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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계 황자는 세상을 구하고 싶다 144화

43장 하룻강아지

"...정말? 그래서?"

"당연히 교환했다. 코어는 원래 다른 마수와 친분을 쌓을 때 사용한다. 우리가 먼저 나서긴 힘들지만... 저쪽에서 고개를 숙이고 교환을 요청하면 어지간하면 들어줄 수밖에 없다."

"그래서?"

"그래서 남은 코어가 하나뿐이다. 그때 네 개를 넘겨준 바람에...."

"아니, 그거 말고 고대 거북이 코어 어쨌냐고."

"흡수했다."

다미갈은 장로 늑대들을 하나씩 살피며 말했다.

"장로들에게 하나씩 나눠 주었다. 내가 흡수해 봤자 심약하여 제대로 활용할 수도 없을 테니...."

아, 망할.

그래서 저 장로 늑대들 내구력이 끝내줬구나!

나도 나름 힘 조절을 하긴 했지만, 솔직히 어퍼컷 맞고 날아간 녀석은 죽어도 전혀 이상하지 않은 상황이었다.

그런데 멀쩡히 살아서 돌아왔다. 그게 다 에이션트 터틀 코어 때문이었다니....

"거북이들은 북쪽의 북쪽으로 떠난다고 했다."

"응?"

"녀석들은 세상에 위기가 찾아오기 시작했다며, 그곳에 있는 초월적인 존재의 권속으로 들어가 종족을 보전하겠다고 이야기했다."

"북쪽의 북쪽에 있는 초월적인 존재라면...."

생각할 필요도 없다. 당연히 얼음의 정령왕이겠지.

"워낙 춥고 험한 곳이라, 그곳에서 버티려면 다른 마수의 코어가필요하다 했다. 그래서 지금 내가 줄 수 있는 코어는 하나뿐이다."

그리고는 울컥하며 점액에 둘러싸인 녹색 빛의 구슬을 토해냈다. 이것 참, 데스 울프에 더해 또다시 대박을 건질 수 있을 줄 알았는데....

아니 잠깐.

그래도 덕분에 다른 문제를 해결할 수 있을 것 같은데?

"어쩔 수 없지. 그럼 지금부터 내 말 잘 들어."

"무엇이든 말해라. 처음부터 경청하고 있었다."

"데스 울프라는 녀석들이 있어. 예전에 너희 에이션트 울프에서 떨어져 나간 무리인데, 죽음을 너무 좋아해서 죽음의 신 성역에 살고 있었거든."

"데스 울프라. 선대로부터 오래전에 그런 녀석들이 무리를 떠났다는 이야길 들은 적이 있다."

"그 녀석들이 얼마 뒤에 여기로 올 거야. 며칠 동안은 내가 보살필 건데, 그 뒤로는 영원의 숲에 보낼 테니 서로 싸우지 말고 같이 잘 좀 지내."

"뭐라고?"

순간 족장이 아닌 수석 장로가 발끈하며 말했다.

"그런 녀석들을 어찌 신성한 숲에 받아들이란 말이냐. 있을 수 없는 일이다."

"정말? 그럼 너희 싹 다 죽이고 대신 넣으면 될까?"

"아니...."

"지금 내가 부탁하는 걸로 보여?"

나는 녀석의 주둥이 속에 손을 쑥 넣으며 경고했다.

"이건 자비야."

"자, 자비라니, 세상에 어떤 자비가...."

"네놈들을 안 죽이고 살려 두는 게 바로 자비야."

"으...."

파직!

입속에서 번개의 템페스트를 만들자 빛이 번쩍였다. 녀석은 입을 점점 크게 벌리며 온몸을 바들거리기 시작했다.

"죽고 싶으면 맘대로 해. 그게 아니면 대가를 치러. 이건 너희가 죽지 않기 위해 치러야 할 대가야. 부탁이 아니라 명령이라고."

"아.... 알겠다."

"그리고 족장이랑 이야기하는 데 나서지 말고."

나는 마법을 풀고 손을 뽑아낸 다음 족장에게 미소를 지었다.

"알았지? 대충 100마리 좀 넘을 텐데, 덩치도 작으니까 먹는 것도 많지 않을 거야. 그날이 올 때 까지 친하게 지내."

"알았다. 영원의 숲은 넓다. 절대 싸우지 않고 친하게 지내겠다."

다미갈은 냉큼 고개를 끄덕이며 물었다.

"그런데 그날이 올 때까지라니, 무슨 날을 말하는 것인가?"

"당연히 웨이브 날이지."

"웨이브?"

"이계 침공 말이야. 앞으로 8개월쯤 남았어. 그때가 되면 너희 모두 실전에 투입할 거니까 그렇게 알아둬."

"실전이라...."

다미갈은 우울한 얼굴로 고개를 숙였다.

"솔직히 말해.... 난 마음이 약하다. 전쟁이 시작되면 마음이 꺾여 버릴 것이다. 제대로 싸울 자신이 없다. 차라리 그날이 되면 나 대신 르갈에게 일족을 이끌고 싸우라 하는 게 좋을 것 같다."

"아니, 르갈은 따로 할 일이 있어."

르갈은 이번 2차 사령전쟁처럼 리넨 태우고 필요한 곳에 기동력을 더해 줘야 한다. 그 밖에도 맡길 일이 여러 가지 있고.

"그리고 늑대들을 이끌고 싸울 수 있는 건 오직 너뿐이야. 다미갈. 에이션트 울프의 하나뿐인 족장."

"...말했지 않나. 나는 전사가 아니다. 전사의 심장을 가지고 태어나지 못했다."

"과연 그럴까?"

나는 군주의 눈을 발동시키며 녀석을 노려보았다.

"네가 지금은 이래 보여도, 나중에 진짜 싸울 때가 되면 야수처럼 미친 듯이 싸울 거야."

"내가? 내가 말이냐?"

"응. 이 눈 보이지? 녹색으로 반짝이는 거?"

"그래. 보인다만...."

"이거 군주의 눈이야. 내가 엘프 군주 죽이고 녀석의 눈을 이어받았어."

"라니르의 눈 말인가? 나무의 정령에게 이야기는 들었다만...."

"그래. 그거."

나는 오른쪽 눈을 손가락으로 크게 벌리며 강조했다.

"이 눈은 사물의 본질이 보여. 그래서 난 볼 수 있어. 네 안에 진짜 사납고 무시무시한 전사의 본질이 숨어 있는 게."

"내 안에...."

"대신 그걸 깨우기 위해서는 일족의 죽음이 필요해."

"죽음?"

"다른 에이션트 울프가 네 옆에서 죽으면 깨어날 거야. 그때까지 기다리든가, 아니면 자길 믿고 스스로 깨어나든가는 네가 알아서 해."

"아...."

녀석은 멍한 얼굴로 자신의 몸을 바라보며 중얼거렸다.

"그런... 내 안에 그런 게 있었다니.... 믿을 수 없다. 하지만 군주의 눈이라면... 정말 사실인가?

"정말이야. 날 믿어."

사실은 뻥이지만.

아무리 군주의 눈이 본질을 본다 해도, 그런 숨겨진 본능까지 확인할 수는 없다.

하지만 녀석의 안에 진짜 야수가 숨어 있다는 건 사실이다. 실제로 동료가 죽기 시작하면 극악한 야수로 돌변하니까.

그걸 어떻게 아냐고?

당연히 예전에 경험했으니까.

코어의 존재를 모르던 과거에는, 녀석들을 통째로 해독제로 쓰기 위해 대학살극을 벌였다.

당시에 광기에 젖어 날뛰던 에이션트 울프 족장의 모습이 아직도 눈에 선하다. 물론 지금 눈앞에 있는 녀석이 바로 그때 그 녀석일 테고.

"내 안에 그런 것이.... 아니, 알겠다."

흐리멍덩하기만 하던 다미갈의 눈이 점점 변하기 시작했다.

군주의 눈에 여러 가지 것들이 보였다. 머릿속에 가득하던 의심과 무력감이 사라지고, 자신에 대한 믿음과 자신감이 점점 차오르기 시작한다.

아무래도 내 허풍이 제대로 먹힌 모양이다. 하긴 아예 없는 거짓말을 지어낸 게 아니니까.

"돌아가면 지금부터라도 훈련을 시작하겠다. 일족을 이끌고 전투에서 활약할 수 있도록."

"잘 생각했어. 그나저나 고대 거북이들 언제 북상했다고? 9년 전?"

"에이션트 터틀 말인가? 그렇다."

"그 뒤로 연락 없었고?"

"없었다. 북쪽의 초월적인 존재라면 분명 얼음의 정령왕일 테니, 지금쯤 그곳에서 정령왕의 권속이 되어 있을 것이다."

그렇지. 불의 정령왕에 붙어살던 고대 물개들처럼.

덕분에 좋은 정보를 알게 됐다. 언제 시간 내서 그쪽도 가봐야지. 물론 과거의 경험을 떠올리면 절대 쉬운 일이 아니겠지만....

"좋아. 그럼 볼일은 끝났어. 다들 일어나."

나는 그때까지도 납작 엎드려 있던 늑대들을 일으키며 말했다.

"이제 정리하고 영원의 숲으로 돌아가. 내가 했던 말들 명심하고."

"명심하겠다. 우리는 숲에 속한 자들이니...."

다미갈은 여전히 떨떠름해 보이는 장로들을 돌아보며 말했다.

"크게 보면 대지의 정령왕의 은혜를 받고 사는 고대종이라 할 수 있다. 그러니 그분과 계약한 네 말에 따르는 것은 이치에도 맞는 일이다."

"그것은...."

"확실히 그렇다."

"흐음. 맞는 말이다."

"족장의 말에 동의한다."

그러자 장로 늑대들도 납득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이거 봐라? 우리 족장 늑대가 그 짧은 사이에 꽤나 의젓해 졌는데?

"그럼 다들 먼저 숲으로 돌아가라. 나는 이곳에서 마지막으로 볼일을 보고 따라가겠다."

다른 늑대들을 전부 돌려보낸 다미갈은, 그제야 내 옆에 있던 르갈과 시선을 맞추며 입을 열었다.

"형제. 오랜만이다."

"그래 형제. 오랜만이다."

르갈이 무표정한 얼굴로 대꾸했다. 다미갈은 눈을 감고 잠시 생각하다 말했다.

"그때, 네가 날 위해 일족을 버리고 숲을 떠난 건 알고 있었다."

"..."

"그래서 장로들이 뭐라 해도 어떻게든 버텼어야 했는데.... 이번에 우연히 가까운 곳에 온 네 냄새를 맡고 반응해 버렸다. 그래서 장로들이 낌새를 알아 차고 날 추궁했고."

"내 냄새를 맡았다고?"

"그래."

"난 냄새를 지웠다. 그런데 어떻게 맡을 수 있었지?"

르갈이 눈을 크게 뜨며 물었다. 다미갈은 입가에 미소를 지으며 대답했다.

"난 처음부터 맡고 있었다. 우린 형제니까."

"...."

"넌 나와 같은 냄새가 난다. 아주 같진 않지만 거의 같다."

다미갈은 르갈의 목덜미에 머리를 들이밀며 숨을 들이마셨다.

"킁.... 그래. 바로 이 냄새다. 아무리 감춰도 사라지지 않는다. 그렇지 않나 형제? 너도 항상 내 냄새를 맡고 있었겠지?"

"...그렇다."

르갈은 다미갈의 머리에 턱을 기대며 말했다.

"덕분에 네가 그곳에 건강히 있다는 걸 항상 알고 있었다."

"그럴 줄 알았다. 이젠 나도 떳떳이 말할 수 있게 됐다. 네가 건강한 몸으로 어딘가에 잘 살고 있다는 걸. 너의 친구인 클로드에게 감사한다."

녀석은 르갈로부터 몸을 빼내며 내 쪽으로 고개를 꾸벅였다.

"그리고 이제부턴 많은 게 달라질 것이다. 내가 부족을 이끌고 통솔할 것이다. 부끄럽지 않은 족장이 될 테니 지켜봐다오."

"지켜보겠다. 형제여."

르갈은 무표정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다미갈도 고개를 끄덕이고는 바로 몸을 돌려 숲으로 사라졌다.

"휴우.... 겨우 끝났군요."

뒤에 있던 카일이 가슴을 쓸어내리며 말했다.

"늑대들이 처음 몰려왔을 때는 정말이지 간 떨어지는 줄 알았습니다. 단장님이 중심을 잡아주셔서 망정이지, 안 그랬으면 바로 전투가 벌어졌을 겁니다."

"수고했어. 덕분에 피 안 보고 잘 끝났네."

물론 피를 본 늑대가 몇 마리 있긴 하지만 뭐 어때. 목숨 건지고 사지 멀쩡히 돌아갔으니 그것만으로도 해피엔딩이지.

"...르갈?"

"왜 그러냐 클로드."

"기분 좋아 보이네. 아까 처음 봤을 때는 완전 겁에 질려 있더니."

"정말 겁에 질려 있었다."

르갈은 순순히 인정했다

"결국 내 손으로 형제를 죽일 수밖에 없는가 싶어 두려웠다. 네 덕분에 모든 게 잘 풀려서 감사한다. 클로드."

"이제 다른 늑대들이 널 건드릴 수 없을 거야. 고향 생각나면 영원의 숲에 들려도 괜찮지 않을까?"

"난 이미 그곳을 떠났다. 이젠 여기가 내 고향이다."

르갈은 루넨브레스 숲을 둘러보며 미소를 지었다. 그리고는 고개를 숙여 자신의 냄새를 맡으며 말했다.

"다만 탈취의 영약은 더는 필요 없을 것 같다."

"그러게. 영약 값 굳겠네. 대신 데스 울프 먹일 고깃값이 새로 엄청 들겠지만."

"며칠만 돌보다 영원의 숲으로 보낸다 하지 않았나? 그곳은 넓은 숲이니 녀석들을 다 먹이고도 남을 수많은 동물들이...."

그때 르갈의 표정이 살짝 일그러졌다. 나는 녀석이 보는 방향으로 걸음을 옮기며 물었다.

"왜 그래? 저쪽에서 뭐가 와?"

"잘 모르겠다. 아직 후각이 완전히 돌아오지 않아서. 하지만 뭔가가 이쪽으로 오고 있는 건 확실하다."

바로 그때, 숲의 북쪽 통로 방향에서 뭔가가 빠르게 저택 쪽으로 달려오기 시작했다.

"저건 대체...."

산양?

커다란 뿔이 꽈배기처럼 말려있는 산양들이 급하게 마차를 끌고 있었다. 나는 마부석에 앉은 키 작은 남자를 확인하고는 소리쳤다.

"드워프!"

"오오! 그쪽은.... 르갈!"

녀석은 나보다 르갈을 먼저 발견하고는, 마차를 세우지도 않고 옆으로 몸을 던져 바닥을 구르기 시작했다.

"큰일이야!"

그리고는 이곳 훈련장 쪽으로 정신없이 달려오며 소리쳤다.

"큰일이야! 큰일이 났어! 지금 당장 알려야 한다고!"

"...하륨인가."

르갈은 드워프의 얼굴을 알아보고는 훌쩍 달려 녀석을 맞이했다.

"무슨 일이냐 하륨. 넌 군주의 부관 아닌가? 왜 네가 직접 여기까지 왔지?"

"지금 주둔지에 큰일이 났어! 황자님 계시나? 빨리 알려야 해!"

"나한테 뭘 알린다고?"

내가 비행마법으로 빠르게 옆에 붙자, 드워프는 화들짝 놀라며 내 몸을 살폈다.

"헛, 이토록 작은 키에 빼빼 마른 몸이라니! 당신이 바로 클로드 황자님이시군요!"

"음...."

살짝 빡쳤지만 뭔가 급한 거 같으니 참자.

"내가 클로드 맞아. 드워프가 여기까진 어쩐 일인데? 갑옷 납품하러 온 건 아닐 테고?"

"큰일 났습니다요! 군주께서 후원자의 마수에 빠졌지 뭡니까! 르갈이 와서 경고했던 그 일이 벌어지고 말았습니다요!"

"...."

너무 갑작스런 일이라 순간 머리가 멍해졌다. 드워프는 양손으로 자신의 머리를 부여잡고 쥐어뜯기 시작했다.

"르갈이 분명히 경고했는데.... 한눈팔면 후원자가 몰래 나타나 군주님을 괴물로 바꿀지도 모른다고...."

"잠깐, 겔리가 벌써 괴물이 됐어? 이계의 마물로 변한 거야?"

"마물...은 잘 모르겠습니다요. 확실한 건 후원자로 변했다는 것뿐입니다.

"뭐?"

"군주님이 후원자로 변했습니다요. 아니 글쎄 군주님께서 그 허연 붕대를 온몸에 감고 소리치시지 뭡니까! 이 녀석은 우리 모두를 죽일 거야! 당장 도망쳐! 도망쳐서 황자에게 전해라! 큰일이 났다고!"

이계 황자는 세상을 구하고 싶다 145화

44장 그림자 전투

영원의 숲 동남쪽에 있는 드워프 주둔지.

달빛 아래 보이는 거라곤 군데군데 쓰러져 있는 죽은 드워프 시체뿐.

그렇다고 여기 있던 천 명도 넘는 드워프가 몰살한 건 아니다. 다수가 주둔지를 벗어나 사방으로 흩어져 목숨을 구했다.

부관 드워프가 큰일 해줬구만.

어제 일이긴 하지만, 아무튼 한밤중에 터진 일이라 대응이 늦었으면 드워프 줄초상 치를 뻔했다.

바로 저놈 때문에.

"후원자...."

엉망이 된 막사 한가운데, 온몸을 붕대로 감은 남자가 홀로 우두커니 서 있다.

"저게 후원자인가 보군. 근방에 살아있는 건 녀석뿐이네."

테우스가 주둔지의 상공을 선회하며 말했다. 나는 고개를 끄덕이며 분석안을 발동시켰다.

거리가 엄청 멀긴 한데.... 이렇게 먼 곳에서도 확인이 될까?

종족 : 마법융합생물.

현재 힘 : S

현재 그림자 : S+

현재 차원능력 : D-

된다.

그나저나 힘이 S급이면 나이트 마스터 수준이잖아?

차원능력만 제외하면 1호 후원자에 비해 압도적으로 강해졌다. 여기에 종족도 변했고.

"전에는 마법생물이었는데 지금은 마법융합생물이 됐어."

"음? 무슨 말이지 잘 모르겠네."

"실은 나도 잘 몰라. 융합이 추가로 붙었다는 거 말고는."

"숲을 찾아온 드워프가 말하지 않았나. 군주가 후원자로 변했다고. 그렇다면 둘이 융합한 것이겠지."

"그래. 하지만...."

어떻게?

그리고 애당초 이런 게 가능했으면 처음부터 하면 되지 않았을까?

드워프 군주 겔리는 훌륭한 대장장이지만 전투 능력은 떨어진다.

그러니 융합을 통해 조종하고 간섭할 수 있다면 엘프 군주나 아크 위저드에 하는 게 훨씬 위협적이었을 텐데.

일단 힘이 아무리 강해봤자, 이렇게 하늘 높이 떠 있으면 공격받을 염려는 없다.

"어떻게 할 생각인가? 마법을 투하할 거라면 고도를 좀 낮추겠네. 거리가 너무 멀면 화력이 떨어질 테니."

"애당초 마법 내성이 있는 녀석이라.... 최대한 붙어서 화력 집중할 거 아니면 의미 없을 거야."

"그렇다면 정령? 하지만 자네 반나절 전에 대지의 정령왕을 사용하지 않았나."

"추가로 바위 정령도 같이 썼고. 지금 가능한 건 이그니스뿐이야."

드라이어드와 사일런스는 일단 제쳐두고서라도, 녀석에게 통할 만한 건 불의 정령왕과의 빙의뿐이다.

"물론 퓨어 매직도 있긴 한데."

종족이 마법생물이라 퓨어 매직 한 방에 보낼 수 있다. 전에 1호 후원자도 그렇게 제거했고.... 물론 그땐 녀석이 일부러 당해준 거긴 했지만.

"퓨어 매직은 범위가 좁아 피하면 그만이야. 대놓고 쏘면 절대 못 맞춰."

실제로 2호 후원자가 눈앞에서 날린 퓨어 매직을 가볍게 피해냈다. 그때도 피했는데 지금이라고 못 피할까?

"크흠. 퓨어 매직이라. 나도 근본은 마력으로 이뤄진 생물이네. 행여 스치기라도 하면 한방에 소멸할지 모르니 주의해 주면 좋겠네."

"아예 시작 전에 미리 멀리 빠져있어. 아무리 하늘을 날고 있어도 잘못 휘말리면.... 응?"

그때 온 세상이 까맣게 변했다.

뭐지 이건?

아무리 한밤중이라도 이런 어둠은 불가능하다. 방금까지 훤하게 달도 떠 있었는데.

"...."

아, 달이 없네.

고개를 치켜들자 밤하늘에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달도, 그리고 별도.

"클로드! 주변에 빛이 사라졌네! 대체 무슨 일인가!"

테우스가 몸을 떨며 소리쳤다. 나는 오금이 저리는 꺼림칙함을 느끼며 즉시 실드 오브 라이트를 전개했다.

팟!

눈부시게 반짝이는 방패.

하지만 어째서인지 주변으로 빛을 뻗어내지 못했다.

빛이 어둠에 먹힌다?

동시에 그 어둠 너머로 뭉툭한 덩어리가 내리꽂혔다.

"망치...."

나는 엉겁결에 방패를 들어 그것을 막았다.

파직!

그 한순간, 마치 번개가 치듯 주변이 환하게 빛났다.

후원자.

갑자기 머리 위에 나타난 후원자가 손에 쥔 망치를 내리찍었다.

그 일격으로 빛의 방패가 산산조각으로 흩어졌고, 동시에 엄청난 힘이 나는 물론이고 내가 올라탄 금독수리까지 지면을 향해 내리꽂기 시작했다.

"크헉!"

어찌나 강한 힘인지, 추락하는 테우스의 날개가 뒤로 꺾이고 있다.

"으...."

내 몸에 쏟아지는 가속도 역시 엄청났다. 그 와중에 멀리 떨어졌던 후원자가 또다시 머리 위로 나타나 재차 망치를 휘둘렀다.

파지지지직!

이번에도 빛의 방패를 만들어 막았고, 마찬가지로 한방에 박살나 흩어졌다.

"클로드!"

순간 테우스가 꺾이려던 날개를 가까스로 휘두르며 추락을 멈췄다.

부우우우웅!

그 한 번의 날갯짓에 엄청난 돌풍이 발생했다. 나는 즉시 녀석의 등 위에서 뛰어내리며 빛 한 점 없는 허공을 비행했다.

"테우스! 무조건 하늘 쪽으로 올라가! 그럼 빠져나갈 수 있을 거야! 난 여기서 알아서 싸울게!"

"아, 알겠네! 승리를 빌겠네!"

위를 향하는 테우스의 모습이 순식간에 사라지며 어둠에 묻혔다. 동시에 등 뒤에서 슉 하는 소리가 들렸고.

"큭!"

나는 급하게 옆으로 몸을 날린 다음, 무작정 정면의 어둠속을 향해 전력으로 비행하기 시작했다.

그러자 어느 순간 주변이 밝아졌다.

"아...."

한밤중인데도 세상이 이렇게 환하게 느껴질 줄이야.

하늘에 뜬 달이 오늘만큼 눈부시게 보인 적이 없다. 고개를 돌리자 방금까지 내가 있던 새까만 영역이 을씨년스럽게 출렁대기 시작했다.

그림자 결계.

전에는 이런 게 존재하는지도 몰랐는데.

며칠 전 퀸시에게 그림자 능력을 받고, 사령군 장로들에게 각각 능력을 테스트한 뒤에야 이 능력의 실체를 알게 되었다.

"하지만 아무리 그래도...."

이건 너무 넓잖아?

그림자 결계는 말 그대로 그림자에 뒤덮인 어둠의 영역을 만들어 내는 능력.

결계 내부에 빛을 차단해 상대방을 혼란에 빠지게 만들 수 있다.

이걸 특기로 하는 사령군 장로조차 시범삼아 만든 영역이 대략 백 미터 정도. 그런데 눈앞의 결계는 못해도 그 열 배에 달한다.

변 하나가 1km에 달하는 거대한 어둠의 정육면체라니.

후원자는 이렇게 만든 결계 내부를 그림자 잠입을 통해 자유롭게 드나든 것이다.

어차피 온 세상이 그림자니까.

팟!

순간 그 거대한 영역이 한 번에 사라졌다.

멀리 지면에 서 있던 후원자가 내 쪽을 향해 망치를 내밀고 위아래로 까딱였다.

군주의 눈을 뜨지 않아도 알 수 있을 만큼 명백한 도발.

"이놈 새끼가...."

두고 보자.

먼저 녀석과의 거리를 최대한 정확히 가늠한다.

다음으로는 일부러 마력결정만 활용, 손을 쓰지 않고 불의 템페스트를 만들어 녀석을 향해 쏘았다.

화륵!

다음으로 오른손을 앞으로 쭉 내밀어 보란 듯이 퓨어 매직을 제작.

푸화아아아악!

녀석은 예상대로 템페스트를 피하지 않았고, 나는 군주의 눈을 발동함과 동시에 작열하는 폭염 너머를 향해 퓨어 매직을 쏘았다.

지이이이이잉!

투명한 빛이 막 폭발하는 화염을 뚫고 녀석의 가슴을 관통....

"...."

...하진 못했다.

불꽃과 폭염으로 시야를 차단했음에도 불구하고.

녀석은 퓨어 매직의 광선이 닿기 직전 몸을 비틀며 그것을 피해냈다.

너무 가볍게.

"퓨어 매직. 1호를 소멸시킨 마법. 하지만 피하면 그만...."

녀석은 내 코앞에서 무감각한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그렇다. 내 바로 코앞에서.

나는 눈앞에 드러난 녀석의 하얀 등판에 직접 손을 대며 말했다.

"이것도 피해 보시지?"

그렇게, 왼손에 미리 완성해 놓은 퓨어 매직이 제로거리에서 녀석의 등짝을 강타했다.

* * *

달빛도 그림자를 만든다.

당연하다면 당연한 일이었다. 물론 한참 멀리 있던 클로드가 갑자기 자신의 그림자에서 솟아오를 줄은 몰랐지만.

등 뒤로 번쩍이는 빛이 감지된 순간, 후원자 3호는 그렇게 생각했다.

당했다.

클로드가 처음 압축 화염 마법을 날려 시야를 차단했다고 믿게 만든 것도.

그 뒤로 퓨어 매직을 날려, 자신의 비장의 수를 날려먹었다고 생각하게 만든 것도.

모두 함정이었다.

녀석은 자신과 마찬가지로 그림자 능력을 가지고 있었다.

사이크 차원이 확보한 정보에는 존재하지 않던 힘.

결국 지금 이 순간을 위해 아껴 놓았다는 뜻이다.

대단하다.

살아있는 인간이 이 정도까지 깊은 심계를 쓸 수 있다니, 3호는 진심으로 감탄했다.

이제 곧 자신의 몸은 소멸해 사라질 것이다. 채 1초도 안 남은 그 짧은 사이, 3호는 지금껏 모르고 살았던 무수한 감정을 떠올렸다.

먼저 의문.

그림자 능력은 생명을 가진 존재는 사용할 수 없다. 그런데 클로드는 어떻게 그것을 쓸 수 있는가?

답은 스스로에게 찾을 수 있었다. 3호 자신도 지금은 반쯤 살아있는 존재가 아닌가?

드워프와 융합한 지금도 여전히 기존의 그림자 능력을 활용할 수 있다. 그러니 클로드는 반대로 생명이 없는 뭔가와 융합한 것이리라.

그림자 능력을 사용할 수 있는 무언가와.

다음으로 증오.

클로드의 존재 자체가 증오스럽다.

처음엔 그저 대의를 위해 임무를 받았고, 그것을 달성해야 한다는 생각밖에 없었다.

하지만 살아 있는 생명과 융합했기 때문일까?

참을 수 없는 증오에 폭발할 것 같다. 기껏 후원자가 되어 대의를 위해 희생할 기회를 얻었는데, 그 마지막 불꽃조차 제대로 태워보지 못하게 만들다니.

마지막으로 후회.

물론 시작은 좀 삐걱거렸다.

드워프의 정신력이 예상보다 높아 융합이 지체되었다.

다른 모든 신체능력이나 잠재력은 형편없던 주제에.

심지어 마음의 뒤틀림조차 거의 없어 융합의 시너지도 크게 기대하기 어려웠다.

그저 자신의 힘으로 목표를 달성해야 한다고 생각했는데....

놀랍게도 기적이 일어났다.

바로 융합되지 않고 오래 버틴 덕분에, 기존에 없던 강렬한 뒤틀림이 드워프의 심리를 지배했다.

덕분에 예상보다 강력한 힘을 손에 넣었다.

그래서 더 보여줄 게 많았는데.

어차피 융합이 끝나면 자신은 며칠 못가 소멸한다. 그전에 사이크를 위해, 대의를 위해 의미 있는 희생을 마무리 지을 수 있었는데.

이런 함정에 빠지지만 않았다면....

그리고 등 뒤에 섬광이 사라졌다.

하지만 놀랍게도 아무것도 변하지 않았다.

새롭게 몸을 감싼 이성의 붕대만 일부 소멸했을 뿐.

정작 내부의 융합된 본체는 완전히 멀쩡했다.

손끝 하나, 아니 털끝 하나 상하지 않았다.

어째서?

손을 등 뒤로 가져가자 단단한 금속이 느껴졌다.

아아.

갑옷.

융합 전 드워프가 입고 있던 갑옷이 퓨어 매직을 막아주었다.

놀랄 만큼 단단하고 강력한 갑옷이다. 3호는 몸을 빙글 돌려 그곳에 있는 조그만 인간을 바라보았다.

"...."

클로드는 퀭한 눈알이 빠질 것처럼 자신을 노려보고 있었다.

그 얼굴을 보고 있자니, 전에 없던 감정이 마음을 지배하기 시작했다.

쾌감.

발끝이 찌릿거릴 정도의 쾌감이 온몸을 지배한다.

지금 이 순간만큼은 사이크 차원의 대의도, 자신의 희생도, 잊을 수 있었다.

원하는 건 그저, 이 가증스러운 인간을 최대한 괴롭히며 가지고 노는 것뿐.

"왜 피해야 하지?"

마지막 말을 맡 받아치자 녀석의 얼굴이 한층 더 일그러졌다.

그래. 이거구나.

3호는 깨달았다. 자신이 영생을 손에 넣으며 반대로 버려야 했던 수많은 것들을.

그럼 지금부터 한번 만끽해 볼까?

사이크 차원 최대의 숙적을 마음대로 가지고 놀며 농락하는 재미를?

* * *

망할!

이 자식 붕대 안에 마갑 입고 있었어!

잠깐, 융합한 게 드워프 군주 게일이라고 하지 않았나? 드워프들은 마갑 잘 안 입는데 왜?

덕분에 허를 찌른 내 퓨어 매직은 녀석의 붕대 일부를 살짝 소멸시켰을 뿐.

군주의 눈에 보이는 갑옷의 본질도 예사롭지 않다. 엄청난 강도는 물론이고 끝장나는 항마력까지.

일단 튀어야 한다.

그런데 녀석이 몸을 휙 돌리며 한마디 했다.

"왜 피해야 하지?"

아흑. 이 녀석도 함정 판 거였나? 오히려 내가 제 발로 함정에 뛰어 들어온 거였어?

그 순간에도 녀석이 휘두르는 망치가 포물선을 그리며 내 가슴팍을 향해 날나왔다.

피해야 한다.

아무 준비 없이 이거 맞으면 죽는다. 나는 지면을 박차며 동시에 비행마법을 발동, 전력으로 뒤로 몸을 날렸다.

덕분에 망치는 아슬아슬하게 맨 아래 늑골 근처를 스치며 지나갔다.

투캉!

동시에 내 몸이 옆으로 꺾이며 측면으로 날아갔다.

아니 잠깐.

이거 살짝 스쳤다니까?

정말 닿을 듯 말 듯 살짝 스쳤을 뿐이다. 그런데도 뼈가 박살나는 소리와 함께, 비행마법이고 뭐고 다 무시한 채 튕겨 날아간다.

팍!

날아가다 지면에 처박히고, 그대로 물수제비처럼 다시 튕겨 계속 날아가고, 또다시 지면에 튕기며 날아가고.

콰앙!

그러다 뒤에 있던 드워프 막사를 박살내고 또 계속 날아가다, 마지막으로 마구간 같은 허름한 건물에 처박히는 것으로 끝났다.

"컥...."

숨도 안 쉬어진다.

통증은 둘째 치더라도 너무 빠르게, 너무 멀리 날아가서 정신이 하나도 없다. 광전사의 돌진에 들이 받혀도 이 정도로 튕겨나진 않을 텐데.

"으...."

신음조차 제대로 안 나온다. 그때 군주의 눈으로 마구간 천장의 흐름이 기묘하게 일그러지는 게 보였다.

푸확!

동시에 천장을 박살내며, 하얀 붕대를 입은 후원자가 치켜든 망치를 아래로 내리찍었다.

내 머리통을 향해.

콰아아아아아아앙!

피하긴 피했다. 아슬아슬하게.

하지만 녀석의 망치가 맨땅을 내리친 순간, 지면에 충격파가 발생하며 또다시 내 몸을 마구간 밖으로 튕겨 날렸다.

"크악!"

피를 토하며 비행마법을 발동해 감속을 걸었는데....

어?

후원자가 사라졌다.

무너지는 마구간에 있던 녀석이 한순간 사라져 버렸다.

다만 지면 쪽에 녀석의 흐름이 희미하게 남아 있었다. 순간 앞뒤 잴 것 없이 앞으로 몸을 날렸다.

부웅!

등 뒤로 바람을 가르는 망치 소리가 들린다.

그림자 잠입.

생각해 보면 후원자야말로 그림자 능력의 원조다. 내가 녀석의 허를 찔러 제로거리 퓨어 매직을 날렸던 것처럼, 녀석도 그림자 잠입술로 내 배후를 잡은 것이다.

그래도 미리 예측해 다행이다. 모르고 맞았으면 이번엔 정말 온몸이 박살났을 텐데....

빡!

그때 등 쪽에 충격이 느껴졌다.

"컥...."

던졌다.

녀석은 망치를 휘두른 게 아니라 집어 던졌다.

이계 황자는 세상을 구하고 싶다 146화

44장 그림자 전투

처음부터 노린 건지, 아니면 마지막 순간에 아슬아슬하게 손을 놓은 건지는 모르지만.

맞은 곳은 왼쪽 견갑골.

통증도 통증이지만 맞은 자리로 마치 온몸이 빨려 들어가는 것 같다.

망할. 이럴 줄 알았으면 나도 마갑 입고 오는 건데. 그나마 왼쪽 상반신이 아예 박살나지 않은 걸 다행이라고 생각해야 할까?

콰광!

동시에 방금 탈출했던 마구간의 잔해 속에 다시 파묻혔다.

"콜록...."

촥!

그 와중에 녀석이 다시 하늘로 뛰어오르는 소리가 들렸다. 이번에도 내 머리통에 망치를 내리찍으려나? 아니지, 망치는 방금 날렸으니 맨주먹?

하지만 뭐가 됐든 죽는 건 마찬가지다!

"망할!"

상황이 급박해서 머리가 잘 돌아가지 않는다. 나는 엉겁결에 새로 얻은 그림자 갑옷을 장착하며 잔해 속에서 몸을 굴렸다.

-귀인께서는 세 가지 그림자 능력 중 그림자 갑옷에 가장 뛰어난 재능을 가지고 계십니다. 본인을 넘어 타인에게 덮어줄 정도라니.... 이미 최고 등급이라 할 수 있겠군요.

게르니트가 그렇게 말했으니 한번 믿어 봐야지. 아직 실전테스트조차 한 번도 안 해봤지만....

콰광!

후원자는 예상대로 잔해를 박살내며 맨주먹으로 지면을 내리찍었다.

콰아아앙!

동시에 구르던 내 몸도 또다시 함께 튕겨 날아갔다. 그 와중에 녀석은 번개같이 지면을 박차며 내 쪽에 따라붙어 주먹을 날렸다.

우웅!

복부에 주먹이 꽂힌 순간, 몸을 덮은 그림자가 반응하며 충격을 흡수해주었다.

"...."

녀석의 움직임이 순간 경직된 사이, 난 그대로 뒤로 튕겨 날아가며 한참 동안 지면을 굴렀다.

"푸하!"

그리고는 급하게 몸을 일으키며 몸을 덮은 그림자 갑옷을 해제했다. 아니, 이거 온몸을 덮으니 숨도 못 수 없잖아!

"...그림자 갑옷?"

후원자는 여전히 주먹을 뻗은 자세로 그곳에 서 있었다.

"그림자 잠입에 그림자 갑옷까지.... 어떻게? 살아있는 인간이 그림자를 두 가지나? 아무리 융합을 했어도 하나 이상은.... 어쩌면 다중 융합을?"

녀석은 혼란스러운 듯 알 수 없는 소리를 중얼대기 시작했다.

하지만 진심은 그렇지 않다는 거.

군주의 눈에는 녀석의 진짜 본심이 보인다.

강렬한 호기심과 즐거움. 그리고 쾌감까지.

이 녀석 즐기고 있다!

"망할...."

나는 천천히 뒷걸음을 치며 급한 대로 빛의 방패 세 개를 만들어 주변에 띄워 놓았다.

후, 이놈 생각보다 너무 강한데?

지금까지 상대했던 그 어떤 이계의 괴물보다 까다롭다.

차라리 젝트바이아처럼 거대하면 파고들 틈이라도 있지, 평범한 인간 사이즈로 저렇게 강하니 빈틈을 노리기도 힘들다.

결국 승부는 불의 정령왕이다.

고대 늑대들 겁주느라 대지 계열 정령을 몽땅 써버린 게 실착.

여기에 드라이어드를 소환해서 라이프링크를 거는 것도 힘들다.

해봤자 녀석이 드라이어드를 먼저 제압하면 오히려 안 입어도 될 피해를 입을 뿐이다. 그러니 남은 건 둘 다 빙의하는 것뿐인데....

'드라이어드. 아무래도 너도 빙의를 해야 할 것 같아.'

-계약자님. 저와 빙의하신다 해도 전투에 도움이 되진 않습니다.

'나도 알아. 지금은 어떻게든 이그니스랑 빙의하고도 안 죽을 생명력이 필요해.'

라이프 링크만큼의 효율은 아니라도.... 최소한 어느 정도는 더 버티게 해 주겠지?

-잠깐, 기다리거라 클로드.

그런데 아직 부르지도 않은 이그니스가 먼저 태클을 걸었다.

-나와 이 녀석을 동시에 빙의하는 건 좋지 않다. 물론 빙의 후유증은 버틸 수 있겠지. 하지만 빙의 시간은 더 짧아진다.

'뭐? 왜?'

-나무와 불이니까. 속성이 맞지 않는다. 내가 나무를 태워버리거든.

앗, 이런.

-허용되는 빙의 시간은 아무리 길게 잡아도 15초다. 그러니 그전에 적을 제압하고 빙의를 풀어야 한다.

"역시 사이크 차원 역사상 둘도 없는 강적.... 모든 감정을 배제하고 철저히 제거해야 한다."

그때 후원자가 내민 주먹을 거두며 조용히 중얼거렸다. 웃기시네, 지금 완전 날 농락하며 즐기려고 눈이 새빨개져 있는 주제에.

'드라이어드, 이그니스, 지금 빙의해.'

-알겠습니다. 계약자님.

-분부대로.

그 순간 세상이 일그러졌다.

정확히는 세상이 아니라 내가 일그러졌다.

한순간 대지에 뿌리내린 아름드리 거목이 되었는데, 그 거목 전체가 새빨간 불길에 휩싸이며 작열하는 불덩이로 돌변했다.

-계약자님. 부디 무사히 이겨내시기를....

나무의 의식은 순식간에 사라졌고, 남은 것은 불의 여왕과 나뿐이었다.

그런데 뭔가 다르다.

전에 이그니스와 빙의 했을 때보다 훨씬 더 강하게 타오른다.

온몸의 신경이 작열하는 불꽃으로 연결되어 동시다발적으로 모든 것을 감지하는 기분.

"...."

덕분에 후원자를 구성하는 모든 것들이 다 보인다.

녀석의 외부를 감싼 붕대를 시작으로, 그 안에 자리 잡은 마갑의 놀라운 성능까지.

그리고 마갑 내부에 담겨 있는 아직 살아있는 드워프의 육체와 거기에 융합된 소름끼치는 불길한 마력의 흐름까지.

-연민을 갖지 마라. 저 드워프는 이미 돌이킬 수 없으니까.

여왕이 말했다. 나도 그렇게 생각하긴 했는데, 정확히 누가 말하고 누가 생각한 건지 잘 구분이 안 된다.

중요한 건 전보다 더 강하다는 것.

빙의된 드라이어드가 불에 타 사라지는 동안, 그 짧은 시간 동안 난 더 강한 화기를 발휘하고 있다.

-단점만 있는 건 아니네.

여왕과 내가 동시에 말했다. 하지만 시간이 없다는 사실은 변하지 않는다.

그래서 난 뛰어들었다.

촥!

뛰어듦과 동시에 검을 뽑아 후원자에게 휘둘렀다. 녀석은 거의 잔상이 남을 정도로 빠르게 움직여 검을 피한 다음, 근처에 떨어져 있는 망치를 주워들고는 한 동작으로 다시 내 쪽을 향해 집어 던졌다.

부왕!

이게 진짜 망치 투척.

좀 전에 내 등을 맞춘 공격은 이것에 비하면 어린애 장난 같은 위력이다. 날아오는 망치 주변으로 파문처럼 번지는 충격파가 보일 정도.

그런데 몸을 틀어 아슬아슬하게 피한 순간, 갑자기 온 세상에 까맣게 물들었다.

그림자 결계.

동시에 후원자가 등 뒤에 솟아오르며 날아오는 망치를 낚아챘고, 그대로 몸을 회전하며 엄청난 기세로 내리찍었다.

하지만 전부 보였다.

회피와 동시에 나도 녀석의 허리를 향해 검을 휘둘렀다.

이것은 피할 수 없다.

만약 뒤로 몸을 날려 피한다 해도, 칼끝에 솟구친 열선이 녀석의 몸을 두 동강 낼 테니까.

하지만 녀석은 공중제비를 돌며 날아오는 칼을 위로 피해냈다.

그리고는 한 동작으로 뒤꿈치를 내리찍었다.

허술한 공격이다.

빈손으로 녀석의 발목을 낚아챈 다음. 그대로 몸을 틀어 뒤쪽으로 집어 던졌다.

그리고 날아가는 녀석을 향해 다시 한번 검을 휘두른 순간.

슥!

녀석의 몸이 결계 속으로 스며들며 사라졌다.

-이 안에서 나는 방향에 상관없이 자유자재로 움직일 수 있다.

마치 그렇게 말하는 것 같다. 나는 사라진 흐름이 왼편으로 흘러들어 그곳에 나타나려는 순간, 미리 예측하고 검을 휘둘렀다.

지이이잉!

솟구치는 열선이 어둠을 가르며 한순간 번뜩인다.

하지면 녀석은 그곳에 나타나지 않았다. 대신 흐름을 계속 이어나가며 아예 한참 떨어진 뒤쪽에 모습을 드러냈다.

-5초 남았다.

여왕이 말했다. 나는 완전히 결합되어 있던 둘의 의식이 조금씩 분리되는 것을 느끼며 적을 향해 몸을 날렸다.

어떻게 해야 할까?

이제 와서 그림자 결계 밖으로 빠져나가 싸우기엔 시간이 없다. 그래봤자 녀석이 다시 새 결계를 치면 그만이고.

하지만 아무리 후원자라 해도, 내가 타임어택을 하고 있다는 사실까지 알진 못할 것이다.

그렇다면 녀석은 뭘 노릴까? 당연히 빈틈을 노려 내 목숨을 노리겠지.

그렇다면 일부러 빈틈을 드러낸다. 나는 양손으로 검을 쥔 채, 마치 세상을 쪼개기라도 할 듯 전력을 다한 베기를 날렸다.

그러자 녀석이 다시 그림자 속으로 사라졌다.

치이이이이익!

어찌나 크게 검을 휘둘렀던지, 열선이 땅을 파고들며 긴 균열을 만들었다.

동시에 내 등 뒤로 녀석의 기척이 솟아오르는 게 느껴진다.

내 몸은 이미 앞으로 쏠려 있는 상황. 눈에 보이진 않지만, 녀석은 분명 텅 빈 내 등을 향해 주먹을 휘두르고 있을 것이다.

"...."

하지만 충격은 전해지지 않았다.

"그림자 갑옷...."

녀석이 웅얼대는 소리를 들으며, 나는 급하게 자세를 고쳐 등 뒤로 회전 베기를 날렸다.

지이이잉!

그러자 녀석의 허리가 반으로 잘렸다.

후원자의 움직임을 멈춘 것은, 녀석의 잠입 장소에 내가 미리 깔아 놓은 그림자 갑옷.

-본인을 넘어 타인에게 덮어줄 정도라니, 이미 최고 등급이라 할 수 있겠군요.

이미 언데드 장로들과의 연습을 통해 이게 가능하다는 테스트는 끝난 상황.

보통이라면 같은 편의 몸을 보호하는 식으로 사용하겠지만, 지금처럼 적의 움직임을 일시적으로 봉쇄하는 용도도 가능하다.

-해체한다.

그때 이그니스의 빙의가 풀렸다.

푸확!

혈관에 흐르던 불꽃이 한순간 사라지며 정상으로 돌아왔다.

그리고 끔찍한 고통.

"으...."

하지만 버틸 수 있었다. 이걸 대비해서 마력 결정에 약 15초 뒤 자동으로 신성마법의 발동을 예약해 뒀거든.

"으.... 후우...."

온몸이 번쩍거리며 오만 회복마법이 쏟아진다.

덕분에 가까스로 버틸 정도는 회복됐다. 하지만 마력결정 세 개에 남은 마력을 몽땅 쏟아냈는데도 아직 다리가 후들거린다니. 말이 회복이지 사실상 진통 마법으로 버티는 셈이다.

근데 뭐 아무렴 어때.

목숨 건지고 팔다리 성한 채로 후원자를 잡았으면 그만이지.

"하, 하, 하하하...."

바닥에 쓰러진 녀석은, 몸이 반으로 잘린 채 계속 웃고 있었다.

쪼개진 단면으로 새까만 기운과 붉은 피가 쏟아지는 게 보인다. 나는 끔찍함을 느끼며 반사적으로 한발 뒤로 물러났다.

"죽는 게 그렇게 재밌어?"

"하, 하하.... 그렇지 않다."

그 순간, 떨어져 있던 녀석의 상하체가 꿈틀거리며 다시 붙었다.

휘릭!

동시에 아직도 주변을 덮고 있던 결계의 일부가 열리며, 새로운 붕대가 튀어나와 녀석의 절단면을 휘감기 시작했다.

"어? 야! 잠깐!"

이건 또 뭔데! 나는 급하게 녀석에게 달려가 정신없이 검을 내리찍었다.

하지만 소용이 없었다.

빙의가 풀린 채로는 암만 휘둘러 봤자 붕대에 흠집초자 나지 않는다. 반사적으로 마력을 끌어올려 템페스트를 만들어 보았지만....

"이성의 붕대는 모든 마법에 면역이다."

녀석은 쓰러진 채로 자신의 붕대를 쓰다듬기 시작했다.

"그럼에도 방금 넌 내 몸을 반으로 잘랐다. 붕대에 갑옷까지. 놀라운 힘이다. 시간만 있으면 난 다시 회복하겠지만 넌 그 시간을 주지 않겠지. 그만 끝내라."

"...."

"시간을 줄 생각인가?"

녀석의 얼굴에 새로운 감정이 솟구친다.

희망.

그리고 나에 대한 강렬한 조롱.

"그게 아니군. 힘을 다 쓴 거야. 방금 그게 마지막이었어."

"...그렇다면?"

"그렇다면 내 승리다. 당장은 내 본질이 절단되어 움직일 수 없지만, 이성의 붕대에 감싸있기만 하면 앞으로 30초 안에 다시 원래대로 복구할 수 있다."

실제로 내 눈에도 보였다. 붕대 속의 녀석의 흐름이 다시 서서히 연결되기 시작한다는 걸.

"후...."

이거 한숨이 절로 나오는구만.

"이럴 줄 알았으면 한번이 아니라 수십 번을 베어.... 아예 토막을 쳐 놓는 건데."

"후회해도 늦었다. 넌 다시 그때의 힘을 낼 수 없다. 그러니 도망쳐라. 그래봤자 20초 후에 내가 널 추격해 끝장을 내겠지만."

"어이구 무서워라."

나는 몸서리를 치며 녀석의 복부를 향해 손을 겨눴다.

"쓸데없는 짓이다. 클로드. 네가 사용하는 그 어떤 마법도 이성의 붕대를 뚫을 수 없다."

"내 눈에도 그렇게 보여. 퀸터플 매직이면 가능할 거 같기도 한데.... 뭐 지금 쓸건 아니고."

투명한 유리구슬처럼 생긴 마력의 결정체가 반짝였다. 후원자는 그것을 바라보며 코웃음을 쳤다.

"퓨어 매직? 아까 안 통한 게 지금은 통할까?"

"그땐 마갑이 멀쩡했잖아."

"...아."

이제야 깨달음을 얻은 모양이구만. 나는 새로 감긴 붕대 너머, 반으로 쪼개졌던 마갑의 절단면을 향해 퓨어 매직을 방출했다.

한순간 붕대의 일부가 날아가고, 갈라진 틈 사이로 투명한 빛이 새어 들어간다.

"아, 아니.... 기기기이이이갸갸갸갹!"

후원자는 몸을 비틀며 괴상한 소음을 쏟아냈다.

그 와중에 여분의 붕대가 순식간에 소멸 지점을 채우며 휘감았지만.... 이미 늦어버린 상황.

마갑 내부로 스며든 퓨어 매직이 녀석의 본질을 해체하며 소멸하기 시작한다.

소름끼치는 광경이지만 동시에 묘한 쾌감도 느껴진다. 나는 후원자의 몸에 발을 올린 채, 녀석의 최후를 시작부터 끝까지 차분하게 지켜보았다.

이계 황자는 세상을 구하고 싶다 147화

45장 멈추지 않는 것

그렇게 후원자의 모든 흔적이 사라지려는 순간.

"...쿨럭! 으윽!"

죽어가던 녀석이 갑자기 꿈틀대며 몸을 들썩였다. 방심하고 있던 나는 그대로 뒤로 넘어가 자빠졌다.

"왁!"

뭐지?

이건 대체 어떻게 된 걸까? 어떻게 존재 자체가 소멸되고도 버틸 수 있지?

급하게 몸을 일으켜 다시 퓨어 매직을 만들었다. 이거 슬슬 마력 딸리는데.... 제발 이 한방으로 죽어줬으면 좋겠다.

그런데 그 순간.

"크, 크으... 아니! 멈춰 클로드! 손 치워! 나야! 나라고!"

하, 이 자식이 어디서 되도 안 되는 나야나 사기를 치고 있어?

"나 겔리네! 내가 다시 몸을 찾았어! 쿨럭! 으, 배가 어떻게 된 거지? 너무 아파! 살려줘!"

...응?

녀석은 배를 움켜쥐고 몸을 뒤틀었다. 그나저나 목소리가 완전 겔리로 돌아왔는데? 나는 바닥에 흥건히 흐르는 핏물을 보며 물었다.

"진짜 겔리야? 너 살아 있었어?"

"살아 있었지! 쿨럭! 하지만 죽을 것 같아!"

후원자와 융합했다고 겔리가 사라진 게 아니었구나!

군주의 눈으로 봐도 후원자의 흔적은 말끔히 사라진 상태.

문제는 절단된 허리가 완전히 붙기 전에 후원자가 소멸했다는 것. 망할, 이럴 줄 알았으면 좀 더 버티다 퓨어 매직을 쓰는 건데.

"미안! 잘린 허리가 다 붙기 전에 후원자를 날려 버렸어."

"잘했다! 내가 죽더라도 무조건 그 자식부터 날려 버렸어야지! 쿨럭! 으윽! 너무 아파! 배가 찢어지고 꼬이는 것 같아!"

"일단 참아. 내출혈이 심해서 회복할 때까지 시간이 걸려."

문제는 마갑의 갈라진 틈으로 신성마법을 퍼부으려니.... 대부분의 효과가 마갑에 먼저 반응하며 중화되어버린다.

"으, 으윽... 살려줘...."

"이 망할 마갑 하고는. 효과 한번 끝내주는구만."

나는 한 손으로 계속 회복마법을 쓰고, 다른 한 손으로 어깨 쪽에 있을 마갑 연결부위를 찾았다.

"여기쯤에... 좋아. 찾았다. 일단 마갑부터 벗기고 나서.... 응?"

그런데 연결부위를 풀었는데도 마갑이 벗겨지지 않는다.

뭐지 이거?

이렇게 하면 보통 붕어빵 찍어내는 틀처럼 앞판이 들려야 하는데?

"...잠깐."

처음엔 경황이 없어서 대충 넘겼는데, 군주의 눈으로 자세히 보니 겔리의 몸과 마갑이 붙어버렸다.

맙소사.

단순히 피부가 붙어 버린 게 아니다. 이건 뭐랄까....

"융합?"

"쿨럭! 으, 윽!"

겔리가 투구 틈으로 피를 토하며 신음했다. 그나마 투구나 다른 부위는 벗겨지는데, 마갑의 핵심이라 할 수 있는 흉갑이 상체와 완전히 융합된 상태.

"후우...."

왜 이렇게 된 걸까?

정신이 혼미해지는 기분이다. 사람이 갑옷과 일체가 되다니. 아니 드워프가, 아니 뭐가 됐든 간에.

"으...."

기분 같아선 확 떼버리고 싶다.

아니, 안 되지. 지금 기분 따질 때가 아니다. 침착하자. 안 그러면 기껏 융합에서 풀린 겔리가 목숨을 잃을 테니까.

"겔리? 지금부터 좀 아플 텐데 참아."

"으, 아, 아무리 아파도 지금보다 아프겠나? 뭐든 좋으니 빨리 처치를... 으악!"

나는 마갑 복부의 갈라진 틈으로 열 손가락을 전부 찔러 넣었다.

"크억! 컥! 왜 그러나! 날 죽일 셈인가! 제, 제발! 제발 진통 마법이라도 써 주게! 페인 킬러인가 뭔가 하는 신성 마법!"

"미안. 그냥 참아."

"크억!"

지금 그런 데 낭비할 마력이 없다.

조금만 있으면 마력이 바닥을 드러낸다. 마력 결정 역시 텅 빈 상태고.

"그나마 척추뼈는 잘 붙은 거 같고... 다음엔 손상된 내장부터 확실히 고쳐야 해. 이게 지금 대충 붙은 게 많아."

"크악! 끄아악!"

"미안. 남은 마력이 아슬아슬해서. 효과를 최대한 내려면 내장과 최대한 가까운 곳에서 회복마법을 써야 해."

"크, 커흑! 아, 암만 그렇다고 뱃속에 직접 손가락을 쑤셔 넣는 게 어딨나! 꺄! 꺄흑! 꺄아아아악!"

드워프 군주의 비명이 점점 원초적으로 변했다. 나는 녀석의 내장이 제대로 붙은 것을 확인하고는 서서히 손가락을 빼냈다.

"힘든 건 다 끝났어. 나머지는 터진 살만 봉합하면 돼."

"으어... 으어어...."

"좋아. 이게 마지막이야."

정확히는 마지막으로 아플 거라는 소리.

나는 터진 살점을 억지로 움켜쥐고 회복마법을 쏟아부었다.

그러자 비명이 폭발했다.

"으아아아아아악!"

틈이 워낙 좁아 극도로 섬세한 손가락 놀림이 필요하다.

손가락이 마치 집게인 것처럼. 벌어진 틈을 꽉 조이고 그대로 회복마법을 쏟아 내 봉합.

그렇게 얼마나 시간이 지났을까.

"휴...."

더는 피가 흘러나오지 않는다. 처치 끝.

흉터 자국이 울퉁불퉁하니 끔찍하게 붙어 버린 건 어쩔 수 없다. 마갑의 방해만 아니었어도 최대한 깔끔하게 봉합했을 텐데.

"으, 으으...."

그러자 드워프의 비명도 잠잠해졌다.

얘도 진짜 대단하구만. 어지간한 인간이었으면 치료 도중에 출혈로 죽거나 쇼크로 죽어도 전혀 이상하지 않았을 텐데.

"으... 오... 사, 살았네. 어떻게든 살아남은 것 같군."

"그러게. 안 죽고 잘 버텼어."

"고맙네. 클로드. 후우.... 정말 고마워! 살려 준 것도 고맙지만, 내가 죽기 전에 그 자식을 몸에서 분리해 준 것만으로도 백번 절해 마땅하지."

그리고는 갑자기 몸을 일으키며 마구 절을 하기 시작했다. 나는 기겁을 하며 녀석을 붙잡았다.

"그만! 너 지금 죽다 살아났어. 제발 무리하지 마."

"무리 좀 하면 어떤가? 자넨 내 은인이네. 그저 생명의 은인이 아니라 모든 것의 은인이야. 그 끔찍한 놈을 떼어주지 않았나? 이젠 죽더라도 드워프로 죽을 수 있게 됐어. 흐윽...."

겔리는 고개를 숙이며 눈물을 흘리기 시작했다.

"난 의식이 있었어. 그래서 정말 끔찍했지."

"후원자와 융합한 채로 의식이 있었다고?"

"그래. 혼미하긴 했지만 사물을 구분하지 못할 정도는 아니야. 그저 몸의 지배권을 완전히 빼앗겨 꼼짝도 할 수 없었고."

"음...."

"그대로 녀석이 저지르는 만행을 지켜볼 수밖에 없었지. 내 손으로 내 동족을 몇 명이나 죽이는...."

겔리는 차마 말을 잇지 못했다. 으, 흘러넘치는 감정이 처참해서 고개를 돌리고 싶을 지경이다. 진짜 엄청 괴로웠나 보네.

"괜찮아. 이제 다 끝났어."

난 겔리의 등을 두드려 주었다. 녀석은 한참 동안 흐느끼다 손과 융합된 건틀릿으로 눈물을 닦기 시작했다.

"녀석이 자네와 싸우는 동안에도 의식이 있었네. 내 몸이 자네 검에 반으로 쪼개지는 것도 느꼈지. 녀석이 점점 소멸하며 사라지는 것도 느꼈고."

"퓨어 매직으로 후원자만 소멸해서 다행이야. 솔직히 나도 이렇게 깔끔하게 떨어져 나갈 줄은 몰랐는데...."

하지만 후원자와 융합되었던 동안, 겔리의 육체는 이미 돌이킬 수 없을 정도로 많이 변해 있었다.

흉갑과 몸이 붙어버린 건 그렇다 치더라도.

몸 내부에 기묘한 것들이 새로 더해지며, 생명의 흐름이 복잡하고 강렬하게 증폭되었다. 그러니까 이걸 한마디로 하자면....

"겔리. 지금부터 내 말 잘 들어."

"왜 그러지? 갑자기 무섭게."

"우선 당신은 이제 드워프가 아니게 됐어."

"뭐?"

겔리는 눈을 크게 뜨며 한참을 깜빡였다.

"그게 무슨 소리지? 내가 드워프가 아니라고?"

"내가 군주의 눈 덕분에 사물의 본질을 좀 보거든. 전에 엘프 군주한테 얻은 건데."

"그런데?"

"그런데 그쪽 육체는 이미 드워프가 아니게 됐어. 너무 많이 변해 서."

"내 몸이...."

겔리는 놀란 얼굴로 자신의 몸을 한참 동안 더듬거렸다.

"그... 그렇군. 나도 엄청 변한게 느껴져. 그럼 난 이제 뭔가? 난 뭐가 된 거지?"

"명확하게 뭐라고 말은 못 하겠어. 나도 처음 보는 거라. 일단 살아 있는 생물인 건 확실한데...."

정작 그 생체조직에 담긴 여러 흐름이 생물의 것과 다르게 보인다.

굳이 비슷한 걸 찾자면 사이크 차원에서 보았던 사이크인? 일단 감정안으로 먼저 확인해 봐야겠다.

종족 : 변종생물.

현재 힘 : A+

현재 차원능력 : D-

변종생물?

이건 또 뭘까. 게다가 융합했던 후원자가 소멸했는데도 힘이 A+등급이다. 사실상 나이트 마스터에 필적하는 수준인데?

"여기에 차원 능력까지...."

"차원 능력? 무슨 소린가? 왜 자꾸 눈을 깜빡이고?"

"아니, 아무것도."

나는 고개를 저으며 먼저 희소식을 전했다.

"아무튼 좋은 면도 있어. 아마 힘이 엄청 강해졌을 거야."

"힘? 힘이라.... 확실히 그런 것 같긴 하군. 방금 죽다 살아났는데 온몸에 힘이 넘쳐."

"그리고 상체가 그 마갑이랑 융합되어 버렸어. 아니! 그렇다고 억지로 떼지 말고!"

"크헉!"

흉갑을 뜯어내려던 겔리가 고통에 몸부림치기 시작했다. 나는 한숨을 내쉬며 고개를 저었다.

"그냥 살 껍질이 붙은 게 아니야. 피부 조직은 물론이고 근육의 일부까지 마갑의 내부와 융합되었어. 억지로 뜯어내면 죽을지도 몰라."

"으억.... 진짜 너무 아파 죽을 뻔했다."

겔리는 그대로 바닥에 주저앉으며 자신의 양손을 바라보았다.

"흉갑뿐만 아니라 건틀릿까지 붙어버린 것 같군."

"상반신은 전부 붙었어. 유감이야."

"흠.... 뭐.... 이것도 나름 괜찮다."

겔리는 코웃음을 치며 고개를 저었다.

"이 마갑은 내가 만든 모든 물건 중에 최고의 역작이지. 이것과 한 몸이 되다니 오히려 바라는 바야. 허접한 갑옷이었다면 땅을 치고 괴로워했겠지만."

"...그럼 다행이고."

놀랍게도 드워프 군주는 진심으로 즐거워하고 있었다.

나보고 평생 저 꼴로 살라고 하면 좌절해서 꼼짝도 못 할 텐데. 만약 감정 안에 멘탈 능력이 보였다면 겔리는 분명 S+등급일 것이다.

"좋아. 그럼 이제...."

맘 놓고 쓰러져도 되겠지.

"클로드! 왜 그러나 클로드!"

겔리가 쓰러진 내 등을 연신 흔들었다.

왜 이러냐고?

너랑 융합한 후원자의 망치에 얻어맞고, 튕겨 날아다녀서?

아니면 마력 결정 세 개를 탈탈 털었는데도 불의 여왕과 빙의한 후유증을 극복 못 해서? 혹은 모든 마력을 너 고치느라 바닥까지 싹싹 긁어 사용했기 때문에?

"으... 죽겠다...."

극심한 피로와 어지럼증과 통증이 동시에 밀려온다. 아까 진통 마법 잔뜩 걸어 놨는데도 이 정도면 진짜 아프단 소린데.

"안 돼 클로드! 날 살려놓고 네가 죽으면 어떻게 하나!"

"아... 안 죽어. 저, 저기...."

"클로드!"

마침 상공을 배회하던 테우스가 타이밍 좋게 지면에 착륙했다. 나는 가까스로 녀석을 가리키며 겔리에게 말했다.

"저 독수리.... 등에 날 좀 태워줘."

"아, 알겠네. 금방 태워주지."

겔리가 날 훌쩍 안아 들고는 달리기 시작했다. 나는 의식이 가물거리는 것을 느끼며 마지막으로 중얼거렸다.

"테우스... 이대로 저택으로...."

"알겠네. 클로드. 바로 저택에 돌아가지. 조금만 버티게!"

의식이 흐려져 무슨 일이 벌어지는지 알기 힘들다.

마지막으로 보인 것은 밤하늘의 달이었다. 갑자기 너무 졸린데, 이게 정말 졸린 건지 아니면 의식이 끊어지는 건지 모르겠다.

부디 다시 눈을 떴을 익숙한 천장이 보이기를. 저런 휑한 밤하늘이 아니라.

* * *

"황자님 무사히 돌아오셔야 할 텐데. 그치 루네야?"

침대에 엎어져 있던 톨라리가 우물거리는 목소리로 물었다. 옆에 앉아있던 루네는 가만히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게요. 언니."

"황자님 요즘 무리하는 거 같아. 돌아오자마자 쉬지도 못하고 르갈 친구들 문제 해결했다며? 난 자빠져 있느라 구경도 못 했네."

"저도 이야기만 들었어요. 그래도 무사히 해결되어 다행이에요."

루네는 품에 안고 있던 커다란 파란 구슬을 꽉 껴안았다. 톨라리는 고개만 살짝 돌린 채 루네를 보며 물었다.

"그나저나 괜찮음? 너 못 본 사이에 얼굴이 창백해졌어."

"아니에요. 별일 없었어요."

"밥은 제대로 먹은 거야? 마법 훈련은?"

"밥은 잘 못 먹었어요. 다 같이 사령군과 싸우러 저택을 떠나셨잖아요? 걱정돼서 그런지 먹을 게 잘 안 넘어가더라고요. 혹시 몰라서 훈련도 안 하고 기다렸어요."

"혹시? 무슨 혹시?"

"저택이 텅 비었는데, 혹시 여길 노리고 누군가 쳐들어오면 저라도 싸워야 하잖아요? 괜히 혼자 훈련하다가 마력 소모하면 안 될 것 같아서 아무것도 안 했어요."

루네는 모범답안처럼 딱 부러지게 대답했다. 하지만 소녀를 보는 톨라리의 표정엔 원인 모를 불길함이 쌓이고 있었다.

이계 황자는 세상을 구하고 싶다 148화

45장 멈추지 않는 것