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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보들의 세상

대체 저 사내의 정체는 뭘까?

밴디트들을 쓸어버린 능력자에서 이제는 또 사냥꾼 흉내라니.

'그냥 사기꾼 아냐?'

근데 또 하는 짓을 보면 사냥꾼이라고 봐도 믿을 것 같아.

'그럼 사냥꾼이라고 해야 되나?'

에피는 끼익 거리는 의자에 앉아서 유신을 바라봤다.

그 너머에 있는 사내까지도.

"에밀리오님 밑에서 일하고 있는 한스라고 한다."

단단한 몸과 훈장처럼 새겨진 흉터.

다른 사람들에 비해 깨끗한 복장.

멸망한 세상에서는 겉모습만으로도 많은 것을 알 수 있는 법이었다.

한스라는 자는 딱 보기에도 평범해 보이지는 않았다.

유신은 알면서도 너스레를 떨었다.

"에밀리오가 누구지?"

"이 도시의 시장님이시다."

"거물이군. 그런 자의 아래에 있는 자가 나를 찾아왔다는 건 내가 생각하는 그게 맞는 거겠지?"

"짐작대로. 의뢰를 맡기고 싶다."

"좋아. 안내해라."

순간 한스의 눈빛이 반짝였다.

그는 사실 유신이 내보일 반응과 자신이 해야 할 답을 미리 준비해두고 있었던 것이다.

예를 들면···

-좋아. 어디 들어나 볼까?

-따라와라. 시장님께서 직접 말씀 하실 거다. 같은···

'벤트 패거리가 당한 건 그렇다 치고··· 젖먹이 애새끼까지 달고 다니는 걸 보면 확실히 얼치기는 아니군.'

사소한 행동이나 말투.

반응 등에서도 그 사람의 진가는 확인할 수 있는 법.

"따라오도록."

손에 피 좀 묻혀봤던 건달인 한스는 유신의 비범함을 눈치챘다. 그렇기에 이 자라면 혹시 보스의 고민을 해결해줄 수 있지 않을까? 라는 기대를 하며 뚜벅뚜벅 걸어갔다.

"..."

그 뒤를 따르던 유신이 고개를 돌렸다.

에피가 여전히 침대에 누워있었던 것이다.

"나 몸이 저려서 못 일어나겠어. 업고 가줘."

"···후우. 그냥 쉬고 있어라."

문이 닫힌다.

여관에 혼자 누워있던 소녀가 킥킥거렸다.

"이럴 줄 알았지."

그동안 봐왔던 유신이라면 이렇게 반응할 줄 알았다.

에피는 거북이처럼 버둥거렸던 방금 전과는 다르게 벌떡 자리에서 일어났다.

이윽고 선반에 있던 석궁을 쥐면서 눈을 반짝였다.

"나쁜 녀석은 아닌 것 같지만··· 마냥 믿어서는 안 돼. 나도 내 살길은 찾아야지."

인생은 남이 대신 살아주지 않는다.

황무지의 소녀는 기꺼이 홀로서기를 자처했다.

지금껏 해왔던 대로.

***

구 시대의 권력자들이 그랬듯.

새 시대의 시장 역시 으레 제일 높고 멀쩡한 건물에 자리하고 있었다.

[피자혓]

그리고 이곳 5층 피자 가게가 바로 그 선택을 받은 모양이고.

'피자집의 권력자라. 이건 대체 뭔 해괴한 조합이지?'

이 도시에서 유일하게 진실을 알고 있는 유신이 피식 웃었다.

그 뜻을 잘못 이해했는지 경비의 탈을 쓰고 있던 건달들이 눈을 흉흉하게 떴다.

"그만."

하지만 한스가 이를 제지했다.

황무지의 사냥개들이 유별난 건 어제오늘 일이 아니다.

그래도···

"보스 앞에서는 예를 차려주기를 바라지."

"방금 전까지는 시장이라며?"

"보스나 시장이나 뭐, 그게 그거지."

한스의 무던함에 유신은 머리를 긁적였다.

"하긴··· 다를 것도 없나?"

정경유착이든. 검은 돈과의 커넥션이든.

옛날부터 세상은 힘 있는 놈들이 다 해 처먹었다.

피자를 든 채 웃고 있는 빛바랜 모델의 사진 아래.

정장을 차려입은 깡패 새끼가 싸구려 증류주를 홀짝거리며 분위기를 잡고있어도 된단 말이지.

그 깡패가 말했다.

"반갑군 사냥꾼."

"이쪽 역시."

에밀리오의 뒤에는 거대한 덩치의 흑인이 시립해 있었다.

그는 단지 서 있을 뿐인데도 이 공간을 가득 채울 정도로 압도적인 위압감을 자랑했는데.

본인은 모르겠지만 유신은 놈에 대해서 알고 있었다.

꺽다리 데이브.

놈은 능력자다.

주 종목은 신체 강화.

그래봤자 2위계에도 못 미치는 잡졸이기는 한데···

'변방 도시에서 어깨에 힘주고 다니기에는 충분하다는 거지.'

에밀리오는 저 히트맨을 이용해서 이 도시의 지배자 자리를 차지했다.

찌릿

유신이 힐끔거리자 데이브 역시 유신을 바라봤다.

두 사람 다 눈을 피하지 않았기에 강렬한 시선 두 개가 허공에서 맞부딪쳤다.

"보수는 300크레딧이다."

에밀리오가 입을 열지 않았더라면 분위기는 험악해지는 것을 넘어 큰 사달이 났을 것이다.

"호오."

유신은 생각했다.

거금이다.

대륙으로 나가면 쓸만한 총기 한 자루를 살 수 있는 정도.

망가진 몸뚱이의 치료를 비롯해 돈 나갈 곳이 많은 유신으로서는 놓칠 수 없는 의뢰였다.

하지만 유신은 한발 물러났다.

"내용부터 들어보고 결정하지."

의뢰가 연관되어 있다면 사냥꾼이 던지는 말의 무게는 무거워야 한다.

한 번 의뢰를 받았다면 무슨 일이 있어도 해결해야 된다는 뜻이지.

그들에게 신용은 곧 목숨이었으니.

그렇기에 그들은 신중하게 일감을 탐색한다.

"현상금 사냥? 리벤지? 아니면··· 헌팅인가?"

유신은 에밀리오가 맡길 의뢰를 알고 있다.

하지만 사기란 것도 언제나 연기가 뒷받침 되어야 가능하다.

그렇기에 그는 철저히 사냥꾼 흉내를 낸다.

"그 세 가지의 분야가 다 다른 건가?"

아무리 분위기를 잡는다 한들 견문 좁은 깡패일 뿐이다.

에밀리오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유신은 여유롭게 웃었다.

"현상금 사냥은 특정된 괴물이나 범죄자의 처치를. 리벤지는 암살 및 복수 대행을. 헌팅은 의뢰주가 원하는 특정한 물건을 구해다 준다. 나는 리벤지는 맡지 않아."

"으음··· 지금껏 만나본 사냥꾼들은 이런 말은 하지 않았는데."

"설명하기 귀찮았거나 원칙을 고수하지 않은 거겠지."

"호오. 흥미롭군. 굉장히 흥미로워."

에밀리오는 콧수염을 쓰다듬더니 눈을 빛냈다.

물론 그는 유신의 말을 다 이해하지 못했다.

하지만 저 사내가 뭔가 있어 보인다는 것.

부하들 앞에서는 위엄을 세워야 한다는 것은 잘 알았다.

"이름이 뭐지?"

"유신이다."

"그래, 사냥꾼 유신. 왠지 당신이라면 나의 고민거리를 해결해줄 수 있을 것 같은 느낌이 드는군."

금반지를 낀 손이 소파를 두드렸다.

"수십 수 백 명의 사람들이 머리를 싸매도 해결하지 못한 이 문제를 말이지···"

"대가리가 그렇게 모여도 안 풀리는 의뢰라··· 그래서 종류는?"

"굳이 따지자면 헌팅이라고 봐야겠지."

어지간히 골치가 아픈지 에밀리오는 미간을 좁히면서 독한 술을 원샷했다.

"크으··· 수수께끼라고 하면 알아듣겠나?"

역시나 튀어나온 말 역시 범상치 않았다.

"호오?"

물론 유신은 이 의뢰가 뭔지 알고 있었다.

그리고 그 답 역시도.

***

"젠장! 대체 답이 뭐냐고오오오!"

유신은 4층으로 내려갔다.

아마 이 도시나 조직의 운영에 대한 회의가 이루어지는 곳인 듯.

널따란 공간에는 소파와 식탁들이 놓여 있었다.

그리고 그곳에는 수십 명의 사람들이 우글우글 모여있었다.

"크아악! 하운드도 아니라고? 그럼 대체···"

"어이! 비켜! 내 차례야!"

성별, 연령 불문의 사람들은 하나같이 머리를 부여잡은 채 끙끙거리거나 괴성을 지르고 있었다.

진행상황도 확인할 겸 아래로 내려온 에밀리오가 고개를 저었다.

"옛 서적도 탐독했다는 학자들."

타닥타닥

[요청을 처리할 수 없습니다.]

"염병. 이것도 아니라고?"

"사냥꾼."

에밀리오의 기대를 담은 시선은 검은 코트를 입은 사내를 힐끔거리다가 사그라든다.

"아낙네들과 떠돌이들까지. 도시 내외 사람들 모두가 이걸 못 풀고 있어."

저들 모두가 의뢰를 받은 사람들이라는 말이었다.

유신이 고개를 돌렸다.

경비들이 양옆으로 서 있는 테이블의 중앙에 웬 기계장치가 놓여져 있었다.

크레딧을 연료 삼아서 전기를 공급할 수 있는 발전기다.

(신)시대의 몇 안되는 발명품이지.

그리고 거기서 뻗어나온 콘센트는 웬 금속제 박스에 연결되어 있었다.

10인치 쯤 되는 모니터와 키보드가 달린 기괴한 박스에.

삐빅

[비밀번호가 일치하지 않습니다]

"으아아아! 이 빌어먹을!"

"어이! 멈춰! 이게 얼마짜린 줄 알고!"

울부짖던 사내가 키보드를 후려치려다가 경비한테 제지당했다.

퍽. 곧 한 대 얻어맞더니 밖으로 쫓겨났다.

"아, 안 돼! 답이라도 알려···"

게임상에서는 이런 디테일까지는 나오지 않았다.

유신은 머리를 긁적거렸다.

"개판이군."

"내가 저 유물을 발굴하고 용도를 해석할 때까지. 힌트를 해석할 때 까지. 약 한 달 동안 이것만 붙들고 있었으니까."

유물.

간혹 황무지의 오지나 지하 깊숙한 곳에 숨겨져 있던 쉘터에서는 유물이라는 이름의 귀한 보물이 발견되고는 했다.

그건 아직까지 보존기한이 남은 (구)시대의 흔적들.

혹은 에스트라는 기이한 힘이 담긴 각양각색의 귀물들이 대부분이었는데.

공통점은 하나였다.

이제는 구할 수도 없고 만들 수도 없는 물건.

그리고 강력하거나 특이한 힘을 지닌 것.

그렇기에 대단한 가치를 지닌 채 인간의 탐욕을 자극하는 물건.

에밀리오는 우연찮게 이 '유물'을 발견했다.

-드디어 인생을 피는구나!

하지만 문제가 있었다.

"락이 걸려있었군."

"락? 아아. 그래, 암호가 걸려있어. 거의 다 풀었는데 마지막 한 걸음을 못 내딛고 있는 상태지."

에밀리오는 혹시 이 자라면? 하는 시선으로 유신을 바라봤다.

"그렇기에 당신을 부른 거야. 새로운 이방인. 새로운 사냥꾼."

그 때 경비가 말했다.

"에밀리오님!"

"뭐냐?"

"횟수가 이제 한 번 남았습니다!"

"이런 시발? 언제 그렇게 두드린 거야?!"

유물 박스에는 귀찮은 조항이 걸려있었다.

9999/1

정해진 횟수 내에 암호를 풀지 못할시 상자는 영원히 잠긴다.

이것 때문에 기껏 유물을 얻어놓고도 쓴 고비를 마신 자만 한 트럭이었다.

"멈춰!"

경비들이 사람들을 제지했다.

"흠."

유신은 상자 앞으로 다가갔다.

친절하게도 모니터에는 암호에 대한 힌트 역시 나와 있었다.

'역시 이거로군.'

유신의 눈동자가 반짝였다.

"내가 풀어보면 되는 건가?"

"아니, 잠깐. 그게··· 후우. 그렇게 해. 어차피 여기 있던 인간들 모두 못 풀던 문제니까."

말리려던 에밀리오가 유신을 바라봤다.

주변에 있던 군중들 역시 그를 주목했다.

그러나 그리 기대하는 시선은 아니었다.

그야 그럴 수 밖에.

수백 개의 두뇌가 모여들었는데도 못 풀던 문제다.

아무리 대단한 능력을 지닌 사냥꾼이라도 저걸 단번에 풀수는 없다.

이미 한 명이 쓴 고비를 마시고 있었으니까.

그 순간.

"잠깐! 답을 알았어! 알았다고!"

누군가가 끼어들었다.

검은 코트를 입은 중년 사내였는데.

그는 일전에 에밀리오가 고용한 사냥꾼이었다.

(구)시대의 언어로 적혀진 힌트를 해석한 자이기도 했다.

"정말인가?"

"그래! 확실해! 답은 네펜데스야!"

에밀리오가 묻자 사냥꾼은 확신에 찬 어조로 말했다.

주변 사람들 모두 곧 고개를 갸웃거리더니 오오하고 감탄사를 내뱉었다.

사냥꾼의 답변이 정말 그럴듯 했던 것이다.

피식

단 한 사람만 빼고.

"흐하하. 네펜데스라. 거 존나게 신박한 답안이군."

유신은 배를 부여잡은 채 낄낄거렸다.

답이 웃긴 게 아니었다. 진지한 관객들의 모습 때문이다.

"···"

사냥꾼은 평상시 냉정하며 침착하다.

그러나 이 좁은 방에 처박혀 문제만 풀다보면 절로 인격이란 게 뒤틀리는 법이다.

중년 사냥꾼 벤이 동업자를 향해 눈을 가늘게 떴다.

"이봐. 이게 그렇게 웃긴가?"

그 섬뜩한 기세에도 유신의 웃음은 멈추지 않았다.

"웃기다 마다. 전혀 새로운 시각이었거든."

"그러는 당신은 이 문제의 답을 알고 있나?"

벤이 유물박스를 가리켰다.

유신은 고민하는 기색도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물론이지."

"···하. 헌팅으로만 수십년을 굴러먹던 내가. (구)한국의 고대어까지 해석가능한 지식인들도 못 풀던 문제를 풀 수 있다고? 그것도 잠깐 훑어보고?"

끄덕.

여전히 긍정하는 유신.

그 건방진 모습은 벤의 심기를 거스르기에 충분했다.

"어린 친구가···"

벤은 주먹을 꾹 쥐다가 입매를 비틀었다.

그의 시선이 향하는 곳은 에밀리오였다.

"이봐 의뢰주."

"듣고 있다."

"당신이 결정해. 내 말을 믿을건지. 이 친구 말을 믿을건지."

"···"

벤은 팔짱을 턱 끼며 생각했다.

이쪽이 풀면 자신이 옳았다는 걸 증명해서 좋고, 저쪽이 시도해서 상자가 잠겨도 자신은 아무런 책임을 지지 않아서 좋다.

벤은 흥분한 와중에도 냉철하게 머리를 굴렸다.

그 어디에도 유신이 저 문제를 푼다는 선택지는 없었다.

자신이 살아온 경험에 의거.

그 정도로 아리송한 수수께끼였기 때문이다.

"어떻게 할 건가?"

"으음···"

말단 깡패에서 한 집단의 장.

나중에는 한 도시의 지배자까지 된 입지적인 사내는 고민했다.

어쩌면 이 한 방으로 자신의 인생이 더 나아갈 수 있냐.

정체되느냐가 걸려있었다.

천금 같은 시간이 흐른 후.

마침내 에밀리오는 결정을 내렸다.

까짓거 도박 한 번 해보자고.

저 의문의 사냥꾼.

요상한 말을 쏟아내는 사내의 여유로운 태도.

뭔가 믿음이 갔다.

설명할 수는 없지만 말이다.

"풀어봐. 사냥꾼 유신."

"흐."

사냥꾼 벤이 비웃음을 흘렸다.

유신 역시 웃었다.

저벅저벅

이윽고 검은 머리칼의 사내는 유물박스로 다가가 자판에 손을 얹었다.

지금은 찾아보기 힘든, 하지만 한때는 그 누구보다도 많이 마주쳤던 데이터로 된 화면.

[비밀번호를 입력하십시오.]

그 새하얀 화면에는 퍽 익숙한 글자들이 둥둥 떠다녔다.

[힌트]

[아침에는 네 발로 걷다가. 낮에는 두 발로 걷다가 밤에는 세 발로 걷는 것은?]

'여전히 바보들의 세상이군.'

한숨을 쉰 이방인은 경쾌하게 답을 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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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보들의 세상

에밀리오의 금고라는 퀘스트가 있다.

모든 문명이 퇴화한 세상.

과거의 영광을 기억하는 자들이 극도로 적은 세상.

그 속에서 플레이어는 특별하다.

그 특별함을 부각시키기 위한 퀘스트가 바로 이거였다.

현대인이라면 간단히 맞힐 문제를 내놓고 npc들의 바보같은 모습을 감상하기.

포스트 아포칼립스물의 묘미지.

지이잉.

금속 상자가 부드럽게 열렸다.

그 바보들이 경악했다.

"열렸다!"

"어, 어떻게?"

척.

유신이 한 손을 들어 올렸다.

수많은 침팬지들이 그의 손끝을 주목하면서 입을 다물었다.

"답은···"

21세기든 망가진 세상이든 퍼포먼스란 중요했다.

자신의 가치를 똑똑히 각인시킬 수 있는 기회니까.

유신이 뜸을 들이자 사람들이 답답함에 가슴을 두드렸다.

하지만 그는 개의치 않은 채 어느 한 곳으로 시선을 보냈다.

사냥꾼 벤이 입을 쩍 벌린 채 서 있었다.

유신의 입매가 호선을 그렸다.

"이봐. 내가 맞았지?"

"···"

"네펜데스는 입력하지 않았다. 네가 옆에서 지켜봤으니 더 잘 알 거 아니야?"

통렬한 비아냥거림.

하지만 벤은 지금 그런 것에 신경 쓸 수가 없었다.

"어, 어떻게 답이···"

벤은 지금 수십 년 동안 쌓아온 자신의 경력이 부정당하는 느낌이었다.

그만큼 유신이 낸 답안은 충격적이었다.

"그래서 대체 그 문제의 답이란 게 뭐야?!"

에밀리오가 소리쳤다.

그는 어느새 금고의 내용물보다 수수께끼의 답이 더 궁금한 모양이다.

의뢰주께서 말씀하신다면야.

유신은 주변을 둘러보더니···

"답은 인간이다."

피식 웃었다.

"사, 사람? 우리들?"

물론 이 바보들은 곧바로 이해하지 못했다.

***

"아침은 아기. 점심은 청년. 저녁은 지팡이를 짚은 노인이라니···"

스핑크스의 전설도, 어릴 때 다들 한 번씩 듣던 퀴즈도 이제는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져 버렸다.

"하하하하. 정말 놀랍군. 사람의 인생을 그렇게도 비유할 수 있다니 말이야."

소파에 앉아있던 에밀리오가 요란하게 박수를 쳤다.

"대체 그런 지식은 어디서 얻은 거지? 헌팅만 수십년을 해먹었다는 자도 못 맞췄는데···"

"뭐, 다 자기만의 노하우가 있는 거지."

유신은 어깨를 으쓱였다.

그 단호함은 이 비밀에 대해 더 이상 캐묻지 말라고 주장했다.

거친 세상을 살아가는 에밀리오는 당연히 납득했다.

"흠흠. 그렇군. 아무튼 대단해. 혹시나 해서 불러봤는데. 이걸 단번에 해결하다니."

에밀리오의 시선이 탁자로 향했다.

탁자 위의 훤히 열린 금고 앞.

아름답게 세공된 투명한 병이 하나 놓여져 있었다.

비범한 생김새로 보나 기운으로보나 유물이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에밀리오는 조심스레 병을 만지작거리더니 물었다.

"유물은 확실한 것 같은데··· 이봐 사냥꾼 양반. 혹시 이것의 효능도 알고 있나?"

"금시초문이다."

"뭐?"

"나도 모른다는 뜻이지."

"그런가···"

에밀리오가 한숨을 쉬던 그때.

"에스트의 힘이 느껴집니다."

시립해있던 거구의 사내.

꺽다리 데이브가 말했다.

"에스트라? 능력자들과 관련된 물품이라는 건가?"

"네. 자세한 효능은 모르겠지만 제 몸을 타고흐르는 기운과 같은 게 저 병에서 느껴집니다."

"호오."

에밀리오의 눈동자가 탐욕으로 번뜩였다.

에스트가 담긴 유물이라니 이거 대박이다.

비싸게 팔아먹을 수 있다.

각 도시의 유력자들. 아니, 컴퍼니 쪽에도 잘만하면···

'완전 맹탕은 아닌가?'

유신은 거구의 흑인을 힐끔거렸다.

말과는 달리 유신은 저 유물의 이름과 효능 역시 알고 있었다.

[탐욕의 에스트병]

소지자의 능력을 한 가지 저장할 수 있다.

물론 한 번 쓰면 다시금 채워넣어야 하는 패널티가 있기는 한데.

그래도 대단한 가치를 지닌 물건이었다.

에스트가 떨어질 때를 대비 보험용 폭탄을 하나 들고 다니는 셈이니까.

'봉 잡았군.'

한낱 건달이 가지기에는 아까운 물건이다.

그러나 어쨌든 그 소유자는 에밀리오였다.

미련을 털어낸 유신은 손뼉을 짝 쳤다.

"슬슬 결산을 부탁하지."

"결산?"

"보수를 내놓으라고."

"아아."

돈 달라는 이야기에 에밀리오는 씨익 웃었다.

그의 뒤편에 있는 히트맨 꺽다리나 경비들 또한 긴장한 모양새였다.

'토사구팽.'

허리춤의 리볼버에 손을 얹은 유신이 가능성 중 하나를 곱씹어 볼 때.

스윽.

에밀리오가 움직였다.

손을 뻗은 그가 내민 것은 칼도, 족쳐!라는 고함도 아닌.

"여기."

묵직한 주머니였다.

"···"

유신은 칩을 세어봤다.

푸른칩보다 좀 더 큼직한 주황색 칩이 33개.

'330크레딧.'

약속했던 보수보다 30크레딧이 더 많았다.

"일 처리가 무척 깔끔하더군. 그래서 더 넣었어. 좋은 거래였네."

에밀리오는 흉악한 칼자국에 어울리지 않게 선량하게 웃었다.

흠. 유신은 이채 어린 눈으로 그를 바라보다가 돈 주머니를 품에 넣었다.

"좋은 거래였어."

이윽고 역시나 웃으면서 밖으로 나갔다.

이 엿 같은 세상에서 양측이 다 만족하는 거래란 건 흔치 않았다.

***

유신이 나간 직후.

한스가 들어왔다.

웃고 있던 에밀리오의 눈동자가 차갑게 빛났다.

"애들 준비시켜."

"몇이나 모을까요?"

"움직일 수 있는 인원 전부."

한스가 고개를 끄덕이자 에밀리오가 물었다.

"그 사냥꾼은?"

"넌지시 던져보기는 했는데. 거절하더군요."

"쳇. 이래서 맹수 새끼들이란. 꼴에 동업자라 이건가?"

에밀리오는 소파를 두드리다가 삐딱하게 고개를 젖혔다.

한스가 꾸물거리고 있었기 때문이다.

"뭐하냐?"

"저, 그게 보스. 밑에 애들만으로 가능할지 모르겠습니다."

"뭐?"

에밀리오가 헛웃음을 지었다.

"지금 내가 잘못 들은 건가? 아무리 사냥꾼이라고는 하나 대가릿수가 서른이 넘어가는데. 그거 하나를 작업 못하겠다고?"

에밀리오는 총이란 게 분명 끔찍할 정도로 위험한 물건이지만 약점도 있다는 걸 안다.

"총알은 무한이 아니야. 다시 쏘는데 시간도 필요하지. 숫자로 밀어붙이면 그만이라고."

실제로 이런 식으로 그는 사냥꾼을 '처리'해봤다.

오래 전 그가 풋내기였을 때의 빛바랜 기억이지만.

"그냥 사냥꾼이 아닙니다. 놈은 능력자입니다."

하지만 한스는 불안한 모양이다.

"벤트 패거리로부터 들었습니다. 허벅지를 도려내고 팔을 꺾어도 금세 멀쩡해졌다고···"

에밀리오의 얼굴이 떨떠름해졌다.

데이브가 끼어들었다.

"재생 능력자로군요."

"위험한가?"

"까다로운 능력임은 분명합니다. 하지만 그것도 육체적인 능력이 뒷받침될 때의 이야기."

검은 피부의 살인귀는 하얀 이를 드러내며 웃었다.

"시정잡배들한테도 고전할 정도면 제 상대는 못 될 겁니다."

에밀리오의 차가운 시선이 한스를 향했다.

결국 자신의 칼을 끌어들이기 위해서 이렇게 꾸물거렸구나. 라고 생각한 것이다.

"···"

정곡이었는지 한스가 움찔했다.

하아. 수완은 좋은데 저리 담이 약해서야···

치익

시원하게 욕을 한 번 해주는 대신 싸구려 담뱃잎에 불을 붙인 에밀리오가 뭔가를 휙 던졌다.

데이브가 그걸 받아서 살펴보자 방금 전 금고에서 나온 유물이었다.

"갔다와."

"소문 돌면 안 되니까 은밀하게 처리하는 거 잊지 말고. 기회가 된다면 그 유물의 사용법도 알아오고 총도 회수 해오도록."

"네. 보스."

에밀리오가 괜히 이 자리까지 올라간 게 아니었다.

두 건달들은 제 나름대로 만족하면서 밖으로 나갔다.

"후우."

에밀리오는 소파에 기댄 채 담배 연기를 뿜었다.

어릴 적.

약조는 고귀한 것이라 배웠다.

사냥꾼들은 위험하기 짝이 없다고 배웠다.

하지만.

그렇게 지킬 거 다 지키고 살았으면 자신은 이 자리까지 못 왔다.

진실됨 보다는 거짓을.

성실함 보다는 악의가 필요한 세상이다.

에밀리오는 이번에도 기꺼이 제 삶의 방식을 고수하고자 했다.

"그런 세상이니까."

흐릿한 담배 연기가 아스라이 흩어졌다.

***

찰팍.

시커먼 오물 위로 앙증맞은 발자국이 새겨진다.

"헉, 헉."

그 주인인 금발머리칼의 소녀는 열심히 다리를 놀렸다.

"쫓아!"

"젠장."

에피는 일이 왜 이렇게 꼬여버린건지 생각했다.

유신이 떠나고 여관을 빠져나온 것 까지는 좋았다.

하지만 이 시궁창 같은 도시는 번화가든 음지든 평등하게 쓰레기들만이 거주했다.

그리고 그들은 결코 혼자서 돌아다니는 애새끼를 방관할 정도로 나쁜 사람들이 아니었다.

토박이 답게 지리에 빠삭하기까지 했다.

어어?

결국 에피는 도시를 채 벗어나기도 전에 쫓기게 되었다.

"이쪽으로 몰아!"

에피는 인정해야 했다.

너무 얕봤다.

고향에서는 가족과 친구들이라는 든든한 버팀목이 있었다.

황야에서는 유신이라는 견고한 동행자가 있었다.

하지만 이곳에는 아무것도 없다.

아무리 소녀가 살인에 거부감이 없다고 한들.

괴물들과 밴디트들을 마주해본 경험이 있다고 한들.

그건 저들 역시 마찬가지였다.

"어이! 광수! 그쪽으로 간다!"

심지어 저들은 더 크고, 길고, 빠르며 악독하다.

소녀는 용기. 바꿔 말하면 무지의 대가를 철저하게 치러야 했다.

"헉, 헉."

그냥 유신의 말을 따라야 했을까?

겉으로는 환하게 웃고 있지만 속으로는 언제 죽을지 불안감에 떨면서 제 목숨을 맡겨야 했을까?

타인의 손에?

멋대로?

"시바알!"

'후회해봤자 뭐해?! 어차피 내가 선택한 거!'

이 당찬 소녀는 악을 쓰면서 제 행동에 대한 책임을 지려고 했다.

끼리릭

여관주인1이 남겨준 전리품.

석궁을 조준하고는 방아쇠를 당긴 것이다.

"헹! 꼬마야. 그따구로 조준해서는 토끼 한 마리도··· 컥!"

골목의 중간을 막은 채 피식거리던 덩치 큰 사내가 하반신을 움켜쥐었다.

에피가 쏘아낸 석환이 정확히 사내의 급소를 강타한 것이다.

아무리 볼트 대신 돌을 발사하는 석궁의 특성상 더 가볍고 다루기 쉽다고는 하나···

전력으로 달리는 와중, 그것도 오늘 처음 이 무기를 다뤄본 꼬맹이가 쐈다고는 믿기 힘든 명중률이었다.

'이상해. 손에 착착 감기는 느낌이야.'

조준부터 발사까지.

마치 누가 제 손을 끌어 인도한 것 같았다.

그만큼 에피는 지금 신비로운 감각을 느끼고 있었다.

저벅

그때문일까?

감상에 사로잡혀 있던 소녀는 그만 추격자에게 뒷덜미가 잡혔다.

"잡았다!"

"큭! 이거 놔아아아!"

에피는 석궁을 놓으며 나이프를 뽑아들었다.

"이크! 안 되지!"

그러나 족제비를 닮은 사내는 이런 경험이 처음이 아닌 듯 능숙하게 에피를 제압했다.

짝짝. 그리고 이어지는 따귀질.

"컥."

새하얀 볼이 붉게 물든다.

소녀는 인형처럼 추욱 늘어졌다.

"끄으으! 시바-아아알! 그 년 제대로 붙들고 있어! 젖가슴을 찢어줄 테니까!"

거시기를 움켜쥐고 있던 덩치가 다가왔다.

핏줄선 눈과 일그러진 얼굴이 당장에라도 에피를 박살낼 것 처럼 보였다.

"미쳤냐? 어떻게 구한 물건인데. 최대한 멀쩡한 상태로 팔아넘겨야지. 어이! 저 녀석 좀 말려!"

"참아!"

"참으라고? 지금 내 거시기가 박살났다고! 끄으으···"

"등신. 그러니까 누가 방심하···"

퍽. 실실 웃고있던 족제비의 눈이 홱 돌아갔다.

털썩 쓰러지는 그의 얼굴에는 웬 손도끼가 박혀있었다.

"차오랑! 어떤 새끼···"

소리치는 녀석의 목덜미에 한 방.

"으, 으아아아아!"

울부짖으며 뒷걸음질치는 덩치의 복부에 세 방.

나이프에 묻은 핏물과 살점을 휙 털어낸다.

이방인은 마치 쓰레기를 치우듯 에피를 쫓던 패거리들을 처리했다.

"···"

오물과 시체들의 틈바구니에 주저앉아있던 소녀가 고개를 들었다.

떨어지는 태양과 좁고 지저분한 골목이 만들어낸 음영 아래.

그보다 더 어두운 머리칼과 눈동자를 가진 사내가 우두커니 서 있었다.

'이거 왠지 익숙한 상황 같은데···'

소녀가 생각할 때 유신이 말했다.

"여기서 뭐하냐?"

기묘할 정도로 태연한 어조였다.

"어, 음. 산책?"

그렇기에 에피는 입술이 터져 피를 줄줄 흘리는 와중에도 되도 않는 거짓말을 쳤다.

피식

유신은 늘 그렇듯 웃으며 석궁을 가리켰다.

"저건 쏴봤고?"

"아, 응. 나 아무래도 재능있는 것 같아! 쏘자마자 바로 한 새끼를 고자로 만들었다니깐? 저기 저 돼지···"

'테스트 성공.'

에밀리오의 음모.

꼬맹이의 일탈과 각성.

처음부터 모든 것은 유신의 계획대로였다.

[탐욕의 에스트병]

이제 유물만 손에 넣으면 끝이다.

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

바보들의 세상

식량과 식수, 깨끗한? 의복과 휴식까지.

여행 준비가 다 끝났다.

의뢰까지 완료했으니 이제 떠나야 할 시간이었다.

"얼마 안 걸렸네? 들은 바로는 존나게 어려운 거 같더만."

에피는 유신의 입매가 호선을 그리는 걸로 봐서 일이 잘 풀렸다는 것을 예감했다.

"바보들한테는 어렵겠지."

역시나 튀어나오는 대답.

"으엑. 재수 없어."

에피는 혀를 내밀었다.

하지만 인정해야 했다.

저벅저벅

혼자서 다니던 것과는 달리 아무도 시비를 걸어오지 않는다.

힐끔거리던 건달들은 유신과 눈이 마주치자 흠칫 시선을 돌린다.

그야말로 극명한 온도 차.

에피는 다시 한 번 이 세상에서 꼬맹이는 너무도 쉬운 먹잇감이라는 것을 깨달았다.

그리고 유신이라는 사내의 비범함도.

"이제 곧장 이예르폴로 가는 거지?"

"그래. 이제 진짜 얼마 안 남았다."

"아싸!"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이 발랑 까진 소녀의 처신이 바뀌는 것은 아니다.

그랬다면 밴디트들이 학살당할 때.

괴물과 악령을 마주쳤을 때 진작 움츠러들었어야 했다.

쓰레기 장벽이 점점 커진다.

두 사람이 막 출입구를 향해서 다가간 순간.

"이봐."

인파들에 뒤섞여 기척도 없이 다가온 누군가가 말을 걸었다.

검은 코트를 입은 중년의 사내.

그는 사냥꾼 벤이었다.

"나갈 셈인가?"

"그렇다만?"

방금 전 유신에게 수모를 당했기 때문일까?

벤의 기세는 날카롭기 그지없었다.

당장 방아쇠라도 당길 것처럼 보였다.

유신의 눈동자가 가라앉았다.

'사냥꾼만한 암살자가 없긴 하지.'

인파에 섞여 한 발 쏘든. 멀리서 저격하든.

추격하고, 인내하고, 은밀히 쟁취한다.

'사냥'이라는 행위는 암살과도 일맥상통하는 부분이 있다.

하지만.

"그쪽 방향으로는 가지 않는 게 좋을 거다. 에밀리오 그 날건달 놈이 함정을 파뒀어."

그랬다면 위험을 감수하고 이렇게 다가오지 않았겠지.

유신이 벤을 바라봤다.

날카로운 눈매는 부모로부터 물려받은 유산일 뿐이다.

허리춤으로 손을 가져가는 것은 수십 년 동안 배여버린 습관일 뿐이다.

중년 사냥꾼의 눈에는 이 대단한, 혹은 젊은 동업자에 대한 걱정이 담겨있었다.

방금 전 보여줬던 깔보는 모습과는 다르게 말이다.

잠깐 본 것만으로 그 사람을 완벽히 파악할 순 없는 법.

유신은 인생의 진리 중 하나를 다시금 곱씹으며 생각했다.

'트레져헌터 벤. 게임상에서 보던 것하고 똑같아.'

식인귀, 사기꾼, 신의 없는 놈 천지인 이 세상에서 이 정도면 훌륭한 인격자다.

유신은 고맙다는 의미로 웃어 보였다.

"알고 있어."

"···그런가?"

벤 역시 피식 웃었다.

저벅저벅

곧 별다른 행동이나 말없이 그냥 인파에 뒤섞여 스르르 멀어져갔다.

벤은 생각했다.

알고 있음에도 굳이 이 방향을 고집한다는 것은 그 나름의 자신이 있다는 얘기리라.

'선의는 여기까지.'

이제 남은 것은 저 젊은 사냥꾼의 실력이 얼마나 대단한지.

에밀리오의 따까리들이 얼마나 오합지졸인지에 달려있다.

저 사냥꾼이 승리한다면 신의 없는 자유도시의 지배자는 감히 사냥꾼을 무시한 대가를 치르게 될 것이다.

건달들이 이긴다면 자신 못지않은 지식을 가진 경쟁자가 한 명 사라지는 셈이다.

그래, 어느 쪽으로 보나 벤에게는 손해될 게 없었다.

하지만···

"승리를 기원하지."

가급적이면 저 젊은 피가 이겼으면 좋겠다.

쓰레기 도시 속의 사냥꾼은 멀어지는 남녀를 보며 모자를 들어 보였다.

***

도시 밖으로 나온 두 사람은 느릿하게 걷기 시작했다.

"뭔 얘기했어?"

"삶의 지혜를 좀 나눠주더군."

"꼰대가 잔소리했다는 얘기지?"

"···그렇게도 되겠군."

"우엑."

질색하는 에피를 보며 유신의 표정이 떨떠름해졌다.

옛날에는 자신도 저렇게 생각했었다.

그러니까 옛날에는.

이 세상 속에 빠지기 직전의 그는 막 청년의 티를 벗어나고 있는 상태였다.

어른이란 뭘까? 사회는 정말 엿 같구나라고 생각하고 있던 시점이었다.

그렇기에 이제는 마냥 잔소리라 생각할 수 없다.

'여기서 내가 그런 말 하면 못쓴다고 얘기하면···'

너도 꼰대야?

이런 답변이 돌아오겠지?

"후우."

이 막돼먹은 애새끼는 충분히 그럴만하다.

그렇기에 유신은 꼬맹이를 상대하는 대신 더 손쉽고 생산성 있는 녀석들을 맞이하기로 했다.

툭.

"알아서 잘 피해 다녀라. 위급하다 싶으면 그거 쏘고."

"응? 그게 무슨···"

말을 하던 에피가 눈을 가늘게 떴다.

지글거리는 황야의 저편.

바위산과 선인장의 뒤편에서 사람들이 우르르 나타났기 때문이다.

흉터 가득한 험상궂은 얼굴.

그렇다고 밴디트라 보기에는 멀끔한 옷차림.

하브람의 지배자.

날건달 에밀리오의 수족들이었다.

"엿 같은 새끼들! 은혜를 이따구로 갚아?! 이 애미애비도 없는···"

기세좋게 소리친 소녀가 중지를 내밀었다.

그러나 행동과는 달리 다다다 도망치기 시작했다.

그 모습을 보던 유식은 피식 웃었다.

"자기 칩을 되찾아오라던?"

"덤으로 그쪽 목숨까지."

저벅.

단단한 몸을 가진 사내 한스가 말했다.

"너무 흔해빠져서 식상할 정도군."

유신은 여유롭게 대꾸하면서도 주변을 훑었다.

'쇠파이프와 쇠뇌. 진압용 방패까지.'

무장상태는 저번의 그 미트스튜 패거리와 비슷했다.

하긴 자유도시 놈들. 아니, 애초에 (구)한국의 녀석들의 수준은 대부분 냉병기를 벗어나지 못한다.

그렇기에 클레이모어와 능력자는 공포와 경외심을 받는 것이고, 그렇기에 사냥꾼은 희망과 두려움을 산다.

저기 저 한스와 데이브라는 놈이 기세 좋게 나타난 것과는 달리 몸을 사리고 있는 것처럼.

'놈들은 총이란 무기에 대해서 잘 알고 있다. 그렇다면···'

"쏴!"

그래, 이렇게 행동하겠지.

퉁.

시위가 튕겼다.

파공성과 함께 화살들이 쏘아져 왔다.

무시무시한 폭력의 향연이었지만 유신도, 그 자리에 있는 날건달들도 이 한 방으로 상황이 끝날 거라 생각하지 않았다.

[방사능 트롤의 재생력]

예상대로.

심장과 머리를 가린 사내는 꼬챙이가 된 상태에서도 눈을 번뜩였다.

"덮쳐!"

유신은 곧바로 우아아아! 소리치며 달려오던 깡패를 향해 손을 뻗었다.

퍽. 가장 용감했던 녀석의 머리가 홱 젖혀졌다.

비명도 지르지 못한 채 무릎을 꿇은 녀석의 미간에는 손도끼가 박혀있었다.

이 몸뚱이는 분명 연약하고 느리다.

하지만 영혼에 새겨진 경험과 손놀림까지 그렇지는 않았다.

유신은 땅을 박차면서 재빨리 나이프를 뽑아들었다.

쿵.

왼손과 떨어지는 쇠파이프를 교환한다.

그 대가로 훤히 드러난 목에 나이프를 박아준다.

"끄르륵."

시체를 방패 삼아서 사각을 만들고.

갖가지 흉기들을 몸으로 버티며 급소를 찔러댄다.

"으, 으아악!"

유신이 피투성이가 되는 만큼 불사신을 처음 마주한 깡패들 역시 금세 피범벅이 되기 시작했다.

"한꺼번에 둘러싸! 방패랑 몸으로 밀어붙이라고!"

한스의 적절한 지시만 아니었다면 말이다.

"흡."

유신의 나이프가 한 불쌍한 건달의 내장을 휘저었다. 그는 엄마, 아버지 신까지 부르짖으며 살려달라 빌다가 쓰러졌다.

무의미한 희생은 아니었다.

칼날이 근육을 가르고 박혀버린 그 틈.

그 짧은 순간을 노리고 또 다른 건달이 방패를 휘두른 것이다.

쿵.

이를 버텨내자 이번에는 뒤에서 다른 놈이 덮쳤다.

옆과 아래에서는 바짓가랑이를 붙잡으며 늘어졌다.

망가진 세상의 건달들은 결코 정직하지 않았다.

영화처럼 주인공을 기껏 포위한 상태에서도 한두 명씩 달려들면서 당해주지 않는단 소리였다.

"잡았다!"

"총이라는 것부터 뺏어!"

과연 여관의 오합지졸들과는 달랐다.

유신은 금세 수십 명의 인간 방벽에 휩싸여 모습조차 보이지 않게 되었다.

"하하."

한스는 웃었다.

긴장했던 것과는 다르게 일이 너무 잘 풀렸기 때문이다.

치익.

그렇기에 그는 담배까지 태워보이는 여유를 보였다.

"진짜 별거 없잖아? 보스 말이 맞았어."

쏘기 전에 밀어붙이면 된다.

총알은 무한이 아니다.

이 명제를 지켰더니 잡았다.

진짜 사냥꾼을.

그는 희열 가득한 눈동자를 번뜩거리다가 주변을 둘러봤다.

에밀리오의 경호원이자 히트맨.

꺽다리 데이브의 표정이 심상치 않았기 때문이다.

"왜 그래? 데이브?"

"이상해."

"뭐가?"

"이렇게 쉽게 잡힌다고? 그것도 총 한 번 쏴보지도 않고?"

"쏠 틈이 없었겠지."

쏠 틈이 없었다?

순식간에 손도끼를 던져서 대가리를 박살 낸 녀석이?

그 정도의 경험과 실력이 있는 놈이 공포라는 무기가 주는 이점을 모른다?

이 도시에서 가장 많은 피를 묻힌 히트맨은 '기이함'을 느꼈다.

그러나 행정과 수완으로 그 자리를 꿰찬 한스는 연기를 뻐금거렸다.

"이봐. 싸움이라는 건 원래 변수가 많아. 아무리 대단한 실력자라도···"

그 순간.

한스의 머리칼이 살랑거렸다.

콰앙! 곧 폭음과 함께 얼굴 위로 무언가가 날아들었다.

한스가 얼굴을 훔치며 바라보자 그건 핏자국이었다.

살점이 뒤섞인···

"이게 뭔···"

한스는 뒷말을 이을 수가 없었다.

-끄아아아아!

난데없이 몸에 불이 붙은 채 바닥을 구르며 발광하는 수십명의 부하들 때문도 있었지만···

그 중심.

화르르륵

몸 주변으로 불꽃을 뿜어내면서 오롯이 서 있는 검은 머리칼의 사내 때문이었다.

툭.

한스는 타들어 가는 담배가 제 입술을 잡아먹으려 한다는 사실도 잊은 채 뒷걸음질쳤다.

"말도 안 되는··· 컥!"

곧바로 눈깔을 까뒤집으며 쓰러졌다.

퍽퍽. 쇠뇌를 든 채 멀리서 저격 포지션을 잡고 있던 부하들하고 같이.

쓰러진 그들의 시신은 하나같이 뒤통수가 함몰되어 있었다.

"···"

팔짱을 끼고 있던 데이브가 한 손을 휘둘렀다.

그러자 한스를 죽였던 흉수가 파삭 박살났다.

후두둑 떨어지는 회색빛 돌조각.

어린아이 주먹만 한 돌이었다.

"쳇."

그리고 이를 날린 꼬맹이는 혀를 차며 바위 뒤로 숨어버렸다.

대단한 실력이고 분명한 위협이었지만 데이브는 지금 그런 것 '따위'에 한눈팔 수 없었다.

"재생 능력자가 아니었나?"

눈앞에 있는 검은 머리칼의 사냥꾼.

아니, 능력자에게 온 정신을 집중하기에도 부족했기 때문이다.

"재생도 되는데?"

사람 수십 명을 순식간에 태워버린 괴물.

유신이 어깨를 으쓱였다.

피식.

비웃음까지 흘리며.

"···"

데이브의 눈이 가라앉았다.

일부러 궁지에 몰리며 저 치명적인 한방을 준비했다.

처음부터 능력을 선보였다면 경계할 것이 뻔했기에.

'총과 재생력은 페이크였다.'

"사냥꾼이 아니라 음험한 뱀새끼였군."

데이브는 능력자가 두 개의 능력을 가질 수 있다는 걸 몰랐다.

그렇기에 유신의 기예가 얼마나 대단한지 얼마나 치명적일 수 있는지 판단하지 못했다.

그게 그의 인생사 가장 큰 실수였다.

"후우."

2미터 덩치의 흑인이 셔츠를 걷었다.

성인 여자 허벅지만 한 팔뚝에서 꿈틀 핏줄이 솟아올랐다.

저벅

왼발은 앞으로. 오른발을 뒤로 내밀며 살짝 꺾는다.

피어오르는 에스트. 태양빛을 받아 번들거리는 주먹의 굳은살.

지금 데이브의 모습은 견고한 성벽과도 같았다.

"부하들도 다 뒤졌겠다."

이에 대항하는 유신의 모습은 변한 게 없었다.

아무런 자세도 취하지 않은 그는 상처가 쓰라린지 인상을 쓴 채 침을 퉤 뱉었다.

"이제 너만 죽으면 에밀리오 그 새끼도 끝이군."

"그럴 일은 없다."

황무지의 황량한 바람이 두 사람 사이를 스쳤다.

꾸우욱

하브람에서 가장 많은 사람을 죽인 살인귀의 발 아래에서 깊은 고랑이 파였다.

"너는 내 움직임을 보지도 못한 채 죽을 테니까."

압도적인 힘과 속도로 상대한다.

총탄은 맞아주되 화염만 주의하면 그만이다.

판단은 짧았고 행동은 더욱 짧았다.

탁. 데이브는 자신이 낼 수 있는 가장 빠른 속도로 유신에게 달려들었다.

수십미터 거리가 대번에 좁혀지고 순식간에 그의 앞에 도달해서 주먹을 뻗을 정도의 힘이었다.

"유언 잘 들었다."

유신은 그 순간까지도 태연하게 서 있었다.

데이브는 승리를 확신했다.

동공의 움직임.

손과 발의 위치.

자신의 주먹 끝이 얼굴에 닿는 순간 그 순간까지도.

저 사냥꾼은 아무런 반응도 못 하고 있었으니까.

"컥."

갑작스럽게 유신의 몸이 가속하며 제 목을 붙들지만 않았더라면.

"어떻···"

화르르륵

유신의 손끝에서 불꽃이 피어올랐다.

───────!

히트맨은 채 말을 끝마치지 못한 채 소리 없는 비명을 내질렀다.

자고로 비수는 최후의 최후까지 숨기는 게 더 치명적인 법.

[질주하는 들소의 광란]

한낱 2위계도 되지 못한 능력자가 감당하기에는 유신의 능력은 너무도 특별했다.

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

청산과 강탈

[질주하는 들소의 광란]

상처를 입으면 폭주하는 매드니스 카우의 특성 중 하나다.

눈앞이 붉어지고 이성을 잃는 대신 모든 신체 능력이 상승하는··· 쉽게 말하면 광전사 모드가 된다.

유신은 데이브가 달려들기 직전 이 능력을 사용했다.

그리고 놈을 불태운 후 곧바로 해제했다. 무슨 말인지 알겠는가?

어드벤티지를 얻는 대신 이성을 잃고 폭주하기 전에 단물만 쏙 빼먹었다는 이야기다.

이 세상에서 오직 강탈자만이 행할 수 있는 기행.

물론 극도로 어려운 일이었다.

능력자들의 힘의 근간이 되는 에스트.

이를 섬세하게 컨트롤하는 동시에 신체강화 능력자인 데이브의 움직임마저 대응해야 했으니까.

'아슬아슬했군.'

1초. 아니, 0.1초.

여유로워 보였던 것과는 달리 타이밍이 조금이라도 어긋났더라면 저기 쓰러져 있는 것은 자신이었을 거다.

"후우."

식은땀을 줄줄 흘리던 유신은 자리에 주저앉았다. 무식하게 육탄전을 벌이고 두세 개의 능력을 동시에 운용했다. 평범한 능력자라면 진작에 탈진했을 정도의 미친 짓거리였다.

에스트에 한해서만큼은 재능 넘치는 그였지만 역시나 내부가 텅텅 비어버렸다.

'기껏 잘 쉬어서 만전의 컨디션을 취해놨건만.'

또 다시 온몸이 삐걱거리기 시작했다. 정말이지 약해빠진 몸뚱이다.

물론 저기 나자빠져 있는 녀석들이 들었다면 억울함에 몸서리치겠지만.

저벅저벅

지글지글 타오르고 있는 시체들의 틈 속으로 에피가 다가왔다.

탐스러운 금발을 양 갈래로 묶은 소녀는 그 참혹한 현상에 눈을 찡그리는 대신 고개를 갸웃거렸다.

"사냥꾼은 다 이렇게 싸워?"

"너는 내가 사냥꾼으로 보이냐?"

"···아니야?"

유신은 헛웃음을 지었다.

이 꼬맹이는 같이 다닌 게 얼마인데 이런 착각을 한단 말인가?

"역시 너는 바보로군."

"뭐야?!"

"사냥꾼이라면 애초에 이런 상황에 빠지지 않았을 거다. 설령 빠졌더라도 냅다 도망부터 쳤겠지."

완전한 도주는 아니다.

작전상 후퇴다.

황야는 뻥 뚫린 개활지다. 폐허 건물과 바위산 같은 몇몇 구조물을 제외하고 말이다.

그런 곳에서 압도적인 사거리를 바탕으로 총을 쏘면 어떻게 되겠는가?

하나씩 하나씩 사냥당한다.

설령 도망에 성공한다 한들 암살의 위협에 시달린다.

신의를 깨트린 대가와 이를 빌미로 잃어버린 크레딧을 모조리 받아낼 때까지.

"사냥꾼들을 건드린다는 건 그런 거야."

사냥꾼의 진정한 위협은 총 따위가 아니다.

그들이 가진 지식과 집념, 그리고 집착이지.

"존나게 흥미로운 얘기 잘 들었어. 하지만 내가 바보라는 말은 인정 못 하겠는걸?"

듣고있던 에피가 손가락을 까딱거렸다.

"그쪽 업계에 대해 이렇게 잘 알고 있는 사람이 사냥꾼이 아니야? 그럼 대체 당신 정체는 뭔데?"

"···"

이방인.

모니터 밖 아저씨.

그저 고향으로 돌아가고 싶은 사람.

바삭한 치킨과 탄산이 그리운 사람.

말하고 싶은 것은 많았다. 하지만 유신은 입술을 떠듬거리다가 콱!

"악! 왜 때려!"

에피에게 딱밤을 날렸다.

"사기꾼."

"사기···꾼?"

"우선은 그렇게만 알고 있어라."

"그게 무슨 개솔···"

"방금 전의 사격은 훌륭했다. 역시 너는 자질이 있어."

"저, 정말?"

막돼먹은 년. 독종. 얼굴 반반한 애새끼.

맨날 부정적인 이야기만 들어온 에피였다.

그렇기에 처음 들어본 칭찬은, 저 괴물 같은 사내로부터 들은 인정은 그녀의 마음을 뛰게 했다.

"그, 그렇게 말해도 뭐 주는 거 없거든?"

에피는 씩씩거리던 것도 잊은 채 몸을 베베 꼬았다.

소녀가 그러든 말든 적당히 쉬었다고 생각한 유신은 슬그머니 일어났다.

저벅

그의 발걸음이 향한 곳은 히트맨 데이브의 시신이었다.

차가운 살인 기계처럼 보이던 덩치도 죽음이 들이닥친 그 순간에는 제 내면속 연약함을 모조리 끄집어냈다.

그는 망자의 눈을 감겨주거나 모욕하는 대신 시신을 뒤적거렸다.

곧 타고 바스러진 잿더미 사이에서도 형형스런 빛을 발하는 작은 유리병을 갈취했다.

[탐욕의 에스트병]

드디어 손에 넣었다.

초반부를 수월하게 풀기 위해서 꼭 필요한 유물 중 하나를.

유신은 우선 매드니스 카우의 능력을 유리병에 담았다.

내면에 있던 무언가가 빨려들어가는 느낌이 들더니 유리병이 반짝였다.

[질주하는 들소의 광란 x1]

능력자들은 보통 에스트가 고갈될 것을 대비 자신의 능력을 예비용으로 이 병에 담는다.

하지만 강탈자인 유신은 괴물과 인간을 비롯한 다양한 능력을 소지할 수 있다.

그 말은 곧 이 병을 쓰면 3개가 아닌 4개의 능력을 소지할 수 있다는 뜻이었다.

'비록 한 번 쓰면 다시 채워넣어야 되지만 말이지.'

"이 다음은···"

유신은 데이브의 시신에 손을 가져다 댔다.

[히트맨의 격동하는 육신]

에스트가 퍼져 나가며 유신의 머리칼이 떠올랐다.

눈을 감은 유신의 머릿속으로 뒷골목을 휘젓고 다니던 냉혹한 살인 기계가 포효했다.

꿈틀

그의 몸을 타고 흐르는 근육과 여기서 파생된 힘까지.

[과도한 능력 흡수!]

[그릇이 넘칩니다]

[사용자의 선택에 따라 질주하는 들소의 광란이 사라집니다]

괴물로부터 흡수한 능력은 분명 유용하나 그 한계가 명확하다.

불을 사출하면 사출. 재생이면 재생. 바리에이션이 그렇게 넓지 않다.

하지만···

'인간형은 다르군.'

유신은 데이브의 능력을 흡수한 순간 깨달았다.

자신이 앞으로 어떻게 하느냐에 따라 이 능력을 더 개화시킬 수도 있을 거라고.

'이게 최선이다.'

이점도 분명히 있지만 페널티가 많은 매드니스 카우는 비수로 담아둔다.

그 대신 히트맨의 능력을 주력으로 사용하며 이 약해빠진 육신의 단점을 커버한다.

[히트맨의 격동하는 육신]

유신은 시험 삼아 능력을 발동해봤다.

"···!"

그리고 그 순간 새로운 세상이 펼쳐졌다.

피로감이 사라진다.

동체시력, 호흡, 근력, 감각지수.

모든 오감이 몇 단계나 상승했다.

병마와 나약함에 허덕이던 육신으로는 맛볼 수 없었던 강렬한 활력이 전신을 내달렸다.

"이건 정말··· 굉장하군."

2위계도 채 못 된 녀석이 이 정도라···

새삼 자신의 육신이 얼마나 쓰레기였는지 깨닫게 된다.

그리고 에스트를 이용해 신체를 강화할 수 있는 능력자들이 얼마나 사기적인지도 알게 되었고.

"큭"

에스트가 끊기자 몸뚱이 역시 본래대로 돌아왔다.

아니, 방금 전 보다 더한 피로와 탈력감이 전신을 내달린다.

비틀거리던 유신은 깨달았다.

데이브의 신체 강화 능력은···

'각성제 같은 거로군.'

마치 도핑과도 같았다.

이에 상응하는 대가 역시 비슷할 것이다.

놈은 원래부터 딴딴했던 몸뚱이로 이를 커버한 것 같기는 한데···

"이쪽은 아니란 말이지."

그래도···

'훌륭한 무기를 손에 넣었다.'

꽈악!

주먹을 쥔 유신은 만족스럽게 웃었다.

이 쓰레기 같은 시궁창에 왔을 뿐이건만 그는 돈 주고도 구할 수 없는 유물. 새로운 힘을 얻었다. 그리고 복수까지 끝마쳤다.

에밀리오.

수족들을 모조리 잃어버린 그 머저리가 할 수 있는 것은 이제 아무것도 없을 테니까.

'원한을 산 적대 조직이나 부랑자에게 쫓기다가 비참하게 생을 마감하겠지.'

드럼통 엔딩 당첨이다.

"자, 이제 마지막으로···"

주변에 널린 건달들의 시신에서 크레딧을 갈취하려던 유신이 멈칫했다.

크레딧은 열에 취약하다. 그리고 유신은 [살아 움직이는 염화]를 한계까지 뿜어내 놈들을 불태웠다. 그렇기에 일어났던 연쇄폭발은 전장의 형세를 뒤바꾸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했지. 즉.

'남은 게 없다.'

적어도 이 주변은.

유신이 고개를 돌렸다. 조막만 한 소녀는 어느새 시신을 뒤져 크레딧을 갈취하고 있었다.

마침 폭발에 휘말리지 않은 녀석들만 골라서.

"너···"

"뭐? 왜? 애초에 이건 내가 잡은 거잖아?"

뒤통수가 부서진 시신을 가리키며 아무렇지 않게 대꾸하는 에피.

"···"

맞는 말이다.

유신은 할 말을 찾지 못하고 그냥 한숨을 쉬다가···

아니, 잠깐.

날카로운 인상의 사내는 생각했다.

"그 석궁은 분명 내가 구해 다 줬지."

"줬다가 뺏기 있어?"

"나도 그 정도로 짠돌이는 아니다. 하지만···"

유신이 피식 웃었다.

소녀는 불길함을 느낀 듯 뒷걸음질쳤다.

"뒷골목에서 나는 너를 구해줬다. 그러니까 도의적인 책임을 다해."

"도의가 무슨 말···"

"닥치고 반 내놔."

"···"

에피가 얄미워죽겠다는 듯 유신을 바라봤다.

"아! 진짜 치사하게! 애새끼 돈을 그렇게 갈취하고 싶어?!"

"물론."

소녀는 씩씩거리더니 크레딧을 휙 던졌다.

유신은 이를 받아들고는 낄낄거렸다.

두 사람은 그렇게 시체들과 쓰레기로 가득 찬 도시를 뒤로한 채 다시 걸었다.

***

에피의 고향인 이예르폴과 하브람은 도보로 하루 정도 떨어져 있었다. 즉 별다른 이변이 없는 한 손쉽게 목적지에 도달한다는 뜻이었다.

두 사람에게는 다행스럽게도 이변은 없었다.

그저 목적지까지 몇 시간을 남겨뒀을 때.

"밴디트?"

"아냐! 애새끼를 데리고 있잖아!"

똑같이 황무지를 방황하는 이방인들을 마주쳤을 뿐.

"식량 주머니 겸 가지고 다닐 수도 있지."

"그렇다기에는 목줄도 없고, 옷도 표정도 너무 멀쩡하잖아!"

"그, 그런 것 같기도···"

"저 병신들은 뭐야?"

막돼먹은 소녀가 내뱉었다.

그들의 앞에는 바위산 뒤에 숨어서 이쪽을 힐끔거리고 있는 두 사내가 있었다.

태양빛에 반짝이는 대머리가 유독 눈에 띈다. 쌍둥이인 모양이다.

'이건 게임상에서도 없던 건데···'

말투나 기세로 봐서 밴디트나 돌연변이는 아니다.

하지만 아무리 사소한 것이라도 변수는 늘 위험을 담보한다.

유신이 경계심을 내비쳤다. 두 쌍둥이 역시 마찬가지.

···

그렇게 서로를 주시하던 것도 잠시.

두 일행은 결국 제 갈 길을 가기로 했다.

피차 서로 부딪쳐봤자 이득 될 게 없다고 느낀 것이다.

저벅저벅

"저 새끼들 우리 따라오는데?"

공교롭게도 방향이 같지만 않았다면 말이다.

"내 생각에는···"

유신이 입을 열려는 찰나.

"어이, 이보쇼! 혹시 그쪽도 이예르폴로 가는 거요?"

대머리 중 한 명이 소리쳤다.

***

눈에 칼자국을 달고 있는 자가 백구.

없는 녀석이 흑구였다. 공교롭게도 흑구라 불린 자는 피부색이 조금 더 까맸다.

"멍멍이 형제라···"

유신이 피식 웃었다.

당연히 이를 알아듣지 못한 그들은 미간을 찌푸렸다.

"우리보고 개새끼라고?"

"너희들의 이름의 유래에 대해서 말한 거다. 백구나 흑구는 원래 개에게 붙이는 이름이었거든."

"그래? 우리 부모는 부자가 될 상이라며 지어준 이름인데···"

지금 그들이 이렇게 태평하게 이야기를 하는 이유는 간단했다.

먼저 적의를 접은 두 사람이 동행을 제안했기 때문이다.

사자가 어디 토끼한테 겁먹던가?

유신은 이들의 무장 상태와 기세를 보고 별 위협이 되지 않을 거라 판단했고,

"애새끼 데리고 다니는 사람이 나쁜 사람일 리가 없지."

이들은 이렇게 판단했기에 서로 간에 이해관계가 일치한 것이다.

만나면 칼부터 꼽는 게 일상인 여행자들간에 동행이라···

극히 드물지만 없는 것은 또 아니다.

세상사는 미지로 가득 차 있지 않은가?

"아까부터 애새끼. 애새끼 거리는데. 너희들도 난쟁이 똥자루 만하거든? 이 불알에 털도 안 달린 자식들아."

실제로 180이 넘는 유신이 비정상적으로 큰 것이었다.

아사가 일상인 이곳에서의 성인들의 키는 대부분 21세기보다 퇴화했다.

"뭐, 뭣? 불알에 털? 없을 리가 없잔···"

거시기를 만지작거리던 백구가 흠칫했다. 에피의 시선이 머리카락 쪽으로 향한 것이다.

즉 불알은 그들의 맨들한 머리털을 빗댄 것이었다.

그야말로 어린애 답지 않은··· 상스럽기 그지 없는 언행이다.

이에 대한 그들의 반응은···

"이, 이건 그냥 민 거야! 원래부터 이런 게 아니라고!"

"하하하하! 이 꼬맹이 진짜 물건일세!"

변명하는 형.

요란하게 웃어 재끼는 동생이었다.

그러자 오히려 당황한 것은 에피였다.

기대하던 반응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이 자식들 이상해···"

황무지인 이라기엔 너무도 순수해 보인달까?

하긴 그러니까 대뜸 동행을 제안했겠지.

유신은 걸어가면서 물었다.

"어디서 왔지?"

"캠든 타운 출신이야."

공교롭게도 사냥꾼이 그때 말했었던 곳이다.

"폭풍하고 방사능이 몰아쳤던 곳 말이군."

이 엿 같은 황무지에서 삶의 터전이 무너지는 것은 한 두 번 벌어지는 일이 아니다.

그러나 당사자에게는 늘 씻을 수 없는 죽음, 혹은 상처를 남긴다.

"···그래. 하루아침에 모든 것이 무너졌지."

환해보이던 얼굴이 가라앉는다.

형제는 눈시울을 붉히며 그날 벌어졌던 처참한 상황과 희생당한 이웃들의 이름을 읉조렸다.

유신은 생각했다.

생각 깊고 카리스마 있는 리더.

이를 믿고 따르는 주민들.

멸세생에서도 캠든 타운은 살기 좋은 마을로 묘사된다.

하지만···

'대부분 금방 사라져버렸지.'

아이러니하게도 그런 장소일수록 빨리 무너진다.

괴물이나 밴디트들의 악의에 의해. 혹은 어찌할 수 없는 자연재해에 의해.

황야의 사람들은 그게 멸망한 세상의 가혹한 환경 탓이라 생각하는 모양이지만···

유신의 시각은 좀 달랐다.

그는 이게 일종의 밸런스 패치가 아닌가 생각했다.

온갖 자극적인 것에 길들여진 현대인들은 늘 플레이어블 캐릭터가 쉬지 않고 달리는 것을 원한다. 그런데 말이다···

세상에 착한 npc들만 남는다면 자극이 될까?

그게 재미가 있을까?

게임의 난이도가 너무 쉬워지지 않을까?

어디서나 뛰어넘을 게 있어야 재롱을 보는 맛도 있는 법이다.

멸세생은 세상에 가득한 악을 정화하고 인간승리란 무엇인가를 보여주는 영웅의 서사시다.

오직 유신만을 위해 준비된 무대.

즉 이들은 그냥 희생자일 뿐인 것이다.

개발자 하나 잘못 만난 데이터 덩어리들인 거지.

"···아재들 힘내. 아까 대머리라고 놀린 거 사과할게."

"고맙다··· 빌어처먹을 꼬맹아."

저기서 살아숨쉬며 눈물 흘리고 낄낄대는 인간들을 정녕 그렇게 속 편하게 생각할 수만 있다면 말이다.

"···"

이 게임의 주인공인 유신은 어깨가 무거웠다.

아니, 한편으론 이런 생각마저 들었다.

이 세상이 정말 게임일까?

'뭔 잡생각이야.'

유신은 고개를 저었다.

이 세상은 게임 속이 맞다.

'아니.'

그래야만 한다. 반드시.

"이예르폴로 가서 새롭게 자리를 잡으려는 생각인가?"

어쨌든 저 형제는 현재 갈 곳을 잃은 피난민들인 것이다.

"그래. 자유도시는 무법자들 때문에 좀 그렇고, 에어리어로 가서 성주들의 노예가 되고 싶지는 않았거든."

난대없이 동행하게 된 동행객이 제 고향에 자리 잡는다고 하자 에피가 눈을 반짝였다.

"오. 잘 생각했어. 개새끼도 많고, 외부인 등쳐먹는 어른들이랑 꼬맹이도 많고 촌장은 욕심쟁이에 피도 눈물도 없지만 나름 살만한 곳이야."

백구의 표정이 떨떠름해졌다.

"저, 정말 좋은 곳 맞아?"

"괜찮을 거야 형. 우리 고향도 외부인들한테는 그런 소리 들었었잖아."

현대든 멸망한 지금이든 고립된 사회라면 텃세란 게 발생하는 것이었고, 이방인들은 배척받았다. 다 서로간에 이해관계가 상반되기에 발생하는 현상이었다.

이를 무마하고 잘 부대낄 수 있느냐는 전적으로 저 형제들의 손에 달렸다.

단···

'사지로 걸어 들어가는군.'

미래를 알고 있는 유신은 혀를 찰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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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산과 강탈

"그래서 이걸로 대가리를 퍽퍽 부숴줬다 이 말이지~"

"허어. 정말? 그 작은 손으로?"

"힘이 약하다고 방아쇠를 못 당기는 건 아니니까."

애초부터 잘 맞은건지 혹은 이제 곧 이웃이 될 사이기 때문인지 에피와 두 대머리는 금세 친해졌다.

"확실히··· 빠르게 누르면 더 빠르고 강하게 나가겠지만 그래도 위력은 충분하지."

석궁이나 쇠뇌란 게 살살 쏘면 살살 나간다는 생산적인 토론까지 할 정도로.

'바보가 셋으로 늘었다.'

유신은 현기증을 느꼈다.

부디 저 대화에 자신이 안 끼게 되기만을 바랄 뿐이었다.

"어?!"

유신에게는 다행히도 그의 바람은 이루어졌다.

눈앞에 드디어 이예르폴이 모습을 드러낸 것이다. 단 조금 특이한 점이 있었다.

"이건···"

"들은 대로 강철로 벽을 세워놨구만!"

2미터 정도로 그렇게 높지는 않았지만 마을을 둘러싸고 있는 것은 강철로 된 장벽이었다.

물론 진짜 강철은 아니고···

'자동차를 이렇게 생각할 수가 있다니··· 정말이지 혁명적이군.'

녹슬고 풀이 자라난 벌레나 다람쥐도 빼꼼 고개를 내밀고 있는 폐자동차들로 구성되어 있다. 아마 마을 내력이 중고차 매매단지 위에 세워졌기 때문이라지?

이 밖에도 교도소.

기차와 다리 위, 심지어 배나 방파제까지.

종말이 일어난 세상에서 '거주지'라는 것은 꽤나 다양하게 기상천외한 방식으로 만들어진다.

좋게 말하면 생존성을 보장받기 위해.

다른 시각으로 말하면 포스트 아포칼립스 감성이란 거지.

"우리 마을에 온 것을 환영해~"

에피의 얼굴에서 지금까지 나타난 것 중에서 가장 환한 미소가 피어났다.

하긴 밴디트들한테 납치당하고 황무지를 가로지르고 악령과 괴물 건달들의 틈바구니에 있다가 고향에 도착했으니 당연한 반응이었다.

"정지! 거기 누구··· 어? 에피?!"

"감자 아재! 나왔어-어!"

"너, 너 정말 에피냐?! 밴디트들한테 납치당한 게 아니었어?"

보닛 위에 선 채 활을 겨누고 있던 동글동글한 사내가 눈을 부릅떴다.

도저히 지금의 상황이 믿기지 않는 모양이다.

하지만 이 막돼먹은 소녀는 남의 생각 따위 배려하지 않았다.

"닥치고 문이나 열어! 탈출했으니까!"

경비들이 활을 거두었다.

덜컥. 입구처럼 보이는 거대한 트럭의 출입문이 열렸다.

"와우. 강철 벽은 들어가는 법마저 특이하군."

그 사이를 마치 애벌레처럼 기어가던 흑구가 감탄했다.

유신 역시 마찬가지다.

'차를 이런 식으로 이용해 보기는 또 처음이군.'

털썩

그렇게 드러난 마을의 정경은 전형적인 소규모 타운이었다.

남아있는 (구)시대의 건물이나 터 몇 개가 존재하고, 자그마한 밭에서 가축이랑 작물을 키우며. 외부인들을 경계하는 거주민들까지.

"에, 에피 진짜 에피라고?!"

노인들부터 시작해서 어른, 코흘리개들까지 모두가 눈을 크게 떴다.

곧 대혼란이 예상되는 찰나.

"모두들 뭐하는 건가?! 작업도 하지 않고!"

큼직한 덩치의 중년인이 나타났다.

그의 뒤에는 창을 들고 있는 경비들이 있었는데. 아마 이 마을의 촌장인 모양이다.

웅성거리던 사람들 중에서 감자라고 불렸던 경비가 대표로 말했다.

"초, 촌장! 보십쇼! 에피가 돌아왔어요!"

"음?"

"촌장 딸년이요!"

백구와 흑구가 뜨악하는 시선을 보냈다.

저 입 더러운 말괄량이가 타운 리더의 딸이라고?

"헤헤."

양갈레 머리 소녀는 개구쟁이처럼 웃었다.

···

물론 유신은 늘 그렇듯 덤덤한 표정이었다.

***

이예르폴의 리더가 거주하는 곳은 붉은 벽돌로 된 2층짜리 빌라였다.

원래 2층이었던 것은 아니고 모종의 이유로 꼭대기층이 사라져 반 토막 난 것이지만 말이다.

"그래, 캠든 타운에서 오셨다고?"

"그렇습니다."

촌장은 놀랍도록 침착한 얼굴이었다.

그는 납치된 제 딸이 살아 돌아왔음에도 별다른 동요를 보이지 않았다.

그저 주민들의 작업을 독려하고 이방인들을 제 거처로 데려와 호구조사부터 시작했다.

실로 비정상적인 반응이었다.

"백구와 흑구라··· 캠든에 있을 때는 뭘 해먹고 살았나?"

"농사, 경비, 목수같이 주로 힘쓰는 일들을 했습니다."

"특별한 기술 같은 것은 없다는 말이로군."

촌장이 수염 성성한 턱을 쓰다듬자 형제가 긴장했다.

여기까지 목숨을 걸고 왔건만 잘못하면 밖으로 내쳐질 수도 있는 것이다.

하지만···

"상관없는 일이지. 이곳은 아직 빈땅이 존재하고 일손도 부족하거든"

환영하네. 라는 말과 함께 촌장의 입가가 어색하게 호선을 그렸다.

냉철해보이던 얼굴은 아마 웃음에 익숙지 않아서 그랬던 것 같았다.

"하하! 고맙습니다! 촌장님! 열심히 하겠습니다!"

두 형제가 손을 맞잡으며 고개를 숙였다. 곧 안내역으로 파견된 경비를 따라 밖으로 나갔다.

"나중에 보자고! 꼬마야! 그리고 형씨!"

"형! 그게 뭔 소리야! 촌장님 딸한테!"

"이크! 미, 미안! 아니 죄송합니···"

웃으며 손을 흔든 에피가 뭐라 말하려는 순간.

"···"

촌장의 시선이 그녀를 주시했다.

에피는 마치 메두사라도 마주한 듯 움찔 굳었다.

"돌아왔구나."

"아, 응."

"어떻게 된 거냐?"

"그게···"

"식인귀들한테 납치된 딸이 살아 돌아왔는데. 너무 차가운 거 아닌가?"

가만히 있던 유신이 끼어들었다. 촌장의 눈동자가 그를 힐끔거렸다.

"외부인이 끼어들 일이 아니다. 쫓겨나기 싫다면 가만히 있어."

밴디트들과 괴물. 자유도시의 지배자를 상대로도 물러서지 않던 유신이다.

그가 피식 웃으면서 입을 열려는 찰나.

"설명할게 아버지! 어떻게 된 거냐면···"

에피가 유신의 앞을 가로막았다.

그 후로 소녀의 입에서 튀어나오는 그동안의 여정들.

그 놀라운 사실들.

이에 대한 촌장의 반응은···

"···그랬군."

피곤함이었다.

그는 '미트스튜' 패거리가 전멸했다는 소식을 들었을 때부터 표정을 찌푸리더니 대화가 끝나자마자 자리에서 일어났다.

"무사히 돌아와서 다행이다. 그리고 거기 능력자 당신도."

곧 사무적인 말만 남겨둔 채 밖으로 나갔다.

"···"

혼자 남겨진 소녀는 퍽 고독해 보였다.

어째 마음 편하게 쉴 수 있는 집이라는 공간이 그녀에게는 감옥처럼 보였다.

"너희 아버지는 좀 까탈스럽군."

유신이 어깨를 툭툭 두드렸다.

에피는 상처받은 얼굴로 유신을 바라보다가···

"그럴 수밖에."

피식 웃음을 흘렸다.

"난 사생아거든."

***

엄마없는 에피.

창녀의 딸 에피.

자의식이 생기고 나라는 인간은 뭔가에 대한 자각이 생길 무렵.

에피의 귓가로 공공연히 들리던 말이었다.

처음에는 믿지 않았다.

엄격한 아비는 여전히 자신을 버리거나 때리지 않았으며, 잘난 척하는 동생이든 자신이든 공평하게 차갑게 대했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그딴 이야기를 들을 때마다 에피는 더 날뛰었다.

함부로 입을 놀리는 아이들의 후려치고, 어른이라도 가차 없이 물어뜯었다.

-너, 이게 무슨 짓이냐···

-그만 하지 못하겠냐!

아비는 그럴 때마다 소녀가 견디기에는 퍽 가혹한 벌을 줬다.

하지만 에피는 견딜 수 있었다.

그 때 만큼은···

"아버지의 시선이 온전히 나를 향했거든."

인형이니 장난감이니 아무것도 없이 텅텅 빈 삭막한 방안에서 소녀는 스스로의 삶을 반추하고 있었다.

"하지만 말이지···"

푸른색 눈동자가 음울하게 가라앉는다.

"그 지랄을 겪고 돌아와보니 알겠어. 아, 나는 진짜 배다른 자식이었구나 라는 걸."

에피는 덤덤하게 그러나 그렇기에 더 처절하게 내면을 토해냈다.

"우리 엄마는 진짜 창녀고··· 아버지를 배신하고 함부로 몸을 굴리다가··· 염치도 없이 이곳으로 다시 왔다는 걸."

"그게 아니면 하나뿐인 딸이 죽다가 살아돌아왔는데 저런 반응을 보일 리가 없잖아?"

"···"

아비의 무관심과 방종 아래 상처받은 소녀.

짧다면 짧고 길다면 긴, 비극적이라면 또 슬프고 황무지의 사연이라기엔 또 별거 아닌 이야기.

모니터 밖에서는 보기 지겹다고 맨날 스킵하던 이야기.

소녀의 옆에 앉아 조용히 경청하던 유신이 말했다.

"···그랬군."

"그게 끝이야?"

소녀는 뭔가 바라는 듯한 어조로 고개를 돌렸다.

그 간절한 시선을 마주하던 유신은 한숨을 내쉬었다.

"내가 여기서 어떤 반응을 해도 널 진심으로 위로할 수는 없을 거다. 원래 당사자와 타인간의 거리는···"

"말이 어려워."

"너는 너고 나는 나니까. 애초부터 제대로 된 공감은 불가능하단..."

"어렵다구."

"같잖게 눈물이나 찔끔 흘리며 너 괜찮아? 라고 해주기보다는 그냥 가만히 들어주는 게 내 방식이다."

"···"

"그러니까 토해낼 게 있다면 더 토해내. 다 들어줄 테니까."

유신은 팔짱을 낀 채 진지한 눈동자를 했다.

소녀의 방은 침묵에 잠겼다.

잠시 후.

피식거리는 웃음소리가 들렸다.

에피는 배를 부여잡으며 낄낄거리기 시작했다.

"진짜. 진짜 재수 없어. 당신··· 아니, 유신. 그거 알아?"

"뭐지?"

"그딴 식으로 말하면 여자한테 인기 없어."

"···내 연애 계획을 네가 걱정해줄 필요는···"

"하지만 난 마음에 들어."

"···"

"난 좋다고. 그 방식."

에피가 환하게 웃었다.

유신과 함께하면서 낄낄거리던 그때의 그 미소로.

···

이에 대한 유신의 반응은···

딱!

"악!"

"범죄다 꼬맹아."

비련의 주인공이 된 소녀에게 가차없이 딱밤을 날렸다.

"씨이."

어느새 슬픔은 털어버린 에피가 빨개진 이마를 만지작거렸다.

이윽고 뭔가 생각난 듯 말했다.

"참. 이러면 나 통과 한 거야?"

"뭐가?"

"내가 착한 아이가 되면 살려주겠다며? 통과한 거냐고?"

"···"

유신은 침묵했다.

소녀에게 닥친 비극은 아직 끝난 게 아니기 때문이다.

이제 시작이라고 봐야 한다.

유신은 아니, 모니터 밖 이방인은 이 당찬 소녀가 앞으로 겪을 미래를 안다.

하지만···

"지겨보겠다. 당분간은."

이를 막거나 뒤틀 수는 없다.

"여기서 무전취식 하겠다는 거야?"

어차피 상황은 벌어졌을뿐더러.

"크레딧을 지불하지."

악당을 교화시키겠다는 이 실험을 성공적으로 끝내려면.

"됐어. 내가 아빠한테 잘 말해볼 테니까."

아무런 변수 없이 상황을 마주해야 하기에.

"들어줄 것 같지는 않다만···"

"아, 좀! 나한테 맡겨 좀! 해준대도 난리야!"

"···그래, 부탁하마."

당차게 걸어가는 소녀의 뒷모습을 보던 유신은 한숨을 쉬었다.

"후우."

그는 자신의 목적을 위해서라면 얼마든지 타인을 이용해 먹고 버릴 수 있다.

하지만 그렇다고 그게 그의 마음에 아무런 상흔도 남기지 않는 것은 아니다.

정말이지···

빌어먹을 정도로···

"엿 같은 게임 같으니."

세상이다.

***

이에르폴의 경비원 중 하나.

둥글둥글한 두상 덕분에 감자라는 이름을 가진 사내가 어딘가로 걸어갔다.

덜컹

두터운 철문을 열자 시커먼 어둠이 그를 맞이한다.

그 안에서 벌벌 떨고 있는 살색의 덩어리들도.

공포, 절망, 분노, 배신감.

온갖 음울한 시선을 덤덤하게 마주하던 감자는 혼잣말을 중얼거렸다.

"어떻게 할거요?"

혼잣말이 아니었다.

덩어리들을 내려다보고 있는 새하얀 안광이 하나 더 있었던 것이다.

"에피 말로는 걔네 패거리 반이 뒤졌소."

"애새끼 하나와 웬 부랑자 말을 믿나?"

"믿고 자시고 결론만 따져보자는 거요. 어쨌든 브라키 그 새끼가 원했던 물건이 다시 되돌아온 셈이니까."

"바뀌는 건 없다네."

"진심이오? 거짓말은 안 통할···"

"물량을 좀 더 늘리면 봐주겠지. 물건이랑 원수도 함께."

"···"

"브라키 그놈은 미친놈이지만 멍청이는 아니야. 황금알을 낳는 거위를 제 손으로 가를 리가 없어."

"···뭐, 알겠소. 나야 명령만 따르면 그만이니까."

머리를 긁적이던 감자가 뒤돌았다.

이윽고 육중한 철문을 열며 손을 흔들었다.

"그럼 고생하쇼 촌장."

한 마디를 남긴 채.

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

청산과 강탈

뱉었던 말을 지키려는 듯 유신은 아무런 행동도 취하지 않았다.

그저 손님용 방에 틀어박혀 있거나 이따금 마을을 돌아다녔다.

그렇다보니 에피가 할 일은 정해져 있었다.

그 일을 겪기 전 처럼 평범하게 일상을 살아가는 것.

-모든 것은 마을을 위해서다.

에피의 아비이자 촌장인 에녹은 엄격한 사람이었다.

그는 설령 어린아이라도 마을 공동체를 위해 한 손 거들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끼이익

그랬기에 에피는 농사일을 돕기 위해 밖으로 집 밖으로 나갔다.

갑작스레 문이 열리며 등장한 소년만 아니었다면.

"돌아왔구나 에피."

"에릭?"

에릭은 에피와 한살 차이나는 오빠였다.

에녹과 닮았다는 것을 증명하듯 갈색 머리칼을 가진 소년.

풍채는 또 어찌나 좋은지 벌써 에피의 키를 가뿐히 뛰어넘었다.

"그게 끝이야?"

"뭘 더 할 말이 있겠어? 살아 돌아왔으면 된거지."

지하실에서 나온 것처럼 보이던 에릭은 어깨를 으쓱였다.

그 모습은 냉정한 아비의 모습과 겹쳐 보였다.

"···"

에피는 입술을 깨물었다.

어릴 때는 오빠~ 동생아~ 하며 친하게 지냈던 것 같은데.

자신에 대한 안 좋은 소문이 돌고 동네 아이들과 어울리게 되면서 태세를 바꿨다.

가족을 감싸기보다는 꺼려하고, 의심하고, 끝내 배척했다.

그 나이대 철없는 소년들처럼.

최근에는 시비를 걸기보다는 아예 무관심으로 대하는 것 같기는 한데···

'얘도 아버지랑 똑같구나.'

에피는 가슴이 아팠지만 겉으로는 짜증스럽게 말했다.

"그래, 돌아왔다. 됐냐? 식인종들하고 괴물들하고 존나게 싸우다가 왔다."

에릭은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그냥 우두커니 서 있다가 킥. 기분 나쁜 웃음을 흘렸다.

"에피."

"뭐?"

"넌 아무것도 몰라."

"뭔 개소리야?"

"아무것도 모른다고. 킥."

혈육은 입가를 가린 채 웃다가 어깨를 으쓱였다.

"그러니까 그냥 그렇게 살아. 그게 편할 테니까."

"기분 나쁜 새끼."

유신이 너무 잘나 보여서 재수 없다면 저건 음침하다.

에피는 더는 상대해주지 않을 생각으로 쿵쿵 밖으로 나갔다.

경작지로 나가자 익숙한 얼굴들이 보인다. 에피를 싫어하는 아이들은 비웃음을. 어른들은 그래도 안쓰럽다는 얼굴이다.

"괜찮니 에피?"

"문제없어. 익숙한 일이잖아? 이 빌어먹을 세상에선."

그들의 성의 없는 관심만큼이나 대충 대꾸해준 에피가 눈을 굴렸다.

반짝이는 햇빛 그보다 더 반짝이는 머리통.

쟁기를 들고 있던 새로운 페이스들이 히죽 웃으며 손을 흔들었다.

"여어, 촌장 따님 왔냐?"

백구와 흑구 형제였다.

"그냥 에피라고 불러. 아재들."

"그, 그럴 순 없지. 촌장님의 피붙인데···"

"흠흠 뭐. 그렇긴 한데. 아재들한테는 특별히 허용해줄게. 우린 길동무였잖아?"

"와하하! 그래? 거 존나게 고맙구만."

흑구가 에피의 머리를 헤집었다.

백구는 기겁해서 이를 말렸다.

소심한 형과 대담한 동생.

에피는 이들이 마음에 들었다.

아이러니하게도 외부인인 그들은 에피를 있는 그대로 봐주었기 때문이다.

-안 힘드냐? 으차!

-아재들! 밥 먹고 해!

-어제 어떤 녀석이 너에 대해서 함부로 떠들고 다니더군. 그래도 되는 거 맞아? 넌 촌장 딸내미잖아."

-···그게.

-쯧. 내가 다음에 혼내주마.

-형 성격에 잘도 가능하겠다.

-뭐, 뭐야?

-그럴 땐 말이야. 은밀하게 엿 먹여야 되는 거라고.

에피는 형제들과 어울려 다니며 평화로운 생활을 만끽했다.

소녀의 열셋 인생동안 가장 즐거운 때 중 하나라고 말할 수 있었다.

갑작스럽게 그 두 사람이 사라지지만 않았더라면.

***

"허억, 허억, 헉."

가슴이 쿵쾅거리고 입에서는 쇠 냄새가 났다.

하지만 소녀는 계속해서 달렸다.

그녀의 다리가 멈춘 곳은 강철로 된 벽 앞이었다.

"개새끼 형제들 못 봤어?"

장벽에 서서 경계를 서고 있던 사내.

감자가 고개를 돌렸다.

"개새끼?"

"백구하고 흑구말이야!"

"아아, 그 겁쟁이들."

에피가 소리치자 손뼉을 치는 감자.

곧 충격적인 답이 튀어나왔다.

"녀석들이라면 떠났다."

"뭐?"

"떠났다고. 오늘 새벽에. 도저히 못 해먹겠다면서."

"그런···"

정을 줬던 사람들의 배신.

에피의 눈동자가 거세게 흔들렸다.

소녀가 상처받든 말든 닳아버린 어른인 감자는 태평하게 귀를 팠다.

"뭐, 한두 번 있는 일도 아니잖냐?"

중얼거리는 감자를 뒤로한 채 에피는 달렸다.

이윽고 백구와 흑구 형제의 흔적을 찾기 시작했다.

하지만 아무리 뒤져도, 마을 어디에도, 그들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진짜 떠났구나···"

자신에게는 언급도 없이 사라진 것이다.

허탈하게 중얼거린 에피가 자리에 털썩 주저앉았다.

그 순간.

홱 그녀의 고개가 젖혀졌다.

어디선가 날아온 돌이 머리를 때린 것이다.

"어이, 창녀의 딸."

돌맹이를 들고있던 그들은 이예르폴의 소년 패거리들이었다.

아직 덜 여물지도 못한 애새끼들은 악동 같은 미소를 짓고 있었는데.

그동안 흑구와 백구 형제가 늘 붙어 다니는 통에 에피를 괴롭히지 못했기 때문이다.

"그 바보 같은 덩치들 마을을 떠났다며? 아쉬워서 어째? 기껏 친구가 생겼는데 사라졌··· 악!"

패거리들의 리더 톰이 비명을 질렀다.

그가 던진 것보다 더 큰 돌이 이마를 강타했기 때문.

스륵

끝이 아니었다.

"아가리-닥쳐!"

어느새 에피가 나이프까지 뽑아들었기 때문이다.

얼굴을 악귀처럼 일그러트린 채.

밴티드들의 핏자국이 묻어있는 서늘한 칼날을.

"미, 미친년··· 그, 그거 안 내려놔?!"

패거리는 당황했다. 그동안은 아무리 에피를 자극해도 그녀는 선을 지켰다.

자신들 역시 나름의 선을 지켰다.

그야 이곳 이예르폴의 구성원이니까.

저 바깥의 맹수들을 피해 같이 부대끼며 살아가야만 하는 양 떼들이니까.

하지만 황무지를 떠돌며 세상을 알아버린 소녀는 저들의 행위가 가혹하다는 것을 알았다.

사람들 간의 정을 깨달았다.

그리고 그것을 짓밟는다는 게 얼마나 역겨운 행위인지도 알았다.

"뒤져!"

밴디트도 찢어버린 칼날이 소년을 향해 떨어졌다.

'아, 약속했는데.'

중간에 유신과의 약속이 떠올랐지만, 손을 멈추기에는 이미 늦었다.

"으, 으아아악!"

톰의 머리통에 나이프가 박혔다.

아니, 이를 잡아챈 손길만 아니었으면 그렇게 됐을 것이다.

꾸우욱

두툼한 손에서 핏물이 주르륵 흐른다.

음영 아래에 서 있는 덩치를 보며 에피가 주춤거렸다.

"아, 아빠···"

짝!

가차없이 딸의 뺨을 후려친 에녹이 으르렁거렸다.

"너 지금 뭐하는 거냐? 이제는 하다 하다 친구들한테 칼까지 휘둘러?"

"그게 아니라··· 저 녀석들이 먼저···"

"시끄럽다!"

또 한 번 소녀의 뺨을 후려친 에녹은 바지를 지린 채 주저앉아 있는 톰과 아이들에게 사과했다. 이윽고 에피의 뒷덜미를 잡았다.

"나는 널 이해하려고 늘 최선을 다했다. 하지만 너는 이번에도 이런 식으로 날 엿먹이는구나. 이 마을의 화합을 깨부수려고 작정했어."

"집으로 돌아가 있어라. 오늘 네가 저지른 잘못에 대한 벌을 줄 테니까."

"···알았어."

오랫동안 아비의 그늘에서 자라온 소녀는, 그의 사랑을 염원하던 아이는 그 말을 거역하지 못했다.

저벅저벅

갑작스럽게 머릿속에서 떠오른 상념만 아니었다면 말이다.

-너는 미래에 아주 나쁜 사람이 되기 때문이야.

유신이 점쳤었던 자신의 미래.

-자유도시는 무법자들 때문에 좀 그렇고, 에어리어로 가서 성주들의 노예가 되고 싶지는 않았거든.

-여기 진짜 괜찮은데? 우리 고향만큼은 아니지만 말이야.

사라지기 전 형제가 했었던 말들.

"뭔가 이상해."

우물안을 벗어난 개구리는 생각이란 걸 할 줄 안다.

"아무리 봐도 지금 같은 시기에 떠날 리가 없잖아."

끼이익.

그리고 그 의문은 자신의 집 지하실에서 빠져나오는 감자를 본 순간 증폭됐다.

"퉤! 엿될 뻔했네."

둥글한 그 얼굴에는 피가 튀어 있었다.

"···"

고오오오

이 구 시대의 잔재는 오늘따라 더 차갑게 느껴졌다.

조용히 집으로 돌아와 주변을 힐끔거리던 에피는 곧 지하실로 내려가는 계단 앞에 섰다.

그리고 유신이 했던 것처럼 주변을 관찰하기 시작했다.

'가장 자리에는 먼지가 쌓여있지만 중앙은 아니야.'

'발자국의 크기가 다른 걸로 봐서 한 두명이 오간 것도 아니지.'

예전에는 이런 흔적 같은 건 없었다.

그렇기에···

순간 에피의 머릿속에서 섬뜩한 생각이 하나 지나갔다.

'설마···'

심장이 두근거린다.

에피는 어두컴컴한 계단을 한 칸.

'아니겠지.'

그리고 또 한 칸.

'아닐 거야.'

내려가기 시작했다.

끼리릭.

육중한 쇠문은 잠겨있지 않았다.

그저 듣기 싫은 굉음을 내며 제 속살을 들어내 보일 뿐이다.

"으, 으으···"

신음소리가 들린다.

희미한 어둠 사이로 무언가가 꿈틀거린다.

에피는 어둠이 눈에 익을 때까지 침착하게 기다렸다.

두근거리는 심장을 애써 부여잡으며, 자신이 생각하던 그게 아니라고 믿으며.

하지만···

소녀의 눈이 적응을 끝내고 지하실의 광경을 살폈을 때.

에피는 헛바람을 들이킬 수밖에 없었다.

"···!"

10평 남짓한 지하실에서 꿈틀거리던 살덩이의 정체는 사람들이었다.

핏줄 선 눈으로 꽁꽁 묶인 채 살려달라고 버둥거리는 인간들.

그리고 끝에는···

매끈했던 머리가 박살 난 채 혀를 삐죽 내밀고 죽어있는 백구와 흑구 형제가 있었다.

***

"백구, 흑구··· 이게 대체···"

에피는 떨리는 손으로 형제의 시신을 만지작거렸다.

기이하게도··· 시신은 따뜻했다.

"떠났다면서··· 사라졌다면서."

그리고 그것은 한 가지를 의미했다.

스윽

에피가 주변을 둘러봤다.

여기 묶여있는 사람들.

이예르폴의 주민들은 아니다. 하나부터 끝까지 전부 다 처음 보는 얼굴들이다.

"···"

사람이 너무 큰 충격을 받으면 이성이 마비된다고들 한다.

"왜?"

에피가 중얼거리던 순간.

"다 마을을 위해서다."

철문이 열리며 누군가가 말했다.

웃기게도···

그것은 에피가 잘 아는 목소리였다.

소녀가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아빠. 대체 왜 이런 짓을···"

"말하지 않았느냐? 다. 마을을 위해서라고."

퍽.

에녹은 자비 없이 제 딸의 뒤통수를 후려쳤다.

***

아포칼립스물의 재미 요소가 뭐라고 생각하는가?

좀비?

재난상황과 문명의 멸망?

생존자들간의 갈등과 가치관의 대립?

그 속에서 피어나는 인간찬가?

나의 대답은 세 번째였다.

Sf소설이든 공포 게임이든 막장 드라마든 매체란 기본적으로 사람 사는 이야기다.

영웅도 조연이나 악당이 있어야 빛나는 법이고, 사이다도 고구마가 있어야 존재할 수 있는 것이니.

그런 의미에서 멸세생의 세계관은 이 틀을 아주 잘 지켰다고 볼 수 있다.

사시사철 중금속과 방사능 섞인 폭풍이 부는 곳.

식인귀들과 괴물들이 주변을 배회하는 곳.

당장 먹을 게 없어 애새끼를 팔아넘기는 곳.

이 게임의 가혹한 환경은 온갖 자극적인 이야기들을 양산해내기에 충분했다.

그리고 그 속에는 이런 이야기 하나쯤 추가된다고 해서 전혀 문제 될 게 없다.

그러니까···

모종의 목적을 위해 밴디트와 타운이 통째로 붙어먹을 수도 있다는 것.

음머어어어어!

거친 포효성과 함께 건물 전체가 지르르 울린다.

저 멀리 황무지의 끝에서 희끄무레한 음영들이 파도처럼 몰려들기 시작했다.

매드니스 카우.

익숙한 소리다.

──────!

그 선두에 있는 뱀 머리의 인간은 그러지 못했지만.

화르륵

이에 화답하듯 어둠에 잠겨있던 이예르폴에서는 하나 둘 횃불들이 타올랐다.

인자한 얼굴의 마을 아낙네, 농사일을 하느라 새카맣게 탄 중년과 청년. 주름살 가득한 노인네들까지.

얼굴이 붉은색으로 물든 주민들은 횃불을 든 채 비척비척 어딘가로 걸어가기 시작했다.

빌라의 꼭대기 층에 앉아 이를 내려다보던 유신이 말했다.

"시작이군."

산제물의 밤.

혹은 두 집단 간의 이해관계의 장.

아니면 그저 광란의 축제의 시작이다.

"···"

그 순간.

문 밖에서 은밀한 발소리와 함께 누군가가 속삭였다.

-준비됐어?

-그래, 쫄지말고 먼저 들어가. 촌장이 수면제를 잔뜩 먹여놨다고 했으니까. 그냥 끌고나오기만 하면···

덜컥 문이 열렸다.

문가에 기댄 채 몽둥이를 들고있던 감자가 어? 소리를 냈다.

잠들어 있어야 할 이방인이 어둠 속에서 눈을 번뜩이며 서 있었기 때문이다.

"컥!"

곧바로 휘둘러지는 주먹.

감자는 우수수 이빨을 흘리며 쓰러졌다.

"이런 씹! 팔팔하잖···"

소리치려는 사내의 목을 낚아챈다.

[살아 움직이는 불꽃의 염화]

곧바로 능력을 발동시켜 성대를 비롯한 경추를 불태워버린다.

사내는 비명도 지르지 못한 채 머리와 몸통이 분해됐다.

"후우."

유신은 불꽃의 잔재를 털어버리며 코트 안으로 손을 가져갔다.

곧 홀스터에 장착된 리볼버에 손을 얹은 채 뚜벅뚜벅 걸음을 옮겼다.

축제가 벌어지고 있는 마을 광장을 향해.

네임드 몬스터 브라키가 가지고 있을 히든피스를 강탈하기 위해.

그리고···

소녀의 운명을 결정짓기 위해.

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

청산과 강탈

화르르륵

횃불이 만들어낸 불빛이 사람들의 얼굴을 알록달록하게 물들였다.

그들의 앞.

광장의 중앙에는 꽁꽁 묶인 사람들이 마치 고기 주머니처럼 진열되어 있었다.

"다들 미쳤어! 미쳤다-고오!"

읍읍거리는 사람들 중에서 유일하게 제 의견을 피력할 수 있는 사람.

이예르폴의 구성원이었던 소녀.

에피가 소리쳤다.

"···"

횃불빛이 흔들린다.

주민들은 고개를 돌려 에피를 바라만 볼 뿐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언제나 걱정스러운 눈길을 보내던 바네사 아주머니, 늘 자신을 못살게 굴던 톰, 그래도 사이가 나쁘지 않았던 농부 제임스까지.

그들의 덤덤한 얼굴은 마치 무생물을 보는 것 같았다.

인간의 탈을 쓰고 있으나 인간이 아닌 것 같다고나 할까?

저벅

그 때 누군가가 한 걸음 앞으로 나섰다.

"내가 말했지 에피. 너는··· 아무것도 모른다고."

에릭이었다.

어둠 속에 가려진 소년은 그보다 더 음침한 미소를 지은 채 혈육을 내려다보았다.

"왜 이런 짓을 하는 거야! 다들 정신 나갔냐?! 인육이라도 먹고 싶어진 거야?!"

"쯧. 우리를 뭘로 보는 거야? 그딴건 밴디트들이나 하는 짓거리···"

짝 소리와 함께 에릭의 고개가 돌아갔다.

소년의 뺨을 후려친 것은 촌장 에녹이었다.

"집회 중에 입을 열게 되어있나?"

"죄송합니다. 아버지."

"나중에 이에 합당한 벌을 내리겠다. 자리로 돌아가."

소년이 인파 속으로 사라졌다.

에녹은 제 피붙이를 바라봤다.

"이유가 궁금하다고 했느냐?"

그의 목소리는 여전히 처음과 같았다.

차갑고 냉정했으며 덤덤했다.

"그-래! 백구와 흑구는 왜 죽였어! 이 사람들은 왜 묶어 둔 거고!"

에피의 눈동자에 이제 아비에 대한 존중이나 정은 없었다.

에녹은 늘 해왔던 답을 반복했다.

"모든 것은 마을을 위해서다."

"그놈의 마을. 마을. 대체 뭐가···"

쿵쿵.

"뭐긴 뭐야. 쉬리릭. 거래 물품이란 거지."

거대한 진동이 울렸다.

침착해보이던 주민들의 얼굴이 굳었다.

마을의 한편에서 나타난 무리 때문이다.

가죽 자켓과 통으로 된 괴물 모피.

자유분방한 복장만큼이나 흉악한 얼굴을 가진 그들은.

"밴디트?!"

황무지의 식인귀들이었다.

그리고 그 선두에 있는 것은···

"촌장. 당신은 나랑 얘기할 게 있는 것 같은데."

검은빛으로 번들거리는 비늘은 대가리를 넘어 온몸을 덮었다.

울퉁불퉁 튀어나온 등판과 꼬리는 문명의 옷가지를 쭉 찢고 튀어나와 제 존재감을 과시했다.

컴퍼니 공인 3급 위험종.

레자드였다.

"왔나."

굽은 허리를 펴자 3미터 가까이 되는 뱀 인간을 앞에 두고도 에녹은 침착했다.

"왜 진작 도착했어야 할 거래 물품이 여기 있는 거냐?"

브라키의 유리알 같은 눈동자가 에피를 주시했다.

"내 부하들은 또 황무지의 한복판에서 뒈져있더군."

"말 잘해야 할 거야."

"하아. 그게···"

에녹은 한숨을 쉬며 이야기를 시작했다.

여기에 밴디트들의 옆에 있는 괴물소들까지.

돌아가던 상황을 파악한 에피는 이들이 유신이 쓸어버렸던 미트스튜 패거리의 본대라는 것을 깨달았다.

그리고···

"나, 날 팔았어? 이 사람들도 전부?"

심연 밑의 심연.

보다 더한 충격적인 사실 역시.

"웬 능력자 새끼의 소행이라··· 놈은?"

"수면제를 먹였다. 지금 데리고 올···"

"날 팔은 거냐고-!"

상처받은 소녀는 마을이 떠나가라 소리쳤다.

괴물과 인간의 탈을 쓴 괴물의 시선이 그녀를 주목했다.

"모든 것은 마을을 위해서다."

아비는 여전히 아무런 감정 없이 그 이유를 회고했다.

"나는 타운의 리더다. 항거할 수 없는 위협에 맞서 이곳을 지켜야 하지."

마치 변덕스러운 폭풍처럼 어느 날 갑자기 들이닥친 재앙들.

60명이 넘는 식인귀들과 괴물떼.

그 두목은 3급 위험종.

어지간한 중소 타운은 그대로 멸망시킬 전력이었다.

에녹은 절망하거나 '멍청'하게 항거하는 대신 머리를 썼다.

어떻게 하면 저 괴물들과 자신들간의 이해관계가 일치할 수 있을지.

"수십 년 동안 부대낀 모두를 죽이냐. 우리와는 관계없는 이방인들을 죽이냐. 둘 중의 하나를 선택해야 했지."

그 답은 이거였다.

타운에 들르는 이방인들을 납치해서 조공처럼 바치기.

"그만···"

또르르 흐르던 눈물이 바닥을 적셨다.

소녀의 눈동자는 그 색을 잃기 시작했다.

"난 선택했다. 그리고 모두에게 내 선택에 대한 책임을 보여주기 위해 널 골랐다. 이해가 됐나?"

혹여 배신을 염려한 볼모로 제 피붙이까지 보낸 것이다.

"그마안···"

아비한테 버림받은 소녀는 소리 없이 꺽꺽거렸다.

유신 앞에서는 체념한 척 했지만 사실은 아니었다.

속으로는 이렇게 생각했다.

열심히, 내가 좀 더 잘하면 아버지는 틀림없이 날 봐줄 거라고···

그러나 현실은 참 가혹했다.

"크흐흐흐."

매드니스 카우들을 저 멀리 보내고, 부하들에게 경계를 서게 한 브라키가 웃어재꼈다.

"크하하하하! 딸년 앞에서 널 팔았다고 하는 애비라 이거 절경이군!"

낄낄거리던 괴물이 손을 휘둘렀다.

"컥."

키이잉!

들려있던 검이 회전하며 에피의 앞에 있던 사내의 목을 쳤다.

뱀머리 인간은 마치 코코넛을 마시듯 머리통을 올려 피를 꿀꺽대더니 꺼억 트림까지 해 보였다.

"재밌네. 정말 재밌어. 원래라면 다 쓸어버릴 생각이었는데···"

유리알같은 눈동자가 섬뜩하게 빛났다.

에녹과 이예르폴의 주민들은 흠칫하며 뒤로 물러났다가···

"생각이 바뀌었어."

"후우."

한숨을 내쉬었다.

브라키는 일그러진 머리통을 과자처럼 씹으며 에피를 툭툭 쳤다.

"이 꼬맹이가 여기서 얼마나 더 부서질지 기대가 돼···"

곧 침을 튀기며 소리쳤다.

"아비한테 버림받고! 친구와 이웃들한테 버림받고! 얼마나 더 나락으로 떨어질지!"

파충류 특유의 날카로운 괴성은 수십 개의 횃불들을 일렁거릴 만큼 강력했다.

"이 두 눈으로 확인하고 싶어졌- 켁!"

소리치던 브라키가 비틀거렸다.

어디선가 쏘아진 불덩이가 그의 얼굴을 강타했기 때문이다.

브라키는 삼류처럼 소리치지 않았다.

그저 비늘에 붙은 불덩이를 털어내며 고개를 돌렸다.

저벅저벅

세로로 갈라진 동공이 어둠을 꿰뚫어본다.

그 홍수를 가르며 여유롭게 걸어오는 존재를 포착한다.

"그렇게는 안 되겠는데."

하나로 질끈 묶은 머리는 주변의 어둠에 동화될 만큼 새카맸다.

그 눈동자 역시 마찬가지.

이외 대비되는 것은···

사내의 손에서 타오르는 불꽃과 그만큼이나 번뜩이는 안광이었다.

"그거 내꺼거든."

***

"저 새끼요?!"

"죽여!"

애꾸, 대머리, 배불뚝이.

원수의 등장에 밴디트들이 격분했다.

척.

하지만 브라키가 손을 올리자 그들은 꿀 먹은 벙어리처럼 조용해졌다.

괴물의 카리스마 혹은 잔혹한 통치력을 알 수 있었다.

쿵.

거인뱀이 몇 걸음 앞으로 나섰다.

자연히 물러난 주민들과 밴디트들에 의해 유신과 괴물은 토너먼트장의 검투사처럼 서로룰 마주보게 되었다.

"네놈이구나. 레비를 비롯해 내 부하들을 죽인 능력자가."

"레비?"

"뒈진 부두목 말이다."

"아아. 그 뚱뚱한 새끼?"

"그래, 그 돼지. 똘똘한 게 눈치는 제법 있는 놈이었는데."

"먼저 덤벼들기에 손 좀 봐줬다. 그래서 뭐? 어쩌라고?"

유신이 양손에 불꽃을 띄운 채 어깨를 으쓱였다.

그 여유로운 모습에 브라키 역시 세로로 갈라진 혓바닥을 내밀며 웃었다.

"원망할 생각은 없어. 어차피 약한 놈이 강한 놈에게 먹히는 건 당연한 사실이니까."

카굴과는 다른 의미의 날카로운 기세가 놈에게서 뿜어져 나왔다.

브라키는 손에 들린 검의 손잡이를 끼리릭 돌렸다.

"그러니까 너도 나한테 먹히는 걸 원망하지는 말란 말이야."

키이이잉!

그러자 놀라운 일이 벌어졌다.

검에 달린 동그란 칼날이 무시무시한 속도로 회전하기 시작한 것이다.

"호오."

유신은 생각했다.

3급 위험종 탈주 레자드 브라키.

막 싹을 틔워가던 카굴과는 달리 이미 완숙하게 무르익은 괴물.

놈의 특징은 어지간한 공격은 튕겨내는 비늘과 완력. 독이 달린 꼬리.

마지막으로···

손에 들린 저 무기. 사냥꾼의 발톱이다.

도낏자루 같은 것에 톱이 달린 물건인데···

쉽게 말해서 전기톱 같은 거라고 보면 된다.

사람이나 어지간한 괴물의 육신 정도는 그냥 분쇄해버린다.

거인 살인마가 전기톱을 휘두르며 덤비는 셈이지.

"찢어버려! 두목!"

"어서 빨리 쳐죽이고 밥이나 먹자고!"

밴디트들이 요란하게 소리쳤다.

"하여간 인내라고는 없는 새끼들."

브라키는 비릿하게 웃으며 상체를 숙였다.

쾅. 곧바로 땅을 박차며 번개 같은 속도로 달려들었다.

근육의 꿈틀거림. 여기서 피어나는 파괴적인 움직임.

그리고 떨어지는 죽음.

곧 있으면 느껴질 손맛에 뱀인간은 입이 찢어져라 웃었다.

[히트맨의 격동하는 육신]

타앙-!

그리고 곧바로 의식이 끊겼다.

***

"어?"

브라키의 부하 중 하나인 샘이 눈을 끔뻑 떴다.

종일달려 이예르폴에 도착하고 이제 곧 벌어질 만찬을 기대한 것까지는 좋았다.

웬 능력자 새끼가 나타나 두목 앞에서 똥폼을 잡는 것까지도 좋았다.

뭔 개짓거리를 하든 어차피 저 괴물의 손에 사지가 분해될 테니까. 그런데···

"뭐, 뭐야?! 뭔데?! 두목이 왜 쓰러진 거야!"

끽해야 (구)한국의 변방에서 주름이나 잡던 밴디트들은 유신의 움직임을 파악하지 못했다.

브라키가 달려들던 그 순간.

극한까지 감각을 벼려낸 유신의 손이 순식간에 총을 뽑아든 것도.

···!

당황하는 괴물의 안구를 향해 정확히 격발한 것도.

회전하는 총탄이 제일 연약한 부위를 헤집고 뇌를 파괴시켜 버린 것도.

쿠웅.

뱀 인간은 입매를 비튼 얼굴 그대로 쓰러졌다.

미동도 없는 몸과 주르륵 흐르는 변이 놈의 죽음을 다시 한 번 확인시켜줬다.

방아쇠를 당긴 순간 상대에게 죽음을.

무지한 자에게는 보다 더 확실한 죽음을.

멸망한 세상 속.

마천루의 열병기는 역시나 치명적이다.

"···"

유신은 연기가 피어오르는 총구를 바라보다가 후 불었다.

이윽고 리볼버를 집어넣으며 주변을 둘러봤다.

화르르륵

마치 그 옛날 마녀사냥이 일어나던 것만 같은 광장은 지금 침묵에 잠겨있었다.

식인귀든.

그들에게 동족을 팔아넘기고 목숨을 연명하던 비겁자든.

비극적인 희생양이 될 뻔한 사람이든.

소녀든.

"자. 이제···"

유신은 터벅터벅 걸어 브라키의 시신을 걷어찼다.

곧바로 놈이 휘두르던 기괴한 무기를 집어들었다.

"대가를 치를 시간이다."

이방인의 냉혹한 눈동자가 번뜩였다.

[질주하는 들소의 광란]

이예르폴의 광기 어린 축제는 다른 의미로 피로 물들었다.

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

청산과 강탈

──────!

유신은 자신이 결코 선이나 정의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그렇기에 오만하게도 남을 함부로 재단하거나 제 행각에 대해 면죄부를 줄 생각도 없다.

콰직

"끄아아악!"

그냥 죽일 뿐이다.

자신의 목적을 위해.

"제, 제발 살···"

이 망겜의 엔딩을 보기 위해.

집으로 돌아가기 위해.

"후우."

떨어지는 달빛이 망가진 세상의 마을을 차갑게 비췄다.

그 중심에 있는 사내가 들고 있던 톱날에서는 핏물이 뚝뚝 떨어졌다.

유신의 주변에는 토막 나고 파헤쳐진 시신들 수십 구가 쓰레기처럼 널려있었다.

[사냥꾼의 발톱]

그럼에도 이 특별한 무구의 날은 조금의 손상도 없다.

유신은 브라키가 남긴 히든피스를 휙 휘둘렀다.

묻어있던 핏물과 살점이 에녹의 얼굴에 튀었다.

촌장은, 제 딸을 팔아넘길 때 조차도 일말의 미동도 없던 그는 창백한 낯빛으로 뒷걸음질쳤다.

"괴, 괴물···"

"괴물? 내가?"

유신은 헛웃음을 지었다.

곧바로 얼굴을 가린 채 낄낄거리기 시작했다.

자신의 행동에 대해 변명할 생각은 없다. 그런데 이렇게 말하면 또 다르다.

"네놈들이 그딴 말을 지껄일 자격이 있다고 생각하나?"

유신은 광장의 주변. 골목길. 텃밭 뒤의 허수아비.

문이 꽉 닫힌 집들을 둘러봤다.

"히익!"

그곳에는 이예르폴의 주민들이 있었다.

벌벌 떨며 머리를 조아리고 있었다.

그렇다.

애초에 유신이 처리한 것은 미트스튜 패거리 뿐이었다.

이예르폴의 주민들은 건들지 않았다.

"부끄럽다는 자각도 없나 보군."

"살기 위해서 기꺼이 인간의 탈을 벗어던진 주제에 이제 와서 남을 괴물로 매도하는 것이."

진짜 괴물들은 너희들이다.

"잠깐 몸 뉘일 곳이 필요했던 여행자들을 속이고, 고향을 잃고 방랑하던 자들을 속이고."

껍데기가 아무리 멀쩡하면 뭐 하는가?

"말 안 듣는다고 죽이고, 팔아넘기고 목숨을 부지하고."

처한 상황이 절박했다면 뭐하는가?

그 의도는 악의가 넘쳐흘렀거늘.

"우, 우리도 어쩔 수 없었어요! 다 죽을 순 없잔아요!"

한 여성이 히스테릭하게 소리쳤다.

유신은 그녀를 스윽 바라보다가···

"뭐··· 그건 그렇지."

머리를 긁적이며 긍정했다.

황무지에서는 힘이 약하면 죽는다.

멍청하면 죽는다.

속인 쪽도 속는 쪽도 그걸 알고 있다.

유신 역시 이 당연한 명제를 알고있다. 하지만···

"이 사람들한테도 그렇게 말해봐."

유신은 묶여있던 사람들을 지나치며 사냥꾼의 발톱을 휘둘렀다.

제물로 바쳐질 뻔 했던 사람들은 자유를 되찾았다.

"으으···"

그들은 주민들과 같이 유신을 두려운 눈으로 쳐다보거나.

"가,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

성의를 표시했으며.

"죽여버리겠-어어! 이 개새끼들!"

이예르폴의 주민들에게 달려들었다.

속고 속이는 것에 대해 그 누구의 책임도 없다면, 복수 또한 응당 그들이 누려야 할 권리인 것이다.

유신이 귀를 후비며 그 개판을 바라보고 있던 그 순간.

"내 선택에 후회는 없어. 나는 최선의 선택을 했다고."

멍하니 서 있던 촌장이 말했다.

"만약 다시 돌아갈 수 있다고 해도 나는 같은 선택을 할 거야. 모든 것은··· 마을을 지키기 위해."

부스럭.

그 때 누군가가 두 사람 사이로 끼어들었다.

고개를 팍 숙인 채 비틀거리면서 움직이는 것은 한 소녀였다.

에피.

친구와 이웃들은 물론 가족에게까지 철저히 버림받은 비극의 소녀.

그런 에피의 손에는 어느새 시퍼런 빛을 흘리는 나이프가 들려있었다.

소녀가 말했다.

"아빠. 아니, 에녹. 하나만 나 하나만 물어볼게."

"···"

"애초에 나 당신 딸은 맞아?"

가라앉은 소녀의 목소리에 에녹은 침묵으로 화답했다.

그러다가 곧 천천히, 느릿하게 토해냈다.

"···그래."

"넌 틀림없이 내 딸이다. 에리카와 나 사이에서 태어난 핏줄."

"···!"

에피의 눈이 부릅 뜨여졌다.

곧 온몸을 벌벌 떨더니.

"근데 왜···"

마을이 떠나가라 소리치면서 에녹에게 달려들었다.

"왜 날 그따위로 키운 거야! 왜애애애애!"

아내를 진심으로 사랑한 한 남자와 소녀를 낳다가 죽은 어미.

한순간에 소중한 피붙이에서 원수가 되어버린 소녀.

애증의 관계 속 어른이 되지 못한 어른.

"···"

복잡한 뒷내용을 뒤로한 채 유신은 생각했다.

멸세생은 꽤나 자유도가 높은 게임이었다.

그 안의 서브 퀘스트 중에는 에피의 소망이라는 것도 있었다.

[에피가 납치당하기 전에 구한다]

[납치당한 후 이예르폴에 끌려왔을 때 구한다]

두 가지 선택지가 존재하는 퀘스트였는데.

전자에서는 진실을 알게되고 큰 충격에 빠진다.

그러다가 플레이어가 말리기도 전에 에녹과 에릭을 죽인다.

후자에서는 브라키에 의해 몸도 마음도 망가진 상태에서 진실을 마주한다.

그리고 역시나 제 손으로 아비와 오빠를 죽인다.

한층 더 잔혹하게. 갈기 갈기.

이해가 가는가?

그 어떤 선택지를 고르든 소녀는 제 혈육을 죽인다.

그리고 죄책감과 고독감에 몸서리치다 타락한다.

'역시 안 되는 건가.'

푹, 푹푹.

유신은 에녹을 덮친 후 미친 듯이 찔러대는 소녀를 보며 한숨을 내쉬었다.

어떻게 처리한다?

"콜록, 콜록, 콜록."

기침을 토해내던 에녹이 한참이 지나도 멀쩡한 것을 확인하기 전까지는.

"···!"

유신이 눈을 가늘게 떴다.

"죽-어! 죽어어! 죽으라고! 다 뒈져버려 그냥! 당신이든 이 빌어먹을 세상이든! 모두 다아!"

오열하는 소녀가 휘두르는 나이프는 찌르는 위치가 반대였다.

날 부분을 제 손으로 쥔 채 손잡이를 휘두르고 있었던 것이다.

"···"

에녹은 끅끅거리는 딸을 보면서도 '미안하다.'나 '이제 그만해.' 따위의 말은 하지 않았다. 그저 가라앉은 눈동자로 제 죄악의 업보를 받아들이고 있었다.

-모든 것은 마을을 위해.

참으로 한결같은 사내였다.

저벅저벅

그런 소녀를 멈춘 것은 검은 머리칼의 사내였다.

툭. 유신이 머리에 손을 얹자 에피가 우뚝 멈췄다.

이윽고 나이프를 떨구더니 끅끅거리며 그를 올려다보는 것이다.

"나, 안 죽였어."

"···"

"아무도··· 흐윽. 안 죽였다고."

"···"

"이러면··· 이러며언··· 착한 사람. 된 거 맞지?"

소녀는 유신과의 약조를 기억하고 있었던 것이다.

"후우."

유신은 깊은 한숨을 쉬었다.

이윽고 에피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그녀가 꼭 듣고 싶어할 말을 해주었다.

"그래. 넌 착한 아이다."

비록 작은 소녀였지만, 썩어나는 악당 중의 하나였지만.

유신은 운명을 바꿨다.

이 세계를 가로지르는 거대한 소용돌이를 뒤틀었다.

그것은 곧 그가 그토록 바라던 미래에 수십 걸음 다가간 것과 같았다.

'다행이군.'

그 안에는 소녀에 대한 걱정 역시 있었다.

***

갑작스레 들이닥치는 모래 폭풍이나 괴물. 괴이 현상은 분명 끔찍한 재앙이다.

하지만 그런 황무지의 변덕이 스케빈저들과 피난민들을 먹여 살리듯. 누군가의 불행도 누군가에게는 다시 없을 기회가 되고는 한다.

[탐욕의 에스트 병 - 레자드의 스케일 아머] x 1

[사냥꾼의 발톱]

178크레딧

유신이 오늘 하루 벌어들인 노획품들이다.

레자드족 특유의 비늘 강도는 유명하다. 브라키로부터 흡수한 능력은 위급한 순간 요긴한 한 수가 되어 줄 것이다. 놈이 사용하던 무기는 이제 유신의 발톱이 되어 휘둘러질 것이다.

만족스러운 것을 넘어서 대박이라고 밖에 할 수 없다.

'염화는 일정 수준 이상의 상대한테는 통하지 않고, 총알은 다 떨어졌었으니.'

유신은 한숨을 쉬면서 등을 기댔다.

아이러니하게도 이곳은 에피의 방안이다. 그 일을 겪고도 두 사람은 이예르폴을 떠나지 않았다.

두 사람 다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괴물과 추위를 피하기에 가장 좋은 곳은 장벽의 안이고, 감성적으로 움직여봤자 제 명을 깎아 먹을 뿐이라는 걸.

'몸 상태가 말이 아니다···'

히트맨의 능력은 그 폭발적인 힘만큼이나 가혹한 대가를 유신에게 요구했다.

지금 유신의 상태를 말해보자면···

속이 울렁거리고, 눈앞이 흐릿하고, 오한이 느껴지며 온몸이 쑤시고 무거웠다.

'뒤지겠군.'

이대로 가다가는 진짜 죽겠다는 생각이 든다.

그것도 괴물이나 악당들 손이 아닌 스스로의 자멸에 의해.

아니, 따지고 보면···

'중금속하고 모래먼지, 방사능의 영향도 컸을 테니 환경 탓인가?'

콜록, 콜록.

기침하던 유신이 헛웃음을 지었다.

빨리 낙원에 가서 몸뚱이부터 고쳐야겠다. 여건이 되면 메트로폴리스로 가서 보다 정밀한 케어를 받아야겠다.

유신이 생각하던 그 순간.

"알고 있었어? 이렇게 될걸."

에피가 물어왔다.

"···"

뭘? 이라는 답은 하지 않는다.

지금 상황에서 에피가 물어볼 것은 하나 뿐이기에.

"내가 본 미래는 단편적인 장면들의 편린들이었다."

"어려운 말 쓰지 말고."

"나도 백퍼센트 확신할 수는 없었다는 말이다."

"···"

평소의 에피였다면 하아? 그럼 반쯤 어림짐작으로 날 죽이려고 한 거야?

라고 말하며 날뛰었을 것이다. 하지만 지금 소녀는 입을 꾹 다물었다.

그리고 생각했다.

왜 알려 주지 않았냐? 왜 막아주지 않았냐?

같은 말들이 속 끝에서 맴돈다. 하지만 그걸 쏟아내지는 않는다.

머릿속으로는 이미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애초부터 유신의 말을 안 믿은 것은 에피였다.

상황은 이미 오래전부터 벌어져 있었다.

그럼에도.

"백구··· 흑구···"

서러운 것은 어쩔 수 없다.

소녀는 울었다.

새벽이 다 지날 때까지.

악몽 같았던 밤이 다 끝날 때까지.

스스로를 옭아맸던 이 모든 악연의 끈을 끊어버릴 때까지.

***

날이 밝았다.

유신은 찌뿌둥거리는 몸을 풀면서 눈을 떴다.

"으하암. 뒤지겠군."

제일 먼저 보인 것은 금색의 머리통이었다.

평상시라면 늦잠을 거하게 잤을 소녀는 우두커니 자신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것도 퉁퉁 부은 눈으로.

유신이 물었다.

"왜?"

"그, 저기 유신. 그러니까···"

"뭐?"

"나··· 그, 크흠. 당신만 괜찮으면···"

속 터지겠네.

아이들은 보통 솔직하다는데. 이 애새끼는 왜 그러지를 못할까?

유신은 코트를 털면서 자리에서 일어났다.

"힘든 길이 될 거다."

"···!"

"나는 이 세상을 정화할 생각이거든."

영원한 삶을 추구하다 끝내 미쳐버린 불사자를 봉인할 것이다.

인류의 마지막 보루였던 아크의 잔재들을 모조리 파괴할 것이다.

인간들의 몸과 영혼을 양분 삼아 암약해온 데몬을 소멸시킬 것이다.

봉인을 깨고 힘을 회복하고 있는 심해의 이물을 증발시킬 것이다.

모든 괴이의 원천인 마녀를 태워버릴 것이다.

모든 감염체들의 지배자이자 정신적 군집체인 여왕을 처리할 것이다.

그리고 마지막···

7대 재앙의 마지막 뿌리를 뽑는 순간.

이 세상은 한결 더 살만한 지옥으로 뒤바뀔 것이다.

"오해와 비난을 사는 것은 예사에 늘상 목숨의 위협에 시달릴거다. 지금껏 상대한 괴물들보다 더한 녀석들이 개미떼처럼 덤벼들 거고."

오만하면서도 섬뜩한 말이었다.

유신의 가라앉은 눈동자는 너, 자신 있냐? 라는 눈빛을 여과 없이 보냈다.

하지만 이를 듣고 있던 소녀는···

"그런 것 따위! 별거 아냐! 이 엿 같은 세상에서는 맨날 겪는 일인걸!"

오히려 환하게 웃었다.

그러면서 주먹을 꽉 쥐며 콧방귀를 뀌어 보였다.

딱!

물론 유신이 딱밤을 때리자 씨이 소리를 내며 물러섰지만 말이다.

"왜 때려!"

"그와는 별개로 넌 너무 약해."

"강해지면 되잖아! 유신 네가 가르쳐주면 될 거 아냐!"

에피가 말을 끝낸 순간.

유신이 씩 웃었다.

마치 그 말을 기다리고 있었다는 듯 보였다.

"분명 네 입으로 그렇게 말했다?"

"으, 응?"

"강해지게 해달라고. 뭐든 다 할 거라고. 맞지?"

"으, 으응···"

에피는 불안감에 휩싸였지만 어쩔 수 없었다.

그녀에게 남은 것은 이제 유신 하나뿐이었으니.

"좋아. 네 훈련에 대해서는 차근차근 생각해보고···"

유신은 고개를 돌려 뻥 뚫린 창문을 바라봤다.

그곳에는 이예르폴의 주민들이 슬금슬금 눈치를 보며 밴디트들의 시체를 치우고 있었다.

"받을 건 받아야겠지."

"뭘··· 아, 설마?"

"그래. 사냥꾼은 결코 공짜로 일하지 않아."

에녹은 브라키에게 자신이 총을 가지고 있다는 것을, 사냥꾼일 수도 있다는 것을 말하지 않았다.

아마 그 나름의 노림수였을 것이다. 내가 죽으면 이 거래를 이어나가고, 만에 하나라도 브라키가 뒤지면 더 좋다고 생각했겠지.

"생각한 대로 됐으니 이쪽 역시 받아줘야지."

밴디트 토벌을 빌미로 크레딧을 뜯어낸다.

양이 얼마나 되냐에 따라 붙잡혔던 사람들에게도 조금 적선 해주도록 하자.

그 때.

부스럭.

에피가 웬 큼직한 자루를 내려놓았다.

"이건?"

"에녹의 비밀 금고에 있던 거야. 나도 공짜로 가르쳐 달라고 할 생각은 없었어."

어제 그런 일을 당한 상태에서도 제 아비의 재산을 털었다라...

충격과 슬픔에 빠져 있어봐야 남는 건 아무것도 없다.

소녀는 이 사실을 잘 알고 있었다.

당당하게 주장하는 소녀를 보며 유신은 피식 웃었다.

"어차피 의뢰 완수금으로 뜯어낼 수 있는데?"

"하지만 이걸 다 뜯어낼 수는 없었을걸? 에녹은 제 목숨보다도 마을을 생각하는 구두쇠고, 유신도 여기 녀석들을 죽이면서까지 크레딧을 강탈하지는 않았을 테니까."

정론이다.

유신은 살인자이자 전사였지 학살자가 아니다.

그는 이 비정한 세상에서도 인간의 마음을 간직하고 싶었다.

조금이라도.

'괴물이 되어버린 채 집으로 돌아가봤자 무슨 소용인가?'

유신의 웃음이 진해졌다.

"모두 얼마냐?"

"1840크레딧."

"내 수업료는 그것보다 더 비싼데."

"앞으로 달아둬. 열심히 배워서 금방 갚아줄 테니까!"

유신은 크레딧을 품에넣으며 소녀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좋다. 하지만 기억해둘 게 하나 있군."

"뭔데?"

"보증이나 계약 같은 건 함부로 하는 게 아니야."

"또 어려운 말···"

"새겨 들어."

쳇. 에피는 혀를 차다가 유신을 보며 음흉하게 웃었다.

"참. 이걸로 끝낼거 아니지?"

"당연하지."

유신 역시 비슷하게 웃으며 마을 주민들을 내려다봤다.

"촌장에게 받은 건 받은거고. 저 자식들한테도 뜯어내야지."

"음음."

마치 스케빈저처럼 고개를 끄덕이는 소녀한테 이곳은 더이상 고향이 아닌 것 처럼 보였다.

"가볼···"

부아아아앙!

어디선가 익숙한 배기음이 들려왔다.

그리고 그 소음의 주인은 두 사람이 무슨 행동을 취하기도 전에 콰앙! 장벽을 부수며 요란스럽게 등장했다.

또각또각

문을 열고 등장하는 늘씬하게 뻗은 곡선의 여인.

유신의 눈가가 가늘어졌다.

그는 저 자를 알고 있었다. 그것도 아주 잘.

"아이언 나이트···"

태양 아래에 우두커니 서 있는 저 여자는.

선글라스를 쓴 채 오만한 미소를 짓고 있는 저 여자는.

(구)한국.

아니,

아시아 지역의 유일한 7위계 능력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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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이언 나이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