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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계 황자는 세상을 구하고 싶다 34화

10장 각성한 자들

그사이 후원자는 바늘을 제스의 팔뚝에 꽂아 넣고 내용물을 빠르게 주입했다.

-윽....

-그러고 보니 이쪽 차원은 신성마법 말고도 영약이란 걸로 몸을 고치더군요. 다만 영약으로 타고난 체질까지 바꾸는 건 힘든 모양입니다.

-그게... 가능했으면 벌써 건강해졌겠지.

-하지만 제가 가져온 약은 다릅니다. 효과도 순식간에 나타날 테니 기대하셔도 좋습니다. 자, 다 됐습니다.

후원자는 바늘을 뽑고 한발 물러났다.

그러자 정말 놀랍게도 두통이 사라졌다.

심지어 항상 맥없이 흐느적거리던 몸에 힘이 돌아왔다. 제스는 주먹을 쥐었다 펴며 놀란 얼굴로 감탄했다.

-정말 좋아졌다. 정말로.

-어떻습니까? 소원은 만족하셨습니까?

-만족하다마다! 그 좋다는 영약을 아무리 마셔도, 실력 좋다는 신관을 백날 불러도 효과가 없었는데....

-마음에 드신다니 다행입니다. 그럼 두 번째 소원도 말씀해 보시겠습니까?

-두 번째 소원이라면....

몸이 좋아지자 그동안 감춰 놨던 열등감과 증오가 폭발하듯 솟구쳤다. 제스는 침대에서 벌떡 일어나 후원자의 손을 움켜쥐었다.

-형님을 죽여줘! 그리고 아버님도! 그것도 그냥 죽이지 말고 최대한 길고 고통스럽게! 내가 느꼈던 고통의 반에 반이라도 느낄 수 있도록!

-형님이면 황태자일 테고, 아버님이면 제국 황제인데.... 어이쿠, 갑자기 소원의 레벨이 급상승했군요.

후원자는 놀란 듯 말했지만 특별히 당황한 것처럼 보이진 않았다.

그는 또다시 붕대 사이에서 바늘이 달린 새로운 관을 꺼냈다. 제스는 긴장된 눈으로 바늘을 노려보며 물었다.

-그걸로 두 사람을 죽일 건가?

-제가 직접 그 두 분을 죽이는 건 불가능합니다.

-그럼?

-대신 황자님의 몸으로 그것이 가능하도록 만들어 드리겠습니다. 하루에 소원을 여러 번 들어 드리는 건 규정에 어긋나지만.... 당신은 특별한 분이니 상관 없겠죠.

그리고는 또다시 제스의 몸에 새로운 약물을 투입했다.

투여가 끝난 제스는 갑자기 눈앞이 핑 도는 것을 느끼며 침대에 주저앉았다.

-이건 뭐지? 설마 내 몸에 독약을 주입한 건가?

-독약이라면 독약이 맞습니다. 물론 황자님의 몸에는 아무 피해도 없지만요. 그저 황자님의 피가 독으로 바뀌게 될 뿐입니다.

-피가 독으로?

-그렇습니다. 만약 죽이고 싶은 사람이 있다면, 그것도 말씀하신 것처럼 길고 고통스런 죽음을 맞이하게 하고 싶으시다면 그분에게 피를 먹이십시오.

-아....

-혈액의 농도가 높아질수록 효과가 강해집니다. 평범하게 섞으면 몸의 면역이 무너져서 온갖 질병에 시달리게 되고, 진하게 섞으면 한순간 쓰러져서 사람 구실을 못하게 됩니다. 그리고 원액을 그대로 마시면....

-마시면?

-괴물로 변해 고통 받다 죽습니다.

-뭐? 괴물?

-그러니 가급적 원액 그대로는 사용하지 마십시오. 갑자기 사람이 괴물이 되면 주변에 너무 이상하게 보일 테니까요. 안 그렇습니까?

얼굴을 감싼 붕대 너머로 미소가 번졌다. 제스는 바늘에 찔린 부위에 배어나오는 피를 손으로 닦으며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그렇다 이거지? 결국 소원을 이루는 건... 나 자신이다?

-그렇습니다. 술에 타든 차에 타든 방법은 여러 가지가 있겠죠. 들키지 않게 잘 해내시길 기원하겠습니다. 아, 혹시 황자님의 세 번째 소원은 무엇입니까?

-세 번째 소원은 필요 없어.

제스는 양 주먹을 움켜쥐며 고개를 저었다.

-당장은 해야 할 일이 머릿속에 꽉 차서 터질 것 같다. 다른 건 아무것도 필요 없어.

-의욕이 넘치시나 보군요. 좋습니다. 그럼 세 번째 소원은 나중을 위해 아껴 놓도록 하죠.

-나중에?

-시간이 나면 가끔 황자님을 찾아오겠습니다. 나중에라도 좋으니 세 번째 소원을 말씀하시면, 그때 가서 소원을 들어 드리도록 하겠습니다. 저는 황자님의 충실한 후원자니까요.

후원자는 우아하게 몸을 구부리며 절을 올렸다. 제스는 순간 뭔가를 떠올리며 마지막으로 질문했다.

-잠깐, 만약 내 피를 아주 연하게 타서 마시면 어떻게 되지?

-아주 연하게 타서 마시면... 서서히 미치광이가 될 겁니다.

-미치광이?

-대신 한 번으론 안 됩니다. 자주 마시면 광기를 제어하기 힘들어지고, 본능에 거역할 수 없어지고, 몸도 점점 엉망이 됩니다. 만약 젊은 사람이 마신다면 육체의 성장도 멈춰버리겠죠.

-오....

-그러니 필요에 따라 적당히 조절해서 사용하십시오. 미리미리 조금씩 뽑아 놓고 보관해 두는 것도 방법이 될 수 있을 겁니다. 황자님의 혈액은 앞으로 절대 부패하지 않을 테니까요. 그럼....

후원자는 연기처럼 뿌옇게 변하며 모습을 감췄다. 그리고 제스는 바로 다음 날부터 자신의 두 번째 소원을 이루기 위한 작업에 돌입했다.

그렇게 얼마나 시간이 지났을까?

황제는 연회장에서 제스의 피가 진하게 섞인 술잔을 들이키고는, 그대로 쓰러져 식물인간이 되어 버렸다.

반면 황태자를 위해서 준비한 건 향이 좋은 홍차였다. 여기에 살짝 희석한 자신의 피를 섞은 다음, 시간 날 때마다 별궁으로 초대해 다과회를 벌였다.

덕분에 황태자의 몸은 온갖 질병의 소굴로 변했고, 이후 자신의 저택에 은거한 채 죽을 날만 기다리는 처지가 되었다.

다른 차원에서 넘어온 독이라 그런지, 이쪽 차원의 신성마법이나 영약이 듣지 않았다.

제국에서 가장 중요한 두 사람이 연달아 쓰러졌지만 그렇다고 제스가 의심받는 일은 없었다. 겉으로는 부모를 공경하고, 형제를 아끼는 모습을 완벽하게 연기했기 때문에.

그렇게 소원을 달성한 제스는, 마지막으로 황제의 사랑을 듬뿍 받던 막내 황자를 위한 가장 길고 비참한 최후를 준비했다.

하지만 이번엔 원하는 결과가 나오지 않았다.

불과 몇 달 전까지만 해도 계획대로 모든 일이 잘 풀리는 듯했는데.

그런데 클로드는 어느 순간부터 자신의 광기를 이겨냈고, 지금은 제국의 주요 대신들이 탄원서를 제출할 만큼의 인망을 얻어 버렸다.

"대체 어디부터.... 뭐가 잘못된 거지?"

현실로 돌아온 제스는, 창문 하나 없이 사방이 꽉 막힌 자신의 방을 가만히 둘러보았다.

역시 피를 너무 연하게 탄 걸까?

이럴 줄 알았으면 기회가 있을 때 투여하는 혈액의 농도를 확 높일걸 그랬다. 그랬으면 지금쯤 황태자처럼 온몸이 썩어가며 침대에서 죽을 날만 기다리고 있을 텐데.

어떻게든 가늘고 길게 살려둔 채, 모두의 비난과 손가락질을 받으며 가장 비참한 죽음을 맞이하게 만들려던 것이 이런 참사를 일으킬 줄이야.

"딱 봐도 이미 눈치 챘어. 내가 주던 보약이 문제라는 걸...."

이제 와서 새로운 보약을 준다고 절대 받아 마시지 않을 것이다. 제스는 걸음을 옮겨 밀실 구석에 있는 커다란 항아리 앞에 걸음을 멈췄다.

"많이도 모아 놓으셨군요."

그때 등 뒤에서 목소리가 들렸다. 제스는 놀란 기색도 없이 몸을 돌려 그곳에 서 있는 남자를 응시했다.

"후원자께서 납시었군. 여긴 완벽한 밀실인데 대체 어디로 들어오는거지?"

"저는 황자님이 계신 곳이라면 어디든지 나타날 수 있습니다. 황자님의 몸이 곧 저의 통로니까요."

남자의 정체는 온몸을 붕대로 둘둘 말고 있는 후원자였다. 제스는 혀를 차며 다시 항아리가 있는 방향으로 몸을 돌렸다.

"불쾌한 녀석. 네놈이 사는 차원에는 예의란 게 존재하지 않나보군."

"놀라셨다면 죄송합니다. 오, 이건 유리항아리군요."

후원자는 항아리를 손가락을 가볍게 훑으며 말했다.

"황자님의 혈액은 유기체와 강한 반응을 보입니다. 그러니 이런 유리나 금속 용기에 담아 두는 것이 바람직하겠죠."

"나무통에 담았더니 그대로 뚫고나오더군. 그나마 네 말처럼 아무리 시간이 지나도 상하지 않아 다행이다."

"황자님의 피는 스스로는 결코 상하지 않습니다. 대신 다른 걸 상하게 만들죠. 그런데 몇 년이나 지났다고 이렇게나 많이...."

항아리에는 선명한 붉은 피가 가득 차 있었다. 제스는 별거 아니라는 듯 무심한 말투로 대답했다.

"틈 날 때마다 상처를 내 피를 모았다. 무기는 많으면 많을수록 좋으니까."

"훌륭하신 말씀입니다. 그런데 잠시 실례해도 되겠습니까?"

"뭐?"

후원자는 손가락을 들어 제스의 얼굴을 가볍게 훑었다. 순간 움찔한 제스는 후원자가 손가락을 입으로 가져가는 걸 보며 이를 갈았다.

"네놈...."

"이거 실례. 이것도 중요한 확인 작업이라서 말입니다. 오, 오오...."

제스의 얼굴 맛을 본 후원자는 순간적으로 경련을 일으키며 몸을 떨었다. 제스는 불안한 눈으로 상대를 노려보며 물었다.

"이런 짓을 한다고 대체 뭘 알 수 있지?"

"황자님께서 무엇을 어디까지 받아들일 수 있는지, 그것을 확인할 수 있습니다. 후원을 받는 분의 감정 왜곡이 어디까지 진행되었는지, 이것이 후원의 품질을 결정하는데 중요한 역할을 하거든요."

"...뭐?"

"그리고 지금 황자님은... 전보다도 더욱 격하게 뒤틀린 감정을 품고 계십니다. 오, 이거 놀랍군요. 제가 황자님 말고도 다른 분들을 여럿 담당하고 있는데, 이 정도까지 뒤틀린 맛을 보여주신 분은 아무도 없었습니다."

"지금 날 우롱하는 건가?"

제스가 눈살을 찌푸렸다. 후원자는 입가에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저었다.

"그럴 리가요. 칭찬하는 겁니다. 지금이라면 황자님의 세 번째 소원을, 그것도 아주 성대하게 이뤄 드릴 수 있을 것 같군요."

"세 번째 소원?"

"전에 아껴 놓은 마지막 소원이 있지 않습니까? 저는 그것도 미리 준비해서 기다리고 있었는데 말이죠."

"내 소원을 미리 알고 있었다?"

"물론입니다."

후원자는 당연하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대부분은 제가 미리 조사해서 준비한 것을 그대로 소원으로 부탁하십니다. 황자님도 처음 두 가지 소원은 예상 그대로였죠."

"...그래서?"

제스는 눈을 가늘게 뜨며 후원자를 노려보았다.

"그래서 내 마지막 소원이 뭔데?"

"힘입니다."

"힘?"

"힘을 가지고 싶지 않으십니까? 그저 높은 위치에서 사람을 부리는 권력이 아닌, 말 그대로 물리적인 강함을 말하는 겁니다."

후원자는 허공에 주먹을 휘두르는 시늉을 했다. 제스는 순간 허를 찔린 표정으로 입술을 깨물었다.

"어려서부터 나이트 마스터의 재목이라고 칭찬 받던 형님과 비교당하는 게 고통스럽지 않으셨습니까? 바로 옆에서 자신을 보좌하는 나이트 파이렌의 강력한 힘을 내심 부러워하지 않으셨습니까? 자신의 손으로 직접 맘에 안 드는 사람을 뭉개버릴 수 있는 순수한 힘을 바라지 않으십니까?"

당연히 바랐다.

어려서부터 비교당하고 살았던 제스는 항상 힘을 갈구했다.

열등감을 드러내지 않기 위해 무의식적으로 감춰왔지만, 내심 강력한 존재들이 눈앞에 나타나면 질투심으로 속이 뒤집히기 일쑤였다.

덕분에 지금 이 순간, 제스는 자신이 왜 이렇게 폭발할 것처럼 속이 부글거리는지 깨달을 수 있었다.

'클로드가 힘을 얻어서 그렇구나.'

가장 비참하게 몰락시키려 했던 존재가, 갑자기 신성마법의 달인이 되어 종횡무진하며 활약하기 시작했다.

여기에 최근엔 원소마법의 힘까지 손에 넣었다. 베리트에서 들어온 첩보에 의하면, 심지어 그 위력이 아크 위저드에 필적한다고 한다.

바로 그것이 제스의 열등감을 폭발시켰다. 황태자를 골로 보낸 후로 더는 이런 고통을 느끼지 않을 거라 생각했는데....

"지금이라면 첫 만남 때보다 훨씬 강력하게 소원을 이뤄 드릴 수 있습니다.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지금 이 자리에서 세 번째 소원을 말씀하시겠습니까?"

후원자는 오래전 그날처럼 붕대 사이에서 바늘이 달린 관을 꺼내들었다. 제스는 흔들리는 눈으로 한참동안 바늘을 노려보다 물었다.

"그걸 맞으면 정말 강해지나? 나이트 마스터만큼?"

"물론입니다. 아니, 분명 그보다 더 강해질 겁니다."

나이트 마스터보다 더?

제스는 숨이 가빠지는 걸 느꼈다. 하지만 섭정이라는 자신의 지위를 떠올리자 순식간에 흥분이 식었다.

그래 봤자 무슨 소용일까?

당장 클로드를 때려죽일 힘을 얻었다 해도, 그걸로 정말 클로드를 때려죽이면 뒤에 올 파장을 감당할 수 있을까?

"그건 너무 위험한데...."

"네? 무슨 말씀이십니까?"

"그냥은 위험해. 혹시 내가 다른 사람들에게 절대 들키지 않고 그 힘을 쓸 방법이 있을까?"

"힘을 쓸 때는 자신의 정체를 감추고 싶으십니까? 과연...."

후원자는 고개를 끄덕이며 붕대 속에서 새로운 관을 추가로 꺼냈다.

"그렇다면 이쪽을 추천합니다. 세상 누구도 황자님의 정체를 모르는 존재로 변신할 수 있습니다."

"변신?"

"그렇습니다. 힘을 풀면 다시 원래의 몸으로 돌아오니 위험 부담도 없습니다."

세상에 그렇게 편리한 힘이 있단 말인가?

하지만 후원자는 지금까지 소원에 있어서만큼은 결코 허언을 하지 않았다. 제스는 그 자리에서 소매를 걷으며 팔뚝을 내밀었다.

"지금 바로 세 번째 소원을 빌겠다. 내게 힘을 다오."

"현명하신 판단입니다. 황자님."

후원자는 활짝 웃으며 제스의 팔뚝에 바늘을 꽂았다.

"큭...."

그것은 앞선 소원 때보다 훨씬 강한 충격이었다.

하지만 고통은 잠시였다. 정신을 차린 제스는 자신이 이전과는 비교조차 할 수 없는 새로운 존재로 다시 태어났다는 것을 실감했다.

"이게.... 이게 바로 힘이군."

"어떻습니까? 만족하셨습니까?"

후원자가 부드러운 목소리로 물었다. 제스는 대꾸 없이 다짜고짜 자신의 피를 담아놓은 항아리를 한손으로 집어 들었다.

"음? 그것은 어쩌려고 그러십니까?"

"...."

제스는 몸을 돌려 반대편 구석에 있는 세면대로 향했다.

"버린다."

"네? 아깝게 왜 그러십니까?"

"이제 이딴 건 필요 없다. 내 힘만 있으면 충분해."

그리고는 세면대 아래 뚫린 배수구에 그동안 모은 피를 몽땅 쏟아 부었다. 후원자는 그런 제스의 모습이 마음에 드는 듯, 고개를 끄덕이며 천천히 모습을 감추기 시작했다.

"강단 있는 모습이 보기 좋군요. 그럼 부디 재미있게 즐기시기를...."

이계 황자는 세상을 구하고 싶다 35화

11장 질투의 종말

밤은 어두웠다. 잔뜩 낀 구름이 달을 휘감고 도통 놔주질 않는구만.

내가 연금된 곳은 황궁에 있는 아홉 개의 별궁 중 가장 외딴 곳에 있는 청사자궁의 2층.

창밖을 보고 있자니 횃불을 들고 주변을 순찰하는 제국 근위대의 모습이 보인다. 반갑게 손을 흔들어 주었지만 녀석은 반응조차 하지 않았고 가던 방향으로 조용히 이동했다.

"한밤중에 수고하네...."

물론 저들의 진짜 역할은 순찰이 아니라 감시.

맘만 먹으면 은신을 써서라도 몰래 탈출할 수 있다. 하지만 그러면 오히려 손해기 때문에 그저 조용히 시간을 보내고 있을 뿐.

음? 탈출하면 뭐가 손해냐고?

지난 아홉 번의 회귀 중 이번처럼 미친 황자 루트를 진행한 것은 총 여섯 번.

제스는 그때마다 나를 청사자궁에 유폐시켰다. 그리고 유폐한 지 사흘째 밤에 항상 똑같이 암살자를 보냈다.

다만 보내는 암살자가 매번 동일하진 않았다.

세 번은 자신과 같은 배신자인 아크 위저드 '톨라리'를 보냈고, 두 번은 직속 호위기사인 파이렌을 보냈으며, 마지막 한 번은 아예 황제 친위 기사단인 '왕관 기사단'의 정예를 몽땅 동원했다.

여기서 기사단의 경우는 예외인 게, 당시 내 평판이 악당에 가까운 상황에서 탈리스만 백작을 족쳤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었다.

그러니 지금처럼 평판 작업을 충분히 해놓은 상황에선 무리하게 기사단을 동원할 수 없다. 배후에 자신이 있다는 걸 숨기고 몰래 일을 벌여야 하거든.

자, 그럼 우리 배신자 둘째 형님께선 오늘밤 과연 누구를 암살자로 보내려나?

톨라리? 파이렌?

아니면 또 다른 아크 위저드 배신자인 그리스컬?

"...응?"

문득 창밖에서 불빛과 인기척이 사라졌다.

어느 샌가 주변을 순찰하던 근위대가 몽땅 사라져 있었다. 이거 올게 왔구만. 나는 가벼운 흥분과 함께 별궁의 복도로 나섰다.

"텅 비었네?"

별궁 안에 있던 호위기사와 시종들도 함께 모습을 감췄다. 덕분에 아무 방해 없이 별궁 밖에 있는 넓은 공터로 나올 수 있었다.

그래. 미친 황자 루트는 여기까지 자동으로 이어져서 마음에 든다.

어차피 톨라리든 파이렌이든 모두 죽여야 할 놈들이거든. 덕분에 따로 작업할 필요 없으니 수고를 아끼는 셈이다.

특히 아크 위저드인 톨라리는... 워낙에 까다로운 상대.

그러니 여기서 죽여 놓는 게 나중을 위해서도 편하다. 그러니 기왕이면 파이렌 말고 톨라리가 오면 좋겠다.

"대신 톨라리랑 싸우면 주변이 완전 쑥밭이 되는 게 피곤한데.... 음?"

혼자 중얼거리고 있자니 멀리 어둑한 길 너머로 다가오는 남자가 보였다.

쳇, 그럼 일단 톨라리는 아니네.

근데 어째 실루엣을 보아하니.... 파이렌도 아닌데?

파이렌은 나이트 마스터만 다룰 수 있는 특제 전용마갑을 항상 껴입고 다닌다. 그것만으로도 양 어깨의 폭이 일반인의 두 배에 가깝기 때문에 한눈에 알아볼 수 있다.

하지만 멀리서 다가오는 남자는 몸이 호리호리하다.

키는 큰 편이지만 걸음걸이만 봐도 훈련받은 기사는 아니다.

얼굴은 복면으로 가리고 있는데, 거리가 가까워지자 복면과 상관없이 녀석의 정체를 단번에 파악할 수 있었다.

"...제스?"

"간이 부었구나. 클로드. 감히 이름으로 부르다니."

제스는 복면을 벗으며 미소를 지었다.

어딘지 후련하면서도 만족스런 표정이다. 이건 좀 신기한데? 제스가 저런 식으로 웃을 줄 아는 녀석이었나?

"형님께서 이 밤중에 어쩐 일로 오셨습니까?"

"그러는 넌 어쩐 일로 연금을 어기고 별궁 밖으로 나왔나?"

"...."

"이젠 확실히 알 것 같다. 넌 영악한 놈이야. 피차 쓸데없는 이야긴 하지 말자."

아니, 제발 부탁이니 뭐든 좀 이야기를 해주면 안 될까?

난 왜 여기에 네가 왔는지 영문을 모르겠다고!

보낼 거면 암살자를 보내야지 왜 본인이 직접 행차하는 건데? 넌 직접 싸우는 재주는 단 1도 없는 양반이잖아?

"그래. 처음부터 이렇게 했어야 했다. 왜 그렇게 구질구질하게 길게 끌면서 고통을 주려 했을까? 그냥 깔끔하게 죽였으면 편했을 것을."

"...형님?"

"힘이 생기니 세상을 보는 눈이 이렇게나 달라지는구나. 아버님이나 형님께도 못할 짓을 했다. 널 죽이고 나면 그 두 사람도 깨끗하게 보내드려야지."

이거 말하는 본새 봐라?

얘는 대체 뭘 믿고 이렇게 자신 만만하대? 지금쯤이면 내가 원소마법까지 아크위저드 급으로 쓸 수 있다는 소문이 퍼졌을 텐데?

아니, 그게 아니더라도 내가 신성마법의 달인이라는 걸 모를 리가 없다. 반면 이놈은 황자라는 혈통과 섭정이라는 지위를 제외하면 아무것도 아닌 일반인. 대체 뭘 믿고 이렇게 뻗대는 걸까?

"잠깐...."

나는 일말의 불길함을 느끼며 제스의 몸을 감정안으로 확인했다.

종족 : 변종.

뭐?

현재 힘 : C

잠재 힘 : S

뭐라고?

현재 변종력 : C

잠재 변종력 : S

이건 또 뭔데?

"...."

당황스러운 게 너무 많아 말조차 제대로 안 나온다.

애초에 종족이 인간이 아니라 변종이라고? 변종이 대체 뭔데?

그리고 잠재적 힘이 S? S등급이면 최소 나이트 마스터 급이란 소리 아냐?

그리고 변종력은 또 뭔데! 누가 나한테 설명 좀 해줘!

"이 상태의 나도 꽤 강하다만... 너도 만만한 녀석은 아니지. 그러니 내가 얻은 진짜를 보여주마."

제스는 걸치고 있던 망토를 벗어 던졌다. 그리고 몸을 웅크리며 부풀어 오르기 시작했다.

아니, 야, 잠깐, 너 뭐하는 거야?

인간이란 생물이 무슨 뻥튀기도 아니고 어떻게 그렇게 부풀어 오를 수 있어?

3미터, 5미터, 7미터....

이미 오우거 따위는 댈 것도 아니게 커졌다. 말 그대로 몸집을 부풀리며 폭발적으로 자라난다.

그리고 하필 그 순간, 밤하늘에 구름이 걷히며 환한 달빛이 제스를 향해 쏟아졌다.

그것은 괴물이었다.

길게 늘어난 하반신에 거미처럼 여덟 개의 다리가 돋아나 몸 전체를 떠받치고 있다.

반면 두꺼운 상반신은 가시가 듬성듬성 난 뭉툭한 선인장을 연상시켰다.

도저히 정상적인 생물이라고는 믿겨지지 않는 모습이다. 심지어 저 가시 하나하나가 자유자재로 늘어나 움직인다는 것도 알고 있다.

그래. 나는 저 괴물이 뭔지 알고 있다.

광전사.

앞으로 9년 후에 벌어질 이계의 침공.

그것도 세 번째 웨이브부터 추가되는 적의 병종이다.

정말 끔찍하게 강하고, 더럽게 질기며 미친 듯이 날뛴다.

어찌나 강한 놈인지, 처음 상대했을 때는 존재 자체가 트라우마로 남을 지경이었다. 외형도 소름끼치게 생겼고.

이것을 최후의 전쟁도 아닌, 그것도 회귀 직후의 첫해에 마주하게 될 거라곤 꿈에도 상상하지 못했다.

"...."

와. 이거 진짜 미치겠네.

지금 난 꿈을 꾸고 있는 걸까? 대체 눈앞에서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 거지?

* * *

그 순간, 광전사의 몸에 난 가시들이 촉수처럼 솟구쳤다.

촥!

촉수 하나의 굵기가 내 몸통만하다. 비행 마법으로 급하게 피했지만, 순식간에 10여 개의 촉수가 추가로 날아와 경로를 차단했다.

"으...."

짧은 순간 무수한 상념이 엄청난 속도로 머리를 스쳤다.

안 돼!

이거 꿈 아니야!

정신 차려! 광전사 한두 번 상대해보냐! 머리가 안 돌아가면 그냥 예전에 만든 매뉴얼대로 해!

광전사 대응 공식 1번. 혼자서 녀석을 상대할 땐 힘이 강한 정령이 필요하다.

"룩카르!"

쿠오!

소환된 룩카르가 포효와 함께 진행 방향에서 쏟아지는 촉수더미를 낚아챘고, 동시에 겨드랑이에 끼워 안으며 몸을 빙글 돌렸다.

뿌직!

촉수가 단번에 뿌리째 뜯기며 사방으로 투명한 액체를 뿌린다.

하지만 이 정도로 타격을 입을 거면 저걸 광전사라고 부르지도 않았지. 녀석은 새롭게 스무 개가 넘는 촉수를 뿌리며 룩카르의 몸 전체를 붕대처럼 휘감았다.

콰득!

촉수 안쪽으로 바위가 으스러지는 소리가 울린다.

그사이, 난 양손에 각각 두 개의 템페스트를 준비하며 광전사와 룩카르를 향해 투척했다.

화륵!

룩카르에게 던진 것은 위력을 최대로 낮춘 불꽃의 폭풍.

작열하는 화염과 함께 휘감은 촉수가 까맣게 타들어간다. 덕분에 바위정령이 완력으로 속박을 찢고 탈출, 한순간 지면을 박차고 적을 향해 돌진했다.

그사이, 미리 던져 놓은 최대 위력의 냉기 폭풍이 광전사의 몸을 고드름처럼 빠삭하게 열려놓았다.

단박에 뛰어든 룩카르는 얼어붙은 녀석의 몸에 큼지막한 주먹을 내리꽂았다.

콰직!

그 일격에, 적을 휘감은 얼음이 박살나며 사방으로 흩어졌다.

하지만 깨진 건 광전사의 외피일 뿐.

덩달아 녀석의 몸 곳곳에 커다란 구멍이 벌어지며 푸른 불꽃이 일렁였다.

"피해!"

그것은 포격이었다.

작열하는 폭발과 함께 바위정령의 몸이 뒤로 튕겨 날아갔다.

"앗...."

위력이 어찌나 강한지, 룩카르는 한 팔이 어깨까지 뜯겨 날아간 상태.

그나만 한쪽 팔은 남아 있어 다행이구만. 나는 그새 준비한 휘몰아치는 번개의 구체를 적에게 투척했다.

이름 하여 라이트닝 오브 템페스트(lightning of tempest).

직격을 맞으면 제아무리 광전사라도 치명상을 입는다.

하지만 광전사는 절대로 이 마법에 직격을 허용하지 않는다.

파지지지지지직!

뇌전이 작열하는 순간, 녀석은 한순간 자신의 몸을 부풀려 새로운 외피를 만들어냈다.

생체 장갑.

외부의 공격에 맞춰, 자신의 외피에 가장 효율적인 방어 장갑을 생성하는 능력.

이것이 바로 광전사를 처음 상대한 제국군이 속수무책으로 무너진 원인이다.

광전사는 뇌전의 힘이 소멸한 순간, 갑자기 머리 한가운데 균열을 열고 굉음을 터뜨리기 시작했다.

"키기기기기기기긱!"

그것은 웃음소리였다. 뭔데 이거. 이 광전사는 괴물 주제에 웃을 줄도 아네?

"역시 최고다! 이 힘! 뭐든 멋대로 해봐라 클로드! 이 몸은 내가 신경 쓰지 않아도 모든 걸 자동으로 해결해 준다!"

아, 맞아, 저거 제스였지.

녀석은 새로 바뀐 자신의 몸이 마음에 드는 듯, 마치 어린아이처럼 거구를 들썩이며 새롭게 촉수를 돌출시켰다.

"어디 또 피해 봐라!"

수십 개의 촉수가 어지럽게 흩날리며 시야를 가득 채운다. 나는 촉수에 휘감기기 직전, 비행마법으로 급히 날아오르며 몸을 피했다.

"그럴 줄 알았지!"

동시에 녀석이 온몸에 구멍을 열고 포격을 시작했다.

생체 포탄.

자신이 생체 장갑으로 막아낸 속성을 그대로 흡수, 같은 속성의 포탄을 만들어 쏟아 낸다.

파지지지지지지직!

당연히 이번에는 번개 속성.

직격을 맞았지만 목숨을 건진 건 프로텍션 매직을 발동시켰기 때문이다.

선명한 빛이 몸을 감싸며 작열하는 뇌전을 막아 줬고, 그사이 미리 준비한 최대 위력의 불꽃을 적의 몸통을 향해 내던졌다.

녀석은 가소로운 듯 웃었다.

"이딴 건 안 통해!"

과연 그럴까?

화륵!

작열하는 화염폭풍이 적의 생체 장갑을 휘감으며 한순간 새까맣게 불태운다.

"큭! 뭐지? 왜 이번엔 이렇게 쉽게 뚫리는데!"

제스는 몸에 남은 잔열에 고통 받으며 또다시 새로운 장갑으로 몸을 부풀렸다.

하지만 녀석의 새로운 갑옷을 기다리고 있던 건, 내가 연속해서 추가로 날린 얼음의 폭풍이었다.

아이스 오브 템페스트.

쩌적!

일순간 광전사의 몸이 거대한 석상처럼 얼어붙었다.

"룩카르! 달려!"

순간 한 팔을 날려먹은 바위정령이 지면을 박차며 적을 향해 내달렸다.

-계약자여. 날 부릴 수 있는 시간은 앞으로 약 110초밖에 남지 않았다.

적을 향해 주먹을 날리는 그 순간에도, 룩카르는 여유가 넘치는 듯 내게 남은 시간까지 전달해 주었다.

콰직!

하지만 한눈에 봐도 첫 번째 공격보다 위력이 떨어진다.

팔 한쪽이 날아가서 그런지, 아니면 단순히 힘이 빠져서 그런 건지는 모른다.

하지만 그것만으로도 충분했다. 얼어붙은 제스의 생체갑옷이 살얼음처럼 박살나며 사방으로 흩어졌으니까.

"크아아아아아아아악!"

제스는 비명을 지르며 새롭게 뻗은 촉수를 마구 휘둘렀다.

하지만 룩카르는 학습이란 걸 하는 정령.

펀치와 동시에 적의 반격을 대비, 이미 잽싸게 뒤로 몸을 뺀 상태였다.

"크윽! 이 돌덩어리는 대체 뭐야! 아니 다 필요 없어! 너, 너! 클로드! 으아아악!"

깨진 얼음 조각이 비교적 부드러운 속살을 파고들며 투명한 피를 흩뿌린다. 제스는 고통스러운 듯 몸부림치며 한순간 내 쪽을 향해 급발진했다.

"너만 죽이면!"

이계 황자는 세상을 구하고 싶다 36화

11장 질투의 종말

작은 빌딩만 한 덩치가 고장난 트럭처럼 막무가내로 달려든다.

가까스로 충돌 직전에 아슬아슬하게 몸을 피했고. 녀석은 그대로 뒤에 있던 청사자궁을 들이받았다.

그러자 붕괴가 일어났다.

엄청난 굉음과 함께, 6층탑인 청사자궁의 절반이 무너지며 제스의 몸을 뒤덮었다.

"크악!"

제스는 대량의 토사를 뚫고 힘겹게 몸을 빼냈다. 하지만 나머지 탑의 절반이 뒤늦게 무너지며 애써 빠져나온 녀석의 몸을 다시 덮쳤다.

그리고는 모든 게 잠잠해졌다.

남은 건 어둠 속을 가득 메운 뿌연 흙먼지뿐.

"콜록, 콜록! 광전사의 생체 장갑이 정말 엄청난 기술이긴 한데...."

그렇다고 무적은 아니거든?

과거 이놈들의 압도적인 힘에 패배의 쓴맛을 본 뒤로, 나는 다양한 연구와 실전을 통해 기어이 녀석들의 약점을 찾아냈다.

우선 냉기 마법으로 기본 장갑을 얼린 다음, 물리적인 힘으로 그것을 파괴한다.

그다음은 뇌전(雷電)이다. 뇌전을 막기 위해 생성된 생체장갑은 일종의 고무 같은 절연속성을 가지고 있거든.

그래서 불로 공략하면 비교적 쉽게 타 녹는다.

그 뒤로 불을 막기 위해 생성된 생체장갑은 초기 형태처럼 냉기에 쉽게 얼어붙고, 얼어붙은 생체장갑은 물리적인 힘에 쉽게 깨진다.

물론 이것이 가능하려면 최소 아크 위저드 급의 마법사가 필요하지만....

아무튼 이런 식으로 생체장갑을 빠르게 소모시키면 결국 힘이 빠지는 단계가 온다는 말씀.

이걸 모르고 상대하면 버서커 한 마리를 잡는데 힘이 열 배는 더 든다!

"후...."

나는 흙먼지 너머로 거대한 봉분이 조금씩 들썩이는 걸 보며 조용히 말을 걸었다.

"제스? 방금 신경 안 써도 모든 걸 자동으로 해준다고 했지?"

"...."

"그게 바로 약점이야. 하기 싫어도 자동으로 속성에 반응해 버리거든."

"...."

"근데 어쩌다 그렇게 됐어? 대체 며칠 사이에 무슨 일이 있었던 거야?"

이거 멱살이라도 움켜쥐고 직접 추궁하고 싶은 마음이 간절한데....

하지만 조금 있으면 다시 힘을 회복하기 때문에 그럴 여유는 없다. 대신 허리춤의 포켓에서 설탕바 하나를 꺼내 먹으며 녀석의 숨통을 끊기 위한 마지막 마법을 준비했다.

-40초 남았다. 내 힘이 필요하다면 최대한 빨리 해라.

뒤에 선 룩카르가 재촉했다. 이 녀석, 이미 광전사 공략에서 자신의 역할을 완전히 이해했구만.

하지만 광전사는 생체장갑이 네 번 벗겨지면 한동안 새로 만들지 못한다. 그러니 이젠 네 도움 없어도 괜찮아...라고 말하려는 순간.

소리.

마치 공기가 찢어지는 듯한 소리가 귓가를 울렸다.

'풍압검?'

동시에 칼날로 만들어진 거미줄이 그물처럼 쏟아졌다.

수십 명의 나이트 익스퍼트가 동시에 풍압검을 날리면 저런 모양이 될까?

"앗...."

발견이 늦어 온몸이 산산조각으로 찢기려는 순간, 먼저 반응한 룩카르가 거구의 몸을 날려 대신 막아 주었다.

까드드드득!

순간 바위가 갈리며 엄청난 소음이 울렸다. 하지만 룩카르는 멀쩡한 얼굴로 내 쪽을 내려다보며 물었다.

-괜찮나?

"그래. 난 괜찮은데...."

바로 그때, 안부를 묻던 룩카르의 머리통이 반으로 쪼개졌다.

콰득!

균열은 몸통을 지나 다리 사이에서 끝나며 룩카르의 몸을 완전히 반으로 갈랐다.

높이만 7미터에 달하는 거인을.

동시에 균열을 만든 칼날이 내 정수리까지 떨어졌다.

하지만 룩카르의 희생 덕분에, 이번엔 확실히 반응할 시간이 있었다.

우웅!

빛으로 만든 정육각형의 방패로 적의 칼날을 아슬아슬하게 받아냈다.

"...."

동시에 새카만 갑옷을 입은 거구의 기사가 몸 전체로 날 짓누르며 입을 열었다.

"막았다고?"

빈틈없는 투구에 가려 표정은 보이지 않았지만, 녀석은 놀랍다는 목소리로 연신 고개를 흔들었다.

"내 중량검(重量劍)이 막힌 건 이번이 처음이군. 아무리 저 돌덩어리를 베느라 위력이 떨어졌다 해도."

파이렌.

녀석은 제스의 호위기사인 파이렌이다.

제국에 단 세 명밖에 없는 나이트 마스터이자 제스와 같은 인류의 배신자.

"그래. 오직 아크 프리스트만이 만들 수 있는 빛의 방패가 있다는 이야기를 들은 적이 있는데...."

녀석은 한순간 검을 거둔 다음, 도저히 반응할 수 없는 속도로 우회하며 내 등 쪽을 향해 검을 휘둘렀다.

우웅!

하지만 이번에도 새로운 방패가 적의 공격을 막아주었다.

"방패가 두 개?"

투구속의 눈이 놀란 듯 번뜩인다. 나는 쉬지 않고 또 하나의 방패를 만들어 대상을 지정했다.

'방패 나와! 목표는 저 갑옷 덩치다!'

빛의 방패.

신성마법'실드 오브 라이트'는 단순히 방패를 만드는 마법이 아니다.

발동 순간 목표를 지정하면 자동으로 날아다니며 목표에 반응해 공격을 막아준다.

다만 방패 하나로는 상대의 움직임에 전부 대응할 수 없다. 나이트 마스터란 족속이 원체 빨라서 말이지.

그러니 지금처럼 최소 세 개는 만들어 전담 마크를 붙여야 한다.

우웅!

우웅!

우우우우웅!

그 사이, 파이렌은 그 엄청난 거구가 믿겨지지 않을 만큼 고속으로 내 주위를 빙빙 돌며 검을 내리쳤다.

그때마다 빛의 방패가 녀석의 공격을 막아주었다. 와, 어지러워 상대가 너무 빨라 눈이 핑핑 도는구만.

이대로라면 얼마 못 가 방패가 소멸할 것이다. 하지만 그때까지 짧게나마 시간을 벌어주는 게 중요하다.

나이트 마스터란 인간의 물리적 한계를 아득하게 돌파한 족속.

눈으로는 이 미친 속도를 따라잡을 수 없다. 그러니 전에 바다 속의 시 서펜트를 낚아챈 것처럼, 생명감지 마법으로 녀석의 몸에 느껴지는 생명의 기운에 집중했다.

'잡았다.'

그리고는 녀석의 몸에 모든 기사의 천적과도 같은 신성마법, 바로 리버스 그래비티를 발동시켰다.

덜컹!

배후에서 급가속하던 파이렌의 몸이 한순간 위로 치솟았다. 난 고개를 돌려 녀석을 향해 환한 미소를 지었다.

여태까지 좋았지? 넌 지금부터 죽을 때까지 스카이 콩콩이다!

그런데 녀석이 하늘 높이 떠오르려는 순간.

투캉!

금속으로 된 녀석의 신발이 폭발하듯 아래로 튕겼다.

"어?"

신발이 벗겨진 자리에는 인간의 발 대신 여러 가닥으로 갈라진 징그러운 무언가가 달려 있었고, 그것들이 한순간 아래로 솟구치며 지면 깊숙이 꽂혔다.

뭔데 이거!

나도 모르게 입이 벌어졌다. 녀석은 발에서 촉수를 뻗어 지면에 꽂은 다음, 그것을 지지대 삼아 리버스 그래비티의 상승 중력을 견뎌냈다.

쿵!

덕분에 5미터도 채 올라가지 못한 채 다시 지면에 착지했다.

나는 뒷걸음을 치며 급하게 다시 리버스 그래비티를 사용했다. 하지만 촉수가 전보다 더 단단하게 고정된 듯, 이번에는 3미터도 채 오르지 못하고 다시 지면에 떨어졌다.

"...이럴 줄 알았지."

투캉!

파이렌은 비어있는 왼손의 건틀렛도 튕겨내며 새롭게 촉수를 뿜어냈다. 나는 거의 반사적으로 녀석의 몸에 감정안을 사용했다.

종족 : 변종.

현재 힘 : S

잠재 힘 : 없음.

현재 변종력 : A

잠재 변종력 : A+

아 젠장!

제스 말고 이것도 인간이 아니었어? 대체 이놈들 몸에 무슨 일이 생긴 거야?

"그쪽이 요튼 만이나 베리트 성에서 어떻게 상대를 요리했는지 정보를 들었지."

"...."

"신성마법 리버스 그래비티. 기사는 아무리 강해도 저항할 방법이 없어 보이더군. 역시 두 번째 소원을 빌기를 잘했어."

"...두 번째 소원?"

"그런 게 있다. 너처럼 타고난 녀석들은 죽을 때까지 모르겠지."

파이렌이 무슨 말을 하는지 감이 안 온다. 소원? 그게 뭔데?

쿠궁!

순간 청사자궁의 잔해가 무너지며 깔려있던 광전사가 몸을 뒤틀었다. 파이렌은 짧은 웃음소리를 내며 고개를 끄덕였다.

"보아하니 섭정 전하께서도 세 번째 소원을 달성하신 것 같군."

뭐?

소원이 뭔진 몰라도 세 번까지 가능하다고?

"클로드으으으으으!"

제스는 몸을 일으키자마자 번개같이 촉수를 뿜어냈다. 비행마법으로 급하게 몸을 피한 순간, 파이렌이 기다렸다는 듯 내 쪽을 향해 미친 듯이 검을 휘둘렀다.

"어딜 가시나!"

촤륵!

한순간 날카로운 풍압의 칼날이 그물처럼 빽빽하게 쏟아졌다.

먼저 만들었던 빛의 방패는 파이렌의 주변을 빙빙 도느라 이번 공격에 반응하지 못했다. 나는 급하게 몸을 웅크리며 또 하나의 방패를 만들어 우산처럼 뒤집어썼다.

우우우웅!

나 참, 몸이 하도 작으니 방패 속에 쏙 들어가는구만.

덕분에 사지는 물론이고 손가락 하나 안 잘리고 버틸 수 있었다.

대신 혼자 공격을 뒤집어쓴 빛의 방패가 힘을 잃고 소멸했다. 아무래도 급하게 만드느라 내구력이 부족했던 모양이네.

"동시에 빛의 방패 네 개를 만들다니. 부럽기 그지없군. 내게도 그런 신의 기적이 있었다면 좋았을 것을!"

파이렌이 공격을 멈추며 감탄했다. 아니 여보세요? 양심도 없지. 그게 나이트 마스터이면서 추가로 팔다리가 촉수처럼 변신한 괴물 놈의 입에서 나올 소리입니까?

아무튼 빛의 방패를 동시에 네 개까지 만드는 것이 아크 프리스트로 인정받는 조건 중 하나다. 뭐 지금 중요한 이야기는 아니지만.

중요한건 파이렌과 거리가 벌어지자, 이번에는 제스가 촉수 말고 생체 포격을 다시 시작했다는 사실.

파지지직!

콰과과광!

쩌저적!

녀석은 자신이 당했던 세 가지 속성탄을 동시에 방출하기 시작했다.

일단 프로텍션 매직으로 전부 막아지긴 하는데.... 뭔데 이거! 전에 싸웠던 광전사는 단 한 번도 저런 재주를 부리지 않았다고! 왜 동시에 다른 속성탄을 동시에 쏴!

제스가 변신한 광전사는 내가 아는 광전사가 아닌 걸까? 그보다 더 강력한 무언가로 진화한 거야?

"섭정 전하께서 놀라운 힘을 얻으셨군. 이젠 나보다도 더 강하겠어."

파이렌도 흥이 살았는지 멀리서 나이트 스킬을 미친 듯이 퍼부어 대기 시작했다. 으아, 저게 쓸 수 있다고 저렇게 맘대로 막 쓸 수 있는 게 아닐 텐데? 아무리 나이트 마스터라도 저렇게 써대면 금방 지치지 않나?

"죽어라 클로드! 너만 죽으면 내 소원은 완성된다! 푸확!"

한편 제스는 기존의 광전사에게는 존재하지 않던 '입'까지 동원해 직접 불을 뿜기 시작했다.

다만 명중률은 형편없었다. 그래도 온 사방에서 공격이 쏟아지는 와중에 뭔가가 더해진 것만으로도 등줄기에 소름이 돋았다.

피하고, 피하고, 막고 또 피하고, 또 막는다.

망할....

식은땀이 흐르고 입안이 바싹 마른다.

지금의 내 역량만으로도 광전사 정도는 충분히 제거할 수 있다. 그것이 비록 전보다 업그레이드된 버전이라 해도.

당연히 나이트 마스터 등급의 기사도 제압 가능하다.

설사 괴상한 업그레이드를 통해 리버스 그래비티가 안 통하게 되었어도 상관없다. 내 머릿속엔 과장 좀 보태 녀석을 제압할 수만 가지의 방법이 들어 있으니까.

하지만 이 둘을 동시에 상대하는 건 완전히 다른 차원의 이야기다!

두 녀석이 동시에 공격을 퍼부으니 제정신을 차리는 것조차 힘들 지경이다. 마력 소모도 이미 쾌 컸고.

망할!

이럴 줄 알았으면 아까 여유 있을 때 설탕바 더 먹어 놓을 걸!

"어디 있냐 클로드! 이미 죽었나? 이미 죽어서 보이지 않는 거냐?"

제스는 더 많은 생체 포격을 난사하며 온 사방을 번개와 화염과 얼음과 먼지로 뒤덮었다.

세상에 맙소사.

이 화력은 역시 뭔가 이상하다. 광전사 두 마리를 동시에 상대해도 이 정도로 무식한 화력이 나오진 않을 텐데.

그 순간 머릿속을 본능적인 충동이 두드렸다.

그냥 도망쳐 버릴까?

어떻게든 밤하늘 높이 날아오른 다음, 거기서 은신을 쓰고 도망쳐 버리면 당장의 위기는 벗어날 수 있을 텐데?

하지만 그렇게 하면....

"으악! 안 돼!"

나는 외마디 비명과 함께 제스가 있는 곳으로 돌진했다.

"지금 도망치면 다 끝장이야! 계획한 빌드가 몽땅 다 무너져! 시작한 지 고작 1년도 안 됐다고! 이래가지고 나중에 진짜 웨이브가 시작되면 어떻게 막을래! 그때도 도망칠 거야? 응? 이번이 마지막 기회인데? 이깟 놈들 뭐가 대수라고! 이거보다 더 끔찍한 것들도 상대해 봤잖아!"

내 입에서 방언이 터지는 동안, 내 몸은 쏟아지는 포격을 뚫고 광전사의 머리 부근에 접근, 녀석의 쩍 벌어진 입 속으로 윈드 오브 템페스트를 쑤셔 박았다.

작열하는 광풍이 쏟아지는 화염을 뚫고 적의 몸속으로 파고들어 난동을 부린다.

"크악!"

녀석은 고통에 몸부림치면서도 새로운 촉수를 뻗었다. 나는 고속으로 비행하여 그 모두를 간발의 차로 피하는 한편, 몸통의 중심부에 열려 있는 생체포탄 구멍을 노리고 파이어 오브 템페스트를 제로거리에서 쑤셔 박았다.

그것은 일종의 자폭과도 같은 행위.

콰광!

작열하는 불꽃이 상대는 물론이고 나까지 동시에 휘감는다.

프로텍션 매직으로 소모되는 마력이 너무 방대해서 수습이 안 될 지경이다. 리치의 마력 결정을 세 개나 흡수했는데도 불구하고, 순간적으로 머리가 텅 비는 충격과 함께 모든 집중력이 파편처럼 흩어졌다.

"...."

하지만 여기서 정신줄을 놓을 수는 없다.

생명감지 마법 덕분에 제스의 숨통이 여전히 붙어 있는 게 느껴진다. 그러니 이놈을 죽이기 위해 당장 뭐라도 한방 더 먹여야 한다고!

그다음은 멀리 있는 파이렌만 제거하면 끝.

이미 힘을 너무 많이 써버렸지만, 그래도 상대가 혼자라면 어떻게든 처리 할 수 있겠지?

그런데 그렇게 생각한 바로 그 순간.

우웅!

먼저 파이렌에게 고정시켜 놓은 빛의 방패들이 순간적으로 소멸했다.

직접 보지 못했기 때문에 어떻게 소멸했는지는 모른다. 그냥 느낌만 왔을 뿐.

동시에 생명감지로 느껴지는 파이렌의 몸의 일부가 내 쪽으로 쭉 늘어났다.

이건 뭐 안 봐도 촉수겠지?

하지만 촉수가 아무리 길어도 녀석과 나 사이의 거리만 수백 미터인데 왜 저러는 걸까?

너무 궁금해서 녀석이 있는 방향으로 고개를 돌릴 수밖에 없었다. 거리가 멀어 정확히 보이진 않았지만, 녀석은 대충 10미터쯤 뻗은 촉수를 지면에 박아 넣고 몸을 더 뒤로 당기고 있었다.

마치 활대를 지면에 박아 넣고 활시위를 잡아당기는 것처럼.

그다음은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활시위를 놓은 순간의 속도가 얼마나 빠른지, 눈은 물론이고 생명감지로 반응하는 것조차 불가능했다.

이계 황자는 세상을 구하고 싶다 37화

11장 질투의 종말

엄청난 속도.

여기에 파이렌 자신의 엄청난 중량이 더해져 휘두른 칼날에는 대체 얼마나 강한 힘이 실려 있을까?

그리고 나는 저 칼이 내 몸을 반으로 쪼개기 전에 시간 맞춰 빛의 방패를 시전할 수 있을까?

하지만 이 모든 의문에 답을 내려준 건 내가 아니었다.

채애애앵!

검과 검이 충돌하는 소리.

위이이이잉!

그 뒤로 공회전 소리 같은 기묘한 소음이 울렸다. 이게 뭔진 모르지만, 어쨌든 하얀 갑옷을 입은 기사가 번개같이 달려와 파이렌의 공격을 대신 막아 주었다.

"내 중량검이 하루에 두 번이나 막힐 거라곤 상상도 못했군. 그것도 진동검(振動劍) 따위에게."

기사의 검은 실제로 미세한 진동을 일으키고 있었다. 기사는 짓누르는 파이렌의 힘을 온몸으로 받아내며 코웃음을 쳤다.

"역시 명불허전입니다. 나이트 파이렌."

"오랜만이군. 나이트 다비."

"고작 며칠 못 봤는데 많이 달라지셨군요. 원래 있던 팔다리는 어따 팔아먹고, 웬 징그러운 문어발 같은걸 달고 계십니까?"

"말투가 불쾌하군. 역시 출신이 천한 놈은 입도 더러운 건가?"

파이렌도 지지 않고 트래시 토크로 되받아쳤다. 어? 그러고 보니 진짜 다비네?

나이트 다비.

제국에 세 명뿐인 나이트 마스터 중 하나.

그리고 태어난 곳이 바로 그 베리트 지방이다. 말하자면 내가 미친 황자 루트를 진행한 목적 그 자체라고 할 수 있지.

근데 다비는 백기사단 소속 아니었나?

백기사단은 지금쯤 북쪽 국경에서 이종족연합과 대치하고 있을 텐데? 얘가 왜 지금 여기있는 거야?

"언젠가 이런 날이 올 줄 알았지."

파이렌은 순간적으로 지면을 박차며 다비와의 거리를 벌렸다. 다비는 칼끝으로 적을 겨누며 나지막한 목소리로 내게 말했다.

"무사하셔서 다행입니다. 클로드 황자님."

"나이트 다비...."

"그냥 다비라고 불러주십시오."

비록 투구에 가려있지만, 과거 무수히 마주했던 다비의 얼굴이 눈에 선했다.

연한 갈색 피부에 마른 얼굴, 가늘고 깊은 눈과 호리호리하지만 탄탄한 근육으로 꽉 찬 몸.

문제는 지금 다비가 백기사단이 표준으로 제공하는 중급 마갑을 착용 중이라는 것이었다. 반면 상대인 파이렌은 자기 전용으로 제작한 최상급 마갑을 입고 있고.

서로가 동일한 실력이라 가정하면 이것만으로도 낼 수 있는 힘의 차이가 두 배 이상이다. 나는 예상 밖의 지원군에 기뻐하면서도 그것을 지적하지 않을 수 없었다.

"다비? 그 마갑 중급인데 괜찮겠어? 상대가 저 파이렌인데?"

"아쉽지만 상급 마갑을 근무지에 놓고 오는 바람에.... 하지만 괜찮습니다. 모자란 힘은 기술로 커버할 수 있으니까요."

-모자란 힘은 기술로 커버할 수 있습니다.

일종의 청각적인 데자뷰가 귓가를 울렸다. 난 지금까지 저 말을 대체 얼마나 많이 들었을까?

"그래도 힘의 차이가 너무 큰 거 아냐? 심지어 저건 그냥 파이렌이 아니라 괴물이 된 파이렌인데."

"괴물이라.... 제가 봐도 그런 것 같습니다. 하지만 저런 몸으로 변한 건 기사의 싸움에 있어 오히려 마이너스입니다."

"엥? 어째서?"

"괴물은 기사가 될 수 없습니다. 혹시 모르니 승부를 좀 서둘러야겠군요. 황자님께서는 그동안 또다른 괴물의 숨통을 끊어 주시기 바랍니다."

할 말을 다한 다비는 주저 없이 적을 향해 몸을 날렸다. 동시에 파이렌은 기다렸다는 듯이 상대를 향해 온갖 나이트 스킬을 퍼부었다.

먼저 파이렌의 전가의 보도와 같은 다중풍압검이 그물처럼 쏟아진다.

그 뒤로 토네이도를 연상시키는 폭풍검(暴風劍)이 날아들었으며, 연달아 지면을 타고 흐르는 파형검(波形劍)이 온 땅을 뒤덮었다.

하지만 다비의 돌진엔 거침이 없었다.

먼저 최소한의 칼놀림으로 그물에 작은 틈을 만들어 돌파했고, 코앞까지 육박한 회오리는 번개 같은 몸놀림으로 후퇴했으며, 그 뒤로 지면을 타고 쏟아지는 충격파는 지면을 박차고 멀리뛰기처럼 점프로 피해 뛰어넘었다.

그 모든 게 정말 한순간에 벌어졌다. 하지만 모든 걸 돌파한 다비를 기다리고 있던 건 파이렌의 혼신을 다한 투구 깨기였다.

부웅!

한순간이나마, 정말로 다비의 투구가 반으로 쪼개지는 줄 알았다.

하지만 다비의 몸은 이미 그곳에 없었다. 온몸이 흐느적거리며 무너지는 것처럼 보이는 순간, 어느새 적의 배후로 미끄러지듯 파고들며 검을 휘두르고 있었다.

"이 따위 것!"

채애애애앵!

파이렌도 급하게 몸을 회전하며 다비의 검을 받아냈다. 다비는 맞닿은 상대의 검을 노려보며 뭔가를 중얼거렸다.

"더 강하고, 더 빨라지셨습니다."

"당연하지! 난 이제 새로운 존재로 다시 태어났다!"

"하지만 몸에서 기사의 움직임이 사라졌습니다."

"그게 뭐 어쨌다고? 내 새로운 몸은 인간에겐 불가능한 동작이 가능하다!"

동시에 파이렌의 왼팔에서 다비의 목덜미를 향해 촉수가 솟구쳤다.

다비는 그것을 보지도 않고 가벼운 발놀림으로 피했다. 그리고는 파이렌의 옆구리를 향해 올려치듯 검을 휘둘렀다.

"어딜!"

파이렌도 즉각 검을 세워 막으려 했다. 그런데 두 개의 검이 서로 충돌하려는 순간, 검을 쥔 다비의 손목이 마치 사라진 것처럼 강하게 흔들렸다.

우우우웅!

한순간 다비의 검이 두개로 늘어난 것처럼 보였다. 파이렌은 급하게 둘 중 하나의 검로를 차단했지만, 실제로 실체를 가진 건 차단하지 못한 다른쪽 검이었다.

촤악!

그리고 파이렌의 목이 날아갔다.

"분열검(分列劍)...."

투구 째 날아간 파이렌의 머리가 바닥에 떨어져 뒹굴었다. 다비는 칼에 묻은 피를 가볍게 털고는 다시 칼집에 집어넣었다.

"이런 간단한 속임수에 넘어가다니. 역시 괴물은 기사가 될 수 없는 모양입니다."

그리고는 내 쪽으로 빙글 몸을 돌렸다. 그 모든 걸 마무리까지 지켜본 나는, 그제야 멈췄던 숨을 몰아쉬며 근처에 쓰러져 있는 제스를 향해 작은 불꽃을 내리꽂았다.

화륵!

동시에 거대한 화염의 날개가 폭발하듯 퍼지며 제스의 큼직한 몸을 휘감았다. 처음에는 새빨갛게 물들었던 녀석의 몸은, 잠시 후 까맣게 타들어가며 점점 형체를 잃기 시작했다.

* * *

툭.

불에 탄 광전사가 사라진 곳에 초라하게 말라붙은 제스의 몸뚱이가 떨어졌다.

물론 숨은 끊어진 상태다. 녀석의 뒤집힌 눈을 보고 있자니... 기분이 매우 착잡해지는구만다.

"대체 뭔 일이야? 지금까지 아홉 번 반복하는 동안 너 이런 적 없었잖아...."

"세상에, 그 괴물의 정체가 섭정 전하였던 겁니까?"

옆으로 돌아온 다비가 투구를 벗으며 조심스럽게 물었다. 난 웅크렸던 몸을 일으키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런가봐. 시체가 남았으니.... 대체 어떻게 하면 사람이 이런 괴물로 변한데? 혹시 전에 이런 거 본 적 있어?"

"없습니다. 그런데 황자님께서는 정말 담대하시군요. 이런 괴물을 처음 보시고도 침착하게 맞서 싸우시다니."

그야 처음 본 게 아니니까. 오히려 그런 것치고는 엄청 놀란 편이라고.

"목이 날아가기 직전이라 놀랄 틈도 없더라. 아무튼 도와줘서 고마워. 하마터면 죽을 뻔했네."

"곁에서 싸울 수 있어 영광입니다."

다비는 가슴에 주먹을 얹으며 한쪽 무릎을 꿇었다. 그런데 생각해 보니 파이렌과 다비의 실력은 거의 비슷하지 않았나?

"그쪽도 순식간에 끝냈네. 둘 다 나이트 마스터 아니었어? 원래 기사의 싸움은 그렇게 빨리 끝나는 거야?"

"예전의 파이렌이었다면 쉽지 않았을 겁니다."

"그런데?"

"하지만 지금은 괴물이 되었죠. 차라리 괴물을 상대하는 편이 진짜 나이트 마스터를 상대하는 것 보다 덜 까다롭습니다. 파이렌은 괴물이 되면서 움직임에 기사 특유의 섬세함이 완전히 사라졌습니다."

"강해졌지만 잃은 것도 있다?"

"그것도 평생 갈고 닦은 감각을 잃은 겁니다. 무턱대고 나이트 스킬을 퍼붓기만 한다고 대수가 아닙니다. 제가 걸은 간단한 속임수도 알아채지 못하더군요."

몸을 일으킨 다비는 허공에 손목을 흔들며 쓴웃음을 지었다.

그런데 그 '간단한 속임수'란 게 분열검 아니었나? 나이트 마스터만 쓸 수 있는 최고난이도의 기술?

"방금 그건 분열검이라 합니다. 검이 여러 개로 늘어나는 것처럼 보이지만, 실체가 있는 건 아니고 그저 눈속임일 뿐입니다."

"나야 잘 모르지만.... 암튼 대단하네. 진짜 나이트 마스터는 다르구나."

"이런 두 괴물을 상대로 끝까지 버티신 황자님이야말로 대단하십니다. 아슬아슬하게 도착한 덕에 황자님의 전투를 많이 보진 못했습니다만...."

다비는 사실상 폐허가 된 청사자궁을 둘러보며 혀를 내둘렀다.

"기사도 아닌데 이렇게 싸울 수 있다는 게 놀라울 따름입니다. 마법사는 화력은 강력하지만 자기 몸을 지키는 능력이 부족하니까요."

"대신 난 신성마법도 쓸 수 있으니까. 근데 다비?"

"네, 황자님."

"어쩌다 이 한밤중에 여기까지 온 거야? 너 백기사단 아니었어?"

답을 알면서도 이해할 수 없다는 얼굴로 질문했다. 다비는 눈을 잠시 감았다 뜨며 말했다.

"저는 황자님께 갚을 수 없는 은혜를 입었습니다."

"응? 우리 오늘 여기서 처음 본 거 아니야?"

"저는 베리트 출신입니다."

그 한마디로 모든 설명을 대신할 수 있다. 하지만 이해가 안 간다는 표정으로 한참동안 고민하는 연기를 했다.

"베리트 출신이 왜.... 아! 혹시 내가 탈리스만 백작 때려잡은 거 때문에?"

"소문에는 성 지하 감옥에 가두고 죽을 때까지 굶기라고 명령을 내리셨다 하더군요."

"그 녀석도 밥 굶는 게 괴로운지 알아야지. 근데 진짜 굶어 죽었대? 나 여기 갇혀 있느라 최근 이야기는 못 들었는데."

"저도 거기까진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그것만으로도 충분합니다."

다비는 여태껏 내가 봤던 그 어느 때보다 행복해 보이는 얼굴로 웃었다. 나는 잘 모르겠다는 얼굴로 머리를 긁적였다.

"솔직히 그땐 머리가 홱 돌아버린 바람에...."

"그리고 식량을 풀어 베리트의 영주민들을 구제하셨다는 소식도 들었습니다."

다비는 눈을 감으며 고개를 깊이 숙였다.

"황자님 덕분에 고통 받던 영주민이 목숨을 구할 수 있었습니다. 베리트를 대표해서 진심으로 감사드립니다."

"탈리스만 같은 놈 배불리기 싫어서 곳간을 열어버린 것뿐이야. 그럼 고맙다고 하려고 여기 온 거야?"

"이번 일은 베리트 영주민에겐 크나큰 은혜지만, 반대로 많은 귀족들이 황자님께 반감을 가질 거라 생각했습니다."

순간 고개를 든 다비의 눈이 무섭게 번뜩였다.

"그래서 황자님이 청사자궁에 유폐되셨다는 소식을 듣자마자 근처 숲에 잠복해 있었습니다. 얼마 전 알베르트 황자님이 녹사슴궁에서 암습을 당해 행방이 묘연하다는 소문도 있었고 말입니다."

"그러니까 처음부터 날 지켜주러 온 거다?"

"그렇습니다."

다비는 다시 고개를 숙였다. 난 까치발을 들고 다비의 어깨를 두드렸다.

"덕분에 살았어. 이번에 진짜 죽는 줄 알았거든."

"만약 황자님이 돌아가셨다면 전 평생 동안 후회했을 겁니다. 그런데...."

다비는 고개를 돌려 멀리 황궁 방향을 돌아보았다.

"지금 대규모의 인원이 이쪽으로 몰려오고 있습니다. 대충 100명 정도. 이 속도면 앞으로 5분이면 도착하겠군요."

"5분 거리에 있는 사람들의 숫자를 알 수 있어? 나이트 마스터는 대단하구나."

"작은 재주일 뿐입니다. 아무래도 기사단인 것 같군요."

난리를 감지한 친위 기사단이 드디어 출두한 모양이다. 나는 제스의 시체로 눈을 돌리며 골치 아픈 표정을 지었다.

"형님의 시체를 이대로 놔두는 것도 곤란한데. 이 난리를 대체 어떻게 수습하지?"

"감히 제 의견을 말씀드리자면, '섭정 전하께서 자신의 형제를 죽이기 위해 괴물로 변신해서 직접 나섰다가 실패하고 목숨을 잃었다.' 이런 이야기가 퍼지면 제국 정부는 끔찍한 혼란에 빠질 겁니다."

"내 생각도 그래. 당장은 숨기는 게 좋겠어. 비밀 지켜줄 거지?"

고개를 들어 올려다보며 가볍게 물었다. 다비는 놀란 눈을 몇 번 깜빡이며 다시 한번 무릎을 꿇었다.

"저는 황자님의 명에 무조건 따르겠습니다."

크 반응 좋고. 표정만 봐도 이미 완전 내 사람이구만.

나는 고개를 끄덕이며 제스의 시체에 적당한 위력의 화염 마법을 날렸다.

화륵!

이미 바짝 말라있던 시체가 순식간에 잿더미로 변했다. 나는 바람 마법으로 잿가루를 멀리 흩뿌리며 고개를 돌렸다.

"그러고 보니 파이렌도 처리해야지. 그쪽으로 가자."

"네. 황자님."

다비는 먼저 파이렌의 시체로 달려가 녀석의 갑옷을 벗겼다. 그리고는 눈살을 찌푸리며 뒤늦게 도착한 내게 말했다.

"이건 제 예상보다 훨씬 끔찍하군요."

파이렌의 시체는 마치 물에 불은 오징어를 연상시켰다.

팔다리 쪽의 촉수가 빠르게 오그라든 덕에 얼핏 커다란 불가사리처럼 보이기도 한다. 나는 근처에 떨어진 잘린 투구와, 그 안에 들어있는 오그라든 살덩이를 보며 헛구역질을 했다.

"대체 언제부터 갑옷 속이 이딴 걸로 채워져 있었던 걸까?"

"적어도 7일 전까지는 아니었습니다."

"응?"

"저는 7일 전에 휴가를 내고 엠퍼로드로 돌아와 섭정 전하를 알현했습니다. 그때 섭정 전하를 호위하고 있던 파이렌은 제가 기억하던 파이렌과 같은 느낌이었습니다."

다비가 차분하게 대답했다. 내 기억에도 파이렌은 배신자이긴 했지만 적어도 끝까지 인간의 모습을 유지하고 있었다.

아무래도 그 사이 후원자가 다시 접근해서 '소원'이란 형태로 농간을 부린 모양인데....

대체 어째서?

지난 아홉 번의 회귀 동안 이런 일은 한 번도 없었다. 제스도 파이렌도 마지막까지 인간의 모습 그대로 저항하다 죽었다.

그때와 지금의 다른 점은 뭘까?

-너만 죽이면!

물론 나겠지.

아까 싸울 때는 정신이 없어서 답을 못 내렸지만 지금은 알 것 같다. 내가 너무 급속도로 강해진 게 녀석들의 경계심을 자극한게 아닐까?

이건 예상 못한 변수가 아닐 수 없다. 내가 최적화 된 루트로 강해지는 만큼, 인류의 배신자들에게도 기존에 없던 변화가 생긴 거니까.

"그렇다면 다른 녀석들도...."

"네? 방금 뭐라 말씀하셨습니까?"

다비가 내 혼잣말에 재깍 반응했다. 나는 불어터진 오징어를 불로 태우며 급하게 말을 바꿨다.

"다른 녀석들이 알기 전에 이것도 치워버려야겠다고. 으, 생긴 것치고는 불에 잘 타네.... 근데 뭐해?"

그사이 다비는 파이렌의 갑옷을 다시 사람의 형태로 조립하고 있었다. 일을 끝낸 다비는 손에 묻은 먼지를 털며 설명했다.

"부족한 제 의견입니다만, 이번 일은 아무래도 파이렌에게 모든 죄를 뒤집어씌우는 게 좋겠습니다."

"파이렌한테?"

"네. 갑옷 속에 시체가 없는 건 황자님의 마법이 그만큼 강력했다 하면 다들 수궁할 겁니다."

곧바로 머리속이 팽팽 돌았다. 확실히 이렇게 처리하는게 좋겠는데?

" 좋은 생각이야. 뒷수습은 좀 피곤하겠지만."

"제가 여기 있었다는 게 밝혀지면 더 피곤해질 겁니다. 그러니 저는 이만 물러나겠습니다."

멀리서 갑옷들이 철컹거리는 소리가 희미하게 울렸다. 나는 몸을 돌린 다비를 보며 질문했다.

"안 들키고 도망칠 수 있겠어?"

"물론입니다. 설사 들킨다 해도 이곳엔 저를 막을 사람이 없습니다."

확실히 그렇긴 하네. 나는 쓴웃음을 지으며 가볍게 손을 흔들었다.

"나중에 사례할 테니 내 저택에 한번 들려. 어딘지 알지?"

"황공한 말씀입니다. 사례는 제가 드려야 마땅하죠. 어쨌든 반드시 찾아뵙겠습니다."

다비는 살짝 고개 돌려 웃은 다음 무너진 청사자궁 뒤편으로 순식간에 모습을 감췄다.

그 사이, 나는 반대편에서 무수한 횃불과 함께 달려오는 황제 친위 기사단의 위용을 보며 한숨을 내쉬었다.

"겨우 행차하셨구만. 이걸 어떻게 둘러대야 잘 둘러 댔다고 소문이 나려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