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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계 황자는 세상을 구하고 싶다 108화

32장 침공 너머

그 순간 젝트바이아가 두 개의 머리를 하나로 모았다.

동시에 두 줄기의 브레스가 쏟아냈다. 하나는 냉기, 또 하나는 번개.

딱 붙은 브레스가 나선처럼 회전하며 하나의 줄기가 되어 쏟아진다.

저건 대체 얼마나 강력한 마법일까?

당장 옆으로 몸을 날린다고, 저 마법의 폭발 반경에서 빠져 나갈 수 있을까?

그렇다면 방어 마법으로? 프로텍션 매직을 걸고, 빛의 방패를 세 겹으로 깔면 무사히 버틸 수 있을까?

안 된다.

군주의 눈이 말하고 있다. 저건 그렇게 해서 막을 수 있는 마법이 아니라고.

그러니까 난 여기서 죽어야 한다는 뜻인데....

그래 봤자 마법은 마법이지.

지이잉!

고속으로 완성한 퓨어 매직이, 코 앞까지 날아든 적의 브레스를 뚫고 날아간다.

마치 투명한 지우기가 현란하게 회전하는 꽈배기를 머리서부터 먹어 치우는 것처럼 보인다.

그렇게 순식간에 브레스를 뚫고 적의 주둥이 사이에 충돌한 퓨어 매직이 폭발을 일으켰다.

퓩.

풍선에서 바람 빠지는 듯한 미세한 폭음.

쳇. 역시 본체에는 안 통하는구만. 하긴 저게 무슨 후원자도 아니고, 빌딩만한 육체가 당당하게 존재하는 생물이니까.

"근데 생물이 어떻게 맨몸으로 퀀터플 매직을 버텨내냐고... 으악!"

억지로 허리를 피며 몸에 박힌 얼음 화살을 뽑아냈다. 으아, 이거 이러다 정말 죽겠네.

이렇게 된 이상, 죽이 되든 밥이 되든 일단 이그니스를 소환할까?

설마 진짜 마법 면역이겠어? 여왕과 함께 협공을 하면 어떻게든 될 거 같은데....

-안 돼.

그러자 여왕이 직접 머릿속으로 말을 걸어왔다.

-지금까지 너의 눈을 통해 지켜봤다. 저 녀석의 몸은 마법이 안 통해.

"그래. 나도 봤어. 후원자 붕대 같더라."

-그 정도는 아니지만 비슷하다. 그러니 답은 빙의다.

"빙의?"

키이이이이이이에에엑!

그 와중에 젝트바이아가 고개를 치켜들며 포효했다.

녀석, 승질하고는. 공격이 자꾸 안 통하니까 열받냐? 너만큼이나 나도 열받는다고.

"이미 룩카르와 빙의되어 있는데?"

-그 녀석 말고, 나와 하라는 뜻이다.

"아직 위험하다며? 아니, 그전에 그런다고 뭐가 되는데? 그냥 몸이 더 강해지는 거잖아? 나이트 마스터 정도? 소용없어. 다비라고 저 괴물을 죽일 수 있을 것 같아?"

-내 빙의는 다르다.

"뭐?"

-나와 빙의하면 넌 불이 된다.

"그게 뭔 소리야!"

-우리가 한 몸이 된다는 뜻이다. 너는 내가되고, 나는 네가 되지. 그러면 저 불쌍한 괴물을 죽일 수 있다.

"그러니까 어떻게?"

-해 보면 안다.

아니 그런 무책임한 소리가 어디 있어!

해봐서 안 되면 나보고 어쩌라고! 그리고 불? 불도 마법이잖아? 저거 마법 안 통한다며?

-물론 당장 네 몸은 그것을 견디기 힘들다. 최대한 빨리 빙의를 푼다 해도 죽을 위험이 있지. 심지어 빙의 시간도 10초를 넘기기 힘들고.

"10초? 고작 10초로 뭘 해?"

-그러니 강요하진 않겠다. 다른 수단이 없다고 생각하면 도망치는 걸 추천한다.

아니, 그렇다고 지금 내가 도망치면....

뒤에 있는 빈디르에 살고 있는 수만 명의 사람들은 어떻게 하라고?

죽여?

그 모두를 죽여서라도 일단 도망쳐?

여기서 내가 죽으면 아무 것도 안 되니까? 세상이 전부 멸망할 테니까?

으아....

머릿속에 오만 생각이 쏟아진다.

이게 다 내가 약해서 오는 결과다.

어떻게 고작 10초의 시간에 모든 걸 걸 수 있겠어? 최소한 1분이든 30초는 되어야 뭘 해도 할 수 있지....

아니 잠깐.

"여왕. 지금부터 빨리 대답해."

-무엇을 말이냐?

"내가 몸이 약해서 10초밖에 못 버틴다며? 근데 지금 룩카르 빙의로 몸 엄청 강화됐잖아? 빙의시간도 2분 정도 남은 거 같고. 그러니 이 상태로 덮으면 어떻게 돼"

-덮다니, 기존의 빙의를 풀지 않고 추가로 덮는다고? 지금 제정신이냐? 둘 다 해체된 순간 뒷감당을 어떻게 하려고?

"됐으니까 빨리 대답이나 해!"

-흥, 2분이다.

"2분? 룩카르가 빙의된 만큼 버틸 수 있어?"

-그래. 하지만 둘이 동시에 풀리면 넌 죽는다. 반드시.

"아니? 난 안 죽어."

결정을 내린 이상, 여기서 부터는 시간 싸움이다.

나는 즉각 나무의 정령, 드라이어드를 소환했다.

"아.... 계약자님은 부르실 때마다 저를 놀라게 만드시는군요."

드라이어드가 멀리 포효하는 괴물을 보며 탄식했다. 나는 즉각 녀석에 손을 뻗으며 신성 마법을 사용했다.

"라이프 링크. 1대9로."

우웅!

한순간 쇠사슬 모양의 빛이 나무 정령과 나 사이를 연결하고는 모습을 감췄다. 드라이어드는 잠시 움찔하고는 고개를 끄덕였다.

"라이프 링크, 받아들였습니다. 지금부터 계약자님께 오는 모든 피해의...."

"됐으니까 최대한 떨어져! 빨리!"

"네. 알겠습니다."

드라이어드는 급하게 나무뿌리를 움직이며 뒤로 물러났다. 으아 시간 없어. 이것만으로도 이미 20초는 흘렀겠다.

"이그니스. 빙의해."

-분부대로.

그 순간, 마치 온몸에 바늘이 꽂힌 듯한 통증이 쏟아졌다.

동시에 그 모든 바늘을 통해, 쇠도 녹일 듯한 화염이 체내로 주입되는 환상을 경험했다.

너무도 많은 화염.

대체 얼마나 많은 불이 내 안으로 쏟아진 걸까?

마치 혈관에 흐르는 피가 전부 불꽃으로 교체된 기분이

동시에 내 모든 신경이 타오르는 불로 연결되어 있음이 느껴진다. 그래 이거구나. 이그니스가 말한 '불이 된다'는 느낌이.

"...."

고개를 들자, 흉측한 괴물의 의식이 내 쪽으로 쏟아지는 게 보인다.

소름끼치는 증오와 분노.

하지만 지금의 내 눈엔 그 이상이 보인다.

녀석을 구성하는 모든 흐름이, 몸속 깊숙한 곳에 모여 하나의 중심을 이루고 있다는 것이.

-저게 약점이다.

여왕이 말했다. 아니, 내가 말한 건가? 이거 둘이 완전히 겹쳐 있어 구분이 잘 안 되네?

어쨌든 적의 약점은, 두 개의 머리가 만나는 지점에서 조금 아래 쪽에 있다.

심장보다 좀 더 위.... 쇄골의 중심?

저곳을 파괴하면, 저 괴물의 육체를 구성하는 모든 흐름이 단숨에 끊긴다.

그래서 난 뛰어들었다.

촥!

몸이 가볍다.

가볍다 못해 거의 날아다닐 지경이네. 비행마법을 발동한 것도 아닌데.

파직!

그때 머리 위로 광범위한 번개 그물이 쏟아졌다.

보기만 해도 소름 끼치는 저 격자무늬.... 하지만 지금은 상관없다. 닿기 전에 돌파하면 그만이지.

치익!

발을 강하게 내딛은 순간 지면이 불타오른다.

동시에 앞으로 몸을 날리자, 한순간 번개 그물의 범위 밖으로 몸이 날아갔다.

대체 지금 난 얼마나 빠른 걸까?

파지지지지직!

그 와중에 적이 번개 그물로 겹겹이 벽을 쌓았다. 나는 그물눈이 좁아지기 전에 그중 하나로 몸을 날리며 뛰어들었다.

그와 동시에 쏟아지는 무수한 얼음 화살.

하지만 아무 상관없다.

치이이이이이이이이익!

수백 개의 화살이 몸에 닿기도 전에 모조리 증발한다.

온 세상이 뿌연 증기로 뒤덮인 가운데, 나는 눈에 보이지도 않는 두 번째 번개그물 벽을 사뿐히 통과했다.

그물눈이 이미 많이 좁아졌긴 한데.

하지만 나도 작거든? 세상에나, 내가 몸이 작아서 득 보는 날이 올 줄이야.

그 와중에, 외부에서 쏟아지는 무수한 정보에 몸이 자동으로 반응한다.

전에는 정보가 너무 많으면 머리가 처리를 다 못해 고통스러웠다.

하지만 지금은 너무도 자연스럽게 온몸이 나눠서 정보를 처리한다.

마치 온몸에 두뇌가 있는 것처럼, 그리고 모든 두뇌 사이를 화염으로 된 신경망이 이어진 것처럼.

그렇게 세 번째 번개 그물과 네 번째 번개 그물을 돌파했고, 수천 개의 쏟아지는 얼음 화살이 순식간에 기화하며 온 세상을 수증기로 가득 채우는 게 느껴진다.

그래. 지금 내가 뜨겁긴 뜨거운가 보구만.

하지만 의문이 든다.

안 통하는 걸 알면서도, 왜 젝트바이아는 기를 쓰고 얼음 화살을 쏟아붇고 있는 걸까?

차라리 저기 쓸 마력을 하나로 모아 수십 개의 아이스 미티어를 떨어뜨리는 게 도움이 되지 않을까? 짜잘한 거 수천 개를 만들어 봤자 순식간에 수증기로 변해 버리는데?

아니, 반대다.

녀석이 원하는 것은 오히려 대량의 수증기를 만들어내는 것.

어째서?

수증기로 내 시야를 가리는 동안 더 강력한 무언가를 명중시키기 위해서.

-천재가 된 기분이 어때?

그때 내가 말했다. 아니 여왕이 말했나? 어떠냐고? 좋지. 아주 좋아. 적의 의도가 뿌리까지 훤히 들여다보이네.

그때 하늘에서 수증기를 뚫고 브레스가 쏟아졌다.

번개와 얼음의 만남.

그 뭉칠 듯하면서도 결코 뭉쳐지지 않는 절묘한 균형이 아름답다.

전에 군주의 눈으로 봤을 때도 이 정도는 아니었는데, 이젠 거기에 여왕의 눈이 더해지니....

세상이 완전히 다르게 보이는구만.

아무튼 나는 또 한 번의 가속으로 이중 브레스의 피폭지점을 이미 벗어난 상태.

하지만 브레스가 강하긴 강했다.

충격.

등 뒤의 피폭지점으로부터, 엄청난 충격파가 사방으로 방출되는 게 느껴진다.

-맞서려 하지 마. 몸을 맡겨.

나와 여왕이 동시에 말했다. 맞아. 등을 떠밀어 준다는데 저항할 필요는 없다. 원래 육상경기할 때도 뒤에서 바람이 불면 기록이 더 좋아지는 거 알지?

우웅!

그렇게 순풍을 등에 업고 순식간에 지근거리에 도달했다.

아직 멀다고?

인간인 나는 그렇게 느끼지만, 불이 된 나는 그렇게 받아들이지 않는다.

가깝다. 지면을 딱 한 번만 걷어차면 적에게 도달할 수 있을 정도로.

-검을 뽑아.

곧바로 허리춤에 차고 있던 엘프 군주의 검을 뽑아 들었다.

-내 안에 흐르는 불을 쏟아부어.

그래서 검에 불을 쏟아 넣었다. 이거 신기한데? 마치 검과 내 손 사이에 혈관이 이어진 기분이다.

그러자 은빛의 칼날이 새빨갛게 타오르다, 순간적으로 노란빛으로 달아오르며 극도의 고열을 뿜기 시작했다.

뜨거워!

맙소사, 불의 정령왕과 빙의를 했는데도 뜨겁게 느껴진다고? 대체 내가 칼날에 무슨 짓을 한 거지?

궁금하니 지금부터 테스트를 해보자.

치이익!

또다시 발바닥으로 지면을 불태우며, 단숨에 적의 명치를 향해 뛰어올랐다.

젝트바이아.

어지간한 빌딩만 한 높이의 괴수.

녀석은 그 틈에 악착같이 새로운 번개 그물 벽을 세웠지만, 이미 내 몸은 그 공간을 지난 뒤였다.

눈앞에는 빼곡하게 곤두선 철갑 같은 비늘.

그리고 이젠 보인다.

그 모든 비늘 사이로, 극도로 미세한 전류 같은 흐름이 빼곡히 들어차 있다.

저 흐름이 외부에서 날아오는 마법을 순식간에 중화시킨다. 그래서 퀸터플 매직을 맞고도 눈 하나 깜짝 안 했던 거구만.

하지만 내가 직접 들어가면 어떻게 될까?

몸을 날린 기세 그대로, 비늘 사이에 칼을 찔러 넣으며 몸을 들이받은 순간.

치직!

철갑 너머의 새까만 피부가 더욱 까맣게 불타며 상처가 확 벌어진다.

결국 드러난 붉은 속살.

그 속살 속으로 온몸을 파고 넣으며, 몸에 닿는 모든 것을 잿더미로 불태운다.

차아아아아아아악!

그렇게 몸으로 직접 길을 뚫자, 결국 적의 모든 흐름이 집중되는 핵심이 모습을 드러냈다.

...관?

이거 관이지? 죽으면 들어가는 거? 몸속에 관을 품고 있는 거야? 어째서?

어쨌든 저 관으로부터 끝도 없는 생체 조직이 뻗어 젝트바이아의 육체를 형성하고 있다.

그럼 뭐 두고 볼 거 있나.

치이익!

일도양단.

칼 길이보다 관의 두께가 훨씬 두껍지만 상관없다. 칼끝에 열선이 방출되고 있어서 눈에 보이는 것보다 길거든?

그렇게 반으로 쪼개진 관 속에서, 정말 끔찍한 무언가가 흘러나왔다.

젝트.

그리고 바이아.

두 아크 위저드의 몸이 반쯤 액화된 채 하나가 되어 있다.

그러니 내가 하나를 다시 둘로 갈라준 셈이다. 물론 이미 섞여 버린 뒤라 무슨 의미가 있냐 싶지만.

그리고 멈췄다.

눈앞에 있는 초라한 두 인간의 시체 말고, 가슴에 구멍이 뚫린 대괴수 젝트바이아의 육체가 정지했다.

"이겼...."

다?

응?

아니, 이긴 건 맞는데.... 갑자기 전에 없던 생소한 흐름이 눈앞을 꽉 채운다.

쪼개진 관에서 어떤 에너지가 방출되고 있다.

원래는 두 아크위저드의 몸으로 흘러들어가, 최종적으로 젝트바이아의 육체를 구성하던 에너지.

그런데 두 아크위저드가 죽어버린 순간, 에너지의 흐름이 멈추며 새로운 현상을 일으키기 시작했다.

"이건...."

난 숨을 멈췄다.

검은 그림자가 열리며, 건너편 세계의 모습이 눈에 들어온다.

이계 황자는 세상을 구하고 싶다 109화

32장 침공 너머

차원문.

게이트.

뭐라고 부르던 간에, 갑자기 공간이 열리며 아주 작은 통로가 연결되었다.

동시에 저편으로부터 눈부신 빛이 쏟아졌다.

경기장.

차원문 너머는 경기장이었다.

그렇게밖에는 말로 표현할 수 없는 공간이다.

와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

수천, 수만의 관중이 관중석에서 환호하고 있다.

살아있는 육신은 아무것도 없이, 그저 온몸이 마력을 포함한 온갖 다양한 '흐름'만으로 엮여 있는 생명체.

과연 저걸 생명이라 불러도 되는 걸까? 뭔가 철학적인 고찰이 필요할 것 같은데.

어쨌든 녀석들은 경기장 중앙에 세워진, 사각기둥의 초대형 스크린을 보며 열광하고 있었다.

대체 얼마나 푹 빠졌으면 스크린 바로 옆에 차원문이 뚫린 것도 눈치채지 못하는 걸까? 어디 월드컵이라도 열렸나?

그래서 나도 고개를 돌려 스크린을 올려다보니....

음....

젝트바이아가 보인다.

드넓은 벌판에 우뚝 선 젝트바이아가, 가슴에 뚫린 커다란 구멍으로 피를 쏟고 있다.

관중들은 그 광경을 보며 미친 듯이 환호성을 질렀다. 아니, 그럼 저놈들이 지금까지 내가 젝트바이아와 싸우던 모습을 관람하고 있던 거야? 무슨 스포츠 경기 즐기듯?

대체 왜?

잠깐, 그러고 보니 대형 스크린에 뜬 수많은 화면에 오직 젝트바이아만 잡혀 있는 게 아니다.

일부는 마치 폭격이라도 맞은 듯, 처참히 무너진 어떤 마을을 비추고 있었다.

모두가 죽은 마을,

아니, 대부분은 죽었지만, 일부 생존자들이 고통 속에 절규하고 있는 마을.

"으아, 으아아아아악!"

"엄마! 엄마! 누가 제발 좀 도와주세요!"

"사, 살려줘! 집에 깔렸습니다! 제발 저 좀 꺼내주세요!"

"우리 아기가! 우리 애가 아직 저기 깔려 있어요! 제발! 제발 누가 좀!"

그들 모두가 바로 내 정면에 있는 스크린에서 괴로워하고 있다.

아. 그거구나.

저곳은 젝트바이아가 처음 날렸던 브레스가 떨어진 마을이다.

그 죽음과 고통의 흔적을, 저들 모두가 실시간으로 시청하며 즐기고 있다.

-빙의 시간이 얼마나 남았지?

-1분 남았어.

내 스스로 묻고 답했다. 나는 사람 하나 겨우 들어갈 사이즈의 차원문을 바라보며 다시 질문을 던졌다.

-이 차원문은 얼마나 버틸까?

-이것도 대충 1분.

그래. 이것도 1분 버틴단 말이지.

1분이면 충분하다.

물론 지금 당장 빙의를 풀어도 어마어마한 데미지가 몰려 올 것이다. 당장 죽어도 이상하지 않을 정도로.

당연히 1분 뒤에 강제로 풀리면....

죽는다.

드라이어드와 라이프 링크를 걸었지만 그래도 죽을지도 모른다.

물론 내가 받는 모든 피해의 90%를 드라이어드가 대신 가져가겠지만, 대포에 맞는 충격을 소총에 맞는 충격으로 줄인다 해도 결국 죽는 건 매한가지.

하지만 이걸 어쩌나? 난 이미 눈이 돌아가 버렸는걸?

* * *

난 차원문 너머로 몸을 던졌다.

후원자가 여길 사이크 차원이라고 했던가?

놀라울 만큼 선명한 태양이 거대한 원형 경기장을 비추고 있다.

사이크인 들은 실체 없는 색색의 전선이 꼬여서 만들어진 목각인형처럼 보였다.

그들은 여전히 스크린을 보며 환호성을 지르고 있다. 지금 내가 이곳에 발을 내딛었는데도.

그래. 이 새끼들. 어디 죽는 순간에도 그렇게 즐거워할 수 있는지 지켜봐주마.

나는 전 속력으로 관중석을 향해 뛰어들었다.

푸화아아아악!

들이받은 지점에 거대한 불길이 솟아오른다.

그 일격에 백 명이 넘는 사이크인이 '증발'했다. 형체도 흔적도 없이.

그러자 더 큰 함성이 온 사방에서 쏟아졌다.

으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

비명인가?

아니면 환성?

아무것도 모르겠다. 그러니 그냥 죽어라.

촤악!

관중석을 따라 달리며 좌우로 검을 휘둘렀다.

칼날을 따라 붉은 선이 그어지며, 알록달록한 목각인형들이 비명과 함께 소멸한다.

약해.

이놈들 약하다. 아니면 내가 너무 강한 걸까?

촤악!

푸확!

휘두른 검을 따라 넓은 화염이 추가로 쏟아진다.

마치 파도처럼.

붉은 선의 범위 밖에서 목숨을 건진 사이크인들이 파도에 휩쓸리며 양 손을 치켜든다.

항복이란 뜻일까?

아니면 만세?

군주의 눈에는 강렬한 흥분과 자극이 보인다. 그러니까 저놈들은... 자신들이 죽어가는 그 순간조차 기뻐하고 있다!

"으아아아아아아악!"

도저히 못 버티겠다. 비명을 지르지 않고서는.

그렇게 미친놈처럼 비명을 지르며, 관중석을 질주했다.

죽어라.

죽어. 더 죽어. 아니 다 죽어!

-남은 시간은 20초다.

이건 내 목소리일까?

아니, 이건 여왕의 목소리에 가깝다. 나는 퍼뜩 정신을 차리며 내가 저지른 참극을 돌아보았다.

관중석의 절반.

그새 이 거대한 원형 경기장의 절반을 돌며, 수천의 사이크인을 학살했다.

후.

속이 다 시원하네.

아쉬운 건 아직도 경기장의 절반만큼 사이크인이 남아 있다는 것.

저것도 마저 다 죽여 버리고 싶지만 시간이 없다. 나는 스크린이 세워진 경기장으로 몸을 날린 다음, 아슬아슬하게 형체를 유지하고 있는 차원문을 향해 전력으로 질주했다.

"죽여! 저놈 죽여!"

"방금 그거! 현실이야! 여기서 일어난 일이야! 우리 차원에서!

"우와아아아악! 도망쳐! 사, 살려줘!"

"미친! 이게 무슨 일이야!"

그래 이 미친놈들아, 이제 겨우 정신이 좀 드냐?

뒤늦게 현실을 파악한 사이크인들이 비명을 지르며 우르르 움직이기 시작했다. 아오, 저거 보니 또 빡치네? 이거 안 되겠어.

콰아아아아아앙!

마지막으로 녀석들이 뭉쳐 달아나는 지점에 템페스트를 한 방 날린 다음, 닫히기 직전의 차원문 너머로 몸을 날렸다.

치익!

차원문 너머는 여전히 젝트바이어의 몸속이었다. 나는 바닥에 흥건한 액체가 증발하는 것을 보며, 곧바로 몸 밖으로 몸을 날렸다.

바로 그때, 빙의가 풀렸다.

* * *

"...."

정신을 차리자 파란 하늘이 보였다.

아직 해가 저물지 않은 걸 보니... 생각만큼 오래 기절한 건 아닌 모양이다. 대충 1분 정도?

마음 같아선 그보다 오래 기절해 있고 싶었다. 그랬으면 이 고통을 잊을 수 있었을 텐데.

"컥...."

숨도 안 쉬어진다.

고통 때문에 기절했다가 다시 고통 때문에 깨어났다.

그런데 또 기절할 순 없다. 일단 가능한 모든 신성마법을 내 몸에 퍼부으며 가까스로 몸을 일으켰다.

"아그그그그극! 아파! 아파 죽겠네!"

신성마법만으로는 통증이 커버가 안 된다. 이럴 줄 알았으면 통각 차단 영약이라도 챙겨오는 건데.

"수고하셨습니다. 계약자님."

눈앞에는 처참하게 박살난 드라이어드가 고개를 숙이고 있었다. 와 세상에, 그 큰 나무가 완전 반의 반쪽이 됐네?

"너야말로 수고했어. 으아, 이 기둥 박살난 거 봐. 나뭇가지도 다 뜯기고... 아팠지?"

"저는 통증을 느끼지 않습니다."

드라이어드는 절반이 사라진 얼굴로 고개를 저었다.

이 녀석이 내가 입은 피해의 90%를 가져가 주지 않았다면, 나는 이미 죽어도 일백 번은 고쳐 죽었을 것이다.

"그래도 미안. 정말 고생했어."

"아닙니다. 계약자님께 도움이 될 수 있어 영광이었습니다. 그럼...."

드라이어드는 미소와 함께 소멸했다.

그래, 잘 가 드라이어드. 그동안 고마웠어. 난 널 영원히 잊지 못할 거야.

물론 사나흘만 지나면 다시 멀쩡하게 소환할 수 있지만.

"찾았다!"

그때 하늘에서 누군가의 목소리가 들렸다.

"황자님! 무사했구나!"

목소리의 주인은 톨라리였다. 톨라리는 착지와 동시에 죽은 젝트마이어의 시체를 향해 손을 겨눴다.

"근데 저건 무엇? 너무 크잖아? 멀리서 저거 발견하고 날아오긴 했는데."

"저게 젝트바이어야."

"응? 뭐?"

"젝트와 바이어라고. 근데 웬일로...."

갑자기 다리에 힘이 풀리며 몸이 넘어갔다. 톨라리는 마법사 답지 않게 빠르게 반응하며 내 몸을 부축해 주었다.

"잡았다! 괜찮아 황자님? 꼴이 장난 아냐! 그리고 왜 몸에서 탄내가 나?"

"어.... 일단 괜찮아. 안 죽었어. 다행이도."

"그러게. 진짜 다행이야. 디디가 난리를 쳐서 심장이 덜컹했는데."

"디디?"

"디디가 갑자기 달려와서는, 르갈을 쫓아서 황자님 도우러 날아가라고 했어."

"르갈? 르갈이 냄새를 맡았나?"

"아마 그런 듯? 중간에 내가 먼저 앞질러 날아오긴 했는데...."

톨라리는 안도의 한숨과 함께 내 몸에 잔뜩 묻은 검댕을 손으로 털어주기 시작했다.

"아마 좀 있으면 도착할 듯. 근데 나 진짜 고생했어. 빨리 오려고 중간에 급가속까지 섞었다니까?"

"급가속? 그거 마력 소모 엄청나잖아."

"덕분에 마력 거의 다 써버렸어. 근데 멀리 저 괴물이 보여서 완전 쫄았어. 대체 무슨 일이야? 설명 좀 해주면 안 됨?"

"그러니까...."

순간 머릿속에 거대한 스크린이 떠올랐다. 으아! 맞아! 그 마을!

"당장 날 데리고 저쪽으로 날아가 줘."

"응? 저쪽?"

"저쪽에 박살난 마을이 있어. 가서 거기 사람들 구해야 해. 빨리 가서 신성마법 쓰면 몇 명은 살릴 수 있어."

"아니, 이렇게 헤롱거리는 데 무슨 소리? 황자님 마력 이미 한계 아니야?"

걱정, 안타까움, 행복, 고마움, 그리고 깊은 애정.

이 모든 감정이 톨라리의 몸에서 나를 향해 쏟아졌다. 나는 어딘지 안심되는 것을 느끼며 군주의 눈을 지그시 닫았다.

"걱정해주는 건 고마운데, 나 멀쩡해. 마력도 아직 여유 있고."

"마력에 여유가 있다면서 직접 비행 마법도 못 써?"

"그 마력조차 아끼려고 그래. 마을 가서 신성마법 써야 하니까. 어쩌면 무너진 집 치우고 사람 구조해야 할 수 있고. 그러니 내 말 좀 들어줄래?"

날 향한 마음이 고마워서 최대한 조용하고 정중히 요청했다. 그러자 톨라리는 외려 놀란 얼굴로 몸서리를 쳤다

"으, 무섭다. 황자님 이렇게 조곤조곤 말하니 뭔가 무서워. 차라리 소리 지르는 게 안심될 뻔."

"...쓸데없는 소리 말고."

"알았어. 그럼 실례합니다!"

갑자기 양팔을 펼친 톨라리는, 그대로 내 몸을 폭 껴안으며 공중으로 날아올랐다.

"으, 황자님 생각 보다 무거워. 솜털처럼 가벼울 줄 알았는데."

"내가 무거운 게 아니라 네가 부실한 거야. 그러니까 평소에 운동 좀 해."

"마법사가 웬 운동? 아, 코어를 먹으면 바로 해결되지 않을까?"

톨라리가 내 얼굴을 마주보며 히히 웃었다. 이 와중에도 코어를 어필하다니, 이 녀석 멘탈도 진짜 보통은 아니구나.

그때 오른편으로 죽은 젝트바이어의 시체가 스쳐 지나갔다.

이런 건 지금까지 한 번도 없었는데.

이 망할 자식들 같으니라고. 남은 시간을 1년으로 줄인 것만으로는 모자랐냐?

그래서 지난 9회 차 동안 한 번도 본 적 없던 괴물을 만들어 낸 거야? 응? 이거 너무 하지 않냐?

제스는 광전사, 탈리스만 백작은 감염 군주, 트롬본 아저씨는 폭탄 마인.

다들 적어도 기존의 웨이브 때 섞여 나오던 괴물로 변했잖아? 근데 저건 뭔데. 젝트바이아? 이름부터 개판이야!

최소한 정식으로 코드네임이라도 지어주든가.

후....

그래. 뭐,

이번엔 준 만큼 받은 것도 있었다. 억울한 만큼 쾌감도 있긴 했다 이 말씀.

나는 잠시 다녀온 사이크 차원의 대학살을 떠올렸다.

으흐흐.

생각만으로 웃음이 절로 나온다. 설마 그놈들의 본거지로 넘어갈 줄이야. 회귀 열 번 만에 처음이네.

실로 역사적인 순간이 아닐 수 없다.

심지어 그냥 넘어가기만 하고 돌아온 게 아니다. 우리의 불행을 보고 즐기던 사이크인 수천을 잿더미로 바꿔 놓았다.

그것도 불과 10여 초 만에.

이 정도면 정신 번쩍 들었겠지?

차원 침공은 네놈들만 할 수 있는 게 아니야. 나도 맘만 먹으면 넘어가서 깽판 칠 수 있다고!

그래. 어떻게든 그쪽으로 넘어갈 방법만 찾을 수 있다면....

이거 반격도 가능하겠는데?

"황자님. 저기."

그때 톨라리가 내 몸을 살짝 흔들었다. 고개를 돌리자 멀리 연기를 뿜고 있는 마을이 보였다.

아니, 이젠 마을이 아니구나.

산산 조각난 폐허. 스크린에 나오던 울부짖는 사람들의 모습이 아직도 눈에 선했다.

사이크인은 다 같이 미쳐버린 걸까?

어떻게 그런 걸 보면서 환호성을 지를 수 있지? 잠깐 다녀왔지만 이곳과 달리 문명이 엄청 발달한 것처럼 보였는데, 애당초 이곳은 왜 공격하는 거고?

잠깐, 설마 그놈들....

규정이니 뭐니 엄청 중대한 일을 벌이는 것처럼 허세를 떤 주제에, 실상은 이 모든 게 자신들의 오락을 위한 유흥거리였던 거야?

그저 우리가 고통받는 모습을 보고 즐기기 위해서?

이계 황자는 세상을 구하고 싶다 110화

33장 이글 스피릿

경기장은 아직도 검은 연기를 뿜어내고 있었다. 주재자는 자신이 거처하는 탑의 맨 꼭대기에서 그것을 내려다보며 말했다.

"울고 싶군. 하지만 울 수가 없어. 오늘처럼 육체가 없다는 게 아쉬운 적이 없었다."

클로드가 사이크 차원에 난입, 경기장에 있던 수많은 인파를 학살한 지도 두 시간이 지났다.

이 사건으로 사이크 차원은 아수라장이 되어 버렸다. 흥분한 시민들이 거리로 뛰쳐나와 비명을 질렀고, 일부는 코앞으로 다가온 '위대한 게임'에 불만을 터뜨리기도 했다.

"웃기지도 않는 군. 위대한 게임은 하기 싫다고 안할 수 있는 게 아니야."

고개를 돌리자 하얀 붕대를 감은 두 사람이 무릎을 꿇고 있었다. 하나는 멀쩡했지만, 또 한 명은 몸의 이곳저곳이 결손되어 엉망이었다.

"분석관. 우리가 입은 피해 규모부터 보고해라."

"네. 주재자님. 경기장에는 총 2만 8천의 일반 시민 계급원이 모여 있습니다. 그중 공격을 받고 소멸한 자는 1만 2천 39명입니다."

"1만 2천이라."

주재자는 손바닥으로 자신의 입이 있던 자리를 막았다.

이것은 돌이킬 수 없는 심각한 피해다. 영생을 얻은 사이크인은 자체적으론 번식이 불가능하니까.

여기에 사이크인 자체가 문명에 필요한 에너지를 생산하는 주체이기도 하다.

그들은 2세를 낳는 대신, 감정의 자극을 통해 자신과 같은 에너지를 생산하여 방출한다.

그렇게 방출한 에너지를 도시 곳곳에 깔린 흡입기가 빨아들여 자원으로 활용한다.

이런 관점에서 보면 경기장은 거대한 발전소나 다름없다. 그러니 적이 침입한 곳은 사이크 차원에서 가장 중요한 전략시설인 셈이었다.

"믿을 수 없는 피해군. 그 한 번에 에너지 총 생산량의 5퍼센트가 사라졌어. 영생의 핵이 엄청나게 방황하고 있겠군."

영생의 핵이란, 죽은 사이크인이 남기는 순수한 에너지를 말한다.

형체도 없고 눈에 보이지도 않지만 사이크인의 근본이나 다름없다. 그 자체로는 생명이 없기에 추가적인 에너지를 생산하진 못하지만, 새로운 사이크인을 만들기 위해선 반드시 필요한 자원 중 하나였다.

"어쩔 수 없이 반란군 사냥에 다시 나서야겠군. 현재까지 회수한 영생의 핵은 얼마나 되지?"

"그것이.... 없습니다."

"없다고? 어떻게 영생의 핵이 없을 수 있나?"

"저희들도 처음에 당황했습니다. 경기장에 남은 영생의 핵 수치가 0으로 표시되어...."

"그건 불가능한 일이다."

주재자는 딱 잘라 말했다.

"영생의 핵은 우리가 죽은 자리에 그대로 남게 되어 있다. 그것은 그 어떤 공격으로도 파괴되지 않는다. 오직 퓨어 매직을 제외하고는."

"...."

"하지만 클로드는 퓨어 매직을 쓰지 않았다. 그런데 왜 영생의 핵이 사라진 거지?"

만약 땀을 흘릴 수 있었다면 지금쯤 폭포수 같은 진땀을 쏟아냈을 것이다. 분석관은 힘겹게 몸을 틀며 한쪽 벽에 준비한 영상을 출력했다.

팟!

"이것을 보아 주십시오."

영상은 관중석의 절반을 휩쓴 클로드가, 엄청난 속도로 차원문을 통해 빠져나가는 그 순간에 멈춰 있었다.

삑!

"바로 이 순간입니다. 영상 분석 결과, 경기장에 남은 모든 영생의 핵이 클로드가 쥐고 있는 저 칼에 흡수되었습니다."

우웅!

화면이 클로즈 업 되며 클로드가 쥔 검에 집중되었다. 분석관은 노란 빛으로 달아 오른 칼날을 노려보며 소리쳤다.

"그건 또 무슨 헛소리야!"

콰직!

순간 분석관의 몸이 머리통만한 사이즈로 오그라졌다가 다시 정상으로 돌아왔다.

"기, 기익! 그그! 으어어어억! 사, 살려주십시오! 주재자님!"

"엄살떨지 마라. 그 정도로 안 죽으니까."

주재자는 흥분을 애써 가라앉히며 물었다.

"그런데 칼이라고? 그래 봤자 기술 등급 제로에 가까운 하등한 차원에서 만들 쇳덩어리에 불과하지 않나? 어떻게 쇳덩어리가 영생의 핵 같은 고등급의 에너지를 흡수할 수 있지?"

"그것이...."

분석관은 구겨졌던 몸이 여전히 고통스러운 듯, 계속해서 경련을 일으키며 가까스로 대답했다.

"후원자 1호가 남긴 마지막 기록과 대조하면, 클로드가 쥐고 있는 저 검은 엘프 군주가 만든 검과 동일합니다."

"엘프 군주? 2호가 놓여버린 그 녀석 말이군. 그런데?"

"그 검은 저희들의 기술력으로도 쉽게 재현할 수 없는 정교함을 갖췄다 합니다. 정확한 메커니즘은 아직 알 수 없지만, 분명 영생의 핵 같은 고위 차원의 에너지를 빨아들이는 능력이 있는 것 같습니다."

"이런 말도 안 되는!"

콰지직!

이번에는 분석관의 몸이 거의 주먹만 한 크기로 오그라들었다.

"그런 일은 있을 수 없어! 저런 하등한 차원에서 영생의 핵을 다룰 기술이 존재 한다고?"

"크아아아각각가악!"

몸이 원래대로 돌아온 분석관은 실성한 듯 제정신을 차리지 못했다. 옆에 무릎 꿇고 있던 2호는 두려운 듯 몸을 떨며 고개를 숙였다.

"꺼져라! 꼴도 보기 싫은 것!"

그러자 문이 열리며 녹색 붕대의 사이크인이 분석관의 몸을 끌고 밖으로 나갔다. 주재자는 혼자 남은 2호를 노려보며 나지막한 목소리로 말했다.

"지금 클로드가 가진 저 검에, 무려 1만 2천의 영생의 핵이 흡수되었다."

"...네. 주재자님."

"그만큼의 영생의 핵으로 무엇을 할 수 있는지 아나? 6천 명의 새로운 사이크인을 만들 수 있지. 물론 반란군 6천 명을 생포해서 잡아 와야겠지만."

"그렇습니다. 하지만...."

"하지만?"

주재자는 2호의 어깨를 쥐었다. 2호는 순간 발작하듯 몸부림치며 신음했다.

"커, 크에, 으극, 허으으으...."

"지금 내 마음을 알겠나?"

"주, 주재자님...."

주재자의 감정이 2호의 몸속으로 계속 흘러 들어왔다.

차라리 방금 분석관처럼, 물리적인 힘으로 고통을 받는 편이 좋았을 것을.

주재자는 모든 사이크인의 번영과 생존을 주관하는 존재.

그가 홀로 짊어진 이 거대한 책임감은, 붕대를 받은 지 겨우 200년도 안 되는 2호가 견딜 수 있는 규모가 아니었다.

"으드드, 으걱, 주재자님 제발...."

하지만 주는 게 있으면 받는 것도 있는 법.

최근 한 달간 2호가 겪었던 고통, 그리고 광기의 일부가 주재자의 몸으로 넘어갔다.

"호."

주재자는 당황한 기색으로 손을 떼어냈다.

"놀랍군. 세상에 나만큼 클로드를 증오하는 존재는 없을 거라 생각했는데."

"주, 주재자님."

"네 감정의 아주 일부만 전달 받았는데도, 지금까지 내가 클로드에 품은 분노가 몇 배로 커졌다."

주재자는 2호의 몸을 직접 일으켜 세우며 무거운 목소리로 물었다.

"클로드가 그토록 증오스러웠나?"

"클로드.... 크, 클로드.... 히히, 하하하...."

"정신 차려라. 끔찍하군. 대체 그 녀석 때문에 얼마나 큰 고통을 받은 거지?"

그 순간, 꿈틀대던 2호의 몸이 축 늘어졌다.

"흐윽.... 주, 주재자님.... 저는 정말이지.... 그놈이 밉습니다."

2호는 흐르지 않는 눈물을 닦으며 울먹였다.

"먼저 엘프 군주를 납치하려 했는데 녀석이 선수를 치고.... 심지어 다음으로 정한 얼음 벌레 여왕까지, 그것도 간발의 차로 박살을 내 놓고.... 흐으으윽!"

"음. 거기 까지는 보고를 받았다."

"너무 괴로웠습니다. 첫 임무부터 이런 거대한 실패라니요. 정말이지 견디기 힘들었습니다."

"그래. 이번이 네가 받은 첫 차원 임무였지."

"게, 게다가 여왕을 위해 엄청난 자원을 미리 투자했는데, 그것이 몽땅 무위로 돌아갔으니.... 그래도 제 몸을 희생해서, 어떻게든 악착 같이 두 명의 아크 위저드를 확보해 녀석들에게 여왕에게 투입하려던 신기술을 모조리 때려 넣었는데...."

"저런, 그 과정에서 1호의 유산을 투입했고?"

주재자가 부드러운 목소리로 물었다. 2호는 하릴 없이 고개를 끄덕이며 울었다.

"흐윽! 그, 그렇습니다. 그림자 차원 장치를 투입했습니다. 그것으로 젝트바이아의 힘을 극대화시켰는데.... 아니, 저도 정말 제정신이 아니었습니다. 자칫하면 차원문이 열릴지 모르는 위험한 물건을...."

"정말 괴로웠겠군."

주재자는 감정의 전달 없이, 그저 맨 손으로 2호의 어깨를 두드려 주었다.

"네가 받은 고통을 나도 느꼈다. 그 끔찍한 고통을."

"주재자님! 전 정말 억울합니다! 그런 일은 일어나선 안 됩니다. 융합체, 아니 젝트바이아의 모든 세부사항은 전부 클로드 하나를 위해 조정되었습니다. 그 녀석이 사용하는 모든 마법은 젝트바이아에 통하지 않았어야 합니다. 그런데 대체 어떻게...."

"그래. 맘고생 심했다."

주재자는 아예 양 손으로 2호의 양 어깨를 두드렸다.

"힘들었지? 내가 너무 무거운 책무를 맡긴 것 같구나. 그래봐야 하얀 붕대를 받은 일개 요원일 뿐인데."

"흐윽...."

"이게 다 내 실책이다. 그동안 1호가 너무 잘 해줬기 때문에 내 판단력에 오차가 생긴 것 같다."

"아닙니다. 주재자님. 전부 제 실수 때문에...."

"됐다. 이제 됐으니 쉬어라."

붕대 속 주재자의 얼굴에 미소가 번졌다. 2호는 감격한 얼굴로 주재자를 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2호의 몸이 구겨졌다.

콰직!

다른 그 어떤 힘도 사용하지 않은 채, 주재자는 오직 양 손의 힘으로 2호의 몸을 압축하기 시작했다.

"컥! 주재자님...."

와직!

가뜩이나 원형이 손실된 2호의 몸은, 한순간 주먹보다 작게 오그라들며 주재자의 손아귀에 갇혀버렸다.

"넌 실패 그 이상을 저질렀다.

"아극...."

"누가 네 맘대로 1호의 유산을 사용해도 된다 했지? 네놈 때문에 1만 2천의 사이크인이 소멸했다. 완전 깨끗하게"

콰지지지직!

주재자는 다시 복구되려는 2호의 몸을 더 강하게 짓눌렀다.

쿠직!

더 작게.

우지지직!

더 작고 더 작게.

그러다 어느 순간, 이제는 붕대의 형상조차 안남은 손톱만한 덩어리에 불이 붙었다.

치익!

그리고 순식간에 사라졌다.

남은 건 아무것도 없었다. 주재자는 손바닥을 털며 2호의 마지막 흔적이 사라진 장소를 주시했다.

"흠, 여기, 이쯤이려나?"

그리고는 바로 그 장소에 퓨어 매직을 날렸다.

지이이잉!

투명한 빛이 텅 빈 공간을 가로지르며 반대편 벽을 강타했다. 주재자는 코웃음을 치며 몸을 돌렸다.

"넌 이미 망가졌다. 아무리 영생의 핵이 귀중해도 이미 망가진 녀석의 핵을 재활용 할 수는 없지."

"주재자님!"

그때 녹색 붕대를 감은 경비가 급하게 안으로 들어왔다. 주재자는 태연한 모습으로 경비를 보며 되물었다.

"무슨 일이지?"

"방금 큰 소리가 들리지 않았습니까? 잠깐, 그런데 이곳에 분명 후원자님이...."

경비는 텅 빈 공간을 바라보며 급 정색했다.

"아니! 아닙니다! 제가 헛것을 들었나 봅니다!"

"정신 차리도록. 그보다 당장 이곳으로 집정관을 모셔와라."

"네. 알겠습니다."

경비는 경례를 붙이며 밖으로 뛰쳐나갔다. 주재자는 가볍게 턱을 만지며 멈춰 있는 화면을 향해 고개를 돌렸다.

클로드.

그곳에는 마치 불의 화신이 된 듯한 모습의 클로드가, 역동적인 자세로 차원문을 향해 뛰어 들고 있었다.

"저것은...."

모든 것을 주관하는 주재자조차 처음 보는 모습.

어떻게 저런 일이 가능한 걸까?

"인간, 살아있는 몸을 가진 인간이 원소의 근원과 융합되다니."

놀랍다는 말만으로는 부족하다.

저 클로드라는 인간은, 이미 오래 전에 자신들이 버린 가능성의 한계를 돌파 해 버린 것이다.

"이미 힘과 속도만으로 평가할 수 없다. 그보다 높은 영역.... 어쩌면 결투자의 수준에 근접한 것이 아닌가?"

결투자.

차원의 존망을 건 최종 승부에 내보낼 마지막 전사.

물론 여태껏 결투자가 나선 일은 매우 드물었다. 하위 차원이 상위 차원의 침공을 막아 내는 건 그 만큼 어려운 일이니까.

하지만 만약 막아낸다면.

그리고 마지막 싸움에서 이쪽의 결투자가 패배한다면?

"우린 소멸하고, 저 알드 차원이 대신 그 자리를 차지하겠지. 안 되겠어...."

주재자는 없는 이를 갈며 혼잣말을 중얼거렸다.

"이젠 정말 위험하다. 하얀 붕대, 화이트 클래스로는 해결이 안 돼. 집정관과 상의해서라도 방법을 마련해야 한다. 여차하면 집정관을 직접 동원해서라도...."

이계 황자는 세상을 구하고 싶다 111화

33장 이글 스피릿

바위 정령 룩카르는 오우거의 성역 안에 있는 자신의 영역에서 몸을 숙이고 있다.

-이그니스? 들려 이그니스?

그때 어딘가에서 클로드의 목소리가 들렸다. 자신을 부르는 게 아님에도 불구하고.

"불의 정령왕이시여. 계약자가 부르고 있습니다."

룩카르는 눈을 감으며 자신의 의식을 정령계로 밀어 넣었다.

"애타는 목소리가 이미 여러 번입니다. 대답하시는 게 좋지 않겠습니까?"

"...하고 싶어도 못해."

그곳은 텅 빔과 동시에, 무수한 에너지가 존재하고 사라지기를 반복하는 공간이었다.

어린 아이처럼 작아진 불의 정령왕이 몸을 웅크리고 있는 게 보였다. 룩카르는 그쪽으로 자신의 의식을 움직이며 물었다.

"모습이 많이 달라 보입니다. 괜찮으십니까?"

"안 괜찮다. 지금은."

이그니스 한쪽 눈을 빼꼼히 뜨며 고개를 저었다.

그 순간의 충격으로부터, 아직 몸이 회복되지 않았다.

이그니스는 이계를 빠져나온 클로드가 젝트바이아의 몸 밖으로 뛰쳐나오던 순간을 떠올렸다.

빙의 시간은 이미 한계.

그녀의 계산으로는, 이대로 빙의가 풀려버리면 클로드는 목숨을 구할 수 없었다.

제 아무리 나무의 정령과 라이프 링크를 걸었다 해도.

그래서 그녀는, 먼저 자신보다 룩카르의 빙의를 해체했다.

클로드의 지시가 없어도 괜찮았다. 그 순간 그녀는 클로드와 거의 동일한 존재였으니까.

동시에 클로드의 의식을 살짝 닫으며 기절시켰다.

그렇게 혼자 육체에 남은 이그니스는, 룩카르의 빙의가 풀리면서오는 충격을 혼자서 전부 흡수했다.

그리고 자신도 빙의에서 해체.

결국 클로드의 육체는 이그니스와의 빙의로 인한 피해만 감당하면 되었다. 그것도 90퍼센트는 나무 정령이 대신 받아 가 주었고.

"위험한 선택이셨습니다. 고작해야 100년도 못 살고 사라질 계약자를 위해, 정령왕께서 소멸의 위험을 무릅쓰시다니."

룩카르가 이그니스를 향해 쓴 소리를 했다. 이그니스는 미소와 함께 고개를 저었다.

"그 정도는 아니었다. 내가 고작 그 정도로 죽을 것 같은가?"

"가능성이 없진 않았습니다."

"없는 거나 다름없었다."

이그니스는 복구되고 있는 자신의 몸을 보며 웃었다.

"후후. 전부 계산 대로였다. 사흘 걸릴 복구가 엿새 정도 필요한 정도로 늘어났을 뿐."

"계산이 자칫 어긋나, 그 복구가 여드레짜리였으면 당신은 소멸하셨습니다."

"그래. 그렇겠지."

이그니스는 순순히 고개를 끄덕였다.

"하지만 그만한 가치가 있었다. 너도 보았지 않느냐? 그 차원 너머의 세상을."

"저는 제대로 보지 못했습니다. 정령왕께서 대부분의 의지를 주체하고 계셨기 때문에."

"그랬느냐? 좋은 구경을 놓이고 말았구나."

이그니스는 눈을 가늘게 뜨며 그 순간을 떠올렸다.

"믿을 수 없는 광경이었다. 수천, 수만의 순수한 흐름으로 구성된 존재들이, 한 자리에 모여 다른 존재의 죽음에 열광하는 모습이라니. 내가 아무리 정령왕이라 해도, 혼자서 그걸 보았다면 압도당해 아무 것도 하지 못했을 것이다."

"정말이십니까? 불의 정령왕 이그니스께서?"

"그 만큼 충격적이었다. 그런데도 저 녀석은 그 너머에 뛰어들어 적들을 쓸어버리기 시작했지."

이그니스는 어둑한 공간 너머, 불안한 표정으로 자신을 부르는 클로드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정말 놀라운 인간이 아닐 수 없다. 거기서 분노를 폭발시키다니."

"정령왕께서 빙의된 상태라 더 끓어 오른 게 아닙니까?"

"아니다. 나 역시 그 순간 클로드의 감정에 압도되며 주도권을 완전히 넘겨 줄 수밖에 없었다. 그때 클로드이자 내가 느꼈든 감정. 그저 분노를 넘어선 길고 긴 회한의...."

이그니스는 뭔가 말하려다 고개를 저었다.

"아무튼 클로드는 그만한 가치가 있다. 그러니 테라직의 피조물 룩카르여, 너 역시 앞으로 고생 길 열렸다고 각오해라."

"전 이미 지금도 더 할 나위 없는 고생길을 걷고 있습니다."

룩카르는 현실 세계에 있는 자신의 육체를 돌아보며 말했다.

"계약자가 소환할 때 마다, 저는 항상 산산 조각으로 박살이 났습니다."

"하지만 빙의 상태로는 그 이상의 고생도 할 수 있지."

"말씀대로입니다. 만약 그 순간이 오면, 결코 주저하지 않겠습니다."

"좋은 마음가짐이다."

이그니스는 활짝 웃으며 룩카르를 바라보았다.

"정말 재미있구나. 아무리 정령계라 해도 속성이 다른 너와 이렇게 대화를 나눌 수 있다니."

"그렇습니다. 저도 처음엔 무척 놀랐습니다."

"이것도 너와 내가 클로드의 몸에 동시에 빙의했기 때문이지. 서로의 영역이 가볍게 얽혀 버렸어."

"전에도 없었고, 후에도 없을만한 일이 벌어지고 말았습니다."

"그래서 재밌다는 거야. 아, 이제 좀 복구됐군."

한순간 이그니스의 몸이 어린아이에서 묘령의 여자로 성장했다. 그녀는 그 와중에도 자신을 부르는 클로드의 목소리에 웃음을 터뜨렸다.

-이그니스! 내 목소리 안 들려? 이거 진짜 문제 생긴 건가...

"하하하! 이를 어쩌면 좋으냐. 오늘따라 저 목소리가 더욱 감미롭게 들리는구나. 이미 한 몸이 되어 봤기 때문일까?"

"저는 딱히 그런 느낌이 없습니다만."

"그야 그럴 수밖에. 정령왕의 빙의는 서로가 섞이기 때문이다."

"저는 섞이지 않습니다. 그저 힘을 제공할 뿐."

"그렇지. 하여간 첫 경험이었는데도 이토록 좋다니...."

이그니스는 클로드의 얼굴을 보며 애틋한 표정을 지었다.

"저 녀석이 앞으로 내게 얼마나 더 큰 기쁨을 안겨줄지 기대되는 구나. 날 부르는 저 애타는 목소리라니, 내가 어찌 대답하지 않을 수 있겠느냐?"

* * *

-그만 부르거라 클로드. 이제 잘 들리니까.

"이그니스!"

나도 모르게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며 소리쳤다.

"어떻게 된 거야! 사흘 동안 대답 없어서 놀랐다고!"

-이제 겨우 회복이 되었다. 다만 앞으로 사흘은 더 나를 소환할 수 없다는 것을 염두에 두거라.

"엑? 왜...."

그제야 모두의 시선이 집중되고 있다는 걸 깨달았다. 앗, 실수. 여기가 기사단 본부 회의장이란 걸 까먹고 있었네.

"황자님? 왜 갑자기 일어나서 혼잣말? 꿈이라도 꿨어?"

모두가 눈치를 살피는 가운데 빠꾸 없는 톨라리가 질문했다. 나는 방가르 지방의 피해상황을 브리핑하던 카일을 보며 멋쩍게 웃었다.

"보고 중에 미안. 갑자기 머릿속에서 정령왕이랑 연결이 돼서 목소리가 튀어 나왔네."

"아닙니다. 중요한 문제 같으니 먼저 해결하시는 게 좋겠습니다."

정령 이야기가 나오자 단원들이 모두 오오하며 수군거리기 시작했다. 덩달아 여왕도 속삭이듯 작은 목소리로 말했다.

-내 정령빙의는 원래 그렇다. 어지간하면 엿새쯤은 휴식해야 하지.

'소환은 아무리 길어도 텀이 사흘이잖아?'

-소환과 빙의는 다르다. 그냥 그런 줄 알고 있도록. 난 더 휴식을 해야 하니 큰일 없다면 앞으로 사흘은 내버려 두어라.

그리고 연결이 끊어졌다. 뭐야, 빙의는 쿨 타임이 원래 더 긴 거였어? 그래도 엿새는 길어도 너무 긴데.

'룩카르? 들려 룩카르?'

-들린다. 계약자여.

휴, 다행히 룩카르는 바로 전화를 받는구나.

'너도 빙의하면 엿새 동안 쉬어야 해? 근데 젝트바이아랑 싸울 때 거의 하루 만에 다시 빙의했잖아?'

-나는 정령왕이 아니니까.

'정령마다 간격이 다른 거야?'

-정령마다 다르고 상황마다 다르다. 필요한 순간에 물어라. 그때마다 가르쳐 줄 테니.

그리고 다시 연결이 끊어졌다. 흠.... 뭔가 분위기가 평소와 다른데? 뭔가 좀 숨기는 느낌 같기도 하고.

"황자님께서는 정말 어떤 상황에도 침착하신 것 같습니다."

옆에 앉은 다비가 날 보며 쓴웃음을 지었다.

"그런 엄청난 괴물이 갑자기 튀어 나왔는데도 침착하게 상대하시고, 지금처럼 갑자기 정령왕이 말을 걸었는데도 바로 냉정을 찾는 모습이 대단한 것 같습니다."

"아니. 뭐."

나는 별거 아니라는 듯 손사래를 쳤다.

물론 나도 속으로는 태풍이 몰아치고 열불이 쏟아진다. 그냥 겉으로 드러내지 않아서 그렇지.

거의 백년의 시간을 10년 단위로 계속 반복하다 보면....

자연스럽게 그렇게 된다. 그럼에도 가끔 흥분해서 뭔가가 튀어나오긴 하지만.

흥분, 격정.

아마도 회귀 할 때마다 항상 어린 소년의 몸으로 돌아오기 때문이 아닐까?

속 알맹이가 아무리 100년 넘게 산 능구렁이라 해도.

그것이 15살 소년의 몸에 들어 있으면 자연스럽게 육체의 영향을 받게 마련이다.

어쩌면 내가 질리지도 않고 계속 이 짓을 반복할 수 있던 것도, 따지고 보면 매번 젊음이 계속 공급되었기 때문일지도?

"정령왕 이야기는 별거 아니었어. 카일? 계속 보고할래?"

"네, 황자님. 다음은 내프트가 입은 피해 보고입니다."

내프트, 젝트바이아의 브레스를 맞고 박살난 마을 이름.

"내프트에 등록된 주민은 447명으로, 이중 여섯 명이 사망하고 17명이 부상을 입었습니다. 물론 부상자는 전부 황자님이 빠른 치료로 인해 건강을 회복했습니다."

"사망자가 여섯 명밖에 없어?"

"수확제가 있던 모양입니다."

"수확제?"

"일종의 축제입니다. 주변에 있는 모든 마을이 대도시인 빈디르에 모여, 나무케이크를 먹으며 즐기는 수확제에 참가하고 있었다고 합니다. 운이 정말 좋았다고 할 수 있겠군요."

"그러게 운이 좋았네."

그러고 보니 미리 들린 도시에 사람이 정말 많긴 했지? 반대로 구조하러 간 마을에는 규모에 비해 사람이 너무 없었고.

생존자 구조하고, 부상자 치료하자마자 뻗어버린 바람에 뒷일을 확인 못했는데 그런 사연이 있었을 줄이야.

"이후 황자님의 이름하에 파괴된 마을의 복구사업이 시작되었습니다. 전 주민에 대한 지원금과, 사망자에 대한 위로금까지 전부 지급 완료했습니다."

이건 내가 지시했다. 당장 마을이 쑥대밭이 됐으니 돈이라도 있어야 버티지.

"잘 했어. 시간도 얼마 없었는데 금방 처리했네."

"급하게 동원된 구스프 상회 분들이 수고해 주셨습니다. 그리고 제가 돌아오기 직전까지 진행된 수색 작업 결과는...."

카일은 서류를 한 장 넘기며 숨을 몰아쉬었다.

"휴우. 그때까지 회수한 금화만 무려 2천여 개에 달합니다."

"2천 개? 정말?"

"아크 위저드가 생각보다 돈을 많이 쌓아 두고 있던 모양입니다."

"어허, 아크위저드라고 다 그런 거 아님. 그 할아버지가 수전노였을 뿐이야."

톨라리가 손가락을 흔들며 태클을 걸었다. 카일은 쓴웃음을 지으며 발언을 정정했다.

"죄송합니다. 아크 위저드 '바이아'의 박살난 마탑에 관한 회수작업은 앞으로도 계속될 것 같습니다. 외부에 흩어진 재산도 엄청나지만, 마탑 지하에도 엄청난 크기의 창고가 있는 것으로 추정됩니다. 건물 잔해를 치우는 데만도 며칠은 걸리겠죠."

"그러다 상회 사람들이 꿀꺽 할지도?"

"그런 일은 절대 없습니다."

카일은 심각한 얼굴로 고개를 저었다.

"구스프 상회는 황자님의 도움으로 살아났습니다. 만에 하나라도 황자님의 이름에 폐가 될 짓은 결코 하지 않습니다."

"그래. 알았어. 정색하긴."

"아, 그 회수한 돈 말인데."

어제 이 문제로 황궁에 출두해 대신들과 이미 합의를 끝냈다 이 말씀.

"거기서 나온 거 전부 내꺼야. 물론 마을이랑 망가진 농지 복구비용을 충당해야 하지만."

"그거 다행이군요. 천만 다행입니다."

카일이 갑자기 가슴을 쓸어내렸다. 어째 반응이 심상치 않은데? 박살난 마을 복구하는 데 돈이 많이 드나?

"우리 살림 아직 넉넉하잖아? 혹시 돈 부족해? 창고에서 금화 만 개쯤 더 퍼줄까?"

"실은 땅이...."

"땅?"

"땅, 그러니까 농지를 복구하는 비용이 계산이 안 됩니다."

"마탑 주변의 농지 말이지? 확실히 젝트바이아가 너무 설쳐대긴 했어."

"그보다는 시체가 문제입니다. 괴물의 시체가 너무 거대해서 처리 비용도 그렇고, 시체에서 흘러나온 체액 때문에 주변 땅이 오염되었습니다. 어쩌면 내년 농사가 불가능할지도 모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