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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

백소린 -2-

퍼억!

백소린이 힘껏 검을 뿌렸다.

정확한 자세, 강맹한 기세.

처음과 다르게 단박에 두개골을 갈라버린다.

머리가 뿌적 갈라지면서 고개를 떨구는 좀비.

그러나 고글을 뒤집어쓴 백소린의 얼굴이 창백하기 그지없었다.

"서, 선생님······ 저 어쩌죠?"

원래 세계에서나 이 세상에서나 통하는 상식.

좀비에게 물리면 좀비가 된다는 것.

나는 두 손을 아래로 내리는 시늉을 했다.

"진정하고 앉아 봐."

"어떻게 진정해요! 좀비한테 물렸는데!"

백소린이 소리를 빽 지른다.

천살성다운 감정변화.

나는 먼저 바닥에 앉아서 옆을 툭툭 쳤다.

"성질내지 말고 앉아 보라니까. 화내면 피가 빨리 돌아서 더 빨리 좀비 된다."

"으······"

백소린이 발을 동동 굴리다가 겨우 진정했다.

그러나 두 눈은 아직도 충혈되어 있다.

내 옆에 앉고는 바닥을 몇 번 긁고는 붉은 눈으로 내게 물었다.

"방법이 있는 거죠, 선생님? 선생님이라면 무턱대고 절 데려오시진 않으셨을 거 아니에요."

사실 그렇다.

치유 물약만 준비하지 않고 성수도 넉넉히 가져왔다.

성수는 모든 삿된 것과 변이를 물리치는 힘이 있으니까.

하지만······

나는 바로 성수를 내미는 대신 가라앉은 눈으로 백소린을 주시했다.

"왜, 왜 그러세요?"

백소린이 괜히 켕기는 어조로 묻는다.

자신이 생각하기에도 조금 사납게 반응했다는 사실을 깨달은 것.

그래. 여기서 한 번 짚고 넘어가는 게 좋겠지.

"소린아."

"네?"

"내가 왜 널 제자로 받았다고 생각하니?"

"어······"

약간은 자신 없다는 표정을 짓는 백소린.

"저는 잘 모르겠지만, 선생님 눈에는 제 재능이 보여서요?"

"맞아. 말했지? 넌 초인계 역사를 새로 쓸 거라고. 내가 본 사람 중에는 네 재능이 최고야. 서우진 정도만 비슷하지, 나머지는 아무리 천재에 영재로 유명한 사람도 너만큼은 아니었어."

"설마요. 말씀은 감사하지만, 정말 그랬다면 이미 저는 초인으로 각성하지 않았을까요?"

"그야 평범한 천재와는 다른 재능이니까."

잠시 뜸을 들였다가 말했다.

목소리에 힘을 가득 담은 채로.

"소린아, 잘 들어라."

"네."

"넌 천살성이다."

천살성!

백소린의 입이 벌어진다.

몸이 떨리기 시작한다.

"제가, 제가 천살성이라고요?"

"맞아."

"아니에요! 선생님이 잘못 아신 거예요! 제가 그런 사악한 살인마일 리가 없어요! 전 사이코패스가 아니라고요!"

이 세상에선 천살성 인식이 별로 안 좋은가 보다.

게임에선 극강의 1티어 특성이었지.

전투 말고는 경험치를 못 얻지만 전투 경험치 1000%라는 것만으로도 떡을 친다.

전투 시작 시 광분 상태에 빠지지만 뭐 어때.

다른 보조 특성이나 정신 방어 아이템으로 보조해주면 컨트롤도 잘 되는데.

"천살성이라고 꼭 사이코패스는 아니고, 반드시 살인마가 되는 것도 아니야."

나는 차분히 설명해주었다.

"중요한 건 극복할 수 있냐 없냐지. 극복하면 어엿한 전사가 돼고 못하면 광전사 돼서 네가 말한 것처럼 살인마 엔딩나는 거다."

"하지만 드라마에선······"

"드라마를 믿을래 나를 믿을래?"

백소린이 아랫입술을 잘근잘근 깨문다.

나를 보더니 내 투구, 방패, 신발, 도끼를 한 번씩 쳐다보았다.

불과 사흘 전까지 봤던 각성 의식을 상기하는 모양.

이내 천천히 머리를 끄덕였다.

"선생님을 믿어요."

"잘 생각했다. 우선 신발부터 벗어 봐."

운동화를 벗고 방호복도 다리만 분리해서 확인했다.

까만 핏줄이 거미줄처럼 꾸물꾸물 돋아 있었다.

그마저도 모자라 실시간으로 확장하는 중.

직접 물린 부위는 이미 까맣게 변하여 괴사되기 직전이다.

"선생님······"

여기선 안심시켜주는 게 좋겠다.

골프백 깊숙한 곳에서 약병 두 개를 꺼냈다.

별빛을 담은 액체가 화사하게 일렁인다.

성수.

최하급이지만 좀비 따위에게는 차고 넘쳤다.

백소린이 안달하며 손을 뻗다가 별안간 멈칫했다.

"선생님? 혹시 이걸로 뭘 해야 할까요?"

합리적인 추론이다.

그냥 치료해줄 거면 성수부터 줬지, 천살성을 굳이 언급하진 않았을 테니까.

나는 성수 두 병을 백소린 앞에 늘어놓았다.

"천살성을 극복하려면 관련 능력을 각성해야 한다. 그건 너도 알지?"

"네."

"생각해 봤는데 이게 최선이야. 좀비에게 물려서 좀비 되기 직전까지 가는 거."

"어······"

"위인전 보면 나오잖아? 죽기 직전에 각성해서 위기를 극복하는 사람들 말이야."

백소린이 울상을 짓는다.

"위인전도 아니고 소설에나 나오는 얘기잖아요······"

그런가?

내가 이 세상 책을 본 적이 없으니 몰랐지.

하지만 남자는 자신감으로 먹고사는 법.

나는 시치미를 뚝 뗐다.

"너라면 충분히 소설 속 주인공이 될 수 있지. 천살성이잖아, 천살성."

"천살성은 좋은 게 아니잖아요······"

"잘 쓰면 좋은 게 되지. 같은 물도 독사가 마시면 독이 되고 소가 마시면 우유가 되는 법이야. 날 믿어봐라. 내가 안 된다고 생각했으면 비싼 돈 줘가면서 성수 사 왔겠니? 이거 하나에 5백만 원씩 해."

"5, 5백만 원이요?"

"그래. 난 벌써 너한테 2천만 원 태우는 거야. 너 연봉이 오늘 하루 벌써 날아갔네? 안 될 것 같으면 아무리 돈이 많아도 2천씩 쓰겠어?"

백소린은 식겁한 표정이다.

하여간 초인 관련 물품이라고 하면 단위부터가 달라진다니까.

이내 눈을 질끈 감는 백소린.

"해볼게요."

"잘 생각했다."

"그, 그래도 위험할 것 같으면 도와주셔야 해요! 전 좀비 돼서 죽기는 싫다고요!"

"약속한다. 대신 최대한 버티다 진짜 숨넘어가기 직전에 마셔라. 알았지?"

"네, 네!"

백소린이 성수 한 병을 쥐고 품에 안았다.

눈을 질끈 감는다.

답답하다고 방호복까지 다 벗어 던졌다.

가볍게 입은 반 팔 티셔츠와 돌핀 팬츠.

하얀 살갗 위로 검은 핏줄이 질주하고 있었다.

"소린아. 속으로 네 이름 계속 외우고 있어."

"이름이요?"

"그래. 내가 듣기로는 좀비 되면 마지막에 자기 이름이랑 존재를 잊는다고 하더라. 네 이름이 생각나지 않으면 그게 바로 좀비 되기 직전이라는 신호야. 그때 성수 마시면 돼."

"알겠어요."

시간이 흘렀다.

거의 두어 시간 이상.

이제 검은 핏줄이 백소린의 몸 전체를 뒤덮었다.

좀비에게 물렸던 발뒤꿈치는 다 썩어서 떨어져 나갔다.

"백소린, 백소린, 백소린······"

백소린은 소리 내서 자기 이름을 외우고 있었다.

전사 계열 초인이라 그런지 역시 오래 버텼다.

그러나 SSR 캐릭터라 해도 끝은 오는 법.

갑자기 머리를 뒤로 확 젖혔다.

"으윽!"

신음과 함께 눈을 치뜨는 백소린.

"배, 백, 배, 애, 어어, 으으으······"

입에서는 사람의 목소리 대신 짐승의 울음이 터진다.

지금 성수를 마셔야 한다.

1초라도 늦으면 돌이킬 수 없는 일이 벌어질 수 있었다.

무심코 백소린에게 손을 뻗었다.

이미 정신이 나간 것 같아 그런 거였는데, 뜻밖에도 백소린이 우렁찬 고함을 질렀다.

"나는 백소린이다!"

광기가 아닌 선명한 이성이 맺힌 눈동자.

육체는 한계 상황.

그러나 정신이 버티고 있었다.

이미 초인의 영역에 반쯤은 진입하여, 냉철하고도 차가운 안광을 사방에 뿌린다.

백소린이 성수를 마신 것은 1분 후.

신경계를 타고 대뇌까지 침입한 죽음의 마력을 버텨낸 것이다.

솨아아아.

맑은 빛이 백소린을 씻어내렸다.

군데군데 살점이 패이긴 했으나 멀쩡하게 회복.

손상된 부위에는 치유 물약을 거즈에 찍어 발라주었다.

그러자 금방 회복되고 모든 것이 정상으로 돌아간다.

"훌륭해. 생각보다 훨씬 잘했다."

"진짜 죽는 줄 알았어요."

"특별한 변화 같은 건 안 느껴지냐?"

"글쎄요. 거기까진 잘······"

내 계산으로는 아직이다.

백지 신체를 가진 김전사라면 모르나, 다른 캐릭터들은 특성 하나 얻기가 꽤 힘들거든.

앞으로 몇 번은 더 반복해야겠지.

거의 10번 가까이.

"계속 가자. 아. 방검복 그냥 벗어버리는 게 낫겠다. 그 상태로 싸워."

"네? 농담이시죠?"

"치유 물약이랑 성수가 이렇게 많은데 무슨 걱정이냐. 그리고 다친 상태로 물려야 효과가 더 빨라."

백소린이 입을 뻐끔거린다.

어이없다는 듯 손가락으로 자기가 입은 옷을 가리켰다.

상의는 배꼽이 노출된 반 팔 티셔츠.

하의는 눈이 시원해지는 돌핀 팬츠.

운동화도 좀비가 물어뜯어서 한쪽이 너덜거린다.

나는 진심으로 말했다.

"훈련은 극한상황에서 해야 효과가 좋아. 천살성은 상처 입으면 더 세지는 거 너도 알지?"

"그, 그건 저도 알지만 너무 하시는 거 아니에요?"

"나라고 편하게 훈련한 줄 아냐? 나도 목숨 몇 번이나 날려가며 강해진 거야. 괜히 아픈 애들 그렇게 몰아붙인 줄 아니?"

"하아······ 이거 완전 스파르타식이네요."

"싫으면 포기해도 되는데, 알지? 여기서 포기하면 이룬 거 하나 없이 빚만 생긴다."

최소한 물약 값이랑 성수 값은 받아야지.

백소린이 눈을 꽉 감았다.

"할게요. 좀비한테도 물렸는데 여기서 포기하면 억울해서 못 살아요."

"잘 생각했다. 이왕 시도했으면 끝을 봐야지."

"알았다구요."

천살성 발현 때문인지 묘하게 까칠해진 백소린.

아예 백소린을 앞세웠다.

시원한 옷차림에 헬멧과 고글만 쓴 패션이 참 묘했다.

백소린은 적당히 긴장해서는 어둠 속을 더듬어 나갔다.

"아악!"

그리하여 치른 첫 전투.

방검복 벗었다고 꽤 소극적으로 변했다.

대범하게 파고들어 공격하지 못한 까닭에 좀비에게 몇 번이나 얻어맞은 것.

손에 든 게 오함마였으면 큰일 났겠다.

그나마 녹슨 철근만 하나 쥐고 있어서 버텼지.

"죽이지 말고 한 번 물려."

"아, 진짜."

울상을 지으면서도 순순히 따라서 한다.

일부러 좀비에게 물린 다음 목을 땄다.

그리고 휴식.

아쉽게도 푹 쉴 수가 없었다.

전투 소음을 들은 건지 좀비 두 마리가 더 등장한 까닭.

백소린이 넌더리를 내며 일어섰다.

"너무하네. 진짜."

"걔들한테도 한 번씩 물려."

"네에에? 농담하지 마세요. 벌써 어지럽다고요."

"농담하는 거 아니다. 극한상황에 들어가야 한다니까?"

"저한테 왜 이러세요······"

백소린은 꿍얼거리면서도 내 지시대로 움직였다.

좀비한테 맞고 손톱에 긁히면서도 한 번씩 물린 것.

그다음에야 몸을 빠르게 움직여 목을 쳤다.

하여간 천살성은 천살성이야.

방어구도 없이 싸운 두 번째 전투 만에 저리 익숙해진 걸 보면.

"나는 백소린이다, 나는 백소린이다······"

좀비화가 빠르게 진행된다.

몇 분이나 지났다고 전신이 까맣게 변하고 있었다.

맞서는 백소린도 처절했다.

입에서 까만 게거품이 흐르도록 버틴 다음에야 성수를 마시고 원래대로 돌아왔다.

"흐아악! 저 살아 있는 거죠?"

"몇 번만 더하면 되겠다."

"으······ 또 해야 한다고요?"

"거의 다 됐어."

정말이다.

성수가 몸을 씻어내리는 순간.

주위 마력이 느릿느릿 백소린에게 향하는 것을 느꼈다.

마력 회로가 생성되는 것.

천살성 고유의 능력이 위기 상황을 맞이하여 꿈틀대고 있었다.

굵고 짧게 한 번만 더 하면 되겠는데······

"아, 그렇지."

"뭐가요?"

"치료하면서 따라와."

채앵!

검을 뽑았다.

성검이 반갑다는 듯이 빛을 뿌린다.

성스러운 빛이 어둠을 채우자 백소린이 황홀하다는 듯이 쳐다보았다.

내가 앞장서서 내려갔다.

"끄어억!"

"꾸륵!"

좀비?

그냥 단칼에 베었다.

백소린처럼 목을 치고 머리를 뚫고 할 필요가 없었다.

흑염을 두르고 참격으로 베자 단숨에 두 토막 나고, 상처에서 일어난 검은 불꽃이 좀비를 불살랐다.

"와, 선생님은 역시 다르시네요."

"이 정도는 쉽지. 다른 초인들도 다 이 정도는 해."

"저도 될까요?"

"각성하고 무기만 적당한 거 구해도 충분하지."

쭉쭉 내려간다.

게임에서 구현된 것과 아주 똑같지는 않아도 거의 흡사했다.

그래서 도착한 곳은 어느 한 커다란 공동.

딱 봐도 보스 몬스터가 있을 법한 음산한 장소.

그리고 중심에 우두커니 서 있는 커다란 형체.

근육이 기괴하게 부풀어서 흡사 고릴라를 보는 것 같다.

강화 좀비도 아니고 변이 좀비라고 해야 할까?

백소린의 얼굴이 새하얗게 변했다.

"서, 선생님? 저걸 저 혼자 싸우라고요?"

"그래. 완벽한 1레벨 변이체다. 한 대 맞으면 장 파열 될 수 있으니까 꼭 피하고, 체액도 좀비독인데······ 그건 그냥 먹어. 그래야 더 빨리 변이되지."

"진짜 너무해요. 혹시 전생에 저한테 사기당하셨어요?"

"마음대로 생각하고, 잘 싸워라. 죽지는 않게 도와주겠지만 맞고 안 맞는 건 네 몫이야."

"으, 진짜······"

백소린이 검을 움켜쥐고 나섰다.

당연한 말이지만 상대가 안 됐다.

1레벨이다.

진짜 1레벨 좀비.

무늬만 1레벨이 아니라 뛰어난 능력치와 준수한 특성을 가진 강력한 적.

쇼핑몰 금역 1층 보스이자 2층 수문장.

백소린은 제대로 공격을 못 하고 피하기 바빴다.

터업!

"아!"

운 좋게 공격을 맞춰도 제대로 들어가지 않는다.

당연히 속절없이 한 대 맞고 튕겨 나가는 신세가 되었다.

"아악!"

입에서 왈칵 피를 토한다.

기세등등해서 달려드는 변이 좀비.

맞고, 맞고, 또 맞았다.

왼팔이 부러졌고 갈비뼈가 골절되면서 폐를 찔렀는지 쌕쌕 숨소리가 났다.

그 와중에도 검을 놓치지 않은 건 칭찬할 만하다.

결국 다리를 밟히고 반쯤 으스러지면서 바닥을 기는 신세가 되었다.

"이이익!"

이제 슬슬 개입하려는 찰나.

백소린이 기적을 일으켰다.

입을 쩍 벌리고 잡아먹겠다고 덤비는 변이 좀비.

절체절명의 순간 찌른 검이 연약한 입천장을 뚫고 뇌를 직격했다.

변이 좀비가 그대로 허물어진다.

"으윽!"

육중한 몸에 깔리고, 피를 뒤집어쓰면서도 백소린은 비명 한 번 지르지 않았다.

신음 한 번 흘리고, 검은 피 섞인 침을 퉤 뱉었을 뿐.

"잘했다! 잘했어!"

나도 진심으로 손뼉을 쳤다.

죽을 수도 있다는 지독한 공포심.

직접 깔아뭉갠 시체의 무게감.

여기저기 흰개미처럼 물어뜯는 통증.

극독으로 인해 급속도로 진행되는 좀비화.

이 모든 스트레스 상황이 백소린에게 오직 하나만을 강요했다.

각성.

마력이 춤을 추며 몰려가고 내 고글에 담긴 [탐지]를 통해 백소린의 척추에, 심장에 마력 회로가 움트는 장면이 보였다.

이걸 그냥 놔두면 죽음의 마력에 근간을 둔 엉뚱한 특성을 개화할 터.

쫄쫄쫄.

백소린의 머리에 성수를 부었다.

무려 세 병이나.

최하급 성수지만 이 정도로도 충분했다.

여기서 그치지 않고 하급 치유 물약도 입에 물려주고 상처마다 아낌없이 뿌렸다.

잠시 넋 나간 듯 보이던 백소린의 눈동자에 빛이 돌아온다.

마력을 흡수하긴 하는데 무차별적으로 흡수하지 않고, 한 차례 걸러 흡수한다.

아울러 마력 회로에도 변화가 있었다.

사악하고 질척한 다 썩은 진흙 같은 질감에서 단단하고 굳세면서도 뜨거운 용암을 품은 화산 같은 인상으로 변한 것.

느껴졌다.

변화한 회로가 품은 의미가.

[불굴].

SSR 백소린의 첫걸음.

여기에 폭주 기관차와 구사일생이 더 붙어야 하지만 기본 바탕은 갖춰졌다.

'좋았어.'

주먹을 불끈 쥐다 말고 움찔했다.

이 미묘한 이질감······

백소린을 본다.

천살성과 불굴, 두 특성이 낱말 파편처럼 떠오른다.

더불어 어딜 어떻게 다쳤는지 속속들이 파악된다.

입고 있는 옷과 손에 쥔 검이 어떤 상태인지도.

이건 탐지가 아니다.

강력한 영감으로 상대를 간파하는 특성.

탐지와는 비교도 안 되는, 특히 PVP에서 1티어로 평가받는 특성.

통찰이었다.

백소린 -3-

생각지도 못한 보너스.

마음이 넉넉해진다.

백소린의 각성도 끝나가는 상황.

골프백에서 전투식량 2팩과 생수통 2개를 꺼냈다.

"아······"

그세 각성이 끝난 백소린.

꿈꾸는 듯한 표정으로 천장을 올려다본다.

마력이 물결치고 있었다.

핏물과 땟물로 얼룩졌던 얼굴이 반질반질하게 변했다.

자기 몸도 더듬어보고, 근육도 꾹꾹 눌러보고.

신기하긴 할 것이다.

마력 감각도 개방되고 전신에 전능감이 넘쳐 흐를 테니.

"와서 밥 먹어라."

"어? 밥이요? 전투식량이네요?"

"나중에 금역 같은데 들어갈 땐 미리미리 준비해야 해. 며칠씩 걸릴 때도 많거든."

"오늘은 금방 끝날 거라고 하지 않으셨어요?"

"그래도 하루는 걸리지."

제 1 매립지 같은 오염 시설이라면 밥은 아예 안 챙긴다.

다 오염돼서 오염 마력이 체내에 직격하니까.

죽음의 마력은 오염 마력에 비하면 독성이 약하니까 취식이 가능하지만.

내가 준비한 전투식량은 원래 세계로 치면 3형, 즉각취식형이었다.

맛은······

"맛있어요!"

백소린이 눈을 반짝였다.

맛있다고?

나는 백소린에게 불신에 찬 눈빛을 보냈다.

분명히 똑같은 제품인데 맛있어?

짬밥이 짬밥이고 군납품이 군납품이다.

여기 들어오기 전에 미리 하나 먹어봤는데 영 아니었다고.

원래 세계의 전투식량과 흡사한 그맛.

이게 맛있다고 하면 평소에 얼마나 못 먹고 살았다는 건지······

'아.'

생각해 보니 백소린은 각성한 직후다.

탄수화물이 땅기겠지.

온종일 칼질하고 뛰어다니고 좀비들한테 물렸으니 더더욱.

"내 것도 먹을래?"

"어······ 그래도 돼요? 선생님은요?"

"난 별로 생각 없다."

"주시면 감사히 먹을게요."

반도 안 먹은 전투식량을 밀어주었다.

그걸로도 모자라 전투식량 두 팩을 더 까야 했다.

어차피 오늘 안으로 금역을 완료할 거고 준비한 전투식량은 많으니 괜찮다.

백소린이 배를 두드리며 민망한 표정을 지었다.

"제가 너무 많이 먹었죠?"

"전사 계열 초인은 보통 그렇지. 칼로리 소모가 많으니까. 눈치 보지 말고 먹고 싶은 대로 먹어."

"원래 그런 거예요? 그런데 선생님은 많이 안 드시잖아요."

"난 마력 효율이 다른 초인들보다 좋아서 그래."

"어······ 그럼 저도 선생님처럼 해야 하지 않아요?"

"사람마다 다르지. 넌 칼로리 소모 많으니까 그냥 많이 먹는 게 나아."

"네! 열심히 먹겠습니다!"

천살성에 폭주 기관차 조합.

마력도 칼로리도 어마어마하게 소모한다.

'폭주 기관차는 조금만 신경 쓰면 돼.'

애초에 불굴은 상태 이상 면역이 아니다.

강한 저항력을 선사할 뿐.

광기와 냉정, 그 사이에서 전투를 치르다 보면 폭주 기관차를 획득하게 된다.

남은 것은 하나.

'구사일생은?'

생각해 보니 이건 얻을 수밖에 없겠다.

나는 항상 짊어지고 있는 골프백을 한 번 쓰다듬었다.

거금을 들여 공간 이동 마법칩을 사 왔으니 만약의 경우라도 죽지는 않을 것이다.

최선은 수정칩을 안 쓰고 살아나오는 거지만.

"가자. 지금부터는 사정 보지 말고 전력으로 죽여버려."

"네! 선생님!"

"좀 강한 놈들 나올 거니까 방심하지도 말고."

"넵!"

최하층을 향해 쾌속 돌파.

초인이 된 백소린은 정말이지 엄청나게 강해졌다.

좀비가 보이자마자 눈을 희번덕이며 돌격하는데, 일격에 강화 좀비가 두 조각이 났다.

두개골?

갈비뼈? 가슴뼈?

뭐든 걸리기만 하면 썽둥썽둥 잘렸다.

공장제 양산형 검을 들고도 그랬다.

나중에 제대로 된 검을 구하면 진짜 볼 만하겠다.

"선생님! 이거 보세요!"

쌔액! 꽝!

어느새 [돌진] 특성을 획득한 백소린.

여기에 [도약], [가속], [돌파]까지 연달아 획득하며 좀비들 사이를 종횡무진 누빈다.

다음 층으로 향하는, 꽤 큰 공동에서 좀비 스무 마리와 마주쳤는데 그때 보여준 움직임은 아주 무시무시했다.

말 그대로 폭주 기관차처럼 좀비들을 갈아버린 것.

나도 폭주 기관차 특성을 얻을까 고민될 정도로 인상 깊은 광경.

'나한텐 안 어울리지.'

폭주 기관차의 파괴력은 확실히 굉장하다.

대신 일 보 후퇴나 돌아간다는 개념이 없었다.

오직 전진만을 외치는, 그야말로 상남자 특성이면서 광전사와 검투사에게 어울리는 특성.

"잘했다. 그렇게만 해. 오늘 2레벨은 찍겠다."

"벌써요?"

"너도 느껴지지? 좀비 죽일 때마다 마력이 흘러들어오는 거."

"네. 느껴져요."

"천살성이라 그래. 넌 싸우고 죽이면서 성장한다. 수련 같은 건 절대 쓸모없으니까 아예 하질 마."

"그······ 명상은 해야 하지 않을까요?"

"필요 없어. 차라리 낮잠을 자라. 멘탈적으로 힘들면 나 찾아오고."

"네!"

모든 전투를 백소린이 치렀다.

좀비 무리, 강화 좀비, 변이 좀비, 무장 좀비, 마법 좀비, 강령 좀비······

강해지는 속도를 보고 있으니 무서울 지경이다.

나도 빨리 강해졌지만 저 정도는 아닌데.

조만간에 넥타르를 더 마시든지 해야겠다.

선생님 소리 들으면서 따라잡힐 수는 없지.

서우진이야 어쩔 수 없었지만.

똑, 똑.

동굴 천장에서 물이 떨어진다.

희한하게도 검은색으로 번들거리는 물방울.

동굴 벽이 옻칠한 듯 기이한 광택이 어려 있었다.

나는 손을 들어 백소린을 제지했다.

"마지막이다. 넌 뒤로 빠져."

"제가 하면 안 돼요?"

"너 유령 잡을 방법은 있어?"

"유, 유령이요?"

"이 뒤에 있는 놈, 유령이다."

3레벨 보스.

사실 나나 되니까 혼자 잡을 생각을 한 거지, 충실히 파밍한 3레벨 풀파티가 잡는 마물이다.

전사 계열 초인이라면 마법검은 필수.

최소한 기름 종류 소모품은 갖고 와야 한다.

백소린이 주춤주춤 물러났다.

"전 뒤에 있을게요······"

"아예 안 들어오진 말고. 냉기 영역이 좀 세긴 한데 너라면 버틸 수 있어. 가끔 영혼 창 날리는데 그건 조심해라."

"냉기 영역에 영혼 창이요? 무슨 리치라도 되요?"

"비슷하지."

보스룸으로 가는 길은 금줄로 막혀 있었다.

X자로 쳐진 금줄 여러 겹.

게임에서 봤던 것과 다르게 봉인이 온전하다.

저걸 무너뜨리면서 좀비 사태가 시작되겠지.

저 안에 고여 있던 죽음의 마력과 냉기 마력이 흘러나올 테니.

까아앙!

곡괭이를 들어 금줄을 부쉈다.

마법적으로는 강력할지 몰라도 물리적으로는 약한 금줄.

곡괭이에 맞자마자 쪼개져 부서졌다.

"어!"

백소린이 쪼개진 금줄을 잡았다가 깜짝 놀랐다.

잡자마자 푸시시, 하며 흰 연기가 피어오른 까닭.

반사적으로 내팽개치자 떨어진 금줄이 금방 검게 변하더니 다 삭아 없어졌다.

"마법 물품에는 손대는 거 아니다. 마법사가 감정해주기 전에는 쳐다보지도 마."

"으······ 괜찮을까요?"

"저주받은 물건은 아니니까 괜찮지. 앞으로는 조심해."

"진짜 배울 게 너무 많네요······ 초인 되고 다 끝난 줄 알았는데."

사실 어지간한 저주에 당해도 괜찮다.

불굴 특성으로 다 튕겨낼 테니.

이윽고 모든 금줄을 제거.

성검을 쥐고 성큼성큼 안으로 전진했다.

어둑한 통로를 한참이나 지나고 명백히 인공적인 분위기의 공동이 나왔다.

정육각형으로 깎아낸 콘크리트 공동.

전기가 아직도 들어오는 걸까?

천장에서 형광등이 희뿌옇게 빛나고 있었다.

기온은 차갑다. 숨을 쉴 때마다 방독면을 쓰지 않은 백소린의 입에서 흰 김이 구름 과자처럼 뿜어졌다.

공동 한쪽에 살짝 열린 철문이 보인다.

그 안에서 냉기가 쏟아지는 중.

게임에서 백소린이 발견되는 냉동 창고였다.

전리품도 저 안에 있겠지.

"유, 유령은요?"

백소린이 달달 떨며 묻는다.

나는 말없이 정면을 주시했다.

공동 중심.

콘크리트 바닥을 뚫고 나온 손뼈.

뭉그러지고 쪼개진 해골 손에 들린 스마트폰에서 발랄한 노래가 흘러나온다.

[곰 세 마리가 한 집에 있어♪ 아빠곰 엄마곰 애기곰♪]

음산한 분위기에 어울리지 않는 노래.

원래 세계에서도 악취미라고 불평이 많았지.

이렇게까지 해야 했냐고.

천천히 걸어간다.

뚜벅뚜벅 발소리가 퍼지고 거기 반응하듯 노래가 엿가락처럼 길어진다.

[곰 세 마리가······ 가가가······ 한한한한한한······집집집집집집집집집······에에에에에에에에에에에에······]

낮아지는 음정.

스마트폰이 출력하는 기계음.

한데 뒤섞여 기괴하고도 으스스한 분위기를 연출한다.

손이 쑥 올라왔다.

해골 손에서 영혼 손이.

죽음의 마력에 찌들어 거무튀튀하게 물든, 한편으로는 반투명하여 훤히 뒤가 비치는 마물.

백소린이 긴장하여 몸을 굳혔다.

"저, 저게 뭐예요?"

얼핏 보기에도 흉악하게 생겼다.

흔히 생각하는 사람 유령이 아니라, 시체를 겹치고 포개어 접합한 다음 영혼만 추출해서 만든 듯한 모양새.

시체 더미를 그대로 유령화시켰다고 할까?

그 와중에 허공을 붕붕 떠다니고 눈 감은 채 벌린 입에선 흐릿한 허밍이 흘러나오니 악몽의 주인이 따로 없다.

"유령 접합체다. 원통하게 죽은 원혼들의 원념과 죽음의 마력이 결합해서 탄생하는 괴물이지."

"보통은 그냥 좀비나 유령 되는 거 아니었어요?"

"보통은 그렇지. 보통은."

하지만 강력한 아티팩트가 있다면 이야기가 달라진다.

쇼핑몰 던전의 메인 보상.

가공해서 무기나 방어구로 만드는 게 가장 좋지만, 직접 쓰는 걸 포기하고 4대 세력에 제출하면 훌륭한 무구로 바꿀 수 있는 물건.

"준비해라."

"네? 어어어?"

내가 말하는 것과 동시에 유령이 길게 비명을 질렀다.

소리는 없다.

대신 지독한 냉기가 뿜어졌다.

고드름 같은 바람이 불고 공동 전체가 얼어붙는다.

고글에 서리가 끼고 방독면에 얼음이 맺혔다.

"으으으."

백소린이 몸을 오들오들 떤다.

불굴이 있다곤 하나 버티기 힘든 냉기.

나도 조용히 특성을 교체했다.

[에인헤랴르 연공법][인내][활기]

[파산검법][통찰][흑염]

인내만으로 버티기는 힘들다.

마력 연공법을 극한으로 발휘하여 마력을 돌려도 그렇다.

이제부터는 시간 싸움.

처억, 처억.

얼어붙는 신발을 간신히 떼어 걸음을 옮긴다.

백소린은 이미 뒤쳐진 다음이다.

성검을 들어 유령 집합체를 가리키자 성검이 스스로 빛나기 시작했다.

[캬아악!]

발작적으로 비명을 지르는 유령 집합체.

영혼손을 내게 가리킨 후 그대로 쏘아낸다.

영혼 창!

속도가 빠르다.

그러나 영혼손을 내게 가리키던 때부터 어떻게 날아올지 궤적이 훤히 보였다.

아니, 인지되었다.

통찰의 효과.

그래서 가볍게 피할 수 있었다.

얼음 때문에 발이 잘 안 움직여도 괜찮다.

내겐 신속 신발이 있으니까.

영혼 창을 피할 때만 신속을 발동시켜 피하고 전진.

서두르지 않았다.

백소린의 상태만 힐끔힐금 확인하며 유령 집합체에게 접근했다.

쌔애액!

[캬아악!]

마침내 내지른 참격.

공격 순간 활기를 참격으로 바꾸어 공격했다.

성검이 유령 집합체를 통과하며 번쩍 빛나고 흑염이 맹렬하게 타올랐다.

비명이 직접 대뇌에 내리꽂힌다.

치명타는 아니다.

그 증거로 유령 집합체는 생생했고 냉기 영역도 차가움을 더해가고 있었다.

"제대로 해봐."

[캬아악!]

유령 집합체가 천천히 몸을 돌린다.

하나둘 일어서는 영혼손.

이어, 나를 목표로 해서 영혼 창을 마구 날려댄다!

회피를 장착하고 피한다.

방어를 장착하고 쳐낸다.

신속이 나를 도왔다.

통찰로 미리 인지하는 탓에 할 수 있었다.

맞을 것 같으면 성채와 철갑을 활성화했다.

유령 집합체는 전형적인 기어체크(전투력 측정) 보스.

패턴은 단순하다.

전장 전역에 까는 냉기 영역과 연발 영혼 창이 전부.

따라서 최소한의 생존 능력을 갖춘 다음 극딜하는 게 정석 공략이었다.

'페이스를 올리자.'

나는 괜찮다.

몇 날 며칠도 버틸 수 있다.

문제는 뒤에 있는 백소린.

"으으, 으으으······"

이미 얼굴이 새파랗게 질렸다.

게임에서보다 경험을 적게 쌓은 판이라 생존하기도 힘들었던 것.

그러나 이 정도는 견딜 것이다.

나는 묵묵히 검을 휘둘렀다.

피하고 막고 지르고!

어느 순간 냉기가 덜해졌다는 느낌이 오고, [냉기 저항]을 획득하자 더욱 속도가 붙었다.

오른손에는 성검.

왼손에는 격노 도끼.

격노마저 활성화한다.

파산검법의 산 부수기, 산 가르기를 연속 시전하며 흑염을 불태운다!

3레벨 4명 풀파티가 와서 잡아야 하는 던전 보스.

그러나 내 앞에서는 때리기 좋은 샌드백에 불과했다.

계획적으로 꽉꽉 채운 특성 여섯 개.

전신을 도배하다시피 한 마법 장비.

사악한 존재에게 특히 효과가 좋은 성검.

무형체에게 추가 피해를 입히는 흑염.

나야말로 유령 집합체의 하드 카운터였으니까.

어설픈 3레벨 풀파티가 밍기적 밍기적 깎아내는 딜보다, 나 혼자 퍼붓는 딜이 훨씬 강력했다.

"끝이다!"

최후의 일격.

[섬광]

눈 부신 빛이 피어나고.

유성처럼 길게 꼬리를 매단 검이 유령 집합체를 관통했다.

백소린 -4-

[흐어어어······]

바람 빠지는 듯한 소리.

유령 집합체가 빙글빙글 돌아간다.

반투명한 내부에서 흐릿한 빛이 새어나왔다.

그러기를 잠깐, 구멍 뚫린 풍선처럼 쪼그라들며 소멸해버렸다.

동시에 사라지는 냉기 영역.

기온이 삽시간에 정상으로 돌아가자 얼었던 몸도 금세 풀렸다.

"끄, 끝난 거예요?"

"그래."

잠시 서서 승리를 만끽했다.

유령 집합체가 사라진 자리에는 아무것도 없다.

대신 처음 나타났던 곳으로 걸음을 옮겼다.

여전히 해골 손이 지면 위로 삐죽 나와 있고, 해골 손에 쥐어진 스마트폰이 발랄한 노래를 부른다.

[곰 세 마리가 한 집에 있어♪ 아빠곰 엄마곰 애기곰♪]

백소린이 떨떠름한 표정을 짓는다.

"저건 대체 뭐예요?"

"핵이지."

"핵이요? 마력핵?"

"맞아."

"핵이 왜 스마트폰에 붙어 있어요?"

"그럴 수도 있지. 유령들한텐 흔한 일이다. 그리고 핵이 안 됐으면 전원도 이미 꺼졌겠지."

"아, 전기······"

스마트폰에 접근한다.

치지직!

허공에 마력 전기가 튀었지만 무시.

가볍게 뚫고 들어가 스마트폰을 내려다보았다.

화면 잠금 상태인 스마트폰.

환하게 켜진 배경 화면에 한 꼬마가 귀엽게 율동하고 있다.

모르는 얼굴이다.

특별히 귀엽거나 예쁘지도 않다.

그냥 평범한 어린아이.

아마도······

여기 묻힌 인부 중 하나의 딸이겠지.

인부는 딸을 그리며 천천히 죽어갔을 것이다.

화면 속 딸을 보면서.

몸이 얼어붙고 숨통이 끊어졌겠지.

그 원념이, 한이 스마트폰에 응결되어 마력핵으로 변질되었고.

'정말이지 좆 같은 세상이야.'

파직!

추출 특성을 장착하고 사용했다.

스마트폰이 쪼개지면서 결합되어 있던 마력핵이 나온다.

3레벨 마력핵.

거의 주먹 크기.

납작한 스마트폰에서 튀어나왔다고 하기엔 크기가 안 맞지만, 마력핵은 가끔 이렇게 현실을 왜곡하는 경우가 있다.

"마력핵이었네요······"

"그렇다고 했잖아."

"진짜 마력핵은 처음 봐요!"

"앞으로는 지겹게 보게 될 거다."

보스전을 승리했으니 보상을 받을 시간이다.

아까부터 보이던 냉동 창고로 움직였다.

살짝 열린 철문을 통해 냉기가 쏟아진다.

문에 손을 대자 손이 어는 것 같지만 물 저항을 장착하자 금방 괜찮아졌다.

"여긴 왜요?"

"생각해 봐라. 봉인 상태가 너무 허술하지 않았냐?"

"어······ 그렇긴 해요. 벽 하나 뚫으면 바로 금역이었으니까요."

"아무리 돈에 눈이 멀었어도 이렇게 어설프게 덮어놓진 않았겠지. 그러다 금역 폭로되면 갤럭시몰도 타격이 커."

"그럼요?"

"처음에는 이 정도 규모가 아니었던 거지. 그냥 작은 구덩이 수준이었을 거다. 그러다 시간이 지나면서 증식한 거고."

"금역이 커지기도 해요?"

"대개는 안 그렇지. 대개는."

냉동 창고를 헤집는다.

대부분이 잡동사니.

공사하고 남은 쓰레기를 여기 쏟아부은 모양이었다.

어차피 묻을 거, 쓰레기 처리 비용도 좀 아끼자는 생각에서였겠지.

[탐지][보물찾기]

푸른 점들이 무수히 떠오른다.

그중에서도 유독 밝게 타오르는 점 두 개.

"소린아. 저기 좀 파 봐라."

"네? 쓰레기를요?"

"어. 빨리."

"네, 네."

내가 직접 손을 쓸 필요는 없지.

백소린은 불평하지 않고 시원스레 땅을 팠다.

처음에는 검을 쓰려고 하기에 야삽을 골프백에서 꺼내 줬다.

"그거 무슨 아공간 주머니에요? 뭐가 끝없이 나오네요."

"아공간 주머니는 무슨. 골프백이 원래 용량이 커."

"총도 들고 다니시고, 물에다 전투식량에 야삽도······ 정말 전쟁하러 다니세요?"

"가끔 전쟁하긴 했지."

백소린이 땅을 판다.

내가 지시하는 대로 열심히 파헤친다.

조금씩 가까워지는 점 두 개.

마침내 마지막 삽질이 푸른 점을 떠내고, 보물 두 점이 차례차례 모습을 드러냈다.

스아아아.

흐으으으.

암울하고 차가운 기운이 차올라 냉동 창고를 채웠다.

어둑한 힘을 뿌리는 검은 별이 하나.

허연 냉기를 뿜는 가시투성이 별이 하나.

백소린이 몸을 떨며 물러났다.

"저, 저게 뭐예요?"

"결정체다."

"결정체요? 처음 들어요."

"그럴 거다. 흔한 물건은 아니니까."

기원은 모른다.

아케인 서울에서는 그냥 '결정체'라 부르는 재료 혹은 교환권.

잊힌 신의 육체 일부라는 설도 있고 고대의 마법사가 소환한 이계의 파편이라는 설, 속성 마력이 응집되어 변형된 물건이라는 설 등 주장이 분분했다.

'이게 하급이구나.'

이 결정체를 쓰면 3레벨에서 5레벨까지 쓰기 좋은 특성이나 무구를 받을 수 있다.

뭘 받을지도 정해 놓았다.

나는 골프백에서 조그만 마법 상자를 꺼내서 두 결정체를 잘 갈무리했다.

"다 끝난 거죠?"

"고생했다."

"으아아! 끝났다!"

백소린이 길게 소리를 질렀다.

그러더니 내 손을 잡고는 기운 좋게 잡아끌었다.

"얼른 가요! 으, 진짜 죽는 줄 알았네."

"어딜 가?"

"네? 끝났다면서요?"

"본편은 끝났지만 마무리는 해야지. 여기 그냥 놔두고 갈 거냐."

"어······ 설마 정화하시게요?"

"그래야지."

"돈이 엄청나게 든다면서요!"

"일반적인 정화 방법과는 조금 달라. 편법을 쓸 거다."

정화가 아니라 파괴라고 해야겠지.

특수한 상황에서만 쓸 수 있는 방법이다. 위험하기도 하고.

쇼핑몰 금역의 보스, 유령 집합체는 소멸했고 핵이 되던 결정체도 내가 갈무리했다.

금열을 구성하는 세 가지 요소, 원념 마력 왜곡 중 두 가지가 소멸한 것.

따라서 금역은 이미 붕괴하는 중이다.

속도가 아주 느린 까닭에 나도 백소린도 느끼지 못하고 있을 뿐.

골프백에서 주섬주섬 물건을 꺼냈다.

TNT를 닮은 마력 폭탄.

붕괴 중인 금역에 치명타를 가할 물건이었다.

거의 수십 개를 꺼내서 지하 공동에 차곡차곡 쌓자 백소린이 질린 얼굴을 했다.

"진짜 전쟁하러 오셨어요?"

"신경 쓰지 말고 뛸 준비나 해."

"뛰어요? 왜요?"

"이거 터뜨리면 금역이 붕괴하거든. 공간 왜곡에 휘말리면 어떻게 되는지 알지?"

"네? 시한폭탄 만들면 되는 거 아니에요? 아니면 원격으로 터뜨려도 되고요!"

"이거 하급품이라 공기 노출되면 1시간 내로 상해. 불발탄 되니까 그전에 터뜨려야지."

스마트폰을 조작했다.

내가 원격 신관을 설치하고 도화선을 연결하느라 걸린 시간만 거의 10분.

제작, 개조, 수리, 함정 특성을 총동원해도 그랬다.

"뛰어!"

"엄마야!"

남은 시간은 45분 남짓.

백소린이 비명을 지르며 뛰쳐나갔다.

빠르다.

숨 쉬듯 자연스럽게 가속 특성을 사용하고 있었다.

나라고 질 수 없지.

신속과 질주를 함께 사용하여 백소린을 단숨에 따라잡았다.

"더 빨리 달려! 늦으면 죽는다!"

"아, 안 돼요!"

"먼저 간다!"

"같이 가요!"

가뿐히 백소린을 추월한다.

쓰는 특성도 마력도 훨씬 위.

거리를 벌리자 백소린이 이를 악물었다.

"으아아!"

나를 목표로 삼아 돌진하는 백소린.

슈아아, 바람 가르는 소리가 들리며 백소린이 급격히 커진다.

역시 괜찮은 전투 감각.

나는 머리를 한 번 주억거리곤 다리에 힘을 주었다.

쿠앙!

땅을 박차고 날아오른다.

거의 십여 미터 이상.

마침 천장이 높고, 통로가 거의 30도 각도로 기울어져 있어 가능한 일이었다.

도약!

착지한 다음 뒤를 힐끔 보자, 백소린이 얼굴을 잔뜩 붉히는 것이 보였다.

"하압!"

백소린도 도약!

착지한 다음 다시 돌진하여 날 따라잡은 다음, 돌파하여 재끼려고 한다.

"그렇겐 안 되지."

나는 에인헤랴르 연공법을 극한으로 발동했다.

아울러 마력심이 심장을 펌프질한다.

마력 혈맥을 통해 전신으로 퍼지는 마력.

마력 회로가 불에 덴 듯 뜨거워진다.

몸이 달아오르는 것을 느꼈다.

여기에 허리띠가 빛나면서 마력이 집중되어 내 의도에 따라 완벽히 움직인다.

타타탓!

내 속도가 거의 두 배는 빨라졌다.

돌진을 쓸 필요조차 없었다.

신속과 질주.

두 특성만으로도 가속, 돌진, 도약, 돌파를 섞어 쓰는 백소린을 압도할 수 있었다.

"반칙이에요! 반칙!"

"억울하면 너도 3레벨 되던가."

"아 진짜."

"화낼 기운 있으면 마력이라도 한 번 더 돌려. 먼저 간다."

"같이 가요!"

얼마나 질주했을까.

거의 1층에 도달한 시점.

내가 쥐고 있던 스마트폰이 요란하게 울기 시작했다.

왜애애애앵!

나는 격발기를 들었다.

"10초 후 터뜨린다."

"자, 잠깐만요! 아직 시간이······"

5분 정도 여유는 있다.

하지만 오차를 감안하면 5분 일찍 터뜨리는 게 맞았다.

"10, 9, 8, 7······"

카운트다운 시작.

백소린이 눈에 힘을 주었다.

이를 악물고 젖 먹던 힘까지 짜낸다.

아직이었다.

백소린에게는 여력이 남아 있다.

[천살성][불굴][돌진]

[도약][가속][돌파]

폭주 기관차는 생성되지도 않았다.

놔두면 저절로 터득하겠지만 지금 하지 말라는 법도 없지.

나는 격발기를 누르며 고함을 질렀다.

"격발!"

딸깍.

작은 소리가 울렸다.

이어 아래쪽에서 둔중한 충격이 올라온다.

충격파가 세상을, 이 공간 왜곡된 작은 세상을 뒤흔들었다.

벽면이, 천장이, 바닥이 물결처럼 출렁인다.

평형 감각이 왜곡되면서 시야가 빙글빙글 돌기 시작한다!

"서, 선생님!"

세계 붕괴의 전조.

백소린이 애타게 나를 불렀다.

나는 속도를 높이며 외쳤다.

"죽기 싫으면 달려! 젖 먹던 힘까지 다해서!"

"으아아, 으아아!"

"1분 안에 못 나가면 죽는다!"

이건 나조차 위험하다.

백소린에게서 신경을 껐다.

뒤를 돌아보지도 않고 달렸다.

한편으로는 주머니 안을 확인했다.

미리 골프백에서 꺼내놓은 공간 이동 마법칩.

만약 내 계산이 빗나간다면 이것이 나와 백소린의 목숨줄이 될 것이다.

수직으로 꺾이는 골목이 나왔다.

속도가 너무 빨라서 이대로 머리부터 처박을 상황.

"이이익!"

이를 악물고 몸을 튼다.

속도는 줄이지 않는다.

눈에 힘을 주어 커지는 벽면을 노려보다가, 사선을 그리며 벽을 향해 뛰어든다.

타탓, 탓!

벽면을 박차며 도약!

거의 수직으로 서다시피 하며 벽면을 질주한다.

다시 지면에 내려선 다음 또다시 질주.

몇 번이나 그렇게 수직 골목이 나왔다.

똑같은 방법으로 돌파하여 달렸다.

그러자 몸이 가벼워지고, 속도를 전혀 줄이지 않고도 원하는 방향으로 꺾을 수 있게 된다.

마치 관성을 무시하는 것처럼.

[기동] 특성 획득.

사용 후 대기시간이 있어 난사할 수는 없지만 충분히 좋은 특성이다.

달리다 보니 말간 흰빛이 눈에 들어왔다.

저 앞쪽, 금역 출구를 통해 형광등 빛이 아른거리고 있었다.

더욱 속도를 높인다.

모든 힘을 투사한다.

어느덧 붕괴가 내 바로 뒤까지 쫓아왔다.

느껴진다.

모든 것이 허물어지는 게.

마력이 덧없이 소멸하고 세계가 분해되는 것이 선명하게 내 감각을 자극한다.

소리도 빛도 바람도 완전히 흩어지는 중.

목덜미가 뻐근하다.

당장이라도 따라잡힐 것 같은 감각.

우지끈!

소멸에 앞서 붕괴가 나를 앞질렀다.

대나무 부러지는 소리와 함께 땅이 무너진다.

대지진을 목격한 것처럼 그어지는 균열.

삽시간에 출구가 멀어진다.

땅이 무너져 큰 덩이가 남고 나를 지저로, 허무의 공간으로 끌어당기고 있었다.

그렇게는 안 되지!

마력을 다리에 모아 날아올랐다.

수십 미터를 가로질러 안정적으로 착지.

출구가 눈앞에 있었다.

"선생님!"

절규가 터진 것은 그때.

뒤를 돌아본다.

무너지는 땅덩이.

그 위로 뛰어오른 백소린.

그러나 부족하다.

갓 각성하여 마력이 적은 백소린으로서는, 똑같은 도약 특성을 사용해도 내 절반 정도밖에 뛰어넘지 못한 것.

눈과 눈이 마주친다.

세상이 정지한다.

무너지는 세계, 소멸하는 공간 속에서.

백소린이 절망에 찬 눈으로 나를 보고 있었다.

발밑에는 아무것도 없다. 도약을 쓰려면 필수적인 디딤대가 없다.

그러나 나는 손을 뻗지 않았다.

도와주지 않았다.

주머니 속에 손을 넣은 채, 마법칩을 움켜쥔 채.

그저 믿는다는 눈빛을 보냈을 뿐.

'너는 가능해.'

그렇게 태어났으니까.

천살성이니까.

단순히 피와 살육에서 경험치를 얻는 괴물이 아니라, 끝없는 전투와 위기 속에서 성장하는 신화적 재능의 소유자니까!

백소린의 눈이 꿈틀거린다.

절망에 차 있던 눈빛이 바뀐다.

활화산 같은 의지가 얼굴 가득 번진다.

잃어버린 검 대신 두 주먹을 꽉 쥔다.

공중에서 자세를 취하는 백소린.

돌진, 도약, 가속, 돌파 네 특성이 엉겨붙는다.

천살성의 일부가 영향을 미친다.

그리하여 탄생하는 세 번째 특성.

[폭주 기관차]

"우아아!"

백소린이 고함을 지른다.

기차 화통 삶아 먹은 듯 우렁우렁한 목청이다.

전신에서 증기가 뿜어진다.

어느새 붉게 변한 피부.

몸이 스르륵 미끄러진다.

성난 황소가 되어 나를 향해 일직선으로 달린다.

돌진.

그냥 돌진도 아니고 공중 돌진.

단순한 돌진 특성만으로는 불가능하고, 폭주 기관차나 대공습 등 상위 특성이 있어야 사용 가능한 그것.

들이받으려 달려드는 백소린을 꽉 끌어안았다.

둔중한 충격이 가슴을 쳤지만 견딜 만했다.

그 힘을 그대로 이용하여 몸을 날린다.

출구를 통과하여 밖으로 나가기 무섭게 금역이 붕괴했다.

솨아아.

폭발음은 없었다.

진동도 전달되지 않았다.

다만 흐릿한 바람 소리가 슬며시 귀를 적셨을 뿐.

유령이 흘린 눈물 한 방울처럼 쓸쓸하고 막막하게.

완전히 소멸한 금역.

그 속에서 피어난다.

구사일생 특성이.

전사 계열 3대장 캐릭터 최후의 조각이.

[SSR 백소린]이 완성되는 순간이었다.

장인 조철 -1-

장인 조철

"흐윽, 흐윽, 흐으윽."

옆에서 백소린이 괴상한 소리를 낸다.

우는 것도 숨 쉬는 소리도 아닌, 여전히 숨이 꽉 막혀 허우적대는 소리다.

등을 팡팡 두들기자 그제야 숨소리가 정상으로 돌아간다.

"선생님······ 저 진짜로 죽을 뻔한 거 아세요?"

"안 죽었잖아."

"너무 하세요."

"너무 한 게 아니라 완벽했던 거지. 진짜 칼 같이 계산해서 한 거다. 사실 내 계산보다 너 따라오는 게 늦었어. 5초는 여유가 있었다고."

"5초······"

백소린이 축 늘어진다.

달팽이처럼 바닥에 착 달라붙은 모양새.

"이거 받아라."

나는 골프백에서 마법 상자 하나와 신사임당 한 뭉치를 꺼내 백소린에게 주었다.

"이게 뭐에요?"

"뭐긴. 아까 그 성물이랑 용돈이지."

"어······ 귀한 거 아니에요?"

"귀하지. 너 혼자 가면 통수 맞으니까 최 소장이랑 꼭 같이 가라. 명함은 저번에 받았지?"

"네? 어딜 가요?"

"서부군이나 동부군에 가서 검법 가르쳐 달라고 해. 아니면 마탑 아무데나 가서 마법검 적당한 거 달라고 하거나. 직접 말하진 말고 최 소장한테 대신해달라고 하면 될 거다."

전리품으로 얻은 성물 두 개.

나는 과감히 하나를 포기했다.

안 그래도 장비 숙련을 쌓아야 할 게 너무 많아서 그렇다.

지금 당장 필요한 특성도 없고.

'차라리 백소린을 키우는 게 낫지.'

3대 검법 중 마르스 검투법은 백소린만 얻을 수 있으니까.

그걸 배우려면 전승 퀘스트를 통해 기억칩의 형태로 추출해야 한다.

어디까지나 나중 일.

7레벨까지 키워놓고 생각하자.

백소린이 손을 떨었다.

"너, 너무 많아요."

"뭐가?"

"돈이요. 오십만 주셔도 충분한데······"

"오십 가지고 누구 코에 붙여? 5백은 있어야 장비도 사고 하지. 유흥비가 아니라 너 자신한테 투자해서 스펙 확실하게 올려. 검이랑 방호복만 사지 말고 총도 사고 말이야. 무슨 말인지 알지?"

"네, 네!"

"그리고 이깟 용돈보다 이게 진짜거든? 이거 경매장 가서 팔면 이십억은 그냥 나와."

"이, 이십억!"

협상 기술에 따라, 세력 우호도에 따라 3레벨에서 5레벨까지 장비나 특성을 얻을 수 있는 물건이다.

내 성검이나 마총 같은 무기도 교환된다는 뜻.

그러고 보면 나 출세했네.

지금 온몸에 걸치고 있는 마법 장비 다 떼면 백억도 넘잖아.

걸어 다니는 빌딩.

그게 나다.

"지, 진짜로 받아도 돼요?"

"줄 때 받아라. 그래야 빨리 강해지지."

"바, 받을게요! 대신 나중에 다 갚을 거예요!"

"많이 안 바란다. 계약서대로만 해."

"더, 더 많이 갚을 거예요!"

"그럼 고맙고."

백소린이 마법 상자를 소중히 끌어안았다.

너무 눈에 띄어서 내가 비상용 백팩을 하나 꺼내 건넸다.

"골프백 진짜 있어야겠네요"

"백팩도 좋은데 부피로 따지면 골프백이 갑이지. 캐리어 끌고 다닐 수는 없잖아."

"꼭 사야겠어요."

남은 건 마무리뿐.

골프백을 탈탈 털어 마법 시멘트와 페인트를 꺼냈다.

구덩이를 치덕치덕 메꿔놓는다.

제작, 개조, 수리가 큰 도움이 되었다.

이 특성들이 없었으면 갤럭시몰 대표에게 깔끔하게 끝내놓겠다고 큰소리를 못 쳤겠지.

백소린이 수리 중인 나를 멀거니 쳐다보았다.

"선생님 초능력은 뭐에요?"

"왜?"

"이상해서요. 보통 초인은 초능력 한두 개, 많아도 여섯 개가 전부 아니에요? 상위 초능력, 초월 초능력 가진 초인도 선생님처럼은 못할 것 같아요. 제가 천살성이란 것도 바로 알아보셨잖아요."

"비밀이다."

"치잇. 불공평해."

"원래 세상은 불공평한 거다. 그리고 다른 사람한테는 절대 초능력 뭐냐고 물어보지 마라. 아주 무례한 거니까."

"선생님이니까 여쭤본 거지 아무한테나 안 물어봐요."

"그럼 다행이고. 또 다른 사람들한테 내 얘기는 하지 마라. 괜히 골치 아파진다."

"저도 그 정도 눈치는 있어요."

나른하게 누워 휴식을 취하는 백소린.

초기 각성은 완벽하게 끝났다.

[천살성][불굴][폭주 기관차][구사일생]

에피소드 2, 막 등장하는 백소린의 특성 그대로.

'무럭무럭 자라라.'

그래야 나한테 마르스 검투법을 물어다 주지.

이윽고 수리를 끝마쳤다.

밤이 늦은 시간.

갤럭시몰 영업시간이 끝난 다음.

야음을 틈타 갤럭시몰을 빠져나왔다.

[성공했습니다. 확인하시기 바랍니다.]

갤럭시몰 대표에게 메시지를 보내놓고 화면을 껐다.

피곤한지 백소린이 눈을 끔뻑거리고 있었다.

"소린아."

"네!"

"앞으로는 혼자 행동해라."

"저 혼자요?"

"그래."

각성시켜줬으면 할 만큼 했다.

내가 직접 키워도 되지만 천살성인 이상 백소린은 혼자서도 잘할 것이다.

갑작스런 하산 선언에 놀란 눈치지만, 백소린은 크게 동요하지 않았다.

본인도 알고 있으니까.

혼자서도 잘 싸울 거라는 사실을.

"내일 되면 초인탑에서 인증부터 받고, 총포상에서 무기 구해라. 성물 교환도 잘 받고. 그다음에는 최 소장 통해서 의뢰받든 다른 중개업자한테 의뢰받든 하면서 레벨 차근차근 올려라. 알지? 너는 오로지 실전으로만 성장하는 거."

"뼈저리게 느꼈죠. 그런데 정말 괜찮을까요?"

"하나만 조심하면 돼."

나는 오른손 검지를 들었다.

"인간. 인간만큼은 조심하고 의심해야 한다. 아무도 믿지 마."

"선생님도요?"

"나? 음······ 전적으로 믿으라는 말은 못 하겠다. 그냥 절반만 믿어."

"아하하. 그게 뭐예요."

어디가 웃겼던 걸까.

백소린이 빵 터져서는 깔깔 웃었다.

"너는 동급 괴물한테는 절대 안 지니까 금역 토벌대나 마수 사냥에 끼어서 성장하는 게 나아. 사람은 위험하니까 관두고. 총 맞으면 진짜 죽는다. 괜히 이권 다툼 끼어들었다가 독침 맞을 수도 있고."

"독침 맞아도 죽진 않을 것 같은데요?"

"독침만 맞겠냐? 로켓탄도 맞겠지."

"로켓탄이요? 선생님 영화를 너무 많이 보신 거······"

"난 맞아봤다."

할 말을 잃어버리는 백소린.

"굳이 사람 잡아봐야 천살성만 자극되고 안 좋으니까 마물이나 많이 잡아라. 알았지?"

"네. 그럴게요. 로켓탄이라니, 영화에서나 쓰는 줄 알았는데······"

"로켓탄만 쓰겠냐? 클레이모어랑 박격포, 킬러 드론에 기관포도 쓴다."

"선생님은 도대체 무슨 싸움을 해오신 거예요?"

"하여튼 여기서 헤어지고 나중에 또 보자. 혹시 어려운 일 생기면 연락하고."

"정말 여기서 끝이에요?"

"끝이 아니라니까. 그리고 너랑 나 같은 초인은 혼자서 움직일 때가 편해. 더 빨리 강해지고. 알아들어? 백소린 초인?"

초인이라 불러주자 백소린이 아쉬워하면서도 힐쭉 웃는다.

푼수 갚기도, 소년 같기도 한 표정.

"나중에 제가 돈 많이 벌어서 호강시켜드릴게요!"

"그놈의 호강은 진짜. 너 하고 싶은 대로 해."

"조심히 들어가세요!"

"너도 조심히 가고."

하여튼 서우진네 친구들한테 이상한 말버릇을 배웠어.

나야 원래 세계에선 나이 좀 먹은 편이지만, 내 육체인 김전사는 끽해야 백소린이나 서우진 또래라고.

뺨에 난 상처 때문일까?

아니면 김전사가 어려서부터 고생을 해서 그럴까?

육체 나이보다 거의 열 살은 늙은 것처럼 취급하는 느낌이다.

"후······ 좀 쉬자."

하여튼 큰일 하나 치렀다.

3레벨 인증 때부터 지금까지 쉬지 않고 달렸지.

나는 택시를 잡아타고 집에 돌아가 바로 곯아떨어졌다.

한 며칠은 침대에서 일어나지 않을 작정이었다.

안타깝게도 오전 일찍 내 게으른 시도가 저지되었다.

9시 때 땡 치자마자 최 소장에게 전화가 걸려온 탓이다.

[초인님, 일은 잘 마치셨습니까?]

"예. 완벽히 끝냈습니다."

[소린 씨······ 소린 초인님께 이야기는 들었습니다. 오늘 바로 인증받을 거라고 하셨지요. 2레벨 정도로 예상한다던데 그게 정말입니까?]

"그 정도 될 겁니다. 1레벨은 확실히 넘었고 3레벨은 확실히 안 됐으니까요."

[허어, 참. 초인님도 그렇고 백소린 초인님도 그렇고 항상 제 상상을 뛰어넘으십니다.]

"과찬의 말씀을."

[그건 그렇고 서우진 본부장님께 연락이 왔습니다.]

"본부장님?"

[어제 정식으로 발령받으셨습니다.]

"그 실력이면 본부장 할 만하죠."

서우진은 5레벨 초인.

전투력으로는 전투기와 맞먹는 강력한 존재다.

[어젯밤 늦게, 운 좋게도 갑옷 장인과 일정 조율이 됐다고 합니다.]

"그래요? 언제 시간이 된대요?"

[지금입니다.]

"예? 지금?"

[예. 초인님도 아시죠? 고레벨 장인은 분 단위로 예약이 밀려있는 거요. 서 본부장님이 섭외하신 분은 옛 아버지 교단 성녀와 사도들 특수 맞춤 갑옷을 제작하셨을 정도로 고명하신 분입니다.]

"7레벨 갑옷을 만든 적이 있다고요?"

[바로 그렇지요.]

그럼 잡아야 한다.

여기서 미적대면서 쉬고 있을 때가 아니다.

나는 단박에 일어나서 머리를 흔들었다.

"알겠습니다. 가지요. 어디로 가면 됩니까?"

[나오시면 됩니다.]

"네?"

[지금 저 초인님 댁 앞입니다.]

빵빵!

대문 밖에서 경적이 울렸다.

행동력 하기는.

전화를 받자마자 차를 몰고 온 모양이다.

나는 제대로 씻지도 못하고 허둥지둥 밖으로 나갔다.

입은 거라곤 방호복과 츄리닝이 전부.

그래도 골프백은 챙겼다.

성검과 마총을 허리띠에 보란 듯이 꽂자 최 소장이 머리를 흔들었다.

"항상 장비는 챙기시네요."

"당연하죠. 언제 어디서 무슨 일이 생길지 알고요."

강도와 테러리스트가 판을 치는 막장 세상이다.

어디를 가든 준비가 되어 있어야 했다.

"한 가지 부탁드리고 싶은 게 있습니다."

"말씀하세요."

"시간 나실 때 태양 마탑이나 빙하 마탑 가셔서 이걸 아티팩트로 바꿔 오셨으면 합니다."

남아 있던 마법 상자를 내밀었다.

내가 직접 가도 되지만 귀찮다.

최 소장이 마법 상자를 열어보고는 깜짝 놀랐다.

"이게 뭡니까?"

"결정체입니다. 마탑 가서 보여주면 마법 무구 하나는 내줄 거예요. 아, 소린이한테도 하나 줬으니까 조만간에 연락 올 겁니다."

"이상하게 생겼네요. 어째 좀 음산한 데요?"

"죽음 속성이라 그렇습니다. 오래 접촉하면 신체 변이 되니까 조심하세요."

"히익!"

최 소장이 기겁하여 마법 상자를 닫았다.

"어떤 아티팩트로 교환하면 되겠습니까?"

잠시 고민.

갖고 싶은 건 많다.

그런데 가진 마법 무구도 많다.

부위가 중복되지 않으면서 쓸모 있는 거라면······

'역시 반지지.'

지금 내가 가진 건 마력 저장 반지 하나뿐이니까.

그럼 뭘 선택해야 할까?

곰곰이 고민 끝에 내린 결론이 있었다.

나는 여전히 저격과 기습에 취약하다는 것.

특성 전환은 확실히 사기적이지만, 준비되지 않은 상태에서 돌발적으로 공격당하면 의외로 쉽게 무너질 수 있었다.

그래서 내린 결론.

'위기 감지가 좋겠다.'

통찰보다는 티어가 낮다.

그러나 대상을 결정해야 발동하는 통찰과 다르게 위기 감지는 나를 향한 모든 악의와 적의를 미리 감지하여 경고해준다.

게임에서는 화면이 붉게 점멸하는 효과가 전부고, 현실에서는 아마 모호한 예감만 들겠지만 그게 어디야.

위험을 느낀 즉시 통찰이나 민감, 마력 방어막 등 여러 특성을 장착해서 대처하면 되는데.

"위기 감지 마법이 담긴 반지가 좋겠습니다."

나중에 통찰과 탐지 등등과 조합해서 상위 특성으로 갈 수도 있다.

그래도 계속 끼고 다니는 게 좋겠지.

상위 특성 반지를 구하지 못한다면.

"위기 감지 마법 반지······ 알겠습니다. 구하는 대로 보내드리겠습니다. 아, 도착했네요."

도착한 장소는 경기도 광주에서도 외곽.

마을 전체가 장인촌인 모양이다.

집집마다 있는 용광로에서 매캐한 마력 연기가 올라왔다.

따앙 따앙 하는 망치 소리가 청명하다.

수많은 집이 저마다 울리는 소리가 합쳐져 중창하듯이 우리에게까지 닿는다.

서우진이 먼저 와서 우리를 기다리고 있었다.

"선생님!"

서우진이 눈을 반짝인다.

"얘기 들었습니다. 소린이가 벌써 2레벨 찍었다던데요?"

"말했잖아. 소린이도 천재라고."

"어떻게 하신 거예요? 저나 제 친구들은 영약이라도 많이 퍼먹었지, 소린이는 그런 것도 없었다면서요."

"나중에 본인한테 직접 물어봐."

"소린이는 선생님한테 물어보라던데요?"

"가르쳐 주기 싫은가 보지."

나는 장인의 저택을 살펴보았다.

어째서인지 눈에 익다.

새하얀 통짜 대리석을 쌓아 올려 만든 저택.

표면 부식을 막기 위해 마법진을 때려 박았다.

고용인들이 표면을 닦아내느라 지금도 분주히 청소하는 중이다.

그리고 저택 요소요소를 지키는 흑금 갑옷 성전사들.

심지어 멀찍이서 나를 주시하는 성기사도 한 명 보였다.

'아오, 씨.'

섭외되었다는 장인과 마주한 직후.

나는 속으로 욕설을 퍼부었다.

"반갑네."

부양 휠체어에 탄 덩치 큰 장인.

얼굴 반쪽은 화상으로 짓무르고 나머지 절반도 칼로 난도질당해 흉터밖에 없다.

오른팔은 어깨부터, 왼팔은 팔뚝부터 강철 의수로 바꿔놓았다.

에피소드 3 여덟 중간 보스 중 하나.

죽음 장인 조철.

뼛속부터 옛 아버지 교단 골수 신자인 그가, 부리부리한 눈을 번뜩이며 나를 보고 있었다.

장인 조철 -2-

"반갑습니다."

속내를 감추고 손을 맞잡았다.

조철이 힘을 꽉 준다.

우웅. 우우웅.

오른쪽 의수가 맹렬하게 구동된다.

내부 마법진이 빛을 뿜고 구동계가 돌아가고 있었다.

내 손을 쥐어짤 듯이 풀력을 뿜는 의수.

해보자는 건가?

나도 손에 힘을 주었다.

[근력][괴력][맷집]

[에인헤랴르 연공법][마력심][인내]

근육이 뿌득뿌득 자라난다.

내 몸이 조금은 더 커진 것 같다.

팔이 특히 부풀면서 의수에 대항했다.

심장에서 뿜는 마력이 마력 회로를 따라 돌며 효율을 증폭시킨다.

잔뜩 핏대가 선 내 얼굴.

그러나 조철은 여유롭기만 하다.

두 다리가 썽둥 잘린 장애인이라고 하나 조철은 현재 6레벨 초인.

에피소드 3 시점에서는 7레벨로 강해지기까지 한다.

그런 조철이 3레벨인 내게 밀리면 말이 안 되지.

"희한하군."

조철이 머리를 갸웃했다.

"3레벨 초인은 이 정도는 아닌 것 같았는데."

손을 놓은 다음, 날 보며 당당하게 요구했다.

"옛 아버지의 세례를 거부했다지? 흑염을 보여주게."

나는 손을 한 번 털었다.

그 짧은 순간 손이 퉁퉁 불어 있었다.

조철이 마음만 먹었다면 손뼈를 아작 내고도 남았겠지.

'시비 거는 건가?'

그렇다고 하기엔 무표정한 얼굴이 사무적으로만 보인다.

되레 저쪽에서 나를 주시하는 성기사에게서 싸늘한 한기가 느껴졌다.

밀폐형 투구를 쓴 탓에 얼굴을 확인할 수는 없었지만.

적당히 장단에 맞춰주었다.

흑염을 장착, 전신으로 발현하자 조철이 느릿하게 머리를 끄덕였다.

"흑염······ 확실하군. 수천 년 역사에서도 흑염을 각성한 자는 드물었는데. 자네 정말로 우리 교단에 입교할 생각 없나? 자네가 입교하면 미래의 기사단장, 아니 사도는 따놓은 당상이야."

내가 미쳤냐?

뚱한 표정으로 노려보자 옆에서 서우진이 끼어들었다.

"장인님. 사실 이번 일에는 교단 측의 양보가 있었습니다."

"나도 알아. 성녀님께 직접 들었거든."

"성녀님이요?"

"원래 나는 새로운 기사단장의 갑옷을 만들어주기로 했었어. 그런데 성녀님께서 일정을 조율해주신 거지. 쯧, 감사히 여기도록 해."

조철이 대놓고 혀를 찼다.

"그놈의 자유 의지가 뭐라고······ 그놈의 신멸 전쟁이 항상 우리 교단 발목을 잡는다니까. 그때 이겼어야 했는데."

지극히 광신도다운 발언.

"성녀님께서 말씀하시길 자네의 강건한 의지에 대한 경의의 표시로 마법 갑옷 한 벌을 하사하기로 마음 먹으셨다는군. 그것도 맞춤형 갑옷으로 말이야. 제일보안 쪽에도 교단이 보상하기로 했다지?"

그래서 신열로 괴롭힌 대가가 고작 갑옷 한 벌이다?

명백히 강자의 횡포.

서우진도 사실은 마음에 차지 않는 모양이었다.

대가를 받았다고 해도 십 년 넘게 고통받은 인생이 복구되는 건 아니니까.

하지만 어쩌겠어.

옛 아버지 교단은 강자고 우리는 약자인 것을.

당장 성기사 한 명만 쫓아와도 위기에 빠지는 게 내 처지.

서우진이 필사적으로 내게 눈빛을 보내고 있었다.

여기서 적당히 타협하자고.

나는 주먹을 으스러져라 강하게 쥐었다.

'뭐 좋아.'

어차피 옛 아버지 교단과는 끝장을 보게 된다.

지금은 대충 굽혀주고 보상이나 뜯어내는 게 낫겠지.

강해지면 된다.

강해지면!

"무슨 말인지 알겠어. 하지만 입교할 생각은 없다. 옛 아버지 교단만 아니라 어느 교단이든 마찬가지야."

"후후후."

존대 따위 집어치우자, 조철이 의미심장한 얼굴로 웃었다.

"마음대로 해. 그런데 그거 아나? 서로마 제국의 황제 하인리히 4세도 신열을 극복했었지만 자의로 옛 아버지의 사도가 됐었어. 자네도 결국 그렇게 될 거야."

이 세상에는 기독교가 없다.

따라서 신성 로마 제국도 존재하지 않는다.

후기 서로마 제국이 있을 뿐.

나는 퉁명스럽게 대답했다.

"두고 보면 알겠지."

"성녀님께서는 자네를 매우 높게 평가하고 계셔. 내게 말씀하시길 자네야말로 교단의 빛이자 세계의 구원자가 될 거라고 하시더군. 그래서 나도 어쨌든 최선을 다해서 갑옷을 만들 생각이야."

"빛이자 구원자? 택도 없는 소릴."

"흥. 성녀님께서 예언하신 내용이다. 옛 아버지께서 계시하신 말씀이고. 인간의 작은 뇌로는 그 형상조차 더듬을 수가 없지."

"그랬으면 세례는 왜 실패한 건데?"

"옛 아버지께서 큰 뜻이 있으셨겠지. 잔말 말고 이쪽으로 와라. 나도 썩 유쾌하진 않으니까. 빨리하고 치우자고."

조철이 공중에 둥둥 떠서는 한쪽으로 날아간다.

응접실 안쪽.

널찍한 공간에 갑옷들이 전시되어 있었다.

적어도 수백 점.

형태도 기능도 모두 달랐다.

조철이 전신 판금 갑옷을 쓰다듬었다.

"먼저 가장 기본적인 형태야. 성기사 갑옷이지. 기능 말고 형태에 대해 얘기하자고. 판금 갑옷은 어떤가? 내가 가장 자신 있는 종류면서 방어력과 마력 증폭에 최적화되어 있는 유형이다."

나쁘지 않다.

극탱으로 육성할 거라면 필수라고 봐야지.

방어 전사 중에는 [갑옷 숙련]이니 [갑옷 방어술] 같은 특성을 빌드에 넣는 경우도 있었다.

하지만 나는 머리를 흔들었다.

중갑 전사는 확실히 매력적이지만 특성을 실시간으로 바꿔가며 싸우는 내게는 맞지 않다.

"너무 무거워. 더 가볍고 움직이기 편한 물건이 필요해."

"판금 갑옷도 움직이기 편해. 보는 것과는 달라. 일반인도 판금 갑옷 입고 낙법, 레슬링, 맨몸 격투, 다 할 수 있다."

"그래도 경갑보다는 덜하지."

"흠, 중갑 전사인 줄 알았는데 아니었나? 아까 힘을 보면 완전히 중갑 전사였는데."

조철이 스르륵 미끄러진다.

다음으로 짚은 것은 착 달라붙는 타이즈.

아닌가?

자세히 보니 금속 실을 엮어 옷처럼 짜낸 갑옷이었다.

표면에 별빛이 머무른 듯한, 갑옷보다는 차라리 예술품에 가까운 물건.

조철이 사랑스럽다는 눈으로 금속 옷을 주시했다.

"금속 극세사 갑옷이다. 활동성과 경량성 두 토끼를 완벽하게 잡은 물건이지. 워낙 얇아서 방어력은 떨어지지만 위에 뭐든 더 걸치면 그만 아닌가?"

문제는 역시 방어력.

그리고 마력 용량.

저렇게 얇은 갑옷은 필연적으로 담는 마법 부여가 잘 안 된다.

돈도 많이 들고 부여되는 마법도 약해지지.

마법진을 그릴 표면적만큼이나 중요한 게 마력이 담길 부피니까.

"중간은 없어?"

"중간? 중갑옷이랑 경갑옷 중간 말이지."

"외형은 신경 안 써. 그냥 무난하게, 내가 지금 입은 방호복 비슷한 거면 좋겠는데."

"방호복? 진심이야?"

조철은 툴툴거리면서도 한쪽으로 움직였다.

전시실 가장 구석.

다른 갑옷에 가려 잘 보이지도 않는 자리.

그곳에서 갑옷 한 벌을 끄집어냈다.

갑옷보다는 차라리 강화복에 가까운 외형.

겉을 장식한 것은 거무튀튀한 강화판.

언뜻 보면 근육투성이 군인 같은 느낌이다.

심미적 관점보다는 철저히 기능성에 집중한 모습.

"그거 좋네."

솔직한 내 감상이었다.

조철이 대놓고 언짢은 표정을 지었다.

"이딴 양산형 디자인을 쓰라고? 그럴 순 없지."

"난 이게 좋아."

"허, 이게 좋다고? 말도 안 되는 소리! 자, 이 갑옷을 봐라. 이 부드러운 곡선미와 광택이 마음을 울리지 않냐? 이 아름다운 반짝임! 압도적인 존재감! 갑옷이란 모름지기 이래야 하는 것이다!"

조철이 바로 옆에 있는 갑옷을 들고 열변을 토했다.

확실히 아름답긴 했다.

부분 판금 갑옷.

중요 부위는 철판이되 연결부는 금속 섬유를 짜서 채워놓았다.

방어력이면 방어력, 활동성이면 활동성, 마력 용량이면 마력 용량, 모든 걸 다 잡은 보물.

그래서 눈에 띄었다.

은신을 쓰든 죽은 척을 쓰든 시선을 끌 정도로.

나는 갑옷을, 아니 방호복을 가리켰다.

"이걸로 해."

"말도 안 되는 소리를! 저놈은 금속이 안 들어가! 성갑을 부여할 수가 없다고!"

갑옷과 방호복의 결정적인 차이.

바로 재질이다.

갑옷은 금속으로 만들지만 방호복은 섬유가 주 재질이고, 안에 들어가는 강판만 금속이나 세라믹으로 만드니까.

내가 짚은 것은 그중에서도 세라믹인 모양.

"성갑은 필요 없어."

"미쳤나? 성갑만큼 강력한 보호 능력이 어디 있다고! 성갑에 광휘를 더하면 자넨 완전히 걸어 다니는 중전차가 돼!"

성갑에 광휘.

전형적인 성기사용 갑옷이다.

조철이 직접 만들면 SSR 등급도 나오지 않을까?

자연히 속으로 조금 감탄하게 된다.

'SSR 갑옷!'

하지만 욕심을 내서는 안 된다.

이건 함정 카드.

광휘 때문이다.

광휘가 제대로 성능을 발휘하려면 신성력 특성이 있어야 한다.

그리고 신성력을 쓰다 보면 반드시 어떤 신에게든 귀의하게 된다.

내 경우에는 그게 옛 아버지가 되겠지.

마력 회로에 흑염이 새겨져 있으니까.

'음흉하기는.'

한 가지 사실을 실감했다.

옛 아버지 교단은, 또 성녀는 아직 날 포기하지 않았다는 사실을.

"성갑 말고 거구랑 극기를 부여해줘."

"뭐? 거구? 극기? 그딴 걸 왜? 성갑이 뭔지 몰라? 무려 3중 중첩 능력이라고! 거구, 극기랑은 비교도 안 돼!"

노골적으로 언짢다는 표정을 짓는 조철.

하지만 내게는 이 두 특성이 필요했다.

거인의 힘, 금강체.

이 두 가지 상위 특성을 구성하는 조각이기 때문이다.

"나는 성갑보다 그 둘이 더 필요해."

"허, 참. 진심인가? 성갑이랑 광휘를 포기하겠다고?"

"다시 한번 말하지만······"

"젠장! 빌어먹을! 알았어. 알았다고. 이 자식 누가 전사 아니랄까 봐 아주 황소고집이구먼. 하지만 반드시 알아둬라. 성갑에 광휘 조합보다는 격이 너무 떨어져! 제대로 성능이 안 나와도 내 탓은 아니니까 나중에 항의하지 마라. 알겠어?"

"기억하지."

조철이 한숨을 푸욱 쉬었다.

"황금을 앞에 두고 은화, 아니 구리 부스러기를 줍는 꼬락서리라니······ 뭐, 좋아. 성녀님 말씀도 있었으니 그렇게 해주지. 작업은 한 달 정도 걸릴 거야. 완성되면 저기 서가네 애송이를 통해서 전달하지."

그 말을 끝으로 손을 휘젓는다.

축객령.

나도 옛 아버지 교단 인사와 오래 얘기하고 싶은 마음은 없었다.

즉시 서우진을 끌고 밖으로 나왔다.

서우진이 미쳤냐는 눈으로 날 주시했다.

"선생님. 성갑은 좀 아깝지 않으세요?"

"하나도 안 아깝다."

"그래도······"

"너도 조심해. 보물에 눈 팔렸다가 세뇌당해서 성기사 되는 수가 있어."

"에이, 성갑에 세뇌 효과가 어디 있어요?"

"신성력엔 있지. 광휘를 제대로 쓰려면 신성력은 필수야. 중립 성물을 사서 신성력을 쓰다가 체화되서 내 마력 회로에 들러붙으면 무슨 일이 일어날 것 같아?"

"체화 안 하고 갑옷으로만 쓰면 되죠."

"퍽이나. 너도 옛 아버지 교단에서 성검 준다고 하면 조심해. 어차피 넌 무사잖아. 성검 쓰지 말고 그냥 마법검, 아니면 영검을 쓰란 말이야."

서우진이 멈칫했다.

정곡을 찌른 모양.

알고 보니 이미 사도급 성검을 주겠다고 제안을 했다나.

"으이구, 순진해 빠져서는."

"어······ 거절해야 할까요?"

"다른 이권 달라고 하거나 보물 창고 열어달라고 해. 괜찮은 마법검 정도는 있겠지. 마법검 제작 의뢰는 하지 말고. 너 하는 거 보니까 말빨에 홀려서 성검 제작하는 게 뻔히 보인다."

서우진이 씁쓸한 표정을 지었다.

"그냥 아버지한테 말씀드려서 이권이나 얻자고 해야겠네요."

"잘 생각했어. 검은 많아. 정 성검 필요하면 가이아 교단이나 시바 교단에 기부하고 받아도 되잖아. 의뢰 몇 개 해줘도 되고."

"입교하지 않는 한 사도급 성검은 안 주니까요."

"옛 아버지 교단에 입교하느니 가이아 교단이랑 시바 교단이 낫지."

"그건 그래요."

갑옷 제작 의뢰는 성공적.

몇 등급 방호복이 나올지는 모르나 한동안 쓰기 좋을 것이다.

부아앙!

빠르게 조철의 집을 빠져나가는 자동차.

우연처럼 성기사와 눈이 마주쳤다.

조철과 대화하는 내내 못 마땅한 기운을 풍기던 성기사.

눈구멍도 까만 고글로 막아놓은 탓에 눈빛조차 읽을 수가 없다.

그러나 한 가지만은 확실했다.

성기사가 내게 절대 호의적이지 않다는 사실만큼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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