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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

칼리안은 다행히 해가 뜨기 전에 테이난샤 거리에 들어설 수 있었으나 상태는 그리 좋지 않았다. 레이븐의 등에 드러눕다시피 한 상태로 이 곳까지 온 것이다.

일찍 일어났는지 아직 잠들지 않았는지, 마법사 로브를 걸친 몇몇 사람들이 거리를 돌아다니고 있었다. 시커먼 말 위에 사람이 축 늘어져 있는 것을 본 이들이 움찔 놀라며 황급히 물러났다.

그럴 때마다 레이븐의 발굽 소리가 커졌다.

행차를 하며 시선이 집중되던 일을 생각하는 것 같았기에 그 등에 여전히 엎드린 칼리안이 힘빠진 목소리로 말했다.

"레이븐. 우리 지금 그런 멋진 상태 아니야. 부끄러우니까 좋아하지 마."

모든 일을 마치니 긴장이 풀렸고 몸이 또 아팠다.

심장의 문제로 제대로 관리를 하지 못해 다 고갈되다시피 한 마력을 박박 긁어다 강제로 오러를 발현했으니 아무리 약을 먹었다지만 한계가 온 것이다. 덕분에 레이븐의 등을 침대로 써야 했다.

그래도 레이븐이 영특해서 천만다행이었다. 왕도까지 알아서 찾아온 놈이 아니었다면 이렇게 제 때 돌아오지도 못할 뻔했다.

오래지 않아 앨런이 얘기해주었던 마법사 협회에 도착했다. 건물 안으로 비척비척 들어가니, 마법사들이 매우 반갑게 칼리안을 맞이해주었다. 에우리아라는 이름의 마법사 협회장이 직접 나오더니 칼리안을 어떤 방으로 안내했다.

그 곳은 작은 서재 겸 응접실이었는데, 사방의 벽에 세워진 책장에 온갖 마법 서적이 빼곡하게 꽂혀 있었다. 그리고 책상 위에 놓인 장식용 나이프가 눈에 확 띄었다. 하필 칼리안이 지닌 것과 매우 비슷하게 생긴 나이프였던 탓이다.

"스승님."

앨런은 소파에 앉아 있었다.

잠을 자지 않고 칼리안을 기다리고 있었다. 그런 앨런이 너무 반가워서, 칼리안은 순간 눈물이 핑 돌 뻔한 것을 간신히 참아냈다.

앨런이 칼리안의 초췌한 꼴을 보며 입을 딱 벌렸다.

"싸웠습니까? 옷은 다 어디다 팔아먹고?"

칼리안이 웃음을 터뜨렸다.

"싸움 안했습니다. 옷은, 그냥 그럴 일이 좀 있었어요."

도박장에서도 겁을 좀 주고 허세를 부린 것이지 싸운 것은 아니었으니 이것도 거짓말은 아니다.

도박장의 불쾌한 냄새가 몸에 뱄는지 살짝 코 끝을 찌푸리던 앨런이 손가락을 튕겼다. 그러자 청량한 공기가 칼리안의 주변을 감싸 안는 듯 하더니 상쾌한 느낌이 들었다. 클린 마법임을 깨달은 칼리안이 좋아했다.

"감사합니다."

그렇게 말한 칼리안이 앨런의 맞은편에 풀썩 앉았다. 앨런은 손에 들고 있던 책을 접으며 물었다.

"볼 일은 모두 끝나신 겁니까?"

"네, 일단은요. 한 달 뒤에 다시 나와야 할 것 같습니다."

그 말에 앨런이 고개를 끄덕였다. 한 달 뒤에도 데려와 주겠다는 의미를 담고 있었다.

곧 앨런이 들고 있던 책을 그대로 허공에 내려놓았다. 그러자 신기하게도 책이 마치 새가 된 것처럼 팔랑 팔랑 움직여 책장에 꽂혔다. 칼리안이 그 모습을 홀린듯이 쳐다보자 앨런이 설명을 해주었다.

"이 건물 전체에 걸려 있는 마법인데 원하는 물건을 원하는 곳에 가져다 두도록 해 줍니다. 마법사들은 움직이는 걸 별로 좋아하지 않으니 말입니다."

"신기하네요."

"건물에 마법을 거는 것이 더 귀찮았을 테지만 원래 그런 것이 마법사 다운 것이니 그냥 그러려니 하시지요."

칼리안이 웃었다. 그러다, 유독 눈에 띄었던 물건을 보며 물었다.

"그런데 마법사 답지 않은 물건도 있네요. 나이프라니."

그 말에 앨런이 칼리안의 시선에 닿은 것을 한참 응시했다. 그의 입에서 묘한 음색이 흘러 나왔다.

"네. 나이프가, 있군요. 있어서는 안 될 것인데."

앨런이 쓴웃음을 지었다. 칼리안은 무슨 일이냐는 듯한 표정이 되어 앨런을 마주 보았다.

아무것도 아닌 것처럼 놓여 있었으나 그것은 협회장 에우리아가 목숨보다 아끼는 보물이었다. 시스파니안이 직접 만든 것이었기 때문이다. 상대방이 품에 숨긴 무기를 장식품의 형태로 보여주는, 일종의 경고를 위한 마법 물품이기도 했다.

그러니 책상 위에 장식용 나이프가 있다는 것은 칼리안이 지금 나이프를 가지고 있다는 말과 같았다.

앨런의 눈빛이 고요하게 가라앉았다.

"사람이 나이를 먹으면 이런 저런 것이 바뀌게 마련인데 호기심이라는 것은 좀처럼 사라지질 않습니다."

칼리안의 얼굴에 다시 한번 의문이 들었다. 앨런은 그에 대해 더 이상 말하지 않았고 마나를 운용하며 다른 말을 꺼냈다.

"말씀드린 것처럼 이 방의 물건은 제 의지대로 움직입니다. 의지를 전달하는 방법만 알면 되는 일이니 마음대로 움직이는 것이 어려울 것이 없지요."

이런 말을 꺼낸 이유도 이해할 수 없었으므로, 아무래도 좀 주무시는 것이 어떻겠느냐 말하려던 칼리안의 입이 다물어졌다.

"사람의 속마음이라는 것도 그렇게 마음대로 움직이고 들춰볼 수 있으면 참 좋을 터인데."

책장에 놓여 있던 장식용 나이프가 조용히 떠오르는 것을 보았기 때문이다.

"그것만은 마음대로 할 수가 없으니."

"스승님."

나이프가 칼리안을 향해 천천히 돌아섰다.

장식용이라 하기엔 다소 날카로운 칼날이 자신을 향하는 것을 본 칼리안의 눈이 살짝 찌푸려졌다.

"······ 제가 그것을 이렇게라도 열어볼까 하여."

장난일 것이라 생각했다. 하지만 앨런은 멈추지 않았다.

- 쌔애액!

나이프가 칼리안의 목을 향해 전광석화와 같은 속도로 날아들었다. 위험을 느낀 칼리안의 손이 본능을 따라 움직였다.

- 카앙!

날과 날이 부딪히는 소리가 찢어질 듯이 울렸다.

그리고 완전한 정적이 찾아들었다.

앨런은.

어느새 뽑혀 나와 칼리안의 손에 들려있는 나이프와, 그것에 튕겨 벽으로 날아가 꽂힌 또 하나의 나이프. 그리고 검의 날처럼 날카롭게 벼려진 칼리안의 눈을 쳐다봤다.

칼리안은 아무 말 없이 앨런을 바라보고 있었고 앨런은 그런 칼리안의 눈빛을 묵묵히 지켜보았다.

숨이 막힐 듯한 침묵을 뚫고 앨런의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설명. 해주시지요."

칼리안이 잠시 눈을 감았다.

제6장. 나쁜 뜻은 없으니 (7)

칼리안은 참담한 기분을 느꼈다.

칼리안의 목 앞에서 나이프가 멈추었다는 것을, 막지 않아도 될 공격이었다는 것을 뒤늦게 알았다. 손에 들린 칼이 그리도 원망스러울 줄은 몰랐다.

조금 전 벽에 날아가 박힌 나이프가 저절로 뽑히더니 앨런의 손 안으로 들어갔다. 칼날에 깊은 검흔이 남아 있었다.

"정말 빠르십니다. 그런 몸으로."

그렇게 입을 연 앨런은 그리 놀란 얼굴이 아니었다. 칼리안이 나이프를 막을 것이라는 것을 익히 예상했다는 태도였다. 입을 열지 못하는 칼리안을 보며, 앨런이 침착한 목소리로 말했다.

"놀라게 해 드려 죄송합니다."

칼리안은 고개를 가로저었다. 여전히 말을 하지 않았다. 그 입을 열고자 앨런이 대신 이야기를 시작했다.

"처음 뵈었던 날. 왕자님이 한참 전부터 저를 기다리고 서 있던 것을 알고 있었습니다. 궁금했지만 우연이겠거니 생각했지요. 그것을 묻기엔 왕자님께서 이미 위험한 상황이라는 것을 알았고 다른 생각을 하기엔 조금 바빴습니다."

아예 처음부터 들켰다는 말이었다.

칼리안의 입에서 한숨이 새어 나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의심 않고 칼리안을 도왔던 사람에게 믿음을 운운했으니 이 얼마나 우스운 일인지.

"그런데 이상한 것이 점점 늘어나더군요. 르메인은 왕자님이 말을 무서워한다고 하였고 귀족들은 왕자님이 완전히 다른 사람이 되었다며 신기해하고. 공연장에 갔던 마법사는 왕자님이 사고를 막아냈다 하지를 않나."

칼리안의 손에 힘이 들어갔다.

공연장의 일을 앨런이 알고 있다는 것에 놀란 것이다.

"그래도 여기까지는 그러려니 하고 넘어갈까 했지요. 그런데, 이상한 것이 또 있었습니다."

허탈한 웃음이 칼리안의 입가에 맴돌았다. 또 있다니. 이래서는 얀이 왜 칼리안을 의심하지 않는지를 고민해야 할 판이었다.

"중독됐다는 것을 알려주었을 때 왕자님 눈에 살기가 보였습니다. 헌데 또 금방 지우더군요. 그 눈은 나비 한 마리 죽여보지 못했을 왕자의 것이 아니었습니다. 제 손에 어지간히도 많은 피를 묻혀본 자나 그런 것을 뿌리고 멋대로 거둘 줄 아는 것이지요. 그렇게 하나 하나 뒤얽힌 실타래가 풀리질 않아서, 저는 밤새 그것을 고민하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거기까지 말한 앨런이 손에 들린 나이프를 살짝 들어보였다.

"시스파니안이 만든 것입니다. 숨긴 무기를 보여준다기에 올려두어 보았는데 화분이었던 것이 나이프로 바뀌더군요. 왕자님께서 나이프를 가지고 있다는 말이었고, 또 왕자님은 살기를 내보일 줄 아는 분이니. 혹시나 하여 건네드려 보았습니다."

칼리안이 저도 모르게 실소하며 대꾸했다.

"목젖을 뚫을 기세로 건네주셨는데."

앨런은 고개 숙여 다시 한번 사과의 뜻을 보인 뒤 말했다.

"저는 왕자님을 믿고 제 삶의 한 면을 고스란히 맡겼습니다. 처음으로 만든 제자라는 놈이 꽁꽁 숨겨놓고 풀어놓지 않는 것을 알지 못하면 의심이 생길 것 같았습니다. 그러니 이제 그만 설명해주시지요. 듣겠습니다."

칼리안이 고개를 끄덕였다.

이미 자신이 진짜 칼리안이 아니라는 것을 확신하고 있으니, 더 숨길 것도 없었다.

"말씀 드리겠습니다."

칼리안은 무슨 말을 어디서부터 어디까지 해야 할지 고민하지 않았다. 모든 것을 꺼내놓기로 했다. 그리하여 조용히 눈을 감고 천천히 말을 시작했다.

"베른입니다. 본래의 제 이름입니다. 베른 세크리티아."

세크리티아.

앨런의 어깨가 움찔했다. 이 시점에 튀어나온 그 이름이 무언가를 떠올리게 했다.

체이스, 그리고······.

칼리안은 말을 멈추지 않았다. 눈을 감고 있었으므로 이름을 들은 앨런의 반응이 심상치 않다는 것을 눈치 채지 못한 탓이다. 때문에 계속되는 칼리안의 말이 앨런에게는 진실을 원했으니 모두 듣고 함께 감당하라는 듯 느껴졌다.

"지금의 왕세자, 제가 있던 시간에서는 왕이셨던 체이스 듀라한 세크리티아의 동생이었습니다. 기사였고요. 그래서 말도 타고 살기도 다루고 칼도 좀 쓸 줄 압니다."

담담한 목소리가 이어졌다.

세크리티아의 왕자였던 베른이 세자위를 받지 않으려 기사가 되고 체이스가 왕위에 오른 것. 그리고 이어진 카이리스와의 전쟁.

수도 세크레타를 둘러싼 학살과도 같았던 마지막 일주일.

왕을 수호해야 할 친위대까지 왕을 두고 성 밖으로 나서야만 했던 절망적인 상황. 모두가 죽고 홀로 성문 앞을 지키던 베른마저 결국 죽음을 맞이한 것까지. 칼리안에게 있어 과거가 된 이야기를 모두 풀어놓았다.

그리고 칼리안은 한번 숨을 내쉰 후 입을 열었다.

"그런데. 세크리티아에는 특별한 것이 있었습니다. 전쟁의 원인이 되기도 했던 물건입니다."

- 달그락.

앨런이 테이블에 나이프를 내려놓았다. 다음 말을 들으면, 그것을 떨굴 것 같아서였다.

"스승님께서는 믿기 어려우시겠지만, 시간의 축이라는 그것은."

이번엔 앨런이 눈을 감았다.

나이프를 내려놓으니 대신 심장을 떨군 느낌이 들었기 때문이다. 앨런의 얼굴에 그 동안 한 번도 보이지 않았던 혼란스러움이 나타났다.

"······ 시간을 되돌린다 하였지요."

앨런의 말에 칼리안은 자신의 귀를 의심했다.

방금 들은 소리가 무슨 뜻인지 이해하기까지 시간이 걸렸다. 그런 칼리안을 한참동안 쳐다보던 앨런이 물었다.

"언제로 돌아오셨습니까."

칼리안의 입에서 숨을 들이키는 소리가 났다.

마치 모든 것을 알고 있다는 듯한 말이 아닌가.

당장 설명부터 듣고 싶었다. 하지만 앨런의 얼굴은 대답을 요구하고 있었다. 손 끝이 떨려오는 것을 간신히 붙든 칼리안이 메마른 목소리로 대답했다.

"한 달······ 한 달 전입니다. 눈을 뜨니 제 시종 얀이 저를 깨우고 있었습니다. 10년의 시간을 앞당긴 채였습니다."

앨런이 소파에 등을 기댔다. 그리고는 말 없이 손을 올려 관자놀이를 주물렀다.

왜 그것을 떠올리지 못했을까.

밤새 고민을 해놓고도.

생각할 시간이 필요해 보이는 얼굴이었으므로, 칼리안은 조급한 마음을 가라앉히며 기다렸다.

비로소 앨런의 입이 열린 것은 어느새 창문 틈 새로 햇살이 들기 시작할 즈음이었다.

"이미 독에 당한 상태셨을 테고. 본래의 칼리안 왕자가 어찌 죽는지도 알고 계셨을 것이니. 제가 올 것을 알았다는 듯 기다리다 나온 것은 그런 이유였군요."

칼리안이 침통한 얼굴이 되어 대답했다.

"맞습니다. 스승님을 만났던 날의 일은······ 우연이 아니었습니다."

첫날의 패기는 다 어디다 두고 어미 잃은 고양이 꼴을 하고 있었다. 그런 칼리안을 지긋이 쳐다보던 앨런이 말했다.

"어차피 왕자님 앞길에 쓰려고 저를 찾으셨던 것이니 미리 알고 기다렸든 아니든 상관치 않습니다. 그런 일로 실망하지 않으니 마음 쓰지 마시지요."

앨런은 그렇게 말한 뒤 잠시 입을 다물었다. 시간의 축을 어찌 알았는지 말해주기 전에 칼리안에게 전해야 할 말이 있었다.

"다만 왕자님께서 먼저 아셔야 할 것이 있습니다."

칼리안의 고개가 위 아래로 움직였다.

앨런이 꺼내는 말은 모두 다 들을 준비가 되어 있었다.

"지금 세크리티아에는 체이스 왕세자 뿐입니다. 체이스는 본래부터 외아들이었고, 왕비에게는 자식이 없었습니다. 그것을 아마도 모르시는 듯 하여."

칼리안이 말 없이 앨런의 눈을 보았다.

앨런이 우려했던 것 같은 감정의 동요는 없었다.

"어렴풋이 느끼고 있었습니다. 제가 여기 있으니 베른이 또 있을 수는 없으리라고요. 그것이 이른 죽음일지 무엇일지 몰라서 어찌 사라졌을지가 걱정이었는데. 아예 태어나지 않은 것이군요."

"네. 그리 된 것 같습니다."

삶이 지워진 것은 어떤 기분일지 가늠이 어려웠다. 때문에 앨런은 어줍잖은 위로 대신 그렇게만 말했고 칼리안은 담담하게 대답했다.

"차라리 다행한 일입니다."

어찌하겠는가. 칼리안은 그렇게만 생각했다.

이미 베른도 다른 이의 생을 빼앗지 않았는가.

"허면, 본래의 칼리안 왕자는 죽은 것입니까?"

앨런은 마치 칼리안이 누구를 떠올렸는지를 읽은 것처럼 물었다. 지금 이 순간도 옛 칼리안이 살아있던 시기였기 때문이다.

칼리안이 고개를 가로저었다.

그리고 자신의 머리를, 그리고 심장을 가리켜 보이며 대답했다.

"처음에는 몰랐으나 아직 있습니다. 예정된 날이 되면 떠날 것 같지만요."

칼리안의 말에 대답처럼 떠오르는 기억들.

그것이 단순한 기억이 아니라는 것을 문득 알게 되었다. 항상 질문을 해야 기억이 떠올랐던 이유는 그것이 바로 옛 칼리안의 대답이었기 때문이었음을.

"서로 대화를 나눌 수 있는 것은 아니지만 있는 것은 분명합니다. 하지만 무슨 일을 겪어 제가 이 곳에 들어온 것인지는 알려주질 않습니다. 옛 칼리안도 모르는 상태일 수도 있고요."

앨런이 고개를 끄덕여 알겠다는 뜻을 전했다. 칼리안이 손가락으로 무릎을 톡톡 건드리며 물었다.

"시간의 축. 어떻게 아십니까?"

"그리 대단한 일은 아닙니다."

앨런이 어깨를 살짝 으쓱이며 답했다.

"작년에 세크리티아를 방문했습니다. 체이스가 비밀리에 불렀지요. 시간의 축이라는 것이 발견되었다며 그것에 대한 자문을 구했습니다. 저는 체이스만 만난 후 돌아왔으니 이전 시간에 같은 일이 있었다 해도 왕자님은 모르셨을 겁니다."

칼리안이 바짝 마른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형님께서 따로이 알아보고 계셨던 거군요."

"혹시 기대하실까봐 미리 말씀드리자면, 죄송하게도 그에 대해 달리 알아낸 것은 없었습니다."

"아닙니다. 그럴 것이라 생각 했습니다. 스승님께서 알아내신 것이 있었다면 저도 알고 있었어야 했으니까요."

고개를 끄덕여 보인 앨런이 다시 말했다.

"시간의 축이라는 그 물건이 아무래도 사람의 힘으로 만든 것은 아닌 듯 하여, 세렌티의 신물은 아닐까 하는 의견은 주고 받았습니다만."

"신물은 신관들이 쓰는 것 아닙니까? 신력을 대체하는 수단이지 신물 자체가 다른 능력을 가졌던 적은 없는 것으로 압니다."

양신 전쟁으로 악신이 봉인되고 주신 세렌티는 잠들었다.

그 이후로 신관들은 신력을 발현하지 못했다. 때문에 세렌티의 신물에 남아있는 신력을 소모하여 치유력을 행사했다.

"맞습니다. 때문에 결국은 의문만 남았지요. 게다가 이제는 그것에 대해 확인할 수가 없게 되었습니다만."

그렇게 말한 앨런의 손이 칼리안을 향했다.

"한 달 전, 시간의 축이 사라졌다는 연락을 받았습니다. 그것이 이렇게 고양이 한 마리를 데려온 모양이군요. 아무튼 체이스나 왕자님이나 이 일로 저를 찾으신 셈이니 형제는 형제라고 해야 할지."

그 말을 들은 칼리안이 조금 아프게 웃었다.

앨런은 그것을 보지 못한 척 했다. 대신 테이블 위에 올려진 나이프를 물끄러미 쳐다보며 물었다.

"저를 처음 보셨던 날. 왕자님께서 원하는 것은 왕좌가 아니라 하셨었는데. 그렇다면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 다시 여쭈어도 되겠습니까?"

대답하지 못할 이유가 없었다. 칼리안이 선뜻 답했다.

"전쟁을 막으려 했습니다."

"전쟁의 원인이었던 시간의 축은 이제 사라지고 없지 않습니까. 그렇다면 전쟁은 일어나지 않는다 보아도 되지 않을는지."

칼리안이 답했다.

"원인을 모릅니다. 플란츠가 시간의 축을 가지려고 했던 이유를 아직 알 수 없습니다. 원인이 남아있다면 결국 문제는 되풀이 될 뿐이니 그것을 알아내어 확인하고자 합니다."

"그것은 체이스를 위해서입니까?"

칼리안이 앨런을 쳐다봤다. 질문의 의도를 알기 어려웠다. 그것을 눈치챈 앨런이 설명을 덧붙였다.

"체이스를 만나보고 제가 아주 감탄했습니다. 인품이며 학식이며 능력이며 무엇 하나 부족함이 없더군요. 카이리스 왕자 셋을 다 합쳐도 체이스 하나만 못 할 겁니다."

백 번 천 번 맞는 말이었다. 무슨 말로 설명해도 체이스를 온전히 칭찬할 수는 없으리라.

"맞습니다. 형님은 더 없이 훌륭한 군주가 되었습니다."

"그러니 목숨이 경각에 달린 카이리스의 3왕자는 그리 훌륭한 세크리티아의 왕세자를 걱정하지 않아도 되겠지요."

"······과거에 얽매여 살지 말라는 말씀이시군요."

칼리안이 평온한 표정을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이 곳에 온 첫 날에 베른으로 살고자 하는 마음은 버렸습니다."

앨런이 몸을 일으켜 앉았다. 그리고 탁자의 나이프를 가리켜보이며 말했다.

"한번 물어볼 만한 이는 있지요. 저보다 많은 것을 알고 있고, 저나 체이스는 만나지 못하지만 왕자님께서는 머지않아 만나시게 될."

앨런의 손을 따라 시선을 돌린 칼리안이 다시 고개를 들어 앨런을 쳐다봤다. 답을 말하기까지는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로젤리타."

앨런이 고개를 끄덕였다.

이제는 너무 익숙해진 이름이 떠올랐다.

"시스파니안이 있군요."

로젤리타, 카이리스 왕자의 성인식.

시스파니안의 빈 둥지를 찾아가 진짜 왕족이 되었음을 알리는 의식이었다. 그리고 로젤리타에 나선 왕자는 시스파니안의 의지와 만난다 하였다.

"그러니 독차는 하루라도 빨리 해결하십시오. 코끼리들의 땅, 지그프리드의 영지는 꽤 멉니다. 준비하셔야지요."

칼리안이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제7장. 장미가 곧 피겠더군요 (1)

아침이 되어서야 궁에 돌아와 한 숨을 자고 일어나니 눈이 시뻘겋게 변한 얀이 바로 옆에 앉아 칼리안을 쳐다보고 있었다. 뜨악한 칼리안이 튀어오르듯 자리에서 일어나 몸을 뒤로 뺐다.

"깜짝아."

얀의 눈에 핏줄이 서고 눈 밑이 거무죽죽한 것이 도무지 잠을 잔 모양새로 보기가 어려웠다.

"밤새 기다렸으니 너도 좀 자라고 했잖······."

"왕자님."

진지한 표정을 지은 얀이 칼리안의 말을 잘랐다.

"모닝 티, 왜 드십니까?"

독이 들었는지를 의심하는 것 같아서 칼리안이 지레 뚱한 얼굴을 만들어 보였다.

"네가 줬잖아."

작은 책망을 담은 말이었다.

물론 독이 든 차라는 사실을 몰랐던 것을 탓할 생각은 없었다. 정작 당사자인 칼리안도 독을 의심하지 않았으니까. 단지 아침마다 저 차를 꼬박꼬박 가져다 준 둔하디 둔한 성실함에 아주 조금 심술이 났을 뿐이었다.

그런 뜻을 아는지 모르는지, 확인하고자 한 것의 답을 듣지 못한 얀은 침대 옆의 협탁으로 손을 뻗었다.

아직 마시지 않은 모닝 티가 있었다.

얀은 그것을 들어 주저 없이 제 입으로 가져갔다.

칼리안의 눈이 날카롭게 변했다.

- 탁!

칼리안이 얀의 입에 닿으려는 찻잔을 뺏어들었다. 그 바람에 찻물이 흘러 바닥에 떨어졌다. 갈색의 물이 카펫에 스미는 것을 쳐다보던 얀이 저도 모르게 주먹을 꽉 쥐었다.

그 꼴을 본 칼리안도 화가 치밀었다.

숨긴 것을 말하라며 죽이려고 들질 않나, 죽으려고 들질 않나.

곱게 물어보질 않고 다들 왜 이렇게 극단적인지!

"뭐하는 짓이야!"

얀을 향해 무섭게 소리친 칼리안이 다급히 손을 뻗어 얀의 얼굴을 살폈다.

"삼켰어?"

얀이 칼리안의 손을 치웠다. 평소 같지 않은 행동이었으나 그에 신경 쓸 정신이 없었다. 말 없는 얀이 답답해진 칼리안은 다시 소리를 높였다.

"먹었냐고!"

"안 먹었습니다!"

얀이 마주 소리질렀다. 칼리안은 그런 얀을 질책하지 않았다. 잠시 뒤, 얀이 입을 열었다.

"제가 제 손으로 왕자님께 독을 드렸군요."

그리고는 다른 말 없이 칼리안을 쳐다봤다. 그 표정에 얀이 하고 싶은 말이 모조리 드러났다. 온갖 욕설과 분노, 후회가 나타났다 사라지기를 반복했다.

그 모든 것은 칼리안이 아닌 얀 스스로를 향해 있었다.

"칼도 못 쓰시는 분이 나이프를 구해오셨기에 왜일까 하고 생각을 하다가."

그놈의 나이프. 괜히 샀다!

"왕자님의 상태와 연관 짓게 됐습니다. 마나실 경이 준 약을 떠올리니 리베른에서 독살당한 마나실 경의 아드님이 생각났고."

칼리안이 깜짝 놀라 얀을 쳐다봤다.

앨런의 일은 전혀 몰랐던 사실이었다. 그제야 자신을 처음 보았을 때 앨런이 왜 그렇게 이곳 저곳을 살펴보았는지, 어떻게 자신의 상태를 속속들이 알고 있었는지가 이해되었다.

"그러다 보니 독을 염두에 두게 되었습니다. 그렇게 생각에 생각이 이어지다가. 모닝 티, 저것이 아닐까 하고."

찻잔을 뺏었을 때 이미 긍정한 것이나 다름 없었다.

그 성격에 혹여 자책할까 걱정했는데 다행히 얀은 생각보다 냉철하게 대응했다.

"······ 실리케입니까?"

평소 얀은 실리케를 저리 부르지 않았다.

맞다고 했다가는 당장이라도 헤이시아 궁에 쳐들어갈 태세였다. 칼리안이 그런 얀을 잠시 바라보다가 가만히 대답했다.

"왜. 복수해주려고?"

"못할 것도 없지요."

차갑게 식은 목소리였다. 얀의 주먹에서 핏기가 사라져 있었다. 칼리안이 고개를 가로저었다.

"코끼리들은 그냥 있어. 전쟁 나."

뭔가를 말하려던 얀이 입을 다물었다.

지금 칼리안이 한 소리를 머릿속으로 되뇌고 있는 것이다. 그렇게 얀은 한참동안 말을 잃은 채로 칼리안을 쳐다봤다.

그러다 결국은 놀란 목소리가 입술 새를 비집고 나왔다.

"······헐."

애초에 슬레이만과 닮은 구석이 너무 많았다.

하루 종일 얀과 붙어다니는 칼리안이 몰라 볼 수가 없었다. 그래도 설마설마 하기는 했으나, 앨런을 붙들려 왕궁을 나갔음을 알았을 르메인이 며칠이 지나도록 아무 말도 하지 않는 것을 보고 완전히 눈치를 챘다. 물론 그들을 코끼리라 부르는 것은 앨런 덕에 알았다.

칼리안은 앞에 앉아 눈을 꿈뻑거리는 새끼 코끼리에게 단호한 목소리로 말했다.

"독차 하나 물리자고 지그프리드와 브리센의 전쟁을 불러올 수는 없지. 그러니 너는 개입하면 안돼. 내 일이니까 그냥 둬."

초식동물은 초식동물 답게.

그들의 신념이 상처 입지 않도록.

"어차피 화요일에 해결 될 거야."

느긋한 목소리로 말한 칼리안이 잔에 남아 있던 차를 마셨다.

* * *

칼리안이 마차를 보내 앨런을 궁으로 불러들였다. 얀이 예상했던대로 사절단 송별식과 오찬이 왕자들의 참석 없이 진행되어 시간이 생겼기 때문이다.

앨런은 칼리안을 만나기가 무섭게 서류 하나를 내밀었다. 그간 마법사들이 모아둔 정보들, 즉 실리케가 저지른 일들의 정황을 추린 것이었다. 칼리안이 반가운 얼굴로 그것을 받아들며 말했다.

"감사합니다. 협회에도 고생 많았다고 꼭 전해주세요."

"가져와 달라고 하셔서 드리기는 합니다만 보시다시피 크게 도움이 될 것 같지는 않습니다."

칼리안이 의미심장하게 웃으며 말했다.

"무슨 목적으로 어떻게 쓰느냐에 따라 다르니까요. 이 정도면 충분합니다."

그것을 나중에 보기 위해 일단 금고에 넣어두도록 한 칼리안이 앨런을 보며 다시 입을 열었다. 이제부터 앨런이 진행해야 할 일에 대해 이야기를 나누어야 했기 때문이다.

"잠시 걸으시죠."

하늘이 계속 흐리고 바람이 많이 불어와 걷기에 좋은 날씨는 아니었다. 하지만 앨런과의 대화 내용이 새어 나갈 것을 우려한 칼리안은 그렇게 말하며 방을 나섰고, 앨런이 묵묵히 발을 옮겼다.

"당연하겠지만."

칼리안이 그렇게 운을 뗀 것은, 이 곳에 온 첫날 시스파니안 조각상을 보며 분을 삼켰던 바로 그 자리를 지나칠 즈음이었다.

그리고 칼리안의 목소리가 나옴과 동시에 둘의 주변에 얇은 사일런트 막이 생겼다. 그런데 둘이 걷는 걸음을 따라 막도 함께 움직였다. 그 막을 밖에서도 볼 수 있었다면 얀이 앨런에게 할 말이 좀 있었을 터였다.

"마법이 있었는데 굳이 나올 필요가 없었네요."

칼리안이 겸연쩍게 웃었다.

"마법사 스승님을 두니 좋군요."

"편히 말씀하시지요."

그렇게 말하며, 앨런이 칼리안 쪽으로 고개를 기울였다. 고개를 끄덕인 칼리안이 다시 말했다.

"제가 본격적으로 마법에 손을 대면 실리케든 브리센 후작이든 견제를 하고 싶어 할 겁니다. 어떻게든 방해할 명분을 만들려고 머리를 굴리겠죠. 시간이 가면 갈수록 심해질테고요. 물론 스승님의 이름이나 협회만으로도 대응할 수는 있겠지만 제 생각에는 스승님께서 보다 제대로 된 세력을 가지시는게 더 좋을 것 같습니다."

앨런이 슬쩍 웃었다. 말을 꺼내는 의도가 보였기 때문이다.

"이번에는 저를 방패로 쓰실 생각입니까?"

"아시다시피 쓰임새가 너무 많으시니. 다만 방패라기보다는."

잠시 입을 다물고 생각을 마저 정리한 칼리안이 말을 이었다.

"무기입니다. 브리센의 기사단을 견제할 정도는 될 테고요."

앨런이 살짝 웃었다. 본격적으로 재미있는 일이 생기려 한다는 것을 눈치챈 것이다.

"기대되는군요."

"네. 스승님 마음에도 드실 겁니다."

"그럼 제가 어떤 무기가 되어 드리면 될는지요?"

둘의 걸음이 장미 정원이 있는 곳에 들어섰을 때 쯤 칼리안의 대답이 들려왔다.

"마법사단."

익숙하지 않은 단어를 들은 앨런이 고개를 갸웃했다. 기사단도 아니고 마법사단이라니.

"말 그대로 마법사로 구성된 군대입니다."

카이리스의 마법사단, 발칸.

그에 대한 기억을 떠올린 칼리안의 심장이 쿵쿵 소리를 냈다.

어찌 잊을까.

베른의 생과 세크리티아를 앗아갔던, 오로지 마법사로만 이루어진 군대의 힘을!

- 하얀 악마들.

세크리티아의 사람들은 그들을 이렇게 불렀다. 하얀 갑옷과 하얀 망토, 그리고 하얀 마스크로 얼굴을 가린 그들이 나타나면, 어김 없이 재앙이 내렸다.

성곽을 파괴하고 계곡을 메꾸어 길을 내고, 도시를 불태우며 기사들을 얼려버린 집단. 속수무책으로 세크리티아를 잃게 한 그들은 진정 악마였다.

그러나 지금의 시기에서는 아직 존재하지 않는 것이었다.

"마법사단을 만드는 겁니다."

한 번 더 힘주어 말한 칼리안이 다시 발을 옮겼다. 의외로 앨런은 조용히 입을 다물고 그 뒤를 따랐다. 칼리안이 하는 이야기를 알아듣지 못했거나 혹은 거부감이 든 까닭은 아니었다.

"그것이 가능하겠습니까? 마법사라는 족속을 아시지 않습니까. 단체 행동에 익숙하지 않을 뿐더러 기사처럼 함께 훈련받고 성장할 수 있는 것도 아닙니다."

가능성을 확신할 수 없었기 때문이었다.

충분히 이해할 수 있을 반응이었다. 모두가 그랬으니까. 르메인이 마법사들을 모아 군대를 만들겠다 했을 때, 비웃지 않은 사람이 없었다고 들었다.

지금 앨런도 같은 생각을 하고 있는 것이다.

마법사들로 어찌 군대를 만들 수 있단 말인가? 그런 군대가 제대로 돌아가기는 하겠는가? 라고.

"가능했습니다."

그것은 그 어떤 말보다 확신을 주는 대답이었다. 이미 지난 과거이자 미래에 대한 증언이었으니까.

"그것도, 이 카이리스에서 해냈습니다. 오로지 르메인의 손 안에서 이루어졌던 일이예요."

"허."

앨런이 헛웃음 소리를 냈고 칼리안이 말을 이었다.

"르메인이 마법사를 홀대하던 입장을 하루 아침에 바꾸어 마법사단을 만든다 했을 때, 브리센에서는 그에 대해 반대할 가치도 없다고 여겼다 들었습니다. 자연히 사라질 것이라고. 덕분에 만들어졌습니다. 한 번 가능했으니 시기를 앞당긴다 하여 만들지 못할 이유가 없습니다."

앨런이 대답하지 않았다.

어떻게 만들고 운영해야 할지 벌써부터 고민을 하기 시작한 것이다. 하지만 그보다 앞서 알려주어야 할 더 중요한 사실이 있었으므로, 칼리안은 앨런의 생각을 잠시 방해했다.

"제대로 된 군대가 되기까지 꽤 오랜 시간이 걸렸습니다. 그런데 마법사단이 완전한 모습을 갖춘 직후 르메인이 죽었습니다. 의문사였어요."

어떻게 죽었는지 그 사인이 전혀 알려지지 않았다. 완성된 마법사단은 왕위를 이어 받은 플란츠에게 고스란히 넘어갔다.

그런 이유로 마법사단의 힘은 르메인이 아닌 플란츠가 실감했고, 세크리티아는 통감했다.

"그러니 이번에도 쉽지는 않을 겁니다. 위험할테고요. 단순히 스승님의 명성으로 마법사를 모으는 것과는 차원이 다른 일이니까요."

"위험한 일이니 할 수 있겠는지를 물으시는 것이 아니라 해야 할 일이 있는데 위험이 따르니 참고하라는 소리가 맞으신지요."

"네. 맞습니다. 필요한 일이지만 걱정이 되어서요."

새롭고 위험한 일을 맡기는 제자의 담담한 얼굴을 쳐다보던 앨런이 칼리안을 향해 고개를 살짝 기울였다. 그리고 비밀스러운 이야기를 전하듯 작은 소리로 말했다.

"사실은 제가, 마법을 좀 잘 씁니다."

걱정하지 말라는 뜻이리라.

칼리안이 웃으며 고개를 끄덕이자 앨런이 다시 입을 열었다.

"하지만 시작은 쉽지 않겠군요."

만약 앨런이 나서서 마법사단을 만든다 하면 브리센 가문은 이전에 르메인이 일을 추진했을 때처럼 무시하고 넘기지만은 않을 것이다. 반드시 방해가 있을 터였다.

"네. 그래서 지금 말씀 드리는 겁니다."

그렇게 대답한 칼리안이 잠시 바람에 흔들리는 나무를 쳐다보다, 이번 일에서 가장 중요한 이야기를 꺼냈다.

"조만간 르메인이 실리케와 선물을 주고 받을 일이 한번 더 생길 테니까요. 플란츠의 실수를 봐주는 대신 브리센 상단의 이득을 일부 줄인 것과 같은 일이요. 이번엔 실리케의 실수를 봐주는 대신이 되겠지만 말입니다."

"드디어 독차를 물리실 생각이십니까."

앨런이 자신의 말 뜻을 곧바로 알아 듣자 칼리안이 혀를 내둘렀다.

무슨 생각으로 이런 사람을 속이려고 했는지.

"눈치 진짜 빠르시네요. 맞습니다. 차, 이제 치우려고요. 다만 이전에도 얘기한 것처럼 이번 일로 실리케를 처벌할 수는 없을 겁니다. 그래서 저도 조금 다른 방법을 쓸 생각이고요."

마법사의 증언과 독을 지닌 크리모사를 수입했다는 기록만으로는 실리케가 칼리안에게 독차를 주었다는 증거가 될 수 없었다. 게다가 독차를 마신 것이 밝혀지면 칼리안의 주변인들이 줄줄이 피해를 보게 되므로 칼리안은 그것으로 실리케를 처벌할 생각을 아예 접었다.

"어떤 방법인지 물어도 되겠습니까?"

칼리안이 대답 대신 옅은 미소만 지었다. 아직 자세히 이야기하지 않겠다는 뜻이었다.

"실리케가 제게 독을 썼다는 것을 협상의 빌미로 잡을 수 있도록은 해 놓겠습니다. 그렇게 되면 얼마 전 플란츠의 말실수에 이어 실리케까지 사고를 친 셈이 되니, 브리센에서도 큰 소리를 내지 못할 겁니다. 그러니 그 때 브리센 후작과 실리케에게 마법사단 창설을 방해하지 말라 요구하시면 됩니다."

앨런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차를 물리는 일에 대해서는 마법사 협회에서 도와주실 것이 있습니다. 정리가 되면 부탁을 좀 드리겠습니다."

"알겠습니다. 언제든 말씀하시지요."

흔쾌히 대답한 앨런이 잠시 누군가를 떠올리며 입을 열었다.

"그나저나 왕자님의 독차 문제가 해결되면 르메인도 한시름 놓겠군요."

"르메인이 한시름을 놓다니, 그게 무슨 말씀이십니까."

"사실 제가 이 곳에 왔던 날, 르메인의 작태에 화를 좀 내었습니다. 그러다 실리케가 왕자님께 어떤 선물을 하고 있었는지를 말하게 되었습니다."

앨런이 이런 말과 함께 당시 무슨 말이 오갔는지를 설명했다. 열심히 편을 들어준 것에 감사를 전한 칼리안이 잠시 생각에 빠지더니, 곧 고개를 끄덕였다.

"스승님 덕분에 이번 일로 얻을 것이 늘어나겠네요. 운이 좀 따라야 되겠지만요."

그렇게 말한 칼리안이 원래 하던 이야기로 돌아와 말을 이었다.

"아무튼, 왕자를 살해하려 한 정도의 큰 실책을 저들이 언제 또 하게 될지 알 수 없으니, 반드시 이번에 협상을 해야 합니다. 그러려면 마법사단의 윤곽이라도 계획이 되어있어야 하고요. 그러니 곧바로 시작해주세요. 르메인과도 의견을 나눠봐 주시고요. 분명 르메인이 생각하던 것이 많을 겁니다."

"늙은 스승을 너무 부리시는군요."

"몹시 팔팔하시다고 얀이 그러던데요. 그래서 가책 없이 부리려고 합니다."

앨런의 부드러운 웃음소리가 사일런트 막 안을 작게 울렸다.

"그리하시지요."

제7장. 장미가 곧 피겠더군요 (2)

하루 종일 날이 흐리더니 다음 날이 되자 비가 주룩주룩 내렸다.

창문을 두드리는 빗물과 바람 소리 때문에 칼리안은 새벽같이 잠에서 깼다. 얀이 아침 맞이를 위해 칼리안의 방을 찾았을 때 침대 헤드에 등을 기대고 앉아 있던 칼리안이 손을 흔들며 인사했다.

"좋은 꿈 꿨어?"

항상 자신이 묻던 아침 인사를 들은 얀이 어색한 얼굴로 칼리안의 인사를 받았다.

"네, 왕자님. 좋은 꿈 꾸셨습니까?"

칼리안은 고개를 끄덕이며 손을 내밀었다. 차를 달라는 것이었다. 마뜩치 않은 얼굴로 건네는 차를 받은 칼리안이 그것을 한 입 마셨다.

그러다, 순간적으로 찻잔에서 살짝 입을 뗐다.

'다르다.'

미묘한 차이가 있었다. 신경을 곤두세우고 마시지 않았다면 느끼지 못했을 만큼의 작은 차이였으나 분명했다.

이유를 깨닫는 것은 어렵지 않았다. 본능적으로 알 수 있었다. 실리케가 독을 늘렸다는 것을.

칼리안이 잔에 다시 입술을 가져다 대며 살짝 웃었다.

'실리케. 독기가 올랐구나.'

축제 기간 동안 속만 뒤집어 놓으려고 했더니 이성도 뒤집어버린 모양이었다. 칼리안에 대한 귀족들의 반응이 너무 좋았으니까.

'이번에도 모르는 척 마실 것인가. 혹은 물릴 것인가.'

찰나와 같은 고민 끝에, 칼리안은 남은 차를 모두 마신 뒤 얀에게 돌려주었다.

'당장 죽을 만큼 양을 늘린 것이 아니라면 화요일까지는 큰 문제가 없을 테니.'

이런 사실을 모르는 채로 아침 준비를 끝낸 시녀들을 돌려보낸 얀에게 칼리안이 말했다.

"수요일에 두 명이 찾아올거야. 하프엘프 남매니까 놀라지 말고."

그 말에 얀이 듣던 중 반가운 소리라는 듯 말했다.

"말씀하신 호위입니까?"

"응. 오빠 쪽이 키리에, 동생은 히나. 키리에가 호위야. 그런데 성도 모르는 상태라 신원 확인이 안되거든. 그래서 너에게 부탁을 좀 하고 싶은데."

무슨 이야기인지 알아들었다는 듯 얀이 살짝 웃었다. 왕궁에서 일하기 위해서는 반드시 신원 확인이 되어야 하는데 둘은 그것이 불가능했던 것이다.

"신원 보증 말씀이십니까?"

"응. 신원에 문제가 없다는 것을 지그프리드에서 보증해주면 문제가 없을 것 같아서."

얀이 고개를 가로저었다.

"그런 경우라면 저희 가문보다는 마나실 경의 보증이 나을 것 같습니다. 아예 경이 리베른에서부터 데려온 아이들이라 하면 성이 없어도 크게 문제되지 않을 테니까요. 혹시 타국의 사람이라 안 된다 하면 그땐 저희 가문에서도 보증을 하겠습니다. 그렇게 되면 누구도 다른 말을 하지는 못할 거예요."

칼리안이 얀을 다시 봤다는 듯한 눈으로 쳐다봤다.

"너 지금 좀 능력있는 사람 같아 보였어."

그 말에 헤벌쭉한 표정이 되었던 얀이 흠흠거리며 얼굴을 다시 고쳐 붙였다. 그리고선 칼리안의 셔츠 핀이 돌아간 것을 똑바로 고쳐준 뒤 물러나며 물었다.

"간혹 엘프들은 신력이 아닌 다른 것으로 치유의 힘을 쓰기도 한다던데요. 그 남매는 그런 능력은 없는 겁니까?"

칼리안이 자신의 가슴을 툭툭 쳐 보이며 대답했다.

"치유력이 있다 해도 나에게 굳이 도움이 될 것도 아니고. 그런 얘기 들은 적 없어."

"하긴. 축복의 힘이 있으니 그렇기는 하겠네요."

그때 갑자기 창 밖에서 번개가 번쩍이며 천둥이 쳤다. 빗줄기가 점점 거세지고 있었다. 창 밖을 보던 칼리안이 말했다.

"오늘 일정은 사냥 뿐이었지?"

"네. 조찬 후 사냥 대회가 있습니다······ 만."

"취소되겠네."

조금 아쉬웠다.

"축제 첫 날을 빼면 귀족들 앞에 나서지 않아서 기간이 더 지나기 전에 한번 더 눈도장을 찍을 생각이었는데. 아쉽게 됐네."

"네. 오늘은 힘들 것 같네요."

어쩔 수 없다는 듯 창문에서 눈을 뗀 칼리안이 말했다.

"오늘 잠깐 스승님께 다녀와줘. 언제 가든 상관은 없고."

"네, 왕자님. 무엇을 전할까요?"

"전하께 화요일 회의를 10분 정도만 지연시켜주시도록 부탁해달라고 해줘."

"알겠습니다. 조찬 마치시면 바로 다녀올게요."

의도를 알기 어려운 말이겠으나 얀은 달리 묻지 않고 고개를 끄덕였다.

고개를 끄덕인 것으로 대답을 대신한 칼리안은 그 외의 별다른 말 없이 준비를 마치고 식당으로 갔다.

* * *

플란츠는 나오지 않았다.

이야기를 들어보니 플란츠도 축제 이후 계속 조찬에 나서지 않은 모양이었다.

'오히려 잘 됐다. 지금부터 화요일까지는 플란츠가 이 자리를 망쳐놓으면 안 되니까.'

유리창을 타고 어지러이 흘러내리는 빗줄기를 보는 칼리안의 귀에 식사를 마친 란델이 자리에서 일어나는 소리가 들렸다.

칼리안이 창 밖을 향한 시선을 거두지 않은 채로 입을 열었다.

"장미가, 곧 피겠더군요."

처음 있는 일이었다.

이 자리에서 정상적인 대화가 나온 것도 그렇지만 칼리안이 란델에게 먼저 말을 붙이는 것도 처음이었다.

때문에 란델이 발을 멈추고 돌아섰다.

그리고 그 깊은 눈으로 칼리안을 쳐다보았다.

그에, 칼리안도 고개를 돌려 란델을 향했다.

어쩐지 처음으로 그 눈을 제대로 본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일전에 장미 정원에서 맞닥뜨렸을 때와는 또 다른 기분이 드는 것이다.

사람의 밑바닥을 들여다보려 하는, 푸른 눈.

왜 그런 눈으로 쳐다보는지 알 것 같아서 칼리안이 편안한 웃음을 보이며 다시 입을 열었다.

"어제 산책을 했고, 장미를 봤습니다. 란델 형님께서 가꾸시던 것이 문득 생각이 나서 말씀드린 겁니다. 다른 뜻 없습니다."

물론 의도까지 없지는 않았다.

이제 나를 좀 보라는 마음에서 꺼낸 말이었다. 그래야, 화요일의 칼리안에게 란델이 힘을 보태 줄 수 있을 테니까.

란델은 별다른 반응을 보이지 않았다.

"그래."

정원에서 그랬던 것처럼, 짧은 말만 내려두고는 식당을 나갔다.

얀이 숨을 들이키는 소리가 났다.

뒤를 돌아보자, 얀은 달이 두 개로 갈라지는 것을 본 듯한 표정을 하고 있었다. 곧 식사를 마치고 식당에서 나가는 칼리안에게 얀이 다가와 작은 소란을 떨었다.

"장미라니요, 왕자님!"

칼리안이 천연덕스러운 얼굴로 대꾸했다.

"장미가 왜?"

"태어나셔서 처음으로 란델 왕자님께 먼저 말씀하신 거예요. 장미가 필 것 같다고, 의미라고는 개똥만큼도 없는 말을요!"

"개······?"

칼리안의 표정이 굳었다. 제 말에 놀란 얀이 황급히 손을 들어 입을 가렸다. 칼리안이 얀에게로 눈동자를 움직였다.

"너 요즘 자꾸 버릇이 없어지는데."

"죄송합니다, 왕자님."

그러니까 너같은 사람이 대체 여기서 왜 이러고 있느냐고. 칼리안이 그런 생각을 하며 웃었다.

그러다 돌연, 기침이 나왔다.

- 콜록!

장난처럼 울상을 짓던 얀의 표정이 싹 바뀌었다. 얀이 불안감을 가득 담은 눈으로 칼리안을 쳐다봤다.

"아무것도 아니야."

"······ 왕자님."

"어제 창문을 열고 잤어. 비가 올 줄을 모르고."

목을 타고 올라오는 비릿한 향에, 칼리안이 잠시 눈을 내리떴다.

* * *

도무지 그칠 생각이 없는 것처럼 내리던 비는 월요일의 오후가 되어서야 쏟아지기를 그만두었다. 그 뒤에는 마치 언제 비가 왔었느냐는 듯 티 없는 햇빛이 들었다.

오랜만에 마주한 반가운 햇살에, 건물 사이사이에 이어진 빨랫줄에는 젖은 옷들이 한가득 널렸다.

겨울이 유난히 혹독한 카이리스에서 이제 완연한 따뜻함이 느껴지는 바람이 불었다. 그 바람을 타고 여러가지 색의 옷들이 꽃잎처럼 흔들렸다. 보고 있는 마음에 절로 졸음이 밀려올 듯한 그런 봄날이었다.

창가에 턱을 괴고 앉아 흔들거리는 옷가지를 가만히 내려다보던 히나가 옆에 앉아있던 키리에에게 손짓을 보냈다. 수어였다.

- 반짝반짝.

테이블에 놓인 검을 애지중지 닦고 있던 키리에는 히나가 고개를 든 순간부터 이미 히나의 눈과 손을 쳐다보고 있었다. 움직임을 느끼는 감각도 좋았지만 동생의 말을 한마디도 놓치지 않으려 하다 보니 히나가 조금만 움직여도 쳐다보는 것이 버릇이 되어 있었다.

"히나. 햇빛이 반짝여?"

히나가 고개를 가로저으며 다시 손을 움직였다.

- 아니. 사람들. 반짝반짝, 기분 좋아 보여.

사람들이 반짝인다니. 키리에가 보일 듯 말 듯 웃었다. 그나마도 히나의 앞에서만 보이는 웃음이었다. 그 모습을 본 히나의 손이 키리에를 가리켰다.

- 오빠도.

그 말에, 키리에는 멀리 보이는 왕궁 쪽으로 시선을 돌렸다. 칼리안을 만났을 때 다쳤던 얼굴은 치료를 받아 이미 말끔히 나은 상태였다. 그래서 키리에는 그날보다 훨씬 더 좋아진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맞아. 좋아."

- 왕궁, 내일이야.

히나는 굉장히 들뜬 얼굴이었다.

칼리안이 '닷새 뒤에 오라'고 말한 것의 의도는 분명 수요일이었다. 이들 남매를 만난 것이 금요일 새벽이었기 때문이다. 키리에도 그렇게 이해를 하였는데 히나는 달랐다.

칼리안을 만난 뒤 금요일 아침이 밝았으므로 금요일도 하루 뒤로 보아야 한다면서 화요일에 왕궁에 가야된다고 유난히 고집을 부렸다.

그래서 둘은 결국 중간 시간, 즉 화요일 저녁 때 왕궁에 가는 것으로 협의를 본 상태였다.

그 뒤로 히나는 이렇듯 왕궁에 가는 날을 손꼽아가며 기다리고 있는 것이다. 키리에가 다 닦은 검을 검집에 넣으며 물었다.

"히나. 가면 다시 일해야 하는데, 괜찮아?"

히나가 위 아래로 열심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는 사흘만에 비추는 햇살보다 더 밝게 웃었다.

- 왕자님, 보고싶어.

그 말을 들은 키리에의 표정이 약간 경직되었다. 그러자 히나가 생긋 웃으며 몇 개의 동작을 덧붙였다.

- 잘생겼어. 오빠보다. 훨씬, 더. 많이.

눈에 넣어도 안아플 여동생의 손이 만들어내는 단어가 늘어날 때마다 검을 쥔 키리에의 손에 아주 조금씩 더 힘이 들어갔다. 그 모습을 본 히나가 장난기 가득한 얼굴을 했다.

사실 히나는 자신보다 키리에가 왕궁 갈 날을 더 기다리고 있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틈만 나면 여관 뒷마당에서 검을 휘두르고 검이 닳는 것이 아닐까 싶을 정도로 닦기를 반복했기 때문이다. 곧 히나의 손이 키리에의 앞에 있는 검을 가리켜 보였다.

- 칼, 어떻게 가지고 가?

당연히 왕궁에는 무기를 소지하고 들어갈 수 없었다. 옛 추억에 빠져 허우적 거리느라 검을 사줄 생각만 했지 그것을 어떻게 들고 왕궁에 들어올지는 생각 못한 칼리안의 실수였다. 키리에가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다 생각해 두셨겠지."

키리에는 벌써부터 칼리안에 대한 믿음이 차고 넘쳤다. 어쩐지 그것이 조금 과한 것 같았으나 히나는 굳이 짚고 넘어가진 않았다. 더 중요한 일이 있었다.

- 아이스크림, 또 사줘. 맛있었어.

어제 처음 먹어 본, 봄 딸기가 가득 들어간 아이스크림을 생각한 히나가 행복한 얼굴을 하며 이렇게 졸랐다. 키리에가 선뜻 자리에서 일어나며 고개를 끄덕였다. 칼리안이 준 돈은 아직도 많이 남아 있었으니까.

"가자. 사 줄께."

히나가 봄꽃처럼 웃으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세상 무엇보다 더 반짝이는 동생을 보는 키리에의 얼굴에도 한번 더 작은 미소가 피어 올랐다.

* * *

사흘간 계속된 폭우로 마지막 조경 공사가 마무리 되지 않아 아스트리샤에 세워진 왕립 미술관 개관식이 일주일 미뤄졌다.

덕분에 그 시간 만큼 여유가 생겨야 했으나 르메인은 그런 사치를 누리지 못했다. 예고도 없이 찾아온 마법사 때문이었다.

"한번 봐주시지요."

르메인이 앞에 놓인 서류 뭉치를 물끄러미 쳐다봤다. 족히 한 뼘은 넘을 두께를 본 르메인이 나지막한 목소리로 물었다.

"혹시 나에게 아직도 불만이 있나."

날카로운 선을 가진 앨런의 눈이 부드럽게 휘어졌다.

"그럴 리가 있겠습니까. 그저 한가로운 늙은이가 소일거리를 좀 마련했다 여기시지요."

애초에 늙었다고 할 나이도 아니었거니와 저런 말을 해도 될 외양도 아니었건만.

어쩔 수 없다는 듯, 르메인은 본래부터 들고 있던 서류를 옆에 내려놓았다. 그것을 흘깃 쳐다 본 앨런이 입을 열었다.

"엘린느는 그런 것까지 보지는 않던데 열심이시군요."

"그런가."

자칫 비꼬는 것으로 들릴 법한 말이었으나 그런 의도가 아님을 알 수 있었다. 앨런을 처음 만났던 날에 하도 비꼼을 많이 당했더니 비교가 되었다.

잠시 리베른의 국왕을 떠올려보던 르메인이 의자에서 몸을 일으켰다.

"나는 그 여자 만큼 태평한 성격이 되질 못하네."

곧 앨런의 서류 뭉치를 든 채 소파로 걸어간 르메인이 안경을 쓰며 말했다.

"앉지."

고개를 끄덕인 앨런이 르메인의 맞은편에 앉았고, 곧 시종장이 들어와 두 잔의 차와 디저트를 내려놓고 나갔다. 르메인이 차 향을 음미하듯 입에 머금다 삼키고는 말했다.

"외박을 했던데."

"일거리를 보아 달라 하였더니 칼리안 왕자님 말씀을 하십니까."

"걱정이 되어 그러네."

"한참 밖에 나가고 싶어 할 나이 아닙니까."

"그리해도 좋을 상태인가?"

독에서 벗어났는지를 묻는 말임을 알아들은 앨런이 고개를 저었다. 다만 구체적인 사정을 전해줄 수는 없었기 때문에 그냥 간단하게만 대답을 전했다.

"위험하지 않을 정도로만 유지 중입니다. 왕자님 성격이 워낙 신중하신 터라, 지금은 우선 지켜보고 있습니다."

"독이 든 것을 알면서 마신단 말인가?"

조금 높아진 르메인의 목소리에, 앨런이 진정하라는 듯 말했다.

"약도 함께 들이고 있으니 당장 위험한 상태는 아닙니다. 생각이 있는 듯 하니 두고 보시지요."

"······경을 통해 전해 듣는 칼리안은 나를 항상 당황하게 하는군. 다른 이들이 전해오던 말과 너무 다르니."

앨런은 가벼운 얼굴로 대답했다.

"그렇습니까."

그러다 '전해들었다'는 말에 앨런이 또 훈계를 둘까 싶었는지, 르메인이 말을 더 보탰다.

"이제 플란츠와 비슷하고, 란델보다는 작고. 내 어깨 아래까지 온다는 것은 알고 있네."

칼리안의 키.

관심을 가지려 노력하기 시작했다는 말이었다.

르메인이 한참 들고 있던 찻잔을 내려놓았다. 달칵, 하는 소리가 작게 들렸다.

"그러니······ 그대가 말하는 그 신중함 때문에 내가 또 자책할 일은 없었으면 하네."

앨런이 대답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더니 가방 속에서 또 하나의 서류 뭉치를 꺼내 르메인에게 건넸다.

"얇은 가방 속에 무슨 종이가 그렇게 많이 들어가는지."

자꾸 일거리가 늘어나는 것 같자 르메인이 피식 웃었다. 누군가 그 모습을 보았다면 굉장히 놀랐겠으나 앨런은 르메인이 얼마나 무표정한 사람인지 알지 못했다. 때문에 그냥 그러려니 하고 입을 열었다.

"무료하실 때 한 번 읽어 보시지요."

"또 무엇인가?"

"그리핀의 날개를 잠시 접을 수 있을까 하여 모아보았습니다."

실리케에 대해 조사했던 내용들을 추린 서류였다. 칼리안에게 주었던 것과 같은 것이었는데, 몇 장 뒤적이던 르메인이 그것을 도로 옆으로 내려놓았다. 자조하는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소용 없을 짓을 했군."

"이미 알고 계시는 내용인가 봅니다."

앨런이 찻잔을 들어 한 모금을 입에 담았다.

차의 맛 때문인지 르메인의 목소리 때문인지 몰라도 쓴 맛이 확 느껴졌다.

달그락, 하고 앨런이 잔을 내려놓는 소리가 크게 울렸다.

"앞으로도 그딴 소리나 계속 하실 요량이라면 모르겠으나."

앨런이 초콜릿 하나를 집어들어 입에 넣었다. 입이 썼던 탓에 이번에는 단 맛이 확 올라왔다. 앨런의 손가락이 르메인의 무릎 위에 놓여 있는 서류를 가리켰다.

"만약 아니시라면, 이제 뒤집어 보는 것이 어떠신지."

그것이 서류든.

아니면 이 나라든.

무례한 말투는 이제 그냥 알아서 걸러 듣기로 한 르메인이 서류를 넘기기 시작했다. 곧 그의 얼굴이 눈에 띄게 변해갔다.

앨런의 입 안에서 초콜릿이 다 녹아 사라졌을 때 쯤, 가늘게 떨리는 르메인의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마법사단."

"마음에 드십니까?"

능구렁이 같은 말이었다. 이미 르메인이 같은 것을 고민중이라는 이야기를 칼리안에게 들어놓고서도 의중을 떠보는 것이다.

"이것은 누구의 생각이지?"

"저는 아닙니다. 그저 쓰임새 많은 스승일 뿐이니."

"그 아이가 나와 같은 생각을 하고 있던 것인가."

르메인의 눈에 이채가 돌았다.

르메인은 다시 서류를 넘겨가며 앨런과 의견을 나누기 시작했다. 그렇게 밤이 깊어지다 다시 밝아오도록 둘의 대화는 계속 이어졌다.

제7장. 장미가 곧 피겠더군요 (3)

칼리안이 가벼운 기침을 하며 식당으로 나섰다.

그 소리에 뒤를 따라오던 얀의 눈에 힘이 들어갔다. 아무리 둔하다지만 멈추지 않는 저 기침이 감기 기운 때문에 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모를 만큼은 아니었다.

"약속대로 오늘까지는 기다렸습니다. 내일도 독차가 도착한다면 저는 시종 노릇 그만하겠습니다."

"직접 나서서 해결해주려고?"

"네."

그 날로 지그프리드 공작은 바이올린 활이 아닌 검을 들어야 할 테지만, 얀이 상관할 바는 아니었다. 그 정도는 얼마든지 감당해 줄 슬레이만이라는 것을 알았으니까.

"그래. 든든하네."

"저 농담 하는 것 아니에요."

"알아. 나도 거짓말 아니야."

그렇게 말한 칼리안이 식당에 들어섰다.

이미 도착해 먼저 식사중이던 란델의 시선이 한동안 칼리안의 얼굴에 머물렀다. 어제보다 더 창백하게 질려 있었기 때문이다. 란델이 쳐다보는 이유를 모르는 것은 아니었지만 칼리안은 별 말 없이 식사를 시작했다.

샐러드 몇 개만 간단히 주워먹은 칼리안이 포크를 내려놓았을 때 쯤 란델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칼리안이 입을 열었다.

"석찬에서 뵙겠습니다."

요 근래 칼리안은 란델에게 하루에 한 마디씩 말을 했다.

뜬금없는 장미 얘기를 시작으로, 다음 날에는 비바람이 심해 잠에 들지 못했다는 말을 했다. 그 다음 날에는 새 소리가 그립다고도 했다. 란델은 그런 칼리안에게 매번 '그래' 라는 말 밖에는 해주지 않았었다. 레이븐한테 말을 가르쳐도 란델보다 유창하게 할 것 같다는 생각까지 들었다.

하지만 오늘은 조금 달랐다.

"건강 챙기거라."

드디어, 마주보는구나.

고개를 숙여 보인 칼리안의 입매가 올라갔다.

식당에 함께 있던 탓에 란델의 말을 함께 듣게 된 다른 이들은 제 귀를 의심했다. 란델의 시종과 얀은 물론이고, 식당의 시종들과 시녀들까지도.

오로지 칼리안만이 자연스러운 웃음을 지으며 대답했다.

"멀쩡합니다."

란델은 더 이상의 말 없이 밖으로 나갔고 칼리안도 밖으로 나와 하루 일과를 시작했다.

그리고 오후가 되었다.

한층 더 창백해진 칼리안의 얼굴을 쳐다보던 얀이 가라앉은 목소리로 물었다.

"지금 귀족 회의가 진행되고 있으니 한 시간 뒤에는 석찬에 드셔야 합니다."

"그래. 알았어."

"더 안좋아지신 것 같은데 정말 참석할 생각이세요?"

이렇게 묻고는 있었지만 사실 얀은 이미 칼리안의 대답을 들은 것 같은 표정이었다. 화요일에 해결될 것이라는 말을 들었을 때, 칼리안이 기다리는 것이 바로 지금 시간임을 알았으니까.

"당연히 가야지."

복잡한 눈으로 칼리안을 바라보던 얀이 천천히 말했다.

"쉬고 계세요. 시녀들을 불러오겠습니다."

"아니, 잠깐만."

그렇게 얀을 붙든 칼리안이 소매를 걷어 나이프를 풀었다. 그리고 그것을 얀에게 넘겨준 뒤 금고를 가리켜 보였다.

"그 나이프랑 해독약, 실리케를 조사한 자료. 전부 챙겨줘."

"챙기다니요?"

"내 방을 확인할 일이 생길지 모르니 미리 스승님께 맡겨놔. 들키면 곤란하니까."

"방을 확인한다니요."

누가 감히 왕자의 금고를 확인한다는 말인가.

대체 무엇을 할 생각이기에.

칼리안은 그 의문을 풀어주는 대신 봉인된 편지 두 장을 얀에게 건네주었다. 얀이 얼결에 그것을 받아들자 칼리안이 다시 말했다.

"하나는 마법사 협회에, 하나는 스승님께 전해줘. 꼭 협회 먼저 들렀다가 스승님께 가."

얀을 거쳐 전달될 편지를 굳이 봉했다는 것은 정확히 얀을 겨냥해 내용을 열어보지 말라는 말을 한 것이나 다름 없었다.

불안하다.

"무슨 생각이신지 말씀 안해주실 거죠?"

"응. 안 할 거야."

칼리안이 웃음을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저 태연한 웃음을 어디서부터 어디까지 믿어야 하는지. 얀은 말 없이 주먹을 말아 쥐었다.

"더 이상 그 차를 드실 일은 없을테고 나이프를 지니고 연회장에 가실 것도 아니라시니 일단은 말씀하신대로 하겠습니다만······."

"그래. 내가 다 알아서 할테니 아무 걱정하지 말고."

"딱 그렇게 웃으면서 알아서 하겠다고 한 날에 플란츠의 칼에 다치셨죠."

"그런 일 아니야."

칼리안의 웃음이 그때보다 조금 더 짙게 변했다.

그런 일 아니다.

그보다 더 한 일이다.

얀은 일단 칼리안이 시키는 대로 움직였다.

얀이 금고 문을 닫는 것을 보던 칼리안이 다시 말했다.

"만찬장에는 혼자 갈 수 있어. 그러니 석찬 준비 끝나는대로 다녀와줘."

"······ 알겠습니다."

그렇게 대답한 얀은 칼리안이 말한 물건들을 챙겨들었다. 그리고 칼리안을 물끄러미 쳐다보다 곧 말 없이 밖으로 나가 시녀들을 불러왔다.

석찬 준비를 도운 얀이 칼리안의 심부름을 위해 밖으로 나간 뒤 칼리안이 금고를 다시 열었다. 그리고 그 깊숙한 곳에 숨겨 두었던 작은 물건을 꺼냈다.

새 판매점에서 사온, 작은 설탕 조각처럼 생긴 물건.

칼리안은 하얀 수리라는 이름의 세작에게 받은 그 조각을 쳐다보다 주머니에 집어넣었다. 그리고 손을 올려 심장 부근을 쓸어내린 뒤 밖으로 나갔다.

그것은, 실리케를 위해 준비한 칼리안의 독이었다.

* * *

연회장 입구를 지키던 기사가 칼리안에게 말했다.

"왕자님. 귀족 회의가 다소 지연되어 석찬 시간이 미뤄졌습니다. 때문에 아직 연회장 안에 귀족들이 도착하지 않았습니다."

귀족 회의를 10분만 미뤄달라고 했던 부탁을 르메인이 잘 들어 준 모양이다.

"괜찮아. 들어가서 기다릴게."

"네, 알겠습니다."

격식을 갖춰 예를 올린 기사가 연회장 문을 열었다.

연회장 안의 모습이 보이는 것보다 더 앞서서 느껴지는 르니에리 향기에, 칼리안의 입술이 살짝 올라갔다.

'실리케.'

넓은 연회장에 실리케가 홀로 앉아 있었다.

회의에 자리하지 않으면서 석찬에 참석하는 이는 칼리안과 실리케 뿐이었다. 회의가 끝나자마자 시작되는 석찬이었으니 회의가 지연된다면 당연히 모두 늦을 것이다.

때문에 르메인에게 부탁을 했다. 오로지 실리케와 이야기를 나눌 시간을 만들기 위해서였다.

뚜벅 뚜벅 걸어간 칼리안이 실리케의 맞은편에 앉았다.

기다려야 하는 칼리안을 위해 시종 한 명이 와서 커피를 내려놓았다. 칼리안이 그를 보며 말했다.

"다른 사람들 오기 전까지 자리 좀 비켜 줘."

"네, 왕자님."

고개를 숙여 보인 시종이 모두와 함께 밖으로 나갔다.

주위를 물린 이유를 모르는 실리케가 칼리안을 쳐다보았고, 습관처럼 부채를 손에 들었다.

그것을 본 칼리안이 손을 내밀며 고개를 가로저었다.

"가면, 쓰지 말죠. 서로."

실리케의 얼굴이 잠시 굳었다. 하지만 곧 고개를 끄덕이며 부채를 테이블에 내려놓았다.

"그러자꾸나."

칼리안은 실리케를, 실리케는 칼리안의 눈을 향한 시선을 돌리지 않고 그렇게 앉아있었다.

양쪽 모두 겉모습은 여유로웠으나 그 속내까지 그렇지는 않았다. 연회장의 시계 초침 소리가 천둥처럼 들리는 고요함이 이어졌다.

결국 실리케의 입이 먼저 열렸다.

"나를 왜 그렇게 쳐다보는 거니?"

지난 번에도 그러더니.

칼리안이 살짝 미간을 찌푸리며 커피잔을 손에 들었다.

"가면을 쓰지 말자고 했지,"

잠시 말을 멈춘 칼리안의 붉은 눈동자가 실리케에게서 떨어져 내려와 잔 속의 검은 커피를 향했다.

"예의까지 지키지 말라 한 것은 아니었는데."

순간 실리케의 눈이 날카롭게 변했다.

칼리안은 왕의 핏줄이었으니 아무리 실리케가 왕비라 하더라도 말을 내려서는 안되었다.

"······정말, 많이 자랐구나."

"이해하기 어려운 말은 아니잖습니까."

그런 사실을 모르는 것이 아닐 실리케는 여전히 말을 낮추고 있었다. 여유롭게 커피를 마신 칼리안이 생긋 웃으며 입을 열었다. 그리고 나지막한 목소리로 덧붙였다.

"실리케."

실리케의 아름다운 얼굴에 독기가 스몄다. 칼리안은 부채 뒤에 저런 얼굴이 있었구나 하는 정도의 표정이 되었다.

"무례하기 짝이 없구나. 역시 천한 핏줄은,"

"방금 내가 당신에게 예의를 모른다고 했던 것 같은데."

실리케의 말을 자른 칼리안이 다시 입을 열었다.

"핏줄 얘기를 꺼내면 브리센 후작이 뭐가 됩니까."

실리케의 눈매가 가늘게 변했다. 이 자리에서 당장 칼리안을 쳐낼 수 없다는 것을 상기한 실리케가 입 속으로 이를 악무는 것이 보였다.

"아무튼. 하고 싶은 얘기가 있어서요, 실리케."

"다음에 하는 것이 좋겠구나. 더 이상 함께 있고 싶지 않으니."

실리케가 몸을 일으켰다.

아니, 일으키려 했다.

- 탁!

칼리안이 조금 큰 소리로 커피잔을 내려놓았다.

"······ 그 차."

실리케를 바라보는 칼리안의 눈이 깊이 가라앉았다. 란델이 그러했듯이 실리케의 밑바닥을 들여다봤다.

"그만 좀 보내줬으면 한다는 말을 해주고 싶어서요. 참고 먹자니 차 향이 끝을 모르고 짙어지기에."

마치 르니에리 향기처럼.

실리케가 다시 천천히 자리에 앉았다.

그녀가 전해듣기로 칼리안은 오늘 아침까지도 모닝 티를 마셨다 했다. 때문에 칼리안이 차에 독이 있다는 것을 알고 있으리라 생각하지 않았다. 그런데 칼리안은 독을 늘린 것까지 아는 눈치였다.

'알면서 마셨구나.'

칼리안에게 건네진 차에 독이 든 것이 알려지면, 실리케는 칼리안의 시종과 시녀들에게 죄를 물어 모두 죽일 생각이었다. 직접 독을 넣었든 아니든, 왕자에게 독을 건넨 행동만으로도 이미 죄가 되니까.

'주제에 그것을 걱정했구나. 제가 죽을 것을 모르고.'

칼리안이 차 속의 독을 왜 모르는 척 마셔왔는지 눈치 챈 실리케의 얼굴에 웃음이 어렸다. 조금도 흔들리지 않는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도무지 알아들을 수 없는 말을 하는구나."

칼리안이 마주 웃으며 대답했다.

"모르는 일이군요."

"모르는 일이란다."

잠시 커피잔을 톡톡 두드리던 칼리안이 가지고 온 조각을 꺼내들었다. 테이블 위에 놓인 설탕 통에도 똑같이 생긴 것이 가득 들어있었다. 물론 생김이 같을 뿐 칼리안의 손에 들린 것은 설탕이 아니었다.

시계 소리를 뒤로 미뤄내며, 칼리안이 솔직한 목소리로 말했다. 가면은 쓰지 않기로 했으니까.

"사실 여러 생각을 했습니다. 레넌에게서 빼낸 증거를 써먹어볼까. 그냥 레넌을 잡아다 협박을 해볼까. 스승님의 그늘 밑으로 들어가볼까. 전하께 얘기를 해볼까. 아니면 나도, 내 형제에게 뱀의 피를 줘 볼까."

실리케가 눈꼬리를 좁혔다. 칼리안은 그것을 무시하고 말했다.

"독을 쓰는 것은 그리 내키질 않았고. 다른 것들은 뭐, 다 피해가겠다 싶더군요. 그래서 그냥 당신이 가진 패를 강제로 가져와야겠다는 결론을 내렸습니다. 그딴 패는 앞으로도 영영 사용하지 못하도록. 두 번 다시, 독 따위를 쓸 생각은 하지 못하도록."

칼리안이 손에 든 것을 실리케에게 보여주었다.

"그러려면 나도 뭔가를 걸어야 할텐데 당장은 가진 게 튼튼한 심장뿐이라. 그래서 그것이라도 한번 걸어보기로 했습니다."

실리케의 연두색 눈이 칼리안의 손에 올려진 것을 바라봤다.

"독입니다. 은에도 반응하지 않고 사람을 죽이는 독이 아니라서 마법 시약에도 검출되지 않습니다. 아, 그럼 약이라고 해야 할 지도 모르겠네요. 사람을 살리는 데 쓴다고도 볼 수 있으니."

무릎 위에 올려놓은 실리케의 손가락이 드레스 자락을 살짝 잡았다. 칼리안의 속을 알지 못했기 때문이다.

제 계획을 실리케가 모두 알아도 상관 없다는 듯, 칼리안이 다시 말했다.

"이것을 먹고 나서 시간이 좀 지나면 잠시 심장을 멎게 하는데 산 사람을 꼭 죽은 것처럼 만들어놓는다 들었습니다."

사실 그것은 세크리티아의 세작들이 피신을 위해 소지하는 독이었다. 물론 세크리티아에서만 사용하는 것은 아니었으니 실리케가 독의 정체를 안다 해서 칼리안과 세크리티아를 연관지을 여지는 없었다.

칼리안은 정말로 신기한 물건을 본다는 눈으로 독인지 약인지 모를 그것을 쳐다보며 말을 이었다.

"물론 나에게는 그렇지 않을 겁니다. 내가 이걸 먹더라도, 축복의 힘이 있어서 심장이 멈추지는 않을 테니까요."

"먹어도 소용 없는 약을 왜 가지고 왔을까."

"대신."

칼리안이 느린 목소리로 실리케의 의문에 대한 대답을 전했다.

"해독을 멈추겠죠."

독보다 덜 중요한 손바닥 상처가 낫지 않았던 것처럼.

축복의 힘은 심장이 멈추는 것보다 덜 중요한 독을 무시한다.

옆 집의 장미가 말라죽을지 모른다는 이야기를 해도 지금의 칼리안보다 평온한 표정을 짓지는 않을 것이다. 자신의 심장이 멈추리라 말하는 칼리안의 태도는 그만큼 담담했다.

"축복의 힘이 이 독의 기운을 없애는 동안, 오늘까지 내가 열심히 먹은 독이 퍼질테고요. 물론 그렇다 해도 심장이 하도 튼튼해서······."

"안 죽어요. 고생은 좀 하겠지만. 대신, 당신은 조금 귀찮아질테고."

매일 조금씩 병들게 하는 정도의 독이 잠시 퍼지는 것으로는 죽지 않는다. 심장이 멈추지 않도록 한 뒤, 다시 해독을 시작할테니까.

칼리안의 커피잔에서 퐁당, 하는 소리가 났다.

"그래서 말인데. 혹시 내일부터 차를 보내지 않겠다 약속한다면 마시지 않겠습니다. 아픈 것은 나도 지긋지긋해서."

실리케는 그제야 칼리안의 의중을 파악했다.

죽지 않더라도 중독 증상은 나타날 것이다. 모두의 앞에서 피를 토하고 쓰러진다면 누구나 독을 의심할 수 밖에 없다. 게다가 증상만으로는 얼만큼의 양을 섭취했는지 알 수도 없으니 축복의 힘으로도 해독되지 않을 만큼의 양으로 독살을 시도했다고 보여질 수 있었다.

심지어 지금 실리케는, 칼리안과 단 둘이 연회장에 있었다.

의심의 시선이 반드시 자신에게 닿으리라는 것을 깨달은 실리케가 코웃음을 치며 말했다.

"맹랑하게도. 내가 네게 독을 주었다, 이런 말이라도 해서 나에게 누명을 씌우겠다는 생각이로구나."

"그것을 누명이라 할 수 있을지는 모르겠네요. 그런데 굳이 그런 말을 할 필요가 있습니까? 어차피 지금 내가 사라지기를 바라는 마음이 당신만큼 간절할 사람이 없을 텐데."

실리케의 입가에 여유로운 웃음이 다시 드리워졌다.

어린 아이가 하루 종일 만들어 둔 모래성에 한쪽 발을 내려놓는 기분이었다. 그 좋은 기분에 가면을 벗은 실리케가 나긋나긋한 목소리로 말했다.

"증거는 만들어 두었니?"

칼리안이 어린 아이처럼 눈을 동그랗게 떴다. 다분히 놀리는 것 같은 과장된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증거! 그런 것이 필요합니까?"

칼리안이 스푼을 들어 커피를 천천히 저었다. 그러면서 실리케가 짚어낸 것을 정정해주었다.

"나는 당장 당신을 쫓아내려는 것이 아닙니다. 아무리 스승님이 계신다지만 브리센 후작이 그 많은 기사들을 전부 끌고 오기라도 하면 제가 어떻게 이깁니까."

"다행히 알고는 있구나."

실리케가 웃으며 대답하자, 칼리안이 함께 웃었다.

"내가 하고 싶은 일은 당신이 더 이상 독을 가지고 장난치지 못하게 만들려는 것이라서. 그러니 증거 같은 건 필요없어요. 이번에는 그냥, 사람들이 나를 대신해서 당신을 끊임없이 의심하고 감시하도록 만드는 것까지만 할 생각입니다. 보이지 않아서 더 숨막히는 감옥도 있으니까."

의심만으로는 사람을 처벌할 수 없다. 그것을 가장 잘 아는 것이 실리케였다.

"그런 감옥으로는 나를 붙들어 둘 수 없단다. 보이지 않는 감옥이라니. 겪어본 적 없었단다. 지금까지 계속 그래왔다는 것을 너도 잘 알고 있지 않니."

지금까지 숱하게 죄를 저지르고도 이렇게 여유롭게 앉아 커피를 마시고 있지 않은가.

실리케가 허리를 숙여 칼리안에게 얼굴을 가까이 했다.

아이같이 해맑은 웃음을 지었다.

"네 어미 그리 보낸 것이 나라는 것을, 이 세상의 누가 모를까!"

아침을 알리는 새의 지저귐처럼, 실리케가 이렇게 속삭였다.

제7장. 장미가 곧 피겠더군요 (4)

칼리안의 고개가 살짝 들어올려졌다.

그리고 얼굴에 드리워져 있던 미소를 지우지 않은 채 실리케의 웃는 얼굴을 마주보며 입을 열었다.

"내키지 않던 마음을 한번 돌려보라는 소리로 들리는데."

가느다란, 아직 변성기도 겪지 않은 소년의 맑고 예쁜 목소리.

그 소리에 한기가 어렸다.

"함부로 찔러 보지 마요. 형제간의 우애가 그리 깊진 않으니."

실리케의 얼굴에 만연했던 웃음이 서서히 사라졌다. 친아들의 안전을 두고 협박해오는 의붓아들의 말에, 그림같이 아름다운 얼굴에도 살짝 주름이 졌다.

칼리안이 스푼을 들어 커피잔 끝을 톡톡 쳤다. 영롱한 소리와 함께 칼리안의 얼굴이 본래의 평온함을 찾았다.

"그래서. 차, 어떻게 할까요?"

실리케는 대답하지 않았다. 그저 가늘게 뜬 눈으로 칼리안을 쳐다보고 있을 뿐. 칼리안은 묵묵히 실리케의 결정을 기다렸다.

"할 만큼 해보려무나."

칼리안이 웃었다.

"거절의 뜻인 걸로."

칼리안이 잔을 들어올렸다.

실리케를 바라보던 시선을 흐트리지 않은 채 남은 커피를 모두 입 속에 흘려넣고, 삼켰다.

그와 함께 연회장의 문이 열리며 귀족들이 들어오기 시작했다.

* * *

마부 옆에 앉아 안달을 내던 얀이 급하게 마차를 세웠다. 왕도를 따라 걸어오고 있는 소년과 소녀를 발견했기 때문이다.

안그래도 바쁘게 움직이던 길이었으므로, 그들이 그냥 소년과 소녀였다면 당연히 지나쳤을 것이다. 물론 남자의 머리가 물색이고 여자의 머리가 은색인 것도 알아봤지만 그 뿐이었다면 신경 쓰지 않고 갈 길을 갔을 것이었다.

"······ 칼을 들고 왕궁으로 들어가려 했다는 거죠?"

저렇게 번쩍이는 장검을 옆에 차고 있는데 대체 어떻게 마차를 세우지 않겠느냔 말이다!

일단 얀은 남매를 마차에 태우고 자신도 마차 안으로 들어갔다. 그렇게 마차는 세 사람을 태운 채로 마법사 협회를 잠시 들른 뒤 앨런의 집을 향해 달리고 있었다.

얀의 질문을 들은 키리에가 표정 없는 얼굴로 무뚝뚝하게 대답했다.

"네. 왕자님께서 하사하신 검입니다."

아 나 미치겠네.

"오늘은 몸만 들어가요. 칼은 지금 가는 마법사 집에 두고요. 아무튼 오늘은 절대 안돼요."

왕자 품 속의 나이프도 궁 밖으로 빼낸 마당이다. 장검을 가지고 들어가게 할 수가 없었다. 그러자 얀의 앞에 오도카니 앉아있던 은발의 소녀, 히나가 키리에를 향해 손을 움직였다.

- 강아지. 이 사람인가봐. 귀엽대서, 여자인 줄 알았는데.

키리에가 그 말에 대답하기 위해 입을 열었다. 그러나 대답은 얀 쪽에서 나왔다.

"얀입니다, 강아지가 아니라. 보시다시피 멀쩡한 남자고요."

수어를 알아듣자, 히나가 어깨를 움찔했다. 말투가 평소와 다르게 딱딱했다는 것을 깨달은 얀이 다시 말했다.

"대충은 알아들으니까 나한테 할 말은 나한테 해요. 아무튼, 지금 정신이 좀 없는 상황이라. 이렇게 맞이하려던 것은 아니었어요. 미안해요."

그리고 키리에를 향해 고개를 돌려 다시 무어라 말하려는데, 마차가 멈춰섰다. 창문 너머로 앨런의 저택이 보였다. 얀은 남매에게 일단 기다리라 말한 후 앨런의 집으로 달음박질쳐 들어갔다.

한편 앨런은 아침이 다 되어서야 집으로 돌아온 탓에 이제 막 잠에서 일어난 참이었다.

"손님이 오시나."

흐트러진 머리를 대충 묶고 커피 한 잔을 내리고 있던 앨런이 조용히 주방으로 걸어가 커피잔 세 개를 더 꺼냈다.

그러다 또 조금 뒤에는 빈 잔 두 개를 다시 집어넣었다. 마차에서 내려 달려오는 것이 한 명 뿐이라는 것을 느꼈기 때문이다. 잠깐 마나를 확장하여 집 근처를 살피던 앨런이 마차 안의 둘을 느끼고는 혼잣말같은 감탄사를 내뱉었다.

"하프엘프라니. 우리 왕자님, 발이 참 넓기도 하시지."

두 잔의 커피가 테이블에 놓였을 때 쯤 넓디 넓은 정원을 가로지른 얀이 도착했다. 앨런이 손가락을 튕겨 얀을 가로막았던 문을 활짝 열었다.

그와 동시에, 문 옆에 세워둔 꽃 모양의 대리석 조각상이 넘실거리듯 움직이며 흥에 겨운 목소리로 노래했다.

"대마법사 앨런 마나실님의 집에 오신 것을 환영합니다아!"

"아······ 진짜 미치겠네."

칼 쓰는 놈이나 마법 쓰는 놈이나 왜 다 제정신이 아니냐고.

이런 소리를 입 속으로 꾹꾹 눌러 담은 얀이 서둘러 들어갔다.

조각상에 대한 얀의 반응을 기대하며 웃던 앨런의 표정이 싹 바뀌었다. 평소와 달리 얀의 얼굴에 아무것도 드러나있지 않았기 때문이다.

"일이 생겼군."

얀은 대답 대신 가져온 것들을 꺼내 앨런에게 건넸다.

나이프와 약 주머니, 보고서. 그리고 편지 한 장이 있었다. 편지를 봉한 인장이 누구의 것인지는 궁금해 할 필요도 없었다.

"무슨 생각을 하는지 말을 안하십니다. 곧 누군가 왕자님의 방을 조사할 수 있으니 그것을 숨겨달라고만 하셨어요."

앨런은 얀의 손에서 편지를 뺏다시피 하여 펼쳐들었다. 글을 읽어 내려가는 앨런의 눈꼬리가 파르르 떨렸다.

"······ 이 놈의 새끼가."

방법을 찾았다 하더니.

"이딴 것을 방법이라고!"

앨런이 편지를 얀에게 돌려주었다. 그리고는 급히 가운을 벗고 옷을 갈아입었다. 그 사이 얀이 칼리안의 편지를 펼쳤다.

눈에 닿은 한 문장에 손이 떨려왔다.

- 그러니 혹시라도 제가 바로 깨어나지 못한다면.

얀이 입술을 꾹 깨물었다.

칼 차고 왕궁에 들어가려는 놈.

조각상에 노래 시키는 놈.

도련님 때려치고 시종 노릇 하는 놈.

그 놈들을 다 모이게 한, 독 차 싫다고 독 처먹는 놈.

그런 놈을 믿는 것이 아니었다.

* * *

석찬의 시작을 알리는 르메인의 연회사가 끝날 무렵.

두근!

칼리안의 심장이 한 번 요동쳤다. 굳이 손을 가져다 대지 않아도 알 수 있을 만큼 불규칙적인 속도로 뛰기 시작했다.

칼리안이 조용히 눈을 감았다 떴다.

모두의 잔에 와인이 채워졌다.

칼리안의 앞에 놓였던 빈 커피잔이 치워지고, 와인을 대신할 음료잔이 놓였다. 칼리안이 그 음료잔을 쳐다봤다.

물론 멀쩡한 음료였다. 그러나 칼리안은 마치 음료에 독이 들었던 것처럼 보이게 할 생각이었다. 아무 것도 먹지 않고 독에 당했다고 할 수는 없었으니 말이다.

'마법 시약을 이용한 독 검출 검사 결과가 나오기까지는 반나절 정도가 걸린다 했고. 그 뒤에는 음료가 정상이었다는 사실이 밝혀져도 상관 없으니까.'

지금 이 시간 협회의 마법사들이 거리에 마구 뿌려대고 있을, 수많은 미스터리한 죽음들에 대한 이야기 때문에 받은 충격이 채 가시기도 전에 칼리안의 소식이 더해지는 것이니 그 때 쯤에는 아무도 검사 결과에는 관심을 가지지 못할 것이다.

칼리안이 음료 잔을 들어 천천히 마셨다.

무슨 생각을 한 것인지 실리케가 고개를 돌려 칼리안을 쳐다봤다. 둘은 아무 표정 없는 얼굴로 시선을 마주하다 약속한 것처럼 서로 다른 곳으로 고개를 돌렸다.

- 콜록.

기침 소리에, 란델이 칼리안을 쳐다봤다.

칼리안의 눈과 란델의 눈이 아주 잠시 마주쳤다. 순간 란델의 미간이 찌푸려졌다.

들여다 본 것이다. 칼리안의 밑바닥을.

제 동생이 어떤 상태인지. 무엇 때문에 그렇게 말을 걸어왔는지. 오늘, 자신에게 어떤 역할을 맡겼는지.

'멀쩡합니다.'

건강을 걱정해주는 말에 왜 조금도 멀쩡하지 않은 얼굴로 그런 대답을 했는지.

두근!

심장 소리가 다시 들렸다. 약이 완전히 스몄다.

칼리안의 심장이 해독을 멈추었다.

조금씩 사그라져가던 타크리모사의 독기가 물에 닿은 핏방울처럼 번져나갔다.

칼리안이 떨려오는 손으로 주먹을 꽉 쥐었다. 기침 소리가 조금씩 커지고, 또 잦아졌다. 귀족들이 칼리안을 쳐다봤다. 실리케가 불편한 얼굴을 하는 것과 르메인이 칼리안의 상태를 살피는 것이 느껴졌다.

진한 피 비린내가 확 올라왔다.

- 쿨럭!

칼리안의 입에서 검붉은 피가 울컥 토해졌다. 귀족들이 경악성을 내며 자리에서 일어섰다.

두근!

심장이 뒤틀리는 고통이 더해졌다.

죽지 않는다 하여 아픈 것까지 줄어들지는 않으니까.

아르센 헤르츠라는 놈이 내리 꽂았던 얼음의 창도 이보다는 덜 아팠던 것 같았다. 기도가 타오르고 폐가 조각나는 것 같은 느낌이 생생하게 전해졌다.

칼리안은 저도 모르게 가슴을 부여잡고 신음했다.

그러다 결국,

- 쿵!

힘을 잃고 바닥으로 쓰러졌다.

"왕자님!"

장내가 소란에 휩싸이고 카에라의 기사들이 연회장을 둘러쌌다. 곧 르메인이 칼리안에게 다가왔다.

"칼리안."

르메인이 바닥에 무릎을 굽히고 앉아 칼리안의 몸을 안아들었다. 앙상한 몸이 쑥 들려 올라오자 르메인의 입에서 침음이 흘러나왔다.

칼리안은 버텼다. 버티며, 르메인을 응시했다. 같은 사람에게 같은 짓을 당한 누군가를 기억하고 묻어두었던 죄책감을 꺼내놓도록. 그래서 조금만, 이성을 잃도록.

결국 르메인의 눈이 일그러지는 것을 본 칼리안이 비로소 정신을 잃었다. 축 늘어진 칼리안의 모습에 르메인의 손이 부들부들 떨렸다.

르메인이 고개를 돌려 누군가를 쳐다봤다. 귀족들의 시선도 함께 움직였다.

- 그 아이가 살기 위해 찾은 것이 일면식도 없는 마법사가 아니라 아버지였어야 마땅하지요!

"기어코······."

르메인이 읊조리듯 입을 열었다. 곧 그것은 분노가 되었다.

"기어코 나의 아들까지 해하려는 것인가!"

- 관망만 하시다가는, 잃게 되실 겁니다.

르메인의 눈이, 분노가, 누군가에게 닿았다. 노기 어린 목소리가 연회장을 쩌렁쩌렁 울렸다.

"실리케!"

처음으로 마주한 국왕의 모습과 그 입에서 튀어나온 이름을 들은 장내의 모든 귀족들이 경악했다.

플란츠가 고개를 숙인 채 욕지거리를 내뱉었다.

두근!

축복의 힘이 다시 발현됐다.

퍼져나간 독을 갈무리하고 죽은 조직을 떼어냈다.

아주 느리지만 분명한 움직임으로, 치유를 시작했다.

르메인은 칼리안의 숨이 조금씩 고르게 변해가는 것을 보지 못했다. 홀로 그 모습을 본 실리케가 드레스 자락을 움켜쥐었다.

* * *

귀족들의 시선이 실리케와 칼리안에게서 떨어지지 않았다. 실리케가 남모르게 입술을 깨물었다. 르메인이 그 자리에서 자신의 이름을 부를 것이라고, 그렇게 경솔한 행동을 할 것이라고 생각하지 못했다.

칼리안의 몸에 나타난 증상들을 살피던 치유사가 입을 열었다.

"중독이 맞습니다."

귀족들이 비명에 가까운 소리를 냈다. 왕자가 정말 독에 당한 것이다. 르메인은 치유사에게 빨리 조치를 하도록 일렀다.

치유사가 목걸이를 손에 쥐고 세렌티의 신력을 모으기 시작했다. 전설에나 나오는 신관들처럼 자신의 신력을 쓸 수는 없었으니 해독을 위한 힘이 발현되기까지는 시간이 걸릴 터였다.

"중독이 아니니라."

그때 실리케가 치유사의 행동을 막으며 입을 열었다.

르메인이 자신의 이름을 외치는 것을 귀족들이 모두 들은 이상 이 자리에서 그대로 물러날 수 없었다.

"독이 아니라 병이니라. 평소 지병이 있다 들었으니."

"실리케. 거기까지. 더는 참지 않겠으니."

이번에는 결코 물러날 생각이 없는 르메인이 실리케의 말을 막았다.

그래. 프레이야가 죽은 것도 병 때문이라 하였다.

기사단을 전부 끌고 나타나서는 그렇게 말했다.

치유사가 재빨리 다시 자리를 잡고 앉아 목걸이를 손에 쥐었다. 실리케는 침착을 가장한 얼굴로 웃어보이며 말했다.

"전하께서 모르시는 듯하여 그럽니다. 우선 다른 이들을 먼저 물리시지요. 소란스러운 와중에 내 아이 상태가 더 나빠질까 걱정이 큽니다."

그 뻔뻔함에, 르메인이 결국 더 참지 못하고 카에라의 단장을 향해 입을 열려 했다. 그러나 누군가의 목소리가 르메인의 말을 막으며 튀어나왔다.

"칼리안은 멀쩡했습니다. 왜 없던 병을 주시는지 모르겠으나 매일 아침마다 보았어도 이상이 있다고 여겼던 적 없습니다. 그런데 '내 아이'라는 소리. 다른 사람도 아닌 칼리안에게 해서는 안되는 것 아닙니까."

실리케의 눈이 크게 흔들렸다.

실리케가 자신의 말에 반박하는 목소리를 따라 시선을 돌렸다.

"애쓰지 마시라고. 그렇게 말을 했었는데."

실리케의 말을 한순간에 뒤집어 놓은 이가 그녀를 향해 고개를 돌리며 천천히 말을 맺었다.

"······ 어머니."

그녀를 보는 연두색 눈.

그것은, 란델의 것이 아니었다.

제7장. 장미가 곧 피겠더군요 (5)

한 점의 그림을 훑어보듯, 란델의 푸른 눈이 조용히 움직였다.

'장미가 곧 피겠다더니.'

왜 그렇게 아침마다 말을 붙여왔는지를 깨닫는 것에는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그 눈빛을 대한 순간 의도를 알 수 있었다.

칼리안이 무슨 이유로 이런 상황을 준비했는지도 알게 되었다. 정확히는 실리케가 그간 칼리안에게 무슨 짓을 저지르고 있었는지를 알았다고 해야겠지만.

돌아가는 상황을 이해했으니 란델은 이제 어떻게 해 주어야 할지를 생각하는 중이었다.

칼리안의 손을 들어줄지.

혹은 항상 그랬듯 한 발 물러나 있을지를.

란델의 시선이 칼리안에게 닿았다. 그리고 천천히 멀어졌다.

대신 그의 발이 바닥에서 떨어졌다. 칼리안이 원했던대로 우선은 칼리안의 말이 되어 보기로 결정한 것이다.

그 장미, 어떻게 피어날지 궁금했으니.

그런데 홀로 의자에 앉아있던 플란츠가 일어났다. 그리고 연회장에 거대한 파문을 일으키더니 란델의 것으로 따라져 있던 와인을 제 입 속으로 비워내곤 밖으로 나갔다.

솔직히 란델은 플란츠가 직접 실리케를 구석에 몰아넣었다는 것보다 플란츠가 앞 뒤가 완성된 말을 할 줄 알았다는 것에 더 놀랐다. 때문에 거칠 것 없다는 듯 걸어 나가는 플란츠의 모습을 한참동안 바라봤다.

어찌됐거나 자신이 하고자 했던 노릇을 플란츠가 이미 해버렸으니, 떼었던 발을 도로 내려놓을 수밖에.

플란츠가 떠난 뒤 실리케는 큰 모욕을 당하기라도 한 것 같은 얼굴로 연회장을 떠났다. 르메인의 다른 지시가 없었던 탓에 카에라의 기사들은 왕자와 왕비가 나가는 것을 막지 않았다.

"어서, 치료를."

르메인이 치유사를 채근했다.

세렌티의 신물로 만들어진 목걸이가 조금씩 빛나기 시작하더니 곧 눈부신 흰 빛이 뭉클거리기 시작했다. 치유사가 칼리안의 몸으로 손을 뻗었다.

그와 동시에 붉은 빛이 감도는 반투명한 실드가 칼리안을 보호하듯 감싸안았다. 그 바람에 칼리안에게로 향하던 치유사의 신력이 실드에 가로막히며 서로 충돌했다.

- 파지직!

그것은 단순한 실드가 아니었다.

실드에 감돌던 붉은 빛이 흰 빛을 뒤덮는 것을, 그리하여 세렌티의 기운이 칼리안의 근처에도 닿지 못하고 허무하게 사라져 버리는 것을 모두가 보았다.

신물의 힘을 막아낸 그것은 6서클의 그레이트 실드였다.

"아예 죽으라고 하시지요."

그리고, 마법사가 등장했다.

르메인의 눈이 매섭게 변했다.

그가 무슨 소리를 할지 뻔히 보였으므로 급한대로 실드를 보내 칼리안의 몸부터 보호했던 앨런은 연회장으로 저벅 저벅 걸어 들어오며 먼저 말했다.

"심장에 이미 서클이 있습니다. 저런 상태에서 신력까지 들어가면 상황만 나빠집니다."

다급하게 처치하느라 칼리안의 몸을 제대로 살피지 못했던 치유사가 깜짝 놀라 손을 뗐다.

앨런은 그런 치유사를 질책하는 대신 칼리안을 향해 다시 한번 마력을 운용했다. 이번에는 무영창이 아니었다. 짧은 몇 마디의 주문과 함께 앨런의 입에서 시동어가 흘러나왔다.

[아브턴던트]

한 번 밖에 사용해보지 않았던, 아픔을 느끼지 못하게 하는 마법이었다. 곧 칼리안의 얼굴이 편안해지는 것이 눈에 보였다. 그런 모습을 말 없이 내려다보던 앨런이 르메인을 향해 입을 열었다.

"이 일은 제 탓도 있으니, 나중에 한 대만 맞아드리겠습니다."

르메인에게 그리 큰소리를 쳐놓고 칼리안이 이런 짓을 하도록 내버려 둔 것에 대한 앨런 나름의 사과였다.

* * *

한가로운 저녁 시간.

말 많은 귀족들이 삼삼오오 몰려 있는 아스트리샤 거리의 하늘에서 하얀 종이가 비처럼 떨어졌다. 종이에는 실리케와 브리센 가문에 의해 죽은 것으로 '추정되는' 수많은 이들에 대한 정보가 일목요연하게 적혀 있었다.

그리고 잠시 후, 청천벽력같은 소식이 전해졌다.

- 누군가 3왕자를 독살하려 했고 국왕 르메인이 왕비 실리케를 지목했다.

귀족들의 시선이 손에 들린 종이를 향해 뚝 떨어졌다.

'왕자에게까지 마수를 뻗는 왕비이니 그 전의 사람들을 해친 것도 모두 왕비의 짓이 맞을 것이다.'

'이렇게 많은 이들을 죽인 왕비라면 세자위에 위협이 되는 왕자도 얌전히 두었을 리 없다.'

칼리안에 대한 살해 시도와 그간 브리센이 저지른 악행이 얽혀가며 서로가 서로의 증거인 것처럼 여겨졌다.

그 후로 며칠이 지나는 동안 수도 카이리시스는 제대로 된 태풍을 맞이했다.

프레이야 한 명의 죽음이 가져왔던 것과는 비교하기 어려울 만큼, 심지어 칼리안도 이 정도일 것이라 예상하지 못한 만큼 큰 혼란이 생겨났다.

피해자들로 알려진 이들과 연관된 사람들이 모여 자료의 사실성 여부를 확인해달라는 소리를 냈다.

사람들은 브리센 상단과의 거래를 거절했고 브리센 기사 양성소에 다니던 학생들이 줄줄이 퇴소했다. 아침마다 브리센 후작가에 인사를 올리던 귀족들의 행렬이 확연히 줄어들었다.

만에 하나 실낱같은 증거라도 발견되면 하츠아라 광장이 피로 물들 것임은 자명했으니 행여라도 브리센과 얽혀 광장을 적시는데 일조하고 싶지 않았던 것이다.

결국 실리케의 축출을 요청하는 종이가 곳곳에 몰래 붙기에 이르자, 브리센 후작가는 잠시 대문을 닫았다.

더불어 칼리안의 방에는 선물상자가 다시 쌓였다.

귀족들이 칼리안의 빠른 쾌유를 기원하며 보낸 것이었다. 물론 명분이 그랬다는 말이다.

"많이 급하셨나 봅니다."

그렇게 쌓여있는 선물들과 불청객을 멀뚱히 쳐다보던 칼리안이 커튼 너머를 향해 이렇게 말했다. 목소리는 다소 잠겨있었으나 여유를 잃은 것은 아니었다.

실리케가 찾아오자 칼리안은 침실 커튼을 내렸다. 와병 중이라 손님과 얼굴을 마주 대하기 어렵다는 이유였다.

오래지 않아 르니에리 향이 방안 가득 퍼졌고 칼리안은 옆에 서 있던 얀을 향해 말했다.

"창문 좀. 머리 아파."

꽃 같은 우리 왕자님께서 머리가 아프시다니!

얀이 소란을 떨며 방과 테라스의 모든 창문을 활짝 열었다. 르니에리 향기가 창문을 넘어 빠져나갔다. 실리케가 아랫입술을 꽉 깨물었다.

"그래서······."

창문이 모두 열린 뒤, 칼리안의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어쩐 일로 오셨습니까. 실리케."

칼리안은 이 일의 마무리를 앨런과 르메인이 진행하도록 해두었으나 르메인은 이번 선물 교환을 온전히 칼리안에게 맡겼다. 목숨을 걸었으니 알아서 제 값을 받아내 보라는 뜻이었다.

한동안 말 없이 서 있던 실리케가 칼리안의 소파에 가 앉았다. 멋대로 구는 그 행동에 칼리안이 인상을 찌푸렸지만 다시 일어나라는 말을 할 만큼 야박하게 굴지는 않았다.

곧 실리케가 입을 열었다.

"그동안 마법사 협회가 조금 바빴던 모양이더구나."

칼리안이 소리 없이 웃었다. 재미가 있어서 짓는 웃음이라기보다는 어처구니가 없어서 나오는 웃음에 가까웠다.

정신을 잃고 있던 시간 동안 일어난 일은 얀에게 전해들어 모두 알고 있었다. 그래서 지금 실리케가 완벽한 약자라는 것도 아주 잘 알고 있었다.

물론 그렇다 해서 오자마자 무릎 꿇고 사과하리라 기대한 것은 아니었지만 저렇게까지 당당하게 나올 것이라고는 생각하지 못했었다.

칼리안이 웃음을 지워내며 대답했다.

"도무지 알아들을 수 없는 말을 하시는군요."

그것은 정확히 일주일 전, 실리케가 칼리안에게 했던 말이었다.

실리케는 한동안 말이 없었다. 그런 그녀의 다음 말을 기다리던 칼리안이 짧은 한숨을 내쉬었다. 일주일만에 눈을 뜨자마자 지금까지의 상황을 전달받았고 30분도 되지 않아 불청객을 맞이하고 있었으니까.

때문에 기꺼운 마음으로 상대할 컨디션이 되지 못했던 칼리안이 다소 지친 말투로 입을 열었다.

"배려해주신 덕분에 내가 조금 오래 쉬었습니다."

그 날의 칼리안이 기억났는지, 실리케의 시선이 잠시 드레스 자락에 가 닿았다.

"그런데 하마터면 저승까지 가서 쉴 뻔한 터라 오래 대면하기는 어려울 것 같네요."

"······ 하나씩."

비로소 실리케의 입이 열렸다. 다른 이도 아닌 칼리안에게 이런 이야기를 꺼내는 날이 오리라고는 꿈에서도 생각하지 못했던 까닭에 목소리가 가늘게 떨리고 있었다.

"교환을 하는 것은 어떻겠니."

"일주일 전에 그렇게 말했으면 서로 좋았을 것을요."

칼리안이 천천히 고개를 가로저었다. 물론 실리케가 커튼 너머를 볼 수는 없을 것이므로, 그에 대한 말도 덧붙여 주었다.

"들어보니 내가 예상했던 것보다 더 많이 몰리셨던 것 같아서. 어찌해야 할지."

잠시 시간을 둔 칼리안이 침대 헤드에 등을 기대며 말을 이었다.

"일단 어떤 것을 준비해 오셨는지 들어보고요."

실리케가 무언가를 간신히 참고 삼키는 듯한 얼굴을 했다. 억지로 말하는 티를 굳이 숨기지 않으며 원하는 것을 말했다.

"자료가 사실이 아니라 해 준다면 전하께서 준비하고 있는 일에 대해 반대하지 않으마."

커튼 너머에서 잠시 작은 웃음 소리가 났다. 칼리안은 웃음기가 아직 남아있는 목소리로 실리케의 약점을 쿡 찔렀다.

"전하께 후궁 후보 명단이 올려졌다는 얘기를 들었습니다. 그런데 그게 정말 후궁일지. 혹은 새로운 왕비일지. 아직 잘 모르겠네요. 혹시 아십니까?"

실리케가 입술을 잘근 씹었다.

카이리시스에 불어닥친 태풍은 생각보다 컸다.

실리케는 칼리안이 예상한 것보다 훨씬 깊은 감옥에 갇혔다. 고작 마법사단 창설만으로 꺼내 주기 어려울만큼.

그래서 칼리안의 마음도, 바뀌었다.

"게다가 군대 창설에 왕비의 허가 같은 것은 애초부터 필요하지 않으니. 그것 말고 다른 것으로 얘기해주세요."

실리케는 대답하지 않았다. 마법사단 외의 다른 것을 들고 오지 않았기 때문이다. 게다가 답은 어차피 정해져 있을 것이므로, 실리케가 이를 악문 채 말했다.

"네가 원하는 것을 말하려무나."

칼리안은 더 지체할 필요 없이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시스파니안의 후손이 지배하는 땅에, 검 부딪히는 소리가 이리 크게 들려서야 되겠습니까."

무슨 말이 이어질지 가늠이 되지 않았다. 실리케가 불편한 기색을 보이며 칼리안의 침실 쪽을 쳐다봤다. 그 안쪽에서 여전히 여유롭고 여전히 평온한 목소리가 이어져 나왔다.

"기사단 파벨, 물리시죠."

파벨이라니!

실리케가 자리를 박차고 일어났다.

카이리스 왕실 근위기사단은 본래 라온과 카렌 뿐이었다.

파벨은 '왕의 검'이라 불리는 국왕 친위대 카에라를 견제할 목적으로 브리센 후작이 실리케에게 선물한 기사단이었다.

그러니 지금 칼리안은 실리케의 검을 내어 놓으라 말하고 있는 것이었다. 내 목숨을 걸었으니 상대의 무기 정도는 빼앗아야 셈이 맞지 않겠는가, 라고.

"파벨 해체. 마법사단 창설."

실리케가 얼마나 놀랐는지에는 관심이 없었던 칼리안이 쐐기를 박듯이 다시 말했다. 타협의 여지를 주지 않겠다는 듯 아주 단호한 목소리였다.

꽉 쥐어진 부채에서 까득거리는 소리가 났고 칼리안은 조금 가벼워진 말투로 덧붙였다.

"나한테 붙여둔 당신의 시녀도 다시 데려가고요."

실리케의 얼굴에서 핏기가 사라졌다. 칼리안은 그런 실리케에게 한참동안 생각할 시간을 내어줬다. 그리고 그 인내심의 끝에, 실리케가 천천히 자리에 앉으며 대답했다.

"······ 그리 해주마."

칼리안의 입술이 긴 호선을 그렸다.

칼리안은 실리케의 결심을 재차 확인하는 대신 곧바로 얀을 보며 말했다.

"가져다 드려."

"네, 왕자님."

기다렸다는 듯 얀이 협탁 위에 놓인 것을 들고 침실 밖으로 나갔다. 그리고 들고 나간 것을 실리케에게 건넸다.

그것은 맹세의 인을 담은 서약서였다.

약속한 내용을 서로의 심장에 새기고 만약 어길 경우 심장을 조이는 마법이 걸려 있는 것이었다.

서약서를 본 실리케가 얼굴을 찌푸리는 것이 보였다. 어느새 그런 것까지 준비해 둔 것에 대한 놀라움인지, 아니면 거래 내용이 마음에 들지 않아 생긴 짜증인지, 혹은 둘 모두인지는 굳이 구분하지 않았다. 무엇이든 칼리안이 상관할 바 아니었으니까.

칼리안은 그저 당연한 절차라는 듯 말했다.

"나와 당신의 신뢰 관계는 그리 돈독하지 않으니까."

잠시 눈을 감고 큰 숨을 내쉰 실리케가 서약서에 서명을 했다. 그러자 실리케가 지켜야 할 것들로 적혀 있던 글자들이 빛을 내며 떠오르더니 하나의 긴 띠를 이루는 듯한 형상을 만들며 실리케의 팔을 타고 올라가다 사라졌다. 심장으로 향한 것이다. 물론 칼리안에게도 똑같은 제약이 걸렸다.

볼 일을 끝낸 실리케가 일주일 전에 비해 확연히 수척해진 얼굴로 자리에서 일어났다. 칼리안이 그런 그녀를 보며 입을 열었다.

"아. 혹시라도 형제 사이가 꽤 좋았다고 오해를 하고 있을까봐 얘기하는데."

실리케가 잠시 발을 멈췄다.

하지만 침실 쪽을 향해 고개를 돌리지는 않았다.

"플란츠는 나를 위해서 그런 말을 한 것이 아닙니다."

실리케를 이 지경으로 몰아넣은 시초가 된, 연회장에서의 말.

아들에 대한 배신감을 상기한 실리케의 눈빛이 차갑게 빛났다. 커튼 너머로도 느껴지는 그 모습에 칼리안이 쯧 하고 혀를 찼다.

"그리 궁금하지 않은 이야기를 하는구나."

"만약 당신이 거기서 한 마디만 더 했었다면."

르메인이 생각보다 더 이성을 잃었었으니.

그 화가 어떻게 번졌을지.

"왕의 검은 그 자리에서 왕비의 목을 쳤을 겁니다."

가만히 서 있던 실리케가 한 걸음씩 걸어 밖으로 나갔다.

제7장. 장미가 곧 피겠더군요 (6)

"키리에 남매는 만나보셨습니까, 스승님?"

열 한 개.

그렇게 물어오는 칼리안의 입 속으로 열 한 개째의 바나나가 사라져갔다. 침대 옆에 바나나 껍질이 하나 더 늘어났다.

실리케가 예고도 없이 들이닥쳤다 하기에 놀라서 왔더니 실리케는 어느새 가고 없고 일주일만에 눈을 뜬 그의 제자가 태평한 얼굴로 바나나를 까먹고 있었다.

그러다보니 걱정되던 마음은 어디론가 사라지고, 그간 칼리안 때문에 몸과 마음이 고생한 것으로 인한 부아가 치밀었다.

그리하여 앨런은, 앞에 있는 제자를 한 대쯤은 때려도 괜찮지 않을까 아까부터 고민하다 뚱한 얼굴로 대답했다.

"네."

그 말에 고개를 끄덕인 칼리안이 다음 바나나를 집어들었다. 하는 양을 보아하니 그 독특한 남매에 대해 설명해 줄 생각이 전혀 없어 보였으므로, 결국 궁금증을 참지 못한 앨런이 잠시 화를 집어넣고는 사일런트를 발현하며 물었다.

"이전 생에서 연이 있던 아이들입니까?"

"키리에만. 히나는 없었어요."

언제나 앨런은 눈치가 빨랐다. 더 물을 것 없이 고개를 끄덕인 것이다. 그러다 설마 하는 표정으로 다시 입을 열었다.

"그럼 혹시 히나라는 그 아이가 치유사인 것을 모르셨던 겁니까?"

입에 바나나가 가득 찬 칼리안의 머리가 위 아래로 움직였다.

앨런의 눈썹이 치켜 올라갔다.

"그럼 축복의 힘 하나만 믿고 무턱대고 몸 속의 독을 풀었다는 말씀이십니까?"

입에 든 것을 삼킨 칼리안이 매우 만족스럽다는 얼굴로 말했다.

"바나나 맛있네요."

맛있겠지. 아무렴.

죽다 살아나서 처먹는 게 맛이 없을 리가 있나.

앨런이 주먹을 꾹 쥐며 큰 숨을 내쉬었다. 참는 것이다. 아무리 제자라지만, 왕자니까.

"저도 듣고 놀랐습니다, 스승님. 치유사였다니."

"덕분에 빨리 일어났다는 것만 아시면 됩니다."

앨런이 냉랭하게 대꾸하자 칼리안은 상큼한 목소리로 말했다.

"덕분에 개운하네요."

해맑은 미소와 함께 나온 말에, 앨런이 간신히 붙들고 있던 이성이 기어코 끊어졌다.

"개운······ 같은 소리 마시지요. 독차 물리겠다고 어디서 근본도 없는 생독을 가져와 집어 처드신 덕에 일주일을 내리 자빠져 계셨으니."

세상 그 누가 카이리스의 왕자에게 이런 말을 할 수 있겠는가. 때문에 멍한 얼굴로 앨런을 보던 칼리안이 한참을 웃다 답했다.

"실리케가 자작극이라 우기지 못할 정도는 되어야 했어요."

"자작극이라니. 아무도 그것을 그렇게 생각할 수 없을 겁니다."

생각만 해도 아찔했다.

연극 한판을 제대로 짰기에, 피만 좀 토했지 꾀병일 줄 알았다.

그러나 칼리안은 일주일 동안 눈을 뜨지 못했다. 두 달을 넘게 먹어온 독이 속을 다 망가뜨려 둔 상태에서 퍼진 맹독이었다.

"히나, 그 아이가 자연의 힘을 부리는 치유사가 아니었거나 때마침 화요일에 찾아오지 않았다면 여전히 일어나지 못하셨을 것 아닙니까."

뿐만인가.

속이 녹아내리는 것을 고스란히 참으면서 날을 기다리다 일을 벌였다는 사실을 알았을 때는 앨런도 등줄기가 오싹했다.

그 지독한 놈이 어느새 열 다섯 개째의 바나나를 해치우고 있었다. 일주일 굶은 것을 바나나로 채워넣고 있는 모양이었다.

"그래도 일어나자마자 제 몫은 했잖아요."

빈혈 때문에 아직까지도 창백한 얼굴을 한 칼리안이 실리케와 담판을 지은 것을 말하며 또 웃었다.

결국 포기했다는 듯 한숨을 탁 내쉬던 앨런이 저도 모르게 살짝 인상을 찌푸렸다. 입술 끝이 아려왔기 때문이다. 그것을 본 칼리안이 물었다.

"그런데 스승님 얼굴은 왜 그렇습니까? 싸우셨어요?"

"그럴 일이 있었습니다. 염려하지 마시지요."

입술을 가리켜보이는 칼리안의 말에 앨런의 표정이 확 일그러졌다.

책상 앞에만 앉아있던 놈이 주먹은 또 왜 그렇게 맵던지.

터진 입술에는 제자에게만은 절대 들키고 싶지 않은 속사정이 있었으므로 앨런은 시선을 돌리기 위해 얼른 품에서 무언가를 꺼내 칼리안에게 주었다. 칼리안이 맡겼던 나이프와 돌돌 말려 있는 두 장의 양피지였다.

베개 밑에 나이프를 넣은 칼리안이 양피지를 펼치며 물었다.

"이것이 무엇입니까?"

"새로 아이들의 신원 보증이 필요하다시기에 준비했습니다."

칼리안이 반색하며 내용을 확인했다.

"그러고 보니 이번 일에 신경을 쓰느라 그 일에 대한 부탁을 드리는 것을 잊고 있었네요."

"새끼 코끼리가 대신 얘기했으니 되었습니다."

고개를 끄덕이며 문서를 확인한 칼리안이 놀란 얼굴로 입을 열었다.

"그런데 이건······ 기대 이상이네요."

"그 아이들의 신원 때문에 곤란한 일은 없을 겁니다."

앨런에게 부탁하려던 신원 보증서가 아닌, 제대로 된 신분 증명서였다. 키리에 남매는 칼리안의 소유인 휘트린 영지에 거주하던 평민이 되어 있었다. 아예 처음부터 칼리안의 영지민이었던 것처럼 만들어버린 것이다.

그리고 또 하나.

증명서를 살피던 칼리안의 얼굴에 처연한 미소가 걸렸다.

"그리고 이건, 더 생각하지 못했는데."

증명서에 적힌 남매의 이름 때문이었다.

- 키리에 베른, 히나 베른.

눈을 돌린 칼리안이 세상에서 사라진 이름을 다시 꺼내 둔 스승을 쳐다봤다. 앨런은 별 것 아니라는 듯 말했다.

"성이 필요하다기에 일러주었습니다. 아무래도 우연히 만나서 데려온 아이들은 아닌 듯 하여."

"······ 감사합니다."

분위기가 갑자기 가라앉자, 그런 것은 질색인 앨런이 바나나 더미를 가리켜 보이며 말을 돌렸다.

"그것이나 더 드시지요. 어디 얼마나 더 들어가는지도 볼 겸."

칼리안이 고개를 주억거리고는 바나나를 또 집어들었다.

감동과 허기는 별개니까.

그러다 문득 앨런이 어떻게 신분 위조를 했는지에 대한 의문이 생긴 칼리안이 물었다.

"증명서 만들어내기 어렵지는 않으셨습니까? 스승님은 카이리스에 부탁할 만한 분도 없었을······."

말을 하며 쳐다보니 앨런의 표정이 참으로 의미심장했다.

그것을 알아본 칼리안이 말을 바꾸어 물었다.

"설마 르메인이 만든 겁니까?"

"제가 이 곳에서 아는 이들이라고는 고작해야 셋 뿐이니. 그나마 요즘 자주 보는 이에게 부탁을 해보았지요."

국왕과 왕자와 공작을 '고작 셋'으로 묶은 앨런이 말을 이었다.

"왕자님의 청이라 하니 다른 말을 묻지도 않고 곧바로 도와주기에 놀라기는 했습니다."

"의외네요. 그런 것을 해줄 줄 아는 사람이었다니."

앨런의 입가에 묘한 웃음이 걸렸다. 지금 르메인이 칼리안을 얼마나 신경쓰고 있는지 전혀 모르는 눈치였기 때문이다. 아마도 그 원인을 칼리안이 직접 제공한 것 같았기에, 앨런이 호기심 가득한 눈을 하며 물었다.

"궁금한 것이 있습니다. 그 날 르메인이 생각보다 더 화를 내는 바람에 국왕이 그렇게나 아끼는 아드님으로 소문이 나셨지 않습니까."

"그렇습니까."

그 날의 일을 생각하던 칼리안이 씩 웃으며 덧붙였다.

"제가 운이 좋았나 보네요."

르메인으로부터 '내 아들' 이라는 소리를 꺼내게 만들어 프레이야가 아닌 르메인의 아들이 된, 그래서 왕위를 가지고자 할 때 프레이야의 출신이 방해하지 못하게 할 근거를 얻은 막내 왕자가 그렇게만 말한 뒤 더는 설명하지 않았다.

물론 앨런이 상황을 이해하기에는 충분한 말이었다.

'얻을 것이 늘어나겠네요. 운이 좀 따라야 되겠지만요.'

며칠 전에 들은 말을 생각한 앨런이 칼리안의 표정을 보고는 속으로 혀를 내둘렀다. 독 한번 먹고 얻은 것이 참 많다 싶어서였다.

"덕분에 르메인이 왕자님 걱정을 꽤 많이 합니다. 오늘은 로젤리타 가는 것을 미뤄야 할지를 고민하더군요."

칼리안이 고개를 한 번 가로저은 뒤 대답했다.

"어차피 실리케는 당분간 저를 건드릴 수 없습니다. 제가 재채기만 해도 실리케 탓이라고 할 테니."

그렇게 말한 칼리안이 잠시 입을 다물었다. 그리고 팔을 들어올려 조심스럽게 마나를 운용했다. 아직 불안정하지만, 따뜻하면서도 강한 느낌이 팔을 감싸는 것이 분명하게 느껴졌다. 몸을 보호해주는 오러의 힘이었다.

"그리고 로젤리타가 시작될 즈음이면 어지간한 것으로는 저를 건드리지 못할 겁니다."

이제 더 이상, 심장이 아프지 않았다.

이 몸을 가진 이후 처음으로 느끼는 자유로운 기분이 된 칼리안이 매우 만족스러운 얼굴로 웃었다. 그러더니 앨런이 지어보였던 표정을 따라하며 비밀스럽게 말했다.

"제가, 검을 좀 잘 씁니다."

앨런이 마법사 제자를 보며 피식 웃었다.

* * *

앨런이 돌아간 뒤 다시 잠자리에 드는 칼리안의 옆에 키리에가 말 없이 다가와 섰다. 칼리안이 잠들어 있던 일주일 동안 낮에는 얀과 앨런이, 밤에는 키리에가 곁을 지켰다고 했다.

그리하여 칼리안은 일주일을 내리 자고 나서도 다시 편안한 마음으로 잠에 빠져들 수 있었다.

그래서였는지 모른다.

이 곳에 온 뒤 처음으로 꿈을 꾸었다.

꿈 속에서, 지금껏 함께 있던 아이를 비로소 만났다.

그리고 영영 헤어졌다.

잠에서 깨어난 칼리안이 한동안 울었다.

동이 틀 무렵의 어두운 새벽에, 한 명의 마법사가 검은 로브를 뒤집어 쓴 왕자를 데리고 왕궁 밖으로 나섰다.

오른쪽 앞 다리에만 하얀 털이 난 검은 말은 간신히 앉아있는 제 주인이 행여 떨어질까 조심스러워하며 세뉴강을 향해 걸었다.

체르밀 궁과 가장 가까울 강기슭에 선 마법사의 손에는 그 새벽에 차마 구하기 어려웠던 안네루시아 꽃을 대신할 붉은 불이 피어올랐다. 떠나가는 아이의 눈과 꼭 닮은 색의 불꽃이었다.

왕자의 고개가 꽃을 향해 숙여졌다.

세뉴는 언제나 고요하게 흐르는 강이었다.

강물에 올려진 불의 꽃도 말 없이 흘러 내려갔다.

왕자는, 꽃이 떠나는 동안

다리 위를 지나는 사람이 없기만을 바랐다.

* * *

기사단 파벨이 급히 해체되어 브리센 후작가로 돌아갔다.

앨런 마나실이 마법사단이라는 것을 만들겠다 선언했다.

르메인은 왕실에 대한 근거 없는 소문을 믿지 말라 일렀다.

피를 토하며 쓰러졌던 칼리안은, 요즘 감기가 참 독하다 했다.

그리고 세 달이 지났다.

오찬을 위해 옷을 갈아입은 칼리안을 보던 얀의 미간이 살짝 찌푸려졌다. 얼마 전부터 스멀스멀 올라오는 불안한 느낌을 지울 수가 없었기 때문이다. 얀이 조용한 목소리로 말했다.

"흠, 메를린."

비슷한 표정을 하고 있던 시녀 메를린이 고개를 끄덕이며 얀이 무슨 생각을 하는지 안다는 듯 대답했다.

"슬레이크 경을 만나고 올까요."

"네. 아무래도 많이 작을 것 같다고 전해줘요."

실리케가 칼리안에게 심어두었던 시녀가 그만둔 뒤 얀의 바로 다음 위치에 오른 메를린이 알겠다 대답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왕실 의상 담당자 섀틴에게, 칼리안의 탄생 기념일 연회를 위해 한달 전 맞추었던 예복을 이번에는 늘려야 할 것 같다고 전하려는 것이다.

매일 칼리안을 보는 그들의 눈에도 확연이 차이가 느껴질 만큼, 칼리안은 부쩍 키가 컸다.

본래에도 또래에 비해 큰 편이었지만 독차를 끊은 뒤부터는 정말 눈에 띄게 자라고 있었다. 조찬에서 란델이 놀란 눈으로 쳐다볼 정도로 많이 먹고 하루 대부분의 시간 동안 키리에와 온갖 체력 단련을 하며 지냈더니 자연스럽게 그리 되었다.

얀은 어느새 자신과 주먹 하나 정도밖에 차이가 나지 않는 칼리안을 보며 웃었다. 그것이 왠지 체이스가 베른을 보며 지어보이던 것과 비슷해서, 칼리안도 마주 웃었다.

준비를 마친 칼리안이 오찬을 위해 세뉴관의 소연회장에 들어섰다. 그리고는 저도 모르게 제 자리에 멈춰 섰다.

연회장의 안에는 르메인과 앨런, 그리고 처음 보는 남자가 있었다. 그 자리가 정확히 어떤 것을 위한 오찬이었는지는 얀에게도 따로 전해지지 않았기 때문에 르메인이 있는 자리인 줄은 전혀 몰랐던 칼리안이 조금 놀란 얼굴로 인사를 올렸다.

"국왕 전하를 뵙습니다."

르메인이 고개를 끄덕이며 맞은편 자리에 앉도록 손을 들어 보였다. 칼리안이 그 곳으로 걸어가 조용히 앉았다.

그런 칼리안을 가만히 지켜보던 르메인이 입을 열었다.

"그 사이에 키가 더 컸구나. 이젠 플란츠보다도 커 보이는데."

칼리안은 르메인이 이 곳에 있는 것을 보았을 때보다 지금 들린 말에 훨씬 더 놀랐다. 르메인이 달라졌다고 듣기는 했으나 저렇게 살가운 말까지 꺼내놓을 것이라고는 생각하지 못한 탓이다. 칼리안의 눈이 아주 잠시동안 앨런을 향했다. 그 눈에는 찬탄의 빛이 담겨 있었다.

'대체 사람을 얼마나 구박했으면 저렇게 변한단 말인가?'

사실 르메인이 변한 것은 앨런의 구박 때문이라기보단 무관심이 자식들 목숨 유지에 아무 도움이 되지 않는다는 것을 몸소 알려준 칼리안 덕분이었다. 앨런은 그저 칼리안의 목숨이 위험함을 알려줬을 뿐, 변화의 직접적인 원인은 분명 칼리안에게 있었다.

앨런은 아무것도 모른다는 듯 순한 얼굴로 얌전히 앉은 채였다. 그것을 본 칼리안이 속으로 실소하며 적당한 대답을 골라 꺼내놓았다.

"네, 전하. 조금 자랐습니다."

"그래. 살도 많이 붙고. 보기 좋구나."

"감사합니다."

르메인이 고개를 끄덕이며 옆에 있던 앨런을 쳐다봤다. 그제야 앨런이 칼리안에게 살짝 인사하며 말을 꺼냈다.

"소개시켜 드릴 이가 있어 자리를 마련했습니다, 왕자님."

앨런이 옆의 남자를 가리키며 말을 이었다.

"이번 로젤리타에서 왕자님을 호위하게 될 마법사입니다. 저를 대신해 왕자님의 마법도 보아드릴 수 있을 겁니다."

앨런이 로젤리타에 함께 가지 않는 것은 이미 알고 있었다. 지금 시점에 앨런이 궁에서 나오면 마법사단에 대한 일을 진행하는 것이 불가하거니와 르메인의 안전에도 문제가 있으리라고 판단한 까닭이다.

그래도 이미 지그프리드 공작가에서 호위기사들을 보내준 터라 마법사의 호위까지 생각하지는 않았던 칼리안이 기대감 어린 얼굴로 그 남자를 쳐다봤다. 그리고 곧 고개를 갸웃거렸다.

'낯이 익은 자인데.'

그런 생각을 하자마자 갑자기 심장이 쿵쿵 뛰기 시작했다.

뭔가 이상하다는 것을 채 깨닫기도 전에, 남자가 자리에서 일어나 칼리안을 향해 허리를 숙여 보이며 인사했다.

"뵙게 되어 영광입니다, 왕자님."

잊을 수 없는 목소리가 심장에 내리꽂히는 순간.

칼리안의 가슴에 시린 냉기가 들어찼다.

"아르센 헤르츠입니다."

마치, 베른의 마지막 날처럼.

제8장. 아주, 반갑습니다 (1)

아르센 헤르츠.

가끔 생각이 났다.

당연히 언젠가 만날 날이 있을 것이라고도 각오를 했다. 사사로운 원한 같은 것도 없었다. 상대가 베른이었기 때문이 아니라 적국의 기사였기 때문에 죽인 것임을 모르지 않았다. 심지어 죽어가는 베른에게 꽤나 예의를 갖춰주었다는 것도 기억하고 있다.

머리로는 알고 있지만.

아무리 그래도 괜한 원망이 치미는 것은 어쩔 수가 없었다.

"잘 부탁드립니다."

아르센의 말에, 칼리안이 진한 미소를 지으며 대답했다.

"네. 아주, 반갑습니다."

그 웃음이 묘하게 플란츠와 닮아 있었다. 유일하게 그것을 눈치 챈 앨런이 칼리안과 아르센을 한 번씩 번갈아가며 쳐다보다 작게 혀를 찼다. 인사 채용이 잘못되었다는 것을 깨달음과 동시에 저 마법사 가는 길이 순탄하지 않으리라는 것을 알게 된 탓이다.

"마법사단에 속하게 될 유능한 인재라 하니 가는 길에 많이 배우면서 서로 친해져 보거라."

다른 이의 눈치를 볼 필요가 없는 르메인이 때마침 이런 말을 했다.

칼리안의 무릎 위에 올려진 손가락이 소리 없이 움직여 긴 곡선을 그려냈다. 손 끝의 잔상을 따라가듯 칼리안의 얼굴에도 같은 곡선을 가진 미소가 그려졌다.

"네, 전하. 꼭, 그렇게 하겠습니다."

그려다 붙인 그 웃음을 본 앨런의 팔에는 오소소 소름이 돋았고 르메인은 그저 기꺼워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칼리안은 아직 기억하지 못했지만 사실 아르센은 칼리안을 두 번째 보는 것이었다. 물론 그 처음은 아르센에게 마법을 가르쳐 준 스승의 영결식 날, 다리를 건너려는 칼리안을 막아섰을 때였다. 그 때 가졌던 칼리안에 대한 첫인상이 매우 좋았기 때문에 앨런으로부터 초대장을 받았을 때 조금도 망설이지 않고 왕궁을 찾은 그였다.

때문에 아르센은 그날 보였던 칼리안의 미소와 오늘의 미소가 가지는 의미가 꽤 많이 다르다는 것을 눈치채지 못한 채 기대감 가득한 눈으로 칼리안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래. 로젤리타 준비는 다 되었느냐?"

문득 르메인이 칼리안을 향해 이렇게 물었다. 익숙해지기 힘든 자상한 목소리 때문에 칼리안이 조금 어색해하는 얼굴로 대답했다.

"네. 모두 마쳤습니다."

"헌데 마차를 타지 않겠다 했더구나. 불편하지는 않겠느냐?"

십수 가지의 편의 마법이 적용된 것은 물론이고, 천하의 앨런 마나실이 걸어 놓은 각종 방어 마법에, 그 지고한 고룡 시스파니안이 이공간을 활용해 만들었다는 마차용 침실과 샤워실과 화장실까지 완벽하게 구비되어 있는 화려하고 고급스럽고 넓고 쾌적한 대륙 최고의 마차를 두고 말이나 타는데 어떻게 안불편하겠느냐는 얼굴로, 칼리안이 조신하게 대답했다.

"아닙니다. 괜찮습니다."

그러니까 이게 다 레이븐 때문이었다.

칼리안이 마차 안에 들어가면 옆에 서서 걷지를 않았다. 말과 유난히 친하다던 엘프의 피를 가진 키리에 남매도 레이븐을 다루지 못했다.

그리하여 칼리안은 레이븐을 두고 가느냐 마차를 두고 가느냐를 놓고 정말 심각하게 고민했고 이참에 운동이나 실컷 하라는 앨런의 조언에 따라 그의 사랑스러운 말과 함께 로젤리타를 다녀오기로 한 터였다.

"말이 워낙 영특하니 별 탈은 없을 겁니다."

르메인을 안심시키겠다는 것인지 칼리안을 놀리겠다는 것인지 앨런이 이렇게 말했다. 그 소리를 들은 르메인이 고개를 끄덕이며 칼리안의 결정을 지지해주었다.

"그래. 말에 올라 카이리스 이곳 저곳을 살펴 볼 기회도 없을 테니. 좋은 생각을 한 것이라 믿으마. 왕자의 신분으로 그리 자유롭게 왕궁 밖을 다닐 기회도 또 없을 것이니."

칼리안이 쓴웃음을 지었다.

"허락해주셔서 감사합니다."

칼리안과의 대화가 마무리 되자 르메인의 고개가 이번엔 앨런을 향해 돌아갔다. 다만 대화의 주제는 여전히 칼리안이었다.

"근래 왕자의 마법은 어떠한가?"

"시스파니안이 울고 갈 정도입니다."

아르센이 함께 있는 자리였으나 칼리안의 마법 수준이야 어차피 아르센도 알게 될 일이었으니 르메인이 편하게 물었고, 같은 이유로 앨런 역시 편하게 대답했다.

르메인이 조금 놀란 얼굴로 앨런을 쳐다봤다. 그 정도로 뛰어난 재능을 가졌다는 말인지 하는 표정이었다. 앨런이 부드럽게 웃으며 말을 이었다.

"축복을 준 것이 아까워서."

덜컥!

지레 놀란 아르센의 손에서 큰 소리가 났다.

떨굴 뻔한 나이프를 간신히 붙든 아르센이 안도의 한숨을 작게 내쉬었다. 그리고는 조심스레 고개를 들어 이 자리를 함께하는 높은 분들의 눈치를 보았다.

칼리안은 나이프 소리는 물론 앨런의 말도 듣지 못한 것처럼 여유로운 식사를 이어나가고 있었고 르메인은 앨런을 물끄러미 쳐다보는 중이었다. 그리고 앨런은 꼴딱꼴딱 물을 마셨다.

르메인이 그런 앨런을 향해 나지막이 말했다.

"경은 참 한결같군."

"여부가 있겠습니까."

결국 르메인의 깊고 푸른 눈이 다시 칼리안을 향했다.

"실로 오랜만에 왕가에서 마법사가 나는 것이니라. 마나실 경이 이리 엉망으로 굴어도 그 능력은 출중하니 로젤리타를 다녀오거든 마나실 경에게 더 많이 배우고 노력하거라."

르메인의 입에서 엉망이라는 표현이 나올 정도면 평소 르메인을 대하는 앨런의 행실을 알 만 했다. 칼리안이 포크와 나이프를 내려놓고는 살짝 고개 숙여보이며 얌전히 대답했다.

"네, 전하. 더 노력하겠습니다."

자신의 아들이 고작 14세의 나이에 3서클을 마스터했음을, 그것이 앨런 마나실보다 1년 빠른 성취임을 알 리 없을 르메인이 고개를 끄덕였다.

제자에 대한 기대감이 너무 높은 스승님 때문에 괜한 소리를 들은 칼리안은 억울할 것도 없다는 듯 평온한 얼굴로 식사에 열중했다. 물론 앨런은 본래부터 한결같은 모습으로 식사중이었다. 오로지 아르센만이 셋의 기에 짓눌려 마른 입을 적셔낼 뿐이었다.

그렇게 몇몇 대화가 오가며 오찬이 마무리되었다.

항상 바쁜 르메인과 속이 바쁜 아르센이 먼저 돌아간 뒤, 칼리안과 앨런은 약속이라도 한 것처럼 함께 밖으로 걸어나갔다. 얀과 키리에가 거리를 두고 따라왔다.

칼리안과 앨런은 둥글게 다듬은 가로수가 회랑처럼 길게 이어진 녹빛의 길을 나란히 걸었다. 그 곳은 세뉴관의 주변을 담처럼 감싸고 있는 멋진 산책로였다. 8월의 더운 햇빛이 나뭇잎 사이사이로 스며들어 고운 자갈길 위에 구슬같은 무늬를 올려놓고 있었다.

앨런이 자연스러운 순서인 것처럼 사일런트를 발현했다. 그것을 본 칼리안이 작게 소리내어 웃었다. 이 대단한 마법사가 카이리스에 와서 가장 많이 쓴 마법이라는 것이 고작 사일런트였기 때문이다. 물론 그런 것에 그다지 큰 신경을 쓰지 않을 앨런은 가만히 고개를 돌려 칼리안에게 물었다.

"인사를 물릴까요, 왕자님?"

아르센에 대해 이야기하는 것이었다.

그를 떠올린 칼리안이 저도 모르게 가슴 한 켠을 쓸어내렸고 앨런은 베른과 아르센이 어떤 관계인지 굳이 묻지 않기로 했다.

가만히 들려오는 매미 소리에 귀를 기울이던 칼리안이 물었다.

"그 자, 나이가 어떻게 됩니까?"

"이제 스물 여덟입니다. 능력이 있으면서도 왕자님과 함께 지내기 좋을 만큼 젊은 마법사를 고르다보니 그리 되었습니다."

베른을 공격했을 때 서른 여덟의 나이로 군단장 직을 수행했다는 소리다. 그 나이에 마법사단을 이끌 정도라면 인재였다. 칼리안만이 홀로 기억하는 응어리 때문에 그런 인재를 놓쳐야 할 이유가 없었다.

칼리안이 웃으며 고개를 가로저었다.

"그대로 두세요. 제가 알아서 할게요."

얀이 세상에서 가장 무서워하는 말이 '알아서 하겠다'라는 칼리안의 호언장담이라는 것을 앨런은 아직 몰랐다. 그래서 앨런은 그냥 고개만 끄덕였다.

"벌써부터 마법사들을 모으고 있는 겁니까? 너무 이르지 않을까요?"

마법사단 창설을 준비한지 고작 세 달이다.

"하다못해 그들을 훈련시키고 머물게 할 건물도 없는 상황에서 사람들을 먼저 모으고 있는 것 같아서요."

앨런이 여유롭게 웃으며 대답했다.

"아닙니다. 왕자님의 호위를 위해 그 자만 미리 부른 것이니 염려하지 마시지요. 그리고 아직 카이리스에 인재라 할 만한 마법사가 많지 않아서 머릿수를 채우려면 시간이 좀 걸릴 겁니다."

하기사, 어련히 알아서 하겠나. 이런 생각이 든 칼리안이 선선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런 칼리안을 보던 앨런이 슬쩍 웃으며 입을 열었다.

"마법사단의 이름을 정했습니다."

칼리안의 고개가 앨런에게 돌아갔다.

르메인이 만들었던 군대이니 칼리안이 미리 만들어 쓰더라도 그 이름만은 르메인이 직접 정하도록 했으면 했다. 때문에 칼리안은 자신이 익히 알고 있는 그 이름을 앞서 알려주지 않았었다.

"무엇으로 정했습니까?"

그러자 앨런이 장난기 가득한 눈으로 칼리안을 쳐다봤다. 맞춰보라는 것이다. 칼리안이 실소하며 입을 열었다.

"발칸."

"역시."

앨런이 미소를 지었다.

"맞습니다. 르메인이 그리 부르자 하여 그리하겠다 했습니다."

"잘하셨습니다. 이름까지 정해지니 조금 실감이 나네요."

앨런이 고개를 끄덕이고는 입을 열었다.

"곧 리베른에 머무는 제 며느리와 손녀를 부를 생각입니다. 아마 로젤리타에서 다녀오실 즈음이면 만나보실 수 있으실 겁니다."

"손녀······가 있으셨군요."

칼리안의 발이 순간 멈칫하다 앞으로 나갔다. 매우 어색한 웃음이 칼리안의 얼굴에 드러났다. 아르센보다 더 젊어보이는 앨런이 할아버지 미소를 지었다.

"당차고 예쁜 아이입니다. 다만 손녀가 아니라 며느리 때문에 부르는 것이지요. 지금 리베른에서 마법을 가르치고 있으니, 아무래도 발칸의 마법사들을 훈련시키는 것에 도움이 될 듯하여."

칼리안은 리베른에 대해 그리 아는 것이 많지 않았다. 그저 마법사들에 대한 대우가 좋고 사람들의 성정이 굉장히 자유로운 나라라는 정도만 알았다. 때문에 리베른의 마법 교육에 대해서도 잘 모르는 칼리안이 앨런에게 물었다.

"리베른에 마법 학원이라는 시설이 궁금합니다. 그 곳에서 가르침을 받아도 마법사로서 활동을 할 만큼 충분히 배울 수 있습니까?"

일대 다수의 마법 교육이 과연 얼마나 효율적일지 알 수가 없어서 묻는 말이었다. 앨런이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했다.

"네. 브리센의 기사 양성소와 비슷합니다. 재능과 노력에 결과가 따르는 것이니 서로 다를 바가 없지요."

그에 대한 칼리안의 말이 들려오지 않았다. 생각에 빠진 것임을 느낀 앨런이 말 없이 칼리안의 옆에서 느긋한 걸음을 옮겼다.

칼리안의 입은 세뉴 관을 거의 한바퀴 돌았을 때가 되어서야 비로소 열렸다.

"스승님, 혹시 오늘 오후에 다른 일정이 있습니까?"

"특별한 일정은 없습니다."

앨런은 고민하지 않고 고개를 가로저었다. 칼리안이 찾는다면 일정이 있어도 없앨 앨런이었으니까.

칼리안이 고개를 끄덕였다. 다만 이번에 칼리안이 찾는 것은 앨런이 아니었다. 칼리안은 기대감 가득한 앨런을 향해 생글생글 웃으며 말했다.

"마차 좀 빌려주세요."

뜬금 없이 마차라니.

예상치 못한 말을 들은 앨런이 의문 어린 눈으로 칼리안을 쳐다보며 물었다.

"제가 아니라 제 마차에게 볼 일이 있으신지요?"

꽤 이상한 소리였기 때문에 칼리안이 잠깐 웃다 대답했다.

"스승님 이름만 잠시 쓰면 되는 일이라서요. 함께 가셔도 상관은 없지만 오늘은 별로 재미 없으실겁니다."

누가 보아도 앨런 마나실의 것임이 분명한 그 호사스러운 마차를 타고 앨런 마나실의 이름을 팔겠다는 소리였다. 먼저 가자 청하는 것이 아닌 자리에 굳이 따라갈 미련퉁이는 아니었던 앨런은 고개를 가로저으며 대답했다.

"재미 없는 곳은 싫습니다. 아무튼 왕자님께서 제 마차를 쓰시는데 제가 왕궁 밖에서 뭉그적거리고 있으면 이상할 테니 르메인과 잠시 이야기나 나누고 있겠습니다. 다녀오시지요."

"네. 감사합니다."

그 길로 칼리안은 얀과 키리에를 데리고 앨런의 마차에 올라 왕궁 밖으로 나갔다.

시종장으로부터 칼리안이 앨런의 마차를 타고 왕궁을 나갔다는 말을 들은 르메인은 앨런이 함께 나가는 경우에는 더 이상 보고를 올리지 말라는 말을 했다. 앨런에 대한 믿음의 표현이었다.

그러나 그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시종장의 뒤로 앨런이 불쑥 나타났다. 그것을 본 르메인의 표정이 잔뜩 구겨졌다.

이 망할 마법사가 애를 혼자 내보낸 것이다.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