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
한동안 계속해서 수 싸움을 벌이며 분신의 공격을 버텨내고 있을 때였다.
화아아아아악!
순간적으로 불안감이 엄습했다.
뒷목이 쭈뼛쭈뼛하며 온몸에서 오소소 소름이 돋아 올랐다.
처음 겪어보는 감각이었다.
'뭐지?'
나를 향해 내리치고 있는 분신의 창.
왠지 저 공격을 막아내면 안 될 것 같았다.
이유는 알 수 없었다.
그저 내 안의 무언가가 계속해서 소리 없는 아우성을 치고 있을 뿐.
'피하면 더 큰 손해를 볼 것 같은데.'
지금 상황에서는 내리치는 창을 흘리며 역으로 창을 찔러주는 게 훨씬 많은 이득을 볼 수 있었다.
그런데 여기서 피한다면? 뒷걸음질 치는 나를 분신이 계속해서 몰아붙일 것이 분명했다.
'젠장. 피하자.'
하지만 나는 내 안에 울려 퍼지는 본능의 뜻을 따랐다.
이런 경우가 처음이었기에, 무슨 이유가 있을 거란 생각이 들었으니까.
그렇게 뒤로 쭉 물러날 때였다.
쐐애애애애애애애애애애애애애애액!
순간적으로 분신의 창에서 공기 터지는 소리와 함께 어마어마한 빛이 뿜어져 나왔다.
마치 한줄기 섬광이 스쳐 지나간 것 같았다.
꽈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앙!
뒤이어 엄청난 굉음이 고막을 때렸다.
무시무시한 뇌전이 사방을 휩쓸고 지나갔다.
'벽력!'
가까스로 벽력의 범위에서 벗어난 나는 식은땀을 흘렸다.
온몸에서 미친 듯이 소름이 돋았다.
내 본능이 아니었다면 온몸이 터져 죽을 뻔한 것이다.
내가 벽력을 피하자 내 분신도 의외라는 듯 가면 너머로 눈을 동그랗게 뜨고 있었다.
'겨우 살았네. 근데 갑자기 이런 위기감이 왜 든 거지?'
지금까지 한 번도 이런 적이 없었는데.
그걸 증명하듯 이어지는 분신의 공격에도 내 본능은 잠잠했다.
그 이전의 소호나 고명, 아니 회귀 전의 부채 여인과 싸울 때도 이런 감각을 느껴본 적은 없었는데 왜 하필 녀석의 벽력에만 반응한 걸까?
'혹시, 즉사할 만한 스킬이 발동될 때만 느껴지는 건가?'
하지만 이건 그저 가설에 불과할 뿐이었다.
좀 더 사례가 쌓여 봐야 확실하게 알 수 있을 것 같았다.
'일단은 전투에 집중하자.'
챙! 채채챙! 챙! 챙!
그 이후에도 지루한 소모전이 계속되었다.
확실한 건, 내 쪽이 압도적으로 불리하다는 것.
녀석과의 스텟 차이를 커버하기 위해 더 많이 움직이다 보니, 체력이 빠르게 떨어지고 있었다.
내 분신은 내가 기회를 만들어내지 못하도록 철저하게 날 압박했다.
'이 지독한 새끼.'
―아, 처절하네요. 렌이 최선을 다해 발버둥을 쳐보지만, 분신은 그 어느 무엇도 허용하지 않습니다. 그야말로 거미줄에 걸린 먹잇감을 천천히 압박해 나가는 것 같습니다.
―지금 렌은 답답해 미칠 지경일 겁니다. 계속해서 조금씩 손해를 보고 있으면서도 그 상황을 타개할 방법이 보이지 않을 테니까요.
―하지만 이 전투로 우리는 렌의 진면목을 보게 되었습니다. 결국 분신도 렌 본인이 지금까지 싸워왔던 데이터를 바탕으로 만들어진 것 아닙니까. 정말 숨이 막힐 정도로 엄청난 수 싸움의 연속이네요. 같은 소프트웨어를 가지고 있다면, 하드웨어가 더 뛰어난 쪽이 이기는 건 당연한 겁니다.
피의 강화 특전이 5분밖에 남지 않았다.
한마디로 5분 안에 녀석을 쓰러트리지 못한다면 이 경기는 내 패배라는 것.
물론 그 전에 녀석의 피의 강화 특전이 풀릴 수도 있지만, 그건 내 희망 사항일 뿐이었다.
후웅! 휙! 휙!
그리고 내 분신이 조급해하지 않고 조금씩 조여 오는 모습에서 알 수 있었다.
피의 강화 특전이 5분 이내로 남았다면 녀석이 저렇게 여유로울 리가 없었다.
'어떻게든 그 전에 승부의 수를 띄웠을 거야.'
숨이 턱 막혔다.
시간마저도 분신의 손을 들어준 상황.
극복하기 어려울 정도의 스텟 차이.
빈틈을 허용하지 않는 철벽 수비.
스텟이 훨씬 높음에도 불구하고 조급해하지 않는 인내심까지.
'씨발. 덕분에 많이 배웠다, 이 개자식아.'
나는 더욱더 힘차게 창을 휘둘렀다.
남은 시간 동안.
이 한 몸을 하얗게 불태울 생각이었다.
스강!
순간 피가 튀며 왼쪽 어깨에서 불에 데인 듯한 느낌이 났다.
나는 아랑곳하지 않고 계속해서 녀석에게 파고들었다.
콰지지지지지직!
분신의 창이 한줄기 섬광을 만들며 날아들었다.
의지를 숨기는 최상급을 넘어, 기세까지 숨기는 고급의 경지가 만들어 낸 찌르기.
그래서 그 공격을 보고 있노라면, 위화감이 들지 않는다.
저게 얼마나 위협적인 공격인지 가늠할 수 없기 때문이었다.
'젠장. 어떻게 해야 저 찌르기를 넘어설 수 있을까.'
이 공간을 통째로 내가 차지할 수 있다면 저 공격을 막아낼 수 있을 텐데.
나도 분신의 창에 맞서 창을 찔러 넣었다.
콰지지지지지직!
내 창이 하나의 직선을 만들며 뻗어나갔다.
이 직선들을, 수 없이 많이 뿌릴 수만 있다면.
그럼 이 영역을 내가 차지할 수 있지 않을까?
그런 생각을 하며 창을 뻗을 때였다.
'뭐지?'
나도 모르게 엉뚱한 곳을 찔러 넣고 있었다.
내 본능이 시킨 움직임이었다.
왠지 이곳으로 창을 찔러야 할 것 같은.
그런 느낌이었달까.
그 감각에 너무나 확고한 확신이 들어있었기에, 난 그저 무아지경에 가까운 상태로 본능을 따라 창을 찔러 넣을 뿐이었다.
그러자 놀라운 일이 벌어졌다.
파바바바바박!
하나의 직선이 잘게 쪼개지면서 엄청난 숫자의 선들을 만들어내고 있었다.
"······!"
"······!"
수많은 선들이 순식간에 공간을 잠식해 나아갔다.
띠링!
[<특급창술 >을 각성하셨습니다.]
서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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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7화. Greatest Of All Time(7)
창을 쥐고 있던 분신의 오른팔이 바닥을 뒹굴었다.
'이, 이게!'
순간 나와 분신이 동시에 깜짝 놀랐다.
나는 갑자기 찾아온 깨달음, 그리고 오랫동안 소망해 왔던 특급 창술을 각성했다는 것에.
내 분신은 오른팔이 잘렸다는 것에.
"······."
"······."
우리 사이에 잠깐의 정적이 흘렀다.
하지만 나는 곧장 분신을 향해 달려들었다.
이러고 있을 시간이 없었다.
'남은 시간은 4분 17초.'
무슨 수를 써서라도 그 안에 녀석을 죽여야 했다.
―오, 이럴 수가! 분신에게 압도적으로 기울었던 전투를 렌이 단숨에 뒤집습니다!
―방금 뭐죠! 이전과는 차원이 다른 공격이었는데요! 분신과 싸우는 도중에 렌이 무언가 깨달음을 얻은 것으로 보입니다!
―렌이 역습을! 이 싸움 아직 몰라요!
분신이 인벤토리에서 검을 꺼내며 거리를 벌렸다.
오른팔이 잘렸기에 창을 포기한 것이다.
창은 지렛대의 원리가 가장 많이 적용되는 무기.
한 팔로는 창의 위력을 절반도 끌어낼 수 없을 테니까.
'이 새끼, 시간을 끌고 있어.'
내가 돌진할 때마다 녀석이 스텝을 밟으면서 좌우로 빠져나갔다.
내 피의 강화 특전이 끝나길 기다리는 것이다.
하지만 내 속도로는 녀석을 따라잡을 수가 없었다.
민첩 스텟이 너무 많이 차이 났다.
'씨발, 아무것도 못 하게 만드네.'
내가 활을 꺼내 들려고 인벤토리를 여는 순간, 녀석이 훅! 하고 내게 대쉬했다.
그 탓에 나는 활을 꺼내지 못한 채 녀석의 역습에 대비해야 했다.
활을 꺼내 들기엔 너무 가깝고, 창을 휘두르기엔 닿지 않는다.
사슬낫 또한 마찬가지.
딱 그 공수 전환을 할 수 있는 절묘한 거리를 끈질기게 유지하기에, 창 말고 다른 무기를 쓸 수가 없었다.
'침착하자.'
이 상태로는 어차피 피의 강화 특전이 끝나기 전까지 녀석을 죽이는 게 불가능할 것이다.
그래서 조급해할 필요가 없었다.
어차피 피의 강화 특전이 끝나더라도, 이미 승기는 내게 확실하게 넘어왔으니까.
녀석의 스텟이 아무리 높아도, 왼손으로 휘두르는 검조차 막아내지 못할 내가 아니었다.
'네가 원하는 대로 해주지.'
나만 피의 강화 특전이 끝나나?
시간이 지나면 녀석의 특전도 종료된다.
그 순간이 되면, 녀석은 확실하게 죽은 목숨이었다.
띠링!
[<피의 강화> 유지 시간이 종료되었습니다.]
[<피의 강화> 로 상승한 스텟이 초기화 됩니다.]
[근력 : 67(+5)(+16)] [민첩 : 75(+5)(+18)] [체력 : 72(+5)(+11)]
[정신 : 110(+18)] [지력 : 17(+3)] [마력 : 98(+5)(+15)]
잠시 후 피의 강화 특전이 종료됐다는 알림창이 뜨며 온몸에서 힘이 빠져나가는 느낌이 들었다.
이걸로 녀석과의 스텟 총합이 132 포인트까지 벌어졌다.
'자, 들어와 보라고.'
내 특전이 끝났다는 것을 눈치챈 것인지, 분신의 눈동자가 잠시 빨갛게 변했다.
악마의 눈을 사용할 때 나타나는 현상 같았다.
콰지지지지지지직!
그러더니 곧장 뇌전을 피우며 거리를 좁혀 내게 돌진해 왔다.
'뚫고 못 들어올걸.'
나는 창의 긴 리치를 이용하여 녀석이 들어올 경로를 차단하는 것에 집중했다.
이제부터는 버티기만 하면 된다.
시간은 내 편이니까.
챙! 채채챙! 챙! 챙!
콰직! 콰지직!
'이 정도면 충분히 버틸 수 있어.'
스텟 차이가 더 벌어졌음에도 이전보다 녀석을 상대하는 게 한결 수월해졌다.
최상급 검술과 특급 창술의 격차는 그만큼 대단했다.
스강!
내가 스타일을 바꾸자마자, 분신이 더욱 격렬하게 파고들기 시작했다.
그러다 보니 녀석에게서 무수히 많은 허점들이 생겨났다.
분신이 피의 강화가 끝나는 순간 방법이 없다는 것을 깨닫고, 다소 희생을 감수하려는 것이다.
'안 통해.'
하지만 나는 드러난 빈틈으로 공격을 찔러 넣지 않고, 녀석을 저지하는 것에만 신경 썼다.
괜히 공격했다가 내가 더 손해를 볼 수도 있었으니까.
분신 녀석이 내게 했던 것처럼, 나 또한 녀석이 아무것도 하지 못하도록 만들 생각이었다.
―오, 렌의 움직임이 엄청나게 느려졌습니다. 아무래도 스텟을 상승시키는 스킬이 종료된 모양인데요.
―분신의 움직임은 여전히 빠릅니다. 하지만 렌의 경우에 비추어 봤을 때, 분신도 곧 스킬이 종료될 가능성이 큽니다. 그래서인지, 오히려 분신 쪽에서 더 악착같이 달려드는 모습이 연출되고 있네요.
―그걸 렌도 알고 수비를 굳건히 하는 거군요! 절대 무리를 하지 않습니다!
'답답해 죽겠지.'
녀석은 검이 닿지 않으니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상황.
하지만 한 손밖에 남지 않은 이상, 검 말고는 방법이 없다.
활도 시위를 당기려면 양손이 필요하고, 사슬낫도 한 손만으로 사슬을 잡고 돌릴 수 없을 테니까.
'슬슬 끝나가나 보군.'
녀석의 공격이 한층 대담해지고 과감해져 갔다.
다리 한쪽쯤은 얼마든지 내놓겠다는 듯이 돌진해 오고 있었다.
콰지지지지지직!
그럴 때마다 나는 오히려 뒤로 빠지며 창을 휘둘러 녀석이 다가오지 못하게 만들었다.
챙! 챙! 스강!
그렇게 한참 동안 수비에 집중하다 보니, 녀석의 움직임이 어느 순간을 기점으로 확연하게 느려졌다.
'악마의 눈.'
[상대방의 능력치를 확인합니다.]
[이름 : 안우진(분신)]
[성향 : 중용]
[근력 : 112(+?)] [민첩 : 117(+?)] [체력 : 103(+?)]
[정신 : 86(+?)] [지력 : 68(+?)] [마력 : 85(+?)]
[각성 능력 : <초감각 > <고급살기 > <특급마나운용 > <고급창술 > <최상급검술 > <최상급단검술 > <최상급투척술 > <중급박투술 > <중급치료술 > <최상급궁술 > <상급검방술 > <중급채찍술 > <중급둔기술 > <상급극술 > <상급도술 >]
[업적 특전 : 역천자]
하.
이 새끼가.
지금 누구한테 약을 팔아.
녀석은 지금 연기를 하고 있는 것이었다.
피의 강화 특전이 끝났다고 생각하게끔 유도하여 내가 녀석에게 달려들도록.
'그런 꼼수는 안 통해.'
녀석도 내가 알아차렸다는 걸 인지했는지 다시 과감하게 달려들었다.
하지만 그것도 얼마 가지 않았다.
다시 움직임이 느려진 것이다.
'진짜로 특전이 끝났군.'
악마의 눈으로 확인해 보니 확실했다.
이걸로 이 싸움은 완전히 내게 넘어온 것이다.
'됐어.'
녀석의 특전이 끝났다는 걸 확인한 나는 곧바로 스타일을 바꿨다.
그러자 녀석도 공격 위주에서 곧바로 수비로 태세를 전환했다.
챙! 채챙! 콰지지직!
'어디, 얼마나 버티는지 보자고.'
단숨에 전세가 역전되며 내가 일방적으로 몰아붙이는 그림이 그려졌다.
└와 앀ㅋㅋㅋㅋ 공수 전환 속도 봐라. 진짜 예술이네 ㅋㅋㅋㅋㅋ
└렌이랑 분신이랑 거의 동시에 스타일이 바뀜 ㅋㅋㅋㅋ 진짜 성계 대항전이 아니었으면 짜고 치는 거라고 생각했을듯 ㅋㅋㅋㅋ
└우승 성계가 거의 확정됐다고 마지막 경기 안 봤으면 땅을 치고 후회할 뻔 ㅠ 이건 진짜 상위 리그에서도 보기 어려울 정도로 수준 높은 싸움임 ㅠ
└엉아들아, 이제 인정할건 인정하자. 나도 무림에 걸었는데, 쟤는 진짜 수준이 달라 ㅋㅋㅋ 역대 하위 리그 플레이어들 중에서 가장 압도적인 퍼포먼스였음 진심.
└ㅇㅇ 윗댓글 동감. 렌보다 셌던 애가 없던건 아닌데, 퍼포먼스로만 따지면 렌을 능가할 네임드가 없다. GOAT 인정.
└9경기에서 블랙 오크들 학살하던 모습만 보고 그냥 흔하디흔한 양학용인줄 알았는데.. 자기보다 고수들 상대로도 급이 다르네. 진짜 간만에 명경기 봤다.
채채챙! 챙! 챙!
내 창을 막아내던 분신이 휘청했다.
녀석의 근력이 나보다 조금 더 높긴 하지만, 한 손으로 창의 공격을 막아낸다는 것은 쉽지 않은 일이었다.
'끝이군.'
나는 자세가 무너진 분신에게 창을 휘둘렀다.
이제 녀석과의 전투를 끝낼 시간이 왔다.
띠링!
[<벽력 >이 발동됩니다.]
꽈아아아아앙!
그때 지금까지 한 번도 발동되지 않았던 벽력이 터졌다.
뇌전이 사방으로 뻗어나갔다.
피의 강화 특전이 꺼져 있었기에, 전만큼 강한 위력을 발휘하진 못했지만.
콰지지지지지지지지지직!
한계에 달해 있는 녀석을 마무리하는 데엔 충분했다.
벽력을 맞은 분신의 몸이 터져나갔다.
띠링!
[@!#[email protected]
# '렌(분신)' 을 처치했습니다.]
녀석이 죽는 모습이 마치 슬로우모션처럼 느리게 보였다.
뇌전에 조각조각 나는 팔다리들.
공중에 흩뿌려지는 붉은 피들.
그리고 바닥에 쓰러지는 모습까지.
'이겼어.'
녀석을 죽였다는 알림창을 보자 온몸의 힘이 쭈욱 빠져나갔다.
이걸로 성계 대항전이.
완전히 끝났다.
'내가 해냈어.'
그것도 내가 그렸던 최상의 결과로.
[10경기가 종료되었습니다.]
[1위. '지구' 4킬]
[2위. '웨스테로스' 2킬]
[2위. '무림' 2킬]
[3위. '알프하임' 1킬]
[3위. '졸본' 1킬]
[3위. '바빌론' 1킬]
[성계 '지구'가 킬 수 1위를 달성했습니다.]
[10경기는 지구에서 승리를 가져갑니다.]
[축하합니다!]
알림창이 뜸과 동시에 돔 경기장 전체가 하얀빛으로 물들었다.
그러자 죽은 플레이어들의 시체, 내 몸에 묻어 있는 피, 뒹구는 목과 팔다리들이 가루가 되어 흩날리더니 서서히 사라지기 시작했다.
종내에는 처음 입장했을 때처럼 때 묻은 곳 없이 깔끔한 모습으로 돌아왔다.
[현재 순위]
[1위 : 지구 / 4승]
[지구가 성계 대항전 최종 우승을 차지했습니다!]
[보상으로 <차원 특전:최강의 성계>을 획득합니다!]
[<차원 특전:최강의 성계>]
[성계 대항전에서 우승한 성계에게 지급되는 특전.]
[적용 시 모든 스텟이 + 10% 상승합니다.]
[지구를 우승으로 이끈 MVP 플레이어로 '렌'이 선정되었습니다.]
[<스킬북:그림자 표식>을 획득합니다!]
[스페셜 이벤트-성계 대항전을 종료합니다.]
[소속된 팀의 팜으로 이동합니다. 수고 많으셨습니다.]
성계 대항전에서 너무나 많은 걸 얻었다.
5년 동안 고급의 경지에 묶여 있던 창술도 특급으로 성장했고.
성계 특전도 획득했고.
전체적으로 내 모든 것들이 한 단계 성장한 것 같았다.
이곳에서 내가 이뤄야 할 건 모두 해냈다.
'상위 리그.'
아득한 절망을 선사했던 상위 리그로.
올라가는 일만 남았다.
* * *
마계의 최하층.
누군가가 콜로세움 시스템에 강제로 접근하여 성계 대항전을 보고 있었다.
거대한 왕좌에 앉은 채 한쪽 팔로 턱받침을 하고 있는 남성이었다.
무표정한 얼굴로 멍하니 경기를 보던 남자가 크게 콧바람을 내쉬며 자세를 고쳐 앉았다.
―오랜만에 정말 멋진 경기를 본 것 같습니다. 이번 성계 대항전, 콜로세움에서 최초로 열리는 대규모 이벤트이다 보니, 시작 전부터 말들이 많지 않았습니까?
―예. 그리고 실제로 5경기까지 치러질 때만 해도 관객 여러분께서 지루하다는 반응을 많이 보이셨죠. 어떤 성계가 최강인가, 라는 타이틀을 내걸고 경기가 시작됐습니다만, 사실 그걸 하위 리그에서 출전하는 플레이어들이 결정하는 게 과연 정확한가, 라는 의문도 있었습니다.
―네, 겉만 요란하지, 실속은 하나도 없는 이벤트였다는 말씀이시군요.
―맞습니다. 하지만 6경기부터 모든 게 달라졌죠. 최약의 성계이자, 네임드가 한 명도 없다고 알려진 지구에서 시작된 돌풍이 성계 대항전을 휩쓸었으니까요.
―지금 생각해도 정말 충격적인 결과이긴 합니다. 설마 우승 확률 0.1%의 지구가 우승할 거라고 어느 누가 생각이나 해봤겠습니까? 그런데 놀랍게도 그 기적이 실제로 일어났습니다.
―예. 지구가. 지금 우승을 확정 지었습니다. 전 앞으로 누군가 제게 하위 리그의 GOAT가 누구라고 생각하느냐, 라고 묻는다면 주저 없이 렌을 꼽을 겁니다.
―저도 마찬가지입니다. 일말의 고민 없이 렌! 이라고 대답할 겁니다.
남자의 얼굴에 옅은 미소가 피어올랐다.
"조금만 기다리게. 내 친구, 블라디미르여. 그대와 다시 만날 날이 얼마 남지 않았을지니."
남자의 목소리가 대전을 울렸다.
그의 머리 위에 씌워진 왕관이 천장에 달린 샹들리에의 불빛에 반짝거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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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8화. 승급전(1)
팜으로 돌아오니, 한바탕 난리가 나 있었다.
커뮤니티의 댓글을 통해 내 활약상을 전해 들은 것이다.
"형, 형! 진짜 대박! 댓글에서 형 닉네임밖에 안 나왔어요!"
"역시······. 안우진님을 이길 수 있는 존재가 없을 거라는 걸 이미 알고 있었습니다."
"고생 많으셨습니다, 안우진님. 그리고 우승 축하드립니다."
"하위 리그 역대 최고의 플레이어라고 난리가 났습니다. 정말 축하드립니다."
쭈뼛대고 있는 신입 플레이어들 사이에서, 사인방이 내게 축하를 건네왔다.
나는 고맙다는 의미에서 가볍게 고개를 끄덕여주곤, 그들의 뒤쪽에 있는 아세리안을 향해 다가갔다.
그녀의 얼굴은 잔뜩 상기되어 있었다.
"다녀왔습니다."
"고, 고생 많으셨어요, 안우진님. 후우. 우승했으면 좋겠다, 라고 생각은 했지만 이 정도로 성계 대항전에서 대활약을 펼치고 오실 줄은 몰랐어요."
그녀의 말에 나는 피식 웃었다.
목소리가 잘게 떨리는 걸 보니 무척 흥분한 것 같았다.
'지구 우승에 제법 많은 포인트를 배팅했던 모양이네.'
배당률 무려 1천 배.
1만 포인트만 배팅했어도 무려 1천만 포인트를 돌려받는 셈이었으니, 그녀가 이토록 들떠 있는 게 이해가 됐다.
'플레이어들도 댓글을 남기거나, 배팅 같은 걸 할 수 있었으면 좋았을 텐데.'
그랬으면 나도 단숨에 몇천만 포인트를 벌었을 것이다.
하지만 아쉽게도 플레이어들에게 허락된 건 커뮤니티를 보는 것 까지였다.
그 이상은 천사와 신들만이 가능하다.
"자, 여기서 이럴 게 아니라 어서 들어가요! 파티를 준비해 놨어요."
아세리안이 내 손을 잡아끌었다.
삼겹살 파티를 한 지 얼마 안 된 것 같은데.
또 파티가 치러졌다.
그것도 아주 성대하게.
다음 날 아침.
나는 아침 식사를 하자마자 아세리안의 집무실로 향했다.
전날 아세리안이 아침 식사 후에 와달라고 미리 얘기했기 때문이었다.
똑똑-
"네에, 들어오세요."
집무실로 들어가자, 테이블 위에는 이미 차와 다과가 준비되어 있었다.
"부르셨습니까?"
"앗, 네. 식사는 맛있게 하셨나요?"
"예."
내게 자리를 권한 아세리안이 한동안 이것저것 물어왔다.
요즘 식사는 어떻냐, 지내는 건 불편하지 않냐, 훈련에 추가됐으면 하는 내용은 없냐 등등 그렇게 중요한 얘기는 아니었다.
그렇게 한동안 영양가 없는 대화가 오갈 때였다.
"저······ 혹시 피의 여명 경기에 들어갈 때 제가 했던 말 기억하시나요?"
아세리안이 길게 흘러내린 백금발의 머리카락을 배배 꼬며 물었다.
"피의 여명이요?"
눈망울이 초롱초롱한 게, 내가 기억하고 있기를 잔뜩 기대하고 있는 모습이었다.
피의 여명 경기라면 아르웬과 싸웠던 블러드나이트 200을 말하는 건데.
그때 아세리안이 뭐라고 했더라?
나는 기억을 되돌려 그녀와의 대화를 곱씹어봤다.
―어때요?
―팜이요. 처음엔 공터밖에 없었잖아요.
―이게 다 안우진님 덕분에 이룰 수 있던 것들이에요.
―팜이 더 커지면, 제가 안우진님께 멋진 창 한 자루를 선물해 드릴게요. 그러니까. 절대 죽지 마세요. 죽으면 땅을 치고 후회할 정도로 멋진 창일 테니까.
"팜이 더 커지면 정말 멋진 창을 선물해 주신다고······."
"헤헤, 기억하고 계셨네요."
아세리안이 방긋 웃으며 허공에 팔을 한번 저었다.
그러자 검은색 빛깔의, 심플해 보이는 디자인의 창이 나타났다.
화아아아아악!
순간 나도 모르게 움찔했다.
아세리안이 창을 꺼내들자마자 오싹한 기운이 집무실을 집어삼켰기 때문이다.
"이건······?"
"아, 놀라셨죠? 이 창의 효과 중에 하나에요. 저도 처음엔 안우진님처럼 놀랐답니다."
아세리안이 한쪽 손으로 입가를 가리며 웃더니 내게 창을 건넸다.
내가 홀린 듯 그 창을 받아 들 때였다.
찌릿!
창을 쥐자마자 강한 반발력이 손끝을 넘어 온몸으로 전해졌다.
날 주인으로 받는 걸 거부한 것이다.
하.
'역천자 칭호 적용. 차원 특전 적용. 천둥의 숨결 적용.'
띠링
[<신화업적:역천자 >을 적용합니다.]
[칭호의 효과로 모든 스텟이 + 20% 상승합니다.]
[<차원 특전:최강의 성계>를 적용합니다.]
[칭호의 효과로 모든 스텟이 + 10% 상승합니다.]
[<천둥의 숨결>을 사용합니다.]
[체력 소모가 2배로 빨라지는 대신, 근력과 민첩이 +15% 상승합니다.]
순식간에 근력과 민첩이 45%, 나머지 스텟은 30%씩 상승하면서 온몸에 힘이 흘러넘쳤다.
그러자 창의 반발력이 점차 줄어들더니, 이내 완전히 사라졌다.
'약한 존재는 잡지도 못하게 하는 창이라니?'
띠링!
[<창:벽력섬전霹靂閃電 >이 주인으로 '렌'을 선택했습니다.]
[<창:벽력섬전 >]
['간장'과 '막야'가 수천 번의 벼락을 맞은 운철로 제작한 창이다. 벼락을 너무 많이 맞아 창 전체가 까맣게 변했다고 알려져 있다.]
[<창:벽력섬전 >의 주인으로 선택된 존재 외에는 사용할 수 없다.]
[착용 시 마나에 뇌전의 힘이 깃든다.]
[착용 시 <청천벽력 > 능력을 사용할 수 있다.]
[착용 시 <전광석화 > 능력을 사용할 수 있다.]
[<청천벽력 > ― 공격 시 1%의 확률로 하늘에서 벼락이 떨어집니다. 실내에선 발동되지 않습니다.]
[<전광석화 > ― 10초 동안 민첩 스텟이 +20% 상승합니다. (재사용 대기 시간 : 24시간)]
[등급 : 전설]
"······!"
창의 아이템 정보를 보는 순간 눈이 번쩍 떠졌다.
무려 전설 등급의 창이었던 것이다.
'미친! 옵션이 왜 이래?'
현재 내가 가지고 있는 전설 등급의 아이템은 두 개.
블라디미르의 유희와 달의 메아리다.
달의 메아리가 300만 골드였으니, 이 창은······.
'잘하면 천만 골드가 넘겠는데.'
창은 필수 아이템이라 로브 같은 보조 아이템보다 훨씬 더 비쌀 게 분명했다.
블라디미르의 유희는 신화 등급까지 성장 가능한 아이템이니까 논외라고 치고.
"마음에 드시나요?"
내가 한참 동안 창에서 눈을 떼지 못하고 있자 아세리안이 은근한 목소리로 물었다.
"······마음에 드는 정도가 아니네요. 제 다른 스킬들과 시너지도 좋을 것 같고, 정말 저를 위해 만들어진 창이라고 해도 믿을 정도입니다."
"헤헤, 만족스러워 하실 거라고 생각했어요. 제가 그랬죠? 땅을 치고 후회할 정도의 창을 선물해 드린다고."
갑작스러운 선물에 내가 정신을 차리지 못하자 아세리안이 배시시 웃었다.
인정.
진짜 이 정도면 땅을 치고 후회할 뻔했다.
정말 엄청난 창이었으니까.
"감사합니다. 잘 쓰겠습니다."
어서 나가서 이 창을 휘둘러 보고 싶을 정도.
그래서 그녀에게 고마움을 표하고 서둘러 자리에서 일어나려고 할 때였다.
"아, 참. 그리고 우리 팀도 이제 천사들을 고용할 생각이에요."
이어지는 그녀의 말에 들떴던 내 기분이 착- 가라앉았다.
천사. 한마디로 트레이너엔젤을 받겠다는 뜻이겠지.
현재 팀 투지에 소속된 플레이어의 숫자는 21명.
팀을 관리하는 데 들어가는 노력을 생각하면 오히려 늦은 감이 있긴 했다.
'내가 도와줬기 때문에 그나마 잡음 없이 굴러가긴 했지만.'
그런 의미에서 배팅으로 적지 않은 포인트를 벌었을 아세리안이 트레이너엔젤을 고용할 생각을 하는 건 어찌 보면 당연한 거였다.
하지만 난 천사를 고용하는 것에 부정적이었다.
만들어놓은 시스템이 무너질까 염려한 건 아니었다.
이미 매뉴얼처럼 자리 잡았기에 천사 몇 명 들어온다고 팜의 훈련 시스템이 바뀌진 않을 것이다.
다만.
"팀의 훈련 노하우들이 외부로 노출이 될까 걱정되는군요."
아세리안이 판매하지 않는 한 다른 팀으로 이적할 수 없는 플레이어들과 다르게 천사들은 커뮤니티도 이용할 수 있고, 계약 관계이기 때문에 자유롭게 팀을 옮길 수 있었으니까.
어차피 시간이 지나면 알려지게 되겠지만, 아직까진 나와 팀 투지의 경쟁력으로 이용할 수 있는 것들이었다.
보통 천사를 통해 그런 정보들이 많이 퍼지다 보니까 내 입장에선 달가울 수가 없었다.
'라이언만 해도 그런 식으로 가면의 정보가 알려졌지.'
덕분에 2회차에 내가 블라디미르의 유희를 손에 넣을 수 있게 됐지만.
"뭐 때문에 그러신지 알아요. 근데 이번에 고용할 천사들은 제 자매들이에요. 한마디로 믿을 수 있는 아이들이라는 거죠."
"가족······이 있으셨습니까?"
"네? 호호, 당연하죠. 인간들은 저희를 초월적인 존재들이라고 생각하지만, 천계에 그런 존재는 단 한 분밖에 안 계세요. 그분과 달리 저흰 그저 상위 차원의 존재일 뿐이랄까요? 정도의 차이는 있겠지만, 큰 틀에서 보면 저와 안우진님이 살아오셨던 삶이 크게 다르지 않을 거예요."
"한 분······?"
"네. 에고, 이야기가 다른 곳으로 샜네요. 하여튼, 걱정하시는 일은 없을 테니 안심하셔도 좋아요."
그분과 관련된 대화를 나누는 게 께름직했는지, 아세리안이 서둘러 말을 돌렸다.
묻고 싶은 게 더 있었지만, 그녀의 표정을 보아하니 물어봐도 대답해 줄 것 같지 않았다.
한숨을 내쉰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다면 전 상관 없습니다."
정보 유출의 리스크가 없다면 천사 계약을 거절할 생각이 없었다.
오히려 환영하고 싶을 정도였다.
천사들은 전문 인력.
그들이 합류한다면 훈련 시스템이 한층 더 견고해질 것이다.
'그나저나 초월적인 존재는 단 한 명이라······.'
그렇다면 왕은 어떻게 날 회귀시켜 줄 수 있었던 걸까.
역천자 칭호를 보면 알 수 있다.
피조물 중에서 최초로 시간을 역행한 자에게 지급되는 칭호.
즉, 회귀는 아세리안 같은 신들이 할수 없는 능력이란 뜻이다.
'머리가 아프군.'
찜찜한 느낌이 가시지 않았다.
아무래도 왕과의 계약을 너무 맹신해선 안 될 것 같았다.
* * *
성계 대항전 이후 하위 리그는 엄청나게 많은 것들이 바뀌었다.
└와 씨;; 지구에서 성계 대항전 우승 보상으로 모든 스텟 +10% 받아갔다는데?
└ㅁㅊ 모든 스텟 10프로?????? 장난하는 것도 아니고;; 이게 말이 됨?
└말이 됨 ㅋㅋㅋㅋ 지구 우승 확률 못 봤냐 0.1%ㅋㅋㅋㅋㅋ 그거 뚫고 우승했는데 충분히 가능하지 ㅇㅇ
└아씨, 지금까진 지구인 나오면 더미로 던졌는데 앞으로 잘 키워봐야할듯. 10%면 시작부터 거의 최상급 종족 특전 하나 먹고 나오는 거나 다름이 없네.
가장 먼저 지구인의 위상이 크게 달라졌다.
그전까진 있어도 밥만 축내고 쓸모도 없다는 인식이 강했다면, 이제는 잘만 키우면 충분히 상위 리그를 노려볼 만 하다는 분위기가 형성된 것이다.
모든 스텟 10% 상승의 힘은 그만큼 대단했다.
그리고 팀 투지에도 엄청난 변화가 생겼다.
[팀 '투지'의 주인 아세리안이 중급신으로 승격했습니다.]
[팜의 레벨이 2로 상승합니다.]
아세리안의 승격과 함께 팜의 크기가 직경 100미터에서 500미터까지 넓어졌다.
'더미'로 던져졌던 팀 성장 팜의 크기와 같아진 것이다.
또한 건물들도 엄청나게 많아졌다.
마력 스텟을 성장시킬 수 있는 '마나 연공실', 마법을 배울 수 있는 '연구실' 같이 마법사를 육성할 수 있는 건물들이 생겨났고, 식당과 숙소가 따로 분리되었으며, 이론 수업을 들을 수 있는 '강의실'까지 만들어졌다.
거기다 가장 큰 변화는.
"안녕하세요, 착하고 성실한 포로도엘이에요! 4급 주천사主天使고, 마법 계열 트레이닝을 맡게 되었답니다! 잘 부탁해요."
마법사나 정령사 계열의 플레이어를 전문적으로 육성시키는 주천사 포로도엘.
그리고.
"반가운 얼굴도 보이는군. 난 피넛엘이라고 한다. 앞으로 근접 물리 계열의 플레이어 육성을 맡게 되었다. 여러분의 많은 응원과 도움을 기대하겠다."
단 하루였지만, 팀 '성장'에서 날 육성했던 7급 권천사權天使 피넛엘이 합류한 것이다.
이제는 네 쌍의 날개가 달린 것으로 보아, 6급 능천사能天使로 승급한 것 같았다.
'나쁘지 않아.'
적어도 트레이너엔젤이 들어왔다고 해서 팜의 분위기가 크게 변하진 않을듯 했다.
콰지지지지지직!
포로도엘과 피넛엘의 합류로 나는 마음 편하게 훈련에 집중할 수 있었다.
일단 가장 먼저 아세리안에게 선물 받은 창, 벽력섬전의 성능부터 확인했다.
'내 스킬들이랑 궁합이 엄청 좋네.'
마나에 뇌전이 깃든다는 효과가 뇌신 스킬과 겹치기에, 뇌신 스킬을 삭제할 생각이었다.
하지만 내 예상과 다르게 마나에 깃든 뇌전의 힘은 중첩이 가능했다.
콰지지지지지지지지지지지지직!
전보다 더 강렬해진 뇌전이 뿜어져 나온 것이다.
색깔도 옅은 붉은색에서 더 진해져, 이젠 완전히 빨갛게 보일 정도였다.
'전광석화는 숨겨둔 한 수로 사용하기 좋을 것 같고.'
하늘에서 벼락이 떨어지는 청천벽력의 위력도 무시무시했다.
스텟이 상승하거나 하진 않았지만, 광역 데미지가 장난 아니었다.
'다음은······ 그림자 표식.'
나는 성계 대항전에서 획득한 그림자 표식 스킬북의 정보를 확인했다.
뭐야.
이런 스킬을 준다고?
진짜로?
'스킬로 이런 것까지 가능하다고?'
성계 대항전에서 지구가 우승하는 데 들였던 노력에 비해 보상이 너무 짜다고 생각했는데······.
정정해야겠다.
'대박!'
차원 특전과 비견될 정도로 엄청난 보상을 얻은 것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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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9화. 승급전(2)
[<스킬북:그림자 표식>]
[액티브]
[대상의 그림자를 터치하여 표식을 남길 수 있습니다.]
[재사용 대기 시간 : 8 시간]
[표식 등록은 3개까지 가능하며, 그 이후에는 가장 오래된 표식을 지우고 새로운 표식이 목록에 추가됩니다.]
[<그림자 이동> 능력을 사용할 수 있습니다.]
[<그림자 교환> 능력을 사용할 수 있습니다.]
[<그림자 확인> 능력을 사용할 수 있습니다.]
[<그림자 이동> ― 표식으로 등록한 대상의 그림자로 이동합니다. 성계를 넘어설 수 없으며, 스킬 시전자만 이동이 가능합니다. 능력을 사용하면 표식은 사라집니다.]
[<그림자 교환> ― 표식으로 등록한 대상과 위치를 교환합니다. 성계를 넘어설 수 없으며, 능력을 사용하면 표식은 사라집니다.]
[<그림자 확인> ― 표식으로 등록한 대상의 위치를 실시간으로 확인할 수 있습니다.]
그림자 표식은 내가 상상했던 것보다 훨씬 더 좋은 스킬이었다.
범용성이 엄청나게 뛰어나달까.
'이 스킬 하나로 할 수 있는 게 도대체 몇 개야?'
암습, 호위, 구출, 침투, 추적, 합류, 위기 탈출 등등 활용도가 너무나도 무궁무진했다.
이 스킬이라면 내가 어려워하는 스토리 미션에서 큰 힘이 되어줄 것이다.
'이럴 때가 아니야. 일단 직접 써 봐야겠어.'
나는 곧바로 스킬을 등록하곤 사인방부터 찾아 나섰다.
사인방은 요즘 한참 대련을 하며 실전 감각을 끌어올리는 데 집중하고 있었기에, 그들을 찾는 것은 어렵지 않았다.
"엇, 우진이형. 이 시간에 여긴 어쩐 일이세요?"
지그와 일대일 대련을 하고 있던 주창범이 나를 발견하곤 고개를 갸웃했다.
"이번에 얻은 스킬 좀 실험해 보고 싶어서요. 오랜만에 4대1로 대련이나 한 번 하죠."
"앗! 좋아요!"
내 말에 사인방이 반색하며 무기를 챙겨 들고 대련장으로 올랐다.
나도 벽력섬전을 인벤토리에 넣고 저주셋을 착용했다.
'악마의 눈.'
확인해 보니 사인방의 스텟이 확실히 준수할 정도로 성장해 있었다.
각자 무기술에 대한 각성 능력도 어느새 상급까지 올라와 있는 상황.
저주셋을 착용하고 스킬도 사용하지 않는다면 이젠 제법 상대할 맛이 날 것이다.
"갑니다!"
그렇게 시작된 4대1의 대련.
주창범을 선두로 사인방이 방진을 짠 채 나를 밀고 들어왔다.
단단한 탱커를 앞세워 날 구석으로 몰아넣으려는 것 같았다.
'제법이네.'
사인방의 움직임은 이젠 한 몸처럼 보일 정도로 완숙한 경지에 이르러 있었다.
심지어 주창범은 차원 특전까지 얻으며 몸놀림이 더욱 빨라진 상황.
'지그가 좋겠어.'
한동안 녀석들의 공격을 피하며 외곽을 돌던 나는 첫 그림자 표식의 대상으로 지그를 골랐다.
사인방이 취한 방진의 중심부에서 균형을 유지하는 역할을 맡고 있었기에, 지그를 무너트리면 저 방진을 수월하게 깨트릴 수 있을 것이다.
외곽을 돌며 몰이를 피하던 나는 곧장 일직선으로 파고들며 카린의 단검을 휘둘렀다.
깡! 깡! 깡! 깡!
그러자 주창범이 방패를 세우며 차분하게 내 공격들을 막아냈다.
띠링! 띠링! 띠링! 띠링!
[플레이어 '주창범'의 그림자에 표식을 남기시겠습니까?]
[플레이어 '제이스'의 그림자에 표식을 남기시······.]
녀석들과 근접전을 펼치자 뜨는 알림창.
터치라는 개념이, 단순히 그림자를 발로 밟는 것만으로도 활성화되는 것 같았다.
'지그의 그림자.'
띠링!
[플레이어 '지그'의 그림자에 표식이 등록되었습니다.]
[표식 목록]
[플레이어 '지그']
됐다.
이걸로 표식 등록은 완료.
남은 건 기회를 봐서 그림자 이동이나 그림자 교환을 사용하는 것뿐.
'먹음직스러운 당근을 흔들어 줘야겠군.'
그때부터 나는 일부러 천천히, 그리고 조금씩 구석으로 몰려갔다.
아마 녀석들의 눈엔 주창범의 방패에 빠져나갈 공간을 차단당한 것처럼 보였을 것이다.
"루치아노형! 제이스형!"
순간 그 기회를 놓치지 않고 주창범이 빠르게 방패를 휘두르며 거리를 좁혔다.
그 움직임을 신호로 주창범의 뒤에서 견제만 하던 루치아노와 제이스가 동시에 대검과 창을 찌르며 달려들었다.
'지금!'
[플레이어 '지그'에게 <그림자 교환> 능력을 사용합니다.]
순식간에 내 시야가 달라졌다.
기존에는 사인방의 정면을 응시하고 있었다면, 이제는 녀석들의 등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림자 교환으로 지그와 내 위치가 뒤바뀐 것이다.
오직 지그만이 나를 정확하게 쳐다보고 있었다.
"헉!"
"무슨!"
졸지에 지그를 공격하는 모양새가 된 주창범과 루치아노, 제이스가 움찔하며 공격을 멈췄다.
그리고 나는 그 틈에 녀석들에게 공격을 찔러 넣었다.
서걱- 서걱- 서걱-
카린의 단검이 단숨에 녀석들의 경동맥을 그으며 붉은 선혈을 만들어냈다.
"크윽!"
녀석들이 너덜너덜해진 목을 부여잡은 채 바닥으로 고꾸라졌다.
순간적인 과다 출혈로 쇼크가 온 것이다.
이걸로 세 명은 전투 불능.
남은 건 쓰러진 사람들의 피로 범벅이 된 지그밖에 없었다.
"흐읍, 후우, 흐읍, 후우."
지그의 숨소리가 거칠어졌다.
물리적 법칙을 무시한 광경에 잔뜩 긴장한 것이다.
이런 스킬은 어떤 메커니즘으로 구동되고, 쿨타임이 얼마나 되는지 알지 못한다면 심리적 압박으로 이어질 수밖에 없었다.
언제 또 자신이 상상하지 못한 방법으로 공격이 들어올지 모를 테니까.
'끝이군.'
나는 일직선으로 지그를 향해 파고들었다.
그리고 지그가 반사적으로 휘두른 검을 한 손으로 쳐내며 녀석의 복부에 카린의 단검을 찔러 넣었다.
푹! 털썩-
공격 한 번 제대로 해보지 못한 지그가 허탈하다는 표정으로 쓰러졌다.
'엄청 좋은데?'
스킬의 설명을 보고 좋을 거라고 예상은 했지만, 이렇게 괜찮을 줄 몰랐다.
특히 스킬이 발동되는 딜레이가 없는 게 무척 마음에 들었다.
내 스킬을 미리 알고 있지 않은 한 상대방이 대응할 수조차 없을 것이다.
'이 스킬을 가진 상태로 분신이랑 싸웠으면 큰일 날 뻔했네.'
만약 그림자 표식을 가진 채 10경기가 펼쳐졌다면, 플레이어들을 마구잡이로 학살하고 다닐 수가 없었을 것이다.
언제 어디에서 그림자 이동이나 그림자 교환으로 분신이 나타날지 모르니까.
내가 예상하지 못한 상황에서 등장할 수도 있다는 것 때문에 심리적 압박감이 엄청났을 것이다.
"크윽. 형, 그 스킬 뭐예요? 순간 이동?"
"순간 이동은 아닌 것 같아. 지그랑 아예 위치가 바뀌었잖아."
"와······ 뭐가 됐든 굉장한 스킬인 건 분명해."
"이번 성계 대항전 보상으로 얻은 스킬이신가 보군요. 이런 스킬이 존재할 거라고는 상상도 해보지 못했습니다."
사인방이 놀라움을 감추지 못했다.
'나도 처음 확인하고 엄청 놀랐지.'
콜로세움에서 경기를 치르며 이런저런 상상을 많이 했었다.
게임처럼 누군가의 뒤에 슥- 하고 나타날 수 있게 만들어준다거나.
위험한 순간에 바로 지정해둔 세이프티 존으로 이동할 수 있는 방법이 있다면.
그런 스킬을 내가 가지고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그런데 실제로 이런 스킬이 존재할 줄이야.'
그림자 표식으로 인해 내 생존율이 기하급수적으로 올라갔다.
미리 안전한 곳에 표식을 남겨두기만 하면 된다.
그러면 경기장 안에서 강자를 만나 죽을 위기에 빠져도 그림자 이동으로 도망가면 끝.
"형, 혹시 저희에게도 전력을 다한 모습 한 번만 보여주시면 안 될까요?"
그때 바닥에 쓰러져 있던 주창범이 자리를 털고 일어나며 물었다.
그사이 목에 난 칼자국이 사라져 있었다.
"전력으로요?"
"네. 형이 강한 건 알고 있는데, 얼마나 강하신지 가늠이 안 돼서요."
얼마나 강한가라······.
아세리안이 성계 대항전에서 어마어마한 포인트를 벌어들이고 가장 먼저 한 일이 대련장의 레벨을 맥스까지 찍는 거였다.
그래서 대련장에선 죽어도 다시 부활할 수 있긴 한데.
'마침 벽력섬전이랑 차원 특전도 사용해 보고 싶었고.'
잠시 속으로 이것저것 계산해 본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좋습니다."
그렇게 다시 시작된 대련.
나는 저주셋을 벗고 풀템을 장착한 채 특전들을 하나씩 켰다.
'역천자 칭호 적용. 최강의 성계 적용. 천둥의 숨결 활성화. 전광석화 사용.'
띠링! 띠링! 띠링! 띠링! 띠링!
연속으로 울리는 알림창.
순식간에 스텟이 엄청나게 올라갔다.
물론 피의 강화 특전까지 켜졌다면 훨씬 더 범핑 되었겠지만 이것만으로도 충분했다.
콰지지지지지지지지지직!
"갑니다."
뇌전을 피우며 벽력섬전을 겨누자 사인방의 눈동자가 흔들렸다.
지금까지 겪었던 분위기랑은 차원이 다를 것이다.
'살살 해야겠군.'
나는 그대로 사인방에게 다가가 창을 휘둘렀다.
띠링!
[<벽력 >이 발동됩니다.]
꽈아아아아아아아아아앙아앙!
엄청난 굉음과 함께 뇌전이 사방을 휩쓸었다.
사인방은 저마다 신체의 일부분이 크게 터져 나가며 몸을 잘게 떨었다.
볼 필요도 없이 즉사였다.
"······."
잠시 후 훼손됐던 부분들이 회복되면서 사인방이 다시 움직이기 시작했다.
하지만 그들이 깨어났음에도 대련장엔 무거운 정적이 흘렀다.
젠장.
하필 이럴 때 벽력이 터지고 난리냐.
날 바라보는 사인방의 눈동자엔 공포가 깃들어 있었다.
그날 이후 사인방은 훈련에 더욱 매진하기 시작했다.
뭐랄까, 넘어설 수 없는 벽을 만나고 자신들이 얼마나 나약한지 깨달은 것 같았다.
긍정적인 반응이었다.
그들이 내 앞에 서면 저도 모르게 기가 죽어 보인다는 게 문제였지만.
"저 네 명과 무슨 일이 있었던 모양이군."
점심 식사 시간.
내 맞은편에 앉는 피넛엘이 턱 끝으로 사인방을 가리키는 모습에 나는 한숨을 내쉬었다.
"예. 본 실력을 보여달라고 해서 그만."
내 말에 피넛엘이 피식 웃었다.
"그들은 아직 그대의 창 한 번 제대로 받을 실력이 안 되거늘. 아, 성계 대항전에서의 활약은 무척 인상 깊었다. 처음 들어왔던 날의 그대 스텟을 알고 있던 내겐 충격적이었지."
"제가 렌이라는 걸 알고 계셨군요."
"판매된 플레이어가 어느 팀으로 갔는지는 알 수 있지. 그것 때문에 그대가 활약할 때마다 시노엘이 얼마나 방방 뛰었는지 모를 것이다."
시노엘이라······.
어쩐지 녀석이 어떻게 알고 피의 여명에서 날 콕 찍어 서브 미션을 걸었나 했다.
앞으로도 노골적으로 내가 위험해질 만한 서브 미션을 걸겠지.
'걸 테면 걸어 보든가.'
이전이라면 굉장히 거슬렸겠지만, 이젠 아니었다.
그림자 표식으로 인해 자신감이 엄청나게 상승한 상태였으니까.
"그건 그렇고, 팜의 훈련 시스템이 무척 인상적이더구나. 모두 그대가 고안해서 적용시킨 것들이라지."
"예. 스텟이 높다고 꼭 상위 리그에 갈 수 있는 건 아니지만, 적어도 생존율은 높여줄 수 있으니까요. 그래서 스텟을 빠르게 올릴 수 있는 방법들을 많이 연구했죠."
"정말 대단하구나. 대다수의 육성자들은 그저 더 많은 훈련을 시키기 위해 분투하거늘. 덕분에 나 또한 배우는 점이 무척 많았다. 그런데 한 가지만 훈련을 추가하면 안 되겠는가?"
"······?"
피넛엘의 말에 나는 고개를 갸웃했다.
한 가지 훈련을 추가해?
그러자 피넛엘이 한쪽 다리를 꼬며 말을 이었다.
"그대의 커리큘럼은 오로지 근민체에 집중되어 있더군. 하지만 마력 스텟 또한 중요하다는 것을 그대도 알지 않은가. 그래서 말인데······."
"아니, 잠깐만요. 훈련 커리큘럼 추가를 왜 제게 말씀하시는지······?"
"아, 아리엘 언니가 그러더군. 이 훈련 커리큘럼을 그대가 고심해서 완성한 거라고. 나 또한 팀의 훈련법을 보고 많이 감탄했노라."
"······."
"그래서 그대에게 묻는 것이다. 이 훌륭한 시스템을 만든 이에게 의견을 구하는 것은 당연한 것 아니겠는가. 아, 아리엘은 아세리안님이 천사일 때의 이름이다."
피넛엘의 말은 한마디로 나를 전임자로서 예우해준다는 뜻이었다.
그래서 피넛엘에게 고마운 마음이 들었다.
자존심 세고 고고한 천사가 인정해 준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라는 걸 알기에.
'그나저나 아세리안의 원래 이름이 아리엘이었군.'
요즘 들어 새로운 사실들을 많이 알게 되는 것 같았다.
천사에서 신으로 승격한다거나, 승격할 때 이름이 바뀐다는 것 등등.
뭐, 크게 중요한 정보들은 아니지만.
"그러시죠. 안 그래도 마력 훈련의 필요성을 느끼고 있었습니다."
지금까지야 마력 연공실이 없기도 했고, 사인방 정도는 유니콘의 뿔로 충분히 커버할 수 있다는 생각에 굳이 커리큘럼을 추가하지 않았지만, 앞으로 들어올 신입들은 아니었다.
팀의 재정이 해결되어 마력 스텟도 스스로 훈련할 수 있게 된 이상, 앞으로는 본인들이 직접 올려야 할 것이다.
내가 고개를 끄덕이자 피넛엘이 옅은 미소를 지었다.
"그럼 기존 훈련 커리큘럼을 최대한 유지하는 선에서 마력 훈련도 추가해 보도록 하지."
피넛엘이 식사를 하다 말고 종이를 꺼내 메모를 하기 시작했다.
아세리안이랑 친자매라더니, 하는 행동도 영락없이 닮아 있었다.
그렇게 조금은 부산스러운 점심 식사를 마치고 식당을 나설 때였다.
"아, 안우진님! 마침 식사 다 하셨나 봐요?"
식당의 문 앞에서 마주친 아세리안이 싱긋 웃었다.
"예. 식사가 늦으시네요."
"네. 누구 오퍼가 들어왔거든요. 그것도 무려, 승. 급. 샷 오퍼가요."
"······!"
승급샷이라면······.
나밖에 없잖아?
"제······ 오퍼가 벌써 들어왔습니까?"
그러자 아세리안이 생글생글 눈웃음을 지었다.
"네. 안 그래도 요즘 안우진님 때문에 커뮤니티가 떠들썩하잖아요. 게임 메이커가 이 기회를 놓칠 리 없죠."
아세리안의 말에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사실, 얼마 지나지 않아 오퍼가 올 거라고 예상하고 있긴 했다.
이렇게 빨리 올 줄은 몰랐을 뿐.
"언제입니까?
"블러드 나이트 207. 메인 이벤트예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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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0화. 승급전(3)
―하위 리그에 나타난 초신성! 그의 하위 리그 마지막 경기가 곧 시작된다.
―지구의 유일한 네임드. 조금 있으면 상위 리그에서 보게 될지도.
―블러드나이트 207 메인 이벤트에 엄청난 괴물이 찾아온다. 게임 유형은 팀 PvM 미션!
아세리안이 전해준 오퍼를 수락한 다음 날 아침.
커뮤니티엔 나와 관련된 게시글로 도배가 되었다.
경기를 뛴 것도 아니고, 고작 내가 출전한다는 사실 하나만으로도 엄청나게 많은 게시글들이 쏟아져 나온 것이다.
'관객들에게 제대로 도장을 찍었군.'
원래 네임드 경기가 잡히면 관련 게시글이 올라오긴 한다.
아르웬이 출전하는 피의 여명 경기에서도 그랬고.
다른 점이 있다면 그땐 고작 해봐야 네다섯 개 정도 올라왔지만, 지금은 수백 개가 넘는다는 것.
댓글의 반응도 폭발적이었다.
└블나 207이면 게임 메이커가 판단 잘한듯. 렌을 최대한 오래 하위 리그에 남겨두는 것보다 반응 왔을 때 팔아먹는 게 더 낫긴 하지. 이 경기는 꼭 직관한다.
└렌 공략법 찾으신분? 수백 번을 다시보기로 돌려봤는데도 분석이 쉽지 않네요ㅠ
└ㅋㅋㅋㅋㅋㅋㅋㅋ 살다살다 내가 하위 리그 경기를 기다리는 날이 올 줄이야ㅋㅋ
└렌니이이이임!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서브 미션 빵빵하게 넣어드릴게요~♡
└ㅋㅋㅋㅋㅋ 윗댓글 딱 봐도 이번 성계 대항전에서 대박난 새끼넼ㅋㅋㅋ
└벌써부터 무슨 서브 미션 걸지 좀 기대 되는뎈ㅋㅋㅋ
└시발··· 나도 그냥 던진다 생각하고 지구에 좀만 걸어둘걸··· 천추의 한이다 진짜.
그중에 눈에 띄는 댓글도 있었다.
'오. 서브 미션을 걸어 준다고?'
아마 이번 성계 대항전에서 지구에 걸어 대박을 터트린 신 중 하나인 모양이었다.
안 그래도 플레이어들은 베팅을 하지 못하게 만들어 놔서 많이 아쉬웠는데, 덕분에 제법 포인트 벌이가 쏠쏠할지도 모르겠다.
'특별한 건 없네.'
혹시나 경기에 대한 다른 정보를 얻을 수 있지 않을까 기대했지만, 게시글이나 댓글들 모두 내가 출전한다는 것에 초점을 맞추고 있었다.
결국 경기에 대해 아무런 정보를 얻지 못한 나는 커뮤니티를 닫고 중개 거래소로 들어갔다.
다음 할 일은 침묵의 망토를 대신할 만한 스킬을 찾는 것.
은신이란 스킬이 활용도가 떨어지고, 뭐랄까 다른 스킬들과의 시너지도 맞지 않는 것 같았다.
'이제는 내가 너무 강해져서 은신을 써야 할 만한 상황이 많이 줄어들기도 했고.'
거기다가 성계 대항전에서 계속 상대에게 은신이 발각되는 바람에 굉장히 짜증 나 있었다.
그래서 이번 기회에 뇌신이나 천둥의 숨결, 마력 상쇄처럼 더 활용도가 높은 스킬로 대체할 생각이었다.
'하, 쓸만한 게 없네.'
하지만 아무리 둘러봐도 괜찮은 스킬이 보이지 않았다.
활용도가 뛰어난 스킬은 시장에 안 풀고 보통 자기가 익히니까.
하지만 계속해서 눈팅을 하며 스킬을 찾고 있을 순 없는 상황.
어쩔 수 없이 아세리안한테 부탁해야 할 것 같았다.
그녀라면 알아서 나와 시너지가 잘 맞는 스킬을 찾아줄 것이다.
그럼 이제 경기에 들어가기 전까지 남은 일은 단 하나뿐이었다.
'스텟을 최대한 끌어올리는 것.'
시스템 창을 끈 나는 눈을 감았다.
"제 훈련을 도와주겠다는 말씀이십니까?"
"네. 안우진님은 본인의 약점이 뭐라고 생각하세요?"
아세리안의 질문에 나는 고개를 갸웃했다.
내 약점에 관한 것은 나 또한 시간이 날 때마다 생각해 보는 부분.
하지만 지금으로서는 딱히 이렇다 할 만한 약점이 없다는 게 내 평가였다.
"약점이 있습니까?"
"있죠. 그것도 아주 치명적인 약점이요."
하지만 이어지는 아세리안의 말에 나는 흠칫할 수밖에 없었다.
그녀가 너무나 확신에 차 있었기 때문이었다.
"뭡니까, 그 약점이?"
"기본 스텟이 너무 낮아요."
하지만 이어지는 그녀의 말에 나는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스텟이 낮은 건 나도 인정하는 부분.
하지만 나는 그 약점을 가릴 수 있는 다양한 무기를 가지고 있었다.
"그건 약점이라고 할 수 없군요. 스킬과 이번에 얻은 차원 특전을 켜면······."
"만약 그 스킬을 사용할 수 없는 상황이 온다면요? 가지고 있는 아이템들을 활용하지 못하는 순간이 온다면 어떻게 하시겠어요? 콜로세움에서 그런 일이 벌어지지 않을 거라고 확신하실 수 있나요?"
"······."
그녀의 물음에 나는 아무런 대답도 할 수 없었다.
뒤통수를 맞은 기분이었으니까.
콜로세움에는 정말 다양한 스킬이 존재한다.
이번에 얻은 그림자 표식만 봐도, 내가 생각해 본 적 없는 것들을 가능하게 해주는 스킬이었으니.
그렇다면 그녀가 얘기한 상황을 연출할 수 있는 스킬도 분명 존재할 것이다.
내 놀란 모습을 본 아세리안이 픽- 하고 웃었다.
"물론 제가 말씀드린 게 다소 극단적인 가정이긴 해요. 하지만 부인할 수 없으시죠?"
"······예."
"이번에 성계 대항전에서 제가 얼마나 놀랐는지 몰라요. 안우진님이 그저 강하다, 라고만 생각했는데 막상 플레이어들의 평균 스텟을 보니까 제가 간과하고 있었더라구요. 그래서 제가 앞으로 훈련할 때마다 도와드릴 거예요."
"어떻게 도와준다는 말씀이시죠?"
내 물음에 아세리안이 활짝 웃었다.
"헤헤, 보시면 알아요."
어.
뭐랄까.
분명 평소와 같은 웃음인데.
왜인진 모르겠지만, 무척 사악해 보이는 미소였다.
"끄으으으윽!"
"마지막 한 개 남았어요! 조금만 더!"
"끄으으으으윽!"
"그만! 고생 많으셨어요!"
아세리안의 말에 나는 들고 있던 1톤짜리 바벨을 바닥에 떨어트렸다.
그러자 쿵! 소리와 함께 체력 단련실의 바닥이 울렸다.
"허억, 헉, 헉, 허억."
온몸이 땀으로 범벅된 채 숨을 고르길 1분여.
미리 짜 놓은 대로 스쿼트 100개씩 3세트를 마친 나는 서둘러 발걸음을 옮겼다.
쓰러지더라도 휴식의 방에서 쓰러져야 한다.
그렇게 체력 단련장을 벗어나려 할 때였다.
덥석!
"······?"
"아직 걸으실 만 한 걸 보니까 한 세트 더 하실 수 있겠는데요?"
아세리안이 내 팔을 잡더니 1톤의 무게가 걸려 있는 바벨 앞으로 끌었다.
"잠시만요. 허억, 한 세트를, 허억, 더 하라는 말씀이십니까?"
"네!"
[남은 체력 : 22%]
아세리안의 말에 나는 양손을 저었다.
두 다리에 힘이 들어가지 않아 걸을 때도 벌벌 떨리고 있는데, 한 세트를 더 하라고?
남은 체력으론 절대 무리였다.
"안 됩니다. 허억, 이미 한계에요."
"그럼 될 때까지만 하는 걸로 하죠! 아, 걱정하지 마세요! 기절이라도 하신다면 제가 휴식의 방에다가 고이 모셔다드릴 테니까."
아세리안이 내 대답을 기다리지도 않은 채 바벨을 번쩍 들었다.
그러더니 내 어깨 위에 막무가내로 올려놓았다.
"어, 어."
순간 느껴지는 엄청난 무게감에 나는 말도 제대로 잇지 못할 정도였다.
진짜?
이걸 더 하라고?
당장 쓰러지기 직전인데?
아세리안에게 그런 무언의 눈빛을 보냈지만, 그녀는 활짝 웃을 뿐이었다.
"하나씩 차근차근해보죠! 자, 하나! 어어, 내려가셔야죠!"
그녀가 내 어깨를 꾸욱 눌렀다.
젠장.
도와준다는 게 이런 의미였구나.
나는 그녀의 손짓에 맞춰 하체를 굽힐 수밖에 없었다.
그렇게 다시 시작된 4세트.
쿵!
이를 악물고 30개를 더 했지만, 더는 무리였다.
나는 그대로 바벨을 던진 채 바닥에 고꾸라졌다.
"커헉, 더, 더이상은 허억, 이제 무리입니다."
눈앞이 핑 돌았다.
정말 한계까지 끌어 쓴 탓인지, 온몸에 힘이 들어가지 않았다.
그렇게 눈을 감으며 사르르 기절하려 할 때였다.
스르릉- 쿵! 스르릉- 쿵!
옆에서 바벨에 달려 있는 중량 플레이트를 빼는 소리가 들렸다.
아무래도 내가 사용한 기구들을 정리하는 모양이었다.
'나 먼저 휴식의 방에 던져 주고 하지.'
지금 상황에선 일분일초가 소중한데.
그렇게 아세리안의 센스에 아쉬워하고 있을 때였다.
"일어나세요. 양쪽에 100kg씩 빼서 이제 800kg이에요."
"······!"
아세리안의 귓속말에 나는 눈을 번쩍 떴다.
뭐라고?
훈련 마무리하는 것 아니었어?
"아, 혹시 못 하시겠어요? 약점 극복하셔야 할 텐데."
"······."
"충분히 하실 수 있어요. 어머, 지금도 힘이 넘치네요. 벌떡 일어나는 것 봐."
억지로 일으켜 세우는 아세리안의 손길에 나는 그저 멍하니 따를 수밖에 없었다.
젠장.
그녀의 눈동자에서 내가 어떻게든 남은 개수를 다 채우게 하고야 말겠다는 강한 집념이 엿보였다.
차라리 빠르게 4세트를 다 끝마치고 마음 편하게 쉬는 게 나을지도.
결국 나는 체념한 채 바벨을 들고 하체를 굽혔다.
"끄으으으으윽!"
그 뒤로 무게를 계속해서 줄여간 덕분에 4세트를 무사히 끝마칠 수 있었던 나는 곧바로 기절해 버렸다.
남은 체력은 9% 였다.
어느새 4주라는 시간이 흘렀다.
4주가 이렇게 길게 느껴진 적은 콜로세움에 들어오고 처음이었던 것 같았다.
아세리안과 함께했던 지옥 훈련도 오늘로 끝.
[이름 : 안우진(닉네임 : 렌)] [소속 : Team 투지]
[리그 : 하위리그]
[근력 : 56] [민첩 :60] [체력 : 61]
[정신 : 94] [지력 : 14] [마력 : 73]
[각성 능력 : <초감각 > <특급창술 > <고급살기 > <특급마나운용 > <최상급검술 > <최상급단검술 > <최상급투척술 > <중급박투술 > <중급치료술 > <고급궁술 > <최상급검방술 > <최상급채찍술 > <중급둔기술 >]
[보유 스킬(5/5) : <침묵의 망토> <뇌신 > <천둥의 숨결> <마력 상쇄> <그림자 표식>]
[업적 특전 : 없음] [차원 특전 : 없음] [종족 특전 : 없음]
'진짜 미친 듯이 올랐네.'
그 사이 근력이 10, 민첩이 8, 체력이 5나 상승했다.
저주셋을 착용하고, 한계의 한계까지 쥐어짠 덕분이었다.
아세리안이 옆에서 날 몰아세우지 않았으면 이렇게 빠르게 올리는 것은 불가능했을 것이다.
뭐.
다음날이 오지 않았으면, 하고 바라게 되는 단점이 있긴 했지만.
"컨디션은 어때요?"
"좋네요. 오늘은 지옥 훈련도 없었겠다, 스텟도 많이 올렸겠다, 자신감이 넘치네요."
"성과가 좋아서 다행이에요. 제가 앞으로도 계속해서 전담으로 도와드릴게요."
아세리안의 말에 나는 헛웃음을 터트렸다.
최근 내가 들은 것중에 가장 섬뜩한 말이었다.
그녀와 함께 훈련했던 4주간.
단 하루도 기절하지 않은 날이 없었다.
"앞으로도 하루하루가 기절의 연속이겠군요."
"다른 사람들은 보니까 시켜도 기절할 때까진 못 하더라구요. 그래서 좀 놀랐어요."
아세리안은 나를 훈련하면서 틈틈이 사인방에게도 같은 방식으로 훈련을 시켰다.
하지만 나처럼 해낸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정신 스텟이 높지 않으면 할 수 없는 훈련법이었다고나 할까.
띠링!
[하위리그-블러드나이트207 코메인 이벤트 경기가 끝났습니다.]
[잠시 후 메인 이벤트 경기가 시작되오니, 준비하시기 바랍니다.]
때마침 알림창과 함께 공터에 게이트가 형성되었다.
평소처럼 아세리안에게 가볍게 목례를 하고 게이트를 향해 걸어갈 때였다.
"오늘."
"······?"
"우리 팀에서 최초의 상위 리그 플레이어가 나오겠죠?"
그녀의 물음에 뒤돌아보니, 말갛게 미소 짓고 있는 아세리안이 보였다.
그 모습에 나는 오랜만에 옅은 미소를 피웠다.
"파티 준비해 두고 계시면 될 것 같군요."
그리고는 로브를 펄럭이며 게이트 안으로 들어갔다.
띠링!
[모든 상태를 100%로 회복합니다.]
게이트를 통과하자 엄청난 숫자의 사람들이 보였다.
그들 너머로는 사방을 둘러싼 성벽이 보였는데, 곳곳이 무너져 있었다.
마치 방금 전까지 대규모 전투라도 치른 것 같은 광경이었다.
내 곁에서 아홉 명의 플레이어들이 더 모습을 드러냈다.
"오오! 신께서! 신께서 우리의 기도를 들어주셨다!"
"신의 전사가 우릴 구하기 위해 나타났다!"
근처에서 우리의 모습을 발견한 사람들이 눈물을 주륵 흘리며 소리쳤다.
'뭐지?'
띠링!
[경기 : 하위리그-블러드나이트207의 메인 이벤트 경기를 시작하겠습니다.]
[유형 : 몬스터 처치(단체 PvM)]
[게임명 : 몬스터 웨이브]
[맵 : 헤르세벨그(소)]
[관객 수 : 479,081 명]
[미션 : 몬스터 웨이브로부터 신성석을 사수하세요.]
[신성석은 헤르세벨그 성 중앙 광장에 있습니다.]
[몬스터 웨이브는 앞으로 1주일간 계속됩니다.]
[단체 PvM 미션이지만, 사망자는 부활하지 않습니다.]
[현재 생존자 수 : 10 명]
[보너스 포인트 조건이 있습니다.]
[많은 숫자의 몬스터를 죽일수록 보너스가 상승합니다!]
[신성석 사수까지 남은 시간 : 168:00:00]
[1시간 후 몬스터 웨이브가 시작합니다.]
미션 내용을 본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게 어려울 것 없는 미션.
성벽이 있으니까 열 명의 플레이어들이 동서남북에 있는 네 개의 성문만 지키면 승리를 챙길 수 있다.
나는 가장 먼저, 함께 경기를 치러나가게 될 플레이어들의 스텟부터 확인했다.
띠링!
[상대방의 능력치를 확인합니다.]
[이름 : 카롤]
[성향 : 안전]
[근력 : 68(+?)] [민첩 : 64(+?)] [체력 : 69(+?)]
[정신 : 55(+?)] [지력 : 7(+?)] [마력 : 55(+?)]
[각성 능력 : <최상급검술 > <상급살기 > <상급마나운용 > <중급박투술 > <하급치료술 >]
'나쁘지 않네.'
메인 이벤트를 뛰는 녀석들이라 그런지 평균 이상의 스텟을 가지고 있었다.
다른 여덟 명의 스텟도 확인했지만 크게 다르지 않았다.
모두 카롤과 비슷한 수준.
팀운은 제법 잘 나왔다.
심지어 미션은 내가 제일 선호하는 다대일 전투.
왠지 느낌이 좋았다.
'시작해 볼까.'
그렇게 상위 리그로 가기 위한 마지막 경기가 시작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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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1화. 승급전(4) -무료 마지막 화-
게이트가 사라지자, 그 자리에 성인 남성 팔뚝만 한 크기의 크리스탈이 보였다.
이게 시스템이 얘기한 신성석인 모양이었다.
몬스터 웨이브가 시작되기까지 남은 시간은 57분.
일단 상황을 정리하는 것이 급선무였다.
"일단 리딩부터 정하죠."
나는 함께 출전하게 된 아홉 명의 플레이어들을 향해 입을 열었다.
"렌님이 하시는 게 어떻겠습니까? 전 카롤입니다. 보시다시피 검객이구요."
"저도 렌님이 리딩을 하셨으면 좋겠어요. 전 엘리스에요."
"아무래도 렌님이······."
모두들 내가 출전한다는 것을 알고 있었는지, 나에게 리딩을 맡겼다.
하긴, 그렇게 블러드나이트 207 메인 이벤트에 출전한다고 커뮤니티에서 떠들어댔으니, 모르는 게 이상할지도.
그렇게 만장일치로 이번 경기 리더가 된 나는 주변에 있던 사람들에게 고개를 돌렸다.
"여기 책임자가 누구죠?"
"예, 신의 전사시여. 이 성을 관리하고 있는 아이작이라고 합니다."
내 물음에 한 기사가 앞으로 나오더니 한쪽 무릎을 꿇었다.
"현재 상황과 남은 병력, 그 외에 우리가 숙지해야 할 만한 것들이 있다면 설명해 주시죠."
"옛. 오늘로 몬스터 웨이브 5일 차고, 녀석들은 달이 떠 있을 때만 공격해 들어옵니다. 해가 뜨면 거짓말처럼 물러났습니다. 몬스터의 종류로는 오크가 대다수이며, 간혹 트롤이나 오우거의 침입도 있었습니다."
"오우거······?"
아이작의 말에 나는 깜짝 놀랐다.
다른 플레이어들의 반응도 비슷했다.
젠장.
오크 정도는 다른 플레이어들도 충분히 상대할 수 있을 것이다.
오크보다 훨씬 센 트롤도 숫자가 얼마나 될지는 모르지만, 병사들까지 힘을 합치면 어떻게든 처리할 수 있다.
하지만 몬스터의 제왕이라고 불리는 오우거는······.
'쉽지 않겠는데.'
"예. 처음에는 침입하는 몬스터의 숫자가 얼마 안 됐는데, 날이 갈수록 몬스터의 숫자가 늘어나고 있습니다. 결국 어제 치렀던 전투로 네 개의 성문이 모두 박살이 났습니다. 원래 만 명이 넘던 병력 중에 남은 병력은 이제 2천. 그중에 중상자가 반이 넘어 실질적으로 싸울 수 있는 숫자는 천이 조금 안 됩니다."
생각보다 전황이 훨씬 안 좋았다.
특히 성문이 박살 난 게 컸다.
"결국 우리가 성문 역할을 대신해야겠군요. 그럼 지금부터 역할 분담을 하겠습니다. 카롤, 고군백, 엘리스가 서쪽 성문을. 이청명, 제프리, 안젤라가 남쪽 성문을. 야스케, 네부드네자르, 녹스가 북쪽 성문을. 동쪽은 내가 맡습니다. 아이작?"
"예. 하명하소서."
"그대가 중앙에서 병사들을 지휘하세요. 밀리는 성문이 있다면 유기적으로 병사들을 움직여 수비 하도록. 동쪽 성문은 성벽 위로 기어 올라오는 몬스터를 막기 위한 최소한의 병력만 배치하면 됩니다. 그리고 다른 성문에서 오우거가 등장하면 곧바로 알려주세요."
"알겠습니다."
나는 악마의 눈으로 최대한 밸런스가 잘 맞게끔 역할 분담을 한 뒤, 아이작의 그림자를 밟으며 표식을 등록했다.
그림자 표식의 쿨타임은 8시간.
현재로선 성문마다 한 명씩 표식을 등록해 두는 게 불가능하다.
'그나마 그림자 이동이랑 그림자 교환은 쿨타임이 없어서 다행이야.'
그렇다면 중앙에서 지휘할 아이작의 그림자에 표식을 남기는 게 그나마 효율적으로 다른 쪽 성문을 커버하러 갈 수 있을 것이다.
최악의 경우, 신성석을 지켜야 하는 상황이 발생하더라도 가장 빠르게 대처할 수 있는 위치기도 하고.
"이런 미션은 첫날을 버텨내는 게 관건입니다. 그러니까 모두들 건투를 빌겠습니다. 시간이 없으니 바로 움직이죠."
내 말이 끝남과 동시에 플레이어들이 세 명씩 찢어져서 각자의 성문 방향으로 달려가기 시작했다.
나도 동쪽 성문을 향해 빠르게 내달렸다.
'처참하군.'
가는 길 곳곳에 미처 수습하지 못한 인간과 몬스터의 사체들이 한가득 널려 있었다.
그 모습을 보는 것만으로도 지난 4일간의 전투가 얼마나 치열했는지 알 것 같았다.
전속력으로 5분 정도 달리자 휑하게 뚫려 있는 동쪽 성문이 보였다.
'소도시 규모인데도 생각보다 넓네.'
거의 여의도에 필적하는 크기였다.
이래서는 다른 쪽 성문이 뚫리더라도 도와주러 가는 게 쉽지 않을 것이다.
왕복 10분이면 도와주러 갔다 오는 사이 몬스터들이 성 내부로 쏟아져 들어올 테니까.
그저 다른 플레이어들이 잘 막아주길 바라는 수밖에.
"헉! 누, 누구!"
내가 도착하자, 성문 앞에 앉아서 쉬고 있던 병사들이 날 발견하곤 창을 들어 올렸다.
슬슬 주변이 어두워지고 있어서, 검은색 로브에 블라디미르 가면을 쓰고 있는 내 모습은 충분히 놀랄만한 비주얼이었다.
"나는 그대들의 신께서 이곳을 구원하라고 보낸 전사입니다. 잠시 후 아이작이 보낸 병사가 도착할 테니, 그에게 자초지종을 들으면 됩니다."
내 말을 들은 병사들이 벌떡 일어나더니 크게 환호하기 시작했다.
"아! 태양신께서 자신의 사자를 보내주셨다!"
"태양신께서 우리의 기도를 들어주셨어!"
체념하고 있던 병사들의 얼굴빛에 화색이 감돌았다.
오늘을 마지막이라고 생각하고 있었는데, 우리의 등장으로 희망을 찾은 것이다.
[30분 후 몬스터 웨이브가 시작합니다.]
'일단 외부로 좀 나가봐야겠어.'
나는 사기가 잔뜩 오른 병사들을 뒤로하고 성문을 빠져나와 거대하게 펼쳐져 있는 숲속으로 향했다.
사방으로 어둠이 깔리기 시작했지만, 악마의 눈 덕분에 대낮처럼 환하게 느껴졌다.
숲 안으로 들어가도 특별한 건 없었다.
그저 고요함이 가득 묻어나올 뿐이었다.
'폭풍전야 같군.'
[20분 후 몬스터 웨이브가 시작합니다.]
내가 예상했던 것보다 숲이 무척 거대했다.
헤르세벨그보다 몇 배는 더 큰 것 같았다.
10분, 20분 정도 들어와서는 택도 없을 정도.
'쯧.'
결국 별다른 소득을 올리지 못한 나는 발걸음을 돌릴 수밖에 없었다.
이렇게 거대한 숲과 산이 자리하고 있다면 몬스터의 숫자도 어마어마할 것이다.
무슨 수를 써서라도 성문 안쪽으로 뚫고 들어오는 것만큼은 막아내야 한다.
현재 헤르세벨그 성의 병력으로는 시가전을 치를 여력이 안 됐다.
몬스터들이 내부로 진입하는 순간 지옥도가 펼쳐질 것이다.
[10분 후 몬스터 웨이브가 시작합니다.]
동쪽 성문으로 돌아오자 한 병사가 날 기다리고 있었다.
다른 병사들에 비해 무장 상태도 괜찮고, 말도 타고 있는 걸로 보아 직급이 제법 높은 모양이었다.
병사는 날 발견하자마자 말에서 뛰어내려, 내 앞에서 고개를 숙였다.
"신의 사자시여. 저는 백부장 랄프손이라고 합니다. 동문의 병사들을 지휘하며 사자님을 보필하게 되었습니다."
"잘 부탁합니다."
"옛. 따로 지시하시거나 제가 숙지해야 할 사항을 여쭤봐도 되겠습니까?"
음.
따로 지시할 만한 일이라.
"입구를 지키는 건 저 혼자 하겠습니다. 랄프손은 혹시나 성벽 위를 기어 올라가는 몬스터가 있다면 녀석들만 처리해 주세요."
"알겠습니다!"
랄프손이 병사들을 데리고 성벽 위로 올라가고, 성문 앞은 나 혼자밖에 남지 않았다.
그리고 해가 지며 헤르세벨그에 완전한 어둠이 찾아왔다.
띠링!
[그믐달이 떴습니다.]
[<로브:달의 메아리> 가 달의 힘을 빌려와 모든 스텟이 3% 상승합니다.]
옅은 달빛이 지상을 비추었다.
고요한 가운데, 병사들의 거친 호흡소리만이 공간을 메웠다.
모두들 벌벌 떨고 있는 게 잔뜩 긴장한 것 같았다.
'저들에겐 매일 찾아오는 이 시간이 악몽과도 같았겠군.'
오늘, 내가 그 악몽을 깨부숴버릴 생각이었다.
[몬스터 웨이브가 시작됩니다!]
마침 경기가 시작된다는 알림창이 떴다.
헤르세벨그의 책임자, 아이작의 말처럼 달이 뜨자마자 웨이브가 시작된 것이다.
그때였다.
띠링! 띠링! 띠링! 띠링! 띠링!
[중급신 '루디악'님이 서브 미션을 걸었습니다.]
―숨 쉬기.
[보상 : 10,000 P]
[중급신 '루디악'님이 서브 미션을 걸었습니다.]
―창 휘두르기.
[보상 : 10,000 P]
[중급신 '루디악'님이 서브 미션을 걸었습니다.]
[중급신 '루디악'님이 서브 미션을 ······.]
무수히 쏟아지는 서브 미션들.
내용도 별거 아니었다.
창을 휘두르고, 걷고, 숨 쉬고, 움직이는 등 살아있다는 것 하나만으로도 미션 완수가 가능한 것들 뿐이었다.
특히 마지막 미션 내용이 가관이었다.
[중급신 '루디악'님이 서브 미션을 걸었습니다.]
―팀 투지가 마음에 들지 않는다면 당근을 흔들어 주세요.
바로 팀 투지와 연락해서 영입을 추진해 보겠습니다.
[보상 : 1,000 P]
서브 미션 내용을 읽은 나는 헛웃음을 터트렸다.
전에 봤던, 서브 미션으로 용돈을 주겠다는 신이겠지.
'서브 미션 일괄 수락. 당근 흔들기만 빼고.'
띠링!
[서브 미션을 수락하였습니다.]
―내용 : 숨 쉬기, 창 휘두르기, 걷기, 움직이기, 몬스터 1킬 하기······.
[보상 : 100,000 P]
'10만 포인트라. 엄청 좋은데?'
내가 무슨 짓을 하든 간에, 일단 10만 포인트는 확정해 놓은 셈.
이제 남은 건 몬스터 웨이브를 막아내는 것 뿐이었다.
"취이이익! 취이이이이익!"
때마침 울려오는 몬스터들의 포효소리.
녀석들의 울음소리엔 적의가 한가득 배어 나왔다.
숲속에선 방금 전까지 잠잠하던 게 거짓말처럼 느껴질 정도로 엄청난 먼지가 피어오르고 있었다.
"오, 온다!"
"저 개새끼들! 아직도 저렇게 엄청난 숫자가······!"
"조용, 조용! 모두 침착해라! 우리에겐 태양신의 가호가 함께하노니!"
백부장, 랄프손이 벌벌 떨고 있는 병사들을 진정시켰다.
쿠구구구구구구구궁-
거리가 제법 되는데도 불구하고, 바닥에서 진동이 느껴졌다.
정말 어마어마한 숫자의 몬스터들이 이곳을 향해 진군해 오고 있는 것이다.
'다른 성문 녀석들이 잘 버텨줘야 할 텐데.'
다행인 점이 있다면, 전투가 탁 트인 평야에서 치러지는 게 아니라는 것이다.
좁은 성문을 끼고 차분하게 상대해 나간다면 녀석들도 충분히 막아낼 수 있을 것이다.
'시작해 볼까.'
띠링! 띠링! 띠링!
[<신화업적:역천자 >를······.]
[<차원특전:최강의 성계>를······.]
[<천둥의 숨결>을······.]
특전을 켜자마자 성문으로 어마어마한 숫자의 오크들이 쏟아져 들어왔다.
트롤이나 오우거의 모습은 아직까진 보이지 않았다.
"취이이이익!"
콰지지지지지지지지직!
벽력섬전까지 깃든 무시무시한 뇌전이 온몸에서 피어올랐다.
서걱!
창을 한 번 휘두를 때마다 서너 마리의 오크들이 바닥에 고꾸라졌다.
오크는 성계 대항전에서 상대했던 블랙 오크보다도 한 단계 아래의 종족.
수십만 블랙 오크 부대의 부락에서도 살아남은 나를, 일반 오크들이 어떻게 할 수 있을 리가 없었다.
'이 정도면 다른 쪽도 할만하겠는데?'
뇌전이 한번 번쩍일 때마다 성문에 쌓이는 오크 사체의 숫자가 기하급수적으로 늘어났다.
고기 타는 냄새가 코끝을 찔렀다.
"오오! 과연 신의 전사시다!"
"태양신이시여! 정말 감사합니다!"
"이 돼지 새끼들! 신의 징벌을 받아라!"
내 압도적인 위용에 성벽 위의 병사들이 소리를 질렀다.
서걱! 서걱!
나는 성문 앞에서 막아서는 것을 넘어, 조금씩 밖으로 격전지를 옮겨갔다.
길목이 좁은 게 오히려 내 사냥 속도의 발목을 잡았다.
'어차피 몬스터의 숫자도 한계가 있을 터.'
몰려온 몬스터들을 최대한 빠른 시간 안에 다 죽여버릴 생각이었다.
띠링!
[<피의 강화> 로 올릴 수 있는 스텟을······.]
마침 피의 강화 특전까지 활성화된 상황.
그때부터 병사들이 말하는 신의 징벌이 시작되었다.
꽈아아아아아아아앙!
벽력이 터지며 사방으로 충격파를 발산하고, 청천벽력이 발동하면서 곳곳에 벼락이 흩뿌려졌다.
그저 창을 휘두른다는 간단한 행위만으로도, 오크들에겐 재앙과 같은 일들이 벌어졌다.
[근력 : 105(+5)(+44)] [민첩 :112(+5)(+47)] [체력 : 104(+5)(+38)]
[정신 : 153(+59)] [지력 : 23(+9)] [마력 : 124(+5)(+46)]
지력을 제외한 모든 스텟이 세 자리를 넘어선 순간, 인간의 범주에서 보일 수 없는 위력이 나타나기 시작한 것이다.
"크워어어어어어!"
서걱!
간간이 트롤의 모습도 보였지만, 그래봤자 한방 컷이었다.
팡! 팡! 팡!
한번 창을 휘두를 때마다 공기 터지는 소리가 났다.
'꼭 불에 뛰어드는 부나방 같군.'
뇌전이 피워낸 섬광은 깜깜한 전장을 밝게 비추었다.
"취이이이익!"
한참을 휘두른 나는 동쪽 성문으로 침입해 왔던 모든 몬스터들을 죽일 수 있었다.
그때였다.
띠링! 띠링! 띠링!
[플레이어 '네부드네자르' 가 사망했습니다.]
[플레이어 '야스케' 가 사망했습니다.]
[플레이어 '녹스' 가 사망했습니다.]
'씨발.'
데스 콜이 울리며 같은 팀원이 죽었음을 알려왔다.
북쪽 성문을 지키라고 보냈던 세 명의 플레이어가 모조리 죽은 것이다.
"랄프손! 뒷정리를!"
몬스터의 사체로 가득한 동쪽 성문을 백부장, 랄프손에게 맡긴 나는 곧바로 북쪽 성문을 향해 내달렸다.
"이 개새끼들!"
"절대 안으로 들여보내선 안 된다!"
"으으······. 저, 저리 가! 으아악!"
다행히 내가 도착할 때까지 북쪽 성문의 병사들이 성문 앞을 몸으로 막아내고 있었다.
오크와 트롤이 한 번 휘저을 때마다 엄청난 양의 피가 흩뿌려졌다.
병사들은 상반신이 통째로 뜯겨 나가거나 도끼에 팔다리가 토막 나는 등 굉장히 잔인한 모습으로 죽어가고 있었다.
"모두 뒤로!"
콰지지지지직!
꽈아아아아아아아아아앙!
나는 그런 병사들의 사이를 헤집으며 또다시 대학살을 시작했다.
다행히 북쪽 성문으로 침입한 몬스터들을 다 죽일 때까지 더 이상 죽는 플레이어는 나오지 않았다.
서걱!
"취, 취익······."
내 창에 목이 베인 오크를 마지막으로, 북쪽 성문의 몬스터 웨이브도 끝.
나는 곧장 서쪽 성문을 향해 달려갔다.
그리고 그곳을 다 정리한 뒤엔 남쪽 성문으로.
그렇게 해서 결과적으로 하룻밤 만에 2만 마리가 넘는 몬스터들을 학살할 수 있었다.
[킬 수 현황]
[1위. '렌' 20,387킬]
[2위. '고군백' 804킬]
[3위. '이청명' 799킬]
[4위. '카롤' 774킬]
"으으으윽! 내 다리! 으윽······."
"여기 들 것좀 가져와! 어서!"
"어어, 이봐! 정신 차려! 이봐!"
"아아, 신이시여······."
날이 밝자, 성문 앞은 아수라장이 되어 있었다.
플레이어들의 체력이 떨어질 때마다 병사들이 나서서 시간을 벌었기 때문이었다.
얼마나 치열한 전투였는지, 몸이 성한 병사가 없을 정도였다.
그나마 다행이라면 햇빛이 떠 있는 동안에는 몬스터들이 침입해 오지 않는다는 것.
때문에 살아남은 플레이어들은 한쪽에서 회복의 물약을 마신 뒤 휴식을 취하고 있었다.
"고생 많으셨습니다, 렌님."
"도와주셔서 감사합니다."
내게 감사 인사를 하는 플레이어들에게 가볍게 고개를 끄덕여 준 나는 곧바로 발걸음을 옮겼다.
'쯧. 이대로는 안 되겠어.'
몬스터 웨이브 첫날이었는데도 엄청난 타격을 입었다.
그런데 아이작의 말로는 하루가 지날수록 몰려오는 몬스터의 숫자가 늘어난다고 했다.
그렇다면 당장 내일부터는 더 많은 숫자의 몬스터들이 몰려온다는 것.
심지어 오늘 3명의 플레이어가 사망했다.
'당장 오늘 밤에 쳐들어올 몬스터 웨이브도 쉽지 않겠군.'
나는 괜찮겠지만, 다른 플레이어들이 문제였다.
내가 아무리 잘한다고 해도, 다른 쪽 성문이 뚫리는 순간 신성석을 지켜내기 어려울 테니까.
'방법을 찾아봐야겠어.'
나는 중앙 광장으로 향했다.
이대로 가만히 몬스터가 침입하길 기다리고만 있을 순 없었다.
* * *
새벽의 여명이 비추기 시작한 깊은 산 속.
한 기사가 후드를 눌러쓴 여인과 대화를 나누고 있었다.
여인은 손바닥만 한 구슬을 들고 있었는데, 온 세상의 빛을 모두 빨아들이는 것처럼 새까만 색이었다.
그때 산 아래를 내려다보던 기사가 인상을 찡그리며 입을 열었다.
"······오늘은 신성석을 부술 수 있을 줄 알았더니 실패했군."
"괜찮습니다. 어차피 며칠 안으로 보름달이 뜰 테니까요. 그때가 되면 더 많은 몬스터를 웨이브로 내보낼 수 있을 거예요."
여인의 호언장담에도 기사의 표정은 펴질 줄을 몰랐다.
"다른 사제님들은 언제 온다는 소식 없었소?"
"네. 더 이상 추가 지원은 힘들다고 하던데요. 대신 사도님들이 모두 오시기로 하셨어요."
"그건 다행이군. 그럼 내일은 오우거를 보내 봅시다."
그러자 여인이 기사를 빤히 바라보며 입을 열었다.
"그러면 몬스터를 몇 마리 못 보낼 텐데요?"
"상관없소. 어차피 오우거가 성문만 뚫고 들어가 준다면, 그 숫자가 몇이든 신성석을 깨부수는 건 가능할 테니."
"알겠어요. 오늘 밤엔 그럼 오우거의 영역으로 이동해야겠네요. 전 이동할 준비 좀 하고 있을게요.
말을 마친 여인이 자신의 이마와 양 어깨를 두드린 뒤 울창한 숲속으로 사라졌다.
그런 여인을 뒤로하고 산 아래의 헤르세벨그 성을 응시하던 기사가 낮은 목소리로 읊조렸다.
"······ 내일은 반드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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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62화. 승급전(5) -유료 시작- >
플레이어들을 데리고 중앙 광장에 도착한 나는 가장 먼저 역할부터 재분배했다.
네부드네자르, 야스케, 녹스가 죽으면서 북쪽 성문을 막을 플레이어가 없어진 상황.
"고군백과 안젤라가 내일부터 북쪽 성문을 맡아주세요."
"알겠습니다."
결국 서쪽과 남쪽에서 각각 한 명씩 차출해 북쪽 수비를 맡길 수밖에 없었다.
[플레이어 '카롤'의 그림자에 표식이 등록되었습니다.]
그다음으로 나는 곧장 아이작부터 찾아 나섰다.
아까는 시간이 없어서 대략적인 내용밖에 물어보지 못했지만, 좀 더 많은 정보들이 필요했다.
아이작을 찾는 건 그렇게 어렵지 않았다.
"남쪽 성벽 보수가 시급합니다!"
"얼마나 무너졌지?"
"아마 오늘을 넘기지 못할 겁니다."
"북쪽은 남은 병사 숫자가 너무 적습니다!"
중앙 광장에서 부관들에게 정신없이 보고를 받고 있었으니까.
그러던 아이작이 날 발견하곤 부관들을 물리며 다가왔다.
"앗, 신의 사자시여. 오늘 엄청난 활약을 하셨다고 전달받았습니다. 도와주셔서 진심으로 감사드립니다."
"예."
"그런데 어째서 쉬시지 않고 이곳을······?"
아이작이 불안감 가득한 목소리로 물었다.
혹여나 우리가 다시 돌아간다고 얘기할까 봐 전전긍긍하는 모습이었다.
"아, 물어볼 게 있어서요. 혹시 성 밖에 있는 산을 드나드는 사람이 있습니까? 예를 들어 약초꾼이라던가, 나무꾼이라던가."
내 물음에 아이작이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예, 있습니다. 이봐, 직스! 가서 루델 좀 불러오게."
"옛!"
직스라는 병사가 중앙 광장을 달려 나가더니, 이내 30대 중반 정도의 남성을 데려왔다.
"데려왔습니다, 아이작 경."
"아, 루델. 인사드리게. 이분은 태양신께서 우릴 구원하기 위해 내려주신 사자님일세."
"뵈, 뵙게 되어 영광입니다, 사자님! 헤르세벨그에서 3대째 나무꾼으로 가업을 이어온 루델이라고 합니다."
루델이 과할 정도로 허리를 숙였다.
그의 눈빛에서는 경외심이 묻어 나오고 있었다.
"여기 산에 대해서 잘 아신다고요?"
"옛. 몬스터 웨이브가 터지기 직전까지는 일주일에 서너 번씩 오르고 그랬습니다요."
"그럼 어떤 영역에 어떤 몬스터가 사는지 잘 알겠군요."
"맞습니다. 그걸 모르면 숲에 나무를 하러 갈 수가 없습니다. 영역에 잘못 들어가는 순간 곧바로 몬스터들의 공격을 받게 되니까요."
"제게 그것 좀 설명해 주시겠습니까?"
"예, 그······."
루델이 말을 끌면서 주위를 두리번거리자, 아이작이 품속에서 지도와 만년필을 꺼내 바닥에 펼쳤다.
그러자 루델이 지도에 슥슥 표시를 해가며 영역을 설명했다.
"여기, 헤르세벨그를 기준으로 동쪽에 있는 산이 나자란이고, 남쪽에 있는 산이 둠베스 입니다. 그리고 서쪽부터 북쪽까지 길게 뻗어 있는 게 아리투아포 산맥이고, 이 두 개의 산과 아리투아포 산맥을 통틀어 데스 벨리라고 부릅니다."
"예."
막상 지도로 보니 몬스터의 영역이 엄청나게 거대했다.
가장 크기가 작은 나자란 산만 해도 헤르세벨그보다 10배는 더 방대할 정도였다.
"여기, 그리고 여기에 오크들이 살고, 이쪽은 블랙 오크의 영역입니다. 다른 곳 같으면 벌써 블랙 오크들한테 흡수당했을 텐데, 산이 워낙 크다 보니까 두 개체가 잘 공존하면서 살고 있습죠."
"······."
"여기랑 여기엔 코볼트랑 고블린들이, 그리고 이 뒤쪽으로 트롤과 오우거의 영역입니다."
루델이 지도에 영역을 사선으로 표시하며 알려준 덕분에 영역 범위가 훨씬 더 머리에 잘 들어왔다.
그나저나 군사 지도로 보이는데, 이렇게 낙서를 해도 되는지 모르겠다.
뭐, 몬스터 웨이브를 막는 게 더 중요하니까 아이작이 만년필을 건넨 거겠지.
"여기, 표시가 안 된 부분들은 뭡니까?"
"아, 거긴 뿔 오크들이 사는 곳입니다."
"······뿔 오크요?"
나는 루델의 말에 깜짝 놀랐다.
하위 종족으로 분류되는 블랙 오크와 달리, 뿔 오크는 중위 종족이다.
한마디로 엘프나 드워프와 같은 등급이라는 것.
오우거는 상위 종족에 들어가지만 개체 수가 몇 안 되는 반면에 뿔 오크는 중위 종족이면서도 블랙 오크들처럼 엄청난 대군락을 이룬 채 살아간다.
그렇기에 오우거들도 뿔 오크는 쉽게 건드리지 못했다.
사실상 이 데스 벨리라는 곳에서 먹이 사슬의 가장 위에 있는 녀석들이 뿔 오크인 셈이었다.
"그들의 숫자는 얼마나 됩니까?"
"글쎄요······. 헤르세벨그의 인구가 40만 정도였으니, 못해도 100만은 될 겁니다."
"100만이요?"
"예. 하지만 그들은 인간처럼 고도의 지능을 가진 존재들. 인간을 건드리면 대규모 전쟁이 일어날 것을 알기에, 먼저 공격한 적은 없었습니다."
"이번 몬스터 웨이브 때도 없었습니까?"
내 물음에 답한 건 아이작이었다.
"예, 뿔 오크들이 공격한 적은 없습니다. 애초에 그들이 공격해 들어왔다면, 지금까지 무사할 수 없었을 겁니다."
불행 중 다행이었다.
뿔 오크들까지 침입해 왔다면, 나는 그대로 미션을 포기했을 것이다.
다른 플레이어들이 막아내지 못했을 테니까.
하위 리그 플레이어들이 상대하기엔, 뿔 오크는 너무 강한 녀석들이었다.
"이 지도, 제가 좀 챙겨가도 되겠습니까?"
"예. 그런데 어디에 쓰시려고······."
"여기, 나자란 산에 좀 들어갔다 오려고 합니다."
"거, 거긴! 사자님의 무력을 의심하는 건 아닙니다만, 그래도 좀 위험하지 않겠습니까?"
아이작의 만류에 나는 고개를 저었다.
"뭔가 건질만한 게 있을까 싶어서요. 가서 간단하게 조사만 하고 돌아오겠습니다."
말을 마친 나는 동쪽 성문으로 향했다.
직접 확인해보지 않고는 이 찜찜한 기분을 지울 수가 없을 것 같았다.
왠지 누군가 인위적으로 몬스터 웨이브를 만들어 헤르세벨그로 보내고 있는 느낌이었으니까.
당장 오늘 밤부터는 또 얼마나 많은 몬스터들이 날뛸지 모르는 상황.
시간이 날 때 확인해 두는 게 좋을 것 같았다.
'산이 엄청 넓네.'
숲속으로 들어오니 금세 어제 내가 정찰했던 곳까지 나올 수 있었다.
지도로 보니 아직 산의 초입이라고 부르기도 민망한 곳이었다.
몬스터들의 영역으로 들어가려면 한참을 더 가야 했다.
'뭔가 있는 것 같긴 한데.'
산속 깊숙이 들어갈수록 어제의 위화감이 무엇 때문에 생긴 것인지 알 수 있었다.
숲이 너무나도 평화로워 보였으니까.
원래 몬스터 웨이브라는 것이 각자의 영역을 지키며 살아가는 몬스터들의 숫자가 폭증하면서 생겨나는 현상이었다.
생태계의 크기는 한정되어 있고, 물량은 증가하니까 중심부에 있는 먹이 사슬 최정점의 몬스터로 인해 파동처럼 밀려 나오는 것이다.
그 도미노 현상으로 외곽의 몬스터들이 인간의 영역을 침범하게 되는 거고.
'근데 그런 것 치고는 숲이 너무 평온해.'
몬스터 웨이브에도 전조 증상이 있는데, 이곳엔 그런 게 전혀 보이지 않았다.
결국 누군가가 특정 시간에 인위적으로 몬스터 웨이브를 조장하고 있을 수도 있다는 뜻.
그리고 그 생각은 루델이 표시해 준 오크의 영역에 도착하고 나서 더 강해졌다.
'조용하군.'
아무리 둘러봐도 전투의 흔적 같은 것들이 보이지 않았다.
평범한 일상을 보내던 오크가 갑자기 누군가의 명령에 의해 산 밑으로 내려온 것 같았달까.
'아무래도 오늘 밤까지 여기서 기다려 봐야겠어.'
어제 대규모로 쳐들어왔기 때문인지 오크의 영역에는 그렇게 많은 숫자의 몬스터들이 있지 않았다.
그렇다면 가장 유력한 건 조금 떨어진 곳에서 살아가는 블랙 오크였다.
나는 지도를 품속에 넣으며 블랙 오크의 영역으로 이동했다.
전투는 최대한 자제할 생각이었다.
'최우선 목표는 일단 누가 인위적으로 몬스터 웨이브를 만들어 내는지 확인하는 거니까.'
괜히 몬스터들과 전투를 벌였다가 이 일의 배후에 있는 존재가 알아차리면 곤란했다.
그리고 만약 실제로 확인했는데, 단순한 자연 현상이라면 그때 가서 사냥을 해도 늦지 않을 것이다.
다시 한참 동안 산을 타고 이동하다 보니, 어느새 블랙 오크와 오우거의 영역이 서로 맞닿는 경계선에 도착할 수 있었다.
아직 해는 중천에 떠 있는 상황.
'밤이 올 때까지 좀 쉬어야겠군.'
나는 근처에 있는 나무 위로 올라갔다.
우거진 나뭇잎이 내 모습을 감춰줄 것이기에 밤까지 휴식을 취하기엔 나쁘지 않은 공간이었다.
'부디 누군가가 인위적으로 만들어 내고 있는 거였으면 좋겠는데.'
그렇다면 보다 쉽게 이 미션을 클리어 할 수 있을지도.
나는 나뭇가지에 편안하게 몸을 기댔다.
달이 뜨고 나면.
확실하게 알 수 있을 것이다.
깊은 산속의 어둠은 빠르게 찾아왔다.
밤이 되면서 싸늘한 한기가 몸을 감쌌다.
띠링!
[<달의 메아리> 가 외부 온도를 차단합니다.]
잠시 후면 달이 뜨기 시작할 것 같았다.
하지만 지금까지는 아무런 특이점도 발견할 수 없었다.
'그래서 더 이상해.'
이렇게 조용하다는 게 이해가 되지 않았다.
띠링!
[상현달이 떴습니다.]
[<로브:달의 메아리> 가 달의 힘을 빌려와 모든 스텟이 3% 상승합니다.]
그때였다.
쑤앙!
'이게 뭐지?'
처음 느껴보는 감각이었다.
마치 공간의 파동? 공간의 뒤틀림? 같은 게 날 훑고 지나간 듯한 느낌이랄까.
나는 곧장 나무를 박차고 떨림이 시작된, 오우거의 영역 쪽을 향해 달려갔다.
"취이이이이이익!"
"쿠오오오오!"
"취이이이이이이이익!"
그러자 방금 전까지 잠잠하던 산이 순식간에 시끌벅적해졌다.
마치 단체로 약을 잘못 먹고 미쳐 날뛰는 느낌이랄까.
'역시 인위적인 거였어.'
"취이이익! 인간이다! 췩!"
"인간을 죽여라! 취이익!"
나를 발견한 몬스터들이 거대한 도끼를 휘둘렀다.
콰지지지지직!
서걱-
나는 죽이기보다, 최대한 돌파하며 떨림의 진원지를 찾아 나섰다.
서둘러야 했다.
앞으로 20분에서 30분 후면.
이 미쳐 날뛰는 몬스터들이 헤르세벨그에 도착할 테니까.
'내게 남은 시간은······ 25분 정도.'
그림자 이동으로 넘어간다고 해도 그 이상의 시간을 벌긴 어려울 것이다.
"······."
그때 내 귓가로 누군가의 목소리가 들렸다.
'어디지? 근처에서 나는 것 같은데.'
목소리가 들리는 방향으로 다가가니, 곧 정체불명의 인간들을 만날 수 있었다.
검은색 로브에 후드까지 뒤집어쓴, 5명의 인간들이 숲의 외곽에서 무언가를 하고 있었다.
'찾았다.'
가운데에 있는 한 명의 괴인이 손바닥만 한 구슬을 들고 뭐라고 중얼거리고 있었고, 나머지 네 명의 기사가 가운데에 있는 괴인을 호위하는 모양새였다.
나는 체력 소모 때문에 꺼둔 천둥의 숨결을 활성화 시키며 곧장 녀석들을 향해 짓쳐 들어갔다.
"헛, 어떻게 알고!"
"사제님을······!"
"모두 경거망동하지 말게."
날 발견한 기사들이 구슬을 든 괴인의 앞을 가로막으며 방패를 세웠다.
'악마의 눈.'
[상대방의 능력치를 확인합니다.]
[이름 : 리암 발데스그라이츠 폰 레인하르트]
[성향 : 광신]
[근력 : 105(+?)] [민첩 : 101+?)] [체력 : 102(+?)]
[정신 : 88(+?)] [지력 : 41(+?)] [마력 : 101(+?)] [신성력 : 99(+?)]
[각성 능력 : <특급검방술 > <특급살기 > <특급마나운용 > <고급박투술 > <하급치료술 > <특급신성술 >]
[업적 특전 : 팔라딘의 의지]
악마의 눈으로 스텟을 보는 순간 소름이 쭈뼛 돋았다.
이 미친 새끼.
'스텟이 왜 이래?'
눈앞의 기사는 엄청난 강자였다.
심지어 특전도 존재했다.
'팔라딘이라면 교단이나 교국의 소드 마스터 같은 존재들이잖아.'
헤르세벨그는 발리노르 성계에 있는 도시.
아무래도 발리노르 성계의 최강자 중 한 명인 모양이었다.
이래서 발리노르가 무림, 알프하임, 웨스테로스와 함께 4강이라고 불리는 것 같았다.
'다른 녀석들은 평범하군.'
다행히도 다른 세 명의 기사들은 성계 대항전 10경기 플레이어들의 평균 수준이었다.
굳이 말하자면 중급 기사 정도랄까.
결국 내가 조심해야 할 녀석은 저 팔라딘 한 명뿐이라는 것.
콰지지지지지지지직!
녀석들의 코앞에 도착한 나는 창을 휘둘렀다.
그러자 팔라딘이 정면에서 상반신을 다 가릴 만큼 거대한 방패를 내밀었다.
채앵!
'크윽!'
피의 강화 특전을 켜지 못한 상황이라서 그런가, 근력에서 너무 많이 차이가 났다.
녀석의 방패에 실린 힘을 이겨내지 못하고 뒤로 크게 튕겨져 나간 것이다.
"제법 강한 이교도로군. 오늘은 운이 좋지 않았다고 생각하시오. 내, 그대의 생명을 취하면 곧바로 신께 기도를 올려 드리리다."
단 한 번의 격돌만으로도 내 수준을 간파한 팔라딘이 성호를 그었다.
십자가는 아니고, 자기 이마와 양 어깨를 긋는 삼각형 모양이었다.
"자신만만하네. 그러다가 뒤의 사제가 죽으면 어떤 표정을 지을지 궁금하군."
"신께서 우릴 보우하시는 이상, 그런 일은 생기지 않을 것이오."
내 말에 팔라딘이 자신만만한 표정으로 답했다.
어디, 그 표정이.
[표식 목록]
[플레이어 '카롤']
[발리노르인 '아이작 머니쿠츠 드 데이커']
[발리노르인 '리암 발데스그라이츠 폰 레인하르트']
얼마나 일그러지는지 보자고.
'그림자 교환.'
순식간에 팔라딘과 내 위치가 뒤바뀌었다.
녀석은 내가 튕겨 나간 곳에.
그리고 나는.
콰지지지지지지지직!
사제의 바로 앞에.
서걱!
사제를 지키고 있던 세 사람의 반응이 느렸다.
그림자 교환을 전혀 예상하지 못한 모습.
덕분에 나는 손쉽게 사제의 목을 벨 수 있었다.
사제가 죽자마자 몬스터들의 포효 소리가 잦아들었다.
미쳐 날뛰던 녀석들이 잠잠해진 것이다.
'역시, 이 녀석을 죽이는 게 정답이었어.'
"이노오옴!"
순간 놀라서 얼굴이 하얗게 질린 팔라딘이 내 쪽으로 쇄도해 들어왔다.
하지만 난 녀석을 쳐다보지도 않은 채 나머지 세 명의 기사들에게도 창을 휘둘렀다.
서걱!
순식간에 세 개의 머리가 추가로 땅에 떨어졌다.
그리고 팔라딘의 검이 내 등을 찌르려는 순간!
'안녕.'
[발리노르인 '아이작 머니쿠츠 드 데이커'에게 <그림자 이동> 능력을 사용합니다.]
시야가 한순간에 뒤틀리며 팔라딘의 검이 아닌, 분주하게 움직이고 있는 아이작의 얼굴이 보였다.
< 62화. 승급전(5) -유료 시작- > 끝
< 62화. 승급전(6) >
"사, 사자님!"
갑작스러운 내 등장에 아이작이 놀라 소리쳤다.
내가 오지 않아 걱정하고 있었던 모양이었다.
'후, 다행이야.'
몬스터들의 침입이 시작되기 전에 사제를 죽이고 올 수 있었다.
남쪽은 테베 강이, 북쪽은 낭떠러지가 있어서 나자란 산의 몬스터들이 아니면 동쪽 성문으로 침입해오지 못할 터.
이걸로 동쪽 성문으로 침입할 몬스터에 대한 걱정은 하지 않아도 될 것 같았다.
"달이 떴는데도 안 오셔서 걱정이 많았습니다."
"시간이 없으니 짧게 말하겠습니다. 동쪽 성문으로는 아마 몬스터 웨이브가 안 올 겁니다. 혹시 모르니까 최소한의 병력만 남겨두고 모두 북문으로 보내주세요."
"예? 그, 그게 무슨······."
"누군가가 인위적으로 몬스터 웨이브를 만들어내고 있었습니다. 리암 발데스그라이츠······? 라는 이름을 썼던 거 같은데."
"거짓된 열두 개의 검!"
리암이라는 이름에 아이작이 놀라 소리쳤다.
얘기하는 것을 들어보니, 제법 이름난 팔라딘인 것 같았다.
하긴, 그 정도 실력자의 이름이 알려져 있지 않을 리가 없지.
"아는 사람입니까?"
"아, 예. 거짓된 밤과 달을 믿는 악의 종자들 중 한 명입니다. 이전에도 한번 악마를 소환하려다 신의 징벌을 받은 적이 있었죠. 그런데 아무리 그들이라고 하더라도 몬스터 웨이브를 고의로 만들어낼 수 있다니······."
아이작이 넋이 나간 채 작게 읊조렸다.
"일단 자세한 얘기는 오늘 밤을 무사히 넘긴 뒤에 합시다. 혹시 모르니까 신성석을 잘 지켜 주세요. 저와 함께 온 이들 중에서도 한 명을 이쪽으로 보내겠습니다. 그리고 이거."
나는 인벤토리에서 신호용 폭죽을 하나 꺼냈다.
"만약 그 팔라딘이라는 녀석이 오거든, 이 폭죽을 하늘에 대고 당기세요. 바로 달려오겠습니다."
아마 그 팔라딘이란 녀석이 직접 오면 나를 제외하곤 아무도 막아내지 못할 것이다.
그래서 나는 표식을 등록해 둔 카롤을 중앙광장으로 보낼 생각이었다.
그러면 그림자 이동을 써서 바로 날아올 수 있을 테니까.
"아, 그들이라면 괜찮습니다. 이 신성석이 있으면 거짓된 신을 믿는 자들은 헤르세벨그 안으로 들어올 수 없습니다."
"확실합니까?"
"예. 그들이 직접 와서 부수지 않고, 번거롭게 몬스터 웨이브를 보내는 이유도 아마 신성석 때문에 헤르세벨그로 들어오지 못해서일 겁니다."
그런 거라면 정말 다행이었다.
리암 같은 괴물들이 몰래 와서 신성석을 부숴버린다면 방법이 없었을 테니까.
혹시 몰라 그림자 표식이 등록된 카롤을 보내 놔도, 내가 이곳에 와서 리암을 막는 순간 몬스터들이 쏟아져 들어왔을 거고.
이래저래 많이 곤란했을 것이다.
"그렇다 해도 일단 보내 놓긴 하겠습니다. 자세한 얘기는 몬스터 웨이브가 끝난 뒤에 하시죠."
나는 카롤이 있는 서쪽 성문을 향해 달려갔다.
경로상으로 보자면 남문부터 도는 게 효율적이지만, 카롤이 서쪽 문에 있는 이상 어쩔 수 없었다.
그 사이 몬스터들의 포효가 점점 가까워져 왔다.
궁금한 게 많았지만, 현재 상황이 너무 촉박하기에 더 이상 시간을 낼 수가 없었다.
'오늘만 넘기면 돼.'
내일은 남쪽에 있는 둠베스 산의 몬스터 웨이브를 막을 계획이었다.
그렇게 되면 서쪽과 북쪽만 남는 셈.
동선 거리도 짧고, 한쪽 성문을 내가 틀어막는다고 가정했을 때, 북쪽 성문에 남은 플레이어들을 다 때려 박으면 그 다음날도 충분히 버틸 수 있을 것이다.
그렇게 한쪽 방향씩 줄여가다 보면 이번 미션도 충분히 승리로 끝마칠 수 있다.
"쿠오오오오오오!"
"취이이익!"
다행히 서쪽 성문에 다다를 때까지 몬스터 웨이브가 도착하지 않은 상태였다.
나는 곧장 서문을 지키고 있던 플레이어들을 향해 소리쳤다.
"지금부터 서문은 제가 맡겠습니다. 엘리스는 북문 쪽으로 이동하세요. 카롤은 중앙 광장으로 가서 신성석을 지키시고요."
"예? 그게 무슨······."
"자세한 얘기는 몬스터 웨이브가 끝나고 말씀드리겠습니다. 어서 이동하세요. 여기 책임자가 누굽니까?"
궁금한 게 많겠지만, 다행히 플레이어들은 이것저것 캐묻지 않고 일단 내가 각자 지정해준 위치로 달려가기 시작했다.
그런 플레이어들을 뒤로하고 병사들을 향해 묻자 한 명이 앞으로 나섰다.
"예, 천부장 막베론입니다."
"여기 오십 명 정도만 남기고, 반반씩 나눠서 남쪽 성문과 북쪽 성문으로 보내세요."
"옛!"
빠르게 전력 분배를 마친 나는 곧장 성문 밖으로 달려 나갔다.
마침 대규모로 이루어진 몬스터들이 코앞까지 다다라 있었다.
"쿠오오오오오오오오!"
몬스터들의 울음소리를 뚫고 귓가로 꽂히는 오우거의 포효.
어제와 달리 오우거도 웨이브에 끼어 있었다.
그 광경에 나는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내가 동쪽 성문의 웨이브를 잠재우지 않았더라면, 오늘 수성전은 무척 위험했을 것이다.
'최대한 빠르게 정리하고 다른 쪽 성문들로 구원가야겠군.'
콰지지지지지지지지지직!
나는 미쳐 날뛰는 몬스터들에게 강렬한 뇌전이 담긴 창을 힘껏 휘둘렀다.
* * *
신의 뜻을 지키는 열두 개의 검 중 일인이자, 어둠의 교단 팔라딘인 리암 발데스그라이츠 폰 레인하르트는 죽은 사제와 세 명의 성기사를 내려다보았다.
도무지 어떻게 된 상황인지 이해할 수가 없었다.
'나와 이교도의 위치가 바뀌다니?'
갑자기 나타난 악귀 가면을 쓴 남자.
제법 강해 보이긴 했지만 그뿐이었다.
많은 제물을 바쳐, 신께 강대한 힘을 선물 받은 자신과 비교할 바는 아니었다.
하지만 리암이 예상한 것과 정반대의 상황이 연출되었다.
이번 계획의 핵심인 사제, 그리고 자신을 수행하던 세 성기사까지 모두 죽은 것이다.
'내 실수로 인해 신께서 안배하신 일이 틀어지게 생겼으니, 이를 어떡하면 좋단 말인가.'
리암이 죽은 사제와 성기사들 앞에서 무릎을 꿇었다.
그리고는 이마와 양 어깨를 긋는 성호를 하고선 기도를 올리기 시작했다.
이들에게 있어 죽음이란 축복과 같은 것.
그래서 명복을 빌어줄 필요는 없었다.
그저, 신께 선택받은 사람들로서 자신의 책무를 다하지 못하고 죽은 것에 대한 위로를 건넬 뿐이었다.
'편히 쉬시오.'
기도를 마친 리암이 자리에서 일어날 때였다.
바스락- 바스락-
산속 깊이 드리워진 어둠을 가르며 두 명의 남자가 모습을 드러냈다.
"거룩한 밤의 세계를 위하여."
"거룩한 밤의 세계를 위하여."
"리암 사도님."
"데클렌 사도. 개럿 사도."
리암과 같이 최전선에서 교단을 수호하는 열두 팔라딘에 소속된 이들이었다.
"저희가 늦는 바람에 사제께서 신의 품으로 돌아가셨군요."
데클렌의 말에 리암이 고개를 저었다.
"아니오, 데클렌 사도. 그대들도 다른 곳에서 사명을 수행하고 있었잖소. 다 이 미천한 종이 부족했던 탓이오."
"어찌 저희가 세상을 정화 시키기 위해 불철주야 노력하시는 리암님을 탓하겠습니까? 그나저나, 어쩌다 사제님이 돌아가신 건지······."
"신의 뜻을 거역하는 이교도가 찾아왔소. 제법 강하긴 했소만, 우리 형제를 해칠 정도는 아니었지."
"그런데 왜······."
개럿의 물음에 리암이 한숨을 내쉬며 어떻게 된 일인지 설명했다.
리암의 말이 이어질수록 개럿과 데클렌의 표정이 굳어져 갔다.
"기이한 마법이군요. 사제님들을 지키는 게 쉽지 않겠습니다."
"걱정하지 마시오. 녀석의 무력은 우리에 비할 바가 못 되니. 다른 사도들도 도착했소?"
"예. 여덟 사도 모두 도착했습니다."
"우리까지 합류하면 사제님마다 네 명의 사도가 붙게 되겠군. 그렇다면 다음번에는 그 이교도를 충분히 막을 수 있을 것이오. 나는 남쪽의 둠베스로 갈 테니, 개럿 사도와 데클렌 사도도 각자 서쪽과 북쪽으로 가서 그 이교도에 대해 얘기해 주시겠소?"
고개를 끄덕이는 데클렌과 개럿의 얼굴에서 짙은 피로감이 묻어 나왔다.
라스그리드에서 헤르세벨그까지의 거리는 1,000 킬로미터.
그 거리를 5일 만에 달려왔으니 많이 피곤할 것이다.
"조금만 더 힘을 냅시다. 헤르세벨그의 수비 병력은 얼마 남지 않았고, 앞으로 5일 후면 보름달이 뜰 테니. 그때가 되면 훨씬 더 많고, 강한 몬스터들을 보낼 수 있을 것이오."
"예."
그나마 희망적인 부분이 있다면, 달의 크기가 커질수록 웨이브로 밀어낼 수 있는 몬스터의 숫자와 등급이 높아진다는 것.
아마 보름달이 뜨는 날이면 확실하게 신성석을 부수고 성 내부로 들어갈 수 있을 것이다.
그렇게 막 발길을 돌려 헤어지려 할 때였다.
리암이 멈칫하더니 입을 열었다.
"르블랑 사제가 죽기 전에 이런 말을 했소. 오늘 만났던 이교도의 육체가 죽은 이의 혼을 담기 좋을 것 같다고. 그러니 녀석을 죽일 때 되도록 머리와 팔다리는 자르지 말아주시오. 그게 사실이라면 권속이신 필로타누스 님이 이 세상에 강림하는데 그 육체를 사용할 수도 있으니."
"그렇다면 헤르세벨그 어딘가에 숨겨져 있다는 강림석 뿐만 아니라 이곳에서 육체도 함께 얻을 수 있겠군요."
"오, 필로타누스님을 영접할 날이 머지않았습니다!"
나자란 산에 도착한 이후, 개럿과 데클렌이 처음으로 활짝 웃었다.
* * *
꽈아아아앙! 콰지지직!
하늘에서 세 개의 벼락이 떨어져 내렸다.
땅이 파이고, 사방을 뇌전의 폭풍이 휩쓸었다.
서걱!
마지막으로 남은 트롤의 목을 베는 걸 끝으로 나는 한숨을 내쉬었다.
'둘째 날도 무사히 끝났군.'
첫날과 달리 오늘은 오우거도 간간이 섞여 있었기에 걱정했지만, 크게 위험한 상황은 연출되지 않았다.
동쪽 성문의 웨이브를 잠재운 것 하나만으로도 난이도가 대폭 하락한 것이다.
거기다가 벽력섬전으로 인해 사냥 속도가 엄청나게 빨라진 덕분인 것도 있었다.
1티어급 스킬인 뇌신, 천둥의 숨결에 있는 벽력, 그리고 잠시나마 민첩을 20%나 상승시켜주는 옵션까지.
괜히 전설 등급의 창이 아니었다.
"고생 많으셨습니다, 렌님."
몬스터를 모두 죽이고 북쪽 성문으로 들어오자, 카롤을 제외한 다섯 명의 플레이어들이 날 반겼다.
서쪽을 모두 정리하고 남쪽을 도우러 가면서 모든 플레이어들을 북쪽으로 몰빵했기에 모두들 모여 있는 것이었다.
"네, 모두들 고생 많았습니다. 잠시 할 얘기가 있으니 중앙 광장으로 이동하시죠. 막베론?"
"예, 사자님."
내 부름에 몬스터의 사체들을 정리하고 있던 천부장, 막베론이 달려왔다.
나는 그에게 인벤토리에서 신호용 폭죽 세 개를 건네며 입을 열었다.
"전장 수습을 부탁합니다. 우린 모두 중앙 광장으로 이동할 생각입니다."
"예. 근데 이건······?"
"신호용 폭죽이라는 겁니다. 남쪽과 북쪽 책임자에게도 하나씩 주세요. 무슨 일이 있거든 하늘에 대고 이 줄을 당기면 됩니다."
"옛, 알겠습니다."
인위적으로 몬스터 웨이브를 조장하는 세력이 있다는 걸 알게 된 이상 대비는 해둬야 했다.
신성석이 녀석들을 못 들어오게 막아준다고는 하지만, 사람 일이라는 게 혹시 모르는 법이니까.
플레이어들을 데리고 중앙 광장에 도착한 나는 나자란 산에서 있었던 일들을 설명해 주었다.
"헉, 누군가 일부러 헤르세벨그에 몬스터들을 보내고 있었다니······."
"그래서 오늘은 둠베스 산으로 다녀올 생각입니다."
"혼자서 가신다는 말씀이십니까? 저희도 도와드리겠습니다."
그러자 플레이어들이 자신도 돕겠다며 앞다퉈 자리에서 일어났다.
하지만 나는 그들에게 고개를 저었다.
마음은 고맙지만, 이들은 밤새도록 몬스터들과 격전을 치렀기에 모두들 기진맥진한 상태.
크게 도움이 되지 않을 것이다.
차라리 이곳에서 휴식을 취하며 신성석을 지키다가, 밤에 몬스터 웨이브를 막아주는 게 더 효율적이다.
"혹시 모르니까 여러분은 이곳에 남아 신성석을 지켜 주세요. 웨이브가 시작되기 전까지 돌아오겠습니다."
"알겠습니다. 조심히 다녀오시길."
"신성석으로 아무도 다가오지 못하게 막고 있겠습니다. 다녀오십쇼."
나는 플레이어들의 배웅을 뒤로하고 둠베스 산으로 향했다.
'사제를 죽이고도 시간이 남으면 서쪽까지 끝내버려야겠어.'
오늘은 굳이 밤까지 기다릴 생각이 없었다.
어제와는 상황이 많이 달라졌으니까.
리암을 통해 녀석들은 자신들의 계획을 망치려 하는 존재가 있다는 것을 알아차렸을 것이다.
그리고 한마디 덧붙였겠지.
'녀석은 우리보다 약하니까 발견하면 그냥 죽여라.'
그렇다면 내가 산속을 휘젓고 다녀도 모습을 숨기지 않을 가능성이 컸다.
아니, 오히려 그쪽에서 먼저 달려들 수도 있었다.
그렇게 된다면 오늘은 많은 시간을 아낄 수 있을 것이다.
'아마 블랙 오크의 영역 근처에 있을 거야.'
나는 루델이 표시해준 영역으로 걸음을 옮겼다.
나자란 산에서와 달리 굳이 몬스터들과의 싸움을 피하지 않으면서.
"취이익! 인간!"
"크아아앙!"
서걱!
[<피의 강화>로 상승한 스텟이 30분간 유지됩니다.]
그렇게 한동안 내게 달려드는 몬스터들을 죽이면서 이동하다 보니, 어느새 블랙 오크의 영역 근처까지 들어올 수 있었다.
'어디쯤 있으려나.'
바스락- 바스락-
블랙 오크 영역의 경계선을 따라 크게 한 바퀴 돌 때였다.
누군가 내가 있는 방향으로 다가오는 소리가 들렸다.
발소리가 둔탁하지 않은 걸로 보아 블랙 오크는 아니었다.
블랙 오크의 영역에서 몬스터 말고 존재할 만한 이들은.
"또 만났군, 이교도여."
몬스터 웨이브를 일으키고 있는, 어둠의 교단 녀석들밖에 없었다.
풀숲을 헤치고 나타난 사람은 단 한 명.
바로 어젯밤에 만났던 팔라딘, 리암이었다.
"설마하니 또다시 혼자서 올 줄은 몰랐소. 설마 오늘도 같은 수법이 통할 거라고 생각하는 건 아니겠지. 그렇다면 우릴 바보로 안 것이오."
"······."
"용기와 만용 정도는 구분할 줄 알았거늘. 그대의 멍청함이 명을 재촉했다고 생각하시오."
녀석이 나를 향해 계속해서 이죽거렸다.
아무래도 어제 사제를 죽이고 도망쳐서 제법 화가 난 모양이었다.
나는 녀석을 향해 한쪽 입꼬리를 올리며 입을 열었다.
"말이 많군. 혹시 팔라딘이란 직책을 입으로 따낸 건 아니겠지?"
내가 잔뜩 비웃으며 얘기하자 녀석의 얼굴이 싸늘하게 굳어졌다.
그러더니 무시무시한 살기가 뿜어져 나오기 시작했다.
"신이시여. 당신의 종이 오늘, 또 한 명의 이교도를 베어 세상을 정화시키겠습니다."
녀석이 순간적으로 도약하며 내게 방패를 휘둘렀다.
콰지지지지지지지지지직!
나도 뇌전을 가득 담아 맞찔러 들어갔다.
채애애앵!
어제와 같은 단 한 번의 격돌.
하지만 결과는 완전 딴판이었다.
"······!"
뒤로 튕겨 나간 리암이 눈을 치켜떴다.
녀석의 얼굴은 당혹감으로 가득 차 있었다.
바보로 안 건 내가 아니라, 리암이었다.
[<피의 강화>로 상승한 스텟이 30분간 유지됩니다.]
[근력 : 105(+5)(+44)] [민첩 :112(+5)(+47)] [체력 : 104(+5)(+38)]
[정신 : 153(+59)] [지력 : 23(+9)] [마력 : 124(+5)(+46)]
'어제와 완벽하게 다른 모습을 보여주지.'
< 63화. 승급전(6) > 끝
< 63화. 승급전(7) >
콰지지지지지지직!
나는 당황해하는 리암을 몰아붙이기 시작했다.
[발리노르인 '리암 발데스그라이츠 폰 레인하르트'의 그림자에 표식이 등록되었습니다.]
벽력섬전이 방패를 두들길 때마다 리암이 인상을 찌푸렸다.
강렬한 뇌전이 녀석의 내부로 파고들어, 데미지를 입힌 것이다.
'제법 아플 거야.'
그러자 녀석이 어떻게든 나를 뿌리치기 위해 방패를 휘둘렀지만, 소용없는 일이었다.
계속해서 거리를 조절하며 녀석의 방패만 집중적으로 노렸으니까.
다른 빈틈 따윈 쳐다보지도 않았다.
[죽음의 가호!]
방패로 내 창을 밀어내며 주문을 읊는 리암.
녀석의 몸이 순간적으로 하얀빛에 감싸이더니, 몸놀림이 더 빨라졌다.
신성 마법을 사용한 것이다.
정확히는 자기 버프 마법이었다.
녀석의 신성 마법은 그것으로 그치지 않았다.
[어둠의 축복!]
[수호자의 의지!]
녀석이 주문을 외칠 때마다 몸에서 빛이 흘러나오더니 더욱 강해지고, 날렵해졌다.
비등비등했던 스텟이 순식간에 녀석의 우위로 바뀌었다.
채앵!
내 속도를 따라오지 못해 애를 먹던 리암이 그때부터 빠르게 쇄도했다.
방패를 앞세운 채 내 품속으로 파고들기 시작한 것이다.
'얼마나 오른 거지?'
악마의 눈으로 확인해 보니, 근민체가 5%씩 상승해 있었다.
이 정도라면 크게 걱정할 정도는 아니었다.
테크닉으로 충분히 커버할 수 있는 수준이었으니까.
채애앵! 채애애앵!
나는 좌우로 피하며 녀석의 돌진을 저지하는 데에 집중했다.
어차피 내 전략은 뇌전으로 데미지를 쌓는 것.
녀석에게 거리만 내주지 않는다면, 결국 내가 이길 수밖에 없는 싸움이었다.
"크윽!"
결국 한참 동안 거리를 줄이는 데 주력하던 리암이 결국 포기한 채 거리를 벌렸다.
제대로 상성에 잡아먹힌 것이다.
나를 상성 면에서 압도하려면 성계 대항전의 아킬레우스처럼 민첩으로 찍어누르려 하지 않는 한 불가능한 일이었다.
'자, 어떻게 할 거냐.'
녀석은 선택의 기로에 놓여져 있었다.
계속해서 되지도 않는 방법으로 조금씩 손해를 보다가 야금야금 죽어갈 것이냐.
아니면 이대로 도망칠 것이냐.
파밧!
녀석의 선택은 후자였다.
등을 돌려 달아나는 리암.
한동안 달리기 시작하니, 저 멀리서 다른 사람들이 보이기 시작했다.
사제 하나와, 기사 열 셋.
녀석이 속해 있는 교단의 사람들이었다.
'이대로 보내줄 수야 없지.'
녀석의 민첩이 상승한 탓에 조금씩 거리가 벌어지고 있었다.
그럼에도 나는 굳이 활이나 사슬낫으로 스왑하지 않은 채 녀석을 쫓는 것에 집중했다.
그리고 녀석이 완벽하게 창의 거리에서 벗어나는 순간!
'전광석화.'
띠링!
[10초 동안 민첩 스텟이 +20% 상승합니다.]
순간적으로 민첩 스텟이 11포인트나 상승하면서 리암과의 거리가 빠르게 좁혀졌다.
그리고는 창의 거리에서 벗어나 안심하고 있던 리암에게 불시에 다가가 창을 휘둘렀다.
서걱!
그러자 떨어져 나가는 녀석의 오른팔.
"크윽!"
갑작스럽게 한쪽 팔이 사라진 탓에 리암이 바닥으로 고꾸라졌다.
"리암 사도님!"
그가 쓰러지는 것과 동시에 이쪽으로 달려오는 흑기사들.
"두 명의 사도는 사제님에게서 떨어지지 마시오!"
모든 흑기사들이 달려오려고 하자 리암이 버럭 소리를 질렀다.
아마 내 그림자 교환을 의식해서 한 말일 것이다.
한 명만 남으면 나와 교환되었을 때 사제를 지킬 사람이 없을 테니까.
나는 굳이 리암을 마무리하지 않은 채 달려드는 녀석들을 훑었다.
'악마의 눈.'
여기 있는 녀석들 중 팔라딘은 총 넷이었다.
달려오는 열한 명의 기사 중에 하나.
그리고 사제를 지키고 있는 두 명도 팔라딘.
마지막으로 쓰러져 있는 리암.
나머지는 일반 흑기사였다.
'충분히 가능하겠어.'
그림자를 밟아 표식을 등록하지 않는 이상 교환 스킬을 사용할 수 없지만, 녀석들은 그걸 모르는 상태.
결국 그림자 표식 스킬을 보유하고 있다는 이유 하나만으로 두 팔라딘의 발을 묶어놓은 셈이었다.
리암은 검 잡는 손을 잃은 탓에 전투 불능이라고 봐도 될 것 같고.
결국 내가 주의해야 할 녀석은 선두에서 달려오는 한 명의 팔라딘 뿐이었다.
"모두들 리암 사도님부터 모시도록! 이교도는 내가 상대하겠다!"
[수호자의 의지! 어둠의 축복! 죽음의 가호!]
선두의 팔라딘이 리암처럼 신성 마법을 쓰더니, 커다란 방패를 앞세운 채 나에게 돌진해 왔다.
여기서 이 녀석을 죽여야 한다.
팔라딘이 두 명밖에 남지 않으면 사제를 처치할 방법이 있었다.
콰지지지지지지직!
채애애앵!
내 창과 팔라딘의 검이 부딪히며 사방으로 뇌전이 뻗어나갔다.
녀석이 뇌전의 통증에 몸을 움찔 떨었다.
'최대한 빨리 끝내야 해.'
리암도 나한테 도망치다가 한쪽 팔이 잘려 나간 상황.
그런데 지금 나와 창을 맞대는 팔라딘은 그런 리암보다도 스텟이 낮았다.
그래서 단기 일전을 노리며 거세게 창을 휘두를 때였다.
[끌어당기는 그림자!]
띠링!
[쇠약의 저주에 걸렸습니다. 민첩 스텟이 -4% 하락합니다.]
[<마력 상쇄>가 저주를 상쇄했습니다.]
[민첩 스텟이 -2% 하락합니다.]
마력이 내 몸을 감싸더니 그림자가 끌어당기는 느낌이 들었다.
사제가 내게 저주 마법을 건 것이다.
다행히 마력 상쇄가 디버프 효과를 절반으로 감소시켜 주었지만, 사제의 저주 마법은 그걸로 끝나지 않았다.
[노화 가속!]
[밤의 짓누름!]
[어둠의 춤!]
[고통 증폭!]
[무無의 ······.]
'도대체 몇 개나 쓰는 거야.'
미친 듯이 꽂히는 저주 마법들.
근력과 체력이 하락하고, 앞이 흐릿해지는 등 다양한 저주들이 나를 뒤흔들었다.
[<마력 상쇄>가 저주를 상쇄했습니다.]
[<마력 상쇄>가 저주를 ······.]
물론 치명적인 저주는 없었다.
원소 마법을 쓰든, 신성 마법을 쓰든, 결국 마력의 범주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것은 같았으니까.
가엔의 정령 마법도 정령력을 소모하지만, 결국 기본 베이스는 마력으로 구동됐던 것처럼.
그렇기에 스텟이 조금 깎이긴 했지만, 팔라딘을 밀어붙이는 데에는 아무런 문제가 없었다.
"저희도 돕겠습니다!"
그러자 리암을 부축해 뒤로 데려간 열 명의 흑기사들이 합세해 팔라딘을 돕기 시작했다.
'리암과 그림자 교환은 안 될 것 같고.'
녀석들의 공격을 막으며 리암의 위치를 힐끗 곁눈질한 나는 그림자 교환에 대한 생각을 버렸다.
한번 당했기 때문인지, 리암은 절대로 사제 곁에 있지 않았다.
'어쩔 수 없군.'
결국 한 명씩 차근차근 죽여나가는 수밖에.
콰지지지직!
나는 흑기사들에게 둘러싸이지 않도록 분주하게 움직였다.
녀석들이 어떻게든 내 발을 묶기 위해 노력했지만, 애초에 민첩 스텟에서부터 차이가 너무 많이 났다.
오히려 공간을 차지하는 바람에 나와 싸우던 팔라딘이 자유롭게 움직이지 못할 정도였다.
상황에 따라 측면으로 움직여야 할 때가 있는데, 그 경로에 흑기사들이 서 있었던 것이다.
서걱!
[<피의 회복> 능력으로 체력이 1% 회복됩니다.]
그럴 때마다 나는 기회를 놓치지 않고 흑기사부터 한 명씩 줄여나갔다.
"형제들이여! 이교도를 처단하는 것보다, 차라리 산개하여 뒤를 막아주십시오!"
보다 못한 팔라딘이 크게 소리쳤다.
'그렇겐 안 될걸.'
팔라딘의 지시에 뿔뿔이 흩어지는 흑기사들.
그 순간 나는 팔라딘에게 정면으로 달려들었다.
콰지지지지지직!
몰이사냥의 가장 기본은 몰이꾼의 역할이다.
"크윽!"
그런데 나보다 약한 녀석이 나를 구석으로 몰 수 있을 리가 없었다.
채애애애앵! 채애애앵!
창을 막을 때마다 크게 뒤로 밀려나던 팔라딘이 결국 방패를 떨어트렸다.
뇌전으로 인해 팔이 저릿저릿해서 손아귀 힘이 풀려버린 것이다.
"루이스 사도!"
방패에 의존해 내 공격을 막아내고 있던 팔라딘.
그런데 방패가 사라진 이상, 녀석이 할 수 있는 것은 없었다.
서걱!
[<피의 회복> 능력으로 체력이 1% 회복됩니다.]
"시, 신이시여······."
루이스라는 이름을 갖고 있던 팔라딘이 작게 읊조리며 바닥으로 쓰러졌다.
심장을 찔렸으니 즉사했을 것이다.
"루이스 사도님!"
흩어지던 흑기사들이 대경실색하며 다시 내게 달려들었지만, 팔라딘이 죽은 이상 그들은 내 상대가 아니었다.
콰지지지지지직!
한 번 창을 휘두를 때마다 한 명의 흑기사가 목숨을 잃었다.
결국 둠베스 산에는 다섯 명의 사람밖에 남지 않았다.
세 명의 팔라딘, 한 명의 사제.
그리고 나.
"······."
푸슉- 푸슉-
정적이 흐르는 가운데, 죽은 흑기사들의 목에서 피가 뿜어져 나오는 소리만이 공간을 잠식했다.
"롤란스 사도, 해럴드 사도. 사제님을 모시고 몸을 피하시오. 내가 저 이교도의 발을 최대한 붙잡아 놓겠소."
리암이 왼팔로 검을 겨누며 나와 사제 사이를 가로막았다.
그러자 롤란스와 해럴드라고 불렸던 팔라딘이 서로 눈을 마주치더니 고개를 끄덕였다.
"잘 부탁드리겠습니다, 사도님."
"거룩한 밤의 세계를 위하여."
그러더니 사제를 데리고 등을 돌려 달아나기 시작했다.
'놓칠 줄 알고?'
나는 곧장 리암을 향해 달려들어 녀석에게 창을 휘둘렀다.
리암이 나를 막아서기 위해 왼팔로 어설프게 검을 휘둘러 왔지만.
탱! 빡!
고작 단 한 번의 공격을 막지 못한 채 창자루에 뒤통수를 얻어맞고 쓰러졌다.
리암을 가볍게 처리한 나는 곧바로 도망치는 녀석들을 따라나섰다.
굳이 빠르게 달려가진 않았다.
사제의 민첩 스텟이 낮은 이상.
절대 내게 도망칠 수 없을 테니까.
"도망치는 건 아무래도 안 되겠습니다, 사제님."
"저 이교도가 아무리 강하다지만 저희 둘을 쓰러트릴 순 없을 터. 이곳에서 녀석을 죽이는 게 훨씬 현명할 것 같습니다."
그걸 느꼈는지, 사제를 호위하던 팔라딘들이 얼마 가지도 않고 몸을 멈춰 세웠다.
롤란스와 해럴드의 말에 후드를 뒤집어쓰고 있던 여자 사제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게 하세요. 저는 사도님들을 믿습니다."
롤란스와 해럴드가 사제 앞을 가로막으며 나를 노려보았다.
녀석들은 무척 긴장한 상태였다.
'결국 도망가는 걸 포기했군.'
두 팔라딘은 리암과 비슷하거나, 조금 약한 수준.
혼자서 녀석들을 쓰러트리기란 쉽지 않을 것이다.
하지만 나는 별로 긴장하지 않았다.
내 목표는 두 팔라딘을 쓰러트리는 것이 아닌, 사제를 죽이는 것.
그리고 두 팔라딘이 사제에게서 떨어지지 못하는 이상, 결과는 정해져 있는 싸움이었다.
'좀 괴롭혀 볼까.'
녀석들과 조금 떨어진 곳에서 멈춘 나는 인벤토리에서 사슬낫을 꺼내 들었다.
그리고는 사제를 겨냥한 채 뇌전을 담아 마구 휘둘렀다.
콰지지지지지지지직!
챙! 채챙! 챙! 챙! 채챙! 채채챙!
사슬낫이 방패를 때릴 때마다 녀석들이 움찔했다.
뇌전의 데미지가 제법 따끔할 것이다.
그런데도 녀석들은 막기만 할 뿐, 반격할 생각을 하지 않았다.
'심리적 압박이 상당하지?'
그림자 교환으로 언제 위치가 뒤바뀔지 모르기에, 둘 모두 사제에게서 떨어질 생각을 하지 않았다.
그렇다고 10미터나 떨어진 곳에서 사슬낫을 휘두르는 나에게 공격을 할 수도 없는 상황.
"크윽!"
한마디로 녀석들은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진퇴양난의 상황이라는 것이다.
"이 개 같은 이교도 놈!"
뇌전 공격을 버티다 안되겠는지, 팔라딘들이 내게 달려들려고 했다.
그럴 때마다 나는 움찔, 하고 몸을 한 번 떨 뿐이었다.
그러면 녀석들은 그림자 교환이 발동되는 줄 알고 다시 호다닥 사제의 곁으로 돌아갔다.
콰지지지지지직!
"으윽!"
그림자 표식이 이래서 사기 스킬이었다.
단순히 내 몸을 이동시켜주거나, 상대와 교환하는 것을 넘어.
채애앵!
"크윽!"
언제 어디서 내가 나타날지 모른다는 두려움을 심어주니까.
콰지지직!
"끄악!"
그 심리적 압박감 하나만으로도.
채챙! 챙!
"끄으으으윽!"
상대는 심한 제약에 걸려버리는 것이다.
결국 한참 동안 내 사슬낫을 막아내던 팔라딘들이, 데미지가 많이 쌓였는지 공격을 걷어내지 못했다.
아무런 제지를 받지 않은 사슬낫은.
서걱!
깔끔하게 사제의 목을 갈랐다.
"사제님!"
두 팔라딘이 화들짝 놀라며 사제의 상처 부위를 살폈지만, 소용없는 일이었다.
목의 절반이나 잘린 이상, 죽음을 피할 수는 없을 테니까.
엘릭서라도 있다면 모르겠지만.
띠링!
[<피의 회복> 능력으로 체력이 1% 회복됩니다.]
'죽었군.'
이것으로 남문의 웨이브도 끝.
남은 건 서쪽과 북쪽뿐이었다.
"이, 이교도 놈이!"
"반드시 죽이고 말겠다!"
사제의 죽음이 분노로 이성을 잃은 두 팔라딘이 내게 달려들었다.
나는 녀석들의 검을 막을 생각도 하지 않은 채 여유롭게 손을 흔들 뿐이었다.
"다시 보자고."
[발리노르인 '아이작 머니쿠츠 드 데이커'에게 <그림자 이동> 능력을 사용합니다.]
"······?"
그림자 이동을 사용하자 시야가 순식간에 뒤바뀌더니 눈을 동그랗게 뜨고 있는 아이작의 얼굴이 보였다.
그 모습을 보자 긴장이 풀리며 한숨이 나왔다.
"다녀왔습니다. 남쪽 성문의 웨이브도 잠재웠으니, 걱정하지 않으셔도 될 겁니다."
"헛, 어제보다 훨씬 빠르게 끝내셨군요! 무사하셔서 다행입니다."
기뻐하는 아이작에게 나는 고개를 끄덕이며 입을 열었다.
"예. 저는 이만 가서 쉬겠습니다. 이틀이나 밤을 새웠더니 피곤하군요."
"예, 고생 많으셨습니다!"
긴장이 풀리니 피로감이 몰려왔다.
현재 시각은 오전 11시쯤.
달이 뜰 때까지 최소 8시간은 남아 있었다.
서쪽의 사제를 죽이는 일은.
조금만 자고 일어나서 해야 할 것 같았다.
'몇 시지?'
헤르세벨그 영주성의 게스트용 침실에서 눈을 뜬 나는 가장 먼저 상태창을 열어 현재 시각부터 확인했다.
19시 08분.
대충 7시간 정도 잔 것 같았다.
기지개를 켜며 몸을 푼 나는 리암의 위치를 체크했다.
'나자란 산?'
상태창에 표시되어 있는 리암의 위치는 동쪽의 나자란 산이었다.
지형지물은 표시되지 않고, 그저 내가 있는 위치와 떨어져 있는 거리만이 표시될 뿐이지만, 상태창 오른쪽 끝에 나침반이 있었기에 녀석이 어느 방향의 어디에 있는지는 알 수 있었다.
나자란 산이라······.
아무래도 내가 다음 표적으로 서쪽 혹은 북쪽에 있는 사제를 죽일 것 같으니까 혼동을 주기 위해서 위치를 옮긴 것 같았다.
'표식이 있는 이상 쓸데없는 짓이지만.'
거기다 어제 동쪽 성문에는 최소한의 병력만이 남겨져 있었기에, 기습적으로 나자란 산에서 웨이브를 일으키려는 것이리라.
영주성을 빠져나와 중앙 광장으로 이동한 나는 아이작을 만나 표식을 등록하곤 서쪽 성문을 빠져나갔다.
그리고는 루델이 표시해준 지도를 보며 뿔 오크의 영역으로 향했다.
"취익. 인간. 이곳은 뿔 오크의 영역이다. 목숨을 부지하고 싶다면 당장 내려가라. 취익."
영역 내부로 들어서자마자 순찰을 돌던 뿔 오크 무리가 날 가로막았다.
블랙 오크보다 머리 하나가 더 크고, 몸집도 더 거대한 뿔 오크.
녀석들의 머리에는 두 개의 뿔이 달려 있다.
그래서 악마 오크라고도 불리는 녀석들이었다.
'평소에는 얌전하지만, 공격을 받는 순간 돌변하지.'
콰지지지지지직!
서걱!
나는 무리에서 앞으로 나와, 내게 돌아가라고 하던 뿔 오크의 목을 단숨에 잘라 버렸다.
"취이이이익! 인가아아안! 감히! 감히!"
"취익! 우리의 호의를 무시하다니! 절대 가만두지 않겠다!"
동족이 죽은 모습에 뿔 오크들이 눈을 뒤집은 채 달려들었다.
뿌우우우우우우우!
그들 너머로 거대한 뿔피리 소리가 울려 퍼졌다.
잠시 후, 어마어마한 숫자의 뿔 오크들이 내가 있는 곳으로 몰려왔다.
"죽인다! 췩! 동족의 원수!"
서걱! 서걱! 서걱!
확실히 뿔 오크는 블랙 오크와는 급이 다른 종족이었다.
무기도 투박한 도끼나 글레이브가 아닌, 잘 벼려진 대검이나 창을 썼고, 화살을 쏘는 녀석들도 있었으며, 모두들 마력을 다룰 줄 알았다.
그래서 상대하기가 무척 까다로웠다.
띠링!
[<피의 강화>로 상승한 스텟이 30분간 유지됩니다.]
그렇게 한참을 싸우자, 기다리던 알림창이 등장했다.
피의 강화 특전이 켜진 것이다.
'후우. 쉽지 않네.'
고작 30마리 죽이는 건데도 같은 숫자의 오우거를 사냥하는 것보다 힘들었다.
오우거와 달리 녀석들은 단체 생활을 하며, 각종 무기와 고도의 전술까지 구사하는 녀석들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걸로 이곳에서의 볼일은 끝.
이제는 동쪽으로 넘어가 사제를 죽이는 일만 남았다.
나는 곧바로 표식 목록을 열어 리암의 이름을 찾았다.
'잘 가라고, 리암.'
사방으로 엄청난 숫자의 뿔 오크들이 몰려오고 있었다.
[발리노르인 '리암 발데스그라이츠 폰 레인하르트'에게 <그림자 교환> 능력을 사용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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