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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계 황자는 세상을 구하고 싶다 124화

37장. 대지의 주먹

메르데스의 훈련은 막바지에 이르고 있었다.

팔꿈치를 들고 검을 당겨 쥔 자세로 의식을 오른팔에 집중한다.

이후 짧은 심호흡과 함께 훈련장 중앙을 향해 팔을 휘두른다.

먼저 어깨와 팔꿈치를 활용한 느린 가속.

다음으로 근육의 수축을 활용한 빠른 가속.

우웅!

그것으로 팔뚝의 전면에 충격파가 발생했다.

하지만 진짜 기술은 지금부터.

여기까지 충격파를 발생한 모든 움직임을 하나의 가속으로 묶어 손목에 연결한다.

동시에 손목의 탄력으로 검에 추가 가속을 넣어 새로운 풍압을 발동.

우우웅!

다음으로 교차를 통해 하나가 된 충격파에 칼날이 닿지 않도록 재빨리 손목을 낚아챈다.

촥!

멀리서 보면 가볍게 낚싯대를 던지는 것처럼 보이는 동작.

하지만 결과는 파괴적이었다.

콰과과과과과광!

포탄을 연상시키는 충격파가 땅속으로 파고들며 대폭발을 일으킨다.

한순간 좁은 지면을 완전히 뒤집어 놓으며 온 사방으로 흙더미를 쏟아냈다. 메르데스는 태연한 얼굴로 날아오는 흙 파편을 손바닥으로 막으며 물었다.

"어떻습니까? 단장님."

"거의... 성공이군."

다비는 멀리 푹 파인 지면으로부터 눈을 떼지 못했다. 메르데스는 검을 거두며 공손한 자세로 고개를 숙였다.

"제 기술에 무엇이 부족했는지 알려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그녀가 시전 한 것은 변형 풍압검. 바로 폭풍검이었다.

다비 스스로도 에이션트 울프의 코어를 먹고 나서야 수월하게 쓸 수 있게 된 기술.

기술을 고안하고 완성할 때 까지만 수년이 걸렸다. 만약 나이트 길드에 등록한다면 당연히 '마스터 스킬' 등급을 받을 거라 확신했다.

하지만 메르데스는 이 까다로운 기술을 채 몇 달도 지나지 않아 완성해 버렸다.

'그것도 고작 17살에 말이지. 진짜 천재란 이런 거구나.'

다비는 속으로 혀를 차며 고개를 저었다.

"아니, 부족해서 그런 게 아니다. 그저 달라서 그렇지."

"다르다니, 무엇이 말씀입니까?"

메르데스가 무표정한 얼굴로 물었다. 다비는 앞장서 피폭지점으로 걸음을 옮겼다.

"내 폭풍검과 너의 폭풍검이 서로 다르다는 뜻이다."

"교정이 필요하겠군요. 제가 무엇을 고쳐야 하는지 말씀해 주십시오."

"일단 기다려라."

다비는 사선으로 5미터 이상 파고든 구덩이 앞에 멈춰 섰다.

"봐라. 위력이 퍼지지 않고 한 장소에 집중됐지. 물론 내 폭풍검을 기준으로 하면 폭발 범위가 좁다만, 대신 좁은 지역에 가하는 충격은 네 쪽이 더 강하다."

"...."

"이건 틀린 게 아니라 다른 거다. 상황에 따라선 네 폭풍검이 더 위력을 발휘할 수도 있다. 어떻게 한 거지? 옆에서 볼 때는 차이가 없어 보였는데?"

"...아마도 이것 때문이 아닌가 싶습니다."

메르데스는 허공에 팔을 휘두르며 대답했다.

"폭풍검은 먼저 발동한 1파를, 뒤에 발동한 2파가 겹쳐서 목표까지 날리는 기술입니다. 그런데 저는 1파에서 2파로 이어지는 속도를 제어하기 힘들었습니다."

"응?"

"최종적으로 휘두른 검의 속도가 너무 빨랐습니다. 연습 도중에 기껏 만든 충격파가 완전히 뻗기도 전에 칼로 베어버리는 일이 자주 생겼습니다."

"...."

다비는 순간 말을 잇지 못했다.

'이건 또 무슨 소리지? 칼을 휘두르는 속도가 너무 빨라서 발생한 충격파를 베어버린다고? 이게 말이 되나?'

나이트 마스터인 다비조차 상상도 못 해본 경우였다. 그게 현실적으로 가능할까? 당장은 일단 말을 끝까지 들어 보는 수밖에 없었다.

"...그래서?"

"그래서 2파가 발생한 순간, 최대한 빠르게 손목을 튕기듯 뒤로 당기는 식으로 반동을 걸었습니다. 그러니 겨우 기술이 완성됐습니다. 다만 단장님처럼 처음부터 완벽히 계산된 속도가 아니라 힘이 추가로 들어가고, 또한 단장님처럼 넓은 영역으로 폭풍이 퍼지지 않아 문제가 있다고는 생각했습니다."

메르데스는 겸손하게 말하며 고개를 숙였다. 다비는 그제야 차이점을 직접 검을 뽑아 메르데스의 자세를 흉내 내기 시작했다.

"빠르게 칼을 당겨봤자 풍압검의 약해져서 제대로 위력이 안 나올 텐데.... 합!"

그리고 실제로 기술을 사용했지만, 역시 예상대로 두 충격파가 제대로 합쳐지지 않고 어중간하게 날아가 지면을 두드렸다.

'이러면 이도저도 아니다. 하지만 메르데스의 풍압검은.... 아!'

문제점을 파악한 다비는, 이번에는 일부러 자신이 만든 충격파를 나가기도 전에 쪼개버릴 기세로 팔을 휘둘렀다.

"합!"

그리고 마지막 순간에 아슬아슬하게 손목을 낚아채며 칼을 뽑아냈다.

그러자 훈련장에 새로운 수직갱도가 모습을 드러냈다.

콰과과과과과과과과광!

"큭...."

역동작에 너무 힘을 줘서 힘줄에 무리가 간 듯 했다. 다비는 오른팔 전체가 욱신거리는 것을 느끼며 칼을 집어넣었다.

"겨우 흉내만 냈군."

"방금 어떻게 하신 겁니까? 단장님의 폭풍검은 날아가다 갑자기 수직으로 떨어졌습니다."

메르데스는 치켜뜬 눈으로 두 개의 구덩이를 비교했다.

자신의 폭풍검은 사선으로 지면에 박히며 완만한 구덩이를 뚫었는데, 다비의 폭풍검은 말 그대로 갑자기 커브를 틀며 위에서 아래로 지면에 내리 꽂혔다.

"손목을 너무 억지로 튕겨서겠지."

다비는 건틀렛을 벗고 욱신거리는 손목을 주무르기 시작했다. 메르데스는 그 와중에도 갑옷 속에 쟁여놓은 영약병 두 개를 꺼내 내밀었다.

"회복의 영약과 진통의 영약입니다."

"음, 고맙다."

다비는 사양하지 않고 영약을 들이켰다.

"원리는 알았다. 검을 낚아채는 바람에 약해진 2파가 1파에 닿은 순간, 1파가 2파를 보자기처럼 덮어 버렸다."

다비는 왼손바닥으로 오른주먹을 감아쥐며 말했다.

"그래서 마지막 순간까지 2파의 힘이 퍼지지 않고 고스란히 보존됐지. 덕분에 폭발 순간에 더 집중된 위력을 낼 수 있던 거다."

기존의 다비의 방식이 탄두를 퍼뜨리는 집속탄의 느낌이라면, 메르데스의 방식은 한 지점을 뚫어 버리는 벙커버스터에 가까웠다.

"손목을 당기는 각도나 세기에 따라 충격파의 마지막 움직임을 조절할 수 있다는 것도 알았다. 기술이 점점 발전하고 있군. 이게 다 메르데스 네 덕분이다."

"어쩌다 보니 맞아떨어졌을 뿐입니다."

"겸손할 필요 없다. 이건 너 아니었으면 끝까지 몰랐을지도 모르니까. 폭풍검 자체를 집중형과 분산형, 이렇게 두 가지 방식으로 구분 지어야겠군. 나중에 나이트 길드에 정식으로 등록하면 네 이름도 넣도록 하겠다."

"그러실 필요 없습니다."

메르데스는 고개를 저으며 평소의 무표정한 얼굴로 돌아왔다.

"저는 그저 단장님께 가르침을 받을 뿐입니다. 그보다 어떻게 하면 분산형 폭풍검을 쓸 수 있을지 알려 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사실 분산형보다 집중형이 더 쓰기 까다로울 것 같다만."

다비는 혀를 내두르며 허공에 맨 손을 휘둘렀다.

"역시 처음부터 속도를 조절할 필요가 있겠지. 맨손 풍압검, 그러니까 1파를 만들 때 가속을 최대한 느리게 조절해라. 풍압검이 발생할 수 있는 딱 최소 조건만 충족할 수 있도록."

"알겠습니다. 그런데...."

메르데스가 고개를 돌리며 숲 쪽을 바라보았다. 그곳엔 어딘지 표정이 어두운 르갈이 엎드려 앉아 있었다.

"...잠시 실례해도 되겠습니까?"

"그래. 오늘 훈련은 여기까지다."

다비는 미소를 지으며 속으로 생각했다.

'메르데스가 진짜 저 늑대 찾아내는 데는 선수군. 나조차도 기척을 눈치 채지 못했는데.'

심지어 르갈의 코어를 먹은 건 메르데스가 아니라 자신이었는데도.

"르갈. 무슨 문제라도 있으십니까? 표정이 좋지 않습니다."

냉큼 달려간 메르데스가 르갈의 목덜미를 쓰다듬으며 물었다. 르갈은 살짝 그릉거리며 눈을 가늘게 떴다.

"흠, 땅울림이 계속 거슬린다."

"죄송합니다. 제가 폭풍검을 훈련하다보니 본의 아니게 땅을 자꾸 흔들게 되었습니다."

"뭐? 아니, 그 이야기가 아니다."

르갈은 뒤늦게 천천히 자신 쪽으로 다가오는 다비를 보며 고개를 저었다.

"얼마 전에 지진이 있었지. 그게 계속 거슬린다."

"며칠 전의 그 지진 말이군요. 저도 저택이 미세하게 흔들리는 걸 느꼈습니다."

클로드가 영문 모를 '테라직 루트'라는 걸 진행해야 한다고 저택을 떠난 바로 그날이었다. 르갈은 송곳니를 살짝 드러내며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무언가 불길하다. 그런데 그게 뭔지 모르겠어."

"지진이 동쪽에서 났다고 하셨으니 크게 걱정하지 않아도 될 겁니다."

"어째서?"

"여기서 더 동쪽엔 엘스톤 백작령이 있을 뿐이고, 거기서도 더 동쪽으로 넘어가면 사람이 살지 않는 죽음의 땅 뿐입니다."

"흠...."

"혹시 몰라 카일을 통해 엘스톤 백작령에 지원물자를 보냈습니다."

옆에 도착한 다비가 멀리 동쪽 숲을 돌아보며 말했다.

"만약 그쪽에 지진이 났더라도 복구는 빨리 될 겁니다. 물론 황자님이 계셨더라면 좀 더 본격적인 지원도 가능하겠습니다만."

하필 클로드가 떠난 그날에 지진이 터진 바람에 국가 규모의 지원을 논하긴 힘들었다. 애당초 지진을 느낀 게 이곳에 있는 르갈이나 일부 코어를 먹은 기사들뿐이라는 것도 문제였지만.

"가능하면 내가 직접 가서 확인해 보고 싶다만, 난 이 저택 주변을 떠날 수 없다."

르갈이 말했다. 다비는 몸을 빙글 돌려 서쪽 하늘을 바라보며 쓴웃음을 지었다.

"그렇다면 톨라리 님께 부탁하는 것도 나쁘지 않겠군요. 마침 저기 날아오고 계시고 말입니다."

"다들 거기구나!"

어째 옷도 대충 입은 톨라리가 뭐가 급한지 급하게 날아오고 있었다. 그러자 메르데스가 들릴 듯 말 듯한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어째서 저런 단정치 못한 모습으로...."

"저 여자 마법사를 보내는 것도 안 된다."

르갈이 고개를 저었다. 다비는 다시 몸을 돌리며 물었다.

"네? 어째서입니까?"

"내가 저택 주변을 떠날 수 없는 이유가 바로 저 여자 때문이다. 클로드가 떠나기 전에 경호를 부탁했다."

"황자님께서?"

"저택 밖의 숲은 내가, 저택 안은 디디가 맡아서 하기로 했다."

"어째서 톨라리 님을 그렇게까지...."

다비가 눈살을 찌푸렸다. 그러자 막 도착한 톨라리가 짐승과 인간 사이에 착륙하며 숨을 몰아쉬었다.

"후우. 급하게 날았더니 숨차네. 근데 내 이야기 중?"

"아닙니다. 그보다 무슨 일이라도 있습니까? 왜 그리 서두르십니까?"

"응? 아니, 그게 그러니까...."

톨라리는 막상 용건을 까먹었는지 한참 끙끙대다 소리쳤다.

"맞아! 우리 엘프 대단한 거 있지?"

"...라니르 말씀입니까?"

"맞아, 라니르. 방금 까지 서쪽 숲에서 같이 놀았거든. 아니, 마법훈련이라고 해야 하나?"

톨라리는 활짝 웃으며 멀리 서쪽 하늘을 가리켰다.

"서쪽 숲 알지? 내가 템페스트로 운동장 만든 곳?"

"압니다. 앞으로 마법 훈련은 그곳에서 하기로 하시지 않았습니까?"

"응. 근데 그 엘프. 일단 마력이 엄청난 건 아님. 근데 컨트롤 대박이야."

"그게 무슨 말씀입니까?"

"글쎄 바람의 화살로 멀리서 주먹두 개만 한 목표를 맞추지 뭐야?"

그리고 침묵이 찾아왔다. 다비는 자신의 주먹을 잠시 바라보다 되물었다.

"그게 그렇게 힘든 겁니까? 이렇게 급하게 날아와 저희들에게 보고할 정도로?"

"힘든 건 아님. 살짝 까다로운 정도?"

"...."

"아니. 그런 표정은 아직 일러."

톨라리는 어처구니없어 하는 다비를 보며 크게 고개를 저었다.

"신기해서 점점 표적을 작게 만듬. 근데 계속 슝슝 뚫더라니까? 이것까지?"

그리고는 엄지와 검지로 조그만 동그라미를 만든다. 다비는 순간 숨을 멈추며 질문했다.

"잠깐, 손가락으로 과녁을 만들었다는 말씀입니까?"

"응."

"잘못하면 손이 크게 다칠 수도 있지 않습니까! 그것도 마법사의 손인데!"

극단적으로 양팔이 없으면 마법사는 마법을 쓰지 못한다. 하지만 톨라리는 별거 아니라는 듯 손사래를 쳤다.

"에이, 뭔 상관? 컨트롤 보니 절대 안 다칠 거 같아서 한 거야."

"아니, 아무리 그래도...."

"중요한건 내가 아니라 라니르. 걔 마법에 재능 있어. 지금까지 본적 없던 방식으로. 후후. 이것도 재밌네. 역시 황자님 사람 보는 눈 탁월해."

톨라리는 재밌는 장난감이라도 발견한 듯 히히거리며 웃었다. 그때 조용히 있던 르갈이 갑자기 귀를 세우며 몸을 일으켰다.

"으? 왜 그래 늑대 씨? 거짓말 아니야. 난 솔직하게 엘프가 재능이 있어서 칭찬을...."

"말이다."

"말?"

르갈은 눈살을 찌푸리며 동쪽으로 머리를 돌렸다.

"말을 탄 인간 둘이 숲 동쪽에서 이쪽으로 달려오고 있다. 아니, 이미 거의 다 왔다. 컨디션이 안 좋아서 파악이 늦었군."

"설마 적입니까?"

다비가 칼자루에 손을 대며 물었다. 르갈은 잠시 코를 킁킁대다 고개를 저었다.

"적은 아닌 것 같다. 하지만 무척 급하군."

"적이 아닌데, 동쪽에서 급하게 말을 몰고 달려올 사람이라면...."

모두의 머리에 '엘스톤 백작령'이 떠올랐다. 잠시 후 그곳에 도착한 두 명의 기사가 급하게 말 아래로 뛰어 내리며 소리쳤다.

"거기 누구십니까! 저희는 엘스톤 백작께서 보내신 전령입니다! 클로드 황자님께 전해야 하는 급보가 있습니다!"

"클로드 기사단 단장 다비다."

다비가 앞으로 나서며 기사들은 순간 그 자리에 무릎을 꿇으며 쩔쩔맸다.

"나이트 마스터가 아니십니까? 만나 뵙게 되어 영광입니다."

"인사는 됐다. 무슨 일이지? 황자님께서는 자리를 비우셨다."

"그것은...."

기사들은 난감한 얼굴로 서로를 바라보았다. 그러다 결심한 듯 고개를 끄덕이며 백작의 서신을 꺼냈다.

"이틀 전 사령군이 국경을 넘은 것을 확인했습니다. 규모가 너무 압도적이라 백작령의 병력만으로는 저항 자체가 불가능합니다."

"뭐라고?"

"백작께서 인근의 모든 마을에 소개령을 내렸지만 일촉즉발의 상황입니다. 부디 황자님을... 아니, 황자님이 자리를 비우셨다면 어떻게든 군대라도 급히 파견해 주십시오."

"군대를...."

엘스톤 백작의 서신에는 사령군의 규모가 최소 5만 단위라는 정보가 적혀 있었다. 기사들은 곧바로 다비의 앞에 머리를 숙이며 소리쳤다.

"이대로라면 백작령 전체가 순식간에 망자들에게 휩쓸릴 겁니다! 시간이 없습니다! 시체가 늘어나면 적들 또한 늘어날 뿐입니다. 백작령에서 막아내지 못하면 그 다음은 제국 본토입니다! 온 세상이 사령군으로 뒤덮일 겁니다!"

이계 황자는 세상을 구하고 싶다 125화

37장. 대지의 주먹

"...아찔해지는군."

테우스가 멀리 지면을 보며 뭔가를 말했다. 뭐? 방금 뭐라고 했냐? 승차감이 편안해서 졸아버렸네.

"응? 뭐가 아찔해진다고?"

"머리말이네. 저 아래 지형이 너무 험해서, 비행이 아니라 걸어서 넘어간다고 생각하니 머리가 아찔해졌네."

하긴 나이피아가 원래 지형이 끔찍하기로 유명하다. 오죽하면 인구밀도가 0이겠어.

지역 자체가 까마득한 고원이기도 하지만, 그 밖에도 대부분의 자연이 인간에게 적대적인 것들로만 구성되어 있다.

당장 지금만 해도 그렇다.

사일런스와 계약한 바람의 협곡에서 그대로 북쪽으로 쭉 올라가는 길.

지형 자체가 풀 한포기 없는 날카로운 바위봉우리의 무한 반복이다.

"나이피아를 걸어서 이동하는 건 자살행위야."

"내 생각도 그렇다네. 그런데 자네는 마치 시도해 본 것처럼 말하는 군. 비행마법을 익히기 전에 와 본적이 있나?"

당연히 있고말고.

일단 실패하면 돌아와야 할 루아의 성소가 이곳 나이피아에 있다.

마법도 제대로 못쓰던 2회 차까지는 지옥이었다. 성소에 도달하려고 진짜 피를 토하며 굴렀었지.

게이트가 열리고 제국이 멸망한 뒤, 루아의 성소까지 도망치는데 걸린 시간만 평균 6개월 이상.

그나마 루아의 성소는 나이피아 지방에서도 동쪽에 가깝다. 반대로 서북쪽 끝에 있는 오늘의 목적지, 바로 '대지의 틈'은 날아서 아니면 거의 못 온다고 봐야 한다.

"그나마 배를 타고 빙 돌아.... 북서쪽 해안가에서 절벽타기를 하면 가능하려나?"

"절벽타기?"

"여긴 해안가도 지형이 끔찍하거든 수직절벽이 끝없이 이어져 있어."

누군가 그 방법을 사용하긴 한 모양이다. 황실 도서관에 대지의 틈에 대한 기록이 남아 있는 걸 보면.

아니면 모험심 투철한 아크 위저드가 발견만 하고 다시 돌아갔던가.

"궁금한 게 있네. 어제 바람 정령과 계약할 때 정령 둘을 꺼내는 것이 조건 아니었는가?"

"맞아. 왜?"

"멀리서 보는데 엄청난 불길의 여성이 보였네. 아마도 불의 정령왕이겠지."

"맞아. 이그니스랑 룩카르 꺼냈어."

"어째서 그 둘을 꺼냈는가? 자네는 정령 셋을 소환할 수 있는데."

"응?"

"가장 강력한 이그니스는 아껴 놓는 게 좋지 않았을까 싶네. 무슨 일이 벌어질지 모르니까. 일단 소환해 버리면 한동안은 다시 소환 못하지 않나?"

"3시간, 하루, 이틀."

"음?"

"하급 정령은 소환하면 3시간동안 소환 못해. 아무 일도 안 시켜도. 중급은 하루, 상급이나 정령왕 같은 건 이틀이나 그 이상. 그래서 일부러 드라이어드를 빼고 소환한 거야. 얘가 전투 능력이 떨어져서 그렇지, 급수로 치면 거의 상급이거든."

"그렇다면... 지금 가는 곳에서 드라이어드를 활용한다는 뜻이군."

"정답."

역시 우리 금독수리. 머리 좋은 거 보니 코어 백 개 값을 하는구만.

"이제 궁금증 해결됐어?"

"오히려 더 늘어났네. 하지만 지금부터 해결되겠지."

테우스는 기수를 틀며 고도를 천천히 낮췄다.

"자네가 말한 곳이 저긴가 보네. 곧 도착할 것 같군."

벌써 도착했다고?

눈을 가늘게 뜨자 멀리 산맥의 중심에 뚫린 노천광산 같은 지형이 보였다.

저것이 바로 대지의 틈.

'불의 정점'이 불의 정령왕 이그니스가 살던 거대한 화산섬이었다면.

대지의 틈은 바로 대지의 정령왕 '테라직'이 살고 있는 정령의 성소.

깎아지를 듯한 산맥의 내부에 있는 분지로, 폭이 수십 km에 달하는 가운데로 갈수록 낮아지는 원형 노천광산 같은 지형이다.

직접 재본 적은 없지만.... 가장 안쪽의 중심부 깊이가 대략 1km쯤 되지 않을까?

바로 그곳에 테라직이 버티고 앉아 있다.

반면 중심부를 향해 나선으로 이어진 모든 층층의 공간에는 수많은 조약돌 정령이 배회하고 있다. 메르데스가 계약한 바로 그 녀석들.

이놈들도 다 합치면 수백 마리는 되지 않을까?

처음 비행마법으로 여길 왔을 때, 나는 한방에 테라직이 있는 중심부로 뚝 떨어지면 안 된다고 생각했다.

그게 그렇잖아?

층층마다 저렇게 정령들이 퍼져 있는데, 이걸 전부 피해 한 번에 중심부로 쑥 들어가 버리면.... 뭔가 주인에 대한 예의가 아닌 것 같은 느낌?

그래서 바깥쪽 테두리에 착지, 먼저 손님이 도착했음을 알리며 천천히 기다릴 생각이었다.

하지만 저쪽은 기다려 주지 않았다.

착지 순간 주변에 있던 조약돌 정령들이 다짜고짜 몰려들며 육탄 공격을 시작했다.

암만 싸울 생각 없다고 소리쳐도 말귀를 알아먹어야지.

물론 조약돌 정령 한두 마리 정도는 그때나 지금이나 어렵지 않게 이길 수 있다.

문제는 대지의 틈에 있던 모든 조약돌 정령이 전부 몰려들기 시작했다는 것.

아무리 나라도 시간차를 두고 몰려오는 수백 마리의 정령을 상대로 계속 싸워 이길 수는 없었다.

그래서 그때는 일단 도망쳤다.

그래서 나중에 다시 찾았을 때는, 조약돌 정령을 피해 처음부터 가장 깊은 중심부의 상공으로 비행, 수직낙하로 직접 테라직에게 도착했다.

-인간이 이곳을 찾은 건 오랜만이다. 거의 300년 만이군.

-2년쯤 전에 어떤 인간이 네 부하들에게 흠씬 두들겨 맞고 도망쳤던 건 기억 안 나?

-그런 일이 있었나? 정해진 조화라 어쩔 수 없지만, 그래도 내가 사과하지.

테라직은 막무가내 조약돌 정령과 달리 신사적이고 말도 통했다.

그런데 막상 차분하게 대화를 나누려는 찰나.

또다시 온 사방에서 조약돌 정령이 중심부로 내려오며 날 공격하기 시작했다.

-으악! 이놈들 또 몰려온다! 테라직! 이놈들 좀 말려! 네 부하잖아! 왜 대장이랑 이야기하고 있는데 부하들이 방해해!

-물론 저들은 내게 속한 정령이다. 하지만 내가 누군가에 속해 대지의 틈을 벗어나는 것을 싫어한다. 그것이 이곳의 조화다.

-뭐?

-그러니 나와 계약하고 싶다면, 우선 대지의 틈에 있는 모든 정령의 방해를 잠재워라. 그것이 계약에 필요한 임무를 들을 수 있는 조건이다.

망할....

그때가 7회 차였던가?

쏟아지는 조약돌 정령을 100마리쯤 잡은 기억이 난다. 나중엔 마력이고 체력이고 다 떨어져서 은신 쓰고 몰래 숨어 도망쳤었지?

그래서 당시엔 대지의 정령왕과 계약하는 것을 포기했다.

이후 8회 차 때에 가서야 조약돌 정령과 안 싸우고 테라직과 대화를 할 수 있는 작전을 떠올렸고, 다행히 작전은 성공적이었다.

-이런 방법을 동원할 줄이야. 나는 무척 감탄했다.

-나, 대지의 정령왕 테라직과 계약하기 위해서는 한 가지 임무를 달성해야 한다.

-내가 내리는 임무는, 자이루트 산맥에 있는 모든 오우거의 숫자를 세 배로 늘리는 것이다.

-그렇다면 너와 계약해 주겠다.

후.

그때 그 소리를 듣고 얼마나 황당해 했던지.

당시가 게이트 열리기 2년 전이었다. 뜬금없이 오우거를 들먹이는 것도 어처구니없는데, 어떻게 2년 동안 그놈들을 세 배로 늘리냐?

새로 회귀를 시작하자마자 임무를 받고, 남은 10년을 풀로 활용한다 해도 불가능한 일.

오우거들이 무슨 애 낳는 기계도 아니고 말이지. 애초에 고기 팍팍 먹이지 않으면 아이도 잘못 만들 더만.

다행인 것은, 대지의 정령왕과 계약하는 방법이 하나 더 있었다는 것.

-내 주먹을 맞고 살아남아라. 그럼 계약해 주마.

썩을.

참고로 방어용으로 그 어떤 마법도 사용하면 안 되며, 신성마법으로 스스로의 몸에 버프를 걸어도 안 되며, 당연히 마갑 같은 걸 입어서도 안 된다.

한마디로 바꿔 말하면 자살행위.

하지만 이번 10회 차에는 예정에 없던 새로운 힘을 많이 얻었다.

물론 그렇다고 '대략 이 정도면 정령왕 주먹 맞고 안 죽을 것 같다'라고 대충 판단한 건 아니다.

정말 다양한 상황을 고려했고, 심지어 최악의 경우가 벌어져도 역전 만루 홈런을 칠 수 있는 방법까지 떠올렸다.

그렇게 긴 장고 끝에 '테라직 루트'를 만들어 이곳까지 날아온 것이다.

그저 단순히 어제 사일런스랑 계약했다고 희희낙락해서 도전하는 게 아니란 말씀.

"저기 중심부에 보라색 덩어리가 보이는군. 바로 급강하해서 착륙해도 되겠는가?"

금독수리가 노천광산의 상공을 빙빙 돌며 물었다.

"잠시만 기다려."

나는 고개를 저으며 바람의 정령을 소환했다.

"나와 사일런스."

우웅!

동시에 구름으로 만든 회오리모양의 정령이 모습을 드러냈다. 녀석은 테우스의 등 위에서 눈에 보이지 않는 기류에 좌충우돌하며 들썩였다.

-계약자님. 정체불명의 기류가 제 움직임을 방해하고 있습니다.

"이 녀석이 만든 바람의 쿠션이야. 그거 없으면 단숨에 튕겨 날아가니 좀 참아."

-바람의 정령이 바람의 구속을 받아야 하다니.... 그래서 제가 무엇을 하면 되겠습니까?

그러고 보니 어째 말투가 공손해 졌네? 어제 이그니스를 보고 완전 쫄아버렸나?

"저 아래 푹 들어간 지형 보이지? 맨 가운데 가장 깊은 곳을 제외하고, 나머지 전체에 침묵의 장막을 깔아버려."

-저곳은 대지의 틈 아닙니까?

사일런스는 기가 차다는 듯 내 쪽을 보았다. 그러고 보니 너 얼굴이 어디냐? 지금 내 쪽을 향한 게 얼굴 맞지?

-저는 등급으로만 치면 하급정령밖에 되지 않습니다. 제가 아무리 전력을 다한다 해도, 저토록 넓은 지역을 전부 침묵시킬 수는 없습니다.

"아니, 넌 할 수 있어."

내가 너 데리고 일을 한두 번 해본 줄 아냐? 이젠 너보다 내가 더 널 잘 활용할 걸?

"대신 시간을 줄이면 돼. 너 최대 여섯 시간 까지 침묵지대를 만들 수 있잖아? 그걸 5분으로 줄여. 그럼 저 넓은 공간을 커버할 만큼 장막을 넓힐 수 있어."

-그것은.... 가능할 것 같긴 합니다만.

사일런스는 몸을 들썩이며 되물었다.

-어떻게 제 능력을 저보다 잘 알고 계십니까? 그러고 보니 전 아직 계약자님께 한 번도 제 능력에 대해 설명드린 적이 없는 것 같은데....

"다 방법이 있어. 내가 괜히 불의 정령왕과 계약했겠냐?"

-그것은... 알겠습니다.

정령왕이란 단어엔 그만큼의 설득력이 있다. 사일런스는 위치를 조금 이동하며 조심스럽게 말했다.

-다만 이곳에선 어렵습니다. 거리가 너무 멉니다. 고도를 좀 더 낮춰주시길 바랍니다.

"들었지 테우스?"

"그래. 지금 바로 하강하겠네."

대답과 동시에 독수리의 급하강이 시작됐다. 나는 바람의 쿠션에 몸을 기댄 채 조용히 사일런스를 응원했다.

"힘내 사일런스. 타이밍은 한순간이야. 넌 할 수 있어. 대지의 틈으로 진입하는 그 순간에 침묵의 장막을 깔아 버려."

-잘될지 모르겠습니다만.... 게다가 맨 아래층은 빼고 말씀입니까?

"응. 거긴 빼고 도넛 모양으로."

-도넛이 무엇입니까?

"가운데가 뻥 뚫린 빵 같은 건데...."

그 순간 소리가 사라졌다.

고막이 먹먹해지는 침묵과 함께, 대지의 틈으로 진입한 금독수리는 마지막 순간까지 속도를 늦추지 않았다.

엇, 이거 너무 빠른 거 아닌가?

그리고 지면에 충돌하기 직전.

우우우우웅!

다시 귀에 소리가 돌아오며, 맹렬한 돌풍과 함께 바닥에 거대한 바람의 쿠션이 깔렸다.

푸확!

테우스는 자신이 만든 쿠션으로 급 감속을 걸며 깔끔하게 착륙을 끝냈다.

"어떤가? 이렇게 하면 단 몇 초라도 시간을 아낄 수 있네."

테우스가 날개를 쫙 피며 몸을 낮췄다. 나는 바닥으로 뛰어 내리며 녀석의 앞가슴을 쓰다듬었다.

"잘했어. 좀 무섭긴 했지만."

-말씀하신대로 이곳에만 장막을 깔지 않았습니다.

사일런스도 함께 바닥으로 내려오며 말했다.

-위쪽에 깐 장막의 지속시간은 앞으로 4분 남았습니다. 그리고 저는 감히 이곳에 있을 수 없으니 뒤로 물러나 있겠습니다.

그리고는 갑자기 구석 쪽으로 빠르게 물러나기 시작했다. 나는 녀석이 물려난 반대방향을 보며 손을 들어 올렸다.

"안녕? 내가 좀 요란하게 내려왔지?"

"...."

그곳엔 보라색의 거대한 강옥 덩어리가 웅크리고 있었다.

대지의 정령왕 테라직.

덩치는 룩카르보다 두 배 이상 크며, 심지어 팔도 두 개 더 달려 있다.

"이런 방법을 동원할 줄이야."

녀석은 천천히 몸을 일으키며 내 쪽으로 걸음을 옮겼다.

쿵.

쿵.

쿵....

한발 한발 내딛을 때마다 지면이 울린다. 이것 참 육중하기도 하셔라.

"나는 무척 감탄했다. 조약돌들의 방해를 잠재우기 위해 바람의 정령을 활용하다니. 애당초 조약돌이 방해를 예정하고 모든 것을 준비한 게 아닌가? 놀랍다. 인간이여. 네 이름은 무엇인가?"

"클로드."

"클로드여. 그대에 깃든 또 다른 정령의 여운이 보인다."

녀석은 붉은 루비 같은 눈동자로 나 몸을 주시했다.

"그 안에 나의 권속도 있군. 그들의 추천으로 이곳에 도달한 것인가.... 흠, 그중엔 심지어 나와 같은 급의 정령왕까지 있군. 대단하다. 너는 또 한 번 나를 감탄하게 만들었다."

음?

전엔 이런 말없이 바로 계약 이야기로 넘어갔는데. 그땐 이그니스와 계약하고 온 게 아니라서 그런가?

"감탄은 나중에 하면 안 될까? 지금 내가 시간이 좀 부족해서."

"시간... 그렇군. 시간은 소중하다. 특히 지금처럼 대지의 균열이 발생한 상황에선 더더욱.

이계 황자는 세상을 구하고 싶다 126화

37장. 대지의 주먹

"대지의 균열?"

이건 또 무슨 소린데? 뭔가 상황이 달라졌나?

"클로드여, 그대는 분명 나와 계약하기 위해 이 대지의 틈에 도달했을 것이다. 나 대지의 정령왕 테라직과 계약하기 위해서는 한 가지 임무를 달성해야 한다. 그것은...."

"잠깐. 오우거 세 배 늘리는 건 지금 못 해. 그거 말고 다른 걸로 하자. 너 주먹 맞고 살아남을게. 그럼 계약할 수 있지?"

"...그렇다."

녀석은 눈을 가늘게 뜨며 내 쪽으로 몸을 낮췄다.

"놀라울 만큼 모든 것을 알고 있군. 혹시 이그니스가 귀띔해 준건가? 그건 좋지 않다. 우린 서로의 영역을 침범하면 안 된다."

"그런 거 아니야. 내가 이곳저곳 찾아보고 알아냈어. 그전에 하나 확인할 게 있는데."

"말하라. 놀랍고 신비한 클로드여."

"너 주먹 맞고 버티는 거, 나한테 신성마법 거는 건 안 되지만, 남 에게 거는 건 상관없지?"

"그게 무슨 뜻이지?"

"라이프 링크."

이게 안 되면 난 미련 없이 여기서 돌아갈 거다. 아무리 코어 먹고 튼튼해졌어도 보험도 들지 않고 저 거대한 주먹에 쳐 맞을 용기는 없거든.

"...라이프 링크라."

"그거 뭔지 알지? 극대신성주문 중 하나인데...."

"알 것 같다. 너는 우렌과 연이 닿았나 보군. 그분과 나는 약간의 연이 있다."

그래. 넌 대지의 정령왕이고 우렌은 대지와 생명의 신이니까.

"그 라이프 링크를 다른 녀석한테 걸 거야. 물론 덕은 내가 보겠지만. 그래도 내 몸에 직접 거는 건 아니니 규칙 위반 아니지?"

"음...."

잠시 고민하던 테라직은 이내 고개를 끄덕였다.

"된다. 네 몸에 스스로 거는 것만 아니면."

"오케이! 나와 드라이어드!"

곧바로 소환된 드라이어드는, 어딘지 착잡한 얼굴로 테라직을 향해 인사를 올렸다.

"오랜만에 뵙습니다. 제가 속한 가장 높은 존재시여."

"나의 권속. 드라이어드. 처음부터 네 기운을 느끼고 있었다."

"자자. 같은 계열 정령끼리 오랜만에 만나서 반가운 건 알겠는데. 지금 내가 시간이 좀 부족해서!"

앞으로 3분 20초쯤 지나면 침묵의 장막이 풀리며 사방에서 조약돌 정령이 쏟아진다. 나는 곧바로 드라이어드에 라이프 링크를 걸고 배율을 1대9로 맞췄다.

우웅!

쇠사슬 모양의 빛이 드라이어드와 나를 연결하자마자 사라졌다.

"이번에도 1대9인가요...."

"응? 방금 뭐라고 했어?"

"아닙니다. 그저 소환할 때마다 놀라운 경험을 체험하게 해주시는 것 같아 놀랐을 뿐입니다."

"미안. 자꾸 이럴 때만 불러서. 혹시 모르니 최대한 멀리 떨어져 있어."

나는 최하층의 벽에 붙어버린 사일런스를 가리켰다. 드라이어드는 고개를 끄덕이며 나무뿌리를 빠르게 움직여 구석으로 향했다.

후, 좋아. 그럼 마지막으로 하나 남았네.

나는 독수리의 목에 매단 가방에 팔을 뻗어, 각종 영약을 꺼내 입안에 들이 부었다.

"꿀꺽꿀꺽... 후, 배 터지겠네. 테우스, 이제 너도 구석으로 피해."

"솔직히 걱정되는군. 물론 자네라면 다 생각이 있겠네만...."

녀석은 키가 6미터를 넘는 거대한 대지의 정령왕과 반대로 키가 1.6미터조차 안 되는 나를 번갈아 보며 한숨을 내쉬었다.

"차마 뭐라 말을 못 하겠군. 부디 승리하길 바라네."

"날 믿어."

그렇게 금독수리도 옆으로 물러났다. 나는 가볍게 몸을 푼 다음, 눈을 감고 사전 대비를 몇 개 준비했다.

"...자. 준비 끝났어. 이제 주먹 날려도 돼."

마지막으로 양팔을 X자로 모으며 얼굴을 가렸다. 테라직은 고개를 끄덕인 다음 몸을 뒤로 크게 젖혔다.

쿠궁....

무거운 돌들이 서로 부대끼는 소리.

그리고는 인간처럼 어깨와 이어진 두 개의 팔과 등에 솟은 두 개의 또 다른 팔을 동시에 풀스윙하며 주먹을 날렸다.

네 개의 주먹.

그 모든 주먹이 하나로 모이는 핀 포인트 지점에 내가 있다는 것을 예감한 순간.

"...."

갑자기 눈앞이 캄캄해지며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뭐지?

왜 아무것도 들리지도 보이지도 않나? 뭐가 어떻게 된 거야?

* * *

으직!

집채만 한 해머로 사람을 후려치면 그런 소리가 날까?

테라직의 네 주먹이 클로드의 몸에 꽂히는 순간, 멀리 옆에 있던 드라이어드의 몸이 폭발했다.

말 그대로 폭발이었다.

높이가 5미터에 달하는 아름드리나무인 드라이어드가, 한순간 산산 조각으로 흩어지며 폭발했다.

동시에 클로드의 몸이 비행마법보다 빠르게 뒤로 날아가 벽에 처박혔다.

콰앙!

암반으로 된 벽에 균열이 생기며 흙먼지와 돌가루가 떨어졌다. 덕분에 위쪽의 침묵지대에 있던 조약돌 정령들이 진동을 느끼며 고개를 갸웃거리기 시작했다.

콰과과과과과과광!

동시에 클로드 가 날아간 주변으로 격렬한 충격파가 퍼지며 폭발을 일으켰다.

덕분에 최하층의 지형 자체가 변해 버렸다. 지면의 3분의 1이 터지고 갈라졌으며, 일부 벽은 완전히 붕괴된 채 뿌연 먼지를 일으킬 뿐이었다.

"클로드!"

룩카르가 날개를 퍼덕이며 클로드가 처박힌 곳으로 몸을 날렸다.

"세상에... 이걸 어찌...."

클로드의 모습은 처참했다.

뼈가 산산조각으로 으스러진 듯, 울퉁불퉁하게 튀어나온 양팔이 보라색으로 부풀고 있다.

"클로드, 정신 차리게. 아니 제발, 눈 좀 떠보게나...."

애써 말하긴 했지만, 테우스의 눈에는 이미 끝장난 참상이 적나라하게 비치고 있었다.

이미 심장이 멈춰버렸다.

아주 미세한 박동이 남아 있긴 하지만, 그것은 이미 꺼진 촛불에 흘러나오는 연기 같은 것.

"놀랍고도 안타깝군."

테라직은 그때까지도 네 주먹을 쭉 뻗은 자세로 경직되어 있었다.

"이렇게 될 거라 예상했다. 준비를 많이 한 것 같지만, 결국 인간의 몸에는 한계가 있었다."

"...너무 심한 것 아닌가?"

테우스는 분노가 어린 얼굴로 테라직을 돌아봤다.

"이 소년은 우리 세상의 파멸을 막아줄 유일한 희망이었네! 그런 존재를 어찌 이리 가혹하게 대한단 말인가! 주먹에 자비를 두어도 좋았을 텐데! 기어이 온 힘을 다해 사람을 죽이면 어떻게 하나!"

"...정해진 섭리를 거스를 수는 없는 법."

테라직은 딱딱한 표정으로 고개를 저었다.

"나 역시 저 인간이 시련을 이겨내길 바랐다. 부디 살아남길 바라며, 가능한 범위 안에 최대한 힘을 억제했다."

"방금 그게 힘을 억제한 거란 말인가?"

극강의 시력을 보유한 테우스조차, 테라직이 주먹을 날린 마지막 순간을 캐치하지 못했다.

마치 주먹이 사라진 것처럼 보였다.

그 정도로 엄청난 최종 속도였다. 튕겨 날아간 클로드의 좌우로 거대한 충격파가 지면을 뒤집어 놓을 정도로.

"그래도 놀라웠다. 인간의 몸으로 저 정도까지 버텨내다니. 육체가 작은 조각으로 분해되지 않고, 저렇게 형체를 갖춘 채 남아 있는 것만으로도 대단하다."

"형체를 보존한 게 무슨 소용인가! 이미 죽어 버렸는데! 장례 치를 시체라도 남은 걸 다행으로 알라 이건가?"

우웅!

바로 그 순간, 죽은 클로드의 몸에 가벼운 뇌전이 번뜩였다.

파직!

그리고 몸 전체에 눈부신 빛이 쏟아졌다. 그것은 지금껏 본적 없는 신성마법의 폭풍세례였다.

"푸하!"

동시에 클로드가 갑자기 눈을 뜨며 숨을 마구 들이켰다.

"흐으으으으으으읍! 으...."

"클로드!"

테우스가 경악하며 소리쳤다.

"자네 살아 있었나! 내가 분명 심장이 멈춘 것을 확인했네! 대체 어떻게 된 건가!"

* * *

아프다.

정말 말이 안 나올 정도로 아파 죽겠다.

그거 말고는 달리 할 말이 없다. 크런치 쿠키처럼 으스러진 양팔이 회복되는 과정도 끔찍하게 아프지만, 그보다 가슴 안쪽을 두드리는 쥐여 짜는 듯한 통증이 더 끔찍하다.

으 아파서 숨을 못 쉬겠네. 이거 진짜 심장이 멈췄었나 보구만.

"자네 살아 있었나! 내가 분명 심장이 멈춘 것을 확인했네! 대체 어떻게 된 건가!"

테우스가 얼굴을 바짝 들이밀며 소리쳤다. 나는 녀석의 목덜미에 있는 가방으로 손을 뻗으려다 이내 포기하고 고개를 떨어뜨렸다.

"팔 아파...."

진통의 영약을 마시고 싶은데 팔이 안 올라간다. 급한 대로 손이 닿는 곳에 진통 마법을 퍼부으며 호흡을 가다듬었다.

"후으.... 후읍.... 후아...."

"아니, 이유가 무슨 상관인가? 자네가 살아 있다는 게 중요하지. 장하네! 정말 장하네 클로드!"

얘가 흥분한 거 보니 그새 정이 들었나 보구나. 나는 통증이 겨우 줄어드는 것을 느끼며 길게 숨을 내쉬었다.

"후우우우.... 죽었을까 봐 걱정했어?"

"죽었을까가 아니라 실제로 죽었었네. 심장이 멈췄다고 하지 않았나?"

"그래. 나도 그렇게 느꼈다."

어느새 근처에 다가온 테라직이 몸을 낮추며 물었다.

"나 역시 궁금하다. 클로드여, 방금 네 몸에 무슨 일이 벌어진 것인가?"

"이 안에 마력결정이 있어."

나는 손가락으로 머리를 두드리며 말했다.

"원래 내꺼 아니라 다른 녀석들 걸 흡수한 거야. 내 몸에 있고 내 명령도 따르지만 독립적으로 움직이거든."

바로 머릿속에 세 개나 들어 있는 리치의 마력결정 이야기다. 테라직은 눈을 크게 뜨며 내 눈을 주시했다.

"마력결정이라. 그런 게 있었군."

"그래서 주먹 맞기 전에 미리 마력 결정에 예약을 걸어 놨어. 무조건 30초 뒤에 예약된 마법을 내 몸에 쏟아 붓는 걸로."

"오오."

"너 주먹 맞고 부상이 심각해서 당장이라도 회복 안 하면 죽는 상황인데, 정작 기절해서 마법을 쓸 수 없으면 큰일이잖아? 쇼크로 심장이 멈출 수도 있고."

그래서 1차 예약으로 가벼운 번개 마법을 스스로에게 걸어놓았다. 혹시 심장 멈췄으면 다시 뛰라고.

그 뒤로도 강심효과를 내는 신성마법을 준비했다. 미리 심장의 영약을 먹어 놓기도 했고.

마지막으로 마력결정에 남은 모든 마법을 힐링으로 예약해 놓았다. 그러고도 양팔의 부상이 완벽히 회복되지 않은 건 충격적이었지만.

어쨌든 간에, 이것이 바로 내가 준비한 역전 홈런이다.

결국 마력결정의 새로운 활용법을 발견했기 때문에 대지의 정령왕 루트를 감행한 것이다. 예약 걸어 놓기. 그럼 의식을 잃어도 일정 시간 뒤에 자동으로 마법이 나가니까.

-계약자님. 침묵의 영역이 앞으로 90초 남았습니다.

여전히 테라직과 거리를 두고 있는 사일런스가 멀리서 경고했다. 나는 눈앞이 핑 도는 것을 느끼며 억지로 몸을 일으켰다.

"으 삭신이야. 아무튼 테스트 통과 지? 마법 잔뜩 쓴 것도 너 주먹 맞은 다음이었고?"

"그렇다. 클로드여. 그대는 나의 조건을 통과했다."

테라직은 거의 엎드리다시피 몸을 숙이며 나와 눈높이를 맞췄다. 동시에 녀석의 눈에서 붉은 돌 조각 하나가 부스러기처럼 떨어졌다.

그것이 순간 가속하며 내 이마에 스며들었다.

슉!

"음...."

한순간 온몸이 딱딱하게 경직되었다. 으, 뭐지, 잠시만 이런 줄 알았는데 계속 몸이 안 움직이는데?

"이로써, 너는 나 테라직과 계약을 마쳤다."

"계약된 거야? 근데 몸이 안 움직이는데...."

"곧 풀릴 테니 잠시 참아라. 지금부터 너는 모든 대지의 정령을 다스리는 존재. 바로 나 대지의 정령왕 테라직을 소환할 수 있다."

그리고는 그 거대한 이마를 내 머리에 살짝 대며 속삭이듯 말했다.

"이 계약은 너 클로드의 생명이 다할 때까지 유효하다. 네 앞에 반드시 쓰러뜨려야 할 적이 나타났을 때 날 소환하라. 녀석은 대지의 분노를 온몸으로 받아내야 할 것이다."

그리고는 천천히 눈을 감으며 그 자세 그대로 침묵했다.

"휴...."

이제 끝난 건가?

한숨이 절로 나오는구만. 이걸로 대지의 정령왕 루트 클리어.

"비장의 수단을 숨겨 놓고 있는 건 좋았네만...."

금독수리가 함께 한숨을 내쉬며 걱정되는 듯 물었다.

"만약 심장이 멈추는 정도가 아닌, 아예 육체가 복구 불가능할 정도로 분해되었으면 어쩔 뻔했나?"

"내가 먹은 코어가 몇 갠데 거기까지 갔겠어? 게다가 피해의 90퍼센트를 드라이어드에게 돌렸는데."

"그 드라이어드, 자네가 주먹에 맞는 순간 폭발하며 산산 조각으로 흩어졌네. 끔찍하더군."

라이프링크를 걸지 않았으면 내 몸이 그렇게 박살났겠지? 나는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고개를 끄덕였다.

"맞아. 끔찍했을 거야. 걱정해 줘서 고마워."

"지켜보다가 심장 떨어지는 줄 알았네. 물론 나는 심장이 존재하지 않네만...."

쿠궁!

그 순간, 갑자기 지진이라도 난 듯 온 사방이 흔들리기 시작했다.

고개를 들자 온 사방에서 조약돌 정령들이 아래층으로 쏟아져 내려오는 게 보였다. 쳇, 내가 니들 보스랑 내가 계약했는데 그건 안중에도 없냐?

-죄송합니다. 침묵의 영역이 해제되었습니다.

사일런스가 힘을 다 썼는지 흐릿하게 변하며 모습을 감췄다. 동시에 테우스가 날입에 물고 등 위로 휙 내던지며 소리쳤다.

"날아오르겠네! 꽉 붙잡게! 아니, 그럴 필요도 없지. 자네를 위해 완벽한 바람의 쿠션으로 좌석을 만들어 놨으니."

그리고는 급하게 날갯짓을 하며 하늘로 날아올랐다. 나는 모든 층에서 쏟아지는 조약돌 정령을 보며 가만히 눈을 감았다.

그래. 지쳤다.

그동안 별의별 경험을 다 해봤지만.... 심장이 멈추고 나서 다시 살아난 건 또 처음이다.

대체 얼마나 죽은 듯 잠을 자야 수지타산이 좀 맞으려나?

이계 황자는 세상을 구하고 싶다 127화

38장 사령전쟁

능선 너머로 거대한 파도가 굽이쳐온다.

해골, 썩은 시체, 누더기처럼 기워진 거대한 살덩이.

모두가 사령군이라 불리는 죽은 자의 군대.

"흉측하구나. 이토록 먼 곳임에도 이리도 자세히 보이다니. 내가 금독수리의 정수를 괜히 먹었구나."

하늘에 자리 잡은 톨라리는 오랜만에 모국어를 쓰며 눈살을 찌푸렸다.

엘스톤 백작령을 침범한 사령군의 규모는 감히 셀 수조차 없을 정도.

-적이 너무 많습니다. 먼저 톨라리 님께서 마법으로 적을 줄여주십시오.

다비의 부탁으로 선봉을 차지하게 되었다. 물론 선봉이라고 해 봤자 안전한 하늘에서 마법만 펑펑 쏴댈 뿐이지만.

"쓸 수 있는 템페스트는 모두 여섯 발. 무리하면 좀 더 가능하지만 여력을 남겨야 한다. 전황이 어찌 흐를지 모르니."

톨라리는 싸늘한 눈으로 최적의 장소를 물색했다.

물론 어디에 날려도 충분할 것이다. 그만큼 사령군은 많았고, 무수히 밀집해 있었으니까.

주의해야 할 것은, 최대한의 효과를 위해 템페스트 여섯 발을 서로 겹치지 않게 날리는 것.

그렇게 해야 저 광활한 적진에 여섯 개의 동그라미를 깔끔하게 그릴 수 있다. 톨라리는 머릿속으로 계산을 하며 혼잣말을 계속 중얼거렸다.

"그것으로 3할.... 아주 잘 되면 4할의 적을 줄일 수 있겠구나. 집중하자. 내가 성과를 거두는 만큼, 저들의 피해가 줄어 들 터이니."

멀리 뒤쪽으로 엘스톤 수비대와 수호기사단, 그리고 클로드 기사단이 각각 좌익과 우익, 그리고 본대를 맡아 방어진을 펼치고 있다.

여기서 최대한 많은 적을 줄여 저들의 부담을 덜어줘야 한다.

각오를 마친 톨라리는 템페스트를 만들어 적진에 뿌리기 시작했다.

한 발 한 발 신중하게.

곧이어 격렬히 몰아치는 소용돌이가 안에 갇힌 망자의 군대를 갈아내기 시작한다.

시력만큼 청력이 좋은 건 아니라 다행이었다. 톨라리는 지면에 솟구친 여섯 개의 회오리 폭풍을 보며 가볍게 한숨을 내쉬었다.

"내 역할은 다 했다. 물론 이래도 수만의 적들이 남았다만.... 으응?"

템페스트가 소멸한 자리에 뭔가가 꿈틀 거리는 게 보였다.

잠시 멍해있던 녀석들은, 사방에 쌓인 망자의 시체를 헤치며 급하게 전방으로 달리기 시작했다.

"...이건 실책이구나."

톨라리는 눈살을 찌푸렸다.

살덩이 괴물.

사령군에서 가장 주의해야 할 괴물이 정작 템페스트 속에서 생존해 버렸다.

"템페스트에 너무 많은 적을 담았구나. 덕분에 강한 녀석이 버티고 말았어."

하지만 이제 와서 후회해도 소용 없다.

그나마 해골이나 좀비를 만단위로 갈아 버렸다는 게 위안이었다. 생존한 살덩이 괴물들도 딱히 온전해 보이진 않았고.

"그래. 내 할 일은 여기서 끝이다. 나머지는 저들에게 맡기고...."

그런데 그때, 적진의 최후방에 안개가 짙게 깔리는 것이 보였다.

"갑자기 안개가?"

그리고 그 안개 너머로, 무언가 거대한 것이 발을 질질 끌며 움직이고 있었다.

거인.

전에 봤던 '젝트바이아'의 시체보다도 더 거대한 회색빛의 거인.

"으.... 윽?"

한참을 주시하던 톨라리가 눈을 가늘게 뜨며 중얼거렸다.

"마치 걸어 다니는 무덤.... 세상에 어찌 저런 흉물이 존재할 수 있단 말인가? 어떻게든 내 선에서 해결하지 않으면 안 되겠구나."

* * *

"음...."

정신을 차리자 금독수리 등에 침을 흘리며 자고 있었다. 죽다 살아나서 그런지 몸 상태가 말이 아니구만.

"일어났군. 자네 꼬박 하루를 잠들어 있었네."

테우스의 말에 배낭에서 먹을 걸 꺼내며 고개를 끄덕였다.

"어째 배가 고프다 했어. 여기가 어디쯤이야?"

"인간들이 알비어스라 부르는 나라의 상공이네."

"벌써? 많이도 날아 왔네."

"자네가 자는 동안 꽤 속도를 높였네. 마침 마력이 떨어지고 있던 터에 잘 됐군. 나도 밥 좀 주게나."

"미안. 그쪽 생각을 못했네."

꼬박 하루를 굶었을 녀석에게 다이렉트로 바람 마법을 퍼부어 주었다. 테우스는 마법을 흡수하는 와중에 연신 움찔거리며 몸을 떨었다.

"오, 오오.... 마력에서 강한 미네랄이 느껴지는 군. 마치 산에서 갓 캐낸 바위를 혀로 핥는 듯한 자극적인 맛이 느껴지네."

"오버하긴. 아무리 테라직이랑 계약했다고 마력 맛이 달라지겠어? 기분 탓 아냐?"

"아니 정말이네."

테라직은 정색하며 고개를 저었다.

"내가 입맛이 좀 예리해서 말이네. 전에 에이션트 이글 녀석들 마력 받아먹고 살 때도, 녀석들이 그날 먹은 식사나 컨디션에 따라 맛에 차이가 나는 걸 정확히 감지해 냈지."

그것 참... 재주도 좋구만.

"그러고 보니 마력의 맛과 별개로, 어째 자네 분위기가 좀 가라앉은 것 같군. 괜찮은가?"

"나? 내가 왜?"

뭔가 분위기가 달라졌나? 평소와 딱히 차이는 없는 것 같은데?

"아무래도 죽다 살아나서 그런가? 임사체험하면 성격이 변한다고 하던데. 난 잘 모르겠지만."

"나는 대지의 정령왕과 계약해서 그런 건가 했네. 아무튼 큰일이었지. 자네 심장 멈춘 거 보고 나도 심장이 멈추는 줄 알았네."

"미리 말해줄 걸 그랬나? 실은 나도 진짜 죽을 줄은 몰랐어. 피해의 90퍼센트를 드라이어드에게 돌렸는데도."

위험한 순간이었지만 덕분에 대지의 정령왕과 계약할 수 있었다. 역대 최초로 말이지. 혹시 모르니 이야기 좀 해 볼까?

"테라직? 내 목소리 들려? 테라직?"

-들린다. 클로드여.

낮고 무거운, 하지만 부드럽게 울리는 테라직의 목소리가 머릿속을 울렸다

"소환할 때 주의사항 같은 거 없나 해서. 그냥 불러내면 알아서 싸우는 거지?"

-그렇다. 너의 적을 내가 분쇄할 것이다. 다만 적과 아군이 뒤엉킨 곳에서 날 부르는 건 위험하다. 자칫 대지의 분노에 아군까지 휘말릴 수 있으니.

"그건 주의할게. 그리고 정령빙의에 대해서도 이야기를 좀 해야 할 것 같은데."

-그 점에 관해서는 나의 권속과 대화를 나누었다.

"룩카르 말이지?"

-그렇다. 물론 숲의 정령도 나의 권속 이다만, 지금은 몸을 회복중이라 뜻을 교환할 수 없었다.

나대신 산산 조각난 드라이어드에게 감사와 미안함을. 테라직은 진중한 목소리로 계속해서 말을 이었다.

-네가 지금까지 어떤 싸움을 했으며, 어떤 정령빙의를 해 왔는지 들었다. 불의 정령왕과 빙의했을 때는 무척 아슬아슬했던 모양이군.

"거의 돌려막기 수준이었지. 룩카르 빙의로 강화된 육체를 통해 이그니스와의 빙의 시간을 늘리고...."

-클로드여, 너는 먼저 두 가지를 알아야 한다.

"응?"

-먼저 정령 빙의는, 단순히 일정 시간동안 육체를 강화하고 그 대가로 몸에 부담을 안는 것이 전부가 아니다.

이건 또 무슨 소리래? 그거 말고 다른 게 있어?

-정령에 따라 전혀 다른 효과를 가지고 있기도 한다. 넌 여태껏 한 번도 나의 권속, 드라이어드와 빙의를 한 적 이 없었지?

"응. 빙의보다는 따로 소환해서 라이프 링크 걸어 놓는 게 유용할 것 같아서."

-드라이어드와 빙의하면, 네 스스로가 나무와 같은 존재가 된다.

"...뭐?"

-빙의 시간도 길고 육체의 부담도 거의 없다. 빙의를 푼다고 몸에 충격을 받을 일도 없고.

"아니, 그래서 나무와 같은 존재가 되면 뭐가 좋은데?"

-전투에 도움이 되는 일은 적을 것이다. 다만 네 스스로가 드라이어드에 필적하는 생명력을 가지게 된다.

"그러면...."

나는 잠시 고민하다 눈살을 찌푸렸다.

"소환해서 라이프 링크 거느니, 그냥 빙의하는 게 더 낫다는 뜻이야?"

-장단점이 있을 것이다. 물론 효율은 라이프 링크가 더 좋겠지. 하지만 드라이어드를 소환해 라이프링크를 거는 행위 자체가 어려운 상황도 있을 테니까.

그렇긴 하지. 난전이 터지면 드라이어드가 직접 공격을 받고 외려 나한테 피해를 분산시키기도 했으니까.

"정확한건 직접 빙의를 해 봐야 알겠네. 몸에 부담이 없으면 돌려막기도 가능 할 테고. 그럼 넌 어떤데? 그냥 육체를 강화시키는 타입이야? 아니면 뭔가 다른 효과가 있어?"

이그니스와 빙의하면 화염 그 자체가 되는 것처럼, 얘도 빙의하면 대지 그자체가 되려나?

-나는 복합적이다.

"복합적?"

-물론 육체를 강화시키는 것은 같다. 룩카르보다 훨씬 더. 다만 정령왕이라는 이름에 걸맞진 않을 것이다. 클로드여, 너는 불의 정령왕인 이그니스와 빙의를 한 적이 있지?

"응."

-그때처럼 극적인 변화를 주진 못한다. 그저 더 강한 힘과, 더 강한 내구력을 얻을 것이다.

"그래? 하지만 다른 효과 있다는 거지?"

-그렇다.

테라직은 엄숙한 목소리로 선언하듯 말했다.

-나는 대지에 속한 모든 것들의 정점. 내가 이 땅에 발을 붙이고 있는 한, 나는 무적에 가까운 존재가 된다.

"응?"

-그러니 클로드여, 네가 나를 받아들이면, 너 또한 네게 가해지는 많은 피해를 대지에 흘려보낼 수 있게 된다.

그리고 갑자기 조용해졌다. 나는 잠시 고민하다 녀석이 한 말을 알기 쉽게 해석했다.

"그러니까... 일종의 라이프 링크를 땅에 건다는 뜻이야? 대신 땅에 발을 붙이고 싸워야 하고?"

-그렇다.

"효과 끝내주는데? 피해를 얼마나 흘릴 수 있는데?"

-속성에 따라 다르다. 다만 그 어떤 피해라도 최소 절반은 대지가 흡수해 준다. 하지만 지금처럼 하늘을 날고 있다면 안 되겠지.

"오호.... 그래서 당장 빙의하면 얼마나 지속할 수 있는데? 20초? 30초?"

-30분이다.

순간 입이 쩍 벌어졌다.

"30분? 이그니스는 2분이었는데? 그것도 룩카르로 돌려막기 해서?"

-빙의를 통해 네 몸에 가해지는 부담 또한 대지가 흡수하기 때문이다.

"오...."

-다만 일정 간격으로 대지에 몸을 붙이고 있어야 한다. 만약 빙의 직후에 계속 비행마법으로 하늘을 날아다닌다면, 30분은 30초로 줄어들게 될 것이다.

그건 약간 패널티인데....

아니, 그래도 이 정도면 감지덕지다.

결국 땅에 발을 붙이고 싸운다는 조건 하에, 룩카르보다 더 강력한 빙의 효과를 30분이나 지속할 수 있다는 소리니까.

-그리고 두 번째로 알아 둬야 할 것은, 이 30분이란 시간은 원래 10분이었다는 것이다.

"10분? 근데 시간이 왜 늘어난 건 데?"

-네가 나의 권속 둘과 계약을 했기 때문이다.

"룩카르와 드라이어드?"

그럼 대지 계열 정령 하나당 대지의 정령왕과의 빙의 시간이 10분씩 늘어난다는 뜻?

"아니 진짜? 그런 식으로 정령 간에 시너지가 난다고?"

-영향을 받는 것은 가장 위에 있는 정점. 바로 나와 같은 정령왕뿐이다.

"그럼 이그니스도? 아래 있는 불의 정령을 모으면 이그니스의 빙의 시간도 늘어나는 거야?"

-어떤 영향을 받는지는 그 상황이 되어야 알 수 있다. 나 또한 이런 영향이 있다는 것을 너와 계약한 후에 알게 되었다.

"오...."

아무튼 이거 완전 꿀이잖아?

정령과 계약을 하면 할수록 이런 시너지가 생길 줄은 전혀 몰랐다.

이렇게 된 이상, 억지로라도 시간을 내 다른 정령들과 계약 할 필요가 있겠는데?

-이 두 가지를 감안하면 더 높은 경지에 도달할 수 있을 것이다. 클로드여, 너는 대지의 균열까지 발생한 이 시점에서 더욱 강해질 필요가 있다.

"당연히 더 강해져야지. 그런데 대지의 균열이 뭔데?"

그러고 보니 전에 주먹으로 쳐맞기 전에도 그런 소리를 했던 거 같은데?

"혹시 지진을 말하는 거야? 어디 지진이라도 발생했어?"

-평범한 지진이라면 언급할 필요도 없다. 그것은 자연의 법칙이니까.

"그럼?"

-우리의 자연에 속하지 않은, 다른 차원에서 넘어온 인위적인 힘이 대지를 뒤흔들어 놓았다.

"다른 차원? 설마 사이크 차원이 또 무슨 짓을 했어?"

-정확한 것은 나도 모른다. 그저 멀리 동쪽에 발생한 이변을 감지했을 뿐.

갑자기 등에 식은땀이 흐른다. 나는 멀리 지상에 펼쳐진 알비어스 왕국의 전경을 노려보며 물었다.

"동쪽이면 여기서 동쪽을 말하는 거야? 페이우드 제국?"

-그보다 더 멀리 동쪽이다.

"제국보다 더 멀리 동쪽이라니, 그럼 죽음의 땅?"

이계 황자는 세상을 구하고 싶다 128화

38장 사령전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