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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P.44 마탑-6
"으...아...!"
요란한 소리와 함께 레오나르도는 책으로 만든 관에서 기상했다.
[일어났냐? 금방도 일어나네.]
<원체 이런 류의 공격에 많이 당해서요. 내성도 생겼고, 아예 파훼법도 만들어뒀죠.>
몽마와 상대할 때도, 흑마법사와 상대한 것도, 심지어 환각제 및 수면제에도 하도 당해서 레오는 내성을 포함한 각종 파훼법을 만들었다.
꿈 속에서 쓴 방법 이외에도 서너 가지 방법은 더 남아있었다. 다만 그 방법은 전부 위험도가 높아 자제했을 뿐이지.
[그래도 충격인데, 적어도 5분은 버틸 줄 알았다고.]
일반적으로 생각했을 땐, 현자 말대로 5분은 족히 넘게 걸리는 시험이긴 했다.
꿈 속에서 자신은 아예 현자의 존재도 잊고, 시험에 대한 기억마저도 제거당했으니까.
아마 회귀한 경험마저 없었더라면 레오나르도조차 꿈에서 헤어나올 수 없을 것이었다.
<어지간히 당했으니까요. 그것보다 다른 사람들은요?>
현자는 주변에 누워있는 다른 사람들을 바라보았다.
[아직 자고 있는데, 한 사람이라도 성공하면 다 일어나니까 걱정하지 마. 그것보다 물건이나 잘 챙겨.]
물건이라는 말에 레오나르도는 주변을 돌아보며 시험의 보상을 찾았다.
<근데 유산은 어디에...>
[이미 손에 잡고 있으면서 뭔소리야?]
그 말에 레오나르도는 자신의 손을 바라보았다. 손에는 은색 쇠사슬로 연결된 목걸이가 쥐어져 있었다. 가운데 있는 보석은 중심에 있는 검은 덩어리 때문에 눈의 홍채처럼 보였다.
[원래 클리어하면 손에 바로 직행해서 줘. 잃어버릴까봐.]
왜 저런 쓸데없이 세심한 배려심은 첫 시험에서 발휘되지 않은 것일까, 그건 아마 몇 세기의 연구를 걸쳐도 밝혀지지 않을 난제일 것이다.
"...으...어...?"
뭔가 좀비와 같은 자세로 관에서 아메리가 일어났다. 아직 치료의 효과가 덜 된 것인지, 골병의 고통이 몸에서 여실히 드러나고 있었다.
[새삼스럽지만 언데드 아니지?]
<대학원생인 이상 이미 인간이 아니긴 하죠.>
그리고 졸업하면 초월체가 되기는 한다. 어디까지나 졸업한다면 말이다.
"어...?! 성공했어요?!"
연해진 다크서클을 비비며 그녀는 레오가 든 목걸이를 바라보았다.
"예, 운이 좋았어요."
"그건... '진실과 사실의 목장식'이네요!!"
그건 이미 알고 있었다. 알고서 노린 거니까.
-진실과 사실의 목장식-
그 목장식을 차면 상대하는 거짓을 파훼할 수 있다. 하급 환각이나 환영, 그리고 변장을 간파하는데도 유용한 도구, 그랬기에 레오나르도도 이 마도구를 우선 순위에 둔 것이었다.
"어디 한번 써볼까요?"
"괜찮을까요...? 그것도 이 반지처럼..."
아메리는 자신의 연애를 방해하고 있는 반지를 들어보이며 말했다.
"괜찮을 겁니다. 그것과는 결이 다른 것 같거든요."
[...애초에 그것도 저주 마도구는 아니거든.]
현자가 만든 평복과 평유의 반지는 저주 물품처럼 영원히 차고 다니는 도구가 아니었다.
다만 치유 기능 중 한 가지가 극단적으로 발현된 것일 뿐이었다.
[마약 중독 수준이 아니면, 저 반지는 빠진다고. 혹시나 해서 나을 때까진 고정되는 기능을 추가한 것일 뿐이지.]
<대학원생이 걸리는 수면 부족, 관절 부위마다 디스크, 안구건조증, 카페인 중독하고 비교하면 비등비등할걸요. 저 사람이 극단적인 것도 있겠지만요.>
그것들까지 다 나을려면 적어도 1년을 소요될 것이다. 그것도 저걸 착용한 채, 건강한 생활을 하는 게 전제지만 말이다.
"...어떤가요? 뭔가 효과가 있나요?"
"잠시만요."
레오나르도는 목에 목장식을 잘 찬 뒤, 먼저 사용자인 현자를 바라보았다.
<어디...>
[아, 그거 참고로 나한테는 안 된다.]
<아...>
제일 중요한 이유가 사라졌다. 아쉬움에 땅을 치고 싶었지만, 하는 수 없이 시험 대상은 다른 이에게 시도하기로 했다.
"아메리 씨."
"네?"
"지금 어때요? 괜찮으세요?"
[그런 질문은 애매해서 잘 안 돼. 거짓이면 목걸이에서 붉은빛이 나오는데, 괜찮다는 건 기준이 애매해서...]
현자의 지적대로 레오도 자신의 질문이 잘못됐었다고는 생각했다, 그래도 혹시나 모르는 일이었으니 한번 정도는 묻고 싶을 뿐이었다.
"네, 괜찮아요."
지잉
갑자기 목걸이에서 적색 광선이 다각도로 산란해왔다. 불꽃의 빛이나 하늘의 태양과 비교해도 전혀 밀리지 않을 섬광이었다.
[...어...원래는 잘 안 되는데... 게다가 이정도 빛은 어지간한 거짓말이 아니면...]
<반지 주길 잘했죠?>
현자는 저 안쓰러운 마탑의 노예를 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저기... 원래 이런 건가요?"
"아무래도요. 반응은 확실하네요."
"...그렇다면 다행인데..."
아메리는 의문스러운 걱정으로 아리아스필을 바라보았다.
"아리아스필 양이 계속 안 일어나요. 아까도 그렇게 강한 빛이 있었는데..."
그 말대로 아리아스필은 여전히 미동도 안한 채로, 잠에 빠져있었다.
<뭐예요? 왜 안 일어나요?>
[이상하네. 원래는 늦어도 지금 정도면 일어나. 어지간히 꿈에 집착하지 않는 이상... 야... 설마...]
어째 뒷말이 불길했다.
<...설마 그건 아니겠죠?>
[음... 미안한데...그게 맞는 것 같다.]
아메리는 아리아스필을 붙잡아 흔들어보지만 소녀는 괴이쩍은 미소를 지을 뿐 깨지는 않았다.
"...어떡하죠? 더 세게 깨울...?"
[그건 안돼. 억지로 깨우면 정신에도 악영향도 가고, 확실히 일어나지도 확신할 수 없어.]
그 말을 듣자 레오는 급히 고개를 저으며 아메리를 아리아에게서 떨어뜨려놓았다.
<왜 이렇게 위험한 걸 만들었어요?>
[나한테 뭐라 그러지 마. 나도 안전장치는 만들어뒀다고.]
현자의 말은 놀랍게도 거짓말이 아니었다.
만약에 실패하거나, 다른 이가 먼저 성공하면 꿈 속에는 거대한 대문이 튀어나온다.
대놓고 '시험 끝났으니 나와.'라고 적혀있으니, 이게 꿈인 걸 바로 눈치챌 수 있고 탈출 수단도 간단했으니 바로 나갈 수 있었다.
아메리도 그런 식으로 탈출한 것이었다.
<근데 아리아는 왜 안 나오는데요?>
[그러니까 내가 말했잖아. 꿈에 집착하는 거라니까!]
<아리아가 무슨 바보에요? 꿈하고 현실도 비교 못 하게.>
안타깝게도 현실은 그 말 그대로인 시궁창이었다.
<...그럼 어떻게 해야돼요? 기다리는 걸로는 안 돼요?>
[운이 좋으면 그걸로 해결되겠지만... 기대하긴 어려워. 오히려 꿈에 더 몰입할 가능성도 있고.]
레오나르도도 동의했다. 악몽이나 환각 계열에 자주 당해본 레오였기에 이해할 수 있는 조언이었다.
<...그럼 깨울 방법은 없습니까?>
[있긴 한데... 생각보다 까다로워. 하면 너도 멀쩡하진 않을텐데... 괜찮겠냐?]
<상관없어요. 저대로 두는 게 더 위험하니까요.>
그러자 현자는 못 이기는 척 고개를 끄덕이며 방법을 읊었다.
[...그거인데... 괜찮겠냐? 아까도 봤겠지만, 이 꿈에선 난 널 못 도와줘. 그렇게 설정해둬서...]
<그래도 해봐야죠. 이런 마법엔 내성이 있어요.>
레오나르도는 각오를 다지며 아메리를 불렀다.
"아메리 씨, 부탁할 게 있습니다."
***
"...정...정말 이렇게 하면 될까요?"
레오의 머리와 아리아의 머리에 손을 올리며 걱정스레 물었다.
"네, 텔레파시 마법이라면 정신... 무의식인 꿈에도 연결할 수 있을 거예요."
4서클 마법인 텔레파시, 이 마법은 정보 전달 및 통신 마법으로 주로 사용된다.
하지만 현자의 조언대로 술식을 조금만 손보면 무의식인 꿈과도 접근할 수 있을 것이다.
"확실히 이렇게 개변하면 가능은 하겠지만... 레오나르도 군이 위험할 수도 있어요. 게다가 전 텔레파시도 잘 못하는 편여서..."
"괜찮아요. 그건 제가 어떻게든 할 테니까요."
"하...하지만..."
아메리는 망설일 수밖에 없었다. 원체 죄책감이 많고, 순한 성격인지라 이런 부담스러운 직책에는 선뜻 도전하기가 어려웠다.
"이런 부탁을 해서 죄송합니다."
레오나르도는 아메리에게 허리를 숙이며 말했다.
"하지만 부탁하겠습니다. 이런 식으로 아리아를 다시 잃을 수는 없습니다."
그건 단지 전속 기사로서의 책임감이었을까, 아니면 그녀를 쫒았던 2인자의 오기였을까, 그것도 아니면 단지 소녀가 죽는 것조차 보지 못한 소년의 죄악이 이를 이끈 것일까.
하지만 확실한 것은 있었다.
"알겠어요. 저도 노력해볼게요."
아메리도 의지를 되새기며 마법진을 양손에 펼쳤다. 텔레파시의 더블 캐스팅을 천천히 조율하며 그녀는 말했다.
"시작할게요. 꼭 성공해주세요."
마법식의 조율이 끝나자, 레오나르도의 눈이 감겼다.
...
...
.......
짹짹거리는 산새 소리가 울렸다.
자연히 레오의 감긴 눈도 점차 떨리며 떠졌다.
"...여긴...?"
성공한 것 같았다. 자신없다는 발언과는 달리 텔레파시의 조율이 제법 깔끔했는지 접속 전의 기억까지도 멀쩡히 남아있었다.
"...자, 이제... 아리아를..."
카앙!!
찾으려던 순간, 충격음이 울려퍼졌다. 소리로 봐선 검이 부딪치는 음파, 그것도 자신과 아리아가 검투를 할 때 나는 소리와 똑같았다.
"...설마..."
레오는 급히 검격이 울리는 결투의 현장으로 뛰어갔다.
카앙!!
"으앗!"
검격을 맞붙는 장소엔 두 흑백의 기사가 서있었다. 우위를 점하는 건, 레오나르도의 예상을 벗어나 있었다.
"왜 그래? 허릿심이 없다고!!"
연격에 난격을 가하는 건, 레오 자신.
그걸 힘겹게 막아내는 건 아리아 그녀였다.
"...이제... 그만... 난 더는..."
현재 자신이 아리아에게 이길 힘을 가지고 있기는 했지만, 저 정도로 압도할 수는 없었다.
단순히 하는 말이 아닌, 현실에 근거한 진심이었다.
'...왜... 왜 이렇게... 밀리는...거지...?'
이해할 수 없었다. 항상 고고하고 도도했던 그녀였다.
자신에겐 아리아는 그런 존재였고, 그런 존재였기에 지금까지 올 수 있었다.
카앙!!
"흐앗...!"
그 순간 아리아의 검이 공중으로 튕겨져 올라갔다.
저 장면을 보자 레오나르도도 떠오르는 것이 하나 있었다.
'...나랑 비슷해...'
자신이 몽마에게 당했을 때와 비슷했다.
그 몽마는 달콤한 음몽 대신 절망적인 악몽을 보여주었다.
그 편이 몰입이 강한 것을, 그 영악한 악마는 눈치채고 있었다.
사람은 희망보다 절망에 더 깊게 빠져든다는 것을.
'...내가 이겼기 때문이야...'
레오나르도가 꾸었던 꿈은 계속해서 아리아에게 패배하는 악몽, 부자연스러움의 연속이었지만 절망이 깊게 베인 고통은 그곳이 꿈인 것조차 잊게 만들었다.
아마 스스로 자결하지 않았더라면 탈출은 영원히 불가능했을 정도로.
그만큼 열등감은 자극하기도, 증폭하기도 쉬운 감정이었다.
'내가 그때 결투에서 이겼기에...'
아리아스필은 스스로를 천재라고 굳게 믿고 있었을 것이다. 그게 사실이기도 했고, 실질적으로도 전생에는 그렇게 살아왔으니까.
'하지만... 지금은 아니야. 지금은...'
자신이 그 믿음과 자존심을 깨부쉈다.
고작 승리하고 싶다는 이유로.
아리아의 인성과는 별개로 그건 열등감을 탄생시키는 촉매가 되었을 것이다.
그건 한번도 패배해본 적이 없는 천재에겐 느껴본 적 없는 굴욕적인 자극이었기에.
'...내가... 원인이었어...'
이런 마음을 눈치채진 못한 스스로에게 구역질이 나왔다.
누구보다 이런 심리를 잘 알아왔다고 생각했는데... 가장 곁에 있는 자신이 눈치채지 못했다니...
"...아직 안 늦었어. 지금이라도...!"
레오가 뛰어들려는 순간, 또다른 레오나르도는 그녀의 목에 칼을 겨눴다.
"내가 이긴 거지?"
"응... 내가 졌어..."
굴욕적인 패배감, 그녀의 표정에는 그 심리가 깊게 녹아있었다.
"그럼..."
갑자기 가짜 레오는 검을 집어던졌다.
'...뭐지...? 갑자기 왜..?'
그러고는 가짜 레오는 그녀의 양손을 붙잡았다.
"잠깐... 뭐하는... 레오...! 흐앗...!"
짐승처럼 그녀를 눕혀 양손을 붙잡아 눌러 아리아의 몸을 결박했다. 그러곤 그녀의 허리와 하반신 사이에 몸을 올려 벗어나기 점점 어렵게 만들었다.
"레...! 레오...! 이...! 이게...! 무슨...!"
"왜? 하기 싫어?"
뭐가 하기 싫다는 건지, 상상하고 싶지 않았다. 그것만큼은 아니여야 했다.
"...시...싫은 건... 아닌데... 이건 뭐랄까아... 그게... 사귀는...게... 먼저...하윽...!"
가짜는 아리아의 목덜미를 살며시 깨물며 소녀의 감각을 뜨겁게 깨우기 시작했다. 말할 때마다 느껴지는 뜨거운 혀의 감각은 순결한 소녀에겐 지나치게 자극적인 촉감이었다.
"선택은 승자에게만 있는 거야. 자기야."
"...자...자기...?! 하...익...!"
아리아는 그대로 그 거짓된 짐승 아래에 점차 빠져들며 숨겨두었던 본능을 한 꺼풀씩 벗기 시작했다.
'시발...미친...'
그게 이 반전을 본 진짜의 감상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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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P.45 마탑-7
의식이 몽롱해지며 머릿속이 하얗게 된다.
유일하게 또렷한 것은 몸의 감각.
아직 키스도, 책에 나온 것 하나 하지 않았는데, 온몸이 또렷하게 달아오른다.
눈앞에 저 남자를 만족시킬 만한 체온을 몸 스스로가 찾아내는 것 같았다.
이게 내 본성이구나.
나라는 건 이렇게 본능에 충실한 여자였어.
본성, 기질, 생리, 충동, 본능
몸이, 모든 것이 그를 원하고 있었다.
이대로 모든 게 깊어지면... 정말...
"그럼... 이제 할..."
"하긴 뭘 해. 시발놈이."
침을 흘리던 레오가 발차기와 함께 날아갔다.
"...어?"
몽롱했던 정신이 다시 또렷해진다. 아쉽긴 했지만, 그런 아쉬움이 잊혀질 만큼 눈앞의 장면은 충격적이었다.
"레오...?"
"아가씨, 저런 놈 무시하고 얼른 나가죠."
본인이 자기를 무시하고 나가라는 모순에 아리아스필은 어리둥절할 수밖에 없었다. 그 사이에 날아간 가짜 레오는 풀숲에서 먼지를 털며 자리에서 걸어나왔다.
"...뭐냐? 너...? 생긴 것만큼 눈치가 없네...!"
"너야말로 뭐냐? 나랑 너무 안 닮아서 못 알아볼 뻔했다."
같은 사람이 서로의 외모를 비하하는 기묘한 광경, 아리아스필은 황당한 당황스러움을 연속적으로 느껴야만 했다.
"누가... 아니... 왜 레오나르도가 두 명이야?!"
"두 명일 리가 없잖아요. 누가 봐도 저 새끼가...!"
"저쪽이 가짜야!!"
선수를 친 건 가짜 레오 쪽이었다.
"뭐 이 새끼야!?"
"잘 생각해봐. 아리아. 진짜라면 너랑 이어지는 걸 기꺼이 받아들이겠지. 너 같은 여자를 가만히 내버려두는 게 더 이상한 거 아냐?"
궤변이라고 하기도 뭐한 개새끼 소리였다. 바보더라도 지랄하지 말라며 역정을 낼 말일 것이다.
봐라. 지금 아리아도...
"...그...그런가아...?"
아리아는 넘어가기 직전이었다. 잔뜩 붉힌 얼굴, 갈곳을 잃은 눈동자, 꼬물거리는 손가락, 둔감한 레오더라도 이해할 수 있었다.
"정신차려요!! 함정이라고요!!"
"너야말로 함정이겠지. 어떤 녀석인진 모르겠지만, 날 상대로 폴리모프하다니... 간땡이가 어지간히 부었나봐?"
폴리모프고 자시고 여기가 꿈인 걸 최대한 숨기는 저 녀석이 누가봐도 가짜였다.
'...그냥 죽여버릴까...'
레오는 검은 돌을 잡았다. 하지만 이내 손에 힘을 풀었다.
'...아니. 그건 내가 불리해.'
이곳은 아리아스필의 꿈, 그렇기에 주인인 아리아의 생각이 절대적인 규칙이 된다.
저 레오나르도가 극단적으로 강해진 것도 아리아가 그렇게 생각했기 때문이엇다.
"허, 어이가 없네. 네가 진짜 아리아를 좋아한다고 생각해?"
그러니 이곳의 법도에 맞는 방식으로 상대하는 수밖에 없었다.
"...그게 무슨..."
"네가 진짜 나고, 진짜 아리아를 좋아했다면 이런 길바닥에서 그런 짓을 했겠어?"
얼굴의 근육을 최대한 경직시키지만, 화끈거리는 감정과 혈기마저 누르는 건 불가능했다. 하지만 이런 수치를 겪지 않는 이상, 아리아를 구하는 건 불가능할 것이다.
"아리아스필은 귀족, 그것도 용사 가문의 영애야. 그런 아가씨한테 흙바닥, 그것도 풀숲에서 서로 몸을 섞는다고? 말이 된다고 생각해?"
참는다. 참아야 한다. 감정을 억누르고, 어떻게든 버텨야 한다. 여기서 무너지면 모든 게 끝난다.
"으으...! 그건... 분명 그렇지만...!"
여기 아리아가 동조하는 건, 분명 다행이었지만... 다른 의미로 참기가 고통스러웠다.
"글쎄, 과연 그럴까?"
하지만 어째서인지 저 가짜는 무척이나 여유로웠다. 마치 그 이상의 발언이 있는 것처럼.
"오히려 난 아리아가 그걸 바라고 있다고 생각하는데?"
"뭔 말같지도 않은...!"
"그럼 왜 풀숲에 눕혔을 때, 반항을 안 했을까?"
아리아는 전신이 달아올랐는지, 허벅지와 허벅지를 배배꼬며 수치심을 참아내었다.
"야, 니가 짓눌러놓고 그게 무슨...!"
"그래? 오러로 치면 아리아는 내 이상이잖아. 팔이 부러진 것도 아니고, 그렇다고 코어가 부서진 것 아닐텐데... 왜 날 안 밀쳐냈을까?"
생각해보면 이상하긴 하지만... 그건 본인한테 물어보면 바로...!
"...그건... 그건 말이지이...! 난... 그런... 걸 원해서는... 아니고오... 레오가 누르니까아... 나도 모르게에... 그만..."
온몸은 땀투성이, 이젠 허벅지 뿐만 아니라 유연하게 전신으로 꼬여가며 대답을 느리게나마 뱉어내고 있었다.
"나한테 짐승처럼 당하고 싶었던 거 아니야? 사실 침대든 풀숲이든 함께하는 게 좋으니까. 나라면 아리아도 같이 짐승으로 만들어줄 수 있는데."
"그게...! 그니까...!"
"하기 싫은가봐? 그럼 나야 강요하기는 싫으니..."
"아니이...!! 그런 게에...!! 아니고오...!! 조금은... 상냥하게...!!"
...이젠 모르고 싶어도 모를 수가 없었다.
어째 불쾌하게도 저 가짜가 진짜보다 아리아의 심리를 더 잘 아는 눈치였다. 애초에 가짜는 아리아의 지식과 상상을 토대로 만든 것이니 이런 전략으로 이기는 건 불가능했을지도 모른다.
"그럼 아리아, 내가 물어볼게."
기세가 등등해진 것인지 가짜는 아예 쐐기를 박으려고 했다.
"저런 놈이 너한테 뭘 해줄 수 있을까?"
그 말에 아리아는 극심한 갈등에 빠졌다. 솔직히 둘 다 좋은데... 서로 싸우지만 않으면 같이 즐기고 싶은 심정이었다.
"참고로 난 널 살살 녹게 할 수 있는데... 어때?"
하지만 이젠 저 짐승 같은 레오에게 넘어갈 것 같았다. 저런 남자를 참는 것은 벅찼다.
"...하... 진짜..."
다른 레오는 머리를 감싸쥐며 중얼거렸다.
"...어차피 기억 못할테니까... 그래."
그러더니 양손을 내려놓으며 레오는 결심한 듯 입을 열었다.
"...살살 녹게 한다고? 아리아를?"
"그래! 너 같은 놈은 생각하지도 못한 방식으로...!"
"나도 니 면상을 살살 녹이고 싶거든. 물리적으로. 근데 그전에 하나만 묻자."
레오나르도는 질문 하기 전 한숨을 내쉬었다. 그 한숨에는 온갖 번뇌와 고민, 고뇌와 고통이 녹아 담겨 있었다.
"첫 경험은 어떻게 했냐? 그거 해보고는 말하는 거겠지?"
"첫...경험...?"
1, 2, 3, 4, 5... 점차 시간이 지나며 10초가 넘어가고, 15초가 넘어가도 저 레오는 말을 더듬기만 할 뿐 명확한 대답은 하지 못했다.
그럴 수밖에 없을 것이다.
아리아가 모르는 것보다 근본적인 문제가 있으니까.
"아... 그러니까 내 첫 경험은...!"
대략 30초가 걸리고 저 가짜는 거짓말을 만들어낸 건지 대답하려고 했다. 하지만 이미 진짜는 선수를 채 간 지 오래였다.
"없어."
"...어...뭐?"
"난 한 적이 아예 없다고. 첫 경험도 없고, 여자랑 사귀어본 적도 없어."
굴욕감이 온몸에 치밀지만, 레오는 말하는 수밖에 없었다. 그나마 아리아나 저 가짜가 자신이 나잇살을 먹을대로 먹은 회귀자라는 걸 모르는 것을 위안 삼아야 했다.
"...그게... 무슨...? 너 동정이야?!"
"네가 나라면 바로 알겠지. 그게 네가 이 꿈 속 가짜라는 증거고."
"그런..."
가짜 레오나르도의 몸은 점차 녹아내렸다.
"잠깐 이거 왜 이래...?!"
"잘 가라. 덕분에 살살 녹겠네."
아리아의 마음은 이미 경험이 없는 레오에게로 기울었고, 이 모든 게 꿈이라는 것을 눈치챘기에.
끝으로 가짜는 녹아내리는 연기처럼 사라졌다.
"...레오...나르도...! 그게 말이야... 내가..."
아라아는 레오가 경험이 없다는 것에 안심할 수 있었지만, 웃을 수는 없었다.
"..."
레오나르도는 유례없이 굳어있는 표정을 지었으니까.
"내가 이런 꿈을 꾸고 싶어서가 아니라아...! 그보다...! 비밀은 꼭 지킬 테니까... 기분 풀어주면...!"
"...아가씨."
딱딱한 정색으로 레오는 말했다. 한기가 서린 찬 목소리였다.
"...우선 탈출구에 가고서 말하죠. 여기에 오래 있으면 위험하니까요."
"아... 그래..."
아리아는 레오나르도에게 처음으로 배운 것들이 많이 있었다. 기술, 경험, 지식, 그리고 감정까지도.
그리고 지금 아리아스필이 처음 느낀 건.
'...무서워...'
공포였다.
정적으로 자아내는 공포는, 비명이나 단말마가 짜내는 공포와는 비교가 되지 않았다.
아무것도 없기에, 아무것도 보이지 않기에 공포는 끝없이 부풀어오를 수 있었다.
저벅거리는 소리가 울리며 레오나르도는 숲의 가장자리로 향했다.
잔디는 점점 바닥에서 사리지고, 나무는 점차 줄어들어갔다. 단순히 배경이 바뀐 것이 아닌, 세상의 채색과 밑그림이 벗겨져 나가는 것처럼 주변은 흰 여백만이 남았다.
"...여긴..."
"저기가 탈출구입니다."
문앞에 있는 것은 어울리지 않는 거대한 대문, 대문에는 투박하게 '시험 끝났으니 나와'라고 크게 적혀있었다.
"...그...그럼 나갈까...?"
밖에 나가는 것도 불안했지만, 이곳에 있는 건 더욱 위험하게 느껴졌다.
"아리아스필."
하지만 레오는 그 전에 입을 열었다.
"...솔직히... 멍청하게 느껴지겠지만, 사실 전 눈치채지 못했습니다."
레오나르도는 무표정했다. 표정 뿐만 아니라, 어투나 기류 모든에 마음이 존재하지 않는 것 같았다. 촌장인 아누스가 말했던 것이 어떤 걸 의미하는지, 아리아는 지금에서야 알 수 있었다.
"아니... 생각해보면 눈치챌 기회는 얼마든지 있었는지도 몰라요. 단지 제가 보고 인정하기 두려워서 외면했겠죠."
이어지는 자조적인 발언, 무심함에 슬픔이 깃든다.
"..."
"...이제야 다 이해되네요. 여태까지 왜 그랬는지, 왜 그렇게 반응했는지, 왜 그렇게 곁에 있었는지도요."
레오나르도는 이제 무심하지 않았다. 단지 깊고 찬 슬픔에 잠긴 것처럼 느껴졌다.
"아가씨, 아무리 정신에 내성이 있다한들 전 이곳의 일을 절대 기억할 수 없을 겁니다. 심하면 아리아 아가씨도 마찬가지겠죠. 그걸 전제로 이곳에 진입한 거거든요."
이 개조된 텔레파시 마법의 부작용은, 기억 손실 및 정신 이상. 극도로 위험하진 않겠지만, 적어도 레오조차 이곳의 일을 기억 못 하도록 하기엔 충분했다.
"그러니까 어떤 대답을 하셔도 전 괜찮아요."
레오는 웃으며 물었다. 그 미소엔 기쁨은 없었고, 그 자리를 메운 것은 슬픔 뿐이었다.
"...혹시 절 좋아하시나요?"
"그...그건..."
아리아는 대답하지 못했다. 단지 부끄러워서가 아니었다. 그저 저 레오나르도가 원하는 대답이 무엇인지 몰랐기에,
그 반응이 두려웠기에 입을 열지 못했다.
"...역시... 이번에도 같군요."
레오나르도는 문을 잡았다.
"미안해요.너무 부담스러운 질문이었..."
"좋아하는 게 아니야."
그 말에 레오는 그녀를 다시 돌아보았다. 무슨 대답을 기대한 건지, 무슨 반응을 보여야할지 결국 아무도 몰랐다.
"레오나르도, 널 사랑해."
그렇기에 소녀는 용기를 낸다.
"...그러면 상처받을 거예요."
소년의 경고였다.
"그런 건 이미 알고 있어. 그건 사랑하는 내가 감내할 문제야."
소녀의 사랑이었다.
"전 그런 사랑을 받을 정도로... 가치있는 사람이..."
청년의 자조였다.
"상관없어. 가치 같은 걸 보고 사랑한 게 아니야."
이건 그녀의 사랑이다.
"저에 대해, 제 과거와 죄에 대해 아시면 마음은 바뀌시겠죠. 전 생각보다 추악한 인간입니다."
중년의 후회였다.
"너의 과거, 죄... 네 말대로 난 그거에 대해 몰라. 하지만 내가 너를 사랑하는 건, 네가 추악하지 않아서가 아니야."
그녀가 사랑하는 것이었다.
"내가 너의 목표이듯, 너도 내 목표가 되어버렸어. 처음 만났을 때부터 반해있었고, 어떤 이유를 붙여도 너에 대한 마음은 다 사랑으로 통할 거야."
이게 그녀의 방법.
"...처음이라, 만약 이게 처음이..."
노년의 회한이었다.
"처음이 아니더라도 좋아. 난 널 사랑해. 무슨 일이 있어도 널 사랑할 거야. 너도 나만큼 날 사랑하고 집착했으면 좋겠어."
그녀가 사랑하는 방식이었다.
"네가 다른 사람을 사랑하든, 아무도 사랑하지 않든 상관하지 않아. 그 이상으로 내가 너에게 사랑스럽고, 사랑하는 사람이 될테니까."
"...이렇게까지 말하는 이유가 뭔가요? 저한테는..."
그의 말은 더 이어지지 않았다.
그녀의 사랑은 그의 모든 것을 틀어막기에 충분했으니까.
"말로 부족하면 지금부턴 행동으로 메꿀 거야."
입술을 떼며 아리아는 말했다.
"..."
입술을 뺏긴 소년은 얼굴을 붉혔다.
"이건 내 마음을 멋대로 생각한 벌이야. 레오."
그녀의 사랑은 경고나 자조보다 견고했고, 후회나 회한을 녹일 만큼 따뜻했다.
"이제 나가자. 다음에는 더한 걸 가져갈 테니까."
"아가씨. 고마워요."
레오나르도는 소녀의 손을 잡았다.
"꼭 기다릴게요."
그리고 소녀의 몸을 당겨 다시 입을 맞추었다.
"...어...어어?!"
"이건 조금만 더 일찍 말하지 않은 벌이에요."
그러곤 레오나르도는 문을 열었다.
정말 꿈 같은 시간이었다.
<+--|-|--+>
EP.46 마탑-8
"...으아..."
레오나르도는 잠에서 깨며, 마치 아침에 기상하는 것처럼 기지개를 켰다.
[이번엔 뭔 일이 있었냐? 엄청 끙끙대던데?]
눈앞에 있는 건 현자, 아무래도 현실에는 잘 돌아온 것 같았다.
<...그게... 분명...>
분명 꿈에 들어간 건, 확실히 기억이 난다. 하지만 그 뒤 일들은 잘 생각이 나지 않는다.
안개가 낀 것처럼 뿌옇고, 흐릿했다.
떠올리려고 할수록 기억의 안개가 더욱더 자욱이 퍼지고, 생각을 끄집어낼수록 머리에 통증이 올라온다.
[기억 안 나면 생각 안 하는 게 나을 거다. 자기 꿈도 2분만에 잊는 게 태반인데, 남의 꿈은 오죽하겠냐?]
그 말대로긴 했다. 오히려 아리아에게는 사생활적인 것도 많이 섞여있을 테니 기억하지 않는 편이 나을 테지.
"...그보다 아리아는 어떻게 됐죠?"
중요한 건 그것보다 아리아의 안전이었다. 본목적인 아리아가 무사하지 못한다면 이 작전 자체가 무의미해진다.
"아리아스필 양은 이미 깨어났어요. 저쪽에..."
아리아스필은 이미 자리에서 일어나, 관으로 썼던 책을 정리하고 있었다.
"아, 일어났어? 레오."
악몽에 시달린 사람처럼 보이지 않을 정도로, 아리아스필은 맑은 미소로 레오에게 눈웃음을 지어보었다.
[...쟨 아까부터 왜 저렇게 싱글벙글이야? 짐작 가는 게 아예 없냐?]
<글쎄요... 꿈에서 안전하게 깨서 그런가...>
어설픈 추측이었지만, 불확실한 기억으로는 그 정도 생각밖에 나지 않았다.
"...레오."
아리아는 귓가 뒤로 머리를 넘기며 레오의 입술을 손으로 닦아주었다.
"입에 뭐가 묻었어."
그렇게 말하곤 요염한 웃음을 지은 채 그녀는 다시 책을 정리했다.
...
.....
......
[너 섰...]
<닥치세요.>
자다가 깨다보면 어쩔 수 없는 생리 현상일 뿐이다. 그런 것이며 그런 것이어야 했다.
***
우선 현자의 유산을 찾는 건, 여기서 중단하기로 했다.
필요한 유산들은 전부 모였고, 이번처럼 위험할 수 있다는 의견이 있었기에 유산을 찾는 건 다음으로 미루기로 했다.
그 사이 레오는 자신이 해야할 일을, 아리아도 자신의 할 일을 하기로 했다.
[근데 어디에 신고할 거냐? 역시 마탑주?]
모은 증거들을 보며 현자는 찡그린 얼굴 물었다. 지금까지의 범죄 행각이 어지간히 엄중한지라 차마 현자마저 농담이나 쌍욕도 하지 않았다.
<아뇨. 마탑주들에게 신고해서야 증거로 증명한다 해도, 백이나 돈 있는 녀석들은 솜방망이로 처벌 받겠죠.>
그것도 레오나르도가 직접 신고해선 오히려 본인 입이나 막지 않으면 다행이었다.
[하긴... 윗 대가리라고 만능은 아니니까. 오히려 제약이 더 많지. 그럼 어떻게 하게? 대자보라도 붙일 거냐?]
<아뇨. 제가 안 할 겁니다.>
그 의문스러운 말에 현자는 이해를 할 수 없었는지, 되물었다.
[그럼 뭐? 누가 대리로 해주겠대?]
<오, 역시 현자님이시네요.>
[이게 왜 진짜냐? 그래서 어떻게 할 건데.]
<이미 판을 다 깔아뒀고, 나머지 그 새끼들이 서로 알아서 자폭할 겁니다.]
레오나르도는 그렇게 미소를 지으며 자신이 든 증거물과 같은 것들을 들었다.
[그게 왜 두 개냐?]
<복사본입니다.>
정확히는 인쇄용 마도구로 복사한 사본, 증거 효력은 없는 복제품이었다.
<이 사본들을 몇몇 마법사들한테 뿌렸죠.>
[몇몇? 그럴 바엔 신문사에 보내는 게 낫지 않아?]
<언론이 우리 편이었던 적이 있습니까?>
마음 같아선 신문사 기자들을 농담(물리)로 다 암살해버리고 싶은 심정이었다.
<보고만 계세요. 발표만 끝나면 알아서 서로 죽고 죽일 테니까요.>
[그래. 뭐... 나도 궁금하긴 하네. 애들 반응이 어떨지는 궁금하긴 해.]
현자의 말에 레오나르도는 고개를 끄덕이며 현자 연구부실로 걸어갔다.
"아메리 씨!"
"아, 레오나르도 군!"
아메리 에스프는 그날따라 정갈하고 생기있는 차림으로 부실에 앉아있었다.
눈그늘도 사라져있고, 피부도 무척 매끈하고 촉촉하게 변했으며, 머릿결도 깔끔히 묶여있으며 빗으로 쓸어내려져 있었다.
[유산을 찼다고 사람이 이렇게 변해?]
<화장한 거겠죠.>
[그것도 마찬가지인데?]
익숙지는 않은 깔끔한 모습이었지만, 이런 허름한 동아리실에 있을 사람은 아메리 밖에 없었다.
"정말 여기서 모여도 될까요? 마탑주님들이..."
"유산을 찾은 것도 저희, 이런 허름한 공간을 현자로 연구하는 부실로 내준 건 마탑 측입니다. 저흰 꿀릴 것도, 잘못한 것도 없어요."
대학원생인 그녀에겐 하나하나가 학점이 깎이는 상황처럼 느껴질 것이다. 하지만 그렇게 저자세로 나와서야 졸업은커녕 사회생활도 힘들 것이다.
"...그렇긴 하지만..."
그 순간, 허름한 문이 또다시 열리며 마법계의 거물들이 차례로 걸어왔다.
"꽤나 허름하군."
흑탑주 베르난 베르데인부터.
"꼭 이런 곳에서 모여야겠어?"
백탑의 대마법사 아스피 일리난,
"정말 현자의 유산을 얻은 거지?"
청탑 최상층의 관리인 블루아 블랑,
"들어보면 알 테지!"
적탑주이자 전투 마법사인 제인 나르샤까지.
4명의 현 마법계의 기둥들이 현자부의 동아리실에 왔다. 순식간에 공기가 무거워지며 마나의 밀도가 짙어졌다.
"...그...그럼... 차라도..."
"아니, 괜찮다. 일이 일인 만큼 본론으로 바로 넘어가도록 하지."
조금의 여유도 주지 않는 발언에 아메리는 바로 기세에 위축되었다.
"본론이라... 이거 말씀이신가요?"
레오나르도는 태연히 '진실과 사실의 목장식'을 목에서 잡아들었다.
자연히 그 현자의 목걸이에 대마법사들의 시선이 모였다.
"진짜야...?"
"...진짜로군."
"아무리 그래도..."
"확인해보면 그만이지!"
먼저 나선 건 적탑주였다.
"난 남자다!"
바보같이 들리는 말이겠지만, 진실과 거짓을 판별하기 쉬운 것은 우문이 제일 적절했다.
지잉
목장식의 눈에서는 붉은 섬광이 빛났다.
"오호~ 그럼 그건 거짓말이다. 난 여자다!"
그 해명에 붉은 광선은 사라졌다.
"오오, 아무래도 진품인 것 같군. 현대의 마법으론 재현할 수 없는 기술이야!"
적탑주의 시험에 다른 마탑주들도 현자의 유산에 대한 경계를 풀었다. 무엇보다 지금 들고 있는 목장식이 판별해주는 거짓말 탐지 기능이 크게 한몫해주었을 것이다.
"...그래서, 얻게 된 경위를 듣고 싶다만."
"겨...경위는 보고서에 올린 그대롭니다."
"이거 말인가?"
흑탑주는 제출받은 보고서를 내밀며 말했다.
"요약하자면... 아메리 학생이 모은 자료를 토대로 레오나르도 자네가 즉석으로 추리해 몇백 년 동안 베일에 감싸진 현자의 유산을 두 개나 찾았다는 것인데... 이걸 신뢰하라는 건가?"
하지만 다들 여전히 의심은 거두지 않았다. 얻은 경위나 시험에 통과한 방식은 정상인인 이상 믿을 수 없는 이야기였다.
"이걸 보시고도 신뢰할 수 없다면 저희 쪽에선 어쩔 도리가 없군요."
목장식을 내보이며 레오는 말했다. 단순히 유산을 얻었다는 의미가 아닌, 이 목장식이 가지고 있는 능력을 되새기는 의도 또한 섞여있었다.
"...그래. 목장식이 그렇다면야 믿는 수밖에 없겠지."
"그럼 다음 주제로, 그 유산들에 대한 처분에 대한 문제로 넘어가야겠군!"
그 말에 마탑주들은 각자의 번뜩이는 욕망을 눈으로 드러내었다. 저 유산들이 가지는 가치는 마법사인 이상 모를 수가 없었다.
"고민할 필요도 없지. 아메리는 흑탑의 학생, 그리고 현자의 유산은 흑탑의 전문 분야인 마도구학. 그렇게 고려했을 때..."
흑탑주의 말을 자른 것은 백탑주였다.
"그건 전제가 잘못되었지 않나? 흑탑이 마도구의 분야를 다루고 있는 것과 현자의 유산은 별개의 문제지."
청탑주도 유리한 흑탑주의 견제를 위해 그녀를 거들었다.
"거기에 흑탑의 학생이라는 이유로 유산을 가지는 건 현자님과 학생에 대한 모독 아닐까 싶은데, 내 착각인가?"
"나도 가급적 중립을 유지하고 싶은 입장이다만, 흑탑주 말엔 동의할 수 없군!"
그렇게 의견을 표명하면서도 그들은 슬며시 목장식을 바라보았다. 목장식의 눈엔 아직 빛이 나오진 않았다.
[아무래도 벌써 파훼법을 찾은 것 같은데?]
<괜히 권모술수가 난무하는 마탑의 꼭대기에 올라온 게 아니죠.>
저들의 말은 대부분 추측과 견해에 중점을 두고 있었다. 그런 것에는 진실이나 사실의 개념이 모호해지기 마련이니, 거짓이 간파되는 것은 불가능했다.
"우선 진정하시죠. 저희 쪽에서도 의견을 표명할 권리는 있습니다."
그 말에 권모술수 마탑주들은 기세와 위압으로 레오나르도를 제압하려고 했다.
하지만 모든 공포에 다져질 대로 다져진 레오에게 무의미했다.
"그래, 말해보겠나?"
"단도직입적으로 말씀드리면."
이젠 공수가 역전될 것이다.
"저흰 현자의 유산을 양도할 생각 없습니다."
또다시 압박해오는 감각, 이미 옆쪽의 대학원생은 압도된 나머지 화장 너머로 다크서클이 다시 들어나고 있었다.
"어째서지?"
그럼에도 여기서 물러날 순 없었다.
"애당초 현자의 유산은 자격이 있는 자만이 가질 수 있다는 조건으로 마탑에 숨겨둔 거죠. 안 그렇습니까?"
다들 쉽사리 반박하지 못했다. 현자가 스스로 이미지를 깎아먹어서 그렇지, 새삼 그의 위상이 어떤 위치에 안치되어있는지 알 수 있었다.
"그렇게 놓고 봤을 때 저희가 이걸 소유하는 건, 지극히 타당하죠."
그리고 아메리는 아예 반지의 부작용으로 뺄 수도 없는 노릇이었으니, 그에 대한 근거는 더욱더 논리적으로 변모한다.
"하지만 마탑주님들이 염려하시는 부분도 충분히 고려해야한다고 생각합니다."
레오나르도는 목장식을 벗으며 테이블에 내려놓았다.
"그렇기에 제안 하나 드리죠."
협상의 주도권은 이미 레오가 잡았다.
***
[진짜 그렇게 해도 돼?]
목걸이가 없는 목을 보며 현자는 이해가 안 된다는 듯 물었다.
<되니까 했습니다. 괜찮아요.>
목걸이는 마탑에 맡기는 것으로 결정했다.
물론 지금도 명시적 주인은 레오였고, 마탑에 맡기는 건 갱신형 한시적 대여의 방식이었다.
[껍데기만 그런 거지, 주인이라 하기도 애매하고... 무엇보다 얻은 것도 별로 없잖아.]
<이 정도면 괜찮은 편이죠.>
레오가 든 것은"특수 마법 허가서"
중급 마법 허가서보다도, 심지어 상급 허가서보다도 유용한 허가서였으니 손해라 할 것까진 없었다.
<고유 마법이라는 것도 개발하려면 일일이 허가받아야 합니다. 그럴 바엔 지금 받는 게 낫죠.>
[...그래 뭐... 그것도 방식은 가르쳐줄 테지만...]
현자는 정면에 있는 방을 손가락으로 가리키며 말했다. 방에는 레오가 대여시켜준 목장식이 들어있었다.
[...굳이 저 개코딱지만한 전시관을 만들 필요는 있냐? 그것도 저렇게 조촐하게 할 바에는 박물관에 기증하는 게 낫겠다.]
<있죠. 사실은 그게 본목적입니다.>
[그게?]
레오나르도는 콧노래를 흥얼거리며 예약서에 적혀있는 인물들을 이름을 살폈다.
"그 페도 새끼도 있고... 횡령범... 그리고 나머지들도 잘 있네."
[...뭐가? 뭔데 그래?]
현자도 어깨 너머로 예약 리스트를 살펴보았다.
<제가 몇몇 마법사들한테 증거 복사본 뿌렸다고 했잖아요.>
[그랬었지. 마탑주한테는 하면 안 된다며.]
<정확히는 여기 있는 9할의 마법사들이 대리로 해줄 겁니다.>
레오나르도는 리스트를 넘겨보여주며 말했다. 리스트의 페이지가 넘어갈수록 동태 같던 현자의 눈에 생기가 불어넣어졌다.
[...어...야... 혹시 너 얘네들한테...]
<원래 쓰레기 새끼가 쓰레기를 잘 잡아요. 자기를 잘 아니까요.>
지금 복사본을 보낸 상대들은 리스트에 적혀있는 인물을 포함해, 그 인물의 적대적 상황에 놓인 인물이었다.
<뭐 특허 경쟁부터 해서 교수직, 논문, 서열, 파벌 싸움까지도. 그 인간 말종들이랑은 안 싸우고 못 배길 놈들로만 엄선했죠.>
의심은 당연히 할 것이다. 바로 증거로 사용할 수도 없고 누군가의 함정인 것도 의심할 테지.
하지만 상관없다. 그에 맞는 절대적인 무기도 마련되있으니까.
[하지만 복사본이라며. 법적 효력은 없을...]
레오나르도는 미소를 지으며 작은 방문을 가리켰다.
<저게 뭔 것 같습니까?>
[...와...오...씨... 나 순간 소름 돋았어.]
저 방은 이제부터 진실의 방이다.
지금부터 서로 죽여라.
<+--|-|--+>
EP.47 아리아는 배운다-1
이제는 쓰레기들끼리 알아서 자멸하기를 기다리면 그만이다.
[그럼 이제 뭘 할 거냐?]
<글쎄요, 마법도 공부해야돼고, 아리아스필의...>
"농담암살자."
경기를 일으키는 발언에 레오나르도는 짜증이 일은 표정으로 뒤를 돌아보았고.
꾹
"...아가씨?"
뒤에는 잔망스러운 미소를 짓는 아리아가 있었다. 손가락으로 뺨을 부드럽게 누르는 건 그녀의 잔망을 더욱 요염하게 만들었다.
"귀엽네. 내 농담암살자."
"자...장난이 지나치시네요."
그 짓궂은 놀이에 레오는 고개를 돌리며 당황스럽게 익은 얼굴을 숨겨야만 했다.
[진짜 꿈에서 뭔 일이 있었던 거냐?]
<제가 묻고 싶어요. 진짜.>
악몽 사건을 겪은 뒤로 아리아스필은 무언가 변해있었다. 트라우마나 PTSD 같은 것이라기 보단... 조숙해졌다고 해야할까, 성숙해졌다고 해야할지...
[...애가 뭐 저리 요망해졌냐?]
격조없는 표현이었지만, 사실 그 표현이 제일 적절했다.
"왜? 부끄러워?"
아리아는 그 부끄러운 표정을 보기 위해 자신의 얼굴을 천천히 다가가게 했다. 그럴 때마다 레오는 더 고개를 돌리고 익어가는 얼굴을 가릴려고 했다.
"많이 더운가? 얼굴이 많이 빨개."
"예예...! 그렇네요!"
레오의 대답과 반응에 그녀는 퍽 만족스러웠는지 쿡쿡거리며 미소를 지었다.
"...그...근데 무슨 일로 오신 건가요?"
"아누스 촌장님이 소개해주신 분, 혹시 아는 분인가 해서."
아리아스필은 아누스에게 받은 쪽지를 내밀었다. 그러고 보니 마을을 떠나기 전에 촌장님은 아리아에게 쪽지 하나를 내밀어주었다.
"피시스 나트라... 처음 들어보는 이름인데..."
그럼에도 무언가 익숙한 느낌이 들었다. 회귀 전에도 비슷한 이름을 들었던 것 같은데...
[어렵게 생각할 것 없지. 가보면 알잖아.]
그건 현자 말대로였다. 촌장님이 소개해준 사람이고, 곤란한 요구를 하러 가는 것도 아니니 그리 망설일 이유는 없었다.
"우선 가보죠. 보면 기억날 수도 있으니까요."
"그래. 그러자."
그 순간, 아리아는 레오의 손을 잡으며 앞쪽으로 가기 시작했다.
"아...! 아가씨?!"
"응? 왜?"
아리아의 표정은 태연하면서도 얄밉도록 맹랑했다. 그런 얼굴을 보자 차마 레오나르도는 아무 말도 못했다.
[...]
<닥쳐요.>
[아직 아무 말도 안 했어.]
마음 속으로 했으니 상관없다. 어차피 또 시원치 않은 소리나 할 테니 미리 입막음하는 게 나을 것이다.
"여긴 것 같아."
도착한 곳은 풀과 나무가 많이 심겨 있는 숲과도 같은 장소, 유리로 된 벽이 둘러져 있는 걸로 봐선 온실이라 칭해도 무방했다.
"저번에 아메리 씨께 여쭤봤는데, 여기에 자주 있다고 들었거든."
"그래요? 식물이라도 연구하나...?"
고민을 해결하기 위해 아리아는 온실의 문을 열어 들어왔다. 그 사이에도 굳게 붙잡고 있는 레오의 손을 놓지 않았다.
"...근데... 사람은 없는 것 같은데."
온실에는 식물과 나무만 있을 뿐, 사람은커녕 산새 같은 동물도 보이지 않았다.
"...이상하..."
레오나르도는 갑자기 아리아가 잡은 손을 잡아끌었다. 그러곤 한팔로 몸에 갖대 안기까지 했다.
"레...! 레오?!"
"나와. 안 나오면 적으로 간주하지."
그렇게 말하며 레오는
검을 기울인 방향에는 웃음 소리가 났다.
"안 보던 사이에 많이 날카로워졌는데? 레오나르도?"
숲에서 난 소리였지만, 나무 사이에서 나온 것은 아니었다. 정확히 말하자면 나무 자체가 말하는 것처럼 보였다.
"아니면 대담해졌다고 봐야할까?"
카랑카랑한 목소리, 이 여성의 것이라 판단해야 적절하겠지.
아카시아 나무의 가지는 떨리더니 이내 사람의 팔 형상으로 변했다. 가지 뿐만 아니라, 몸통도 잎사귀도 점차 사람의 형상으로 변해갔다.
"...으아, 뻐근하다."
완전히 사람의 형태를 한 여성은 레오나르도를 바라보며 반갑게 손을 흔들었다.
"오랜만이네. 레오나르도."
"...아는 사람이야?"
아리아는 미소를 살짝 지운 채 레오를 바라보며 물었다. 육감적인 여성에 대한 본능적 경계심이 그녀의 표정을 굳게 만들었다.
"글쎄요. 잘... 모르겠는데요."
단순히 얼버무리거나 무시의 의도가 아닌, 진심으로 의문의 의미였다. 사실 누구인지 아예 감도 안 잡혔다. 회귀 전이나 지금이나 마탑에는 알만한 사람이 없을 것이다.
"이거 섭섭하네. 몇 년은 됐다지만, 누나를 잊어? 그럼 기억나게 해줄까?"
누나는 여유있는 미소를 지으며 주머니에서 사진 한 장을 꺼냈다.
"이거 기억 안 나? 그때 내가 가져온 걸로 찍은 건데."
내민 사진에는 레오나르도 자신과 사진을 내민 그녀가 찍혀있었다. 다만 특징이 있었다면 그 사진에 찍힌 레오는 십대보다도 어린 아이처럼 작고 귀여웠다는 점에 있었다.
"...이건...확실히 저이긴 한데..."
"...하아...그렇...하아...구나...!"
갑자기 들리는 거친 숨소리, 숨을 헐떡이며 그녀는 사진을 자세히 들여다보았다. 붉어지고 땀을 흘리는 모습이 가히 이형적이라 느껴졌다.
'...세상에
이런 귀여운 생물이 존재할 수 있구나...! 13살 때보다도 순수하고 귀여워. 저 볼을 잡으면 무척 부드럽겠지? 부드러운 빵처럼 잘
늘어날 거야...! 흉터 있는 몸도 매력적이지만, 저 때는 더 사랑스러워. 지금이라도 껴안아서 몸에 비비면 정말 좋을 텐데...
왜 난 이때 레오랑 처음부터 만나지 못한 거지...!!'
독백과 상상만으로도 아리아는 극상의 행복을 맛볼 수 있었다. 입가에는 군침도 살짝 돌았다.
"저기...? 아가씨?"
"흐...헤... 왜애...?"
"뭣 때문에 흥분했는지 잘 모르겠지만... 우선 숨은 고르시고요. 얘기는 계속 하셔야죠."
그 말에 아리아는 침을 다시며 사진에서 얼굴을 떼며 피시스를 바라보았다.
[혹시나 해서 묻는 건데... 아리아... 그런 취향은 아니지?]
<무슨 취향이요?>
[...아냐. 내 머리에 마가 낀 거지. 신경쓰지 마라.]
뭔가 말에 가려운 부분이 있었으나, 눈 앞에 여성은 그 부분을 신경을 쓸 시간도 주지 않았다.
"그래도 놀랐어. 그때 꼬맹이가 이렇게 클 줄은 몰랐거든."
"저기... 정말 죄송한데... 이 사진에 찍힌 게 저인 건 알겠거든요. 근데 여전히 기억이 안 나서..."
그 말에 누나는 더욱 활기찬 기운을 뿜어내며 기억의 되살리는 것을 도왔다.
"예전에... 대략 10년 전 쯤인가? 아누스 선생님께 내가 무릎 꿇고 가르침을 달라고 빌었잖아. 그러고 나서 두세달 동안 선생님께 배우면서 너랑 같이 놀기도 했고."
"...아....아아...!!"
이제야 기억났다. 그때 그 사람이었구나.
"누나였어? 그때 정령술 배웠던?"
"어! 이제야 기억난 눈친데?"
그럴 수밖에 없었다. 그도 그럴 것이...
"아니... 그렇잖아! 이름하고 성까지 다 바뀌었는데!"
"사정이 있다보니 그렇게 됐어. 아무래도 '피순'이라는 이름은 엘레강스하지 못하잖아."
그건 그렇긴 했다. 하도 뇌리에 남는 이름인지라 '피시스'라는 개명이 되려 잘 기억에 남지 않았다.
[예전 이름이 훨씬 나은데?]
<...아...뭐...네...>
새삼 현자가 어느 시대 사람인지 되새길 수 있었다. 현자의 시대엔 저 이름이 오히려 세련됐을 것이다.
"같이 숨바꼭질도 하고 책도 읽어줬잖아. 아, 이제 기억나네."
"기억나지? 같이 목마도 태워주고, 누나 하면서 쫄래쫄래 따라왔었는데. 그땐 참 귀여웠어."
옛 고향을 추억이 되살려진다. 생각해보면 아누스 다음으로 레오나르도가 잘 따랐던 사람은 피시스(피순)이었다.
"아, 그래?"
"네. 이제야 생각나네요."
어느새 아리아는 흥분한 표정을 차갑게 식히며 팔짱을 끼고 있었다. 그 너머로 보이는 비수와 같은 시선은 레오의 몸을 따갑게 찌르고 있었다.
"같이 숨바꼭질도 하고, 책도 읽어주고, 목마도 태워주고, 누나라고 부르면서 따랐다는 거잖아."
감히도
"아니야?"
"...맞긴 한데요..."
어느샌가 레오는 죄인과 같은 태도를 보이고 있었다. 죄목도, 죄명도 잘 모르겠지만 저 차가운 시선을 보면 어느새 고개를 숙연히 숙이게 되었다.
"아, 그렇구나. 알겠네. 잘 알겠어. 그러니까 저 사람이 같이 저 사진에 나온 레오 너랑 어렸을 때 즐거운 시절을 보낸 사람이라는 거잖아."
그건 맞는 말이긴 한데... 뭔가 대화의 핀트가 몹시... 삐뚤어진 것 같았다.
그리고 그 추측은 사실이었다.
'...감히... 저렇게 어린 레오를 독점했다고...?'
참고로 마을 사람들과 다 같이 있었으니 독점은 아니었다.
'그리고 같이 놀고 몸을 비비고...'
논 것은 단순히 동화책을 읽어주거나 숨바꼭질 정도였고, 몸을 비빈 건 목마를 태우다보면 어쩔 수 없는 것이었다.
애당초 당시 레오는 다섯 살이었다.
'게다가...'
아리아가 가장 화가 난 부분은 그런 것이 아니었다.
'누나...누나라고?! 감히...?! 나도 듣지 못한 말인데...!!'
참고도 아닐 것이 아리아와 레오는 동갑이었다. 아리아스필도, 레오나르도 또한 이미 알고 있는 당연한 사실이었다.
"저기... 미안한데, 편지 좀 있을까? 아누스 선생님께서 자세한 내용은 그걸로 확인하라고 하셔서."
"네."
아리아는 싱긋 미소를 지으며 편지를 내밀었다. 이마의 혈관이 도드라진 것이 그녀의 감정을 간접적으로나마 느낄 수 있었다.
"저기...음..."
"왜요?"
아리아는 도드라진 힘줄에 힘을 살짝 빼며 미소를 지었다.
"너 손가락 악력 장난 아니구나?"
피시스는 간신히 편지를 가져가며 그녀는 쪽지를 펴보았다.
"음...음... 그렇구만. 이해했어."
"무슨 내용인데? 누..."
"하하, 레오. 지금부턴 여자들의 시간이여서 나가줘야겠어."
아누스 때와 같다고 느끼는 거면 착각일까, 아마도 아닐 것이다.
"그게 무슨... 오랜만에 만났는데, 얘기라도 더..."
"자자, 얼른 나가시라고. 부정 탈라."
영문도 모른 채 레오는 온실 밖으로 쫒겨났다. 그리고 온실 내에는 어느샌가 김이 서려 내부가 보이지 않게 되었다.
"자, 이제 얘기를 해볼까?"
"무슨 얘기요?"
레오가 사라지자 아리아는 거리낌없이 적의를 들어내었다. 그 적의가 역으로 귀여웠는지 피시스는 배시시 웃었다.
"귀여운 질투인데~ 그래도 또래끼리만 해. 아줌마가 낄 때는 아니잖아?"
"아시면 왜 레오만 빼고 말하시는 거죠?"
여전히 가시가 돋친 발언, 그럼에도 피시스는 여유를 잃지 않았다.
"아무래도 이런 대화는 일대 일로 하는 게 낫다고 생각했거든."
그러곤 피시스는 자신의 손가락을 튕겨 마력을 전개했다.
[무슨 일이지? 피시스?]
나무에서 정령이 튀어나오며 그녀에게 다가왔다. 그 등장에 아리아는 흠칫 놀라게 되었다.
"역시~ 너 보이는구나?"
"보인다니... 당연히 보이는 거 아닌가요?"
[정말 보이는 것 같군. 시선이 일정해.]
정령조차 놀란 눈치로 아리아를 바라보고 있었다. 증오어린 질투로 차있는 아리아의 시선은 어느샌가 의문으로 뒤바뀌었다.
"당연하지 않을걸. 정령을 본다는 건, 마법사들 사이에서도 드문 일이야."
정령사, 결과는 마법사와 비슷하지만 과정과 원리라는 마법사와 결이 달랐다.
"정령사는 마나에 축복받은 사람이야. 마나의 정수인 정령과 대화할 수도 있고, 계약할 수도 있지."
"하지만 레오도 정령을 봤어요."
그렇지 않고서야 아누스의 정령들의 외모를 알 리가 없었다.
[그건 촌장이 직접 실체화시켰기 때문이지. 그 소년은 정령술에 재능이 없는 쪽에 가까워.]
실제로 레오나로드는 전생에도 아누스를 통해 정령술을 배우려 했으나 몇 번이고 실패했다.
"정령술은 마법과 달리 재능이 8할이야. 마법사들도 정령사를 할 수는 있겠지만 재능이 없으면 거의 쓸모가 없어서 하지를 않지."
"하지만 저는..."
아리아는 눈앞에 있는 나무의 정령을 바라보았다. 실제 사람만큼이나 명확하게 보이며, 또렷하게 목소리가 들려왔다.
[그게 자네가 재능이 있다는 증거다.]
"정령술은 마법에 대한 지식이 없어도 사용이 가능해. 오히려 지식이 없기에 더 효율적으로 쓸 수도 있을 걸."
아리아는 지근거리의 쾌검을 다루는 검사, 그렇기에 마검사인 레오나르도와는 달리 중거리나 원거리에 불리한 점이 존재할 수밖에 없었다.
"그걸 알아본 선생님이 널 나한테 보내신 것 같아. 아무래도 나도 강의라면 몇 번 해본 적 있으니까."
[보아하니 자네는 검사인 듯한데, 정령술을 배우면 분명 도움될 테지. 정령인 내 입장에서도 추천하겠네.]
그녀 입장에선 분명 좋은 기회이자 제안이었다. 하지만 아직 이해가 가지 않는 것은 있었다.
"감사하긴 한데... 아누스 님께서 쪽지에 어떻게 적으셨길래..."
뭐라고 적었기에 마탑의 정령사에게 직접 교육을 받을 수 있는 건지, 그녀 입장에선 조금 의아할 수밖에 없었다.
"아, 별거 없어."
피시스는 자신이 든 편지를 내밀었다.
[내 손주 며느리 될 애다. 정령술에 재능은 있는데, 성교육이 부족하니 그런 걸 고려해서 잘 가르쳐라.]
그녀는 완전히 얼굴이 붉어졌다.
"...으...아..."
그런 붉은 귀에 피시스는 작게 이 말을 속삭였다. 반지가 끼워진 손은 그녀의 가정이 어떤지를 은유적으로 알려주고 있었다.
"레오 꼬시는 법도 어른의 방식으로 잘~ 알려줄게. 내 남편도 내 기술에 못 참고 먼저 덮쳤거든. 어때?"
잠시 고민하던 아리아는 이후 어린 레오의 사진을 준다는 말에 바로 지장을 찍었다.
거절하기엔 너무 크나큰 오예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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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P.48 아리아는 배운다-2
마탑에서의 생활도 일주일이 지났다.
[그래. 그런 식으로! 옳지!]
레오나르도는 마탑에서 미뤄두었던 3서클의 마법과 3성의 코어를 안정화시켰다.
원래 코어는 전부터 3성에 도달할 수 있었지만, 서클과의 안정성을 중시하라는 현자의 조언에 따라 서클의 성장에 따라 균형을 맞춘 것이었다.
<파이어 스톰>
연속적으로 방출되는 파이어볼의 회오리, 위력과 파괴력은 파이어볼과 비교하는 게 죄송스러울 정도였다.
그도 그럴 것이 아예 표적인 바위 덩어리를 불로 부숴 녹여버렸기 때문이었다.
"...원래 이렇게 센 마법입니까?"
[원래 이런데, 이 시대의 마법사놈들이 정말 형편없게 쓰는 거야.]
그게 역으로 더 충격적이었다.
[내가 괜히 내실을 다지라 했겠냐? 다 생각이 있어서 그러는 거야.]
<와... 존경합니다. 현자님.>
이건 존경을 안 하고는 못 배겼다. 전생에도 상급 마법사들과 자주 싸워본 레오로서는 고작 3서클 마법이 이런 위력을 발휘하는 것에 경악스러울 수밖에 없었다.
[낯간지러운 소리는 됐고, 이제 전체적으로 다져질 건 다져졌으니 다음 단계로 넘어가도 되겠어.]
<다음 단계면 4서클 마법인가요?>
[아니, 고유 마법.]
레오나르도는 당황스러운 표정으로 되물었다. 그도 그럴 것이 교수님의 진도가 너무 빨랐다.
<고유 마법이요? 그... 대마법사들이나 쓴다는...?>
고유 마법, 스스로만이 만들어낸 고유한 특징을 지닌 마법.
대마법사의 위업이라고도 칭송받는 최상급의 마법이었다.
[뭐가 대마법사냐? 그거 사실 초급 마법만 배우면 바로 만들 수 있는 거야. 그게 이 시대에 와서 묘하게 추앙받아서 그렇지.]
현자는 눈과 눈꺼풀을 긁으며 태연히 그렇게 말했다. 사실 레오나르도도 고유 마법을 지닌 마법사들과도 상대해본 적도 있긴 했다.
생각해보면 당시 전투할 때 썼던 고유 마법들도 범용 마법에 비하면 정말 시원치 않기는 했다.
[어쨌든 오늘은 여기서 끝이야. 푹 쉬고, 내일 보자고.]
<근데 어차피 저희 같이 다니잖아요.>
[아, 그러네?]
애당초 저 양반이 본인 심장에 현자의 돌을 박은 인간이었다. 뭔가 윤리적으로나, 도덕적으로나 따져야 할 것 같았으나 지금은 귀찮은지라 미루기로 했다.
[근데 아리아는 어딨냐?]
<아직 훈련 중이겠죠.>
아리아스필은 일주일 동안 피시스에게 정령술을 배우기로 했다. 최근에는 얼굴도 보는 것이 힘들어졌지.
[..,근데 일주일만에 정령술을 익힐 수 있을까? 재능이 아무리 있어도 반년에서 일년은 걸릴 텐데.]
<될 겁니다. 전생에도 쓰긴 썼거든요.>
대략 17살쯤 정도에 자연스럽게 사용하게 되었다. 배에 출혈이 생겼는데, 갑자기 주변의 물 정령이 나타나서 복부의 상처를 치료해주었다.
[자연스럽게...? 그러니까...]
<그냥 썼어요. 그래서 저도 딱히 선생이 필요 없겠다고 생각해서 놔둔 거죠.>
레오 본인이 가르쳐줄 수 있는 것도 아니었고, 아리아도 그저 보조기로 쓰기만 할 뿐, 딱히 진심으로 배우지 않았다.
배우면 좋을 수도 있었겠지만, 무리하게 가르칠 필요는 없다고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걘 없이도 잘 싸웠거든요.>
애당초 성검을 얻은 뒤로는 검에서 광선을 수시로 발사하는데 정령이 뭐가 대수겠는가.
정령이 바람으로 칼날 만들 때, 아리아는 검풍만으로 절벽을 만들어냈다.
[...흠...그게 사실이라면 좀 무서운데...]
<천재란 게 그런 거죠.>
[아니, 그런 게 아니라... 걘 도대체 어떻게 죽은 거냐?]
현자로서는 그런 천재와 괴물의 경계에 있는 인간이, 그것도 용사가 죽는 것이 쉽사리 이해되지 않았다.
<...사실... 저도 잘 모릅니다.>
[야,네가 모르면 누가 아는데?]
<그 현장에 있는 사람들은 다 미치거나 죽었거든요.>
[...뭐?]
뒤늦게 레오가 현장에 갔을 때 그곳은 지옥이나 다름없었다.
만약 그 현장에 아리아스필이 없었더라면, 한 국가가 멸망하는 것도 무리도 아닐 것이었다.
<방에 돌아가서 설명해드릴게요. 그때의 일을요. 아무래도 미루기만 할 순 없으니까요.>
현자는 말로 대답하지 않은 채 묵묵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날의 상처는 아직 레오에겐 쓰라린 흉터로만 느껴졌기에, 현자로선 섣부르게 대답할 수 없는 노릇이었다.
"레오!"
그 순간, 이 비극의 주인공이 레오에게로 뛰어왔다.
"아리아 아가...!"
레오나르도는 그 순간 말을 멈췄다. '멈출 수밖에 없었다'라고 말해도 무방할 것이다.
[...오우...]
아리아의 옷차림은 평소와는 격이 달랐다.
평소에는 기동성과 편안함을 중시했다면, 지금 옷은 아리아스필이라는 여자의 매력에 모든 것을 치중시키고 집중시켰다.
분명 평범한 블라우스에 긴 치마를 입은 것일 뿐이었지만.
노출이 적은 것은 역으로 특유의 청초함을 나타내면서도, 가슴의 볼륨과 대비되는 잘록한 허리를 강조해 색기어린 매력을 드러내다 못해 과시하고 있었다.
보자마자 심장이 갑자기 거세게 뛰는 것 같은 착각이 들 정도였다.
[그거 착각 아닌...]
닥쳐라. 착각이라면 착각인 것이다.
"...어때?"
"예?"
그녀가 슬며시 몸을 다가 세우며 물었다.
"피시스 씨께서 주신 옷이야. 어울릴 거라고 하셨거든."
몹시 적합하고 적절한 스타일링이었지만, 심장 건강에 꽤나 고통스러운 코디네이션이었다.
파시스에 대한 원망스러움과 감사함이 공존해 합일했다.
[그거 그냥 좋은 거잖...]
그거랑은 엄연히 다르다. 다르고 말고. 이 설명을 듣고도 이해를 못한다면 더 이상 할 말은 없었다.
"...어...때?"
슬며시 자세를 잡은 아리아는 물었다. 어설펐지만 오히려 그게 색기와 귀여움을 동시에 잡는 묘수가 되어주었다.
"아...아름다우십니다. 무척이나..."
레오는 얼굴의 붉은 홍조를 가리기 위해 고개를 숙이며 아리아의 아름다움에 대한 감상을 남겼다.
"그래? 다행이다!"
아리아는 순수한 표정으로 웃었지만, 실상은 달랐다.
'...작전대로...!'
일주일 동안 아리아가 배운 것은 정령술 뿐만이 아니었다.
***
사실 정령술은 이미 하루만에 진도를 빼둔지 오래였다.
'...너 진짜 처음 하는 거야...? 진짜...?!'
'...예? 그런데요...? 뭔가 잘못된 건가요...?'
'그 반대야...! 어떻게 사람이 이럴 수 있지?!'
아리아스필 그녀는 정령에, 마나에게 지나치게 사랑받고 있었다. 지금 피시스가 가르친 것은 정령술조차 아니었다.
'...그냥 마나를 인격으로 인지하는 법만 알려줬다고... 근데 바로 이렇게...'
아리아는 그 방식을 듣자마자 온실 속 숲의 모든 정령을 자신의 주변으로 집합시켰다.
온 정령들은 말을 짜맞추기라도 한 듯 이 말을 내뱉었다.
[그냥 와야 할 것 같았어.]
생각해보면 아리아스필이 여태껏 만나왔던 정령들은 이미 계약이 된 요정들 뿐이었다.
그런 계약 정령들조차 아리아에게 호감을 가지고 있다는 시점에서, 아리아의 재능은 규격 외나 다름없었는지도 몰랐다.
'...뭔가를 더 다듬어야할까요?'
'...아니, 그럴 필요는 없겠어.'
그 뒤로 피시스는 여태까지의 수업 계획을 전면 수정해야했다.
원래라면 간신히 부름에 응답한 정령과 교감을 통해 정령 친화력을 높이고 계약을 진행시키는 방향으로 가르치는 게 정석이었다.
'저도 그래야 되는 거 아닌가요?'
'아니, 넌 계약하는 게 오히려 손해야.'
계약을 하는 것은 어디까지나 정령과의 인연을 깊게 만들기 위해서였다. 정령과의 연이 깊으면 깊을수록 사용할 수 있는 마법과 마나도 늘고, 복잡한 지시나 대화도 가능하기 때문이다.
'근데 넌 언제 어디서든 마나만 있다면 정령과 대화가 가능할 거야. 계약을 하면 오히려 종속될 가능성이 높아.'
정령 또한 지성체의 일종, 그렇기에 분노나 질투와 같은 감정을 품고 정령사를 돕지 않는 경우도 어렵지 않게 볼 수 있었다.
'그래서 어지간해선 정령사들은 다수의 정령과 계약하는 걸 선호하진 않아. 곤란하기도 하고, 까다로운 제약이 많거든.'
'아누스 촌장님은 제법 많이 계약하셨던데...'
'그건 고향 출신의 혜택이지. 같은 출신의 정령들과는 연이 깊을 수밖에 없거든.'
실제로 아누스의 전투에 협력했던 건 계약하지 않는 소정령들도 포함되었다. 정령들은 때론 인간들보다 지연이나 혈연과 같은 인맥을 중시했다.
'근데 넌 이 세상 모든 곳이 고향이나 다름 없어.'
아리아의 정령 친화력은 과하다 말할 정도로 특출났다. 정령의 지역을 대규모로 파괴하지 않는 이상, 모든 정령들은 아리아스필이라는 존재에게 호의적일 것이다.
'그러니 굳이 계약할 필요는 없지. 오히려 정령들 관계만 나빠져.'
지금부터 집중할 것은 정령과의 마법 사용 정도 뿐이었다. 정령 마법의 장점은 친밀도만 높으면 마법을 실행하기 쉽다는 것에 있었으니, 지금 아리아에겐 일의 축에 끼지도 못했다.
'그럼 지금은 조금 여유를 갖자는 의미에서 다른 걸 배워볼까?'
'다른 거요?'
피시스는 여유있는 미소와 함께 사진을 보여주었다.
'레오를 꼬시는 법. 사실 이게 본론이잖아?'
아리아는 어느샌가 수첩을 꺼내들고 있었다.
***
'...계획대로야...!'
아리아는 레오의 저 부끄러워하는 표정을 보며 계획의 만족스러움을 느꼈다.
지금 입은 옷 또한 피시스가 유혹을 위해 준 옷, 계획의 일부였다.
'이 옷이 제일이야. 너무 파이거나 벗겨진 옷이면 의도가 보이거든. 근데 이 옷은 가릴 곳은 다 가리지만 몸의 매력을 살려주니까 오히려 더 매혹적으로 보이지.'
그 말대로 아리아스필은 이런 옷을 입는 것에 거부감은 없었다. 하지만 저 앞의 소년은 무척이나 곤혹스러운 눈치였다.
항상 어른스럽기만 했던 그 레오나르도가 지금은 붉은 얼굴을 감추려고만 하는 것이 귀엽게만 느껴졌다.
'이제 2단계.'
아리아는 자신의 장점을 최대로 살리기로 했다.
"오랜만에 찌뿌둥한데... 대련이라도 할까?"
"대련이요? 좋네요!"
대련만 하는 것으로는 여성성을 드러내는 건 어려울 것이라고 생각할 수도 있다. 하지만 그게 오히려 역수가 되어 허점을 찌를 수도 있게 될 것이다.
'중요한 건 대련 당시도 있겠지만, 대련 끝난 이후야.'
대련 자체에서는 이성적인 스킨쉽을 기대할 수 없다.
하지만 이후라면 다르다.
대련에 지친 것을 핑계로 업히거나 안아들 수도 있고, 상처가 생겼다면 직접 다친 부위에 서로 소독도 할 수 있으며, 가장 궁극적인 목표는...
-대련 후의 마사지
'어떻게든 야릇한 분위기가 나올 수밖에 없지. 스킨쉽도 자연스럽고 신음이 나와도 이상할 게 없지만, 듣는 쪽은 좋든 싫든 의식하게 되거든.'
그것뿐일까, 만약
아리아 자신이 받는다면 레오가 당황스레 자신의 몸을 주무르는 걸 가장 가까이서 구경할 수 있었고, 자신이 하는 쪽이라면
합법적으로 레오의 몸을 주무를 수 있었다. 어느 쪽이든 쉽게 얻을 수 없는 포상이라는 말이었다.
"....흐...헤..."
[...쟤 왜 저렇게 띨빵하게 웃냐?]
<...>
차마 변호를 못하는 레오였다. 띨빵하다는 건 분명 과한 표현이었지만, 아니라는 반론을 할 정도는 아니었기에.
레오는 당황스럽게 말을 거는 수밖에 없었다.
"그럼 대련은..."
"대련이라, 나쁘지 않겠군."
그 자리로 걸어들어온 것은 쓸데없이 크고 무거운 지팡이를 든 여성이었다.
검은 정장을 입고 있었지만, 육감적 몸매는 곡선으로나마 여실히 드러났고 오히려 정장을 통해 어른의 매력마저 끌어내고 있었다.
"실례만 안 된다면 내가 먼저 자네와 해도 괜찮겠나?"
"...오랜만이군요. 에일린 템페리우스 님."
레오나르도는 한쪽 무릎을 꿇으며 그녀의 명예 앞에 품격있는 인사를 내보였다.
에일린 템페리우스.
마법계의 정점이라 불리우는 템페리우스 가문의 영애이자.
'...여자...'
현재 아리아의 연적이 된 여성이었다.
<+--|-|--+>
EP.49 아리아는 배운다-3
아리아의 눈이 점차 질투심으로 이글거리기 시작했을 때, 에일린은 무릎을 꿇은 레오나르도를 보며 어른의 미소를 내보였다.
"날 알고 있나?"
레오는 고개를 숙인 채 시선을 아래로 향하게 하며 대답했다.
"마법에 몸을 담근 자가 어찌 템페리우스 가문의 마법사를 모르겠습니까."
템페리우스 가문
마법계의 정상에 위치한, 용사 가문인 라인하르트와 비등하다 불리는 마도 가계.
가문 전체가 일으킨 위업만 놓고 보자면 현자와 동등하다 말할 수 있었다.
[템페리우스?]
<예예. 마법사 계열의 용사 가문이라고 생각하시면 돼요.>
[흠... 나도 아는 가문이야. 그 녀석, 그래도 자손을 낳긴 했구만.]
현자의 인맥은 도대체 어디까지 뻗어있는 것일까. '아마 하늘에서 신이 인간을 만들 적에도 현자는 존재하지 않을까.'하는 의문이 들 정도였다.
[근데 이상하네. 아무리 그래도 그 녀석이?]
<왜요? 이번에도 비리가 있습니까?>
[비리까지는 아니고. 그냥 템페리우스 가문의 마법사가 내 친구였어. 이름은... 칼렌이었지.]
칼렌 템페리우스
마법사라면, 그것도 마탑의 정식 교과서를 한 줄이라도 읽어본 사람이라면 모를 리가 없는 사람이었다.
현자가 마법의 초석을 쌓았다면, 칼렌은 마법의 비석을 쌓았다고 말해도 무방하니까.
<그게 이상한가요? 유명한 마법사니까 후계는 당연히 남겼겠죠.>
[근데 그 새끼 나한테 고백 때렸어.]
<......예?>
내가 알기로는 칼렌 템페리우스는...
[그거 맞다. 그 새끼 남잔데 나한테 고백한 거야.]
<...아...어...음...>
뭔가 알아서는 안 될... 인류사의 드러나선 안 될 검은 역사를 억지로 들추어낸 것 같았다.
[아이는 여자로 변신해서 낳으면 그만이라나? 뭔가 소름 끼쳐서 거절했지.]
<아...예...>
현자의 존재를 감추어야 할 이유가 안타깝게도 더 늘어버렸다.
이 비밀은 저 가문의 영광과 긍지를 지닌 영애를 위해서라도 감추어야 마땅했다.
"무슨 일 있나? 안색이 창백하군."
한 명문가의 출생에 이런 비밀이 있는 걸 안 이상, 태연한 표정을 짓는 것은 레오로서는 실현하기 어려운 이상이었다.
"아...아무것도 아닙니다. 그보다 대련이라는 것은...?"
우선 지금은 화제를 돌릴 필요가 있었다. 자신의 정신 건강을 위해서라도 아까의 일은 잊을 필요가 있었다.
"엿들을 의도는 없었으나, 대련이라는 말은 나에게도 흥미가 깊어서 말이네."
화제가 전환되자 레오는 자리에서 일어난 채, 그녀를 마주 보았다.
"실례가 안 된다면, 내 먼저 너와 대련을 청해도 되겠는가?"
그걸 바라보고 있는 아리아는 입으로 조심히 뻐끔거렸다.
'받아주지 마... 거절해! 레오! 거절하라...!'
"이런 영광을 거절할 이유는 없죠. 좋습니다."
아리아의 염원은 그렇게 깨부숴졌다.
***
[근데 진짜 싸우게? 대강 6서클은 되는 것 같던데.]
현자의 말대로 에일린 템페리우스는 6서클, 라인하르트 가의 가주이자 6성인 글라디오와 동급의 힘을 지닌 마법사라는 의미였다.
그것도 나이 차를 고려하면 에일린의 실력은 현자로서도 그리 무시할만한 것은 못 되었다.
<그래서 더 의미가 있는 거죠. 지금 제 힘이 어디까지 미치는지는 알아야 하니까요.>
하지만 그런 위협적인 사실은 레오나르도의 호승심을 자극할 뿐이었다. 본디 레오의 성격 또한 전투와 대련을 즐기는 호전적인 성질에 가까웠다.
[그래. 칼렌의 후손이 어떤지도 한번 보고 싶기도 하네.]
<...아...음...네...>
평소라면 그냥 대답할 격려였으나, 아까 들은 충격적인 비밀에 레오는 떨떠름한 표정을 지을 수밖에 없었다.
그런 잡념을 지우기 위해 레오는 대련용 장비를 착용했다.
"준비되셨습니까?"
대련장을 감독하는 관리인은 레오가 착용한 장비를 보며 확인삼아 물었다.
"네, 됐습니다."
"그럼 시작하죠. 나오세요."
관리인의 말에 따라 레오는 팔찌 형태인 검은 돌을 검으로 바꾸며 결투장으로 걸어갔다.
"준비는 된 것 같군."
결투장에 서있는 것은 검은 정장을 입고 있는 여성, 들고 있는 커다란 지팡이는 그녀의 마법사로서의 격을 시각적으로나마 알려주고 있었다.
"난 예전에 마검사라 자칭하는 자들을 몇 번 상대해본 적은 있었다."
"어땠습니까?"
"형편없었다. 검사로서도, 마법사로서도 말이지."
본디 마검사란 그런 존재였다.
무술에 충실하면 마법에 소홀해지기 마련이고, 반대도 마찬가지였다.
하지만 적절히 노력을 배분한다고 해도 결국 마검사의 실력은 별 볼 일 없었다. 결과적으로 한쪽에 쏟아야할 노력을 나눴기에 어중간해지기 때문이다.
"자네는 달랐으면 좋겠군."
"부응해보죠."
하지만 레오나르도는 달랐다.
"경기 시작!!"
심판의 외침과 함께 레오나르도가 돌진했다. 정면으로 돌진했지만 그 공격은 기습적이라 표해야 알맞았다.
"큭...!"
카앙!
레오나르도의 찌르기를 가로막은 것은 마력의 방패, 소년의 돌진이 1초도채 안 된 것을 계산했을 때 그녀의 대응 속도 또한 만만치 않았다.
콰앙!!
하지만 레오의 일격은 급조한 마력의 벽으론 막을 수 없는 것이었으니, 레오는 다음 연격을 이어갔다.
[템페스트 블래스트]
그 연격을 저지하기 위해 에일린은 바람의 포탄을 날렸다. 정면으로 추돌하면 망가지는 건 레오, 그렇다고 바람을 검으로 잘라낼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방어다...!'
레오도 마찬가지로 마법으로 방어막을 전개시켰다. 그렇지만 바람의 대포는 그 방어막을 우습게 깨부셨다.
"읍...!!"
3서클 마법인데도 불구하고 위력은 레오의 것 이상이었다. 아마 검은 돌을 급히 방패로 변환시키지 않았다면 골절을 면치 못했을 것이다.
"대응이 빠르군. 대단해. 넌 검사로서도, 마법사로서도 다른 이들보다 뛰어나."
에일린은 레오의 실력을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아마 평범한 마법사였다면 아까의 찌르기에 반응도 못하고 당했을 것이다.
그리고 아까 날린 바람 마법도 보통이라면 막더라도 충격 때문에 서는 것조차 불가능했을 것이다.
"그럼 더 시험해보도록 하지."
에일린은 피식 웃음을 내었다. 오랜만에 전력을 다해도 괜찮을 것 같은 상대를 만난 기쁨에 그녀는 주체할 수 없는 실력을 발휘해나갔다.
<라이트닝 랜스>
<윈드 버스트>
<헬 플레임>
연이어 날아오는 트리플 캐스팅, 과부하를 막기 위해 약한 마법과 강한 마법을 섞는 정석의 방식, 그리고 그 섞는 과정에서도 마법 간의 상성을 적절히 배합시켰다.
이건 마법만으로도, 무술만으로도 반격할 수 없다.
[스톤 스킨]
그렇기에 레오는 자신의 최선을 다해 반격을 계산했다. 발현한 암석 마법은 피부를 덮으며 전격과 열기에 대항할 수 있는 체질로 변화시켰다.
그리고 준비한 자세는, 공격을 가르기에 최선의 형태.
•베기 제2형 참(斬) 수직베기
풍압과 함께 내리쳐진 검격, 고화력의 마법은 반으로 갈라져 좌우로 흩어졌다. 물론 갈라진 마법의 일부도 위험했지만, 스톤 스킨의 보호로 간신히 버틸 수 있었다.
"...하아...하아..."
거친 숨을 몰아쉬며 레오는 검을 고쳐 잡았다.
"굉장하군. 그 공격을 막아내는 건 3서클 마법사 중엔 아무도 없었다."
"전 마법사만이 다가 아니니까요. 그리고..."
레오는 주저 앉는 몸을 일으키기 위해 검을 지팡이 삼으며 말했다.
"...완전히 막은 건 아닙니다."
방어력이 높은 아이언 스킨이라면 충격을 완전히 받아낼 수 있었지만, 전격 마법을 막아낼 수는 없었다.
그래서 택한 차선책, 스톤 스킨은 공격에 버틸 수 있게는 해주었지만 완벽하게 방어에는 성공하지 못했다.
[괜찮냐?]
<아뇨... 비슷한 걸로 한 방 더 맞으면 같은 방식으론 못 막아요.>
그전에 마나와 체력의 탈진으로 쓰러질 테지.
"널 더 시험하고 싶어졌어."
그녀는 공격으로 준비한 마법진을 해제했다. 그 의문스러운 행동에 레오와 관중들은 당황스러운 표정으로 그녀를 바라보았다.
"전에도 봤었지만, 네 검술은 동방의 삼재검법과 유사하더군."
삼재검법(三才劍法)
세 초식으로 만들어진 가장 기초적이고 기본적인 최하급 무공.
그렇기에 모든 무술의 바탕이 될 수 있는 근본이기도 했다.
그녀의 말대로 기본의 심화는 삼재검법의 묘리를 본뜬 레오만의 기술이었다.
"그렇다면 남은 세 번째의 기술이 있을 터, 그 기술을 보여다오. 이대로 끝내는 건 너무 아쉽군."
시험, 그 표현이 제일 적절했다.
공격할 기회를 줄 테니 최선을 다한 전력을 다하라는 뜻이겠지.
"...기회를 준 이상, 받아들이는 수밖에요."
레오는 몸을 낮추며 마치 한 마리의 표범과 같은 자세를 취했다.
<라이트닝 엑셀>
전신 구석구석으로 낙뢰가 떨어진다. 3서클에서 라이트닝을 개량한 육체 강화용 마법.
지금 레오의 운동 및 반사신경은 아리아스필조차 뛰어넘는다.
"...삼재검법이라 하셨습니까? 그 이상을 각오하십시오."
지금 보여줄 것은 검술에 한정되지 않는다.
"호오...!"
이윽고 자세를 취한 레오는 준비한 기술을 시전한다.
•던지기 제10형 투(投) 조준 투척
그건 찌르기도, 막는 것도, 하물며 휘두르는 것도 아니었다.
일순 몸에 뻗은 낙뢰가 투창의 형태로 뻗어나갔다.
"...이건...!!"
에일린은 급히 방어막의 형태를 일점으로 축소시켰다. 그녀가 예상했던 건 검술, 돌진을 통한 근거리 공격이었다.
하지만 레오가 뽑아든 건 창술, 그것도 원거리에서 투창한 공격이었다.
'...하지만 못 막을 정도는 아니군.'
예상 외이긴 했으나 투창은 의외로 위협적이지 못했다. 여러 겹의 방어막을 집중시키니 투창된 창은...
'....창이 없어...?'
아직 깨질 예상은 더 남아있었다. 날아온 창은 변형된 검은 돌이 아닌, 라이트닝의 잔여로 남은 전격 덩어리였다는 사실이 그 예였다.
"그럼...!"
에일린은 대응을 위해 주변을 돌아보았다. 전방에도, 후방에도 레오가 없자 그녀는 남은 방향으로 고개를 올렸다.
'...위쪽에서...!'
공중으로 뛰어든 레오가 든 것은 검은색 활, 활시위에는 암석 마법으로 만들어진 화살이 걸려져 있었다.
"일격이라 한 적은 없습니다...!!"
•쏘기 제9형 사(射) 조준 발사
체공하는 찰나, 공중에서 화살비가 쏟아진다. 위력은 약했으나 하나라도 제대로 적중한다면 에일린으로서는 굴욕이나 다름없었다.
"맹랑하군."
[템페스트 블래스트]
화살비가 폭풍 앞에 흩어진다. 그리고 그 바람의 충격은 레오에게로 향했다.
"...아직...!"
검은 돌을 다시 방패로 바꾸며 레오는 바람 앞으로 뛰어들었다.
•치기 제7형 타(打) 정권 치기
7형의 타(打), 본래라면 주먹을 사용한 정권 기술, 하지만 방패를 그 위에 덧씌운다면 패링으로도 사용이 가능한 기술이었다.
바람의 위력이 되받아쳐지며 레오는 낙하에 박차를 가했다.
"...이걸로...!"
반대손의 손날에 오러를 집중한다. 창이나 검으로 찌르는 것보단 못하지만, 지금은 강철도 관통할 수 있는 수도(手刀)나 다름없었다.
•찌르기 제6형 척(刺) 손날 찌르기
방어막이 차례 격파돼간다. 철두철미한 그녀답게 몸 주변에도 최소 다섯 겹의 방어벽을 감싸놓은 뒤였다.
카가가가각!
한겹, 두겹, 차례로 방어벽이 손날 앞에 무너져간다. 남은 거리는 두뼘조차 되지 못했다.
"...하아...허억...!"
그런 필살의 노력에도 레오의 공격은 닿지 못했다.
"훌륭했다."
확실히 손날 공격은 방어벽은 전부 다 깨부섰다.
다만 겹쳐진 방어막은 각도를 차례로 기울게 하는 것으로 공격 방향을 완전히 비껴가게 만들었다.
"다만 패인이 있다면 마나 부족으로 마법을 쓰지 않은 것과..."
에일린은 반격으로 지팡이를 휘둘러 레오의 공격을 받아쳤다.
"내가 마법사라는 이유로 근거리전에서 방심했다는 점이겠군."
크고 무거운 지팡이는 둔기로서도 유용했다. 그녀의 봉술은 탈진으로 지친 레오에게 반격할 만큼 충분히 숙련되어 있었다.
"하지만 너의 기량은 우리 가문의 마법사들에게도, 라인하르트의 기사들에게도 드문 편이다. 네 나이대를 생각하면 이런 재능은 아예 존재하지도 않을 테지."
그녀는 쓰러지는 레오를 한팔로 안으며 말했다.
"마음에 들었다. 충분하겠어."
정신을 잃어가는 레오를 붙잡으며 그녀는 말했다.
"이제부턴 내 사람이 되어줬으면 좋겠군. 여긴 사람이 많으니, 우선 장소를 옮기지."
에일린은 일순에 순간이동의 마법진을 구성하며, 레오와 자신을 이동시켰고.
아리아스필이라는 존재는 그 광경을 보며 흉흉한 살기가 담긴 검을 뽑아들었다.
다행이며 안타깝게도 에일린의 공간이동이 더 빨랐지만 말이다.
<+--|-|--+>
EP.50 아리아는 배운다-4
현재 상황이 이해가 안 되기에 천천히 정리해보겠다.
분명 자신은 결투장에서 전력을 다해 에일린과 맞붙었다. 그리고 필살의 공격이 실패하고 제압당해 패배했다.
그래, 분명 그럴 터였다.
"왜 가만히 있지? 홍차는 취향이 아닌가?"
근데 왜 지금 자신은 카페에서 홍차를 먹고 있는가.
그에 대한 의문은 여전히 해소되지 않았다.
[갑자기 순간이동했잖아. 기억 안 나냐?]
그러고 보니 정신이 흐릿해지던 와중, 에일린은 자신을 안고 텔레포트의 마법진을 구성했다.
<...그리고 여기로 이동한 거군요.>
[아무래도. 발동 속도만 놓자면 칼렌하고 비등하네.]
<...아...예...>
분명 친우의 후손을 보며 호평하는 것인데, 앞서 들은 설명 때문에 묘하게 아련하게 느껴졌다.
차라리 그때 그런 얘기를 안 들었다면 아무 생각도 안 했을 텐데 말이다.
[근데 뭔놈의 찻집이 손님이 아무도 없대?]
현자의 말대로 카페에도 위화감은 존재했다. 아무리 한적한 시각이라 할지라도 이 찻집은 지나칠 정도로 인적이 드물었다.
"이 가게는 내가 개인적으로 운영하는 가게다. 일종의 취미라고 생각해도 좋지."
취미로 찻집에서 일하는 건 봤어도, 직접 카페를 운영하는 것은 처음 보았다. 역시 재벌가의 마법사라는 건가.
[그러고 보니 칼렌도 다도에 취미가 있었지. 각종 찻잎을 많이 가져와서 얻어먹을 때도 많았는데.]
이젠 현자의 말은 듣고 싶지 않았다. 현자의 잘못이라기 보단, 레오 스스로가 이 상황의 숨겨진 비밀을 아는 것에 쓰라린 고통을 느꼈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갑자기 찻집으로 데려온 이유가 뭐죠?"
"'단둘이 여유롭게 이야기를 풀어나가고 싶다.'라는 이유로는 부족할까?"
그녀는 찻잔과 설탕통을 내밀며 여유로운 웃음을 내보였다. 앞섬의 단추를 살짝 풀었기에 몸을 앞쪽으로 뻗자 가슴골이 드러났다.
"아무래도 부족하겠죠. 그런 거라면 평범히 걸어서 찻집에 온다는 방식도 있을 테니까요."
"자네라는 남자에게 흥미가 깊어서 말이네."
그러곤 드물게 입을 가리며 가벼운 웃음을 내보였다. 현자도 저런 에일린의 행동에 나름 재밌다는 듯 관전하고 있었다.
"자네에 대해 더 알고 싶어졌네만, 그 자리엔 방해꾼이 많았지."
그녀는 성숙한 매력을 물씬 풍기며 머리를 귓가 뒤로 넘겼다.
"차는 안 마시나?"
"죄송하지만, 현재 상황에 대해 이해가 된다면 즐기도록 하죠."
레오가 경계가 어린 눈치로 보자 그녀는 그 반응이 귀여웠는지 찻잔을 도로 가져와 자신의 입가로 대었다.
"보다시피 독은 없다. 풍미가 깊은 차이니 부디 편히 즐겼으면 좋겠군."
찻잔의 끝 면에는 입술연지의 자국이 깊게 남아있었다. 남자라면 의식할 수밖에 없는 강렬한 색이었다.
[칼렌보다 불여시 같은데?]
비교의 대상이 이상했지만, 레오는 당황하지 않은 채 찻잔을 잡았다.
"그럼 감사히 마시도록 하죠."
레오나르도는 가볍게 종이 냅킨을 뽑아 찻잔의 연지 부분을 닦았다. 그러곤 부드럽게 홍차를 들이켰다.
"예, 회복 포션까지 섞어주셨군요. 감사합니다."
"...위생에 꽤나 신경쓰는군."
얼핏 보기엔 무례해보이는 행동, 하지만 그건 레오나르도도 자각하고 있는 바였다.
"위생보단 대화에 감정을 줄이기 위한 의식이라 생각해주십쇼."
"조금 섭섭한 답변이로군. 선을 긋는 건가?"
"이런 방식으로는 절 설득하지 못한다는... 입장 표명이라고 생각하셔도 좋습니다."
레오나르도는 이런 유혹은 수도 없이 당해보았고, 이에 품격있게 대응하는 방법도 마련해둔 상태였다.
***
"...으아...!!"
연적에게 남자를 뺏긴 아리아스필은 결투장에서 검을 휘두르며 울분을 표했다.
주변에 관객으로 있던 마법사들조차 당황한 눈치로 사라진 에일린과 레오나르도를 찾기 시작했다.
"...이...이...!"
너무 끓어넘치는 분노에 아리아스필은 언어능력조차 상실했다. 아까 그 불여시가 레오나르도에게 속삭인 더러운 말들은 아리아의 귓가에도 울렸다.
<내 마음에 들었다. 내 반려가 되기 충분하겠어.>
<이제부턴 내 남자가 되어줬으면 좋겠군. 여긴 사람이 많으니, 둘이 오붓이 있게 우선 장소를 옮기지.>
뭔가 하지 않은 말까지 추가된 느낌이었지만, 아리아스필은 분명 그렇게 들었다.
"...어디로...! 어디로 갔지...?!"
그 여자만큼은 용서하지 못한다. 절대로 멀쩡히 두지 않을 것이다. 레오를 탐하는 여자들은 모조리 자신의 손에 잘라내버릴 것이다.
[...이쪽이야...]
그 순간, 마나의 정수가 그녀의 마음과 공명했다.
"어...?"
[레오는 이쪽에 있어...!]
주변을 떠다니고 있는 정령들은 마나를 공유하며 레오의 위치를 알려주었다.
"...고마워...!!"
감사하다는 말과 달리, 아리아는 증오와 질투가 이글거리는 표정으로 결투장을 뛰쳐나갔다.
***
정령을 따라 도착한 곳은 한적한 거리의 찻집, 마나의 요정들은 카페 내부 쪽을 향해 방향을 가리켰다.
다행이라고 해야할지 카페 창문에는 블라인드가 쳐져 있지 않아 내부가 들여보였다.
문제는 대화를 듣기 위해 근처로 가면 들킨다는 점에 있었다.
"...그렇다면..."
아리아는 레오나르도에게 배운 오러의 응용법을 사용했다. 전신에 퍼져있는 마나를 한 곳의 감각 기관에 응집시켜면 그 기관의 성능은 몇 배나 강하게 증폭된다.
눈에 오러를 모으자 시력이, 귀에는 청각이 강회되었다. 본래 레오가 이 기술을 알려준 이유는 독이나 야습과 같은 상황에 대비하라는 이유로 가르친 것이었으나, 아리아스필은 사용하는데 거리낌이 없었다.
지금 자신은 엄연히 자신의 기사를 보호하기 위해 이러는 거였으니까.
시력이 강화되자 흐릿한 카페 내부에 확실하게 보였다. 카페에는 에일린과 자신의 레오가 오붓이 마주보고 차를 마시고 있었다.
"...저...저 불여우가...!!"
저 색정에 찬 눈을 봐라, 저 불여시는 순수한 레오를 어떻게든 홀려보겠다고 갖은 발악을 해대고 있었다.
일부러 저렇게 가슴골을 드러내는 것도 그렇고, 하찮게 눈웃음을 짓는 것도, 상냥한 척 찻잔을 내미는 것도 괘씸하기 짝이 없었다.
레오도 당황한 나머지, 차에는 손도 안 대고 있지 않은가.
지금이라도 데리고 나오면 저 불여우에게서 레오를 구출해낼 수 있을 것이다.
그렇게 생각하며 뛰어가려던 순간,
"보다시피 독은 없다. 풍미가 깊은 차이니 부디 편히 즐겼으면 좋겠군."
저 불여시는 건방지게 선을 넘었다. 자신도 간신히 시도한 키스를 저 여자는 태연히 찻잔이라는 편법을 이용해 시도하려고 했다.
그 더러운 입술의 타액은 찻잔의 면에 진하게 남아있었다.
'...들지 마...! 마시지 말라고...!! 레오...!!'
그런 기대를 깨부수며 자신의 기사는 찻잔의 손잡이를 잡았다.
"그럼 감사히 마시도록 하죠."
배신감이 몸에 깊게 스며든다.
지금 저 레오나르도는 꿈속의 입맞춤을 기억하고 있지 못할 것이다.
그러면 저 찻잔을 허락하는 건 저 여자와의 간접적 첫 입맞춤을 허락한다는 뜻 아닌가.
만약 자신의 기사가 저 잔을 입에 댄다면, 그 타락한 입술을 자신의 것으로 다시 몇 번이고 덧씌울...
"예, 회복 포션까지 섞어주셨군요. 감사합니다."
레오나르도는 차를 가볍게 들이켰다. 하지만 아리아는 분노하지도, 질투하지도 않았다. 자신의 레오는 지조있게 찻잔을 냅킨으로 닦은 뒤 차를 음미했기 때문이었다.
'...의심해서 미안해애...!! 사랑해애...!! 레오나르도!!'
그 현명한 대처에 아리아스필은 더욱더 사랑이 샘솓았다. 만약 진도만 더 나갈 수 있다면 양팔로 껴안은 채 계속 칭찬을 속삭이고 싶었다.
"...위생에 꽤나 신경쓰는군."
저 불여시의 얼굴이 조금 일그러진다. 필시 건방지게남의 것을 탐했기에 벌을 받은 것이었다.
"위생보단 대화에 감정을 줄이기 위한 의식이라 생각해주십쇼."
"조금 섭섭한 답변이로군. 선을 긋는 건가?"
"이런 방식으로는 절 설득하지 못한다는... 입장 표명이라고 생각하셔도 좋습니다."
철벽을 치며 레오나르도는 품격있게 찻잔을 비웠다.
"그런가? 나름 괜찮은 전략이라 생각했는데."
에일린은 오히려 레오의 반응이 재밌었는지 일그러진 얼굴을 폈다.
"사실 냉정히 생각하면 당연합니다. 당신은 야심가니까요."
야심가, 한 단어로 그녀를 정의 내렸음에도 아일린은 전혀 부정하지 않았다.
그녀 자신조차 인정하는 사실이었으니까.
"야심가는 사랑조차 목표의 초석으로 삼죠. 사랑으로 맺은 인연은 이용하기도 쉬운 법이까요."
결혼이나 약혼은 귀족계를 넘어 왕국 간에서도 자주 사용되는 정치 전략이었다. 사랑을 핑계로 서로와 연을 맺고 이득을 얻는 정치적 수단, 아일린에게 사랑이란 그런 것이었다.
"아무리 허용해도 남작 작위 이내, 또는 마법사 가계로서 재산이나 혈통이 뛰어나지 않고서야 당신은 이성과 연을 맺지 않을 것입니다. 아닙니까?"
단정짓는 어투, 부정하려면 얼마든지 할 수 있었지만 아일린은 미소를 지은 채 그 이야기를 들었다.
"...대단하군. 어린 소년인 줄 알았는데, 속 안에는 늙은 현인이 잠들어있어."
[어떻게 알았대? 역시 칼렌의 후손.]
이 미묘한 관계에 레오나르도는 쓸린 상처에 모래와 소금을 뿌리는 고통을 느꼈지만, 흐트러지는 표정은 간신히 붙잡을 수 있었다.
"하지만 다른 방식으로 설득한다면 이야기는 달라질 수 있겠지."
그렇게 말하며 그녀는 큰 봉투를 내밀었다. 처음에는 돈이라고 생각했으나 의외로 봉투에는 각종 사진과 서류가 담겨있었다.
"이건..."
"본디 템페리우스 가문은 마탑에 소속되면 안 된다. 마법이 삐뚤어진다면 마탑이 다잡으면 되지만, 마탑이 타락한다면 그걸 붙잡을 자는 우리 가문 이외엔 없으니까."
지당한 말이었다. 실제로 마탑에서 비리나 불상사가 발생했을 때, 마탑에게 제일 영향을 끼칠 수 있는 건, 템페리우스 가문 이외엔 없었다.
"그렇군요. 지위에 맞는 훌륭한 정신과 책임감입니다."
"그 서류에도 우리 가문의 정신이 책임져야할 문제가 들어있지."
서류와 사진을 살펴보자 레오나르도는 조심히 봉투에 다시 집어넣으며 질문했다.
"이걸 저에게 보여주셔도 되는 겁니까?"
"글쎄... 도박이긴 하지만, 손해볼 일은 아닌 것 같군."
사진엔 각종 마법사들이, 서류에는 그 마법사들의 인적 정보가 적혀있었다. 좀 더 자세히 설명하자면 그 인물의 범죄 및 비리 행각이 자세히 기술되어 있었다.
"정말 마탑 내에 이런 행각이 일어나고 있습니까?"
[...넌 천성이 사기꾼이야. 어떻게 그렇게 사기가 자연스럽냐?]
현자님도 공범이니까 조용히 해주셔야겠습니다.
"그게 내가 마탑에 온 이유다. 대략 일주일 사이에 마탑주들과 가문과 연이 마법사들에게 연락이 왔지. 그러곤 이 비리와 범죄 행각을 신고했다."
"...이렇게 대규모로요? 어떻게...?"
사실 답은 이 자리에 있는 모두가 아는 비밀이었다.
"자네가 찾은 현자의 유산, 진실과 사실의 목장식 덕분이지."
그게 레오의 계획이었다. 이렇게 빠르게 서로가 자멸할 줄은 몰랐지만, 이 상황은 레오 자신에겐 전혀 불리할 게 없었다.
"목장식을 공개적으로 전시관에 보관했기에, 불충분한 증거를 보충할 수 있었다. 우연치곤 절묘하지."
"...뭔가... 당황스럽군요. 전 단지... 현자님의 유산을 세상에 알리고 싶었을 뿐이었는데..."
옆 방향에 있는 현자의 시선이 차고 시리게 느껴지지만, 레오나르도는 태연히 대화를 이어갔다.
"그런가? 난 상황을 전개시킨 흑막이 너라고 생각된다만."
정확한 추리...라고 생각한다면 그녀의 수에 말리는 것이다.
"의심하는 건 이해가 되지만, 확신하는 까닭은 묻고 싶군요. 어째서죠?"
왜냐하면 레오에겐 여유와 확신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먼저 네가 온 기간과 증거가 모인 시기가 겹친다는 점, 그리고 목장식을 얻은 뒤 전시관에 공용 시설로 설치했다는 점이 의심스럽군."
확실히 그건 타당하게 고려해볼만한 문제였다. 용의자 선상에 들어가도 이상할 건 없지.
"하지만... 이 증거를 얻으려면 상당한 수사가 필요할 겁니다. 실제로 템페리우스 가문과 마탑 측에서도 이 비리들을 놓치고 있었으니까요."
아직 논리가 부족했다.
"게다가 제가 만약 계획의 흑막이라면, 고려해야할 것이 하나 있어야 합니다."
레오에게는 결정적인 알리바이가 충분했기 때문이다.
"이 위험을 무릅쓰고 제가 이 사건을 벌인 것으로 얻는 이득."
동기의 결여.
"동기가 없죠."
그녀가 아직 레오를 추측의 범위에만 놓는 이유, 그건 증거를 모을 능력이나 현자의 유산을 얻는 것에 대한 방법 따위가 아니었다.
이 계획적이고도 복잡한 행위로 레오나르도가 얻는 목적과 이득, 그 자체가 불분명했기에 아일린은 이 방식으로 추측을 확인하려 한 것이다.
"...역시, 이런 가벼운 수는 안 통하는군."
"마치 제가 진범이라는 말 같군요."
레오가 이러는 이유는 어디까지나 미래, 회귀자로서 본 미래가 있기에 이런 행동을 하는 것이기에.
현대에 사는 그녀로선 이해할 수도, 추측할 수도 없는 영역이었다.
"...사실 진범이니 범인이니 하는 표현은 끌리지 않는군. 애당초 이 소행은 범죄라 하기도 모호하니까."
오히려 주변의 범죄를 밝혀내고 수사에 협력한 것이나 다름없으니 마탑과 가문 입장에선 감사한 일이나 마찬가지였다.
"하지만 대단하군. 바로 내 추리의 허점을 논파할 줄이야."
"서로 입장을 이해하는 것, 소통과 추리의 기본이죠."
멀찍이서 이 대화를 엿듣고 있는 아리아스필은 당황한 눈치였다.
'...이게 무슨 얘기지...?'
상황의 흐름이 너무 복잡해 갑자기 끼어든 자신으로서는 완전히 파악할 수 없는 고도의 대화였다.
그런 아리아스필을 모른 채, 레오는 냅킨으로 손에 묻은 물기를 닦아내었다.
"좋은 평가 감사합니다. 유익한 대련과 대화에 한 수 배웠습니다."
그렇게 자리를 뜨려던 순간,
덥썩
"그렇기에 자네가 더 아깝군."
에일린은 레오의 손목을 잡았다.
"만약 자네가 귀족이었다면, 몰락 가문이라 할지라도 어떻게든 우리 가문과 연을 맺었을 거다. 결혼? 그 정도야 우습지."
멀찍이 있는 한 소녀가 그 대담함에 온갖 증오를 표출하고 있었으나, 이곳까지 닿을 거리는 아니었기에 아무도 몰랐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아니군요."
그녀는 살짝 힘을 주어 레오를 자리에 다시 앉혔다.
"그래서 제안하지. 내가 만약 자네를 귀족으로 만들어줄 수 있다면 어떤가?"
레오나르도는 그 제안에 당황했는지, 말을 조금 떨었다.
"...설마 작위 수여입니까? 그건 아무리 템페리우스 가문이라도 실현하기 어렵고, 타격도 클텐데요."
"발상이 귀엽군."
그녀는 그렇게 말하며 다른 서류를 쥐어주었다. 레오는 말의 의문을 풀기 위해를 서류를 살펴보았다.
"...이분들은..."
"작위 계승은 혈통보단 가족 관계의 세습에 가깝지."
서류의 내용에는 미혼의 마법사들과 자식을 못 얻거나 사고로 잃게 된 마법사들로 채워져 있었다.
"만약 귀족, 그것도 마법사 가문이 널 입양한다면 너의 직위는 어떻게 될까?"
어렵지 않은 질문이었다.
대화에 따라가지 못한 아리아스필조차 대답할 수 있을 정도로.
"하지만 저에게도 부모는 있습니다. 사정이 있지만..."
"그에 대한 방법도 생각해보았다. 너에겐 상당한 무례겠지만, 응당한 각오를 하고 말하지."
그녀는 부드럽게 차를 한 모금 마시며 입을 열었다.
"만약 네가 입양에 대한 제안을 받아들인다면, 템페리우스의 모든 정보력과 기술력을 동원해 네 부모를 찾아주마."
템페리우스 가문의 마법은 마탑보다 호각, 그것도 수사와 관련된 업무가 많은 만큼 추적과 탐색에 관한 마법으로는 정점에 가까웠다.
레오나르도는 손에도 약간의 떨림이 생기는 걸 체감했다.
실제로 전생에도 어머니의 시체는 찾지 못했기 때문이었을까. 아니면 마음 한켠으로 어머니의 생존을 믿고 싶었기 때문이었을까.
레오 본인조차 그 이유를 들추어내고 싶진 않았다.
"설사 우리 가문과 연을 만들지 않는다 할지라도 말이야."
그 말에 아리아는 질투도, 분노조차 낼 수 없었다.
아일린의 제안은 무게를 체감할 수 없을 정도로 무거웠기에, 자신의 사랑이라는 행위는 한없이 가벼워져만 갔기에.
아리아스필은 절망스레 침묵할 수밖에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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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P.51 아리아는 배운다-5
레오나르도의 어머니
렌은 레오가 9살에서 10살로 넘어갈 무렵, 한 의뢰를 받으며 마을 밖으로 나갔다.
이번 의뢰만 되면 몇 달은 두 다리 쭉 피고 살 수 있을 거라며 호언장담을 하는 그녀였기에, 그리고 자신의 어머니를 믿었기에 레오는 묵묵히 집을 지켰다.
한 달이 지났을 때는 수당만큼 어려운 일이었다고 생각했다. 용병업은 듣는 것으로는 실감할 수 없는 고충이 있었으니까.
두 달이 지났을 때는 걱정이 턱밑까지 차올랐다. 설마 돌아오지 못할 정도로 다친 것일까, 아니면 자신을... 버린 것일까.
세 달이 지나자 레오나르도는 어머니와의 약속을 떠올렸다.
3개월 동안 연락이 아예 오지 않는다면 자신은 죽은 거나 다름없다고. 그리니까 더 미련을 갖지 말라고.
그렇게 소년은 약속을 기억했고.
-다녀올게.
약속을 지키지 않은 채 사라진 어머니를 찾으러 갔다.
아직 10살 무렵의 일이었다.
***
아리아스필은 질투도, 하물며 에일린에게 있는 분노마저 사그라들었다.
그건 용서니 관용과 같은 자비로운 감정 때문이 아니었다.
부정할 수조차, 반박할 수도 없는 절대적인 의미, 절망만이 아리아에게 덩그러니 남아있었다.
'...레오의 부모...'
아누스 촌장에게 모든 이야기는 들어 알고 있었다. 레오가 무슨 이유로 마을 떠난 건지, 3년 동안 그런 몸이 되면서까지 무엇을 찾은 건지 말이다.
"멋대로 가정사와 사생활을 조사한 것은 사과하마. 하지만 이 제안만큼은 진심이다."
레오는 살짝 경직된 표정으로 차가운 말투로 물었다.
"부모님을 가지고 거래를 하자는 뜻입니까?"
"네 매도와 경멸을 부정할 생각이 없다. 이건 내 의도와 관계없이 그렇게 받아드릴 수밖에 없는 문제니까."
하지만 에일린은 그에 맞는 각오를 다진 뒤였다. 그건 그녀가 야심가이기 때문만이 아니었다.
"하지만 난 진심으로 너에게 도움을 주고 싶었다. 아직 스무 살 도체 되지 못한 네가 그런 능력과 힘을 얻기까지, 어떤 일을 겪었는지 나로서는 상상도 할 수 없으니 말이지."
아리아스필은 레오의 힘과 노력이 단순히 대단한 것이라고만 생각했다. 그런 힘을 얻기까지 일구어낸 노력은 진심으로 가치있는 것이라고 믿고 있었다.
하지만
아리아는 지금 깨닫게 되었다.
힘과 노력을 하지 않으면 아예 사는 걸 허락할 수 없는 인간도 있다는 것을.
그 사람을 늘 상 곁에 두고도 자신은 사랑에 그저 히히덕거렸다는 것을.
"그렇기에 꼭 우리 가문과 연을 맺는 것을 전제로 두진 않았지. 난 어른으로서 네 선택을 존중하고 싶으니까."
그렇기에 에일린에게서 레오를 떼어놓을 수 없었다. 사랑이나 죄책감이라는 같잖은 감정 때문이 아니었다.
자신에게 이 일에 간섭할 자격은 처음부터 없었고, 레오나르도에게도 선택할 권리도 있었기에.
그녀는 절망스레 마음을 닫고 접었다.
듣는 것조차 두려웠기에 귀와 눈에 있는 오러마저 점차 사라져갔다.
그렇게 점차 소리가 희미해질 무렵,
"죄송하지만, 제안은 거절하겠습니다."
자신의 기사는 선택을 내렸다.
"역시...불쾌했나?"
"아뇨. 이런 은혜와 제안은 쉽게 오지 않는다는 건 알고 있습니다. 하지만 설사 제가 직접 말해 제 가정사를 알고 있는 사람이 이를 제안해도 전 거절했을 것입니다."
어느샌가 다시 감각은 집중되었다.
"...이유를 들어봐도 되겠나?"
레오나르도는 망설임 없이 대답했다. 처음부터 망설일 일이 아닌 것처럼.
"그게 제가 약속을 지키는 방식이니까요."
"가문의 충의를 중시하는 건가?"
야심가와 같은 판단, 분명 냉정히 생각하면 그렇게 결론이 도출될 것이다.
"그럴 수도 있겠지만, 제 사람들과의 약속도 지키기 위해서도 있습니다."
하지만 레오는 지략가일 뿐, 야망에 불타는 야심가는 아니었다.
"가주님과의 약속, 크리스 님과의 약속, 설사 가문에서 일하는 사용인조차 제게 인덕을 주고 인연을 나눈 소중한 사람입니다. 그런 그들을 저버릴 수는 없습니다."
지금의 소년은 자신을 나로서 있게 해준 사람들을 소중히 여긴다.
"부모를 찾는 건, 어떻게 생각하지? 원한다면 조건을 바꾸는 것 또한 고려..."
"그리고 어머니와의 약속도 지켜야하니까요."
레오나르도의 어머니, 렌은 항상 용병으로 일을 나가기 전에 항상 하나의 약속을 했다.
-3개월, 아무리 길어도 사람이 죽는 걸 확인하는데는 딱 3개월이 걸려. 그러니까 3개월이 넘어도 돌아오지 않으면 난 죽었다고 생각해.
어린아이에게는 여과 없는 사실적인 통보, 그럼에도 레오나르도는 고개를 끄덕이며 약속을 했다.
렌은 언제나 일주일 안으로는 돌아왔기 때문이었다.
"마을 밖을 나가서 1년 동안은 어머니의 흔적을 찾아 돌아다녔죠,"
처음은 용병 길드에 가봤다. 사망 처리가 되어있다면 유족에게도 통보가 될 테니, 그에 대한 걸 묻기 위해서였다.
-...렌 님은 2개월 전부터 실종 처리가 되었습니다. 시체를 찾지는 못했지만...
당시에는 그걸로도 충분했다. 시체라는 확답이 없는 이상, 희망을 걸만 했으니까.
"그렇게 2년째 되는 날, 전 포기했습니다. 세상은 차마 제가 화날 게 두려웠는지 확답 대신에 완곡어법을 즐기더군요."
어머니의 시체는 계속 나오지 않았고, 그녀의 지인들은 먼저 렌을 포기한 지 오래였다.
레오나르도는 그런 실낱같은 희망에 매달리기에는 너무 어렸고 지쳐있었다.
"그제서야 전 엄마와 약속을 지킬 수 있었죠. 받아드리는데까지 너무 오래 걸린 겁니다."
"..."
에일린도, 아리아도, 하물며 현자조차, 그리고 말한 레오마저 잠시 침묵에 빠졌다.
"만약 템페리우스 가의 힘을 빌려 부모님의 시체라도 찾는다면 분명 그건 다행인 일일 겁니다. 저로서도 어머니를 무덤에 직접 모시고 싶거든요."
레오의 눈은 무심한 슬픔에 적셔져 있었다. 자식을 잃은 부모의 고통을 헤아릴 수 없다지만, 자식이라고 부모를 편히 보낼 수 있는 것은 아니었기에.
소년은 슬픔에 잠겨있었다.
"하지만... 만약에, 어머니께서 정말 살아계시다면..."
그 슬픔에 기포가 조금 끓어오른다. 잔잔한 무심의 수면이 기포에 의해 흔들린다.
"어떻게 만나야 할지 모르겠군요. 만약 정말 저를 버린 게 사실이라면, 지금까지의 모든 힘든 세월과 사랑이 모두 원망으로 변해 도저히 용서가 안 될 것... 같거든요..."
회귀했기에 어머니가 죽은 것은 알고 있다. 그에 대해 부정할 생각은 없었고.
다만 부모의 그리움과 미련은 속없이도 레오에게의 마음에 꽈리를 튼 지 오래였다.
"...미안하군. 어줍지 않은 방법으로 네 상처를 더 덧나게 만들었어."
"괜찮아요. 어차피 전 템페리우스 가문에 안 들어갈 거고, 라인하르트에 뼈를 묻을 생각이거든요."
괜찮다고 말하면서 날리는 돌직구, 그건 선을 긋는 것과 동시에 그녀의 죄책감을 지워주는데 큰 도움을 주었다.
"가문에 대한 충심이 지극하군. 자네와 같은 인재를 포섭할 수 없는 게 한이야."
"가문의 충심이라, 물론 그것도 있겠지만."
레오나르도는 씨익 웃어보이며 말했다.
"아리아 아가씨를 혼자 둘 순 없거든요."
아까와는 반전되고 상반되는 화사한 웃음.
"아가씨 곁엔 제가 있고 싶어요."
걱정과 슬픔 하나 없는 해맑은 미소였다.
멀리 있는 아리아스필은 그 말에 얼굴을 붉혔다. 이윽고 시선이 겹치자 그녀는 황급히 얼굴을 숨겼다.
하지만 장거리에 있는 레오로서는 그 황급히 숨긴 홍조를 볼 수 있을 리가 없었다.
"...하늘은 참 무심하시군. 내가 먼저 만났더라면 템페리우스는 분명 대성할 수 있었을 텐데."
"그럼 전 하늘에게 감사해야겠군요. 아리아스필 님의 곁에 있을 천운을 주셨으니 말이죠."
이젠 귀까지 붉어져 아리아는 황급히 귓가의 오러마저 빼내었다. 너무 사람이 사랑스러운 나머지, 아리아는 소년의 얼굴을 영접하는 걸 멈추었다.
"얄미운 남자로군."
"그런 말은 많이 듣는 편이죠. 그럼 먼저 일어나보도록 하죠."
"잠깐, 아직 할 말은 남았다."
그 말에 레오나르도는 조금 당황한 눈치였다. 아직도 남은 수단이 있는 것일까.
"걱정하지 마라. 설득하려는 말은 아니니."
그녀도 식은 찻잔을 비우며 작은 당부를 남겼다.
"나와 마탑주들은 이 비리를 마법협회로 가 처리할 것이다. 물론 징계를 받는 마법사들도 마찬가지겠지. 이런 규모의 사태는 마탑에서도 처음이니까."
비리과 범죄에 대한 징계는 셀수도 없이 많지만, 이렇게 큰 규모의 범죄가 몇 년치로 한꺼번에 몰아서 신고됐으니 대규모적인 정리가 일어날 것이다.
가문과 마탑 입장에선 처리가 복잡하고 곤란할테지.
"제법 혼란스럽겠군요."
"그래, 혼란스럽지. 그리고 이런 혼란에는 더한 광란이 더해지기 마련이고."
그녀는 그렇게 말하며 한 가지 사실을 더 말해주었다.
"최근 마탑 주변의 실종이 많이 늘고 있다. 아직 피해자는 적지만 당한 대상이 마법사인지라 조금 의심스럽더군."
"...흑마법사입니까?"
빠른 추측과 예상에 에일린은 조금 놀란 눈으로 레오를 바라보았다. 하지만 이내 더 놀랄 것도 없다는 듯 피식 웃음을 내었다.
"그렇게 추측은 하고 있지. 원래라면 내가 수사해야 하지만, 이런 일이 터진 이상 바로 돌아올 수는 없을 거다."
"그 사이에 흑마법사가 다시 날뛸 거라는 뜻입니까?"
"...확신이 없지만, 그럴 가능성은 충분히 있다. 징계 절차로 마탑주들이 자리를 비울 때, 범죄율이 올라는가는 건 당연한 현상이니까."
그렇다고 다른 마탑주 중 한 명이 마탑을 지키기에는 사건의 규모가 너무나 컸다. 만약 자신이 관리하는 마탑에 문제가 생기고 변호나 해명이 늦는다면 그 책임은 자신이 온전히 떠안아야 했으니까.
"어디까지나 조심하라는 당부다. 너나 네 아가씨가 쉽게 당할 것 같지도 않지만 말이지."
"걱정해주셔서 감사하군요. 혹시 짚이는 부분이 생긴다면 알려드리도록 하겠습니다."
"얄밉도록 고맙군."
그렇게 말하며 레오는 카페 밖으로 나갔다.
[괜찮겠냐?]
<...시체가 남아있을 거라는 보장도 없으니까요.>
레오나르도라고 2년 만에 포기한 것은 아니었다. 다만 그럴수록 죽었다는 증거만 명백해졌을 뿐이니 그만뒀을 뿐이지.
<이젠 극복할 때도 됐죠.>
[그러냐. 그러면 됐고.]
참 싱겁고 심심한 문답이었다.
그래서 오히려 편했다.
[저기 아리아 아니냐?]
"...어? 그러네요?"
근처 시내에서 걷고 있는 아리아스필, 아무래도 사라진 자신을 찾는 눈치였다.
"아가씨!!"
레오는 그런 아리아를 향해 반갑게 뛰어갔다.
"어? 레오...?"
하지만 아리아스필은 조금 지친 기색이었다. 격전에 참여한 레오보다도 지친 눈치였다.
"...괘...괜찮으세요?"
"어...? 어어..."
척 봐도 괜찮지 않았다. 숨은 계속 헐떡이고 있었고, 시선도 고르지 못한 것이 마나 탈진 증상과 유사했다.
'...설마 나 때문에...'
자신을 찾기 위해 그렇게 무리를 한 것인가. 이렇게 마나를 낭비하면서까지... 자신을 위해서...
"...아가씨, 업어드릴게요. 지금 상태로는..."
"아냐, 괜찮아. 너도 아까 무리했을 텐데..."
그리고 아리아가 지친 이유는 따로 있었다.
'아까 대화에 집중하느라 마나를 너무 소비했어...'
아리아는 그저 더 확실하고 깔끔하게 훔쳐보기 위해 오러를 낭비시켰을 뿐이었다.
"그러지 마시고... 흣...?!"
그 소리에 아리아는 레오를 바라보았다.
명백한 신음.
고통으로 인한 곡소리라 하기엔 야릇하고,
공포로 인한 비명이라 하기엔 색정적인,
성욕에 의한 신음이었다.
"...레오...?"
"죄...죄송합니다. 무리하게 부축하다가 실수로..."
레오는 급히 손을 그녀의 흉부에서 치웠다. 아마 쓰러진 것 같은 그녀를 팔로 붙잡다가 우연치 않게 닿은 것 같았다.
"흐응~"
여유로운 미소가 절로 나온다. 항상 철저하고 여유로운 레오나르도의 당황한 표정을 보니 묵은 피로가 싹 가시는 느낌이었다.
"그래? 난 괜찮은데 말이지~"
소악마 같은 장난스럽고 요망한 미소, 그렇게 말하며 아리아는 레오의 팔을 잡았다.
"예? 그게 무슨...?"
그러고는 자신의 가슴골 사이에 단단한 팔뚝을 끼워 넣었다. 그러곤 팔짱을 끼어 레오의 팔을 완전히 결박시켰다.
부드러운 피부와 풍윤한 지방의 감촉, 당황스러운 걸 넘어 잠시 황홀하다 느낄 정도의 촉감이었다.
"자...! 잠깐만요...!! 이런 건...!!"
"왜? 나한테는 이런 부축도 못 해줘?"
태연하다 못해 능청스럽기까지 한 질문.
이건 부축보단... 부축이라 하기엔...
양팔을 압박해오는 태산 같은 존재들이 소년의 온 신경을 자극했다.
어린 소녀는 고작 몇 년 만에 숙녀와 비등한 몸매를 지니게 되었다.
목석같은 소년을 움직이게 할 정도로 말이다.
그때 아리아는 배웠다.
이 둔감한 남자의 마음을.
<+--|-|--+>
EP.52 아리아는 배운다-6
"...으...어..."
"저기...?"
오늘 아메리는 심히 당황한 눈치로 자신의 옆에 있는 사람을 바라보았다.
분명 며칠 전만 하더라도 템페리우스 가의 마법사와 정면승부를 벌였을 만큼 건장한 소년이었다.
"...어...어..."
근데 왜 지금은 자신보다도 못한 시체꼴을 하고 있을까, 고작 며칠 사이 만에 사람이 저렇게 수척해질 수는 있는 걸까.
그 의문을 풀기 위해 아메리는 레오에게 말을 걸었다.
"...그...레오나르도 군...?"
"...예?"
거의 언데드 수준으로 피곤한 표정으로 레오는 아메리를 바라보았다.
"아, 아메리 씨, 다크서클도 많이 없어졌네요. 반지가 효과가 있나 봐요."
아메리는 반지를 보며 미묘한 표정을 지었다. 차라리 반지가 공유할 수 있는 물건이라면 레오에게 빌려주고 싶은 심정이었다.
"...괜찮은가요...?"
"...예? 예예... 최근에 마법 수련을 자주 하다 보니까요."
곧 있으면 마탑도 떠나야 하니 남은 기간 동안 최선을 다해 마법을 공부할 필요가 있었다.
게다가 이번에 배우는 건 단순히 노력만으로 해결할 수 있는 문제가 아니었다.
[그러니까 적당히 하라니까. 애초에 실전에 쓰려고 하는 게 아니라고.]
<그래도 닿는 데까지는 해봐야죠.>
[지금 만든 고유 마법만 해도 10개가 넘어. 사흘 동안 너 3시간밖에 안 잤잖아.]
그 말대로 지난 3일 동안, 레오나르도는 계속 밤을 새가며 고유 마법의 개발에 전념했다.
<근데 전혀 쓸모가 없잖아요.>
[원래 그런 거라니까.]
하지만 그 고유 마법들은 전혀 실용성과 실전성이 없었다. 그것들을 쓸 바에는 정석대로 알려진 범용 마법을 사용하는 게 효율적이었다.
[고유 마법을 만드는 건, 애당초 마법에 대한 이해도를 높이기 위한 수련이 주목적이라고. 직접 만드는 방식이 더 좋으면 정석이라는 게 왜 있겠냐?]
얄밉지만 현자의 지적은 정론이었다.
현자가 고유 마법의 형성 방식을 알려준 건, 어디까지나 마법에 대한 이해와 응용력을 늘리라는 의미에서였다.
몇 세기가 넘도록 다듬어지고 이어져온 정석의 마법이, 일개 개인의 마법에게 밀리는 게 더 이상했다.
[고유 마법을 만드는 게 대마법사가 아니라, 마법 자체를 잘 쓰는 게 대마법사인 법이지. 요즘 것들은 근본을 몰라.]
평소라면 꼰대 소리하지 말라고 일침을 꽂아넣을 생각이었지만, 상대가 이 업계의 창조주인지라 그만두기로 했다.
[차라리 잠이나 더 자둬라. 이 정도 했으면 차고도 넘쳐.]
<그렇지만... 조금만 더 하면...>
[니가 이번 3일 동안 처먹은 커피잔 수는 아냐?]
오늘만해도 이미 열 잔은 넘긴지 오래였다.
<현자님은 여태까지... 마신 물의 양을 일일이 기억합니까?>
[인간을 그만뒀구먼. 저런.]
카페인 자체는 오러로 간의 해독 작용을 증폭시키면 그만이지만, 문제는 수면 부족에 있었다.
"...좀 자는 건 맞겠네요."
너무 무리하는 것도 능률과 체력에도 손해였다. 차라리 이번 기회에 미룬 잠을 한꺼번에 자둬야겠다.
"...아..."
근데 자리에 일어나는 도중 발을 헛디뎠는지, 레오의 몸은 기울어져 넘어지기 시작했다.
"레오나르도 구...!"
턱
기울어진 레오나르도는 넘어지지 않았다. 스스로가 중심을 잡았기 때문은 아니었다.
"괜찮아? 레오?"
자신의 아가씨, 아리아스필이 넘어지는 레오를 붙잡아 들었다.
"...아가...씨...?"
사실 레오나르도는 탈진하기 직전이었다. 부족한 수면은 어떤 고역에도 버텨냈던 레오를 한없이 연약하게 만들었다.
"너무 무리했어. 얼른 자러 가자. 도와줄게."
부축해준다는 의미 같기에 레오나르도는 거절하지 않았다. 설마 이번에도 저번처럼 팔뚝을 다시 가슴에 끼우겠는가? 그것도 피로에 지친 사람을?
그런 범죄적인 행복은 이런 공공장소에서는 도저히 참아낼 수는 없을 것이다.
"...네... 고마워..."
레오의 몸은, 그리고 발은 지면에서 떨어져 공중으로 올라갔다.
"...요...?!"
아리아스필의 양팔은 레오의 듬직한 몸을 너끈히 들어 안고 있었다. 도서관은 원래부터 조용했지만, 저 아가씨와 기사를 보니 더욱 기묘한 침묵으로 정적이 뒤덮였다.
"얼른 방으로 가자."
"자...잠...! 시만...! 읍...!"
입을 막은 것은 손이 아니었다. 아리아는 탐스럽고도 풍만한 흉부를 레오의 얼굴에 짓누르면서 입막음을 해버렸다.
"레오, 많이 피곤하구나~ 그래도 여긴 사람이 많은 도서관이니까 조용히 해야 해. 그러니까..."
아리아는 가슴으로 점차 쿠션처럼 레오를 감싸며 푹신한 감촉을 자아내었다.
"단둘이서 쉬자?"
당황한 채 흥분한 레오는 대답하지 못했지만, 그 자리에 있는 모두는 이렇게 생각했다.
[부러운 새끼]
'부러운 새끼'
부러운 새끼
레오는 부러운 새끼였다.
***
살결의 달콤한 향기와 흉부의 흉악한 압박에 레오의 정신이 점차 몽롱해졌다.
생각해보면 지난 3일 동안은 방에 안에 틀어빅혀서 쉬지도 못했는데, 이정도 잘못은 저질러도 용서받을 수 있지 않을까.
하지만 그래도 자신이 모시는 아가씨인데, 이런 행동은 자제시켜야하지 않을까.
그런 배덕과 도덕이 교차하며 갈등하던 와중, 아리아는 레오를 안은 채 방에 도착했다.
"도착했네. 이제 푹 자자?"
조금은 아쉽기도 했지만, 레오는 그 감정을 부정하며 방문으로 갔다.
"감사합니다. 이제..."
레오가 문 뒤로 가려던 순간, 아리아가 갑자기 방 안으로 손을 넣어 힘으로 문을 잡아당겼다.
"이제 단둘이 있게 됐네?"
뭐지? 뭔가 섬뜩하면서도 달콤하게 귀여운 말투는?
<...그보다 단둘은 아닌...>
[난 유령이니까 논외다. 하던 거마저 해.]
현자는 그렇게 말하며 어디서 가져왔는지 모를 팝콘을 꺼내들어 입 안에 한 움큼 집어먹었다.
[이젠 보는 것도 재밌어졌거든.]
<...고유마법을 그딴 데 낭비하시는...>
그렇게 따질 것도 없이, 아리아는 레오의 손목을 잡으며 방 안으로 끌어내었다.
"온통 공식이랑 마법진투성이네."
방에 들어가자 아리아가 본 것은 온 사방에 퍼진 마법서들과 공식이 적혀있는 종이들의 무덤이었다.
"정령 마법하고는 달리 일반, 그것도 고유 마법은 계산이 제일 중요하니까요."
지난 3일 동안 고유 마법 개발에 전념한 나머지, 레오는 쉬지도 않고 마법의 형태와 원리, 발상까지도 이것저것을 쉬지 않고 습득해 개발했다.
좋은 고유 마법은 나오지 않았지만, 마법에 관한 연구 자체는 의미가 있었기에 실력 자체는 괄목이 성장했을 것이다.
"침대까지 종이랑 책투성이야."
침대에도 공식이 적힌 이면지와 마법서들로 뒤덮여있었다. 당시엔 너무 연구에 몰입한지라 장소가 침대인지도 의자인지도 구분이 가지 않았다.
"정리를... 잘 해둘 걸 그랬네요. 조금 민망합니다."
평소라면 늘 깔끔히 정리하는 습관을 지닌 레오로선 치부가 드러난 것 같았다.
"아무래도 조금은 정리할 필요는 있겠네요. 조금 있다가..."
"괜찮아. 여기라면 괜찮겠는데?"
아리아는 종이와 책들의 사이에 있는 여유 공간에 앉으며 말했다.
"에이, 저라도 바닥보단 침대에서 자는 게..."
아리아는 레오를 붙잡아 눕혔다.
"이래도?"
정확히 자신의 다리에 말이다.
소위 말하는 무릎베개였다.
"...예...?"
"조금은 쉬어도 돼. 여태까지 열심히 했잖아."
부드러운 말, 그리고 이마와 머리를 쓰다듬는 상냥한 손길에 레오는 자신도 모르게 저항심을 잃었다.
"자자. 레오."
"...네..."
몸이 너무 피로했던 탓일까, 레오는 반항하지 않은 채 그대로 눈에 힘을 풀었다.
'...어차피 무릎베개는 오래 못 하실테니까... 괜찮겠지...'
어느샌가 레오나르도는 숙면을 취하기 시작했다. 새근새근 숨을 쉬면서 자는 것이 너무 사랑스럽고 귀여웠다.
'...작전대로야...!'
아리아도 그 감상을 눈에 톡톡히 새겨두었다. 앞으로 몇 시간 동안은 이 행복한 감상을 레오와 함께할 것이다.
다리가 저린 것 따위는 문제도 되지 않았다. 정령술을 훈련하면서 동시에 마나를 통제하는 방법도 단련했기에.
'혈액 순환 쯤이야 간단하지.'
오러를 사용해 혈액을 순환시켜 저림을 푼다는 희대의 재능 낭비도 가능했다. 이거라면 10시간도 우습게 버틸 수 있었다.
"...흐..."
사랑스럽게 자고 있는 표정, 저번에 침대와 함께 동침할 때는 얼굴을 껴안아 쓰다듬었기에 제대로 감상하지 못했는데, 지금은 가장 가까이서 즐길 기회를 얻게 되었다.
여기서 조금만 더 나아가면 더한 스킨쉽도 가능...
"...흠냐..."
그 순간 레오의 고개는 잠결에 돌아가게 되었다. 그녀의 대담한 시도와 피로로 인한 잠꼬대가 일으킨 우연의 일치였다.
"흣...?"
아리아는 조금 당황했지만, 이내 다시 침착하게 진정할 수 있었다. 아직 기회는 남아있을...
"읏..응...!"
아리아스필은 황급히 자신의 입을 막았다. 튀어나올 것 같은 신음을 틀어막기 위해서였다.
신음이 나오는 이유는 고개를 돌린 채 잠결에 숨을 내쉬고 있는 한 소년 때문이었다.
지금 아리아는 오러로 혈액 순환을 촉진시킨 상태, 그만큼 감각이 예민해질 수밖에 없었다.
그렇기에.
잠결에 움직이는 머릿결과 숨결에 그녀는 민감하게 반응할 수밖에 없었다.
"...하아, 으응...!"
거기에 소년의 머리는 그녀가 반응할 때마다 움직여 점차 고개를 더 깊숙한 부분으로 향하게 되었다.
아리아는 이 민망한 광경을 보이고 싶지 않기에 입을 계속 틀어막고 있었다. 조금이라도 더 느끼게 되면 못 참게 될 수도 있었다.
"으...으으응, 으흡..."
그런 그녀의 속도 모른 채 소년은 잠에 푹 빠져있었다. 잠자리가 편안했는지 입가에는 조금이지만 침도 고여있었다.
'...이건... 이것만큼은...!'
안 그래도 신음을 참기 힘든 아리아였다. 만약 레오의 성분이 든 질척하고 따뜻한 액체가 닿는다면 그녀라도 이성을 유지할 수 없을 것이다.
"...하앙....하아..읏...!"
그녀는 최대한 자제력과 인내심을 발휘하며 고개가 돌아간 레오를 조금씩 정면으로 옮기기 시작했다.
그럴 때마다 약간이 묻는 따뜻한 타액은 아리아를 한 마리의 암컷으로 만들고 있었다.
"...조금만...조금만 더...!"
인고의 노력 끝에 고개는 다시 정면으로 돌아가 천장을 보게 되었다. 섬세한 손길 덕분에 그런 움직임에도 아직 레오는 잠에서 깨지 않고 있었다.
"...하아...하아..."
내몰아쉬어지는 거친 숨, 아쉽긴 했으나 이 이상 흥분했다간 아리아 본인도 참기 힘들 것이다.
"...그래도 잘 자서 다행..."
아리아는 레오의 숙면에 도움을 주었다는 것에 위안을 얻으려고 했다. 그 행위 자체에는 문제가 없었으나, 정말로 난처한 일은 그런 곳에 있지 않았다.
"...이...건..."
건강한 남성은 편안히 숙면을 취하면 남성호르몬과 혈액 순환이 활발해진다고 한다.
그리고 남성호르몬과 혈액이 잘 순환하게 되면 성적인 자극이 없다라도.
"...너무... 크..."
육체엔 반응이 온다.
"...큰데...!"
실수로 새어나온 큰 목소리, 용병으로서 야습과 기습에 대비하는 레오로서는 그런 소리에도 예민할 수밖에 없었다.
"아가씨... 무슨 일...?"
"미안해! 레오! 푹 쉬고 내일 봐!!"
끼익, 쾅!
뭐라 대답할 것 없이, 아리아스필은 황급히 레오를 내려놓은 채 문밖으로 뛰쳐나갔다.
뛰쳐나간 뒤에도 아리아의 눈가에는 바지를 찢을 것만 같던 길고 굵직한 잔상이 아른거렸지만 말이다.
"...왜 저래요...? 다리가 저려서 그런가?"
멀찍이서 고유 마법으로 창조한 팝콘 한통을 비운 현자는 입을 떡 벌린 채로 말했다.
이게 섹스지.
<+--|-|--+>
EP.53 탈선의 광란-1
어제의 소동을 뒤로 하고 레오나르도는 상쾌한 표정으로 방을 나섰다.
오랜만에 숙면도 취했고, 피로도 풀렸으니 남은 휴가를 즐길 필요도 있었다.
[놀 거냐?]
<기껏 모아온 휴가 몰아 썼는데 쉬는 날도 있어야죠.>
이 신비로운 도시에 와서 하는 짓이 방구석에 박혀서 마법 연구만 하는 거면 조금 아쉽지 않겠는가.
이런 식으로도 즐길 거리도 있어야지.
[그럼 아리아도 데리고 가게?]
<그래야죠. 아가씨도 쉴 날은 있어야 하니까요.>
아리아스필도 정령술에 대해 속성으로 숙련됐으니, 상이라는 의미에서 휴식을 취하는 것도 나쁘지 않을 것이다.
[그럼 끝나면 부탁 하나만 하자. 기분은 잡치겠지만 이건 꼭 해야겠다.]
<언제는 안 잡친 것처럼 말씀하시네요.>
[그건 사실인데, 이건 무게 달라 임마.]
현자는 진중한 표정으로 물었다.
[전생에는 무슨 일이 있었던 거냐?]
<...>
언젠가는 나올 거라고 생각한 질문이었다.
단지 자신이 말을 돌리고, 현자는 행동을 눈치채 배려해줬을 뿐.
언젠가는 마주해야 할 질문이었다.
[지금 대답할 필요는 없어. 오늘 밤쯤에나 대답해라. 생각도 정리해야 할 테니까.]
<...네, 꼭 대답하겠습니다.>
그 약속을 맺으며 레오는 바깥으로 나섰다.
[근데 아리아가 어딨는 줄 알고 찾게?]
<뭐 적당한 곳에 있겠죠.>
[그게 설명이냐.]
그런 트집을 들으면서도 레오는 태연히 멀찍이 떨어져 있는 건물을 가리켰다. 창문이 넓게 나있는 마탑 내의 식당이었다.
<저기 있잖아요.>
[넌 무슨 탐지견이냐? 어떻게 아리아만 핀포인트로 찾아내?]
<탐지견이 뭡니까? 탐지견이.>
탐지견이라고 하니 자신이 무슨 아리아스필의 애완견 같지 않은가. 자신은 엄연히 아리아의 기사인데.
"가는 길에 밥이라도 한 끼하면 되겠네요."
늦은 아침인데 조식도 안 먹었으니, 차라리 구내 식당에서 해결하는 것도 나쁘지 않을 것이다.
[마탑 밥은 먹을 만하냐?]
<가격은 싸고 양은 많아요.>
밥이라도 제대로 안 주면 대학원생들은 단체로 난동을 피워도 할 말이 없었다. 밥을 안 주면 군인도 상관을 쏴죽이는 마당에, 학생이라고 다르겠는가.
"아, 레오나르도 군."
노예 생활에 지친 대학원생이 건강한 표정으로 레오에게 손을 흔들었다. 아마 반지가 없었더라면 지금 마시고 있는 오렌지 주스는 카페인 농축제나 회복 포션 중 하나였을 것이다.
"좋은 아침입니다. 아가씨."
아리아스필이 먹고 있는 건, 소시지와 스크램블 에그로 이루어진 아침 세트였다.
"어? 어어...! 좋은 아침이네!"
아리아는 당황스러운 표정으로 얼굴을 돌리고 다시 식사에 집중했다. 하지만 이내 굵고 긴 소시지를 보자 그녀는 더욱 당황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왜 저런데요? 맛이 없나?>
[너무 크고 굵어서 한입에 안 들어가나 보지.]
그럴 듯한 설명이긴 한데, 말하는 투나 표정이 몹시 의심되었다. 근데 차마 의심하는게 한심했기에 입을 열지 않았다.
"저도 학식이나 먹어야겠네요."
"그럼 오늘 특식이 있는데, 그걸로 드실래요?"
메뉴가 있는 쪽을 바라보니, 베이컨과 소시지가 푸짐하게 든 특식 요리가 특징적으로 눈에 띄였다.
"오, 그거 좋네요. 그럼 주문하러 가겠습니다."
그렇게 말하며, 레오는 식탁에서 일어나 주문대로 걸어갔다. 마탑 식당에선 식권 이외에도 현금도 받기에 레오 입장에선 편리하게 주문하고 식사할 수 있었다.
"여기..."
"저기...!"
그렇게 주문대로 간 순간, 한 소녀가 레오에게로 다가왔다. 그러고는 떨리는 목소리와 얼굴로 말했다.
"괘...! 괜찮으시다면 저...저랑 같이 식사하지 않겠습니까...!? 차도 한 잔 하면서...!"
그 한마디에 북적거렸던 식당이 일순에 조용해졌다. 이미 도서관에서의 일은 볼 사람들은 다 봤고, 소문은 퍼질 대로 퍼졌다.
아리아와 레오는 연인이라는 공식은 세워진 지 오래였다는 뜻이었다.
그런데 저런 무모한 행위를 하는 것엔 경악할 수밖에 없었다.
"...저기... 아리아스필 양...?"
그 공식을 정립한 아리아스필은 그 불쾌한 광경을 바라보며 나이프를 쥐었다.
아메리는 그 독기어린 눈과 살기가 베여 있는 나이프를 바라보며 두려움에 느낀 소동물처럼 몸을 떨었다.
'...어차피 거절할 거야. 저번에도 그 불여시 마법사한테도 안 넘어갔으니까...!'
잠시 침묵하던 레오나르도는 떨고 있는 그녀를 바라보며 대답했다.
"마침 주문하기 직전이니 괜찮겠군요. 일행이 있으니 말씀드리고 가겠습니다. 괜찮을까요?"
푹, 푹푹푹!
아리아는 왜인지 그 대답에 그릇에 담겨있는 소시지를 포크로 난도질하기 시작했다. 길고 굵었던 소시지의 껍질은 터지고 육편이 그릇 주변에 튀었다.
레오나르도는 그렇게 말하며 다시 아리아 일행이 있는 테이블로 돌아갔다.
"아리아 아가씨, 죄송하지만 잠시 다른 곳에 들러도 되겠습니까?"
"어어...! 당연히 그래도 되지...!"
포크가 소시지를 짓누르자 육즙이 터져 나왔다. 이젠 소시지라고 부르기도 힘들 정도의 고깃덩이가 되어있었다.
"레오나르도, 네가 도무지 꼭 그러고 싶다면야...! 난 당연히 방해 안 하지...! 당연히...!"
누가 봐도 그대로 가면 폭발할 것 같은 표정이었다. 양손에 들고 있는 나이프와 포크에 묻은 육즙이 피로 착각될 정도였다.
"배려해주셔서 감사합니다. 금방 돌아오겠습니다."
"그...으...래?"
아리아스필은 차마 레오를 붙잡지 못하고, 입술이 파래질 때까지 깨물었다.
그걸 보면서도 레오나르도는 구내식당 밖으로 나갔다.
***
[괜찮겠냐? 정말 이러다가...]
<저 사람 표정을 보고도 느끼는 게 없습니까?>
카페의 바깥에 있는 테이블, 레오와 소녀는 식사와 음료를 주문한 뒤 자리에 앉았다.
소녀는 너무 긴장했는지, 경망스럽게 다리를 떨며 손가락을 꿈틀거렸다. 표정은 지나치게 창백했는지 병이라도 걸린 것처럼 시선도 고르지 않았다.
[...쟤 진짜 왜 저래? 네가 그렇게 좋은가?]
<...그런 거라면 차라리 좋겠네요.>
레오나르도는 착잡한 표정으로 주변을 돌아보았다.
<...두 명... 아니, 세 명인가?>
이곳으로 지속해서 향하고 있는 시선.
두 명은 대강 누구인지 감이 오지만, 문제는 다른 한 명에 있었다.
[뭐가? 뭔데?]
<지금은 잠시 조용해주세요. 이제부턴 대답할 수도 없어요.>
그렇게 오러로 대답하며 레오나르도는 앞에 있는 소녀에게 시선을 집중했다.
"그러고 보니 성함을 묻지 않았네요. 성함이 어떻게 되시는지요?"
소녀는 떨리는 눈치로 입을 열었다.
"이리나 리테이...라고 합니다."
"너무 몸을 떠시는데요? 이리나 씨, 혹시 많이 추우십니까?"
그런 전형적인 말과 함께 레오는 그녀의 손을 가볍게 만졌다. 어찌 보면 무례하다고 느낄 행위, 평소라면 하지도 않는 신체접촉을 레오는 억지로 할 수밖에 없었다.
<누구에게 지시를 받았습니까?>
신체접촉을 해야만 오러로 낸 소리를 외부에 새어나가지 않게 전달할 수 있었기 때문이었다.
"...저 여자가...! 레오...!!"
"레오나르도 군...?!"
멀찍이서 훔쳐보는 아리아와 아메리는 오해할 수밖에 없었지만, 그건 나중에 해결해야할 문제였다.
"네...!?"
<진정하시죠. 이 대화는 텔레파시처럼 외부에는 들리지 않습니다. 마법진도 없기에 그런 방향으로도 들키지 않죠.>
옆 방향에 있는 현자는 속으로 감탄을 삼켰다. 그녀가 떨었던 이유는 부끄럽거나 쑥스러움을 타서가 아니라는 걸, 레오나르도는 보자마자 눈치챘기 때문이었다.
'...너무 뻔하게 이상한 상황이니까.'
식사 제안을 하는 것 정도야 이해할 수 있다. 사람이 사람에게 호감을 갖는데는 인과관계를 찾기 어려우니까. 하지만 그렇다고 하기엔 그녀의 행동거지는 명백히 의심스러웠다.
상식적으로는 개인적인 약속은 사람이 적은 장소에 잡기 마련인데, 지금은 너무나 경직적으로 레오에게 접근했다. 마치 누군가에게 지시받은 것처럼.
설사 그걸 고려하지 않는 사람이라 할지라도 상대에게 호의가 있어 제안한 거라면, 부끄러워도 그 대상에게 집중하기 마련이다.
'그런데 저 여자는 너무 당황스러워하는 눈치야. 겁에 질렸다고 봐도 되겠지. 보통은 쑥스럽다로 넘어갈 수도 있겠지만, 이렇게 확인했을 때 반응으로 봐선... 안 좋은 쪽으로 적중한 것 같네.'
그 추리 그대로 이리나 리테이는 부정하지 않았다.
<지금도 분명 지시한 인물이 저희를 감시하고 있겠죠. 말이나 필담으로 대답하면 즉각적으로 사살하는 거죠? 맞다면 왼뺨을 긁으세요. 아니면 반대쪽을요.>
그 말에 조금 당황해하던 그녀는 이내 지시대로 왼뺨을 긁었다.
[...지시했다고? 데이트를...?]
범인의 목적은 확실히, 정체는 대략적으로나마 알 수 있었다.
아마 그녀의 태도나 반응으로 봐선 한패라는 가정보단, 이 사건에 말려든 피해자라고 봐야 마땅했고 말이다.
<절 죽이고자 하는 인물이죠? 맞다면 종이냅킨을 뽑아 떨어뜨리시고, 아니면 냅킨을 뽑고 놓기만 하세요.>
그녀는 천천히 냅킨을 뽑아 미끄러지듯 떨어뜨렸다.
"이런, 제가 주워드리겠습니다."
그런 말과 함께 레오는 자연스레 손을 떼며 바닥 쪽으로 걸어갔다. 그러고는 냅킨을 주으면서 그녀의 어깨에 손을 올렸다.
"겉옷을 덮어드릴까요? 손이 많이 차갑더군요."
<인질은 당신뿐입니까? 아니면 더 있습니까? 이번에는 예, 아니요로 대답하세요.>
이리나는 잠시 말을 떨더니 이내 입을 열었다.
"예에..."
"그렇군요."
최악의 상황은 면했다. 인질이 더 있었다면 혼자선 해결할 수 없었을 것이다.
조금 안심하면서 레오는 이리나의 등에 겉옷을 걸쳐두었다.
'검은 돌을 최대한 얇게...'
검은 돌의 팔찌 일부를 최대한 얇고 가늘게 실로 변환시켜 겉옷에 걸어놓았다. 아마 적은 원거리에서 자신을 죽이기 위해 관찰 중일테니 이 실를 눈치채지 못할 것이다.
<겉옷은 벗지 마세요. 옷에 연결된 실이 실 전화와 같은 역할을 해줄 겁니다.>
단순한 소리라면 안 들릴 수도 있겠지만, 오러의 전도율이 높은 검은 돌에, 자신의 실력이라면 충분히 그녀와 몰래 대화가 가능했다.
<지시한 인물은 한명입니까? 아니면 다수입니까? 한명이면 왼쪽 어깨로 옷을 당기시고, 아니면 반대를 당기세요.>
올린 건 왼쪽 어깨춤, 상황 자체는 차선적으로나마 다행이었다. 다수라면 인질이 더 있는 것만큼이나 불리할 테니까.
<다음으로 지시받은 건 뭡니까? 저를 불러낸 다음, 지시 받은 게 있을 테죠.>
사실 데이트 같은 건, 지시받은 방법 중 하나였을 뿐, 그다지 중요하지 않았다.
마탑에 있는 그녀라면 자신을 데려올 수단 한두 개 정도는 더 있을 테지.
문제는 이다음의 행동, 이 여자랑 자신이 살 방법을 마련하기 위해선 그 지시를 알아내는 게 중요했다.
<이번에는 음료로 답하세요. 식사가 오고는 음료를 드시지 마시고, 제가 말한 것 중에 맞는 것이 있다면 잔을 들어 마시세요.>
그 사이에 요리와 차가 왔다. 레오는 태연히 조식을 먹으며, 질문을 시작했다.
<장소는 은닉한 곳으로 가되, 위치 결정은 당신이 하는 것입니까?>
이리나는 음료를 들지 않은 채, 최대한 침착히 음식을 먹었다. 돌을 씹는 것 같지만, 그런 것에 신경 쓸 여유는 없었다.
<지정된 골목이나 방, 그런 장소가 정해져 있습니까?>
그녀는 그 말에 음료잔을 들며, 힘겹게 차를 마셨다.
<알겠습니다. 그럼 지금부터 그 지시대로 절 이동시켜주세요.>
그녀는 당황한 눈치로 레오를 바라보았다. 부자연스럽게 음식을 든 건 덤이었다.
"요리가 맛있네요. 좋은 카페에요. 잘 먹었습니다."
<지금 절 데려가지 않으면 당신은 죽을 겁니다. 우선 지정된 장소로 절 데려가고, 제가 적을 처리하겠습니다. 그 동안 당신은 경비나 주변 사람에게 도움을 청하세요.>
지금까지의 정보를 종합했을 때, 레오가 낼 수 있는 최선의 방법.
이 방법이 어그러지지만 않는다면, 두 명 다 살 수 있는 수단이었다.
"조금 빨리 갈까요?"
"...네?"
<너무 느리게 가면 오히려 의심을 살 겁니다. 습격하는 건 예상했으니 반격하는 건 어렵지 않습니다.>
그 말과 함께 레오는 그녀에게 손을 내밀었다. 이렇게 잡아야 상대가 습격할 때, 그녀가 죽는 걸 방지할 수 있었다.
"가죠."
이리나와 레오나르도는 마치 연극 속 나오는 연인처럼 달리기 시작했다.
이를 통해 아리아 일행은 훔쳐보는 걸 놓쳤고, 추격자는 더 편하게 암살할 기회를 노릴 수 있었다.
그리고 골목 쪽으로 들어가자, 막혀있는 통로와 함께 어두운 길이 드러났다.
<최대한 자연스럽게 절 유혹하세요. 키스하는 자세가 좋겠죠.>
그렇게 되면 적은 암살을 위해 기습을 시도할 것이다.
"저기..."
이리나는 레오를 벽에 기대며 눈을 감은 채 입을 내밀었다. 속 내용만 모른다면 꽤나 로맨틱해 보이는 상황.
카앙!
그 때를 놓치지 않고 두건을 쓴 자는 검을 휘둘러 이리나째 레오의 목을 베려고 했다.
아마 레오가 검은 돌을 단검으로 만들어 막지 않았더라면 두 남녀의 머리는 몸에서 벗어나 서로에게 이어졌을 것이다.
"너구나? 이 사단을 만든 게."
레오는 이리나를 골목 밖으로 밀치며 두건남에게 돌려차기를 날렸다. 골절되는 소리와 감각, 레오의 반격에 머리와 척추가 연결된 연수가 으스러졌다.
"크악!"
"얼른 시킨대로 가세요. 이리나 씨."
레오의 지시에 이리나는 경악하며 도망치듯 자리를 빠져나갔다.
그게 오히려 편하다는 듯 레오는 단검을 늘려 장검으로 변화시켰다.
"저번 열차 사건도, 이번에 실종 사건도 네가 연관이 있겠지. 안 죽은 거 알고 있어. 그니까 마탑 경비국에서 천천히 얘기해보자고."
"...평민 주제에 얕은수를 부리는 건 여전하네."
이때 레오는 조금 예상이 어그러지는 걸 느꼈다. 아무리 흑마법사여도 연수가 부러지면 언어능력은 마비되고 호흡곤란이 오기 마련이었다.
[...저 자식... 흑마법사가 아니야.]
현자의 말대로, 눈앞의 적은 흑마법사라고 할 수 없었다. 그랬다면 저주나 방출형 흑마법으로 죽이는 게 편리했을테니까.
"날 잊은 거냐? 난 2년 동안 네 얼굴을 한 번도 잊은 적이 없는데."
그 남자는 두건을 벗으며 말했다. 두건을 벗자 눈에 익은 사람의 얼굴이 안에 자리 잡고 있었다.
목이 절단된 것 같은 흉터는 처음 봤지만, 그게 오히려 그자의 정체를 떠올리는데 일조했다.
"...하... 씨발새끼..."
[...암살 당한 게 아니었어. 저 개자식...]
눈앞의 아리아의 '전' 호위기사는 태연한 게 역안으로 레오나르도를 노려보았다.
[마인이 된 거였어. 자기 영혼까지 팔아서.]
마인 제하드는 광소를 내보였다.
"할 짓이 없어서 악마한테 가족을 팔아?"
그 폭소는 2년 전, 의식의 제물로 바쳤던 가족과 약혼자에게 보여주었던 것과 완전히 똑같았다.
<+--|-|--+>
EP.54 탈선의 광란-2
제하드 다이논스
그는 작은 귀족 가문인 다이논스 가의 장남으로, 전형적인 엘리트 코스를 밟은 귀족계의 기사였다.
남동생인 엘리 다이논스는 자리나 물욕이 적었기에 후계에 대한 경쟁에서 처음부터 물러났고,
약혼자 레인 리포드는 그런 가주 자리를 얻을 제하드에게 호의를 느꼈고, 제하드 또한 리포드 가문의 연과 미인을 얻을 기회가 주어졌으니 거절하지 않았다.
하지만 아직 부친인 젠 다이논스는 정정하고 건재했으니, 제하드는 기사로서 자신의 기반을 다지기 위해 업적과 경력이 쌓아야했다.
그렇게 택한 것이 라인하르트 가문의 영애 호위직 겸 검술 교사, 다이논스는 귀족로서의 격은 낮지만 라인하르트와 연줄이 깊기에 채택되는 건 그리 어렵지 않았다.
"내 미래에는 비전이 있었어. 분명 비전이 있었다고."
하지만 그런 장맛빛 미래는 레오나르도의 존재에 의해 어그러졌다.
"너만 없었으면...! 내가 이렇게 되진 않았겠지."
아버지와 어머니는 자신을 버린 자식 취급했다. 남동생은 자신을 대신에 가문을 이끌 재목을 다시 주목을 사고 있었다.
약혼녀는 그런 자신을 버리며, 이제는 다른 남자를 찾고 있기 급급했다.
"너만 없었으...!"
"그래. 너는 너무 착하고 유능한 나머지 아리아 버린 채 대피했고, 나는 너무나 악랄하고 영악한지라 혼자서 발록이랑 맞대결을 깠구나. 이거 참 너무한가?"
결국에 자기합리화에 남탓으로 점철된 개지랄이었지만 말이다.
"야, 네가 그딴 병신짓만 안 했으면 적어도 가족들이 면전에 욕은 안 했을 거다. 쓰레기 통에 사는 바퀴벌레보다도 못한 놈이 어디서 큰소리야."
처음부터 제하드가 잘리는 건 예정되어 있었고, 그게 앞당겨진 건 본인의 피운 찌질한 지랄 때문이었다.
"설마 혼자 살겠다고 여자애 버린 새끼한테 잘했다고 칭찬이라도 받을 줄 알았어? 넌 개념하고 지능까지 악마한테 팔았냐?"
참고로 인성하고 양심은 당초에 없었을 것이다.
그 말을 듣자 제하드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눈은 찢어져 역안이 두드러지고, 이빨에서는 송곳니가 예리하게 튀어나왔다.
"...살려달라고 울부짖을 때까지 찢으면서 가지고 놀..."
양팔에 난 보랏빛 피부와 톱날 같은 손톱은 그 말은 증명하는 듯 보였다.
<파이어 스톰>
화염구의 회오리에 타오르지만 않았더라면 말이다. 레오가 숨긴 반대손에는 화염구가 회전하며 연발로 튀어나오자 제하드는 그대로 폭발에 타오르며 나가떨어졌다.
"내가 뭐가 좋다고 너랑 놀아? 마법진 만드는 동안 아가리는 터는 것도 좆같은데."
레오도 아무 생각도 없이 시간을 끈 것은 아니었다. 마법진을 구성하는 동안, 시선을 끌 도발이 필요했기에 입을 움직였을 뿐.
사실 레오는 제하드가 죽든, 감방에 갇히든 상관이 없었다.
"이제 몇 분만 지나면 경비병도 올 테니, 그 동안..."
[...잠깐...! 피해!!]
날아온 건 거대한 나무상자, 불더미가 된 근육으로는 도저히 던질 수 있는 크기와 무게였다.
카앙!!
나무상자를 그대로 레오의 검 앞에 반토막났다. 문제는 그런 연막 같은 공격이 아니였다.
'...파이어 스톰은 내가 낼 수 있는 최대 화력의 마법... 그걸 버텼다는 건...'
"...너 같이 비겁한 꼬맹이는... 토막나는 게 낫겠지? 감히 말하는 틈을 타서 기습을 하니까아...!"
제하드의 머리 일부는 정말로 날아갔다. 피부와 근육은 타고 녹아 뼈가 드러나있었다.
그럼에도 그가 죽을 것 같다는 생각은 들지 않았다.
"...내가아...! 아무 생각도 없이 2년 동안 잠적한 줄 알아...?!"
끄아아아악!! 콰앙!!
이윽고 울리는 비명과 폭음.
이건 레오와 제하드가 낸 소리가 아니었다.
외부에, 시내에서 나는 소리였다. 현자는 급히 최대한 골목을 빠져나가 공중으로 몸을 띄었다.
[...도시가 완전히 초토화됐잖아... 괴물들이 날뛰고 있어. 마물이라고 하기엔...]
인간의 형태와 극히 유사했다. 정말 불쾌할 정도로.
"...너... 고작 그딴 거 때문에... 이렇게까지 한 거냐?"
레오 자신은 착각하고 있었는지도 모른다.
여태까지의 일들은 단순히 실종과 복수 정도의 개인 규모의 사태라고. 주모자인 제하드만 처리하면 해결될 일이라고.
하지만 그건 낙관적으로 무른 판단이었다. 마탑주들의 출장, 많은 마법사의 징계, 그런 상황에서 마인이 나타났다는 시점에 눈치챘어야 했다.
"크키...킥... 내가 맛본 지옥을 느껴보라고..."
대규모 몰살, 마인과 흑마법사들이 기회에 따라 일으키는 학살극이다.
그리고 주로 이런 몰살극을 벌이는 건.
"...내가 말했지?"
이미 악마라 말할 정도로 사람을 죽인 마인밖에 없었다.
〘악마화〙
제하드의 몸은 검은 살가죽으로 재생되어 있었고, 얼굴의 골격은 뒤틀리며 살갗을 뜯기 편한 송곳니와 뿔이 기이하게 튀어나왔다.
전신은 성체 발록보다도 거대하게 부풀어올랐다. 그 형상은 사람들이 상상하는 악마를 최대한 불쾌하게 그려낸 것 같았다.
"넌 내가 살려달라고 울부짖을 때까지 찢으면서 가지고..."
"...닥쳐."
그 악마의 마인의 말을 자르며 레오나르도는 검을 들었다.
"닥치고 와. 목숨 구걸도 못하게 아가리째 꼬매줄 테니까."
분노 이상의 감정이 주변에 휘몰아친다.
"이 건방진... 놈이..!"
마인이 돌진한다. 속도는 이미 인간을 상회하고 있었다. 아리아조차 반응하지 못할 정도였다.
콰아앙!!
선격은 직선 방향, 피하는 것 자체는 성공했다. 하지만 뒤방향에 있는 벽은 마인의 손에 유리처럼 깨부서졌다.
[무너져 내린다!! 빠져나와!!]
레오는 급히 직각으로 팔을 뻗어 마법을 전개했다.
"윈드 버스트...!!"
영창까지 동원해야 간신히 시간을 맞출 수 있었다. 돌풍의 대포는 팔에서 뿜어져 나오며 반동으로 자신을 골목 밖으로 밀쳐내었다.
파앙!
그리고 그 바람의 포탄은 마인을 맞으며 움직임을 일순 멈추었다. 본래라면 바위도 금이 가게하는 일격이었지만, 마인에게는 생채기 하나 나지도 않았다.
"...이게 다냐...?!"
"다겠냐?"
하지만 작전은 아직 남아있었다. 무너지는 건물의 잔해는 그대로 제하드에게로 낙하했다.
이어지는 충격음, 그 무게라면 아무리 상급 마인이더라도 부상을 면치 못할 것이다.
[옆쪽을 봐!!]
시내의 양옆으로는 완전히 페허가 되어있었다. 사람들의 시체를 뜯어먹고 있는 무언가가 갑자기 레오에게로 돌진해왔다.
"이에에에에엑...!!"
오른쪽과 왼쪽에서 오는 협공, 검은 돌은 쌍검의 형태로 전환되며 양옆의 괴인들의 목을 베었다.
[...이 자식들... 사람이야...]
충격받은 현자의 말과 표정, 레오는 베여있는 괴인들의 얼굴을 살폈다.
"...이 새끼들까지...!"
예상하지도 못했고, 가장 예상하기 싫었던 전개.
"개조인간이 왜 여기에...!"
"그걸 알고 있어어...!?"
갑작스러운 목소리, 그러고는 날아오는 벽들의 잔해들.
'...이건 쌍검으론...!'
쌍검으론 벨 수 없다. 연격은 빠를지라도, 장검보다 길이가 짧고 위력도 분산되기에.
"크윽...!!"
모든 잔해를 베어넘길 수는 없다. 왼쪽 팔과 복부, 갈비뼈에 투척된 잔해가 적중한다.
[레오나르도!]
입가에 핏물이 터진다. 갈비뼈는 부러지고 꺾여 폐를 찌르고 있었다. 팔은 부러지지 않았지만, 그리 붓기로 봐선 상태는 좋지 못했다.
'그래도 아직은...'
"아직...! 울부짖지 않았네...?!"
잔해와 흙먼지를 뚫고 마인이 돌진한다. 피할 수가 없다. 이미 속도로는 아리아마저 초월했다.
<라이트닝 랜스>
급히 날리는 전격의 창, 라이트닝 랜스로 마인의 움직임을 경감시키고 쌍검으로 카운터를 날린다는 전략이었다.
[그만둬!! 저 녀석한테는...!]
전격을 뚫고 마인은 그대로 주먹을 날렸다. 감전은 통하지도 않고, 충격조차 받지 않은 채 주먹은 레오에게 맞아들어갔다.
"크악!!"
쌍검으로 받아냈음에도 파괴력이 방어를 뛰어넘겼다. 특히나 부실한 왼팔로 인해 몸이 측면으로 나가떨어진다.
<원드 아머>
1서클의 바람 방어 마법, 원드 월을 개조한 특수한 마법으로 갑옷과 같은 바람이 몸을 감싸는 기술이었다.
'...방어력은 떨어지지만...!'
저런 주먹은 당연히 막을 순 없지만, 덕분에 날아가는 속도를 늦추고 지면과의 마찰을 최대한 없앨 수 있었다.
<...저 자식... 분명 전격 마법을 맞았는데...>
[악마 중에는 항마력이 뛰어난 종류가 있어. 저 자식은 그걸 알고 일부러 그런 형질로 몸을 강화시킨 거야.]
게다가 제하드의 몸은 이미 재생해냈다. 뒤틀렸다고 생각된 팔도 맞춰져 있으며, 피부에 난 상처들은 깔끔히 메워져 있었다.
[재생력도 뛰어나고, 신체능력은 이미 널 상회하고 있어. 거기에 마법 저항력은 적어도 5서클은 되야 뚫을 수 있을 거야.]
<인정하긴 싫지만...>
모든 면에서 레오에게 대항하기 위해 만든 능력.
[천적이야. 저 자식.]
지금 레오에겐 가장 대응하기 까다로운 적이었다.
게다가 아까 그 개조인간들로 봐선 도시 전체에 이런 괴인들이 뿌려졌을 것이다.
마탑주나 마법사들의 수만 많았더라면 조금은 원만히 해결될 테지만, 그런 이상적인 상황은 오지 않을 테지.
[...그럼 도망치는 것도 안 된...]
<도망치죠.>
레오나르도는 그렇게 말하며 달리기 시작했다.
[뭐? 내가 말했잖아...! 지금은 지원군도...!]
<죄송하지만 지금은 집중해야 합니다.>
레오는 그렇게 말하며 넝마가 되어가는 손에 있는 쌍검의 형태를 변형시켰다. 그 시간을 벌기 위해 앞으로 달리기 시작했고.
"고작 생각해 낸 게 도망이었냐!? 결국 너도 다를 게 없어!!"
추격해오는 제하드, 속도로만 놓고 봤을 때는 마인은 그가 유리했다.
'...해보는 수밖에...!'
레오나르도는 검은 돌로 준비한 투척용 대거를 제하드에게 던졌다.
"이딴 장난감이 애새끼의 전부겠지!!"
대거는 양팔에 박혔지만 위력은 마인에게는 손톱 정도밖에 안 될 것이다.
[차라리 제대로 도망쳐! 이대로 가면 잡힌다고...!]
<확인은 끝났어요. 그럼 분부대로 하죠.>
그렇게 말하며 레오는 남은 대거를 건물로 던져대었다.
던진 대거는 건물 외벽에 박히며 단단히 고정되었다. 그리고 대거와 연결된 검은 돌의 와이어는 레오의 체중을 지탱하며 끌어당기고 있었다.
[검은 돌을 이렇게 쓴다고?]
<지금은 달리 더 빨리 움직일 수단은 없습니다.>
되감기며 뭉쳐지는 검은 와이어, 그 속도에 따라 레오의 신체도 빠르게 이동하며 공중에 떠오를 수 있었다.
속도만 보면 비행 마법조차 따라잡을 수 없을 것이었다.
"잔재주를...!!"
그에 따라 제하드도 분주히 레오를 따라잡았다. 속도만 보면 제하드가 위였지만, 그 부족한 점을 레오는 경험과 기교로 메꾸어 우위를 점했다.
[이대로 계속 도망칠 순 없어. 이런 식으로 검은 돌을 운용하면 마나가 먼저 동날 거다.]
검은 돌을 빠른 속도로 변형시키는 건, 정신력과 마나에 무리를 주었다. 아마 따돌릴 정도로 거리를 벌릴 시간은 없겠지.
"상관없어요."
레오의 도망에는 생존이 목표인 경우가 없었다.
[...공동 묘지?]
용사의 기사는 언제나 승리를 위해 도망을 친다.
"낭만 있는데...!? 고아 새끼가 외롭게 죽고 싶진 않았나 보군!!"
도발에도 레오는 분노하지 않았다. 오히려 작전과 계획이 예상대로자 여유의 미소가 나왔다.
"...사실 도망칠 땐 나도 죽을 각오였어. 이것마저 실패하면 널 죽일 방법은 도무지 없거든."
레오나르도는 그렇게 말하며 손에 만들어둔 검은 돌의 대거들을 들었다.
"그런 장난감으로 날 죽일 거라고 생각하나?!"
그러면서 제하드는 마인의 손으로 레오를 향해 손톱을 내리쳤다. 묘지의 묘표를 엄폐물로 삼으며 공격을 피해나갔다.
동시에 대거를 연속해 던지기 시작했다. 이런 사냥 같은 전투는 레오에겐 산책이나 다름 없는 일상이었다.
"간지럽다고!! 이걸로...!!"
어느새 묘비들은 절반이나 부서졌다. 근처에는 몸을 숨길 엄폐물은 없었다.
"끝이다아아!!!"
제하드는 주먹을 날렸다. 하지만 어째서인지 레오는 더는 엄폐물을 찾으려고 하지 않았다.
"...끝이라며?"
그럴 필요도 없으니까.
"왜?"
레오의 작전은 이미 성공했다.
"팔하고 다리가 생각대로 안 움직여서 그래?"
제하드는 간신히 레오에게 주먹을 날렸다. 하지만 이미 둔해질 대로 둔해진 마인의 주먹 따위가 레오에게 맞을 리가 만무했다.
오히려 찢어진 관절이 더 비틀어져 제하드는 그대로 바닥에 쓰러졌다.
"만약 내가 던진 장난감이 네 살갗에 튕겨 나갔더라면 나라도 방법은 없었을 거야."
하지만 레오의 대거는 정확하게 마인의 살을 비집고 들어갔다. 단지 날의 길이가 짧았기에 제하드는 위협이 안 된다 판단했을 뿐.
"아무리 재생력이 뛰어나도, 고깃덩이인 생물인 이상 단검이 꽃혀있는 부위까지 재생하진 못하거든. 하물며 무릎이나 팔꿈치 같은 관절과 같은 중요 부위에 박혔다면 더욱이 말이지."
그 말에 제하드는 급히 손으로 박힌 대거를 뽑으려고 했다. 하지만 관절까지 넝마가 된 이상, 근력으로 뽑는 건 무리였다.
하지만 제하드의 입에는 여전히 광소가 퍼져있었다.
"역시 넌 애새끼였어...!! 그런 중요한 사실을 주절주절 읊다니...!!"
그렇다면 재생력을 강화시켜 살덩이째 대거를 밀어내면 그만이다.
"...그렇게 생각하면 조금 실망인데?"
"왜지...?! 끄아아악...!?"
대거는 재생력을 강화시켜도 빠져나오지 않는다. 오히려 재생시킨 살점이 대거의 주변으로 기묘히 뒤틀린다.
"내가 뭐 좋으라고 탈출법을 알려주겠냐? 너 같은 놈은 더 굴욕적으로 죽어야 내 직성에 풀리거든."
그렇게 말하며 레오나르도는 친절히 대거의 비밀을 제하드의 눈 앞에 보여주었다.
"여행하다 항해를 했을 때, 늙은 고래잡이가 알려준 방식이지. 아무리 힘이 좋아도 이렇게 작살을 만들면 절대 안 빠진다고 말이야."
용사 가문에 떠나고 나서 배운 작살 모양의 날붙이, 이후 레오가 저런 재생력이 높은 마인과 괴물들을 상대할 때 몹시 유용히 사용한 무기가 되었다.
아까의 외벽에 날린 대거도 이런 구조로 만들기에 고정이 단단했던 것이었다.
퍽석
이윽고 이 작살의 대거는 제하드의 빛을 빼앗았다.
"끄아아아악!!"
양눈이 단검에 찌부러지자 비명이 짜내어졌다. 레오는 눈의 시야를 완전히 제거하기 위해 단검의 손잡이를 잡아 돌렸다.
"지금 많이 질러둬. 이제부턴 하고 싶어도 못 하거든."
그렇게 말하며 레오는 마인의 입에 불꽃의 마법진을 그렸다.
"원래는 횃불로 하는 게 진국이지만, 상황이 급한지라 이해해라."
이후의 일을 예상한 제하드는 추하게나마 발버둥치기 시작했다. 그 풍경은 마치 다리가 모두 꺾인 거미가 작은 개미에게 천천히 뜯어먹히는 장면과 닮아있었다.
그런 발버둥에도 신경쓰지 않고 레오는 무덤 근처의 지푸라기와 마른 가지를 엮어 제하드의 입 안에 쳐넣었다.
"우읍...!? 크압...!"
"재생력이 뛰어난 마인이더라도 불로 지져서 괴사한 상처는 회복이 더디고, 어이가 없게도 근본은 인간인지라 호흡을 못 해도 죽어."
화륵
"그래서 난 이 처리법이 몹시 마음에 들어. 내가 겪은 통증 중에서 가장 아픈 게 불에 타는 거랑 숨을 못 쉬는 거거든."
레오의 불길은 제하드의 입에 우겨넣어진 가지와 지푸라기를 도화선 삼아 입술과 살점, 그리고 장기마저 태워 녹이기 시작했다.
장작의 화염이 점차 거세지자, 녹은 살점과 장기는 변성하며 괴사되어 목과 호흡기의 통로를 점차 메워나가기 시작했다.
폐에 남아있는 산소는 타오르는 불꽃에 의해 점차 줄어들며, 마인에겐 작열과 질식의 통증을 동시에 경험시켜주고 있었다.
"내가 말했잖아. 입을 꼬매버리겠다고."
대답은 없었다.
그리고 레오가 떠난 뒤, 몇 분 뒤 마인은 소리 없이 죽었다.
<+--|-|--+>
EP.55 탈선의 광란-3
[지금 이해가 안 돼서 그런데, 아까 그 괴물...아니 괴인은 뭐냐? 내 시대엔 그런 마물은 없었어.]
넝마짝이 된 몸으로 자신의 아가씨를 찾고 있는 레오는 대답 대신에 또다른 괴인을 베어넘겼다.
"없는 게 당연하죠. 이 괴인들은 원래 무관계한 사람들이니까요."
이 개조인간들은 태반이 이번 테러에 말려든 피해자들, 그리고 살해당한 실종자들일 것이다.
[...설마 개조당한 거냐? 누가 이런 식으로...]
"그 자식보다 먼저 아가씨한테 가야해요."
괴인의 목을 떨구며 레오는 말했다.
"다 폴리모프시킨 거에요."
[...폴리모프?]
정확히는 고유 마법으로 개조시킨 흑마법식 폴리모프였다.
"의태 마법을 아예 변신 마법으로 마개조시켰죠."
통칭 점토사
사람은 물론, 어떤 생물이더라도 변신시키는 게 가능한 고유 마법을 지닌 흑마법사.
마인인 제하드의 외모가 자연스러웠던 까닭도 점토사의 힘이 컸을 것이다.
[그럼 그때 테러범들도... 그 녀석이...]
<아마 그때 열차의 흑마법사들은 미끼였을 거에요.>
점토사가 자주 쓰는 전략이었다.
일부러 기본적인 폴리모프를 걸은 뒤. 돈을 받고 덤으로 의뢰자가 성공하면 추가적으로 사람을 죽여 재료로 삼는다.
설사 의뢰인이 실패한다 해도, 오히려 본인에 대한 의심이 줄어들 테니 더 안전히 지역을 이동할 수 있다는 장점도 있었다.
[하지만 아리아도 폴리모프를 구별하는 법은 알잖아. 그러면...]
<저 괴인들의 신체능력이 왜 저런지 알아요?>
점토사의 폴리모프는 외모만 바꾸는 게 아니다.
골격, 근육, 혈관의 구조까지 뒤바꾸는 '변신' 그 자체, 그렇기에 일반인이나 하급 마법사들이었던 사람들까지 저런 초인이자 괴인이 될 수 있었던 것이다.
[그럼 자기 얼굴도...]
폴리모프는 어디까지나 의태의 능력이기에 그런 방식으로 구분이 가능한 것이다.
하지만 점토사의 폴리모프는 육체 자체가 변신하기에 때문에 레오가 말한 방법으로는 도저히 구별할 수 없었다.
"제가 더 먼저 가야해요...!"
이렇게 가까이 있는데도, 아무것도 못하고 있을 수는 없었다.
늑골은 움직일 때마다 점차 금이 벌어지고 폐를 찔러왔으나, 다리는 멈추지 않았다.
두 번 다시는 아리아를 잃을 수는 없었기에.
그는 지금도 달린다.
***
사태가 터지기 몇 시간 전.
레오와 이리나가 데이트를 하는 연기를 하는 상황, 그 뒤엔 한 소녀와 대학원생이 있었다.
"저기... 아리아스필 양, 아무래도 이건 개인적인 사생활인 것 같은데..."
"조용히 좀 해주실래요?"
그때 아메리는 봤다.
살인자의 눈을, 저 눈의 그림자는 냉철하게 인간성마저 버릴 수 있는 의미를 내포하고 있었다.
그리고 아메리 자신도 이 이상 막는다면 죽을 수 있다는 것도 자각했기에.
"네...네엡..."
순순히 아리아에게 순응했다.
'...그래도 레오나르도 군이라면 적당히 장단만 맞혀주다가 가겠지.'
아메리는 그렇게 생각하며 홀로 안심했다. 도서관 사건 이외에도 레오가 템페리우스 가문의 제안을 거절했다는 것도 소문이 퍼진지 오래였다.
그런 레오가 그렇게 간단히 마음을...
-너무 몸을 떠시는데요? 이리나 씨, 혹시 많이 추우십니까?
그 안심은 레오가 직접 시도한 스킨십에 모래성처럼 무너졌다.
레오는 이성적인 목적이 아닌, 오러로 대화하기 위한 수단으로 이용했을 뿐이었지만.
"손... 레오가 직접 잡아주는 손..."
아리아와 아메리가 눈치챌 리가 없었다. 애초에 외부에 들리지 않는 대화가 목적이었기에 들킬 리가 만무했다.
"아리아스필...양...?"
스릉
아리아는 검집에서 검을 발도했다.
"지...! 진정하세요...!! 아리아스필 양...!?"
"괜찮아요. 레오의 성결한 손길이 닿은 저 더러운 손목만 잘라낼 테니까요. 아무 문제 없을 거에요."
온통 문제였다. 아메리는 당황해하며 최대한 그 살육극을 막으려고 했다.
"일단...! 진정하세요!! 레오나르도 군도 그런 의도가...!"
그 사이
-겉옷을 덮어드릴까요? 손이 많이 차갑더군요.
레오는 겉옷을 덮어주는 것으로 아리아의 살인 욕구를 증폭시켰다.
"...아리아스필 야...양...? 전 살려..."
"아메리 씨."
생각 외로 아리아스필의 표정은 덤덤했다. 그 고요한 표정에 아메리는 조금이나마 안심할 수 있었다.
"비키실래요? 거기 계시면 저 년을 죽일 수가 없잖아요."
전혀 고요하지 않았다. 때때로 인간은 분노가 인계점에 넘어가면 정신적 해탈을 겪는다는 걸 아메리는 그제서야 알 수 있었다.
"진정하세요!! 제발!! 죽이면 진짜 돌이킬 수 없어요오...!!"
사랑으로서도, 범죄로서도 돌이킬 수가 없을 문제였다.
그걸 안 아메리는 가녀린 팔로 아리아를 붙잡고 있었다. 그 행동에 아리아는 싱긋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그러고 보니 아메리 씨도 레오랑 밤에 여자 화장실에 있었죠?"
"예...? 그건...?"
분명 그건 해명을 했다. 논리적으로 생각했을 때는 '그런 일'이 없었다는 건 아리아스필도 알고 있는 사실이었다.
하지만 지금 아리아는 분노의 해탈을 겪고 폭주하는 중이었다. 논리성이라고는 전혀 안중에도 없을 정도로 말이다.
"...아아...! 지금 갑자기 마탑에서 연락이 와...! 왔네요...!! 가보겠습니다아...!!"
이 살육극에서 도망치기 위해 아메리는 순간이동 지도를 펴서 몸을 피신시켰다. 지금 상황을 막는 것도 중요했지만, 자신의 목숨만큼은 무엇과도 바꿀 수 없었기 때문이었다.
"그... 죽일 년은 어디에...!"
방해꾼이 없어지자 아리아는 더욱 거리낌없이 칼을 빼들었다. 다행이라고 해야할지 레오 일행은 달리며 골목 쪽으로 몸을 숨겼다.
아메리로 인해 시선이 돌아간 아리아는 그런 레오 일행이 어디로 갔는지 보지 못했다.
"정령들아."
다만 그 점은 정령술을 익힌 아리아에게는 문제가 되지 않았다. 저번 때처럼 정령들의 시야와 힘으로 추적하면 그만이었으니까.
[도망쳐야 돼...]
[사람들이 위험해...]
[너도 위험해질 거야...]
하지만 주변의 정령들은 무언가 안색이 이상했다. 공포에 빠진 것인지, 혼란스러운 것인지 정령들은 불안정한 형태로 떨고 있었다.
"...위험해진다고? 그게 무슨..."
콰아아아앙!!
그 순간 울리는 폭음.
"꺄아아악!!"
화음으로 이어지는 찢어지는 듯한 비명.
그 소리에 아리아도 당황해하며 그 방향으로 바라보았다.
"키에에에엑!!"
돌진해오는 의문의 괴물, 흉물스러운 턱을 벌리며 아리아를 물어뜯으려고 했다.
스릉.. 퍽석
분노한 아리아에게는 오히려 좋은 화풀이감일 뿐이었지만 말이다. 일순 괴물의 목은 베이며 바닥에 떨어졌다.
"...뭐지? 이런 마물은 본 적이..."
"도와주세요...!!"
다시 들리는 사람의 목소리, 도움을 간절히 바라는 목소리였다. 분노는 억누르며 아리아는 우선 도움을 청한 사람에게로 뛰어갔다.
가문의 피와 그녀가 배운 기사도는 일시적으로나마 분노를 잠재울 수 있었다. 물론 나중엔 자신의 믿음에 상처를 입힌 내 레오에게는 확실히 교육이 필요하겠지만 말이다.
"오빠아아아아...! 오빠아아...!!"
공격을 당하고 있는 건, 어린 소녀.
공격을 하는 것은 아까와 같은 괴인.
상황으로 봐선 오빠라는 사람은 이미 괴인에게 당하고, 이제는 동생까지 공격하려는 것 같았다.
이미 괴인은 여자아이의 양팔을 눌러 머리를 뜯어먹을 준비를 마친 뒤였다. 조금이라도 늦거나 빠르면 저 사람은 확실히 죽는다.
서겅
각도, 위력, 모두를 고려한 최선의 공격이 아리아의 검에 의해 휘둘러졌다.
괴인의 목은 발도 한 번에 베여나가고, 여자아이에게는 최대한 검격이 닿지 않도록 신경을 썼다.
[잘했어?]
<어, 고마워.>
그리고 혹시 몰라 바람의 정령으로 아이 근처에 보호벽을 쳐두었으니, 최악의 사태까지는 미연에 막을 수 있었다.
"괜찮니? 다친 데는..."
"오빠아아아!!"
아리아는 조금 당황한 눈치로 소녀를 바라보았다. 아리아는 정령술을 익히며 타인의 마음을 감각적으로 눈치채는 것에 능숙해졌다.
지금 저 아이가 느끼고 있는 감정까지 여과없이 느껴진다.
혼란, 절망, 고통, 공포.
그리고 자신을 향한 증오까지.
그 증오에 아리아가 당황할 찰나, 소녀는 목이 잘린 괴인을 붙잡고 울부짖으며 울기 시작했다.
"오빠아아아...! 일어나봐아...!! 오빠아아...!"
아리아는 그 행동에 생각하기 싫은 추론을 떠올렸다. 저 괴인의 출처와 소녀의 오빠가 어떻게 죽은 것에 대한 추측이었다.
목죽지는 토악질이 나올 것만 같은 감각에 뜨거운 역함이 느껴졌고, 머리의 사고는 점차 또렷이 이성을 잃어간다.
자신의 검이 무엇을 베었고, 누구를 죽였는지 인지할 수밖에 없게 되었다.
[아리아! 위험해!]
주변에 있는 정령의 말에 아리아는 급히 정신을 다잡는다. 불확실한 사실로 평정심을 잃으면 안 된다.
레오나르도처럼 언제나 침착하고 냉정하게 다음 상황을 판단한다.
"크에에에엑!!"
어김없이 나오는 또다른 괴인 한 마리, 골목에서 튀어나 일순에 발톱을 날린다.
'반격할 수 있어.'
아리아는 반격으로 검을 잡아 휘두르려고 했다.
"살려줘어..."
순간적으로 그런 목소리가 들렸다. 소녀도, 정령에게도 나온 목소리는 아니었다.
누가 말한 건지 상상하고 싶지 않았다. 하지만 이미 아리아의 예리한 청각은 누가 말했는지 눈치채고 있었다.
"죽이면...안돼..."
[알았어. 아리아.]
그 순간 주변에 있는 괴인을 향해 물의 수압이 날아가고, 그 수분을 찰나에 얼려내었다. 얼음과 물의 정령이 아리아의 마음을 읽고 스스로 괴인을 제압해준 것이었다.
"...그르르르..."
괴인은 몸의 대부분이 얼었음에도 낮은 목소리로 괴성을 내질렀다. 저 괴성이 단지 위협의 목적이라고 생각하고 싶었다.
그 이상을 상상하면 아리아스필이라 할지라도 버틸 수 없을 것이다.
"아가씨!!"
그 순간, 들린 익숙한 목소리.
그 소년만 있다면 이 상황도 버틸 수 있을 것이다.
"괜찮으세요? 지금 도대체..."
"레오나르도!"
레오나르도였다. 다행히 레오나르도는 안전하게 버틴 것 같았다.
"이 괴물은... 아가씨께서 그러신 건가요?"
얼린 괴인을 보며 레오나르도는 걱정스러운 눈치로 물었다.
"...이것들... 아무래도..."
이 상황과 고뇌를 토로하려던 순간, 또다른 목소리가 들렸다.
[위험해... 저 녀석...]
[분명 레오 같은데 뭔가 이상해...]
아까 도와주었던 물과 얼음의 정령이 말한 것이었다. 그 말에 아리아는 다시금 냉정히 판단하기 시작했다.
"...레오."
"아가씨, 괜찮으세요? 어디에 상처는..."
아리아스필은 조금 물러나며 그 레오 같은 무언가를 바라보았다.
"레오, 의심하는 건 미안한데 혹시 팔을 걷어서 상처를 내줄 수 있어?"
"아... 아아. 확실히 의심할 수 있죠. 저번 같은 상황이 또 있을 수 있으니까요."
그는 그 부탁에 수긍하며 팔을 걷었다. 흉터투성이인 팔에 가볍게 나이프로 상처를 내자 피가 흘러나왔다.
"아시죠? 폴리모프는 피부에 상처가 나도 피가 안 나온다..."
서걱
아리아는 돌진하며 발도술을 내보였다. 상처가 난 팔은 그녀의 검격 아래에 잘려 떨어져나갔다.
"으악...! 끄아아아악!! 이게 뭐하는...!"
"너, 누구야. 진짜 레오는 어딨어."
"아까부터 무슨...!!"
아리아는 계속해서 검을 날렸다. 이번에는 복부가 베였다. 몸을 급히 피해 그자는 피했지만 공격은 충분히 들어갔다.
"옷에 묻은 피가 이상하잖아."
피 자체는 제법 뭍어있는 편이지만, 형태가 이상했다. 마치 사선으로 튄 게 아니라, 일부러 핏자국을 묻힌 것 같았다.
그때 예전에 레오가 말해준 것이 떠올랐다.
-추적이나 사냥을 할 때, 핏자국은 좋은 단서에요. 모양에 따라 정황이 파악되거든요.
"그리고 팔을 보여달라고 한 건, 상처에 나오는 피를 보기 위해서가 아니야."
아리아가 보고자 한 건 팔의 흉터였다. 흉터는 난도질하듯 많았지만 아리아는 알 수 있었다.
"팔의 흉터가 달라. 모양도, 위치도."
잘려진 팔의 흉터를 다시 봐도 모양과 위치는 확실히 달랐다.
"...그걸 기억한다고?"
기억한다. 레오니까.
"무엇보다."
그녀는 마무리 짓기 위해 자세를 잡았다.
"레오라면 분명 피했을 거야. 그딴 공격 쯤은."
내 레오나르도니까.
"...냉정하다 해야할지, 박정하다 해야할지."
말투는 이미 바뀌어있었다.
연극이 끝나고, 선량한 역할을 맞았던 배우가 담배를 피며 극단 직원에게 욕설을 하는 것처럼, 신랄하다 느낄 정도의 극단적 변화였다.
가짜는 잘린 팔째로 양손을 들었다. 상처에서 흘러나오는 피는 어느샌가 멎고, 새로운 팔이 돋아났다.
"허당인 줄 알았는데, 천재라는 말이 허명은 아니었나봐."
복부도 마찬가지였다. 재생이라기보단 복구에 가까웠다.
"비슷한 건 이미 한번 당했어."
꿈에서 겪은 경험은 아리아의 성장에 큰 발판이 되어주었다.
"그래? 그럼 이런 것도 당해봤나 모르겠네?"
점토사는 패닉에 빠진 소녀에게 달려들었다.
"어...?! 아아악...!! 살려...주...!"
"꽤나 예술적이네. 남매가 똑같이 죽는다는 건."
소녀의 몸은 수분이 가득 찬 점토처럼 녹아내렸다. 이내 비명은 사라지고 피부와 근육, 뼈마저도 다시 뭉쳐지며 하나의 새로운 인형이 완성되었다.
도살과 생명의 불쾌한 골짜기가 그 소녀의 사체에 고통스레 녹여 들어가 있었다.
"이런 건 관객이 감상이 중요하지. 어떻게 생각하세요? 아가씨?"
불과 3초 만에 일어난 일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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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P.56 탈선의 광란-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