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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밀의 방(2)

***

철구덩이에서의 광부 생활은 결코 쉽지 않았다. 인내심을 타고난 드워프라고 해도 마찬가지였다.

"빌어먹을··· 고블린 똥꼬 같은 나날들이여! 퉤에!"

더러운 침대에서 몸을 일으킨 드워프 드라크린은 저주의 말과 함께 오늘 하루를 시작했다.

그의 노동은 보통 광부보다도 더 힘들었다. 왜냐하면 드라크린은 죄를 짓고 도시에서 쫓겨난 '형벌 광부'이기 때문이다.

형벌 광부는 말 그대로 죄인이다. 열악한 환경 속에서 가혹한 노동에 내던져지는 이들이었다.

"으으으···."

드라크린은 눈곱을 떼며 전날 노동으로 비명을 지르는 뼈마디에 몸을 비틀었다.

따로 아침 식사는 없었다. 그는 자신의 곡괭이를 들고 희미한 랜턴 빛에 의지해 다시 지하로, 지하로 나아갔다.

'이 노역은 내가 뒤져야 끝날 것 같군.'

또 그렇게 끝없는 곡괭이질을 하는 하루가 반복됐다. 드라크린은 동료 형벌 광부들과 함께 가장 위험한 광맥에 투입되어 곡괭이질을 해야 했다.

까앙! 깡! 깡!

어둠 속에서 곡괭이가 광석과 부딪칠 때마다 불꽃이 번쩍였다. 그의 하루는 단조로웠다. 곡괭이로 깨고, 다시 깨고, 부서진 바위와 광물을 옮기는 일 뿐이다.

게으름을 부리면 형벌 광부로 지내야 하는 날이 늘어나기 때문에 부지런히 움직여야 했다.

점심시간에야 잠깐 쉴 수 있었는데, 딱딱한 빵과 냄새 나는 치즈를 억지로 쑤셔 넣으며 한탄을 이어갔다.

'이대로는 더 못 살겠다!'

붙잡혀 처형되는 한이 있더라도 거지 같은 감독관을 나이프로 쑤시고 싶은 불 같은 욕망이 밀려왔다. 하지만 그는 애써 참을 수밖에 없었다.

"갈두어 브론즈비어드···!"

하루에도 되뇌는 그 저주받을 이름 때문이다.

으드득!

이가 갈리는 소리가 절로 났다.

갈두어는 이 철구덩이 광산마을의 책임자로 드라크린의 사촌이기도 했다. 하지만 말이 사촌이지 철천지원수였다.

그가 드워프의 본진인 산 밑 도시국가인 '스톤헤븐'에서 쫓겨나게 된 게 바로 사촌 갈두어 때문이니까.

본래 드라크린은 스톤헤븐에서 영향력 있는 금세공 길드의 길드장이었다. 드워프 세계에서 장인이 갖는 위상을 고려해 볼 때 그것은 인간 사회에는 완전히 달랐다.

금세공 길드의 길드장은 드워프 의회에 출석할 권한까지 있을 정도의 지위. 즉, 정치적 힘까지 가진 자리였다.

문제는 그 힘이 그를 파멸로 이끌고 말았다는 것. 드라크린은 의회에서 사촌인 갈두어와 심하게 반목했고, 결국 그의 모함으로 누명을 썼다.

해명은 먹히지 않았다. 끝내 그는 파멸했다. 단순히 길드에서 쫓겨난 것을 넘어 형벌 광부로 추락한 것이다.

이후 원수의 관리 하에 놓이게 됐으니 드라크린의 심경은 더 설명할 것도 없었다. 그는 하루하루 복수를 맹세했다.

'그래. 그 갈보 같은 갈두어 놈을 찢어죽이기 전에 섣불리 행동할 수 없지.'

드라크린은 매일 원한을 불태웠지만 마땅한 방법이 없었다. 갈두어는 엄중히 경호 받고 있었고, 정치적으로 실각시킬 방법도 없었다. 그렇기에 그는 하루, 하루 지쳐만 갔다.

16시간의 중노동이 끝나고 그는 자신의 거처로 향했다. 광산 밖에 있는 다 쓰러져가는 허름한 건물이었다.

딱히 감시도 없었다. 네깟 놈이 갈 곳이 있냐고 비웃는 것 같았다. 사실 다른 형벌 광부들도 다르지 않았다.

드워프에게 고향에서 추방되는 건 죽음과도 같았으니까. 다들 어딘가로 갈 생각조차 못 한 채 그저 형벌이 끝나길 묵묵히 기다릴 뿐이었다.

"으윽···! 크으."

조잡하고 더러운 침대에 걸터앉을 때 뼈마디가 비명을 질렀다. 아직 살아있는 게 용할 정도였다. 이 삶은 끝나지 않는 고통과도 같았다. 드라크린은 복수심으로 버텨왔지만, 점점 자신이 없어졌다.

"후우···."

낙담이 가득한 한숨이 길게 뿜어져 나왔다.

"빌어먹을 인생."

잠들기 전에 언제나 하는 혼잣말이었다. 하지만 놀랍게도 오늘은 거기 답해주는 이가 있었다.

"그래, 우리 인생은 대개 그렇지."

나른하게 늘어져 있던 드라크린은 눈이 휘둥그레졌다.

"!"

그러자 키가 껑충하게 큰 인간이 드라크린 앞에 모습을 드러냈다.

"이런, 토끼처럼 놀란 드워프라니. 괜찮은 볼거리구만."

"누구냐! 네놈!"

드라크린은 아무 도움이 되지 않을 걸 알면서도 곡괭이를 들었다. 그러거나 말거나 나타난 인물은 여유롭게 근처의 나무 상자 위에 앉았다.

"곡괭이를 들이미는 게 드워프식의 '안녕하세요'인가 보군. 그럼 '환영합니다'는 뭐지? 내 입장에선 아무래도 그게 더 마음에 들 거 같은데."

"네놈! 갑자기 나타나서 무슨 뚱딴지같은···!"

대답 대신 인간 사내는 검지로 입을 당겨 이빨을 드러내 보였다. 마치 맹수처럼 길고 뾰족한 송곳니가 드러났다. 그게 무슨 의미인지 깨달은 드라크린은 몸이 뻣뻣하게 굳는 것 같았다.

"배, 뱀파이어!"

"그래, 보통 그렇게 불리지."

"날 잡아먹으러 온 건가! 이 사악한 놈!"

그 말에 나는 눈살을 찌푸렸다.

"주변에 괜찮은 도시락이 있어서 사양하지. 뭣보다 네놈은 피냄새가 좋지 않군. 품질이 구려."

"뭐, 뭐라고?"

"그만 허둥대도록. 듣기로 꽤 배포가 있는 자라 들었는데 오늘 보니까 헛소문이었군."

"이놈! 갑자기 쳐들어와서 무슨 개소리를 지껄이는 거야!"

사실 야밤에 뱀파이어를 만났는데 이리 목청을 높이는 것만 해도 꽤 강단이 있는 거다.

"거래를 위해 찾아왔다. 드라크린. 전 금세공 길드의 길드장이여."

드라크린은 상대가 영 수상쩍했다. 하지만 진짜 파격은 이제부터였다. 뱀파이어가 광산 금고를 털고 싶다고 했기 때문이다. 드라크린은 입을 멍하니 벌렸다.

"네놈, 미쳤나? 광산 금고가 어떤 곳인지 알고."

"알지, 알아. 아주 엄중히 보호되고 있는 장소라는 걸."

"알면서도 그딴 정신 나간 소리를 하는 건가?"

"하지만 못 털 장소도 아니지. 내부에 적절한 협력자가 있다면 말이야. 바로 너처럼."

그제야 뱀파이어가 찾아온 이유를 알고 드라크린은 눈이 커졌다.

"날 이용할 셈인가!"

드라크린은 과거 권력자였기에 여러 가지 보안 사항에 대해서도 잘 알았다. 광산 금고 역시 마찬가지였다. 또한 그의 손재주면 금고의 문도 딸 수 있었다.

"그래, 드라크린. 이건 나쁘지 않은 기회다. 금고가 털리면 네놈이 증오해 마지않은 광산의 책임자 갈두어가 큰 곤경에 처할 걸? 실각해도 이상하지 않아."

그 말에 드라크린은 순간 구원받은 것 같은 기분을 느꼈다. 마침내 확실히 복수할 길을 찾은 것이다.

"네놈! 이 무슨!"

흥분한 드라크린이 손을 덜덜 떨어대자 뱀파이어는 씩 웃었다.

"구미가 당기는 제안이지?"

흥분한 드라크린은 바로 답하지 못했다. 이에 뱀파이어가 품에서 독주를 꺼내서 내밀자 단번에 그걸 벌컥벌컥 들이켰다. 그제야 드워프의 낯빛이 조금 돌아왔다.

"크으···! 어, 어째서 금고를 털려는 거지?"

"별 거 아니야. 그냥 안에 있는 보석과 금을 탐할 뿐이다. 우리는 서로를 도울 수 있을 거야."

드라크린은 혹하는 심경이 됐다. 하지만 이건 극히 위험한 일이다. 눈앞의 뱀파이어는 처음 보는 존재인데 뭘 믿고 같이 거사를 벌인다는 말인가.

"정체도 모르는 놈과 목숨을 걸라고? 웃기는 얘기를 하는군."

게다가 상대가 뭔가 거창한 목표가 아니라 금이나 탐하는 잔챙이란 사실이 드라크린을 실망시켰다.

"내 정체 말인가?"

"그래! 근본 없는 놈!"

"크흐흐, 근본 없다는 말은 받아들이기 어렵겠군. 내가 누군 줄 알고 그런 소리를 하지?"

"네놈이 누군데?"

드라크린의 물음에 뱀파이어는 여유로운 미소를 지을 뿐이었다. 하지만 그건 겉모습만이었다. 내심 적잖이 당황하고 있었으니까.

'뭐지? 이 새끼 왜 이리 완고하고 안 넘어오지?'

뱀파이어의 정체는 소렌 다켄발트였다. 그는 자신이 가진 지식을 바탕으로 드라크린을 설득하고 있었다. 하지만 현실은 게임보다 복잡했다.

'뭔가 더 혹할 만한 게 필요한가 보군.'

뭐가 좋을까. 속으로 고민하던 그에게 드라크린이 다시 물어왔다.

"정체를 밝힐 수 없다는 건가? 그런 자와 어찌 손을 잡을까?"

드라크린의 단호한 말에 소렌은 고민하다가 강수를 두기로 했다.

'좋아, 어쩔 수 없지.'

그는 어둠의 숲에서 한 번 빌렸던 공포의 이름을 다시 써먹기로 했다.

"이름을 밝히지 못할 건 없다. 다만 네놈이 곤란할까 싶어 함구했을 뿐이다."

"흥! 뱀파이어가 배려심을 운운하다니 웃기지도 않는군. 어디 그 잘난 이름을 말해보라."

"좋다. 나는 어둠의 숲의 지배자. 블라르 백작이다."

소렌은 다시 한번 블라르 백작의 이름을 팔아먹었다. 그리고 효과는 탁월했다. 드라크린이 펄쩍 뛴 것이다.

"네, 네놈이 그 블라르라고? 이런 미친!"

"호오, 내가 블라르라 밝혔음에도 말투가 계속 그딴 식인가? 배짱이 좋군. 드워프."

"아, 아니. 이것은··· 그게 아니오라."

블라르 백작이란 말만으로도 기가 센 드워프 드라크린이 쩔쩔매기 시작했다. 하지만 완전히 믿는 눈치는 아니었다.

"당신이 블라르 백작이란 걸 어찌 믿나. 아니···, 믿겠소?"

"그럼 믿게 해드려야지. 크흐흐. 네놈도 알겠지만, 이 블라르는 모르는 게 없지."

실제로 블라르 백작은 사방에 거미줄을 치듯 촘촘하게 정보원을 배치하는 것으로 유명하다. 그의 그런 특징은, 이 세계의 온갖 걸 알고 있는 내 특징과 잘 어울렸다.

"그렇다고 익히 들었소."

"물론이다. 무엇이 알고 싶나? 우리 뱀파이어들 사이에서 가장 중요한 비밀을 하나···."

"뱀파이어에 관한 이야기는 됐소. 관심도 없을뿐더러 내가 알아먹을 만한 게 좋겠소. 우리 종족에 관한 걸 말해보시오. 소문 정도를 모은 게 아니라, 드워프인 내가 놀라서 입이 벌어질 정도의 정보면 내 당신을 인정하겠소."

드라크린은 어지간한 거로는 동요하지 않겠다는 듯 자신만만한 태도였다. 하지만 그건 이 세계에 흠뻑 빠졌던 날 지나치게 무시하는 거다. 드워프의 치부 정도는 얼마든지 알고 있었다.

"좋다. 마침 재밌는 게 떠오르는군. 이건 너희 드워프의 왕인 레그너 3세에 관한 얘기니 귀를 씻고 들어라. 결코, 아무나 알 수 없는 내용이니까. 크흐흐흐."

"뭐, 뭐라고? 폐하의?"

"잘 들어봐라. 레그너 3세는 음악과 예술을 경멸하기로 유명하지."

"알고 있소. 그것은 나약함의 증거라고 하셨소."

"한데 사실 왕이 작곡가라는 건 알고 있나? 레그너 3세는 몰래 악기와 고대의 악보를 수집하는 게 취미다."

"아니, 어찌 그걸···?"

그건 왕실의 일원이나 의원 일부만 아는 추문이었다. 하지만 이제 시작에 불과했다.

"또 있다. 레그너 3세는 젊은 시절 엘프 여왕에게 반한 적이 있다. 종족의 차이에도 불구하고 열정적인 구애 편지를 수차례 보냈지만 냉담하게 거절당했지. 지금 레그너 3세가 엘프를 병적으로 싫어하는 건 그 때문이다."

"아, 아니. 그것까지?"

"더 들어보도록. 현재 레그너 3세는 십여 년 전에 발견한 고대신의 유물에 완전히 빠져있지. 그는 학자 몇을 데리고 도서관에서 계속 유물의 연구를 편집증적으로 연구 중인데 사실 그게 엘프에게 사랑을 얻어내는 방법이란 소리가······."

거기까지 듣던 드라크린은 소리를 빼액 질렀다.

"그만! 그만두시오!"

드라크린은 절대 더 듣고 싶지 않았다. 이것은 왕의 비밀이었고 많이 알수록 목숨이 위험해지는 얘기였다. 특히 엘프 여왕의 관한 건은 레그너 3세의 역린이었으니까.

"좋소. 당신이 블라르란 사실을 믿겠소. 백작이 아니라면 어찌 그런 이야기를 알겠소?"

말은 그렇게 했어도 사실 드라크린은 반신반의했다. 하지만 이제 그건 아무래도 좋았다.

'저자가 설령 블라르 백작이 아니라도 상관없다. 저런 정보를 알 정도면 딱 봐도 보통 인물이 아니다.'

잔챙이가 아니라면 사촌을 엿 먹여줄 작전에 목숨을 걸어볼 만했다. 이후로도 둘은 몇 가지 얘기를 나눴는데 드라크린은 점점 생각이 바뀌어 갔다.

'아니, 어쩌면 블라르 백작이 맞을지도 모르겠군. 눈빛이 비범하고 느껴지는 기운이 장대해서 숨이 막힐 정도다.'

사실 드라크린이 느낀 장대한 기운은 아단의 10단계의 신체개조 덕분이었다.

하지만 그런 사정을 알 리가 없는 드라크린은 뜯어볼수록 상대가 블라르가 맞을 것 같단 생각으로 기울어져 갔다. 그러던 중 한 가지 생각이 퍼뜩 떠올랐다.

'가만? 왜 블라르 백작이 그 빌어먹을 갈두어를 노리지?'

말로는 보석과 금이 목표라고 했지만 드라크린은 믿지 않았다. 자신처럼 갈두어의 실각을 획책하는 게 틀림없다고 여겼고, 그것을 바탕으로 추리가 이어졌다. 그러자 한 가지 결론에 도달했고, 온몸에 소름이 돋았다.

"이제! 이제 알겠소! 블라르 백작! 당신은 갈두어 그 빌어먹을 놈이 태양 교단과 손을 잡은 걸 알고 나타난 거군! 그를 방해하기 위해!"

그 말에 소렌은 잠깐 뇌 정지가 왔다.

'어? 갑자기 태양 교단?'

무슨 소리인지 알 수가 없다. 하지만 블라르를 연기하고 있으니 태연을 가장해야 했다. 그는 흔들리지 않는 표정으로 미소를 지었다. 그러자 드라크린은 자신의 추측이 맞았다고 확신했다.

"역시! 그렇다면 잘 오셨소! 금고에는 갈두어의 개인물품도 보관돼 있을 거요. 분명 거기에 태양 교단과 놈의 유착 관계를 증명할 문서도 있을 터!"

"······."

"우리가 손을 잡는다면 그 저주받을 갈두어를 완전히 나락으로 보낼 수 있겠구려!"

이에 소렌은 자신이 뱀파이어라 땀을 흘리지 않는다는 사실에 감사하며 답했다. 그는 방금 전까지도 갈두어와 태양 교단의 관계에 대해 전혀 몰랐으니까.

"······물론이다. 이제야 이 몸의 뜻을 이해했군."

"블라르 백작이여. 그대는 갈두어를 쳐내 태양 교단에게 한 방 먹여주려는 거군! 갈두어가 처리되면 드워프에 대한 태양 교단의 입김도 자연히 약해질 터!"

"······그, 그렇다."

무언가 사건이 점점 커지고 있었다. 이거야말로 스노우볼링이었다. 하지만 이미 돌이킬 수 없었고 소렌은 자기 책임을 어둠의 숲의 주인에게 떠넘겼다.

"태양 교단은 이 블라르의 적! 그들과 손을 잡은 자는 절대 용서할 수 없다!"

일은 소렌이 벌이고 책임은 블라르가 지는, 그런 구조가 점점 만들어지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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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밀의 방(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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드라크린과 얘기가 잘 끝났다. 그는 우리가 광산 금고를 터는 데 전적으로 협력해 주기로 했다.

그는 이번 추문으로 증오하는 사촌을 골로 보낼 생각에 흥분하고 있었다.

'확실히 드워프가 태양 교단이랑 내통하는 건 문제긴 하지.'

그게 왜 문제냐?

간단하다. 이 세계의 각 종족들은 저마다의 종족신을 섬기기 때문이다. 드워프는 당연히 드워프 신을 섬긴다.

한데 태양 교단은 자신들이 섬기는 신이야말로 유일신이며 다른 모든 종족을 아우를 수 있다고 주장 한다.

당연히 다른 종족 입장에서 분노할 주장이지만, 태양 교단의 적극적인 포교에 이를 동조하는 자들도 나오곤 했다.

당연히 그들은 종족의 배신자로 통한다.

'드라크린의 사촌이 그런 경우고.'

무슨 이득을 약속받았기에 배신자로 불릴 위험을 무릅쓰고 태양 교단과 결탁한 건지는 잘 모르겠다. 확실한 건 이게 순수한 신앙의 문제는 아니라는 거다.

아무튼 이번 건을 제대로 터뜨리면 그들의 비밀스러운 관계는 커다란 위기를 맞이하겠지.

이후 태양 교단의 분노가 나 대신 블라르 백작에게 향하도록 하면 그만이다.

'괜찮은 이간계야.'

어차피 둘 다 내 친구가 될 수 없으니 서로 치고받고 싸워주면 좋은 일이지.

'태양 교단의 분노라니···, 본의 아니게 블라르 백작에게 엄청난 똥을 던지는 일이 되겠군.'

* * *

스킨크들에게 돌아온 나는 몇 가지 준비에 들어갔다. 내가 블라르 백작을 사칭했다는 사실을 모두에게 주지시키고, 이번 일에 필요한 망치와 정을 구했다. 광산 마을에서 몰래 몇 개 가져오면 그만이었다.

다음날 밤. 우리는 드워프 광산으로 출발했다. 드라크린과는 광산 내부에서 만나기로 했다.

"이쪽으로. 광산으로 들어갈 수 있는 작은 길이 있다. 옛날에 공사용으로 쓰고는 드워프들도 잊어버린 장소지."

내가 안내한 곳은 광산 내부로 향할 수 있는 축축하고 퀴퀴한 터널이었다. 너무 좁아서 중간부터는 바닥을 기어가야 했다. 어둠 속에서 벽면이 사방에서 눌러오는 그 느낌은 폐소공포증을 일으킬 정도였다.

"드워프들이 왜 여기를 쓰지 않는 건지 알 것 같네요. 스에에···."

스킨크 정찰병인 차라가 자신의 기다란 혀를 낼름낼름 거리면서 인상을 찌푸렸다.

확실히 이곳은 음침했다. 거칠게 깎은 벽은 울퉁불퉁하고 곳곳에 균열이 가득해 언제라도 무너질 것만 같았다.

또 바닥은 고르지 않은 데다가 일부 구간에는 더러운 물이 고여서 눅눅한 냄새를 풍겼다.

"시체네요."

앞장선 차라의 말에 나는 별거 아니라는 듯 끄덕였다.

"광산에는 원래 죽음이 가득하지."

원래 백골이 된 시체와 녹이 가득 슨 장비 정도는 굴러다녀야 여기가 좀 위험하고 제대로 된 길이구나 싶은 법이다.

우리는 한참을 간 뒤에야 겨우 몸을 일으킬 정도의 공간에 도착했다. 그러자 앞에서 조심스러운 목소리가 들려왔다.

"···오셨소?"

접선 장소에서 미리 기다리고 있던 드라크린이었다. 그는 꽤 긴장하고 있었던 듯, 내 모습을 보더니 안도한 기색이다.

"진짜 스킨크들을 데려오셨군."

"유능한 친구들이니 믿어도 좋다. 그것보다 오늘 작업은 꽤나 힘들었나 보군."

드라크린은 형벌 광부인 만큼 행색이 아주 남루했다. 한데 오늘은 머리 끝부터 발 끝까지 흙더미를 뒤집어쓰고 있었다. 누가 보면 조그맣고 못되게 생긴 땅의 정령이라고 해도 믿겠다. 한데 놈의 표정이 묘하게 홀가분했다.

"아, 이거 말이오. 몰래 빠져나오기 위해 감독관 놈을 몰래 파묻느라 그랬소. 최근에 지하수가 흘러나와 꽤 땅이 질척거렸지. 그래도 목을 꺾는 맛이 최고로 좋았으니 만족하오."

"감독관이 평소에 꽤나 못살게 굴었나 보군?"

"그렇소. 앓던 이가 빠진 것 같구만. 대신 일을 이렇게 벌였으니 돌아갈 곳이 없소. 그래서 혹시 안 오나 하고 마음을 졸이고 있었소이다. 자, 안내할 테니 어서 갑시다."

우리는 드라크린을 따라 조심스럽게 나아갔다. 그는 내부의 감시와 함정, 경보 기관을 피하는 법을 빠삭하게 알고 있었다. 때로는 경비병을 피하기 어려운 경우가 있었는데, 주술사 아타르가 수면 마법으로 간단하게 처리했다.

"혼몽에 빠졌으니 적어도 열 시간은 일어나지 않을 것입니다."

주술사 아타르는 생각보다 훨씬 대단한 존재였다. 연이어 주술을 사용하고도 조금도 지친 기색이 없었다.

다만 문제는 이제부터였다. 슬슬 목표인 광산 금고에 가까워지고 있었는데 문제는 어떻게 안으로 들어가냐는 것. 드라크린이 다소 안달하는 기색으로 그 점을 물어왔다.

"백작이여. 금고의 단단한 잠금 장치를 뚫고 어찌 들어가려 그러시오?"

"걱정할 것 없다. 들키지 않고 들어가는 법을 알고 있으니."

"정말 그런 방법이 있단 말이오?"

"왜, 놀랍나?"

"그도 그럴 수밖에 없는 게···. 우리 광부들은 늘 상상하곤 한단 말이오다."

"무엇을?"

"이 좆같은 광산 전체를 엿 먹일 방법을 말이오. 하염없이 곡괭이질을 하고 먼지를 먹다보면 금고를 털어서 도망가고 싶다는 상상을 수도 없이 하지."

"그래서 말하고 싶은 게 뭐냐? 드라크린."

"실제로 그런 일을 행동에 옮겼던 녀석들이 종종 있었단 말이오. 하지만 모두 실패하고 갱도 입구에 세워진 교수대에서 썩어가는 신세가 됐소."

드라크린의 말에 의하면 드워프들은 기본적으로 건축물의 구조를 파악하거나 함정을 알아보는 능력이 어느 정도 있다고 한다.

"그런 자들도 다 실패했는데, 어쩌려는 건지 궁금하오."

"걱정할 것 없다. 거의 다 왔으니."

내가 일행은 이끈 곳은 광맥이 끊긴 폐광지대였다. 나는 그들에게 한 가지 얘기를 해줬다.

"아무리 금고가 비밀에 싸여 있다고 해도 그걸 만든 자들이 있는 법이다. 그리고 그자들은 한 가지 대담한 계획을 세웠지."

바로 금고의 환기구를 따라 몰래 드나들 수 있는 출입구를 만드는 것이다. 나중에 금고를 털어서 도망칠 계획이었다고 한다.

"문제는 당시 금고를 만들었던 레그너 1세가 만만치 않은 놈이었다는 거지. 보안을 위해 공사에 참여한 자를 모두 죽여버리는 바람에 그들의 뜻은 이뤄지지 못했다. 그리고 환기구를 따라 만들어진 비밀 통로도 한 번도 쓰인 적이 없다."

"아니? 어찌 그런 비밀을!"

드라크린은 놀라고 믿기 어렵다는 표정이었다. 게임에서 얻은 지식이라 뭐라 설명하기도 어려워서 그냥 눈을 부라렸다.

"이 블라르의 능력을 의심하는 건가?"

"그게 아니라···."

"아까부터 주절주절 시끄럽군. 한 번 더 시끄럽게 굴면 입을 찢어버리마."

협박은 잘 먹혀서 드라크린은 입을 다물었다.

"모두가 함께 갈 수는 없다. 왜냐하면 통로가 매우 비좁아서 마법의 도움 없이는 드나들 수 없기 때문이다."

실제로 일을 꾸몄던 드워프들도 쥐로 변신하는 아티펙트가 있었기에 가능했다.

게임 퀘스트에는 그 아티펙트를 찾는 부분도 있었지만, 지금 나랑은 별 상관없는 일이다. 박쥐로 변신할 수 있는 능력이 있으니까. 같이 갈 몇은 주술사 아타르가 변신 마법을 써주기로 했다.

"차라, 드라크린. 너희가 같이 간다."

금고 안으로 들어갈 자들은 나와 주술사 아타르, 정찰병 차라, 드워프 드라크린, 이렇게 넷이었다. 나머지 둘은 여기서 망을 보고 기다리기로 했다.

"좋아. 통로를 열지."

폐광의 평범한 바위가 입구다. 다행히 생긴 게 게임과 똑같은 위치에 있어서 찾기 어렵지 않았다.

바위에는 측면에 홈이 일렬로 파여 있었다. 자세히 보지 않는다면 잘 모를 정도로 위장돼 있었다. 드라크린은 드워프인지라 바로 관심을 보였다.

"아니, 이건?"

"그래. 네가 생각하는 게 맞다. 자기 통로를 써보지도 못했던 놈들이 미리 만들어 둔 거지."

나는 미리 준비해간 정을 미리 만들어진 홈을 따라 꽂았다. 그리고 망치로 힘껏 두들기기 시작했다.

콰앙! 쾅!

어둠 속에서 불꽃이 튀며 정이 안으로 파고들었다. 그리고 잠시 뒤 거대한 바위가 허무하리만큼 간단히 쪼개졌다.

쩌억! 콰아아앙!

사방에 요란한 소리가 울렸다. 이것 때문에 누군가 폐광 지역까지 와볼 수는 있었지만, 애초에 광산에서 낙석 등 이런 소음이 일어나는 건 흔하니 그럴 거 같진 않았다.

먼지가 가시자 쪼개진 돌 너머로 작은 통로가 보였다. 나는 박쥐로 변신했다.

퍼엉!

"이 안으로 들어가면 환기구랑 이어진다. 시간이 없으니 서두른다."

이어서 주술사 아타르가 차라를 도마뱀으로, 드라크린은 쥐로 만들어서 통로 안으로 집어넣었다. 본인도 도마뱀으로 변해서 뒤에서 따랐다.

파닥파닥.

나는 부지런히 날갯짓하며 좁은 통로 안을 비행했다. 중간부터는 비행하기 어려워서 땅바닥을 기어갔다. 내가 변한 흡혈박쥐는 박쥐 중에서도 기는 걸 잘해서 별문제 없었다.

그렇게 한 시간 이상 나아간 끝에 우리는 목적지에 도착했다. 환기구를 빠져나가 금고로 들어가려는데 드라크린이 다급히 말렸다.

"안에 온갖 함정이 가득하오! 신중해야 하오! 찍찍!"

"무슨 함정이 어디 있는지 다 알고 있다. 걱정하지 말도록."

그 말과 함께 금고 안에서 도로 뱀파이어로 변했다.

"후우···."

금고의 벽면은 드워프의 역사가 느껴졌다. 천장은 높았는데, 하중을 경감하기 위해 위로 갈수록 좁아지는 형태였다.

벽면을 따라 다양한 크기의 선반이 있었고, 거기에는 온갖 보석의 원석과 금덩이가 정리돼 있었다. 그 아름다운 보화들은 금고의 야광석의 빛을 받아 신비롭게 반짝거렸다.

"스에에! 아름답네요."

"대단합니다."

뒤이어 온 차라와 아타르도 감탄한 기색이었다. 역시 보석과 금을 좋아하는 스킨크족답게 대번에 시선을 빼앗긴 것 같았다. 반면 드라크린은 드워프답지 않게 금과 보석에 관심도 없었다.

"여기 어디 개인금고가 있을 것이오. 그걸 찾아야 하오."

드라크린에겐 사촌에 대한 복수심이 우선인 것 같았다. 나는 그들을 잠시 진정시키고 내부의 함정에 대해 설명해줬다.

"내가 얻은 정보에 의하면···."

실제론 게임 속에서 여러 번 밟고 나서야 파악하게 된 거지만 말이다. 나는 내부의 가스 함정, 석궁 발사 함정, 낙하물 함정 등을 설명해주고 그것들을 건드리지 않게 신신당부했다.

"자, 아타르와 차라는 보석을 챙기도록. 드라크린은 그 개인금고를 찾아보고."

모두에게 역할을 맡긴 나는 금덩이로 향했다.

'크흐흐. 대박이야.'

창고에 있는 가공되지 않은 금덩이는 눈대중으로 봐도 거의 200킬로그램은 돼 보였다. 이게 어느 정도냐 하면 한국 돈으로 치면 대충 160억이 넘는 금액이다.

'한동안 돈 걱정은 없겠군.'

나는 익숙하게 근처에 있는 상자에서 커다란 용량을 가진 마법주머니를 찾았다. 이것은 드워프들이 금이나 보석의 원석을 운반하기 위해 준비해둔 것이다. 스킨크들이 주술사를 통해 무거운 돌이나 광물을 부유해 옮긴다면, 드워프들은 마법 주머니를 사용했다.

'설마 이걸 도둑이 유용하게 쓸 거라고 생각하진 못 했겠지만···.'

나는 금덩이를 마법주머니에 넣기 시작했다.

'나중에 스킨크 놈들을 족쳐서 금괴로 가공해야겠군.'

얼마 후 금을 다 챙긴 나는 근처에서 환기구를 하나 더 발견했다.

'음? 여기 환기구가 하나 더 있었네?'

게임에선 못 보던 환기구다.

'이건 어디로 연결될까?'

문뜩 호기심이 일었다. 박쥐로 변하면 안으로 기어가 볼 수 있을 것 같기도 했고. 탐사해볼까 싶어 주변을 보니 다들 바빴다.

아타르와 차라는 마법주머니에 온갖 보석의 원석을 쓸어 담고 있었고, 드라크린은 자기 사촌의 개인 금고 찾기에 삼매경이었다. 아무래도 혼자 잠깐 가봐야 할 것 같았다.

"여기 환기구 좀 살펴보고 오겠다. 잠깐이면 된다."

이에 아타르가 대표로 답했다.

"알겠습니다. 대신 이걸 가져가십시오."

아타르가 내민 건, 작은 이빨로 근거리에서 통신할 수 있는 마법 도구였다. 나는 그걸 품에 넣고 끄덕였다.

"알겠다."

퍼엉!

다시 흡혈박쥐로 변한 나는 좁은 환기구 안으로 기어들어 갔다. 작은 박쥐임에도 몸이 낄 정도로 좁았다.

'가다가 정 안 될 것 같으면 돌아가야지.'

하지만 뭔가 공략쟁이의 감이라고 할까? 처음 보는 환기구에서 설명하기 힘든 게 느껴졌다. 내 경험상 이런 걸 쑤셔보면 꼭 뭐가 나오긴 했었지.

다행히 환기구가 더 좁아져서 진입이 어려워지고 그러진 않았다. 한참 기어가던 나는 저 앞쪽에서 희미한 불빛을 발견하고는 작게 흥분했다.

'또 다른 방이구나? 무슨 용도일까?'

어쩌면 전혀 모르는 금고일지도 모른다는 사실에 흥분을 감추기 어려웠다. 나는 대박을 기대하며 그 방 안으로 들어갔다.

그리고 그 안에 펼쳐진 광경에 전율하며 얼어붙었다.

"맙소사···!"

그것은 폐쇄된, 그리 크지 않은 방이었다. 출입구는 어디에도 없었다. 다만 방 한쪽에 딱 봐도 마법 관문으로 추정되는 두 개의 기둥이 보였다. 아마 마법이 활성화되면 저 기둥 가운데 마법이 나타나는 식일 듯했다.

하지만 그딴 건 아무래도 좋았다. 방안을 빼곡히 채우고 있는 그림이 내 정신을 빼놓고 있었으니까.

수많은 그림은 놀랍게도 한 인물을 묘사하고 있었다. 몹시 아름다운 여성으로 나는 그녀가 엘프 여왕임을 쉽게 알아봤다.

여왕이 웃는 모습.

우아하게 산책하는 모습.

식사하는 모습.

온갖 장면이 가득했는데 가장 눈길을 끄는 건 엘프 여왕과 함께 그려진 드워프 왕이었다.

수염이 덥수룩하고 거친 인상의 드워프 왕은 어째서인지 그림 속에서 엘프 여왕과 매우 친밀해 보였다.

'마치 연인 같군···.'

실제로 둘의 사이가 원만하지 못한 걸 비춰볼 때 그런 묘사는 어쩐지 기괴해 보였다.

하지만 소름 돋는 건 이 광기가 그림만으로 그치지 않는다는 거였다. 방에 있는 선반에는 엘프 여왕에게 바치는 시와 노래가 가득했다.

또한 존귀한 여인에게 어울릴 법한 극상의 기예로 완성된 장신구도 여러 개 보였다.

하지만 가장 소름 돋는 건 그게 아니었다. 책상 위에 있는 사람 얼굴만한 수정이었는데, 그 안에는 몇 가닥의 금발이 소중히 보존돼 있었다.

대체 어떻게 수정 안에 머리칼을 넣은 건지 모르겠지만, 이건 정황상 분명 엘프 여왕의 머리칼 같았다.

그걸 깨달은 순간 전신에 소름이 쫘악 돋았다.

"씨발···. 진짜···!"

동시에 어서 여기서 나가야겠단 생각만 들었다.

한데 그때.

갑자기 잠잠하던 마법 관문이 묵직한 소리와 함께 활성화되기 시작했다.

으우우웅!

우우우우우웅―!

놀란 나는 황급히 박쥐 변신을 사용하려 했지만 작동하지 않았다. 대번에 내 얼굴은 창백해졌다.

'이런! 쿨타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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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밀의 방(4)

쿨타임 때문에 당장 박쥐로 변할 방법이 없다. 더군다나 이 방에선 따로 숨을 곳이 마땅치 않았다. 그러는 사이 두 기둥 사이에서 빛무리가 퍼지더니 결국 마법 관문이 열렸다.

'젠장! 드워프 왕이 온 게 틀림없어.'

드워프 왕은 강자로 이름 높았기에 결코 좋은 상황이 아니었다.

우우우웅.

곧 마법 관문 너머에서 근육질의 드워프가 나타났다. 그는 밤색 턱수염을 단정하게 손질한 위엄 넘치는 자였다.

복장은 단출한 편이었지만 허리춤에는 화려한 도끼 두 자루를 차고 있었다.

"어제 그리던 걸 마저 그려야겠군."

웃는 낯이던 드워프 왕의 얼굴은 날 발견하더니 딱딱하게 굳었다. 잠시 이게 무슨 상황인가 이해를 못 하겠다는 얼굴이었다. 그래서 예의 바르게 먼저 인사했다.

"안녕하십니까? 폐하."

일단 나름대로 웃어 보였다. 원래 웃는 얼굴에는 침 못 뱉는다고 하지 않나? 하지만 기다란 송곳니가 드러나 역효과였다.

"사악한 뱀파이어! 감히 짐을 노리고 온 것이더냐! 이놈!"

드워프 왕 레그너 3세는 쌍도끼를 뽑아 들더니 당장이라도 날 찢어발길 기세였다. 그래서 재빨리 근처에 있던 수정을 잡아챘다.

"경거망동하지 마십시오! 폐하! 엘프 여왕의 머리칼이 든 이 수정을 박살 내 버릴 테니!"

"이노옴! 감히! 그것보다···? 네놈이 그걸 어떻게 알고!"

역시 이 수정에 든 머리칼은 엘프 여왕의 것이었군. 레그너 3세는 놀란 얼굴이 됐고 나는 그 모습에 여유를 되찾았다.

"사실 우연히 여기 들어왔습니다만, 상당히 흥미로운 물건이 가득해서 구경 중이었습니다."

"네놈이 진정 죽고 싶은 거로구나. 협박이라도 할 셈이냐!"

"글쎄요. 그런데 주변에선 폐하의 이런 취미를 알고 있습니까?"

"이 도적놈이 감히!"

레그너 3세는 분노로 밤색 수염을 부들부들 떨면서도 내 손에 있는 수정 때문에 함부로 달려들진 못하고 있었다.

"뱀파이어! 함부로 말하지 마라! 이 방 안에 있는 것이 떳떳하진 않지만, 누구에게 피해를 준 일도 없다!"

"그렇습니까?"

"그저 그녀가 좋아서 그림을 그리고, 작곡을 했을 뿐이다! 짐은 그 이상 뭔가 한 적이 없거늘 비난받아야 한단 말인가!"

레그너 3세의 말에 주변을 다시 둘러봤다. 그림 속의 엘프 여왕은 하나 같이 아름다웠고, 온갖 정성을 다해 그려져 있었다. 그리고 엘프 여왕 옆에 그려진 레그너 3세의 모습은 그의 개인적인 망상을 느끼게 했다.

'잠깐? 이거 뭔가 익숙한 느낌인데···?'

어디서 비슷한 경험을 한 것 같단 생각이 들었다. 그러다가 퍼뜩 한 가지가 떠올랐다.

'이거 아이돌 덕질하는 거랑 좀 비슷한데?'

그런 생각이 들자 레그너 3세도 좀 달리 보였다. 원래는 크레이지 사이코 스토커인 줄 알았는데, 그냥 중증의 답 없는 덕후가 아닐까 싶었다.

'생각해 보면 이 양반, 본인 말대로 뭔가 나쁜 짓을 한 적은 없지.'

과거 두 차례 구애 편지를 엘프 여왕에게 보낸 뒤 까이긴 했지만, 그 뒤로는 조용했다. 나는 그걸 떠올리며 물었다.

"종족도 다르건만, 어찌 엘프 여왕을 이리도 흠모하십니까?"

거기에 대한 대답이 가관이었다.

"네놈은 이해하지 못한다. 고개를 드니 거기 별이 있었다. 그렇기에 마음에 품게 된 것이다!"

당당한 그 모습은 마치 최애 아이돌을 향한 애정을 선언하는 것만 같았다.

"······."

대체 이걸 어떻게 판단해야 할지 모르겠단 생각이 들었다. 그래도 일단 물었다.

"그리 당당하신데 어찌 이런 골방에서 작업을 하십니까?"

개인적으로 궁금하기도 했고, 지금은 시간을 끌 필요도 있었다. 박쥐 변신까지의 쿨타임을 벌어야 했으니까.

"짐이 왕이기 때문이다. 짐을 바라보는 백성들을 위해서라도 근엄한 왕으로 남아야 한다. 그것이 짐의 소임이다."

"하지만 폐하께서 진정 원하시는 건 이 방 안에 있군요?"

내 물음에 레그너 3세는 울적한 얼굴이 됐다.

"그것은 용납될 수 없는 인생이다."

"그렇습니까?"

"그리고 별이란 결국 닿을 수 없기 때문에 별이 아니겠느냐···."

레그너 3세의 말투에서 깊은 슬픔이 느껴졌다. 그는 사실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던 거다. 자신이 엘프 여왕과 맺어질 수 없다는 걸. 나는 어쩐지 레그너 3세란 남자에 대해 조금은 알 것 같은 기분이 됐다.

'아마 근엄한 겉모습과 다르게 내면은 수줍음이 많고 사랑이란 걸 어색하게 여기는 자겠지.'

그런 자가 용기를 내 구애의 편지를 보냈다가 딱 잘라서 거절당했다. 이후 마음을 꾹 닫고 혼자 골방에서 무수한 그림을 그리며 무슨 생각을 했을까?

망상 속에서 허우적거렸다고 해도 나는 그를 비난할 생각이 들지 않았다.

"뱀파이어."

나를 부르는 그는 음성은 감정의 폭풍이 모두 정리된 듯 차분했다.

"네, 폐하."

"도둑처럼 야밤에 살금살금 기어들어온 데에는 무언가 사연이 있겠지. 하지만 우리가 차 한 잔 나누는 것처럼 이런 대화를 계속할 수는 없지 않겠나? 자, 검을 뽑게."

레그너 3세는 이런 상황에서도 품위를 잃지 않았다. 자신의 치부를 보였으니 이성을 잃을 법하건만, 내가 무기를 들길 기다려주고 있었다.

"수정구가 파괴돼도 좋으십니까?"

"아깝긴 하지만 어쩔 수 없는 일이지. 언제까지 그걸로 짐을 막을 수는 없는 일이야."

상대가 저렇게까지 나오니 더는 저열한 인질극을 하고 싶진 않았다.

"···알겠습니다."

나는 수정을 원래 있던 곳에 내려놓고는 허리춤에 검을 뽑아 들었다. 왼손에는 아단 삼촌의 지팡이를 든 상태다.

"저도 나름 사정이 있습니다. 봐드릴 수는 없습니다."

"짐이 할 말이로군. 자네에게 안 된 말이네만 뱀파이어에게 져본 게 언제인지 기억도 나지 않는군. 오게나."

레그너 3세의 말에 나는 지팡이로 곧장 '괴사의 광선'을 쏘아냈다. 섬뜩한 녹색빛이 상대의 생명력을 빼앗기 위해 번쩍였지만, 왕은 멀쩡했다.

"사악한 힘을 쓰는군! 하지만 드워프 왕족은 마법에 면역이다!"

나도 아는 얘기다. 드워프는 마법에 서툰 대신 타고난 마법저항력을 갖고 있다. 왕족쯤 되면 마법 면역이라는 사기적인 특성을 달고 있다.

그럼에도 괴사의 광선을 쏜 건 이어질 공격을 위해서다. 나는 번쩍이는 녹색 광선이 주변을 어지럽히는 순간 앞으로 쏘아져 나갔다. 그리고는 뱀파이어 스타일의 철검을 힘껏 찔러 넣었다.

하지만 레그너 3세는 노련한 전사답게 도끼 머리로 검을 낚아채서는 반격까지 해왔다.

부웅!

도끼날이 허공에 섬뜩한 빛을 뿌렸다. 나는 재빨리 뒤로 연기처럼 꺼지며 사라졌다. 짧은 순간 연기처럼 회피하는 건 뱀파이어의 주특기 가운데 하나다. 하지만 레그너 3세는 여유로웠다.

"한 번의 공격을 피하기에 충분한 몸놀림이군. 하지만 연이은 공격은 어쩌겠나?"

그와 함께 레그너 3세의 손이 순간 여러 개로 늘어난 것처럼 보였다. 그리고 도끼날 십여 개가 한꺼번에 날아왔다.

극속에 다다른 공격 덕에 마치 도끼가 여러 개로 분화한 것처럼 보이는 것이다.

나는 재빨리 다시 연기처럼 꺼지는 회피를 사용했다. 하지만 몇 미터 옆으로 이동했음에도 소용없었다.

어느새 레그너 3세가 그리는 도끼의 궤적이 방 안 전체를 가득 채우고 있었기 때문이다.

'마치 공간을 지배하는 것 같군!'

공간을 도끼로 가득 채우니 피할 곳이라곤 없었다. 삽시간에 다섯 번이 넘는 공격을 허용했다.

카앙! 캉! 카아앙!

캉! 캉!

요란한 소리와 함께 내 상의가 갈가리 찢겨 나갔다. 하지만 그게 다였고, 상처라곤 없었다. 심지어 도끼가 몸을 때린 소리도 특이했다. 레그너 3세는 놀란 듯 입을 살짝 벌렸다.

"호오··· 그건?"

팔을 교차해 얼굴을 가리던 나는 팔뚝에 일어난 변화를 볼 수 있었다. 도끼를 받아낸 피부에 드래곤의 비늘이 돋아나 있었기 때문.

'신체 개조 3단계의 힘이군.'

아단이 해준 신체 개조 3단계는 '피부 보강'. 위기 시에 드래곤의 비늘이 피부 위로 튀어나와 몸을 보호해주는 역할을 한다.

즉, 아단은 엄청난 돈지랄로 실제 드래곤의 비늘을 구해서 잘게 조각내 가공까지 했던 것이다. 진짜 혈육이라도 이 정도는 못 해줄 은혜였다.

덕분에 드워프 왕의 살벌한 일격을 모두 막아내고도 몸은 멀쩡했다. 잃은 건 의복뿐이다.

물론 완벽해 보이는 이 능력에도 제약은 있다. 오직 날붙이에만 비늘이 반응하는 것이다.

"자네, 드래곤의 혈통인가? 아니지, 아니야. 그건 분명 드래곤의 비늘을 이식한 거로군? 어찌 그런 수법이 가능한 건가?"

레그너 3세는 무구에 열광하는 드워프답게 싸움도 잊고 호기심을 비춰왔다.

나를 어깨를 으쓱할 수밖에 없었다.

"저는 폐하가 꽤 마음에 듭니다만, 아무래도 이건 영업비밀이라 어렵겠습니다. 오늘 살아서 돌아가고 싶거든요."

"별로 가능성도 없을 텐데 아직 희망을 못 버렸나 보군. 이 방의 것을 보인 이상 돌려보낼 생각은 없다만."

"하하, 제가 좀처럼 쉽게 포기 못 하는 성격이라···."

이후에 벌어진 공방전에서 쉽게 승패가 나지 않았다. 레그나 3세는 공격은 매서웠지만, 드래곤의 비늘을 뚫을 정도는 아니었기 때문이다.

물론 그 정도 되는 강자라면 더 큰 힘을 끌어낼 수 있겠지만, 주저하는 것 같았다. 이유는 알 만했다.

'일대가 날아가 버릴까 걱정되는 거겠지.'

레그너 3세는 사방에 살벌한 공격을 펼치면서도 엘프 여왕은 그림만은 절묘하게 피해가고 있었다.

하지만 그런 그도 드래곤의 비늘을 뚫을 정도의 힘을 일으키면 더 이상 그런 섬세한 제어는 불가능해질 터였다.

"뱀파이어. 항복하지 않겠나? 그러면 목숨은 살려주고 지하 감옥에 가두는 거로 끝내지."

"얼마나 가두시렵니까?"

"짐이 죽을 때 풀어주라고 유언을 남겨두겠네."

"···어렵겠습니다."

서로 사납게 노려보는 것과 다르게 전투는 소강상태였다. 마땅한 해법이 없었기 때문이다. 그 와중에 좋은 소식이 하나 있었다.

'쿨타임이 찼군.'

이제 타이밍만 나오면 박쥐로 변해서 튈 수 있다. 드워프 왕이 대단하다고 해도 좁디좁은 환기구로 쫓아올 수는 없을 테니까. 그렇게 여유가 생기자 머리가 원활히 돌아가기 시작했다.

'단순히 도망가는 거로 끝내긴 아쉬워.'

우연이 겹쳐 드워프 왕을 만나게 됐다. 평소라면 만남을 청해도 한마디로 거절당할 인물이니 이대로 튀긴 아쉬웠다.

미혹의 산을 점령하기 위해서 무언가 새로운 포석을 놓고 싶었다. 그러던 중 좋은 아이디어가 떠올랐다.

"폐하, 제안이 있습니다."

"미안하네만, 더는 할 말이 없어."

단호히 대화를 거부한 레그너 3세의 도끼가 황금빛으로 찬란하게 빛나기 시작했다. 주변이 박살 나는 걸 감수하고 강력한 공격을 날리기로 한 것이다.

하지만 그런 그의 의지도 이어진 내 말에 꺾여버렸다.

"폐하를 위해 엘프 여왕의 호의를 얻는 방법을 알려드리겠습니다."

내 말에 레그너 3세는 멍한 표정이 됐다. 그러다가 되물어 왔다.

"···정말인가?"

"네."

게임 속 지식이 있는 내게 엘프 여왕의 호의를 얻는 법은 정도는 어려운 게 아니다. 솔직히 연인은 무리겠지만, 레그너 3세가 노력하면 친구 정도는 가능하지 싶다.

'둘이 친하게 지내는 게 내게 이득이란 말이지.'

머지않아 드워프와 엘프는 전쟁을 벌이게 된다. 거의 수습할 수 없을 정도로 일이 벌어지는데, 엘프 놈들이 먼저 시작한다.

드워프가 보낸 사절을 과거 레그너 3세가 보냈던 연서로 심하게 조롱했고, 이에 열 받은 드워프 사절이 비아냥거리던 엘프 고관의 머리를 도끼로 쪼개버린다. 가히 수습 불가의 상황이 되고 양쪽은 격렬한 전쟁에 휘말린다.

놀라운 게 이게 무슨 정치적 의도를 가지고 일부러 시비를 걸었던 것도 아니고, 그냥 선을 넘은 농담이 발단이라는 거다.

전쟁이란 게 때론 이렇게 어처구니없이 일어나기도 했다.

'문제는 그 전쟁에서 태양 교단이 크게 교세를 확장한단 말이지···.'

답이 없던 전쟁에서 태양 교단이 중재자 역을 맡게 된다. 이후 태양 교단은 평화 회담을 이끌고, 전쟁으로 지친 자들에게 자선을 베풀어 크게 찬사받는다.

교세 확장을 위한 것이지만 그때만큼은 가히 바람직한 종교의 모범을 보여준다고 할까.

이에 드워프와 엘프 중에서도 전통적인 질서에 염증을 내던 자들이 여럿 태양 교단에 투신하게 된다.

'내 입장에선 간과할 수 없는 부분이지.'

태양 교단이 잘 되는 건 뱀파이어 입장에서 두고 볼 수 없는 일. 특히나 뱀파이어 성녀를 모시는 신으로 택한 이상, 부패한 교회의 수뇌부를 척결하는 게 거의 메인퀘스트나 다름없다.

즉, 양 진영의 싸움을 막아서 태양 교단이 활약할 무대를 없애버리면 큰 이득이란 거다.

'본래 이 건에 관해서는 나중에 결정하려 했는데, 드워프 왕을 만남 김에 처리하는 것도 괜찮겠어.'

애초에 전쟁의 시발점은 레그너 3세가 과거에 보냈던 연서를 엘프 고관이 굳이 끄집어내 비웃는 거로 시작된다.

한데 그 시점에 드워프 왕과 엘프 여왕이 친구가 된다면 고관도 함부로 입을 놀리지 못할 터. 전쟁이 터지지 않을 확률이 높았다.

그때 레그너 3세가 헛기침을 하더니 날 불렀다.

"뱀파이어 공."

어느새 호칭이 변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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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벽의 강림(1)

아니, 뱀파이어 공(公)이라니.

처음에는 농담하는 줄 알았다. 하지만 날 보는 저 기대감 넘치는 눈빛은 진심이었다.

"정말 가능한 것이오? 뱀파이어 공?"

심지어 말투도 하오체로 바뀌었다. 나는 드워프 왕의 번개 같은 태세 전환에 혀를 내두를 수밖에 없었다.

"가능합니다."

"어찌 그럴 수 있소?"

"그건 제 밑천인데 쉬이 말씀드리긴 어렵습니다."

"간략히라도 말해보시오. 오늘 살아 돌아가고 싶다면 말이오."

조곤조곤 협박하는 게 일품이로군. 쿨타임이 찬 이상 튀어도 되지만 여기서 무언가를 얻어가고 싶었다.

"시간이 없으니 간략하게만 말씀드리겠습니다."

"이해하오. 공과 같은 도적은 매사 초조한 법 아니오?"

"······해량해 주셔서 감읍할 뿐입니다. 아무튼 폐하께선 엘프 여왕이 미망인이라는 걸 아실 겁니다."

엘프 여왕은 세상에서 제일 아름다운 미망인으로 이름 높다. 그렇기에 많은 권력자들이 구애했지만, 그녀는 모두를 칼같이 거절해왔다.

하지만 그런 엘프 여왕도 백성들의 요구와 정치적 상황 때문에 어쩔 수 없이 결혼 상대를 찾는 척이라도 해야 하는 상황.

결국 그녀는 내키지 않지만, 올가을에 구혼자들을 모아놓고 파티를 열 계획을 세웠다. 나는 이런 점을 설명하며 파티에서 여왕의 호의를 얻게 해주겠다고 했다.

"정말 그게 되겠소?"

"물론입니다. 다만, 그전에 할 일이 있습니다."

"무엇이오?"

"현재 폐하께선 여왕과 원만한 관계가 아니니 수습을 하셔야겠지요."

"아······."

내 지적에 레그너 3세는 낙담한 표정이 됐다. 그는 젊은 날에 치기로 급발진했던 연서를 수습할 자신이 없어 보였다.

"어찌해야 할지 감도 안 잡히는구려. 지혜를 들려주시오."

"어렵지 않습니다. 과거의 일을 정중히 사과하고 선물이라도 보내면 됩니다."

"그리 간단하겠소?"

엘프 여왕을 잘 알고 있는 나는 확신하며 끄덕였다.

"물론입니다."

"오! 그러면 무슨 선물을 준비해야 하겠소? 이럴 게 아니다. 왕국 최고의 장인에게 가장 아름답고 고귀한 보석과 예물을···."

"폐하. 멈추시지요. 여왕의 오해를 푸는 데는 어떤 선물을 고르냐가 제일 중합니다. 애초에 엘프 여왕이 폐하를 멀리하는 이유가 뭐겠습니까? 가뜩이나 지긋지긋하게 구혼자들에게 시달리고 있는데, 알지도 못하는 드워프 왕이 부담 백 배의 편지를 보냈으니 꺼릴 수밖에요."

"그, 그런 건가······. 큿!"

"제가 알기로 여왕은 폐하를 증오하지 않습니다. 다만 부담스러워 꺼릴 뿐이죠. 이런 상황에서 보석과 예물이라고요? 약혼이라도 하실 요량입니까?"

"크윽! 아, 아니오!"

레그너 3세는 자신이 또 한 번 급발진 했다는 사실을 깨닫고는 잔뜩 취한 사람처럼 얼굴이 붉어졌다.

"하면 어쩌면 좋겠소?"

"당연히 여왕이 좋아하는 걸 줘야지요. 여왕은 성군으로 이름이 높습니다. 그러니 백성들의 삶에 도움이 될 만한 드워프 기계를 선물하면 무척 기뻐할 것입니다."

"마침 적당한 게 생각났소!"

레그너 3세는 드워프제 최근 개발한 증기 물레방아가 있다고 했다.

"증기 물레방아와 석탄을 보내면 좋겠소. 그것은 원심조속기가 달렸는데 철제 바퀴가 도는 힘이 말 100마리와 맞먹는 걸작이오."

"괜찮겠군요. 정중한 사과와 잘 어울릴 것 같습니다. 양국의 우애를 원한다는 말을 덧붙이면 좋겠군요. 개인적인 게 아니라 공적인 느낌으로 다가가는 게 중요합니다."

더불어 나는 현재 엘프들은 먼 친족인 다크엘프에게 시달리느라 친구가 필요한 상황이라고 덧붙였다.

"그러니 잘 먹힐 겁니다."

"오, 눈이 번쩍 뜨이는 기분이오. 뱀파이어 공!"

"거기까지만 잘 진행하신다면 훗날 구혼자가 모일 잔치에서 반드시 폐하께서 여왕과 친해지게 만들어 드리겠습니다."

"그런 일이! 참으로 감사하오. 자자, 이럴 게 아니라 아예 짐의 응접실로 가서 자세한 얘기를···."

"송구합니다. 폐하. 오늘 밤은 제가 바쁜지라."

"아, 어쩔 수 없겠구려."

결국 레그너 3세는 자신과 바로 연락할 수 있다며 마법의 수정구를 내밀었다.

"감사합니다. 폐하."

"한데, 뱀파이어 공. 오늘 밤은 대체 무엇을 도둑질하러 오신 거요?"

"하하하, 집주인 앞에서 하긴 민망스러운 이야기군요. 다만 한 가지 말씀드리면 제 개인적 욕심 때문에 온 게 아닙니다. 나중에 설명드리겠습니다."

거기까지 말한 나는 박쥐로 변해서는 재빨리 내뺐다. 이러니저러니 해도 도둑놈인 건 변함없는 사실이라 대답이 궁했기 때문이다.

* * *

그날 밤 드워프의 광산 금고를 터는 일은 무사히 끝났다. 우리는 엄청난 보석을 바리바리 싸들고는 스킨크의 둥지로 귀환길에 올랐다.

하루가 지나자 드워프 왕인 레그너 3세에게 수정구를 통해서 연락이 왔다.

우우웅.

우우우웅!

진동하는 수정구를 보며 연락을 받기 싫다는 생각만 들었다. 하지만 왕의 연락이니 무시할 수도 없었다.

꿀꺽.

도둑이 제 발 저린다고, 마른침을 삼키며 연락을 받았다.

-폐하?

-뭐 이런 놈이 다 있나! 시팔!

당장 고성이 터져 나왔다. 욕설은 물론 가식적인 하오체도 증발했다.

-노여워하시는 건 이해가 되오나···.

-시끄럽다! 도둑질하러 왔다고 해서 설마 광산 금고를 통째로 털어갈 거라곤 상상도 못 했다!

아무래도 필요한 것만 적당히 털어갈 줄 알았나 보다. 레그너 3세의 목소리에서 분노와 당혹감이 느껴졌다.

-폐하, 그게 다 일곱 봉우리의 평화를 위해···.

-시끄럽다! 그것도 모자라 폭탄을 던져?

-네?

-태양 교단의 내통자 말이야! 드라크린이 폭로해서 지금 도시가 난리가 났다.

아, 드라크린이 기어코 터뜨렸나 보군. 처음부터 그는 금고에서 사촌을 파멸시킬 증거만 찾고 있었으니 당연한 일이다.

-폐하, 태양 교단은 무섭고도 교활한 상대입니다. 이번 폭로는 드워프 사회에 도움이 될 것입니다.

-쯧! 그건 짐도 모르지 않아. 다만 벌집을 쑤신 듯 난리가 났단 말이야. 이래가지고는 고귀한 여왕에게 헌정할 새로운 시를 지을 틈이 없단 말이다!

-······폐하, 부디 체통을 좀.

-커흠! 아무튼, 자네. 원석을 그리 많이 가져간 이유가 뭔가? 짐은 자네가 재물을 탐해서 그런 게 아니라 생각하네만.

생각보다 날 좋게 봐주고 있구나. 사실 재물을 탐해서 금고에 있던 황금 덩어리를 모조리 챙겼는데, 그건 말하지 말아야겠다.

'그냥 스킨크들에게 뒤집어씌워야지.'

고생하는데 그 정도 수고비는 받아야 하지 않겠는가.

-사실 지금 일곱 개의 봉우리는 심각한 위험에 처해 있습니다. 룩스 움브라가 깨어났습니다.

이건 중요한 문제였으므로 자초지종을 설명했다. 또한 보석으로 공양해 끌어낸 뒤 척살할 계획도 말이다.

-폐하, 사적인 욕심으로 행한 일이 아니니 헤아려 주십시오.

-놀랍군. 이 산지에 봉인된 고대신이 있다는 이야기기가 조상 대대로 내려오긴 했다네. 설마 진짜일 줄이야. 도와주지 않아도 되겠는가? 자네 말대로라면 일곱 봉우리 전체의 위기가 아닌가?

-말씀은 감사하오나 일단은 괜찮습니다.

굳이 거절한 이유는 이번 일이 핏빛 새벽 교단의 위엄과 관계있기 때문이다.

외부의 힘을 끌어들이지 않고 해결해야 스킨크들은 성녀를 더더욱 구원자로 여길 터.

-음, 이게 그리 간단한 문제가 아닐세. 이건 일곱 봉우리 전체의 운명이 달렸으니 방관만 할 수는 없어.

-하오면?

-일단 자네의 뜻은 존중하지. 하지만 상황을 보다가 일이 틀어질 것 같으면 개입할 걸세.

-알겠습니다.

아무래도 거기까진 거절하기 어려웠다. 무엇보다 레그너 3세는 이번 일의 최대 후원자기도 했으니까.

- 아무튼 이번 일이 끝나면 엘프 여왕 건을 도와줘야 하네.

-물론입니다. 약속한 바를 지키겠습니다.

그건 내게 이득이 되는 일이니 꺼릴 게 없다. 나중에 엘프 여왕과 잘 되는 걸 봐서 레그너 3세에게 추가적으로 뜯어낼 작정이기도 했고.

'드워프의 보물 중에 근사한 게 뭐가 있더라?'

더불어 여왕에 관한 일로 드워프 왕 레그너 3세와 친분을 쌓아두는 것은 중요했다. 어쨌든 그들은 일곱 봉우리 최강의 종족이니 말이다.

종국적으로 미혹의 산의 지배자가 되길 바라는 내 입장에선 드워프와 평화 전선을 유지할 필요가 있었다.

* * *

드워프 광산 금고를 털러 갔던 우리는 무사히 복귀했다.

"귀환을 축하드립니다. 사도시여."

스킨크 족장이 허겁지겁 마중을 나와 인사를 해왔다.

"성녀께서 가호하시니 별거 아니었다. 이제부터 룩스 움브라를 낚을 본격적인 준비에 들어가겠다."

"알겠습니다. 그럼 의식용 제단은 어찌하시겠습니까?"

"제단은 이번 일에서 가장 중요한 것 가운데 하나이다. 제단은 보석을 올려 룩스 움브라를 유인하는 역할을 하면서도 놈을 쓰러뜨릴 함정이 되어야 하니까."

"전에 말씀하신 함정이란 걸 제단과 통합하시려는 거군요."

"그래, 이벤트 컷씬에서나 등장하는 특수한 기술을 써보려고 한다."

"네? 이벤트 컷씬? 그게 뭡니까?"

"아···, 그런 게 있다."

설명하기 어려웠으므로 얼버무렸다. 다행히 족장은 눈치가 있어 더 묻지 않았다.

"사도시여, 그런데 그 정도의 제단을 어찌 만들어야 합니까? 우리 주술사들 중 누구도 방법을 모를 겁니다."

"걱정 마라. 주술사들이 해줄 일은 묵직한 돌덩이를 나르는 일이니."

스킨크는 광부 종족이었고, 그들의 주술사는 바위나 광산의 돌을 옮기는 주술에 능했다. 먹고 살기 위한 특기였다.

"네? 그게 무슨 소리신지?"

내 계획은 간단하지만 어려웠다. 본진인 골짜기로 가서 지금쯤 완성되었을 피의 제단을 뜯어와 이곳에 임시로 설치하는 것이다.

'룩스 움브라를 격퇴할 정도의 기적을 일으키려면 피의 제단이 필수다.'

나는 이런 점을 설명하고 '석재 부유' 주술을 쓸 수 있는 주술사를 최대한 소집하라고 했다.

"이틀 안에 골짜기에서 제단을 뜯어와야 한다. 가능하겠나?"

"쉽지 않겠지만··· 해보겠습니다."

스킨크들은 나랑 다르게 낮에 이동을 중단할 필요가 없다. 놈들이 잠도 안 자고 움직이면 왕복에 하루가 걸리고, 제단의 분해와 설치에 다시 하루를 잡으면 아슬아슬하게 가능할 터였다.

"가용한 주술사와 인력을 최대한 동원해라. 기간 안에 끝내야 한다. 안 그러면 이번 일은 실패다."

"알겠습니다. 사도시여."

스킨크들에게 명을 하고 나는 먼저 박쥐로 변해서 본진인 골짜기로 날아갔다. 도보로 이동하면 봉우리를 우회하느라 오래 걸리지만, 날아서 직선으로 가로지르면 금방이었다.

내 갑작스러운 방문에 골짜기를 지키고 있던 에레미나는 깜짝 놀라면서도 반가워했다.

"주인님, 어서오십시오! 가셨던 일은 잘 해결하셨습니까?"

"아직 진행 중이다."

"앗, 그렇군요. 하면 어쩐 일로 오셨습니까?"

"피의 제단을 옮기려고 한다."

내가 와서 설명하지 않으면 제단을 지키는 에레미나가 스킨크들에게 순순히 비켜주지 않을 테니 말이다.

더불어 태양 저항 물약을 제조하기 위해서기도 했다. 룩스 움브라를 퇴치할 때 태양광을 사용할 예정이다. 같이 타죽기 싫으면 반드시 필요했다.

'다행히 아단 삼촌이 남긴 마법 시약이 충분하지.'

나는 에레미나의 보조를 받아 부활한 피닉스의 둥지에서 긁은 잿가루와 태양석, 달맞이꽃 에센스 등을 섞어 태양 저항 물약의 제조에 들어갔다.

다음날이 되자 스킨크가 주술사를 포함해 백여 마리가 넘게 도착했다. 그들은 내 감독을 받아 피의 제단을 조심스럽게 뜯어냈다.

"에레미나, 일을 잘 끝내고 돌아오겠다."

"주인님, 부디 무운을 빌겠습니다."

나는 밤중에 먼저 박쥐로 변해 바위 봉우리로 돌아왔다. 그리고 피의 제단을 설치할 땅을 고르게 했다.

"서둘러라!"

모든 작업이 밤낮으로 행해졌다. 의식까지 준비할 게 많아서 제대로 쉴 틈도 없었다. 다시 하루가 지나자 백여 마리의 스킨크들이 뜯어낸 제단을 가지고 바위 봉우리에 도착했다.

옮기는 걸 보니 주술사들이 많지 않았다면 어림도 없었을 것 같았다. 그들은 제대로 쉬지 못하고 제단의 설치에 들어갔고, 일이 끝났을 무렵에는 탈진해서 쓰러지는 자들이 속출했다.

아무튼 그런 노고 끝에 간신히 준비가 끝났다. 새롭게 설치된 피의 제단 위에는 수많은 보석이 정해진 방법대로 놓여 있었다.

디데이가 오자 나는 자정이 지날 즈음 제단 위에 올라섰다.

"의식을 시작한다."

"네, 사도시여!"

스킨크들은 미리 받은 역할 대로 부지런히 움직였다. 이 의식은 다섯 시간가량 이어질 거고, 새벽녘에 절정에 이르게 된다.

스킨크 주술사들이 신성한 약초를 태우고는 룩스 움브라에게 바치는 송가를 부르기 시작했다.

"찬란한 그림자여―. 신성한 조각이여―. 고고한 어둠의 촉수시여. 우리가 당신의 자비를 청합니다."

그와 함께 가면을 쓴 스킨크들이 기괴한 춤을 추기 시작했다. 사방에는 횃불이 밝혀졌고, 춤추는 스킨크의 그림자가 현란하게 늘어졌다.

처음 몇 시간 동안은 아무런 조짐도 없었다. 열심히 춤을 추던 스킨크들은 다소 당황하는 기색을 보였고, 제단 가운데 서 있는 날 계속 힐끔거렸다.

마치 눈으로 이게 맞냐고 물어오는 것 같았다. 거기에 대한 내 답은 명확했다.

"더 크게 노래하고, 더 열정적으로 춤춰라."

스킨들은 별다른 방법이 없었기에 순응했다. 이후 얼마나 지났을까? 처음으로 반응이 나타났다.

우르르릉!

갑자기 산지가 낮게 진동하기 시작한 것이다. 땅밑에서 무언가 거대한 게 움직이는 것 같았다. 모두 두려운 기색을 감추지 못했다.

"괴물이 기어 올라온다!"

"이 세상의 것이 아니야. 스에에······!"

스킨크 둥지의 입구에서 진득한 체액이 흘러나오기 시작했다. 그와 함께 거대한 촉수 다발이 천천히 튀어나왔다.

지켜보던 스킨크들을 경기를 일으켰다. 일부는 달아나려는 움직임을 보여 호통을 쳐야 했다.

"도망치는 놈은 베겠다!"

만약 그런다면 기껏 부른 룩스 움브라를 자극해 살육의 파티가 벌어질지도 몰랐다. 족장과 원로들이 서둘러 주변을 통제했다.

"계속 송가를 불러! 스에에!"

"비명을 지르지 마라! 신께 무례를 범해선 안 된다!"

"못 참겠으면 머리를 땅에 박아. 멍청한 것들! 스엑! 스엑!"

확실히 촉수의 움직임은 마구잡이로 희생자를 잡아가던 이전과 달랐다. 부드럽게 미끄러지며 천천히 모습을 드러내고 있었다.

마치 점잖고 위엄있게 등장하려는 것 같았다. 하지만 그건 지켜보는 이들에게 참기 힘든 공포를 뿌리고 있었다.

일부 스킨크들은 천적을 만난 듯 자기 꼬리를 끊기까지 했다. 또 시체처럼 비늘색이 시커멓게 죽어서 움직이지 않는 놈까지 보였다. 압박감을 느끼고 기절해 버린 것이다.

꾸물꾸물.

룩스 움브라는 스킨크 둥지의 여러 구멍에서 다 흘러나오고 있었다. 질척질척한 체액으로 뒤덮인 촉수가 꾸불텅하고 모습을 드러낸다.

그 모습에 스킨크 족장은 입을 멍하니 벌리며 물어왔다.

"우리가 저것을 이길 수 있겠습니까?"

"이겨야만 한다. 안 그러면 우리에게 미래는 없을 테니까."

"···새롭게 모시게 된 스킨크 어머니의 자비를 바랄 뿐입니다."

"믿어라. 그분께서 우리를 구하실 테니."

찐득한 촉수들은 점점 밖으로 나오면서 주변을 탐색하고 있었다. 저것은 신의 형체를 한 짐승이었다. 조각난 신체(神體)의 일부에 불과했기에 제대로 된 지성은 없었지만, 그래서 더 위험했다.

"더욱 열정을 다하라. 저 존재를 기쁘게 해야 한다!"

내 명령에 스킨크들은 공포에 빠져 춤을 춰댔다. 그와 함께 산지 전체가 형언하기 힘든 광기 속으로 젖어들어 갔다.

마치 모든 게 꿈속처럼 몽롱해지던 그때 놀라고 긴장된 목소리가 날 흔들었다.

"사도시여!"

숨죽여 부르고 있지만 다급함이 느껴졌다.

"무슨 일이지?"

목소리의 주인공은 유능한 스킨크 정찰병 차라였다.

"인간들. 인간들이 나타났습니다!"

"뭐라고? 이 산지에?"

"틀림없이 태양 교단입니다. 사제와 성기사들이 잔뜩 몰려왔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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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벽의 강림(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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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양 교단의 원정대는 미혹의 산에 도착해 거침없이 진군 중이었다.

산에 도착한 지 얼마 안 되어 고블린 수십 마리에게 습격을 받았지만 거뜬히 물리쳤다.

원래 성기사와 사제들은 방어력이 높기로 유명한데, 뭉치면 더 단단해지는 속성이 있다. 고블린 따위가 어떻게 해볼 수 없었고, 그들은 대패했다.

이후로 원정대는 별다른 어려움을 겪지 않았다. 원정대장인 아달릭 교구장은 이런 상황에 크게 기뻐했다.

"형제님들. 이번 원정은 반드시 성공해야 합니다. 우리는 룩스 움브라를 처리하고 이 땅에 신의 평화를 선물할 것입니다. 설령 그들이 이교도라 해도 사랑을 베푸는 것, 그것이 빛의 자식인 우리의 일입니다."

저녁 예배 도중 아달릭은 고양감을 감추지 못하고 모두에게 그리 말했다.

아무리 야전이라도 신앙인인 그들은 캠프에서 간단하게나마 예배를 드렸다.

"그리될 것입니다."

"그리될 것입니다."

한목소리로 답하는 원정대를 보며 교구장 아달릭은 흡족한 표정을 감추지 못했다.

'원정대의 사기는 왕성하군.'

이번 일은 그에게 매우 중요했다. 결과에 따라 승진 여부가 달려 있었기 때문이다. 사실 미혹의 산에 사는 천한 것들의 생사 따윈 알 바 아니었다.

'신력을 무사히 회수하면 추기경께서 내게 서부 대주교 자리를 약속하셨다.'

고대신의 조각인 룩스 움브라를 퇴치하면 신력이라 불리는 가공할 힘을 얻을 수 있다.

추기경은 그걸 개인적으로 탐내고 있었다. 신이 아닌 인간에게 신력이란 위험하고 활용 불가능한 힘에 불과했으나 추기경은 그걸 원했다.

'대체 어디다 쓰려는 건지 알 수 없지만···, 나야 대주교직만 얻으면 아무래도 좋다.'

고대신의 조각인 룩스 움브라를 처단할 방책도 확실했다. 아달릭 교구장은 성기사들이 엄정하게 지키고 있는 나무 상자를 잠시 바라봤다.

저 안에는 태양 교단의 법기가 들어 있다. '태양의 촛대'라 불리는 물건으로, 1.5미터나 되는 커다란 촛대다.

촛불을 여러 개 켤수록 그 힘이 강해지는 게 특징인데 어둠의 존재를 상대로 가공할 위력을 갖고 있었다.

아달릭 교구장은 승리를 자신하고 있었다. 그런데 그때, 섬뜩한 기운이 미소를 짓던 아달릭 교구장의 가슴팍을 관통했다.

"!"

아달릭 교구장만이 아니다. 여기 있는 모두가 말로 표현하기 힘든 불길함을 느끼고는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고대신이 본격적으로 움직이려는 것 같습니다!"

원정대 사제의 외침에 아달릭 교구장은 빠르게 결정을 내렸다.

"모두 캠프를 철거하고 출발 준비를 하십시오. 그리고 자비에 경께서는 종복 둘을 데리고 정찰을 다녀 오세요."

"알겠습니다!"

사방이 부산해졌다. 깜깜한 밤이지만 느긋하게 쉬고 있을 틈은 없어졌다. 원정대는 물자를 챙긴 뒤, 정찰이 먼저 달려간 방향으로 행군을 시작했다.

세 시간이 지나자 정찰을 나갔던 성기사 자비에가 돌아와 보고해왔다.

"교구장님! 믿을 수 없이 끔찍한 일이 벌어졌습니다."

자비에가 가져온 정보는 모두를 놀라게 했다. 지금 바위 봉우리에서 스킨크족이 사악한 고대신을 찬양하는 의식을 행하고 있다는 것. 이에 룩스 움브라의 촉수가 땅 밑에서 꾸물꾸물 기어 나오는 중이라 했다. 아달릭 교구장은 노호성을 터뜨렸다.

"기어코! 이 미개한 것들이!"

원정대 내에서도 분기가 끓어오르고 있었다.

"교구장님! 어서 돌격해야 합니다!"

"놈들에게 태양신의 분노를 보여줍시다!"

"서둘러 사악한 것을 심연으로 추방해야겠습니다. 안 그러면 일이 걷잡을 수 없을 것입니다!"

다들 의지가 불타고 있었다. 아달릭 교구장은 고개를 끄덕이며 명했다.

"신의 이름으로 정의를 집행합시다! 언제든 싸울 수 있게 법기를 꺼내십시오!"

* * *

나는 차라의 보고를 믿기 어려워 다시 물었다.

"뭐? 태양 교단이라고? 제대로 본 거 맞아?"

따지듯 묻자 차라가 겁먹은 기색이 됐다. 하지만 또박또박 답해왔다.

"분명합니다. 사도님."

"와··· 이거 뭐냐."

유능한 정찰병 차라가 헛소리를 할 리가 없다. 그렇다면 진짜 태양 교단이 왔다는 건데, 갑자기 왜? 중요한 순간 허를 찔리니 당혹감을 감추기 어려웠다.

"총 몇 명인데?"

"보이는 건 21명입니다."

그 외에 이것저것 물었으나 차라가 태양 교단에 대해 자세히 알지는 못하는 게 문제였다. 결국 직접 가서 볼 필요를 느꼈다.

"족장, 잠시 자리를 비우겠다."

"아니, 이 중요한 때에 어디를 가시려는 것입니까!"

"태양 교단 놈들이 몰려오고 있다는군. 저 고대신은 걱정하지 마. 몇 시간 동안 자기를 향한 찬양을 즐기고 있을 테니까. 제단의 보석을 차례로 가져다줘서 환심을 사라."

이후 즉각 차라를 따라 산길을 달렸다. 우리는 마치 바람처럼 질주했고, 얼마 뒤 저 멀리서 몰려오는 횃불을 볼 수 있었다.

"저놈들인가?"

"네, 그것보다 이쪽으로. 거기서 계속 보시면 들킬 수 있습니다."

"알겠다."

우리는 바위 사이에 숨어서 놈들을 살펴봤다. 나는 앓는 소리가 절로 나왔다.

"태양 교단 놈들이 맞군···."

심지어 성기사와 사제가 여럿이다. 강력한 전력이라 퇴치하기도 쉽지 않았다.

"사도님, 놈들의 진행 방향을 보니 우리 쪽으로 오는 게 확실합니다."

나는 차라의 말에 동의했다. 저 간악한 태양 교단 놈들이 봉우리에 도착하면 모든 게 엉망이 될 터. 욕설이 절로 흘러나왔다.

"이런 시팔. 진짜 좆같은 태양 교단 놈들!"

인생이 도움이 안 되는 것들이란 생각이 들었다. 일단 가장 평범한 해결책은 스킨크 전사단을 보내 놈들을 저지하는 것.

'하지만 산지에서 난리가 벌어질 텐데···.'

신성마법이 번쩍이면 룩스 움브라가 관심을 가질지도 모른다. 당연히 이번 제사는 어떤 방향으로 흘러갈지 미지수. 그렇다고 저 강력한 태양 교단 놈들을 조용히 처리해 버릴 방법도 없었다.

으드득!

이가 절로 갈린다. 그런데 놈들을 보던 중 한 가지 특이한 걸 발견했다.

"음? 저건?"

사제 놈들이 웬 커다란 촛대를 운반하고 있었는데 딱 봐도 비범해 보였다. 나는 유심히 살펴보다 그게 뭔지 깨달았다.

'태양의 촛대잖아?'

이런 미친광이들! 저 사악한 법기를 여기까지 가져오다니! 아무래도 저놈들은 진심으로 룩스 움브라를 갈아버릴 생각인 것 같았다.

저 태양의 촛대에 대해선 나도 잘 안다. 어둠의 존재를 상대로는 더없이 강력한 물건이라 뱀파이어들이 치를 떨었다. 아무리 중요한 일이라도 태양의 촛대가 떴다하면 도망갈 수밖에 없을 정도였으니까.

'저거 분명 룩스 움브라를 상대로도 먹힌다.'

이러니 내 입장에선 초조해질 수밖에. 저 반동분자들 때문에 오늘 일을 다 망치게 생겼다. 뱀파이어 성녀의 위엄을 보이며 룩스 움브라를 처리해야 하는데 말이다.

"아니, 잠깐?"

고민하던 중 퍼뜩 한 가지 생각이 떠올랐다. 그와 함께 잔머리가 맹렬하게 굴러가기 시작했다.

'이게 생각해 보니 위기가 아니라 기회잖아?'

금방 나는 이 사태를 어떻게 해결할지 감을 잡았다.

* * *

서둘러 복귀한 나는 족장을 만났다. 주변은 여전히 룩스 움브라에게 바치는 음침한 노래가 울려 퍼지고 있었다.

"족장."

"사도시여. 어찌해야 합니까?"

"내게 생각이 있다. 그대로 따르라."

"말씀하십시오."

나는 태양 교단 놈들이 오면 다투지 말고 순순히 받아들이라고 했다. 동시에 놈들에게 호의를 보이며 협조하란 말까지 덧붙였다. 당연히 스킨크 족장은 의문을 품었다.

"제가 우둔해 어찌 그런 명을 내리시는지 알기 어렵습니다."

"의아하겠지. 하지만 이 작전은 우리를 승리로 이끌 것이다. 태양 교단 놈들이 오면 이 제사에 대해 어쩔 수 없었다고 설명하며 도움을 청하라."

스킨크족은 힘이 없고 두려워 불가피하게 룩스 움브라를 찬양하는 중이며, 태양 교단이 저 사악한 고대신을 퇴치하겠다면 적극 협력하겠다는 식으로 말이다.

"룩스 움브라를 물리쳐주면 태양 교단에 입교하겠다는 말까지 덧붙여라. 전도라면 사족을 못 쓰는 놈들이니 반색하겠지. 아마 스킨크족을 미혹에 산에 발을 들이밀 도구로 삼으려 할 거다."

"대체 그것으로 무엇을 얻으려 하십니까?"

내 계획은 간단하다. 태양 교단 놈들이 먼저 룩스 움브라랑 싸우길 유도하고, 이후 너덜너덜해진 룩스 움브라를 내가 최종적으로 퇴치하는 것. 이에 대해 설명해줬다.

"어떤가?"

"사도시여. 기본적으로 좋은 계획 같습니다만, 태양 교단이 룩스 움브라를 정말로 퇴치해 버리면 어찌하시려고요? 그 촛대란 물건이 고대신의 조각을 처리하기에 충분한 힘을 가졌다 하셨잖습니까?"

"걱정할 것 없다. 흐흐흐. 태양 교단 놈들은 우리 어머니의 발판 역할만 하게 될 거다."

이번 일에서 태양 교단 놈들은 작은 공도 세우면 안 된다. 처절하게 룩스 움브라랑 싸우고 패퇴하면 된다. 이후 내가 뒤처리를 할 생각이다.

"족장. 내가 언급했던 봉인의 석주를 잊었나?"

"아? 설마!"

봉인의 석주는 스킨크들의 거주지인 바위 봉우리 근처에 있는 정체불명의 유적이다.

스킨크들은 그걸 코앞에 두고도 뭐에 쓰는지 몰랐지만, 그건 사실 룩스 움브라의 힘을 약화시키는 장치다. 봉인을 위한 보조 장치인 셈이다. 그것을 모두 부술 경우 룩스 움브라는 더더욱 강해진다.

'게임에서는 보상과 관계된 장치였지만 말이야.'

봉인의 석주를 부수면 난이도를 인위적으로 올릴 수 있는 거다. 그런 짓거리를 하는 이유는 간단한데, 강해진 룩스 움브라는 더욱 많은 보상을 떨구기 때문이다.

즉, 자신 있으면 도전해 보라는 거다. 탐나긴 하지만 솔직히 석주를 한 개라도 부수면 룩스 움브라를 공략하기 힘들어 건들 생각도 안 해봤다.

하지만 상황이 달라졌다. 태양 교단 놈들이 고맙게도, 어려움 모드를 깰 수 있게 지원 온 것이다.

'이런 고마운 발판들이 있나!'

덕분에 엄두 못 냈던 도전을 할 수 있게 됐다. 물론 그 과정에서 태양 교단 놈들이 갈려 나가는 건 덤이다.

내가 이런 점을 설명하자 스킨크 족장은 눈가를 파르르 떨었다.

"세상에, 이런 쓰레기가!"

"족장. 혹시 그건 날 보고 하는 말인가?"

"아, 아닙니다. 사도시여."

거기에 그치지 않고 나는 한 가지 추가적인 명령을 내렸다.

"태양 교단 놈들이 예상외로 강해진 룩스 움브라에 당해서 너덜너덜해지면 네가 할 일이 있다. 족장."

"치료라도 해줄까요? 고생했는데···."

"이런 멍청한 놈! 순진하게 무슨 소리냐! 모두 체포해서 감방에 처넣어! 가진 걸 모두 빼앗아야겠다."

내 말에 스킨크 족장은 전율한 듯 눈이 커지더니 몸을 부르르 떨어댔다.

"맘대로 부려먹고, 약탈까지!"

날 보는 눈빛을 보니 아무래도 이 완벽한 계획에 감동한 것 같았다.

"그래, 오늘은 아주 근사한 밤이 될 거야."

"···분부대로 하겠습니다. 사도시여."

"어서 태양 교단 놈들에게 전령을 보내 사정을 설명해라. 놈들이 여기 도착한 뒤에 얘기하려면 쉽지 않을 거다."

* * *

태양 교단이 오고 있었기에 나는 재빨리 몸을 숨겼다. 뱀파이어인 내가 눈에 띄었다가는 바로 척살이다.

이후 힘 좋은 스킨크 놈들을 주변에 있는 봉인의 석주로 보냈다. 석주는 총 세 개였다.

"사도시여. 이 물건이면 석주로 간 자들에게 명령을 내릴 수 있습니다."

스킨크 주술사가 내게 색이 다른 나뭇가지 세 개를 내밀었다. 이것의 기능은 간단하다. 나뭇가지에 마력을 밀어 넣으면, 쌍이 되는 나뭇가지가 진동하게 된다.

즉, 언제든 실시간으로 석주를 파괴하라고 신호를 보낼 수 있는 거다. 이후 나는 스킨크 주술사들의 도움을 받아 일대가 잘 보이는 곳에 숨어서 기다렸다.

'흐흐흐. 난이도를 올려서 보상을 마구 늘리는 거다.'

태양 교단 놈들이 힘을 써주면 어려운 일도 아니었다. 나는 적시에 나가 막타만 칠 생각이었다. 이것이야말로 책략이며, 현명한 자가 싸우는 방법이라 하겠다.

"왔군!"

그때 산봉우리가 수선스러워지더니 태양 교단 놈들이 도착했다. 스킨크들은 족장이 미리 말한 대로 태양 교단에게 길을 비켜줬다. 그러자 태양 교단 놈들은 당당히 걸으며 소리쳤다.

"찬미하라! 태양을!"

"구원의 빛이여!"

"너희는 걱정하지 마라!"

당연히 제사가 중단됐다. 자신에게 바치던 의식이 끊기자 거기 한껏 취해 있던 룩스 움브라는 불쾌한 기색을 드러냈다.

크르르르르!

얌전하던 촉수들이 금세 이리저리 뒤틀리며 사납게 움직이기 시작했다.

그러자 태양 교단의 우두머리인 듯한 놈이 나와 준엄한 목소리로 외쳤다.

"어둠을 이기는 빛을 찬양하라! 형제들이여! 전투를 준비하십시오! 이곳에 있는 사악한 그림자를 걷어내겠습니다!"

그 말과 함께 태양 교단은 진형을 갖추고 가져온 촛대에 불을 붙였다. 일대에는 비장한 분위기가 가득했다.

'마치 보스 레이드전 같군.'

룩스 움브라는 촛대의 빛에 격분하더니 태양 교단을 향해 수많은 촉수 가닥을 뻗었다.

나는 두근거리는 가슴을 억누르며 그 모습을 지켜봤다.

'멍청한 새끼들! 낄낄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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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벽의 강림(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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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양 교단의 원정대와 고대신의 조각인 룩스 움브라 사이에 치열한 전투가 벌어졌다.

솔직히 지켜보면서 감탄하지 않을 수 없었다. 태양 교단의 성기사들은 신앙에 대한 열렬한 고백과 함께 저 거대한 룩스 움브라에게 거침없이 달려들었기 때문이다.

'저게 진짜 닥돌이구나! 겁도 안 나나?'

룩스 움브라의 촉수 한 가닥은 20~30미터나 됐는데, 그런 게 이 봉우리에 수십 가닥이다.

보기만 해도 오금이 저릴 광경이었음에도 성기사들은 자신의 검을 빛으로 물들인 채 질주했다.

"빛이여! 어둠을 몰아내라!"

"믿음의 검이여! 적을 베어라!"

룩스 움브라는 이것에 대응해 거대한 촉수를 내리치거나, 공성추처럼 찔러왔다.

크르르르!

하지만 저 거룩한 도살자들은 역시 그 솜씨가 일절이었다. 촉수의 공격을 날렵하게 피하며 반격까지 하고 있었다.

부웅! 붕!

성기사들이 빛으로 물든 검을 휘두를 때마다 요란한 진동음이 일어났다. 무슨 광선검이라도 든 것 같았다.

"갈라져라! 어둠이여!"

무거운 갑옷을 입고도 그 움직임이 마치 한 마리의 벼메뚜기를 보는 것처럼 날쌨다. 하지만 결국 첫 번째 희생자가 나왔다.

퍽!

촉수 찌르기를 얻어맞은 성기사 하나가 그대로 터져나갔다. 마치 포탄이라도 얻어맞은 것처럼 상반신이 산산 조각난 것이다. 눈 깜짝할 사이에 일어난 일이었다.

"자비에 경!"

"자비에! 크으으!"

여기저기서 비통한 탄식이 터졌다. 그런데 그때, 태양의 촛대를 만지작거리던 사제들이 준비를 끝났음을 알렸다.

"작동 가능합니다!"

"명령을!"

촛대는 총 12개의 촛불을 꽂을 수 있는 초꽂이가 있었다. 저 법기는 초를 여러 개 밝힐수록 그 위력이 강해지는데, 대신 버프 시간이 빠르게 줄어든다. 많이 꽂는다고 무조건 좋은 건 아닌 거다.

'일단 촛불을 3개만 밝혔군.'

12개를 모두 밝히고 압도적인 힘을 쓰긴 리스크가 크다고 판단한 거겠지.

'점점 촛불을 늘리며 차근차근 진행할 것 같군.'

사실 저게 정석이긴 하다. 12개를 한 번에 다 켜도 지금 놈들은 룩스 움브라를 어떻게 공략해야 효과적인지 모른다. 초반에 시행착오를 겪는 동안 촛대의 효능이 끝나버리면 낭패였다.

"오오오! 축복이 임했다!"

"더욱 맹렬히 몰아쳐라!"

촛불이 켜지자 버프가 제대로 들어갔다. 공격에 나섰던 성기사들이 더욱 날뛰기 시작했다.

그때 룩스 움브라의 촉수가 다시 성기사 하나를 정통으로 찔렀다. 하지만 성기사는 그 공격을 견뎌냈다.

"헛!"

지켜보던 나는 놀라서 몸을 반쯤 일으켰다.

그 성기사는 타워실드를 든 유난히 덩치 큰 자긴 했다. 하지만 그렇다고 룩스 움브라의 공격을 견디긴 쉬운 일이 아닐 텐데, 그는 해냈다.

뒷발은 빼고 몸을 낮춘 채 커다란 방패를 사선을 들고 버틴 것이다. 촉수 찌르기는 성기사가 만든 피탄 경사각에 튕겨 나갔다.

방패술도 훌륭했지만, 태양의 촛대가 가져다준 막대한 버프 덕분이었다.

실제로 촛불이 3개 켜진 뒤로 성기사들이 좀비처럼 죽질 않았다. 다쳐도 뒤에 있는 사제들이 회복시키니 그야말로 신성 바퀴벌레들이 날뛰는 모습이다.

그들이 빛의 검을 마구 휘두르자 촉수의 움츠러들고 살이 타는 냄새로 일대에 악취가 가득해졌다.

크으르르르르!

크아아아!

격통을 느끼는지 룩스 움브라의 촉수들이 경련을 해댔다.

'놀랍구나! 태양 교단 놈들.'

확실히 저놈들은 어둠의 존재를 사냥하는데 특화된 것들이다. 아무리 이지를 잃은 조각이라고 해도 룩스 움브라를 이리 밀어붙이다니.

"태양의 가호가 임하고 있습니다! 더욱 몰아치십시오!"

태양 교단을 이끄는 우두머리는 자신감이 넘쳤다. 하지만 녀석은 모른다.

'흐흐흐, 이대로 순순히 공을 세우게 둘 수 없지.'

생각보다 잘 싸워줘서 다행이군. 덕분에 커다란 보상을 노리고 난도(難度)를 올릴 수 있겠어.

나는 쥐고 있는 나뭇가지 한 개에 마력을 불어넣었다. 봉인의 석주 한 개를 부수라는 신호였다.

위잉.

낮게 울리는 소리와 함께 석주에 배치한 스킨크들이 즉각 반응했다.

콰아아앙!

폭음이 터지더니 산지 저 멀리서 불기둥이 치솟았던 것.

스킨크들이 폭발물로 봉인의 석주를 날려버렸다. 그리고 그 효과는 즉각 나타났다.

아까 촉수 찌르기를 막아내 내게 깊은 인상을 남겼던 덩치 큰 성기사가 똑같은 공격을 받아내지 못하고 날아간 것이다.

"고드릭 경!"

"고드릭 경을 도와라!"

그가 든 커다란 타워실드는 박살 났고, 등과 어깨에 붙어 있던 빛을 형상화한 장식은 사방으로 반짝이며 깨져나갔다.

갑작스럽게 강해진 룩스 움브라의 모습에 경악성이 여기저기서 터졌다.

"어둠이 다시 짙어지고 있습니다!"

"뭔가 폭음이 들린 이후로 달라졌습니다."

"서둘러 촛불을 더 붙여라! 이대로는 당한다!"

기세등등하던 태양 교단 놈들이 발작하고 있었다. 나야 노력해서 보상을 올려주겠다면 적극 환영하는 바다.

자, 어쩔 건가? 지켜보고 있자니 사제들이 태양의 촛대에 불을 붙이고 신성한 기도를 올렸다.

이번에는 촛불이 6개였다.

"오, 계속 가겠다 그거군."

다시 버프가 강력해지자, 전열에 나섰던 성기사와 종복, 이단심문관들이 광전사처럼 날뛰기 시작했다. 그들은 전투의 함성을 쩌렁쩌렁 질러댔다.

"형제들! 힘을 내시오! 이 고난에는 의미가 있을 것이오!"

"영광이 임할 것이니 칼을 놓지 마라!"

좋은 소리였다. 그래, 너희 고난은 내 성공을 위해서라면 큰 의미가 있지. 그리고 그 영광도 태양 교단이 아니라 내게 임할 터였다.

다시 태양 교단이 우세해졌다. 고위 성직자들이 기적까지 일으키자, 룩스 움브라의 촉수가 여러 개 펑펑 터져나갔다. 지켜보는 내가 다 아팠다.

"미친놈들. 으윽!"

저 고위 성직자의 기적을 직접 맞았다가는 뱀파이어인 나는 뼈도 못 추릴 것 같다.

하지만 나 같이 현명한 뱀파이어는 저런 교단의 마귀 사탄을 직접 상대하는 어리석음을 범하지 않는다.

나는 다음 나뭇가지를 들고는 마력을 흘려 넣었다.

위잉.

곧 응답이 왔다.

콰아아아앙!

산지 반대편에서 폭음과 함께 불길이 치솟았다. 대기하고 있던 스킨크들이 폭발물을 터뜨린 것이다.

다시 봉인의 석주가 부서졌고, 그 효과는 극적이었다.

굵직한 룩스 움브라의 촉수가 여러 가닥으로 분화하기 시작했다. 작은 인간을 상대하기 훨씬 유리한 구조로 형태를 변경한 것이다. 그리고 그건 태양 교단에게 지옥을 선사했다.

"크아아악! 토비아스 형제가!"

"아아악! 아델리나 수녀!"

상대할 촉수가 늘어나자 삽시간에 희생자들이 늘어났다. 여기저기서 비명이 터졌고 태양 교단은 무너져 내렸다. 우두머리로 보이는 자가 악을 쓰며 독려했지만 전황은 좋지 않았다.

"승리를 향한 믿음을 저버려서는 안 됩니다! 희생과 신앙의 이름으로 돌격하십시오!"

하지만 놀랍게도 종복 몇이 몸을 돌려 도망치기 시작했다.

"아아아악! 살려줘!"

"이건! 이건 무모한 싸움입니다!"

완전히 공황에 빠져서는 무기를 던지고 달아나고 있었다. 그 모습에 성기사와 사제들은 당황하는 기색이 역력했다.

종복은 그냥 하인 같은 게 아니다. 신분이 평민일 뿐, 오래간 성기사를 보조해온 유능한 전투원들이며 믿음도 출중했다. 그런데도 달아나고 있었다.

"돌아오라! 에이몬!"

"정신 차려라! 흔들리지 마라!"

성기사들이 도망가는 종복을 불렀지만 소용없었다. 그들은 공포에 사로잡혀 도주 외에는 다른 판단이 불가능해 보였다. 지켜보던 나는 다소 실망하지 않을 수 없었다.

'여기서 끝인가?'

하지만 믿음의 연쇄살인마들은 날 배반하지 않았다. 기어코 판돈을 올리듯 태양의 촛대에 추가적으로 불을 붙인 것.

놀랍게도 이번엔 12개였다.

"강수를 뒀군."

3개, 6개였으니까 다음은 9개일 줄 알았다. 하지만 12개다.

저게 위력은 최고지만, 버프 시간이 극히 짧아지는 게 문제다. 금방 촛대의 불이 다 꺼져버릴 테니 나름 도박수를 둔 거다.

'이대로 싸우다가는 무난히 질 거 같으니 발악을 하는군. 아주 고맙다. 덕분에 보상을 최대로 뽑아먹을 수 있겠군.'

12개의 촛대가 불을 밝히자 신성력이 뿜어져 나왔고 주변이 대낮처럼 환해졌다. 효과는 확실했다.

도망가던 종복들은 모두 용기백배해서 돌아섰으며, 부상을 입은 자들은 완전히 회복했다.

심지어 성기사들은 덩치가 두 배로 커져서 무슨 오거를 보는 것처럼 변해버렸다.

"엄청나군!"

신성력이 담긴 검을 휘두르는 오거 크기의 철갑 성기사라니···. 꿈에 나올까 두려운 광경이었다. 내가 지금 저 미치광이들을 상대하지 않아도 된다는 사실에 안도, 또 안도할 뿐이다.

"이번에야말로 끝을 봐야 한다!"

"전력으로 몰아쳐라! 물러날 곳은 없다!"

최종 버프를 받은 태양 교단은 거칠 게 없었다. 성기사들의 칼날 앞에 룩스 움브라의 촉수들은 마치 수산시장의 낙지처럼 무력하게 토막 쳐졌다.

'무지막지하게 강하군.'

하지만 끝날 때까진 끝난 게 아니지. 내 손에는 이제 마지막 세 번째 나뭇가지가 있다.

'드디어 3페이즈 가나요.'

발악에 가까운 공격을 해대는 태양 교단에겐 미안하지만, 역시 보상은 최대치로 받아야겠다. 나는 그들의 분투에 열렬한 경의를 표하며, 나중에 시간이 나면 교회에 헌금이라도 좀 해야겠단 생각을 했다.

"마지막이다."

세 번째 가지에 마력을 흘려 넣었다. 가지는 진동했고, 저 멀리서 신속한 대답이 왔다.

콰아아아앙!

마지막 봉인의 석주가 박살 난 것이다. 드디어 룩스 움브라는 풀파워 상태다. 놈은 땅에 반쯤 묻혀 있던 온몸을 밖으로 드러내기 시작했다.

와르르르르! 콰아앙!

봉우리 일대가 무너지며 수많은 낙석이 일대를 덮쳤다. 분진이 자욱하게 일어났고, 그 속에서 어마어마한 실루엣이 모습을 드러냈다.

마침내 룩스 움브라의 몸체가 둥지 밖으로 모두 튀어나온 것이다. 녀석의 몸통은 수백 개의 눈알로 가득한 끔찍한 형태였다.

'단단한 껍질 탓에 이전처럼 코어가 보이지도 않는군.'

놈은 이제 거칠 게 없었다.

크아아아아아! 크르르!

제약이 없어진 룩스 움브라의 위력은 무시무시했다. 놈은 촉수의 빨판에서 산성액과 독을 마구 뿜어냈고, 이건 가히 재앙 그 자체였다.

"끄아아아아!"

"회복을 어서!"

산성이 덮치자 태양 교단 놈들은 흐물흐물 녹아서 주변에 눌어붙었다. 간신히 산성액을 피해내도 독에 당해 피를 토하고 쓰러지기 일쑤였다.

삽시간에 전세가 역전됐다. 그걸로 그치지 않고 룩스 움브라는 촉수에 돋아난 가시를 마구잡이로 쏘아내기까지 했다. 그 전방위 폭격에 절대 무너지지 않을 것 같은 성기사들조차 차례로 쓰러졌다.

고통 어린 울부짖음만이 일대에 가득했다. 태양 교단 놈들은 좀 더 버텼지만 결국 끝이 다가왔다.

태양의 촛대가 핏, 하고 꺼져버린 것이다.

어둠을 몰아내던 찬란한 광휘가 사라졌다. 신성한 힘은 흔적도 없어졌고 태양 교단은 무력해졌다. 그러자 빛에 자극받아 날뛰던 룩스 움브라도 지친 듯 촉수를 멈췄다.

이제 다 이겼으니 잠시 몸을 추스르려는 것 같았다.

꿀렁꿀렁.

놈은 촉수로 담벼락을 만들어 태양 교단 놈들이 도망치지 못하게 가두고 있었다. 이 절망적인 상황에서도 성기사와 사제들은 할 수 있는 게 없었다. 그들은 급격히 약해진 상태였다. 마치 약이 떨어져 비실비실해진 중독자들 같았다.

"이제 우리는 다 죽었소···."

"제발, 우리를 구원하소서!"

"신이시여. 돌보소서! 이대로 저 악귀의 주둥이로 모두 들어가겠습니다!"

살려달라고 아우성이었다. 드디어 내가 나설 때가 왔다.

"아이러니한 일이야. 구원을 부르짖는 태양 교단에게 응한 게 나 같은 뱀파이어라는 건. 킥킥."

태양의 촛대가 꺼졌으나 주변은 어둠만 가득하진 않았다. 어느새 먼동이 터오고 있었기 때문이다. 사방을 주홍색으로 물들이는 세계 속에서 나는 태양 저항의 물약을 꺼내 마셨다.

꿀꺽. 꿀꺽.

이윽고 비어버린 병을 던지고는, 은신을 풀고 제단으로 향했다.

"가자."

내 명령에 뒤따르는 스킨크 주술사들이 공손히 답해왔다.

"사도시여. 우리가 어디든 따르겠습니다."

이런 모습에 멀찌감치 피해 있던 스킨크들이 절을 하기 시작했다.

"핏빛 새벽의 여신이시여!"

"그분의 사도께서 나서셨다!"

거체를 드러내고 있던 룩스 움브라도 멈칫했다. 그러다 격렬한 반감을 드러냈다. 나와 있었던 일을 기억하는 게 틀림없었다.

크르르르르르!

상황이 범상치 않게 굴러가자 태양 교단도 대체 무슨 일인가 싶어 내 쪽을 쳐다봤다.

"이른 새벽의 빛을 후광처럼 두른 저자는 누구인가!"

그들의 대장이 외쳤지만 답을 하는 이는 없었다.

나는 수많은 시선을 담담하게 받아내며 제단의 한 가운데로 가서 섰다. 그리고 두 팔을 위로 올리며 모두에게 선언했다.

"새벽빛이 너희를 구원할 것이다. 이제 눈을 크게 뜨고 진정한 신의 기적을 보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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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벽의 강림(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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