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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계 황자는 세상을 구하고 싶다 104화

30장 폭풍전야

하지만 정령 빙의를 제외한다 해도, 일단 그동안 먹어댄 코어 덕분인지 최하급 마갑 정도는 자유롭게 소화 할 수 있게 됐다.

여기에 아직 입어 본 적은 없지만, 하급 마갑도 어느 정도는 버텨 낼 수 있지 않을까?

"좋아. 다음에 룩카르 회복되면 하급 마갑을 착용한 채로 빙의 해 봐야겠다. 그럼 단숨에 커맨더 급의 실력이 나오지 않을까?"

"그건 아닙니다."

"응?"

왜 갑자기 단언하는데? 넌 정령사도 아니면서 그걸 어떻게 알아?

"실은 메르데스 양과 그 문제를 놓고 테스트를 해 봤습니다."

"메르데스?"

"제가 정령 빙의 한 메르데스와 훈련을 했다고 하지 않았습니까?"

그래. 메르데스는 중간에 칼같이 빙의를 풀어서 후유증 없이 잘 싸웠다며?

"모두 두 번이었는데, 한번은 맨몸으로 빙의를 했고, 또 한 번은 중급 마갑을 입고 빙의를 했습니다."

"그런데?"

"맨몸으로 빙의했을 때는 나이트 커맨더 급의 힘이 나왔습니다. 그런데 마갑을 착용하고 빙의를 했는데 큰 차이가 없더군요."

"진짜?"

"서로의 힘이 충돌을 일으키는지, 아니면 정령 빙의와 마갑의 메커니즘이 서로 겹치기 때문인지... 이유는 저도 모르겠습니다. 확실한 건 1에 1을 더하는데 2가 되지 않고, 1.3이나 1.2정도 밖에 효율이 나오지 않았습니다."

정말로? 이건 약간 예상 밖인데?

"그렇다면... 아니, 근데 1.2라고 해도 일단 20퍼센트는 추가로 강해지는 거잖아?"

"네. 확실히 그 정도의 차이는 있었습니다. 다만 마갑을 착용하면 그만큼 기동력에 손해가 생기죠."

"속도...."

"그렇습니다. 마갑은 무거우니까요. 그래서 딱히 이득인지 모르겠습니다. 물론 계속 다듬다 보면 개선의 여지는 있을 거라 생각합니다."

다비는 멀리 훈련장 귀퉁이에서 팔을 흔들고 있는 메르데스를 주시했다.

"물론 이것은 모두 메르데스 양의 경우입니다. 이것이 황자님께 동일하게 적용 되는지 까지는 확신 할 수 없습니다."

"아니야. 수치까지 정확하진 않아도 대충은 들어맞겠지. 메르데스!"

"...!"

메르데스는 반응과 동시에 쏜살같이 달려와서는 몸을 숙였다.

"네. 황자님. 부르셨습니까."

"한창 훈련 중에 미안. 근데 조약돌 정령이랑 빙의한 거랑, 아니면 그냥 중급 마갑 입고 싸우는 거랑 직접 느끼는 게 어때?"

"체감을 말씀하시는 거라면, 능력이 증폭되는 건 정령빙의가 더 높습니다. 힘도 속도도. 속도는 특히 마갑을 안 입어도 되기 때문에 정령빙의 쪽이 월등합니다. 하지만 실전에 사용하는 건 까다롭습니다."

"왜? 넌 이미 실전에 한번 써먹었잖아?"

"그때도 기절해서 한동안 깨어나지 못했습니다. 지금 제 빙의 시간은 최대 8분입니다."

"8분?"

"이것도 원래 5분이었는데 황자님께서 하사하신 코어를 먹고 늘어났습니다. 하지만 그렇다고 8분을 다 채워서 싸울 수는 없습니다. 후유증을 최대한 줄이려면 그 절반인 4분에서 끊어야 합니다. 안 그러면 빙의를 푼 다음에 전투 불능이 되어 버리니까요."

그렇다면 3분 라면 신세인 나는 그 절반인 90초에서 끊어야 한다는 소리구만. 이거 점점 활용하기가 까다로워지는데....

"그래서 당장은 마갑 쪽이 유용하다 생각합니다. 다만 마갑을 챙기지 못했거나, 혹은 마갑이 파손된 경우엔 활약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그렇겠네. 설명 고마워."

"황공한 말씀입니다."

메르데스는 그 자리에 양 무릎을 꿇으며 인사를 올렸다. 나는 쓴웃음과 함께 직접 메르데스의 손을 잡아 일으켰다.

"그렇다고 이런데서 막 주저앉지 말고. 와, 팔 엄청 기네. 좋겠다. 다리도 그렇고."

"...."

"근데 방금까지 뭐 하고 있던 거야? 손날 내려치기?"

"단장님께서 지시하신 훈련입니다."

메르데스는 무표정한 얼굴로 훈련장 한복판을 향해 팔을 치켜들었다.

그리고는 그 긴 팔뚝에 짧은 스냅을 주며 한순간 손날을 내리 그었다.

콰광!

동시에 충격파가 쏟아지며 바닥이 푹 파였다. 풍압검? 이거 풍압검이잖아?

"오. 멋져. 근데 왜 맨손으로 풍압검을 쓰는데? 검을 잡아야 위력이 제대로 나오지 않나?"

"여기엔 이유가 있습니다."

그러자 이번엔 다비가 맨손으로 천천히 풍압검을 쓰는 시늉을 했다.

"말씀하신대로 풍압검은 검을 쥐어야 위력이 나옵니다. 물론 모든 나이트 스킬이 마찬가지입니다만."

"그렇지. 혹시 칼이 없을 때를 대비한 훈련?"

"그런 건 아닙니다만."

다비는 복잡한 얼굴이었다. 그러다 메르데스를 힐끗 보고는 고개를 끄덕였다.

"어차피 다음 단계로 넘어갈 예정이었습니다. 준비가 필요하니 잠시만 기다려 주십시오. 황자님."

그리고는 기사단 본부를 향해 슝 내달렸다.

그런데 준비?

대체 뭘 설명하려고? 그리고 본부 한번 들어갔더니 어째 깜깜무소식이네?

멍하니 서 있기도 뭐해서, 옆에 있는 메르데스에게 말을 걸었다.

"다비가 늦네. 근데 언제부터 훈련을 시켰다고?"

"어둠산으로 떠나시기 며칠 전부터 훈련을 지시하셨습니다."

메르데스는 다소곳한 자세로 대답했다. 그럼 거의 한 달 전의 이야기잖아? 일식 게이트 열리고 바로 뒤?

"왜?"

"이유는 저도 모릅니다. 처음엔 맨손으로 풍압검을 쓸 수 있는 경지에 도달하라는 지시였고, 금방 도달했습니다."

"그래 뭐. 너 정도면 금방이겠지."

"황공합니다. 황자님."

메르데스는 허리를 깊이 숙이며 다시금 인사를 올렸다. 아니 얘는 무슨 칭찬할 때마다 이렇게 빼놓지 않고 반응을 하냐? 부담스러워서 뭔 말을 못하겠네.

그런데....

몸을 숙인 메르데스에게 살 내음이 풍겼다.

음, 냄새 좋다. 들이 마신 숨을 뱉어내기 싫을 정도로.

하지만 냄새의 원인이 계속 그곳에 남아 있으니 상관없다. 나는 메르데스에게 살짝 몸을 기대며 깊이 숨을 들이마셨다.

어쩐지 마음이 놓이고, 또 피로가 몰려온다.

그래. 좀 지친 것 같네.

이번엔 시작부터 너무 빨리 달린 것 같다. 그런데 남은 시간은 더 빨리 달려야하고.

"잠깐 기대도 될까?"

이미 기댔으면서. 나도 뻔뻔하긴.

"네. 황자님."

메르데스는 언제나처럼 무표정한 얼굴이었다. 문득 군주의 눈을 켜고 싶었지만....

그냥 그러지 않기로 했다.

그리고 얼마나 시간이 지났을까.

"죄송합니다! 금방 가겠습니다!"

다비가 기사단 본부 2층에 얼굴을 내밀며 창문 밖으로 몸을 던졌다.

쿵!

그리고 다시 이쪽으로 달리기 시작했다. 그런데 어째 갑옷이 바뀌었네? 나는 메르데스에게 기댔던 몸을 천천히 떼어내며 물었다.

"준비란 게 갑옷 바꿔 입는 거였어?"

"죄송합니다. 일단 급이 높은 게 필요했습니다."

다비가 입고 온건 백기사단의 중급 마갑. 방금과 비교해서 급이 하나 올라갔다.

왜 굳이?

"우선 풍압검의 원리는, 미세한 진공을 만들어 적에게 뿌리는 겁니다."

그리고는 직접 검을 뽑아 풍압검을 시전했다.

콰콰콰광!

강력한 충격파가 훈련장 바닥을 두드리며 방사형으로 흩어진다. 다비는 피폭지점을 칼끝으로 가리키며 말했다.

"이렇게 진공이 흩어지며 충격파가 발생합니다. 누구나 알고 있는 풍압검의 원리죠. 하지만...."

이번에는 비어 있는 왼손을 휘둘러 풍압검을 사용했다.

콰광!

"보시다시피, 검을 쓰지 않고 맨손으로 풍압검을 쓰면 위력도 떨어지고 사거리도 짧아집니다. 어째서일까요?"

"진공이 더 약하게 만들어 지니까."

"정답입니다. 그래서 진공이 빨리 흩어지고, 덕분에 약하게 생성된 충격파가 멀리 뻗지 못합니다. 심지어 수고도 더 듭니다."

"수고가 더 들어?"

"칼의 중량이나 날카로움을 활용할 수 없으니까요. 날카로움이란 공기에 닿는 면적이 그만큼 적다는 뜻입니다. 그래서 맨손으로 충격파를 만들려면 힘이 훨씬 더 들죠."

첫 회귀 때 이 소리를 들었을 땐 대체 무슨 헛소린가 싶었다. 지금이야 이쪽 차원의 상식이려니 하지만.

"그러니 검을 들고 쓰는 게 무조건 이득이잖아? 왜 맨손으로 쓰는 훈련을 하는데?"

"가능성이 보였기 때문입니다. 실제로 증명도 했습니다."

"뭘?"

"풍압검으로 발생시킨 진공이 적에게 날아가 흩어지기 전, 맨손 풍압검으로 발생시킨 짧은 충격파와 합쳐 거리와 위력을 증가시킵니다."

뭐?

듣긴 들었는데 하나도 이해가 안가네?

"뭐가 뭘 어쩐다고? 충격파를 합쳐?"

"직접 눈으로 보면 이해가 되실 겁니다. 잠시 제 뒤로 물러나 주십시오."

내가 물러서자 메르데스도 함께 물러났다. 다비는 짧게 심호흡을 한 다음, 훈련장 한가운데를 향해 가볍게 검을 휘둘렀다.

적어도 그렇게 보이긴 했다. 가볍게.

하지만 결과는 전혀 가볍지 않았다.

콰과과과과과과과광!

미칠 듯한 충격파가 훈련장 중심에서 사방으로 폭발하듯 퍼진다.

이미 직격을 맞은 땅은 운석이라도 떨어진 듯 커다란 구멍이 뚫려 있었다. 어머 세상에, 저 구멍에 집도 하나 집어넣을 수 있겠어.

"후우.... 어떻습니까?"

다비가 고개를 돌리며 물었다. 어떻긴 뭐가 어때. 몰라, 뭐야 그거, 무서워.

"엄청나네. 처음 보는 기술 같은데.... 혹시 내가 모르는 마스터 스킬이야? 나이트 마스터만 쓸 수 있는 거?"

"아닙니다. 그저 풍압검을 활용해서 만든 기술입니다."

"만들었다고? 다비 네가 직접 만들었어?"

"그렇습니다."

다비는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방금 설명한 것처럼, 두 종류의 다른 풍압검을 동시에 시전하면 이런 위력이 나옵니다."

"그래? 근데 너 왼손은 안 썼잖아?"

"서로 다른 손으로 쓰면 타이밍이나 간격을 도저히 맞출 수가 없습니다. 그러니 한 손으로 동시에 두 기술을 사용해야 합니다."

"어떻게?"

"팔꿈치와 손목 사이의 반동으로 맨손 풍압검을, 여기에 손목의 반동을 더해 기존의 풍압검을 추가로 발동시킵니다. 이렇게, 이렇게. 이렇게."

그리고는 눈앞에서 오른 팔을 리드미컬하기 튕기기 시작했다. 난 암만 봐도 잘 모르겠는데....

"이게 동시에 나가지나보구나. 근데 그냥 그거면 돼? 맨손 풍압검 더하기 풍압검?"

"말처럼 쉬운 일은 아닙니다. 우선 원리를 정확히 파악해야 하고, 사전에 충분한 연습이 되어 있어야 합니다. 안 그러면 팔꿈치와 손목이 고장 납니다."

문득 옆을 보니 메르데스가 눈에서 레이저가 나올 정도로 다비의 동작을 주시하고 있었다. 그래. 나 보단 메르데스가 이해하면 됐지 뭐.

"물론 타이밍도 까다롭습니다. 두 스킬의 시작 시점은 살짝 어긋나게 하면서, 막상 발동 시점은 겹쳐야 합니다. 이런 식으로. 극히 미세한 딜레이를 겹쳐서...."

"아니, 근데 암만 그래도 방금 같은 위력이 나올 수 있어? 대체 언제 만든 거야?"

누가 보면 윈드 오브 템페스트라도 지면에 내리 꽂은 줄 알겠네.

그런데도 다비가 한일이라곤 그저 검을 가볍게 휘두른 것뿐이다.

그런데도 이런 위력이라니... 여보세요, 다비 씨? 당신 지난 9회 차 때까지 이런 파워풀한 기술 한 번도 안 썼잖아? 기술의 다비가 어쩌다 이런 무식한 파워 캐릭터가 됐어?

"완성은 한참 전에 됐습니다."

"그럼 원래 쓸 수 있는데 안 쓴 거야?"

"네. 최상급 마갑을 입으면 가까스로 시전이 가능했습니다. 다만 제 피지컬이 최상급 마갑을 오래 버텨내지 못하기 때문에 의미가 없다고 생각했죠. 하지만 이젠 달라졌습니다."

다비는 갑옷을 입은 채 양 팔을 뒤로 젖히는 묘기를 보이며 말을 이었다.

"에이션트 울프의 코어 덕분에 관절이 놀랄 만큼 유연해졌습니다. 가동범위도 늘어났고."

"관절이 중요했던 거야?"

"사실상 핵심입니다. 어깨, 팔꿈치, 그리고 손목. 여기에 관절 자체가 충격에 더 잘 버티도록 강화된 게 중요했습니다. 그래서 더 적은 힘으로도 안심하고 기술을 쓸 수 있게 됐습니다."

"그러게. 너 지금 중급 마갑 입고 있잖아?"

"그래서 메르데스 양에게 맨손 풍압검을 훈련시킨 겁니다."

다비는 본론으로 돌아오며 메르데스를 바라보았다.

"결국 멀지 않은 미래에, 메르데스 양은 저를 뛰어 넘어 온전한 나이트 마스터가 될 겁니다. 마스터 스킬도 자유롭게 다루고, 최상급 마갑도 완벽하게 소화하겠죠. 하지만...."

"하지만?"

"시간이 없습니다. 멀지 않은 미래라 해도 최소 10년, 아니 5년은 필요합니다. 하지만 5년 후의 미래에 도달하기 위해선 먼저 1년 뒤의 난관을 돌파해야 하지요."

그렇지. 이계의 침공이 무려 8년이나 앞당겨졌으니까.

"메르데스 양이 아무리 뛰어난 재능을 가지고 있어도, 고작 1년 사이에 나이트 마스터가 되는 건 불가능합니다. 이제 1년도 아니라 10개월쯤 남았군요. 그러니 나이트 마스터가 되지 않아도, 어지간한 마스터 스킬보다 강한 기술을 쓸 수 있게 되는 게 중요하지 않겠습니까?"

오오, 그렇지. 방금 귀가 엄청 솔깃해졌다.

"지금 속도라면 메르데스 양은 6개월 안에 새로운 풍압검을 완성할 겁니다. 분명 이계의 침략에 큰 도움이 될 거라 확신합니다."

그래. 납득했다.

아니 납득을 넘어 감동적이기까지 한 브리핑이었다.

다비야, 너는 다 계획이 있었구나.

고작 10개월 남은 이계의 침공에 맞서기 위해, 어떻게든 더 효율적으로 전력을 높이려 머리를 굴리는 게 나뿐이 아니었다니.

이계 황자는 세상을 구하고 싶다 105화

30장 폭풍전야

"역시 우리 기사단 단장은 다르구나. 최고야. 나 감격했어. 어떻게 이런 생각을 다 했니?"

"황자님께서 이토록 전 세계를 날아다니며 고생하시는데, 신하 된 입장에서 그저 손 놓고 현상유지나 할 수는 없는 노릇이지 않겠습니까? 그저 신하된 도리를 다 했을 뿐입니다."

크, 말도 참 예쁘게 하는구나. 그런데 갑자기 떠오른 의문이 하나 있는데.

"잠깐, 새로운 풍압검에 관절이 중요하다고? 그래서 에이션트 울프의 코어가 효과 있던 거고?"

"그렇습니다. 황자님."

"근데 메르데스는 늑대가 아니라 물개 코어 먹었는데? 에이션트 씰 코어?"

"메르데스 양은 기본적인 신체 스펙이 저 보다 우수합니다. 제가 에이션트 울프의 코어를 먹고 나서야, 겨우 지금의 메르데스 양과 비슷한 관절의 안정성을 확보했습니다."

"그 정도야? 그렇게 몸이 유연했어?"

"...."

메르데스는 고개를 살짝 돌리며 시선을 피했다. 헹, 얘가 부끄럼도 다 타네? 신기해라.

"암튼 잘 됐네. 완성하면 엄청난 전력이 될 거야. 직접 본건 너도 처음이지?"

"...네. 저도 처음 봤습니다."

"소감이 어때?"

"폭풍 같았습니다."

메르데스는 처참해진 훈련장을 보며 차분히 대답했다.

"터지는 순간에 하나가 아닌, 수십 개로 갈라진 충격파가 폭풍처럼 사방으로 쏟아졌습니다."

"그 말 대로야. 다비? 혹시 새 풍압검 이름 지어 놓은 거 있어?"

"없습니다. 임시로 변형 풍압검이라고만 생각하고 있었습니다."

다비는 고개를 저었다. 나는 메르데스의 표현을 인용해 새 이름을 지어주었다.

"그럼 폭풍검 어때? 마침 위력도 템페스트급이니 딱 어울리잖아?"

* * *

새로운 나이트 스킬의 이름은 폭풍검으로 정해졌다.

물론 정식으론 나이트 길드를 찾아 길드 사람들 앞에서 기술을 시전하고 등록하는 게 먼저지만.

그리고 길드가 유명 기사단의 고위 기사를 초빙해 기술의 실전성이나 난이도를 파악하고, 긴 논의 끝에 기술의 등급과 이름을 정하는 과정이 이어지는데....

지금은 생략.

-기술 창시자로 역사에 남는 건 영광스런 일입니다만, 그것도 인류가 생존하지 않으면 아무 의미가 없습니다. 나중에 이계의 침공을 막아 낸 뒤에 진행해도 충분하겠죠.

크, 우리 다비 쿨한 거 보소.

그보다 폭풍검의 임팩트가 워낙 강해 대충 넘어가긴 했지만, 이번 훈련과 테스트로 생각이 약간 바뀐 게 있다.

우선 내가 가진 기사의 힘.

10회 차를 시작할 때만 해도 전혀 안중에 없었지만, 지금은 굳이 일부러 배제할 필요까진 없을 것 같다.

물론 마법 쪽이 여전히 압도적으로 월등하다. 마력이 남아 있는데 굳이 위험하게 적과 붙어서 투닥 거릴 필요? 전혀 없고말고.

하지만 더는 마법을 쓸 수 없을 정도로 머리를 혹사하고, 이후 설탕바든 뭐든 먹어서 해결 못할 정도로 과부하가 걸리면?

그때 바로 기사 클로드가 활약할 순간이 오는 것이다.

물론 상황이 그쯤 되면 활약 보다는 발악이란 표현이 더 어울리겠지만.

아무튼 그것만으로도 플러스 요인이다. 룩카르와 정령빙의를 하면 적어도 3분 동안은 하급 마갑 입은 다비와 어설프게라도 비벼 볼 수 있다는 것도 확인됐고....

"황자님, 이곳에 사인을 부탁드립니다."

앞에 앉은 카일이 서류를 내밀었다. 웬 사인? 아, 여기 기사단 본부에 있는 집무실이었지. 서류에 사인해 달라고 나 불렀고.

"베리트 지방 재건 비용 추가 요청 계획서라.... 이거 네가 기획한 거야?

"제국 정부에서 먼저 계획서를 보내왔습니다."

"저쪽이 먼저?"

"황제폐하의 입김이 들어갔다는 소문을 들었습니다. 추가로 탈리스만 백작, 아니 역적 탈리스만의 압류한 재산 처분에 관한 자문도 들어왔습니다."

"압류면 압류고 처분이면 처분이지. 그걸 또 내가 왜 자문을 해야 하는데?"

"해석하자면 압류한 재산을 황자님께서 직접 확인하고 필요한 만큼 뜯어가라는 뜻입니다. 당장 탈리스만의 목표가 황자님이었고, 피해를 본 것도 황자님이며, 최근 제국에 있어 가장 중요한 인물도 황자님이니까요."

아, 그런 이야기였구만.

일식 게이트를 사실상 나 혼자(물론 카일의 수호 기사단과 다비의 활약도 있었지만) 해결했다는 소식이 전해진 뒤로, 제국 정부는 전보다 훨씬 내 눈치를 살피기 시작했다.

"나 한 테 잘 보이려고 미리 아무를 떠는 거야? 근데 탈리스만이라고 해 봤자 단물은 이미 쪽 빼먹었는데."

"안 그래도 제국 감찰단이 눈에 불을 키고 은닉 자금을 찾고 있다 합니다. 기껏 저택을 덮쳤더니 금고가 텅 비어 있었다던가."

그 은닉자금은 이미 내 비자금으로 대체되었다. 감사 하십시오 감찰단. 르갈이랑 내가 그거 빼내오느라 얼마나 고생했는데.

"결국 텅 빈 쭉정이잖아? 이제 와서 뜯어먹을 게 얼마나 있으려고?"

"아직 백작가가 소유한 땅이나 건물이 상당합니다. 특히 엠퍼로드의 기존 상단은 대부분 탈리스만의 세력권에 들어 있습니다."

하긴, 탈리스만 정도나 되는 놈이 돈을 쌓아만 둘 리가 없지.

"내가 상가나 건물에 대해 뭘 알겠어? 자문 역할은 네가 대리로 맡아서 좀 해줘."

"...."

카일은 그제야 서류작업을 멈추며 날 바라보았다.

"제가 무슨 자격으로 대리를 맡겠습니까? 제국 정부도 난색을 표할 겁니다."

"황자의 외가인 루넨브레스 가문의 재정담당관이자, 클로드 기사단 재무 담당관 겸, 구스프 상회의 후계자면서 동시에 제국 최고의 명문 기사단인 수호 기사단의 부단장이라고 해."

"...제가 수호 기사단의 부단장이었습니까?"

"곧 그렇게 될 거야."

"미리 명함이라도 파 놔야겠군요. 알겠습니다."

카일이 한숨과 함께 고개를 끄덕였다. 미안하지만 어쩌겠냐. 나도 시간 없어 죽겠는데, 그 와중에 한가롭게 건물까지 보러 다닐 수는 없잖아?

"수호 기사단은 어때? 훈련은 잘 되어가?"

"순조롭습니다. 하지만 근본적인 한계는 어쩔 수가 없습니다. 여기 사인 부탁드립니다."

카일은 무덤덤한 얼굴로 새 서류를 내밀었다. 음, 신규 기사단원 양수 확인서라. 내가 전에 이런 걸 지시했던 것 같기도 하고....

"근본적인 한계가 뭔데?"

"수호 기사단 절반이 아직 최하급 마갑조차 적응하지 못 한 상태입니다. 저번 일식 게이트 때 사망자가 적은 게 기적입니다."

아, 그거라면 내가 또 미리 준비한 게 있지.

"지금 드워프들이 수호기사단을 위한 특제 갑옷을 만들고 있거든. 그거면 충분히 해결 될 거야."

"드워프, 말씀입니까?"

카일이 눈을 크게 뜨며 되물었다. 후후. 그래 이 아버지가 자식들을 위해 큰 선물을 준비했단다. 뜯어보면 깜짝 놀랄걸?

"곧 시제품이 도착해. 효과는 직접 기사단에 입혀 보고 확인하라고."

"최하급 마갑조차 적응하지 못했는데.... 특제 마갑이 무슨 소용이 있겠습니까?"

"그런 녀석들이 바로 입어도 버틸 수 있는데, 성능은 오히려 하급 마갑 수준으로 나오는 마갑을 주문했어."

"그런 기적이 가능합니까? 대체 보석을 얼마나 덕지덕지 박아 넣으면... 아니, 설마."

카일은 놀란 눈을 몇 번이나 깜빡였다.

"담당 시녀에게, 전에 지하 금고에서 챙겨온 보석 주머니가 사라졌다는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황자님이 저택에 돌아 오시자마자."

"내가 따로 사람 시켜서 드워프 주둔지에 보냈어. 물론 그것만 가지고 500벌은 못 만들 테니 추가로 새 보석을 구입해야지."

"최소 중급 마갑 이상에 들어가는 보석입니다. 비용이 어마어마하겠군요."

"그만큼 가치가 있으니까?"

"음, 기대에 부응하도록 노력하겠습니다."

카일은 조용히 고개를 숙였다. 그리고는 다시 쓱싹거리며 새로운 서류 작업을 시작했다.

"그 밖에 황자님께서 내리신 지시는 전부 처리했습니다. 린 베르크, 파날 리프, 제인 하람, 하무스 바킨달. 전부 기존에 입단한 기사단에서 수호기사단으로 양도 받았습니다."

맞아, 이거였지. 어둠산으로 원정가기 전에 카일에게 그런 지시를 내렸다.

"수고했어. 기사단들이 안 내놓으려고 버텼을 텐데."

"일부는 그랬지만 대부분은 납작 엎드리더군요. 덕분에 일 처리하기 편했습니다."

"다행이네. 쓸데없이 시간 뺏기지 않아서."

나는 고개를 끄덕이며 방금 언급된 이름들을 떠올렸다.

모두 카일의 사관학교 동기이며, 훗날 이계와의 전쟁에 활약하는 인재들.

당연히 이번 10회 차에도 내 직속으로 데려와서 키워줄 생각이었다.

그런데 처음 사관학교를 찾았을 때 그 중 두 사람이 하필 휴가 중이었고....

그 뒤로는 다비가 지금 멤버들을 키우는데 집중하고 싶다 해서 또 영입이 늦어졌다.

그렇다고 완전히 배제할 수는 없었기 때문에, 일단 카일이 지휘하는 수호기사단에 영입해서라도 활용하기로 했다.

"베르크는 좀 억지로 적응 훈련시키면 하급 마갑까지는 빠르게 올라올 거야. 부장급으로 활용해. 리프도 마찬가지고. 하람은 발이 엄청 빠르고 활을 잘 쏴. 전투원으로 묶어두지 말고 전령으로 활용하는 게 어떨까? 아니면 소수의 분대를 따로 지휘하는 것도 좋고. 바킨달은 버티는 힘 하나는 끝내줘. 우리 리넨처럼. 그렇다고 홀리랜스는 못 쓰지만. 아무튼 최전방에 세워 놓고 적의 1파를 받아내게 하면 좋을 거야."

"대체 그런 걸 다 어떻게 조사하셨습니까?"

카일이 경악한 얼굴로 되물었다. 이게 다 경험에서 나오는 바이브란다. 세상 여러 번 살아 본.

"제국 정보부에서 자료를 받았어."

"정보부... 그렇군요."

물론 진짜 제국 정보부는 일 안 하기로 유명한 부서지만.

"말씀하신대로 적재적소에 활용하도록 노력하겠습니다. 그런데 하나 남은 에이션트 베어의 코어는 아직 주인이 정해지지 않았습니까?"

카일이 펜을 놓으며 뜬금없이 물었다. 코어? 여기서 갑자기 코어 이야기가 왜 나와?

"왜? 탐나?"

"당연히 탐은 납니다."

카일은 솔직하게 대답했다.

"물론 저 보다는 단장님이, 아니면 다른 단원이 먹는 게 훨씬 유용하다는 것도 알고 있습니다. 그래서 적극적으로 나설 생각은 없습니다."

"그런데?"

"개인으로 볼 때는 제가 많이 떨어지지만, 집단으로 보면 충분히 의미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집단?"

"요즘 수호 기사단을 훈련시키면서 그런 생각이 들었습니다."

카일은 차분한 목소리로 자신의 가치를 설명했다.

"지금은 기사단 전체를 완전히 균등한 생물로 가정하고 지휘합니다. 하지만 만약 그 생물에 '이빨'이 달려 있다면 결정적인 순간에 더 큰 힘을 발휘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그러니까.... 결국 자기가 두뇌이자 동시에 이빨까지 하고 싶다는 말이지?

"좋긴 한데 위험하지 않을까? 이빨 역할 하다가 괜히 머리가 터져버리기라도 하면 끝장인데?"

"그것도 감안해서 말씀드리는 겁니다. 지난 며칠 동안 리넨을 쭉 지켜보았습니다."

"리넨? 그 녀석이 곰돌이 코어 먹어서?"

"두드려 맞고 몇 미터를 튕겨 날아가 바닥을 뒹구는데 생채기도 안 나더군요. 단장님이 정말 무시무시하게 굴리기 시작했는데 잘 버티고 있습니다."

"내구력이 엄청 좋아졌구나. 그래서 너도 그렇게 되고 싶다는 거야? 전장에서 지휘관이 죽으면 큰일 나니까?"

"여러모로 장점이 있을 거라 생각합니다."

카일은 추가적인 어필 없이 거기서 고개를 숙였다.

뭐, 생각해 보니 그렇긴 하네. 이 녀석에게 코어를 먹이는 것도 장점은 있겠어.

다만 그 장점이 다른 모두의 장점을 능가한다 해도, 지금 당장 카일에게 코어를 먹일 수는 없다.

이유는 간단하다. 아직 에이션트 베어의 효과가 덜 밝혀졌거든.

힘이 강해지고, 내구력이 높아지고, 냉기 저항력이 올라간다.

하지만 남은 효과가 더 있을지도 모른다. 고대 물개만 해도 효과가 넷이었고.

그래서 뭔가 더 있는지 좀 더 지켜 볼 생각이다. 내가 알아 낼 수도 있고, 어쩌면 리넨이 알아차릴 수도 있다. 그렇게 새로운 효과가 드러나면 거기에 더 적합한 녀석을 고를 수 있겠지?

"알았어. 너도 일단 후보에 넣어 둘게. 경쟁자가 많으니 너무 기대는 말고."

"감사합니다. 그저 염두에 두신 것만으로 충분합니다."

카일은 미소를 지으며 다시서류 작업에 착수했다. 이 녀석, 딱 봐도 그동안 없던 자신감이 몸에 붙었구만.

지휘관의 역량뿐 아니라, 스스로 가진 기사로써의 힘에도 가치를 두기 시작했다.

이것은 지난 아홉 번의 회귀동안 한 번도 보여준 적 없는 모습이다. 그만큼 코어가 모든 단원들에게 긍정적인 효과를 주고 있다는 뜻이겠지?

역시 코어가 미래다.

당장 하나 남은 곰돌이 코어를 누구에게 줄지는 미지수지만, 결과적으로 더 많은 마수에게 더 많은 코어를 얻어내면 해결될 문제.

물론 이 몸은 그렇게 얻어낸 모든 코어를 하나씩 다 먹을 테고.

그렇게 계속 육체적으로 강해지다 보면.... 또 모르잖아? 나도 다비처럼 나이트 마스터가 될지도?

나이트 마스터이자, 아크 위저드면서 동시에 아크 프리스트.

상상만 해도 가슴이 웅장해진다. 다른 건 몰라도 나이트 마스터는 진짜 꿈도 못 꿨는데.

그러고 보니 이제 남은 마수가 또 뭐가 있더라?

르갈이 에이션트 베어 말고도 두 종족을 더 안다고 했다. 분명 이번에도 멀리 원정을 떠나야겠지?

하지만 그 전에 처리할 문제가 있다.

바이아.

젝트가 실종된 이상, 어쩌면 또 다른 인류의 배신자일지 모르는 아크 위저드의 문제를 먼저 해결해야 한다.

물론 바이아가 후원자와 결탁했다는 증거는 없지만.

하지만 세상이 멸망할지도 모르는 그 순간까지 침묵을 지켰고, 강제로 마탑 문을 뜯고 들어갔더니 숫제 경기를 일으키며 날 공격했다.

과연 적일까?

아니면 그냥 정신 나간 노인네일 뿐?

뭐든 상관없다. 미안하지만 이번엔 그런 걸 천천히 확인할 시간도 여유도 없거든.

그러니 다음 행선지는 바이아가 직접 세운 방가르 지방의 마탑이다.

그리고 어쩌면... 그 마탑에서 실종된 젝트의 흔적을 찾을지도 모르고.

이계 황자는 세상을 구하고 싶다 106화

31장 원수는 외나무다리에서

젝트와 바이아는 서로 못 죽여 안달인 원수.

30대의 청년과 70대의 노인이 그토록 반목하는 것도 묘한 일이긴 한데, 아무튼 길드에서 무슨 일만 생기면 둘이 사사건건 대립하며 싸웠다고 한다.

그러다 결국 자존심을 건 현피를 뜨게 되었고, 거기서 패배한 젝트가 쪽팔려서 알비어스 왕국으로 도망쳤다는 게 지금까지의 상황.

어쩌면 알비어스 왕국에서 사라진 젝트는 복수를 위해 이곳으로 돌아왔을 지도 모른다. 물론 지금까지 그런 적은 단 한 번도 없었지만.

"마탑이 멀쩡한 거 보니.... 그냥 기우였나?"

추수가 끝난 텅 빈 농지 한복판에, 붉은 벽돌색의 거대한 마탑이 하늘을 찌를 듯 솟아있다.

저것이 바로 아크 위저드 바이아의 마탑.

대충 몇 년 만에 뚝딱 만들어 버린 톨라리의 마탑은 비교도 안 된다.

젊은 시절의 바이아가 무려 30년에 걸쳐 쌓아 올린 최대 규모의 마탑으로, 덕분에 방가르 지방 어디서도 고개만 들면 발견 할 수 있는 랜드 마크가 되었다.

지나가는 이야기지만 방가르는 엠퍼로드의 서북쪽에 위치한 제국 최대의 곡창지대.

제국의 곡물 생산의 절반이 이 동네서 쏟아진다고 한다. 추수가 끝나서 다행이네. 괜히 싸움이 크게 번졌다가 농사를 망치기라도 하면 큰일이니까.

어쨌든 마탑까지는 아직 한참 남았지만, 미리 지면에 착지하고 은신을 발동시켰다.

"저게 감지 범위가 300미터였지...."

마탑은 일정 범위로 사람이 다가오면 경보를 알려주는 능력이 있다.

물론 300미터까지 접근하려면 멀었기 때문에 천천히 밭길을 따라 걸음을 옮겼다.

계획은 간단하다. 최대한 가까이 접근 한 다음, 바이아가 미처 반응하기도 전에 순식간에 박살낸다.

마탑까지 통째로.

"이미 일식 게이트 소문은 들었을 텐데... 그런데 아무 반응도 없는걸 보면 빼박 아닐까?"

그렇게 스스로를 정당화 하며 정신건강을 챙겼다. 혹시 수확이 끝난 밭이라도 농부가 있을지 모르니 주변도 잘 살피면서.

룰루랄라....

그러고 보니 르갈에게 새로 확보할 코어에 대한 정보를 들었다.

-에이션트 베어를 제외하면, 내가 아는 마수는 에이션트 터틀(turtle)과 에이션트 이글(eagle)이 있다.

-에이션트 터틀은 오래 전 먼 곳으로 떠나 행방을 모른다. 코어를 노린다면 화살촉 봉우리로 가라. 에이션트 이글은 아직 그곳에 살고 있으니까.

화살촉 봉우리는 자이루트 산맥의 최북단에서도 좀 더 위에 있는 특수한 지형.

제국 영토를 기준으로 잡으면 서북쪽 국경 너머다. 지난 아홉 번의 회귀동안 딱 한번 가봤네.

거기 터를 잡고 활동하는 '클러스터 암살단'이라는 도적집단을 제거하고, 녀석들이 숨겼다고 추정되는 특별한 보물을 손에 넣으려 했는데....

"암 것도 없었지. 아무것도."

애당초 그 정보가 도적단 본인들이 퍼뜨린 미끼였다. 보물에 혹해 접근하는 순진한 녀석들을 낚아채기 위한.

바로 나 같은.

....

그게 5회 차였던가?

갑자기 열 받네? 안되겠다. 고대 독수리 코어 노리기 전에 그놈들부터 조져 버려야지.

아, 그전에 일단 저택에 돌아가서 카일에게 고백부터 먼저 하고.

미안해 카일아. 내가 좀 나중에 생각이 나 버렸지 뭐야? 수호 기사단에 추가로 영입할 인물에 세 명 더 있었어. 일 두 번 시켜서 미안.

기억이 늦게 난 이유는, 새로운 인물이 카일의 동기가 아니기 때문이다.

현재 제국 사관학교에 재학 중인 1년 후배들로, 원래대로라면 한참 시간을 두고 느긋하게 영입할 예정이었다. 지금 시점에선 아직 좀 햇병아리거든.

그래도 그 녀석들이 지금 엉망인 수호기사단 보다는 압도적으로 쓸 만하다. 남은 몇 개월이라도 카일이 잘 훈련시키면 요긴하게 써 먹을 수 있겠지?

암튼 귀찮게 해서 미안한 김에, 카일 주려고 이곳 방가르 지방 특산품인 나무케이크도 사 놨다. 돌아가면 그거 선물로 주고 다시 또 부려먹어야지.

그 와중에 얼추 마탑의 감지 거리에 가까워졌다.

그럼 이쯤에서 철거작업을 시작 해 볼까?

물론 템페스트 한두 발로 저 거대한 건축물을 무너뜨리는 건 역부족.

하지만 동시에 다섯 발이라면 어떨까?

광전사 세 마리도 한방에 날려 버렸는데 기껏 마탑쯤이야.

그렇게 은신을 풀고 두뇌를 풀가동 하려고 폼을 잡는 순간.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옆에서 목소리가 들렸다.

하지만 내 옆엔 아무도 없다.

하늘 저편에 태양이 떠 있고, 추수가 끝난 드넓은 밀밭 한복판에 나 혼자 그림자와 함께 서 있다.

나.

그리고 그림자.

바로 그 그림자가 일그러지며 새하얀 무언가가 지상으로 올라온다.

온몸을 붕대로 감고 있는 후원자....

그러면 퓨어 매직.

후원자의 존재를 인식 한 순간, 두뇌와 양 손이 거의 자동으로 움직이며 복잡한 프로세스를 순식간에 처리했다.

그렇게 완성된 퓨어 매직을 녀석의 가슴팍에 발사.

지잉!

하지만 빗나갔다. 눈앞에 아무 것도 없다.

"퓨어 매직이라. 1호가 이걸 못 피해서 안 피한 줄 아십니까?"

후원자의 목소리가 등 뒤에서 들렸다.

히익!

옷 속으로 지네가 들어가면 이런 느낌일까?

나는 척수 반사 급의 속도로 녀석에게 전류를 쏟아 냈다.

파지지지직!

동시에 내 마법 역사상 가장 빠른 속도로 화염의 템페스트를 만들어 뿌렸고, 비행마법으로 급가속을 걸며 적으로부터 최대한 신속히 벌어졌다.

그리고 불꽃이 날개를 펼쳤다.

주변의 모든 것이 불꽃으로 타오르며 폭발에 휘감긴다.

하지만 폭발이 사그라졌을 때, 녀석의 몸에는 약간의 그을음조차 남아 있지 않았다.

"과연, 1호가 심혈을 기울여 함정을 판 이유가 있었군요. 하하."

후원자는 놀리듯이 옷을 툭툭 털며 웃었다.

"퓨어 매직을 이렇게 빨리 만들다니. 그것도 염사(念寫)가 아닌 손을 쓰는 구식으로 말이죠."

"...."

"다음 뇌전도 준비 없이 뿌린 것치고는 위력적이었습니다. 화염 마법은 말할 것도 없고. 이쪽에선 그걸 템페스트라고 부른다지요?"

"넌 죽었을 텐데."

"실례. 제 소개가 늦었군요."

후원자는 우아한 자세로 몸을 숙이며 인사를 건넸다.

"저는 후원자 1호의 뒤를 이어, 이곳 알드 차원의 일을 인수받은 후원자 2호입니다."

2호?

그러고 보니 외모가 좀 다르긴 하다.

팔 하나가 없고, 머리가 반쯤 찌그러져 있고, 마치 다이어트라도 한 듯 복부가 쑥 들어가 있다.

하지만 구라치는 걸 수도 있잖아? 군주의 눈으로 보면 뭔가 다를까?

"...."

하지만 아무것도 안 보인다.

정신이 혼란스러울 정도의 수많은 정보가 쏟아져야 하는데, 녀석의 몸에는 그 어떤 것도 보이지 않았다.

생명도, 마력도.

신경의 흐름도, 감정의 종류나 방향성도.

말 그대로 새하얀 백지.

심지어 녀석과 닿고 있는 지면, 혹은 공기까지 흐릿해지며 본질이 안 보인다.

이건 어쩌면....

붕대?

저 붕대가 안에 있는 후원자의 실체를 감춰주는 걸까? 그래서 외부에 닿는 것마저 변질시키고?

위험하다.

대체 어떤 짓을 하려는지 전혀 예측이 안 된다. 나는 세 개의 빛의 방패를 녀석의 몸 주변에 뿌리며 언제 올지 모를 기습을 대비했다.

"저는 당신과 싸우러 온 게 아닙니다. 오히려 싸우면 안 되죠. 규정 위반이라. 하하, 흐, 히히히."

후원자는 미친놈처럼 웃으며 어깨를 으쓱였다. 이번에도 그놈의 규정 어쩌고 저쩌고야? 저번 후원자가 저러다 내 뒤통수를 거하게 후려쳤지?

"그래서?"

"그래서?"

"그래서 뭐 하러 왔냐고. 1년 남은 침공이 한 달로 줄어들기라도 했어? 그래서 통보하러 왔나?"

"정말 그랬으면 좋겠군요. 그럼 진심으로 행복할 텐데."

후원자는 어딘지 약한 모습을 보이며 고개를 끄덕였다.

"하지만 아닙니다. 통보 하러 온건 맞지만요. 그래야 제가 저지른 짓이 규정 위반이 안 되니까요. 그럼 지금부터..."

벌써부터 불안해진다. 저지른 짓? 이번엔 또 무슨 짓을 저질렀는데? 설마 또 게이트가 열리는 건가?

그렇다면 그전에 저놈부터 죽여 놔야 할 텐데....

방금 움직임이 너무 빨라 눈에 거의 안 보였다. 대체 어떻게 하면 퓨어 매직을 맞출 수 있을까? 다른 마법은 아예 안 통하잖아?

"현재, 사이크 차원은 알드 차원에 후원을 통한 추가적 간섭이 정지되었다."

갑자기 목소리가 기계음처럼 딱딱해졌다. 그래. 저번 후원자도 죽기 전에 저랬었지.

"이에 간섭이 가능한 것은, 맛보기 침공 이전 이미 간섭이 되었던 존재에 한정된다."

"...."

"현재 남은 존재는 다섯. 그중 둘을 융합하여 새로운 존재로 만들었으나, 융합 도중 이상이 발생하여 수습 과정에 추가적인 기술이 도입되었다."

그러니까, 남은 인류의 배신자가 다섯이 있는데... 그중 둘을 하나로 합쳐 버렸다고?

근데 문제가 생겨서 뭔가를 추가 적용했고?

"이는 차원 침공 규정 3114-7항의 위반 소지가 있다. 이에 위원회의 평가를 거쳐, 위 내용을 알드 차원의 유력 존재에 사전 고지함을 전달한다. 휴, 이제 끝났군요."

녀석은 기계처럼 삐걱대며 흔들던 몸을 멈추며 어깨를 으쓱였다.

"아무튼 그렇게 되었습니다. 피후원자 둘을 융합시키는데, 제 예상보다 훨씬 말도 안 되는 결과가 나와 버렸지 뭡니까? 후후, 키키킥. 아하하하하!"

"...."

"하하.... 휴. 이거 실례. 제가 당신의 얼굴을 보고 이 말을 하고 싶어 얼마나 기대했는지 아십니까?"

몰라. 알고 싶지도 않고.

근데 아까부터 왜 저렇게 미친놈처럼 구는 거지? 2호라고? 1호는 좀 더 품위가 있는 느낌이었는데.

"젝트 님과 바이아 님. 알고 계시겠죠? 아니, 반드시 알고 있을 겁니다. 당신은 후원받은 분의 존재를 귀신같이 파악하니까요. 그러니 여기까지 행차하신 게 아닙니까?"

그렇다면 바이아 역시 인류의 배신자 확정이긴 한데.

그보다 배신자 둘을 융합 했다는 게 젝트와 바이아 이야기였어? 애초에 융합이 뭔데? 녹여서 하나로 합치기라도 한 건가?

"잡설이 길었군요. 아무튼 제작자조차 컨트롤할 수 없어 애를 먹었다고 설정된 존재를.... 앗, 실례. 마음이 급해 비밀을 흘리고 말았군요. 크크. 하하! 그럼 지금부터 공개합니다!"

딱!

후원자는 경쾌한 소리와 함께 손가락을 튕겼다.

동시에 멀리 있던 마탑이 붕괴했다.

콰과과과과과과광!

마치 내부에서 폭발이라도 일어 난 듯, 저 거대한 건물이 순식간에 박살나며 무너진다.

그리고 마치 알을 깨고 나오듯, 그것이 모습을 드러냈다.

온몸에 빼곡하게 박힌 곤두선 철갑 같은 비늘.

공룡, 그것도 수각류를 연상시키는 체형.

그런데도 길게 뻗은 목과 머리는 두 개.

무엇보다 마탑의 절반쯤 될 법한 어마어마한 덩치. 저건 대체 키가 몇 미터일까? 한 30미터쯤 되려나?

그런 말도 안 되는 무언가가, 자욱한 흙먼지와 마탑의 잔해를 마구 헤치며 밖으로 기어 나온다.

이건 대체 뭘까?

괴물? 괴수?

"끼이이이에에엑!"

"크아아어아어아억!"

그래. 괴수구나.

녀석은 고개를 치켜들며 악마의 비명 같은, 혹은 인간의 절규처럼 들리는 괴성을 뿌렸다.

"멋지군요. 저분들 때문에 무기고 하나가 완전히 박살났습니다."

후원자가 괴수를 보며 감개무량한 듯 미소를 지었다.

"처음엔 저런 말도 안 되는 사이즈까지 키울 생각은 없었습니다. 그런데 융합 과정에서 어찌나 서로를 거부하던지, 실로 가공할만한 뒤틀림이 무한대로 증폭되더군요. 이때다 싶어 차원 장치의 펌프를 강력하게 넣었습니다."

아니.... 암만 그래도 저건 인간 둘을 합쳤는데 나올 사이즈가 아니잖아?

"그런데 너무 커지는 바람에 정신은 물론이고 지성 자체가 무너졌습니다. 어쩔 수 없이 생물에 대한 무조건적인 증오를 주입해서 겨우 목표를 만들었습니다. 그렇게 융합생물병기 '젝트바이아'가 탄생했습니다."

"...뭐?"

"이름이 마음에 안 드시나요? 그럼 '바이아젝트'라고 부르셔도 상관없습니다. 어쨌든 클로드 황자, 바로 당신을 상대하기 위해 만든 무기니까요. 어디 한번 자신의 모든 공격이 통하지 않는 비통함을 만끽해 보시지오."

후원자는 허리를 깊이 숙이며, 자신의 몸에 걸친 괴물의 그림자 속으로 사라졌다.

"그렇게 오래 오래 즐기다 죽어 주시기 바랍니다. 처절하게, 비참하게, 최소한 제가 받은 만큼이라도 고통을 받으며...."

그때 문제의 괴물, 젝트바이아가 또다시 포효했다.

그리고 공룡을 연상시키는 입 주변에 압축된 마법을 둥글게 뭉치기 시작했다.

어.... 나 저거 알아.

템페스트.

그것도 압축된 결정이 내 머리통보다 큰 템페스트다. 보통은 한손에 쥘 만큼 작은 건데....

에이, 설마 아니겠지?

원근감이 이상해서 그냥 저렇게 보이는 걸 거야. 세상에 저렇게 큰 템페스트가 어디 있겠어?

이계 황자는 세상을 구하고 싶다 107화

31장 원수는 외나무다리에서

늦은 오후, 디디는 르갈 등 위에 축 늘어진 채 루넨브레스 숲을 산책하고 있었다.

"요즘 들어 훈련이 더 힘들어 진 것 같다. 버틸 만한가?"

"...뭐? 뭐라고 했어?"

깜빡 잠이 들었던 디디가 정신을 차리며 물었다. 르갈은 코웃음을 치며 고개를 저었다.

"아무것도. 황자에게 코어가 하나 남은 것 같은데 달라고 하는 게 어떠냐?"

"코어? 에이션트 베어의 코어?"

"그걸 흡수하면 단번에 치고 올라갈 수 있을 거다. 원한다면 내가 압박을 좀 넣어줄 수도 있고."

"아니, 그러지 마."

디디는 무심한 표정으로 르갈의 목덜미를 쓰다듬었다.

"단장님 말로는 내가 아직 잠재력을 다 끌어내지 못하고 있대. 너한테 받은 코어의 잠재력 말이야. 그러니 당장은 거기에 집중하려고. 추가 코어는 필요 없어."

"흠. 그 인간의 말은 약간 걸러 들을 필요가 있다."

"왜?"

"그 인간은 규격외다. 인간 중에서도 최상위의 최상위지. 그러니 그 녀석과 같은 코어를 흡수했다 해서, 너도 똑같은 능력을 끌어내리란 보장은 없다. 너는 밑바닥 중에도 밑바닥이었으니까."

"맞아. 그래도 믿어볼래."

디디는 희미한 미소와 함께 고개를 저었다.

"그래야 나도 쓸모가 있어 질 거야. 뭔가 해야지. 나중에 이계의 군대가 쳐들어 왔을 때."

"정했으면 그렇게 해야지. 내 생각엔 가급적 도망치라고 하고 싶지만."

"그렇게 못 미더워?"

"...."

르갈은 말없이 한참을 터벅이다 고개를 치켜들었다.

"킁. 냄새가 난다."

"저녁 식사? 아직 이른데?"

"이것은... 그놈들의 냄새다."

거대한 늑대는 눈을 가늘게 뜨며 으르렁대기 시작했다. 디디는 르갈의 몸이 긴장으로 수축하는 것을 느끼며 몸을 낮췄다.

"르갈? 무슨 소리야? 그놈들이라니?"

"이계의 괴물 말이다. 지금 그놈들의 냄새가 났다."

"...또 저택을 노리나? 어디야?"

"서쪽, 아니 서북쪽."

"숲의 서쪽 통로?"

"아니, 그보다 한참 먼 곳이다. 엠퍼로드를 넘어서도 한참 서쪽."

"그렇게 멀리? 그렇게 먼 곳인데 냄새를 맡았어?"

"그래. 전에 북쪽에서 일식 게이트란 게 터졌을 때도 같은 종류의 냄새를 맡았다."

"정말? 거긴 더 멀 텐데?"

"내가 하수도에 몸을 숨긴 이유를 잊었나? 그보다 빨리 소식을 알려야 한다."

"황자님에게?"

"다른 녀석들에게. 황자의 냄새도 비슷한 곳에 있다. 최대한 빨리 지원을 가야 한다."

"알았어. 당장 달려갈 생각이구나."

디디는 잽싸게 르갈의 등에서 뛰어 내렸다.

"전력 질주하면 한 명밖에 못 태우지? 그럼 단장님을 데려가. 여기서 가장 강한 사람이니까."

"그 녀석은... 안 된다."

르갈은 고개를 동쪽으로 돌리며 킁 하고 냄새를 맡았다.

"어째서인지 그 인간의 냄새가 동북쪽에서 난다. 그것도 꽤 멀리."

"동북쪽? 앗. 맞아. 아침에 훈련 지시한 다음에.... 베리트에 있는 고향 마을에 다녀온다고 하셨어. 내일 돌아오신다고 했는데."

"쳇. 하필 타이밍이 안 맞는군."

"그럼 톨라리 님?"

"그 여자는 나 없이도 현장까지 날아갈 수 있겠지."

"맞아. 그럼 메르데스 아가씨라도 데려가."

"메르데스라, 킁. 좋아. 훈련장에 있군. 너는 저택에 돌아가 그 아크 위저드에게 보고해라, 그 녀석이라면 금방 따라 올 수 있겠지."

그리고는 훈련장이 있는 방향으로 쏜살같이 내달렸다. 디디는 가볍게 심호흡을 한 다음, 마찬가지로 저택이 있는 방향으로 온 힘을 다해 달리기 시작했다.

* * *

역시 눈의 착각이었다.

젝트바이아의 템페스트는 결코 내 머리통만하지 않았다. 대신 내 몸통만 했지. 빌어먹을.

아무튼 최선을 다해 대비했다. 미리 만들어둔 빛의 방패 3개를 전면에 배치하고, 프로텍션 매직도 걸고, 혹시 몰라 전면에 얼음벽도 전개했다.

그런데 녀석은 내가 아닌, 외려 남쪽 방향으로 고개를 틀며 템페스트를 뿜어냈다.

그래. 뿜었다.

압축된 본체가 직접 날아가는 대신, 본체가 레이저 같은 광선을 직선으로 뿜어낸다.

마치 드래곤이 브레스를 뿜듯.

방출된 광선을 선명한 번개줄기가 스크류처럼 휘감고 있다. 번개속성인 걸 보니 저 왼쪽 대가리가 젝트인가 보네.

아무튼 템페스트 브레스가 멀리 어딘가에 꽂혔고, 내가 볼 수 없는 어딘가에서 대 폭발을 일으켰을 것이다.

작열하는 뇌전의 폭발.

처음엔 왜 아무것도 없는 방향으로 쏘았는지 궁금했다. 하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녀석의 행동양식이 파악할 수 있었다.

-생물에 대한 무조건적인 증오를 주입해서 겨우 목표를 만들었습니다.

생물에 대한 증오.

그래서 가까이 있는 생물 하나(나) 보다는, 멀리 있는 다수의 생물이 매력적으로 느껴진 것이다.

"설마...."

비행마법으로 하늘에 떠오르자, 멀리 뿌연 연기를 뿜고 있는 폐허가 된 마을이 보였다.

"...."

분명 수십, 아니 수백 명은 죽었겠지.

그 순간, 녀석이 두 개의 대가리를 동시에 내 쪽으로 틀었다.

순간 심장이 철렁 내렸다.

증오. 분노.

마치 폭포수처럼 끝도 없이 쏟아진다. 그런데 어째 감정의 방향이 내가 아닌데? 살짝 더 왼쪽?

어째서?

"...빈디르?"

빈디르. 방가르 지방의 수도 역할을 하는 중심도시.

약 3만의 인구가 살고 있으며, 이곳에 오기 직전에 들려 지역 특산품인 나무케이크를 특제로 주문해 맞춰 놓은 곳이기도 하다.

바로 그곳을 향해, 녀석은 또다시 템페스트 브레스를 방출했다.

그것도 두 개의 머리로 동시에.

"...!"

생각 보다 몸이 먼저 움직였다.

냉기 브레스는 몸으로 직접 경로를 차단했고, 번개 브레스는 빛의 방패를 날려 브레스의 방향을 미세하게 틀었다.

콰지지지지지지지직!

동시에 내 몸을 중심으로 극한의 한파가 몰아치며 얼음 결정이 부풀어 올랐다. 나는 몇 초 정도 아무 대처도 하지 못하고 그대로 지면에 추락했다

콰직!

"으...."

박살난 얼음덩어리에서 기어 나왔을 때는, 이미 적의 시선이 내 쪽으로 집중되어 있었다.

이 자식이 뭘 꼴아 봐? 나라고 아무것도 안하고 그냥 추락한 줄 아냐?

촥!

나는 미리 준비한 다섯 발의 템페스트를 먼저 방출했다.

화륵!

압축된 불꽃들이이 한순간 껍질을 벗으며, 어지럽게 회전하는 화염의 꽃잎을 온 세상에 흩뿌린다.

퀀터플 매직. 다섯 발의 템페스트.

그렇게 한 지역을 통째로 장악해 버리는 불꽃의 축제가 끝나면, 남는 것은 오직 까맣게 탄 재와 뿌연 연기뿐이었다.

아니, 그렇게 되었어야 하는데.

키이이이이이이이익!

멀쩡히 살아남은 괴수는, 아직도 작열하는 폭발을 헤치며 내 쪽으로 크게 한발을 내딛었다.

쿠웅!

순간 지진이라도 난 듯 땅이 흔들렸다. 나는 언제, 어떤 공격이 쏟아지더라도 미리 반응해 피할 수 있도록 비행 마법을 발동시켰다.

하지만 착각이었다.

파직!

한순간 온 세상을 뒤덮을 듯 거대한 번개 그물이 머리 위에 펼쳐졌다.

뭐냐 이거.

그물이 어찌나 넓은지 고개를 돌려서는 끝이 안 보인다.

말도 안 돼. 어떻게 이런 광범위한 마법을.... 준비도 없이 한 번에 전개할 수 있지?

덕분에 도망도 못치고 번개 그물을 뒤집어썼다.

파지지지지지지직!

으악.

말 그대로 으악 이다. 미리 걸어 놓은 프로텍션 매직이 단 한 번에 거덜 났다.

어떻게 이럴 수 있지?

이렇게 극도로 넓은 지역을 커버하는 마법이, 어떻게 템페스트급의 위력을 가질 수 있는 거야?

정신이 혼란을 넘어 혼미해질 지경이다. 하지만 정신 차릴 시간도 없이, 녀석은 또다시 한순간에 번개 그물을 펼치며 천라지망 속에 나를 가뒀다.

안 돼!

이번에도 도망은 못 친다. 그물이 너무 넓고 떨어지는 속도가 너무 빠르다.

그렇다고 앉아서 또 당해 줄 수는 없다. 나는 얼음벽을 3중으로 전개하고 그 아래 몸을 숨겼다.

하지만 소용없었다.

파지지지지지지직!

작열하는 뇌전이 한순간에 얼음벽을 박살내며 내 몸을 휘감는다.

"큭!"

덕분에 너덜너덜해진 프로텍션 매직이 완전히 해체되었다.

남은 충격이 몸을 타고 번지며 소름끼치는 짜릿함을 선사한다. 이것도 코어 덕분에 항마력이 올라가서 망정이지, 아니었으면 기절했거나 죽었다.

하지만 덕분에 저 번개 그물의 비밀을 밝혀냈다.

그물이 무언가에 닿는 순간, 넓게 퍼진 다른 그물이 그 지점으로 수축하며 화력을 집중한다.

그래서 한순간 템페스트급의 위력이 나온 것이다.

말도 안 돼.

세상에 이렇게 효율 좋은 마법이 어디 있냐? 이런 걸 하나하나 컨트롤 하려면 대체 얼마나 복잡한 계산을 해야 하는 거지? 뇌가 열 배는 커져야 가능하지 않을까?

파직!

그러자 또다시 세상을 뒤덮는 번개 그물이 쏟아졌고.

"망할!"

나는 이를 갈며 비행 마법을 발동, 이번엔 도망 대신 정면 승부를 선택했다.

내가 미리 봤어! 이 두 눈으로 똑똑히 봤다고!

그물이 발동된 그 순간만큼은, 그물의 틈새로 나 하나쯤은 빠져나갈 공간이 있다고!

그리고 내 눈은 정확했다.

촥!

쏟아지는 그물눈이 좁아지기 직전, 아무 피해 없이 아슬아슬하게 그곳을 돌파했다.

이제 눈앞에 있는 건 괴수 젝트바이아의 본체뿐.

하지만 녀석과 나 사이를, 또다시 드넓은 번개 그물이 가로막았다.

이젠 그물로 벽을 치시겠다? 그런다고 내가 못 빠져 나갈 것 같아?

그렇게 새롭게 그물눈을 돌파한 순간.

콰직!

거대한 얼음 창이 내 안면을 강타했다.

프로텍션 매직을 새로 전개하지 않았다면 얼굴에 바람구멍이 뚫렸을 것이다.

하지만 충돌 순간 힘에 밀려 뒤로 날아갔고, 날아간 곳에 아직 번개 그물이 깔려 있어 또다시 템페스트급 충격이 쏟아졌다.

망할....

쿵!

잠시 달아났던 의식이 갑작스런 충격으로 돌아왔다.

여긴 어디지? 아, 땅이구나. 대체 얼마나 높이서 추락한 걸가? 곰돌이 코어 안 먹었으면 그대로 낙사할 뻔했네.

하지만 죽음은 그리 멀리 있지 않았다.

고개를 들자 또다시 세상을 뒤덮는 번개 그물이 펼쳐졌고.

마치 돌파할 수 있으면 해 보라는 듯, 수천 개의 얼음 화살이 그물눈 사이에 촘촘히 자리 잡으며 쏟아졌다.

그런데 그 위에 또 새로운 번개 그물이 생성되었고.

파직!

또 그 위로도 새로운 그물이 전개 되는 게 보였다.

아. 저놈이 날 완전히 묻어버리려고 하는구나.

지금 내가 어떻게 해야 살 수 있을까?

-난 번개에 강하다.

두꺼운 목소리가 뇌리를 스친 순간, 나는 곧장 룩카르를 내 몸에 빙의했다.

"윽...."

소름끼치는 통증이 온몸을 두드리는 찰나, 나는 비행마법을 발동하며 괴수의 반대 방향으로 직진했다.

물론 그런다고 그물을 빠져 나갈 수는 없었다.

파지지직!

절반도 벗어나기 전에 그물이 내 몸을 덮치며 온몸을 휘감는다.

하지만 감전에 의한 통증은 거의 없었다. 오히려 그물과 함께 쏟아진 얼음화살이 피부를 뚫고 들어와 아프다.

그렇게 비틀거리다 다시 날았고, 날다가 또다시 번개 그물에 휘감기며 땅바닥을 뒹굴었고, 그럼에도 또다시 지면을 박차고 달리고 또 달렸다.

결국 끝도 없이 쏟아지는 그물망을 전부 빠져나온 순간, 나도 모르게 입에서 비명이 쏟아졌다.

"으아! 이 미친!"

온몸에 얼음 화살이 박혀 있다.

박힌 채 부러진 곳에 또 화살이 박히고, 무슨 하늘이 내린 명궁도 아닌데 박힌 화살을 관통하며 또다시 새로운 화살이 박혀 있다.

난 이 꼴로 대체 어떻게 살아 있는 걸까? 룩카르와 빙의되지 않았다면 죽어도 열 번은 죽었을 거 같은데?

"으...."

화살을 뽑아내고 회복마법을 거는 일 자체가 두렵다. 그나마 빙의 때문에 통증에 둔감해져 이 모양인데, 혹시 이러다 빙의 풀며 쇼크로 즉사하는 건 아닐까?

그나마 다행인 건 젝트바이아의 마법에도 사거리가 존재했다는 것.

한참 멀어지자 더는 번개 그물이나 얼음화살을 쏟아내지 않았다. 휴. 일단 여기서 시간 좀 끌면서 회복을 해야겠는데....

하지만 녀석에겐 사거리가 무제한인 기술이 하나 있었다.

우우우우웅....

저 거대한 주둥이 주변으로, 또 다시 거대한 마법이 압축되기 시작한다.

템페스트 브레스.

"이거 반칙이야...."

대체 뭘 어떻게 해야 하지?

단순히 적의 공격을 피하는 게 다가 아니다. 피하면서 동시에 숨통을 끊어 놓지 않으면 의미가 없다.

하지만 어떻게?

템페스트 다섯 발을 동시에 날려도 안 됐는데? 그게 내가 쓸 수 있는 가장 강력한 마법이었다고!

그렇다면 마지막 수단으로 불의 정령왕을 소환해서....

아니 잠깐.

-어디 한번 자신의 모든 공격이 통하지 않는 비통함을 만끽해 보시지오.

사라진 후원자의 목소리가 뇌리를 스쳤다. 그럼 저 괴수가 설마 마법에 면역? 아니 잠깐! 그럼 정령 마법이고 뭐고 다 소용이 없잖아!

이계 황자는 세상을 구하고 싶다 108화

32장 침공 너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