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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23 화



제 23 화

만 년 동안 사랑해

“강호에 바람이 일고, 어두운 마을에 비가 오는데, 산과 들은 소리 내어 울고, 바닷물은 뒤집히네.”

영서는 술기운에 몽롱하게 시를 읊었다. 그러고는 비틀거리며 일어섰다.

잠시 후, 쨍그랑 소리와 함께 영서가 술잔을 떨어뜨리곤 발을 구르며 춤을 추기 시작했다.

“장작불의 불길이 순하고, 융단은 따듯하여 나와 고양이는 문을 나서지 않네.”

영서의 가늘고 유연한 허리가 마치 버들가지처럼 굽어지더니 갑자기 힘차게 튕겨졌다. 이윽고 얇은 옷감이 바람에 흩날리고, 춤을 추는 영서의 눈빛은 매우 요염했다.

“조용한 마을에 병들어 누워있어도 슬퍼 않고, 언제나 나라를 위한 마음으로 윤대(輪臺)를 지켰노라.”

영서는 탁자 위의 술병을 집어 들고, 단숨에 들이켰다.

그 현란한 동작은 여인의 춤이라기보다, 전쟁터에서의 전무(戰舞) 같았다. 영서는 순식간에 사람을 유혹하는 요염한 여인에서 전쟁터에서 맹렬하게 싸우는 장군으로 변신해, 사람들을 놀라게 했다.

덕비의 정체는 여장군 명장희다. 명(孟)씨 가문은 대대로 나라를 위해 싸움터에 나갔지만, 끝내 온 집안의 재산이 몰수당하고 참형을 당하는 최후를 맞이했다. 그리고 가문의 사람 중 명장희, 오직 그녀만이 살아남았다. 명장희는 황궁 안으로 잠입하여 가문의 원수를 죽이고 이 세상을 뒤집으려 한다.

멀지 않은 곳에 있던 황제는 조금의 위험도 인지하지 못하고 덕비의 미색에 빠져 술잔을 들고, 움직이지도 않고 멍하니 덕비의 춤을 지켜보았다.

황제는 그녀에게 빠져 정신 차리지 못했고, 현비와 새로운 수녀들은 모두 질투심에 가득 차 있었다.

“밤이 새도록 비바람 소리 들리고, 철마(*鐵馬: 철갑을 입힌 전쟁에서 쓰는 말을 가리킴)를 타고 얼어붙는 강을 건너는 꿈을 꾸네. 철마를 타고 얼어붙는 강을 건너는 꿈을 꾸네. 철마를 타고 얼어붙는 강을 건너는 꿈을 꾸네.”

영서는 마지막 문장을 세 번 반복했다. 한번은 황홀하게, 한번은 비탄에 잠겨, 마지막은 단호하게.

시 읊는 것을 끝낸 영서는 요염하게 황제의 품에 기대어 군심을 유혹하며, 복수의 칼을 마음속으로 갈았다.

이내 한 장면이 끝이 났다. 희승은 영서의 연기를 넉 놓고 보느라 하마터면 ‘컷’소리를 잊을 뻔했다.

“컷! 아주 좋아!”

희승이 앞장서서 박수 쳤다.

“영서 씨, 춤을 너무 잘 추는데? 정말 전문가 같아. 내가 원하는 그런 걸 다 표현해내기가 어려운데, 표정도 분위기도 너무 좋았어요. 지훈 씨는 말할 것도 없고. 청이 씨도 의외인데, 아까 그 표정 굉장히 잘 나왔어!”

고청의 안색이 어두워졌다. 잘 나오긴 뭐가 잘 나왔겠는가. 그녀의 표정은 진심에서 우러나온 질투심이었다.

황제 역은 박지훈이 맡았는데, 그는 사람들에게 인정받는 실력파 배우였다. 그는 흔히 말하는 ‘황제 전문 배우’로서, 미녀들과 연기한 적이 수없이도 많았다. 한편, 그는 배역몰입이 끝난 지금도 실실 새어 나오는 웃음을 참지 못하고 말했다.

“곽 감독님, 저 방금 진짜 넉 놓은 거예요. 연기가 아니었어요!”

“제가 한 후배님 실력이 대단하다고 전부터 말했었잖아요!”

옆에서 지켜보고 있던 새론도 지훈을 따라 영서에게 칭찬을 아끼지 않았다. 하지만 사실 새론은 이를 너무 꽉 물고 있어서 이가 부러지기 직전이었다.

촬영장에 사람들이 떠나자, 새론은 매니저를 불러 물었다.

“어떻게 된 거야? 이미 오전 다 지나가는데 아무런 반응도 없잖아!”

매니저는 당황한 기색이 역력했다.

“제가 직접 퍼프 말고도 블러셔, 섀도우, 하이라이터에도 조금씩 금속 가루를 넣었어요! 아직 알레르기 반응이 안 온 거 아닐까요?”

새론이 매니저를 노려봤다.

“아니야, 걘 금속이 몸에 닿으면 30분 안에 붉은 반점이 올라온단 말이야!”

사실 새론은 예전에 영서의 생일 파티 때 이 방법을 써, 망신을 준 전적이 있었다.

“그러면 한영서가 그 화장품들을 안 썼다는 얘기인데…….”

매니저가 소심하게 말했다.

“멍청아! 만약을 대비해 두 가지 경우를 준비했어야지. 걔 옷에도 묻혀 놨어?”

“제가 그거까진 미처 생각지 못했어요. 새론 언니, 화내지 마세요. 다음에는 절대 실수하지 않을게요!”

새론은 분노를 꾸역꾸역 집어삼켰다. 이번에 실수를 하긴 했지만, 어쨌든 앞으로 기회는 많았다. 어쩌면 이후에는 새론이 직접 손을 쓰지 않아도 될 것 같았다. 아까 고청이 영서를 못 잡아먹어서 안달 난 눈빛으로 영서를 노려보았기에, 잘만 하면 고청의 손을 빌릴 수도 있을 것 같아 보였다.

‘하, 한영서. 이 배역 쉽게 얻어낼 수 있을 거 같지? 내가 너보다 한 수 위야. 더 비참하게 부숴주겠어!’

* * *

이번 일로 영서가 자신의 연기력을 증명하긴 했지만, 그녀의 평판은 조금도 나아지지 않았다. 영서가 연기를 너무 잘한 탓에 다른 사람들은 그녀가 남자를 잘 홀릴 줄 안다고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심지어 그들은 영서가 연기를 한 것이 아닌, 단지 본색을 드러냈다고 생각했다.

감독 희승은 영서의 기분이 좋지 않을까 걱정되어, 떠나기 전에 영서에게 가 그녀를 위로했다.

“영서 씨, 조급해하지 마요. 다음 달부터 서브 남자 주인공이 팀에 합류하니까. 그리고 영서 씨에게 좋은 장면은 다 뒷부분에 있어요.”

영서는 씁쓸하게 웃었다.

“감독님, 우리 서브 남자 주인공 배우가 도대체 누구예요? 제작발표회부터 계속 감추셔서 정말 누군지 모르겠어요. 언론에만 알리지 않으면 되는데, 왜 저희한테도 말씀해 주시지 않는 거예요?”

“말할 수 없어요. 만약 나중에 말실수하면 어떡해? 어쨌든 내가 알려줄 수 있는 건, 서브 남자 주인공이 진짜 대단한 사람이라는 거예요!”

희승은 자신 있다는 표정을 지었다.

옆에서 고청이 지나가다 이 얘기를 듣고는 비아냥거렸다.

“어차피 서브 남주인데, 어떻게 대단한 사람일 수가 있어? 대단해 봤자 최우수 남우주연상 받은 조세진보다 더 대단하겠어? 새론 언니, 안 그래요?”

새론은 웃기만 하고 아무 말 없었다. 새론도 내심 감독이 서브 남주 역의 배우를 과장했다고 생각하는 것 같았다.

영서는 고청의 비아냥을 들은 척도 않고, 희승 뒤를 따라다니며 계속 질문했다.

“잘생겼어요? 이건 말씀해 주실 수 있죠? 극 중에서 서브 남자 주인공은 전국에 있는 부잣집 따님들을 꾀병 부리게 할 정도로 잘생긴 명의잖아요!”

영서는 극 중에서 서브 남자 주인공과 붙어 있는 장면이 꽤 많았다. 키스와 포옹은 말할 것도 없고, 각종 스킨십은 물론 몇 번의 베드신도 있다. 그렇기에 서브 남자 주인공에 대해 많은 관심이 생길 수밖에 없었다.

“당연히 잘 생겼지. 내가 보장할게요! 그때 가서 흥분해서 기절하면 안 돼요!”

“진짜예요? 곽 감독님, 저한테 거짓말하시면 안 돼요! 저 감독님 믿어요!”

* * *

눈 깜짝할 사이 벌써 8월이 되었다. 영서가 시혁의 자택으로 들어온 지 벌써 2주나 지났고, 민우와의 관계는 더 좋아졌다. 그리고 영화 촬영 또한 순조롭게 진행되고 있었다.

새론과 고청은 연맹을 맺어 며칠에 한 번씩 영서에게 작은 수작을 부렸지만, 대부분은 영서가 다 눈치를 챘다. 하지만 촬영할 때마다 매번 방어하는 것도 지쳐서 영서는 한 번에 이 일을 처리할 기회를 찾고 있었다.

그런데 조금 이상한 건, 제작진 중 누군가가 몰래 영서를 도와주고 있는 것 같았다. 몇 차례 위기에 빠진 상황이 있었는데, 영서가 그때마다 작은 힌트를 얻을 수 있었던 것이다. 아마도 누군가가 고청이 제멋대로 구는 꼴을 보기 싫어서 일부러 방해하는 것 같았다. 그러나 영서는 그것에 대해 별로 신경 쓰지 않았다.

오늘 영서에게 있어 제일 골머리 아픈 일은, 저녁에 공항으로 성가신 녀석을 마중 가야 한다는 것이었다.

오늘은 온종일 촬영하는 날이었는데, 강목원 그 자식이 계속 재촉 전화를 걸어 영서는 족히 열 번이나 주의를 받았다.

일을 마치고, 영서는 먼저 시혁의 집으로 돌아갔다. 집에서 장비를 챙겨야 했기 때문이다.

“왔네요. 이번에 맛있는 훠궈집이 새로 문 열었다고 하는데, 민우 데리고 같이 가서 저녁 먹는 거 어때요?”

시혁은 소파에 앉아 신문을 보다가, 영서가 돌아온 것을 보고 마치 아내에게 물어보는 것처럼 자연스럽게 물었다.

영서는 보름 남짓 되는 시간 동안, 시혁과 이런 식으로 지내는데 이미 익숙해져 있었다.

민우까지 있으니까 정말 단란한 세 식구가 한집에서 사는 것 같았다.

영서는 고개를 흔들어 그런 망측한 생각들을 머릿속에서 내보냈다. 그러고는 난처하다는 듯 말했다.

“오늘 저녁엔 안 되겠네요. 저 지금 누구 좀 데리러 공항엘 가야 하거든요. 아마 오늘 좀 늦게 들어올 것 같아요. 민우가 훠궈 먹고 싶다고 했나요? 유시혁 씨가 민우 데리고 가서 훠궈 먹는 건 어때요?”

“만약 영서 씨가 없다면, 민우는 저와 나가려 하지 않을 테죠.”

“흠…… 알겠어요. 그러면 다음에 같이 먹으러 가요!”

시혁은 신문을 내려놓고 그녀를 향해 심오한 눈빛을 보냈다.

“공항에는…… 친구를 데리러 가는 겁니까?”

“어, 아마도요…….”

영서는 곤란해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남자입니까, 아니면 여자?”

“어…….”

‘이 질문은 약간 선을 넘은 것 같은데……?’

영서도 시혁이 자신을 대하는 태도가 남다르다는 것을 느끼고 있었다. 하지만 시혁은 매번 아주 적당한 선을 유지했고, 적절한 시기에 맺고 끊는 걸 알았다. 만약 영서가 과민하게 반응을 보인다 싶으면, 시혁은 꼭 다정하게 나오곤 했다.

그래서 영서는 솔직히 대답했다.

“남자예요.”

그 말에 시혁의 다정했던 눈이 가늘어졌다.

“밤에 집에 옵니까?”

‘이번 질문은 어째 점점 더…….’

영서는 연기를 하며 마치 이 질문의 뜻을 이해하지 못한 듯 애매하게, 아무렇지 않은 척 대답했다.

“저도 잘 모르겠어요. 상황 봐서 전화할게요! 시간이 별로 없으니까 저 먼저 올라갈게요!”

영서가 짐작하기에 오늘 밤에는 돌발 상황이 아주 많을 것 같았다. 만일 영서가 참지 못하고 강목원 그 자식을 때린다면 더더욱.

영서는 황급히 위층으로 올라가, 커다란 검은색 크로스백을 메고는 민우를 안고 뽀뽀를 하며 재빨리 작별 인사를 했다.

이내 쏜살같이 달려가는 영서를 보며, 시혁의 얼굴이 두려움으로 뒤덮였다.

민우는 영서를 제외하고 세상 모든 것에 대해 아무런 관심이 없었다. 심지어 자신의 친아빠인 시혁에게도 별 관심이 없었다. 그런데 지금 시혁의 침울한 표정을 보자, 민우는 고개를 파묻고 칠판에다가 무언가를 쓱쓱 적었다. 그리고 작은 손을 뻗어 시혁을 콕콕, 찔렀다.

시혁은 팔뚝에 작은 힘이 느껴지자 아래를 내려다봤다. 이내 그는 민우의 칠판에 물음표가 쓰여 있는 것을 발견했다.

“왜 아빠가 기분이 안 좋은지 물어보는 거야?”

시혁은 잠시 생각에 잠겼다. 그러고는 조용히 말을 이어나갔다.

“만약 어느 날, 영서 이모가 다른 사람처럼 변해서, 다른 사람한테 ‘애기야’라고 부르고, 다른 사람이랑 모닝 뽀뽀, 굿모닝 뽀뽀, 작별 뽀뽀하고, 다른 사람이랑 훠궈를 먹으러 간다고 생각해봐. 그런데 너는 이모한테 아무것도 아닌 사람이라 화낼 자격조차 없다면 어떨 것 같아?”

민우는 잠시 멍해졌다. 그러다 곧 시혁의 말을 이해하자 순간, 하늘이 무너지는 듯한 표정을 지었다.

시혁은 민우의 표정을 보고 다시 정신을 차렸다.

이내 민우가 울먹거리며, 시혁의 손에 있는 핸드폰을 빼앗아서 영서에게 일러바쳤다.

민우는 영서에게 우는 모습의 이모티콘을 보냈다.

「ㅠㅠㅠㅠ」

공항 가는 길에 그 메시지를 본 영서는, 민우가 훠궈를 못 먹어서 슬퍼하는 줄 알고 재빨리 달콤한 말로 민우를 달래주었다.

「민우 왜 그래? 기분이 안 좋아? 슬퍼하지 마. 네가 슬퍼하면 이모는 더 슬퍼! 오늘 이모가 진짜 급한 일이 있어서 그랬어. 내일 밤에 같이 훠궈 먹으러 가자! 어때? 뽀뽀! 민우야 만 년 동안 사랑해! 이모는 민우가 웃는 게 제일 좋아!」

민우는 영서의 답장을 보고 울음을 멈추고 웃었다. 그러곤 만족해하며 아버지한테 핸드폰을 건네주었다.

시혁은 영서가 민우에게 해 준 달콤한 말들을 읽어보았다.

“…….”

이에 시혁은 민우에게 회심의 공격을 받았다고 생각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