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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계 황자는 세상을 구하고 싶다 100화

29장 번개와 얼음과 생명

"네!"

마법사를 제외한 모두가 동시에 대답했다. 다비는 우선 오른편에 앉은 디디에게 시선을 옮겼다.

"디디?"

"네. 단장님. 하루에 네 시간씩 하급 마갑을 착용하는 훈련을 빠짐없이 했습니다."

"성과는?"

"처음엔 3분도 못 버티고 무너졌지만, 어제는 10분쯤 버티면서도 활동이 가능했습니다."

디디의 얼굴은 여전히 무표정했다. 하지만 그 와중에도 입가에 붙은 약간의 자신감을 읽을 수 있었다.

"수고했다. 놀라운 성과군. 너 역시 에이션트 울프의 코어를 먹었으니 믿고 있었다."

"저도 놀랐습니다. 최하급 마갑도 겨우 받아들였는데 하급까지 바로 적응해서. 하지만 에이션트 울프의 코어에 힘이 늘어나는 효과는 없지 않습니까?"

"대신 체력이 늘어나지."

다비는 자신이 체험한 코어의 효과에 기사의 능력을 대입시켰다.

"물론 기본적인 힘이 올라오지 않으면 마갑을 버텨낼 수 없다. 하지만 마갑이 기사의 몸에서 빨아들이는 건 힘이 아니라 체력이지. 그러니 체력이 버텨주기만 하면 모자란 근력도 커버 할 수 있다."

"...."

"그래서 이번엔 다소 억지로 밀어 붙여서라도 그쪽을 활용하도록 유도했다. 반드시 성과가 있을 거라 확신했지."

"...."

설명을 들은 디디의 표정에 놀라움이 스쳤다.

르갈의 코어를 먹은 지도 벌서 4년이 지났다. 그런데 먹은 지 불과 며칠 밖에 안 된 다비가 자신보다 더 많은 것을 깨달았다니.

"내일부터는 본격적으로 하급 마갑 적용 훈련을 진행하겠다. 동시에 풍압검에 대한 기본 훈련도 시작할 테니 그렇게 알도록."

"알겠습니다. 그런데 풍압검은 중급 마갑부터 가능하지 않습니까?"

"어차피 시간문제인데, 미리 감을 잡아 놓는다고 나쁠 건 없겠지?"

결국 빠른 시일 내에 중급 마갑까지 다루게 될 거라는 암시였다. 디디는 '나이트 익스퍼트'라는 단어를 작게 읊조리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다음은 카일."

다비가 고개를 왼편으로 돌리자, 그제야 추위를 가라앉힌 카일이 천천히 심호흡을 하며 대답했다.

"후우.... 일단 처음에 지시하셨던 하급 마갑 적응 훈련은 끝났습니다."

"하급 마갑을 착용하고 30분간 구보가 가능했나?"

"네."

"리넨과의 대련은?"

"대부분 제가 졌습니다."

"그, 그게! 하지만 저는 중급 마갑을 착용하고 있었습니다!"

리넨이 급하게 끼어들며 카일을 변호했다. 다비는 리넨을 향해 손바닥을 펼치며 고개를 저었다.

"상관없다. 처음부터 승리를 기대한 게 아니니까. 하루에 몇 번이나 대련했지?"

"지시하신 대로 매일 5회씩 했습니다. 첫날엔 지쳐 죽는 줄 알았는데, 이틀 전에는 한 번 더 뛰어도 될 정도로 폼이 올라왔습니다. 에이션트 씰 코어의 효과가 빛을 보기 시작 한 것 같습니다."

"핵심은 폐활량이지. 폐활량이 늘어난 게 기사의 전투력에 어떤 영향이 있다고 느끼나?"

"지구력입니다. 버티는 힘이 전과 비교 할 수 없을 정도로 강해졌습니다."

카일은 숨을 길게 들이마시며 주먹을 움켜쥐었다. 다비는 살짝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너도 내일부터 본격적으로 나이트 스킬 훈련에 들어간다. 그럼 다음으로 리넨."

"넷! 저도 단장님께서 내려 주신 훈련과정을 철저히 완수했습니다. 카일 님과의 대련도 매일 다섯 번 씩 하고, 하루에 두 시간씩 구보도 하고, 그런데...."

거침없이 말을 늘어놓던 리넨은, 순간 갑자기 눈이 풀어지며 테이블에 얼굴을 처박았다.

쾅!

"리넨!"

"어.... 어? 아닙니다. 갑자기 어지러워져서."

모두가 깜짝 놀랐지만, 막상 당사자는 다시 고개를 치켜들고는 아무렇지도 않은 표정을 지었다.

"지금은 괜찮아졌습니다. 정말입니다."

"코는 괜찮나? 엄청난 기세로 처박던데?"

"네. 단장님. 멀쩡합니다. 너무 멀쩡해서 저도 신기하네요."

"코어의 효과인 모양이군. 에이션트 베어의 코어는 내구력을 대폭 올려주니까."

"아?"

순간 멍해있던 리넨의 얼굴이 기쁨으로 물었다.

"그랬군요! 이, 이거! 정말! 안 아픕니다! 얼굴이 별로 안 아파요!"

그리고는 자신의 얼굴을 손바닥으로 내리치기 시작했다. 다비는 쓴웃음과 함께 손을 흔들며 흥분한 리넨을 제지했다.

"그만 멈춰라 리넨."

"네? 앗, 네. 죄송합니다."

"코어를 먹었으니 네 성장도 이제부터겠지. 지금까지의 훈련도 중요했지만, 앞으로의 훈련이 훨씬 더 중요할 거다."

"네. 알겠습니다. 단장님."

"그럼 마지막으로 메르데스?"

"지시하신 것을 달성했습니다.

메르데스는 무표정한 얼굴로 허공에 팔을 휘둘렀다.

"이젠 검을 쥐지 않고 맨손으로 풍압검을 쓸 수 있습니다."

"...."

순간 다비의 입가에 작은 경련이 일어났다.

"정말인가? 고작 20일 만에?"

"달성할 수 있겠다 싶어 지시하셨던 것이 아닙니까?"

"그야... 언젠가는 달성할 거라 생각했지. 빠르면 5개월 안에."

"그 정도로 어렵진 않았습니다."

메르데스는 대수롭지 않다는 듯 고개를 저었다.

"실제로 성공한 건 훈련 시작한지 열흘째였습니다. 하지만 무슨 의미가 있습니까? 검으로 풍압검을 쓰는 것에 비해 위력이 한참 떨어집니다."

"의미? 의미는 충분하지."

다비는 손을 들어 메르데스의 움직임을 흉내 냈다.

"자세한 건 내일부터 전수하겠다. 그럼 기사단 회의는 이걸로 마치고, 오늘은 본격적인 훈련에 앞서 그동안의 성과를 가볍게 확인하도록 하지. 모두 훈련장으로 나오도록."

"단장님."

그러자 카일이 몸을 일으키며 물었다.

"훈련에 앞서 확인하고 싶은 게 있습니다. 황자님의 향후 일정을 알고 계십니까?"

"황자님 말인가?"

"상단 일로 보고할 것이 많습니다. 전에 지시하신 수호기사단의 결원 모집에 관한 문제도 있고. 혹시 어둠산에서 황자님과 헤어지신 이후의 행보를 들으셨습니까? 언제쯤 돌아오실지라도 알았으면 좋겠습니다만."

"...그걸 알려주는 걸 깜박했군."

다비는 고개를 끄덕이며 다시 자리에 앉았다.

"황자님께서는 먼저 자이루트 산맥에 들려, 그곳의 오우거들에게 1년 뒤에 터질 전쟁에 참전해 줄 것을 요청한다 하셨다."

"마그 오우거 말씀이군요. 분명 이계와의 전쟁에 큰 전력이 될 겁니다."

"그 뒤로는 알비어스 왕국으로 넘어가 아크 위저드 트롬본의 흔적을 파악하신다 하셨다."

"아! 그 아저씨가 그나마 사람 괜찮음."

듣고 있던 톨라리가 손뼉을 치며 말했다.

"아크 위저드 중에서 말이야. 나도 포함해서."

"...그리고 마지막으로, 역시 알비어스 왕국에 숨어 있을 것으로 추정되는 또 다른 아크위저드, 바로 젝트를 제거할 예정이라 하셨다."

"젝트? 그 아저씨는 왜?"

톨라리가 깜짝 놀라며 물었다. 다비는 무거운 표정으로 톨라리에게 시선을 집중했다.

"황자님께서는 젝트가 후원자 관련이 있을 거라 말씀하셨습니다."

"후원자? 젝트도 그 붕대남이 붙었어?"

"그렇다고 합니다. 황자님께서는 그 자가 더 강해지거나, 혹은 이계의 괴물로 변신하기 전에 후환을 끊어 놓겠다 말씀하셨습니다."

"그렇구나...."

톨라리는 고개를 기울이며 침울한 표정을 지었다.

"젝트도 그쪽이었다니. 음.... 그거 아쉽네."

"그렇다면 황자님께서는 젝트를 제거한 후에 다시 저택으로 돌아오시는 겁니까?"

카일이 물었다. 고개를 끄덕이던 다비는 순간 눈을 크게 뜨며 고개를 흔들었다.

"아니, 그 뒤로 한 가지 일을 더 처리하신다고 했다. 새로운 극대신성마법을 얻기 위해 나이피아란 곳을 들리신다 하셨지."

"나이피아? 나이피아가 어디입니까? 여기서 얼마나 떨어진 곳인지 아십니까?"

카일의 질문에 대답할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다비는 다시 자리에서 일어나며 담담하게 말했다.

"나도 모른다. 그렇다고 손 놓고 기다리기만 할 순 없지. 당장 기사단 전원 훈련장으로 집합한다!"

* * *

페이우드 제국이 있는 서대륙은, 크게 보면 네 개의 지역으로 나눌 수 있다.

가장 오른쪽은 죽음의 땅.

까마득한 옛날에는 이곳도 다양한 국가가 공존하던 인간의 생활권이었다고 한다.

하지만 엄청난 전쟁이 거듭되며 모두가 멸망했고, 그 자리에 네크로 아미, 즉 사령군이 자리 잡으며 죽음의 땅이 되어 버렸다.

물론 내 손으로 사령군주 크록과 핵심 기지인 네크로폴리스를 날려 버렸으니 뒤통수를 맞을 후환은 없다.

다만 죽음의 땅에는 여전히 끝도 없는 언데드 군대가 남아 있는데.... 이놈들도 군주가 없으니 결국 서서히 말라 죽겠지 뭐.

그리고 죽음의 땅의 왼편이자 대륙의 우중앙에는, 다양한 산맥에 둘러싸인 서대륙 최대의 알짜배기 땅이 존재한다.

바로 페이우드 제국.

이 지역 전체가 그냥 제국령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물론 북쪽으로 손이 닿지 않은 땅이 많이 있긴 한데 거긴 그냥 내추럴 오더, 자연 그 자체고.

그리고 제국의 서쪽이자 대륙의 좌중앙에는 알비어스 왕국을 비롯한 잡다한 중소 나라들이 덕지덕지 모여 있다.

알비어스를 제외한 대부분의 나라가 제대로 된 국가 규모를 갖추지 못했으며, 서로가 서로에 대한 투쟁 상태를 끝없이 반복하며 전력만 낭비하고 있는 상태.

그리고 여기서 더 서쪽으로 이동하면, 일명 '세계의 지붕'으로 불리는 지역이 있다.

나이피아.

면적만 치면 서대륙 전체의 3할에 육박하지만, 정작 인간은 거의 살지 않는 오지 중 오지.

평균 해발만 수천 미터에 달하며, 극한의 추위와 극한의 돌풍, 극한의 건조함에 극한의 폭설이 공존하는 지역이다.

동시에 신들의 성역이기도 하고.

"회귀 1년차에 여길 올 줄이야."

깎아지른 듯한 절벽 전체를, 두꺼운 나무뿌리가 끝도 없이 휘감고 있다.

이곳이 바로 대지와 생명의 신, 우렌의 성역.

방위로만 따지면 나이피아의 남부 어딘가.

정확한 위치를 설명할 방법이 없다. 기준점이 될 만한 도시나 마을이 있는 것도 아니고. 자연 이란 게 멀리서 보면 다 거기가 거기 같고.

덕분에 처음 여길 찾았을 때는 거의 몇 달 동안 쌩 고생을 했다. 물론 지난 9회 차 때도 한방에 찾아오진 못했는데....

"군주의 눈이 좋긴 좋구나."

하늘에서 군주의 눈으로 생명의 흐름이 집중되는 위치를 쉽게 발견 할 수 있었다. 덕분에 시간도 아끼고 좋구만.

"드라이어드."

시간 끌 것 없이 나무의 정령을 소환했다. 모습을 드러낸 높다란 거목은 자신보다도 수십 배는 큰 절벽을 보며 감탄을 거듭했다.

"세상에. 이곳은... 이럴 수가."

"여기가 어딘지 알겠어?"

"이곳은 성역입니다."

나무 정령은 뿌득거리는 소리와 함께 내 쪽으로 몸을 돌렷다.

"계약자님은 어째서 이런 곳에 절 소환하신 겁니까? 이곳에 제가 싸워야 할 적이 있습니까?"

"그럴 리가. 근데 기왕 부른 김에 열매 좀 주면 안 될까? 먹을 거랑 마실게 부족해서."

"설마 도시락으로 활용하기 위해 절 부르신 겁니까?"

드라이어드는 황당해 하면서도 순순히 열매를 내어주었다. 나는 복숭아 향 물씬 나는 열매를 한입 베어 물며 한숨을 내쉬었다.

크. 이거지.

사람은 자고로 이런 싱싱하고 촉촉한 음식을 먹어줘야 한다. 사흘 동안 말린 고기랑 설탕바만 먹었더니 괴혈병 걸리는 줄 알았네.

"으, 살 것 같네. 그럼 저기 뿌리 좀 치워줄래?"

열매를 반쯤 먹다가 앞쪽의 절벽을 가리켰다. 드라이어드는 다시 뒤로 몸을 돌리며 조용한 목소리로 되물었다.

"성역의 입구를 막은 나무뿌리를 치우라는 말씀입니까?"

"응. 맞아."

"계약자님의 명령에는 무조건 따르는 게 법칙이지만.... 지금은 예외를 적용하지 않을 수 없겠군요."

"거절 하려고?"

"거절은 아닙니다. 다만 여기가 무엇의 성역인지 알고 계십니까?"

"알지. 우렌의 성역이잖아?"

"대체 이곳은 어떻게 알고 오셨습니까?"

"책으로. 대신전의 지하에 있는 비밀 도서관에서 읽었어."

"대신전이라면.... 다섯 신을 섬기는 신관들의 총본산이군요."

드라이어드는 그제야 이해가 간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다만 실제로 대신전 도서관에서 정보를 찾은 건 아니다.

오히려 생명과는 정반대에 있는 무시무시한 녀석에게서 정보를 입수했다.

바로 사령군주 크록.

이계 황자는 세상을 구하고 싶다 101화

29장 번개와 얼음과 생명

-우리의 최종 목표는 우렌의 성역을 파괴하는 것이다.

-나의 최고의 수제자 클로드여. 너는 언젠가 반드시 우렌의 성역을 가로막은 방벽을 뚫고, 우리 사령군의 기치를 드높여야 한다.

그게 3회 차였나?

애초에 '사령군 우호 루트'를 탔던 게 그때뿐이니 그때가 맞겠지, 뭐.

아무튼 사령군주 크록으로부터 성역의 위치와 특징을 파악했고, 이후 파괴가 아닌 온건한 방식으로 성역의 입구를 여는 방법은 내 스스로 궁리 끝에 터득했다.

"책에는 성역의 입구가 엄청난 나무뿌리로 가로막혀 있다고 하더라고. 근데 너는 바로 그 나무뿌리를 움직이는 능력을 가지고 있잖아?"

"그렇습니다. 물론 계약자님이 절 소환해서 제 능력을 활용하신 적은 한 번도 없지만요."

앗? 그랬나?

하긴 이 녀석과 계약한 지 얼마 지나지도 않았지? 이럴 줄 알았으면 땅벌레랑 싸울 때 한번 소환해 보는 건데.

"네 능력은 엘프들이 설명해 줬어. 뿌리나 가지를 뻗어 직접 적을 공격하기도 하고, 또 주변의 나무가 있으면 그것도 활용할 수 있다며?"

"네. 그렇습니다."

"전에 군주의 방에서도 데자르의 팔다리를 그렇게 묶었고. 그래서 너라면 이걸 열 수 있을지 않을까 했지. 어때? 가능하겠어?"

"...."

드라이어드는 잠시 동안 침묵에 잠겼다. 그리고 난 속으로 가만히 숫자를 세기 시작했다.

4, 5, 6, 7, 8, 9....

숫자는 왜 세냐고?

지금까지 평균 30초가 걸렸거든. 드라이어드가 결심하고 저 나무뿌리를 치워줄 때까지.

"...가능합니다."

결심을 굳힌 드라이어드는, 이내 나뭇가지를 양 팔처럼 치켜들며 능력을 사용했다.

빠드드드드드득!

그물처럼 꼬여 있던 뿌리들이 엄청난 기세로 풀리기 시작했다. 그런데 이번엔 15초밖에 안 걸렸네? 왜 고민의 시간이 절반이나 줄었지?

근데 그건 그렇고.

빠드드드득!

빠득! 뿌득!

빠지지직!

여기 뿌리방벽은 예나 지금이나 무지막지하게 두껍구만.

"계약자님께서 왜 이곳에 들어가려 하시는지 알겠습니다. 1년 후에 세계가 멸망할지도 모르니까요."

정확히는 10개월 하고도 6일 후에 말이지만. 아무튼 작업을 끝낸 드라이어드는 뻥 뚫린 동굴 입구를 보며 안타까운 표정을 지었다.

"본래라면 저는 이 문을 열어선 안 됩니다. 하지만 계약자님의 필사적인 상황이 제 마음을 움직였습니다. 부디 원하는 바를… 이루시길...."

힘을 전부 써 버린 드라이어드는 곧장 모습을 감추며 소멸했다. 그만큼 여길 막고 있던 나무뿌리가 엄청났다는 거겠지?

"아, 실수했다."

여기서부터 진짜 성역까지 한나절은 걸어 들어가야 했지?

이럴 줄 알았으면 드라이어드한테 열매 몇 개 더 달라고 할 걸. 에구, 나도 요새 참 정신이 없구만....

* * *

여기서 한번 다섯 신을 전부 되짚어 보자면.

우선 운명과 시간의 신 루아. 바로 날 이쪽 차원에 소환한 놈.

다음으로 신비와 법칙의 신 라나. 이 녀석은 원소 마법과 연관이 있고.

권력과 힘의 신 페이오. 얜 뭐 하는 놈인지 잘 모르겠다.

마갑을 빼고 계산해도 이쪽 사람들은 지구의 인간보다 훨씬 강해지는데.... 아마도 그것과 연관이 있는 게 아닐까?

그리고 어둠과 죽음의 신 퀸시. 이 녀석은 말할 필요도 없이 사령마법 담당이고.

마지막으로 대지와 생명의 신 우렌.

얘는 존재 자체가 신성마법의 원천이다. 그런데도 신관들은 다섯 신의 축복 어쩌고 하면서 다섯 신 모두를 섬긴다고 내숭을 떨지? 실제로 섬기는 건 우렌 하나인 주제에.

"넌 이곳에 오면 안 된다."

멀리서 사람 형상을 한 빛의 덩어리가 경고하듯 손바닥을 내밀었다. 휴, 좋아. 이제 겨우 다 왔나 보구만.

"너무 그러지 마. 가뜩이나 시간도 없는데. 나름 존중의 의미로 비행마법도 안 쓰고 여기까지 걸어왔다니까?"

"너는 이미 다른 신의 대리자로 속해 있다. 신들은 서로의 대리자에 간섭할 수 없다. 그러니 나는 네게 그 어떤 도움도 줄 수 없고, 그 어떤 정보도 줄 수 없다. 당장 여기서 나가라."

이 뻑뻑한 녀석이 바로 대지와 생명의 신, 우렌이다. 나는 손을 들고 미소와 함께 인사를 건넸다.

"그래. 나도 만나서 반가워. 초면에 인사 부터버버버으게게겍!"

아, 썩을.

군주의 눈으로 녀석을 봤더니 뇌가 폭발 할 뻔했다!

몰라 뭐야 저거. 무서워.

뭔 놈에 흐름이 수만, 아니 수십만 배로 압축되어 있냐? 저게 다 생명이야? 아니 마력 같기도 하고....

에이, 나도 몰라.

기왕 쓰러진 거, 머리 아프니 잠시 누워서 좀 쉬어야지.

"너, 루아의 대리인. 대체 뭐 하는 거지? 당장 내 성역에서 나가라."

"시끄러. 너 어차피 말로만 허풍이잖아."

"뭐라고?

"나 강제로 못 쫓아내는 거 다 알아. 망할 놈아. 좀 친절하게 대해 주면 안 돼?"

"친절? 강제로 성역의 문을 뚫고 들어온 너 같은 불한당에게?"

"내가 왜 불한당이야? 기껏 드라이어드 소환해서 신사적으로 열고 왔더니. 확 이그니스 소환해서 불로 태우고 들어올걸 그랬나?"

"흥. 그래봤자 입구는 뚫리지 않는다. 뿌리 벽은 아무리 태워도 무한하게 재생하니까."

"나도 알아. 그냥 해본 소리가지고 발끈하긴."

"이 망할 루아의 종놈 같으니...."

"어허, 피차 험한 말 쓰지 말자고. 어차피 나 아니면 1년 후에 세상에 멸망할지도 모르잖아? 나 아니면 안 되는 거 뻔히 알면서, 서로 익스큐즈 좀 하면 안 돼?"

어째 생긴 게 루아랑 똑같으니 옛날 말도 나오고 그러는구만. 물론 우렌은 정색하며 받아주지 않겠지만.

"...나는 그 어떤 도움도 네게 줄 수 없다. 돌아가라. 조언을 바란다면 너의 신의 성역을 찾아라."

"조언을 바라고 온 게 아니야. 얻어낼 게 있어서 온 거지."

"난 네게 아무것도 줄 수 없다."

"과연 그럴까? 넌 하나가 아니잖아?"

"무슨 헛소리냐. 나는 당연히 하나의 존재다."

"아니, 속성이 두 개라고. 생명. 그리고 대지."

바로 이것 때문에, 다른 신의 대리인인 내가 파고들 틈이 생긴다.

"땅, 대지. 그러니 넌 대지의 정령과 관계가 있지. 다섯 신 중에 오직 너만 특정 정령 계통과 관련이 있어. 그쪽 정령들의 소유주 같은 거라고나 할까?"

"그걸 어떻게...."

"나 루아의 대리인이잖아? 내가 이 짓을 몇 번을 했을 거라고 생각해?"

"...그렇군."

우렌은 제자리에 주저앉으며 쓰러진 나와 눈높이를 맞췄다.

"내가 말해줬군. 나 스스로."

"그래. 내가 여기서 하루 쯤 버티고 징징대면 네가 먼저 말을 꺼내."

-이런다고 달라질 건 없다. 네 고통은 이해하지만, 난 널 절대 도울 수 없다.

-하지만...

-다른 신의 대리인인 너를 도울 수 없다. 내가 도울 수 있는 건 내 권속의 계약자일 그것도 둘 이상의.

권속은 정령을 말한다. 이런 츤데레 같으니라고.

"그래서 이번에도 미리 계약해 왔어. 바위 정령 룩카르랑 나무 정령 드라이어드. 이 녀석들 모두 네 권속이지? 그러니까 도와줄 수 있지?"

"...이번에도?"

"그래. 이번에는, 이 아니라 이번에도."

우렌은 한동안 침묵했다. 그러다 몸을 일으키며 손을 들어 올렸다.

"알았다. 네게 있어 신의 절차는 의미가 없군. 모든 걸 생략하겠다. 어차피 다 알고 있을 테니. 그냥 본론으로 넘어가지."

"그냥 넘어가지 말고 이야기 좀 더 하면 안 돼? 내가 이런 화제를 꺼낼 기회가 흔치 않거든."

말해 봤자 믿지 않고, 믿어도 문제라서.

하지만 우렌은 매정하게 고개를 저었다.

"안 된다. 바로 시작하지."

"쳇...."

"나의 권속인 바위의 정령과 계약한 정령사여, 그 모든 시련을 뚫고 여기까지 온 너에게, 대지와 생명의 신인 나 우렌이 권능을 내리겠다. 너는 신성을 받아들일 준비가 되어 있느냐?"

"네. 라이프 링크 주세요."

"...!"

얼굴도 없는 주제에 놀라긴.

나는 양 손바닥을 모아 내밀며 구걸하는 포즈를 취했다.

"어차피 '라이프 링크'랑 '라이프 인퓨젼(life infusion)' 중에 선택이잖아? 필요한 건 라이프 링크니까 그걸로 줘."

"어떤 신성마법인지 설명을.... 아니, 어차피 이미 다 알고 있겠군."

당연히 알고 있지.

라이프 링크는 익히 말했듯 우호적인 대상과 생명을 연결해 피해를 분산시키는 마법.

반면 라이프 인퓨젼은 대상에게 내 생명을 주입하는 마법. 회복마법 조차 안 통할 만큼 다 죽어가는 사람조차 살릴 수 있다고 한다.

대신 내가 죽어가면서.

"라이프 인퓨젼은 필요 없어. 뭐 어쩌라고. 나 죽으면 이 세상도 끝인데."

"알았다."

우렌은 추켜올린 손 위에 둥그런 빛의 덩어리를 만들어냈다.

위이이이잉!

동시에 덩어리가 내 몸으로 떨어지며 주변을 빙빙 돌기 시작했다.

"이것이 나의 권능이다. 라이프 링크. 너의 생명으로 타인의 생명을 보존할 수 있다."

미안하지만 반대다. 타인의 생명으로 내 생명을 보존할 계획이지.

그렇게 커다란 빛덩어리가 내 몸에 스며들며 흡수되었다.

"이것으로 우리의 인연은 결말이 지어졌다. 당장 나가라 인간. 해가 지기 전에 뿌리방벽이 다시 닫힐 것이다. 그렇게 되면 넌 이곳에서 굶어 죽는다."

"해가 지려면 두 시간쯤 남았나.... 알았어."

나는 그제야 쓰러졌던 몸을 일으켰다.

"볼일 끝났으니 나가볼게. 데 두 시간은 좀 빠듯한데, 비행마법으로 날아가도 될까?"

"네 마음대로 해라."

"나중에 다시 왔을 때, 그때 무례를 저질렀다면서 혼내기 없기다?"

"꺼져라! 너와 다시는 볼 일 없다!"

우렌은 양 팔을 휘저으며 일갈했다.

하지만 과연 그럴까?

물론 지금까지 내가 계약할 수 있는 대지 계열 정령은 둘 뿐이었다. 룩카르와 드라이어드.

근데 이번엔 일반 정령이 아닌, 그 위에 있는 대빵과 계약할 가능성도 있거든?

나는 뒷걸음을 치며 분노하는 우렌을 향해 손을 흔들어 주었다.

"그럼 안녕! 나중에 테라직이랑 계약하고 다시 돌아올게!"

"...테라직?

"대지의 정령왕 말이야. 바위 정령이랑 나무 정령만 해도 이 정돈데, 정령왕 급이면 훨씬 더 큰 권능을 주겠지? 기대할게! 안녕! 금방 돌아올 테니 그동안 잘 있어!"

* * *

성역을 막 빠져나온 순간, 마치 기다렸다는 듯 나무뿌리가 동굴 입구를 휘감았다.

빠드드드드드드득!

녀석 하고는.

우리 우렌이가 신 치고는 마음이 여리고 착한 편이지. 지금까지 뭔가를 뜯어내는 데 성공한 것도 녀석뿐이고.

일단 권력과 힘의 신인 페이오의 성역은 정확한 위치조차 파악 못 했다. 나이비아 서부에 있을 것으로 추정만 할 뿐.

그리고 신비와 법칙의 신인 라나는 나 같은 아크 위저드레벨의 마법사가 가면 아무 의미가 없고.

-정령은 신비이며, 정령은 법칙이며, 모든 정령은 나의 권속이다.

-그러니 다섯의 정령과 계약한 그대에게, 가장 높은 수준의 원소 마법인 '템페스트'에 대한 가르침을 주겠노라.

그치만 난 이미 템페스트를 쓸 줄 아는걸.

혹시 정령 다섯 마리를 넘어, 일곱 마리든 열 마리든 계약하고 라나를 찾아가면 뭔가 변화가 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딱히 기대는 안 된다. 라나의 기본 보상이 템페스트를 쓸 수 있게 해주는 게 아니라, 그저 템페스트에 대한 정보를 줄 뿐이라서.

나 참.

템페스트 정보? 그거 이미 인간 마법사들은 전부 알고 있어요. 신 주제에 정보가 늦어도 너무 늦는 거 아닙니까? 내가 말을 말아야지.

다음은 날 이곳으로 소환한 만악의 원흉, 바로 원수 같은 루아의 성역인데....

여긴 항상 닫혀 있다.

아니지. 그보다는 입구 자체가 존재하지 않는다는 게 정확하다.

대신 운명의 그날이 찾아오면.

이계의 게이트가 열리고, 결과적으로 내가 실패해서 도망치는 순간이 오면 머릿속에 내비게이션 같은 게 떠오른다.

그것을 따라 계속 도망치다 보면 루아의 성역에 도착한다.

대충 나이비아 중부에 있는 모래폭포 어딘가 같긴 한데....

멀쩡할 때 한번 와 봤지만 입구는커녕 입구의 흔적조차 찾을 수 없었다. 아마도 루아 본인이 원하지 않으면 출입이 절대 불가능한 모양.

마지막으로 어둠과 죽음의신, 퀸시의 성역은 저 혼자 죽음의 땅에 자리 잡고 있다. 거긴 아예 다른 차원의 문제니 논외로 치고.

어쨌든 라이프 링크를 얻었으니 이번 원정은 끝.

그럼 중간 점검도 할 겸 즐거운 나의 집으로 돌아가 볼까?

마력을 한계까지 쥐어짜 날아가면 사흘 안에 도착할 것 같은데.... 좋아. 어디 한번 조져 보자고.

이계 황자는 세상을 구하고 싶다 102화

30장 폭풍전야

하지만 조져진 건 나였다.

사흘은 얼어 죽을.

우렌의 성역에서 루넨브레스 저택까지 날아오는 데만 일주일 걸렸다. 역시 사람은 자신의 힘을 너무 과신하면 안 된다니까?

"으.... 그럼 실례하겠습니다!"

갈색 머리카락에 갈색 눈동자를 가신 소녀가 벌서듯 양 팔을 치켜들었다. 그러자 훈련장 구석에 서 있던 톨라리가 양 손을 확성기처럼 모으며 소리쳤다.

"긴장하지 마 루네야! 넌 할 수 있어!"

"네!"

곧바로 머리 위에 거대한 얼음덩어리가 생성, 그리고 동시에 빠른 속도로 내리 꽂혔다.

아이스 미티어.

전에 땅벌레 여왕이 밥달에게 시전했던 바로 그 마법.

근데 마무리가 어설프구만. 나는 바람 마법으로 거대한 에어쿠션을 만들어 추락하는 얼음덩어리를 가볍게 받아냈다.

부웅!

그리고 쿠션의 방향을 살짝 틀어, 얼음덩어리를 내가 서 있는 바로 옆에 사뿐히 떨어뜨렸다.

콰아아아앙!

음, 사뿐히는 아닌가?

"으아...."

루네는 잠시 비틀대다 제자리에 주저앉았다.

"루네!"

순간 톨라리가 빛의 속도로 날아와서는 루네의 몸을 부축했다.

"괜찮아? 머리 어지럽지? 여기 설탕바."

"가, 감사해요. 톨라리 언니...."

루네는 풀린 눈으로 고개를 꾸벅였다. 이거 못 본 사이에 둘이 훨씬 정다워진 것 같네?

"마무리가 살짝 부족했어."

나는 비행마법으로 두 사람 앞에 착지하며 소감을 말했다.

"아이스 미티어는 끝까지 의식을 집중해야 해. 상대가 바람 마법에 능숙하면 방금처럼 무용지물이 될 수 있어."

"네. 황자님. 명심하겠습니다."

그새 얼굴이 핼쑥해진 루네가 진지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자 톨라리가 입술을 쭉 내밀며 눈을 흘겼다.

"우리 르네 듣지 마. 넌 잘못 없어. 여기 황자님이 괴물이야."

"네? 네?"

"어지간한 마법사는 그걸 커트할 생각 자체를 못해. 생각해도 실천할 수 없고. 그냥 이 황자님이 규격 외. 신경 쓸 거 없음. 알았지?"

아니, 물론 그 말이 맞긴 하다만.

"암만 그래도.... 넌 스승 주제에 그렇게 말 하는 게 어딨냐?"

"사실이니까. 황자님 무슨 마법사들 떼로 모아 놓고 마법 실전 훈련만 잔뜩 했어? 어떻게 반응이 그렇게 즉각적이고 정교해?"

그야 즉각적이고 정교하지 않으면 목숨이 달아나는 실전을 엄청나게 많이 치렀으니까?

"반응 못했으면 내가 얼음에 깔려 죽었을 텐데?"

"우리 귀여운 루네가 기껏 어려운 마법 성공했는데, 기왕이면 벽마법 같은 걸로 아슬아슬하게 막았으면 좀 좋아? 이 와중에 자기 자랑 하고 있음?"

"뭔 소리야. 너도 이 정도는 가볍게 할 텐데."

"나는 바람 마법사니까. 근데 황자님은 모든 속성 다 다루고."

"저, 저 때문에 싸우지 마세요...."

루네가 안절부절못하며 입을 열었다. 나는 톨라리에게 비키라고 훠이훠이 하며 루네의 앞에 몸을 숙였다.

"싸우는 거 아니야. 암튼 대단하네. 설마 아이스 미티어를 쓸 줄은 몰랐어. 템페스트 바로 아래 등급 마법인데."

"감사합니다. 근데 한 번 쏘면 이렇게 돼요. 으. 으으...."

루네는 아직 어지러운지 머리를 빙빙 돌리며 신음했다. 나는 루네가 반쯤 먹은 설탕바를 새것으로 교환해 주며 몸을 일으켰다.

그럼 제자 테스트는 끝났고, 지금부터 스승과의 면담 시간.

"대체 무슨 마술을 부린 거야?"

나는 톨라리를 뒤로 몇 발 끌고 가며 물었다.

"어떻게 루네가 아이스 미티어를 쓸 수 있어? 재 수중식 끝낸 지 채 몇 달도 안 된 거 알지?"

"웬 호들갑? 황자님도 저 애가 아크 위저드의 재능이 있다고 했잖아?"

"암만 그래도 너무 빨라서."

"빠르긴 해. 근데 가르치기 전부터 이미 급이 꽤 됐어."

톨라리는 양 손의 손가락을 하나씩 마주 대며 설명했다.

"수중식으로 마법 각성할 때 주변을 싹 다 얼렸다며? 그때부터 이미 싹이 튼 거야."

"싹?"

"마법 출력의 싹. 물론 세세한 컨트롤은 아직 기초단계. 하지만 출력만 키우면 방금처럼 아이스 미티어도 가능해."

"암만 그래도 갭이 너무 큰데?"

"나도 동감. 하지만 컨트롤은 단기간에 안 돼. 오히려 출력에 집중해서 커버하는 게 좋을 듯? 어때 황자님?"

아, 그래서 방금 루네한테 듣지 마 어쩌고 했던 거구만.

결국 루네의 마법 방향성을 컨트롤 보다는 물량으로 잡았다는 뜻이다. 물론 이것도 충분히 메리트가 있지만....

"근데 이러면 결국 템페스트는 못 쓸 텐데? 템페스트는 컨트롤 없이는 꿈도 못 꾸잖아?"

"그렇긴 해. 하지만."

"하지만?"

"템페스트는 원래 다들 꿈도 못 꿔."

톨라리는 눈을 가늘게 뜨며 설명했다.

"황자님 기준이 너무 높아. 템페스트? 내가 옆에 붙어 5년, 아니 10년 가르쳐도 확신 못 해."

그렇긴 하지. 지금까지 르네는 단 한 번도 아크 위저드의 경지에 도달하지 못했으니까.

"루네 재능 훌륭해. 하지만 황자님이나 나 정도는 아냐. 그리고 시간 없다며?"

"시간?"

"앞으로 1년 남았잖아. 최대한 거기 맞춰야지?"

"...그렇지."

이거 틀린 말이 하나도 없구만.

하지만 막상 그날을 생각하니 속이 쓰리다. 과거의 루네는 대충 23살쯤 전쟁에 투입 됐는데, 지금의 루네는 약 14살의 나이로 이계와의 전투에 뛰어 들어야 한다.

차라리 루네는 전력에서 제외해 버릴까?

하지만 이건.... 패배한 순간 모든 것을 잃는 전쟁.

게다가 나이를 따지면 디디도 똑같이 어리며, 홀리랜스 던지는 리넨도 이제 겨우 16살에 불과하다. 물론 외모만 따지만 중후한 30대지만.

"암튼 내 생각은 그래. 10년 뒤를 본다면 컨트롤, 1년 뒤를 본다면 물량. 황자님 생각은?"

"너한테 맡길게. 전부."

"탁월한 선택이야."

톨라리는 빙긋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엘프 소년 이야기도 있어."

"라니르 말이지? 지금 어디 있는데?"

"저기."

톨라리는 멀리 뒤쪽에 있는 기사단 본부를 가리켰다.

"다비랑 나랑 반씩 나눠서 가르치기로 함. 황자님 돌아오기 전까지 닷새 동안 그렇게 했어."

"걔는 어떤 것 같아? 아크 위저드의 눈으로 보기엔?"

"황자님도 아크 위저드인데 뭘."

"난 기연으로 얻은 힘이잖아. 넌 타고난 마법 천재고."

"그렇게 말하면 좀 쑥스럽고."

말로는 쑥스럽다면서 표정은 활짝 웃고 있구만. 톨라리는 이제 막 일어나 엉덩이를 털기 시작한 루네를 보며 말했다.

"재능? 잠재력? 그건 루네보다 많이 떨어져."

"그 정도야?"

"마력만 따지면 아예 안 늘어 날 것 같고."

"마력이 안 늘어난다고? 그런 것도 알 수 있어?"

"길드 시절부터 마법사 한둘 본 게 아니라서. 엘프는 성장이 느리지? 그래서 마력 성장도 느린 듯. 이것저것 건드려 봤는데 변화가 아예 없어."

"나도 그런 걱정을 좀했어. 역시 엘프는 어쩔 수 없나?"

"대신 컨트롤은 괜찮을 듯?"

"컨트롤?"

"뇌 구조? 생각의 구조? 인간이랑 구조가 달라. 계산력이 안정적. 출력만 조절하면 컨트롤은 키워줄 수 있어."

"그럼 루네랑 완전 반대 타입이네?"

"응. 둘이 완전 반대. 신기할 정도로."

톨라리는 어깨를 으쓱였다. 그리고는 갑자기 손뼉을 치며 한발 뒤로 물러났다.

"맞아. 나 이제 퓨어 매직 쓸 수 있을 듯?"

"벌써? 아직 좀 더 먹어야 하지 않을까?"

"뇌가속영약이라면 이해했어."

톨라리는 자신만만하게 고개를 저었다. 근데 이해했다고? 영약을 이해했다는 게 무슨 뜻이지?

"며칠 전에도 될 거 같았는데 기다린 거야. 황자님 올 때까지. 눈앞에서 보여주려고."

그리고는 방금 루네가 만들어 놓은 거대한 얼음덩어리를 노려보았다. 나는 급하게 뒤로 물러나며 물었다.

"지금 바로 쓰게?"

"응. 영약도 이미 먹고 나왔어."

뇌가속영약을 미리 먹고 나왔다고? 아예 처음부터 작정하고 있었구만.

"그리고 황자님 봐줘야 의미 있어."

"내가 왜?"

"이게 얼마나 대단한 건지.... 황자님만 아니까."

그 순간, 톨라리의 오른손에 투명한 바람의 기류가 뭉치기 시작했다.

윈드 오브 템페스트.

동시에 왼손에도 템페스트를 만들었다. 하지만 이번엔 완성체가 아닌, 압축이 느슨하게 된 미완성상태로.

"으...."

입에선 신음이 흐르고 이마에선 진땀이 흐른다.

양쪽 광대가 미세한 경련을 일으키는데, 좌우의 경련이 일치하지 않고 서로 번갈아 가며 일어난다.

그 와중에도 톨라리는 양손을 포갤 듯 천천히 겹치며, 미완성으로 완성품을 감싸는 정교한 작업을 완성했다.

"와...."

감탄이 절로 나오는구만.

아름답다.

지금 톨라리의 저 앙상한 손가락 안에서 무슨 일이 벌어지는지는 나만 알고 있다.

극한의 섬세함과 극한의 압축이 더해진 마법의 최종단계.

끼기기기기기기긱....

덕분에 한계 이상으로 압축된 안쪽의 템페스트가 괴상한 소음을 쏟아내기 시작했다.

그렇게 처음부터 투명했던 템페스트는, 투명을 넘어 속성을 망각한 반투명의 구체로 돌변했다

우웅!

순간 바깥쪽을 감싸던 미완성의 템페스트가 사라졌다.

이것이 바로 퓨어 매직.

자신과 접촉하는 모든 마법을 해체해 버리는 스펠 브레이커.

톨라리는 완성과 동시에 그것을 정면으로 방출했다.

지이이이잉!

그러자 집채 만 한 얼음덩어리의 중심에 구멍이 뚫렸다.

마치 레이저로 관통한 듯, 흠 하나 없는 깨끗한 구멍.

동시에 그 구멍을 중심으로, 얼음 덩어리가 안쪽으로 오그라들며 순식간에 소멸 했다.

"...와!"

침묵을 깬 건 루네였다.

"얼음! 얼음이 사라졌어요! 그 커다란 게 순식간에!"

"하으으..."

톨라리는 해롱거리며 그 자리에 주저앉았다. 설마 과부하가 걸렸나?

"톨라리!"

냉큼 달려가 미리 까놓은 설탕바를 내밀었다. 녀석은 눈앞에 있는 설탕바를 덥석 물고는 내 손까지 먹어버릴 기세로 흡입하기 시작했다. 휴, 의식이 있는 거 보니 과부하는 아닌 모양이네.

"...어우 달아. 역시 머리 쓰고 나면 단 게 땡겨."

"성공했네. 축하해."

"고마워 황자님. 이게 다 황자님 덕분이야."

톨라리는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는 조신하게 몸을 일으킨 다음, 걱정스런 얼굴로 옆에 서있던 루네를 껴안았다.

"루네야. 나 퓨어 매직 성공했어."

"저도 봤어요. 축하드려요 언니."

"나 성공했어. 나 성공했다고.... 으아아아아아!"

그리고는 루네를 껴안은 채 함성을 지르며 방방 뛰기 시작했다.

"성공이야! 성공! 퓨어매직! 퓨어매직! 될 줄 알았어! 될 줄 알았다고! 이 영광을...."

그리고는 루네를 갑자기 놓아주며 몸을 홱 돌려 내 쪽으로 절을 했다.

"황자님께 돌릴게! 이게 다 황자님 덕분이야! 충성충성! 신 톨라리는 황자님께 영원한 충성을 맹세합니다!"

"호들갑 떨긴. 됐으니까 빨리 일어나."

일단 억지로 톨라리를 일으켜 세우고 옷에 묻은 먼지를 털어줬다.

"나 너무 좋아. 나 완전 행복해. 황자님이 이렇게 손수 옷도 털어주고."

"옷쯤이야. 역사에 이름을 남겼는데 이 정도는 해줘야지."

"역사?"

톨라리는 눈을 크게 뜨며 되물었다.

"웬 역사? 퓨어 매직은 황자님이 먼저 썼는데?

"이쪽은 신성마법 섞어서 편법으로 쓴 거고. 넌 순수하게 원소마법만 가지고 달성했잖아? 그러니 역사 맞아."

"그건.... 그래. 헤헤. 히히. 헤헤헤."

와, 25살이나 먹은 인간이 저렇게 바보처럼 웃는 게 가능하구나. 좋게 말하면 순수하고 정확하게 말하면 멍청하게.

"이거 한번 써버렸으니 알지? 다시 쓰려면 뇌가속 영약 또 한참 먹어야 하는 거?"

"헤헤... 흐흐흐.... 아니? 안 그래도 될 걸?"

한없이 멍청하게 웃던 톨라리가 갑자기 정색하며 고개를 저었다.

"이젠 감 잡음. 쓰기 전에 딱 한 병만 마시면 다시 쓸 수 있을 거야."

"...정말?"

"정말. 나 괜한 소리 안 해. 특히 황자님 앞에선."

보통은 몇 개월 동안 꾸준히 복용하면서 머릿속을 뇌가속 적응 상태로 만들어야 할 텐데?

"근데 앞으로 이거 쓸 일 없을 듯? 괴물한텐 안 통하고, 마법사끼리 싸울 일도 없을 테고."

"...아니."

"아니? 왜?"

"어쩌면 쓸 일이 생길지도 몰라."

젝트가 사라졌거든.

나는 행방이 묘연한 또 다른 아크 위저드를 설명했다. 톨라리는 눈살을 찌푸리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젝트를 제외하고도, 만악의 근원인 후원자에 대해 경계하지 않을 수 없다. 녀석은 존재 자체가 마법이었으니까.

물론 녀석은 일식 게이트 때 자기 목숨을 미끼로 걸고 낚시에 성공했지만.

그렇다고 이계에 후원자 같은 놈이 하나만 있진 않겠지?

어쩌면 이번 침공에는 이계의 군대에 후원자가 포함되어 있을지도 모른다.

그렇다면 퓨어 매직이 활약할 일도 생기지 않을까?

그래서 나도 퓨어 매직을 좀 더 빨리 발동하는 방법을 구상했다. 급박한 실전에서 사용할 수 있도록.

이계 황자는 세상을 구하고 싶다 103화

30장 폭풍전야

"암튼 나 퓨어 매직 성공함. 나 잘했지? 잘했으니 상주세요. 황자님."

"응? 상?"

갑자기 뭐지? 이 뜬금없는 요구는?

"...하긴. 못 줄 건 또 뭐야."

"만세!"

"뭐든 말해. 돈 필요해? 아니면 저택 옆에 조그만 마탑이라도 지어 줄까?"

"코어 주세요."

"뭐?"

톨라리는 히히 웃으며 공손한 자세로 손바닥을 내밀었다.

"에이션트 베어 코어 하나 남았다며? 그거 나 줘."

아니, 잠깐. 여기서 코어를?

"뭐든 준다고 했지? 그러니 얼른. 상 줘라! 상 줘라! 상 줘라! 루네야 너도 같이."

"상.... 상 줘라. 상 줘라. 아니 상 주세요."

두 여자가 똑같이 박수를 치며 압박의 강도를 높이기 시작했다. 큭, 이런 거였나? 저택에 도착하자마자 뜬금없이 루네의 성과를 보여준다더니.... 이 녀석들 처음부터 계획적이었어! 날 함정에 빠뜨린 거라고!

* * *

잠시 분위기에 휩쓸리긴 했지만, 톨라리에겐 일단 후보에 넣어 주겠다는 정도만 약속 하고 넘어갔다.

그게 그렇잖아? 아무리 분위기가 업되었다 해도 옜다 너 줄게! 하며 귀한 코어를 함부로 넘길 수야 없지. 이것도 다 심사숙고해서 코어의 주인을 정하는 거라고

그런데 마법사에게 코어라.

전에는 아예 안중에도 없었는데, 앞으로는 이것도 생각을 좀 해봐야겠다.

당연 기사에게 먹이는 것보다는 효율이 떨어질 것이다. 하지만 상황에 따라 새로운 시너지가 발생할지도 모르잖아?

르갈이 말했던 공감각이라는 게 어떤 식으로 발현될지는 미지수다. 전부 케바케니까. 나 역시 군주의 눈에 추가로 공감각이 붙을 거라곤 상사도 못했고.

"황자님. 왜 한쪽 눈을 계속 깜빡이십니까?"

훈련장에 마주 보고 있던 다비가 물었다. 나는 꽉 감았던 눈을 뜨며 고개를 저었다.

"아니야. 눈에 뭐 들어간 거 같아서."

다행인 건 군주의 눈도 감정안처럼 온, 오프가 가능해 졌다는 것. 아직 완벽하진 않지만 평소에는 꺼 놓는 게 가능하다.

하지만 지금은 다시 발동 시켜야 한다. 중요한 승부를 앞두고 있으니까.

바로 다비와의 실전 테스트.

전에 어둠산에서는 내가 방어만 했지? 이번엔 내가 공격하고 다비가 수비만 하기로 했다.

다만 그때에 비해 달라진 게 있다면....

'룩카르? 들려?'

-들린다. 계약자여. 날 불러 눈앞의 저 인간과 대결시킬 생각인가?

'그럴 리가. 대결은 내가 해야지.'

나는 속으로 심호흡을 하며 룩카르에게 명령했다.

'지금부터 내 몸에 빙의해. 정령 빙의 상태로 다비와 대련할 거야.'

-진심인가?

'진심이고말고. 전에 이그니스가 보증해 줬어. 자긴 몰라도 너라면 가능할 거라고.'

-불의 정령왕께서 그렇게 말씀하셨단 말인가?

룩카르는 잠시 침묵하다 말을 이었다.

-계약자의 육체가 최근 들어 급속도로 강화된 건 사실이다. 하지만 내 기준엔 아직 미약하다. 분명 오래 버티지 못하고 강제로 해체될 것이다.

'대충 몇 분쯤 버틸까?'

-그것은 해봐야 안다. 확실한 건 3분을 넘기진 못한다.

전에 메르데스도 조약돌 정령과 빙의가 5분이었다고 했지? 목숨 건 실전도 아닌데 3분이면 충분하겠지 뭐.

'알았어. 위험할 거 같으면 바로 해체할게.'

-네가 직접 해체하지 않아도, 내가 먼저 해체될 것이다. 그럼 충격에 대비해라.

바로 그 순간, 온몸이 전율했다.

거대한 바위들의 틈 속에서 짓눌리는 느낌.

"악...."

하지만 고통은 잠시였다. 세상에 죽는 줄 알았네. 통증이 몇 초만 길었으면 의식이 저세상 갔겠어.

하지만 그만한 가치가 있었다.

몸이 어느새 투명한 바위 같은 형상에 덮여 있다. 일종의 바위 갑옷이라고 할까? 물론 무게는 전혀 느껴지지 않지만.

음....

정령빙의가 이런 거였구나.

온몸이 차분하고 안정되어 있다. 마음에 흔들림이나 기복도 적어졌고.

빙의한 정령이 바위라서 그런가?

마치 나 자신이 바위가 된 느낌이다. 바위처럼 단단하게.

증강된 힘도 확실히 체감 된다. 전에 억지로 한번 하급 마갑을 입어 봤는데, 오히려 그때보다도 한층 더 강해진 느낌.

그러면서도 마갑 특유의 중량적인 압박감이나 체력이 빨리는 느낌도 전혀 없고.

"...이게 마갑 보다 훨씬 좋네"

"황자님? 시작하시겠습니까?"

검을 뽑아든 다비가 방어 자세를 갖췄다. 나는 태어나서 처음 느끼는 묵직한 고양감을 만끽하며 고개를 저었다.

"잠시만. 이거 기분이 묘해서 적응 좀 해야겠어. 적응 끝나면 공격할게."

"네. 언제든지 오십시오."

"후우...."

호흡을 반복할수록 기분이 정말 뭐랄까....

좋다.

정령과의 일체감이 이렇게 좋은 것이었을 줄이야. 마음 같아서는 이대로 우뚝 선 채 숨만 쉬다 끝내고 싶을 지경이다.

하지만 그럴 수야 없지.

"...시작."

나는 가볍게 몸을 날리며 검을 휘둘렀다.

부웅!

호를 그리는 칼날에서 지금껏 본적 없던 속도감이 느껴진다.

이거 너무 강해진 거 아닌가? 상상 이상인데?

이러다 혹시 다비한테 큰일 날지도?

물론 설레발이었다.

슥!

다비는 내 공격 따윈 받아칠 필요도 없다는 듯, 그저 작은 발놀림으로 가볍게 피하기 시작했다.

쳇, 그럼 그렇지.

하지만 군주의 눈을 통해 녀석의 감정이 어디로 흐르는지 보인다.

물론 대부분은 내 몸을 향해 쏟아지고 있다. 그 어떤 적의도 느낄 수 없는 순수한 집중, 몰두.

이걸로 내 움직임을 읽고 있는 거겠지?

붕!

다음 공격도 여유 있게 피했다. 하지만 피하기 직전에 의식의 흐름을 읽었고, 그쪽을 향해 미리 칼날을 느리게 가속하며 휘둘렀다.

그리고 중간 쯤 지났을 때 템포를 바꿔 빠른 가속으로.

푸확!

서로 다른 가속이 한 지점에 만나 미세한 진공을 만들어 뿌리고, 그 진공이 복구되는 과정에서 충격파를 일으키며 목표를 박살낸다.

이것이 바로 풍압검.

그런데 다비는 이미 그곳에 없었다.

콰과과광!

작열하는 충격파가 맨땅을 두드린 순간, 다비의 의식은 이미 그곳을 떠나 내 측면을 향해 흐르고 있었다.

촥!

심지어 거기서 한 번 더 파고들며 내 배후를 잡아버렸다!

"칫...."

군주의 눈에는 분명 보였는데.

하지만 내 몸이 눈의 반응을 따라 잡지 못한다.

아니, 이건 대체 뭔 놈의 속도지? 사람이 어떻게 저렇게 빠르게 움직일 수 있어....

라고 할 줄 알았지?

콰앙!

지면을 박차고 뒤로 들이받은 몸에 뭔가가 충돌했다. 물론 다비일 테고.

너는 곡선으로 파고들었지만 나는 직선으로 들이 받으면 그만이다. 과연 누가 더 빠를까?

"흡...."

다비가 숨을 멈추는 소리가 들린다. 나는 몸을 회전하며 검을 휘둘렀다.

보지도 않고.

물론 괜찮다. 소리가 난 방향에 상대가 있을 테니.

채앵!

한순간 청아한 쇳소리가 사방에 퍼졌다.

"...."

일순간, 다비의 감정이 맞부딪힌 검을 향해 폭포수처럼 쏟아졌다.

놀라움, 경이로움, 감탄. 뭐 그런 거.

하지만 정말 한 순간이었다. 다비는 손목의 작은 반동만으로 내 칼을 튕겨낸 다음, 살짝 거리를 벌리며 투쟁과 기쁨이 섞인 감정을 마음껏 쏟아냈다.

-정말 대단하십니다!

-전 감격했습니다. 이 정도로 강해지셨을 줄이야.

-상대하는 게 흥이 나는군요. 자, 계속해서 마음껏 공격 해 보십시오. 얼마든지 받아 드리겠습니다.

마치 이런 목소리가 귀에 들리는 것 같다.

그래 알았어. 나도 이제 슬슬 시동 걸렸다고.

어디 한번 진짜 전력을 쏟아 내 볼까? 다비 너라면 내가 아무리 발악해도 여유 있게 다 받아 줄 테니....

...응?

그런데 갑자기 온 세상이 내 얼굴을 향해 솟구쳤다.

꽝!

물론 그럴 일이 생길 리 없으니, 반대로 내 얼굴이 바닥을 향해 추락 한 거겠지?

"황자님!"

기겁하는 다비의 목소리와 함께, 나는 가까스로 손을 움직여 스스로를 향해 회복마법을 퍼부었다.

"힐링... 블레스... 페인 킬러...."

그리고 진통 마법까지.

하지만 쏟아지는 통증이 진통의 벽을 뚫고 온몸을 두드리기 시작했다.

"으, 으악.... 아으야....

"황자님! 괜찮으십니까? 갑자기 쓰러지셨습니다!"

"으... 괜... 괜찮은데 저기 영약...."

가까스로 손가락을 뻗자, 다비는 쏜살같이 훈련장 구석에 놓아둔 영약박스를 들고 돌아왔다.

"여기 있습니다!"

"후, 후아...."

통증으로 죄여드는 숨을 억지로라도 몰아쉬었다. 안 그러면 쇼크로 기절할지도 모르거든.

그리고 잽싸게 각종 영약병을 열고 입안에 부어 넣었다. 바로 이 순간을 위해 준비한 진통과 회복의 스페셜 영약들을.

"으아... 후아... 하극...."

"괜찮아지셨습니까? 얼굴이 창백했는데 어느 정도 돌아왔습니다."

"그래? 휴. 그러게."

하지만 거기서 끝이 아니었다.

빙의되었던 룩카르가 완전히 사라지는 것을 느끼며, 동시에 끝도 없는 날카로운 돌조각이 온몸을 후비기 시작했다.

정확히는 후비는 환각이지만.

"어.... 메르데스 말로는 여기서 아파 죽는다는데."

"네? 무슨 말씀이십니까?"

"정령 빙의 후유증. 그래서 방금 통각 차단 영약을 마셨어."

"통각 차단이라니, 그런 것도 있습니까?"

"있지. 근데 이거 마시면 몸이 마비가 돼. 끙.... 나 좀 일으켜 줄래?"

다비는 내민 손을 움켜쥐고 쭉 잡아당기며 한숨을 내쉬었다.

"빙의 후유증이 이정도로 심각할 줄은 몰랐습니다. 메르데스는 시간에 맞춰 칼같이 빙의를 풀었던 거군요."

"걔도 처음엔 빨리 못 풀어서 죽는 줄 알았대. 휴, 근데 아쉽네."

나는 떨어뜨린 칼을 집어넣으며 한숨을 내쉬었다.

"방금 진짜 좋았었는데. 처음에 적응한답시고 너무 많이 시간을 낭비했어. 그것만 아니었으면 좀 더 즐겼을 텐데."

"그랬으면 제가 위험했을 겁니다. 어찌나 제 허를 찌르는 공격을 하시던지, 솔직히 잔뜩 쫄았었습니다."

웃기시네. 하나도 안 쫄았으면서. 넌 내가 감정을 읽을 수 있는 거 모르지?

"쫄기는...."

나는 발동시킨 군주의 눈을 억지로 닫아 버렸다. 이것도 계속 켜 놓고 있으면 뇌가 받는 스트레스가 장난 아니거든.

"솔직히 놀랐습니다. 특히 황자님의 배후로 돌아들어가는 순간에 갑자기 온몸을 뒤로 날리시지 않았습니까?"

"그랬지. 등판 어택."

"정말 허를 찌르는 공격이었습니다. 빙의된 정령 때문인지, 무슨 거대한 돌덩어리에 들이 받힌 줄 알았습니다."

"근데 그것도 네가 수비만 하는 상황이라 시도한야. 진검승부였으면 내 몸이 반으로 쪼개졌을 걸?"

"꼭 그렇지만도 않습니다. 제가 반격 각을 잡기도 전에 충돌했거든요."

"진짜?"

그만큼 내 예측과 움직임이 맞아 떨어졌다는 뜻이다. 하지만 그래봤자....

"그래봤자, 너 지금 입고 있는 거 하급 마갑 아냐?"

"네?"

다비는 놀란 눈으로 자신의 갑옷을 살폈다.

"그렇습니다만.... 등급 표시도 안 된 시제품인데 어떻게 바로 아셨습니까?"

"다 아는 수가 있어. 암튼 너 중급마갑만 입었어도 방금 그거 가볍게 피하거나 받아 쳤을 걸? 결국 봐 준거지? 안 그래?"

"물론 그렇습니다."

다비는 더는 가식을 떨지 않고 시원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명색이 나이트 마스터니까요. 그럼에도 황자님의 성장 속도는 가공할 만합니다. 힘과 속도뿐만 아니라, 제 움직임을 미리 예측하고 최선의 수를 깔아 놓는 판단력이 일품이었습니다."

그야 뭐. 지난 수십 년의 경험에 군주의 눈의 힘이 더해졌으니까.

"마음 같아서는 당장이라도 황자님의 공격을 계속 받아 보고 싶습니다. 몸은 좀 어떠십니까?"

"최악이야. 앞으로 대충 두 시간은."

일종의 전신마취 상태라 촉감이 거의 느껴지지 않는다. 두 발로 서 있는 게 아슬아슬할 정도로.

"물론 마취 풀려도 안 돼. 룩카르가 다시 충전될 때까지 사흘은 걸리거든."

이것이 정령마법의 단점이다. 한번 사용하면 다시 쓸 때까지 충전 시간이 필요하다는 것.

"하긴, 전에 메르데스 양도 사흘에 한 번씩 빙의가 가능하다고 했습니다. 안타깝지만 훈련은 여기 까지겠군요."

"그래. 여기까지야. 순식간에 끝나긴 했지만, 그래도 평가를 하자면 어때?"

"룩카르와 빙의한 황자님의 실력을 평가하자면...."

다비는 잠시 생각하다 가볍게 말했다.

"일단 나이트 익스퍼트 등급인 건 확실합니다."

"그렇겠지. 풍압검도 자유자재로 써지던데."

"개인차를 감안해도 최소 중견급은 되는 익스퍼트입니다. 조금만 더 올라오면 나이트 커맨더에 도전할 정도일까요? 단숨에 여기까지 끌어올릴 수 있다는 게 믿겨지지 않을 정도입니다. 다만 지속 시간이 3분도 안 된다는 게 문제군요."

그렇지.

이건 뭐 컵라면도 아니고.... 3분만 지나면 완전 퍼져버리니.

이계 황자는 세상을 구하고 싶다 104화

30장 폭풍전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