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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기꾼

불어닥치는 모래바람.

호시탐탐 눈을 번뜩이는 밴디트와 뮤턴트들.

세상이 망한지 백년하고도 또 비슷한 시간이 흐른 지금.

황무지를 가로지르는 여정은 험난하기 그지 없었다.

"와아."

하지만 그런 악천후 속에서도 웃음꽃이 피어날 때가 있었는데.

"이게 그렇게 신기해? 아가씨."

행렬의 중심.

다른 자들보다 깨끗한 행색의 사내의 손에서 뻗어나오는 빛 때문이다.

"당연하죠."

때 탄 로브와 꼬질꼬질한 얼굴에도 그 미모가 제법 괜찮았던 여자가 입을 헤 벌렸다.

"클레이모어 님을 직접 뵙는 것도 처음이고! 그 능력을 보는 것 역시 처음인걸요! 와아! 신기해라!"

"허허. 함부로 만지면 큰일나. 지금은 이렇게 아름다운 빛덩이일 뿐이지만 이게 화를 내면···"

꾸욱

사내가 주먹을 꽉 쥐자 빛더미가 요동치기 시작했다.

척 보기에도 심상치 않아 보이는 기세를 흘리며.

"으, 꺄악!"

"하하. 많이 놀랐어? 걱정마. 이 빛이 아가씨를 향하는 일은 없을테니까. 아. 여러분들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그것이 터지기 직전.

빛을 갈무리한 사내가 매끈한 미소를 지은 채 주변을 둘러봤다.

이 상황을 주목하고 있던 동행객들은 식은땀을 훔쳤다.

"휴우."

그 때 그 무리에 속해있던 소녀가 고개를 돌렸다.

유독 한 사내만이 입을 쩍 벌리며 하품을 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소녀는 호기심이 많은 편이었다.

"아저씨는 저게 안 신기해요?"

"뭐가?"

사내의 목소리는 고저가 없었다.

정말 지금 상황에 눈꼽만치도 관심이 없어보였다.

"클레이모어님의 이능이요."

"···"

피식.

그 때 사내의 얼굴에 처음으로 감정이 나타났다.

"넌 빛이 신기하냐?"

비웃음에 가까운 조소였다.

"그냥 빛이 아니니까 그렇죠! 아무것도 없는 허공에서 짠! 하고 나타난 거잖아요!"

"태양빛이든 복사열이든 허공에서 피어난 건 똑같은데?"

"복사열이 무슨 말··· 아니! 아무튼 대단하잖아요! 저게 터지면 이 주변 일대가 초토화 된다는데!"

"너 진짜 순진하구나?"

사내의 입가가 찢어졌다.

그는 이제 눈물을 흘리며 낄낄거리고 있었다.

"저 말을 곧이 곧대로 믿네."

"믿어···? 그럼 아저씨는 지금 클레이모어님이 거짓말을 했다는거에요?"

"크흐흐. 꼬마야. 빛이 파괴력을 가지려면 어떤 조건이 필요한지 아니?"

"···?"

"여러가지가 있겠지만 그 중 대표적인 것은 열이다. 근처에 있는 것만으로도 피부가 녹아내릴 정도의 강도는 돼야해. 하지만 난 저 빛에서 아무런 열기도 느끼지 못했···"

사내가 말을 멈췄다.

대화 소리가 컸는지 어느새 주변의 모두가 그들을 주목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특히나 클레이모어라고 불린 남자의 얼굴은 차갑게 굳어있었다.

"이봐. 지금 내 능력이 뭐가 어쨌다고?"

그의 손에는 어느새 새하얀 광구가 지글거리고 있었다.

방금 전에 보여주던 것보다도 더 크고 선명한 빛이.

"큼. 목소리가 좀 컸나?"

사내는 어깨를 으쓱였다.

그걸로 끝이었다.

그는 사과조차 하지 않았다.

"이 자식이···"

클레이모어의 얼굴이 붉어졌다.

그가 당장에라도 광구를 던질 것 같이 팔을 홱 젖혔다.

"차, 참으십쇼!"

그러자 기겁한 건 주변에 있던 사람들이었다.

"뭣도 모르는 떠돌이가 지껄인 헛소립니다!"

"···황무지인의 우매함은 이해를 합니다만. 저 태도만큼은 참기 어렵군요. 하지만 여러분들이 이렇게까지 말하니··· 후우. 참겠습니다."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 클레이모어님! 저 비렁뱅이한테는 저희가 본때를 보여주겠습니다! 어이! 너!"

중년인이 삿대질을 하던 그 순간.

쐐애액 퍽.

돌연 그는 눈깔을 홱 뒤집으며 쓰러졌다.

그의 머리에는 화살깃이 매달려 있었다.

"으, 꺄아아아악!"

비명과 고함의 하모니가 울려퍼진다.

터벅터벅.

샛노란 모랫더미 너머로 나타나는 거뭇한 인영들.

혼란에 빠진 행렬의 주변으로는 어느새 수십명의 인간들이 몰려있었다.

"낄낄낄."

살의로 번들거리는 눈동자.

씨익 웃으니 드러나는 날카로운 이빨.

황야의 악몽 중 하나.

밴디트들이다.

"모, 모두 무기 들어!"

지금껏 살아남기 위해 발악해왔던 황무지인들의 대처는 기민했다.

녹슨 쇠파이프. 돌팔매. 새총. 따위의 하찮은.

그러나 맞으면 확실히 치명적인 무기들을 꺼내들었다.

심지어 방금 전 여덞살 짜리 소녀 역시도.

하지만.

"휴우. 이 자식들 기세 좀 보게. 얘들아!"

모래먼지 너머.

대머리의 호출에 곧바로 나타나는 시커먼 음영들을 보고 그들의 기세는 꺾여버렸다.

"시, 시발! 뭔놈의 숫자가!"

"터미네이터들이다! 요즘 이 주변의 싹을 말려버린다는 그 악귀들!"

황무지인들을 압도할만큼 밴디트들의 숫자는 많았다.

쿠웅.

그 때 밴디트 중에서 누군가가 앞으로 나섰다.

"지금부터 셋 센다. 여자와 가진 물건 다 내려놓고 꺼져. 그렇지 않으면 모조리 다 족치겠다. 산채로 스튜를 끓여주지."

피 딱지가 엉킨 도끼를 든 대머리는 그 흉흉한 외관과는 다르게 태평하게 코를 휘볐다.

"크흑!"

"싸웁시다! 에밀리를 저딴 식인종 새끼들한테 줄 수는···"

"말 같지도 않은 소리! 애는 다시 낳으면 그만이야! 하지만 싸우면 우린 다 죽는다!"

"이 미친 영감탱이가! 뚫린 입이라고!"

"하나."

목숨이 경각에 달린 순간.

격렬한 논쟁이 황무지인들 사이로 퍼져나갔다.

그들이 악을 쓰든 말든 밴디트들은 낄낄거리거나 태평하게 숫자를 셌다.

"둘."

세엣.

'본보기로 몇 놈 대가리 좀 깨줘야겠군.'

도끼를 휙 돌린 대머리가 눈을 번뜩이던 순간.

"이, 이놈들! 여기 이 분이 누군줄 아느냐!"

황무지인들 중 한 명이 소리쳤다.

백정들의 흉흉한 시선이 그를 향했다.

"이 빌어먹을 놈이 지금 죽고싶어 환장···"

"이분은 클레이모어님이시다! 죽고 싶어 환장한 것은 네놈들이지! 이 더러운 식인종 새끼들!"

"크, 클레이모어?!"

클레이모어.

멸망한 세상에서 벌어지는 갖가지 재앙 중 가장 위협적이며 가장 치명적인 재앙.

그들은 해결사이자 살육자였으며. 범인들과 부대끼고 살아가면서도 그들의 위에 군림했다.

그 끔찍한 수식어들 사이에서도 통용되는 공통점은 단 하나.

이런 밴디트 무리 따위는 얼마든지 짓밟아버릴 수 있다는 것.

"클레이모어님! 본때를 보여주시지요!"

"크흠, 흠."

지금 이 순간.

이 자리에 있는 모두의 시선이 한 곳으로 모였다.

때가 탔으나 멋들어진 양복과 구두를 차려입은 사내가 헛기침을 했다.

"···좋습니다. 모두 물러나세요."

뚜벅뚜벅

사내는 겁도 없이 몇 발자국 앞으로 나왔다.

"흐읍!"

곧 눈동자를 번뜩이면서 양손을 펼쳐보였는데.

지이이이잉

지금까지와는 비교도 할 수 없을 정도의 광채를 가진 빛더미가 그의 손에서 피어올랐다.

"나는 가람. 클레이모어다. 라이트세이버라는 이명으로도 불리고 있지. 죽기 싫다면 지금 당장 꺼져라. 이 빛이 터진다면 나는 몰라도 이 일대는 흔적도 없이 사라질테니까."

수십명의 살인자들을 앞에 둔 상태에서도 태연한 얼굴과 목소리.

능력의 위험성을 고려해 아직까지 나서지 않았다는 당위성까지.

가람의 겁박은 악명높은 밴디트들을 겁먹게 만들기에 충분했다.

"시, 시벌! 도망쳐야 하는 거 아뇨?! 저거 진짜 능력이잖아!"

"이쪽 역시 셋을 세지. 하나."

"크윽. 이게 얼마만의 대어인데. 이대로···"

"둘."

"셋. 네놈들이 자초한 거다."

"젠장! 모두 튀···!"

가람이 빛더미를 던지려고 하고, 대머리가 몸을 돌리던 그 순간.

쐐애액.

검은선 하나가 그 사이로 끼어들었다.

"어?"

가람은 눈을 깜빡거렸다.

곧 제 팔에 박힌 화살깃을 보면서 찢어져라 비명을 질렀다.

"끄, 끄아아아악!"

"두, 두목! 지금 이게 무슨 짓··· 억!"

"등신 새끼들."

대머리의 뺨을 후려치면서 도적들 틈에서 누군가가 나왔다.

검은색 가죽재킷에 하키가면을 쓴 자였는데.

그는 조잡한 쇠뇌를 어깨에 걸친 채 질질짜면서 바닥을 구르는 가람을 바라봤다.

"저건 클레이모어가 아니다."

"뭣이?! 하지만 저 빛은···"

"그냥 운 좋게 재주하나 깨우친 능력자일 뿐이지."

저벅저벅

"응? 그렇지 않나? 광대양반."

하키가면은 가람에게 다가가서 조끄려 앉았다.

"끄으으. 이놈이! 좋다! 어디 한 번 죽어···!"

가람이 또 한 번 비명을 질렀다.

하키가면이 화살대를 턱 잡고는 상처를 헤집었기 때문이다.

"끄아아악!"

가람은 차가웠던 얼굴을 지운 채 눈물콧물을 질질 짜냈다.

곧 눈앞에 있는 존재를 올려다 봤는데.

하키가면의 키는 비상식적으로 컸다.

이는 떨어지는 태양빛이 만들어낸 음영이 더해져 그를 괴물처럼 보이게 했다.

꿀꺽

그가 침을 삼킬 때. 하키가면의 입이 열렸다.

"자기 능력을 제입으로 말해주는 클레이모어가 있단 사실은 들어본 적도 없다."

"그리고 저 빛은 그냥 밝기만 하더군. 아무런 열기도 느껴지지 않아."

줄줄이 새어나오는 진실들.

가람은 눈을 질끈 감았다.

쿵.

곧 이마가 찢어져라 땅에 머리를 박았다.

"사, 살려주십쇼! 전 분명히 쓸모가 있을 겁니다!"

비열을 넘어 비참하게까지 보이는 모습이었다.

"이 개같은 새끼가 감히 우리를 속여?!"

"크하하하하! 이 놈 이거 물건이네!"

방금 전까지의 수모를 잊기 위해서라도 밴디트들은 요란하게 웃어재꼈다.

반면에 황무지인들의 얼굴은 굳었다.

특히나 소녀는 실망을 넘어 절망에 빠져버렸다.

"어, 어떻게···"

처음이었다.

부모를 잃고.

굶주림과 열기. 추위와 싸우며 버텨오던 생에에서 처음 맞이한 신비였다.

저 빛은. 그리고 가람이 보여주던 자신만만한 모습은 그녀에게 있어 단순한 흥미거리가 아니라 희망 그 자체였던 것이다.

그런데 그게 무참히 깨졌다.

'엿같은 세상.'

부모님들이 늘 입 밖으로 내놓던 말.

그리고 이젠 자신 역시 공감하는 말.

동심을 잃은 소녀의 눈동자가 추욱 가라앉을 때.

턱.

"내 말 맞지?"

누군가가 자신의 머리에 손을 얹었다.

방금 전에 봤던 그 남자였다. 클레이모어를 사기꾼이라 몬··· 아니, 진실을 간파한 유일한 사람.

"아저씨···"

"어떻게 처음부터 끝까지 레파토리하나 바뀌지도 않는지."

그는 지금 같은 상황에서도 낄낄거리고 있었다.

저벅.

아니, 이에 그치지 않고 앞으로 나서고 있었다.

밴디트들이 시선이 남자에게 집중됐다.

멋들어진 가람과는 달리 꼬질꼬질한 행색.

전형적인 황무지 원주민이었다.

"넌 뭐냐."

"진짜 클레이모어."

덤덤한 목소리에 웃음이 퍼져나간다.

"크흐흐흐. 이 황무지 들개들 사이에는 클레이모어가 대체 몇 명이나 있는거야?"

"저 친구와 마찬가지로 셋을 세지. 도망치는 놈은 봐준다."

또 한 번 터지는 웃음.

퍽. 그 중심에 있던 히키가면이 가람을 걷어찼다.

"억!"

"어이, 진짜 클레이모어 양반. 내가 진짜와 가짜를 어떻게 구분했는지 알려줄까?"

그가 가면을 벗었다.

밴디트들을 제외한 주변 사람들 모두가 헉 소리를 냈다.

줄줄이 새어나오는 고름.

가면 아래 얼굴은 지독한 화상자국으로 가득했다.

피식. 비틀어진 얼굴의 두목이 웃었다.

"진짜 그 새끼들한테 당해봤기 때문이지. 그 악마들을 진짜로 마주해봤기 때문에 나는 진실을 꿰뚫어 볼 수 있었던 거야."

그는 마치 훈장처럼 오히려 제 망가진 얼굴이 자랑스러운 듯 했다.

이에 대응하는 사내의 태도는···

"알빠냐?"

"뭐?"

"한 때 유행했던 말인데. 몰라? 알빠냐고. 아. 네가 못생겼단 사실은 잘 알았다."

피식 웃으며 어깨를 으쓱일 뿐이다.

"이 자식이···"

화상자국 가득한 얼굴이 일그러진다.

철컥.

순식간에 쇠뇌의 장전을 끝마친 그가 사내를 겨눴다.

"쉽게 죽을 생각하지 마라. 저 얼치기와는 달리 너는 포를 떠서 국물을 우려내 줄 테···"

두목이 말을 멈췄다.

화르르륵

시뻘건 불꽃이 사내의 손에 맺혔기 때문이다.

"어?"

오싹 소름이 돋는다.

"자, 잠깐···!"

오래전의 훈장이 부글부글 끓어오른다.

당황한 두목이 양손을 휘졌던 그 순간.

화르륵.

"셋. 네가 열심히 씨부리는 동안 시간 다 지났다."

툭 내뱉어지는 말과 함께 사방이 환해졌다.

가람이 보여줬던 빛보다 더 화려한 광채.

피부가 타오를 정도로 강력한 열기.

진짜 클레이모어의.

혹은 그저 고향으로 되돌아가고 싶은 청년의 손짓 한 번에 화염의 세례가 떨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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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짜 사기꾼

터미네이터라니. 그건 네깟 놈들이 쓸 수 있는 이름이 아니라고.

"아놀드 슈왈제네거 형님이 아닌 이상 말이지."

"두, 두목이 뒈졌다! 진짜 클레이모어야!"

"도망쳐!"

꽁지가 빠져라 달아나는 밴디트들을 보며 유신은 침을 퉤 뱉었다.

'아슬아슬했네. 엿같은 겜 같으니.'

곧 주변이 고요해서 뒤돌아보자 모든 황무지인들이 자신을 뚫어져라 바라보고 있었다.

흠. 유신은 어깨를 으쓱였다.

"뭘 봐? 진짜 클레이모어 처음보나?"

"저 그게···"

망설이는 자.

"죄, 죄송합니다! 귀하신 분을 미처 못 알아뵙고!"

냅다 고개부터 숙이는 자.

"히익."

두려움에 빠진 자.

"와아. 진짜였어···"

순수하게 감탄하는 자.

법과 질서 따위는 길거리 쓰레기 만도 못한 세상.

강력한 힘 앞에서 드러나는 다양한 인간군상들.

'애는 애구만.'

이 매마른 땅에서 그나마 유신의 눈에 띄는 것은 눈동자를 반짝이는 저 꼬맹이 뿐이다.

"내 말 맞지? 꼬마야."

유신은 피식 웃어주고는 불타죽은 밴디트들의 시체로 다가갔다.

"으, 으아! 죄, 죄송···!"

"우리 삼류 사기꾼 씨는 입 닥치시고."

비굴하게 엎드리는 가람을 무시한 채 녀석들의 품을 뒤진다.

'힘 조절 좀 할 걸...'

유신은 숯더미가 되버린 쇠뇌를 보며 입맛을 다셨다.

조잡하게 만든 것이었지만 가공된 나무도 들어갔고 쇠도 들어갔다.

결정적으로 사람의 몸에 대번에 구멍을 뚫을 수 있을 정도의 위력을 자랑했지.

공장이든 가게든 설계도든 장인이든.

모든 것이 평등하게 불타버린 세상.

사람을 확실하게 죽일 수 있는 물건의 가치는 대단했다.

저기서 벌벌 떨고 있는 황무지인들 목숨값 몇 개 정도는 간단히 씹어먹을 만큼.

'10크레딧 정도인가···'

푸른빛을 띠는 동전들을 챙긴 유신은 고개를 돌렸다.

수십 명의 바보들이 자신을 멍하니 바라보고 있었다.

"이봐."

"네, 넵! 클레이모어님!"

"피냄새가 짙군. 날파리들이 또 꼬이기 전에 어서 출발하지."

"아, 그, 그렇군요! 알겠습니다!"

"흠. 배가 좀 고픈데. 뭐 먹을 것 좀 얻을 수 있을까?"

"물론입지요!"

지글거리는 태양 아래.

고향을 잃은 자들은 또 한 번 황무지를 가로지른다.

돌연변이 쥐고기를 씹으면서 유신은 생각했다.

이들에게 말 하지 않은 사실이 하나 있었다.

자신은···

"빨리 걸어 이 사기꾼 새끼!"

클레이모어가 아니다.

"으, 으으···"

성난 군중들에게 얻어터져 질질 끌려가는 저 가람과 같은 처지다.

즉 그는···

'바보들.'

사기꾼 앞의 또 다른 사기꾼인 것이다.

저벅저벅

세상이 망한지 백년하고도 또 비슷한 시간이 흘렀다.

도로를 뒤덮었던 아스팔트도, 드높은 마천루들도, 손짓 한 번에 모든 것을 할 수 있던 전자기기들도 모조리 사라졌다.

사람들은 이제 독설과 키보드 대신 두 손과 이빨로 사람을 죽인다.

총과 미사일 대신 기묘한 초능력을 부리며 사람을 죽인다.

역사는 이제 더는 발전하지 않고 오히려 퇴보하고 있다.

지독시리 기묘한···

아니.

바보들의 세상인 것이다.

그 눈먼 자들의 틈바구니 속에 있던 이방인은.

찬란하게 빛나던 그 시절을 오롯히 기억하고 있던 유일한 존재는 한숨을 내쉬었다.

'길고 길었다.'

유신은 이제서야 이 망겜의 시작점에 섰다.

***

멸망한 세상의 생존자들.

줄여서 멸세생은 짬뽕이라는 수식어가 걸맞는 그야말로 매니악한 게임이었다.

포스트 아포칼립스.

능력자 배틀.

크리처와 좀비.

한 두개만 골라 집중해도 모자랄 판에.

겁 없게도 멸세생의 제작자들은 이 모든 걸 뭉쳐서 게임을 만들었으니까.

그 결과는?

당연히 망했다.

아포칼립스 특유의 배경과 좀비를 좋아하는 유저들은 크리처와 이능력 배틀을 도무지 용납하지 못했다.

능력자 배틀물을 좋아하는 팀 플레이 게임 유저들은 그외 나머지 것들을 용납하지 못했다.

상당한 게임성과 괜찮은 그래픽을 가진 채 출시된 게임은 그렇게 일부 매니아들을 위한 전유물이 되었다.

현대인들의 참을성을 너무 높게 본 것이 제작자들의 패인이었다.

아니, 이 경우엔 사회 현상과도 맞물려 있다고 봐야겠지.

지금은 너무 많은 정보가 범람하는 시대였으니까.

퓨전 판타지 따위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져야 한다고.

···

각설하고 유신은 이 망겜을 즐기던 유저였다. 숨겨진 히든피스와 선택지를 탐구하고 손수만든 공략법까지 올릴 정도로 꽤나 열성적인 플레이어.

-어? 내가 1위라고?

그런 자신이 나중에 이 게임의 랭킹1위가 됐다는 사실을 깨달았을 때는 솔직히 그리 기쁘지 않았다.

전 세계를 다 합쳐도 플레이어 풀이 극도로 적은 게임이었으니까.

누가 알아주지도 않는 업적 따위···

[숨겨진 조건을 달성하여 특전이 해금됩니다!]

그나마 관심이 가는 것은 랭커용으로 준비 된 특전 정도랄까?

사냥꾼, 밴디트, 황무지인과 도시인, 크리처, 고대 인류의 실험체, 클레이모어, 기계인.

멸세셍은 플레이하는 직업에 따라. 또 그 속에서 행하는 선택지에 따라 게임의 분위기와 결말이 바뀌는 게임이었다.

수십개의 다양한 직업들과 종족들. 스타팅 포인트를 고를 수 있었으며.

그들 모두가 제각기 고유한 특색과 장단점을 가지고 있었다.

유신은 이 수많은 직업들을 씹고 뜯고 맛보고 즐겼다.

나중에 가서는 눈 감고도 플레이 할 수 있을 정도였다.

-하암. 지루해 죽겠네. 할 것도 없는 망겜.

그래서 였을까?

강탈자.

[NO 509571 오직 당신만을 위해 준비된 '존재'입니다]

유신은 홀린듯이 이 새로운 캐릭터를 만지작거렸다.

기초스탯 최하.

초기자금 최하.

스타팅 포인트 환경 최하.

최하. 최하. 최하.

깡마른 몸에 다크서클이 내려앉은 눈.

그나마 봐줄만한 건 샤프한 인상의 얼굴 뿐인 이 동양계 아바타는 모든 것이 불합리할 정도로 쓰레기였다.

하지만.

-재밌겠네.

유신은 기대감으로 눈을 반짝였다.

그야 그럴 수 밖에 없는 것이.

이 모든 페널티를 감수할 만큼의 메리트가 이 자식한테 있었기 때문이다.

이 녀석은···

-강탈이라니. 개쩔잖아?

죽인 타인의 능력을 흡수할 수 있다.

조건이 허락하는 한 무한대로.

-좋아. 390회차는 너로 결정. 닉네임은···

타닥타닥

점멸하는 모니터 빛.

씨익 웃으며 기묘한 눈빛을 흘리는 아바타.

어딘가로 끌려가는 정신.

[반갑다.]

유신은 그렇게 배불뚝이 아저씨라면 단 한 순간도 버티지 못할 생지옥 속에서 눈을 떴다.

***

"젠장."

여전히 어제일처럼 생생한 기억에 유신은 헛웃음을 지었다.

어떻게 잊을 수 있을까?

그런 병신같은 짓거리만 하지 않았다면.

아니, 애초에 그딴 망겜에 손도 대지 않았다면 자신은 여전히 집구석에서 잘 먹고 잘 살고 있었을 것이다.

휘이잉.

이런 황량한 황무지를 방황하는 것도.

어떻게든 뜯어먹을 게 있나 싶어 눈을 부라리는 아귀들 사이에 있을 일도 없었을텐데.

"후우."

이 땅에 떨어진지 어언 1년.

유신은 이제서야 현대인의 쓸모 없는 감정들을 배제하고. 목표를 향해 움직일 준비를 끝마쳤다.

"무언가 안 좋은 일이 있으신 모양이군요."

말과 함께 수염이 하얗게 센 노인이 차를 내왔다.

물론 '차'라고 해봤자 칡을 달여서 내왔을 뿐이었지만 말이다.

하지만 이 세상에서는 충분히 사치품이라고 불릴만 했다.

(구)한국의 외곽 중의 외곽인 이 근방은 깨끗한 물 조차 보기 힘든 땅이 아니던가?

"활동하기에 좋은 환경은 아니니까."

유신은 자연스럽게 차를 마시는 척하며 혀끝만 살짝 댔다.

톡쏜다는 느낌은 없다.

그저 칡 특유의 쓴 맛만 느껴진다.

'극독이나 마취제는 없는 것 같고.'

무색무취의 약품은 이런 비렁뱅이 마을에선 구할 수 없다.

이정도 감별로도 충분하다.

클레이모어의 연기는 잘 먹혀들어가고 있으니 허튼짓을 할 것 같지는 않다만···

인생사 혹시 모른다. 광인들의 시대 아니던가?

표정을 갈무리한 유진은 호로록 차를 마신 후 잔을 내려놨다.

"맛이 좋군. 솜씨가 제법이야 촌장."

"허허. 이 나이쯤 먹다보면 여러가지 재주가 생기는 편이지요."

이 곳의 이름은 모래두지 타운.

철골만 남은 터널을 중심으로 쓰레기 벽을 쌓아 만들어낸 정착촌이었다.

유신과 함께 했던 황무지인들의 목적지이기도 했다.

그곳의 리더가 인간적이며 현명하다나?

피난민들이 퍼트린 소문이 반나절도 안 되어 타운에 퍼져나갔을 무렵.

소문의 주인인 촌장은 후다닥 달려나오며 유신을 맞이했다.

인간적인 건 모르겠지만···

'바보는 아닐지도.'

과거의 세상에서는 그랬다.

나이와 지혜는 꼭 비례하지 않았다. 하지만 지금은 다르다.

복지, 배려, 존중.

같은 사전적 의미는 휴짓조각만도 못한 세상.

아이든 성인이든 힘이 없으면 나란히 한줌 고깃덩이가 되는 세상.

저 나이까지 살아남았단 것은 무언가 한 수가 있다는 뜻이었다.

저자 같은 경우에는 그게 소문과 일치할 가능성이 컸다.

'인망이 있어보였지.'

통제된 주민들의 모습.

깍듯하게 대하는 자경단.

저 왜소한 몸에 숨겨진 물리력 같은 게 있을리는 없을테니.

아마 능력자거나 특별한 지식을 겸비했겠지.

'게임 상에서는 이런 디테일까지는 나오지 않았다.'

유신이 이 황무지에서 1년간 구르고 얻은 경험 중 하나다.

모든 것을 모니터 밖 세상에 딱딱 맞출 수 없다. 큰 틀을 따르되 자잘한 것은 스스로의 직관력과 경험으로 매꿔야 한다.

모래두지 타운이 바로 이에 부합하는 곳이었다.

유신의 기억 속에서 이곳은 그저 텍스트 몇 줄로만 언급되는 장소일 뿐이었으니까.

-더스트 봄이 일어나기 전. 모종의 이유로 인해 멸망.

"의뢰를 넣은지 얼마나 됐다고 이렇게 빨리 와주실 줄은 몰랐습니다."

유신의 머리가 바쁘게 돌아갈 때. 촌장이 난대없이 고개를 숙였다.

"···의뢰?"

"실례가 안 된다면 혹시 증표를 보여주실 수 있으신지요? 방금 전의 가람이라는 녀석도 그렇고 요즘 워낙 얼치기들이 많아서···"

아하. 그렇게 된 거였나?

대화의 문맥으로 상황을 파악하는 것은 쉬웠다.

"무언가 착각하고 있는 모양이군. 나는 당신네들이 찾던 클레이모어가 아니야."

완전한 부정은 하지 않는다.

클레이모어라는 신분은 꽤나 유용했으니까.

"···이런."

주름진 얼굴에 낭패감이 드러났다.

그 정도로 보아 어지간히 시급한 일인 모양이다.

"죄송합니다. 시기가 너무도 절묘했던지라···"

'이렇게 평온해 보이는 마을에서 거금을 써가며 클레이모어를 부른다라···'

냄새가 난다.

더럽게 위험한 냄새가 풀풀 풍긴다. 당장에 간추려지는 것들만 다섯 개 정도.

하지만.

"이야기 정도는 들어볼 수 있겠지."

이 엿같은 세상에 위험을 담보로 하지 않는 일이 어디 있단 말인가?

유신이 능청스럽게 어깨를 으쓱였다.

선심쓰듯 말하는 말투.

그러나 당사자에게 있어선 지금 꼭 필요한 대답.

"가, 감사합니다!"

촌장은 어느새 징표를 보여달라는 말을 잊은 채 고민거리를 털어놓았다.

"마을 근처에 죽지 않는 괴물이 나타났습니다. 혹시··· 불멸자가 아닐지."

"···!"

불멸자.

컴퍼니에서 지정한 수많은 위험종 중 가장 꼭대기에 있는 괴물.

세상의 멸망을 가속시킨 일곱 재앙 중 하나.

이제 막 튜토리얼을 시작한 찰나.

난대없이 최종보스 중 하나가 거론되자 유신은 눈을 가늘게 떴다.

이거 설마?

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

망가진 세상

'진정해. 아무리 망겜이라고 해도 시작부터 이 지랄일까?'

유신은 스스로를 타일렀다.

섣부른 단정만큼 위험한 짓은 없다.

우선 정보를 더 수집한다.

"7대 재앙 중 하나인 불멸자··· 그 말은 어디서 들었지? 그리 쉽게 접할 수 있는 정보가 아닌데."

"옛날에 사냥꾼의 조수 노릇을 한 적 있었지요. 그 덕분에 아는 게 좀 많습니다."

촌장은 7대 재앙이라는 말에 눈을 반짝이면서 답했다.

"호오."

밴디트. 방사능 오염과 모래폭풍. 돌연변이 괴물들.

망가진 세상의 환경은 퍽 가혹한 것이었다. 그럼에도 황무지인들이 끈질기게 살아남는 것에는 여러가지 이유가 있었는데.

컴퍼니에서 온 클레이모어라는 해결사 외에도 사냥꾼이라는 일익이 있었기 때문이다.

먹고 자고 숨쉬는 모든 행동을 크레딧으로 계산하는 그들은 황무지인들의 고민거리를 털어주는 고마운 존재였다.

'이거 조심해야겠군. 생각보다 더 아는 게 많겠어.'

"좋아. 전직 사냥꾼 조수 양반. 마을 주변에 나타난 그 괴물을 불멸자라고 생각하는 이유는?"

"흘흘."

노인은 웃었다.

촌장이라는, 한 타운의 지배자라고 불리는 것보다 과거의 그 뜨거웠던 기억이 더 마음이 동하는 모양이다.

"며칠 전 사냥꾼을 한 명 고용했었습니다. 저와 같이 늙어가는 처지의 노인이었는데. 그는 인생의 황혼기를 이곳에서 보내고 싶어했고 저는 그 대가로 그 괴물을 퇴치해달라고 말했죠."

뒤의 답을 예상하는 건 어렵지 않았다.

"그런데 실패했군."

"네. 사냥꾼은 되돌아오지 않았습니다."

"그 사냥꾼이 별 볼일 없는 사기꾼이었을 가능성은?"

촌장의 입매가 미세하게 꿈틀거렸다.

자신의 안목을 무시한다는 것은 곧 자신을 무시한다는 말과 같았으니까.

유신은 코웃음을 쳤다.

과거의 기억을 훈장삼아 살아가는 저 노인네를 일부러 자극한 이유가 있다.

"당신 말마따나 사기꾼들이 넘쳐나는 시대 아닌가? 밴디트나 황무지인. 하다못해 정키들까지 남을 등쳐먹으려고 하는 때지."

"제 나름의 검증을 거쳤습니다."

"어떤 방식으로?"

"···"

지금까지와는 달리 촌장은 입을 꾹 다물었다.

곧 실례한다는 듯 고개를 숙이고는 제 손가락을 움직였다.

나머지 손가락을 접은 채 검지를 뻗고 엄지를 위로 젖히는 요상한 모양새였다.

누가 본다면 지금 뭔 개짓거리를 하는 거냐고 할만큼.

그러니까···

황무지인들에 한해서만.

유신은 촌장이 왜 저런 제스처를 취했는지 간파해냈다.

미심쩍은 눈동자. 어디 한 번 맞혀보라는 것이다.

진짜 클레이모어라면 사냥꾼의 진위를 구별하는 법을 모를리가 없으니까.

아마 방금 전 클레이모어의 징표를 확인하지 못한 것이 마음에 걸리는 것 같았다.

'신중한 노인네로군. 아니, 한 타운의 우두머리라면 당연한가?'

어디서나 사기를 칠려면 빌드업이 중요하다.

장단에 맞춰주지.

스윽

유신은 검지와 엄지를 쭉 뻗은 채 촌장을 겨눴다.

"탕."

곧 입으로 격발음을 냈다.

흠칫.

장난스러운 짓거리였지만 촌장은 주춤했다.

뒤이어 튀어나온 유신의 말에 그 떨림은 더 커졌다.

"코끝을 간지럽히는 매캐한 화약내음. '총'을 담을 수 있을 정도로 치렁거리는 옷차림."

"···!"

"부족한가?"

"하, 하하. 충분합니다. 충분하고 말고요. '클레이모어님'"

의심의 눈초리가 대번에 사라진다.

그만큼 유신이 내뱉은 말은 은밀한 비밀들 중 하나였다.

평범한 자들이라면 결코 알 수 없는.

달그락

어디서 구한건지 촌장은 부드러운 밀빵과 말린 과일등을 내놓았다.

유신을 시험한 것에 대한 사과의 의미인 모양이다.

'크으. 살살 녹는구만.'

괴물이나 돌연변이들의 노린내 나는 고기.

삶은 감자나 나무뿌리.

혹은 인육.

등이 황무지인들의 주식이다.

눈앞에 있는 음식들이 얼마나 진수성찬인지는 말 할 필요도 없으리라.

유신은 기품있게 그러나 빠르게 만찬을 씹었다.

촌장은 입맛을 다시며 그 모습을 보다가 말을 이었다.

"원론으로 돌아가자면 화약 냄새를 풀풀 풍기던, 진짜 '총'으로 무장한 노련한 사냥꾼마저 그 괴물을 당해내지 못했습니다."

(구)한국과 (구)일본은 전 세계에서 핵전쟁의 여파를 가장 적게 받은 변방이었다. 그렇기 때문에 위협적인 괴물이나 밴디트들의 숫자가 적은 곳이기도 했다.

그런 지역에서 진짜 총을 다루는 사냥꾼이 나타난 것도 신기한데. 그런 자를 죽일 정도의 괴물이 존재한다니.

이 사냥꾼 조수가 상대를 불멸자라고 생각하는 것도 무리가 아니다.

"놈은 꼭 어두컴컴한 밤이 되어서야 활동을 시작했습니다. 장벽을 타고 넘을 정도로 거대했으며 사람을 순식간에 으스러트릴 만큼 강한 힘을 가지고 있었지요. 아직은 괜찮으나 곧 피해는 걷잡을 수 없을 만큼 커질 겁니다."

'어쩐지.'

타운에 들어섰을 때 부터 들었던 의문점이 풀렸다.

주민들의 얼굴에 불안감은 없었다. 기묘할 정도로.

촌장의 능력으로봐서 통제에 들어간 덕분이겠지.

그리고 그들은 피난민들을 반기는 분위기였다.

친지나 가족조차도 못 믿는 지금 같은 세상에서 말이다.

'유사시 미끼로 쓸 수 있다고 생각한 거야.'

비난할 생각은 없다.

이 정도 수작질은 애교에 가까웠으니까.

아마 저 밖에서 눈을 굴리는 황무지인들에게 물어봐도 같은 대답이 나오리라.

-멕여주고 재워줄테니 괴물 미끼가 되라고? 그러지 뭐. 밖에서 잡아먹히나 여기서 잡아먹히나 매한가지니까.

그만큼 각박한 세상이었다.

별개로···

피식

유신은 웃었다.

"잘 들었어. 머리까지 쓰는 걸 보니 보통 놈이 아니로군."

"역시 그렇지요? 불멸자가 맞는거겠지요?"

촌장의 얼굴은 절박했다.

말과는 달리 그는 이 사실이 틀렸기를 바라는 것 같았다.

그럴 수 밖에.

마을 주변에 그런 괴물이 돌아다닌다면 이들은 이 정착지를 버려야 한다.

그건 곧 쌓아올린 모든 것들을 잃는다는 것과 같았다.

괴물과 돌연변이들이 적은 곳.

방사능 수치가 낮은 곳.

밴디트들이 적은 곳.

지금 같은 때에 세 가지 요건에 부합하는 땅을 찾기란 하늘의 별따기와 같았으니까.

안타깝게도 유신은···

"직접 확인해봐야겠군."

촌장이 원하는 답을 내어줄 수 없었다.

"짐작가는 바는 있으나 그게 확신은 아니니까."

이 망겜의 고인물로서 놈의 정체를 알고있음에도 불구하고.

"그, 그렇군요. 그렇다면 보수는···"

"필요 없어."

"네?!"

"정식으로 요청한 의뢰가 아니니까."

물론 그 이유는 다분히 물질적인 관점 때문이다.

"그런···"

애초부터 이건 사기다.

나는 클레이모어도, 황무지인도 뭣도 아닌 연고지 없는 이방인이었을 뿐이다.

"정 찝찝하면 선수금만 조금 달라고. 컴퍼니에서도 주의령이 내려올 정도의 괴물이라 나도 파악을 해두고 싶을 뿐이야."

그런 내가 이 엿같은 땅에서 살아남기 위해 뭔 짓을 해야했을 것 같은가?

"회사는 고객님들 덕분에 돌아가는 거니까."

"···"

결론만 말하자면 다했다.

살인이든 약탈이든 애원이든. 뭐든.

그러니까 사기 정도는 양반이다 이거지.

어쩌면 이들 역시도 원하는 목적을 이룰 수도 있고.

절그럭

"여기 120크레딧입니다. 다른 클레이모어님을 부르기 위해 타운의 모든 재산을 모은터라··· 양해 부탁드립니다."

"충분하군. 지금 바로 출발하지. 놈의 서식지는 알고 있나?"

씨익.

속으로 웃은 유신은 푸른칩들이 가득 들어있는 주머니를 훔치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처음부터 크레딧을 요구했다면 냅다 의심부터 샀을거다.

그러나 약간의 말장난과 진실을 섞어준다면 이건 더 이상 사기가 아니게 된다.

일종의 믿음의 영역에 걸친다고 해야할까?

뭐 당사자에게 있어 사기인 것은 마찬가지지만.

'그 새끼도 족치면서 돈도 벌고. 일석이조로군.'

"이곳에서 조금 떨어져 있는 지하굴로 추정하고 있습니다. 마을 주민들도 몇 붙잡혔는데 꼭 좀 구해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최선을 다해보지."

사기꾼은.

아니, 이 세상 어디에도 속하지 못한 이방인은 날렵해보이는 얼굴을 쓸며 웃었다.

***

망가진 간판과 콘크리트 조각.

썩어빠진 매트리스까지.

얼기설기 꼬아져 있는 쓰레기 장벽 너머로는 매마른 바람만이 불 뿐이다.

저벅저벅

그 사이를 가로지르고 있는 로브 쓴 사내만을 제외하면 말이다.

단단한 몸체에 곳곳에 새겨진 흉터.

모래두지 타운의 경비조장은 고독해보이는 사내의 뒷모습을 주시하며 말했다.

"정말 괜찮을까요?"

"뭐가 말이냐?"

"괜한 얼치기가 아닐지···"

"쉿. 자네. 아직도 그 입이 말썽이군."

"하지만 촌장님. 저는 아직도 믿기지 않습니다."

버크는 어렸을 때 밴디트들에 의해 부모들을 여의고, 악착같이 살아남아 끝내 이 타운의 경비조장 자리까지 오른 입지적인 인물이었다.

그렇다보니 으레 그렇듯. 자신이 경험해보지 못한 일들은 믿지 않았다.

"저 사내가 진짜 클레이모어가 맞을지는 둘째치고, 한 개인이 그런 괴물을 처리한다는 게 말이나 되냐는 말이지요."

버크는 야간 경비를 서는 도중 그 괴물의 모습을 봤다.

비록 횃불빛에 비친 실루엣 뿐이지만 말이다.

-크르르르

어둠 속에서 번뜩이는 눈빛.

지독한 노린내. 목덜미를 찌를 듯한 살의.

발가벗겨진 채 짐승 앞에 내던져졌을 때 같은 무력감.

단지 그 잠깐의 광경 하나만으로도 버크는 공포에 사로잡혔다.

그렇기에 그는 이 사실을 인정할 수 없었다.

"에잉 쯧쯧."

촌장은 치기어린 젊은이를 보다가 고개를 저었다.

곧 본인의 지혜를 조금 나눠주기로 했다.

"사냥꾼이나 클레이모어들이 왜 황무지의 폭군이라고 불리우는지 아나?"

"그건 그들이 기상천외한 능력을 가지고 있기 때문···"

"물론 그 덕도 있지. 하지만 본질적인 차이점은 지식. 이로인해 파생된 지혜 때문이다."

"파생? 지식?"

"괴물이나 식인종들의 특성이나 습성. 놈들의 약점에 대한 지식들. 이로인해 놈들보다 몇 수 앞서나갈 수 있는 안목이 길러지고 경험이 쌓이지. 그리고 그 경험을 말미암아 종래에는 범인들은 상상조차 못하는 폭넓은 사고관을 가지게 되는게다."

중간중간 튀어나오는 어려운 말들.

가방끈이 없는 수준인 버크는 머리를 긁적거렸다.

"사고관? 그게 그렇게 대단합니까? 어차피 아무리 똑똑해도 칼 맞으면 뒤지는 건 똑같은데."

"흘흘흘. 그래, 그럴수도 있지. 하지만 말이다."

노인은 고개를 들어 황량한 하늘을 바라봤다.

오래 전에는 저 하늘이 푸르게 반짝이던 시대도 있었다던데...

"우물 밖을 벗어나 더 큰 세상을 볼 수 있다는 것은 하나의 축복과도 다름없느니라."

뒷방 늙은이인 내가 이 타운을 지배하는 것처럼.

노인은 뒷말을 삼켰다.

"축복? 그건 또 뭡니까?"

여기서 무얼 덧붙여도 이 바보가 알아들을 것 같지는 않았기에.

***

게임 세상에 빠졌다면 무엇을 해야할까?

그건 바로 게임을 클리어 하는 것이다. 그리고 엔딩을 보면 집으로 돌아갈 수 있을꺼라고 믿는 것이지.

유신이 빠진 망겜.

멸망한 세상의 생존자들의 해피엔딩을 보는 법은 간단했다.

인류를 위협하는 모든 재앙, 모든 불순분자들을 처리한다.

궁극적으로 인류를 구원한다.

이해가 가는가?

이 세상은 지금 멸망으로 치닫고 있다.

작게는 황무지의 식인종들과 괴물들에 의해.

크게는 암약하고 있는 여러가지 세력들로 인해.

이런 거대하고도 불합리한 상황 속에서 유신이 할 일은 간단했다.

가진 지식을 이용해 힘을 키우고, 에스트가 담긴 신비의 유물을 수집하고, 세상을 바꿀 능력을 가진, 그러나 비극적이게 죽음을 맞이하는 영웅들의 운명을 바꾼다.

곧 그들과 힘을 합쳐 이 거대한 부조리에 대항한다.

그렇게 멸망을 막으면 유신의 승리.

정해진 운명을 바꾸지 못하면 패배다.

'멀다, 멀어.'

유신은 자신이 있었다.

자신은 이미 이 망겜의 랭킹 1위까지 갔던 사람이 아닌가?

물론 그게 현실이 될 줄은 몰랐지만.

···

터벅

더러운 부츠발이 흙먼지에 흔적을 아로새긴다.

마스크를 내린 유신은 후우 한숨을 내쉬었다.

반쯤 무너진 콘크리트 너머로 보이는 구덩이.

그 안에는 미저궁 같은 어둠 뿐이다.

그리고 그곳은 이방인에게는 너무도 익숙한 장소였다.

아니, 익숙했던 이라고 봐야겠지.

"봐도 봐도 적응이 안 된단 말이야."

덜컹.

[초량역]

녹슬고 반파되어 덜렁거리는 간판을 보면서 유신은 침을 퉤 뱉었다.

그 괴물이 서식한다는, 촌장이 말해준 땅굴의 정체는 바로 폐허가 된 지하철역이다.

이 바보들은 이곳의 용도를 알리가 없으니 그냥 땅굴이라 칭한거고.

"자, 이제 이놈을 어떻게 잡는다..."

역시 그 방법 뿐인가?

낡은 것을 넘어 썩어버린 인류의 흔적 앞에서 유신은 턱을 쓰다듬었다.

모래두지 타운을 위협하고 있는 괴물.

놈은 불멸자같은 거창한 게 아니다.

놈은···

방사능 트롤이다.

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

망가진 세상

멸세생은 꽤나 자유도가 높은 게임이었다.

스토리를 관통하는 핵심 에피소드는 정해진 틀을 따라갔으나 그 안의 크고 작은 디테일.

그리고 서브 퀘스트들은 툭 하면 바뀌고는 했는데.

게임 속의 시간의 흐름.

특정 존재의 죽음이나 환경의 변화 등이 바로 그 요건이었다.

그래.

제작사 이 미친놈들은 끝내 로그라이크적 특징까지 집어넣어놨다.

세이브 로드가 없는 영구적 죽음.

플레이를 할 때마다 패턴이 바뀌는 랜덤요소 같은 것.

그 불합리함 속에서도 유신이 이번 의뢰의 타깃을 알아차릴 수 있었던 것은 전적으로 그의 폭넓은 지식. 그리고 놈의 특징 때문이다.

우선 촌장이 분위기를 잡았던 불멸자라는 단어.

야밤에 활동하며 횃불을 꺼트릴 정도의 지능이 있으며.

그림자로 볼 때 그 크기가 인간은 가뿐히 넘는다는 힌트.

결정적으로···

"짐승 노린내와 이끼냄새."

지하철의 입구에서 부터 흘러나오는 트롤 특유의 체취.

놈이 이번에는 이곳에 자리를 잡은 모양이군.

코를 킁킁 거린 유신은 생각했다.

[가짜 불사신]이라는 퀘스트가 있다.

스스로를 불멸자라고 소개하며 세력을 모은 트롤이 마침내 거대한 밴디트 캠프의 우두머리가 되어 (구)한국의 남쪽을 초토화시키다 싶이 휘젓고 다니는데.

그 퀘스트의 시발점이 바로 지금 유신이 받은 의뢰 [폐허 지하철의 불길한 싹]이다.

이해가 가는가?

이 게임은 변화하는 게임이다.

좆밥 식인종 녀석이 시간이 흐름에 따라 감당키 힘든 재앙이 되거나.

잘나가는 영웅 캐릭터가 지병이 악화되어 죽기도 한다.

그리고 그것들 하나하나가 모여 멸망을 가속시킨다.

"확실하군. 돌연변이 카쿨이 맞아."

유신이 할 일은 간단하다.

스스로가 살아남기 위해.

더 강해지기 위해.

끝내 집으로 돌아가기 위해.

이 싹을 짓밟아 버린다.

이 녀석은 어차피 갱생조차 안 되는 괴물이었으니.

저벅

발 디딜 곳 조차 여의치 않는 콘크리트 더미.

중간중간 툭 튀어나온 철골까지.

당장에라도 무너질 것 같은 계단을 조심히 내려간다.

빛이 들어오는 것도 초입부까지다.

나머지 역 내부는 온통 어둠에 잠겨있었다.

"···"

유신은 경솔하게 횃불을 켜는 대신 이 몸뚱이의 이능 중 하나를 사용했다.

[방사능 들개의 어둠을 꿰뚫는 눈]

날카로운 검은 눈동자가 초록색으로 물들었다.

유신의 세상 역시 녹색으로 물들며 역 내부를 환하게 비췄다.

마치 야간 투시경을 쓴 것 처럼.

히든직업 강탈자의 좋은 점 중 하나다.

유신은 황야의 별 볼일 없는 하이에나로부터도 배울 것이 있다.

만약 사냥꾼이나 클레이모어로 이 곳에 들어왔다면?

'횃불부터 켜야했겠지.'

으적으적

그리고 역 곳곳에 보금자리를 틀고있는 저 괴물들의 주의를 끌게 됐을거다.

'2형 감염자들이 다섯. 이빨 불가사리가 하나.'

폐허가 된 인류 문명의 종착지.

어둠 속에서 암약하고 있는 인외의 괴물들.

소름이 끼치는 광경이었다.

이 역의 과거를 알고있던 자한테는 기묘한 위화감을 선사하는 광경이었다.

하지만 마음이 닳을대로 닳아버린 이방인은 혀를 찰 뿐이다.

'생각보다 더 똑똑한 놈이야.'

초반부 네임드 몬스터.

돌연변이 카쿨.

놈은 인간들이 괴물을 꺼려한다는 것을 안다. 그리고 저것들을 제 보금자리에 놔두면 훌륭한 방패막이가 될 거란 것도.

그렇기에 포식자는 기꺼이 하이에나들과 공생을 택했다.

방사능에 절여져 뇌의 주름이란 게 생겨난 트롤은 꽤나 까다로웠다.

'지금 내 상황에서 놈을 잡으려면··· 우선 그것부터 챙겨야겠지.'

스으윽

유신은 식사에 열중하고 있는 괴물들을 피해 조심히 걸음을 옮겼다.

이곳에 들어오기 전에 미리 자이언트 랫의 향 주머니를 터트려 체취를 지웠다.

2형 감염자들은 신체의 모든 기능이 인간보다 현저히 떨어진 상태니 유신을 알아보지 못한다.

키익, 키익.

예상대로 이곳에서만 백년이 넘게 썩어왔을 창백한 피부의 인간들은 시력이란 게 퇴화되어 있다.

불가사리는···

'어딜.'

녀석의 위치만 파악해둔다면 피하는 건 쉽다.

그저 천장에 대롱대롱 매달린 채 아래로 촉수를 뿜어내는 것이 끝이니까.

강탈이라는 전율적인 이능은 유신의 생존 가능성을 대폭 끌어올려줬다.

하지만 유신의 가장 큰 무기는 다름아닌 지식이었다.

어떤 괴물을 어떤 식으로 상대해야 하는지.

녀석들이 환장하는 것과 꺼림칙해 하는 것은 무엇인지.

다른 사람들이면 죽을 고비를 꼬박 넘기고 오랜 세월이 흘러야 습득이 가능한 수천가지 지식들.

유신은 간단하게 그 모든 것을 쟁취했다.

단지 집구석에서 게임 좀 즐겼다는 이유 하나 때문에.

'엿같은 똥겜.'

물론 그가 게임과 현실간의 괴리감을 좁히기 위해 겪은 피나는 노력들을 알게 된다면 절대 '쉽다'고는 말하지 못하겠지만.

스으윽

걸어가던 유신의 걸음이 멈췄다.

눈앞에 나타난 일직선의 길다란 통로.

[장수 옥돌침대] [돈까- 친구ㄷ]

그리고 그 옆에 자리한 폐허가 된 여러개의 상가들.

이건 초량역만의 특징이기도 했다.

지하철역의 중심부로 가려면 다른 곳보다 통상적으로 긴 이 통로를 꼭 지나야 했다.

물론 이 길은 문제될 게 없다.

문제는···

크르르.

새롭게 나타난 괴물 때문이다.

1미터는 가뿐히 넘는 덩치에 가시처럼 솟은 털.

흉흉하게 반짝이는 노란 눈동자와 발톱들.

유신이 강탈하고 지금 사용하고 있는 능력의 본래 주인.

방사능 들개.

컴퍼니 공인 1등급 위험종일 뿐인 녀석.

그러나 아이러니하게도 황무지에서 가장 많은 인간들을 죽이는 녀석.

인류가 멸망하고 다시금 새로운 문명을 꽃피운 지금도.

"···"

광견병의 치료제는 나오지 않았다.

어디서나 예방만이 최선의 방책인 셈이다.

으르르르

눈에 들어온 들개는 두 마리.

두 녀석 다 웬 고깃덩이에 머리를 처박고 있느라 이쪽을 신경쓸 틈도 없어보인다.

하지만 저 맹수들이 등신도 아니고. 이 좁은 통로를 지나치다보면 틀림 없이 주의를 끌게 될거다.

유신의 눈동자가 가라앉았다.

밴디트들을 처리할 때 썼던 능력.

[살아 움직이는 불꽃의 염화]는 사용할 수 없다.

에스트의 소모도 소모거니와 그 능력은 너무 요란하다.

이로 인해 발생할 소란은 유신에게 결코 좋지 않다.

그렇다면···

유신은 품속에서 조용히 제 무기.

가시나무를 깎아만든 방망이를 꺼내들었다.

뭐, 몸으로 때워야지 어쩌겠는가?

스으윽

한 발. 그리고 또 한 발.

바닥에 깔린 파편들을 피해 조심히 걸음을 옮긴다.

시시각각 괴물들의 모습이 가까워지며 유신의 심장 역시 작게 맥동했다.

온 힘을 실는다.

이 한 방으로 족친다는 생각으로 내려찍어야 한다.

괴물의 두개골은 그만큼 단단했으며 이 몸뚱이는 그만큼 나약했다.

크르르앍

느껴지는 인기척에 길다란 주둥이가 돌아가던 그 순간.

유신이 휘두른 몽둥이가 놈의 머리통을 박살냈다.

지금까지 느릿하게 움직이던 발걸음과는 달리 번개처럼 빠르며 과감한 솜씨였다.

후두둑 튀는 핏물.

제 친구가 당한것을 알아차린 걸까? 옆에 있던 또 다른 방사능 들개의 행동은 기민했다.

놈은 냅다 몸을 날리는 동시에 하울링을 내뱉으려고 했다. 그러나.

그 자리로 이미 유신의 몽둥이가 날아들고 있었다.

깨갱

빗맞았다. 놈은 짧은 신음을 내며 바닥을 굴렀다.

유신은 당황하지 않았다.

겁도 없이 제 덩치만한 괴물에게로 달려들었다.

휙휙 날아드는 발톱을 피해 놈의 가슴을 짓밟고.

성대가 소리를 내지르지 못하게 구강쪽을 집요하게 후려쳤다.

퍽퍽

어둠 속에서 울리는 섬뜩한 소리.

유신은 마치 기계처럼. 길거리의 쓰레기를 치우듯 괴물을 처리했다.

'젠장. 조금만 격하게 움직여도 이 꼴이군.'

지르르 울리는 팔.

살기위해 억지로 거세시켜 버린 공포.

그러나 여전히 내면속에 남아있는 한 줄기 끔찍함.

형언할 수 없을 정도로 복잡한 감정을 한숨으로 흘려보낸다.

"후우."

덕분에 유신은 바닥에 굴러다니는 고깃덩이를 덤덤한 눈동자로 바라볼 수 있었다.

두피에 붙어있는 머리칼과 파해쳐진 갈비뼈.

고통스럽게 치켜떠진 눈동자. 그리고 그 속에 비치는 자신.

고깃덩이의 정체는 바로 인간이었다.

아마 그 트롤놈이 납치해왔다는 타운의 주민이겠지.

이 불쌍한 여자가 겪었을 고통. 절망. 애도 같은 건 접어두자.

내가 할 수 있는 것도 없을 뿐더러. 그딴 감정은 살아남는 것에 방해가 될 뿐이니까.

대신에 유신은 생각했다.

이거··· 먹기 위해서 납치해온 게 아니다.

그랬다면 야들야들한 인간고기를 남겼을리가 없을테니까.

그렇다면···

'게임 속에서하고 똑같군.'

장난감처럼 가지고 놀다가 버렸다.

아마 녀석은 지금 인간이란 종족에 대해서 연구하고 있을 것이다.

제 나름대로. 당사자들에게는 끔찍한 방법으로.

-*@#&^&!

귀를 기울이니 정체를 알 수 없는 괴소리가 미약하게 들려온다.

그 안에 섞인 비명과 고통어린 소리도.

유신은 그런 것에 정신이 팔리기 보다는 제 할 일에 집중하고자 했다.

[돈까- 친구ㄷ]

간판마저 떨어져 그 이름마저 제대로 알 수 없다.

깨진 유리창과 박살난 식탁들은 또 어떤가?

종말을 직격으로 맞은 식당에서는 더는 어떠한 식사도 하지 못할 것이다.

바스락

하지만 유신은 기어이 그 식당 내부로 걸음을 옮겼다.

곧 주방 쪽으로 향하더니 회색빛의 매끈한 통을 꺼내왔다.

[구포 국수]

[나리네 기-밥]

다른 점포들 역시 돌아다니면서 말이다.

푸쉬이익

밸브를 억지로 비틀자 무색무취의 죽음이 퍼져나간다.

마스크를 끌어올린 유신은 손을 털었다.

"이 정도면 되겠지."

모든 준비가 끝났다.

카쿨이라는 개체의 영악함과 놈의 습성까지 고려하여 계획을 짰다.

유신은 폐허가 된 지하철역의 중심부를 향해 걸음을 옮겼다.

일말의 두려움조차 없이.

덤덤하게.

***

레나는 모래두지 타운에 사는 여인이었다.

지금 같은 세상에서 처녀는 당연히 아니고.

때에 따라서 양심도 팔고 몸도 좀 판 어디서나 볼 수 있는 평범한 여자.

"흐, 흐으으으."

그런 레나의 머릿속은 지금 고통과 공포로 잔뜩 일그러져 있었다.

퍽퍽퍽

부서진 타일과 오줌자국이 눌러붙은 소변기 주변.

거대한 음영이 허리를 움직였다.

일초에 한 번도 아닌 두 세번은 될법한 속도로 빠르게. 그리고 격렬하게.

꺼-어어어어

그 음영의 위에서 이를 받아내고 있는 여인의 얼굴은 이제 고통을 넘어. 산산이 부서져 있었다.

게거품을 부글부글 뿜으면서 그저 음영의 움직임에 따라 떨어댈 뿐이니까.

그렇게 한동안 고기 두드리는 소리가 연신 울렸을까.

"인간. 음. 번식 안 된다."

화장실을 채우고 있던 거대한 음영은 품고있던 여자를 던졌다.

"─────!"

다 죽어가는 물고기처럼 움찔거리는 여자의 꼴은 엉망이었다.

온 몸의 관절이 기괴한 각도로 꺾여있는 것은 둘째치고 하복부 쪽은 아예 박살이 나 있었다.

아마 두 번 다시 정상적인 생활을 할 수 없으리라.

예상대로.

레나의 오랜 친구인 진달래는 그렇게 죽었다.

애도할 시간 따위는 없었다.

"이 개체. 될까?"

괴물의 큼직한 눈동자가 이번에는 레나를 주시했기 때문이다.

욕망이 아닌 순수한 호기심이 깃든 눈동자.

그건 광기의 또 다른 일면이었다.

"히, 히이이익! 제발! 제바알! 살려주세요!"

아랫춤이 또 한 번 축축하게 젖어든다.

레나는 소용없다는 것을 알면서도 애원했다.

그럴 수 밖에.

인간은, 아니, 생명체는 누구나 살고 싶어한다.

비록 그것이 덧없는 발버둥일 뿐일지라도.

가장 원초적인 본능이란 그런 것이었다.

카쿨은 씨익 웃었다.

이 방사능 트롤은 그 사실을 알고 있었다.

알면서도 일부러 이렇게 행동했다.

그 이유는 간단했다.

재미도 재미거니와 인간이란 종족을 곁에 두고 관찰하는 것이 자신의 발전에 도움이 되리라는 생각 때문이다.

분노, 절망, 슬픔, 두려움.

각 개체들이 뿜어내는 다양한 반응들.

그들의 언어체계와 행동양식까지.

새로운 지적능력의 흡수는 곧 지능의 상승을 불러일으킨다.

카쿨은 지금 인간을 옆에 둔 채 학습이란 걸 하고 있었던 것이다.

마치 앵무새가 인간을 따라하듯이.

"제발. 살.려. 주세요. 히히."

온기가 식지 않은 시체를 뜯어먹으며. 실험체의 반응을 살피던 그 순간.

바스락

어디선가 희미한 소리가 들려왔다.

카쿨의 예리한 감각은 이를 포착해냈다.

"···!"

실험체의 얼굴에 떠오른 희망이라는 추상적인 감정까지도.

"흐흐."

저게 또 절망으로 일그러지면 얼마나 더 재밌을까?

씨익 웃은 폐허의 폭군은 손님을 맞이하기 위해 움직였다.

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

망가진 세상

주저앉은 기둥. 박살난 개찰구와 역무원실.

폐허가 된 지하철역은 음침한 것을 넘어 음울했다.

"허억, 허억."

그 공간 속을 한 존재가 가로지른다.

제 딴에는 조심히 움직인다고는 하는데 몸놀림이 어색해서 그런가?

부스럭

바닥에 깔린 콘크리트나 유리조각을 밟으며 기어이 소음을 내고야 만다.

"젠장. 대체 어디있는 거야?"

욕설을 내뱉는 흑발의 사내는 유신이었다

그는 지금까지의 침착했던 모습은 던져버린 채 불안한 눈동자로 주변을 두리번 거렸는데.

마치 괴물들의 영역에 처음 들어온 인간을 보는 것 같았다.

'물었나?'

그 이유는 간단했다.

그는 지금 연기를 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트롤

컴퍼니 공인 3급 위험종.

환장할 재생력과 피부강도.

거대한 덩치에서 오는 물리력을 제외하고서라도 네임드 몬스터 카쿨은 특히나 까다롭다.

이 자식은 트롤답지 않게 영악한 녀석이니까.

사냥꾼이 강하고 신중하기까지 하다면 어떻게 해야겠는가?

간단하다.

녀석마저 걸려들 정도의 덫을 놓으면 된다.

그게 바로 유신이 지금 어리숙한 초짜 연기를 하고 있는 이유였다.

음···

이곳에 잡혀온 누이를 구하기 위해 용기를 낸 미치광이 청년1쯤 될까?

'사냥꾼의 시체는 보이지 않는다.'

'어쩌면 상대가 트롤인 것을 알고 내뺐을 수도 있다. 둘의 상성은 최악이니까.'

타다닥

그 때.

"이, 이봐요! 흐으, 흐으! 지금 당장! 당장 여기서 도망쳐요!"

화장실 쪽에서 웬 나체의 여자가 튀어나와서 소리쳤다.

"빙고."

속으로 웃어보인 유신은 표정을 갈무리했다.

방심해서는 안 된다. 놈은 지금도 어딘가에 숨어 이쪽을 주시하고 있을테니.

"타운 사람입니까?!"

"도망쳐야돼! 도망쳐야 된다고··· 그 괴물이···!"

"다른 사람들은 어디있죠?! 난 누이를 찾으러 왔···"

"도망쳐야 돼애애애애!"

거칠게 흔들리는 핏줄선 안구. 발광하는 몸짓.

마치 먹이를 눈앞에 둔 감염자를 보는 듯 하다.

완전히 정신이 나갔다.

오히려 좋군.

유신은 소란에 어쩔 수 없었다는 듯 여자를 부축했다.

크-어어어어!

때마침 괴성이 울려퍼진다.

지진이라도 난듯 천장에서 돌조각들이 떨어질 정도의 기세였다.

이건 침입자들을 가지고 놀기 위한 존재감의 과시임과 동시에 경고였다.

놈들은 내 먹잇감이다. 그러니 건드리지 말고 꺼지라는 뜻이다.

컹컹

고요했던 폐허역이 부산스러워진다.

감염체든 들개든 불가사리든 괴물들은 그 종류를 가리지 않고 꽁지가 빠져라 도망치기 시작했다.

킁킁.

중간중간 기침을 하거나 코를 찡긋거리면서 말이다.

'예상대로.'

유신은 여인을 부축한 채 달리기 시작했다.

속으로는 어떤 표정을 지어야 저 괴물이 의심하지 않을까? 하며.

***

예상대로다.

도망치기 시작하는 인간 암컷과 수컷을 보면서 카쿨은 씨익 웃었다.

쿵쿵.

일반적으로 덩치가 크면 느릿할 거라는 편견이 있다. 하지만 그건 편견에 불과했다.

덩치가 크면 보폭이 더 크다. 더 많은 근육은 더 많은 힘을 낼 수 있게 해준다.

즉 카쿨은 크고 빨랐다. 인간들이 부리나케 도망친 거리를 대번에 따라잡을 만큼.

"꺄아아아악!"

암컷이 비명을 질렀다.

그 옆에 있던 사내의 표정은 좀 요상했지만 곧바로 공포로 얼룩졌다.

크르

카쿨은 발을 놀리다가 미끄러지거나 어딘가에 부딪치는 등.

일부러 페이스를 조절했다.

천천히 몰다가 잡아챌 것이다.

저들이 탈출에 성공했다고 여길 때.

희망이 가까워졌다고 믿을 때 그 모든 것을 깨트려버릴 것이다.

그리고 그 반응을 관찰하는거지!

크흐크흐.

인간 암컷이 흘린 노폐물들이 바닥에 찔끔찔끔 흘려져 있다.

카쿨은 아랫도리까지 빨딱 세워가며 추격을 개시했다.

그렇게 홀을 지나고 긴 통로를 지나칠때 쯤이었다.

카쿨은 무언가 의문점을 느꼈다.

킁, 킁킁.

요상한 냄새가 났다.

어째선지 주변 기온도 더 낮아진 것 같았다.

"빨리, 빨리-이!"

하지만 카쿨은 금새 이 의문을 털어버렸다.

이곳은 제 아지트 였으니까.

사냥의 끝이 도래하고 있었으니까.

이런 사소한 일 따위 나중에 알아보면 된다.

안타깝게도 인간을 관찰하고 연구하던 트롤은 인간의 단점까지 그대로 학습해버렸다.

그게 결정적인 실수였다.

카쿨은 제 발에 걸리는 것이 lpg가스통이라는 것도.

이 공간은 이미 그것에서 뻗어나온 가스로 인해 가득차 있다는 것도.

작은 불씨 하나만 퍼져나가도 주변이 초토화 된다는 것도 몰랐다.

바보들의 세상아닌가?

인류의 후손들조차도 제대로 알지 못하는 사실들을 한낱 괴물이 알 수 있을리가.

그렇기에.

타닥

"···"

출입구 계단에 다다른 유신이 한 철골을 잡아당긴 것.

이로인해 굴러떨어진 돌조각들이 길을 막은 것.

크아아아아!

분노한 카쿨이 장애물을 부수며 전진했을 때 눈앞에서 불씨가 번뜩인 것.

화르르륵!

"재밌었다."

지금까지의 두려움은 어디로 갔는지 피식 웃은 수컷이 손을 흔든 것.

그 모든 것들을 이해할 수가 없었다.

삐-이이이이이!

대폭발.

곧바로 눈앞이 새하얘지며 의식이 흐려졌으니까.

사냥감은 애초부터 카쿨 자신이었다.

***

"잘 타네."

유신이 손을 털었다.

얼굴이 붉게 물들어 있는 그의 앞에는 인류 문명의 잔해가 거대한 불기둥을 뿜어내고 있었다.

"연기가 잘 먹혀들어간 덕분이겠지. 아직 죽지 않았다니깐."

유신은 혼자서 중얼거리며 피식거리고 있었다.

그의 옆에 주저앉아있던 레나는 멍한 얼굴로 중얼거렸다.

"이게 대체···"

"안심해. 이제 다 끝났으니까."

가장 듣고싶었던 말.

"다 끝났다고?"

가타부타 설명같은 것은 필요 없다.

그저 이 한마디가 불쌍한 처녀의 마음을 위로했다.

"다··· 끝났어?"

"그래. 다 끝났어."

"흐, 흐윽. 흐아아아앙!"

터져나오는 오열.

척박한 황무지의 한 가운데서 여인은 서럽게 눈물을 쏟아냈다.

그 모습은 멸망한 세상의 후손들이 겪어야 할 애환을 나타내고 있었다.

'엿같은 세상.'

가족을 구해달라.

누군가를 찾아달라.

혹은 죽여달라.

황무지에서의 의뢰는 다양했다.

하지만 그 결말은 대부분 이런 꼴로 끝났다.

"후우."

유신은 자신의 이득을 위해서라면 기꺼이 남을 이용할 수도. 처단할 수도 있었다.

하지만 그렇다고 그가 인간의 마음까지 잃어버린 것은 아니었다.

정말이지 빌어먹을 세상이다.

유신은 레나가 마음껏 속에 있는 것들을 쏟아내게 놔둔 채 초량역으로 다가갔다.

화르르르

폭발이 끝나고 불길이 천천히 사그라들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르르···

놀라운 일이 발생했다.

카쿨이 아직 살아있었던 것이다.

비록 몸 전체가 숯더미가 된 상태에서 벌레처럼 꿈틀거리는 정도지만 말이다.

하여간 트롤의 생명력은 알아줘야 했다.

"휘익~"

휘파람을 분 유신이 그런 카쿨을 내려다봤다.

희열에 들떠있던 괴물의 눈동자는 지금 고통과 증오로 얼룩져 있었다.

···

침묵에 잠긴 황야의 한복판.

피식

"네가 그렇게 쳐다보면 뭘 할 수 있는데?"

검은 머리의 사내는 그런 괴물의 끈질김을 비웃어줬다.

"그렇게 발버둥치는 거 말고 뭘 할 수 있냐고 응?"

"이 괴물 새끼야."

그-으으으···

핏줄선 눈이 부릅떠진다.

그아-아아아아아!

발광하던 카쿨이 녹아내리던 팔을 휘둘렀다.

마지막 생명을 불태운 일격 답게 과연 빠르고 강했다.

하지만···

끄아아아!

[살아 움직이는 불꽃의 염화]

유신의 손에서 튀어나온 불덩이가 놈의 마지막 숨통을 끊는 것이 더 빨랐다.

···

그렇게 모래두지 타운을 공포에 떨게한.

훗날 이 세상의 멸망을 가속시킬 악 하나가 사그라들었다.

손을 툭툭 턴 유신은 카쿨의 시체로 다가가 손을 얹었다.

사냥은 성공했고 애도도 했다.

그렇다면 이제 무엇을 해야겠는가?

'보상을 챙겨야지.'

유신은 자선사업가가 아니다.

애초부터 그가 모래두지 타운의 일을 해결하러 온 것은 다 이 녀석 때문이다.

컴퍼니 공인 3급 위험종.

트롤.

이 세상에 단 하나 뿐인 특이한 능력을 지닌 능력자.

강탈자.

"···"

눈을 감고 체내에 흐르는 에스트를 끌어올린다.

그러자 손끝에서 강렬한 기운들이 느껴졌다. 마치 트롤이 눈앞에서 포효하는 것만 같은. 유신만이 느낄 수 있는 신비.

그걸 게임상으로 표현한다면 이렇게 되겠지.

[방사능 트롤의 괴력]

[방사능 트롤의 재생력]

[방사능 트롤의 질긴피부]

바위도 맨손으로 부수는 힘.

가스 폭발에서도 목숨을 부지할 수 있게 해주는 재생력.

혹은 질긴피부.

고민은 길지 않았다.

유신은 트롤의 재생력을 강탈했다.

간단한 이유였다.

괴력은 분명 훌륭한 능력이다.

잘 숨겨두고 있다가 강력한 비수로도 활용할 수 있다. 하지만···

'이 몸뚱이로 썼다가는 자살행위야..'

그 힘도 사용할 수 있는 육체가 뒷받침되어야 한다.

"콜록, 콜록."

영양실조.

중금속과 미세먼지 중독.

도시인들이 아닌 이상. 대부분의 황무지인들이 겪는 질병들이다.

태생부터 약한 육체를 가진 유신은 이 정도가 특히나 더 심했다.

그런 그에게 트롤의 괴력은 파멸을 앞당기는 무기일 뿐이다.

질긴 피부는···

'내 피부결이 초록색이 되겠지.'

그렇게 되면 감염자나 방사능 중독자로 오해받아 사냥당해도 할 말이 없게 된다.

[방사능 트롤의 재생력]

그렇기에 결국 유신이 택할 수 있는 것은 애초부터 이것 뿐이었다.

물론 그 능력 역시 남들이라면 군침을 흘릴만한 권능이었고.

"후우."

몸안에서 꿈틀거리는 새로운 힘에 유신은 만족스럽게 미소지었다.

'난 지금 여분의 목숨이 생겼다고 봐도 된다.'

목이나 심장. 머리가 박살나지 않는한.

에스트가 충분하다는 전제 하에 말이다.

이는 황무지에서의 생존의 허들을 몇 단계나 낮춰줄 것이다.

물론 인생사 등가교환이라고 얻는 것만 있는 것은 아니었다.

[살아 움직이는 불꽃의 염화]

[방사능 들개의 어둠을 꿰뚫는 눈]

[방사능 트롤의 재생력]

[슬롯이 가득 찼습니다.]

[능력을 개화시키십시오.]

현재 유신이 소유할 수 있는 능력은 총 세 개.

방금 전 트롤의 특성을 훔쳤기에 지금 막 그 한계를 다 채웠다.

그렇기에 앞으로 능력을 강탈하려면 가지고 있는 것 중에 하나를 버려야 한다.

전적으로 유신의 힘이 딸리는 탓이다.

게임상으로 따지자면··· 지금 그의 수준은 쪼렙 중의 쪼렙이니까.

물론 방법이 없는 것은 아니었다.

앞으로 보유한 에스트의 총량을 늘리고.

컴퍼니가 있는 도시로 가 제대로 된 환경에서 능력을 개발한다면 이런 한계 따위 금방 뛰어넘을 수 있다.

이 몸뚱이가.

이 세상 어디에도 없는 기이한 능력을 가진 사내가 그렇게 소리치고 있었으니까.

'페널티 없이 모든 특성을 다 훔칠수도 있겠지.'

그러면 이 망겜의 엔딩을 보는 것이 조금 더 쉬워리지라.

부스럭

유신이 얼굴을 쓸고있을 때 레나가 다가왔다.

"저··· 감사드립니다. 아까는 경황이 없어 인사를 못 드렸어요."

고개를 꾸벅 숙이는 여자의 눈동자는 붉게 물들어 있었다.

유신은 그녀를 힐끔 보다가 손을 내저었다.

"어차피 의뢰 때문에 한 일이다. 그보다 안에 당신 말고 살아있던 다른 사람들은 없었나?"

레나는 말을 하는 유신의 분위기가 바뀐 것도 모르는 모양이다.

"아뇨."

아니면 개의치 않던지.

"없었··· 어요. 진달래도 죽고. 에밀리오와 칸나 아주머니도 죽고··· 다. 다 죽었어요. 그 괴물에게 따먹히고 뜯어먹혀서···"

레나는 잿더미가 된 카쿨의 시체를 떨리는 눈동자로 바라봤다.

후우. 그런가?

그 말에 유신은 조금이나마 남아있던 양심의 가책이 사라지는 것을 느꼈다.

적어도 아무 죄 없는, 산 사람을 산채로 불태우지는 않았으니까.

물론.

누군가는 그를 나약하다고 손가락질 할 것이다.

하지만···

유신은 이 일말의 양심 역시 버리지 않기로 했다.

모든 것이 망가져 버린 세상 속에서 인간의 마음을 유지하는 것은 중요하다.

그러지 못한 자는···

'괴물이 되고 마니까.'

지난 1년간의 여정은 유신에게 너무도 많은 것들을 알려주었다.

"그럼 가지."

쓰게 웃은 유신은 입고 있던 로브를 벗었다.

"마을 안까지는 안 되도 근처까지는 바래다 줄 테니까.

곧 레나에게 이를 씌워주었다.

"아···"

레나는 눈을 동그랗게 떴다.

더러운 천쪼가리에 불과할 뿐이지만 황무지인인 그녀는 안다.

이것이 얼마나 큰 호의인지.

비록 이를 주는 당사자가 누구인지 뭐하는 사람인지 아무것도 모르지만 말이다.

레나는 고개를 숙이며 얼굴을 훔쳤다.

"네. 가야죠. 흑. 그래야죠··· 가서 구걸을 하든. 몸을 팔든. 어떻게든 살아야죠."

유신에게 하는 말이 아니다.

스스로에게 다짐하듯이 하는 말이었다.

눈물을 주르륵 흘리는 레나의 얼굴에는 어느새 죄책감과 안도.

희망이 동시에 공존하고 있었다.

터벅터벅

천천히 걸음을 옮기던 유신은 그 모습을 보면서 생각했다.

'강하군.'

아니, 정정한다.

강할 수 밖에 없다.

그렇지 못한 인간들은 이미 싸늘한 백골이 되어 저 황무지를 굴러다니고 있을테니.

"···"

다시 한 번 말하지만···

휘이이잉

정말이지.

빌어먹을 정도로.

"엿같은 세상이야."

불어닥치는 모래 먼지가 두 사람을 집어삼켰다.

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

네임드 NPC x 황무지의 소녀

지글거리는 태양 아래.

중금속과 미세먼지 가득한 바람이 매마른 황야를 적신다.

그 한복판에 아무렇게나 눌러앉아 무언가를 끓이고 있는 밴디트들.

바위산이나 구덩이 아래에 숨어 먹잇감을 노리는 괴물들까지.

황야의 아침은 오늘도 별반 다를 게 없었다.

부아아앙!

갑작스레 울려퍼지는 요란한 배기음만 뺀다면 말이다.

괴물이든 인간의 탈을 쓴 괴물이든 그자리에 있는 모두가 움찔했다. 이윽고 고개를 이리저리 돌리며 이 굉음의 원인을 파악하려고 했다.

혹여 감당키 힘든 포식자가 나타났다면 얼른 자리를 피해야 할테니.

그들은 곧 굉음의 정체를 알아냈다.

비산하는 흙먼지 너머.

마치 여인의 알몸처럼 쭉뻗은 곡선이 반짝거렸다.

그 아래에 자리한 네 개의 다리는 거칠게 맥동하며 땅을 헤집었다.

한 때는 사람들이 선망하던 '낭만'이라고 불리던 물건.

수 백년의 시간이 흐른 지금 역시도 그 가치가 퇴색되기는 커녕 더욱 빛나는 물건.

부아아아앙!

그건 슈퍼카였다.

고급 세단.

혹은 외제차라고도 불리우는 구시대의 욕망의 산물이었다.

[BMW]

아무리 차에 대해서 문외한인 사람이더라도 로고에 적힌 문양 정도는 읽을 수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크르르?

"저, 저게 뭐여?"

이곳에 구시대의 교양지식을 가진 자는 존재하지 않았다.

무지렁이 황무지 원주민들은 그저 쇳덩어리가 저절로 움직이는 것에 놀라버렸다.

"여긴 언제와도 좆같다니깐. 뭔 놈의 비탈길이 이렇게 많은거야?"

차의 주인은 붉은 머리칼의 젊은 여자였다.

선글라스를 쓴 채 껌을 질겅질겅 씹던 그녀는 신경질적으로.

하지만 양손과 발은 조심히 움직이며 운전을 하고 있었는데.

"..."

돌연 그녀의 눈썹이 오므라들었다.

헥헥헥

백미러 너머로 보이는 또 다른 흙먼지들.

한 무리의 괴물떼가 세단의 뒤를 쫓아오고 있었기 때문이다.

방사능 들개들이었다.

그런데 그 숫자가 장난아니었다.

들개만 수십 마리에 놈들의 선두에 있던 리더처럼 보이는 거대한 놈은 머리가 두개였다.

쩌어억

정정한다.

갑자기 녀석의 얼굴이 갈라졌다.

그 안의 핑크빛 살속에는 수십 개의 이빨들이 낼름거렸다.

'돌연변이인가? 덩치로 보나 기이한 특성으로보나 최소 2급···'

1급 위험종까지는 평범한 사람이라도 죽을 둥 살둥 싸우면 잡아낼 수 있다.

하지만 2급부터는 달랐다.

방사능이든. 바이러스든 혹은 개체가 살아남기 위해 꾀한 진화든.

본격적으로 인간의 한계를 벗어난 진짜 '괴물'인 것이다.

한 마리 한 마리가 소규모 타운 정도는 쑥대밭으로 만들만큼.

하지만.

"아. 귀찮게."

껌을 쩍쩍 씹어대던 여인의 얼굴은 덤덤했다.

곧 속도를 올리기는 커녕 오히려 엑셀을 밟은 발에 힘을 빼기 시작했다.

위이잉

매끄럽게 내려가는 창문.

헥헥!

기회를 노린 포식자들의 공습.

으르르아아악!

리더의 명령에 따라 들개 패거리가 일제히 땅을 박찼다.

날카로운 발톱을 번뜩이며, 쏘아지는 화살처럼 떨어져 내리기 시작했다.

그 속도와 맹목적인 공격성은 아무리 강철로 된 관이라 할지라도 대번에 찢어버릴 것 같았다.

그 안에 있던 연약해 보이는 여인 역시.

그 순간.

"후우."

풍선껌을 불던 여인이 손을 휘적거렸다.

파리라도 내쫓듯 가볍게.

놀라운 일이 벌어졌다.

당장에라도 고개를 처박을 듯이 덤비던 괴물들이.

저 황야의 포식자들이 우뚝 허공에서 멈춰선 것이다.

그걸로 끝이었다.

툭. 처음에는 머리.

툭두둑. 그 다음에는 목과 몸통.

괴물들은 온 사지가 분해되서 폭포수처럼 흘러내렸다.

눈썰미가 좋은 사람이라면 여인의 손에서 무언가가 쏘아진 것을.

곧 엄청난 속도로 괴물들을 스쳐지나간 것을 알아챌 수 있었겠지만···

이곳에 그런 안목을 가진 자는 없었다.

부아아앙!

여인은 다시금 엑셀을 밟았다.

그 절묘한 속도 조절 덕분에 세단은 괴물들의 피와 살점으로 뒤덮히지 않았다.

"휴우."

여인은 손짓 한 번으로 괴물들을 전멸시킨 것보다.

-시, 시부럴! 저게 뭐시여?! 지금 저 괴물 새끼들이 어떻게···

주변에서 경악어린 시선으로 쳐다보는 것보다 그 사실이 더 기쁜 듯 했다.

"여기도 점점 이상해지기 시작하네."

황무지인들의 상식으로는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말을 하며.

"땅은 좀 험해도 드라이브 하기에는 좋은 곳 이었는데."

메트로폴리스 아시아 지부.

(구)한국 지대 소속.

클레이모어 아이언 나이트는 그렇게 본래의 목적지로 향했다.

비즈니스를 위해. 모래두지 타운으로.

***

현실이 된 게임이란 복잡하기 짝이없는 것이었다.

굳이 유동적으로 변해가는 주변 환경을 제외 하고서라도.

모니터 밖에서 순식간에 훑을 수 있는 주변 지리가 당장에 수십 만배는 더 커지게 되니까.

터벅터벅

그렇다보니 지도라도 없는 이상 길을 잃는 것은 당연한 수순이다.

이딴 세상에 그런 고급스러운 게 남아있을 리도 없으니 당연히 중간중간 정착지에 들러서 확인을 해야하고.

이곳이 어디인지. 혹여 주변에 뭔가 특이한 구조물이 있는지.

위협적인 괴물이나 환경, 밴디트가 존재하는지.

유신이 모래두지 타운에 들렀던 것에는 그런 이유들이 있었다.

"후우. 잠깐 쉬었다 가야겠군."

[CU]

이제는 앙상한 뼈대만 남은 편의점이 그를 맞이해준다.

주변에 좀 더 괜찮아 보이는 건물들도 몇 개 있었지만 유신은 구태여 이곳을 고집했다.

모래먼지와 직사열을 막아줄 천장이 많을 수록.

쓸만한 생필품이 남아있는 곳일 수록.

인간이 봤을 때도 살기 좋은 환경이 구성되어 있을 수록.

선객이 있을 가능성이 높아지니까.

···

자각자각

저 맞은편에 있는 식당터의 그늘 구석.

거미줄을 친 채 대롱대롱 매달려 있는 늑대거미처럼.

'제 영역을 침범하지 않는 이상 온순한 놈이니··· 괜찮겠지.'

유신은 1미터가 넘어가는, 황갈색 배를 드러낸 채 딱딱 거리고 있는 거대 절지류를 태연하게 바라보면서 가방을 뒤적거렸다.

그의 손에 잡히는 것은 삶은 감자다.

타운에서 몇 개 얻어낸 귀한 식량이지.

우적

포슬한 식감 끝에 고소함이 살살 밀려온다.

예전에 반찬투정이나 하던 현대인이라면 좀 씹다 내려놓았을 밍밍한 맛이었다.

하지만.

"햐아."

이제는 황무지인이 다 되어버린 이방인은 만족스럽게 웃었다.

떠돌이가 맛보기 힘든 것은 오히려 고기가 아닌 이런 작물이었으니까.

그렇게 감자 한 알로 굶주림도 면하고, 수통에 담긴 탁한 물로 입술마저 적신 유신은 주변을 두리번거렸다.

평탄화 되다 싶이 한 근처에서 유독 한 건축물이 눈에 띈다.

누렇게 변색되고 꺾인 전망대다.

그것은···

'다이아몬드 타워.'

용두산 공원의 상징물이었다.

"남포동 근처로군."

한 때 수많은 사람들이 버글거리던 번화가 역시 종말을 피해갈 수 없었다.

'이제 대략 반 정도 온 건가···'

길을 잃은 것은 아니다. 제대로 가고 있다.

유신은 턱을 쓸면서 앞으로의 계획을 점검했다.

유신의 목적을 거시적으로 보자면 이 세상을 좀 먹고 있는 재앙들을 처리하는 것이다.

하지만 그러기 위해서 먼저 선행되어야 할 것들이 많았는데.

"콜록, 콜록."

우선 이 몸뚱이가 있겠다.

영양실조.

중금속과 미세먼지 중독.

황무지인들이라면 누구나 직면할 수 밖에 없는 느릿한 죽음의 전조들.

[기초스탯 최하]

[스타팅 포인트 환경 최하]

강탈이라는 사기적인 능력에 대한 페널티 때문일까?

안 그래도 이 캐릭터는 태생부터가 강골과는 거리가 멀었다.

유신은 극한의 정신력과 지식으로 겨우겨우 버텨내고 있었지만 한계가 다가오고 있었다는 말이었다.

우선 이 몸뚱이를 고쳐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 필요한 것은 양질의 식사와 제대로 된 의료지원이다.

컴퍼니가 존재하는 메트로폴리스 만큼은 아니어도 이만한 시설이 갖춰진 곳이 한 곳 있다.

낙원.

타운도, 자유도시도, 에어리어도, 컴퍼니도.

그 누구의 간섭도 받지 않는 거대한 집단이 있다.

이 곳 (구)한국에만 존재하는 특이점이라고 할 수 있지.

그곳이라면 메트로폴리스에서 받는 것만큼은 아니어도 훌륭한 케어를 받을 수 있다.

단.

"내가 얼마나 모았지?"

충분한 양의 크레딧만 있다면.

유신은 품속 깊이 넣어둔, 푸른칩이 가득 들어있는 주머니를 만지작거리면서 한숨을 내쉬었다.

'괴물사냥이든 약탈을 하든 의뢰를 받든 부지런히 움직여야겠어.'

이러다가는 기껏 낙원에 가도 부랑자 꼴을 면하지 못 할 것이다.

'카쿨의 상태로 봐서 더스트 봄이 터지기 전까지 아직 여유는 있으니까.'

중간중간 유적에 들러 [신비의 에스트병]이나 [잘 보관된 구시대 의약품] 같은 것을 구해도 좋겠지.

"음."

어느정도 휴식도 취했겠다.

다시 움직여 볼까?

유신이 막 자리에서 일어났던 그 순간.

키이이이익!

쇠긁는 소리가 울려퍼진다.

곧이어 지진이라도 난듯 바닥이 덜덜 떨리기 시작했다.

'이 소음은···'

눈가를 굳힌 유신은 잽싸게 반쯤 무너진 벽에 은폐부터 했다.

이윽고 눈만 살짝 내밀어 주변을 둘러봤다.

"히-하!"

누런 하늘 아래.

한 무리의 인마가 황무지를 가로지른다.

털이 북슬한 여섯개의 다리에 한 뼘 정도 되어보이는 뿔.

이마에 박힌 또 한 개의 눈.

馬가 아니라 魔다.

그러니까 괴물들.

컴퍼니 지정 2급 위험종.

매드니스 카우.

꽥꽥 소리지르며 손을 흔드는 저 인간들은 지금 마물들을 타고 있었다.

"···"

복장으로보나 하고 있는 미친 짓거리로 보나 십중팔구 밴디트들이다.

저기 러시아나 유럽 쪽으로 가면 오토바이를 타고 다니는 놈도 있다고는 하는데.

"이 새끼들은 괴물을 타고 다니네?"

유신은 헛웃음을 지었다.

짐작 가는 녀석들이 있었기 때문이다.

"놔! 놓으라-고오! 이 더러운 식인종 새끼들!"

그리고 그 어림은 확신으로 바뀌었다.

질주하는 밴디트들의 사이.

밧줄로 꽁꽁 묶인 채 꽥꽥 소리를 지르는 저 소녀는 유신이 아주 잘 아는 NPC였으니까.

"운이 좋군."

그 한 마디를 끝으로 유신은 몸을 숨겼다.

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

네임드 NPC x 황무지의 소녀

밴디트.

살인, 강간, 약탈, 방화, 식인.

온갖 흉악한 짓거리는 다 저지르고 다니는 이 황무지의 악귀들은 새로운 시대의 대표적인 범죄자들이었다.

황무지인을 가장 많이 죽이는 것이 방사능 들개라면.

황무지인들에게 가장 많은 절망과 고통을 주는 것은 바로 밴디트들이다.

크레딧이라도 남기는 괴물들과는 다르게.

"크하하! 달려어!"

오직 부수고 빼앗을 뿐인 그들에게서 일말의 생산적인 활동이란 것은 찾아볼 수 없었으니까.

"정지! 저곳에서 잠깐 쉬었다 간다!"

선두에 있던 대머리 사내가 손짓했다.

마침 유신이 자리잡고 있던 그 폐허지역이었다.

두두두두

그러나 밴디트들이 그곳에 도착했을 때는 아무런 흔적도 찾아볼 수 없었다.

"워워."

가죽끈 비스무리한 것으로 가슴만 가린 놈.

맨몸에 괴물 모피만 걸친 놈.

옆과 뒷머리는 빡빡 깎고 중앙만 남겨 닭벼슬 헤어스타일을 자랑하는 놈.

그 자유로움만큼이나 밴디트들은 다양한 개성을 자랑했다.

매드니스 카우들을 진정시키며 한 곳에 묶어두고, 짐을 내려놓은 그들은 곧 부산스럽게 움직이기 시작했다.

"다 먹지는 말고 몇 놈만 잡아서 요기나 하자."

모닥불 위에서 냄비가 끓어오르는 것으로 보아 아마 식사라도 할 생각인 것 같았다.

'숫자는 스물 여덞. 내가 생각하던 것보다 적다. 어쩌면 본대가 아닐지도 몰라.'

작게 솟아오른 바위 뒤.

'드문드문 떨어져서 경계를 서고 있다. 한 방에 다 쓸어버릴 수 없어.'

'게다가 매드니스 카우까지 있지. 신중하게 움직여야 해.'

모래먼지를 뒤집어써 주변과 완전히 하나가 된 유신은 조용히 그들을 주시했다.

"사, 살려주세요. 살려··· 컥!"

밴디트들이 짐칸에 실려있던 식량들을 꺼내 손질하는 그 순간에도.

"이 더러운 식인··· 흡."

꽥꽥 소리지르던 소녀가 공포에 질리던 그 순간에도.

"왜 그러니 꼬마야?"

순박해 보이는 덩치가 씨익 웃으며.

"진짜 사람 먹는 모습은 처음보니?"

날카롭게 갈린 이빨을 드러내는 그 순간까지도.

"흐으, 흐으···"

무릇 사람에게 큰 공포를 주는 법은 별 게 없었다.

큰 소리나 겁박보다 직접 행동으로 보여주면 된다.

덤덤하게.

마치 이것이 일상인 것처럼.

식인.

밴디트들은 그 배덕스러운 행위를 즐긴다.

황무지인들은 시체를 뜯어먹을지언정 살아있는 자들을 잡아먹지는 않는다.

그건 그들 사이에 암묵적으로 통용되는 일종의 선이었다.

자신이 인간이라는 것을 주장하기 위한 허들인 것이다.

그리고 저들은 그 선을 넘었기에 악귀라고 불린다.

그 어떤 타운도 자유도시도 에어리어도 저들을 배척하는 것은 그런 이유 때문이다.

'사람'과 괴물은 절대 공존할 수 없으니까.

"으, 으아아아!"

붙잡혀 있던 금발 머리칼의 소녀 에피가 뒷걸음질 쳤다.

"낄낄낄."

순박한 인상의 밴디트는 식칼을 장난스럽게 휘두르며 그녀에게 다가가다가 퍽. 뒷동수를 맞았다.

"저건 먹으면 안 된다."

선두에서 그룹을 이끌던 대머리였다.

그는 손을 털더니 유신이 있던 자리를 주시하면서 작게 휘파람을 불었다.

"씹. 부두목. 나도 그 정도는 알어. 그냥 장난 좀 쳐본거야. 장난 좀!"

토실한 사내는 머리를 만지작거리며 웃었다.

"저걸 보고 있자니 죽은 내 딸이 떠올라서 말이야."

"크흐흐. 스웜 바이트에게 뜯어먹혔다는 그년?"

"아내는 바람이 나서 도시민의 첩으로 들어갔다지?"

"아가리 닥쳐 이 등신들아!"

밴디트들이라고 처음부터 밴디트였던 것은 아니다.

그들 역시도 말 못할 여러 과거들을 가지고 있었다.

하지만···

"꺄아아악!"

"쉿. 이걸로 찔릴래? 저걸로 찔릴래?"

지금은 그저 광인 무리일 뿐이다.

멸망한 세상의 환경이란 건 사람을 너무도 쉽게 바꾸어버린다.

···

썰고 끓이고 떠먹고.

한때는 누구보다도 고귀한 존재라고 배웠던 자들이 도축되어 간다.

'보초의 위치는···'

유신은 가라앉은 눈으로 그 역겨운, 비극스러운 상황을 주시한다.

일면식조차 없는 사람들일 뿐이라며 스스로를 타이르며.

'무장 상태는 활과 도끼를 비롯한 냉병기··· 방패를 가진 놈도 있다.'

그것이 자신이 살아남기 위한 방법이었으니까.

"꺼억. 잘 먹었다."

"그러고 보니 그 얘기 들었수?"

"뭐?"

"터미네이터 새끼들 세가 급격하게 줄었다던디."

"들었다마다. 하필 들개들을 잡다가 클레이모어를 건드렸다면서?"

"하키를 비롯해 아주 그냥 숯더미가 됐다는구먼. 우리도 조심해야 하지 않겠수?"

"그래서 이렇게 조달해 가는거지 않냐."

"역시 두목이구먼. 똑똑혀."

밴디트들은 중독성 식물까지 태우며 한가로운 분위기를 풍겼다.

아마 이대로 조금만 있으면 그들은 이 자리를 뜰 것이다.

하지만.

사삭.

그 전에 움직이는 존재가 있었다.

날카로운 눈매를 가진 검은 머리칼의 사내. 유신이었다.

그는 조용히 모래 속에서 빠져나오며 은밀하게 걸음을 옮겼다.

그 순간.

"저쪽이다!"

눈을 번뜩인 밴디트들이 무기를 집어들었다.

지금까지 늘어져 있던 것이 믿기지 않을 정도로 재빨랐다.

그들은 처음부터 유신이 숨어있다는 것을 알고 있었던 것이다.

비록 그게 한 명이었는지는 몰랐지만 그를 경계, 방심 시키기 위해 함정까지 판 것이다.

유신은 황야에서 1년을 보내고 쓸모없는 감정들을 '거세'하여 한 명의 전사가 됐다.

하지만 그렇게 따지자면 밴디트들은 황야에서 평생을 보내온 놈들이다.

본능적인 기시감.

혹은 살아남으며 벼려낸 경험들.

황무지의 악귀들은 결코 눈 먼 장님이 아니다.

어떤 면에서는 괴물보다 까다롭다.

쐐애액.

유신이 있던 자리로 벼락처럼 화살들이 떨어졌다.

"잡았나?"

기세좋게 달려들던 밴디트들이 혀를 찼다.

화살에 박혀 펄럭거리는 저것은···

"옷가지 뿐이잖아."

"저기다!"

"어차피 한놈이야! 포위···"

소리치던 부두목이 눈을 동그랗게 떴다.

그래, 저놈은 분명 혼자였다. 그에 반해 이쪽은 수십 명.

압도적인 전력차였다.

하지만···

"엿같은 새끼들."

머리를 쓸 줄 아는 것은 밴디트들만이 아니다.

유신은 저 스캐빈저들이 자신의 흔적을 간파했을 거라고 확신했다.

그렇기에 그는 이 상황을 뒤집을 수 있는 묘수가 뭐가 있을까? 고민했다.

답은 간단했다.

이쪽의 전력이 부족하면 그걸 채운다.

굳이 우리편이 아닐지라도 말이다.

화르르륵!

매마른 태양 아래.

땅을 박차는 유신의 양손에서 불꽃이 피어올랐다.

"느, 능력자다! 방패···"

아이러니하게도 불꽃이 향하는 것은 밴디트들 쪽이 아니었다.

불꽃은···

'힘 조절 하고.'

반대편에 있던 폐건물의 주인.

늑대거미들을 향해서 쏘아졌다.

녀석들한테는 별 피해가 없게.

하지만 놈들이 힘겹게 쌓아올린 집과 알집들만 절묘하게 태울 정도의 화력으로.

푸화아악

엉망이 된 건물이 불타오른다.

화마 속에서 시커먼 그림자들이 일렁거린다.

키아아아악!

불의 벽을 박차고 나온 거대 거미들의 겹눈이 흉흉하게 번뜩였다.

"이, 이런 미친놈이! 크아악!"

곧 날카로운 이빨을 딱딱 거리다가 닥치는 대로 주변을 공격하기 시작했다.

괴물들의 시선으로 볼 때 인간들은 다 같은 종이었기 때문이다.

"뭉쳐!"

물론 밴디트들 역시 가만히 당하고만 있지 않았다.

쇠파이프와 도끼가 날아든다.

퍽. 쏘아진 화살이 거미의 겹눈을 꿰뚫었다.

하지만 그와 동시에 폐허의 괴물들 역시 제 무기를 휘둘러댔다.

유신 역시 밴디트들의 틈으로 화염을 던져댔다.

"끄아아악!"

그야말로 난전이었다.

'예상대로군.'

이대로 가면 상황은 순조롭게 풀릴 듯 했다.

콰아아앙!

"···!"

갑작스레 대지를 뒤흔든 강렬한 충격만 아니었다면.

···

"모두 엎드려!"

치이이익

심지가 타오른다.

소리 친 부두목이 또 한 번 손에 들린 것을 휙 던졌다.

또 한 번 터져나가는 폭발.

밴디트들도 여럿 휘말려서 죽었지만 늑대거미들은 태반이 몰살당했다.

"너 이 씹쌔끼! 네가 그 클레이모어냐?"

대머리는 핏발선 눈으로 외쳤다.

다이너마이트.

이제는 생산법 조차 희귀해진 구시대의 유물은 여전히 전율적인 위력을 자랑했다.

'염병.'

유신은 욕설을 내뱉었다.

게임상에서는 다이너마이트 같은 것은 존재하지 않았다.

인형사의 끄나풀이기도 한 '미트스튜' 패거리들은 끽해야 냉병기로만 무장하고 있었을 뿐이었다.

하지만 저걸 들고있다는 것은···

'변수.'

모든 게 게임 상에서처럼 쉽게 흘러가지는 않는다는 것을 증명했다.

"휘유."

하지만 그렇다고 낭패감을 드러내는 것은 악수다.

그리되면 적들은 더 기세를 올릴테니.

화르르륵!

여유롭게 휘파람을 분 유신이 다시금 불꽃을 쏘아냈다.

다이너마이트는 화약의 집합체.

통채로 발화시켜 터트려 버릴 생각이었다.

그 순간.

"막아!"

몇몇 부하들이 큼직한 쓰레기 방패로 이를 막아냈다.

"쳇!"

유신은 혀를 찼다.

아이러니하게도 동시에 안도했다.

황무지인들은··· 애새끼던 어른이던 다 죽어가는 노인네던 크고 작은 비수를 한 가지씩 숨겨둔다.

능력에 취해 놈들과 정면으로 맞섰다면 틀림없이 큰 화를 입었을 것이다.

"크흐흐흐."

지글거리는 불꽃과 괴물.

인간들의 시체가 합쳐져 하모니를 이뤄낸다.

"재주는 다 부렸냐?"

그 중심에 있던 대머리가 씨익 웃었다.

"···"

밴디트들은 반 이상 살아남았다.

유신의 유일한 무기는 적에 의해 차단당했다.

하지만 그럼에도 그는 여유로워보였다.

"뭐, 어느정도는?"

지금 같은 상황에서도 태평하게 귀까지 휘비고 있었으니까.

"···좋아. 눈까리가 파이고 불로 지져저도 그 잘난 낯짝이 멀쩡한가 보자."

이를 뿌득 문 대머리가 손짓했다.

"한꺼번에 덮쳐! 손에서 나오는 불꽃만 조심하면 돼!"

몇몇은 화살을. 몇몇은 쇠파이프와 방패, 어떤 녀석들은 시체를 장벽 삼아 달려들었다.

"우아아아!"

그들은 손에 들린 이 날붙이가 저 새끼를 족칠 수 있음을.

동료들의 두툼한 지방이 저 화염을 막아낼 수 있을꺼라 믿어 의심치 않았다.

"고맙게도."

유신이 피식 웃지만 않았더라면.

그의 시선이 향하는 곳을 포착하지만 않았더라면 말이다.

"···!"

상대적으로 여유로웠던 대머리가 유신이 바라보는 곳을 확인 할 수 있었다.

그곳에는 그들이 지금껏 타고왔던 마물. 매드니스 카우들이 한가롭게 풀을 뜯고 있었다.

2급 위험종 매드니스 카우.

녀석들은 괴물이란 이름에 걸맞지 않게 평소에는 매우 온순하다.

하지만···

몸에 상처라도 나는 순간.

눈까리가 확 돌아버린다.

곧 그 이름에 걸맞게 모든 것을 짓밟아 버린다.

"이런 시발! 쏴아!"

상황을 파악한 부두목이 소리쳤다.

몇몇 눈치 빠른 밴디트들 역시 시위를 놓았다.

퍽퍽.

조잡하다고는 하나 두개골도 꿰뚫는 위력의 화살이다.

유신의 허약한 몸뚱이 같은 것은 풍선처럼 휘날렸다.

하지만···

"왜! 왜! 안 뒤지는 거야!"

[방사능 트롤의 재생력]

화르르륵

날카로운 눈매의 사내는 쓰러지지 않았다.

오히려 양손의 불꽃을 강렬하게 지피며 휙 날아올랐다.

"잘 가라. 이 버러지 새끼들아."

지금까지의 악행을 그대로 돌려받으라는 듯.

사납게 웃으며.

양손을 힘차게 휘둘렀다.

세 개의 눈을 끔뻑거리고 있는 괴물 소떼를 향해.

크아아아아아!

스탬피드.

성난 들소들의 거친 쇄도.

"시발···"

자신의 얼굴로 날아드는 발굽을 보며 부두목이 헛웃음을 지었다.

···

이 엿같은 게임 속을 떠돈지 1년.

유신은 밴디트들의 머리 위에서 돌아다닐 정도로 영악해졌다.

***

밴디트들은 자신들이 보살피고 관리하던 애마들의 발에 의해 유명을 달리했다.

광분한 소때들은 황야의 지평선 너머로 사라졌다.

타닥타닥

불길 사이로 피어오르는 각양각색의 냄새.

그거 아는가?

인간 시체는 잘 익히면 스테이크 향기가 난다.

"이제는 그냥 맛있는 냄새 같다니깐."

킥킥거리던 유신은 미친 사람처럼 중얼거렸다.

그러다가 곧 시체들의 틈바구니 속으로 고개를 돌렸는데.

"으, 으으···"

앙증맞은 머리통이 쏙 하고 고개를 내밀었기 때문이다.

"살아있었군."

금색 머리칼에 고양이처럼 치켜올라간 눈동자.

아이라기엔 조금 더 크고, 처녀라기엔 어려보이는.

그 경계에 있던 소녀는 에피였다.

유신이 그토록 찾아해매던 네임드 npc중의 하나.

"뒤지는 줄 알았네···"

소녀는 이쁘장한 외모와는 다르게 상스러운 말을 내뱉었다.

"컥, 커컥."

곧 살아남은 밴디트의 목에 박혀있던 나이프를 뽑았다.

아마 난리통에 밧줄을 풀고 몸을 숨기고 있다가 저 밴디트를 처리한 모양.

무심한 눈길과 손놀림.

전형적인 황무지 아이의 특색이다.

"고마워. 그 쪽 덕분에 살았어. 뭐, 애초부터 그냥 말려든 것 같지만."

잘나가다가 삐딱해진 말투까지.

그 담 만큼이나 성격이 그리 좋은 모양은 아닌 모양이다.

하긴 그러니까 밴디트들한테 '팔려'갈 때도 발광했겠지.

툭 내뱉은 에피가 유신을 바라봤다.

유신 역시 그녀를 유심히 관찰하다가 말했다.

"한 가지만 묻자."

"응?"

"이름이 뭐지?"

"이름? 갑자기···?"

"대답해라."

"에피, 에피야."

"···그런가?"

유신은 안심한 듯 한숨을 내쉬었다.

에피 자신을 보고 입맛을 다시거나. 음욕을 내비치지도 않았다.

그 태도에서 에피는 판단했다.

'다행이야. 미친놈은 아니구나.'

"히히. 귀여운 이름이지? 우리 부모님이 지어주신 거야."

에피가 안도하던 그 순간.

시커먼 눈동자가 차갑게 번뜩였다.

이와 반대되게 양손에는 지글거리는 불꽃이 피어올랐다.

화르르륵

괴물들을, 밴디트들을 학살하던 그 게걸스러운 이능이.

"그래, 정말이지 앙증맞은 이름이군."

"저기··· 갑자기 그건 왜?"

유신이 스산하게 말하자 에피가 당황했다.

"그럼 이제 죽어라."

곧이어 일어난 상황 역시 그러했다.

"···?!"

눈을 크게 뜬 소녀를 향해 유신은 자비없이 손을 뻗었다.

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

네임드 NPC x 황무지의 소녀

"자, 잠깐!"

에피는 시체들의 틈바구니로 쏙 들어가 불꽃을 피해내는 기염을 토해냈다.

유신은 아무런 감정없이 마치 기계처럼 또 다른 불꽃을 피어올렸다.

그리고 또 투척.

"으아아아악! 미친놈아! 대체 왜 그러는···"

유신은 의도치 않게 망자들의 넋까지 달래주고 있었다.

그럴 수록 시체들의 벽은 점점 더 얇아져만 갔다.

마침내.

콰당탕.

벌거벗겨진 꼬맹이가 내동댕이 쳐졌다.

혼란, 공포, 절박함.

갖가지 마이너스적인 감정들이 동그란 눈동자에 떠오른다.

그러든 말든 유신은 또 다시 불꽃을 피워올렸다.

사실 이것도 유신 딴에는 자비를 베푼 것이다.

냉병기로 후려처서 고통스럽게 죽이는 것 보단.

"고통은 없을거다. 최고 화력이거든."

한 방으로 깔끔하게 보내줄려는 의도였으니.

하지만.

"좆-까는 소리하지마!"

소녀는 살고싶은 모양이다.

휙 들어올린 그녀의 손에는 어느새 다이너마이트가 들려있었다.

밴티드가 흘린 것을 주운 모양.

'재빠르군. 그리고 머리도 잘 돌아가.'

유신의 눈이 가늘어졌다.

에피는 거친 숨을 내쉬었다.

"허억, 허억. 이봐."

"···"

"이유라도 알려줘."

"대체! 대체 왜 나를 못 죽여서 안달인건데!?"

지글거리는 태양 아래.

에피는 유신과 눈을 맞췄다.

광인이라기엔 너무 침착해보인다.

살인을 즐기는 것처럼 보이지도 않는다.

저 사내는 그냥 자신을 처리하려 한다.

마치 경비대가 경비를 서듯. 무슨 의무라도 지고 있는 듯.

"후우."

불꽃을 없앤 유신은 얼굴을 쓸었다.

과도한 에스트의 소모 때문일까? 혹은 이 병약한 육체의 한계 때문일까?

아니면···

"너는 말이지."

"···"

"나중에 아-주 나쁜 사람이 되기 때문이야."

자신이 내뱉을 말의 황당함을 알기 때문일까.

유신의 얼굴은 퍽 피곤해보였다.

"시발?"

"그게 무슨 개소리야?"

에피는 헤 입을 벌릴 수 밖에 없었다.

***

(구)한국.

종말이 전 세계를 집어삼킨 대격변 속에서도 그나마 과거의 풍요로움을 간직하고 있는 곳.

방사능 지대도 적고, 모래폭풍에 섞인 중금속과 미세먼지의 농도도 다른 곳보다 옅다.

위협적인 괴물이나 괴이현상. 밴디트들 역시 드물었다.

그 특성 덕분일까?

이곳에는 유난히 재앙의 싹들이 많았다.

에피.

크레이지 건 에피.

엄마 없는 에피.

그래, 이 녀석은 영웅같은 거창한 게 아니다.

여러가지 이명으로도 불리는 이 아이는 밴디트다.

아니, 밴디트가 된다.

그것도 카쿨 따위와는 비교도 할 수 없을 정도로 끔찍한 악귀가.

[메트로폴리스 아시아 지부 테러]

[실 끊기 작전의 분쇄자이자 인형사가 숨겨둔 히트맨]

[그룹 더 호라이즌의 간부]

굵직한 것들만 추려도 이 정도다.

판데모니엄이나 7대 재앙까지는 못 되어도 6위계 정도의 위협은 된다는 거지.

클레이모어들도 샐 수 없이 죽이는 이 소녀는 무척 까다로운 능력자니까.

'아직 능력을 개화하지는 않은 것 같지만.'

물론 에피한테 여기까지 설명하지는 않았다.

그저 자신이 죽어도 싼 놈이 된다는 데 까지만 들은 그녀는 당연히 분노했다.

"미친 새끼! 네가 뭔데 나를 판단해? 네가 뭔데?!"

에피는 살아가면서 도둑질도 좀 하고, 사람도 좀 찔러봤다.

하지만 그게 자신이 악당이라는 증거는 못 된다.

그야 그럴 수 밖에.

황무지인들은···

"다들 이렇게 살아가!"

젖먹이 때부터 장난감 대신 나이프를 쥔다.

"뺏고, 죽이고, 훔치지 않으면 못 살아남는 세상이라고!"

에피는 제 나이또래의 평범한 소녀였다는 말이다.

뭐···

'지금은 그렇겠지.'

"너도 알다시피 난 능력자다."

"그래, 존나게 잘나신 학살자 양반."

"난 미래를 볼 수 있다."

모니터 밖 이방인한테 그런 호소 따위는 먹히지 않았다.

"···"

화염이면 화염.

벼락이면 벼락.

기이한 이능이면 이능.

세부적인 메커니즘은 조금씩 바뀌어도 능력자들은 통상 하나의 능력만을 가질 수 있다.

에피가 능력자들에 대한 지식이 조금만 있었더라면 유신의 거짓말을 간파할 수 있었을거다.

물론 그렇다 한들 미래가 바뀌지는 않았을테지만.

스윽.

유신은 품에서 가시몽둥이를 꺼내 쥐었다.

피딱지와 살점이 굳은 저 흉기는 퍽 흉흉한 기세를 흘렸다.

"자, 잠깐. 잠깐마안···"

에피는 한 손을 내밀며 뒷걸음질 쳤다.

도저히 말이 통하지 않는다.

멀쩡해 보이는 줄 알았는데. 이건 저 밴디트 새끼들보다 더 한 또라이다.

'설령 저 개소리가 사실이라고 한들···'

이대로 뒤질 수는 없다.

"내가 나쁜 사람이 된다면··· 나중에 희대의 썅년이 될 수 밖에 없다면···"

에피는 광인을 상대로 스스로가 할 수 있는 최선의 변호를 했다.

"증명해보이면 되는 거 아니야!"

"···증명이라?"

우뚝.

유신의 걸음이 멈췄다.

"이 세상에서 가-장 착한 사람이 될게."

시체밭에서 폭탄을 쥐고 있던 소녀는.

"당신이 옆에서 지켜보다 아니다 싶으면 콱 죽여버리면 되잖아? 응?"

본인이 지을 수 있는 가장 선량한 미소를 지어보였다.

***

휘이이잉

황량한 모래바람이 불어재끼며 타다만 불씨를 잠재운다.

···

천금같은 침묵이 주변을 감싼다.

"···좋다."

믿기지 않게도 유신은 납득했다.

"저, 정말?!"

"못 믿겠다면 다시 죽여 줄···"

"아냐! 믿어! 믿는다구우!"

물론 믿지 않는다. 기회를 봐서 도망칠 셈이다.

에피는 고양이 같은 눈매를 굴리며 유신을 경계했지만···

유신은 제 무기를 휙 집어던지며 등을 돌렸다.

아무리 다이너마이트를 쥐고 버틴다고 한들 죽일 수 있다.

그냥 다가가서 머리를 찍어버리면 되니까.

하지만.

유신은 구태여 에피를 살렸다.

물론 그가 이렇게 행동한 것에는 다 이유가 있었다.

저게 아직 다 크지도 않은 애새끼라 동정심이 들어서?

천만에.

이건 실험이다.

'가능할까?'

그대로 놔둔다면 거대한 악으로 자라날 저 새싹.

하지만···

그 운명을 바꿀 수 있다면?

적대적일 게 분명한 npc를 내 편으로 만든다면?

적의 세력을 줄이고 이쪽의 세력을 늘릴 수만 있다면?

'미리 시도해봐서 나쁠 게 없다.'

그렇게만 된다면 이 망겜을 클리어 할 수 있는 확률은 기하급수적으로 높아진다.

자신이 집으로 돌아갈 수 있는 확률이 높아진다.

게다가...

'어차피 더스트 봄을 막기 위해서는 이예르폴로 가서 브라키를 죽이고 인형사의 세력을 꺾어놔야 한다.'

피식

불안하게 눈을 굴리는 소녀를 뒤로한 채 유신은 웃었다.

이윽고 시체들을 뒤적거리며 전리품을 회수하기 시작했다.

"추출기는 당연히 없고···"

약간의 크레딧을 우선 입수한다.

그 다음이 밴디트들이 남긴 무기들이다.

대부분이 격전 와중 깨지고 불타버려 몇 개 안 남았긴한데.

"흠."

그래도 몇 개 정도는 건질 수 있었다.

유신은 나무 손잡이와 조잡한 쇠로 만들어진.

그러나 날 부분은 제법 날카롭게 갈려있던 손도끼를 만지작거렸다.

그리고 작은 나이프 역시도.

좋아.

이게 있으면 가시 방망이 따위 필요 없지.

'다이너마이트는···'

저게 끝인가?

유신은 에피가 들고있는 폭탄을 힐끔거렸다.

"윽!"

그녀는 움찔했다.

그러나 곧 본인의 빈약한 가슴 사이에 그것을 찔러넣고는 당당히 소리쳤다.

"안 줘! 아니! 못 줘! 이건 내가 정당히··· 얻은 건 아니지만 내 목숨줄···"

"달라고도 안했다."

고개를 저은 유신은 또 다시 걸음을 옮겼다.

이번에는 각종 괴물들의 시체들이 있는 곳이었다.

누누이 말하지만 그는.

'늑대거미? 아니면 매드니스 카우?'

이 세상에서 하나뿐인 특별한 능력자였으니까.

"···"

고민하던 유신의 손이 향한 곳은 결국 매드니스 카우였다.

[늑대거미의 겹눈]

[늑대거미의 질기고 튼튼한 거미줄]

위의 능력들보다.

[질주하는 들소의 광란]

아래의 능력이 더 자신한테 필요해 보였으니까.

'좋아.'

손아귀로 와닿는 강렬한 힘.

새로운 능력을 흡수하는 것은 늘 만족스러운 충만함을 선사했다.

마치 배를 채우는 느낌이라고 해야할까?

물론 그 대가로.

[과도한 능력 흡수!]

[그릇이 넘칩니다]

[사용자의 선택에 따라 방사능 들개의 어둠을 꿰뚫는 눈이 사라집니다]

잃는 것 역시 있었지만 말이다.

'어차피 흔하게 볼 수 있는 녀석.'

정 필요하다면 또 한 마리 잡아서 흡수하면 될 것이다.

씨익

시체밭을 헤집던 유신은 혼자서 낄낄거리며 휘파람을 불었다.

"으갹!"

곧 자신을 피해 슬금슬금 도망치던 에피의 발앞에 손도끼를 박아넣었다.

"하, 하하. 오줌이 마려워서···"

"그래? 난 또 도망치려는 줄 알았다."

"무슨 그런 섭한 말씀을···"

말을 하던 에피가 헙 입을 다물었다.

횅하니 뚫려있는 지평선 너머.

하나 둘 그림자들이 모습을 드러내고 있었다.

시체 냄새를 맡고 다가오는 괴물들이었다.

"움직이지."

"으, 응"

아무래도 곧바로 이 광인에게서 빠져나갈 수는 없을 듯 하다.

이방인과 악당이 될 소녀는 황급히 걸음을 옮겼다.

***

"···그래서 그 의문의 클레이모어가 나타나 타운을 위협하던 '불멸자'를 처리했다?"

꿀꺽

"그렇습니다."

전직 사냥꾼 조수였던 촌장은 지금 바짝 얼어있었다.

눈앞에 있는 여인의 존재감 때문이다.

무릇 외견이라는 것은.

분위기라는 것은 그 사람의 첫인상을 결정하는 것에 지대한 역할을 한다.

사기꾼 가람이 멋들어진 정장을 입고 다녔던 것처럼.

새하얀 피부에 짙은 화장.

비즈니스용 정장에 하이힐까지.

눈 앞에 있는 여자의 차림은 가람의 옷마저 싸구려로 보이게 할 정도로 기품이 넘쳤다.

그리고 이는 기묘한 위화감을 선사했다.

굶주림 때문에 자식을 파는 곳.

동족 포식을 하고 죽이는 곳.

모든 것이 이 황무지의 일상 아니던가?

굳이 눈앞의 여자가 클레이모어라는 사실이 아니더라도 말이다.

"불멸자라···"

아이언 나이트.

에바그린이 다리를 꼬았다.

"그 말 증명할 수 있나?"

그녀의 시선은 선글라스에 가려져 보이지 않았다.

하지만 촌장은 오싹 소름이 돋았다.

"죄, 죄송합니다! 어디까지나 제 추측에 불과했던터라···"

"흠. 뭐 좋아. 황무지인들의 무지는 이해해줄 수 있으니까. 질문을 바꿔보지. 그 '클레이모어'는 어디갔지?"

"보수도 받지 않은 채··· 납치됐던 주민을 데려다주고는 곧바로 떠났습니다."

"하아?"

"하, 하지만! 지금 막 그 주민을 데리고 오고 있습니다! 당사자의 입으로 들으시는 게 보다 더 정확한 정보 전달을···"

"쉿."

새빨간 입술에 검지를 대며 촌장의 입을 막은 에바그린.

"눈치가 빨라서 좋군. 오래 살겠어."

곧 선글라스를 슬쩍 젖히며 웃었다.

잠시 후.

똑똑

"레나입니다."

"오오. 그래, 어서오거라."

황무지의 당찬 여인 레나가 판잣집 안으로 들어왔다.

수백년은 묵은 스프링 고장난 소파에 앉은 그녀는 촌장으로부터 설명을 들었다.

이윽고 에바그린을 향해 고개를 돌렸다.

"그 분에 대해서. 그리고 저를 납치했던··· 그 괴물에 대해서 말씀 드리면 되는 건가요?"

"으흠. 자세하게 말해봐."

클레이모어를 앞에 두고도 레나의 얼굴은 덤덤했다.

아마 폐허 지하철에서 겪었던 그 일이 그녀안의 무언가를 부숴버린 것 같았다.

"···"

그런 레나의 무표정했던 얼굴에 처음으로 감정이란 게 나타났다.

그것은···

"멋진 분이셨어요. 친절하고 다정하시고 강하시고···"

명백한 호감이었다.

쯧. 에바그린은 혀를 찼다.

이래서 황무지인들은 안 된다. 멍청하고, 눈치도 없고···

아니, 이 경우엔 시야가 좁아진건가?

'계집이란···'

"그런 개소리 말고. 네 사심과 생각 같은 건 배제한 체 있는 그대로의 사실들만 말해."

"사심? 배제?"

레나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러나 촌장이 옆에서 설명해주자 아. 하고 손뼉을 쳤다.

"그러니까···"

곧이어 튀어나오는 놀라운 말들.

손에서 거대한 불덩이를 뿜어내 땅굴 전체를 연소시켰다느니.

거대한 덩치의 괴물보다 빠르게 달려나가며 미로를 돌파했다느니.

나름대로 사실만 전달한다고 했는데도.

무식한 황무지인의 말은 전혀 객관적이라 할 수 없었다.

'그 자칭 클레이모어가 몇 위계인지는 둘째치고···'

'아무리 봐도 불멸자가 아니라 트롤 같은데···'

심증만으로 판단할 수 있는 사안이 아니다.

또각

에바그린의 하이힐이 경쾌한 소리를 냈다.

다리를 꼬은 채 고민하던 그녀는 곧 자리에서 일어났다.

"흐음. 그렇단 말이지?"

아이언 나이트는 일단 이 의문의 클레이모어를 추격하기로 했다.

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

조우

괴물들의 후각은 굉장한 편이었고, 그건 곧 눈에 보이는 것보다도 더 멀리서부터 끈덕지게 몰려들기 시작한다는 뜻이었다.

두 사람은 그런 녀석들을 피하기 위해 때로는 숨거나. 때로는 달리며 부지런히 움직였다.

그러다가 마침내 안전해졌다고 여겼을 때.

"으갹!"

에피는 또 도망을 치다가 유신에게 제지당했다.

이걸로 스무 번째.

소녀는 아무렇지 않게 웃었다.

"저기··· 우리 이제 어디로 가는거야?"

이제는 변명도 하지 않는다 이거냐?

내가 자신을 죽이지 않으려고 한다는 걸 알고 있는 것 같았다.

'영악하군.'

유신은 태양을 보며 방위를 가늠하다가 답했다.

"네 고향으로 간다."

"정말?!"

에피의 눈동자가 반짝였다.

상황에 짓눌려 가만히 있었지만 그녀에게는 사실 돌아갈 집과 가족이 있었다.

"그래. 그곳 이름이 분명··· 이예르폴이었지?"

"어, 어떻게!"

유신이 어깨를 으쓱였다.

마치 전에 말했잖냐. 미래를 안다고. 라고 주장하는 듯 했다.

'찌, 찍은거겠지···'

에피는 식은땀을 흘리는 한편 생각했다.

어떻게 할까?

이 미친놈은 정말 자신을 안 죽이고 있다.

어차피 나 혼자서 황야를 가로지르는 건 불가능하다.

한 번 믿어봐?

피식

에피는 비웃음을 흘렸다.

자신은 가족말고 아무도 믿지 않는다.

선량한 얼굴에 속아 통수 맞은 적이 얼마나 많던가?

'바뀌는 건 없어. 미친 새끼라도 이용해주지.'

"왜 우리 고향으로 가는거야? 내가 진짜 착한 아이인지 확인하려고?"

"그래."

"조오았어. 기대하라구! 제대로 보여줄 테니까!"

"···그러지."

'무슨 생각하는지 다 보이는군.'

영악한 소녀가 눈을 굴린다고 한들. 유신의 눈에는 다 보였다.

그는 지금보다 훨씬 더 진보된 세상인 21세기에서도 살아가지 않았던가?

'고양이 한 마리를 길들이는 기분인데.'

어떤 게임이든 엑스트라 악당에게 할애하는 지문은 그렇게 많지 않다.

타락할 수 밖에 없었던 비극적인 과거사 텍스트로 몇 줄.

현재의 흉악한 일러스트와 대사가 곧 그 인물의 전부를 나타냈으니.

'이름이나 특징으로 보면 아무리 봐도 크레이지 건이 맞아.'

귀엽게 묶은 양갈래 머리와 황무지인 답지 않은 하얀피부.

마치 조커카드 영화의 여자 빌런을 연상케 한다.

'아직까지는 그냥 먹고싸는 잉여인간에 불과하지만 말이지.'

유신이 총총 흔들리는 머리칼을 가만히 주시하자.

"뭘 봐? 흠흠. 아니, 보세요?"

그 잉여인간이 한 소리했다.

유신은 어깨를 으쓱였다.

"생각해보니 너무 무료로 봉사하고 있는 것 같아서."

"봉사?"

"대가가 필요하다는 말이다."

"···?!"

"그 과정이야 어쨌든 결론적으로 나는 너를 고향까지 무사히 데려다주고 있는 셈이니까. 안 그러냐?"

사실 대가 같은 것은 필요없다.

어차피 이예르폴에 가면 원하든 원하지 않든 가득 챙기게 될 테니.

하지만···

'한 번 떠볼까?'

우선 인성 테스트부터 해볼 생각이다.

"···맞는 말이네."

요 발랑까진 꼬맹이는 의외로 쉽게 인정했다.

"어쨌든 난 당신 덕분에 살았고, 지금도 살아있는 셈이니까."

부스럭.

곧 제 품을 뒤적거리더니 거창하게 무언가를 꺼내든다.

"···"

단돈 2크레딧을.

이걸 누구 코에 붙이라고?

유신의 눈이 가늘어졌다. 소녀는 콧방귀를 꼈다.

"그거 내 전재산이야."

"돈의 대단함은 그, 뭐시냐? 사람마다 다 다르잖아? 당신한텐 푼돈이라도 나한텐 대단한 거라고."

"호오."

여기서 개개인의 부의 가치에 대한 이야기를 들을 줄은 몰랐는데···

"흥미롭군. 아주 바보는 아닌가?"

"뭐야?! 내가 왜 바보야? 받기 싫으면 말···"

"받기 싫다는 말은 안했다."

유신은 자비없이 소녀의 코묻은 크레딧을 갈취했다.

곧 자신을 황당하게 바라보는 에피를 보더니 어깨를 으쓱였다.

"가자."

"그, 당신 이런 말 어디에서 듣지않아? 미쳤다던지. 재수 없다던지."

"한 번도 없다."

"에엥?"

"착하게 생기셨네요. 도를 아시나요. 같은 말은 들어봤지."

"푸훕. 그 얼굴로? 말도 안 돼~"

칭찬인가? 아니, 아닌 거 같은데?

"으갹!"

에피가 기겁했다.

유신의 도끼가 갑자기 발밑에 박혀들었기 때문이다.

"너도 공부 잘하게 생긴 얼굴은 아니다."

"···쪼잔함 추가."

두 사람은 그렇게 투닥거리며 황야를 가로지르기 시작했다.

유신은 이 여정의 끝이 어떻게 될까 궁금해졌다.

***

터벅터벅

이예르폴은 자유도시 하브람을 지나쳐서 조금 더 가면 나오는 소규모 타운이었다.

멸망 전에는 다대포가 위치한 장소에 있었지.

즉 거리가 제법 된다는 말이었다.

"얼마나 걸렸나?"

"응?"

"네가 납치되고 이곳에 당도하기까지 말이다."

"아아. 하루정도? 으으. 그러고보니 온 몸이 쑤시네."

매드니스 카우는 그 특성답게 지치지 않고 달린다. '미트스튜' 패거리는 마적과도 같은 놈들이니 역시나 쉬지 않고 몰았겠지. 이걸 도보로 환산하면···

'사흘정도··· 중간에 마주칠 변수들을 생각하면 넉넉잡아 일주일.'

충분히 감내할 만하다.

조금 돌아서 가야겠지만 낙원까지 가는 길이 그렇게 틀어지지도 않으니까.

"여기서 잠깐 쉬었다가지."

유신은 황야 한 가운데에 떡하니 박혀있는 마치 고인돌 같은 바위를 가리켰다.

"좀 더 걸을 수 있···"

"쉬었다 간다."

빨리 집에 가고싶은지 에피가 강한척을 했다. 하지만 유신은 단호히 거절했다.

시시각각 들이닥치는 모래바람과 강렬한 태양광.

황무지에서의 컨디션 조절은 곧 목숨과 직결된다.

육신이 지치면 정신이 흔들리고.

정신이 흔들리면 주변의 이변을 알아차리는 게 늦어지게 되니까.

그건 곧 구석구석 숨어있는 포식자들에게 나 잡아먹어줍쇼. 하는 것과 같은 뜻이다.

"기억해라."

이 녀석의 운명을 한 번 바꿔보기로 한 이상 굳이 까탈스럽게 대할 이유가 없었다.

당사자는 여전히 경계하는 모양이지만.

'이쯤 움직이면 한계이기도 하고.'

정말이지 빌어먹을 정도로 약해빠진 육체다.

지난 1년 동안 뼈를 깎는 노력으로 단련했는데도 말이지.

"···"

역시나 유신의 친절한 설명 때문일까?

에피는 당황한 모양새였다.

"하지만 밴디트들은···"

"그 녀석들은 애초부터 목숨을 내놓고 살지."

"왜 그러는 거야?"

"정신이 돌아버렸다는 이야기는 너무 흔하겠군. 음···"

각진 얼굴에서 식은땀이 흐른다.

바닥을 유심히 훑어본 유신은 괴물이 없다는 것을 확인한 후 털썩 앉았다.

"그들 조직만의 기강 정도로 해둘까?"

곧 배낭에서 천으로 둘러쌓인 무언가를 꺼내들었는데.

노릇한 냄새를 풍기는 그것은 밴디트들이 타고다니던 매드니스 카우의 고기였다.

꼬르르륵

에피는 군침을 흘리며 이를 보다가 물었다.

"조직이 무슨 뜻이야?"

"여러 사람들이 특정한 목적을 이루기 위해 결성한 단체···"

"결성이랑 단체는 또 뭔 뜻이고?"

또 한 번 고개를 갸웃거리는 에피.

염병.

유신은 이마를 짚었다.

그러고보니 이 녀석은 못 배워먹은 황무지인.

그것도 어린애다.

유신은 이럴 때 마다 자신의 과거와 이 세상이 오버랩되며 혼미해지고는 했다.

21세기의 아이들은, 스마트폰을 늘 끼고 사는 잼민이들은 똑똑한 것을 넘어 영악했으니까.

'방금 전에 가치 어쩌고 할 때는 좀 똑똑한 줄 알았는데··· 그게 아니었군.'

"그러니까···"

"쉽게. 쉽게 설명해줘."

"어떻게하면 저 새끼를 족치거나 따먹을 수 있을까? 고민하던 사람들이 모여 패거리를 만든거다."

"아하. 이해가 쏙 되네."

손바닥에 주먹을 마주치는 꼬맹이.

유신은 중학생도 안 된 애새끼한테 이런 저급한 언어를 사용하는 것에 찝찝함을 느꼈다.

"그런데 말야."

"말해라."

"기강은 뭔 뜻이야?"

물론 에피의 의문은 끝나지 않았다.

"이런 등신이-!"

소녀가 숙녀가 되지 못했 듯 유신 역시 아직 어른이 되지 못했다.

유신은 자신도 모르게 와악 소리쳤다.

누누이 말하지만···

멸망한 세상의 환경이란 퍽 가혹하다.

***

"등신이라니··· 너무 하잖아. 나보고 착한 사람이 되라면서 정작 그 말을 한 사람이 이래도 되는거야?"

"···"

"그러니까 자기들끼리 통수 맞기도 싫고, 남한테 깔보이기도 싫어서 존나 쎈척 한다는거지?"

유신이 힘겹게 설명한 밴디트들의 행동양식과 이유에 대한 논리가 아주 심플하게 축약됐다.

'이걸 이렇게 생각할 수도 있군.'

그는 한숨을 쉬다가 다시금 고기를 뜯었다.

매드니스 카우는 몇 안 되는 먹을만한 괴물 중 하나였다.

아니, 사실 먹을만한 것을 가뿐히 뛰어넘는다.

스테이크 맛이 나거든.

'시간만 더 있었어도 좀 더 챙겼을텐데.'

"개맛있어··· 나 이런 거 처음 먹어봐."

감동한 에피 역시 소고기를 게걸스럽게 뜯다가 문득 멈췄다.

곧 망설이면서 물었다.

"그렇다면 그··· 녀석들이 사람 고기를 먹는 것도 그런 이유야?"

"그것도 있고."

공동체끼리만 공유하는 것들.

규율, 규칙 같은 것들은 서로간의 관계를 더 끈끈하게 만들어준다.

밴디트들의 식인 풍습은 분명 이런 연유도 있었다.

물론 이뿐만은 아니고 결정적인 이유가 있다.

그건···

"괴물보다 잡기 쉬우니까."

극소수를 제외하고.

이 엿같은 세상에서 인간은 먹이사슬의 최하위다.

"개새끼들."

고기를 뜯던 에피가 침을 퉤 뱉었다.

일그러진 푸른 눈동자. 떨리는 입술.

지금 저 모습은 동족의 죽음에 분노하는 아이의 순수함이었다.

'저 얼굴이 그렇게 바뀐다는 거지?'

찢어진 입술로 히히히히 웃어재끼며 사람팔을 질겅대는 광인.

"···"

펼쳐질 수도 있는 미래를 생각하던 유신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쉴만큼 쉬었지?"

"응? 아, 응!"

"그렇다면 이제 움직···"

말을 하던 유신의 눈가가 가늘어졌다.

그는 냅다 에피를 껴안고 바닥을 굴렀다.

"악! 가, 갑자기 뭔 짓거리···"

버둥거리던 에피가 우뚝 멈췄다.

매마른 바닥과 하늘이 만나 태어난 지평선.

저벅저벅

굴곡조차 없는 그 땅을 누군가가 걸어오고 있었기 때문이다.

"저건 또 뭐야."

마치 광대같은 챙 넓은 모자에 치마도 아닌데 치렁거리는 옷.

방랑자의 복장은 퍽 기이했다.

적어도 에피가 보기에는.

하지만 유신은 상대의 정체를 대번에 간파할 수 있었다.

"사냥꾼이다."

기묘한 운명이라도 몰고 다니는 것일까?

황야의 또 다른 폭군이 모습을 드러냈다.

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

사냥꾼 x 의문

밴디트든 황무지인이든 괴물이든 도저히 공통점이라고는 없을 것 같은 이 집단들에게도 한 가지.

통용되는 규칙이 있다.

황야를 거닐 때는 항상 무리를 짓는다.

하지만 인생사 그 규칙이란 게 통용되지 않는 자들도 존재한다.

진짜 '괴물'로 분류되는 3급 위험종부터. 클레이모어. 그리고 마지막으로···

"사냥꾼."

"사냥꾼? 아, 그 건달들?"

"건달?"

"뭐, 있어 보이는 척 똥폼 잡고 틈만 나면 의뢰니 머니 지껄이면서 먹을거나 탐내는 떠돌이들 말하는 거 아냐?"

돌벽 뒤에 엄폐해 있던 유신은 피식 웃었다.

곧 이쪽으로 다가오고 있는 방랑자에 대한 경계를 늦추지 않으며 말했다.

"네가 봤던 건 사기꾼들이다."

"사기? 그럼 진짜는 달라? 저 요상한 복장하고 관계가 있는 거야?"

'총'을 비롯한 무기를 숨길 수 있을 정도로 펑퍼짐한 옷.

한쪽으로 치우쳐져 있는 무게 중심.

그리고···

"화약냄새."

"화약이란 게 뭐···"

"네가 들고 있는 폭탄을 구성하고 있는 것."

구성이 뭔 말이냐고 물어볼 상황이 아니었다.

에피는 가슴팍에 꽂혀있던 다이너마이트를 킁킁거렸다.

확실히··· 뭔가 매캐한 냄새가 났다.

터벅

그러는 동안에도 이제 사냥꾼은 육안으로도 가까이 보일 정도로 접근했다.

확실했다. 그는 이곳으로 오고 있다.

잠깐 숨돌릴 그늘이 목적인지 두 사람의 목숨이 목적인지 모르겠지만 말이다.

여전히 처음과 같이 빠르지도 느리지도 않은 일정한 보폭으로.

'카우보이모자라니. 어디 대륙에서 굴러먹던 놈인가?'

한 손에는 능력을 사출할 준비를.

다른 한 손에는 도끼를 꾹 쥔 유신이 눈가를 가라앉혔다.

에피는 생각했다.

유신의 저런 모습은 처음 봤다.

수십명의 식인귀들과 괴물들을 앞에 뒀을 때도 태연해 보이던 사내가 지금은 긴장하고 있다.

그렇기에.

"···저기 사냥꾼이란 게 그렇게 무서운 녀석들이야?"

자신이 알고 있는 가장 강력한 무기를 꾹 쥐며 던질 준비를 한다.

"당신보다도 더?"

'안 도망치네?'

유신의 눈동자가 이채를 발했다.

그러나 여전히 에피쪽으로는 시선도 주지 않은 채 답했다.

"무섭다마다."

터벅

"녀석이 손 한 번 까딱거리면."

터벅터벅

"우리는 다 죽는다."

멸망한 세상에서 '총'이라는 무기의 위력은 전율적일 정도다.

***

"···!"

소녀의 눈이 경악으로 뜨인 순간.

사냥꾼의 걸음이 멈췄다.

거리는 약50m

굥교롭게도 권총의 유효사거리에 딱 걸칠 정도였다.

'아무리 봐도 진짜다.'

이윽고···

스윽

사냥꾼은 진정하라는 듯 양손을 들어올렸다.

그 손아귀에는 아무것도 없다.

여기서 터져 나오는 걸걸한 목소리.

"경계하지 말라고. 그저 태양을 피할 그늘을 찾고 있을 뿐이니까."

물론 유신은 방심하지 않았다.

코트를 젖히고 홀스터까지 0.5초. 조준을 끝마치고 쏘는데 또 0.5초

숙련된 사수라면 단 1초도 걸리지 않는다.

가혹한 환경과 인외의 괴물들은 한 때 가장 손쉬운 병기를 다루던 자들을 한순간에 서부극의 카우보이로 만들어놨다.

터벅터벅

대담한건지 얕보인건지 사냥꾼은 양손을 들어 올린 채 이곳으로 다가왔다. 곧 유신이 앉아있던 자리에 털썩 않고는 롱코트를 펄럭거렸다.

"후우. 뒤지겠구먼. (구)한국은 원래 이렇게 더운 건가?"

드러나는 홀스터.

그 위에 곱게 자태를 드러내는 은빛의 리볼버.

유신은 이를 주시하다가 손도끼를 집어넣었다.

에피가 당황했다.

"어어? 괜찮은 거야?"

"쏠 수 있다면 진작에 쐈을 거다."

"그리고 그쪽은 피했겠지. 안 그런가?"

[Texas]

라고 적힌 챙 넓은 모자를 벗은 사내는 씨익 웃었다.

이마를 드러낸 곱슬머리와 수염.

날카로운 눈매까지.

꽤나 멋들어지게 생긴 중년이다.

'아는 얼굴은 아니야···'

"뭐, 초탄 정도는 가능했겠군."

그러나 어중이떠중이는 아니다.

"하하하. 지나친 겸손이군. 이리 오시게! 같이 땀이나 식히자고!"

사냥꾼이 돌벽을 탕탕 두드렸다.

생긴 것만큼이나 호쾌해 보이는 행동양식이다.

이에 대응하는 유신은···

"그러지."

태연하게 사냥꾼의 앞으로 가서 앉았다.

"어어?"

그러자 당황한 건 에피였다.

분명 위험하다고 했지 않는가? 손가락만 까딱거리면 죽는다며?

그런데 이렇게 무방비하게 있어도 되는 거야?

"안심해라 꼬마야. 나도 사냥꾼에 대해서 잘 알고 있는 자와 굳이 적대시할 생각은 없어."

"설마?"

그 말에 에피는 눈을 동그랗게 떴다.

그러고 보니 유신의 목소리는 평상시에 비해 컸다.

마치 주변보고 들으라는 듯.

즉 그는 상황을 보고 일부러 에피의 장단에 맞춰준 것이다.

-난 너에 대해서 잘 알고 있다. 그러니 허튼수작 부리지 마라.

"으아···"

에피는 황무지인답게 무식했다.

그러나 멍청하지는 않았다.

그는 유신의 설계에 오싹 소름이 돋았다.

'진짜 무서운 건 똑똑한 미친놈이라더니···'

"귀가 꽤 좋군."

태연한 얼굴과는 다르게 유신은 속으로 한숨을 내쉬었다.

사냥꾼들은 극도의 실리주의자이자 안전주의자들이다.

이득이 되지 않는다면 결코 움직이지 않으며, 이득보다 손해가 더 크다고 판단되면 과감히 몸을 사린다.

유신은 그런 사냥꾼의 생리를 꿰뚫고 있었기에 수를 던졌고, 이는 멋들어지게 통했다.

'뭐, 싸웠어도 지지는 않았겠지만.'

"주기적으로 낙원에서 관리를 받고 있거든."

사냥꾼은 홀스터 쪽으로는 손도 대지 않은 채 땀을 닦았다.

곧 코를 킁킁 거렸는데. 그는 바닥에 떨어져 있는 뼛조각을 힐끔거리더니 유신에게 말했다.

"맛있는 냄새가 나는데. 그거 설마 매드니스 카우의 고기인가?"

"그래."

"여행자간의 정을 생각해서 조금만 나눠줄 생각은?"

여행자간의 정이라니...

낯선 사람들끼리 조우하면 서로 칼부터 꼽는 게 일상인 이 세상에서?

웃기지도 않는 괴변이다.

하지만 유신은 납득했다.

"맨입만 아니라면."

"하하하! 물론이지! 사냥꾼들은 무보수로 일하지 않아. 무상으로 뭘 받지도 않지."

유신이 소고기를 건넸다.

이를 받아드는 사냥꾼의 손에서는 역시나 매캐한 화약냄새가 났다.

"아, 안 돼!"

옆에 있던 에피가 아쉽다는 눈초리를 보냈다.

저게 마지막 남은 매드니스 카우의 고기였던 것이다.

"네가 잡았냐?"

"그건 아닌데··· 저런 털복숭이한테 주기에는 좀 아깝잖아."

사냥꾼이 두 사람을 보더니 피식 웃었다.

"하하. 거 가정교육 한 번 존나게 못 받아 처먹은 애새끼로군."

"엄마 욕 미쳤네. 갑자기 나타난 부랑자 주제에···"

사냥꾼은 이 돼봐라 먹은 소녀를 상대할 줄 알았다.

한 귀로 흘리며 고기를 뜯은 것이다.

"아앗···"

"크으. 역시나 맛나는군. 굽기가 조금 아쉽기는 한데. 이 정도면 황야에서는 찾아보기 힘든 별식이지."

"좋아하니 다행이군."

유신은 기대했다.

사냥꾼의 정보는 맛있는 한 끼보다도 더욱 가치가 있다.

"자네들 목적지가 어디지?"

"이예르폴."

"이예르폴이라··· 구석 중의 구석으로 가는군. 그렇다면 하브람을 지나칠 테니 계속 남하하는 중이겠구만?"

유신이 고개를 끄덕였다.

사냥꾼은 나이프로 이를 쑤시면서 답했다.

"캠든 타운 주변은 피해서 가도록 해. 거대한 모래폭풍이 불고 있다. 듣기로는 방사능 역시 섞여 있는 모양이야."

"이례적인 일이군."

"협회에서도 난리야. 그래도 살만했던 땅이 몰락해간다고 말이지."

폭풍이 캠든 타운을 집어삼킨다는 것은 알았다.

하지만 그 정확한 시기는 몰랐던 유신이었다. 충분히 고깃값을 한 정보였다.

자칫하다간 휘말렸을 수도 있었을 테니.

그 순간.

"아, 하나 더."

아무래도 이 사냥꾼은 제법 매너가 좋은 모양이다.

"내려갈 때 조금 돌아서 가는 게 좋을 거야."

"위험한 괴물이라도 돌아다니는 건가?"

"괴물이면 차라리 낫지. 돌연변이다. 그것도 인간형."

쯧.

유신이 혀를 찼다.

"위험도는?"

"정해지지 않았어. 수배서도 막 붙었거든. 하지만 능력자 하나와 타운 하나를 집어삼켰다고 하면 가늠이 되겠나?"

"보통 놈이 아니군. 고맙다."

유신은 서비스에 대한 대가로 감자 반 쪽을 던졌다.

사냥꾼은 거부하지 않은 채 멋들어지게 한 입 베어 물었다.

"저기··· 돌연변이가 뭐야?"

휙휙 돌아가는 어려운 말들의 향연 속에서 눈치를 보던 에피가 물었다.

"방사능 중독자들을 말한다. 방사능은 알고 있나?"

"알아. 가까이 가기만 하면 죽는 독을 말하잖아."

유신은 안도했다.

이 바보도 이 정도 지식은 있는 모양이다.

이러면 이야기가 쉬워진다.

"괴물이든 인간이든 보통은 방사능에 피폭되면 죽는다. 하지만 드물게도 이를 이겨내는 것들이 존재하지."

"설마?"

"그래, 그런 녀석들이 돌연변이가 된다. 어떤 의미에서는 괴물보다도 더 까다로운 놈들이지. 그 중에서도 인간형은···"

"능력도, 습성도, 생김새도 모든 것들이 미지수. 하지만 기이하게도 평소에는 인간의 탈을 쓰고 있는 괴물들."

사냥꾼이 가라앉은 눈으로 덧붙였다.

"흐에···"

새롭게 알게 된 지식에 에피가 입을 벌렸다.

"밴디트랑 괴물만으로도 살기 팍팍한데. 그딴 것들까지 존재한다고···?"

유신은 피식 웃었다.

이건 약과다.

지하 쉘터와 바다 밑. 세상의 끝에는 더욱 끔찍한 녀석들이 우글거린다.

그리고 나는 그런 녀석들을 다 족쳐야 하지.

정말이지···

"엿 같은 세상이니까."

"흐흐. 젖비린내나는 애새끼 하나 달고 다니는 걸로 봐서 보통은 아니라 생각했는데···"

"뭐?! 이 밴디트 똥꼬나 핥게 생긴···!"

말을 하던 에피가 유신의 눈치를 보며 흠칫했다.

그러든 말든 사냥꾼은 웃었다.

"내 예상은 틀리질 않는군. 어이, 형씨. 당신 정체가 뭐야?"

돌연변이에 대해서 저렇게 잘 알고 있는 사람들은 같은 '전문가'가 아닌 이상 불가능했다.

그야 그럴 수 밖에···

평범한 사람들은 돌연변이를 마주치면 백이면 백 죽는다.

살아남을 정도의 능력이 있는 자들은 특정한 세력에 속해있다. 그리고 결코 그 지식을 공유하지 않는다.

그렇기에.

이 자는 이례적이다.

그 범상치 않은 자가 말했다.

"클레이모어."

"뭣?"

"지망생 정도라고 해두지."

"하하. 센스도 제법이군. 역시나 안 쏘길 잘했어."

사냥꾼은 유신이 마음에 든 모양이다.

"원래라면 '엘리자베스'를 옆구리에 한 번 찔러주곤 이렇게 말할 생각이었다고. 거 식량이나 물 좀 있나? 크레딧은 봐주지. 하고. 하하하!"

거리낌 없이 유신이 얕보였다면 취했을 자신의 속내를 털어놓았다.

'쯧.'

유신은 혀를 찼다.

역시나다.

화기애애한 것처럼 대화하긴 했지만 사실 상황은 변한 게 없다.

방어하기 보다는 경계를. 경계보다는 과감히 선공을 취하는 게 사냥꾼들이니까.

즉 이것들 역시 밴디트나 괴물들 못지않은 하이에나들이란 소리였다.

"덕분에 잘 쉬었어. 배도 두둑하게 채웠고."

사냥꾼이 슬그머니 일어나자 유신이 어깨를 으쓱였다.

"가는 건가?"

"가야지. 예상보다 너무 지체해버렸어."

"사냥이 성공하길 기원하지."

"고맙군. 자네와 꼬맹이도 무사히 목적지까지 도착하라고."

롱코트가 펄럭거린다.

멋들어지게 카우보이모자를 쓴 사냥꾼은 처음과 같이.

터벅터벅

황야 저편을 가로지르기 시작했다.

에피는 그때서야 깨달았다.

저 사냥꾼은···

"방금 전에 말한 돌연변이가 목적이었구나?"

유신은 웃었다.

"사냥꾼은 결코 목적 없이 움직이지 않아."

너무도 당연한 사실이니까.

"우리도 움직이지."

"아, 응."

***

두 사람이 움직이는 방향은 공교롭게도 사냥꾼이 앞서 갔던 길과 겹치고 있었다.

그렇기에 유신은 방향을 조금 틀었다.

사냥꾼과 돌연변이 간의 전투에 휘말리지 않기 위해.

그러나···

"이봐 저거···"

아직 유신의 이름을 듣지도 물을 생각도 없는 에피가 어느 한 곳을 손짓했다.

아지랑이를 피워올리는 갈라진 땅 위에 뭔가가 있었다.

토막난 그것은 본래의 형체를 알아볼 수 없을 정도로 훼손되어 있었는데.

딱 하나 멀쩡한 흔적이 하나 남겨져 있었다.

그것은···

[Texas]

라고 적힌 피 묻은 카우보이모자였다.

"···일이 꼬이는군."

처참하게 살해된 사냥꾼의 시신 앞에서 유신은 혀를 찼다.

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

사냥꾼 x 악령

유쾌하게 웃어재끼던 얼굴은 혀를 턱까지 내민 채 창백하게 굳어있다.

손과 발목은 어디갔는지 망자는 제 유해마저 도둑 맞아버렸다.

"그, 그 사냥꾼이잖아?"

에피가 눈을 부릅떴다.

곧 주변을 두리번거리기 시작했다.

"손만 까딱거려도 우리 다 죽일 수 있는 실력자라며! 그런 새끼가 여기 나자빠져 있다는 뜻은···"

"쉿."

침범하는 당황을 털어버린다.

냉정하게 상황을 파악하려 노력한다.

유신의 눈동자가 날카롭게 주변을 훑었다.

'끌려온 듯 말라붙어 있는 핏자국... 여기서 죽은 게 아니다.'

팔은 10미터 정도 떨어진 바닥에. 다리는···

'저 건물인가?'

[부산 제일교회]

유신의 시선이 돌아가는 곳에는 폐허가 된 교회가 있었다. 그런데 망가진 것 치고는 상태가 나쁘지 않다. 그저 십자가가 존재했을 지붕이랑 스테인드글라스만 좀 부서져 있을 뿐이니까.

기괴한 것은 따로 있었다.

사냥꾼의 하반신이··· 그런 교회의 정문에 거꾸로 매달려 있었다.

'명백한 악의가 느껴진다. 지능이 높은 놈이라는 거지.'

인간형 돌연변이들은 그 개체마다 특징이 모조리 다 다르다.

모니터 밖 세상에서 즐길 때 역시 그랬다.

하지만 결국은 게임.

계속 굴리다 보면 주사위는 어느 순간 패턴이란 걸 띤다.

덕분에 유신은 제 나름대로 돌연변이들을 구분할 수 있게 되었다.

자세하게는 아니고···

스윽

유신은 사냥꾼의 시신에 손을 댔다.

'차갑다.'

순간 느껴지는 시릴 정도의 한기.

아무리 시체라고는 하나 황야의 기온을 생각할 때 기이한 온도였다.

"···"

물리력을 발휘할 수 있으며 지능이 높다.

이토록 무참하게 당한 걸로 봐선 '총'이 통하지 않았을 가능성이 높다.

그리고 마치 냉동실에서 갓 꺼낸 듯 차가운 체온.

지금껏 수집한 단서들을 토대로 유신은 추측을 시작한다.

이 망겜의 랭킹 1위로서의 경험과 황무지에서 1년 동안 살아남은 전사의 감각이 교차한다.

"···!"

답이 나왔다.

그리고 그 답은 최악의 가정 중 하나였다.

"악령이다."

유신은 짜증스럽게 내뱉었다.

객관적으로 볼 때 쓸모없는 잉여인간과 3위계 수준도 안 되는 능력자 둘이서 악령을 마주치다니.

"악령?"

"설명은 나중에."

유신은 하늘을 바라봤다.

시간이 없다.

"에피."

"응?"

"지금 당장 땔감들을 모아라. 해가 지기 전까지."

"땔감을 모으라고? 그 돌연변이가 근처에 있을 텐데?! 도망치기도 바쁜데 갑자기 그게 뭔···"

"어서!"

"으아··· 아, 알았어!"

유신이 으르렁거렸다.

그제서야 상황의 위급함을 인지했는지 에피는 별다른 반론 없이 도도도 움직였다.

유신은 사냥꾼의 시신을 뒤적거렸다.

철컥

떨어지는 석양빛이 사내의 각진 얼굴을 붉게 반대쪽은 새카맣게 물들였다.

유신의 손에는 어느새 은빛으로 반짝이는 피 묻은 리볼버가 들려있었다.

"쉽지 않겠군."

황무지의 위협은 무력만으로만 헤쳐나갈 수 있는 게 아니다.

***

황야의 밤은 춥다. 아니, 추운 것을 넘어 매섭다.

마치 모래 가득한 사막처럼 온도가 휙휙 뒤바뀌기 때문이다.

해는 이제 지평선의 끝자락에 걸쳐져 고개만 삐죽 내밀고 있었다.

유신과 에피는 부지런히 움직이며 땔감들을 모았다.

그러나 쉽지 않은 일이었다.

황야는 애초에 척박하고 메마른 땅이니까.

식물들은 꽃을 피우기도 전에 사그라든다.

가혹한 환경에 의해 혹은 탐욕스러운 자들에 의해.

"다 모았나?"

"잠깐만! 이것만 뽑고··· 으으윽!"

"시간 없다. 그냥 와!"

박혀 있던 나무뿌리를 뽑아내는 에피를 제지한다.

유신은 소녀를 데리고 걸음을 옮겼다.

[ABC마트]

신발이든 진열대든 유리창이든 모조리 사라져 횅하니 뚫린 구 시대의 잔재로.

그 순간.

"헉!"

장작더미를 안고 있던 에피가 비틀거렸다.

갑자기 등골이 오싹해지며 소름이 돋았기 때문이다.

마치 누군가가 뚫어져라 바라보는 느낌···

그 시선이 느껴지는 곳은 폐허가 된 교회였다.

그 위화감의 정체를 간파하기 위해 에피가 고개를 돌리려던 그 때.

"뒤돌아 보면 안 된다."

유신이 내뱉었다.

지금껏 들은 말투 중 가장 무거운 어조로.

"아, 아아. 알았어."

에피는 침을 꿀꺽 삼킨 채 앞만 보며 걸었다.

두 사람은 텅 빈 폐건물 안으로 들어와 앉았다.

화르르륵

곧 유신의 능력을 빌려 불을 피웠다.

'역시 숨어서 우리를 지켜보고 있었군.'

에피는 마트의 입구를 등진 채 앉아있었고 유신은 그 맞은편에 앉아있었다.

그렇기에 그는 교회의 입구에서 무언가가 스으윽 빠져나오는걸.

그 음영이 꿈틀거리면서 몸을 뒤트는 것을 똑똑히 바라볼 수 있었다.

까드드득

누렇게 변색된 거적은 한 때에 그게 치마라는 사실만 간신히 확인시켰다.

구불거리는 긴 머리칼 역시 그 주인의 성별을 짐작케 했다.

여자다.

곱추처럼 등이 굽은 상태에서도 키가 2미터는 넘으며, 목과 팔다리가 기괴할 정도로 긴 여자.

-왜··· 안 죽지? 왜 안 죽는 거야아?

악령.

유신이 가까스로 알아낸 돌연변이의 변태 타입 중 하나.

무지와 공포를 먹는 괴물.

그렇기에 악령의 형태는 대부분 끔찍하기 그지없다.

-사냥이 실패했네? 실패했네?

유신이 사냥꾼을 죽인 흉수를 악령이라 생각한 이유는 두 가지다.

첫째. 그의 시신에서 지독한 한기가 느껴졌다.

둘째. 진짜 사냥꾼이 아무것도 못 해보고 당했다.

그 말은 즉···

"저 녀석은 죽지 않는다."

총칼도, 미사일도, 어지간한 능력도 통하지 않는다.

반면에 녀석은 이쪽을 공격할 수 있다.

"그, 그런 게 가능해?"

그야말로 불합리할 정도의 교환비다.

그러나.

"정확히 따진다면 지금 우리가 가진 '장비'로는 못 죽인다고 봐야지."

완전한 불사는 아니다.

어디서나 해법은 있다. 그게 빌어먹을 정도로 어려워서 그렇지.

오컬트.

웃기게도 놈을 잡는데 필요한 것은 고리타분한 고대 전설들이다.

지금 유신에게는 은으로 된 날붙이도, 소금이나 팥도, 성수도 없었다.

유신은 속으로 소리쳤다.

'염병. 어떤 등신이 포스트 아포칼립스에 이딴 걸 집어넣냐고···'

귀신이라니 웃기지도 않는다.

그런데 또 멸망한 세상, 폐허가 된 콘크리트 무덤가와는 또 잘 맞아떨어져서 기묘하다.

에피가 벌벌 떨었다.

뼈 부딪치는 소리가 점점 더 요란하게, 그리고 가까워지고 있었기 때문이다.

"왜, 왜 이렇게 춥지?"

그와는 별개로 차가운 한기가 온몸을 찌르고 있어서 이기도 하다.

"음기를 뿜어내는 것은 모든 악령들의 공통점이지."

고오오오오

마침내 황야의 밤이 찾아왔다.

다가가각

네 개의 다리로 기어다니고 있는 악령은··· 지금 막 교회를 빠져나와 마트 건물로 다가왔다.

입구 근처에 숨어서 이쪽의 눈치를 살피고 있다.

"지, 지금이라도 도망을···"

"아서라. 이 밖으로 나가는 순간 그대로 끝장일 테니까."

타오르는 횃불 빛이 유신의 얼굴을 붉게 물들였다.

그 뒤편에 있는 어둠은 더 진해지기만 했다.

"그, 그럼 녀석의 약점은 불인거야? 당신은 그걸 알고 있었기 때문에 장작을 주우라고 한 거구나!"

에피는 쉬지 않고 물었다.

공포심을 잊기 위한 행위였다.

점점 더 한기가 진해졌기 때문이다.

유신은 이를 알고 있기에 평소보다 친절한 목소리로 답했다.

악령은 공포를 먹고 산다.

"약점이라기 보다는 꺼려한다고 봐야겠지. 놈은 어둠이 있는 곳에서만 물리력을 발휘할 수 있거든. 선택지가 없었던 셈이다."

교회에 숨어있던 악령은 이미 이쪽을 포착한 상황.

조금 있으면 날이 지는 상황.

여러모로 더럽게 맞물렸다.

"그럼 이게 꺼지면 안 되겠네?"

그 침착함 덕분일까? 에피는 한결 진정된 모양새였다.

물론 그렇다 한들 아주 그냥 모닥불로 뛰어들 기세였지만.

"그렇지."

자, 지금부터는 시간 싸움이다.

다가가각

"못 버티겠으면 그냥 눈을 감고 있어라. 땔감에는 손도 대지 말고."

해가 뜰 때까지 버틴다면 이쪽의 승리.

그러지 못한다면 악령은 또 한 번 만찬을 즐길 것이다.

철퍽

마침내 폐허가 된 마트 위로 창백한 손바닥이 걸음마를 내디뎠다.

"···"

사실 유신 역시 긴장되기는 마찬가지였다.

황야 생활로 단련된 그 역시도 저 녀석의 끔찍한 면상에는 도저히 면역이 안 되었기 때문이다.

-왜··· 안 죽지? 왜 안 죽는 거야아?

음산한 목소리가 들려온다.

잡아뜯은 듯 쭈글거리는 피부에.

텅 빈 눈두덩이.

연골만 남은 코에 칼로 쪼개놓은 듯 쭉 찢어진 입가.

흉물이라 부르기에 부족함이 없는 그것은.

어둠 속에 숨어있다가 냅다 그 얼굴을 내밀었다.

화르르륵

모닥불이 거칠게 흔들린다.

두 사람의 입에서 새하얀 입김이 흘러나왔다.

"허억, 흑."

악령은 떨고 있는 에피를 가만히 내려다보다가 씨익 웃었다. 곧 기괴하게 꺾인 제 손을 휘둘렀다.

-끼이이?

그러나 그 날카로운 손톱이 소녀를 해치는 일은 없었다.

미약하게 타오르는 저 빛이. 불덩어리로부터 피어난 온기가 소녀를 지켜주고 있었기 때문이다.

-끼아아아아아!

어둠 속에서는 선명한 빛을 띠는 놈의 육신이. 모닥불의 영역에 들어온 순간 반투명해졌다.

유신의 말이 맞아떨어진 셈이다.

"···"

툭. 유신은 침착하게 손에 들린 나뭇가지를 부러트려 집어넣었다.

꺼져가던 빛은 다시금 게걸스럽게 타올랐다.

철퍽

에피가 고개를 처박은 채 미동도 하지 않자 악령은 유신을 바라봤다.

-꺼, 어어어어

곧 성대 끝에서부터 기괴한 소리를 내며 그에게 다가왔다.

'시발.'

천하의 유신 조차 순간 공포를 느꼈다. 그러자 몸을 감싼 한기가 더 진해졌다.

모닥불이 꺼져가는 속도가 더 빨라지기 시작했다.

악령이 씨익 웃었다.

"···"

실수를 알아차린 유신은 느릿하게 심호흡을 했다.

[살아 움직이는 불꽃의 염화]

화르르륵

곧 자신의 손에서 또 다른 불꽃을 피워올리며 놈을 노려보았다.

"···"

공포를 분노로 치환하고자 한 것이다.

-끼이이이···

기겁한 악령은 순간적으로 물러났다.

그러나 그뿐이었다.

밤은 길었고 황무지의 야경은 인간들의 소유가 아니었다.

-왜··· 안 죽지? 왜 안 죽는 거야아?

-매드니스 카우 고기 맛있어! 고기 맛있어어!

-에나! 미안해! 아빠가 약속을 못 지켜서! 못 지켜서!

악령은 마지막으로 잡아먹은 희생자의 목소리를 내뱉으며 발광했다.

네 다리로 벽면과 천장을 기어 다니거나.

모닥불 밖에서 불쑥 얼굴을 내밀며 일행을 겁주고자 했다.

타닥타닥

끔찍한 상황이었지만 두 사람은 꼿꼿이 놈의 마수로부터 버텨나갔다.

"때, 땔감이 다 떨어졌어!"

갑작스레 들이닥친 비보만 아니었다면 말이다.

-이히히히. 떨어졌어? 분명 떨어졌다고 말했지?

어둠 속에서 우두커니 서 있던 입 찢어진 여자가 웃었다.

모닥불이 희미해져 갈수록 놈은 기세를 올리기 시작했다.

"어, 어떡해! 으, 으아아아악! 저게 뭐야 시발!"

설상가상 에피는 당황하다가 악령과 눈까지 마주쳐버렸다.

침범하는 공포.

피부를 찌르는 냉기.

"···"

그러나 그런 위급한 순간에도.

아이러니하게도 유신은 덤덤한 얼굴이었다.

그는 아직도 캄캄한 주변을 둘러보더니 푸후 한숨을 내쉬었다.

"내가 이 짓거리까지는 안 하려고 했는데..."

그건 삶을 포기한 자의 얼굴이 아니었다.

사탕을 빼앗기고 싶지 않아하는 아이의 치기였지.

짤그랑.

"어? 그, 그건?"

유신이 품에서 꺼낸 것은 웬 주머니였다.

그 안에서 찰랑거리는 푸른 칩들은 크레딧이라고 불리는 물건이었다.

그 효능은 간단하다.

화폐.

근 미래의 에너지 자원.

지금 우리의 목숨을 연명시켜줄 물건.

그러나 이런데 쓰기에는 아까운 물건.

"엿 같은 놈."

침을 퉤 뱉은 유신은 크레딧 하나를 모닥불 속에 넣었다.

그 순간 피어나는 광명.

-끼아아아악!

폐허 마트가 대번에 환해지고, 악령이 겁에 질려 물러날 정도의 세기였다.

에피는 어느새 공포도 잊은 채 물었다.

"마, 맞아! 크레딧은 분명 불 피울 때도 쓸 수 있지 참! 왜 진작에 쓰지 않은 거야?!"

유신의 답은···

"아깝잖아."

"응?"

"아까워. 앞으로 돈 들어갈 곳이 얼마나 많은데."

참으로 속물적이었다.

"네 돈 아니라고 막 쓰는 거 그거 잘못 된 거다."

어지간한 사냥꾼이나 수전노 저리가라할 정도로.

"···"

에피는 그만 말문이 턱 막혀버렸다.

물론 유신의 말은 틀린 게 없다.

그의 재산이니 그걸로 국을 끓이든 노숙자에게 던지든 온전히 그의 영역이다.

하지만···

'저게 지금 상황에서 할 말이야?'

그야말로 쇳덩이 같은 멘탈이다.

턱. 이해를 포기한 에피가 비틀거렸다.

긴장이 풀려서 그런가?

지금껏 잊고 있던 피로가 몰려오기 시작했다.

"씨이. 이젠 나도 몰라!"

혼자서 벌벌 떨고 지랄하던 스스로가 한심하게 느껴졌다.

"이 병··· 아니, 멍청이! 나 잘 거야!"

꽤나 감정적이었던 소녀는 냅다 자리를 깔고 누웠다.

-에나아아아아!

"아가리 닥쳐! 이 등신아!"

그토록 두려워하던 악령한테 꽥 소리까지 지르면서.

"흐하하."

유신은 낄낄거리면서 크레딧을 넣었다.

악령은 혼자서 괴성을 질러대고, 소녀는 코골이를 했다.

악몽같던 밤이 그렇게 지나가고 마침내 여명이 찾아왔다.

[생존율 0.1%]

황무지에서 악령을 마주쳤을 때 살아남을 수 있는 확률이었다.

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

자유도시 하브람

부아아앙!

그란쿠페는 제 발자취를 진득하게 남기다가 우뚝 정차했다.

[초량_ㅕㅇ]

문을 열고 나타난 적발의 여자.

에바그린의 앞에는 한층 더 엉망이 된 폐허 지하철역이 모습을 드러내고 있었다.

"흐음."

바닥에 떨어져 있는 간판을 힐끔거린 그녀는 걸었다.

또각. 또각···

하이힐이 멈춘다.

무너져 내린 지하철역의 입구에는 선객들이 잔뜩 몰려있었기 때문이다.

직사광선에 벌써부터 부패가 일어나고 있는 것은 2형 감염자들이고, 나머지는 들개와 늑대거미다.

우적우적

녀석들은 거대한 무언가에 나란히 고개를 처박고 있었는데.

인기척이 느껴지자 슬쩍 고개를 돌렸다.

스릉

그리고 곧바로 산산조각이 났다.

후두둑 떨어지는 살점들의 단면은 깔끔했다.

마치 날카로운 무언가가 엄청난 속도와 힘으로 베어낸 듯한 느낌.

그 전율적인 능력을 선보인 에바그린은 손을 툭툭 털다가 시체로 다가갔다.

게걸스러운 스캐빈저들에 의해 거의 뼈만 남은 덩어리.

선글라스를 젖힌 에바그린은 '카쿨'이었던 그것을 유심히 관찰했다.

'골격의 형태로 보아 트롤이 맞아.'

'늙은 놈은 아니고 젊은 녀석이다. 교활함은 떨어질지언정 신체 능력은 전성기 수준이었겠어.'

에바그린은 돌연변이 카쿨이 영악함마저 겸비했다는 것은 몰랐다.

그저 흔적을 바탕으로 추론을 이어나갈 뿐이다.

바스락

예쁘게 손질된 손이 주변에 묻은 잿더미를 만지작거린다.

타다만 콘크리트 조각이 무너져 내린다.

'상흔으로 봐서 일격에 처리했다. 트롤의 재생력마저 압도할 정도의 화력··· 최소 4위계에서 5위계.'

클레이모어.

망가진 세상의 폭군이자 해결사인 그들의 진가는 가진 지식과 경험에서 우러나온다.

에바그린은 충분히 이에 부합할 정도의 실력자였다.

그렇기에···

'가만···'

이변을 눈치챈다.

'이 녀석은 분명 입구에서 죽었다.'

놈이 거처로 들어가는 순간 습격했다고는 볼 수 없어.

그 황무지인을 데리고 분명 역을 빠져나왔으니까.

이 정도의 능력자가 굳이 그런 번거로운 짓을?

마주친 순간 태워버리면 그만일 텐데···

"크레딧을 추출하지도 않았고. 그 쥐소굴에서 완수금을 받아가지도 않았지."

클레이모어라 사칭까지 해가며 굳이 이 녀석을 사냥한 이유를 추론한다.

"흐음."

떠오르는 편린들에서 가능성들을 짜맞춘 에바그린은 피식 웃었다.

"정말 재밌는 녀석이네."

원래라면 불멸자에 대한 토착민의 오보 수정.

3급 위험종 트롤을 처리 후 28구역 타운A의 의뢰 완료.

정도로 이 일을 끝냈을 것이다.

하지만···

'생각이 바뀌었어.'

또각또각.

에바그린은 자동차 키를 휙휙 돌렸다.

이윽고 그린쿠페가 요란한 굉음을 울리며 다시금 질주를 시작했다.

"꼭 한 번 낯짝을 봐야겠어."

운전대를 잡고 있는 에바그린의 눈동자가 흥미로 반짝였다.

쿠페의 라디오에서는 오래된 팝송이 흘러나왔다.

The world i believed in betrayed everyone.

People have lost hope.

"우리는 어디로 가야하는가~"

***

따사로운 햇빛이 폐허가 된 건물 내부로 스며들었다.

유신은 꾸벅꾸벅 졸다가 쩍 하품을 했다.

"뒤질 뻔 했네."

그야말로 목숨을 건 사투였다.

밤을 꼴딱 새며 심력을 소모했더니 컨디션 역시 최악이다.

"하암. 좋은 아침."

그 때 팔자좋게도 부스럭거리면서 일어나는 에피.

'콱 쥐어박아버리고 싶군.'

유신은 제 생각이 전해지길 바라면서 소녀를 내려다봤다.

그러든 말든 이 간 큰 소녀는 눈곱을 때며 태평하게 주변을 두리번거렸다.

"갔나 보네."

"···아직 우화한지 얼마 안 된 녀석이니까."

햇빛에는 면역이 없다.

아직은.

"뭔가 무서운 말인데? 그런 녀석들이 더 있다는 건 둘째 치고. 오래 묵은 놈은 다르단 말 아냐?"

"더 지능이 높고, 더 강하지."

한기만으로도 불을 꺼트려 버리거나. 주술도구에 대한 면역도 있다.

심지어 더 영악하다.

괴물을 끌어들이기도 하거든.

'아슬아슬했다는 얘기지.'

녀석은 이제 밤만 되면 황무지를 떠돌면서 또 다른 희생자를 찾아다닐 것이다.

어떤 비극적이면서도 운 좋은 생존자가 의뢰를 맡기고, 실력 있는 사냥꾼이나 클레이모어의 손에 사냥당하기 전까지.

"···으."

분명 기온은 서서히 후끈해지고 있건만 에피는 오싹 몸을 떨었다.

"당신을 알고 나서부터 뭔가 내 인생이 존나 꼬이는 느낌이야. 차라리 몰랐으면 편했을 텐데···"

"밴디트들 뱃속에서?"

"···히히."

거짓말이다.

'미트스튜'의 두목은 에피를 잡아먹지 않는다.

그저 제 성적취향 때문에 가지고 논다.

그러다가···

'능력자인 걸 알게 되지.'

피도눈물도 없는 황무지의 식인귀.

그 아래에서 병기로 키워지는 소녀.

사람 인생 망가지는 건 한 순간이다.

'요년이 그걸 알아주길 바라는 건 내 욕심이겠지."

"배고파! 오늘 아침 뭐야?"

"하아."

유신이 손도끼를 던졌다.

찍! 휘리릭 날아간 쇠붙이는 폐허 속에서 움직이던 거대한 쥐를 후려쳤다.

"와우. 대단해!"

유신은 그 쥐를 가리켰다.

에피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응?"

"저기 있네. 네 아침."

소녀가 한숨을 쉬었다.

"···애정이 식었어. 설마 어젯밤 그 일 때문에 삐진 건···"

"닥치고 요리나 해라 꼬맹아. 일하지 않는 자 먹지도 말라. 모르나?"

"진짜 삐졌···"

"···"

"윽! 네에."

소녀는 냅다 일어나더니 능숙하게 쥐의 목을 자르고 털을 뽑기 시작했다.

도망칠 생각 같은 것은 하지도 않고.

어젯밤에 겪은 악몽이 두 사람 사이에 유대를 만들어버린 것이다.

유신은 아닐지라도 적어도 에피에겐.

"오늘 아침은 에피표 특제 쥐구이야!"

***

마주쳤던 악령이 액땜이라도 해준건지 다행이 그 후의 여정은 무탈하게 풀렸다.

두 사람은 아무런 방해도 없이 이틀을 꼬박 걸어 거대한 쓰레기 벽을 마주했다.

"와아. 이곳이 하브람이야?"

"그래. 이 근방에서는 가장 큰 도시지. 이예르폴로 가기 전에 잠깐 재정비한다."

거듭된 강행군 때문에 몸 상태가 말이 아니다.

제대로 된 침대와 식사가 간절하다.

'여기서 얻어야 할 것도 있고.'

"알았어."

에피는 냅다 고개를 끄덕였다.

유신과 함께 한 짧은 기간 동안 그녀 역시도 정보수집과 휴식의 중요성을 절절히 깨달았기 때문이다.

"참. 그런데 경비들은?"

문득 벽을 올려다보던 에피가 주변을 두리번거렸다.

들어가는 사람은 많은데. 그들을 제지하거나 검문하는 사람들은 아무도 없었다.

이상했다.

저벅저벅

유신은 자연스럽게 그 인파 사이로 스며들면서 말했다.

"하브람은 자유도시다. 출입에 아무런 제지도 하지 않는다는 거지."

"그, 그래도 돼?! 밴디트나 돌연변이들은?"

"돌연변이들은 애초에 그렇게 쉽게 발견할 수 있는 놈들이 아니다. 더군다나 사람들이 많은 곳이라면 녀석들 역시 몸을 사리지."

모든 짐승들처럼 인간들 역시 무리를 짓는다.

그리고 그 무리는 자연스럽게 강력한 저지력을 발휘한다.

자유도시나 대규모 타운은 그 이름값만으로도 하나의 성벽이 된다.

"한 마디로 우리가 존나 운이 없었다는 거구나."

"···그렇지."

요 꼬맹이는 말을 참 잘 줄인다.

그것도 힘 빠질 정도로.

유신은 머리를 긁적거리다가 말을 이었다.

"그리고 밴디트들. 녀석들은 광인이지만 바보는 아니다."

유신이 고갯짓했다.

그와 나란히 걸어가던 에피가 주변을 둘러봤다.

"와아."

곧 입을 헤 벌렸다.

판잣집과 천막이 대부분인 타운과는 달리 이곳은 말 그대로 '도시'였다.

[ZARA]

[유가네 닭갈비]

곰팡이나 풀이 피어있지만 폐허에서 보는것보다 확연히 상태가 좋아보이는 상가들.

작은 아파트나 빌라 등이 쓰레기 벽 사이사이. 그리고 그 내부에 즐비하게 널려있었다.

음머어어어

"방사능 들개 고기 한 줌이 단돈 1크레딧!"

여기다 좌판을 깔고 장사를 하는 사람들과 텃밭에서 농사를 하는 사람들.

그 앞을 지나치며 크레딧을 꺼내 드는 사람들까지.

퇴보하는 문명의 흔적 속에서도 사람들은 악착같이 살아가고 있었다.

"그 치들도 아는 거지. 이 도시의 필요성을."

식량과 식수, 의복과 쉼터, 술과 무기, 그리고 여자까지.

비록 낙원이나 메트로폴리스 만큼은 아니지만 이곳 자유도시에서는 다양한 물건들을 구할 수 있다.

크레딧만 있다면.

"아무리 식인종 새끼들이라도 황야에서만 모든 걸 해결 할 수는 없다는 건가?

"그렇지."

굳이 그것만이 아니더라도 이 도시의 시장과. 그의 사병들. 뒷골목 갱단이 있기에 최소한의 치안은 유지되는 것이지만 말이다.

"그래도 이해가 안 되는 건 마찬가지야···"

"뭐, 인간은 원래 이율배반적이니까."

"이율배반이 무슨 말···"

"그만. 다 왔다."

또 피곤해지기 전에 에피의 입을 닥치게 한 유신이 걸음을 멈췄다.

맥주잔이 조악하게 그려져 있는 건물은 여관이었다.

고시원을 개조한 곳 같은데···

끼이익

"돈은 있나?"

기름칠 안 된 문을 열고 들어가자 카운터석에서 잔을 닦고 있던 털보가 냅다 물었다.

선반에는 개수작부리지 말라는 듯이 장전된 석궁이 올려져 있었다.

참. 팍팍한 세상이다.

"물론이지."

"애새끼 포함해서 하루에 2크레딧이다. 식사는 별도고."

"식사도 하도록 하지. 여기서 제일 괜찮은 걸로 2인분 내와."

유신은 푸른색 칩 네 개를 던졌다.

그리고는 식탁에 앉으며 보라는 듯이 슬쩍 로브를 젖혔다.

선명하게 드러나는 홀스터와 은빛의 리볼버.

이제는 새로운 주인을 맞이한 무구가 빛을 반짝였다.

"···"

주인은 슬쩍 눈을 굴리며 이를 바라보다가 주방으로 들어갔다.

유신은 딱딱한 나무의자에 등을 기대며 한숨을 쉬었다.

우연찮게 악령을 만나고 그동안 모아두었던 크레딧의 상당량을 소진했다.

그렇다고 놈을 잡지도 못했지.

그야말로 뼈아픈 손해였다.

하지만···

'이건 돈이 있어도 못 구하는 물건이니까.'

오히려 그게 전화위복이 되어버렸다.

총.

(구)시대 최고의 살인귀가 제 손에 들어왔으니까.

이것이 주는 의의는 컸다.

유신은 앞으로 더 많은 일들을 행할 수 있었다.

'비록 한 발 밖에 안 남았지만 말이지.'

총탄이야 구하면 그만이다.

자신은 이미 그 장소를 알고 있다.

'제대로 된 물건이다. 관리도 잘 되어있어.'

유신이 만족스럽게 웃으며 리볼버를 만지작거릴 때.

"저기, 그게 '총'이지?"

옆에 있던 에피가 눈을 반짝였다.

그녀 역시 이 물건의 가치를 알고 있는지 작게 속삭이며.

"그래."

"이 작은 게 어떻게 사람을 죽인다는 거야?"

"그러니까···"

할 것도 없겠다.

계획대로 일이 풀리면 '총잡이'로 질리도록 굴릴 생각이겠다.

유신은 에피에게 총의 원리에 대해서 알려줬다.

거창하게는 아니고 총알과 방아쇠. 쏘아진 총탄이 사람을 죽이는 방법에 대해.

"헤에. 그게 말이 돼? 그럼 내가 쏴도 죽어?"

"물론이지. 이건 사람을 가리는 물건이 아니거든."

"하지만 난 힘이 약한걸?"

오싹.

순간 유신은 이 만담의 끝이 어떻게 될까 예상했다.

에피의 수준을 고려해본 결과였다.

그렇기에···

"물론 쎄게 쏘면 더 강하게 나간다. 하지만···"

"지금 네 힘으로 쏴도 웬만한 괴물이나 사람을 죽이기에는 충분해."

"그렇구나아···"

스스로가 생각해도 어이없는 소리를 하며 대화를 끊어버렸다.

"나중에 너도 괜찮은 걸로 한 자루 주마."

"정말?!"

"착한 아이가 되는 것에 성공한다면."

"아, 알았어! 맡겨만 줘!"

당근까지 주면서.

때마침.

"맛있게 드쇼."

여관주인이 접시를 내려놨다.

건더기라고는 없는 스프에 고기구이다.

이만한 시간이 걸릴 요리는 아닌데. 꽤나 오래 걸렸다.

뭐, 맛만 좋다면야.

"우엑. 존나 맛없어···"

말과는 달리 허겁지겁 먹는 에피와는 다르게 유신은 느릿하게 움직였다.

스프를 휘젓거나 고기를 작게 썰어 조금씩 씹었다.

평상시 황야에서만 보던 모습과는 정반대의 행동이었다.

'이제 슬슬 올 때가 됐는데.'

유신이 생각하던 순간.

"아으. 가, 갑자기 배가···"

에피가 배를 부여잡았다.

주방에 있던 여관주인이 씨익 웃었다.

덜컹하고 문이 열렸다.

떨어지는 햇빛 아래에 있는 것은 웬 패거리였다.

칼자국이나 흉터. 손에 연장까지 들려있는 게 딱 봐도 질이 좋아 보이는 놈들은 아니었다.

"저놈이야? 그 얼치기가?"

패거리는 유신을 보고 음흉하게 웃었다.

그들은 몰랐겠지만 유신 역시 웃었다.

'물었구나.'

우선 잃어버린 재산부터 채워넣도록 하자.

그 다음에는 좀 더 큰 건을 물어보는 거다.

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

자유도시 하브람

썩고 곰팡이 핀 바닥 위로 그보다 더 더러운 발자취들이 새겨진다.

손님들의 숫자는 대충 보기에도 열은 넘어 보였다.

"이번에도 불쌍한 놈들이 걸려들었군."

본래 여관에 자리 잡고 있던 몇 안 되는 손님들은 슬쩍 방안으로 들어갔다.

혹은 술을 들이키며 킬킬거렸다.

아마 이런 일을 겪어본 것이 한 두 번이 아닌 듯했다.

"으으. 이 씹쌔들은 또 뭐야?"

에피는 배를 부여잡은 상태에서 눈을 굴렸다.

곧 본능적으로 여관주인과 깡패들간의 커넥션을 알아챘다.

우리들이 함정에 빠져들었다는 것도.

"독을 처먹였구나!"

"흐흐. 죽지는 않을 거다. 구울의 손톱을 조금 갈아 넣었을 뿐이니까."

복통과 마비를 유발하는 독이다.

통통한 입매를 비튼 여관주인이 비릿하게 웃었다.

"병신같이 '총'을 대놓고 보여주고 말이지."

"애초에 저거 사냥꾼은 맞아? 존나 비실해 보이는데."

깡패들 역시 실실 쪼개며 거친 욕설을 내뱉었다.

에피는 짧은 순간에 그들의 엄마와 아빠. 조상들까지 모욕하고 나서 유신을 바라봤다.

"괜찮... ?!"

곧 눈을 동그랗게 떴다.

유신이 멀쩡해 보였기 때문이다.

카운터석에 앉아있던 그는 자리를 털고 일어났다.

스윽. 그리고 품속으로 손을 집어넣었다.

"자유도시가 다 그렇지."

자연스러운 움직임과 태연한 기색.

다가오던 깡패들이 주춤했다.

"어이! 해밀! 어떻게 된 거야?!"

여관주인이 유신이 먹다 남긴 접시를 바라봤다.

조금 남아있기는 했지만 음식들은 줄어들었다.

"이, 이상하다! 분명 먹었는데?"

[방사능 트롤의 재생력]

3급 위험종의 이 괴물 같은 능력은 신진대사를 격렬하게 순환시킨다.

독이 퍼지고 그것이 해독되는 것마저 찰나의 순간이면 된다.

물론 이 무지렁이들은 유신이 가진 능력을 몰랐다.

"너희는 지금 '사냥꾼'을 엿 먹이려 했다. 이게 뜻하는 바를 모르지는 않겠지?"

"시, 시발! 덮쳐! 쏘기 전에 잡으면 돼!"

그렇기에 호기롭게 달려들었다.

'총'이라는 물건은 방아쇠를 당기기 전에는 아무것도 아니라고 배웠으니까.

하지만.

퍽.

"끄아아아!"

선두에서 달려들던 머리 긴 사내가 비명을 질렀다.

그의 어깨에는 어느새 날카로운 도끼가 박혀있었다.

건달들은 이번에도 몰랐다.

유신이 애초부터 총을 쏠 생각은 없었다는 것을.

'이딴 놈들한테 쓰기에는 아깝지.'

도끼를 던진 유신은 재빨리 나이프를 뽑아들었다.

"뒤져어!"

곧 양쪽에서 달려드는 건달들을 힐끔 보고는.

그대로 맞아줬다.

'염병.'

유신이 지난 1년 동안 황무지를 돌아다니며 겪었던 위험들은 이런 뒷골목 건달들과는 비교도 할 수 없다.

하지만.

눈썰미가 아무리 좋아도. 경험이 아무리 쌓여도.

이 육신은 나약하기 그지없다.

자신의 생각보다 몇 배는 더 느리게 반응한다.

그렇기에.

유신은 늘 그렇듯 자신의 방식대로 이 상황을 해결해나간다.

"어?"

살을 주고 뼈를 깎는다. 유신의 단검이 번뜩인다.

무기를 휘두른 상태이던 건달들은 뭐 해볼 것도 없이 목젖과 손목이 베여나갔다.

"이런 씹···!"

사람이 칼에 찔리면 어떻게 되는지 아는가?

처음에는 아무런 느낌이 안 든다.

그러다가 상처를 인지하고.

"끄르륵."

온 몸에 힘이 빠지기 시작한다.

특히나 그 위치가 동맥이면 말할 것도 없다.

털썩.

희희덕거리던 건달 둘이 피를 뿜으며 쓰러졌다.

"조, 조온! 이 새끼가!"

나머지 건달들은 당황했지만 곧 용감하게 달려들었다.

사냥꾼이 개싸움을 벌인 것으로도 모자라 상처도 입었다.

움직임도 이상한 것이 조금만 더 몰아붙이면 이길 수 있다! 라고 생각한 것이다.

"허억, 허억! 뭐, 뭐야! 왜! 왜 안 쓰러져?!"

물론 오판이었다.

유신은 쓰러지지 않았다.

"가만 저 녀석 상처가!"

아니, 이에 모자라 오히려 멀쩡해지고 있었다.

괴물같은 속도로 상처들이 아물어가고 있었다.

"능력자다!"

한 눈치 좋은 건달이 소리쳤고,

"켁."

단검 손잡이에 얻어맞아 누런 이빨을 후두둑 흩날렸다.

"후우."

그걸로 끝이었다.

이쪽은 타격이 없는데 저쪽은 하나하나가 치명적이다.

마치 인생사처럼 불합리의 극치를 자랑한다.

건달들에게는 슬프게도 결과는 이미 정해져 있었다.

툭툭.

유신은 청소라도 한 듯 덤덤한 얼굴로 핏물을 털었다.

탐욕에 눈이 멀었던 인간들은 나 죽는다 비명을 지르면서 바닥을 굴러다녔다.

"으아아아악!"

그리고 방금 막 비명 하나가 추가됐다.

유신이 고개를 돌렸다.

여관 주인이었다.

그는 주방에 달린 뒷문 앞에서 석궁으로 이쪽을 겨누고 있었는데···

"이 미친 꼬맹이가···"

"이 개새꺄!"

웬 금색 짐승한테 붙잡혀서 목적을 이루지 못했다.

아무리 털이 숭숭한 두툼한 주먹을 휘둘러봐도.

에피는 악귀처럼 주인의 바짓가랑이를 붙잡은 채 이빨로 물어뜯고.

"그, 그마안!"

할퀴고.

"끄아아아"

손에 들린 나이프로 찔러댔다.

철컥.

버티다 못 한 여관주인이 석궁을 겨누었다.

에피의 나이프 역시 그의 목을 향해서 떨어졌다.

"흡."

그 사이에 끼어든 유신이 석궁의 궤도를 비트는 동시에 털보의 면상을 후려쳤다.

"켁."

털보가 쓰러졌다.

그러나 에피는 멈추지 않은 채 달려들었다.

물론 유신한테 곧바로 뒷덜미가 잡혔지만 말이다.

"그만."

"이익! 놔아!"

소녀의 예쁘장한 벽안은 지금 분노로 이글거렸다.

지금껏 보여주던 장난기 가득하거나 어벙한 모습과는 정반대의 감정이다.

'될성부른 떡잎이다 이건가?'

공포나 망설임보다는 분노를.

도망치기 보다는 맞서 싸움을.

체념보다는 지독함을.

오래 살아남기에 그다지 좋은 요소는 아니다.

그러나 전사가 되기에는 꼭 필요한 요건이다.

하지만 역시 어린애가 지니기에는 맞지 않다.

딱.

유신이 꿀밤을 때렸다.

악! 소리를 낸 에피는 제 머리를 감싸다가 버둥거렸다.

"씨이. 왜 말리는 거야!? 우릴 엿먹인 놈이잖아!"

"아무리 자유도시라고는 하나 죽여선 곤란하다."

이런 수작질을 부리는 걸 보면 뒷골목 카르텔하고 연관되어 있을 거다.

게다가 시장의 사병들하고도 끈이 있겠지.

유신은 건달들과 여관주인을 한 곳에 모았다.

곧 쪼그려 앉은 채 피 묻은 도끼를 느릿하게 만지작거렸다.

'염병.'

당사자는 피곤해 죽을 지경이었지만 건달들이 보기엔 아니었다.

그들에게 있어서 유신은 흡사 괴물과도 같았다.

"이 개판도 알아서 수습해줘야 되고. 뜯어 내야할 것도 있으니까."

유신은 이 놈들을 다 쳐죽여서 상대의 분노를 사거나 자존심을 건드리기보다.

"어이."

"히익."

"이건 정당방위다. 네놈들은 간 크게도 감히 '사냥꾼'을 건드렸으니까. 그렇지?"

"네, 네! 그렇··· 습니다아!"

압도적인 공포를 심어주고, 경계를 사는 것을 노렸다.

사기꾼은 우연히 얻게 된 총으로 이번에는 사냥꾼을 흉내냈다.

"3초 준다. 지금 당장 가진 거 다 내놔."

황무지 생존법칙 중 하나.

어디서든 냉정하게. 그리고 효율적으로 움직이기.

"아, 너는 이리와라."

"네, 넵!"

"아까 뭐라고? 존나게 비실하게 생긴 창녀의 자식이라고?"

"그, 그렇게 까지는 말 안하··· 억!"

짜악.

"변명은 죄악이라는 걸 모르는 건가?"

그럼에도 할 때는 하고, 풀어야 할 때는 풀기.

'계획대로군.'

63크레딧.

유신은 악령을 만나서 소모한 크레딧보다 더 많은 액수의 크레딧을 이 허름한 곳에서 벌어들였다.

***

"아으으. 아파. 아프다구우."

침대에 앉아있던 에피가 칭얼거렸다.

아직 남은 독 기운과 여관주인한테 얻어맞은 곳이 쑤시는 모양이다.

이곳은 노래방을 개조한 것처럼 보이는 방안이다.

크레딧, 이 근방 동태에 대한 정보까지.

그 건달 패거리들한테 뜯을 것은 다 뜯어낸 일행은 여관을 옮겼다.

찝찝하니까.

부스럭.

'딱 봐도 시체에서 벗겨온 거 같은데. 이런 게 10크레딧이라고?'

탁자 앞에 앉아서 시장에서 사온 옷가지를 꺼내들던 유신이 혀를 찼다.

"그러게 왜 무리했냐?"

"방금 전에도 말했잖아! 어떻게 당하고 가만히 있어!"

"객기와 용기 정도는 구분해라. 내가 끼어들지 않았다면 넌 지금쯤···"

"나도 한 손 보태야 할 거 아냐."

"···?"

"나보고 착한 사람이 되라며? 동료가 맞고 있는데 어떻게 가만히 있어."

"호오."

이 녀석이 그런 기특한 생각을?

유신은 의외라는 눈으로 에피를 바라봤다.

에피는 멀뚱한 표정으로 유신을 마주하다가 미간을 찌푸렸다.

"근데 내가 지금 화가나는 건 당신이야."

"음?"

"알고 있었지?"

"뭐를?"

"총을 보여주면 그 녀석들이 환장할거라는 걸. 이쪽을 공격할 거라는 걸."

'눈치 하나는 기가 막히는군.'

유신은 부정하지 않았다.

그저 피식 웃었다.

"신선한 고기에는 늘 하이에나들이 꼬이지. 때로는 그것들을 잡아먹을 때가 필요한 법이고."

"나한테 귀띔이라도··· 아으으! 배야! 해줄 수 있었잖-아."

"옛날 격언 중에 이런 말이 있다."

"격언? 갑자기 그게 무슨 개솔···"

"적을 속이려면 우리 편부터 속여라."

"···거 존나게 매정한 말이네. 속은 사람은 틀림없이 상처받을걸?"

"그 대가로 크레딧과 정보를 얻었지."

벽안이 삐죽 갈라진다.

입술을 질겅질겅 씹던 소녀는 또 한 번 발버둥 쳤다.

"으아아아아! 진짜! 진짜 재수 없··· 엑?!"

소리치던 에피가 입을 꾹 닫았다.

유신이 뭔가를 휙 던졌기 때문이다.

방금 전 시장에서 산, 전 주인의 핏자국이 묻은 질기고 튼튼한 옷가지.

그리고 여관주인이 다루던 석궁이었다.

"이걸 왜?"

"선물이다. 전에 말했지? 한 자루 구해준다고."

"···"

"화살이 아니라 돌을 쏘는 거니 너 같은 애도 쉽게 다룰 수 있을거다."

다른 의도도 있었다.

'과연 재능이 넘칠까?'

사수로서의 이 녀석의 능력을 한번 보고 싶었기 때문이다.

"총 만큼은 아니어도··· 뭐, 이것도 나름대로 괜찮네."

말과는 달리 에피는 석궁을 조심스럽게 쓰다듬었다.

킁킁

무슨 개처럼 냄새를 맡으며 피히 웃기도 했다.

그 전주인이 수염 난 털복숭이라는 것도 까먹은 모양이군.

틀림없이 거기도 긁으면서 잔뜩 만져댔을 거라고.

굳이 밝혀도 되지 않을 사실은 숨겨둔 채 유신은 하던 행동을 계속했다.

황무지를 가로지르느라 누더기가 된 옷을 벗고, 사온 가죽 바지와 부츠. 셔츠와 코트까지 걸쳤다. 그리고 허리춤에 홀스터와 리볼버까지 차주면 완성.

그는 금새 황무지의 부랑자에서 뭔가 있어보이는 사내가 됐다.

돈의 힘이란...

'얼추 준비는 됐고. 이제···'

"흠흠. 저기··· 말이지."

유신이 문가를 힐끔거릴 떄.

"이름이 뭐야?"

에피가 갑작스럽게 물어왔다.

"이름?"

"그래, 이름. 언제까지나 당신. 야. 라고 부를 순 없잖아. 함께 여행한지도 꽤 됐으니까!"

소녀는 꽤나 속물적이었다.

"···"

고민하던 유신은 툭 한 마디 던졌다.

"여자카우보이팬티핥짝."

이 천박한 단어는 모니터 밖 이방인의 흔적 중 하나다.

"뭐, 뭣? 여저카보?"

물론 에피는 고대의 언어를 알아듣지 못했다.

유신은 쓴웃음을 지으며 어깨를 으쓱였다.

"유신이다. 김유신."

"유신이라··· 이름 한 번 존나 특이하네."

"그 때 생각나는 게 이것뿐이었거든."

"뭐? 아까부터 계속 뭔 개소리야?"

"아무것도 아니다."

고개를 저은 유신은 다시금 의자에 기댔다.

곧 눈을 감은 채 명상에 빠져들었다.

휴식도 취할 겸. 목표로 했던 손님이 오기 전까지 내면의 에스트를 좀 갈고 닦을 생각이었다.

능력이란 건 자고로 근육과 비슷한 면이 있었다.

***

"자유도시는 결코 천국이 아니야. 장벽 안의 황무지인 셈이지. 좋은 경험 했다고 생각해라."

에피는 침대에 누워 유신이 뱉었던 말을 곱씹었다.

타운 사람들은 그래도 하나 된 공동체 아래에서 살아갔다.

내부에 불화가 있어도 그게 큰불로 번지지는 않았다.

다들 어떻게든 맞춰가며 살았다. 아니면 빠져나가거나.

하지만 이곳은 아니었다.

야생. 이라는 단어가 이만큼 어울리는 곳은 없었다.

장사치들과 손님들은 눈을 번뜩이며 어떻게든 한 푼이라도 더 받아내고자 악을 썼고, 멀쩡해 보이던 건물들도 사실은 오물천지에 내부는 잔뜩 썩어있었다.

뿐만 아니라 저기 뒷골목에는 시체들도 널려있었다.

황당한 건 거리를 지나다니는 사람들 모두가 그 시체에 관심을 두지 않았다.

'아무도.'

'진짜 좆같은 세상이다. 우리 마을은 약과였구나.'

의도치 않게 유신과 함께 세상을 돌아다닌 에피의 견문은 점점 더 넓어지고 있었다.

정서적으로는 좋지 않지만 생존에는 좋은 쪽으로.

스윽

에피는 고개를 돌려 책상에 기대어 있는 사내를 바라봤다.

이마를 드러내면서 목을 덮는 흑발에. 오똑한 코는 무슨 여인의 그것을 보는 것 같았다.

그러나 맹수같은 날카로운 눈매와 굵직한 턱선을 보면 그 이미지가 확 바뀌어버린다.

에피는 이제 인정해야 했다.

이 사내는 보통이 아니다. 단순한 미친놈도 아니다.

'진짜 미래를 보는 건가?'

라고 생각을 할 수 밖에 없을 정도로 유신이 보인 행보는 파격적이었다.

하지만···

'아냐. 그럴 리가···'

에피는 고개를 저었다.

인정할 수 없다.

유신의 말이 맞다고 인정하게 되는 순간. 자신은 미래에 희대의 썅년이 되는 게 아닌가?

'난 그딴 식인종들과 동급이 아니라고!'

꾸욱.

소녀가 석궁의 손잡이를 꾹 쥔 채 상념에 잠길 때.

"왔군."

명상 중이던 유신의 눈이 뜨였다.

뭐가? 물어보려던 에피가 주춤했다.

똑똑

기다렸다는 듯이 누군가가 문을 두드렸기 때문이다.

"이보시오. 사냥꾼 양반. 나 여기 주인인데. 그, 자네를 찾아온 분들이 계시다네."

누구지?

라는 생각은 들지 않는다.

모니터 밖 이방인은 상대방의 정체를 이미 알고 있었으니까.

그리고 그것은 이 낚시가 수월하게 성공했다는 것을 뜻했다.

수천 명이 오고 가는 이 도시 제일의 권력자.

그러나 직함과는 달리 실상 이 도시에서 가장 세력이 큰 건달일 뿐인 녀석.

'하브람의 시장 에밀리오.'

유신은 이 건달 우두머리를 상대로 또 한 번 사기를 칠 생각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