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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계 황자는 세상을 구하고 싶다 152화

47장 군단

"후...."

그러자 깔끔하게 정리되며 머릿속이 개운해졌다.

대신 마력 결정의 일부가 활용할 수 없는 구역으로 막혀버렸다.

총 마력의 10퍼센트 정도가 사라진 셈이려나?

물론 그 정도 대가는 아무것도 아니다. 대신 총 113마리의 얼음 정령을 한 번에 쏟아낼 수 있게 됐으니까.

"대단하다. 역시 날 두렵게 만든 자.... 이 정도는 가볍게 처리하는군."

글라체스가 감탄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난 얼어붙은 코피를 털어내며 이를 갈았다.

"너 잘도 이런 위험한 짓을.... 평범한 인간이었으면 미쳐버렸을 걸? 머리가 터지거나."

"하지만 넌 평범한 인간이 아니지 않은가?"

그건 그렇지만.

그때 마력 결정에 깃든 소유권 중 하나가 눈에 들어왔다.

르네.

이미 반쯤 정령이 된 르네의 소유권이다. 나는 즉시 르네를 바라보며 소리쳤다.

"르네야! 지금 안고 있는 거 당장 내려놔!"

"...."

르네는 아무 말 없이 품에 안고 있던 얼음의 정수를 내려놓았다.

쿵!

마치 철구가 떨어진 듯 얼음에 금이 갔다. 저게 저렇게 무거웠었나? 그리고 저 무거운 걸 계속 들고 있던 거야?

"음...."

그리고 얼음의 정수를 내려놓자마자, 뿌옇던 르네의 눈이 곧바로 정상으로 돌아왔다.

"...황자님?"

르네는 놀란 눈을 깜빡였다. 나는 그제야 한숨을 내쉬며 르네에게 다가갔다.

"고생했어. 르네야. 몸은 괜찮아?"

"저기.... 몸은 괜찮은데...."

르네는 왕방울만 해진 눈으로 날 보며 목소리를 낮췄다.

"세상에 이게.... 전부 진짜였어요? 전 모두 꿈이라고 생각했는데.... 죄송해요 황자님. 제가 감히 황자님께 공격을...."

"괜찮아 르네야. 너 아무 잘못 없어. 진짜 꿈 꾼 거야."

"이것으로 권속의 모든 소유권은 네게 넘어갔다."

글라체스는 힘을 많이 소모한 듯, 다시 처음처럼 눈보라와 안개로 흩어지기 시작했다.

"이 모든 권한과 마력 결정은 클로드, 네가 죽는 순간 다시 내게 돌아올 것이다. 그때까지는 온전히 너에게 귀속된다."

"그게...."

여기서 무슨 말을 해야 하지?

모든 일이 너무 순식간에 벌어져서 감이 안 온다. 나는 눈을 꽉 감았다 뜨며 가만히 고개를 끄덕였다.

"고마워. 잘 쓸게. 이걸 바라고 여기 온건 아니지만."

"마지막으로 임무를 내리겠다."

녀석은 사라지기 직전, 내 귓가에 속삭이듯 말했다.

"만약 네가 바람의 근원까지도 그 작은 몸 안에 품을 수 있다면, 그때는 나 또한 네 안에서 하나가 될 수 있다."

"아까는 이그니스 때문에 불가능하다며? 폭발하잖아?"

"둘로는 불가능하다. 셋으로도 안 되고. 하지만 넷이라면 서로를 견제하며 균형을 잡을 수 있다."

동시에 정령왕 넷이 서로를 마주보며 불꽃을 튀기는 모습이 뇌리를 스쳤다. 그렇게 녀석이 완전히 사라진 순간.

쿵.

쿵.

쿵.

쿠웅....

섬에 있던 모든 정령들이 나를 향해 무릎을 꿇었다.

"황자님...."

르네가 무서워하며 내 품에 안겼다. 나는 가만히 르네의 등을 두드려주며 작은 목소리로 말했다.

"다 끝났어. 아무 걱정 안해도 돼. 이제 그만.... 집으로 돌아가자."

* * *

문득 머릿속에 이그니스의 목소리가 울렸다.

-굳이 말을 하진 않았다만, 실은 나와 계약한 순간부터 너는 글라체스에 대해 강한 반감을 가지게 되어 있었다.

나는 테우스가 만들어준 바람의 쿠션에 몸을 기댄 체, 바로 앞에 잠들어 있는 톨라리와 르네를 바라보던 중이었다.

'원래 그렇게 되어 있는 거야? 얼음의 정령왕과 계약할 마음이 사라지도록?'

-그것도 그렇지만, 녀석이 말했듯이 우리가 서로 상극이라 그렇다.

'반대로 그 녀석과 먼저 계약하면 너랑 계약하기 싫어지는 거야?'

-그렇게 되겠지. 다만 글라체스는 어떻게든 계약하지 않도록 꼼수를 부렸을 거다.

'왜?'

-이번에도 그렇게 하지 않았나. 이미 조건이 달성된 이상, 녀석은 좋든 실든 너와 계약을 해야 했다. 그것을 정령왕의 권한을 이전하는 것으로 피해 버렸지.

덕분에 113마리의 얼음 정령 군단을 한 번에 쏟아낼 수 있게 되었다.

이것도 게이트 열리기 전에 한번은 써 봐야 텐데.... 대체 어디서 테스트를 해야 주변에 민폐를 끼치지 않으려나?

-녀석은 자신의 힘으로 세계의 종말을 늦추고 있다 생각하지. 그래서 계약을 통해 힘을 소모하는 것을 극도로 기피한다.

'빙하가 녹는 걸 막으려고?'

-그래. 과거엔 세상을 구해야 한답시고, 내 힘을 떨어뜨리기 위해 싸움까지 걸어 왔다.

'너 한 테 직접? 어떻게 됐는데?'

-물론 박살을 내 줬지.

순간 불의 정령왕과 얼음의 정령왕이 서로 혼신의 힘을 쏟아내는 장엄한 광경이 뇌리를 스쳤다.

'그것 참.... 좋은 구경 놓쳤네.'

-물론 싸우지 않고 해결되었으니 나쁠 건 없다. 결말이 이렇게 될 줄은 상상도 못했어.

'그러게. 이럴 줄 알았으면 섬 돌파할 때 나도 힘을 보탤걸.'

덕분에 힘을 다 써버린 톨라리는 르네를 끌어안고 잠에 빠져 있었다.

저 녀석도 최근 고생이 많다. 2차 사령전쟁 때 마력 오버해 버려서 기절한지도 얼마 지나지 않았는데.

-꼭 그렇지는 않다. 그 모든 것이 더해져서 글라체스를 궁지로 몰아 놓은 것일 테니.

'그래? 그냥 퓨어 매직으로 겁줘서 항복한 거 아냐?'

-가득 찬 대량의 마력, 언제든지 소환 가능한 정령들, 정교하고 치밀한 전투 계획, 분노, 자신감. 이 모든 것이 녀석의 모든 권한을 넘기게 만든 것이다.

이그니스는 웃음소리를 내며 말을 이었다.

-후후.... 그토록 겁먹은 모습이라니. 속이 다 시원했다. 역시 나의 클로드. 힘을 쓰지 않고도 정령왕을 제압하다니.

'솔직히 나도 놀랐어. 빙의도 안했는데 그 정도 까지 몰아붙인 줄이야.'

-그 정도로 몰리지 않았다면, 그저 한두 마리의 권속이나 르네의 지배권만 넘기고 끝냈을 것이다. 그러니 결과적으로 잘 된 일이지.

'그러게. 근데 좀 이상했어.'

나는 결정적인 순간에 정령왕들과 동화된 느낌을 떠올리며 물었다.

'빙의도 안했는데 마치 빙의한 것 같은 느낌이 들더라. 그건 왜 그런 거야?'

-나 역시 느꼈다. 분명 우리가 자주 한 몸이 되었기 때문이 아니겠느냐?

해석하자면 결국 빙의를 자주한 후유증이란 뜻?

-나쁘게 받아들일 필요는 없다. 서로가 서로의 영향을 받는 건 당연하니까.

'그런가? 이러다 성격이 완전 변하거나 그러면 위험한데?'

-변하는 게 아니라 닮는 것이다. 나 역시 너와 생각이 비슷해졌지.

'정말?'

-네가 저 르네란 아이를 위해 분노할 때, 나 역시 같은 감정을 느꼈다. 불쌍한 녀석. 마을 사람들을 구하기 위해 그 조그만 아이가 영지를 탈출해서 네게 도움을 청하러 오지 않았느냐? 이제라도 좋은 곳에서 잘 먹고 편하게 지내게 해 주려는데, 그것을 저 얼음덩어리 녀석이 방해해 버렸지. 그래서 화가 머리끝까지 올랐다.

'오.... 맞아. 완전 똑같아.'

표현하지 않았을 뿐이지 나도 그렇게 생각했다. 정말로 생각하는 게 서로 비슷해져 가고 있구나.

-그러니 그냥 받아들여라. 클로드. 네가 앞으로 겪을 싸움을 위해서라도, 우리를 닮는 것이 결코 해가 되진 않을 테니까.

'멘탈 관리에 있어서 말이지?'

-그렇다. 우리들은 분노하고, 흥분하고, 무관심하고, 서두를지언정 무너지진 않는다. 그 어떤 상황에서도 결코.

'그런 것 치고는 얼음의 정령왕은 쉽게 무너지던데?'

-녀석은 무너지지 않았다. 오히려 그 와중에도 이성을 잃지 않고 현명한 판단을 한 셈이지.

'그런가?'

-당연히 그렇다. 뒤가 있다면 물러날 줄 아는 것도 중요하지.

하긴 녀석은 300년 뒤를 보고 있으니까. 지금 이 순간에 모든 걸 걸 수는 없겠지.

하지만 내겐 뒤가 없다.

뒤가 없는데 자꾸 열 받게 구니까.... 무려 정령왕을 날려 버릴 계획을 세우고 실천 직전까지 몰아 붙였다. 그래. 이런 것도 좀 자제해야지. 이번엔 다행히 잘 풀리긴 했지만.

-앞으론 어떻게 할 생각인가? 나의 사랑스런 클로드?

이그니스가 정이 뚝뚝 흘러넘치는 목소리로 물었다. 나는 품속에서 연한 푸른빛의 코어를 꺼내 가만히 바라보았다.

-에이션트 터틀 코어-

종합 항마력 강화(소)

내구 강화(대)

수명 강화(대)

냉기 마력 강화(개인 차 있음)

해독(소)

섬을 떠나기 전, 글라체스의 권속이 된 고대 거북이 장로를 불러 코어를 넘겨받았다.

-마음 같아선 더 많이 드리고 싶습니다만, 아쉽게도 이곳에 오기 전 다른 마수와 코어를 교환해 버렸습니다.

코어의 효과를 보면 정말 하나 밖에 없는 게 아쉽긴 하다.

다른 건 몰라도 내구력 강화 '대' 자가 떡하니 박혀 있다. 기사단 애들 주면 진짜 잘 써먹을 텐데.

물론 '수명 강화'가 붙어 있는 건 아쉽다.

다른 능력이 붙어 있으면 좋았을 텐데. 당장 침공 못 막으면 거기서 죽을 텐데 수명 따위가 무슨 필요가 있을까?

'우선 돌아가서 애들한테 코어부터 배급해야지.'

-그걸 나눠 줄 생각인가? 단 하나뿐인 코어인데?

'이건 말고.'

나는 고대 거북이 코어를 입안에 집어넣고는 천천히 흡수를 만끽했다.

'데스 울프 코어 왕창 있잖아. 기사단 소집해서 그것부터 나눠줘야지.'

* * *

얼음의 정령왕과 일이 잘 풀린 덕분에, 돌아오는 길에는 테우스의 등 위에서 숙면을 취할 수 있었다.

덕분에 저택에 돌아오자마자 곧바로 기사단 본부로 이동, 기사단원 전부를 회의장에 불러 모았다.

"...그러니 길게 재지 않고 바로 코어 나눠줄게. 먼저 카일."

"네!"

카일은 깜짝 놀라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분명 자기 이름이 맨 먼저 불릴 거라고 상상도 못했겠지?

"데스 울프 코어에는 밤눈이 밝아지는 효과가 있어. 앞으로 전투가 야간에 치러질지도 모르잖아? 군대를 이끄는 지휘관에게 이 보다 중요한 능력은 없지. 그래서 가장 먼저 널 선별한 거야.

"감사합니다! 황자님!"

카일은 감격한 표정과 함께 90도로 허리를 숙였다. 나는 미리 대기시켜 놓은 시녀에게 코어를 넘겼고, 시녀는 손수건에 받은 코어를 카일의 앞에 공손히 배달해 주었다.

"그럼 다음으로 다비."

"네. 황자님."

다비는 차분하게 대답하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나는 또 하나의 코어를 손에 쥐며 물었다.

"새 나이트 스킬이 관절에 부담이 많이 간다며? 폭풍검?"

"그렇습니다. 폭풍검은 손목과 팔꿈치에 피해가 쌓일 수밖에 없는 구조를 가지고 있습니다. 덕분에 위력에 비해 힘의 소모가 적은데도 무작정 많이 사용할 수는 없습니다."

"그러니 너도 이걸 먹어. 데스 울프 코어에는 관절을 더 강화 시키는 효과가 있으니까."

"감사합니다. 앞으로 더 큰 활약으로 보답하도록 하겠습니다."

다비는 가슴에 경례를 붙이며 고개를 숙였다. 나는 시녀에게 코어를 넘기며 또 하나의 코어를 집어 들었다.

"다음은 메르데스."

"네. 황자님."

급하게 왔는지 시녀복장의 메르데스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나는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너도 같은 이유야. 그러고 보니 직접 폭풍검의 변종을 만들어 냈다며?"

"하다 보니 그렇게 됐을 뿐입니다. 모두 단장님께서 가르쳐 주신 덕분입니다."

메르데스는 다비가 있는 쪽으로 몸을 살짝 숙였다. 나는 세 번째 코어도 메르데스에게 배달시킨 다음. 테이블에 남은은 마지막 코어는 그대로 품에 집어넣으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자, 그럼 오늘 분배는 여기서 끝이야. 고대 곰돌이 코어랑 고대 늑대 코어가 하나씩 더 남아 있는데 이건 며칠 후에 다시 정해서 나눠줄게."

"저, 저기요? 실례지만 황자님...."

그러자 얼굴에 수염이 가득한 리넨이 화들짝 놀라며 손을 들었다.

"그.... 데스 울프 코어는 모두 네 개가 있다고 하지 않으셨습니까?"

"맞아. 그런데?"

"그런데 이번에는 세 개만 분배하셨는데.... 혹시 하나는 아직 주인을 찾지 못해 보류하신건가요?"

"아니, 이건 르갈 줄 거야."

나는 집어넣은 마지막 코어를 다시 꺼내 흔들어 보였다.

"네? 르갈 말씀이십니까?"

"데스 울프도 결국 에이션트 울프에서 파생된 건데 코어 효과가 서로 다르잖아? 그래서 둘이 코어를 교환시켜 보려고. 어쩌면 기존에 없던 새로운 효과가 생길지도 몰라."

"아.... 그, 그렇군요. 저도 무척 기대됩니다."

리넨은 차마 실망한 표정을 숨기지 못했다. 반면 똑같이 코어를 못 받은 디디는 가만히 고개를 끄덕이며 즐거운 기색을 드러냈다.

"그럼 다비?"

"네. 황자님."

코어를 입에 문 다비가 즉시 대답했다. 나는 가볍게 몸을 풀며 다비의 옆으로 걸음을 옮겼다.

"느낌이 어때? 코어를 하나 더 흡수하는 기분이?"

"아직은 잘 모르겠습니다. 완전히 흡수 될 때 까지는 시간이 좀 걸릴 테니까요."

입에 커다란 구슬을 물고 있는데도 발음이 전혀 새지 않았다. 나는 창문 너머 훈련장을 가리키며 조용히 명령했다.

"그럼 코어는 천천히 소화하고, 지금부터 나 밖에서 훈련 좀 시켜줘."

"이런, 해가 서쪽에서 뜨겠군요. 황자님께서 먼저 훈련을 요구하시다니. 제가 앞장서겠습니다."

다비가 활짝 웃으며 먼저 회의실을 빠져나가기 시작했다. 나는 녀석의 뒤를 따르며 가만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게 말이야. 나도 이런 날이 올 줄은 몰랐네."

하지만 지금은 전과 달라졌다.

정령 빙의를 통한 육탄전이 가능해진 이상, 본격적으로 나이트 스킬을 활용할 만한 가치가 생겼다.

만약 이그니스와 빙의한 채, 지면을 따라 충격파를 퍼뜨리는 '파형검'을 사용하면 어떤 결과가 벌어질까?

여기에 그 강력하다는 폭풍검을 시전하면? 생각만 해도 완전 기대 되지 않나?

이계 황자는 세상을 구하고 싶다 153화

48장 넥스트 레벨

주재자는 느슨해진 자신의 검은 붕대를 꽉 조이며 물었다.

"그사이 후원자 3호도 실패하고, 알드 차원의 발현된 잠재력도 확 뛰어 올랐단 말인가?"

"드릴 말씀이 없습니다. 모두 제 실책입니다. 죽여주십시오. 주재자님."

집정관은 바닥에 이마를 박고 사죄했다. 이러다 주재자가 다시 폭주하며 해방될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식은땀이 흐른다는 착각을 느낄 정도였다.

하지만 주재자는 별다른 감흥 없이 없어 보였다. 대신 자신이 방금 나온 투명한 캡슐을 돌아보며 고개를 저었다.

"그대는 아무 잘못 없다. 한순간의 흥분으로 도시를 파괴했던 내 잘못이 크다. 회복 기간 동안 대신 업무를 맡아 처리하느라 수고했다."

"주재자님...."

"캡슐에서 회복하는 동안 이성의 붕대를 재조정했다. 앞으론 어지간한 일로는 감정에 휘둘리지 않을 거다."

그리고는 스크린에 표시된 48이라는 숫자를 바라보았다.

"그나저나 놀라운 숫자군. 차원 잠재력이 50퍼센트에 육박하도록 발현되다니.... 역시 클로드겠지?"

"분명 그럴 겁니다. 3호의 신호가 끊어졌을 때 까지만 해도 40퍼센트였습니다만, 이후 며칠 사이에 갑자기 8퍼센트나 급등했습니다."

"그쪽 세계의 신과 융합하기라도 했나? 놀랍군. 우리 사이크 차원도 위대한 게임 전까지 40퍼센트를 넘기지 못했는데."

주재자는 흥분과 분노를 넘어 초연의 단계에 도달한 것처럼 보였다. 집정관은 내심 큰일은 안 나겠다 생각하며 조심스럽게 자료를 내밀었다.

"연결이 끊어지기 전 마지막으로 후원자가 보내온 자료입니다."

"3호가?"

"영생체와 비영생체의 융합이 예상보다 강한 시너지를 일으키는 것으로 추정됩니다. 해당 드워프의 신체 능력은 특별할 것이 없었는데, 융합 뒤에 타락군주에 필적하는 힘을 가졌다고 합니다. 물론 이제 와서는 아무 의미도 없는 자료긴 합니다만...."

알드 차원에는 더는 간섭할 것이 남아 있지 않았다. 주재자는 집정관이 내민 디스크를 받으며 고개를 저었다.

"아니, 의미는 있다."

"그것이.... 어떤 의미 말씀입니까?"

"이번 게임을 승리로 끝낸 다음, 새로운 차원과 연결되면 그때 도움이 될 것이다."

"아...."

아무렇지도 않게 승리를 말하는 모습에서 위화감이 느껴졌다. 단순히 재조정만으로 저렇게까지 무감각해질 수 있을까?

'설마?'

집정관은 그제야 깨달을 수 있었다. 주재자가 했다는 붕대 재조정의 의미를.

'그저 감정을 컨트롤하기 위해 조정을 한 게 아니다. 주재자는 스스로의 개성을 제거했어.'

그러자 공포가 밀려왔다.

개성.

생명을 잃고 영생을 얻는 모순적인 상황에 빠진 사이크 인에게 있어, 개성이란 목숨보다 소중한 핵심이었다.

물론 붕대를 받고 이성을 획득한 상위 계급의 사이크 인에게만 해당되는 이야기지만.

몸에 붕대를 감고 시간이 지나면, 과거 생명이 있던 시절의 개성이 조금씩 살아난다.

그것이야말로 진정한 자신으로 다시 태어나는 과정이다.

그러니 사이크 인에게 있어 개성이란 존재 그 자체.

그런데 주재자는 그 소중한 것을 스스로 삭제해 버린 것이다.

'그렇다고 모조리 삭제한건 아닌 것 같지만... 저쯤 되면 후원자 3호나 다를 바 없다. 붕대를 받은 지 얼마 안 돼 개성이 확립되지 않았던 그 녀석과....'

분명 스스로를 컨트롤하지 못하고 도시를 파괴한 자신에 대한 처벌이었을 것이다.

그래서 집정관은 더 두려웠다.

주재자는 자신에게 가장 소중한 것 마저 가차 없이 잘라내는 모범을 보였다.

그렇다면 자신에게도 같은 처벌을 내리지 않을 거라 장담할 수 있을까?

'개성을 제거하느니 소멸하는 편이 낫다. 내가 나로써 존재하지 못한다면... 지금부터 정신 바짝 차려야 해.'

"왜 그러나 집정관? 갑자기 멍해졌는데?"

"아닙니다. 그저 사이크의 승리를 위해 무엇을 해야 할지 고민하고 있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에겐 이미 남은 수단이 없다는 걸 보고할 수밖에 없었다.

"남은 건 차원 침공뿐입니다. 침공에 투입하는 개체를 정예로 구성하는 선별 작업을 시작해야 할 것 같습니다."

다만 말이 좋아 선별작업이지, 현실은 딱히 의미 없는 기분 내기에 불과하다.

양산형 파워 슈트 중 그나마 상태가 좋은 것을 구분해 화염병의 출력을 높인다던가.

혹은 광전사를 모아 놓고 파워 테스트를 벌여 약간이라도 성능이 높은 녀석을 골라낸다든가.

기껏 해야 이런 수준에 불과하다. 그러자 주재자가 책을 읽듯 무감각한 목소리로 말했다.

"차원 침공의 전력은 큰 변화를 줄 수 없다."

"물론 그렇습니다만...."

"그저 매 단계마다 허가 범위 안에서 최대한을 투입하는 게 전부지."

"당연히 최대 전력을 투입할 예정입니다. 당장 1차 침공부터 위원회가 허가한 최대치인 화염병 2천기를 투입하여...."

"강화 화염병으로 대처하면 된다."

"주재자님?"

집정관은 반사적으로 몸을 일으키며 되물었다.

"방금 강화 화염병이라 말씀하셨습니까?"

"그래."

"...위원회의 허가가 떨어지지 않았습니다. 강화 화염병은 6차 침공부터 겨우 투입이 가능합니다. 그전에 투입하면 당연히 규정 위반입니다."

"괜찮다. 이번엔 1차부터 투입해."

"하지만 그렇게 하면 위원회의 제재가...."

"피해는 감수할 수밖에."

주재자는 무시무시한 이야기를 아무렇지도 않게 내뱉었다.

"화염병과 강화 화염병은 큰 틀에서는 동일하다. 고작해야 스펙에 차이가 생길 뿐. 침공에 투입하는 병력의 스펙 변경은 어느 정도 제재를 받게 되지?"

"그, 그것은...."

집정관은 급하게 스크린에 규정집을 띄워 놓고 페이지를 넘기기 시작했다.

"병력의 10퍼센트 미만 변경 시.... 최종적으로 승리하더라도 상위 차원에 도전하는 도전권이 박탈됩니다."

"30퍼센트 미만은?"

"그때는 승리 시 획득하도록 정해진 보상을 받을 수 없게 됩니다. 그리고 30퍼센트를 넘기면...."

"차원 회수겠지."

차원 회수라는 것은, 결국 사이크 치원의 멸망을 의미한다.

얼마 전 차원집정소의 파괴로 인해, 허가받지 않은 차원간섭의 제재가 하이시티에 떨어졌다.

거대한 칼날. 바로 위원회의 검.

당시엔 그저 제재사항이 적힌 통보문일 뿐이었지만, 차원 회수가 결정되면 그와 같은 칼날 수천 개가 무작위로 떨어져 지면을 파고든다.

그리고 차원 전체가 소멸한다.

처음 위대한 게임에 참가했을 당시, 위원회는 친절하게도 그 영상을 모두의 머릿속에 강제로 보여 주었다.

그 공포는 아직도 모든 사이크인의 뇌리 깊숙이 박혀 있다. 그럼에도 주재자는 별다른 고민 없이 스크린을 보며 명령을 내렸다.

"1차 침공부터, 화염병의 29퍼센트를 강화 화염병으로 변경한다."

"재고해 주십시오! 너무 위험합니다!"

집정관은 죽음을 각오하고 반발했다. 주재자는 별다른 반응 없이 잠시 생각하다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확실히 29퍼센트는 위험할지도 모르겠군. 굳이 아슬아슬하게 할 필요는 없지. 28퍼센트 정도로 조정하도록."

"아니, 물론 그 조정도 중요하겠지만.... 그전에 보상을 얻을 수 없다는 것 자체도 너무 심각한 위험이 아닙니까!"

승리 시 획득 보상이 없다는 것은, 결국 사이크인의 유일한 종족 번식 도구인 '영생의 핵'을 확보 할 수 없다는 뜻.

제아무리 영생을 누리는 사이크 인이라 해도, 결국 이런 저런 이유로 항상 일정 수가 소멸하며 개채가 줄어들게 마련이다.

"차원 전쟁에서 승리하고, 그래서 패배한 차원의 힘을 빨아들여 에너지를 확보하고, 그것으로 영생의 핵을 만들어야 종족을 유지할 수 있습니다. 그걸 모르실 리가 없는 주재자께서 어찌 그런 결단을 가볍게 내리십니까?"

"어차피 패배하면 차원이 소멸한다."

주재자는 감흥 없는 목소리로 대꾸했다.

"이번 한번 영생의 핵 못 얻는다고 무슨 상관인가? 그 다음 전쟁에서 이기면 되는 거 아닌가?"

"그것은...."

집정관은 엉겁결에 흐르지도 않는 식은땀을 닦아내는 시늉을 했다.

물론 원칙적으로는 맞는 말이다.

하지만 사이크인의 존망을 책임지는 주재자가 함부로 내 뱉을 이야기 역시 아니다.

이것은 종족 전체의 생존과 번영에 관련된 일이기 때문.

심지어 이번엔 하위 차원의 역습을 받고 수만 개의 영생의 핵이 소멸 해 버렸다.

이런 상황에서 알드 차원 녀석들이 모든 침공을 막아내고 최종 결투까지 간다면 어떻게 되겠는가?

'잠깐. 혹시 개성을 잘라내면서 기억까지 함께 사라졌나?'

집정관은 설마 하는 마음에 질문을 던졌다.

"주재자님. 감히 실례되는 질문을 하나 하겠습니다. 결투자가 어째서 그토록 강한 힘을 낼 수 있는지 알고 계십니까?"

평소라면 이런 질문을 하는 것 만으로도 경을 칠 것이다. 분명 자신을 놀리는 거냐고 온갖 질책을 쏟아내겠지.

하지만 주재자는 별 반응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물론 알고 있다. 결투자는 수백 년간 최종 결투만을 위해 힘을 축적하지 않았나?"

"그 축적된 힘이라는 게 사이크의 시민 그 자체이지 않습니까?"

결투자는 다른 사이크인의 내부에 있는 영생의 핵과 연결된 존재.

그들이 힘을 축적한다는 것은, 결국 더 많은 사이크인과 연결된다는 것을 의미한다.

"결투자가 힘을 내면 낼수록, 그와 연결된 핵의 에너지를 빨아들여 연료로 사용합니다."

그러니 결투자가 싸운다는 것은 수백에서 수천, 혹은 수만에 달하는 사이크인의 소멸을 의미한다.

"만약 제재를 받았음에도 상대가 침공을 전부 막아낸다면. 그렇게 최종 결투까지 가서 결투자가 정말 모든 힘을 다 쏟아 내어 승리를 거둔다면...."

설령 이긴다 해도 상처뿐인 승리가 될 것이다.

"자연스럽게 인구도 대량으로 소멸할 것이며, 이것은 복구가 불가능합니다."

"당장은 그렇겠지."

"인구는 곧 에너지입니다. 다음 전쟁엔 에너지 부족으로 후원자를 보내는 차원 간섭은 물론이고, 침공에 투입할 기본 전력조차 제작하지 못할 지도 모릅니다."

"그래도 이기고 봐야지."

주재자는 건조한 목소리로 대답했다.

"뒷일은 그때 가서 고민하면 된다. 차원 잠재력을 50퍼센트나 발현 시킨 녀석들을 상대로 여유를 부리는 건 사치야. 반발이 나오겠지만 어쩔 수 없다."

반발도 그냥 반발이 아니다. 붕대를 받은 모든 사이크 인의 격렬한 저항에 부딪힐 것이다.

이미 주재자는 '힘의 해방'이라는 큰 실착을 저질렀다.

비록 당장은 잠잠하다 해도, 이런 위기가 반복되면 새로운 주재자를 바라는 목소리가 점점 커질 것이 불 보듯 뻔하다.

그러니 보통의 경우라면 주재자는 이런 위험한 결정을 단독으로 내릴 수 없다.

'...그런가.'

덕분에 집정관은 깨달을 수 있었다.

주재자가 목숨보다 소중한 자신의 개성을 쳐낸 진짜 이유를.

'바로 이 결정을 내리기 위해서였다. 개성을 가진 채로는 함부로 내릴 수 없는 결단을 단행하기 위해서.'

마치 붕대를 막 받은 사이크 인처럼.

자신의 안위보다는 차원 전체의 대의를 위해, 스스로는 물론이고 수만의 사이크 인을 주저 없이 희생하는 결단을 내릴 수 있도록.

생각이 여기에 이르자 두려움과 동시에 경외심마저 들었다.

'대단하다. 과연 주재자는 이 자리에 걸맞은 인물이었군.'

하지만 존경보다 더 큰 감정이 솟구치기 시작했다.

'만약 주재자가 실각하면, 다음 차례는 내가 될 수 있지 않을까?'

욕심.

강렬한 욕심이 집정관의 마음을 사로잡았다. 이미 그의 머릿속에는 차원 전쟁이 끝난 뒤의 정치적 판단들이 펼쳐지고 있었다.

'우선 원로원을 포섭해야 한다. 48명의 시민 대표자들도 전부 끌어들이고. 아니, 그 전에 먼저 주재자에게 명예로운 퇴진을 요구하여 온건하게 검은 붕대를 넘겨받을 수만 있다면....'

이런 집정관의 마음을 아는지 모르는지, 주재자는 감정의 기복이 전혀 없는 목소리로 계속 명령을 쏟아냈다.

"당장은 강화 화염병의 숫자가 부족하겠지. 남은 기간 동안 충분한 숫자를 확보할 수 있겠나?"

"...비상체제로 돌리면 충분히 가능합니다. 다만 모든 명령을 공식 기록으로 남겨주십시오."

"공식 기록?"

"하이시티 전역에 비상체제를 선포하기 위해서입니다. 시민들에게 필요 이상의 에너지 공급을 강요해야 할 테니까요."

"그렇군. 바로 기록해서 넘겨주겠다. 그리고 침공 전에 할 수 있는 일도 추가로 지시하겠다."

"침공 전이라면 차원 간섭 말씀입니까? 하지만 마지막으로 남은 드워프까지 사라진 판국에...."

"물론 우리가 간섭할 수단은 전부 사라졌지."

"설마 아무 매개체도 없이 알드 차원에 사이크 인을 투입하실 생각입니까? 그랬다간 바로 차원 회수가 시작됩니다!"

집정관이 기겁하며 소리쳤다. 주재자는 고개를 저으며 대꾸했다.

"그건 안 될 일이지. 하지만 사이크 인이 아닌 다른 자들을 보내면 상관없지 않은가?"

"...네?"

"사이크 인이 아닌, 그렇다고 사이크에 속한 무기도 아닌 것들을 알드 차원에 투입한다. 그러면 위원회도 대놓고 규정 위반으로 처단할 수 없겠지."

이계 황자는 세상을 구하고 싶다 154화

48장 넥스트 레벨

"아니, 우리가 가진 모든 것은 우리에게 속한 존재입니다. 그렇지 않은 존재가 대체 어디 있습.... 아!"

순간 집정관도 깨달음을 얻으며 탄식했다.

"설마 반란군을 말씀하시는 겁니까?"

"그래. 반란군은 사이크 인이 아니니까."

"하지만.... 으음...."

확실히 반란군은 영생을 얻은 사이크 인이 아니며, 그렇다고 사이크 인이 만들어낸 무기나 도구도 아니다.

"그렇다고 반란군이 사이크 차원에 속하지 않은 존재는 아닙니다. 다만.... 최고 판결을 받을 만큼 무거운 위반은 아닐 것 같군요."

"기껏해야 가벼운 제재만 떨어지겠지. 해볼 만한 가치가 있다. 물론 반란군을 잡아다 그냥 보내봤자 아무 의미 없을 테고, 그렇다고 변이나 개조를 너무 많이 하면 사이크인의 도구로 인식되겠지."

"...제게 좋은 생각이 있습니다."

순간 집정관의 머릿속에 한 가지 아이디어가 떠올랐다.

"예전에 드워프에게 받아온 갑옷이 있습니다."

"갑옷?"

"후원자 1호의 계획입니다. 파이렌이라는 후원인을 공포 군주로 변이시킨 다음, 녀석에게 알드 차원의 무구를 장착시킬 계획이었습니다."

"그런데?"

"무기까지는 계획대로 진행됐지만 갑옷은 장착이 까다로워 포기했다는 기록이 남아 있습니다. 그것을 활용할 생각입니다."

집정관은 스크린에 해당 갑옷을 띄우며 미소를 지었다.

"이것은 어디까지나 알드 차원의 도구인 만큼, 다시알드 차원에 보낸다 해도 규정에 어긋나지 않을 겁니다."

"과연...."

"추가로 갑옷에 티가 안 날 만큼의 가공을 더하면 됩니다. 내부에 투입할 반란군의 정신을 컨트롤할 수 있도록 말이죠."

"그것을 똑같이 여러 개 카피하면 군대를 만들 수 있겠군. 예전에 확보한 알드 차원의 광물은 여분이 충분한가?"

"물론입니다. 차원 간섭의 1차 과정이 해당 차원의 각종 자원을 수집하는 것이니까요. 저장고에 대량으로 쌓여 있을 겁니다."

"갑옷의 사이즈가 커 보이는데 이를 해결할 방법은?"

"해결할 필요도 없습니다. 갑옷 하나에 반란군 여러 명을 집어넣으면 되니까요."

집정관은 스크린을 조작, 사람 형태의 인형을 갑옷에 채워 넣는 영상을 만들었다.

팔다리에 각기 한명씩.

몸통엔 다섯 명이 동시에.

그러자 거대한 갑옷 내부가 빽빽하게 채워졌다. 실로 그로테스크한 광경이 아닐 수 없지만, 사이크 인들의 눈에는 대단히 효율적인 모습으로 인식되었다.

"당장 시작하도록."

주재자는 즉시 명령을 내렸다. 집정관은 허리를 숙이며 곧바로 다음 계획에 착수했다.

'이번 차원 전쟁은 무슨 대가를 치르더라도 반드시 승리해야한다. 주재자의 말처럼 뒷일은 그때 가서 고민하면 돼. 그러면 다음 자리는 내 차지가 될 테니까....'

* * *

내리친 칼날이 땅을 두드린 순간, 선명한 충격파가 지면을 타고 전방으로 쏟아졌다.

콰과과과과과과과광!

훈련장 끝에서 날린 충격파는 훈련장의 중심부에 못 미치고는 서서히 가라앉았다. 훈련장 폭이 200미터쯤 되니.... 대충 사거리가 60미터라고 보면 되는 건가?

"훌륭하십니다. 황자님."

옆에 서 있던 다비가 박수를 치며 고개를 끄덕였다.

"고작 두 시간도 안 되어 파형검을 마스터하다니, 실로 타고난 기재가 아닐 수 없습니다."

"그냥 가르치는 사람이 좋아서 그래."

"저는 기본만 가르쳐 드렸을 뿐입니다."

다비는 허공에 칼질을 하는 시늉을 하며 고개를 저었다.

"집중해서 받아들이는 속도가 정말 놀랍습니다. 전부터 집중력이 뛰어나다고 생각했지만.... 지금은 전 보다 더 올라가신 것 같습니다."

"7개월 뒤면 전쟁이잖아? 상황이 상황이니까. 어떻게든 팍 집중해서 빨리 배워야지."

위기가 다가올수록 집중력 또한 자연스레 오르는 법.

하지만 내가 순식간에 파형검을 완성한건 다른 이유가 있다.

예습을 했으니까.

한때 기사의 길에 매진했을 때, 그나마 가능성이 있다고 생각한 나이트 스킬에 대한 정보를 전부 습득하고 훈련까지 했다.

물론 실제로 성공한 건 기본이 되는 풍압검뿐이었지만....

"파형검은 나이트 커맨더를 증명하는 스킬입니다. 마갑의 등급으로 치면 상급 마갑부터 가능하죠."

다비는 내가 입은 마갑을 가리키며 미소를 지었다.

"그런데 황자님은 지금 하급 마갑을 착용하고 계십니다. 그만큼 스킬에 대한 이해도와 구현력이 압도적이라는 뜻입니다."

"대신 엄청 피곤해."

스킬 테스트 네댓 번에, 실제로는 딱 한번 성공했음에도 몸이 남아나지 않을 지경.

"황자님. 파형검을 완성하신 것을 축하드립니다."

그러자 뒤쪽에 대기하고 있던 메르데스가 얼른 옆으로 다가와 쟁반을 내밀었다.

"체력 영약과 꿀을 찬 곡물가루입니다. 잠시 쉬시는 동안 설탕바와 함께 드시면 좋을 것 같습니다."

"고마워, 메르데스. 너도 훈련하느라 바쁠 텐데."

나는 곡물가루와 꿀과 차를 섞어 만든 걸쭉한 음료를 목구멍에 부어 넣고는 한숨을 내쉬었다.

맛없어....

어떻게 꿀을 넣었는데도 맛이 이따위지?

"죄송합니다. 황자님. 제가 목숨 걸고 담당 시녀들과 함께 더 나은 음식을 만들기 위해 노력하겠습니다."

표정을 읽었는지 메르데스가 순간 무릎을 꿇으며 사죄했다. 나는 쓴웃음을 지으며 찻잔에 남은 음료를 원샷 했다.

"후, 괜찮으니까 하지 마. 너 목숨 걸면 다른 시녀들 다 죽어나갈걸? 먹을 만하니 냅둬. 몸에도 좋은 것 같고."

"황공합니다. 황자님."

"그나저나 마갑은 역시 마갑이네."

그저 입고 있을 뿐인데도 체력이 조금씩 빨려나가는 게 느껴진다.

이미 착용한 지 두 시간이 넘었으니 한계에 도달한 셈. 그것을 각종 영약과 칼로리 높고 흡수 빠른 음식들로 어떻게든 커버하고 있다.

"지금의 황자님이라면 중급 마갑도 30분정도는 버티실 수 있을 겁니다. 그보다 방금 기술에 대해 조금 충고를 드리자면...."

다비는 몸을 웅크리고는 칼로 지면을 찍은 장소를 가리켰다.

"파형검에서 가장 중요한건 바로 첫 충돌입니다. 지면을 칼로 내리치는 순간의 속도죠."

"속도가 느렸나?"

"이번엔 빨랐습니다."

다비는 몸을 일으키며 옆에서 천천히 검을 휘둘렀다.

"파형검도 기본은 풍압검과 같습니다. 풍압검이 두 단계로 구성된다면, 파형검은 총 네 단계로 진행됩니다."

"그래. 아주 느린 가속, 느린 가속, 빠른 가속, 아주 빠른 가속."

"그만큼 긴 시간이 필요하기 때문에, 머리 위에서부터 지면까지 내리 찍는 과정이 필요 합니다."

다비는 일부러 동작을 딱딱 끊으며 가속하는 제스처를 취했다.

"덕분에 발생한 충격파가 강하고 무겁게 가라앉기 때문에, 지면에 닿는 순간 속도가 너무 빠르면 충격이 멀리 퍼지지 못합니다. 그만큼 빨리 소멸하는 문제가 생긴다는 뜻이죠."

"느리게 닿으면 더 멀리 퍼진다고?"

"네. 바로 이렇게...."

다비는 순간 자신이 했던 느린 동작을 원래대로 반복하며 파형검을 시전했다.

콰과과과과과과과광!

오, 진짜 멀리 가네?

다비의 파형검은 훈련장의 중심을 가볍게 넘어섰다. 대략 120미터쯤?

"이게 저렇게 멀리까지 도달하는 기술이었구나. 다른 기사들은 안 그랬던 것 같은데...."

"혹시 다른 기사들의 파형검을 보셨습니까?"

다비는 갑자기 눈을 반짝이며 기사들의 이름을 줄줄이 늘어놓았다.

"백기사단의 나이트 트란과 나이트 가브리스가 파형검을 잘 씁니다. 아, 황궁에 계셨을 테니 왕관 기사단 단장께 시범을 구하셨나 보군요. 나이트 블랙우드의 파형검이 예리한 것으로 유명합니다. 그 밖에도...."

"아니, 그냥 말이 그렇다고. 그보다 틀렸으니 다시 해봐야겠네. 검이 땅에 닿는 순간을 조절해서."

체력도 어느 정도 회복됐겠다, 나는 기지개를 피며 다시 자세를 바로잡았다. 그러자 다비가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

"틀린 게 아닙니다. 서로 장단점이 있다는 것을 말씀드린 겁니다."

"장단점?"

"파형검은 충돌 순간의 속도를 조절해서 기술의 효과에 변화를 줄 수 있습니다. 느리게 치면 충격파가 멀리까지 나가지만 그만큼 위력이 줄어들고, 빠르게 치면 충격파가 짧아지지만 그만큼 위력이 늘어납니다."

"아, 그래?"

"그러니 상황에 맞춰 속도를 조절하면 됩니다. 파형검은 위력이 강하지만 분명한 약점이 존재하니까요."

"그게 뭔데?"

"위가 뚫립니다. 상대가 파형검을 예측하고 미리 준비해서 뛰어 넘어 오면 빈틈을 내 줄 수밖에 없습니다."

다비는 또 한 번 파형검을 시전 하는 자세를 취했다. 덕분에 쏟아지는 충격파를 뛰어넘으며 상대의 머리를 쪼개버리는 상상을 할 수 있었다.

"하긴, 이건 준비자세가 꽤 크니까."

"기술을 쓴 다음 반동도 강합니다. 자세를 바로 잡을 때까지 약간의 시간이 필요하죠. 덕분에 급이 높은 기사끼리 겨룰 때는 파형검을 속임수로 사용하기도 합니다."

"속임수?"

"이렇게 쓰는 척만 하고, 상대가 공중으로 몸을 날려 접근하는 것을 유도해서 맞받아치는 겁니다."

그리고는 혼자서 1인 2역을 하며 상황극을 펼쳤다. 나는 옆에 있는 메르데스가 고개를 끄덕이는 것을 보며 호기심에 질문했다.

"메르데스? 너도 파형검은 쓸 수 있지?"

"써본 적은 없습니다. 대신 상대해 본 적은 있습니다."

"상대 해봤다고? 다비 말이야?"

"아닙니다."

메르데스는 가만히 고개를 저었다.

"전에 탈리스만 백작의 용병들이 저택을 노리고 올 때 파형검을 사용했습니다. 방금 단장님께서 말씀하신대로 충격파를 뛰어넘어 제압할 수 있었습니다."

아하. 메르데스는 이미 이걸 실전으로 체험했구만.

"널 얕보고 무작정 날렸나 보네. 이쪽이 제국 최강 나이트 마스터의 제자인지도 모르고."

"메르데스에겐 처음부터 나이트 스킬의 장단점을 가르쳤습니다."

다비는 메르데스에게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그것이 도움이 된 모양입니다. 마음 같아서는 황자님께도 모든 나이트 스킬을 하나씩 전부 전수하고 싶습니다만.... 아무래도 그럴 필요는 없겠지요."

"왜?"

"왜냐고 물어보셔도...."

다비는 오히려 모르겠다는 얼굴로 반문했다.

"처음부터 그걸 염두에 두고 파형검을 배우신 게 아닙니까? 이계의 괴물들을 상대로는 섬세함 보다는 강한 위력이 필요할 테니 말입니다."

"아니, 딱히 그런 건 아니고...."

내가 파형검부터 가르쳐 달라고 한 이유는, 그저 파형검이 내 머릿속에 로망으로 남아 있었기 때문이다.

지면을 타고 뻗어가는 강력한 충격파.

하지만 과거의 내가 아무리 발악해도 이룰 수 없는 높은 등급의 스킬.

"지금 같아서는 뭐라도 빠르게 배울 수 있을 것 같아. 확실히 집중이 잘되거든. 그러니 다비, 네가 중요하다고 생각되는 나이트 스킬은 전부 알려줘."

"오...."

다비는 감격한 얼굴로 눈물을 닦는 시늉을 했다.

"황자님이라면 제가 가진 모든 기술을 전수 받을 실 수 있을 겁니다. 그런데 대부분은 기사가 다른 기사를 상대하기 위해 만들어진 스킬인데, 그런 것들을 위주로 배우셔도 상관없겠습니까?"

"뭐든 어때. 이계의 군대에 덩치 큰 괴물들만 있는 것도 아니고."

"알겠습니다. 그럼 시작은 진동검입니다."

우우웅!

순간 다비의 검이 시동 걸린 엔진처럼 강하게 떨렸다. 아니 잠깐, 진동검이라고? 얘가 지금 진심으로 하는 말인가?

"진동검은 마스터 스킬이잖아? 나이트 마스터만 쓸 수 있는?"

"꼭 그런 것은 아닙니다. 상급마갑을 착용할 수 있으면 누구든지 사용할 수 있습니다."

"누구든지라니, 세상에 상급 마갑 입을 수 있는 기사가 몇 명이나 된다고."

"하하. 물론 그건 그렇습니다만."

다비는 흥에 겨운 듯 가볍게 웃으며 칼날을 강하게 진동시켰다.

"실제로는 그보다 급이 낮아도 구현이 가능합니다. 그저 체력이나 관절의 소모가 심하기 때문에, 나이트 마스터가 아니면 권장되지 않을 뿐이죠."

"나도 나이트 마스터 아니거든?"

"황자님께서는 원하시면 그 이상도 가능하지 않습니까?"

"빙의 말이야?"

다비는 고개를 끄덕였다.

물론 한 번에 몽땅 빙의하면, 짧게라도 나이트 마스터 이상의 힘을 낼 수 있다.

그러니 당장은 한두 번만 써도 뻗어버릴 지언즉, 그때를 위해 미리 배워 놓으면 좋다는 말이구만.

"좋아. 근데 왜 시작이 진동검이야 하는데? 더 좋은 마스터 스킬도 많이 있잖아?"

"진동검은 공수를 겸하기 때문입니다. 상대의 모든 기술을 안전하게 받아낼 수 없다면, 제아무리 강력한 기술도 발휘해 보지 못한 채 끝나 버리게 됩니다."

"상대의 기술이라. 나야 어지간하면 피하거나 마법으로 받아내면 되는데...."

"제가 중요하다고 생각하는 스킬을 알려 달라고 하지 않으셨습니까?"

다비는 진지한 얼굴로 고개를 저었다.

"그러니 먼저 진동검을 배우셔야 합니다. 이번 기회에 황자님을 그 어떤 강자와도 1대1에서 지지 않을 존재로 만들어 드리겠습니다. 황자님께서는 그저 각오만 단단히 해주시면 됩니다!"

이계 황자는 세상을 구하고 싶다 155화

훈련장 바닥에 시체처럼 엎어진 채, 고개만 옆으로 돌리고 힘겹게 숨을 내뱉었다.

"흐아, 흐아, 흐아, 흐어어...."

간만에 죽을 뻔 했네.

아무리 신체 능력이 올라갔다 해도 안 된다. 나이트 스킬을 계속 썼더니 체력이 진짜 썰물처럼 빠져 나가는구만.

"메르데스... 거기 있지... 마갑... 마갑 좀 벗겨줘...."

"네. 황자님."

메르데스가 순식간에 달려와 마갑을 벗기고 몸을 일으켜주려 했다. 나는 손사래를 치켜 바닥에 얼굴을 처박았다.

"어푸. 괜찮으니 내버려 둬. 여기 좀 누워 있을래."

"그래도 체력의 영약은 드시고 다시 누우시는 게 좋을 것 같습니다만."

"그것도 됐어. 더 마셨다간 배 터질지도 몰라."

나는 엎어진 채로 손사래를 쳤다. 메르데스는 조용히 물러났고, 그러자 다비가 옆으로 다가오며 말을 걸었다.

"제가 일으켜 드리겠습니다. 황자님."

"됐대도? 5분이라도 좋으니 제발 내버려 둬. 난 여기가 좋아...."

"아무리 그래도 황자 되신 분께서 맨땅에 얼굴을 파묻고 계시는 건 조금...."

"아니, 나 이거 좋아. 흙냄새 멋져. 으아, 땅이 날 끌어당기고 있어. 이게 중력인가? 아니 사랑이야. 기껏 세상이 이렇게 애정 표현을 격하게 해주고 있는데 거기 응해주지 않는 것도 도리가 아니지."

이젠 내가 뭔 소리 하는지도 잘 모르겠다. 피곤하니까 입에서 아무 말이나 막 나오는구만.

그만큼 지쳤다. 고작 중력을 거스르는 것조차 힘에 부칠 정도로.

"좀 전에 황자님께서 저희들에게 새 코어를 하사하셨는데, 생각해 보면 황자님은 지금까지의 모든 코어를 하나씩 드셨겠군요."

"그렇지. 안 그랬으면 이런 걸 어떻게 버텨. 근데 왜?"

"그게 아니라면 현실적으로 불가능한 일이라 그렇습니다. 정말 말도 안 되는 습득력이라...."

다비는 좀 전의 파형검보다, 이번 진동검의 성공에 더 큰 충격을 느끼는 듯했다. 물론 이번 거는 마스터 스킬이라 더 그렇겠지만.

"설명드린 것처럼 진동검은 기존의 나이트 스킬과 다른 움직임이 더해집니다."

고개만 살짝 돌리자, 팔꿈치와 손목을 좌우로 돌리는 다비의 모습이 보였다.

"바로 회전이죠. 관절에 수평적인 부하가 추가됩니다. 여기에 기존의 수직적 부하가 더해지면 엄청난 부담이 가중되는데.... 물론 진동검은 여기에 근육의 떨림도 있어야 하지만 말입니다."

"그래. 셋 다 더하니 되더라."

덕분에 약 두 시간 동안 체력을 바닥까지 긁어내야 했다. 오른팔은 쑤시다 못해 저렸고, 지금은 거의 감각 자체가 느껴지지 않는다.

그래도 성공했다.

느낌을 완전히 파악했으니, 다음번엔 시행착오 없이 바로 실전에 투입할 수 있겠지.

"아무튼 놀랐습니다. 아무리 황자님께서 귀신같은 재능을 가지고 계셨다 해도 오늘 안에 완성하는 건 불가능하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래. 나도 놀랐어. 내가 이 정도까지...."

집중할 수 있었는지를.

이쯤 되니 나도 스스로 느끼는 게 있다. 며칠 전 얼음의 정령왕, 바로 글라체스를 상대한 이후로 생각하는 게 기존과 달라졌다는 걸.

정령처럼 사고한다고 하면 좀 과장이려나?

무언가를 대할 때 겉으로 드러난 정보가 아닌, 우선 본질부터 먼저 파악하게 된다.

덕분에 이 마스터 스킬, 진동검도 간단하게 본질을 파악할 수 있었다.

손목과 팔꿈치 관절의 수직, 그리고 수평 방향이 섞인 다중 바이브.

거기에 진폭을 가중시키는 근육의 떨림.

결국 관절과 근육의 힘으로 다양한 파동을 일으킨 다음, 그 파동을 칼날 쪽에 집중하는 것이 진동검의 본질이다.

본질을 파악했다면 다음은 쉽다. 그저 완성될 때까지 시행착오만 반복하면 그만이니까.

"일단 진동검을 완성했다면 다음 것들은 오히려 쉽습니다. 바로 다음 스킬로 넘어가도 될 것 같군요. 이대로 한 시간쯤 쉬고 저녁 식사 전까지 계속 훈련을...."

"아니, 괜찮아."

그전에 선약이 있다. 나는 억지로 몸을 일으키고는 몸에 묻은 흙을 털어냈다.

"오늘은 충분히 배웠어. 나머지는 내일 하자. 메르데스?"

"네. 황자님."

"소화 좀 됐으니까 체력의 영약 다시 가져다 줘. 혹시 먹을 것도 좀 있나?"

"설탕바와 꿀에 절인 과일이 있습니다. 엘스톤 성에서 배워온 레시피로 만든 타르트와 꿀차도 준비되어 있습니다."

어째 달달한 것들만 천국이구만. 나는 어느새 훈련장 옆에 세팅된 간이 테이블과 음식들을 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일단 먹고 움직여야겠어. 그리고 각성의 영약도 좀 가져다 줘."

각성의 영약은 이름 그대로 일시적인 각성과 잠을 깨게 만드는 효과가 있다. 메르데스는 기다렸다는 듯 품속에서 새 영약병을 꺼내며 테이블에 내려 놓았다.

"먼저 요기를 하시고 영약은 다음에 드시는 게 좋을 것 같습니다."

"그래. 다비? 너도 고생했는데 같이 먹을래?"

"영광입니다만 사양하겠습니다."

다비는 고개를 저으며 멀리 훈련장 주변을 달리고 있던 다른 기사 단원에게 소리쳤다.

"리넨! 디디! 라니르! 체력 훈련은 그만한다! 지금부터 전신 복합 훈련을 시작한다!"

"네! 단장님!"

그러자 세 소년이 삽을 들고는 부리나케 달려와 엉망이 된 훈련장 바닥을 복구하기 시작했다. 나는 꿀과 약초향이 진한 차를 한입 마시며 혀를 찼다.

전신 복합 훈련이라. 노가다를 그렇게 부를 수도 있구만.

"저는 지금부터 다른 단원들의 훈련을 봐주도록 하겠습니다. 황자님께서는 이후에 다른 일정이 있으십니까?"

"있지."

나는 고개를 돌려 멀리 서쪽 숲을 바라보며 대답했다.

"저녁 먹기 전에 봐주기로 한 게 있어. 그것도 꽤 피곤할 것 같긴 한데...."

* * *

"필요한 건 압축임. 너 템페스트 만들 마력은 이미 충분하고."

서쪽 숲의 뻥 뚫린 공터에서, 톨라리는 루네를 붙잡아 놓고 일대일로 과외수업을 하고 있었다.

"잘 봐. 손바닥 위의 기류가 점점 소용돌이치지?"

"네. 언니."

"너는 얼음 결정이 소용돌이 칠 거야. 그렇지. 압축을 극한까지 하면 이렇게 마법이 회전을 해. 그럼 이걸 날리면 그만이야. 잘한다 우리 루네. 바로 그거야!"

"이걸 바로...."

그렇게 완성된 템페스트를 멀리 날리려는 순간, 루네는 갑자기 마법을 거둬들이며 내가 서 있는 쪽으로 몸을 돌렸다.

"안녕하세요 황자님. 어서 오세요."

"황자님! 언제 왔어!"

톨라리도 깜짝 놀라며 내 쪽을 돌아봤다. 나는 훈련장에서 포장해온 간식거리를 두 사람에게 내밀며 대답했다.

"방금 왔지. 그보다 벌써 템페스트 완성했네? 어제부터 훈련 시작한 거 아니었어?"

"응. 루네 마력 엄청나서, 방법만 알면 금방이야. 그리고 간식 고마워 황자님."

톨라리는 간식거리를 받아 루네의 손에 쥐여주었다. 루네는 즉시 보따리를 풀고 안에 들은 것들을 보며 눈을 깜빡였다.

"루네야, 그거 너 혼자 다 먹어도 돼."

"정말요? 제가 다 먹어도 괜찮아요?"

"응. 배고프지? 빨리 먹어."

그러자 루네가 활짝 웃으며 각종 달달한 음식들을 흡입하기 시작했다. 어쩐지 그날 이후 표정이 냉랭해 졌는데.... 그래도 저렇게 웃으니 보기 좋구만.

"루네 최고야. 진짜 엄청 강해졌어."

톨라리는 루네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웃었다. 실제로 반 정령화를 거친 다음, 루네의 마력은 말도 안 될 수준으로 높아진 상태.

종족 : 마법융합생물.

현재 힘 : B

현재 마법 : S

잠재 정령 마법 : S

S가 두 개!

톨라리를 처음 봤을 때도 마법이 S등급은 아니었는데, 얘는 이미 그 이상이 되어 버렸다.

힘 B등급인 것도 대단하지만, 정령마법에 대한 잠재력이 S등급인건 본인이 반쯤 정령이 되어 버렸기 때문이겠지?

근데 정령이 정령을 소환하는 건 좀 이상한 것 같은데....

"역시 루네 이쁘지? 뚫어져라 계속 보고 싶을 정도로?"

톨라리가 루네 얼굴에 자신의 얼굴을 찰싹 붙이며 물었다. 나는 쓴웃음을 지으며 한발 뒤로 물러났다.

"맞아. 이뻐."

"감사합니다. 황자님."

루네는 가만히 고개를 숙였다. 다만 종족이 '마법융합생물'인 건 마음에 좀 걸린다.

물론 인간과 정령이 융합되었다는 의미겠지만, 전에 겔리와 융합한 후원자도 종족명이 저렇게 떴었거든.

그나저나 보자기에 싸들고 온 간식을 벌써 다 먹었네? 루네는 내 시선을 느꼈는지 보자기를 접으며 다시 고개를 숙였다.

"죄송합니다. 황자님. 제가 너무 많이 먹게 돼서...."

"어허, 너 잘못 아니래도?"

그러자 톨라리가 어깨를 두드리며 대신 격려해 줬다.

"갑자기 힘을 얻었으니 많이 먹는 게 당연한 거야. 그치 황자님? 루네 많이 먹어서 좋지? 성장기엔 많이 먹어야 쑥쑥 크지?"

"음...."

물론 루네가 성장기라서 식사량이 늘어난 건 아니다.

저택에 돌아온 뒤로 갑자기 식사량이 대폭 상승했다. 아무래도 정령화가 진행된 게 원인인 듯한데....

"…루네야?"

"네. 황자님."

"내가 이쪽 눈으로 마력의 본질을 좀 볼 수 있거든."

"네. 저도 그쪽 눈에서 무언가 특이한 게 느껴져요."

루네 역시 내 오른쪽 눈을 뚫어져라 바라보았다. 나는 감정안을 열어 루네의 몸을 잠시 살피다 말했다.

"물론 넌 인간이지만, 동시에 정령 비슷한 무언가기도 해. 알지?"

"네. 알아요."

"정령은 자연에서 마력을 흡수하는데 넌 기본이 인간이라 그렇게는 못 해. 그래서 먹는 양이 늘어난 거야."

"얼음의 정수를 안고 있으면 허기가 사라지긴 하는데...."

"절대 안 돼."

나는 즉시 고개를 저었다.

"앞으로 어지간하면 그거 곁에 놓지도 마. 지금은 제정신이 돌아왔지만 언제 다시 정령 쪽으로 넘어갈지 모른다고."

"네. 황자님 말씀에 따를게요."

루네는 넙죽 고개를 숙였다. 순간 루네의 내부에 있는 정령의 흐름이, 내 머릿속에 있는 마력의 정수와 연결된 것을 느낄 수 있었다.

그래. 이리저리 둘러대긴 했지만 결국 루네의 본질은 정령에 가깝다.

그저 남아 있는 인간적인 부분에 어떻게든 더 집중할 뿐이다. 한층 강해진 톨라리의 스킨십도 그렇고.

"좋아. 그럼 지금부터 실전 테스트하자."

"실전?"

순간 톨라리가 먼저 반응하며 고개를 저었다.

"미안 황자님. 난 루네랑 실전은 못 할 것 같아. 아무리 테스트라도 이렇게 귀여운 걸."

그리고는 뒤에서 루네를 껴안으며 목 부근에 냄새를 맡기 시작했다.

"스읍. 와, 몸에서 마력 소모했을 때 나는 특유의 향이 계속 나. 이거 머릿속에서만 느끼던 건데 실제로 몸에서 나니 너무 신기한 거 있지?"

"...뭐?"

"역시 반쯤 정령이 되어서 그런가? 처음엔 살짝 안타까웠는데 지금은 더 좋아. 사춘기 느낌? 분위기가 좀 쿨해진 것도 맘에 들고. 몸도 약간 냉랭해졌어. 춥진 않지?"

"톨라리 언니...."

"자자. 됐으니까 그만 좀 떨어지고."

나는 톨라리 강제로 떼어 내고는 루네와 일대일로 마주보았다.

"너희끼리 실전하라는 거 아니야. 루네랑 내가 하는 거지."

"응? 정말?"

"루네가 아침에 와서 부탁했어."

"바쁘실 텐데도 시간 내주셔서 정말 감사해요. 귀찮게 굴어서 죄송합니다."

루네는 빙하처럼 투명한 눈으로 날 가만히 바라보았다.

"그래도 확인하고 싶었어요. 나중에 적들이 침략해 왔을 때 제가 얼마나 잘 싸울 수 있을지. 그래서 황자님께 테스트를 부탁드린 거예요."

"앗, 그렇구나. 우리 루네 기특하기도 하지."

그러자 톨라리가 다시 달라붙으며 어깨를 토닥여줬다. 나는 고개를 저으며 한 발 더 뒤로 물러섰다.

"죄송할 거 없어. 나도 이번 기회에 테스트 할게 있거든."

바로 글라체스에게 얻은 마력의 결정.

기존에 리치에게 얻은 마력 결정에 비해 두 배 이상 거대한, 이 새로운 마력 결정의 성능을 시험할 생각이다.

굳이 왜 그러냐 하면....

이건 좀 다르거든.

리치의 마력결정과는 느낌이 꽤 다르다. 분명 내 안에 있긴 하지만, 완전히 내 것이 된 것이 아니라 어쩐지 빌려 쓰는 느낌.

"자, 그럼 마음껏 덤벼. 반격하지 않고 막거나 피하기만 할게."

"정말... 괜찮을까요?"

루네가 주저하며 물었다. 나는 손으로 허리를 짚으며 가볍게 눈살을 찌푸렸다.

"왜? 내가 너한테 죽을까 봐 겁나?"

"아니, 그런 게 아니라.... 죄송합니다. 황자님. 감히 제 주제에."

"걱정 마. 황자님은 유일한 분이니까. 네가 전력을 쏟아내도 눈 하나 깜짝 안 하고 끄떡없을."

"...네."

톨라리의 말에 용기를 얻었는지 표정에 각오가 돌아왔다. 톨라리는 그제야 루네를 놓아주며 슬슬 옆으로 빠지기 시작했다.

"그럼 잘해! 황자님도 좀 봐주면서 해줘!"

"뭔 소리야. 반격도 안 할 건데 봐주긴 뭘 봐줘."

"그런가? 그럼!"

그리고는 비행 마법으로 빠르게 공터를 벗어났다. 동시에 웅크리고 있던 루네의 몸에서 서늘한 푸른 빛이 아지랑이처럼 피어오르기 시작했다.

"그럼.... 실례하겠습니다!"

이계 황자는 세상을 구하고 싶다 156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