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2화 무자비한 폭군(4)
102. 무자비한 폭군(4)
"다들 알다시피 오늘은 던전 공략 시범이 있는 날입니다."
B등급 던전 거인의 협곡.
마치 거인국에 온 듯한 거대한 지형에 10m가 넘어가는 거인들이 등장하는 극악의 난이도를 자랑하는 던전이었다.
솔직히 말하면, 배데스 길드의 정예인 공략 1팀도 상당히 무리를 해야 하는 곳이었지만, 강현은 시각적인 효과를 극대화하기 위해서 이 던전을 선택했다.
-길드장님. 거인의 협곡은 너무 위험하지 않겠습니까...?
-언제는 뭐 안 위험하게 던전 공략했어요? 보스를 잡는 것도 아니고 몬스터만 설렁설렁 잡다가 나올 거니까 충분할 거예요.
-...
-왜요? 불만이에요?
-아닙니다...
한시환은 똥을 한가득 씹은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일 수밖에 없었다.
"원래 교육 내용은 조교들의 공략을 지켜보는 거지만, 제가 누굽니까! 이번에는 특별히 배데스의 정예인 공략 1팀이 사냥하는 것을 견학하기로 했습니다."
강현이 웃으며 말했지만, 교육생들의 굳은 얼굴은 펴질 줄 몰랐다.
"교육장님... 여기 너무 위험한 것 아닌가요?"
"맞아. B등급 던전이라니... 10대 길드들도 목숨 걸고 공략하는 곳이잖아."
교육생들은 갑자기 들어오게 된 상급 던전에 완전히 얼어붙어 있었다.
"어허! 원래 던전 공략이 목숨 걸고 하는 거지. 이 정도 깡도 없으면서 능력자를 하려고 해?"
"..."
"어차피 싸우는 것도 아니고 구경만 하는 거고, 만일의 상황에는 제가 직접 나설 테니 다들 마음 편하게 있어요."
교육생들은 지난 며칠간의 교육으로 강현과 대화가 통하지 않는다는 것을 깨달았기 때문에 얌전히 고개를 끄덕였다.
"오, 때마침 오네."
그때 던전 입구로 걸어오고 있는 한 무리의 사람들이 보였다.
"소개합니다. 배데스 길드의 정예. 공략 1팀입니다."
공략 1팀은 전원이 울상을 하고 있었다.
졸지에 예정에도 없던 고난도의 던전을 공략하게 되었으니 당연한 일이었다.
"쓰으읍. 전부 얼굴 펴라. 불만 있으면 한시환 팀장에게 이야기하고."
쪼잔함의 극치였다.
솔직히 회식비용이 500만 원이 넘어갔을 때는 한시환도 미안해하긴 했다.
'아무리 그래도 이건 너무한 거 아니냐고!'
한시환은 다시는 강현에게 회식 가자는 말을 하지 않으리라 다짐했다.
"그럼 공략을 시작하겠습니다. 여기 등장하는 협곡 거인은 주로 단독 행동을 하니, 거리만 잘 유지하면 교육생 여러분들이 위험할 일은 없어요."
"예..."
"가자!"
그렇게 누구도 원하지 않는 던전 공략이 시작됐다.
**
강현은 마력 감지로 몬스터를 찾아 나섰다.
다행히 바로 인근을 배회하고 있는 거인을 발견할 수 있었다.
"저게 뭐야...?"
"무슨 몬스터가 빌딩 같아. 저렇게 큰 몬스터는 영상에서도 못 봤는데."
10m가 넘어가는 몬스터의 압도적인 위용.
대부분의 교육생은 실제로 몬스터를 본 적 조차 없다.
그런데 생에 처음 마주하는 몬스터가 말 그대로 거대 괴수이니 경악하는 것이 당연했다.
"다들 대형 몬스터 공략 포메이션 알지? 훈련대로 움직인다!"
"예."
한시환의 공략팀은 막상 몬스터를 마주하자 언제 그랬냐는 듯이 호전적인 모습을 보였다.
그들은 거의 매일이 전투의 연속이었기에 놀라운 일도 아니었다.
"흐아압!"
-콰아아앙!
인간과 거인의 대결.
잠깐의 방심은 목숨의 위기로 이어진다.
거인은 압도적인 무게 그 자체가 무기였기에, 공략팀은 어떠한 공격도 허용하지 않으려 주의했다.
"크악!"
그러나 전투는 항상 예상처럼 흘러가지 않는다.
거인이 휘두른 주먹이 협곡을 때리고, 거기에 생겨난 파편에 몇몇 길드원이 쓸려나갔다.
"공격을 피하는 걸로는 부족해! 아예 그 동선에서 미리 떨어져 있어!"
"팀장님. 그러기엔 공격이 너무 빠릅니다!"
"둔화 마법 사용해!"
-콰아아앙!
공략팀이 싸우는 모습은 제법 멋이 났다.
압도적으로 거대한 몬스터와 그에 맞서는 전사들.
강현이 원하는 시각적인 효과는 충분히 나타나고 있었다.
"대단해..."
"확실히 배데스 길드가 강하기는 하구나."
"저기 한시환 팀장이라는 사람. 원래 수호자 길드의 부길드장이었대."
"뭐? 길드 랭킹 5위였던 그 수호자 길드?"
"어. 망하기 전까지 부길드장 맡고 있었다더라."
교육생들은 연신 감탄했다.
손에 땀을 쥐게 하는 아슬아슬한 상황이 끊임없이 벌어지는 숨 막히는 전투.
영상이 아닌 현장에서만 느낄 수 있는 박진감.
그들은 완전히 전투에 몰입했다.
그중에는 눈을 초롱초롱하게 빛내는 최연화도 포함되어 있었다.
'아직은 그렇겠지.'
강현의 목적은 최연화를 겁먹게 해서 그만두게 만드는 것이다.
이대로라면 오히려 원래의 계획에 크게 어긋나는 것.
하지만 강현은 걱정하지 않았다.
'조금만 기다려라.'
아직은 공략 초반이다.
공략팀의 체력과 컨디션이 최상이기에 이렇게 멋진 장면이 연출되는 것도 당연한 일.
'하지만 시간이 지나면 다르지.'
던전 공략은 언제나 최상의 컨디션으로 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시간이 지날수록 자연스레 체력이 빠지고, 집중력이 흐려진다.
그럴수록 예상치 못한 돌발 상황이 벌어질 확률은 높아진다.
즉, 공략이 길어질수록 위험한 상황이 늘고, 한 순간의 실수로 죽음에 이른다.
'그걸 견뎌내면 더 강해지는 거고. 아니면 죽는 거지.'
세 마리의 거인을 연달아 쓰러뜨리고, 네 번째 거인과의 전투.
그동안 한 번도 쉬지 않고 전투를 계속했기에 공략팀은 상당히 지친 모습이었다.
"이런, 조심해!"
"크하악!"
순간 한 길드원이 거인이 휘두른 주먹에 직격 당했다.
단숨에 수십 미터를 날아간 길드원은 교육생들의 근처까지 날아와 바닥에 처박혔다.
공략 이후 처음 발생하는 중상자였다.
"꺄아아악!"
"뭐야? 죽은 거 아니야...?"
"저 사람 완전히 피투성이야."
강현은 무표정한 얼굴로 길드원에게 다가갔다.
"괜찮냐...?"
"끄윽, 끅... 괘, 괜찮습..."
"그래."
고개를 끄덕인 강현이 주위를 두리번거렸다.
"안연화! 어디 있어? 여기 이 친구 좀 살려 놔!"
안연화.
초창기 한시환과 함께 들어온 수호자 길드 출신의 치유사였다.
"예."
처음에 상당히 유약한 성격을 가지고 있던 그녀는 이제 어지간한 부상에는 눈도 깜짝하지 않을 강심장이 되어 있었다.
그리고 치료 스킬 또한 발군으로 성장한 상태였다.
"야. 여기 뼈 뒤틀렸잖아. 이런 거 제대로 안 붙이면 나중에 다시 박살내고 붙여야 한다 했지?"
"죄송합니다."
강현이 손을 뻗어 어긋난 길드원의 뼈를 막무가내로 옮겼다.
"크하아악!"
"쓰읍. 가만히 있어."
"하악, 하악..."
잠시 후. 부상당한 길드원은 어느 정도 회복이 되자 자리에서 일어났다.
"움직일 수 있어?"
"예."
"뛸 수 있어?"
"예."
"그럼 가서 싸워"
"예!"
그리고 곧장 전장으로 합류했다.
교육생들은 그 장면을 보며 입을 다물지 못했다.
"저게 뭐야...?"
"방금 막 죽을 뻔한 사람을 다시 싸우라고 한다고?"
"우리가 지켜본다고 너무 무리하는 것 같은데..."
강현이 씨익 웃으며 교육생들을 바라봤다.
"여러분. 교육 첫날 제가 재능에 대한 이야기를 했죠?"
"..."
"방금 맞아서 날아온 친구는 객관적으로 봤을 때, 재능이 좋은 편에 속합니다. 적어도 중상위권? 정도는 되겠네요."
교육생들은 전혀 믿는 분위기가 아니었지만, 강현은 계속해서 이야기했다.
"그런 사람도 고작 배데스 길드의 공략 팀원으로 속해있기 위해 저 정도 노력을 계속해야 해요. 거짓말이 아닙니다. 그리고 저렇게 개고생 하다가 죽으면? 그냥 죽는 거지."
"..."
"던전에서는 사람 목숨이나 파리 목숨이나 다를 게 없어요. 법? 이 안에서 그딴 게 여러분들을 지켜줄 거 같아요?"
"하지만 교육장님! 최상위 능력자를 목표로 하는 게 아니라 적당히 E등급이나 D등급. 안 되면 F등급 던전만 돌면서 안전하게 사냥만 하면 문제없지 않나요?"
그때 한 학생이 손을 들어 당돌하게 질문했다.
"좋은 질문입니다!"
강현의 눈에 약간의 광기가 깃들었다.
"어려운 던전에 도전하지 않고, 안정성이 높은 사냥만 한다. 쉬울 것 같죠? 예. 쉽죠. 그래서 실제로도 대부분의 능력자들이 그러고 있습니다."
"그러면 문제없는…."
"그런데 그런 야망 없는 인간이 너무 많아."
"예...?"
"현재 E, F등급의 던전이 과포화된지는 한참 지났고 D등급도 거의 꽉 찬 생태입니다. 이게 무슨 말이냐. 지금 남아있는 F에서 D등급 던전은 전부 길드들의 소유 던전이 됐다는 겁니다. 새로 등장하는 던전도 금세 지역의 강한 길드가 차지하죠. 길드가 없으면 사냥도 못해요."
"..."
"지금 이 순간에도 길드들은 서로 돈이 되는 던전. 고작 F등급 던전 하나 차지하기 위해서 서로에게 무기를 휘두르고, 협박을 일삼고, 별에 별 짓을 다 하고 있습니다."
강현의 말에 교육생들의 표정이 무겁게 내려앉았다.
"내가 과장하는 것 같아요? 뭐, 그렇게 생각할 수도 있지. 전부 교육 끝나고 능력자 등록증 발급되면 한번 던전에 들어가 봐요. 어떤 던전을 가던, 길드 가입 전까지는 입구 컷 당할 테니까. 재수 없는 또라이들한테 걸리면 바로 죽을 수도 있고."
강현이 한창 교육생 사기 떨어뜨리기에 열중하고 있을 때였다.
"후우... 길드장님 사냥 끝났습니다."
사냥을 끝난 한시환이 보고를 하기 위해 다가왔다.
"오케이. 죽은 사람 없죠?"
"예."
"마력은?"
"아직 한 번 더 싸울 정도는 남았습니다."
"그럼 바로 이동하죠."
"알겠습니다."
한시환은 한눈에 보기에도 상당히 지친 모습이었다.
저 멀리 보이는 일반 길드원들의 상태는 말할 것도 없었다.
그럼에도 잠시도 쉬지 않고 다음 사냥을 위해 움직이는 모습을 보고 교육생들은 질린다는 표정을 지었다.
"자자, 원래 휴식은 이동하면서 취하는 겁니다."
그렇게 10분 뒤 시작된 다섯 번째 전투.
"우워어어어!"
"크하아악!"
공략팀은 이제 완전히 악과 깡으로 전투에 임하고 있었다.
그 처절한 모습에 교육생들이 가지고 있던 선망, 열정이 깃든 눈은 온데간데없이 사라지고, 이제는 대부분이 집에 돌아가고 싶다는 눈을 하고 있었다.
-쿠웅, 쿵!
"또 온다!"
"팀장님! 한 마리 더 붙었습니다!"
그때 멀리서 또 한 마리의 거인이 걸어오는 모습이 보였다.
이미 상당히 코어에 가까워졌기에 충분히 예상할 수 있는 일.
평소라면 미리 준비하고 대응했겠지만, 오늘은 강현이 지켜보고 있어 더욱 빡빡하게 공략을 진행했다.
이미 지칠 대로 지친 공략팀은 한 번에 두 마리의 거인을 사냥할 여력이 없었다.
"저건 내가 처리할 테니까 다들 싸움에 집중해!"
"예!"
"정종호 씨. 그리고 조교들! 교육생들을 지켜요."
"알겠습니다."
강현이 인벤토리에서 장인의 장검을 뽑아 들었다.
빌게인의 장검은 아직 베일을 완전히 길들이지 못했기에, 실전에서 사용할 만한 상태가 아니었기 때문이다.
"크긴 크네."
거인의 앞에선 강현이 고개를 위로 꺾어 얼굴을 바라봤다.
얼마 전에 사냥한 파나스가 떠오르는 모습이었다.
물론, 전체적인 크기는 날개를 가진 파나스가 훨씬 컸지만 높이는 제법 비슷했다.
"우와아아아!"
거인은 자신의 발치에 있는 강현을 보고 괴성을 내질렀다.
동시에 강현을 짓밟기 위해 힘차게 발을 들어 올렸다.
"아... 귀청 떨어지겠네."
귀를 한번 후빈 강현이 재빨리 거인의 발치로 이동했다.
그리고 검에 마력을 잔뜩 불어넣어 거인의 발뒤꿈치 위에 있는 아킬레스건을 잘라냈다.
"크워어어!"
강현을 밟기 위해 한 발로 땅을 딛고 있던 거인은 몸을 지탱하지 못하고 휘청거렸다.
"이거 무슨 순두부도 아니고 슥슥 잘리네?"
거인의 가죽. 외피는 그 크기에 걸맞게 무척 거칠고 단단하다.
파나스에 비할 바는 아니었지만, 저렇게 쉽게 잘려나갈 성질의 그것은 아니었다.
하지만 그럼에도 강현에게 속수무책으로 잘린 이유는 하나였다.
마력.
파나스는 마력을 운용하는 거대 몬스터로, 외피와 내피 또한 항시 운용되는 마력에 보호받고 있었다.
하지만 거인은 마력을 운용하지 못하는, 말 그대로 덩치만 큰 몬스터일 뿐이었다.
때문에 강현이 검에 불어넣은 마력에 아무런 저항도 하지 못한 것이다.
강현은 이 점을 알고 있었기에 이곳 거인의 협곡을 선택한 것이기도 했다.
"곱게 쓰러져라."
-쿠우웅!
휘청거리던 거인이 바닥에 넘어지며 굉음이 울렸다.
피어오르는 흙먼지 사이로 강현은 재빨리 거인의 뒤통수로 향했다.
"흐읍!"
다시 한번 거인의 목 뒤를 베어낸 강현.
하지만 워낙 거인의 목이 두꺼웠기에 이 정도로는 거인을 죽일 수 없었다.
"크아어어어!"
"시끄러워!"
강현은 베어낸 거인의 상처에 자신의 양손을 깊숙이 찔러 넣었다.
"마력 폭발!"
-퍼엉!
무려 B등급에 달하는 마력 폭발. 거기에 강현이 의도적으로 마력을 과하게 불어넣어 폭발력을 더욱 끌어올렸다.
"크하악!"
그 공격 한 번에 거인은 단말마의 비명과 함께 고개를 바닥에 처박았다.
"쓰읍... 많이 아프네."
강현이 손을 빼내자 단번에 파괴된 로날드의 갑옷이 보였다.
마력 폭발의 위력이 강해진 만큼, 강현의 피부도 단단해졌기에 다행히도 손이 터져나가거나 하는 일어나지 않았다.
"후우..."
마침내 전투가 끝나고, 공략 1팀과 교육생들 전원이 다시 모였다.
"전부 잘 봤죠?"
"..."
"한시환 팀장. 그리고 공략 1팀도 수고했어."
"예."
"대충 내가 느끼기에 한 시간 정도만 더 걸어가면 노말 코어가 나올 것 같거든."
"...?"
이제 공략이 끝나는 줄 알았던 사람들이 강현의 말에 당황한 표정을 지었다.
"집에 가는 거 아닌가요..?"
"무슨 소리야. 돌아가면 반나절은 걸려. 그런데 노말 코어로 가면 중간에 전투하고 휴식하더라도 두 시간 정도면 충분히 도착하겠네."
"..."
"그럼 코어 부수고 포탈 타고 나가면 편하잖아?"
강현의 말에 모두가 침묵했다.
"자, 공략팀! 좀 더 수고하자고."
"예."
"오케이. 가자!"
그렇게 무자비한 폭군의 강행군이 다시 시작됐다.
'으음... 이쯤 되면 질릴 만도 하겠지.'
코어로 향하며 강현이 곁눈질로 따라오고 있는 최연화를 쳐다봤다.
그리고 눈이 마주쳤다.
'뭐, 뭐야..?'
최연화는 처음 왔을 때보다 더욱더 반짝반짝 거리는 눈으로 자신을 바라보고 있었다.
"하아..."
강현은 머리를 쓸어 넘기며 한숨을 내쉬었다.
오늘 계획도 역시나 실패인 것 같았다.
103화 인기 스타(1)
103. 인기 스타(1)
그날 밤.
숙소로 돌아온 교육생들은 모두 녹초가 되어 있었다.
그것은 교육생들 중 강한 편에 속하는 최연화 또한 마찬가지였다.
"후아... 피곤하지?"
"응. 진짜 죽을 것 같아."
비록 이들이 직접적인 전투를 한 것은 아니었지만, 공략 내내 긴장을 유지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게다가 B등급 던전은 마력 농도 또한 굉장히 짙었기 때문에 익숙하지 못한 사람은 피로를 느낄 수박에 없었다.
"얼른 자자."
"응. 연화야 잘 자."
"대한이 너도 굿밤."
그렇게 숙소에 불이 꺼지고, 모두가 잠에 빠져들었다.
-째깍, 째깍, 째깍
자정을 넘긴 시각.
시계 소리만 들려오던 최연화의 숙소에서 부스럭 거리는 소음이 들려오기 시작했다.
"야. 일어나. 너 진짜로 자냐?"
"아으... 오늘 좀 피곤했냐."
"조용히 해. 최연화 깨겠다."
잠든 줄로만 알았던 최연화의 친구들이 하나둘 자리에서 일어나기 시작했다.
"아우. 하루 종일 따라다닌다고 죽는 줄 알았네."
"그러니까. 강현 그 새끼 완전 또라이 아니냐?"
"나는 도중에 몇 번이나 때려치울까 생각했다. 시벌... 어휴."
옷을 챙겨 입고 밖으로 나온 그들은 본격적으로 수다를 떨기 시작했다.
"그나저나 최연화 이년. 어제 강현한테 애교 부렸던 거 생각나냐?"
"으으... 강현 오빵~ 하는 거? 완전 토악질 나와. 우에엑!"
"푸하하하!"
밖으로 나온 이들은 총 다섯 명.
즉, 최연화를 제외한 모두였다.
"강현. 그 새끼도 완전히 정신을 못 차리던데?"
"야. 네가 꼬셔봐. 넘어올지도 몰라. 그 새끼 헤벌레~ 하면서 좋다고 난리 날걸?"
"뭐? 나는 그렇게 야만인 같이 생긴 남자 싫어. 오늘 던전에서 보니까 좀 역하더라."
"푸흡. 야만인이래. 하하!"
이들을 이끌고 있는 것은 정대한이라는 남자였다.
정대한은 국회의원 아버지와 사업가 어머니를 둔 엘리트 집안의 외동아들이었다.
"일단 밖에 좀 나가자. 2주일이나 이딴 숙소에 처박혀 있으라는 게 말이냐?"
"그러니까. 이거 우리 아빠한테 이야기하면 자동으로 졸업 처리될 텐데. 쯧."
"맞아. 최연화가 괜히 직접 교육 와야 된다고 지랄해서 이 고생이잖아."
정대한과 아이들은 수다를 떨며 건물 복도에서 담배를 꺼내 물었다.
"아으, 시벌. 오늘 하루 던전 간다고 참았더니 금단현상 쩔어."
"야야. 술 한 잔 하고 올래?"
"그럴까?"
"세희. 네가 김 비서 좀 불러봐."
"김 비서는 왜?"
"술 좀 사 오라고 시켜. 술집 가지 말고 대충 근처에서 노상이나 까다가 가자."
"그래. 어차피 내일 교육은 들어야 하니까. 룸 잡고 놀면 너무 피곤해."
"시발. 최연화 그년 때문에 이게 뭔 고생이야. 다시 생각해도 존나 빡치네."
최연화와 함께 있을 때와는 180도 다른 모습.
대화 내용도 도저히 이제 갓 20살이 된 학생들이라고는 믿기 힘든 수준이었다.
그렇게 불량 청소년들이 능력자 교육 학교를 벗어나려던 찰나.
야간 순찰을 돌던 조교 한 명이 악당들을 발견했다.
"거기 뭡니까!?"
다급히 달려온 조교가 얼굴을 확인하고는 인상을 찌푸렸다.
"교육생들. 지금 여기서 뭐하는 겁니까?"
"..."
"뭐하는 거냐고 물었습니다."
"조교 아저씨. 신경 끄고 가요. 다치기 전에."
"우리가 누군지 알아? 괜히 허접한 감투 하나 썼다고 나대지 말고 그냥 못 본 척하고 지나가."
정대한과 아이들의 막말에 조교, 안시형은 이성의 끊을 놓지 않기 위해 사력을 다했다.
"교육생들. 지금이라도 숙소로 돌아가면 없던 일로 하겠습니다."
"아나... 진짜 빡치네."
하지만 정대한과 아이들은 정신을 차릴 생각이 없어 보였다.
"이 꼰대 새끼는 말을 못 알아 처먹어!?"
정대한이 얼굴을 구기며 전력으로 주먹을 휘둘렀다.
-퍽!
정대한에게 얼굴을 맞은 안시형이 차갑게 눈을 떴다.
"뭐? 야리면 어쩔 건데!?"
-퍼억, 퍽!
"어쩔 거냐고! 시발!"
그렇게 몇 번을 맞아주던 안시형이 결국 참지 못하고 정대한의 손을 붙잡았다.
"교육생들은 다른 교육이 필요할 것 같습니다."
"뭐야. 이 새끼가 이거 안 놔?"
"놓으라고!"
정대한과 아이들이 필사적으로 달려들었지만 안시형은 꿈쩍도 하지 않았다.
안시형은 능력자 교육 학교에 조교가 되기 전, 나름 중견 길드의 던전 공략팀으로 있었기에 당연한 일이었다.
"그럼 지금부터 정신 교육을 시작하겠습니다."
그렇게 조교 안시형의 정신 교육이 시작됐다.
"끄아아아!"
"꺄악!"
**
다음날 아침.
안시형은 밤새도록 야간 근무를 선 상태에서 숙소로 돌아와 운동을 시작했다.
"후욱, 후욱!"
능력자는 일정 수준에 도달하면 헬스와 같은 근력 운동이 불필요하다.
주위를 둘러보더라도 이런 운동을 하는 능력자는 안시형 자신뿐.
하지만 이것은 그가 능력자가 되기 전부터 항상 해왔던 것이기에, 이제는 그저 하루를 시작하는 의미의 의례적인 행사였다.
"하아..."
그렇게 30분 정도 몸을 풀고 샤워를 한 안시형이 능력자 육성 학교로 출근했다.
조금 피로하긴 했지만, 교육 도중에는 근무 취침과 같은 개념이 없었기에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왔냐."
"어."
가볍게 인사하는 동료들.
학교의 조교가 된 것은 아직 두 달이 채 되지 않았지만 안시형은 만족스러웠다.
기존에 있던 길드는 너무 자신과 맞지 않았던 탓이다.
길드에서는 영역을 차지하기 위해 다른 능력자와 싸우는 일이 흔했다.
몬스터가 아닌 다른 능력자. 즉, 사람과 싸우고 서로를 죽인다는 것은 안시형의 상식에서 절대 받아들일 수 없는 것이었다.
"아, 맞다... 괜찮으려나?"
순간 어젯밤 일이 떠올랐다.
불량 교육생들.
마치 약속이라도 한 듯 기수마다 끼어 있는 사람들이었지만, 어제는 그 정도가 심했다.
안시형은 정말 어쩔 수 없이 강압적으로 폭력을 동원해서 숙소로 돌려보냈다.
내심 그것이 찝찝하긴 했지만, 좋게 생각하기로 했다.
세상 물정 모르는 그들에게도 좋은 교육이 되었을 것이다.
"안시형 조교!"
그때였다.
얼굴이 벌겋게 상기된 정종호가 다급히 달려왔다.
"도대체 무슨 일을 벌인 겁니까!?"
"예...?"
안시형은 정종호가 이렇게 흥분하는 모습은 처음 봤다.
항상 교육장으로써 무게감 있고 진중한 모습을 보이던 평소와는 전혀 다른 모습이었다.
"후우... 어젯밤. 무슨 일이 있었습니까?"
"어젯밤이라면…."
그제야 안시형은 무슨 일인지 알 수 있었다.
"그 불량 학생들이 민원이라도 넣은 건가요?"
"민원... 차라리 민원이었다면 다행이겠지요."
"하지만 저는 정당한 절차대로 했습니다. 교육생이 제멋대로 교육장을 벗어나거나, 위해를 가할 때는 규정에 따라…."
"지금 그깟 규정이 중요한 게 아닙니다!"
정종호가 눈에 불을 켠 채로 호통을 쳤다.
"안시형 조교. 그 아이들 부모가 어떤 사람들인지 압니까?"
"예...?"
"시장, 국회의원, 대기업 사장, 대학 병원 원장까지 그야말로 대한민국 최상위 엘리트 계층에 속한 이들입니다."
"..."
"안시형 조교는 그런 집안의 자식들을 후드려 팬 겁니다. 내가 윗선에서 오는 전화를 오늘 아침에만 수십 통을 받았어요!"
"죄송합니다..."
"하아..."
안시형이 고개를 숙이고 사죄하자 정종호도 더 이상 나무라지 않았다.
그도 사실 안시형의 잘못이 아니란 것을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아무튼 이건 제가 해결할 수 있는 범위를 넘어섰어요. 이번 교육이 끝나면 안시형 조교는 학교에서 퇴출될 겁니다."
"하지만 교육장님…!"
"퇴출 정도로 끝나는 걸 다행으로 아세요! 그리고 안시형 씨. 개인적으로도 조심해야 할 겁니다."
"그게 무슨 말씀이십니까?"
"저도 들은 이야기이지만... 그들은 무서운 사람들입니다. 어떤 위협을 가할지 몰라요. 가족들 안위를 신경 쓰세요."
정종호의 말에 안시형이 인상을 찌푸렸다.
솔직히 애들을 훈육한 것 가지고 너무 과장하는 것이 아닌가 싶은 것이다.
게다가 규정 상 자신이 잘못한 것은 단 하나도 없었다.
"알겠습니다."
하지만 지금은 정종호의 심기를 건드려서 좋을 것이 없기에 얌전히 고개를 끄덕였다.
-우우웅, 우우웅!
그때 안시형의 주머니가 울렸다.
스마트 폰을 꺼내 확인하니 '어머니'라고 쓰여 있는 것이 보였다.
"받아보세요."
"예. 죄송합니다."
평소에 자신이 일하는 시간에는 전화를 거는 법이 없는 어머니였기에, 안시형이 고개를 갸웃하며 전화를 받았다.
"여보세요?"
-시형아!
전화 속 어머니의 목소리는 상당히 다급한 것 같았다.
"엄마?"
-시형아. 이게 무슨 일이냐!? 이 사람들은 뭐고? 응?
"그게 무슨 말이야. 엄마! 지금 어디야?"
-이게 무슨 난리야. 이게! 시형아! 오늘 이상한 사람들이 찾아와서는 가게를 부수고 난리가 났다.
"뭐라고...?"
순간 안시형의 두 눈동자가 정신없이 흔들렸다.
-우리 가게가 불법 건축물에 무슨 위생법을 위반했다고 강제로 철거한단다. 벌금도 무슨 몇 천이라는데... 시형아. 이게 무슨 일이냐. 시형아... 아이고!
홀몸으로 자신을 키운 어머니.
평생 불평, 불만 한번 내뱉은 않은 어머니가 펑펑 울고 있었다.
안시형은 처음 보는 어머니의 모습에 머리가 하얗게 물들었다.
"이제 좀 상황 파악이 돼?"
그때 뒤쪽에서 들려오는 목소리.
안시형이 고개를 돌리자 껄렁껄렁 걸어오는 정대한이 보였다.
"그러니까 나대지를 말았어야지."
"너 이 개새끼! 죽여 버린다!"
순간 이성을 잃고 달려들려던 안시형을 정종호가 붙잡았다.
"안시형! 정신 차려!"
"으아아!"
정대한은 그 모습을 보며 비열하게 웃었다.
"뭐? 치려고? 조교 씨. 감당할 수 있겠어요?"
"닥쳐!"
"이건 그냥 가볍게 맛만 보여준 거야. 진짜 우리를 건들면 어떻게 되는지 보여줘?"
"..."
"엄마는 포장마차 인생. 동생은 그래도 멀끔한 회사에 다니고 있네. 대기업이라. 여기 사장님 번호가 어디 있더라?"
정대한의 말에 안시형의 얼굴이 딱딱하게 굳었다.
"평생 힘들게 공부해서 겨우 들어간 대기업에서 이유도 없이 짤리면 동생이 좋아하겠어? 보니까 실적도 좋은 게 아주 열심히 한다 하더라고?"
"원하는 게 뭐야..."
"우리 조교 씨. 말이 짧네."
"원하시는 게 뭡니까..."
안시형의 말에 정대한이 폭소했다.
"푸흡. 크하하하! 이제야 말이 좀 통하잖아? 응?"
"..."
"일단 따라와. 친구들이 기다리고 있으니까."
엿같은 미소를 지은 정대한이 손가락을 까딱였다.
"어제는 재미 좀 봤지? 이제 우리도 좀 놀아보자고."
**
"크헉!"
"야. 뭐하는 거야? 그렇게 쳐서 되겠어? 이렇게, 발로 까야지!"
"크하악!"
학교 내 구석진 곳에 위치한 화장실.
안시형을 둘러싼 다섯 명의 남녀가 돌아가며 발길질을 가했다.
"조교 씨. 이 씨발아. 이제 정신이 좀 들어?"
"끄으으..."
안시형은 전신이 피투성이였다.
비록 안시형은 능력자고 정대한과 아이들은 일반인들과 다름없다고 해도, 연장까지 이용한 잔혹한 폭력은 그 간극을 메우기에 충분했다.
"그러니까 처음부터 잘했으면 좋았잖아? 응? 사람 봐가면서 건드렸어야지."
"허억, 허억..."
"도대체 왜 그런 거야? 이런 데서 알량한 조교나 하고 있으니까 막 뭐가 된 거 같았어? 그 버러지 같은 노예 신분이 상승한 것 같았냐고. 크큭."
"크하! 대한이 말 진짜 잘한다."
"야. 있어봐 이 새끼 대가리 한 번 더 변기에 처박자. 화가 안 풀리네."
정대한과 아이들은 안시형의 머리를 붙잡고 변기에 처박았다.
그러면서 들고 있던 담배를 목에 지지는 것도 잊지 않았다.
"꾸르르륵... 푸아학!"
"뒤져! 그냥 뒤지라고!"
"하하하!"
그렇게 한참 동안이나 안시형을 고문하던 정대한과 친구들이 담배를 꺼내 물었다.
"후우, 이 짓도 슬슬 힘드네."
"야. 대충 마무리하고 가자."
"그래."
완전히 탈진해서 고개조차 들지 못하는 안시형을 내버려 두고 학생들이 바지춤을 열었다.
"마무리로 성수를 뿌려야지?"
"크큭. 아까 오줌 눠서 안 나올 것 같은데."
"억지로 짜면 나와. 새꺄."
그렇게 그들이 낄낄거리고 있을 때였다.
"네들 뭐하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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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4화 인기 스타(2)
104. 인기 스타(2)
"네들 뭐하냐?"
"뭐야!?"
한창 볼일을 보던 도중 갑자기 등장한 거대한 실루엣.
강현이었다.
"뭐하냐고."
"신경 쓰지 마요."
"너희들 최연화 친구들이지? 여기서 뭐하는 거야?"
"아, 꺼지라고요."
"당돌한 친구들이네."
강현은 어이가 없다는 듯이 그들을 바라봤다.
"최연화는 어디 있어?"
"그년을 왜 여기서 찾아? 꺼지라고. 당신이 배데스 길드장이고 뭐고 우리가 신경 쓸 거 같아?"
"그럼 이 일이랑 최연화는 관계 없는 거구나."
"시발. 자꾸 그딴 년이랑 엮지 말라고!"
결국 강현의 인내심이 한계에 도달했다.
"어린놈의 새끼가 입에 걸레를 쳐 물었나. 오냐오냐 해주니까 밑도 끝도 없이 기어오르네."
"하, 그깟 나이 좀 많다고…."
"내 말 안 끝났다. 어른 말 끊고 들어오면 안 된다고 안 배웠냐? 예의라고는 쥐똥만큼도 없는 새끼."
"그러니까. 내가 왜 당신…"
"이 새끼가 그래도 정신 못 차리네. 학습 능력이 부족한가? 대가리는 존나게 큰데 생각이 없어. 목 위에 달린 그거 혹시 장식이냐?"
"뭐, 뭐!? 대가리가 커?"
"그래. 이 왕대가리 가분수 새꺄. 네 목 위에 달려있는 그 거추장스러운 대가리는 무게중심이나 잡으라고 달려 있는 게 아니라고. 생각이란 걸 해."
정대한은 사실 체구에 비해 상당히 머리가 큰 편이었다.
어릴 적부터 머리가 큰 것이 콤플렉스였는데 강현이 그것을 제대로 건드려 버렸다.
"너 진짜 죽고 싶어!? 내가 누군지 몰라?"
"몰라! 이 씨벌놈아!"
대답과 동시에 강현이 정대한의 뺨을 후려갈겼다.
"크하아악!"
"살살 쳤다. 엄살 부리지 마."
"당신 미쳤어? 여기 이 조교 꼴 나고 싶냐고!?"
"뭐하는 짓이야! 대한아 괜찮아?!"
정대한의 부하 겸 친구들이 목에 핏대까지 세워가며 소리쳤다.
"아. 시끄러워."
인상을 쓰며 귀를 후빈 강현이 벽을 후려쳤다.
-콰과광!
그 위력에 단숨에 콘크리트 벽이 박살나며 굉음이 울렸다.
정대한과 친구들은 단숨에 꿀 먹은 벙어리로 변했다.
"미친 건 네들이고. 꼬맹이 새끼들이 어디서 못된 것만 배워 쳐 먹어가지고 말이야. 네들 부모님이 누구야?"
"..."
"내가 농담하는 것 같아? 부모님이 누구냐고."
"그, 그걸 우리가 왜 말해야 하는데...요."
정대한이 뺨을 부여잡은 채로 조심스럽게 말했다.
"이유가 궁금해?"
"..."
"맞다 보면 이유를 알게 될 거야."
"자, 잠깐! 안 돼!"
"돼."
강현이 그대로 정대한의 뺨을 후려쳤다.
짜악-하는 경쾌한 소리와 함께 정대한의 고개가 홱 돌아갔다.
"크하아악!"
동시에 정대한이 피를 토해냈지만, 강현은 눈 하나 깜짝하지 않고 재차 뺨을 후려쳤다.
"부모님이."
-짜악!
"누구니?"
-짜악!
"누구냐고!"
-짜아악!
반쯤 실신한 정대한을 지키기 위해 친구들이 막아섰다.
"그만해요! 이러다 죽겠어요!"
"그럼 네가 대신 맞아."
-짜아악!
정대한을 지키기 위해 나섰던 친구가 힘없이 바닥에 쓰러졌다.
"꺄아아악! 세희야!"
"방금 여자를 때린 거야!? 완전히 미쳤어!"
"미친 건 네들이고 이 쓰레기 양아치 새끼들아."
피식 웃은 강현이 바닥에 쓰러진 정대한의 친구를 발로 걷어찼다.
"능력자가 되겠다는 놈들이 남자여자 타령이나 하고 말이야. 능력자에 성별이 어디 있어? 레벨 높은 놈이 칼 들고 찌르면 그게 남자든 여자든 그냥 죽는 거야."
"..."
"그리고 그 대사는 너희 같이 재활용도 힘들어 보이는 쓰레기 양아치들이 하기엔 좀 비겁한 말이라는 생각 안 드냐?"
계속되는 강현의 욕설에도 정대한과 친구들은 아무런 대답을 할 수가 없었다.
그저 공포에 몸을 떨 뿐이었다.
"어쨌든 좀 맞자. 간만에 정신교육 한번 들어가야겠네."
"잠깐만요! 말할게요. 말할 테니까. 때리지 마요."
"싫은데?"
"에...?"
"처음부터 너희들 부모님이 누구인지 다 알고 있었어. 신청서에 그렇게 자랑스럽게 적어뒀는데 내가 어떻게 모르냐."
강현의 말에 정대한과 친구들이 당황한 표정을 지었다.
"그러면 왜..."
"그냥. 심심해서. 때릴 구실이 필요했던 거지."
"이런 미친!"
그제야 정대한과 친구들은 정말 제대로 잘못됐다는 것을 깨달았다.
'저건 그냥 미친놈이야 제대로 또라이라고!'
'대화 자체가 불가능해.'
당장 이곳을 벗어나기만 하면 부모님에게 전화를 할 수 있다.
그러기 위해선 강현을 구슬려야 하는데 도저히 불가능했다.
무언가 말이 통해야 협박이든 회유든 할 수 있는 것이다.
-퍽.
"크헉!"
-콰직.
"쿠에엑!"
-찰싹.
"캬학!"
강현의 손찌검이 가해질 때마다 찰진 타격음과 함께 탄성이 터져 나왔다.
"내가 주먹으로 패는 데는 또 일가견이 있거든. 솔직히 이건 재능이 아닐까 싶을 정도라니까."
입을 열심히 놀리면서도 강현은 휘두르는 손을 멈추지 않았다.
"그래서 너희들 부모님이 누구랬지?"
그렇게 한참을 두들기던 강현이 갑자기 멈추더니 말을 했다.
"아, 아까... 안다고..."
"까먹었어. 이야기 좀 해봐."
무려 10분을 넘게 구타하던 강현이 마침내 대화를 할 준비가 된 듯했다.
그 후로 강현은 사건의 자초지종을 들었다.
다만 이미 3명은 바닥에 기절했고, 나머지 두 명도 얼굴이 붓고 이빨이 빠진 상태라 제대로 전달하는 데는 시간이 제법 걸렸다.
"이제야 이해했다."
"..."
"여기 조교가 참 안됐네. 정의로운 사람인데 말이야. 세상이 이렇다니까? 개같은 일이 끝도 없이 벌어져요. 안 그러냐?"
강현의 말에 정대한이 힘겹게 고개를 끄덕였다.
'개새끼... 두고 보자...'
그때 갑자기 강현이 정대한을 바라보며 씨익 웃었다.
"너 같은 쓰레기 때문에 세상 살기가 각박한 거야. 안 그래요? 여러분?"
"뭐..?"
"이거 지금 리얼 100% 실제 상황입니다. 전부 녹화 잘 떠놨죠?"
갑자기 신이 나서는 허공을 향해 떠들어 대는 강현을 보고 모두가 당황했다.
정대한은 도대체 무슨 상황인지 알 수가 없었다.
"와. 뭐야 이거? 시청자 15만 명? 대박이다. 크하하하!"
**
능력자 교육 학교에 출근한 강현은 위튜브 라이브 방송을 켰다.
"아, 여러분 반갑습니다. 오랜만이죠?"
강현이 운영하는 BadAss TV는 이미 구독자 200만이 넘어갔기에 방송을 시작하자마자 엄청난 수의 사람들이 접속하기 시작했다.
-와. 강현 라이브 방송 켰다.
-얼굴 진짜 볼 때마다 적응 안 되네요. 너무 무섭게 생겼음...
-가까이서 보니까 더 무서워요. 조금 떨어져 주세요.
"얼굴 가지고 뭐라하는 분들 신고합니다."
그렇게 강현과 시청자가 가벼운 농담을 주고받았다.
"지난번에 말씀드렸듯이 제가 능력자 교육 학교, 성남 지부에 교육장을 맡게 됐거든요. 1년 만에 다시 돌아오니 감회가 새롭네요."
-여기가 교육장이구나.
-시설이 좋네요.
-강현이 교육장이라니. 이번 기수들 완전 계 탔네.
-교육하는 모습 라이브로 보여주세요!
"교육하는 모습이요? 별 거 없는데... 한번 생각해 볼게요. 일단 오늘은 노가리나 좀 까다가….
말을 하던 강현이 갑자기 멈춰 섰다.
"여러분. 방금 무슨 소리 못 들었어요?"
-아무 소리도 안 들렸는데.
-나 이어폰 소리 최대로 올리고 듣고 있었는데, 아주 작은 소리 나기는 했음.
-주작 ㄴㄴ. 재미없어요.
"아니. 진짜 무슨 소리 들렸다니까요. 잠깐만 있어 봐요."
강현은 서둘러 소리가 들리는 방향으로 이동했다.
점차 시청자들에게도 어떤 소리가 들리기 시작했다.
-지금 욕하는 것 같은데? 싸움 난 거 아닌가?
-싸움이다. 싸움! 얼른 가 봐요.
-강현이 담당하는 교육에서 싸움이라니. 간도 크네ㅋㅋㅋ
-ㄹㅇㅋㅋㅋ
마침내 강현이 소리의 근원지인 화장실에 도착했다.
"쉿! 여기인 것 같습니다."
강현이 조심스럽게 카메라를 화장실 안쪽으로 들이밀었다.
-미친. 저게 뭐야?
-저거 조교 복장인데. 지금 교육생들이 조교 구타하는 거임?
-와... 너무 심한데. 어린 친구들 같은데 저건 너무하네요.
-이거 주작 아니에요?
"주작 아닙니다. 여러분 제가 아무래도 나서야 할 때인 것 같습니다. 카메라는 여기 고정시켜 둘 테니 잘 지켜봐 주세요."
강현이 조심스럽게 카메라를 고정시켜 두고는 화장실로 들어갔다.
"네들 뭐하냐?"
"뭐야!?"
그때부터 마지막까지 시청자들은 모든 장면을 라이브로 지켜봤다.
게다가 실시간으로 sns를 타고 유명세를 얻어 시청자는 끝도 없이 수직상승 중이었다.
-캬햐! 강현 식 참교육ㅋㅋㅋㅋ 미쳤따리!
-이제는 때리던 애들이 불쌍해 보이는데?
-이거 방송 19 걸려 있나?
-와 미친... 무슨 주먹 한방에 콘크리트 벽이 박살나네;;;;
한동안 구타 장면이 이어지고, 마침내 강현이 정대한과 친구들의 정체를 밝혔다.
"그러니까. 여기는 정대석 의원 아들. 어머니가 무슨 사업가? 여기는 성소대학병원 원장 딸. 여기는 유산기업 회장 아들…."
계속해서 드러나는 이들의 정체에 시청자들은 경악했다.
-이거 역대급이다. 미쳤어.
-우리나라 상위 0.0001%가 여기 다 모여있네 ㅋㅋㅋㅋㅋ
-저기 조교는 무슨 죄냐. 진짜 불쌍하다.
-쓰레기 새끼들. 그냥 지금 죽여.
-ㅇㅇ 사회에 풀려나면 다시 부모 빽으로 멀쩡하게 돌아다닐 놈들임. 강현이 그냥 없애줬으면...
마침내 모든 이야기를 들은 강현이 웃으며 스마트 폰을 집어 들었다.
"와. 뭐야 이거? 시청자 15만 명? 대박이다. 크하하하!"
-방금 구독자 3만명 늘었음ㅋㅋㅋㅋ 미친 속도다.
-강현 클라스 지리고 갑니다.
-이거 이렇게 방송으로 나가도 괜찮은 거예요? 불안하다.
"아아. 걱정하지 마세요. 저놈들 빽이 얼마나 든든하든 저는 신경 안 쓰거든요. 꼽으면 덤비던가."
스마트폰을 든 강현이 시청자를 확인하며 씨익 웃었다.
"그리고 그 잘난 부모님들. 저한테 신경 쓸 시간도 없을 걸요? 당장 자리 내놓을 걱정이나 해야지. 하하하!"
**
강현의 예상대로였다.
이번에는 정말 다른 의미로 대한민국이 발칵 뒤집어졌다.
정재계 고위 인사 자녀들의 무자비한 폭력.
지위를 이용한 약자 괴롭히기.
그리고 이어진 참교육.
강현의 인기는 정말 하늘 높은 줄 모르고 치솟았다.
"강현 씨. 정말 이럴 겁니까?"
그렇게 대다수의 사람들이 축제 분위기였지만, 오늘도 걱정이 가득일 수밖에 없는 남자가 하나 있었다.
"왜요? 뭐 문제 있어요?"
"그걸 몰라서 묻습니까!?"
얼마나 급박했는지 신태길은 강현을 직접 찾아오기까지 했다.
"최연화는 안 건드렸잖아요. 나머지는 어차피 떨거지고."
"그냥 떨거지가 아닙니다! 대한민국을 좌지우지하는 떨거지들이죠!"
"그런가...? 하하!"
"후우..."
깊은 한숨을 내쉰 신태길이 마른세수를 했다.
"그래도 나름 괜찮지 않아요?"
"뭐가 괜찮습니까?"
"제 인기가 올라갔잖아요. 여기서 최연화만 잘 잘라내서 우리 쪽에 붙여서 얻을 거 다 얻고. 제가 정부랑 사이가 좋은 것도 좀 더 적극적으로 홍보하고. 무슨 말인지 알죠?"
"예..."
확실히 강현의 말도 틀린 것은 아니었다.
비록 원래 의도했던 바와는 다르게 흘렀지만, 충분히 유리하게 이끌 수 있을만한 상황이다.
저들의 세력은 한때 강했을지언정 현재 무너지기 직전이나 다름없다.
거기서 최강우만 따로 빼내서 힘을 합친다.
그리고 정의구현으로 대한민국 최고의 이슈를 몰고 있는 강현.
그를 이용해 잘 움직인다면 여론을 완전히 대통령 편으로 만들 수 있을지도 몰랐다.
"이건 제가 대통령님께 잘 말씀드리겠습니다."
"알겠어요."
"제발, 부탁입니다. 사고 좀 그만 쳐 주십시오."
"신태길 씨가 맡겨놓고 이제 와서 무슨 소리예요? 싫으면 같이 뭘 하자는 말을 말던가."
"하아... 요즘 흰머리도 많이 나고, 자고 일어나면 머리칼이 뭉텅이로 빠지고 있습니다."
갑작스러운 신태길의 탈모 고백에 강현의 표정이 어두워졌다.
"아... 미안해요."
강현도 한동안 겪었던 고민이었기에 그 심정을 잘 알았던 것이다.
"부탁 좀 드리겠습니다."
"예..."
그렇게 숙연한 시간이 흐르고, 정신을 차린 강현이 본론을 꺼냈다.
"그때 넘겨준 놈은 어떻게 됐어요? 이름이 박송민이었나?"
능력자 교육 학교의 첫날.
교육생으로 위장하고 들어온 수상한 남자에 대한 이야기였다.
그날 남자를 실신시킨 강현은 곧장 신태길에게 넘겨주었는데, 그 후로 어떻게 되었는지는 듣지 못했다.
"강신 길드의 길드장이었던 김준용. 기억하십니까?"
"며칠 전인데 당연히 기억하죠."
"박송민도 김준용이 속해있던 자유 능력자 해방 연합이란 곳에서 온 것이었습니다."
"그 이야기는 저번에도 했잖아요."
"아, 그랬습니까?"
무안해진 신태길이 머리를 긁적였다.
"소속은 됐고, 그래서 왜 여기로 찾아온 거래요? 상황으로 봐서는 아마 나를 노리려던 것 같은데."
"맞습니다. 복수하기 위해서라더군요."
"복수? 무슨 복수?"
그때 강현이 한 것이라고는 다 죽어가는 김준용을 조금 때려준 것 말고는 아무것도 없었다.
"아무래도 그때 안무석 회장을 납치하려던 계획을 무너뜨리고, 강신 길드를 처리한 인물이 강현 씨라 생각하는 것 같습니다."
"시벌... 안 그래도 나 미워하는 놈들 천지인데, 이제 외국 놈들까지 덤벼들게 생겼네."
"강현 씨. 조심하십시오. 조사한 바로는 보통 놈들이 아닙니다."
"당연히 보통 놈들이 아니겠죠. 보통 놈들이 백주 대낮에 세계 기업을 운영하는 회장을 납치하려고 해요?"
"후우... 그런 정도가 아닙니다. 강신의 김준용은 비정상적으로 강한 마력을 지니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어디서 그런 힘을 얻었나 조사했더니 충격적인 결과가 나왔습니다."
신태길이 무게를 잡으며 시간을 끌었다.
"질질 끌지 말고 빨리 말해 봐요."
"다른 사람의 마력을 강제로 뽑아내서 김준용에게 지속적으로 주입한 것 같습니다."
"예? 그런 게 가능해요?"
"저희도 그런 것이 가능한지 전혀 몰랐습니다. 애초에 상상조차 하지 못했던 일이라... 구체적인 방법은 모르겠지만, 일단 다른 사람의 마력을 억지로 가져온 것은 확실합니다."
"어쩐지... 그래서 마력 느낌이 그렇게 이상한 거였어."
그제야 강현은 처음 강신 길드를 만났을 때 불쾌하게 느껴졌던 이유를 깨달았다.
"아무튼 조심하셔야 합니다. 놈들은 이대로 멈추지 않을 겁니다. 자존심이 굉장히 강한 놈들이라고 하니, 어떻게든 다시 복수하기 위해 찾아오겠죠."
"하아, 진짜 인기 스타 납셨네."
강현이 한숨을 내쉬자 신태길이 피식 웃었다.
"강현 씨. 사고치는 능력 하나는 정말 타고나신 것 같습니다."
"뭐요? 이번에는 내가 한 게 아니잖아요."
"어쨌든 강현 씨와 연관되어 있지 않습니까?"
틀린 말은 아니었다.
"어휴... 확 때릴 수도 없고..."
"예? 방금 뭐라 하셨습니까?"
"아니에요."
"분명 때리니 뭐니 하셨던 것 같은…."
"아니라고요! 확 진짜 때려버릴 까보다!"
강현이 짜증을 내며 거칠게 머리를 쓸어 넘겼다.
"강현 씨. 머리 넘기는 거 계속하시면 탈모 옵니다."
"시벌..."
105화 죽음에서 돌아온 사신(1)
105. 죽음에서 돌아온 사신(1)
"연화야. 제발 부탁이야... 우리 좀 도와주라."
"최연화. 우리 사이가 이것밖에 안 돼? 너 그 영상 정말 믿는 건 아니지?"
"맞아! 그거 전부 강현 그 자식이 조작한 거라고. 우리가 왜 그런 짓을 하겠어?!"
정대한과 아이들이 쉴 새 없이 입을 나불거렸다.
"알겠으니까. 그만해..."
"연화야. 그럼 우리 부탁 들어주는 거지?"
"맞아. 너희 아버지한테 말 좀 잘 해주라. 이럴 때 우리가 서로를 도와야지."
최연화는 잔뜩 피로한 모습이었지만, 악질 청소년들은 멈출 생각이 없어 보였다.
그만큼 그들의 심리 상태가 불안하다는 방증이기도 했다.
"그만하라고..."
"그러니까 네가 아버지한테 전화 한 통만 해주면 다 해결…."
"그만해!"
결국, 참다못한 최연화가 버럭 소리를 질렀다.
최연화가 진심으로 화를 내는 모습은 한 번도 본 적이 없었기에 정대한 무리는 당황했다.
"왜 소리를 지르고 그래..."
"맞아. 연화야. 흥분하지 말고."
"그만하라고. 이 나쁜 새끼들아."
"뭐...?"
"너희들이 그러고도 사람이야? 이때까지 나한테 했던 말. 행동. 전부 연기였어?"
"무, 무슨 소리야. 연화야. 그런 거 아니라니까..."
"닥쳐!"
잔뜩 흥분한 최연화가 자리를 박차고 일어났다.
"연화야. 어디가!?"
"따라오지마.죽여버리고싶으니까."
"야! 최연화. 말이 너무 심한 거 아니야?"
최연화는 대답하지 않고 숙소 문을 박차고 나갔다.
"하아... 저 썅년..."
최연화가 나가자마자 정대한이 담배를 꺼내 물었다.
"대한아 어쩌지?"
"어쩌긴 뭘 어째. 끝까지 구슬려 봐야지."
"그래. 최연화 아버지가 나서면 어떻게든 될 거야."
"하아... 진짜 큰일이다... 우리가 어쩌다가 이렇게 된 거냐."
"어쩌다가 이렇게 됐기는! 강현 그 개새끼 때문이지. 시발! 으아아아!"
정대한이 미친 사람처럼 소리를 지르며 머리를 흔들어 댔다.
"후우, 내일이 마지막 교육이지?"
"어. 사냥 실습하고 교육 끝이야."
"그때까지 무조건 최연화 마음을 돌려야 해. 너희들도 살고 싶으면 진짜 자존심이고 뭐고 다 버리고 들러붙어. 내 말 알겠어?"
정대한의 말에 나머지가 침통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강현. 최연화. 두고 보자고..."
**
숙소 밖으로 뛰쳐나온 최연화는 정처 없이 내달렸다.
가슴을 짓누르는 답답함.
너무나 답답한 나머지 당장 미쳐 돌아버릴 것만 같은 기분이었다.
'어디서부터 잘못된 거지?'
사실 최연화도 알고 있었다.
정대한과 다른 친구들은 가식적으로 자신을 대한다.
하지만 그것을 딱히 문제 삼지는 않았다.
어차피 다른 사람들도 마찬가지니.
유치원 시절부터 시작해 고등학교를 졸업할 때까지.
모든 교육 과정을 대한민국 최고의 사립 교육 시설에서 보냈다.
그리고 그곳에서 만난 모든 사람들이 자신에게 친절했다.
'내가 삼오 그룹 회장의 딸이니까.'
국내 재계 서열 2위의 초거대 기업 삼오.
그곳의 외동딸이라는 직함은 단순히 돈이 많아서 기쁘다는 정도로 넘어갈 수 있는 성질이 아니었다.
지독하리만큼 철저한 교육.
그 속에 인간 '최연화'는 어디에도 존재하지 않았다.
그저 삼오 그룹 회장의 외동딸이 있을 뿐이었다.
정대한과 아이들은 그런 최연화에게 나름 괜찮았던 친구들이었다.
적당한 농담을 주고받고, 맛집에 같이 밥을 먹을 수 있는.
정대한과 아이들은 가식적이었지만, 최연화는 그 속에서 나름의 우정이 싹텄다고 믿었다.
'멍청이... 우정 같은 소리 하네.'
그렇게 고개를 숙인 채 달리던 최연화가 돌연 단단한 무언가와 부딪혔다.
"뭐하냐."
무심하게 자신을 바라보는 남자.
강현이었다.
"뭐야. 얼굴이 말이 아니네. 왜 질질 짜고 있어?"
사실 강현은 이미 이러한 상황을 예상했다.
그리고 의도적으로 최연화가 지나갈 만한 곳에서 기다렸다.
그런데도 그렇지 않은 척, 태연하게 묻는 이유는 지금 최연화에게는 그깟 작위성이 중요한 것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강현 오빠... 흐흑..."
하지만 막상 상황이 들이닥치자 어떻게 해야 할지 갈피를 잡을 수 없었다.
'시벌. 차라리 몬스터 아가리에 머리를 밀어 넣고 말지. 이게 무슨 짓거리야? 후우...'
결국 강현은 평소처럼 하기로 했다.
"맥주 한잔할래?"
"네?"
"따라와."
당황한 최연화는 얼떨결에 강현을 따라 능력자 육성 학교를 벗어났다.
목적지는 인근의 편의점이었다.
"맥주 좋아하는 거 있냐?"
"저는 소맥..."
"무슨 20살 된 지 한 달도 안 된 애가 편의점에서 소맥을 찾아."
"그러면 여기 맥주 아무거나…."
"됐어. 소맥 해줄게."
강현은 최연화에게 주기 위해 맥주와 소주를 담고, 자신은 항상 마시는 355ml 캔 맥주를 골라 담았다.
굳이 작은 캔을 고집하는 것은 편하게 원 샷이 가능하기 때문이었다.
"크으으! 시원하네. 그렇지?"
"네..."
차가운 바람이 부는 1월.
강현에게는 아무런 영향을 끼칠 수 없는 날씨였지만, 최연화는 바람이 스칠 때마다 몸을 잘게 떨었다.
"이거라도 입어."
"감사합니다."
"보통 한 번 정도 거절하지 않나?"
"예?"
"아니야. 입어. 크큭."
강현이 입고 있던 외투는 너무 커서 최연화가 걸치기도 힘들 정도였다.
"답답하지?"
"네..."
"사실 네 아버지한테 부탁을 받았어. 네가 능력자 하고 싶다는 말을 못하게 겁 좀 주라고 하더라."
"아..."
뜬금없는 말에 최연화는 당황했지만 금세 이해했다.
확실히 자신의 아버지라면 그런 부탁을 해도 이상할 것이 없었다.
"내가 생각해 봤는데 말이야. 그냥 너 하고 싶은 대로 해. 너는 재능이 있어 보이니까."
"그러면 강현 오빠가 큰일 나는 거 아니에요?"
"내가 그런 거 신경 쓰는 사람으로 보여?"
"하하. 그것도 그러네요."
그랬다.
강현은 항상 당당하고, 늘 하고 싶은 대로 했다.
최연화는 그 자유로움에 반해 강현의 팬이 되었다.
"너도 20살이잖아. 그러면 하고 싶은 대로 하고, 스스로 거기에 대한 책임을 지는 게 당연한 거야."
"네."
"그 떨거지들은 어떻게 할 거야?"
"..."
떨거지들. 정대한과 그 무리를 지칭하는 것이었다.
"잘 모르겠어요. 이제는 누구를 믿어야 할지. 어떻게 살아야 할지. 아무런 생각도 들지 않아요. 어쩌면 저는 평생 다른 사람이랑 어울리지 못할 운명인가 봐요."
"쬐끄만한 게 벌써부터 운명 타령이야."
강현이 손을 들어 가볍게 꿀밤을 먹였다.
"네가 무슨 삶을 살아왔는지 나는 몰라. 그래도 대충 예상해 보자면 뭐, 책임감 비슷한 것들에 짓눌려서 휘둘려 왔겠지."
"네..."
"잘난 집안에 유일한 후계자라는 게 어떤 무게인지 나는 평생 모르겠지만, 이거 하나는 확실하다."
단숨에 맥주 캔을 비워낸 강현이 말을 이었다.
"하면 된다."
"네..?"
"너를 짓누르는 게 뭐든 간에 치워내면 돼. 네 마음대로 할 수 없는 상황? 있을 수 있겠지. 하지만 영원한 건 없어. 무슨 말인지 알아?"
"솔직히 잘 모르겠어요..."
"상황의 노예가 되지 말란 말이야. 안 그러면 언젠가 구속에서 벗어날 수 있는 기회가 와도, 너는 벗어나지 못하고 제 발로 다시 구덩이에 들어갈 거니까."
"..."
"그리고 내가 보기에, 지금 너한테 바로 그 기회가 왔어."
조용히 강현의 말을 곱씹던 최연화는 이내 무언가를 결심했는지, 밝게 웃었다.
"고마워요."
"그런데 이왕이면 그냥 집에 가서 가업이나 물려받아."
"네?"
"그래야 내가 편하잖아. 그리고 대기업 회장님의 삶도 한 번쯤 살아 볼 만한 것 같지 않아?"
"싫은데요."
"그래."
강현이 뒤늦게 수습을 해보려 했지만, 이제 와서 무마하기는 늦은 듯했다.
**
능력자 교육 학교의 커리큘럼.
강현이 교육받을 때와는 달리 많은 변화가 있었지만, 마지막은 같았다.
현장 실습.
능력자 교육 학교를 졸업하기 위해서는 직접 던전에 들어가 몬스터를 잡아야 했다.
"우으으... 너무 떨린다."
"그래? 나는 B등급을 보고 와서 그런가. 솔직히 F등급 던전은 쉬울 것 같아."
지난 2주 동안 제법 친해진 교육생들이 저마다 수다를 떨며 이동했다.
"연화야. 어디가? 같이 가자."
"우리가 다 같이 몬스터 사냥이라니! 너무 떨린다. 그지?"
그리고 최연화에게 들러붙은 양아치들 또한 여전했다.
"어."
최연화는 무심하게 대답했다.
순간 정대한의 눈이 매서워졌다.
"야야. 이번에 잘 맞춰야 다음에 우리끼리 던전 공략할 때 편하지."
하지만 금세 언제 그랬냐는 듯 눈웃음을 지으며 최연화에게 들러붙었다.
"그래. 그래야지."
최연화는 오직 정면만을 바라보며 터벅터벅 걸었다.
항상 웃으며 주위의 사람들을 신경 써주던 평소와는 전혀 다른 모습.
정대한과 친구들이 빠르게 눈짓을 주고받았다.
'벌써 끝난 거 아냐?'
'안 돼. 오늘이 아니면 마음을 돌릴 기회가 없어. 끝까지 매달려.'
오늘은 교육 마지막 날이다.
이제 이곳을 떠나면 앞으로 영원히 최연화를 보지 못할 수도 있는 것이다.
그렇게 정대한과 아이들이 바쁘게 눈짓을 주고받을 때였다.
"여기다."
목적지에 도착한 강현이 모두를 멈춰 세웠다.
"이제부터 사냥을 시작한다. 진행 방식은 이미 다 알고 있겠지만, 다시 한 번 설명한다."
강현이 가벼운 어조로 말을 하고, 모든 교육생이 어미 새를 바라보는 아기 새처럼 강현의 입을 바라봤다.
"상대는 새끼 타란크. 열 마리 내외를 교육생 다섯이 상대한다. 새끼 타란크는 산성액을 내뿜지 못하는 경우가 대부분이긴 하지만, 간혹 그렇지 않은 놈도 있으니 주의해."
"교육장님."
한 교육생이 손을 들었다.
"산성액에 당하면 어떡하죠?"
"어떡하긴 뭘 어떡해? 많이 아프겠지. 피부가 좀 벗겨져서 흉측해지고."
강현의 말에 교육생들의 얼굴이 사색이 됐다.
"쯧. 여기 대기하고 있는 치유 전문 능력자들이 흉터 없게 케어해 줄 테니 신경 쓰지 마."
"예..."
"우선 조교들이 먼저 시범을 보여줄 테니 잘 보도록 해."
강현의 말에 조교들이 타란크를 몰아오기 위해 움직였다.
"오네."
잠시 후.
조교들이 몰아온 열한 마리의 타란크가 한곳에 모였다.
그리고 조교 다섯 명이 나서서 전투를 벌였다.
"보다시피 새끼 타란크의 전투 능력은 매우매우매우 떨어진다. 고작 이것 잡는데 다치는 놈은 능력자 할 생각일랑 말고 밖에 나가서 성실하게 공부나 해."
강현의 말대로 새끼 타란크는 약하다.
비록 대형견 크기의 거대 거미로, 날카로운 다리가 위협적이긴 했으나 그것은 일반인 기준.
갑옷까지 갖춰 입은 능력자들은 일부러 다치려 해도 다치기 힘든 수준이었다.
"어어,저기저놈.독쏜다. 잘봐둬."
순간 강현이 한 타란크를 가리켰다.
놈은 갸르르르- 하는 소리를 내며 입을 부르르 떨더니 곧 산성액을 내뱉었다.
조교들은 그 모습을 신중하게 바라보다가 여유롭게 산성액을 피해냈다.
"보다시피 새끼 타란크는 독을 쏘더라도 준비시간이 길고, 사거리도 짧으니까 피하기 쉬울 거야. 저기에 맞을 거면 능력자 할 생각은 집어치워. 평균 이하 재능이란 거니까."
"..."
"혹시 모르지. 목숨이 백 개쯤 있다면 시도해 보든지."
전투가 벌어지는 내내 강현은 교육생들의 사기가 떨어지도록 사력을 다했다.
그러면서 조심스럽게 최연화의 얼굴을 살폈다.
'하아, 저건 안 되겠다.'
완전히 결의에 찬 표정.
어떠한 설득도 먹혀들지 않을 만큼 결연한 표정이다.
두 눈에는 고작 스무 살이 보이기 힘든 굳건한 의지가 들어서 있었다.
"쯧. 조교들. 끝났으면 몬스터 몰아와요."
"예."
어느새 전투가 끝나고, 교육생들과 싸울 타란크를 몰아오기 위해 조교들이 움직였다.
"이런, 멈춰!"
"예..? 크헉!"
그때였다. 갑자기 강현이 한 조교에게 다급히 외쳤으나 이미 늦었다.
어디선가 나타난 남자가 조교의 뒤를 붙잡은 것이다.
"넌 또 뭐야?"
남자는 백인이었다.
조교를 죽이지 않고 목에 칼만 들이댄 거로 봐서 협상의 여지가 있다고 판단한 강현이 말을 걸었다.
"네가 강현인가?"
"한국말로 해. 새끼야."
상대의 영어에 강현의 미간이 좁혀졌다.
"무식한 놈. 네가 강현이냐 물었다."
"무식한 놈? 이게 돌았나. 그리고 네가 무슨 말 하는지 알아들었거든? 나 대기업 나온 사람이야! 인턴이지만."
그렇다.
아무리 강현이 무식해도 자신의 이름을 묻는 기초적인 영어는 알고 있었다.
다만, 강현은 영어가 싫었을 뿐이다.
"아무튼, 내가 강현이 맞는데. 뭐 어쩔 건데?"
"그래. 그럼 됐다."
강현의 말에 씨익 웃은 남자가 무언가를 바닥에 내던졌다.
동시에 엄청난 양의 마력이 빨려 들어가기 시작했다.
"크윽... 뭐야!?"
그리고 등장한 푸른 포탈.
던전이 클리어 됐을 때나 등장하는 포탈이 남자의 옆에 생성됐다.
"무슨 꿍꿍이를…."
말을 하던 강현의 표정이 경악으로 물들었다.
완성된 포탈 안에서 엄청난 수의 외국인들이 물밀 듯이 쏟아져 나왔기 때문이다.
"하아..."
그 모습을 보고 한숨을 내쉰 강현이 거칠게 머리를 쓸어 넘겼다.
"엿 됐네."
106화 죽음에서 돌아온 사신(2)
106. 죽음에서 돌아온 사신(2)
"하아... 엿됐네..."
강현이 한숨을 내쉬며 머리를 쓸어 넘겼다.
"뭐야? 저 사람들 능력자인가?"
"저기 저거. 포탈인가 하는 그것 같은데?"
"전부 외국인이야."
"야. 큰일 나는 거 아냐? 튀어야 할 것 같은데..."
갑작스러운 상황에 당황한 교육생들이 웅성거렸다.
조교들 또한 전혀 예상하지 못한 상황이었기에 멀뚱멀뚱 서 있을 뿐이었다.
"교육장님. 이게 무슨 일입니까..?"
전임 교육장, 정종호가 강현에게 불안한 표정으로 다가왔다.
"절대로 움직이지 마요. 학생들 단속 잘하고."
"예...?"
"그냥 시키는 대로 해요. 살고 싶으면."
정종호는 이해할 수 없었으나 강현의 표정이 워낙 무서웠기에 얌전히 고개를 끄덕였다.
"후우..."
끊임없이 쏟아져 나온 능력자들은 100명이 넘는 것 같았다.
그들 하나하나가 상당히 강한 마력을 품고 있었다.
'저 불쾌한 혼종 마력... 역시 그놈들인가.'
강현은 저 마력의 정체를 알고 있었다.
강신 길드.
정확히는 자유 능력자 해방 연합의 놈들이 지니고 있던 마력이었다.
강현은 그들 중에서도 압도적인 마력을 뿜어내고 있는 사내를 바라봤다.
단연코 지금껏 봐왔던 어떠한 능력자보다 강대한 마력.
자신과는 비교조차 불가능한 수준이다.
'저건 뭐하는 괴물이야?'
강현은 저 남자의 마력 수치가 70은 가뿐히 넘을 것으로 예상했다.
동시에 강현은 남들이 자신의 근력과 체력을 볼 때 이런 느낌이었나 하는 생각 또한 들었다.
그 정도로 강현은 남자의 마력에 압도됐다.
"강현 님."
그때, 조교 자격으로 함께하던 신성아가 조심스럽게 다가왔다.
"왜."
"도망치십시오."
"뭐?"
강현이 따갑게 노려봤으나 신성아의 얼굴은 진지했다.
"아시겠지만, 보통 놈들이 아닙니다."
"그래서?"
"냉정하게 말해서. 이 학생들 모두의 목숨보다, 강현 님. 한 명의 목숨이 더 중요합니다. 교육생들이 동시에 도망치도록 해서 혼란을 유도한다면, 적어도 강현 님은 확실하게 도망칠 수 있을 겁니다."
신성아의 말에 강현이 피식 웃었다.
언젠가 죽음의 무게에 관해 생각했던 것이 떠올랐던 것이다.
"걱정하지 마. 나는…."
순간 강현의 말을 끊고 두 명의 남자가 다가왔다.
"네가 강현이군."
"..."
한 명은 강현이 대장으로 짐작한 남자였고, 다른 하나는 통역사인 듯했다.
"만나서 반갑다. 나는 자유 능력자 해방 연합의 연합장. 반다렌코다."
반다렌코가 웃으며 말했으나, 강현의 표정은 한없이 차가웠다.
"인사나 하려고 온 건 아닐 거고. 목적이 뭐냐."
"목적? 그거야 뻔한 것 아닌가. 복수다."
"..."
"너는 우리 연합의 계획을 무너뜨린 것은 물론, 우리가 보낸 암살자조차 무참히 짓밟았지. 그것도 모두가 보는 앞에서."
박송민의 이야기였다.
능력자 교육 학교의 첫날.
강현이 박송민을 박살 낼 때 몇몇 교육생들이 영상을 찍었고, 그것을 위튜브에 올렸다.
그리고 대박이 터졌다.
박송민이 쓰러지는 영상은 고작 며칠 만에 천만 뷰를 넘었고, 박송민의 정체 또한 자연스레 알려졌다.
반다렌코는 그날 이후로 며칠 동안 분노로 인해 불면증에 시달렸을 정도였다.
"나는 실추된 우리 연합의 명예를 되찾아야 한다."
"하아..."
"강현. 너에게 최후의 제안을 하지. 순순히 우리를 따라와라. 그러면 여기 있는 자들은 무사히 보내주겠다."
"네 말대로 할 테니 이 사람들은 바로 보내줘."
강현은 선택지가 없었다.
어차피 자신은 죽어도 부활한다.
하지만 여기 모인 교육생들, 그리고 신성아는 죽으면 끝이다.
어떻게든 이들의 목숨을 살리는 것이 중요했다.
"호오. 상당히 반항적이라고 들었는데, 의외군."
순간 반다렌코가 광기 어린 미소를 지었다.
"죽여라."
반다렌코의 지시에 처음 조교를 붙잡은 남자가 고개를 끄덕였다.
"어, 어..? 끄아아아!"
단검이 단숨에 조교의 목 깊숙이 파고들었다.
손쓸 틈도 없이 목이 잘린 조교를 보며 강현이 분노했다.
"이 개새끼가... 지금 뭐하자는 거야!?"
"일이 너무 쉽게 풀리면 재미가 없지 않나? 크하하하!"
놈의 말에 강현은 직감했다.
'이놈은 애초에 여기 있는 사람들을 보내줄 생각이 없다.'
강현의 머리가 빠르게 회전했다.
'어쩔 수 없어...'
무언가를 결심한 강현이 신성아를 불렀다.
"성아야..."
"예."
속삭이는 듯한 목소리였으나, 신성아가 용케 알아듣고 대답했다.
"내가 신호하면 도망쳐."
"싫습니다."
"내 말 들어. 여기 이놈들은 우리를 전부 죽일 생각이야. 누군가는 도망쳐서 이 사실을 알려야 해."
"그럼 강현 님이 도망치십시오. 제가 여기 남겠습니다."
둘이 속닥거리는 모습을 지켜보던 반다렌코가 조롱이 담긴 미소를 지었다.
"무슨 꿍꿍이인지는 모르겠지만, 이곳에서 도망치는 건 불가능하다. 얌전히 죽음을 기다려라."
"닥쳐!"
반다렌코에게 악을 쓴 강현이 신성아를 붙잡았다.
"잘 들어. 나는 죽어도 죽지 않아. 부활한다고. 믿기 힘들겠지만, 믿어야 해. 그러니까 여기서 나를 제외하고 탈출 가능성이 가장 높은 사람은 바로 너야. 내 말 알아들어?"
속사포처럼 쏟아진 강현의 말에 신성아가 당황했다.
"강현님. 그게 무슨 말씀이신지..."
"정신 차려! 시간이 없어!"
강현이 신성아의 눈을 똑바로 바라봤다.
"이건 부탁이 아니라 길드장으로서 내리는 명령이야. 내 말 알겠어?"
"예... 알겠습니다."
"반드시 신태길 팀장한테 이 사태를 전달해야 해. 믿는다."
신성아가 굳은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녀의 눈에는 약간의 눈물이 고여 있었다.
"작전 회의는 끝났나?"
"어. 덕분에 잘 끝났네. 고맙다."
강현의 말에 반다렌코가 호탕하게 웃었다.
"하하하하! 도대체 어떻게 발악할지 아주 궁금해. 이봐 잘 찍고 있겠지?"
"예."
반다렌코의 말에 카메라를 들고 있던 부하가 대답했다.
오늘을 위해 거금을 들여 구매한 던전 안에서 촬영이 가능한 카메라였다.
"이제 슬슬 시작하지. 우리 자유 능력자 해방 연합을 건드린 자의 최후가 무엇인지, 전 세계가 똑똑히 알게 될 것이다."
"지랄하네."
반다렌코의 선언에 강현이 지금까지와는 다른 광기가 어린 표정을 지었다.
"대가리에 총 맞았냐? 무슨 중2병 같은 컨셉이야? 그리고 애초에 너희가 먼저 덤빈 거잖아. 시발. 박송민? 그 암살자 사건도 그래. 걔가 털린 게 왜 내 탓이야? 처음부터 센 놈으로 보냈어야지. 그딴 비실한 새끼를 쳐 보내니까 그 꼴이 난 거 아냐? 하긴 이렇게 우르르 몰려온 것만 봐도 거기 수준을 알만하다."
속사포처럼 터져 나온 강현의 욕설에 통역사는 아무런 말도 하지 못하고 굳었다.
"저놈이 뭐라고 한 거냐?"
"그, 그게..."
통역사는 어쩔 줄 몰라 했으나, 반다렌코가 자신을 노려보자 하는 수 없이 입을 열었다.
"..."
통역사의 말을 들은 반다렌코의 눈가가 파르르 떨렸다.
"나는 너의 남자다움을 인정해서 마지막 배려까지 하려 했건만... 도저히 안 되겠군."
"안되면 어쩔 건데? 뻑큐다. 새꺄! 엿이나 까 잡숴!"
강현이 양 손을 들어 힘껏 중지를 내밀었다.
[분노의 사자후가 발동됩니다]
[모든 적들의 사기와 능력치가 감소했습니다]
동시에 반다렌코 또한 괴성을 내질렀다.
"Убейте этого!"(죽여!)
**
전신이 짜릿해질 정도로 긴장이 극에 달했다.
답답함으로 인해 가슴은 터질 것만 같다.
자신의 뜻대로 할 수 없음에 짜증이 끝없이 밀려왔다.
온갖 감정들의 소용돌이 속에서 신성아가 숨을 골랐다.
"후우... 하아..."
보통 사람이라면 머리가 새하얗게 불타오를 상황이었지만, 신성아는 되려 머리가 맑아지는 것 같았다.
-잘 들어. 나는 죽어도 죽지 않아. 부활한다고. 믿기 힘들겠지만, 믿어야 해.
죽어도 부활한다.
도저히 믿기 힘든 말이었다.
하지만 믿어야 했다.
강현이 한 말이기에.
신성아는 믿고 따를 뿐이었다.
-으득.
저도 모르게 힘이 들어갔는지 이가 갈리는 소리가 났다.
'이제 곧...'
강현과 반다렌코의 신경전이 극에 달했다.
"Убей меня!"(죽여!)
마침내 터져 나온 반다렌코의 외침.
그것이 신호탄이라도 되어 대혼란이 벌어졌다.
"교육생들! 살고 싶으면 튀어!"
"꺄아아아!"
"시발. 이게 뭐야!?"
"으아아!"
강현은 마력구를 생성해 사방으로 집어 던졌다.
평소처럼 마력 분배를 고려한 움직임이 아니었다.
모든 것을 쏟아내는 듯한 모습.
굉음과 함께 흙먼지가 피어오르고, 교육생들은 사방으로 흩어졌다.
하지만 대부분은 얼마 가지 못해 적들에게 붙잡혔다.
'최대한 은밀하게...'
신성아는 기척을 숨기고 사람들 사이를 빠르게 이동했다.
은신은 그녀가 제법 자신 있어 하는 특기였다.
비록 암살에 특화된 능력자들 수준에 이르지는 못했지만, 그녀가 작정하고 숨으면 어지간해서는 들키지 않는다.
"강현의 부하가 도망친다!"
"잡아라!"
조금 전의 생각이 무색하게, 놈들은 곧장 자신을 알아챘다.
'처음부터 나를 주시하고 있었던 건가.'
신성아는 이미 처음부터 놈들이 자신의 정체를 알고 주의 깊게 본 것으로 판단했다.
-타앗!
신성아는 기척을 숨기는 것을 포기하고 전력으로 입구를 향해 달렸다.
"거기 너! 어서 쫓아!"
"포위해!"
"길을 막아라!"
놈들은 순식간에 대형을 갖춰 신성아의 앞을 막아섰다.
모두 상대할 시간은 없었다.
'어느 정도 피해를 감수하더라도 지나치는 것이….'
그녀의 생각은 이어지지 못했다.
어느샌가 달려온 강현이 적들에게 뛰어들었기 때문이다.
"다 꺼져!"
"크아악!"
강현은 자신의 몸을 사리지 않고 사방으로 날뛰었다.
곁눈질로 확인하자 그 사이 상처를 입어 피를 흘리고 있는 것이 보였다.
'나에게 주어진 일을 해야 해.'
당장 강현을 돕고 싶었으나, 그가 애써 만들어준 기회를 버릴 수는 없었다.
신성아는 혼란을 틈타 재빨리 강현의 곁을 지나쳤다.
고맙다.
미안하다.
어떠한 말도 하지 않았다.
한마디 말에 호흡을 낭비하는 것보다, 한 걸음이라도 더 강하게 내딛는 것이 강현을 위한 일이었다.
"믿는다!"
뒤에서 강현의 외침이 들려왔다.
신성아는 돌아보지 않았다.
그저 던전 입구를 향해 달렸다.
"하아, 하아..."
그렇게 전략으로 달리기를 한참.
마침내 던전의 입구가 보였다.
"저건..."
그 앞에는 여섯 명의 능력자들이 서 있었다.
그들은 모두 외국인이었다.
"후우..."
신성아는 걸음을 늦춰 호흡을 골랐다.
뒤를 확인하니 쫓아오는 적들은 보이지 않는다.
"오오. 저기 여자가 오는데?"
"제법 섹시하잖아!?"
"크하하! 멍청이들아! 저건 강현의 부하인 신성아라는 년이야."
능력자들은 저들끼리 러시아어로 신나게 떠들었다.
"입구나 지키라 해서 짜증 났는데 말이야. 이런 기회가 주어지다니! 연합장님. 감사합니다!"
"하하하! 지루할 일은 없겠어!"
신성아는 놈들의 말을 알아들을 수 없었지만, 상관없었다.
'어차피 뻔하지.'
말투와 분위기만 봐도 이미 충분히 파악이 가능했다.
범죄자들은 한국이든 외국이든 별반 다를 바가 없는 듯했다.
'지금 중요한 건 어떻게 놈들을 뚫고 가냐는 거야.'
자신의 장기는 원거리 교전이다.
수없이 연습한 만큼 이제는 근접전도 나름 자신이 있었지만, 그것이 놈들을 이길 수 있다는 확신을 주지는 못했다.
'놈들은 그저 그런 어중이떠중이들이 아니야.'
놈들은 한눈에 보기에도 전투에 익숙한 강력한 능력자들이었다.
마력 또한 자신의 수준을 아득히 넘어섰을 것이 분명했다.
십중팔구, 필패다.
'그래도 해야만 해.'
신성아는 이런 날을 대비해서 끊임없이 노력해 왔다.
그동안 자신을 가르쳐 줬던 안유성을 떠올리며 그녀가 단검을 뽑아 들었다.
107화 죽음에서 돌아온 사신(3)
107. 죽음에서 돌아온 사신(3)
객관적으로 봤을 때 신성아의 전투 능력은 그리 나쁜 편이 아니었다.
능력자 전체로 보면 오히려 최상위권이라고 할 수 있다.
하지만 신성아 본인은 항상 스스로를 부족하다 여기고, 끊임없이 노력해 왔다.
주위에 괴물들이 득실거리니 어찌 보면 당연한 일일 수도 있었다.
그렇게 노력하기를 1년.
신성아는 스스로가 자랑스러웠다.
일취월장한 실력에 안심했다.
한 달 전까지만 해도 말이다.
-너희들도 이만 끝내주지.
베일의 미로에서의 보스와 벌인 전투는 그녀의 안일함을 철저하게 박살냈다.
지독한 무기력감. 그리고 분노.
그곳에서 느낀 감정들이 신성아를 다시금 채찍질하기 시작했다.
"안유성 씨."
"아, 누나. 무슨 일이에요?"
훈련 중인 안유성에게 찾아간 신성아는 단도직입적으로 말했다.
"강해지고 싶습니다."
그 말에 한창 검을 휘두르던 안유성이 우뚝 멈춰 섰다.
안유성은 흘러내리는 땀을 닦으며 신성아를 바라봤다.
"갑자기 왜요?"
"이번 전투로 제 부족함을 깨달았습니다. 아마 안유성 씨가 평소랑 다르게 열심히 훈련하고 있는 것도 같은 이유에서겠죠."
사실이었다.
안유성 또한 베일과의 전투에서 상당한 충격을 받았다.
그 때문에 평소 던전 공략이 아니면 항상 길드 사무실에서 시간을 보내던 안유성이 지금은 며칠째 훈련장에서 틀어박혀 나오지 않고 있었다.
"바쁘시겠지만, 부탁드립니다."
안유성은 거절하려 했으나, 신성아가 고개까지 숙이고 부탁하자 차마 그럴 수 없었다.
"알겠어요. 뭐, 누나랑 훈련이라니 제법 재미있을 것 같기도 하니까."
그렇게 안유성의 1대1 맞춤 교육이 시작됐다.
"누나. 안력(眼力)에 대한 스킬. 아니면 능력 있죠? 어쩌면 고유 능력일 수도 있고."
"고유 능력입니다. 어떻게 아셨습니까?"
신성아는 당황했다.
한 번도 말한 적이 없는데, 안유성은 원래 알고 있었던 듯 자신의 핵심 능력을 알아맞혔다.
"그거야 싸우는 거 보면 뻔하죠. 지금 누나가 원하는 것처럼 접근전을 잘하려면, 우선 누나가 가진 장점이 무엇인가를 살펴봐야 해요."
"으음..."
"누나의 장점은 뛰어난 눈. 민첩성. 유연성. 궁술. 냉철한 상황판단. 준수한 전투 센스 정도겠네요."
"그렇습니까?"
"제가 보기엔 그래요. 몇 가지 더 있긴 한데, 저게 주요 핵심이죠. 근거리 전투든 원거리 전투든 간에, 이 장점들을 핵심 바탕으로 두고 어떻게 활용할지를 고민하는 게 시작이에요."
"알겠습니다."
자신의 장점, 특기를 바탕으로 발전시킨다.
안유성의 말은 정론이라고 할 수 있었다.
"음, 제가 방금 생각을 해봤는데... 누나. 제가 싸우는 건 자주 봤죠?"
"예."
"누나는 저보다 훨씬 더 곡예를 하듯이 움직여야 할 것 같아요. 아주 아크로바틱하게! 무슨 말인지 알죠?"
"그게 가능하겠습니까..?"
솔직히 자신이 없었다.
기존의 전투 방식을 포기하고 새로운 것을 시도한다. 이 자체도 힘들겠지만, 더욱 심각한 문제는 안유성보다 기민하게 움직이라는 것이다.
그 정도 수준이라면 전문 서커스단도 고개를 저을 것이 분명했다.
"해보기 전에는 모르는 거죠. 그래도 제 육감에 따르면 상당히 가능성이 높다고 하네요."
농담인지 진담인지 모를 말을 내뱉으며 안유성이 씨익 웃었다.
"그럼 일단 기본적인 것부터 보여줄게요. 잘 봐요."
안유성이 단검 두 자루를 인벤토리에서 꺼냈다.
한 손으로는 단검을 던지고, 다른 손으로는 단검을 받는다.
단검을 이용한 저글링이었다.
"이 정도는 쉽게 할 수 있죠?"
"예."
"그럼 이건요?"
점차 안유성의 손에 새로운 단검이 추가되기 시작했다.
저글링을 하면서 인벤토리에서 새로운 단검을 꺼내고, 단검을 추가하는 것이다.
두 자루에서 시작된 단검은 어느새 여덟 자루가 되어 있었다.
"으음... 조금만 연습하면 가능할 것 같습니다."
높아진 신체 능력 덕에 저글링 자체는 별로 힘들지 않았다.
정말 힘든 것은 순간적으로 인벤토리에서 새로운 단검을 꺼내서 정확하게 집어던지는 것.
하지만 그 또한 연습한다면 어찌 될 것 같기는 했다.
"그럼 이건 어때요?"
그때 벌어진 안유성의 묘기에 신성아의 눈이 부릅떠졌다.
"그건...!"
안유성은 저글링 하는 무기들을 끊임없이 바꾸고 있었다.
무기를 받아 드는 순간 인벤토리에 집어넣고, 동시에 새로운 무기를 꺼내서 다시 던진다.
심지어 아까처럼 단검으로 통일된 것도 아니었다.
온갖 장비들이 엄청난 속도로 인벤토리를 왔다 갔다 하며 허공을 날았다.
"그건 불가능합니다."
저글링을 하면서 초당 두 개, 세 개의 아이템을 인벤토리에 집어넣으면서 동시에 꺼내고 있었다.
저건 저글링이 아니라 그냥 바닥에 무기를 펼쳐놓고 하라고 해도 할 수 있을까 말까 하는 기행(奇行)이었다.
"누나는 이걸 마스터해야 돼요."
말하는 순간에도 안유성은 계속해서 무기들을 던지고 있었다.
심지어 컨트롤도 가능한지 무기의 종류 또한 균일하게 바꾸었다.
단검들이 일렬로 허공을 가르는가 하면, 어느새 메이스들이 줄줄이 떠오르고 있다.
신성아는 눈앞에 있는 정신 나간 남자의 능력이 어디까지인지 고민하는 것을 그만두었다.
"후우, 이유가 있습니까?"
"파워가 부족하잖아요. 그러면 의외성으로 빈틈을 만들어 내고 급소를 공격할 수밖에 없죠."
"으음..."
"누나가 가진 마력에 대한 재능이 강현이 형 수준만 됐으면, 불필요했을 수도 있는데, 제가 보기에 누나는 마력에 대한 재능이 평범한 수준이거든요. 그 이하일 수도 있고."
"예."
"그러니까 이 방법밖에 없죠."
안유성이 말한 결론은 납득했다.
그러나 그 내용을 이해할 수는 없었다.
"구체적으로 어떤 방법인지 보여주실 수 있겠습니까?"
"그러면 제가 공격할 테니까 한번 막아 볼래요?"
"알겠습니다."
안유성과 신성아가 서로 마주 보고 섰다. 신성아는 단검을 쥔 채였고, 안유성은 빈손이었다.
"갑니다."
순간 안유성의 손에 붉은 단검 세 자루가 생겨났다.
안유성은 일말의 망설임도 없이 신성아에게 단검을 집어던졌다.
-쐐애액
엄청난 속도로 날아오는 단검.
정확도는 말할 것도 없다.
안유성은 단검을 던지자마자 본인도 함께 달렸다.
그가 자주 사용하는 방법이다.
신성아는 재빨리 대처했다.
아니, 대처하려 했다.
'이런!'
언제 던진 것인지 신성아가 피하는 방향으로 새로운 단검이 날아오고 있었다.
처음에 붉은 단검 세 자루로 시선을 끈 뒤, 어두운 색의 단검을 던져 눈치 채지 못한 것이었다.
-팅!
다행히 신성아는 뛰어난 반사 신경으로 단검을 쳐냈다.
그걸로 끝이었다.
이미 안유성의 단검이 그녀의 목에 닿아 있었다.
"어떤 것 같아요?"
"당혹스럽군요..."
"그렇죠? 아마 본인이 생각해도 어이가 없을 거예요. 이런 간단한 장난에 당하다니. 그런데 장난에 당하든 진심 전력에 당하든 죽으면 그걸로 끝이에요."
이미 수많은 죽음을 봐왔던 신성아였기에, 절실하게 이해했다.
"의외성. 누나는 끊임없이 변수를 만들어 내야 해요. 거의 본능이라 할 수 있을 만큼."
"예를 들자면 뭐가 있습니까?"
"저한테 검을 한번 휘둘러볼래요? 전력으로."
안유성의 말에 신성아가 힘껏 검을 휘둘렀다.
-챙!
능력자들의 근력은 일반적인 상식을 아득히 뛰어넘는다.
안유성은 검이 부딪힐 때 생기는 강한 반작용을 이용해 몸을 뒤로 날렸다.
동시에 양손에 단검을 생성해 집어던졌다.
-파박!
단검이 신성아의 머리 양 옆을 지나며 벽에 꽂혔다.
"이렇게 검을 던지면서 다시 적에게 달려든다거나 하는 거죠."
"으음..."
"능력자들은 본인 체중에 비해 과한 힘을 쓰고 있어요. 이걸 잘 이용하면 상대의 힘이 더 강하더라도 충분히 나의 이점으로 승화가 가능한 거죠."
"무슨 말인지 알겠습니다."
"별거 아니야? 다른 사람들도 다 생각하는 거잖아.라고 생각할 수도 있는데, 맞아요. 그런데 그걸 정말 제대로 이용하는 사람은 지금껏 한 번도 본 적이 없어요. 다들 머리로는 알고 있지만 몸이 안 따라 주는 거죠."
"그렇군요..."
"여기서 추가적인 설명을 하면, 누나는 저처럼 단검을 던지는 것도 좋지만, 활을 써야 해요."
"근접에서 활을 씁니까?"
"편견을 없애요. 장점을 이용해야죠. 활은 단검보다 훨씬 강해요. 만약 방금처럼 뒤로 빠지는 순간에 활로 무기를 바꿔서 화살을 날린다면? 그게 강력한 마력 화살이었다면? 단번에 전투가 끝날 수도 있었겠죠. 뿐만 아니라, 적의 공격을 피함과 동시에 면전에서 활을 쏜다면? 보통은 당황하고 빈틈이 생길 수밖에 없어요."
신성아는 그제야 안유성이 궁극적으로 말하고자 하는 바를 깨달았다.
"쉽지 않은 길이겠군요."
"비교적 쉬워 보이는 길도 있죠. 무기에 독을 쓴다든가 하는. 하지만 그런 것들은 결국 한계가 있어요. 정석이 받쳐주지 않으면 의미가 없다 할까나?"
"흐음..."
"누나 정도면 분명히 할 수 있을 거예요. 시간이 제법 걸리겠지만."
"알겠습니다. 지도 감사합니다."
그 뒤로 신성아는 잠자는 시간까지 아껴가며 훈련에 매진했다.
컨디션이 좋으면 안유성과 대련하고, 체력이 빠지면 혼자 연습을 했다.
그렇게 밤새 훈련하다 지쳐 잠이 들고, 눈을 뜨면 다시 안유성과 대련을 하는 나날이 이어졌다.
**
"크하하! 이봐. 그 귀여운 단검으로 뭘 하려는 거야?"
"저기에 찔려서 피 한 방울 날지 모르겠군."
"하하하하!"
해방 연합의 능력자들은 저들끼리 재미없는 농담을 주고받으며 신나게 웃어젖혔다.
영어와 러시아어가 섞여 대부분 알아들을 수 없었지만, 딱히 지금 중요한 것은 아니었다.
"거기 너. 이름이 신성아였나? 그냥 얌전히 항복하는 게 어때?"
머리가 반질반질한 놈이 어눌한 영어로 말을 걸어왔다.
신성아는 피식 웃으며 손을 들었다.
"Xuck you. Xtich"
(엿 먹어. 잡것들아.)
순식간에 튀어나온 잉글리시 대표 욕설에 대머리가 깜짝 놀랐다.
"You. mouth is Bitch. You so Xucking Xussy."
(너. 말만 많아. 완전 겁쟁이.)
뒤이어서 몰아치는 욕설들.
신성아는 입가에 비웃음을 머금고 있어 보는 이로 하여금 더욱 분노를 유발했다.
예상대로 화가 머리끝까지 난 대머리는 두피까지 벌겋게 달아올랐다.
"쑤까! 그 파렴치한 입을 당장 찢어주겠어!"
분노의 대머리가 괴성을 내지르며 달려왔다.
신성아는 재빨리 재킷을 집어던졌다.
-파라락
자신의 얼굴로 날아온 재킷을 본 대머리가 코웃음을 쳤다.
"무슨 개수작이야!?"
대머리는 검을 휘둘러 가볍게 재킷을 두 동강 냈다.
"파벨! 위험해!"
순간 뒤쪽에서 들려온 외침.
동시에 파벨이라 불린 대머리의 얼굴이 딱딱하게 굳었다.
'젠장. 이딴 잡기술에...'
재킷과 함께 날아든 화살.
그것은 정확히 파벨의 눈을 향하고 있었다.
"으아아! 파베엘!"
"당장 저년을 죽여!"
허무한 파벨의 죽음에 동료들이 괴성을 내지르며 달려왔다.
"갈기갈기 찢어주마!"
"화염의 고리!"
"죄의 속박."
목숨에 경각에 달린 상황이었지만, 신성아는 침착했다.
'이제 남은 적은 다섯. 셋은 근접형이고, 둘은 마법에 능하다.'
생각을 하면서도 그녀의 발은 쉴 새 없이 움직였다.
"뭐가 이렇게 빨라!?"
"이 쥐새끼 같은 게!"
마치 서커스 선수와 같은 현란한 움직임으로 모든 공격을 피한 신성아가 재빨리 뒤쪽으로 달려갔다.
-파박!
연달아서 날아가는 화살.
달리면서 쏘는 것이라고는 믿을 수 없을 만큼 정확한 솜씨였다.
"이까짓 화살!"
뒤쪽에서 마법을 날리던 남자는 갑작스러운 공격에도 침착하게 방어 마법을 전개했다.
-콰앙!
마력화살이 방어벽과 부딪히고, 굉음과 함께 먼지가 일었다.
"어디냐."
남자는 만일을 대비해 여전히 방어벽을 전개한 상태였다.
"조심해!"
"뭐?"
"위에서 온다!"
동료의 말에 재빨리 고개를 들었으나 이미 늦었다.
그의 눈에 보인 것은 자신의 머리 위에서 단검을 내려찍고 있는 신성아였다.
-콰직!
"이런 멍청한 자식들! 정신 안 차려!?"
"전부 방심하지 말라고. 계집 하나한테 이게 무슨 꼴이야?!"
단숨에 동료 둘이 쓰러지자 놈들도 경각심을 가졌다.
신성아와 놈들이 서로를 노려보며 대치했다.
'기습이나 트릭은 더 이상 활용하기 힘들겠어.'
방심을 이용해서 두 명을 처리했지만, 이제는 놈들도 심각하게 경계하는 상태다.
어쩔 수 없이 정면 돌파를 해야 할 것 같았다.
'고민할 시간이 없다.'
이러는 사이 뒤에서 온 놈들에게 붙잡히기라도 하면 큰일이다.
강현이 만들어준 소중한 기회.
절대로 실패해서는 안 된다.
생각을 정리한 신성아가 한 번에 3개의 화살을 시위에 걸었다.
그리고 엄청난 속도로 팔을 놀려 미친 듯이 화살을 쏟아냈다.
어차피 화살은 종류별로 수백 개가 인벤토리에 쌓여 있다.
그동안 인벤토리에서 아이템을 꺼내는 연습을 수도 없이 반복했기에, 그녀가 화살을 날리는 화살은 마치 기관총의 그것과도 같았다.
'이걸로는 시간 끌기 밖에 되지 않아. 처리하려면 어떻게든 접근해야 한다.'
그러나 적들도 고레벨의 능력자.
날아오는 화살 정도는 손쉽게 피할뿐더러, 가끔 화살이 적중하더라도 그들이 입은 갑옷조차 뚫지 못하고 튕겨나갔다.
"잡았다!"
화살비를 뚫고 달려온 남자가 신성아에게 창을 찔러왔다.
신성아는 재빨리 몸을 틀어 창을 피하고는 단검을 휘둘렀다.
-카가가각!
단검이 갑옷을 긁으며 불똥이 튀었다.
"이게 얼마짜린 줄 알아? 그딴 장난감 칼로는 흠집도 낼 수…"
여유롭게 영어로 말을 하던 남자가 기겁하며 창을 휘둘렀다.
그의 눈앞에 화살이 날아들고 있었기 때문이다.
-타앙!
'젠장 무슨 화살 위력이..!'
그러나 그 화살은 이전처럼 나무로 된 것이 아니었다.
통짜 철덩어리.
화살대, 화살촉, 날개 모든 것이 강철로 이뤄진 묵직한 화살은 차원이 다른 위력을 품고 있었다.
'큰일이다!'
신성아는 일부러 무게가 가볍고 위력이 약한 화살만을 사용했다.
때문에 그것에 적응해 있던 남자는 갑작스럽게 날아온 강력한 화살을 제대로 쳐내지 못했다.
남자의 팔이 젖혀지며 약간의 틈이 생겨났다.
신성아는 그 순간을 놓치지 않고 접근해 단검을 쑤셔 박았다.
"끄륵, 끅..."
남자의 목 부근에 위치한 갑옷의 이음새 단검이 박혔다.
"피가 한 방울보다는 많이 나오는 것 같은데. 안 그래?"
남자가 벌겋게 충혈된 눈으로 신성아를 노려봤다.
"다음 생에는 갑옷보다는 실력을 키우는 게 좋겠어."
그 눈을 똑바로 응시한 신성아가 피식 웃었다. 그녀가 단검을 비틀어 뽑아내자, 푸슉-하는 불쾌한 음성과 함께 피가 폭포처럼 쏟아져 나왔다.
"커허억!"
"다닐라아!! 젠장!"
피를 뿜어내는 남자. 다닐라를 발로 차서 날린 신성아가 손을 들어 검지를 까딱였다.
"Come on."
108화 죽음에서 돌아온 사신(4)
108. 죽음에서 돌아온 사신(4)
"얼마나 진행됐지?"
"대부분 본국으로 이송했습니다. 제압이 힘든 몇몇은 어쩔 수 없이 죽이긴 했지만..."
"그 정도면 됐다."
반다렌코가 고개를 저으며 부하의 말을 끊었다.
"몇 놈 흘린다고 해서 문제 될 건 없지. 그보다... 저 놈은 언제까지 날뛸 생각이지?"
반다렌코가 전방을 바라보며 미간을 찌푸렸다.
그의 시선 끝에는 수많은 연합원들을 상대로 혼자 날뛰고 있는 강현이 있었다.
"크아아악!"
"뭐하는 거야! 놈은 고작 하나다!"
마법의 융단폭격이 가해졌다.
이들은 연합의 정예.
반다렌코가 직접 마력을 부여했기에, 일반적인 능력자보다 높은 마력 수치를 지니고 있었다.
그들은 넘쳐나는 마력을 바탕으로 끊임없이 마법을 쏟아냈다.
-콰과과과광!
강현에게 쏟아지는 마법에 눈이 부실 정도로 빛이 터져 나오고, 굉음이 울렸다.
"죽었나..?"
"닥쳐!"
피어오르는 흙먼지를 보며, 누군가 어리석은 대사를 내뱉었다.
잠시 후. 흙먼지가 걷히고, 그 사이에서 오롯이 서있는 강현이 나타났다.
"하아, 수고했다."
강현의 손에는 걸레짝이 된 시체가 들려 있었다.
방패로 사용하던 시체를 집어던진 강현이 다시 움직였다.
"젠장! 속박 마법을 펼쳐!"
"통하지 않습니다!"
"전사들. 몸을 던져서라도 놈을 붙잡으란 말이야!"
상대하는 입장에서 봤을 때, 강현은 말 그대로 이레귤러.
규격 외의 괴물이었다.
그들의 연합장 반다렌코도 이 정도 인원을 상대로 저런 움직임을 보일 수는 없었다.
"끝이군."
강현이 펼치는 예상 밖의 선전에 모두가 허둥댔지만, 반다렌코는 냉철하게 상황을 분석했다.
"놈의 몸이 회복되는 속도가 눈에 띄게 느려졌다. 체력도 이미 다한 것 같군."
반다렌코의 말대로다.
강현은 최대한 아무렇지 않은 척 움직였지만, 이제 그마저도 한계에 달했다.
손가락 하나 까딱하기 힘든 상황에서 오직 정신력 하나만으로 움직이고 있었다.
"끄어..."
"하악, 하아..."
또 한 명의 목에 검을 쑤셔 박은 강현이 거칠게 숨을 몰아쉬었다.
"괴물 같은 놈!"
"됐어. 놈도 이제 지쳤어. 이대로 포위하면 돼."
연합원들은 강현의 주위를 완전히 포위했다.
그들 또한 강현이 한계에 다다랐음을 느끼고 있었기 때문이다.
"후우, 야. 듣고 있냐."
강현이 작은 소리로 중얼거렸다.
-...
자신의 손에 들린 빌게인의 장검.
그 속에 잠들어 있는, 아니 잠든 척을 하고 있는 베일에게 건네는 말이었다.
"마지막으로 부탁한다. 도와줘."
-...
빌게인의 장검은 베일이 깃들면서 더욱 강한 힘을 손에 넣었다.
그러나 그뿐.
검의 통제권이 완전히 베일에게 넘어가 강현은 기존의 능력들을 전혀 사용하지 못했다.
지금 강현의 손에 들린 빌게인의 장검은 그저 단단하고 날카로운 검일 뿐이었다.
"네가 돕든 안 돕든 어차피 난 죽어. 그런데 말이야."
강현이 빌게인의 장검을 강하게 움켜쥐었다.
"너는 열 받지도 않냐? 네 입으로 잘난 기사라면서. 명예가 어떻고, 수호가 어떻고 지껄였잖아. 그런데 결국 이거냐? 죄 없는 애들이 저기 코쟁이 새끼들한테 다 잡혀가서 죽을 판에 네 자존심이 그렇게 중요해?"
강현이 말을 거는 사이 반다렌코가 천천히 다가왔다.
"포기해라. 지금이라도 순순히 잡혀준다면 살려줄 용의가 있다."
반다렌코의 말을 전달하는 통역사의 말이 강현의 귓가를 후벼 팠다.
'살려줄 용의 같은 소리하네.'
애초에 살 생각도 없었다.
하지만 강현은 시간을 끌어야 했다.
"정말 살려줄 건가?"
강현의 대답에 통역사는 신이 나서 설명했다.
"강현 씨. 제 말 잘 들으세요. 지금이라도 투항하면 여기 계신 반다렌코 님께서 연합의 중요한 직책을 맡기고 또한…."
통역사의 설명을 흘려들으며 강현은 계속 베일에게 말을 걸었다.
"마지막으로 말한다. 도와줘."
-내가 돕는다 해도 어차피 너는 죽는다.
드디어 베일에게서 응답이 들려왔다.
"아까 내가 한 말 못 들었냐? 죽어도 부활한다고."
-그런 거짓말을 내가 믿을….
"진짜면 어쩔 건데."
강현의 말에 베일이 침묵했다.
"만약 내가 이대로 죽고 부활하면... 제일 먼저 뭘 할 건지 알아? 아무짝에 쓸모도 없는 너를 용광로에 처박는 거야! 이 개새끼야!"
"저기 강현 씨...?"
순간 흥분을 참지 못한 강현이 소리치자 통역사가 당황했다.
"고민 중이니까 기다려!"
그런 통역사에게 일갈한 강현이 다시 베일에게 말을 걸었다.
"후우, 그러니까 도와 달라고. 만약 지금이라도 네가 도와준다면..."
-도와준다면?
"같이 저것들 제대로 한번 족쳐보자. 존나 멋지게 부활해서 전부 다 박살내고, 사람들도 구하자고."
강현의 말에도 베일의 반응은 회의적이었다.
-가능한 것인가. 놈들의 대장이란 자가 지닌 마력은 내가 언데드가 됐을 때 지니고 있던 마력보다 강대하다. 그 정도라면 내가 살아있던 시절에는 한 국가에서 이름이 날 정도의….
"말 존나 많네. 이때까지 근질거려서 어떻게 참았냐?"
-지금 그딴 농담을 할 때가….
"시발. 안 되면 어쩔 건데? 어차피 질 거니까 그냥 고개 처박고 있을까? 그게 네가 말하는 기사도냐?"
-...
"그딴 게 기사도고, 명예라면 왜 네가 그런 던전에 처박혀 있었는지 알만도 하네."
-입 조심해라.
"돕기 싫으면 치워. 새꺄. 너 없이 혼자 할 수 있으니까."
가볍게 몸을 푼 강현이 천천히 앞으로 걸었다.
"거기 통역사."
"예? 예!"
"당신은 한국인이야?"
"예. 맞습니다."
"그런데 왜 그딴 코쟁이 범죄자 밑에서 일하고 있어."
"그게 어쩔 수가 없이..."
"됐고. 당신 옆에 있는 코 제일 큰 놈한테 전해 내가 졌다고."
"알겠습니다!"
한껏 얼굴이 밝아진 통역사가 신이 나서는 러시아어로 무언가를 떠들었다.
그 말을 들은 반다렌코가 득의양양하게 웃고 있을 때였다.
"그리고 다음 2차전은 지옥에서 이어간다고도 전해라."
"예..?"
통역사가 멍청한 표정을 짓고, 강현의 전신에서 터질 듯한 힘이 끓어 넘쳤다.
"어차피 도와줄 거면서 튕기기는."
믿을 수 없다는 듯이 눈을 치켜뜬 반다렌코에게 달려가며 강현이 씨익 웃었다.
**
반다렌코는 팔짱을 낀 채로 오만하게 강현을 내려다봤다.
"놈이 뭐라고 하지?"
"자기가 졌다고 합니다."
통역사의 말에 그가 만족스럽게 웃었다.
"그래야지. 놈에게는 살려줄 테니 걱정 말라고 전해. 크큭."
거짓말이 아니었다.
반다렌코는 강현을 살려줄 생각이었다.
'저런 수준의 마력을 가진 자를 그냥 죽일 수는 없지.'
철저하게. 마력 한 방울 남지 않도록 쥐어짜 낼 것이다. 더 이상 능력자라고 부를 수 없을 만큼.
그 뒤에는 능력자의 신체를 연구하는 놈들에게 비싼 값을 받고 넘길 것이다.
'전 세계에 이름을 떨치는 놈이니 제법 두둑하게 들어오겠지.'
반다렌코가 김칫국을 사발로 마시고 있을 때였다.
강현이 다시 무언가를 말했다.
"예..?"
이어지는 통역사의 멍청한 표정.
"방금 놈이 뭐라한…."
반다렌코는 말을 끝낼 수 없었다.
강현이 지금껏 보여줬던 것보다 배는 빠른 속력으로 날아왔기 때문이다.
"흐읍!"
반다렌코는 다급히 모든 마력을 쏟아부어 방어벽을 만들었다.
이 정도면 어지간한 공격은 가볍게 막아내겠지만, 강현을 상대로는 부족해 보였다.
-콰아아아앙!
역시나 강현의 공격 한 번에 모든 방어벽이 박살났다.
"이게 인간의 힘이라니..."
미리 뒤쪽으로 피해있던 반다렌코가 온갖 마법을 사용해 강현의 시야를 어지럽혔다.
"네놈 정체가 뭐냐!"
강현은 한눈에 봐도 톤 단위의 무게가 나갈 것 같은 망치를 한 손으로 들고 있었다.
물리법칙을 무시한 듯한 그 모습에 반다렌코가 저도 모르게 침을 삼켰다.
"코쟁이가 뭐라는 거야. 한국말로 떠들어!"
다시 달려오는 강현을 보고 반다렌코가 빠르게 상황을 파악했다.
'단발성 스킬. 그것도 자기희생이 전제된 스킬이 아니면 나올 수 없는 위력이다.'
강현의 약점을 직감한 그가 다급히 외쳤다.
"상대하지 말고 시간을 끌어! 버티는 것에 집중해라!"
그때였다.
어느새 주위의 능력자를 돌파한 강현이 그의 코앞에 와있었다.
'너무 빨라!'
저만한 무게를 다루는 것이라고는 믿을 수 없을 만큼 빠른 속도였다.
기겁한 반다렌코가 다시 한번 마력을 쏟아부었다.
'이 정도면 버틸 수 있다!'
찰나의 순간.
반다렌코는 네 종류의 쉴드 마법을 여러 겹 중첩시키고, 그의 신체를 강화하는 마법을 여섯 개나 사용했지만,
-콰아앙!
"커헉!"
소용없었다.
망치에 스친 반다렌코의 뼈가 나뭇가지처럼 허무하게 부러졌다.
"연합장님이 위험하다!"
"다들 움직여!"
너무 강한 충격에 반다렌코는 무려 100m를 넘게 날아갔다.
그 상황이 반다렌코의 목숨을 구했다.
강현이 다시 연합원들에게 둘러싸인 틈에 반다렌코가 서둘러 회복마법을 전개했다.
"허억, 허억! 저 괴물 같은 놈!"
반다렌코의 상식으로는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위력이었다.
강한 능력에는 그에 상응하는 반동이 따른다.
그것을 없애기 위해서는 모든 능력, 스텟을 골고루 올리고, 피나는 노력을 통해 스텟을 온전히 자신의 것으로 만드는 수밖에 없었다.
그럼에도 반다렌코는 오직 마력 하나만을 안정시키는 것에 그쳤다.
너무 높은 마력을 신체가 감당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그런데 저놈은 뭐란 말이냐..."
하지만 지금 강현은 한눈에 봐도 근력, 순발력, 체력까지 모든 스텟이 압도적인 수준으로 올라 있었다.
"저걸 육체가 버틸 수 있다는 말인가?"
아니. 육체가 버티고 말고를 떠나서 정신이 붕괴된다.
불에 타거나 칼날이 몸을 헤집는 것 정도는 어린아이의 장난처럼 느껴지는 수준의 격통이 치밀어 오를 것이다.
그 정도 수준의 고통을 인간이 견딜 수 있을 리가 없었다.
"끄으윽... 끅. 도망쳐..."
"저건 인간이 아니야. 우리가 어떻게 할 수 있는 게 아니라고..."
반다렌코의 눈에 비치는 강현은 완전히 인간의 영역에서 벗어나 있었다.
이제는 자신을 향하는 마법을 피할 생각조차 없는 모습.
말 그대로 광전사.
싸움에 미친놈이었다.
강현이 오직 적을 죽이는 것에만 집중했다.
나름 연합의 정예라 치부할 수 있는 이들이 채 5분도 지나지 않아 몰살당했다.
아니, 한 줌 핏물로 산화했다.
"..."
그나마 살아 있는 부하들을 둘러봤지만, 멀쩡한 이가 없었다.
긴장감에 꽉 쥐어진 반다렌코의 주먹이 떨려왔다.
'어차피 몸이 멀쩡하다고 해도 소용없었겠군.'
모두가 겁에 질려있었다.
그리고 그것은 반다렌코 또한 다르지 않았다.
'인간이 아닌 것인가...'
그의 눈에 강현은 죽음에서 돌아온 사신이었다.
"커헉, 커흐헉..."
마침내 5분이 지나고, 모든 힘이 빠진 강현은 더 이상 뛰지 못했다.
강현은 다 죽어가는 사람처럼 걷고 있었다.
거대한 망치도, 화려하게 빛나는 붉은 장검도 사라진 채로.
"크큭..."
하지만 눈만은 여전히 불타고 있었다.
강현의 눈을 마주한 반다렌코는 맹수 앞의 한낱 초식동물에 지나지 않았다.
"..."
잠시간의 침묵.
들리는 것이라고는 강현의 힘없는 발걸음에 땅이 쓸리는 소리뿐이었다.
마침내 강현이 코앞까지 다가오고, 반다렌코가 침을 꿀걱-삼켰다.
"기, 기… 라. 다… 온다..."
아주 미약한 목소리로 들려오는 한국말. 그 말만을 내뱉은 채로 강현이 바닥에 쓰러졌다.
"허억, 허억..."
그제야 숨을 들이켠 반다렌코가 조심스럽게 강현을 살펴봤다.
"죽었다."
완전히 심장이 멈추었다.
그것을 확인함과 동시에 반다렌코가 쓰러지듯 주저앉았다.
109화 정면돌파(1)
109. 정면 돌파(1)
"으윽..."
머리가 지끈지끈했다.
가볍게 신음하던 최연화가 조심스럽게 눈을 떴다.
"여기가 어디지?"
처음 와보는 장소였다.
음침한 어둠과 몸을 찝찝하게 하는 습기가 올라왔다.
최연화는 어째서 자신이 이런 낯선 곳에 있는지 기억을 더듬었다.
'던전 실습 도중에 괴한들이 나타났지...'
자신은 놈들에게 저항하다가 기습을 당해 기절했다.
그리고 현재.
그녀는 생전 처음 와보는 장소에 와있었다.
주위를 둘러보니 같이 교육을 받던 학생 몇몇이 모여 있는 것이 보였다.
"일어났어요?"
한 남자가 조심스럽게 그녀의 안색을 살폈다.
최연화는 그의 이름을 몰랐지만, 교육을 받는 동안 오가며 본 기억이 있었다.
"여기가 어디죠?"
"저희도 잘 모르겠어요. 정신을 차린 지 얼마 안 됐거든요... 다른 건 몰라도 감옥인 것만은 확실한 것 같아요."
"그렇네요."
어느 모로 보나 이곳은 감옥이었다.
좁은 방에 사방이 단단한 시멘트로 막혀 있었다.
문은 두꺼운 철문이었는데, 그곳에 있는 좁은 쇠창살 틈이 밖과 통하는 유일한 통로였다.
"다른 사람들은 어떻게 됐나요?"
"각자 다른 방에 잡혀 있는 것 같아요. 조금 전에도 한국말이 들려왔거든요. 거의 욕설과 비명이긴 했지만."
"비명이요...?"
"아마 탈출을 시도하다가 붙잡힌 것 같아요."
최연화는 빠르게 상황을 이해했다.
여기 붙잡혀 있는 이들은 능력자들.
각자 인벤토리에 무기를 지니고 다니고, 몇몇은 스킬까지 사용한다.
이런 갑갑한 감옥 따위, 순식간에 부수고 탈출할 수 있는 무력을 갖춘 사람도 있었을 것이다.
"놈들은 붙잡힌 사람들을 고문했어요. 한동안 비명이 계속됐는데, 그 이후로는 아무도 나갈 생각을 못 하는 것 같아요."
"놈들이라면, 던전에 찾아온 외국인들 말하는 건가요?"
"예. 들리는 말로는 아마도 러시아 사람인 것 같아요."
"러시아..."
그 말을 들으며 최연화는 이곳이 대한민국이 아닐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때 놈들은 포탈을 타고 왔어. 그 출입구가 꼭 한국으로 이어져 있다는 보장은 없으니까...'
그녀가 생각을 정리할 때였다.
-철컥!
갑자기 두꺼운 철문이 열렸다.
그리고 등장한 외국인 두 명.
"따라와."
한 남자가 어눌하게 한국어를 구사했다.
방 안에 갇혀 있던 최연화와 사람들은 어떻게 해야 할지 몰라 주춤했다.
"따라와!"
"크악!"
순간 남자가 앞에 있던 사람을 발로 걷어찼다.
"따라와."
놈은 할 줄 아는 말이 '따라와' 밖에 없는 것 같았다.
순간 최연화는 고민했다.
무기를 들고 대항해야 하나? 하지만 놈을 이긴다고 해서 이곳에 탈출하리란 보장은 없다.
함께 잡혀 있던 사람들은 모두 낮은 레벨의 교육생들.
그에 반해 놈들은 상당히 강한 능력자들인 것 같았다.
"일단은 저놈 말대로 하죠."
최연화를 깨웠던 남자가 말했다.
엉거주춤하던 사람들이 고개를 끄덕이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복도 밖으로 나가자 꽤 많은 사람이 모여 있는 것이 보였다.
대략 30명 정도.
최연화의 방에 5명이 있었으니, 총 6개의 방에서 사람이 나온 셈이다.
그중에는 정대한과 부하들도 섞여 있었다.
"여러분 반갑습니다. 저는 오정수라 합니다. 지금 상당히 혼란스러울 텐데 모두 지시에 잘 따라주시기 바랍니다."
밖으로 나온 그들을 기다리는 것은 오만한 표정의 동양인이었다.
익숙한 한국말이 들려오자, 여기저기서 외침이 터져 나왔다.
"여기가 어딥니까?!"
"이 사람들은 누구예요? 집에 보내줘요!"
"당신들 이러고도 무사할 줄 알아!? 우리 아버지가 누군지 알고!"
그 말들을 듣고 있던 오정수가 손을 뻗었다.
"거기 당신."
"예, 예?"
"그래. 너. 이리로 나와."
"내가 왜 나가야 하는데!?"
오정수의 말에 남자가 당황하며 반발했다.
"집에 보내 달라면서. 보내 줄 테니까. 나오라고."
오정수는 어느새 반말하고 있었다. 고압적이고 건방진 말투였지만, 분위기에 압도된 남자는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Приведи мужчину."
(남자를 데려와.)
오정수의 말에 건장한 체격의 백인들이 남자에게 다가갔다.
"뭐, 뭐야? 왜이래!?"
남자는 필사적으로 저항했지만, 소용없었다.
남자와 놈들의 근력 차이는 어린아이와 성인보다도 심각했다.
놈들은 그런 남자를 가볍게 제압해 오정수 앞에 데려다 놨다.
"집에 가고 싶어?"
"예..."
어느새 기가 죽은 남자가 얌전히 눈을 내리깔았다.
그런 남자를 무심히 보던 오정수가 갑자기 손찌검을 가했다.
-짜악!
그 따귀 한방에 남자는 자신의 위치를 깨달았다.
"크헉!"
단숨에 피가 터져 나오며 이가 흔들렸다.
-짜악, 짜악!
"집에 가고 싶어? 응?"
"아, 아니..."
-짜악!
"집에 가고 싶다면서?"
남자의 얼굴은 순식간에 부풀어 올라 눈까지 뜨기 힘들 지경에 이르렀다.
남자는 이제 오정수의 바짓가랑이를 붙잡고 매달리고 있었다.
"죄, 죄송합…."
남자가 사정했지만, 오정수는 가차 없이 남자를 걷어찼다.
"집에 가고 싶어? 어?! 상황 파악 안 돼!?"
"크어어..."
5분도 지나지 않아 만신창이가 된 남자는 결국 실신했다.
"Унеси это." (치워버려)
오정수의 말에 놈들이 남자를 들고 사라졌다.
오정수는 손뼉을 쳐서 분위기를 환기하고 사람들을 바라봤다.
"아직 할 말이 남은 사람 있습니까?"
오정수의 말에 아무도 고개를 들지 못했다.
그들은 모두 능력자였지만, 그래 봤자 아직 던전 한번 제대로 경험해 보지 못한 신출내기일 뿐이다.
완전히 무장을 갖춘 적들은 심지어 총까지 지니고 있었기에, 감히 대항할 생각조차 들지 않았다.
"좋습니다. 이렇게 신사적으로 대할 때 잘 따라 주시기 바랍니다."
**
오정수를 따라 이동한 곳은 음습한 광장이었다.
그곳에는 많은 한국인이 모여 있었는데, 대부분 비슷한 처지인 것처럼 보였다.
'저건 뭐지?'
그 와중에 최연화는 주위를 파악하는 데 여념이 없었다.
처음 보는 거대한 기계장치.
몸에 무수한 바늘을 꽂고 기계들을 부착하고 있는 사람들.
그중에는 과거 최연화의 친구였던, 정대한의 무리도 섞여 있었다.
온몸에 기괴한 장치를 꼽은 그들은 구타의 흔적이 역력했고, 정신을 잃은 것 같았다.
"자, 지금부터 여러분들은 각자의 상태창에 대해 상세하게 말씀해 주셔야 합니다. 혹시라도 거짓말을 하시면 저기 있는 사람들 보이죠?"
오정수는 기계장치가 있는 쪽을 가리켰다.
"저기 있는 사람들처럼 될 겁니다. 저 사람들 몸에 꽂혀있는 저건 건강검진을 위한 게 아니에요. 특수한 처리를 한 '아이템'이지요. 저 사람들이 나중에 어떻게 되는지 아십니까?"
오정수가 음흉한 미소를 지으며 사람들을 둘러봤다.
"죽을 때까지 마력이 빨릴 겁니다. 한 방울 남기지 않고 쪽쪽 빨아낸 다음에는 여기저기에 팔아버립니다. 그래도 능력자라 제법 비싸게 팔 수 있어서 좋습니다."
오정수의 말에 사람들의 얼굴이 창백해졌다.
"저렇게 되기 싫으시면 지시에 잘 따르시기 바랍니다. 한 명씩 앞으로 나와서 본인의 신체 스텟, 가지고 있는 스킬, 능력 목록을 말해주시고 제 앞에 놓인 기계장치 위로 올라가시면 됩니다."
사람들은 감히 대항할 생각을 하지 못했다.
그저 얌전히 앞으로 나가 자신의 상태창을 보며 스텟을 말해주고, 옆의 기계장치 위로 올라서기를 반복할 뿐이었다.
기계장치는 거대한 원통형의 모양이었는데 사람들이 올라올 때마다 체중계처럼 수치가 나타났다.
오정수는 신체 능력과 함께 그것을 열심히 기록했다.
'저 수치... 마력이랑 비례해.'
그 수치를 눈여겨보던 최연화는 금세 그것이 무엇인지 눈치챘다.
바로 마력 측정기.
사람들이 말하는 마력 수치와 기계장치에 뜨는 숫자가 일정한 비례 관계를 가지고 있는 것이 분명했다.
"다음."
어느새 최연화의 차례가 다가오고, 앞으로 나간 그녀는 먼저 자신의 상태창을 살폈다.
▫이름 : 최연화
▫칭호 : 불굴의 의지
▫레벨 : 7
▫상세 능력치 :
·근력 12 (+1)
·순발력 18 (+1)
·체력 14 (+1)
·마력 12 (+1)
·추가 스텟 : -
▫고유 능력 : 검의 가호
▫능력 : 중급 검술(D), 하급 체술(E)
▫스킬 : 가속(B), 검귀의 강림(B)
제법 화려한 스텟창.
던전 경험은 없지만, 튜토리얼을 5단계까지 통과하며 성장시킨 결과였다.
덕분에 그녀의 레벨은 대부분 2~4레벨인 주위 사람들보다 조금 더 앞서 있었다.
그뿐만 아니라, 그녀는 같은 레벨의 사람들과 비교해도 상당히 높은 수치를 지니고 있었다.
그것은 재능의 차이임과 동시에 어릴 적부터 운동을 좋아한 덕에 꾸준히 계속해온 노력의 차이이기도 했다.
"불러요."
"레벨 3. 근력 9, 순발력 12, 체력 10, 마력 13이요."
최연화는 일부러 마력을 제외한 수치를 최대한 낮게 불렀다.
"제법 준수하네. 스킬은?"
"최하급 검술 하나뿐이에요."
"좋아. 여기 위에 올라서."
최연화가 다른 사람들처럼 기계장치 위로 올라섰다.
그러자 숫자가 떠올랐고 그것을 받아 적은 오정수가 고개를 끄덕였다.
"다음."
**
이른 새벽.
뜬눈으로 밤을 지새운 반다렌코가 한숨을 내쉬었다.
"강현..."
마지막 강현과의 전투가 머릿속에서 떠나지를 않았기 때문이다.
다시 만난다면 이길 수 있을까? 자신에게 물어봤지만, 그는 이미 답을 알고 있다.
"이길 수 없다."
그는 강현에게 압도됐다.
너무 당황한 나머지 본 실력을 발휘하지 못했다는 것은 핑계일 뿐이다.
"놈은 정말 죽은 건가?"
원래라면 이런 고민은 하지 않았을 것이다.
강현이 죽은 것을 직접 확인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마지막이 문제였다.
강현이 죽고 얼마 지나지 않아 강현의 시체가 사라졌다.
심지어 아이템 하나 떨어뜨리지 않은 채로 말이다.
원래 능력자는 죽는 순간 인벤토리에 있는 모든 아이템을 떨어뜨린다.
"그렇지 않았다는 것은 놈이 살아있을지도 모른다는 거지."
분명 놈의 심장이 멎는 것을 확인했지만, 혹시 모르는 일이다.
워낙 경황이 없었고, 강현이 죽기 직전 어디론가 이송하는 아이템 같은 것을 지니고 있을지도 몰랐다.
"후우..."
만약 그가 살아있다면.
그래서 어떤 식으로든 이곳을 찾아온다면, 그를 제지할 방법이 있을까.
'고작 강현 하나도 제대로 처리하지 못한 내가...'
그때였다.
-똑똑
노크 소리가 들려왔다.
"들어와라."
문을 열고 나타난 것은 오정수였다.
한국을 차지하기 위해 영입했던 자 중 제법 쓸만한 남자.
강신 길드가 무너지고 김준용이 죽은 지금은 사실상 그가 유일한 한국과의 연결책이었다.
"무슨 일이지?"
"이번에 온 한국인들에 대한 보고입니다."
"특별한 것이 있나?"
"아닙니다. 예정대로 마력 측정이 끝났으며, 일부 저항이 심한 놈들은 바로 추출을 시작했습니다. 그 외에 나머지 인원들은 내일부터 레벨업에 들어갈 예정입니다."
반다렌코는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알겠습니다. 그럼 이만..."
"잠시. 할 말이 있다."
반다렌코가 떠나려는 오정수를 붙잡았다.
"이번 인원들은 죽는 일이 없도록 신경 써라."
"예?"
갑작스러운 반다렌코의 말에 오정수는 당황했다.
원래라면 사로잡은 능력자들은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레벨업을 시켜 모든 스텟을 마력에 투자하게 한다.
그 후에 일정 수치에 도달하면 마력을 뽑아내는 것에 사용하는데, 그 과정에서 사상자는 전혀 신경 쓰지 않는 것이 기존의 방식이었다.
"누구도 죽는 일이 없도록 하라고 했다."
"알겠습니다. 혹시 특별한 이유가 있습니까..?"
"그놈들을 미끼로 한국과 교섭을 해야겠다."
"교섭이라 하시면..."
"그것까지는 네가 알 필요 없다."
"알겠습니다."
오정수는 군말 없이 고개를 숙였다.
"어차피 교섭이 끝나면 다 죽일 생각이다. 다만, 그전에는 모두 목숨을 붙여놓도록 해라."
"명심하겠습니다."
110화 정면돌파(2)
110. 함정의 함정(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