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2화. 뒤로 걷다
얼마 지나지 않아 소군왕은 붓을 손에서 내려놓았고, 곧바로 심모에게 시를 청했다.
심모는 그를 향해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는 소군왕이 서 있던 자리로 가 붓을 집어 들었다.
그가 그린 것은 대나무 숲가였다. 대나무로 만든 집 앞에는 피풍을 입은 한 사내가 악기를 타고 있었다.
그 사내의 온아(溫雅)한 모습을 보고 있자니, 그가 그린 것은 소군왕 자신일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심모의 눈은 그림 속의 그가 타고 있는 악기에 잠시 머물러 있었다. 그 악기의 현 하나 끊어져 있었기 때문이었다.
만약 이를 눈치채지 못하고 시를 적었다면 분명 웃음거리가 됐을 터였다.
그녀는 잠시 생각하는 듯하더니 곧 맑은 미소를 지어 보였고, 옷소매를 걷어 올리고는 종이 위에 글을 쓰기 시작했다.
글은 빠르게 완성되었다. 심모는 붓을 내려놓고 뒤로 두 발을 물러났다. 먼저 소군왕에게 보이기 위해서였다.
소군왕은 종이를 들고 그녀가 쓴 글을 보았고, 순간 멈칫해서는 심모의 글을 뚫어지게 쳐다보고 있었다.
종이 위에는 이렇게 적혀 있었다.
‘번잡한 근심 곡조에 실려 보내네. 지음(知音)이 없으니, 현이 끊어진들 그 누가 알겠는가.’
잠시 후, 시녀가 종이를 동평왕 등에 보이기 위해 무대로 올라왔다.
소군왕 역시 아무 말 없이 그녀에게 종이를 건넸다.
시녀가 무대를 내려가자 소군왕이 무대 앞쪽으로 나아갔고, 곧이어 사동이 와서는 탁자를 들고 내려갔다.
그 옆에 서 있던 심모는 사동이 탁자를 가지고 지나가니 뒤로 한 발짝 물러서며 길을 터주었다.
그런데 이 한 발짝이 문제였다.
심모는 이곳이 무대 위라는 것을 잠시 잊고 있었다. 뒤로 한 발짝 물러서면 거기는 허공인 것이다. 그녀는 결국 중심을 잃고 몸이 뒤로 젖혀지면서 곧 넘어지기 일보 직전이었다.
심모는 속으로 울부짖었다. 왜 도대체 자꾸만 이렇게 재수가 없는 것일까. 아까는 앞으로 자빠질 뻔했는데, 이번에는 뒤로 넘어가려 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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