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장. 사람이 변했나?
한편 진운서는 편안한 표정으로 마차에 등을 기댄 채, 창에 달린 발 사이로 길을 바라보고 있었다.
마차에 오르기 전, 그녀는 일부러 그런 말을 했다. 첫째로는 그녀가 왜 늦게 도착했는지를 해명하기 위함이었고, 둘째로는 화제를 그쪽으로 돌리기 위해서였다.
설사 소부(昭府)의 아가씨를 잘 모르더라도, 궁중 연회에 참석한 사람이라면 모두 소여옥이 어떻게 생겼는지 알 수 있었다. 그녀가 어젯밤 주제넘을 정도로 앞에 나섰기 때문이었다.
상황이 이리됐으니 소여옥은 소부의 이름에도 먹칠을 한 셈이고, 소부의 다른 규수들도 그녀를 더욱 압박하려 할 테니 어디에 있어도 숨이 턱 막히게 되는 셈이었다.
생각이 여기까지 이르자 진운서가 눈썹을 살짝 치켜세웠다. 전생에서 그녀는 악독한 술수에 당해 집안과 가족을 모두 잃었다. 지금은 우선 소여옥에게 작은 교훈만을 주었을 뿐이었다. 앞으로 남은 날은 아주 길었다.
진운서가 한창 생각에 잠겨 있을 때, 마차가 갑자기 흔들리더니 얼마 가지 않아 멈춰서고 말았다.
상념에서 빠져나온 진운서가 이유를 묻기 위해 입을 떼려던 그 순간, 마차 밖에서 흥분한 백성들의 고함이 들려왔다.
“변방을 지키던 사황자 전하께서 정말 돌아오신 게야? 적은 수의 병사를 데리고도 대승을 거뒀다는 용맹한 그 황자께서 돌아오셨다고?”
“이미 군대를 이끌고 도성에 들어오셨다고 하니, 곧 이 거리를 지나가실 거야. 기다리면 볼 수 있겠지!”
진운서는 심장이 뛰어 자기도 모르게 두 손으로 소매 끝을 꼭 잡았다. 그때 마차 밖에서 시위의 공손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진 소저, 사람이 너무 많아서 마차를 잠시 길옆에 세웠습니다. 군대가 지나간 후에야 출발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시위의 짧은 말 한마디에 그녀의 마음속에서는 천 겹의 파도가 일었다. 몇 년이나 국경 관문을 지키던 사황자가 돌아왔으니, 소근언도 분명 돌아왔을 것이다.
가만히 눈을 감은 진운서의 마음이 순간 요동쳤다. 그녀의 눈꼬리에는 감출 수 없는 웃음이 떠올랐고, 아무리 참아보려 해도 손이 계속해서 떨리고 있었다.
진운서는 소근언을 다시 볼 수 없을 거라 생각하며 절망했었다. 그러나 지금소근언은 그녀의 앞에 있었다.
그녀는 군의 행렬이 다가오는 걸 바라보다가, 행렬 안에서 자신이 결코 잊지 못했던 사내를 발견했다.
곧은 등, 단단한 어깨와 짙은 눈썹. 그는 다른 사람과 같은 갑옷을 입고 있었으나 유난히 기개가 흘러넘쳤다.
대제의 무풍을 되살린 소근언은 원래 무척이나 어렸다. 그러나 국경 밖에서의 수련은 그에게 기개와 늠름함을 가져다주었으며, 그에게선 그 나이대 사내만이 가질 수 있는 패기가 또렷하게 빛나고 있었다. 귀하고 날카로운 검을 검집에서 빼기만 해도, 모두의 기가 꺾이는 것처럼 말이다. 그 행렬 속에서 소근언은 남달라 보였다.
쿵쿵-
거리에는 질서 정연한 병사들의 우렁찬 발소리가 가득했다. 그 훤칠한 뒷모습이 시야에서 사라질 때까지 진운서는 하염없이 그쪽을 바라보았다.
전생에서 그녀와 소근언은 이곳에서 처음 만나지 않았었다. 당시 납매(臘梅) 나무 아래에서 소근언은 늘씬한 몸을 돌려 그녀에게 몸을 굽히고 예를 올렸었다.
덜컹덜컹-
바퀴 굴러가는 소리를 내며 마차가 다시 출발했다. 여전히 눈썹을 치켜세우고 있던 진운서가 잠시 후 조용히 중얼거렸다.
“근언, 나 돌아왔어.”
진운서는 변방 관문에서 적은 수의 병사로 거머쥔 대승이 모두 소근언이 군대를 이끌고 가시밭길을 헤치며 이루어낸 것임을 알고 있었다.
이번 개선에서 소근언은 황제에게 포상을 받아 일개 병사에서 군의 일품 교위(校尉)로 영전(榮轉)하게 될 것이다. 그리고 사황자는 이번 기회로 왕야(王爺)에 봉해지지는 않지만 기존에 3할을 장악하고 있던 병권을 5할까지 장악하게 되었으니, 한 사람이 병권의 절반을 독점하게 되는 셈이었다.
“진 소저, 진부에 도착했습니다.”
공손한 목소리가 허공을 떠돌고 있던 진운서의 상념을 깨뜨렸다.
“응.”
그녀는 바깥을 향해 가볍게 대답했다.
* * *
두 발이 땅에 닿은 그 순간, 진운서는 고개를 들어 금색 테를 두른 낯익은 현판을 바라보았다. 현판 위에 쓰인 세 글자는 황제의 친필이었으며, 커다란 대문 옆에 선 돌사자 두 마리는 위엄이 넘치는 모습이었다.
“나 돌아왔어.”
진운서는 깊은 생각에 잠겼다. ‘집’이라는 이 글자를 그녀는 오랫동안 떠올릴 수 없었다. 그러나 이제 집은 그녀의 눈앞에 있었다.
‘좋다, 정말 좋아. 주변의 공기마저 얼마나 상쾌한지…….’
진운서가 부드럽게 미소 지었다. 얼굴 가득 찬란한 웃음을 띤 그녀는 지금 더없이 즐거웠다.
“아가씨, 소인이 늦었습니다!”
어디선가 다급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진운서가 고개를 돌려보니, 그녀의 여종인 류의(柳意)가 빠른 걸음으로 달려오고 있었다. 류의의 두 손에는 담비 털로 만든 피풍이 들려 있었다.
가까이 다가온 류의가 숨을 헐떡이다가 말했다.
“아가씨, 어제 옷을 얇게 입고 입궁하셨잖아요. 오늘은 눈이 녹아 기온이 더 내려간 데다 바람도 거세졌으니 얼른 이걸 걸치세요.”
류의는 다급하게 말하면서 진운서에게 피풍을 걸쳐주었다. 류의의 따스한 눈동자에는 주인을 향한 진심이 드러나 있었다.
류의의 눈동자는 맑았으며, 얼굴은 뽀얗고 윤이 났다. 착하고 착실한 류의가 따뜻한 숨을 뱉으며 진운서의 앞에 서서 제 주인의 분부를 기다리고 있었다.
아주 오랜만에 느껴보는 친숙한 감정이었다. 진운서의 눈은 웃음기를 띠었고, 입술에서 흘러나오는 말에도 부드러운 웃음이 담겨 있었다.
“내가 어딜 봐서 그렇게 연약해 보여? 너야말로 그렇게 얇게 입었으면서!”
그렇게 말하며 그녀는 손을 들어 벌을 주듯 류의의 머리를 콩, 하고 가볍게 때렸다.
전생에서 진운서는 자신이 시집을 가면 류의가 기회를 봐서 이낭(*姨娘: 첩)으로 들어앉으려는 계획을 세우고 있다는 소여옥의 중상모략을 그대로 믿어버렸었다.
너무나 아둔했던 진운서는 류의에게 의심을 품고, 먼 지방에 사는 아무런 사내나 골라서 류의를 시집보냈었다.
그러다 훗날 그녀가 병상에 누웠을 때, 류의는 그녀를 다시 찾아가 온 마음을 다해 시중을 들었다.
그제야 그녀는 류의가 시집간 후 시부모에게 소처럼 부려지고 있으며, 성미가 거친 부군에게 시시때때로 맞고 산다는 걸 알게 되었다.
류의의 반짝이는 작은 눈에서 어리둥절하고 의아한 기색이 드러났다.
아가씨는 항상 하인들에게 너그럽고 얼굴에 늘 온화한 미소를 띠고 있지만, 농담 같은 걸 하는 성격은 아니었다. 그러나 지금은 평소의 온화함 사이로 유달리 장난기가 느껴지고 있었다.
하지만 류의가 하룻밤 새에 아가씨의 성격이 변하리라고 어찌 생각할 수 있겠는가.
“류의야, 나는 이미 안으로 들어왔는데 너는 왜 아직도 문밖에 멍하니 서 있는 거니?”
즐거운 듯한 목소리가 류의를 상념에서 끌어냈다. 흠칫 놀란 류의가 급히 뛰어가 제 주인의 뒤를 따랐다.
“아가씨, 바람이 거세니까 얼른 이걸 걸치세요.”
그녀는 그렇게 말하며 진운서의 몸 위에 피풍을 걸쳐주었다. 그런데 공교롭게도 그때 진운서가 갑자기 걸음을 멈추는 바람에, 어리바리하던 류의가 하마터면 그녀와 충돌할 뻔했다.
비틀거리던 류의가 얼른 중심을 잡고 고개를 푹 숙이며 말했다.
“소인이 너무 칠칠치 못했어요. 아가씨, 용서해주세요!”
그렇게 말하며 류의는 곧 몸을 숙여 무릎을 꿇으려 했다. 그런데 순간 불쑥 뻗어온 손이 그녀를 잡아당겼다.
진운서가 눈웃음을 지으며 그녀를 바라보았다.
“걸핏하면 무릎을 꿇고 용서를 구하니, 모르는 사람이 보면 내가 가혹한 주인인 줄 알겠어.”
순간 깜짝 놀란 류의가 하얗게 질린 얼굴로 발랑고(*撥浪鼓: 좌우로 흔들며 노는 중국 전통 악기 겸 장난감)처럼 고개를 가로저었다.
“절대 그런 뜻이 아니었어요. 아가씨께선 세상에서 가장 너그러운 마음씨를 가진 분이신걸요!”
긴장한 그녀의 모습을 보고 진운서가 순간 웃음을 터뜨렸다. 별처럼 빛나는 진운서의 눈동자와 버들잎처럼 구부러진 눈썹이 더욱 능글맞아 보였다.
류의는 자기도 모르게 얼떨떨해져서 작은 눈을 애써 크게 떴다.
분명 예전과 같은 얼굴인데도 아가씨는 어딘지 모르게 전보다 더 예뻐져서 모두의 시선을 더욱 끌어들이는 것 같았다.
“봐봐, 또 바보 같은 표정을 짓고 있잖아.”
진운서가 말을 하고는 시원하게 웃었다. 그런데 바로 그때, 부 안의 큰길에서 한바탕 시끄러운 소리가 들려왔다.
날카로운 여인의 목소리를 들은 진운서가 눈썹을 살짝 찡그렸다. 그녀의 얼굴은 점차 웃음기를 잃고 곧 어둡게 변했다.
이 목소리를 어찌 잊을 수 있겠는가. 그것은 바로 주(周) 유모의 목소리였다. 대원(*大院: 부의 여러 원 중 가장 중심이 되는 곳)에서 연륜이 깊은 이 늙은 유모는 줄곧 진부에서 일해왔으며, 대원에 오기 전에는 대부인의 시중을 들었다.
대부인이 세상을 떠난 후, 주 유모는 대원으로 와 진운서가 자라는 걸 지켜보았으며, 주방에서 직접 그녀에게 온갖 맛있는 음식을 만들어주기도 했다.
십수 년이나 가까이 지내며 친밀하게 지내 온 사람을 누가 의심하겠는가? 그러나 결국 주 유모는 변심하여 둘째 숙모와 소여옥에게 차례로 매수되었다.
진운서의 얼굴을 망가뜨렸던 그 사나운 불길……. 주 유모의 협조가 없었다면 둘째 숙모가 그 일을 어떻게 성공시킬 수 있었겠는가?
진부가 무너지고 진운서가 목숨만 겨우 건져 도망칠 때, 은자 열 냥을 상으로 받기 위해 그녀를 팔아넘긴 사람이 바로 주 유모였다. 당시 진운서를 살리기 위해 장(莊) 이낭은 친아들을 군으로 보냈었다.
지난 생에서 봤던 한 장면 한 장면이 진운서의 뇌리를 스치고 지나갔다. 아들을 떠나보내야 했던 장 이낭이 느꼈을 그 깊은 절망과 고통…….
진운서의 가슴이 다시 두방망이질 치기 시작했다. 그녀는 새하얀 손바닥에 붉은 손톱 자국이 생길 정도로 두 손을 꼭 쥐었다.
어림잡아 시간을 계산해 보면, 이 시기의 주 유모는 이미 그들에게 매수됐을 것이다.
“아가씨, 신경 쓰지 마세요. 주 유모와 왕(王) 집사가 싸우는 것도 하루 이틀일이 아니니까요. 좀 지나면 괜찮아질 거예요.”
진운서는 곧 어두운 표정을 풀고, 류의를 힐끗 보며 말했다.
“내가 가볼게.”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그녀는 바로 소란이 난 곳을 향해 나아갔다.
그 말을 들은 류의는 다시 어리둥절한 표정을 지으며, 점점 멀어져가는 아가씨를 의아하게 바라보았다.
아가씨는 원래 주 유모가 일으킨 소란에는 일절 참견하려 하지 않았다. 주 유모가 아가씨의 물건이 마음에 든다고 한마디라도 하면, 아가씨는 그냥 너그럽게 그걸 유모에게 상으로 내려줄 정도였다.
‘오늘은 웬일로 저런 일에 참견하신담?’
류의가 의문을 가지고 진운서를 바라볼 때, 진운서는 이미 큰길에 다다라 있었다. 멀리서 목에 핏대를 세우며 다투고 있는 주 유모가 보였다.
“왕 씨, 당신은 그저 장방(*賬房: 옛 지주 집안에서 회계를 맡아보던 곳)의 집사일 뿐이야. 내가 돈을 쓰는데도 당신 눈치를 봐야 해? 아가씨가 돌아오시면, 내가 당신을 자르고 진부에서 쫓겨나게 할 거라고!”
왕 집사는 그녀의 고함에도 대답 한마디 하지 않은 채 그대로 자리에 우뚝 서 있었다.
진운서는 왕 집사가 겉으론 약삭빨라 보여도, 충심으로 가득한 좋은 사람이라는 걸 알고 있었다.
“흥, 네 의붓아들이 병치레를 한다지? 네가 돈을 벌지 않으면 그 애도 바로 죽고 말걸!”
면전에서 주 유모가 아무리 욕을 해도 왕 집사는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었다. 그런데 이 말을 듣자마자, 그는 분노가 치민 나머지 오른손으로 주먹을 꽉 쥐고 휘두르려 했다.
그가 손을 들자마자 경쾌한 발소리가 들렸다. 고개를 들어보니 뜻밖에도 거기에는 진가의 대소저, 진운서가 서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