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펑크시티 >
메마른 황무지 위로 우뚝 서 있는 저 도시의 웅장함은 두 촌년들의 경악을 사기에 충분했다.
"저게 메트로폴리스···"
"크다··· 그리고 저 요상한 기계들은 뭔가? 총기 부품과도 비슷해 보이기는 한데. 또 조금 다르다."
"벌써부터 그렇게 놀라면 곤란한데."
아직 내부에는 진입도 안 했는데 말이지.
유신은 관문소로 늘어서 있는 사람들 쪽으로 두 바보를 이끌며 줄을 섰다.
메트로폴리스 펑크시티는 이 근방.
아니, 동아시아 대륙에서 가장 안전한 거점이다.
그렇다보니 전국에서 각양각색의 사람들이 도시로 들어가기 위해 몰려들었다.
장거리 의뢰를 끝마쳤는지 하품을 하는 사냥꾼.
배낭을 한가득 짊어진 보따리꾼.
에피와 헤카테처럼 연신 주변을 두리번거리는 안주를 찾아온 피난민들까지.
웅성웅성.
타운과 자유도시가 쓰레기로 된 장벽을 세우고, 낙원이 (구)시대의 잔재인 콘크리트 벽을 장벽으로 세웠다시피. 펑크시티 역시 외부의 위협을 차단하기 위해 벽을 세웠다.
드넓은 부지를 빈틈없이 둘러싸고 있는 것은 철조망이다.
에피는 이를 힐끔 살피더니 말했다.
"저 벽은 낙원에 비해 좀 딸리는 것 같은데?"
"자세히 봐라."
유신이 철조망의 어느 한 부분을 고갯짓했다.
찍찍.
그곳에는 막 자이언트 렛 한 마리가 은밀히 접근 중이었다.
감시탑에 있던 보초도 다른 곳을 주시하고 있었기에 놈의 침입은 성공적일 듯했다.
그 순간.
푸쉬이익.
철조망에서 새하얀 증기가 뿜어져 나왔다.
이를 뒤집어쓴 자이언트 렛은 바닥을 구르며 켁켁대다가 죽었다.
에피가 눈을 동그랗게 떴다.
"저게 뭐야?"
"고압 고온의 증기가스다. 내부에는 공장에서 배출된 유독물질 역시 섞여있지."
"당연히 이해는 안 되는데. 존나게 위험하다는 건 알겠어."
이제보니 철조망의 곳곳에는 파이프관이 매달려 있었다.
그리고 거기서 뿜어지는 증기가 은밀하게 접근하는 괴물들을 사냥하고 있었다.
마치 스프레이로 곤충을 잡듯이.
도시를 둘러싼 쿰쿰한 분위기는 이 덕이었다.
'벽과 달리 철조망은 언제든지 쉽게 확장시킬 수 있으며, 파이프관 역시 마찬가지. 거기다가 유독물질의 합법적인 배출까지.'
빌어먹을 정도로 실용적이다.
역시 대도시 답다고나 할까?
"다음."
어느새 유신 일행의 차례였다.
검문소에 서있는 자들은 블루코트를 입고 손에는 압력계가 달린 머스켓을 들고 있었다.
컴퍼니 휘하의 가드들이다.
그들은 헤카테를 힐끔거리더니 사무적인 어조로 말했다.
"펑크시티에 온 것을 환영한다. 귀환자라면 시민증을 제시하고, 아니라면 이 서류를 작성하라."
애미애비도 못 알아보는 이런 세상에서 시민권이라니···
메트로폴리스 쯤 되면 꽤나 체계적으로 출구통제를 한다.
유신은 까막눈인 두 사람을 대신해 세 장의 서류를 작성했다.
"인간 둘과 엘프 노예 하나. 확인했다. 인간들은 두 당 1000크레딧. 엘프는 시민증이 발급되지 않으며 대신 500크레딧의 관세가 붙는다. 총 2500크레딧이다."
태연한 목소리로 엘프를 물건 취급하는 가드들.
헤카테가 이를 악물었다.
그러나 유신의 당부를 잊지 않았기에 경솔하게 나서지는 않았다.
'잘 참았다.'
유신은 헤카테의 어깨를 두드려주며 가드에게 비용을 지불했다.
일전에 클레르로부터 강탈한 크레딧의 일부였다.
그때 빼앗아두지 않았다면 중간중간 괴물 사냥을 더 해야 했겠지.
실제로 줄을 서있던 자들 중에는 비용을 지불하지 못하고 쫒겨나거나···
-저, 정말 빌려주는 겁니까?
-그래, 속고만 사셨나? 66%금리로 싸게 빌려드릴게. 이 정도면 금방 갚아.
이를 노리던 브로커에게 목줄이 채였다.
"접수했다. 약 한 달 정도면 관청에서 시민증이 나올 거다. 그전까지는 이 임시 시민증을 사용하도록."
물론 이 공무원들은 주변 상황 같은 건 신경도 쓰지 않는다.
그저 사무적인 어조로 이름이 새겨진 명패를 내밀 뿐.
"알았다."
그렇게 도시 내부로 들어가려는 찰나.
부아아아앙!
익숙한 배기음과 함께 차량 한 대가 이쪽으로 질주해왔다. 곧 요란하게 드리프트를 하며 정차했다.
"콜록, 콜록."
피어오르는 흙먼지에 대기 중이던 사람들이 기침했다.
"이런 미친 새끼···"
몇몇 성격이 안 좋은 피난민이 허리춤으로 손을 가져갔다.
달칵.
"헙."
그러나 곧 차량의 문이 열리며 등장한 사람들의 모습에 입을 다물었다.
지금 같은 세상에서도 깔끔한 정장을 입은 두 남녀.
그 외관은 이미 하나의 증명이나 다름없다.
저들은 클레이모어였던 것이다.
"으휴. 오늘도 바글바글하구만."
포마드를 발라 머리를 넘긴 사내는 주변을 둘러보더니 인상을 구겼다.
단발머리칼의 여자는 그런 사내의 팔짱을 턱 끼더니 고갯짓했다.
"벌레 구경은 그만하고 어서 들아가자 자기."
"그럴까? 어이, 뒤지기 싫으면 알아서 비켜라!"
벌어진 소란에 당연히 검문은 중지되어 있었다.
건들거리며 걸어온 두 남녀가 유신을 툭 치며 앞으로 나왔다.
"무사귀환 하신 것을 환영합니다! 매드독!"
유신은 생각했다.
'그래, 그동안 마주친 클레이모어들이 너무 신사적이었던거지.'
사실 클레이모어나 vip전용 출입구는 따로 있었다.
그럼에도 이들이 이곳으로 온 것은 단순히 하나의 이유 때문이다.
하찮은 벌레들을 내려다보며 우월감을 느끼기 위해.
심지어 옆에 끼고 있는 저 여자는 옷만 저렇게 입었다 뿐이지 클레이모어도 아니다.
"아아 그래, 인사는 그쯤하고 내 차 좀 파킹 해주라."
"맡겨주십시오!"
포마드남은 군기가 바짝 든 가드에게 열쇠를 툭 던지며 도시 내부로 들어가려다가···
"히야. 이거 뭐야?! 깐프잖아?"
갑자기 몸을 휙 돌려 헤카테를 바라봤다.
***
마치 애완동물을 구경하는 듯한 흥미어린 눈동자.
"흐하하하! 와씨! 존나 딴딴하네? 근데 얼굴은 또 이쁘네?"
"자기야. 그냥 가···"
"가만히 좀 있어봐!"
포마드남은 헤카테를 물건처럼 만지작거렸다.
야만인은 모멸감을 참으며 침묵을 고수했다.
그렇게 한참을 품평한 포마드남이 유신을 바라보며 씨익 웃었다.
"그 쪽이 주인?"
"그렇다."
"복장으로 봐서 사냥꾼 같은데. 어디서 잡은 거야? 엘프헬름? 이거 나한테 팔지 않겠나?"
태연하게 개소리를 지껄이고 있다.
헤카테는 물건이 아니다. 동료지.
"거절하지."
"그러지 말고 응? 값은 잘 쳐줄 테니까."
하지만 이 난봉꾼은 집요했다.
결국 유신으로서는 동료의 마음에 상처가 될 수도 있는 말을 할 수 밖에 없었다.
"그녀는 주인이 정해져 있다."
"누군데? Vip나 vvip? 아님 클레이모어라도 되나? 어디 이름 한 번 대봐."
아, 이 새끼가 진짜.
내가 웬만하면 문제 일으키기 싫어서 가만히 있으려고 했는데···
'말로 해서는 안 되겠군.'
유신은 건들건들 자신의 가슴을 치는 포마드남을 향해 얼굴을 내밀고는.
"아이언 나이트."
이 한 마디를 내뱉었다.
고오오오.
그리고 갈무리해두었던 에스트를 방출했다.
백휘도가 그랬던 것처럼 한가득 살기를 담아서.
오싹.
"···"
매드독이라 불린 사내는 좋게 봐줘도 3위계 중하위 수준의 능력자였다.
당연히 생사를 넘나들며 단련된 유신의 기세를 함부로 감당할 수 없었다.
'무슨 놈의 에스트가···'
"컥, 큽."
그는 창백한 낯빛으로 유신에게서 물러났다가.
"하하··· 아이인 나이트 님이라니. 이거 실례했군."
짝.
"꺅!"
"뭐하고 있어 이년아! 그러게 왜 욕심을 부려?!"
끼고 있던 애인의 뺨을 치더니 그녀의 머리채를 잡고 질질 끌고 갔다.
저 난봉꾼이 이렇게 떠난다고?
저 사내는 대체 무슨 말을 한 거야?
가드들의 어리둥절한 시선을 뒤로한 채. 유신은 주머니에 손을 넣었다.
"가도 되나?"
"아, 네."
곧 태연하게 걸음을 옮겼다.
그래, 이게 도시지.
폭력과 권력으로부터 피어나는 억압, 약자멸시, 자본과 힘에 의해 계층이 정해지는 피라미드.
유신은 도시의 쿰쿰한 냄새를 맡으며 푸후 한숨을 쉬었다.
고향으로 돌아온 듯한 느낌이다.
***
세상이 망한지도 제법 많은 시간이 흘렀다.
하지만 그런 와중에도 이 몰락한 세상의 주인을 자처하는 자는 시도때도 없이 나타나고는 했다.
방사능과 신비로 탄생한 괴물과 이종족 이라던지.
더 이상 국가에 충성하는 것이 아닌 스스로의 야망과 신념에 충성하는 (신)군부 라던지.
나는 남들과 다르다고 믿으며 스스로가 왕이 되기를 자처했던 초인들 이라던지.
이대론 너무 비효율적이라며 왕관을 강탈하고 새로운 법도와 법칙을 세운 사업가들 이라던지.
당장 한 치 앞의 미래도 기약할 수 없는 가혹한 세상.
힘과 자본, 안전이 모이는 곳에는 반드시 사람들이 모인다.
그리고 그곳에서 또 다시 새로운 힘과 안전, 인력들이 꼬인다.
복잡하게 얽히고 또 바뀌는 법도들 사이에서 통용되는 유일한 법칙은 하나.
약자들은 늘 착취당한다는 것이다.
히히히힝.
굴뚝에서 피어오르는 매연과 증기로 인해 사시사철 쿰쿰한 회색도시 내부.
마차들과 증기로 움직이는 천장 없는 자동차들이 그 사이를 가로지른다.
그 옆의 인도에서는 멜빵 셔츠에 빵모자를 쓴 사내들, 드레스에 넓은 챙모자를 쓴 여인들이 담배를 태우거나 어딘가로 부산히 움직인다.
공해 속에서 들려오는 수많은 목소리들.
-난 이 일을 꼭 해야 한다고! 제발!
-라오셩은?
-그 녀석이라면 죽었어.
-뭐 때문에?
-화학약품 유출. 바이스 케미컬에서 어제 하나 터졌잖아.
-그쪽은 늘 시끄럽군. 젠장!
당장 가족의 생계를 책임지기 위해 일감을 수주하려는 인부.
동료의 죽음을 쯧 혀를 차는 것으로 털어내버리는 친구들.
단돈 10크레딧에 자신을 파는 창부.
뒷골목의 마약 중독자나 주정뱅이의 신음.
어리숙한 외지인들을 노리는 갱들의 음험한 눈초리.
펑크시티는 결코 신비로우며 평화롭기만 한 도시가 아니었다.
사람이 모이고 자본과 힘이 모이는 만큼 짙은 그늘 역시 존재하고 있었다.
이 대도시는 블루칼라.
통칭 노동자 계층의 사람들의 고혈을 쥐어짜며 유지되고 있다.
인간들의 가장 큰 적은 인간이다.
라는 법칙이 오늘도 지켜지고 있는 것이다.
-호외요! 호외!
에피는 주변을 둘러보더니 입을 헤 벌렸다.
"여긴 진짜 별세계네."
굳이 복식만이 특이한 것이 아니었다.
째깍째깍
저 멀리 보이는 높게 솟은 시계탑과 뾰족하거나 둥근 첨탑.
닭장처럼 옹기종기 모인 붉은 벽돌집과 증기를 뿜어내고 있는 파이프관과 공장들.
대도시 펑크시티는 끝모를 정도로 거대했다.
소녀의 눈에는 이 도시의 모든 것이 처음 접하는 양식이자 문물이었다.
'실제로 보니까 다르긴 하구만.'
유신 역시 저기 있는 촌년들처럼 티는 안 냈지만 주변을 힐끔거렸다.
펑크시티는 19세기 후반에서 20세기 초반.
영국 런던을 연상케 하는 도시다.
고딕풍 양식의 고풍스러우면서도 음울한 분위기를 잘 살려냈다는 평을 받았었지.
그 이름값답게 이 도시는 꽤나 특이했다.
물론 그 이면을 들여다보면 마굴도 이런 마굴이 없지만 말이다.
'블루로드는 대충 이런 느낌이로군.'
유신은 우선 두 사람을 이끌고 근처에 있던 옷가게로 갔다. 그리고는 헤카테에게 입힐 옷을 샀다. 배일이 드리워진 챙넓은 모자와 드레스였다.
"흠. 뭐, 나쁘지는 않네."
유신이 턱을 쓰다듬었다.
여리여리한 것과는 거리가 멀었으나 키가 있기에 못 봐줄 정도는 아니다.
헤카테는 근육 돼지가 아니라 실전 압축 근육을 가졌다.
"흐흐. 언니 그렇게 입으니까 딴 사람 같은데?"
"부, 불편하다."
물론 거의 헐벗고 다니다시피한 이 야만인은 문명인의 복식을 견디지 못했다.
하지만 유신의 다음 말이 결정적이었다.
"조금만 참아라. 그 귀만 숨긴다면 방금 전처럼 더러운 꼴은 안 볼 거다."
"···"
헤카테는 주먹을 뿌득 쥐었다.
바깥 세상에서 인간들이 요정을 어떻게 취급하는지는 알고 있었다.
하지만 직접 경헝해보니 더 기분 더러웠다.
유신이 만류하지 않았다면 그 자리에서···
"어허. 옷 찢어진다. 그거 비싼거야."
"헉! 미, 미안하다!"
"그래, 진정하고 우선 배나 좀 채우자."
유신 일행은 주변의 호객꾼들에게 물어 여관으로 갔다.
그리고 몸을 씻고 종업원에게 괴물들의 피와 채취로 더럽혀진 옷가지의 세탁까지 맡긴 후에 식사를 주문했다.
건더기 없는 멀건 죽과 말라 비틀어진 소시지.
김 빠진 맥주까지.
이곳 블루로드에 사는 하층민들의 전형적인 식단이 나왔다.
물론 괴물 고기를 씹으며 수 없이 노숙을 한 일행에게는 진수성찬이다.
합.
에피는 소세지를 한 입 씹더니 오묘한 표정을 지었다.
"이거 고기 같기는 한데··· 좀 맛이 이상한데?"
"아마 합성육이라서 그럴 거다."
"합성?"
"공장에서 찍어내는 가짜고기다. 고기맛을 엇비슷하게 흉내 낸 거지."
"으에. 그럴바에 매드니스 카우 같은 먹을만한 괴물의 고기가 더 낫지 않나?"
유신은 죽을 들이키더니 피식 웃었다.
"그건 비싸잖냐."
"그럼 이건 싸단 거야? 가격은 전혀 아니던데?"
"뭐든지 유통과정과 납품, 인건비가 들어가면 비싸지게 되어있어."
그게 도시의 법칙이고 룰이다.
자급자족이 대부분인 시골과는 달리 말이지.
우걱우걱.
"한 그릇 더 시켜도 되나?"
물론 엘프 야만인은 개의치 않은 채 연신 접시를 비웠다.
유신은 주문을 추가하며 말했다.
"먹으면서 들어라. 헤카테는 아마 처음 듣는 말일 테니."
유신은 헤카테에게 자신의 여정의 목적을 밝혔다.
이 세상을 좀 먹는 악의 씨앗들을 처리하고 종래에는 세상을 구원하겠다는 오만하면서도 원대한 포부를.
물론 이 요정은 비웃지도 당황하지도 않았다.
"멋지군. 역시 내가 인정한 전사답다."
그저 눈을 반짝이며 감탄할 뿐이다.
나는 이래서 얘가 좋다. 한 번 마음을 주면 맹목적일 정도로 따르거든.
마치 삼국지의 장비 같은 포지션이야.
"그러기 위해서는 전제되어야 할 사항들이 많다. 우선···"
유신은 희미한 미소를 지으며 말을 잇다가.
"이 도시를 이루고 있는 계층 피라미드에서 우리들은 꼭대기에 선다."
주먹을 꽉 쥐며 야망을 드러냈다.
< 펑크시티 >
바닥은 삐걱거리고 창문으로는 담배 연기가 끼어 흐릿했다.
이 낡은 여관에는 고된 노동을 끝마친 노동자들과 창부들이 그저 하루를 버텨낸 것에 감사하며 아무런 의미도 없이 살아가고 있었다.
그런 상황에서 유신이 던진 말은 주변의 비웃음을 살 정도로 오만했다.
하지만 이 사내가 가진 잠재력을 알고 있는 에피와 헤카테의 두 눈은 깊게 가라앉았다.
"흐하하하하! 좋다. 함께 이 도시를 먹자는 말이구나."
"드디어 고생 끝. 행복 시작인 거야?! 내가 뭘 하면 돼?!"
"너희들은 우선 야경으로 가라. 그곳으로 가서 정식으로 사냥꾼이 되는 거다."
이 도시의 지배자이자 절대권력이 컴퍼니라면 야경은 그 이인자다.
결코 좌시할 수 없는 거대세력이다.
[일곱 번째 기회]
저번 엘프헬름에서 능력을 개화한 것은 물론이고.
에피 특유의 약삭빠름과 사격 실력, 헤카테의 서포터를 더한다면 야경의 꼭대기로 올라가는 것도 그렇게 힘들지는 않을 터.
너희들은 그곳으로 가서 자리를 잡으며 미래를 대비하라고 유신이 명했다.
에피가 물었다.
"그렇다면 유신 당신은?"
-호외요! 호외!
끼이익 문이 열리며 등장한 소년 배달부한테 크레딧을 튕긴다.
촤악.
다리를 꼬으며 신문을 펼친 유신은 오늘자의 날짜와 소식들을 살피고는 웃었다.
"나는 클레이모어 시험을 치르고 오겠다."
태연하게.
마치 어디 가볍게 산책이나 다녀오겠다는 어조로.
"오래 걸리지는 않을 거야."
유신은 이 망가진 세상 제일가는 권력자들의 한 축이 되겠다고 선언했다.
***
유신은 거리를 걷다가 한 손을 들었다.
히히히힝.
대로를 지나던 합승 마차가 정지하며 높은 모자를 쓴 마부가 뒷좌석을 고갯짓했다.
"어허이. 밀지 마쇼."
"실례."
마차의 좌석에는 이미 출근을 준비 중인 인부들이 한가득이었다.
풍기는 땀 냄새, 분 냄새, 담배 냄새.
유신은 그들 틈에 끼어 신문을 펼쳤다.
자신의 시야가 닿지 않는 곳에서 혹여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지는 않은지 정보를 구하는 것이다.
[또 사고! 바이스 케미컬의 미흡한 대책! 이대로 괜찮은가?!]
[도시 한 복판에서 늑대인간이 나타나다!]
[살인마 잭의 정체가 사실은 여자?!]
"히얏."
그러는 동안에도 마부는 연신 채찍을 휘둘렀고, 마차는 천천히 이 도시를 가로질렀다.
덜컹덜컹.
시간이 지남에 따라 천장까지 꽉 찼던 사람들이 하나둘 마차에서 내렸다.
종래에는 유신과 마부밖에 남지 않았다.
마부가 말했다.
"형씨. 클레이모어 시험을 치러가나?"
"그렇다만."
"도전할 수 있는 그 열정이 부럽구만."
인권 따윈 개나 줘 버린 이 세상에서도 클레이모어는 존중과 경외를 받는다.
어디 그뿐일까?
명예뿐만이 아닌 막대한 부와 권력, 보통 사람들은 알 수도 없는 특별한 힘과 지식 역시 손에 넣을 수 있다.
클레이모어가 된다는 것은 그야말로 인생의 가장 큰 전환점을 맞이하는 것이라 할 수 있다.
'뭐, 내 경우에는 노리는 게 조금 다르지만.'
"주인장도 능력자였나?"
유신이 물었다.
말도 많고 탈도 많은 클레이모어 시험의 유일한 응시 조건은 하나다.
바로 능력자일 것.
말투로 봐서 뭔가 아는 눈초리인데.
마부는 흰 장갑을 벗으며 손가락을 들어 보였다.
차캉!
별안간 그 손가락이 칼날로 변했다.
변이 능력자라···
메트로폴리스쯤 되면 길거리에 차이는 게 능력자다.
한낱 마부나 창부가 실은 어느 조직의 비밀결사라고 해도 이상할 게 없다는 이야기지.
"말이 놀라겠군."
유신의 감상은 덤덤했다.
"하하. 이런 반응은 또 처음이군. 신선해."
마부는 허허 웃으며 자신의 과거를 회상했다.
"나도 형씨처럼 클레이모어 시험에 도전한 적이 있었지. 결국 그 드높은 이상에 닿지 못하고 꺾여버렸지만 말이야."
이제보니 옷 위로 드러난 마부의 살갗은 흉터로 가득했다. 그 역시 순탄치 않은 삶을 살았다는 증거. 이에 대한 유신의 답은···
"그래서 꿈 많은 젊은이의 마음을 꺾으실려고?"
"그럴 리가. 나는 자네를 응원한다네. 아니, 도전하는 모든 젊은이들을 응원해."
히히히힝.
마차가 멈췄다.
유신이 크레딧을 내밀자 마부는 웃으며 손을 저었다.
"삯은 괜찮네. 나중에 클레이모어가 된다면 그때 주시게나."
"고맙군."
유신이 진짜 클레이모어가 될 거라고 믿는 어조는 아니었다.
한해 시험을 치르는 지망생들의 숫자만 수천에서 수만 명.
그중에서도 이를 통과하고 명예를 손에 쥐는 자는 1%도 채 되지 않으니까.
하지만.
그럼에도 마부의 호의는 진짜였다.
유신은 마부의 특징을 잘 기억해 두고는 걸음을 옮겼다.
저벅저벅.
[블루로드 9번 구역↑]
북적대던 인파가 점점 줄어들며 사람들의 복식이 바뀐다.
건물들 역시 점점 뜸해졌다.
잠시 후 유신의 앞에 모습을 드러낸 것은 승강장과 그 위로 깔린 철도였다.
이곳 펑크시티에는 기차가 존재하고 있었던 것이다!
'이건 봐도 봐도 신기하네.'
마차, 자동차에 이어 기차라니.
진짜 어마어마한 규모다.
에피나 헤카테가 봤다면 틀림없이 까무러졌겠지.
혀를 내두른 유신은 매표소에 들러 승차권을 샀다.
"화이트로드 로열벨리까지 한 명."
"50크레딧입니다. 고객님. 약 10분후에 도착할 999미라클 호에 탑승해주세요."
유신은 정해진 라인으로 가서 줄을 섰다.
"아오! 왜 이렇게 복잡해?!"
검을 찬 녀석, 한 쪽 팔을 기계의수로 대채한 녀석, 로브를 쓴 녀석 등.
지금껏 보던 사람들과는 다른, 특이한 복식을 가진 자들이 다가왔다.
하나같이 능력자들이다. 이들 역시 클레이모어 시험을 준비 중인 지망생인거지.
'아는 녀석들은 안 보이는데··· 에스트도 별로 대단치 않고.'
순간 유신의 눈동자가 가늘어졌다.
"한 푼만 줍쇼."
유신의 시선은 주변에 득시글거리는 지망생들도 아닌 웬 구걸을 하고 있는 거지에게로 향했다.
"아이씨 더럽게! 안 꺼져?!"
"죄, 죄송합니다요. 나리."
추례한 행색의 노인은 한 지망생의 겁박에 바짝 겁먹고는 물러났다.
그러나 곧 슬쩍 눈치를 보더니 다른 사람들에게 다가와서 구걸을 하는 것이다.
"한 푼만 줍쇼."
애초에 부유한 자였다면 이곳 블루로드가 아니라 화이트로드에서 곧바로 시험장으로 향했을거다. 즉 여기 있는 지망생들은 다 주머니 사정이 여의치 않은 자들.
노인의 간절한 어조를 들어주는 이는 아무도 없었다.
아니,
"이 새끼가."
오히려 무시하기만 하면 다행이었다.
방금 전에 노인을 겁박한 사내가 쿵쿵 걸어오더니 노인의 멱살을 잡았다.
"야이 거지 새끼야. 내 말 못 들었어?! 꺼지라고!"
덜덜덜.
"너 같은 새끼들을 내가 한 두 번 본 줄 알아?! 앞에서만 불쌍한 척 하면서 편하게 남의 돈을 갈취하는 기생충 같은 놈들! 돈이 필요하면 장기를 내다팔던지! 공장으로···"
사내가 노인을 후려치려던 그 순간.
"저기요. 너무 심하신 것···"
"주먹까지 쓰는 건 좀 심하지 않나."
턱. 유신이 사내의 손을 붙잡았다.
"넌 또 뭐야? 이 거지 새끼 친구라도 되는··· 흡!"
눈을 부리부리하게 뜨는 사내를 향해 살기를 담은 에스트를 뿜는다.
유신의 기세에 움찔한 사내는 주춤 물러나더니.
"퉷! 아주 그냥 천사 나셨구만."
바닥에 침을 뱉으며 걸음을 옮겼다.
유신은 손수 노인을 일으켜주었다.
"괜찮습니까?"
"가, 감사합니다. 감사합···"
"더러운 꼴 그만 보시고 이걸로 어디가서 요기나 하시죠."
유신은 노인이 들고있던 그릇에 크레딧을 담아줬다.
그것도 100크레딧이라는 거금을.
"헉, 이, 이렇게나 많이···"
"노인장을 보니 내 아버지가 생각나서 말이지."
"···"
노인의 눈동자에 눈물이 맺혔다.
유신은 그의 어깨를 두드려주고는 걸음을 옮겼다.
땡땡땡땡!
저 멀리 힘차게 증기를 내뿜으며 열차가 도착했기 때문이다.
"이 열차는 화이트로드 로열벨리! 로열벨리로 갑니다!"
객실 내부로 들어서며 유신은 생각했다.
자신이 살기를 품었을 때. 오직 저 노인만이 아무런 반응도 하지 않았다.
겁 먹지도 않았고, 당황하지도 않았지. 그야말로 무(無) 그 자체.
거기다가 손아귀로 와닿던 노인의 단련된 신체.
그 기행에서 유신은 알아챈다.
역시···
'내가 잘 못 본 게 아니었어.'
[괴이 : 헬헤임의 생환자]
[전 로열가든의 군주]
[검성 베르망]
사람이 평소에 하지 않는 행동을 하는 것에는 이유가 있는 법이다.
유신은 낡고 쇠퇴했지만 여전히 예리한 날을 감추고 있는 영웅과 안면을 텄다.
***
붉은 쿠션이 깔린 객실은 푹신했다.
유신은 느릿하게 지나가는 풍경을 보며 생각에 잠겨있었다.
제 38회 클레이모어 시험이 어떤 식으로 치러졌던지 기억을 더듬고 있었다.
그 순간.
지이잉.
문이 열리며 웬 청년이 들어와 고개를 두리번거렸다.
"31A가 여기가 맞는 것 같은데···"
"내 맞은편이다."
"아, 감사합니다."
청년은 제 몫의 짐을 어설프게 짐칸에 올리고는 유신의 맞은편에 앉았다.
그는 허리춤에 검을 차고 있었다.
'지망생이로군.'
지금 이 시기에 저런 복장으로 이 열차를 타는 사람은 클레이모어 지망생 뿐이다.
실제로 이 열차에는 이런 자들이 수 백명은 넘게 타고 있었다.
유신이 커피를 홀짝거리며 신문을 읽고 있던 그 순간.
"방금 전에는 정말 감동했습니다."
"응?"
청년이 난대없이 입을 열었다.
"조금 전 약자를 도우신 그 고결한 행위요."
"아아."
이제서야 기억났다.
자신이 베르망을 돕기 전에 먼저 손을 뻗던 한 남자가 있었다.
그게 얘였구나?
유신은 피식 웃었다.
"그냥 잠깐의 변덕일 뿐이야."
내 목적을 위한 초석이지.
하지만 청년은 눈을 반짝였다.
"잠깐의 변덕이라고 해도 대단한 건 대단한 겁니다. 이 세상은 불의에 순응하는 것이 너무도 당연하게 변했으니까요."
이거 어느정도 가늠이 되기 시작하는데.
정의충. 뭐, 그런 거냐?
유신은 떨떠름했지만 청년의 장단에 잠시 맞춰주기로 했다.
할 것도 없었고.
청년의 이름은 레오였다.
갈색 머리칼을 가졌는데. 꽤나 곱상하게 생겼다.
느껴지는 에스트는 그렇게 강하지 않았지만 찢겨지고 갈라진 손아귀의 굳은 살.
굉장한 노력파라는 건 알 수 있었다.
유신과 대화가 제법 잘 통하는지. 아니면 원래 성정이 이런건지 그는 금새 유신에게 이런 말까지 했다.
"유신 씨는 클레이모어가 되시려는 이유가 뭐죠?"
"이 세상을 구하기 위해."
"헙? 저, 정말로요?"
"농담이고. 부귀영화를 누리기 위해서다."
잠깐 눈을 반짝였던 레오는 곧 실망한 듯 한숨을 쉬었다.
그러나 곧 가슴을 치며 제 포부를 밝혔다.
"전 클레이모어가 되어 강해져서 나중에 칠검사(七劍士)가 되고 싶습니다. 그리고 종래에는 이 도시를 바꾸고 싶습니다."
세븐 나이츠라...
뭐, 칼잡이라면 누구나가 다 노리는 이상향이기는 하지.
유신은 다른점에 주목했다.
"바꾼다라? 어떤 식으로?"
"좀 더 살기 좋은 곳으로. 사람들의 처우를 개선하고 싶습니다."
별 다른 안전장비도 없이 공장에 들어간다거나. 날때부터 책이나 엄마품 대신 앵벌이에 이용되는 아이들의 기초교육 등.
복지, 노블리스 오블리주 같은 실현 가능성이 낮은 허황된 이야기들을 레오는 줄줄이 늘어놓았다.
몽상가로군.
유신은 헛웃음을 지었다.
"확실히 블루로드의 사람들은 가혹한 환경에 처해있지. 하지만 그것 아나? 바깥은 더 지옥이다."
"알고 있습니다. 저도 외부에서 왔거든요. 그러나 아무리 그렇다고 한들..."
레오의 눈동자가 반짝였다.
"그것이 이 도시 사람들의 상황에 대한 면죄부는 되지 못합니다. 족쇄 자랑일 뿐이에요."
"흠."
유신은 턱을 쓰다듬으며 대도시들이 생겨난 비화에 대해서 떠올렸다.
지금으로부터 한 세기 전.
과거 이 세상을 지배하던 것은 컴퍼니가 아니라 에어리어의 성주들이었다.
본신의 강력한 능력과 휘하의 군단을 앞세워 약육강식. 철혈통치라는 법칙을 이 세상에 내세웠지.
마치 중세시대의 영주들처럼 성주들은 제 땅에서 폭군과 다름 없이 군림했고, 다른 성주들과 전쟁을 하거나 약탈을 하며 제 맘 내키는 대로 살았다.
그리고 그런 암흑시대를 끝낸 것이···
"컴퍼니의 전신인 헬리오스사의 회장. 알렉산더님이죠."
그 기원도, 성장배경도 모른다.
하지만 알렉산더는 어느날 홀연히 나타나 성주들의 에어리어를 차례대로 무릎 꿇렸다.
그들의 막강한 권능도, 능력자 군단도 알렉산더의 힘 앞에서는 아무런 소용이 없었다.
그렇기에 붙은 이명은 뇌신(雷神).
결국 그의 발 아래에서 성주들의 시대는 끝을 맺었고, 컴퍼니라는 새로운 기둥이 생겨났다.
이곳 펑크시티는 그런 알렉산더의 인도 아래 탄생한 새로운 법칙이다.
"분명 처음에는 이런 의도가 아니었을 겁니다. 하지만 고인물은 썩기 마련인 법. 지금 클레이모어들의 경직된 사회에는 새로운 활력이 필요합니다."
이런 타입은 또 오랜만이군.
"그러니까 네가 그 활력이 되어 이를 바꾸겠다?"
"하하. 할 수 있다면 말이죠. 어디까지나 꿈일 뿐입니다."
유신은 비웃지 않았다. 그저 그의 어깨를 두드려주었다.
"멋지군. 힘내라."
자신이 이 세상을 구원하고자 하듯 꿈 역시 누구나 꿀 수 있는거니까.
하물며 저 생각이 뭐, 세상을 불태운다던지 하는 그런 삐뚤어진 것도 아니고.
'극단적인 볼셰비키만 아니라면야.'
"고맙습니다. 저희 모두 꼭 클레이모어가 되죠!"
잠시 후.
열차가 멈췄다.
뭐, 어디 열차강도가 나타난다거나 습격이 일어난다거나 하는 '흔한' 일은 없었다.
유신과 레오는 무사히 열차에서 내려 펑크시티의 중심부라고 할 수 있는 화이트로드를 걸었다.
저벅저벅.
블루로드가 노동자들의 생활상을 그대로 반영한 듯한 풍경을 보여줬다면. 이곳은 그들의 지배층.
브루주아 계급의 모습을 보여줬다.
거리는 깨끗했으며. 지나다니는 사람들은 하나같이 멋들어진 턱시도와 높은 모자를 쓴 채 곰방대를 물고 있었다. 여인들은 코르셋을 끝까지 쪼인 채 양산과 하이힐로 또각또각 걸어다녔다.
"오늘이 그날인가?"
"재밌는 구경거리가 되겠어."
그들은 마치 동물원의 원숭이를 구경하는 듯 우르르 몰려가는 클레이모어 지망생들을 힐끔거렸다.
몇몇 지망생들이 인상을 구겼지만 시험장으로 향하는 길에는 가드들이 쫙 깔려있었기 때문에 그들이 할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이 순백의 거리는 그야말로 계층사회의 민낯을 여실히 보여주고 있었다.
"여전히 이곳은 재수 없네요."
"뭐···"
대충 대꾸해준 유신의 걸음이 멈췄다.
그의 눈앞에는 높게 솟은 빌딩이 그 위용을 드러내고 있었다.
주변에 널린 고딕양식의 건물과 파이프관 따위는 없는. 차갑게 느껴질 정도로 실용적인 21세기 양식의 고층빌딩.
저것이 바로 컴퍼니의 상징이다.
"이곳이···"
침을 꿀꺽 삼키는 레오를 뒤로한 채 유신은 덤덤하게 걸음을 옮겼다.
"앗! 유신씨! 같이 가요!"
대리석 깔린 카운터에 있는 접수원은 친절하게 웃으며 응대를 해주었다.
"클레이모어 시험을 치르기 위해 오셨습니까?"
"그렇다."
"신분증과 접수비 1000크레딧을 제시해주시기 바랍니다."
보통 사람이라면 평생을 가도 모으기 힘든 거금이다.
이는 본 시험에 앞서서 어중이떠중이를 걸러내겠다는 컴퍼니의 의지를 보여주었다.
집안의 재력이든 본신의 실력이든.
이만한 액수의 크레딧을 모았다는 것은 곧 그것 하나로 증명이 될테니.
"처, 천···"
레오가 덜덜 떨면서 크레딧과 신분증을 내민다.
유신 역시 아직 잉크도 마르지 않은 임시 신분증과 함께 크레딧을 내밀었다.
"흐음."
접수원은 순간 유신이라는 이름에 눈을 가늘게 떴다가 이를 갈무리하며 한 곳을 손짓했다.
"레오 님은 A동. 유신 님은 C동 입니다. 이 번호표를 가슴에 차신 후에 안내판을 따라 가셔서 대기해 주시기 바랍니다."
'1004번이라··· 어쩐지 기분 나쁜데.'
"유신 씨 화이팅입니다!"
"그래, 너도."
유신은 배정받은 대기실로 향했다.
넓은 광장같은 곳에는 수많은 인파들로 북적거렸다.
역시나 이곳으로 오면서 봤던 지망생들처럼 하나같이 특이한 복장과 살벌한 무기들을 쥐고 있었다.
'턱걸이조차 안 되는 1위계 수준도 있고··· 호오. 4위계도 보인다.'
능력자라면, 크레딧만 낸다면 누구든 응시자격을 준다.
악명 높은 빌런이나 밴디트만 아니라면 말이다.
그렇다보니 모인 인원들의 수준은 천차만별이었다.
유신이 그들을 살폈듯. 그들 역시 유신을 살폈다. 그러나 곧 관심을 끊었다.
따르르르릉!
별안간 요란한 알람소리가 울리더니 문이 닫혔기 때문이다.
잠시 후.
저벅저벅
단상 위로 푸른색 양복을 차려입은 사내가 올라왔다.
"접수는 여기서 마감하도록 하겠습니다."
오른쪽에 낀 외눈 안경이 인상적인 그는 구비된 마이크를 툭툭 치며 음량을 체크하다가 지망생들을 보면서 말했다.
"반갑습니다 지망생 여러분들. 저는 기욤. 제38회 클레이모어 시험의 1차 담당관을 맡게 되었습니다. 잘 부탁드립니다."
기욤은 기품있게 목례를 했다.
"···"
모여있던 수백 명의 사람들은 아무런 대꾸도 하지 않았다.
지금 그들을 사로잡고 있는 것은 긴장감과 미약한 흥분이니까.
"흠흠. 이번 기수들은 꽤나 과묵하시군요. 그럼 거두절미하고 말하겠습니다."
순간 예의바르게 말하던 기욤으로부터 사나운 기세가 뿜어져 나왔다.
"목숨이 아깝다면 지금 당장 저 문으로 나가십시오."
"헉!"
"큽."
몇몇 담이 약한 지망생들이 가슴을 부여잡거나 기절할 정도의 에스트였다.
이를 행한 기욤은 덤덤하게 말을 이었다.
"컴퍼니에서는 패배자들에 대한 그 어떠한 인도적인 조치도 취하지 않습니다. 불구가 될 정도의 중상은 예사에 죽음은 필연적으로 따릅니다."
"···"
기욤의 겁박에도 사람들은 여전히 침묵하며 우두커니 서 있었다.
하긴 이딴 겁박이나 듣고 물러날 거였다면 진작에 사라졌겠지.
"닥치고 그냥 시작이나 해! 뭘 하면 되는거냐?!"
그 때 누군가가 소리쳤다.
유신이 살피자 일전에 기차역에서 시비가 붙었던 그 대머리였다.
호오. 패기보소.
그래, 저 정도는 되야지.
시험관 기욤 역시 그렇게 생각하는지 씩 미소를 지었다.
"좋습니다. 그러면 제 38회 클레이모어 시험. 시작하도록 하겠습니다."
유신은 생각했다.
기억났다. 이곳 펑크시티에서 치러지는 제38회 클레이모어 시험의 첫 번째 난관.
그것은 분명···
-일단 숫자가 너무 많군요. 조금 줄여볼까요? 자, 지금부터 서로 피터지게 싸우십시오.
이거였다.
저 매끈한 얼굴로 분명 저렇게 말을 했었다.
모범적일 정도로 클리셰적인 진행이라 기억난다.
씨익.
기욤의 입가에 잔혹한 미소가 떠올랐다.
상황을 예감한 유신과 몇몇 지망생들이 에스트를 끌어올렸다.
하지만.
"제 38회 클레이모어 시험. 그 첫 번째 테스트는 바로···"
이어진 발언은 오늘만을 위해 뼈를 깎는 노력을 한 지망생들도 유신도 당황케 하기에 충분했다.
"필기시험이다."
또각또각.
대답은 기욤 대신 문을 열며 등장한 또 다른 인영의 입에서 튀어나왔다.
"뭐, 뭣? 필기?"
지망생들이 눈을 동그랗게 떴다.
'네가 여기서 왜 나와?'
유신은 눈을 가늘게 떴다.
변수발생이다.
< 클레이모어 시험 >
몸에 딱 맞게 제작된 맞춤 정장이 탄탄한 기럭지를 드러낸다.
화염처럼 빨간 머리칼과 짖궂은 미소.
푸후.
풍선껌을 씹고 있는 그녀를 보며 누군가가 말했다.
"아, 아이언 나이트잖아?"
"아이언 나이트?"
"몰라? 7위계 능력자!"
"패, 팬입니다아아악!"
갑작스런 유명인의 등장에 지망생들이 웅성거렸다.
에바그린은 단상으로 다가가더니 기욤과 대화를 나눴다.
"쉘라이트 이사님. 갑자기 시험 내용을 바꾸다니 곤란한데요···"
"보나마나 일단 숫자 좀 줄여보겠다고 치고박고 싸우라고 할 것 아니었나?"
"···그렇긴 합니다만."
"쯧. 무식하긴. 그냥 내 방식대로 해. 이게 훨씬 더 효율적이며 흥미로울 테니까."
아무리 에바그린이 컴퍼니의 본사인 헬리오스사의 대표 이사라고는 하나 이건 명백한 월권행위였다.
그러나 여기서 에바그린의 뜻을 막을 수 있는 자는 아무도 없었다.
당장에 펑크시티 지부의 지배자인 메이슨조차 그녀에게 쩔쩔매지 않는가?
기욤은 떨떠름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지요."
"지망생들은 내 뒤를 따라와!"
"젠장. 공부와는 담을 쌓았는데."
"흐하."
갑작스레 종목이 바뀌자 낙담하는 사람도 있고, 기뻐하는 사람도 있다.
글쎄. 이게 그렇게 간단하게 생각할 문제일까?
인파에 섞여 에바그린의 뒤를 따르던 유신은 생각했다.
필기시험이라니.
이런 적은 처음이다.
모니터 밖에서 수 없이 많은 시험을 치렀을 때도 이런 내용은 없었다.
이건 아마···
'에바그린 덕에 일어난 변수겠지.'
광명교의 핵폭탄이 터지면 중상을 입어 요양하느라 사라졌었고, 그게 아니더라도 그녀는 (구)일본이나 러시아에서 주로 활동했었으니까.
즉 이 세상의 미래는 유신이 알고있던 것과 달리 점차 바뀌어 가고 있단 뜻이었다.
좋지 않은데.
변수는 늘 치명적이다.
'찔리는 것도 좀 있고···'
"정말 좋지 않아. 형씨도 그렇게 생각하지?"
그 때 누군가가 말을 걸었다.
선해 보이는 인상의 사내였다.
"뭐···"
"지금껏 클레이모어 시험에서 필기시험이 나온 적은 한 번도 없었다고. 체력이나 정신력, 괴물사냥에 대한 테스트라면 몰라도 말이야. 보나마나 대단히 어려울 거야!"
"잘 알고 있는 눈초리군."
"그야 당연하지! 현명한 지망생이라면 사전조사는 필수니까."
참. 난 한스야.
하브람의 시장 에밀리오의 밑에서 일하던 자의 이름도 한스였다.
그만큼 흔해빠진 이름이라는 이야기지.
한스라고 스스로를 밝힌 지망생은 넉살좋게 웃으며 악수를 청해왔다.
유신은 그를 잠깐 바라보다가 마주 손을 잡았다.
팅! 그 순간 손아귀로 와닿는 딱딱함.
씨익.
웃고있던 한스의 낯빛이 창백해지더니 황급히 물러났다.
그의 손바닥에는 보랏빛 가시가 삐죽 튀어나와있었다.
유신은 무형갑을 발동시켜 몸 전체를 보호하고 있던 상태였고.
"하, 하하. 나도 모르게 그만! 실례했어!"
'비열한 한스.'
경쟁자를 줄이기 위해 늘 얕은 수를 쓰는 장애물 중 하나다.
역시나 이번에도 나왔군.
유신이 한 방 먹여주려는 찰나.
"줄 맞춰서 서!"
때맞춰서 이동이 끝났다.
바글바글한 내부.
회사 내부에 마련된 웬 광장 같은 곳에 시험 응시자들이 모조리 몰려있었다.
급히 마련된 것처럼 보이는 단상에는 시험지를 들고있는 에바그린 외에도 몇 명의 남녀들이 보였다.
아마 다른 구역을 맡고 있던 시험관들이겠지.
에바그린이 말했다.
"자! 우리 귀여운 지망생 친구들! 그럼 지금부터 1차 시험을 시작하도록 하겠다. 참고로 말하는데 필기시험이라고 허술하게 봤다간 큰코 다칠거야."
이런 곳에서 필기시험을 치른다고?
책상이나 하다못해 팬도 없는 공간에서. 수천 명의 사람들을 한 곳에 모아놓고?
사람들의 머릿속으로 의문이 들던 그때.
에바그린이 씨익 웃으며 손가락을 튕겼다.
서있던 시험관 중 하나가 양손을 모았다.
고오오오오.
한 순간 피어오르는 에스트와 광장을 뒤덮는 기이함.
이건?!
'햐. 이건 또 신박하네.'
유신이 헛웃음을 짓던 그 순간.
콰장창.
세상이 깨어졌다.
***
인지와 동시에 황량한 회색빛의 하늘이 시야를 채운다.
유신은 지금 웬 바윗덩이 위에 서 있었다.
쿠르르르.
그 하나만이 간신히 운신할 수 있을 정도로 협소하며 고립된 바위 기둥에 말이다.
유신이 슬쩍 고개를 내렸다.
깎아지를 듯한 낭떠러지와 어둠이 자신을 맞이한다.
떨어지면 백퍼 죽겠군.
그리고 그 옆에는···
"흐억!"
"이, 이게 뭐야! 미친!"
자신과 똑같은 처지의 지망생들이 제 각각 기둥위에 서있었다.
그들이 당황하던 그 순간.
화르르륵!
정면에서 불꽃이 피어올랐다.
지망생들이 서있는 수천 개의 기둥들의 앞.
그곳에는 마치 야만인들의 의식용 제단을 떠올리게 할 정도로 넓고 평평한 바위가 있었다.
그리고 그 위에는 에바그린과 시험관들이 우두커니 서있었다.
마치 여왕과 그 신하들처럼.
"시험 시간은 60분. 시험 도중에 잡담, 과도한 비명은 탈락으로 간주하겠다. 능력의 사용은 자유다. 같은 지망생에게 손을 쓰는 것만 아니라면 말이야."
씨익 웃은 에바그린이 손을 휘둘렀다.
들려있던 시험지들이 촤르르륵 날아가며 사람들의 손에 쥐여졌다.
시험관들 역시 시험지들과 펜을 휙휙 던졌다.
긴장한 사람들의 얼굴 위로.
수천 개의 종이들과 펜대가 날아다니는 모습은 장관이라 칭하기에 부족함이 없었다.
"중도 포기하고 싶은 사람은 손을 들도록."
그럼 시험시작.
에바그린의 말이 끝나자 허공에서 빛으로 된 회중시계가 나타났다.
째깍째깍
흘러가는 초침 아래 지망생들이 침을 꿀꺽 삼켰다.
세상에.
아공간에서 치르는 필기시험이라니.
그리고 발 아래에는 까마득한 낭떠러지다.
몇몇은 고소공포증이 있는지 비틀거리다가 비명을 지르기도 했다.
"으, 으아아아악!"
"255번 탈락."
쿠르르르!
그러자 낭떠러지 아래에서 튀어나온 거대한 바위손이 호명당한 사람을 잡아챈다.
"컥, 컥컥."
압력에 의해 얼굴이 파랗게 질린 그의 얼굴은 이 공간이 결코 환상으로만 치부할 수 없다고 주장했다.
이건··· 진짜 목숨이 걸렸다.
단순한 필기시험이 아니다.
상황을 깨달은 지망생들이 정신을 수습하던 그때.
유신은 이미 태연하게 자리에 주저앉아 시험지를 살피고 있었다.
'문제는 총 60개. 제한시간 내에 모두를 풀려면 하나당 1분을 넘어선 안 된다.'
우선 무슨 내용인지부터 파악해야겠지.
유신은 안내사항을 넘기며 1번 문항을 살폈다.
문제1 : 트롤의 갈비뼈는 총 몇 개가 존재하며 그 중 어디를 베어내야 가장 고통스러워 하는가?
시작부터 주관식이다.
그것도 노회한 사냥꾼이나 괴물 해체업자가 아니라면 알 수 없는 문제다.
"시발. 이게 무슨···"
옆에 있던 대머리가 머리를 긁적거린다.
한스는 고개를 끄덕이며 긍정했다.
"그래, 클레이모어와 괴물 사냥은 때래야 땔 수가 없지. 납득할 수 있어. 답은 모르겠지만!"
[36개. 왼쪽 갈비뼈 아래에서 3번째]
유신은 손쉽게 답을 써냈다.
그 후로 튀어나온 것은 객관식 문제들.
다른 사람들이 본다면 기함을 토해내는 수준이었지만 빙의자이자 모니터 밖의 고인물이었던 유신은 어떻게든 답안을 작성할 수 있었다.
'이건 1번이고, 이건 3번···'
분주하게 펜을 움직이던 그 순간.
유신이 눈을 가늘게 떴다.
자신의 주변으로 은밀한 에스트의 흐름이 느껴졌기 때문이다.
그는 지체 없이 품에 있던 구슬을 던지며 컨트롤했다.
지이이잉!
파라오의 눈이 광선을 쏟아냈다.
그 대상은 피막 날개를 팔락거리던 외눈괴물이었다.
키에에엑!
하늘 위에서 유신의 답안지를 관음하던 괴물이 잿더미가 됐다.
"큭. 아, 안··· 아아아아악!"
웬 여자가 가슴을 부여잡은 채 비틀거리다가 낭떠러지 아래로 추락했다.
콰직.
섬뜩한 뭉게지는 소리.
이를 보고있던 에바그린이 유신을 힐끔거렸다.
"1004번. 지금 다른 시험생을 공격한 건가?"
이년 봐라. 처음부터 끝까지 다 봤으면서 일부러 이러네?
헛웃음을 지은 유신이 변론했다.
"퍼밀리어 능력을 이용해 컨닝을 시도하더군. 난 그저 대응했을 뿐이다."
"흐음. 그래? 우선은 넘어가도록 하겠다."
1차 필기시험이 절대평가일수도 있고, 상대평가 일수도 있다.
이쯤되면 단순히 문제만 잘 푸는 것만이 정답이 아니었다.
실제로 시험장에는 자신만의 능력을 사용해 다른 사람들의 답안을 훔치거나.
발판 형태의 베리어나 날개를 펼쳐 다른 사람보다 좀 더 원활한 환경에서 문제를 푸는 자들도 있었다.
"이봐! 시험관 양반! 저래도 되는 거야?!"
그 꼴이 보기 싫었는지 대머리가 소리쳤다.
에바그린은 어깨를 으쓱였다.
"능력의 사용에 대한 제한은 없다고 했다."
이것이 바로 능력자들만이 치를 수 있는 특별한 시험과 룰.
"남을 '직접' 공격하는 것만 아니라면."
그리고 이어지는 많은 것을 내포하고 있는 말.
"이, 이새··· 으아아아악!"
퍽.
각양각색의 에스트가 흐름을 타고 날뛴다.
보이지 않는 살수가 오가며 골통깨지는 소리가 연달아 울렸다.
"기궈어어언!"
누군가는 식은땀을 줄줄 흘리면서 손을 들어올리기도 했다.
그 아비규환의 상황 속에서.
"10분 경과."
장난스럽게 웃어보인 에바그린이 손가락을 까딱거렸다.
그 순간.
쿠르르르!
지망생들이 앉아 시험을 치르던 기둥이 흔들렸다.
곧 그 표면이 깎여나가며 앉기에도 협소한, 두 다리로 서는게 고작일 정도로 그 크기가 줄어들었다.
"으, 으아아아!"
"이런 시발! 이런 상황에서 어떻게 시험을 치르라는···"
"3667번 탈락. 77번 탈락."
반론은 허락하지 않는 단호함.
그 많던 지망생들의 숫자가 기하급수적으로 줄어들기 시작한다.
발 한 번만 잘 못 디디면 죽는 낭떠러지에서.
온갖 방해 공작을 뒤로한 채.
깨알같은 글씨에 집중하며 문제를 풀라고 하는 건 보통 담력과 정신으로는 할 수 없는 행동이니까.
'대충 이런 느낌이로군.'
하지만 그런 극한의 상황 속에서도 유신은 침착했다.
속으로는 이 시험의 출제 의도 역시 파악하기 시작했다.
'그 어떤 상황 속에서도 냉정과 침착함을 유지할 수 있는 정신력의 확인. 그리고 그런 상황에서 얼마나 제 능력을 활용하는지. 얼마나 머리를 잘 굴리고 적절한 판단을 내리는지. 이 모든 사항들을 시험하고 있다. 이건 굉장히···'
'잔혹하면서도 실용적이고 세련됐군.'
철의 여제라고도 불리우는 아이언 나이트의 성정과도 딱 맞다.
7위계쯤 되면 극한으로 단련된 초인.
어지간한 인과관계에서는 초탈하게 된다.
사각사각.
2번인가? 아니, 3번 같은데.
확실한 것을 먼저 풀자. 헷갈리는 건 나중에.
유신은 부지런히 펜을 놀리면서 생각했다.
'하지만 이게 끝이 아니다. 분명 뭔가가 더 있어.'
째깍째깍.
"30분 경과."
에바그린의 웃음 띤 목소리가 불길하게 울려퍼진 순간.
옆에 있던 시험관이 땅바닥을 짚었다.
그러자 낭떠러지의 바닥에서 붉은 기운이 폭사했다.
사람들의 얼굴을 시뻘겋게 물들이는 저것은···
부글부글 끓어오르고 있는 용암이었다.
"···!"
툭. 에바그린은 마치 보란듯이 제 머리카락을 몇 가닥 뽑아 용암 속으로 던졌다.
치이이이.
그러자 노릿하게 퍼져나가는 단백질 타는 냄새.
몸 전체로 와닿는 이 뜨거운 열기가 현실감을 일깨운다.
"후후. 더우면 옷을 벗어도 된다."
그런 상황에서조차 에바그린을 비롯한 시험관들은 태연하게 농담을 던진다.
"후우, 후우!"
"기궈어어어언!"
그 끔찍한 허들에 어떻게든 버텨내던 악바리들마저 손을 번쩍 들었다.
"···"
그러든 말든 유신은 흘러내리는 땀을 닦으며 문제를 풀었다.
문제31.
빌런들이 사람들을 납치해 어느 건물들에 가둬뒀다.
건물에는 폭탄들이 설치되어 있으며, 당신은 이중에 단 한 곳의 폭탄만을 해제할 수 있다.
각 건물에 다음과 같은 인물들이 갇혀 있을 때 당신은 어느곳의 폭탄을 해제 할텐가?
1. [첫 번째 건물 : 당신의 부모]
2. [두 번째 건물 : 선량한 시민50명]
3. [번외 : 빌런의 또 다른 끔찍한 요구사항을 받아들이고 협조한다]
양자택일도 아닌 세 가지의 선택지.
심지어 앞의 주관식 문항들처럼 답이 정해져 있는 것도 아니다.
사람마다, 살아온 환경마다 답이 다를 수 밖에 없는 문제가 튀어나왔다.
"폭탄이란 게 뭔데···"
"이런 씹. 난 부모가 없다고. 그렇다면 역시 시민들인가?"
"이게 말이 돼?!"
실제로 이 문항을 마주한 몇몇 지망생들의 한탄이 귓가로 들려왔다.
유신은 헛웃음을 지었다.
그 패악질이나 악폐습이야 어떻든 원론적으로 클레이모어들은 이 세상의 영웅들이자 구원자다. 그렇다면 당연히 악당과의 협조는 고려대상이 못 된다.
시민들을 살리면 패륜이고, 부모를 선택하면 무고한 목숨50개가 사라진다.
저울추는 빌어먹을 정도로 맞지 않다.
유신은 생각했다.
'클레이모어로서 모범적으로 내려야할 답안이라면 2번이겠지. 하지만···'
'막상 이 상황이 닥친다면 누가 이렇게 행동할까? 게다가 지금까지의 문제들과는 달리 너무 단순하다. 정녕 출제자들의 의도가 이건가?'
'가만···'
순간 유신의 머릿속으로 무언가가 스쳐지나갔다.
곧 혼란스러운 지금의 상황과 이 어이없는 문항.
시험관들의 의도가 소용돌이치며 그에게 영감을 선사했다.
'그렇군. 애초부터 이 답안지는···'
유신은 깨달았다.
이 시험의 진정한 의도를.
< 클레이모어 시험 >
'몇몇은 눈치챘군.'
팔짱을 턱 낀 채 지망생들을 훑어보던 에바그린이 생각했다.
갖가지 신비를 부려 위기를 타개하거나. 지금 같은 상황에서도 머리를 굴려 이 시험의 본질을 꿰뚫어 본 녀석 등.
눈에 띄는 녀석들이 몇 명 있다.
하지만 그중에서도 에바그린의 시선을 가장 끄는 것은 두 녀석이다.
'77번이랑 1004.'
한 명은 자수가 수놓아진 고급스러운 옷을 입은 사내였다.
그는 주변의 혼란에도 아랑곳 않고 눈을 감은 채 허리춤의 검을 만지작거리고 있었다.
옆에 있던 시험관한테 눈짓으로 물어보자 그가 답했다.
-몰락한 에어리어 출신입니다. 그 애쉬포드 가의···
-아아. 그 칼잡이들.
'용케 자존심을 버렸군. 녀석들한테 있어서 컴퍼니는 철천지원수일 텐데...'
재밌다.
역시 이 세상은 즐길 거리가 넘쳐난다.
에바그린은 피식 웃으며 이번에는 1004번을 바라봤다.
요근래 자신의 고민거리 중 하나를 해결해 준 당사자이자. 흥미로운 행보를 보이고 있는 이 루키를.
'못 본 새에 에스트가 더 늘었군. 나름 숨긴다고 숨겼지만···'
자신의 눈에는 다 보인다.
정말이지 비정상적인 성장 속도다.
희대의 천재라고 불리던 능력자들과도 어깨를 나란히 할 정도.
물론 그 사실이.
'시험의 통과여부를 점칠 수는 없겠지만 말이지.'
에바그린의 미소가 짙어졌다.
***
유신은 시험지를 꽉 쥐었다가 힘을 풀었다.
곧 다시금 펜대를 움직이기 시작했는데. 그 손놀림에 전과 같은 조급함은 없었다.
"40분 경과."
부글부글!
용암의 수위가 높아진다.
발조차 디디기 힘든 협소한 기둥 아래. 불과 몇 십 센치 차이를 두고 화염이 이글거린다.
"크아아아악! 하, 항복! 항보옥!"
끝끝내 버티던 몇몇 지망생들이 화상을 입더니 다급히 소리쳤다.
너무 긴장해서 시험지를 화염 구덩이 속으로 떨군 사람들도 낙담하며 기권했다.
유신은 무형갑을 활성화시켜 그 죽음의 손길에 맞섰다.
그는 이제 펜대를 움직이지 않고 있었다.
"50분 경과. 이제 10분 남았다."
용암을 사출하던 시험관이 제 능력을 거둬들였다.
"사, 살았다!"
안도하던 것도 잠시 또 다른 시험관이 양손을 펼쳤다.
반짝이는 푸른 수정구.
휘이이잉!
그러자 이번에는 하늘이 새하얗게 물들며 눈보라가 몰아쳤다.
그것은 열기에 달아올랐던 몸을 순식간에 식혀버릴 만큼 차가웠고, 주변 소리는 물론 한치 앞도 보이지 않을 정도로 맹렬했다.
"크으으으으!"
누군가는 화염을 뿜으며 이에 대항했다.
또 다른 누군가는 날개로 제 몸을 감쌌다.
아무런 권능도 없는 자는 그저 기둥에 매달려 제 몸뚱이로 추위를 버텨냈다.
"···"
이 근방에선 오직 유신만이 무형갑의 인도 아래 우두커니 제 자리에 서있었다.
"종료까지 5분."
더욱 더 맹렬해지는 눈보라.
버티다 못해 날아가거나 기권할 정신도 없이 얼어붙어 버린 사람들.
"10, 9, 8···"
모든 것이 순백으로 물들어버린 세상 속.
시간은 지독시리 느리게 흐르며 에바그린의 목소리만이 아련하게 들려온다.
마침내.
따르르릉.
"그만. 다들 답안지에서 손 때."
시험이 종료되었다.
'생각보다 더 빡센데.'
무형갑을 해제시킨 유신이 옷가지를 털었다.
쿠르르르.
그러는 동안에도 지형은 또 제멋대로 바뀌더니 웬 넓은 돌판위에 남아있던 지망생들 모두가 모여들었다. 그 숫자는···
"287명이라··· 후훗. 꽤나 우수한데."
제단에 서있던 에바그린이 웃었다.
유신은 헛웃음을 지었다.
시험을 치르기 전 지망생들의 숫자만 수천 명이었다.
그런데 지금 그 숫자가 10분의 1이하로 줄었다. 고작 1차 시험 하나가 끝났을 뿐인데도 말이다.
원작에서도 이렇게 팍팍 깎여나간 적은 없었다.
이건 그만큼 에바그린의 난관이 가혹하다는 것을 뜻했다.
그만큼 이를 이겨낸 지망생들의 수준이 높다는 뜻이기도 했고.
'아는 얼굴도 몇 보인다.'
"자, 그럼 이제부터 체점을 시작해볼까?"
"허억, 허억. 기다리고··· 있었다고."
에바그린의 말에 대머리가 물에 젖은 시험지를 자신있게 내밀었다.
열차에서 유신과 시비가 붙었던 그놈이었다.
'호오. 저 녀석도 살아남았어? 보기보다 강골인데.'
"으흠. 어디보자···"
에바그린은 건네받은 시험지를 받아들더니.
쫘악!
보지도 않고 찢어버렸다.
***
"무, 무슨···!"
대머리가 눈을 부릅떴다.
지진과 용암, 눈보라의 포화 속에서도 저걸 써내기 위해 얼마나 고생했던가?
그런데 그걸 보지도 않고 찢다니.
그 황당한 행동에 다른 지망생들 역시 거세게 항의했다.
"지금 이게 뭐하는 짓이야! 왜 시험지를···"
"1차 시험 합격자는 이 자리에 있는 287명 전원이다. 축하한다."
"···"
하지만 곧 그들은 에바그린의 입에서 튀어나온 말에 꿀먹은 벙어리가 됐다.
피식.
유신은 웃으면서 손에 들린 시험지를 찢어버렸다.
마치 수능이 끝난 학생들이 교과서를 불태우듯이.
"흐흐흐."
이 상황을 알고 있던 다른 지망생들 역시 마찬가지.
몇몇은 처음부터 시험지를 들고 있지도 않았다.
"이게 무슨···"
대머리가 어리둥절해하자 한스가 엉망이 된 꼴로 답했다.
"아직도 모르겠어 친구? 헥헥. 처음부터 시험지는 페이크였던 거야."
저 놈도 살아남았어?
유신은 한스를 힐끔거리다가 생각했다.
놈의 말이 맞다.
제 1차 필기시험은 처음부터 지망생들의 지식을 테스트하기 위한 시험이 아니었다.
그저 극한의 상황 속.
끝까지 포기하지 않는 인내심과 목표를 향해 달려가는 의지력을 테스트하기 위한 시험이었다.
'각 문항마다 점수가 표기되어 있지도 않았고, 몇 점 이상이면 통과한다는 말도 없었지.'
생각해보면 시작부터 힌트는 있었던 셈이다.
그저 같은 지망생들끼리의 경쟁유도, 몰아치는 극한의 환경으로 시선을 돌렸기에 알아차리는 것이 힘들었을 뿐.
"이, 이럴수가··· 이게 클레이모어 시험?"
살 떨리는 허들에 놀란건지. 아니면 긴장이 풀린건지 대머리가 털썩 주저앉았다.
에바그린이 손가락을 튕기자 또 다시 세상이 깨어졌다.
콰장창.
"으으···"
"끄아아아아!"
사람들은 아공간으로 빨려들어오기 전의 광장으로 되돌아왔다.
그리고 그곳은 비명과 신음으로 아우성치고 있었다.
탈락했던 지망생들은 죽지 않았다.
하지만 죽지 않았다 뿐이지 아공간에서 겪었던 고통은 답습하는지 고통스러워하거나 기절해 있었다.
'물리력을 의지에 따라 구현했다가 무효화 시킨건가?'
방금 전의 시험장은 여러 시험관들의 능력을 한 대 모아서 만들어낸 곳이었다.
뭐가 됐든 이들은···
'오늘 겪은 일로 인해 지독한 트라우마를 겪거나 불구가 되겠지.'
혹은 이를 버텨내고 보다 강해지거나.
실로 살벌하기 그지없다.
그 귀한 능력자들의 목숨은 지금 길거리의 파리만도 못하다.
뭐지?
순간 느껴지는 시선에 유신이 고개를 돌렸다.
하지만 그 수상한 기척을 특정할 순 없었다. 워낙 많은 인파가 몰려있었기 때문이다.
누군가 날 노리고 있는 걸까? 원한관계?
아니면 그저 어그로가 끌렸나?
유신이 생각하던 순간.
"자. 2차 시험장으로 안내하겠다. 합격자 여러분들은 날 따라오도록."
마녀는 잠깐의 쉴 시간도 주지 않은 채 곧바로 사람들을 인도했다.
저벅저벅.
사람들이 향한 곳은 빌딩의 옥상이었다.
거센 바람이 부는 고층 빌딩의 꼭대기에는 아무 것도 없었다.
뭘까? 또 뭘 시키려는 걸까?
"난대없이 저 아래로 뛰어내리라고는 하지 않겠지?"
시작부터 험한꼴을 봐서 그런가? 추측 역시 황당하기 그지없다.
하지만 그게 꼭 틀린 것도 아니라는 게 더 문제다.
지망생들이 웅성거리던 그 때.
지이이잉. 지이이잉.
어디선가 요상한 소리가 들렸다.
몇몇 눈치가 좋은 자들은 이게 모터 돌아가는 소리란 걸 깨달았다.
"때 맞춰서 왔네."
음영 진 에바그린의 시선을 따라 그들이 고개를 들었다.
"···!"
곧 눈을 동그랗게 떴다.
유선형의 기체 위로. 톱니바퀴와 기어가 맞물리며 묵직한 소음을 자아낸다.
그 아래에 달린 날카로운 프리깃함은 연신 프로펠러를 돌리며 힘차게 걸음마를 내디딘다.
하늘을 둥둥 떠다니며 이쪽으로 날아오고 있는 것은 거대한 비행선이었다.
유신이 알고있던 21세기의 것과는 조금 다른.
극도로 발전된 증기기관이 설치된 최첨단 비행선.
'브레스 체플린.'
푸쉬이이익.
빌딩에 마련된 활주로에 비행선이 착륙했다.
거체와는 어울리지 않게 꽤나 고요했다.
문이 열리며 내려온 계단으로 에바그린이 지망생들을 인도했다.
"탑승."
펑크시티의 대외적인 상징물 중 하나이자 강력한 병기 중 하나를 이곳에서 꺼내든다?
그 대범한 스케일에 유신이 헛웃음을 지었다.
그리고 이 녀석을 끌면서 가야할 곳 역시 예상이 되기 시작했다.
1차 시험은 변수 투성이였지만 2차 시험은···
'아마도 그곳이겠군.'
***
"2차 시험이 벌어지는 장소까지는 하루정도 걸린다. 그 전까지 다들 자유롭게 시간을 보내도록."
에바그린의 말에 모여있던 사람들이 하나 둘 흩어졌다.
'하루라. 그 안에 어떻게든 구현이 가능할 것 같기도 하고.'
주먹을 꽉 쥐며 내면을 관조하던 유신 역시 그 인파에 뒤섞여 자리를 옮기는 찰나.
"유신 씨!"
들려오는 목소리에 걸음을 멈췄다.
자신을 부르며 신나게 달려오는 사내는 레오였다.
호오.
"통과했군."
"말도 마십시오. 정말이지 죽는 줄 알았습니다! 설마하니 1차 시험에 그런 비밀이 있을 줄은···"
"괜히 클레이모어 시험이 아니라 이거지."
"동감합니다. 참. 같이 식사라도 하러 가시지 않겠습니까? 이 비행선에는 없는 게 없다던데요."
다양한 영양분의 섭취는 늘 중요하다.
하물며 이 몸뚱이 같은 약골이라면야.
"그러지."
두 사람은 대화를 나누며 선내에 마련된 식당으로 갔다.
마치 연회장을 연상케 할 정도로 고급스러운 식당에는 이에 걸맞는 음식들이 뷔페식으로 차려져 있었다.
"어서 오십시오."
정중하게 고개를 숙이며 시중을 드는 웨이터들까지.
그 태도는 마치 이렇게 주장하는 듯 했다.
클레이모어가 된다면 지금과도 같은 영화를 마음 껏 누릴 수 있다고.
그러니까 포기하지 말고, 악바리를 써가며 통과하라고.
'속 보이잖아. 이 여자야.'
하지만 효율적인 건 부정할 수 없다.
탐욕과 갈망만큼 사람의 마음을 쉽게 이끄는 것이 있을까?
실제로.
"으하하하! 입에서 살살 녹잖아!"
"이거 합성육이 아니네요··· 진짜 소고기에요."
단순히 식사를 제공했을 뿐이건만 지망생들은 열띤 얼굴로 환호하고 있었다.
유신은 나이프를 놀리며 그들보다 덤덤한 기색의 다른 사람들을 주목했다.
고풍스러운 옷차림과 예의바른 식사예절.
마치 나는 남들과 다르다. 이 정도는 익숙하다라는 분위기를 보여주고 있는 인간들을.
'화이트로드 출신들이군. 가문 소속 녀석도 몇몇 보인다.'
'애쉬포드의 둘째도 역시 참전했고···'
시험을 통과하는데에 앞서 가장 위협적인 요인들을 파악하는 찰나.
"2차 시험은 어떤 식으로 치러질까요?"
레오가 우물거리며 말했다.
"글쎄다."
미안한데. 그걸 말해줄 순 없지.
유신이 고개를 저었다.
"뭐가 됐든 1차 시험 만큼이나 어렵다는 것은 분명하다."
클레이모어 시험은 매번 그 내용과 진행 방식이 바뀐다.
짧으면 2차까지 길면 5차 시험까지 가기도 한다.
빙의자인 유신은 이번 2차 시험이 어떤 식으로 치뤄질지 예상은 하고 있었으나 딱 그 뿐이다.
그 이상은 모른다.
이미 아이언 나이트의 개입으로 인해 변수가 발생한 상황이니까.
다른 지망생들 역시 상당한 심리적인 압박감을 받고 있겠지.
앞으로 남은 시험이 몇 개인지.
이를 대비하여 체력의 안배는 어떻게 할 것인지.
다른 지망생들과의 경쟁을 대비. 자신이 가진 패를 어디까지 드러내야 할 것인지.
"고려해야 될 사항이 너무 많아. 다들 웃고있지만 속으로는 머리를 굴리고 있을걸? 2차 시험은 이미 시작된거나 다름 없다."
"···"
즐거워하던 레오의 표정이 굳었다.
그러든 말든 유신은 태연하게 고기를 썰어 먹었다.
캬. 이 집 잘하네.
그 순간.
또각또각.
하이힐 소리가 울렸다.
식당에 나타난 자는 에바그린이었다.
난대없이 시험관이 등장하자 지망생들이 눈을 가늘게 떴다.
뭐지? 또 뭘 하려고?
그 날선 반응에 그녀는 손을 저으며 웃었다.
"긴장하지 마. 나도 그냥 밥 먹으로 온 거니까."
'마주쳐서 좋을 게 없겠지.'
유신은 먹던 고기도 남긴 채 이 자리를 뜰려고 했다.
하지만.
또각또각.
어째 하이힐 소리가 가까워진다. 그리고 유신이 막 자리에서 일어난 그 순간.
"안녕. 1004번."
눈앞에는 에바그린이 접시를 든 채 빙긋 웃고있었다.
눈빛으로는 이렇게 말하는 듯 했다.
당장 자리에 앉으라고.
"···"
유신은 삐그덕거리며 자리에 앉았다.
에바그린은 그런 유신의 옆자리에 앉더니 태연하게 식사를 했다.
달그락.
나이프와 포크, 접시가 마찰하는 소리.
뭐지? 내가 착각한 건가? 그냥 지래 놀라서 괜히 쇼 한 건가?
라고 생각한 유신이 자리에서 일어나려는 순간.
"너."
에바그린이 태연하게 말했다.
"내 이름 좀 많이 팔고 다녔더라?"
오싹.
유신의 몸에 소름이 돋았다.
***
'잡아 땔까?'
'아니, 그냥 잘못했다고 비는 게 맞겠지.'
유신의 염려와는 다르게 에바그린은 그 후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그냥 식사를 끝마치고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만큼의 활약. 기대해도 되겠지?
귓가를 스친 이 한 마디만 빼고.
또각또각.
'후우. 얼추 넘긴건가?'
"유신씨! 아이언 나이트님과 아는 사이셨나요?!"
그 때 레오가 소리쳤다.
그의 눈동자는 지금 사생팬처럼 반짝거리고 있었다.
아, 너도 걔 팬이야?
"그냥 악연···"
유신이 말하려던 순간.
툭.
"앗!"
누군가가 나타나 레오를 밀치면서 말했다.
"이봐. 하층민. 시험관과 무슨 얘기를 했나?"
장발의 은발머리칼에 고급스러운 셔츠와 코트를 입은 사내였다.
유신은 이 자가 누군지 알고있다.
애쉬포드의 둘 째다.
그 밖에도 식당에 있던 지망생들 전원이 자신을 주목하고 있었다.
'염병.'
어쩐지 저 삐뚤어진 여자가 얌전히 그냥 간다했다.
"후훗."
귓가로 들려오는 웃음 소리를 뒤로한 채 유신은 머리를 긁적거렸다.
"시험 힘내라더군."
"···"
납득하는 얼굴은 아니었다.
유신 역시 납득시키려고 한 소리는 아니었다.
무슨 말을 하든 어차피 저들은 믿지 않을테니까.
유신은 지금 거하게 어그로가 끌렸다.
잠시 후.
24시간이 정확히 지났을 무렵 비행선이 정차했다.
지상으로 내린 것은 아니고 제자리 비행을 하는 중이었다.
지망생들은 비행선 내에 마련된 광장에 모여있었다.
에바그린과 시험관들은 단상 위에 서 있었고.
그녀가 말했다.
"자. 그럼 지금부터 2차 시험을 시작하겠다."
유신을 제외한 지망생들 모두가 눈을 가늘게 떴다.
이번에는 뭐냐? 어떤 기상천외한 종목이냐?
마녀는 이번에도 그 기대를 저버리지 않았다.
"2차 시험의 종목은···"
씨익 웃은 에바그린의 손에서 뻣뻣한 종이다발이 나타났다.
"보물찾기다."
[1등 시험 패스권]
[2등 서바이벌 키트]
[3등 식량 주머니]
[번외 유물 교환권]
< 클레이모어 시험 >
이제보니 에바그린이 들고있던 것은 종이다발이 아니라 카드에 가까웠다.
그것도 보통 카드가 아니다. 에스트가 담겨있다.
에바그린이 말했다.
"두 번째 시험은 보물찾기다. 비행선이 정차할 경기장에 이 카드들을 숨겨놓았다. 너희들은 그곳에서 이 시험 패스권을 찾으면 된다."
"앞으로 10일. 시험이 종료되는 그 날 까지 [시험 패스권]을 지니고 있는 자가 통과다."
에바그린은 그 후로 주의점들을 말해주었다.
"지정 구역을 벗어난다면 탈락이다. 경기장 곳곳에는 감시 카메라들이 있으니까 수작 부릴 생각은 않는게 좋아."
뭐, 부릴 수도 없겠지만.
"질문있는 사람?"
대머리가 물었다.
"분명 시험이 종료될 때 까지 그 패스권이라 적힌 종이를 가지고 있기만 하면 된다고 했지? 그 방법에 룰이나 제한 같은 건 없나?"
"무슨 짓을 하던 자유다."
죽이든.
살리든.
겁박하든.
도망치든.
버티든.
"흐흐. 거 좋구만."
내포하고 있는 말에 대머리를 비롯한 몇몇 지망생들이 비릿한 미소를 지었다.
이번에는 한스가 질문했다.
"패스권말고 2등, 3등, 번외는 뭘 의미하는 겁니까?"
"직접 보여주는 게 낫겠지."
[봉인된 트럼프 카드]
에바그린은 3등 식량주머니라 적힌 카드를 쥔 채 말했다.
"해제."
그러자 펑 연기와 함께 카드가 사라지고 그 대신 식수와 식량이 담긴 꾸러미가 에바그린의 손에 들렸다.
'역시 봉인 계통이로군.'
자신이 알고있던 것과 똑같다.
"방금 본 대로 각 카드에는 특정한 물품이 담겨있다. 해제가 시동어며 이를 이용해 시험을 진행하는데에 필요한 물자를 획득할 수 있지. 패스권과 유물 교환권을 빼고 말이야."
"그럼 유물 교환권은?"
이건 내가 알고있던 것에서도 없던 건데?
유신이 물음에 에바그린이 선량해보이는 미소를 지었다.
"일종의 보너스 상품 같은거야. 경기가 종료될 때 이 교환권을 가장 많이 가지고 있는 자에게 컴퍼니가 보유하고 있는 유물을 하나 증여하겠다."
참고로 꽤나 좋은거야.
"···!"
유신은 벌써 세 개나 가지고 있기는 했지만. 일반적으로 유물은 굉장히 구하기 어렵다.
그 중에서도 검증되고 쓸만한 유물을 구하는 건 더더욱 어렵고.
그런 와중에 철의 마녀라고 불리는 능력자가 좋다고 말할 정도의 귀물이라.
사람들의 눈에 탐욕이 불 붙었다.
시험이 치러지기에 앞서 몇몇 개의 그룹을 형성했던 지망생들이 슬쩍 물러났다.
유신은 쯧 혀를 찼다.
'또 나왔군.'
사이 좋게 협력이나 공생하며 시험을 통과하는 꼴은 못 봐주겠다는 저 단호함.
경쟁을 부추기며 약한 녀석은 철저히 도태시키겠다는 잔혹함.
저게 철의 마녀의 방식이다.
"자, 설명은 이쯤이면 된 것 같으니 시작해볼까?"
고오오오.
비행선이 하강을 시작했다.
에바그린이 단상에 있던 버튼을 띡 누르자 강철 차양막이 올라가며 유리창이 드러났다.
그 너머로 보이는 것은···
쏴아아아.
대해의 한복판.
옅은 바닷물에 잠겨 넘실거리고 있는 폐허가 된 도시였다.
***
[제2차 시험 시작이다. 다들 안대를 풀도록.]
시커먼 안대가 툭 떨어진다.
눈을 쓰다듬고 있는 자는 검은 머리칼을 가진 날카로운 인상의 사내였다.
'건물 내부인가?'
시험이 시작될 때 지망생들은 전부 눈을 가린 채 각자 특정한 장소로 인도됐다.
랜덤배치 인거지.
나쁘지 않군.
유신은 무형갑에 에스트부터 채워넣으며 주변을 두리번거렸다.
뚝뚝.
어두컴컴한 콘크리트 건물 내부는 소금기 냄새로 그득했다.
천장에서는 물이 뚝뚝 떨어졌고, 벽면과 나무 토막에는 따개비나 조개를 비롯한 해양 생물들이 다닥다닥 붙어있었다.
확실하다. 이 건물은 침수되었다. 아니, 되었었다.
"흐음."
근방에서 에스트의 흐름은 안 느껴진다.
소리 역시 고요하다.
현재 이곳에는 나 밖에 없는 것 같은데...
아닐 수도 있겠지. 은신 계통 능력이나 몸놀림이 뛰어난 자라면 능히 기척을 숨길수도 있을 테니까.
철컥.
유신은 코트자락에서 꺼낸 기관단총을 오른손에 쥐고, 왼손에는 언제든 이 새로운 힘.
[아룡의 불꽃]을 사출할 준비를 하며 걸음을 옮겼다.
찰팍찰팍.
신발과 수분기가 마찰하는 소리가 고요히 울려퍼진다.
뻥 뚫린 방을 지나고 복도에 도달할 때 까지 습격자는 보이지 않았다.
대신 창문 없는 창을 통해 외부의 광경을 살필 수가 있었다.
유신은 자세를 숙인 채 눈만 굴려 바깥을 힐끔거렸다.
쏴아아아.
옅은 물에 잠긴 무너진 도로 위에 녹슨 자동차들과 군함, 탱크들이 아무렇게나 처박혀 있다.
고층 빌딩이나 아파트들은 멀쩡히 서 있는 것보다 무너져 내리거나. 기우뚱 휘어져 옆으로 처박혀 있는 것들이 더 많았다.
유신은 잠시 2차 시험이 치러지는 이 경기장.
언더워터 시티에 대해서 생각했다.
이곳은 대해의 한복판 수몰되었던 21세기의 (구)도심이다.
하지만 일년에 딱 한 번을 주기로 수면 위로 그 모습을 드러낼 때가 있었는데.
그게 바로 지금이다.
여기서 반나절이 더 지나면 지면을 흐르는 저 얕은 물까지 다 사라진다.
그러다가 다시금 천천히 차오르는 것이다.
그것도 도심 전부까지.
유신은 고개를 들어 이 근방에서 제일 높은 빌딩을 바라봤다.
건물의 꼭대기에는 역시나 따개비와 조개가 다닥다닥 붙어있었다.
'이건 단순한 보물찾기가 아니다. 서바이벌이다.'
이를 증명하듯 무언가가 유신의 눈에 띄었다.
그건 물 위를 둥둥 떠다니는 웬 카드였는데. [시험 패스권]이라고 적혀있었다.
"···"
그리고 이를 향해 접근하는 한 사내가 있었다.
찰팍.
사내는 주변을 힐끔거리면서 신중하게 걸음을 옮겼다. 이윽고 패스권과의 거리가 3미터 남짓되자 갑자기 땅을 박찼다.
"흡!"
그리고 마치 먹이를 사냥하는 표범처럼 재빨리 패스권을 갈취한 후. 다시금 몸을 날렸는데.
탕!
그 순간.
요란한 화약소리가 울렸다.
"어딜!"
사내는 당황하지 않았다.
기예로 느껴질만큼 아크로바틱하게 몸을 틀며 총탄을 피했다.
납탄은 애꿎은 수면만 갈랐다.
하지만.
쐐애액 퍽.
기다렸다는 듯이 사내가 발을 디딘 위치로 화살이 쏘아졌다.
"커헉."
정확하게 가슴이 꿰뚫린 사내가 빙그르르 돌며 바닥에 처박혔다.
옅은 수면 위로 퍼져나가는 핏물.
스르르 빠져나가는 패스권.
'같은 녀석이다. 심지어 화살에는 독까지 묻혀놨군.'
'능력을 사용한 것 같은데.'
유신은 보라색으로 물든 시체의 얼굴.
화살이 날아온 건물의 옥상을 가늠하며 생각했다.
아마 방금 전 죽은 저 사내는 자신이 가진 무력에 자신이 있었을거다.
그렇기에 눈에 뜨인 패스권을 가장 먼저 선점.
본신이 가진 힘을 이용해 이를 지키든 거래 수단으로 이용하든 무언가를 해볼 속셈이었겠지.
하지만 그런 사내의 생각은 먹이를 노리던 더 강한 포식자에 의해 끊겼다.
'길게 봐야한다.'
에바그린은 분명 시험이 종료될 때 까지 [시험 패스권]을 지닌 사람이 통과라고 했다. 바꿔 말하면 시험이 종료되는 그 10일 동안 시험 패스권을 입수하는 것은 물론 지켜야 된단 뜻이기도 했다.
즉 이건 더 이상 보물찾기가 아니다.
보물과 목숨 지키기지.
페허 도시에서 숙련된 살인광들과 굶주림, 가혹한 환경과 벌이는 배틀로얄인 것이다.
10분, 20분, 30분.
이를 증명하듯 인고의 시간이 흐를 때 까지 또 다른 희생자는 나타나지 않았다.
둥둥 떠다니는 패스권의 또 다른 주인 역시 나타나지 않았다.
모두가 이 폐허 더미에 숨어서 기회를 노리고 있었다.
어떻게 하면 더 적은 리스크로 시험을 통과할 수 있을지 머리를 굴리며.
유신은 생각했다.
에스트 인형과 악몽의 나락을 쓰면 손쉽게 상대의 위치와 전력을 끌어낼 수 있다.
숫자 역시 순식간에 줄일 수 있겠지.
하지만.
이것에는 문제가 있다.
지이이잉.
바로 하늘을 날아다니는 저 감시 카메라들.
이것 덕분에 유신은 본신의 힘을 발휘하지 못한다.
그가 강탈자인 걸 들킨 순간 전 세계의 괴물들이 자신을 노리고 달려들 테니까.
이 사실은 자신이 어느정도 이 세상에 자리를 잡았을 때.
강력한 힘과 지위를 얻을 때 까지는 공표할 수 없다.
그렇다면···
'파라오의 눈과 무형갑, 탐욕의 에스트병, 아룡의 불꽃과 총기. 정도인가?'
4등급 위험종이자 유물 파수꾼인 그리폰으로부터 강탈한 강력한 특성.
그리고 최악의 범죄자가 쓰고 노리던 유물들.
이 정도가 지금 당장 유신이 사용할 수 있는 비수들이다.
유신은 피식 웃었다.
충분하다.
이 정도만 해도 자신은 이미 여기 모인 지망생들 중에서 최상위권이다.
하지만 그 화력이 혹시 모를 변수를 완벽히 차단할 수 있냐면 또 아니다.
능력자들간의 전투는 그 상성과 특이성, 환경에 따라 얼마든지 뒤집어질 수 있었으니까.
결론은···
'우선은 신중하게 움직인다.'
겸사겸사 여기서 강탈할 만한 능력이 보인다면 뺏는다.
유신에게 이곳은 합법적인 콜로세움이었다.
***
건물 내부에는 다른 지망생들도 없었지만 식량이나 서바이벌 카드, 유물 교환권 역시 존재하지 않았다.
반나절의 시간이 흐르고.
발목까지 잠기던 물마저 사그라들었을 무렵 유신은 건물의 뒷문으로 빠져나왔다.
수심이 다시 차오르기 전까지의 하룻동안.
교환권은 얻지 못하더라도 유리한 고지는 선점해야 한다.
이를테면 주변을 훤히 내려다볼 수 있는 고층건물 같은 것.
'그 스나이퍼가 있는 곳을 노릴까?'
유신은 고개를 저었다.
아니, 너무 멀다.
그곳까지 가는 와중에 어그로가 끌릴거다.
안 그래도 에바그린의 수작질로 인해 식당에 있던 지망생들이 자신을 주목하고 있는 상황.
쓸모없는 동선은 최대한 줄이고, 최대한 빨리 움직여야 한다.
결국 유신이 택한 것은 자신의 근처에 있는 건물 중에서 가장 높은 빌딩이었다.
초록색 이끼와 따개비로 뒤덮힌.
마치 피사의 사탑처럼 비스듬하게 선 게 언제 무너질지 모를 불안한 빌딩.
저벅.
유신은 천천히 입구로 들어섰다.
직후 느껴지는 섬뜩함에 고개를 들었다.
"잘 가시고~"
비릿한 미소와 함께 천장에 거미처럼 매달려 있던 사내가 떨어졌다.
차캉! 그의 손목에서 뻗어나온 자마다르가 흉흉한 날을 번뜩였다.
"흐흐."
사내는 곧이어 느껴질 손맛을 기대하며 양손을 휘둘렀다.
"···!"
그러다가 곧 눈을 부릅 떴다.
칼날이 놈의 목을 가르기는 커녕 단단한 반발감만 느껴졌기 때문이다.
이건··· 베리어?
"젠장!"
자신의 공격이 무위로 돌아간 것을 깨달은 사내의 대처는 기민했다.
다급히 덤블링을 하며 유신에게서 멀어진 것이다.
하지만.
[아룡의 화염]
푸화아아악!
유신의 손에서 뿜어진 시뻘건 불기둥마저 피하지는 못했다.
──────!
단말마마저 토해내지 못한 사내가 의미없는 아우성을 내뱉었다.
지글지글.
유신의 불꽃이 지나간 자리에는 초고온에 녹아내린 건물들과 땅.
그리고 잿더미 뿐이었다.
일전에 썼던 살아 움직이는 불꽃의 염화와는 비교조차 되지 않는.
그야말로 압도적인 화력이었다.
하지만.
"염병."
이 기행을 행한 당사자는 쯧 혀를 찼다.
그야···
뭐, 남은 게 없잖아?
사내는 순식간에 재가 됐다.
그러니 당연히 소지품 역시 다 불탔다.
'교환권이 있었을지도 모르는데 말이야.'
"화력 조절을 좀 해야겠군."
태연하게 손에 남은 불꽃을 꺼트린 유신은 재만 남은 시신에 손을 갖다댔다.
[곡예사의 은밀한 몸놀림]
이건···
곧 일렁거리는 새로운 힘에 눈을 가늘게 떴다.
***
쏴아아아.
그 무렵 언더워터 시티를 둘러싸고 있는 대해의 근방.
초라한 고무보트 한 대가 도시로 접근하고 있었다.
그런 보트 아래로 여러가지 그림자들이 스쳐지나간다.
수천 미터 수심의 바다 아래에는 온갖 괴물들이 들끓고 있었기 때문.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보트에 타고있던 인영들은 덤덤했다.
"저곳인가?"
"쓸만한 친구들이 많았으면 좋겠는데."
"끼리릭."
기괴하게 날카로운 송곳니, 안대 쓴 애꾸, 온 몸이 구체관절 인형처럼 생긴 자.
보트에 타고있는 인원들은 퍽 요상하며 다양한 특징들을 가지고 있었다.
하지만 그 중에서도 가장 눈에 띄는 자는 선두에서 노를 젓고있는 자였다.
한쪽 팔을 기계의수로 대체한 웬 방독면을 쓴 사내.
후욱.
그는 느릿하게 숨을 내쉬며 가까워지고 있는 페허 도시를 바라보았다.
그 순간.
보트 아래로 거대한 음영이 졌다.
곧 거친 파문과 함께 그 주인이 모습을 드러냈다.
키아아아악!
몸 길이만 수십미터가 넘는 거대한 갑각류로 된 해양괴수였다.
그 덩치에서 나오는 물리력으로만 해도 웬만한 존재는 그냥 압사시킬 정도의 괴물.
하지만.
"···"
보트에 타고있던 자들은 태연했다.
괴수가 아가리를 쩍 내밀며 덤벼들어도 말이다.
괴물의 이빨이 보트를 집어삼키던 그때.
선두에 있던 방독면 사내가 허리춤의 검으로 손을 가져갔다.
스르릉.
불길해 보이는 검은 칼날이 곧은 선을 그리며 뽑혀져 나왔다.
그걸로 끝이었다.
──────!
대해가 갈라졌다.
괴수는 달려들던 그대로 반토막이 나며 바닷속에 처박혔다.
자기보다 수 백 배는 작은 존재가 휘두른 미약한 이쑤시개에 말이다.
갈라졌던 파도가 휘몰아치며 핏물이 퍼져나간다.
보트에 타고 있던 자들은 그런 기행에도 눈 하나 깜빡하지 않고 있었다.
그저 점점 가까워지는 수몰되었던 도시를 보며 입맛을 다셨다.
"개돼지들을 도살할 시간이군."
이 세상을 혼란으로 물들이려는 또 하나의 악의가 침범을 개시한다.
< 클레이모어 시험 >
'쓸만해 보이지가 않는데?'
시신에 손을 댄 순간.
유신은 이 능력이 어떤 식으로 발휘되는지. 어떤 효능을 가지고 있는지 대략적으로 짐작할 수 있었다.
그렇기에 알 수 있었다.
이 힘은 자신이 가진 능력 중 하나를 지우고 얻을 만큼의 메리트가 없다는 것을.
'약간의 기척 제거, 몸놀림이 조금 더 빨라지는 게 다로군.'
'신체 강화에만 집중된 능력이었으면 좋았을 텐데.'
굳이 수준을 논하자면 2위계 쯤 될까?
어중간하게 이도저도 아니다.
유신은 손의 불꽃을 꺼트리며 짜증스럽게 머리를 긁적이다가... 곧 목에 걸고있던 목걸이를 만지작거렸다.
'그래도 쓸 곳이 있을지도 모르니까.'
능력을 영구히 갈아끼우는 게 아닌 탐욕의 에스트 병에 일회용으로 담아뒀다.
"다음부터는 화력 조절을 좀 해야겠는걸."
생각보다 위력이 강해.
직후 불구덩이가 된 땅을 뒤로한 채 덤덤하게 걸음을 옮겼다.
우선 이 빌딩 전체를 싹 돌며 교환권들을 찾아볼 생각이었다.
시험 패스권이야 남은 10일동안 천천히 구하면 된다. 시험이 종료되기 직전에 '양도' 받아도 되고.
하지만 서바이벌 키트와 식량주머니, 유물 교환권은 아니다.
도시가 침수되기 전에 최대한 모아두면 편하다.
이끼가 낀 구덩이 내부.
뼈만 남은 괴물의 갈비뼈 사이.
박살난 채 바닥에 처박혀 있는 녹슨 스테인레스제 서랍이었던 것.
유신은 이 넓은 빌딩 내부를 샅샅이 뒤졌다.
하지만 그럼에도 그의 손에 들린 것은 [유물 교환권] 이 한장의 카드 뿐이었다.
'유물 교환권은 추첨식이라 그런다쳐도. 식량 주머니하고 서바이벌 키트가 이렇게 안 나온다고?'
자신이 운이 없는걸까? 아니면 애초부터 몇 장 뿌려두지 않은걸까?
날 암습했던 사내가 다 챙겼을 수도 있겠지.
뭐가 됐든···
생각보다 까다로운데.
유신은 빌딩의 마지막 층계를 올랐다.
이제 이 복도와 옥상만 확인하면 모든 수색이 끝났기 때문이다.
쾅!
문짝이 존재했던 자리에 드글거리는 따개비를 개머리판으로 후려친다.
유신은 꿉꿉한 복도를 수색하다가 눈을 가늘게 떴다.
스윽.
유신이 방아쇠에 손을 건 그 순간.
"자, 잠깐! 항복! 공격하지 마세요!"
방문에서 웬 사내가 튀어나왔다.
손을 번쩍 들고있는 그의 한 손은 톱니바퀴와 파이프, 섬세한 부품들이 결합되어 있는 기계 의수였다.
'오토메일.'
펑크시티만의 독자적인 문화 중 하나다.
극도로 발달된 증기기관이 만들어낸 신문물이지.
"항복?"
유신이 총구를 거두지 앉자 의수 사내는 냅다 무릎부터 꿇었다.
"미, 밑에서 싸우는 거 다 봤습니다! 전 그 녀석한테 쫒기고 있었거든요!"
"···승산이 없다는 것을 깨닫고 냅다 꼬리를 내리겠다?"
"죽고 싶지 않습니다! 그렇게 끔찍하게 타죽는 건 더더욱이요!"
흔들리는 동공이 사내의 심정을 대변한다.
주변을 슬쩍 보자 매복하고 있는 자들도 없어보인다.
아는 얼굴은 아닌데.
유신이 물었다.
"너, 능력이 뭐지?"
"네, 네?"
"능력."
"헙. 네, 네! 지금 보여드리겠습니다! 공격하지 마세요!"
사내는 유신에게 양해를 구하며 매고있던 큼직한 망치 같은 것을 분해했다.
곧 작은 부품들 수십 개로 분리된 그 망치를 재조립하기 시작했다.
[순간조립]
사내의 눈과 손에서 피어오르는 빛.
채 몇 초도 되지 않아 순식간에 다시 조립된 망치.
"이. 이게 제 능력입니다. 순간조립! 그저 손놀림이 굉장히 빨라지죠!"
이 세상엔 꼭 무언가를 파괴하는데에 특화된 능력들만 있지 않았다.
방금 전 사내의 능력처럼 창조나 보조에 특화된 능력들도 많았다.
통칭 서포팅 계열.
(구)한국을 비롯한 외곽에서는 이런 능력자들을 보는 것이 드물었다.
그야 살아남는데에 별 도움이 되지 않으니까.
"서포트 계열이라··· 그쪽 계통이라면 차라리 클레이모어보다 공방으로 가는 것이 더 괜찮지 않나?"
메트로폴리스에는 이런 기술자들을 운용하는 집단도 있다.
메탈 스미스라 불리는 컴퍼니 휘하의 조직도 있고.
경우에 따라서 성과를 증명해보이면 클레이모어로 임명될 수도 있다.
사내의 답변은 퍽 현실적이었다.
"하하. 그게··· 클레이모어 시험에 참여하기만 해도 훌륭한 이력이 되거든요."
"···그런가?"
제 커리어를 위해 목숨을 거는.
치열한 회색도시에서나 보던 광경.
이 유약한 사내 역시 이 세상을 살아가기 위해 최선을 다하고 있었다.
'아니, 꼭 약하다고 볼 수 만은 없겠지. 그랬다면 1차 시험을 통과하지 못했을 테니.'
유신은 어느새 어두워진 바깥을 바라보다가 총구를 거뒀다.
"네가 팔에 달고있는 그거 오토메일이지. 작동원리가 어떻게 되는거지?"
"그게···"
관련자가 아니라면 접할 수 있는 정보를 수집하고.
"교환권 가진 것 있나?"
"3등 식량 주머니가 한 장 있습니다."
사내로부터 교환권까지 뺏어들고는.
"가봐."
고개를 까딱거렸다.
"가, 감사합니다!"
사내는 뒤도 돌아보지 않은 채 도망쳤다.
유신은 빈 방 중 하나로 들어가 카드를 쥔 채 말했다.
"해제."
펑.
나타나는 것은 통조림으로 된 보관 식품들.
친절하게 따개와 수저까지 넣어놨다.
'딱 1인분이군.'
이곳에 사는 해양 생물들을 전부 다 체내에 독을 지니고 있다.
그러므로 인육을 먹을 게 아닌 이상 식량 수급은 다 이 교환권으로만 해야한다.
유신은 음식을 씹으며 생각했다.
자신의 목적은 학살이 아니다.
능력의 강탈 역시 순전히 제 욕심을 위해서가 아닌 하나의 목표를 위해서다.
바로 이 세상을 구원하는 것.
그러기 위해서 태동하는 싹을 짓밟는 것도 중요하지만 살릴 수 있는 생명은 최대한 살리면 좋다. 이 세상을 재건하기 위해서라면 저런 능력자들도 꼭 필요하니까.
총칼만으로 어떻게 땅을 개간할 수 있겠는가?
뭐, 그 자비심을 저 사내가 알아줄 지는 모르겠지만 말이다.
달칵.
수저를 내려놓은 유신은 내면을 관조했다.
[일곱 번째 그릇]
괴이에서 겪었던 지독한 고행길이 어떤 영감을 준 걸까?
새로운 그릇의 탄생이 얼마남지 않았다.
***
그로부터 며칠이 흘렀다.
남은 시험 기간은 3일.
유신은 그동안 조용히 자신을 습격해오는 경쟁자들만 처리하며 서바이벌을 이어나갔다.
[일곱 번째 그릇]
그 동안 새로운 그릇을 창조해 내는 것에도 성공했다.
노리고 있던 신체강화 능력은 아직 흡수하지 못했지만 말이다.
그 잠깐 사이에 수위는 무섭도록 높아졌다.
이제 낮은 단층 건물들은 다 물에 잠겼고 고층 건물들만이 무사했다.
쏴아아아.
유신이 있는 이 빌딩 역시 옥상을 제외하고는 전부 다 수몰당했다.
난간에 기대어 있던 유신이 고개를 내렸다.
투명한 바닷물 내부로 페허가 된 도로와 건물들이 흐릿하게 일렁거렸다.
그리고 그 사이로는 시커먼 그림자들이 지느러미를 살랑거렸다.
수위가 차오르자 떠났던 이 구역의 해양 괴물들이 다시금 모습을 드러낸 것이다.
'크로켄부터 이빨 불가사리, 따개비 인간까지.'
'여기서 더 차오르면 위험하겠군. 붉은 매기를 비롯한 심해어들까지 상대할 수는 없다.'
[2등 서바이벌 키트]
유신은 카드를 쥔 채 해제라고 외쳤다.
펑.
그러자 나타난 것은 밧줄이 연결된 갈고리와 구명보트, 의약품이 든 상자다.
그 이름에 걸맞게 지금 같은 상황에서 딱 필요한 장비들.
유신은 갈고리를 만지작거리며 고층 건물들간의 거리를 가늠해보다가.
'내가 맞출 수 있을 것 같지는 않은데.'
'파라오의 눈에 묶는다고 해도 내구도도 그렇고, 통제 범위도 불안정해.'
고개를 젓고는 구명보트를 바닷물로 휙 던졌다.
이윽고 노를 저으며 아직 수몰되지 않은 빌딩들로 움직이기 시작했다.
기이익, 기이익.
건물에 숨은 채 이 행위를 지켜보고 있던 살아남은 지망생들이 헛웃음을 지었다.
-미친놈. 그렇다고 이걸 진짜 저런식으로 건너와?
-저거 그놈 맞지? 아이언 나이트하고 얘기 나눴던 녀석.
유신을 힐끔거리던 한 여자가 에스트를 끌어올린다.
훗날 위협이 될 게 확실한 경쟁자를 미리 제거하려는 술수였다.
하지만 옆에 있던 동료가 이를 제지했다.
-관둬.
-왜?
-여기서 빠트리면 교환권 못 챙기잖아? 게다가··· 우리 위치도 들통난다.
-···그렇긴 하네.
하이에나들은 쯧 혀를 차며 유신의 행동을 가만히 주시했다.
지이이잉!
덕택에 유신은 유물을 이용해 괴물들만 내쫒으며 목적지까지 갈 수 있었다.
'머리 굴리는 거 다 보인다 자식들아.'
유신은 속으로 웃었다.
대놓고 보트를 띄운 이유가 이거였다.
바로 교환권의 유무와 지망생들간의 경쟁관계를 고려한 것이다.
적의 적은 나의 친구라 했던가?
모두의 합의점 아래 아이러니하게도 가장 안전한 지대가 만들어진다.
물론 세상사 늘 이성적인 사람들만 있는 것은 아니었다.
쉬이익.
보트 위로 누군가가 떨어져 내렸다.
유신의 손에서 불꽃이 이글거린 것과 사내가 양손을 들어올린 것은 거의 동시였다.
"잠깐, 잠깐. 우리 얘기 좀 하지 않을래?"
고급스러운 재질의 옷을 입은 사내의 몸은 흐릿했다.
유신은 그 모습과 사내가 보트 위로 떨어질 때 일말의 흔들림도 없었다는 특징에서 한 가지 사실을 유추해낸다.
'가문 출신이다. 환영 능력인가? 영체화 일수도 있다.'
가문.
대전쟁에서 컴퍼니한테 패배하고 몰락한 에어리어 성주들의 후손들.
이 시험을 통과하는데에 있어 가장 까다로운 경쟁자가 등장했다.
***
"얘기를 할거면 본체로 오지 그래?"
"미안. 난 겁쟁이거든. 하지만 내 말을 들어서 손해볼 건 없을걸?"
사내는 싱긋 웃으며 유신의 보트가 향하고 있는 빌딩을 고갯짓했다.
"저곳으로 갈 생각이지?"
"그렇다만."
"그렇게 추천하고 싶지는 않은데. 저 안에 바글거리거든."
굳이 시험을 혼자서 통과할 필요는 없다.
함께 힘을 합쳐 패스권을 모은 후에 그것을 분배하면 되는 일 아닌가?
유물은 뭐 나중에 가서 생각하면 그만이고.
아마 그룹을 형성한 지망생 무리가 이미 저 안에 자리를 잡은 모양이다.
"내게 그 말을 하는 이유는?"
"대범한 미친놈한테 해주는 걱정. 그리고 제안."
사내가 멋들어지게 웃었다.
유신 역시 웃었다.
"서로 손을 잡자?"
"나를 포함한 우리 일행은 총 셋이다. 디오도라와 켄싱턴을 비롯한 하나같이 고귀한 가문 출신들이지. 너한테도 나쁜 제안은 아닐텐데?"
저쪽이 무리를 이룬다면 이쪽 역시 무리를 이룬다.
그것도 어중이떠중이들을 거르고 강자들만 골라. 앞으로의 분배에서 보다 더 쉽고 합리적인 결정이 가능하도록.
사내의 말투는 오만한 동시에 그에 걸맞는 자부심을 내비췄다.
난 충분히 그런 실력이 있다고. 그러니까 너도 함께 하자고.
이에 대한 유신의 답은···
"거절하지."
"뭣?"
"우르르 몰려다니는 건 내 취향이 아니거든."
'나 혼자 먹을 것도 부족한데. 이걸 왜 나눠?'
"···하하. 진심으로 하는 소리···"
헛웃음을 짓던 사내가 입을 다물었다.
고요하게 가라 앉아있는 유신의 눈동자와 눈을 마주쳤기 때문이다.
"···"
저건 진심이다.
순간 위압당했다는 생각이 절로 들었다.
자존심에 입은 상처가 얼굴에 그대로 드러났다.
사내의 분신은 이것이 들키기 전에 재빨리 사라졌다.
'싱거운 녀석.'
끼이익.
보트가 멈췄다.
유신의 눈앞에는 창문 따위는 없는 녹슨 철골 흉물이 모습을 드러내고 있었다.
시험이 시작된 첫날.
그 스나이퍼가 자리를 잡았던 빌딩이다.
유신이 이곳으로 온 이유는 간단했다.
저곳만은 유일하게 2차 시험이 끝날 때 까지 완전히 물에 잠기지 않기 때문이다.
'이제 슬슬 자리를 잡아야 할 때다.'
바꿔 말하면 종래에 모든 지망생들은 결국 이 건물로 모일 수 밖에 없다는 뜻이었다.
'개판 한 번 쳐보라는 거지.'
아이언 나이트 이 나쁜년. 잔인한 년.
맥콜 먹여버릴 년.
위이잉.
유신은 허공을 배회하는 눈 형태의 감시 카메라에 제 마음을 듬뿍 담아 중지를 날려주었다.
직후 갈고리를 휙 던지며 어설픈 몸놀림으로 빌딩 내부로 들어섰다.
저벅.
발을 내디디자마자 환영인사처럼 날아드는 송곳.
이에 대응해 유신의 주변으로 반투명한 역장이 생겨났다.
탱!
무형갑은 오늘도 주인의 안위를 철저히 보호했다.
"이야~ 유물 성능 좋네."
가시를 쏘아낸 것은 한스였다.
일전에 복도에서 유신에게 수작질을 부렸던 자.
그를 필두로 1차 시험에서 봤던 대머리와 지망생들 수십 명이 콘크리트 뒤편에서 모습을 드러냈다.
고오오오.
에스트를 줄줄이 뿜어내고 있는 그들은 유신을 보며 비릿한 미소를 지었다.
"교환권이랑 유물들 내려놓고 꺼진다면 목숨만은 살려주지. 어때?"
약탈자들은 핏물마저 채 지우지 않은 채 잔혹한 겁박을 일삼는다.
'그래, 이렇게 나와주는 게 차라리 더 마음 편하지.'
이에 대응하는 유신의 태도는 덤덤했다.
마치 길거리의 쓰레기를 치우듯.
높낮이 없는 어조로.
입가에는 조소를 띤 채.
화르르륵!
손아귀에서 시뻘건 불꽃을 피워올렸다.
"거절하지."
부디 이번에는 쓸만한 능력이 있으면 좋겠는데.
"죽여-어어어어!"
폐허가 된 빌딩에서 악의와 분노로 점철된 신비들이 꿈틀거렸다.
< 새로운 힘. 갑작스러운 난입 >
화르르륵!
유신이 한 손을 뻗자 불기둥이 맹렬한 기세로 뻗어 나갔다.
몇몇 지망생들은 기겁하며 피했지만 몇몇은 우두커니 선 채 능력을 끌어올렸다.
그 사이로 나타나는 것은 각양각색의 형태를 지닌 에스트 장벽들.
"훗!"
불덩이가 뻗어나가지 못하고 제자리에서 버둥거리자 그들이 피식 웃었다.
유신의 입가에서 나타난 미소와 함께 화염의 기세가 달라지지만 않았다면.
"어?"
유신이 에스트를 끌어올렸다.
[아룡의 화염]
불기둥은 더욱 맹렬한 기세로 이빨을 날름거렸다.
장벽들이 차례대로 녹아내리며 그 안에 있는 자들 역시 집어삼켰다.
───────!
호흡기마저 다 타버렸기에 그저 공허하게만 뻗어나오는 단말마.
"미친 무슨 화력이···"
"지금이야! 공격해!"
충격적인 광경이었지만 나머지 지망생들은 전의를 잃지 않았다.
유신의 능력이 사출된 틈을 타 온 사각에서 덤벼들었다.
한 여인이 휘두른 검이 벼락처럼 떨어진다.
무형갑을 활성화 시킨 유신은 어깨로 이를 받아내며 코트 자락을 젖혔다.
쾅!
격발된 산탄에 엉망진창이 돼버린 검사.
"놈!"
이를 노리고 보랏빛 채찍을 휘두른 사내.
샷건을 놓치며 무방비 상태가 된 유신.
"지금이야!"
"크허어어엉!"
그 절묘한 틈에 순식간에 곰으로 변한 대머리가 유신을 덮쳤다.
쩌억, 쩌억.
직후 그 육중한 체중으로 유신을 짓누르며 이빨을 날름거렸다.
"왜. 크륵. 이렇게. 단단해!"
"계속 공격해! 아무리 유물이라고 해도! 에스트가 고갈되면 끝이야!"
[스팅체이서]
한 쪽 손을 가시로 변환시킨 한스가 비릿한 미소를 지으며 유신의 심장을 찔렀다.
다른 지망생들 역시 각양각색의 무기나 능력을 사출하며 유신을 타격했다.
하지만.
"···"
그들이 아무리 권능을 뽐내며 유신을 후려처도 유신으로부터는 아무런 반응이 없었다.
쾅쾅쾅!
꽤나 긴 시간이 흐를 때 까지도 말이다.
"···무슨."
그제서야 상황의 이상함을 눈치 챈 몇몇 지망생들이 창백한 낯짝으로 주춤 물러났다.
하지만.
고오오오오.
"다했나?"
쓰러져 있던 유신으로부터 폭발적으로 에스트가 뿜어져 나온 것.
곧 주변의 기온이 대번에 상승하며···
콰아아아앙!
예의 그 불기둥이 폭탄처럼 터져나간 것 보다는 빠르지 못했다.
──────!
휘몰아치는 강렬한 열폭풍에 지망생들이 튕겨져 나갔다.
삐이이이이.
지근거리에 있다가 회복하지 못할 중상을 입은 자들도.
조금 거리가 있어 충격만 입은 자들도.
"크아아아악!"
하나같이 지독한 이명과 화상에 시달렸다.
저벅.
결국 이 폐허 빌딩의 로비에서 끝까지 서있는 것은 유신뿐이었다.
'얼추 정리됐···'
"쿨럭."
순간 느껴지는 격통에 유신은 입가에서 흐르는 핏물을 닦았다.
직후 생각했다.
'언제 당한거지?'
분명 무형갑의 전신 보호는 완벽했다.
베리어가 깨진 곳 역시 없었는데?
주변을 두리번거리던 유신의 시선은 양팔에 건틀릿을 찬 채 쓰러져 있는 사내에게 향했다.
[되돌려주는 자의 앙갚음]
이 세상에서 오직 유신만이 느낄 수 있는 신비가 내면에서 그 설명을 띄운다.
유신은 사내가 가졌던 능력이자 자신을 노린 흉수를 알아챌 수 있었다.
'카운터 계열 능력이로군.'
'수준이 조금만 더 높았다면 위험했겠어.'
신중을 가하고자 했던 이유가 바로 이것때문이다.
능력자들의 세계는 너무도 방대하며 오묘하다.
언제 어디서 무슨 방식으로 승부가 결정 날지 그 누구도 모른다.
쿠르르르.
이루어진 격전에 폐허 빌딩이 비명을 지른다.
균형을 다잡은 유신이 주변을 둘러봤다.
"으, 으으···"
지망생들은 다 죽지 않았다.
최초의 화염에 휩쓸렸던 자들과 몇몇을 제외한다면 대부분은 중경상에 그쳤다.
그들 역시 마냥 잡스러운 자들은 아니라 이거다.
그저 유신이 가진 유물 무형갑의 강력한 성능과 이를 뒷받침해주는 방대한 에스트로 인해 수세에 몰렸을 뿐.
저벅.
유신이 그들에게로 다가가자 신음하던 지망생들이 힘겹게 말했다.
"사, 살려···"
"살려달라?"
끄덕.
사내의 절박한 얼굴은 곧 다가올 죽음의 공포와 분노로 점칠되어 있었다.
하지만 그 안에는 체념 역시 섞여있었다.
이 자가 우리를 살려줄리 없다는··· 경험에 의거한 체념.
"시부럴. 그냥··· 죽여. 개새끼야. 조롱하지 말··· 큭."
물론 추하게 목숨을 구걸하지 않는 녀석도 있었다.
곰으로 변신했던 대머리였다.
"···"
유신은 그런 각양각색의 친구들을 주르륵 훑어보다가.
"그럼 살려주지 뭐."
아무렇지 않게 툭 내뱉었다.
"너네들 성의표시 하는 거 봐서."
***
[유물 교환권] x 22
[시험 패스권] x 1
유신은 손에 들어온 카드다발을 촤라락 만지며 만족스럽게 웃었다.
그의 앞에는 무릎을 꿇고있는 살아남은 지망생들이 있었다.
유신이 이 친구들을 죽이지 않은 이유는 역시나 미래를 대비하기 위함이다.
앞으로 준동할 괴물들과 돌연변이, 재앙들의 공세에 맞서려면 인간들의 세력은 너무도 미약하니까.
당장에 전세계에서 동시다발적으로 악이 날뛰는데 이에 대항할 수 있는 수단이 너무도 적었으니까.
가능성의 확보란 거다.
너무 미친 빌런만 아니라면 말이지.
강자만이 내보일 수 있는 자비심이라고 불러도 좋다.
"자, 이걸로 상처도 치료하도록."
유신은 압수했던 카드 중에서 서바이벌 키트도 던져줬다.
그러자 지망생들은 연신 감사하다고 외치며 상처를 치료했다.
하지만 딱 한 명.
이에 손대지 않는 녀석이 있었다.
"왜 우릴 살려주는 거냐?"
곰으로 변했던 대머리였다.
녀석은 2도 화상에 피부가 따갑고 고통스러울텐데도 미심쩍은 눈초리를 먼저 보내고 있었다.
이 자식은 진짜 한결같은 놈이로군.
유신은 어깨를 으쓱였다.
"사람을 살리는 것에 이유가 필요한가?"
"우린 너를 죽이려고 했다."
"그러니까 너희들이 경우 없는 살인자 새끼들이라고해서 나까지 똑같아야 되냐고."
쿨럭.
찔끔한 지망생들이 기침했다.
대머리는 툭 내뱉었다.
"위선자 놈이. 방금 전에는 잘도 태워놓고선···"
"상황이 정리된 이상. 굳이 헛된 피를 흘릴 이유는 없지."
이미 여기서 얻을 수 있는 건 모두 얻었다.
유신의 내면에선 새로운 힘이 꿈틀거리고 있었다.
[싹을 틔워가는 전사의 육신]
방금 전에 검을 휘둘렀던 여인의 능력이다.
신체 강화 능력으로 데이브보다 조금 더 수준이 높다.
한 3위계 초입 정도?
뿐만 아니라...
[되돌려주는 자의 앙갚음]
탐욕의 에스트 병에는 혹시 모를 상황을 대비 방금 전의 카운터 능력까지 흡수해뒀다.
즉 유신은 시험의 통과는 따놓기도 했거니와 보유한 전력 역시 한층 더 강화시켰다.
펑크시티로 진입하고, 넓어진 세상에서 본격적으로 능력자들과 맞부딪치기 시작하자 강탈자로서의 권능이 더욱 더 빛을 발하기 시작한 것이다.
'유물 교환권은 좀 더 모아야 되겠지만.'
유신이 생각하던 순간.
"어어! 이 새끼 뭐야?!"
당황한 목소리가 울려퍼졌다.
그 지망생은 유신의 화염에 잿더미가 된 시신들을 가리키고 있었는데.
꾸득꾸득.
한 시신이 이상했다.
마치 사후경직이 일어난 것처럼 혼자서 버둥거리다가.
새카만 피부에서 진물을 주륵 뿜어냈다.
직후 새살이 돋아나는 것이 아닌가?
'저건?!'
그건 가히 신비라고 칭할만 했다.
잠시 후.
"어, 어어···"
시체가 부활했다.
***
"그러니까 이 반지 덕분이었다는 거지?"
"네, 넵. 그렇습니다···"
사내는 죽은 것이 확실했다.
유신의 불꽃에 휘말린 그 순간 말이다.
하지만 부활한 것 역시 사실이었다.
[데프크라토스의 흑마술 반지]
사내가 부활할 수 있었던 비밀이다.
꽤나 강력한 효능을 가진 유물인데.
죽음이 닥친 순간 이를 무효화시켜준다.
물론 유신은 이 반지의 부작용 역시 알고 있었다.
'부활의 대가로 소유자의 영혼을 갉아먹지.'
'보석에 새겨진 마법진의 갯수만큼 남은 횟수를 가늠할 수 있었다.'
본디 육망성이었을 마법진은 이제 선 한 줄기만 달랑 남아있었다.
남은 횟수가 한 번 이라는 이야기다.
"이건 어디서 얻었지?"
"동료들과 시난성 근처의 유적을 털다가 얻었습니다. 제가 주웠을 당시에는 그냥 아무것도 안 느껴지는 돌반지라고 생각했는데..."
그곳은 유신이 펑크시티에서 자리를 잡고 기회가 된다면 털어먹을려고 했던 유적이었다.
하지만 선객들이 있었을 줄이야.
"운이 좋군. 가봐."
유신은 반지를 갈무리하며 사내에게 고갯짓했다.
사내는 부활의 후유증인지 혹은 목숨을 살린 것 만으로도 감사한지 꾸벅 고개를 숙이며 힘겹게 되돌아갔다.
'부작용이 심해서 그다지 환영받는 건 아니지만···'
뭐가 됐든 죽는 것 보다는 낫다.
재생력과는 차원을 달리하는 여분의 목숨이다.
이거 생각지 못한 수확인데?
유신이 웃으며 즐거워하던 그 순간.
탕!
거친 화약소리가 철골과 콘크리트 사이를 지르르 울렸다.
'스나이퍼.'
2차 시험이 시작된 이후 이 빌딩의 옥상에 쭉 자리잡고 있던 터줏대감.
녀석이 당기는 방아쇠 소리가 연신 울려퍼지고 있었다.
이 아래 녀석들과 동맹을 맺은 걸까?
아니면 각자도생? 뭐가 됐든···
"낯짝 한 번 볼까?"
[싹을 틔워가는 전사의 육신]
능력을 발동시키자 흐릿했던 오감이 보다 날카로워진다.
무거웠던 족쇄를 떨쳐버린 유신은 한 마리의 맹수처럼 옥상으로 올라갔다.
'그래, 이거지. 이 느낌이지!'
그러자 보인 것은 위태로운 철골과 콘크리트 더미에 서있는 저격총을 든 애꾸.
그와 대치하고 있는 로브를 쓴 사람이었다.
'체구가 가녀린데. 여자?'
'그보다 에스트 패턴이 어딘가 익숙한데···'
유신이 생각하던 순간.
"또 다른 불청객이로군. 아래쪽에서 소란을 일으킨 주범이 너 맞지?"
저격수는 로브 쓴 자한테 시선을 때지 않으면서 말했다.
"이봐. 친구. 거래를 하자. 내가 가진 유물 교환권을 전부 주지. 나와 동맹을 맺지 않겠나? 이 시험이 끝날 때 까지 말이야."
"호오?"
두 녀석 다 어중이떠중이는 아니다.
느껴지는 에스트의 양이 상당했으니까.
물론 사람의 경지란 게 꼭 에스트로만 판단할 수는 없지만 말이다.
"···"
로브 쓴 자는 유신의 반응에 당황한 것 같았다.
주춤 물러선 그가 뭐라고 입을 열려는 찰나.
스릉.
섬뜩한 검명이 울렸다.
저격수의 목에 실선이 그어졌다.
툭 데구르르.
이윽고 머리와 목이 분리되며 피분수를 뿜어냈다.
저벅.
순식간에 저격수를 죽이며 나타난 것은 웬 은발 사내였다.
조각처럼 미려한 얼굴과 푸른 눈동자.
자수가 놓아진 셔츠와 고급스러운 코트까지 걸친 사내는 장검에 묻은 핏물을 휙 털면서 나른한 목소리로 말했다.
"남은 건 두 명인가?"
***
세 명의 대치 상황에서 한 명이 줄고.
또 다시 위와 같은 대치상황이 벌어졌다.
유신은 갑작스레 나타난 저 사내가 누군지 알고 있었다.
그는 무형갑에 에스트를 있는대로 집어넣으며 가라앉은 눈동자로 말했다.
"로벤 애쉬포드."
"호오. 나를 아나 하층민? 잠깐... 가만보니 식당에서 마주쳤던 자로군."
헬리오스사의 알렉산더 회장을 위시로 한 컴퍼니가 에어리어와의 전쟁에서 승리하고 성주들과 그 세력을 정리할 때에. 모든 에어리어가 불타서 없어진 것은 아니었다.
그들 중 몇몇은 자존심과 위신을 꺾고 컴퍼니에게 목숨을 구걸했다.
그리고 그 아래에서 가문이라는 이름으로 재탄생.
이 망가진 세상의 권력자의 한 축으로서 살아나가고 있었다.
총기와 마법같은 권능이 현란하게 날뛰는 이 세상에서 여전히 시대착오적인 냉병기를 다루는 미치광이들.
눈앞에 있는 사내는 그런 미치광이 집단 중의 하나.
고강한 검술로 유명했던 에어리어.
애쉬포드 가의 둘째다.
그 인성은 모르겠지만 이에 걸맞는 실력은 충분히 가지고 있었다.
그야···
"뭐, 위대한 애쉬포드의 이름을 모르는 이들은 더 적겠지."
훗날 동료로 영입할 수도 있는 네임드 npc이자.
검에 에스트를 담을 수 있는 경지까지 다다른 검사거든.
이를 증명하듯 로벤의 검날에는 시퍼런 오오라가 넘실거리고 있었다.
웬만한 능력이나 보호구는 종이 가르듯 갈라버리는 가공할 권능이자 초인의 상징.
검기.
저건 무형갑으로도 몇 번 막으면 깨져나간다.
유신의 눈이 가늘어졌다.
'백휘도하고 비슷하거나 좀 더 수준이 높다.'
아무리 유신 역시 그동안 강해졌다고는 하나 쉽사리 승패를 점칠 수 없는 상대.
하물며 그런 상황에서 옆에는 불청객 역시 존재한다.
"인사치례는 여기까지 하도록 하지."
교환권을 모으려면 꽤나 바쁘게 움직여야 되서 말이야.
저벅.
로벤이 검 손잡이를 부드럽게 쥐며 자세를 낮췄다.
유신과 로브 쓴 자 역시 에스트를 끌어올렸다.
세 가지의 기운이 맞부딪치며 맹렬한 기운이 공명하듯 퍼져나갔다.
그들이 맞부딪치려던 그 순간.
"···?!"
유신이 움찔거리며 어느 한 곳을 바라봤다.
그 다음은 로벤이었고 그 다음은 로브 쓴 자였다.
그 시선이 향하는 곳에는 어느새 한 인영이 서 있었다.
허리춤에는 시커먼 검을 찬 채 얼굴에는 웬 방독면을 쓰고있는 사내가.
"후욱."
방독면 사내는 마치 처음부터 이 자리에 있었다는 것처럼 자연스럽게 배경에 녹아들어 있었다.
유신은 기이함과 섬뜩함을 동시에 느꼈다.
기척조차 느끼지 못했다.
이 자리에 있는 세 명의 감각을 동시에 파고들면서 난입했다고?
"···네놈은 또 뭐냐?"
섬뜩함을 느낀 것은 유신만이 아니었다.
로벤 역시 갑작스럽게 난입한 사내를 심상찮은 눈으로 보더니 칼끝을 겨눴다.
사내는 태연하게 답했다.
"계속 하라."
후욱.
필터 너머로 새어나오는 목소리는 거칠었으며 기분나빴다.
유신은 로벤의 칼끝으로 에스트가 집중 되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내가 먼저 질문했다. 넌 뭐냐."
"···"
답변은 없었고, 로벤의 인영이 흐릿하고 사라졌다.
범인이라면 인식조차 불가능한 순간. 한 줄기의 섬광이 번뜩였다.
그 안에 담긴 속도와 힘은 유신으로서도 결코 좌시할 수 없는 맹공이었다.
달인의 검이었다.
하지만.
그 검의 주인인 로벤은 지금 칼을 휘둘렀던 자세 그대로 우두커니 멈춰있었다.
스르릉.
직후 방독면 사내가 검을 휙 털자···
─────!
반으로 갈라지며 핏물과 내장을 쏟아냈다.
"···!"
단 일격.
단 일합만에 처참하게 도살된 초인의 모습에 유신의 오감이 경종을 울렸다.
'이런 씹. 네임드 npc가 이렇게 허무하게 뒤진다고?'
< 칠검사(七劍士) >
양단된 로벤의 단면은 마치 자로 잰 듯 깔끔했다.
그 역시 죽음의 순간까지도 죽음이 닥친 것을 인지하지 못했는지 달려들던 그 표정 그대로 쓰러져 있었다.
뚝, 뚝뚝.
그 비현실적인 광경에서 유신은 생각했다.
로벤 애쉬포드는 뛰어난 실력을 지닌 검사이자 초인이다.
자신 역시 이보다는 못해도 신체 강화 능력자의 권능을 흡수하고 진보된 오감의 영역에 들어섰다.
하지만 그런 두 명이 반응조차 하지 못했다.
그건 곧 하나를 뜻했다.
'압도적인 격차.'
저런 괴물이 대체 어디서 튀어나온 거지? 저건 지망생이 아니다.
가만··· 놈이 들고 있는 저 검. 분명 어디선가···
유신이 생각하던 그 순간.
"뭐해요?! 어서 안 도망치고?!"
로브 쓴 자가 유신을 붙잡았다.
직후 어딘가로 이끌었는데.
사아아아.
그것은 허공에서 갑작스레 생겨난 빛으로 된 길이었다.
유신은 순식간에 멀어지는 방독면 쓴 검사를 뒤로한 채 이 정체불명의 능력자를 바라봤다.
"젠장. 젠장. 난 왜 이렇게 운이 없는거람?!"
거친 바람에 로브가 젖혀진 채 욕설을 내뱉고 있는 이 자는.
"클레르?"
백휘도의 일행 중 하나였던 클레르였다.
***
마치 고속 에스컬레이터를 타는 것처럼 빛의길은 깨어졌다가 모여들었다가를 반복하며 두 사람을 인도하고 있었다.
급박한 상황.
유신은 멍청하게 네가 왜 여기에 있지? 같은 질문은 던지지 않았다.
그저 물었다.
"저건 대체 뭐지?"
저 괴물은 뭐냐고.
"절명검 카르갈."
굳은 얼굴의 클레르 역시 최적의 답변을 내뱉는다.
"전 칠검사(七劍士)중 한 명이에요."
검사.
에스트를 이용해 신체를 강화하고, 온갖 신비와 권능이 날뛰는 지금 같은 험악한 세상에서 고리타분하단 말로도 부족한 냉병기를 다루는 미치광이들.
그 중에서도 칠검사는 모든 검사들의 정점에 섰다는 일곱 괴물들을 말한다.
검에 관한 한 최고의 기술과 기예로 무장한 살인귀들.
일찍이 백휘도의 스승이 그랬고. 블라디보스톡의 얼음성채의 주인이 그러했다.
"절명검 카르갈?"
그 중에서도 절명검 카르갈은 그 이명답게 단 일검으로 상대를 도살하는 걸로 유명했다.
유신이 놀라는 이유는 하나였다.
카르갈의 모습이 자신이 알던 것과는 달랐기 때문이다.
자신이 알던 카르갈은 기계 의수도, 방독면도 차지 않았다.
그리고 그가···
"권좌에서 내려왔다고?"
"저도 알아차린지는 얼마 안 됐어요. 방금 전에도 놈이 휘두른 검의 외양을 보고 짐작했을 뿐이에요."
대외비인지 클레르는 말을 아꼈다.
유신은 머릿속이 복잡했다.
알고 있던 미래가 뒤틀렸다.
그리고 자신이 모르는 어떤 음모와 상황이 이 폐허가 된 도시에서 벌어지고 있다.
더 끔찍한 것은 지금 상황에서 유신은 그저 격류치는 소용돌이에 휩쓸린 한 마리의 송사리일 뿐이란 거다.
그 정도로 이 세상의 질서를 주도하며 움직이고 있는 거목들의 존재는 압도적이었다.
"사, 살려줘어어어! 항복 한다니까?!"
"기권! 기··· 끄륵!"
수중도시를 가로지르는 동안 주변에서는 갖가지 파열음과 비명이 들려왔다.
지망생들이 습격당하고 있었다.
그것도 온 사방에서.
흉수가 한 둘이 아니란 뜻이었다.
'카르갈 정도의 강자라면 로벤이 손도 못 써보고 당한 게 말이 된다.'
유신은 카르갈의 배경을 떠올렸다.
그는 분명···
"노스트라의 일원이었지."
컴퍼니조차 토벌에 애를 먹는다는 최악최흉의 범죄집단.
"컴퍼니한테 피해를 입히기 위해 클레이모어 시험장을 습격한건가?"
"지금 그게 중요해요?"
"···"
정론이다.
유신은 고개를 저었다.
지금은 사건의 인과관계 따위를 구성할 때가 아니었다.
시험의 합격여부 역시 생각할 때가 아니다.
그저···
"이 경기장을 벗어날 생각인가?"
여기서 살아나가는 것만 생각해야 한다.
"대해로 가서 잠깐만 버티면 될 거에요. 그럼 컴퍼니에서 손을 쓰겠죠."
[빛의 조형사]
클레르의 능력은 조형시킨 빛에 물리력을 담는 것이다.
그렇다면 지금처럼 허공에 만들어낸 발판으로 이곳을 탈출. 대해 한복판으로 도망친다면 습격자들 역시 쉬이 공격할 수 없을터.
지금으로서 내릴 수 있는 최적의 판단이다.
'보인다.'
쏴아아아.
저 멀리 도시가 끝나는 경계지점이 보였다.
그 너머로 꿈틀거리는 넓은 대해도.
하지만.
상황은 그렇게 수월하게 풀리지 않았다.
쉬이이이익!
일순 주변이 어두컴컴해지며 날갯소리가 들렸다.
유신은 무형갑에 에스트를 밀어넣으며 장벽을 강화시켰다.
쿵!
동시에 둔중한 충격이 들이닥치며 빛의길에서 튕겨져나간 두 사람이 수면 위로 떨어졌다.
키이이익!
그 아래에는 먹이를 노리던 해양괴물이 아가리를 쩍 벌리고 있었다.
하지만 괴물이 포식하는 일은 없었다.
"쯧."
클레르가 다시금 발판을 만들어냈기 때문이다.
두 사람은 빛으로 된 계단을 밟으며 근처에 있던 빌딩의 옥상에 착지했다.
이윽고 시선을 올려 자신들을 습격했던 흉수를 확인했다.
"안 되지. 안 돼."
허공을 유영하던 수 백 마리의 박쥐떼가 한곳으로 모여든다.
곧 그곳에서 검은 망토로 몸을 감싼 창백한 안색의 중년인이 나타났다.
"시험이 아직 끝나지도 않았는데 말일세."
"경기장을 벗어나면 탈락한다는 규칙. 못 들었는가?"
흡혈귀였다.
***
기본적으로 어둠과 혈조술을 다루며 에스트의 개화 여부에 따라 권능 역시 다루는 이들.
살아온 환경과 세월에 따라 다르기는 하지만 흡혈귀는 강력한 종족이었다.
'카르갈처럼 그 경지가 짐작조차 안 되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손쉽게 승부를 장담할 수 있는 놈도 아니야.'
"유신씨! 괜찮으십니까?"
옥상에는 다른 지망생들 역시 있었다.
그 안에는 일전에 기차에서 만났던 레오 역시 포함되어 있었다.
"저 자는 또 뭐···"
흡혈귀의 신영이 사라졌다.
"커헉."
직후 그가 나타난 곳은 한 지망생의 뒤편이었다.
순식간에 여인의 가슴을 꿰뚫고 심장을 적출한 그는 그것을 씹으며 태연하게 말했다.
"딱 알맞게 남았군. 거기 네 사람? 지금부터 서로 죽이게."
"레베카씨!!!"
"승자는 살려주겠네. 요즘 조직이 인력난에 시달려서 말이야."
"이 개자식이··· 무슨 말도 안 되는 소리를···"
분노하던 레오가 눈을 부릅떴다.
"하비씨?!"
챙!
흡혈귀의 말이 끝나자 한 지망생이 냅다 무기를 휘둘러왔기 때문이다.
순식간에 동료를 배신한 그는 처절한 어조로 소리쳤다.
"일단 살아야 될 거 아냐! 저 녀석 솜씨 못 봤어?! 놈은 여기있는 우리 전부를 상대할 자신이 있단거야!"
"아무리 그래도···! 크윽!"
벌어지는 동료들간의 칼부림.
목숨을 구하기 위해 제 신념조차 접어버린 영웅 지망생들의 모습.
"하하하하!"
손뼉을 치며 그 모습을 즐겁게 감상하던 흡혈귀가 시선을 돌렸다.
"음? 자네들은 왜 안 싸우는 건가? 설마··· 연인 사이인가?"
그 시선을 받는 클레르는 태연했다.
"진짜 저 말 대로 할 건 아니죠?"
"더 좋은 선택지가 있는데 내가 왜 그러겠나?"
유신 역시 마찬가지.
"허어?"
"절명검의 목적이 우리가 아니라면 가능성은 있어요."
클레르는 품에서 황금색으로 도색된 리볼버를 꺼내들었다.
차르르륵.
직후 실린더를 회전시키며 총구를 겨눴는데. 그 대상은 흡혈귀가 아니라 자기자신이었다.
탕!
[4]
총탄 대신 나타나는 황금빛의 숫자.
고오오오오.
그 순간 증폭되는 그녀의 에스트.
"···"
심상찮은 기운에 흡혈귀가 눈을 가늘게 떴다.
"나쁘지 않은 숫자."
씨익 웃은 클레르가 양손을 모았다.
"이런데서는 또 운이 따라주네."
[빛의 조형 : 무장]
빛더미가 모여들며 황금빛으로 반짝이는 칼 한 자루가 그녀의 손에 들렸다.
이는 유신 역시 마찬가지.
"서포트 할게요. 저딴 모기 따위. 빨리 처리하고 가자구요."
흡혈귀한테 있어 고도로 압축된 태양빛과 화염은 극상성의 힘.
"좋다."
황금빛 칼날을 쥔 유신이 한 쪽 손을 뻗었다.
[아룡의 화염]
모든 것을 태워버릴 불기둥이 어둠의 일족을 향해 몰아쳤다.
***
그 무렵 펑크시티가 자랑하는 무장 비행선 브레스 체플린의 내부.
주르륵 떠있는 수십개의 모니터 너머에서는 검기와 어둠을 비롯한 가공할 신비들이 넘실거렸다.
그리고 이는 오직 학살.
또 학살만을 피워낼 뿐이었다.
경기장에서 벌어지고 있는 이변을 알아챈 시험관들이 앞다투어 입을 열었다.
"A구역 7번 카메라 파괴! B구역 11번 역시 마찬가지! 실시간으로 눈이 무력화 되고 있습니다!"
"습격자들은 총 다섯으로 판명. 흡혈귀 바그나드 및 인형사의 더미. 그리고···"
잠시 머릿속의 지식과 화면속의 이미지를 떠올리던 그가 눈을 부릅떴다.
"저, 절명검입니다! 절명검 카르갈이 저 무리에 끼어있습니다!"
흑도를 쥔 카르갈이 손을 까딱거릴 때마다 하늘과 땅. 수면이 갈라진다.
그 아래에서 토막나는 지망생들은 그저 거인 앞의 개미들일 뿐이었다.
쟁쟁한 수배범들을 하룻강아지로 만들어버릴 정도로 압도적인 존재감.
꿀꺽.
그 모습은 이 망가진 세상에서 실력을 증명하고, 경력을 인정받아 시험관직을 수행하고 있는 클레이모어들 역시 긴장시키기에 충분했다.
"펑크시티 지부에서 구호요청 확인. 공간이동까지 걸리는 시각 약 한 시간!"
"너무 늦습니다! 저희들이 나서야 합니다!"
아무리 내부적으로 썩어가고 있다고 해도 늘 영웅은 존재하는 법.
몇몇 시험관이 소리쳤다.
그 시선이 향하는 곳에는 이곳의 총책임자 에바그린이 삐딱하게 서 있었다.
"흐음. 이건 그 때의 일에 대한 분풀이일려나?"
"아이언 나이트?"
지금 같은 상황에서도 태연하게 풍선껌을 쩍쩍 씹으며 고개를 갸웃거리던 에바그린은.
"아니, 우리들은 나서지 않는다."
아무렇지 않게 웃으며.
"시험 속행이다."
잔혹한 뜻을 내비췄다.
"···?!"
에바그린의 시선이 향하고 있는 곳에는 한 사내가 있었다.
한 손에는 이글거리는 화염을.
다른 한 손에는 빛으로 된 검을 휘두르며 투쟁하는 흑발의 한 남자가.
***
쐐애애액!
꿀렁거리던 핏물이 송곳처럼 돋아난다.
유신은 땅을 박차는 동시에 무형갑을 운용했다.
'다리 밑과 오른쪽 어깨.'
전신을 감싸는 베리어의 강도를 극도로 줄인다.
그리고 흡혈귀의 공격이 닿는 부분만을 파악. 집중적으로 이곳에만 투사한다.
실로 위험하기 짝이 없는 도박수였지만 효과는 탁월했다.
차캉.
덕택에 바그나드의 공격은 무위로 돌아간 것은 물론 약간의 경직조차 줄 수 없었으니까.
[싹을 틔워가는 전사의 육신]
유신의 손목이 현란하게 돌아가며 빛의검이 번뜩였다.
"크으으으으!"
이에 어깨를 베인 바그나드가 고통스러운 표정으로 주춤 물러났다.
"이 하찮은 송사리가아아아!"
순간 그를 중심으로 모여든 어둠이 폭발적으로 터져나갔다.
분노하는 어조였지만 그의 눈동자는 차갑게 번뜩였다.
마치 유신이 근접전으로 나서며 검을 찔러넣는 것을 기다렸다는 눈치.
하지만 그 순간.
[빛의 조형 : 실드]
클레르가 양손을 뻗자 유신의 주변으로 빛으로 된 장막이 생겨났다.
유신 역시 무형갑에 에스트를 밀어넣으며 방호에만 극도로 치중했다.
챙강!
"큭!"
바그나드가 폭발시킨 어둠의 위력은 굉장했다.
일격으로 클레르의 실드를 깨트린 것은 물론 유신의 장벽 역시 금이 쩍 가게 만들 정도였다.
뿐만 아니라 남은 잔재들이 녹진하게 퍼져나가며 시야를 가리고, 감각을 왜곡시켰다.
쐐애애액!
피어오르는 흑연 속.
들려오는 섬뜩한 소리와 연기 속에서 고속으로 움직이며 꿈틀거리는 실루엣.
지근거리까지 접근한 암살자가 이빨을 날름거린다.
어디냐?
유신은 오감을 끌어올리며 주변을 두리번거렸다.
배후? 아니면 사각?
'아니다.'
하지만 역설적이게도 그런 급박한 상황 속에서조차 머리를 굴렸다.
'놈은 나를 노리는 게 아니야.'
녀석은···
순간 연기가 갈라지며 흉수가 들이닥쳤다.
유신은 품에서 꺼낸 매그넘 리볼버의 방아쇠를 당겼다.
철컥.
자신에게 닥쳐들던 흉수를 향해서가 아니라.
"엎드려!"
바로 클레르의 뒷편으로.
쾅!
무지막지하게 화약을 때려박은 44구경 탄환이 여인의 머리칼을 스쳐 지나갔다.
이는 곧 그녀의 뒤편에서 은밀하게 모습을 드러낸 창백한 사내의 미간을 꿰뚫었다.
"···!"
아무리 흡혈귀의 강대한 육신이 웬만한 물리력에는 내성이 있다고 한들 그 안에 담긴 에너지까지 온전히 무시할 수는 없다.
매그넘탄의 저지력은 이 흡혈귀의 움직임을 일순 멈출 정도로는 충분했다.
그리고 그 찰나의 순간은 유신이 역습의 기회를 잡을 정도로도 충분했다.
"합!"
클레르가 휘두른 빛의검이 핏물로 화해 도망치려던 흡혈귀의 사지를 결박한다.
뒤이어서 유신이 찍어내린 빛의검이 마치 말뚝처럼 바그나드의 가슴을 꿰뚫었다.
"컥..."
피를 토해내는 중년인의 눈동자가 이리저리 흔들렸다.
그건 들이닥친 죽음에 대한 공포도 담고 있었으며 의문 역시 담고있었다.
어떻게?
꽈악.
[아룡의 화염]
───────!
놈의 목을 잡고, 재생조차 불가능할 정도로 불꽃을 토해내며 유신은 답해줬다.
그야···
"너한테 있어서 가장 까다로운 적은 내가 아니라 이 여자니까."
영문을 알 수 없는 상황에 빠진다면 항상 상대의 입장에서 판단하고 생각해본다.
간단한 이치다.
< 절명검(絕命劍) 카르갈 >
역지사지.
말은 참 간단했다.
하지만 실현은 결코 간단하지 않았다.
바그나드는 사방에 흩뿌린 핏물과 어둠으로 혈조술을 구현하며 전 방위에서 유신을 압박했다. 그리고 권능만이 아닌 강력한 육신을 이용해 지근거리에서 난타전을 벌이기도 했다.
도무지 유신이 눈앞의 상황에만 집중할 수 밖에 없도록 정신없이 몰아쳤다.
거기다가 결정적인 순간 더미를 깔아두고 클레르를 노린 약삭빠름까지.
교활함과 전투센스를 동시에 겸비한, 일전에 만났던 적들과는 비교조차 안 되는 괴물이었다.
그런 녀석을 잡아낸 유신과 클레르의 콤비가 비정상적인 상황이었다.
지금껏 서로간의 능력도 제대로 파악하지 못한 채 즉석에서 합을 맞춰 싸웠으니까.
'상성이 좋았어.'
'환경 역시 이쪽이 유리했지. 성채 내부나 야밤에 싸웠다면 훨씬 더 힘들었을 거야.'
끄.으 아아아아아아!
흡혈귀의 재생력마저 압도해버릴 요량으로 유신은 계속해서 화염을 내뿜었다.
클레르 역시 녀석이 혈조술을 사용해서 도망칠 수 없게 빛의 조형술로 압박했다.
쩍, 쩌저저적.
마침내 놈의 피부가 마른 고목처럼 갈라지고, 손끌이 잿더미로 화하며 죽음이 임박한 그 순간.
지잉!
느닷없이 빛이 반짝이더니 바그나드의 신형이 사라졌다.
"점멸?!"
눈을 부릅뜬 클레르가 사방을 두리번거렸다
유신은 바그나드를 불태웠고, 지금도 불태우고 있을 자신의 불꽃에 담긴 에스트의 흔적을 쫓았다.
이 빌딩과 얼마 떨어지지 않은 건물의 옥상.
"하악, 하악···"
처참하단 말로도 부족할 정도로 엉망이 된 중년인이 무릎을 꿇은 채 거친숨을 토해냈다.
그래, 저 정도 수준쯤 되면 숨겨둔 수가 몇 개쯤은 있겠지.
뿌득.
바그나드가 이를 악물었다.
"이 빌어먹을 잡놈들이이이이!!!"
곧 붉게 물든 눈동자로 포효하는 그의 주변으로 맹렬한 에스트가 휘몰아치기 시작한다.
'놈은 지금껏 능력을 사용하지 않았다.'
유신은 생각했다.
'아마 사용하기 상당히 까다로운 조건이 달린 힘이겠지. 혹은 그만큼의 부작용이 있거나.'
'광전사? 변이? 오랜 준비기간이 필요한 강력한 화력사출?'
뭐가 됐든···
그 전에 끝낸다.
[빛의 조형 : 무장]
빛으로 이루어진 활을 소환해낸 클레르가 시위를 당겼다.
유신 역시 에스트를 끌어올리며 최고 화력의 불꽃을 사출한다.
화르르륵!
이리 꼬이고 저리 얽히며 몰아치는 화염과 빛의 폭풍우가 마지막 발악을 준비 중인 흡혈귀에게로 떨어진다.
"끄으아아아아!"
바그나드 역시 준비해뒀던 최후의 비수를 꺼내들었다.
맞부딪치는 두 가공할 신비.
그것들이 이루어낼 하모니의 파장은 굉장히 강력할 것이었다.
그리고 어떤 식으로든 승부를 낼 것이었다.
갑작스레 그 사이에 끼어든 한 인영만 아니었다면.
스르릉.
인영의 손에 들린 흑검이 번뜩였다.
그 순간 서로를 노리던 불꽃과 빛. 혈기의 폭풍이 마법처럼 사그라들었다.
···
아무렇지 않게 가공할 신위를 선보인 방목면의 사내.
절명검 카르갈은 검을 휙 털며 덤덤하게 말했다.
"우수하군."
"···"
뒷골이 지르르 울린다.
방금 전까지 거침없이 투쟁하던 유신과 클레르는 맹수를 앞에 둔 피식자처럼 우뚝 굳었다.
"크윽. 카르갈."
바그나드는 난입한 카르갈을 보며 미간을 찌푸렸다.
"끼어들지 말게. 저 년놈들은 내 먹이···"
푸화아악!
직후 정수리부터 사타구니까지 갈라지며 내장을 쏟아냈다.
흡혈귀가 자랑하는 재생력도 혈조술도 아무런 소용이 없었다.
카르갈은 핏물이 뚝뚝 흐르는 검을 휙 털더니 코웃음을 쳤다.
"사냥당하던 짐승 주제에··· 뭐라는 거냐."
놈이 왜 여기까지 온 거지?
설마 우리를 쫓아 온 건가?
일단은···
어떻게든 시간을 끌어야 한다.
판단을 내린 유신이 말했다.
"동료 아니었나?"
"동료?"
방독면의 필터 너머로 거친 쇳소리가 낮게 조소했다.
"동료란 대등한 위치에서··· 어깨를 나란히 할 수 있는 자를 뜻한다. 녀석은 그저··· 내 목적을 위한 장기말이었지."
"이제보니 그것조차 못 되었던 모양이지만."
한낱 지망생들에게 고전해서 죽였다?
냉혹하기 그지 없는 말이었다.
하지만 무(武)의 꼭대기에 오른 자이자 악명 높은 범죄자에게는 퍽 어울리는 대처였다.
툭.
가볍게 도약한 카르갈이 유신이 있던 빌딩에 착지했다.
"잃어버렸다면··· 채워넣어야겠지."
직후 두 사람을 훑어보았다.
"너희들에게··· 기회를 주겠다."
"지금부터 서로 죽여라··· 그리고 승자로서 기회를 쟁취하여··· 내 장기말 중 하나가 되어라··· 그게 너희들이 살아나갈 수 있는··· 유일한 길이다."
클레르는 전과 달리 헛소리라며 반박하지 않았다.
그저 유신을 힐끔거리더니 한숨을 쉬며 자세를 잡았다.
"우린 할 만큼 했어요. 서로 원망하지 말자구요."
"진짜 이럴건가?"
"그럼 어쩌란 말이에요? 상대는··· 그 절명검인데!!!"
[빛의 조형 : 무장]
방금 전과는 달리 빛으로 된 철퇴가 흉흉한 기세로 유신에게 날아들었다.
유신이 이를 피하며 접근하자 클레르가 무장을 바꿨다.
채캉!
황금빛 방패와 불길에 휩싸인 주먹이 맞부딪쳤다.
카르갈은 재롱거리를 보는 듯한 눈으로 이를 바라봤고. 그 틈을 타 유신은 클레르에게 속삭였다.
-방법이 있다.
"방법?"
에스트의 흐름을 타서 상대방에게만 제 뜻을 전달하는. 전음 비슷한 것이었다.
-어차피 컴퍼니는 곧바로 나서지 않을거다. 이 시험의 총책임자는 아이언 나이트니까.
그 섬세한 에스트 조율능력과 기행에 대해 감탄할 시간은 없다.
그저 몰아치는 상황에 머리를 굴릴 뿐.
-차라리 여기에 걸어. 그게 더 가능성이 클거다.
두 사람이 떨어졌다.
채캉!
직후 또 한 번 무기를 맞댔다.
"···"
얼굴에 떠오른 절박함과 몸짓은 충분히 생사결이라 부를만 했다.
하지만 두 사람은 계속해서 저울추를 만지작거리고 있었다.
정확히는 클레르가.
마침내.
끄덕.
고개를 끄덕인 클레르가 속으로 물었다.
'어떻게?'
유신은 기계로 대체 된 카르갈의 오른팔.
호흡이 힘든지 중간중간 말을 멈추는 그의 모습.
자신이 아직 선보이지 않은 또 다른 비수를 떠올렸다.
그리고 이를 보다 매끄럽게 연결시켜줄 고리 역시도.
-그것 좀 빌리자.
"당신 설마?"
유신이 클레르의 품에서 황금빛 리볼버를 뺏어들었다.
"···지금 뭐하는 거지?"
이상한 기류를 눈치 챈 카르갈이 흑도를 들어올렸다.
'주사위에 목숨 거는 타입은 아닌데···'
'제발. 부탁한다.'
촤르르륵.
탕!
방아쇠를 당기자 나온 숫자는 6.
승리한 도박사의 주변으로 강맹한 에스트가 휘몰아쳤다.
[아룡의 화염]
카르갈이 검을 휘두르기 전. 유신이 뿜어낸 불꽃이 이빨을 날름거린다.
그 어떤 때보다도 강력한 화력으로. 모든 것을 집어삼킬 기세로 말이다.
그 대상은 이 자리에 있는 그 누구도 아닌.
콰아아아앙!
이 폐허 빌딩 그 자체였다.
몰아치는 화염과 폭발하듯이 비산하는 콘크리트 파편.
그 속에서도 태연히 자세를 잡은 채 오만하게 이쪽을 내려다보며 검을 휘두르는 카르갈을 보며.
유신은 양손을 모았다.
[악몽의 나락]
세상이 깨어졌다.
***
칙칙한 회색빛 하늘 아래.
콘크리트로 된 무덤들이 줄줄이 늘어서 있다.
차가운 것을 넘어 음산하게 까지 보이는 이 낯선 공간속에서도 전 칠검사(七劍士)카르갈은 태연했다.
'아공간이군.'
'녀석은 분명 신체 강화와 원소계열 능력자였다.'
'탐욕의 에스트병인가?'
세 가지 능력을 다루려면 그 수 밖에 없다.
판단한 카르갈이 고개를 돌렸다.
그 자리에는 막 꾸물거리며 이쪽으로 다가오던 그림자 인간들이 있었다.
대상의 공포심을 먹고 끝없이 성장하며 웬만한 물리력에는 내성을 가진 피조물.
하지만.
스르릉.
카르갈이 검을 휘두르자 사출된 검기가 그림자 인간들을 갈랐다.
녀석들은 그대로 반토막이 나며 잿더미로 화했다.
그 뒤편에 있던 건물들 역시 순식간에 몇 채가 무너졌다.
그 어디에도 유신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무슨 꿍꿍이를 꾸미나 했더니··· 고작해야 숨바꼭질인가?"
실망한 카르갈이 흑도를 휘둘렀다.
그럴 때 마다 뿜어진 거대한 검기들이 주변의 건물들을 가르고 박살내기 시작했다.
콰앙! 쾅!
이대로 가다가는 아공간 자체가 찢겨져 나갈 듯 했다.
그 순간.
탕!
요란한 화약소리가 울렸다.
카르갈은 고개만 까딱거린 곳으로 총격을 피하고는 땅을 박찼다.
그의 신영이 잔상을 남기며 사라지고 순식간에 수십미터 건물의 옥상에서 나타났다.
번뜩인 칼날 아래에서 꿈틀거리고 있는 것은···
"인형?"
찾고있던 목표물이 아니었다.
풍선처럼 터져나가 쭈글쭈글해진 총기를 들고있는 인형이었다.
"호오?"
카르갈은 대단한 신위를 가진 칼잡이이자 능력자였다.
그렇기에 이 인형이 방금 전 아공간에서 나온 그림자 인간과는 전혀 다른 별개의 능력이란 것을 간파했다.
'같은 유물이 두 개? 그게 아니라면···'
"재밌군. 재밌어··· 이 망가진 세상의 가능성이란··· 인간의 가능성이란···"
필터 사이로 거친 웃음소리가 튀어나왔다.
"너한테··· 흥미가 생겼다."
방독면 아래의 랜즈에서 흉흉한 안광이 번뜩였다.
"장단에 맞춰주마."
쉴 틈 없이 번뜩이는 검기가 회색도시를 집어삼키기 시작했다.
***
'이걸로 시간은 벌었다.'
멀리서 들려오는 굉음을 뒤로한 채 유신은 능력을 마저 사출했다.
[에스트 주입 인형1호]
풍선처럼 부풀리며 나타나는 인형들의 갯수는 총 18구.
전보다 더 강해진 유신의 힘.
클레르의 유물로 인해 한층 더 증폭된 에스트의 효과다.
[나이트워커의 형태없는 어둠]
직후 건물의 그늘에서 뽑아낸 어둠으로 에스트 인형들을 무장시킨다.
어차피 저 괴물을 상대로 근접전은 소용 없을테니 활과 자벨린 같은 원거리 투척용 무기를 구현시킨다.
거목을 쓰러트리기 위한 사냥준비는 차근차근 되어가고 있었다.
'가라.'
유신이 명령을 내리며 에스트 인형들을 잠복시킨 그 순간.
휘몰아치는 검기와 함께 옥상으로 카르갈이 모습을 드러냈다.
그와의 거리는 어림 잡아도 수 백미터.
저 고명한 검사는 유신이 뿜어낸 일말의 에스트를 느끼고 순식간에 이 자리까지 도약해온 것이다.
"역시 내 눈이··· 틀리지 않았군."
카르갈이 흥미로운 어조로 물었다.
"한 가지 물어보겠다. 너··· 어떻게 그 많은 능력을 다룰 수 있는거지? 네 능력은··· 뭐냐?"
"말하면 살려줄건가?"
"당연··· 하다. 넌 이미 내 흥미를 끌었다."
"좋다. 말해주지. 내 능력은···"
달칵.
유신은 말을 하다말고 옥상문을 열며 건물 안으로 들어갔다.
카르갈이 문짝을 가르며 내부를 살피자 유신의 모습은 어느새 씻은듯이 사라져 있었다.
"···"
이곳은 아공간.
침범자로부터 특별한 룰과 법칙을 강요하는 기묘한 장소.
지난번 괴이를 해결하고 펑크시티로 향하던 무렵.
유신은 자신이 가진 능력들의 특성과 다양성을 다시 한 번 파악하고. 어떻게 하면 이 능력들을 보다 강화시킬 수 있을지 연구했다.
그 안에는 인형사로부터 빼앗은 이 능력[악몽의 나락]에 대한 연구도 있었다.
강탈자의 재능 수치는 압도 그 자체.
유신은 이 자질에 힘입어 악몽의 나락의 성질을 변화시키는 것에 성공했다.
공포를 잡아먹은 피조물들이 물리력을 가진다는 특성은 그대로 둔 채. 환경에 변주를 준 것이다.
그리고 그 변주는 공간이동과도 비슷한 맥락을 가지고 있었다.
지정된 문을 열고 들어가면 다른 건물의 내부가 나온다.
마치 주머니 고양이가 사용하는 마법의 도구와도 비슷한 알고리즘을 이 아공간에 새겨넣었다.
덕분에 유신은 카르갈의 손아귀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물론.
콰아아앙!
'벌써···'
이를 감지해내고 쫓아온 녀석의 마수에서 벗어나기 위해 재차 문을 열고 공간을 이동해야 했지만 말이다.
흑도가 춤을 출 때 마다 건물들이 붕괴하며 공간 자체가 흔들린다.
유신은 아공간 자체가 깨지지 않게 거듭 에스트를 주입하며 이를 담금질 하는 동시에.
문을 열며 공간을 이동해야 했다.
스르릉.
한 번, 두 번, 세 번을 넘어 어느덧 수십 번.
샐 수 없을 정도로 수많은 검광이 번뜩인다.
쿠르르르.
유신이 구현해낸 회색도시는 어느새 우뚝 솟은 한 개의 탑만을 남긴 채 폐허가 되어있었다.
그 탑 역시 방금 카르갈이 휘두른 참격에 반토막이 나며 우르르 무너졌지만 말이다.
물론 의미없는 도주의 시간만은 아니었다.
우선 판을 설계하는 동시에 카르갈의 에스트와 체력을 소모시켰으며.
'내 눈으로는 녀석의 검을 쫓을 수 없다.'
유신은 카르갈이라는 검사에 대해 조금이나마 파악할 수가 있었다.
'차라리 놈이 검을 휘두를 때의 에스트 패턴과 흐름을 느끼고 대응해야 한다.'
도저히 잡히지 않는 미몽에 대한 유신만의 대처법.
그 어떤 능력자보다도 에스트에 민감하며 이를 자연스럽게 다룰 수 있는 강탈자만의 기질.
[에스트 장벽]
제각각 다른 형태로 중첩된 수십개의 장막이 칼날의 궤도를 흩트러트린다.
에스트를 극한까지 담아 구현한 무형갑이 이 철벽을 뚫고 들어온 검날을 버텨낸다.
그것마저 깨트리고 날아드는 검날은.
[나이트워커의 형태없는 어둠]
손에서 사출해낸 끈적한 어둠의 사슬로 잡아챈다.
"호오···"
동시에 여러 개의 능력을 다룬다.
그건 곧 준비된 여러 개의 도화지에 제각각 다른 형태의 복잡한 그림을 그려내는 것과 같다.
그만큼 어마어마한 집중력과 사고력을 필요로 한다.
찰나의 순간 목이 달아나는 검사와의 육탄전에서 아무렇지 않게 이를 해내보인다는 것은 곧 유신이 가지고 있는 찬란한 재능의 편린을 엿볼 수 있게 해주었다.
딱!
유신이 손가락을 튕겼다. 그러자 폐허 더미에 잠복하고 있던 에스트 인형들이 시위를 당기며 카르갈의 사각을 노린다.
아무리 고명한 검사라고는 하나 저걸 몸뚱이만으로 다 받아낼 수는···
──────!
웃기게도 카르갈은 검풍만으로 그 공격을 무효화시켰다.
하지만 유신은 당황하지 않았다.
칠검사(七劍士) 절명검 카르갈.
모든 검사들의 정점 중 하나이자 이 세상을 호령하는 강력한 초인.
그 정도 되는 자에게 이런 얕은수가 통하리라고는 생각지 않았다.
일정한 정도를 넘어선 격차는 능력의 상성 따위 씹어먹어버리니까.
그저···
'약간의 흩트러짐.'
검풍을 일으킬 때 사용한 잠깐의 동작.
암습에 대한 찰나의 주의력 배분.
그 잠깐의 틈만 만들 수 있으면 된다.
화르르륵!
카르갈의 시선이 팔린 틈을 타 유신의 손에서 불기둥이 뿜어져 나왔다.
지금까지의 불꽃다는 조금 다른 극한으로 응축시켜 범위를 줄인 대신 그 위력을 높인 화염이었다.
투타타타타!
다른 손에서는 (구)시대의 화약병기가 또 다른 불꽃을 뿜어냈다.
유물 파라오의 눈 역시 그 파괴적인 빛을 토해냈다.
나이트워커의 어둠 또한 송곳처럼 섬뜩한 칼날을 토해냈다.
[도박사의 러시안 룰렛]으로 증폭된 에스트.
그동안 강탈하고 강화시킨 수많은 능력들.
유신은 자신이 가진 모든 전력을 이 일격에 쏟아부었다.
무너져 내리던 건물 파편들이 잿더미가 되고.
여기서 더 분해가 되지 않을 것 같던 주변 환경들이 초토화 될 정도로 맹렬한 공세였다.
그 결과는···
울컥.
도로 위에서 비틀거리며 핏물을 토해내는 유신의 모습으로 끝을 맺었다.
인형사로부터 강탈했던 유물 역시 산산이 조각나 바닥을 구르고 있었다.
"···"
카르갈은 식은땀과 핏물로 인해 엉망이 된 유신을 물끄러니 바라보며 검을 휙 털었다.
"나름대로 인상적이었다."
모든 것을 끌어다 썼기에 녹초가 된 유신과는 달리 그는 호흡만 약간 거칠어졌을 뿐. 아직도 여유로워 보였다.
애초에 카르갈은 유신의 수준에 맞춰 장단을 맞춰줬던 것이다.
물론 그 수준이란 게 까딱하면 목이 달아나는 초인들의 영역이었지만 말이다.
이건 그만큼 카르갈이 유신의 능력을 인정하고 그를 탐낸다는 뜻이었다.
"후우, 후우."
"아직 질문에 대한 답을···"
카르갈이 말을 하던 그 순간.
지지지직.
그의 오른손에 달려있던 기계 의수가 거친 마찰음을 냈다.
카르갈의 강대한 육신 속에 존재하는 단 하나의 불협화음이 과부화를 일으킨 것이다.
그가 말했다.
"노림수가··· 이거였나?"
카르갈은 의수를 만지작거리더니 왼팔로 검을 바꿔들며 코웃음을 쳤다.
"고작 이거뿐이라면··· 좀 실망인데."
외팔이가 된다고 한들 너 정도는 손쉽게 짓밟을 수 있다.
네가 아무리 다양한 권능들을 부려도 말이다.
그 오만한 말투에 담긴 의미는 이랬다.
실제로 틀린말도 아니기도 했고.
유신은 쓴 웃음을 지었다.
"거 존나게 튼튼하군."
카르갈은 비틀거리는 유신을 물끄러미 쳐다봤다.
"이쯤됐으면··· 깨달았겠지? 넌··· 나를 이길 수 없다. 이제 그만 포기하라."
다 포기하고 밑으로 들어와라.
그리고 네가 가진 그 능력의 비밀을 토해내라.
어쩌면 나를 가로막고 있는 이 벽을 깨트릴 수도 있는 그 비밀을.
카르갈이 말했다.
하지만···
"그런가?"
유신의 눈동자에 서린 감정을 읽은 카르갈은 쯧 혀를 찼다.
저 안에 담긴 감정은 체념이나 굴복이 아닌 끝모를 투쟁심 뿐이었으므로.
"안타깝군··· 재능넘치는 꽃이 지는 모습을 보는건···"
"언제나 안타까워."
말과 함께 참격이 떨어졌다.
유신의 얼굴과 상체, 하체위로 실선이 그어졌다.
이 세상을 구원하고자 했던 영웅은 핏물과 내장을 토해내며 영원히 침묵했다.
쿠르르르.
주인이 사라지자 아공간이 비명을 지르며 깨져나간다.
마치 유리 조각처럼 떨어지는 세상의 편린 속에 있던 카르갈이 눈을 가늘게 떴다.
공간의 붕괴가 갑작스레 멈췄기 때문이다.
"···이건."
카르갈이 이를 인지한 순간.
느닷없이 그의 가슴께가 갈라지며 핏물이 치솟았다.
[에스트 장벽]
뒤편에선 투명한 장벽이 돋아났다.
촤르르륵. 어디선가 나타난 검은 쇠사슬들이 카르갈을 속박했다.
"퉤!"
직후 벌어진 일은 놀라운 신비였다.
분명 죽어있었을 시체가 비척 자리에서 일어났으니까.
"정말 엿같은 기분이군."
[응축된 괴이의 신비]
설계된 이 판의 마지막 비수를 다른 손에 쥐고서.
시체는 아니, 유신은 떨리는 손으로 손가락을 튕겼다.
콰아아앙!
유신을 중심으로 폭발하듯 뿜어져 나간 불꽃이 카르갈과 그 스스로를 집어삼켰다.
< 절명검(絕命劍) 카르갈 >
이글거리는 화마에 온 몸이 시뻘겋게 달아오른다.
발간 피부는 식은땀을 비명처럼 토해냈고, 눈앞은 오직 진홍의 색으로 붉게 물들었다.
후우, 후우.
숨을 들이키자 폐마저 익어버릴 정도로 침범하는 열기.
유신은 순간 생각했다.
이렇게 뜨거웠던가?
이렇게 고통스러웠던가?
하지만···
'멈출 수 없다.'
[아룡의 화염]
이글거리는 불구덩이 속에서도 유신은 계속해서 권능을 사출했다.
화르르륵!
주변을 둘러싼 장벽이 열기에 녹아내리고.
그 내부가 마치 지옥에서 기어올라온 듯한 악마들의 쉼터로 변모할 정도로 쉴틈 없이 뿜어냈다.
'호흡이···'
얼마나 지독하게 토해냈는지. 공기마저 모조리 연소되어 시야마저 흐릿해진 그 순간.
화마 속에서 서슬퍼런 빛이 번뜩였다.
인지는 고통과 동시에 찾아왔다.
푸확!
깊숙히 가슴을 베인 유신의 오른손이 떨어져 나간다.
직후 불구덩이 속에서 시커먼 음영이 지며, 불구덩이 속에서 나타난 무언가가 맹수처럼 유신의 목을 틀어쥐었다.
파지지직.
화염을 가르고 튀어나온 그것은 황동과 파이프관, 태엽장치로 이루어진 강철의 색으로 빛나는 손이었다. 지금은 그저 이리저리 녹아내리고 스파크를 튀기는 볼품없는 쇳덩어리였지만 말이다.
"그렇군··· 애초부터 노리던 것은··· 이거였군."
잦아드는 화염 속.
유신의 목을 틀어쥐고 있던 카르갈이 방독면을 벗었다.
흉터자국과 화상으로 얼룩졌음에도 강인한 선을 가진 사내의 얼굴이 나타났다.
유신에게 당한 상처가 아니다.
그보다 오래된 낙인이었다.
"죽음마저 미끼로 삼아 이 한 방을 준비했구나. 훌륭하다."
쇠긁는 소리 대신 들려오는 중후한 목소리.
어조에는 끊김 조차 없다.
너를 인정한다는 듯 제 본모습을 드러낸 초인은 유신에게 극찬을 날렸다.
"이름이 뭐지?"
"···유신."
"유신. 여전히 네가 품었던 그 마음에 변화는 없나?"
척.
유신은 대답 대신 하나남은 손으로 중지를 올려주었다.
카르갈은 흐릿하게 웃으며 검을 들어 올렸다.
이번에는 구명의 수단조차 통하지 않도록.
산산조각을 낼 기세로.
고오오오.
피어오르는 검기가 파괴적인 기운을 뿜어냈다.
직후 유신을 향해 빠르지도 느리지도 않은 속도로 떨어진다.
그것은 선고였다.
모든 것을 다 불태우고 소진한 전사에게 이제 남은 것은 죽음뿐이라는 변하지 않을 선고.
그 찰나의 유예 속에서도 유신은 덤덤했다.
그저···
손에 흐르는 식은땀을 닦으며.
출혈로 인해 흐릿해지는 정신을 다잡으며.
콰득.
쥐고있던 보석을 깨트렸다.
"···?!"
카르갈의 눈앞에 처음으로 당황이란 감정이 드러났다.
***
타오르던 불꽃의 비명이 사라진다.
격전에 무너져 내리던 세계의 비명 역시 사라진다.
유신이 보석을 깨트린 순간.
일순 요란스럽던 주변은 고요한 침묵 속으로 잠겨들었다.
사아아아아.
그 사이로 퍼져나가는 안개.
이 습하고 끈적하며 기분나쁜 안개는 두 사람을 순식간에 집어삼켰다.
그리고 그 순간.
유신과 카르갈은 내면에서 맥동하던 힘을 잃어버렸다.
에스트.
모든 능력자들의 근원이자 힘.
막대한 권능을 다루는 원소나 사이킥, 변이 계열 능력자들도.
강력한 육신이 권능 그 자체인 초인들 역시 에스트가 없다면 그저 한낱 범인에 지나지 않는다.
···
마치 전신에 구속구라도 찬 듯 온몸에서 느껴지는 강력한 압박감.
호흡조차 힘든 목구멍.
충만함 대신 텅비어버린 내부.
한 순간 에스트가 사라지자 카르갈이 눈을 부릅 떴다.
하지만 그는 동시에 이 자리까지 오면서 쌓은 방대한 경험을 말미암아 이변을 순식간에 눈치챈다.
"봉인 능력인가?! 아냐, 그런 낌새는 없었... 이건 설마 괴이의···?!"
콰앙!
말을 하던 카르갈이 요란하게 튕겨져나갔다.
그 격발음의 주인은 유신이었다.
"···"
목에는 손모양으로 된 짙은 화상자국을.
오른손은 어깻죽지부터 떨어져 나간 중상을.
온 몸에도 역시나 크고 작은 생채기를 입은 그는 지금 남은 왼손을 힙겹게 들어올린 채.
철컥.
턱으로 총구를 젖히며.
"까득."
이빨로 탄환을 재장전한다.
콰앙!
그리고 다시 격발.
"컥!"
유신의 몸이 격하게 비틀거린다.
카르갈이 또 한 번 바닥을 굴렀다.
그는 지금껏 보여줬던 압도적인 무위도 선보이지 못한 채 피를 토하며 움찔거렸다.
칠검사(七劍士)라 불리던 강대한 초인이.
아니, 모든 능력을 봉인당하고 한낱 범인이 되어버린 무인이.
차가운 총구 앞에서 살기 위해 발버둥쳤다.
지금 이 순간 유신은 지옥에서 기어나온 전사요.
카르갈은 이빨을 잃은 악마였다.
"네, 네노···"
시간이 없다.
"···"
비틀거리면서 일어난 유신은 샷건을 내던지며 리볼버를 꺼내들었다.
직후 연신 방아쇠를 당겼다.
쾅!쾅!쾅!
괴이의 영향으로 인해 아공간이 소멸하며 공간 자체가 뒤틀린다.
중상을 입은 몸과 한 쪽 팔로 쏘는 사격 역시 엉뚱한 곳을 때리기 일수였다.
철컥. 철컥.
하지만 유신은 포기하지 않은 채 실린더가 빌 때까지 연신 방아쇠를 당겼다.
지금 자신이 살아날 수 있는 길은 이것 하나뿐이었으니까.
이 녀석한테 이길 수 있는 길은 이것 하나뿐이었으니까.
목숨을 걸고 설계한 판의 클라이맥스가 이제 막 다가오려고 하고 있었으니까.
"커··· 어어···"
흘러내리는 핏물이 강을 이룬다.
괴이로부터 피어난 속박과 거듭되는 총격에도 맹렬히 타오르던 카르갈의 눈빛이 흐릿해진다.
확실하다.
죽음의 신이 그에게 강림했다.
아주 작은 충격.
송곳으로 찌르기만 해도 저 고명한 검사는 죽는다.
···울컥.
유신은 핏물을 토해내며 리볼버에 탄환을 밀어넣었다.
단 한 발.
카르갈을 죽이기 위한 단 한 번의 비수를 꽂아넣기 위해.
지금 이 순간 자신이 짜낼 수 있는 모든 전력을 다해.
끼리릭 철컥.
마침내 장전을 끝낸 유신의 총구가 카르갈의 심장을 겨눴다.
쾅!
그리고 방아쇠를 당겼다.
순간 세상이 깨졌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