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주체(主體).
중심이 되는 건 나다.
박현명이다.
하지만 란돌프도 나임은 틀림없었다.
온전하게 하나가 되었으니.
그리고 빌헬름 역시 가족이자, 친구이자, 스승이자, '또 다른 나'로 칭하기에 부족함이 없는 존재였다.
"빛의 길······."
정해진 숙소로 돌아와, 진열된 검 한 자루를 바라보았다.
빛의 길.
빌헬름이 사용했던 유일등급의 검.
나는 천천히 진열된 '빛의 길'을 꺼내어 쥐어보였다.
마치 내 손처럼 착 감기는 기분.
뿐만이 아니다.
그 옆에 있는 또 다른 무구.
"거룩한 길."
빛의 길과 세트가 되는 붉은 망토였다.
돌고 돌아, 비로소 내게 돌아왔다.
이 두 가지가 빌헬름을 상징하던 가장 상징적인 장비들이었으므로.
마치 빌헬름이 아직 곁에 있는 것만 같다.
나머지 장비들을 모두 모으면, 다시금 빌헬름이 되살아날 것만 같은 감각.
나는 한참을 매만지다가, 원래 자리로 돌려놓았다.
'더이상 지켜보는 자가 없다.'
아까까지만 하더라도 존재하던 시선이 없었다.
방치하기로 결정이라도 한 듯이 한꺼번에 사라졌다.
오히려 내게는 잘 된 일이다.
'이제야 변신해볼 수 있겠군.'
글자로 확인하긴 했지만, 확실함을 위해선 스스로 변신해보는 게 가장 좋다.
란돌프로.
또 다른 멸망이자, 원시 천마가 된 란돌프의 모습으로.
흉의 장갑과 재의 장갑으로 인해 박현명과 란돌프 간의 '스위칭'이 가능해졌으니까.
나는 흉의 장갑을 바라보았다.
그리고.
"'흉의 장갑'을 사용합니다."
"'란돌프'로 변신합니다."
슈아아악!
짙은 어둠이 피어오르며, 순식간에 모습이 변하기 시작했다.
외형 변형 물약과는 차원이 다른, 그저 외형만이 아닌 모든 것이 변했다.
그리하여 란돌프가 되었을 때.
고오오오오오-
미칠듯이 쏟아지는 마력.
전신에서 피어오르는 가공할 마(魔)의 기운!
클래스 별의 계승자가 사라져, 브레이크가 걸리지 않는 본연 그대로의 모습이었다.
··· 아니, 그 정도가 아니다.
투신의 탑 정상에서 보았던 '또 다른 란돌프'가 지녔던 악의 형상조차도, 지금의 나를 따라올 순 없었다.
투신의 탑을 오르기 전과 감히 비교조차 할 수 없을 지경.
하여 나는 절로 한 마디를 내뱉을 수밖에 없었다.
"······ 미친."
명예의 성소
또 다른 멸망.
그리고 원시 천마!
본질은 비슷하다.
두 가지 클래스 모두 '악(惡)'과 '마(魔)'에 근간한다는 것.
빛과 영광의 성향은 박현명에게, 반대의 성향이 모조리 란돌프에게 몰린 결과였다.
그리고 그 결과는 내 상상을 초월하고 있었다.
그저 존재하는 것만으로도, 스위칭한 것만으로도 이만한 위력이라니!
절제하며 갈무리할 수 있는 영역을 넘어섰다.
··· 강하다.
너무 강했다.
마의 기운이.
악의 형상이.
가뜩이나 강력했던 어둠의 성향이 몰리고, 합쳐지며, 격을 넘어 초월하더니 비로소 완결무결해진 것이다.
그와 동시에.
"'또 다른 멸망'은 '멸망'을 불러오는 자입니다."
"'세계'를 선택해, '붕괴'를 일으킬 수 있습니다."
"세계를 붕괴시켜 '완전한 멸망'으로 거듭나십시오."
"하나의 세계를 붕괴시킬 때마다 '멸망 포인트'를 획득합니다."
"혹은 '신의 심볼'을 파괴할 때마다 '멸망 포인트'를 획득합니다."
"'멸망 포인트'로 멸망의 힘을 강화시킬 수 있습니다."
"하나의 세계를 파괴할 때마다 권속이 늘어납니다."
"첫번째 권속, '멸망의 까마귀'를 소환할 수 있습니다."
······.
······.
또 다른 멸망에 대한 설명.
세계를 파괴하고, 그 파괴한 세계에서 힘을 얻는 이기적인 클래스.
단순 히든 클래스를 넘어서는 압도적인 내용이었다.
그리고 신의 심볼은 아마도 신의 격을 상징하는 중요한 성유물, 혹은 '탑'과 같은 것들을 말하는 것일 테다.
그것들을 파괴해 포인트를 얻고, 멸망의 본질을 강화시키다니.
일전 판게니아를 멸망시킨 '멸망' 역시 이와 같은 능력을 지니고 있었던 걸까?
허나, 내가 판게니아나 지구를 멸망시킬 일은 없었다.
만약 모조리 부숴버려야한다면 그것은 '천상'이 될 것이다.
'권속이라.'
게다가 사흉과 같은, 나로부터 파생한 첫 번째 권속까지.
왜 하필 까마귀인가 생각해보면 간단한 일이었다.
흉과 재의 신으로 말미암아 계속해서 진화했던 까마귀의 힘.
그것의 최종진화 형태라고 봐도 될 것이었다.
이뿐만이 아니었다.
글귀는 계속해서 떠올랐다.
이번엔 원시천마에 관하여.
"'원시천마'는 최초로 천상에 오른 마귀입니다."
"하늘을 위협하고 세상을 오시했던, 하지만 너무 강력했던 탓에 천상이 직접 봉인한 이름입니다."
"이후의 모든 마귀는 원시천마의 영향을 받았으며, 그 위대한 이름을 계승했고자 하였지만 '원시천마'의 격에는 다다르지 못했습니다."
"'천마신공', 혹은 '흡성대법'등을 만들어 스스로를 천마라 부르며 '원시천마'의 기술을 흉내내었으나, 결코 원류에는 미치지 못합니다."
"'원시천마'는 가장 강력한 마귀."
"'원시천마'는 모든 마귀를 잡아먹습니다."
"'원시천마'의 고유 히든 스킬 '멸세천마'를 사용할 수 있습니다."
······.
······.
내가 지니고 있던 천마와 관련된 모든 것들이 합쳐지며 '원시천마'로 완성됐다.
원류의 천마.
가장 강력했던 그 이름으로.
새로이 얻은 두 이름은 강력하지 않은 게 없었다.
도리어 너무나도 강력해서 탈이었다.
지금의 나로선 도저히 감당할 수 없을 정도의 힘이었으니!
"'재의 장갑'을 사용합니다."
"'박현명'으로 변신합니다."
재빨리 스위칭했다.
가만히 란돌프로 있다간 무슨 일이 벌어질지 알 수가 없었다.
하물며 이곳은 제국의 심장이다.
발각되었다간 그대로 전투가 벌어질 것이다.
발각되지 않기가 힘들 수준으로 마력이 끓어넘치고 있었으므로.
'······ 레벨만 올린다고 능사가 아니군.'
그제야 깨달았다.
성향을 분리하기 전의 란돌프는 혼돈 그 자체였다는 걸.
그리고 내 레벨을 올린다고 완전한 균형이 맞춰지지 않으리라는 사실도.
빛의 힘을 키워야 한다.
그래야만 란돌프의 어둠을 제어할 수 있다.
제어하지 못하면, 그저 변신하며 존재하는 것만으로도 세상의 멸망을 가속화할 터이다.
칠대악마나 마왕이 친구하자며 달려들수도 있는 노릇이다.
······ 상상만으로도 어지러웠다.
이후 몇 분이 채 지나지 않아서.
"무슨 일이냐!"
벌컥!
다급히 문을 열며 라이가가 모습을 드러냈다.
완전무장.
그리고 긴장이 역력한 눈빛으로.
*
"페르몬과 락투샤가 죽었다······?"
다크엘프 로드에게 보고를 받은 흑왕이 눈가를 찌푸렸다.
절대로 패배하지 않으리라 믿고서 보낸 최측근이다.
한데, 바알과 파편은 회수하지도 못한 채 죽었다니.
심지어 그 둘은 자신의 은혜로 말미암아 더욱이 강화되어 있었건만.
"누구에게 죽었지?"
"락투샤는 페르몬에게, 페르몬은 빌헬름에게 죽었습니다."
"······."
동시에 흑왕이 입을 꾹 닫았다.
여전히 인상을 찌푸리고는 있으나, 다크엘프 로드에게서 전해들은 이야기가 일순간 이해가 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은혜를 입은 자들 끼리는 서로 죽일 수 없다.
흑왕이 그것을 허락하지 않기 때문이다.
물론, 다른 경우도 있기는 했다.
"페르몬이 나의 은혜를 상실한 건가?"
은혜를 상실하는 경우.
하지만 페르몬은 은혜를 상실하면 그냥 멍청한 괴물이 될 따름이다.
지능을 잃고 퇴화해버린다.
당연히 락투샤를 죽일 수 없다.
한데, 락투샤를 죽였다니. 대체 어떻게?
"완전체로 진화했습니다."
다크엘프 로드가 답했다.
하지만 그는 '은혜의 상실'이 정확히 어떤 경로로 이루어졌는지 말하지 않았다.
흑왕의 천적이 등장했다는 사실에 대해서.
신비를 파괴하고, 은혜를 부숴버리는 그 존재에 관하여.
다만, 완전체로 진화했다고 얼버무릴 따름이었다.
흑왕의 얼굴에 새겨진 골이 더욱 깊어졌다.
"그럼에도 빌헬름에게 죽었다?"
완전체로 진화했다는 건 어찌되었든 흑왕이 설계한 최종형태로 만들어졌다는 뜻.
절망의 세포가 극대화했다는 의미다.
락투샤를 죽이는 것도 가능하다.
하지만, 완전체로 진화했음에도 빌헬름에게 패할 줄이야.
'빌헬름. 백왕의 송곳니 하나를 빼앗아간 놈이지.'
그 이름은 익히 들어서 알고 있다.
백왕의 송곳니를 잘라낸 자라는 것 역시.
허나, 놈은 죽지 않았던가?
"페르몬과 락투샤의 시체를 가져왔습니다."
"잘했다."
시체를 분석해보면 보다 확실한 답이 나오리라.
하지만 둘의 시체를 본 순간 흑왕은 인상을 찌푸렸다.
락투샤의 시체는 짓뭉게져 있었다.
반면 페르몬의 시체.
검은 인간의 형태로 정제되어 완성된 페르몬.
빌헬름에게 패했다는 녀석의 시체는, 너무나도 멀쩡했다.
흑왕이 작게 중얼거렸다.
"··· 일격에 죽었군."
너무나도 압도적인 실력차로 인해 일격에 패한 것이다.
정확히 생명의 근원을 잘라내었다.
아예 재생조차 못하도록.
쯧.
흑왕은 작게 혀를 찼다.
'개미의 한계겠지.'
그래봤자 개미다.
락투샤도 그래봤자 오크이고.
아무리 은혜를 베풀고 강하게 만들어도 종의 한계는 어쩔 수 없는 모양이었다.
하지만, 둘의 시체로 말미암아 한 가지 실험을 해볼 수 있게 됐다.
흑왕의 입가에 미소가 머금어졌다.
"'태초의 숲'에서의 일은 어떻게 진행되고 있지?"
"엘프 장로를 비롯한 다수의 '하이엘프'를 확보했습니다. 다만······."
"다만?"
"예상치 못한 존재의 출현에 의해 여왕의 생포는 불가했습니다."
"예상치 못한 존재라면?"
"백왕입니다."
백왕?
북부 크람델에 처박혀 있어야할 놈이 왜 난데없이 엘프의 거점인 '태초의 숲'에서 나타났단 말인가.
허나, 백왕이 등장했다 하더라도 바뀔 건 없다.
이빨 빠진 호랑이는 전혀 두렵지 않았다.
그대 다크엘프 로드가 마저 말했다.
"백왕이 힘을 되찾은 듯합니다."
"송곳니를 되찾았다? 흠······."
흑왕이 턱을 쓸었다.
송곳니를 되찾아 전성기의 힘을 수복했다면, 다크엘프들만으로는 버거울 수 있다.
그래도 괜찮다.
여왕을 확보하지 못한건 아쉽지만, 하이엘프만으로도 충분하다.
하물며 '장로'가 포함되어 있다면 금상첨화다.
······ 그때였다.
"······!!!"
찰나, 흑왕의 두 눈가가 거칠게 흔들리기 시작했다.
저도 모르게 시선을 옮겨, 지평선 바깥을 바라보았다.
어딘가에서.
분명히 지금.
어마어마한 '악'이 출현했다.
순간 사고가 멈췄다.
마치 멸망과도 같은.
······ 세계를 멸망시켜버릴 것만 같은 악의 기세를 틀림없이 느낀 것이다.
*
흑왕만이 아니다.
"음?"
교만의 악마.
프리드릭 왕 역시 지평선 너머를 바라보았다.
어쩐지 익숙한 기운이 느껴진 탓이다.
"'멸망'······?"
바로 멸망의 기운이.
교만을 비롯한, 다른 악마들도 마찬가지로 그것을 느꼈다.
하지만 아직 이르다.
아직, 멸망이 나타날 때가 아니다.
교만은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그리곤 고개를 갸웃했다.
'때가 멀었거늘.'
지금 멸망이 나타나는 건 말이 안 된다.
멸망의 출현조건이 만족되지 못했기 때문이다.
천상이 멸망을 보내는 경우는 한 가지뿐이었다.
문명이 발달하고 신들의 콧대가 높아졌을 때.
가장 화려하게 번성했을 때, 문명레벨이 아득히 높아져 그리하여 천상에 닿고자 할 때, 멸망이 나타나게 되어있었다.
그러나 판게니아는 멀었다.
이제 고작 투신 카라스와 용신 한 마리가 재생했을 따름이다.
문명의 번성은커녕 한창 갈 길이 멀다는 의미다.
그리고 만약 그러했다면 지금 교만이 하늘을 올려다본 것만으로도 수많은 신들이 등장했어야 함이다.
하지만 나타나지 않았다.
아직 신들도, 문명의 레벨도 한참 수준미달인 바.
'사라졌다?'
또한, 멸망의 기세가 찰나와 같은 순간 사라져버렸다.
뭐지?
분명 착각은 아닐진대.
"······."
그리고 그러한 의문을 느낀 건, 교만만이 아니었다.
마왕(魔王).
마계의 옥좌에 앉은 채, 빌헬름의 육신을 차지한 그가.
무저갱과 같은 눈빛으로 가만히 저 먼 곳을 바라보았다.
*
잔뜩 긴장한 라이가는 고개를 갸웃할 수밖에 없었다.
방금 전까지 느껴지던, 진저리쳐지는 악의 기운이 돌연 사라졌기 때문이다.
마치 처음부터 없었던 것처럼.
착각일까?
찰나와 같은 순간.
곧장 사라졌으니, 착각이라 생각해도 무방할 터이다.
게다가 그 장소에 있던건 '현'뿐이다.
"무슨 일 있으십니까?"
"······."
라이가는 할 말을 잃었다.
이 가공할 기운을 자신만 느낀 듯했다.
제국, 그것도 황궁 내에서.
그렇다면.
'진정 죽을 때가 된 건가······?'
······ 역시 착각일는지.
죽을 때가 되어 감각이 이상해지기라도 한 듯했다.
그도 그럴게, 아드리움의 현은 악과는 거리가 멀다.
여신교의 성도.
그곳은 여신의 결계로 인해 모든 '악'의 출입이 불가능한 곳이다.
하물며 여신교 추기경의 아들인 아론이 열렬하게 따를 정도로 신앙이 깊다.
그래. 착각이리라.
착각이어야만 했다.
내심 한숨을 쉰 라이가가, 현을 바라보며 말했다.
"······ 준비하거라."
"어디로 가는 겁니까?"
현의 물음에 라이가가 고개를 끄덕였다.
"'명예의 성소'로 가서 '팔가의 의식'을 치룰 것이다."
정식 제자로 인정받기 위해서 반드시 치뤄야하는 의식.
팔가의 가문이 거부한다 하더라도 강제로 진행할 심산이다.
그리고 온전하게 넘겨줄 것이다.
자신의 힘을, 역대 팔가를 이끈 자들의 의지를.
비록 제국에 충성하지 않더라도 괜찮다.
황제에게 검을 겨누지만 않는다면.
그러한 업까지 물려줄 생각은 이제 없으니까.
그저, 자신과 달리 자유롭게 살기를 바란다.
어두운 심연에서 벗어나 세계를 탐험하며 이름을 날리길.
무신의 경지에 올라 팔가의 비원을 이루어주길 바랐다.
그렇게 팔가의 이름이 건재함을 세상에 알리기만 해도 좋다.
그것이 팔가를 만든 최초의 선인(仙人)이 의도한 것일 터이므로.
깨달음
명예의 성소.
이름 그대로 명예로운 자들이 의식을 치르는 곳이다.
정식으로 '자격'을 발부받기 위해 반드시 들러야만 하는 장소.
예컨대 수많은 영토를 거느린 자가 왕이 된다던가, 혹은 영웅이나 귀족으로 제대로 인정받기 위해선 명예의 성소에서 의식을 치를 필요가 있었다.
특히 황제가 잠든 제국에선 명예의 성소에서 반드시 자격을 확인해야만 했다.
얼마나 명예롭고, 얼마나 의로운가를.
"'명예'라는 것만큼이나 부질없는 것은 없다."
다그닥, 다그닥.
말을 탄 채 라이가가 말했다.
현재 나는 라이가와 함께 제국을 벗어나는 중이다.
허나 팔가의 수행치고는 무척이나 조촐하기 그지없는 행렬이었다.
고작해야 그와 나, 그리고 말 두 마리가 전부였으니까.
그런데 한참이나 침묵으로 일관하던 라이가가 불현 듯 그렇게 말한 것이다.
명예라는 건 부질없노라고.
"왜 그렇게 생각하십니까?"
"사람은 태어난 환경에 따라 기본적으로 주어지는 '명예'가 존재하기 때문이다. 왕의 자식들, 귀족의 자식들은 평민보다 더 많은 '명예'를 처음부터 쥐고 있지."
라이가 치고는 상당히 의외의 발언이었다.
팔가의 주인이라는, 제국 최상단의 직위를 지녔음에도 체계의 불공평함을 토로하고 있는 것이다.
하지만 판게니아에서 '불공평함'은 지극히 당연한 것이었다.
태어날 때부터 지위가 다르고, 명예가 다른 건 이상한 일이 아니었으므로.
무엇보다 '명예'의 수치가 달랐다.
일반적인 판게니아의 인간은 태어날 때 명예가 0이다.
죄인의 자식은 마이너스로 시작하는 경우도 있다고 들었다.
하지만 귀족의 자식, 왕가의 자식은 최소 100포인트 이상의 명예를 쥐고 태어난다.
"부모로부터 쌓아올려진 '명예'가 자신의 아이에게 양도되는 것이 이상한 일은 아니지 않습니까?"
"······ 역시, 너도 그렇게 생각하나보군."
살짝 실망했다는 눈빛으로 라이가가 나를 바라보았다.
허나, 틀린 말은 아니었다.
이게 바로 판게니아가 질서를 유지하는 방식이었으니.
부모의 명예가, 부모의 죄가, 자신의 아이에게 이어지는 것.
그래서 많은 이들이 착하게, 명예롭게 살려고 하는 것이다.
판게니아라는 세계가 돌아가는 근간을 부정할 수는 없지 않은가.
이어 라이가가 말했다.
"명예란 스스로 쌓아올린 자격이다. 그저 태어났을 뿐일진대 누군가는 무거운 업을 지고 탄광에 들어가며, 누군가는 아무런 노력없이 하늘 위를 날아다니지. 이상하지 않느냐?"
일종의 '수저론'이었다.
흙수저와 금수저의 경계처럼.
하지만 명예란 단순히 '돈'의 문제만은 아니었다.
판게니아에서 명예가 있는 것과 없는 것의 차이는 그보다 극심했다.
"이상하지 않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고개를 저어보였다.
모두가 평등한 사회는 존재하지 않기 때문이다.
그러한 이상향(理想鄕)은 어디에도 없다.
내 확답에 라이가의 미간이 살짝 찌푸려졌다.
"진정 그리 생각하느냐?"
"예. 우리가 명예롭게 살아가야만 하는 이유, 사람답게 살아가야만 하는 이유. 자식에게 부끄럽지 않은 아버지가 되기 위해서 아닙니까? 허나······."
"······."
"그와는 별개로 모두에게 평등한 '기회'를 부여해야만 한다고 생각합니다."
"기회를 부여한다니?"
"명예가 없는 출신이라 하여 실력이 있음에도 기회조차 주어지지 않는다면, 그보다 불명예한 일은 없을 테니 말입니다."
"······!"
라이가의 두 눈빛이 살짝 떨렸다.
명예에 대한 정의.밑바닥 출신이라한들 실력이 있다면 기회를 주는 것이 진정한 명예라는 나의 말을 듣고 심경에 변화가 생긴 것이다.
"······ 그래, 그것이야말로 가장 불명예스러운 일이지."
곧이어 라이가가 고개를 끄덕였다.
동시에 나를 바라보는 눈빛이 조금 누그러졌다.
만족한 듯이 입가에 미소마저 띄우고 있었다.
'의외로군.'
역시 라이가는 일반적인 귀족들과 사상의 궤가 달랐다.
고압적이고 출신을 당연히 따지는 그들과는 전혀 다른 인물이었다.
라이가가 따지는 것은 오로지 실력이다.
실력과 노력이었다.
'단순히 약자를 멸시하는 게 아니라, 노력하지 않는 자를 싫어하는 것이었나.'
처한 상황을 극복하려 하지 않고, 포기해버리는 부류를 혐오하는 것일 뿐이다.
이 역시도 판게니아의 특권층과는 전혀 다른 부분이었다.
그들은 '노력'이라는 단어를 무척이나 우습게 보는 경향이 있었으므로.
이윽고 라이가가 입을 열었다.
"또한, 명예는 '검'과 같다."
"······?"
"갈고 닦으면 닦을수록 빛이 나며 날카로워지지. 녹이 슨 검일지라도 얼마나 열심히 가느냐에 따라 충분히 빛을내며 날카로워질 수 있다."
"그건 검이 아니라 다른 무기들도 마찬가지 아닙니까?"
"검은 양쪽 날이 세워진 무기다. 단순히 갈고 닦기만 한다면 검은 균형을 잃는다. 양쪽을 모두 얼마나 잘 갈고 닦느냐에 따라 녹슨검도 명검이 될 수 있는 게다."
명예의 또 다른 이야기였다.
검을 갈고 닦는 법.
하지만 단순히 그러한 방법론을 이야기하고자 말을 꺼낸 것은 아닌 것이다.
이윽고 라이가가 표정을 굳힌 채 계속해서 말했다.
"나는 너에게 검의 양쪽 날을 잘 갈고 닦는 법을 가르칠 것이다. 명예의 성소가, '그들'이 인정하지 않는다고 하여도."
"······."
"반드시 그렇게 할 것이다. 실력이 있고, 재능이 있다면 기회를 주는 게 당연한 일이니."
너에겐 재능이 있다.
라이가는 나를 향해 그렇게 말하고 있었다.
그래서일까.
'미안해지는군.'
사신교의 간부로 만났을 때와는 전혀 다른 모습.
나를 향한 라이가의 열정은 진심이었다.
여태껏 몰랐던, 알 수 없었던 라이가의 진실을 마주하게 된 기분.
그래서 미안해졌다.
나는 라이가에게 진심이 아니었으니까.
라이가가 이런 인간일 것이라곤 상상도 못했었으니까.
게다가.
'라이가는 나를 파악했다.'
아드리움의 현.
아드리움 출신이라고 했지만, 그게 거짓임을 간파한 게 분명했다.
그럼에도 상관없다고 말하는 것이다.
도리어 그럴만한 이유가 있노라고 믿는 듯싶었다.
'··· 나도 조금은 진심으로 대해야겠군.'
처음부터 거짓된 관계이나, 이제와서 진실을 말할 수는 없었다.
그의 불씨는 이제 곧 꺼진다.
그의 두 눈은 조금씩 생기를 잃어가고 있었다.
다만, 그렇기에 더욱 진심으로 대할 수는 있을 것이다.
적어도 그가 바라는 모습으로 그의 원을 이루어줄 수는 있을 것이었다.
어차피 서로가 서로를 필요로하는 상황.
"······ 열심히 배우겠습니다."
지금은 그가 바라마지않는 '노력하는 천재'의 모습을 선보이기로 결심했다.
그게 내가 라이가에게 해줄 수 있는 최선의 표현일 테니.
*
-명예가 없는 출신이라 하여 실력이 있음에도 기회조차 주어지지 않는다면, 그보다 불명예한 일은 없을 테니 말입니다.
그 말을 들었을 때, 라이가는 작게 전율했다.
단순히 재능만 있는 것이 아니었다.
현은 자신과 같은 생각을 공유하고 있었다.
제국에는 자신과 같은 가치관을 지닌 자가 없었거늘.
'죽기전 하늘이 내게 내려준 선물인가······?'
현은 마치 선물과도 같았다.
죽기 전, 하늘이 자신을 가엽게 여겨 내려준 선물처럼 느껴졌다.
단순히 자신에게 잘 보이려고 하는 대답이 아니었음을 알았기에 훨씬 더 기꺼웠다.
'출신은 상관 없다.'
여신교의 성도 아드리움.
그곳의 출신이라는 건, 거짓말이다.
현은 그곳에서 나고 자라지 않았다.
하지만 그곳에서 기회를 노린 건 분명했다.
아마도 출신 때문이리라.
평민, 혹은 그보다 더 비루한 출신이었기에, 기회가 필요했을 것이다.
아드리움에서 그 기회를 찾고 잡은 것뿐이었다.
도리어 기특하지 않나.
세상의 많은 사람들이 기회를 눈앞에 두고서도 잡지 못하는 경우가 태반이다.
반면 현은 아드리움으로 가서, 스스로 기회를 거머쥐었다.
'현과 관련된 것은 세상 어디에도 없다.'
어째서이겠나.
현은 이 세상에 남겨진 정보가 없다.
가족도, 친구도, 그를 아는 자도 없었다.
그의 정보력으로도 알아내지 못했다.
말인 즉슨.
'아마도 노예 출신일 터.'
자신과 같은 노예의 출신일 가능성이 높다는 것.
노예의 인장은 없었지만, 라이가가 그러했듯 육체를 재생시켜 인장을 지워낼 방법은 많았다.
그래서일까.
더욱 가깝게 느껴지는 건.
물론, 명예의 성소로 향해봤자 형편없는 명예의 소유자라며 타박만 당할 것이다.
성소 자체가 거부할지도 모르는 일이다.
애초에 명예를 수치화시켜 자격을 부여하는 곳이었으니.
당연히 팔가는 반대하겠으나, 라이가는 이야말로 마지막 기회라고 여겼다.
팔가를 개선할, 그리하여 세상을 바꿀 첫 걸음.
비록 자신은 실패했지만 현은 다를지도 모른다.
아니, 달라야만 했다.
"지금부터 나를 상대해보거라."
라이가는 명예의 성소로 향하며 틈틈이 현에게 가르침을 내리고 있었다.
··· 대련의 방식으로.
벌써 수차례나 이루어진 대련.
한데, 라이가의 가르침을 현은 마치 스펀지처럼 흡수했다.
아무도 따라오지 못했던 그의 검을.
그의 검식을.
검에 담긴 묘리와, 라이가가 행하고자 했던 검의 의지를 현은 무척이나 손쉽게 따라오고 있었다.
이런 적은 처음이었다.
이토록, 누군가를 가르치며 즐거웠던 기억은 없었다.
챙-!
검과 검을 맞대자 마찬가지로 명쾌한 소리가 흘러나왔다.
'스승님께서 나를 가르칠 때 이런 기분이었나.'
라이가는 저도 모르게 미소를 짓고 있는 걸 깨달았다.
생각해보면.
전대 팔가의 주인.
스승님은 자신을 가르치며 항상 웃었다.
진심으로 즐거워했다.
당시에는 자신이 구르는 모습을 재밌게 보고 있는 듯했으나, 이제와서 보니 아니라는 걸 알겠다.
그저 즐거웠던 것이다.
라이가를 가르치는 게.
하지만 지금껏 라이가는 그런 기분을 맛본 적이 없다.
누군가를 가르치는 건 무척이나 귀찮고 시간낭비일 뿐이었다.
어차피 아무도 따라오지 못했으니까.
아무도, 그의 검에 공감하지 못했으니까.
그가 보는 것을 똑같이 보는 자가 없었으니까.
'··· 결을 볼 줄 안다.'
만물에는 결(結)이 존재한다.
라이가에겐 결이 보였다.
어디를 찌르면 치명상이고, 어디를 베면 결의 균형이 깨어지는지 알았다.
그리고 현 역시도 결을 볼 줄 아는 게 틀림없었다.
하지만 녀석이 결을 보는 방식과 자신이 보는 방식에는 약간의 차이가 있었다.
라이가는 오로지 결을 베어내려고만 한다.
하지만 현은 그 결의 순환을 이용할 줄 안다.
다만, 그래서인지 결을 베어내는 방식엔 약하다.
반대로 라이가도 결의 순환을 이용하는 방식에는 약했다.
'결의 순환. 존재의 파장을 받아들인다······.'
라이가는 자신에게 약했던 부분을 현을 가르치며 알게 되었다.
이러한 방식도 있음을 깨달았다.
단순히 상대의 힘을 이용하는 게 아니라, 상대 그 자체의 파장을 받아들인다는 것.
만약 다른 자가 이러한 기술을 사용했다면 라이가는 본능적으로 거부했을 것이다.
하지만 가르침의 즐거움을 가르쳐준 존재가, 현이 사용하는 묘리였기에 라이가에게 강력하게 부각되었다.
라이가가 누군가를 이해하려고 해본 것 자체가 처음 있는 일이었던 탓이다.
'아······!'
······ 그 순간이었다.
검을 맞대면 맞댈수록.
현을 이해하려고 노력하면 노력할 수록.
조금씩 차오르던 무언가가 마침내 임계점에 도달했다.
라이가는 전신을 부들부들 떨었다.
그리고 이내, 검을 맞댄 채 멈췄다.
"······."
세상이 정지한 것만 같았다.
눈을 감고, 숨소리마저 거의 들리지 않을 정도로.
가만히.
라이가는 깨달음을 얻었다.
무장 해제
깨달음.
그것은 자신의 부족한 점을 알게 되는 것이다.
자신의 부족함을 알고, 받아들이며.
그리하여 더욱 깊어지는 과정이었다.
흔히 말하는 '벽을 부순다'라는 표현처럼.
그것은 벽 바깥에 존재했던 것을 알게 됨으로써 자신의 세상을 한층 더 넓힌다는 의미다.
깨달음은 갈구하는 자에게만, 열려있는 자에게만 찾아오기 마련이었다.
당연히 스스로가 완전하다 믿고, 앞뒤가 막혀있다면, 깨달음은 찾아오지 않는다.
이것이 빌헬름이 정의한 '깨달음'에 대한 이야기다.
끊임없이 갈구하고 탐욕 하되 자신을 내려놓는 것!
'······ 허.'
한데, 지금 내 앞에서 깨달음이 이루어지고 있다.
내게 가르침을 준다면서 도리어 스스로 가르침을 얻게 된 모습.
나는 모든 행위를 멈춘 채 라이가를 바라봤다.
검을 맞대며 눈을 감은 라이가.
마치 정지화면처럼 아무런 미동도 없었다.
다만, 그의 전신에서 뭉실뭉실 떠오른 기운들이 잔잔하게 피어올라 세상을 받아들이고 있었다.
연결되는 중이다.
불현 듯 떠오른 깨달음을 붙잡는 중이었다.
그렇게 실과 같이 떠오른 기운의 줄기들이 마침내 나에게도 닿자.
-살고싶다······.
순간 라이가의 목소리가 들린 듯했다.
살고싶다고.
이대로 죽기 싫다고.
자신의 목소리를, 의지를, 그는 처음으로 바깥에 내었다.
겸허히 죽음을 받아들인 척 하였으나 사실 살고 싶었던 게다.
부족함을 알게되고, 받아들임으로써 삶을 욕망하게 된 것이다.
오랜세월 닫혀있던 문이 열렸다.
해가 지고, 달이 떠오를 때까지.
"······ 으음."
반나절이 넘는 시간 동안.
나는 묵묵히 그가 문을 여는 것을 기다렸다.
마력을 펼쳐 아무것도 접근하지 못하도록, 아무런 소리도 들리지 않도록 조치했다.
그리고 완전한 밤이 되어서야 그는 눈을 떴다.
동시에 나를 보는 두 눈동자가 거칠게 흔들렸다.
"날··· 기다려준 게냐?"
"축하드립니다."
"······ 고맙구나."
라이가가 크게 심호흡을 했다.
고맙다는 말.
그러한 말을 사용해본 게 언제가 마지막인지 기억조차 나지 않는다.
하지만, 진정으로 고마웠다.
깨달음은 찰나와 같아서 항상 쏜살같이 지나간다.
그 찰나에 잡지 않으면, 모두 훑지 않으면 언제 다시 찾아올지 모르는 게 깨달음이다.
허나 그러한 집중력은 작은 움직임 하나, 숨소리 하나만으로도 깨져버린다.
특히 라이가와 같은 강자의 깨달음은 더욱 그러하다.
그것을 알고 함께 멈춘 채 기다려준 것이다.
상대에게 극도로 집중하고 있지 않았다면 불가한 일이었다.
또한, 반나절이 넘는 시간 그 자세 그대로 가만히 있어준 것도 엄청난 인내심이라 하지 않을 수 없었다.
"당연히 해야할 일이었습니다."
뿐만인가.
말은 또 어찌나 마음에 들게 하는지.
좀이 쑤시고 불편했을 게 뻔할 텐데도.
그래서일 것이다.
스승님 이후로는 처음이었다.
다른 사람에게 라이가가 '호감'이라는 걸 가져본 것은.
'절대적인 경지인 심검지경에 다다랐다고 생각했으나, 나는 아직 합일(合一)조차 제대로 이르지 못했다.'
검사의 경지에는 여러 단계가 있다.
그중 심검(心劍), 혹은 무검(無劍)의 경지라고 칭해지는 단계는 '절대자'가 되었음을 뜻하는 말이었다.
라이가는 생사의 경계에서 심검을 깨달았다.
하여 절대자가 되었다고 스스로 생각했으나.
사실 정기신(精氣神)의 합일조차 이루지 못했음을 이제 알았다.
'팔가의 비기, 오문개방의 문제점은 정기신의 합일이 원활하지 않은 것이다.'
······ 하여 제대로된 축기가 되지 않고, 오문을 열면 죽음에 이르는 것이다.
드디어 팔가의 문제점을 깨달았다.
이를 해결하기 위한 방법도 얼추 알 것 같다.
연결이다.
무한히 연결되는 것이다.
"······."
라이가가 입을 작게 열었다가, 다시 닫았다.
하지만 이내 마음을 굳게 먹고 녀석에게 물었다.
"··· 생사경의 나머지 부분을, 내게 알려줄 수 있겠느냐?"
*
결(結).
맺고, 끊는 것.
라이가의 깨달음은 내게도 각성의 단초를 주었다.
그의 결이 내게 닿으며 알게된 것들이 있었다.
'빌헬름은 맺는다. 라이가는 끊어낸다. 허나, 둘 다 있어야 비로소 결이 완성된다.'
빌헬름의 검술은 맺었다.
상대를 파악하고, 파장을 공유하며, 자연스럽게 흘려냈다.
무한한 순환.
끝없이 맺고 또 맺는 게 빌헬름의 검술이다.
상대의 힘을 이용하며 더욱 크게 굴려 받아치는 묘리다.
상대가 강하면 강할수록 그 반동은 상상을 초월했다.
반면, 라이가는 전혀 달랐다.
결을 끊는다.
자세를 취하기도 전에, 중심을 무너트린다.
정신과 기운, 신체의 균형을 박살낸다.
하지만 결을 끊어내는 건 생각보다 어려운 일이었다.
빌헬름과는 완전히 다른, 정반대의 검술이라서 더욱 그런 듯싶었다.
'결을 온전히 맺고, 끊을 줄 알게되면······ 다음 단계로 나아갈 수 있다.'
그런 확신이 들었다.
검 숙련도 레벨 35.
그 이후의 세계에 도달하게 되리라는 걸.
'숙련도 레벨이 35에 도달하자 검강 대신 무장 해제라는 기술이 나타났지.'
숙련도 레벨 20에 이르면 검기를 사용할 수 있다.
30을 넘어서면 검강을 발현시키는 게 가능해진다.
하지만, 그 이후는 몰랐다.
35레벨에 도달하자 '무장 해제'라는 신기술이 발현될 줄은.
피해량이 100% 증가하는 것만으로도 어이가 없을 지경이건만.
말인 즉슨, 그 이후의 세계가 더 있다는 뜻이다.
'무장 해제······ 공격할 수 없는 것을 공격할 수 있게 해주는 힘.'
검기나 검강처럼 따로 피어나는 기운은 아니다.
허나, 능력만큼은 확실했다.
방어를 꿰뚫는 관통력과는 다르지만, 어떤 의미에선 관통력을 넘어서는 능력이었다.
절대적인 회피.
혹은 공격불가의 무언가를 공격할 수 있게 해주는 게 바로 '무장 해제'였으므로.
말 그대로 상대의 무장을 해제시킨다는 말이다.
예컨대.
"결(結)을 보아도 끊지 못하는 것들이 있다. 파괴불가, 무적과도 같은 능력을 지닌 것들. 말 그대로 '회피'를 전제로한 것들이다. 실체가 없는 정령들도 여기에 포함되지."
내가 그에게 생사경의 반쪽을 알려줘서일까.
라이가는 결(結)에 대한 공부를 내게 가르치고 있었다.
결을 베어내는 게 가능한 것과, 불가한 것.
하지만 듣다보니 궁금해졌다.
무장 해제의 경지에 다다르면, 저것들조차도 공격가능한 게 아닌지.
"파괴가 불가한 무적의 능력을 지닌 적은 그럼 어떻게 대처해야 합니까?"
궁금증을 입에 담자 라이가가 답했다.
"완전한 무적은 없다. 보통 파괴가 가능한, 혹은 무적을 푸는 조건이 있기 마련이다. 그러한 '틈'이 존재한다면 '결'을 읽어 공격할 수 있다."
용신이 그랬다.
단 하나의 약점만을 지닌 신격체들.
약점을 찾는다면 한없이 약해지지만, 그 약점을 찾아내는 일 자체가 불가능에 가까웠다.
한데, 결을 읽으면 해결이 가능하다니?
"결을 읽으면 약점을 찾아내지 않아도 된다는 겁니까?"
"아아. 제대로 '결'을 읽을 줄만 안다면 그 틈을 파고드는 게 가능하다. 어렵게 약점을 찾아낼 필요가 없어지지."
······ 문득 대원정에서 이세라의 약점을 찾고자 개고생을 한 게 떠올랐다.
라이가의 말마따나 결을 읽어내 틈을 파고들 수만 있다면, 굳이 그렇게 고생할 필요가 없다는 것이다.
허나 제대로 '결'을 읽을 줄 아는 이는 거의 없다.
아니, 결을 읽고 완벽하게 베어낼 줄 아는 건 이 세상에서 라이가뿐일 것이다.
"만약 약점이 없다면 어떻게 해야합니까?"
"그런 적을 만난다면······ 도망가거라."
라이가는 대수롭지 않게 답했다.
하지만 그래서 나는 더더욱 궁금해졌다.
'무장 해제와 결을 베어내는 것. 두 묘리가 더해지면 진짜 가능할지도······.'
무적과 파괴 불가.
그 두 가지의 난제를 해결하는 게, 어쩌면 가능할지도 모른다.
이는 판게니아에서 여태껏 극복되지 않은 옵션이었으므로.
방어는 관통력으로 뚫으면 된다지만, 저 두 가지는 어떻게 뚫어야 되는지 제대로 논의된 바가 없었다.
판게니아를 넘어, 어지간한 신들조차도 모르고 있을 가능성이 높았다.
'··· 미지의 탐험이라.'
아직 이 판게니아에 내가 극복하지 못한 게 남아있음에, 그야말로 미칠 듯이 심장이 뛰었다.
*
'하나를 가르치면 열을, 백을 안다. 결의 묘리를 벌써부터 깨우치고 있다.'
라이가는 현을 보며 끊임없이 감탄했다.
현은 마른 스펀지처럼 그의 가르침을 흡수하고 있었다.
자신의 예상보다 훨씬 빠른 속도로.
'내가 느리다는 생각이 들다니.'
라이가도 마찬가지로 현에게 배우고 있다.
허나, 현이 익히는 속도에 비해 자신의 배움이 느린 것만 같은 기분이 들었다.
결을 맺는 것과, 생사경의 나머지 반절.
둘은 묘하게 관계가 있었다.
'흡성의 능력이다. 상대와 이어지고, 상대의 것을 빼앗아오는 게 나머지 반쪽의 내용이니.'
팔가는 오로지 결을 끊는 것만 가르친다.
맺는 법에 대해선 가르치지 않는다.
배운 적이 없으니, 어떻게 해야할지 모르겠다.
하지만 답은 가까운 곳에 있었다.
현.
녀석을 보며 자연히 알게 되는 것들이 있었다.
깨닫게 되는 것들이 있었다.
'······ 정말로 묘한 녀석이다.'
까도 까도 끝이 없는 양파 같다.
녀석의 끝을 보고싶다는 생각이 강하게 들었다.
그러려면 오문을 극복해야만 한다.
깨달음을 말미암아 계속해서 나아가야만 했다.
시간이 부족할지언정, 포기하지 않는다.
이제는 포기할 수 없는 이유가 생겼다.
라이가와 현.
둘은 서로를 보며 부족함을 채워갔다.
배우고, 배우고, 또 배웠다.
그렇게 보름간 쉴 새 없이 이동한 끝에.
"이곳이 '명예의 성소'다."
마침내 도착했다.
명예의 성소.
······ 팔가가 봉문된 장소에.
*
명예의 성소는 거대한 궁전으로 둘러싸여있었다.
이곳은 스스로의 자격을 증명해내어 인정받는 곳이었다.
자신이 명예롭다 생각하는 이들이 찾아오는 장소이기에, 수많은 이들로 붐볐다.
성소에서 자격을 확인하는 방법은 간단하다.
'명예'라 이름붙은 성배 앞에서 맹세하는 것이다.
자격을 묻는 것이다.
"나, '아무름'은 '왕'의 자격으로 그대 앞에 섰다. 내 자격을 인정해다오, 명예의 성배여!"
오직 실력으로 몇 개의 도시를 정복한 '아무름'이라는 자가 성배 앞에서 외치자.
화아아아악!
성배에서 빛이 흘러나왔다.
하지만 빛은 아무름에게 닿지 않았다.
도리어.
쿵!
······ 아무름을 튕겨냈다.
그러자 아무름의 얼굴이 울그락불그락해졌다.
"감히······! 물건 따위가 나를 거부해!"
스릉!
분노에 차올라 검을 빼어든 순간.
촤악!
아무름의 목이 잘려나갔다.
자신이 어떻게 죽는지도 모른 채.
"신성한 성소에서 무기를 빼어들면 즉결사형입니다."
그때, 성배를 지키던 남자가 말했다.
허나 검을 빼어드는 것조차 제대로 보이지 않았다.
극에 이른 발도술이다.
이어 남자가 라이가를 바라보았다.
"돌아가십시오, 라이가님. 이곳은 당신에게 허락된 대지가 아닙니다. 하물며······."
라이가임을 알고 있음에도 적대적으로 말하는 남자.
남자가 나를 슬쩍 바라보곤 고개를 저었다.
이곳에 무엇을 하러 왔는지 알고 있다는 기색이다.
냉담한 반응에 라이가가 표정을 굳히며 입을 열었다.
"······ 여덟 장로를 모두 불러오라. 다 부숴버리기 전에."
"마지막 경고입니다. 저는 당신이 두렵지 않습니다."
"하! 네놈 따위가?"
라이가가 피식 웃고 말았다.
그리곤 어깨를 으쓱했다.
"오냐, 네놈을 죽이면 전부 나타나겠지. 보아하니 네놈이 내 다음 전인인 듯싶으니-"
"멈춰라!"
그때였다.
흰색의 무복을 입은, 백발이 무성한 노인이 등장한 것은.
······ 마치 신선처럼, 구름을 탄 채로 말이다.
그렇게 하죠.
팔가.
그러나 세간에 알려진 이름은 '팔가기사단'이다.
라이가가 이끄는 최강의 기사단이며 제국을 대표하는 이름이었다.
하지만 기사단의 이름인 '팔가'가 무엇을 뜻하는지, 그러한 가문이 있는지조차 모르는 사람이 태반이었다.
또한, 명예의 성소에 팔가의 가문이 봉인되어 있다는 사실을 아는 이도 없었다.
명예의 성소를 지키는 수호자들의 이야기야 몇 번 들어봤지만.
어지간한 초월자도 명함을 못 내밀 정도로 강력한 괴물들!
'밝혀지지 않은 히든 퀘스트와 연계되어 있을 줄 알았는데.'
이들의 정체에 대해 설왕설래가 많았다.
그러나 도저히 정체를 알아낼 수가 없었다.
하여 아직 업데이트가 안 됐거나, 특정 조건을 만족해야만 정체를 밝힐 것이라고 예상할 따름이었다.
나는 명예의 성소에 있는 수호자들이 아직 밝혀지지 않은 '히든 퀘스트'의 줄기라고 여겼는데, 반은 맞고 반은 틀린 셈이다.
'이들이 팔가일 것이라곤 아무도 예상하지 못했으니.'
그러니, 플레이어 중에선 내가 최초일 것이다.
성소의 수호 집단이 사실은 팔가이고, 라이가와 관계되어있다는 걸 아는 사람은.
게다가······.
'······ 구름을 탄 인간이라.'
흰색 구름을 타고 나타난 노인.
그가 등장하자 등 뒤로 소름이 좌악 돋는 기분이었다.
단순히 기세 때문에, 마력이 강해서만은 아니다.
손오공의 근두운처럼 구름을 타고 있어서도 아니었다.
물론, 그 또한 특이하긴 했지만 노인에게서 느껴지는 기색은 그보다 더 거대했다.
마치 대자연을 눈앞에 둔 느낌이라고 해야할까.
나는 내심 고개를 끄덕였다.
'신선이 있다면 딱 저런 모습이겠군.'
자연의 기운이 이토록 농축된 인간은 처음이었다.
드라이어드들보다도 더 자연친화적인 느낌마저 들지 않나.
"이곳이 어딘 줄 알고 행패를 부리는 것이냐, 라이가."
구름을 탄 노인이 근엄하게 말했다.
하지만 명백히 라이가를 괄시하는 말투였다.
"이곳이 어딘 줄 아느냐 물었나?"
이에 라이가의 입가에 미소가 피어올랐다.
그리곤 무미건조한 목소리로 계속해서 말했다.
"내가 주인인 곳. 하지만 내가 버린 곳. 그러나 이제 다시 되찾을 곳!"
팔가를 되찾겠다.
라이가는 그렇게 선언한 것이다.
그러자 노인의 눈빛이 굳었다.
"······ 처음부터 너는 이곳의 주인이었던 적이 없다. 같은 이유로 버릴 수도 없고, 되찾을 수도 없지. 팔가의 봉문은 우리가 선택한 것이니."
"지나가던 개가 웃을 일이군."
쯧.
라이가가 혀를 찼다.
세상 어느 가문이 봉문을 스스로 선택하겠는가.
가문의 이름이 적힌 간판을 내리고, 세간에서 잊혀지는 선택을 제알아서 하는 가문은 어디에도 없다.
전대 팔가의 주인, 라이가의 스승에 의해 강제로 그리 되었을뿐.
그것을 이들은 '스스로의 선택'이었다며 자기위안이나 하고 있는 것이다.
노인은 고개를 저었다.
"꺼지거라. 이곳에 네가 서있을 곳은 없다."
"일장로. 분명히 말했을 텐데. 되찾겠다고."
"······ 끝까지 벌주를 마시려 드는구나."
일장로라 불린 노인이 한차례 손을 휘저었다.
그러자.
휘이이이이이이!
쿠아아아아아앙!
사방에서 돌풍이 몰아닥치기 시작했다.
수십, 수백 가닥의 돌풍이 라이가를 덥치며 이내 태풍으로 돌변했다.
동시에 하늘 위에 결계가 새겨지며 라이가를 태풍과 함께 가둬버렸다.
결계 안에서 압축된 공기압과 거센 태풍의 바람은 그 안에 있는 모든걸 세포단위로 갈아버릴만큼 강력하기 그지없었다.
"강철을 먼지로 만들 정도로 강력한 압을 네가 버틸 수 있겠느냐?"
일장로가 나지막히 말했다.
저 결계 안에 갇히면 단단한 용의 비늘도 찢겨져나간다.
하물며 인간의 얇은 피부 정도는 순식간에 갈아버려 살과 뼈를 분리시킬 것이다.
마력을 둘러 저항한다고 해봤자 소용없다.
광활한 자연의 힘 앞에선 시간문제일 따름이었다.
"지금이라도 잘못을 빌고 돌아간다면······."
성히 보내는 주마.
그리 말하려던 일장로의 눈에 순간 이채가 뗬다.
스악!
쩌어억!
······ 결계가 일자로 갈라지며, 라이가가 천천히 걸어나왔기 때문이다.
아무런 타격도 없이.
너무나도 멀쩡한 모습으로.
"······!"
일장로의 두 눈에 당황과 경악이 담겼다.
인간은 절대로 자연을 이길 수 없다.
자연의 '결'을 벨 수 없었다.
한데.
"형편없는 '결'이로군."
라이가는 베어냈다.
마치 숨쉬듯 자연스럽게 싹둑 잘라버렸다.
그리곤 천천히 일장로를 향해 걸어나갔다.
그 찰나.
"멈추······!"
일장로가 다급히 입을 열었다.
다가오는 라이가를 향해 하는 말일까?
그건 아니었다.
일장로의 시선이 향한 곳은 그보다 더 뒤다.
성소를 지키던 수호자.
성배를 향해 검을 뽑아든 남자의 목을 쳐냈던 그가, 라이가를 향해 발도(拔刀)한 것이다.
하지만.
푹!
검을 뽑기도 전에 남자는 거꾸러졌다.
보이지 않는 검 한 자루가 남자의 급소를 찔렀기 때문이다.
그를 본 일장로의 안색이 변했다.
"심검······?"
무형검.
형체가 없는 심검의 공격임을 알아본 탓이다.
이는 전대 팔가의 주인도 도달하지 못했던 영역!
라이가가 스승을 넘어섰다는 의미였다.
"··· 내 자비는 끝났다."
라이가는 사신과도 같이 말했다.
무표정하게, 그저 명했다.
"모두에게 알려라. 너희의 주인이 돌아왔노라고."
너희의 주인이 돌아왔으니.
······ 알아서 고개를 조아리라고.
*
성소의 끝, 보이지 않는 결계를 넘어가자 또 다른 세상이 나타났다.
높은 절벽.
폭포가 흐르고 안개가 자욱한 신비한 땅.
그리고 절벽 위에 지어진 전각 하나.
팔가의 표식이 새겨진 전각의 주변에는 수많은 괴생명체가 공존하고 있었다.
'······ 하나같이 희귀한 영물들이로군.'
다섯가지 색을 가진 뱀, 금색의 두꺼비, 황금빛으로 빛나는 거북이, 인간의 얼굴을 한 거미, 붉은 빛이 감도는 커다란 잉어 등등.
전부 판게니아에서 극히 희박한 확률로 등장하는 영물들이다.
한 마리라도 등장하는 순간 전쟁이 벌어질 정도로 귀하디 귀한 영기(靈氣)의 덩어리들.
영물의 내단은 마력증진 효과가 뛰어나 돈으로도 살 수 없다.
나 역시 거의 본 적조차 없는 영물들이 이곳엔 지천에 널려있었다.
"'팔가의 성역(???)'에 입장했습니다."
"업적, '최초로 팔가의 성역에 발을 들인 자'를 달성했습니다."
그야말로 신선의 땅이었다.
처음 보는 장소.
플레이어 중 그 누구도 도달한 적 없는 미지의 영역에 발을 디뎠다.
끼이익!
일장로의 안내를 따라 전각에 다다르자, 전각의 거대한 문이 자동으로 열렸다.
그 너머엔 일곱 노인과 한 청년이 있었다.
노인들은 일장로를 포함한 팔장로들이었다.
하나같이 자연적인 모습이었다.
불로 된 구름, 물로 만들어진 구름 따위를 타고 있었으니.
허나 유일하게 두 발로 서 있는 나머지 한 청년은 누구인지 알 수가 없었다.
청년은 장로들의 중심에서 여유로운 미소로 라이가를 맞이했다.
"40년만이로구나, 라이가."
"대장로. 오랜만이로군."
청년은 대장로였다.
모든 장로들을 이끄는 가장 위의 사람.
현재 팔가의 가문을 이끄는 실질적인 주인.
"그 어렸던 아이가 벌써 다 컸구나."
대장로가 웃어보였다.
그런 대장로를 바라보는 라이가의 눈빛에 약간의 긴장이 어렸다.
다른 장로들은 몰라도, 대장로만은 그에게도 어려운 듯싶었다.
[???]
······ 확실히 다르다.
아무것도 알 수가 없었다.
보이는 것도, 느껴지는 것도 없다.
하지만 분명한건 외관과 달리 그는 어리지 않다는 것이다.
40년 전 라이가를 보았다면, 최소 그 이상의 나이라는 뜻.
"그래. 오랜만에 손님이 왔는데 차라도 한잔 마셔야지."
"한가로이 차나 마시자고 돌아온 게 아니다. 대장로."
"후후. 너무 성급하게 굴지 마려무나."
대장로가 미소짓는 것과 달리, 다른 장로들의 표정은 가히 좋지 않았다.
경멸하며 바라보는 눈빛.
대장로가 손을 휘저었다.
순간.
휘익!
배경이 바뀐다.
어느덧 커다란 탁자가 눈앞에 있었다.
목재 의자와 함께 탁자의 위에는 차가 가지런히 놓여있다.
대장로가 차를 홀짝이며 말했다.
"흐음. 40년만에 팔가를 찾은 이유가 있겠지. 어디 한 번 들어보자꾸나."
"··· 알고 있을 텐데?"
"팔가의 진정한 주인이 되겠다? 아서라, 그러기엔 남은 시간이 얼마 없지 않느냐?"
"······."
라이가가 이맛살을 구겼다.
최대한 내색하지 않고 있음에도 대장로는 라이가의 상태를 단번에 알아봤다.
대장로가 이어서 말했다.
"너의 스승도 오문의 죽음을 이겨내지 못했지. 그리고 지금과 같이, 내 앞에 한 아이를 데려왔단다. 피골이 상접한 어린 소년을."
대장로의 눈이 내게로 향했다.
라이가가 나를 데려온 이유 또한 정확히 알고 있다는 눈초리였다.
"아이는 노예였지. 그럼에도 성역에 존재하는 진짜 '명예의 성소'에서 자격을 확인하기 위해서. 모두의 반대를 무릅쓰고 녀석은 너를 그곳에 데려갔단다."
"······."
"그래. 안타깝게도 성역은 너를 거부했지. 어릴 적부터 몇 번이나 사람을, 주인을 죽였으니, 어쩌면 당연한 일이었을지도 모르겠구나."
"······ 닥쳐라."
라이가의 얼굴에 분노가 차올랐다.
허나 대장로는 아랑곳하지 않았다.
"우리는 너의 스승이 두려워서 봉문을 택한 게 아니란다. 어차피 인간의 시간은 짧아. 하물며 녀석의 시간은 더욱 짧았으니, 두려워할 필요가 없었지."
"그래서, 나를 인정하지 않기에 계속 봉문을 택했다?"
"당연한 걸 묻는구나. 라이가, 우리는 성역이 거부한 자를 진정한 팔가의 주인으로 여기지 않는단다."
"그럼 다 없애고 새로이 만들어야겠군."
후우우우우!
라이가의 전신에서 짙은 기운이 피어올랐다.
곧이어 대장로의 목에 심검을 겨누었다.
"심검이라······ 그러나 아직 조금 얕구나."
대장로가 손을 뻗어, 심검을 쥐었다.
그러자 심검의 방향이 바뀌었다.
무형에 담긴 의지가 변했다.
······ 라이가에게로.
이윽고 대장로가 천천히 입을 열었다.
"나를 상대하려면 이런 얕은 심검이 아니라 오문을 개방해야할 터인데, 다시 개방하면 그 자리에서 너는 즉사할 게야."
"상관없다. 나를 인정하지 않는 팔가는 필요없으니."
"흐음. 너의 스승도 나를 적대하진 않았거늘······."
일촉측발의 상황.
당장 검이 오가도 이상하지 않은 긴장감.
씨익!
그때, 돌연 대장로가 미소를 지었다.
"그럼 이렇게 하자꾸나. 라이가, 네가 다시 성역에서 자격을 확인받는 게다."
순간 라이가의 눈동자가 얕게 떨렸다.
"······ 재확인이 가능한 것이었나?"
"가능하고말고. 결과가 변하는 일은 거의 없지만, 그래도 아예 없는 건 아니거든."
툭!
찰나, 라이가의 살기가 사라졌다.
라이가 역시도 성역의 재확인을 받고 싶었기 때문이다.
비록 어렸을 땐 명예롭지 않아 거부당했다지만.
어릴적 성역에 거부당한 기억은 족쇄처럼 라이가를 따라다니고 있었다.
······ 그러나 지금이라면, 다를 수도 있으니까.
한평생을 쌓아올린 명예라면 가능할지도 모른다.
어차피 이미 거부당한 상태이니 더 잃을 것도 없지 않은가.
"물론, 여기엔 한 가지 조건이 있단다."
"무슨 조건이지?"
"그 아이도 함께 받아야 된단다."
대장로.
그의 눈이 나에게로 향했다.
"둘 다 자격을 확인받는 게야. 팔가의 주인으로 어울리는 존재인지. 그렇게 둘 다 받아들여진다면, 그땐 봉문을 풀고 팔가를 너희의 품에 안겨주마."
"받아들여지지 않는다면?"
"아쉬운 일이 되겠지."
"······."
라이가는 침묵한채 고심했다.
다시금 성소에서 자격을 묻는 게 가능하다는 말.
그건 굉장한 유혹이었으니까.
하지만, 둘 다 명예로이 받아들여지는 일은 불가한 일이다.
게다가 대장로도 말하지 않았던가.
결과가 변하는 일은 거의 없다고.
그렇다면······.
차라리 하지 않는 게 나을지도 모른다.
처음의 계획대로 다 부숴버리는 게 나을 수도 있다.
"그렇게 하죠."
"······!"
불현 듯 들려온 목소리.
전혀 예상하지 못한 이에게서 들려온 목소리에 모두가 시선을 옮겼다.
그곳엔 현이 있었다.
지금껏 한 마디도 하지 않았던 녀석.
기세에 눌린 듯싶었으나.
"자격을 확인받겠습니다. 제가 팔가에 어울리는 존재인지. 그것을 위해 40년만에 이 비루한 곳을 찾아온 것 아닙니까? 스승님?"
"······ 비루한 곳?"
"지금 저놈이 뭐라고······!"
장로들이 반발했다.
라이가는 내심 당황하고 말았다.
비루한 곳이라는 표현 때문이 아니다.
'스승님······?'
스승님이라는 말.
그 말 자체를 처음 들었으니.
그걸 아는지 모르는지, 녀석은 도리어 밝게 웃으며 자신감 가득한 모습으로 대장로를 쳐다보았다.
대장로의 두 눈을 똑바로 마주한 채.
한 치의 망설임 없는 모습으로 말이다.
재미있는 아이를 주워왔구나.
"······ 재미있는 아이를 주워왔구나."
대장로가 흥미롭다는 듯 말문을 열었다.
라이가가 유일하게 데려온 남자.
여유롭게 상황을 지켜보던 남자의 기색은 확실히 어릴적 라이가와는 딴판이었다.
당시의 라이가는 다친 야생동물 같았으니까.
잔뜩 움크린채 여유없이 살기를 흩뿌려대지 않았나.
하지만 지금 자신을 정면에서 바라보는 녀석은 다르다.
'여유가 있다.'
······ 처음부터 그랬다.
이곳, 성역에 처음 발을 들인 자들은 하나같이 압도되기 마련이다.
긴장하며 정신을 놓기 마련이었다.
세상에 존재하지 않는 절경.
수많은 영물과 신선들의 출현으로 인해 움츠러들어야 정상이다.
지금까지 단 한 명도 예외는 없었다.
한데······.
'진짜로 웃고 있군.'
긴장은커녕 이곳으로 자신을 끌고온 라이가보다 더 여유가 넘친다.
이게 가능한 일인가?
보통 제자가 긴장하고 스승이 여유를 부려야 정상적인 그림일텐데.
이 둘은 반대다.
스승이 긴장하고 제자가 여유를 부리고 있다.
게다가.
'확신에 찬 여유. 죽지 않을 것이라는 자신감.'
··· 자신감이 넘친다.
눈을 보니 알겠다.
대장로.
그를 도발하는 듯한 눈빛.
마치 유람이라도 온 것 같았으니까.
허나 의아한 일이었다.
머리가 고장난 게 아니라면, 설령 고장났다고 하더라도 대장로의 눈을 이렇게 똑바로 쳐다볼 수 있는 자는 이 세상에 거의 존재치 않는다.
그의 눈은 선인(仙人)의 눈.
마주하면 현기(玄機)에 잠식당해 본인이 얼마나 볼품없는 가치를 지녔는지 절로 깨닫게 만드는 탓이다.
대자연과 광활한 우주 앞에 한없이 초라한 인간처럼 말이다.
하여 라이가도 오랜시간 그의 눈을 마주할 순 없었다.
얼마나 명예롭고, 얼마나 악할지라도.
어차피 대장로의 존재 앞에선 티끌과도 같았으니.
그래서 말한 것이다.
재미있는 아이를 주워왔다고.
저 자신감의 근원이 어디서부터 비롯된 것인지는 모르겠으나, 분명한건 라이가의 어린 시절과는 정반대의 인간상이다.
그렇다면, 명예 또한 그럴는지.
"어찌할 생각은 없단다. 그러니, 살기를 거두렴."
대장로가 미소를 지으며 라이가를 바라봤다.
자신의 제자를 잡아먹으리라 생각이라도 한 건지.
두 눈을 마주하자마자 미친 듯이 살기를 흩뿌려대고 있었다.
신성한 성역에서 참으로 불신한 행위이나.
'가엾은 운명이야.'
이 또한 운명이고 인연이다.
돌고 돌아 원점으로 돌아가려는 세상의 이치였다.
지금 라이가가 그랬다.
그의 전 스승처럼, 그 전전대의, 전전전대의 후계자들 또한.
죽기 직전 결국 이곳으로 모두 돌아오기 마련이었다.
이곳은 팔가가 시작된 장소이며, 대장로는 그러한 팔가의 태동과 함께한 인물이었으므로.
하여 봐주었다.
그래봤자······ 이제 10일도 채 남지 않은 생명.
팔가를 이은 자의 마지막 모습을 두 눈에 담는 것 역시 대장로의 역할일 터.
'변하는 건 없단다.'
성역이 생기고, 명예의 성소가 자격을 판단한 역사는 이루 말할 수 없을만큼 길다.
그 긴 세월 동안 결과가 바뀐 적은 딱 두 번밖에 없었다.
성역의 성소는 명예와 영혼의 고귀함을 모두 시험한다.
고로, 단순히 명예만 쌓는다고 결과가 바뀌진 않는다는 말이다.
물론 예외는 있었다.
정말 미친 듯이, 압도적인 명예를 쌓은 경우.
허나 그 정도의 명예를 쌓는 건 인간의 수명에선 불가능한 일이다.
그렇다고 오랜세월을 산다하여 쌓을 수 있는 것도 아니다.
'명예라는 건 참으로 깎이기 쉽지.'
오랜세월을 산다는 건 수많은 실수를 한다는 뜻과 일맥상통했다.
그리고 작은 실수만으로도 깎여나가는 게 명예다.
그 힘이 강해지고, 책임이 막중해질수록, 실수의 크기 역시 커지기 마련이었다.
하여 결과가 바뀐 건 고작 두 번밖에 없었던 것이다.
성역이 존재한 오랜 세월동안.
······ 실낱같은 희망에도 부나방처럼 달려드는 게 인간의 습성이긴 하지만.
앞선 두 번의 이변들은 모두 세상을 바꿨다.
결과를 스스로 바꿔낸 자들은 영원불멸한 업적을 세계에 새겨놓았다.
라이가는 어떨까.
과연, 세 번째 이변이 될 수 있을까?
"그럼 성역의 시험을 시작해자꾸나. 전부 나를 따라오거라."
*
라이가는 긴장한 채 대장로의 뒷모습을 바라보았다.
문득 어렸을 적, 처음 이곳을 스승과 함께 찾아왔을 때가 떠올랐다.
장장 40년이라는 세월이 흘렀음에도 여전히 같은 모습을 한 대장로.
그의 스승도, 스승의 스승도, 그보다 더 오랜 세월 전부터 대장로는 저 모습 그대로 이곳에서 살아가고 있었다.
팔가의 화석같은 존재라고 해야할까.
-라이가. 대장로를 적으로 돌리지 말거라. 대장로만은, 결코 적으로 돌려선 안 된다. 그는 세상이 나뉘기 전부터 존재해온 자이니······.
죽기 직전 라이가의 스승은 신신당부했다.
절대로 대장로를 적대하지 말라고.
다른 장로들을 모두 적대하는 한이 있어도, 오직 대장로만은 놔두라고 말이다.
그 이유를 이제는 확실히 알겠다.
'틈이 없다······.'
한 치의 틈도 없었으니까.
대장로.
그는 완전무결한 존재였다.
그야말로 무적이었다.
오문을 개방한들 이길 수 있을지 의문이 들 정도로.
무엇보다 세상이 나뉘기 전부터 존재했다면, 판게니아가 멸망에 의해 심연과 천공의 대륙으로 나뉘기 전부터 살아있었다는 뜻.
'구제국의 팔가와 함께한 자.'
구제국.
그곳을 대표하던 네 거대가문.
팔가, 데르시안, 아르혼, 그리고 라혼.
아르혼 황가를 포함한 나머지 세 가문들 모두가 하늘에 닿을 정도로 강성했던 시절.
그 시절부터, 어쩌면 그 시절보다 더 과거에서부터 존재한 노괴가 대장로라는 말이었다.
허나, 왜 그가 팔가와 함께하고 있는지는 아무도 모른다.
전대 팔가의 후계자들도 정확한 기원은 몰랐다.
다만.
'성역을 지키는 자. 그리고 성역에서 벗어날 수 없는 자.'
대장로는 성역을 벗어나지 못한다.
허나 성역에 있어서 그가 무적인 것은 아니었다.
성역을 벗어나는 게 무적이 풀리는 조건이라면 그것도 '틈'이다.
약점이 있는 것 자체가 '틈'이었으니 라이가가 결을 통해 읽을 수 있어야만 했다.
그러나 틈이 없다.
성역에 있든 없든 대장로는 약점이 없는 진짜 괴물이라는 의미였다.
'······ 허나 대장로가 성역의 의지를 마음대로 다룰 수 있는 것은 아니다.'
성역의 의지와 대장로의 존재는 무관하다.
명예의 성소는 오롯이 진실로 명예를 가리는 곳.
대장로가 마음에 들어하지 않는다고 성역도 마찬가지의 대답을 내놓지는 않는다.
그리고 팔가의 진정한 힘은 이곳 성역에서 자격을 획득해야 생긴다고 말한다.
라이가는 오문개방과 팔가의 기술들은 섭렵했지만, 정작 성역에서 팔가의 자격을 온전히 획득하진 못했다.
'지금의 나라면······.'
어릴때의 그는 그랬다.
볼품없이 성역에서 튕겨나갔다.
기절했고, 눈을 떴을땐 제국이었다.
정말 아무것도 하지 못했다.
-괜찮다. 성역의 허락 없이도 너는 내 제자이니.
-오직 너만이 나의 제자이니.
-라이가. 우리가 함께 증명해보자꾸나.
-성역이 잘못되었다는 걸, 그들이 보는 눈이 없었다는 걸.
-함께 세상을 바꿔보자꾸나, 라이가!
그럼에도······ 전대 팔가의 주인은 라이가를 받아들였다.
모두의 반대를 무릅쓰고서.
하지만 그의 스승은 머지않아 죽었다.
홀로 남은 라이가는 한평생을 죽음의 바로 옆에서 잠이 들고, 깨어나길 반복해왔다.
세상을 바꿀 여유 따위는 없었다.
허나, 라이가는 충분히 명예로웠노라고 생각한다.
심연을 정화하고, 제국의 영토를 넓히는데 평생을 이바지해왔다.
기사단을 키우며 제국 최강으로 자리잡았다.
무(無)에서 유(有)를 창조한 것이다.
이게 명예롭지 않다면 그 무엇이 명예로운 일이겠는가.
"자, 라이가. 이곳이 진짜 '명예의 성소'다. 기억이 나느냐?"
대장로가 멈춰선 곳.
그 바로 앞에 '명예의 성소'가 있었다.
바깥에 있는 성배는 이곳의 기능을 흉내낸 가짜다.
진짜 명예의 성소를 숨기고자 만들어낸 허상과도 같다.
왜 숨겨놓았는가.
이유는 간단했다.
······ 거대한 나무.
빛 한 점 들지 않는 곳에서 스스로 빛나는 나무 한 그루가 있었다.
신록보다 더 아름답고 신비한.
"세계수······."
태초의 숲에만 존재한다는 세계수.
그것이 이곳 성역에 있었기 때문이다.
대장로가 고개를 끄덕였다.
"'명예의 세계수'다. 오로지 명예로운 자만이, 스스로의 자격을 증명한 자만이 다가갈 수 있는 가장 아름다운 나무이지."
바깥에 있는 가짜 성배따윈 세계수 앞에서 아무것도 아니다.
어떠한 신들도 이보다 더 존엄하진 못하리라.
"다시금 증명해보거라. 네가 팔가에 어울리는 자격을 지녔는지."
대장로가 미소를 머금었다.
마지막 기회.
투욱-
라이가가 천천히, 발을 옮겼다.
신중에 신중을 가하며.
잔뜩 긴장한 모습으로.
'··· 어릴때의 내가 아니다.'
라이가는 주먹을 움켜쥐었다.
강하게 쥔 두 손에선 식은땀이 흘러나왔다.
저 명예의 나무는, 세계수는 라이가의 트라우마와도 같다.
팔가의 계승을 허락받지 못했고, 그의 스승은 쓸쓸하게 죽어갔다.
가장 외롭게 죽었다.
이곳 성역에서 세계수의 축복을 받으며 묻히는 게 팔가의 정통이고 예의이거늘, 그조차도 허락받지 못한 것이다.
라이가.
성역이 불허한 자신을 제자로 받아들였다는 이유 하나 때문에.
'스승님.'
떠올려보면, 제대로 스승이라는 말도 못해봤다.
어릴 때의 라이가는 세상을 향한 적의로 가득했기 때문이다.
몇 번이나 팔려가고, 자신을 산 사람을 죽였다.
온갖 고문. 입에 담지 못할 일들을 계속해서 당해왔으니.
인간불신이 생긴 건 당연한 일.
그의 스승도 그러리라 생각했다.
어떠한 불순한 의도가 있어서 자신을 키우고 있는 것이라고 여겼다.
······ 그게 아니라는 걸 너무 늦게 깨달았다.
자신의 가치를 온전하게 봐준 유일한 사람이 그의 스승임을 스승이 죽고나서야 알았다.
그래서다.
현.
녀석이 자신을 '스승님'이라고 불렀을 때, 마음이 격동(激動)한 것은.
왜 더 빨리 찾지 못했을까.
하루라도 더 빨리 알아차렸어야 했는데.
왜 이렇게 삐딱하게 그는 세상을 바라보고 있었나.
'스승님께서도 저와 같은 마음이셨겠지요.'
죽기 직전에야 깨달은 것이다.
그의 스승도, 자신도.
너무 편협하게만 세상을 바라볼 필요가 없다는 걸.
하기야, 그래서 인간이겠지.
허나 어릴때의 라이가와 지금의 라이가는 다른 사람이다.
지금의 그는 명예를 안다.
자신에게 창피하지 않기 위해 살아왔다.
지금이라면, 그의 스승도 자신을 보며 만족하지 않을까.
투욱-
라이가는 마침내 세계수의 영역 안으로 들어갔다.
그리고 쉼호흡을 하며, 말했다.
"나, 라이가가 '팔가'의 주인된 자격으로 이곳에 왔으니. 내 자격을 인정하거라, 명예의 세계수여!"
인정해라.
지금이라도, 스승님의 눈이 틀리지 않았음을.
자신이 팔가의 이름에 적합한 후계자이며 주인임을.
······ 인정하란 말이다.
스으으으으!
그 순간이었다.
세계수의 나뭇잎이 거칠게 흔들리기 시작했다.
그리고.
쿵!
무언가가 가슴을 때렸다.
동시에 라이가의 신형이, 영역 바깥으로 튕겨져나갔다.
"······."
전과 달리 기절하진 않았다.
그러나 라이가의 얼굴엔 형용할 수 없는 분노의 감정이 떠올랐다.
분명히 달라졌다 생각했다.
이번에야말로 받아들여지리라 여겼다.
그런데.
'달라진 게 없다고 말하고 싶은 게냐······?'
어릴 때와 같다.
결국, 결과는 바뀌지 않았다.
그는 영원토록 팔가의 주인이 될 수 없는 것이다.
"······ 아쉽게 되었구나."
대장로가 고개를 저었다.
역시나 예상대로의 결과긴 했지만.
하여간 이로써 이야기는 없던 것이 됐다.
"얌전히 돌아가거라. 이곳은 너의 무덤이 아니다, 라이가."
또한, 이곳에서 라이가가 죽는걸 허락하지 않겠다.
성역의 허락을 받지 못한 이가, 성역의 축복 속에서 죽는걸 놔둘 수는 없는 노릇.
그가 죽을 장소는 제국이 딱이다.
제자와 함께 떠나라.
"역시 근본은 어쩔 수 없나보군."
"쯧쯧, 40년 전 처음 보았을 때부터 나는 알고 있었지."
"얼마나 많은 세상의 오물을 묻히고 다닌 건지."
"선계(仙界)와는 맞지 않는 인물이로다."
장로들이 그럴 줄 알았다는 듯 혀를 내둘렀다.
명예롭지 못한 자.
팔가를 이을 자격이 없는 이.
스으으으으으으!
그때였다.
"음······?"
"세계수가?"
"이게 무슨······?"
세계수의 잎이 다시금 파르르 떨린다.
전과는 비교도 안 될 정도로 가파르게.
하지만, 그뿐만이 아니다.
눈앞에서 벌어지는 광경은.
억겁의 세월을 살아온 대장로도 당황할 수밖에 없었다.
'세계수의 잎이······!'
······ 느닷없이, 만개(滿開)했기 때문이다.
잎사귀에서 꽃이 활짝 피어난다.
후우우우웅-!
동시에 세계수가 푸르러지며, 성역 전체를 가득 채울 정도의 찬란한 빛을 뿜어내기 시작했다.
어떻게 이런 일이?
세계수(世界樹).
세계를 지탱하는 나무.
세계에 뿌리를 내리고, 세계를 유지하는 근간이다.
현재 판게니아에 남아있는 세계수는 '태초의 숲'에 존재하는 엘프들의 나무뿐.
하지만 한 그루가 더 있었다.
이곳, 팔가의 성역에.
'세계수의 존재가 창공의 대륙을 존재케 한다.'
그리고 대다수가 모르는 사실이 있었다.
세계수가 무슨 역할을 하는지 말이다.
먼 옛날, 대륙이 하나였을 시절.
찬란했던 문명은 '멸망'의 출현으로 파멸했다.
그나마 대지의 여신 '레아'의 희생으로 완전한 파멸은 막을 수 있었지만, 절반의 땅은 심연에 가라앉았으며 나머지 절반의 땅은 하늘로 떠올랐다.
하늘에 떠오른 땅은 본래 먼지처럼 사라질 예정이었으나 레아의 쌍둥이 여신인 창공의 여신 '피나'가 지탱할 수 있게 만든 것이다.
지금의 판게니아가 완성된 이야기.
모두가 알고 있는 역사적인 사실이다.
하지만 정작 그 '지탱력'으로 사용된 게 바로 '세계수'라는 사실은 모르고 있었다.
세계수가 사라지면 어떤 일이 벌어질지조차도.
'세계수는 마르고 있었다······.'
문제는 세계수가 죽어가고 있다는 점이었다.
엘프들도 그러한 사실을 깨닫고 있을 테지만, 그저 발만 동동 구르고 있는 실정.
해결방안이 없는 탓이다.
세계수를 관리하던 종족의 부재(不在)로 인해.
멸망에게 멸족당한 비운의 종족 중 하나.
'드루이드.'
······ 드루이드가 사라졌기 때문이다.
멸망은 세계의 근원이 되는 종족들을 모조리 멸족시켰다.
탑을 관리하는 흉의 까마귀들을 없애 탑이 재기능을 못하도록 만든 것처럼.
그리하여 신들을 약화시켰듯이.
드루이드를 없애, 세계수가 모두 말라 죽도록 하였다.
오직 드루이드만이 유일하게 세계수의 씨를 뿌리고, 세계수를 관리할 수 있는 종족이었으니!
'그런데······.'
대장로는 믿기지 않는 눈초리로 세계수를 바라보았다.
그는 오랜세월 명예의 세계수를 돌보며 지켜보았다.
진정으로 명예로운 자가 자격을 확인하여 꽃이 개화한 적이 두 번 있기는 했지만······.
'만개 하다니······!'
그것도 몇송이에 불과하다.
모든 잎이 만개(滿開)한 것은 처음이었다.
하지만 여전히 이유를 알 수가 없었다.
왜 갑자기?
라이가를 튕겨낸 직후에 만개했단 말인가.
하물며 말라가던 세계수가 기운을 되찾았다.
자신이 사력을 다해 돌보았음에도 찾지 못했던 기력이건만.
그도, 라이가도 아니라면 원인은 하나뿐이다.
-재미있는 아이를 데려왔구나.
저 아이.
라이가가 데려온 제자.
허나 기대하지 않았다.
전대 팔가의 주인이 데려왔던 라이가 역시 세계수의 인정을 받지 못했으므로.
라이가가 데려온 제자라는 녀석은 훨씬 더 볼품없으리라 여겼다.
"······."
대장로의 시선이 그에게로 향하자 모든 이들의 시선이 함께 이동했다.
그들 또한 은연중 느꼈기 때문이리라.
지금 이 변화의 중심에 누가 있는지를.
하지만 아닐 수도 있다.
그러니 확인해야만 했다.
"······ 받아보겠느냐, 자격의 시험을?"
대장로가 입을 열었다.
그조차도 살짝 긴장한 듯한 눈동자로.
툭-
짧게 고개를 끄덕인 라이가의 제자가 그 즉시 한 발자국을 떼었다.
그리고 세계수로 다가가 말했다.
허나 그의 입에서 튀어나온 말은 전혀 예상 외의 것이었다.
"내가 너의 주임인을 인정하거라, 세계수여."
"······!"
"······!!!"
장로들이 두 눈을 부릅떴다.
대장로도 당황하긴 매한가지였다.
팔가의 주인, 후계자, 혹은 제자 따위의 말을 늘어놓을 줄 알았다.
한데, '너의 주인'이라니?
설마 세계수의 주인이라고 말하고 싶은 건가?
'말도 안 된다.'
대장로는 내심 고개를 저었다.
세계수의 주인은 존재하지 않는다.
천하의 드루이드도 세계수의 주인임을 자처할 수는 없다.
만약 그런게 있다면 그건.
드루이드 중에서도 전설로 화자되는.
오직 단 한 존재만이 가능할 것이다.
'······ 하이 드루이드.'
드루이드의 지배자.
모든 만물의, 자연의 주인이라고 칭해지는 그 이름만이 가능할 터.
그러나 하이 드루이드는 전설속에서만 등장한다.
그 이름을 계승한 자는 대장로도 본 적이 없었다.
세계가 멀쩡하던 시절에도.
'하이 드루이드는 존재하지 않는다. 존재할 수 없다.'
그러니 저 증명은 실패할 것이다.
라이가와 제자, 둘 다 세계수의 선택을 받지 못하리라.
한데, 그 순간이었다.
화아아악!
빨간색.
세계수가 붉은빛을 내보냈다.
실패의 색깔이다.
하지만.
'······ 튕겨내지 않았다. 명예 1만점을 넘겼다는 뜻이다.'
명예의 세계수는 명예를 수치화하여 확인한다.
빨간색은 1만점의 영역이다.
하지만 1만점에 도달하지 못한 자는 그 즉시 튕겨낸다.
라이가가 튕겨나간 이유 역시 1만점이 되지 않아서다.
허나 라이가의 제자는 튕겨나가지 않았다.
그 말인 즉슨, 1만점을 넘겼다는 의미.
화아아악!
'주황색!'
··· 색이 바뀌었다.
주황색.
2만점의 영역에.
전설로 남겨진 왕들, 대영웅들의 명예가 보통 이 점수대에 속한다.
그들이 자격을 증명할 때 주황색에서 멈추는 경우가 극소수로 있었다.
아니면 그와 비슷할 정도로 찬란하며 아름다운 영혼을 갖고 있을 때, 주황색이 나타났다.
그러할진대.
화아아악!
'······ 넘어섰다고?'
노란색.
3만의 영역대에 진입했다.
이는 황제도 될 수 있는 명예로운 색이다.
팔가의 주인이 될 자격도 이곳에 포함된다.
하지만, 3만의 명예를 쌓았다면 이미 그 이름을 모두 알고있는 자여야만 한다.
굳이 라이가의 제자가 될 이유가 없다는 말이다.
그렇다면.
'신이 직접 빚은 영혼의 소유자라는 것이냐?'
압도적으로 아름다운 영혼만이 도달할 수 있는 영역이거늘.
그야말로 신이 빚은 것처럼, 신의 선택을 받은 교황 같은 자의 영혼이라면 노란색도 가능하다.
"아······!"
"어, 어떻게 이런 일이······!!"
문제는 거기서 끝이 아니라는 것.
또 다시 빛의 색깔이 바뀌었다.
초록색!
······ 이는 여태껏 단 두 번 나타났던 색깔이다.
역사에 길이 이름을 남겼던 두 존재.
스스로 쌓아올린 명예로 정해진 결과를 바꾸었던 최강자들.
대장로도 납득할 수밖에 없었던 그 성스러운 둘 제외하고는 처음보는 색이었다.
무려 명예 4만의 영역.
만약 같은 규격의 영혼이라면, 도무지 상상도 안간다.
성스럽고 거룩한 신의 아이라면 가능할는지.
"······?!"
"······!!!"
허나.
그조차도 끝이 아니었다.
모두 경악하였으나, 목이메어 말도 나오지 않았다.
······ 파란색.
명예점수 5만의 영역에 진입했으니까.
그러나 지금까지 단 한 번도 본 적이 없는 색이었다.
대장로도, 다른 모든 장로들도.
명예의 세계수가 파란색의 빛을 내는 건 전혀 목도한 바가 없었다.
모두가 초록색이 끝이라고 생각했다.
그 이상 가는 존재는 앞으로 나타날 일이 없을 것이라고 확신하고 있었다.
그럼에도 만약 파란색의 빛을 내는 존재가 나타난다면······.
'세계수의 주인.'
······ 처음 내뱉었던 말과 같이, 진정으로 세계수의 주인이라 칭할만하다.
허나 본 적이 없다.
그래서 대장로는 아무런 반응을 할 수가 없었다.
이미 라이가의 제자는 증명해 냈다.
팔가의 주인이 되었음을, 그 이상 가는 자격을 지녔음을.
세계수가 만개하고 기운을 차린 이유도 이제는 확실하게 알 것 같았다.
'마치 선지자(先知者)와 같은······.'
먼 옛날.
굳이 증명을 받을 필요가 없었던 이들이 있었다.
종의 정점에 군림하며 태초를 이끌어나갔던 자들이 있었다.
하이 드루이드가 그러했다.
영원의 군주가 그러했고.
마혈왕이 그러했다.
하지만 이제는 사라지고, 잊혀진 절대자들이다.
그들이라면, 그들과 같은 선지자라면 파란색의 빛을 뿜어내게 만들 수 있을 것 같다.
"대··· 장··· 로님······!"
"나, 남색입니다!"
"이럴수가!"
······ 설마 다시금 색깔이 바뀌리라곤 상상조차 못했기에.
파란색을 넘어, 남색이 되었다.
두 번째 최초의 자격.
6만대의 영역에.
"아······."
대장로는 가만히 감탄을 흘려보냈다.
순수한 감탄이다.
더 이상 생각하기를 포기한 것이다.
이미 저 남자는 자신이 상상했던 모든 영역을 넘어서 있었으니.
세계수가 처음으로 뿜어낸 남색의 빛.
평생 죄와는 먼 인생을 살아도 1,000점을 찍기 힘든게 명예라는 것이다.
만점은 거기서 더 나아가 한없이 명예로워야한다.
그럼, 6만점은 어떨까.
대체 뭘 해야 6만점의 영역에 도달할 수 있을 것인가?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시련의 달성자.'
그 정도로 해야 가능할 것 같다.
당연히 불가능한 일이다.
영원을 사는 불멸자라 할지라도 마찬가지다.
혹시 그와 비슷한 영혼의 규격이라면?
선지자들마저 뛰어넘는 규격이라는 게 있을 수가 있나?
'······ 모르겠다.'
적어도 대장로는 그 이상의 존재를 떠올릴 수 없었다.
오만한 '천상'의 주인들이라면 가능할까.
글쎄.
그들에게 명예가 있다면 멸망을 불러내지 않았을 터.
'끝났군.'
미지의 영역에 도달한 인간.
경이로울 정도로 명예로운 남자.
끝이다.
더 볼 필요가 없다.
뒤가 더 있을 수도 없었다.
그런데.
"보, 보라······."
"보라색!"
"꺼어억······!"
······ 더 있었다.
이론상으로만 존재하던, 일곱 번째 영역.
그 순간이었다.
후웅! 후우우웅!
빨, 주, 노, 초, 파, 남, 보.
일곱가지 색깔이 동시에 세계수를 수놓았다.
그리고 무지개를 만들었다.
무지개를 본 몇몇 장로는 졸도해버렸다.
상식을 벗어난 신비로움에.
저것을, 어떠한 자격이라고 불러야할지 더는 감도 잡을 수가 없었다.
"······ 아름답군."
그저.
··· 아름다웠다.
대장로는 전율했다.
너무나도 거대하고 광활한 대자연의 기운이었으므로.
살면서 한 번도 느껴본 적 없는 강렬한 기운의 활성.
쩌어억!
이변은 또 일어났다.
세계수의 중심부가 갈라지며.
처음보는 영역이 나타난 것이다.
"히든 던전, '잊힌 명예의 던전'이 출현했습니다."
"해당 던전은 '파티 던전'입니다."
"'완성된 명예'를 지닌 자가 지정한 일곱 존재만이 함께 입장할 수 있습니다."
"단, 명예롭지 않은 자는 입장할 수 없습니다."
······ 세계수와 이어진 던전이라니?
그런게 있다는 말 역시 들어본 적이 없었다.
뿐만인가.
스윽!
스으으윽!
대장로의 머리 위로 뿔이 돋아났다.
사슴의 뿔과 같은 거대한 뿔이 나타나기 시작했다.
다른 장로들도 마찬가지다.
비록 대장로의 크기 정도는 아니지만, 그들 역시 뿔이 돋았다.
"아아······."
"어, 어떻게 이런 일이······."
"잘라내었던 뿔이······"
힘이 솟구친다.
그들의 명예가 회복되었다.
잊고 있던, 잊어야만 했던 본분이.
"되, 되찾았습니다!"
"드루이드의 힘을······!"
감격하며 눈물을 흘렸다.
격하게 울부짖었다.
서로를 껴안고, 마구 몸을 떨어댔다.
그럴 수밖에.
그들은 드루이드였기 때문이다.
멸망을 피해 세계수를 옮기고 숨었던 존재들이다.
'멸망을 피하고자 스스로 잘라냈던 뿔이건만.'
멸망을 피할 방법은 하나밖에 없었다.
뿔을 잘라내고, 스스로가 드루이드임을 포기하는 것.
이후 명예를 불태우며 그저 살아갈 뿐이었다.
오로지 세계수를 지키고자 자신을 버렸다.
그런데.
불태웠던 명예가, 버렸던 자격이.
······ 거짓말처럼 회복되었다.
세계수가 온전히 복구되며 그들에게 다시금 원래의 자격을 돌려준 것이었다.
대장로.
먼 옛날, 그는 드루이드를 이끄는 대족장 중 한 명이었다.
멸망과 싸웠던, 하지만 멸망의 절망스러운 힘에 좌절하며 도망쳤던.
가장 불명예한 드루이드다.
그랬을진대.
······ 대장로는 천천히.
예를 다해, 한쪽 무릎을 꿇었다.
그리고 고개를 숙이며 말했다.
"푸른 드루이드의 대족장 '알비노'가 대자연의 주인, 하이 드루이드를 뵙습니다."
지금부터 너를 '파문'한다.
처음, 튕겨 나갔을 때만 하더라도.
라이가는 그저 분하고 원통할 뿐이었다.
일평생을 쌓아 올린 명예가 부정당한 기분이 들어서.
스승의 유언과 기대에 못 미친 것 같아서.
결국, 발악해봤자 라이가는 노예인 것이다.
아무리 비싼 옷을 입고,
고고한 기사인 척 검을 휘둘러도,
··· 그 태생은 비천한 노예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이었다.
세계수가 뿜어내는 붉은색 빛.
명예의 척도.
최초의 빛을 받아들이지조차 못한 까닭이 그 외에 있을 리가 없지 않은가.
한 마디로.
'최소한의 명예조차 없는 존재.'
세계수는 라이가에게 그렇게 말한 것과 진배없다.
하지만······.
라이가는 제국의 온갖 궂은일을 마다하지 않았다.
심연을 돌며 대지를 정화했다.
그리고 정화한 대지를 제국에 편입시켜 대륙을 넓혀왔다.
육체가 잘리고, 부서지며, 정신조차 어그러지는 심연에 계속 발을 들인다는 건 어지간한 용기로는 불가한 일.
아무리 강인한 존재라 할지라도 육체에 독이 쌓이기 마련이니까.
라이가가 생명을 갉아가며 계속 심연에 발을 들인 건 오로지 명예를 위해서다.
스승의 명예에 누를 끼치지 않고자.
아무도 할 수 없는 일을 해내어 스스로 명예로워지고자!
······ 그렇게 한평생을 일구었는데.
'내가 해온 일들이··· 명예와 아무런 상관이 없는 일이라고 말하고 싶은 것이냐?'
그럼 대체 명예란 무엇인가.
자신이 한 일이 명예로운 일이 아니라면.
아무도 하지 않고, 하지 못했던 일들을 해내는 게 명예로운 행위가 아니라면!
'······ 죄송합니다. 스승님.'
팔가의 주인이 되겠다는 꿈.
스승님의 희생이 헛되지 않았음을, 태생의 신분 따윈 명예와 상관없다는 걸 세상에 보여주겠다는 결심.
그 모든게 단번에 무너졌다.
자신을 믿고 팔가와 제국을 등졌던 스승님께 폐를 끼쳤다.
못난 제자 탓에.
다시 팔가의 품으로 돌아가지 못한 채.
"······."
······ 하지만 그러한 비통함도 오래가지는 않았다.
단순히 변심을 해서가 아니다.
상황이 급격히 바뀌었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비통해할 틈도 없었던 것이다.
아드리움의 현.
자신의 제자.
녀석이 세계수의 앞에 섰을 때만 하더라도 크게 기대하지 않았건만.
아무리 무신(武神)의 자질을 지녔다고 한들, 당장은 그것이 명예와 관계되어 있지 않다.
하물며 현 역시 자신과 비슷한 처지이지 않은가.
명확한 신분이 없는, 아드리움의 부랑자.
'주황색······.'
······ 분명히 그랬을 터다.
자질과 명예는 명백히 다른 것이니까.
허나.
현은 튕겨나가지 않았다.
도리어 명예의 다음 자격을 시험받았다.
빨간색에서 주황색으로.
주황색에서 노란색으로.
초록색, 파란색, 남색.
그리고 마침내 일곱빛깔의 찬란한 색을 뿜어내는 세계수.
한 단계가 뻗어나갈 때마다 라이가의 표정은 점차 오묘해졌다.
찡그렸던 표정은 온데간데 없이.
주름이 펴지고, 눈을 크게 뜬 채, 동공이 확대되며.
"푸른 드루이드의 대족장 '알비노'가 대자연의 주인, 하이 드루이드를 뵙습니다."
멍청한 표정을 짓고선.
······ 가만히 입을 벌렸다.
도저히 믿기지가 않았으니까.
그 중심에서 장로들과 대장로 모두에게 찬사를 받는 자.
몇 번을 보고 또 봐도, 그것은 틀림없이 현이었으니.
'이, 이게······ 어떻게 된······.'
어떻게 된 일일까?
자신의 제자가 '하이 드루이드'라니?
장로와 대장로는 왜 전설속 드루이드의 형상을 하고 있는가.
저들이 자연의 힘을 다루며, 영원을 살아가는 이유가 설마 인간이 아니었기 때문이었나?
그러나 현은 인간이다.
결코 저들과 같은 드루이드가 아니다.
그때, 현이 대장로를 바라보며 말했다.
"시험은 끝났습니까?"
"······ 무례를 용서하십시오, 하이 드루이드시여."
세계수의 주인에게 세계수의 시험을 내렸다.
이보다 더한 무례가 어디있나.
시험을 볼 필요가, 증명을 할 이유가 없는 존재였다.
그는 선지자들을 넘어서는 명예와 영혼의 소유자.
그저 서서 자격을 확인한 것만으로도 세계수가 활기를 되찾으며 그들의 자격마저 돌려받았다.
가히 기적과 같은 이름의 존재이리라.
"부디 이름을 알려주십시오."
"······!"
라이가는 이 대목에서 다시 한 번 놀랄 수밖에 없었다.
대장로가 먼저 이름을 묻는 모습은 처음보았다.
그는커녕 자신의 스승에게조차, 더 먼 스승들조차도 먼저 이름을 묻지 않았다고 했다.
제스스로 알려왔을뿐.
한데, 대장로가 먼저 이름을 물은 것이다.
공손히, 극진히 예를 다해서 말이다.
한 번도 본 적 없는 태도였다.
"현."
현이 대답하자 대장로 알비노가 눈빛을 굳히며 말했다.
"현님. 저희를 이끌어주십시오."
"생각해보죠."
생각해본다는 말.
왜인지 희망적인 말이다.
바로 받아들이자니 눈치가 보이는 것이리라.
하기야 하이 드루이드가 자신들을 마다할 리 없지 않은가!
하여 알비노가 미소를 머금은채 물었다.
"감사합니다. 그리고 현님. 다시한번 실례이오나······ 그것이 '진정한' 모습입니까?"
"그런데요."
"그럼 진짜 라이가의 제자 신분이······ 맞습니까?"
다른건 다 재쳐두고서라도 도저히 이해가 안 된다는 모습이었다.
그 누구보다 고귀한 영혼을 지닌 존재가 고작 라이가의 제자라니!
명예의 '명'자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할 이의 제자라는 게 말이다.
세계수의 시험에서 두 번이나 탈락한 자.
팔가의 이름을 잇기도 창피한 신분일진대.
사실은 정체를 숨기고 이곳까지 흘러들어온 게 아닐까?
혹은 진짜 모습을 감춘 게 아닐까?
그런 일말의 기대감을 지닌채 물은 것이다.
"맞는데요."
······ 허나 현은 한치의 망설입없이 답했다.
게다가 왜인지 고까운 말투로.
대장로 알비노의 표정이 살짝 굳었다.
"하이 드루이드이시여. 혹시 제가 무슨 실수를 저질렀습니까?"
"궁금한게 있는데요."
"예. 무엇이든 물어보십시오. 제가 아는 모든걸 답해드리겠습니다."
"스승의 명예가 제자의 명예 아닙니까?"
"그, 그건······."
"제자의 명예가 곧 스승의 명예 아닙니까?"
순간 알비노는 당황하고 말았다.
스승의 명예는 제자의 명예로 직결되긴 한다.
그렇다면 제자의 명예 역시 스승의 명예로 이어진다는 말이다.
하지만 그것도 어지간한 격차 내에서의 일이다.
라이가와 현의 차이는 명백했다.
차이가 너무 커서 감히 한데 묶을 수가 없을 지경이다.
그러나 그런 대답을 원해서 물어본 건 아닐 터.
대장로 알비노의 얼굴에선 어느덧 여유와 미소가 온데간데 없이 사라졌다.
"······."
"제가 따르는 분을 거절한 곳입니다. 제가 그대들을 이끌 이유도, 이곳에 머물 이유도 없습니다."
척!
현이 미련없이 등을 돌렸다.
동시에 모든 장로와 대장로의 눈이 화등잔만하게 커졌다.
'아, 안 돼!'
막아야한다.
현이 돌아가는 일만큼은 절대로 있어선 안 된다.
그가 없으면 세계수는 다시 마를 테고, 자신들의 모습도 예전으로 돌아갈 것이다.
뿐만인가.
세계수에 생긴 던전.
저곳에 분명히 '길'이 있다.
본능적으로 알았다.
저 던전에 자신들이 오랜시간 찾고 있던 '답'이 있으리라고.
"자, 잠시만 기다리십시오!"
대장로 알비노가 급히 현을 멈춰세웠다.
그러나 현은 멈춰서지 않았다.
그대로 전각을 나가, 성역을 벗어나, 영영 떠나버릴 기색이다.
어떻게 해야 하는가.
어찌해야 저 발을 멈추게 할 수 있을까?
'스스로를 하이 드루이드라 불렀던 대족장은 있었으나, 세계수의 주인으로 인정받은 진정한 하이 드루이드는 나타난 적이 없다.'
드루이드의 대족장들.
세계가 멀쩡하던 시절, 그들중 몇몇은 스스로를 '하이 드루이드'라 부르며 드루이드의 대통합을 시도했다.
하지만 정작 세계수의 주인으로 인정받은 자들은 없다.
자격을 확인받고, 일곱빛깔의 무지개를 띄워내는 자만이 '하이 드루이드'라 인정받을 수 있으나, 실상 불가능한 일인 것이다.
이후 그들은 '멸망'에게 멸망당했다.
통합되지 않아서, 그들이 따를 진정한 주군이 없었기에.
그런데······ 오랜 세월이 흘러 드디어 나타났다.
나타난 것이다.
그런데 이대로 보낼 수는 없다.
이토록 허무하고 허망하게 놓쳐선 안 된다.
"······."
대장로 알비노는 라이가를 쳐다봤다.
결국 이 모든 문제의 답은 그에게 있었다.
성역이 거절한 자.
모든 장로와 자신이 거부했던 남자.
그러나 팔가와 함께 공존했던 오랜 세월동안, 그들은 결정을 번복한 적이 없다.
역대 어떤 팔가의 후계자도 그들의 심기를 거스를 순 없었다.
하물며 두 번이나 거부한 이를 받아들이라고?
'······.'
단순한 자존심의 문제가 아니다.
성역과 명예의 근간이 흔들리는 문제였다.
라이가를 받아들이는 순간, 자신들이 틀렸음을 인정해야만 한다.
여태껏 행해왔던 모든 자격의 확인이.
자신들의 역할이 잘못 되었었노라고 말이다.
"현."
그때였다.
라이가.
그가 불현 듯 입을 연 것은.
우뚝!
동시에 현이 멈춰섰다.
라이가는 그런 현의 등을 향해 말했다.
"나는 괜찮다."
괜찮다니.
무엇이 괜찮다는 말인가.
"너는 너의 삶을 살거라."
라이가가 미소를 지었다.
생각이 정리된 듯.
현현한 기운마저 느껴지는 눈빛으로.
"나의 제자가 아니어도 좋다. 나라는 이름의 족쇄를 차지 않아도 돼. 억지로 묶이긴 했으나, 정작 내가 너에게 준 것은 별 게 없지 않느냐?"
기껏해야 이름뿐이다.
팔가기사단 라이가의 제자라는 타이틀밖에 없었다.
그러나 그 타이틀이 마냥 좋다고 할 수도 없다.
지금처럼 발목만 잡을뿐이다.
······ 그래.
저 녀석이 나아가는데 자신의 이름은 필요없다.
무신의 자질을 갖췄으며 대장로와 팔가를 갖게 된다면 굳이 자신의 이름이 없어도 창공을 훨훨 날게 될 터이니.
차라리 없는게 낫다.
제자가 아닌 게 나았다.
그것을 알텐데도, 현은 끝까지 라이가가 스승임을 주장하고 있었다.
··· 충분하다.
지금, 라이가는 구원받았으니.
자신은 비록 닿지 못했지만, 자신의 제자가 성역의 주인이 되었다.
인정을 넘어 정점에 섰다.
장로와 대장로들이 쩔쩔매는 모습을 본 것만으로도 만족했다.
"현. 지금부터 너를 파문······."
"자, 잠깐!"
말을 끊고 다급히 끼어든 이.
그건 다름아닌 대장로 알비노였다.
알비노가 식은땀을 줄줄 흘렸다.
'여기서 파문을 시켰다간 영원히 돌아오지 않으실 거다.'
최악의 상황이었다.
스승을 위해 떠나는 제자.
그런 제자를 위해 떠나려는 스승!
이보다 더 끔찍한 그림은 없었다.
이대로 진행이 된다면 하이 드루이드는, 현은 영원히 이곳에 돌아오지 않을 것이다.
아니, 도리어 적대감만 생기리라.
그것만은 막아야한다.
그리고 막을 방법은 하나뿐이었다.
"라이가를 팔가의 주인으로 인정한다. 장로들이여, 그대들도 동의하는 바이겠지?"
물었으나 사실상 강제다.
이윽고 열명의 장로들이 한결같이 급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도, 동의합니다."
"예, 예. 라이가는 팔가를 잇기에 충분한 인물입니다."
"그러고말고요."
"하, 하. 반대하는 자가 있을 리가 없지요."
모두가 식은땀을 뻘뻘 흘려댔다.
그러나 방법은 이뿐이었다.
비록 내부적인 반발이 있을지언정.
대장로 알비노가 라이가를 다시금 바라보며 말했다.
"라이가. 팔가 가문의 수장이여."
"······."
"그대가 성역의 축복과 함께 묻히는 것을 허락한다. 원한다면, 그대의 스승 '단탈리안' 역시도."
절대로 거절할 수 없는 제안.
라이가가 고개를 들었다.
묘한 표정. 일렁이는 눈빛.
그리고 현을 바라보았다.
그러자 현이 이빨이 다 보이도록 환하게 웃으며 말했다.
"그렇게 하십시오, 스승님."
진행하지.
명예의 세계수.
그 자격을 확인받을 때.
변한 건 세계수가 뿜어내는 빛의 색깔만이 아니었다.
"'명예의 세계수'가 당신을 판단합니다."
"'박현명'과 '란돌프'가 지닌 명예가 합쳐집니다."
"도합 100,200점의 '명예'를 지녔습니다."
명예가 합산됐다.
하지만 이상했다.
몇 번을 봐도 수치가 내 계산과 맞아떨어지지 않았으니까.
'10만?'
10만은 절대로 될 수 없는 점수였다.
애초에 합산될 점수도 없었다.
란돌프와 나는 명예점수를 공유하는 상태였으므로.
기껏해야 6만 안팎이었던 명예점수.
혹, '찬란한 순혈자의 위상' 반지 때문일까?
'위대한 위상은 명예를 두 배로 올려줄 뿐이지.'
특정 업적을 달성했을 때 획득하는 명예를 두 배로 올려주는 것이지, 이미 올랐던 명예마저 두 배로 올려주진 않는다.
합산된 결과를 두 배로 뻥튀기할 수도 없다.
그렇다면.
'빌헬름의 명예가······?'
빌헬름의 명예가 합산된 걸까?
그러면 10만의 명예도 가능은 하다.
내게 잠재되어있던 빌헬름의 명예를 세계수가 하나로 봐준 것이다.
나와 빌헬름, 란돌프가 모두 하나의 몸과 다름이 없다는 인증과도 같았다.
그리고 머지않아.
"최초로 명예 '10만 점'을 돌파했습니다."
"'명예'의 이름이 바뀝니다."
"모든 '명예'가 '성화(聖化)'로 치환됩니다."
"명예 10,000점당 1의 성화를 지닙니다."
"'성화'는 신의 상징물에 '부여'할 수 있습니다."
"'활성화 된 신의 상징물'을 찾아 성화를 '부여'할 경우, 해당 신과 직접 소통하는 '교황'의 직위를 획득할 수 있습니다."
"'비활성 상징물'에 더욱 많은 성화를 부여하게 되면 잊혀진 신을 불러올 수도 있습니다."
"히든 던전의 출현 조건을 만족했습니다."
"'잊힌 명예의 던전(태고)'이 등장합니다."
"그곳에서 잊힌 자들, 잊혀진 자들의 명예를 되찾으십시오."
"해당 던전에서 '신의 상징물'을 찾을 수 있습니다."
"주의하십시오. 명예롭고, 성스러우며, 신뢰가 두터운 7인의 파티를 구성하지 않으면, 영원히 던전에 잠겨 빠져나오지 못할 수도 있습니다."
"또한 던전의 규칙 변환, 파괴를 행하는 모든 것들은 '잊힌 명예의 던전'에서 사용불가합니다."
"최소 입장조건 : '20,000' 이상의 명예를 지닌 자. 또는 그와 같은 규격의 '성스러운 영혼'을 지닌 자. 그리고 '박현명'이 동행을 허락한 자."
명예의 이름이 '성화'로 바뀌었다.
10만점의 점수가 10으로 치환되며, 쓰임새마저 변경된 것이다.
그 이후 이어진 내용들도 하나하나 엄청나지 않은 게 없었다.
'란돌프는 신의 상징물을 파괴하고, 나는 신의 상징물에 성화를 부여한다. 비활성 상징물을 통해 잊힌 신들마저도 불러올 수 있다······.'
명확하게 나뉘었다.
란돌프는 '갓 이터(God Eater)'와 다를 게 없다.
신을 잡아먹고 죽이는 존재.
하지만 나는, 박현명은 '신을 살리고 신과 소통하는 자'다.
완전히 반대되는 성향을 지니게 됐다.
명예마저 전부 가져왔으니.
'이제야 균형을 잡을 수 있겠군.'
란돌프와 나 사이의 균형을 잡을 수 있는 방법.
그것이 이것이리라.
란돌프로 변신할 때 발생하는 어둠을 현재의 나는 잡을 수가 없었다.
너무나도 방대하고 강력해서.
도저히 손을 쓸 수가 없는 것이다.
하지만 균형을 잡지 않으면 원치 않는 온갖 '어둠'이 몰려올 것은 자명한 일.
한데, 신의 상질물들로 말미암아 더욱 성스러워진다면?
'가능하다.'
··· 가능하다.
어둠을 잡고, 균형을 잡으며, 보다 완전해지는 게.
놀라운 점은 그뿐이 아니었다.
'······ 태고 레벨의 던전이라니.'
가장 놀라운건 역시나 새로이 등장한 히든 던전이다.
그냥 히든 던전도 아니고, 무려 '태고' 레벨의 던전!
내가 지닌 '태고의 갑옷'과 동급의 던전이라는 말.
태고를 보게 된 건 이번이 세 번째다.
후욱! 후욱!
숨이 가빠진다.
미칠 듯이 심장이 뛰었다.
'태고의 갑옷 하나로도 말도 안 되는 일들을 해냈지.'
태고의 갑옷은 내 한계를 한참이나 뛰어넘는 용도로 사용되었다.
그럼 태고 레벨의 던전은 어떨까.
확실한건 말도 안 되는 것들을 얻을 수 있을 것이라는 점이다.
'그런데 2만점 이상의 명예 보유자를 어디서 구하지?'
문제는 입장조건이었다.
이렇게 까다로운 입장조건을 지닌 던전을 나는 본 적이 없었다.
2만의 명예.
세계에 이름을 떨치는 극소수의 최강자들을 제외하면, 절대로 쌓을 수 없는 점수다.
하물며 그러한 자들이 오로지 명예롭게 명예만 쌓아야 가능한 수치였다.
라이가도 1만점이 안되어서 튕겨나갔을 정도이니.
'라이가는 악업이 명예를 깎어먹은 경우이긴 한데.'
신의 섬, 그리고 투신의 탑.
그 둘을 오가며 라이가의 명예는 깎여나갔을 것이다.
특히 신의 섬에서.
'천마와 악신은 상대의 명예를 더럽힌다.'
그리고 라이가는 오문을 개방하며 천마와 맞섰다.
압도하기까지 하였으나, 그로인해 명예가 더럽혀졌을 터.
라이가는 신의 섬에서 벌어진 일을 기억하지 못하니, 자신의 명예가 1만점도 안 된다고 여기며 절망한 것이다.
허나 라이가가 고작 1만점의 명예조차 보유하지 못했을 리가 없다.
그저 깎여나갔을 뿐.
당연히 복구할 방법은 있었다.
'······ 앤드류 사제.'
바로 '면죄부 복사기' 앤드류 사제!
현재 '태초의 숲'에 있는 앤드류 사제라면 라이가의 명예도 복구할 수 있을 것이다.
허나 라이가의 수명은 얼마 남지 않았다.
기껏해야······ 10일 안팎.
어떻게 해야할까.
다행히 답은 멀리 있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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