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4. 각개전투(6)
"올룬들이 모두 당했군."
최동우가 있는 곳에 도착한 가투 아사스.
그의 눈에 보이는 것은 머리가 사라진 채로 바닥에 쓰러져 있는 올룬들이었다.
"저들은 어디서 나타난 거지? 이 땅에 이 정도 수준의 인간들이 있었나?"
가투의 말에 옆에 있던 오칼 올룬이 고개를 숙였다.
"저들은 바로 아래에 있는 대한민국이라는 국가에서 온 능력자들입니다."
오칼 올룬은 한때 바노 쿨사와 함께 한국에서 활동했었기에 최동우에 대해 잘 알고 있었다.
"특히 저기 창을 든 자는 대한민국에서 손꼽히는 강자입니다."
"그렇다면 바노 쿨사가 저자에게 당한 건가?"
"그건 아닙니다."
오칼의 대답에 가투 아사스 이빨을 딱 부딪쳤다.
"재미있군... 흥미로워."
이 북한이라는 나라는 너무 시시해서 하품이 나올 지경이었다.
하지만 바로 아래쪽에 있는 나라는 이곳과 달리 조금 재미있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렇다고 해도 바노 쿨사가 당한 것이 의문이긴 하지만... 그건 대한민국이라는 곳에 가면 알게 되겠지."
그렇게 둘이 대화를 하는 사이, 어느새 능력자들은 둘을 포위하고 전투 준비를 끝마친 상태였다.
"오칼 올룬. 죽지 마라."
"예."
총 10인의 올룬 중 다섯은 중국으로 보냈고 넷은 이곳에서 당했다.
즉, 이제 가투 아사스를 보좌할 올룬은 여기 있는 오칼 올룬이 끝이라는 뜻이었다.
후에 귀찮아질 것을 대비한 가투는 빠르게 전투를 끝내기로 결정했다.
"..."
무겁게 내려앉은 정적.
먼저 움직인 것은 가투 아사스였다.
-촤아아아악!
단 한번 검을 휘두른 것으로 단숨에 수십 명의 능력자가 허리가 잘린 채로 죽어나갔다.
"젠장! 모두 도망쳐라-!"
동시에 창을 든 남자, 최동우가 큰 소리로 외치며 가투에게 달려들었다.
가투는 지체 없이 다시 검을 휘둘렀다.
검에서 뻗어나간 검은 마력이 단순에 최동우를 덮쳤다.
최동우가 다급히 창을 들어 마력을 막아냈다.
-서걱!
"큭!"
하지만 단숨에 창이 반으로 갈라지고, 최동우의 가슴에 긴 상처가 생겼다.
그럼에도 최동우는 달려오는 것을 멈추지 않았다.
"호오, 살아있는가."
피를 흩뿌리며 달려오는 최동우를 본 가투가 작게 감탄했다.
"일격에 죽일 생각으로 휘둘렀건만."
이곳에서 그의 공격을 버틴 인간은 최동우가 처음이었다.
달려오던 최동우는 어느새 다른 창을 꺼내서 자신에게 던지고 있었다.
붉은 마력이 넘실거리는 창.
-콰아아앙!
가투가 창을 쳐내자 굉음이 울렸다.
"위력은 제법이군."
회심의 일격이 허무하게 막혔지만, 최동우는 예상했다는 듯이 곧장 다음 공격을 이어갔다.
-콰아앙! 콰앙!
가투가 여유롭게 최동우 창을 받아냈다.
검에 흘려진 창이 바닥을 칠 때마다 폭탄이 터지는 것 같은 굉음이 울렸다.
"기술도 나쁘지 않아."
자신에게 공격을 가하면서도 최동우는 흘깃흘깃 눈을 돌려 연합원들이 잘 도망치는지 확인했다.
"하지만 건방지군"
그 모습을 본 가투가 크게 검을 휘둘렀다.
단순해 보이지만 최동우가 막기 힘든 경로로 다가오는 검.
최동우는 눈을 부릅뜨고 창을 들어 막았으나, 창이 절반으로 갈라졌다.
-촤아아아!
최동우의 상반신이 사선으로 갈라지며 피가 뿜어졌다.
최동우의 부릅떠진 눈은 쓰러지면서도 가투를 바라보고 있었다.
"아쉽군. 쿨사 하나만 있더라도 영원히 아곤님을 위해 싸우는 전사로 만들어 주었을 텐데."
가투 아사스도 마법에 조예가 아주 없는 것은 아니었지만 그의 전공은 어디까지나 검.
"아쉽군. 아쉬워..."
가투는 이곳에 쿨사급의 마법사 하나만 있었더라도 최동우를 뛰어난 전사로 되살렸을 것이다.
그 정도로 최동우의 힘은 탐나는 것이었다.
"아쉽지만 어쩔 수 없지."
가투가 바닥에 쓰러진 최동우를 향해 검을 휘둘렀다.
**
같은 시각.
강현은 여전히 홀로 던전을 공략하고 있었다.
A등급 던전 '다키란의 미로'.
공략 첫날 혼자 통로로 들어간 강현은 그 이후로 계속 혼자서 싸워왔다.
"키에에에!"
"어쩌라고. 새꺄!"
강현이 주둥이를 쩍 벌리며 괴성을 지르는 몬스터의 턱주가리를 전력으로 후렸다.
단숨에 놈의 턱이 박살나며 허공을 날아 벽에 처박혔다.
"하아... 좀 피곤하긴 하네..."
강현의 주위에는 방금 죽인 놈과 같은 몬스터들의 사체가 사방에 널려 있었다.
대충 보아도 100구는 넘어 보이는 사체들.
이런 전투를 강현은 무려 일주일이 넘는 시간동안 벌여왔다.
"진짜 죽겠다..."
한숨을 내쉰 강현이 철퍼덕 바닥에 주저앉았다.
일주일 내내 싸움을 벌여온 강현은 길거리의 거지보다 더한 몰골을 하고 있었다.
혼자서 움직인 탓에 제대로 휴식을 취할 수 없는 것은 물론이고, 항상 쪽잠으로 수면을 취한 탓에 눈 밑에는 거무튀튀한 다크서클이 짙게 내려와 있었다.
"레벨업 한번 안 해주냐. 어?"
강현이 잔뜩 인상을 쓴 채로 허공을 향해 주먹을 휘둘렀다.
"관리자인지 뭔지. 레벨업 좀 시켜 달라고."
하필이면 던전에 들어오기 직전에 레벨이 올라 90레벨 도달한 강현이었다.
그래서인지 지난 일주일간 사투를 벌여 왔음에도 레벨은 도무지 오를 기미가 보이질 않았다.
"이러다 진짜 죽겠다..."
마지막으로 이렇게 피곤에 절을 정도로 싸운 게 언제인지 생각나지 않을 정도였다.
"몰라. 일단 잠 좀 자자. 죽이던지 살리던지 맘대로 해. 시벌."
그렇게 강현의 눈이 점차 감기던 그 순간.
[레벨어업-!]
"응? 레벨어업?"
평소보다 묘하게 더 경쾌한 메시지와 함께 강현의 레벨이 올랐다.
"뭐야? 진짜? 정말로!?"
조금 전까지 죽어가던 강현의 눈에 생기가 돌기 시작했다.
바닥난 마력도 완전히 차올랐고, 제대로 치유되지 않아 남아있던 상처들이 말끔하게 사라졌다.
"크하하하!"
비록 여전히 거지꼴이긴 하지만 강현은 정말 다시 태어난 것처럼 상쾌했다.
"다 죽었어!"
이 기세라면 정말 혼자서 노말 코어까지 갈 수 있을 것 같았다.
시간이 얼마나 걸릴지는 모르겠지만, 일주일 넘게 한 길만을 향해 걸었으니 코어가 그리 멀지 않았을 것이다.
"마력감지가 안 되는 게 아쉽긴 하네. 벽도 안 부서지고."
이곳은 철저하게 미로 속을 방황하게 하는 것이 목적인지, 전혀 마력을 감지할 수 없었다.
이전처럼 해머를 휘둘러 벽을 부수려고 했지만 그것도 여의치 않았다.
때문에 노말 코어까지 얼마나 남았는지, 제대로 가고 있는 것인지 아무것도 알 수 없는 상황이었지만 괜찮았다.
"가다보면 나오겠지. 아니면 다른 놈들이 클리어 해주거나."
누군가 코어를 부쉈을 때 그곳에서 멀리 떨어져 있으면 그 사람에게도 포탈이 생긴다.
강현은 정 안되면 자결을 해서 집으로 돌아가면 되니 이곳에 갇힐지도 모른다는 걱정은 하지 않았다.
"읏차! 다시 가볼까."
힘차게 바닥에서 일어난 강현이 엉덩이를 털어다.
그러자 끈적끈적하게 눌어붙은 피와 몬스터의 체액들이 손에 묻어 나왔다.
"에이, 시벌."
다음에 던전에 들어올 때는 꼭 갈아입을 옷을 챙겨 와야겠다고 다짐하는 강현이었다.
**
신사 길드의 길드장 임현성.
신사 길드라는 이름에 걸맞게 그는 항상 깔끔한 것과 매너를 강조했으며, 던전 밖에서는 늘 정장을 입고 다녔다.
"후우..."
그랬던 그가 지금은 완전히 거지꼴을 하고 있었다.
"이봐요. 팀장. 노말 코어에는 언제 도착하는 겁니까?"
"던전 내부의 마력이 뒤엉켜서 감지가 불가능한 상황입니다. 이대로 계속 나아갈 수밖에 없습니다."
"며칠 째야? 이러다 다 죽겠어."
임현성이 팀장으로 있는 5팀은 총 83명으로 가장 많은 능력자가 속해 있었다.
하지만 대략 일주일 정도가 흐른 지금.
남아 있는 사람은 48명에 불과했다.
그사이 무려 35명이나 되는 능력자가 죽은 것이다.
그것도 어중이떠중이가 아닌 대한민국 최고의 능력자들이.
'쉽지 않을 거라 생각하긴 했지만... 예상보다 더 힘들어.'
몬스터가 밤낮을 가리지 않고 끊임없이 밀려들어왔다.
통로 중간에 설치된 교묘한 함정들은 방심하는 순간 목숨을 앗아갔다.
'마력 밀도가 짙어지는 걸로 봐서 제대로 가고 있는 거긴 한데...'
그렇게 임현성이 미간을 찌푸리며 고민할 때였다.
"코어다!"
누군가가 외치는 소리에 모두의 시선이 모였다.
"정말이야! 노말 코어야!"
마침내 찾은 코어!
임현성이 능력자들을 제치고 앞으로 나갔다.
"모두 조심하십시오. 코어를 지키는 몬스터들이 있을…!"
말을 하던 임현성이 갑자기 멈춰 섰다.
그의 예상과 달리 노말 코어에는 아무런 몬스터가 없었기 때문이다.
정확히는 이미 죽어있는 몬스터 뿐이었다.
"벌써 누가 도착한 건가?"
능력자들이 수군대던 그때, 몬스터 사체 사이에서 누군가가 벌떡 일어났다.
"거, 왔으면 조용히 좀 합시다. 오랜만에 푹 쉬려는데."
"이 목소리는... 강현?"
누구인지 알아볼 수 없을 정도로 꾀죄한 몰골이었지만 분명 들리는 목소리는 강현의 것이었다.
자세히 보니 확실히 체격도 비슷한 것 같았다.
"뭐야? 강현이 어떻게 살아있는 거야!?"
"혼자서 여기까지 왔다고? 말이 안 돼!"
"강현이 간 통로가 편한 길이었던 건가..."
5팀의 능력자들은 이 상황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지 알 수 없었다.
혼자서 미로에 들어간 강현이 5팀보다 먼저 온 것으로도 모자라서 노말 코어의 몬스터까지 모조리 죽였다.
사체들을 확인해 보니 그중에는 동료의 목숨을 앗아갔던 강력한 놈들도 섞여 있었다.
"..."
그런 5팀에서도 가장 충격을 받은 것은 바로 팀장인 임현성이었다.
'이렇게까지 차이난다고..?'
신사 길드는 만들어진지 막 1년이 된 길드임에도 불구하고 빠르게 치고 올라와 현재 10위에 랭크돼 있었다.
물론, 대기업의 후원이 없었다면 단기간에 이렇게 빠르게 성장하긴 힘들었을 것이다.
하지만 그럼에도 임현성의 능력이 뛰어나다는 것을 부정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단순히 돈만 가지고는 최상위권의 능력자를 살 수 없었으니까.
때문에 임현성도 자신의 능력을 믿었고, 항상 자신감에 차있었다.
'조만간 1위까지 치고 올라가 주지.'
시작부터 지금까지 굳건히 1위의 자리를 지키고 있는 단군.
빠르게 치고 올라와 2위를 쟁탈해간 배데스.
오랫동안 길드를 안정적으로 성장시킨 3위의 불사.
사람들은 그들을 추앙하지만 언젠가 그 모두를 자신의 아래로 만들 자신이 있었다.
'분명 그랬는데...'
그때였다.
"먼저 와 있었군요."
다른 통로에서 몇몇 사람들이 걸어왔다.
"단군 길드다."
단군 길드는 모두가 몰골을 하고 있는 상황에서 단군은 비교적 멀끔한 모습이었다.
그리고 단군의 가장 앞에서 당당하게 걸어오는 여성, 한세연은 처음과 별반 다를 바가 없는 모습으로 깔끔한 모습이었다.
게다가 처음 출발한 15명. 모두가 그대로 생존해 있었다.
"그 쪽수를 가지고도 나보다 늦다니. 단군도 한물갔네요."
강현이 히죽 웃으며 한세연에게 시비를 걸었다.
"다가오지 마시죠. 냄새납니다."
"뭐요!?"
아옹다옹하는 둘을 보며 임현성이 조용히 눈을 감았다.
'내가 오만했구나...'
뛰는 놈 위에 나는 놈이 있는 법.
최고의 자리라는 문턱은 그의 생각보다 더 높은 것 같았다.
185화 우연과 필연 사이(1) - 20.01.17
185. 우연과 필연 사이(1)
현재까지 노말 코어에 도착한 팀은 1팀과 2팀. 그리고 5팀이다.
아직 불사 길드의 한명도가 이끄는 3팀과 블랙나이츠의 이청운이 이끄는 4팀이 도착하지 않은 상황이었다.
"어떻게 할까요?"
본래 공략대의 목적은 노말 코어 공략이었다.
그러니 굳이 다른 팀을 기다릴 필요 없이 당장 코어를 부수면 됐다.
코어가 부서지면 아직 오지 못한 팀들에게도 포탈이 열릴 것이고, 모두가 던전 밖으로 나오면 그것으로 공략은 종료된다.
하지만 한세연은 무언가 다른 꿍꿍이가 있는 것 같았다,
강현이 한세연을 바라봤다.
"무슨 의미로 하는 말이에요?"
"굳이 지금 노말 코어를 부술 필요가 있냐는 거예요."
"그러면?"
"여기서 다른 팀이 도착하기를 기다렸다가, 다 같이 의논을 하고 싶어요. 이대로 메인 코어까지 공략하는 게 어떤지."
한세연의 말에 강현이 고민했다.
'단군 길드는 노말 코어까지 오는 동안 아무도 죽지 않았으니까. 자신감에 차있을 만도 하지.'
그리고 강현 또한 비슷한 생각이었다.
'확실히 이 던전은 나랑 상성이 잘 맞아.'
다키란의 미로는 의외로 강현이 공략하기 쉬운 형태의 던전이었다.
보통 공략대가 이 던전에서 가장 힘든 것이라면, 곳곳에 산재하고 있는 위험한 함정들이다.
하지만 강현은 단번에 머리나 심장이 터지지 않는 이상 순식간에 부상을 치유해 버린다.
치명적인 독 공격 또한 그거 강현이 내성 능력을 올려주는 고마운 놈들일 뿐이다.
즉, 즉사가 아닌 이상에야 함정은 강현에게 아무런 위협이 되지 않는 것이다.
그렇다면 강현에게 남은 위협은 주기적으로 등장하는 몬스터뿐이다.
'보통 이렇게 미로나 함정처럼 전투 외적으로 스트레스를 주는 던전은 몬스터의 평균 수준이 낮지.'
실제로 아직까지 강현의 목숨을 위협할 만한 몬스터는 존재하지 않았다.
다만, 혼자서 모든 것을 감당하다 보니 조금 피곤할 뿐이었다.
어쨌든 이 모든 것들이 작용한 덕에 강현은 A등급 던전임에도 불구하고 혼자서 노말 코어가 있는 곳까지 올 수 있었다.
'욕심 한 번 내봐?'
강현은 한동안 팔짱을 낀 채로 고민을 이어갔다.
"생각할 거 있어요? 당장 결정하자는 게 아니라 다른 팀이 올 때까지 기다렸다가, 같이 결정하자는 거예요."
"만약 다른 팀이 안 오면요?"
"이틀 정도 기다렸다가 그래도 모두 오지 않으면 공략을 포기하고 노말 코어만 부수고 나가는 거죠."
"좋네요. 그렇게 합시다."
결국, 강현은 한세연의 제안을 받아들이기로 했다.
'딱히 손해 보는 것도 아니고.'
이후 공략에 대한 고민은 다른 이들이 모두 모였을 때 해도 늦지 않을 것이다.
**
불행인지 다행인지 노말 코어에 도착한 지 둘째 날.
남은 3팀과 4팀이 모두 노말 코어에 도착했다.
이때 5팀의 팀장 임현성은 다시 한번 놀랄 수밖에 없었는데, 3팀과 4팀 또한 그리 큰 피해를 받지 않은 상태였기 때문이다.
'사망자는 3팀에 3명, 4팀에 9명인가...'
무려 35명이나 죽은 5팀과 비교하면 엄청난 차이였다.
아무리 그들의 출발 숫자가 5팀에 비해 적었다고는 이 정도 차이는 말이 되지 않는 것이다.
'아니, 오히려 우리가 더 많은 전력을 가지고 출발했으니, 더 생존율이 높아야 정상이야.'
그런데도 5팀은 압도적으로 차이로 사망자가 발생해 버렸다.
다른 5팀의 능력자들도 그것을 느꼈는지 임현성에게 은근한 시선을 보내왔다.
'이제 와서 나보고 뭘 어쩌라는 거야 새끼들아!'
자신은 최선을 다했다.
5팀에서 이렇게 많은 사망자가 나온 것은 순전히 이들의 평균 실력이 떨어졌기 때문이지 자신의 탓이 아니었다.
'너희들. 다른 팀에 들어가기에는 실력 때문에 눈치가 보여서 5팀으로 온 걸 모를 줄 알아? 병풍밖에 되지 않는 하찮은 놈들 주제!'
임현성의 마음속에 점차 추잡하고 더러운 열등감이 자리 잡기 시작했다.
"전부 주목해 주시죠."
그때 한세연의 목소리가 울리며 사람들이 이목을 모았다.
"지금부터 다음 공략 진행에 대한 회의를 시작하겠습니다."
한세연의 주위로 팀장들과 길드장들이 모여들었다.
"먼저 피해 상황을 점검하도록 하죠."
한세연이 각 팀장들에게 피해 상황을 전달받았다.
"5팀은 어떻죠?"
차례대로 보고를 이어가고, 마침내 5팀의 차례가 오자 임현성이 미간을 찌푸렸다.
"사망자 35명. 현재 부상자는 없습니다."
"알겠습니다.'
모두가 아무런 내색도 하지 않았지만 임현성은 왠지 다른 이들이 자신을 비웃고 있는 것 같았다.
"그러면 총 사망자는 47명이군요."
처음 200명이 넘는 인원들이 들어왔으니 사실 제법 큰 피해인 것은 맞았다.
하지만 정말 공략의 중심이 되는 핵심 전력. 알짜배기들은 사실상 거의 손실이 없었다고 봐도 무방한 상황이다.
아무도 직접적으로 그런 말을 하지는 않았지만, 모두 속으로는 알고 있는 사실이었다.
"저는 앞으로 메인 코어까지 나아갈 생각입니다. 여러분들의 의견을 묻고 싶군요."
한세연의 말에 팀장과 길드장들이 생각에 잠겼다.
"너무 위험하지 않겠습니까? 노말 코어와 메인 코어는 차원이 다를 겁니다."
한 길드장이 손을 들어 말했다.
"그렇겠죠."
"자칫하다간 공략에 성공한다 해도 남는 게 없을 수도 있습니다."
부정할 수 없는 말이었다.
앞으로 벌어질 일은 아무도 모른다.
특히나 전 세계에서 수많은 능력자를 집어삼키고 있는 A등급 던전에서는 더욱 그렇다.
"먼저 공략을 해본 입장에서 말하자면, 메인 코어는 차원이 달라요. 솔직히 말하면 여기가 중국 던전보다 많이 쉬운 것 같기는 한데, 그렇다고 해도 A등급은 A등급이니까. 각오하는 게 좋겠죠."
강현의 말에 모두의 낯빛이 어두워졌다.
"그러면 이렇게 하는 게 어떤가?"
그때 불사 길드의 길드장 한명도가 손을 들었다.
"공략대에서 메인 코어를 공략하고 싶지 않은 인원들은 여기 노말 코어를 지키고 있는 것이지."
"메인 코어 공략에 참여하고 싶은 인원만 참여한다는 뜻입니까?"
"그렇지. 그리고 그들에게 시간을 주는 것일세. 가령 10일에 14일 정도가 좋을 것 같네. 그 시간이 지나도 메인 코어가 공략되지 않으면 여기 남아 있던 인원들이 노말 코어를 부수는 거야. 모두가 던전 밖으로 도망칠 수 있도록."
"만일의 상황에 대비해서 탈출구를 남겨두는 것이군요. 좋은 생각입니다."
한세연이 오랜만에 밝은 표정을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다른 친구들 생각은 어떤가?"
한명도의 물음에 길드장들이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확실히 자원자들에 한해서 공략을 진행하고, 잘못됐을 대를 대비해 안전한 탈출로까지 만들어두는 셈이니 해볼 만한 것 같습니다."
모두가 한명도의 제안을 긍정적으로 받아들였다.
"좋아. 그럼 그렇게 진행하도록 하지."
그 뒤 공략대는 메인 코어 공략에 참여할 지원자들을 받기 시작했다.
"87명이라. 생각보다 많이 빠져나갔군."
그 결과 거의 절반의 사람들이 공략을 포기했다.
공략을 원했던 이들은 예상보다 많은 인원이 빠져나가 당황했지만 공략을 포기하지는 않았다.
"정말 남는 건가?"
"쉬고 싶군요."
"그렇다면, 알겠네..."
의외인 것은 신사 길드의 길드장이자, 5팀의 팀장인 임현성이 공략을 포기한 것이었다.
많은 사람들이 그것에 대해 안타까워했지만 본인이 원하지 않는 것을 강요할 수는 없는 일.
"그럼 출발하겠습니다. 정확히 12일 후에도 메인 코어가 공략되지 않으면 노말 코어를 제거해 주시면 됩니다."
"알겠습니다."
그렇게 한세연과 강현을 필두로 재정비된 공략대가 메인 코어를 향해 출발했다.
임현성은 그 뒷모습을 사납게 치켜뜬 눈으로 노려봤다.
"길드장님? 괜찮으십니까?"
뒤쪽에서 길드원이 자신을 부르자 언제 그랬냐는 듯 온화한 표정을 지은 임현성이 돌아섰다.
"어... 여기까지 오느라 좀 피곤해서."
"돌아가서 쉬시죠. 다들 기다리고 있습니다."
"그래."
길드원들에게 돌아가며 임현성이 은근한 미소를 지었다.
**
"신태길 팀장님! 큰일입니다!"
한 부하가 노크도 없이 벌컥 사무실에 들이닥쳤다.
서류를 들여다보고 있던 신태길은 인상을 찡그리며 부하를 노려봤다.
"노크 정도는 해줬으면 하는데."
"아, 죄송합니다... 너무 급한 사안이라."
"무슨 일이야?"
평소에는 어떤 일이 있던 차분하게 움직이던 부하였다.
그랬던 부하가 도대체 무슨 일로 이렇게 호들갑을 떠는 것인지 신태길은 의문이었다.
"최동우 연합장님이... 죽었답니다."
"뭐..?"
순간 표정 관리가 되지 않은 신태길의 얼굴이 기괴하게 일그러졌다.
"그게 무슨 말이지? 최동우 씨가 죽었다니..?"
능력자에게 죽음이란 친숙한 것이다.
매일매일 엄청난 숫자의 능력자가 목숨을 잃기 때문이다.
하지만 최동우는 아니다.
그는 일반적인 능력자가 아닌 대한민국을 대표하는 능력자다.
어디를 가서 어떤 전투를 벌이든 그에게 패배나 죽음이라는 단어가 어울리지 않는 것이다.
"북한에 파견된 연합원들이 적에게 대패하고 도망쳤다고 합니다. 300명 중에 살아서 복귀한 이는 겨우 34명입니다."
"..."
신태길은 머리가 새하얗게 변한 느낌이었다.
"적은... 적은 어떻게 됐지?"
신태길의 물음에 부하가 보고받은 내용을 상세하게 전달했다.
"결국 핵심이라 할 수 있는 적의 대장은 건재하다. 이거군."
"예..."
신태길이 깊은 한숨을 내쉬며 머리를 쓸어 넘겼다.
"하아... 어째서..."
어디서부터 잘못된 것일까.
최동우와는 던전 사태 초창기부터 안면을 트며 자주 대화를 나눴던 사이다.
서로가 서로를 도왔으며, 가끔은 대한민국의 미래에 대해 진솔한 이야기를 하며 술잔을 기울였다.
"하아..."
하지만 신태길은 최동우의 죽음에 대해 슬퍼할 시간조차 없었다.
"놈들이 남쪽으로 내려고 있다고?"
"예. 지금까지 이동 경로를 봤을 때 거의 확실합니다."
"왜 하필이면 이런 때에..."
신태길이 어금니를 꽉 깨물며 씹어 내뱉듯이 중얼거렸다.
10대 길드 대부분이 A등급 던전 공략을 위해 들어가 있는 상황이다.
최동우조차 아무것도 하지 못하고 당할 정도의 적이라면 현재 대한민국에 놈을 막을 수 있는 자는 존재하지 않는다고 봐야 했다.
"어디 가십니까?"
신태길이 갑자기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외투를 챙겼다.
"배데스 길드에 가야겠어. 차량 준비해."
**
정서빈의 연구소에서 총기를 받고 난 이후, 신성아는 거의 모든 시간을 새로운 무기를 숙달하는 데 사용했다.
식사시간조차 줄여가며 연습을 한 지 2주가 넘어가는 상황.
"후우..."
신성아는 오늘도 배데스 길드 소유의 던전에서 들어가 있었다.
"스읍...!"
호흡을 멈춘 신성아가 천천히 방아쇠를 당겼다.
-타앙!
일반적인 총소리보다 훨씬 작은 소음.
하지만 반동은 그것과 비교할 수 없을 만큼 강했다.
"됐나...?"
신성아가 방아쇠를 당긴 지 약 1초 후.
무려 2km가 넘는 거리에서 움직이던 고블린이 피를 흩뿌리며 바닥에 쓰러졌다.
갑자기 머리에 구멍이 난 채로 죽은 동료를 보고 당황한 고블린들이 호들갑을 떨며 사방팔방으로 뛰어다녔다.
"됐구나... 오늘은 여기까지 할까."
처음으로 2km가 넘는 거리의 저격에 성공한 신성아가 만족스러운 미소를 지으며 훈련을 종료했다.
던전 밖으로 나온 신성아는 곧장 바이크에 올라탔다.
"안유성 씨를 만나봐야겠어."
앞으로의 훈련에 대해 의논하기 위해 시동을 걸던 신성아가 돌연 동작을 멈추었다.
"잠깐 확인해 볼까?"
하루 동안 던전에 있었던 지라 아마 외부와 연락을 하지 못했다.
강현이 없는 지금 길드의 대소사를 그녀와 안유성이 결정하는 때가 있었기에, 연락 확인은 필수적이었다.
"응?"
핸드폰을 켠 신성하는 당황했다.
엄청난 숫자의 문자와 부재중 전화 목록이 떠올랐기 때문이다.
"신태길 팀장..?"
평소에는 절대 자신에게 전화를 걸 일이 없는 남자.
단순히 안부를 묻는 것은 아닐 것이기에 신성아가 서둘러 신태길에게 전화를 걸었다.
-신성아 씨?
"맞습니다. 부재중 전화가 있어서 연락 드렸습니다. 무슨 일입니까?"
-도움이 필요합니다.
갑작스럽게 도움이 필요하다는 신태길의 말.
"자세히 말씀해 주시겠습니까?"
-우리 대한민국이 위험합니다...
아무래도 다음 훈련은 조금 뒤로 미뤄야 할 것 같았다.
186화 우연과 필연 사이(2)
186. 우연과 필연 사이(2)
"모두 급한 요청에도 불구하고 이렇게 모여 주셔서 감사합니다."
신태길의 요청에 모인 능력자는 약 50여 명.
그들 모두가 수도권에서 제법 이름을 날리는 길드의 길드장, 혹은 간부들이었다.
"다들 지금 벌어지고 있는 사태에 대해 궁금한 게 많으실 거라 생각합니다."
신태길의 말에 능력자들이 고개를 끄덕였다.
당연한 일이었다.
갑자기 대한민국이 위험하다니.
신태길, 정확히는 정부의 요청이 있었기에 급하게 달려왔으나 그런 것이 아니었다면 그저 우스갯소리로 취급하고 넘어갔을 것이다.
"현재 우리는 세 가지 문제에 직면해 있습니다."
문제가 무려 세 가지나 된다는 말에 능력자들의 눈에 이채가 돌았다.
"첫 번째는 대한민국의 기둥과도 같던 능력자 연합의 연합장. 최동우 씨께서 작고(作故)했습니다."
작고하다.
즉 고인이 되었다는 뜻이다.
"별이 졌군."
최동우가 죽었다는 말에 사람들의 눈이 경악으로 떠지고, 곳곳에서 숨을 들이켜는 소리가 들려왔다.
최동우라면 누구나 인정하는 대한민국 최고의 능력자다.
문무를 겸비했으며 인성 또한 누구보다 올발랐던, 모든 능력자의 귀감이 될 만한 인물.
그런 최동우가 죽었다는 소식은 비록 일면식이 없던 이들이라 해도 충격을 주기에 충분했다.
"두 번째는 그 최동우 씨를 죽음에 이르게 한 적이 현재 우리가 사는 대한민국을 향해 빠르게 접근하고 있다는 겁니다."
직전의 충격이 가시기도 전에 이어진 다음 소식에 사방에서 탄식이 터져 나왔다.
신태길은 계속해서 말을 이었다.
"마지막... 세 번째는 현재 그 적을 막을 수 있을 만한 능력자들이 모조리 A등급 던전 '다키란의 미로'에 들어갔다는 겁니다."
"그 말은 우리가 놈들을 막아야 한다는 건가?"
"예."
신태길의 말에 능력자들의 눈동자가 흔들렸다.
"최동우를 이긴 적을 우리가 막으라고?"
"듣기로는 이번에 연합의 정예 300명과 함께 움직였다고 했는데..."
"이곳에 모인 길드 전체가 움직이면 해볼 만할지도..."
"헛소리! 대량 학살이 벌어질 거야."
능력자들이 잔뜩 격앙된 모습으로 언성을 높였다.
신태길은 최대한 이름이 있는 길드 위주로 모았다고 하지만, 아무리 그렇다고 해도 이들을 최동우에 비할 수는 없었다.
최소 상위 0.01% 이내의 엘리트들과 상위 10%의 차이는 그 정도로 컸고, 이들 또한 그 사실을 잘 알고 있었다.
"시간은 얼마나 있는 겁니까?"
그때 한 여성이 손을 들며 물었다.
그러자 주위에서 떠들어 대던 능력자들이 모두 입을 다물었다.
"배데스 길드의 신성아야."
"뭐야? 배데스는 이번에 A등급 던전에 간 거 아니었어?"
"던전에는 강현 혼자 갔다는 것 같아."
주위에서 수군대는 것이 들려왔지만 지금은 그런 것 따위를 신경 쓸 때가 아니었다.
"그건 모릅니다."
신태길이 고개를 저었다.
"지금 적이 어디에 있는지, 언제 쳐들어올지. 아무것도 모른다는 말입니까?"
"예…. 현재 알고 있는 정보는 오직 놈들이 위쪽에서 남하하고 있다는 것뿐입니다."
신태길의 대답에 능력자들이 모두 인상을 찌푸리며 짜증을 냈다.
"도대체 그럼 우리 보고 어떻게 막으라는 거야?"
"지금이라도 빠져야 하나...?"
그렇게 모두가 회의적인 반응을 보이던 그때.
"큰일입니다!"
갑자기 회의장의 문이 벌컥 열렸다.
"무슨 일이야?"
신태길의 물음에 숨을 헐떡이던 부하가 큰소리로 외쳤다.
"놈들이…. 놈들이 쳐들어 왔습니다!"
"젠장! 이렇게 빨리 오다니!"
최대한 빠르게 대비를 했음에도 늦어버렸다.
신태길이 다급한 얼굴로 물었다.
"현재 공격받고 있는 도시는 어디지?"
"연천군을 거쳐 빠르게 동두천으로 이동하는 중입니다."
연천군과 동두천이라면 경기도 북부 지방이다.
그리고 그쪽에서 가장 유명한 길드라면...
"신사 길드군."
임현성이 이끄는 신사 길드.
길드장 임현성을 포함한 신사 길드의 핵심 전력은 모조리 A등급 던전에 들어가 있는 상태였다.
"현재 군 부대와 함께 그곳에서 활동하고 있는 길드들이 급하게 움직이고 있지만 모두 속수무책으로 밀리고 있다는 소식입니다."
"젠장!"
화를 참지 못한 신태길이 책상을 내려쳤다.
"막아야 하지 않겠습니까."
그때, 신성아가 다시 입을 열었다.
"우리가 나서지 않는다고 해도 적은 결국 이곳까지 찾아올 거고, 그러면 이미 늦습니다. 모두 흩어져서 따로 죽을 생각입니까?"
"..."
"지금 당장 움직여야 합니다. 1분 1초가 아까운 상황입니다."
신성아의 말에 모두가 정신을 차렸다.
"후우... 죄송합니다. 바로 움직이도록 하죠. 여러분 도와주시겠습니까?"
신태길의 물음에 능력자들이 고개를 끄덕였다.
이대로 치졸하게 숨어서 조국이 망하는 것을 보는 지켜보는 것보다는, 몸부림이라도 쳐보는 게 나았으니까.
"다 같이 한번 발악해 보죠."
**
같은 시각.
던전 안에서는 메인 코어 공략대가 떠난 지 하루 정도가 흐른 시점이었다.
"..."
절반으로 나뉜 공략대.
더 이상의 공략을 포기한 자들만 남은 노말 코어에는 적막이 감돌았다.
이곳에 남은 사람만 무려 90명에 달했으나, 공간은 마치 모두가 죽은 것처럼 고요했다.
이따금 들여오는 한숨 소리만이 이곳에 사람이 있음을 알려왔다.
"후우..."
이곳에 남은 능력자들이 이렇게 풀이 죽은 이유는 분명했다.
자신이 포기했다는 것 때문이다.
여기 모인 이들은 상위 1% 이내에 드는 능력자들이다.
지금까지 가진 재능을 꽃피우며 탄탄대로를 걸어왔던 이들.
그들에게 포기란 자신에게 어울리지 않는 단어였으며 항상 도전하고 앞을 막아서는 벽을 부수며 달려왔다.
그런데 A등급 던전을 겪고, 그곳에서 정말 진정한 강자들을 보면서 그 기세가 꺾여버렸다.
자신보다 뛰어난 능력자.
자신과 비슷함에도 굴복하지 않는 능력자.
자신보다 뒤떨어짐에도 포기하지 않는 능력자.
그 어떤 경우에서든, 이들은 떠난 능력자들에게 열등감을 가질 수밖에 없었고.
그 처음 겪는 감정이 이들을 힘들게 하는 것이었다.
'나서야 할 때가 왔군.'
그 상황을 주시하던 임현성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전부 잠시 주목해 주시겠습니까?"
공동에 울려 퍼지는 임현성의 목소리에 모두의 시선이 모였다.
"저는 지금부터 여러분께 하나 제안을 하려 합니다."
뒤이어지는 임현성의 말은 충격적인 것이었다.
"지금 노말 코어를 부수는 게 어떻습니까?"
"그게 무슨 말입니까..?"
그렇게 되면 먼저 떠난 이들의 중요한 탈출구가 사라지게 된다.
그들이 열리는 포탈을 따라 곧장 밖으로 나올 수도 있겠지만, 그럴 가능성은 희박하다.
애초에 메인 코어를 향해 떠난 이들은 둘 중 하나.
자신감에 차 있거나, 목숨 아까운 줄 모르거나.
어떤 경우든 그들이 고작 탈출로가 사라졌다고 꼬리를 말고 도망칠 것 같지는 않았다.
고작 공략을 출발한 지 하루 만에 말이다.
"제 생각에 그들은 높은 확률로 던전 공략에 실패할 겁니다."
"그러면 이 노말 코어를 제거하면 안 되는 것 아닙니까?"
"그래서 더 제거해야지요. 공략에 실패한 그들이 죽게끔."
임현성의 말에 사람들의 얼굴이 잔뜩 일그러졌다.
"우리 모두 솔직해지는 게 어떻습니까?"
임현성이 한숨을 내쉬며 말을 이었다.
"다들 느끼지 않았습니까? 벽의 차이를. 아마 이 간격은 이번 공략을 기점으로 더욱 벌어질 겁니다. 평생 좁힐 수 없는 차이로 말이죠."
"..."
"저나 여러분들은 평생 이류로 남아야 한다. 이 말입니다. 세상은 일류가 아니면 기억해 주지 않습니다. 지금까지의 경험으로 다들 잘 알고 있지 않습니까? 그런데 지금 이 코어를 부수면... 단번에 모든 일류를 제거할 수 있을지도 모릅니다. 그러면 자연스럽게 이류였던 우리가 일류가 되는 것이지요."
임현성이 광기에 번득이는 눈으로 능력자들을 바라봤다.
"여러분들에게 강요하지 않겠습니다. 대신 그저 침묵해 주시면 됩니다. 그러면 이 일에 대해 동의한 것으로 알고, 모두 비밀을 지켜주시리라 믿겠습니다."
"만약 공략에 성공했을 때, 후폭풍은 어떻게 감당할 생각입니까?"
누군가 손을 들어 물었다.
임현성은 피식 웃었다.
"공략에 실패했다면 이 일에 대해 떠벌릴 자들이 모두 죽으니 문제가 없고, 공략에 성공했다면 애초에 이 노말 코어는 필요 없었던 것 아니겠습니까?"
"그런 억지가..."
"여차하면 말을 맞추면 됩니다. 갑자기 이곳에 대규모 몬스터의 급습이 있었다. 전투 도중 누군가의 실수로 코어가 부서졌다. 이 정도면 충분한 핑계가 되지 않겠습니까?"
그때였다.
이야기를 듣던 누군가가 화를 참지 못하고 벌떡 일어나며 역정을 냈다.
"당신이 그러고도 사람이야!?"
"그러니 말하지 않았습니까? 싫다면 지금 말하라고. 단 한 명이라도 반대가 있다면 이 일을 실행하지 않겠습니다."
임현성의 말에 사람들이 이리저리 눈을 굴렸다.
"반대하시는 분은 손을 들어주시죠."
모두가 눈치를 봤지만 의외로 손을 드는 이들은 고작 두 명뿐이었다.
그러자 일어나서 화를 내던 남자가 당황했다.
"당신들 전부 제정신이..!? 커헉!"
그때, 재빠르게 움직인 임현성이 남자의 목줄을 움켜쥐었다.
"같은 패배자 주제에 고귀한 척이라니. 역겹군요. 가만히 따르기만 하면 모든 스포트라이트를 돌려준다 했을 텐데 이렇게 훼방을 놓다니..."
남자가 무언가 행동을 취하기도 전에, 임현성의 단검이 남자의 목에 틀어박혔다.
"던전 안에서의 일은, 던전이 무너지는 순간 아무도 모르는 겁니다."
능력자들의 눈이 조금 전 손을 들었던 두 명의 능력자들에게로 모여들었다.
"안 돼! 살려줘! 제발!"
"끄아아아악!"
**
노말 코어를 부수고 던전 밖으로 나온 임현성은 상쾌한 미소를 지었다.
"좋은 공기야."
예상대로 먼저 떠난 공략대는 포탈을 타고 나오지 않았다.
비록 비상 탈출로가 사라지더라도, 그대로 공략을 진행할 생각인 것 같았다.
"흥. 오만한 놈들."
그런 이들을 비웃으며 임현성이 능력자들을 바라봤다.
"모두 비밀은 잘 지키시리라 믿습니다."
조용히 고개를 끄덕이는 이들.
"만약 어길 시에는 어떻게 되는지 다들 알고 계시죠?"
비밀을 발설하는 자는 죽음이다.
"그럼 모두 일상으로 돌아갑시다. 일류의 자리를 지키려면 부단히 노력해야겠지요. 하하하!"
그렇게 모두가 떠나고 신사 길드원들과 남은 임현성이 사악한 미소를 지었다.
'생각보다 일이 잘 풀렸어.'
임현성은 이번 일에 가진 스킬과 능력을 총동원했다.
사람들을 선동하는 것.
단순히 가슴 깊은 곳에 있던 추악함을 들춰내는 것만으로는 부족하다.
이 모든 것이 그가 지금까지 다져온 스킬과 능력이 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그리고 그 모든 것의 화룡점정이 바로 이 아이템.
이름 : 죽음과 영혼의 맹약
등급 : A+(성장형)
내구도 : 100/100
설명 : 바이서스 제국의 황제가 비밀을 지키기 위해 만든 반지. 사용자들의 영혼을 잡아먹고 자라는 귀물(鬼物)이다.
능력 : 마력 21스텟 증가, 영혼의 맹세
*영혼의 맹세 : 이 반지에 맹세한 것을 지키지 않을 시 대가로 영혼을 가져간다.
임현성이 튜토리얼 4단계를 통과하고 받은 반지.
이 반지는 지금의 임현성이 있게 해준 1등 공신이나 다름없었다.
-반지에 피를 흘리고 맹세의 내용을 직접 말씀하시면 됩니다. 그러면 마력이 움직일 텐데 거부하지 마십시오.
사용법은 간단했다.
반지 중앙에 박혀 있는 붉은 보석에 피를 흘리고 맹세하는 것.
이러면 반지가 사용자의 마력과 영혼을 일부 담으며 맹약이 이뤄진다.
임현성은 지금까지 이런 방식으로 항상 쓰레기 같은 짓을 벌여왔으며, 비밀이 새어나가지 않게 만들 수 있었다.
모두가 공범이 되는 것이다.
그러다 가끔 비밀을 발설하는 자가 나오면 반지는 그자의 영혼을 잡아먹고 더욱 강해진다.
'차라리 입이 가벼운 놈들이 잔뜩 나와줬으면 좋겠군.'
어차피 비밀을 말하기 전에 죽을 테니 임현성은 제발 그들이 열심히 떠들어 줬으면 하는 마음이었다.
"슬슬 돌아가도록 하지."
"예."
그렇게 임현성과 신사 길드가 길드 하우스로 돌아가던 길.
A등급 던전에서 조금 벗어나자 다시 스마트폰이 작동하기 시작했다.
임현성은 곧장 길드의 간부에게 전화를 걸었다.
"어. 나다."
-벌써 나오셨습니까?
"예상치 못한 사고가 생겼어. 지금 길드로 돌아가는 중이야."
-알겠습니다.
"그래. 그동안 별일 없었나?"
-딱히 일은 없었습니다. 다만...
"다만?"
간부가 말을 끄는 듯하자 임현성이 인상을 찌푸렸다.
-조금 전 어떤 미친놈이 길드 영역에서 설치고 있다는 소식이 들려서 길드원들을 보낸 상태입니다.
"우리 길드의 구역에서 말인가?"
-예. 고작 두 명이라고 하는데... 길드장님께서 신경 쓰실 일은 아닙니다.
"하아..."
임현성이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이제는 개나 소나 같은 별의별 잡놈들이 다 나를 무시하는군.'
경기도 북부 지역은 신사 길드가 꽉 잡고 있는 상태였다.
중소길드는 대부분 몸을 사리고 있으며 대형 길드는 마찰을 일으키지 않기 위해 애초에 그쪽으로 오지 않는 것이다.
-고작 두 놈이라고 했으니 금방 처리될 겁니다.
"어디야?"
-예?
"그놈들이 나타난 곳이 어디냐고!"
임현성의 갑작스러운 역정에 전화 너머로 간부의 당황한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소요산 인근입니다.
"내가 직접 처리할 테니 내버려 둬."
-이런 일에 굳이 길드장님이 나설 필요까지는….
"두 번 말하게 하지 마."
-죄송합니다...
임현성은 그대로 전화를 끊었다.
"어떤 놈들인지는 몰라도, 곱게 돌아갈 생각은 하지 않는 게 좋을 거다."
그동안 던전에서 받았던 무시와 수모를 풀어줄 절호의 기회였다.
187화 우연과 필연 사이(3) - 20.01.29
187. 우연과 필연 사이(3)
강현을 필두로 한 공략대는 파죽지세로 던전을 나아가고 있었다.
"진짜 인간이 맞는 건가..?"
"이렇게 무식한 공략이라니..."
공략대는 기존보다 거의 2배에 가까운 속도로 나아갈 수 있었는데 모두 강현 덕분이었다.
"크억! 으악!"
"이런, 시벌!"
앞쪽에서 강현이 함정에 맞는 소리가 들려왔다.
"어떻게 저렇게 당하고도 죽지 않을 수가 있지?"
이 A등급 던전 '다키란의 미로'의 함정은 굉장히 은밀하고 위험했다.
때문에 공략대는 시간 대부분을 함정을 해제하는 데 소모했었다.
그러나 강현은 모든 함정을 직접 몸으로 들이받아서 해제함으로써 공략 시간을 엄청나게 단축해버렸다.
"다 된 것 같으니 와요."
잠시 후.
걸어 다니는 것이 신기할 정도의 몰골로 강현이 다가왔다.
독에 당한 것인지 푸르뎅뎅하게 변한 피부.
무언가에 할퀴어져 뼈가 보일 정도로 벌어진 상처.
전신에 꼽힌 화살만 해도 열 대는 넘어 보였다.
공략대는 행여나 그런 강현과 눈이 마주칠까 서둘러 고개를 돌렸다.
"설마 노말 코어까지 혼자 저러고 온 거야?"
"진짜 독종이다."
"또라이라는 소문은 들었는데, 소문이 약과였어."
어쨌거나, 공략대는 파죽지세로 나아갈 수 있었다.
이대로라면 금세 보스가 있는 곳까지 도달할 수 있을 것 같았다.
-위이이잉.
그러던 공략대가 갑자기 멈춰 섰다.
그들 앞에 푸른 포탈이 생겨났기 때문이다.
"설마..."
포탈을 본 공략대의 눈빛이 조금 흔들다.
지금 포탈이 생겨났다면 그 이유는 하나다.
노말 코어가 부서졌다는 것.
"이유가 뭐지?"
"코어 쪽에 있던 놈들은 뭘 한 거야!?"
"몬스터가 습격했을 수도 있어."
능력자들이 저마다 한 마디씩 던지며 토론을 벌였다.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그러는 사이 강현과 단군의 한세연. 불사의 한명도 등, 던전 공략의 핵심이라 할 수 있는 인원들이 따로 모였다.
"포탈이 닫힐 때까지 시간이 그리 길지 않습니다. 빠르게 결정하도록 하죠."
한세연이 포탈을 바라보며 말했다.
"전부 잘 생각해야 될 거예요."
강현의 말에 시선이 모였다.
"나는 분명 경고했습니다. 앞으로 가면 지금까지랑 다를 거라고. 괜히 객기 부리다가 죽을 때 원망하지 말라고요."
"그럼 자네는 어떻게 할 생각인가?"
한명도의 물음에 강현이 씨익 웃었다.
"당연히 가죠. 쪽팔리게 빠꾸가 어딨습니까?"
3초 전에 자신이 한 말을 잊은 듯한 답변이었다.
그러면서 강현이 은근히 한세연을 바라봤다.
'흥. 이런 식으로 도발을 하다니.'
한세연은 이 던전에서 강현이 부활한다는 비밀을 아는 유일한 사람이었다.
'내가 비밀을 발설하면 어쩌려고.'
그런데도 도발하는 강현이 대담한 건지 멍청한 건지, 이제는 그녀도 제대로 판단이 서지 않았다.
'그냥 별생각이 없는 건가?'
다시 생각해 보니 강현은 상황이 어떤 식으로 흘러가든 상관없어하는 것 같기도 했다.
"저도 계속 공략을 할 생각입니다. 강현 씨가 있으니 확실히 공략이 수월해지기도 했고요."
결국, 한세연까지 공략에 가세했다.
"재미있군. 재미있어! 이게 진정한 남자의 모험 아니겠나!? 하하하!"
갑자기 불사의 한명도가 정신 나간 사람처럼 웃어젖혔다.
"한명도 씨. 초를 쳐서 미안하지만 저는 여성입니다."
"아, 실수. 그러면 진정한 터프가이들의 모험으로 하지."
"됐습니다."
한세연이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다른 친구들은 어떻게 하겠나?"
한명도의 말에 다른 능력자들이 씨익 웃었다.
"여기서 빠질 수는 없지요."
"가능성은 충분하다고 봅니다."
다른 능력자들 또한 계속 공략을 진행하려는 것 같았다.
"다들 제정신이 아니네."
"강현 씨한테 그런 말을 듣고 싶지는 않습니다."
"하하하하!"
한세연의 말에 모두가 큰 소리로 웃었다.
'확실히 여기까지 온 놈들이라 그런가? 정상인이 없네.'
이들은 대한민국에서 가장 강한 능력자들을 이끄는 자들이었다.
한국의 능력자 수준이 세계에서 최상위권이라고 평가받는 것을 생각해 보면, 세계 어디를 가든 인정받을 만한 능력자인 것이다.
'앞뒤 재고, 계산만 해서는 절대 올라설 수 없지.'
그 자리까지 올라오는 데 필요한 것은 단순히 강한 무력, 냉철한 판단력만 가지고는 힘들다.
이 수준에서 그것들은 어디까지나 기본적인 것에 불과했기 때문이다.
'그 위로 올라서기 위해서는 말 그대로 광기가 필요해.'
강현은 그렇게 생각했다.
어떤 식으로든 최고의 자리에 도달하기 위해서는 미쳐 있어야 한다고.
명예에 미치든, 살육에 미치든, 무력에 미치든, 모험에 미치든.
어딘가에 미쳐 나사가 한두 개쯤은 풀려 있어야 한다.
그래야만 진짜 날고 기는 놈들 사이에서 보스를 할 수 있는 것이다.
"그럼 갑시다."
그중에서도 가장 미친놈이 웃으며 앞으로 걸어갔다.
**
소요산은 경기도 동두천시와 포천시의 경계에 있는 산으로 그 높이는 대략 600m에 달했다.
규모가 크지는 않지만, 산세가 수려하고 아름다워서 많은 등산객이 방문하는 곳.
우리에게는 해골물을 마신 것으로 유명한 원효대사가 수행한 장소로 알려진 산이었다.
"이곳의 군대라는 건 하나같이 귀찮군."
마지막으로 대한민국의 수많은 군부대가 모여 있는 곳이기도 했다.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오칼 올룬이 고개를 조아리며 물었다.
"숫자에는 숫자로 대응해 줘야겠지."
무심한 가투 아사스의 대답.
오칼 올룬은 곧장 그 뜻을 알아차렸다.
"알겠습니다."
"최대한 이목을 끌어라. 나는 이곳의 지도부를 처리하며 남하하겠다."
"예."
그렇게 둘이 행동을 개시하려던 찰나, 오칼이 다시 한번 가투 아사스를 불렀다.
"하나만 여쭤봐도 되겠습니까?"
가투 아사스가 말해보라는 듯 턱을 까딱였다.
"굳이 이 방향으로 남하하시는 이유가 있습니까? 혹 이 나라의 국왕을 처치하시려는 것인지..."
한국에서 대통령을 죽인다면 엄청난 혼란이 일어나겠지만, 북한과 같은 효과를 기대할 수는 없다.
그것을 잘 알고 있는 오칼은 괜한 위험부담을 떠안기 보다는 조금 더 안전하게 한국을 공략하자고 말하려 했다.
"아니다. 이 나라의 국왕은 천천히 죽여도 상관없겠지."
"그러면 왜...?"
"아무리 올룬이라지만 이곳까지 와도 느끼지 못하는 것이냐."
가투의 말에 오칼이 고개를 숙였다.
"죄송합니다."
"아래쪽에서 강한 마력이 느껴진다. 이 정도 마력이라면 아마 이 나라에서 가장 강한 놈들이 있겠지. 지금 가장 먼저 해야 할 것은 그들을 없애는 것이다."
"명심하겠습니다."
그렇게 대화를 끝내고 떠나려던 둘이 돌연 멈추었다.
"아직 피라미가 남아 있었나?"
이곳으로 접근하는 약 스무 명의 인간이 느껴졌다.
"조금 전에 처리한 놈들보다 조금 더 강한 것 같습니다."
"그래봤자 하찮은 놈들일 뿐이지."
가투의 말이 끝남과 동시에 임현성을 필두로 한 신사 길드가 도착했다.
"누가 하찮은 놈이라고?"
**
신사 길드의 길드장. 임현성은 잔뜩 화가 난 상태였다.
"당한 길드원이 몇이지?"
"스물 정도입니다. 다만, 길드에 들어온 지 얼마 되지 않은 신입들이라 전력에 큰 문제가 생긴 것은 아닙니다."
옆에서 말하는 간부의 보고를 들으며 임현성이 인상을 찌푸렸다.
'감히 내가 없는 사이에 시비를 걸다니. 어떤 놈들인지 몰라도 곱게 죽을 생각은 하지 않는 게 좋을 거다.'
경기도 북부는 신사 길드의 영역이다.
그렇지 않아도 던전에서 겪은 사건들로 잔뜩 날이 서 있던 임현성은 머리끝까지 화가 치밀어 올랐다.
"더 밟아! 멍청한 새끼야!"
"죄송합니다."
임현성이 운전자의 뒤통수를 후려쳤다.
'신사' 길드.
대외적으로는 항상 여유와 매너가 넘치는 모습을 보여주는 임현성이지만, 내부에서 보이는 것은 전형적인 소인배에 심성이 아주 고약한 악질이었다.
다만, 길드원 모두가 길드에 가입할 때 비밀 유지를 조건으로 영혼의 맹세를 했기 때문에 밖으로 이런 사실이 새어나갈 일은 없었다.
"이 근처입니다."
마침내 목적지에 도착한 임현성이 차량에서 내렸다.
마찬가지로 뒤따르던 차량에서 스무 명 가량의 능력자들이 내렸다.
그들은 열흘 가까이 이어진 던전 공략으로 굉장히 피곤한 상태였지만, 임현성의 명령에 울며 겨자 먹기로 따라온 상태였다.
'저기군.'
임현성은 곧장 문제의 적들이 어디 있는지 알아차렸다.
'하나는 평범하고 하나는 조금 강한가.'
실제로 전력을 보니 길드원들이 당할 만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봤자 나한테는 안 되지.'
임현성이 미소를 지으며 달려갔다.
"… 하찮은 놈들일 뿐."
얼마 가지 않아 목표가 보이고, 그들이 대화를 나누는 목소리가 들려왔다.
"누가 하찮은 놈이라고?"
잔뜩 인상을 찌푸린 임현성의 말.
가투 아사스와 오칼 올룬이 지긋이 임현성을 바라봤다.
"한 번에 왔으면 좋았을 것을. 귀찮게 하는군."
가투 아사스의 말에 임현성이 큰 소리로 웃었다.
"크하하하! 곧 죽을 놈들이. 하여간 이놈이나 저놈이나 저 허세는! 마음에 안 든다고! 알아!? 감히 나를 무시한 대가를 치르게 해 주겠다. 이 말이다!"
처음에는 웃던 임현성의 얼굴이 점차 일그러지더니, 나중에는 미친 사람처럼 발악했다.
"보여주겠어. 내가 절대 무능하지 않다는 걸."
임현성이 간부에게 다가가 조용히 속삭였다.
"저기 검을 든 놈이 약하니 너희들이 빠르게 처리해. 그동안 나는 지팡이를 든 놈을 붙잡고 있겠다."
"예."
현재 가투 아사스는 외부로 방출되는 마력을 숨긴 상태였는데, 그것을 본 임현성이 뒤쪽에 있던 오칼 올룬이 적의 대장인 것으로 착각한 것이었다.
"간다!"
그리고 시작되는 전투.
"단번에 끝내주지."
다가오는 능력자들을 본 가투 아사스가 벼락처럼 검을 뽑아 휘둘렀다.
-촤아아아아!
엄청난 돌풍이 몰아치며 숲의 나무들이 흔들리고,
"커억...?"
임현성과 신사 길드원들의 눈이 튀어나올 듯이 커졌다.
-쿠구구구궁! 콰아앙!
그리고 수백 그루의 나무들이 쓰러지며 굉음이 울렸다.
당연히 그 검에 맞은 신사 길드원들의 몸뚱이 또한 사방으로 흩날렸다.
가투 아사스는 임현성. 정확히는 '머리만' 남은 임현성에게 다가갔다.
가투가 머리칼을 붙잡아 임현성의 머리통을 들어 올렸다.
임현성은 자신이 죽은 것조차 인지하지 못했는지 자신만만한 얼굴로 가투 아사스를 노려보고 있었다.
"흥. 쓰레기 같은 놈."
**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뒤쪽에서 지켜보던 오칼 올룬이 가투에게 다가갔다.
"충실한 아곤의 종으로 만들어라. 쓰레기들이라도 없는 것보다는 낫겠지."
"알겠습니다."
북한에서는 전혀 필요성을 느끼지 못해 언데드를 일으키지 않았지만, 한국은 달랐다.
능력자와 군대의 무력 수준이 북한보다 훨씬 뛰어났기에 시선을 분산시킬 필요가 있었다.
게다가 지금은 빠르게 이곳을 처리하고 중국으로 이동해야 하는 상황.
조금이라도 거들어 줄 손이 있다면 좋았다.
-달그락, 달그락!
오칼 올룬이 주문을 외자, 근처에 있던 수십 구의 시체들이 땅에서 일어나기 시작했다.
방금 막 죽은 싱싱한 사체.
거기에 가투 아사스가 워낙 깔끔하게 처리해서인지 비교적 쉽게 언데드로 만들 수 있었다.
"으음..."
하지만 그런 상황임에도 불구하고 임현성의 시체를 언데드로 만드는 것은 버거웠다.
"역시 올룬의 수준에서는 무리인가."
"죄송합니다."
애초에 임현성과 오칼 올룬의 힘은 그리 큰 차이가 나지 않았다.
가투는 이런 상황을 예상했었기에 딱히 오칼을 나무라지 않았다.
"어쩔 수 없군. 워낙 조악한 마법이라 쓰지 않으려 했건만."
가투 아사스가 손을 뻗었다.
그러자 검은 마력이 뿜어져 나와 임현성의 머리통을 감싸기 시작했다.
"일어나라."
가투 아사스의 명령에 순간 임현성의 눈이 반응했다.
갑자기 목이 잘린 상태에서 임현성의 눈동자가 미친 듯이 움직였다.
마치 자신의 몸이 어디 있는지 찾는 듯한 모습.
"네 하찮은 몸뚱이를 일으켜라."
가투의 말에 임현성의 몸이 천천히 일어서더니 자신의 머리통을 붙잡았다.
"그으으으..."
손에 머리통을 든 채로 눈을 검게 물든, 그로테스크한 모습을 하고 있는 임현성.
놈의 입에서 기괴한 소음이 흘러나왔다.
"으음... 역시 별로야."
상당히 많은 마력을 쏟아냈음에도, 원래의 임현성보다 조금 강한 수준으로 만들어내는 것에 그쳤다.
이것이 가투 아사스가 마법을 쓸 수 있음에도 사용하지 않는 이유였다.
자신의 성에 차지 않았기 때문이다.
"별수 없지. 이런 쓰레기라도 데리고 다니는 수밖에."
그렇게 가투 아사스와 오칼 올룬. 그리고 죽음에서 돌아온 임현성이 길을 떠났다.
188화 우연과 필연 사이(4)
188. 우연과 필연 사이(4)
강현과 공략대는 빠르게 던전의 중심부를 향해 달려갔다.
"처음부터 다 같이 움직일 걸 그랬나?"
기분 탓인지 모르겠지만, 던전의 중심부로 이동하고 있음에도 오히려 공략이 더 쉬워진 느낌이었다.
'하긴 쉽게 느껴질 만도 하지.'
어차피 함정은 이전에도 혼자 처리해 왔었다.
거기에 최고의 능력자들이 함께 싸워주니 쉽게 느껴지지 않을 수 없었다.
'확실히 중국 때랑은 다르네.'
중국의 A등급 던전에서는 지금보다 공략대의 숫자가 많았다.
그러나 평균적인 능력자의 수준은 지금보다 훨씬 낮았다.
외국에서 온 극소수의 능력자를 제외하면 중국과 북한 러시아에서 대규모로 파견한 능력자들이 대부분이었으니 당연한 일.
그에 반해 지금 여기 모인 이들은 하나하나가 최고의 정예다.
공략이 순조롭지 않을 이유가 없었다.
"캬아아아!"
그때, 전방에서 들려오는 괴성이 강현을 상념에서 깨웠다.
"숫자는 대략 300마리! 전열 준비하십시오!"
한세연의 외침에 능력자들이 빠르게 진형을 갖췄다.
"하아압!"
항상 전투에서 가장 선두를 맡았던 강현은 이번에도 앞장섰다.
"뒤져어!"
홀로 달려 나간 강현이 필시언의 해머를 휘두르며 몬스터들의 진형을 휘젓고.
-촤아아아!
뒤이어 도착한 능력자들이 엄청난 속도로 몬스터를 베어나갔다.
"돌연변이! 엘리트 객체입니다!"
그때 악어를 닮은 몬스터들 사이에 유독 덩치가 크고 피부색이 거무스름한 놈이 나타났다.
"단군에서 처리하겠습니다!"
놈을 본 한세연이 길드원을 이끌고 접근했다.
단군 길드는 약 3m에 달하는 놈을 포위하고 사방에서 공격을 가했다.
모두가 수없이 합을 맞춘 만큼 단군 길드는 안정적으로 몬스터를 압박했다.
그 안에서도 한세연은 유독 눈이 부실 정도로 뛰어났다.
한세연이 몬스터의 코앞에서 엄청난 속도로 검을 휘둘렀다.
놈은 그런 한세연을 잡기 위해 칼날과도 같은 손톱을 휘둘렀으나 스치지도 못하고 허공을 가를 뿐이었다.
"캬라아아!"
순식간에 놈의 전신이 난도질당하며 엄청난 피가 흩뿌려졌다.
그 피를 한껏 뒤집어 쓴 한세연이 놈의 눈에 검을 틀어박고.
-촤악!
검을 비틀어 내며 뽑아내자, 놈의 거체가 천천히 무너지기 시작했다.
"후우... 끝났나."
주위를 둘러보자 다른 이들의 전투도 마무리되고 있는 것 같았다.
-콰앙! 쾅! 쾅!
전장에서 둘러보던 한세연이 유난히 시끄러운 곳을 향해 고개를 돌렸다.
그곳에는 당연하게도 거대한 망치를 미친 듯이 휘두르는 강현이 있었다.
'이전에도 강했지만... 지금은 정말 인간이라 부르기 힘들 정도의 괴물이 됐어.'
솔직히 말하면 강현과 1대1로 싸웠을 때 이길 수 있을지 확신할 수 없었다.
마지막으로 강현을 봤을 때만 해도 충분히 이길 수 있다 생각했지만...
'스쳐도 죽을 거야.'
지금 자신은 저 망치에 스치기만 해도 뼈가 박살나며 전투불능에 빠질 것이다.
당연히 한세연은 숨겨둔 한수가 있었지만 그것은 강현도 마찬가지일 터.
'분명 좋은 일이겠지.'
저렇게 강력한 능력자가 나타난다는 것은 인류 전체를 봤을 때 굉장한 축복이었다.
하지만 한세연은 가슴 한편에서 질투와 함께 호승심이 피어오르는 것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었다.
"모두 수고하셨습니다!"
전투는 얼마 지나지 않아 끝이 났다.
사망자는 0명.
부상자가 다수 존재하긴 했지만 이곳에는 최고의 힐러들이 대기하고 있었다.
그들은 금세 상처를 치유하고 다시 전투에 합류할 것이다.
"어떨 것 같아요?"
전투 후. 모두가 장비를 점검하고 부상자를 치료할 때. 강현이 한세연에게 다가왔다.
"무슨 뜻이죠?"
"메인 코어까지 갈 수 있겠냐고요."
"지금 상황만 보면 무난하게 코어에 도달해서 클리어 할 것 같네요."
"흐음...
모든 것이 순조로웠지만 강현은 무언가 불안해 보였다.
"뭔가 문제라도 있나요?"
"A등급 던전인데 아무리 생각해도 너무 쉬운 것 같아서요."
던전이 너무 쉽다.
다른 사람들이 들었으면 기겁할 만한 말이다.
지금 순조롭게 나아가는 것은 던전이 쉬워서가 아닌, 단지 여기 모인 이들이 너무 뛰어났기 때문이다.
한세연은 어째서 강현이 그런 걱정을 하는 것인지 의문이었다.
"이전에 겪었던 A등급 던전 때문인가요?"
"그렇죠. 아무리 같은 등급 안에서 난이도 차이가 난다 하더라도, 중국과 비교하면 여기는 지나치게 쉬워요. 그 말은 결국..."
"보스가 더 강할 것이다?"
"뭐, 그럴 수도 있다는 거죠."
솔직히 한세연은 동의하기 힘들었으나, 이곳에서 유일하게 A등급 던전을 클리어 한 경험이 있는 강현의 말이기에 무시할 수 없었다.
"아마 다키란이라는 게 보스의 이름일 것 같긴 한데..."
무언가를 고민하던 강현이 이내 고개를 저었다.
"됐다. 어차피 메인 코어까지 가서 공략할 건데 미리 생각해서 뭘 하겠어."
"오랜만에 생각이 일치하는군요."
한세연의 말에 강현이 피식 웃었다.
"슬슬 출발하죠. 다들 충분히 쉰 것 같은데."
어느새 몸을 모두 회복한 강현이 힘차게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때까지는 누구도 예상하지 못했다.
보스가 있는 메인 코어에서 무엇이 기다리고 있을지는.
**
서울 전체에 사이렌 소리가 울렸다.
-실제 상황입니다. 시민 여러분께서는 즉시 건물이나 지하로 대피하시기 바랍니다. 다시 한 번 알려드립니다. 현재 서울 북부….
갑작스러운 피난 경보에 서울 전체가 혼란에 휩싸였다.
"갑자기 무슨 피난이야!?"
"장난하는 거 아니야?"
모든 도로가 차량으로 가득 들어차고, 거리에 있던 사람들은 갑작스럽게 닥친 재난에 어쩔 줄 몰라 했다.
"아직 밖에 계신 분들은 서둘러 건물 안으로 대피해 주시기 바랍니다!"
군과 경찰이 총동원돼서 상황을 통제하려 했지만 쉽지 않은 일이었다.
신성아는 근방에서 가장 높은 빌딩 옥상에서 그런 혼란을 무심하게 지켜봤다.
"얼마나 남은 겁니까?"
신성아의 물음에 그녀의 귀에 있던 이어폰에서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엄청난 속도로 접근 중입니다. 아마 5분 이내에 도착할 겁니다.
신태길의 말에 신성아가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후우..."
앞으로 벌어질 일을 생각하자 가슴이 요동쳤다.
현재 서울 어린이 대공원 근처에는 약 1,000명이 넘는 능력자들이 대기 중이었고, 지금도 그 숫자가 빠르게 늘어나는 중이었다.
'막을 수 있을까...'
적은 이미 3개의 차단선을 돌파했다.
그곳에도 수백 명의 능력자들이 대기하고 있었지만, 적들은 능력자들의 포위망을 비웃기라도 하듯 손쉽게 돌파했다.
가장 오래 버틴 곳이 채 10분을 넘기지 못할 정도.
'결국은 우리가 해내야 해.'
이곳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다른 것이 있다면 이곳에는 가장 강한 능력자들이 모여 있었고, 자신과 배데스 길드원들이 있다는 것 정도.
-2시 방향! 거의 접근했습니다.
신태길의 목소리에 신성아가 눈을 부릅뜨고 전방을 바라봤다.
'빠르다.'
인간이 낼 수 없는 수준으로 빠르게 접근하는 검은 물체가 흐릿하게 보였다.
신성아가 호흡을 가다듬으며 천천히 스코프를 조준했다.
'첫 공격에 타격을 줘야 해.'
지금 그녀가 들고 있는 것은 정서빈 연구소에서 특별히 제작한 저격총.
무려 3km 이상까지 저격이 가능한 이 총에 들어가는 탄환 한 발만 100만 원이 넘었다.
'처음에 성공하지 못하면 경계심을 가질 거야.'
그렇게 되면 다음은 훨씬 더 힘들어질 것이다.
"..."
신성아가 호흡을 멈추고, 그녀의 몸이 굳은 것처럼 완전히 멈췄다.
몸 안에서 천천히 흘러나가는 마력이 총과 총알에 쌓이고, 모든 것이 극에 달한 순간.
-타아앙!
총알이 발사됐다.
**
가투 아사스와 오칼 올룬. 그리고 언데드로 변한 임현성은 빠르게 남쪽으로 이동하고 있었다.
"생각보다 시시하군."
지금까지 수많은 능력자들이 덤벼왔지만, 모두가 단 1합도 버티지 못하고 목숨을 잃었다.
그렇게 죽은 시체를 오칼이 언데드로 일으켜 혼란을 가중시켰다.
도심은 복잡하고 수많은 민간인 들이 대피하지 못한 상황이었기에, 군과 능력자들은 소극적일 수밖에 없었다.
"목표만 처리하면 이 나라를 무너뜨리는 것도 그리 어렵지 않겠어."
"그어어어..."
가투의 말에 임현성의 머리가 동의한다는 듯 입을 벌렸다.
가투가 그런 임현성을 마음에 들지 않는다는 듯 바라봤지만 어쩔 수 없었다.
"생각보다 쓸 만한 놈이니 조금 더 살려둘 수밖에."
단기간에 인간의 사기를 가득 먹어치운 임현성은 실시간으로 강해지고 있었다.
인간들은 자신의 머리를 들고 휘두르는 임현성에게 엄청난 공포를 느꼈기에 단순히 무력 이상으로 도움이 되기도 했다.
"또 다른 인간들인가."
그렇게 한창 남쪽으로 이동하던 도중.
전방에서 또다시 엄청난 숫자의 마력이 느껴지기 시작했다.
"많이도 모였군."
대충 느껴지는 숫자만 해도 천 이상.
하지만 숫자는 가투에게 아무런 의미가 없다.
그저 다시 일으킬 시체의 숫자가 늘어날 뿐이다.
그 순간.
"...!"
가투가 재빨리 팔을 들어 올렸다.
-콰아아앙!
앞쪽에서 날아온 무언가가 가투의 갑옷에 맞아 튕겨나갔다.
"어떤 놈이 감히..!"
충격 때문에 팔의 뼈들이 진동하는 것이 느껴졌다.
그러나 가투는 분노할 시간이 없었다.
재차 날아온 무언가가 다시 그의 머리를 노렸기 때문이다.
막는 것이 힘들다는 것을 깨달은 가투가 빠르게 고개를 꺾었다.
-후우우웅!
날아온 발사체가 투구를 스쳐 지나가며 엄청난 풍압이 불었다.
"재미있구나... 그래. 너무 쉬우면 안 되겠지."
"지금이야!"
동시에 사방에서 쏟아지는 엄청난 마법과 화살들이 가투 아사스를 덮쳐왔다.
-콰과과광!
**
"커허억!"
복부를 검에 관통당한 남자가 울컥 피를 토해냈다.
-촤아악!
가투 아사스는 그 상태 그대로 검을 휘둘러 남자의 허리를 잘라내 버렸다.
"끝이 없군."
이곳에서만 몇 시간 싸운 것인지 알 수 없었다.
모르긴 몰라도 적어도 한나절은 넘었으리라.
그동안 그가 베어난 인간만 1,000이 넘어가고 있었다.
계속된 전투에 가투의 갑옷은 피가 말라붙어 끈적거릴 정도였다.
주위에는 그가 베어난 인간에게서 나온 시체가 작은 웅덩이를 이뤘다.
"...!"
그때 가투가 다급히 검을 휘둘렀다.
-카아앙!
가투의 검에 총알이 튕겨나가고, 검을 쳐낸 가투는 팔이 찌르르 울리는 것이 느껴졌다.
"이건 정말 귀찮군... 진심으로 화가 나려 해."
어딘가에서 자신에게 발사체를 날리는 인간.
저 인간이 전투가 길어지게 하는 주범이었다.
처음부터 그 인간에게 접근해 사살하려 했지만 놈은 신출귀몰하게 이동하며, 끈질기게 자신을 방해했다.
"어째서 마력이 느껴지지 않는 거지?"
이 정도로 강한 공격을 날릴 정도면 그 인간의 마력이 느껴질 법한 했건만 그렇지 않았다.
이것이 주위가 너무 혼잡하기 때문인지 아니면 놈의 은신술이 뛰어났기 때문인지는 모르겠지만.
"정말 귀찮아..."
중요한 건 그것이 오래 만에 가투 아사스의 신경을 제대로 긁고 있다는 것이었다.
'원래라면 지금 물러나야 한다.'
가투 아사스는 굳이 이곳에서 무리할 필요가 없었다.
잠시 후퇴한 뒤에 마력을 회복하고 다시 인간들을 처리하면 된다.
-타아아앙!
그러나 저 멀리서 날아오는 무언가가 자신을 떠나지 못하게 하고 있었다.
"죽여주지...!"
가투는 이번 전투에서 조금 무리하더라도 저 인간만은 확실하게 끝낼 생각이었다.
"오칼 올룬."
"예."
"뒤로 빠져나가 은밀하게 놈을 찾아라."
아무래도 자신이 시선을 끌고 오칼 올룬에게 그 인간을 찾는 일을 맡겨야 할 것 같았다.
"죄송합니다. 마력이 모두 떨어져서..."
오칼 올룬이 말을 하며 고개를 바닥으로 숙였다.
'확실히. 올룬급에게는 버거운 전투였군.'
지금까지 지켜본 결과 오칼은 올룬 중에서도 상위의 능력을 지닌 마법사였지만, 그래도 결국 올룬은 올룬일 뿐이다.
그에게는 이 정도로 큰 규모의 전투를 장기간 지속할 만한 능력이 없었다.
"어쩔 수 없군. 저놈에게 치유의 주문을 걸어 살리는데 집중해라."
"예."
이 상황에서 가장 효율적인 것은 오칼을 임현성 전용 힐러로 사용하는 것이었다.
임현성은 이미 머리가 피로 흠뻑 적셔져 눈을 뜨기 힘들어 보였지만 놈은 오히려 이런 상황을 즐기는 것 같았다.
감정이 없는 저급한 언데드에게서는 있을 수 없는 일이었지만 어쩐지 가투는 그렇게 느껴졌다.
"그러면 계속 움직이도록 하지."
**
-철컥
굵은 탄피가 빠져나가고, 신성아가 빠르게 총을 재장전 했다.
"후우..."
오랜 시간 동안 집중한 탓에 머리가 깨질 듯이 아파왔다.
"그래도 목표의 절반은 성공했다."
많은 이들이 죽었지만 성과가 없는 것은 아니었다.
적들을 사람들이 완전히 대피한 청계산 근처까지 유인할 수 있었던 것이다.
청계산은 이미 A등급 던전이 터지고 많은 사람들이 피난을 떠난 지역.
그 덕에 가장 빠르게 사람들이 대피소로 이동할 수 있었다.
"문제는 이 다음인데..."
원래는 이곳까지 유인한 다음 마정석 장비들로 무장한 군대가 적들을 상대하기로 예정돼 있었다.
하지만 신성아는 정말 군인들이 저 괴물을 이길 수 있을지 의심하지 않을 수 없었다.
"정말 괜찮겠습니까?"
신성아의 물음에 이어폰에서 신태길의 대답이 들려왔다.
-맡겨 주십시오. 신성아 씨는 이미 할 수 있는 만큼 하셨습니다. 어차피 여기서부터는 제 권한을 벗어난 일이라 더 이상 할 수 있는 것도 없습니다.
"예,"
대답을 한 신성아가 다음 장소로 이동하기 위해 장비를 정리했다.
가투가 자신이 있는 곳을 알아서는 안됐기에 신성아는 한 자리에서 5분 이상 머물지 않았다.
신성아가 어깨에 총을 메고 이동하려던 그때.
"이런!"
무언가를 느낀 신성아가 재빨리 몸을 날렸다.
-쿠구구궁!
그녀가 있던 건물이 마치 무른 소시지라도 되는 것처럼 깔끔하게 잘려나가며 무너지기 시작했다.
재빨리 몸을 피한 신성아가 고개를 들자, 지금까지 지겹도록 봐왔던 검은 갑옷의 적이 서 있었다.
"드디어 찾았군."
189화 우연과 필연 사이(5)
189. 우연과 필연 사이(5)
A등급 던전. 다키란의 미로.
어느덧 공략대가 공략을 시작한 지 12일 차에 접어들고 있었다.
"이번에는 확실히 운이 좋네."
강현이 웃으며 말하자 한세연이 날카롭게 눈을 뜨고 노려봤다.
"왜 그렇게 쳐다봐요?"
"휴우... 됐어요."
"거기서 나온 게 지름길이라니. 이거야말로 하늘이 돕는 거지!"
강현과 한세연은 현재 보스룸 앞에 서 있었다.
노말 코어까지 도달하는데 1주일이 넘게 걸렸던 것을 생각하면 굉장히 빠른 진행속도라고 할 수 있었다.
그런데도 한세연이 저렇게 화가 난 이유는 하나였다.
"어떻게 할 거예요?"
"알면서 물어보기는. 그냥 들이받는 거죠."
현재 보스룸 앞에 서 있는 사람이 강현과 한세연.
단, 둘 뿐이었기 때문이다.
"그때 나서는 게 아니었는데..."
강현과 한세연. 이 둘이 공략대에서 떨어져 나간 것은 누구의 잘못도 아니었다.
단지 상황이 좋지 않았을 뿐.
"그래도 조금 감동인데요? 나 구하겠다고 그렇게 달려오다니."
"착각하지 말아요. 부활할 수 있었다는 걸 잠시 잊었을 뿐이에요."
"어쨌거나 부활 스킬 없었으면 왔을 거라는 말 아닌가?"
공략대보다 앞서서 함정을 발동시키며 이동하던 강현은 실수로 물이 쏟아져 나오는 함정을 건드렸다.
-으아아아! 이게 뭐야!?
강현의 우렁찬 비명에 놀란 한세연은 공략대를 두고 먼저 달렸다.
-무슨 일인지 모르니 전부 천천히 따라와요! 먼저 가서 확인할 테니!
그 결과.
-꺄아아아!
갑자기 옆에서 쏟아지는 물에 대응하지 못하고 강현과 한세연은 그대로 떠내려갔다.
차라리 살상력이 강한 함정이었다면 둘은 쉽게 돌파했을 것이다.
너무 예상치 못하게 등장한 고전 함정에 어이없게 당해버린 둘이었다.
"확실하게 말하죠. 저는 어디까지나 당신이 없으면 공략에 차질이 생기기 때문에 걱정돼서 달려온 것뿐이에요. 그러니까 쓸데없는 생각을 하고 있다면 당장 접는 게 신상에 이로울 거예요."
"쓸데없는 생각?"
강현이 무슨 말인지 모르겠다는 듯 어깨를 으쓱였다.
한세연이 다시 강현을 째려봤다.
"이게 그 도끼병인가 그건가?"
도끼병. 모든 사람이 나를 찍었다고(좋아한다고) 생각하는 병이다.
자매품으로 왕자병과 공주병이 있었다.
"생각하는 꼴을 보니 머리가 장식용으로 쓰이는 것 같은데..."
"응?"
"그 쓸모없는 것 지금 떼어 드리죠."
"으아아아! 이거 미친년 아냐!?"
눈에 불을 켠 채로 검을 휘두르는 한세연을 보고 강현이 비명을 지르며 도망쳤다.
**
"드디어 찾았군."
가투 아사스가 말했다.
마치 지옥의 악마가 속삭이는 듯한 소름 끼치는 저음에 신성아가 몸을 떨었다.
'이럴 시간이 없어.'
당황해서 가만히 있어서는 아무것도 달라지지 않는다.
신성아는 곧장 품을 뒤져 연막탄을 꺼냈다.
"허튼짓은 하지 않는 게…"
-퍼어엉!
굴러나간 연막탄이 터지며 주위가 엄청난 연기에 휩싸였다.
일반적인 연막탄은 연막 차장을 하는데 시간이 수초에서 수분까지도 걸린다.
하지만 신성아가 쓰는 것은 보병용이 아닌 전차에서 주로 사용하는 장비.
던지자마자 엄청난 폭발이 일어나며 사방에 매캐한 연기가 들어찼다.
일반인에게는 치명적일 수 있는 상황이나 신성아 정도 되는 능력자에게 그런 것은 중요하지 않았다.
'제발 빨리 왔으면!'
연막은 자신이 탈출하기 위한 시간을 버는 것과 동시에 주위에 있는 사람들을 부르기 위한 구조 신호였다.
'보인다.'
시야가 완벽하게 차단된 상태였지만 신성아는 마력의 흐름으로 가투를 찾아냈다.
-투두두두!
연발 권총으로 가투가 있는 곳을 난사한 신성아가 재빨리 옆으로 뛰었다.
동시에 그녀가 있던 자리에 엄청난 마력의 칼날이 스치고 지나갔다.
-카가가가각!
콘크리트 바닥을 1m 이상 파내면서 날아온 마력의 칼날은 단숨에 뒤쪽에 있던 건물까지 쪼개버렸다.
그 황당할 정도로 무시무시한 위력에 신성아가 식은땀을 흘렸다.
'막는다는 선택지는 없어. 무조건 피해야 해.'
신성아가 추가로 연막탄을 뿌리며 몸을 숨겼다.
'마력을 숨기는 코트를 입기는 했는데... 어디까지 통할까?'
지금껏 그녀가 가투로부터 몸을 숨길 수 있던 이유는, 그녀가 최근에 외부로 방출되는 마력을 차단하는 코트를 샀기 때문이다.
장거리 저격의 이점을 최대한 살리기 위해 구매한 것이었는데, 이 정도 근거리에서 저런 강자에게도 효과를 발휘할 수 있을지는 미지수였다.
"재미있는 재주가 많군."
가투 아사스가 천천히 걸으며 말했다.
그가 걸을 때마다 갑옷으로 인해 철컥거리는 소리가 울렸다.
"그렇지만 살 생각은 하지 않는 게 좋을 거다."
신성아는 직감했다.
놈은 자신의 위치를 모른다.
시야와 마력이 차단된 이상 소리만 내지 않으면 위치가 발각될 일이 없는 것이다.
"하지만 잔재주는 어디까지나 잔재주일 뿐."
그때, 가투 아사스가 검을 고쳐 잡더니 제자리에서 엄청난 속도로 검을 휘둘렀다.
360도로 회전하며 휘두른 검.
-화아악!
그 검으로 인해 돌풍이 불며 단숨에 연기가 흩어졌다.
"죽어라."
가투가 재차 휘두른 검에 칠흑과도 같은 마력이 쏘아졌다.
'이런, 늦었어!'
너무나도 가까운 거리에서 휘둘러진 검.
피할 틈이 없었다.
신성아의 눈은 정확하게 공격을 파악했지만, 그녀의 신체는 그것을 따를 만큼 재빠르지 못했기 때문이다.
그렇게 신성아의 몸이 마력에 갈라지기 직전,
-터엉!
어디선가 쏘아진 마법이 검을 칼날을 쳐내며 경로를 틀어냈다.
"후우..."
자신의 몸을 스치듯이 지나가는 마력을 보며 신성아가 안도의 한숨을 내쉬던 그때,
"누나. 많이 기다렸어요?"
안유성과 윤나래가 다가왔다.
**
"생각보다 아늑한데?"
"강현 씨는 아늑하다는 게 무슨 뜻인지 모르는 것 같네요."
"이 정도면 아늑한 거죠. 뭐."
강현과 한세연이 보스룸을 걸으며 도란도란 이야기를 나눴다.
"그나저나 몬스터가 아무것도 없다는 게 불안한데."
"아까부터 은근슬쩍 말이 짧아지는 것 같네요."
강현이 반말을 사용하자 한세연이 눈을 흘기며 말했다.
"혼잣말한 건데요? 한세연 씨 혹시 그건가? 꼰대!"
"던전 밖에 나가면... 각오하는 게 좋을 거예요."
한세연이 어금니를 꽉 깨물며 말했다.
"그냥 반말하면 안 되나? 자꾸 잘 쓰지도 않는 존댓말 하려니 온몸이 다 오글거리는 느낌이네."
"..."
"몇 살이에요? 한세연 씨."
"스물아홉."
"뭐야? 동갑이었네. 곧 있으면 같이 서른 되는 처지에 편하게 말해!"
한세연은 밀려오는 두통에 머리를 붙잡고 인상을 썼다.
"마음대로 해요. 저는 이게 편하니까."
"그러던지."
"그나저나 강현 씨는 5월 8일생이었죠?"
갑작스러운 생일 물음에 강현이 당황했다.
"맞긴 한데... 어떻게 안 거야?"
"저는 4월 2일 생이예요. 제가 더 위라는 것만 알고 있어요."
한세연의 말에 강현이 눈을 잘게 뜨고 한세연을 바라봤다.
"이상한데 집착하네."
그렇게 생각해서 본인이 만족한다면야.
강현은 딱히 쩨쩨하게 한 달, 하루까지 따져가면서 형, 오빠 노릇을 하고 싶지는 않았다.
"그런데 진짜 보스는 어디 있는 거지?"
정말 코앞에서 메인 코어의 강력한 마력이 느껴졌지만, 보스는 도통 모습이 보이질 않았다.
주위에 있는 곳이라고는 끝도 없이 늘어져 있는 온갖 실험장비들.
"미로라면서 이런 게 있네?"
강현이 플라스크에 담겨 있는 용액들을 흔들어 대며 말했다.
"방심하지 말아요."
"이상하잖아. 벌써 메인 코어까지 와버렸네."
이야기를 나누며 걷다 보니 어느새 보스룸의 중앙, 메인 코어에 도달해 있었다.
"코어를 건드리면 나타나려나?"
강현이 마치 심장처럼 맥동하는 코어를 바라봤다.
"부순다?"
코어에 손을 올리며 말하는 강현.
"진짜 부숴!? 아무도 안 나와?"
"강현 씨. 일단 기다리는 게..."
"에이. 기다려서 뭐해? 시간만 아깝지. 메인 코어 부순다는데 반응이 없는 몬스터 본 적 있어?"
"..."
없다. 모든 몬스터의 제1과제는 코어를 지키는 것이었으니까.
"다른 공략대원들도 걱정하고 있을 텐데. 얼른 밖으로 나오게 해줘야지."
"후우... 알겠어요."
강현의 말에 결국 한세연도 설득됐다.
"마지막 기회 준다! 5초 안에 안 나오면 이거 부술 거야! 오. 사. 삼..."
강현의 협박에도 아무런 반응이 없는 실험실.
"이. 일. 아무도 없지?"
역시나 조용했다.
"그래. 그럼 나가자."
강현이 손을 강하게 움켜쥐고,
-파아앙!
그 힘에 메인 코어가 터져나갔다.
[던전의 중심 핵(Main Core)이 제거되었습니다]
[외부로 향하는 포탈이 열립니다]
강현과 한세연의 앞에 푸른 포탈이 생성됐다.
"얼른 나가자. 아! 나가자마자 샤워해야지. 찝찝해 죽겠…."
포탈을 향해 걸어 나가며 중얼거리던 강현이 돌연 걸음을 멈추었다.
"뭐야...?"
보스룸에는 여러 가지 실험을 하고 있었지만, 그중에 가장 눈에 띄는 것은 거대한 유리관에 잠들어 있던 몬스터들이었다.
"하... 조졌네."
그놈들이 동시에 눈을 뜬 채로 강현을 노려보고 있었다.
"수고했다."
그리고 등장하는 누군가.
딱딱거리는 소리와 함께 등장한 이는 해골이었다.
"또? 또야!? 또냐고! 이 지긋지긋한 새끼들아!"
해골의 머리 위에 떠 있는 다키란이라는 이름으로 놈이 던전의 보스임을 알 수 있었다.
"무슨 말인지 모르겠군."
연구자였던 다키란은 자신이 어떠한 공간(던전)에 갇혀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리고 저기 있는 메인 코어를 부수는 순간, 이 공간이 무너지리라는 것도.
하지만 어떠한 금제에 의해 그것을 실행할 수 없었다.
그때 들어온 공략대.
공략대를 보자마자 다키란의 머릿속에 멋진 계획이 그려졌다.
-놈들을 이용하면 되겠군.
자신이 부술 수 없다면, 남이 부수게 하면 된다.
그렇게 다키란은 자신에게 추가적인 금제를 걸어 움직일 수 없게 만든 뒤에 조용히 공략대를 기다렸다.
"멍청한 네놈 덕에 드디어 나갈 수 있게 되었군."
"하아... 나가서 보자. 새꺄."
어쨌거나 강현은 던전 밖으로 나가야 했다.
무너지는 던전에서 같이 싸웠다간 자칫하면 완전히 소멸된다.
그것보다는 밖에서 기다릴 공략대와 함께 보스를 처치하는 게 더 안전하고 성공 가능성이 커 보였다.
-화악!
눈앞에 빛이 번짐과 동시에 몸이 떠오르는 감각이 느껴지고, 다시 눈을 뜨자 어느새 던전 밖에 나와 있었다.
"응..?"
강현은 눈앞에서 벌어지는 광경에 입을 쩍- 벌렸다.
"이게 무슨 일이야...?"
**
-콰과과광!
폭탄이 터지고, 총성이 끊이질 않았다.
-스걱!
"끄아아아!"
윤나래와 안유성의 합류 이후, 마정석 무기들로 무장한 군대까지 전투에 가세했다.
하지만 가투 아사스는 조금도 밀리리 않았다.
-콰아앙!
애초에 일격에 건물을 베어내던 검이다.
아무리 최첨단 신소재 방검복을 입었던, 단단하고 두꺼운 철판으로 전차를 무장했던.
"죽어라."
아무런 의미가 없었다.
가투 아사스사 검을 휘두를 때마다 모든 것이 깔끔하게 썰렸다.
"젠장! 지금이라도 군대를 후퇴시켜야 해!"
신성아의 입에서 거친 말이 쏟아져 나왔다.
"어떡하면 좋겠습니까!?"
"연락할 방법이 없어요."
하지만 이곳은 A등급 던전 바로 옆.
던전에서 뿜어져 나오는 마력에 전자기기들은 사용이 불가능했다.
그들이 고민하는 사이에도 가투 아사스는 실시간으로 사람들의 목을 베어내고 있었다.
불과 10분도 지나지 않았는데 이미 목숨을 잃은 군인들이 서 있는 군인보다 많을 정도였다.
-드르르르르르...
더 문제는 이러한 사실을 모른 채 끊임없이 새로운 군대들이 밀어닥치고 있는 것.
"개죽음이 늘어날 뿐이야..."
저 악마는 단순히 숫자로 어찌해 볼 적이 아니었다.
여기에 군대를 더 밀어 넣는 것은 말 그대로 자살행위에 불과했다.
"우리가 나서야 합니다."
신성아의 말하자 윤나래가 고개를 돌려 바라봤다.
"감당할 수 있겠어요?"
"할 수 없어도 해야만 합니다."
이미 그들과 가투 아사스는 한 차례 격돌한 이후였다.
결과는 참패.
중간에 개입한 군이 아니었다면 여기 모인 셋은 이미 이 세상 사람이 아니었을 것이다.
"아직 상처가 회복되지 않았잖아요."
"저 많은 사람이 허무하게 죽는 걸 두고 볼 수만은 없습니다."
그때였다.
"무슨...?"
갑자기 던전이 있던 방향에서 엄청난 마력이 흘러나오기 시작했다.
그리고 천천히 열리는 던전의 문.
"던전이 클리어됐다..?"
가장 먼저 밖으로 나온 이는, 모두가 잘 아는 유명인사였다.
던전 밖으로 나온 강현이 머리를 긁적였다.
"이게 무슨 일이야...?"
190화 우연과 필연 사이(6)
190. 우연과 필연 사이(6)
혼란의 도가니.
이보다 더 이 상황을 잘 표현할 수 있는 말이 있을까?
총성. 그리고 폭약과 마법이 폭발하는 소음이 머리통을 울렸다.
사방에서 들려오는 비명과 괴성.
지옥이 현현(顯現)한 것 같은 풍경 속에서 강현이 달렸다.
'상황이 어떻게 돼가는 거야?'
잠깐 동안 신성아에게 들은 이야기를 종합하면 현재 이곳에는 몇 개의 세력이 격돌하는 중이었다.
정체불명의 검은 검사와 그 일당.
그들을 막기 위한 능력자와 군대.
던전에서 나온 공략대.
마지막으로 던전에서 나온 A등급의 몬스터 무리와 그 보스.
크게 묶었을 때 이렇게 4개의 무리가 있고, 이들을 세분하면 더 복잡해진다.
'일단 저 검은 갑옷을 입은 놈. 이름이 가투 아사스라고 했나?'
우선 가장 중요한 목표는 두 가지였다.
하나는 가투 아사스라는 검사를 잡는 것.
다른 하나는 던전의 보스 다키란을 죽이는 것이다.
'저 가투라는 놈은 뭐지?'
군대와 몬스터를 함께 베어내고 있는 가투 아사스를 보고 강현이 인상을 찌푸렸다.
'분명 24시간 이상 쉬지 않고 싸웠다고 했는데... 왜 저렇게 팔팔해?'
처음에는 A등급 던전의 보스 다키란을 가장 조심해야 된다 생각했다.
하지만 가투 아사스의 움직임을 보니 계획을 바꿔야 할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캬아악!"
그때 강현에게 한 몬스터가 주둥이를 들이밀었다.
"이 새끼가!"
강현은 재빨리 필시언의 해머를 휘둘렀다.
다키란의 미로 중심부.
실험실에서 나온 몬스터는 그런 강현을 비웃기라도 하듯 가볍게 점프를 해서 해머를 피했다.
순식간에 휘둘러진 놈의 발톱이 강현의 얼굴을 할퀴었다.
"이게 어디다 손을 대!?"
강현의 눈에 불이 켜졌다.
"잡몹이면 잡몹답게 그냥 뒤져!"
"케엑!"
강현이 상처에 개의치 않고 놈의 목줄을 움켜잡았다.
"끄아아!"
괴성과 함께 강현의 근육이 꿈틀거리고, 핏줄이 튀어나올 듯 커졌다.
천천히 몸에서 뽑혀 나오는 놈의 머리.
-콰드드득!
그대로 놈의 머리통을 뜯어낸 낸 강현이 손을 털었다.
"꼴에 메인 코어에서 나온 놈이라는 건가."
일반 몬스터 치고 수준이 상당히 높았다.
이런 놈들이 대량으로 풀려난 지금, 군대로 놈들을 막는다는 것은 무리일 것이다.
"모르겠다. 그냥 눈에 보이는 데로 족치다 보면 어떻게든 되겠지."
이런 혼란 속에서 치밀한 계획을 세우고 최선을 결과를 도출해 내는 것은 강현의 머리로는 무리였다.
강현은 일단 가까이에 보이는 적부터 차근차근 정리하기로 결정했다.
"응?"
그런 강현의 눈에 들어온 누군가.
"저놈... 어디서 봤는데..?"
놈은 머리가 없는 언데드였는데, 그 외형이 상당히 기괴했다.
자신의 머리를 손에 쥐고 휘둘러서 다른 사람의 머리를 후려쳐 죽이는 모습. 얼마나 많은 사람의 머리를 깨부순 것인지 머리통이 완전히 피에 절어 있었다.
"어디서 봤더라..."
인상을 찌푸린 채 놈을 바라보던 강현이 고개를 저었다.
"몰라. 어차피 뒈질 놈."
생각해보니 곧 죽을 놈의 이름을 굳이 기억할 필요는 없었다.
"크아아아!"
그 순간, 놈이 강현을 보더니 갑자기 미친 듯이 괴성을 내질렀다.
호흡, 발성 기관이 없이 어떻게 저런 우렁찬 소리가 나올까? 라는 시답잖은 생각을 하며 강현이 마주 달려갔다.
"네 머리가 그렇게 딱딱하냐?"
"크아아! 크아! 크아아!"
임현성이 달려오며 자신의 머리를 전력으로 휘둘렀다.
"내 머리가 더 딴딴해. 새꺄!"
강현도 지지 않고 자신의 머리를 들이밀어 놈의 머리에 가져다 댔다.
그 결과.
-퍼걱!
수많은 사람의 머리통을 부쉈던 임현성의 머리가 무른 수박처럼 터져나가며 흩어졌다.
그리고 달려오던 임현성의 몸뚱이는 그대로 힘이 풀리며 바닥에 쓰러졌다.
"아으. 머리야... 이거 왜 이렇게 돌대가리야!?"
순간 강현은 우주를 경험했다.
별이 흩날리는 느낌에 머리를 만져보니 거대한 혹이 생긴 것이 느껴졌다.
평소라면 10초 이내에 상처가 가라앉아야 했는데 어째서인지 혹은 크기가 줄어들 기미가 보이질 않았다.
"휴우. 됐다. 그냥 가자."
머리에 덕지덕지 붙은 임현성의 피와 살점이 손으로 쓸어낸 강현이 다시 앞으로 달려갔다.
**
가투 아사스는 고민했다.
'상황이 이상하게 돌아가는군...'
이곳에서 느껴지던 마력이 사실 '던전'이란 곳에서 흘러나온 것이란 사실.
그리고 그 던전에서 나온 정체불명의 언데드가 상당히 강한 힘을 가지고 있다는 것.
모든 것들이 그의 머리를 혼란스럽게 했다.
'특히 저 언데드...'
하늘을 날아다니며 마법을 난사하고 있는 '다키란'이라는 리치.
놈의 힘은 쿨사 작위의 능력을 뛰어넘고 있었다.
거의 아사스와 비등할 정도.
'저런 힘을 가진 놈을 몰랐다? 있을 수 없는 일이다.'
올룬과 쿨사의 경우에는 숫자가 제법 많았기에 가투가 모른다고 하여도 그리 이상한 일이 아니다.
하지만 아사스 작위부터는 다르다.
현재 대륙에 있는 아사스는 약 총 서른이 되지 않기 때문이다.
아사스 위의 작위인 아드라즈의 경우 단 셋뿐이다.
현재 대륙의 모든 언데드들은 절대자 '아곤'의 아래에 있는 상황.
모든 것을 종합했을 때 저런 강한 언데드가 갑자기 튀어나온다는 경우는 있을 수 없었다.
사실 이는 던전이라는 것이 과거의 하켄 차원을 기반으로 만들어진 것이기에 발생한 일었다.
즉, 현재 '아곤'을 주축으로 하는 언데드 무리와 던전 안의 언데드들은 아무런 관계가 없다는 것이다.
이 사실까지는 알지 못했던 가투 아사스는 고민했다.
'지금이라도 빠져야 하나?'
현재 자신은 너무 지쳐 있었다.
언데드라 육체적인 피로는 없지만, 장장 하루 이상 지속한 전투로 인한 정신적 피로가 상당했다.
거기에 바닥이 드러난 마력.
지금 남은 마력은 채 두 시간이 지나기 전에 바닥을 드러낼 것이다.
'아쉽지만 어쩔 수 없지.'
잠시 물러난 후에 다시 와야 한다.
급하게 계획을 진행하는 것보다는 자신의 안위가 더욱 중요했으니까.
그렇게 슬그머니 가투 아사스가 빠지려던 그때였다.
"어디를 가는 거지?"
새하얀 로브를 펄럭이는 언데드가 가투의 앞을 막아섰다.
"비켜라..."
"감히 나 다키란에게 명령이라니. 우습군."
가투를 막아선 다키란이 불쾌하다는 듯 이빨을 딱! 부딪쳤다.
"어디서 온 놈인지 모르겠지만, 나는 절대자 아곤을 모시는 종이다. 이런 태도는 네놈에게도 이로울 것이 없다."
"아곤? 그런 이름은 처음 듣는군."
"뭐라고..?"
"아곤인지 뭔지는 모르겠으니... 이곳에서 죽어줘야겠다. 너를 보니 살려뒀다가는 조금 귀찮아질 것 같다는 생각이 들어."
다키란은 가투 아사스의 전력을 정확하게 파악했다.
가투는 이곳에서 가장 압도적으로 강력한 무력을 지니고 있다.
'하지만 지쳐 있지.'
새로운 세상에서 자신의 활동에 걸림돌이 될 만한 놈은 즉시 처리하는 것이 옳았다.
"어쩔 수 없군..."
"죽어라."
그렇게 두 언데드가 격돌했다.
**
"워... 살벌하네..."
조금 떨어진 곳에서 벌어진 전투를 보며 강현이 입을 벌렸다.
"어떻게 하실 생각입니까?"
강현의 옆으로 다가온 신성아가 물었다.
"저대로 놔둬서 이긴 놈이랑 붙는 거지. 뭐."
현재 전투는 가투와 다키란의 싸움을 제외하면 대부분 끝이 나고 마무리 단계에 접어들고 있었다.
"위험한 놈들입니다."
"그래 보이네."
"저 둘 중 하나라도 살아나간다면..."
"그렇게 안 되게 막아야겠지. 일단 기다려 봐. 고민하는 중이니까."
-콰아아아앙!
두 언데드가 싸우며 뿜어져 굉음과 마력의 파장에 머리가 지끈거릴 정도였다.
"이 정도면 거의 드라곤볼 저리 가라네."
강현은 확신했다.
저기 정면승부로 끼어들었다가는 죽도 못 쓰고 죽을 것이라는 걸.
"응?"
그때였다.
모든 상황이 정리되는듯하여 보이자 군대가 움직이기 시작했다.
"저기를 들어간다고? 지금? 굳이?"
가만히 놔두면 이이제이를 노릴 수 있는 상황이다.
누워서 굿이나 보고 떡이나 먹으면 되는 상황에 누군가가 죽음을 자초하고 있었다.
"안 돼. 가서 말려!"
강현이 다급히 달려갔으나, 이미 포탄은 쏘아졌다.
-투두두두!
가투와 다키란이 있는 곳에 가해지는 무차별 포격.
잠깐 동안 가해진 공격에 먼지구름이 피어나고, 조금 시간이 흐르자 그곳이 드러났다.
"하아... 엿됐네."
가투 아사스와 다키란이 이곳을 향해 달려오기 시작했다.
**
인간들을 향해 달려가며 가투 아사스가 고민했다.
'지금이 기회다.'
다행히 자신의 동맹 제안에 '다키란'이 승낙했다.
'우선 물러나야겠군.'
가투는 더 이상 싸울 생각이 없었다.
이 인간들의 처리는 다키란에게 맡기고 자신은 빠져서 회복할 생각이었다.
'이 가투 아사스에게 이런 수모를 주다니...'
적어도 지난 백 년 안에는 상상조차 하지 못했던 일이다.
가투의 무력은 하켄 대륙의 인간 중 초인이라 불리는 자들과 엇비슷한 수준이었다.
즉, 대륙 전체에 가투와 싸워볼 만하다 할 만한 인간은 채 열 명이 되지 않았던 것이다.
이종족까지 뻗어 나가면 그 수가 조금 늘겠지만, 그리 큰 차이가 나지는 않는다.
'재미있군.'
그렇게 강한 자신이 이런 낯선 세계에서 곤욕을 치르리라고는 정말 예상하지 못했다.
'살아남아 주겠다.'
이미 수백 년의 세월을 견뎌왔다.
그런 자신이 이런 낯선 곳에서 허무하게 당할 생각은 전혀 없었다.
가투는 어떻게든 살아남아서 더욱 강해지고, 절대자 아곤이 만든 원대한 세계를 보게 될 것이다.
"거기까지입니다."
그때, 한 인간이 가투의 앞을 막아섰다.
눈매가 상당히 매서운 여성이었는데, 느껴지는 기세가 심상치 않았다.
동시에 자신의 주위로 은근히 포위망을 좁혀오는 몇몇 인간들이 느껴졌다.
'모두 기세가 제법이다.'
평상시라면 크게 문제가 될 만한 수준은 아니었지만, 지금은 한계까지 내몰린 상황.
솔직히 다른 아사스급의 언데드라면 이길 수 있다고 확실할 수 없을 것이다.
"죽여주마."
하지만 자신은 달랐다.
아곤의 군대 중 오직 '검' 실력에 한해서는 최고의 경지에 이르렀다 평가받는 가투 아사스.
검을 고쳐잡은 가투 아사스가 곧장 한세연에게 달려갔다.
그녀가 대장인 것을 느끼고 먼저 처리하기로 한 것이다.
-촤아아!
예의 검은 마력이 가투의 검에서 뿜어지고,
-채앵!
한세연이 검을 비틀어 그 마력을 흘려보냈다.
그 모습을 보며 가투가 작게 감탄했다.
'이곳에서 내 공격을 흘려낸 첫 번째 인간이군.'
지금까지 공격을 제대로 막아낸 남자는 단 하나 최동우.
그런 최동우도 저렇게 완벽하게 자신의 공격을 흘려내지는 못했다.
'제법이야.'
굉장히 뛰어난 실력이었다.
어디까지니 인간의 기준에서는.
가투 아사스가 다시 검을 휘두르고, 동시에 한세연의 눈이 부릅떠졌다.
"죽어라."
사방에서 쏟아지는 칼날의 향연.
모든 인간의 한계라 불리는 초인을 뛰어넘은 그 움직임이었다.
-채애애앵!
한세연이 다급히 검을 휘둘러 공격을 쳐내려 했으나 역부족이었다.
가투의 공격은 이전처럼 단순히 강력한 마력을 쏘아내는 것이 아니었다.
검술의 극한.
그 경지에 이른 자의 움직임.
마치 모든 것을 내다보고, 그의 손바닥 안에서 칼춤을 추는 것 같은 기분이었다.
"길드장님!"
사태의 심각함을 깨달은 단군 길드원들이 재빨리 달려왔으나.
"크아악!"
단 일합도 제대로 견뎌내지 못하고 가투의 검에 목이 잘려나갔다.
그러는 와중에도 실시간으로 한세연의 몸에 상처가 늘어가고 있었다.
"실력과 재능이 뛰어나구나. 십 년만 지났으면 나조차도 승리를 확신하지 못할 정도로."
한세연의 움직임을 본 가투 아사스의 말이 길어졌다.
같은 검을 다루는 자로서 한세연의 실력에 대한 순수한 마음이었다.
"크윽...!"
"하지만 시기가 좋지 않았다. 네 운명을 탓해라."
가투 아사스가 한세연을 향해 검을 휘두르려던 찰나, 갑자기 경로를 바꿔 옆을 향해 휘둘렀다.
"제길!"
공격을 완벽하게 막아냈다고 생각했으나, 힘이 부족했다.
-콰아아아앙!
거대한 해머에 맞은 가투 아사스가 단숨에 허공을 날아 100m 밖으로 날아갔다.
"허억, 허억..."
바닥에 무릎을 꿇은 채로 숨을 헐떡이는 한세연.
필시언의 해머를 휘두른 강현이 그녀를 보며 웃었다.
"쯧쯧. 똥폼 잡을 때부터 알아봤다니까."
191화 진짜 강한 놈(1)
191. 진짜 강한 놈(1)
"쯧쯧. 똥폼 잡을 때부터 알아봤다니까."
"하아... 지금 상황에 농담이 나옵니까?"
한세연이 숨을 헐떡이며 말했다.
"됐으니까 저쪽으로 가."
"저쪽?"
강현이 가리킨 곳을 보니 그곳에는 하늘을 나는 언데드가 있었다.
놈이 던지는 마법이 폭죽처럼 터지며 굉음과 함께 화려한 불꽃 쇼가 연출됐다.
"저기도 위험하니까 가보라고. 여기는 나 혼자 막을 거니까."
"놈은 그런 허세를 부릴 상대가 아니에요!"
강현에게 맞은 갑옷을 툭툭 털며 걸어오는 가투 아사스.
놈을 보며 한세연이 소리쳤다.
"일단 어떻게든 같이 처치하고…."
"어떻게든 어떻게 처치할 건데?"
"그건..."
"그냥 가라니까. 거 참 말 많네. 상성이란 게 있다고 상성. 몰라?"
"..."
"내가 제일 잘 아니까 빨리 가. 가서 회복하고 저쪽 처리해. 그리고 다시 와서 도와주면 되잖아?"
"그때까지 당신이 버틸 수 있다는 보장이 없어요."
"여차하면 그냥 죽지 뭐. 죽고 다시 부활하면 되잖아?"
강현이 이렇게까지 나오자 할 말이 없었다.
한세연이 자리에서 일어나며 강현을 노려봤다.
"죽지 말고 기다리고 있어요."
"네 걱정이나 해."
한세연이 서둘러 달려 나가려던 찰나,
"의미 없는 대화군. 어차피 너희들은 여기서 죽는다."
가투 아사스가 엄청난 속도로 검을 휘둘러 그녀가 있는 방향으로 마력을 날렸다.
-쐐애애액!
가로막는 모든 것들을 잘라버리며 날아오는 마력.
-터엉!
강현은 해머에 마력을 두른 채로 가투의 검은 마력을 쳐냈다.
"곧 죽을 건 너겠지. 다 죽어가는 놈이 어디서 허세를 부리네."
가투와 강현이 서로를 노려보며 침묵했다.
'이제 어떻게 한다...'
한세연에게는 자신만만하게 말했지만 솔직히 강현도 방도가 없었다.
-상성이란 게 있다고 상성. 몰라?
상성 이야기는 그냥 아무렇게나 내뱉은 말이었다.
'그딴 게 어디 있어 시벌.'
굳이 따지자면 이쪽이 오히려 상성이 안 좋다고 할 수 있었다.
"계속 그렇게 서있을 건가?"
가투가 강현에게 물었다.
"그러면? 당장 시작할래? 어차피 너도 다친 몸 회복하고 있잖아?."
강현의 대답에 가투 아사스가 이빨을 딱! 부딪쳤다.
"재미있군. 내가 시간을 끈다 생각하나? 고작 네놈을 상대로?"
"그럼 아냐?"
"죽여주지."
말이 떨어짐과 동시에 가투 아서스가 달려왔다.
강현은 빌게인의 장검을 꺼내 들었다.
재빠른 놈을 상대로 무거운 해머를 쓰는 것은 힘들다 판단해서였다.
'좌측 상단인가?'
검로를 예측해 막으려던 찰나, 검 안에 잠들어 있던 베일이 외쳤다.
-한 방향으로 온다는 안일한 생각은 버려! 상대는 괴물이다.
'뭐?'
베일의 말이 끝나자마자 강현은 그 의미를 깨달을 수 있었다.
-촤자자작!
사방에서 날아드는 검.
순식간에 강현의 몸에 수십 개의 칼자국이 생겨났다.
만약 가투의 공격에 마력이 담겨 있었다면, 이번 접전으로 목숨을 잃었어도 이상할 것이 없는 수준.
"이게!"
강현이 힘껏 마력을 밀어 넣어 검을 휘둘렀다.
"아직 자신의 힘조차 제어하지 못하는군."
가투는 그런 강현의 검을 가볍게 피하며 조소했다.
'어떻게 해야 돼?'
강현이 속으로 베일에게 물었다.
-상대는 내가 인간이던 시절의 검술 능력을 아득히 뛰어넘은 존재다. 나한테 물어봤자 아무런 도움도 얻을 수 없어.
'하아...'
-너답게 싸워라. 그게 이 상황을 해결할 수 있는 유일한 해답이다.
'나답게...'
갑자기 자신답게 싸우라니.
강현은 그 말의 의미를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지 알 수 없었다.
그러는 사이에도 가투의 공격은 멈추지 않고 계속됐다.
-촤아아아!
그렇게 강현의 전신에 상처가 생기고, 회복되고, 다시 상처가 생기고.
그런 과정이 한참 동안 계속됐다.
"질긴 놈이군. 트롤보다 더한 놈이야."
가투가 질렸다는 듯 말했다.
"그거 칭찬이지?"
강현이 씨익 웃으며 대답했다.
'언제까지고 이렇게 당하기만 할 수는 없어.'
현상 유지가 계속되면 먼저 마력이 바닥나는 것은 자신을 것이다.
가투는 일부러 마력의 사용을 극도로 제한하며 강현을 공격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다른 쪽은 어떻지?'
강현이 슬쩍 눈을 굴려 다키란과 전투가 벌어지는 곳을 바라봤다.
그곳에는 한세연과 던전 공략대, 배데스 길드원, 그리고 군대까지 합세해서 싸우고 있었지만 오히려 열세인 것처럼 보였다.
'도움은 기대할 수 없겠네. 여기서 어떻게든 해결해야 돼.'
강현이 고민하는 사이에도 그의 몸에는 끊임없이 상처가 생기며 사라지기를 반복하고 있었다.
'잠깐 마력 포션 마실 여유만 만들어도 좋겠는데...'
강현이 그렇게 생각할 때였다.
[스킬 상급 육체 재생의 등급이 상승합니다]
[마력에 변화된 신체에 맞춰 스킬이 진화합니다]
[스킬 마력 육체 재생을 획득합니다]
마력 육체 재생(S) :
능력 : 마력으로 육체를 만들어 손상된 신체를 복구합니다.
상세설명 : 축하합니다. 당신은 이제 죽고 싶어도 죽기 힘든 몸이 되었습니다. 마력으로 신체의 회복력을 끌어올리는 것을 뛰어넘어, 마력으로 자신의 육체를 만들어 냅니다.
변화는 스킬뿐만이 아니었다.
[칭호 '최초의 S등급 스킬 획득자'를 획득합니다]
갑작스럽게 얻은 스킬과 칭호.
강현은 어떻게 이 상황을 받아 들여야 할지 고민했다.
"어... 개꿀...?"
**
강현에게 검을 휘두르면서도 가투 아사스의 머리는 빠르게 굴러갔다.
'여러 가지로 인간이라 보기 힘든 놈이군.'
처음 강현의 기습 공격에 당해 날아갔던 그때.
가투 아사스는 뼈에 금이 갔었는데, 아직도 완벽하게 낫지 않았다.
일반적인 인간을 아득히 뛰어넘는 완력.
그것만으로도 괴물 같은 놈이었는데, 더한 것은 회복력이었다.
'저 인간은 어미가 트롤이라도 되는 것인가?'
과장을 조금 보태면 어지간한 트롤보다 더 회복력이 좋은 것 같았다.
그뿐만이 아니다.
가죽은 얼마나 질긴지 오우거의 살갗을 베어도 이것보다는 부드러울 것이다.
'마력을 사용하면 빠르게 끝낼 수 있겠지만...'
지금은 마력을 최대한 모아야 할 때였다.
실제로 가투 아사스는 강현과 싸우며 아주 조금씩 마력을 회복하고 있었다.
'섣불리 움직여서 놈에게 틈을 주는 것보다는 현상을 유지하는 것이 최선의 선택이다.'
어차피 강현이 몸을 회복하는 것에도 한계가 있을 것이다.
실제로 그의 마력이 처음보다 많이 떨어진 상태였으니까.
머지않아 강현의 마력이 바닥나고, 회복력이 떨어지면 강현은 자연스럽게 죽게 된다.
그 이후에 자신은 충만해진 마력으로 다키란을 처리하고, 유유자적 이곳을 빠져나간다.
그러면 모든 것이 해결될 것이다.
'음..?'
그런데 상황이 변했다.
갑자기 강현의 기세가 변한 것이다.
'뭐하는 짓이지?'
허공을 보며 놀란 표정을 짓더니, 다시 실실 웃고 있었다.
마치 실성한 것 같은 모습.
'어째서인지 모르겠지만... 조금 강해졌다.'
본능적으로 느껴졌다.
저기 서 있는 인간. 강현이 강해졌다는 것을.
분명 마력도 그대로 변한 것은 없었지만, 그럼에도 자신은 알 수 있었다.
그때 강현이 자신을 바라보며 씩 웃었다.
"2차전 시작해야지?"
가투는 대답하지 않고 자세를 고쳐 잡았다.
'어쩔 수 없이 마력을 조금 사용해야겠어.'
최소한의 사용으로 최대의 효율을 만들어 낼 생각이다.
자신은 그렇게 할 수 있었다.
-콰앙!
강현이 땅을 박차고 달리기 시작했다.
'아무리 괴물 같은 신체능력을 지녔다고 하여도...'
가투의 안광이 빛나며 검이 벼락처럼 뿜어져 나왔다.
-촤악!
달려오던 강현은 온몸을 틀어 공격을 피하려 했지만.
'극한에 다다른 기술 앞에서는 아무런 의미도 없다.'
결국 팔 전체가 잘리고 말았다.
강현이 팔이 바닥에 떨어지며, 턱 하는 묵직한 소리가 울렸다.
"아..."
입을 벌린 채로 그것을 바라보는 강현.
"오른 팔이 잘렸군. 이제 끝이다."
승부는 여기서 끝난 것이나 마찬가지다.
그때 강현이 자신의 떨어진 팔을 집어 들었다.
그리고는 상처 부위에 가져다 대는 모습.
"크하하하!"
가투가 처음으로 큰 소리로 웃음을 터뜨렸다.
"네놈이 아무리 트롤 같은 신체 능력을 지녔다고 해도, 그것은 무리다. 그건 최상급 치유사가 마법으로 붙이지 않는 이상…."
가투 아사스가 말을 멈추었다.
강현의 상처 단면에서 촉수와 같은 기괴한 것들이 연결되더니, 그대로 상처를 봉합해 버렸기 때문이다.
"어..."
심지어 붙인 지 몇 초만에 강현은 손을 자유자재로 움직이고 있었다.
"이게 되네?"
"..."
"솔직히 나도 될지 몰랐는데 말이야. 하하하하하!"
가투 아사스는 이것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지 알 수 없었다.
'진정해라. 고작 회복력이 조금 더 좋아졌을 뿐이다.'
저 현상을 '고작'과 '조금'으로 표현하는 것이 맞는지는 모르겠지만, 어쨌거나 회복력이다.
저것으로 인해 강현의 실질적인 무력이 더욱 강해지거나 하는 것은 아닌 것이다.
'회복하지 못할 만큼 전신을 난도질해주지.'
가투 아사스가 자세를 고쳐 잡고 재차 검을 휘둘렀다.
이전보다 더욱 날카롭고 기민해진 움직임.
거기에 강력한 마력까지 담겨 있었다.
-촤아아악!
강현의 몸에 또다시 수많은 상처가 생기며 사방으로 피가 뿜어져 나왔다.
그러나 강현은 달리는 것을 멈추지 않았다.
"흥."
가투 아사스는 코웃음을 쳤다.
강현이 하고자 하는 바가 너무 뻔했기 때문이다.
회복력을 믿고 어떻게든 접근해서 진흙탕 싸움을 만든다.
거기서는 자신의 자신 있는 완력을 이용해 승부를 결정지을 것이다.
'나쁜 방법은 아니다만...'
어디까지나 실력이 엇비슷한 상대에게나 통할 방법이다.
자신은 이미 그런 것에 당할 수준을 뛰어넘었다.
강현이 더 접근한다고 해도 자신은 절대 그의 손에 붙잡히지 않을 것이다.
천천히 놈의 주위를 맴돌며 사지를 잘라내고, 몸통만 남은 놈의 심장에 검을 틀어박을 것이다.
-촤악!
또다시 강현의 몸이 베이며 피가 후두득 하고 떨어졌다.
"다 왔다."
자신을 보며 악귀처럼 웃는 강현.
"딱! 한 대만 맞아라."
예상처럼 강현은 빠르게 자신을 향해 손을 뻗어왔다.
"소용없다."
가투 아사스는 재빠르게 검을 휘둘러 강현의 팔을 쳐냈다.
강력한 마력을 두른 덕분에 허무하게 강현이 팔이 잘리며 허공을 날았다.
"페이크다. 새꺄!"
"...!"
그때 다시 날아오는 강현의 주먹.
피하기에는 이미 늦었다.
가투 아사스가 팔을 오므려 강현의 주먹을 막아냈다.
'이깟 주먹 한 대 쯤…."
가투는 생각은 그것으로 끝이었다.
-콰아아아아아앙!
강현의 주먹에 맞은 가투의 갑옷이 폭발한 것처럼 터져나갔고, 사방으로 뼈들이 흩날렸다.
"후우..."
한숨을 내쉰 강현이 잘린 왼팔을 들어 다시 몸에 붙였다.
"내가 한 대면된다 했잖아."
**
강현이 터벅터벅 걸어 가투 아사스의 두개골에 다가갔다.
"크으으... 이건 좀 많이 아프네."
전사의 죽음 사용한 영향으로 온몸이 끊어질 것 같았다.
척추 중앙을 중심으로 완전히 끊어진 가투는 양팔만으로 겨우 바닥을 기어 움직이고 있었다.
"도대체..."
강현이 쪼그려 앉은 채로 가투 아사스를 바라봤다.
"말해봐. 그래도 마지막 가는 길인데 들어줄 테니까."
"네놈... 정체가 뭐냐..."
"정체?"
정체가 뭐냐는 물음에 강현이 턱을 쓰다듬으며 고민하더니 이내 미소를 지었다.
"뭐긴 뭐야. 너보다 쎈놈이지."
"그런…!"
가투 아사스는 무언가를 말하려 했으나,
-파각!
강현의 주먹에 두개골이 깨어지며 말을 끝맺지 못했다.
192화 진짜 강한 놈(2)
192. 진짜 강한 놈(2)
강현이 가투 아사스와 싸우던 그때.
A등급 던전에서 나온 보스 몬스터 '다키란'이 있는 곳에도 접전이 벌어지고 있었다.
"흥미로운 땅이야."
100명이 넘어가는 능력자들.
그리고 엄청난 숫자의 군대와 싸우면서도 다키란은 여유로웠다.
"대부분은 보잘것없는 놈들이긴 하지만... 이 정도만 해도 한동안 즐기기에는 충분하겠지."
다키란은 '생명체'라는 것에 미쳐있는 연구자였다.
다키란이 미로를 만들고 그 중심에서 실험을 했던 것 또한 방해받지 않기 위해서였다.
대륙에서 생명체에 관한 연구는 금기시되는 것이었으니까.
그런 다키란의 눈에 이곳에 있는 최신식 현대 무기들은 그다지 신비롭지 않았다.
정확히는 말하면 신기했지만, 그다지 관심이 가지 않았다.
그가 눈여겨보는 것은 바로 능력자들.
그중에서도 특출나게 뛰어난 능력을 보이는 이들이었다.
'대충 열 명 정도인가.'
한세연과 단군 길드원 셋.
불사 길드의 한명도.
신성아와 안유성 그리고 윤나래.
그 외에도 연구해볼 가치가 느껴지는 인간 몇몇이 보였다.
-타앙!
그때 총성이 들리며 다키란의 마력 실드가 깨어졌다.
"아까부터 귀찮게 하는군."
특히 멀리서 총기를 쏘고 있는 여성, 신성아.
다키란은 그녀가 가장 거슬렸다.
이곳에서 유일하게 자신의 마력 실드를 완벽하게 부술 수 있었기 때문이다.
실드가 부서지자마자 기다렸다는 듯이 다키란에게 마법들이 쏟아졌다.
다키란은 다급히 몸을 피하며 재차 실드를 전개했다.
'아무래도 마력의 흐름을 눈으로 보는 것 같단 말이지.'
사실 신성아에게서 날아오는 탄환은 강한 힘을 품고 있지 않았다.
아니, 보통의 기준에서 강한 힘은 맞았으나, 그것만으로 실드를 뚫는다는 것은 불가능했다.
그런데 항상 저 탄환이 날아올 때마다 실드가 연약한 유리처럼 허무하게 깨어졌다.
'마력의 흐름을 보고 연약한 부분, 실드의 중심부를 정확하게 파괴하지 않는다면 불가능한 일이지.'
언젠가 들은 적이 있었다.
마력을 눈으로 볼 수 있는 자들이 있다는 것을.
보통 마력이란 감으로 느낄 수밖에 없다.
마력을 방출하며 유형화될 때, 타오르는 불꽃 같은 모습을 보이기는 하지만.
그것은 단지 마력이 타오르며 생기는 현상일 뿐이다.
정말로 미세한 마력의 흐름을 느낀다는 것은 감각을 극도로 날카롭게 갈고닦아야만 했다.
'하지만 아무리 감각이 좋더라도 이런 공격은 불가능하지.'
신성아는 처음부터 끝까지 단 한 번도 놓치지 않고, 마력의 흐름을 끊어내는 공격을 가했다.
그것도 먼 거리에서 정확하게.
이것은 마력의 흐름이 눈에 보이지 않는 이상은 불가능한 묘기였다.
'궁금해 미치겠군. 저 눈알을 뽑아서 직접 사용하고 싶을 정도야.'
다키란의 생각에 이번 전투에서 얻어야 할 가장 중요한 실험체는 바로 신성아. 그녀뿐이었다.
"음?"
그때였다.
다키란의 감각에 무언가 예상치 못한 것이 잡혔다.
'설마 당한 건가.'
조금 전까지 자신과 싸웠던 언데드.
가투 아사스라는 이름을 가지고 있던 놈의 마력이 끊어진 것이다.
'이런 곳에서 죽을 것이라고는 생각하지 못했는데.'
한눈에 봐도 지쳐 있는 것이 느껴지기는 했었다.
하지만 가투 아사스라는 놈의 실력은 진짜였다.
아무리 지쳐 있다고 해도 고작 이런 곳에서 당할 수준이 아니었다.
'온전한 상태에서 싸웠다면 나조차도 장담하지 못할 정도였는데...'
다키란은 고개를 저어 상념을 떨쳐냈다.
어차피 이미 벌어진 일.
게다가 가투 아사스는 자신의 적이었다.
누군가 처리해 줬다면 도리어 고마워해야 할 일이다.
"나도 본격적으로 움직여야겠군."
생각을 정리한 다키란이 자신의 아공간을 뒤져 무언가를 꺼냈다.
어린아이의 주먹만 한 그것은 씨앗의 모양을 하고 있었다.
"품종을 개량한 멜키러스의 씨앗."
다키란이 손수 만들어낸 이 씨앗은 그의 역작 중 하나였다.
-툭
다키란이 던진 씨앗이 바닥에 떨어졌다.
다키란이 마력을 불어넣자 씨앗이 그것을 게걸스럽게 먹어치우기 시작했다.
-파르르르!
엄청난 속도로 씨앗을 뚫고 자라난 거대 식물.
"뭐야!?"
"으아아아!"
순식간에 10m 가까이 자라난 멜키러스는 통나무만 한 촉수를 휘두르며 닥치는 대로 주위에 있는 것을 잡아먹었다.
그 외에도 다키란은 아공간에 들어있던 괴생명체를 여럿 풀어냈다.
상상할 수 없는 기괴한 모습의 키메라들.
인간보다 작은 크기부터 코끼리보다 거대한 것들까지.
하나하나가 다키란의 역작들이었다.
"나의 예술품들아. 너희들의 가치를 뽐내라."
다키란이 풀려난 괴물들을 보며 흡족해하고 있을 때였다.
뒤쪽에서 빠르게 접근하는 마력이 느껴졌다.
"누구냐?"
고개를 돌리자 사나운 인상의 인간이 자신을 바라보고 있었다.
"나?"
자신을 손가락으로 가리키며 씨익 웃는 인간.
"초 울트라 강력한 해골 뚝배기 브레이커."
**
가투와의 전투를 끝낸 강현은 곧장 다키란이 있는 곳으로 이동했다.
"크으! 다음에는 콜라 맛으로 만들어 달라 해야겠어."
강현이 마력포션을 마시며 쓸데없는 생각을 하는 사이.
"끄아아아!"
어느새 땅에서 자라난 거대 식물이 사람들을 삼키고 있었다.
"저게 뭐야?"
갑자기 전투의 장르가 바뀌는 느낌에 당황하던 강현은 뺨을 두드리며 정신을 일깨웠다.
"일단 가자."
저게 뭐든 간에 저걸 만들어낸 놈이 있을 것이다.
원래 전투는 머리만 처리하며 끝.
'괜히 팔다리에 얽혀서 싸워봤자 별 볼 일 없는 진흙탕 싸움만 될 뿐이지.'
진흙탕 싸움의 대가 강현이 서둘러 이동했다.
적의 보스, 다키란을 찾는 것은 그리 어렵지 않았다.
거대 식물의 뒤쪽에서 강한 마력을 뿜어내고 있는 언데드.
다키란에게 다가가자, 놈도 자신을 느끼고 고개를 돌렸다.
"누구냐?"
"초 울트라 강력한 해골 뚝배기 브레이커."
놈과 불필요한 대화를 이어가는 사이.
강현은 조용히 자신의 몸에 버프를 걸었다.
'거인의 힘'과 '웨인의 비기'. 마지막으로 '광전사'까지.
사용할 수 있는 모든 것을 써서 단숨에 전투를 끝낼 생각이었다.
"크으으..."
몸 안에서 요동치는 막대한 힘이 느껴졌다.
실시간으로 몸이 붕괴하고 있었지만, 이전보다 훨씬 빠르게 회복되고 있었기에 문제는 없었다. 다만,
'금방 마력이 바닥나겠네.'
회복속도가 증가한 만큼 마력이 미친 듯이 소모됐다.
효율성으로 따지자면 이전보다 훨씬 좋아졌지만, 그럼에도 너무 지나치게 회복력이 빨라져 마력이 순식간에 동나고 있었다.
"네 몸은 신기하군. 지금껏 한 번도 보지 못한 육체 구성이다. 네놈을 잡아서 새로운 실험체로…."
"닥쳐! 시간 아까우니까!"
고함을 친 강현이 곧장 땅에서 점프했다.
동시에 강현의 엄청난 괴력을 견디지 못한 지면이 쩌적- 하고 갈라지고,
-콰앙!
굉음과 함께 흙먼지가 피어올랐다.
"...!"
그것을 본 다키란이 자신의 모든 것을 쏟아부으며 방어 마법을 전개했다.
눈 깜짝할 사이에 다키란의 앞에 도착한 강현이 곧장 빌게인의 장검을 휘둘렀다.
-끼기기기긱!
실드를 짓이기며 조금씩 파고드는 장검.
"이런 정신 나간 인간이!"
분명 강현의 장검에는 마력이 둘러져 있었지만, 다키란의 입장에서는 그리 대단할 것이 없는 수준이었다.
현재 실드를 찢고 있는 것은 강현의 순수한 완력.
'고작 완력으로 내 실드를 뚫겠다고!?'
이것은 자신에 대한 도전이었다.
다키란은 분노가 치밀어 오르는 동시에 강렬한 환희가 차올랐다.
'아직, 아직 더 확인이 필요하다.'
다키란이 더욱 실드를 강화하며 강현에게 공격 마법을 날렸다.
-콰아앙! 쾅!
순식간에 강현의 전신에 폭발이 일어나고, 살갗이 베여나갔다.
그러나 채 몇 초가 흐르기도 전에 모든 상처가 치유됐다.
"크흐흐... 도대체 어떻게 되먹은 신체냐! 정말 오랜만에 나를 미치게 하는 놈이구나!"
모든 생명체를 압도하는 근력과 회복력.
강현을 보는 다키란은 전신이 짜릿해지는 것을 느꼈다.
"조금만 기다려라. 네놈을 사로잡아서 내 최고의 걸작을 만들어내겠다!"
"미친놈이 뭐라는 거야."
그때, 강현이 검을 휘두르는 것을 멈추고 손을 뻗었다.
"끄으으..."
강현은 장검을 휘둘러 만들어낸 실드의 틈을 붙잡고 양손으로 벌렸다.
전신의 근육이 흉포하게 부풀어 오르고,
"으아아아!"
목에 선 핏대는 당장에라도 터질 것만 같았다.
-찌직... 찌이이익!
동시에 무언가가 찢기는 소리가 들리며 서서히 실드가 벌어지기 시작했다.
"경이롭구나! 경이로운 신체야! 어떻게 그런 힘을 육체가 버티는 것이지? 터져나가지 않는 것이 신기할 정도…."
흥분해서 소리치던 다키란이 그대로 멈췄다.
-터억
바로 강현의 단단한 손바닥이 자신의 안면을 덮어왔기 때문이다.
"초 울트라 강력한 해골 뚝배기 브레이커."
강현이 씨익 웃으며 다키란을 바라봤다.
"아까부터 무슨 소리를…."
그 순간, 강현이 손아귀에 힘을 가했다.
다키란은 마력으로 자신의 두개골을 보호했으나, 소용없었다.
-파가각!
단숨에 다키란의 두개골이 박살나며 강현의 손안에서 흩어졌다.
"그게 나라고 인마."
**
강현을 본 한세연의 눈이 튀어나올 듯이 커졌다.
'살아있었어!?'
강현이 이곳에 왔다.
그 말은 검은 갑옷의 검사, 가투 아사스가 죽었다는 뜻이다.
실제로 기감을 확장해 봐도 가투 아사스 특유의 끈적하고 어두운 마력은 완전히 사라진 상태였다.
"정말 이겨버리다니..."
솔직히 기대하지 않았다.
그저 강현이 조금이라도 시간을 벌어준다면 그것으로 만족했을 것이다.
그런데 강현은 그런 것을 넘어 혼자서 그 검사를 죽였다.
그것도 상처하나 없이.
오히려 이전보다 더욱 팔팔해 보였다.
"후우, 이럴 때가 아니야. 일단 전투에 집중해야 해."
강현이 어떻게 그를 이겼는지는 나중에 물어보면 된다.
지금은 당장 눈앞의 전투에 집중해야 했다.
그렇게 마음을 잡고 전투를 이어가려 했으나,
"말도 안 돼!"
한세연은 금세 다시 강현의 전투를 바라보고 있었다.
"실드를 찢어버리고 있어..?"
너무 놀란 나머지 육성으로 내뱉어 버렸다.
"완력으로 실드를 찢는다니. 도저히 불가능해..."
한세연도 강현의 완력이 특출나다는 것은 알고 있었다.
그가 휘두르는 거대 해머만 봐도 수백 킬로그램은 나갈 것 같았으니까.
하지만 저건 전혀 다른 차원의 문제다.
전 세계적으로 근력에 특화된 능력자를 모두 가져다 놔도 저런 묘기를 부릴 수는 없다.
실제로 조금 전까지 이곳에 있는 이들 중 유일하게 실드에 타격을 줄 수 있었던 것은 신성아가 유일했으니까.
'그마저도 극도로 정밀한 타격으로 실드를 무력화한 것이지, 단순히 공격력으로 실드를 파괴한 게 아니야.'
다른 이들은 몰랐지만, 한세연은 알고 있었다.
신성아가 교묘하게 마력의 흐름을 끊어냄으로써 실드를 무력화시킨다는 것을.
"그런데 저건 뭐야..."
아무리 마력을 둘렀다고 해도 맨손으로 강력한 실드를 찢는 인간이라니.
장담컨대 맨몸으로 대전차 미사일을 막아내도 지금처럼 놀라지는 않을 것이다.
"끝났다..."
모두를 공포에 떨게 했던 다키란의 마지막은 허무했다.
강현에게 붙잡혀 두개골이 바스러지는 것.
강현의 손안에서 조각나는 다키란의 머리를 보며 한세연이 허탈하게 웃었다.
"하... 하하..."
아무래도 진짜 강한 놈이 온 것 같았다.
193화 북진(1)
193. 북진(1)
"햐아... 고놈 때깔 좋네."
강현이 영롱하게 빛나는 반지를 만지작거렸다.
반지는 보는 사람을 섬뜩하게 하는 붉은 빛을 띠고 있었다.
"이게 그 루비인가 뭔가 하는 그거야?"
강현의 물음에 옆에 있던 윤나래가 고개를 저었다.
"이렇게 생긴 루비가 어디 있어요? 가만 보면 참 무식…."
신이 나서 재잘대던 윤나래가 강현의 사나운 눈빛을 보고는 자신의 머리를 콩 하고 때렸다.
"나는 정말 무식해! 모를 수도 있는 걸 가지고 말이야! 하하하."
그제야 강현이 편안한 미소를 지었다.
"어쨌든 간에 참 좋단 말이지."
반지에서는 인간이라면 본능적으로 께름칙함을 느낄만한 기운이 풍겨 나왔다.
하지만 강현에게는 그저 예쁜 반지구나. 정도의 감상을 줄 뿐이었다.
"거기에 옵션이 아주 기똥차고. 이거 완전 그거 아냐 그거?"
"뭐요?"
"완소! 완전 소중해!"
강현의 말에 윤나래가 구토를 하는 시늉을 했다.
"우엑. 아재 감성."
"뭔데? 이거 요즘 애들이 쓰는 유행어 아니야?"
"요즘 애들은 무슨. 옛날 아저씨들이나 쓰는 말이겠죠."
윤나래의 대답에 강현의 이마에 힘줄이 돋았다.
"그런데 이게 아까부터 왜 시비야? 요새 안 맞아서 근질근질하지? 어?"
"아, 점심 약속이 있었지!? 어휴! 늦을 뻔했네. 하하하!"
윤나래가 다급히 백팩을 메고는 사무실 밖으로 호다닥 달려갔다.
"야!"
강현이 힘껏 소리쳤으나 윤나래는 뒤도 돌아보지 않고 떠난 후였다.
"쯧쯧."
혀를 차던 강현이 이내 미소를 지었다.
"어휴. 이쁜 것."
화가 나다가도 이 반지만 보면 마음이 사르르 녹는 기분이었다.
그럴 수밖에 없는 것이, 반지의 외형도 외형이지만 성능이 너무 뛰어났기 때문이다.
이름 : 죽음과 영혼의 맹약
등급 : A+(성장형)
내구도 : 100/100
설명 : 바이서스 제국의 황제가 비밀을 지키기 위해 만든 반지. 사용자들의 영혼을 잡아먹고 자라는 귀물(鬼物)이다.
능력 : 마력 21스텟 증가, 영혼의 맹세
*영혼의 맹세 : 이 반지에 맹세한 것을 지키지 않을 시 대가로 영혼을 가져간다.
"마력이 무려 21스텟! 어디서 이런 이쁜 놈이 튀어나온 걸까!? 크하하하하하!"
강현이 미친놈처 크게 웃어젖혔다.
잠시 사무실에서 일하던 직원들의 시선이 몰렸으나, 강현인 것을 확인하고는 이내 시선을 돌렸다.
"휴우... 이제 한번 확인을 해봐야겠지?"
반지를 착용했으니 눈으로 직접 상태창을 확인해 봐야 할 것 같았다.
기대에 찬 눈빛으로 손을 비비던 강현이 상태창을 열었다.
▫이름 : 강현
▫칭호 : 튜토리얼 졸업자 외 6개
▫레벨 : 92
▫상세 능력치 :
·근력 40 (+4)(+10)
·순발력 41 (+4)
·체력 44 (+3)(+10)
·마력 43 (+5)(+21)
·추가 스텟 : -
▫고유 능력 : 부활
▫능력 : 강현식 사투(A), 마력운용(A), 마력감지(A), 베일의 검술(B), 열기내성(C), 독 내성(D), 냉기내성(D), …
▫스킬 : 마력 육체 재생(S), 분노의 사자후(A), 마력장(A), 일도양단(A), 거인의 힘(A), 마력폭발(A), 엔트리아의 외피(A), 웨인의 비기(A), …
"이거지. 이거야!"
순수 마력 43 에 칭호로 5 스텟 증가. 거기에 아이템으로 21스텟.
총 69에 이르는 엄청난 마력 스텟이었다.
"후우... 충만하다."
몸속 가득히 마력이 퍼지는 느낌이었다.
이 정도면 아무리 육체 재생을 극한으로 끌어올리더라도 쉽게 마력이 바닥날 것 같지 않았다.
"이거 다 채우려면 포션 한두 병으로는 어림도 없겠네."
마력 통이 커진 만큼, 한번 비워냈을 때 채우기가 힘들 것 같았다.
"그나저나 진짜 많이 올랐구나."
스텟 창을 유심히 보던 강현은 새삼 초창기가 떠올랐다.
근력 8, 순발력 9, 체력 7, 마력 14.
스텟 총합이 38이던 그때 그 시절.
강현은 정말 죽기 살기로 노력했다.
아니, 실제로 죽어가면서 강해졌다.
하루하루를 버티기 위해 아등바등하던 그때가 주마등처럼 스쳐 갔다.
"지금은 참 많이 좋아졌지."
이제 강현은 액세서리나 칭호의 도움 없이 순수 스텟 합만 168이라는 괴물 같은 수치에 도달했다.
"마음에 안 드는 놈 머리통도 시원하게 깨부수고."
강현이 냉장고로 다가가 맥주를 꺼내 들었다.
"이렇게 시원한 맥주 무한리필 냉장고가 손 뻗으면 닿는 곳에 있고!"
물론 그 맥주는 직원이 채워 넣은 것이다.
강현이 맥주 캔을 따자 딸깍- 하는 익숙한 소리가 울렸다.
"크흐으! 이게 행복이지!"
단숨에 맥주 캔을 비워내며 탄성을 내뱉는 강현.
12월 말.
곧 새해가 되면 강현도 30대에 접어든다.
"새해에는 뭘 목표로 하지?"
강현 본인의 능력은 충분히 성장했고, 길드는 알아서 놔둬도 잘 크는 중이다.
그러다 보니 다가올 새해에 무언가 새로운 것을 하고 싶었다.
"응? 전화네."
그때 강현의 스마트폰이 울렸다.
"또 무슨 일이에요?"
전화를 건 이는 익숙한 인물. 신태길이었다.
-강현 씨.
"예."
-북한 정벌. 해보실 생각 없습니까?
"예!?"
신태길의 뜬금없는 물음에 강현이 당황했다.
-정벌이라는 표현은 조금 그렇고... 합병이 올바른 단어겠군요.
"어..."
아무래도 새해에 할 일이 정해진 것 같았다.
**
신태길과의 통화 이후.
딱히 할 일이 없었던 강현은 곧장 신태길을 찾아갔다.
그에게 자세한 이야기를 듣기 위해서였다.
"저번에 먹어보니까 그 방어회라는 게 참 맛나더라고요."
맛있는 음식은 어디까지니 덤이었다.
"오늘은 참치회로 가는 게 어떻습니까? 지난번에 드셔보신 적이 없다고 했던 것 같은데."
"오, 좋죠!"
강현이 싱글벙글 웃으며 콧노래를 불렀다.
그사이 강현과 신태길을 태운 차량이 근처에 위치한 고급 참치 횟집에 도착했다.
"와... 이거 때깔이 장난 아니네."
생전 처음 참치회를 영접한 강현이 눈을 크게 떴다.
"강현 씨는 도대체 돈 벌어서 어디에 쓰는 겁니까?"
"내가 돈 쓸 시간이 어디 있어요? 매일 싸우고 피 터지고, 오늘도 좀 쉬려니까 신태길 씨가 이렇게 일 시키려고 불렀잖아요."
"제가 전화를 한 건 맞지만, 직접 만나자고 한 건 어디까지나 강현 씨입니다만."
"그게 그거죠. 아무튼."
커다란 참치 회 한 점에 고추냉이를 조금 올려 쌈처럼 싸고, 간장에 살짝 찍은 강현이 곧장 입으로 가져갔다.
"으음... 아무튼. 아무튼... 이거 진짜 맛있네요!"
새로운 세계에 눈을 뜬 강현의 눈이 초롱초롱해졌다.
"무슨 말을 하려던 거 아니었습니까?"
"아! 갑자기 북한 이야기가 왜 나온 거냐고요."
"북한이라... 강현 씨는 계속 던전에 계셨으니 모르셨을 것 같긴 합니다."
"뭐를요?"
"북한의 지도자가 죽었습니다."
"예!?"
"말씀드린 그대로입니다. 강현 씨가 싸웠던 검은 갑옷의 검사 있지 않습니까?"
강현이 기억난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이름이 가투인가 뭔가 했던 그놈이요?"
"맞습니다. 그 가투 아사스가 북한을 완전히 뒤집어버렸습니다. 덕분에 수령을 포함한 군의 고위층 대부분이 사망했고, 북한은 현재 완전히 혼란에 빠진 상황입니다."
"으음... 그렇게 심각하다고요? 고작 그놈 하나가 벌인 일 때문에?"
"군과 능력자들이 던전을 통제하지 못해 몬스터들이 쏟아지고 있습니다. 민간인들은 그런 몬스터들에게 무방비하게 당하고 있고요. 지금까지 추정 사망자만 300만 명 이상입니다."
북한의 인구가 대략 2,500만 명 정도이다.
300만이라면 그중 10분의 1이 넘는 숫자였다.
"그리고 그 숫자는 매일매일 빠르게 늘어나고 있습니다. 어쩌면 이미 저것보다 훨씬 많은 수의 사람들이 죽었을 수도 있습니다."
모든 이야기를 들은 강현이 인상을 찌푸렸다.
"궁금한 게 두 가지 있어요."
"말씀하시죠."
"첫 번째는 그 지경이 되도록 북한에서는 왜 나서지 않는가?"
"예."
"두 번째는 우리가 북한을 합병한다면 다른 나라들과 문제가 생기지 않는가? 뭐... 중국이나 러시아. 그런 데서 아니꼽게 볼 수 있잖아요?"
강현답지 않은 제법 냉철한 분석에 신태길이 감탄했다.
"차례대로 말씀드리면. 일단 북한에서는 나서지 않는 것이 아니라, 나서지 못하는 겁니다. 그 안에서 이미 군벌들이 나뉘어서 자신의 안위만을 생각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더 쉽게 설명해 줘요."
"우리나라 사단장, 군단장들이 자신의 병력을 사병화시켜서 호위부대로 쓰고 있다고 보면 됩니다."
"아..."
"실제로 우리나라에 먼저 도움을 요청한 것도 북한입니다. 북한의 한 장성이 나라가 망하는 것을 볼 수 없다며 정부에 도움을 요청했죠. 그리고... 우리는 이미 능력자를 한번 파견했습니다."
"그래요?"
이미 능력자를 파견했다는 말에 강현의 눈이 커졌다.
"예... 능력자 연합에서 나섰는데, 결과가 그리 좋지는 않았습니다."
이야기하는 신태길의 표정이 급격히 어두워졌다.
"가투 아사스와의 전투에서 최동우 씨가 죽었습니다."
"..."
최동우가 죽었다는 말에 분위기가 급변했다.
무서운 표정으로 침묵하는 강현.
신태길은 강현에게서 흘러나오는 묵직한 기운에 식은땀을 흘렸다.
"죄송합니다."
"신태길 씨가 죄송할 게 뭐가 있어요."
갑자기 표정을 풀고 피식 웃은 강현이 머리를 긁적였다.
"오늘은 소주로 가야겠네."
분위기가 어두워지자 강현이 일부러 밝은 표정을 지었다.
"하던 이야기. 마저 해야죠."
"아, 예..."
그제야 정신을 차린 신태길이 설명을 이었다.
"북한에서 이 상황을 해결하지 못하는 이유는 말씀드렸고, 두 번째가..."
"타국의 시선."
"아, 맞습니다."
잠시 고민하던 신태길이 말했다.
"현재 세계에 다른 나라를 신경 쓸 정도로 여유로운 곳은 어디에도 없습니다."
"이유가 있어요?"
"예. 중국과 러시아뿐만 아니라. 미국, 유럽의 국가들. 남미. 아프리카까지 모두 본격적으로 A등급 던전이 나타나기 시작했고, 다른 세계에서 넘어온 언데드들을 상대하는데 총력을 기울이고 있는 상황입니다."
"어제 죽은 그 가투라는 칼잽이도 그런 놈이죠?"
"맞습니다. 특히 중국은 현재 국가 영토 절반이 놈들에게 넘어간 상황이라 여기에 신경 쓸 여력은 어디에도 없을 겁니다."
"그럼 깔끔하겠네."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당연히 하죠."
강현은 더 생각할 것도 없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예상외로 강현이 쉽게 승낙하자 도리어 신태길이 당황했다.
"이렇게 쉽게 승낙하시는 이유가 있습니까?"
신태길의 물음에 강현이 씨익 웃었다.
"내 손으로 한반도 통일이라니. 폼 나잖아요!"
**
다음날.
강현은 오랜만에 길드 회의실에 간부진을 모았다.
강현과 안유성. 신성아. 윤나래.
던전 공략팀의 팀장과 부팀장들.
마지막으로 한재문을 필두로 한 사무직의 핵심 인력들까지.
"다 모였지?"
강현이 모인 길드원들을 한 바퀴 둘러봤다.
나름 길드의 핵심 인력들만 모인 자리였음에도 제법 숫자가 많았다.
새삼 길드가 많이 커졌구나 하는 생각에 강현이 괜히 콧잔등을 슥 문질렀다.
"오늘 이렇게 모이라 한 건 멤버를 뽑기 위해서다."
강현이 말을 끊고 반응을 살폈다.
"무슨 멤버인지 궁금해 죽겠지? 그렇지? 그럴 거야."
"..."
아무도 궁금해하지 않았다.
"바로 북한 원정 멤버!"
"..."
싸늘한 반응에 강현의 인상이 와락 구겨졌다.
"전부 박수 안 치냐?"
그제야 성의 없는 박수 소리가 뜨문뜨문 터져 나왔다.
강현이 만족스러운 표정을 지으며 말을 이었다.
"갑자기 뭔 북한 원정이냐 할 거야. 그렇지?"
강현이 이번에는 정말 궁금하지 않냐는 듯이 물어봤다.
"그 이유…."
강현이 무언가를 말하려던 찰나, 갑자기 윤나래가 열심히 박수를 쳤다.
강현이 노려보자 윤나래가 어깨를 으쓱였다.
"너 일부러 그러지?"
"뭐가요?"
"뒤질래?"
"내가 뭘 했다고요!?"
윤나래가 억울하다는 듯 소리쳤다.
"이제 내가 박수 치라고 할 때만 쳐."
"쳇! 자기가 무슨 강일성이야 강정일이야? 북한에 가면 아주 찰떡이겠어. 고향같은 기분이 아닐까!?"
"너는 무조건 간다."
"네?"
"너는 무조건 나랑 같이 갈 거니까 지금 나가서 바로 짐 싸."
"..."
"나가라고."
"네..."
강현이 노려보자 윤나래가 터벅터벅 걸어나갔다.
"자, 한 명은 일단 확정됐다! 또 가고 싶은 사람?"
강현의 말에 모두가 시선을 돌렸다.
194화 북진(2) - 20.02.2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