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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201

194. 북진(2)

길드 회의 결과.

강현. 신성아. 윤나래.

그리고 수호자 길드 출신의 한시환이 이끄는 공략 1팀.

마지막으로 능력자 교육 학교에서 만난 최연화가 최종 멤버로 확정됐다.

언뜻 보면 평소와 다를 것이 없는 구성이었으나, 안유성 대신 최연화가 합류한 것이 달랐다.

-저는 집에 일이 있어서요.

그 말을 끝으로 안유성은 홀연히 사라졌고, 그것을 본 최연화가 적극적으로 나섰다.

-길드장님! 저도 가고 싶습니다!

처음 능력자가 됐던 때부터 두각을 드러냈던 최연화는 굉장히 빠르게 성장했다.

지금은 한 공략팀의 부팀장을 맡은 상태.

강현은 그녀도 북한에서 충분히 한 명의 몫을 해낼 수 있다 판단하여 참여 요청을 승낙했다.

'여전히 한세연이랑 비교하기는 힘들어 보이지만... 성장이 정말 빠른 편이긴 해.'

최연화는 처음부터 한세연을 뛰어넘는 것이 목표라고 말했다.

아직은 그 목표를 달성하기에 한참 부족해 보이는 게 사실이나, 그녀의 엄청난 성장 속도를 생각하면 불가능한 일은 아니리라.

'얼른 쭉쭉 커서 따라잡아라.'

그렇게 강현이 시시콜콜한 생각을 이어가는 사이.

"오셨습니까."

마침내 목표했던 장소에 도착했다.

"뭐야. 나 혹시 늦었어요?"

이미 자신을 제외하고 모두 모여있는 것을 보고 강현이 물었다.

"아닙니다. 오히려 일찍 오셨습니다."

혹시나 해서 시간을 확인하니 다행히도 약속 시간에 늦은 것은 아니었다.

"다 모이셨으니 본격적으로 이야기를 진행하겠습니다."

신태길이 앞에 있는 세 명의 남자를 바라보며 말했다.

차례대로 강현과 불사의 한명도. 블랙나이츠의 이청운이었다.

"제가 오늘 여러분들을 만나고자 한 것은 여러분들이 바로 이번 작전의 핵심이기 때문입니다."

"핵심이요?"

강현의 물음에 신태길이 고개를 끄덕였다.

"이번 작전의 최우선 과제는 북한의 안정화입니다. 그러기 위해서 엄청난 숫자의 능력자와 군대가 투입될 겁니다. 저는 여기 계신 분들이 능력자들을 이끌 대표를 맡아 주셨으면 합니다."

"으음... 대표라. 좀 더 자세히 말해 보게."

한명도가 신태길에 말했다.

"능력자는 크게 두 개의 부대로 나눠서 운용될 예정이며, 각각 황해북도와 강원도의 안정화를 위해 움직일 겁니다. 저는 한명도 씨와 이청운 씨가 그 부대를 총괄하는 역할을 맡아줬으면 합니다."

"단군 길드에서는 나서지 않는 건가?"

"예. 한세연 씨는 개인적인 사유로 움직이지 않을 거라 합니다. 혹여나 길드의 전력이 필요하면 말씀하시라고 하기는 했습니다."

사실 한세연은 지난 전투에서 강현을 보고 충격을 받아 훈련에 매진 중인 상태였다.

"궁금한 게 있는데."

그때 강현이 손을 들었다.

"저 둘이 대장을 하면, 나는 뭘 해요?"

"강현 씨는 이번에 북한의 고위층을 협상하는 일을 맡아주셨으면 합니다."

"고위층 협상?"

강현의 이해가 안 간다는 표정으로 물었다.

"현재 북한은 크게 두 개의 파벌로 나눠져 있습니다. 하나는 우리 대한민국에게 협력을 요청하자는 쪽이고, 다른 하나는 자력으로 이 난관을 극복하자는 쪽이죠."

"아..."

"강현 씨가 하실 일은 한국이 나서는 것을 반대하는 군벌. 장성들을 만나서 그들을 설득하는 겁니다."

'설득'이라는 표현을 썼지만 강현은 신태길이 자신에게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 잘 알았다.

정말 설득을 원했다면 자신에게 이런 일을 맡길 리가 없으니까.

자신의 성격을 잘 아는 신태길은 아마 협상 자리에 호위로도 쓰지 않았을 것이다.

'그런데 나보고 직접 설득을 해라?'

강현이 피식 웃었다.

"말 안 듣는 놈 싹 다 족쳐라. 이거죠?"

"솔직히 말하면 그렇습니다."

신태길은 시원하게 인정했다.

"그들은 북한의 국민들이 끔찍하게 죽어가는 와중에도 본인들의 안위. 그리고 권력만 생각하는 인간들입니다. 정부에서는 그들을 상대로 제대로 된 설득을 하기란 불가능하다 판단했습니다."

"어차피 설득하지 못할 바엔 그냥 압도적인 무력을 보여주고, 설설 기게 만드는 게 낫겠다. 이거네."

"예. 다만 한 가지 걸리는 건... 살인. 그러니까 능력자가 아닌 사람들의 목숨을 취해야 하는 일이 많을 겁니다. 만약 강현 씨께서 살인이 거북하다 하시면 거절하셔도 괜찮습니다."

"뭘 이제 와서 새삼스럽게."

이미 이 손에 죽은 사람들의 숫자만 해도 셀 수 없을 만큼 많았다.

세계는 이미 변했고, 삶은 그 자체가 생존과 전쟁으로 바뀌었다.

"쓰레기들 목숨 챙기면서 위선 떨 생각은 없어요. 다만."

"다만?"

"안유성이 빠지는 게 좀 아쉽긴 하네요."

"예?"

뜬금없는 강현의 말에 신태길이 무슨 말이냐는 듯 물었다.

강현은 씨익 웃고는 고개를 저었다.

"아무것도 아니에요. 대충 무슨 말인지 알았으니 가보죠. 한반도 통일이라니. 재미있겠네!"

또 무슨 일이 벌어질까 생각하자 벌써 두근거리는 느낌이었다.

**

북한 개성.

한때 수많은 공장들이 들어서며 활기를 띠던 도시였다.

하지면 몇 년 전 공단 가동이 중단되고, 던전 사태까지 겹치면서 지금은 완전히 유령 도시가 된 상태.

그 개성의 한 건물에 어쩐 일인지 조선인민군의 장성들이 다수 모여 있었다.

"도착했습니다."

한 병사의 보고에 장성들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뒤이어 이곳과 어울리지 않는 사람들이 차례대로 들어섰다.

"잘 오셨습니다."

제2군단 군단장 안창복 상장을 필두로 장성들이 차례대로 인사를 건넸다.

"예. 반갑습니다."

이곳을 찾아온 이는 불사 길드의 한명도와 배데스의 한시환 등 고위 능력자 몇몇.

그리고 한국군의 장성들이었다.

"이렇게 저희 요청에 응해주셔서 다시 한번 감사드립니다."

북한군의 대표로 안창복 상장이 다시 감사 인사를 전했다.

안창복 상장은 이전 최동우가 북한을 방문했을 때도 가장 먼저 맞이했던 인물이다.

그는 현재 북한 내, 친 대한민국 파벌의 수장을 맡고 있었다.

한동안 어색한 인사를 주고받는 것이 이어지고, 분위기가 무르익자 안창복 상장이 본론을 꺼내기 시작했다.

"유선상으로 이미 전달했지만은. 다시 말하자면 이곳의 상황이 많이 좋지 않습니다."

매일매일 늘어나는 몬스터.

그에 맞춰 폐허가 되는 도시와 마을 또한 기하급수 적으로 늘어난다.

이런 시기에 북한군은 몬스터조차 감당하지 못하면서 파벌을 나눠 같은 인간에게 총구를 겨누고 있었다.

"일차적인 목표는 이곳의 몬스터를 몰아내고 안정화를 하는 것이고, 그다음은 우리 북조선 내의 반대 세력들을 설득하는 겁니다."

안창복 상장의 말에 모두가 고개를 끄덕였다.

"반대 세력을 설득하는 데는 남조선의 동무가 나서 준다고 들었습니다만. 혹시 이곳에 있습니까?"

안창복의 물음에 한명도가 고개를 저었다.

"그 친구라면 이미 더 위쪽으로 떠났습니다."

"음... 도와주는 동무에게는 미안한 말이지만, 가능하면 무력충돌을 자제해야 합니다. 이런 시기일수록 서로 피를 흘리기보다는 더 똘똘 뭉쳐야 되지 않겠습니까."

"예. 그 친구라면 알아서 잘 할 겁니다."

한명도가 씨익 웃으며 대답했다.

강현이라면 분명 아주 잘 해결할 것이 분명했기에.

"그럼... 그 부분에 대해서는 전적으로 남조선에 맡기기로 했으니 더 이상 왈가왈부하지 않겠습니다."

헛기침을 한 안창복 상장이 말을 이었다.

"여기서 우리가 해야 할 일은 근방의 땅을 안정화하는 것입니다. 우리 군이 총력을 동원해서 진행하고 있지만은. 이 거대한 괴물 놈들 때문에 일이 쉽지 않습니다."

거대한 괴물.

B등급 던전의 보스 몬스터들을 말하는 것이었다.

"지난번에 보니 남조선의 초능력자 동무들은 엄청나게 강한 것 같았는데. 동무들에게 그놈들의 처리를 맡기겠습니다."

안창복이 지시를 하자 큰 스크린에 황해북도의 지도가 띄어졌다.

"이것은 현재까지 우리가 발견한 거대 괴물들의 위치를 표기한 것입니다. 남조선 동무들은 이 지도를 보고 놈들을 처리하고, 근방에 던전을 완전히 닫아주면 됩니다."

"알겠습니다."

한명도는 일이 그리 어렵지 않으리라 생각했다.

어차피 중요한 것은 B등급 던전과 그 몬스터들.

분명 그 아래 등급의 몬스터와 던전이 무수히 많겠지만 전혀 문제 될 것은 없다.

현재 한국은 능력자 포화 상태.

낮은 등급의 던전을 차지하기 위해 경매를 하고, 길드끼리 전쟁이 일어나고 있는 판국이다.

문제가 되는 B등급의 던전만 자신과 몇몇 길드에서 맡아준다면, 나머지는 한국에서 온 수많은 능력자들이 알아서 처리할 것이다.

'몬스터는 돈이 되니까.'

한국 정부는 이 기회에 대량의 마정석을 벌어들일 계획이다.

국내에 고여서 썩어가던 힘도 풀어내고, 영토의 확장과 인구 증가도 노릴 수 있다.

겉으로는 북한 주민의 인권과 안전을 도모한다고 하지만 자세히 들여다보면 이건 하나의 거대한 사업이었다.

국가가 국가를 상대로 하는.

한명도는 그것을 떠올리며 쓰게 웃었다.

"그럼 지체할 시간이 없으니 바로 시작하도록 하겠습니다."

**

다음날.

한국의 능력자들은 곧장 몬스터를 사냥하기 위해 움직였다.

그중 하나를 맡은 배데스 길드.

최연화는 공략 1팀과 함께 이름 모를 산을 걷고 있었다.

'하아... 묘하게 떨리네.'

최연화가 능력자 생활을 시작한 것은 비교적 짧았다.

하지만 그녀는 정말 쉬지 않고 싸워왔다.

짧은 경력에 비해 경험이 굉장히 풍부한 것이다.

그것은 폭발적으로 성장한 그녀의 레벨이 검증해주는 것이었다.

'밖에서의 전투는 처음이야.'

그런 그녀도 처음 겪는 던전 밖에서의 전투에 긴장되는 것이 느껴졌다.

'공략 1팀은 이런 경험이 많을 걸까? 차분해 보여.'

한시환과 공략 1팀을 보며 최연화가 눈을 빛냈다.

'수호자 길드 출신이라 했지?'

수호자 길드는 던전 사태 초창기에 탑 5에 들 정도로 대단했던 길드였다.

한시환은 그곳에서 부길드장을 지냈으며, 다른 공략팀원들도 어디 가서든 최고의 대접을 받을 만큼 이미 잘 나가는 능력자였다.

그런 이들이 배데스 길드에 모여 혹독한 훈련을 거친 뒤에 완성된 것이 바로 공략 1팀.

비록 최연화가 빠르게 성장해 현재 공략팀의 부팀장을 맡고 있긴 했으나, 공략 1팀은 길드 내의 다른 공략팀과 비교하기 미안할 정도로 차원이 달랐다.

'이번 기회에 잘 배워둬야 해.'

그때 갑자기 가장 앞에서 걷던 한시환이 멈춰 섰다.

그러자 뒤따르던 공략 팀원들도 거짓말처럼 동시에 멈췄다.

모두 짜 맞추기라도 한 듯 자세를 낮추고 기척을 숨기는 모습에 최연화가 작게 감탄했다.

"캬아아아!"

그 순간, 숲이 울릴 정도의 엄청난 소음이 들려왔다.

곧이어 무언가 부딪히는 듯한 소리와 함께 땅이 울렸다.

"천천히 접근한다."

최연화도 한시환의 명령을 따라 조심스럽게 접근했다.

점차 소음의 진원지가 가까워지고,

"크워어!"

마침내 드러난 것은 상상조차 하지 못한 광경이었다.

"영역다툼 중인가."

거대한 구렁이를 닮은 몬스터와 키가 10m는 돼 보이는 거인들이 서로 싸우고 있었다.

"우리 목표물이다."

길이만 해도 수십 미터가 넘는 놈의 이름은 자레이트 워름.

거대한 뱀처럼 생긴 놈이 바로 배데스 길드의 목표였다.

"크아아아!"

-콰앙! 쾅!

거인들이 나무를 뿌리째 뽑아 자레이트 워름을 후려쳤다.

하지만 두터운 놈의 가죽에 생채기를 내는 것에 그쳤다.

"저기 거인들도 하나하나가 보스급이야."

정보에는 없던 놈들이다.

아마 그사이 새로운 던전이 터지며 생겨난 몬스터인 것 같았다.

한시환은 굳이 그들의 싸움에 끼어들지 않고 추이를 지켜보기로 했다.

그렇게 거대 괴수들의 접전은 한동안 계속됐다.

놈들이 움직일 때마다 땅이 파이고 나무가 부서지며 흙먼지가 거대하게 피어올랐다.

"캬아아아!"

끝나지 않을 것 같은 괴수대전 의외로 시시하게 승부가 결정났다.

승자는 자레이트 워름이었다.

10m가 넘는 거인들을 차례대로 압사시킨 놈은 하나씩 거인을 집어삼키기 시작했다.

"지금이다!"

한시환이 움직인 것은 그때였다.

한창 거인을 입에 욱여넣고 있던 놈은 반응이 굼뜰 수밖에 없었다.

반면 생전 처음 보는 몬스터임에도 공략 1팀은 마치 수없이 싸워봤던 적인 듯 능숙하게 움직였다.

"눈 부위를 집중적으로 노려!"

이런 거대 몬스터의 공통점은 말 그대로 괴물 같은 생명력을 가지고 있다는 것이다.

놈들을 처리하는 가장 확실한 방법은 머리를 터뜨리거나, 목을 잘라내는 것이다.

자레이트 워름은 목 부분도 지름이 수 미터에 달할 만큼 두꺼웠기에, 그것을 잘라내기 보다는 머리를 타격하는데 집중하기로 했다.

수백 개에 달하는 징그러운 눈.

공략팀은 놈의 눈에 칼을 꽂고 마법을 난사했다.

"캬아아!"

눈알이 터져나가며 자레이트 워름이 비명을 내질렀다.

한순간의 실수가 치명적인 부상, 혹은 죽음으로 이어질 수 있는 적이지만 공략팀의 움직임에는 전혀 망설임이 없었다.

특히 가장 앞에서 놈의 시선을 끌며 검을 휘두르는 한시환의 움직임은 가히 환상적인 수준.

최연화는 단군의 한세연 이후 저런 움직임을 보인 사람을 실제로 보는 것은 처음이었다.

"벌써 끝났어..."

전투가 시작된 지 약 30분.

배데스 길드는 단 한 명의 사망자도 없이 목표물인 자레이트 워름을 사살할 수 있었다.

195화 북진(3)

195. 북진(3)

같은 시각.

강현은 윤나래와 신성아를 데리고 평양으로 향하고 있었다.

"강현 님."

조용히 오솔길을 걷던 도중, 신성아가 강현을 불렀다.

"응?"

"등에 메고 계신 '검'은 혹시 그것입니까?"

그것이라는 굉장히 애매한 질문.

하지만 강현은 단번에 그 뜻을 알아차렸다.

"어어. 맞아. 이번에 가투인가 감투인가 하는 놈한테서 뺏은 거야."

강현은 가투 아사스에게서 얻은 장검을 등에 멘 채로 걷고 있었다.

그때 옆에서 이야기를 듣고 있던 윤나래의 장난기가 발동했다.

"궁금한 게 있는데요!"

"뭐가?"

"왜 검을 인벤토리에 안 넣고 거추장스럽게 들고 다녀요? 혹시! 설마! 지금 그게 멋지다고 생각하는 건 아니죠? 에이~ 아닐 거야!"

윤나래가 얄미운 목소리로 호들갑을 떨었다.

"어쩌라고. 내 맘이다!"

인상을 팍 찡그린 강현이 윤나래에게 꿀밤을 먹였다.

"아악! 머리 때리면 머리 나빠진다고요!"

사실 강현도 검을 거추장스럽게 들고 다닐 생각은 없었다.

단지, 인벤토리에 넣는 것이 불가능했기에 들고 다니는 것뿐이었다.

현재 빌게인의 장검은 최연화에게 빌려준 상태였기에, 강현이 쓸 수 있는 도검류는 등에 메고 있는 것이 유일했다.

"그런데 언제까지 걸어갈 거예요?"

꿀밤을 맞고 도망갔던 윤나래가 어느새 강현의 옆에서 나란히 걷고 있었다.

"걱정하지 마. 얼마 안 걸려."

"아직 한참은 남았겠구만. 뭐가 얼마 안 걸려요!?"

"아! 꼬우면 네가 차 구해 오던가!"

이들이 처음부터 이렇게 맨몸으로 걷던 것은 아니었다.

원래는 차량과 함께 운전사까지 있었으나, 갑작스러운 몬스터의 공격으로 차량이 터지고 말았다.

"그때 네가 실드만 똑바로 켰어도 이런 일이 없었을 거 아냐!?"

강현의 핀잔에 윤나래가 기가 찬다는 듯 황당한 표정을 지었다.

"참나. 애초에 몬스터 집어던져서 자동차를 박살 낸 게 누군데요!?"

윤나래의 반격에 강현이 입을 꾹 다물었다.

"길드장님은 좋겠네요! 양심에 털이 하도 많이 나서 한겨울에도 아주 뜨뜻~하시겠어!"

"..."

"에휴! 그때 힘만 무식하게 센 누가 바보짓만 하지 않았으면 여기서 이 개고생을 할 일도 없었을 텐데. 말해 뭐하겠어! 아주 그냥…."

말을 하던 윤나래가 곁눈질로 은근히 강현의 반응을 살폈다.

보아하니 슬슬 인내심에 한계가 온 것 같았다.

"아주 그냥 멋져! 터프해! 길드장님 짱짱! 어쩜 그렇게…. 아야! 왜 때려요!?"

"너 이제 앞으로 내가 말하라고 할 때만 말해."

"그런 법이 어디 있어요!?"

"여기 있다. 꼬우면 한판 뜨던가."

갈수록 윤나래와의 말싸움이 힘들어지고 있었다.

결국, 강현은 자신이 절대적 우위에 있는 무력을 동원할 수밖에 없었다.

"쳇! 완전 강일성. 강정일 보다 더해! 독재자도 아주 혀를 내두를…."

순간 강현의 표정을 본 윤나래가 고개를 푹 숙였다.

"조용히 할게요..."

더 했다가는 정말 많이 맞을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렇게 한동안 일행은 침묵을 유지하며 길을 걸었다.

일반인이라면 꼬박 하루를 넘게 걸어야 할 거리였지만, 이들은 능력자.

워낙 기본 신체 스펙이 뛰어나 예상보다 빠르게 목적지에 다다를 수 있었다.

"앞으로 한 20km만 더 가면 돼."

강현이 지도를 확인하며 말했다.

"거의 다 왔네요."

20km면 천천히 가도 2시간 안에는 도착할 만한 거리였다.

"응?"

그때 어디선가 희미한 소음이 들려오기 시작했다.

"다들 들었지?"

"예."

제법 먼 곳이었지만 강현은 확신했다.

전투가 벌어지고 있었다.

**

"쏴라! 접근하지 못하게 공격해!"

병사들을 지휘하는 이상석 대좌가 목이 터져라 소리쳤다.

하지만 그런다고 해서 날아가는 총알이 더 강해지지는 않는다.

"키에에에!"

단단한 외피를 가진 거대한 괴수가 터프하게 총탄을 맞으며 달려왔다.

"도망치셔야 합니다!"

한 장교가 이상석 대좌에게 소리쳤다.

"초인 부대는 뭘 하는 거야!?"

"이미 모두 당했습니다."

"젠장!"

날이 갈수록 강해지는 괴수들.

북한의 군인들은 총알과 미사일이 언제까지나 지켜줄 것이라 믿었지만 현실은 그리 녹록지 않았다.

'후퇴해야 되나...'

이상석 대좌가 눈을 질끈 감으며 고민했다.

자신이 고민하는 사이에도 실시간으로 부하들이 죽어가고 있었다.

"안 되겠다. 모두 후퇴를…."

그 순간,

-콰아앙!

갑자기 앞에서 거대한 폭발이 일어난듯한 굉음이 울렸다.

깜짝 놀라서 고개를 들자 낯선 남자가 서 있는 것이 보였다.

"어쭈? 이걸 버텨?"

거대한 해머를 들고 있는 남자.

그는 무언가 마음에 들지 않는 듯 인상을 잔뜩 찌푸린 채였다.

"곱게! 곱게! 가자!"

-콰앙! 쾅! 쾅!

남자는 수백 킬로그램. 어쩌면 톤이 넘어갈지도 모르는 거대한 해머를 가볍게 휘둘렀다.

그러나 거대 괴수의 단단한 외피는 깨어지지 않고 약간의 금이 가는 것에 그쳤다.

"이렇게 단단한 놈은 오랜만이네."

굉장히 사나운 얼굴을 한 남자가 인상을 찌푸리니 더욱 무섭게 느껴졌다.

괴수의 위에 서 있던 남자가 어디론가 가더니 자리에 주저앉았다.

그리고는 괴수의 단단한 외피 틈에 손을 집어넣었다.

'설마... 껍질을 까려는 건가?'

새우 껍질을 까듯이 괴수의 외피를 들어낼 생각인 것 같았다.

'그딴 게 될 리가...'

남자의 큼지막한 근육이 터질 듯이 부풀어 올랐다.

"안 되면 되게 하라! 끄아아아!"

인간의 힘으로는 도저히 불가능할 것 같은 일이었으나,

-뚜둑, 뚝!

섬뜩한 소리와 함께 괴수의 외피가 들리기 시작했다.

"캬아아아!"

거대한 몸체를 가진 놈은 피부가 뜯겨나가는 고통에 몸부림쳤다.

"됐다!"

마침내 남자가 자신의 몸집보다 더 큰 외피 조각 하나를 뜯어냈다.

그가 만족스럽게 웃으며 등에서 칠흑처럼 어두운 검을 뽑았다.

"확실히 마력을 전달하는 효율이 좋단 말이지."

이상석 대좌는 남자의 말을 이해할 수 없었으나, 그가 무언가를 하려 한다는 것은 눈치챌 수 있었다.

마치 기를 모으는 것처럼 집중하던 남자가 마침내 검을 휘둘렀다.

-스걱!

단숨에 거대한 괴수의 몸체 절반 가량이 잘려나갈 정도로 엄청난 위력이었다.

"캭, 캬악..."

괴수의 몸 안에 있던 내장들이 밖으로 쏟아져 나오며 그로테스크한 장면이 연출됐다.

"어어..."

이상석 대좌는 도저히 믿을 수 없는 현실에 자신의 눈이 어떻게 된 게 아닌가 의심했다.

"어떻게 저렇게..."

분명 직전까지 자신의 부하들을 학살하던 놈이다.

휘하의 초인 부대까지 나섰으나 힘 한번 제대로 써보지 못하고 허무하게 죽임을 당했다.

그런데 어디선가 등장한 낯선 남자가 마치 물가에서 잡은 가재를 요리하듯 손쉽게 거대 괴수를 손질해 버린 것이다.

"빨리빨리 처리합시다!"

남자는 지치지도 않는지 곧장 다른 괴수들에게 뛰어가며 학살을 시작했다.

그제야 정신을 차린 이상석 대좌가 명령을 내리기 시작했다.

"저 남자를 도와라! 괴수들을 쓸어버려!"

그는 기적처럼 찾아온 기회를 놓칠 생각이 없었다.

**

전투는 대승이었다.

강현과 윤나래가 참가한 이후에는 거의 사상자가 나오지 않을 정도로 일방적인 전투가 벌어졌기 때문이다.

더 이상 몬스터의 괴성이 들리지 않게 되자, 이상석 대좌는 곧장 강현을 찾아갔다.

"도와주셔서 정말 감사합니다."

그는 대좌라는 높은 직급에도 불구하고 강현에게 연신 고개를 숙이며 감사 인사를 전했다.

강현도 그런 이상석이 싫지만은 않은 듯 미소를 지었다.

"그런데 동무들은 혹시 어디 부대 소속이십니까?"

"예? 부대 소속은 아니고. 길드 소속이긴 한데..."

강현의 말에 순간 이상석의 얼굴이 굳었다.

"설마... 남조선에서 왔습니까?"

"맞습니다. 남쪽에서 왔고 지금은 평양을 향해 가는 중이죠."

강현의 무심한 대답.

이상석은 고민에 휩싸였다.

'중앙에서 보낸 초인일 줄 알았더니...'

하긴 조국에서 이렇게 강한 초인을 지금까지 숨겨뒀을 리가 없다.

조국에 이런 초인이 있었다면 당의 최고 존엄, 수령 동지가 위험에 처해 있을 때 진작 나섰을 것이다.

"..."

이상석 대좌가 침묵하자 강현이 인상을 찌푸렸다.

"미리 말해두는데. 쓸데없는 짓은 안 하는 게 서로한테 좋아요. 무슨 말인지 알죠?"

강현이 한 말의 의미는 분명했다.

괜한 짓을 하지 말고 뜻에 따르라는 것.

"평양에는 무슨 볼일입니까?"

이상석 대좌는 우선 강현의 의도를 파악하기로 했다.

"그쪽 대장한테 볼일이 있어서. 그냥 대화만 할 생각이니까 그렇게 경계하지 않아도 돼요."

"으음..."

"잘 생각해요. 내가 깽판을 치면서 그쪽 대장을 강제로 만나는 것. 아니면 그쪽에서 잘 조율해서 조용히 만남을 주선하는 것."

강현이 자신만만한 미소를 지었다.

"계산기 두드리면 뭐가 이득인지 딱 나오지 않아요?"

이상석 대좌는 제법 합리적인 사람임과 동시에 지극히 현실적인 사람이었다.

그는 조국의 미래 같은 거창한 것보다는 자신의 목숨. 안위가 더 중요했다.

'승낙하자.'

여기서 강현에게 반대해 봤자 자신만 피해를 볼뿐이다.

"안내하겠습니다."

**

총정치국장 김길수 대장.

그는 현재 매우 들뜬 상태였다.

'호박이 넝쿨째로 굴러들어 왔다.'

그도 남조선에서 초인과 군대를 보낼 것이라는 소식은 들어 알고 있었다.

그런데 이런 상황에 남조선의 전력의 핵심이라 할 수 있는 유명한 초인이 따로 찾아올 줄을 상상조차 하지 못했다.

'어떻게든 손에 넣어야 해.'

김길수 대장은 강현을 원했다.

아니, 강력한 능력자를 원했다.

능력자 억제, 말살 정책으로 능력자의 씨가 마른 지금.

그 어떤 때보다도 그들의 무력이 절실했기 때문이다.

"도착했습니다."

"들어오라 해."

명령이 떨어지자, 문이 열리며 강현과 윤나래가 들어섰다.

"반갑소. 총정치국장을 맡고 있는 김길수요."

"배데스 길드의 강현입니다."

강현과 김길수가 가볍게 악수했다.

"나를 만나고 싶어서 이곳까지 왔다고 들었소."

먼저 입을 연 것은 김길수였다.

"어째서인지 이유를 들을 수 있겠소?"

김길수의 물음에 강현이 고개를 끄덕였다.

"지금 여기에서 제일 높은 사람이 당신이 맞죠?"

묘하게 건방진 말투에 주위에 기립해 있던 병사들이 발끈했다.

"말조심해라!"

"이분이 누구인 줄 알고!"

김길수 또한 약간 인상을 찌푸렸으나, 이 정도쯤이야. 충분히 웃고 넘어갈 수 있었다.

"다들 그만해. 잘 모르면 실수할 수도 있는 거지."

김길수 대장이 사람 좋은 미소를 지으며 허허 웃었다.

"맞소. 수령 동지와 고위 간부들이 모조리 죽은 지금. 나 김길수가 임시로 최고사령관을 맡고 있소."

"다행히 잘 찾아왔네."

"그래. 나를 만나서 하고 싶은 이야기가 뭐요?"

김길수의 물음에 강현이 씨익 웃었다.

"그쪽. 대장 자리에서 내려오시죠."

강현의 돌직구에 김길수의 얼굴이 딱딱하게 굳었다.

"이런 에미나이 새끼! 진짜 미친 거야!?"

옆에 있던 군인들이 역정을 내자 김길수가 손을 들었다.

"조용히 해라."

그러자 모두가 침묵하며 주위가 삽시간에 조용해졌다.

"너. 배짱이 좋구나."

김길수가 이제 완전히 반말하며 강현을 노려봤다.

"이 상황에서 너 혼자 뭘 할 수 있을 거로 생각하나?"

"그거야 보면 아는 거고."

"솔직히 말하지. 나는 너를 살려 보낼 생각이 없다."

"그래서?"

"죽기 싫다면 내 말을 따르는 게 좋을 거야."

김길수가 음흉한 눈을 하며 말했다.

"크큭. 큭... 크흐흡."

김길수의 말을 들은 강현이 갑자기 낄낄대기 시작했다.

"종간나 새끼! 지금 이 상황이 웃기나?"

김길수가 노한 표정을 짓자 강현이 손사래를 쳤다.

"아, 미안. 죽기 싫으면 내 말을 따르라니. 너무 오랜만에 듣는 개소리라 나도 모르게 웃었네. 하하하!"

강현이 정말 웃겨서 참을 수 없다는 듯이 크게 웃어젖혔다.

"듣자 하니 남조선에서 아주 유명한 초인이라니... 이제 보니 이거 그냥 정신이 돈 놈이구나?"

김길수가 인상을 찌푸리며 한숨을 내쉬었다.

"죽여."

무심하게 떨어지는 김길수의 말.

동시에 사방에서 강현과 윤나래를 향해 총탄이 쏟아졌다.

-투두두두두!

고막이 터질듯한 소음과 함께 매캐한 화약 연기가 방안을 채웠다.

"쯧. 괜히 시간만 낭비했어."

김길수는 당연히 강현과 윤나래가 죽을 것이라 생각했다.

제깟 놈들이 아무리 초인이라 해도 지금까지 머리에 총알이 박히고도 살아남은 놈은 없었으니까.

하지만 김길수의 안일한 생각은 채 몇 초가 흐르기도 전에 부서졌다.

"나이스! 반응 속도 좋았어."

"하아... 조금이라도 늦었으면 어쩔 뻔했어요?"

"그러면 너만 죽는 거지 뭐."

편안하게 잡담을 나누는 강현과 윤나래.

그들에게 날아간 총탄은 모조리 실드에 막힌 상태였다.

"이런! 전부 뭐하는 거야! 쏴! 쏘라고!"

김길수의 명령에 다시 둘을 향해 총탄이 퍼부어졌다.

그러나 얼마나 강력한 총을 사용하던, 어떤 총알을 사용하던, 둘에게는 닿지 않았다.

"..."

그제야 무언가 잘못됐다는 것을 느낀 김길수가 땀을 삐질 흘렸다.

"다 쐈냐?"

강현이 김길수를 바라보며 씨익 웃었다.

그리고는 손가락을 펼쳐 총 모양으로 만들더니 김길수를 겨눴다.

"무, 무슨 짓을 하는 거야!?"

괜히 겁을 집어먹은 김길수가 소리쳤다.

"내가 옛날부터 하고 싶었던 게 있거든."

한쪽 눈을 감을 채로 김길수의 머리를 조준한 강현.

그가 가볍게 손을 튕겼다.

"빵야."

동시에 옆에 있던 창이 깨어지며,

"저격수다!"

김길수 대좌의 머리에 구멍이 생겨났다.

이마에서 피를 줄줄 흘리며 그대로 죽어버린 김길수.

잠시나마 최고 존엄의 자리를 차지한 남자의 최후 치고는 허무했다.

그 모습을 본 방 안에 있던 군인들은 혼비백산하며 흩어졌다.

강현은 놈들을 하나하나 손가락 총으로 겨눴다.

"빵야. 빵야."

강현의 입술이 떨어질 때마다 겨눠진 사람의 머리에 구멍이 생겨났다.

군인 대부분이 바닥에 쓰러지고, 남은 것은 높은 계급의 정성 몇몇이 다였다.

"후우..."

천천히 손가락을 입술에 가져다 댄 강현이 화약을 날리는 것처럼 바람을 불었다.

"쳇. 똥폼은."

그 모습을 보며 윤나래가 인상을 찌푸렸으나, 강현은 뭐래도 좋았다.

"아, 소원 성취했네."

씩 웃은 강현이 터벅터벅 걸어갔다.

"히, 히익..! 오지마!"

겁을 집어먹은 장성들의 강현에게서 멀어지기 위해 발악했다.

"이제야 대화를 할 준비가 됐네."

드디어 강현이 원하던 그림이 완성된 것 같았다.

196화 서막(1) - 20.03.04

196. 서막(1)

죽은 자들의 왕.

모든 마법사의 스승.

지고의 존재.

자신을 부르는 말은 수없이 많았지만, 그가 가장 좋아하는 단어는 따로 있었다.

절대자.

아곤은 '절대자'라는 단어가 자신에게 가장 잘 어울린다 생각했다.

현계(顯界)에서는 더 이상 그의 적수가 존재하지 않았다.

남은 것은 신(神).

아곤은 자신의 존재.

그 자체의 격이 높아지고 있다는 것을 느끼고 있었다.

이대로라면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아 새로운 경지에 들어설 것 같았다.

"그때가 되면..."

스스로를 '관리자'라 부르며 자신을 기만하는 놈도 끝이다.

아마 놈도 그 사실을 잘 알고 있을 것이다.

그게 아니고서야 자신을 방해하기 위해 온갖 수작을 부릴 이유가 없으니까.

"하지만 이 싸움은 내 승리다."

아곤이 자신의 앞에 있는 거대한 마력 장치를 바라봤다.

"이걸로 마지막."

비록 회복한 힘 대부분을 다시 잃게 되겠지만 괜찮았다.

여기서 관리자의 계획을 비틀어버릴 수만 있다면.

"그걸로 족하다."

아곤의 몸에서 막대한 마력이 흘러나갔다.

그러자 장치에서 우웅-하며 울리더니 이윽고 눈부신 마력 빛을 허공에 쏘아냈다.

"앞으로 1년. 그 안에 모든 것이 끝나리라."

**

"눈이네."

눈. 북한에 오고 나서 정말 지겹도록 봐온 것이었다.

최연화는 하늘에서 떨어지는 눈송이를 멍하니 바라봤다.

"이제 21살이구나..."

북한으로 올라온 지 약 한 달이 흐른 현재.

지긋지긋했던 12월이 지나가고, 새로운 1월에 다다른 상태였다.

지금 와서 돌아보면 정말 많은 일이 있었던 1년이었다.

그동안 햇병아리에 불과했던 최연화는 1년간의 험난한 생활 끝에 60레벨에 도달해 있었다.

배데스 길드는 단군과 어깨를 나란히 하는 길드가 되었고.

강현은 전 세계에서 알아주는 유명인이 되어 있었다.

이렇게 생각하면 정말 현실감이 없는 이야기였다.

"강현 오빠는 잘 있을까."

북한에 온 이후로 한 번도 마주치지 못한 강현.

요즘 그는 눈코 뜰 새 없이 바쁜 것 같았다.

북한의 고위층을 설득하는 일은 강현답게 엄청난 속도로 처리했지만, 문제는 다른 곳에 있었다.

바로 던전과 하켄 차원.

새해에 접어들면서 A등급의 출현 빈도가 기하급수 적으로 늘어났다.

아직 A등급의 노말 코어도 제대로 공략하지 못하는 국가가 많은 상황이다.

거기에 하켄 차원에서 본격적으로 언데드들이 넘어오면서 대대적인 침공이 시작됐다.

"분명 5년이라 했던 것 같은데."

던전 초창기.

시스템 메시지는 분명 하켄차원의 완전한 연결까지 남은 시간은 5년이라 했었다.

그렇다면 2년이 지난 지금.

남은 시간은 3년이 돼야 했지만, 그렇지 않았다.

[하켄 차원과의 완전한 연결까지 남은 시간 : 363일 13시 6분 25초]

"또 줄었어."

분명 며칠 전에 확인했을 때 남은 시간은 약 380일 정도였다.

그런데 불과 며칠 만에 2주에 가까운 시간이 사라져 있었다.

이대로라면 저 남은 1년이란 시간도 언제 급격하게 줄어들지 모르는 일이다.

"크르르..."

그때 어디선가 낮은 으르렁 거림이 들려왔다.

오늘만 벌써 세 번째 방문객이었다.

"휴우..."

한숨을 내쉰 최연화가 빌게인의 장검을 뽑아 들었다.

-또 전투인가.

검에 잠들어있던 베일이 깨어나며 말을 걸어왔다.

"그렇게 됐어."

최연화가 답을 하며 천천히 앞으로 걸어 나갔다.

그러자 그녀의 뒤로 수많은 능력자들이 따랐다.

최연화는 오늘 베이스 캠프의 야간 경계조장.

뒤를 따르는 능력자들은 야간 경계조였다.

"다시 한번 말하지만 안전이 최우선이에요."

"예."

아무래도 긴 밤이 될 것 같았다.

**

하켄 차원에서 불사자라 불리는 언데드.

단순히 몬스터 취급을 받던 놈들은 어느새 하켄 차원을 지배하는 위치에 서게 되었다.

어떻게 이런 일이 가능했을까.

가장 먼저 떠오르는 것은 죽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들은 수백 년. 혹은 수천 년을 살아오며 자신의 기술을 갈고닦는다.

그렇게 갈고닦은 마법과 검술은 인간의 한계를 아득히 초월하는 엄청난 힘을 발휘한다.

하지만 그것만으로는 부족하다.

분명 무시무시한 일이었으나, 그런 자들은 어디까지나 극소수였으니까.

언데드가 하켄을 지배할 수 있었던 또 다른 이유는 그 숫자에 끝이 없다는 것이다.

그들은 전쟁을 거칠수록 전력이 줄어들기는커녕 더욱 막강해졌다.

살육으로 인한 사기(死氣).

그 사기를 먹고 더욱 강력해지는 언데드.

적들의 시체에서는 새롭게 언데드가 태어난다.

전쟁의 규모가 커질수록 이러한 그들의 특징은 더욱 빛을 발한다.

"시벌! 도대체 언제 끝나!?"

그리고 여기 21세기의 중국.

공식 통계로 잡힌 인구수만 14억이 넘어가며, 실제로는 그보다 훨씬 더 많은 사람이 살고 있을 거라 추정되는 나라.

"그어어..."

언데드에게 중국은, 천국이었다.

"작작 좀 와라!"

강현의 전투는 이미 꼬박 하루를 넘기고 있었지만 적들의 군대는 줄어들 생각을 하지 않았다.

"어휴. 죽겠네."

전투를 피해 잠시 건물 옥상에 올라온 강현이 털썩 주저앉았다.

"야."

"왜요."

주저앉은 상태로 강현이 윤나래를 바라봤다.

"메테오인가 뭔가 한방 먹이면 깔끔하게 정리되지 않을까?"

강현의 말에 윤나래가 인상을 찌푸렸다.

"그걸로 될 것 같았으면 진작 썼겠죠. 여기 도시 면적을 봐요. 도시 전체에 놈들이 퍼져있는데 메테오를 써봤자 티는 나겠어요?"

"그런가..."

분명 윤나래의 메테오가 강력하긴 하지만, 도시 전체를 날려버릴 수준은 아니다.

윤나래는 메테오를 한번 쓰면 한참 동안 쉬어줘야 했는데, 그럴 바엔 차라리 광역 마법을 지속적으로 써주는 것이 더 효과적이었다.

"예전에 그 도마뱀 놈이 살아 있었으면 기가 막혔을 것 같은데."

강현은 A등급 던전 '크록타의 위대한 성지'의 보스였던 코시크를 떠올렸다.

"마법 한방에 수백, 수천 마리씩 아주 그냥! 휴..."

아마 지금 놈이 살아있었다면 정말 엄청난 활약을 하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물론, 그렇다고 해서 다시 만나고 싶은 생각은 없었다.

같은 A등급 보스라고 해도 놈은 직전에 싸운 다키란 보다 훨씬 강하고 까다로운 적이었으니까.

-가... 강현.

그때 강현이 지니고 있던 수신기에서 소리가 들려왔다.

-강현 씨. 들리십니까.

연락을 한 사람은 신태길이었다.

"예. 말해요."

-베이징을 포기한다는 전언입니다. 철수 준비하시죠.

"결국, 그렇게 됐나 보네요."

이미 예상한 일이었지만 막상 현실로 닥치자 씁쓸한 기분을 떨칠 수 없었다.

비록 타국이라 할지라도 인간의 영역이 다른 존재에게 넘어가는 것을 지켜보는 것은 달가운 일이 아니었기 때문에.

-북한과 인접한 랴오닝 성의 선양 시에서 다시 방어선을 꾸리기로 결정했습니다. 강현 씨는 우선 한국으로 복귀해서 좀 쉬시는 게 어떻겠습니다.

"그러죠."

한국을 떠난 지 무려 보름이 넘었다.

피곤한 것도 있었지만, 그보다는 입맛에 맞는 한식과 소고기가 너무 그리웠다.

"복귀는 어디로 하면 돼요?"

-아까 헬기를 보냈으니 곧 도착할 겁니다. 헬기를 타고 공항으로 이동한 뒤 항공기로 갈아탈 겁니다.

"아, 보이네요."

때마침 멀리서 다가오는 헬리콥터가 보이고, 로터음이 들려왔다.

"어?"

그 순간.

강현의 눈에 무언가가 들어왔다.

"좋지 않은데..."

시체들이 모이고 있었다.

이전까지 스켈레톤이나 좀비로 돌아다니던 놈들이 갑자기 뭉치기 시작했다.

점점 높아지는 시체의 탑.

-두두두두...

놈들이 거대한 산처럼 쌓이고, 무너지며 난장판이 벌어졌다.

"안되는데..?"

강현은 최근 저것과 비슷한 장면을 몇 번 본 적이 있었다.

"왜 하필 지금이야!?"

이대로 두면 결과는 뻔했다.

당장 움직여야 한다.

"뛰어!"

"크아아아!"

마침내 수많은 시체들이 모여 만들어진 거대 좀비가 울부짖었다.

한눈에 봐도 수천 구는 될 법한 시체가 모여 만들어진 놈은 보는 것만으로도 구역질이 날 만큼 역겨운 외형이었다.

-타다다다!

헬리콥터는 갑자기 앞에서 생겨난 거대 좀비를 피하기 위해 급하게 몸체를 틀었다.

그러자 좀비의 몸에 달려있던 수천 개의 눈동자가 동시에 핑그르르 돌아가기 시작했다.

이내 자신의 앞을 지나가는 헬리콥터에 고정되는 눈알들.

서서히 놈의 손이 들어 올려진다.

언뜻 보기에 느릿한 것 같지만 그것은 단지 놈의 크기가 워낙 거대해서 느껴지는 착시였다.

실제로 놈의 손은 굉장히 빠르게 헬리콥터에 접근하고 있었다.

"어딜 만져! 새꺄!"

때마침 등장한 강현이 누가 들으면 오해할 만한 소리를 하며 강현이 힘껏 뛰어올랐다.

"더러운 손 안 치우냐!"

강현의 손에서 물 흐르듯 뽑혀 나와 휘둘러지는 새카만 검.

검에서 쏘아진 마력이 단숨에 좀비의 팔을 잘라냈다.

-투화악!

팔이 바닥에 떨어지며, 뭉쳐 있던 언데드들이 사방으로 흩어졌다.

그 모습이 마치 불을 켰을 때 모여 있다가 도망치는 바퀴벌레 떼처럼 보여 더욱 혐오감을 부추겼다.

"큰일 날 뻔했네."

하마터면 헬리콥터를 날려먹고 한참을 이곳에서 기다릴 뻔했다.

강현과 일행이 탑승하자 헬리콥터가 빠르게 고도를 상승시켰다.

"그아아아!"

멀어지는 헬리콥터를 보며 거대 좀비가 마음에 들지 않는다는 듯 괴성을 내질렀다.

"야. 마무리는 하고 가야지."

강현이 고개를 돌려 윤나래를 바라봤다.

"이제 돌아갈 건데 한방 먹여줘."

"휴... 알겠어요."

지금까지의 경험상 저런 언데드를 내버려 두면 나중에는 감당하기 버거울 정도로 강해진다.

그러니 당장 처리할 수 있다면 처리를 하는 게 맞았다.

"위험하니까 더 멀리 이동해요!"

나무 지팡이를 든 윤나래가 마력을 모으기 시작했다.

대기중에 흩어져 있던 마력이 빠르게 모이고, 하늘 높은 곳에 거대한 바윗덩어리가 생성되기 시작했다.

"오. 크기가 많이 커졌네?"

성능이 좋은 지팡이 덕인지, 아니면 윤나래의 스킬 숙련도가 오른 덕인지는 모르겠지만.

하늘에 생성되는 바윗덩이가 과거보다 훨씬 커진 느낌이었다.

느껴지는 마력도 그때보다 1.5배는 강해졌으니 잘못 본 것은 아닐 것이다.

"시작한다."

강현이 낮게 읊조리는 것과 동시에 거대한 바위가 떨어지기 시작했다.

아마 저게 떨어지면 적어도 근방 수 km는 박살이 날 것이다.

"간다. 간다!"

강현이 재난 영화를 보는 어린아이처럼 조마조마한 마음으로 그것을 지켜봤다.

그렇게 강현의 주먹이 꽉 쥐어지던 그때.

"어...!?"

강현의 눈이 튀어나올 듯이 커졌다.

강현 뿐만 아니라 윤나래. 신성아 또한 상황은 별반 다르지 않았다.

그들 모두 믿을 수 없다는 듯이 전방을 바라봤다.

"멈췄다..?"

엄청난 속도로 떨어지던 거대 바위가 허공에 멈춰 있었기 때문이다.

"네가 한 거냐?"

강현이 묻자 윤나래가 고개를 저었다.

"장난해요? 저런 걸 하려면 메테오를 떨어뜨릴 때보다 몇 배나 많은 마력이 필요하다고요... 아까 말한 도마뱀 대장이 다섯이 와도 저런 묘기는 힘들 걸요."

설명을 하는 윤나래 본인도 어이가 없는 듯 허탈하게 웃었다.

강현은 전신에 소름이 돋는 기분이었다.

"강현님. 저기 무언가가 있습니다."

신성아는 손가락으로 어딘가를 가리키고 있었다.

그곳을 바라보자 허공에 떠있는 무언가가 보였다.

"으음..."

자세히 확인하자 로브를 뒤집어쓰고 거대한 지팡이를 들고 있는 것을 알 수 있었다.

"굉장히 익숙한 실루엣이네..."

어디선가 많이 본 모습.

'올룬'이니 '쿨사'니 하면서 떠들어 대던 해골 놈들과 굉장히 닮아 있었다.

다른 점이 있다면 단 한 점의 마력도 느껴지지 않는다는 것.

그리고 떨어지는 메테오를 혼자서 막아낼 정도로 정신 나간 마력의 소유자라는 것.

"좆됐다. 일단 튀자."

강현의 말에 윤나래와 신성아가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조종사 아저씨! 더 밟아요!"

"예?"

헬리콥터에서 뜬금없이 밟으라는 헛소리에 조종사가 당황했다.

"빨리 도망가자고요!"

"이미 최대 속도입니다!"

"살고 싶으면 더 밟아요!"

다행히 놈은 일행을 쫓을 생각은 없는 것 같았다.

"피부... 피부가 있습니다."

그때, 신성아가 무언가를 발견한 듯 말했다.

"뭐?"

"해골이 아니라 마치 사람 같습니다."

"저게 보인다고?"

"예... 조금 무리해야 하긴 하지만, 볼 수는 있습니다."

신성아는 안력을 최대로 끌어올려 수 km밖에 떨어진 놈을 자세히 들여다보고 있었다.

"로브에 가려 제대로 보이지 않지만... 분명 사람의 입술입니다."

순간 어디선가 불어온 바람의 놈의 머리에 써진 로브를 젖혔다.

그러자 드러나는 얼굴.

"..."

놀랍게도 놈은 신성아의 눈을 정확하게 마주 보고 있었다.

놈의 입술이 천천히 떨어졌다.

아마 무언가를 말하는 것 같았다.

신성아는 그 모습을 보며 조용히 놈의 말을 따라 했다.

"이제... 시작이다..."

197화 서막(2) - 20.01.17

197. 서막(2)

스스로를 '관리자'라고 칭하는 자.

'레-드헤라'는 요즘 굉장히 들떠 있었다.

그가 관리하는 차원에서 흥미로운 일이 벌어지고 있었기 때문이다.

덕분에 잠시라도 한눈을 팔지 못할 정도로 바쁘긴 했지만.

오늘도 레-드헤라는 자신이 관리하는 차원에서 벌어지는 일을 열심히 관찰했다.

"드헤라."

그때 누군가가 부르는 소리에 관리자가 고개를 돌렸다.

"헤지스. 오랜만이네요."

익숙한 자였다.

레-헤지스.

자신과 마찬가지로 차원을 관리하는 이들 중 하나였다.

"또 이상한 짓을 벌였더군."

헤지스의 말에 드헤라가 방긋 웃었다.

"이상한 짓이라니요?"

"우리는 차원을 관리하는 자다."

"저도 잘 알고 있어요."

"그런데 지금 네 행동은 뭐지?"

"뭔가 문제라도?"

헤지스는 드헤라의 뻔뻔함에 눈살을 찌푸렸다.

"차원을 파괴할 셈이냐."

헤지스의 말에 드헤라가 고개를 저었다.

"이런, 헤지스... 제가 언제 차원을 망가뜨린 적이 있었나요? 저는 제 일의 스페셜리스트! 프로라고요."

드헤라가 눈을 동그랗게 뜨더니 배실배실 웃었다.

헤지스는 분노가 밀려왔지만 딱히 할 말이 없었다.

실제로 드헤라는 항상 차원을 지켜냈기 때문이다.

드헤라의 방식은 정도를 벗어나는 잘못된 것이었지만, 결과적으로 그가 관리하는 차원은 항상 생존했다.

헤지스는 그래서 더 못마땅했다.

"언제까지고 행운이 계속되리라 생각하는 건가. 차원은 장난감 따위가 아니야. 그렇게 재미로 일을 처리하다가는 결국 너도 끝장날 거다."

헤지스의 경고에 드헤라가 미소를 지었다.

"글쎄요. 그건 두고 보면 알겠죠? 용건이 끝났으면 이제 사라져 주시겠어요?"

"..."

"요즘 신격을 넘보는 친구 때문에 굉장히 바쁘거든요."

"후회할 거다."

반드시 그렇게 되라는 염원이 담긴 저주와도 같은 말이었다.

그러자 무언가에 열중하던 드헤라가 돌연 뒤로 돌아섰다.

"헤지스."

"뭐냐."

"꺼져요."

드헤라가 손가락을 튕겼다.

경쾌하게 딱-! 하는 소리가 울림과 동시에 헤지스가 사라졌다.

또다시 새하얀 공간에는 혼자 남게 된 드헤라.

그는 하던 일을 마저 하기 위해 거대한 화면을 띄었다.

"흐음~ 어떻게 하면 좋을까?"

드헤라는 어느새 불청객에 대한 것은 깔끔하게 잊고 자신의 일에 집중했다.

"아곤. 당신이 그렇게 나온다면... 이건 어떨까요?"

다음에 벌어질 일을 생각하며 드헤라가 해맑은 미소를 지었다.

**

전 세계에서 가장 안전한 국가는 어디인가?

던전 사태 이전이라면 많은 의견이 갈렸다.

누군가는 스위스라 말했으며 또 다른 이는 바티칸을 언급하기도 했다.

혹은 치안이 뛰어난 싱가포르나 일본을 꼽는 사람도 있었다.

그것도 아니면 세계 최고의 강대국인 미국이 가장 안전한 나라라고 말하기도 했다.

그러나 던전 사태가 터진 지 3년째가 된 지금.

세계에서 가장 안전한 나라가 어디인가?를 물으면 하나같이 답한다.

대한민국이라고.

"바빠 보이네요."

오랜만에 만난 신태길은 어째서인지 평소보다 더 바쁜 것 같았다.

"예. 요즘 이민자 문제로 정신이 없습니다."

"그걸 왜 신태길 씨가 담당해요?"

"현재 이민자 중 민간인이 아닌, 능력자인 사람을 제가 관리하고 있습니다."

요즘 한국은 넘쳐나는 이민자로 골머리를 썩이고 있었다.

"사람들이 그렇게 많이 찾아와요?"

"매일매일 수만 건의 이민 요청이 들어오고 있습니다. 그중에서 레벨이 높은 고위 능력자만 추려내도 상당한 숫자입니다."

"그럼 날마다 수만 명이 우리나라로 들어온다는 뜻이잖아요. 안 그래도 좁은 나라에 더 사람을 받을 자리가 있어요?"

강현의 물음에 신태길이 고개를 저었다.

"땅은 충분합니다."

"땅이 충분하다고요? 어째서요?"

"북한과 중국 땅이 있지 않습니까."

"아..."

사실상 중국이 무너진 상황이다.

그사이 대한민국은 북한을 합병했고, 더 나아가 만주 일부까지 영토를 뻗어 나가고 있었다.

"문제는 그들 대부분이 과거 군사분계선 아래. 그러니까 남한이라 불렸던 곳에 정착하고 싶어 한다는 겁니다."

"확실히 그러면 문제이기는 하네요."

현재 대한민국의 영토가 아무리 넓어졌다만, 치안이 확립된 곳은 과거 남한이었던 지역뿐이었다.

북한은 많이 안정됐지만, 여전히 산과 숲에 야생의 몬스터가 산재하고 있었다.

만주 쪽은 상황이 더욱 심각했다.

몬스터는 물론이고 언제 언데드의 마수가 뻗쳐올지 모르는 상황.

그러니 이민을 요청하는 사람 모두가 더 남쪽으로 내려가려 하는 것이다.

"민간인들은 최대한 남쪽 지역에 수용하려 하고 있고, 능력자들은 북쪽과 만주 쪽으로 배정하고 있습니다."

"반발이 만만치 않겠네요."

"그렇다고 받지 않을 수도 없는 일 아닙니까. 후우..."

전 세계가 위기에 빠진 상황에서 자국만 살겠다고 문을 걸어 잠가봤자 아무것도 해결되지 않는다.

잠깐 동안은 더 나은 생활을 이어갈 수 있겠지만, 그것만으로는 근본적인 문제를 해결할 수 없다.

결국,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는 세계가 힘을 합쳐야 할 때였다.

"아, 그러고 보니 강현 씨가 중국에서 마주쳤다는 남자 있지 않습니까?"

"그 메테오 막은 놈이요?"

거대한 바위를 허공에 멈추게 한 남자.

강현은 지금 다시 떠올려도 소름이 돋았다.

"예. 확실하진 않지만 아마 언데드 편에 선 자인 것 같습니다."

"인간인데도요?"

"알아보니 마법 실력이 뛰어나면 인간처럼 모습을 바꾸는 것도 가능하다고 합니다. 강현 씨가 말한 게 사실이라면 그자가 모습을 인간처럼 바꿨을 가능성이 높습니다."

"그럴 수도 있겠네요. 그냥 인간이라기엔 너무 상식 밖으로 강하긴 했으니까. 그런데 그건 어떻게 알았어요?"

"그자가 러시아 쪽에 나타났습니다."

베이징에서 만났던 놈은 다행히 더 다가오지 않고 북쪽으로 멀어졌다.

언젠가는 부딪치게 되겠지만, 강현은 당장 시간을 벌었다는 것에 감사했다.

"그럼 만주에 선양? 거기 만든 방어선이 무너질 일은 없겠네요."

"예. 사실상 최후의 방어선이라 그렇게 규격 외의 존재가 오는 것만 아니라면 충분히 막아낼 겁니다."

"다행이네요."

강현은 다시 중국으로 가야 하나 하고 생각했는데, 한동안 그럴 일은 없을 것 같았다.

"그래서 말입니다만... 강현 씨."

신태길이 서류를 집어넣고는 강현을 똑바로 바라봤다.

갑자기 무게를 잡는 그 모습에 강현이 한숨을 내쉬었다.

"또 무슨 일인데요?"

"눈치가 많이 좋아지셨습니다."

"됐으니까 말해봐요."

다 포기한듯한 강현의 대답에 신태길이 피식 웃었다.

"일본으로 가보실 생각 없습니까?"

"일본은 왜요?"

"지금까지 일본은 타국에 도움을 요청하지 않고 자력으로 버텨 왔습니다."

신태길이 담배에 불을 붙이고는 말을 이었다.

"그런데 이번에 처음으로 우리에게 도움을 요청했습니다."

"내가 알기로는 지금 우리한테 도움을 요청하지 않은 나라가 더 적지 않아요?"

돌려서 말했지만, 굳이 일본으로 갈 필요가 있냐는 뜻이었다.

"저희가 분석하기로는 강현 씨가 나서 준다면 충분히 일본 내에서 언데드를 몰아낼 수 있을 거라 예상됩니다. 그렇게 되면 우리는 뒤쪽에 방어하기 용이한 안전한 땅을 하나 확보하게 되는 것이죠. 급증하는 이민 문제도 같이 처리할 수 있을 겁니다."

"흐음... 그러니까 쉽게 이야기하면 거기 땅을 안정화해서 식민화하자는 거예요?"

강현의 물음에 신태길이 머리를 긁적였다.

"식민화라고 하기는 좀 그렇습니다만... 맥락은 비슷합니다. 북한처럼 합병은 거의 불가능하겠지만, 현재 일본을 도와서 얻을 이득은 다른 나라를 돕는 것에 비해 대단히 크다는 것은 확실합니다."

일본을 북한처럼 통째로 삼키기에는 여러 가지로 제약이 많았다.

하지만 차근차근 잘라먹는다면 언젠가 완전히 소화할 수 있으리라.

이번 일본에 대한 지원은 먼 미래까지 생각한 일종의 투자였다.

"부담 갖지 말고 생각해보시죠. 어차피 강현 씨가 나서지 않는다고 해도, 정부 차원에서 파견을 보낼 예정이었습니다."

"갈게요."

강현이 일말의 고민도 없이 승낙하자 신태길이 눈을 가늘게 뜨며 쳐다봤다.

"요즘 들어 너무 제 부탁을 잘 들어주시는 거 아닙니까?"

"참나, 도와줘도 난리네. 나는 뭐 말 잘 들으면 안 돼요?"

"죄송합니다. 그저 강현 씨 답지 않은 것 같아서..."

강현이 피식 웃었다.

"그냥... 이제는 이해득실을 따지기보다는 정말 생존을 생각해야 한다고 판단했을 뿐이에요."

강현의 대답에 신태길의 눈이 동그랗게 커졌다.

"정말 강현 씨 맞으십니까? 혹시 중국에서 강현 씨는 당하고 언데드가 가죽을 뒤집어쓴 게…."

"헛소리할 거면 갑니다."

강현이 불타는 해골 그림 아래 BADASS가 쓰인 그려진 재킷을 챙겼다.

"강현 씨. 일정은 1주일 뒤로 하면 되겠습니까?"

떠나는 강현의 뒷모습을 보며 신태길이 물었다.

"마음대로 해요. 저는 쉬러 갑니다."

강현이 손을 한번 흔들고는 그대로 사무실을 떠났다.

**

길드 사무실로 돌아온 강현이 눈살을 찌푸렸다.

"야."

"왜요."

자연스럽게 자신의 자리에 앉아서 게임을 하고 있는 안유성을 봤기 때문이다.

"뭐하냐."

"게임하죠."

"지금 내가 그걸 묻는 것 같아?"

"형. 컴퓨터가 제일 좋은 거잖아요. 이런 컴퓨터로 맨날 위튜브만 보는 건 죄악이에요."

"지금 그게 문제가 아니잖아!"

강현이 손바닥을 휘둘러 머리를 후려치려 했으나, 안유성은 뒤통수에 눈이라도 달린 듯 가볍게 피했다.

"어쭈? 피해?"

"오랜만에 봤는데 다짜고짜 폭력이에요?"

"반가워서 그런다 새꺄. 한 달 동안 연락이 안 돼서 객사한 줄 알았네. 뭐하다 이제 나타난 거야!?"

한 달 전.

강현이 북한으로 떠날 때, 일이 있다고 빠졌던 안유성은 그 뒤로 연락이 닿지 않았다.

그래서 살았는지 죽었는지도 모르는 상태였는데, 갑자기 나타나서 태평하게 게임을 하는 모습에 열이 뻗쳐왔다.

"미안해요. 집에 일이 좀 있었어요."

"사과를 하려면 적어도 게임은 끄고 하는 게 예의지!"

강현이 재차 손을 휘둘렀으나 이번에도 안유성이 잽싸게 몸을 놀려 피했다.

그러면서도 두 눈은 여전히 모니터에 고정된 채였다.

"한번 해보자 이거지?"

"바빴다니까 그러네."

강현이 어금니를 꽉 깨물며 사납게 웃었다.

"오늘 길드의 기강을 다시 잡아야겠다."

"에이. 그러다 괜히 길드장 자리 뺏겨요. 괜히 후회하지 말고 평소처럼 맥주나 마셔요."

안유성이 생글생글 웃으며 말했다.

"대련장으로 따라와. 새꺄."

**

한 시간 뒤.

배데스 길드 내 자유 대련장.

바닥에 피 묻은 침을 뱉어낸 강현이 거칠게 숨을 몰아쉬었다.

"퉤! 이제 이 길드장님의 위대함을 좀 알겠냐? 후우..."

바닥에 대자로 뻗어있는 안유성을 보며 강현이 승리의 미소를 지었다.

"스텟 빨로 미는 건 너무한 거 아니에요? 크큭."

피투성이가 된 안유성이 실실 웃으며 중얼거렸다.

"누가 들으면 언제는 안 그랬던 줄 알겠네."

당당하게 자신은 스텟 빨임을 밝힌 강현이 안유성의 옆에 털썩 주저앉았다.

"그래서 한 달 동안 뭐하다 왔어?"

강현은 오랜만에 한바탕 하고 나니 머리가 시원해진 느낌이었다.

안유성도 마찬가지였는지 조금 전보다 개운해진 얼굴이었다.

"회사 경영권 문제로 일이 있어서요."

"너 그런데 관심 없다며."

"늘 하고 싶은 것만 하면서 살 수는 없잖아요?"

"다이아 수저의 고충이 있다. 이거야?"

"비슷하죠."

"재수 없는 놈."

강현의 욕설에도 뭐가 그리 좋은지 안유성이 실실 웃었다.

"그래서 지금은 다 해결된 거고?"

"거의 다 끝났어요."

"내가 도와줄까?"

안유성이 고개를 돌려 지긋이 강현을 바라봤다.

"왜 그렇게 쳐다봐?"

"형이 도와준다고요?"

"그래. 얼른 네 일 후딱 해치우고 같이 일본 여행이나 가게."

"푸흡. 이 시국에 여행이라니. 역시 제정신은 아니네요."

"뭘 새삼스럽게."

실제 재벌집의 승계 권력 다툼이라니.

'어지간한 드라마 뺨치는 스토리가 나오겠지?'

해외 원정을 떠나기 전, 몸풀기로 딱 안성맞춤이었다.

198화 협상 전문가(1) 20.02.17

"세계는 변했다. 이제는 무력이 곧 권력이고, 재력이다. 무력을 가진 자는 그 누구의 눈치도 볼 필요가 없어졌지."

안유성이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이제 와서 너에게 용서해 달라는 말은 하지 않으마."

"..."

"그저 너를 위해서, 네가 이 사업을 맡아줬으면 좋겠다."

"저는…."

198. 협상 전문가(1)

부자는 망해도 3대는 간다는 말이 있다.

시대가 변하고, 무력이 곧 권력이자 돈이 된 세상이 왔어도 부자는 부자였다.

"햐... 이게 너희 집이야?"

눈 앞에 펼쳐진 거대한 정원과 저택을 보며 강현이 감탄했다.

"아니요. 여기는 그냥 제가 사는 곳이에요. 자취방 같은 거죠."

"자취방? 자취바앙? 넌 시발. 자취방이 무슨 뜻인지 모르냐?"

"음... 밥을 직접 해 먹지는 않으니까. 자취방이라는 말은 틀린 건가?"

"그게 중요한 게 아니라고. 새꺄!"

강현은 한동안 현대 사회의 부조리함과 빈부격차.

그리고 서민의 힘든 삶에 대해 열변을 토해냈다.

"하긴. 생각해 보면 그 무시무시한 빌딩도 너희 거라 했지?"

강현이 예전에 찾아갔던 혜성 타워를 떠올리며 말했다.

높이 666m의 세계에서 두 번째로 높은 혜성 타워.

자본의 정수와도 같은 그 빌딩의 웅장함은 여전히 강현의 뇌리에 인상 깊게 박혀 있었다.

"거기에 비하면 여기는 제법 검소한 편이네."

"형은 돈도 많으면서 왜 자꾸 서민 코스프레를 하려 해요?"

"비교하지 마라. 너는 태생부터 다이아 수저잖아."

강현과 안유성이 아옹다옹하며 저택에 들어섰다.

지나가며 마주치는 사람들이 그들을 보고는 고개 숙여 인사했다.

"그래서 여기는 왜 온 거야? 자랑하려고?"

"그건 아니고요. 여기서 보여주는 게 제일 편할 것 같아서요."

안유성이 거실에 있는 커다란 유리 테이블로 걸어갔다.

테이블에 있는 버튼 몇 개를 조작하자 유리가 컴퓨터의 모니터처럼 화면을 내보냈다.

마치 영화와 같은 모습에 강현이 입을 떡 벌리고 바라봤다.

"이게 뭐냐?"

"집 살 때 옵션으로 추가했어요."

"옵션으로 이런 게 된다고? 정말!?"

당연히 거짓말이었다.

안유성이 킥킥거리며 강현을 불렀다.

"됐으니까 이리로 와봐요."

안유성이 화면을 몇 번 더 조작하자 스크린에 무언가가 떠올랐다.

"이게 뭐냐?"

기괴한 외형의 동물들.

흡사 던전에 나오는 키메라와 같은 모습에 강현이 인상을 찌푸렸다.

"회장님. 그러니까... 아버지가 이쪽으로 투자를 많이 했더라고요. 저도 한 달 전에 알게 됐어요."

"능력자 키우는 데 실패하니까 이쪽으로 눈을 돌린 거야?"

안무석 회장은 과거 '강신 길드'를 키웠었다.

혜성 그룹의 엄청난 지원으로 국내 길드 랭킹 6위까지 올라갔던 강신 길드.

그러나 알고 보니 놈들은 자유 능력자 해방 연합의 끄나풀이었고, 안무석 회장을 납치하려다 안유성에게 몰살을 당한 이력이 있었다.

아마 안무석 회장은 그 사건 이후로 절대 배신할 일이 없는 '충견'을 만들어내려 한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럴지도 모르죠. 아무튼 성과가 제법 있더라고요. 특히나 지금은 지구 자체에 마력이 풍부해지면서 돌연변이가 나오는 상황이잖아요?"

"어어. 그렇지. 신태길 팀장한테 들었던 것 같다."

"그게 연구에 도움이 돼서 최근에는 더 진척이 있었다네요."

안유성이 계속해서 화면을 넘기며 연구소의 모습을 비추었다.

"형이 북한으로 갔던 날. 저는 처음으로 아버지랑 연구소를 갔어요. 아버지가 저한테 연구 성과가 괜찮은지 평가해 줬으면 좋겠다고 했거든요."

예상했던 재벌 집안의 승계 다툼은 아니었지만, 강현은 계속 이야기에 집중했다.

"그리고 바로 그날. 외국 능력자들의 습격이 있었어요."

"외국 능력자들?"

"짐작 가는 곳은 몇 군데 있긴 한데 정확히 어디인지는 몰라요. 증거도 전혀 안 남겼고."

"흐음..."

"어쨌든, 그때 제가 있어서 전부 깔끔하게 처리했죠. 아버지가 좀 다치시긴 했지만."

"많이 다치셨냐?"

"지금은 거의 다 나았어요."

"그래. 다행이네..."

안유성의 대답에 고개를 끄덕이던 강현이 돌연 인상을 찌푸렸다.

"그러면 네가 한 달 동안 잠수를 탄 이유가 뭐야?"

"바빴어요. 습격한 놈들 정체를 밝힌다고 돌아다녔죠. 그리고..."

안유성이 말을 하지 않고 뜸을 들였다.

"뭔데?"

강현이 보채자 민망한 표정으로 입을 여는 안유성.

"아버지가 그룹 내 능력자와 던전에 관련된 사업을 모두 저한테 넘기겠다고 했거든요."

안유성의 말에 강현의 눈이 동그랗게 떠졌다.

"뭐야? 지금 상황에 그걸 너한테 넘긴다고?"

강현이 아무리 사업적인 것을 보는 눈이 어둡다고 해도, 현재 능력자와 던전 관련 사업이 무엇보다 중요하단 것쯤은 알고 있었다.

"사실상 그룹의 미래를 넘기는 거나 마찬가지긴 해요."

"그래서. 너는 승낙 했어?"

강현이 흥미진진한 눈으로 안유성을 바라봤다.

"아니요. 귀찮게 뭘 하러 그런 걸 맡아요."

"이게 배가 불렀네! 냉큼 받아들였어야지!"

"어차피 가족들 반대가 너무 심해서 받아들여도 시끄럽기만 했을 거예요."

"그래?"

"당연하죠. 사실상 저는 지금까지 집안에서 내친 자식이었거든요. 이때까지 경영에 참여하지 않던 제가 갑자기 가장 중요하고 돈이 되는 사업을 가져가는 건데."

"하긴 그렇긴 하겠네."

"아버지가 그 이야기 꺼냈을 때, 형이랑 누나들이 전부 눈이 뒤집혀서 거품 물고, 난리가 났다니까요."

"그래서 결국 어떻게 된 거야? 못하겠습니다! 하고 그냥 나온 거야?"

"그건 아니고. 이번에 아버지를 습격한 놈들. 그놈들을 찾아서 깔끔하게 처리하면 경영권을 맡는 거로 결론이 났어요."

직전까지 사업을 맡지 않겠다고 했던 안유성이 갑자기 경영권을 맡는다고 하자 강현이 고개를 갸웃했다.

"응? 이야기가 왜 그렇게 돼? 방금 전에 귀찮아서 하기 싫다며?"

강현의 물음에 안유성이 민망하게 웃었다.

"말하자면 길어요. 아무튼, 이게 지난 한 달간 있었던 일을 최대한 간추려서 말한 거예요."

"흐음..."

강현이 턱을 쓰다듬으며 무언가를 고민했다.

"결국, 당장 해야 할 일은 그 습격자들을 찾아서 처리하는 거네?"

"그렇죠. 경영권 문제는 차치하더라도 그런 놈들을 살려두는 건 뒤가 구리니까요."

"아까 짐작 가는 놈들이 있다면서?"

"예. 심증은 있는데 물증은 없는 상태랄까."

"그럼 바로 가자."

"그냥 바로요?"

"가서 밥상 한번 뒤집어주면 알아서 술술 불지 않겠어?"

안유성과 눈을 마주친 강현이 씨익 웃었다.

"그것도 재미있겠네요."

**

피저 그룹.

세계 브랜드 순위 3위에 자리매김하는 거대 기업 단체.

피저 그룹의 회장인 엘리오 피저는 최근 한 가지에 몰두하고 있었다.

피저 그룹의 수많은 계열사.

그중의 하나인 피저 바이오.

그곳에서 진행되는 생체 실험에 대한 것이었다.

엘리오 피저 회장의 전폭적인 지원 덕에 피저 바이오는 초고속 성장을 하며 빠르게 성과를 만들어냈다.

그렇게 하루가 다르게 가치를 상승 중인 피저 바이오의 한국 지사.

"이번에 들어온 실험체는 어떻게 됐지?"

한국 지사장인 홀랜드가 보고서를 읽고 있었다.

"아직 별다른 성과가 없습니다."

"쳇. 어차피 기대하지도 않았다지만. 너무하는군."

홀랜드가 혀를 차며 보고서를 테이블 위에 던졌다.

"혜성 그룹의 상황은?"

"여전히 침묵 중입니다."

"안무석. 그 노인네가 살아있다고 하지 않았나?"

"예. 아직 회복 중이긴 하지만 조만간 병상을 털고 일어날 거라 보입니다."

"그런데도 가만히 있는다라... 늙어서 겁이 많아진 건가?"

홀랜드는 안무석 회장을 잘 알고 있었다.

호랑이 같은 눈빛에 태산 같은 기세를 한 남자.

그 남자라면 분명 물증이 없더라도 자신을 공격한 것이 어디일지 짐작했을 것이다.

애초에 피저 바이오의 한국 지사는 순전히 혜성 그룹을 견제하고 염탐하기 위해 만들어진 것이었으니까.

"조용히 있다면 우리야 좋지. 다음 계획은 언제쯤 준비되지?"

"약 1주일 정도가 더 소요될 것으로 보입니다만... 정말 다시 공격을 감행할 생각이십니까?"

비서의 물음에 홀랜드가 피식 웃었다.

"이봐. 이제는 누구의 눈치를 보면서 움직일 때가 아니야. 세계가 멸망할지도 모른다고. 정부가 언제까지 국민을 보호해 줄 거라 생각하나? 앞으로 변한 세상에서 살아남기 위해서는 닥치는 대로 힘을 긁어모아야 해."

이는 단순히 홀랜드만의 생각이 아니었다.

피저 그룹의 정상에 있는 남자.

엘리오 피저의 생각이었고, 자신은 단지 그의 계획을 이행하는 사람 중 하나일 뿐이었다.

"혜성 그룹은 일찍이 연구에 뛰어들어서 세계 정상급의 성과를 내고 있는 곳이야. 시간이 충분하다면 우리가 따라잡을지도 모르지만... 하루하루가 아쉬운 상황에 여유를 부릴 수는 없지. 어떻게든 놈들의 연구 자료를 빼돌려야 한다."

"알겠습니다."

비서가 고개를 숙일 때였다.

-따르르르릉!

사무실에 있던 홀랜드의 전화가 울려댔다.

"뭐지?"

홀랜드가 전화를 받자 안절부절못하는 목소리가 들려왔다.

-지사장님. 손님이 찾아왔습니다.

"손님? 오늘 미팅 일정은 끝났을 텐데?"

-그게... 배데스 길드분들입니다.

"배데스 길드?"

제법 익숙한 이름이었다.

'아, 그 강현이라는 남자가 길드장으로 있는 곳이군.'

한국의 길드지만 워낙 유명한 능력자가 길드장으로 있는 곳이라 잘 알고 있었다.

그리고 배데스 부길드장은 혜성 그룹의 막내 아들이 맡고 있었다.

"젠장. 어쩐지 조용하다 했더니, 배데스 길드를 움직였군."

역시 그 능구렁이 같은 남자가 가만히 있을 리가 없다.

"둘이서 찾아왔나?"

-예. 강현과 안유성. 둘 뿐입니다.

"그렇단 말이지..."

홀랜드가 입꼬리를 슬쩍 올렸다.

"전투 실험장으로 안내해."

-예?

"그리고 지금 가용 가능한 실험체를 모두 준비시켜."

-하지만 지사장님….

"공짜로 실험체들의 성능을 확인할 수 있는 좋은 기회다. 이런 기회를 놓칠 수는 없지."

어차피 혜성 그룹의 연구실을 털고 난 뒤에는 한국을 뜰 예정이다.

그때까지만 강현과 안유성의 죽음을 숨기면 그만.

"오랜만에 좋은 구경을 하겠군."

홀랜드가 히죽 웃으며 CCTV를 활성화했다.

태평하기만 한 홀랜드의 얼굴.

그곳에는 자신의 실험체들이 당할 것이라는 일말의 우려도 존재하지 않았다.

**

"이쪽입니다."

안내하는 여성을 따르며 강현이 주위를 두리번거렸다.

"여기도 건물이 좋네."

"피저 그룹은 돈이 많으니까요."

"너희 집보다 많냐?"

"아마 비슷할 거예요."

안유성의 대답에 강현이 인상을 팍 찡그렸다.

"너. 오늘따라 왜 이렇게 재수가 없냐?"

강현과 안유성은 한동안 널찍한 복도를 걸어갔다.

"얼마나 가야 돼요? 여기 보스 만나려고 온 건데."

강현의 물음에 안내하는 여성이 미안하다는 듯 민망한 미소를 지었다.

"지사장님께서 바쁜 업무 중이시라... 바로 현장으로 와달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아니면 끝날 때까지 기다려야 하는데, 괜찮을까요?"

강현이 한숨을 내쉬며 고개를 저었다.

"됐으니까 그냥 갑시다."

이 여성은 단순히 말단 직원일 뿐이다.

그리고 아직 이 피저 바이오라는 회사에서 혜성 그룹을 공격했다는 물증이 없는 상태.

무작정 때려 부수는 것은 옳지 않았다.

"도착했습니다."

마침내 거대한 문에 도착한 여성이 뒤로 돌아섰다.

"이 방으로 들어가시면 됩니다."

"같이 안 들어가요?"

"지사장님께서 두 분 외에 다른 이들의 출입을 금지하셨습니다."

여성의 대답에 강현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죠. 뭐."

자동문이 열리고 드러난 곳은 굉장히 넓은 공간이었다.

"이게 응접실인가?"

어디를 보더라도 응접실과는 거리가 먼 모습.

그렇다고 낯서냐고 하면 그건 또 아니었다.

강현은 이런 장소와 비슷한 곳을 아주 잘 알고 있었다.

"전투 훈련장 같이 생겼네."

"그러게요."

"몸의 대화를 나누자. 뭐 이런 건가?"

강현이 실없는 말을 하며 낄낄거릴 때였다.

-위잉! 위잉!

경보음이 울리며 붉은 비상등이 번쩍였다.

그리고 곳곳에 있던 단단한 철문이 동시에 열리기 시작했다.

"얼씨구?"

"아무래도 여기가 확실한 것 같네요."

철문을 통해 나타나는 해괴망측한 괴물들.

놈들을 보며 강현이 씨익 웃었다.

"바로 본론으로 들어가서 좋네."

저쪽에서 몸의 대화로 협상을 하려 한다면, 제대로 알려줄 생각이다.

"다시는 못 까불게 해 줘야지."

진짜 물리 협상 전문가는 이쪽에 있다는 것을.

199화 협상 전문가(2)

199. 협상 전문가(2)

피저 그룹의 계열사 중 하나인 피저 바이오.

홀랜드는 피저 바이오의 한국 지사장을 맡고 있었다.

"후후. 기대되는군."

대형 CCTV 화면을 보며 홀랜드가 손을 비볐다.

거대한 원형 경기장처럼 생긴 공간.

그 가운데 두 명의 남자가 무기를 들고 서 있었다.

"배데스 길드라... 어디 소문처럼 강한지 실력 한번 볼까?"

홀랜드가 마이크를 작동시켰다.

"28호. 공격해라."

그러자 경기장 안에 홀랜드의 목소리가 울려 퍼지고, 등에 28이라는 숫자 문신을 새긴 괴수가 천천히 움직였다.

-크르르...

화면 너머로 놈이 낮게 으르렁거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놈은 마치 호랑이와 비슷한 외형을 하고 있는데, 한눈에 봐도 거대한 덩치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

28호가 강현 근처에 다가가자 4족 보행을 하고 있음에도 강현과 눈높이가 비슷할 정도였다.

-귀엽게 생긴 놈이네.

강현이 놈을 보며 피식 웃었다.

-크엉!

그런 강현이 마음에 들지 않는다는 듯 놈이 울부짖던 그 순간,

-스걱!

화면의 보는 홀랜드의 눈이 튀어나올 듯이 커졌다.

"어...?"

어느새 28호의 머리가 바닥에 떨어져 있었기 때문이다.

"뭐야? 뭐냐고!?"

무언가 번쩍였다고 느낀 순간 목이 잘려나간 28호.

놈도 자신의 죽음을 받아들이지 못한 것인지 두 눈이 부릅떠진 채였다.

홀랜드가 재차 마이크를 켰다.

"전부 총공격이다! 죽여버려-!"

그의 명령이 떨어짐과 동시에 모든 실험체가 강현과 안유성을 향해 달려들었다.

그리고 학살이 벌어졌다.

"..."

전혀 예상하지 못한 전개에 홀랜드가 침묵했다.

'어째서지..?'

방금 내보낸 실험체들은 어느 정도 검증을 마친 놈들이었다.

각 개체가 홀로 B등급 던전의 준보스를 상대할 수 있는 수준.

피해를 감수하고 뭉쳐서 공격한다면 B등급의 보스도 잡을 수 있었다.

이 정도면 어지간한 중대형 길드의 전력인 것이다.

'이것들만으로 이길 수 있을 거라 생각한 건 아니었지만...'

이 실험체들로 강현과 안유성을 사살할 것이라 판단한 건 아니었지만, 최소한 어느 정도 피해를 끼칠 수는 있으리라 믿었다.

-뭐야? 여기 왜 이렇게 시시해?

그런데 불과 5분이 지나기도 전에 모든 실험체가 사살당했다.

그것도 제대로 된 공격 한번 하지 못하고.

홀랜드의 표정이 무시무시하게 일그러졌다.

"그래... 이름값은 한다 이거군..."

어금니를 꽉 깨문 홀랜드가 다른 곳으로 연락을 취했다.

"놈들을 B-6 섹터로 인도해. 타격부대와 기계 보병. 변환자까지 동원할 수 있는 건 모조리 동원하란 말이야!"

**

"생각보다 별거 없는데?"

강현이 검에 묻은 피를 털어냈다.

"애초에 일본 가기 전에 잠깐 몸풀기로 온 거긴 하지만 말이야. 너무 시시하면 재미없는데."

강현은 기대했던 재벌집 막장 드라마도 못 보게 됐는데, 전투마저 시시해지면 정말 실망할 것 같았다.

"형. 이제 시작이잖아요. 앞으로 뭐가 나와도 나오겠죠."

"그렇겠지?"

둘이 담소를 나누던 사이 앞쪽에 있던 거대한 문이 열렸다.

"저쪽으로 오라는 것 같은데?"

"가보죠."

강현과 안유성이 통로에 들어서자마자 탈출로를 막겠다는 듯 두꺼운 철문이 쿵- 소리를 내며 닫혔다.

"어차피 도망칠 생각도 없는데 고생하네."

강현이 피식 웃으며 계속 복도를 걸었다.

"왔다."

잠시 후.

앞쪽에서 마력과 함께 부산스러움이 느껴졌다.

복도 끝 코너를 돌자 완전 무장한 특공대 수십 명이 기다리고 있었다.

놈들은 강현을 보자마자 엄청난 총탄 세례를 퍼부었다.

-투두두두두두!

강현은 재빨리 몸을 돌려 총알을 피하고는 한숨을 내쉬었다.

"하아... 또 총이야? 여기 대한민국이 맞긴 하냐? 응?"

"왜 촌티 내고 그래요? 요즘 세상에 총은 필수라고요."

"닥쳐. 인마."

강현의 짜증에 안유성이 낄낄거리며 웃었다.

"일단 대충 뭘 들었는지 한번 봐야겠다."

잠깐 본 것이지만 무언가 거대한 것이 있었던 것 같기도 했다.

강현의 몸이 어지간한 총알은 다 튕겨낸다 해도 예외는 있는 법.

대물 저격총 같은 류가 쏘아대는 대구경 탄환은 강현도 그저 피하는 게 답이었다.

"흐으음... 살짝만 내밀야지."

강현이 슬쩍 복도 끝으로 머리를 내밀었다.

그 순간,

-타앙!

빠르게 쏘아진 탄이 그대로 강현의 이마에 적중했다.

일반 총알과는 비교를 거부하는 엄청난 충격에 강현이 복도 벽에 처박혔다가 튕겨 나왔다.

"형. 괜찮아요? 죽은 거 아니죠?"

이마 중간에 구멍이 난 채로 부르르 떨던 강현이 갑자기 숨을 크게 들이켰다.

"크허억! 시벌! 진짜 뒤지는 줄 알았네!"

강현이 이마를 손으로 매만지자 어느새 상처가 아문 것이 느껴졌다.

"방금 뇌에 구멍 난 거 아니었냐?"

"그건 모르겠는데, 거의 죽은 거 같긴 했어요."

"저 새끼들... 곱게는 안 보내준다."

강현이 어금니를 깨물며 사납게 웃었다.

"어차피 법이고 뭐고 없다 이거지? 그러면 누가 더 편한지 보자고."

강현은 자신에게 위협이 될 수 있는 총기에 대해 제법 알아본 적이 있었다.

방금 놈들이 쏜 것은 나온 지 5년도 되지 않은 최신 대물 저격용 총이었다.

"장갑차 잡으라고 나온 걸 사람한테 쏘냐 새끼들아!?"

강현이 억울하다는 듯 소리쳤다.

아마 상대는 그걸 머리에 정통으로 맞고도 살아있는 인간이 있다는 사실이 더 억울할 것이다.

"야. 내가 신호하면 내 뒤로 바짝 붙어서 달려."

"계획이라도 있어요?"

"당연하지. 내가 누구냐."

강현이 씨익 웃더니 양 손바닥을 펼쳤다.

그러자 손안에 마력구가 각각 3개씩 생겨났다.

"마력폭발로 시야 가리고 접근해서 근접전으로 처리. 오케이?"

"가죠."

"일단 지금 내 뒤로 빠져있어."

강현은 먼저 전방에 보이는 벽에 마력구를 집어던졌다.

-콰앙!

그 충격에 단단해 보이던 벽이 부서지며 흙먼지가 피어올랐다.

"가자!"

그 틈에 코너 쪽을 돌아 나온 강현이 재차 놈들을 향해 마력구를 집어던졌다.

-콰과과과과광!

놈들을 향해 정신없이 쏟아지는 마력구.

연쇄 폭발이 일어나자 굉음과 함께 땅이 진동했다.

거대한 흙먼지에 놈들의 시야가 가려졌다.

제법 큰 충격을 입은 것처럼 보였지만, 사실 놈들이 피해를 입지는 않았다.

마법을 쓰는 능력자들이 강현의 마력구를 완전히 막아낸 것이다.

"됐어!"

하지만 어차피 예상했던 것.

강현은 그저 놈들에게 접근할 약간의 시간만 있으면 충분했다.

-투두두두두!

흙먼지로 시야가 가려지자 놈들이 전방으로 총을 난사했다.

강현은 팔을 교차해 머리만 가린 채로 달려갔다.

"...!"

마침내 복도 끝에 다다르고, 먼지를 뚫고 나오자 경악으로 가득 찬 눈동자들이 강현을 반겼다.

"반갑다."

강현이 가장 앞에 있는 놈의 면상에 주먹을 꽂고, 곧장 그 옆에 있는 놈의 다리를 잡아챘다.

"풍차 돌리기!"

발목을 붙잡은 채로 사람을 휘두르자, 동료에게 맞은 놈들이 사방으로 튕겨 나갔다.

"응?"

그 순간, 거대한 덩치를 한 남자가 튀어나왔다.

다른 놈들보다 머리 하나는 더 큰 남자.

덩치가 휘두른 주먹이 강현의 턱에 작렬했다.

-콰아앙!

엄청난 속도로 날아간 강현이 벽에 처박히며 굉음이 울렸다.

"기고만장해서 날뛰는 꼴이라니. 도저히 못 봐주겠군."

남자가 씨익 웃으며 자신의 팔을 매만졌다.

그는 한쪽 팔 전체가 완전히 금속으로 이뤄져 있었는데, 피저 그룹의 기술이 총망라된 최신 장비였다.

"아이고... 대가리 깨지겠네."

강현이 머리를 매만지며 일어났다.

강현이 멀쩡하게 살아있는 것을 본 남자의 눈이 크게 떠졌다.

"너 뭐냐? 주먹이 왜 이렇게 단단해?"

"그건 내가 묻고 싶군. 어떻게 살아있는 거냐?"

"당연히 내가 너보다 쎄니까 살아있지. 새꺄."

말을 하며 달려나간 강현이 재빨리 남자의 팔을 붙잡았다.

그리고 온 힘을 다해 남자에게서 팔을 뽑아냈다.

"잠깐 무슨 짓을...!"

남자는 저항하려 했지만, 기계의 힘을 빌려도 완력에서 상대가 되지 않았다.

-투둑, 툭!

어깨의 연결부에서 불쾌한 소리가 들리기 시작했다.

"여기가 연결부구나?"

그것을 본 강현이 씨익 웃으며 손을 휘둘렀다.

-콰지직!

강현의 손날치기에 놈의 어깨가 박살 나며 팔이 뽑혀 나왔다.

"크아아아!"

남자가 고통에 비명을 내질렀으나, 강현은 팔을 살펴보기에 바빴다.

"흐음... 딱히 쓸만한 곳은 없는 것 같은데."

팔을 이리저리 돌려보던 강현이 손을 붙잡았다.

"잡는 느낌은 나쁘지 않네."

강현이 팔을 둔기처럼 휘둘러 그대로 남자의 턱을 가격했다.

-퍼억!

남자는 단숨에 턱이 깨어지고, 눈이 까뒤집힌 채로 넘어갔다.

"타격감은 나쁘지 않네."

최첨단 장비의 사용처가 정해지는 순간이었다.

**

"도대체 뭣들 하는 거야!"

홀랜드가 고함을 치며 책상을 내리쳤다.

"후우..."

이제 제1선이 붕괴한 것뿐이다.

하지만 더 지켜볼 필요는 없었다.

"헬기를 준비해."

"알겠습니다."

일단 여기를 떠야 한다.

저 정신 나간 놈들이라면 금세 이곳까지 들이닥칠 것이다.

"젠장. 본사로 돌아가면 한 소리 듣겠군."

아마 제법 중한 징계를 받을지도 모른다.

그렇다고 해도 징계가 두려워 목숨을 버릴 수는 없는 일.

-콰앙! 쾅!

아래쪽에서 들리던 울림이 조금씩 가까워지고 있었다.

홀랜드의 마음이 조급해졌다.

"뭐하는 거야!? 서둘러!"

"지사장님. 우선 옥상으로 이동해서 대기하시는 게 좋겠습니다."

비서의 말에 홀랜드가 고개를 끄덕였다.

"젠장. 내가 어쩌다가 이 꼴이 난 건지."

모든 게 힘이 부족해서다.

조금만 더 연구에 진척이 있었더라면.

그래서 더욱 강한 괴수. 더욱 강한 개조 인간을 만들어냈더라면 분명 놈들을 처리할 수 있었으리라.

"기다려라. 다음에는 지금처럼 웃고 있지 못할 거다."

홀랜드가 CCTV 화면을 보며 씹어 내뱉듯이 말했다.

그곳에는 잠깐 사이 또 한 무리의 군인들을 격파한 채로 미소짓고 있는 강현이 있었다.

**

강현과 안유성은 파죽지세로 나아갔다.

"너희가 무슨 로보캅이냐!?"

팔다리 한 짝이 쇳덩이로 된 놈들.

"이건 또 뭐하는 놈이야?"

묘하게 짐승을 합쳐놓은 것처럼 기괴하게 놈들.

"총질하면 죽여버린다! 야야! 거기 너! 바주카는 너무하잖아!"

대전차 미사일을 든 놈들까지.

온갖 놈들이 앞을 막아섰지만, 강현과 안유성은 굴하지 않았다.

"후우... 아까부터 계속 물어서 미안한데. 여기 뭐하는 기업이라고?"

"제약회사 비슷한 거예요."

강현이 거칠게 머리를 쓸어넘겼다.

"시발! 제약은 지랄! 마약쟁이들이 운영해서 제약회사인가? 도대체 뭐하는 곳이야!?"

기상천외한 놈들이 끝도 없이 등장하니 정신이 하나도 없었다.

현대와 SF, 판타지까지.

장르를 가리지 않고 골고루 나와주니 더 미칠 지경이었다.

"잠깐만. 이거 헬기 소리 아냐?"

그때 강현의 귀에 익숙한 로터음이 들렸다.

창가로 다가가자 더욱 확실해졌다.

"튄다. 이거 튀려는 거야."

"어떡할래요?"

"어떡하긴! 네가 더 급해야지. 왜 이렇게 태평해?"

"사실 이 정도 했으면 우리가 받은 피해보다 한 10배는 넘게 돌려준 거라서... 그리고 여기 지사장 얼굴을 잘 알고 있어요."

"그래?"

"네. 그 아저씨 성격에 그냥 당하지는 않을 테니까. 나중에 복수하려고 찾아올 거란 말이죠?"

"그때 머리통을 깨부순다?"

"정답!"

안유성이 해맑게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똥싸네. 족치려면 한 번에 끝내야지 뭘 기다려?"

인상을 팍 찡그린 강현이 필시언의 해머를 꺼냈다.

"준비해라. 5초. 그 안에 뚫고 들어간다."

'전사의 마지막 불꽃' 반지에 내장된 스킬.

*전사의 죽음 – 5초간 근력 5배 증가

1일 1회 사용.

사용 후에는 극심한 후유증이 있지만 강현은 자신의 회복력을 믿었다.

"간다!"

전사의 죽음을 활성화한 강현이 필시언의 해머를 들고 전력으로 점프했다.

그 충격에 단숨에 바닥이 깨어지고, 천장으로 날아오른 강현이 필시언의 해머를 휘둘렀다.

-콰아앙!

인간을 아득히 초월한 근력에 마력을 잔뜩 때려 넣은 해머가 작렬하자 폭발음이 울렸다.

"다시 간다!"

시간이 없었다.

공격 한방에 천장이 훤하게 드러났어도 아직 남은 층이 많았다.

-콰앙, 콰앙! 쾅-!

단 5초 만에 7개의 층을 박살 낸 강현이 순식간에 옥상으로 올라왔다.

옥상에 올라서자 다급히 떠나가는 헬기와 그곳에 탑승해 있는 금발의 중년 남자가 보였다.

"찾았다."

강현과 눈이 마주치자 남자의 얼굴이 경악으로 물들었다.

"너구나?"

강현은 본능적으로 알 수 있었다.

저 남자가 이 마약 회사.

아니, 제약 회사의 보스라는 것을.

200화 협상 전문가(3) - 20.04.13

200. 협상 전문가(3)

"저놈이 왜 저기 있는 거야!?"

강현이 건물 옥상을 뚫고 올라오자 홀랜드가 깜짝 놀랐다.

"분명 조금 전까지 중간층에 있었는데..?"

홀랜드가 헬리콥터에 탑승하기 위해 출발했을 때만 해도 강현이 도착하려면 한참이나 남은 상태였다.

이해할 수 없는 사태에 홀랜드가 혼란스러워하던 그때, 강현과 그의 눈이 마주쳤다.

"..."

화면에서 보는 것과 실제로 두 눈을 마주하는 것은 차원이 달랐다.

강렬한 눈을 표현할 때 흔히 사용하는 맹수의 눈빛.

단순히 그런 단어로 정의할 수 있는 성질이 아니었다.

끝을 알 수 없는 광기.

그리고 폭력과 잔인함.

온갖 것들이 그 눈에서 휘몰아치고 있음을 느낄 수 있었다.

"크윽! 쏴라! 죽여버리란 말이야!"

홀랜드는 자신이 겁먹은 것을 인정하기 싫은 만큼 더 불같은 목소리로 명령을 내렸다.

헬기에 탑승해 있던 용병들이 강현을 향해 총을 난사했다.

**

옥상에 도착한 강현이 인상을 찡그렸다.

"아으으..."

앓는 소리가 절로 나왔다.

말 그대로 온몸이 부서질 것 같은 느낌.

"이게 확실히 후유증이 심하긴 하네."

전사의 죽음은 5초 동안 상상 이상의 힘을 주지만, 그 대가는 결코 작지 않다.

괜히 이름에 '죽음'이라는 단어가 들어갔겠는가.

5초가 지나면 사실상 사용자 대부분이 죽음을 맞이했기에 그런 이름이 생긴 것이었다.

"움직일 만한데?"

하지만 강현은 달랐다.

원래라면 전신의 근육이 끊어지고 뼈가 부러져야 정상.

그런데 강현은 엄청난 회복 속도 덕에 이미 어느 정도 움직이는 것이 가능했다.

움직일 때마다 끔찍한 고통이 밀려오긴 했지만.

"그래. 이거지!"

고통은 이제 강현에게 각성제 이상의 의미를 주지 못했다.

실시간으로 신체가 난도질당하는 느낌.

그럼에도 강현이 웃으며 고개를 들었다.

강현과 홀랜드의 눈이 정확하게 마주쳤다.

"기다려라."

궁지에 몰린 쥐새끼의 눈을 한 홀랜드.

"크윽! 쏴라! 죽여버리란 말이야!"

놈의 명령에 헬기에서 총알이 날아왔다.

강현은 양팔을 교차해서 얼굴을 가리고 달리기 시작했다.

엄청난 속도로 옥상을 가로지른 강현이 빌딩 끝에서 전력으로 점프했다.

-콰앙!

시멘트를 박살내며 날아오른 강현이 헬리콥터가 착륙할 때 바닥에 닿는 기다란 관(스키드)을 붙잡았다.

갑자기 무게중심이 흔들린 헬리콥터가 크게 휘청였다.

"같이 좀 탑시다!"

헬기 끝에서 총을 들고 있던 용병이 토끼 눈을 하며 강현을 바라봤다.

강현은 재빨리 손을 뻗어 용병을 아래로 집어 던졌다.

"으아아아아!"

용병은 수십, 어쩌면 수백 미터 상공에서 떨어지며 비명을 내질렀다.

"쏴! 쏘란 말이야!"

남은 용병들이 강현을 향해 총을 갈겼으나, 그들도 결국 먼저 간 이와 같은 전철을 밟았다.

"끄아아아아!"

"으어어!"

용병들이 헬기에서 추락하며 한탄이 섞인 비명을 내질렀다.

"이제 너만 남았네?"

강현이 씨익 웃으며 홀랜드를 바라봤다.

"으으..! 꺼져! 꺼지란 말이야!"

홀랜드는 완전히 겁을 집어먹은 어린아이처럼 벌벌 떨고 있었다.

강현에게 조금이라도 멀어지기 위해 발버둥 치는 홀랜드.

"괜찮아. 이제 본격적으로 협상을 시작하자고."

그렇게 방심하며 강현이 홀랜드에게 접근하던 순간,

'걸렸다.'

홀랜드가 눈을 빛내며 힘을 발동했다.

-콰르르륵!

홀랜드의 한쪽 팔이 기괴한 소리와 함께 거대해지더니 날카로운 손톱이 돋아났다.

반응하기 힘들 정도로 빠르게 강현의 목을 향해 찔러오는 홀랜드의 손.

"죽어!"

한눈에 봐도 위협적인 홀랜드의 공격이었으나,

"뭐하냐."

허무하게 강현의 손에 막혔다.

강현은 홀랜드의 손을 붙잡은 채로 서서히 비틀었다.

"어, 어어.. 아아아!"

거기에 따라 홀랜드의 몸이 같이 뒤틀리며 신음이 새어 나왔다.

"아아아아! 그만!"

"뭘 그만해.""하, 항복! 그만해! 이러다 부러지겠어!"

강현이 그대로 무릎을 찍어 올렸다.

-콰직!

홀랜드의 팔꿈치가 기형적으로 뒤틀리며 뼈가 튀어나왔다.

"끄아아아아!"

고통에 눈물을 줄줄 흘리는 홀랜드를 보며 강현이 미소를 지었다.

"슬슬 대화를 시작해 볼까?"

**

배데스 길드에서는 작년부터 전국 곳곳에 안전가옥을 만드는 작업을 하고 있었다.

간단한 방음 시설과 마력 차단 기술 등 여러 가지가 첨단 설비가 들어간 안전가옥.

제법 비용이 들었지만, 그만큼 필요한 상황에 톡톡한 효과를 볼 수 있었다.

바로 지금처럼.

"당장 풀어! 풀라고!"

때마침 근처에 있는 길드 안전가옥으로 온 강현이 홀랜드를 바닥에 묶었다.

"조용히 좀 해라. 시끄러워 죽겠네."

강현이 홀랜드의 오른쪽 팔.

정확히는 조금 전 부러져 뼈가 튀어나온 부분을 발로 툭 찼다.

"끄아아아아!"

문장 그대로 뼈가 흔들리는 느낌에 홀랜드가 자지러졌다.

"도대체 이러는 이유가 뭐야!? 내가 무슨 잘못을 했다고!?"

"혜성 그룹에 연구소 습격한 거. 너희들 짓이잖아."

"모르는 일이라고 했잖으아아아!"

홀랜드가 시치미를 떼려 하자 강현이 재차 팔꿈치를 발로 찼다.

"자꾸 귀찮게 할래?"

"나는 정말 모르는 일이라고!"

"그래? 그럼 뒤져야지."

강현이 인벤토리에서 필시언의 해머를 꺼냈다.

한눈에 바도 무시무시한 무게의 해머를 본 홀랜드의 눈이 지진이라도 난 듯 흔들렸다.

"자, 잠깐만! 도대체 왜 이러는 거야? 나는 모르는 일이라니까!? 그리고 우리는 민간 기업이라고! 네가 뭔데 민간인을 이렇게 붙잡아서…."

강현이 인상을 찌푸리며 홀랜드의 말을 끊었다.

"민간 기업 같은 소리 하네. 무슨 민간 기업이 기관총에 바주카에 생체실험에 로보캅에! 시벌. 뭔 말 같지도 않은 소리를 하고 있어? 내가 그렇게 등신처럼 보여?"

"..."

"할 말 끝났으면 곱게 가라."

"피저 그룹에서 가만히 있지 않을 거다...!"

홀랜드가 분노에 찬 얼굴로 중얼거렸다.

"어쩌라고. 피자인지 피저인지 나는 처음 듣는 곳이니까 그딴 협박은 안 통해."

홀랜드는 강현의 말이 진심인지 알아보려는 것처럼 빤히 쳐다봤다.

"너... 진심이군..?"

"그럼 거짓말이겠냐?"

홀랜드는 뭐 이런 인간이 다 있냐는 듯이 쳐다봤다.

'21세기에 피저 그룹을 모르는 놈이라니!'

세계 기업 브랜드 가치 순위 3위.

그만큼 피저 그룹에서 하는 것은 모든 인류의 생활에 밀접하게 관련돼 있다고 볼 수 있었다.

'아무리 피저 그룹이 한국에 진출한 분야가 별로 없다지만...'

고개를 저은 홀랜드가 필사적으로 정신을 차렸다.

지금 중요한 건 피저 그룹의 브랜드 가치 따위가 아니었다.

당장 자신의 목이 떨어지게 생겼으니 뭐라도 해야 했다.

"됐고. 마지막 기회. 딱 5초 준다."

"..."

"똑바로 대답 안 하면 여기 있는 이 커다란 망치로 네 머리를 뽀뽀해 줄 거야. 아주 세게! 뭔 말인지 알지?"

강현이 눈썹을 으쓱거리며 말했다.

"미친놈."

홀랜드의 솔직한 감상평이었다.

"오."

'어떡하지? 다 말해야 하나?'

"사."

'여기서 살아난다 해도 피저 그룹에게 죽을 거야.'

"삼."

'하지만 말하지 않으면 지금 죽는다.'

"이."

강렬한 키스까지 2초가 남은 순간.

"알겠어 말할…."

홀랜드는 입을 열려고 했다.

그런데 안유성이 문을 박차고 들어왔다.

"형! 자료 전부 찾았어요! 이제 그 아저씨는 필요 없으니까 보내줘요!"

"그래."

홀랜드의 눈이 부릅떠졌다.

"잠깐! 잠깐만!"

강현이 당황하는 홀랜드를 보며 씩 웃었다.

"늦었어."

강현이 이를 꽉 깨물며 전력으로 내려친 해머.

-콰직.

홀랜드의 머리가 깨지며 진득한 피가 흘러나왔다.

**

"여보세요."

-도대체 하루 사이에 무슨 짓을 벌인 겁니까!?

"아아. 귀청 떨어지겠네."

피저 바이오에서 볼일을 끝내고, 안유성의 저택으로 돌아가는 길.

일을 치른 지 고작 한 시간이 흘렀을 뿐인데 신태길의 귀에 들어간 것 같았다.

-강현 씨. 피저 그룹입니다! 아니, 그것보다 미국입니다!

강현이 스마트 폰을 귀에서 멀리하며 신태길의 잔소리를 흘려들었다.

"신태길 씨. 솔직히 까고 말해서. 이제 다른 나라 눈치 볼 필요가 있어요? 미국이 그렇게 대단한가? 편견을 버려요. 걔들도 지금 자기 땅덩이 하나 똑바로 못 지키고 있잖아요."

-...

맞는 말이었다.

정부 자체가 무너지는 국가들이 나오는 상황에서도 미국은 타국에 아무런 지원을 하지 않고 있었다.

아니, 미국 뿐만 아니라 세계 어디든 마찬가지였다.

모두 자신의 영토를 지키는 것조차 버거워하고 있는 것이 전 세계의 현실이었다.

"이런 상황에! 저기 코쟁이들이 우리 나라 최고 기업! 그것도 우리 길드 부길드장이 물려받을지도 모르는 기업을 공격했는데. 가만히 있을 이유가 있냐 이 말이죠. 내 말이 틀렸어요? 이제 적어도 받은 만큼은 돌려줘야 할 거 아니에요."

-하아... 알겠습니다.

강현의 표현이 직설적이고 없어 보여서 그렇지, 근본적으로는 맞는 말이었다.

이제 세계에서 대한민국은 더 이상 누구의 눈치를 볼 위치가 아니었다.

"그놈들한테 전해줘요. 이 정도로 넘어간 걸 감사하게 생각하라고."

-...

"내가 워낙 배포가 큰 사람이라서. 하하하!"

신태길과의 통화를 종료하자 때마침 안유성의 저택에 도착해 있었다.

"끝났어요?"

"어."

"잘 해결된 것 같네요."

"그렇지? 사람들이 너무 편견에 갇혀 있다니까. 시대가 변했으면 마인드도 바뀌어야지."

"그러게요."

오늘 강현의 대화는 의외로 안유성도 생각하지 못했던 것들이다.

자기도 모르게 자신을 틀 안에 가두는 것.

인간이라면 모두가 가지는 본능과도 같은 것이었다.

하지만 한계를 부수는 것에 너무 익숙했던 강현은 그러한 틀 자체가 굉장히 유연한 것 같았다.

**

저택 거실로 들어온 안유성은 피저 바이오에서 가져온 자료를 펼쳤다.

그곳에는 피저 바이오의 최근 연구성과. 혜성 그룹을 공격 계획 등, 굉장히 다양한 내용이 담겨 있었다.

"야. 언제 그런 걸 다 챙겼냐?"

"이왕 복수하러 가는 건데 이것저것 챙기면 더 좋잖아요?"

"너도 참 많이 변했네. 머리통 깨부수는 것 말고는 아무것도 관심이 없는 것 같더니. 욕심이란 게 다 생겼어."

생각해보면 과거 강신 길드의 안무석 회장 납치 사건.

그 이후로 안유성이 조금 변한 것 같기는 했다.

"뭐, 그냥 철이 좀 든 거겠죠."

시니컬하게 웃으며 자조적으로 말하는 안유성.

"와! 진짜 적응 안 되네. 하던 대로 해. 새꺄."

어쩐지 안유성이 더 잘생겨 보이는 느낌에 강현의 미간이 찌푸려질 때였다.

"도련님. 회장님이 오셨습니다."

한 직원이 다가오더니 공손한 목소리로 말했다.

"어? 아버지가?"

"뭐야? 어떻게 알고 왔대?"

"아, 일을 처리했다고 연락은 넣었거든요. 그런데 바로 이렇게 찾아오실 줄은 몰랐네요."

안무석 회장은 어지간해서 직접 움직이는 경우가 없다.

게다가 지금 도착한 시간을 보면 안유성의 연락을 받자마자 바로 출발했다고 봐야 했다.

"아직 치료도 덜 끝난 걸로 아는데."

"아들놈이 한 건 했다니까 보고 싶나 보지."

강현이 중얼거릴 때였다.

"맞다. 아들놈이 한 건 해서 기쁜 마음에 달려왔지."

안무석 회장이 거실로 들어왔다.

"오셨어요."

안유성이 가볍게 고개를 숙여 인사하고,

"오랜만입니다."

강현이 대충 고개를 까딱였다.

"인사치레는 됐네. 우리가 딱히 그렇게 편한 사이도 아니고."

"그럼 됐고요."

강현의 반응에 안무석이 피식 웃었다.

천천히 다가온 안무석이 테이블 위에 있는 자료들을 살펴봤다.

"역시... 내 생각이 맞았다."

안무석의 말에 안유성이 의아한 표정으로 그를 바라봤다.

"이제 시대가 변했어. 앞으로는 유성이. 너 같은 자들이 지배하는 세상이 오겠지."

비록 경기도라고 하나, 수도권에서 대낮에 총싸움이 벌어졌다.

그런데 지금 상황은 어떤가.

피해를 본 미국 기업은 입을 다물고 있고, 사건의 주범이라 할 수 있는 둘은 편안하게 저택에서 강탈한 자료를 살펴보고 있다.

전후 관계를 떠나서 분명 법에 저촉되는 일이었으나, 아무도 그것에 대해 토를 달지 않는다.

"단순히 머리만 쓰는 놈들의 세상은 이제 끝난 거야. 법은 더 이상 우리를 지켜주지 않지."

안무석이 고개를 돌려 안유성을 바라봤다.

"그래서 나는 너에게 이 일을 맡기려 했다. 내가 아닌 너. 그리고 우리 그룹 전체를 위해서."

"..."

안유성은 대답하지 않고 가만히 테이블을 바라봤다.

무언가를 고민하는 것처럼 보였다.

그 순간, 갑자기 문이 열리며 누군가가 들어왔다.

"회장님! 죄송합니다. 부회장님께서 갑자기 찾아오셔서..."

"뭐?"

직원의 말과 함께 모두의 고개가 돌아가고,

"아버지. 뭐하는 겁니까!"

나타난 이는 혜성 그룹의 부회장.

안준성.

안무석 회장의 장남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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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햐... 드디어 시작하네."

강현은 어느새 멀리 떨어진 곳으로 이동해 자리를 깔고 앉았다.

인벤토리에서 팝콘을 꺼낸 강현이 한 줌 쥐어 우걱우걱 씹어 먹었다.

"역시 재벌집 막장 드라마가 최고지. 뭐야? 팝콘도 꿀맛이네!"

정서빈 연구소 신상 아이템 팝콘.

아직 출시 전인데, 강현만 특별히 받은 것이었다.

"역시 사람은 잘나고 봐야 해."

강현은 지금 이 순간만큼은 정말 정서빈 연구소와 협업하기를 잘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201화 협상 전문가(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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