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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계 황자는 세상을 구하고 싶다 180화

53장 역린

"저쪽이다!"

"6번 경비대! 돌격!"

"7번대도 돌격!"

경비대라.

녀석들이 함성을 지르며 돌진하는 순간, 손에 쥔 창끝에 빛이 번뜩였다.

딱 봐도 평범한 무기는 아닌 것 같다. 덩달아 녹색 붕대 위로 검은 그림자를 뒤덮기 시작했다.

"그림자 갑옷... 급이 높은 것 같진 않은데."

내가 쓰는 그림자 갑옷에 비하면 명백히 허술해 보인다. 그나저나 달려오는 속도가 심상치 않은데?

종족 : 마법생물.

현재 힘 : B+

현재 그림자 : B+

다들 힘 좋구만.

기사로 치면 나이트 커맨더 급이다. 여기에 그림자 능력까지.

그런데 녀석들의 그림자 갑옷은 결코 B+등급에 어울리지 않는 수준.

그렇다면 다른 그림자 능력을 또 가지고 있다는 뜻이다. 나는 미리 깔아놨던 영역을 지우며 녀석들을 새로운 함정으로 끌어들였다.

"지금!"

한 녀석이 소리친 순간, 멀리서 달려오던 스무 명의 경비대가 지면 속으로 쑥 파고들었다.

정확히는 지면에 깔린 그림자 속으로.

"그림자 잠입...."

지금은 한밤중.

고로 그림자 결계를 깔지 않아도 어디든 잠입이 가능하다. 아무리 도시가 빛나고 사방에 불길이 치솟고 있다 해도.

물론 그게 가능하다는 전제 조건 아래서 말이지만.

금제. 그림자 능력.

우웅!

동시에 온 사방으로 투명한 영역이 펼쳐나갔다.

"컥!"

동시에 바로 근처에 깔린 그림자 위로, 수십 명의 경비대들이 마치 무를 뽑듯 쑥쑥 뽑혀 나왔다.

"크악...."

"그, 그림자가...."

녀석들은 몸을 제대로 가누지 못한 채 바닥을 뒹굴었다.

처음엔 왜 저러나 잠시 경계했는데, 아무래도 그림자 잠입 도중에 강제로 끌려 나오면 몸에 엄청난 충격이 떨어지는 모양.

이건 나도 처음 알았다. 혹시 모르니 이쪽도 조심해야지.

"그나저나 이번엔 좀 까다로울 것 같았는데...."

다른 부가능력은 제외하더라도, 순수하게 나이트 커맨더 급의 신체능력을 가진 적이 무려 서른 명.

하지만 이번에도 힘은 전혀 들지 않았다.

"하나."

"컥!"

"둘."

"크악...."

"셋."

"하, 하위차원 인간 따위가...."

나는 충격에서 헤어나지 못하는 녀석의 멱을 하나씩 친절하게 따 주었다.

"스물일곱, 스물여덟, 스물아홉.... 아, 풀렸나?"

그때 마지막 남은 놈이 마비에서 풀린 듯, 잽싸게 몸을 일으키며 창을 휘둘렀다.

"이런 사악한 수를 쓰다니!"

"사악?"

후들거리는 창끝에 매가리가 전혀 없다.

이 정도는 정령빙의 없이도 충분히 상대할 수 있다. 나는 녀석의 창끝을 가볍게 피한 다음, 곧장 품속으로 파고들어 명치에 검을 찔러 넣었다.

푸확!

"사악은 좀 별로네. 아직 좀 더 노력해야겠어."

"컥...."

이번엔 영생의 핵을 정확히 관통했다.

녀석은 마치 수챗구멍을 뽑기라도 한 듯, 찔린 부위를 중심으로 안쪽으로 말려 들어가며 오그라들기 시작했다.

"...영역이 진짜 최고구나."

나는 주변에 펼친 영역을 거두며 고개를 끄덕였다.

이거 아니었으면 지금까지 대체 얼마나 많은 수고가 들었을까?

걱정되는 건 영역술 역시 차원능력의 한 분파라는 것.

그리고 저 사이크 놈들 또한 일부는 차원 능력을 쓸 수 있다. 예전에 후원자들이 그랬으니까. 어쩌면 영역술을 본격적으로 쓰는 놈들도 나타나지 않을까?

팟!

그때 하늘에서 환한 빛이 쏟아졌다.

"오...."

고개를 들자, 하늘에 비행선이 소리 없이 날아오는 게 보였다.

정확히는 수송헬기에 가까운 형상인데...

"...엄청 크네."

초대형이다.

어찌나 큰지, 작은 빌딩 하나가 통째로 날아오는 듯한 느낌.

동시에 비행선의 문이 열리며 검은 갑옷을 입은 기사들이 공수부대처럼 아래로 몸을 던지기 시작했다.

"거대 갑옷...."

전에 위칸을 침공했던 부대에 섞여있던 바로 그 거대 갑옷이다.

덩치가 얼마나 큰지 한 녀석이 다 빠져 나오는 데에도 몇 초씩 시간이 걸린다.

그럼 굳이 보고만 있을 필요는 없잖아? 나는 곧바로 양손에 템페스트를 만들어 비행선을 향해 발사했다.

불꽃이 휘몰아치는, 화염의 템페스트를.

그러자 불꽃놀이가 시작됐다.

콰과과과과과과과과과광!

거대한 화염의 날개가 어둠을 가르며 밤하늘을 수놓는다.

격추된 거대 비행선이 더 커다란 유폭을 일으키며, 아래쪽에 있던 무너진 건물들을 또다시 들쑤시기 시작했다.

동시에 폭발의 기류가 하늘로 치솟으며 거대한 불꽃 기둥을 만들었다.

"와...."

이건 내가 예상한 위력보다 몇 배는 강하다.

아마도 비행선 내부에 폭발성 물질이 대량으로 들어 있던 모양. 나는 멀리서도 화끈거리는 열기를 느끼며 곧바로 정령의 이름을 불렀다.

"룩카르, 지금 빙의해 줘."

-10분이다.

순간 룩카르의 목소리가 뇌리를 울리며 온몸이 전율했다.

-계약자여, 네가 빙의를 버틸 수 있는 시간은 대략 10분이다. 부디 잘 조절하길 바란다.

"10분이라...."

강렬한 고통이 몸을 헤집어 놓기 시작했다. 마치 돌덩이로 된 산사태에 휩쓸린 느낌.

하지만 고통은 잠시였다. 그나저나 10분이라니, 전에는 3분도 못 버티던 시절이 있었는데, 확실히 몸이 튼튼해졌구만.

그사이 온몸에 투명한 바위 같은 형상이 덮여 있었다. 이것만으로도 어지간한 마갑 이상의 내구력을 확보할 수 있다.

비록 정령왕 급의 빙의에 비할 바는 아니지만, 그래도 룩카르 하나만 해도 증폭되는 힘이 엄청나다.

-거대 갑옷은 덩치에 비해 움직임이 엄청나게 빠릅니다. 물론 괴력 또한 엄청난 수준이었습니다.

문득 투사들이 귀띔해 준 이야기가 떠올랐다.

화력이야 차원검으로 커버가 가능하지만, 속도는 지금 이대로는 어쩔지 모른다.

그래서 룩카르와 빙의한 것이다.

쾅!

한순간 지면을 박차며, 먼저 뛰어내려 목숨을 건진 두 거대갑옷을 향해 뛰어들었다.

"...."

"...."

녀석들은 움푹 팬 도로 위에 덩그러니 선 채, 아직도 폭발이 가시지 않은 비행선의 잔해를 바라보고 있었다.

고맙게도.

지이이잉!

영생의 핵을 서른 개나 먹인 칼날이 투명한 빛을 뿌리며 공간을 가른다.

조금 앞에 있던 왼쪽 거대갑옷은 그 일격에 복부가 반으로 갈라졌다.

하지만 조금 뒤에 있던 오른쪽 녀석은, 놀랍게도 한 템포 빠르게 지면을 박차며 차원검을 뛰어 넘었다.

그리고는 내 쪽을 향해 그 육중한 몸을 그대로 들이 받았다.

쿠궁!

또다시 지면이 박살나며 사방으로 돌조각이 튀어 올랐다. 미리 자리를 피한 나는, 바닥에 대자로 엎어진 녀석의 다리를 향해 반사적으로 칼을 휘둘렀다.

콰직!

칼날이 갑옷을 한 뼘쯤 파고들었다.

순수한 내 힘만 가지고는 이게 한계다. 나는 즉시 칼을 뽑은 다음, 칼날에 새롭게 영생의 핵 다섯 개를 먹여주며 머리 위로 칼을 치켜들었다.

바로 그때, 내 눈에 뭔가 끔찍한 것이 보였다.

피.

칼날이 파고든 틈으로 붉은 피가 흘러나온다.

동시에 그 작은 틈 안으로 머리가 반쯤 잘린 인간의 모습이 스쳐 보였다.

"...."

나는 그대로 치켜든 검을 내리 그었다.

지잉!

그것으로 끝이었다.

거대한 몸이 정확히 사선으로 쪼개지며, 안에 들어 있던 무수한 인간들의 '파편'이 밖으로 쏟아졌다.

개중에는 절단면을 피해 목숨을 구한 인간들도 여럿 있었다.

하지만 녀석들은 이미 평범한 인간이 아니었다.

"반란군...."

신체가 변이된 녀석들은 온몸에 크고 작은 촉수가 돋아 있었다.

"크르...."

동시에 광기어린 눈을 번뜩이며 내 쪽으로 몸을 던졌다.

전부 정리할 때 까지 5초쯤 더 걸렸다.

추가로 처음에 허리를 잘랐던 거대갑옷의 내부를 정리하는데도 10초의 시간이 더 걸렸다.

"후우...."

바닥에 흥건한 핏물을 보자 절로 한숨이 나왔다.

이런 것을 기대하고 사이크 차원으로 넘어온 건 아닌데.

하지만 사이크 차원 놈들이 반란군을 이런 식으로 활용하기 시작한 이상, 결국 내가 감수해야 할 일이었다.

그때 이그니스의 목소리가 머릿속을 울렸다.

-클로드, 나 슬슬 돌아가 봐야 할 것 같다.

동시에 멀리 동쪽에서 불기둥이 솟아올랐다.

진짜 먼 곳이었는데도 붉은 빛이 선명하게 보였다. 소환 시간이 다 돼서 마지막으로 크게 한탕 하고 돌아간 걸까?

그런데 그 불빛에 잠시 눈을 빼앗긴 사이, 또 다른 눈부신 빛이 내 주변을 휘감았다.

뇌전.

파지지지지지지지지지직!

거대한 번개가 채찍처럼 내리 꽂힌다.

그것도 하나가 아니라 동시에 수십 가닥. 나는 정통으로 한발을 얻어맞은 뒤에야 프로텍션 매직으로 몸을 포호할 수 있었다.

파지지지지직!

파지지지직!

파지지지지지지지직!

끝도 없이 쏟아진다.

마치 온 세상이 섬광에 휩싸인 느낌.

어찌나 맹렬한지 눈을 뜨기 힘들 지경이다. 그사이 걸레짝처럼 너덜대는 프로텍션 매직을 재차 발동하며, 나는 새로운 영역을 최대한 먼 곳까지 펼치기 시작했다.

금제. 마법.

파지지지지지지지직!

하지만 뇌전은 멈추지 않았다.

뭐지 이건?

분명 누군가 마법을 쓰고 있을 텐데 영역이 말을 듣지 않는다.

혹시나 해서 직접 마법을 발동해 봤는데.... 정작 나는 잘 통하는구만. 발동할 수 있는 건 프로텍션 매직 같은 신성마법뿐이다.

그렇다면 적은 영역 밖에 있다.

지금까지 영역의 범위를 정확히 잰 적은 없다.

하지만 못해도 반경 500미터는 넘을 텐데, 그렇다면 적은 그보다 먼 곳에서 이런 말도 안 되는 마법을 정확히 꽂아 넣고 있단 말인가?

"근데.... 번개 마법을 이런 식으로 낭비할 바에는.... 차라리 템페스트를 쓰는 게...."

날 직접 때리는 번개 줄기보다, 오히려 주변의 맨땅을 두드리는 번개가 훨씬 더 많다.

한 마디로 낭비가 심하다는 뜻.

그런데 마침 고개를 치켜든 순간, 멀리 남쪽 하늘에서 휘몰아치는 번개의 구체가 보였다.

바로 템페스트.

그것도 동시에 세 발이었다.

"...!"

순간 귀가 뻗어버렸다.

그때 처음 알았다. 가까운 곳에서 너무 큰 소리가 터지면 청각이 마비된다는 걸.

아니면 그냥 고막이 터져버린 걸까?

프로텍션 매직을 초단위로 리필하며 동시에 실드 오브 라이트 다수를 전개, 어떻게든 몸에 직격이 뚫리는 건 막아냈다.

덩달아 회복마법으로 감전에서 오는 잔부상과 귀 안쪽의 상처를 치료.

그렇게 10여초가 지나자, 작열하던 번개들이 한꺼번에 자취를 감췄다.

그렇게 다시 세상이 고요해졌다.

그리고 멀리 박살난 도로 저편에, 선명한 붉은색 붕대로 몸을 감고 있는 사이크인 하나가 보였다.

"호, 여기까지 영역을 펼쳤단 말이야?"

녀석과의 거리는 최소 300미터 이상.

그런데도 목소리가 선명하게 귀를 파고들었다. 이건 또 무슨 재주를 부리는 거지?

"하위 차원이라고 무시할 게 아니군. 차원 능력을 다루다니. 누가 실수한 게 아니었어. 직접 차원 이동을 써서 이쪽으로 넘어왔던 거야."

녀석은 가벼운 걸음으로 내 쪽을 향해 다가왔다.

"이건 최초 아닌가? 위대한 게임으로 연결된 하위 차원에서 직접 상위 차원으로 넘어온 케이스?"

"...."

"집정관이 급하게 부른 이유가 있었군. 오랜만에 속도 좀 내봤네. 그런데 마법 금지라...."

녀석은 걸음을 멈춘 다음, 마치 허공에 피아노를 치듯 손가락을 두드리기 시작했다.

"게다가 손을 움직이는 것도 못 봤는데. 어떻게 된 거지? 아문 준비 없이 바로 영역을 펼칠 수 있다고? 그거 어떻게 하는지 알려 줄 수 있어?"

"...."

"시치미 떼긴. 너 들리잖아?"

물론 들리지만 대꾸하지 않았다. 대신 100여 미터까지 다가온 녀석에게 감정안을 사용했다.

종족 : 마법 생물

현재 힘 : S+

현재 마법 : SS

현재 그림자 : A+

현재 차원 능력 : SS

이런 건 처음 본다.

SS?

지금까지 S가 두 개 붙은 건 처음 봤다.

S+보다 한 등급 더 높다는 뜻일까? 아니면 중간에 SS-도 있는 걸까?

"그나저나 마법을 금지하다니 예리했어. 마치 내가 올 줄 알고 있었다는 듯이. 설마 이쪽 정보를 확보했나? 그래서 미리 최후의 결투를 준비하고 있던 건가? 훌륭해. 오랜만에 소름이 돋는 느낌이군."

미안하지만 착각이다

내가 영역으로 마법 금제를 건 이유는, 단순히 내 주변을 엄청난 마법들이 쏟아졌기 때문.

그나저나 저 녀석.... 영역 밖에서 마법을 쓰며 접근하다, 어느 순간 영역 안으로 들어와 마법을 쓰지 못하게 된 모양이다.

하지만 마법을 못 쓴다 해도, 당장 힘 스텟이 나이트 마스터 이상.

게다가 차원 능력도 SS급이다.

이건 뭘 뜻하는 걸까? 저 녀석도 주드만큼, 아니 그 이상의 영역을 펼칠 수 있는 걸까?

아니면 투사를 능가하는 결속술?

이계 황자는 세상을 구하고 싶다 181화

53장 역린

"그래봤자 테스트 다 끝난 거지만."

순간 녀석의 붉은 붕대가 검은 그림자로 뒤덮였다.

그림자 갑옷.

동시에 바닥에 깔린 그림자 속으로 몸을 감춘다.

그림자 잠입.

이 녀석 그림자 능력도 거의 최고였지? 어지간한 후원자들은 상대도 안 될 정도로?

하지만 이미 여러 번 상대한 패턴.

다만 기존의 마법 금지 영역을 거두고 새로 그림자 금지 영역을 깔 시간은 없다.

대신 군주의 눈으로 그림자 속의 흐름을 파악한 다음, 미리 녀석이 튀어나올 곳을 예측한다.

"빨라...."

그 먼 거리를 정말 순식간에 좁힌다.

동시에 내 왼편의 그림자 위로 솟아오른 순간, 타이밍을 맞춰 가볍게 검을 휘둘렀다.

지이이이잉!

차원검.

그것도 역대 가장 많은 영생의 핵을 소모해서 만들었다.

그 일격에, 녀석의 등 뒤에 있던 건물들까지 단숨에 쪼개졌다.

50미터쯤 베었을까?

하지만 가장 먼저 벤 녀석의 몸은 텅 비어 있었다.

속이 텅 빈 그림자 갑옷.

"...!"

반사적으로 몸을 돌린 순간, 반대편에서 시간차로 튀어나온 녀석의 주먹이 먼저 날아들었다.

죽는다.

본능적으로 느낄 수 있었다. 이걸 얼굴에 맞으면 뒤가 없다는 걸.

피해야 한다.

급가속이라면 가능할지도?

하지만 내가 펼친 영역 때문에 마법을 쓸 수 없는 상황. 대신 그림자 갑옷으로 몸을 덮으며 최대한 고개를 뒤로 젖혔다.

그러자 녀석의 주먹이 턱끝을 스치며 쇄골 사이에 내리꽂혔다.

투캉!

정말 그런 소리가 들렸다.

타격 순간 몸이 바닥에 꽂혔고, 그 뒤로 마치 물수제비처럼 지면을 튕기며 뒤로 날아간다.

"컥...."

그 한방에 몸을 감싼 그림자 갑옷 전체가 날아갔다.

그나마 룩카르와 빙의한 상태라 망정이지, 만약 맨몸이었다면 그림자 갑옷이고 뭐고 가슴 한복판에 주먹만 한 구멍이 뚫렸을 것이다.

"흐윽...."

물수제비가 멈췄는데도 한동안 숨이 쉬어지지 않았다.

하지만 일어나야 한다. 나는 반사적으로 몸을 일으키며 멀리 있는 적을 응시했다.

녀석은 주먹을 날린 모습 그대로 그곳에 멈춰 있었다.

"...이 정도 속임수도 간파 못 하는 건가?"

녀석은 그제야 주먹을 거두며 고개를 저었다.

"아까 말한 거 취소. 집정관도 엄살이 심하군. 고작 이런 녀석을 상대로 위기랍시고 우릴 부르시다니."

"넌...."

"난 결투자다."

녀석은 붉은 눈을 번뜩이며 웃었다.

"너희 하위차원이 만약 모든 침공을 막아낸다면, 그다음에 자연스럽게 나를 볼 수 있었겠지."

"...쿨럭."

순간 호흡이 돌아오며 입에서 피가 쏟아졌다. 나는 곧바로 회복마법을 걸며 영역을 거둬들였다.

마법 금지?

지금은 내가 더 위험하다. 급가속이라도 써야 저놈의 말도 안 되는 공격을 피하던가 하지.

대신 새로운 금지를 걸고 주변에 영역을 흩뿌릴 준비를 했다.

"호, 영역을 거두는 속도가 대단하군."

녀석은 한동안 내 모습을 살피다가 순간 또다시 그림자로 몸을 감싸며 몸을 날렸다.

"그렇다면 펼치는 속도도 빠르겠지?"

하지만 녀석이 더 빨랐다.

목표는 녀석이 그림자 잠입을 쓴 순간 영역을 펼치는 것.

하지만 녀석은 그냥 지면을 박차며 몸을 날렸고, 그와 동시에 이미 내 얼굴을 향해 주먹을 뻗고 있었다.

나는 급가속으로 반대편을 향해 몸을 날렸다.

우웅!

덩달아 방금 내가 있던 장소를 향해 검을 휘둘렀다.

소모한 영생의 핵은 모두 30개.

하지만 칼끝을 따라 갈라진 공간에 적은 남아 있지 않았다.

지잉!

이번에도 베어버린 건 적의 그림자 갑옷뿐.

"느려."

그새 갑옷을 남기고 본체만 잠입을 탄 녀석은, 어느새 내 배후에서 무릎을 들어 올리고 있었다.

콰앙!

동시에 내 몸이 공처럼 튕겨 날아갔다.

척추가 부러지지 않은 건 충돌 순간에 실드 오브 라이트를 전개했기 때문.

바꿔 말하면 녀석은 무릎 한 방으로 빛의 방패를 박살내고 내 몸을 수십 미터나 날려 보냈다는 뜻이다.

"...."

이번에도 숨이 쉬어지지 않았다.

두 발로 착지할 자신이 없어서 비행마법으로 몸을 띄웠다.

여기서 추격해 왔다면 위험했을 텐데.

녀석은 저번처럼 무릎을 들어 올린 자세로 가만히 그곳에 서 있었다.

"망할...."

엄청나게 강하다.

스텟만 보면 마법이 주특기인 거 같은데, 정작 마법을 쓰지 않고도 저만큼 싸울 수 있다니.

특히 그림자 갑옷을 허물처럼 자유롭게 활용하는 능력이 일품.

군주의 눈으로 어떻게든 흐름을 읽는다 해도 내 몸이 그 반응속도를 따라잡지 못한다.

"이럴 줄 알았으면 정령왕 하나는 남겨 놓을 걸 그랬나...."

가령 이그니스와 빙의했다면 충분히 싸워 볼 만하지 않았을까?

아무튼 당장은 녀석의 그림자 능력이 문제다. 저렇게 빠른데 트리키함이 더해지니 감당할 수가 없다

그래서 함정을 파는 대신, 대놓고 그냥 새 영역을 전개했다.

금제. 그림자 능력.

"호.... 이번엔 그림자인가?"

녀석은 마침 몸을 덮으려던 그림자가 사라지는 것을 확인하며 미소를 지었다.

"좋은 판단이다. 감당할 수 없는 것부터 치워버려야지."

"...."

"그런데 이 정도 영역이면 동시에 여러 개의 금지를 걸 수 있을 텐데, 왜 마법은 걸지 않는 거지?"

"...."

"혹시 그게 네 목숨 줄인가?"

바로 그 순간, 녀석의 몸에서 희뿌연 연기가 사방으로 쏟아졌다.

빠르게.

그리고 끝도 없이 엄청난 넓이로.

"...!"

순간 비행마법이 풀리며 지면으로 추락했다.

금제. 마법.

저 녀석도 영역을 펼치며 금제를 걸었다.

두 개의 영역이 동시에 공존하자 숨이 막히는 기분이다. 아니면 그냥 방금 얻어맞은 충격이 남은 것뿐인가?

"자, 이제 우리 맨몸으로 한번 싸워 보자고."

녀석은 그대로 지면을 박차며 몸을 날렸다.

50미터쯤 되는 거리가 한순간에 제로로 돌변했고, 내겐 녀석의 공격을 효과적으로 피할 수단이 아무것도 남아 있지 않았다.

그래서 왼팔을 들어 적의 공격을 받아내고.

콰직!

받아내고 나서 검을 휘두르려 했는데, 채 휘두르기도 전에 팔이 기역 자로 꺾이며 몸 전체가 뒤로 튕겨 날아갔다.

"이게 무슨...."

룩카르와 빙의했는데도 이 정도라니.

팔이 부러진 것을 넘어 절단될 지경이다. 나는 뒤로 튕겨 날아가는 사이, 급하게 드라이어드의 빙의를 추가했다.

동시에 강한 생명이 몸으로 스며들었다.

약간의 회복마법만으로도 부러진 팔이 빠르게 붙으며 원래 모습을 되찾는다. 나는 착지와 동시에 양손으로 검을 쥐며 영역을 거두어들였다.

"뭐지? 분위기가 달라졌군."

녀석은 이번에도 그 자리에 가만히 서 있었다.

마치 관찰하듯 살피는 시선이다. 결투자라고 했나? 왜 저런 식으로 싸우는 거지? 한 번에 계속 몰아붙였으면 이미 끝났을 싸움인데?

"무언가 내가 모르는 힘이 추가됐군. 그거 하나는 인정하지. 넌 아주 좋은 데이터다."

"...데이터?"

"우리 결투자는 모든 상황을 대비한다. 상대가 어떤 놈이 올라올지 모르니까."

그 와중에 몸 전체에 회복마법을 걸며 최대한 컨디션을 돌려놓았다. 결투자 역시 그런 내 모습을 뚫어져라 응시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니 넌 좋은 데이터다. 새로운 상황을 대비하게 해주니까. 지금도 그렇고. 분명 영역으로 마법 금지를 걸었는데도 마법을 사용하다니, 내가 모르는 새로운 형태의 마법인가?"

녀석의 질문에 대답할 필요는 없지만, 덕분에 중요한 정보를 확인할 수 있었다.

그렇다.

저 녀석이 이렇게 괴상하게 뚝뚝 끊으며 싸우는 이유는, 바로 내게서 최대한 많은 데이터를 뽑아내기 위함.

말하자면 날 가지고 놀고 있는 셈이다.

박살을 내는 거야 언제든지 가능한데, 그전에 어떻게 대응하는지 최대한 확인해 보고 싶다 이거지?

"이것 참...."

헛웃음이 절로 나온다.

과정은 다르지만 우리 둘 다 같은 짓을 하고 있던 셈.

나도 저 녀석이 뭐 하는 놈인지, 실제로 어떤 힘을 어디까지 발휘할 수 있는지 최대한 알아내고 싶었다.

"물론 죽일 수 있다면 더 좋았겠지만...."

"뭐라고?"

"나도 최대한 끌어내고 싶었다고. 여기 너 같은 놈이 몇 마리나 더 있는지 모르니까."

"...."

결투자는 잠시 침묵하다 웃기 시작했다.

"하, 하, 하하.... 너도 정보를 끌어내고 있던 거냐? 훗날을 위해? 최후의 결투를 대비해서?"

"그런 셈이지."

아직 그 최후의 결투가 뭘 말하는지는 정확히 모르지만.

"재밌는 녀석이군. 주제 파악이 잘 된 건지 안 된 건지.... 하지만 확보한 정보를 어떻게 전달할 생각이냐? 넌 이제 곧 죽을 텐데?"

그럴 리가.

내가 진짜 죽을 것 같았으면 승천을 써서 바로 도망쳤지, 굳이 지금까지 남아서 버티고 있었겠냐?

-그 붕대 감은 녀석들은 소리가 약점이다. 소리를 막으면 아무것도 인식할 수 없어.

나는 이틀 전에 태선에게 들은 이야기를 떠올리며, 마지막까지 감춰 놓았던 비장의 수를 꺼냈다.

금제. 소리.

한순간 온 세상의 소리가 사라진다.

영역의 금제는 내가 가지고 있는 모든 능력을 적용할 수 있다.

당연히 눈으로 보는 것도, 냄새를 맡는 것도, 소리를 듣는 것도 내가 가진 능력. 금제가 가능하다.

그리고 난 귀가 안 들려도 상관없다.

하지만 저 녀석은 어떨까?

"...!"

녀석은 순간 경직된 채 머리만 비틀기 시작했다.

무언가 엄청 불편하고 괴로워 보이는 모습.

역시 소리가 사라지면 주변을 인식할 수 없는 걸까?

"...."

하지만 아직 모른다.

나는 천천히 왼편으로 걸음을 옮기며 검속에 깃든 영생의 핵을 발동시켰다.

그래. 계속 가만있어라. 네가 아무리 통뼈라고 해도 이거 맞고 버틸 재간은 없을 테니까.

일단 맞출 수만 있다면....

그런데 그 순간.

우웅!

갑자기 귀가 뻥 뚫리며 주변에 소리가 들어왔고, 녀석은 내가 휘두른 차원검을 가벼운 몸놀림으로 피해냈다.

지잉!

"여차. 이건 위험하지."

녀석은 순간 갈라졌다 복구되는 공간을 돌아보며 미소를 지었다.

"이건...."

새로운 영역.

녀석은 한순간에 자신이 펼친 영역을 거두고, 다시 새롭게 영역을 만들어 펼쳤다.

금제. 차원능력.

"내가 말했지? 결투자는 모든 상황을 대비한다고."

영역술 또한 차원능력의 하위분류.

덕분에 내가 펼친 영역은 물론이고, 녀석이 만든 새 영역도 발동과 동시에 소멸했다.

"우리가 이런 걸 예상 못 했을 줄 아나?"

"...소리? 물론 약점이지. 우리는 모든 주변의 흐름을 청각으로 인식하니까."

결투자가 떠들어 대는 사이, 나는 또 한 번 소리의 금제를 걸고 영역을 전개했다.

우웅!

그러자 녀석은 또다시 차원 능력을 금지하는 영역을 전개했다.

우우우우웅!

"이거 영역 싸움으로 가자는 건가? 재미있군. 어디 한번 해봐라. 앞으로 몇 번이나 영역을 전개할 수 있지?"

여섯 번이다.

하지만 실제로는 한 번이 한계다. 그 이상 사용했다간 차원력이 부족해서 승천을 발동할 수 없게 될 테니까.

"...."

"왜, 해보라니까?"

"...."

"못하겠나? 겁쟁이 녀석. 하지만 그게 현명한 거지."

붕대 너머로도 녀석의 웃는 표정을 선명하게 확인할 수 있었다.

"우린 지는 수백 년간, 오직 최후의 결투 하나만을 위해 모든 시간을 바쳤다."

"...."

"최악의 상황을 연구하고 또 연구했지. 이런 약점에 대한 대처는 이미 초반에 다 끝내놨어."

"...그래?"

나는 함께 웃으며 최후의 수단을 발동했다.

"그럼 이것도 막아보시던가."

사일런스.

마치 구름으로 만들어진 회오리 같은 정령.

"지금 당장 풀파워로 침묵의 영역을 만들어."

-알겠습니다. 계약자님.

사일런스는 곧바로 온 세상에 침묵의 영역을 깔기 시작했다.

효과는 소리를 금지한 영역과 동일.

하지만 이건 또 다른 금지로 커버할 수 없다. 당장 차원능력이 아닐뿐더러, 저 녀석은 정령마법을 쓰지 못하니까.

자신이 쓸 수 없는 능력은 금제를 걸 수 없다.

그리고 내 예상은 정중했다.

"...!"

녀석은 갑자기 지면을 박차며 내가 있던 장소로 몸을 날렸다.

하지만 난 이미 그곳을 피한 상태. 빈곳에 주먹을 날린 녀석은 마치 섀도 스파링이라도 하듯 온 사방에 주먹을 날리기 시작했다.

아무 소리도 없이.

정확히는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는 거겠지만.

아무튼 혼자 발광을 하던 녀석은, 내가 차원검을 날리기라도 한 듯 갑자기 몸을 비틀며 뭔가를 피하는 포즈를 취하기 시작했다.

"...!"

그러다 순간 그림자 잠입을 사용, 지면 속으로 모습을 감췄다.

그리고 난 바로 그 순간만을 기다리고 있었다.

금제. 그림자 능력.

동시에 100미터쯤 떨어진 남쪽 도로의 구석에서 녀석이 튕겨지듯 솟구쳐 올랐다.

"...!"

아까 경비대 녀석들이 그랬듯, 결투자 역시 강제로 그림자에서 끌려 나온 순간 온몸을 비틀며 발작하기 시작했다.

하지만 차이가 있다면 회복력이었다.

"...!"

녀석은 몸을 비틀면서도 극적으로 두 다리로 버티고 선 다음, 이번에도 어딘가에서 날아올지 모르는 공격을 피하듯이 반대편 도로로 몸을 날렸다.

동시에 뻗어나간 차원검이 녀석의 뒤에 있던 폐허를 반으로 절단했다.

쳇. 진짜 피했네.

하지만 녀석은 자신이 뭘 피했는지도 모르고 있을 것이다. 계속해서 혼자 발작하듯 튀어 다니던 녀석은, 어느 순간 남쪽으로 방향을 잡고 전력을 다해 내달리기 시작했다.

엄청난 속도.

최상급 마갑을 입은 다비가 전력질주하면 저만큼의 속도가 나올까? 나는 곧장 마음속으로 사일런스에게 명령을 내렸다.

'사일런스? 어떻게든 저 녀석 쫓아가면서 침묵의 영역 속에 가둬. 네 힘이 다 떨어질 때까지.'

'네. 계약자님.'

사일런스는 즉시 녀석을 추격하기 시작했다. 얘도 명색이 바람의 정령, 날아가는 속도 하나는 꽤 빠른 편이다.

그러자 순식간에 내 주변에 있던 침묵의 영역이 사라졌다.

남은 것은 불에 타는 소리와 스산한 바람 소리.

그리고 폐허가 된 도시뿐이었다.

"후우...."

이제야 속이 좀 후련해지는 기분이다.

비록 저 결투자인가 하는 놈을 제거하진 못했지만.... 그건 다음으로 미뤄도 충분하다.

내겐 승천이 있으니까.

언제든지 다시 돌아와서 박살 낼 수 있다.

그렇다고 당장은 더 지체할 시간은 없다. 나는 그제야 룩카르의 빙의가 풀리는 것을 느끼며, 곧장 손바닥 위에 새로운 승천의 영역을 만들었다.

이젠 돌아갈 시간이었다.

이계 황자는 세상을 구하고 싶다 182화

54장 루네의 모험

"2번 거주구역에 적들의 침공이 시작되었습니다!"

기술 장교 하나가 헤드셋을 벗으며 소리쳤다. 상황실에 있던 반란군의 지도자, 비렉스는 충혈된 눈을 질끈 감으며 중얼거렸다.

"또 시작인가...."

이미 얼마 전 3번 거주구역이 변질자 들의 기습공격을 받고 전멸했다.

그곳에는 3만에 달하는 민간인이 살고 있었다. 확인 가능한건 그들 중 상당수가 생포된 채 적들에게 끌려갔다는 것 뿐.

한 번에 전멸당하는 걸 막기 위해, 반란군 본부와 각 거주구역은 서로 상당한 거리를 둔 채 흩어져 있다.

덕분에 곧장 지원 병력을 보내는 게 불가능했다. 물론 보낸다 해도 적들을 막을 가능성은 지극히 희박했지만.

'그런데 어째서?'

비렉스는 영문을 알 수 없었다.

변질자들의 반란군 사냥은, 보통 위대한 게임이 끝나고 새로운 영생의 핵을 확보하게 되면 그때부터 시작된다.

종족을 늘리기 위해서.

하지만 지금은 아직 차원 침공조차 시작되지 않은 상황.

'어쩌면 이미 승리를 예상하고.... 미리부터 인간을 확보해 두려는 건가?'

"결정을 내려주십시오, 사령관님. 2번 거주구역까지 잃으면 남은 건 이제 1번 거주구역 하나뿐입니다."

옆에 선 부사령관이 괴로운 얼굴로 비렉스를 다그쳤다.

"명령을 내리시면 지금 당장 전 병력을 스텔스 수송기에 태워 2번 거주구역에 보내겠습니다."

"그것은...."

비렉스는 눈을 감은 채 말을 흐렸다.

스텔스 수송기. 무려 100년에 걸쳐 가까스로 복원한 유물.

한 번에 500명의 병력을 수송할 수 있는 초대한 수송기로, 오래전 황금시대 때는 이런 대형 수송기를 수백 대씩 운용했다고 한다.

하지만 지금은 오직 한 대뿐.

그리고 말이 좋아 전 병력이지, 반대로 말하면 전 병력을 모아 봤자 이 수송선 한 대면 충분하다는 뜻이기도 하다.

'너무 많은 병력을 잃었어....'

거주구역을 쥐어짜서 어떻게든 병력을 충당한다 해도, 결국 전투가 벌어지면 대부분 신병들부터 먼저 쓸려나갔다.

그만큼 새로 태어나는 인간들은 체력과 정신력이 함량 미달이었다.

하지만 거주구역 자체가 사라지면 그것조차 더는 확보할 수 없게 된다. 한참을 고심하던 비렉스는 들리지 않게 한숨을 내쉬며 고개를 저었다.

"지원군은 보내지 않는다."

"사령관님!"

"지금 수송기를 보내 봤자 제때 시간을 맞추리란 보장은 없다."

"외람된 말씀이지만, 사령관님께서 그렇게 생각하고 싶으신 게 아닙니까?"

부사령관은 고통스런 얼굴로 항변했다.

"명령만 내리시면 지금 당장이라도 움직일 수 있습니다. 3번 거주구역이 무너진 그때부터 지금까지, 언제라도 수송기를 띄울 수 있도록 24시간 대기 중이란 걸 아시지 않습니까!"

"나도 안다. 부사령관. 하지만 변질자 놈들의 알드 차원 침공이 이제 정말 몇 달 남지 않았다."

"사령관님...."

"바로 그때가 총반격의 시간이다. 그것이 우리가 유일하게 알드 차원에 줄 수 있는 도움이기도 하고."

최근 수송선 복원에 속도를 높여 완성에 박차를 가한 것도 바로 그것 때문이다. 그러자 부사령관은 고개를 푹 숙이며 입술을 깨물기 시작했다.

"하지만 2번 구역에는 제 가족들이...."

"우리 모두가 그렇다."

비렉스는 부사령관의 어깨에 손을 얹었다.

"우리 모두가 거주구역에 가족들을 남겨두고 왔다. 3번 구역이 날아갔을 때 이미 수많은 병사가 가족을 잃었어."

"죄, 죄송합니다, 사령관님. 하지만 2번 구역에는 사령관님의 가족도...."

"우리가 약한 모습을 보이면 안 돼."

비렉스는 목소리를 낮추며 고개를 저었다.

"예외란 있을 수 없다. 우리 목표가 가족을 살리는 것인가? 아니면 변질자들의 파멸에 조금이라도 보탬이 되는 것인가?"

"크흑...."

부사령관은 눈을 질끈 감으며 그 자리에 주저앉았다. 덩달아 주변에 있던 장교들도 신음하며 웅성대기 시작했다.

그런데 바로 그때.

"고유 주파수 확인! 클로드입니다!"

상황실 구석에 있던 정보장교 하나가 벌떡 일어나며 소리쳤다.

"방금 클로드의 차원 진입을 확인했습니다!"

"뭣이? 어디냐!"

"위치는 아직 정확하게 특정할 수 없지만... 대략 하이시티 중앙! 아마도 전에 출몰했던 주경기장으로 추정됩니다!"

동시에 상황실에 있던 모두가 벌떡 일어나며 소리를 지르기 시작했다.

"클로드!"

"우와아아아아!"

"또 왔다고? 그 하위차원의 인간이?"

"세상에! 그 녀석 대체 뭐 하는 놈이야! 만세!"

그야말로 절묘한 타이밍이 아닐 수 없었다. 비렉스는 몇 달 전, 자신이 넘어갔던 알드 차원에서 만난 조그만 소년을 떠올렸다.

"그 소년이... 또다시 이쪽으로 넘어왔다고? 설마 이번에도 후원자가...."

하지만 변질자 놈들이 같은 실수를 두 번 할 리는 없다.

그렇다면 어떻게?

설마 육체를 버린 변질자만이 얻을 수 있던, 바로 그 차원능력을 손에 넣기라도 했단 말인가?

"그래. 차원능력 자체는.... 모든 차원마다 최종적으로는 얻을 수 있게 되었다는 이론이 있었지."

그것은 오래 전 황금시대 때 연구자들이 밝혀낸 사실.

다만 그것을 얻기 위해서는 극단적으로 말도 안 되는 시련이나 희생이 필요하다.

그중에도 사이크 차원에서 확인된 차원 능력의 전제는, 바로 생명 그 자체를 포기해야 가능한 정도의 고난이었다.

대체 누가 새로운 능력을 얻겠다고 목숨을 버리겠는가? 죽고 나서 얻어 봐야 무슨 소용이 있다고?

그런데 변질자 놈들은, 정말로 생명을 포기하면서까지 그것을 얻어 내고 말았다.

덕분에 새로운 변질자는 일정 확률로 차원능력을 가지고 태어나게 되었다. 물론 예전 방식 그대로 태어나는 반란군에겐 꿈도 꿀 수 없는 이야기였지만.

"아니, 아무리 그래도 그건 말이 안 돼."

비렉스는 고개를 저었다. 설마 클로드가 차원 능력을 얻기 위해 생명을 포기하진 않았을 텐데...

아니면 그것인가?

간이 차원문 발생 장치?

알드 차원에 넘어간 그가 클로드에게 주고 온 황금시대의 유물.

어차피 더는 에너지를 충전할 방법이 없어 포기하다시피 넘겨준 것이다.

'설마 그곳에 에너지를 충전하는 방법을 알아냈나?'

그것은 직접 황금시대를 살았던 비렉스 본인마저 상상할 수 없는 일.

하지만 가능성을 따지면 차라리 그쪽이 더 높다고 할 수 있다.

'뭐가 어찌되었든, 이번만큼은 우리도 도움이 돼야 한다.'

2번 거주 구역을 살리기 위해 스텔스 수송기를 띄우는 것은 의미 없는 짓이지만.

알드 차원의 승리를 돕기 위해 하이시티로 병력을 보내는 것은, 설령 전원이 옥쇄하더라고 큰 의미를 가지고 있다.

"...지금 바로 격납고에 연락하라."

비렉스는 즉시 명령을 내렸다.

"격납고 주변에 주둔하던 병력은 모두 수송기에 탑승한다. 그리고 하이시티로 넘어가 적의 심장부를 타격한다."

오오오오오!

상황실의 모두가 주먹을 치켜들며 소리쳤다. 덩달아 쓰러져 있던 부사령관도 눈물을 닦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사령관님. 드디어 기회가 찾아왔습니다."

"그래. 기회가 왔다, 부사령관."

비렉스는 부사령관의 몸을 직접 일으키며 미소를 지었다.

"우리가 의미 있게 희생할 수 있는 절호의 기회다."

"차원 침공을 노리는 것보다 지금이 더 효과가 좋을 겁니다. 비록 2번 구역은 전멸하겠지만...."

그런데 부사령관이 말을 다 잇기도 전, 격납고과 교신하던 장교 하나의 안색이 하얗게 돌변했다.

"격납고 침묵!"

"뭐?"

"정확히는 스텔스 수송기 전담반의 반응이 없습니다! 대신 미리 작성된 전언이 출력되고 있는데...."

장교는 실금이 잔뜩 난 화면을 한동안 뚫어져라 바라보다 말을 이었다.

"그것이.... 전략, 얼마 전 전멸당한 3번 거주구역은 저희 전담반 대부분의 고향입니다. 변질자 놈들에게 보복하지 않고서는 도저히 견딜 수가 없습니다. 모든 책임은 저 총담당관이 지겠습니다. 저 잔악한 놈들에게 반드시 쓴맛을 보여줄 테니, 뒤늦게나마 사령관님께 사죄의 말씀을 올립니다."

"...."

동시에 모두가 침묵했다.

그리고 5초쯤 지났을 무렵, 또 다른 정보장교가 격납고 상황을 스크린에 띄우며 소리쳤다.

"스텔스 수송기는 이미 격납고에 없습니다! 약 3시간 전에 비밀리에 출격한 것 같습니다."

"목표는? 목표는 어디냐!"

얼음이 된 비렉스 대신 부사령관이 소리쳤다. 장교는 한동안 화면을 두드리다 헉 소리를 내며 대답했다.

"이미 스텔스 모드라 정확한 위치를 파악할 수는 없지만.... 초기 비행 방향을 역산, 대략 뽑아낸 목표는 바로 하이시티입니다!"

* * *

문제의 수송기는, 이미 하이시티의 인근 지역까지 날아간 상태였다.

그들의 목표는 오직 3번 거주구역에 대한 보복.

그것을 위해 수송기 안에 몰래 모아놓은 유폭물질을 잔뜩 싣고 스텔스 모드로 비행 중이었다.

작전은 단순했다. 수송기를 하이시티의 중심부에 떨어뜨려 자폭한다.

그것을 위해 전담반에서도 일부만 수송기에 탑승했다. 명백한 자살임무에 모두가 죽을 필요는 없으니까.

그래도 모두가 가족을 잃었다.

수송기 전담반 대부분이 3번 거주구역 출신이라는 건 우연의 일치가 아니었다.

3번 구역은 가뜩이나 체격이 줄어들기 시작한 신세대 중에서도 신체능력과 거리가 먼 인력풀이 모인 곳.

덕분에 이곳에서 뽑힌 병사들은 전투요원보다는 후방에서 보급이나 수리, 생산에 동원되는 경우가 많았다.

"아무리 그래도... 나 혼자서 이 거대한 녀석을 움직이는 건 괴롭군."

수송기의 컨트롤 휠을 잡은 총담당관이 진땀을 흘리며 중얼거렸다.

이미 세 시간째 혼자서 이 초대형 수송기를 조종하는 상황.

그를 제외하고 조종실에 있는 것은 스텔스 담당과 레이더 담당, 그리고 격납실 담당뿐이었다.

"하이시티 외곽 방위라인 진입합니다. 시체 속도를 최소한으로 늦춰 주십시오."

레이더 담당이 낮은 목소리로 중얼거리듯 말했다.

하이시티는 변질자들의 핵심 도시로, 도시를 둘러싼 외곽 장벽에는 외부의 적을 포격하는 자동 시스템이 갖춰져 있었다.

이것을 피해 도시 상공으로 돌입하기 위해선 반드시 스텔스 기능이 필요했다.

다만 소실된 기술을 억지로 되살렸기 때문에 제대로 작동할지는 의문이었다. 조종실의 모두가 입을 다문 채 숨을 죽였고, 그렇게 몇 초의 시간이 추가로 흘러갔다.

"...방위라인 통과."

그러자 모두가 한숨을 내쉬었다.

이것으로 가장 큰 관문을 돌파했다. 남은 것은 하이시티의 중심부에 이 거대한 수송기를 무사히 떨어뜨리는 것뿐.

'그리고 우리 모두가 무사하지 못하겠지.'

총담당관이 이마에 흐르는 땀을 닦으며 미소를 지었다.

각오라면 이미 충분히 되어 있다. 하지만 막상 그 순간이 다가오자 온몸에 땀이 비 오듯 흐르기 시작했다.

그래도 도시의 밤 풍경은 아름다웠다.

이 행성의 모든 지면을 통틀어, 밤에도 빛을 내는 유일한 지역.

한때는 별의 모든 표면이 빛으로 가득 차 있었다고 한다. 지금은 그저 전설처럼 내려오는 황금시대의 이야기에 불과했지만.

"다들 수고했다. 앞으로 얼마 안 남았어."

총담당관의 말에 모두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런데 레이더 담당 혼자서 화면을 가만히 바라보다 눈살을 찌푸렸다.

"정면에서 미확인 물체가 날아옵니다."

"뭐? 날아온다고?"

총담당관은 심장이 덜컹 내리는 것을 느끼며 되물었다.

"날아온다고? 설마 관리자인가? 스텔스! 무음! 무진동 모드는 어떻게 되고 있나!"

"이미 작동 중입니다."

스텔스 담당이 긴장한 얼굴로 화면의 그래프를 확인했다.

이 수송기의 스텔스 모드는, 단순히 전파탐지를 피하는 게 전부가 아니다.

변질자 놈들은 세상을 눈으로 보지 않는다.

대신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흐름을 청각이란 형태로 받아들인다. 그래서 스텔스 모드에는 필연적으로 소리와 진동을 제어하는 기능이 탑재되었다.

'하지만 만약 보인다면?'

총담당관은 등줄기가 싸늘해지는 것을 느꼈다.

변질자 놈들 중 '관리자'라는 계급이 있다.

이들은 마법이라는 특별한 힘을 사용, 하늘을 날아다니며 불덩이나 번개를 마구 쏘아댄다.

반면 이쪽은 스텔스를 제외하면 그 어떤 반격 수단도 갖추지 못했다.

물론 거대한 덩치에서 오는 기본적인 내구력은 가지고 있다.

하지만 전투를 대비해 추가적으로 장갑을 붙이거나 하진 않았다. 어차피 적에게 발각되지 않는 것을 전제로 만들어졌으니까.

"미확인 물체, 계속 접근 중."

레이더 담당의 목소리가 심하게 떨리기 시작했다. 휠을 쥐고 있는 총담당관의 손도 마찬가지로 요동치기 시작했다.

'틀렸나?'

일단 전투가 벌어지면 대책이 없다.

격납실에 잔뜩 쌓아 놓은 유폭물질에 불이라도 옮겨붙는다면 모든 게 끝장.

"아직 도시의 중심까진 거리가 있지만.... 어쩔 수 없지. 여기서라도 끝을 봐야겠어."

총담당관은 휠을 아래로 꺾을 준비를 하며 억지로 미소를 지었다.

"지금부터 저 망할 변질자 놈들에게, 우릴 건드리면 어떤 반격을 당할지 보여주자."

그러자 모두가 고개를 끄덕였다. 마지막으로 격납실 담당이 만약에 대비해 연결해놓은 시한폭탄 버튼을 누르려는 순간.

"미확인 물체, 고속으로 접근!"

레이더 담당의 갑작스런 외침과 함께, 뭔가가 수송기의 전면 특수패널에 찰싹 달라붙었다.

퉁!

"으악!"

조종실의 모두가 비명을 질렀다.

"벼, 변질자 놈이 앞에 달라붙었다! 지금 당장 폭탄을 활성화해서...."

"총담당관님!"

뒤를 돌아본 총담당관을 향해, 옆에 있던 스텔스 담당이 패널 쪽을 가리키며 소리쳤다.

"변질자가 아닙니다!"

"뭐라고?"

총담당관은 깜짝 놀라며 고개를 돌렸다.

처음에는 당연히 붕대를 감은 변질자가 그곳에 붙었을 거라 확신했다.

하지만 그것은 변질자가 아니었다.

인간.

그것도 피부가 얼음장처럼 하얀 소녀가, 처음 보는 묘한 복장을 한 채 그곳에 달라붙어 있었다.

"...."

상상도 못 한 충격적인 모습에 모두가 얼빠진 모습으로 침묵했다.

패널에 달라붙은 소녀는 한동안 조종실 안을 들여다보다, 이내 어색한 미소를 지으며 손등으로 패널을 두드리기 시작했다.

툭툭.

툭툭.

툭툭.

마치 여기 문 좀 열어 달라는 듯이.

이계 황자는 세상을 구하고 싶다 183화

54장 루네의 모험

수송기에 탑승한 루네는 자초지종을 모두 들은 다음 대답했다.

"여러분들 마음은 저도 알겠어요. 하지만 지금은 일단 원래 있던 곳으로 돌아가 주세요."

"하지만...."

"말씀드렸다시피, 여러분들이 하려던 일을 지금 저희 황자님께서 대신하고 계십니다. 반드시 저 도시를 박살내 주실 거예요."

물론 제아무리 클로드라 해도, 지금 당장 이 거대한 하이 시티 전체를 무너뜨리는 건 불가능한 일.

하지만 이렇게라도 말하지 않으면 이 거대한 배의 자폭에 황자가 휘말릴지도 모른다.

덕분에 수송기의 승무원들이 머리를 맞대고 고민하기 시작했다.

"클로드라니, 전에 한 번 넘어와서 주경기장을 박살낸 하위차원의 인간 아닌가?"

"맞습니다. 사령관님 말씀으로는 이번에는 가능성이 있을지 모른다고...."

"하지만 담당관님, 이제 와서 기수를 돌린다고 무사히 빠져나가리란 보장이 없습니다. 이미 예정보다 너무 오래 도시 상공에 머무르고 있어서...."

"제 의견은 다릅니다. 정말 그 클로드 황자가 그렇게 강하다면, 지금쯤 모든 시선이 그곳에 쏠려 있을 겁니다."

"나도 그렇게 생각한다. 하지만...."

부하들의 서로 다른 의견에, 총 담당관의 표정이 갈대처럼 계속 흔들렸다.

그 사이, 멀리 하이시티의 중심가에 불길이 솟구치는 게 보였다.

한밤중임에도 이미 온 도시에 뿌연 연기가 퍼지는 것을 확인할 수 있었다. 그 와중에 대화에 끼지 않았던 레이더 담당이 손을 들며 말했다.

"담당관님. 실은 조금 전부터 본부 상황실에서 계속 전문이 들어오고 있었습니다. 명령대로 계속 받지 않긴 했지만, 내용은 방금 저 여자아이가 했던 말과 일치합니다."

"클로드의 고유 주파수를 확인했다?"

"그렇습니다. 모든 위반사항은 불문에 부칠 테니 기지로 복귀하라고 합니다. 함부로 일을 벌였다가 자칫 클로드 황자의 신변에 위해가 가해지기라도 하면 뒷감당을 어찌 할 거냐고.... "

"...이런 낭패가."

총 담당관은 컨트롤 휠에 얼굴을 묻으며 괴로워했다.

자신들은 그저 목숨을 바쳐서라도 반란군의 명예를 지키고, 죽은 가족들의 복수를 하려 했을 뿐인데.

"...돌아간다."

총담당관은 수송기의 자동 선회모드를 풀고 곧바로 휠을 옆으로 틀었다.

"지금 당장 본부로 복귀한다. 본부에 그렇게 알려라. 하위차원에서 넘어온 귀인을 데리고 돌아간다고."

"알겠습니다."

레이더 담당은 즉시 옆자리인 통신석으로 옮겨 전문을 보내기 시작했다. 총담당관은 길게 한숨을 내쉬며 옆에 서 있던 루네에게 말했다.

"그쪽에겐 미안하게 됐다. 자칫 큰 실수를 저지를 뻔했군. 이름이 루네라고?"

"네. 클로드 황자님께 속한 종자입니다. 어쩌다 보니 황자님과 같이 넘어와서 일이 이렇게 되었네요."

"그쪽도 꽤 강해 보이던데. 하늘을 자유롭게 날아다니다니.... 그 정도면 어지간한 붕대 놈들도 충분히 상대하겠어."

"붕대 놈들이라면 후원자 말씀인가요?"

"후원자는 붕대 놈들 중에서도 강한 축에 속하지. 경비대나 관리자에 비하면 몇 수 위야."

"그런가요? 제가 알고 있는 건 후원자뿐이라서 잘 몰랐네요."

"그야 하위 차원에 내려가서 간섭할 수 있는 건 후원자뿐이니까. 그런데 지금 우리가 어떻게 대화를 할 수 있는...."

총 담당관은 뭔가를 말하려다 퍼뜩 놀라며 소리쳤다.

"어떻게 말이 통하지? 번역기도 없는데? 변질자 놈들이 아니고서야.... 잠깐, 네놈 설마 변질자가 보낸 스파이인가? 변질자가 우릴 속이기 위해...."

"그건 아마 제가 반쯤 정령이라 그럴 거예요."

갑작스럽게 돌변한 분위기에도 불구하고, 루네는 태연한 얼굴로 미소를 지었다.

"정령은 언어와 상관없이 모두와 대화를 나눌 수 있거든요."

"정령? 원소의 근원 말인가?"

"원소의 근원? 여긴 정령을 그렇게 부르나 보죠?"

"그래. 하지만 황금시대 이전의 전설 같은 이야기인데...."

총 담당관은 물론이고, 다른 승무원들의 시선까지 전부 루네에게 집중됐다.

하지만 정작 루네의 시선은 승무원을 넘어, 멀리서 전투를 벌이고 있는 클로드를 향하고 있었다. 총 담당관은 갑자기 멍해진 루네를 보며 조심스럽게 물었다.

"왜 그러지? 뭔가 문제라도 생겼나?"

"...황자님이 위기에 몰리신 것 같아요."

"위기? 클로드 황자가 말인가?"

"저는 황자님과 계약한 정령 취급이라, 어느 정도는 그분과 연결이 되어 있어서 멀리서도 상황을 파악할 수 있어요. 하지만 걱정하실 필요는 없습니다."

"걱정할 필요가 없다니, 방금 위기에 몰렸다면서?"

"황자님은 항상 비장의 수단을 숨겨 놓고 계시니까요."

루네는 눈을 감으며 예전 기억들을 떠올렸다.

그녀가 아직 루넨브레스 저택에서 열심히 마법을 훈련하던 무렵.

클로드는 정말이지 하루가 멀다 하고 전 세계를 돌아다니며 끝도 없는 능력을 쓸어모았다.

예를 들면 코어 같은.

혹은 다양한 정령 같은.

처음엔 그렇게까지 집요하게 힘을 모으는 이유를 알 수 없었다.

루네의 눈에 클로드는 이미 대적할 사람이 없는 최강의 존재였으니까.

하지만 이젠 그 이유를 알 수 있었다.

"그분은 혼자서 싸우고 계셨던 거예요. 우리들이 상상도 못 하던 거대한 적들을 상대하기 위해."

"그거.... 변질자 놈들 말하는 건가?"

"네. 그나저나 저는 앞으로 사흘정도 이곳에 머물러야 해요. 어떻게든 안전한 곳에 몰래 숨어 있으려 했는데 여러분들을 만나 얼마나 다행인지 몰라요. 앞으로 신세를 질 것 같으니 잘 부탁드리겠습니다."

그리고는 승무원 모두에게 한 명씩 고개를 숙이며 인사를 건넸다.

"저런...."

총담당관은 분위기와 어울리지 않는 루네의 행동에 헛웃음을 지으며 고개를 저었다.

"부탁은 우리가 드리고 싶군. 아무튼 기지까지 안전하게 모시도록 하지."

"네. 감사합니다."

"하지만 담당관님. 이대로 돌아가면 우린 분명...."

"처벌받겠지. 아무리 전문에는 불문에 부친다고 했어도."

그만큼 그들이 저지른 짓은 반란군 전체를 뒤집어 버린 말도 안 되는 폭거였다. 총담당관은 무거운 표정으로 전방 패널을 보며 말했다.

"하지만 여기 계신 분은 하위 차원의 손님이다. 우릴 대신해 저 변절자들과 싸우는 은인이지. 이분이 안전을 부탁하는데 우리가 처벌을 두려워해서 되겠나?"

"네. 담당관님."

"그저 한방 크게 먹여주지 못한 게 아쉬울 뿐입니다."

"잠시만 기다려 주십시오. 방금 본부에서 새 전문이 들어왔습니다."

순간 레이더 담당이 심각한 표정으로 전문을 읽기 시작했다.

"곧바로 기지에 복귀하지 말라고 합니다."

"뭐라고?"

"이것은.... 현재 2번 거주구역이 변질자들에게 공격받고 있다 합니다."

"그새 또? 이런 망할 놈들이!"

"그래서 기지 복귀전에 먼저 2번 거주구역에 들려 사태를 수습하라고 합니다. 그러니까 지원군 명목으로...."

레이더 담당은 믿을 수 없다는 표정으로 말을 흐렸다. 총담당관은 멍한 얼굴로 한동안 눈을 깜빡이다 말했다.

"지금 우리만 가라고 명령이 내린 건가? 공격받고 있는 2번 거주구역의 지원군으로?"

"네. 정확히 그런 명령입니다."

"어떻게? 설마 수송기를 거기 들이받으라고? 거주구역은 지하에 있는데?"

"자세한 행동강령은 없습니다만, 그저 수송기에 태운 귀인에게 지원을 받으면 충분히 가능할 거라고...."

"저요?"

루네는 손가락으로 자신을 가리켰다.

그리고 한동안 침묵이 이어졌다. 그렇게 모두가 말도 안 된다고 생각하는 가운데, 수송선은 하이시티의 외곽구역을 벗어나 다시 텅 빈 황무지로 진입하기 시작했다.

* * *

2번 거주구역은 이미 초토화되어 있었다.

반란군 본부에서 서쪽으로 300㎞떨어진 곳에 위치한 이곳은, 오래전 두꺼운 암반층을 뚫고 지하 2㎞ 지점에 지어진 초대형 벙커.

그러나 이미 적들에 의해 모든 통로가 점령당했고, 거주구역을 지키던 반란군 전투병들은 순식간에 제압당하며 목숨을 잃었다.

시민들 역시 무기를 들고 거주구역에 난입한 적들을 상대로 전투를 벌였다.

하지만 헛된 저항일 뿐이었다. 거주구역에 살던 2만의 시민 중 절반 이상이 사망했고, 나머지는 포로로 잡혀 강제로 거주구역 밖으로 끌려 나왔다.

"빨리 걸어! 이 느려 터진 살덩이 놈들! 네놈들 때문에 복귀가 늦어졌잖아!"

마지막 포로를 지상으로 끌어내던 관리자가 손에 쥔 뇌전의 채찍을 바닥에 내려치며 위협을 가했다.

파직!

"히익!"

덕분에 가까스로 지상까지 올라온 시민들이 신음하며 몸을 움츠렸다.

잔혹하게도 손바닥에 구멍을 뚫고, 그곳에 철사를 꿰어 굴비처럼 엮여진 상태. 관리자는 있지도 않은 혀를 차며 치며 지상에 남아 있던 경비병에게 물었다.

"이게 마지막이다. 수송선은 몇 대나 남았지?"

"전부 돌아가고 딱 두 대 남았습니다. 한 대엔 살덩이를 싣고, 한 대엔 변이된 살덩이를 실으면 될 것 같습니다."

살덩이.

사이크 인이 반란군을 칭하는 멸칭이다.

이미 7천명이 넘는 반란군 시민을 수송선에 태워 개조시설로 보낸 상황. 그 와중에 지상에 올라온 마지막 시민들이 주변에 깔린 변이체를 보며 비명을 지르기 시작했다.

"으, 으아아아악!"

"싫어! 저렇게 될 수 없어!"

"안 돼! 차라리 죽여!"

일부 도망치려던 시민들의 등에, 그들이 그토록 되기 싫었던 변이체의 긴 손톱이 갈고리처럼 내리꽂혔다.

푸확!

"저항하면 죽을 뿐이다! 쓸데없는 짓 하지 말고 빨리 움직여! 젠장, 너무 많이 죽였어...."

마지막으로 남은 관리자가 초조한 모습으로 중얼거렸다.

심기가 불편한 이유는 간단했다. 상부에서는 못해도 1만이 넘는 반란군을 생포하라 지시했는데, 저항이 너무 거센 바람에 생존자가 7천을 겨우 넘기는 수준에 이르고 말았다.

"어쩔 수 없습니다. 3번 거주구역의 일이 이미 알려졌을 테니까요. 이만큼이라도 확보한 게 다행입니다."

경비병 하나가 창끝을 내리며 귀띔하듯 말했다. 관리자는 쯧 소리를 내며 구멍에서 줄줄이 끌려나오는 인간들을 노려보았다.

"아무리 그래도 너무 죽였다. 변이체를 제압에 투입한 건 어리석은 짓이었어."

"그래도 그만큼 빨리 끝나지 않았습니까? 지금 나오는 살덩이들이 마지막 아닙니까?"

"마지막이다. 모두 300명 정도. 빨리 싣고 돌아가면 좋겠군. 그나저나 수송선은 왜 저렇게 멀리 있지?"

"가까운 곳에 있던 것부터 먼저 태우고 돌아갔으니까요. 당연한 결과입니다."

"쳇, 이럴 줄 알았으면 끝마무리를 맡는 게 아니었는데...."

그런데 그때 멀리 세워진 수송선 위로 뭔가 둥그런 것들이 우르르 떨어졌다.

통.

유폭물질을 가득 채운 통이 두 대의 수송선 위로 마구 떨어져 내렸다.

그리고 대폭발을 일으켰다

콰과과과과과과과과과광!

어찌나 강력한 폭발인지, 1㎞ 이상 떨어진 곳에 있던 관리자의 몸이 절로 움츠러들 지경이었다.

"이게 무슨 일이야! 위에서 뭐가 떨어진 건데!"

고개를 치켜들었지만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정확히는 아무것도 들리지 않았다는 표현이 맞겠지만.

그 와중에 유폭물질을 투하한 반란군의 스텔스 수송기가 소리 없이 하늘을 선회하고 있었다.

최선을 다해 날아왔지만, 이미 대부분의 상황이 끝난 뒤였다.

하지만 비록 일부라 해도 아직 시민이 남아 있었다. 승무원들을 그들을 내버려 두고 절대 그냥 기수를 돌릴 수 없었다.

"반란군의 기습인가? 이제 와서?"

관리자가 코웃음을 치며 천천히 공중으로 떠올랐다.

반란군이 보유한 대부분의 무기는 이성의 붕대를 뚫지 못한다.

그러니 기습을 당했다고 무서워할 것도 없었다.

물론 집중 공격을 당하거나 일부 특수한 무기에는 피해를 입을지도 모르지만, 만약 그런 경우가 생기면 일이 커지기 전에 냅다 하늘을 날아 도망치면 그만.

문제는 그렇게 하늘로 날아오르는 관리자 옆으로, 뭔가가 엄청난 속도로 지면을 향해 날아들었다.

부웅!

"음?"

어찌나 빠른지, 관리자는 그것을 제대로 확인조차 하지 못했다.

확실한 건 자신이 목표는 아니라는 것.

대신 그것은 지상에 있던 경비대 하나를 뒤에서 껴안은 채, 처음보다 더 빠른 속도로 다시 하늘 위로 날아오르기 시작했다.

"뭐, 뭐냐! 누구야!"

경비대는 발버둥을 치며 저항했다. 하지만 별다른 보람도 없이, 어느새 지면이 까마득하게 보일 정도로 높은 하늘까지 솟구쳐 버렸다.

"뭐야! 넌 누구냐! 대체 뭐 하려는 거야!"

등 뒤에서 느껴지는 건 오직 차가운 숨결과 냉기뿐.

어떻게든 창이나 주먹으로 등 뒤를 가격하려 했지만, 그때마다 단단한 얼음에 막혀 본체에 타격을 줄 수 없었다.

그렇게 밤하늘의 구름보다도 더 높은 곳으로 날아오른 순간.

"황자님께서 그러셨어. 후원자에 마법은 안 통한다고."

등 뒤의 괴물이 자신에게 속삭이듯 말했다.

"근데 넌 후원자도 아니라며? 경비대? 후원자보다 한참 아래라서 비행도 못 한다고?"

"무, 무슨 헛소리냐! 비행은 후원자도 못 해! 비행 마법을 쓸 수 있는 건 관리자뿐...."

"그래?"

등 뒤의 목소리는 차갑게 대답하며 손을 놓아 버렸다.

그리고 추락이 시작됐다.

"으아아아아아아아악!"

경비대는 비명을 지르며 빠르게 다가오는 지면을 주시했다.

두렵다.

하지만 이 두려움은 오래전 인간이었던 시절의 잔재일 뿐.

아무리 경비대에게 주어진 붕대가 급이 떨어진다 해도, 이 정도 물리적인 충격에 박살날 만큼 허접한 물건은 아니다.

'걱정할 필요 없다. 그래봤자 지면도 물렁한 흙이니 충격도 적을 테고.... 음?'

그런데 그 순간.

자신을 하늘로 끌어올린 그 조그만 괴물이, 추락하는 자신보다 더 빠른 속도로 옆을 스치며 내려갔다.

"안녕?"

그렇게 순식간에 지면에 도착한 녀석은, 두꺼운 얼음벽을 바닥에 깔고는, 그 위에 날카로운 얼음창을 수직으로 세우기 시작했다.

마치 빠지는 순간 죽음을 피할 수 없는 함정처럼.

이계 황자는 세상을 구하고 싶다 184화

55장 바람의 정령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