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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계 황자는 세상을 구하고 싶다 172화

53장 역린

"곧 적들이 온다! 자리를 지켜!"

위칸의 근위군은 방패를 내민 채 몸으로 계단을 사수했다.

이곳이 뚫리면 바로 왕궁이다.

위칸은 건국 이래 단 한 번도 적들에게 범궐을 허용하지 않았다. 만약 오늘 역사가 깨진다면, 위칸의 최정예인 근위군에 씻을 수 없는 치욕이 될 것이다.

하지만 그들은 기사가 아니었다.

그저 극한까지 단련한 일반인일 뿐.

이계를 넘어온 괴물들에, 마갑조차 착용 안 한 인간이 대적하는 것은 불가능했다.

"캬갹!"

순간 어슴푸레한 계단 아래에서, 한 남자가 기괴한 괴성을 지르며 계단을 마구 뛰어올랐다.

네 발로.

온몸에 지렁이 같은 촉수가 돋은 남자는, 뒤집힌 눈으로 근위군의 전열을 향해 뛰어들었다.

"캬각!"

"찔러 창!"

순간 방패 사이로 무수한 창들이 날아들었다.

푹!

한순간에 구멍투성이가 된 남자는, 그 와중에도 멈추지 않고 눈앞에 있는 방패를 향해 손을 내리쳤다.

그 일격에 방패가 찢겨 날아갔다.

덩달아 방패를 쥐고 있던 병사의 오른손도 함께 날아갔다. 남자는 비명과 함께 몸을 숙인 병사의 목덜미를 단숨에 입으로 물며 뜯어냈다.

피가 솟구쳤다.

"한 번 더 찔러!"

그러자 사방에서 다시 한번 창이 날아들었다.

"컥...."

그제야 남자의 몸에 힘이 풀렸다. 녀석은 몸에 꽂힌 창이 뽑혀나감과 동시에 뒤로 넘어가며 계단 아래로 굴러떨어지기 시작했다.

퉁.

퉁.

퉁.

그리고 고요해졌다. 하지만 전투는 지금부터였다.

"촉수병이 몰려온다! 버텨! 버티면 이길 수 있다!"

근위군 3진의 부대장이 목이 쉬어라 소리를 질렀다. 이제 남은 부대장은 자신뿐이다. 이미 1진과 2진은 저 아래 어디선가에서 전멸했기 때문에.

동시에 수백 배의 더 큰 함성이 아래쪽에서 솟구쳤다.

캬아아아아아아아아아악!

촉수병.

생존해 돌아온 정찰의 보고에 따르면, 저 촉수 달린 괴물 같은 인간들의 숫자만 수천에 달한다.

"온다!"

동시에 무수한 적들이 미친개처럼 침을 흘리며 계단을 마구 뛰어 올라오기 시작했다.

그리고 전투가 시작됐다.

근위군의 1열은 순식간에 무너졌다.

하지만 그들이 죽음으로 버티는 동안, 뒤에 있는 2열의 병사들이 정신없이 창을 내지르며 적의 숫자를 차곡차곡 줄여나갔다.

그리고 다음은 2열이 방패가 될 시간.

미친 듯이 창질을 하던 2열의 병사들은 부대장의 신호와 함께 창 대신 방패로 몸을 막았다.

그리고 10초가 지나자 2열도 전부 갈려 날아갔다.

하지만 근위군의 대열은 여전히 수십 겹이 남아 있었다. 그렇게 죽음으로 버티며 악착같이 시간을 끄는 동안, 가장 높은 계단에 있던 부대장의 눈에 검은 광채가 번뜩였다.

"좌우로 산개!"

동시에 계단 아래쪽에서 새빨간 불길이 치솟았다.

역류하는 화염은 앞서 싸우던 촉수병을 산채로 불태웠다.

다음으로 계단을 막고 있던 근위군을 덮쳤지만, 그사이 근위군은 계단의 좌우에 있는 숲으로 몸을 던진 상태였다.

"조심해!"

"으악!"

"굴러떨어진다!"

"나무를 잡아! 계속 추락하면 죽는다!"

그곳은 말이 숲이지 가파른 경사로 이뤄진 절벽이나 다름없었다.

수백의 병사들이 저마다 절벽에 솟은 나무를 붙잡으며 목숨을 부지했다.

그러고는 저 아래서 불을 뿜은 장본인, 바로 새까만 갑옷을 입은 새로운 적들을 주시했다.

화염병.

예상 못 한 근위군의 움직임 덕분에, 화염병의 일격은 그저 아군인 촉수병을 학살하는 것으로 끝나고 말았다.

"...."

하지만 아무 상관없었다.

그저 허리춤에 달린 호스를 조금 틀어, 좌우에 펼쳐진 숲에 한 번 더 화염을 뿜어내면 그만이니까.

그런데 그때, 계단 위에서 굉음과 함께 무언가가 왕창 쏟아졌다.

콰과과과광!

통나무.

"전부 굴려! 가져오는 대로 바로 굴려라!"

부대장은 유사시를 대비, 성에 보관하던 대량의 통나무를 가져와 굴리기 시작했다.

근위군이 시간을 번 것도 바로 이때를 위해서였다. 가파른 계단을 따라 가속도를 얻은 통나무들이 엄청난 기세로 이계의 군대를 덮치기 시작했다.

그에 맞서, 화염병이 할 수 있는 일이라곤 그저 불을 뿜는 것뿐.

푸화아아아아악!

물론 자폭이었다.

불길에 휩싸인 통나무들이 수십, 수백에 달하는 화염병을 박살내며 휩쓸기 시작한다.

이계의 첨단기술이 응집된 화염병.

그런데도 고작 통나무 따위에 쓸려 모습이 기묘했다. 지켜보던 부대장은 회심의 미소를 지으며 주먹 움켜쥐었다.

"좋아! 계속 계속 굴려! 아직 쟁여놓은 통나무는 많으니...."

콰직!

그때 저 아래서 새로운 소리가 들렸다.

화염병이 통나무에 휩쓸러 박살나는 소리가 아니다.

그보다 좀 더 경쾌한 파열음.

마침 동이 트며 주황빛 노을이 저 멀리 계단 아래까지 쏟아졌다.

덕분에 그곳의 무시무시한 전경이 모습을 드러냈다.

거대 갑옷.

말 그대로 거대한 갑옷이 우뚝 서 있다.

사람 키보다 큰 대검을 쥐고 있는 거인.

저 안에 과연 뭔가 들어있기나 한 걸까?

거인도 말이 좋아 거인이지, 대체 얼마나 몸이 커야 저런 말도 안 되는 갑옷을 착용할 수 있을까?

"...."

부대장이 눈을 부릅뜬 순간, 마침 새로 굴린 통나무 하나가 거대 갑옷의 몸통을 향해 내리꽂혔다.

녀석은 딱히 통나무를 막으려 하지도 않았다.

텅!

충돌한 통나무가 둔탁한 소리를 내며 옆으로 튕겨 날아갔다. 말문이 막힌 부대장은 한동안 입을 뻐끔거리다 겨우 목청을 열 수 있었다.

"어.... 아니! 뭣들 하나! 계속 굴려! 통나무를 더 가져와! 아니, 다 가져...."

그 순간, 부대장의 몸이 둘로 갈라졌다.

거대 갑옷 하나가 쥐고 있던 검을 집어 던진 것.

어찌나 빠르게 날아오는지 뭔가를 느낄 새도 없었다. 부대장을 절단 낸 검은 뒤에 있던 궁 입구의 기둥 하나를 박살냈고, 뒤에서 열심히 통나무를 굴려오던 인부 다섯 명의 몸까지 계속 관통하며 지나갔다.

콰앙!

그리고는 겨우 후문 벽에 꽂히며 멈췄다.

"힉...."

운 좋게 살아남은 인부들이 벽에 꽂힌 검을 보며 기겁했다.

저게 가능한 일인가?

위에서 아래로 던진 것도 아니고, 저 멀리 계단 아래서 위로 검을 던졌는데.

그것이 사람 대여섯 명을 그대로 절단 내고는 벽까지 날아가 꽂혔다고?

"으.... 살려줘!"

"나, 난 그냥 잡부야! 병사가 아니라고!"

"으아아악!"

통나무를 굴리던 인부들이 비명과 함께 궁 쪽으로 도망치기 시작했다.

덕분에 통나무 샤워가 주춤해지자, 멀리 아래 거대 갑옷들이 다시 성큼 발을 뻗으며 계단을 올라오기 시작했다.

"괴, 괴물...."

너무 거대하다.

여전히 절벽에 매달려 있던 병사들은, 그 위압만으로도 자지러지며 손을 놓쳐 아래로 떨어지기 시작했다.

"꽉 잡고 있어! 떨어지면 죽는다!"

하지만 의미 없는 짓이었다.

거대 갑옷의 뒤쪽으로 새로운 화염병이 추가, 계단 좌우의 절벽을 향해 호스를 겨누기 시작했다.

저 호스에서 모든 걸 불태우는 새빨간 불길이 쏟아진다. 병사들은 몸을 웅크리며 비명을 지르기 시작했다.

"으, 으아아악!"

"안 돼! 살려줘!"

"피해! 일단 불부터 피해야 해!"

하지만 불을 피해 손을 놓으면 절벽 아래로 굴러떨어진다.

그렇다고 계속 나무를 잡고 버티자니 새까만 숯덩이가 될 상황.

그런데 그때, 뭔가가 멀리 계단 위로부터 날아왔다.

부웅....

포물선을 그리며 날아든 그것은, 계단을 오르던 거대 갑옷과 뒤에 있던 화염병들의 정확히 사이에 착지했다.

콰앙!

그것은 두 명의 남자였다.

한 남자는 착지와 동시에 위에 있던 거대 갑옷들을 향해 주먹을 내질렀고.

또 한 남자는 아래 있던 화염병을 향해 주먹 내질렀다.

동시에 나선형의 충격파가 위아래로 솟구쳤다.

콰과과과과과과광!

수십 기의 화염병이 그 한방에 갑옷 채 으스러지며 아래로 날아갔다.

위에 있던 거대 갑옷 세 기 중 하나는 직격을 맞아 분해됐고, 좌우의 둘은 옆으로 튕기며 절벽 아래로 굴러떨어지기 시작했다.

"우와아아아아!"

"투사님!"

순간 절벽에 매달려 있던 근위군이 환성을 질렀다.

투사.

위칸을 지키는 최후의 보루가 드디어 전장에 도착한 것이다.

"후우...."

투사 셴은 주먹 한 방에 화염병 부대를 쓸어버리고는 호흡을 가다듬었다.

상체가 날아간 채, 덜렁 다리만 남은 갑옷 속에 사람 다리가 들어 있는 게 보였다.

셴은 눈을 질끈 감았다 뜨며 등 뒤의 다른 투사에게 물었다.

"뤄제. 그쪽은 어떤가?"

"물론 해치웠다. 그런데...."

투사 뤄제는 바닥에 널브러진 거대 갑옷의 다리를 보며 이를 갈았다.

"이 커다란 녀석. 몸속에 사람이 들어있다."

"무슨 당연한 소릴, 내가 잡은 이 녀석들도 당연히 속에 사람이 들어 있다."

"그게 아니라...."

거대 갑옷의 박살난 다리 한쪽에, 몸이 으스러진 사람 하나가 피를 쏟으며 죽어있다.

찢겨나간 다른 부위도 마찬가지였다. 뤄제는 속에서 신물이 올라오는 것을 느끼며 짧게 설명했다.

"십여 명의 사람이 동시에 갑옷 속에 들어있다."

"뭐? 그게 말이 되나?"

"말이 안 되지만 현실이다. 이놈들은 대체...."

"투사님!"

"오셨군요, 투사님!"

"만세! 이제부터 반격이다!"

절벽에 매달린 근위군이 일제히 환성을 질렀다. 투사들은 심각하던 표정을 풀며 근위군을 향해 주먹을 치켜들었다.

"늦어서 미안하다! 지금부터 우리가 상대하겠다!"

투사들은 전장에서 완전히 반대편에 있는 태선부 근처의 산속에서 새벽 수련 중이었다.

그렇게 수련을 하며 클로드 황자가 선옥에서 나올 시간을 기다리고 있었는데, 갑자기 상상도 못 한 적의 침공이 시작된 것.

"투사님! 그냥 가만히 계시면 위험합니다! 적들 중에 화염병이 있습니다!"

병사 하나가 악을 쓰며 소리쳤다. 셴은 저 멀리 아래서 새로운 적들이 올라오는 것을 확인하며 되물었다.

"화염병? 그게 무엇이냐?"

"방금 투사님이 쓰러뜨린 적입니다! 화염을 길게 내 뿜는... 앗! 조심하십시오!"

그때 멀리 계단 아래에서 불덩이가 날아들었다. 셴은 잘 발달된 전완근에 힘을 주며 다시금 주먹을 말아 쥐었다.

"이따위 불은 아무것도 아니다!"

그러고는 X자로 얼굴을 가리며 날아오는 불덩이를 몸으로 받아냈다.

하지만 그 불덩이는 그냥 불이 아니었다.

콰과과과과과과과광!

충돌 순간 강력한 폭발을 일으키며 사방으로 폭염을 쏟아냈다. 덕분에 멀리 절벽에 매달린 병사들까지 충격에 휘말리며 몸을 움츠려야 했다.

"큭! 투사님!"

"셴! 괜찮나!"

뒤에 있던 뤄제가 셴의 몸에 붙은 불을 손으로 훑어내며 소리쳤다. 덕분에 반라가 되어버린 셴은 웅크렸던 몸을 천천히 피며 부릅뜬 눈을 번뜩였다.

"이건.... 예사 불이 아니군."

지금까지 근위군이 경험했던 화염병의 불길과는 전혀 다른 형태였다.

"저 녀석들...."

셴은 멀리 계단 아래 형태가 다른 새로운 화염병을 발견했다.

방금 박살냈던 녀석보다 덩치가 더 크고, 갑옷 색도 다르다. 그런 녀석들이 수십 명이 뭉쳐서 새로운 불덩어리를 준비하고 있었다.

"...."

"...."

두 투사는 시선을 교환했다.

당장이라도 뛰어들어 박살내야 한다. 그렇게 다리를 웅크리며 아래로 몸을 날리려는 순간.

푸확!

새로운 화염병, 바로 강화 화염병들이 무더기로 불덩이를 쏘아냈다.

투사들 입장에선 예상했던 바였다. 처음부터 뭔가를 쏘더라도 뚫고 돌진할 생각이었으니까.

문제는 적들이 불덩이를 쏜 방향이 자신들이 아닌, 절벽에 매달린 근위군을 향했다는 것이었다.

"...뤄제!"

"셴! 일단 구하고 본다!"

덕분에 두 투사는 아래가 아닌 양 옆으로 몸을 날릴 수밖에 없었다.

"으악! 투사님!"

병사들이 비명을 지르는 순간, 절벽에 몸을 날린 셴은 날아오는 불덩어리를 향해 미리 주먹을 휘둘렀다.

콰아아아아아앙!

짧게 쏟아진 충격파가 날아드는 불덩어리를 미리 격추해 떨어뜨렸다.

그렇게 수십 번의 주먹질로 모든 요격에 성공한 셴은, 이내 날렵하게 절벽을 짚으며 다시 계단 쪽으로 몸을 날렸다.

"뤄제! 여긴 내가 막을 테니 너 혼자 내려가 적을 격퇴해라!"

"혼자서 할 수 있겠나!"

같은 일을 하고 온 뤄제의 몸에는 그을음이 잔뜩 묻어 있었다. 셴은 이를 악물며 고개를 끄덕였다.

"최선을 다하겠다! 그동안 빨리 처리해!"

"알겠다! 그럼...."

그런데 그때.

"...음?"

이미 동이 터서 사방이 환해지고 있는 상황에, 갑자기 주변이 검게 물들기 시작했다.

"이건 뭐지?"

"아무것도 안 보여!"

"아니, 그래도 적들은 아래쪽에 있다!"

투사들은 멀리 계단 아래를 노려보며 경계했다.

하지만 어둠이 깔린 덕분에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그렇게 두 투사의 눈이 완전히 봉쇄된 순간.

"...."

뭔가가 뒤쪽에서 쑥 올라왔다.

그것은 하얀 붕대를 감은 이계의 존재였다. 녀석은 그림자 위로 솟구치자마자 투사들의 뒷목을 향해 동시에 양손을 뻗었다

날카로운 손끝에는 투명한 액체가 번들거렸다.

이계 황자는 세상을 구하고 싶다 173화

53장 역린

푹!

손끝이 뒷목을 파고 든 순간, 두 투사가 동시에 몸을 회전하며 적을 향해 주먹을 휘둘렀다.

셴의 주먹은 적의 몸을 좌에서 우로 박살냈고, 뤄제의 주먹은 우상에서 좌하로 짓눌렀다.

우직!

적의 몸 전체가 기묘한 형태로 뒤틀렸다.

동시에 붕대가 터지며 안에서 살점과 피가 솟구쳤다.

덩달아 검은 연기도 피어올랐다. 녀석은 구겨진 붕대처럼 무너졌고, 그 와중에도 투사들을 올려다보며 미소를 지었다.

"엄청난 힘...! 하지만 당신들은 이제 죽습니다. 사이크 차원을 위해...."

"독인가? 더러운 녀석이군."

셴은 뒷목을 만지며 침을 뱉었고, 뤄제는 확인사살이라도 하려는 듯 주먹을 치켜들었다.

"...어째서?"

녀석의 표정이 빠르게 일그러졌다.

"죽어도 열 번은 죽었을 텐데.... 이건 설마.... 결투자?"

"결투자? 난 투사다."

순간 뤄제의 주먹이 무너진 적의 머리를 한 번 더 가격했다.

콰직!

사방으로 뼈와 살이 튀었다. 뤄제는 주먹을 거두며 이를 갈았다.

"네놈의 독수 때문에 결속된 백성이 열 분도 넘게 돌아가셨다. 그 고마운 분들을.... 네놈 목숨 따위는 백 개를 줘도 갚을 수 없어."

"저, 정말 결투자라니. 이건 말도 안 돼."

녀석은 반도 안남은 머리를 심하게 흔들었다.

"차원 잠재력이 떨어지는 동대륙에 이런 힘이.... 차원 능력.... 이런 개죽음을.... 나는 후원자가 되고 싶...."

"시끄럽다."

콰앙!

이번엔 셴이 발을 들어 녀석의 마지막 숨통을 내리 끊었다.

그걸로 끝이었다. 뤄제는 사방에 튄 피를 바라보며 눈살을 찌푸렸다.

"후원자? 괴상한 이름이군."

"예사 놈이 아니었다. 손끝에 독을 바르고 있다니. 후원자라는 게 암살자의 다른 이름인가 보군."

실제로는 후원자가 되지 못한 채 반란군과 융합한 사이크인이었지만.

그때 그림자로 검게 물든 세상이 다시 환해졌다.

덕분에 투사들의 표정도 잠시 환해졌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뿐, 계단 아래서 수십 발의 불덩어리가 날아드는 것이 보였다.

"...."

"...."

이건 위험하다.

투사들은 바짝 긴장했다. 방금 저거 한 발만 해도 엄청난 위력이었다. 그런데 이번엔 동시에 수십 발이라니.

물론 피하는 건 간단하다.

하지만 그랬다간 주변 절벽에 매달린 근위군이 전멸할 것이다. 셴과 뤄제는 시선을 교환한 다음 양 주먹을 뒤로 당기며 맞받아칠 준비를 갖췄다.

어떻게든 한 발이라도 더 많이 격추시킨다.

그래야 근위군을 지킬 수 있고, 덩달아 자신과 연결된 백성들의 목숨 또한 하나라도 더 구할 수 있다.

그런데 막상 불덩어리를 향해 주먹을 내지르려는 순간.

위잉!

하늘에서 조그만 바람 구슬 같은 것이 아래로 내리꽂혔다.

그것도 동시에 두 개가.

엄청난 속도로 날아든 바람의 구체는, 한순간 압축에서 해방되며 온 사방으로 날카로운 칼날을 흩뿌리기 시작했다.

위이이이이이이이이잉!

"큭!"

"피해!"

투사들은 지면을 박차며 계단 위쪽으로 몸을 던졌다.

하지만 기우였다.

솟구친 소용돌이는 투사들은 물론이고, 좌우의 절벽에 있던 근위군의 몸에 생채기조차 내지 않았다.

절묘한 궤도와 컨트롤.

그리고 직진하며 날아드는 불덩어리만 완벽하게 집어 삼켰다.

그리고 폭발이 일어났다.

하지만 폭발은 소용돌이를 빠져나가지 못했다. 그렇게 내부에 폭발을 품은 채, 소용돌이는 계속 전진하며 아래에 있던 무수한 적들을 단숨에 덮쳤다.

순간 지켜보던 모두가 같은 단어를 떠올렸다.

지옥.

저것은 바람과 불의 지옥이다.

음속으로 작열하는 무수한 바람의 칼날이 적들을 난자한다.

동시에 지금껏 아무도 본적 없던 맹렬한 화염이 날개를 펼치며 찢긴 적들을 휘감는다.

불의 폭풍.

적들은 어떻게든 그곳에서 빠져나가려 했다.

하지만 가장 먼 곳으로 뻗은 바람의 날개가, 안에 갇힌 적들이 빠져나가지 못하도록 회전하며 소용돌이를 일으켰다.

그것은 폭풍이자 동시에 감옥이었다.

아무리 큰 죄를 지었다 해도 죽어서 저런 곳에 떨어지는 건 과한 판결이 아닐까?

감옥 안에는 수백에 달하는 적들이 산산 조각으로 찢김과 동시에 폭발에 터지고 불에 타올랐다.

"왕녀님!"

투사 셴이 문득 고개를 치켜들며 소리쳤다.

하늘 위에는 아름다운 복장을 한 톨라리라 양손을 내밀고 있었다. 톨라리는 한동안 눈을 깜빡이다 급하게 가슴을 쓸어내렸다.

"이게 웬 난리? 그저 템페스트 두 발을 쐈을 뿐인데...."

날아오던 불덩어리를 빨아들인 덕분에 상상도 못한 위력이 발생했다.

톨라리는 문득 클로드를 떠올리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황자님. 이거 황자님이면 혼자서도 할 수 있을 듯?"

"황녀님! 조심하십시오!"

"셴!"

고개를 내리자 투사 셴이 팔을 마구 휘두르고 있었다.

조심하라니? 뭘?

방금 그걸로 시야에 있던 모든 적을 쓸어 버렸는데?

하지만 셴이 경고한 건 적이 아니었다.

하늘에 떠 있던 그녀를 중심으로, 온 사방에서 검은 그림자가 썰물처럼 밀려들기 시작했다.

"...어?"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갑자기 온 세상이 캄캄해졌다. 그런데 어둠 속에서 뭔가가 꿈틀대며 자신을 향해 손을 뻗는 게 보였다.

위험해!

톨라리는 속으로 소리치며 급가속을 걸었다.

동시에 어둠에서 솟아오른 네 명의 남자가 자신이 서 있던 곳으로 손을 찌르는 것이 보였다.

온몸에 붕대를 감은 기묘한 존재들.

"후원자!"

톨라리는 경악했다. 설마 여기서 후원자를 다시 볼 거라곤 상상도 못했다.

그것도 넷이나.

다만 전에 봤던 후원자처럼 몸이 매끈하게 빠지진 않았다.

붕대로 감은 몸 이곳저곳이 울퉁불퉁하게 튀어나와있다. 마치 꿈틀대는 촉수를 억지로 감아 억제하는 것처럼.

녀석들의 정체는 변질된 반란군과 이제 막 붕대를 받은 후원자 예비생들의 융합체.

물론 톨라리의 시점에서 거기까지 알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그나마 이런 어둠 속에서도 적들의 모습을 대충 확인할 수 있다는 것에 감사할 따름이었다.

'아마 에이션트 이글의 코어 덕분이겠지?'

마침 후원자들이 고개를 틀며 톨라리와 시선을 맞췄다. 톨라리는 등줄기가 오싹해지는 것을 느끼며 녀석들을 향해 템페스트를 투척했다.

하지만 무의미한 짓이었다.

녀석들은 마법이 발동하기도 전에 어둠 속으로 모습을 감췄고, 톨라리는 뭔가를 보고 느낄 새도 없이 정면을 향해 반사적으로 몸을 날렸다.

부웅!

동시에 등 뒤에서 뭔가가 휘두르는 소리가 울렸다.

고개를 돌리자 어느새 위치를 바꾼 후원자들이 손끝을 휘두르고 있었다.

'살았다!'

반응하고 피한 게 아니다. 그저 상황에 맞는 지식이 있었을 뿐.

드워프 군주와 후원자의 융합체.

클로드가 얼마 전 그 괴물과의 전투를 자세하게 설명한 적이 있었다.

당시엔 그저 손에 땀을 쥐며 즐겁게 들었을 뿐이었다. 그런데 설마 자신이 같은 상황에 처할 줄이야.

'하지만 난 황자님처럼 싸울 수 없어.'

아무리 최고의 마법사라 해도.

아무리 급가속이라는 고속 이동마법을 쓸 수 있다 해도, 이런 식의 빠른 근접전은 감당할 수 없다.

'일단 그림자 결계에서 탈출부터 하고 보자.'

판단을 끝낸 톨라리는 무작정 하늘 방향으로 날아오르기 시작했다.

하지만 아무리 날아도 어둠이 걷히지 않았다.

대체 왜?

그 순간 갑자기 하늘 방향의 공간이 일렁였다. 톨라리는 생각할 겨를도 없이 급가속으로 오른편으로 몸을 날렸다.

촥!

촥!

이번에도 번개같이 나타난 후원자들의 공격이 허공을 갈랐다. 톨라리는 이를 악물며 급가속의 압박을 버티다, 이번엔 브레이크 없이 같은 방향으로 계속 비행마법을 지속했다.

하지만 이번에도 그림자 감옥은 끝나지 않았고, 또다시 진행 방향의 공간이 일렁이기 시작했다.

"아."

톨라리는 그제야 상황을 파악 할 수 있었다.

후원자들은 그저 처음 펼친 그림자 결계 속에서 움직이고 있는 게 아니다.

지금처럼 계속 그녀의 이동 방향을 따라 붙으며, 새로운 그림자 결계를 확장하고 있었다.

'큰일 났다....'

등줄기에 식은땀이 흘렀다. 이걸 어떻게 하지? 심지어 후원자의 붕대는 어지간한 마법에 면역이라고 까지 하지 않았나?

* * *

선옥에 들어온 지도 이미 11개월이 훌쩍 지났다.

이제는 이 아무것도 없는 텅 빈 공간에 안정감마저 느끼기 시작했다. 처음엔 그렇게 붕 뜬 느낌이었는데, 역시 사람이란 적응의 동물이구만.

-이번엔 영생의 핵을 서른 개만 사용해 보겠네!

문득 뇌리에 주드의 목소리가 울렸다. 드디어 엘프 군주의 검속에서 교통정리가 끝났나 보구만.

"좋아! 시작해!"

대답과 동시에 칼날에서 투명한 빛이 맴돌기 시작했다.

우웅....

성공이다!

드디어 칼 속에 깃든 영생의 핵을 에너지로 변환할 수 있게 됐다. 나는 곧장 검을 치켜들고는 정면을 향해 가볍게 휘둘렀다.

지잉!

순간 정면이 갈라졌다.

정말 아무것도 없는 공간인데도, 공간 자체가 갈라지며 가느다란 틈이 생겼다.

불과 1초도 안 되는 시간에 불과했지만.

"...어?"

눈 한번 깜빡이자 공간은 원래대로 돌아와 있었다. 방금 내가 본거 맞지? 잠깐 헛걸 본 게 아니지?

"오, 대단하군."

어느새 칼날을 빠져나온 뿌연 연기가 주드의 형상으로 뭉치며 말했다.

"칼날이 지나간 곳의 공간이 잠시 갈라졌네. 실로 무서운 위력이군."

"그렇지? 방금 정말 갈라졌었지?"

"확실히 갈라졌네. 그런데 그게...."

주드는 이미 원상 복구된 공간을 잠시 바라보다 고개를 저었다.

"아무튼 겨우 성공했군. 이제 영생의 핵도 자네의 힘으로 사용할 수 있게 됐네."

"1만 개가 넘는 걸 말이지?"

"정확히 1만 2천 67개였네. 지금은 1만 2천 37개가 남았군."

고작 30개를 소모했을 뿐인데 이정도 위력이라니.

"공간을 자른 건 예상 밖이긴 한데.... 아무튼 느낌은 퓨어 매직과 비슷했어."

"퓨어 매직?"

"마법과 관련된 모든 것을 소멸시키는 마법. 아마 효과도 비슷하지 않을까?"

"공간을 자르는데 마법이 문제겠나. 분명 검에 닿는 모든 것을 잘라 버릴 걸세. 고작 30개 정도로 말이지."

"그게 말이 좋아서 30개지, 따지고 보면 사이크인 30명을 소멸시키면서 에너지를 뽑아 쓰는 거 아냐?"

"흠, 확실히 그렇게 볼 수도 있겠군."

주드는 가만히 고개 끄덕이며 말을 이었다.

"그리고 위력도 위력이지만, 차원 자체에 잠시 균열을 일으킬 수 있다는 것도 엄청난 효과가 아닐 수 있네."

"방금 공간 잘렸던 거? 그게 차원의 균열이었어?"

"적어도 난 그렇게 느꼈네. 아주 짧은 시간이긴 했지만."

"그럼 30개가 아니라, 한 3천 개쯤 쓰면 어떻게 될까?"

"상상도 못 하겠군. 끔찍한 일이 벌어질 거야."

주드는 고개를 저었다. 이젠 굳이 결속술을 얻지 않아도 산이 갈라지고 땅을 뒤집을 수 있게 된 게 아닐까? 물론 계속 뭔가가 소모되긴 하지만.

"그리고 억지로 게이트를 만들 수 있을지도...."

"게이트?"

"다른 차원에서 이쪽으로 넘어올 때 만드는 거대한 차원문. 결과적으로 비슷한 거 아닐까?"

"갈라진 차원 반대편을 선택할 수 있다면 그렇게 되겠지."

"선택?"

"차원은 한두 개가 아니지 않나? 방금 잠시 갈라진 차원 너머는 그 사이크인가 뭔가 하는 게 아닌, 바로 우리가 살던 그곳이었네."

"그래? 그건 또 어떻게 골라서 결정할 수 있으려나?"

"나도 모르겠네. 그보다 말했듯이 방금 잠시 동안 고향의 기운을 느꼈는데...."

주드는 눈살을 찌푸리며 고개를 갸웃거리기 시작했다.

"그때 무언가 불길한 기운을 느꼈네. 너무 잠깐이라 확실한건 모르겠네만.... 기분이 좋지 않군."

"밖에 무슨 일 생겼나? 하긴 벌써 11개월이나 지났으니.... 아니, 근데 밖에서는 기껏 해봐야 하루도 안 지난 거 아냐? 이제 22시간?"

"정확하게는 자네가 선옥에 들어 온지 11개월 하고도 보름이 지났네. 그러니 밖에는 23시간이 흐른 셈이지."

후. 그렇게 들으니 이제 정말 얼마 안 남았구만. 고지가 바로 눈앞에 있다.

"글쎄, 아무튼 나 여기 들어올 때만 해도 위칸에 아무 일도 없었어. 고작 하루도 안 지났는데 그새 무슨 난리가 났을까?"

"흠.... 그저 기우였으면 좋겠군. 그보다 당장 중요한 일들이 있으니...."

"당장 중요한 일?"

"...자네 말일세."

주드는 잠시 고민하다 별것 아니라는 듯 어깨를 들썩였다.

"자네 선옥에서 남은 시간이 겨우 보름뿐이지 않나. 이제 겨우 칼에 깃든 영생의 핵을 사용할 수 있게 됐지. 차원을 가를 수 있으니 차원검이라 부르면 좋겠군."

"오, 차원검."

"그러니 남은 시간 동안 어떻게든 차원검의 활용법을 훈련하는 게 좋지 않겠나?"

"딱히? 그냥 이것만으로도 충분한 거 같은데."

나는 방금처럼 허공에 검을 휘둘렀다. 그러다 문득 새로운 아이디어를 떠올리며 고개를 끄덕였다.

"아, 혹시 이거 쓸 때 폭풍검을 같이 쓰면 어떻게 될까?"

"폭풍검이라. 나이트 마스터인 다비라는 인물이 만든 새로운 나이트 스킬 말이군."

"다비가 만들고 메르데스가 개량했어. 아무튼 새로 생긴 힘이니 이것저것 다 해봐야지."

확실히 선옥은 최고의 훈련 장소나 다름없다. 주변 신경 안 쓰고 마구 날뛰어도 아무 걱정이 없으니까.

"그래. 그렇게 하는 게 좋겠네. 밖에 돌아가면 이런 짓도 못 하겠지. 나도 옆에서 최대한 돕겠네."

주드는 가만히 웃으며 내 얼굴을 바라보았다. 이 할아버지도 슬슬 나갈 때가 되니 마음이 복잡한가 보구만.

"그럼 바로 시작하자. 방금처럼 칼에 들어가서 영생의 핵을 변환해줘."

"알겠네."

주드는 곧장 뿌연 연기로 몸을 바꾸며 칼날 속으로 깃들었다. 나는 한순간 칼과 내가 일체화된 기분을 느끼며 호흡을 가다듬었다.

이계 황자는 세상을 구하고 싶다 174화

53장 역린

톨라리는 온 정신을 회피에 집중했다.

그렇게 하지 않으면 사방에서 쏟아지는 후원자들의 공격을 피할 수 없었다.

녀석들은 어떻게든 톨라리를 잡고야 말겠다는 듯, 아무리 발악하고 도망을 쳐도 절대 포기하지 않고 뒤를 쫓았다.

'어떻게든 저놈들을 지치게 해서 뿌리칠 생각이었는데....'

정작 톨라리야말로 지쳐 쓰러질 판이었다. 마력은 아직 충분하지만 체력이 먼저 고갈될 지경.

그 와중에도 톨라리의 비행 방향으로 그림자 결계가 확장되었고, 동시에 정면에서 붕대를 감은 두 후원자가 악몽처럼 모습을 드러냈다.

'둘?'

그렇다면 다른 두 놈은 다른 방향을 막고 있을 것이다.

왼쪽? 혹은 오른쪽?

아니면 위쪽이나 뒤쪽일지도 모른다.

여기서부터는 찍기의 영역. 그리고 톨라리의 선택은 아래 방향이었다.

우웅!

동시에 급가속이 걸리며 톨라리의 몸이 아래쪽으로 확 꺾인 순간.

쾅!

무언가 단단한 것이 톨라리의 몸을 강타하며 뒤로 튕겨냈다.

"큭!"

그것은 땅이었다.

어둠 속에서 한참을 헤매며 날아다닌 덕분에, 고도가 지면에 닿을 만큼 낮아졌다는 것을 깨닫지 못하고 있었다.

"으...."

예상 밖의 충돌이라 쿠션조차 제대로 깔지 못했다. 톨라리는 온몸이 으스러질 듯한 통증과 함께 하늘 방향으로 고개를 돌렸다.

후원자.

땅도, 하늘도 안 보이는 와중에 저놈의 후원자만큼은 희미하게 보인다.

문제는 녀석들이 늘어나 있었다는 것.

처음엔 넷이었는데 어느샌가 여덟로 늘어나 있었다. 톨라리는 즉시 맨바닥에 등을 붙이고 하늘 방향으로 바람의 벽을 깔기 시작했다.

'몸이 찢어질 것 같아. 지금 급가속 썼다간 자폭이야. 하지만 이런 방어 마법 따위는 순식간에 뚫릴 텐데....'

그나마 적들이 등 뒤로 잠입할 걱정이 없다는 게 다행일까? 땅바닥에 누워 있으니까.

적들은 예상대로 그림자 잠입 대신, 아래 있는 톨라리를 향해 그대로 낙하하기 시작했다.

'그래, 그대로 와라. 조금만 더....'

톨라리는 양손에 최후의 마법을 준비하고 있었다. 쏟아지는 적들의 폭이 최대한 좁아지는 타이밍을 노려서....

그런데 그때, 뭔가 거대한 것이 엄청난 속도로 날아와 추락하는 적들을 들이받았다.

투캉!

그것은 독수리였다.

"이 틈에 몸을 피하시게!"

"테우스!"

테우스는 새까만 어둠 속에서 조차 금빛 날개를 번뜩이며 위용을 과시했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

"...."

"...."

교통사고로 튕겨 날아간 후원자들이 소리 없이 모습을 감추며, 비행중인 테우스의 곁으로 잠입했다.

"이놈들!"

테우스는 몸을 회전하며 접근한 적들을 날개로 후려쳤다.

하지만 한 녀석이 머리 쪽으로 접근해 정수리에 수도를 꽂아 넣은 순간, 마치 번개라도 맞은 것처럼 몸을 떨며 지면으로 추락하기 시작했다.

"테우스...."

톨라리는 허망한 얼굴로 독수리의 추락을 바라보았다. 그러자 방해물을 처리한 후원자들이 일제히 고개를 돌리며 시선을 집중했다.

그런데 갑자기 세상이 밝아졌다.

"...어?"

톨라리는 갑작스런 빛에 눈살을 찌푸렸다.

온 세상을 꽉 채우고 있던 그림자의 결계가 사라지며, 찬란한 태양이 세상을 가득 메우기 시작했다.

덕분에 톨라리는 지금 자신이 어디에 쓰러져 있는지 파악할 수 있었다.

앞마당.

그렇게 온 하늘을 비집고 날아다녔는데, 결국 돌고 돌아 위칸 왕궁의 앞마당에 추락했던 것.

그런데 처음엔 찬란하기 그지없던 태양이, 눈이 익숙해지자 어딘가 빛이 바래 있다는 걸 알 수 있었다.

"어째 빛이 뿌연 게.... 어?"

톨라리는 깜짝 놀라며 자신의 목을 만졌다.

분명 입으로 말을 했는데 아무 소리도 귀에 안 들린다.

'소리가... 사라졌어?'

목소리뿐만이 아니다. 주변에 아무 소리도 안 들린다.

"...."

"...."

덩달아 지면에 추락한 후원자들도 당황한 기색이 역력했다. 그때 누군가 톨라리의 손을 움켜쥐고는 위로 쭉 잡아당겼다.

"...아바마마!"

그것은 태선이었다.

목청껏 소리쳤지만 이번에도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얼굴에 하얀 수염이 가득한 태선은 미소와 함께 톨라리의 손에 필담을 하기 시작했다.

-영역을 전개했다. 녀석들이 네 흐름을 찾지 못하도록. 이 영역 안에서는 아무 흐름도 느낄 수 없다.

-흐름? 그런데 아무 소리도 안 들려요.

톨라리 역시 필담으로 대답했다. 태선은 손가락으로 자신의 귀를 가리킨 다음 대답했다.

-소리 역시 흐름이다.

-하지만 소리건 흐름이건 무슨 상관인가요? 당장 눈으로 이렇게 뻔히 보이는데?

톨라리는 멀리 담벼락 위에 웅크리고 있는 후원자를 가리켰다. 태선은 이번엔 자신의 눈을 가리키며 말했다.

-저놈들에게 눈이 있나?

"아...."

톨라리는 그제야 한숨을 내쉬며 물었다.

-그나저나 태선부는 어찌하고 나오셨나요.

-급한 불부터 꺼야지. 여기서 널 잃을 수는 없다.

"아빠...."

태선은 톨라리의 눈물을 닦아주며 미소를 지었다.

-그나저나 저놈들은 어떻게 할 생각이냐? 마법이 통하지 않는 것 같은데. 계단에서 싸우고 있는 투사들을 불러 올까?

-아니에요.

톨라리는 고개를 저으며 함께 미소를 지었다.

-저놈들에게도 통하는 마법이 있어요.

그리고는 곧바로 양손에 퓨어 매직을 준비했다. 영역 덕분에 설명 없이도 퓨어 매직의 위력을 깨달은 태선은 놀란 얼굴로 뒷걸음을 치기 시작했다.

"지켜보세요 아빠. 지금부터 이 딸이 멋진 모습을 보여드릴 테니까."

* * *

선옥에 처음 들어갔을 때는 매우 극적인 느낌이었다. 흑화된 주드 때문에 이리 뛰고 저리 구르느라 아주 그냥 난리도 아니었지.

그런데 나올 때는 정말 아무 느낌도 없었다.

주드가 이제 슬슬 시간이 됐다고 하면서 엘프 군주의 검에 들어갔고, 그와 동시에 주변 풍경이 흐느적거리며 어느새 밖으로 나와 있었다.

선옥의 방.

1년 전에 봤던 하얀 종유석 같은 돌이 여전히 바닥에 솟아 있다.

하지만 태선은 없었다. 나는 선옥의 방을 벗어나 태선부로 나와 주변을 살폈다.

"여보세요? 태선? 아무도 없습니까?"

태선부는 텅 비어 있었다.

덩달아 내가 기억하는 태선부와 어딘지 모습이 달랐다. 전에는 분명 좀 더 깔끔한 느낌이었는데, 어째 지금은 그냥 평범한 동굴 속 같잖아?

"...아직 출근을 안 했나?"

1년 전에 이곳을 찾았을 때가 이른 아침이었다. 그러니 지금도 딱 24시간이 지난 아침이겠지?

하지만 태선은 거의 하루종일 여기에 상주하는 것 아니었나?

그것도 내가 나올 타이밍을 알고 있을 텐데 굳이 자리를 비웠다고?

하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금방 이유를 알 수 있었다.

"이건...."

커다란 나무통.

태선부의 한쪽 벽에 김이 모락모락 나는 커다란 나무통이 있었다.

이건 딱 봐도 욕조다.

통 안에는 적당히 데워진 물이 담겨 있고, 통 옆의 테이블에는 깨끗한 옷 한 벌이 가지런히 놓여 있었다.

태선이 자리를 비운 것도 내가 맘 놓고 몸을 씻을 수 있도록 배려해 준 거겠지?

하지만 몸을 씻기에 앞서, 나는 먼저 통속에 얼굴을 넣고 연거푸 물을 들이켰다.

"...후."

물 맛 끝내준다!

지난 1년 동안 내가 가장 먹고 싶었던 것이 바로 물이다.

아무것도 첨가되지 않은 순수한 물.

드라이어드의 열매가 아무리 수분이 풍부하다 해도, 그것만 먹고 1년을 버티자니 깨끗한 맹물이 너무도 그리웠다.

그렇게 한참을 마시고 나서야 겨우 목욕 생각이 났다. 나는 가장 먼저 허리에 찬 검을 풀어 통 옆에 세워 놓으며 주드에게 말했다.

"태선이 배려가 좋네. 미리 목욕할 준비도 다 해놓고. 기대되지? 오랜만에 아들 만날 생각에?"

하지만 검에선 아무 반응도 없었다. 나는 반쯤 넝마가 된 옷을 벗으며 검 손잡이를 툭툭 건드렸다.

"뭐 해? 밖으로 나오지 않고. 이제 안전해. 이미 선옥 밖에 나왔다고. 여기 원래 세상이야."

하지만 이번에도 아무 반응이 없었다.

이건 또 왜 이러지? 설마 마지막 순간에 검속에 제대로 깃들지 못한 건가? 그럴 리 없는데?

"...휴."

급하게 검을 쥐며 한숨을 내쉬었다. 주드의 기운이 검 속에서 확실하게 느껴진다.

그런데 이 할아버지, 왜 밖으로 안 나오고 이러고 있지? 뭔가 문제라도 생겼나?

어쩌면 바뀐 차원에 적응하는 문제가 있을지도 모른다. 뭐 당장 어디 갈 것도 아니니 잠시 기다리지 뭐.

그렇게 옷을 벗고 통속에 들어가 잠시 묵은 때를 벗겨내던 와중에....

"황자님!"

순간 선녀 차림의 시녀가 반대편 벽을 관통하며 태선부로 쑥 들어왔다.

"여기야!"

나는 통 위로 손을 내밀며 흔들었다.

"나도 나온 지 얼마 안 됐어. 선옥 1년 코스 무사통과했고."

"그, 그렇군요. 우선 감축드립니다."

시녀는 하얗게 질린 얼굴로 고개를 숙였다. 뭔가 분위기가 이상한데? 혹시 씻고 있는데도 내 몸에서 냄새가 너무 심하게 나나?

"그런데 태선께서는 어디 계시지? 태선부는 왜 이렇게 황량해졌고?"

"태선부는... 태선께서 자리를 비우셔서 원래 모습으로 돌아간 것뿐입니다."

"아, 영역술을 풀어서?"

"그렇습니다. 그보다 지금 밖에 큰일이 났습니다."

"큰일? 무슨 일?"

"그것이... 아니, 태선께서 황자님께 남기신 말씀을 그대로 전하겠습니다."

시녀는 진땀을 닦으며 심호흡과 함께 말을 이었다.

"후우.... 우선 페이우드 제국의 황자에게 사과의 말을 전한다. 본래 법도대로라면 태선인 내가 수련을 마치고 돌아올 그대를 맞이해야 하나, 정체불명의 적들이 위칸의 궁을 침범하여 어쩔 수 없이 태선부를 비우게 되었다."

"정체불명의 적?"

더운 물에 몸을 담그고 있는데도 순간 오한이 들었다. 시녀는 뭔가를 버벅거리다가 고개를 강하게 흔들며 대답했다.

"우선 전하신 말씀을 마저 하겠습니다. 크흠. 내 딸 톨라리와 투사들이 선전하고 있으나 전황은 극히 위험한 듯하다. 부득의하게 내가 나서 시간을 끌어야 할 것 같으니, 황자는 몸을 추스르는 대로 밖으로 나와 이 나라를 위기로부터 구해 주길 바란다. 자세히는 알 수 없으나, 적들은 두꺼운 갑옷으로 몸을 감싸고 불을 뿜는 듯하다."

"화염병!"

그 소리를 듣자마자 통 밖으로 단번에 뛰쳐나왔다.

설명만 들어도 이거 완전 화염병이잖아?

근데 화염병이 왜 동대륙에 나온 거지? 설마 게이트가 열렸나? 아니, 침공이 시작될 때까진 아직 한참 남았을 텐데?

"이봐! 거기! 내가 선옥 들어간 지 하루 지난 거 맞아?"

"네? 네! 그렇습니다!"

시녀는 양손으로 얼굴을 가린 채 급히 대꾸했다. 나는 잽싸게 새 옷으로 갈아입으며 검을 쥐고 태선부 밖으로 달리기 시작했다.

대체 왜?

어째서 이 시점에 침공이 시작된 거지? 그것도 페이우드 제국이 아니라 한참 멀리 떨어진 동대륙의 위칸 왕국에서?

* * *

"이제 안 돼...."

하늘에 떠 있던 톨라리는, 어느 순간 완전히 지친 모습으로 추락하기 시작했다.

그사이 위치를 이리저리 옮기며 총 네 번의 퓨어 매직을 발동, 그중에 세 발을 맞추며 후원자 셋을 제거했다.

태선의 영역 덕분에 무력해진 후원자였지만, 무언가 낌새를 느꼈는지 이리저리 날뛰는 바람에 한 발은 실패.

물론 세 명의 후원자를 제거한 것도 대단한 성과다.

하지만 남은 다섯 명을 제거할 수단이 완전히 사라지고 말았다. 추락하는 톨라리는 멀리 계단 쪽에 벌어지는 전투를 보며 자신도 모르게 한숨을 내쉬었다.

"저쪽도 큰일인데. 내가 도우러 가야 하는데...."

계단 쪽 전투 역시 막바지를 향해 흐르는 상황.

여기서 막바지란 투사들의 힘이 다 떨어지고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처음엔 톨라리의 마법으로 대량의 적들을 제거했다 생각했지만, 그조차도 더 아래서 올라오던 적들의 일부에 불과했다.

덕분에 두 투사는 새로운 적을 상대로 모든 힘을 쏟아낼 수밖에 없었다.

다른 건 몰라도 내부에 열 명이 넘는 사람들이 꽉 들어찬 거대 갑옷을 상대하는 게 힘들었다.

"후, 이제 한계다. 넌 어떻지, 뤄제?"

"나도 바닥이다. 결속된 힘을 모두 사용했어."

두 투사는 서로 등을 기댄 채 가쁜 숨을 몰아쉬었다. 넓다면 넓고, 좁다면 좁은 주변 계단은 이미 박살난 거대 갑옷과 죽은 반란군의 시체로 가득 찬 상황.

그 와중에 계단 아래쪽으로 새로운 거대 갑옷들이 쿵쿵대며 올라오는 게 보였고, 더 아래쪽에는 강력한 불덩어리를 쏘는 화염병들이 대열을 맞춰 올라오는 게 보였다.

"큭...."

투사들은 절망적인 기분을 느끼며 고개를 치켜들었다.

"하늘이시여...."

그런데 마침 그 하늘에서 추락하는 톨라리의 모습이 보였다.

"왕녀님!"

당장이라도 톨라리의 추락지점으로 달려가고 싶었지만, 이미 몸이 말을 듣지 않는 상황.

덩달아 멀리 계단 아래서, 폭발하는 불덩어리 여럿이 빠르게 날아드는 게 보였다.

이것이 마지막 순간일까?

두 투사는 빠르게 시선을 교환했다.

지금이라도 성 안쪽으로 몸을 피하면 목숨을 건질 수 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이제 와서 구차하게 자신들만 살아날 생각은 없었다. 죽을 때 죽더라도 위칸의 투사답게 당당히 죽을 장소를 선택할 것이다.

바로 지금 이곳.

하지만 그들의 죽음은 이미 뒤로 미뤄진 상황이었다.

콰직!

투사들의 주변으로, 순간 엄청난 두께의 얼음벽이 솟아올랐다.

이계 황자는 세상을 구하고 싶다 175화

53장 역린

동시에 불덩어리가 얼음벽을 강타하며 맹폭을 시작했다.

맹렬한 폭음과 함께 전면의 얼음벽이 산산조각으로 박살났지만, 그 뒤로도 계속 새로운 벽이 솟아오르며 쏟아지는 불폭풍을 완벽하게 막아주었다.

"이건...."

투사들은 멍한 눈으로 얼음벽을 바라보았다. 그러다 사방으로 튀는 화염과 얼음 파편을 확인하고는 고개를 옆으로 돌렸다.

"근위군! 아...."

하지만 절벽에 매달린 병사들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그들 역시 두껍게 깔린 얼음벽에 의해 보호받고 있었다. 대체 누구기에 이토록 세심한 배려로 그들을 보호한 걸까?

"...!"

뒤를 돌아 고개를 치켜들자, 공중에 떠 있는 작은 소년의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클로드 황자.

위칸의 수행복 차림의 황자는, 어째서인지 물에 젖은 머리카락을 흩날리며 뭔가를 소리치고 있었다.

"...!"

하지만 아무것도 들리지 않았다.

손발을 이리저리 휘저으며 뭔가를 어필하려던 황자는, 이내 포기하고는 새로 마법을 쓰려는 듯 아래쪽으로 손을 뻗었다.

그러자 온 사방의 공간이 일렁였다.

동시에 온몸이 얼음으로 이뤄진 거인들이 끝도 없이 소환되기 시작했다.

50기.

아니, 100기도 넘을까?

가뜩이나 덩치도 큰데 숫자까지 엄청나다. 투사들은 한순간 세상이 얼음 거인들로 꽉 찬 기분을 느끼며 감탄했다.

"이게 대체 무슨 일이.... 큭!"

하지만 얼음 거인들은 적과 아군을 가리지 않았다.

바로 옆에 소환된, 키가 5미터쯤 되어 버리는 얼음거인이 눈앞의 얼음 벽을 박살내며 마구 전진한다.

일부는 멀리 적들을 향해 얼음 창을 쏟아내기 시작했고, 또 일부는 방금 그 녀석처럼 계단 아래를 향해 돌진하기 시작했다.

덕분에 중간에 낀 투사들은 거인들의 질주에 휩쓸려 몸이 터져나갈 지경이었다.

"컥...."

"윽...."

비명소리마저 거인들의 굉음에 묻혀 사라지려는 순간.

콰직!

둥그런 모양의 얼음집이 주변을 감싸며, 계단에 쓰러진 투사들의 몸을 감싸주었다.

"몸을 숙이세요."

좁은 얼음집 안에는, 어느새 투사들 말고도 조그만 소녀가 같이 들어 있었다. 투사 셴은 창백해 보이는 소녀를 보며 한동안 입을 뻐끔였다.

"너, 너는 대체...."

"저는 루네라고 합니다. 클로드 황자님의 부하예요."

"부하?"

"네. 부하. 신하라고 해야 할까요? 아니면 소속된 정령이라고 해야 하나.... 저도 잘 모르겠네요."

소녀는 자신의 양 손을 보며 고개를 갸웃거렸다. 사용하는 말이 동대륙어가 아니었음에도 불구하고 어째서인지 이해가 가능하다는 게 신기했다.

"정령들이 한꺼번에 소환되는 바람에 흥분했어요. 한동안은 여기서 조용히 엎드려 있는 게 좋을 거예요."

그 와중에도 거인들이 얼음집을 밟으며 마구 뛰어가는 소리가 들렸다. 하지만 소녀가 만든 얼음은 실금조차 나지 않은 채 거인들의 무게를 지탱하고 있었다.

"정령이라니, 지금 저 얼음 거인들이 전부 정령이란 말이냐?"

셴이 물었다. 루네는 가만히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네. 그리고 저도요."

"너도?"

"저도 반쯤 정령이에요. 그래서 황자님이 얼음 정령들을 단체로 소환할 때 함께 소환된 모양이네요."

"아...."

"놀라셨죠? 저도 놀랐어요. 방금까지 저택 주방에서 저녁식사를 준비하고 있었는데, 갑자기 여기 와버렸네요."

루네는 미소와 함께 얼음집 천장을 올려다보았다.

"그런데 여긴 소리가 들리네요? 계단 위쪽이나 하늘에서는 소리가 완전 먹혀 있던데."

"소리가 먹혔다고?"

"네."

"...태선께서 나서셨나 보군. 그분의 영역술이다."

"영역술이 뭔가요? 그리고 여긴 정확히 어딘가요? 여러분들은 제가 뭐라고 부르면 되나요?"

루네는 아무것도 모르는 표정으로 눈을 깜빡였다.

그 순간에도 온 사방에 정령들의 돌진 소리가 울리고 있었다. 투사들은 그 와중에도 묘한 안도감을 느끼며 루네에게 간단한 설명을 시작했다.

* * *

살짝 정신이 없었다.

태선부를 빠져나와 왕궁 앞마당 쪽으로 날아가다 보니, 앞마당 너머로 이어진 계단 아래서 올라오는 끝도 없는 적들의 행렬이 보였다.

화염병.

진짜 화염병이 적들 속에 섞여 있다.

가장 숫자가 많은 건 촉수가 돋아난 괴상한 병사들이지만, 내 눈엔 오직 화염병만 집중되었다.

녀석들이 강해서가 아니다. 그저 화염병의 등장 자체가 차원 침공의 상징이기 때문.

그때 녀석들이 계단 위쪽을 향해 불덩이를 쏘아냈다.

"불덩이?"

나도 모르게 목소리가 튀어나왔다. 저건 또 뭔데? 화염병은 불을 구체로 쏘는 게 아니라 줄기로 뿜어낼 텐데?

덩달아 어째서인지 내 목소리도 안 들린다. 누가 소리를 막는 영역이라도 펼쳐 놓았나?

어쨌거나 지금은 의문을 해소할 때가 아니다.

불덩어리의 목표는 계단의 상단을 향하고 있었다. 그곳엔 두 명의 투사와 함께, 어째서인지 계단 너머 좌우의 가파른 경사에 수많은 병사가 나뭇가지 같은 걸 껴안고 매달려 있었다.

나는 얼음벽을 발동해 그들 모두를 막아주었다.

"모두 퇴각해! 지금부터 내가 막을 테니까!"

그리고는 아마도 안 들리겠지만, 어쨌든 소리를 지르며 새로운 정령 마법을 사용했다.

얼음의 정령왕 글라체스.

녀석의 권한을 대리, 얼음에 속한 모든 정령을 한 번에 소환했다.

총 113마리의 얼음 정령의 군단.

크고 작은 정령들이 계단 주변을 가득 메우며 적진을 향해 돌진한다.

일부는 예전에 얼음의 정점에 진입할 때 날 괴롭혔던 얼음 창을 퍼붓기 시작했다. 숫자가 워낙 많다보니 하나씩 컨트롤은 불가능한데, 그래도 알아서 잘 싸우는 거 보니 보기 좋구만.

그런데 그때, 먹먹하던 귀가 갑자기 뻥 뚫리며 주변 소리가 들어왔다.

"톨라리! 톨라리!"

고개를 돌리자 앞마당 쪽에 웅크리고 있던 태선이 손가락으로 어딘가를 가리키며 소리를 지르고 있었다.

나는 뒤도 돌아보지 않고 손가락이 가리키는 방향으로 날아갔다.

"톨라리!"

소리를 질렀지만 대답은 없었다.

대신 왕궁 주변의 경사진 나무에 걸쳐있는 톨라리를 발견할 수 있었다. 나는 급가속까지 활용해 단숨에 접근, 일단 회복마법부터 퍼붓기 시작했다.

"톨라리! 괜찮아 톨라리?"

"으...."

다행히 목숨은 붙어 있었다. 추락의 충격인지 이곳저곳이 부러져 있던 톨라리는, 겨우 눈을 뜨며 멀리 전투가 벌어지고 있는 계단 쪽을 가리켰다.

"황자님... 저기... 도와줘야 해...."

"걱정 마. 이미 정령 소환해놨어. 이거 상태가 안 좋은데...."

급한 불은 껐지만 여전히 상태가 안 좋아 보인다. 나는 톨라리를 품에 안고 곧장 태선이 있는 앞마당으로 돌아왔다.

"태선!"

"오오!"

태선은 반색하며 내가 내민 톨라리를 받아 안았다. 나는 왕궁 쪽을 손으로 가리키며 즉각 지시를 내렸다.

"톨라리 데리고 당장 안전한 곳으로 피하세요."

"...."

태선은 뭔가를 대답했지만 알아들을 수가 없었다. 그러고 보니 번역기를 짐가방에 넣어 놓고 그냥 왔네?

하지만 개떡같이 말해도 찰떡같이 알아먹은 모양이다. 태선은 톨라리를 안은 채로 즉시 안쪽으로 달리기 시작했다. 다리를 절뚝거리는 게 이 사람도 어디 다친 모양인데.... 그런데 붕대 감은 놈들이라고?

"설마 후원자 말하는 건가?"

"황자님."

그때 계단 쪽에서 눈에 익은 두 명의 투사와 함께, 뜻밖의 인물이 모습을 드러냈다.

"루네?"

얜 또 갑자기 왜 여기 있어?

아, 내가 얼음 정령들 한방에 소환할 때 함께 섞여 나온 건가? 재도 반쯤 얼음 정령이니까?

그때 두 투사가 뭔가를 말하는데 역시 이해할 수 없었다. 대신 톨라리가 고개를 끄덕이며 투사들의 말을 번역해줬다.

"계단 옆의 절벽에 근위병들이 매달려 있대요. 힘이 다 빠져서 추락하기 직전이래요."

"구해달라고? 알았어. 내가 알아서 할게. 그리고 루네야?"

"네. 황자님."

"저기 안쪽에 달려가는 할아버지 보이지? 저 할아버지가 기절한 톨라리를 안고 보호하고 있어."

"톨라리 언니를요?"

그때까지만 해도 침착하던 루네의 눈이 크게 떠졌다. 나는 루네에게 두 사람을 보호해 줄 것을 부탁하며 즉시 비행마법으로 몸을 띄웠다.

"일단 병사들부터 구해라인데...."

그런데 막상 보니 체력이 문제가 아니라 온몸이 상처투성이였다. 그러고 보니 선옥에서 바로 이런 상황을 대비해 주드한테 기술을 가르쳤지?

"주드! 나와!"

나는 칼을 뽑아들며 소리쳤다.

"지금이 바로 힐링 샤워 사용할 때야! 저기 병사들 몸부터 회복시켜 줘!"

하지만 돌아오는 대답은 아무것도 없었다.

주드는 마치 칼에 먹혀버리기라 한 듯 꼼짝도 하지 않았다. 이 할아버지 왜 이래? 진짜 무슨 문제라도 생긴 건가?

어쩔 수 없이 힐링 샤워는 내가 쓸 수밖에 없었다.

먼저 계단 왼편에 있는 병사들에게 회복마법을 잔뜩 퍼부어 준 다음, 얼음벽을 새롭게 바닥에 깔아 계단까지 걸어올 수 있는 길을 만들어 주었다.

"모두 성 안으로 퇴각해! 어서!"

"...!"

말이 안 통해도 뜻은 통했다. 나는 반대편 절벽에도 똑같이 해준 다음 퇴각하는 병사들을 보며 한숨을 내쉬었다.

"일단 대충 정리된 거 같은데...."

그 와중에도 저 멀리 아래쪽에서는 이계의 군대와 얼음 정령들의 난투극이 벌어지고 있었다.

당장 날아가서 도와줄까 하다가, 이미 적과 아군이 심하게 얽혀 있는 걸 보고 그냥 내버려 두었다.

얼음 정령 군단을 소환한 건 이번이 처음이다. 이번 기회에 어디까지 활약할 수 있는지 위력을 체크해 놔야지.

"그나저나 정령 군단 소환할 때마다 루네도 같이 소환되는 건 좀 그런데...."

군단을 소환하는 것까지는 좋은데, 막상 하나하나 따로 소환할 수 없다는 것도 단점이 있구만.

그런데 갑자기 온 세상이 까맣게 변했다.

너무 갑작스런 변화에 위화감이 느껴질 지경.

모르는 사람이 당했다면 내가 눈이 멀었다고 생각하며 공포에 사로잡혔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난 이걸 예전에 이미 겪어 봤으며, 곧바로 어떤 일이 이어 질지 몸으로 터득했다.

어둠속에서 하얀 붕대를 감은 놈이 솟아오른다.

후원자.

그것도 네 마리나.

녀석들은 사방에서 동시에 손끝을 휘둘렀고, 그것은 아슬아슬하게 발동에 성공한 빛의 방패에 전부 가로막혔다.

파직!

어둠 속에서 빛의 불꽃이 튀어 오른다.

완벽한 방어.

후원자들의 표정이 붕대 너머로 일그러지는 게 보인다.

하지만 그마저도 날 방심시키기 위한 속임수였다.

다섯 번째 후원자.

반 박자 늦게 머리 위에 모습을 드러낸 또 다른 후원자가 내 머리를 향해 손끝을 내리꽂는다.

하지만 군주의 눈은 그 모든 것을 미리 읽고 있었다.

푹!

후원자의 손끝이 미세하게 머리를 파고들었다.

덩달아 녀석의 입가에 미소가 번졌다. 정말 손톱만큼만 박혔지만, 그것만으로도 날 죽이기엔 충분하다는 듯이.

과연 그럴까?

"...그림자 갑옷!"

순간 녀석의 입에서 탄성이 터졌다. 흠, 사이크 차원에도 그림자 갑옷은 똑같이 그림자 갑옷이라고 부르는 모양이네.

녀석이 파고든 건 미리 발동시킨 그림자 갑옷.

덩달아 온 세상 가득한 그림자를 활용, 녀석들의 몸을 덮어 도망치지 못하도록 했다.

우웅!

하지만 걸린 것은 한 놈뿐.

나머지 넷은 휘두르는 손날이 계속 막히자 갑자기 모습을 감추며 어딘가로 사라졌다. 나는 그림자 갑옷에 휘감겨 꿈틀대는 녀석을 향해 가만히 왼손을 뻗으며 질문했다.

"너흰 대체 후원자가 몇 명이냐?"

물론 대답을 바란 건 아니었다.

지이이이잉!

퓨어 매직.

녀석의 가슴팍에 고속으로 완성한 퓨어 매직을 발동했다.

투명한 빛은 내가 덮은 그림자 갑옷은 물론이고, 녀석의 몸을 감싼 붕대까지 단숨에 해체하며 반대편까지 관통했다.

팟!

동시에 마법의 궤적을 따라 세상을 덮은 그림자까지 한순간 갈라졌다. 아, 이건 또 예상 못 했네. 퓨어 매직을 이런 식으로도 활용할 수 있었구나.

하지만 정말 예상 못 한 건 후원자의 몸이었다.

"쿨럭...."

녀석은 놀랍게도 붕대 사이로 피를 토하며 무너져 내렸다.

피? 피를 토한다고?

자세히 보니 붕대 안에 진짜 사람이 들어 있었다. 망할, 이번에도 드워프 군주 때처럼 인간과 융합한 거였나?

덕분에 퓨어 매직이 몸을 관통했음에도 여전히 살아서 계속 꿈틀거렸다. 나는 생각할 것도 없이 녀석의 목덜미에 허술해진 붕대 틈으로 칼을 찔러 넣었다.

푹!

그리고는 가차 없이 손목을 비틀었다.

콰직!

관통된 뼈가 으스러지는 느낌이 칼을 타고 전해진다.

그러자 겨우 움직임을 멈추며 잠잠해졌다. 하지만 그 사이 몸을 피한 후원자들이 다시 수를 쓴 모양이다.

갈라졌던 그림자 결계의 틈이 순식간에 다시 메워졌네?

이계 황자는 세상을 구하고 싶다 176화

53장 역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