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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7화 마음이 잘 통하는 벗



27화 마음이 잘 통하는 벗

소천야는 어두운 얼굴로 영창 군주에겐 눈길도 주지 않았다. 그리곤 앞으로 다가서 온화한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남궁 아가씨, 사패환 아가씨. 영창이 두 분께 무례를 범했소이다. 돌아가 어머니께 말씀드려 제대로 가르칠 터이니 부디 너그럽게 봐주시게.”

이윽고 남궁묵이 위군맥의 품에서 떨어졌다. 아무리 정혼자라 할지라도, 많은 사람들 앞에서 이러는 것은 예의에 어긋나는 적절치 못한 행동이었다.

이내 남궁묵이 자신의 뒤에 서 있던 사패환을 돌아보았다. 사패환은 고개를 숙인 채 엷은 미소를 띠고 있었다.

곧 사패환이 여유롭게 말했다.

“월군왕 전하, 당치도 않으십니다. 군주마마께선 군주시고 저희는 신하일 뿐입니다. 군주마마께서 죽으라 하시면 신하가 어찌 이를 거역하겠습니까. 다만 앞으로는 저 하나만 죽여주십시오. 저 사패환은 죽으면 죽었지, 사씨 가문의 명예를 더럽히고 싶진 않습니다.”

소천야는 급변한 안색으로 억지웃음을 지으며 말했다.

“사패환 아가씨, 무슨 그런 말씀을 하시는가. 오늘 일은 그저 뜻하지 않게 일어난 일이니 돌아가서 내 누이동생을 잘 가르치겠네. 영창아, 어서 사패환 아가씨와 남궁 아가씨에게 사과하거라.”

영창 군주의 안색이 확 변했다. 황제의 봉호까지 받은 군주가 어떻게 신하의 여식에게 사과를 할 수 있겠는가. 앞으로 사람들을 어떻게 본단 말이지?

“오라버니…….”

소천야가 낮은 목소리로 윽박을 질렀다.

“어서 사과하래도!”

영창 군주는 입술을 꽉 사리문 채 입을 열려고 하지 않았고, 사패환과 남궁묵을 뚫어버릴 것처럼 죽일 듯이 노려보았다.

그때, 침묵을 지키고 있던 남궁묵이 갑자기 입을 열었다.

“사패환 아가씨의 말씀이 옳습니다. 군주마마께서 사과하신다니요. 이 일은……, 그냥 이쯤에서 마무리하는 게 좋을 것 같습니다.”

소천야가 미간을 찌푸리며 말했다.

“잘못했으면 응당 사과를 해야 하지 않겠는가. 영창…….”

그때, 영창 군주가 일순 급변한 안색으로 남궁묵을 매섭게 노려보았다.

“누가 너보고 내 사정을 봐 달라 했느냐? 필요 없다. 이 몸은 태자 전하의 장녀이고 폐하의 황손이다. 그런 내가 너희 둘을 때린다고 뭐 어떻게 될 것 같으냐? 이 맞아도 싼…….”

짝!

따귀 소리가 울려 퍼지자 영창 군주의 입에서 흘러나오던 듣기 거북한 말이 멈췄다. 안색이 어두워진 소천야가 말했다.

“여봐라! 군주가 아픈 것 같으니 어서 금릉으로 데려가 어머니의 보살핌을 받게 하여라.”

“예, 황장손 전하.”

시위(侍衛) 둘이 사람들 사이를 비집고 나와 영창 군주 곁으로 다가간 후 정중하지만 단호한 어투로 말했다.

“군주마마, 모시겠습니다.”

영창 군주는 창백해진 얼굴로 소천야의 싸늘한 눈빛을 바라보다가 결국 아무 말도 꺼내지 못한 채 시위를 따라갔다.

소천야가 다시 사과했다.

“영창이가 아직 철이 없어서 그러니, 두 아가씨와 군맥이가 너그러이 봐주십시오.”

사패환이 담담히 말했다.

“황장손 전하, 별말씀을 하십니다. 존귀하신 군주께서 아직 어려 그러신 것인데 저희가 어찌 감히 탓을 하겠습니까.”

남궁묵은 고개를 갸웃거리며 호기심 어린 눈빛으로 사패환을 바라보았다. 그녀가 고개를 들자 두 사람은 잠깐 어리둥절하다가 곧 서로의 의중을 알았다는 듯 미소 지어 보였다.

영창 군주가 사과하게 두면 안 되었다. 만약 미안하다는 말 한마디로 모든 일이 매듭지어지면 오늘 그녀들만 공연히 욕먹을 것이 아닌가?

영창 군주는 앞으로도 마음 편히 살기는 글렀다. 군주라는 귀한 신분에 열일곱이란 나이에도 약혼도 아직 못한 데다, 그 이유는 누가 봐도 뻔했다. 앞으로 일 년 안에 혼약을 맺을 가능성은 거의 없었다. 태자가 여식을 ‘신분이 낮은 이에게 시집보내는’ 경우를 제외한다면.

여인들이 모인 곳은 남자들이 오래 머물 곳이 아니었기에, 소천야는 말 몇 마디를 끝으로 사람들을 데리고 자리를 벗어났다.

남궁회는 태연자약한 모습으로 황장손 옆에 서 있는 딸을 응시하더니, 결국 아무 말도 꺼내지 않고 복잡한 표정으로 떠났다.

남궁휘와 남궁서는 걱정스러운 눈빛으로 남궁묵을 바라보았다.

위군맥은 고개를 숙여 제 앞에 조용히 서 있는 소녀에게 낮은 목소리로 속삭였다.

“걱정할 것 없습니다, 무슨 일이 생기면 외숙모님을 찾으면 됩니다.”

그는 남궁묵의 대답을 듣고 나서야 다른 사람들과 함께 소천야의 뒤를 따랐다.

그렇게 사람 한 무리가 왔다가 제일 골치 아픈 영창 군주를 데려갔다. 화원에 있던 수많은 규수들은 나란히 서 있는 침착한 두 소녀를 바라보며 기뻐해야 할지 노여워해야 할지 알 수 없었다.

사패환이 고개를 기울여 남궁묵을 살펴보더니 만면에 웃음을 띤 채 말했다.

“역시 내가 보는 눈이 있다니까.”

남궁묵이 눈썹을 추켜세우고 웃으며 말했다.

“나도 운이 좋은가 보다.”

그녀가 착하기만 한 사람은 아니라는 걸 알았지만 그래도 이렇게 보고 있으니 꽤 마음에 들었다.

두 사람은 서로를 바라보며 웃었다. 주변 사람들이 두 사람을 전혀 신경 쓰지 않는 것처럼 행동하면서도 힐끔거렸으나, 둘은 상대하지 않았다.

사패환은 남궁묵을 끌어당기더니 적당한 자리를 찾아 앉으면서 말했다.

“보아하니 위씨 가문 큰 공자와 잘 지내나 봐?”

“위씨 가문 큰 공자? 너 설마…… 위군맥을 말하는 거야?”

“그럼 누구겠어?”

사패환은 그녀를 흘겨보더니 안타깝다는 투로 말했다.

“위군맥이 횡재한 거지, 네가 만약 쭉 금릉에서 살았다면…….”

남궁묵이 손사래를 치며 말했다.

“내가 금릉에서 계속 살았다면 지금까지 살아남지 못했을 거야.”

처음 눈을 떴던 순간 어디에 있었는지 그녀는 아직도 기억하고 있었다. 사패환은 턱을 괴고 잠시 생각하더니 말했다.

“하긴. 예전에 할머니가 하시는 말씀을 들었는데, 남궁가의 큰아가씨는 모친을 섬기며 효를 다하는 강직한 성정이라고 했어. 그때 내가 몸이 안 좋아 외출을 못 했던 터라 여태 너를 못 만났던 게 아쉬울 뿐이야.”

모친을 섬기며 효를 다했다고? 남궁묵의 눈썹이 꿈틀거렸다. 아 그렇지, 아홉 살 밖에 안 된 어린아이가 친어머니를 위해 3년 상을 치르고 고향에 돌아가 생모의 영구를 지켰으니 지극한 효성이 아니면 무엇이겠는가?

사패환이 말했다.

“돌아가도 걱정할 것 없어. 폐하께서는 효성이 지극한 아이를 가장 어여삐 여기시니까. 남궁 부인에 대한 너의 효심을 봐서라도 네가 괴롭힘 당하는 꼴을 보고만 계시지는 않을 거야.”

남궁묵이 마지못해 말했다.

“우린 방금 전에 수모를 당할 뻔했지.”

사패환이 입을 비죽거리며 어쩔 수 없다는 듯 말했다.

“어쩔 수 없지 뭐. 사람들은 똑똑한 사람을 상대하기 어렵다고들 하지만 사실 아둔한 사람이야말로 진정 상대하기 어렵거든.”

똑똑한 사람들은 승패와 득실을 따지고 일의 경중(輕重)을 알지만, 우둔한 사람은 열받으면 무작정 달려든다. 언제 화가 치밀어 올라 뒷일은 신경도 쓰지도 않고 달려들지 알 수 없으니 참으로 골치 아픈 일이었다.

영창 군주가 조금만 더 현명한 사람이었다면, 절대로 사람들 앞에서 남궁묵과 사패환에게 손찌검을 하려 들지는 않았을 것이다.

“그나저나 남궁주가 지금까지 안 오는 걸 보니, 너한테 당해서 그러는 게 맞아?”

사패환은 조금도 숨기는 기색 없이 궁금해하며 물었다. 이미 남궁묵이 보통내기가 아님을 안 이상, 떠보는 듯한 의미 없는 행동을 할 필요가 없었기 때문이었다.

남궁묵이 눈썹을 추켜세우더니 웃으며 말했다.

“나와는 아무런 상관없어. 너야말로 영창 군주가 왜 너한테 그렇게 한 건지 말해봐. 내 기억이 틀리지 않다면 영창 군주는 원래 나를 괴롭히려고 온 거잖아?”

영창 군주가 지능이 얼마나 낮은 건지 도통 알 수 없었다. 원래 갑자기 튀어나온 남궁가의 적녀를 괴롭히러 왔던 것일 텐데, 사패환이 몇 마디 했다고 그녀에게 모든 적개심을 쏟아낼 줄 누가 알았겠는가. 사씨 가문 셋째 딸은 미움받을 만한 사람도 아닌데 말이다.

남궁묵이 턱을 괸 채 천천히 물었다.

“황장손이 너한테 매우 정중하게 행동하던데?”

사패환이 마지못해 말했다.

“너랑 친구가 된 게 좋은 일인지 모르겠다.”

너무 똑똑해도 성가시긴 마찬가지였다. 어릴 적부터 궁벽한 시골에서 자란 남궁묵에게 가르침을 준 사람이 없었을 텐데도 이리 영민한 것이 놀라워, 사패환은 감탄하지 않을 수 없었다.

사실 남궁묵은 이런 이야기에 별 관심이 없었다. 하지만 사패환과 만난 순간 연지 물분, 능라 주단에 관한 이야기를 나누지는 않으리란 건 불 보듯 뻔한 일이었다.

이야기를 나누던 중, 사패환은 남궁묵에게 금릉 황성 규수들과 명문 세가와 관련된 최신 소식들을 소상히 알려주었다. 연왕비도 이런 얘기를 그녀에게 들려주었지만, 그녀는 신분이 높고 또 오랫동안 금릉에 있지 않았기 때문에 자세히 알진 못했다.

정 씨가 이런 이야기를 남궁묵에게 해줄 리 만무했다. 사패환의 이야기를 통해 남궁묵은 금릉 황성의 세력 분포에 대해 제대로 알게 되었다. 사패환이 그녀에게 큰 도움을 준 셈이었다.

연왕비 곁에 있던 한 시녀가 총총 다가와 정중히 말했다.

“남궁 아가씨, 사패환 아가씨. 곧 연회가 시작되니 연왕비마마께서 오라 하십니다.”

두 사람은 순간 멍해졌고 그제야 자신들이 오전 내내 이야기를 나누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두 사람은 함께 일어섰다. 사패환이 웃으며 말했다.

“우리 금릉에 돌아가서 다시 얘기할까?”

남궁묵이 천연스레 웃으며 말했다.

“언제든 상대해 드리지.”

* * *

행궁의 대전에서는 연회가 막 시작하려 했다. 두 사람이 측문으로 들어서자, 미소를 머금고 그들을 향해 손짓하는 연왕비가 보였다.

“연왕비마마.”

연왕비는 자애로운 얼굴로 둘을 바라보며 미소를 띤 채 말했다.

“보아하니 묵아와 사씨 가문 셋째 아가씨가 마음이 잘 통하는 것 같습니다. 두 아가씨는 내 곁에 앉아라. 모두 날 너무 미워하지 마시게나.”

사씨 부인이 언짢을 리가 없었다. 사씨 가문은 황실의 권력 다툼에 끼어들고 싶지 않았지만, 그렇다고 황권을 업신여길 정도로 생각이 짧지는 않았다. 연왕비가 사씨 가문 여식을 귀히 여기는 것은 그들에게 당연히 좋은 일이었다.

“연왕비마마께서 농을 하십니다. 왕비께서 마음에 들어 하시면 이 아이에겐 복이나 다름없습니다.”

연왕비가 기뻐하며 두 아가씨를 제 곁으로 끌어당겨 앉히자, 자리에 있던 규수들은 이를 보며 부러움과 질투를 느꼈다. 연왕비의 아랫자리에 앉은 주왕비가 웃으며 말했다.

“보아하니 남궁 아가씨와 사 씨 아가씨만 마음이 통하는 건 아닌 것 같습니다. 셋째 형님과 남궁 아가씨도 마음이 맞는 듯합니다. 아, 그러고 보니 영창이 그 아이는 왜 안 보이는 겁니까?”

연왕비가 옅은 미소를 지으며 차분한 목소리로 말했다.

“조금 전 천야가 말하길, 영창이는 몸이 좋지 않아 처소에 돌아가 쉰다고 했다네. 자네는 못 들었나 보군.”

주왕비의 웃는 얼굴이 살짝 굳어지더니 제 이마를 두드리며 웃으며 말했다.

“제 기억력 좀 보십시오. 그새 까먹었습니다. 그 아이는 정말…… 아침에도 저녁에도 멀쩡하더니만 하필 지금 병이 나서는…….”

영창 군주에게 무슨 일이 있었는지 자리에 있던 규수들은 대부분 알고 있었다. 남궁묵과 사패환을 향한 눈빛이 더욱 미묘해졌다.

연왕비라는 든든한 배경에 황장손마저 이 두 사람을 위해 친여동생을 벌했으니, 이들이 타고난 복이 얼마나 큰지 알 수 없었다.

남궁묵은 이미 위군맥과의 혼사가 정해졌기 때문에, 그녀들의 질투심은 사패환에게 향했다. 이를 보며 사씨 가문 셋째 아가씨는 어이가 없다는 듯 쓴웃음을 지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