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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계 황자는 세상을 구하고 싶다 156화

한순간 사방에 한기가 퍼지며 안개가 뒤덮였다.

동시에 안개를 뚫고 루네가 날아들었다.

콰광!

얼음벽을 세웠더니 그 벽을 몸으로 박살내며 육탄돌격을 했다. 뭔데 이거?

아무리 힘이 B등급이라 해도 마갑도 없이 이런 파워가 나오나?

"...?"

벽을 박살내며 지면에 착지한 루네가 빠르게 주변을 살폈다. 그새 나는 미리 몸을 빼서 한참 옆에 자리 잡은 상태.

"...!"

순간 루네의 머리카락이 흥분한고양이처럼 곤두섰다.

촤륵!

녀석은 자신의 주변에 십수 개의 얼음창을 만들어 나한테 발사하는 한편, 본인도 주변에 냉기의 막을 두르며 얼음 창을 따라 몸을 날렸다.

파지지지지지지직!

회피 대신 실드 오브 라이트를 만들어 얼음 창을 전부 받아낸 다음, 일부러 마지막 순간에 비행 마법으로 몸을 틀어 몸통박치기를 피했다.

이러면 어떻게 할까?

"...."

루네의 투명한 눈은 옆으로 빠지는 내 모습을 끝까지 지켜보고 있었다.

동시에 손 위에 만든 커다란 얼음덩어리를 투척했고, 거의 같은 순간에 내 등 뒤로 얼음벽을 만들어 일으켰다.

콰직!

뭔데 이거, 이렇게 먼 곳까지 바로 얼음벽을 세울 수 있다고?

솔직히 놀랐다. 나는 충돌 직전에 방향을 바꿔 위로 솟구쳤다.

그런데 솟아오른 바로 그곳에, 지금까지 본 것 중에 가장 거대한 얼음덩어리가 안개를 뚫고 떨어지고 있었다.

아이스 미티어.

푸확!

화염 벽과 바람벽을 동시에 만들어 급하게 받아냈다. 그런데 내리꽂히는 얼음덩어리는 그게 전부가 아니었다.

쾅!

쾅!

콰광!

콰과과광!

모두 다섯 개의 집채만 한 얼음덩어리가 순식간에 서로 충돌하며 내 몸을 들이받는다.

"억...."

와, 머리 좋네.

아이스 미티어들을 하늘에 미리 만들어 놨구나.

처음 안개를 뿌린 것도 단순히 자신의 돌진을 가리기 위한 게 아닌, 바로 이 얼음 덩어리들을 시야로부터 감추기 위한 술책이었다.

나는 그대로 얼음에 깔리며 지면까지 추락했다.

콰과과과과과과광!

덩달아 얼음 덩어리들이 산산조각으로 박살나며 강렬한 충격을 선사했다. 이거 좀 위험한 거 아닌가?

물론 아니다.

나는 위에 쌓인 산더미 같은 얼음 파편을 치우며 몸을 일으켰다.

프로텍션 매직.

신성마법의 최고봉중 하나인 선명한 빛이 내 몸을 감싸고 모든 마법으로부터 날 보호한다.

충격도 거의 안 받았고 미세한 냉기조차 느껴지지 않는다.

물리적인 압박조차 미리 만들어 놓은 빛의 방패 뒤에 숨어 전부 차단했다. 나는 옷에 묻은 얼음 파편을 털어내며 주변에 쌓인 얼음덩어리를 바라보았다.

"그래도 대단한데...."

바로 그 순간, 쌓인 얼음덩어리를 박살내며 루네가 머리부터 내 쪽으로 날아들었다.

또 박치기?

대체 어떤 정령이 이런 독특한 방식으로 싸우는 걸까? 나는 아직 멀쩡한 빛의 방패를 앞으로 내밀며 충격에 대비했다.

하지만 루네는 방패에 몸을 들이받지 않았다.

대신 자신을 감싸고 있던 푸른 기운만을 날리고, 스스로는 거기서 쏙 빠져나와 하늘로 솟구친다.

"앗...."

순간 그 푸른 기운이 폭발을 일으켰다.

콰드드드드드드드득!!

그것은 냉기의 폭탄이었다.

템페스트급의 냉기가 내 몸을 휘감으며 주변의 모든 것을 얼음으로 뒤덮는다.

우우웅!

전방위에서 쏟아지는 한기에, 프로텍션 매직이 빠르게 반응하며 힘을 잃었다. 나는 그 와중에도 얼음 주변을 휘몰아치는 강렬한 냉기에 혀를 내둘렀다.

지금 이게 무슨 마법인지는 몰라도....

얘는 템페스트를 따로 배울 필요가 없지 않을까? 압축도 안 한 이게 사실상 템페스트급인데?

그 순간, 또다시 하늘에서 세 덩어리의 아이스 미티어가 내 쪽으로 내리꽂혔다.

"루네야...."

이거 테스트 맞지?

왜 이렇게 무섭게 몰아치는 거야? 실은 나한테 그동안 쌓인 게 많았었니?

에이 설마. 나는 급하게 새로운 프로텍션 매직으로 몸을 감싼 다음, 화염 마법으로 주변에 약간의 공간을 만들었다.

그러고는 새로운 빛의 방패 3개를 생성, 추가로 몸을 감싸며 충격에 대비해 태아처럼 몸을 웅크렸다.

그리고 정말 엄청난 충격이 전해졌다.

콰과과과과과과과광!

얼음이 얼음을 박살내고, 그 박살난 얼음을 또다시 얼음이 박살낸다.

도무지 정신을 차릴 수 없는 얼음과 냉기의 대축제.

"으...."

그 축제가 거의 끝나갈 때 쯤, 나는 겨우 몸을 일으키며 주변을 살폈다.

그러자 루네가 또다시 온몸에 푸른 기운을 감싸며 정면을 뚫고 날아들었다.

"또!"

푸확!

이번에는 그냥 막진 않고 정면에 두꺼운 화염 벽을 일으켰다.

하지만 루네가 남겨 놓고 도망치는 그 선명한 냉기는, 고작 화염 벽하나 정도로는 방어가 불가능했다.

치이이이이이이이익!

한순간 온 세상이 수증기로 가득 차며 화염벽이 소멸한다.

동시에 옆으로 몸을 날리며 화염 벽을 뚫고 들어온 냉기의 직격을 피했다. 그렇게 내가 서 있던 공간이 또다시 얼음으로 뒤덮이는 순간.

"...?"

루네가 안 보였다.

녀석은 분명 냉기만 따로 남기고 하늘로 솟구쳐 올랐을 텐데?

그런데 하늘 어디에도 흔적이 남아 있지 않았다. 그제야 급하게 군주의 눈을 열고 주변의 흐름을 파악하려는데....

뒤?

하늘로 올라갔던 흐름이 긴 꼬리를 남긴 채, 내 배후로 이어진 게 보였다.

정확히는 보였다고 느낀 순간 앞으로 몸을 날렸다. 그러자 어느새 내 배후로 엄습한 루네가 양팔을 휘두르며 허공을 와락 껴안았다.

냉기가 흘러넘치는, 성에가 가득 핀 무시무시한 양팔. 방금 저걸로 날 등 뒤에서 껴안으려 한 거야? 그것 참 무시무시한 공격이구만.

나는 혀를 차며 루네와의 거리를 벌렸다. 루네는 방금 그것이 비장의 수단이었는 듯, 아쉬운 표정으로 새로운 마법을 준비하기 시작했다.

음, 대단해.

지금까지 일련의 모든 공격들이 전부 멋지고 대단하다.

그저 멀리서 마법을 쏟아 낼 거라고만 생각했다. 이런 식으로 기동력을 발휘하며 온 사방에서 정신없게 만들 줄이야.

그나저나 방금 그걸로 나도 영감이 떠올랐다. 이렇게 된 이상 나도 슬슬 실력 발휘를 해줘야겠지?

* * *

황자가 곤란해하고 있다.

그 모습을 본 루네의 얼굴에 나지막한 미소가 번졌다. 자신은 그저 새롭게 생긴 본능에 맡겨 공격했을 뿐인데, 이렇게까지 황자를 몰아붙일 수 있을 줄이야.

'어쩐지 즐거워. 이게 내 힘이구나. 이대로 계속 공격할 수 있다면....'

그것은 온기를 가진 존재를 괴롭히고 싶어 하는 얼음 정령 특유의 감정이었다.

하지만 클로드는 온기를 가진 생명이자, 동시에 자신의 지배자이기도 했다.

'저분은 얼음의 정령왕.... 그분의 대리자야. 나의 주인. 그러니 함부로 대하면 안 돼.'

이 모순이 정령의 마음을 뒤흔든 순간, 잠시 수면 아래로 내려가 있던 인간 루네의 마음이 위로 치고 올라왔다.

'아니! 지금 내가 대체 무슨 생각을 하는 거야! 저분은 클로드 황자님이잖아! 내 목숨과 우리 마을을 구해주신 은인 중에 은인이라고!'

한순간이라도 그런 망측한 생각을 품었다는 사실이 수치스러웠다. 루네는 급하게 머리를 흔들며 마주본 클로드를 주시했다.

'황자님께서 날 위해 저렇게 고생해서 테스트해 주시는데, 난 이런 못된 마음이나 품고.... 안 돼. 끝나면 전부 고백하고 엎드려서 사과드리자.'

하지만 당장은 전투에 집중해야 한다.

그 어떤 불순하고 불경한 마음에 지배당하지 않고, 순수하게 자신의 모든 역량을 남김없이 뽑아내야 한다.

그래야 황자가 적재적소에 자신을 사용해 줄 테니.

'황자님께서 저렇게 몰린 것처럼 보이는 것도, 당연히 날 봐주고 계시기 때문이야. 집중하자. 최대한 멋진 모습을 보여 드려야 해. 톨라리 언니도 멀리서 지켜보고 계시잖아?'

그런데 그때.

꽈득!

갑자기 황자가 크고 두꺼운 얼음벽으로 자신을 가렸다.

'얼음벽? 왜? 그리고 아직 공격도 안 했는데 미리?'

순간 황자에게 감지되던 대량의 마력이 빠르게 움직이며, 한순간 자신의 등 뒤로 위치를 이동했다.

'방금 엄청 빨랐는데.... 눈속임? 아까처럼 미리 자리를 피해놓고 내 공격을 유도하기 위해?'

하지만 루네는 마력의 흐름을 읽을 수 있다.

처음처럼 아슬아슬한 순간에 피하면 모를까.

지금처럼 대놓고 미리 몸을 피하면 충분히 반응할 수 있다.

그러니 자신에게 그것을 알아볼 수 있는 능력이 있다는 것을 보여 줘야 한다.

본때를.

톨라리는 새롭게 정령의 의식이 위로 올라오는 것을 느끼며, 등 뒤에 있을 클로드를 향해 방금 배운 새로운 마법을 단숨에 쏟아냈다.

템페스트.

'잠깐! 내가 갑자기 등 뒤를 공격해서 황자님 놀라실지도 몰라. 그런데 그 와중에 템페스트를 쓰는 건....'

너무 한 게 아닐까?

제아무리 황자라도 대처하지 못해 큰일이 생길지도?

"잠깐...."

하지만 이미 날린 템페스트를 되돌릴 방법은 없었다.

소용돌이치는 냉기가 목표에 명중한 순간.

꽈드드드드드득!

그 모든 것이 한순간에 얼어붙었다.

거대한 얼음에 갇힌 클로드.

그리고 얼음 주변을 계속해서 휘몰아치는 맹렬한 냉기의 폭풍. 게다가 폭풍 내부에는 지금까지 황자의 몸을 감싸고 있던 프로텍션 매직의 기운도 느껴지지 않는다.

"으아... 큰일났...."

그런데 자세히 보니.

"...아?"

그곳에 있는 것은 클로드가 아니었다.

마력 결정.

정령의 감각으로 느꼈을 때는 분명 클로드 본인이 움직였다고 생각했는데.

정작 사람의 눈으로 보니 그저 반짝이는 조그만 마력 결정에 불과했다.

"대체 어떻게...."

마치 환상에 빠졌다가 현실로 돌아온 느낌이다.

당황한 루네가 입을 뻐끔거리는 순간, 얼음에 뒤덮인 마력결정이 루네의 좌우로 화염 기둥을 뿜어냈다.

푸확!

생전 처음 보는 맹렬한 불기둥. 루네는 반사적으로 불기둥을 피해 뒤로 몸을 날렸다.

'얼음!'

그곳엔 클로드가 처음 세워놓은 얼음벽이 있었다. 루네는 엉겁결에 얼음벽에 등을 기댄 채, 그대로 위쪽으로 다시 날아오르려 무릎을 구부렸다.

바로 그때였다.

푸확!

한순간 얼음벽에 구멍이 뚫리며, 불길에 뒤덮인 황자의 손이 뒤에서 자신의 목을 휘감았다.

"체크메이트."

동시에 빛의 방패 3개가 정면으로 날아와 도망치게 못하도록 모든 방위를 막아섰다.

루네는 그제야 클로드의 팔이 실제로는 자신의 목을 감지 않았고, 그저 조금 떨어진 곳에서 간격을 두고 있다는 것을 깨닫고는 한숨을 내쉬었다.

'황자님은 역시 다정해.'

루네는 그대로 양손을 치켜들며 선언했다.

"제가 졌어요 황자님. 항복할게요."

* * *

"루네야 잘 싸웠어!"

톨라리는 루네의 항복 선언이 끝나자마자 날아와서는 루네를 와락 껴안았다.

"너 진짜 멋지더라. 나도 황자님 상대로 그 정도는 못 싸울 듯."

"네? 아무리 그래도 저보단 언니가...."

"아니, 아니야. 방금 보고 확신했음. 난 몸이 약해서 그런 식으로 절대 못 싸워."

톨라리는 고개를 강하게 흔들었다. 그리고는 뒤에서 선 나를 돌아보며 혀를 내둘렀다.

"그런데 황자님이 더 대단해. 마지막에 항복 받아내는 게 멋졌어."

"사실 이기고 지고 하는 문제는 아니었는데."

따지고 보면 그냥 내가 계속 피하거나 막기만 할 생각이었다. 마력 결정 테스트하다 보니 나도 모르게 그만 흥이 나는 바람에....

"그런데 방금 그거 어떻게 한 거야?"

"저거?"

나는 반대편에서 여전히 반짝이고 있는 마력 결정을 가리켰다.

"글라체스에게 받은 마력 결정이야."

"얼음의 정령왕? 근데 황자님 몸에서 나오더니 알아서 마법을 쓰던데? 어떻게 그게 가능해?"

"완전히 내 꺼가 아니라서."

덕분에 내 몸에 완전 정착한 리치의 마력결정과 달리, 정령왕의 마력 결정은 몸 밖으로 다시 빼 내는게 가능했다.

"저 자체로도 마력이 엄청나. 거의 내가 가진 마력만큼 마법을 추가로 쓸 수 있어."

"정말? 그럼 마력 두 배 된 거야? 게다가 몸 밖으로 빼내서 저렇게 사용도 가능하고? 저것도 일종의 정령소환 같은 거네?"

"정령 소환?"

그러게? 따지고 보면 그럴지도?

아니지, 정확히는 분신술에 가까운 것 같다. 그것도 허상이 아닌, 나와 같은 마법을 쓸 수 있는 실체가 있는 분신.

"대신 너무 멀리 보낼 수는 없어. 그리고 단점도 있는 것 같고."

"무슨 단점?"

"일단 몸에서 빼내면 스스로를 지킬 수단이 마법뿐이야."

"마법이 뭐 어때서? 황자님도 마법사인데?"

"상대가 퓨어 매직이라도 쓰면 아예 소멸할지도 모르잖아."

"퓨어 매직?"

톨라리는 순간 한쪽 눈썹을 찌푸렸다.

"그거 기우. 퓨어 매직 쓸 수 있는 게 얼마나 된다고. 애당초 세상에 황자님뿐이잖아?"

"하긴.... 아니지, 너도 쓸 수 있잖아? 왜 넌 빼먹어?"

"아? 아. 맞아. 그렇지?"

톨라리는 깜빡했다는 듯 헤헤 웃었다.

"근데 내가 황자님 공격할 리 없잔아? 그러니 없는 셈 쳐도 돼."

"으...."

그 와중에 루네가 털썩 주저앉으며 식은땀을 흘렸다. 톨라리는 깜짝 놀라며 루네를 부축했다.

"루네야! 괜찮아? 마력 너무 많이 썼니? 마력 고갈 후유증이야?"

"아니.... 그게...."

루네는 초점 없는 눈으로 바닥을 바라보며 겨우 입을 열었다.

"배가...."

"배? 배 아파? 후유증으로 복통은 드문데."

"아니.... 배가... 배가 고파요."

"응?"

톨라리가 놀란 눈을 깜빡였다. 나는 품속에 챙겨놓은 설탕바를 꺼내 루네의 손에 쥐여주었다.

"일단 이거 먹어. 그리고 저택에 돌아가서 바로 식사하는 게 좋겠다."

"으.... 감사합니다. 황자님."

루네는 냉큼 설탕바를 입안에 넣었다. 확실히 연비가 엄청 나빠졌구만. 간식 먹은 지 몇 분이나 됐다고 배가 고파서 쓰러지다니.

물론 나와 싸우느라 힘을 많이 쓴 게 원인이겠지. 앞으로 전투에 활용하려면 루네 전용 보급도 같이 챙겨야 할 것 같네.

나는 얼어붙은 설탕바를 아삭거리는 루네를 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정말 강해졌어. 루네야. 너도 이계와의 전쟁에서 크게 활약할 수 있을 거야."

"그게.... 죄송해요 황자님. 저도 모르게 못된 마음이 생겨서 황자님을 난처하게 만들려고...."

"무슨 소리야. 싸울 때 작전 걸고 속임수 쓰는 게 당연하지."

자고로 싸울 때는 상대 입에서 먼저 욕 나오게 만드는 게 최고다. 그러자 톨라리가 루네를 안아 일으키며 말했다.

"맞아. 상대를 정신없게 괴롭히는 게 최고. 그럼 황자님? 나 루네 데리고 저택으로 돌아갈게."

"아니, 잠깐."

나는 급하게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

"루네야? 너 혼자서 저택에 돌아갈 수 있지? 톨라리는 나랑 여기서 훈련 좀 더 해야 하거든."

"네. 황자님. 이제 괜찮아졌어요."

루네는 고개를 꾸벅이며 하늘로 날아올랐다. 톨라리는 돌아가는 루네를 향해 계속 손을 흔들며 배웅하다 퍼뜩 내 쪽을 돌아봤다.

"잠깐 황자님. 혹시 나도 대련하려고?"

"응?"

"나 루네처럼 못 싸워. 황자님 간에 기별도 안 갈걸?"

"그게 아니야."

나는 고개를 저으며 엉망이 된 공터를 돌아봤다.

"배우고 싶은 게 있어. 기왕 나온 김에 바로 시작하자."

"나한테? 황자님이? 뭘?"

톨라리는 이해할 수 없다는 표정이었다. 나는 곧장 비행마법으로 하늘에 떠오른 다음, 가능한 가장 빠른 속도로 1초쯤 가속해서 공터의 끝에 도착했다.

우웅!

그리고는 한순간 멀어진 톨라리를 향해 손은 흔들었다. 잠시 주저하던 톨라리는 그대로 내 쪽으로 날아오며 고개를 끄덕였다.

"알았어 황자님. 황자님 급가속 쓰고 싶은 거구나?"

이계 황자는 세상을 구하고 싶다 157화

49장 선의 나라

바람 마법으로 몸 주변에 새로운 기류를 만든다.

결과적으로는 회전하는 두 롤러 사이에 몸을 집어넣는 것과 비슷했다.

그것이 가속도를 만들어낸 순간, 나 역시 비행마법으로 같은 방향을 향해 몸을 날린다.

이것이 바로 급가속.

"큭!"

한순간 눈앞의 공간이 말도 안 되는 속도로 지나간다.

몸에 가해지는 압력이 엄청나 컨트롤이 불가능하다. 반대 방향에 바람의 쿠션을 만들어야 억지로 감속을 걸 수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콰직! 콰직!

콰지직!

폐허 옆의 나무를 몇 그루나 박살내고 나서야 멈출 수 있었다.

"컥...."

이거 상상 이상이구만. 지금까지 내가 쓰던 비행마법은 아무것도 아니네.

"황자님! 괜찮아?"

톨라리가 급하게 날아왔다. 나는 가볍게 회복마법을 걸며 몸을 일으켰다.

"괜찮아. 나 생각보다 튼튼해."

"휴 다행. 근데 타이밍이 늦었어. 거의 급가속 발동과 동시에 감속 걸어야 해. 안 그러면 몸 박살나. 조심해야 해."

그러는 이 녀석이야 말로 몸도 부실하면서 잘도 이런 마법을 썼구만. 방금도 시범삼아 한 번 보여줬는데.

"너야 말로 괜찮아? 이거 몸에 부담 엄청 심한데?"

"그래서 나도 잘 안 써. 연속으로 두 번 쓰면 눈 돌아가서 기절할지도 몰라."

당장 지금도 팔다리가 후들거리는 게 보인다. 하지만 내색하지 않고 고개를 끄덕이며 미소를 지었다.

"아무튼 황자님 정말 대단해. 연습 몇 번이나 했다고 이걸 완성? 정말 하늘이 내린 재능이야."

"아니, 나보다 네가 더 대단해."

직접 써보고 나서야 알게 되었다. 톨라리가 진짜 마법 다루는 솜씨 하나는 기가 막힌다는 걸.

"갑자기 왜? 나 급가속 완성하는 데 몇 년 걸렸는데?"

"이걸 완성했다는 게 엄청난 거야."

방금 급가속에 성공했던 건 편법을 동원했기 때문이다. 톨라리가 가르쳐준 방식대로는 도저히 완성할 수 없었다.

"톨라리. 처음부터 다시 설명해 줘."

"응? 황자님 이미 완성했는데 왜?"

"정석대로 한 게 아니라서."

"정석?"

"다른 편법을 동원했다고. 당장은 이렇게 해도 언젠가는 제대로 써 봐야지."

"...알았어."

톨라리는 고개를 갸웃거리다 말을 이었다.

"급가속은 몸 주변에 바람의 기류를 만들어야 해. 거기에 내 몸 하나 빠져나갈 틈을 남기고."

"그 틈이 문제야. 내 몸 사이즈에 딱 맞추지 않으면 저항이 생기면서 급가속이 안 걸리거나 몸이 뒤틀려."

"맞아. 정말 미세한 단위로 흐름을 조절해야 해. 마법을 커다란 덩어리 하나가 아니라, 조각조각 따로따로. 그리고 그 모든 조각을 한 방향으로 회전하며 가속시켜야 하고."

"하지만 그런 건 불가능해. 제 아무리 아크 위저드 레벨이라도."

"응. 뇌가 한 번에 할 수 있는 일은 한계가 있으니까. 강하게 하는 건 몰라도, 동시에 여러 개 조작하는 건 또 다른 문제."

그러면서 자신의 몸 주변에 기류를 일으키기 시작했다. 나는 곧바로 군주의 눈을 열어 톨라리를 둘러싼 기류의 흐름을 확인했다.

그것은 예술이었다.

수백 개의 털오라기 같은 미세한 기류가 각자의 흐름을 가지며 한 방향으로 회전한다.

이것은 인간의 머리로는 결코 해낼 수 없는 컨트롤이다. 그런데 톨라리는 이 짓을 하면서 동시에 아무렇지도 않게 대화까지 이어나갔다.

"그래서 이건 머리로만 하는 게 아니라 몸 전체로 해야 해."

"몸 전체로. 몸으로 마법을. 어떻게?"

"어떻게? 황자님도 방금 했잖아? 그래서 급가속 성공했고?"

"난 전부 머리로 계산했어."

난 손가락으로 머리를 두드리며 설명했다.

"네가 말한 방식을 도저히 따라갈 수 없어서, 대신 머릿속에 있는 마력의 결정들을 총동원해 전부 하나씩 다 계산했어."

"정말?"

톨라리는 순간 뜨악한 표정으로 날 바라보았다.

"그게 됨? 아무리 마력 결정 동원해도, 그게 더 신기한 거 아닌가?"

"별로 안 그래. 마력 결정은 일종의 두뇌거든."

"두뇌?"

"그러니 내 머릿속엔 뇌가 추가로 더 있는 셈이야. 마법 관련된 연산만 할 수 있는."

"그래도 신기한데...."

톨라리는 내 머리를 살피며 혀를 내두르다 말했다.

"아무튼 마저 설명할게. 몸으로 마법을 쓰는 건 생각보다 어렵지 않아. 출력이 필요한 게 아니니까."

"강력한 마법은 불가능해도. 아주 미세한 마법을 여러 개 만드는 건 쉽다는 뜻이지?"

"맞아. 그냥 팔다리 움직이는 거랑 비슷해."

톨라리는 꼭두각시처럼 팔을 덜렁거리며 웃었다.

"이것도 결국 시작은 머리잖아? 머리에서 보낸 신호가 팔에 도착해서 움직이는 거야."

"그렇지."

"그러니 머리가 계산한 걸 몸으로 보내. 신경을 따라. 그렇게 몸 주변에 바람 마법으로 아주 작은 기류를 만들어서 컨트롤하는 거야. 그리고 그 사이 만들어놓은 틈으로 몸을 집어넣으면...."

톨라리는 순간 만들었던 기류를 지워버리며 옆으로 한 걸음을 내딛었다.

"짠! 이렇게 급가속이 완성돼. 생각보다 쉽지?"

"아니. 전혀."

나는 고개를 저었다.

저 방식이 도저히 안 되는 바람에, 결국 마력 결정의 연산능력을 총동원한 뒤에야 겨우 마법을 완성할 수 있었다.

"솔직히 말도 안 돼. 머리로 계산한 걸 몸 전체로 보내는 것까진 좋아. 근데 계산한 건 하나잖아? 결국 수백 개의 바람의 기류를 어떻게 컨트롤해? 팔다리에 뇌가 들어 있는 것도 아닌데?"

"그건 몸이 알아서 자연스럽게...."

톨라리는 답답하다는 얼굴로 이리저리 몸을 비틀다 이내 한숨을 내쉬었다.

"미안 황자님. 나도 거기서부터는 말로 설명하기 힘들어. 그냥 계속하다 보니 된 거라서."

"그러니까 대단하다는 거야."

이런 톨라리조차 완성까지 몇 년 걸린 마법이다. 내가 즉석에서 바로 성공하는 건 말도 안 되지.

"아무튼 칭찬 감사. 고마워."

톨라리는 고개를 푹 숙이며 뜬금없이 답례를 올렸다.

"근데 나도 이걸 쓰긴 쓰는데 쉽지 않아. 전투할 때 사용해서 기동성 있게 요리조리? 절대 안 돼. 내 몸이 못 버텨."

"그래도 급하게 도망칠 땐 요긴하지 않을까?"

"맞아. 전에 마탑에서 황자님 퓨어 매직 피할 때도 그랬고."

"어.... 그랬나?"

"그랬어. 그때 나 진짜 죽을 뻔. 근데 황자님이라면 전투에도 쓸 수 있을 테니 효과 만점 아닐까?"

처음부터 그걸 노린 것이긴 하다. 전투에서 빠르게 움직이는 건 무엇보다 중요하니까. 후원자들 움직임이 겁나 빠르기도 하고.

"아까 루네도 그래. 급가속 까지는 아니라도 엄청 빠르게 날아다니더라. 막 휙휙 꺾으면서 기동성 좋게. 실전 들어가면 나보다 훨씬 잘 싸울 거야."

톨라리는 한숨을 내쉬었다. 나는 몸에 묻은 나뭇잎을 털며 고개를 저었다.

"에이, 아무리 그래도 걔가 너 만할까?"

"정말 그렇게 생각해?"

"응?"

"배려 고마워. 그래도 아닌 건 아닌거야."

톨라리는 고개를 들어 하늘을 올려보며 말했다.

"하늘 높이, 멀리서 가만히 마법만 쏟아낸다? 그럼 내가 나을지도. 하지만 그렇게만 싸울 수 있을까? 이계의 괴물들? 전에 사령군 잡을 때처럼 멍청하게 뭉쳐서 몰려오진 않을 것 같은데?"

"그건..."

사실이긴 하지.

당장 대답하진 않았지만 톨라리의 말이 틀린 건 아니다.

실제로 같은 아크 위저드였던 트롬본이 과거에 그랬다.

화염병의 비중이 높은 웨이브 초반에는 그 누구보다 활약했다. 화염병들은 대체로 대열을 이루고 뭉쳐서 나오니까.

하지만 적들의 구성이 변하고, 각종 괴물들이 복잡하게 섞여 나오기 시작하면 트롬본의 활약도 점점 제한적으로 바뀐다.

하지만 루네는 어떨까?

방금 싸웠던 루네의 기동력은 이미 인간의 범주를 벗어났다.

일종의 마법전사라고 해야 할까?

저돌적으로 들이받는 육탄전도 서슴지 않고, 그러면서도 기동력을 살려 적을 교란하는 게 가능하다.

물론 기존의 마법사처럼 멀리서 화력 지원만 하는 것도 당연히 가능할 테고.

말하자면 토털 패키지. 완전체에 가까운 모습이었다.

덕분에 내 한쪽 머릿속은 루네를 어떤 웨이브에 어떤 식으로 투입할지 시뮬레이션 중이었다.

개중에는 이미 루네를 적극적으로 활용, 무려 4차 웨이브까지 최소한의 피해로 돌파하는 계산이 나왔다. 이것 참, 테스트한 지 얼마나 지났다고 벌써부터 희망회로부터 돌리고 있냐?

"그래서 나도 변해야 할 것 같아."

톨라리가 고개를 들며 내 눈을 가만히 바라보았다.

"황자님, 실은 전부터 말하고 싶은 게 있어서. 무서워서 차마 못 꺼냈지만."

"...뭔데?"

그러고 보니 꽤 오래 전부터 그런 낌새가 있었다. 톨라리는 입을 다물고 고개를 이리저리 틀며 고민하다 겨우 말했다.

"황자님 이 뒤로 일정 바쁨?"

"안 바빠. 이제 저택 돌아가서 저녁 먹고 쉴 거 밖에 없어."

"오늘 말고."

"내일?"

"내일, 모래, 글피, 쭉."

"글세. 그건 가봐야 알겠지만...."

바쁘긴 바쁘지.

이계 침공까지 이제 남은 시간은 불과 7개월뿐. 그나마 황금독수리 테우스 때문에 일정을 많이 단축할 수 있던 게 다행이다.

물론 남은 시간에 가능한 핵심 테크트리가 몇 개 없긴 하다. 하지만 본격적으로 거시적인 전쟁 준비와 사전 훈련만 돌입해도 시간은 순식간에 지나갈 터.

"바쁘긴 해도.... 어떻게든 시간 내 볼게. 대체 무슨 일인데 그래?"

"나랑 같이 고향 좀 가줄 수 있어?"

"고향?"

톨라리의 고향이라면 동대륙이잖아?

"동대륙.... 그러니까 라그란 대륙 말이야."

"맞아. 그래서 금독수리 타고 같이 가줬으면 좋겠어. 안 그러면 시간 너무 걸려서."

"가는 거야 어렵지 않은데, 왜?"

"왜냐 하면...."

톨라리는 또다시 끙끙대며 머리를 이리저리 돌리기 시작했다. 대체 무슨 일이지? 얘가 이렇게까지 괴로워하면서 고민하는 건 또 처음 보네.

"...난 도망쳐 온 거야."

그렇게 한참 만에 겨우 꺼낸 이야기는 꽤나 충격적이었다.

"도망치다니, 뭐한테? 혹시 고향에서 무슨 범죄라도 저질렀어? 설마 사람 죽이고 서대륙으로 튀었다든가?"

"말도 안 돼! 절대 그런 건 아님. 내가 도망친 건.... 가업 때문이야."

가업?

그럼 집안일을 잇기 싫어서 도망쳤다는 뜻인가?

"전엔 그게 정말 싫었어. 특히 가업을 잇기 위해서 테스트를 받아야 하는데 그걸 정말 하기 싫었어. 하지만 이젠 해야 할 것 같아. 모두를 위해서."

"그게 뭔진 모르지만...."

아마도 그 문제로 가족과 틀어졌나 보구만. 나는 톨라리의 팔을 가볍게 두드리며 미소를 지었다.

"계속 마음에 걸리는 거지?"

"...응."

"그럼 풀고 오는 게 맞아. 돌아가서 가족도 만나고, 그 가업 관련된 테스트도 받고 그래. 아, 그리고 테우스는 나 없어도 상관없어."

"응?"

"나 없이도 너만 태우고 날아갈 수 있다고. 미리 말해 놓을 테니 이번 기회에 고향 돌아가서 푹 쉬고 돌아와. 대신 합동 훈련을 해야 하니 3개월은 남기고 꼭 돌아와 줬으면 하는데...."

"황자님도 같이 가야 해!"

톨라리는 갑자기 펄쩍 뛰며 내 팔을 감아 안았다.

"나 혼자 가면 의미 없음! 아니, 의미는 있겠지만 황자님 가는 게 더 중요해! 나보다 황자님 테스트 받는게 더 중요하다고!"

"뭐? 나? 내가 왜 너희 가업 테스트를 받아야 하는데? 아니 잠깐, 설마...."

이거 혹시 무슨 데릴사위 관련된 이야기는 아니겠지?

설마 날 끌고 가서 소개하고, 가업을 잇는다는 이야기로 부모님을 안심시킨다던가?

"꼭 같이 가줘 황자님. 내 고향으로. 나도 그렇지만 황자님도 더 강해질 수 있을 거야."

"...응? 강해진다고?"

"응. 반드시. 제발."

톨라리는 간절한 얼굴로 애걸했다. 이거 데릴사위 이야기 아니었나? 강해진다고? 내가?

"잠깐. 일단 하나만 짚고 넘어가자."

나는 톨라리의 팔을 모질게 떼어내며 질문했다.

"톨라리. 너희 집이 대체 뭔데? 가업은 또 뭐고? 정확히 무슨 일을 하는지 말해줘."

"우리 집안의 가업은...."

톨라리는 눈을 꽉 감았다 뜨며 한숨을 내쉬었다.

"...통치야."

"뭐?"

"가업은 나라를 다스리는 것. 라그란 대륙 전역에 퍼진 11개의 제후국을 다스리는 위칸이라는 나라가 있어. 그 나라의 국왕이 바로.... 내 아버지야."

이계 황자는 세상을 구하고 싶다 158화

49장 선의 나라

클로드가 저택을 떠난 다음 날, 훈련장은 완성 이후 처음으로 수십 명의 기사가 몰려와 있었다.

"린! 파날! 뒤로 너희만 뒤로 쳐진다! 계속 달려! 아직 열세 바퀴다! 두 바퀴 남았어! 쉬지 말고 쥐어짜내!"

카일은 구보 대열의 옆을 따라 달리며 기사들을 격려했다. 그러자 뒤로 쳐지기 시작한 기사들이 원망스러운 눈으로 카일을 향해 항의했다.

"카일! 아니, 부단장님! 이건 너무 합니다! 헉! 허억! 하급 마갑으로 올린 지도 얼마 안 됐는데! 이렇게 갑자기 중급 마갑으로 올리고 어떻게 속도를! 허억! 냅니까!"

"이건 적응 훈련이다. 모두 한 등급씩 올려서 구보 중이니 예외는 없어."

"아니! 그래서 다들 최하급에서 하급으로 올린 거잖아! 왜 우리만 중급이냐고!"

수호기사단의 30명 분대장 중 카일과 사관학교 동기인 린과 파날만이 유일한 중급 마갑 착용자였다.

당연히 끔찍하게 힘들 것이다. 카일은 뒤로 쳐진 두 기사의 등을 두드리며 앞으로 쭉 밀었다.

"정신 차려! 너희가 잘해야 다른 분대장들에게 모범이 된다고!"

"으, 살려줘. 이건 횡포야. 이런 막무가내 체력훈련 따위...."

"이번 훈련을 계획한 건 내가 아니야."

카일은 두 동기의 옆에 바짝 붙으며 속삭이듯 말했다.

"바로 저기 계신 단장님이지. 나이트 다비."

"뭐? 정말?"

나이트 마스터의 이름이 나오자 두 기사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그만큼 다비의 명성은 뜻 있는 제국 기사들에게 있어 흠모의 대상이었다.

카일은 고개를 끄덕이며 거절할 수 없는 미끼를 던졌다.

"체력 훈련 끝나면 바로 단장님의 교습이 시작될 거야. 근데 여기 모인 분대장은 모두 30명이고. 안타깝지만 한사람 한 사람에게 돌아가시는 시간은 매우 적겠지?"

"...그런데?"

"내가 부탁해서 따로 개인 훈련을 받게 해줄게. 여기서 합숙 훈련하는 보름 동안 내내."

"정말이야?"

"약속할게. 대신 아침 구보마다 절대 포기하지 말고 끝까지 버텨. 중급 마갑이 아무리 힘들어도 버티다 보면 점점 적응될 거야. 너희 둘 다 그만큼 재능이 있고."

"그.... 그럴까?"

두 기사의 눈에 희망이 번뜩였다. 카일은 당연하다는 듯 고개를 끄덕이며 앞에 뛰고 있는 기사들을 향해 속도를 높였다.

"다들 속도가 느려졌다! 빨리 달려! 뭐 하는 거냐! 무릎이 점점 내려가고 있다! 고작 하급 마갑 따위에 위축되지 마! 저 뒤에 두 사람은 중급 마갑 입고도 잘도 뛰는 거 안 보이나!"

물론 갑작스런 등급 올려치기는 엄청난 부담이 아닐 수 없다.

그럼에도 지금은 기사단의 전력을 억지로라도 끌어 올려야만 했다.

'적들은 더 빠르고 더 강해질 게 분명하다. 어떻게든 역량을 높이지 못하면 실전에서 한순간에 휩쓸릴지도 몰라.'

얼마 전 2차 사령전쟁에서 수호기사단이 보여준 성과는 대단했다.

하지만 7개월 뒤에 시작될 이계와의 전쟁은 전혀 다를 것이다.

일단 적들의 구성이나 특징이 완전 딴판.

수호기사단이 상대해야 할 초반 웨이브의 주력은 화염병과 데스웜인데, 이 둘이 가진 특징이 완전 딴판이라는 게 문제였다.

그래서 상황에 따른 신속한 대처가 필수였고, 이를 위해선 일단 분대장들 역량이 지금보다 높아질 필요가 있었다.

'집단전에서 검술이나 나이트 스킬은 의미 없어. 무조건 기본 피지컬을 업그레이드시켜야 해.'

결국 다비의 개인 교습은 저들의 사기를 끌어 올릴 미끼일 뿐이었다. 반대로 지금 하는 체력 훈련이나 상위 마갑 적응 훈련이 진짜 핵심이고.

그렇게 서른 명의 기사들이 훈련장의 외곽을 따라 달리는 동안, 다비와 메르데스는 훈련장 한가운데서 기사들의 훈련이 끝나는 걸 기다리고 있었다.

"카일은 뛰어난 지휘관이자 훈련교관이다. 이번 전쟁이 무사히 끝나면 주력 기사단의 단장을 시켜도 문제없을 거야."

다비가 흐뭇한 얼굴로 말했다. 메르데스는 평소처럼 무표정한 얼굴로 기사들을 바라보며 물었다.

"어쩌면 수호기사단이 다른 주력 기사단보다 더 강해지지 않을까요?"

"음? 하긴 그럴지도. 물론 전쟁에서 얼마나 살아남느냐가 관건이겠지만...."

다비는 문득 메르데스의 안색을 살피고는 지나가는 말투로 물었다.

"기분이 나빠 보이는군. 황자님이 다시 저택을 비우셔서 그런가?"

"그보다는 황자님의 수행으로 톨라리님만 동행한 게 마음에 안 듭니다.

"음?"

"어차피 테우스의 등에 타 날아가는 여행입니다. 비행마법의 유무는 상관없습니다. 그렇다면 황자님의 수행을 제가 해도 됐을 텐데.... 그게 아쉽습니다."

너무 대놓고 말해버려서 신선할 정도였다. 다비는 헛웃음을 지으며 고개를 저었다.

"아쉬워도 어쩌겠나. 우린 우리 대로 여기서 해야 할 일을 해야지. 그런데 그나저나...."

다비는 메르데스의 허리에 채워진 두 자루의 검을 보며 물었다.

"왜 검이 한 자루 늘었지? 예비용인가?"

"예비용이 아닙니다. 어제 황자님께 부탁드려서 한 자루를 더 얻었습니다."

"쌍검을 다루려고?"

메르데스는 고개를 끄덕이며 두 자루의 검을 동시에 뽑았다.

스릉....

"이번에 황자님께서 하사하신 새 코어를 먹었습니다."

"그래. 데스 울프 코어. 나도 먹었지."

"황자님께서는 폭풍검을 다루는데 좀 더 도움이 될 거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관절이 더 강해질 거라고. 그래서 조금 생각해보니 이것도 가능할 것 같았습니다."

기사의 검은 양손으로 다루는 게 기본인 만큼, 대체로 길고 무겁게 만들어져 있다.

물론 한 손으로 다루는 게 불가능한 건 아니지만 자세가 잘 안 나온다.

하지만 장신인 메르데스가 쌍검을 늘어뜨려 쥐고 있으니 그림이 그럴듯했다.

다비는 속으로 혀를 내두르며 고개를 끄덕였다.

"무슨 생각인지 알 것 같군. 바로 실전 훈련인데 괜찮을까? 미리 연습이라도 좀 해보는 게?"

"괜찮습니다. 바로 시작해도."

메르데스의 목소리는 고요하고 차분했다. 다비는 고개를 끄덕이며 검을 뽑아 들었다.

"난 수비 위주로 싸울 거다. 하지만 긴장을 늦추지 마. 언제 반격을 찌를지 모르니."

"명심하겠습니다."

메르데스가 고개를 끄덕인 순간, 훈련장 구보를 마친 카일이 기사들을 한자리에 모아놓고 소리쳤다.

"모두 수고했다! 구보 열다섯 바퀴 종료! 지금부터 마갑을 벗어도 좋다!"

"푸하!"

"흐억! 나 죽네!"

"사, 살려줘... 마갑이 날 빨아들이고 있어... 이것 좀 벗겨줘...."

기사들은 즉시 바닥에 주저앉거나 쓰러졌다. 마찬가지로 카일 자신도 숨이 턱까지 찼지만 내색하지 않고 소리쳤다.

"지금부터는 클로드 기사단의 단장이신 나이트 다비와, 같은 기사 단원인 나이트 메르데스의 실전 훈련이 진행된다. 혹시 모르니 훈련에 방해되지 않도록 숲으로 빠져서 관람하도록!"

"네. 넷!"

기사들은 쓰러진 채로 엉덩이를 끌며 외곽 숲으로 물러났다.

그리고는 지금부터 벌어질 일을 절대 놓칠 수 없다는 듯, 저마다 나무 틈에 자리를 잡고 훈련장을 주시하기 시작했다.

"저게 나이트 다비구나. 제국 유일의 나이트 마스터...."

"저 키 큰 아가씨가 메르데스인가? 나이트 다비 수제자라며?"

"백작령에서 엄청 활약했다던데."

"소문에는 이미 나이트 마스터급이라던데?"

"진짜? 근데 우리만 이렇게 눈 호강해도 되나? 두고 온 애들 불쌍해지네."

"뭔 소리야. 걔네들 간만에 팔자 늘어졌을 텐데. 우리만 여기 와서 보름 동안 빡세게 구르는 거라고."

"맞아. 그러니 이런 보너스도 있어야 버티지."

그때 다비와 메르데스가 천천히 거리를 벌렸고, 지켜보던 기사들이 침을 꼴깍 삼키기 시작했다.

"그런데 저 아가씨 쌍검인데...."

마침 기사 하나가 중얼거린 순간.

우웅!

메르데스의 오른팔이 예고 없이 움직였다.

얼핏 보면 빠르게 팔꿈치를 튕긴 것처럼 보였다. 하지만 그것만으로도 마치 포탄을 연상시키는 충격파가 발생, 반대편에 선 다비의 머리 위를 향해 엄청난 속도로 날아갔다.

저게 뭐지?

모두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동시에 뭔진 몰라도 메르데스가 잘못 겨누고 날렸다고 짐작했다.

하지만 충격파는 다비의 머리 위에서 거의 수직으로 꺾이며 아래로 내리꽂혔다.

피해야 한다.

모두가 그렇게 느꼈지만, 다비는 회피 대신 검을 들어 그것을 막아냈다.

위이이이이이이잉!

칼날이 마치 드릴처럼 진동하며, 내리꽂히는 충격파를 분해한다.

진동검.

오직 나이트 마스터만 쓸 수 있다는 마스터 스킬 중 하나.

그런데 갈려나가던 충격파가 어느 순간 종잇장처럼 구겨지며 폭발을 일으켰다.

콰과과과과과광!

절반의 폭발.

하지만 폭발의 충격까지 진동검이 막아주었다. 다비는 등골이 오싹해지는 것을 느끼며 소리 없이 한숨을 내쉬었다.

'예상보다 강해.'

폭풍검.

그것도 '집중형' 폭풍검이다. 파고드는 힘이 어찌나 강한지, 버티고 선 다리가 발목까지 땅에 파묻힐 지경이었다.

하지만 그걸로 끝이 아니었다.

슥!

어느새 코앞까지 달려든 메르데스의 왼쪽 검이 자신의 목덜미를 향해 날아들었다.

만약 피하지 않으면, 이대로 내 목이 날아갈까?

의심할 필요도 없었다. 다비는 파묻힌 발을 전력으로 튕기며 뒤쪽으로 몸을 날렸다.

부웅!

그렇게 칼끝이 허공을 베었다고 생각한 순간, 새로운 충격파가 뒤로 빠지는 다비의 몸을 엄습했다.

'아니?'

이것도 폭풍검이다.

심지어 처음부터 폭풍검을 시전한 게 아닌, 이미 칼을 휘두른 뒤에 한 템포 늦게 발동시켰다.

덕분에 쏟아지는 충격파의 조준점이 옆으로 틀어졌지만, 그 와중에도 다비는 진동검을 발동시킬 수밖에 없었다.

이번에는 날아온 폭풍검이 분산형이었기 때문에.

콰과과과과과과광!

폭발한 충격파가 사방으로 퍼지며 후폭풍을 일으킨다.

지이이이이이잉!

그나마 칼날의 진동이 퍼지며 직격을 막아주었다. 하지만 균형을 잃은 다비의 몸은 한없이 뒤로 날아갈 뿐이었다.

'일단 착지를 해야....'

한쪽 발을 최대한 아래로 뻗어 봤지만 걸리는 게 아무것도 없다.

그렇게 다비를 살짝 띄워 날려 버린 메르데스는, 곧바로 오른쪽 검을 휘둘러 새로운 폭풍검을 방출했다.

이번엔 집중형으로.

콰과과과과광!

목표에 명중한 충격파가 한순간 지면에 파고들며 땅속에서 폭발을 일으킨다.

하지만 거기서 끝이 아니었다. 메르데스는 쉴 새 없이 왼쪽 검을 휘둘러 새로운 폭풍검을 방출, 푹 파인 바닥 속으로 새로운 충격파를 집어넣었다.

콰과과과광!

소음은 작았지만, 대신 지진이라도 난 듯, 훈련장 전체가 뒤흔들렸다.

"힉...."

"으, 으아...."

"아니...."

멀리서 지켜보던 기사들의 안색이 창백해졌다.

방금 대체 무슨 일이 벌어진 걸까?

저런 걸맞고 살아날 인간은 어디에도 없을 것 같았다. 그 전에 시체라도 건질 수 있으면 다행일 것이다.

실제로 먼지가 사라진 곳에 다비는 존재하지 않았다.

땅속으로 몇 미터나 파고든 구덩이 속도 마찬가지였다. 모두가 허망한 표정을 짓고 있는 사이, 유일하게 긴장을 풀지 않은 것은 메르데스뿐이었다.

"...!"

고개를 옆으로 돌리자, 그곳에 서 있는 다비가 보였다.

언제 저기까지 몸을 피했을까?

그 순간 폭풍검을 피하는 건 불가능했을 텐데? 가득한 먼지 속에서 무슨 일이 벌어졌는지 상상조차 할 수 없었다.

"...."

한편 다비의 얼굴엔 표정이 사라져 있었다.

그의 두 눈은 메르데스가 아닌, 메르데스가 포함된 공간 자체를 인식하고 있었다. 그리고 어느 순간 지면을 박차며 그녀를 향해 몸을 날렸다.

메르데스는 즉시 폭풍검으로 응수했다.

우우우웅!

다비는 날아오는 충격파를 피하는 대신, 오히려 검을 휘두르며 베어 넘겼다.

위잉!

진동검이 장착된 검으로.

잘려 흩어진 충격파가 양옆에서 폭발을 일으킨 순간, 상대의 새로운 충격파가 또다시 머리 위에서 수직으로 내리꽂혔다.

'엄청나군.'

다비는 진심으로 감탄했다.

메르데스는 양손의 검을 번갈아 휘두르며 폭풍검을 시전하고 있다.

관절의 안정성, 근력, 타이밍, 몸의 밸런스.

저 아가씨는 대체 어디까지 강해질 생각인가?

하지만 마지막 밸런스가 살짝 깨지는 게 보인다.

당장 벌어진 일은 아니다. 지금 이대로 시간이 지나가면 앞으로 벌어질 미래의 사건.

다비의 눈은 그것을 보고 있었다. 그렇게 무릎을 튕겨 한순간 폭발적으로 도약, 머리 위로 떨어지는 충격파를 돌파하고.

콰과과과광!

뒤에서 터지는 폭압에 떠밀려 더욱 빠르게 돌진, 몸의 균형이 무너진 메르데스의 복부를 향해 발차기를 날렸다.

콰직!

그것이 마지막이었다.

걷어차인 메르데스의 몸이 한순간 반대편으로 날아가 나무를 뚫고 숲에 처박혔다.

"으악!"

관람하던 기사들이 대신 비명을 질렀다.

그만큼 무시무시한 일격이었다, 갑옷 찌그러지는 소리가 어찌나 오싹한지, 안 봐도 결말을 알 수 있을 정도였다.

죽었다.

분명 갑옷이 터지고 내장이 파열됐을 것이다.

아니면 온몸의 뼈가 으스러졌거나.

뭐가 어찌 됐든 회복은 불가능할 것이다. 지금 당장 신관들이 달려온다고 해도 고개를 설레설레 저을 만큼.

"다, 다, 단장님?"

함께 지켜보던 카일도 창백한 얼굴로 더듬거렸다. 다비는 아무렇지도 않은 얼굴로 치켜든 발을 내리며 호흡을 정돈하고 있었다.

"단장님... 바, 방금 그건 너무...."

우직!

그때 부러진 나무가 옆으로 날아가며, 밑에 깔려 있던 메르데스가 불쑥 몸을 일으켰다.

"메르데스!"

카일이 반색하며 소리쳤다. 잠시 멍한 얼굴로 서 있던 그녀는, 이내 몸을 털며 훈련장 안으로 걸음을 옮기기 시작했다.

"무사했구나...."

카일은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그렇게 다비의 앞까지 돌아온 메르데스는 복부가 완전히 찌그러진 마갑을 벗으며 아무렇지도 않은 듯 말했다.

"이 갑옷은 이제 못 쓸 것 같습니다"

이계 황자는 세상을 구하고 싶다 159화

49장 선의 나라

"어차피 마갑 등급을 높여야 하니 상관없겠지. 훌륭했다. 메르데스."

다비는 미소와 함께 검을 집어넣었다. 메르데스 역시 튕겨 날아가는 동안에도 놓지 않았던 쌍검을 칼집에 넣었다.

그러자 관람하던 기사들이 기립하며 박수갈채를 터뜨렸다.

"오오!"

"대단해!"

"말도 안 돼. 내가 지금 뭘 본 거지?"

"눈으로 따라가는 것도 버겁더라. 저게 사람 움직임인가?"

"이게 나이트 마스터... 눈물 날 것 같아."

"마지막 그 발차기 무서웠어...."

"그나저나 저 아가씨는 어떻게 그걸 맞고도 멀쩡하지?"

"그런데 저 아가씨, 아니, 저 기사님 복장이...."

메르데스는 갑옷 안에 두꺼운 시녀 복을 받쳐 입고 있었다. 이내 갑옷을 몽땅 벗어버린 메르데스는 옷 매무새를 가다듬으며 고개를 숙였다.

"복장이 단정치 못해 죄송합니다. 저택에서 영약을 만들다 바로 나오는 바람에."

"...그러고도 불편하지 않았나?"

"땀은 좀 많이 난 것 같습니다. 그보다 방금 그때 먼지가 피어올라 아무것도 보지 못했습니다. 그 순간에 어떻게 몸을 피하신 겁니까?"

"방금 그때라면, 내가 붕 떠서 뒤로 날아가던 그 순간 말이지?"

메르데스는 고개를 끄덕였다. 다비는 빈손을 휘두르며 멀리 공터에 풍압검을 시전했다.

콰광!

"맨손 풍압검...."

지켜보던 메르데스가 작게 탄식했다. 다비는 손을 거두며 고개를 끄덕였다.

"나도 예전에는 그런 편견을 가지고 있었지. 풍압검을 공격으로만 쓴다는 건 고정관념이다."

"풍압검의 반동으로 몸을 피하신 거군요."

"하늘을 날아다닐 정도는 아니지만, 그래도 순간적으로 방향을 트는 건 가능하지."

"제가 어리석었습니다."

메르데스는 눈을 감으며 고개를 숙였다.

"아무리 단장님이라 해도, 일단 몸을 띄우기만 하면 꼼짝없이 방어밖에 할 수 없다고 생각했습니다."

"이렇게 하나씩 견문을 넓혀 나가는 거지. 모든 상황에 맞게 대처할 수 있는 게 나이트 마스터다."

"명심하겠습니다."

"그나저나 쌍검으로 폭풍검을 날리다니...."

다비는 쓴웃음을 지으며 방금 전투를 떠올렸다.

자신도 똑같이 새로운 코어를 먹고, 코어의 효과만큼 강력해졌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메르데스의 성장 속도는 그런 기준으로 가늠이 불가능했다.

'이제 정말 얼마 남지 않았다. 저 아이가 완벽하게 날 능가할 날이.'

메르데스를 처음 본 날부터 예감하긴 했다. 그리고 그날이 오면 미련 없이 길을 비켜줄 생각이었다.

최강의 기사라는 자리를 향한 단 하나뿐인 길.

그런데 막상 그 순간이 닥치자 생각이 달라졌다.

'비켜주고 싶지 않아.'

어떻게든 버티고 또 버텨서 이 자리를 지키고 싶다.

순간 단원들의 훈련에 쏟는 시간마저 아깝게 느껴졌다.

다른 이의 성장에 집중하는 것이 아닌, 오직 스스로를 위한 훈련에 몰입하고 싶다는 욕망이 솟구친다.

그러다가 갑자기 웃음이 흘러나왔다.

"하, 하, 하하하...."

메르데스는 눈을 가늘게 뜨며 질문했다.

"괜찮으십니까? 단장님? 제가 역시 실수라도? 무언가 문제가 있습니까?"

"하하... 응? 문제? 그럴 리가. 넌 아무 문제 없다. 문제는 나한테 있지."

다비는 고개를 저으며 검의 손잡이를 움켜쥐었다.

지금이라면 가능하지 않을까?

나이트 마스터가 되기엔 부족했던 힘.

그것을 온갖 기술과 훈련으로 메우고 나서야 겨우 최고의 자리에 오를 수 있었다.

하지만 이젠 상황이 다르다. 다비는 한때 자신과 같은 나이트 마스터였던 파이렌을 떠올리며 가만히 고개를 끄덕였다.

지금 부터는 '기술의 다비'가 아닌, '힘의 다비'가 될 필요가 있었다. 어떻게든 여기서 더 위로 올라가기 위해서는....

"메르데스."

"네. 단장님."

"지금부터 내 훈련을 좀 도와줄 수 있겠나?"

"제 훈련이 아니라, 단장님의 훈련을 말씀입니까?"

메르데스가 눈을 크게 떴다. 다비는 검을 뽑아 들며 말했다.

"혼자서 하는 것보다는 받아주는 사람이 있는 게 빠를 테니까. 힘도 빠지고 까다롭겠지만... 그래도 부탁한다."

"부탁이라니요. 그런 말씀 안 하셔도 당연히 돕겠습니다."

메르데스는 양손으로 시녀복의 치마를 잡고 몸을 숙였다.

"지금껏 받은 은혜를 조금이나마 갚을 수 있다니, 영광입니다."

그리고는 날렵한 동작으로 검을 뽑아 들었다. 영문을 모르는 기사들 사이에서 다시 박수가 터지는 가운데, 다비는 호흡을 가다듬으며 새로운 나이트 스킬을 준비했다.

* * *

기존의 동대륙 여행이 한층 더 까다로웠던 이유는, 대륙의 동부가 '죽음의 땅'이라는 접근 불가능한 지역이기 때문이었다.

만약 죽음의 땅 어딘가에 항구를 세울 수 있었다면 두 대륙의 교류는 훨씬 편해졌을 것이다.

하지만 항구는 고사하고, 근해로 배를 몰다 언데드가 된 시 서펜트 무리나 만나지 않으면 다행이었다.

덕분에 먼 바다로 나가 항로를 틀어야 하니 여간 까다로운 게 아니었다.

카일 역시 동대륙과의 무역에 있어 가장 큰 걸림돌은 죽음의 땅이라 했고.

"이거 웬일? 무슨 풀뿌리 같은 걸 꿀에 절였는데 먹을 만해."

톨라리가 내민 것은 뚜껑을 딴 유리병이었다. 나는 퍼뜩 정신을 차리며 뿌리의 정체를 알려주었다.

"그거 클레졸 나무뿌리야."

"나무뿌리? 나무뿌리도 먹을 수 있어?"

"오래 찌면 먹을 수 있지. 영약 재료기도 하고."

라니아에게 여행 도중 먹을 보존식을 싸달라고 했더니 이런 것도 넣어 둔 모양이다. 톨라리는 뿌리 하나를 꺼내 앞으로 내밀며 아 소리를 냈다.

"아. 먹어봐 황자님."

"아...."

나는 별 생각 없이 뿌리를 받아먹었다. 이러고 있으니 어디 피크닉이라도 나온 것 같지만....

지금 이곳은 동대륙을 향하는 금독수리의 등 위.

상공 수백 미터를 고속으로 비행 중이며, 아래쪽으로는 파랗게 반짝이는 끝도 없는 대해가 펼쳐져 있다.

예정에 없던 장거리 여행은 꽤나 부담이었다.

아무리 테우스가 반영구적으로 하늘을 날 수 있다 해도, 결국 등에 탄 인간들은 어쩔 수 없이 가끔 지상에 내려와야 한다.

그나마 다행인 것은, 이제 죽음의 땅이 안전 지역이 되었다는 것.

그렇게 죽음의 땅 최동단에서 한 번 착륙해 재정비를 한 다음, 다시 날아올라 한 번에 바다를 건너는 중이었다. 중간에 한번 무인도에 들려 잠시 쉬었다 가기도 했고.

"동대륙은 국가들의 세력 구조가 서대륙과 많이 달라."

톨라리는 병에 마지막 남은 뿌리를 입안에 쏙 넣으며 이야기를 꺼냈다.

"페이우드 제국처럼 압도적인 강국은 없어. 자잘한 제후국들이 서로 전쟁도 하고 협력도 하면서 균형을 맞추는 게 기본."

"하지만 결국 그 위칸이라는 제국이 다른 제후국들 지배하는 거 아냐?"

"아니야."

톨라리는 냉큼 고개를 저었다.

"위칸은 제후국들의 국정에 관여 안 해. 그리고 위칸은 제국도 아니야."

"제후국을 거느리고 있는데 제국이 아니라고?"

"위칸은 동대륙의 첫 번째 국가일 뿐이야. 위칸의 왕족이나 공신들이 밖으로 나가 나라를 세운 게 지금의 11제후국이고. 그래서 제후국들이 위칸을 존중해 주긴 하는데, 지배받진 않아."

그건 좀 특이하구만. 옛날 중국의 주나라 같은 건가?

물론 동대륙에 있는 위칸 제국이 실권이 약하다는 건 이미 알고 있었다. 예전 동대륙에 넘어갔을 때 직접 경험했으니까.

하지만 실상은 좀 더 기묘했다. 아예 제국조차 아니었을 줄이야. 게다가 국가 규모도 다른 제후국보다 오히려 작다고?

"위칸의 영토는 산지가 많아서 인구도 적어. 다 합쳐도 100만이 안 되는 정도. 지금은 딱 100만 정도 되려나?"

"그럼 다른 제후국은?"

"대부분 위칸보다는 인구 많아. 500만짜리도 하나 있고."

"그럼 거기가 제일 강국이겠네?"

"갑자기 무슨 소리? 당연히 위칸이 제일 강국이야."

"영토도 별로에 인구도 적은데 위칸이 제일 강국이라고? 어째서? 군사력도 가장 약할 것 아냐?"

실제로 과거에 개고생해서(그땐 테우스가 없었다) 동대륙 넘어가 위칸에 도착한 적이 있었다.

목표는 이계의 침공에 맞춰 군대를 파견해 달라 요청하는 것.

딱히 큰 기대를 한 건 아니었다. 동대륙으로 넘어간 1차 목적도 지원군 요청이 아니라 그곳에 있는 바람의 정령왕과 접촉해서 계약 방법을 알아내는 것이었고.

그러니 서대륙 기준으로 나이트 마스터 정도는 아니라 해도, 그 아래 커맨더 급이라도 다섯 명쯤 지원받을 수 있다면 요긴하게 쓸 수 있을 거라 생각했다.

하지만 놀랍게도, 동대륙은 '마갑'이라는 개념 자체가 없었다.

그러니 기사, 혹은 기사와 비슷한 역할을 하는 무장 자체가 존재하지 않았다.

현실을 파악한 다음엔 아예 공식적으로 그쪽 정부를 만나 요청이나 교섭을 진행하는 것을 포기했다.

애초에 동대륙에는 마법사도 거의 없는데, 여기에 기사조차 없으면 대체 누굴 데려다 전쟁을 시킬 것인가?

물론 신체 능력이 괜찮아 보이는 무장은 꽤 있었다. 그래봤자 단기간에 가능한 건 나이트 익스퍼트 정도가 한계.

이런 기사의 개념조차 모르는 사람들에게, 이제 와서 마갑을 입히고 기사 훈련을 하는 건 너무 비효율적이라 생각했다.

그래서 포기.

대신 위칸 황궁이 뭔가 구조가 특이해서 은신으로 잠입해 보려 했는데... 그때 한 이틀 정도 찔러보다 결국 포기하고 그냥 돌아왔었지?

"다른 건 몰라도 군사력은 위칸이 제일 강해. 그렇다고 다른 제후국 침략하고 하진 않지만."

"내가 전에 동대륙에서... 그러니까 동대륙에 갔던 카일에게 들은 이야기인데,"

"응?"

"위칸은 동대륙의 중심에 있잖아? 바다가 없는 내륙국이고?"

"맞아. 바다 없음."

"그런데 바다를 낀 나라... 그러니까 제후국이겠지? 제후국들은 몰래 이쪽에서 마갑 수입해서 쓰기도 한다더라. 아주 소수지만. 근데 소수라도 마갑이 있는 쪽이 군사력은 더 강하지 않을까? 위칸은 아예 마갑 안 쓰는 거 같던데?"

"응. 위칸은 마갑 안 써. 원칙대로는 모든 제후국도 마갑 쓰면 안 돼."

"그런데?"

"나도 어렸을 때 들었어. 제후국들이 자기들 전쟁 유리하게 하려고 몰래몰래 서대륙에서 마갑 수입해서 쓴다는 거. 그런데 걸리면 제재받아."

"제재? 누가?"

"누구긴 누구? 당연히 위칸이지. 분쟁은 오직 제후국들의 순수한 힘으로만 해야 한다는 게 법칙. 그러니 이를 어기면 위칸이 잘못을 확인하고 처벌을 내려."

"그러니까 어떻게? 혹시 군사력이라는 게 권위를 말하는 거야?"

"권위?"

"최초 국가에 대한 권위. 그러니까 규정을 위반한 나라가 생기면, 다른 나라들의 군대를 모아 힘을 합칠 수 있는 명분 같은 게 있다던가?"

"그런 것도 없는 건 아닌데...."

톨라리는 잠시 고민하다 고개를 끄덕였다.

"생각해 보니 황자님은 모르는 게 당연하구나."

"내가 뭘?"

"군대 숫자만 치면, 위칸이 별거 없는 건 맞아."

"그런데?"

"대신 위칸엔 투사가 있어."

"투사? 싸우는 사람? 기사 같은 거야?"

"서대륙 기사와는 많이 다른데...."

그리고는 다시 입을 다물고 끙끙대기 시작했다. 공개하면 안 되는 비밀 같은 게 있나 본데....

그것을 피하면서 개념을 설명하려니 말이 잘 이어지지 않는 듯했다.

"동대륙에는, 오직 위칸에만 내려오는 전승이 있어."

"전승? 소문 같은 거?"

"소문은 아니고, 전해 내려오는 힘? 투사도 그런 것 중 하나야. 엄청 강해."

"정확히 얼마나?"

"그쪽은 전문이 아니라 구분이 힘든데... 아마 나이트 마스터 정도 아닐까?"

"정말? 다비만큼 강하다고?"

얘가 지금 농담 하는 건가?

전에 갔을 때 그런 녀석은 코빼기도 안 보였는데? 물론 은신으로 돌아다닌 거라 실제로 싸워본 건 아니지만....

"물론 요즘 다비 말고, 옛날 다비 정도는 되지 않을까 싶어. 코어 먹기 전?"

그것만 해도 장난이 아니다. 이 정도면 뒤늦게라도 기사 훈련시킬 보람이 있지 않을까?

"투사는 위칸이 공격받는 상황이 아니면 절대 나서지 않아. 아니지, 방금 말한 마갑 밀수 같은 분쟁에도 나서는구나. 제후국이 반칙 쓰면서 싸우면 투사를 파견해서 응징해."

"그거 멋지네. 암행어사 같은 건가?"

"암행어사? 그게 뭔데?"

"그런 게 있어. 아니지, 암행어사보다는 장군에 가깝겠구나. 군대를 이끌고 출진할 테니."

"군대는 보통 안 끌고 가. 수행하는 소수의 전사들만 동행함."

"소수? 그게 몇 명인데?"

"투사 한 사람당 열 명 정도?"

"그럼 총 열한 명? 열한 명 가지고 나라 하나를 응징하러 간다고?"

"그렇다니까? 사실 수행하는 전사도 필요 없어. 투사가 옛날 다비만큼 강하니까."

"아니, 잠깐...."

뭔가 이상하다. 지금 우리가 똑같은 다비를 말하고 있는 게 맞나?

"설마 그 다비가 마갑 입은 다비 말하는 거야? 최상급은 아니라도, 중급이든 상급이든 갑옷 입고 제대로 힘쓰는 그 상태?"

"당연하지."

"하지만 동대륙은 마갑이 없잖아? 제후국이 마갑 몰래 수입하면 응징하면서, 정작 위칸은 마갑을 사용하는 거야?"

"그럴 리가. 위칸은 절대 마갑 안 써."

"그럼 맨몸? 아니면 마갑은 아닌데 투사 전용으로 마갑 비슷한 효과를 내는 물건이 있다던가?"

"그건 아니고, 따지고 보면 맨몸은 맨몸인데...."

톨라리는 또다시 고민에 빠졌다. 녀석은 한참을 끙끙대다 체념한 듯 한숨을 내쉬었다.

"황자님? 어차피 알게 되겠지만 그래도 내가 말 했다고 하면 안 돼? 나 아버지한테 혼나. 이거 대외비라."

"응. 절대 말 안 할게. 뭔진 모르지만."

"투사의 힘은 위칸의 백성으로부터 나와."

이계 황자는 세상을 구하고 싶다 160화

49장 선의 나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