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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계 황자는 세상을 구하고 싶다 168화

51장 망령 수행

-승천이란, 다른 하늘을 열고 새로운 세상으로 올라가는 것을 말한다.

-선의 가장 높은 경지이며, 세상에 새로운 섭리를 가져다줄 수 있는 가능성의 힘이다.

-또한 세상의 섭리를 무너뜨릴 수 있는 파괴의 힘이다.

-선을 수행하는 자는 경각심을 가져야 한다. 새로운 세상은 곧 죽음일 수 있으니.

-죽음 앞에 은신하여 발각되지 않고, 죽음 앞에 전이하여 회피하며, 죽음 앞에 영역을 만들어 보존하고, 죽음 앞에 결속하여 저항하라.

-오직 이 모두를 능히 할 수 있는 자만이, 승천하여 새로운 세상에 견딜 수 있을 것이다.

-하나 명심하라.

-죽음에게 발각된 순간 우리 세상 또한 무사하지 못할 것이니.

-그 어떤 상황에서도 함부로 승천하는 일은 결단코 피해야 할 것이다.

"이것이 초대 태선께서 남기신 승천에 대한 기록이네."

주드는 직접 입으로 기록을 읊으며 말했다.

"처음엔 말 그대로 저승에 가는 선술인가 했네. 새로운 세상은 죽음이라는 문구도 있으니까. 그래서 선술에 너무 심취하지 말라는, 후대에 대한 경고라 생각했네. 그런데 자네 이야기를 들어보니...."

"새로운 세상이 정말로 다른 차원이다?"

"아무래도 그 사이크인가 하는 차원 아니겠나?"

주드는 한쪽 눈을 찌푸렸다.

"사이크 차원에는 무시무시한 괴물과 갑옷뿐인 병사들이 수두룩하다며? 게다가 그곳 주민들은 생명이 없는 유령 같은 존재라 했지. 바로 지금의 나처럼."

"맞아. 비슷해."

"초대 태선께서는 이미 그곳에 넘어가셨던 게 아닐까? 그 끔찍한 경관을 보고 죽음뿐인 세상이라 말씀하신 게 아닌가 싶네."

"음...."

그럴듯한데?

당장 그렇다고 확답할 순 없지만, 상당히 설득력 있는 이야기다.

일단 그 승천이라는 선술이 다른 차원으로 넘어가는 능력이라는 가정은 신빙성이 있다.

선술이란 결국 차원능력.

그리고 차원 능력을 가진 후원자 같은 놈들이 우리 차원에 자유롭게 넘어 왔다.

바꿔 말하면 후원자는 차원능력 중에서도 승천을 가지고 있다는 뜻.

"...좋아. 확실하진 않더라도 해보자. 그 승천술 얻는 거."

"오오. 도전해 보겠는가?"

"딱히 힘들 것도 없잖아? 그냥 1년 채우기 전에 당신이 여기 들어오면 끝이지?"

그리고는 칼을 내밀었다. 주드는 고개를 끄덕이며 칼에 대해 다시 언급했다.

"그 칼은... 매우 특별하네."

"나도 알아. 수천 년을 산 엘프 군주가 만든 거니까."

"단순히 잘 만들었거나, 예리하다는 그런 이야기가 아니네. 그 안에 끝도 없는 힘이 깃들어 있어."

"아, 그거라면...."

전에 사이크 차원에 넘어갔을 당시, 내가 날려버린 1만이 넘는 사이크인의 에너지.

정확히 어떤 에너지인지는 모르지만, 특별한 눈을 가진 테우스나 독수리 장로는 그 힘을 알아보고 경계했다.

"사이크 인을 죽이고 흡수한 에너지야. 정확히 어떤 건지는 나도 모르고."

"나 역시 자세히는 모르겠네만, 적어도 이 몸과 비슷한 힘이라는 건 알겠네."

"당신이랑 비슷하다고?"

"우리 세상엔 없던 힘이야. 생명은 아니지만 압축된 생명 같기도 하고, 선옥이 가진 흐름 그 자체와 비슷하기도 하고."

"뭔가 복잡한데?"

"어쩌면.... 내가 그 안에 깃든 힘을 자네가 쓸 수 있도록 연결할 수 있을지도 모르겠네."

"연결?"

"중계라고 하는 게 나으려나? 이쪽 세상의 존재는 그 힘을 다룰 수 없네. 흐름의 구조가 다르니까. 그러니 다른 세상의 존재가 된 내가 중간에 낀다면... 자네가 다룰 수 있도록 변환이 가능할 거야."

"오.... 그래서 연결이 되면 뭘 어떻게 할 수 있는데?"

"그건 해봐야 알겠지."

주드는 재밌다는 표정으로 칼을 바라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앞으로 서서히 알아보세. 서두를 건 없어. 앞으로 1년간 달리 할 일도 없지 않은가? 그보다 아직 답을 듣지 못했는데...."

주드는 갑자기 표정을 진지하게 바꾸며 물었다.

"자네 대체 여기서 어떻게 버틸 생각인가? 방법이 있다고만 했지, 정확히 무슨 방법인 줄은 못 들었네만."

"아, 그거."

마침 잘됐다. 예상과 달리 선옥에 오자마자 격렬하게 뛰어다닌 바람에 속이 꺼졌거든.

그래서 난 곧바로 드라이어드를 소환했다.

"오오...."

주드는 모습을 드러낸 거대한 아름드리나무에 연신 감탄했다.

"대단하군. 이것도 정령인가? 정령인데도 생명이 넘치는군."

"덕분에 도움이 많이 돼. 드라이어드? 열매 좀 줄래?"

드라이어드는 말없이 웃으며 가지에 열린 분홍빛 열매를 따 주었다. 한입 베어 물자 예나 지금이나 변함없는 달콤한 향기와 과즙이 쭉 흘러내렸다.

"이거 진짜 맛있어. 당신도 하나 먹어볼래?"

열매 하나를 더 받아 주드에게 넘겨주었다. 주드는 황송하다는 듯 양손으로 열매를 넘겨받고는 연신 눈을 껌뻑이기 시작했다.

"선옥에서 과일이라니.... 믿을 수가 없군. 이런 방법이 있었을 줄이야...."

"반칙 쓰는 것 같아서 미안한데, 그거 아니었으면 애초에 여기 들어올 생각도 못 했을 거야."

"반칙? 그게 무슨 소린가. 이것도 다 자네의 능력이네."

주드는 고개를 저으며 열매를 입으로 가져갔다.

물론 인간이 아니라 실제로 먹는 건 불가능하겠지만.... 뭐 어때? 기분이라도 낼 수 있으면 그만이지.

* * *

그렇게 보름이 지났다.

선옥엔 밤과 낮이 없기 때문에 시간의 흐름을 알기 어렵다. 다행인 건 같이 있던 주드가 마치 생체시계라도 가진 양 정확한 시간을 알려준다는 것.

"각오하게!"

주드가 미끄러지듯 몸을 날리며 가느다란 검을 휘둘렀다.

"큭...."

나는 눕혀 든 검으로 녀석의 공격을 받아내며 뒷걸음을 쳤다. 압박이 대단한데? 칼날은 엄청 가는 주제에 뭐 이렇게 무겁냐?

"빈틈!"

순간 주드가 몸을 회전하며 내 발목을 향해 검을 그었다.

하지만 녀석이 몸을 회전하는 것 자체가 더 큰 빈틈이다. 나는 동요하지 않고 먼저 녀석의 목에 검을 찔러 넣었다.

푸확!

동시에 회전력 때문에 모가지 전체가 도려지듯 날아갔다. 헛, 이렇게까지 할 생각은 없었는데....

"주드!"

"...."

목이 날아간 주드의 검은 내 발목 바로 앞에서 아슬아슬하게 멈춰 있었다.

"...괜찮네."

순간 날아간 목이 사라지고, 대신 투명한 안개가 몸에서 피어오르며 새롭게 머리를 만들기 시작했다.

"머리 정도는 날아가도 아무렇지도 않네. 이래 봬도 인간이 아니니까."

"이래 봬도...가 아니라 암만 봐도 인간은 아니야. 대체 어떻게 생겨먹은 구조야? 뭔가 몸에 피해는 없어?"

"쌓아 놓은 흐름의 일부가 소모되었을 뿐이네. 자네가 그 오른쪽 눈을 사용하면 금방 파악하겠네만...."

주드는 손가락으로 자신의 명치를 가리켰다.

"이곳 근처에 지금의 나를 이루는 핵이 있네."

"핵?"

"정수라고 해야 할까? 날 죽이려면 이걸 제거해야 하네. 아니, 이미 산몸이 아니니 죽는다는 표현도 이상하군."

"결국 그것만 잘 지키면 불사신인 셈이네?"

"그렇지. 분명 영생을 누릴 수 있을 거야. 살아있지 않은데 영생을 누리는 게 무슨 의미가 있는지 모르겠네만...."

주드는 어딘지 쓸쓸한 표정으로 한숨을 내쉬었다.

"후, 지금 내가 한숨을 내쉬는 것도 정수에 기록된 습관을 흉내 내는 것에 불과해. 생전의 모든 기억과 다루던 힘이 정수에 남아 있으니.... 지금의 나는 예전의 나를 흉내는 꼭두각시일 뿐이네."

"꼭 그런 건 아닌 것 같은데."

나는 가만히 고개를 저었다.

"따지고 보면 대충 비슷한 거 아닐까? 인간의 몸이라는 것도 따지고 보면 뇌에서 신호를 보내 움직이는 인형 같은 거니까?"

"그러니까, 이 새로운 정수가 바로 인간의 뇌와 같은 것이다?"

"느낌은 그래. 물론 당신이 자학하고 싶은 마음도 모르는 건 아니지만."

이 정도면 위로가 되었을까? 뭔가를 생각하던 주드는 이내 고개를 끄덕이며 미소를 지었다.

"덕분에 마음이 좀 편해졌군. 고맙네. 그보다 방금 틈을 참 잘 노렸어."

"그야 노리라고 먼저 말해줬으니까?"

"미리 알고 있다 해도 쉬운 일은 아니야."

주드는 사방으로 검을 휘두르며 말을 이었다.

"라그란 대륙의 검술을 대부분 이런 식이네. 현란한 움직임으로 상대의 눈을 현혹해 주의를 분산시키는 것. 하지만 현란한 움직임 자체가 자신의 빈틈을 드러내지."

"그럼 그렇게 안 하면 그만 아닌가?"

"아무것도 안 하면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으니까. 그래서 여기서부터가 재밌네."

녀석은 방금처럼 똑같이 몸을 회전하며 아래쪽으로 검을 휘두르며 물었다.

"방금 것과의 차이를 알겠는가?"

"...축발의 무릎을 살짝 구부리고 있다는 거?"

"정확하네."

주드는 구부렸던 무릎을 튕기며 뒤쪽으로 살짝 물러났다.

"이렇게 일부러 빈틈을 보여 상대의 공격을 유도한 다음, 동작의 속도를 맞춰 회피와 동시에 새롭게 생긴 상대의 빈틈을 노리지."

그리고는 아래로 내린 검을 위로 올려 베었다. 나는 주드의 검이 허공을 찌른 내 손목을 베는 상상을 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서로 빈틈 노리기 게임이네. 없는 빈틈도 억지로 만들어 내고."

"정확한 평이네. 물론 서대륙의 기사들은 이렇게까지 정교한 심리전을 배우지 않고, 또 배울 필요도 없지."

"마갑 때문에?"

"마갑 때문에."

주드는 턱수염을 쓰다듬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마갑으로 올라가는 힘이 너무 압도적이네. 덕분에 이런 세밀한 검술이 활약할 기회가 없지. 압도적인 힘과 속도를 제어하는 것만으로도 보통 일이 아니니까. 하지만 그렇다 해도...."

주드는 허공에 대고 빠르게 세 번 찌르기를 날린 다음 자세를 가다듬었다.

"실력이 위로 갈수록 기사 역시 이를 무시할 수는 없네. 내 비록 나이트 커맨더에 완전히 도달하지 못했으나, 대련을 받아준 나이트 커맨더에게 단 한 번도 패한 적은 없네."

정말? 아니, 그전에 나이트 커맨더라고?

"당신 그 정도였어? 나이트 커맨더?"

"물론이네. 합!"

주드는 한 번의 기합으로 세 번 검을 휘두르며, 정면의 텅 빈 공간에 세 발의 풍압검을 방출했다.

콰과과과과과광!

"이 정도는 충분히 가능하지. 내 비록 기사 수련은 5년만 했네만, 그 기간 동안 서대륙 기사들에게 천재 소리 들었네."

천재라.

확실히 그랬을 것이다. 그것도 성장이 빠른 10대도 아니고, 성인이 훌쩍 넘은 남자가 불과 5년 만에 나이트 커맨더에 도달했다면.

"당시에 백기사단의 단장에게 제국에 귀화해서 정식으로 기사가 될 생각 없냐는 이야기까지 들었지. 물론 위칸의 왕족이 그럴 수는 없는 노릇이고, 내 뜻이 다른 데 있어 거절했지만 말이네."

"오...."

그리고는 몇 가지 나이트 스킬을 추가로 시전해 보였다. 그런데 마갑도 안 입고 저게 가능한가? 물론 애초에 인간조차도 아니긴 하지만....

"이상한 질문인 건 아는데 일단 물어는 볼게. 어떻게 마갑도 안 입고 그런 힘을 낼 수 있어?"

"마갑이야 살아있는 인간이 착용해야 의미 있는 물건이고, 지금 이 몸은 인간의 육체를 초월했으니까. 정수에 남은 지식을 활용할 만큼의 힘은 충분히 낼 수 있지. 혹시 더 강한 상대가 필요하면 말만 하게."

"여기서 더 강해질 수 있다고?"

"주변에 영역을 펼치면 가능하네. 다른 부가조건 없이, 오직 영역 안에서 나만 좀 더 빠르게 강한 힘을 낼 수 있도록 정할 수 있네."

"그거 엄청 좋은데.... 근데 나중에 하자."

나는 검을 거두며 고개를 저었다.

"지금은 이 정도만으로도 벅차. 그렇다고 당신이랑 가볍게 수련하는데 정령빙의를 쓸 수도 없고."

"걱정 말게. 내 자네 몸에 해가 되지 않도록 힘을 조절할 테니."

"그래. 조절 좀 해줘."

"당분간은 내가 아는 동대륙의 검술을 전수해 주겠네. 언젠가는 도움이 될 거야. 당장은 쓸모없어 보여도."

"어차피 시간도 많은데 뭐. 남은 시간 동안 당신이랑 이렇게 검 훈련이랑 대련만 해도 도움 엄청 되겠는데?"

"도움 될 수 있다니 영광이네."

주드는 가볍게 허리를 숙이며 미소를 지었다.

"그나저나 선옥에서 이런 말동무를 가질 수 있다니, 나는 스스로를 가사상태에 빠뜨렸는데도 사람과의 대화가 그리웠네. 솔직한 심정으로 자네가 참 부럽군."

"그럼 좀 더 부럽게 해볼까?"

나는 사흘 만에 다시 드라이어드를 소환해 열매를 따 먹기 시작했다.

"자, 이번에도 하나 드셔."

"오오.... 고맙네."

열매를 받은 주드는 주저 없이 한입 덥석 베어 물었다.

주룩.

몸이 살짝 투명해서 속으로 넘어간 과육과 과즙이 전부 보인다. 나는 눈살을 찌푸리며 웃음을 지었다.

"역시 보기는 좀 그러네."

"확실히 보는 나도 좀 그렇군. 허허...."

주드는 자신의 몸속으로 천천히 내려가는 과육을 내려다보며 너털웃음을 지었다.

"그래도 기분이 썩 좋네. 보름 전에 처음 먹었을 때는 정말 날아갈 것 같았지. 이 얼마 만에 먹어보는 과일이란 말인가?"

"그렇게 좋아? 맛도 못 느끼면서?"

"맛은 정수에 남은 오랜 기억을 떠올리면 그만이네. 정말 오랫동안 과일은 손도 못 댔지. 선옥에 들어갈 몸을 만들기 위해.... 마지막 10년은 내가 생각해도 좀 과했나 싶군. 허, 아니 하나면 됐네. 더 줄 필요 없어."

주드는 하나 더 내민 열매를 거절하며 고개를 저었다.

"이런 건 가끔 먹어줘야 감흥이 있겠지. 나야 안 먹어도 안 죽으니 자네나 하나 더 들게."

솔직히 말하자면 나도 슬슬 물리기 시작했다. 하지만 1년 동안 쫄쫄 굶으며 버틴 사람을 앞에 두고 그런 소릴 했다간 벌 받겠지?

"그나저나 손녀아이 이야기나 좀 더 해주게. 저번에 그 아이가 세운 마탑에 자네가 쳐들어가는 데까지 이야기했네. 그 뒤로 정확히 어떻게 된 건가?"

"쳐들어간 건 아니야. 멀리서 저격했어."

"저격?"

"퓨어 매직이라고, 마법 관련된 모든 현상을 제거하는 마법이 있는데...."

그대로 제자리에 주저앉으며 주드에게 이야기를 늘어놓았다.

별것 아닌 디테일도 빼놓지 않고, 시시콜콜한 내용까지 전부.

처음에는 선옥에 들어가려 할 때는 1년 동안 말도 제대로 못 하고 가끔 정령들과 소통이나 하려나 했는데....

어째 밖에 있을 때 보다 더 말을 많이 하는 것 같은데? 이거 기분 탓인가?

이계 황자는 세상을 구하고 싶다 169화

51장 망령 수행

그리고 석 달이 지났다.

그 사이 검으로 하는 대련은 승부가 나지 않는 지경까지 올라와 버렸다.

물론 주드가 내 힘을 맞춰주는 선에서 그렇다는 말이지만.

다음 단계로 올라가려면 내가 마갑을 입어야 한다.

당연히 없는 것을 입을 수는 없는 노릇. 이럴 줄 알았으면 선옥 들어올 때 마갑도 한 벌 챙겨 오는 건데.... 내가 어찌 선옥에서 마갑입고 훈련할 순간이 올 거라 예상할 수 있었을까?

그 밖에 정령 빙의 대련은 한번 해봤는데 너무 위험해서 폐지.

주드가 자신의 다크 버전을 정화한 이그니스의 힘을 다시 보고 싶다고 해서 정령 빙의를 했는데....

빙의 된 채로 정말 살짝 휘두른 검에 스친 순간, 주드는 눈을 까뒤집으며 쓰러지고 말았다.

-불의 정령왕이 깃든 검은 스쳐도 사망이군. 나처럼 흐름만으로 이어진 존재에게 너무도 위험한 힘이야.

몇 시간 만에 깨어난 주드는 허탈한 얼굴로 고개를 흔들었다.

-방금 스친 것만으로도 큰 충격을 받았네. 정수 주변에 쌓아 둔 선의 힘도 엄청나게 소멸했고.

칼이 조금만 더 깊었어도 자신이 소멸할 뻔했다며 감탄했다. 하긴 예전에 사이크 차원 잠깐 넘어갔을 때만 해도, 이 검 한방에 사이크 인이 수천 명씩 소멸하고 그랬지?

그 뒤로는 검술도 지겨워서 마법으로 분야를 옮겼다. 나는 주드 앞에서 템페스트를 발동하며 소리쳤다.

"잘 봐! 이렇게 실제로 날리기 직전까지는 압축을 완전히 끝내면 안 돼!"

"호오.... 이 무슨 집중력이란 말인가...."

지켜보던 주드가 혀를 내둘렀다. 나는 멀리 허공을 향해 휘몰아치는 압축된 불꽃을 쏘아냈다.

푸확!

순간 거대한 화염의 날개가 폭발하듯 퍼지며 텅 빈 공간을 휘감는다.

한순간 주변 풍경이 새빨갛게 물들었다. 동시에 작열하는 불꽃이 거대한 기류를 만들며 선옥의 빈 공간을 한숨에 날려 버렸다.

콰과과과과과과광!

꽤 멀리서 터뜨렸는데도 여기까지 열기가 쏟아졌다. 주드는 손으로 눈썹을 가리는 시늉을 하며 고개를 저었다.

"이게 바로 템페스트.... 나도 이야기 정도는 들었네. 실제로 보니 그야말로 장관이군."

"서대륙 왔을 때 마법도 배웠다며? 어느 정도까지 돼?"

오랜만에 큰 마법 썼더니 머리가 살짝 띵하구만. 주드는 고개를 기울이며 잠시 생각하다 답했다.

"당시에는 하급 소리를 들었네. 출력은 부족하지만 컨트롤은 좋다는 평가였지. 속성은 불이었고."

"불이 가장 써먹기 좋아. 특히 싸울 때는."

"그런데 지금은 인간이 아니라 어디까지 될지 모르겠군. 템페스트라...."

그리고는 바로 뿌연 빛의 손바닥 위에 화염 마법을 압축하기 시작했다. 어, 저게 바로 된다고? 방금 딱 한 번 보여줬는데?

"뭐야, 완전 잘하잖아? 맞아. 거기서 그렇게 압축해. 불꽃의 흐름은 최대한 살려서 스스로 소용돌이치도록 유도하는 거야."

"끄응.... 이것 참 까다롭군. 하지만...."

"하지만이고 자시고, 지금 이게 완성된 거야! 던져!"

주드의 손바닥엔 이미 압축된 불꽃이 소용돌이 치고 있었다. 녀석은 내 외침에 움찔 놀라며 방금 폭발이 일어난 곳으로 또다시 불꽃을 방출했다.

그러자 방금 일어난 일과 정확히 같은 과정이 반복됐다.

콰과과과과과과과광!

"...여기 아크 위저드 하나 추가요."

"허허, 이게 될 줄이야."

주드는 자신이 만든 불지옥을 보며 헛웃음을 지었다.

"인간이었을 때는 마법을 쓰는 머리에 한계가 있었지. 이런 건 꿈도 못 꿨네. 그런데 인간의 한계를 벗어나고 보니.... 생각보다 간단하군."

"당신 존재 자체가 마법 비슷한 무언가니... 근데 마력은 어떻게 되는 거야? 뭘 소모해서 마법을 써?"

"정수 주변에 쌓아 놓은 선력을 마력으로 치환했네. 그리고 자네 말대로 정수가 인간의 뇌와 비슷한 기능을 하는군."

"마법 많이 쓰면 뇌가 지치니까. 정수도 지치는 거야?"

"비슷한 느낌이네. 완벽한 상태라면.... 이걸 서너 번까지는 쓸 수 있겠군."

그리고는 다시 한번 템페스트를 만들어 반대편에 투척했다. 나는 순간 그쪽 방향에 쌓아 놓은 손수건들을 떠올리며 잽싸게 몸을 날렸다.

"안 돼! 내 손수건!"

다행히 방향만 그쪽이지 폭발과는 거리가 있었다. 나는 손수건 무더기를 챙겨 품에 안으며 한숨을 내쉬었다.

"휴.... 이거 다 탔으면 어쩔 뻔했나...."

"미안하네. 내가 방향을 잘못 잡았군. 거리가 멀어서 괜찮을 거라 생각했는데."

"아니, 실제로 괜찮았어. 그냥 내가 설레발 친 거야."

"설레발?"

"호들갑 떨었다고. 아무튼 좀 더 안전한 장소가 있으면 좋겠는데...."

하지만 선옥의 내부는 여전히 텅 비어 있을 뿐이다. 오히려 손수건을 쌓아둔 곳이 기준점이 될 정도로.

그나저나 손수건은 정말 중요하다.

태선이 말없이 챙겨준 이유가 다 있었다. 아직도 선옥에서 버텨야 할 시간이 9개월이나 남았으니.... 어떻게든 최대한 아껴야지. 이제 한 5분의 1쯤 사용했나?

"그나저나 그 선력이라는 거, 선술을 쓰기 위한 마력 같은 거지?"

"그러네."

주드는 자신의 가슴 쪽을 손으로 만지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가만있어도 서서히 회복되지. 내 느낌으로는 바깥세상보다 이곳이 회복 속도가 더 빠른 것 같네."

"선옥이라 선력이 빠르게 회복되나?"

"아무래도 그렇지 않겠나?"

"그럴지도. 그런데 선술은 차원능력이잖아? 내가 전에 설명했지?"

"설명했네. 자네의 왼쪽 눈은 상대의 능력을 감정할 수 있는데, 그것으로 본 후원자의 능력에 차원 능력이 있었다고."

"맞아. 그러니까 선력이라는 건 차원력이라는 말로 바꿔 말할 수 있을 것 같은데."

"그렇게 되겠지? 물론 용어야 아무래도 어떠냐 싶네만."

"그럼 차원능력을 터득하면 인간의 몸에도 차원력이 쌓이겠지?"

"물론이네."

"그럼 그 차원력으로 차원 능력 안 쓰고 지금 당신처럼 마력으로 바꿔서 마법을 더 많이 쓸 수도 있는 건가?"

"그건 어렵지 않나 싶네."

주드는 가만히 고개를 저었다.

"내가 인간이 아니기 때문에 그런 식의 변환이 가능할 걸세. 존재 자체가 다 같은 흐름이니까. 하나 자네는 분명 살아 있는 인간의 육체를 가지고 있지 않나?"

"그렇긴 한데.... 혹시 밖에 있을 때 다른 사람들한테 확인해 봤어?"

"그럴 기회도 없었네. 동대륙에 마법은 흔한 게 아니라서."

그렇다면 내가 밖에 나가야 진짜 테스트를 할 수 있을 것이다. 개인적으로는 이것도 가능하면 엄청 유리해질 것 같은데....

"자네는 이미 엄청난 마력을 가지고 있지 않은가? 스스로도 그렇고, 머릿속에 새로 얻은 마력 결정인가 하는 것도 여럿 있지. 그런데도 또 마력을 필요로 하는가?"

"마력은 무조건 많을수록 좋아. 그래야 게이트를 전부 커버하지."

"게이트?"

"사이크 차원이 침공할 때 넘어오는 문. 보통 한 번에 다섯 개씩 열려."

"자네 혼자서 그 다섯 개를 전부 막아내려고?"

"2차까지는 가능할 것 같아. 마력만 충분하면."

당장 문제되는 건 게이트 사이의 거리긴 한데, 그것도 톨라리에게 배운 급가속을 활용하면 어떻게든 될 것 같다.

"꼭 그럴 필요가 있겠나? 듣자하니 전쟁에 대비해 수하들도 많이 키운 것 같은데. 게다가 자네 페이우드 제국의 황자라며?"

"맞아. 막내 황자."

"그렇다면 제국의 기사단이나 마법사도 동원해야 하지 않겠나? 아니, 그들 역시 마땅히 동원되어 싸워야지."

"물론 맞는 말이긴 한데...."

내 입장에선 어떻게든 나중을 대비해 피해를 줄이고 싶다.

나중에 비해 1, 2차 웨이브가 아무리 할 만하다 해도, 결국 군대를 투입하면 병사와 기사의 죽음을 피할 수 없다.

그렇다고 이 와중에 사람 목숨이 가장 소중해~ 같은 나이브한 이야기는 아니고.

결국 나중에 3차나 4차 웨이브를 넘어가면 어마어마하게 죽어 나갈 수밖에 없다. 그러니 그때를 위해 초반 손실을 최대한 피하려고 하는 거지.

"죽은 사람은 못 살려내지만, 소모한 마력은 좀 쉬면 회복되니까."

"그러다 자네가 축나면 그게 더 큰일이네. 마법도 많이 쓰면 후유증이 남지 않나?"

"마력을 한계까지 박박 긁어 쓰면 그렇지. 그러고 보니 인간은 한계까지 마법을 쓰면 입에 거품을 물거나 코피를 쏟으면서 기절하는데, 당신은 어떻게 돼?"

"그건 안 해봐서 모르겠군. 지금 한 번 해볼까?"

"아니, 그러지 마. 괜히 소멸하거나 다시 폭주하면 그게 더 위험하니까."

가장 먼저 떠오른 것은 선옥에서 처음 맞이해준 시커먼 블랙 주드였다. 아무리 정화됐다 해도 일단 전과가 있으니 조심해서 나쁠 건 없지.

"폭주라니, 그럴 일은 결코 없을 걸세. 자네 아직도 날 못 믿겠나?"

"아무리 믿어도 조심할 건 조심하는 게 좋잖아? 그러고 보니 지금 당신이 괜찮은 것 자체가 좀 신기해."

"그건 또 무슨 소린가?"

"전에 당신이랑 사이크 인이 비슷한 느낌이라고 했지?"

"그런데?"

"그때 본 사이크인 들은 제정신이 아니었거든. 본능 그 자체라고 할까? 이쪽에서 전쟁 난 거 보고 미친 듯이 환호하면서 즐기는 게... 뭔가 이성 없이 날뛰는 짐승 같은 느낌이었어."

"흠, 그거 무도한 놈들이군. 내가 만난 후원자는 꽤나 신사적인 느낌이었네만."

"맞아. 후원자라는 확실히 이성적이었지. 물론 이성적으로 미친놈들이었지만."

"놈들?"

"나중에 후원자 2호도 나오고 그러더라고. 몸에 붕대를 감아서 제어가 되나? 아무튼 당신은 괜찮나 해서."

"붕대라.... 허, 그러고 보니 내가 말을 안 했군."

주드는 혀를 차며 허공에 손가락을 두드리기 시작했다.

그러자 비쩍 마른 평범한 노인의 육체가 점점 부풀어 오르며 거인이 되기 시작했다.

"...어?"

"그게 정확히 어떤 능력인진 모르겠지만, 나 역시 붕대에 감겨 있는 셈이네."

자세히 보니 거대해진 주드의 표면에 미세한 사이즈의 투명한 미로들이 빽빽이 맺혀 있었다.

"영역술!"

"원래의 나는 형태가 없네. 지금 자네가 보는 내 모습은 그저 만들어 낸 껍질일 뿐이지."

"그럼 지금까지 계속... 영역으로 몸을 감싸고 있던 거야?"

"그렇지. 안 그러면 형태를 유지할 수 없으니까."

"그 영역 덕분에 이성을 유지하고 있는 거고? 만약 영역 풀어버리면 당신도 헤까닥 하는 거야?"

"허허, 헤까닥까지야. 그래도 좀 풀어질 것 같기는 하네. 하나 나는 수행을 한 몸 아닌가?

주드는 커졌음에도 여전히 삐쩍 마른 몸으로 다양한 포즈를 취하며 자신을 어필했다.

"나는 내 육체를 완벽하게 컨트롤하는 수행을 했네. 모든 욕망을 극한까지 제한했지. 그래서 정신력 하나는 대단하다고 자부하네. 물론 그럼에도 심마를 피할 수 없었네만."

"그 심마는 아마도 후원자가 투약한 것 때문에...."

"뭔들 무슨 상관이겠나? 허나 적어도 그 평범한 사이크 인과 비교하는 건 실례라네."

"그러게. 100년 동안 수행한 사람에게 내가 실례했네."

"허허. 솔직하니 좋구만."

주드는 활짝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고는 다시 원래 사이즈로 작아지며 물었다.

"그나저나 마법에 대해 좀 더 배우고 싶네. 특히 템페스트. 이거 잘하면 양손에 각각 하나씩 만들 수도 있지 않겠나?"

"맞아. 가능해. 일단 쌍수마법을 쓸 수 있어야 하고."

나는 양손으로 불꽃과 얼음을 동시에 만들어 보였다.

"인간 머리로 이거 하는 건 엄청 힘들긴 한데...."

"이게 말인가?"

주드는 오른손에 불꽃을, 왼손에는 그보다 훨씬 미약한 바람의 기류를 만들어 보였다.

"전혀 힘들지 않아. 물론 내 속성이 아닌 다른 속성 마법을 쓰는 건 좀 까다롭네만."

"아니... 그거면 충분해."

쌍수마법을 굳이 서로 다른 속성으로 쓸 필요는 없다. 그냥 양손에 똑같이 화염의 템페스트를 만들면 그만이니까.

그보다 내가 쌍수마법 완성할 때까지 몇 번의 회귀가 필요했더라?

심지어 이 할아버지는 처음 보자마자 템페스트를 완성했다.

아무리 인간을 초월했다 해도 이게 가능한가? 나 살짝 맘 상하려 그러는데?

이계 황자는 세상을 구하고 싶다 170화

52장 위칸 멸망전

"얼마 전 반란군의 지하 벙커를 기습, 총 2만의 반란군을 생포하는 데 성공했습니다."

청색 붕대를 감은 집정관이 거대한 스크린 앞에서 보고를 이어나갔다.

"이후 전투에 부적합한 영유아와 노인을 제외, 총 1만의 자원을 선별했습니다. 이것을 지금까지 제작한 알드 차원의 갑옷에 삽입 완료했습니다."

"완성된 갑옷의 숫자는?"

지켜보던 검은 붕대의 주재자가 질문했다. 집정관은 화면에 커다란 갑옷을 띄우며 대답했다.

"총 51개입니다."

"오리지널을 제외하면 50개인가?"

"그렇습니다. 처음엔 갑옷 하나당 아홉 명의 반란군을 넣으려 했습니다만, 반란군의 신체적인 문제 때문에 최소 12명에서 최대 16명까지 채워 넣었습니다."

"신체적 문제가 뭐지?"

"몸집입니다."

동시에 화면에 수많은 인간들의 사진이 파노라마처럼 나열됐다.

"저희가 확보하고 있던 과거 반란군의 정보에 비하면, 새롭게 확보한 반란군의 몸집이 대폭 감소했습니다."

"몸이 작아졌다는 말이군. 확보한 반란군의 연령이 대체로 어렸던 건가?"

"그건 아닙니다. 100년 전에 비해 반란군의 키와 체중이 평균 15퍼센트 줄어들었습니다."

"15퍼센트나?"

"오랜 지하생활과 영양 부족 때문에 생긴 결과 같습니다."

"그동안 전투를 벌인 반란군은 큰 문제가 없던 것 같은데?"

"전투요원은 개중에서 최대한 덩치가 큰 자들을 고르고 골라 뽑은 듯합니다. 덕분에 반란군이 전체적으로 왜소화되는 것을 저희들이 눈치 채지 못했던 겁니다."

"좋은 소식은 아니군."

주재자는 무감각한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그래서, 50개의 갑옷에 평균 14명씩 채워 넣었다면 700명이 소모되었겠군?"

"정확히는 704명입니다. 남은 9296명은 '적성 검사'를 걸쳐, 약 5천의 변이체를 확보했습니다. 나머지는 변이에 실패하여 전부 폐기했습니다."

"변이체의 기본 성능은?"

"형편없습니다."

스크린에 신체의 일부가 부풀어 오르고, 몸 곳곳에 촉수가 돋아난 끔찍한 인간들이 모습을 드러내기 시작했다.

"투약을 최소한으로 제한했기 때문에 어쩔 수 없는 결과입니다. 변이나 개조를 너무 많이 하면 사이크의 도구로 인식될 위험이 있습니다."

"파워 슈트를 착용시키면 되겠군."

주재자의 감흥 없는 목소리에, 집정관이 펄쩍 뛰며 반발했다.

"화염병으로 만들라는 말씀입니까? 그렇게 하면 정말 사이크인으로 간주될 위험이 있습니다!"

"안에 반란군을 태웠으니 상관없다. 정 곤란해지면 녀석들이 우리 물건을 훔쳐가서 착용했다고 변명하면 돼."

"그것은...."

위원회가 과연 그런 변명을 들어줄 기회를 줄까? 집정관은 붕대 안쪽에 식은땀이 흐르는 착각을 느끼며 말했다.

"...너무 많이 만들면 나중에 진짜 침공 때 슈트가 부족할지 모릅니다. 이번엔 딱 300기만 만들어 보내는 게 좋겠습니다."

"500기. 그리고 강화 화염병도 50기를 만들도록 하지."

"강화 화염병까지...."

이제는 식은땀을 넘어 마치 피부가 녹아 흐르는 기분.

하지만 논리적인 문제는 없다. 만약 화염병이 통한다면 같은 논리로 인해 강화 화염병도 통할 테니까.

"그리고 변이된 반란군 중, 가장 스펙이 높은 자를 열 명만 따로 선발해라."

"선발하는 건 어렵지 않습니다만.... 어째서입니까?"

"전에 후원자 3호와 드워프의 융합에 관한 자료를 감명 깊게 봤다. 이번에 새로 붕대를 받은 자들 중 열 명을 뽑아 선별된 반란군과 융합시킨다."

"주재자시여!"

지금 제정신입니까? 하는 외침이 목구멍까지 올라왔다. 집정관은 가까스로 감정을 누그러뜨리며 목소리를 낮췄다.

"그것은 너무 위험합니다. 위원회에서 결코 그냥 넘어가지 않을 겁니다."

"어째서? 강화 슈트에 반란군을 집어넣는 게 통한다면, 당연히 이것도 같은 맥락에서 통할게 아닌가?"

"문제는 통하지 않았을 때입니다. 붕대를 받았다는 건 저희들 중에서도 상위 1퍼센트에 들었다는 뜻입니다. 당장은 부족하더라도 후원자의 역할을 감당할 능력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런 그들을 규정을 어기고 알드 차원에 보냈다는 것이 발각되면...."

"전부 통하거나."

주재자는 집정관의 말을 끊으며 고개를 저었다.

"아니면 전부 통하지 않거나. 둘 중 하나뿐이다."

"집정관이시여, 그건 도박입니다."

"지금은 도박을 할 때다. 모든 책임은 내가 질 테니 집정관은 명령에 따르면 된다."

주재자가 이렇게까지 나오면 거절할 명분이 없었다. 집정관은 꽉 쥐고 있던 주먹을 풀며 고개를 끄덕였다.

"알겠습니다. 바로 준비하겠습니다."

"수고해주길 바란다. 그리고 반란군을 알드 차원에 보낼 게이트 준비는?"

"차원능력에 특화된 서른 명의 관리자들을 선별했습니다. 동시에 소형 게이트 세 개를 열 계획입니다."

"설마 그런 일은 없겠지만, 단 한명의 관리자라도 게이트 너머로 얼씬거리지 않도록 주의를 단단히 기울여라. 만약 그랬다간 제제를 피할 수 없을 테니까."

"명심하겠습니다."

"그런데 벙커 하나를 전부 털어서 2만의 반란군을 생포했다고?"

주재자는 갑자기 화제를 바꾸며 질문 물었다. 집정관은 혼이 빠지는 기분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네? 네. 그렇습니다만."

"사이크인을 늘리기 위해서는 결국 반란군이 계속 세력을 유지해야 한다. 그래서 굳이 뿌리를 뽑지 않고 내버려 둔 것인데."

"이번에 수집한 정보에 의하면, 이런 지하 거주용 벙커가 행성 전역에 약 10여 개 더 숨겨져 있다고 합니다."

"열 개나?"

"여기에 반란군 지도자 비렉스가 있는 중앙본부도 따로 세력을 가지고 있으니 멸종을 걱정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다 합치면 20만을 넘는 건가? 그동안 숫자를 많이 늘렸군. 그리고 게이트 어느 곳에 열 계획인가?"

"게이트는...."

집정관은 급하게 생각을 전환하며 스크린에 새로운 얼굴을 띄웠다.

"신호가 잡히는 마지막 인물을 목표로 하고 있습니다."

"톨라리군."

화면에 뜬 건 눈 밑이 퀭한 검은 머리카락의 여자였다. 집정관은 새롭게 지도를 열며 말했다.

"당장 알드 차원에서 신호가 잡히는 건 톨라리뿐입니다. 물론 톨라리 주변에 무슨 일이 벌어지는지는 알 수 없습니다만."

"그런데 위치가 바뀌었군."

"톨라리의 최근 위치는 변동이 심합니다. 얼마 전에는 서대륙의 최북단까지 올라갔다가 본거지로 내려왔는데, 최근에는 갑자기 동대륙을 향해 바다를 건너고 있습니다."

지도 위의 붉은 점이 서대륙에서 동대륙을 향해 천천히 움직이고 있었다. 주재자는 잠시 생각하다 말했다.

"톨라리를 목표로 삼으면 바다 위에 게이트가 열릴지도 모른다."

"어차피 당장은 열 수도 없습니다. 준비할게 많으니까요. 지금 작업을 시작해도 게이트가 열리는 건 톨라리가 동대륙에 도착한 이후가 됩니다."

"...좋다. 그렇게 하지."

주재자는 길게 고민하지 않고 결정을 내렸다.

"동대륙은 서대륙에 비해 인류의 역량이나 발현된 잠재력이 떨어진다. 바꿔 말하면 이번 침공만으로 동대륙 전체를 완전 무력화 시킬 수도 있다는 뜻이다."

"그렇습니다. 물론 그 와중에 톨라리를 확보할 가능성도 충분합니다."

"원정군에게 다음과 같은 사항을 지시하라."

"부디 말씀을 내려주십시오."

집정관이 몸을 굽히며 명령을 기다렸다. 주재자는 몸을 일으켜 한동안 스크린을 노려보았다.

"눈에 보이는 모든 것을 불태우고 파괴해라. 톨라리를 발견하면 확보하고. 죽은 시체라도 상관없다. 그리고 만약 근처에 클로드가 있다면...."

주재자는 움찔하고 손을 떨며 잠시 쉬었다 말을 이었다.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말고 제거해라. 그 어떤 피해를 감수하고서라도 반드시...."

* * *

선옥에 들어온 지도 6개월이란 세월이 흘렀다.

그 사이 주드는 최강 수준의 아크 위저드가 되어 있었다. 나랑 톨라리를 제외하면 거의 최고 아닐까? 반쯤 정령이 된 루네와 비슷한 정도?

"그럼 시작하겠네!"

마침 하늘 높이 솟아오른 주드가 온몸으로 빛을 뿜어내기 시작했다. 그렇다고 저게 원소 마법이란 소리는 아니고....

번쩍!

순간 온 사방으로 결정화된 투명한 빛이 쏟아져 내렸다.

힐링.

신성마법의 기초이자 전부라고도 할 수 있는 회복마법이다. 나는 분수처럼 쏟아지는 빛의 알갱이를 보며 손을 흔들었다.

"성공이야! 여기까지 닿았어!"

내가 서있는 곳과 주드가 떠있는 곳과의 거리는 약 50미터.

그렇다는 이야기는 지름이 100미터에 달하는 공간에 회복마법을 쏟아 냈다는 뜻이다. 주드는 곧바로 활짝 웃으며 내 쪽으로 날아와 착지했다.

"드디어 성공했네! 그런데 말이 나와서 하는 말이네만. 이게 대체 무슨 소용이 있나?"

"응?"

"처음부터 이야기 하지 않았나, 내가 쓸 수 있는 신성마법은 고작해야 이런 가장 낮은 수준의 힐링뿐이라고. 이런 걸 넓게 뿌린다고 무슨 의미가 있겠나? 어차피 이보다 높은 등급의 신성마법을 쓸 수 없는데?"

"아니, 이거면 충분해."

나는 고개를 저으며 훈련의 이유를 설명했다.

"목표는 전투 도중에 광역 회복이야. 게이트를 막기 위해 버티는 군대를 공중에서 지원하는 거지."

"하긴 전장에서 부상병을 하나하나 찾아가서 회복시키긴 어렵겠지. 허나 이렇게 하면 범위 안에 있는 적도 회복되지 않겠는가?"

"이계의 기본 병과는 화염병이라고 하는데."

문득 두꺼운 갑옷으로 온몸을 감싸고, 허리춤에 달린 호스로 불을 뿜어내는 이계의 악마들이 뇌리에 떠올랐다.

"정작 갑옷만 움직이고 속은 텅 빈 괴물이야. 생물이 아니니까 상관없어."

"호오.... 화염병이라."

"숫자가 제일 많은 잡졸이긴 한데, 그렇다고 절대 무시할 수도 없어. 하나하나가 뿜어내는 화염이 어지간한 마법사 수준이거든. 화염 저항 영약을 마셨는데도 눈 깜짝 할 사이에 부대 전체가 반죽음 상태가 되기 십상이야."

"그렇게 화상을 입은 군대의 위로 날아가서 방금처럼 회복 마법을 퍼부어라?"

"맞아. 힐링 샤워."

"힐링 샤워?"

"내가 붙인 이름이야. 아무튼 급할 때 도움 될 것 같아. 나도 비슷한 게 가능한데.... 아무래도 난 방어나 보다는 공격에 치우칠 테니까."

"무슨 뜻인지 알겠네. 마음 놓고 적들을 유린할 수 있는 환경을 만들고 싶다는 거지?"

6개월이란 시간을 함께 보낸 덕분에, 주드는 이미 내가 가진 화력의 모든 것을 알고 있었다.

"맞아. 내가 한 놈이라도 더 빨리 죽일수록 그만큼 아군 피해가 줄어 들 테니까."

"자네의 힘은 이미 인간의 상식을 초월했네. 다른 모든 것 보다, 우선 그걸 최대한 적절하게 살릴 수 있는 방법을 연구하는 게 옳아."

"나도 그렇게 생각해. 그리고 데스웜이라는 것도 있는데, 이건 반대로 너무 엄청난 생명 덩어리 같은 괴물이라, 힐링 샤워 좀 뒤집어 써도 크게 상관없을 거야. 그 정도 회복한다고 간에 기별도 안 간다고 할까?"

"오호. 이름만 들어도 무시무시하군."

"물론 어지간하면 전투가 일단락된 곳에 뿌리게 될 테니 문제없지. 그렇다고 무조건 당신을 그런 쪽으로 써먹을 생각은 아니고, 그저 그럴 경우도 생길지 모르니 미리 훈련해 놓은 것뿐이야."

"알겠네. 미리 준비해 두어 나쁠 거 없지."

주드는 흐뭇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나는 바닥에 주저앉으며 이틀 전 드라이어드를 소환했을 때 미리 따놓은 열매를 입으로 가져갔다.

"음.... 그럼 조금 쉬었다 하자. 마침 배도 고프고. 좀 시들긴 했는데 하나 줄까?"

"괜찮네. 다음에 새로 부르면 그때 신선한 걸로 하나 얻도록 하지."

주드는 고개를 저으며 내 옆에 자리를 잡았다.

선옥의 시스템이 생각보다 까다로운 것이, 유기물로 추정되는 물질은 바닥에 떨어진 순간 마치 물거품처럼 사라진다.

그것이 피건, 땀이건, 침이건 상관없이.

당연히 미리 따놓은 드라이어드 열매도 바닥에 닿는 순간 순식간에 사라진다.

한 번은 바닥에 옷을 깔고 그 위에 놓았는데도 게 눈 감추듯 사라지는 걸 보고 탄식했다.

덕분에 한 번에 왕창 따서 보관해 놓고 천천히 먹는다는 계획은 파기해야 했다.

대신 한번 소환했을 때 최대한 많이 먹어 놓고, 두세 개 정도만 추가로 따놓고 품속에 넣어두는 게 고작.

덕분에 드라이어드를 다시 소환할 수 있게 될 때까지, 약 하루 정도는 상당한 허기와 갈증에 시달려야 했다.

그렇다고 생전에 1년 가까운 시간을 쫄쫄 굶고 버틴 존재를 앞에 두고 우는 소리를 낼 수는 없었고.

"아, 내가 이야기했던가? 나한테 그림자 능력이라는 게 있다고."

"전에 가볍게 언급한 적이 있네. 이곳 선옥에서는 쓸 수 없다며 투덜대지 않았나?"

"맞아. 근데 이게 후원자한테도 있더라고."

"사이크인도 쓸 수 있는 능력이란 말인가? 선술, 그러니까 차원 능력도 쓴다고 했으니... 의외로 겹치는 게 많군."

"대책을 좀 세우는 게 좋을 것 같아. 전에 후원자가 드워프 군주에 빙의 한 적이 있었는데 그림자 능력을 엄청 잘 쓰더라고."

그리고는 그림자 능력의 기본이 되는 그림자 잠입과 그림자 갑옷, 그리고 그림자 결계에 대해 설명했다.

"호, 그것 참.... 역시 세상은 넓군."

설명을 들은 주드가 감탄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내가 소문조차 듣지 못한 능력이 이렇게 많았을 줄이야. 젊었을 때 그렇게 세상을 돌아다녔는데도 헛수고였군."

"헛수고까지야. 아무튼 알았어도 선옥에서 버티는 데 도움은 안 됐을 거야."

이곳엔 기본적으로 그림자가 없으니까.

물론 선옥에 빛이 없는 건 아니다.

결코 어두운 공간은 아닌데, 그렇다고 어딘가에 태양 같은 광원이 있는 것도 아니다.

그냥 한없이 거대하고, 한없이 뿌연 끝도 없는 텅 빈 공간.

덕분에 가만있으면 그림자도 안 생긴다. 그래서 일부러 거대한 불덩이를 만들어 공중에 띄운 다음, 그것으로 생긴 그림자를 활용해 그림자 갑옷을 시전했다.

"오, 그림자가 정말 몸을 덮는군. 온몸이 새까만 게.... 마치 한밤중에 숨어든 도둑처럼 보이네."

"도둑 좋네. 잘 써먹어서 사이크 놈들 왕창 털어먹어야지."

콰과과과광!

순간 하늘에 떠올린 불덩어리가 폭발을 일으켰다. 나는 덩달아 그림자 갑옷을 해체하며 몸을 일으켰다.

"그럼 슬슬 다시 몸 좀 풀어 볼까?"

"힐링 샤워는 이미 완성했고, 지금 부턴 무얼 할 생각인가?"

"폭풍검 복습."

"다비라는 나이트 마스터가 만든 새로운 기술 말이군."

"그리고 메르데스라는 우리 집 시녀가 추가로 개량했고."

"아, 그 시녀 나중에 꼭 한번 만나보고 싶군. 어떻게 일개 시녀가 영약의 달인이자 동시에 나이트 마스터에 필적한 검의 달인이 될 수 있는가?"

"만나면 깜짝 놀랄 거야. 키가 엄청 크거든."

"호, 그것도 마음에 드는군. 그나저나 자네 곁에 여자가...."

주드는 뭔가를 말하려다 이내 고개를 저으며 웃었다.

"아니지, 이런 이야기는 나중에 밖에 나가서 하는 게 좋겠어."

"무슨 이야기?"

"별거 아니네. 그냥 손녀에 대해 말할게 있어서."

"톨라리?"

"그 아이도 꾸미면 제법 그럴듯하다네. 그보다 기술 훈련에 앞서 한 가지 부탁을 해도 되겠는가?"

"무슨 부탁?"

"이제 슬슬 그 검에 깃들어 봐야 할 것 같네."

그리고는 내가 뽑아든 엘프 군주의 검을 가리켰다.

벌써? 아직 나가려면 6개월이 남았는데?

이계 황자는 세상을 구하고 싶다 171화

52장 위칸 멸망전

"지금 당장? 아직 시간 많잖아?"

"미리 적응을 해 두는 게 좋을 것 같네. 괜히 마지막 순간에 검에 들어갔다가 잘못해서 튕겨 나오기라도 하면 큰일 아닌가?"

그랬다간 본래 계획했던 '승천'을 얻을 수도 없고, 주드 역시 이곳 선옥에 영영 남아 돌아올 수 없게 된다.

"...알았어. 혹시 뭔가 아니다 싶으면 바로 튀어 나와. 어차피 고생 할 거면 나중에 한번만 해도 충분하니까."

"알겠네. 그럼...."

그 순간, 노인의 형상을 하고 있던 주드의 몸이 하얀 안개처럼 흩어졌다.

푸확!

마치 후원자의 붕대처럼, 자신의 몸을 감싸고 있던 영역을 풀어 버린 것.

동시에 흩어진 안개가 빠르게 움직여 칼날 주변에 휘몰아치기 시작했다. 이거 좀 긴장되는데....

그런데 그때, 칼날이 강하게 울리기 시작했다.

우우우우우웅!

동시에 칼날 주위를 맴돌던 안개들이 순식간에 칼날 속으로 빨려 들어갔다.

"앗...."

어찌나 심하게 울리는지, 하마터면 칼을 놓일 뻔했다. 나는 양손으로 칼을 고쳐 쥐며 마른 침을 삼켰다.

"이거 잘 돼야 하는데. 그래야 나중에 사이크 차원 넘어가서...."

그런데 혼잣말을 다 끝내기도 전에, 칼날에서 솜사탕처럼 뿌연 연기가 새어 나오기 시작했다.

"크헉!"

그리고는 허공에 지긋한 노인의 형상이 맺히기 시작했다.

"컥! 으어! 아니 세상에!"

주드는 본 모습으로 돌아오자마자 기겁하며 온몸을 들썩이기 시작했다.

"이런 맙소사! 생전 이런 건 처음이네! 아니, 이미 죽은 몸이니 생전이란 말은 좀 이상하네만!"

"일단 진정해. 칼 속에서 대체 무슨 일이 있던 거야? 기껏 해봐야 몇 초 안 있었는데?"

"후.... 아니, 좀 놀라서 그랬네. 내 생각보다 더 무시무시하군."

주드는 가슴을 쓸어내리며 연신 한숨을 내쉬었다.

"이 작은 칼 속에.... 너무도 엄청난 것들이 들어 있었네."

"사이크인의 정수 아니었어?"

"정확한 이름은 영생의 핵이라 하네."

주드는 마치 땀을 닦는 것처럼 얼굴을 쓸어 내렸다.

"만개도 넘는 핵이 저마다 난리를 치고 있었네. 광기 그 자체야. 휴, 아무튼 핵에 남은 기억을 잠시 읽었네."

"핵에 남은 기억을 읽다니, 그런 것도 가능해?"

"기억, 아니 정보라고 해야 할까? 검 내부가 너무 혼돈이었네. 영역을 펼치지 않았으면 나도 휩쓸렸을 거야. 덕분에 영역 안에 있던 핵의 정보를 알 수 있었네."

"그래?"

사이크 차원의 정보라면 무조건 환영이다. 나는 집중하며 주드의 말을 기다렸다.

"일단 확실히 사이크인의 것이 맞아. 후, 그리고 사이크인은 정말 무시무시하군."

"그렇게 강한 놈들이야?"

"강함에 대한 정보는 잘 모르겠네. 물론 강하긴 하겠지. 다른 차원을 몇 개나 집어삼켰으니까."

"다른 차원?"

"우리 차원이 처음이 아니네. 이미 몇 개나 되는 차원을 같은 방식으로 소멸시켰어. 후우.... 세상에 이런 존재들이 있었다니. 너무 거대한 영역의 이야기군."

순간 등줄기가 오싹해졌다. 주드는 마치 스스로를 확인하려는 듯, 자신의 몸을 손으로 이곳저곳 쓸어내리기 시작했다.

"이 모든 건 바로 영생의 핵 때문이네. 사이크는 다른 차원의 힘을 빨아들여야 새로운 영생의 핵을 만들 수 있네. 종족 번식을 위해 다른 차원을 침공하는 거야. 그리고 영생의 핵에 인간의 정수를 결합해서.... 말 그대로 영생하는 사이크인을 만들어 내고."

순간 나도 모르게 입술을 깨물었다.

"그러니 다른 모든 게 파괴되어도, 영생의 핵만 남으면 다시 새로운 사이크인을 만들 수 있네. 이것 참 무시무시하구만. 당장 내가 할 말은 아닌가 싶네만, 그래도 이런 식의 생명이 지배하는 세상이 있을 줄이야."

"...끔찍한 놈들이라고 말 했잖아."

결국 이 놈들은 다른 차원을 일종의 광산처럼 취급하고 있던 것이다.

광산을 점령하고, 광산에서 광물을 캐내 그것으로 생을 유지한다.

"대체 이놈들한테 몇 개의 광산이 털린 걸까...."

"음? 광산?"

"차원 말이야. 다른 차원. 혹시 알아낸 다른 정보는 없어?"

"미안하지만 이 정도가 한계네. 여기 담긴 녀석들은 대부분 사이크 차원에서 가장 낮은 등급의 일반 시민이야. 그 이상의 정보는 다들 잘 모르네."

"그런가...."

"아, 그렇지. 사이크 차원은 바로 이런 일반 시민들이 만들어 내는 힘으로 돌아가네. 일종의 연료라고 할 수 있지."

"연료?"

"시민들의 몸에서 계속 연료가 생산되고, 그것을 흡수해서 도시를 돌리는 것 까지 확인했네. 물론 내가 사이크인이 아니라.... 어떻게 그런 게 가능한지 까지는 잘 모르겠군. 미안하네."

"아니, 그것만 해도 엄청난 정보야."

순간 머릿속에 전구가 켜지는 듯한 기분이 들었다.

"결국 저놈들 하나하나가.... 일종의 자원인 셈이잖아? 사이크 차원의?"

"자원이라. 물론이네. 우리 인간이라고 안 그렇겠나? 국가의 가장 큰 자원은 백성이지."

"아니, 물론 그렇긴 한데 그런 이야기가 아니라.... 사이크 차원의 기술이 엄청나거든."

"기술?"

"무슨 생명 공학 같은 걸로 괴물도 막 만들어내고, 주사 한방에 사람 몸을 막 변화시키고, 당신도 경험했잖아?"

"경험했지. 그 주사 한 번에 수십년은 젊어졌으니까."

"그런 기술들도 따지고 보면 결국 백성들 몸에서 에너지를 뽑아서 만들어 낸다는 소리야. 아니면 혹시 다른 자원도 활용해?"

"거기까진 모르겠네만, 일단 백성의 몸에서 나오는 에너지가 가장 중요한 건 맞는 듯하네."

"그러니 결국 백성, 사이크인 하나하나를 제거할 때마다 저놈들 전체의 힘이 떨어지는 셈이야. 안 그래? 미리 잔뜩 죽여 놓으면 나중에 침공 때 제대로 힘을 못 쓰지 않을까? 화염병이 한 부대라도 부족하고, 괴물이 한 마리라도 덜 나올 거 아냐?"

"과연, 그렇게 기대 할 수도 있겠군."

주드는 감탄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나는 머릿속에 켜진 전구를 휘어잡으며 미소를 지었다.

"그러니 여기서 내가 승천을 얻으면, 그걸로 곧장 사이크 차원에 넘어가 테러를 하는 거야."

"테러?"

"가서 사이크인들 족치고 다닌다고. 전에도 비슷한 거 잠깐 했다고 했잖아? 이번엔 아예 작정하고 할 수 있을 거야."

"과연.... 전쟁 전에 적의 주요 시설을 파괴하는 셈이군. 괜찮군. 해볼 만해."

해볼 만한 게 아니라, 당연히 해야 한다.

문득 젝트바이아의 몸속에서 사이크 차원으로 넘어갔던 순간이 떠올랐다.

그 경기장.

경기장 가득 찬 관중들의 광기어린 환성이 아직도 귀에 선하다.

그땐 시간이 10초밖에 없어서 만 명 정도를 날려 버리는 데 만족해야 했다.

그렇다면 이번엔 과연 어떨까? 고작 경기장 하나 정도로는 간에 기별도 안 갈 것 같은데?

* * *

이른 새벽, 톨라리는 긴 동굴을 지나 태선부를 향해 걸음을 옮기고 있었다.

그런데 안쪽 입구가 이미 열려 있었다. 톨라리는 열린 문을 살짝 두드리고 안을 바라보았다.

"...아바마마?"

태선부에는 어제까지만 해도 못 본 커다란 욕조가 놓여 있었고, 태선은 그 옆에서 직접 군불을 뗄 준비를 하고 있었다.

"아바마마, 무엇을 하고 계시옵니까?"

"목욕준비다."

태선은 허리를 피며 미소를 지었다.

"황자가 나오면 일단 씻고 싶어 할 테니까. 너도 알지 않느냐. 선옥에서 3개월만 수행하고 나와도 무슨 몰골이 되는지."

"그 또한 선옥에서 버틴 것을 증명하는 훈장인 따름이옵니다. 저는 하나도 더럽다 생각하지 않사옵니다."

"그도 그렇지. 그나저나 당장은 우리 둘뿐이니 그만 내려놓는 게 어떠냐?"

"아바마마께서 원하신다면...."

톨라리는 도도한 듯 근엄한 표정을 풀며 한숨을 내쉬었다.

"이거 엄청 피곤해요 아빠. 서대륙에선 완전 풀어져서 지내다 보니."

"사람은 가끔씩 조여 줄 필요가 있지. 그러니 자주 좀 얼굴 보러 오거라."

"이계 침공 막으면 생각해 볼게요. 당장은 저쪽에서 할 일이 많아서."

"그나저나 웬? 황자가 나오려면 아직 세 시간이나 남았는데."

태선은 욕조에 손을 집어넣고 물 온도를 재기 시작했다. 톨라리는 졸린 눈을 비비며 한숨을 내쉬었다.

"밤에 잠이 잘 안 와서요. 그보다 황자가 선옥에서 나오면 바깥 음식이 그립겠죠? 안에서는 1년이 지났으니까. 그래서 간단한 거 몇 가지 준비해 봤어요."

그리고는 등 뒤에 숨기고 있던 보따리 하나를 쑥 내밀었다. 태선은 숨을 들이마시고는 가만히 웃어 보였다.

"네가 애가 타나 보구나. 이렇게 일찍부터 서둘러대다니."

"그건 마찬가지 아닌가요? 아빠도 이렇게 일찍부터 목욕을 준비하고 있는 거 보면?"

"하긴. 나도 가슴이 미어지는 게 애가 타긴 타는 것 같구나. 허허."

앞으로 세 시간이 지나면, 클로드 황자가 선옥의 1년 수행을 끝내고 밖으로 나오게 된다.

물론 나올 때 까지는 성공을 확신 할 수는 없지만.

그래도 가능성은 대단히 높다. 무엇보다 식량 문제를 완벽히 해결했으니까.

"황자가 들어간 지 21시간이 지났으니.... 저 안에서는 10개월하고 보름쯤 지났겠군요."

"그렇지."

"아직 한 달 하고도 보름이나 남았네요."

"그렇겠지."

"지금쯤 무엇을 하고 있을지.... 막바지에 혹시 심마라도 끼지 않았을까 걱정이 되요."

"나도 걱정된다. 1년의 수행은 지금껏 누구도 성공하지 못했으니까. 심지어 네 할아버지도 말이다."

"...그렇죠."

톨라리는 침울한 표정으로 고개를 숙였다. 태선은 그런 딸을 잠시 바라보다 물었다.

"너야말로 선옥에 들어가면 한 달 동안 무엇을 할 생각이냐?

"마법이요."

"마법?"

"마법 수련할 거예요. 그렇다고 밥도 못 먹는데 마법을 막 쏴대면 몸이 못 버틸 테니.... 머릿속으로 상상만 하는 수련이 대부분이겠지만요."

"마법은 그게 좋지. 철저하게 두뇌만 사용하는 힘이니까."

태선이 손가락으로 머리를 두드리며 웃었다. 톨라리는 놀란 눈으로 되물었다.

"아빠가 어떻게 마법을 알아요?"

"네 할아버지가 소싯적에 자주 말씀하셨다. 직접 눈앞에서 보여주기도 하셨지."

"할아버지가요?"

"그래. 다만 궁에선 마법에 대해 쉬쉬하는 느낌이라 대놓고 드러내진 못했지만."

"와...."

"네 할아버지는 스스로를 꽤 괜찮은 마법사라 칭하셨다. 어쩌면 네게도 그 피가 이어진 모양이구나. 그런데...."

"큰일 났습니다!"

순간 선녀복장을 한 시녀가 벽을 통과하며 태선부 안으로 들어왔다.

"이 무슨! 비인! 태선부에 기별도 없이 무슨 일이냐!"

태선이 호통과 함께 시녀의 이름을 불렀다 시녀는 급하게 머리를 조아리며 말했다.

"무례를 용서해 주십시오, 태선. 지금 밖에 난리가 났습니다!"

"...무슨 일이냐. 차분하게 말해 봐라."

"궁으로 올라오는 진입로 중턱에, 갑자기 적이 나타났다고 합니다."

"적?"

"그러합니다. 지금 바로 이쪽으로 진격하고 있다 합니다."

"설마 티브스인가? 전에 내린 판결에 불만을 품고 암살자를 보낸 건가?"

"암살자가 아...아닙니다."

시녀는 떨리는 목소리로 겨우 보고했다.

"대군입니다. 가히 5천은 넘으리란 보고를 받았습니다."

"뭐? 5천?"

태선과 톨라리의 눈이 동시에 휘둥그레졌다. 시녀는 긴장이 조금 풀렸는지 몸을 벌벌 떨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습니다. 게다가 적들은 몸에서 불을 뿜어대고.... 지, 집채만 한 거대한 갑옷 전사들이 위칸의 근위병을 짚단처럼 으깨고 있다 하옵니다."

"그게 무슨 소리냐. 집채만 한 크기의 갑옷을 입은 전사라고? 세상에 그런 게 어디 있지?"

"저도 모르겠습니다. 전령 역시 지금껏 본적 없는 적들이라 말했습니다. 이미 진입로에 있던 근위군이 전멸했다 합니다."

"진입로에는 밤낮을 가리지 않고 3백의 근위군이 순찰을 돌고 있을 텐데...."

태선의 안색이 빠르게 창백해졌다. 시녀는 호흡을 가다듬으며 계속해서 보고했다.

"제가 이곳에 오는 동안 투사들이 진입로로 내려가는 것을 보았습니다. 당장은 물론 투사들이 버텨주겠지만.... 일이 어찌 될지 급박한 상황입니다. 태선께서 납시어서 모두를 이끌어 주셔야 합니다."

누가 뭐라 해도 위칸의 가장 강력한 선술사는 태선이었다. 하지만 태선은 눈살을 찌푸리며 뒤에 있는 문을 돌아보았다.

"허나 내가 이곳에 있지 않으면.... 선옥에서 황자가 나오는 순간 무슨 일이 벌어질지 모른다."

"제가 가겠사옵니다."

태선이 고개를 돌리자, 어느새 처음의 도도한 표정으로 돌아온 톨라리가 미소를 짓고 있었다.

"소녀가 나서 적을 막아보겠사옵니다. 아바마마께서는 태선부의 수장이시옵니다. 부디 이곳에 남아 나라에 닥칠 횡액을 막아주시옵소서."

이계 황자는 세상을 구하고 싶다 172화

53장 역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