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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0-158

150화 건방진 놈들(1)

150. 건방진 놈들(1)

다음날.

신태길은 제법 이른 시각에 강현을 방문했다.

"아침은 먹었어요?"

"김밥 먹었습니다."

"바쁘게 사시네."

아침부터 삼겹살을 굽고 있던 강현이 안타깝다는 듯이 혀를 찼다.

"와서 이거라도 좀 들어요."

"괜찮습니다."

"싫으면 말고."

"보통 예의상으로라도 한 번 더 묻지 않습니까?"

"나는 두 번 묻지 않는 주의라서."

강현은 고기가 적당히 구워지자 가위로 큼지막하게 썰었다.

"올리엔. 이 정도 크기는 괜찮지?"

"네! 더 크게 잘라도 괜찮아요!"

"좋아좋아. 훌륭하구만."

눈을 초롱초롱하게 빛내는 올리엔을 보고 강현이 흐뭇하게 웃었다.

"강현 씨. 어제 제가 한 말은 생각해 보셨습니까?"

"뭐요?"

"미국행 말입니다."

"으음... 갑자기 그렇게 물으면 대답하기 그렇잖아요? 생각할 시간을 좀 줘요."

"강현 씨가 언제 생각을 하셨…."

"어허. 위험한 발언입니다. 그거."

말을 하면서도 강현의 집게는 멈추지 않았다.

"지금이야! 더 익으면 맛없어. 얼른 먹어!"

"네!"

올리엔과 가넷의 젓가락이 바쁘게 움직였다.

"신태길 씨는 됐다면서요?"

강현이 은근슬쩍 다가오는 신태길의 젓가락을 막아냈다.

"치사하게 이러기 있습니까?"

"방금 멍청하다고 한 말 사과해요."

"제가 언제 그런 말을 했다고 그러십니까?"

"싫으면 먹지 말든가."

"죄송합니다."

고기 앞에 자존심이 무슨 소용이랴.

자존심을 버린 대가로 신태길을 삼겹살을 쟁취할 수 있었다.

'맛있다...'

일반 삼겹살임에도 어떻게 구운 것인지 차원이 다른 풍미가 느껴졌다.

신태길은 고기를 음미하며 생각했다.

진정한 삼겹살이란 무엇인가?

"아, 역시 고기란 굽기에 따라... 이게 아니잖아! 강현 씨! 지금 장난할 때가 아닙니다!"

"고기 잘 처먹고 왜 짜증이에요!?"

"크흠, 죄송합니다."

최근 심각한 과로에 시달렸기 때문일까. 신태길은 매우 신경이 예민한 상태였다.

"미국행. 정말 생각 없으십니까? 강현 씨가 나서 주시면 올리엔 씨와 일행에 대해서는 더는 신경 쓰지 않겠다고 약속했습니다."

"웃기는 새끼들이네. 우리가 안 괴롭힐 테니까 와서 도와라. 이거 아니에요?"

"그게 아니라..."

"아니긴 뭐가 아니야. 그런 양아치들이랑 일할 생각 없으니까 치우라고 해요."

강현이 상추에 고기를 얹으며 말했다.

"그것뿐만 아니라, 강현 씨가 오는 것에 대한 보수도 지급하기로 했습니다. 그 돈은 백 퍼센트 강현 씨가 다 가져갈 거고요."

"참나. 돈이라고 해봤자 얼마나 된다고. 기껏 해봤자…."

"1,000억입니다."

"케헥, 켁! 뭐라고요?!"

순간 강현의 입에 있던 쌈이 밖으로 튀어 나갔다.

"으윽, 더럽게 무슨 짓입니까?"

"지금 그게 중요해요? 1,000억이라고요?"

"예. 정확히는 1억 달러. 한화로 1,000억이 조금 넘습니다. 승낙하시면 선수금으로 천만 달러가 즉시 입금해 주겠다고 합니다. 일이 해결되면 나머지 구천만 달러가 지급될 거고요. 상황에 따라 추가 보수가 나올 수도 있다고 하는군요."

"거기에 올리엔도 다시는 건드리지 않는다?"

"예."

"하죠."

강현이 결의에 찬 사람처럼 눈을 빛냈다.

"역시 미국이라 그런가 배포가 아주 큰 친구들이네."

"강현 씨. 조금 전까지는 분명..."

"어허. 올리엔의 안전을 위한 건데 당연히 해야죠. 그렇지?"

강현의 물음에 올리엔이 멀뚱멀뚱 강현을 바라봤다.

아무래도 고기를 집어 먹느라 대화를 듣지 못한 것 같았다.

"그렇지?"

"네."

"그래. 계속 먹어."

올리엔이 힘차게 고개를 끄덕였다.

"미국 쪽은 바로 가는 거로 하고, 올리엔은 어떻게 할 거예요?"

"대통령께서 올리엔 씨가 오셨던 헤이그란 왕국을 초청하기로 결정하셨습니다."

"오, 그래요?"

"예. 강현 씨가 나서 준다면 미국에서 간섭하지 않기로 했으니, 이 기회를 붙잡아야 하지 않겠습니까?"

"결국, 재주는 내가 부리고, 그쪽은 앉아서 떡이나 먹겠다. 아니에요?"

강현의 말에 신태길이 고개를 저었다.

"강현 씨도 돈을 벌지 않습니까?"

"아무튼! 가운데서 콩고물 주워 먹겠다는 거잖아요."

"부정하지는 않겠습니다."

신태길은 시원하게 인정했다.

"하지만 그만큼 보수가 크지 않습니까?"

"그건 미국이 주는 거고. 그걸 왜 신태길 씨가 생색내고 그래요?"

"쳇."

계획이 실패하자 신태길이 혀를 찼다.

"따로 원하시는 게 있습니까? 어차피 부자가 되실 예정인데."

신태길의 물음에 강현이 잠시 생각에 잠겼다.

"일단 통역 스킬북 3개."

"구해보겠습니다."

시간이 제법 걸리겠지만, 충분히 할 수 있는 일이었다.

"던전 경매에 우선권 부여."

"그건 안 됩니다. 다른 길드가 형평성 문제로 반발할 수 있습니다."

"안 걸리면 그만이잖아요."

"강현 씨. 던전 경매는 민감한 문제입니다. 쉽게 확답을 드릴 수는 없습니다."

"예전에 신태길 씨가 이야기했잖아요? 우리는 한배를 탔다면서요."

"아무리 그래도..."

"단군 길드 때문에 그래요?"

"굳이 단군만을 의식해서 하는 말은 아닙니다. 밖으로 새어나가면 말이 나올 수밖에 없습니다."

"안 새어나가게 하면 되죠."

대화가 통하지 않았다.

"하아, 조율해 보겠습니다..."

"그리고…."

"또 뭐가 남았습니까?"

신태길의 말에 강현이 인상을 찌푸렸다.

"또? 또오? 내가 뭐 어려운 거 요구했어요? "

"아닙니다... 다음은 뭡니까?"

꼰대 강현이 턱을 쓰다듬으며 생각에 잠겼다.

"그 헤이그란 왕국? 거기랑 하는 일에 나도 한발 걸치면 좋겠는데."

"그것에 대해서는 아직 정해진 게 없습니다."

"그러니까. 앞으로 뭔가 생기면 나도 끼워 달라고요. 그 정도는 할 수 있잖아요?"

"으음... 모든 상황과 정보를 강현 씨와 공유하고, 원하신다면 새로 벌이는 사업에 들어올 수 있도록 조치하겠습니다."

"오케이! 일단은 여기까지."

제법 괜찮은 거래라고 생각됐다.

강현이 만족스러운 미소를 지으며 고기를 먹었다.

"그래서. 미국에서 하는 일이 뭐라고 했죠? 무슨 언데드 어쩌고 했던 것 같은데, 맞나?"

"예. 맞습니다."

현재 미국에는 얼마 전 한국에서 있었던 것과 비슷한 일이 벌어지고 있었다.

한국의 경우는 강현이 조기에 발견해서 대처할 수 있었으나, 미국은 이미 늦은 상태였다.

"자세한 이야기는 에든 씨가 해주실 겁니다."

뜬금없이 등장한 '에든'에 강현의 눈이 크게 떠졌다.

"에든? 얼마 전에 나한테 당한 그 에든 말하는 거예요?"

"예. 워리어즈의 길드장. 에든 크리스 씨가 강현 씨와 함께할 겁니다."

**

"강현! 오랜만이야!"

공항에서 강현을 본 에든이 반갑게 손을 흔들었다.

"그저께 봐놓고 오랜만은 무슨."

투덜대는 말투와는 달리 강현도 내심 반가웠던 터라 미소를 지었다.

"어떻게 된 거야? 바로 미국으로 간다더니."

"거의 갈뻔했지. 임무를 실패했다고 보고하고 돌아갈 준비를 하던 중이었거든. 그런데 거의 비행기에 올라타기 직전에 연락이 왔어. 너를 데려와야 하니까 한국에 남아 있으라 하더라."

에든의 말에 강현이 고개를 끄덕였다.

'잘됐네. 다른 놈들보다는 대화도 잘 통할 테니.'

강현에게도 나쁘지 않은 일이었다.

새로운 미국 쪽 사람보다 에든과 함께하는 것이 자신도 더욱 편할 터였다.

"일단 가자. 자세한 건 가면서 설명해 줄게. 상황이 그렇게 좋지 않아서, 미국에서도 다급 해하고 있더라고."

"그래."

강현을 기다리고 있는 것은 에든의 전용 항공기였다.

에든은 일반 항공기를 개조해서 사용 중이라고 했는데, 굉장히 넓고 편안했다.

"확실히 돈이 많기는 한가 보네."

"이 정도쯤이야. 뭐 마실래?"

"맥주. 시원한 걸로."

강현이 말이 떨어지기 무섭게 테이블에 차가운 맥주병이 놓였다.

"그래서 우리가 가는 곳은 어디야?"

병째로 맥주를 들이켜며 목을 적신 강현이 물었다.

"플로리다 주의 템파라는 도시야."

"템파?"

"원래 목적지는 바로 옆의 올랜도인데, 지금 거기는 접근이 위험해서."

"흐음, 도시의 공항을 이용하기 힘들 정도면, 상황이 많이 심각하나 보네."

"그렇지. 올랜도는 완전히 넘어갔다고 봐야 해, 놈들은 지금도 빠르게 세력을 넓혀가고 있어."

에든의 설명에 강현이 생각에 잠겼다.

"그 정도면, 미국 군대가 해결해야 하는 거 아닌가? 너희 유명하잖아? 천조국이라고."

솔직히 강현은 왜 자신을 부르는지 이해가 가질 않았다.

미국은 전 세계에서 가장 군사력이 강한 강대국이다.

도시를 빼앗길 정도로 상황이 심각하다면, 자신 같은 능력자보다는 군대가 움직여야 맞는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적이 몬스터가 아니라 같은 미국인이니까. 한국에서도 비슷한 일이 있었다면서?"

"아, 그렇지."

얼마 전 강현의 손으로 끝장냈던 바노 쿨사에 대한 이야기였다.

"이번에도 비슷해. 지금 우리의 목표는 적들의 대장을 사살하는 거지, 국민들을 없애는 게 아니야. 그리고..."

잠시 고민하던 에든이 입을 열었다.

"이미 사건이 터지는 것과 동시에 특수부대가 움직였다고 하더라. 아무런 성과 없이 모두가 죽었지."

강현은 그럴 만하다고 생각했다.

지난번에 싸웠던 바노 쿨사의 무력이 그만큼 강력했기 때문이다.

지금 미국에 활개 치는 적이 바노 쿨사와 비슷한 수준이라면, 아마 일개 사단 정도는 여유롭게 박살 낼 수 있을 것이다.

"그 이후에 능력자들도 움직였는데, 역시나 실패했어."

"능력자들까지?"

"어. 미국 남부에서 제법 유명한 길드가 움직였는데, 완전히 몰살당했다더라. 그 뒤로는 접근하지 않고 조심하고 있는 상황이야."

"흐음..."

"그러던 차에, 예전에 한국에서 비슷한 일이 있었고 때마침 그걸 네가 해결했다는 것을 알게 된 거야."

대략 상황이 어떻게 흘러간 것인지 알 수 있었다.

"그러면 그쪽에도 이상한 벌레나, 사이비 종교로 생겨난 건가?"

"비슷하지..."

강현의 물음에 에든의 표정이 어두워졌다.

"비슷하다는 건 또 무슨 말이야?"

"지금 플로리다주에서 벌어지는 사건은 사이비 종교 때문이 아니야."

"그러면 뭔데?"

"백인 우월주의자들. 어떻게 된 건지는 모르겠지만, 언데드가 극단적인 인종 혐오 단체를 이끌고 있어."

백인 우월주의.

해외에 딱히 관심이 없는 강현도 이름 정도는 들어봤었다.

"은근히 잘 어울리네."

사이비 종교와는 상황이 달랐지만, 강현은 그 언데드 놈들과 인종 혐오 단체가 비슷하다고 느꼈다.

'그놈들도 인간은 벌레다. 하찮다 이딴 말을 입에 달고 살았으니까.'

생각할수록 그 둘은 굉장한 베스트 프렌드가 될 수 있는 놈들이었다.

"그럼 이상한 벌레 같은 건 없고?"

"벌레? 그건 뭐야?"

"아냐. 됐다..."

다행인지, 불행인지 강제로 조종되는 사람은 없는 듯했다.

"아니지. 이게 더 골치 아플 것 같기도 한데..."

강현이 턱을 쓰다듬으며 생각에 잠겼다.

"내가 할 일은 뭐야? 그 언데드 보스만 잡아서 족치면 끝인가?"

"1차 적인 목표는 그렇지."

"또 뭐가 있어?"

"언데드 보스를 처치하고, 놈에게 동조하는 길드, 능력자의 몰살. 이게 최종 목표야. 일반인들은 어차피 충분히 제압할 수 있으니까."

"능력자까지... 이거 잘못 끼어든 거 아닌지 모르겠네."

강현은 이번 일이 제법 길어질지도 모르겠다고 생각했다.

151화 건방진 놈들(2)

151. 건방진 놈들(2)

미국 남동부는 미국 내에서 인종차별이 가장 심한 지역으로 유명하다.

시대가 변하고 사람들의 의식이 바뀌며 많이 개선되기는 했으나, 그것이 인종차별이 완전히 사라졌다는 것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현재까지도 극단적인 백인 우월주의, 인종 혐오 단체들이 가장 밀집해있는 곳이 미국 남동부라는 것만 봐도 알 수 있는 사실이다.

"이것들이 마지막인가?"

"그렇지."

"좋아. 전부 수용소에 처넣어 버리자고."

플로이다 주의 올랜도.

광역권에 200만 명이 넘는 사람들이 거주하고 있으며, 연간 수천만 명이 방문하는 세계적인 관광지다.

테마파크 놀이공원, 박물관, 전시장 등 수많은 방문객을 즐겁게 하고 영감을 주던 아름다운 도시.

그곳이 불과 1주일 만에 지옥으로 변해있었다.

끊임없이 울리는 총성과 비명.

거리는 백인 우월주의자, 인종 혐오자들의 놀이터로 전락해버렸다.

새하얀 옷을 입은 사람들, 혹은 기괴한 문신을 새긴 이들이 총기를 난사하며 활개 쳤다.

-좋군.

그 모습을 보며 베하 쿨사가 만족한 듯이 두개골을 까딱였다.

-이렇게 쉬운 일을 망치는 것으로도 모자라 인간에게 당하다니.

얼마 전, 한국에서 바노 쿨사가 영면에 들었다는 소식을 들었다.

베하 쿨사는 안타깝기보다는 분노가 치밀었다.

-놈은 쿨사의 자리에 너무 오래 있었어. 오만하고 안일했지.

바노는 쿨사의 작위를 받은 이들 중 가장 오랜 세월을 견뎌왔다.

그리고 견뎌온 시간만큼이나 강력한 힘을 지니고 있었다.

-고지식한 놈. 차라리 잘 됐어.

바노 쿨사는 은근히 다른 쿨사들을 무시하는 듯한 언행을 해왔는데, 베하 쿨사는 그런 놈의 태도가 마음에 들지 않았다.

-다른 쿨사들이 어떻게 되든 상관없지. 나는 그분께서 오시기 전에 이곳을 완전히 우리의 땅으로 만들겠다.

다른 쿨사들보다 먼저 움직인 것도 그런 이유에서였다.

이 넓은 대륙을 차지하려면 시간이 필요하니까.

그만큼 베하 쿨사는 치밀하게 준비했고, 자신이 있었다.

-또다시 불청객인가.

그 순간, 베하의 앞에 한 무리의 사람들이 나타났다.

"이 자식! 감히 우리 고향에서 이런 짓을 벌여?"

-쯧. 저런 놈들을 막지 않고 내게 오게 하다니.

원래는 자신과 함께하는 인간들이 진작에 소탕했어야 할 놈들이다.

그런데 간혹 포위망을 벗어나 직접 자신에게 찾아오는 놈들이 있었다.

-차라리 잘 됐군. 적적한 시간을 보내는 데 도움이 되겠어.

놈들에게서 느껴지는 마력을 느끼며 베하 쿨사가 두개골을 두드렸다.

"죽어라! 언데드!"

인간들이 달려옴과 동시에 마법을 날렸다.

베하가 손을 휘둘렀다.

-콰과과과광!

그 가벼운 손짓에 날아오던 마법들이 단번에 폭발했다.

"뭐야!?"

"멈추지 마! 계속 공격해야 해!"

당황하는 인간들의 얼굴이 보였다.

베하가 가장 좋아하는 모습 중 하나였다.

-좋구나. 좋아.

지난번에 만들어둔 장난감은 너무 빨리 죽어서 아쉽던 차였다.

이번에는 그러지 않으리라.

베하 쿨사는 천천히 유희를 즐기리라 다짐하며 마법을 전개했다.

**

"끄아아! 겁나 오래 걸리네!"

비행기에서 내린 강현이 힘차게 기지개를 켰다.

검은 양복을 차려입고, 머리가 조금 횅하게 비어있는 남자가 다가오는 것이 보였다.

"반갑습니다. 이번에 강현 씨와 일을 하게 된 데클란입니다."

데클란이 미소를 지으며 강현에게 손을 내밀었다.

"강현입니다."

"오시는 길에 에든 씨가 대부분 설명을 한 것으로 압니다. 시간이 촉박한 상황이니 바로 회의에 들어가도 되겠습니까? "

"그러죠."

데클란을 따라 차량에 탑승하고, 잠시 후 임시 지휘소에 도착했다.

그곳에는 이미 세 명의 능력자들이 자리에 앉아 기다리고 있었다.

'다들 제법이네.'

느껴지는 마력과 기세가 심상치 않았다.

그리고 하나같이 호의적이지 않은 눈빛을 하고 있었다.

어째서인지 자신에게 적개심을 가진 듯한 모습.

'어딜 가나 팬클럽이 많아서 걱정이네.'

하지만 강현은 이런 상황이 아주 익숙했다.

강현은 씨익 웃으며 태연하게 눈빛을 받아넘겼다.

"모두 모였으니 회의를 시작하겠습니다."

데클란이 말을 하자 대형 스크린에 지도가 떠올랐다.

"이번 일의 핵심은 신속과 정확입니다. 피해 없이 적의 수장인 언데드에게 접근해 사살하는 것이 최우선 목표라고 할 수 있습니다."

데클란이 계속해서 현재 상황에 대해 설명했다.

"능력자가 아닌 민간인들의 살상은 최소화해야 합니다. 비록 그들이 총을 들이민다고 해도 말이죠. 여기까지 질문 있습니까?"

약 10분간 이어진 설명이 끝나고, 데클란이 질문을 받았다.

"로니. 말씀하시죠."

데클란이 손을 든 남성, 로니에게 말했다.

"저기 있는 동양인은 왜 부른 거지?"

"로니. 강현 씨를 부른 것은 상부에서 내린 결정이고 이미 협의가 끝난 상황입니다. 설명하지 않았습니까?"

"여기 모인 우리는 동의한 적이 없어. 그렇지 않아?"

로니의 말에 나머지 두 명의 길드장이 고개를 끄덕였다.

"우리는 각 길드의 마스터야. 그것도 어중이떠중이가 아니라 하나같이 강인한 정예들을 이끌고 있지. 당신도 그렇게 판단했으니 우리를 부른 것 아닌가?"

"맞습니다."

"그런데 왜 우리 미국의 일에 타국의 동양인을 끌어 들어야 하는지. 그게 의문인데?"

로니의 말에 데클란이 인상을 찌푸렸다.

"로니. 계속 같은 말을 하게 하는군요. 이미 충분히 설명하지 않았습니까?"

"아니. 나는 이해하지 못하겠어. 이건 명백히 나를 무시하는 행동이야. 너희들도 그렇게 생각하지 않아?"

"동의해."

"나도."

로니의 질문에 다른 두 명의 길드장이 기다렸다는 듯이 대답했다.

세 명의 길드장은 이미 서로 협의가 끝난 상태인 듯 보였다.

'지랄하고 있네.'

강현은 이 상황이 우스웠지만, 일단 지켜보기로 했다.

"이봐. 너희들 뭐하는 거야? 이런 방식은 상황을 해결하는 데 아무런 도움도 되지 않아."

그러나 에든은 아니었다.

계속해서 강현이 빠지는 쪽으로 이야기가 흘러가자 에든이 인상을 찌푸렸다.

"도움이 되지 않는다고? 에든... 예전 같지 않다는 말은 들었지만, 이렇게까지 추락했을 줄은 몰랐어."

"뭐야?"

"솔직히 말하면 네가 사람들에게 인지도가 높고 거대한 길드를 이끌고 있다고는 하지만, 속 빈 강정 아닌가?"

"소문은 과장되기 마련이지."

"맞아. 에든은 이제 사실상 사업가나 다름없으니까."

다른 두 명의 길드장이 로니의 말에 맞장구쳤다.

"에든. 너는 그냥 네가 사랑하는 돈이나 열심히 벌라는 말이야. 이제 능력자 세계에서는 한물갔으니까."

"..."

"처음부터 나는 이해가 되질 않았어. 이런 중요한 일에 도대체 왜 에든이 온 거지? 당연히 그레이슨이 왔어야 하는 건데 말이야."

그레이슨은 에든을 밀어내고 현재 미국 랭킹 1위 길드인 PAG(Power and Glory)를 이끌고 있는 길드장이었다.

계속되는 로니의 모욕적인 언행에 에든의 얼굴이 붉어졌다.

"로니. 거기까지만 하시죠. 계속 이런 식으로 나오시면 작전을 수행할 수 없습니다."

데클란의 말에 로니가 어깨를 으쓱였다.

"그건 모르지. 굳이 저들이 없어도 나는 이 일을 해결할 자신이 있거든. 너희들도 그렇지 않아?"

"맞아. 꼭 저들이 필요한가?"

길드장들의 말을 듣는 데클란의 미간에 주름이 깊어졌다.

"그렇게 안일하게 나섰다가 죽어 나간 사람이 이미 수백 명입니다! 로니. 왜 처음에 협의한 대로 하지 않는 겁니까!?"

"그런 멍청이들과 우리를 비교하지 말아 줬으면 좋겠는데. 그리고 나는 분명 동의한 적이 없다고 했어."

분위기는 점점 험악해져 갔다.

팔짱을 낀 채로 그 모습을 지켜보던 강현의 얼굴도 험악해졌다.

"그러니까. 지금이라도 늦지 않았어. 저 동양인과 에든은 빼버려. 차라리 우리가 다른 뛰어난 능력자들을 추천하지."

다른 능력자를 추천하는 것.

그것이 로니의 본 목적이었다.

이번 일은 엄청난 보수가 약속되어 있었으니까.

강현에게는 특히나 더 많은 돈을 주기로 한 것을 로니는 이미 알고 있었다.

'저 동양인과 에든을 빼고 다른 사람들을 채워 넣으면 보수가 두 배는 뛸 거야.'

로니와 길드장들은 타국에서 온 강현과 위상이 떨어진 에든에게 수익을 나누고 싶은 생각이 없었다.

"아주 개지랄을 하네."

대략적인 상황을 파악한 강현이 탁자를 내려쳤다.

콰앙- 하는 소리가 울리며 단숨에 탁자가 박살났다.

"뭐하는 짓이지?"

로니와 길드장들이 눈살을 찌푸리며 강현을 노려봤다.

"뭐하기는 새끼들아. 다른 나라에 왔으니 나름대로 배려 좀 하려고 두고 봤더니 아주 시발, 북치고 장구치고 신이 났네. 이쪽 동네는 원래 이렇게 매너가 없나?"

강현의 말에 앉아있던 로니와 두 명의 길드장이 벌떡 일어났다.

"지금 한 말. 사과해라."

"강현. 마음은 이해하지만 일단 진정해."

먼저 화를 냈던 에든 조차 급발진을 하는 강현을 보고 잔뜩 긴장했다.

"잠시만. 이런 놈들은 아주 제대로 교육을 시켜야 돼. 기본이 안 된 개새끼들이라고."

"방금 뭐라고 했나!"

강현의 말에 로니가 재빠르게 검을 뽑았다.

-차앙!

순식간에 강현의 목젖 앞에 놓이는 칼날.

"다시 말하지. 죽기 싫으면 지금이라도 사과해라. 한 번은 용서해주마."

"용서? 용서어어?"

강현이 씨익 웃었다.

점차 강현의 눈이 광기로 번들거리기 시작했다.

"너희 셋. 나랑 내기 하나 하자."

갑작스러운 강현의 내기 제안에 모두가 인상을 찌푸렸다.

"내기? 그게 무슨 말이냐."

"누가 먼저 저기 언데드 모가지 따는지 내기하자고. 이해 안 돼?"

"강현 씨. 일단 진정하시고…."

데클란이 강현을 말리려 했으나 이미 늦었다.

"그거 재미있겠어. 너희들은 어떻게 생각해?"

"일단 제안을 들어봐야겠지. 저 남자의 보수를 전부 우리에게 넘긴다 약속하면 괜찮은 것 같은데."

"그거 괜찮은 생각이군."

로니와 나머지 길드장들은 이미 강현의 제안을 수긍하는 분위기였다.

"잘됐네. 받아들이는 걸로 알고..."

강현이 품에서 스마트 폰을 꺼내 들었다.

"뭐하는 거냐?"

"나중에 내기에서 져놓고 배째라고 하면 곤란하잖아? 발뺌 못 하게 박제를 해야지."

"흥. 야비한 동양인답게 생각하는 것도 치졸하군."

로니는 딱히 신경 쓰지 않았다.

어차피 할 수 있는 것이라고 해 봤자 녹음이나 동영상을 촬영 정도.

어차피 내기에서 이기는 것은 자신일 테니 강현이 무슨 짓을 하든 신경 쓸 이유가 없었다.

"너... 설마..."

그러나 강현의 행동은 예상을 초월하는 것이었다.

"여러분 오랜만입니다! 배데스 길드의 강현입니다!"

"너, 너! 무슨 짓을 하는 거냐!?"

"강현 씨. 지금 뭐하는 겁니까!?"

강현은 자신의 채널로 들어가서 라이브 방송을 진행했다.

강현의 돌발행동에 모두가 경악했다.

"당장 멈추십시오!"

"아아. 안 들린다. 안들려."

강현이 마치 유치원생처럼 유치하게 고개를 흔들며 무시했다.

"갑자기 이게 무슨 상황이신가 싶으실 겁니다! 간략하게 말씀드리면, 제가 미국에 왔습니다. 대단하죠!?"

"당장 방송을 끄라고 했을 텐데!"

그때였다.

로니가 품에서 단검을 집어던졌다.

강현을 해하기 위함은 아니었고, 단순히 스마트폰만 부술 생각이었다.

-파앗!

그러나 강현은 스마트폰의 코앞에서 단검을 잡아냈다.

"어허, 기다려 새꺄."

"네놈이 끝까지!"

"내기하자면서? 그러면 증인이 있어야 할 거 아니야?"

로니와 두 명의 길드장을 비춘 강현이 다시 말을 이었다.

"미국에서 좀 도와달라 해서 왔는데 말이죠. 이 코쟁이 새끼들이 동양인 비하에, 예? 아주 개지랄을 떨잖아요!"

상황은 이미 걷잡을 수 없이 커져 버렸다.

돌이키기엔 늦은 상황.

"그래서! 강현의 참교육 교실을 열기로 했습니다."

강현이 희번덕거리는 눈알로 로니를 노려봤다.

"저 새끼들이랑 내기 한판 하려고요. 너희들도 동의했지?"

로니는 무시무시한 눈으로 강현을 노려볼 뿐이었다.

"맞아? 아니야? 왜 대답을 안 해? 쫄려!?"

"너..."

악귀처럼 일그러진 얼굴과 꽉 깨물어진 어금니에서 로니의 분노가 느껴졌다.

"내기 해? 안 해?! 시발 쫄리면 뒤지시던가!"

"후우..."

한숨을 내쉰 로니가 가슴을 진정시켰다.

'차라리 잘 된 걸지도 몰라.'

로니는 강현의 돌발 행동이 어쩌면 기회가 될 수도 있다고 생각했다.

"네가 그렇게 공개적으로 망신을 당하고 싶다면, 그렇게 해주마!"

"진작 그렇게 나왔어야지."

152화 건방진 놈들(3)

152. 건방진 놈들(3)

-??? 라이브? 오늘 라이브 예고 있었나요?

-ㄴㄴ 갑자기 켠 듯

강현이 방송을 시작하자마자 사람들이 물밀 듯이 들어왔다.

강현의 채널 구독자는 약 320만.

거기에 항상 라이브마다 사건이 터지는 방송이다.

갑작스러운 방송이라고 해도 접속률이 높을 수밖에 없었다.

"여러분 오랜만입니다! 배데스 길드의 강현입니다!"

카메라는 강현과 낯선 외국인들이 앉아있는 모습을 담고 있었다.

-여기 어디임?

-저 사람들 어디서 본 것 같은데

한눈에 봐도 심상치 않은 분위기.

영어로 오고 가는 대화로, 시청자들은 이것이 갑작스러운 상황임을 알 수 있었다.

-ㅋㅋㅋㅋ 느낌 왔다. 딱 봐도 강현 눈에 똘끼 차있음.

-ㄹㅇㅋㅋㅋ 벌써 재밌네 ㅋㅋ

주위에서 강현에게 삿대질을 가하고, 소리를 질렀다.

"아아. 안 들린다. 안들려."

강현은 무적의 도리도리를 사용해 모든 공격을 받아내는 진귀한 풍경을 보여 주었다.

"갑자기 이게 무슨 상황이신가 싶으실 겁니다! 간략하게 말씀드리면, 제가 미국에 왔습니다. 대단하죠!?"

강현의 말에 채팅창에 불이 났다.

-아아 기억났다ㅋㅋ 저기 있는 사람들 미국 길드에 길드장들임ㅋㅋㅋ

-강현 미국 진출했네

-저 사람 에든아님? ㄷㄷ 에든은 진짜 거물인데

그때였다.

갑자기 로니가 무언가를 집어던짐과 동시에 단검이 정확히 카메라 앞에서 멈췄다.

-깜짝이야! 방금 뭐야?

-누가 칼 집어 던졌는데 강현이 붙잡음 ㄷㄷ

-반응속도;;

-ㅅㅂ 누워서 스마트폰 들고 보다가 놀라서 떨궜음 ㅋㅋㅋ 아 눈에 찍었어

-ㅋㅋㅋㅋㅋ 무슨 상황인지 모르지만 일단 꿀잼 확정

시청자들은 정확히 상황이 어떻게 돌아가는 알 수 없었지만, 이것만은 확실했다.

무언가 엄청난 사건이 터졌다.

그것도 아주 재미있을 것 같은.

잠시 후면 매스컴을 장악할 만한 대형 사건을 실시간으로 본다는 것에 모두가 흥분했다.

"미국에서 좀 도와달라 해서 왔는데 말이죠. 이 코쟁이 새끼들이 동양인 비하에, 예? 아주 개지랄을 떨잖아요!"

-호에에?? 인종 차별!? 21세기에!?

-저것들 뭐임? 뭔데 듣보잡들이 강현한테 깝치는 거지?

-저기서는 강현이 듣보 일 듯? 저 사람들 미국에서 이름만 대면 다 아는 사람들임

-이번에는 상대 잘못 고른 거 아닌가...

-여러분 강현입니다. 믿으세요.

"그래서! 강현의 참교육 교실을 열기로 했습니다."

강현의 참교육 교실.

이미 한국에서는 유명한 말이었다.

어떤 상황에 직면해도 막무가내로 밀어붙이는 강현식 정의구현!

누구가는 그것에 불편함을 토로하기도 했지만, 대부분의 사람들은 그 모습에 열광했으며 또 이런 일이 없을까 오매불망 기다리던 차였다.

-드디어 참교육 시즌인가!

-참교육 영상은 오랜만이네ㅋㅋㅋㅋㅋㅋ

-강현 센세의 참교육 시즌 3. 지금 시작합니다.

"저 새끼들이랑 내기 한판 하려고요. 너희들도 동의했지?"

내기에 대한 말이 나오고, 잔뜩 화가 난 듯한 로니의 모습이 비쳤다.

"맞아? 아니야? 왜 대답을 안 해? 쫄려!?"

상황은 점점 극으로 치닫고 있었다. 그에 따라 화면 속 강현의 눈도 점점 뒤집히고 있었다.

-미친개 등장ㅋㅋㅋㅋㅋ

-쫄려? 미친ㅋㅋ

-미국에서도 깽판치는 클라스... 막나가는 건 진짜 월클이야...

-강현 눈 완전히 돌은듯ㅋㅋ 이제 못말린다ㅋㅋㅋ

강현의 광기는 점점 극으로 치달았다.

"내기 해? 안 해?! 시발 쫄리면 뒤지시던가!"

강현이 로니에게 얼굴을 들이밀며 소리쳤다.

-쫄리면 뒤지시던가!ㅋㅋㅋㅋ

-내.기.해! 내.기.해!

-미친 ㅋㅋㅋㅋ 역대급이다 이거

"네가 그렇게 공개적으로 망신을 당하고 싶다면, 그렇게 해주마!"

결국 로니는 강현의 제안에 승낙했다.

"지금 무슨 일이 벌어진 건지, 자세한 건 저도 말 못 해줘요. 원래 이 라이브도 켜면 안 되는 건데, 저 코쟁이들이 빡치게 굴어서 그냥 엿 먹으라고 켰거든요. 어쨌든 쟤들이 내기에 승낙했으니까 여러분들이 증인입니다. 맞죠?"

-무슨 일인지 궁금하다. 요즘 미국에도 사건이 많이 터져서 짐작이 안가네

-미국까지 불려갈 정도면 보통 일은 아닐 듯

-얼마 전에 뉴스에서 플로리다에 대형사건 터졌다 했는데 그거 일 듯?

그때였다.

옆에서 이글거리던 눈으로 강현을 보던 로니가 입을 열었다.

"언제까지 그렇게 시시덕댈 생각이지? 얼른 끝내라."

로니의 말에 강현이 씨익 웃었다.

"그럼 내기를 했으니까 대가가 있어야겠지? 내기에 지는 놈이 무릎 꿇고 바닥에 대가리 찍기다."

"바닥에 머리를 박는다?"

"그래. 세 번! 그것도 쿵! 소리가 나게끔."

강현의 제안에 로니가 사악한 미소를 지었다.

"유치한 내용이지만, 재미있겠군. 대가는 그게 끝인가?"

"그 장면은 지금처럼 방송 켜고 생중계할 거야. 불만 있으면 지금 말해."

"없다. 오히려 내가 고마울 지경이야."

회의에 참석하기 직전, 로니는 강현에 대해 조금 들어서 알고 있었다.

위튜브 스타를 꿈꾸는 한심한 놈.

놈이 자신의 팬들 앞에서 무릎을 꿇고 굴욕적인 모습을 보여 줄 거라 생각하니 벌써부터 전신이 짜릿한 기분이었다.

"거기에 이번 일의 보수는 승자가 독식한다. 불만 없겠지?"

"그러든가 말든가."

건성으로 대답한 강현이 시선을 다시 스마트 폰으로 돌렸다.

"자, 양쪽 모두 승낙했습니다. 여러분! 이 영상 많이많이, 아주 열심히 퍼날라 주세요. 지는 놈은 두 번 다시 얼굴도 못 들고 다니게"

-ㅇㅋ 접수완료.

-하... 벌써부터 기대된다...

-오늘의 명연 : 쫄리면 뒤지시던가!

-근데 ㄹㅇ 강현 똘끼는 미국을 가서도 여전하네 ㅋㅋㅋㅋ 홈그라운드가 아닌데 전혀 밀리질 않음.

그렇게 방송이 끝나고, 강현의 정신 나간 라이브 영상이 전 세계로 퍼져나가기 시작했다.

**

-지금 뭐하는 거야! 그걸 두고 보고만 있어!? 제정신이야!?

"죄송합니다..."

전화 너머로 폭언이 10분째 이어지는 중이었다.

데클란은 계속해서 죄송하다는 말을 반복할 뿐이었다.

-거기 있던 길드장놈들은 뭔데 구경만 하고 있었어? 그 강현이라는 놈 하나 제압 못 해?!

"그렇게 되면 사상자가 발생할 수도 있는 상황이었습니다."

-그럴 일이 없게 제압하면 될 거 아니야!

상사의 말은 논리적으로 맞지 않았다.

강현이 그렇게 쉽게 제압될 만한 인물이라면, 애초에 거금을 들여서 영입을 시도하지 않았을 것이다.

"그러면... 강현을 영입하려던 계획은 취소합니까?"

-영입? 지금 상황에 그딴 말이 나와!?

"죄송합니다..."

-놈은 전 세계가 보는 앞에서 미국을 모욕했어. 그딴 놈을 영입하다니! 생각이 있는 거야 없는 거야!?

"죄송합니다..."

갑자기 5년 전에 끊었던 담배가 생각났다.

데클란은 지금 담배에 불을 붙여 한 모금을 한 뒤, 상사에게 지져버릴 수만 있다면 당장 죽어도 행복할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어떻게든 놈을 이번 내기에서 지게 만들어. 죽이든 뭘하든! 절대 놈이 이기는 상황이 연출돼서는 안 돼! 무슨 말인지 알겠어!?

"예. 명심하겠습니다."

마침내 통화가 종료되고.

잔뜩 핼쑥해진 데클란이 다시 지휘소로 들어섰다.

**

로니와 길드장들. 강현과 에든이 서로 편을 나뉘어 노려보고 있었다.

그 모습을 본 데클란이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후우... 지금부터 다시 작전을 설명하겠습니다."

스크린에 지도를 띄운 데클란이 설명을 시작했다.

"우선, 강현 씨 덕분에 임무의 난이도가 더 상승했다는 걸 말씀드리겠습니다. 놈들이 그 라이브를 봤다면, 자신들을 습격할 생각이라는 것을 짐작할 수 있을 테니까요."

"미안합니다. 대신 내가 깔끔하게 해결해 줄게요."

"이미 벌어진 일은 어쩔 수 없죠. 그리고 작전이 일부 변경됐습니다. 처음 계획과는 다르게, 두 팀으로 나눠서 작전을 수행하도록 하겠습니다."

모두가 고개를 끄덕이며 수긍했다.

당연한 일이었기 때문이다.

지금 상황에서 저들을 한 번에 전장으로 보냈다가는 무슨 일이 벌어질지 몰랐다.

"양 팀은 최대 다섯 명까지 자유롭게 구성하시면 됩니다. 그리고 제가 말씀드린 경로로 이동할 겁니다. 여기까지 의문 있습니까?"

"다섯 명이라는 게 무슨 뜻인가?"

"길드장 세 분은 알아서 나머지 둘을 채우시고, 강현 씨와 에든 씨도 나머지 셋을 채워 총 다섯으로 각자의 팀을 구성하면 됩니다."

"그렇군."

"더 질문 없습니까?"

데클란의 질문에 에든이 손을 들었다.

"전투 중 지휘는 이곳에서 담당하는 건가?"

"예. 미리 통신장비를 지급해서 변수가 생겼을 시, 실시간으로 지시를 내릴 겁니다."

데클란의 설명에 에든은 무언가 불만족스러운 표정을 지었으나, 이내 고개를 끄덕였다.

"작전은 앞으로 다섯 시간 후인 새벽 세 시에 시작합니다. 두 시부터 이동을 준비할 테니 대기하고 계시기 바랍니다."

그것을 끝으로 모두가 회의실을 떠났다.

혼자 남아있던 데클란이 스마트폰을 두드리기 시작했다.

잠시 후.

"나만 따로 불러내다니. 무슨 일이지?"

밖을 나갔던 로니가 혼자서 돌아왔다.

"이번 내기에서 반드시 로니. 당신이 이겨야 합니다."

"그거야 당연한 거고."

"우리 쪽에서 당신이 이길 수밖에 없게 조치하겠습니다."

"뭐..?"

데클란의 말에 로니의 인상이 팍 구겨졌다.

"지금 그게 무슨 뜻이야? 데클란. 당신이 이 전투에 개입하겠다고?"

"예. 강현이 최대한 놈들의 보스와 접촉하는 걸 막고, 험한 곳을 돌아다니게 해서 지치게 하겠습니다."

데클란에 말에 로니가 탁자를 내려쳤다.

-쾅!

"지금 장난해!? 나를 뭐로 보고 그딴 짓을 하는 거야!?"

"로니. 이성적으로 생각하십시오. 만일이라는 게 있는 겁니다. 이 전투에서 지면 당신과 다른 길드 마스터들은 모든 걸 잃을 겁니다. 길드장 자리를 내려놓는 건 물론, 길드가 와해될지도 모른다고요."

"그건 저 강현이라는 놈도 마찬가지지."

로니의 말에 데클란이 답답한 가슴을 두드렸다.

"지금 이건 미국의 명예가 걸린 일입니다! 어떠한 천재지변이 일어나도 로니. 당신이 이길 수밖에 없는 상황을 만들어서 우리가 승리해야 된다. 이 말입니다!"

"..."

미국의 명예라는 말에 로니가 침묵했다.

"아까 작전에서 말하지 않은 게 하나 있습니다."

"뭐지?"

"당신들에게는 8개의 새하얀 의복이 지급될 겁니다. 놈들이 주로 입는 것들인데, 그걸 입고 마력을 숨긴 채로 빠르게 도심부를 통과하십시오. 옷 자체에도 마력을 숨기는 소재가 발라져 있으니, 그리 어렵지는 않을 겁니다."

"하아..."

데클란의 설명에 로니가 한숨을 내쉬었다.

"그렇게 최대한 빨리 보스에게 도달해서 적을 처리하면 됩니다."

"의복이 8개인 이유는 뭐지? 팀은 분명 5명일 텐데."

"당신들은 추가로 3명을 더 데려서 총 8명으로 팀을 구성하십시오."

데클란의 말에 로니의 얼굴이 붉으락푸르락하게 변했다.

"로니. 이왕 부정을 저지르기로 했으면 확실하게 해야 하는 겁니다. 무슨 뜻인지 이해하리라 믿습니다."

"..."

"일이 잘 해결되면 추가 보수도 지급하겠습니다."

말을 한 데클란이 등을 돌렸다.

"그럼 저는 이만. 로니도 잠시 쉬십시오. 최상의 컨디션으로 출발해야 할 테니까요."

**

"갈리우. 준비됐나요?"

올리엔의 물음에 마법사 갈리우가 고개를 끄덕였다.

"모든 준비가 완벽합니다."

둘의 앞에는 엄청난 크기의 마법진이 그려진 상태였다.

그 위를 빼곡히 채우는 수많은 마정석들. 당장 저것들을 가져다 팔아도 100억은 가볍게 넘길 만한 엄청난 양이었다.

"신태길 씨. 시작해도 될까요?"

"물론입니다."

신태길이 당연하다는 듯 대답했다.

"갈리우! 신호를 보내세요!"

올리엔이 갈리우를 보며 외쳤다.

그 말에 갈리우가 마력을 불어넣기 시작하고, 마법진에서 빛이 나기 시작했다.

-위이이이잉!

그 모습을 보며 신태길이 눈을 빛냈다.

'확실히 스킬에 의존하는 지구와는 차원이 다르군. 최민준 씨가 이야기했던 것들이 이제야 이해가 돼.'

최민준은 항상 스킬을 사용하는 것으로 끝내면 안 된다. 스스로 마법과 스킬을 갈고닦아야 한다는 말을 달고 살았다.

신태길은 이제야 그의 말이 조금 이해되는 것 같았다.

"후우... 끝났습니다."

갈리우가 땀을 닦아내며 말했다.

"신태길 씨. 본국에 신호를 보냈어요."

"그러면 언제쯤 오는지 알 수 있습니까?"

신태길의 물음에 올리엔이 고개를 저었다.

"그건 몰라요. 본국에서 어느 정도 준비를 하고 있었느냐에 따라 다르니까요."

"그렇군요."

"그래도 열흘 내에는 오지 않을까 해요. 지구와 제가 있던 곳은 시간 축이 거의 같은 것 같으니까. 그렇게 오래 걸리지는 않을 거예요."

올리엔이 해맑게 웃으며 설명을 하던 때였다.

"왕녀님! 포탈이 열립니다!"

"네!?"

마법진의 중앙에 푸른 포탈이 생성되기 시작했다.

153화 돌아온 참교육 시즌(1)

153. 돌아온 참교육 시즌(1)

새벽 두 시.

대기하던 헬기에 탑승한 사람은 모두 여덟 명이었다.

원래 약속된 인원보다 세 명이 더 많은 상황.

모두가 의아한 표정을 지을 때, 오직 로니만이 체념한 듯 눈을 감고 있었다.

"로니. 이게 무슨 상황이야?"

다른 두 명의 길드장이 로니에게 물었다.

"후우... 타일러. 안드레. 나도 어쩔 수 없었어."

로니도 자신이 부끄러웠다.

자신이 강현을 무시하기는 했지만, 이렇게 비겁하게 승부에서 이기고 싶은 것은 아니었다.

"조국에서 원하는 거야. 우리는 여덟 명으로 최대한 빨리 적의 보스를 처치한다."

로니가 데클란에게 들었던 설명을 전해주었다.

"데클란. 그 영악한 인간이 이런 일을 준비했군."

"딱히 그를 탓할 것도 아니야. 워낙 돌발 상황이었으니까."

한숨을 내쉰 로니가 말을 이었다.

"우리는 그저 이 새하얀 옷을 입고, 빠르게 일을 처리하기만 하면 돼. 그러면 모두가 해피엔딩이라고."

로니가 입고 있는 것은 새하얀 망토.

이것은 백인 우월주의 단체 중 가장 대표라고 할 수 있는 JJJ단이 입는 옷이었다.

"우리 8명은 이것으로 위장하고 빠르게 적의 내부로 들어갈 거야. 그리고 보스만 깔끔하게 처치하는 거지."

"돌아오는 건 어떻게 해?"

"보스 말고는 딱히 우리에게 위협이 될 만한 놈들은 없을 거야. 다만, 언제 눈먼 총알에 죽을지 모르니. 그건 주의해야겠지."

"결국은 자력으로 탈출해야 한다는 거군."

"그래."

자력으로 탈출한다. 충격적인 말이었지만, 낙담하는 사람은 없었다.

어차피 각오한 일이었기 때문이다.

상식 밖의 엄청난 보수를 주는 데는 다 이유가 있는 것이다.

"우리야 그렇다고 해도. 그 강현이라는 놈은 안타깝게 됐어."

"그러게. 데클란이 직접 위험한 곳으로만 방향을 유도한다고 했으니... 어쩌면 보스에게 도착하지 못하고 죽을 수도 있겠군."

"우리야 잘된 일이지. 적들의 시선이 거기 모여있으면, 보스의 방비가 그만큼 허술해질 거야."

이 내기는 결과적으로 강현에게는 불행, 이들에게는 행운을 가져다주었다.

"어차피 동양의 원숭이라고. 이런 일에라도 쓰여서 미국을 위해 죽는 걸 고맙게 생각해야지."

"그래. 하하!"

코쟁이들이 분위기를 띄우기 위해 헛소리를 늘어놓았다.

그사이 헬기가 목적지에 도착하고,

"가자!"

새하얀 거적을 뒤집어쓴 8명이 도시로 침투했다.

**

"정말 둘이서 괜찮겠어?"

에든이 걱정스럽게 물었다.

"여기서 어중간하게 셋을 더 데려와 봤자 짐만 될 뿐이야."

"우리 길드의 평균 수준이 그렇게 높은 건 아니지만, 그래도 가장 정예들로 뽑아오면 분명 도움이 될 거야."

"지금 당장 그런 애들을 데려올 수나 있고?"

"그건..."

에든은 대답할 수 없었다.

내기는 작전 시작 직전에 벌어진 일.

이제와서 사람을 구하라고 해 봤자 갑자기 목숨을 던질 최정상급의 능력자 땅에서 솟아나지는 않는다.

"어중간한 애들 데려오면 그냥 시체만 늘어나는 거야. 우리 둘이 하는 게 맞아."

"후우... 그래. 네 말이 맞네."

"혹시라도 위험할 것 같으면 너는 빠져도 돼. 나 혼자 해도 되니까."

혼자 할 것이라는 강현의 말에 에든이 손사래를 쳤다.

"아냐. 단지 조금이라도 빨리 보스에게 도착해야 하니, 거들어줄 손이 있으면 어떨까 해서 물어본 거야."

"진짜 빠져도 괜찮은데... 이거 상당히 위험한 일이야. 네가 더 잘 알 거 아니냐? 잘못하면 죽을 수도 있어."

자신을 걱정하는 강현의 말이 에든이 피식 웃었다.

"어떤 전투에서든 나는 항상 목숨을 걸어왔어. 이제와서 조금 위험하다고 빠지면 모양이 안 살지."

"그러면 뭐... 나중에 원망하지 마라."

얼마 지나지 않아 헬기가 목적지에 도착했다.

"더 접근하는 것은 위험합니다! 여기부터는 걸어서 이동해야 합니다!"

조종사의 말에 강현과 에든이 헬기에서 내렸다.

"분위기 좋네."

헬기에서 내리자 곳곳에서 불길이 올라오는 도시의 전경이 보였다.

"회의에서 말한 세븐스 마트. 저거인 것 같은데."

에든이 멀리 있는 고층 빌딩에 전광판을 보며 말했다.

"맞는 것 같네."

강현과 에든은 주저 없이 움직였다.

어두운 새벽.

의지할 빛은 드문드문 있는 가로등뿐이었다.

이따금 들리는 총성과 폭음이 강현의 눈살을 찌푸리게 했다.

"앞에 누가 있어."

그때였다.

강현의 귀에 발걸음 소리가 들려왔다.

희미하지만 마력 또한 느껴졌다.

'저게 그 JJJ단인가.'

곧이어 모습을 드러내는 새하얀 망토를 뒤집어쓴 사람들.

그들은 하나같이 위험해 보이는 총기를 소지하고 있었다.

-투두두두두!

"이런 미친놈들이! 다짜고짜 총질이야!?"

놈들은 강현을 보자마자 아무런 경고도 없이 총을 갈겼다.

에든은 재빨리 건물 뒤로 숨었고, 강현은 그대로 놈들에게 달려갔다.

-인명피해는 어떡해요?

-총기를 든 사람, 혹은 무기를 든 능력자에 한해서 사살 허용합니다.

이미 데클란에게 모든 허락을 받은 상황.

놈들의 머리를 부수는 데 망설일 이유가 없었다.

-투두두두!

놈들이 쏜 총알이 강현의 몸에 적중했다.

"뭐야!? 저 새끼 왜 안 죽어!?"

"갈겨! 쏘라고!"

총알은 강현의 옷을 뚫었지만, 그뿐이었다.

단단한 강현의 몸에 부딪힌 총알이 찌그러진 채로 튕겨 나갔다.

"따갑잖아. 새끼들아!"

어금니를 꽉 깨문 강현이 전력으로 주먹을 내질렀다.

-푸화아악!

그 공격에 한 놈의 머리가 터지며 사방으로 피가 뿜어졌다.

생전 처음 보는 그로테스크한 광경에 놈들의 몸이 그대로 굳었다.

"전부 총 버려."

강현의 말에 놈들이 얌전히 총을 바닥에 내려놨다.

"사, 살려줘..."

"그래. 살려는 줄게."

강현은 한명 한명 친절하게 로우킥을 날려 주었다.

단번에 놈들의 무릎뼈가 기형적으로 뒤틀리며, 비명이 울려 퍼졌다.

"조용히 해라."

"커헉!"

강현은 놈들의 뒤통수를 쳐서 기절시켰다.

다리가 꺾인 채로 축 늘어진 놈들이 근처 슈퍼마켓에 차곡차곡 쌓였다.

"저대로 두게? 죽을 수도 있을 것 같은데."

몇몇은 강현에게 맞는 과정에서 피를 많이 흘리고 있는 것이 보였다.

"나한테 총질한 놈들인데, 살려준 걸 고마워해야지."

"그러네..."

그 후로도 비슷한 일이 반복됐다.

놈들은 극단적인 인종 혐오자들답게 강현을 보자마자 묻지도 따지지도 않고 총질을 해댔다.

그때마다 무릎이 뒤로 꺾인 신인류들이 계속해서 탄생했다.

"데클란! 언제까지 이 짓거리를 해야 돼요!?"

강현이 초소형 마이크에 대고 소리를 질렀다.

-차근차근 놈들의 보스와 가까워지고 있습니다. 지금 보이는 은행 방향으로 3 km정도 더 가시죠.

"후우... 알겠어요."

무전을 종료한 강현이 인상을 찌푸렸다.

"지금 장난질하는 것 같은데."

강현의 말에 에든이 생각에 잠겼다.

"일단 도시 중심부로 가고 있는 건 맞아. 점점 능력자들 비율이 늘어나고 있고."

"그런데 왜 이렇게 돌아가는 느낌이야?"

"그건..."

에든 본인도 느끼고 있었다.

무언가 주변을 계속 맴도는 느낌.

하지만 쉬이 확답을 내릴 수는 없었다.

조국에서 이런 비열한 짓을 할 리가 없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아, 드디어 오네."

그때였다.

어쩐지 들떠 보이는 강현의 말이 에든을 상념에서 깨웠다.

"적인가?"

사방에서 마력이 느껴졌다.

하나하나가 높은 수준은 아니었지만, 숫자가 압도적이다.

"도대체 몇 명이야?"

얼핏 느껴지는 것만 해도 백 단위는 아니다.

적어도 천 단위의 적들.

지금껏 상대한 적들 중 가장 많은 수였다.

"에든. 괜찮겠어?"

강현의 물음에 에든이 씨익 웃었다.

"본 실력을 보여 줄게. 놀라지나 말라고."

**

-로니. 거의 다 왔습니다.

"나도 느껴져."

데클란의 말에 로니가 고개를 끄덕였다.

"놈은 지금 어디 있지?"

-인근을 배회하다가, 적의 본대와 만난 상태입니다. 확인 결과 능력자 숫자만 1300명이 넘어갑니다.

"죽겠군."

놈들은 고작 두 명에서 움직였다고 했다.

'멍청한 에든. 그런 원숭이를 위해서 혼자 사지에 뛰어들어?'

어차피 두 명이든 다섯 명이든 상관없는 일이기는 했다.

놈들은 천 명이 넘는 적을 상대로 살아남을 수는 없다.

-지금이 기회입니다. 빠르게 보스를 처치하고 빠져나와요.

"알고 있어. 끝나고 다시 연락하지."

무전을 종료한 로니가 주위를 둘러봤다.

자신을 포함한 8명의 전사들.

미국을 위기에서 구할 영웅들이다.

"모두 들었지? 놈들이 시선을 끌었어. 지금이 기회야."

"좋아. 가자고!"

로니와 일행은 빠르게 앞으로 나아갔다.

"지독한 놈이군."

길 곳곳에 사지가 절단된 인간의 시체가 놓여 있었다.

마치 장식품처럼 심혈을 기울여 치장한 모습.

그들은 고문을 받다가 죽은 것인지 하나같이 고통스러운 얼굴을 하고 있었다.

-새로운 장난감들인가.

마침내 이 모든 일의 원흉인 놈이 모습을 드러냈다.

검은색 망토를 두르고 몸 곳곳에는 화려한 보석을 걸친 해골.

베하 쿨사가 로니 일행을 바라봤다.

-마지막 장난감이 죽어서 아쉽던 차에 잘 됐어.

베하 쿨사의 말에 로니가 인상을 찌푸렸다.

"장난감이라니. 건방진 해골이네. 빠르게 죽여주지."

로니가 전투를 시작하려는 찰나, 갑자기 베하 쿨사가 두개골을 딱딱 두드렸다.

-너는 이곳에서 얼마나 강하지?

"뭐?"

뜬금없는 물음에 로니가 당황했다.

-너와 일행은 이 땅에서 얼마나 강하냐고 물었다. 지금까지 만난 놈들과는 조금 다른 것 같군.

베하의 말에 로니가 웃었다.

"하하하! 웃기는 놈이군. 이제 슬슬 겁이 나기 시작하나?"

-묻는 말에나 대답해주면 좋겠는데.

로니가 씨익 웃었다.

"가장 강하다. 우리보다 강한 놈은 아마 지구 전체를 뒤져봐도 거의 없을 거야."

오만한 말이었지만, 어느 정도는 사실이기도 했다.

미국 내에서 그보다 강한 능력자는 거의 없었으니까.

10명? 20명?

어쩌면 자신보다 유명한 능력자들은 그저 운이 조금 더 좋았을 뿐일지도 모른다.

로니는 그들과 직접 맞붙는다고 해도 이길 자신이 있었다.

그러니 세계 전체를 뒤져봐도 그리 많지 않을 것이다.

-그런가. 고맙군.

"천만에. 이제 네가 있던 지옥으로 돌아갈 건데, 이 정도 호의쯤이야."

-네 덕분에 확실히 알았다. 그분께서 오시기 전에 이 땅의 정화를 끝낼 수 있겠어.

베하 쿨사의 말에 로니가 인상을 찡그렸다.

"할 말이 끝났으면, 이제 시작하지!"

로니가 힘껏 땅을 박차고 달렸다.

지금까지 베하 쿨사가 상대했던 인간과는 차원이 다른 움직임.

동시에 일행 또한 재빠르게 움직이며 저마다 최고의 스킬을 사용했다.

'이런 수준으로 최고를 논하다니. 그분께서 이곳을 너무 과대평가하셨어.'

하지만 그래봤자 베하 쿨사의 눈에는 아이들의 재롱으로 보일 뿐이었다.

-너희들에게 즐거운 경험을 선사해 주지.

베하 쿨사가 양팔을 휘저었다.

그러자 엄청난 마력이 사방으로 폭사됐다.

-퍼엉! 펑!

그 충격에 날아오던 마법이 모두 터지고, 로니를 포함한 능력자들이 뒤로 튕겨 나갔다.

"크윽! 이게 뭐야!?"

"방금 무슨 일이 벌어진 거지?"

그 누구도 피해를 보거나 다치지 않았다.

그럼에도 위안을 얻을 만한 상황은 아니었다.

-더 발버둥 쳐 봐라.

베하 쿨사의 말에 모두가 인상을 찌푸렸다.

"잘난 척하지 말란 말이야!"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는 않았다.

타오르던 분노가 시리도록 차가운 절망으로 바뀌는 것에는.

154화 돌아온 참교육 시즌(2)

154. 돌아온 참교육 시즌(2)

"틀렸어. 놈은 괴물이야! 우리가 이길 수 없는 적이라고!"

"엔디! 정신 차려!"

"로니. 미안해! 나는 못하겠어!"

엔디라 불린 남자가 뒤로 돌아 달리기 시작했다.

베하 쿨사는 도주자를 내버려 둘 마음이 없었다.

-어딜 가는 거냐.

도망치던 엔디의 발아래서 시커먼 손들이 올라왔다.

"으아악! 뭐야!? 떼어줘. 도와 달라고!"

발목을 붙잡힌 엔디가 발버둥 쳤다.

이성적인 판단이 가능했다면, 그리 어렵게 탈출할 수 있는 간단한 마법이다.

하지만 정신이 붕괴된 엔디는 그러지 못했다.

"커흑, 컥..."

허공에서 생겨난 검은 창이 엔디의 목을 관통했다.

"엔디!"

-남은 건 넷인가. 예상보다 시시하게 끝나겠어.

베하 쿨사가 검지로 두개골을 딱딱 소리가 나게 두드렸다.

어떻게 하면 이 상황을 더 즐길 수 있을까 고민하는 모습.

'젠장. 어떻게 돼먹은 놈이야?'

로니는 그런 베하 쿨사를 보며 혼란스러웠다.

'우리가 이렇게 허무하게 죽는다고?! 말도 안 돼!'

자신만만하게 시작한 레이드였다.

모두가 정예들이니 당연한 일이다.

지금껏 한 번도 패배하지 않고 탄탄대로를 걸어왔다.

'도대체 왜!? 어째서 이렇게 된 거지...?'

지금까지 만난 적과 같을 것이라 생각한 것이 패착이었다.

베하 쿨사는 달랐다.

놈은 완전히 다른 차원에 존재하는 것처럼, 기상천외한 방식으로 능력자들을 압박했다.

어떤 방식으로 공격하든 놈은 간단하게 파훼하고 맞받아쳤다.

사실 놈이 마음만 먹었다면 일행은 단 5분도 버티지 못했을 것이 분명했다.

"젠장! 데클란! 지원은 어떻게 된 거야!?"

다급한 마음에 로니가 데클란을 찾았다.

-처음부터 말씀드리지 않았습니까. 이 작전은 최소한의 피해로 최대의 이득을 얻는 게 목적입니다.

"그래서 뭐? 우리를 다 죽게 두겠다고!?"

-어쩔 수 없습니다. 지원은 불가능합니다.

"으아아아!"

죽음을 눈앞에 마주한 로니가 미쳐가기 시작했다.

그 모습을 보며 베하 쿨사가 만족한 듯 손을 비볐다.

-그거다. 조금 더 나를 즐겁게 해 다오.

휘둘러지는 베하 쿨사의 손.

동시에 4개의 칼날이 생겨나며 능력자들에게 날아갔다.

"로니! 지금이라도 도망쳐야 돼!"

칼날을 힘겹게 막아낸 길드장이 소리쳤다.

"이제와서 뭘 어떻게 하자는 거야? 저놈이 우리가 도망가게 두고 볼 것 같아?!"

"그럼 이대로 죽자는 거야!?"

"젠장! 나한테 묻지 말라고!"

로니가 소리를 버럭 질렀다.

하지만 다시 베하 쿨사를 바라보니 금세 몸에 힘이 빠지는 기분이었다.

처음의 패기는 온데간데없고, 이제는 감히 놈에게 다가갈 생각조차 하지 못하고 있었다.

놈에게 다가가는 것은 그저 남은 명을 재촉하는 것밖에 되지 않았다.

-이런 상황에도 분열이라니. 역시 인간들은 재미있구나.

베하 쿨사가 즐겁다는 듯이 손뼉을 칠 때였다.

-응? 누가 오는군.

누군가 접근하는 것이 느껴졌다.

제법 강인한 마력.

그것도 하나가 아닌 두 명이었다.

-네놈들의 동료인가?

마침내 베하 쿨사의 앞에 마력의 정체가 도착했다.

"후아! 시벌! 드디어 왔네."

모습을 드러낸 이는 강현과 에든이었다.

"너, 너!"

강현을 본 로니가 손가락질을 하며 말을 더듬었다.

'어떻게 된 거야...?'

혹시나 하는 생각이 있기는 했다.

놈들이 와줄까.

하지만 그렇게 엄청난 숫자의 능력자들을 상대로 살아남을 리가 없다.

"네가 어떻게 살아있는 거냐!?"

온몸이 피로 점칠 된 모습.

대충 닦아낸 얼굴로 겨우 강현이란 것을 알아볼 수 있었다.

"기다렸냐?"

"멍청한 놈! 살아남았으면 그대로 떠났어야지!"

"저 새끼는 도와주러 와도 지랄이네."

어떻게 살아왔는지는 모르지만, 놈들은 죽는다.

이미 피투성이가 된 몸으로 뭘 할 수 있을까?

강현의 뒤에 있는 에든은 서 있는 것조차 버거워 보였다.

최상의 컨디션일 때 모여도 이길 수 있을까 할 적을 상대로 저런 몸 상태라니...

시체가 늘어날 뿐이다.

"멍청한 놈들... 결국 전부 죽을 거다..."

**

베하 쿨사가 강현을 바라보며 양팔을 벌렸다.

-장난감이 늘었어. 오늘은 오랜만에 즐겁구나!

머릿속에서 울리는 음성에 강현이 인상을 찌푸렸다.

"장난감? 이것도 어지간히 자의식 과잉이네."

-크흐... 네놈도 자신은 다를 거라고 믿고 왔겠지. 저기 있는 놈들이 그랬던 것처럼.

"그 말 그대로 돌려줄게. 나한테 박살난 해골 새끼들도 전부 다 그러더라. 자기는 다르다고. 그런데 어떻게 됐는지 아냐?"

강현이 베하 쿨사를 노려보며 씨익 웃었다.

"내가 지다니! 이럴 리가 없어! 끄아아~ 하면서 두개골이 박살났다고 새끼야. 이것들은 패턴이 변하지를 않아."

-설마 네놈인가. 바노 쿨사를 영면에 들게 한 것이.

"그래그래. 알겠으면 이제 너도 뒤질 준비 해라."

말을 내뱉은 강현이 땅을 박차고, 엄청난 속도로 달려갔다.

-흥! 이 베하 쿨사를 그딴 놈과 비교하지 마라!

베하 쿨사는 마법을 전개하기 위해 마력을 움직였다.

'크윽! 마력이 왜..!?'

마력을 운용하던 도중 갑자기 마력의 흐름이 엉켜버렸다.

"잘 먹히나 보네. 다행이다."

강현이 씨익 웃으며 종이 쪼가리를 집어던졌다.

그것의 정체는 '마력 고착화 스크롤'.

언젠가 유용하게 써먹으리라 다짐하고 인벤토리에 넣어둔 것이 지금 빛을 발하고 있었다.

-이딴 저급한 스크롤 따위!

베하 쿨사가 분노하며 재차 마력을 운용했다.

놈이 어떤 스크롤을 찢은 건지는 보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

그가 있던 하켄에서 마법사를 상대하기 위해 자주 이용되는 것이니까.

-나는 베하 쿨사다!

하지만 자신은 다르다.

이런 것쯤, 압도적인 마력으로 뚫어버릴 수 있었다.

그렇게 다시 마력이 움직이려는 찰나, 강현이 그의 코앞까지 다가왔다.

"네가 누군지는 알 바 아니고."

베하 쿨사의 어깨를 붙잡은 강현이 미소를 지었다.

"피곤하니까 빨리 끝내자."

-이 하찮은 인간 놈이...!

단숨에 강현을 죽여버리라.

강력한 마법 한방이면 끝낼 자신이 있었다.

그런데 마력이 움직이지 않았다.

강현의 몸에서 흘러나오는 마력이 자신의 마력 흐름을 방해하고 있었다.

-어째서!?

그 순간, 고개를 힘껏 뒤로 젖힌 강현이 그대로 박치기를 시전했다.

-콰앙!

머리와 머리가 부딪친 것이라고는 믿을 수 없는 소리가 울렸다.

-크아아아! 이런 저급한 공격으로 어찌할 수 있을 것 같으냐!?

"뭐라는 거야? 그냥 뒤져!"

-콰앙! 콰앙! 콰앙!

강현이 멈추지 않고 박치기를 날렸다.

단단한 놈의 두개골을 때린 강현의 이마에서 따뜻한 피가 흘러나왔다.

베하 쿨사는 필사적으로 마력을 움직였다.

'도대체 왜 움직이지 않는 거냐!?'

분명 강현의 마력은 제법 강하다.

하지만 자신과 비교할 수준은 아니었다.

'아무리 마력 회로가 뒤엉켰다고 해도 이럴 수는 없다.'

처음 강현이 스크롤을 찢었을 때, 순간적으로 마력 회로가 뒤틀리기는 했다.

그 이후로 강현은 마력장을 사용해 베하 쿨사의 마력 운용을 집요하게 방해했다.

'아무리 회로가 뒤틀렸다고 해도 고작 저런 마력을 이겨내지 못한다는 말인가?'

아무리 마력을 막아내려 해도 강현은 집요하게 빈틈을 찾아내 마력을 밀어 넣었다.

분명 고도의 집중력을 요구하는 일이었지만, 그러면서도 강현은 박치기를 멈추지 않았다.

'안돼. 도저히 마법을 쓸 수가 없어. 일단 놈을 떼어낸다.'

어떻게든 거리를 벌려야 한다.

그러면 분명 승기를 가져올 수 있으리라.

'움직여라..!'

베하 쿨사가 손가락에 날카로운 마력을 둘렀다.

마법을 사용하는 것이 아닌 단순히 마력을 방출하는 방식.

원래라면 쓰지 않았을 투박한 방법이었으나, 현재로서는 이게 최선이었다.

-푸욱

베하 쿨사의 검지가 강현의 목을 꿰뚫었다.

"크아아아!"

목에 손가락이 박힌 강현이 미친 사람처럼 소리를 질렀다.

하지만 그러면서도 강현은 박치기를 멈추지 않았다.

-콰앙, 쾅! 쾅!

양손으로 베하 쿨사를 붙잡은 채로 강현이 계속해서 머리를 들이받았다.

강현의 이마에서 나온 피가 베하 쿨사의 두개골을 적셨다.

-이런 정신 나간 놈이!

베하 쿨사가 필사적으로 발버둥 쳤으나, 완력 면에서 그는 강현과 상대가 되지 않았다.

점차 베하 쿨사의 머리에도 금이 가기 시작했다.

-이럴 수는 없다. 이런 허무한 죽음이라니! 이럴 수는 없어!!!

베하 쿨사의 발악에 강현이 씨익 웃었다.

"내가!"

-쾅.

"같은!"

-콰앙.

"패턴이라고!"

-콰앙.

"했잖아!"

-콰아앙!

"하악, 하아..."

숨을 헐떡이던 강현이 이마에서 흘러내리는 피를 닦으며 웃었다.

두개골이 절반 정도 갈라진 베하 쿨사가 부들부들 몸을 떨었다.

-아곤이시여... 이렇게 허무하게...

"지깃지긋한 새끼들."

강현이 베하 쿨사의 두개골을 붙잡고 바닥에 내리꽂았다.

-파가각!

그 충격에 놈의 두개골이 산산이 조각나며 흩어졌다.

**

"무슨 일이 벌어진 거지...?"

언데드가 죽었다.

최고의 능력자 8명이 달려들어서 상처하나 입히지 못한 적이다.

그런데 강현은 고작 박치기 하나로 그 강력했던 해골을 박살 내버렸다.

"말도 안 돼..."

로니는 믿고 싶지 않았다.

차라리 여기서 자신이 죽었어야 했다.

저런 현실을 볼 바에, 죽는 게 나았다.

"대단하지?"

어느새 옆으로 다가온 에든이 털썩 주저앉았다.

"나는 인정할 수 없다. 나는..."

"로니. 세상은 이렇게 넓은 거야."

로니는 무슨 말을 해야 할지 혼란스러웠다.

그저 쉬고 싶은 마음뿐이었다.

"하나만 묻지..."

"뭔데?"

"너희 둘. 많은 능력들에게 포위됐다고 들었다."

"맞아. 고생 좀 했어."

"어떻게 빠져나온 거냐?"

로니의 물음에 에든이 피식 웃었다.

"알면서 뭘 묻고 그래?"

"설마..."

"맞아. 다 죽였어."

"하, 하하! 크하하하!"

갑자기 로니가 실성한 듯이 웃었다.

"뭐야? 미치기라도 한 거야?"

"아니. 내가 잘못 생각했어. 나는 정말 아무것도 아니었다."

세상은 넓다.

그 넓은 세상의 최고는 미국이라 생각했다.

그리고 자신은 그 미국에서도 손꼽히는 강자.

당연히 세상의 최고라고 생각했다.

"오만했구나..."

로니는 다짐했다.

자신은 새로 태어날 것이다.

진정한 최고가 되기 위해서.

그러기 위해서는 일단 저기 있는 남자. 강현을 뛰어넘어야 한다.

**

침묵.

누구도 입을 열지 않았다.

여섯 명의 용사들이 돌아왔으나, 아무도 반기는 사람이 없는 것처럼 보였다.

"후아! 분위기가 왜 이래? 잘 해결된 거 아니에요?"

강현의 말에 정신을 차린 데클란이 미소를 지었다.

"정말 수고하셨습니다. 이렇게 멋지게 해결하실 거라고는 상상도 하지 못했습니다."

"입바른 말은 됐어요."

플로리다 주는 실시간으로 안정되고 있었다.

놈들의 핵심이라 할 수 있는 베하 쿨사와 능력자들이 모조리 죽어버렸으니 당연한 일이었다.

이제 남은 문제는 군대가 해결할 것이다.

"그나저나 남은 보수는 언제 줘요? 9,000만 달러. 해결하면 준다면서요."

"이미 입금했습니다. 한번 확인해 보시죠."

데클란의 말에 강현이 통장을 확인했다.

"으아아아! 이런 미친!"

"무슨 일 있습니까?"

"아니, 아무것도 아니에요."

너무 놀라서 한 말이었다.

'숫자가 몇 개야!?'

통장에 이렇게 많은 숫자가 찍힐 수 있다는 것을 처음 알았다.

일십백천만십만백만천만일억십억백억천억!

무려 천억이 넘는 거금.

강현은 갑자기 들어온 거액을 어떻게 써야 할지 고민했다.

"저번에도 설명해 드렸지만, 그것은 스위스에 개설한 계좌입니다. 완벽하게 보호돼 있으며, 어떤 식으로 사용하던 강현 씨 자유입니다."

"좋네요."

강현은 올라가는 입꼬리를 숨기지 않았다.

"크하하하! 부자다 부자!"

그렇게 강현은 한동안 미친놈처럼 웃어젖혔다.

"후우, 다음에도 일 있으면 불러요. 자알~ 놀다 갑니다!"

그 말을 끝으로 강현은 로니에게 가려 했다.

로니와는 아직 해결할 일이 남아 있었기 때문이다.

그때, 데클란이 강현을 붙잡았다.

"강현 씨."

강현은 무슨 일이냐는 듯 데클란을 바라봤다.

"강현 씨가 다른 길드장들과 하신 내기 있지 않습니까..?"

"예. 그게 왜요?"

데클란의 입에서 내기라는 단어가 나오자 강현이 인상을 구겼다.

"없던 일로 해달라고요?"

"예... 아무래도 미국의 명예 문제도 있고, 그게 방송되면 저기 있는 세 명은 길드가 무너질지도 모릅니다."

"그걸 내가 왜 신경 써야 되는데요?"

"어떤 식으로든 강현 씨에게 보상하겠습니다. 필요하시다면 돈을 더…."

"됐어요. 돈은 이 정도면 충분하니까. 저놈들한테도 받을 생각 없고."

"강현 씨. 한 번만 선처를..."

데클란이 간절하게 말했지만, 강현은 듣지 않았다.

"선처는 무슨! 저런 놈들은 인생의 쓴맛을 봐야 한다고요."

강현이 들을 생각이 없는 것처럼 보이자 데클란은 포기했다.

"하아... 알겠습니다."

"그럼 이제 가도 되죠?"

강현이 떠나려고 하자 다시 데클란이 붙잡았다.

"아직 하나 더 말씀드릴 게 있습니다."

"뭔데요?"

"강현 씨. 미국에서 일해보실 생각 없습니까?"

"예?"

뜬금없는 말에 강현이 당황했다.

"최고. 전 세계 어디보다 더 나은 조건으로 대접하겠습니다. 강현 씨와 그 길드. 모두를 영입하고 싶습니다. 강현 씨 가족은 물론이고, 원하신다면 길드원들의 가족 모두에게 시민권을 부여할 수 있도록 조치하고 또한…."

강현이 열성적으로 설명하는 데클란에게 손을 내저었다.

"됐어요."

"예...?"

"됐다고요. 관심 없습니다."

"일단 조건을 들어보고 다시 한번 생각해 보시는 것이..."

"아! 됐다고요!"

강현이 짜증을 내자 데클란이 뒤로 물러났다.

"나 조지려고 뺑뺑이 돌릴 때는 언제고 뭐? 영입? 장난하는 것도 아니고."

강현의 말에 데클란이 입을 꾹 다물었다.

'알고 있었나...'

강현이 눈치챌 수도 있겠다는 생각은 했다.

하지만 이렇게 확신하고 있을 줄은 몰랐다.

"다음에 미국에서 저 부르려면, 돈을 더 써야 할 거예요. 무슨 말인지 알죠?"

"예. 알고 있습니다..."

그 말을 끝으로 강현은 뒤도 돌아보지 않고 떠나갔다.

멀어지는 강현의 뒷모습을 바라보며 데클란이 한숨을 내쉬었다.

"하아... 어디서부터 꼬인 것인지."

155화 돌아온 참교육 시즌(3)

155. 돌아온 참교육 시즌(3)

"예예! 아이고, 반갑습니다!"

강현이 스마트폰을 보며 히죽히죽 웃었다.

"생각보다 빨리 왔죠?"

강현이 방송을 켜자마자 빠르게 사람들이 들어오며 채팅이 올라왔다.

-내기 어떻게 됐음?

-우리 반 애들 전부 다 이거만 기다리고 있어요!

채팅을 훑어본 강현이 씨익 웃었다.

"당연한 거 아닙니까? 제가 이겼죠."

강현이 화면을 돌려 침울한 표정을 짓고 있는 세 명을 비추었다.

-엌ㅋㅋ 침울한거 보소

-와 무슨 내기인지는 모르겠지만 미국 길드장들을 발라버렸어 ㄷㄷ

-강현이 드디어 월드 클라스가 된건가...

조금 과장을 보태면, 전 국민이 내기의 결과를 기다렸다.

공중파 뉴스에서 강현의 사건을 다루었으며 신문 1면에 보도될 정도.

이슈를 다루는 위튜버들도 하나같이 이번 내기에 관해 이야기하며 각자 결과를 예측했다.

"자자, 약속은 약속이니. 라이브로 참교육 진행하도록 하겠습니다."

그렇게 세상의 관심이 쏠려 있었음에도, 정작 그 모든 사건의 중심인 강현은 태평했다.

강현의 관심사는 오직 하나.

어떻게 해야 놈들이 더욱 수치심을 느낄까였다.

강현이 계속 낄낄거리자 로니가 인상을 찌푸렸다.

"빨리 시작하지."

"그래그래. 시작해야지!"

"후우... 어쩌다 내가 이렇게 된 건지..."

잘 나가는 대형 길드의 길드장에서 한순간에 전 세계의 웃음거리가 돼버렸다.

그런 자신의 처지를 생각하며 로니가 한숨을 내쉬었다.

그나마 불행 중 다행이라면 강현이 자신들의 보수금을 가져가지 않겠다고 한 것 정도.

"야. 내가 다른 제안 하나 할까?"

갑자기 강현이 새로운 제안을 꺼내 들었다.

사악한 미소를 짓고 있는 것이 불안했지만, 로니는 일단 들어보기로 했다.

"다른 제안?"

"그래. 솔직히 무릎 꿇고 땅에 대가리 박기라니. 자존심 상하잖아. 안 그래?"

"..."

강현의 말에 로니가 침묵했다.

"그러니까. 내가 다른 방식으로 퉁칠 수 있게 해준다. 이거야. 고맙지?"

"그 다른 방식이란 게 뭐냐..."

로니가 어금니를 꽉 깨물며 말했다.

"싸다구 한 대."

"뭐?"

"남자답게! 뺨 한 대만 맞으면 없던 일로 해준다고. 어때? 당연히 스킬 같은 거 없이, 그냥 완력으로만 칠 거야."

강현의 설명에 로니가 반색했다.

'훨씬 좋은 조건이다.'

물론 뺨을 맞는 것도 굴욕적이다.

하지만 무릎을 꿇고 바닥에 머리를 들이받는 것보다는 훨씬 나았다.

'당당하게 맞고 끝내겠어.'

강현의 힘이 강하다는 것쯤은 로니도 알고 있었다.

하지만 자신도 어디 가서 뒤처지는 능력자는 아니다.

고작 뺨을 맞는 것, 게다가 스킬도 사용하지 않고 완력만 쓴다고 한다.

이 정도면 한 대가 아니라 얼마든지 맞아줄 수 있었다.

"하겠다. 그걸로 하지."

로니의 말에 다른 길드장들이 로니를 바라봤다.

"정말이야? 뺨을 맞겠다고!?"

"비록 내기에서 졌지만, 자존심까지 팔지는 않았어. 고작 뺨을 맞는 것으로 내기를 없던 일로 해준다면, 나야 고맙지."

로니의 말에 다른 길드장들도 고민하는 기색을 내비쳤다.

"좋아. 바로 시작해도 되지?"

"그래."

로니가 뒷짐을 지고 가슴을 폈다. 그리고는 편안하게 눈을 감았다.

'최고가 되겠다고 다짐했다. 이건 그 시작. 깔끔하게 초심으로 돌아가는 거야.'

솔직히 조금은 강현에게 고맙기도 했다. 강현이 없었더라면 자신은 영원히 우물 안의 개구리로 남았을지도 모르는 일이다.

"시작해라."

로니가 모든 것에 초탈한 사람처럼 편안하게 자리에 섰다.

"이빨 꽉 깨물어라."

강현이 씨익 웃으며 손바닥을 들어 올렸다.

"준비하시고..."

강현의 모든 근육이 터질 듯이 부풀어 오르고, 핏줄이 튀어나오기 시작했다.

"뒤져어-!"

마침내 휘둘러지는 강현의 손바닥.

-파아아악! 콰앙!

손바닥과 얼굴이 부딪친 것이라고는 믿을 수 없는 굉음이 울리고, 뺨을 맞은 로니의 머리가 총알처럼 빠르게 시멘트 바닥에 내려꽂혔다.

"저, 저... 지금 무슨..."

바닥을 조금 파고 들어간 로니의 머리는 완전히 피떡이 되어 있었다.

남은 두 길드장은 그 모습을 보며 덜덜 떨었다.

"아... 너무 세게 쳤나. 죽지는 않았겠지?"

-저 사람 죽은 것 같은데... 방송사고 아님?

-영구 정지 각인가...

-방금 손으로 뺨을 때린 거 맞아요? 오함마로 대가리 후려친 거 같은데;;

-영상 따서 슬로우 모션으로 돌려봐야겠다 ㅋㅋㅋㅋㅋ

채팅창에서는 로니가 죽은 것이 아니냐는 말이 계속해서 나왔다.

잠시 턱을 쓰다듬으며 고민하던 강현이 손가락을 펼쳤다.

강현의 손가락 끝에서 물이 조르르 흘러 로니의 면상을 때렸다.

"야. 일어나 봐. 죽은 거 아니지?"

그 순간, 기절했던 로니가 눈을 번쩍 떴다.

"끄, 끄헉, 커헉!"

"여러분! 살아있습니다. 방송사고 아니에요."

해맑게 미소를 지은 강현이 나머지 두 명의 길드장을 바라봤다.

"자. 당신들을 어떻게 할 거야? 뺨? 아니면 머리 박기?"

강현의 말에 두 길드장이 털썩 무릎을 꿇었다.

"박겠습니다!"

그리고는 바닥에 머리를 쿵- 소리가 나게 찍었다.

"여러분. 이거 돈 주고도 못 보는 광경인 거 아시죠? 많이많이 날라 주세요."

너무 즐거워서 죽겠다는 강현의 얼굴을 끝으로, 방송은 종료됐다.

**

"왕녀님! 포탈이 열립니다!"

"네!?"

마법진의 중앙에 푸른 포탈이 생성되기 시작했다.

"어째서 이렇게 빠르게 온 거지? 적어도 하루 이틀은 걸릴 것이라 생각했는데..."

사실 왕국의 입장에서 올리엔을 보낸 것은 일종의 실험이었다.

자신들이 다른 차원에 무사히 갈 수 있을 것인가.

그렇게 간 차원에는 자신들에게 호의적인 생명체가 살 것인가.

아무런 정보도 없는 상황.

그런 상황에 올리엔과 그 일행을 보낸 것이다.

그들은 버려도 되는 패였으니까.

버리는 것을 넘어 적당한 구실만 생기면 처리할 예정인, 말 그대로 눈엣가시 같은 존재들이었으니까.

"아무도 기다리지 않을 줄 알았어."

그래서 당연히 신호를 보내고 한참 뒤에나 올 것이라 생각했다.

왕실의 절반은 그녀에게 아무런 기대를 하지 않았고, 나머지 절반은 아예 실패하기를 바랐다.

이런 상황에서 그들이 준비했을 리가 없다고 생각했다.

"후우, 정신 차리자."

고개를 흔든 올리엔이 눈이 힘을 주었다.

저 포탈로 넘어오는 이들은 아마 100명 내외로 구성된 대규모 조사단.

조사단이 완벽하게 이 땅이 안전하다고 판단하면, 다시 신호를 보내 공식적으로 사절단을 요청한다.

그러니 자신은 조사단에게 이곳이 안전하며, 왕국에 도움이 될 만한 사람들이 많다는 것을 잘 설명해야 했다.

-우우우웅

마침내 포탈에서 사람들이 나오기 시작했다.

전신 갑옷을 입은 기사.

망토를 두른 마법사.

그 외에도 학자, 연금술사, 시종 등 많은 사람들이 쏟아져 나왔다.

'조사단의 대표는 누구지?'

저들 중에 아직 높은 작위의 귀족은 보이지 않았다.

저 정도 규모를 이끄는 자라면 최소 백작위를 가진 사람일 터.

그 순간 올리엔의 눈이 크게 떠졌다.

'왕실 기사단!?'

포탈에서 화려한 갑옷을 입은 왕실 기사 2명이 걸어 나왔기 때문이다.

왕실 기사는 왕국을 수호하는 마지막 검.

왕족이 위험에 빠지거나 직접 행차하지 않는 이상 절대 움직이지 않는다.

'왜 왕실 기사단이 온 거지?'

올리엔의 의문은 금세 해결되었다.

포탈에서 나오는 마지막 인물과 눈이 마주쳤기 때문이다.

"오라버니..."

헤이그란 왕국의 2왕자, 카를 헤이서스.

그가 직접 포탈을 타고 나왔다.

**

포탈 밖으로 나온 카를 헤이서스.

그가 찬찬히 주변을 둘러봤다.

'이곳이 다른 차원...'

제국에 보낸 스파이로 그 존재를 알고는 있었지만, 실제로 보니 감회가 새로웠다.

'마력이 희박하군.'

대기 중에 마력이 느껴지긴 했으나, 그가 있던 곳에 비하면 한창 부족한 마력 농도였다.

그 순간, 카를의 눈이 올리엔과 마주쳤다.

"오라버니..."

어찌할 줄 몰라하는 올리엔의 모습.

자신이 오리라고는 상상도 하지 못했을 테니 당연한 일이었다.

카를 헤이서스는 그런 올리엔을 무시하고 갈리우를 찾았다.

"갈리우! 어디있나?"

"예. 왕자 저하."

카를의 말에 올리엔과 함께 왔던 마법사 갈리우가 달려왔다.

"현재 상황을 보고하도록 해라."

"알겠습니다."

고개를 깊이 숙인 갈리우가 지금까지 지구에서 있었던 일을 간략히 설명했다.

"…이상입니다."

"저기 있는 검은 옷을 입고 있는 남자들. 저들이 이 나라의 대표라는 말인가?"

"예."

갈리우의 설명을 들은 카를이 속으로 조소했다.

'이곳의 수준이라는 것도 알만하군.'

순간 의문이 들었다.

이 땅에 자신에게 도움이 될만한 이들이 있을까?

저기 있는 검은색 옷을 입은 자들. 좋게 봐도 지방에 있는 기사단 정도의 수준이다.

'왕좌를 차지하는데 도움을 얻기 위해 직접 이곳까지 찾아왔건만... 괜히 시간 낭비만 하게 되는 건 아닌지 모르겠군.'

현재 헤이그란 왕국은 1왕자와 2왕자가 세력 다툼이 치열하게 벌어지고 있었다.

전통 귀족들의 지지를 받는 1왕자.

신흥 귀족들의 지지를 받는 2왕자.

1왕자의 세력은 굳건하다.

자신이 왕좌를 차지하기 위해서는 새로운 힘이 필요했다.

그러기 위해 예정돼있던 조사단의 명단을 자신의 친위대로 바꾸고, 언제든지 이동할 수 있도록 준비하고 있었다.

'형보다 먼저 선수를 쳐야 해.'

왕국에서는 이곳에 대한 정보고 아무것도 없다.

무언가 필요한 것이 있다면 먼저 움직여서 선점해야 했다.

그렇게 생각하며 카를이 앞으로 걸어갔다.

"대한민국에 오신 것을 환영합니다. 저는 대한민국의 특수 능력자 관리팀의 팀장 신태길입니다."

통역 마법을 사용했음에도 제대로 이해할 수 없는 말들이 섞여 있었다.

하지만 카를은 태연하게 미소를 지었다.

"헤이그란 왕국의 왕자. 카를 헤이서스요."

"예. 만나서 반갑습니다."

신태길이 미소를 지으며 악수를 하기 위해 손을 뻗었다.

그 모습을 본 카를의 얼굴이 딱딱하게 굳었다.

'이 건방진 놈이...'

자신이 왕족임을 밝혔음에도 불구하고 무릎을 굽히지 않는다.

듣자 하니 이 남자는 귀족이 아니라고 했다.

'하찮은 평민이 나에게 손을 내밀어?'

이러한 카를의 기색을 읽은 것인지 카를의 시종이 달려 나왔다.

"비록 타국이라고는 하나 왕자님 앞입니다. 예를 갖추시지요."

시종이 신태길에게 작게 속삭였다.

"예..? 아! 죄송합니다."

무언가를 깨달은 듯 신태길이 다시 인사를 했다.

"만나서 반갑습니다. 저는 신태길이라고 합니다."

신태길이 허리를 가볍게 숙이며 인사했지만, 경직된 분위기는 풀어질 줄 몰랐다.

그 순간, 뒤쪽에서 지켜보던 올리엔이 달려왔다.

"오라버니. 이곳은 저희가 있던 곳과 다른 예법을 가지고 있어요. 지금 이 사람은 최대한 예의를…."

"누가 너에게 끼어들라고 했지?"

카를이 싸늘한 눈으로 올리엔을 노려봤다.

"내가 먼저 말을 걸기 전까지는 절대 나에게 그 더러운 입을 벌리지 말라고 했을 텐데."

카를이 고개를 내밀어 올리엔의 귓가에 속삭였다.

"죄, 죄송해요..."

올리엔이 물러가고, 카를이 다시 신태길을 바라봤다.

"이런 내가 실례했군."

갑자기 환한 미소를 짓는 카를 헤이서스.

"신하들이 이곳의 예법에 대해 잘 알지 못해서 말이야. 오해한 것 같네. 하하!"

"괜찮습니다."

신태길이 아무런 문제가 없다는 듯 미소를 지었다.

"혹시 이 나라에서 자네가 어떤 직위를 가졌는지 알려주겠나?"

"저는 국가를 위해 일하는 공무원입니다. 던전과 능력자에 관련된 모든 것을 총괄하고 있습니다."

"오호, 그렇구만."

사실 이해할 수 없었으나 카를은 신태길의 말을 알아들은 것처럼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다면 자네가 외교관이나, 국왕의 명을 받드는 자는 아니군?"

"가끔 대통령의 지시를 직접 받기도 하지만, 그게 주 업무는 아닙니다."

"그렇다면 이런 일을 맡을만한 더 높은 사람을 불러와 줄 수 있겠나? 가령 그 대통령이라는 사람이라던가... 내가 긴히 할 말이 있어서 말이야."

카를의 말에 신태길이 고개를 저었다.

"죄송하지만, 왕자님과 헤이그란 왕국에 관련된 모든 권한을 제가 위임받았습니다. 앞으로의 일에 관해서도 저와 의논하시면 됩니다."

신태길의 말에 아주 잠깐 카를의 눈가가 찌푸려졌다.

하지만 언제 그랬냐는 듯이 미소를 지었다.

"알겠네. 앞으로 자네에게 이 나라에 대해 배우면 되는 거군?"

"예. 맞습니다. 저와 제 부하들이 불편함이 없게 모시겠습니다."

고개를 숙이며 말하는 신태길의 눈이 차갑게 빛났다.

156화 인간 실격(1)

156. 인간 실격(1)

신태길은 자신에게 걸어오는 남자를 빠르게 훑어봤다.

'30대 중반. 화려하군. 올리엔 씨의 말대로 귀족인 건가?'

동양인이 아니라 정확한 추정은 불가능하지만, 자신과 비슷한 또래로 보였다.

입고 있는 옷은 너무 화려하게 치장된 나머지 눈이 부실 지경이었다.

"헤이그란 왕국의 왕자. 카를 헤이서스요."

순간 신태길의 미간이 아주 살짝 좁혀졌다.

자신이 잘못 들은 게 아니라면, 이 남자는 분명 왕자라고 했다.

아마 올리엔의 예상보다 더 높은 사람이 온 것 같았다.

"예. 만나서 반갑습니다."

신태길은 당황하지 않고 편안한 미소를 지으며 인사했다.

자신의 악수 요청에 카를 헤이서스의 얼굴이 굳어지는 것이 보였다.

뒤의 시종들도 당황한 모습.

'이런, 뭔가 실수했군.'

올리엔은 분명 가벼운 악수로 괜찮을 거라고 했다.

'귀족이 아닌 왕족이라 다른 방식으로 인사를 해야 했나?'

그때 시종으로 보이는 남자가 다가와 신태길에게 속삭였다.

"비록 타국이라고는 하나 왕자님 앞입니다. 예를 갖추시지요."

시종의 말에 신태길이 속으로 비웃었다.

'무릎을 꿇으라는 건가?'

돌려서 표현했지만, 신태길은 확신했다.

'그럴 수는 없다.'

자신은 지금 이 자리에 대한민국의 대표로 와있는 것이다.

대통령은 저들을 국빈으로 대접하라고 했지, 상전을 모시듯 바짝 엎드리라고 한 적은 없었다.

'다른 세계에 와서는 자신들의 예법을 강요하다니... 생각보다 멍청하고 오만한 놈들이야.'

신태길은 무릎을 꿇는 대신 가볍게 허리를 숙여 인사했다.

"크흠...!"

역시나 분위기는 풀리지 않고, 곳곳에서 헛기침 소리가 들려왔다.

'귀찮게 됐군. 좀 더 말이 통하는 상대면 좋겠는데.'

신태길이 상황을 타개하기 위해 고민하던 때였다.

달려온 올리엔이 카를 헤이서스에게 무언가를 열심히 설명했다.

"내가 먼저 말을 걸기 전까지는 절대 나에게 그 더러운 입을 벌리지 말라고 했을 텐데."

싸늘한 카를의 말.

작은 목소리였지만 능력자였던 신태길은 분명하게 들을 수 있었다.

'올리엔 씨의 지위가 좋지 않다는 말은 들었지만... 예상보다 더 심한 것 같군.'

신태길은 이 자리에 강현이 없는 것이 정말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강현이 이 모습을 봤다면, 당장 저 시건방진 왕자라는 놈의 멱살을 틀어쥐었을 것이 분명했으니까.

"이런 일을 맡을만한 더 높은 사람을 불러와 줄 수 있겠나? 가령 그 대통령이라는 사람이라던가..."

카를의 말에 신태길이 속으로 조소했다.

'어림도 없다.'

아직 신태길은 카를에 대해 아는 것이 아무것도 없다.

이런 자를 대통령께 데리고 갈 수는 없는 일.

카를이 대통령을 만나는 것은 한참 후에나 가능할 것이다.

"저와 제 부하들이 불편함이 없게 모시겠습니다."

신태길은 간단히 이곳의 상황에 대해 설명하고 카를을 예정된 숙소로 안내했다.

"오늘은 시간이 늦었으니 이만 쉬시는 게 어떻겠습니까? 내일 제가 다시 찾아뵙겠습니다."

"알겠네."

카를이 사람 좋은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가식의 대명사 같은 인간이군.'

신태길 또한 가식적인 미소를 지으며 카를을 숙소로 안내했다.

**

그날 밤.

올리엔은 떨리는 마음으로 복도를 걸었다.

"왕녀님을 뵙습니다."

이곳은 카를이 묵고 있는 호텔 방.

올리엔은 카를의 부름에 이곳을 찾아왔다.

"들어와라."

침을 꿀꺽 삼킨 올리엔이 조심스럽게 문을 열었다.

"오라버니. 부르셨…."

올리엔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우악스러운 손길이 그녀의 머리를 잡아챘다.

"무릎 꿇어."

바닥에 내동댕이쳐진 올리엔이 군말 없이 무릎을 꿇었다.

"왕국에서 너를 여기로 보낸 이유가 뭐라 생각하나?"

뜬금없는 카를의 물음.

올리엔은 덜덜 떨리는 몸을 애써 진정시키며 입을 열었다.

"이곳이 헤이그란 왕국에 도움이 될 만한 곳인지 알아보고, 후에 조사대가 안전하게 올 수 있도록 조치를 취하는 것입니다."

"그걸 아는 년이 일을 이렇게 처리해!?"

카를이 소리를 지르며 올리엔을 발로 걷어찼다.

"당연히 이 나라의 국왕. 하다못해 그에 걸맞은 인간이 나와서 나를 맞이하게 했어야지! 오늘 그놈의 태도는 도대체 뭐란 말이냐!"

"죄송합니다. 오라버니가 직접 오실 줄 알았다면 좀 더 준비를…."

"말대답하지 마!"

카를의 발길질에 맞은 올리엔이 바닥을 굴렀다.

'참아야 해...'

이 정도 구타는 올리엔에게 익숙한 일이었다.

그녀는 신음조차 내지 않고 다시 무릎을 꿇었다.

"죄송합니다..."

"앞으로 절대 내가 말하기 전까지는 나서지 마라. 천한 네년이 반쪽짜리 피를 이어받았다고 해서, 왕족이 되는 게 아니라는 말이다."

"명심하겠습니다..."

"또다시 아까처럼 내가 말하는 도중 끼어들거나 건방진 짓을 하면, 그때는 각오하는 게 좋을 거야."

"예."

"퉷! 꺼져라. 창녀의 냄새가 진동하는군."

부들거리는 다리로 겨우 일어선 올리엔이 허리를 숙였다.

"이만 물러가겠습니다."

밖으로 나온 올리엔이 한숨을 내쉬었다.

그사이 그녀의 몸에는 많은 멍이 생긴 상태.

왕실 기사들은 그런 올리엔을 흘깃 바라봤지만,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그럼 여러분도 수고하세요."

올리엔은 해맑게 웃으며 왕실 기사들에게 인사했다.

"..."

대답은 없었다.

올리엔이 조용히 자신의 방으로 향했다.

복도를 걷는 올리엔의 입술은 꽉 깨물어져 있었고, 그 사이로 피가 흘러나왔다.

**

다음 날.

올리엔은 아침 식사조차 하지 못한 채 카를의 방에 불려왔다.

"이곳의 상황에 대해서는 대충 들었다. 길드, 능력자, 던전, 몬스터 이런 것들이 있다지?"

"예."

밤사이 정보를 들은 것인지 카를이 이런저런 것들을 물어왔다.

"네가 신세를 지고 있던 배데스? 길드라는 곳이 이 나라에서 가장 강한 길드라고 들었다."

"예..."

"오늘은 그곳부터 가도록 하겠다. 이 땅의 능력자란 것들은 영 못 미더워서 말이야. 그래도 국가에서 가장 유명한 용병 단체라면 제법 수준이 높겠지."

카를이 피식 웃으며 말했다.

'어떡하지...'

올리엔은 고민했다.

카를이 배데스 길드로 가서 무슨 짓을 벌일지 모르는 상황.

자신에게 친절하게 대해준 그들에게 해가 될 수도 있는 것이다.

"왜 대답이 없지?"

"아닙니다. 바로 안내해 드리겠습니다."

올리엔이 조심스럽게 카를을 바라봤다.

"오라버니. 하나만 여쭤봐도 되겠습니까?"

"뭐?"

순간 카를의 얼굴이 구겨졌으나, 이내 선심을 쓴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말해봐라."

"혹시 따로 안내를 맡은 이곳의 사람은 없는 건지요...?"

"흥. 그 신태길이라는 남자가 시종을 붙여준다 했으나, 내가 거절했다. 우선 내 눈으로 직접 이곳을 둘러보고 필요한 것이 있으면 그때 설명을 들어도 늦지 않겠지."

"예..."

즉 신태길의 허락이 떨어졌다는 말.

역시 자신에게 선택권은 없었다.

"당장 가도록 하지. 이곳의 문명은 상당히 신기하단 말이야. 음식도 제법이고. 첫인상과 달리 꽤 마음에 드는 곳일지도 모르겠어. 하하!"

카를이 속 편한 소리를 하며 밖으로 나섰다.

그 뒤를 따르는 스무 명의 기사와 마법사.

올리엔은 그 끝에서 고개를 숙인 채로 조용히 걸었다.

'제발 아무 일도 없었으면 좋겠는데...'

**

배데스 길드 사무실.

"오신다는 연락을 받았습니다. 배데스의 부길드장. 신성아라고 합니다."

신성아는 갑작스럽게 찾아온 손님을 웃으며 맞이했다.

-신성아 씨. 부탁드리겠습니다.

-지금은 강현 님이 안 계십니다만.

-신성아 씨가 부길드장이지 않습니까? 안유성 씨에게 이런 일을 맡길 수도 없고...

불과 한 시간 전 신태길이 전화해서는 간곡하게 부탁한 일이었다.

신성아는 거절하려 했지만, 차마 신태길의 부탁을 모른 척할 수는 없었기에 결국 받아들이고 말았다.

"헤이그란 왕국의 왕자. 카를 헤이서스네."

카를 헤이서스가 신성아를 위아래로 훑어봤다.

'가장 강한 용병들이라 해서 기대했건만... 수준 이하군.'

마력으로 신성아의 수준은 그리 높아 보이지 않았다.

잘 쳐줘도 시골 영지의 기사단장.

왕실 기사단에는 입단조차 불가능해 보이는 수준이다.

"이곳은 무얼 하는 공간인가?"

카를이 오만한 표정으로 주위를 둘러보며 말했다.

"길드 내의 업무를 보는 사무실입니다."

"업무라... 연병장은 없는 건가?"

"길드원들을 위한 훈련장이 하나 있습니다."

"훈련장을 보고 싶네만."

어느 정도 이곳에 익숙해진 카를은 완전히 하대하고 있었다.

'한낱 용병일 뿐이야.'

그런 카를에게 신성아는 최대한 깍듯이 대했다.

"안내하겠습니다."

훈련장은 사무실에서 그리 멀리 떨어져 있지 않다.

잠시 후.

훈련장에 들어선 카를이 가볍게 감탄했다.

"숫자가 제법 많구만."

훈련장에는 약 오십 명의 길드원들이 훈련 중이었다.

길드원들에게는 미리 손님이 온다고 말해두었기에, 이곳에 관심을 가지는 이는 없었다.

"자네 용병단의 규모가 어떻게 되나?"

"전투원들 기준으로 300명이 조금 넘습니다."

"오호..."

카를이 눈에 이채를 띄었다.

'만약 300명이 모두 이런 수준이라면 제법이야.'

부단장이라는 신성아는 예상보다 약해 실망했지만, 단원들의 평균적인 전력이 높은 듯했다.

대륙에서도 이 정도 수준과 규모를 갖춘 용병단은 드물었다.

'어지간한 영지의 기사단 두세 개 정도의 전력은 되겠어.'

훈련장을 흐뭇하게 보던 카를이 신성아에게 고개를 돌렸다.

"혹시 자네가 용병단 내에서 얼마나 강하지? 부단장이라면 두 번째인가?"

그 말에 신성아가 잠시 고민했다.

"음... 두 번째는 아닙니다. 하지만 적어도 다섯 손가락 안에는 들 것 같습니다."

"그렇군. 그러면 저기 있는 저 남자는 얼마나 강한가?"

카를의 손끝이 한 남자를 가리켰다.

바로 안유성이었다.

안유성을 본 신성아가 눈살을 찌푸렸다.

'분명 훈련장에 없는 걸 확인했는데... 언제 온 거지?'

만일을 대비해 안유성이 없다는 것까지 확인하고 온 신성아였다.

'안유성 씨와는 안 부딪히게 하고 싶었는데...'

안유성은 어디로 튈지 모른다.

그는 계산적인 남자였지만, 그러면서도 철저하게 욕망에 따랐다.

그렇기에 일반인들은 상상할 수 없는 생각을 하고 그것을 행동으로 옮겼다.

"저 남자는 얼마나 강하냐고 물었네만."

카를의 말에 신성아가 상념에서 깨어났다.

"그는 저와 마찬가지로 길드의 부길드장입니다. 길드 내에서는 아마 길드장님 다음으로 강할 겁니다."

"부단장이 두 명이었군! 저 남자와 대화를 나누고 싶네만."

카를의 말에 신성아가 고민하는 기색을 내비쳤다.

"지금은 훈련 중이라 어려…."

신성아가 완곡하게 거절하려던 찰나,

"누나. 무슨 일이에요?"

안유성이 먼저 이곳으로 다가왔다.

'젠장.'

신상아가 속으로 욕을 삼켰다.

"길드의 손님이십니다."

"손님? 그런 이야기 못 들었는데?"

"올리엔 씨가 온 왕국의 왕자님이라고 합니다."

"아..."

신성아의 말에 안유성이 씨익 웃었다.

"반갑네. 헤이그란 왕국의 왕자 카를 헤이서스라고 하네."

"안유성이에요."

안유성이 예를 갖추지 않았지만 카를은 신경 쓰지 않았다.

'예법에 무지한 놈들이라 하니, 관대한 내가 참아야지.'

카를의 생각에 인간들은 굉장히 몰상식했다.

지금 눈앞에 있는 안유성이라는 남자만 봐도 온갖 해괴한 그림을 몸에 그려서 보기만 해도 눈살이 찌푸려지는 모양새였다.

하지만 자신은 이곳에 원하는 것이 있다.

어느 정도 불편은 어쩔 수 없이 안고 가야 한다.

"조금 지켜봤는데, 자네 솜씨가 상당히 괜찮은 것 같더군. 무기를 손에 쥔 지는 얼마나 됐나?"

"음... 2년 정도 됐네요."

"2년이라! 대단한 재능이야! 미래가 창창한 친구였어! 그렇지 않나?"

카를의 말에 옆에 서 있던 왕실 기사가 고개를 끄덕였다.

"예. 2년 만에 저 정도 경지라면, 왕실 기사단에 들어오는 것도 무리가 아닐 것 같습니다."

"역시 벨티오 경도 그렇게 생각하는군!"

카를이 흐뭇한 미소를 지었다.

"자네 이름이 안..."

"안유성이요."

"그래. 안유성! 혹시 이 용병단에서 어느 정도 보수를 받고 있지?"

"딱히 고정적인 건 없고, 그냥 하는 만큼 받죠."

원래 배데스 길드의 모든 직원, 길드원은 고정적인 월급이 있다.

거기에 전투 요원의 경우 성과에 따라 추가적인 성과급을 지급했다.

하지만 안유성은 원래 돈이 썩어날 정도로 많은 부자.

강현과 함께 다니며 던전의 부산물을 처리하면 돈을 받기는 하나, 딱히 고정적인 임금은 없었다.

안유성 본인이 거절했기 때문이다.

"이런 인재에게 지원을 못 해줄망정...! 이곳도 그렇게 풍족한 삶을 사는 것은 아닌가 보군그래."

그 사실을 모르는 카를이 과장되게 반응하며 안타깝다는 듯 혀를 찼다.

"자네. 혹시 나와 함께 일해볼 생각 없나? 내가 왕실 기사단에 자네를 추천하지. 자네는 잘 모르겠지만, 이건 엄청난 혜택이야."

카를의 말에 안유성이 씨익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역시! 좋아할 줄 알았네. 왕실 기사단에 들어오면 자네는 지금보다 훨씬 강해질 거야! 최고의 부와 명예를 누리는 것은 물론이고, 온갖 미녀들을 독차지할 수 있지. 자네가 원하는 건 뭐든 할 수 있다네."

"네."

일이 너무 순조롭게 풀렸다.

카를이 미소를 지으며 안유성의 어깨에 손을 올렸다.

"그럼 당장 이런 용병단 따위는 때려치우고, 나오도록 하지. 내가 지금까지와 비교도 하지 못할 만큼 새로운 세계를 보여주겠네."

"싫은데요."

"역시. 그렇게 말할... 뭐..?"

"싫다고요."

한순간에 얼어붙은 분위기.

옆에서 지켜보던 신성아가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이럴 줄 알았어...'

결국, 사고가 터지고 말았다.

157화 인간 실격(2)

157. 인간 실격(2)

"싫다고요."

안유성이 생글생글 웃었고, 그럴수록 카를 헤이서스의 얼굴은 점점 더 굳어갔다.

카를이 통역 마법을 사용하는 마법사를 바라봤다.

"지금 통역이 제대로 되는 게 맞는 건가?"

"예. 맞습니다..."

마법사가 덜덜 떨면서 말했다.

카를의 얼굴이 분노로 인해 벌겋게 달아올랐다.

'이 천한 놈이 감히...'

놈은 감히 왕족인 자신을 웃음거리로 만들고 있었다.

살면서 한 번도 받아보지 못한 굴욕적인 처우였다. 카를이 안유성을 죽일 듯이 노려봤다.

"감히... 감히 나를 능멸해!?"

"능멸이라고요? 어째서 그렇게 생각하는 거지?"

"뭐라..?"

"나는 처음부터 길드를 나갈 생각이 없었는데요?"

"그 입 닥쳐라!"

결국 폭발한 카를이 소리를 질렀다.

"누나. 이 아저씨가 왜 소리를 지르는 거예요? 이해가 안 되네."

안유성이 낄낄거리며 말했다.

"멈춰라. 더 이상 왕실을 능멸하면 목을 베어버리겠다."

카를의 뒤에 서 있던 왕실 기사가 참지 못하고 검을 뽑아 들었다.

"오호, 목을 베어버린다... 그것도 재미있겠네요. 크큭."

분위기가 심상치 않자 훈련을 하던 길드원들이 모여들었다.

"부길드장님. 무슨 일 있습니까?"

"손님이라더니. 이것들은 뭔데 여기서 깽판이야?"

하나같이 험악한 인상파 길드원들이 안유성의 뒤로 잔뜩 모여들었다.

그에 대항하듯 카를을 따라온 스무 명의 기사들 또한 검을 빼 들고 카를의 주위로 모였다.

20명의 기사와 50명의 길드원이 대치한 상황.

'싸우게 된다면... 아마 우리가 지겠지?'

안유성은 빠르게 상황을 파악했다.

길드가 수적으로는 우세하지만, 전반적인 실력에서는 밀릴 것 같았다.

게다가 왕자의 옆에 있는 화려한 갑옷을 입은 둘.

'저 둘은 일대일로도 이기기 힘들겠어.'

두 명의 왕실 기사는 강현이 와야만 처리가 가능할 것 같았다.

'그러면 이제 어떻게 하면 좋을까...'

일촉즉발의 위기상황.

하지만 안유성에게는 이 또한 일종의 이벤트였다.

안유성이 어떻게 하면 이 상황을 자신에게 유리하게 끌어올 수 있을지 고민할 때였다.

옆에서 발을 동동 구르던 올리엔이 보다못해 나섰다.

"오라버니... 이들과 싸우시면 문제가 생길 수 있습니다."

"내가 끼어들지 말라고 했지!"

카를이 올리엔을 향해서 손을 들어 올렸다.

'후우... 참아야 한다.'

카를이 필사적으로 화를 억눌렀다.

천한 시녀에게서 태어났다고 하나, 어쨌든 왕실의 일원이다.

남들이 보는 앞에서 올리엔에게 폭력을 행사할 수는 없었다.

카를이 올리엔을 잡아채며 귓가에 속삭였다.

"네가 반쪽이라도 왕가의 피를 이은 것을 다행으로 여겨라. 그게 아니었으면 당장 목을 쳤을 테니."

"죄송합니다..."

"오늘 밤. 내 방으로 와라."

"예..."

카를이 올리엔을 거칠게 밀쳐냈다.

그리고는 얼굴에 미소를 띠며 안유성을 바라봤다.

"하하. 그렇구만. 내가 아직 이곳에 익숙지 못해서 오해를 했나 보군. 자네들도 모두 검 집어넣게. 타국에 와서 이게 무슨 민폐인가?"

카를의 말에 기사들이 물러나며 검을 회수했다.

"이곳에서 볼일은 끝난 것 같으니 이만 가보겠네."

카를의 말에 신성아가 그를 밖으로 인도했다.

"잘가요."

그 모습을 보며 안유성이 싱긋 웃으며 손을 흔들었다.

카를은 다시 화가 치밀어올랐지만, 필사적으로 억눌렀다.

"자네들도 편히 쉬게."

억지로 미소를 지었지만, 입꼬리가 잘게 떨리는 것까지 숨기지는 못했다.

안유성은 카를이 떠나가자마자 웃음기를 지우고 정색했다.

"오늘 밤이라..."

**

"흐아! 깔끔하네!"

방송을 종료한 강현이 힘껏 기지개를 켰다.

"보자... 시간이 벌써 이렇게 됐나?"

새벽에 베하 쿨사를 처치하고, 돌아와서 나머지 일을 처리하니 이미 늦은 오후였다.

"다시 한국 돌아가려면 후, 생각만 해도 치가 떨리네."

오늘 길에는 에든 덕분에 다른 도시를 거치지 않고 곧장 플로리다까지 날아왔다.

그럼에도 12시간이 넘는 시간이 걸렸다.

돌아가는 길에 이런저런 도시를 경유하면 얼마나 걸리지 감도 잡히지 않았다.

"에든한테 다시 태워달라고 할까?"

강현이 은근히 에든에게 시선을 보냈다.

"왜 그렇게 쳐다봐?"

"에든. 혹시 한국 다시 갈 생각 없어? 너 한국에 무슨 지부도 만들고 해야 한다면서."

"아냐. 지금은 미국에서 해야 될 일이 밀려서. 몇 주 뒤에나 한국에 갈 거야."

"쳇."

혀를 찬 강현이 한숨을 내쉬었다.

"그냥 가야 되나."

어차피 돈은 썩어날 정도로 많다.

퍼스트클래스를 타고 가면 그렇게 힘들지는 않을 것이다.

"지루한 건 좀 참지 뭐."

그렇게 생각하던 찰나, 강현의 핸드폰이 울렸다.

"네가 무슨 일이냐?"

-형. 일은 끝났어요? 보니까 조금 전에 라이브 했던데.

전화 너머로 안유성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당연하지. 내가 누구냐. 화끈하게 끝냈어. 흐흐. 이번에 얼마나 벌었는지 알면 놀라 쓰러질걸?"

-얼마나 벌었는데요?

"1억 달러다. 달러! 크하하! 부자다 부자!"

-오. 제법 벌었네요. 이참에 형이 타고 다니는 똥차 좀 바꿔요.

"제법? 제버업? 이 새끼 누가 금수저 아니랄까 봐, 반응이 그것밖에 안 돼?! 그리고 내 번틀 리가 어때서! 잘 굴러가 인마!"

강현이 화를 내자 안유성이 키득거리며 웃었다.

"그나저나 왜 전화했어? 또 심심하냐?"

배데스 길드가 유명해지면서, 사람들은 강현이 바빠졌으리라 생각하지만 의외로 그렇지 않았다.

길드의 업무는 대부분 한재문이 처리했기 때문에 강현은 예전처럼 훈련장과 던전을 오갈 뿐이었다.

그런 상황이 반복되니 안유성과 신성아가 가끔 심심하다고 칭얼대는 경우가 있었다.

-그건 아니고. 일이 하나 생겨서요.

"일? 무슨 일인데?"

-한국에 좀 빨리 올 수 있어요?

안유성은 강현의 물음에 대답하지 않았다.

"글세... 빨라도 내일 저녁? 잘 모르겠네. 더 늦을 수도 있고."

-흠... 그러면 안 되는데.

"왜? 무슨 일인데?"

강현이 인상을 찌푸리며 물었다.

-올리엔 누나가 좀 위험한 것 같아서요.

"뭐? 그게 무슨 말이야. 설마 이 새끼들이 뒤통수친 거야?"

강현은 자신이 떠난 사이 미국에서 다시 올리엔에게 접근한 것이라 생각했다.

-그게 아니라. 이번에 누나가 온 왕국이라는 곳이랑 접선하기로 했잖아요. 거기서 문제가 좀 생겼어요.

안유성은 자신이 본 것과 들은 것을 총동원해서 강현에게 설명했다.

그 과정에서 약간의 과장이 들어갔음은 물론이다.

"그거 완전 때려죽일 새끼네!"

-그렇다니까요. 오늘 안 오면 올리엔 누나가 위험할 수도 있어요. 아까 보니까 멍 자국 같은 것도 있고 장난 아니더라고요.

"돌아가면 뒤졌다. 딱 기다리라고 해!"

강현의 눈에 불길이 일었다.

'때릴 게 없어서 그 쪼만한 애한테 손을 대?'

올리엔은 강현보다 한 살 어렸는데, 한국식으로 하면 스물여덟 살이었다.

그리 어린 나이는 아니었지만 작고 귀여울 때 외모에, 워낙 밝은 성격을 가져서 그런지 정말 동생처럼 느껴졌다.

그것은 강현뿐만 아니라 다른 길드원들도 마찬가지.

며칠 사이에 길드의 마스코트가 된 올리엔을 떠올리며 강현이 주먹을 꽉 쥐었다.

"빨리 돌아가야겠어..."

잠시 고민하던 강현이 어디론가 전화를 걸었다.

**

최시현은 국내 최대의 암시장을 운영하는 간부 중 하나였다.

"요즘은 영 재미있는 일이 없네."

사무실에 앉아있던 최시현은 얼마 전 일을 떠올렸다.

"강현... 재미있는 사람이었지."

정말 같이 다니는 내내 조마조마하게 하고, 결국은 사고를 쳐서 그녀를 피곤하게 한 강현.

하지만 이상하리만큼 그 마지막이 잊혀지지 않았다.

"가끔은 같이 놀아도 좋을 것 같은데 말이야..."

중얼거리던 최시현이 화들짝 놀랐다.

"내가 방금 뭐라한 거야!? 미쳤나 봐. 하하!"

그렇게 최시현이 혼자서 북 치고 장구 치고 다 하던 도중이었다.

최시현의 전화가 울렸다.

"이건 업무용이 아닌데? 누구지?"

자신이 사적으로 사용하는 핸드폰.

그곳에서 벨소리가 흘러나오고 있었다.

"강현...?"

짧은 순간 수많은 생각이 스쳐 갔다.

'받을까? 귀찮을 것 같은데... 안 받으면 해코지하는 거 아냐? 어떡하지?'

고민은 짧았고, 행동은 빨랐다.

"네. 최시현이에요."

-저 강현인데요.

"알고 있어요. 무슨 일이죠?"

-그 순간이동 하는 거 뭐야? 그래. 포탈 한 번만 빌립시다.

역시 받지 말아야 했다. 라는 생각이 스쳤다.

"포탈은 갑자기 왜..."

-제가 지금 미국인데, 한국으로 급하게 가야 할 일이 있어서요.

강현의 말에 최시현이 인상을 찌푸렸다.

"암시장은 그러려고 있는데 아닌데요...?"

물론 사나운 인상 달리 전하는 말은 굉장히 조심스러웠다.

-얼마면 돼요!?

"네?"

-얼마면 되냐고요! 이용료 낼게요. 급하니까 빨리 좀 부탁해요.

최시현이 생각에 잠겼다.

'돈을 낸다면야 해줄 수 있긴 한데...'

금액이 문제다.

자신은 암시장의 간부.

이미 엄청난 돈을 벌어들이는데 푼돈이 움직인다는 것은 말이 되지 않는다.

게다가 강현과 함께하는 일은 그게 무엇이든 간에 상당한 리스크가 따른다.

"얼마나 주실 수 있는데요?"

-일억. 잠깐 이용하는데 이 정도면 되지 않아요?

"일억이요?"

예상보다 큰 금액에 최시현의 눈이 동그랗게 떠졌다.

'나쁘지 않네.'

어차피 이동에 대한 인프라는 갖춰진 상태다.

잠깐 움직여서 강현을 옮겨주고 그 대가로 1억이면 충분히 좋은 수익이었다.

-왜요. 부족해요? 그럼 2억으로 하죠.

"아뇨아뇨! 1억이면 충분해요."

하는 일에 비해 너무 과한 대가를 받으면 탈이 나는 법이다.

'그나저나 돈이 많나 보네... 미국에 스카우트 됐다는 말이 있던데, 정말인가?'

최시현은 혹시 강현이 한국을 뜨는 것인가 하고 생각했다.

"그러면 바로 부탁할게요."

-네. 현재 정확한 위치가 어디죠? 거기서 가장 가까운 암시장 입구에 직원을 대기시켜 놓을게요.

**

카를 헤이서스가 묶고 있는 호텔 방은 비싼 만큼 넓고 화려했다.

그런 호텔에서 무전취식을 하는 놈팡이 카를.

원래라면 아무런 걱정 없이 기분 좋은 저녁을 만끽했어야 했지만, 오늘은 달랐다.

"감히 다른 놈들이 보는 데서 나에게 반항해? 내가 그렇게 만만하게 보이더냐!"

카를이 올리엔의 뺨을 올려붙였다.

짜악- 하는 소리가 울리며 올리엔의 고개가 홱 돌아갔다.

"내가 분명 나서지 말라고 했을 텐데? 왕궁에서 교육한 것을 그새 잊었나? 아니면 알면서 그러는 것이냐?"

"아닙니다. 죄송합니다..."

눈은 마치 죽은 사람처럼 빛이 꺼진 눈동자.

올리엔은 아무런 감정이 없는 눈으로 대답했다.

"죄송하다는 년의 태도가 이것밖에 안 돼!?"

씩씩대던 카를이 발로 올리엔을 걷어찼다.

"이유가 뭐냐? 왕궁을 벗어나니 온 세상이 네 것 같더냐!?"

"아닙니다..."

"아니면 그 건방진 놈이 너에게 친절을 베푸니 정이 가더냐? 그래서 그 천한 몸뚱이라도 받쳤느냐?"

"그런 건 절대 아닙니다."

올리엔이 정말 억울하다는 얼굴로 카를을 바라봤다.

"그런데 왜에!!!"

카를의 미친 사람처럼 소리를 질렀다.

"너는 항상 그랬지. 천한 종년에게서 태어났으면서 주제를 모르고 나부댔다. 내가 아무리 교육을 해도 그것만은 바뀌지 않았어."

입술을 핥은 카를이 욕망에 들어찬 눈으로 올리엔을 바라봤다.

"이곳은 왕궁이 아니니... 이참에 제대로 된 교육을 하는 것도 좋겠지."

카를이 거칠게 올리엔의 목을 움켜쥐었다.

"커헉, 컥! 죄, 죄송합니다! 제발!"

"닥쳐!"

카를이 재차 올리엔의 뺨을 후려쳤다.

"얌전히 있어라. 이곳에는 너와 나. 둘 뿐이다. 네가 죽는다고 해서 신경 쓸 이는 아무도 없다는 말이다."

카를의 눈이 광기로 번들거렸다.

"왕궁에 사고로 죽었다는 소식을 전하기 싫으면 가만히 있는 게 좋을 거야."

카를의 말에 올리엔이 고개를 푹 숙였다.

'그만 포기하자...'

이제 한계였다.

왕궁을 벗어나고, 드디어 해방됐다고 생각했지만, 착각일 뿐이었다.

'그래. 포기하고, 받아들여.'

올리엔의 눈에서 눈물이 흘러나왔다.

그 모습을 보며 카를이 더욱 기괴하게 웃음을 지었다.

"좋구나! 그대로 있거라. 크흐흐. 몸종을 데려오지 못해서 근질근질했는데... 지금 생각하니 잘한 일이었어."

카를의 마수가 올리엔의 턱을 훑었다.

"이 오라버니가 진짜 교육이 뭔지 알려주지."

그 순간.

밖이 소란스러워지기 시작했다.

"중요한 순간에 흥을 깨는군."

카를이 잠시 인상을 찌푸렸지만, 이내 다시 올리엔을 바라봤다.

"기사들이 알아서 처리하겠지."

이곳에는 절대, 아무도 들이지 말라고 엄명을 내려 두었다.

누가 찾아오든 자신을 방해할 수는 없다.

분명 그래야 했건만, 소란은 가라앉을 줄 몰랐다.

계속되는 소음에 흥이 식어버린 카를이 벌떡 일어났다.

"하아... 도대체 뭐냔 말이다!"

그 순간,

-콰아아앙!

호텔의 고풍스러운 나무문이 박살 났다.

"나다! 이 개새끼야!"

158화 인간 실격(3) 20.01.1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