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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

산책이나 하자는 말에 칼리안은 고개를 끄덕였다.

앞에 서 있던 키리에가 무슨 말을 하고자 하는 눈치였으나 일단은 란델과의 일이 먼저였다.

때문에 칼리안은 얌전히 란델을 따라 나섰다.

다음 일정까지 시간이 촉박했으므로 둘은 잠시 아르피아 궁 후원으로 갔다.

한참을 걷도록 란델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때문에 칼리안은 이번에 또 무언가 들킨 것이 있는지를 심하게 고민했다. 하지만 아무리 생각해봐도 이미 까발려질대로 까발려진 능력 말고는 다른 것이 없었다.

'아니면 설마 플란츠와 등 돌린 것이 아니라는 걸 알았나.'

하지만 그 후로도 란델은 계속하여 말이 없었다.

그래서 정말 이대로 산책이나 하다 돌아가자는 말이었나 하는 생각이 들자 칼리안은 더 기다리지 못하고 입을 열었다.

"하실 말씀이라도 있으십니까."

불편한 마음이 고스란히 느껴지는 목소리였다.

무슨 꿍꿍이를 가졌는지도 알 수 없을 뿐더러 그간 칼리안을 어떻게 여겨왔는지를 안 이상 좋은 태도로 란델을 대하기가 힘들었다.

"물을 것이 있다."

"말씀하십시오."

"레넌 브리센을 찾고자 한다."

나란히 걷고 있었으므로 란델이 칼리안의 표정을 보지는 못했다. 따라서 칼리안은 마음 놓고 미간을 찌푸렸다.

서른 명의 신관과 그레이에 이어 이제는 레넌 브리센이다.

과연 세 가지가 다 란델과 연관 있는 것이 맞기는 한가 싶을 만큼 서로간의 상관관계가 너무 없었다.

"그 자를 왜 저에게 물으십니까."

"휘트린 영지의 수익금이 어느 정도인지를 내가 모르고 있었겠느냐. 네가 브리센 자작을 어떤 방법으로 치웠는지 역시 모르고 있지 않다. 그러니 그의 행방 역시 알고 있지 않더냐."

칼리안이 어느 정도의 영향력이 있는지를 알면서도 그냥 두고 보았다는 말.

"······ 그것을 아시면서 왜 모르시는 척 하셨습니까."

"나에게 해가 될 것이 없지 않더냐."

가만히 두면 알아서 실리케도 없애고 브리센도 야금야금 줄여주니 란델이 칼리안을 막을 이유가 있었겠나.

아무튼 란델이 정황을 이미 다 알고 있다 해서 덥썩 물어버릴 수는 없었다. 그랬다가는 그새 또 들키고 왔느냐며 앨런에게 끝없는 잔소리를 또 들어야 할 터였다. 때문에 칼리안은 일단 발을 뺐다.

"레넌 브리센의 행방에 대해서는 저도 잘 모릅니다."

"네가 이렇게까지 경계할 필요 없는 일이다. 굳이 숨겨주는 이유를 모르겠구나."

그 말에 칼리안이 실소했다.

그야말로 의미 없는 말이었다.

"경계할 필요가 없다 하나 제가 이렇게까지 날을 세우게 만든 것은 바로 란델 형님이십니다."

칼리안은 고개를 돌려 란델의 눈을 쳐다봤다.

그리고 체르밀 궁의 계단을 올라갔던 날을 떠올리며 말했다.

"형님이 만들어 두었던 선을 제가 넘었다 여기시는 것 아니었습니까."

란델은 그에 대해 별달리 부정하지 않으며 말했다.

"브리센 자작의 일은 내 개인적인 사정이다. 확인할 것이 있을 뿐, 자리 싸움과는 관련 없는 일이니 그렇게 날 세우지 말거라."

란델의 그 말과 함께 칼리안의 발이 잠시 멈칫했다.

'개인적인. 자리 싸움과 관련 없는.'

저 말 때문에 한 가지 사실이 떠오른 까닭이다.

란델은 자신에게 등을 돌리겠다는 뜻을 명확히 한 칼리안을 굳이 불러내어 레넌의 행방을 물었다. 세자위 싸움과는 관련이 없다지만 란델에게는 그만큼 중요한 일이라는 소리였다.

서른 명의 신관을 왜 들여왔는지는 아직 알 수 없었다.

하지만 그레이와 레넌을 불러 란델이 확인하고자 할 일이 무엇인지 알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칼리안은 곧바로 다시 발을 놀렸다. 때문에 란델은 방금 자신이 칼리안에게 무엇을 떠올리게 했는지를 눈치채지 못했다.

'설마. 전 왕비 아이샤의 죽음에 대해 확인하려는 것은 아니겠지.'

그런 생각에 칼리안이 살짝 입술을 깨물었다.

만약 란델이 이 일을 알게 되면 텐실과의 전쟁이 시작될 지도 모른다.

당연히 그것은 베른의 과거에서는 없던 일이었다.

제20장. 이번에는 (1)

플란츠는 계속 고민하고 있었다.

"네가 그 정도의 언행을 할 것이라고는 생각하지 않았다. 무슨 이유로 타국의 왕세자에게 그런 모습을 보였느냐."

전날 플란츠가 체이스에게 무례한 행동을 한 것에 대해 전해 들은 르메인이 생일 축하 인사를 하러 온 플란츠를 따로 남겨놓고 혼을 내기 시작한 탓이다.

"체이스 왕세자는 훌륭한 왕의 재목이다. 충분히 보고 배울 점이 많은 이를 그리 대했다 하니 내가 너를 잘못 보았던 것은 아닌지 참으로 걱정이 많았다."

1년 전 르메인의 앞에서 프레이야를 욕했을 때 르메인은 플란츠에게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질책하는 표정조차 짓지 않았다. 그 정도의 관심조차 없던 사람이었다. 그랬던 르메인이 실상 아무 상관도 없는 체이스에게 무례를 범했다며 꾸중을 하고 있었다.

그러니 플란츠는 고민을 할 수밖에 없었다.

르메인을 이렇게 만든 아우님에게 화풀이를 해야 할지. 아니면 고맙다 해야 할지.

"나라의 크고 작음으로 위와 아래를 정하려 하지 말거라. 그것은 만용이니라."

자신의 말을 한 귀로 듣고 고스란히 흘리면서 다른 생각을 하고 있다는 것을 아는지 모르는지, 르메인은 여전히 엄한 표정을 한 채 말을 맺었다.

그런 르메인을 보던 플란츠가 조금 늦은 대답을 했다.

"생각이 짧았습니다. 주의하겠습니다."

그런데 주의하겠다는 대답과는 달리 플란츠의 말 끝에 웃음기가 있었다. 그것을 느낀 르메인이 잠시 입을 다물었다.

물론 비웃음이 아니라는 것 정도는 알고 있었다.

다만 혼을 내는데 웃는 아들을 어떻게 대해야 하는지는 아직 생각해본 적 없었기 때문에 잠깐 멈칫했을 뿐이다.

당황한 것이 아니다. 정말이다.

"그래."

결국 르메인은 짧은 대답과 함께 다른 이야기를 꺼내들었다.

"그래서 요즘은 어찌 지내느냐."

실컷 혼낸 것도 모자라 이제는 걱정을 하고 있었다.

플란츠가 르메인의 얼굴을 다시 쳐다봤다. 그런 반응에 르메인이 말을 덧붙였다.

"내가 나서지 않는 것이 약이라 하여 따로 찾아 부르거나 물어보지 않고 있었다만 사실 그 일이 지나간 뒤 걱정을 많이 하였다."

이 말을 듣고 나서야 플란츠는 르메인이 무슨 일에 대한 안부를 묻는 것인지를 이해할 수 있었다. 실리케에 대한 일을 잘 잊고 지내고 있는지를 이제야 묻는 것이다. 그것도 저렇게 조심스러운 표정을 한 채로.

나서지 말라 한 것 역시 앨런의 조언이었을 것이다.

실리케에게 결국 독을 내린 것이 르메인이었으니 플란츠의 앞에서 쓸데없이 얼쩡거리지 말라 했을 테지.

"걱정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이렇게 대답한 플란츠가 작게 실소했다.

르메인이 이렇게 어려워하는 정도인데 정작 그 일에 가장 크게 관여해놓고는 이래도 죽을거다 저래도 죽을거다 해가며 걱정인지 참견인지를 계속 해대던 웬 놈이 생각난 탓이었다.

혼냈더니 웃는다.

걱정했다 하니 피식 웃는다.

질풍노도의 시기를 겪고 있는 아들의 이상한 반응에 상당히 복잡한 심정이 된 르메인의 표정은 보지 못한 채였다.

* * *

르메인을 만나고 나오면 곧바로 말해주려 했다.

란델과 산책을 끝내고 오면 곧바로 말해주려 했다.

때문에 문 밖까지 체이스를 배웅한 앨런이 키리에를 보자마자 곧바로 들어오라 손짓했을 때 키리에는 정말 난감한 기분을 느꼈다.

"다 들었는가?"

"무엇을 말씀이십니까."

얀을 두고 키리에만 집무실로 불러들인 앨런이 물었고 최근 거짓말이 많이 늘어난 키리에가 시치미를 뗐다. 다만 상대가 앨런이었다.

"자네가 들은 것을 왕자님께 말씀드릴 생각인지 묻는 것이네."

"제가 들은 것은 곧 왕자님께서도 들으신 것이어야 합니다."

"그 귀는 걸러 듣는 것은 모르는 귀인가?"

"모릅니다."

"이 우직한 칼잡이를 어찌하나."

앨런이 허허 웃었다.

"그리고······ 제 이름을 말씀드렸을 때 세크리티아의 세자께서 많이 놀라셨습니다. 칼리안 왕자님의 과거에 대해 제가 직접 알려드린 것이나 다름 없습니다."

"자네가 '베른'이라는 성을 말해서 체이스가 눈치를 챘다고 생각하는 것인가."

"제 말로 인해 확신을 하셨을 것 같습니다."

사실 체이스가 칼리안과 베른을 연관지은 과정은 조금 더 복잡했다. 그리고 그에 있어 키리에가 아주 큰 역할을 한 것은 맞았다.

당연하겠지만 기억을 찾은 체이스는 처음부터 칼리안과 베른을 함께 생각하지 않았다. 연관짓기는 커녕 베른이 어딘가 살아있으리라는 생각조차 하지 못했다.

다만 자신이 기억을 찾았을 그 즈음 가장 떠들썩했던 '실리케 축출' 소식과 죽었어야 했을 3왕자가 실리케를 몰아내는 것에 가장 큰 역할을 했다는 이야기를 듣게 되었을 뿐이었다.

'칼리안이 어떻게 살아있을까.'

모든 것이 자신의 기억과 똑같이 굴러가고 있는 상황에서 칼리안과 연관된 것들만 틀어지고 있었다. 그것을 알게 되니 자연스럽게 카이리스 3왕자에 대한 호기심이 생겼다.

칼리안은 리베른으로 돌아갔어야 할 앨런 마나실을 스승으로 삼았고 앨런 마나실이 발칸을 만들었다. 심지어 칼리안이 여섯 번째 검이라는 이야기까지 전해졌다. 호기심에서 알아본 내용이 범상치 않았다.

그때부터 체이스는 칼리안에 대한 모든 정보를 수집하기 시작했다.

그렇게 해가 지난 후 칼리안의 시종 한 명이 어떤 도박장에서 한바탕 칼부림을 했다는 소식이 전해졌다. 시종의 이름도 함께였다.

- 키리에.

그때까지만 해도 체이스는 키리에의 성이 무엇인지 몰랐다. 카이리스의 시종들은 대체로 성을 공개하지 않고 일했으니까.

하지만 그 이름만으로도 충분했다. 체이스가 너무나 잘 아는 이름이었다. 베른을 대신해 화살받이가 되어 죽었던 충성스러운 기사가 아닌가.

세크리티아로 와야 할 키리에가 죽었어야 할 칼리안과 함께 있었다. 이제 체이스는 하필 그 둘이 함께하게 된 출발점을 알아보게 되었다.

- 칼리안 왕자가 '어딘가'에서 직접 데려온 아이.

이미 키리에와 도박장을 함께 떠올리던 중이었다.

그랬으니 조금 더 지난 일을 생각해내는 것은 어렵지 않았다.

정작 체이스는 알지도 못하는 '붉은 고니'라는 이름의 세작이 새 판매점의 암호를 모조리 꿰고 있더라는 보고. 그리고 붉은 고니가 도박장 정보를 알아간 바로 그 날 도박장에서 사라진 오드아이의 소년.

체이스는 망치로 머리를 세게 얻어맞은 기분이 되었다.

카이리스의 왕자이며 소드마스터이자 키리에를 데리고 있는 칼리안이 바로 붉은 고니일 수 있다. 소드마스터이자 키리에와 막역했던 베른은 세크리티아의 세작들을 관리했었다.

······ 그러니 어쩌면. 혹시 어쩌면.

이런 사고의 결과로 체이스는 칼리안을 직접 만나보기 위해 카이리스에 왔다. 자신을 대하는 칼리안의 반응을 보고 예감했다. 키리에를 만났고, 물었다. 그리고 들었다.

'키리에 베른.'

맞았다. 칼리안이 바로 베른이었다.

잊어버려서도 잃어버려서도 안 됐을.

동생이었다.

그렇게 오랜시간 아주 긴 과정을 거쳐 알게 된 사실이었다.

"저 때문에 벌어진 것이니 더더욱 제가 숨겨서는 안 될 일입니다."

키리에의 말이 틀린 것은 아니었다. 체이스가 키리에의 성을 듣고 확신을 가지게 된 것은 맞으니까.

앨런이 침음을 흘렸다.

물론 거기에 대해 앨런이 왈가왈부 할 입장도 아니었다.

"그래. 다른 이의 말을 들을 놈이었으면 칼리안 왕자님이 제 등 뒤에 놓을 생각도 안했을 테지."

또 한 편으로는 차라리 잘 됐다는 생각도 들었다. 앨런 역시 이 일을 칼리안에게 숨겨야 할지 고민이 컸던 것이다. 그러니 저 우직한 키리에가 제 소신대로 말을 하도록 두는 것이 낫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 그래도 지금은 귀족들이 많이 모이는 기간이네. 그들 앞에서 평정심 잃은 모습을 보이시지는 않도록 축제 기간만 보내고 이야기하게."

"제가 고민을 해보겠습니다."

다 칼리안을 생각해서 하는 말이거늘, 그나마도 고민해보고 결정하겠단다.

칼리안의 말이라면 무엇이든 네 밖에 안하는 키리에다.

그리고 앨런은 명색이 칼리안의 스승이며 현명한 대마법사다. 그런데 이 놈의 칼잡이는 곧죽어도 앨런의 말을 바로 듣질 않았다.

"그래. 다 그냥 자네 알아서 하게."

결국은 앨런이 이렇게 한 수를 접고 말았다.

어쩌겠는가?

이게 다 귀 밝은 놈 옆에 두고 마법 안 쓴 놈 잘못인 것을.

* * *

란델이 칼리안을 깊이 응시했다.

"무리한 부탁이 아닐 것이라 생각했다만."

자칫 전쟁을 부를지도 모를 정보를 알려달라 하고 있으면서 무리한 부탁이 아니라니.

그런 란델을 향해 '레넌을 왜 찾는질 말해주시면 알려드릴지 말지 생각해볼게요' 따위로 대답을 할 수는 없었다. 때문에 칼리안은 란델의 눈을 피하지 않고 다시 대답했다.

"모르는 것을 계속 물으셔도 답이 달라지지는 않습니다."

그 말과 함께 자리를 피하려는데 때마침 란델의 시종이 조심스레 다가오는 것이 보였다. 얀 역시 그 옆에서 함께 걸어오고 있었다.

"광장에 나가야 할 시간이 되었나봅니다. 일정이 있으니 산책은 여기까지 해야 할 것 같습니다."

이렇게 대화를 일단락지은 칼리안이 간단한 예를 보인 뒤 얀이 있는 곳으로 걸어갔다. 칼리안의 얼굴을 본 얀이 조금 굳은 얼굴이 되어 입을 열었다.

"무슨 일 있으세요? 표정이 너무 안좋습니다. 안그래도 어제부터 계속 말씀도 잘 안하셨는데."

"아니야. 별 일 없어."

거짓말인 티가 팍팍 난다.

아니 대체 어떤 놈이 우리 꽃 같은 왕자님 심기 건드렸냐고.

라고 할 뻔 하다가 오늘 칼리안이 만난 이라고는 위대하신 국왕 전하와 그 국왕 전하의 장자이신 1왕자님 뿐이었다는 것을 깨달은 얀이 얌전히 입을 닫았다.

어느새 옆으로 돌아온 키리에 표정도 그냥저냥 보고 넘기기 어려울 판에 칼리안까지 이러니 사정 모를 새끼 코끼리는 그저 울고 싶을 뿐이다.

아무튼 그런 얀의 사정과는 관련 없이 칼리안은 칼리안대로 곤욕이었다. 란델과의 대화가 꽤 길어진 탓에 칼리안은 제대로 된 고민도 해보기 전에 광장에 불려나가 인사를 마치고 연달아 이어지는 귀족들과의 티 타임에 참석하게 되었으니까.

"반갑습니다."

그나마 다행인 것은 그래도 칼리안이 제 스스로 이상한 소문을 만들어 낼 짓을 하지는 않는다는 것이다.

언제 그렇게 생각이 쌓였냐는 듯 칼리안은 참으로 여유로운 행동과 미소로 귀족들의 인사에 화답했다. 멀리 에반 브리센 후작이 보였지만 서로 반가울 사이가 아니었으니 간단한 시선만 주고 받았다.

그렇게 자리에 앉은 뒤에는 다시 고민을 시작했다.

아이샤가 독살됐음을 말할지 고민하는 것이 아니었다.

란델에게 아이샤의 사망 원인을 알리지 못하는 것은 칼리안의 입장에서 미안함을 느낄 일이기는 했다. 하지만 어차피 피해자도 가해자도 모두 죽은 사람이다.

괜스런 전쟁을 일으킬 이유가 없다.

칼리안은 심지어 실리케를 눈 앞에 두고도 참지 않았던가.

때문에 칼리안이 고민하는 것은 조금 달랐다.

레넌 브리센을 꺼내면 안된다.

그레이 브리센이 와서도 안된다.

'계속 숨겨둬야 하나. 아니면······.'

죽여야 하나.

아이샤에 대한 비밀을 알고 있는 것이 맞는지 불분명한 둘을 어찌 처분해야 할지였다.

'아무래도 축제 이후 둘을 만나봐야 할 듯 한데.'

만나보고 그 입을 열어두어도 될 지를 결정해야겠다고. 그렇게 결론이 날 즈음이었다.

"세크리티아의 왕세자, 체이스 듀라한 세크리티아님입니다."

생각지도 못한 기사의 목소리.

그리고 그 뒤를 이어 체이스가 들어왔다.

칼리안의 얼굴에 순간적으로 당황한 기색이 스쳤다.

물론 체이스를 다시 만나게 된 탓도 있었다. 하지만 그보다 큰 것은 체이스와 함께 들어온 테일란 때문이었다.

지금 이 곳에는 에반이 있었다.

때문에 칼리안은 마법으로 오러를 감춘 채였다.

'오러를 감추면 테일란 카스트린의 의심을 살 테고, 감추지 않으면 에반 브리센에게 내 오러가 보일텐데.'

고민의 시간은 길지 않았다.

'대륙의 첫번째 검에게 의심을 받는 것보다는 에반과 정면 충돌하는 것이 낫다.'

검의 길에 오른지 1년도 채 되지 않은 이가 테일란보다 많은 양의 오러를 지니고 있다는 의심을 받는 것보다는, 알고 보니 칼리안의 오러가 자신보다 적은 것을 안 에반이 덤벼오는 편이 나으리라.

"오러는 그대로 감추고 계셔도 괜찮습니다."

그 때 칼리안의 뒤로 걸어온 키리에가 이렇게 말했다.

"······ 왕자님이 누구인지, 세크리티아의 왕세자께서 알고 계십니다."

덧붙여진 말을 들은 순간, 칼리안의 눈이 깊이 가라앉았다.

제20장. 이번에는 (2)

실로 비인도적이고 비언어적이며 윤리적이지도 않은데다, 그것을 실현하는 것에도 무리가 있다는 것을 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인간이라는 것은 지극히 불완전하여 머리가 아닌 심장에 한껏 휘둘리기도 하는 존재이므로.

이성의 끝자락을 간신히 틀어 쥔 채 이런 생각을 하곤 한다.

- 때릴까.

이렇게.

앨런의 마음속에 오로지 단 한 사람만을 향한 맹목적인 폭력성이 가득 들어앉았다.

두 대도 말고 그냥 진짜 딱 한 대만 때려 보면 안되나.

"카이리스 중앙 귀족들이 모인 자리에 타국의 왕세자를 대관절 왜 부르셨습니까?"

"대화를 나누어보니 그 생각의 깊이가 남다르더군. 나조차도 감탄을 금치 못하였는데 귀족들이라 하여 다르겠나."

앨런의 숨결 하나하나에 짙은 한기가 맺혀있는 것도 모르는 것이 분명하다. 연회장으로 가기 위해 자리에서 일어서던 르메인이 별 것 아니라는 듯 대답했다.

"그래서 중앙 귀족들이 모인 자리에 보란듯이 초대를 하셨습니까."

"그래. 초대 자리를 극구 사양하였네만 왕자들도 함께 하는 자리이니 견식을 넓히도록 내가 불러내었네."

"심지어 극구 사양하는 것을 들어 앉혀 놓으신겁니까."

물론 르메인도 칼리안이 마법으로 무엇을 감추고 다니는지 잘 알고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런 일을 저질렀다. 그러니까 체이스 초대하는 것에 신경을 쏟느라 그 뒤꽁무니에 누가 따라다니는지를 떠올리지 않은 것이다.

그제야 앨런은 둔하고 눈치 없기로 얀과 쌍벽을 이룰 경쟁자가 바로 르메인이었음을 다시 깨달았다. 하기사 제 아들 죽어가는 것도 모르던 작자였으니 이 정도 쯤이야.

앨런은 저 혼자 무엇을 생각하고 결론을 내린 듯 고개를 끄덕이더니 르메인을 보며 말했다.

"아무튼 축하드립니다, 전하. 그래도 오늘 전하의 고민거리 하나는 더시겠습니다."

"또 무슨 소리를 하려는지."

앨런이 요즘 참 많이 참았다.

르메인이 체이스만 안 불러왔어도 누구보다 평화로운 마음으로 축제를 만끽했을 것이다. 그것을 방해받았으니 참고 참았던 입이 결국 열렸다.

"오늘 세 왕자 중 한 놈 어디 먼 곳으로 보내버리게 생기셨으니 다른 둘 중에 누구를 남길지만 결정하시면 되겠습니다."

농담이 아니라 정말로 화가 난 앨런이 자리에서 일어섰다. 그리고는 카에라의 기사단장 렌을 가리켜보이며 말했다.

"내로라하는 칼잡이가 넷이나 모인 그 자리에 늙은 마법사는 차마 못 가겠으니, 전하께서는 뒤에 서 있는 저 친구 데리고 다녀오시지요."

그리고는 저벅저벅 걸어가 집무실 밖으로 나가버렸다.

물론 앨런은 그 정도 상황이라면 키리에가 칼리안에게 사실을 알려주었을 것이라고는 생각을 했다. 그러니 별 일 없이 잘 넘어갈 수는 있을 터였다.

그저 하나만 알고 둘은 계속 모르는 르메인이 한번 더 정신을 차려야 할 때가 온 것 같아서 그리 말했다. 저렇게 아무 생각 없이 굴다가는 조만간 뒤통수 맞기 딱 좋겠다 싶어서였다.

'내로라 하는 칼잡이라니.'

일단 칼리안이 가장 먼저 떠올랐고 그 뒤로 슬레이만과 에반이 떠올랐다. 거기까지 생각해낸 르메인이 길게 탄식했다. 앨런이 화를 낸 이유를 그제야 눈치를 챈 것이다.

"3왕자를 빨리 불러오게."

때문에 르메인은, 테일란과 에반의 사이에 끼인 칼리안부터 일단 꺼내기로 했다.

* * *

- 알고 계십니다.

칼리안만 들을 수 있을 만큼 작은 목소리였다.

하지만 그것이 칼리안에게는 하늘을 찢는 천둥이었다.

그럼에도 얼굴 표정 눈빛 하나 변하지 않았다.

그저 깍지를 낀 채 테이블 위에 올려두었던 손이 하얗게 변했을 뿐이었다.

잠시 눈을 감았다 뜬 칼리안이 짧게 대답했다.

"알았어."

그것이 칼리안이 할 수 있는 말의 전부였다. 지금 칼리안은 마음대로 제 감정을 겪어낼 수 있는 처지가 되지 못했으니까.

'정신차리자.'

스스로를 채근한 칼리안이 짧은 한숨과 함께 다시 앞을 쳐다봤다.

란델은 아직 오지 않은 상태였고 플란츠가 이제 막 도착해 자리에 앉은 차였다. 연회장 입구에서 몇몇 안면이 있는 듯한 귀족들과 인사를 나눈 체이스가 저벅저벅 발 소리를 내며 칼리안이 있는 쪽으로 걸어왔다.

그리고 플란츠와 먼저 가벼운 인사를 나눴다.

좋게 말해 가볍다는 것이지 그냥 서로 고개만 까딱한 정도라 하면 맞을 것이다.

그 후에는 플란츠를 볼 때와는 완전히 다른 자상한 얼굴을 한 채 칼리안을 향해 입을 열었다.

"또 보게 되는군요, 칼리안 왕자."

체이스는 아직 칼리안이 무엇을 알게 되었는지를 몰랐다.

칼리안이 잠시 입을 다물고 그 얼굴을 쳐다봤다. 생각해보니 제대로 얼굴을 본 적이 없었던 것 같아서였다. 그렇게 꽤 오랜 시간동안 체이스를 쳐다보던 칼리안이 입을 열었다.

"이렇게 다시 뵙게 되어······."

한동안 말이 이어지지 않았다.

얼마나 그럴싸한 미사여구를 붙이려고 저러나 하는 눈으로 칼리안을 바라보는 귀족들의 시선이 모여들었다. 곧 칼리안이 짧은 말을 덧붙였다.

"참 좋습니다."

이것이 어떻게 꺼내져 나온 말인지 모를 귀족들은 그저 '그럼 그렇지.' 하는 정도의 표정이 됐다.

말주변이 없는 것도 아니면서 언제 누굴 만나든 반갑다는 말 밖에 안하는 3왕자가 아니던가. 그나마 상대방이 다른 나라 세자라고 조금 더 길게 말했구나 하는 정도로 여기고 고개를 돌렸다.

체이스가 웃었다.

칼리안의 말이 무슨 의미인지를 알게 되었는지는 알 수 없었지만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네. 나 역시 같습니다."

그리고 이렇게 전날 칼리안이 했던 것과 같은 말로 답을 전해왔다.

그렇게 인사를 주고 받은 체이스와 두 왕자가 자리에 앉으려는데 연회장 안으로 누군가 들어왔다. 르메인의 시종장 라울이었다.

안그래도 르메인의 입장을 기다리고 있었을 귀족들의 시선이 다시 쏠렸다. 그리고 라울은 곧바로 칼리안이 있는 곳으로 다가와 말했다.

"칼리안 왕자님. 전하께서 급히 찾으십니다."

그러더니 연회장에 앉아있는 귀족들을 보며 조금 큰 목소리로 르메인의 말을 전했다.

"전하께서 조금 늦으시니 먼저 이야기 나누고 있으라 하셨습니다."

이들은 모두 중앙 귀족이었다.

때문에 만약 작년에 이런 이야기를 들었다면 꽤 많은 곳에서 웅성거림이 들렸을 터였다. 귀족들을 전부 모아두고는 정작 본인이 늦는다는 것에 대해 불만을 말했을 것이 분명했다.

하지만 이번에는 그렇지 않았다.

다들 그러려니 하는 얼굴로 고개를 끄덕이고는 둥그렇게 삼삼오오 모여앉은대로 저들끼리 다시 이야기를 시작한 것이다.

별 것 아닌 듯 보여도 그것은 정말 큰 변화였다.

잠시 그런 분위기를 확인한 라울이 정중한 손짓으로 밖을 가리켜보이며 칼리안에게 말했다.

"제가 안내해드리겠습니다."

"알겠습니다."

르메인이 부른다 하니 달리 거절할 수가 없는 일이다. 때문에 칼리안은 고개를 끄덕이며 라울을 따라 나섰다.

칼리안이 걸어나가는 모습을 잠시 보던 플란츠가 고개를 돌려 맞은편의 체이스를 쳐다봤다. 칼리안이 나갔고 르메인과 란델은 아직 도착하지 않았으니 둥근 원탁에 달랑 둘만 앉아 있게 되었다.

그 시선을 느낀 체이스 역시 플란츠를 향해 고개를 들었다. 그렇게 한참동안 말 없이 서로 쳐다보던 둘이 동시에 입을 열었다.

"이 자리에는."

"플란츠 왕자는."

그리고 함께 입을 다물었다.

곧 체이스가 가볍게 손짓을 보였다. 먼저 이야기 하라는 뜻이었다. 플란츠가 사양하지 않고 입을 열었다.

"이 자리에는 또 무슨 일로 오셨는지."

또 시비였다.

카이리스의 세 왕자 성격들이 천차만별이며 그 중 둘째가 가장 사납다던 세작의 말이 딱 맞는 소리였다.

아무튼 체이스가 하려던 말은 플란츠의 질문에 대한 답도 될 수 있을 것 같았다. 때문에 체이스는 본래 하려던 이야기를 그냥 다시 꺼냈다.

"플란츠 왕자는 내가 굉장히 마음에 안 드나 봅니다."

체이스가 부드러운 표정을 지었고 플란츠의 한 쪽 입꼬리가 올라갔다. 어차피 주변이 소란스러워 서로에게만 말이 들리고 있었으니 딱히 말을 숨길 것도 없었다.

"그보다는 의문이 생겨서 그렇습니다."

"무슨 의문을 가졌기에 나를 마주할 때마다 그리 불편해 하는지."

"굳이 세자께서 여기까지 직접 오실 일이 무엇일까. 정말 마나실 백작을 보러 온 것은 맞을까 하는 의문."

앨런 마나실을 만나기 위해 왔다지만 정작 체이스는 오늘 아침 아주 잠시동안 앨런을 만났을 뿐이었다. 보름이나 체류하겠다 했다면 그만큼 확인해야 할 것이 많다는 소리임에도 만남이 너무 짧았던 것이다.

"맞습니다. 명목상의 일이 아니겠습니까."

작게 웃던 체이스가 의외로 선선하게 플란츠의 말을 인정해버린 뒤 말을 이었다.

"만날 이는 따로 있었고, 잘 만났습니다."

그것이 어쩐지 칼리안에 대한 이야기인 것 같다고 플란츠는 괜스레 그런 생각을 하게 되었다.

혹시 어쩌면 체이스도 칼리안과 마찬가지로 남다른 기억을 가지고 있는 것은 아닐까 하는 생각도 함께 들었다.

때문에 플란츠가 살짝 찌푸린 눈으로 체이스를 쳐다보는데 잠시 주위를 둘러보던 체이스가 플란츠를 향해 입을 열었다.

"그건 그렇고. 최근 플란츠 왕자께서 발칸의 육성에 꽤 열의를 보이신다 들었습니다."

카이리스에 대해 모르는 것이 없다.

플란츠가 또 다른 의미의 불쾌감을 담아 대답했다.

"세크리티아에 흘러가는 카이리스의 정보가 그 정도로 많을 줄은 생각지 못했습니다."

"어쩔 수가 없군요. 전하께서 새 키우는 것을 워낙 좋아하셔서."

별 일 아니라는 듯 가볍게 대꾸한 체이스가 꽤 의미심장한 얼굴로 아까 꺼냈던 이야기를 다시 언급했다.

"그렇게 열의를 가진 발칸은 플란츠 왕자의 힘입니까."

그 말을 듣자마자 플란츠의 표정이 잠시 굳었다.

타국의 왕세자와 플란츠가 편히 나눌 주제의 말이 아니었다.

"그런 것을 왜······."

그렇게 입을 떼던 플란츠가 눈을 가늘게 떴다.

그리고 한동안 말 없이 체이스를 노려보았다.

플란츠의 입에서 본래 하려던 말이 아닌 새로운 말이 나왔다.

"내가 뭔 짓을 하긴 했군. 당신은 그걸 알고."

말투도 호칭도 모두 바뀌었다.

설마 칼리안이 제 과거를 누구에게 말했을까.

체이스는 이렇게 생각을 했었기 때문에 그런 플란츠의 반응을 보며 조금 놀란 얼굴로 말했다.

"아무것도 모르는 줄 알았는데 아니었나 봅니다."

아마 칼리안이 얼마나 많은 곳에 얼마나 많은 것들을 들키고 다녔는지 안다면 체이스는 이렇게 여유롭지 못했을지도 모른다. 아무튼 아직까지는 여유를 잃지 않았다.

어찌됐건 플란츠는 자신이 무슨 짓을 했는지에 대해 체이스에게 더 묻지 않았다. 궁금했다면 이미 칼리안에게 물어봤을 것이다. 세렌티가 찾아와서 미래를 알려주겠다 해도 싫어할 마당에 뭐하러 되돌아온 시간의 일을 알려 하겠는가.

바로 전날과 마찬가지로 체이스의 눈을 응시한 플란츠가 한 글자 한 글자 힘을 주어 말했다.

"발칸은 내 동생의 것이니. 걱정할 필요 없다."

"꼭, 그래야 할 겁니다. 플란츠 왕자."

체이스가 부드러운 얼굴로 대답했다.

* * *

'전하께서 체르밀 궁으로 돌아가 휴식하라 하셨습니다.'

라울은 이렇게 말했다.

그래서 칼리안은 굉장히 허탈해졌다.

기껏 마음 먹고 체이스를 대하고 있었는데 굳이 불러내서는 방에 가서 쉬란다. 무엇을 걱정해서 그랬는지 모르지는 않았지만 맥이 빠지는 것은 어쩔 수가 없었다.

연회장 안에서 두 형님들이 어떤 기싸움을 벌이는지 알았다면 르메인에게 큰 감사함을 느끼며 잘 도망쳤을 테지만, 몰랐으니까.

아무튼 칼리안은 그냥 걸어서 체르밀까지 가기로 했다.

"세크리티아의 왕세자께서 알고 계시는 것에 대해 미리 말씀드리지 못해 죄송합니다."

"네 잘못 아니야. 걱정하지 마."

이렇게 말하며 주변을 잠시 둘러보던 칼리안이 큰 숨을 한 번 내쉰 뒤 다시 입을 열었다.

"아무튼 전하께서 좋은 명분을 주셨으니,"

오후 내내 쉴 수 있을 시간이 생겼으니 같이 수련장이나 가자고. 칼리안은 그렇게 말하려 했다.

그러다 문득 무언가가 생각나게 된 칼리안이 우뚝 발을 멈췄다.

- 명분.

"명분이라······ 그렇지. 명분이 없던 것을 이상하게 생각하고 있었지, 내가."

"그것이 무슨 말씀이십니까."

"아. 오늘 란델 형님께서 갑자기 산책을 하자시더니 의뭉스러운 말씀을 하셨는데. 무슨 소리였는지 조금 알겠어서."

칼리안과 란델의 대화는 키리에 역시 잘 들었다. 다만 지금 칼리안이 한 이야기와 둘이 나눈 대화의 연관성을 찾지 못해 조용히 입을 다물었다.

"네가 봤다는 서른 명의 신관. 텐실에서 미안하고 고맙다는 명분으로 보냈다는데 그렇다기에는 너무 많거든. 그게 이상해서 내가 그 일을 좀 궁금하게 여기고 있었는데 갑자기 란델 형님이 브리센 변경백을 부르질 않나, 브리센 자작의 행방을 묻질 않나."

키리에가 고개를 끄덕였다.

지금 칼리안이 언급한 것 까지는 키리에도 알고 있던 내용이었다.

"브리센 변경백에 이어 브리센 자작을 내 앞에 꺼내두면 내가 알아서 아이샤 전 왕비를 떠올리고 그 쪽으로 관심을 돌리리라는 것을 알고 계셨던 것 같아서."

"신관들 쪽에서 시선을 돌리게 하려고 왕자님께서 예민하게 여기시는 부분을 언급했다는 말씀이십니까."

"응. 아이샤 전 왕비가 브리센에 의해 죽은 것도 알고 계셨고."

만약 아이샤의 죽음이 브리센의 짓임을 란델이 알고 있었다면, 아이샤의 죽음을 떠오르게 할 만한 말로 칼리안의 시선을 레넌에게로 붙들어두려 했을 수 있다.

"내가 실리케의 시선을 돌려놓으려고 썼던 방법을 이번에는 란델 형님이 나에게 건네주신 듯하네. 그런 이유라도 있지 않고서야 이런 바쁜 와중에 갑자기 나를 불러내서는 뜬금없이 브리센 자작의 행방을 물을 사람도 아니고."

그러니 레넌은 그냥 미끼인 것이다.

"산책이나 하자시더니."

먼 곳에 보이는 장미 정원을 물끄러미 쳐다보던 칼리안이 길게 웃었다.

언젠가 란델의 마음 속을 들여다 보았던 그 때와 똑같은 웃음이었다.

"산책 좋아하시네."

제20장. 이번에는 (3)

쪽지 든 손을 늘어뜨린 칼리안이 조소했다.

"감사를 드려야 하나."

체이스가 베른을 기억하고 있었음을 알게 되었다. 그럼에도 '참 좋다'는 말밖에 하지 못했다.

찰나의 시간조차 무너질 수 없었다.

지금 칼리안을 끊임없이 쫓아다니는 이가 있지 않은가. 마치 체이스에 대한 상념과 과거의 일에 얽매여 허우적거리지 못하도록 붙들어두는 것처럼.

때문에 칼리안은 이 상황이 마치 자신을 향해 걸어오는 란델의 말 같다는 생각을 했다.

지금 너는 카이리스의 3왕자라고.

태평하게 형님 하나만 지키면 될 왕제 베른이 아니니 정신 똑바로 차리라고.

그렇지 않으면 내 손에 당장 밀려나게 될 것이라고.

"마음 앓는 것도 하지 말라며 이리 마음을 써주시니······ 깊은 관심에 그저 감사할 따름입니다."

그리하여 칼리안은 들을 이 없을 자신의 빈 방에다 대고 한숨과 비아냥이 섞인 감사인사를 건넸다. 그 후 방 한가운데 우두커니 선 채로 한참을 보낸 뒤에야 체이스에 대한 감정을 조금 더 미뤄둘 수 있게 되었다.

그렇게 온전한 모습으로 간신히 돌아온 칼리안이 제 손에 들린 쪽지를 다시 한 번 읽었다.

- 카이리시스에 입성한 신관 중 '말콤 체티쉬' 없음.

방으로 돌아오니 멜피르 폴룬이 전해온 마법 서적이 도착해 있었다. 칼리안이 주문하지 않은 것이었다. 돌려보내는 대신 익숙한 손놀림으로 두 번째 책을 펼치니 에우리아의 쪽지가 숨겨져 있었다.

그것은 에우리아가 멜피르를 통해 칼리안에게 전달할 내용이 있을 때 사용하는 방법이었다.

굳이 그렇게 할 필요 없이 그냥 사람을 보내 알려줘도 된다 일렀는데 에우리아는 어느새 정보원 노릇에 꽤 심취한 모양이었다. 덕분에 칼리안의 책장에 의미 모를 마법 서적만 잔뜩 쌓여갔다.

아무튼 쪽지의 내용은 전날 칼리안이 에우리아에게 알아봐달라 부탁한 것에 대한 답이었다.

라트란 영지에서 칼리안이 구해 주었던 그리고 그레이 브리센 변경백의 단전을 회복 불가한 상태로 만들어버린 바로 그 신관에 대한 내용인 것이다. 아무래도 신관 중 안면이 있는 이는 말콤 뿐이었기 때문에 한번 만나보고자 했는데 이번 사절단 일행에 그가 없다고 했다.

그런데 텐실에서는 돌려받았던 신관을 포함한 서른 명의 신관을 보낸다 했었다. 분명 그렇게 말했다.

칼리안이 소파에 앉으며 혼잣말처럼 중얼거렸다.

"말이 좀 다른데. 말콤을 뺀 나머지 신관들은 모두 들어온건지 아닌지도 모르겠고."

곧 칼리안은 고개를 삐딱하게 기울인 채 무릎을 톡톡 두드리며 생각에 빠져들었다.

그렇게 어느 정도 시간이 흘렀을 때 얀이 들어와서는 말린 딸기와 민트를 함께 우린 차 한 잔을 내려놓았다. 그리고 칼리안의 얼굴을 잠시 쳐다보다 입을 열었다.

"마나실 백작이 연회장에 오지 않았던데 불러다 드릴까요? 하루종일 고민이 많아 보이셔서요."

얀의 앞에서는 따로 표정 관리를 하지 않았으니, 얀은 무슨 일인지 묻지도 못하고 이틀 내내 걱정만 했을 터였다.

생각해보니 '밖'에 있을 때는 대체로 얀과 상의를 했는데 성인식을 마치고 왕궁에 다시 들어온 뒤에는 얀에게 말해준 것들이 별로 없었다. 그것이 어쩌면 서운했을 수도 있겠다 하는 생각에 칼리안이 맞은편 자리를 가리켜 보였다.

"얀. 잠깐 앉아봐. 얘기해줄게."

얀이 화색을 띠며 그 앞에 앉았다.

"내 말 좀 들어봐."

"네, 왕자님."

"텐실에서 서른 명의 신관을 보냈어. 아마 란델 형님이 얽힌 것 같아."

목적이 있을텐데 일단 명분은 따로 있어. 란델 형님이 그레이도 부르신 것 같지만 그레이는 네 아버지 눈치 보느라 못 오고 있어. 그리고 란델 형님이 오늘 갑자기 나에게 레넌 브리센 자작의 행방을 물었어.

아무래도 란델 형님이 지금 꾸미고 있는 제일 중요한 일은 신관들과 관련이 있는 것 같아. 나한테 브리센 자작 위치를 알려달라고 한 게 너무 이상하잖아. 그것도 이런 날에.

그래서 내 생각은 이래.

사실 란델 형님이 처음에는 그레이 브리센 변경백을 불러서 내 시선을 돌려놓으려고 했던거지. 그런데 변경백이 못 오게 되니 급하게 다른 미끼를 던진거야.

내가 신관들에게 신경 쓰지 않게 하려고.

"그래서 내 질문은 그거야. 신관들은 왜 왔을까."

얀이 물끄러미 칼리안을 쳐다보다 말했다.

"······ 음."

새끼 코끼리.

이해 못한 것 같다.

사실 특별한 대답을 기대한 것이 아니었으므로 칼리안이 작게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어차피 이것은 칼리안의 일이니까.

그런데 가만히 앉은 채 칼리안을 계속 보고 있던 얀이 말했다.

"서른 명이나 보낼 수가 없는데요."

얀은 이해하지 못한 것이 아니었다.

게다가 얀의 대답은 보다 근본적인 것에 닿아 있었다.

"보낼 수가 없다니?"

"이번 봄에 카이리스에도 병이 돌았었잖습니까?"

방금 그 말은 칼리안도 익히 잘 아는 사실이었다. 칼리안을 따르던 기사 가문 중 한 곳이 전염병 피해를 입었다 해서 칼리안이 꽤 많은 지원금을 보내지 않았던가.

그런 생각을 하던 칼리안이 고개를 살짝 들었다.

머릿속에 퍼뜩 떠오른 것이 생긴 탓이었다.

칼리안이 비로소 조금 펴진 얼굴로 혼잣말처럼 입을 열었다.

"수해가 있었으면 당연히 병이 돌았을 텐데."

젖은 음식은 썩는다.

젖은 지붕도 젖은 나무 벽도 곰팡이가 슬고 결국은 썩는다.

날은 점점 따뜻해지고 모든 환경이 썩어가는 상황에서 생긴 전염병은 쉬이 가라앉지도 않는다. 멀쩡한 상태에서도 날이 풀리니 전염병이 돌았는데 왕국 전체가 물에 잠긴 뒤라면 말할 것도 없다.

"신관이 꼭 필요할 텐데 신관을 보낸다. 안그래도 신물이 부족하다며 어려움을 겪던 나라에서, 그것도 서른 명이나······ 제 나라 사람들이 죽어가는데 옆나라 왕의 생일을 축하한다며 서른 명이나 되는 신관을 보내는 것은 정말로 미치지 않고서는 하지 못할 짓인데."

"네. 그렇죠."

"내가 그걸 왜 가늠하지 못했을까."

이번에는 칼리안의 생각이 짧았다.

"진짜 신관이 아닐 수 있겠구나."

전부 혹은 눈속임을 위한 일부를 제외한 이들이 가짜 신관이라면 말콤이 없는 것도 이해가 되었다.

"그럼 가짜 신관들은 왜 보냈을까?"

평생 똑똑할 것을 모아서 지금 쓴 듯한 얀을 향해 칼리안이 다시 물었다. 그러자 얀은 왜 그런 것을 자신에게 묻고 있느냐는 듯한 얼굴을 하며 대답했다.

"저도 모르죠."

"아······ 그렇겠구나."

평생 똑똑할 것 모아서 방금 다 썼지 참.

* * *

칼리안에게 호밀쿠키를 선물했던 아이즌 에이프린은 백작이기는 했으나 사실 많은 이들에게 알려져 있지 않은 이였다. 사실 브리센 후작가와 손 잡지 않은 기사 가문의 가주들은 대부분 그랬다.

'이를 어찌해야 하나.'

때문에 아이즌은 지금 다소 난처한 얼굴로 주변을 두리번거리고 있었다. 지방 귀족의 티 타임에 참석을 하기는 했으나 주변에 친분 있는 귀족이 없었기 때문이다.

물론 티 타임이 진행되는 동안 대화 나눌 상대가 없어서 난처해 한 것은 아니었다. 지금 아이즌이 알고자 하는 것에 대해 물어볼 만한 이가 없어서였다.

- 누구 혹시 3왕자님 왜 안 오시는지 아는 사람?

이런 질문 말이다.

처음에는 조금 늦나보다 했다.

그런데 나머지 두 왕자와 국왕 르메인까지 입장을 했음에도 칼리안이 오지 않으니 당황스러운 마음이 컸다. 르메인이 간간히 칼리안에 대한 칭찬을 하는 것을 보아 르메인의 눈 밖에 나는 등의 좋지 않은 일 때문에 오지 못한 것도 아닌 듯 했다.

그러니 칼리안에게 혹시라도 무슨 일이 생긴 것은 아닌지 괜한 걱정이 되었다.

그렇게 계속 문을 흘끔거리며 티 타임을 마치고 나가려는데 한 시종이 다가왔다. 그러더니 스쳐가는 걸음으로 아주 짧은 말을 전하고는 곧바로 멀어졌다.

"가장 마지막에 나오십시오."

아이즌은 그 말을 듣기가 무섭게 구두 끈을 풀었다.

저 시종의 말은 칼리안의 전언일 것이 분명했으니까.

함께 온 하인이 풀린 구두 끈을 얼른 묶어주려 했으나 아이즌은 그것을 거절한 채 먼저 연회장 밖으로 나가라 말했다.

그렇게 허리를 숙인 채 구두 끈 묶기에 열중하고 있을 즈음.

뚜벅뚜벅 하는 발소리와 함께 누군가의 목소리가 이어졌다.

"뭐야."

아이즌의 고개가 움찔했다.

하늘 아래 홀로 고고하다 말하는 것 같은 저 낮은 목소리.

칼리안의 것이 아니었다.

아이즌이 깜짝 놀라 자리에서 일어섰다. 들은대로 당장 죽어도 여한 없다는 듯한 표정의 플란츠가 앞에 서 있었다.

'하필 플란츠 왕자라니.'

칼리안을 기다리고 있는데 플란츠를 만나게 되었다. 하필이면 저를 살린 칼리안을 배신한 바로 그 2왕자가 아닌가.

칼리안 왕자를 기다리고 있다는 말은 차마 꺼내지 못한 아이즌이 적당한 답을 전했다.

"구두 끈을 묶는 것에 익숙치가 않아서 지체하였습니다, 왕자님."

그 말을 들은 플란츠의 한쪽 입꼬리가 비틀려 올라갔다.

고개도 숙이지 않은 채 시선만 내려 아이즌의 구두를 쳐다본 플란츠가 다시 아이즌의 눈을 직시했다.

"헛소리 말고."

그 모습을 본 아이즌이 다시 조금 더 놀랐다.

싹퉁머리 없는 말버릇 때문이 아니었다. 조금 전까지는 세상 어떤 것에도 미련없다는 듯한 표정을 하고 있더니 어느새 사냥을 앞둔 늑대의 눈이 되어서는 아이즌을 쳐다보고 있던 까닭이다.

플란츠의 목소리가 다시 아이즌의 귀를 파고들었다.

"내 아우님. 왜 찾냐고."

아이즌 역시 아둔한 이는 아니었다.

때문에 아이즌은 그 순간 몇 가지를 깨달을 수 있었다.

조금 전 시종이 전달한 말은 칼리안이 아니라 플란츠의 전언이라는 것. 그리고 지금 자신이 칼리안을 찾고 있었음을 플란츠가 정확히 눈치챘다는 것.

또 어쩌면.

칼리안과 플란츠가 적대 관계가 아닐지도 모르겠다는 것도.

아무튼 생각에 깊이 잠긴 아이즌이 계속 말을 삼가고 있자 플란츠는 다시 나른한 얼굴이 되어 말했다.

"안 믿네. 나를."

플란츠 왕자는 머리 꼬리 없이 말하는 것이 주특기라더니 딱 맞는 소리였다.

지금 플란츠는 칼리안을 찾는 것을 어떻게 알았는지도 설명해주지 않고 칼리안과 사실은 무슨 관계인지도 말해주지 않고 그저 칼리안을 왜 찾는지만 묻더니 자신을 믿지 않는다며 질책을 한 것이다.

세상에 이런 고약한 언변이 또 어디에 있단 말인가?

온화한 카리스마를 지닌 칼리안과는 영 딴판인 플란츠와의 대면에 채 적응도 하지 못했는데 플란츠는 기다리지도 않고 계속 말을 꺼냈다.

"발칸에 싸움 좋아하는 정신 나간 마법사가 하나 있는데, 내일 쯤 그대와 한번 겨뤄봐도 좋겠군."

그리고는 더 볼 일 없다는 듯 연회장 문을 향해 발을 옮기며 마지막 말을 남겼다.

"하필 내 아우님이 내일 구경을 오겠다 했으니."

본래 내일은 사신들과 함께 하는 일정이 있었다.

그러니 그 일정에 칼리안이 참석할 리 없었다. 체이스와 함께 다니는 기사 테일란을 의식한 르메인이 분명 칼리안의 동석을 제외시킬테니까.

그러니 그때 칼리안과 아이즌이 만나면 될 것 같다는 생각을 한 플란츠가 이렇게 자리를 마련해 준 것이었다.

그제야 플란츠의 의도를 제대로 파악한 아이즌이 걸어나가는 2왕자를 향해 고개 숙여 인사를 보였다.

"정말 감사합니다, 플란츠 왕자님."

물론 플란츠는 그런 것에 화답할 성격이 아니었다.

* * *

석찬까지는 아주 잠시간의 시간이 있었다.

때문에 플란츠는 피곤해진 얼굴로 체르밀 궁에 돌아왔다.

내일 이후의 일정에 대한 시종들의 회의가 있다기에 플란츠는 레릭을 보내고 방으로 오게 된 터였다. 그리고 방문 앞을 서성이는 은발의 시녀를 보았다.

발소리를 듣고 고개를 돌린 히나가 플란츠를 향해 허리를 숙여 인사했다.

그것을 본 플란츠가 짧은 한숨을 쉬었다.

아마도 또 들어간 모양이었다.

'나는 칼리안 왕자님의 고양이입니다.'

고양이가 플란츠의 방에.

고양이는 자랐고 문틈은 늘어나지 않았는데 놈은 여전히 자유자재로 드나들고 있었다. 참으로 신기한 족속이 아닌가.

"또 왔나."

- 죄송합니다.

"뭐가."

고양이가 드나드는 것을 어찌하겠는가.

때문에 대충 대꾸하고 넘긴 플란츠가 방문을 열었다.

- 쾅!

그리고 그냥 닫았다.

안에 뭔가 있었다.

히나가 어리둥절한 얼굴로 쳐다봤고 플란츠는 잠시 이 곳이 4층이 맞는지를 확인했다. 그리고는 히나를 보며 말했다.

"두고 가. 고양이."

왕궁의 일이 바빴던 터라서 고양이를 맡아주겠다 하니 감사할 일이었다. 때문에 히나는 웃으며 다시 인사를 했다.

- 네. 감사합니다, 좋은, 왕자님.

여전히 저 '좋은' 이라는 단어를 배우지 못한 플란츠였다. 도통 알려주질 않는 것이다.

이번에도 가르쳐 줄 생각은 없었던 히나는 얼른 인사하고 뒤돌아 갔다.

그 모습을 잠시 보던 플란츠가 방으로 들어섰다.

그리고 살짝 인상을 찌푸리며 입을 열었다.

"나는 여기가."

방 안의 소파 위에는 '나는 칼리안 왕자님의 고양이입니다.' 고양이가 있었다. 그리고 소파와 고양이 사이에 칼리안이 있었다.

"······ 내 방인 줄 알았는데."

보통 어떤 방에 고양이와 고양이 주인이 있으면 그 방은 고양이 주인의 방이 아니던가?

주인도 없는 방에 멋대로 들어온 한 명과 한 마리를 보며 플란츠가 짜증 섞인 소리를 냈고 칼리안이 씩 웃었다.

그리고는 멀리 환하게 불을 밝힌 그리하여 석양 아래 홀로 빛나는 보석 같은 지그프리드 관을 가리켜보이며 뜬금 없는 말을 꺼냈다.

"오늘 석찬에 저와 함께 드시죠."

두 왕자가 다시 손을 잡았음을 알리자는 소리가 아닌가.

"내 아우님께서 또 무슨 일을 꾸미시는지."

"별 것은 아닙니다. 아무래도 란델 형님께서 서른 명이나 되는 가짜 신관을 보내주시려는 것 같아서요."

서른 명의 신관에 대해 칼리안이 신경쓰지 못하도록 란델이 얕은 수를 썼으니 칼리안도 똑같이 되갚아 줄 생각이었다.

"그런데 제가 어디 휘둘리는 건 질색이라 그럽니다."

서른 명이나 되는 가짜 신관으로 뭘 꾸몄든 상관 없다.

칼리안과 플란츠의 동맹에 신경이 쓰여서 제대로 추진하지 못하게 만들어 줄 테니까.

제20장. 이번에는 (4)

찬란히도 아름다운 지그프리드 관.

대륙에서 가장 화려하다 칭송받는 카이리스 왕궁의 대연회장.

크리스털과 백금이 만들어낸 환상적인 그곳에 귀족들이 모여 갖가지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왕국의 미래를 점쳐보는 말, 자식을 걱정하는 말, 지식을 뽐내기 위한 말, 제 안위를 도모하는 말, 말, 말.

세상이 뒤집혀도 멈추지 않을 것 같은 이런 말들이 만약 거짓말처럼 일순간에 사라진다면 그 이유가 될 만한 것은 단 하나였다.

- 칼리안.

항상 그래왔듯 이목이 집중되는 것이다.

이 셋째 왕자가 오늘은 무엇을 입고 어떤 장신구를 했으며 무슨 행동과 무슨 말을 할지.

그리고 무엇보다, 누구와 함께 있을지.

지금 상황이 딱 그랬다.

지그프리드 관에 모여 있던 모두가 할 말을 잃었다. 아니 말을 잃은 것에서 모자라 하나같이 경악한 얼굴로 연회장의 입구를 쳐다보고 있었다.

검붉은 재킷을 입고 금사로 수를 놓은 검은 망토를 걸친, 실로 인상적인 칼리안의 예복 차림 때문이 아니었다. 보란듯이 다시 착용한 셔츠 핀의 루비 펜던트 때문도 아니었다.

'플란츠 룬 카이리스 왕자님과 칼리안 레인 카이리스 왕자님 입장하십니다.'

둘이 다시 한 편에 선 것이다.

좌중을 압도하며 들어오는 두 왕자를 본 귀족들이 대체 이 상황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지 결정하지 못하고 있을 무렵. 둘을 조용히 바라보던 란델은 그대로 자리에서 일어나 체르밀로 돌아갔다.

그 모습에 귀족들은 다시 저마다의 의견을 조용히 주고 받기 시작했다.

그런데 이런 분위기와는 전혀 상관 없다는 듯, 옹기종기 모여앉아 평화로운 한 때를 보내는 세 명의 사람이 있었다.

"잘 들어보게. 집중하고."

완벽한 침묵에 잠긴 연회장의 한 구석탱이에서 그들 중 한 명이 이렇게 소근거렸다. 바로 남들 눈에 띄지 않을 곳에 일찌감치부터 자리를 잡고 앉아있던 아르센이었다. 그런 아르센의 말이 향한 곳에는 키리에가, 또 그 옆에는 얀이 있었다.

아무튼 무언가를 잘 들어보라는 아르센의 말에 '이런 곳에 쓰라는 귀가 아닌데' 하는 표정이 된 키리에가 고개를 대충 끄덕였다.

곧 칼리안과 플란츠가 자리로 가 앉자 귀족들의 입이 조금씩 열리기 시작했다. 그리고 잠시동안 그 소리를 듣던 키리에가 입을 열었다.

"헤르츠 경."

키리에가 제 이름을 부르자 그것 보라는 표정이 된 아르센이 얀에게 손바닥을 내밀었다. 그러나 키리에의 말은 아직 끝나지 않았다.

"······이 졌습니다."

아르센이 이겨서 이름을 부른 것이 아니라 져서 불렀다는 소리다. 순식간에 표정을 바꿔 단 얀이 반대로 아르센에게 손을 내밀었다.

"그것 봐요. 우리 왕자님한테 아무도 그런 말 못한다니까요."

쉽게 말해 지금 둘은 내기를 했다.

칼리안의 어머니를 독살하고 칼리안도 살해하려 한 실리케. 실리케를 죽음으로 몰아넣은 칼리안. 칼리안을 향한 실리케의 칼을 대신 맞은 플란츠. 죽어가는 플란츠를 살려낸 칼리안.

도대체 이것이, 무슨 관계인가.

아무튼 그런 일을 겪으면서 실리케가 물러난 뒤, 칼리안이 플란츠를 도우며 동맹을 맺었다. 그리고 잘 알려진대로 플란츠가 칼리안의 뒤통수를 후려치면서 멀어졌다. 그런데 오늘 또 다시 사이 좋게 입장을 했다.

그랬으니 내막을 모를 귀족들이 이런 결정을 내린 칼리안을 보며 무슨 평가를 할까.

이것을 두고 얀과 아르센의 의견이 갈려 돈을 건 것이다.

귀족들 사이에서 가장 처음으로 나올 말이 무엇일지를.

"우리 왕자님을 호구라고 부를 간 큰 사람이 어디 있습니까?"

내기에서 이긴 얀이 이렇게 의기양양하게 말했다.

그러자 어딘가 억울하다는 표정이 된 아르센이 그럴 리가 없다는 눈으로 키리에를 보며 물었다.

"정말로 왕자님께서 배포가 크시다 했다는 말인가?"

얀은 귀족들이 칼리안의 배포를 칭찬하리라 했고 아르센은 이 대륙에 칼리안만한 호구가 없다 할 것이라 했다. 배신하고 돌아선 형을 다시 받아 준 꼴이니 분명 그리 말할 것이라고.

헌데 틀렸단다.

아르센은 내기에서 지기는 했으나 꽤 기꺼운 얼굴이 되었다.

"그래도 아주 잘 된 일이네."

그것이 칼리안의 능력에 대한 인정이든, 혹은 두려움이든.

이유야 어찌됐건 이제 공적인 자리에서 칼리안을 욕하는 이들이 사라질 정도의 위치에는 올랐다는 소리였으니까.

그것은 그저 인기가 좋은 것과는 차원을 달리하는 궤도였다.

"평생 모실 왕자님께서 그렇게나 인정을 받고 계신다 하니 기분이 좋군. 나는 이 좋은 기분에 왕자님을 위해 조금이라도 더 일을 해야겠네."

그렇게나 좋은 기분으로 이렇게 말하며 싱긋 웃은 아르센이 자리에서 일어나 밖으로 나갔다.

내기로 걸었던 은화 다섯 개를 주지 않은 채였다.

* * *

아들들이 하나같이 똑똑했다.

처세에 능할 뿐 아니라 정치적인 행동도 곧잘 했다.

일반적인 부모라면야 당연히 환영할 일이겠으나 르메인에게는 양날의 검과 같이 느껴졌다.

- 탁.

르메인이 앞에 놓인 술잔을 들어 반을 마시고 내려놨다.

본래 르메인의 테이블에는 슬레이만과 에반 브리센 후작, 그리고 앨런이 함께 앉기로 되어 있었다. 그런데 슬레이만은 그냥 안왔고 에반은 슬레이만이 보기 싫어서 안 왔다.

물론 슬레이만과 에반은 불참을 미리 알렸다.

때문에 르메인은 빈 자리에 누굴 채울지 생각해보다가 그냥 비워두라 일렀었다. 둘이 안오더라도 자리를 채울 만한 한 명이 있었으니까.

그러니 지금 르메인이 혼자 앉아 궁상을 떨고 있는 이유는 멋대로 안오고 있는 앨런 때문이다.

그러다보니 쓸데 없는 생각이 자꾸 머릿속을 헤집고 있었다.

- 오늘 연회장에 플란츠 왕자님과 칼리안 왕자님께서 함께 들어왔다 합니다.

조금 전 연회장에 도착한 르메인은 시종장 라울로부터 이런 소식을 전해듣게 되었다.

그 말을 들은 르메인은 미간을 살짝 찌푸렸었다.

칼리안과 플란츠가 거짓으로 등을 돌렸던 사실은 알고 있었다. 때문에 이번에 그 반대의 행보를 보인 것이 란델을 견제할 목적이라는 것 역시 잘 알았다.

둘의 행동이 못마땅해서 인상이 써진 것은 아니었다.

'과연 란델이 순순히 물러나겠는가.'

이런 생각이 떠올랐던 탓이다.

당연하겠지만 르메인은 세 아들을 모두 아꼈다.

하지만 왕의 자리를 물려주는 것은 사랑하는 마음과는 별개의 잣대로 정해야 할 일이었다.

그러므로 란델은 아니었다.

죽어가는 플란츠를 그대로 버려두고 빌헬름 관에서 나왔던 그 날. 란델은 르메인이 생각하는 왕의 재목이 아님을 스스로 증명한 것이나 다름 없었다. 르메인은 왕이 되지 못할 나머지 두 아들이 탑에 갇히는 것을 원치 않았으니까.

그런 란델이 혹시라도 벌써부터 다른 둘에게 해코지를 하는 것은 아닌지 하는 걱정도 되고 그렇다고 나서서 세자위를 내릴 수도 없으니, 아버지이면서 동시에 왕이어야 할 르메인은 애가 탈 밖에.

아무튼 그런 이유로 잠시 혼자 앉아 있으려니 온갖 상념이 계속 머리를 들이밀었다. 때문에 조금 어두운 얼굴로 짧은 한숨을 쉴 때.

- 드르륵!

르메인 곁으로 누군가 걸어와 털썩 하고 앉았다.

"왕자님들 저리 구는 것이 하루 이틀도 아닌데, 매번 그렇게 오늘 내일 할 상으로 계실 겁니까?"

앨런 마나실의 것으로 배정된 자리였으므로 앉은 이도 당연히 앨런이었다. 사실 자리가 아니었어도 저런 말을 꺼낼 수 있는 이는 앨런밖에 없었다.

낮에 그렇게 화를 내고 나갔던 앨런이었으나, 화를 낸 사람도 화를 일으킨 사람도 그런 것에 오래 신경을 두는 편이 아니었다. 때문에 르메인은 낮의 일에 대해 언급하는 대신 그냥 자연스러운 대답을 꺼내놓았다.

"그것이 어디 내 마음대로 되는 것이어야지."

"뱀 같은 데블란 밑에서 어떻게 체이스 세자가 났는지를 궁금해 할 일이 아니었습니다. 걱정 많고 둔하고 생각도 짧은데 손까지 많이 가는 분 밑에서 저런 아들들이 어떻게 났는지 그것부터가 난제 아닙니까."

그 말에 피식 웃은 르메인이 고개를 끄덕였다.

"내가 생각해도 그것이 참 신기해지고 있는 참이네."

"그런데."

왕자들의 일에 신경쓰지 말라는 말은 이미 여러 번 한 앨런이었으므로 그에 대해 더이상 언급하지 않고 다른 화제를 꺼내들었다.

"체이스 세자가 이 곳에 오는 길에 이상한 것을 보았다 하더군요."

"이상한 것이라니."

르메인의 질문에 앨런이 물을 한 잔 쭉 들이키고는 입을 열었다.

"텐실의 신관 서른 명을 보았다는데 혹시 그것도 전하께서 허락하신 일입니까?"

어쩐지 또 한 소리 들을 듯한 기분이 무럭무럭 들었으나 그리 한 것을 두고 안 했다 할 수도 없을 일이었다.

때문에 르메인이 조용히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했다.

"그랬지. 내가 허락했네. 얼마전에 칼리안도 그것을 묻더니 백작도 묻는군."

칼리안이 이미 그 일을 아는 줄은 몰랐으므로 앨런이 잠시 고개를 주억거렸다. 갑자기 칼리안과 플란츠가 함께 연회장에 들어온 이유를 알 것 같아서였다.

"체이스 세자의 말로는 그들이 아마도 가짜 신관일 것이라 했습니다. 전하께 직접 이야기하자니 이 나라에 참견을 하는 것으로 여기실까 우려된다며 그리 말하더군요."

앨런의 말대로였다.

카이리시스로 오는 길에 서른 명의 신관을 보았을 때 곧바로 그들이 가짜임을 파악한 체이스였다.

다만 이것을 국왕에게 직접 전하기에는 자신의 위치가 애매하여 앨런에게 전해달라 했던 터였다.

"이것을 칼리안 왕자님도 알고 있었다면 전하의 두 아드님이 갑자기 함께 나타난 것도 그 일과 관련이 있지 않겠습니까."

"······ 알겠네. 나도 한번 알아보도록 하지."

그렇게 대답한 르메인이 란델의 빈 자리를 한참동안 쳐다봤다.

* * *

석찬이 끝나고 지그프리드 관에도 불이 꺼졌다.

그렇게 밤이 가고 다음 날이 되었다.

플란츠가 생각한대로 르메인은 이번 해에도 사신들과의 일정에 왕자들을 동석시키지 않았다.

작년에는 술 마시는 플란츠 때문에, 그리고 올해에는 오러를 숨겨야 하는 칼리안 때문에.

체이스가 이미 내용을 알고 있으니 칼리안이 앞에 나서도 무관했으나 그것을 르메인에게 알릴 수가 없었다. 그래서 칼리안은 얌전히 르메인의 결정에 따랐다.

'아우님을 찾는 놈이 하나 있던데.'

그리고 플란츠가 친절하게 잡아 준 약속에 따라 빌헬름 관에 마련된 아르센의 집무실을 찾았다.

문을 열고 들어가니 참으로 오랜만에 보는 얼굴이 있었다. 아이즌 에이프린 백작이었다.

꽤 오랫동안 칼리안을 기다리고 있었는지 아이즌은 칼리안을 보자마자 아주 반색하며 예를 올렸다.

"칼리안 왕자님을 뵙습니다."

사실 전날의 석찬에서도 칼리안을 보았으나 사람들이 많은 곳이었기 때문에 인사조차 제대로 하지 못한 터였다.

가볍게 고개를 끄덕이며 화답한 칼리안이 아이즌을 보며 물었다.

"나를 만나고자 청했다 들었습니다."

플란츠였다면 분명 '뭔데' 혹은 '뭐야' 정도로 말을 했으리라. 때문에 아이즌은 이렇게 건네오는 칼리안의 말에 매우 큰 감사함을 느꼈다.

"네, 왕자님. 돌려드릴 것이 있어 이렇게 뵙고자 하였습니다."

그렇게 말한 아이즌이 내민 것은 지난 번에 칼리안이 지급했던 금액의 남은 돈이었다. 그것을 본 칼리안이 허탈한 듯 웃으며 물었다.

"이것을 돌려주려 온 겁니까. 굳이 돈을 돌려주고자 했다면 에우리아를 통해서도 충분했을 일인데요."

"네, 왕자님. 한 가지 드릴 말씀이 더 있습니다."

곧 아이즌이 고개를 들어 말을 이었다.

"이제 어느 정도 준비가 된 것 같습니다. 그것은 아무래도 직접 말씀을 드리는 것이 좋을 것 같았습니다."

"기사들의 준비가 벌써 끝났습니까."

"네. 왕궁의 기사단을 대체할 정도로는 충분할겁니다."

기사단 카렌과 라온을 대체할 만큼의 수.

물론 칼리안이 최종적으로 목표한 것은 그보다 훨씬 많은 수의 기사들이었다. 다만 지금 아이즌이 말한 수의 기사들이라 하더라도 상당히 빠른 성과라 할 수 있었다.

"알겠습니다. 당장은 다른 문제가 있어서 곧바로 부르기는 어렵겠지만. 날이 되면 연락하겠습니다."

"네. 그렇게 하겠습니다."

그렇게 대답한 아이즌이 칼리안에게 예를 보인 뒤 밖으로 나갔다.

그 뒷모습을 보던 칼리안은 잠시 눈을 내리뜬 채 무언가를 가늠해보기 시작했다.

란델과 브리센.

과연 어느 쪽에 먼저 검을 드리우게 될 지를.

제20장. 이번에는 (5)

칼리안은 무릎에 팔꿈치를 댄 채로 턱을 괴고 있었다.

턱을 괴지 않은 손의 긴 손가락 끝이 테이블을 두드렸다.

- 톡 톡 톡.

아르센의 집무실은 참 단출했다.

그 흔한 그림 하나 화분 하나 없었다. 책상과 의자 그리고 소파와 테이블이 전부였다. 그런 것에 비해 집무실 크기는 또 상당히 큰 편이라 작게 말하는 소리도 꽤 크게 울리는 곳이었다.

덕분에 테이블을 두드리는 소리의 끝에도 작은 울림이 있었으나 칼리안은 그리 신경쓰지 않았다. 아무도 없었기 때문이다.

지금 칼리안은 아르센을 기다리는 중이었다.

기다리면서 란델을 생각하고 있었다.

"뭐가 그리 급하셨는지."

칼리안이 실소하며 이렇게 중얼거렸다.

란델에 대한 생각으로 머릿속이 가득찰 날이 이렇게 빨리 올 것이라고는 생각하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생각해보면 이유를 알기 어려울 일은 아니었다.

그저 칼리안이 그리 중요하게 따져보지 않고 있었을 뿐이었다.

칼리안보다 세 살이 많은 란델은 이제 열 여덟이다. 스무 살이 되기까지 오랜 시간이 남지 않았다. 그러니 그 전에는 결정이 될 터였다.

자리에서 밀려나 카이리시스를 떠나야 할지.

세자가 되어 왕궁에 계속 있을지.

'혹은 죽게 될지.'

그런 이유로 란델의 움직임에 대해 이해 아닌 이해를 해주기로 한 칼리안이 다시 한번 쓴웃음을 지었다.

- 똑똑.

그 때 집무실 문을 노크하는 소리와 함께 아르센이 돌아왔다. 안으로 들어와 칼리안의 맞은편에 앉는 그의 손에는 두세 장 정도 되어 보이는 서류가 있었다.

"그것이 무엇입니까."

"마나실 군단장님께서 전해드리라 하셨습니다."

아르센이 손에 든 것을 칼리안에게 내밀며 대답했다.

"카이리스로 보내겠다며 텐실에서 전달해 온 신관 명단과, 이전에 카이리스에 머무르던 신관들의 정보입니다."

"스승님이 아니라 전하께서 주신 자료겠군요."

"네, 맞습니다."

두 명단을 양쪽에 두고 살펴볼 필요도 없었다.

기존에 있던 신관들 모두가 지금 오기로 한 신관 명단에 빠짐 없이 포함되어 있었다. 그러니 말콤 체티쉬 역시 이번에 방문하기로 한 신관의 명단에 있었다는 말이다.

"방문자 명단에는 있지만 실제로는 없었다는 건데."

마법사들의 정보 수집 방법은 마법사답지 않게 아주 많이 무식한 면이 있었다. 말콤이라는 신관이 실제로 없다는 것을 확인하기 위해 몇몇 마법사가 그들 주변에 숨어 있었을 것이 뻔했다. 무슨 방법을 썼든 서른 명이 서로를 부르는 것을 하나하나 훔쳐 들었을 터였다. 그렇게 그들 중 누구도 말콤이라 불리지 않는다는 사실을 확인했으리라.

그러니 에우리아의 정보가 더 정확하다.

"하마터면 그냥 넘어갈 뻔했네요."

사실 이상하다는 것만 알아차리지 못했다면 이런 방법을 쓰지도 않았을 터였다.

곧 칼리안이 고개를 들어 다시 아르센을 쳐다봤다. 서류는 앨런이 전해달라 한 것이었고 칼리안이 아르센에게 지시한 것은 따로 있었다. 지금 아르센의 눈 밑이 또 시커멓게 변한 것과 관련이 있는 일이었다.

"내가 확인해달라 부탁한 것은 어떻게 되었습니까."

"네 왕자님. 브리센 후작의 집을 밤새 지켜봤습니다만 특별히 사람이 드나들지는 않았습니다."

칼리안이 플란츠와 손을 잡았으니 란델이 에반에게 손을 뻗지는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다만 석찬이 끝난 뒤 에우리아를 바로 만날 수가 없었던 탓에 급한대로 빌헬름 관에 있던 아르센에게 부탁을 했었다. 그러니 지금 쯤이면 에우리아의 사람들이 후작의 집 근처에 꼭꼭 숨어 드나드는 이들을 체크하고 있을 터였다.

"신관들이 가짜인 것은 확실한데 브리센 후작과 만나는 것 같은 기미는 없고······."

찻잔을 들어 한 모금을 마시며 생각을 정리해 낸 칼리안이 아르센을 보며 다시 말했다.

"전하께 부탁드릴 것이 있다는 말 좀 전해주세요."

"네, 왕자님. 어떻게 전해드리면 되겠습니까?"

"란델 형님이 이 일에 대해 알고 있는 바가 있는지 그것을 물어봐 주셨으면 좋겠다고요."

"지금 말씀이십니까?"

아르센이 의문 가득한 얼굴로 이렇게 물었다.

플란츠와 투닥거리며 지내기 시작한 뒤로 쓸데 없이 정중하던 아르센의 말투가 조금씩 바뀌고 있었다. 아마 예전 같았으면 저 질문은 훨씬 길게 이어졌을 것이다.

생각해보면 베른을 공격했을 당시의 아르센은 반말을 쓰고 있었다. 혹시 그 역시 플란츠와 연관이 있던 것은 아니었을까. 문득 든 그런 생각에 칼리안이 소리 없이 웃었다.

시간을 확인해 본 칼리안이 고개를 끄덕이며 조금 늦은 대답을 전했다.

"아직 특별한 일정이 시작되지 않을 시간이니 전하께서도 충분히 이야기 나누실 수 있을 겁니다."

"죄송합니다. 시간이 아니라, 아직 왕자님께서 란델 왕자님의 의중을 잘 모르시는 상황이기 때문에 여쭤보았습니다. 이 쪽에서 이상함을 느꼈다는 것을 란델 왕자님에게 드러내기에는 너무 이르지 않겠습니까."

"내가 잘못 알아들었네요. 그 신관들 정체 말이군요."

"네, 그렇습니다."

곧 칼리안의 얼굴에 플란츠를 닮은 웃음이 걸렸다.

란델의 의도를 대충 파악해 두었다는 뜻을 담은 비웃음이었다.

그것을 본 아르센이 질색하는 표정을 했다.

플란츠가 종종 칼리안을 만나더니 애한테 이상한 것을 가르쳐놨다는 생각 때문이었다.

이런 아르센의 속내를 알 리 없을 칼리안이 손가락 세 개를 펼쳤다. 그리고는 그것을 하나씩 접으며 설명했다.

"의외로 진짜 신관일 수도 있고. 세작일 수도 있고. 자객일 수도 있고. 그도 아니면."

거기까지 말한 칼리안이 고개를 가로저으며 아르센에게 말했다.

"셋중 하나일 것이라고 생각하는 것이 속 편하겠네요."

사실 말을 숨긴 네 번째는 조금 억지를 부려 떠올려 본 것이었으니 굳이 아르센에게까지 언급할 필요는 없을 터였다.

"아무튼 그들을 데리고 뭔 짓을 꾸미려는지 내 추측만으로는 범위를 더 좁히기가 어려워서요. 그냥 직접 알려주게 만들려고 합니다."

"또 덫을 놓으시려는 겁니까."

"내가 잘 하는 게 그 쪽이라."

세상에서 제일 재밌는 것이 칼리안이 놓은 덫에 뭐가 걸리는지 보는 것이 아니던가. 때문에 아르센의 눈에 흥미로운 기색이 가득 들어앉았다.

"손자도 잘 맡아 주고 다이아몬드도 사 주고 소금도 보내줬는데. 고마움을 이런 식으로 갚으려는 것을 보고만 있어서야 되겠습니까."

그 말을 들은 아르센이 이상하다는 얼굴을 했다. 칼리안이 언급하는 것은 텐실의 국왕이었다. 란델이 아닌 것이다.

아르센이 불안한 얼굴로 물었다.

"설마 왕자님······ 텐실을 잡으시려는 겁니까."

칼리안이 생글생글 웃으며 대답했다.

"나 전쟁 싫어해요. 그래서 이번에는 되도록 피할 생각이고."

순간 그 말이 아르센에게는 텐실을 못 잡는 것이 아니라 전쟁이 싫어서 안 잡는다는 소리로 들렸다.

하긴. 칼리안이니까.

큰 덫 놓는 일이 조금 복잡할 뿐. 칼리안이 지금 고작 왕자의 위치에 있다 해서 전쟁을 일으키지 못할 것도 없으리라는 생각이 들었다.

아무튼 그런 생각에 빠져있느라 아르센은 칼리안이 말한 '이번에는' 전쟁을 피해 볼 생각이라는 말에 별 의미를 두지 못하고 넘어갔다.

"주제 모르고 자꾸 덤비면 제 핏줄 어찌 될지 생각해보라고. 경고만 해주는거죠."

그렇게 말하는 칼리안의 표정을 본 아르센은 칼리안 따까리나 하면서 평생을 살기로 한 것이 얼마나 잘한 결정이었는지를 잠시 깨달았다.

그렇게 말을 맺은 칼리안이 자리에서 일어섰다.

가야 할 곳과 그 곳에 데려갈 사람이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다 문득 무언가가 생각난 칼리안이 짧게 입을 열었다.

"아차."

"잊으신 것이 있습니까."

문 앞에서 잠시 멈춰 선 칼리안이 다시 몸을 돌려 아르센을 봤다. 그리고 꽤 의미심장한 얼굴로 농담과 우려가 섞인 말을 했다.

"플란츠 형님 검은 부수지 마요. 귀한 거라서."

안그래도 영 부수기 힘들게 생겼기에 어떻게 해야 할지 연구하던 중이었다는 말은 절대 꺼내지 말아야겠다 싶다.

"······ 네."

"그리고."

그런 아르센을 본 칼리안이 씩 웃으며 한 가지 말을 더했다.

"내 새끼 코끼리가 경에게 못 받은 것이 있다고 징징대던데."

······ 에이씨.

아르센이 느릿느릿 돈 주머니를 꺼냈다.

* * *

칼리안은 본래 검은 옷을 좋아했다.

옛 칼리안은 눈에 띄는 것이 싫어서, 그리고 베른은 피가 튀어도 티가 잘 나지 않아서였다.

지금도 칼리안은 그랬다. 검은 옷을 즐겨 입었다.

플란츠는 원래 어땠는지는 기억이 나지 않는다. 원수같은 형님이 무슨 색을 좋아하는지까지 칼리안이 알아야 할 필요가 없었다.

때문에 플란츠가 언젠가부터 갑자기 밝은 옷을 입기 시작했다는 것도 칼리안은 몰랐었다.

그것을 이제 알았다.

정확히는 그 이유를 이제 알았다.

그래서 플란츠의 시종 레릭이 방문을 닫자마자 칼리안의 웃음보가 터졌다. 한참을 웃던 칼리안이 입을 열었다.

"이름표 바꿔드리겠습니다. 제 이름 빼고 형님 것으로."

그리고는 플란츠의 품에 안긴 '나는 칼리안 왕자님의 고양이입니다.' 고양이를 가리켜보였다. 플란츠는 뭐 어쩌라는 것이냐는 표정이 되어 대꾸했다.

"짖지 말고."

아마 플란츠 앞에서 그렇게 소리 내서 웃을 위인도 이런 말에 전혀 신경쓰지 않을 위인도 칼리안 외에는 없을 터였다.

곧 고양이를 내려놓은 플란츠가 칼리안을 보며 물었다.

"또 왜."

왜 또 왔나. 그 잘난 시종들은 어디 두고 직접 와서 웃고 난리냐. 아무튼 처 웃지 말고 왜 왔는지 말하고 빨리 꺼져라. 등등이 함축된 말이었다.

"잠깐 저와 가실 곳이 있습니다."

플란츠가 인상을 찌푸렸다.

석찬에 한 번 같이 갔으면 됐지 또 어디를 가자는 말인가.

"브리센 후작 만나러 갑니다. 말 타고요."

칼리안의 말을 들은 플란츠가 잠시 말 없이 무언가를 생각했다. 그러더니 피식 웃으며 칼리안의 속내를 짚어냈다.

"속이는 건가."

역시 플란츠는 똑똑하다. 칼리안이 웃었다.

"네. 두 왕자가 브리센 후작을 만나러 갑니다. 말 타고 보란듯이 드러내놓고 가면 란델 형님께서도 보시겠죠. 지나치게 뻔한 행동이니까요."

지나치게 뻔한 두 동생의 행동을 보면 란델은 분명 이렇게 생각할 터였다.

- 내 신경을 거슬리게 하기 위해서 일부러 하는 행동이다.

그런 행동들이 일부러 꾸며낸 것임을 깨닫는다면, 전날 석찬에 둘이 함께 왔던 것도 혹시 거짓은 아닐까 하는 의심을 할 터였다. 그런 상황에서 르메인이 란델을 불러 신관에 대해 묻는다.

그리하면 란델은 칼리안이 신관들의 정체에 대해 의심하고 있으며 한편으로 플란츠와는 일부러 손을 잡은 척 연기를 하고 있다 생각을 하게 될 터였다.

"그렇게 해둔 뒤 오늘 밤에 란델 형님의 방에 찾아 갈 생각입니다. 하루종일 저에 대해 아주 많은 생각을 하셨을테니 많은 것을 설명할 필요도 없겠죠. 그냥 한 마디만 드릴까 합니다."

"같이 손잡고 브리센부터 치자고."

"네. 맞습니다. 저와 손을 잡고 브리센부터 같이 건드리자 할까 합니다. 그럼 란델 형님께서 숨기고 계셨던 것에 대해 제가 알아낸 것들은 전부 입을 다물겠다고요."

"······ 거절하진 않으시겠군."

"저도 그렇게 생각합니다."

왜냐하면.

"저를 손 위에 두고 싶어 안달하시는 분이니."

칼리안이 생글생글 웃으며 말을 맺었다.

제20장. 이번에는 (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