜 놓고도 경악에 잠긴 대마법사를 향해 드래곤의 앞발이 벼락처럼 휘둘러졌다.
그저 단순하게 육체만을 사용한 공격이 아니었다.
그가 뿜어내던 보랏빛 기운이 통째로 호응하며 현실과 환상의 경계를 불분명하게 만들고, 시공간 질서마저 혼란스럽게 만들면서 태산처럼 거대해진 드래곤의 앞발이 그 대마법사를 후려쳤다.
- 안···!
미처 다 내뱉어지지 않은 비명 같은 노호성이 그의 육체와 함께 산산조각 났다. 터져 나오는 마력의 후폭풍은 카사르녹스의 몸으로 즉시 흡수되며 이어지는 후속 공격들에 어느 정도 대응했다.
다만 '어느 정도' 대응했을 뿐이었다.
미친 게 아닌가 싶을 정도로 무모했던 그 반격 때문에 카사르녹스는 다른 한쪽 날개마저 누더기처럼 변했고 꼬리의 반 이상이 잘려 나가며 대량의 피를 흩뿌려야 했다.
- 크하하학···!
고통에 겨워하면서도 무언가 유쾌하다는 듯 드래곤의 정신파가 사방으로 뿜어져 나갔다.
- 이대로 내가 무력하게 당해버리면, 사대일이 아니겠는가?
그리고 영문 모를 소리를 이었다.
직후.
그림자를 조종했던 가장 뒤편의 대마법사가 바로 곁에 있던 다른 대마법사를 겨누며 마법을 발출했다.
어둠이 끔찍한 짐승의 아가리처럼 갈라지며 소리도 없이 대상을 뒤덮는다. 기습당한 대마법사의 로브와 목걸이 등에서 휘황찬란한 빛이 뿜어져 보호막을 형성했으나 거의 즉시 찢겨 나가는 모습이었다.
- 얀코티, 미친 거냐-!!
가까스로 공간을 뚫고 몸을 피한 그 대마법사가 분노에 차 소리 질렀다.
겨우 목숨은 건졌지만, 몸에 걸치고 있던 아티팩트의 반 이상이 부서져 내린 게 손해가 막심한 듯했다. 안색도 매우 창백하여 단순히 장비적인 측면에서만 피해를 입은 것도 아닌 기색이었다.
- 내게 분노할 여유가 있나?
배신한 대마법사, 얀코티라고 불린 음침한 안색의 노인은 태평한 어조로 답했다.
그리고 과연 카사르녹스는 이 잠깐의 기회를 놓치지 않고 무시무시한 마력을 그러모으며 온갖 마법을 쏟아내기 시작했다.
공간을 봉쇄하며 대상의 힘을 억제하는 아스테리온 봉인이 여전하다지만, 여섯 대마법사가 힘을 합쳐 상대하던 드래곤을 이제 넷이서만 상대하게 됐다.
원래도 전혀 여유롭지 못했던 만큼 전투의 흉험함이 배 이상 급증했다.
- 과연 내 느낌이 맞았구나, 하하하하···!
드래곤 카사르녹스는 입은 부상에도 불구하고 이전보다 더 유리해진 느낌으로 상대를 한껏 비웃었다.
- 너희 인간 놈들은 항상 그런 식이지. 이득 앞에서 제 동족을 아무렇지도 않게 팔아먹는 벌레 같은 놈들!
- 닥쳐라-! 그 벌레 같다며 깔보는 인간의 영육으로 탄생하는 놈들 주제에!
- 입이 비뚤어졌어도 말은 똑바로 해야지. 너희의 영육으론 그저 알의 생존율을 높일 뿐이거늘.
온갖 마법적 공격과 방어가 미친 듯이 오가면서 함께 오가는 대화에, 사정을 잘 모르던 한유진은 많은 것을 짐작할 수 있었다.
- 우리는 더 이상 가축처럼 사육당하지 않을 것이다!
- 그러면서 아스테리온과 손잡았다고? 그저 사육 방식이 다를 뿐임을 모르지 않을 터인데?
카사르녹스의 전신으로 보랏빛이 폭풍처럼 휘몰아친다. 날아들던 마법들이 그 폭풍에 휘말려 녹아들고 뒤틀리며 역으로 쏘아진다.
- 내게 위선 떨지 마라, 이 은혜도 모르는 벌레들아. 너희는 단지 사육장의 관리자로 출세하고 싶을 뿐 아니더냐? 그게 아스테리온의 방식이니까!
고작 숫자 둘이 줄었을 뿐인데 그 빈자리가 생각보다 큰 모양이었다.
슬슬 밀리기 시작하는 대마법사들의 모습에, 잠시 물러나 있던 배신자 얀코티가 마법을 영창하여 드래곤을 향해 어둠을 폭발시켰다. 명백한 견제였다.
덕분이랄지 다시 균형이 맞춰진 상황에서 카사르녹스가 그를 보며 조롱했다.
- 그리고 너, 여기서 가장 추악하고 더러운 악마 추종자야. 저울질에 좀 더 신중해야 할 거다! 네 수작질에 자칫 내가 죽어버리기라도 한다면 큰일이지 않겠느냐?
- 주의하도록 하지.
감정이 없는 것처럼 무덤덤하게 답한 배신자 얀코티의 시선이 문득, 주변에 아직까지도 용케 살아있던 '잔챙이'들을 훑었다.
- 그런 의미에서, 변수를 줄여야겠군.
전투의 양상에 한 번 더 개입하여 균형을 맞춘 그가 스태프를 높이 치켜들었다.
본디 투명하던 스태프 머리의 수정구가 사악한 핏빛 어둠으로 차오르고 주변의 그림자가 꿈틀거린다.
직후 곳곳에서 숨죽이고 있던 이들의 비명이 터져 나왔다. 채 반항할 틈도 없이 그림자에 빨려 들어가듯 분쇄당하는 끔찍한 모습이었다.
이어 그 배신자 대마법사의 시선이 땅속으로 향하는 순간.
한유진은 지둔술을 최대로 발휘하며 밑으로 향했다. 하나, 일정 깊이로 내려가자 그 아스테리온 봉인이 가로막고 있음을 깨닫곤 즉시 방향을 바꿔야 했다.
그런 한유진이 스쳐 지나간 자리를 아슬아슬하게 어둠이 꿈틀대며 물어뜯었다.
겨우 일 초 정도의 짧은 회피에 불과했지만, 어쨌든 자신의 공격이 실패했음에 얀코티의 미간이 살짝 구겨지는 그때.
최대한 살아보려고 머리를 굴리던 한유진이 급히 외쳤다.
"이카파 판게아! 제가 거기 방문자입니다!"
혹시 몰라 사실만을 내뱉었다.
그리고 어느새 코앞까지 들이닥쳤던 어둠이 멈칫했다.
'살았나···? 이카파 판게아를 안다고?'
악마 추종자라는 말에 혹시나 싶어 내뱉어 봤는데 진짜 통할 줄은 몰랐다.
하나 그 외침이 비단 얀코티의 흥미만을 끈 게 아니었다.
한유진의 존재를 완전히 무시하고 있던 다른 대마법사들이 관심이 아주 조금이지만 쏠렸고, 그런 대마법사들과 흉험한 전투를 이어가던 드래곤 역시 비슷했다.
특히 카사르녹스의 관심이 아주 크게 동한 듯했다. 아마도 변수가 간절한 입장이기 때문일 터다.
순간 드래곤의 몸을 두르고 일렁이던 보랏빛 기운이 약간의 손해를 감수하면서도 땅 아래로 파고든다. 그렇게 미처 한유진이 피할 새도 없이 그를 휘감아서는 장난치듯 전장의 중심부까지 끌어냈다.
'망했다!'
결과를 지켜보지도 못하고 죽게 생겼다. 이렇게 붙잡힌 이상 밖으로 휙 내던져지기만 해도 그는 마법의 충돌 여파에 먼지처럼 부서져 내릴 터였다.
- 이 하찮은 벌레는 또 뭔···.
말을 잇던 카사르녹스의 시선이 한유진의 몸 곳곳을 빠르게 훑었다.
- ···수선자?
그 의문 섞인 읊조림 직후.
한유진은 세상 전체가 보랏빛으로 물들며 보이는 모든 광경이 꿈결처럼 흐트러진다고 느꼈다.
방향감각이 사라지고 자신의 몸마저 느낄 수 없게 되어, 시간이 몇 초 정도 흘렀는지 아니면 몇 시간 이상 흘렀는지조차 알 수 없었다.
그렇게 어느 순간.
"······."
그는 자신이 어느 화려하고 아름다운 정원에 서 있단 사실을 깨달았다. 눈앞에는 정자와 같은 용도지만 명백히 판타지스러운 디자인의 건축물이 세워져 있었고, 그 안에서 누군가가 그를 내려다보며 서 있었다.
외모를 제대로 살피기도 전 시선이 마주쳤다.
그러자 그밖에 다른 모든 것에 도저히 관심을 줄 수가 없었다.
우주의 은하성운을 닮은 빛을 흘려내는 한 쌍의 눈이 흡사 그의 모든 것을 꿰뚫어 보는 느낌으로 주시해 오는 터라, 짓눌려 뭉개지는 듯한 느낌을 버티는 것만으로도 온 정신을 쏟아야 했다.
- 하하하하···!
어느 순간, 듣기에 매우 좋지만 허탈함과 어이없음에 가득 찬 웃음소리가 울려 퍼졌다.
- 이게 다 가짜 환상놀음이라니···! 이럴 수가 있다니···! 하하하하하하···!
연허기급 드래곤, 그 위대한 존재가 자신의 옆에 자리한 건물 기둥을 손바닥으로 치면서까지 박장대소했다.
50화. 서로 이득인 거래 (무료 마지막)