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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계 황자는 세상을 구하고 싶다 116화

34장 마인드 어택

까마득하게 솟은 가장 높은 봉우리에서, 금독수리는 위풍도 당당하게 날개를 펼치며 모두에게 선언했다.

"모두 잘 들어라. 지금부터 나는 여기 있는 클로드를 따라 가기로 했다."

그러자 모든 독수리들이 탄식하며 소리쳤다.

"세상에!"

"아니! 그런!"

"말도 안 돼!"

"끼익! 끼이익!"

"꺄갹! 기껏 돌아오셨는데 왜 떠나십니까!"

"이글 스피릿이시여! 당신은 우리 에이션트 이글의 정수 그 차체이십니다! 부디 이곳 화살촉 봉우리에서 천년만년 부족을 이끌어 주십시오! 떠나시면 안 됩니다!"

마지막으로 울부짖은 건 족장인 레텝이었다. 겨우 고향에 돌아오자마자 폭탄선언을 해버렸으니 저런 반응이 나올 수밖에.

"...아직 모르나 보군."

금독수리는 눈을 가늘게 뜨며 자신을 둘러싼 독수리들을 천천히 살폈다.

"10년 전 그날. 이곳에 있던 내가 폭주하여 날아 간 것은 이유가 있었다."

"...이글 스피릿이시여?"

"잠시 비켜라 레텝. 뒤에 녀석에게 볼일이 있으니. 그래. 거기 너."

금독수리가 날개 끝으로 뒤에 있는 독수리를 가리켰다. 그러자 무리에 숨어 있던 한 녀석이 움찔하며 몸을 떨었다.

"삐익...."

"어서 나와라. 이 병아리 같은 놈."

순간 금독수리의 몸에서 마력의 흐름이 새어나오며 젊은 독수리의 머리로 빨려 들어갔다. 녀석은 발작하는 몸을 흔들며 즉시 앞으로 나섰다.

"이글 스피릿 님. 저는...."

"그때로부터 10년이 지났는데, 넌 아직도 진실을 밝히지 않았나?"

"죄, 죄송합니다! 피익! 삐이익!"

녀석은 절규하듯 울음소리를 내며 머리를 조아렸다.

"두려워서 말하지 못했습니다! 부족에서 추방당할까 봐!"

"테우스? 이게 대체 무슨 일이지?"

족장이 젊은 독수리를 다그쳤다. 테우스라 불린 녀석은 독수리답지 않게 눈물을 줄줄 흘리며 진상을 털어 놓았다.

"10년 전, 이글 스피릿께서 폭주하신 이유는 저 때문입니다."

"뭐라?"

"당시에 저는... 제 짝이 이글 스피릿에 반해 저에게 눈도 주지 않는 것에 고통받고 있었습니다."

"뭐라? 아니 잠깐, 지금 설마...."

"그렇습니다. 저는 질투에 사로잡혀.... 아무도 안보는 사이에 이곳 봉우리에 올라, 동상처럼 멈춰 계시는 이글 스피릿을 박살내기 위해, 제 모든 힘을 다한 마법을 날렸습니다!"

그 순간, 이곳에 모여 있던 독수리 사회 전체가 들썩였다.

"죄송합니다. 이글 스피릿님. 제가 질투로 정신이 나가버려...."

"이 미친놈이! 네가 그러고도 이 위대한 에이션트 이글의 일원이냐!"

흥분한 족장이 커다란 날개로 테우스의 등을 후려치기 시작했다. 그러자 금독수리가 앞으로 나서며 족장을 막아섰다.

"멈춰라, 레텝."

"하지만 이글 스피릿이시여, 이자 때문에 당신께서 그 긴 수모를 당했는데...."

"수모를 당한 건 사실이다. 저 녀석의 마법에 깃든 감정이 너무 격렬해서, 흡수하는 과정에 내가 잠시 이성을 놓아 버리고 말았다."

금독수리는 바닥에 엎드린 테우스를 노려보았다. 그런데 순간 또 다른 젊은 독수리가 옆으로 날아와 함께 머리를 조아렸다.

"제 불찰입니다! 이글 스피릿님! 당시에 제가 당신의 모습에 혹하여 제 짝에게 소홀한 바람에...."

우와, 이게 그 소문에만 듣던 삼각관계?

옆에서 보고 있자니 완전 팝콘 각이다. 뭐 먹을 거 없나? 일단 설탕바라도 하나 뜯어야지.

"네놈들! 여기가 어디라고 이제 와서 이 사달을 일으키는 것이냐! 안되겠다! 족장의 이름으로 당장 너희 둘을...."

"기다리라고 했다."

금독수리는 근엄한 표정으로 고개를 치켜들었다.

"저들을 탓할 필요는 없다. 그저 나의 존재가 너무 잘났기 때문이지."

와, 말하는 거 재수 없어.

하지만 녀석이 멋들어지게 날개 짓을 하자, 주변에 있던 다른 독수리의 절반이(아마도 암컷으로 추정한다) 휘청거리며 병아리 같은 소리를 냈다.

"삐익...."

"이글 스피릿 님!"

"아앗 나 죽어...."

"피익, 피익, 피익...."

뭐 그래. 솔직히 내가 봐도 좀 멋지긴 하다.

저 번쩍이는 거대한 날개의 자태라니. 게다가 목소리도 좋다. 중저음으로 쫙 깔린 게 아주 그냥 매력적이야.

"모두 이해했으리라 생각한다. 내가 이곳에 있는 건 종족의 번영에도 좋지 않다. 그러니 나는 클로드를 따라 이곳을 떠나기로 했다."

"클로드. 그게 정말인가?"

독수리 족장이 고개를 홱 꺾으며 날 노려보았다. 나는 미소와 함께 가볍게 고개를 저어주었다.

"아니?"

"아니라고?"

"나도 지금 첨 들었어."

"무슨 소리냐 클로드! 여기까지 오는 길에 계속해서 상의하지 않았나!"

금독수리가 펄쩍 뛰며 소리쳤다. 나는 한숨을 쉬며 방금 있었던 일들을 떠올렸다.

"그게 왜 상의야? 난 암 것도 안 들었어. 너 혼자 뭔가 엄청나게 쉬지 않고 주절거리기에 귀를 닫았다고."

"그런.... 그토록 절실하게 어필하였는데 너무하지 않은가?"

"너무한 건 너야. 나 귀에서 피 나는 줄 알았다고. 암튼 결정된 거 아무 것도 없어."

"으윽! 클로드! 내가 그대를 등에 태워주기까지 했는데!"

"그거 네가 억지로 태운 거잖아? 은혜 갚는다니 어쩌니 하면서. 뭐 승차감은 좋았다만."

"당연하지. 흔들리지 않는 편안함을 위해 많이 노력했네. 이런데도 날 내칠 텐가?"

"애초에 널 왜 내가 책임 져야 하는데...."

"자네가 날 구해주지 않았나. 구해줬으면 책임을 져야지."

아니, 이건 무슨 물에 빠진 거 구해줬더니 보따리 내 놓으라는 심사냐?

"그리고 이곳을 떠나면 난 갈 데도 없네. 게다가 난 이미 그대의 마력이 없으면 살 수 없는 몸이 되어 버렸어. 그 농후하고 풍부하한 감미로운 느낌이라니...."

"그만. 알았으니까 그만해."

여기서 더 내버려 뒀다가 무슨 끔찍한 묘사가 흘러나올지 두렵다. 암튼 뭐.... 르갈도 데려왔는데, 얘라고 못 데려올 이유는 없겠지.

"그럼 내가 시키는 대로만 해. 쓸데없이 딴짓 하지 말고."

"알겠네. 정기적으로 마력만 공급 해 주면 그대의 명령에 복종하지. 그럼 모두 들어라! 나는 지금부터 화살촉 봉우리를 떠난다! 너희는 이곳에서 대대손손 번식하고 번영하라!"

"이글 스피릿이시여!"

그러자 모든 독수리들이 통곡하며 머리를 숙였다. 나는 그 와중에 족장에게 다가가 작은 목소리로 요구했다.

"코어 줘."

"뭐라?"

"난 약속 지켰잖아? 계약대로 코어 줘. 나중에 이계와 전쟁 나기 전에 모여서 함께 싸우는 것도 잊지 말고."

"...크웨엑!"

족장은 곧바로 코어를 토해낸 다음 촉촉해진 눈망울로 날 바라보았다.

"여기 있다. 그리고 우리 에이션트 이글의 정수이신 이글 스피릿을 부탁한다."

"딴 건 몰라도 밥은 꼬박꼬박 챙겨 줄게."

그리고 봉우리 바닥에 떨어진 코어를 집어 들었다. 코어는 이글 스피릿처럼 찬란한 황금빛으로 반짝이고 있었다.

좋아. 이걸로 에이션트 이글 코어도 획득.

개수로 치면 이게 네 번째 코어다. 과연 이번엔 어떤 능력이 새롭게 추가 될까?

* * *

독수리 코어의 효과는 너무도 즉각적이었다.

덕분에 뭔가 숨겨진 능력이 있을지 고민할 필요도 없었다. 나는 이글 스피릿의 등에 큰 대자로 누운 채 편안한 비행을 만끽하며 말했다.

"코어보다 이게 더 좋네. 앞으론 악착같이 비행 마법으로 안 날아 다녀도 되겠어."

"아까는 그리 매정하게 굴더니, 이번엔 또 좋다고 난리인가?"

"그땐 그냥 돌아가는 상황이 웃겨서... 아, 여기서 남쪽으로 살짝 틀어봐. 그대로 계속 직진."

"알겠네. 엠퍼로드 동쪽에 있는 작은 숲이라 했지?"

"엠퍼로드를 알아?"

"에이션트 이글이 알고 있는 건 나 역시 모두 알고 있네. 페이우드 제국의 수도 아닌가?"

"눈이 좋으니 멀리서 다 구경하면서 살았나 보구만. 진짜 엄청난 시력이야."

"그보다 내가 감금된 동안 세상에 이런 일이 벌어지고 있는 줄은 꿈에도 몰랐네. 세상의 종말까지 앞으로 채 10개월도 남지 않았다니."

"종말 비슷한 거지, 종말은 아니야."

내가 무슨 짓을 해서라도 그렇게 되지 않도록 만들 것이다. 이글 스피릿은 고개를 끄덕이며 공중에서 방향을 선회했다.

"앗? 그쪽 아니라니까?"

"걱정 말게. 잠시 돌아 기류를 타려면 더 빨리 갈 수 있으니까."

"그래?"

"걱정 말고 내게 편안히 맡기시게. 자네는 그동안 너무 많은 책임을 짊어지고 산 것 같군."

"그걸 알겠어?"

"알다마다. 내 특기가 무엇인지 자네도 알지 않은가?"

"텔레파시?"

"그렇지. 꼭 텔레파시가 아니라도 염파를 보내 다양한 일을 할 수 있네. 정신 공격도 가능하고, 염파가 닿은 사물에 남은 기억을 읽을 수도 있지."

"물건에 남은 기억을 읽는다고? 그건 좀 무서운데?"

"나이 지긋한 에이션트 이글이라면 누구나 가능하지. 지금 족장은 아직 어려서 거기까지 도달하진 못했지만. 그보다 자네 코어를 흡수하지 않았나?"

"맞아. 아까 먹었지."

"원한다면 효과를 미리 말해 주겠네. 그럼 나중에 갑자기 효과가 생겨도 놀라지 않을 테니."

"아니, 내가 먼저 말해 볼게."

나는 고개를 저으며 즉각적인 변화를 설명했다.

"일단 마력 늘었어. 맞지?"

"호오, 그렇네. 그게 바로 체감이 되는가?"

"내가 직업이 마법사니까. 집중력이나 계산력 쪽에 당장 여유가 살짝 생긴 게 느껴져."

"집중력과 계산력이라.... 그렇군. 인간은 오직 뇌를 통해 마법을 사용하니 그렇게 느낄 만도 해."

"독수리는 뇌 말고 다른 걸로 마법을 써?"

"물론이네. 자네는 정령이 두뇌가 있어서 마법을 쓴다고 생각하나?"

어... 생각해 보니 그러네? 정령은 뭘 로 마법을 쓰는 거지?

"인간이 두뇌로 하는 일은 결국 흐름을 만드는 것이지. 정령은 온 몸으로 그 흐름을 만든다네. 나 역시 마찬가지고."

"너야 코어로 만들어진 존재니까. 정령이랑 거의 비슷한 거 같은데."

"비슷하지만 다르네. 나는 이 세상에 묶여 있지. 정령처럼 정령계를 자유롭게 옮겨 다닐 수 없어."

그렇게 말하는 금독수리의 표정이 살짝 아쉬워 보였다. 그러고 보니 얘를 계속 이글 스피릿이니, 금독수리니 하며 부르기도 뭐 한데....

"너 이름이 뭐야?"

"음? 당연히 이글 스피릿 아니겠나?"

"그건 호칭 같은 거고. 그냥 순수한 이름."

"순수한 이름이라. 그렇다면 테우스라 부르시게."

"테우스? 아까 그 질투 독수리이름이잖아?"

"그렇지. 그 녀석이 온 마음을 담아 날린 마법을 흡수했을 때, 나 역시 일부는 그 녀석을 받아들었네. 그러니 지금 내가 가장 가까운 건 테우스라 할 수 있겠지."

"어.... 그래?"

뭐 아무렴 어때. 뭔가 좀 이상하긴 하지만.

"그럼 테우스."

"그래. 클로드."

"그렇게 따지면, 앞으로 내 마법 계속 먹다보면 이름이 클로드로 바뀌는 거야?"

"그럴 리가. 물론 자네가 어떤 격렬한 마음을 품고, 날 죽일 듯이 강력한 바람 마법을 사용한다면 또 모르겠네만."

"감정이 중요한 거구나. 근데 너 템페스트도 흡수할 수 있어? 템페스트 뭔지 알지?"

"그건 너무 강력한 마법이네. 내가 흡수할 수 없으니 부디 자제 해 주게나."

테우스는 움찔 하고 몸을 떨었다. 나는 가만히 웃으며 화제를 원래대로 돌렸다.

"코어 먹고 생긴 두 번째 능력은 비행 속도가 빨라진 거야. 아까 너한테 탑승하기 전에 비행 마법 썼는데 속도가 확 늘어났더라고."

"그것은 자네에게 기류를 타는 감각이 생겼기 때문이네."

"기류?"

"에이션트 이글은 본능적으로 공기의 흐름을 읽을 수 있지. 눈이 아닌 몸으로. 덕분에 자동으로 기류를 타서 비행 속도가 빨라졌다 느낀 거야."

그런 거였어? 난 그냥 비행 마법을 다루는 능력이 높아져서 속도가 빨라졌다고 생각했는데.

"그러고 보니 살짝 아쉽네. 이번 코어는 남았으면 톨라리 확정인데."

"톨라리?"

"나랑 비슷한 아크 위저드야. 속성이 바람이거든. 바람 하나만 따지면 나보다 나아."

"그거 참 마음에 드는 인간이군. 원한다면 내가 코어를 줄 수도 있네."

"정말?"

"내 몸이 코어로 되어 있지 않나? 아니 잠깐, 그렇다고 내 몸을 산산 조각으로 분해해서 수백 개의 코어를 만드는 상상 같은 건 하지 말게. 대부분은 이미 융합되어 분리가 불가능하니까."

쳇. 들켰네?

"대신 마지막으로 흡수한 하나 정도는 다시 끄집어 낼 수 있지. 나중에 그 톨라리라는 인간과 만나면 날 대면시켜 주게나. 마음에 들면 그 자리에서 넘겨줄 테니."

"그럼 완전 고맙고. 아, 세 번째는 눈 좋아진 거야. 코어 먹고 멀리 볼 수 있게 됐어."

그렇다고 에이션트 이글처럼 수백 킬로미터 떨어진 곳을 볼 수 있는 건 아니다. 인간의 시력을 기준으로 엄청나게 좋아진 거지. 대충 시력 측정을 하면 5.0 정도 되지 않을까?

"시력 또한 에이션트 이글의 특징이니까. 이미 실시간으로 체험 중인가 보군."

"맞아. 이 높은데서 내려다보는데도 지상 풍경이 꽤 잘 보여. 내가 느낀 건 여기까지인데, 혹시 다른 능력 또 있어? 혹시 너처럼 텔레파시 능력 생긴다든가?"

"그건 어려울 거야."

테우스는 다시 기류를 찾아냈는지, 좀 더 높은 곳으로 날아오르며 남쪽으로 기수를 변경했다.

"물론 텔레파시가 에이션트 이글의 특기이긴 하네만, 이는 우리가 비교적 정령에 가까운 존재라 가능한 거라네. 나는 더더욱 그렇고."

"인간은 정령과 먼 존재라 안 된다?"

"쉽지 않을 거라 생각하네. 아무리 코어를 흡수해도 타고난 종의 한계를 넘어서는 건 어렵겠지."

"빙의하면 되려나?"

"음?"

"정령 빙의. 나 정령사기도 하거든."

"...정말인가?"

테우스는 비행 와중에 내 쪽으로 목을 돌리며 놀란 표정을 지었다.

"자네 대체 정체가 뭔가? 템페스트를 쓸 수 있는 최강의 마법사인데, 거기에 신성마법까지 사용한다고 하지 않았나? 그런데 정령 마법도 가능해? 뒤에 마법이 붙기만 하면 뭐든 할 수 있는 만능인가?"

"아마도?"

"여기에 고대종의 코어를 네 개나 흡수했다니.... 믿어지지 않는군. 10개월 뒤에 다른 차원의 군대가 몰려와도 자네라면 분명 간단히 정리하고 우리 세계를 지켜낼 수 있을 거야."

"아니. 그렇지 않아."

나는 정색하며 고개를 저었다.

다른 건 몰라도 그거 하나는 장담할 수 있다. 이계의 침공과 웨이브는 절대 간단하지 않을 거라고.

물론 전력을 다하면 마지막으로 경험했던 5차 웨이브를 막아낼 수도 있겠지만....

아직 아무도 모르잖아?

만약 6차 웨이브가 존재한다면?

그리고 그 뒤로 7차 웨이브가 이어 진다면?

이계 황자는 세상을 구하고 싶다 117화

35장 반란군과 변절자

사이크 차원 어딘가의 깊은 지하에 위치한 요새.

이곳은 영생을 위해 육체를 버리는 일에 반대한 마지막 소수파가 숨어든 최후의 기지였다.

반란군.

하지만 지하로 숨어든 반란군에게 기다리고 있던 것은 서서히 말라 죽는 결말뿐이었다.

그들에겐 모든 것이 부족했다.

마지막 전쟁에서 패배한 것도 이미 300년 전의 일. 가까스로 보존한 황금시대의 기술로 겨우 종족의 명맥만 이어나갈 뿐이었다.

"그게 정말인가?"

반란군의 리더인 비렉스가 부릅뜬 눈으로 되물었다.

그는 얼굴이 수염으로 가득한 40대의 남자였다. 실제 나이는 거기서 10을 곱하고도 남았지만.

"교차 검증으로 확인했습니다. 지금으로부터 147시간 전, 하이시티의 주경기장 하나가 하위차원의 인간에게 역공을 당했습니다."

정보장교가 상기된 얼굴로 재차 보고했다. 동시에 상황실에 있던 모든 이들이 감격의 함성을 터뜨렸다.

"우와아아아아!"

"만세! 드디어!"

"역공이라니! 이런 일이 생길 줄이야!"

"으아아아! 이번 하위차원은 다르구나!"

반면 비렉스는 흥분 대신 눈을 질끈 감았다 뜨며 뒤쪽에 있는 위성 팀에 명령을 내렸다.

"지금 당장 차원 에너지 변동을 확인해라. 142시간 전부터 152시간 전까지의 모든 정보를."

"네! 사령관님!"

수십 명의 분석 장교 들이 빠르게 움직이기 시작했다. 비렉스는 혀를 차며 부사령관에게 말했다.

"사실이라면 변절자 놈들도 난리가 났겠어. 이런 일은 지난 300년 간 처음 아닌가?"

"처음입니다. 지금까지 사이크에 연결된 모든 차원은 반격은 고사하고 침공조차 막지 못했으니까요."

"남은 유예기간이 1년으로 줄어 무슨 일이 벌어졌나 했더니.... 이번엔 정말 만만치 않나 보군. 이번 하위차원 이름이 뭐라고?"

"정식 명칭은 발음이 까다롭습니다. 변절자들도 대충 '알드'라고 부르는 모양입니다."

"그렇군. 알드라."

비렉스는 눈을 감고 생각에 빠졌다.

이미 세상의 주도권은 저 변절자들 에게 넘어간 지 오래.

간간이 반격을 가하기도 했지만 대부분은 완패했다. 새로 태어나는 아이들은 대부분 몸이 약했기 때문에, 그들의 세력은 계속해서 줄어들 수밖에 없었다.

그렇게 300년이 지났다.

이제 전쟁을 통해 변절자들을 몰아내는 건 불가능하다. 오히려 틈만 나면 사냥을 당해 끌려갈 뿐.

육체를 버린 그들은 너무도 효과적인 방식으로 문명을 통제했다.

반란군과의 전쟁과 차원침공이라는 양면 전선을 큰 힘 들이지 않고 수월하게 해치운다. 덕분에 그들이 택한 방식이 효율적이라는 사실만큼은 인정하지 않을 수 없었다.

하지만 그렇다고 육체를 포기할 수는 없다.

몸을 버린 인간은 더는 인간이 아니다.

비렉스는 그 신념 하나로 지금껏 버티며 반란군을 이끌었다.

하지만 그것도 이제 끝이 보이고 있다.

인구는 줄어들고, 식량도 줄어들고, 이제 모든 것이 한계다.

그럼에도 반란군이 이 깊은 땅속에서 아직까지 버티고 있는 이유는 아이러니하게도 변절자들이 그들을 끝장을 내려 하지 않기 때문이었다.

어째서?

변절자는 스스로 종족 번식을 할 수 없으니까.

그들이 새로운 변절자를 만드는 방법은 하나뿐이다. 살아 있는 인간의 몸에 영원의 핵을 투입하는 것.

그러면 새로운 변절자가 탄생한다. 비록 들어가는 영원의 핵이 2 대 1로 교환되기 때문에 숫자가 계속 줄어들 수밖에 없지만, 이것 역시 다른 곳에서 보충이 가능하다.

위대한 게임.

새로운 하위 차원이 사이크 차원에 연결되고, 그들에게 승리를 거두면 하위 차원의 모든 것을 흡수, 정제가 가능해진다.

그 뒤에 남는 것은 새로운 영원의 핵.

즉, 변절자들이 위대한 게임에서 승리를 거두면, 또다시 반란군 사냥이 시작된다는 의미.

"또다시 동포를 잃을 수는 없어...."

비렉스는 지난 수백 년간 그 모습을 무수히 목격했다.

함께 동고동락한 동료들이 전투 도중 산채로 잡혀가 변절자 놈들에게 강제로 영원의 핵을 주입당하고 똑같은 변절자로 변하는 모습을.

그럴 때마다 모든 걸 포기하고 싶어졌다. 자신은 어째서 이 질긴 목숨을 이어가며 끝없는 고통을 경험해야 하는가?

그 역시 과거에 영생을 추구했기 때문이다.

사이크인은 종족 자체가 장수, 혹은 영생에 대한 과도한 집착을 가지고 있었다.

덕분에 영원의 핵을 통해 육체를 버리고 영생을 얻는 방법을 알아내기 전까지, 그들은 어떻게든 수명을 늘리기 위해 모든 기술을 투입했다.

일명 수명 치료.

비렉스 역시 그 치료를 받은 황금시대의 산증인 중 하나였다. 물론 변절자들이 주도권을 잡은 이래로 그들이 쌓은 찬란한 기술은 대부분 사라졌지만....

"에너지 변동을 확인되었습니다!"

그때 기술 장교 하나가 헤드셋을 벗으며 소리쳤다.

"마지막 남은 클로킹 위성이 하이 시티 한가운데서 하위차원의 에너지 발생을 확인했습니다!"

"고유 주파수는?"

"고유 주파수는.... 아주 길고 복잡합니다!"

장교가 직접 출력한 종이를 들고 비렉스에게 달려왔다. 비렉스는 종이에 찍힌 200여 개의 문자를 천천히 살피며 눈살을 찌푸렸다.

"이건 대체.... 어떻게 한 인간이 이토록 복잡한 주파수를 가질 수 있지?"

"매우 다양한 종류의 힘을 다루는 게 아닐까 생각됩니다. 그러니 지금처럼 변절자들에게 카운터를 먹인 게 아니겠습니까?"

"그런가. 알겠다."

비렉스는 장교를 자리로 돌려보내며 긴 한숨을 내쉬었다.

"후우...."

이번엔 가능할까?

지금까지 반란군이 확인한 차원 침공은 모두 여섯 차례.

어쩌면 확인 못 한 더 많은 침공이 있을지도 모르지만, 무엇이 어찌되었든 지금껏 단 한 번도 하위 차원이 승리한 적은 없다.

이번엔 믿어야 하나?

기회는 단 한 번인데?

비렉스는 자신의 서랍을 열고, 그곳에 놓인 조그만 기계장치를 집어 들었다.

간이 차원문 발생 장치.

과거 황금시대에 만들어진 유물로, 더는 이것을 재현할 수 있는 기술이 남아 있지 않다.

변절자 녀석들이 전부 파괴해 버렸으니까.

그러니 손에 쥐어진 이것이 세상에 남은 마지막 차원문 발생장치다.

심지어 안에 충전된 에너지로는 단 한 번 차원문을 만들 수 있을 뿐이며, 일단 에너지를 소모하면 추가로 충전할 방법도 없다.

그러니 이것이 마지막 기회.

방금 확인된 고유 주파수를 장치에 입력하고 그자가 있는 곳으로 넘어간다.

물론 넘어간다고 뭔가 대단한 일을 할 수 있는 건 아니다.

그가 넘길 수 있는 건 한정적인 정보뿐이었다.

그것도 변절자 놈들이 쓸데없는 정보를 넘기는 선수를 치지 않았다는 가정하에.

게다가 정보를 순조롭게 넘겨준다 해도, 결국 알드 차원이 차원 침공을 막을 역량이 없다면 아무 의미가 없다.

하지만 비록 그렇다 해도.

여태껏 단 한 번도 벌어지지 않았던 '역공'을 성공한 그들에게, 비렉스는 모든 것을 걸고 싶은 충동을 느꼈다.

"...제군들."

비렉스는 상황실의 모두를 향해 발언했다.

"아무래도 이번이 우리의 마지막 기회인 듯하다. 변절자 놈들이 기를 쓰고 유예 기간을 줄인 것도 처음이고, 하위 차원에서 반대로 넘어와 녀석들에게 반격을 가한 것도 처음이다. 그러니 나는 그들에게 모든 것을 걸어보려 한다. 모두 내 뜻에 동의하는가?"

"우오오오오오!"

순간 모든 병사들이 손을 치켜들며 함성을 내질렀다. 비렉스는 운명이 결정되었다는 것을 느끼며 손에 쥔 장치를 가만히 움켜쥐었다.

* * *

"르갈을 처음 봤을 때도 정말 놀랐습니다만...."

다비는 눈앞에 있는 황금 독수리를 넋을 잃고 바라보았다.

"이번이 그때보다 더 놀랍군요. 이름이 뭐라고 했습니까?"

"테우스라 부르게. 자네는 좀 알겠는가? 나의 이 호화스러운 자태를?"

"네. 정말 멋집니다."

"칭찬 고맙네. 자네도 인간치고는 심미안이 훌륭하군."

테우스는 만족스러운 듯 몸을 이리저리 흔들며 광채를 발산했다. 녀석을 타고 저택 마당에 착륙한 이후로, 다들 몰려와 한 번씩 만지고 감탄하는 일의 무한 반복이 이어졌다.

"후, 클로드여, 자네의 밑에 있는 자들은 다들 심성이 올바르군. 만난 지 얼마 되지 않았음에도 아주 마음에 드네."

"너 잘났다고 칭찬해 주면 심성이 고운 거야?"

"당연하지 않나? 올바른 존재란 마음에 우러나온 심상을 결코 숨기지 않지."

아, 그래. 너 잘났다. 같은 고대종이면서 르갈이랑은 어떻게 이렇게 성격이 다를 수 있지?

"아, 생각해보니 너 고대종 아니구나. 코어 생물이지."

"코어 생물? 간단하면서 핵심을 찌르는 명칭이군. 자네는 역시 나에 필적하는 현명한 존재야. 날 생물이라 불러 줘서 고맙네."

테우스는 날개를 굽히며 절을 하는 포즈를 취했다. 거 참, 자뻑이 저렇게 심한데도 싫지가 않으니, 혹시 나도 모르는 사이에 마인드 컨트롤 당하고 있는 건가?

"몇 시간 동안 소개를 받느라 조금 지쳤네. 괜찮으면 물을 좀 주지 않겠나?"

"물? 너 물도 마셔? 마력만 흡수하는 거 아니었어?"

"에이션트 이글 녀석들이 나에 대한 편견을 심어 줬나 보군. 그놈들이야 항상 고기만 먹으니 내가 아무것도 안 먹는다 생각했겠지."

"그럼 고기 말고 다른 건 먹을 수 있어?"

"액체라면 뭐든 마실 수 있네. 비록 마력을 흡수하는 것에 비할 바는 아니네만, 만약 양분이 풍부한 물이라면 거기서도 필요한 약간의 힘을 얻을 수 있지."

"그래? 여기 설탕물 양동이로 하나만 가져다 줘!"

"네. 황자님."

뒤에서 구경하던 라니아가 직접 움직였다. 시녀장이 들어가자 다른 시녀들도 꺅꺅대며 함께 저택 안으로 모습을 감췄다.

"그러고 보니 마력은 어때? 날아오느라 힘 뺀 거 같은데 다시 충전해 줄까?"

"아직은 괜찮네. 다른 건 몰라도 내가 비행 하나만큼은 마력 대비 효율을 잘 뽑을 수 있거든."

"그러고 보니 그 이야길 안 했네. 혹시 싸움은 어때?"

"싸움이라. 상대에 따라 다르네만, 일단 감정이 있는 존재라면 정신 공격으로 묶어둘 수 있네."

"전에 나한테 했던 것처럼?"

"대상이 하나라면 그 정도로 강력하게 걸 수도 있겠지. 보통은 길어야 수십 초 정도 묶어 놓는 게 전부네."

"그럼 광역으로 걸 수 있다는 거야? 정신 공격을? 얼마나 넓게?"

"여기서부터."

금독수리는 갑자기 날개를 쭉 펼치며 옆에 있는 기사단 본부를 가리켰다.

"저 집까지 선을 긋고, 그 선을 한 바퀴 돌리면 되겠지."

"컴퍼스로 원을 그리듯?"

"컴퍼스?"

"그런 게 있어. 암튼 꽤 넓네?"

하지만 대상이 감정이 있어야 한다니, 암만 봐도 이계의 군대엔 안 통할 거 같지?

"그럼 정신공격 빼고 다른 건?"

"물론 바람 마법도 가능하네."

"템페스트?"

"그건 까다로울 것 같군. 어떤 마법인지 모르는 건 아닌데, 거대한 마법을 그토록 작게 압축하는 게 잘 와 닿지 않네."

"황자님. 여기 가지고 왔습니다."

그때 라니아가 양동이를 들고 돌아왔다. 테우스는 자기 앞에 놓인 커다란 양동이를 잠시 바라보다 물었다.

"마셔도 되겠나?"

"응. 너 마시라고 가져온 건데."

"고맙네. 그럼...."

녀석은 부리 끝을 양동이에 집어넣고 한순간에 쭉 빨아들였다.

"꿀꺽. 양이 좀 적군."

"네 덩치가 너무 큰 거야. 나도 르갈보다 더 큰 녀석을 식구로 들일 줄은 몰랐는데."

"그래도 달콤하니 맛이 좋네. 자주 이야기를 하는 르갈이란 자는 에이션트 울프를 말하는 건가?"

"응. 근데 지금은 여기 없어. 드워프 군주한테 갔거든."

그러고 보니 나보다 먼저 돌아와 있을 줄 알았더니, 르갈 녀석 혹시 문제 생긴 건 아니겠지?

"여하튼 싸우라면 충실히 싸우도록 하지. 다만 나로선 전투보다 다른 쪽으로 활용해 주길 바라네."

"예를 들면?"

"아군에게 이 아름다운 자태를 널리 과시하여 사기를 높인다든가."

"...."

"마음에 안 드나? 쯧, 자네는 현명하지만 심성이 곱지 않은 게 탈이야."

"내 심성은 알아서 챙길 테니 상관 말고. 암튼 싸우는 게 싫어? 그럼 지금처럼 날아다니는 탈것으로 활용하는 건?"

그것만으로도 엄청난 도움이 될 것이다. 테우스는 문제없다는 듯 고개를 까딱였다.

"맡겨 주시게. 마력만 충분하다면 어디든지 날아갈 수 있으니까."

확실히 내가 플라이 마법 쓰는 것보다 이 녀석한테 바람 마법 쓰는 게 효율이 좋다. 속도는 말할 것도 없고. 무엇보다 몸이 피곤하지 않은 게 최고.

"그보다 누군가에게 코어를 준다 하지 않았나? 말이 나온 김에...."

우웅!

갑자기 금독수리가 새하얀 빛으로 휘감기며, 눈앞에 작은 황금 구슬을 만들어 냈다.

"후, 다행히 분리가 잘 되는군."

"여차!"

반사적으로 몸을 내밀어 떨어지는 코어를 캐치했다. 테우스는 힘이 빠지는 듯 그 자리에 주저앉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잘 잡았네. 반사 신경이 훌륭하군."

"이쯤이야. 근데 몸 괜찮아? 막 억지로 토한 거 아니고?"

"문제없네. 기껏해야 120분의 1정도 약해진 것뿐이니."

"혹시 하나 더 분리 안 되고?"

"전에 말했듯이 안 되네. 지금 건네준 것도 살짝 흡수가 되어서 약간 효과가 떨어질 거야."

"진짜?"

그런 것 치고는 얼마 전에 먹은 독수리 족장의 코어와 완전히 똑같이 생겼는데.... 아, 이게 크기가 살짝 작은가?

이계 황자는 세상을 구하고 싶다 118화

35장 반란군과 변절자

"그렇다고 큰 차이는 아니네. 자네가 마음에 둔 사람에게 넘겨주게나."

"응. 톨라리 줘야지. 아까 만났던 깡마른 여자 기억나지? 눈 퀭하고, 옆에 조그만 여자아이를 같이 데려왔던."

"역시 그 인간이었군. 느낌이 아주 좋았네. 바람 속성의 마법사였지. 작은 아이는 냉기 속성이었고."

"그게 눈에 보여?"

"이래 봬도 눈이라면 빠지지 않는 에이션트 이글의 정수가 모여진 존재라네. 지금 자네가 차고 있는 그 칼에 엄청난 상위 차원의 힘이 깃든 것도 보고 있지."

"아, 이거."

하지만 내 눈엔 처음과 똑같은 검으로 보일 꾼이다. 에이션트 이글 코어가 아직 덜 풀렸나? 아니면 원래 인간이 먹으면 단순히 시력만 좋아지나?

"기왕이면 나도 그런 게 보였으면 좋겠네. 혹시 코어 두 개 먹으면... 응?"

순간 손바닥에 쥔 코어에 어떤 이미지가 붕 떠올랐다.

인간이 코어를 흡수하면....

-에이션트 이글 코어-

마력 강화(소)

기류 감지

시력 강화(대)

텔레파시(개인차 있음)

해독(소)

...엥?

인간이 해당 코어를 흡수하면 어떤 효과가 나오는지, 눈앞에 이미지로 떠오른다.

뭔데 이건? 무슨 감정안도 아니고 갑자기 코어 효과가 왜 보여?

"왜 그러나 클로드? 표정이 이상해졌는데?"

"아니, 뭔가 몸에 이상한 능력이.... 음?"

그 와중에 내 몸을 바라보니, 기존에 흡수한 다른 코어의 효과까지 전부 이미지로 떠오른다.

-에이션트 울프 코어-

관절 강화(중)

체력 강화(중)

후각 강화(개인차 있음)

독 면역(대)

해독(대)

오, 이거 단순히 효과만 보이는 게 아니라 효과의 강도까지 대중소로 보이잖아?

근데 독 면역이랑 해독은 같은 거 아닌가? 왜 따로 보이지?

-에이션트 씰 코어-

종합 항마력 강화(중)

내구 강화(중)

체력 강화(개인차 있음)

정력 강화(개인차 있음)

해독(소)

이건 물개 코어 효과구나. 헹, 저 완전 쓸데없는 효과 오랜만에 보네.

그보다 해독은 모든 코어에 다 있구나. 일단 먹으면 해독 영약 같은 효과가 있다는 뜻인가?

-에이션트 베어 코어-

내구 강화(소)

근력 강화(소)

냉기 항마력 강화(대)

자연 치유(중)

해독(소)

엥?

곰돌이 코어 내구력이랑 근력 강해지는 게 소밖에 안 돼?

이건 좀 의외네. 물론 저 대중소가 어느 정도 격차가 있는지는 모르지만, 적어도 '중'은 될 줄 알았는데.

그보다 아직 드러나지 않은 네 번째 효과를 알게 된 게 큰 수확이다. 자연 치유라. 상처를 내버려 둬도 빠르게 치료된다는 뜻이겠지?

"클로드, 미리 말해두겠네만, 같은 고대종의 코어를 두 개 흡수한다고 효과가 두 배로 나오진 않네."

"응? 아, 그거. 그냥 해 본 말이야. 근데 갑자기 이상한 게 보이네."

고개를 들자 테우스의 몸에도 에이션트 이글의 코어 효과가 보인다. 뭐 이놈이야 코어 그 자체이니 당연한 건가?

"코어의 효과가 보여. 심지어 전에 먹은 것들까지."

"음? 정말인가?"

"효과의 강도까지 대중소로 구분되어 보일 정도로 정교해. 이거 갑자기 왜 이래?"

혹시 이것도 르갈이 말한 공감각의 한 종류인가?

"흐음.... 일단 내 생각은 이렇네."

금독수리는 주저앉은 몸을 천천히 일으키며 말했다.

"우리 에이션트 이글 코어는 서로 끌어당기고, 융합하는 성질이 다른 코어에 비해 무척 강하네."

"그래서 네가 만들어진 거고. 그런데?"

"기존에 자네 몸속에 깃든 코어와 활발하게 상호작용을 한 결과가 아닌가 싶네. 그 과정에서 서로의 효과를 정확히 파악하는 힘을 가지게 된 것이 아닐까? 물론 모두 내 판단에 불과하네만."

내 생각도 대충은 그런 게 아닌가 싶다.

사실 대부분은 기존에 다 알고 있던 것들이라 딱히 유용한 건 없지만....

그래도 모르는 것보다는 아는 게 낫겠지?

나중에 새 코어 얻을 때 바로 알 수 있을 테니 그거 하난 확실히 좋겠네.

그나저나 코어를 계속 먹을수록 계속해서 뭔가가 새로 추가되는 기분이다.

이거이래도 되나?

이 조그만 몸에 계속해서 새로운 능력을 꾹꾹 쑤셔 넣다가.... 혹시 나중에 빵 터지거나 하는 건 아니겠지?

* * *

"황자님 고마워, 금독수리 안녕. 나 때문에 새 코어 못 먹게 된 모든 단원들에게도 감사."

코어를 쥔 톨라리가 눈물까지 글썽이며 환하게 웃었다.

얘 이거 다른 애들 엿 먹이는 거 맞지? 당장 카일 표정이 뭔가 울긋불긋한 게 심상치 않은데?

이럴 줄 알았으면 굳이 회의실에 다 모아놓고 코어 시식회 열지 말걸 그랬나?

하지만 이미 역사와 전통이 되어 버렸기 때문에 어쩔 수 없다. 어차피 몰래 숨어 밀거래하듯 코어를 넘겨주는 것도 모양이 썩 좋진 않을 테고.

"와.... 축하해요, 언니."

오직 옆에 앉은 루네만이 조그맣게 박수를 치며 축하해 주었다. 목소리가 크지 않은 건 주변 분위기가 심상치 않음을 감지해서겠지.

"축하드립니다, 톨라리 님. 어차피 코어의 효과 때문에 톨라리 님이 드실 수밖에 없었지만 말이죠."

다비 이 녀석도 축하를 하는 건지 까내리려는 건지 잘 모르겠다. 리넨도 대놓고 부러우면서도 아쉬운 표정이고.

크, 지금 군주의 눈 발동하면 감정 교차하는 거 진짜 볼만 할 것 같다. 하지만 난 착한 황자니까 관음 같은 건 하지 말아야지.

"코어 효과 나도 들었어. 마력 강화? 나를 위한 거. 기류 감지? 이것도 나를 위한 거. 그치 황자님? 비행 마법 빨라진다며?"

"마법이 빨라지는 게 아니라 바람 길을 잘 타게 돼."

"뭔들 어때? 그리고 시력 강화? 이것도 완전 나를 위한 거."

"시력 강화가 왜 톨라리 님을 위한 것입니까?"

순간 카일이 날카롭게 끼어들었다.

"말이 나왔으니 하는 말인데, 전장에서 군대를 지휘하는 지휘관에게 있어 가장 중요한 능력 중 하나가 시력입니다. 눈이 좋을수록 더 멀고 넓은 전장을 확인할 수 있습니다. 그만큼 빠른 대처가 가능해진다는 뜻입니다."

"그러게. 지휘할 때 시력 정말 중요하겠네. 코어 하나 더 있으면 너도 먹었을 텐데. 안타까워. 정말 마음 아프다."

"큭...."

카일의 악다문 입에서 뿌득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톨라리는 손가락으로 눈을 키우며 말했다.

"근데 마법사도 눈 중요함. 특히 나처럼 날아다니면서 멀리서 날리려면."

놀리는 것처럼 들리지만 사실이다. 아무리 먼 곳이라도 일단 시야가 닿는 한에서는 집중력을 유지할 수 있기도 하고.

"그리고 텔레파시 능력? 이건 무슨 소리? 마음으로 말을 걸어?"

"그건 너무 기대하지 마. 나도 발현은 안 된 것 같으니까."

"흐흥. 황자님 그래? 혹시 어쩌면 난 가능할지도?"

"설명 끝났으면 빨리 드십시오!"

카일이 발끈하며 소리쳤다. 얘가 진심으로 저 코어 땡겼나 보구만. 방금 말처럼 지휘관에게 시력은 중요한 능력이긴 하니까.

그때 조용히 있던 메르데스가 반대편 창문을 보며 반색했다.

"르갈님!"

"메르데스."

어느새 창가에 르갈이 얼굴 들이밀고 있었다. 얜 또 언제 왔대? 방금 전까지 은신이라도 걸고 있었나?

"왔어 르갈? 좀 늦었네? 나보다 먼저 돌아올 줄 알았는데."

"그 드워프 군주가 생각보다 꽉 막혀 있었다. 후원자가 기습할지도 모른다는데 절대 호위를 늘리지 않더군. 납득시키는 데 애를 먹었다."

"수고했어. 마침 톨라리가 코어 먹으려는 순간이야. 에이션트 이글 코어."

"코어? 그렇지 않아도 오면서 기묘한 냄새를 맡았다."

르갈은 눈을 가늘게 뜨며 코를 킁킁거렸다.

"내 코가 잘못된 게 아니라면, 근방에 아주 많은 코어 향이 퍼져 있다. 설마 이번에 코어를 수십 개쯤 얻어 온 건가?"

"그건 아니고, 여기 금독수리가 한 마리 와 있거든."

"금독수리?"

"맞아! 내가 먹는 게 그 금독수리 코어임. 정말 잘 됐어. 지금부터 먹을게!"

톨라리가 활짝 웃으며 손에 쥔 코어를 입 안에 밀어 넣었다.

"헙. 이대로 계속 물고 있으면 끝?"

"그래. 삼키지 말고 계속 물고 있어."

"응. 알았어 황자님. 헤헤."

톨라리는 코어를 입에 물고는 행복한 얼굴로 의자째 몸을 흔들었다.

그리고 그 의자가 훌렁 뒤로 넘어가며 쓰러졌다.

쿵!

"언니!"

모두가 기겁하며 몸을 일으켰다. 급하게 달라붙은 루네가 내 쪽을 보며 소리쳤다.

"황자님! 톨라리 언니 기절했어요!"

"뭐?"

이게 뭔 일이래?

잽싸게 달려와 확인했더니 정말 기절한 상태였다. 나는 가능한 모든 신성마법을 녀석에서 쏟아부었다.

"으... 뭔데 이거. 어째 하나도 안 통하는데...."

이거 설마 회복 마법 쓰기 전에 뇌손상이라도 왔나?

세상에 맙소사.

천하의 톨라리가 촐싹거리다 넘어져서는 뒤통수가 깨져 죽는다고?

모두가 당황해서는 몰려든 가운데, 멀리 뒤쪽에서 르갈의 차분한 목소리가 들렸다.

"무슨 일이냐 클로드."

"잠깐 르갈! 지금 내가 좀 급해서...."

"방금 묘한 냄새가 났다. 내가 어떻게 할 수 있을 것 같으니 이쪽으로 데려와라."

"뭐?"

"빨리."

고개를 돌리자 근엄한 표정의 하얀 늑대가 노려보고 있었다. 뭔가 이상 증상을 눈치챈 건가?

"메르데스. 톨라리를 조심해서 옮겨줘. 혹시 모르니 머리 다치지 않게."

"네. 황자님."

메르데스가 능숙한 손길로 톨라리의 머리를 고정하고 르갈에게 데려갔다.

창문 안쪽으로 고개만 쏙 들이밀고 있던 르갈은, 이내 기절한 톨라리의 몸에 킁킁대며 냄새를 맡기 시작했다.

"이것은... 흠, 그렇군."

"무슨 일인데? 바닥에 머리 박고 기절한 거 아냐?"

"외상은 없다. 이건 전에 너와 같은 증상이다. 클로드."

"나?"

"잠시 실례하겠다."

르갈은 톨라리의 이마를 스치듯 혀로 핥고는 눈을 가늘게 떴다.

"역시 그렇군. 독이다."

"독?"

"땀에 정화된 독이 배어 나오기 시작했다. 이 세상에 존재하지 않는 독. 너도 그렇지 않았나? 숨어 있는 독 덕분에 코어를 먹자마자 기절했지."

"나야 그때는...."

"모든 코어는 흡수한 생물의 몸에 존재하는 독을 정화하는 효과가 있다. 아무리 깊은 곳에 숨은 독이라도 결코 여기서 벗어날 수 없지."

덕분에 나도 관절 속에 숨어 있던 제스의 독을 제거할 수 있었다만.

"다만 에이션트 이글의 코어는 내 코어만큼 해독력이 강하진 않다. 때문에 회복에 시간이 꽤 오래 걸릴지도 모른다."

맞아. 해독(소)와 해독(대)만큼의 차이가 있지?

"오래 걸려? 대충 얼마나?"

"최소 이틀, 혹은 사흘 정도."

"근데 세상에 존재하지 않는 독이라니. 이계의 독 말이야? 톨라리가 왜?"

"그건 나도 모른다."

르갈이 고개를 좌우로 흔들었다. 아무리 그래도 뭔가 이상하잖아? 톨라리가 나처럼 못된 형이 있어서 맨날 이계 독을 물처럼 퍼먹었을 리도 없고....

"아!"

순간 나도 모르게 탄성이 나왔다.

후원자!

톨라리는 예전에 후원자한테 소원을 빌고 선물을 받았다.

그때 주사 맞은 게 아직 몸속에 남아 있던 거구만. 이제 겨우 흡수되기 시작한 코어가 톨라리의 몸속에서 숨은 독을 제거하기 위한 전쟁을 시작했고.

아니, 근데 이게 무조건 잘된 일이 아니지 않나?

톨라리는 그 선물 덕분에 더블 매직을 쓸 수 있게 됐다고 했는데, 선물이 사라져 버리면 더블 매직도 못 쓰게 되어버리는 거 아냐?

* * *

사이크인들의 핵심 도시인 하이 시티.

그곳에서 두 번째로 높은 집정 탑에 도착한 주재자는, 녹색 붕대로 몸을 감은 관리자들의 인사를 받으며 넓은 방으로 걸음을 옮겼다.

"어서 오십시오. 주재자님."

청색 붕대를 감은 집정관이 우아하게 몸을 숙이며 인사를 올렸다.

집정관은 단순히 붕대 색만 청색이 아니었다. 다른 사이크인과 달리 푸른 전류 같은 흐름이 밖으로 흘러나와 붕대 표면을 감싸고 있었다.

"부탁한 지 얼마 지나지도 않았는데, 이미 본격적으로 시작했나 보군."

주재자는 집정관의 방에 깔린 수많은 장치를 살피며 고개를 끄덕였다. 이미 활발하게 돌아가는 장치 앞으로, 수십 명의 관리자들이 바쁘게 움직이며 무언가를 조작하고 있었다.

"주재자님의 명령인데 어찌 서두르지 않겠습니까? 말씀하신 대로 침공 전에 알드 차원의 전력을 최대한 깎아낼 수 있는 방법을 모색했습니다."

집정관이 손을 펼치자, 동시에 반대편에 있던 대형 스크린에 붉은 점 두 개가 떠올랐다.

띵! 띵! 띵!

"현재 알드 차원에서 간섭 가능한 존재는 이들 셋뿐입니다. 톨라리, 겔리, 주드."

"표시되는 건 두 개뿐인데?"

"주드는 신호가 잘 잡히지 않습니다."

집정관이 손짓을 하자, 스크린의 멀리 오른편에 새로운 붉은 점이 모습을 드러냈다.

"마지막으로 포착된 위치는 저곳입니다. 라그란 대륙. 혹은 동대륙이라 불리는 장소입니다."

"동대륙? 서대륙에 비해 잠재력이 낮아 비중을 두지 않지 않았다는 보고를 받았다. 그 뒤로는 신경 쓰지 않았는데."

"후원자 1호는 그 뒤로도 꾸준히 보고서를 갱신했습니다. 우선 서대륙에 비해 땅이 넓고 인구가 많다는 특징이 있다는군요."

"인구가 많은데도 쓸 만한 녀석은 없었다는 건가?"

"보고에는 서대륙처럼 권력 구조나 전투력을 뚜렷하게 구분하기 어려운 게 특징이라 합니다. 1호는 그중에 그나마 영향력이 있고, 뒤틀림이 강해 보이는 인간을 찾아 접촉했습니다."

팟!

그러자 새롭게 생긴 붉은 점 옆으로, 눈을 감고 있는 중년의 대머리 남자가 떠올렸다.

이계 황자는 세상을 구하고 싶다 119화

35장 반란군과 변절자

"이것이 주드입니다. 어느 시점부터 신호가 끊겨 위치를 파악할 수 없습니다."

"죽은 것 아닌가?"

"그럴 가능성이 높습니다."

"하필 이런 상황에 최악이군. 녀석이 후원자에 빈 소원은 뭐지?"

"수명입니다."

"수명?"

"자신이 곧 죽을 거라며, 수행을 더 오래 하기 위해 좀 더 오래 살고 싶다는 소원을 빌었습니다. 당시 주드의 나이는 약 105살이었습니다."

"인간치고는 장수했군. 표시된 얼굴이 젊어 보이는 걸 보면.... 1호가 저자에게 수명 치료제를 투입했나 보군. 황금시대의 유산이라."

"아직 보관 중인 여분이 있으니까요. 여하튼 주드는 신호가 잡히지 않기 때문에 활용이 불가능합니다."

화면에 뜬 주드의 얼굴에 커다란 X자가 그어졌다. 집정관은 미련 없이 왼편에 있는 두 개의 붉은 점으로 고개를 돌렸다.

"남은 건 톨라리와 겔리뿐입니다. 먼저 겔리에 대한 분석을 보고하자면."

팟!

두 개의 붉은 점 중, 위쪽에 있는 점 옆으로 수염이 가득한 드워프의 얼굴이 나타났다.

"중하급 전투력, 마력을 다루지 못함, 상급 영향력, 낮은 수준의 감정적 뒤틀림. 여기서 뒤틀림은 첫 소원을 이룬 다음 완전히 해소되었습니다."

"흠."

"사실상 빈껍데기에 불과합니다. 강제로 끌고와 변이시켜 봐야, 기존에 편성된 무기 이상으로 끌어 올리는 건 어렵습니다. 기껏해야 광전사 정도나 만들 수 있을까요? 물론 엄청난 자원을 퍼부으면 또 달라질 수도 있겠지만 말입니다."

"그만큼의 가치는 없겠지. 그렇다면 결국 남은 건 톨라리뿐인가? 기껏 나온 결론이?"

집정관을 보는 주재자의 분위기가 급속도로 냉랭해졌다.

기껏 불러다 명령을 내렸더니 고작 이것뿐인가? 결국 나도 다 알고 있던 결론인데?

말 속에 숨어 있는 속뜻이 명백했다. 그러자 집정관은 기다렸다는 듯 고개를 저었다.

"꼭 그렇지는 않습니다. 다른 존재를 찾아냈습니다."

"다른 존재? 피후원자는 이게 전부일 텐데?"

"1호가 남긴 모든 기록을 철저히 조사한 끝에, 이미 간섭된 것으로 간주할 수 있는 존재를 셋이나 발견했음.

"뭣이? 셋이나?"

주재자는 오랜만에 긍정적인 놀라움을 느꼈다. 덕분에 붕대에 감겨 있는 집정관의 얼굴에 회심의 미소가 스쳤다.

"제스라는 피후원자를 알고 계십니까?"

"물론이다. 나도 1호의 보고서는 대부분 읽었다. 제국의 둘째 황자라 하지 않았나? 지금은 죽었지만."

"제스는 증오하는 자들에게 고통을 주기 위해 자신의 혈액을 독으로 교체하는 시술을 받았습니다. 그리고 딱 세 사람에게 혈독을 주입했죠. 황제, 황태자, 그리고 막내 황자."

동시에 세 사람의 얼굴이 화면에 떠올랐다. 집정관은 그중 마지막에 떠오른 얼굴을 보며 경악했다.

"클로드!"

"네. 바로 그 클로드입니다."

"설마...."

"사실입니다. 이들 셋은 고지가 떨어지기 한 참 전에 제스의 독에 중독되었습니다. 따지고 보면 이들 역시 사이크 차원의 간섭을 받은 셈이죠."

"...역시 집정관은 다르군. 이런 빈틈을 발견할 줄이야."

"감사합니다. 다만 이 중 클로드는 고지를 직접 받은 하위 차원의 주요 인물로 지정되었기 때문에 간섭은 불가능합니다."

"그렇지. 하지만 나머지 둘은 상관없지 않나?"

"아무 문제없이 추가 간섭이 가능합니다. 물론 정상적인 경로로 후원을 받은 게 아니기 때문에 주변 영상을 확인 할 수는 없습니다.

"그야 영상막을 안 깔았으니 별수 없지. 하지만 위치는 간단히 확인 할 수 있는 게 아닌가?"

"물론입니다. 이미 체내에 남은 독의 신호 분석에 들어갔습니다. 주재자님을 지금 모신 것도, 곧 결과가 나오기 때문입니다."

"오, 오오...."

주재자는 기대 가득한 얼굴로 화면을 바라보았다.

"잠깐, 그러고 보니 클로드도 마찬가지 아닌가? 직접적인 간섭이야 불가능하다 해도, 최소한 위치를 확인 하는 건 가능하지 않은가?"

"물론입니다. 우선 황제와 황태자의 위치를 파악, 그림자 능력으로 접근하여 바로 무기고로 끌고 올 계획입니다."

"멋지군. 다음 후원자는 그림자 능력이 강력한 자로 뽑아야겠어."

"현명하신 판단이십니다. 가능하면 차원 능력과 그림자 능력이 동시에 높은 자가 좋겠지요."

"그게 바로 1호였지. 1호가 정말 유능한 존재였다. 그런 식으로 소모될 게 아니었는데."

주재자가 아쉬운 기색을 드러냈다. 집정관은 그 와중에도 기계를 다루는 관리자들을 소리 없이 재촉하며 대답했다.

"지금껏 1호가 너무 일을 잘해주었습니다. 덕분에 다른 후원자를 제대로 육성하지 못했지요."

"지난 여섯 번의 침공이 전부 1호 선에서 정리됐으니까. 녀석에 비하면 2호는 정말 형편없었다. 아쉽지만 어쩔 수 없지."

그 순간, 관리 하나가 자리에서 일어나며 보고했다.

"분석 끝났습니다. 잠시 뒤에 특정 신호를 보유한 것으로 추정되는 황제, 황태자, 그리고 클로드의 위치를 화면에 출력하겠습니다."

"오, 드디어인가?"

주재자는 기대 가득한 얼굴로 화면을 바라보았다.

하지만 아무리 시간이 지나도 그대로였다. 집정관은 초조한 목소리로 관리자를 채근했다.

"무슨 일이지? 결과가 아직인가?"

"...결과가 나왔습니다."

"뭐라고?"

"후원자의 기록에 남은, 특정 물질의 신호는 현재 알드 차원에서 잡히지 않습니다."

"잡히지 않는다고? 단 하나도?"

"네. 단 하나도 잡히지 않습니다."

그리고 침묵이 이어졌다. 주재자는 한참 만에 나지막한 목소리로 물었다.

"혹시 기계 고장인 건 아니겠지?"

"그럴 리가 없습니다. 당장 톨라리와 겔리의 신호는 잡히고 있지 않습니까?"

화면에는 여전히 두 개의 붉은 점이 깜빡일 뿐이었다. 집정관은 경직된 주재자의 안색을 살피며 가까스로 입을 열었다.

"그것이.... 제 실착입니다. 이미 죽었을 가능성을 염두에 두지 않고 주재자님을 이곳에 모시다니."

"아니다."

"아닙니다. 제 실수입니다. 감히 주재자님의 마음을 어지럽힌 큰 죄를...."

"저건 죽은 게 아니다."

"네?"

주재자는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

"죽어서 신호가 잡히지 않는다? 물론 황제나 황태자는 그럴 수 있지. 하지만 클로드는?"

"아...."

"클로드까지 신호가 잡히지 않는다는 건, 결국 녀석이 몸에 남은 독을 완벽히 제거했다는 뜻이다."

"그것은 불가능하지 않겠습니까? 독이라고 부르긴 해도 결국 황금시대에 만들어진 물질입니다. 세균보다도 수백 배 작은 입자가 관절 속이나 신경절 사이로 파고듭니다. 한 번 감염되면 그 어떤 약이나 마법으로도 완벽한 제거는 불가능합니다."

"하지만 제거했지."

결과는 거짓말을 하지 않는다. 동시에 집정관의 표면에 흐르던 에너지가 크게 요동치기 시작했다.

"그런 고도의 기술이 알드 차원에 존재했다니... 두렵군요. 역시 잠재력이 높은 차원은 무시할 수 없습니다."

"집정관."

"네. 주재자님."

"신호가 사라진 피후원자에게 간섭이 가능한가?"

"규정에 걸릴 가능성이 높습니다. 다만 리스크를 짊어진다 해도 쉽지 않습니다."

"어째서?"

"위치를 알 수 없으니 정확한 장소에 후원자를 보낼 수 없습니다. 물론 마지막으로 신호가 발견된 장소에 억지로 보낼 수는 있지만…‥. 피후원자가 그곳을 떠났다면 손해만 보는 셈입니다."

"현재 알드 차원에 발현된 잠재력은?"

직접 확인할 수 있지만 굳이 질문했다. 집정관은 관리자에게 지시해 화면에 숫자를 띄웠다.

26.

"26퍼센트입니다."

"얼마 전까지 저게 14퍼센트였다는 건 알고 있나? 정말 무섭게 파고드는군. 알드 차원의 최대 잠재력은?"

이건 알고 있지만 일부러 질문했다. 집정관은 분위기가 점점 위험해지는 것을 느끼며 대답했다.

"우수입니다. 주재자님."

우수라 하면 그냥 그런 수준처럼 들리지만, 실제는 '최상'을 다음으로 높은 등급이다.

"지금까지 침공한 모든 차원은 우수는 고사하고 그 아래인 '중상', 아니 그보다 아래인 '적절'조차 드물었지."

"켄로드 차원이 딱 한 번 적절이었습니다. 카메이라를 확보한 그 차원 말이죠."

"하지만 알드 차원은 최대 잠재력이 아무리 높아도.... 잠재력 자체는 거의 발현이 안 되어 있었지. 그래서 마음 놓았더니 이런 뒤통수를 쳐 주시는군."

주재자의 몸을 두른 검은 붕대가 서서히 부풀어 오르기 시작했다. 집정관은 순간 몸을 날려 주재자의 다리를 부여잡았다.

"고정하십시오! 당신은 주재자이십니다! 사이크의 모든 일들이 당신을 통해 발현됩니다! 감정에 지배당해 휘둘리면 안 됩니다!"

"난 지극히 정상이다."

"주재자님...."

"하지만 기분이 썩 좋지 않군. 그러니 플랜B를 설명해라. 빨리."

"네. 알겠습니다."

집정관은 급히 몸을 일으키며 화면을 가리켰다.

"결국 노릴 것은 톨라리입니다."

팟!

화면에 뜬 것은 톨라리가 아직 10대였을 때의 얼굴이었다.

"물리적인 전투력 없음. 최상급 마법. 중급 영향력. 중간 수준의 감정적 뒤틀림. 여기서 뒤틀림은 첫 소원을 이룬 뒤로 전혀 늘어나지 않았습니다."

"그래도 남아 있긴 있다는 거군."

"1호가 마지막으로 확인한 바에 의하면 그렇습니다. 무엇보다 겔리에 비하면 본체에 깃든 능력이 대단히 높습니다. 1호가 집중적으로 노렸던 바로 그 아크 위저드이며, 기록으로는 아크 위저드 중에서도 가장 강력했다고 합니다."

"그리고 영상막이 깨져서 실태를 파악할 수 없지. 신호가 나오니 가서 잡아 올 수는 있겠지만"

"물론입니다. 다만 톨라리는 클로드의 밑으로 들어간 것으로 추정됩니다. 그러니 몰래 그림자 능력으로 배후를 잡는다 해도...."

"클로드가 옆에서 튀어나올 수 있다?"

"항상 붙어 있진 못할 겁니다. 현지 시간으로 늦은 밤을 노려 순식간에 해치우면 가능성은 높다고 생각합니다."

집정관이 초조한 목소리로 말했다. 주재자는 경직된 몸을 풀며 고개를 끄덕였다.

"가능성을 따져야 하는 것 자체가 기분 나쁘군. 하지만...."

스크린에 상세 표시되는 톨라리의 능력, 그리고 함께 나오는 변이 결과들이 치솟은 분노를 가까스로 억제해 주었다.

덕분에 주재자의 몸이 다시 원래대로 가라앉기 시작했다. 집정관은 나오지 않는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

"맡겨 주십시오. 2호의 마지막 작품을 압도적으로 뛰어넘는 무기를 제작해 보이겠습니다."

바로 그때, 스크린에 깜빡거리던 톨라리의 빨간 점이 꺼졌다.

"...."

"...."

"...."

그리고 얼마나 시간이 지났을까.

하이 시티에서 두 번째로 높은 집정 탑이 폭발에 휘말렸다.

탑의 최고층부터 폭발에 무너졌고, 이후 거대한 검은 불길이 남은 탑을 휘감으며 모든 것을 잿더미로 만들었다.

* * *

톨라리는 이틀 만에 깨어났다.

"괜찮아 톨라리? 기분은 어때?"

"...."

톨라리는 침대에서 상반신만 일으킨 채, 멍한 표정으로 내 얼굴을 멀뚱멀뚱 바라보았다.

"황자님. 뭔가 이상해."

"나?"

"아니, 나 머리가 이상해. 잠시만."

그러더니 대뜸 창문을 향해 양손을 뻗으며 마법을 시전하는 포즈를 취했다.

"잠깐, 너 혹시 지금 실내에서 템페스트 쓰려고...."

"폼만 잡았어. 근데 왜 이거 안 됨?"

포즈를 보아하니 더블 매직을 쓰려던 모양이다. 얘도 참 타고난 마법사라니까? 정신 차리자마자 마법에 문제 생긴 것부터 파악하다니.

"톨라리. 지금부터 내 말 잘 들어. 전에 네가 후원자에게 소원 빌었던 그거 말인데...."

"사라졌어."

톨라리는 자신의 머리를 만지며 환한 표정을 지었다.

"사라졌네? 개운해졌어. 와, 머릿속이 완전 맑아졌어!"

"어... 응?"

"후원자 소원? 그거 맞아. 소원 빌어 더블 매직 쓸 수 있게 된 거. 그 뒤로 머릿속에 항상 뭔가가 찜찜하게 남았음. 근데 그거 사라졌어! 아싸!"

"하지만 너 이제 더블매직을...."

"무슨 말씀?"

톨라리는 그대로 공중에 떠오른 다음, 반쯤 열린 창문 밖으로 매끄럽게 빠져나가며 손을 흔들었다.

"바로 보여줄게! 따라와, 황자님!"

"야! 톨라리!"

나는 급하게 녀석을 따라 날며 소리쳤다.

"기다려! 너 기절한 지 이틀 만에 깨어났어! 그리고 지금 잠옷 차림이라고!"

"무슨 상관?"

톨라리는 마치 곡예라도 하듯 하늘을 빙글빙글 날며 소리쳤다.

"기분 완전 좋아! 날아갈 것 같아! 어서 와, 황자님! 저쪽에서 바로 새 더블 매직 보여줄게!"

이계 황자는 세상을 구하고 싶다 120화

35장 반란군과 변절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