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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8-166

158. 인간 실격(3)

"수고했어요!"

강현이 안내를 해준 최시현에게 손을 흔들었다.

"아니에요. 혹시 괜찮으면…."

최시현은 다음에 또 보자는 말을 하려 했으나, 강현은 순식간에 떠난 뒤였다.

"많이 바쁘구나..."

멀어지는 강현의 뒷모습을 보며 최시현이 괜히 머리를 긁적였다.

**

강현이 엄청난 속도로 도심을 질주했다.

지하철을 이용하는 것보다 배는 빠르게 길드 사무실에 도착한 강현.

그곳에는 안유성이 기다리고 있었다.

강현을 본 안유성이 손을 들어 인사했다.

"왔어요?"

"왔어요? 지금 그딴 태평한 소리가 나와!?"

강현이 소리를 버럭 질렀다.

"올리엔은 어디 있어?"

"근처에 있는 호텔이요."

"바로 가자!"

곧장 사무실을 떠나려던 강현의 눈에 누군가가 보였다.

완전히 넋이 나간 사람처럼 멍하니 허공을 바라보고 있던 가넷이었다.

"야! 가넷!"

강현의 목소리에 가넷이 고개를 돌렸다.

"..."

가넷이 초점 없는 눈으로 강현을 응시했다.

"지금 뭐하는 거야? 네가 올리엔 호위 기사라면서? 옆에서 떨어지지 않겠다고 큰소리쳤잖아."

강현의 말에 가넷이 고개를 푹 숙였다.

"어쩔 수 없다. 그분은 왕족이시다. 미천한 내가 나설 일이 아니야..."

"이것도 답답한 놈이네. 따라와!"

강현이 가넷을 팔을 붙잡았다.

"자, 잠깐! 나는 갈 수가…."

"됐으니까. 닥치고 따라와!"

강현은 무작정 가넷을 이끌었다.

처음에는 가넷도 저항했지만, 이내 고개를 떨구며 강현의 뒤를 따랐다.

"올리엔이 있는 곳이 어디라고?"

"랭밋 호텔이요."

길드 사무실에서 도보로 30분 정도면 도착하는 곳이었다.

강현이 전력으로 달리면 5분 안에 도착할 수 있을 것이다.

"가자!"

강현은 서둘러 사무실을 빠져나가고, 건물 밖으로 나섰다.

"뭐야?"

강현은 당장 호텔을 향해 달릴 생각이었으나 멈출 수밖에 없었다.

빌딩 입구에 수백 명의 길드원이 막아서고 있었기 때문이다.

아마 길드 내의 전투원들은 거의 다 모인 것 같았다.

"길드장님. 저희도 따라갈게요."

"너희들이 왜?"

"오늘 보니까 그 카를인지 뭔지 하는 놈. 영 싸가지 없더라고요."

"누가 감히 우리 올리엔을 건드려!?"

그들은 모두 강현과 함께하기 위해 대기하고 있던 것이었다.

"우리 길드 마스코트는 올리엔이라고!"

"맞아. 올리엔을 건드리는 놈은 척추를 360도로 접어버려야 해!"

올리엔이 길드에 머문 것은 그리 긴 시간이 아니었다.

하지만 올리엔은 항상 미소를 띠며 모든 길드원들에게 상냥하게 인사해왔다.

비록 짧은 시간일지라도 그 해맑은 미소는 모든 사람에게 힘을 주었고 위로를 주었다.

"올리엔이 길드장님보다 더 중요한데, 어떻게 두고만 보고 있겠어요?"

"1절만 해. 이 새끼들아!"

길드원들의 말에 강현이 발끈했다.

"강현님. 모든 길드원들이 동의했습니다. 비록 작은 힘일지라도 보태겠습니다."

길드원들의 대표로 나와 있던 신성아가 말했다.

"후우..."

강현이 한숨을 내쉬며 머리를 쓸어 넘겼다.

"알아서 해라. 걸리적거리지 말고."

투덜대며 말했지만 강현의 입가에는 진한 미소가 걸려 있었다.

"쯧쯧. 길드장님이나 방해하지 마쇼."

"방금 말한 새끼 나와."

감히 밖으로 나오는 이는 없었다.

**

카를 헤이서스가 머무는 객실 앞.

두 명의 왕실 기사는 석상처럼 굳은 자세로 서 있었다.

"음... 누가 오는 것 같은데?"

선임 기사인 벨티오가 인상을 찌푸렸다.

"숫자가 좀 많은 것 같습니다."

마찬가지로 왕실 기사단 소속인 아볼프가 고개를 끄덕였다.

"호의적인 것 같지는 않아."

얼마 지나지 않아 그들은 기척의 주인공이 누구인지 알 수 있었다.

"가넷... 그리고 오늘 낮에 본 용병 단원들인가."

하나같이 인상을 험악하게 일그러뜨린 것이 편하게 차나 마시러 온 것 같지는 않았다.

'하아... 올리엔 왕녀 때문이군...'

어째서 저들이 오밤중에 찾아온 것인지는 묻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

'한 번은 큰 사달이 날 거라 생각했지만... 이런 타국에서 일이 터질 줄이야.'

벨티오도 객실 안에서 무슨 일이 벌어지는지는 잘 알고 있었다.

하지만 벨티오는 왕실에 충성하는 몸. 그가 받은 명령은 카를 헤이서스를 보좌하라는 것이었다.

벨티오는 자신의 목숨이 붙어있는 한 그 명을 수행할 것이다.

"멈춰라. 이 앞은 지나갈 수 없다."

벨티오가 앞으로 나서서 강현 일행을 막아섰다.

강현이 한 걸음 앞으로 나와 벨티오를 노려봤다.

"올리엔. 이 안에 있지?"

"대답할 의무가 없다."

"비켜."

"아무도 들이지 말라는 왕자님의 엄명이 있으셨다. 용건이 있으면 내일 다시 찾아오도록."

"비키라고."

강현의 얼굴에 굵은 힘줄이 돋아나기 시작했다.

"마지막으로 경고한다. 돌아가라."

마찬가지로 얼굴이 딱딱하게 굳은 벨티오가 강현을 정면으로 노려봤다.

"비키라고 이 새끼야!"

순간 강현의 옆차기가 작렬했다.

벨티오는 빠르게 팔을 들어 그 공격을 막아내려 했다.

"커헉!"

그러나 강현의 근력은 벨티오의 예상을 아득히 뛰어넘는 것이었다.

벨티오가 단숨에 수십 미터를 날아가 호텔 벽에 처박혔다.

옆에 있던 아볼프가 깜짝 놀라 검을 뽑아 들었으나, 그의 앞을 안유성이 막아섰다.

"도대체 뭐냔 말이다!"

그 순간 객실 안에서 카를의 짜증 어린 음성이 들려왔다.

강현이 주먹으로 문을 박살내고 안으로 들이닥쳤다.

"나다! 이 개새끼야!"

고함을 내지른 강현이 곧장 카를에게 달려갔다.

카를은 깜짝 놀라며 바닥에 엉덩방아를 찧었다.

"으어어! 근위병! 아니, 벨티오 경! 모두 어디 간 가냐!"

강현이 호들갑을 떠는 카를을 두고 올리엔에게 시선을 돌렸다.

"올리엔 괜찮아?"

강현이 왔음에도 올리엔은 아무런 말도 하지 못했다.

그저 모든 것을 포기한 눈으로 무릎을 꿇고 있을 뿐이었다.

"올리엔! 괜찮냐고!"

강현이 큰 소리로 묻자 올리엔이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아..."

상처투성이의 얼굴.

눈처럼 새하얗던 피부는 곳곳이 멍으로 인해 푸르스름하게 변해 있었다.

"전부 뒤졌다고 생각해라."

분노로 인해 강현의 얼굴이 악귀처럼 일그러졌다.

강현이 카를에게 손을 뻗었다.

"벨티오 경! 아볼프 경! 모두 어디를 간 것이냐!"

"네 꼬붕이 어디 있는지는 지옥에 가면 알 수 있을 거다."

강현의 손이 카를에게 닿기 직전,

"흐읍!"

강현이 재빠르게 뒤로 물러났다.

아슬하게 검이 스쳐 지나가며, 강현의 옷깃을 베어냈다.

"후우... 왕자님 죄송합니다."

어느새 달려온 벨티오가 카를의 앞을 막아섰다.

"벨티오 경! 도대체 어디를 갔다 온 것이오! 내가 지금 저 불한당에게 큰일을 당할 뻔했잖소!"

"죄송합니다. 왕자님의 명을 이행하지 못한 벌은 이 불청객들을 처리한 후에 달게 받겠습니다."

"후우... 지금 당장 저놈의 목을 베시오! 당장!"

얼굴이 시뻘게진 카를이 강현에게 삿대질하며 소리쳤다.

벨티오가 자세를 고쳐 잡으며 강현을 노려봤다.

"네가 저 용병단의 대장인가?"

"그렇다면?"

"당장 물러나라. 지금이라도 물러나면 목숨만은 살려주지."

벨티오는 냉정하게 상황을 파악했다.

'저자를 단숨에 처치하지 못하면 왕자님이 위험해진다.'

밖에는 수백의 적이 기다리고 있다.

조금이라도 시간을 끄는 순간 왕자가 위험해질 수도 있는 것이다.

왕자의 안위를 최우선으로 하는 벨티오는 무작정 검을 들이밀기보다는 대화로 해결하기 위해 노력했다.

"벨티오 경! 그게 무슨 소리요!? 내가 당장 목을 치라고 했을 텐데!?"

"죄송합니다. 모든 게 왕자님의 안위를 위한 것입니다."

"지금 내 명령을…!"

"왕자님!!!"

순간 벨티오가 소리를 내질렀다.

"사건이 해결되고 어떤 벌이든 달게 받겠습니다. 지금은 저를 믿어 주십시오."

벨티오의 호통에 카를이 주춤하며 물러났다.

"제대로 처리하지 못하면 각오하는 게 좋을 거요!"

카를이 씩씩거리며 마지못해 참는다는 듯이 등을 돌렸다.

그 모습을 보며 강현이 조소했다.

"아주 똥을 싸네. 어디 뮤지컬 찍냐?"

"예의를 갖춰라. 타국이라 하나 이분은 헤이그란 왕국의 왕족이시다."

"그건 내가 알 바 아니고. 저 변태 새끼한테 곱게 뒤질 생각은 하지 말라고 전해."

강현이 사납게 웃으며 말했다.

"후우... 비록 이곳이 너희의 땅이라고 하나, 이 일은 엄연히 타국의 일이다. 네가 간섭할 것이 아니야. 흥분을 가라앉히고 물러나라."

"흥분을 가라앉혀? 이 꼴을 보고? 장난하냐?"

강현의 눈이 희번들하게 빛났다.

-죽여!

그때 밖에서 전투가 벌어지는 소리가 들려왔다.

"이런, 아볼프! 함부로 검을 휘두르면 안 된다고 했건만!"

당황하는 벨티오의 모습.

강현은 기다렸다는 듯이 땅을 박차고 달려갔다.

"뒤져!"

**

"이 안으로는 아무도 들어갈 수 없다."

검을 빼든 기사, 아볼프가 안유성과 길드원들을 노려봤다.

'벨티오 님께서 들어가셨으니 안쪽은 괜찮을 것이다.'

지금 자신이 할 일은 더 이상 적들이 문을 통과하지 못하도록 막는 것이다.

비록 눈앞의 적이 수백 명이라고 하나, 자신은 왕실을 수호하는 최고의 기사다.

'왕가를 수호하는 최후의 검.'

왕실 기사단은 육체와 기술이 정점에 다다른 이들만이 들어올 수 있는 곳.

적들의 수가 얼마나 되든 그것은 작은 장애물에 불과했다.

"불필요한 피를 보고 싶지는 않습니다. 비키십시오."

신성아가 앞으로 나서며 말했다.

"내가 죽지 않는 한, 아무도 이곳을 통과할 수 없다."

굳건한 아볼프의 말.

신성아가 안유성을 바라봤다.

"안유성 씨.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내가 결정해도 돼요?"

"지금은 안유성 씨의 행동력이 필요한 때인 것 같습니다."

신성아가 원하는 바는 분명했다.

"아, 혹시나 해서 말씀드리는 겁니다만. 책임은 저도 같이 질 테니 걱정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신성아의 말에 안유성이 씨익 웃었다.

"됐어요."

메이스를 빼든 안유성이 힐긋 돌아 길드원들을 바라봤다.

그리고는 아무런 말도 없이 달려가기 시작했다.

"우아아아! 죽여!"

그것이 신호라도 된 듯 모든 길드원이 좁은 복도를 물밀 듯이 밀고 들어갔다.

'이런!'

이렇게 한꺼번에, 무작정 들이닥치리라고는 생각하지 못한 아볼프가 당황했다.

'정신 차려! 어떻게든 막아야 한다.'

아볼프는 빠르게 상황을 파악했다.

'복도는 좁다. 수가 아무리 많다고 해도 충분히 막아설 수 있어.'

약 5m 정도의 통로.

혼자서 막기에는 벅찬 공간이지만, 해내야만 했다.

그렇게 아볼프가 가장 앞에서 달리는 안유성에게 검을 휘둘렀다.

'우선, 하나!'

한번 검을 휘두를 때마다 하나씩 처리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이 숫자를 감당할 수 없다.

-카아앙!

아볼프의 계획은 시작부터 틀어졌다.

'보통내기가 아니야!'

낮에 훈련하는 모습을 보기는 했으나, 이 정도일 줄은 몰랐다.

그사이 다가온 수많은 길드원들이 그에게 무기를 휘둘렀다.

"죽여! 밀어붙이라고!"

"전부 힘으로 찍어 눌러!"

아볼프가 정신없이 검을 휘둘렀다.

'어차피 한 번에 공격할 수 있는 적은 한정돼 있다. 놈들끼리 동선이 얽히게 해서 단숨에 처리한다!'

다수가 좁은 곳에서 공격을 가할 때는 많은 페널티가 따른다.

저들이 아무리 저돌적으로 나온다고 한들 그 점을 무시할 수는 없을 것이다.

"커, 커헉! 잠깐!"

그러나, 아볼프의 예상은 또다시 무너졌다.

'이런 미친 놈들이!'

적들은 자신의 목숨을 전혀 돌보지 않았다.

검이 날아와도 즉사할 공격이 아니라면 그대로 맞아가며 자신에게 달려들었다.

'인간인 이상 죽음과 고통에 대한 두려움이 없을 수가 없거늘..!'

놈들은 마치 약에 취하기라도 한 듯 고통도, 두려움도 없어 보였다.

"조져버려!"

"아무것도 못 하게 해!"

길드원들이 아볼프에게 접근한 길드원들이 온몸으로 그를 짓눌렀다.

"크아아아!"

아무리 뛰어난 검사라고 해도, 검을 휘두를 공간이 있어야 한다.

수십, 수백 명이 짓눌러 손가락 하나 까딱하지 못하게 하자 아볼프는 미칠 지경이었다.

'젠장. 처음부터 전력을 다했어야 했었다!'

초반에 살상력이 높은 기술을 쓰지 않고, 이들을 제압할 수 있다고 생각한 것이 문제였다.

물론 그 뒤에도 충분히 만회할 기회는 있었으나, 계속해서 빗나가는 예측에 당황한 나머지 그마저도 놓치고 말았다.

'어떻게든 다시 움직이기만 하면..!'

이제라도 무슨 짓이든 해서든 벗어나야 한다 생각해도, 이미 돌이키기에는 늦어 보였다.

'젠장...'

수많은 피가 얼룩진 메이스가 그의 시야를 가득 메웠다.

159화 인간 실격(4)

159. 인간 실격(4)

"뒤져!"

강현이 전력으로 검을 휘둘렀다.

-보통 놈이 아니다. 생각 없이 움직이지 마라!

검에 잠들어있던 베일이 깨어나 강현에게 소리쳤다.

'알고 있어!'

좁고 한정된 공간이다.

사소한 실수가 승패를 가를 수도 있다.

강현이 무턱대고 달려가는 것처럼 보여도, 나름의 계산은 끝마친 상태였다.

'올리엔이 다쳐서는 안 돼. 그리고 적은 뒤에 있는 왕자라는 놈을 지켜야 한다.'

벨티오와 강현. 둘 다 이동과 움직임이 한정적일 수밖에 없었다.

그 결과, 지근거리에서 접전이 일어났다.

-카가가가강!

순간마다 서로의 검이 부딪히며 고막을 찢을 듯한 소음이 일었다.

검이 부딪힐 때마다 퍼져나가는 마력에 머리카락이 잘게 흔들렸다.

-예상보다 더 강한 놈이야. 이 정도 수준이면 한 국가의 정상급에 위치한 기사다. 더 신중하게 움직여!

'더 신중하면 뭐가 달라지냐!?'

상대가 강하다는 것은 직접 싸우는 강현이 가장 잘 느끼고 있었다.

처음 기습으로 발차기가 통했지만, 그것은 놈의 방심과 운이 작용한 것.

막상 실제로 겪어보니 놈의 검술은 자신과 비교할 바가 아니었다.

-저 기사가 주군을 지키기 위해 본 실력을 발휘하지 못하는 걸 다행이라고 생각해라.

'그딴 소리 말고 이길 방법이나 내놔 봐!'

대화를 주고받는 잠깐 사이에도 강현의 팔뚝이 베이며 피가 흘러나왔다.

벨티오는 절대로 무리하지 않으며 차근차근 강현의 몸에 상처를 누적시켰다.

-현재로서는 버티는 것이 최선으로 보인다. 다른 동료의 지원을 기다렸다가 한 번에 밀어붙여라.

'지원 같은 소리 하네!'

저런 놈에게 길드원을 붙여봤자 순식간에 도륙이 날 것이 뻔했다.

안유성이나 겨우 버틸 수 있을까.

그런 사태가 일어나기 전에 지금 자신이 처리하는 것이 옳았다.

'안 되겠어. 더 넓은 곳으로 이동해야 돼. 여기서는 올리엔이 있어서 제대로 싸울 수가 없어.'

-멍청한 놈! 그것은 적도 마찬가지다! 밖으로 나가면 네가 저 날카로운 검을 잠깐이라도 버틸 수 있으리라 생각하느냐?!

베일의 생각은 합당한 것이었다.

현재 벨티오는 카를을 지키기 위해 행동거지 하나하나, 전부를 조심하고 있었다.

자칫하면 휩쓸리는 것만으로도 카를이 다칠 수 있었기 때문이다.

강현은 이런 상태의 벨티오에게도 밀리고 있는데, 만약 밖으로 나가 벨티오의 움직임이 편해진다면 순식간에 당할지도 몰랐다.

'닥치고 보기나 해!'

그런 베일의 우려는 무시하고, 강현이 전력으로 땅을 박찼다.

**

강현이 달려오는 것을 본 벨티오가 눈을 찌푸렸다.

'뭐지?'

지금까지 강현은 영리하게 카를 왕자가 휩쓸리도록 공격을 유도했다.

그 덕에 자신은 사소한 행동 하나에도 많은 제약이 생길 수밖에 없었다.

분명 불리한 조건으로 싸우고 있는 상황.

그러나 벨티오는 자신이 패배할 것이라 생각하지 않았다.

'육체 능력은 엄청나지만, 나머지가 받쳐주지 못하는군.'

벨티오의 기준에서 강현의 기술은 그리 대단한 것이 아니었다.

같은 인간인지 의심이 갈 정도로 강인한 육체를 제외하면, 강현에게서 조심해야 할 것은 없어 보였다.

'지금 이 상황을 유지한다.'

이대로 강현의 몸에 상처를 늘려 피해를 누적시키는 것이 가장 안전하게 강현을 제압하는 방법일 것이다.

'무슨 생각이지?'

그때, 강현의 움직임이 바뀌었다.

'왕녀님이 목표인가?'

마치 왕녀를 데리고 이 방을 벗어나는 것 같은 모습.

짧은 순간 벨티오는 고민했다.

'막아야 하나? 아니면 놈이 떠나게 두어야 하는가?'

고민은 길지 않았다.

'왕녀님도 왕실의 일원. 적에게 넘겨줄 수는 없다.'

벨티오가 강현을 막기 위해 걸음을 옮겼다.

그 순간, 올리엔을 향해 달려가던 강현이 갑자기 몸을 틀었다.

순식간에 가까워지는 강현의 검.

'얕은수를 쓰다니. 스스로 목을 조르는구나.'

나름 회심의 일격을 날린 것처럼 보였으나 벨티오는 이런 잡기에 당할 정도로 어리숙하지 않았다.

벨티오는 침착하고 빠르게 검을 휘둘렀다.

단숨에 강현의 몸을 이등분할 생각이었다.

"이런!?"

검을 휘두르던 강현이 갑자기 손을 활짝 펼쳤다.

벨티오는 순간적으로 강현의 입에 걸린 미소를 볼 수 있었다.

"마력폭발!"

강현이 검을 잡은 벨티오의 손 앞에서 마력구를 터뜨렸다.

그 충격에 벨티오의 팔에 크게 밖으로 벌어졌다.

'다음 공격을 대비해야 한다!'

어차피 몸에 마력을 둘러서 막았기에 피해는 없었다.

벨티오가 다시 검을 고쳐잡고 강현에게 휘두르려 했으나, 강현은 그 자리에 없었다.

"벨티오 경!"

"왕자님!"

빠르게 시선을 돌리자 카를을 붙잡으려는 강현이 보였다.

'안 돼!"

1초도 되지 않는 순간, 모든 것이 결정될 것이다.

'왕자님이 인질로 잡히는 일은 없어야 한다.'

그렇게 되면 모든 게 끝이다.

벨티오가 재빠르게 강현에게 달려갔다.

'놈이 왕자님을 붙잡는 찰나의 순간. 그 틈에 목을 베어난다!'

자칫하면 카를도 같이 피해를 입을 수 있었지만, 벨티오는 자신의 실력에 자신이 있었다.

"안 돼!"

하지만 이번에도 벨티오의 예상은 빗나가고 말았다.

"밑에서 보자."

카를을 낚아챈 강현이 그대로 호텔 창밖으로 뛰어내렸다.

**

-쨍그랑!

강현이 뛰어내린 곳은 수백 미터 높이의 호텔 최상층이었다.

일반인이라면 자살행위나 다름없었지만, 강현에게는 문제 되지 않았다.

"끄아아아아아!"

카를 헤이서스가 목이 찢어져라 비명을 질렀다.

"닥쳐! 넌 곱게 안 보낼 줄 알아!"

강현이 카를에게 박치기를 했다.

"커헉!"

단숨에 카를의 코가 깨지며 피가 줄줄 흘러나왔다.

'낙하 속도를 줄여야 돼.'

아무리 강현이라 해도, 이 정도 높이에서 사람을 안고 맨땅에 들이박을 수는 없었다.

강현이 손에 마력을 둘러 건물 외벽에 꽂아 넣었다.

-카가가가가각!

시멘트가 후드드 떨어지며 강현의 낙하 속도가 줄어들기 시작했다.

"이노옴! 왕자님을 내놔라!"

그 순간 위쪽에서 벼락같은 고함이 들려왔다.

고개를 든 강현은 깜짝 놀랐다.

"저게 말이 돼!?"

벨티오가 건물 외벽을 달리며 엄청난 속도로 내려오고 있었다.

영화에서도 저게 말이 되냐며 손가락질을 받을 만한 일이 현실에서 벌어지고 있었다.

-움직여! 이대로라면 따라잡힌다!

"나도 알아!"

강현이 건물에 박혀 있던 손을 빼내 다시 낙하 속도를 올리려 했으나, 그사이에 접근한 벨티오가 검을 휘두르는 것이 더 빨랐다.

"왕자님을 내놓지 못할까!"

강현이 한 손으로 검을 휘둘러 힘겹게 받아냈다.

-카앙!

다행히 공격은 막아냈지만, 그 충격으로 강현의 중심이 무너졌다.

강현과 카를이 공중에서 빙글빙글 돌며 낙하하기 시작했다.

"끄아아아! 벨티오겨엉!"

"시벌! 팔자에도 없는 공중전을!"

욕지거리를 내뱉은 강현이 다시 중심을 잡기 위해 몸을 틀었다.

"놓치지 않는다!"

벨티오는 끈질기게 따라붙어 강현에게 검을 휘둘렀다.

'저건 왕자라는 놈이 죽으면 어떡하려고 저렇게 무식하게 휘둘러!?'

-그만큼 자신의 실력에 확신이 있는 거겠지. 그것보다 집중해라! 곧 지상이다!

지면과의 거리가 급속도로 가까워졌다.

호텔 앞을 걷던 사람들의 깜짝 놀란 얼굴이 보였다.

"마력폭발!"

강현은 공중에서 마력폭발을 일으켜 사람이 없는 곳에 착지했다.

"뭐야? 하늘에서 떨어졌어!?"

"저 사람 강현 아니야?"

"싸움 난 것 같은데?"

분명 폭발음이 들렸음에도, 사람들은 물러나기는커녕 더욱 모여들었다.

"전부 물러나요! 다칠 수…."

강현이 말은, 벨티오의 분노에 찬 고함에 묻혔다.

"이노옴!!! 왕자님을 풀어줘라!"

험악한 인상에 피가 묻은 검을 들고 달려오는 벨티오.

거리는 순식간에 아수라장으로 변했다.

"꺄아아아아-!"

"전부 위험하니 비켜! 하여간 이놈에 안전 불감증은!"

인상을 찡그린 강현이 카를의 목을 움켜쥐었다.

"그만! 거기까지."

목이 졸린 카를이 고통에 신음했다.

"커헉, 컥!"

그 모습을 본 벨티오가 멈춰 섰다.

"치졸한 수를 쓰는구나..."

"이기는 놈이 장땡이지."

"당장 멈춰라."

"싫다면?"

"그분이 죽는 순간..."

벨티오의 눈에서 귀기가 일었다.

"너와 동료들. 그리고 너의 가족들까지 모조리 사지를 잘라 내주마. 내 명예를 걸고 약속하지."

벨티오의 말에 강현이 씨익 웃었다.

"그래? 어디 마음대로 해봐."

"뭐..?"

강현이 그대로 카를의 얼굴을 바닥에 처박았다.

-콰앙!

단숨에 카를의 얼굴이 까지고 피가 나며 만신창이가 됐다.

"이노오오옴-!"

눈이 뒤집힌 벨티오가 미친 듯이 달려왔다.

강현은 마지막까지 카를의 머리를 자근자근 밟았다.

"멈추지 못할까!"

"네가 와서 멈춰 봐. 새꺄!"

사나운 미소를 지은 강현이 벨티오에게 마주 달려갔다.

-하아, 이런 멍청한 놈... 인질을 이용해서 편하게 처리할 수 있었건만! 끝까지 이런 식이군.

강현의 행동에 베일이 한숨을 내쉬었다.

'이게 뭐가 어때서? 가만 보면 명예니 뭐니 하는 놈들이 더하다니까. 그렇게 살면 재미있냐?'

-네놈을 위해서 하는 말이다! 그리고 네 주제에 기사도를 논하느냐!

'됐고, 내가 알아서 해. 저 칼잽이를 쓰러뜨리고, 왕자라는 놈은 아주 천천히 괴롭혀 줄 거야. 철저하게.'

-네가 기사를 이긴다는 전제 자체부터 틀려먹었군.

'닥쳐.'

강현과 벨티오가 실시간으로 가까워졌다.

벨티오와 강현. 누구도 속도를 줄이지 않았다.

전력으로 달려온 둘이 검을 맞부딪히려는 찰나,

-카앙!

갑자기 나타난 사람들이 둘의 검을 막아냈다.

"동우 형님?"

강현을 막아선 최동우.

"넌 누구냐... 당장 비켜라!"

벨티오의 앞을 막아선 한세연.

"전부 동작 그만. 움직이면 즉시 발포합니다."

그리고 총화기로 무장한 수십 명의 능력자를 이끌고 온 신태길이었다.

**

"강현 씨. 벨티오 씨. 두 분 다 멈추십시오. 그렇지 않으면 죽습니다."

검은색 정장에 선글라스를 낀 남자들 수십 명이 코앞에서 총구를 들이밀고 있었다.

"누가 겁낼 줄 아느냐! 당장 왕자님을 구해야…."

그 순간, 신태길이 카를의 코앞에 총을 갈겼다.

-타다다다다당!

"당신은 어떨지 몰라도. 이분은 확실하게 죽을 겁니다."

총탄은 단숨에 보도블록을 박살 냈다.

그 위력을 본 벨티오가 신음하며 주위를 둘러봤다.

'저런 무기를 든 자가 수십 명...'

도저히 답이 없었다.

자신은 몰라도 카를은 반드시 죽을 것이다.

"하아..."

한숨을 내쉰 벨티오가 검을 집어넣었다.

"강현 씨도 여기까지만 하시죠."

"그러려고 했어요."

강현도 이제 상황이 자신의 손을 떠났다는 것을 알았다.

강현이 미련 없이 빌게인의 장검을 회수했다.

"후우... 어쩌자고 이런 일을 벌이신 겁니까?"

"아니. 그러면 올리엔이 맞고 있는데 구경만 해요?"

"예. 구경만 하셨어야 합니다."

"뭐요!?"

"이것은 엄연히 저들 사이에서 벌어진 일입니다. 냉정하게 말해서 타국도 아니고 다른 차원의 일에 개입할 이유가 뭡니까? 그리고 아무리 화가 난다고 해도 시내 한복판에서 이런 일을 벌입니까?"

"아... 이건 미안해요. 이것저것 생각할 때가 아니었어서."

머리를 긁적인 강현이 다시 인상을 찌푸렸다.

"그게 중요한 게 아니라! 타국의 일이라서 무시하라니. 그건 안 되죠!"

"왜 안됩니까... 강현 씨만 참았으면 아니, 조그만 신중했더라면 일이 이렇게 되지는 않았을 겁니다."

"길드원이 맞는데 두고 보는 길드장이 어디 있어요? 조금만 신중했다가 올리엔이 죽어버리면? 신태길 씨가 책임질 거에요?"

"언제부터 올리엔 씨가 길드원이었다고..."

"한 시간 전부터?"

강현의 말에 신태길이 한숨을 내쉬었다.

"하아... 됐습니다. 앞으로 어떻게 할지 내일 다시 이야기하죠."

강현은 그 결단이 불만스러웠지만, 자신의 잘못도 있기에 고개를 끄덕일 수밖에 없었다.

160화 인간 실격(5)

160. 인간 실격(5)

담요를 두른 올리엔이 사시나무 떨듯 몸을 오들오들 떨었다.

강현이 그 모습을 보며 한숨을 내쉬었다.

"괜찮아?"

"네... 괜찮아요."

올리엔이 애써 미소를 지었다.

"미리 말하지 그랬어. 그러면 일정을 조정했을 텐데."

"아니에요. 괜히 폐를 끼치기는 싫어요..."

강현은 답답했다.

본인이 죽을 것 상황에서도 남을 걱정하다니.

강현의 상식으로는 이해하기 힘든 모습이었다.

"하아..."

시선을 돌리자 죽을상을 하고 있는 가넷이 보였다.

"총체적 난국이네."

초상집 분위기도 이보다는 나을 것이다.

한숨을 내쉰 강현이 맥주를 들이켰다.

"크흐, 천천히 이야기해봐. 다 들어줄 테니까. 털어놓고 나면 좀 편해질 수도 있어."

"..."

"말하기 싫으면 안 해도 되고."

강현의 말에 올리엔이 고개를 저었다.

"아... 어디부터 시작해야 좋을지 모르겠어요..."

"그냥 생각나는 대로 편하게 말해."

잠시 고민하던 올리엔은 이내 무언가를 결심한 듯 천천히 자신의 이야기를 풀기 시작했다.

"저는... 천한 시녀의 몸에서 태어났어요. 왕가에서는 그런 저를 항상 탐탁지 않게 생각했고요. 너무 흔한 이야기죠? 하하..."

"괜찮으니까 신경 쓰지 말고 말해."

그 후로 한동안 올리엔의 이야기가 계속됐다.

한번 입을 열기 시작하자, 막혔던 둑이 무너지듯 이야기가 쏟아져 나왔다.

한동안 올리엔은 정신을 놓은 사람처럼 넋두리를 이어갔다.

"왕가의 사람들이 그렇게 나쁘기만 한 건 아니에요... 다들 능력도 출중하고 왕족으로써 본분을…."

그러다가 점차 횡설수설하던 올리엔이 울먹이기 시작했다.

"본분을 지키고... 그러니까 저도 더 노력해서…."

"됐어. 이제 그만해도 돼."

"흐흑, 죄송해요..."

"죄송할 게 뭐가 있냐."

강현이 거칠게 머리를 쓸어 넘겼다.

'후우... 카를인지 뭔지. 진짜 반 죽여놔야겠어.'

놈은 선을 넘었다.

귀하게 태어났다는 이유 하나로 주제 모르고 설치는 놈을 강현은 곱게 보내줄 생각이 없었다.

'이렇게 착한 애를...'

화가 난 강현이 맥주 캔을 일그러뜨렸다.

"강현 씨는 신경 쓰지 않으셔도 괜찮아요. 이건 제 일이고... 나중을 생각해서라도 더 이상 일을 키워서는 안 돼요."

"그게 무슨 말이야?"

강현의 물음에 올리엔이 고개를 푹 숙였다.

"언젠가는 저도 왕궁으로 돌아갈 테니까요... 그러니까 그냥 이대로 조용히 지나가는 게…."

"꼭 돌아가야 돼?"

"네?"

올리엔이 무슨 소리냐는 듯 눈을 동그랗게 떴다.

"무조건 원래 살던 곳으로 돌아가야 하냐고. 그냥 여기서 살면 안 돼?"

"그건..."

**

둥그런 테이블을 두고 세 명의 남자가 마주 앉았다.

"어째서 저놈이 아직 살아있는 거지?"

카를 헤이서스가 강현을 보고 인상을 찌푸렸다.

"카를 씨. 참으시죠. 우리는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모인 겁니다. 불필요한 언행은 일을 해결하는데 도움이 되지 않습니다."

신태길의 말에 카를이 코웃음을 쳤다.

"하! 불필요한 언행? 저기 있는 천한 놈은 감히 왕족인 나를 능멸했다! 아무리 이곳이 다른 세계라고 해도 나는 이 문제를 좌시할 생각이 없어. 당장 놈을 죽여라."

"지랄하고 있네."

"뭐야!?"

강현의 말에 카를이 벌떡 일어났다.

"이런 놈과 대화를 하라고!? 어이가 없군. 그래! 벨티오 경! 당장 놈의 목을 잘라내게!"

"제발 부탁입니다... 모두 진정하시죠."

신태길이 중재를 하려 했으나 소용없었다.

"맞아. 진정 좀 하라고. 나한테 뒤지기 전에 혈압으로 쓰러지면 안 되잖아?"

강현이 불난 집에 부채질을 가했다.

"내가 죽는다? 너 따위 놈에게? 그 말을 책임질 능력은 되느냐?"

"그거야 겪어 보면 알겠지."

"천한 놈. 내가 사고를 당하지 않은 것을 다행으로 여겨라. 그렇지 않으면 이 나라는 불바다가 되었을 테니."

카를의 말에 신태길이 인상을 찌푸렸다.

"그게 무슨 말씀이십니까?"

"내가 열흘 안에 본국으로 돌아가지 않을 경우, 군대를 파견하라 일러두었다. 그러니 허튼짓은 하지 않는 게 좋을 거야."

카를이 의기양양하게 말했다.

"아이고 무서워라! 인간이 어떻게 저렇게까지 찌질해질 수 있지?"

강현이 양 손을 쥐고 흔들며 호들갑을 떨었다.

"이놈! 방금 뭐라 했느냐!"

"왜 그렇게 찌질하게 사냐고, 이 찌질한 새끼야. 뭐, 왕족을 능멸해? 아주 똥을 싸네. 그냥 변태 싸이코 새끼 주제에."

"강현 씨!"

신태길이 제지했으나 이미 내뱉은 말을 주워 담을 수는 없었다.

"지금 한 말... 사과해라. 그렇지 않으면 큰코다칠 거다."

"사과? 사과로 대가리 깨져볼래? 어디서 개소리야?"

"네놈이... 네놈이 감히!"

얼굴이 벌겋게 달아오른 카를이 테이블을 내리쳤다.

-쾅!

카를이 씩씩거리며 강현을 노려봤다.

"네놈에게 결투를 신청한다."

"결투? 비실비실한 놈이 칼자루들 힘은 있냐?"

강현의 카를의 얇은 팔을 보며 비웃었다.

"벨티오 경!"

"예. 왕자님."

"하늘 높은 줄 모르고 날뛰는 원숭이가 한 마리 있다. 처리할 수 있겠지?"

"맡겨만 주십시오."

둘의 대화에 강현이 인상을 찌푸렸다.

"뭐야? 결투라면서?"

"그래. 결투다. 나는 대전사로 벨티오 경을 보낼 것이다. 네놈도 원한다면 다른 전사를 보내도록."

"하, 어이없는 놈이네."

강현은 결투라는 것이 대리 전투일 줄은 상상도 하지 못했다.

"됐다. 누구를 보내든 알아서 하고. 대신 지면 어떻게 할 거야?"

"당연히 죽음이지."

"너는 다른 놈 보냈잖아."

"그럴 리가 없겠지만, 내가 지게 되면 나는 귀중한 전사와 명예를 잃는다. 뭐가 더 필요한가?"

카를은 이것도 모르냐는 얼굴로 물었다.

"뭐 이런 뻔뻔한 새끼가 다 있어? 답답해서 암 걸리겠네. 하..."

"이 천박한 놈이 끝까지!"

보다 못한 기사 벨티오가 검을 꺼내 들었다.

"더 이상 주군을 모욕하면 참지 않겠다."

"후우... 그래. 그렇다고 치자. 근데 나는 이거 못 받아들여."

"네놈은 내 명예를 짓밟았다. 그래놓고선 도망친다는 말이냐!"

잔뜩 흥분한 카를이 소리쳤다.

"아니. 결투는 하지. 대신 넌 다른 걸 걸어라."

"뭐라?"

"나는 목숨을 걸 테니까. 너도 그에 걸맞은 걸 걸어야지."

강현이 씨익 웃었다.

그 모습을 보며 신태길이 고개를 저었다.

'죽어도 다시 살아나는 강현 씨 할 말이 아닌 것 같습니다만...'

신태길은 강현이 무언가 꿍꿍이가 있으리라 생각하고 일단 지켜보기로 했다.

"흥. 원하는 바를 말해봐라."

카를의 말에 강현이 턱을 쓰다듬었다.

"보자... 우선, 올리엔에게 사과해. 그리고 다시는 올리엔을 건들지 않겠다고 약속하고."

강현의 말에 고민하던 카를이 고개를 끄덕였다.

"어렵지 않은 일이군. 내 명예를 걸고 약속하지."

"두 번째로는 신태길 팀장이랑 약속한 것들을 전부 이행해."

지난 며칠 동안 카를과 신태길은 많은 이야기를 나눈 상태였다.

앞으로 양국이 교류하며 서로 어떤 것을 주고받을 것인가에 관한 내용이었는데, 강현은 자신으로 인해 그것이 무산될 것을 걱정한 것이다.

"어려운 일은 아니군. 어차피 본국에도 이들이 될만한 사안들을 가지고 조율하는 것이니. 원하는 것은 이것으로 끝인가?"

카를의 말에 강현이 씨익 웃었다.

"아니지. 마지막으로 하나 더. 아직 제일 중요한 게 남았거든."

"그게 뭐지?"

이어지는 강현의 설명에 자리에 앉은 모든 이들의 얼굴이 굳어졌다.

"왕자님! 안됩니다. 이런 자를 어떻게 믿고…."

흥분한 벨티오가 자리에서 일어나며 소리쳤다.

카를이 손을 들어 그런 벨티오를 진정시켰다.

"벨티오 경. 괜찮네. 어차피 자네가 질 일은 없지 않은가?"

"그렇다고 해도 만일이라는 것이 있습니다."

둘이 심각하게 대화를 나누자 강현이 고개를 저었다.

"누가 잡아먹는데? 사지 멀쩡하게, 상처 없이 돌려보내 준다니까?"

"닥쳐라! 명예를 모르는 놈의 말을 어찌 믿고 왕자님의 안위를 약속한다는 말이냐?!"

"상관없다. 그 제안 받아들이기로 하지."

"왕자님!"

카를이 벨티오의 어깨에 손을 얹었다.

"벨티오 경. 나는 경을 믿네. 저 천한 놈이 목숨을 걸겠다고 하니, 나도 그만한 것을 걸어야 하지 않겠나?"

"아무리 그렇다고 해도..."

"이미 결정했네. 반론은 듣지 않는 것으로 하지."

강현이 휘파람을 불었다.

"오우, 의외로 화끈한 구석이 있네. 아주 조금 마음에 들려고 해."

"착각하지 마라. 어차피 내가 결투에서 질 일은 없으니 승낙하는 것이다."

"그거야 두고 봐야 아는 거고."

다시 자리에 앉은 카를이 강현을 노려봤다.

"날짜는 언제가 좋겠느냐. 네놈이 원하는 날로 잡아라. 어차피 죽을 놈이니 이 정도는 들어줘도 되겠지."

벨티오의 말에 강현이 고개를 끄덕였다.

"기다릴 거 있어? 바로 시작해."

**

인근에 위치한 F등급 던전.

한적한 던전에 수십 명의 남자들이 총을 들고 서 있었다.

바로 신태길과 정부 소속 능력자들이었다.

"후우..."

그들이 보는 앞에서 강현은 몸을 풀며 숨을 골랐다.

-네가 이길 가능성은 희박하다.

베일의 말에 강현이 인상을 찌푸렸다.

"시작부터 초지지 마라."

-네놈을 걱정해서 하는 말이다. 적은 일반적인 기사가 아니야. 지금까지 싸워온 어중이떠중이와는 차원이 다를 거다.

"그래서 뭐 어쩌라고? 이제 와서 잘못했습니다. 하면서 대가리 숙이고 없던 일로 할까?"

-싸움에 진지하게 임하라는 말이다.

"네가 그러지 말라 해도 그럴 생각이다. 인마."

가벼운 말과는 달리 강현은 잔뜩 긴장하고 있었다.

'저놈이 강하다는 것쯤은 잘 알고 있어.'

직접 싸워본 강현이 누구보다 잘 알았다.

자신의 앞에 서 있는 기사 벨티오는 강적이다.

공격과 방어. 모든 것이 완벽하다 할 정도로 완성돼 있었다.

-진정한 기사에게 요행을 바라지 마라.

베일의 말이 맞았다.

놈은 약점이라는 것이 없는 상대.

진짜 실력으로만 승부해야 하는 적이었다.

"거 잔소리 존나 많네. 내가 알아서 할 테니까 방해하지나 마."

강현이 눈을 빛내며 자세를 잡았다.

"준비는 끝났나."

벨티오의 말에 강현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바로 시작하지."

"살 생각을 버리는 게 좋을 거다."

"너는 주둥이로 싸우냐?"

강현의 도발에 벨티오의 이마에 힘줄이 돋았다.

"간다."

외마디와 함께, 벨티오가 쏘아지듯 앞으로 달려갔다.

'흐읍!'

숨을 삼킨 강현이 힘껏 허리를 틀었다.

-쏴아아아!

벨티오가 검을 휘두르며 날린 마력이 강현의 귓가를 스치고 지나갔다.

-콰앙! 쿵, 쿠웅...

강현의 뒤쪽에 있던 나무와 바위가 모조리 잘려나가며 굉음이 일었다.

'신체로 견딜만한 공격이 아니야.'

저 정도 위력이라면 아무리 강현이라 해도 무조건 두 동강이 날 것이다.

가까이에 접근한 벨티오가 본격적으로 검을 휘두르기 시작했다.

강현 또한 그런 벨티오의 공격을 침착하게 막아냈다.

마력을 두른 두 개의 검이 쉴 새 없이 맞부딪히고, 마치 광선검을 들고 싸우는 것처럼 화려한 장면이 연출됐다.

-이대로라면 진다. 다른 수를 강구해!

언뜻 보면 막상막하였으나, 실제로는 강현이 압도적으로 밀리는 중이었다.

불과 1분도 지나지 않아 강현의 전신이 땀으로 젖어가는 것만 봐도 알 수 있었다.

"하압!"

기합과 함께 강현이 손을 뻗었다.

적의 팔을 붙잡을 생각이었으나, 벨티오는 호락호락하게 몸을 내주지 않았다.

"같은 수에 당할 것 같으냐!"

벨티오가 유려하게 몸을 피하고, 동시에 뻗어오는 강현의 팔을 자르기 위해 검을 휘둘렀다.

"마력폭발!"

강현은 어쩔 수 없이 폭발을 이용해 뒤로 물러났다.

'필시언의 해머를 꺼내는 건 안 되겠지?'

강현의 물음에 베일이 코웃음을 쳤다.

-멍청한 놈. 그 무식하게 큰 해머를 드는 순간 전신이 난도질당할 거다.

'혹시나 해서 물어본 거야. 말하는 싸가지 하고는!'

생각하던 도중 날아드는 마력에 강현이 다급히 검을 휘둘렀다.

-채앵!

강현에 의해 튕겨 나간 마력이 주변의 지형지물을 완전히 파괴하며 뻗어 나갔다.

시큰거리는 손목을 주무르며 강현이 쓰게 웃었다.

'이건 뭐 거리를 벌릴 수도 없고 좁힐 수도 없네.'

단순히 마법으로 칼날을 날리는 것과는 차원이 다른 위력이었다.

저런 경지의 강자라면, 허공을 날아다니는 해골들도 단숨에 도륙을 낼 수 있을 것이다.

-저것이 진정한 검사가 마력을 활용하는 모습이지.

'지금 감탄할 때냐!'

말을 하면서도 강현은 정신없이 움직였다.

또다시 검이 스치며, 강현의 피부게 길게 베어졌다.

-전투에 집중해라!

강현은 대답하지 않고 벨티오를 노려봤다.

'내가 가진 장점을 최대한 활용해야 돼. 뼈를 주고 살을 취한다.'

161화 인간 실격(6)

161. 인간 실격(6)

'보이는 빈틈은 다섯 군데.'

눈을 빛낸 벨티오가 쏜살같이 검을 휘둘렀다.

-파아악!

강현의 몸이 베이며 핏방울이 허공으로 비산했다.

'이번에도 회복하는가?'

벌써 수십 차례 강현의 몸을 베어냈다.

그가 입고 있던 옷은 너덜너덜해졌고, 피로 물들어 있었다.

보통 사람이라면 몇 번을 죽어도 이상하지 않았을 상처들.

그럼에도 강현은 아무 문제도 없다는 듯이 처음과 같이 움직였다.

'완력, 체력, 회복력까지... 인간이라고 보기 힘든 수준이야.'

상식을 뛰어넘는 강현의 신체에 벨티오는 정말 질려버릴 지경이었다.

'그렇다고 해서 조급해지면 안 돼.'

벨티오는 굳이 무리해서 강현에게 상처를 입히려 하지 않았다.

그러다가 눈먼 공격에 당하기라도 하면, 단숨에 전세가 기울어질 수도 있었다.

'지금 이대로 천천히 압박한다.'

어차피 현재 페이스만 유지한다면 승리하는 것은 불 보듯 뻔했다.

다만 시간이 조금 걸릴 뿐이다.

-스걱

또다시 강현의 팔에 기다란 자상이 생겼다.

근육이 잘려나간 것인지 강현의 팔이 축 늘어졌다.

강현이 인상을 찌푸리며 뒤로 물러났다.

'이번에는 조금 깊게 들어갔어.'

벨티오는 강현이 상처를 회복하는데 조금 오래 걸리지 않을까 생각했다.

하지만 불과 10초도 지나지 않아 강현은 언제 그랬냐는 듯 멀쩡해진 팔을 들어 올렸다.

'후우... 그래도 언제까지 회복할 수는 없을 것이다.'

한숨을 내쉰 벨티오가 정신을 다잡았다.

'어차피 인간의 마력에는 한계라는 것이 존재한다.'

느껴지는 강현의 마력은 자신과 거의 비슷한 수준.

언젠가 마력이 다 떨어져 회복하지 못하게 되면, 그때가 강현의 목을 취할 시점이었다.

'내 마력은 아직 충분하군.'

벨티오는 싸움이 장기전으로 갈 것을 대비해서 마력을 아끼는 중이었다.

그 순간, 강현의 움직임이 한층 거칠어지며 더욱 거세게 덤벼들기 시작했다.

자신이 장기전을 준비한다는 것을 눈치챈 것 같았다.

'이건 기회다.'

벨티오가 속으로 웃었다.

'조급해지면 실수가 나오기 마련이지.'

강현도 알고 있을 것이다.

싸움이 길어질수록 불리해진다는 것을.

'하긴 어차피 놈에게 선택지는 없었겠군.'

단지 일찍 죽을 것인가, 기다리다 천천히 죽을 것인가.

두 종류의 선택지가 존재할 뿐이다.

그리고 강현은 먼저 죽는 것을 택했다.

이해하지 못할 것은 아니다.

그것만이 승리에 대한 일말의 희망이라도 볼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었을 테니까.

"크아아아!"

강현이 괴성을 지르며 달려왔다.

동시에 손에 든 붉은 장검에서 쏘아지는 마력.

"흐읍!"

벨티오는 깜짝 놀라며 아슬하게 허리를 틀어 마력을 피해냈다.

'역시 비장의 한 수 정도는 준비하고 있었나.'

검으로 마력을 쏘아내는 것은 굉장히 고급 기술이다.

비록 강현이 기술에 대한 숙련도가 부족해 보이긴 하지만, 그래도 경시할 만한 것은 아니었다.

'상관없지. 이제 당하지 않는다.'

하지만 그래 봤자 자신의 손바닥 안이었다.

처음이라 당황했지만, 같은 기술에 또다시 당할 정도로 벨티오는 어리숙하지 않았다.

"이제 뭐가 더 남았지? 숨겨둔 수가 더 남았나?"

벨티오가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아직 존나 많이 남았으니까 걱정하지 마라."

"그런 것치고는 상당히 조급해 보이는 군, 그래."

"닥치고 덤벼!"

놈은 확실히 궁지에 몰려 있었다.

'예상보다 일찍 끝낼 수 있겠어.'

두 자루의 검이 어지럽게 얽혔다.

점차 강현이 상처를 입는 빈도가 높아지기 시작했다.

강현에게서 뿌려지는 피가 사방에 흩날렸다.

'끝이다!'

기회를 엿보던 벨티오가 마력을 폭사시키며 검을 찔러 넣었다.

목적지는 강현의 심장.

'아무리 괴물 같은 놈이라고 해도 심장이 뚫리면 그걸로 끝이지.'

극한의 몰입 생태에 빠져든 벨티오는 마치 시간이 천천히 흘러가는 것처럼 느껴졌다.

당황으로 물든 강현의 얼굴이 보인다.

자신의 검과 강현의 심장 사이의 거리는 약 30cm.

점차 그 거리가 좁혀진다.

'조금만 더...!'

그 순간.

'뭐냐!?'

강현이 엄청난 속도로 몸을 틀었다.

-콰아악!

어떻게 한 것인지 모르겠지만, 순간적으로 강현의 움직임이 엄청나게 빨라졌다.

검이 아슬하게 심장을 비껴가며 강현의 가슴에 틀어박혔다.

'이대로 상체를 절단해 주마!'

벨티오는 당황하지 않고 검에 힘을 가했다.

검이 박힌 상태에서 강현의 가슴을 완전히 절단한 생각이었다.

"음!?"

하지만 검이 움직이지 않았다.

마치 단단한 바위에 박힌 것처럼 꿈적도 하지 않았는 검.

'뭐냐. 왜 검이 움직이지 않는….'

그때였다.

"잡았다."

강현이 씨익 웃으며 몸을 앞으로 들이밀었다.

-푸우우욱!

벨티오의 검이 손잡이 부분까지 강현의 가슴을 파고들었다.

"뭐냐!? 커헉!"

당황한 틈을 타서 강현이 벨티오의 목을 움켜쥐었다.

'완력이 훨씬 강해졌어!'

원래도 강한 힘이었지만, 지금은 저항할 수조차 없을 정도로 압도적인 힘의 차이가 느껴졌다.

"으라야!"

벨티오의 목을 움켜쥔 강현이 그대로 바닥에 내려쳤다.

-콰앙!

"커허억!"

단 한순간에 역전된 싸움.

강현은 이것이 처음이자 마지막 기회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

벨티오가 정신 차리지 못하도록 강현이 쉴 새 없이 머리를 바닥에 내려쳤다.

-쿠웅, 쿠웅, 쿠웅!

"커헉, 컥..."

점차 카를의 몸에서 힘이 빠지기 시작했다.

'나는... 왕실을 수호하는 기사. 이렇게 무너질 수는 없다...'

흐릿해져 가던 벨티오의 눈에 점차 귀기가 일렁이기 시작했다.

"크아아아아아!"

벨티오가 괴성을 내지름과 동시에 전신에서 마력이 터져 나왔다.

"나는 왕국을 지키는 최후의 검. 절대 물러날 수 없다!"

숨이 잘 쉬어지지 않았다.

머리가 부딪치며 정신이 흐릿해졌다.

그러나 절대 패배해서는 안 된다.

벨티오가 양손으로 강현의 머리를 붙잡은 상태에서 엄지를 강현의 눈알에 밀어 넣었다.

"크윽, 이 독한 새끼가!"

이것은 절대로 명예를 지키는 기사가 할 행동은 아니었다.

하지만 벨티오는 그만큼 절실했다.

지금은 명예 같은 것을 내려놓고 전투에서 이겨야 할 때였다.

그래야만 자신의 본분을 다할 수 있다.

"으아아아! 그냥 곱게 뒤져!"

강현의 눈에서 핏물이 흘러나오기 시작했다.

강현이 벨티오의 목줄을 쥔 상태에서 그대로 바닥에 내려쳤다.

-콰아아앙!

그 충격에 바닥에 있던 바위가 부서지고, 벨티오의 머리에서 피가 터져 나왔다.

"크아아아아아!"

그럴수록 벨티오는 더욱 괴성을 내지르며 손에 힘을 주었다.

"커허억..."

그러던 벨티오가 갑자기 배터리가 다한 기계처럼 멈췄다.

강현이 계속 목을 졸라 결국 기절한 것이었다.

"후아... 이런 독한 새끼..."

기절한 상황에서도 자신의 얼굴을 놓지 않는 벨티오를 보며 강현이 고개를 저었다.

**

전투를 지켜보던 카를은 시종일관 여유로웠다.

"역시 벨티오 경이군."

벨티오 하인.

그는 왕실 기사단 내에서도 최상위의 실력을 갖춘 기사였다.

기사단의 단장을 제외하고, 그의 적수는 손에 꼽을 정도.

"벨티오 경이 저런 천한 놈한테 진다니. 그럴 리가 없지."

벨티오는 단 한 번도 흐름을 내주지 않았다.

점차 궁지에 몰리는 강현.

"끝났군."

마침내 강현의 가슴에 검이 틀어박히고, 카를은 전투가 끝났다고 생각했다.

"무슨...!?"

그 안일한 생각이 경악으로 바뀌는 데는 불과 10초도 걸리지 않았다.

"저놈은 괴물이란 말이냐!?"

강현이 벨티오의 목을 졸라 기절시키고 말았다.

"이, 이럴 수는 없다. 이건, 말도 안 돼!"

카를은 믿을 수 없다는 듯 비명을 내질렀다.

하지만 아무리 부정해도 현실은 현실.

"크흐으... 엿될 뻔했네."

자리에서 일어난 강현이 가슴에 박힌 검을 스스로 뽑아냈다.

두 눈에서 피가 줄줄 흘러내리고, 전신이 붉게 물든 모습은 도저히 인간으로 보이지 않았다.

몇 번 눈을 깜빡이던 강현이 고개를 돌려 카를을 바라봤다.

"저리가... 가란 말이다! 이 악마 같은 놈!"

강현이 다가오자 카를이 뒷걸음질 쳤다.

"무슨 수를 쓴 것이냐! 나는 인정할 수 없다. 네놈이 정녕 인간이란 말이냐!? 이건 결투가 아니야! 너는 악마다!"

"닥쳐. 이 새끼야."

카를의 앞에 선 강현이 미소를 지었다.

"마지막 약속을 지키러 가야지?"

벨티오의 몸이 공포로 인해 덜덜 떨려왔다.

"시, 시, 싫어... 나는 왕자다... 그런, 너같은..."

그것이 카를의 마지막 기억이었다.

**

"가끔은 강현 씨가 같은 인간이 맞나 의심스럽습니다."

신태길의 질린다는 표정으로 말했다.

"무슨 말을 그렇게 해요?"

"주위를 한번 둘러보시죠."

신태길의 말에 강현이 고개를 돌렸다.

그러자 눈을 피하기 급급한 정부 소속의 능력자들이 보였다.

"쯧. 이겼는데 환호는 못 해줄망정. 이런 취급을 하네."

이들은 강현처럼 특수 능력자 관리팀이 아닌, 정부의 직속 능력자들이었다.

즉, 신태길의 부하들.

전원이 50레벨 이상의 강한 능력자들로 이루어져 있었지만, 강현이 보인 무위(武威)는 상상을 뛰어넘는 것이었다.

"나도 순정이 있어요. 계속 이런 태도면 곤란합니다."

강현의 말에 능력자들이 흠칫 몸을 떨었다.

"장난은 그쯤 하시죠."

신태길이 다가와 강현의 앞을 막아섰다.

"그나저나 그 남자는 어떻게 할 생각입니까?"

강현의 손에는 기절한 카를 헤이서스가 들려 있었다.

"약속을 이행해야죠. 크큭."

그를 보며 강현이 사악하게 웃었다.

"죽이면 안 됩니다."

"알고 있어요. 누가 죽인다 했나?"

"거울 한 번 보시면, 제가 왜 이런 말을 하는지 아실 겁니다."

"아, 사지 멀쩡하게 보내준다니까 그러네."

"후우... 잘 부탁드리겠습니다."

강현이 고개를 끄덕이고는 발걸음을 돌렸다.

"바로 가십니까? 간단한 치료라도 받고 가시죠."

"됐어요. 일이 바빠서. 이만!"

카를을 옆구리에 낀 강현이 총총 던전을 벗어났다.

그 모습을 보며 신태길이 고민에 휩싸였다.

'언제까지 붙잡을 수 있을까.'

강현의 능력은 한계를 모르고 강해지고 있었다.

분명 다른 능력자들도 분명 강해지고 있었으나, 그들과의 격차는 갈수록 벌어지는 느낌이다.

'언젠가 통제를 벗어나게 되면... 아니야. 지금은 현재에 집중하자.'

생각하던 신태길이 고개를 흔들었다.

"전부 철수한다! 던전을 클리어해서 깔끔하게 정리하도록."

"예!"

**

"야야! 순서 지켜, 자식들아!"

배데스 길드 소유의 던전 중 하나인 '빛바랜 영광의 언덕'.

평소에는 길드의 공략 3팀만 사냥을 하던 던전이지만, 오늘은 달랐다.

한 줄로 길게 서서 순서를 기다리는 길드원들.

그 숫자가 무려 200명이 넘어갔다.

"크하하하! 죽어! 죽어라!"

"어디서 올리엔 누님을!"

대기줄의 끝에는 몇몇 길드원들이 둥그렇게 모여서 소리를 지르고 있었다.

"크헉, 커헉! 꺼억!"

그 한가운데에 누워있는 카를 헤이서스.

"이! 새끼가! 다시는! 나쁜 생각! 못하게! 해줘야지!"

한 길드원이 발길질을 할 때마다 대사에 악센트를 넣었다.

"야야. 적당히 팼으면 빠져! 상처 잘 치료하고!"

"예!"

"완전히 새것처럼 만들고 나서 다음 사람들한테 넘겨줘야 할 거 아냐."

한 팀의 순서가 끝나자, 대기 중이던 길드원들이 카를에게 치유 마법을 걸었다.

"끄어어어..."

카를은 반쯤 눈이 풀린 채로 신음했다.

"기분이 어때?"

강현이 카를의 상태를 살피며 말했다.

"사, 살려줘..."

"뭐라고? 잘 안 들리네?"

"살려줘! 내가 잘못했다! 제발..."

강현이 고개를 끄덕이며 일어났다.

"야! 멀쩡해진 것 같다. 다음 팀 들어와."

강현의 말에 줄을 서 있던 10명의 길드원이 다가왔다.

"이런 후레자식이. 감히 올리엔 누님한테! 어!?"

"죽었다고 생각해라. 새꺄."

벌써 수십 번도 넘게 들은 말.

길드원들이 사악하게 웃으며 또다시 구타를 시작했다.

"끄억, 컥! 크악!"

옆에서 그 모습을 지켜보던 강현이 흐뭇하게 웃었다.

"사운드 좋고!"

길드원들은 그동안 받았던 스트레스를 여기서 모두 풀려는 것처럼 보였다.

"살려서 보내는 걸 감사하게 생각해라. 쨔샤!"

매일매일 목숨을 걸고 벌이는 힘겨운 전투.

그 속에서 올리엔은 한 줄기의 빛이었다.

유일한 안식. 삶의 낙이 돼버린 올리엔이 이런 잡놈에게 몹쓸 짓을 당해서 침울해져 있다고 생각하자 당장 사지를 찢어 죽이고 싶은 마음이었다.

"커허어어..."

길게 늘어서던 줄이 모두 사라지고, 장장 10시간에 걸쳐 이뤄진 구타가 드디어 끝이 났다.

완전히 폐인처럼 변한 카를이 숨을 헐떡였다.

"수고했다."

"..."

카를은 강현의 말에 대답할 기운도 없었다.

그저 풀린 눈으로 바닥을 바라보고 있을 뿐이었다.

"이제 2차전 해야지?"

"...?"

순간 카를의 눈에 초점이 돌아왔다.

재빨리 고개를 돌린 카를이 잔뜩 커진 눈으로 강현을 바라봤다.

만약 눈으로 욕을 하는 대회가 있다면 우승은 따놓은 단상일 것이다.

"나는 아직 안 했잖아? 본 게임은 이제 시작이라고."

절망 어린 카를의 얼굴을 보며 강현이 환한 미소를 지었다.

162화 암시장 투어(1)

162. 암시장 투어(1)

"재문아. 혹시 전에 내가 말한 거. 준비됐냐?"

강현의 물음에 한재문이 고개를 끄덕였다.

"예. 마정석. 시가로 100억 원 치... 전부 모아뒀습니다."

"오, 빨리 준비했네. 어디 있어?"

"길드 창고에 보관 중입니다."

"오케이."

배데스 길드에서 얻는 마정석은 크게 두 가지로 사용된다.

하나는 정서빈의 아이템 연구소로 보내지는 것.

다른 하나는 정부나 기업에 마정석을 팔아 돈을 버는 것이다.

"100억 원 치라 그런지 양이 제법 되네."

강현은 그중에서 외부로 판매하는 마정석을 모조리 사비로 구매했다.

미국에서 받은 1,000억이 넘는 거금이 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길드장님... 그런데 이건 어디에 쓰시려는 건가요...?"

"필요한 데가 있어서. 왜? 혹시 문제 있으면 지금 말해."

"아니, 그런 건 아니에요. 그냥 궁금해서..."

"나쁜 일에 안 쓰니까 걱정하지 마. 어차피 외부로 파는 마정석인데, 내가 조금 웃돈 주고 사면 서로 좋잖아?"

"네..."

맞는 말이었다.

한재문은 그저 순수하게 궁금해서 물어봤을 뿐이었다.

'솔직히 공짜로 마정석을 갈취해가지 않은 것만 해도 다행이야...'

그런 한재문의 생각을 모른 채 강현이 싱글벙글 웃었다.

"바로 가볼까?"

마정석을 챙긴 강현은 곧장 올리엔이 있는 숙소로 향했다.

**

"올리엔!"

"강현! 오랜만이에요."

"어제도 봤잖아."

"그런가요? 하하."

카를 헤이서스 사건 이후 며칠이 흘렀다.

그동안 올리엔은 안정을 취해 어느 정도 원래의 모습을 되찾아가고 있었다.

"올리엔. 쇼핑가자."

"네? 쇼핑이요? 설마 백화점을 가는 건가요?"

쇼핑이라는 말에 올리엔의 얼굴이 눈에 띄게 밝아졌다.

"음... 비슷하지?"

"너무 좋아요! 지구의 물건들은 하나같이 예쁘고, 세련 됐거든요."

처음 백화점을 간 날.

올리엔은 정말 어린아이처럼 들떠 있었다.

'오늘은 목적지는 백화점이 아니기는 하지만... 뭐, 상관없겠지.'

비록 백화점이 아니라 해도, 항상 새로운 경험을 즐기는 올리엔이라면 분명 좋아할 것이다.

"가넷은?"

"훈련장에 있어요."

"그래? 잘됐네."

어차피 다음 목적지는 훈련장.

강현과 올리엔이 숙소를 벗어나 훈련장으로 향했다.

**

"하아압!"

훈련장에는 많은 길드원이 훈련에 매진하고 있었다.

그중에서도 유독 눈에 띄는 둘이 있었는데, 바로 실전을 방불케 하는 치열한 전투를 벌이는 안유성과 신성아였다.

조금 떨어진 곳에는 윤나래가 넋이 나간 사람처럼 멍청한 표정으로 둘을 지켜보고 있었다.

"너는 뭐하냐?"

강현의 물음에 윤나래가 히죽 웃었다.

"잘생긴 게 최고죠."

"헛소리할래? 너는 뭐 하고 있냐고 인마. 훈련 안 해?"

"이미지 트레이닝 중이에요. 방해하지 마요."

"어휴, 이걸 콱 그냥!"

강현이 윤나래에게 꿀밤을 먹였다.

"아! 왜 때려요!?"

"심심해서 때렸다. 왜?"

강현이 눈을 부라리며 쳐다보자 윤나래가 입술을 삐죽 내밀었다.

"씨이... 맨날 나만 미워해."

"됐고, 전부 모여봐!"

강현의 외침에 안유성과 신성아가 고개를 돌렸다.

"강현 님. 오셨습니까?"

"어. 오늘 훈련은 여기까지만 하고 나랑 어디 좀 가자."

"형. 또 이상한 데 가려고요?"

"야. 그 발언은 오해의 소지가 있는 것 같은데."

강현이 인상을 찌푸리며 고개를 저었다.

"됐고, 다들 고생했는데 선물 하나씩 해주려고 그러니까 따라와."

선물이라는 말에 모두의 얼굴이 밝아졌다.

'놀라지나 마라.'

조금 뒤에 화들짝 놀랄 일행을 생각하며 강현이 흐뭇하게 웃었다.

**

"어서오십..."

문이 열리는 것을 보고 인사를 하던 바텐더의 얼굴이 잔뜩 굳었다.

"오랜만이네요!"

해맑게 웃으며 악당 비어에 들어서는 강현을 봤기 때문이다.

'저 미친놈은 또 무슨 일이지..?'

바텐더는 두 번 다시 강현과 마주치지 않기를 빌었지만, 이뤄질 수 없는 꿈인 것 같았다.

'후... 어쩔 수 없지.'

다행인 이전보다는 상황이 나았다.

강현이 처음 온 날.

간부인 최시현이 강현의 출입증을 만들어주고 보증인을 자처했기 때문이다.

이제 바텐더는 그저 강현에게 암시장으로 가는 포탈을 열어주기만 하면 됐다.

"바로 2층으로 가시겠습니까?"

바텐더의 물음에 강현이 고개를 저었다.

"아니요. 오늘은 친구들이 좀 있어서."

"예...?"

친구라는 말에 바텐더의 얼굴이 또다시 굳었다.

불안감이 엄습하기 시작했다.

"야! 전부 들어와."

강현의 말에 문이 열리고, 한 무리의 사람들이 우르르 들어왔다.

"형. 갑자기 웬 술집이에요?"

"와아! 맥주 마시는 날인가요?"

"분위기가 좋은 술집이군요."

"뭐야? 미국에서 돈 벌었다더니. 회식해요? 이왕 회식할 거면 소고기 가게로 가지!"

마지막은 윤나래의 말이었다.

"닥쳐."

윤나래에게 쏘아붙여 준 강현이 다시 바텐더에게 시선을 돌렸다.

"오늘은 여기 이 친구들이랑 다 같이 갈 생각인데. 괜찮죠?"

"아... 그게..."

바텐더가 땀을 삐질삐질 흘렸다.

"혹시 이분들은 출입증이... 있으십니까?"

"없어요."

있을 리가 없었다.

"하나씩 만들어 줘요. 내가 보증인 할게요."

"그게... 음..."

보증인은 아무나 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조직에 신뢰 관계를 맺고 있으며 만일 일이 잘못됐을 때, 정확하게 책임을 질 수 있는 사람이 보증인의 자격을 가지는 것이다.

당연히 강현은 그 두 가지 모두 해당하지 않는다.

'저 미친놈에게 책임을 물었다가 도리어 맞지나 않으면 다행이지...'

바텐더가 억지 미소를 지으며 강현을 바라봤다.

"잠시만 기다려 주시겠습니까? 상부에 연락을 취하겠습니다."

결국, 바텐더는 다시 최시현에게 떠넘기기로 했다.

**

"아아~ 심심하다."

최시현은 탁자에 발을 올린 채로 멍하니 천장을 바라봤다.

"던전이나 돌까?"

암시장의 간부가 된 이래로 한가한 날의 연속이었다.

시스템이 갖춰져 업무 대부분을 부하들이 처리했기 때문이다.

최시현이 할 일은 그저 보고를 듣고, 서류에 결재하는 것뿐이었다.

"여기까지 올라오는 데는 정말 치열했는데 말이지..."

최시현은 정말 목숨을 걸었었다.

능력자 세계에서 살아남기 위해 필사적으로 던전을 돌았고, 범죄자 조직에서 위로 올라가기 위해 매일매일 전쟁을 치렀다.

그런 각고의 노력 끝에 목표를 이뤄냈건만, 그 끝에 남은 것은 공허함과 불안함뿐이었다.

"그래. 던전이나 돌자."

이제 그녀는 위로 올라가는 것이 아닌 아래로 내려가지 않기 위해 노력해야 했다.

제법 위치가 공고해졌다고 하지만 빈틈을 보이는 순간 득달같이 달려들 하이에나들은 사방에 널려있다.

"보고드릴 것이 있습니다."

그때였다.

노크 소리와 함께 부하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들어와."

최시현의 말에 문이 열리고, 굳은 표정의 부하 직원이 들어왔다.

"무슨 일이야?"

"악당 비어에서 연락이 왔습니다."

"악당 비어?"

어딘가 익숙한 이름이었다.

최시현은 금세 그곳을 기억해낼 수 있었다.

"설마... 강현이야?"

"예..."

"무슨 일인데?"

"일행을 잔뜩 끌고 와서는 암시장 출입을 요구하고 있습니다."

부하의 말에 최시현이 한숨을 내쉬었다.

'하아... 또 골치 아프겠네.'

머리를 긁적이던 최시현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내가 직접 간다고 전해."

"알겠습니다."

최시현이 외투를 입고는 곧장 밖으로 나섰다.

'이번에는 무슨 일을 벌이려는 걸까?'

불안하지 않다면 거짓말이었다.

그런데 이상하게 묘한 흥분감이 함께 밀려왔다.

'가보면 알겠지.'

최시현의 입꼬리가 저도 모르게 올라가기 시작했다.

**

악당 비어에 도착하자, 문밖에서부터 소란스러운 소리가 들려왔다.

-딸랑딸랑

문을 열고 들어가자 술판을 벌이고 있는 사람들이 보였다.

"마셔마셔!"

"와아! 여기 술은 정말 고급스러운 맛이에요!"

"당신이 길드장이면 다야!? 왜 맨날 나만 구박해!? 엉!? 나도 길드원이라고!"

"이게 갑자기 왜 지랄이야!? 진짜 뒤지고 싶냐?"

그들에게 술을 건네주는 바텐더는 정말 울기 직전처럼 보였다.

"오셨습니까..."

"무슨 상황이야?"

최시현의 물음에 바텐더가 한숨을 내쉬었다.

"강현 씨와 이분들이 암시장 출입을 원하신다고 합니다."

"그런데 왜 술판을 벌이고 있어?"

"그게..."

그때 최시현을 본 강현이 손을 들었다.

"여! 왔어요?"

"강현 씨. 무슨 일이죠?"

"내가 이번에 돈을 좀 많이 벌었거든요. 그래서 얘들 데리고 시장 구경이나 가려고요."

강현의 말에 최시현이 한숨을 내쉬었다.

'암시장이 어디 관광지도 아니고...'

사실 암시장 내에서 싸움을 엄격히 통제하기에 그리 큰 위협은 없다.

하지만 아무리 그렇다고 해도 저렇게 술에 취한 채로 관광을 갈 만한 곳은 아니었다.

"가끔은 기분 전환이란 게 필요하잖아요? 이번에 다들 고생하기도 했고..."

"그렇군요..."

"예. 원래는 최시현 씨한테 연락하지 않고 내가 보증인 해서 들어가려 했는데 저 사람이 안 된다고 하네요. 귀찮게 한 거면 미안해요."

"아니에요. 신경 쓰지 마세요."

최시현은 프로답게 미소를 잃지 않고 말했다.

"그럼 바로 갈까요?"

"그러죠."

고개를 끄덕인 강현이 일행을 바라봤다.

"야야! 그만 먹고 가자."

"어딜 가! 나도 데려가!"

얼굴이 벌겋게 달아오른 윤나래가 강현의 옷자락을 잡고 흔들었다.

"이걸 진짜 죽여 말어..."

**

암시장에 들어선 일행은 하나같이 놀란 표정을 지었다.

"와아! 지구에도 공간 이동 마법진이 존재했군요!? 신기하네요."

"그렇지? 처음에 나도 엄청 놀랐다니까."

"네. 여기는 시장인 것 같은데, 규모가 엄청나요! 가넷도 함께 왔으면 좋았을 텐데."

올리엔은 케르고와 훈련하기 위해 일행과 함께하지 않은 가넷을 떠올리며 안타까워했다.

'저 여자가 말로만 듣던 다른 차원에서 왔다는 사람인가...'

손뼉을 치며 좋아하는 올리엔을 보고 최시현이 눈을 빛냈다.

다른 차원에 인간이 지구로 왔다는 것은 아직 일반인들에게 풀리지 않는 비밀이었다.

조직 내에서도 최시현 같은 간부 급이 아니면 모르는 극비 정보.

'지켜볼 필요는 있겠어.'

최시현은 딱히 내색하지 않고 미소를 유지했다.

"강현 씨. 혹시 따로 필요한 물건이 있나요?"

"그런 건 딱히 없고, 여기 있는 애들 장비. 전부 B등급으로 싹 갈아줄까 해요. 겸사겸사 구경도 시켜주고."

강현의 말에 최시현이 고개를 끄덕였다.

"B등급이라면 비쌀 텐데 괜찮겠어요?"

"그래 봤자 하나에 10억 넘어가는 건 거의 없잖아요?"

"그렇죠."

"그러면 됐어요."

강현이 미국의 일을 해결한 것은 방송으로 전 세계에 알려진 사실.

최시현은 강현의 언행에서 그가 미국에서 받은 보수가 상당하는 것을 눈치챌 수 있었다.

"자. 이거 받아."

인벤토리를 뒤적인 강현이 신성아에게 마정석 한 무더기를 건넸다.

"강현 님. 이건...?"

"여기서는 마정석을 화폐로 쓰는 게 제일 거래하기 쉽거든. 이게 10억 원 치는 넘으니까 어지간한 장비는 전부 살 수 있을 거야. 혹시 부족하면 말하고."

강현의 말에 신성아가 손사래를 쳤다.

"아닙니다. 제가 직접 구매하도록 하겠습니다. 그 정도 돈은 있으니까요."

"됐으니까 받아. 지금 남는 게 돈이라니까?"

"그래도..."

"어허, 빨리 받아. 팔 떨어지겠다."

신성아는 마지못해 마정석을 받았다.

"감사합니다..."

신성아에게 마정석을 건네준 강현은 안유성을 바라봤다.

"야."

"왜요?"

"너는 내 계좌로 입금해라."

"그냥 주면 안 돼요?"

"쓰읍! 감히 다이아 수저가 코 묻은 돈을 갈취하려 해? 아직 세상에 정의는 살아있다. 인마."

강현이 엄한 표정으로 말했다.

"쯧. 대충 30억 원에 맞춰서 줘요. 돌아가서 보내줄게요."

혀를 찬 안유성은 시원하게 30억을 약속했다.

강현이 미소를 지으며 안유성에게 마정석을 건네고, 마지막으로 윤나래를 바라봤다.

"으음... 너는 어떡하지?"

"나도 줘요..."

"기다려봐. 고민하는 중이니까."

강현이 턱을 쓰다듬으며 고민하자 윤나래가 다급해지기 시작했다.

"저는 흙수저 출신인데요. 어려서부터 집이 가난해서 고기도 잘 못 먹었어요. 또... 코스프레도 사실 아르바이트로 시작한 거예요. 그거 입고 사진 찍으면 돈 많이 준다고 해서. 결국에는 취미가 됐…."

윤나래가 대뜸 불우한 가정환경에 대해 주저리주저리 늘어놨다.

강현은 귀를 후볐다.

"어쩌라고. 마정석 맡겨놨냐?"

"쳇. 쫌생이. 기대한 내가 바보지."

윤나래가 입을 삐죽 내밀었다.

"사실 주려 했는데, 그냥 말아야겠다. 나는 쫌생이니까."

"아아아악! 잘생기고 위대하고 관대하신 길드장님! 잘못했습니다! 사고 싶은 게 있어요. 제발! 제발 부탁드려요!"

"안 돼. 나는 쫌생이거든."

"왜에! 나도 달라고요! 나도 길드원인데 자꾸 나만 왕따 시켜!"

윤나래가 악을 쓰며 달려들자 강현이 손을 뻗어 윤나래의 이마를 밀었다.

"왜 이렇게 질척거려? 떨어져라."

"아아아! 쫌만 줘요. 제발!"

강현은 잠시 윤나래를 발악하는 것을 지켜보다가 이내 피식 웃었다.

"옜다. 봐줬다."

"아싸!"

윤나래가 싱글벙글 웃으며 마정석을 챙겼다.

"최시현 씨. 고급 장비 판매하는 쪽으로 가죠."

강현의 말에 최시현이 고개를 끄덕였다.

"올리엔은 혹시나 갖고 싶은 거 있으면 말해."

"저는 괜찮아요! 구경만 해도 엄청 재미있거든요!"

"그러니까. 혹시나 갖고 싶은 게 생기면 말하라고."

"네."

올리엔이 싱긋 웃었다.

"어디 괜찮은 거 없으려나..."

그 이후로 일행은 크게 멀어지지 않는 선에서 각자 아이템을 구경했다.

강현 또한 장비를 확인했는데, 지금 그에게 필요한 것은 보이지 않았다.

'하긴... 이미 B등급 장비로 도배된 상태니까.'

현재 강현이 착용하는 아이템보다 수준 높은 것은 거의 보이지 않았다.

아직 A등급 아이템이 풀리지 않았기에 당연한 일이었다.

갑옷, 무기, 액세서리까지 모든 장비가 B등급이거나 B+등급으로 도배된 강현은 그저 구경하는 것에 만족하기로 했다.

'그래도 혹시나 괜찮은 걸 건질지도 모르니 잘 봐야지.'

그렇게 강현이 한창 아이템을 둘러보고 있을 때였다.

"강현 님. 물건은 고르셨습니까?"

"아직."

대답하던 강현은 신성아가 무언가를 들고 있는 것을 발견했다.

"뭐야? 너는 벌써 샀네?"

"예."

"잠깐만, 뭐야 이거? 옷이야?"

"아이템으로 제작된 가죽옷입니다. 등급은 C등급이긴 하지만... 평상시에 입고 다녀도 괜찮을 것 같아서 구매했습니다."

요즘은 지구에서도 아이템 제작자들이 늘어서 이런 장비들이 나오곤 했다.

"그렇다고 해도 C등급까지 제작이 된다니 의외네."

강현은 제작 아이템이 던전 장비를 따라잡을 날도 그리 멀지 않았다고 생각했다.

"그나저나 얼마나 줬어? C등급이라도 제작이니까... 한 1억 5,000 정도 줬나? 아니면 2억?"

강현의 말에 신성아가 머리를 긁적이며 웃었다.

"그게... 10억입니다."

"응? 뭐라고..?"

무언가 잘못된 듯하다.

163화 암시장 투어(2)

163. 암시장 투어(2)

"응? 뭐라고..?"

강현이 당황하며 눈을 깜빡거렸다.

"10억입니다."

"그거 C등급이라 하지 않았나?"

"맞습니다."

일반적으로 C등급 장비는 비싸도 1억 원대에 거래됐다.

간혹 2억 3억 원에 거래되는 것이 있다지만, 그건 정말 예외적인 경우.

'후우... 이 호갱이 진짜...'

강현이 머리를 거칠게 쓸어 넘기며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어디야?"

"예?"

"그거 어디서 샀냐고."

강현이 물건을 산 곳으로 가려 하자 신성아가 손사래를 쳤다.

"강현 님. 괜찮습니다."

"괜찮기는 뭐가 괜찮아? 완전히 바가지 쓴 거잖아."

"아... 이게 이렇게 보여도 장인이 수공업으로 한. 땀. 한. 땀. 만든 명품이라고 합니다."

신성아가 바느질을 하는 제스처를 취하더니 자랑스럽게 가죽옷을 내밀었다.

"하아..."

강현이 이마를 붙잡은 채로 고개를 저었다.

"그것뿐만이 아닙니다. 한국으로 돌아가면 등판에 붉은색으로 배데스 로고도 새겨주기로 했습니다."

"로고?"

"특별히 서비스해 준다고 합니다."

"판매자가 한국인이었어!?"

강현은 당연히 외국인이 판매한 것이라 생각했다.

한국에서 능력자에 관련 일을 하고 있으면 배데스 길드를 모를 수가 없기 때문이다.

'성아가 배데스 길드인지 알면서도 이딴 짓을 벌였다고?'

이것은 단순히 강현의 자의식 과잉이 아니었다.

객관적으로 배데스 길드는 단군과 함께 대한민국의 최고의 길드로 손꼽힌다.

그런 길드의, 심지어 부길드장에게 사기를 치는 한국인.

강현은 그런 간 큰 인간이 도대체 누구인지 직접 확인을 해야 직성이 풀릴 것 같았다.

"바로 가자."

"예?"

"그 사기꾼 새끼 튈 수도 있잖아. 바로 가자고!"

"하지만 강현 님..."

"빨리!"

강현의 재촉에 신성아가 별수 없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옆에서 그 모습을 지켜보는 최시현이 한숨을 내쉬었다.

'제발 조용히 넘어가면 좋겠는데...'

어쩐지 사고가 터질 것만 같은 불길한 예감이 들었다.

그리고 정말 불행히도, 이런 종류의 예감은 상당히 잘 들어맞는다.

**

박종수는 암시장에서 제법 잔뼈가 굵은 상인이었다.

한국에서 대대적인 암시장 소탕이 있기 전, 아주 초창기부터 꾸준히 장사해온 박종수.

아마 자신만큼 오래 암시장에 들락거린 상인도 드물 것이다.

"슬슬 퇴근해 볼까?"

그가 하는 일을 한마디로 정의하자면 유통업이었다.

제작자에게서 아이템을 구해서 소비자에게 판매하는 것.

원래 소규모 유통업이란 것이 딱히 돈이 되는 일은 아니었으나, 그래도 부유한 능력자들을 상대로 장사했기에 제법 벌이가 쏠쏠했다.

"이천만 원이라... 이 정도면 나쁘지 않네."

현재 박종수는 한 달에 약 2억 정도의 순익을 챙긴다.

이 바닥 일이라는 것이 목숨을 걸어야 한다고는 하지만, 월에 2억이라면 박종수는 충분히 목숨을 걸만하다고 생각했다.

게다가 암시장에서는 가끔 대박이 터지곤 했다.

바로 오늘처럼.

"이건 얼마입니까?"

물건을 고르는 여성을 보며 박종수가 눈을 빛냈다.

큰 키에 수려한 외모. 그리고 날카로운 인상을 가지고 있는 여성.

'냄새가 나는데...'

박종수는 직감적으로 호구의 기운을 눈치챘다.

눈앞의 여성은 겉보기와 달리 물건을 고르는 것에서부터 어수룩함이 느껴졌다.

"그건 수제라서 좀 비싸요. 10억은 훨씬 넘습니다."

박종수는 일부러 무리한 가격을 던졌다.

'물면 좋고 아니면 말고.'

어차피 이미 오늘은 충분히 벌 만큼 벌었다.

만약 여성이 떠난다고 해도 딱히 아쉬울 것은 없었다.

"C등급치고 너무 비싼데... 조금만 깎아주면 안 되겠습니까?"

아쉬운 눈을 하며 대답하는 여성.

박종수는 비명을 내지르려는 입을 틀어막았다.

'대박이다! 왕호구야!'

박종수가 큰맘 먹고 1억 원에 구한 가죽옷 세트.

원래라면 2억 원 정도에 거래하려 했으나, 이제는 아니다.

박종수가 무려 10배가 넘는 가격을 불렀음에도 여성이 구매할 여지를 내비친 것이다.

그때부터 박종수의 혓바닥이 쉴 새 없이 움직였다.

"여기 이 원단 좀 보세요. 이거 몬스터 가죽인데 현대 기술로 가공해서 편하면서도 내구성이 끝내줍니다!"

"오호..."

"마감처리 보이십니까? 이런 걸 바로 명품이라고 하죠. 멍청한 어디 사람들처럼 브랜드 가치로 입는 것이 아닌 진정한 명품!"

"대단하네요..."

여성의 눈이 몽롱하게 풀리기 시작했다.

"고객님처럼 외모도 수려하시고 실력도 뛰어난 능력자는 사실 스스로가 명품이나 다름없긴 합니다. 하지만 그럴수록 더욱 본인의 품위에 맞는 옷을 입어야지요."

박종수의 말에 여성이 혼이 나간 사람처럼 고개를 끄덕였다.

"고객님께서 이 옷을 입는다면 말 그대로 천사에게 날개를 단 것이나 다름없지 않겠습니까!? 하하하!"

낯간지러운 말이었지만 여성은 싫지 않은지 발갛게 달아오른 얼굴로 머리를 긁적였다.

"고객님. 혹시 지금 들어가 있는 길드가 있습니까?"

"예..."

"그러면 제가 서비스로 길드 로고까지 새겨드리겠습니다."

완전히 얼굴이 상기된 여성의 눈이 초롱초롱하게 빛났다.

"그러면 개인적인 디자인도 가능합니까?"

"물론입니다!"

"그러면 여기를 이렇게…."

한동안 여성의 설명이 계속됐다.

"알겠습니다. 길드 로고는 어떻게 해드릴까요?"

"영어로 BADASS라고 적어주시면 됩니다."

여성의 말에 순간 박종수의 얼굴이 굳었다.

"배데스요...? 설마 배데스 길드 소속이셨습니까?"

"예. 무슨 문제라도?"

박종수의 머리가 빠르게 굴러갔다.

'어디서 많이 봤다 했더니. 젠장! 어떡하지?'

이 정도로 초대형 호구는 박종수도 처음 잡는 것이었다.

일생일대의 기회나 마찬가지.

그는 이것을 놓치고 싶지 않았다.

'그래. 배데스가 대수야? 어차피 강현도 아니잖아?'

강현의 악명이 유명하긴 했지만, 자신은 암시장의 베테랑 상인이다.

'한탕 한 뒤에 잠적하면 그만이야. 어차피 잘못돼도 죽기밖에 더하겠어?'

고민을 끝낸 박종수가 신뢰의 미소를 지었다.

"고객님 혹시 마정석으로 거래가 가능하십니까? 지금 특별 이벤트로 10% 저렴하게 판매하고 있습니다."

물론 거짓말이었다.

단지 마정석 거래는 기록이 남지 않았기 때문에 던져본 말이었다.

"그렇지 않아도 마정석으로 구매하려 했습니다. 잘됐네요."

박종수가 속으로 기쁨의 비명을 내질렀다.

'최구야! 최구! 최강 호구!'

모든 것이 그가 원하는 대로 돌아가고 있었다.

이제 10억이 먹는 돈을 챙기고 돌아가서 잠적하기만 하면 됐다.

"그럼 바로 결제하시겠습니까?"

"예. 그러면 디자인이랑 로고는 언제 완성되는 겁니까?"

"아! 그건 걱정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여기 제 명함입니다. 한국에서 연락 주시면 언제든지 수선해 드리겠습니다. 이게 기술을 배우기가 힘들어서 그렇지 알기만 하면 적용하는 건 금방이거든요. 하하!"

"감사합니다. 여기..."

박종수는 가죽옷과 함께 자신의 가짜 명함을 건네주었다.

그것을 받은 여성이 해맑게 웃으며 마정석을 건넸다.

한 아름 안길 정도의 엄청난 양.

"이 정도면 충분하네요. 아니다. 다시 계산하니 조금 남습니다."

박종수는 오히려 잔금이 남았다며 약간의 마정석을 돌려주는 여유까지 부렸다.

"또 이용해 주세요!"

여성을 보내고, 박종수가 미친 사람처럼 실실 웃기 시작했다.

"흐흐흐. 이게 얼마 치야?"

한가득 쌓인 사랑스러운 돈덩이! 아니, 마정석들!

박종수는 멍하니 마정석을 바라보다가 이내 다급히 인벤토리에 넣었다.

"이럴 때가 아니지. 얼른 뜨자."

혹시라도 여성의 일행이 있을지도 모른다.

그렇다면 높은 확률로 여성이 바가지를 썼다는 것을 눈치챌 것이다.

그런 사태가 일어나기 전에 얼른 이 자리를 떠야 했다.

"좋았어. 가자."

빠르게 가판대를 정리를 끝낸 박종수가 배낭을 멨다.

"대박이야. 대박! 흐흐흐..."

그러다가 무심결에 고개 들었는데, 그 순간 누군가가 눈에 들어왔다.

멀리서도 확연히 느껴지는 인상파의 얼굴.

'강현...!?'

때마침 강현도 박정수를 발견한 것인지 눈을 크게 떴다.

"이런, 시발!"

**

강현을 발견한 박종수는 미친 듯이 달렸다.

"야이 새끼야! 거기 안 서!?"

뒤쪽에서 벼락같은 고함이 들려왔으나 돌아볼 여유는 없었다.

'너 같으면 서겠냐?!'

박종수는 과거 강현이 결투장에서 유명했던 레이건을 족치는 것을 직관한 사람 중 하나였다.

'잡히면 즉사다!'

박종수도 나름 능력자였지만, 강현에게 붙잡혀서 10초도 버틸 자신이 없었다.

"후욱, 후욱, 후욱!"

박종수가 거칠게 숨을 헐떡였다.

'할 수 있어! 도망쳐야 해!'

비록 신체 스펙은 밀렸으나 박종수는 도망칠 자신이 있었다.

이곳은 미로처럼 얽힌 암시장.

박종수처럼 이곳에서 먹고살지 않는 이상 강현이 이곳의 지리에 빠삭할 것 같지는 않았다.

'내가 너 같은 놈 한두 번 본 줄 알아?'

칼 밥 먹고 사는 능력자들을 상대하다 보니 이런 추격전은 제법 흔한 편이었다.

그리고 박종수는 이런 일이 있을 때마다 항상 성공적으로 도망쳤다.

'따돌렸나?'

그렇게 달리기를 한참.

이 정도면 강현이 자신을 놓쳤으리라 생각한 박종수가 멈춰 섰다.

"후우... 다행이야."

박종수가 안도의 한숨을 내쉰 순간.

-콰앙, 쾅! 콰아앙!

소란과 함께 무언가 박살 나는 소리가 들려왔다.

다급히 고개를 돌리자, 코뿔소처럼 앞을 막아서는 모든 것을 박살 내며 달려오는 강현이 보였다.

"저런 미친놈이!"

가판대든 사람이든 막아서는 것을 모조리 부수며 달리는 강현은 마치 불도저 같았다.

강현의 사악한 얼굴이 실시간으로 가까워지고 있었다.

"크하하하! 잡히면 넌 뒤졌어!"

암시장 내의 싸움이 금지이고, 곳곳에 가드가 존재한다고 하지만 암시장은 결국 근본이 무법지대다.

그 때문에 밖에서 한가락 한다는 범죄자들도 이곳에서는 몸을 사리기 마련이다.

"지금 서면 반만 죽인다!"

그런데 강현은 그런 사실 따위는 전혀 신경 쓰지 않는 것 같았다.

원래라면 멱살을 틀어쥐고 시비를 걸었어야 할 놈들도 모두 길을 비키기 바빴다.

"으으... 으아아악! 사람 살려!"

박종수가 두 발을 놀리며 목이 터져라 소리쳤다.

"가드! 가드는 뭘 하는 거야! 얼른 도와줘! 빨리!"

뒤를 돌아볼 때마다 강현의 험악한 얼굴이 차츰차츰 가까워지고 있었다.

'안 돼, 따라 잡힌다!'

잡히면 그것으로 끝이다.

그 순간. 박종수의 앞을 누군가가 막아섰다.

"멈추시죠."

그들의 정체는 암시장의 가드들.

가드를 본 박종수가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

암시장의 가드는 대부분 한국인이었다.

이곳 암시장의 시작이 한국 조직이었기에 당연한 일이었다.

"무슨 소란입니까?"

"가드! 살려줘. 죽게 생겼다고."

박종수가 가드의 옷자락을 붙잡으며 흔들었다.

"갑자기 살려달라니 무슨..."

가드는 금세 박종수의 말을 이해할 수 있었다.

"야이, 개새끼야-!"

험악한 인상에 근육질의 남자가 달려오고 있었다.

강현을 본 가드의 얼굴이 딱딱하게 굳었다.

'젠장! 잘못 걸렸다.'

능력자들의 다툼을 해결하는 일이었기에, 당연히 가드 또한 아주 강한 능력자였다.

그의 레벨은 무려 68.

가드 중에서도 거의 가장 높은 레벨이었고, 그에 걸맞은 엄청난 보수를 받고 있었다.

'그래도 강현은 아니잖아!'

세간에 알려진 강현의 악명대로라면 자신은 산채로 잡아먹힐 것이 뻔했다.

"후우... 어디를 도망가려고?"

마침내 도착한 강현이 박종수의 멱살을 틀어쥐었다.

"가드! 뭐하는 거야!? 고객을 보호해야지!"

"뭐? 고객? 이 사기꾼 새끼가 무슨 소리를 하는 거야?"

"안돼! 살려달라고! 사람 살려!"

박종수가 거의 경기를 일으키며 비명을 내질렀다.

"두 분... 일단 진정을 하시죠."

"너는 또 뭐야?"

"이곳 암시장의 가드입니다."

"가드?"

"강현 씨. 암시장 내에서의 싸움은 금지입니다. 모르시지는 않겠지요?"

가드가 침을 꿀꺽 삼키며 조심스럽게 말했다.

'하아, 어쩌다가 이런 일에 엮여서.'

말은 이렇게 했지만, 가드도 알고 있었다.

법의 심판이 아닌 주먹의 힘으로 유지되는 이곳 뒷세계에서는 힘이 곧 진리.

현재 근무하고 있는 가드를 전부 불러 모은다고 해서 강현을 막을 수 있을 것 같지는 않았다.

"아... 미안해요. 이 사기꾼이 돈을 먹고 튀려고 해서."

"사기꾼이라니! 나는 정당하게 물건을 팔았습니다! 도대체 무슨 근거로 그런 말을 하는 겁니까?"

"이 새끼가 끝까지 오리발이네?"

"가드! 당장 이 남자를 제압해요! 암시장의 규칙 모릅니까!? 이 남자는 지금 소란을 일으켰다고요!"

마음 같아서는 당장 박종수의 입을 틀어막고 싶었으나, 사실 그의 말이 틀린 것도 아니었다.

그렇게 고민에 빠져있던 순간, 가드에게 구명줄이 내려왔다.

"최시현 님!?"

강현의 뒤로 암시장의 간부인 최시현이 다가온 것이다.

"어어. 여기는 나한테 맡기고 가드들은 볼일 봐."

"알겠습니다!"

가드는 뒤도 돌아보지 않고 떠났다.

"안돼! 그렇게 가면 어떡하라고? 가지마! 돌아와!"

박종수의 처절한 목소리가 암시장에 울려 퍼졌다.

**

결국, 박종수는 받아간 마정석을 그대로 토해낸 것으로 모자라서 가지고 있던 돈까지 모조리 뜯겼다.

"이건 왜 가져갑니까!?"

"너 때문에 여기 시장에 피해 본 사람들이 생겼잖아 새꺄. 보상은 해줘야지."

강현이 박종수를 쫓아가며 부순 것들에 대한 말이었다.

"그걸 왜 내가 보상합니까?"

"그럼 내가하리?"

"..."

욕설이 목 끝까지 치밀어 올랐지만, 박종수는 필사적으로 참아냈다.

법은 멀고 주먹은 가까웠다.

"앞으로 착하게 살아 인마."

"..."

"어쭈? 대답 안 해?"

"예..."

박종수의 등을 두드려 주고 강현이 일행에게 돌아갔다.

"강현 씨. 이렇게 사고를 일으키면 곤란해요."

해맑은 모습으로 오는 강현을 보며 최시현이 한숨을 내쉬었다.

"크흠... 미안해요. 그런데 이건 전부 저놈 때문이에요. 저게 사기만 안 쳤어도 이런 일 안 생겼다니까요?"

"휴우..."

"부서진 거 전부 물어준다니까 그러네. 인상 좀 펴요. 하하!"

물론 박종수의 돈으로 물어주는 것이었다.

"전부 필요한 건 다 샀지?"

잠시 후. 소란이 정리되고, 모든 아이템을 구한 일행이 모였다.

"다들 끝났다고 하네요."

"하아... 이제 가면 되죠?"

최시현은 몇 시간 사이 10년은 늙어버린 듯했다.

"예. 가죠."

그렇게 강현이 돌아가려던 때였다.

-안내 방송 드립니다. 앞으로 3시간 뒤. 협정세계시(UTC) 18시에, 제2회 암시장 최강 팔씨름 대회가 있을 예정입니다. 많은 능력자 여러분의 적극적인 참여 바랍니다. 다시 한번 말씀드립니다 앞으로 3시….

대형 스피커로 사방에서 들려오는 안내음.

음성은 한국어, 영어, 중국어 등 여러 나라말을 번갈아 가며 안내를 계속했다.

"저건 뭐예요?"

강현의 물음에 최시현이 곤란한 표정을 지었다.

"말 그대로 팔씨름 대회예요... 별건 아니죠. 하하!"

"재미있겠는데? 우리도 가보죠."

"네...?"

"저기 참가하자고요. 안돼요?"

강현의 말에 최시현이 억지 미소를 지었다.

"아니요. 바로 가죠. 하하하하..."

그녀의 고운 눈가가 촉촉이 젖어가기 시작했다.

164화 천하 제일 팔씨름 대회(1)

164. 천하 제일 팔씨름 대회(1)

"팔씨름 대회는 암시장에서 새롭게 기획한 이벤트에요."

대회에 접수하러 가는 길.

최시현은 팔씨름 대회에 관해 구체적으로 설명해주었다.

"이런 무법지대에서 벌이는 이벤트 치고는 건전하네요?"

강현의 의문에 최시현이 피식 웃었다.

"실제로 보고 나면 건전 같은 말은 쏙 들어갈 거에요."

"왜요. 팔씨름에서 지면 목이라도 치나?"

"그렇게까지 극단적이지는 않아요. 룰도 일반 팔씨름 대회랑 크게 다를 게 없죠. 경기에서 져도 그냥 깔끔하게 물러나는 걸로 끝. 대신에..."

최시현이 말을 끊고는 강현을 바라봤다.

"대신? 뭔데요?"

"상대에게 피해를 주지 않는 선에서 스킬, 버프, 아이템 등 무슨 수단을 써도 상관없어요. 능력자들의 팔씨름 대회니까요."

최시현이 굉장하지 않냐는 듯이 말했지만, 강현에게는 별 감흥이 없었다.

"재미있겠네. 그거 완전히 나를 위한 룰인데."

만약 스킬이나 버프 없이 순수 근력으로만 대결하는 것이었으면 우승을 장담하기 힘들었을 수도 있다.

강현은 모든 스텟을 골고루 올렸기 때문이다.

근력과 체력. 이 두 개만 무식하게 올린 고레벨 능력자가 존재한다면, 순수 근력으로는 충분히 강현보다 높을 수 있는 것이다.

어디까지나 이론상으로 가능하다는 것이었지만.

"괜찮네요. 그런데 그런 룰이면 다치는 사람이 꽤 나올 것 같은데."

"네. 지난번 대회에서 참가자 중에 절반이 팔이 터져나갔고, 참가자 중에 10%가 죽었어요."

"워... 살벌하네."

강현이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인간이 받아들일 수 있는 버프의 한계라는 게 존재하는데, 무턱대고 써대면 안 되지."

강현은 항상 버프를 달고 사는 거의 중독자라고 할 수 있었다.

비록 그 종류가 다양하지 않지만, 하나같이 신체에 엄청난 부담을 주는 것들이다.

아마 이 분야에 대해서 강현만큼 잘 아는 능력자는 아마 전 세계를 뒤져도 거의 없을 것이다.

"맞아요. 하지만 그걸 알면서도 다들 포기하지 못하죠. 인간이란 생물, 특히 남자는 더 그렇잖아요?"

"뭐, 부정하지는 못하겠네요."

당장 강현의 주위만 봐도 그렇다.

곧 죽어도 자존심을 굽히지 못하는 멍청이들은 발에 챌 정도로 널려 있었다.

"아무튼, 대회 룰은 대충 알겠고. 우승상품은 뭐예요? 아까 방송에서 뭔가 준다고 했던 것 같은데."

최시현은 대답 대신 스마트폰을 강현에게 내밀었다.

액정 안에는 고풍스러우면서도 수수한 반지 사진이 담겨 있었다.

"음... 반지네?"

"네. 정확히는 아이템 반지죠. 명칭은 전사의 마지막 불꽃."

"이름이 제법 운치 있네요."

'전사' '마지막' '불꽃' 하나같이 강현의 감성을 자극하는 키워드였다.

"능력치가 어떻게 돼요?"

"현존 최고라고 할 수 있는 B+ 급. 옵션은 근력을 10포인트 올려주고, 전사의 죽음이라는 스킬을 내장하고 있어요."

"괜찮네."

일반적으로 B등급 액세서리는 두 종류로 나뉜다.

하나는 순수 스텟 10포인트.

다른 하나는 스텟 8포인트와 스킬 하나.

그런데 최시현이 말한 아이템은 B+등급이라 그런지 스텟을 10포인트 주면서 스킬 또한 내장돼 있었다.

"전사의 죽음이란 스킬은 뭐죠?"

"정확히 5초... 5초간 근력을 5배 증가시켜 줘요."

아이템 설명을 들은 강현이 깜짝 놀랐다.

"근력을 5배나 증가시킨다고요!?"

"네. 5초 뿐이지만요."

"그래도 엄청난데? 사용에 제한은 없어요?"

"하루에 한 번 밖에 못 써요."

"아..."

1일 1회라는 것은 조금 아쉬운 점이었다.

"그런데 어차피 사용자에게 횟수는 문제가 안 되죠. 아니, 의미가 없다고나 해야 하나?"

"왜요? 하루 한 번이면 좀 아쉽지 않나?"

"저걸 사용하면 10초 이내에 대부분 죽었거든요. 불구가 되거나."

"아... 그렇겠네요."

이해할 수 있었다.

아무리 체력이 강하다고 해도 근력의 5배를 버티는 것은 무리다.

게다가 반지를 착용한 상태라면 5배로 증가한 근력에 +10이 추가된 상태.

"죽지 않으면 다행이네."

"맞아요. 그래서 전사의 마지막 불꽃이라는 이름이 붙었는지도 모르죠."

최시현의 말에 강현이 고개를 끄덕였다.

"좋아. 아주 마음에 드네요."

"네?"

"저건 그냥 맞춤형 제작 아이템이나 마찬가지라고요!"

최시현은 저런 위험한 아이템을 보고 저런 소리를 하는 강현이 이해되지 않았지만, 그러려니 했다.

'원래 정상은 아닌 건 알았으니까.'

새삼스러울 건 없었다.

"후우... 이 대회. 무슨 수를 써서라도 우승한다."

강현의 눈에 욕망이 일렁이기 시작했다.

**

팔씨름 대회가 벌어지는 곳은 급하게 만든 듯한 간이 경기장이었다.

중앙에 전광판과 링이 있고 그 주위로 둥그렇게 사람들이 서서 구경할 수 있게 해둔 모습.

접수를 마친 강현은 경기장 근처에서 자신의 차례가 오기를 기다렸다.

의자 하나 없이 자리에 서 있는 강현과 일행을 보며 최시현이 미안한 표정을 지었다.

"미안해요. 아직 시범 운용 중인 이벤트라 부족한 게 많아요. 정식으로 자리 잡으면 관련 시설을 제대로 만들 예정이에요."

"됐어요. 가까이서 보고 좋은데요 뭐. 그것보다 언제 시작해요?"

"아마 곧 시작을…."

최시현의 대답이 끝나기도 전에 불이 켜지며 사회자가 등장했다.

-뒷세계의 신사 숙녀 여러분. 오래 기다리셨습니다!

경기장에는 대략 천 명이 조금 넘는 관중이 있었는데, 사회자의 말에 제법 큰 함성이 터져 나왔다.

-지금부터 제2회 세계 능력자 팔씨름 대회를 시작하겠습니다!

사회자는 뒤이어 경기 룰과 우승상품 등, 잡다한 것들을 설명했다.

그리고 시작된 첫 번째 경기.

-첫 번째 출전 선수! 러시아에서 시베리아의 냉혹한…

쓸데없이 길고 화려한 사회자의 소개가 지나고,

-페트로프!

등장한 사람은 페트로프라는 이름을 가진 거구의 남자였다.

"힘은 좋게 생겼네."

"근육이 형보다 큰 것 같은데요?"

"내 건 실전 압축 근육이야 인마."

강현과 안유성이 아옹다옹하는 사이, 흘러나오는 음악과 함께 페트로프가 경기장으로 이동했다.

페트로프는 이동 도중 강현의 앞을 지나쳤는데, 그때 페트로프와 옆에 있던 올리엔의 눈이 마주쳤다.

"어흥!"

페트로프가 올리엔을 보고 표정을 일그러뜨리며 위협적으로 짖었다.

"꺄악!"

"크하하하하!"

겁이 많은 올리엔이 격하게 반응하자 페트로프가 만족스럽다는 듯이 웃어 젖혔다.

"하... 곰돌이 푸요처럼 생긴 새끼가 시비를 거네."

강현의 말에 페트로프의 고개가 홱 돌아갔다.

그러더니 손을 들어 자신의 눈과 강현을 번갈아 가리켰다.

해석하자면, 지켜본다는 뜻.

"페트병인가 뭔가 하는 놈. 나랑 붙을 때까지 꼭 살아있었으면 좋겠다. 아주 팔병신을 만들어 줄 텐데."

강현은 페트로프를 만난다면 반드시 팔을 부러뜨리라 다짐했다.

"강현 씨. 이건 싸움이 아니라 팔씨름 대회인데요..."

"말이 그렇다는 거죠. 말이... 하하!"

최시현의 말에 강현이 멋쩍게 웃었다.

'전혀 아닌 것 같은데...'

그러는 양 선수의 입장이 끝나고, 경기 준비를 시작했다.

"카이스의 힘!"

"전사의 희망!"

"꺾이지 않는 기상!"

계속해서 양 선수에게 쌓이는 버프를 보며 강현이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뒤지고 싶어서 환장했네."

아마 저들의 근력 수치는 이미 본인의 원래 수치보다 2배 가까이 증가했을 것이다.

"저 버프는 누가 걸어주는 거예요?"

"보통 선수의 지인들이 걸죠. 하지만 요청하면 경기장에 대기 중인 마법사가 걸어주기도 해요. 그 종류가 그리 많지는 않지만."

최시현이 설명을 하는 사이, 마침내 버프 중첩이 끝났다.

"크아아아아아!"

"우아아아아!"

모든 버프를 받은 두 선수의 근육이 꿈틀거리며 터져나갈 것처럼 부풀어 올랐다.

고통으로 인해 두 선수가 얼굴을 일그러뜨리며 괴성을 내질렀다.

"크흐흐흐..."

서로 손을 마주 잡은 남자들이 고통과 쾌감을 오가는 알 수 없는 감각에 기괴하게 웃었다.

그들 가운데 있던 심판이 양 선수의 손을 질긴 천으로 칭칭 감았다.

서로의 손이 미끄러져 떨어져 나가는 것을 방지하기 위해서였다.

-선수 준비... 시작!

심판의 선언과 동시에 양 선수가 혼심의 힘을 다해 서로의 팔을 안쪽으로 당겼다.

"와아아아!"

눈으로 보기만 해도 느낄 수 있는 엄청난 힘! 근육!

남자들끼리 있을 때 팔씨름만큼 재미있는 구경거리도 없다.

그것이 근육질에 거구의 남자이면 2배는 더 재미있어지고,

"크아아아!"

"끄아아아아!"

그 근육질에 거구의 남자들이 약에 취한 것처럼 미쳐있다면 구경하는 사람들도 반쯤 미치게 된다.

"넘겨! 넘기라고!"

"와아아!"

열띤 응원 사이에서도 강현의 큰 목소리는 유독 귀에 거슬렸다.

"죽여어어어-!"

"강현 씨. 이건 팔씨름 대회..."

"죽여! 죽여버려!"

최시현은 강현을 말리는 것을 포기했다.

"으아아아!"

팽팽한 힘의 접전.

두 선수가 밀려오는 고통에 얼굴을 일그러뜨리며 비명을 내질렀다.

그 순간.

-피슉, 픽!

한 선수의 팔에서 바람 빠진 소리가 들려오더니, 이내 피가 뿜어져 나오기 시작했다.

"어, 끄어어!?"

-퍼엉!

결국, 터져나가는 선수의 팔.

"와아아아아아!"

동시에 경기장에 떠나가라 함성이 터졌다.

"그거지! 그래! 이거야!"

어느새 열성 팬 1호가 된 강현이 주먹을 불끈 쥐며 소리쳤다.

"최시현 씨. 여기 맥주 없어요!?"

"아... 있어요."

"이런 경기에 맥주가 빠지면 안 되죠! 아, 그나저나 저 페트병이 이겨서 다행이네. 여기서 졌으면 아쉬울 뻔했어."

승리자는 처음 등장 때 강현과 신경전을 벌였던 페트로프였다.

"쿠아아아아아!"

마치 몬스터처럼 포효하던 그 페트로프도 강현의 시선을 느꼈는지 고개를 돌렸다.

그러더니 손가락을 들어 자신의 눈과 강현을 번갈아 가리켰다.

"딱 기다려라. 새꺄. 얼마나 센지 보자."

강현이 주먹을 불끈 쥐며 전의를 다질 때였다.

강현의 옆에 있던 안유성이 말을 걸어왔다.

"형은 팔이 터져도 재생하죠?"

"당연하지. 마력만 충분하면 30분도 안 걸려. 그런데 그건 왜?"

"혹시나 형 팔이 날아가면 죽여야 하나 싶어서 물어봤어요."

"그러냐."

옆에서 둘의 대화를 듣던 최시현이 고개를 저었다.

'정신나간 놈들...'

경기장은 인간 광기의 끝을 달리고 있었다.

**

몇 번의 경기가 지나고, 마침내 강현의 차례가 다가왔다.

"뭐야? 저거 강현 아니야?"

"강현도 참가자에 있었어!?"

강현이 경기장 위에 올라서자, 많은 사람들이 그를 알아보고 깜짝 놀랐다.

대부분은 횡재했다며 즐거워했지만, 올리엔은 이 분위기에 편승하지 못하고 불안해하고 있었다.

"강현... 괜찮겠죠?"

올리엔이 걱정스러운 얼굴로 물었다.

"예. 강현 님은 괜찮을 겁니다."

신성아가 편안한 미소를 지으며 올리엔을 다독여 주었다.

"네..."

경기장에서 둘의 이야기를 들은 강현은 걱정하지 말라는 의미로 엄지를 들어 주었다.

"쟤는 걱정이 너무 많다니까."

피식 웃은 강현이 자신의 상대를 바라봤다.

"네가 그 강현인가?"

상대는 아쉽게도 페트로프가 아니었다.

대신 머리통에 수염을 풍성하기 기른 백인이었는데, 영어로 강현에게 말을 걸어왔다.

"어. 내가 그 강현인데."

"이번에 네가 미국에서 벌인 짓은 잘 봤다. 각오하는 게 좋을 거다."

"뭐야? 너도 미국인이야?"

"그래. 어쩌면 하늘이 돕는 건지도 모르겠어. 내 조국을 모욕한 놈을 여기서 만나다니 말이야."

아메리칸이 목소리를 낮게 깔며 으르렁거렸다.

"박살을 내주마."

"새끼가 어디서 목소리를 깔아? 지가 무슨 올버린인 줄 아네."

"뭐?"

"멋있는 척하지 마라. 짜증나니까."

강현의 말에 짝퉁 올버린이 눈을 사납게 떴다.

"자. 양 선수 모두 준비해 주시죠."

둘의 신경전이 길어지자 심판이 나서서 중재했다.

"나는 됐으니까 이놈이나 준비시켜요."

강현의 말에 심판이 백인 선수를 바라봤다.

"준비 끝났습니까?"

그 순간, 갑자기 백인이 비명을 내지르기 시작했다.

"크아아아아아아!"

온몸에 전신에 털이 나며 덩치가 거대해지는 남자.

계속해서 커지던 덩치는 결국 3m에 가깝게 자라고, 얼굴은 마치 짐승의 그것처럼 변해 있었다.

"뭐야? 짝퉁이 아니라 진짜 올버린이었어!?"

강현은 깜짝 놀랐다.

"이런 건 오랜만이네."

몸의 괴수화하는 스킬은 굉장히 희귀하고, 아무나 사용할 수 없다.

들리는 말로는 신체 자체가 타고나야 한다고 하는데, 강현도 실제로 본 것은 굉장히 오랜만이었다.

"크르르르..."

진퉁 올버린이 짐승처럼 낮게 울었다.

"이거 반칙 아닌가...?"

"이제와서 무서워졌나 보지? 하지만 이곳 경기에 반칙이란 없다. 크르르... 클클..."

놈이 강현을 보며 낄낄거렸다.

"쫄기는 누가 쫄아? 그냥 궁금해서 물어본 거야 새꺄."

인상을 팍 찡그린 강현이 버프를 활성화하기 시작했다.

'웨인의 비기'와 '거인의 힘'.

"크으으... 좋네."

두 개의 버프를 사용한 강현의 근력은 90이 넘어갔다.

"놀아보자고."

몸을 지배하는 익숙한 통증을 느끼며 강현이 사납게 웃었다.

"선수 준비..."

심판이 다가와서 강현과 올버린의 손을 끈으로 휘감았다.

'너무 커서 잡기도 힘드네.'

놈의 손은 강현보다 배는 큰 느낌이라 잡기조차 쉽지 않았다.

'뭐... 상관없어.'

강현과 놈의 눈이 마주쳤다.

명백한 비웃음을 띠고 있는 눈.

강현 또한 마주 웃어 주었다.

"시작!"

심판의 선언과 동시에 강현이 전력으로 손아귀에 힘을 주었다.

그러자 단숨에 거대한 진퉁 올버린의 손이 일그러지기 시작했다.

강현의 손 모양 그대로 함몰되는 올버린의 손.

"깨애애앵!"

놈은 처음의 낮은 위협과는 다르게 고음으로 비명을 토해냈다.

강현은 단숨에 팔을 넘길 수 있었지만, 절대 그러지 않았다.

-우드득, 우드드득!

계속해서 부서지는 손을 감당하지 못하고 결국 올버린의 변신이 풀려버렸다.

"머, 멈춰! 이건 바,바, 반치익…"

"여기서 반칙이 어딨어!?"

"끄아아아! 항보오옥!"

백인이 미친 듯이 몸이 비꽈대며 연신 항복을 외쳤다.

"강현 승! 멈추시죠."

"이야아아압! 휴우!"

마지막까지 쥐어짜기를 시전한 강현이 놈의 손을 휙 집어던졌다.

"으으으..."

완전히 박살 난 상태로 뼈와 살이 뒤엉켜진 모습.

'최상급 치유사도 저건 못 살려.'

저 상태에서 손을 원래대로 되돌리려면 잘라낸 다음 새로 복구하는 것이 훨씬 쉽고 간단할 것이다.

"휘유. 오래간만에 운동했더니 상쾌하네."

그 사태를 일으킨 강현은 이마의 땀을 훔치며 싱긋 웃었다.

165화 천하 제일 팔씨름 대회(2)

165. 천하 제일 팔씨름 대회(2)

화려했던 강현의 데뷔전이 끝나고, 뒤에 이어진 경기도 비슷한 양상이 계속됐다.

-퍼어엉!

"크아아아악!"

-콰앙!

"끼야야아아-!"

눈을 의심할 수밖에 없는 광경.

솔직히 말하면 팔씨름 대회라기보다는 마약사범들의 목숨을 건 차력 대회에 가까워 보였다.

"그거야!"

"와아아! 역시 이길 줄 알았다고!"

하지만 이곳은 오지에 있는 암시장.

이곳에서 법과 도덕 따위는 별다른 의미를 가지지 못했다.

"내 차례인가."

경기를 지켜보던 강현은 자신의 순서가 다가오는 것을 느꼈다.

"파이팅! 강현. 힘내요!"

"강현 님. 이기실 거라 믿습니다."

"이기던가 말던가."

열렬한 응원을 뒤로하고 강현이 경기장 위로 올라섰다.

"슬슬 만날 때가 된 것 같은데..."

이번이 강현의 세 번째 경기였다.

그동안 지켜본 결과 처음 강현에게 시비를 걸었던 러시아 남자, 페트로프도 탈락하지 않고 올라온 것을 확인했었다.

"오! 역시! 올 줄 알았다니까."

맞은편에서 올라오는 페트로프를 보며 강현이 해맑게 웃었다.

"...!"

그에 반해 강현을 마주 본 페트로프의 얼굴은 딱딱하게 굳었다.

'어떡하지... 기권할까?'

자신만만하던 처음과는 달리 그는 상당히 위축돼 있었다.

'저런 놈이 참가라니. 반칙 아냐!?'

솔직히 처음에는 호승심이 일었다.

주위에서 매일같이 떠들어댔기 때문이다.

강현. 강현. 강현. 정말 지겨웠다.

도대체 얼마나 강하기에?

자신 또한 러시아에서 알아주는 능력자였다.

특히 힘으로는 한 손에 꼽을 정도로 강한 능력자이기도 했다.

-뭐든지 소문은 과장되기 마련이지. 실제로는 다들 별거 아니야.

오늘 강현을 만났을 때만 해도 그렇게 생각했다.

오히려 그는 이 만남을 기회라고 여겼다.

-강현을 꺾고 내 힘을 전 세계에 보여주겠어.

그 오만한 생각은 강현의 첫 경기를 보자마자 처참하게 부서졌다.

'저게 인간인가...?'

도저히 같은 인간으로 볼 수 없는 완력이었다.

특히 처음에 강현과 붙었던 수인화 능력자. 그는 페트로프와도 친분이 있는 남자였다.

'절대로 허무하게 당할 사람이 아닌데...'

자신과 비등한 능력자를 강현은 어린아이 다루듯 하며 손아귀를 비틀어 버렸다.

'페트로프! 정신 차려! 싸우기도 전에 무너질 생각이냐!'

자신의 뺨을 두들기며 페트로프가 눈을 빛냈다.

겨뤄 보기도 전에 지레 겁먹고 도망치는 것은 자존심이 용납하지 않았다.

"정신이 좀 돌아왔나 봐?"

"닥쳐라! 각오하는 게 좋을 거다."

흥분한 페트로프가 저도 모르게 궁지에 몰린 쥐새끼처럼 발악했다.

"내가 뭘 어쨌다고 지랄이야? 넌 그냥 안 보내줄 줄 알아. 손을 아예 뽑아버려야겠다."

강현의 말에 페트로프의 얼굴이 하얗게 질렸다.

"미, 미안하다..."

당황한 나머지 저도 모르게 척수신경 반사처럼 흘러나온 사과.

"뭐?"

강현은 자신이 잘못 들었나? 라고 생각하며 인상을 찌푸렸다.

"아무것도 아니다! 덤벼라!"

페트로프가 정신을 차린 줄 알았지만 아니었다.

동공이 풀린 페트로프가 헛소리를 늘어놓기 시작했다.

"미친놈이네."

그렇게 한창 둘이서 아옹다옹하는 사이 심판이 다가왔다.

"준비해주시죠."

심판의 말에 강현과 페트로프가 각자 버프를 받기 시작했다.

"윤나래! 힘 버프 하나만 걸어봐."

강현은 처음으로 본인의 버프만 쓰는 것이 아닌 타인의 버프까지 받기로 했다.

그렇게 하면 신체에 너무 강한 부담을 줘서 하지 않으려 했지만, 상대가 상대인지라 제대로 혼을 내줄 생각이었다.

'안돼. 무슨 짓이야? 거기서 또 버프를 받는다고? 그러지 마! 제발!'

그 모습을 본 페트로프가 양손으로 볼을 붙잡으며 절규했다.

"으아아! 좋네!"

강현이 약수터 아저씨처럼 기합을 넣으며 몸을 풀었다.

흉악한 근육이 한층 더 부풀어 오르는 것이 눈으로도 보였다.

'어떡하지..?'

분명 눈으로 보이는 강현의 체구는 그리 큰 편이 아니었다.

일반적인 능력자들보다 조금 더 큰 수준.

솔직히 이곳에 모인 거대한 덩치의 능력자들에 비하면 한참 부족해 보이는 것이 사실이다.

그런데 어째서인지 강현의 근육은 뼈와 살이 아니라 강철과 콘크리트로 이뤄진 것 같았다.

'원래도 괴물이 또 버프를 받았어! 나도 버프를 더 받아야 하나...?'

페트로프는 자신을 잘 알았다.

'아냐. 그랬다간 팔이 터져나갈 거야.'

괜히 무리해서 팔 하나를 날리고 싶지 않았다.

여기 대기하고 있는 최상급의 치유사가 치료해주기는 하지만, 터져나간 팔을 완벽하게 되돌려 주지는 않는다.

게다가 치료하기도 전에 간혹 쇼크사로 죽는 놈들이 나오기도 했다.

"얼른 시작합시다!"

강현의 재촉에 심판이 다가왔다.

"자세 잡아주시죠."

페트로프가 천천히 팔을 뻗었다.

"뭐해? 빨리 잡아."

강현의 재촉에 페트로프가 살포시 손을 얹었다.

"하, 하... 항..."

"뭐?"

"하, 항... ㅂ..."

빨리 말해! 빨리 항복이라 말하라고 이 멍청한 새끼야!

페트로프가 속으로 비명을 질렀지만, 입은 마음대로 떨어지지 않았다.

"시작하겠습니다. 준비."

그사이 결국 손을 묶고 경기 준비가 끝나버렸다.

'이런 멍청한 놈! 아니! 아니야. 페트로프. 너는 할 수 있어. 충분히 이길 수 있다고?'

페트로프는 이제 조현병. 즉, 정신분열증이 오고 있었다.

"시작!"

마침내 시작된 경기.

페트로프는 시작과 동시에 전력으로 팔을 안쪽으로 당겼다.

"우라야아아아!"

하지만 강현의 손은 꼼짝도 하지 않았다.

"뭐하냐."

페트로프는 즉시 상황을 파악했다.

"항..ㅂ..!"

항복이라고 말하려 했으나, 강현이 움직이는 것이 더 빨랐다.

"끄아아아아아!"

손안의 뼈가 수백 조각으로 나뉘는 것을 실시간으로 느끼며 페트로프가 그대로 혼절했다.

"강현 승리!"

**

영롱하게 빛나는 반지.

전사의 마지막 불꽃을 바라보며 강현이 흐뭇하게 웃었다.

"호오... 이거 때깔부터 다른데?"

"뭐가 어떻게 다른데요?"

"느낌이 다르잖아. 느낌이."

"아직 착용도 안 했잖아요. 그런데 무슨 느낌이 다른데요?"

계속되는 윤나래의 딴죽에 강현이 인상을 팍 구겼다.

"이걸 낀 다음에 널 때리면 뭐가 어떻게 다른지 아주 잘 알 수 있지 않을까?"

"쳇."

윤나래가 혀를 차며 고개를 돌렸다.

"마음에 들어요?"

"예. 좋네요."

최시현의 물음에 강현이 해맑게 웃었다.

"흐음... 이걸 끼려면 기존에 착용하던 것들 중에 하나를 버려야 하는데... 어떻게 할까?"

능력자는 총 4개의 액세서리를 착용할 수 있다.

강현 또한 마찬가지였는데 그 목록은 다음과 같았다.

· 카미엘의 반지 : 체력 8 증가, 스킬 미친개.

· 양산형 고급 마력 반지 : 마력 10 증가.

· 싸움꾼의 반지 : 근력 5, 체력 5 증가.

· 강인한 정신의 반지 : A등급 이하의 정신 마법, 정신 상태 이상 면역.

강현은 4개의 액세서리를 보며 한참을 고민했다.

"그래. 너로 정했다."

고심 끝에 선택한 것은 바로 카미엘의 반지.

"지금은 이게 맞겠어."

이름 : 카미엘의 반지

등급 : B

내구도 : 96/100

능력 : 미친개, 체력 8 스텟 증가

*미친개 – 미친개는 한번 물면 죽기 전까지 놓아주지 않는다.

강현에게 미친개라는 별명을 선사해준 소중한 반지였다.

'정진 길드였나? 거기 여자 길드장이 선물로 줬었지.

벌써 1년도 넘은 일.

참고로 절대 선물은 아니었다.

"그동안 수고했다."

강현은 조만간 길드 무투 대회를 열어 우승자에게 이 반지를 주리라 생각했다.

"후후. 이제 껴 볼까?"

입맛을 다신 강현이 손에 든 '전사의 마지막 불꽃'을 착용했다.

이름 : 전사의 마지막 불꽃

등급 : B+

내구도 : 100/100

설명 : 위대한 전사는 그 마지막까지 화려하게 불태운다.

능력 : 전사의 죽음, 근력 10 스텟 증가

*전사의 죽음 – 5초간 근력 5배 증가

"크하아! 이거 느낌이 확 다르네."

단번에 근력이 10스텟이나 증가하자 강현이 함박웃음을 지었다.

"하아... 그런데 밸런스가 문제네."

강현은 반지를 교차함으로써 근력에 10스텟 증가하고 체력이 8스텟 감소했다.

이 상태에서 힘을 증가하는 버프를 전처럼 사용했다가는 몸이 견디지 못할 것이다.

"반지를 하나 더 구매해야겠어."

강현은 추가로 체력을 10 증가시켜주는 반지를 구매했다.

그리고 체력과 근력을 5씩 증가하던 싸움꾼의 반지를 빼고 새로 구매한 반지를 착용했다.

▫이름 : 강현

▫칭호 : 튜토리얼 졸업자 외 4개

▫레벨 : 88

▫상세 능력치 :

·근력 39 (+4)(+10)

·순발력 40 (+3)

·체력 41 (+3)(+10)

·마력 41 (+3)(+10)

·추가 스텟 : -

▫고유 능력 : 부활

▫능력 : 강현식 사투(A), 마력운용(A), 마력감지(A), 베일의 검술(B), 열기내성(C), 독 내성(D), 냉기내성(D), …

▫스킬 : 거인의 힘(A), 마력폭발(A), 분노의 사자후(A), 상급 육체 재생(A), 마력장(A), 일도양단(A), 엔트리아의 외피(A), 웨인의 비기(B), …

"아주 좋아!"

마침내 모든 스텟이 균형을 이뤘다.

순발력이 조금 모자라기는 하지만, 사소한 것은 신경 쓰지 않기로 했다.

"88레벨이라. 슬슬 레벨업 할 때가 된 것 같은데 말이지."

상태창의 레벨을 본 강현이 중얼거렸다.

강현이 88레벨에 접어든 지도 제법 시간이 흘렀기 때문이다.

그사이에도 많은 전투가 있었으니, 강현은 조만간 레벨을 올릴 수 있지 않을까 예상했다.

"레벨업이요?"

강현의 혼잣말에 안유성이 반응했다.

"어. 조만간 오를 것 같아서."

"형. 지금 레벨이 몇인데요?"

"88 레벨. 너는?"

"와. 높네요. 저는 지금 80 이요."

"딱히 차이도 안 나는구만 뭐."

"형이 80에서 88까지 올리는 데 얼마나 걸렸는데요?"

"한 두세 달 걸렸나?"

"그런데 차이가 안 난다고요?"

안유성이 인상을 찌푸리며 말했다.

"아, 그렇게 말하니까 좀 차이가 나는 것 같기도 하고."

"요즘 열심히 훈련해서 제법 빠르게 올렸는데, 이렇게 차이가 날 줄은 몰랐네요."

"이제 내 위대함이 좀 느껴지냐?"

"기다려요. 금방 따라잡으니까."

"네가? 어디 힘껏 발버둥 쳐 봐라. 후후..."

강현이 중2병에 걸린 중학생에 빙의한 것처럼 낄낄거렸다.

"그러고 보니 다른 얘들은 레벨이 몇인가?"

"저는 75레벨입니다."

신성아가 대답했다.

"그 정도면 양호하네. 한시환 팀장 레벨이 78 아니야?"

"맞습니다."

"지금 길드 내에서 간부진 제외하면 한시환 팀장이 제일 높지?"

"예."

한때 유명했던 수호자 길드의 부길드장이었던 한시환과 비교해도 그리 큰 차이가 나지 않는 레벨.

이 정도면 신성아도 제법 착실히 성장하고 있다 봐도 될 것이다.

"너는 몇이냐?"

강현이 윤나래를 보며 말했다.

"78인데요."

"구라치지 말고."

"아! 진짜라고요!"

윤나래의 말에 강현이 잔뜩 인상을 찌푸렸다.

"네가? 왜? 뭘 했다고 그렇게 높은 건데?"

"뭘 하긴 뭘 해요? 열심히 사냥하지. 이래 봬도 다른 데 나가면 대접받는 귀한 능력…."

"아, 그건 관심 없고. 앞으로도 열심히 올려라."

강현이 건성으로 대답하며 윤나래의 말을 잘라냈다.

"치... 두고 봐. 언젠가 따라잡아서 내가 길드장 하고 만다."

"78 짜리 쩌렙 주제 어떻게 따을 건데?"

"길고 짧은 건 대봐야 아는 거지!"

"안 대봐도 다 알거든. 그리고 은근슬쩍 반말할래!?"

"아아아! 때리지 마요!"

강현과 일행의 대화를 듣고 있던 최시현은 허탈한 웃음을 지었다.

'이건 뭐하는 괴물들이야...'

당장 조직은 간부인 그녀의 레벨도 고작 69에 불과하다.

물론, 조직 내에 그녀보다 더 높은 이들도 몇 존재하나, 그들조차도 80은 넘지 못한다.

'듣기로는 10대 길드의 길드장들이 이제 막 80에 도달했다고 했는데...'

대부분의 길드에서 가장 레벨이 높은 것은 길드장이다.

베일에 싸여 있는 단군 길드는 알 수 없지만, 그 외에 10대 길드들은 제법 정보가 개방되어 있다.

조직 내에 알려진 국내 길드 랭킹 10위 안에 드는 길드의 길드장 평균이 레벨이 약 80이 안 됐다.

굉장히 높은 레벨이기는 했지만, 강현과 비교하면 무려 8레벨 이상 차이가 났다.

'8레벨 정도는 별거 아니라고 생각할 수도 있지만... 절대 그렇지 않지.'

60레벨 이후부터 레벨업이 지독히 어려워진다.

더 높은 곳으로 갈수록 그 정도가 심화되는 것은 물론이다.

'실제로 강현 본인도 80에서 88까지 올라가는데 제법 시간이 걸렸다고 말했지.'

강현 뿐만이 아니다.

안유성 80 레벨.

윤나래 78 레벨.

신성아 75 레벨.

거기에 과거 10대 길드의 부길드장 출신의 78 레벨의 능력자가 하나 더 있다.

이들 하나하나가 대형 길드의 길드장급 레벨이었다.

'절대로 배데스는 건들지 말라고 해야겠어...'

이미 뒷세계에서 강현과 배데스는 건들면 안 된다는 불문율이긴 했으나, 최시현은 돌아가면 다시 한번 주의를 시키리라 다짐했다.

166화 중국 출장(1)

166. 중국 출장(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