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성검 -3-
우르릉!
주먹을 뻗는 것만으로 대기가 요동친다.
아예 태풍이 몰아치는 듯했다.
'이건 못 막아.'
이를 악물고 몸을 날렸다.
오른쪽, 조금이라도 박대엽에게서 멀어지는 방향으로.
"흥!"
코웃음을 치는 박대엽.
주먹을 회수하더니 느긋하게 양손을 쥔다.
그리고 심호흡 후에······
"우어어어어어!"
소리를 내질렀다.
전투 함성.
음파에 깃든 마력 파장이 사정없이 나를 두들겼다.
"큭!"
순간적으로 방어용 특성을 주르륵 장착하지 않았으면 이 한 판으로 전투 결과가 결정되었을 것이다.
EMP 폭탄 얻어맞은 부회장처럼.
이를 악물며 땅을 박찼다.
포탄처럼 정면을 향해 쏘아지며 성검을 찌른다.
특성을 교체하고, 마력을 극한까지 발산하고!
일점!
파아앗!
서늘한 빛이 검 끝에 어렸다.
그러나 박대엽은 조소를 보낼 뿐이다.
"고작 이거냐?"
왼쪽 팔뚝을 직각으로 내려 찌르기를 막는다.
아주 단순한, 장난 같기까지 한 동작.
하지만 내 찌르기가 거기 막히고야 만다.
변형된 강철 장갑을, 팔뚝 보호대 위 표면만 긁어놓으며 미끄러진 것.
"죽어!"
상관없다.
바로 제 2타를 먹였다.
마총을 들고, 반지에 저장된 마력을 몽땅 집어넣어 쏜 것.
묵광이 박대엽을 직격하고, 당장 검은 불꽃이 피어오르기 시작했다.
"으하하하! 제법이구나!"
박대엽이 호탕하게 웃으며 배에 힘을 주었다.
찢어진 정장 아래 왕(王)자 복근이 물결치듯 흔들렸다.
아울러 심장에서 시작하여 번지는 무형의 힘.
마력 방어막.
흑염이 힘도 못 써보고 밀렸다.
약간의 틈, 내가 성검을 다시 찔러 넣었으나 박대엽은 아까처럼 팔뚝을 내려 간단히 성검을 튕겨냈다.
"장난은 끝이다!"
우렁우렁한 고함과 함께 폭풍 같은 연격을 날린다.
주먹이 내 얼굴을, 어깨를, 가슴을, 배를, 허벅지를, 무릎을 무자비하게 두드렸다.
성검으로 받아내고 마력 방어막으로 막아냈지만 한계가 있었다.
척추를 관통하여 뇌리까지 꽂히는 충격에, 나는 그만 피를 토하며 붕 나가떨어지고 말았다.
"커헉!"
기다렸다는 듯이 토해지는 핏물.
오른손으로 바닥을 짚고 일어나려다가 비명을 삼켰다.
성검은 어디론가 날아가고 없고, 손뼈에 금이 갔는지 날카로운 통증이 엄습해 온 까닭이다.
미친. 뭐가 이렇게 강해?
과연 격이 다르다.
[SR 박대엽]
흔한 돌격형 전사라 갈아 버렸던 과거가 믿기지 않을 지경.
"끝이냐?"
박대엽이 이죽거렸다.
"그럼 죽어야지."
보란 듯이 오른손을 뻗는다.
새끼손가락부터 손가락 하나하나 느리게 접어 주먹을 쥐는 박대엽.
그 위협적인 동작에 도리어 마음이 차분하게 가라앉았다.
'역시 안 되는 거였지.'
아까 일점이 아니라 섬광을 날렸어도 마찬가지.
에보니, 바이퍼, 사이보그와는 다르다.
빠르게 강해지는 대신 약점이 하나씩 있는 강화병과 전사는 역시 차이가 있었다.
방법은 처음부터 하나뿐.
천천히 일어난다.
오른발을 땅에 붙이고 왼쪽 무릎을 펴면서, 허리를 세우고 고개를 빳빳이 처든다.
그런 나를 가소롭다는 듯이 바라보는 박대엽.
이내 흥미롭다는 눈빛을 한다.
특성을 바꿨으니까.
동작 하나에 하나씩. 실시간으로.
[근력]
호리호리한 체형에 근육이 붙어 방호복이 팽팽하게 당겨진다.
[맷집]
체구가 유의미하게 커지며 뼈대가 굵어진다.
[에인헤랴르 연공법]
진한 마력 파장이 번지고 피가 증발하여 마력 증기를 뿜기 시작한다.
그러나 진짜는 지금부터.
[돌연변이 근육]
근섬유가 폭증한다. 섬유마다 두세 배는 두꺼워진다. 그리하여 증식한 근육이 방호복 따위 찢어버릴 듯 튀어나온다.
[돌연변이 육체]
키가 커진다. 몸도 커진다. 명백히 비정상적으로 성장하여 머리 하나 반, 그리하여 박대엽보다도 머리 반은 위에 있게 된다.
[돌연변이]
방호복? 다 찢어져 버렸다. 아울러 피부가 핏빛으로 달아오르고 머리카락은 가시처럼 쭉쭉 일어선다. 이제 박대엽의 동공에 비친 것은 전도유망한 젊은 초인이 아니라 한 마리 괴물, 변이체뿐이다.
"뭐, 뭐······"
경악으로 일그러진 눈동자가 당혹감을 토해낸다.
그 앞에 대고 나는 길게 울음을 터뜨렸다.
"크아아아아!"
고함도 함성도 아닌, 그저 본능에서 터지는 목소리.
목에 찬 목걸이가 쉬지 않고 명멸하고 있다.
오른손 장갑은 좋다고 내 피를 빨아먹는다.
거기서 오는 힘이, 강력한 치유력과 강건 특성이 나를 미치게 만든다.
하나 더 있다.
최후의 이성을 쥐어짜 방호복 바지 호주머니를 뒤졌다.
다행히 여기만큼은 아직 온전했다.
안에 들어 있던 안경알을 꺼내어 힘껏 허벅지에 박아넣었다.
안경알이 깨지고, 붉은 마력 회로가 거미줄처럼 번지며 나를 장악한다.
그 마법진이 내 눈에 새겨진다.
박대엽의 눈동자를 통해 그 과정이 선명하게 보인다.
검은색이던 내 눈이 핏빛으로 물들고, 머리카락은 하얗게 탈색되어 버렸다.
"미, 미친! 광분? 도대체 무슨 마약을 처먹은 거냐!"
눈앞이 빨갛다.
온 세상이 다 빨간색이다.
피와 죽음과 분노가 어우러져서 광란의 축제를 벌이고 있다!
그리고 이상하게도 심장에서 솟구치는 음산한 욕구.
저놈!
저놈!
저놈!
저 잘났다고 서 있는 저놈을 콱 죽여버리고 싶다.
그 욕구만이, 그 욕망만이 뇌리를 꽉 채웠다.
참지 않았다.
몸을 던졌다.
허우적대듯 달려가 그놈을, 나만큼이나 큰 놈을, 대거리하겠다고 서 있는 새끼를 후려갈겼다.
"노옴!"
박대엽도 그냥 당해주진 않는다.
절도 있게 격투 자세를 취하고는 내 공격을 막아낸다.
동작이 눈에 익다.
팔을 직각으로 세워서 팔뚝 보호대로 공격을 흘리는, 간단해 보이지만 절대 간단하지 않은 동작.
뻐억!
둔중한 충격이 올라왔다.
온통 시뻘건 세상 속, 홀로 은빛으로 보이는 주먹이 내 배에 박혀 있었다.
왼쪽 팔뚝으로 공격을 막고 오른쪽 주먹으로 반격한 것.
박대엽이 냉정한 얼굴로 날 본다.
그 와중에도 눈에 깃든 의기양양함이, 오만함이 나를 빡돌게 했다.
"케케케케!"
나는 침을 흘리며 웃었다.
안 아프다.
그저 가소로울 뿐이다.
나보다 쪼그마한 게 까불어?
죽어라!
주먹을 날린다.
얼굴을 후려친다.
배에 정권을 지른다.
무릎을 걷어찬다.
몸통으로 들이받는다.
박치기를 날린다.
때리고 때리고 또 때린다.
"으으음!"
확실히 박대엽은 고도로 숙련된 격투가.
정신없이 몰아치는 공격을 절제되고 직각 같은 동작으로 하나하나 막아냈다.
주먹을 날려도, 발차기를 해도, 박치기를 해도 마찬가지.
그러나 방어만 해서는 결국 패배하기 마련.
어느 순간 괴성과 함께 마력 파장을 터뜨렸다.
"이노옴!"
화악, 피어오르는 혈기.
얼굴이 시뻘겋게 달아오르고 두 눈에 핏기가 감돈다.
거칠게 갈아대는 치아.
마력 파장만큼 부풀어 오른 근육.
[격노] 특성이다.
광분의 하위호환이지만 이성을 유지할 수 있는 특성.
아울러 박대엽을 연격, 마력 방어막, 전투 함성과 함께 SR 등급으로 결정되게 한 그 특성.
박대엽이 거칠게 주먹을 뻗는다.
더는 방어하지 않는다.
오로지 공격, 공격, 공격뿐!
꽝! 꽝! 꽝!
주먹이 거칠게 부딪친다.
서로의 공격이 서로의 몸뚱이에 작렬한다.
머릿속이 새하얗게 빈 것 같다.
광분에, 본능에 몸을 맡긴 채 상대를 난타한다.
나도 박대엽도 물러서지 않는다.
철탑처럼 버티고 서서 주먹을 휘두르고 또 휘두른다.
"끄윽!"
신음을 흘리고 핏물을 흘리는 박대엽.
"캬캬캬!"
괴소와 함께 피 섞인 거품을 뿜는 나.
결국은 누가 더 오래 버티느냐의 싸움이다.
누가 더 미쳤는지, 누가 더 악에 받쳤는지에 따라 승패가 결정될 터.
아무래도 좋다.
지금의 나는 이성이 날아간지 오래.
뒷일은 생각하지 않았다.
그저 이 희열에, 광기에 몸을 내던지고 오로지 앞에 보이는 기분 나쁜 것을 부수느라 골몰하고 있었다.
뻐억!
얼굴을 후려갈겼다.
그 대가로 턱을 얻어맞았지만 웃는다.
인간이었으면 평형감각이 흔들려 주저앉았을 그 충격을 돌연변이답게, 변이체답게 웃어넘기고 또 주먹을 휘두른다.
뻐억!
이번에는 아랫배다.
제대로 들어간 올려치기.
마력 방어막과 단련된 육체로 막아내지만, 박대엽이 결국 욕설을 내뱉고야 만다.
"괴물 새끼."
물론 내 귀에는 안 들렸다.
뭐라고 입을 삐죽이는 것만 보였지.
그러거나 말거나 히죽히죽 웃었다.
또, 또 주먹을 내쳤다.
다시 한번 반격이 날아오지만 씹었다.
몸에 누적되는 충격 따위 무시하고서 공격에 공격을 더했다.
몸이 불타는 것 같다.
머리는 진작 다 타서 재가 되어버린 느낌이다.
근육이, 근섬유가 올올이 타오르는 이 감각.
후끈하고도 뜨겁고 화끈한 기운이 내 팔을 타고 질주한다.
오로지 팔에서만.
근육 섬유 대신 용암 섬유를 심어놓은 듯이.
화악!
꽝!
"어억?"
순간, 폭음과 함께 박대엽이 쭈우욱 밀려나간다.
당황한 얼굴로 나를 보는 박대엽.
나는 몰랐다.
왜 이런 일이 일어났는지.
아예 생각하지도 않았다.
씹어먹어도 시원치 않을 놈이 밀렸다는 것에 기꺼워하며 또또또 주먹을 날릴 뿐이다.
꽈앙! 꽈앙!
폭탄처럼 터지는 피격음.
박대엽이 이를 악문다.
마력 방어막을 최대한으로 전개하며 돌진한다.
빗나간 내 주먹, 그 사이로 파고든 박대엽.
이내 공격이 폭우처럼 내 가슴을 두드렸다.
"어떠냐!"
제대로 들어온 연격!
나도 피를 토했다.
우드득, 하고 갈비뼈 부러지는 소리가 요란하게 났다.
그러나 버틴다.
갈비뼈가 폐를 찌르건 말건 가슴을 편다.
살이 재생되고 뼈가 제 자리로 돌아오느라 아픈 가슴을 무시하고, 가파르게 주먹을 뻗는다.
"이 새끼가! 으어어어어!"
박대엽이 고함을 질렀다.
두 번째 전투 함성.
의미 없다.
돌연변이 육체의 마력 저항력은 전사 계열 초인의 전투 함성 따위 가뿐히 무력화했다.
대신 박대엽만 눈에서 피를 흘렸다.
격노에 격노를 더한 것.
거의 광분 상태가 되어서 내게 달려든다.
꽝꽝꽝!
쉬지 않는 연타!
무예에 거의 문외한이라 어설픈 내 주먹질.
반면 확실하게 날카롭고 묵직한 박대엽의 공격.
그러나 스펙 차이가 나는 까닭에, 인간과 변이체의 종족 기본값 때문에 비등비등한 공방이 오가고 있었다.
그 균형이 깨진 것은 박대엽의 연격이 또다시 작렬한 직후.
내 갈비뼈와 가슴뼈가 쪼개진 직후였다.
"케케켓!"
변형이 찾아온다.
내 몸이, 피부가 이차 변이를 일으킨다.
각질이 돋는다.
방호복과 융합되면서.
거의 찢어져 형체만 남아 있던 방호복을 잡아먹고 새로운 형태로 진화한다.
각질이 아니라 뱀의 비늘 같기도, 혹은 거북이 등껍질 같기도 한 형태로.
그것은 갑옷. 아니, [철갑].
조금 전 얻은 [괴력]과 함께 근력과 맷집의 명백한 상위 특성이었다.
"이, 이놈이!"
소리 질러봐야 소용없다.
근력 대신 괴력, 맷집 대신 철갑.
전신 근육량은 줄었다. 대신 팔이 훨씬 두꺼워졌다. 체구도 약간은 작아졌지만 표면에 돋은 철갑이 피해 일부를 아예 무효화시키고 반사시킨다.
이 상태에서 맞다이?
아무리 무예의 달인이어도 안 된다.
내가 박대엽을 압도하기 시작했다.
뻐억! 뻐억! 뻐억!
유효타가 연속으로 들어갔다.
괴력으로 강화된 주먹이 마력 방어막을 뚫기 시작했다.
일격일격 들어갈 때마다 박대엽이 눈을 부릅뜨고, 그 커 보였던 몸이 크게 들썩인다.
피를 얼마나 토했는지 턱부터 가슴, 배가 나이아가라 폭포를 연상시킬 지경.
"노옴! 노옴!"
그러나 물러서지 않는다.
처맞을 때마다 쓰러질 듯 휘청이면서도 두 눈을 빛낸다.
기다리고 있었다.
내가 지쳐 쓰러지는 것을.
박대엽은 내가 마약이라도 빨고 변이체가 되었다고 생각하고 있으니까.
설령 아니라고 해도 상관없다.
돌연변이 특성에는 제한 시간이 없지만 광분은 시간이 지나면 풀리고 끔찍한 후유증이 찾아오니까.
'승부를 걸어야 해.'
어느새 이성이 돌아오고 있었다.
내가 이런 생각을 할 수 있다는 사실 자체가 광분이 끝나간다는 증거.
그래도 물러서지 않는다.
숨을 고르지도 않는다.
오로지 전진하며 주먹을 휘두르고 또 휘둘렀다.
다만 특성을 교체했다.
[에인헤랴르 연공법][마력심][섬광]
[돌연변이 근육][돌연변이 육체][돌연변이]
괴력과 철갑을 마력심과 섬광으로!
우웅, 우우웅.
전신 마력이 들끓는다.
용암처럼 부글부글 끓기 시작한다.
뜨겁고 맹렬한 기운이 마력 혈맥을 타고 휘돈다.
동시에 폭발하듯 번지는 마력 파장!
내 몸이 왜소해진 만큼, 팔이 가늘어진 만큼, 빈자리를 채우려 마력 영역이 거세게 일어난다.
"뭐, 뭘 하려는 거냐!"
본능적으로 위기감을 느낀 박대엽.
날 마구 두들긴다.
이제는 대등한 눈높이가 된 내 얼굴을 후려치고 가슴에 주먹을 꽂는다.
소용없었다.
광분이 끝나가는 순간.
본능과 이성이 절묘하게 교차하는 이 시점.
내 정신은 지극히 명징했고 한편으로 들불 같은 열기에 휩싸여 있었다.
눈에 보이는 것은 오직 하나!
주먹을 뻗었다.
마력이 길게 용솟음친다.
마력심이 울음을 터뜨린다.
연공법으로 단련된 마력 혈맥을 타고 한 마리 용이 질주한다.
그리하여 터져 나오는 빛.
박대엽의 눈이 커졌다.
그 눈 가득 내 주먹이 맺힌다.
분해되고 있다.
손뼈를 통해 전달되는 마력을, 검기를 견디지 못하고 피부와 근육, 핏줄, 신경이 송두리째 떨어져 나가는 중이다.
남는 것은 뼈가 전부.
그나마 뼈까지 갈려나간다.
뚝뚝뚝 떨어지고 분쇄되어 손가락까지 떨어지고 손뼈만 뭉툭하게 남았다.
하지만 빛은 남았다.
여전히 마력은 빛을 발하고 있었다.
내 초월적인 집중력이, 명징 상태가 강제로 마력체를 유지시켰다.
그리하여 꿰뚫고야 만다.
뭉툭한 손이, 마치 해골 단검처럼 변해버린 손뼈가.
박대엽을.
그 심장을 관통하고 등 뒤로 빠져나온 것.
여전히 손뼈에 머무르는 빛무리.
아니, 검의 형상.
박대엽이 왈칵 피를 토했다.
"허······"
도저히 믿어지지 않는다는 얼굴로 나를 쳐다보는 박대엽.
나는 돌연변이를 유지하고 있다.
그래서 괴물처럼 보이는 나를 향해 박대엽이 띄엄띄엄 입을 열었다.
"이건······ 뭐지?"
"스가이다(섬광이다)."
잘 돌아가지 않는 혀를 겨우 굴려 말해주자 박대엽이 허탈한 표정을 짓는다.
"섬광, 섬광이라고?"
고개를 들어 하늘을 바라보는 박대엽.
마력이 흩어지고 있었다.
그와 함께 결집하고 있었다.
내가 꿰뚫은 등 뒤로 마력 회로가 번지고 그 회로 끝에서 새로운 회로가 새겨지고 있었다.
허공에, 존재할 수 없는 곳에, 원래는 체내에 각인되었어야 할 마력 회로를 무가치하게 풀어놓는다.
박대엽이 웃었다.
흐릿하게, 허허로우면서도 허무한 미소를 흘려보냈다.
"이제야, 이제야 도달했는데······"
내 섬광을 보고 깨달음을 얻은 것일까.
인생 최후의 시점에 5레벨을 밟은 박대엽.
그러나 무의미하다.
섬광에 의해 마력 회로가 으깨졌고, 새로운 마력 회로는 허무하게 흩어지고 말았으니까.
"최소한 유성······ 유성검이라고 해주게······"
박대엽이 마지막으로 남긴 말이었다.
이재열 -1-
이재열
후유증이 몰려온다.
"끄윽, 꺽!"
나는 바닥을 긁어대며 침을 흘렸다.
조금 전만 해도 붉게 보이던 세상.
지금은 어둠에 잠긴 듯하다.
깜깜하니 흐릿한 윤곽밖에 보이지 않고, 땅이 출렁출렁 춤을 추면서 날 넘어뜨리려 하고 있었다.
시간이 얼마 없다.
기다시피 바닥을 벅벅 더듬어 출입구로 향했다.
우연처럼, 손에 발에 성검과 마총이 걸렸다.
성검과 마총은 중요하지.
한 팔로 끌어안고서 겨우 출입구에 도착했다.
"쿨럭!"
피를 토한다.
귓가에 찌잉- 하는 이명이 울리더니 소리가 딱 끊어진다.
적막이 포식자처럼 나를 집어삼켰다.
온몸이 불타는 것 같다.
신열 디버프에 다시 걸리기라도 한 느낌.
숨 한 번 들이마시고 계단 아래로 몸을 던졌다.
우당탕탕!
계단 수십 개를 굴렀으나 아무 느낌이 없다.
촉각마저 차단되고 있었다.
광분의 후유증.
그나마 돌연변이를 유지하고 있어 버티고는 있으나 오래 가진 않을 것이다.
후유증이 100% 찾아온다면, 그래서 한 조각 남은 이성마저 잡아먹힌다면······
끝이다.
육체는 살아남을지언정 정신은 죽어서 한 마리 괴물이, 완벽한 변이체가 되고 말 것이다.
"으아아!"
혀를 짓씹는다.
무의식적으로 성검을 가슴에다가 대고 마구 그었다.
얼음장처럼 차가운 통증이 심장 쪼개듯 낙인 찍힌다.
"흐억, 허억."
원래는 소유주를 강화하고 보호하는 성검.
그러나 삿된 존재를 물리치는 광격 능력도 있다.
그 광격 능력이 나를 향해 발현되고 있었다.
상처 난 곳에서 하얗고 예리한 빛이 번뜩인다.
원래는 따사로웠어야 할 빛이 날 적대하는 것.
오히려 좋았다.
그 싸늘하고 위압적인 빛 덕에 정신이 번쩍 들었으니까.
"후욱, 후욱, 후욱."
계단을 겅중겅중 내려간다.
한달음에 세 개 네 개, 아니 거의 절반씩 쑹덩쑹덩.
무릎이 쑤시고 종아리가 저렸지만 아랑곳하지 않았다. 근육이 해체되어 피가 흐르는 것도 게의치 않았다.
조금이라도 지체했다간 모든 근육이 파열되고 뼈가 쪼개지기 직전이니까!
벌컥!
문을 열었다.
지하 비밀 공간으로 통하는 문이다.
다리가 부러진 듯 아픈 것을 무시하며 좁은 문으로 비대한 몸을 쑤셔 넣었다.
"허억, 허억."
미리 준비해 놓은 상급 성수를 마셨다.
그러나 부족하다.
택도 없이 모자라다.
어떻게든 특성을 교체하고 마법 욕조에 몸을 던지는 것을 끝으로 의식이 끊어지고 말았다.
·········
·········
침잠해 있던 의식이 부상한 것은 한참이나 지난 다음.
바깥이 묘하게 시끌시끌했다.
"허······ 미쳤네, 미쳤어."
"이걸 다 혼자 해치웠다고?"
"단검파 때 알아봤지만 보통이 아냐."
"분명히 처음에 봤을 때는 1레벨 아니었어?"
"이건 최소한 4레벨인데······"
"깝치면 안 되겠다."
나는 눈만 굴려 상황을 확인했다.
마법 욕조 안.
모로 누운 채 쓰러져 있다.
그나마 제대로 들어오지도 못했다. 상반신만 겨우 담갔고 다리 한 짝은 아예 밖에 나가 있었다.
다행인 점은 머리를 처박지는 않았다는 것.
살짝 모로 돌린 채 쓰러져서, 코와 입은 수면 위에 나와 겨우 숨을 쉬는 중이다.
'으으으.'
신음을 흘리려고 했으나 목소리도 안 나왔다.
손가락도 까딱하지 않는다.
아니, 마음을 먹는 순간 격한 고통이 머리부터 발끝까지 관통하는 바람에 비명을 삼켜야 했다.
고통에 몸을 떨면서도 속으로 크게 안도했다.
'살았다······'
격한 안도감이 강물처럼 밀려왔다.
살았다. 살아남았다.
눈만 굴려서 몸을 확인했다.
평범한 사람 몸이다. 변이체의 흉물스러운 육체가 아니다.
도박이 성공한 것.
대신에 어마어마한 후유증이 덮쳐오고는 있으나 뱃속의 성수 기운과 마력천 물의 힘이 천천히 치유하는 중이다.
"흐으, 흐흐흐."
소리를 죽여 웃었다.
사실 쩌렁쩌렁 웃고 싶었는데 그게 안 됐다.
목 놓아 웃은 게 숨소리 정도밖에 안 되는, 고작해야 20 데시벨 나뭇잎 부딪히는 소리 정도였다.
하지만 통쾌했다.
이보다 유쾌할 수가 없었다.
뒤늦게 찾아온 승리감이 날 훨훨 날아가게 했다.
날개를 펴고 비상하면 이럴까?
드높은 점프대에서 번지 점프를 하면 혹시 비슷할까?
드넓은 해방감이 가슴을 상쾌하게 만들고 성취감에 머리가 펄펄 끓어오를 지경이었다.
한참을 히죽대며 웃다가 겨우 진정했다.
가장 먼저 한 것은 특성 교체.
[재생][상처 회복][활기]
[정화][에인헤랴르 연공법][마력 회복]
아까는 간신히 돌연변이 특성만 치워서 보다 최적화한 것.
여기까지 하고 나는 뭔가 이상한 것을 느꼈다.
신체 회복에 모든 방점을 찍었는데, 어째 내가 예상한 것보다 몸이 더 무거운 느낌.
하나를 빠뜨린 것 같다는 직감.
'어? 혹시?'
짚이는 것이 있었다.
새로운 특성을 불러온다.
[소생]
재생과 비슷하지만 부상 정도가 크면 클수록 효과가 좋아지고 가벼운 상처에는 회복력이 떨어지는 특성.
내가 거의 죽었다가 살아난 게 벌써 몇 번째냐.
당연히 획득 조건이 된다.
나는 정화를 몇 번이나 사용한 다음 치우고 소생을 빈자리에 넣었다.
그러면서 속으로 차분히 셈해본다.
'불사까지 몇 개 남았지?'
신체 회복 특성 중 명실상부한 1티어.
아울러 전사 계열 초인만 획득할 수 있는 계열 특성.
기본 요구 특성은 재생이며, 신체 회복 특성 중 다섯 개를 추가로 모아 합성하거나 굉장히 특수한 퀘스트를 성공해야만 얻을 수 있다.
아니면 돈을 들이부어서 불사를 고유 특성으로 가진 캐릭터를 뽑아 전승받거나, 불사 기억칩을 뽑거나.
'상처 회복, 활기, 소생은 있고고. 치유는 장비 숙련으로 먹으면······ 하나만 더 있으면 되네?'
불사만이 아니다.
거인의 힘, 금강체, 불굴, 실전 격투, 검 전문가, 총잡이 등 전사 계열 1티어 특성들이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와, 진짜 백지 신체랑 특성 전환이 사기는 사기구나.
김전사 키우면서 1티어 특성 하나 물려주려면 뺑뺑이를 죽어라 돌았어야 했는데.
"초인님! 초인님! 어디 계십니까!"
"초인님!"
밖에서 나를 부르는 소리가 들린다.
나는 이를 악물고 손가락을 꿈틀거렸다.
가위눌린 것처럼 손가락 하나 움직이기가 힘들다.
몇 번이나 심호흡하고, 젖먹던 힘을 짜낸 다음에야 손가락을 까딱할 수 있었다.
그러자 거짓말처럼 마비가 풀렸다.
아프고 쓰린 몸을 겨우 뒤집으며 욕조에 몸을 묻었다.
풍덩!
물소리와 함께 몸이 온전히 욕조 안으로 들어온다.
마력천 물이 전신을 포근하게 감쌌다.
비로소 청량한 기운이 온전히 체내로 투사된다.
떨그렁!
왼팔로 성검을 잡아당기고 마총은 욕조 밖에 떨어뜨렸다.
장갑 역시 마찬가지다.
그나마 온전한 왼손을, 이 미친 장갑이 여전히 피를 빨아먹고 있었다.
오른손은 처참하게 망가져 쓸 수 없었다.
입으로 물고 잡아당겨 던지자 겨우 머릿속이 맑아져 생각다운 생각을 하게 된다.
"초인님······ 으헉!"
"왜 그래? 어······ 이힉!"
"초, 초인님! 괜찮으십니까!"
이제야 철권파 갱단원들이 나를 발견했다.
산전수전 다 겪은 그들의 얼굴이 충격과 공포로 기괴하게 변한다.
나는 오른손은 마력천 물에 담그고, 왼손만 들어 살살 흔들어 주었다.
"여어."
"그······ 야, 119 불러!"
"119? 미쳤어? 짭새들 좋다고 쫓아오겠다!"
"그럼 129라도 불러야지!"
"초인님! 얼른 병원 가셔야 합니다!"
"아, 괜찮아. 괜찮아. 이건 좀 쉬면 나아."
"쉬면 낫는다니요! 지금이라도 가시면 됩니다! 공식 병원은 못 가도, 돈 좀 발라주면 신체 재생해줄 의사놈은 쌔고 쌨어요!"
갈 필요 없다니까 그러네.
재생에 소생, 상처 회복에 치유까지 있다.
지금도 내 목걸이가 반짝반짝 열일 중이라고.
이러면 시간은 걸려도 다 회복된다.
아주 작살이 난 손은 물론 잘린 손가락까지 완벽하게.
"허······"
소식을 듣고 급히 들어온 김철권과 최 소장.
김철권은 말을 잃고, 최 소장이 턱을 툭 떨어뜨린다.
"초인님······ 초인님? 이게 대체 어떻게 된 일입니까?"
최 소장이 벌벌 떨며 다가왔다.
거의 무릎 꿇고 대성통곡하려는 모습.
왼손을 들어 급히 제지했다.
"청소부 협회를 저 혼자 통으로 갈아 마셨는데 이 정도면 싸죠."
"하지만, 하지만······ 이건 너무 심하지 않습니까······"
도대체 어떻길래 그래?
그제야 시선을 내려 내 몸을 차분히 확인했다.
오른손이 묵사발이 난 건 더 말할 필요도 없지.
다른 곳이라고 멀쩡할 리가 없다.
괴상하게 뒤틀린 왼팔.
검상이 열 개도 넘게 그어진 가슴.
시퍼렇게 멍이 들고 내출혈로 배불뚝이가 된 아랫배.
언제 부러졌는지 뼈가 피부를 뚫고 나온 오른쪽 정강이.
수면에 비친 얼굴이 결정타였다.
얼굴 전체가 화상을 입어 피부가 잔뜩 뭉그러졌다.
입술은 뜯어져 치아가 다 노출되고 코와 귀는 흔적만 남아 있었다.
공포 영화에 나올 법한 괴물 같은 모양새.
나는 기괴한 입을, 치아만 남은 입을 움직여 미소를 지었다.
"이 정도면 싸죠. 죽는 것보단 훨씬 낫잖습니까?"
아까 했던 말의 반복.
진심이었다.
복구할 수 있는 피해이기도 하고.
그런 나를 최 소장이 탄복했다는 눈으로 쳐다본다.
"초인님은······ 정말이지······"
김철권은 냉정을 되찾았다.
내 몸을 샅샅이 훑어보고는 묻는다.
"재생 중이시네요. 혹시 자력 회복이 가능하십니까?"
"가능합니다."
"손도요?"
"예."
"하하하하."
어이가 없다는 듯 웃어버리는 김철권.
"이거 생각보다 거물이셨네요. 그 재능을 가진 분이시니 확실히 다르겠지요."
"예? 사장님? 그 재능이라뇨?"
"그런 게 있습니다."
적당히 최 소장의 말을 끊는 김철권.
내가 몸을 담근 마법 욕조를 의미심장한 눈으로 보다가 묻는다.
"어떻게, 댁까지 모셔다 드릴까요? 초인님 댁에서 물을 더 가져올 수도 있지만 그건 아무래도 불편하실 것 같습니다."
"부탁드립니다."
아무래도 집이 편하다.
곧 철권파 갱단원들이 떼로 들어왔다.
물이 넘치지 않게 덮개를 덮고, 내 물건들을 챙긴 다음 통째로 들어서 커다란 미니밴에 실었다.
덜컹거리는 미니밴에 실린 채 집으로 돌아간다.
마법 욕조를 원래 있던 자리에 옮기고, 내 배를 째서 복강에 고인 피를 빼고, 물을 갈아준 다음에야 모두 자리를 떴다.
딱 한 명.
최 소장만 남고.
"초인님. 정말로 괜찮으시겠습니까?"
차마 발이 떨어지지 않는 모양이다.
최 소장이 마법 욕조 앞에서 이리저리 서성였다.
"괜찮다니까요."
"잠깐 하녀라도 부를까요? 초인님 간병할 사람이 필요한데······"
"정말로 괜찮습니다. 정 마음에 걸리면 고기랑 야채 좀 옆에다 쌓아주고 가세요. 여기 이거 보세요. 벌써 꽤 많이 회복되지 않았습니까?"
최 소장에게 손을 흔들었다.
왼손이 아니라 오른손.
건우봉에 있을 때만 해도 손가락 다 떨어지고 닳은 손뼈만 남아 뭉툭한 뼈 칼처럼 변해 있던 그것.
지금은 혈관과 신경, 근육이 어느 정도 올라와 있었다.
아직은 손가락 하나도 복구되지 않았지만 2주 정도면 다 회복되지 싶다.
최 소장이 끔찍한 형상을 보고 마른침을 삼켰다.
"아까보다는 확실히 좋아지셨네요."
"그렇다니깐요. 가만히 놔두시는 게 절 도와주시는 겁니다."
"그, 그래도 혹시 제가 도와드릴 일 있으면 꼭 말씀해주세요."
"이번에 크게 도움을 받았습니다. 그것만으로도 고맙습니다."
"별말씀을요. 초인님 일인데 제가 당연히 도와야지요."
최 소장은 마법 욕조 옆 탁자에 구운 고기와 신선한 야채, 고열량 음료를 잔뜩 쌓아 놓았다.
그걸로도 모자라 아예 위층에서 냉장고를 가져와 놔둔다.
내가 손만 뻗으면 식자재를 꺼낼 수 있게.
"전 이만 가보겠습니다."
"예, 고생하셨습니다."
"초인님이야말로 고생하셨지요. 세상에, 청소부 협회를 혼자 끝장내시다니······ 내일부터 저희 사무소 전화기에 아주 불이 나게 생겼습니다."
"잘된 일이지요."
"그럼요."
최 소장이 허리를 깊이 숙였다.
"그럼 몸조리 잘하시고, 무슨 일 생기면 꼭 연락주세요."
"예, 살펴 가세요."
드디어 갖는 혼자만의 시간.
성역 신상 덕분에 위험할 일도 없다.
"후우."
마법 욕조에 드러누웠다.
배를 봉합하지 않아 피가 줄줄 흐르는 중이다.
그 덕에 마력천 물이 뻘겋게 물들었다.
콸콸콸.
상관없다.
반쯤 열어놓은 마개를 통해 물이 자동으로 빠져나가고, 틀어놓은 수도로 새로운 마력천 물이 유입되는 중이니까.
여기에 잔뜩 도배한 회복 계열 특성과 목걸이, 끌어안은 성검까지 더해져 몸이 빠르게 회복되었다.
그만큼 열량이 소모된다.
갑자기 배가 고파서 고기와 야채, 음료를 입에다 들이부었다.
그리고 잤다.
깨면 다시 먹었다.
화장실을 갈 때를 제외하면 마법 욕조에서 24시간 생활하다시피 했다.
효과가 상당했다.
빠른 속도로 몸이 회복되고 있었다.
피부는 어느새 다 재생되었고 손가락도 돋아나기 시작했다.
내출혈은 멈췄으며 내상도 치료되었는지 속 쓰림도 꽤 가셨다.
시간도 날짜도 잊었다.
혼수 아닌 혼수상태가 훌쩍 달력을 넘겼다.
게임이었다면 하루 만에 회복되었을 부상.
현실은 달랐다.
스마트폰 기준 정확히 15일이 지난 다음에야 겨우 정상으로 돌아갔다.
"어······"
희한했다.
고개를 드는데 몸이 왜 이렇게 가벼운지 몰랐다.
다시 태어난 기분.
어둑한 지하실이 이상하게도 환해 보이고 공기 속 부유하는 마력이 선명하게 느껴졌다.
특히.
내 몸에 새겨진 새로운 마력 회로가 그랬다.
가닥가닥 몇 줄기 선이 고작이었던 1레벨 2레벨과는 다른, 중심에 마력심을 두고 거미줄처럼 뻗은 복잡한 구성의 마력 회로.
마력 회로에 마력을 불어넣었다.
무의식적으로 한 행동.
그런데 그 여파가 어마어마했다.
푸하악!
물이 폭발한다.
욕조에 차 있던 물이 마력과 반응하면서 사방으로 튄 것.
탁자가 쓰러지고 냉장고도 두들겨 맞아 퍽퍽 소리를 냈다.
그 와중에 수증기가 치솟아 구름처럼 꿈틀거린다.
물속에 폭탄을 넣고 터뜨린 듯한 광경.
이 장면을 보고서야 실감했다.
3레벨 초인이 되었다는 것을.
이재열 -2- [2권 끝]
송파구 신천동.
세 쌍둥이 탑은 여전히 위압감 넘치는 모습으로 서 있다.
나는 택시에서 내려서 초인탑을 한참이나 구경했다.
'들어가야지.'
문득, 골프백이 거추장스럽다는 생각이 들었다.
내팽개치는 대신 골프백을 열어 성검을 꺼냈다.
몇 번 쓰다듬은 다음 허리띠에 찬다.
총기류는 가져오지 않은 탓에 푹 가라앉은 골프백.
골프백은 등에, 성검은 길게 늘어뜨리자 당장 시선이 집중된다.
"엄마. 저기 아저씨 좀 봐!"
"쉿! 손가락질하지 말고."
"저 아저씨는 왜 칼을 갖고 다녀?"
"조용히 하라니까."
이목이 쏟아지고 있었다.
얼굴을 관통할 듯이 쳐다보는 눈길.
나는 오른쪽 호주머니에서 마총까지 꺼내 허리띠에 꽂았다.
무장은 이게 전부.
장갑은 여전히 흡혈 장갑을 끼고 있다.
박대엽의 변형 강철 장갑은 쓰기 힘들었다.
강건 능력이 부여된 건 똑같은데 너무 컸거든.
격투가나 쓸 장갑.
검도 못 쥐고 총도 못 쓸 판국이라 최 소장 통해서 팔아 버렸다.
에보니와 바이퍼, 부회장의 시체도 판 덕에 전쟁을 치르느라 쓴 돈을 벌충하고도 남아 나는 수십억대 자산가가 되었다.
사람들이 본격적으로 수군거리며 나에게서 멀어진다.
이제 나를 주시하는 건 딱 두 명.
초인탑 앞에 장승처럼 서 있던 경비원들.
"아!"
경비원 한 명이 탄성을 질렀다.
"저기, 지난달에 오셨던 분 아닙니까?"
"맞습니다."
"잠깐만요. 지난달에는 1레벨이셨던 걸로 기억하는데, 그새 3레벨이 되셨다고요?"
공개 무장은 3레벨 이상 초인의 특권.
경비원이 입을 벌리더니 이내 머리를 끄덕였다.
"과연 옛 어버이 교단은 대단합니다. 갓 1레벨이 된 초인을 한 달 만에 3레벨로 만들다니요."
정확히 말하면 한 달 하고 조금 더 걸렸지만 우수리는 떼도록 하자.
나는 천천히 고개를 저었다.
"아뇨. 전 성기사가 되지 않았습니다."
"예? 하지만 초인님 무기가······"
"제가 정식으로 세례를 받았으면 성표라도 하나 들고 다녔겠지요. 옷도 이런 거 안 입고요."
"아하."
경비원이 내 옷을 보고는 겨우 납득했다.
방호복에 츄리닝 한 벌.
최 소장이 센스 있게 옷장을 채워놓지 않았으면 다 낡아빠진 셔츠에 청바지 입고 올 뻔했지.
만약 내가 옛 아버지 교단 성기사가 됐다면 판금 갑옷, 최소한 축성 받은 사슬 갑옷을 입고 왔을 것이다.
신성력은 금속에 특히 잘 반응하니까.
"수고하세요."
초인탑 안으로 들어간다.
회전문이 열리고 탁 트인 내부가 나를 맞이했다.
두 번째 보지만 여전히 신기한 정경.
기둥 하나 없이 마력이 건물을 떠받치고 있다.
보이는 것이라곤 축구장을 연상시키는 거대한 광장이다.
'엄청나네.'
3레벨이 되어서일까?
전과는 다른 장면을 함께 볼 수 있었다.
모자이크 화(畵)처럼 도도히 어우러져 흐르는 마력 흐름을.
그 우아하면서도 정교하고 아름다운 선율을.
허공에 마법진을 슥슥 문대어 그린 듯한 모습.
아울러 무형 마법진이 내 마법 회로와 반응하여 기이한 울림을 전달한다.
저절로 마력이 차분히 가라앉고 심신이 이완된다.
더 대단한 것은 마법진이 상층으로 갈수록 집중된다는 것.
2층으로, 3층으로, 혹시 최상층으로 가면 도대체 어떤 느낌을 받을까?
모르긴 몰라도 그 안에 앉아 있는 것만으로도 법열에 가까운 쾌감을 얻을 것이다.
"와하하하!"
"축하한다, 축하해!"
"동기 중에선 자네가 1등이야!"
안쪽이 시끄러웠다.
갑옷 입은 남자들이 마력 회로 측정 장치 주변에 잔뜩 몰려 있었다.
모두 똑같은 갑옷을 입었다.
까만 쇠사슬 갑옷.
등에 걸친 망토도 까만 색이고, 금색 줄을 쭉쭉 그어놓았다.
흑금 교단 성전사의 복장.
무기는 보이지 않는다.
아마도 2레벨이라 무장하지 않았겠지.
딱 두 명.
쇠사슬 갑옷이 아닌 판금 갑옷을 입은 성기사와 동료들에게 머리와 등을 얻어맞으며 축하 받는 한 명을 빼면.
무장한 성전사가 밝게 웃었다.
"고마워. 모두 고마워! 오늘은 내가 한 턱 쏠게!"
성기사가 못 마땅하다는 듯 눈살을 찌푸린다.
"이 단원. 자네는 성기사가 되고 싶다고 하지 않았나? 성기사가 되려면 일체 세속의 쾌락을 멀리하고 옛 아버지께 영혼과 정신, 육체를 모두 바쳐야 하네. 3레벨이 되어 기쁜 것은 알겠지만 더 정진해야 하네."
"아휴, 대장님. 그래도 오늘 하루는 괜찮지 않습니까? 드디어 3레벨로 인증받는 건데요! 중학생 때부터 오늘만 기다렸단 말입니다!"
"후우. 오늘만일세."
구레나룻과 수염을 풍성하게 기른 남자.
전형적인 한국인이라 그렇지 백인 혼혈이라도 됐으면 중세 유럽 영화에서 튀어나온 줄 알았겠다.
'얼굴이 익숙해.'
어디서 봤더라?
하나밖에 없지.
모바일 게임, 아케인 서울.
내가 성기사를 주시하며 기억을 더듬을 때였다.
시선을 느꼈는지 성기사도 나를 돌아보았다.
잠시 후, 성기사가 의외라는 듯 눈 하나를 치켜뜬다.
"반갑습니다. 성녀님께서 세례하신 분이 아닙니까?"
성기사가 가까이 다가와 스스럼없이 손을 내민다.
고급스러운 양식의 강철 장갑.
손등에 새겨진 사자 조각.
그걸 보고서야 정체를 깨달았다.
"저는 오두식이라고 합니다."
"반갑습니다. 김전사입니다."
그래, 그런 이름이었지.
사자 기사 오두식.
게임에서는 5레벨 던전 보스였다.
그런데 지금 보니 게임에서의 모습과는 약간 달랐다.
조금 덜 화려하고, 덜 고급스러운 차림이라고 할까?
'4레벨이구나.'
옛 아버지 교단 기준으로는 상급 기사.
아직 기사단장급은 아니다.
성전사들 틈에 섞여 있는 것을 보면 성전사 부대를 이끌고 있는 모양.
"저기, 대장님?"
유일하게 무장한 성전사가 오두식을 불렀다.
"불신자와 말을 섞으시다니요. 대장님답지 않으십니다."
"불신자라고 꼭 무시해야 하는 건 아니다."
오두식은 날 눈여겨보며 말했다.
날카로운 눈이 내 주위 공간을, 아무것도 없는 공간을 샅샅이 훑고 있었다.
"세례받은 지 한 달 만에 옛 아버지의 축복을 거절한 자에게는 더더욱 그렇지."
"예?"
"그게 무슨······"
넥타르를 마신 후, 나는 흑염 특성을 항상 켜놓고 다녔다.
지금은 아니다.
3레벨이 되었다면 신열을 극복한 것이 자연스러우니까.
오두식도 바로 그걸 지적하고 있었다.
"신열을······ 극복했다고?"
무장한 성전사가 목이 멘 듯이 중얼거린다.
그러더니 나를 콱 노려보았다.
그 눈 깊숙이 가라앉은 적의.
열등감. 분노. 질시.
온갖 부정적인 감정이 휘몰아치는 바람에 내가 오히려 당황스러웠다.
저 새끼 왜 저래?
"이 단원. 아직도 미망을 떨치지 못했나?"
"죄, 죄송합니다."
오두식이 지적하자 고개를 팍 숙인다.
하지만 나는 느낄 수 있었다.
나를 향한 뚜렷한 적의를.
아, 설마······
저 성전사도 강제로 세례받고 입교한 것일까?
서우진처럼?
그럼 말이 되지. 자기는 성전사가 되어 바닥부터 박박 닦고 있는데 나는 신열을 극복하고 잘 나가고 있으면.
원망할 상대를 잘못 찾아도 한참 잘못 찾았지만, 사람은 애초에 그리 합리적인 동물이 아니다.
"이 단원. 시작하지. 저분도 초인 인증 받으러 온 것 같으니 비켜드려야 하지 않겠나."
"예, 대장님."
성전사가 크게 심호흡하고는 인증 장치 앞에 섰다.
이내 손을 가져다 대자 번쩍하고 불꽃이 튀었다.
반딧불 같은 불꽃이 빛의 기둥을 넘어 사방으로 질주한다.
빛의 파도 사이에서 글자가 꿈틀거린다.
[이재열]
[남자]
[25세]
[전사 계열]
[3 레벨]
[2중 회로]
옆에 서 있던 직원, 백소린이 화사하게 미소 지었다.
"축하드립니다. 이재열 초인님! 드디어 진정한 초인이 되셨네요! 3층 라운지로 안내해드릴까요?"
"흥. 필요 없어."
이재열이 매몰차게 몸을 돌렸다.
백소린의 얼굴에 부르르, 경련이 일어났지만 애써 웃으며 넘겼다.
"오오, 이재열! 오오!"
"천재 성전사 이재열!"
"아버님도 뭐라고 못하시겠어!"
"가서 당당하게 말하라고! 오늘부터 옛 아버지 교단의 성기사라고!"
"암암! 자기 것을 동생한테 빼앗기면 안 되지! 쟁취하라고! 쟁취!"
"쟁취! 투쟁!"
탕탕탕!
성전사들이 요란하게 축포를 터뜨렸다.
커다란 가방에 넣어온 흑금 소총을 꺼내 허공에 갈긴 것.
총소리를 들으니 공포탄이었지만 민폐가 따로 없었다.
바로 앞에 서 있는 백소린의 눈썹이 파닥파닥 떨리고, 오두식이 혀를 차도 아랑곳하지 않았다.
"이 망나니들 같으니······ 미안합니다. 응석받이로 자란 놈들이라 좀 시끄럽습니다."
"아닙니다. 그럴 수도 있죠. 3레벨이 됐으니 축하할 일 아닙니까."
오두식 이 인간 진짜 특이하네.
하긴 게임 설정에서도 그랬다.
옛 아버지 교단의 몇 안 되는 개념인이라고.
한 가지 약점만 빼면.
광신도라는 것.
평소에는 점잖고 성기사다운 인간이 옛 아버지나 성녀만 얽히면 이성이 깨끗이 날아간다고 했지.
소총을 허공에 갈기는 성전사들.
이재열이 그 안에서 환희를 만끽하다가 날 힐끔 본다.
희미한 우월감과 승리감이 얼굴에 어려 있었다.
3레벨 된 게, 성기사 자격을 얻은 게 그리도 자랑스러울까?
이중 회로, 즉 N급 주제에.
김전사도 N급이지만 지금의 나는 다르다.
여전히 방방 뛰고 있는 성전사들을 지나쳤다.
마력 회로 측정 장치에 다가간다.
옆에 서 있던 백소린이 나를 알아보았다.
"어? 김전사 초인님 아니세요?"
"저 알아보시겠습니까?"
"그럼요. 그때 워낙에 인상이 깊어서요. 그런데······"
백소린이 조심스럽게 나를 살펴본다.
텅 빈 내 주위 공간과 허리에 찬 성검, 마총을 보고는 눈을 동그랗게 떴다.
"설마 레벨 올리신 거예요? 3레벨로? 2레벨은 인증받으신 적이 없잖아요!"
"어쩌다 보니 그렇게 됐습니다."
"세상에, 세상에······ 정말로 대단하세요. 신열을 극복하시다니······ 역사서에나 나오는 이야기잖아요! 사제님이나 주교님도 아니고, 성녀님이 직접 세례하셨는데요!"
"운이 좋았죠."
"운이 좋기는요! 초인님 나중에 나라 하나 세우시는 거 아니에요? 그, 이성계도 신열 극복하고 초인 된 걸로 유명했었잖아요! 삼국지에 여포도 그랬고요!"
맞아. 그런 설정이었지.
신열을 극복했다는 건 그런 의미다.
초월적인 의지의 증거.
운이 따랐든 다른 신의 가호가 있었든 마찬가지.
신열을 극복한 초인은 반드시 고레벨 초인이 된다는 사실을 이 세상의 역사가 증명했다.
"측정 장치는 준비 끝났어요! 지금 바로 측정하실 거죠?"
"예. 부탁드립니다."
"시작하셔도 돼요."
빛의 기둥에 손을 가져갔다.
기둥 전체가 웅웅거리며 떨고, 조금 전 이재열과 똑같은 현상이 벌어졌다.
불빛이 너울너울 춤추다가 글자판을 형성했다.
[김전사]
[남자]
[22세]
[전사 계열]
[3 레벨]
[6중 회로]
예상했던 그대로, 3레벨.
나는 시위하듯이 흑염을 길게 뽑았다.
공작새 꽁지깃처럼 펼쳤다가 흑룡처럼 주변에 대고 휘두르자 사방에서 웅성거리기 시작했다.
특히 성전사들의 얼굴이 가관이었다.
흑염은 옛 아버지 교단에서도 주교급 이상 고위 성직자들이나 쓰는 것.
기사단장 중에는 검에 묻혀 쓰는 자도 있으나 나처럼 자유자재로 쓰는 인간은 거의 없었다.
오두식 혼자 경탄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실로 대단합니다. 지금이라도 마음을 돌릴 생각은 없습니까? 초인님께서 우리 교단에 입교하신다면 총기사단장이나 총군단장은 물론 사도 직위에 오를지도 모릅니다. 그 흑염을 보니 알겠습니다. 옛 아버지의 은총이 이미 초인님에게 머물러 있다는 사실을요."
미쳤냐?
몇 년만 지나도 망할 교단에 들어가게?
내 대답은 항상 똑같다.
"죄송하지만 저는 자유가 좋습니다."
"그렇습니까······"
못내 아쉬워하는 오두식.
반면 성전사들은 다행이라는 기색이다.
몰래 가슴을 쓸어내리는가 하면 내게 질투와 시기 섞인 눈빛을 보낸다.
오두식이 마지막으로 나와 악수를 나눴다.
"저는 이만 가봐야겠습니다. 초인님께 옛 아버지의 축복과 은총이 영원하기를 빌지요."
"뭐······ 좋은 뜻으로 받아들이겠습니다. 조심히 가세요."
그제야 사라지는 성전사 무리.
초인탑을 나가면서도 이재열이 내게 눈을 부라린다.
저 새끼 진짜 나한테 왜 저러지?
하지만 하나도 안 무섭다.
코웃음을 치며 잊어버리려는 찰나 백소린이 걱정스러운 눈빛을 보냈다.
"초인님. 괜찮으시겠어요?"
"왜요?"
"저분이요······"
백소린이 막 회전문을 빠져나가는 이재열을 쳐다본다.
"저 성전사님 아버지가 승천보안 사장님이세요."
언젠가 말했지.
이 세상 대한민국은 4대 세력이 꽉 잡고 있다고.
군단, 재벌, 마탑, 교단.
이 안에 5대 재벌이 존재한다.
신화, 금오, 유일, 명성, 승천.
승천 그룹은 5대 재벌 중에서는 말석이지만 절대 무시할 수 없다.
부와 권력의 집중이 극도로 심한 이 세상에서는 더더욱.
"이야. 금수저였네요."
"네······ 초인님도 아시겠지만 재벌한테 밉보이면 안 돼요."
"괜찮습니다."
"하지만요, 초인님······"
"계열사 사장 아들이지 진짜 재벌도 아니지 않습니까. 고작 사장 아들한테 겁먹을 정도로 약하지 않습니다."
승천보안 사장?
그래서 뭐?
성전사들끼리 하는 말을 들어보면 내부 사정이 복잡한 것 같다.
자기 것을 동생한테 빼앗기지 말라고 했었지.
서우진의 경우를 생각하면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알 만하다.
내부 상속 문제가 있겠지.
내가 승천보안 사장이라도 이재열한테는 안 준다. 가업을 다 뺏길 일 있어?
여차하면 승천그룹 본사에서 힘을 쓸 수도 있고.
"하아."
백소린이 짧게 한숨을 쉬었다.
"초인님이 부러워요."
"뭐가요?"
"그냥요. 이것저것 다. 저도 초인님처럼 강한 사람이었으면 얼마나 좋을까요."
조금은 우울해 보이는 백소린.
사슴 같은 눈망울이 스마트폰 속 화면과 겹쳐진다.
항상 자신감 넘치는 미소를 짓고 있던 화면 속 그녀, 백소린.
얼굴 위에는 항상 [SSR] 무지갯빛 글자가 떠 있었지.
그래서였을까.
충동적으로 한마디를 내뱉고야 말았다.
"백소린 씨. 초인이 되고 싶습니까?"
"네? 그야 당연히 되고 싶죠. 초인 되기 싫은 사람이 어디 있어요?"
"그럼 제 제자가 되시죠."
"네?"
"백소린 씨가 원하신다면, 제가 백소린 씨를 초인으로 만들어 드리겠습니다."
백소린이 나를 빤히 쳐다본다.
명백히 불신에 찬 태도.
하지만 나는 안다.
아케인 서울 출시 때만 해도 캐릭터 목록에 없던 백소린.
무슨 에피소드에서 등장하고 어떤 과정을 거쳐 SSR 전사 계열 초인으로 각성하는지.
어떻게 해야 현재 시점에서 초인으로 각성시킬 수 있는지도.
이를테면 확정 SSR 뽑기권이다.
이걸 뽑지 않아야 할 이유가 있나?
백소린의 눈.
수많은 감정이 우스스 떠올랐다가 사라진다.
의심과 의혹과 의문이 부유하는 가운데 흐릿한 희망과 조그만 기대, 미약한 신뢰가 꺼질 듯이 깜빡인다.
나는 담담한 얼굴로 그런 백소린을 마주 보았다.
괜한 말 늘어놓지 않았다.
그저 진심을 눈에 실어 보낼 뿐.
"후우!"
기나긴 침묵 끝에 백소린이 짧게 숨을 내쉬었다.
"좋아요. 할게요."
전사 계열 3대장 중 하나.
천살성 백소린이 내 손에 들어오는 순간이었다.
[2권 끝]
내기 -1-
내기
초인탑 3층 투명 라운지.
마법적으로 벽과 바닥을 처리한 덕에 공중에 둥둥 떠 있는 듯한 느낌이 일품이다.
'맛이 괜찮네.'
캐비어 카나페 하나를 또 입에 가져갔다.
부드러우면서 고소하고, 한편으로는 짭짤한 맛이 혀를 풍성하게 만들었다.
술 한잔 하면 참 좋겠지만 참았다.
중요한 일할 때는 술을 마시는 게 아니다.
예전에 멋모르고 술 먹고 계약서에 도장 찍은 후, 나는 술과 사람을 극도로 경계하게 되었다.
대신 아이스 아메리카노를 숭늉처럼 들이킨다.
옆에서 백소린도 내 눈치를 보다가 카푸치노를 입에 가져갔다.
"초인님, 저 같은 게 여기 올라와도 될까요?"
"소린 씨가 뭐가 어때서요?"
"하지만 여긴 3레벨 이상 초인분들과 동반자들만 올라오실 수가 있어요."
"지금은 소린 씨가 제 동반자입니다."
"초인님······"
"그리고 지금부터는 초인님 말고 선생님이라고 부르세요."
"네. 선생님."
시선이 느껴진다.
3층 라운지의 직원들이 오고 가며 힐끔거리고 있었다.
특히 백소린을.
시기 질투가 올올이 묻어나오는 시선.
아무리 친절한 미소를 짓고 있어도 감정을 숨길 수는 없다.
"저 불여시 같은 년."
"얌전한 고양이 부뚜막 먼저 올라간다더니······"
"초인님들한테 꼬리 칠 때 알아봤지."
"이미 사표 냈다는데?"
"흥. 21세기 기생이 따로 없네."
라운지 안쪽, 직원실에서 자기들끼리 속닥거리고 있으나 내 귀를 피할 수는 없다.
뭔 소리를 하나 싶어 민감 특성을 쓰고 있었거든.
나는 백소린을 제자로 받아들였지만 노리개로 쓸 거라고 생각한 모양.
백소린도 비슷하게 생각했는지 긴장을 감추지 못하고 있었다.
캐비어 카나페를 하나 더 먹고 백소린을 불렀다.
"소린 씨."
"네! 네!"
"혹시 예전에 초인 수업을 받은 적이 있습니까?"
"있긴 한데 모두 실패했어요."
"어떤 수업을 받았죠?"
"어······ 마력 연공법이랑 마력 감응이요. 강화병은 신체 개조해야 한다는 게 마음에 걸려서 포기했어요."
마력 감응은 마법사의 훈련법.
즉, 전사와 마법사에 도전하고 실패했다는 얘기다.
"세례는요?"
"해보려고 했는데 찾아갔던 사제님이 좀······ 과한 걸 요구하셔서······"
무슨 소린지 알겠다.
이 막장 세계에서 초인 각성을 대가로 성 상납을 요구하는 건 이야깃거리도 못 되니까.
백소린이 앉은 채 자기 무릎을 꼭 쥔다.
손에 얼마나 힘을 줬는지 두 손이 하얗게 변해 있다.
"저, 선생님께는 수업료를 얼마나 드려야 할까요? 제가 정말로 가진 게 없는데······"
"후불로 하죠."
"후불이요?"
"네. 초인 각성을 한 다음에, 최소한 3레벨 아니지, 5레벨이 된 다음에요."
"5레벨이요?"
백소린이 눈을 크게 뜬다.
"전 재능이 없는걸요······ 마력 감응도 마력 연공도 다 실패했어요. 무예 사부님은 도저히 재능이 없어서 평생 정진해도 1레벨 되기도 힘들 거라고 하셨다고요. 그런데 5레벨, 아니, 3레벨이 가능할까요?"
"가능하지요."
나는 천천히 머리를 끄덕였다.
이어 얼굴을 굳히고 진중한 목소리로 말했다.
"제가 장담합니다. 백소린 씨는 분명히 5레벨을 넘어 7레벨, 9레벨로 성장할 겁니다. 그래서 초인계 역사를 다시 쓸 겁니다."
"네에?"
백소린이 자길 놀리냐는 표정을 짓는다.
괜히 주변을 서성이던 직원들이 필사적으로 웃음을 참는 게 보였다.
"1레벨도 불가능하다고 그랬는데 9레벨이요? 장난치지 마세요. 저 진짜 진지해요."
"진심입니다. 어차피 말로는 납득이 안 되겠죠. 최대한 빨리 수업을 시작하도록 합시다. 그 전에, 마력 연공 훈련을 했다고 했는데 정식으로 연공법을 배운 겁니까?"
"네. 부모님께서 무리하셨어요. 연금까지 털어서 사부님을 초빙해 오셨는데 그분께 삼재신공을 가르쳐 주셨죠."
삼재신공, 즉 삼재심법.
최하급 마력 연공법이지만 마력 폭주 위험성은 없다. 그래서 돈 없고 인맥 없는 사람들이 전사 입문용으로 많이 사곤 했다.
싸다고는 해도 수억은 가뿐히 넘지만 못 살 돈은 아니니까.
나는 다 알면서도 모르는 척 물었다.
"삼재심법이라······ 훈련하면서 마력 못 느꼈죠?"
"네······"
"그것 말고 검법이나 다른 무예는 안 배웠습니까?"
"안 가르쳐주셨어요. 최소한 삼재신공을 익혀서 마력을 각성해야 뭐가 된다고 되신다고요. 힘들여서 마력 인도도 해주셨는데 제가 부족해서······"
"알겠습니다."
들어보니 교육 방법에 문제가 있었다.
저레벨 초인이 자기 마력을 주입해서 마력 인도로 마력 혈맥을 짚어준 건 대단한 일이 맞다.
엄청나게 많은 심력과 체력을 소모했겠지.
문제는 그런 방법으로 천살성을 깨울 수가 없다는 점.
'천살성을 깨우는 건 실전이지.'
백소린이 천살성이 아닌 천재였다면 마력 인도가 아니라 설명 한 번 듣고 삼재심법을 깨우쳤을 것이다.
그러나 백소린은 천재가 아닌 천살성.
천살성에게는 천살성에 맞는 교육 방법이 있었다.
'천살성, 불굴, 폭주 기관차, 구사일생'
백소린의 시작 특성.
내 눈치를 보는 백소린을 보면 지금은 전부 없다고 봐야 한다.
당장 불굴 특성만 있어도 저런 표정은 나오지가 않는다고.
천살성 정도는 잠재되어 있겠지만.
'백소린은 에피소드 2 때 함께 업데이트됐지.'
에피소드 2.
좀비 사태.
설정상 백소린은 좀비 사태로 아수라장이 된 쇼핑몰에서 살아남으며 각성한다.
이후 개인 퀘스트를 거치면 특성 하나를 새로 얻지.
'마르스 검투법'
아케인 서울 3대 검법 중 하나.
날카로운 칼라라트리.
굳건한 네피림의 검.
자돌적인 마르스 검투법.
지금 시점에선 아무도 모르지만 쇼핑몰 지하에는 상당한 규모의 금역이 있다.
그곳에 좀비를 넣고 봉인을 푼 게 좀비 사태의 실체.
쇼핑몰만 아니라 서울 곳곳에서 비슷한 일이 벌어졌다.
아직은 준비 중이겠지만, 내가 아무것도 하지 않으면 반드시 벌어질 일이다.
옛 아버지 교단에 의해서.
"그래도 집에 검은 한 자루 있겠네요?"
"네. 공장제 합금 장검 한 자루 있어요."
"잘 됐습니다. 준비되는 대로 연락하지요. 그때 검만 아니, 방호복 적당한 걸로 하나 챙겨 오세요. 방탄 기능은 필요 없고 방검복이면 됩니다. 조끼 형태 말고 전신을 다 보호하는 걸로요."
"언제까지 준비하면 될까요?"
"모르겠습니다. 저도 준비는 해야 해서······ 그래도 최대한 빨리 준비하세요."
영화관, 실내 운동장, 찜질방이 같이 있는 복합 쇼핑몰이다.
지하 주차장 가장 깊은 곳에서 금역과 연결되는데, 아무도 모르게 들어가기란 불가능하다.
누군가 도움을 받긴 받아야 하는데······
최 소장이 처리할 수 있을지 모르겠다.
잠깐 생각에 잠긴 사이.
라운지 직원이 두 손을 모아쥐고 총총 걸어왔다.
"실례합니다, 김전사 초인님. 초인님 앞으로 초대장이 왔습니다."
"초대장이요?"
직원이 공손히 손을 펼쳤다.
마법 파랑새가 사뿐히 날아올랐다.
내 앞에 도달해서는 펑, 하고 터지더니 허공에 초대장을 새긴다.
[오랜만입니다, 선생님.]
[그동안 잘 지내셨는지요?]
[건강하신 모습을 보니 기쁩니다.]
[선생님 덕분에 저는 각성과 인증을 완료하고 충실한 나날을 보내고 있습니다.]
[우연히 초인탑에 방문했는데 선생님을 보게 되어 이렇게 초대장을 남깁니다.]
[숙녀분과 이야기가 끝나셨다면 잠깐 뵐 수 있을까요?]
[초대장에 5층 라운지로 올라올 수 있는 코드를 담았습니다.]
[모쪼록 시간을 내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서우진 올림.]
"엇!"
가만히 보고 있던 백소린이 외마디 소리를 질렀다.
"왜 그래요?"
"서우진! 서우진 님이잖아요! 서우진 님!"
"우진이가 왜요?"
"네?"
백소린이 나를 멀뚱멀뚱 쳐다보았다.
다른 직원들도 충격받은 얼굴.
"우진이가 왜······ 아!"
그쯤 되자 나도 눈치를 챘다.
5층. 5층 라운지라고 그랬다.
6층 라운지가 아니다.
자기 부모님하고 같이 왔다면 6층에서 불렀겠지. 대표 부부 모두 6레벨이니까.
그런데 5층에서 불렀다?
즉, 본인이 5레벨이거나 5레벨 초인과 같이 왔다는 뜻.
그리고 백소린과 라운지 직원들의 반응을 볼 때 추론되는 결론.
서우진이 5레벨이 되었다는 것.
"우진이가 언제 인증받은 겁니까?"
"며칠 안 됐어요. 일주일도 안 됐을걸요. 선생님, 혹시 모르셨어요?"
"몰랐죠. 폐관하고 있어서."
"아······ 그런데 서우진 님이랑은 어떻게 아는 사이세요?"
"그럴 일이 있었습니다."
대단하긴 대단하다.
태어나자마자 받은 벌모세수, 어릴 때 먹어둔 영약, 각성의 순간 대표 부부와 양대검문 원로들의 희생이 있었겠지만 단번에 5레벨이라니.
하긴 그래야 SSR 캐릭터고 에피소드 중간 보스라고 할 만하지.
"올라가죠."
5층으로 직행한다.
내가 일어서서 움직일 필요도 없었다.
앉아 있던 소파 아래 부유 마법진이 활성화된다.
탑 안을 흐르던 마력 흐름 일부가 뻗어와 나와 백소린을 들어 올린다.
4층은 가보지도 못하고 통과.
5층, 탑 안의 또 다른 세계, 아차원 공간에 진입한다.
이건 무슨 구름 위 세상에 올라온 것 같다.
사방이 투명.
드높은 하늘 위, 서울 도심이 고스란히 내려다보인다.
그나마 비슷하게 보이는 것이 쌍둥이 탑 중 나머지 둘.
다른 마천루도 그 꼭대기가 비슷한 눈높이에 머물러 있었다.
"선생님!"
서우진이 만면에 미소를 띠고 다가왔다.
"3레벨 인증 축하드립니다! 와, 아까 그게 흑염이었습니까? 정말 대단하던데요. 흑염을 그렇게 자유자재로 쓰는 건 정말로 처음 봅니다!"
나도 웃으며 서우진과 악수를 나눴다.
"5레벨 인증받으셨나 보죠? 축하합니다. 제가 폐관하느라 소식을 늦게 들었습니다."
"말씀 편하게 해주세요. 제가 비록 지금은 선생님보다 레벨이 높지만, 선생님은 3레벨에서 멈출 분이 아니지 않습니까?"
"하하, 그럴까?"
"그럼요! 선생님께서 절 구해주셨잖아요. 선생님 아니었으면 저 정말로 옛 아버지 교단에 끌려가서 세뇌당하고 마음에도 없는 성기사질 했을 거라고요. 제 인생을 구해주셨는데 드린 게 없어서 정말로 죄송합니다."
"의뢰받고 한 건데 뭘. 나도 많이 얻었어."
"그동안 폐관만 한 건 아니신가 보네요?"
서우진이 내 허리에서 달랑거리는 성검과 마총을 살폈다.
"성검에 마총······ 힘든 조합이지 않나요?"
"잘 쓰면 좋은 조합이야."
"그런데 왜 허리띠에 달고 계세요? 요새 좋은 검총 허리띠가 얼마나 많은데. 아, 그렇지."
서우진이 자기 허리띠를 훌훌 풀었다.
고풍스러운 가죽 허리띠.
표면에는 마법 문자가 새겨져 있고 줄을 지어 색색의 보석이 박혔다.
거기서 검만 분리해서 손에 들고는 허리띠를 내게 내민다.
"선생님. 선물입니다. 3레벨 된 것 축하드립니다."
"이건 너무 과분한데?"
"전혀 과분하지 않습니다. 이런 거 집에 가면 아주 굴러다녀요. 선생님께서 제게 베푼 은혜를 생각하면 아무것도 아니에요."
서우진이 얼른 받으라는 듯 손을 내민다.
잠깐 망설이다가 허리띠를 받았다.
의뢰받고 한 거긴 해도 이 정도는 받을 만하잖아?
서우진은 부잣집 아들내미라고.
쏴아아아.
허리띠를 든 순간.
마력이 칼날처럼 일어섰다.
당연히 통제를 잃어야 정상인데 제멋대로 내달리기는커녕 오히려 결집하며 내 마력심에 결착된다.
너무 쉬웠다.
마력을 다스리기가.
'마력 집중이다!'
분명했다.
[마력 집중] 특성이 허리띠에 담겨 있었다.
그것도 꽤 높은 등급. 아마도 SR.
마법사에게 특히 좋지만 마력에 많이 의존하는 무사에게도 좋은 물건이다.
전사에게는 마력 증폭이 조금 더 좋지만 나쁘지 않다.
마력심 상위 특성을 생각하면 더더욱.
이쯤 되면 겸양으로라도 거절할 수 없다.
나는 서우진의 등을 친근하게 두드렸다.
"정말로 고맙다. 절대 잊지 않을게."
"선생님께서 잘 써주시는 것만으로도 감사한 일입니다."
마력 집중이라니······
고등급 장비인 만큼 장비 숙련은 오래 걸린다.
신원 시장에서 다이아를 꾸준히 사들여서 이식하는 게 현실적이겠지.
"두 분이 진짜 친하신가 봐요."
내 뒤에 서 있던 백소린이 오물거리듯 말했다.
서우진이 주의 깊게 백소린을 살핀다.
"선생님이 아가씨를 데리고 3층 라운지 가는 것까진 봤습니다만, 혹시 어떤 관계이신지요?"
내게 눈으로 묻는 서우진.
여자친구라고 생각한 걸까?
"인사해. 새로 들인 제자야."
"제자······요?"
"우진이 너만큼이나 잠재력이 큰 사람인데 자기 갈 길을 모르는 것 같아. 그래서 좀 키워보려고."
"그 정도입니까? 솔직히 저는 잘 모르겠습니다. 각성하고 나선 사람들 근골이나 마력 혈맥이 대충 느껴지는데, 이분은 그냥 평범합니다. 아니, 오히려 평균에서 한참 이하 같습니다. 솔직히 말해서 이렇게 약한 분은 처음 봅니다."
그야 그렇겠지.
서우진은 어느 정도 단련된 사람들만 봤을 테니까.
백소린의 얼굴이 어두워지는 한편, 내 말이 정말이냐는 눈으로 나를 본다.
정말로 자기 잠재력이 서우진과 비등하냐고.
자신만만하게 한 번 웃어주었다.
"두고 보면 알겠지. 나중에 소린 씨한테 따라잡히고 울지나 마."
"하핫. 선생님 유머 감각이 있으시네요?"
서우진은 내 말을 그냥 웃어넘겼다.
말이 안 되는 이야기지.
제검문과 일검문, 두 검문의 정화가 빚어낸 작품이 서우진.
그런 서우진을 검 한 번 제대로 잡아본 적 없는 사람이 따라잡는다고?
말이 안 된다.
하지만 말이 안 되는 걸 말 되게 바꾸는 게 바로 천살성.
방심하면 정말 추월당할 것이다.
"재미있네요."
서우진이 눈을 반짝였다.
"선생님. 정말 자신 있으시면 어때요? 내기하실래요?"
"내기?"
"네. 3개월 안에 저 아가씨······ 소린 씨가 3레벨, 아니 2레벨이 되면 제가 지는 거고 못 되면 선생님이 지는 거죠. 저랑 비슷한 재능이면 그 정도는 하겠죠?"
"좋지."
이건 반드시 내가 이긴다.
"그래서 판돈은?"
"음······"
잠시 고심하는 서우진.
"선생님이 이기면 갑옷 한 벌 맞춰드릴게요."
"갑옷?"
"네. 최고급으로요. 판금 갑옷도 좋고 마법 무복도 좋고, 선생님이 원하는 스타일로 어때요?"
"좋아. 안 그래도 갑옷 하나 갖고 싶었어. 그럼 내가 지면 뭘 해야 하지?"
"선생님이 지면······"
서우진이 뜸을 들이며 날 쳐다본다.
다 예상이 된다.
자기 가신이 되어달라고 하겠지.
싹수 있는 인재를 보면 어떻게든 수집하려 드는 게 높으신 분들 고질병이니까.
하지만 서우진이 내민 조건은 내가 전혀 예상하지 못했던 거였다.
"제 친구들을 도와주세요."
"응? 뭐라고?"
"제 친구들이요. 신열을 앓고 있는 애들······ 걔들을 도와주고 싶어요."
각박하다 못해 잔인한 세상.
눈 감으면 코가 아니라 장기 털어가는 세계.
괴물과 마주하다 괴물이 되어버린 내 가슴을, 소금물 화살이 적시고 지나가는 느낌이었다.
내기 -2-
"오케이. 그렇게 하자."
생각할 것도 없이 머리를 끄덕였다.
서우진의 얼굴이 확 밝아진다.
"정말이시죠?"
"그래. 그런데 몇 명이나 되냐? 아무리 내기에서 졌다고 해도 수십 명, 수백 명씩 해줄 수는 없어."
"적어요. 다 합쳐서 네 명밖에 안 돼요."
네 명?
혹시?
순간 떠오르는 이름들이 있었다.
나는 모르는 척 질문을 던졌다.
"생각보다 적네. 좋아. 이기든 지든 그 네 명은 내가 치료해줄게."
"진짜요?"
"네 친구면 나랑도 아예 남남은 아니잖아. 그 정도는 해줄 수 있어."
"약속하신 거예요!"
"그렇다니까. 그런데 누구누구야? 나도 누군지는 알아야지."
"잠깐만요."
서우진이 허겁지겁 자기 스마트폰을 뒤졌다.
그러더니 단체 사진 하나를 꺼내 보여준다.
다들 서우진 또래, 20대 초반.
약속이나 한 듯 선남선녀.
그리고 낯이 익었다.
이름도 특성도 가물가물하지만 공통점이 있는 존재들.
아케인 서울 에피소드 3, 보스 서우진의 부관으로 등장하는 이들이라는 것.
"멀쩡하네?"
"저처럼 봉인구를 차고 있어요. 여기 현주는 목걸이, 여기 승윤이는 조끼, 여기 명진이는 허리띠, 이렇게요."
"다들 있는 집 자식인가 보네."
"옛 아버지 교단이 그렇죠 뭐. 자기네들한테 이득이 될 것 같으면 세레부터 내리고 봐요."
서우진이 또렷한 적개심을 드러낸다.
"용케 이렇게 많이 데려가고도 무사했네. 반 교단 동맹 같은 거 생겨도 이상하지가 않은데 말이야."
"분하지만, 옛 아버지 교단은 그만큼 강하니까요. 정치권 인사 치고 옛 아버지 교단 뒷돈 안 받아먹은 인간이 없어요. 다른 세력들과도 혈연 지연 학연으로 얽혀 있고."
그러니까 이런 중견기업 몇 개쯤은 대놓고 처먹을 수 있는 거다.
위협이 될 수 있는 대기업은 절대 손대지 않으니까.
어, 잠깐만.
아까 승천보안 아들이라는 성전사도 강제 세례받지 않았었나?
"혹시 이재열? 승천보안 사장 아들도 강제 세례받았어?"
"네. 저보다 조금 일찍요. 그쪽은 집안 사정이 복잡하더라고요. 지금 승천보안 사장 와이프가 명성그룹 계열사 사장 딸인데 계모래요. 배다른 아들 낳고 몇 년 뒤에 승천보안 사장 아들이 강제 세례받아서 뒷말이 많았어요."
이건 무슨 중세 시대도 아니고.
자기 친아들한테 회사 물려주려고 장남을 수도원 출가시킨 격이네.
인성이 파탄난 이유가 있었어.
서우진이 사진 하나하나 가리키며 설명했다.
"얘는 BY 건설 장녀 이현주에요. 얘는 갤럭시몰 장남 김승윤, 얘는······"
듣다 말고 귀를 의심했다.
갤럭시몰?
거기서 백소린이 각성하잖아. 좀비들 때려잡으면서.
'······아.'
섬광과 같은 깨달음이 찾아왔다.
옛 아버지 교단의 손길은 여기에도 닿아 있었다는 것을.
앞서 말한 것처럼 좀비 사태는 서울 곳곳에서 좀비들이 범람하면서 시작한다.
그중 갤럭시몰 지점 두 개가 휩쓸린다.
단순히 우연이라고 생각했는데 우연이 아니었던 것.
'잘됐네.'
완전 꿩 먹고 알 먹기, 도랑 치고 가재 잡기다.
백소린을 키워주고 다른 부잣집에 빚도 지우면서 옛 아버지 교단까지 방해한다?
이건 못 참지.
"좋아. 네 명 다 치료해줄게."
"역시! 선생님이라면 가능할 거라고 생각했어요!"
"가능하긴 한데 어려워. 나도 쉽게 해주는 건 아니다? 저번에 너도 봤지?"
"그럼요. 선생님 그때 정말 고생하셨는데······"
서우진이 살살 내 눈치를 본다.
덮어놓고 지르긴 했는데 쉬운 일이 아니라는 사실을 깨달은 것.
"내기는 분명히 내가 이길 거지만 네 얼굴을 봐서 해주는 거야. 그건 알아둬."
"에이, 제가 이길 것 같은데요?"
"두고 보면 알겠지. 그리고 인마, 신열 치료할 정도 사람이 석 달 안에 사람 한 명 2레벨 못 만들겠어? 넌 몇 레벨 됐는데?"
"어어, 그러네요."
"마법 갑옷 장인이나 미리 수배해 놔라. 그리고 내일 네 명 중 시간 되는 사람 만나자고 해."
"내일요? 그렇게 빨리?"
"뭐든 빨리 처리하는 게 낫지. 그리고 너 친구들한테도 말해놔. 내가 내기에서 지면 진 대신에 치료해주는 거지만, 이기면 대가를 받을 거라고."
"그냥 해주시는 거 아니었어요?"
"세상에 공짜가 어디 있냐."
서우진이 조금 억울하다는 표정을 지었다.
그럼 내가 무료 봉사할 줄 알았어?
아무리 착한 마음씨에 감동했든 어쩌든 일면식도 없는 사람들을 위해 피똥 쌀 의리는 없다.
서우진이 머리를 벅벅 긁고는 말했다.
"끙······ 중개업자가 된 느낌이네. 혹시 원하시는 거 있으세요?"
"합리적인 선에서 청구하겠다고 말해줘. 네 부모님이 나한테 줬던 것도 말해주고. 그 정도는 괜찮잖아? 치료만 되면."
"그렇죠. 치료만 되면."
"생각 있으면 내일 보자고 해. 어차피 네 이야기는 이미 다 했을 거 아냐?"
"사실 그랬죠. 선생님이 비밀로 해달라고 해서 말은 안 했는데, 걔들이 얼마나 애원했는지 몰라요."
서우진이 씁쓸하게 웃는다.
한편으로는 마음속 짐을 내려놓은 듯 편한 얼굴이 된다.
적잖이 시달리긴 한 모양.
나는 마시던 아이스 아메리카노를 원샷하곤 일어섰다.
"내일 보자. 장소는 어떻게 하지?"
"저희집에서 어떠세요? 그게 여러모로 편할 것 같아요. 괜히 밖에서 만나다가 교단놈들이랑 마주치면 머리만 아프죠."
"오케이."
백소린과 함께 빠져나온다.
이번에도 직원 전용 통로를 사용했다.
사표를 내긴 했지만 공식적으로 퇴사 처리가 되지 않아 가능했던 것.
직원 통로를 빠져나오며 백소린이 소곤거렸다.
"서우진 님 치료하신 게 선생님이셨어요?"
"그랬죠."
"아니, 어떻게요? 신열은 치료할 수 없는 거 아니었어요? 제가 알기로는 각성해야만 극복할 수 있다고 들었는데요."
"소린 씨가 아는 게 맞아요. 우진이가 각성할 수 있게 유도했죠."
"와, 대박······ 아, 선생님. 저한테도 말씀 편하게 해주세요. 서우진 님한테도 편하게 말씀하시는데 저한테 존댓말 쓰시니까 듣기가 조금 그래요."
"아하하. 알았어."
서우진을 만나고 조금은 신뢰가 쌓인 걸까?
날 대하는 표정이 한결 편해져 있었다.
처음, 3층 라운지에서 경계하는 기색이던 것을 생각하면 장족의 발전.
서우진네 집에서 만나기로 하고 헤어졌다.
다음날.
최 소장을 대동하고 간 자리.
약속 시간보다 이르게 도착했는데 백소린이 서우진네 집 앞에서 발을 동동 구르고 있었다.
"반갑습니다."
최 소장이 본능처럼 명함을 내밀었다.
"초인님께 이야기 들었습니다. 초인님 제자시라고요. 최선수 소장이라고 합니다. 부족하지만 초인님 잡일을 이것저것 도와드리고 있습니다."
"아, 네. 안녕하세요. 저도 잘 부탁드려요."
백소린이 환하게 웃으며 명함을 받았다.
"흐흐, 저야말로 잘 부탁드려야지요. 우리 초인님 제자님이면 그야말로 예비 초인님 아닙니까? 시키실 일 있으면 언제든 불러주십쇼! 제자님께는 만사 제쳐놓고 달려가겠습니다."
"아니에요. 예비 초인은 무슨······ 솔직히 저 재능 없어요."
"그랬으면 우리 초인님이 제자로 받으셨을 리가 없죠. 안 그렇습니까?"
"역시 소장님이 절 잘 아시네요."
위이잉.
우리가 온 걸 감지했는지 저택 정문이 천천히 열렸다.
대기하고 있던 고용인이 차 열쇠를 받아 차고에 주차하고, 우리 셋은 정원 산책로를 걸어 안쪽으로 들어갔다.
"와아!"
짧은 감탄사.
백소린이 주위를 둘러보며 탄성을 흘렸다.
본격적인 여름을 맞이한 정원.
날씨가 슬슬 후덥지근한데 기이하게도 정원 안에는 단풍 천국이었다.
실외 에어컨이라도 빵빵하게 튼 걸까?
기후 자체가 가을.
시원하고 서늘한 바람이 나무 사이에서 불어와 이마를 훑고 지나간다.
나무도 온통 단풍빛.
허공에서 떨어지는 폭포가 시냇물이 된다.
시냇물은 졸졸 소리를 내며 정원을 관통하여 사라진다.
저번에 왔을 때와는 차원이 다르게 아름답고 기이한 광경.
그 끝에 대표 부부, 그리고 서우진이 나란히 서 있었다.
"오랜만에 뵙습니다. 선생님."
대표가 내게 깍듯하게 허리를 굽혔다.
처음 봤을 때 툴툴거리던 그 사람이 맞나 싶을 지경.
부대표도 화사하게 웃었다.
"선생님 덕분에 요즘엔 살맛이 나요. 이이가 글쎄, 선생님 오신다고 평생 신경 안 쓰던 조경에도 돈을 쓰더라니까요?"
"정원이 아주 멋집니다. 동화 속 세상에 들어온 것 같네요."
"호호, 그렇죠? 요즘엔 이게 유행이에요. 기후 변환 마법진 설치하는 거요."
"엄청 비싸겠는데요?"
"우리 우진이 살려주신 분 맞이하는 건데요. 계시는 동안만이라도 편히 계시다 가세요."
"고맙습니다."
역시 돈이 좋긴 좋다.
서늘한 자연풍은 에어컨 바람과는 비교가 안 됐다.
나도 언젠가 이런 정원을 만들어야지.
속으로 생각하며 서우진을 따라 응접실로 이동했다.
서우진 친구 넷과 보호자들이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무시무시한 눈길이 쏟아진다.
과연 네가 우리 도련님을, 아가씨를 치료할 수 있겠냐는 태도.
아랑곳하지 않고 척척 걸어간다.
보안회사 자제가 아니어서일까?
보호자라고 따라온 인간들 레벨이 그저 그랬거든.
몽땅 4레벨.
박대엽을 쓰러뜨린 내 눈에는 별로 차지 않는 인간들이다.
"반갑습니다. 앉아서 얘기하죠. 김전사라고 합니다."
"안녕하세요. 이현주에요."
"김승윤이라고 합니다. 우진이한테 얘기 많이 들었습니다. 뵙게 되어 영광입니다."
"저는 채명진······"
간단히 통성명을 했다.
백소린이 꿔다놓은 보릿자루처럼 어색해하길래 앉으라고 수신호를 주었다.
4레벨 보호자들이 아니꼽다는 듯 쳐다보지만 그래서 뭐 어쩔 건데.
갑질할 생각은 없지만 이 자리의 갑은 엄연히 나다.
"우선 하나 확실히 하겠습니다. 여기 계시는 분들 모두 옛 아버지 교단에게 강제 세례 당하신 게 맞지요?"
"예, 맞습니다."
"예······"
"그랬죠."
"아시다시피 신열을 극복하는 방법은 하나입니다. 교단에 입교하지 않는 한 각성해서 초인이 되어야 하지요. 여기 있는 우진이도 똑같은 과정을 거쳤습니다. 그 결과는 여러분도 보시다시피 5레벨 초인이 되는 거였고요."
동경과 경탄 섞인 시선이 서우진에게 날아가 꽂힌다.
서우진의 친구도, 따라온 보호자들도 예외는 없었다.
그만큼 5레벨 초인이라는 이름값은 엄청났으니까.
"단, 각성에 성공한다고 바로 5레벨이 된다고 보장은 못 합니다. 이건 우진이가 특이한 거예요. 태어나자마자 벌모세수 받고 영약을 물처럼 마셨을 거 아닙니까? 제검문이랑 일검문 후계자인데요. 각성 후에도 두 검문 원로들이 다 달라붙었을 거고요."
"그럼요."
"이 지긋지긋한 조끼만 벗어도 만족합니다."
"솔직히 말해서 전 초인 안 돼도 좋아요. 그냥 사람답게 살고 싶어요. 지금은 살아도 사는 게 아니란 말이에요."
아우성치듯 울분을 토하는 그들.
나는 손뼉을 한 번 쳐 시선을 끌어모았다.
"제 치료는 이런 식으로 진행이 됩니다."
자세히 설명해준다.
서우진에게 했던 치료 방식을.
영역 방어막으로 신열을 밀어내고 대련하며, 무의식에 잠재된 검법을 각성하게 만들었던 것.
공명 효과는 흑염으로 대체할 수 있다.
신열, 성화, 흑염 모두 옛 아버지에게서 비롯된 같은 속성이니까.
어린 녀석들이 뜨악한 표정을 지었다.
"그런 방법으로 각성이 된다고요?"
"그게 되면 그냥 대련만 해도 각성하는 거 아니에요?"
"세례받기 전이면 불가능한 일이죠. 사실 신열 때문에 가능한 방법입니다. 신열은 집중력을 초월적으로 강화시키니까."
나는 넷을 꾹꾹 쳐다보며 말했다.
가물가물한 얼굴들.
솔직히 기억이 안 난다.
하지만 어제, 나는 밤을 새우다시피 집중하며 겨우 깊이 묻어둔 기억을 꺼내는 데 성공했다.
칠흑 학살자의 네 부관.
전사 하나 강화병 하나 마법사 하나 사제 하나.
스마트폰 화면에서는 광신에 불타던 그 눈들이 불안과 기대, 의심과 희망으로 범벅되어 다채롭게 빛나고 있었다.
이들도 서우진만큼은 아니어도 천재다.
다들 7레벨까지는 달성한다고.
당연히 서우진에게 썼던 치료 방법이 통한다.
조금씩 내용을 달리해야 하지만.
"선택은 여러분 몫입니다."
나는 손을 펼쳐 넷을 가리켰다.
"죽을 만큼 힘들 거라는 점만 알아두세요. 여러분이 신열 때문에 고통스러웠던 만큼 각성 과정 역시 어렵고 힘듭니다. 각오가 된 분만 남고 다른 분들은 돌아가시면 되겠습니다."
잠시 아무도 말이 없었다.
그러다 당차 보이는 여자애가 나서서 묻는다.
"한 가지만 여쭤볼게요."
"말씀하세요."
"고생하는 건 좋아요. 평소에도 그러니까요. 현실적으로 극복할 확률은 얼마나 되죠? 괜히 고생만 죽어라 하고, 의지가 부족해서 실패했다는 말은 듣고 싶지 않아요."
"확률이라?"
잠시 머리를 굴려본다.
과연 얼마나 되는지 싶어서.
금방 결과가 나왔다.
나는 자신만만한 표정을 지었다.
"분명히 말씀드리죠. 제 지시에 무조건적으로 따른다면 한 달 내에 신열을 극복할 가능성이 99% 이상입니다."
"네? 정말요? 어떻게 장담하세요?"
"아무리 그래도 99%는 좀······"
"말도 안 돼."
"거짓말 아니에요?"
말이 안 된다는 반응.
백소린도 못 믿겠다는 표정을 짓고 있었다.
내 말을 듣고도 웃는 건 단 네 명.
서우진과 최 소장, 그리고 대표 부부뿐이었다.
"어떨 것 같습니까?"
나는 팔을 양쪽으로 펼쳤다.
흑염 발동.
검은 불꽃이 사방으로 질주한다.
흑룡을 풀어놓은 것과 같은 광경.
누군가 신음을 흘렸다.
"흑염······"
신열을 극복한 초인의 증표.
옛 아버지 교단의 신열을 극복했을 때야만 얻는, 역사서에도 몇 차례 기록되지 않은 그 특성.
이건 서우진도 얻지 못한 것이다.
서우진을 향하던 동경어린 시선이 비로소 내게로 옮겨왔다.
"다시 말씀드리지만."
나는 넷과 하나하나 시선을 맞췄다.
"선택은 여러분의 몫입니다."
여기서 싫다고 할 사람이 있을까?
없다.
넷 다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일주일 후.
한 달까지도 필요 없었다.
애초 얘기했던 것보다 4배는 빠르게.
전원 3레벨을 달성했다.
내기 -3-
"감사합니다, 선생님! 정말로 감사합니다!"
"선생님 덕에 우리 애가 살았어요!"
"이렇게 감사할 때가······ 선생님께 맡기기를 잘 했습니다!"
치료 완료.
그 말이 전해지기 무섭게 부모들이 달려왔다.
하나같이 중견기업의 대표나 사장.
내 손을 잡고는 허리를 부러질 듯이 굽혀댔다.
"아닙니다. 자제 분 의지가 뛰어나서 가능했던 거죠. 저는 그저 자제분이 신열을 극복하게 도와준 것에 불과합니다."
"아휴, 겸손하기도 하셔라."
"말이야 쉽지 누가 신열을 치료해준답니까? 저희가 승윤이 치료하려고 안 해본 게 없었습니다. 진심으로 감사 말씀 올립니다."
말로만 인사할 건 아니지?
옆에서 최 소장이 은근한 눈짓을 보냈다.
부모들이 찰떡같이 알아듣고는 수신호를 보냈다.
그러자 미리 밖에서 대기하고 있던 이들이 저마다 마법 상자를 둘러메고는 들어온다.
"약소하지만 감사의 마음을 담았습니다."
"아니, 뭐 이런 걸 다······"
"제일보안 대표님께 들었습니다. 원래는 우진 군과 내기 결과로, 우진 군이 이겼을 때 저희 애들을 치료해주는 거였다고요. 그래도 사람인 이상 입 싹 씻을 수는 없죠. 선생님께서 내기 결과 상관없이 치료해주시기도 했고. 내기가 어떻게 되든, 저희끼린 선생님께 감사 선물을 드리기로 의견을 모았습니다."
주르륵 늘어선 마법 상자 다섯.
응? 다섯?
다른 보호자가 상자를 가리키며 말했다.
"하나는 저희끼리 최대한 성의를 모은 것이고, 나머지는 하나씩 상의해서 가져왔습니다. 괜히 부위가 겹치면 안 되니까요."
꿀꺽.
저절로 마른침이 넘어간다.
마법 상자 안에 뭐가 들어 있는지 알 것 같아서.
바로 마법 무구.
서우진이 머리를 긁적였다.
"마법 갑옷 장인 수배는 했는데 아직 일정이 안 된대요. 다음 주에나 시간이 된다고 해서 그때로 약속 잡아놨어요."
"아직 이긴 거 아니잖아."
"제 친구들 모두 3레벨로 만들어 주셨는데 그 정도는 해드려야죠. 내기 이기든 지든 맞춰드릴게요."
"하하. 고맙다."
"상자 지금 열어보실 거죠?"
"당연하지."
기대에 찬 눈길이 쏟아졌다.
백소린도 최 소장도 설레는 얼굴로 상자를 훔쳐보고 있었다.
하나씩 개방한다.
마법 자물쇠에 내 손을 가져다 대자, 미리 입력된 유전자 정보를 확인한 다음 빛이 반짝였다.
상자 표면 마법진으로 질주하는 빛무리.
이내 덜그럭대기 시작하면서 하얀빛이 새어 나오고, 팟 하면서 섬광이 터졌다.
'아케인 서울 무료 뽑기하던 때 같네.'
마침내 상자가 열렸다.
안에 들어 있는 것은 신발 한 켤레.
튼튼해 보이는 판금 장화였다.
발등에 촘촘히 보석을 박았고 마법진이 새겨져 자기 존재를 웅변하고 있었다.
"신속 마법이 담긴 신발입니다. 튼튼하고, 진은 합금으로 만들어서 아주 가볍고 편하지요. 한 번 신어보시겠습니까?"
"고맙습니다."
거절하지 않고 즉석에서 착용했다.
놀랍도록 몸이 가벼워지면서 경쾌한 바람이 나를 휘감는다.
신속 특성.
단거리에선 가속 특성이 더 낫지만 개인적으로 나는 신속을 더 좋아한다.
내가 김전사에게 장착해 주는 상위 이동기 특성 필수 재료라서.
돌진, 도약, 질주랑 같이 쓰면 더 좋기도 하고.
나는 만면에 웃음을 지었다.
"생각보다 더 좋네요. 잘 쓰겠습니다. 크게 도움이 될 것 같네요."
"별말씀을. 저희한테 베푸신 은혜에 비하면 별것 아닙니다."
상자 개봉쇼가 이어졌다.
다음 물건은 투구였다.
말이 투구지 접이식 헬멧에 가까운 물건.
요즘엔 휴대성을 중시하다 보니 머리 장비는 다 이렇게 나온다나.
내가 쓰던 접이식 헬멧처럼 접어서 등에 달고 다니다가 쭉 끌어당기면 얼굴과 머리를 완전히 뒤덮는다.
고글과 방독면도 당연히 달려 있고.
"탐지 마법이 걸려 있습니다. 이것만 잘 차고 다니셔도 기습당할 일은 없을 겁니다."
"구하느라 고생하셨겠습니다. 감사합니다."
세 번째로 받은 것은 방패.
역시 접이식 방패다.
내가 쓰던 것과 비슷하게 왼쪽 팔뚝에 장착하는 종류.
차이점이라면 장착해서 전개하면 둥글게 펴진다는 점이다.
기존에 쓰던 거는 뭐, 사실 그냥 철판 쪼가리 몇 개 넣었던 거였지.
"성채 능력이 담겨 있습니다. 방패 자체도 쓸 만하고요."
"성채······ 이것도 귀한 물건이네요. 감사합니다."
이건 발동형 특성.
활성화하면 방어력과 저항력을 크게 올린다.
대신 이동 능력이 급격히 저하하지만 제 자리 버티기가 쉬워지지.
방어 전사의 필수 특성.
더불어 금강체 필요 조건 중 하나이기도 하다.
'앞으로 하나!'
금강체가 눈앞으로 훌쩍 다가왔다.
남은 것은 마지막 상자.
빛을 발하며 열린 상자 속에서 손도끼가 튀어나왔다.
크기는 그리 크지 않은, 말 그대로 보조 무기로 적당할 용도.
대신 매우 아름다웠다.
통짜 진은 합금에 날은 예리했으며 도끼날 바로 뒤에 박힌 마력핵을 중심으로 마법진이 은은하게 빛나고 있었다.
"격노의 도끼입니다."
"격노!"
격노다, 격노.
박대엽이 쓰던 그 능력.
광분의 하위 호환이지만 광분을 어디 내 맘대로 쓸 수 있나.
저주받은 안경알을 몸에 찔러서 강제로 쓴 거였지.
더구나 격노는 켜고 끄는 게 자유롭다.
광분처럼 한 번 썼다고 죽을 정도로 후유증이 몰려오지는 않는다는 뜻.
나는 진심으로 허리를 굽혔다.
"정말 좋은 물건이네요. 우진이가 하도 간곡하게 부탁해서 한 건데 이런 보물을 주실 줄은 몰랐습니다. 잘 쓰겠습니다."
"흐흐, 선생님. 그거 제가 드린 방패랑 같이 쓰면 아주 와따입니다. 그만큼 궁합 맞는 게 없다니까요?"
"벌써 상상이 됩니다. 방패 들고 도끼 쓰면 같은 레벨에선 절 이길 초인이 없겠지요."
"제 신발도 빼놓으시면 섭섭합니다! 위험하면 신속 쓰고 후퇴하세요! 격노 쓰고 신속으로 달려들어도 좋고요!"
"미리미리 위험을 파악하는 게 최고죠. 탐지만 잘하고 다니셔도 위험하실 일이 없습니다."
"하하. 모두 감사합니다."
남은 것은 마지막 상자.
지금까지 얻은 것만으로도 포만감이 느껴질 지경인데 그걸 열려니 손이 떨렸다.
겨우 진정하고 자물쇠에 손을 댔다.
상자가 파르르 떨리며 괴물처럼 입을 개봉한다.
"어머!"
보고 있던 백소린이 감탄을 날렸다.
열린 상자 안.
들어 있는 것은 병 두 개가 전부.
그러나 범상치 않다.
투명하게 빛나는 수정병 속, 은하수를 닮은 빛이 몽실몽실 어려 있었다.
넥타르!
태생 등급 한계에 부딪힌 초인을 한계 돌파시켜주고, 저레벨 초인은 먹기만 해도 레벨을 팍팍 올려주는 그것!
비록 현실은 게임과 달라서 넥타르를 먹어도 고생을 좀 해야 하지만, 충분히 마실 가치가 있었다.
보호자 하나가 자기 코를 쓱 문질렀다.
"선생님께서 우진 군과 인연을 맺은 게 넥타르 때문이었다지요?"
다른 보호자가 말을 받는다.
"신열은 극복하셨지만 넥타르는 또 언제 필요하실지 모르죠."
"분명히 필요해질 겁니다."
"그때를 위해서 저희가 겨우 넥타르를 마련해 왔습니다. 이상하게도 요즘 넥타르 씨가 말라서 쉽지는 않았지요."
"부디 도움이 됐으면 좋겠습니다."
넥타르, 넥타르다.
내가 마셔도 좋고 백소린한테 하나 줘도 좋다.
강해진 백소린은 결국 내 강력한 검이 될 테니까.
정중히 넥타르 두 병을 받았다.
"감사합니다. 정말 놀랍네요. 넥타르를 받을 거라고는 상상도 못 했습니다."
"하하하. 이 정도는 해야지요."
"저희가 비록 무문은 아니지만 어디 가서 떨어지는 사람들도 아닙니다."
"제일보안한테 넥타르 1병을 받으셨으니 저희한테도 넥타르 2병은 받으셔야지요!"
알고 보니 은근한 경쟁 심리가 있었던 모양.
제검문과 일검문은 고려 시대부터 이어진 유서 깊은 무문이지만, 여기 이 네 업체는 해방 이후 벼락출세한 졸부들이거든.
상관없다.
나야 보물 받으면 그만이지.
다시 한번 머리를 깊이 숙였다.
"진심으로 감사 말씀드립니다. 나중에도 제가 필요한 일이 있으면 연락 주시기 바랍니다."
"흐흐흐. 말씀이라도 감사합니다. 일 생기면 꼭 선생님께 부탁드리겠습니다. 그때 가서 모른 척하시면 안 됩니다?"
"당연한 말씀을."
훈훈하게 정리되는 분위기다.
떠나기 전, 네 명의 학생들이 내 앞에서 무릎을 꿇었다.
"선생님······ 살려주셔서 감사합니다."
"고마우신 건 알겠지만 이러실 필요까진 없습니다."
"아닙니다. 이 은혜를 어떻게 갚아야 할까요?"
"이미 갚으셨습니다."
"고작 마법 무구 한 점으로 갚았다고 할 수는 없지요. 선생님께서는 제 인생을 구해주셨습니다."
"고마우면 우진이한테 인사하세요. 전 솔직히 우진이 얼굴 봐서 도와드린 겁니다. 우진이가 부탁 안 했으면 애초에 관심도 안 가졌을 거예요."
"그렇다고 해도 선생님께서 저흴 구해주신 것에는 변함이 없습니다."
훈훈하고 감동적이긴 한데 어떻게 끝을 맺지?
내가 난감해하자 서우진이 나섰다.
억지로 친구들을 일으켜 세워서는 뒤통수를 때린다.
"선생님께서 곤란해하시잖아! 고마우면 병신들아, 나중에 선생님한테 효도하면 돼! 너희도 이제 3레벨이야!"
"아, 그렇지."
"맞아. 선생님한테 효도하자."
"어······ 효도? 그게 맞아?"
어릴 때부터 신열 때문에 집에만 있어서 그럴까.
좋게 말하면 순수하고 노골적으로 말하면 백치미 같은 구석이 있다.
가정교사 고용해서 배울 만큼 배웠을 텐데도.
"안녕히 계세요! 선생님!"
"또 봬요!"
"감사합니다!"
하나둘 자리를 뜬다.
마지막으로 갤럭시몰 김승윤네 가족이 떠나기 전, 갤럭시몰 대표를 은밀히 불러냈다.
갤럭시몰 대표가 묘한 눈으로 나를 쳐다본다.
"저한테 하실 말씀이 있다고요?"
"예. 혹시 도청 방지기가 있으면 쓰시겠습니까? 외부에 알려지지 않았으면 해서요."
"그러지요."
갤럭시몰 대표가 손목시계를 꾹 눌렀다.
무형의 파장이 번지며 우리 둘을 감쌌다.
"말씀하시죠."
"예. 실은 부탁드릴 게 있습니다."
"부탁이요? 선생님 부탁이면 당연히 들어드려야지요. 그런데 왜 굳이 도청 방지기까지······"
"갤럭시몰 하남 지점 지하 금역에 들어가야 해서요."
지하 금역.
바로 정곡을 찔렀다.
갤럭시몰 대표의 얼굴이 굳어진다.
"지하 금역이라뇨? 그런 거 없습니다."
"정말요?"
"그럼요. 금역이 있으면 그 위에 갤럭시몰을 세웠겠습니까? 하남 지점이면 우리 회사가 전력을 기울여 만든 지점입니다. 매출도 우리 회사 지점 중에서 가장 잘 나오고요. 금역은 있지도 않고, 설령 있더라도 진작 정화해서 없앴을 겁니다."
그런 것 치곤 말이 기십니다?
나는 갤럭시몰 대표를 뚫어져라 응시했다.
도저히 부인할 수 없도록 한 글자 한 글자 천천히 말했다.
"지하 8층 주차장. A-1 구역과 A-2 구역 사이 벽, 거기에 정말로 지하 금역이 없다고요?"
"없습니다."
완고하게 부인하는 갤럭시몰 대표.
그러나 잠깐 동공이 흔들리는 건 어쩌지 못했다.
아무리 이 막장 세계의 사업가라도 인간은 인간이니까.
"정말로 없습니까? 제가 하남 지점 찾아가서 지하 8층 벽에 곡괭이질 해도 됩니까?"
"선생님! 지금 절 협박하시는 겁니까? 아무리 선생님이라고 해도 이건 선을 넘었습니다!"
갤럭시몰 대표가 얼굴을 붉히고 항의한다.
나 역시 협박하려고 이러는 게 아니다.
"그럴 거면 승윤이 치료 건이랑 엮어서 협박했겠죠. 제가 지금 대표님한테 돈이나 뭐 그런 거 뜯어내려고 이러는 것 같습니까? 제가 그 정도 인간으로밖에 안 보여요?"
"그, 그건 아닙니다."
치료한 학생을 들먹이자 눈에 띄게 한풀 꺾였다.
채찍을 들었으니 당근 차례.
나는 조곤조곤한 목소리로 말했다.
"제가 원하는 건 별것 없습니다. 지하 금역, 그 안에 제가 찾는 게 있으니 출입 허가만 주시면 됩니다. 지하 8층을 며칠만 봉쇄하고, A 구역을 가려놓으시면 제가 알아서 다 하죠. 내려가서 금역을 탐사하고, 정화까지 확실하게 다 해놓겠습니다. 마무리로 봉인도 덮고요."
"그, 그것이······"
"어려운 일은 아니지 않습니까? 적당히 수리한다고 봉쇄하고, 저랑 제 제자만 들여보내시면 됩니다."
"흠, 흠, 그게 말처럼 쉬운 일이 아닙니다."
여전히 굳은 얼굴.
능숙하게 표정 관리, 시선 관리를 하지만 날 속일 수는 없었다.
저런 얼굴과 눈빛은 원래 세계에서 많이 봤거든.
뭔가 켕기는 게 있을 때 보여주곤 했지.
도대체 뭘 숨기고 싶어서?
반딧불 반짝이듯 무수한 상념이 떠오른다.
에피소드 2, 좀비 사태에서 개방된 갤럭시몰 던전을 상기한다.
저레벨 던전이었지.
초입은 1레벨, 보스는 3레벨만 되어도 깰 수 있었던.
주로 나오는 괴물은 좀비 종류.
좀비 사태니까 당연하지만, 톱과 곡괭이, 망치 등 공구류로 무장하고 있었······
'어? 이거 혹시?'
한 가지 가능성이 뇌리를 스친다.
저절로 주먹을 움켜쥐게 된다.
눈앞에서 느물거리는 갤럭시몰 대표를 한 대 때리고 싶어졌다.
'역시 사업가는 사업가야.'
이 미친 세계에서 사업을 하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
양심적으로 사업해서는 안 된다.
못 살아남는다고.
당연하다는 듯 사람 뒤통수를 치고, 칼을 꽂고, 갈아 넣고, 고혈을 빨아야 살아서 사회 상층부로 기어 올라간다.
갤럭시몰 대표가 지하 금역 개방을 꺼리는 이유?
간단하다.
지가 무슨 진시황도 아니고 인부들을 생매장했으니까 그렇지.
이 세계에서는 왕왕 있는 일.
알려지면 지탄받지만, 그래도 돈으로 막고 권력으로 막을 수 있는 일.
구역질이 치밀었다.
조금 전 내게 마법 무구를 내밀며 웃던 얼굴과 이 사업가의 얼굴이 똑같다는 게 믿어지질 않는다.
인간이라는 게 그렇지 뭐.
누군가에겐 좋은 아버지, 좋은 가장이더라도 피도 눈물도 없는 수전노이자 돈에 미친 학살자가 될 수도 있었다.
나라고 어디 다른가.
오십보백보, 나도 갤럭시몰 대표와 똑같은 괴물이다.
"대표님이 뭘 걱정하시는지 압니다."
그래서 설득할 수 있었다.
"원하신다면 마법 맹약이라도 하지요. 지하 금역에 뭐가 있는지, 누가 잠들어 있는지 짐작하고 있습니다. 거기서 뭘 보든 누구에게도 발설하지 않겠습니다."
"······정말이시지요?"
"그럼요. 나중에 걱정하시는 일이 생기지 않게 정화와 봉인까지 완벽하게 해놓겠습니다."
"후우우."
길게 한숨을 내쉬는 갤럭시몰 대표.
한참을 망설이다가 다짐하듯이 내게 말한다.
"절대로, 절대로 어디 가서 말씀하시면 안 됩니다. 특히 승윤이한테는 절대로요."
"당연하지요. 약속드리겠습니다. 진짜 마법 맹약이라도 할까요?"
"아닙니다. 승윤이 치료해주신 선생님께 그런 실례를 할 수는 없지요. 선생님을 믿겠습니다."
일정은 사흘 후.
기한은 이틀.
갤럭시몰 대표는 촉박하다고 걱정했지만 충분했다.
내 머릿속에 갤럭시몰 던전 완벽 공략이 들어 있으니까.
그렇게 사흘이 지나고.
백소린을 데리고 금역에 입장했다.
백소린 -1-
백소린
벽이 무너졌다.
곡괭이질 몇 번에 망가져서는 꺼먼 구멍이 뚫린다.
사람 둘이 어깨를 맞대고 들어가고도 남을 크기.
시커먼 기운이 서늘한 바람과 함께 밀려왔다.
백소린이 몸을 부르르 떨었다.
"지, 진짜 있었네요."
"내가 말했잖아."
백소린을 한 번 살펴본다.
무장은 단출했다.
전신 방검복에 장검 한 자루.
머리에는 군용 헬멧과 고글을 덮어썼다.
중고로 구했는지 낡은 티가 역력했지만 굳이 지적하진 않았다.
초인탑 말단 직원에 불과했던 백소린으로선 이게 최선인 게 빤히 보여서.
덜그럭.
골프백을 어깨에 메자 백소린이 힐끔힐끔 쳐다본다.
"선생님은 항상 그거 가지고 다니시네요."
"유비무환이지."
내 골프백에는 소총과 산탄총, 유탄발사기까지 들어 있다.
여러 종류 수류탄은 덤.
그 외 여러 가지 소모품도 챙겼고.
솔직히 말해서 이곳에선 과무장이다.
최하층에서 기다리고 있을 보스를 생각해도 그렇다.
하지만 노루 패거리에게 기습당한 트라우마라고 할까?
어딜 가든 들고 다녀야 마음이 편했다.
서우진네 집에 갈 때도 가지고 갔고.
"고글 그거, 야간시도 되는 거지?"
"네. 당연하죠. 선생님께서 야간시 되는 거 사라고 하셨잖아요."
"잘했어. 그리고 다음에 여유 되면 방독면이랑 귀 보호대도 같이 있는 물건을 사. 마물이랑 싸울 때는 별로 필요없는데 사람이랑 싸울 땐 꼭 필요하다."
"사람······"
"가장 무서운 게 사람이야. 마물보다 사람이 더 위험해."
"초인이 되면 사람이랑도 싸워야겠죠?"
"당연한 소릴."
헬멧을 덮어쓰고 앞으로 나섰다.
백소린이 바짝 따라붙는다.
성검이 허리띠에서 달그락거리지만 마총만 뽑았다.
드디어 진입.
공기가 달라진 듯 음산한 기운이 폐부까지 스며들었다.
퀴퀴한 냄새가 코끝을 자극한다.
혀 전체로 느껴지는 비릿하면서 질척한 맛.
죽음의 마력이다.
공동묘지에서나 찾아볼 수 있다는 그 마력이 금역 전체에 도사리고 있었다.
"선생님? 왜 도심 한 가운데에 금역이 있어요? 원래 있던 금역은 도시공사가 싹 밀어버리지 않았어요?"
"숨긴 거지."
"왜요?"
"갤럭시몰에서 여길 개발한 거나 다름이 없으니까. 도시계획에 들어 있던 곳도 아니고. 자기네들이 정화해야 하는데 돈 아깝다 이거지."
"아니, 그런 이유 때문에 그냥 덮어버렸다고요?"
"금역 정화에 돈이 얼마나 드는지는 아니?"
"글쎄요······ 한 10억?"
"하하하."
말이 안 되는 경제 관념에 그만 웃어 버렸다.
"최소한 수천억 단위로 든다."
"예에? 설마요!"
"그러니까 묻었지. 수천억 단위는 되어야 사람도 비밀도 묻을 생각이 들지 않겠냐?"
내가 하는 것은 봉인.
돈은 적게 든다.
잘못하면 여기에 묻힐 수 있어서 문제지.
나는 어둠 저편을 향해 날카롭게 시선을 던졌다.
[밝은 눈]
평소에 잘 쓰지 않던 특성을 장착한 탓에 고글 성능까지 더하여 앞을 훤히 볼 수 있었다.
그런 내게는 보인다.
스스스슷.
바닥을 쓸 듯이 느릿느릿 걸어오는 한 존재가.
백소린이 의아하다는 얼굴로 날 돌아보았다.
"왜 그러세요?"
"앞을 봐라."
"네? 어······ 엄마야!"
백소린이 펄쩍 뛰었다.
이제 겨우 어둠 속 존재를 확인한 것.
그래도 역시 SSR급 캐릭터라 평범한 사람과는 반응이 달랐다.
비명을 지르고 도망치거나 내 뒤로 숨는 대신, 당차게 검을 뽑으며 아랫입술을 깨문다.
내가 뭐 하나 가르쳐준 적도 없건만 전투 자세를 취하기까지.
검을 양손으로 쥐고 겨누는 동작이 꽤 깔끔했다.
"좀비? 좀비 맞죠!"
우리 시야에 완전히 들어온 존재.
전신이 다 썩고 살점이 너덜거린다.
백골과 시체의 사이 어느 한 지점.
좀비라고도, 스켈레톤이라고도 부르기 어려운 마물이 삐그덕삐그덕 걸어오고 있었다.
손에 든 것은 다 녹슨 오함마 한 자루.
"저놈 잡아."
"네? 제가요?"
"말했잖아. 넌 실전을 겪어야 한다고."
서우진네 집에 있을 때 백소린과 많은 대화를 했다.
특히 성장 방향과 성장 방법에 대해서.
백소린은 불안해하긴 했으나 내가 학생들을 치료하는 걸 보면서 나에 대한 신뢰를 얻은 성싶었다.
대신 확실히 주의를 주었지.
"소린아. 너도 내 스타일 알지?"
"알죠."
"난 스파르타식이다. 신열 걸렸던 애들만큼은 아니어도 너도 초인 되려면 고생 꽤 해야 할 팔자야. 좀비 따위 1레벨도 안 돼. 머리에 총알 한 방만 맞아도 죽는다고. 좀비 1마리 정도는 너 혼자서 끝낼 수 있어야 한다."
백소린이 침을 꼴깍 삼킨다.
어두운 동굴 속.
기괴하게 피어오르는 죽음의 마력.
전진해오는 징그러운 시체.
적잖이 압박을 받는 모양.
자기 손바닥에 침을 퉤퉤 뱉고 문지르더니, 검을 꼭 쥐며 결연하게 말했다.
"할게요. 저요, 초인은 못 됐지만 운동도 열심히 했고 검술도 열심히 배웠어요. 좀비 정도는 잡을 수 있어요."
그렇게 나와야지.
"이야아아!"
백소린이 함성을 지르며 달려나갔다.
제법 각 잡힌 자세.
좀비가 느릿느릿 오함마를 휘둘렀지만 먹히지 않는다.
백소린은 날렵하게 몸을 뺀 다음 가볍게 찌르기를 날렸다.
푹!
검이 머리에 박힌다.
그러나 그뿐.
두개골을 못 뚫었는지 중간에서 턱 걸리고야 말았다.
백소린이 당황한 표정을 지었다.
"어? 어어?"
영화와 현실은 다른 법.
힘이 부족하고 실전경험은 아예 없다.
거기서 오는 결과를 백소린이 온몸으로 보여주고 있었다.
부웅!
"아악!"
당황한 사이 좀비가 오함마를 찍었다.
어떻게든 몸을 뺐으나 왼쪽 어깨가 직격당하고 만다.
부서지는 어깨 관절.
비명을 지르는 백소린.
도움을 청하며 날 돌아보지만 나는 팔짱을 끼고는 턱짓만 했다.
고작해야 1레벨 좀비.
혼자서 못 이길 정도면 초인은 꿈도 꿔서는 안 된다.
아무리 그것이 SSR급이라고 해도.
물론, 게임에서 검증된 캐릭터가 고작 이 정도 위기에 무너지지는 않겠지만.
"이이익!"
예상대로였다.
내가 냉정하게 서 있기만 하자 백소린이 이를 악물고 힘을 냈다.
어깨에서 전해지는 통증 따위 무시한다.
몸을 돌리며 회전력을 더하고, 어떻게든 검을 회수한 다음 전력으로 내리그었다.
이번에야말로 제대로 들어간 공격.
좀비의 오른팔이 잘리고 오함마가 땅에 떨어졌다.
떵그렁, 하는 소리를 배경음 삼아 백소린이 춤을 춘다.
처절하게 피로 얼룩진, 또 악에 받쳐 상대를 난도질하는 춤을.
오래 걸리진 않았다.
좀비는 머리와 몸이 분리된 채 대지에 널브러졌다.
그 옆에 백소린 또한 쓰러진다.
자기 어깨를 감싼 채로, 검도 떨어뜨린 채로.
"아파······"
"첫 실전은 어땠냐?"
"너무하세요······"
"그러니까 방심하지 말았어야지. 넌 상처 하나 없이도 좀비를 이길 수 있었어."
"뼈가 그렇게 단단한지 몰랐어요."
"사람 몸에서 가장 단단한 곳이 두개골이다. 그걸 뚫는 건 어지간한 초인도 어려워. 도끼나 철퇴, 방망이가 있으면 모를까 검으로 상대할 때는 목을 자르는 게 정석이다. 네가 한 것처럼 무장 해제부터 하면 더 좋고."
백소린을 눕혀놓고 어깨를 더듬었다.
손길이 닿을 때마다 백소린이 움찔움찔 몸을 꿈틀거린다.
통증이 심한 모양.
그래도 초인이 되려면 이 정도는 익숙해져야지.
뽕.
골프백에서 약병을 하나 꺼내 뚜껑을 땄다.
적당히 뼈를 맞춰준 다음 방호복을 벗기고 가득 붓는다.
피를 연상케 하는 붉은 액체.
우드득, 우득, 하면서 뼈가 저절로 맞춰진다.
손상된 근육도 부어오르던 피멍도 회복되었다.
"선생님? 이게 뭐예요?"
"치유 물약이지."
"치유 물약이 이렇게 대단한 거였어요? 예전에 봤던 물약은 이 정도는 아니었어요."
"하급이니까. 물약 종류는 등급 따라 편차가 커."
"어······ 하급 물약이요? 그럼 비싸지 않아요?"
"조금 비싸지. 천만 원 정도 해."
"히익!"
백소린이 진심으로 놀랐나 보다.
눈이 화악 커지고 입을 헤 벌렸다.
"너, 너무 비싼 거 아니에요?"
"3레벨 초인만 되도 천만 원은 별것 아니다. 이번에도 내가 돈으로 받았으면 수십억씩 받았을걸?"
"그, 그래도요. 제 연봉이 2천이었는데······"
"좀 짜다? 초인탑이면 좋은 직장 아니었어?"
"제 친구들보다는 많이 받는 편이었지만, 초인이랑은 비교가 안 되죠."
그래서 다들 초인, 초인 하는구나.
연봉 2천이 많이 받는 편이라니······
청소부 협회 쓸어버리고 내가 번 게 수십억이라는 걸 생각하면 어마어마한 차이.
"나중에 초인 돼서 갚으면 돼. 부담 갖지 말고 싸워. 대신 내가 직접 도와줄 거라곤 생각하지 말고."
"네. 꼭 해낼게요."
응급 치료는 종료.
백소린이 팔을 크게 돌려보곤 어색한 표정을 지었다.
상급 치유 물약이 아니니 이질감이 남을 수밖에 없다.
그렇다고 엄살 피울 수는 없는 노릇.
계속 전진했다.
"그르륵!"
"그극!"
두 번째로 만난 것은 좀비 두 마리.
두툼한 라쳇렌치와 전동드릴을 들고 있었다.
둘 다 무기로 쓰기에는 부적합한 물건.
그래서인지 백소린이 매끄럽게 좀비들을 해치웠다.
손을 먼저 때려 무장 해제하고 전력으로 검을 휘둘러 목을 벤 것.
나는 가볍게 손뼉을 쳐주었다.
"잘했어. 실력이 훌륭하네."
"후우! 잘한 거예요?"
"아무리 살이 다 썩었어도 목을 베는 게 쉽진 않지. 나도 순수한 검 실력으로는 그렇게 못해."
"네? 선생님도요?"
"나는 검술을 제대로 배운 적이 없어. 내 주력은 초능력이지 검술이 아냐."
"아······"
잠깐 휴식.
백소린이 땀을 한 번 닦고는 석연찮다는 표정을 짓는다.
"그런데 이상하네요."
"뭐가?"
"여기 이 좀비들······ 이상해요. 자연 발생한 좀비는 아닌 것 같아요. 옷도 작업복 입고 들고 있는 것도 건설 공구고······"
백소린이 좀비 하나를 뒤적였다.
뭐 하나 보니 머리에 쓴 헬멧을 벗기는 중이다.
[안전제일] 네 글자가 새겨진 안전모.
드디어 상황을 알아차린 듯 동공이 흔들렸다.
"서, 선생님? 이 사람들 말이죠. 혹시······"
"그래. 네가 생각한 게 맞아. 갤럭시몰 대표가 묻어버린 거지. 돈 아끼려고."
"생매장했다고요?"
"아마도. 금역 최하층에 죽여서 묻었던 묻고 파묻었든 했을 거다. 그 원념이 금역과 결합해서 언데드로 되살아나고 금역은 내부에서 자꾸 확장됐겠지."
"말도 안 돼······ 김 사장님이 정말로 그랬다고요? 좋은 분이었는데······"
"좋은 아버지라고 해서 좋은 인간일 수는 없지."
"너무해······"
백소린이 참혹하다는 표정을 짓다가 얼굴을 돌려버린다.
"정말로, 정말로 몰랐어요. 선생님은 알고 계셨어요?"
"알았지. 갤럭시몰 대표만 그러겠냐? 거기 있었던 사람들 모두 학살자에 범죄자들이야."
"그럴 수가······"
"너도 알잖아? 지금까지 살면서 본 게 있을 텐데."
"그래도 이 정도인 줄은 몰랐어요. 그냥 도시 괴담인 줄로만 알았는데······"
"초인이 된다는 건 이런 거다. 화려한 도심에 가까워지면서 그 그림자에 필연적으로 발을 담그게 돼. 육체적으로만이 아니라, 심적으로도 준비되어 있어야 한다."
말을 해놓고 보니 살짝 그렇다.
너무 꼰대 같았나?
다행히 백소린은 내 조언을 착실하게 받아들이는 눈치다.
"명심할게요. 선생님."
"계속 가자. 지금처럼만 해."
"네, 선생님."
내려갈수록 난이도가 높아진다.
중간쯤 내려가자 신체가 변이된 좀비들이 등장하기 시작했다.
일명 강화 좀비.
움직임이 사람보다 빠르고 힘도 강한 놈들.
무기류는 전동기기가 대부분이라 쓸모없었지만 가끔 오함마나 철근을 들고나오는 놈이 있어 백소린이 수세에 몰렸다.
"이익!"
"죽어!"
"꺼져! 꺼지라고!"
"개 같은 새끼들!"
하지만 백소린은 백소린이었다.
고작 몇 번 전투를 치렀다고 빠르게 성장하고 있었다.
더 날렵해지고 더 예리해져서는 목을 딴다.
'역시 천살성.'
그래서 더 고민하게 된다.
천살성은 백소린이 타고났지만 나머지 세 특성은 에피소드 2, 좀비 사태 때 여기서 얻어야 하니까.
'불굴을 어떻게 얻어주지?'
나 같은 경우에는 여섯 개 특성 조합으로 만들면 된다.
오염 저항, 마약 저항, 독 저항, 저주 저항, 질병 저항, 정화, 이렇게 여섯.
그게 아니면 굉장히 어려운 특수 퀘스트를 클리어해야 하는데······
백소린을 거기 데려가면 죽기 십상.
아케인 서울에서도 유료 아이템을 들이붓는 게 정석 공략이었으니까.
'방법이 있을 거야.'
고심하는 가운데서도 계속 전진했다.
죽이고 죽이고 또 죽이고.
백소린의 눈이 서서히 충혈되는 게 보인다.
천살성의 전투 경험치 1000% 적용으로 빨리 성장한 건 좋은데 부작용이 슬슬 시동을 거는 것이다.
그래서 불굴이 필요하다.
모든 상태 이상에 강력한 저항력을 선사하는 특성.
그게 없으면 백소린은 백소린이 되지 못한다.
SR 천살성은 되도 SSR로는 못 올라간다고.
"악!"
금역을 반의반 정도 주파했을까?
잘 싸우던 백소린이 갑자기 비명을 질렀다.
깜짝 놀라 백소린을 쳐다본다.
막 검을 뻗어 좀비 하나를 처치한 백소린.
사슴처럼 쭉 뻗은 다리.
그 끝에 좀비 한 마리가 매달려 있었다.
팔도 다리도 잘린 채, 몸통과 머리만 남은 좀비.
놈이 백소린을 물어뜯었다.
절묘하게도 방검복이 보호하지 못하는 위치.
다 낡아빠진 운동화만 하나 신은.
발뒤꿈치를.
백소린 -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