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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계 황자는 세상을 구하고 싶다 176화

53장 역린

녀석들은 퓨어 매직의 위험을 인지한 듯, 바로 접근하지 않고 계속해서 그림자 속을 정신없이 이동했다.

어떻게든 내 정신을 교란시키려는 듯.

머리 위에서 끊임없이 위치를 바꾸며 잠입과 등장을 반복한다.

"이 자식들...."

귀찮다.

하나하나만 따지면 전에 겔리와 융합했던 후원자보다 훨씬 약하다. 마갑을 입은 것도 아니고.

다만 저렇게 여러 마리가 동시에 움직이니 상대가 까다롭다. 단순히 그림자 결계와 잠입의 활용만 따지면 더 뛰어난 것 같기도 하고.

저놈들을 잡는 방법은 두 가지 있다.

하나는 정령 빙의.

일단 두 정령왕과 동시에 빙의하기만 하면, 저놈들이 아무리 결계 속에서 날고 긴다 해도 상관없다.

다만 그렇게 하면 잡고 난 뒤가 문제.

자세한 건 몰라도, 분명 이 근처 어딘가에 게이트가 열렸을 것이다.

물론 이게 진짜 침공이 시작된 건지, 혹은 전에 일식 게이트처럼 일시적인 현상인지는 모르지만.

어쨌든 후환을 대비해서 여력을 남겨 놓아야 한다. 어쩌면 주변에 또 다른 게이트가 열렸을 지도 모르니까.

그러니 지금은 영역을 사용해야 한다.

영역술.

물론 내가 쓰는 건 아니다.

-영역술의 꽃은 힘을 봉인하는 '금제'네. 다만 자신이 사용할 수 있는 힘에만 사용 가능하지.

-그러니 내가 밖에 있으면 자네만 쓸 수 있는 여러 힘은 금지할 수 없네. 예를 들면 은신이나 정령마법 같은 것 말이지.

-다만 이렇게 자네의 검과 겹쳐 있는 동안에는 그것 또한 금제가 가능하네.

주드에게 부탁하면 된다.

실제로 선옥에 있을 때 이것저것 테스트해 봤다. 어차피 시간은 많고 할 일은 없었으니까.

그리고 난 그림자 능력을 가지고 있다.

그러니 칼 속에 깃든 주드에게 '그림자 능력 금지'를 부탁하고 사방에 영역을 깔아버리면 그만.

하지만 선옥을 나온 순간부터 주드의 반응이 없다는 게 문제인데....

"주드? 내 말 들려? 이제 정신 좀 차렸어?"

지금도 여전히 반응이 없다.

하지만 검 안에 깃든 느낌은 여전하다. 심지어 그것이 내 몸과 연결된 느낌마저 들고.

그런데 이 친숙한 느낌은....

"마력 결정?"

퍼뜩 그 생각이 들었다.

당장 내 머릿속에 있는 여러 마력 결정과 비슷한 느낌이 검 안에서 느껴진다.

당연히 내가 직접 컨트롤하는 것도 가능하다는 걸 깨달은 순간.

-영역술은 자신의 힘을 해방하는 과정이라고 생각하면 되네.

선옥에서 들었던 주드의 영역술 이야기가 떠올랐다.

-결과물은 대단히 정교하고 복잡하네만, 그것을 만들기 위해 머리를 싸매고 고생할 필요는 없어.

-힘을 쓴다는 건 단순한 일이 아닌가?

-밀고, 당기고, 차고, 때리고.

-결계 역시 그것의 연장선상이라고 생각하게. 마치 숨 쉬듯이 자연스럽게.

-내가 그것을 원하면, 영역 안에서 그것이 가능해지는 거야.

...그러고 보니 정말 자세하게도 설명했구만.

어차피 난 배우지도 못할 힘인데, 왜 그렇게까지 정성을 다해 가르쳤을까? 물론 달리 할 일도 없으니 말하는 대로 다 듣긴 했지만.

하지만 그 덕분에, 지금 내가 이렇게 영역을 컨트롤할 수 있게 됐다.

혹시 주드는 이렇게 될 상황을 미리 예측한 걸까?

물론 당장은 아무것도 장담할 수 없다. 나중에 주드가 정신을 차리면 물어봐야지.

그 와중에도, 저 후원자 놈들은 그림자 속을 끊임없이 점프하고 있었다.

어떻게든 내 눈을 현혹시키려는 듯.

그러면서도 조금씩 거리를 좁히고 있다. 슬슬 배후로 잠입해서 기습을 시도할 생각 같은데....

"고생했다."

나는 뽑아 든 검을 손에 쥔 채, 곧바로 영역을 전개했다.

영역에 바라는 것은 오직 하나. 바로 그림자 능력의 금제.

영역은 소리 없이 사방으로 퍼져 나갔다.

만약 여러 가지 금제를 걸었다면 영역 또한 크기가 줄어들 수밖에 없다.

하지만 지금처럼 한 가지만 건다면, 주드는 최대 1㎞ 이상 반경까지 영역을 확장할 수 있었다.

그러자 한순간에 어둠이 걷혔다.

눅눅한 그림자가 사라지고, 오전의 태양 빛이 온 세상에 쏟아진다.

그런데 뭔가 이상한데?

펼쳐진 영역이 주드가 가진 특유의 미로의 형태가 아니다.

대신 투명한 물결처럼 가볍게 흔들릴 뿐이었다. 이건 왜 이러지? 주드가 직접 쓴 게 아니라 내가 사용해서 모양이 달라졌나?

-영역의 형태는 사람에 따라 전부 다르네.

-나 같은 미로 모양은 극히 드물지, 대부분은 흐릿한 안개처럼 주변에 퍼져 나가네. 물론 다른 모양도 얼마든지 있고.

순간 주드의 이야기가 뇌리를 스쳤다.

물론 아무래도 상관없다. 이미 결계는 사라졌고, 날파리처럼 날뛰던 후원자들은 그림자를 잃고 지면을 향해 추락하기 시작했으니까.

거리는 서로 다르지만, 네 마리가 거의 동시에 지면으로....

"...!"

그 순간, 어떤 생각이 내 머릿속을 강하게 사로잡았다.

"영생의 핵 300개!"

짧게 소리를 쳤지만, 이번에도 주드는 반응하지 않았다.

하지만 상관없다. 이번에도 손에 연결된 감각으로 직접 쓸 수 있었으니까.

엘프 군주의 검에 깃든, 1만이 넘는 영생의 핵.

그중 300개가 한순간에 분해되며 힘으로 변환된다.

힘.

어느덧 영생은 사라지고, 반대로 영원히 존재하는 것들을 베어버릴 힘이 그곳에 깃들었다.

우웅!

동시에 투명한 빛이 칼날을 맴돌았다.

전에 30개를 썼을 땐 그저 빛에 불과했는데, 지금 300개를 소모하자 빛이 나선 모양으로 칼날을 휘감는다.

그래. 이거면 충분하겠지.

쿵!

마침 후원자들이 거의 동시에 지면에 떨어졌다. 나는 녀석들을 향해 수평으로 검을 휘둘렀다.

한 녀석은 30미터쯤 떨어져 있었고.

두 녀석은 40미터쯤 떨어져 있었고.

마지막 녀석은 60미터쯤 떨어져 있었다.

하지만 거리는 아무 상관 없었다.

지잉!

칼날의 궤적을 따라 끝없이 공간이 갈라진다.

시야에 있는 모든 후원자는 그 틈에 들어 있었고, 그 틈을 따라 위아래로 갈라졌다.

촥!

그것으로 끝이었다.

어떤 녀석은 허리가 반으로 갈렸고, 또 어떤 녀석은 착지 순간의 자세가 안 좋아 몸이 사선으로 두 동강 났다.

검으로 자른 공간의 틈은 거의 100미터까지 퍼져 나간 다음 사라졌다. 후, 이럴 줄 알았으면 영생의 핵을 조금 아낄 걸 그랬나?

'훌륭했네.'

순간 주드의 목소리가 검을 타고 내 안으로 쏟아졌다.

"주드! 정신 차렸구나!"

선옥을 나온 지 얼마 지나지도 않았는데 엄청 반갑다.

근데 목소리가 왜 이렇게 들리지? 무슨 골전도방식인가? 뼈를 울리는데?

'시간에 맞출 수 있어 다행이군. 마력 결정과 비슷한 형태로 힘을 재구성하느라 시간이 걸렸네.'

"마력 결정? 아.... 맞아. 덕분에 직접 컨트롤이 되더라. 어떻게 이런 생각을 다 했어?"

'익숙한 형태가 좋을 테니까. 자네가 내 힘을 직접 사용하려면 말이지. 어떤가, 사용하기 편했지?'

"맞아. 거의 내 힘처럼 편하더라. 그럼 정신도 차렸으니 일단 검 밖으로 나와서...."

'숨겨서 미안하네.'

주드는 대뜸 사과하며 말했다.

'난 밖으로 나올 수 없어.'

"뭐?"

'그보다는 선옥 밖에서는 존재할 수 없다는 게 맞는 말이겠군. 칼 속에 있어도 마찬가지야. 이제 곧 나는 사라지네.'

"...뭐?"

'걱정 말게. 내 힘은 여전히 검 속에 남아 있으니까. 지금처럼 사용하면 앞으로도 문제없을 거야.'

"아니, 지금 그게 문제가 아니라.... 사라진다고? 당신 사라져?"

'난 이미 죽은 목숨이었네. 그저 선옥과 영역의 힘으로 주드라는 기억을 붙잡아 둔 것뿐이었지.'

"아니 잠깐, 그러니까 당신은 선옥에서밖에 생존할 수 없는 몸이었다고?"

'그런 셈이지.'

"그걸 왜 이제 말해! 그럴 줄 알았으면 밖으로 안 끌고 나왔잖아!"

나도 모르게 목소리가 마구 커졌다. 그러자 웃음소리와 함께 주드의 웃는 얼굴이 머릿속에 떠올랐다.

'허허.... 내가 그 안에서 혼자 영원토록 있어 봤자 무슨 소용인가?'

"주드...."

'자책할 필요 없네. 이 모든 건 내가 원해서 선택한 길이니까.'

거기서부터.... 주드의 목소리가 조금씩 작아지기 시작했다.

'자네가 선옥에서 차원검을 썼을 때 잠시 바깥 세계와 연결되었지? 그때 직감했네. 나는 원래 세계에서 존재할 수 없다고.'

"...."

'이제 나는 사라지네. 하지만 자네가 있으니 여한은 없어.'

"그럼 선옥에서 줄기차게 선술을 가르친 것도...."

'기왕이면 알고 쓰는 게 더 좋지 않겠나? 부디 잘 사용해 주게. 그리고 손녀에게 안부를.... 아니, 말하지 말게. 괜히 그 아이의 마음만 더 괴롭게 할 거야.'

"주드...."

'이게 내 마지막 부탁이네.'

주드는 거의 들리지도 않은 소리로 마지막 유언을 남겼다.

'내 이야기는 아무에게도 하지 말게. 저 안에서 1년 동안 있었던 일은.... 부디 우리 사이의 비밀로 묻어 주면....'

거기까지였다.

그리고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게 되었다. 나는 허탈한 기분으로 칼을 바라보며 중얼거렸다.

"그걸 이제 말하면 어떻게 해...."

"우와아아아아아아아!"

그때 멀리서 사람들이 환성을 지르며 내 쪽으로 달려오기 시작했다.

다른 곳의 전투가 끝난 걸까? 더는 적이 없는 거야? 우리가 승리 한 걸까?

아마도 그럴 것이다. 펼쳐놓은 영역에 인간밖에 안 느껴졌으니까.

하지만 기쁜 마음은 느껴지지 않았다. 나는 손에 쥔 검을 내려다보며 한참 동안 그곳에 그냥 서 있었다.

* * *

지난 1년 동안 함께 했던 주드의 소멸은 충격적이었다.

심지어 이걸 다른 사람들에게 말할 수 없다는 게 더 괴로웠다. 휴, 이건 무슨 임금님 귀는 당나귀 귀도 아니고.

그래도 그 할아버지의 마지막 유언이니 지켜줘야 한다. 나중에 진짜 침공을 다 막고 나면 그때 다시 생각해 보든가 하고....

그래. 진짜 침공.

결과적으로 이번 침공은 가짜 침공이었다.

물론 침공에 진짜와 가짜가 어디 있겠느냐마는.

적어도 다섯 개의 게이트가 동시에 열린다든가, 혹은 며칠 뒤에 2차 게이트가 열린다든가 하는 일은 벌어지지 않았다.

이번에도 저번 일식 게이트처럼, 사이크 놈들이 뭔가 편법을 활용해 일시적으로 침공한 모양.

그나저나 후원자를 이렇게 한 번에 많이 보내는 게 가능했었단 말이야?

이번 침공에서 최종적으로 확인된 후원자의 숫자는 총 10명.

그중 한 명은 투사들이 해치웠다. 3명은 톨라리가, 그리고 다섯 명은 내가 잡았고.

나중에 한 마리가 더 발견됐는데, 녀석은 전장에서 좀 떨어진 곳에서 오직 그림자 결계를 만드는 데 힘을 쏟아붓고 있었다.

아마도 그림자 결계 전문 요원이었던 모양이다. 아무튼 이렇게 떼거리로 보낼 수 있었으면 처음부터 그렇게 하면 좋지 않았을까 싶었는데....

실상은 좀 달랐다.

이번에도 죽은 후원자는 소멸하는 대신 시체를 남겼다.

흐물흐물해진 붕대 속에는 인간의 몸이 들어 있었다. 뭔가 촉수 같은 게 곳곳에 돋아난 게 정상으로 보이진 않았지만.

전에 드워프 군주 때도 그랬지만, 이젠 이런 식의 융합이 기본이 된 걸까?

그리고 다들 처음 보는 사람이라는 것도 문제였다.

대체 언제 이렇게나 많은 사람들에게 후원을 한 걸까?

다들 죽었으니 물어볼 수도 없는 노릇. 하지만 내겐 죽은 사람에게도 정보를 뽑아낼 수 있는 새로운 능력이 생겼다.

영역술.

영역술은 금제를 걸거나 나만 추가적인 힘을 얻는 식으로도 사용할 수 있지만, 단순히 그 안에 있는 존재들의 경험을 파헤치는 용도로도 사용할 수 있다.

태선부에 처음 들어갔을 때 태선이 내가 겪었던 일을 바로바로 파악했던 것.

그렇게 영역술로 이계의 군대의 정보를 한참 동안 읽어내고 나서야, 나는 겨우 이번 사태의 진실을 파악할 수 있었다.

반란군.

이번에 침공해 온 인간이나 후원자와 융합된 인간들은, 전부 우리 알드 차원의 인간이 아니다.

그들의 정체는 사이크 차원의 생존자인 반란군이었다.

근본은 같으니 생존자라는 표현은 좀 이상하긴 하지만, 아무튼 사이크인들이 반란군을 무더기로 잡아 자신들이 써먹을 수 있도록 인체개조를 감행한 모양.

덕분에 사이크인은 더 이상 우리 차원에 간섭할 수 없지만, 대신 반란군은 사이크인이 아니라는 괴상한 논리를 대입해서 이번 일을 꾸민 것 같다.

하지만 이것은 대단히 위험한 판단.

시체마다 남은 정보가 뒤죽박죽이라 확신할 수는 없지만....

이런 행동 자체가 사이크 차원에 심각한 위해를 가져다줄 수도 있다. 그게 어떤 위해인지 까지는 아직 모르겠지만.

아무튼 이번 침공으로 위칸은 큰 피해를 입었다.

왕궁의 근위군은 전멸에 가까운 피해를 입었고, 왕궁과 연결된 긴 계단의 입구 쪽에 주둔 중인 방어군 역시 몰살을 당했다고 한다.

하지만 내 입장에선 꽤 큰 성과도 있었다.

우선 이 후원자들의 집단 습격을 정령빙의조차 안 쓰고 제압했다는 것.

그만큼 차원검의 효과는 절대적이었다. 아직은 좀 더 테스트를 해봐야겠지만, 이걸로 잘리지 않는 건 아마도 존재하지 않는 듯하다.

그리고 얼음 정령 군단이 내 예상보다 더 강력했다는 것.

처음에 소환한 녀석들은 계속 계단 아래로 전진, 남아 있던 적들의 주력을 단 하나도 남김없이 완전 소탕했다.

이 정도면 1차 웨이브 정도는 게이트 하나가 아니라 게이트 다섯 개를 전부 맡겨도 충분할 지경.

이계 황자는 세상을 구하고 싶다 177화

53장 역린

그런데 이 과정에서, 얼음 정령들이 박살을 내놓은 '거대 갑옷'이라는 새로운 적이 마음에 걸렸다.

영역으로 시체를 확인한 결과, 우리 알드 차원에서 퍼간 자원과 기술로 제작한 갑옷에, 변이된 반란군을 무더기로 집어넣어 컨트롤을 하는 방식이었다.

그 위력은 하나하나가 공포군주에 필적하는 수준.

그것도 인간을 부품처럼 개조해서 찍어낸 결과라는 게 더 소름끼쳤다.

"니들이 그러고도 무사할 줄 아냐...."

나는 손바닥 위에 검게 일렁거리는 작은 영역을 만들었다.

한밤중이라 잘 보이지 않지만, 이것이 바로 새로 얻은 선술인 승천이다.

-승천은 바로.... 다른 차원으로 넘어가는 힘이야.

승천에 대한 주드의 예상은 정확했다.

좀 더 정확히는 우리와 연결된 차원으로 넘어가는 힘인데, 당장 내가 느낄 수 있는 연결된 차원은 딱 하나뿐이었다.

사이크 차원.

지금 당장이라도 상관없다. 이 손바닥 위의 새까만 영역을 확장하기만 하면 사이크 차원으로 넘어갈 수 있다.

저번처럼 시간제한이 있는 것도 아니고.

일단 넘어가기만 하면 원하는 만큼 머물 수 있다. 돌아올 때는 다시 승천을 발동하면 그만이니까.

"조심해서 들어! 시체가 썩기 시작했다!"

"밤새 작업하면 마무리할 수 있다! 다들 기운 내!"

"정신 차려! 여기서 굴러 떨어지면 뼈도 못 추린다!"

문득 멀리 계단 쪽에서 사람들의 고함소리가 들렸다.

한밤중임에도 불구하고 인부들은 횃불을 켜 놓고 계단과 주변 절벽의 청소 작업을 진행하고 있었다.

"전투가 끝난 게 벌써 사흘 전인데...."

그만큼 침공해온 적들의 규모가 어마어마했다. 아직도 시체를 치우는 작업이 덜 끝났을 정도로.

위칸 입장에서는 마른하늘의 날벼락 같은 재앙이었고, 나 역시 아직 확정된 건 아니지만 심각한 피해를 입었다.

테우스가 사라졌다.

전투가 한창이던 사흘 전.

톨라리가 후원자들을 상대로 고전하던 순간, 테우스가 전력으로 날아와 후원자들을 몸통으로 들이 받으며 자신을 구해줬다고 한다.

그런데 그 뒤로 행방이 묘연했다.

죽었으면 시체라도 어딘가에 남았을 텐데, 주변의 그 어디에도 테우스의 흔적은 찾을 수가 없었다.

"테우스는 에이션트 이글의 코어로 만들어진 존재니까...."

어쩌면 죽어서도 시체를 남기지 않고 그냥 소멸했을지도.

"...."

순간 피가 거꾸로 솟아오르는 듯 했다.

물론 확실한건 아무것도 모른다. 전투 과정에서 피해를 입고 어딘가로 날아가 숨었을지도 모르고.

하지만 그게 벌써 사흘 전이다.

무사하다면 지금쯤 다시 이곳으로 돌아와야 정상 아닐까?

"...황자님."

그때 등 뒤에서 톨라리의 목소리가 들렸다.

"테우스 기다리는 거야? 밤 너무 늦었어. 내일 해가 뜨면 나도 다시 나서서 대대적으로 주변을 수색 할 테니...."

"아니야."

난 멀리 계단 아래로 이어진 횃불들을 보며 고개를 저었다.

"테우스 기다리는 거 아니야."

"그럼 뭐해?"

"시간 재고 있었어."

"시간? 무슨 시간?"

톨라리가 앞을 막아서며 물었다. 나는 머릿속에 있는 마력 결정을 체크하며 대답했다.

"얼음 정령 군단을 다시 소환할 시간."

"정령? 왜? 아니 잠깐."

톨라리는 깜짝 놀라며 주변을 살피기 시작했다.

"또 이계의 공격이 시작 되는 거야? 근처에 다시 게이트 열려?"

"아니. 그 놈들도 당장은 그럴 여력이 없어."

"정말? 어떻게 알아?"

"영역."

"아, 영역술...."

톨라리는 그 한마디로 납득한 듯 고개를 끄덕였다.

"아빠도 비슷한 이야기를 하더라. 그 녀석들 시체를 영역으로 확인했는데, 뭔가 없는 살림을 억지로 쥐어 짠 느낌이라고 했어."

"진짜 살림은 나중에 정식으로 침공할 때를 대비해서 남겨 놔야 하거든."

"그럼 왜 시간을 잰 거야? 얼음 정령 군단으로 뭐 하려고?"

"저놈들이 자꾸 넘어오잖아. 이번엔 이쪽에서 답례를 해주려고."

나는 손바닥에 만들어 놓은 새까만 영역을 바라보았다.

"지들도 당해봐야 알지. 이게 얼마나 기분 더러운 짓인지...."

* * *

승천을 발동한 순간, 온 세상이 새까만 터널 같은 곳으로 돌변했다.

"...어?"

방금 까지도 한밤중이었는데, 이곳은 그보다 훨씬 더 어둡다.

방금까지 이야기를 하던 톨라리는 어딘가로 사라져 버렸다.

대신 끝도 없는 흐름들이 전방으로 이어져 있고, 그 너머로 작은 구멍이 빛을 내는 것이 보인다.

사이크 차원.

저 너머에 사이크 차원이 있다.

다만 길은 그것뿐이 아니다.

주변에 작은 곁가지 길들이 있는데.... 일단은 전부 막힌 것처럼 보인다.

"저 길은... 선옥?"

그중에는 불과 며칠 전까지만 해도 몸을 담고 있던 선옥으로 가는 길도 보인다.

물론 당장은 막혀있었고, 설령 열려 있다 해도 쓸데없는 일에 한눈 팔 시간은 없다.

지금은 해야 할 일이 있으니까.

그렇게 사이크 차원으로 몸을 넘긴 순간, 어딘지 익숙한 풍경이 주변에 펼쳐졌다.

"여긴...."

경기장이다.

전에 한번 넘어왔던 바로 그곳이다. 차원을 넘어간다 해도 도착할 장소까진 몰랐는데, 그래도 아는 곳이 나오니 마음이 편하네.

그나저나 당시로부터 꽤 시간이 지났을 텐데, 반파된 경기장의 관중석은 여전히 그때 그 모습 그대로 망가져 있었다.

왜 안고치고 그대로 놔뒀을까?

그만큼 이놈들도 여유가 없다는 뜻일까?

"...."

주변은 고요했다.

나는 한밤중에 텅 빈 경기장을 가만히 바라보다, 이내 비행 마법을 쓰며 천천히 공중으로 떠오르기 시작했다.

그러자 주변에 있는 도시의 풍경이 하나씩 모습을 드러내기 시작했다.

"이건...."

어딘지 익숙한 모습.

완전히 똑같은 건 아니지만, 내가 원래 살던 예전 세상과 비슷한 도시의 풍경이 그곳에 펼쳐져 있었다.

빌딩 같은 건물.

건물 사이로 촘촘하게 나 있는 도로.

그리고 묘하게 가늘고 높이 솟아 있는 탑....

"아니, 탑 같은 건 없었어."

나는 고개를 저었다. 근데 정말 없었나? 하도 오래 전의 일이라 기억이 좀 가물가물한데?

그나저나 한밤중임에도 불구하고, 도시는 대낮처럼 환하게 밝혀져 있었다.

"후우...."

한숨이 절로 나온다.

지금 나는, 열 번의 회귀 끝에 처음으로 우리를 침공하던 놈들의 도시를 내려다보고 있다.

끝없이 펼쳐져 있는 현대식의 광활한 도시.

그리고 도로를 따라 돌아다니는 사이크인의 모습이 보인다.

마치 색색의 전선이 꼬여서 만들어 진 목각인형처럼 보이는 사람들.

예전에는 경기장에서 스크린을 보며 광기에 가까운 환호성을 지르고 있었는데, 지금 보니 마치 아무 일도 없었다는 평범하게 도시를 활보하고 있다.

그게 더 아니꼽다.

저 놈들은 지금 우리 차원이 얼마나 끔찍한 일을 당하고 있는지 알고나 있는 걸까?

아니, 물론 알고는 있을 거다. 아니까 전처럼 구경도 하고 환성도 지르고 하겠지.

그나저나.... 가만히 보고 있으니 뭔가가 이상하다.

"저긴 왜 저렇게 박살이 나 있지?"

도시의 중심부에 반쯤 무너진 거대한 탑이 있는데, 그곳을 기준으로 한쪽 라인이 완전히 붕괴되었다.

마치 거대한 허리케인이 그곳을 뚫고 지나간 것처럼.

사이크 차원에도 자연재해 같은 게 있는 걸까?

덕분에 선택의 여유가 생겼다. 정확한 방위는 모르지만 일단 저 박살난 라인을 북쪽이라고 정하자.

그렇다면 내게 남은 건 동쪽, 서쪽, 그리고 남쪽이다.

어디를 조져야 이놈들이 더 큰 고통을 받을까?

어디를 무너뜨려야 이놈들의 차원침공에 영향을 줄 수 있을까?

대체 몇 명의 사이크 인을 죽여야 테우스를 잃은 내 마음을 달랠 수 있을까?

"...한 번에 다 하지 뭐."

어디든 상관없다.

우선 도시 중심의 부러진 탑 주변으로 이동했다.

탑 근처에 착지한 순간, 마침 주변을 지나가던 사이크인 하나가 고개를 꺾으며 내 쪽을 바라보았다.

"...."

"...."

실체가 없는 혈관 같은 녀석.

녀석은 아무 말도 못한 채 한참동안 날 바라보았다.

저런 놈들에게 붕대를 감으면 바로 그 후원자가 되는 걸까? 뭔가 상상이 잘 안 가는데?

"...알드인?"

녀석의 입에서 겨우 목소리가 새어 나왔다.

물론 어디가 입인지도 모르겠고, 그 목소리란 것도 마치 전파의 잡음처럼 지직거리는 느낌이었지만.

"알드.... 정말 알드인이다! 알드인이 여기 있어! 이게 무슨 일이야!"

녀석은 갑자기 펄쩍펄쩍 뛰며 몸을 마구 흔들기 시작했다.

그렇다고 딱히 주변에 경고를 하려는 것 같진 않다.

"와! 이게 뭐지? 죽여! 알드인은 죽여야지! 스크린이 아니라 직접! 직접 볼 수 있어! 우와아아!"

그저 지금 상황이 재밌어서 죽겠다는 모습이다. 나는 가만히 칼을 뽑아 녀석의 목을 베어 날렸다.

파직!

"우와!"

동시에 날아간 머리통이 환호성을 질렀다.

남은 몸뚱이 역시 뭐가 즐거운지 양팔을 번쩍 치켜들었다.

아, 맞아.

이제 생각났다. 이놈들 원래 이런 녀석들이었지?

흥분과 자극에 눈이 돌아간 놈들이다. 설령 자신이 죽는다 해도 그 순간의 스릴에 기뻐하는.

파직!

나는 남은 몸뚱이를 세로로 베어 절단했다. 그제야 몸 전체가 소멸하며 주변으로 흩어져 사라지기 시작했다.

"하, 하, 하하하...."

소멸하는 그 순간까지도 뭐가 그렇게 좋은지 웃음을 남기면서.

덩달아 칼날 속에 뭔가 희미한 것이 배여 들어오는 게 느껴졌다.

"영생의 핵...."

이것이 사이크 인의 본질이다. 동시에 멀리서 수십 명의 사이크인이 우르르 몰려오는 게 보였다.

"저기!"

"저기서 누가 싸운다!"

"죽어! 죽는다! 죽이고 있어!"

"실제 상황이야! 직접 볼 수 있어!"

그래. 어디 한번 직접 죽이고 죽어봐라.

나는 굳이 그럴 필요가 없음에도, 일부러 군주의 검에 깃든 영생의 핵 스무 개를 사용했다.

지이이잉!

그리고 멀리서 오는 녀석들은 단숨에 베어 날렸다.

푸확!

칼끝의 궤적을 따라 공간이 갈라지며, 녀석들의 몸도 함께 위아래로 흩어진다.

단순히 잘려 나가는 걸로 끝나지 않고, 잘리는 동시에 몸을 구성하는 흐름이 완전히 흩어지며 소멸한다.

이것도 따지고 보면 동족 학살일까? 저놈들의 힘으로 저놈들을 소멸시켰으니까.

"고마워 주드. 당신 아니었으면 이런 짓도 못 했겠지."

문득 자신의 힘만 남기고 사라져 버린 주드의 모습이 떠올랐다.

동시에 총 다섯 개의 새로운 영생의 핵이 주드의 품으로 빨려 들어왔다.

그래, 이젠 이 검을 주드라고 불러도 되겠구나.

그나저나 열댓 명을 베었는데 왜 흡수된 건 영생의 핵은 다섯 개 뿐일까?

"...차원검으로 잘리면 영생의 핵도 같이 소멸하나?"

그렇다면 반대로 다섯 녀석이 용케 급소를 피했다는 뜻이다.

흠, 이거 효율이 좀 안 좋네?

앞으로 사이크 인을 공격할 때는 차원검은 좀 자제해야겠다. 지금 부터는 원래 계획대로 싹 쓸어버려야지.

바로 이 순간을 위해, 일부러 사흘을 기다려 만반의 준비를 갖췄으니까.

가장 먼저, 도시의 남쪽 영역을 향해 얼음 정령의 군단을 소환했다.

콰과과과과과광!

육중한 얼음 덩치들이 끝도 없이 모습을 드러내며 주먹으로 지면을 두드리기 시작했다.

이렇게 놓고 보니 실로 장관이다. 사흘 전에 소환했을 때는 좁은 계단과 절벽 쪽으로 몰려 그 위용을 온전히 확인할 수 없었다.

나는 별다른 고민 없이 남쪽을 가리키며 명령했다.

"저쪽 방향을 전부 쓸어버려."

콰광!

순간 백 마리도 넘는 얼음 정령들이 지면을 박차며 달리기 시작했다. 나는 그 와중에 덩치들 사이에 섞여 있는 조그만 소녀를 발견하며 소리쳤다.

"잠깐 루네야! 넌 빼고!"

"...황자님."

순간 같이 소환된 루네가 몸을 돌리며 고개를 숙였다.

"안녕하세요, 황자님. 그런데 저기.... 저는 분명히 위칸에서 마련해준 방에서 잠을 자고 있었는데...."

"미안. 이게 무조건 한 번에 다 소환할 수밖에 없어서. 넌 어디 가지 말고 내 옆에 있어."

"네. 황자님. 그런데 여긴 어딘가요?"

루네가 졸린 눈을 비비며 주변을 살폈다. 나는 한밤중에 소란이 터진 도시를 미소를 지었다.

"사이크 차원."

"...네?"

"당하기만 하는 게 열 받아서 넘어왔어. 자 그럼 이번에는.... 테라직!"

동시에 키만 해도 6미터를 넘는 거대한 대지의 정령왕, 바로 테라직이 모습을 드러냈다.

"클로드여. 지금부터 난 무엇을 하면 되는가?"

육중한 바위덩이가 내 쪽을 돌아보며 물었다. 나는 지체 없이 탑의 서쪽 길을 가리키며 말했다.

"저쪽으로 달리면서 눈에 보이는 모든 걸 박살 내. 건물이든 사이크인이든 할 것 없이."

"...이곳은 다른 차원이군."

테라직은 잠시 침묵하다 내가 가리킨 방향을 보며 물었다.

"그렇다면 저 건물이 가득한 방향으로 대지의 분노를 쏟아내면 되겠는가?"

"대지의 분노? 안 돼."

"안 된다고?"

"물론 그 한 방이 엄청나긴 한데, 그거 쓰면 바로 소환 끝나잖아?"

"꼭 그렇지는 않다만, 거의 그렇긴 하다."

"거 봐. 이번엔 그렇게 단숨에 끝내면 안 돼. 최대한 오래 남아 버티면서 끈질기게 박살 내줘. 하나라도 더 많이. 1초라도 더 오래."

"...알겠다."

녀석은 묵묵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는 마치 산책이라도 하듯 쿵쿵대며 대로를 달리기 시작했다. 그러다 바로 옆에 있는 건물을 향해 가볍게 주먹을 뻗었고.

콰과과과과광!

그 한방에 박살이 나며 무너지는 건물 사이로, 마치 개미떼처럼 쏟아져 나오는 사이크인을 손바닥으로 후려쳤다.

팍!

그러자 흩어졌다.

말 그대로 존재 자체가 흩어져 버렸다. 마치 거대한 파리채로 풀스윙을 맞은 날파리처럼.

이계 황자는 세상을 구하고 싶다 178화

53장 역린

좋다.

보고만 있어도 가슴이 후련해진다. 나는 반대편 통로로 몸을 돌린 다음, 이번에는 작열하는 불의 여왕을 사이크 차원에 강림시켰다.

"이그니스!"

동시에 밤거리가 대낮처럼 환하게 번쩍였다.

"기다리고 있었다, 클로드."

이글거리는 불꽃의 여인이 내 쪽을 보며 미소를 지었다.

"빙의를 하지 않은 건 아쉽네. 하지만 괜찮아. 네가 뭘 바라는지 알고 있으니까."

순간 루네가 움찔하며 뒤로 달아났다. 나는 멀어지는 루네를 향해 손을 흔들며 말했다.

"그래. 좀 물러나 있어, 루네야."

"죄송합니다, 황자님! 저분이 너무 뜨거워서 녹아버릴 것 같아요!"

"얼음과 불이 상극이니... 그런데 이그니스?"

"그래. 클로드."

"내가 뭘 바라는지 알고 있다고?"

"당연하지. 너와 나는 이미 여러 번이나 한 몸이 된 관계잖아? 이 정도를 몰라서 되겠어?"

이그니스는 손바닥 위에 불덩어리를 만들며 미소를 지었다.

"여기 녀석들에게 고통을 안겨주면 되는 거잖아? 최대한 길게, 그리고 최대한 많이."

"정확해."

더 이상의 명령은 필요 없었다. 이그니스는 고개를 끄덕이며 탑의 동쪽 길을 향해 긴 다리를 성큼 내딛기 시작했다.

완벽한 신체비율을 가지고 있는, 키가 3미터에 달하는 불꽃의 여왕.

그녀는 눈에 보이는 모든 건물을 향해, 마치 힘 조절을 하듯 적당한 크기의 불덩이를 휙휙 내던졌다.

그리고 폭발이 일어났다.

콰과과과과광!

새빨간 불꽃이 사방으로 번지며 주변 건물까지 휘감기 시작했다.

"흐흥.... 이거 재미있구나."

이그니스는 흥이 나는 듯, 어깨까지 으쓱이며 계속해서 온 사방으로 불덩이를 던지기 시작했다.

"...으아아아악!"

"불! 불이다!"

"타죽어! 아니 몸이 소멸한다!"

그러자 무수한 사이크인들이 집 밖으로 뛰쳐나오며 비명을 지르기 시작했다.

"하하! 죽는다! 내가 죽어!"

"이게 무슨 일이야! 완전 최고잖아!"

개중에는 이런 상황을 즐기는 녀석들도 꽤 있었다. 그런 놈들에겐 이그니스가 친절하게도 도움의 손길을 내밀어 주었다.

"저런, 너희는 어쩌다 그 모양이 되었니?"

푸확!

이그니스의 손에 닿은 순간, 녀석들은 형체도 남기지 못한 채 불꽃에 휩싸였다.

그러자 집 밖으로 뛰쳐나온 사이크인들이 비명을 지르기 시작했다.

절반은 비명과 함께 이그니스의 반대 방향으로 도망치고, 또 절반은 비명과 함께 이그니스를 향해 뛰어들었다.

마치 불에 뛰어드는 불나방처럼.

"죽는다! 저기! 저기서 다들 죽고 있어!"

"꺄하하! 나도! 나도 같이 할래!"

"도망쳐! 으, 으아! 도망쳐야 하는데.... 왜 몸이 저쪽으로 향하는 거야!"

그것은 광란의 아비규환이었다.

물론 내 눈엔 신나는 불꽃 축제처럼 보일 뿐이었다. 소음이 엄청나게 끔찍하긴 하지만....

"...좋네."

지금은 그 소음마저 아름답다.

그리고 이곳은 음악을 감상하기 가장 좋은 특등석.

나는 온 사방에서 쏟아지는 소음의 하모니를 감상하며 가만히 눈을 감았다.

"그래...."

이거다.

지금이 바로 내가 꿈꿔온 줄도 몰랐던 바로 그 순간이었다.

콰광!

그때 테라직이 내달리던 서쪽 길 멀리서 굉음이 터졌다.

-클로드여, 방금 붕대 감은 녀석 둘을 처리했다.

동시에 테라직의 목소리가 머릿속을 울렸다. 붕대 감은 녀석? 후원자 말인가?

-그리고 열 마리가 넘는 것들이 그쪽으로 날아가고 있다. 조심하라.

테라직의 보고는 거기서 끝이었다. 후원자 열 마리? 며칠 전에도 그러더니 이놈들은 사실 열 마리씩 몰려다니는 게 기본 사양인가?

"어디 보자...."

서쪽 하늘을 올려다보자, 어둑한 하늘 저편에서 정말로 후원자들이 떼로 날아오고 있다.

그런데 붕대 색이 좀 이상한데? 녹색이잖아?

"황자님, 이번엔 저도 싸울게요."

루네가 주먹을 움켜쥐며 공중으로 떠올랐다. 나는 잠시 생각하다 고개를 저었다.

"아니, 넌 지금부터 북쪽길이야."

"네? 하지만 지금...."

"저기 날아오는 놈들은 내가 처리할게. 넌 북쪽 길로 천천히 이동하면서 눈에 보이는 녀석들을 처리해 줘."

"...알겠습니다."

루네는 즉시 고개를 끄덕이며 폐허가 된 북쪽 길을 따라 저공비행을 시작했다. 나는 그사이 포위하듯 하늘에 멈춰 선 후원자를 보며 미소를 지었다.

"정말 붕대가 녹색이네?"

"...이상 반응 감지."

"하위 차원의 생명반응 발견."

"3차 전파탑 소속 관리자 전원 전투를 시작합니다."

"넌 당장 집정탑으로 날아가서 보고부터 해라."

"알겠습니다!"

녀석들은 뭔가를 쑥덕거리며 지시를 내리기 시작했다. 나는 그동안 감정안으로 녀석들의 능력을 하나씩 확인했다.

종족 : 마법생물.

현재 힘 : C-

현재 마법 : A

이것들 마법사였어?

열 녀석 모두가 비슷한 능력치를 가지고 있다. 그림자 능력이나 차원능력을 기대했는데 완전 뜻밖이네.

"하긴, 당장 하늘에 떠있는 것도 비행마법이니...."

그때 한 녀석이 혼자 빠지며 남쪽 하늘을 향해 날아가기 시작했다.

"저런, 어딜 그렇게 급하게 가시나?"

나는 검에 깃든 주드의 힘을 발동, 곧바로 주변에 영역술을 펼쳤다.

"악!"

순간 외마디 비명과 함께 날아가던 녀석이 지면으로 내리 꽂혔다.

-금제 : 마법.

영역에 건 금제는 단 하나, 마법 뿐.

금제를 복잡하게 걸지 않으니 소모되는 힘도 적고, 영역도 멀리까지 펼칠 수 있다.

"앗!"

"마법이!"

"마법이 사라졌다!"

"떨어진다! 안 돼!"

덩달아 공중에 떠 있던 녀석들도 모조리 추락했다.

"안녕?"

나는 바로 옆에 추락한 녀석을 향해 가만히 검을 치켜들었다.

"그리고 안녕."

푹!

그렇게 얼굴 한복판에 검을 찔러 넣은 다음, 명치 아래까지 수직으로 내리 그었다.

"컥!"

녀석은 순간 발작하듯 몸을 뒤틀기 시작했다. 좋아 영생의 핵을 한 개만 썼는데도 칼이 아주 잘 드는구만.

"으, 억, 아니.... 어, 어째서 이성의 붕대가 이렇게 쉽게...."

녀석은 갈라진 틈으로 검은 연기를 뿜어내다 이내 푹 꺼지며 소멸했다.

남은 것은 나풀대는 녹색의 붕대뿐이었다. 나는 발에 감긴 붕대를 걷어차며 혼자 중얼거렸다.

"이성의 붕대라.... 이거 없으면 이성을 유지할 수 없다는 건가?"

"모두 일어나!"

동시에 리더로 보이는 녀석이 급하게 몸을 일으키며 소리쳤다.

"당장 저 생물체를 제압해야 한다! 오면서 봤지 않나! 모든 이상 반응이 저 생물체와 연결되어 있다!"

"하지만 관리자27호님. 마력의 흐름이 전혀 움직이지 않습니다."

"관리자 114호. 저도 마력이 멈췄습니다.

"관리자 159호. 저도 마찬가지입니다.

덩달아 다른 녀석이 몸을 꿈틀대며 보고했다. 이 녹색 붕대 녀석들을 관리자라고 부르나 보네. 하얀 붕대가 후원자고.

"상관없다! 몸으로라도 제압해! 집정관님의 총애를 받는 3차 타워 관리자들의 이름을 걸고...."

"뭘 건다고?"

나는 단숨에 녀석을 향해 뛰어든 다음, 대답을 기다리지 않은 채 목을 베어 날렸다.

촥!

덩달아 팔을 빙글 회전하며 녀석의 몸을 사선으로 내리 그었다.

우웅!

깔끔한 마무리.

일부러 중심부를 피해 검을 그었다. 덕분에 녀석의 몸에 깃들어 있던 영생의 핵이 주드의 검으로 흡수되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핵 하나 써서 핵 하나 추가. 플러스마이너스 제로네."

동시에 다른 관리자들이 거미새끼들 마냥 기겁하며 사방으로 흩어졌다.

"뭐지?"

"방금 저 검...."

"이성의 붕대를 한번에?"

"어떻게 그게 가능하지?"

"투명한 빛...."

녀석들도 이런 힘은 처음 보는 모양.

하긴, 저 녀석들에게 있어 영생의 핵은 생명 그 자체나 다름없다.

당연히 그것을 소모해서 힘을 발휘한다는 개념은 떠올리기 힘들 것이다.

생명을 소모해서 힘을 쓰다니 무슨 자폭도 아니고.... 분명 이놈들만의 윤리 문제 같은 것도 있겠지.

하지만 난 아무렇지도 않게 막 써도 상관없는 걸?

"촥!"

또다시 한 녀석을 베어 날리고 옆에 있는 새로운 적을 향해 몸을 날렸다.

"큭! 망할! 왜 마법이 안 나가는 거야!"

녀석은 본능적으로 내 쪽을 향해 손바닥을 뻗으며 마구 흔들었다.

마력이 A등급이라는 건 사실상 아크 위저드에 거의 근접했다는 뜻.

하마터면 아크 위저드 열 명을 동시에 상대할 뻔했네?

하지만 내 영역 안에서는 그 누구도 마법을 쓸 수 없다.

촥!

발악하는 적의 팔을 베어 날린 다음, 그대로 녀석의 명치에 검을 찔러 넣고 강하게 비틀었다.

푸확!

"컥...."

"앗, 실수."

나도 모르게 영생의 핵을 또 날려 버렸네?

의식하지 않으면 칼끝이 알아서 적의 핵심을 파괴해 버린다.

이것도 일종의 중력 같은 걸까? 칼 속에 들어있는 1만 개가 넘는 영생의 핵이 서로를 강하게 끌어당긴다던가?

* * *

사이크 차원의 하이시티 남부.

이곳엔 주재자의 폭주로 파괴된 집정탑을 대신할 새로운 전파탑이 세워져 있었다.

"이게 대체...."

청색 붕대의 집정관은 불길한 기분으로 스크린을 바라보고 있었다. 순간 기계를 조작하던 관리자 하나가 손을 들며 소리쳤다.

"이상 반응 확인!"

"어디지?"

"시가지의 중심부입니다."

화면의 중심부에 붉은 점이 깜빡이며 소리를 냈다. 집정관은 있지도 않은 심장이 멎는 듯한 기분을 느끼며 소리쳤다.

"옛 집정탑 자리라고?"

"그렇습니다. 하위차원의 생명확인. 고유 주파수도 확인되었습니다."

"...설마?"

삑!

순간 스크린에 새로운 인간의 얼굴이 모습을 드러냈다.

"클로드!"

그것은 과거 하이시티의 주경기장에 난입했던 클로드의 얼굴이었다.

녀석은 사실상 생명체라 할 수 없을 만큼의 높은 온도와 속도를 유지, 당시에 경기장에 있던 사이크인을 무려 만 단위로 도륙했다.

"저 놈이 어떻게 다시...."

당시엔 후원자 2호의 실책으로 인해, 젝트바이아라는 병기의 몸속에 장착된 그림자 차원장치의 폭주로 원인이었다.

그것으로 매우 짧은 시간동안 차원문이 열렸고, 클로드가 차원문에 난입해서 한바탕 휩쓸고 다시 돌아가 버린 것이다.

하지만 이번엔 그런 것도 없다.

하위 차원에서 상위 차원을 향한 전이?

애당초 후원자가 활동을 해야 그런 일이 벌어질 가능성이 조금이라도 생길 텐데.

하지만 당장은 정식으로 임명받은 후원자가 존재하지 않는 상황.

며칠 전에 대실패로 끝난 침공 역시 정식 후원자는 한명도 포함되어 있지 않았다. 대신 후원자 지망생이 열 명이나 소모되었지만....

"정말 클로드라니, 게다가 대체 어떻게 알고 저 위치를 알아낸 거지? 몇 달 전까지만 해도 하이시티의 핵심 시설이 아니었나?"

"정보가 새어 나간 게 아닐까 싶습니다."

"어떻게?"

"그것은 저희들도...."

녹색 붕대의 관리자들도 서로를 바라보며 고개를 저었다. 집정관은 있지도 않은 심장이 빠르게 뛰는 것을 느끼며 지시를 내렸다.

"도시 경비는, 경비대는 어디에 배치되어 있지?"

"이미 하이시티의 경비대 전원이 주 도로망을 따라 옛 집정탑 자리로 이동 중입니다만...."

"중입니다만? 빨리 말해!"

"그게.... 가까운 곳에 있던 14구역 경비대가 방금 전멸했습니다."

"전멸?"

순간 화면이 전환되며, 온몸이 불길에 휩싸인 새빨간 여자가 모습을 드러냈다.

푸확!

여자는 마침 긴 팔로 경비대 하나를 움켜쥐며 불을 붙이고 있었다.

"크아아아아악!"

순간 경비대의 몸에 맹렬한 불길이 치솟았다. 여자는 불이 붙은 경비대를 근처의 빌딩에 집어던지며 폭발을 일으켰다.

콰과과과과과광!

"저게 대체...."

"고유 주파수 확인. 알드 차원에 속한 원소의 근원으로 추정됩니다."

"원소의 근원!"

집정관은 몸을 떨며 주먹을 움켜쥐었다.

지금껏 그들이 상대한 모든 차원에는 각기 다른 원소의 근원이 존재했다.

그것은 사이크 차원조차 무시할 수 없는 강력한 힘이었다. 다만 지금껏 그 어떤 차원의 인류도 원소의 근원을 직접 다루는 모습을 보여주진 못했다.

"클로드.... 전에는 살아있는 인간 주제에 원소의 근원과 융합하더니.... 이제는 노예처럼 따로 부려먹기까지 한다는 건가?"

고도의 기술을 확보했던 자신들조차 이미 오래 전에 불가능하다고 결론 내린 힘.

바로 그 힘을, 클로드는 마치 숨을 쉬는 것처럼 자연스럽게 활용하고 있었다.

"대체 어떻게 저런 괴물이.... 아니지, 지금 당장 가까운 전파탑에 지시를 내려라. 전파탑의 관리자들을 모두 집결해서 클로드를 공격하라고 해!"

"네. 집정관님."

"4번 전파탑. 바로 출격한다 합니다.

"5번 전파탑은 시간이 걸린다 합니다."

"시간? 왜?"

"예상 못 한 에너지가 전파 탑으로 몰려오고 있다 합니다. 이를 재처리해서 가용상태로 만들어야 하기 때문에...."

"필요 없어!"

집정관은 자신도 모르게 소리를 질렀다.

"에너지가 몰려온다고? 그야 시민들이 죽어나가고 있으니 당연하겠지! 우린 죽는 그 순간까지 에너지를 토해내는 존재야! 그딴 거 신경 쓸 시간 있으면 애당초 시민들이 죽지 않도록 막아!"

이계 황자는 세상을 구하고 싶다 179화

53장 역린

"고정해 주십시오 집정관님. 여기서 집정관님마저 이성을 잃으면 더 큰일이 납니다."

관리자들이 부풀어 오른 집정관을 보며 기겁했다. 집정관은 과거 폭주했던 주재자의 모습을 떠올리며 애써 흥분을 가라앉혔다.

"그.... 그래. 진정해야지. 모두 미안하다."

"아닙니다. 우선 말씀하신 대로 5번 전파탑에 다시 명령을 보내겠습니다."

"그래. 그런데 3번 전파탑은 어떻게 됐지? 그쪽 관리자들이 마법에 관해선 최정예인데?"

"3번 전파탑, 침묵 중입니다."

"침묵?"

"계속 반응이 없습니다. 이미 이상사태를 확인하고 현장으로 출동한 것 같습니다."

"하긴 그쪽이 현장에서 가장 가깝긴 하지. 제발 잘 싸워야 할 텐데...."

집정관은 손가락을 입 근처로 가져가 잘근거리기 시작했다. 그리고 마침 스크린의 좌우가 열리며 새로운 화면이 들어오기 시작했다.

"현재 도시 남쪽, 6번과 7번 구역의 상황입니다."

콰광!

순간 거대한 얼음덩이가 화면에 출몰, 앞에 있던 건물을 몸으로 들이 받으며 뒤로 무너뜨렸다.

덩달아 무수한 얼음덩어리들이 도시 내부로 진입, 집밖으로 뛰쳐나오는 시민들을 마구잡이로 학살하기 시작했다.

"...뭐지 저건?"

"고유 주파수 확인 결과 원소의 근원, 정확히는 그중에도 하위 존재라 추정됩니다."

"숫자가 너무 많잖아! 아무리 하위 존재라 해도...."

집정관은 또다시 부풀어 오르는 몸을 가라앉히며 고개를 저었다.

"이걸 말도 안 돼. 하위차원에서 넘어온 게 정말 클로드 하나뿐인가?"

"현재까지 발견된, 인간에 해당하는 고유 주파수는 하나뿐입니다."

"어떻게 혼자서.... 저렇게 많은 원소의 근원을 다룰 수 있지?"

"제 눈에는 다룬다기보다는, 그냥 풀어놓고 마음대로 설치게 내버려 두는 것 같습니다만.... 아니, 아무것도 아닙니다."

관리자 하나가 급하게 입을 막으며 고개를 숙였다. 녀석을 쏘아보던 집정관은 꽉 쥔 주먹을 풀며 소리 없이 한숨을 내쉬었다.

"어째서 이런 일이...."

"집정관님. 이건 사이크 역사를 통틀어 한 번도 없던 위기입니다."

또 다른 관리자가 집정관을 돌아보며 제안했다.

"현장 상황을 무작정 비관할 수는 없지만, 이렇게 된 이상 더 큰 피해를 막기 위해서라도 최대 전력을 동원해야 하지 않겠습니까?"

"최대 전력?"

순간 집정관의 눈빛이 더 어둡게 가라앉았다.

"주재자님을 전장에 내보내라는 뜻인가? 그분은 지금 자리를 비우셨다. 며칠 전의 대실패 때문에...."

"주재자님을 말씀드린 게 아닙니다. 저희들은 항상 최후의 순간을 대비하고 있지 않습니까?"

"최후의 순간...."

그제야 집정관의 눈이 빛을 내며 번뜩였다.

"지금 결투자를 말하는 건가? 하지만 결투자는 침공이 실패로 돌아갔을 때를 대비해 끝까지 남겨놔야 한다."

"어차피 위원회의 제재가 떨어지지 않았습니까? 만약 그 순간이 와도 내보낼 수 있는 결투자는 하나뿐입니다."

"...그런데 우리에겐 세 명의 결투자가 있지."

집정관은 완전히 생기가 돌아온 눈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규정대로라면 결투자를 동원하는 데는 주재자의 승인이 필수적.

하지만 주재자는 전권을 자신에게 맡기고 자리를 비운 상황이다. 집정관은 길게 고민하지 않고 바로 명령을 내렸다.

"최종구역에 상황을 전달하고 동원령을 내려라."

"네. 집정관님. 결투자는 누구를 보내라 지시할까요?"

"그쪽에서 결정하라고 해. 어차피 셋 중 누가 와도 상관없을 테니. 그리고 내부 무기고에 새 무기가 약간 남았지?"

"새 무기라면...."

"알드 차원의 기술로 만든 갑옷 말이다."

"아, 네. 추가 제작된 알드갑옷 10여 기가 남은 걸로 확인됩니다."

관리자가 급하게 재고를 확인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집정관은 화면에 뜬 거대한 갑옷들을 확인하며 말을 이었다.

"이것들을 먼저 수송기에 싣고 현장에 보내라. 적어도 결투자가 도착할 때까지 시간은 벌 수 있겠지."

* * *

최종 구역.

하이 시티의 외곽 너머에 존재하는 특별 자치구로, 중앙의 통제를 벗어난 1만 여명의 사이크인이 특별한 목적을 위해 이곳에 보관되어있다.

위대한 게임.

그들의 목표는 오직 위대한 게임의 승리 뿐.

바로 차원의 존망을 건 최종 승부에 내보낼 결투자를 위한 구역이다.

구역의 모든 시스템은 이곳에 있는 세 명의 결투자를 위해 만들어졌다.

"요즘 농장의 컨디션이 별로인데...."

결투자 하나가 유리벽 너머를 보며 고개를 갸웃거렸다.

벽 너머에는 속이 훤히 보이는 투명한 관이 끝도 없이 놓여 있었다.

관속에 들어 있는 것은 전부 사이크 인.

1만에 달하는 사이크인이 전기적인 자극을 받으며 활력을 유지하는 동안, 그들과 연결된 결투자는 가히 상상을 초월하는 힘을 발휘 할 수 있었다.

결속술.

사이크의 최종병기라 할 수 있는 결투자의 정체는, 다름 아닌 차원능력의 하나인 결속능력자였다.

위칸 왕국을 지키는 투사들과 정확히 같은 능력.

차이가 있다면 위칸의 투사들이 1천의 백성들과 결속을 맺는다면, 결투자는 최대 1만의 시민들과 결속이 가능하다는 점이었다.

"매직(magic), 중앙에서 연락이 왔다."

그때 또 다른 결투자가 옆으로 다가왔다.

두 사람 모두 붉은 빛의 붕대를 감고 있었지만, 매직이라 불린 결투자의 붕대 색이 좀 더 진한 핏빛으로 번뜩였다.

"하이시티에 난리가 난 모양이다. 하위차원의 인간이 넘어와 난동을 부리기 시작했고, 이미 수만의 시민들이 목숨을 잃었다고 한다."

"하위차원?"

매직은 고개를 꺾으며 빨간 눈을 번뜩였다.

"하위차원의 인간이 어떻게 이곳으로 넘어 올 수 있지?"

"나도 모른다. 중앙에서도 모르는 것 같고."

"전에 주경기장으로 넘어왔다던 녀석과 같은 인간인가?"

"넘어온 정보를 보면 그렇다."

"새 후원자가 일을 또 망친 모양이군."

매직은 코웃음을 치며 고개를 저었다.

중앙의 일에 무심했기 때문에 나올 수 있는 반응이었다. 그들에게 있어 중요한건 오직 최종 결투뿐이었으니까.

"최대한 빨리 결투자 하나를 하이시티로 보내달라고 한다. 옛날 집정탑 자리로."

"옛날? 왜 과거형으로 부르지?"

"전에 듣지 않았나? 주재자가 폭주한 바람에 하이시티의 일부가 파괴됐다고."

"그랬나? 그쪽 일에 관심이 별로 없어서."

매직은 머리를 긁는 시늉을 하며 말했다.

"그보다 리버레이트(liberate)는?"

"리버레이트는 여전히 잠들어 있다. 최종결투가 아니면 절대 깨우지 말라고 당부했지."

"그럼 너 아니면 나네. 섀도(shadow)."

매직은 마주본 결투자의 이름을 부르며 웃었다. 섀도라 불린 결투자는 유리벽 너머의 관들을 바라보며 물었다.

"누가 나가도 상관없다. 이번엔 내가 나갔다 올까?"

"아니, 내가 좋겠어. 넌 저번 최종 결투에 나갔으니까."

"결투라. 그게 대체 몇백 년 전의 일인지 기억도 안 난다."

"나도 그래. 하지만 이번엔 기대해도 되지 않을까?"

매직은 손바닥 위에 투명한 빛을 만들며 미소를 지었다.

"무려 상위차원에 넘어와서 반격까지 하는 놈들이니까. 오랜만에 우리가 나설 일이 생기지 않을까?"

* * *

나는 마지막 남은 관리자의 몸을 예쁘게 세 등분으로 나눠 주었다.

머리, 가슴, 배.

"컥...! 이자는… 이자는 차원능력을 쓸 수 있... 누가 아무나 집정탑에 알려...."

녀석은 소멸하기 직전까지 온몸을 바동거렸다. 나는 녀석의 머리를 향해 발을 치켜들며 고개를 저었다.

"미안하지만 그건 안 돼."

푸직!

한순간 검은 연기가 폭발하듯 사방으로 터졌다.

그리고 모든 게 다시 잠잠해졌다.

아무래도 관리자라 불리는 이 녹색 붕대 녀석들은 모두가 마법사인 모양.

덕분에 마법을 금제로 건 영역 속에서 아무 힘도 발휘하지 못한다.

물론 기본적으로 보유한 힘이 꽤 강한 편이긴 하지만.... 그래봤자 하급 마갑 입은 카일 정도나 되려나?

-클로드?

그때 머릿속에서 불의 여왕의 목소리가 울렸다.

-방금 녹색 붕대 감고 있는 녀석들 한 무더기를 처리했다. 전에 봤던 후원자에 비하면 별것 아닌데?

'그렇지? 다들 마법사 같은데 약점이 너무 많아. 너쯤 되면 굳이 영역을 쓰지 않아도....'

-마법사? 그렇지 않다. 내가 상대한 녀석들은 괴상한 창을 든 전사들이었다.

'전사?'

이건 또 무슨 소리래? 마법 말고 무기 쓰는 놈들이 따로 있나?

그 와중에 또 북서쪽 하늘에서 한 무더기의 날파리들이 날아오기 시작했다.

저거 봐, 이번에도 다들 녹색 붕대에 마법사들이잖아? 이그니스는 대체 무슨 녀석들을 상대한 거지?

"그건 나중에 차차 알아보기로 하고...."

나는 일부러 펼쳐놓은 영역을 거둔 다음, 녀석들이 가까이 올 때까지 기다렸다가 다시 새 영역을 펼쳤다.

우웅!

그러자 관리자들이 여지없이 지면으로 추락했다. 이번에도 월척이구만.

촥!

"컥! 아니 이건...."

촤륵!

"아흑! 어째서 마법이...."

콰직!

"마, 말도 안 돼. 이성의 붕대가 고작 하위차원의 칼 따위에...."

저마다 한마디씩 남기며, 동시에 영생의 핵까지 깔끔하게 넘겨준다.

"이 짓도 계속하다 보니.... 이젠 완전 손에 익었네."

하지만 아무리 아껴 쓴다 해도, 결국 소모되는 영생의 핵이 더 많을 수밖에 없는 게 사실.

이럴 줄 알았으면 나도 주택가로 넘어가서 시민들이나 쓸어버릴 걸 그랬나?

"으, 으윽...."

나는 마지막 남은 관리자의 팔다리를 잘라놓은 다음, 가슴팍을 발로 밟으며 질문을 던졌다.

"죽이기 전에 뭐 좀 물어볼게."

"이.... 이 악독한 놈이...."

"칭찬 고마워. 그보다 이 도시에 사이크 인이 몇 명이나 있어?"

"죽여라! 집정관께서 반드시 우리들의 복수를 해주실 거다!"

"집정관?"

이건 또 처음 들어보는 이름이다. 사이크 차원의 지도자 같은 건가?

"집정관이 뭔데? 여기서 이러고 있으면 녀석이 출동하는 건가?"

"큭...."

"말 좀 해보라니까? 대답만 잘하면 살려줄 수도 있는데?"

"하, 하위차원 인간 주제에.... 감히 누굴 회유하려는 거냐!"

"회유?"

나는 녀석의 마지막 남은 오체를 칼로 베어 날리며 고개를 저었다.

"이건 회유가 아니라 협박이야. 다른 놈들은 협박이 좀 통하면 좋겠는데...."

-황자님!

그때 머릿속에 루네의 목소리가 울렸다.

-이쪽 길엔 아무것도 없어요. 뭔가 엄청난 폭풍 같은 게 휩쓸고 지나간거 같아요.

'그래? 사이크인이 한 명도 없어?'

-보이는 건 폐허뿐이에요. 그보다 하나 걱정되는 게 있는데....

'뭔데?'

-제가 완전한 정령은 아니지만, 그래도 황자님이 얼음 정령 군단을 소환하며 함께 딸려 오잖아요? 그래서 이번에도 이렇게 날아왔고.

'그렇지. 자는데 억지로 불러와서 미안.'

-아니, 저야말로 불러주셔서 영광이에요. 가능하면 적들과 싸우고 싶은데.... 그런데 나중에 어떻게 해요?

'나중에? 그게 무슨 소리야?'

-여기 사이크 차원이라고 하셨죠? 황자님은 여기 어떻게 넘어오신 거예요?

'그걸 설명 안했구나. 선옥에서 승천이라는 선술을 배웠어. 정확히는 차원능력 중에 하나인 차원 이동인데.... 앗?'

순간 루네가 걱정하는 게 뭔지 바로 파악했다.

-그 승천이라는 거, 돌아갈 때도 쓰실 힘이 남아 있는 건가요?

'응. 돌아갈 힘은 충분해. 딱 두 번 쓸 만큼 되더라. 근데 차원문을 여는 게 아니라 나 혼자 넘어오는 거라....'

다른 정령들은 힘을 다 쓰거나 소환시간이 끝나면 사라진다.

하지만 절반은 인간인 루네는 그대로 이곳에 남게 된다. 내가 복수에 눈이 멀어서 이걸 생각 못 했네?

-역시 그렇죠? 나중에 저도 원래 세상으로 돌아가려면 사흘 정도 기다려야 하는 거죠?

'...맞아.'

그래야 다시 얼음 정령 군단을 소환해 루네를 원래 세상으로 돌려보낼 수 있다.

하지만 이런 내 실착에도 불구하고, 루네는 아무렇지도 않은 목소리로 해결책을 내놓았다.

-그럼 저는 싸우는 대신에, 어디 안전한 곳에 날아가서 숨어 있을게요.

'...그래 줄 수 있겠어?'

-물론이죠. 마침 멀리서 뭔가 느껴지는 것도 있고요.

'느껴진다고? 뭐가?'

-일단 찾아간 다음에 말씀드릴게요. 위험한 일은 안 할 테니까 너무 걱정하지 마세요!

그러고는 연결이 끊어졌다. 나는 한숨과 함께 고개를 저었다.

"다음엔 이것도 먼저 고려해야지...."

"저기! 저쪽이다!"

그때 멀리서 녹색 붕대를 감은 사이크인 들이 무더기로 달려오는 게 보였다.

저곳은 얼음정령들이 쓸고 내려간 남쪽 방향이다. 이미 정리를 끝내고 반격까지 시도하는 걸까? 아니면 서로 방향이 어긋난 걸까?

"그나저나 저놈들도 녹색붕대를 감고 있는데...."

막상 다른 놈들처럼 하늘이 아니라 육로로 달려오네?

저게 이그니스가 말한 그놈들일지도 모른다. 자세히 보니 확실히 손에 창 같은 걸 쥐고 있기도 하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