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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계 황자는 세상을 구하고 싶다 96화

28장 언더 더 마운틴

"집게를 모았다 피는 순간 다수의 충격파가 방출되었습니다. 엄청난 악력이군요. 저걸 악력이라 불러도 되는지는 모르겠습니다만.... 족장의 갑옷은 이미 박살났을 겁니다."

지켜보던 다비의 손에 이미 칼이 쥐어져 있었다.

그리고 통로 위로 완전히 올라온 여왕의 전신이 눈에 들어왔다. 사이즈는 대략 일반적인 땅벌레의 세 배 이상.

스스스스스스슥!

여왕은 좌우로 갈라진 턱으로 기괴한 소리를 내며 집게발을 치켜들었고, 동시에 쓰러진 밥달의 머리 위로 거대한 얼음이 맺히기 시작했다.

"아이스 미티어?"

급으로만 치면 템페스트의 바로 아래 있는 강력한 냉기마법이다. 그것도 한 덩어리가 아니라 동시에 네댓 개.

"쿠, 쿠워! 으, 움직여! 움직이라고!"

바동거리며 몸부림치는 밥달의 위로 거대한 얼음덩어리가 내리 꽂힌다.

정확히는 녀석의 몸을 감싼 빛의 방패 위로.

콰지지지지지지직!

"황자님!"

뒤에서 다비의 목소리가 울렸다. 이미 비행 마법을 발동한 나는 쓰러진 에이션트 베어의 앞을 가로 막으며 착지했다.

"밥달! 괜찮아? 너 덩치가 너무 커서 방패 세 개로도 커버가 안됐어!"

"클로드! 난 돕지 말라고 말했다!"

밥달은 자신을 막아준 빛의 방패를 손으로 마구 밀어냈다.

"이건 족장인 나의 사명이다! 우리 에이션트 베어의 싸움이란 말이다! 외부인이 도우면 안 된다!"

"외부인? 내가 왜 외부인인데?"

그러게 말이야. 나는 멀리서 다가오는 땅벌레 여왕을 향해 팔을 뻗으며 웃었다.

"나도 일종의 에이션트 베어 아냐? 너희 코어를 먹었으니까."

"...뭐?"

"아까 보니까 추위도 안타더라. 이미 반쯤 곰돌이 다 됐어. 그러니 포기 해. 난 외부인이 아니야."

뭐가 어쨌든 여기서 밥달이를 죽게 둘 수는 없다. 나중에 이계와의 전쟁에서 써먹어야 하고, 또 아직 받아 내야 할 코어가 있기도 하니까.

캬라라라라라라라락!

여왕은 순간 몸을 세우며 배 쪽에 달린 수십 개의 다리를 물결처럼 흔들었다.

으 끔찍한 거.

군주의 눈으로 보니 내부에서 어떤 힘을 끌어 올리는 과정인가 본데....

"큭! 피해라 클로드! 저거 맞으면 죽는다!"

"저게 뭔데?"

콰앙!

순간 여왕은 자신의 꽁무니를 지면에 박아 넣고, 복부를 꿈틀거리며 뭔가를 빨아들이기 시작했다.

"빨아들인 토사를 뿜는다! 우리도 못 버티는 냉기에, 맹독에, 땅벌레의 단단한 갑각 조각까지 섞어서 온 사방에 뿌린다!"

"그래?"

"아직 시간 있다! 저거 시작되면 다 죽는다! 모두 전투 그만! 여왕이 발작을 시작했다! 실패! 실패다! 모두 밖으로 도망 쳐!"

밥달의 외침에, 이미 호위벌레를 전멸시킨 곰돌이들이 몸을 돌려 출구를 향해 달리기 시작했다.

뭐야, 기껏 여기까지 와서는 그냥 이렇게 도망친다고?

아마도 여왕이 저 필살기 같은걸 쓰기 전에 끝장 낼 생각이었나 본데....

"여왕 껍질 단단했다. 엘프 군주 칼도 안 들었다. 난 실패다. 몸 안 움직인다. 너라도 살아가라 클로드."

"글세. 기왕이면...."

나는 땅벌레 여왕이 뿜어낼 토사물 쇼를 머릿속에 그리며 눈살을 찌푸렸다.

"다 같이 사는 게 좋지 않을까?"

상대가 여왕이라면, 이쪽도 여왕으로 맞서 주는 게 예의겠지?

"이그니스."

화륵!

"추워!"

불의 여왕은 소환되자마자 몸을 움츠리며 엄살을 떨었다.

"무엇이냐 클로드? 여긴 왜 이리 추운 것이냐? 이러다 다 얼어 죽겠구나."

그게 지금 온몸이 작열하며 타오르는 불의 정령왕이 할 소리냐?

"추우면 불을 피우면 되지 않을까?"

"정답이다."

이그니스는 미소를 지으며 몸을 돌렸다.

그리고는 뭔가를 막 뿜어내려는 거대한 땅벌레 여왕을 항해, 손에 맺힌 불덩어리를 단숨에 집어 던졌다.

지이이이이이이익!

벌레가 막 토해낸 무언가와, 거대한 불덩어리가 충돌하며 맹렬한 수증기를 일으켰다.

그리고 이어지는 폭발.

콰과과과과과과광!

하지만 불의 여왕은 멈추지 않았다.

"얼음의 정수가 담긴 벌레라. 죽이는 가치가 있겠구나."

평소보다 흥이 올라간 여왕은, 그야말로 춤을 추듯 몸을 회전하며 양손에 맺힌 불덩어리를 미친 듯이 투척하기 시작했다.

던지고.

콰과과과광!

던지고.

콰과과과과과광!

또 던진다.

콰과과과과광!

한발 한발이 템페스트에 필적하는 무지막지한 화력. 나는 연이은 폭발에 실내 기압이 변하는 걸 느끼며 뒷걸음쳤다.

"이그니스? 저거 이미 끝난 거 같은데?"

"방금 뭐라 했느냐?"

이그니스는 한참 만에 불놀이를 멈추며 내 쪽으로 몸을 돌렸다.

폭염이 걷힌 곳에 남은 건 처참한 잔해뿐.

그나마 형태를 유지하고 있는 건 지면에 박아 넣었던 꽁무니가 전부였다. 승리한 여왕은 훌쩍 몸을 날려서는, 그 꽁무니 속으로 팔을 푹 쑤셔 넣는 만행을 저질렀다.

치이이이이익!

으, 저게 지금 뭐 하는 거야?

"호, 여기 있었구나."

이그니스는 적의 시체에서 뭔가를 끄집어내고는 내 쪽으로 집어 던졌다.

"받아라."

"음?"

얼떨결에 받은 건 내 머리통만한 하늘빛의 덩어리였다. 으 차거! 뭐가 이렇게 차갑지? 나 냉기 저항력 만렙 찍은 거 아니었나?

"이것은 얼음의 정수다."

여왕은 순식간에 내 옆으로 날아와서는 미소를 지었다.

"세상엔 가끔씩 이런 걸 품은 생물이 태어나지. 그 중에도 이렇게 큰 정수는 처음 보는 군. 날 소환한 건 잘한 선택이다. 안 그랬으면 골치 아팠을 거야."

"그래? 이게 뭐 하는 건데?"

"정수는 일종의 마력 보약이다. 해당 속성을 가진 존재에 한해서지만."

"부, 불의 정령왕...."

그 와중에 밥달이 이그니스를 피해 뒤로 몸을 끌었다. 하긴 갑자기 저런 게 나타났으니 겁먹을 만도 하지. 나는 밥달의 몸에 회복 마법을 걸며 안심시켰다.

"걱정 마. 해치지 않으니까. 이그니스는 나와 계약했어."

"정령왕과 계약을.... 인간이 말이냐?"

"인간이면서 동시에 에이션트 베어잖아? 여기에 에이션트 울프와 에이션트 씰이기도 하고."

"...."

밥달은 벌어진 입을 다물지 못했다. 한편 불의 여왕은 허리를 깊이 숙이며 내 얼굴을 이리저리 살피기 시작했다.

"그새 몸이 많이 좋아졌구나. 클로드. 나의 계약자여."

"에이션트 베어 코어를 먹었거든. 어때? 이 정도면 정령빙의 할 수 있을까?"

"흐음.... 아직 날 받아들이기엔 미숙하다."

여왕은 손끝으로 내 가슴을 쓱 훑으며 눈살을 찌푸렸다.

치익!

"야! 잠깐! 화력 낮춰! 옷 타! 옷 탄다고!"

"일부러 그랬다. 맨 몸을 좀 보고 싶어서."

"뭐? 뭐?"

"농담이다. 후후."

여왕은 눈을 가늘게 뜨며 미소를 지었다.

"그래도 다른 녀석은 가능하겠구나. 그 바위정령이라든가."

"룩카르 말이지?"

"그래. 그 녀석이라면 잠시는 가능 할 것 같다. 음? 그런데 정령이 또 하나가 늘어났구나. 이건 나무 정령인가?"

"맞아. 나무 정령 드라이어드."

"흐흥.... 혹시 모르니 나와 동시에 소환하지 마라. 자칫 녀석을 태워 버리면 곤란할 테니."

"주의할게. 그런데...."

그런데 지하 광장이 흔들렸다.

쿠구구구궁...!

이미 엄청 깊은 지하인데도, 더 깊은 어딘가로 부터 강한 진동이 올라왔다.

"이 진동은...."

이그니스가 몸을 돌리며 죽은 땅벌레 여왕의 잔해를 살폈다. 그러다 갑자기 입을 벌리며 정령왕답지 않은 얼빵한 표정을 지었다.

"아."

"아?"

"내가 실수했다. 저 벌레."

"땅벌레 여왕? 왜?"

"자신의 몸을 땅굴의 지맥과 연결하고 있었다. 그런데 내가 너무 과하게 두드려서.... 충격이 몸을 타고 지맥으로 전달됐구나."

"그래서?"

"땅굴이 무너지기 시작했다. 당장 달려라."

"달리라고?"

"아니 날아라. 날아서 도망쳐라 클로드. 그리고 거기 인간!"

"저 말씀입니까?"

뒤에 있던 다비가 손가락으로 자신을 가리켰다. 이그니스는 쓰러진 밥달에게 다가가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너. 너도 지금 당장 출구까지 달려 도망쳐라. 내가 너까지 케어해 줄 수 없으니까."

그러고는 냉큼 밥달의 거대한 몸을 안아 들었다.

호리호리하고 나긋나긋한 몸매의 여왕이, 거대한 밥달을 번쩍 안아든 모습이 뭔가 웃기긴 한데....

"크어어어! 뜨겁다! 뜨겁습니다, 정령왕님! 나 탄다! 나 타죽어!"

순간 밥달의 털이 타들어가며 비명을 지르기 시작했다. 여왕은 급하게 화기를 낮추며 출구 쪽으로 달리기 시작했다.

"미안하구나. 그래도 참을 수 있겠지?"

"크, 크으. 차, 참기 힘듭니다...."

"기다려!"

저러다 곰 통구이 되겠다! 나는 비행마법으로 급하게 따라붙으며 밥달의 몸에 프로텍션 매직을 걸어주었다.

바로 그때, 광장의 천장이 무너져 내렸다.

쿠구구구구궁!

"시간 없어! 소환마법 풀리면 어떻게 해!"

품에 있는 얼음의 정수를 꽉 끌어안으며 소리쳤다. 막 광장을 벗어난 이그니스는 괴로워하는 밥달을 힐끔 보며 대꾸했다.

"괜찮다. 앞으로 5분은 버틸 수 있다."

"여기 내려오는 데 두 시간 걸렸는데? 5분 가지고는 탈출 못 할걸? 몸 좀 어때? 회복마법 썼는데?"

"나, 난 버리고 가라 클로드. 여전히 몸이 움직이지 않는다...."

"기특한 고대종이구나."

이그니스는 밥달에게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그런 의미에서 내가 힘을 좀 써 보마. 5분이면 충분하고도 남지."

동시에 여왕의 몸에 맹렬한 주황빛 불꽃이 솟아올랐다.

푸확!

"쿠워! 쿠워어어!"

놀란 밥달이 소리를 지르는 사이, 녀석을 안아 든 여왕의 몸이 믿을 수 없을 만큼 빠르게 멀어졌다.

슉!

비행 마법을 가볍게 능가하는 속도다. 저건 또 뭔데? 거의 톨라리 급가속만큼 빠르잖아?

쿠구구구궁....

그 와중에 동굴은 계속 무너져 내렸다. 그러고 보니 내가 가장 뒤에 쳐져 있네?

어....

이러다 설마 다 살고 나 혼자 깔려 죽는 건 아니겠지?

아무리 비행마법이라 해도, 이런 지하 동굴에선 야외만큼 속도를 높일 수 없다고!

* * *

결과적으로는, 날 기다리며 속도를 늦춘 다비와 함께 마지막으로 땅굴을 빠져나왔다.

쿠쿠구구구구궁....

빠져나오고 얼마 지나지 않아, 땅굴 안에서 굉음이 울리며 뿌연 먼지가 솟구쳤다.

휴, 진짜 아슬아슬한.... 정도까지는 아니지만, 그래도 1분만 늦었어도 위험할 뻔했다.

땅굴 밖에는 미리 빠져나온 에이션트 베어들이 대열을 갖추며 서 있었다. 이거 가만 보고 있자니 열 받네?

"야! 너희들! 아무리 그래도 족장이 혼자 쓰러져 있는데 냅두고 내빼는 게 어디 있어!"

"괜... 괜찮다. 클로드."

그러자 입구 근처에 쓰러져 있던 밥달이 겨우 몸을 일으켰다.

"원래 그러기로 계획되어 있던 거다. 그러니 혼내지 마라."

"원래?"

"땅벌레 여왕을 못 죽이면.... 족장이 끝까지 남아 녀석을 막는 사이에 나머지가 탈출한다. 그게 부족의 원칙이다. 크윽...."

신음하는 밥달의 모습은 놀랄 만큼 초라했다. 아무래도 풍성했던 털이 이그니스 덕분에 싹 다 타버린 바람에....

그러고 보니 다른 곰돌이들도 족장 버리고 나왔다는 사실에 자책하는지 침울해져 있었다. 밥달은 그런 부하들을 보며 앞발을 번쩍 치켜들었다.

"하지만 덕분에 난 살았고, 땅벌레 여왕도 해치웠다. 그러니 우린 이겼다!"

"쿠워!"

"쿠워어!"

"쿠워어어어!"

그제야 우중충한 분위기가 걷히며, 승리의 함성이 쏟아지기 시작했다.

"쿠워어어어어! 우리에게 승리를 가져다 준건 바로 여기 있는 작은 인간이다! 클로드! 하지만 클로드는 내 코어를 흡수했다. 그러니 우리 에이션트 베어의 일원이나 마찬가지다!"

"후엉?"

"후, 후어?"

순간 당황하던 곰돌이들이 하나둘씩 내개 다가와서 킁킁거리기 시작했다.

"흠흠. 맞아."

"이거 확실히 족장 냄새 남."

"킁. 이거 우리 냄새다. 에이션트 베어다."

"뭔가 다른 냄새도 많이 나는데?"

"그래도 나쁘지 않지?"

"나쁘긴! 아주 좋다!"

그리고는 갑자기 날 치켜들고 헹가래를 치기 시작했다.

"만세! 만세! 만세!"

"클로드 만세!"

"족장 만세! 에이션트 베어 만세!"

"우린 이겼다! 이겼다고!"

으 어지러워.

맘만 먹으면 비행마법으로 빠져나올 수 있지만.... 분위기 좋은데 그냥 내 한 몸 희생해야지. 휴.

그래야 나중에 전쟁에 끌어들일 때 조금이라도 더 도움이 되겠지? 이거 너무 계산이 속물적인가?

이계 황자는 세상을 구하고 싶다 97화

29장 번개와 얼음과 생명

모든 것이 무너져 내린, 깊은 지하의 땅굴.

그 붕괴된 틈바구니 속 어둠에서, 온몸을 붕대로 감은 후원자 2호가 오열하며 가슴을 쥐어뜯고 있었다.

"흐흑... 안 돼.... 이럴 순 없어."

하지만 2호에겐 눈물을 흘릴 눈도, 쥐어뜯을 가슴도 없었다.

남은 것은 처참한 고통과 허무함뿐이었다. 2호는 붕괴된 암벽사이에 살짝 드러나 있는 땅벌레의 유해를 움켜쥐며 소리쳤다.

"으아아아아악! 이 죽일 놈의 클로드으으으!"

대체 어떻게 알았을까?

자신조차 인수인계를 받기 전까지는 모르고 있었다. 후원자 1호가 이 깊은 땅속을 찾아, 기나긴 커뮤니케이션의 벽을 뚫고 땅벌레 여왕의 소원을 들어줬다는 사실을.

"클로드! 이 귀신같은 놈! 개 같은 자식! 썩어 문드러져 죽어버려라!"

날아가 버린 멘탈을 주체할 수 없었다. 2호는 손에 쥔 땅벌레 껍질을 으스러뜨리며 비명을 질렀다.

"으아아아아악! 또 늦었어! 또 늦어 버렸다고! 심지어 여왕의 소원이었던 얼음의 핵도 뽑아갔어! 하하! 하하하! 주재자님 죄송합니다! 제가 또 늦어버렸습니다! 그 빌어먹을 클로드가 또 선수를 쳤다고요! 대체 어떻게!"

당장이라도 몸을 감싼 붕대를 풀어버리고, 이 내면에 끌어 넘치는 분노와 허탈감을 분출하고 싶었다.

하지만 붕대를 풀어버리면 그는 더 이상 자기 자신이 아니게 된다.

오직 선별된 극소수의 사이크인만이 붕대로 몸을 감쌀 특권을 누린다. 2호는 가까스로 감정을 가라앉히며 좁은 틈 사이에 몸을 숙였다.

"안됩니다. 이건 안 돼요. 이미 이 땅벌레 여왕을 위한 모든 준비를 끝내 놨단 말입니다. 여왕은 정말 특별한 존재였는데.... 그래서 1호도 가까스로 여왕의 소원을 알아내 얼음의 핵을 주었는데...."

바로 그 문제의 얼음의 핵을 만들기 위해, 당시 1호는 자신에게 주어진 자원의 상당량을 투자해야 했다.

"그만큼 뒤틀림이 엄청났다고 하지요. 지상의 모든 생물을 증오하고, 특히 에이션트 베어에 대한 증오는 뒤틀림을 넘어, 이 알드 차원 전체를 뒤덮을 만큼의 가능성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것을 위해 모든 준비를 끝내고 넘어왔는데... 그랬는데... 하, 하, 하하하...."

헛웃음이 절로 나왔다. 이미 자신에게 주어진 자원의 대부분을 여왕 개조작업을 위한 키트에 투입한 상태.

그만큼 확신이 있었다.

제아무리 클로드라 해도, 여기까지 기어 들어와 여왕을 제거하진 못할 거라는.

애당초 클로드의 모국인 페이우드 제국은 물론이고, 대륙에 있는 모든 국가는 땅벌레의 존재 자체를 모른다.

그나마 정보를 알고 있는 건 땅굴을 팠던 드워프인데, 드워프는 이를 자신들의 수치로 여기기 때문에 결코 외부로 발설하지 않았다.

"설마 드워프 군주.... 그자가 발설한 걸까요? 이 빌어먹을 땅딸보를 당장이라도 납치해서 다리가 수백 개 달린 지네괴물로 개조해도 속이 시원하지 않을 것 같습니다만...."

문제는 드워프 군주에겐 더는 비벼볼 만한 감정의 뒤틀림이 없다는 것.

물론 1호가 그랬던 것처럼 억지로 공포나 혐오를 주입할 수도 있겠지만, 그러기엔 드워프 군주가 가진 잠재력이 너무 떨어진다.

"그래봤자 의미는 없겠죠. 그럼 남은 건 결국 둘뿐...."

하지만 그 악귀 같은 클로드가. 그 두 사람이라고 가만 놔둘 것인가?

가장 안전할 거라 판단했던 땅벌레 여왕조차 기어이 찾아 죽인 악마 같은 존재다. 당연히 제거당하는 것도 시간문제.

"일단 여기 넘어오기 전까지는 그 둘이 살아 있었습니다만.... 저는 이번에도 또 20일 동안 움직일 수 없습니다. 분명 20일 후에는 그 둘도 죽어 있겠죠. 안 돼... 그럴 순 없어.... 빌어먹을 클로드...히익!"

이제는 클로드를 떠올리기만 해도 몸서리가 쳐진다.

어둠속에서 잠시 침묵하던 2호는, 순간 오른 손으로 왼팔을 움켜쥐며 중얼거렸다.

"이대로는... 정말 주재자님의 공포가 현실이 될지도.... 그럴 수는 없습니다. 저도 1호처럼 스스로를 희생하서라도...."

순간 2호가 자신의 왼팔을 단숨에 뜯어냈다.

푸확!

뜯긴 단면으로 형태가 존재하지 않는 검뿌연 그림자가 새어 나왔다.

"악...."

2호는 비명과 함께 고개를 숙였다.

이는 다시는 복구 할 수 없는, 영구적인 존재의 손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2호는 이런 자해행위에 모든 것을 걸 수밖에 없었다.

"저도... 스스로를 희생할 수밖에 없습니다. 부족한 차원 능력을 메우려면.... 크윽!"

순간 떨어져 나간 왼팔의 붕대가 풀리며, 내부에 있던 검은 그림자가 새로운 차원의 문으로 모습을 바꾸기 시작했다.

"큭. 흐윽.... 클로드 이 개 같은 자식... 내가 너 때문에...."

차원 문 너머에는 머리가 하얗게 샌 노인이 앉아 있었다. 2호는 나오지 않는 눈물을 억지로 참으며, 차원문을 넘어 노인의 그림자 위로 한순간에 공간을 이동했다.

그러고는 언제 그랬냐는 듯, 태연한 목소리로 인사를 건넸다.

"안녕하십니까. 바이아 님. 이거 실례가 많았습니다. 제국 최고의 아크 위저드를 저희가 너무 오래 방치했군요. 슬슬 두 번째 소원을 들어 드리려 왔어야 했는데 말입니다."

"...후원자인가?"

노인은 게슴츠레한 눈으로 고개를 돌렸다. 2호는 그런 노인의 어깨에 오른손을 살짝 올리며 미소를 지었다.

"네. 저는 후원자 2호입니다."

"2호? 전에 그 녀석이 아니라고?"

노인은 2호의 몸을 위아래로 훑으며 눈살을 찌푸렸다.

"그러고 보니 뭔가 다르군. 팔이 하나 없어."

"저도 그것이 정말 아쉽게 되었습니다. 스스로의 존재를 소멸시키는 것만큼 고통스러운 일은 없으니까요."

"음? 뭐라고?"

"중요한 이야기는 아닙니다. 아, 실례. 실은 땅벌레 여왕을 잠재우기 위한 특제 독을 준비했습니다만."

2호는 다짜고짜 노인의 목에 손톱을 찔러 넣으며 웃었다.

"후후.... 뭐 아무래도 상관없겠죠. 어차피 원형은 남지 않을 테니까요."

"컥...."

노인은 눈을 까뒤집으며 한 번에 의식을 잃었다. 2호는 그런 노인을 움켜쥔 채, 다시 그림자로 끌고 내려가며 한숨을 내쉬었다.

"아쉽지만 어쩔 수 없죠. 당신을 위해 만든 건 아닙니다만 기존의 키트를 활용하는 수밖에.... 아!"

순간 모습을 감추던 2호가 움직임을 멈추며 탄성을 터뜨렸다.

"그렇군요! 그러면 되는 겁니다! 어차피 땅벌레 여왕을 위해 만든 대형 키트! 조금만 개조하면 인간 두 명 따위는 가볍게 집어넣을 수 있겠죠! 하! 하! 하하하하!"

* * *

그날 밤. 나는 또다시 벌어진 에이션트 베어의 축제를 보며 밥달에게 말했다.

"나중에 발모의 영약 가져다줄게. 타버린 털도 금방 다시 돋아 날거야."

"인간들은 그런 약도 만들었나? 고맙다. 감사히 쓰도록 하겠다."

밥달이가 꾸벅 고개를 숙였다. 털이 다 타서 그런지.... 뭔가 초라해 보이는 게 가슴이 뭉클하네. 난 왜 이렇게 얘가 마음에 드는 걸까?

-에이션트 울프와 에이션트 베어는 족장 간에 서로 코어를 교환하는 풍습이 있다.

순간 예전에 르갈이 했던 이야기가 뇌리를 스쳤다.

"아, 이거네."

"뭐가 말이냐?"

"너 원래 인간 싫어하지?"

"물론이다. 아주 싫어하지. 하지만 넌 괜찮았다."

"저기 있는 다비는?"

"다비? 힘이 강한 인간 말이군. 저 녀석도 괜찮았다. 인간치고는 느낌이 아주 좋았지."

"그게 말이야. 저 녀석도 에이션트 울프의 코어를 먹어서 그래."

"아, 그랬나?"

"그리고 너도 먹었고."

"나?"

"에이션트 베어와 에이션트 울프는 족장끼리 코어를 나누는 풍습이 있다며?"

"어...."

밥달은 커다란 눈을 한동안 껌뻑대다 헉소리와 함께 고개를 끄덕였다.

"맞다. 그랬지. 내가 정식으로 족장이 되었을 때 그 늑대들과 코어를 교환해 흡수했다. 벌써 50년 전의 일이다."

"그러니까 우린 모두 에이션트 울프의 코어로도 묶인 거야. 서로 맘에 드는 게 당연하지."

"이해했다. 과연."

밥달은 놀란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싸울 땐 그렇게 빠릿하고 흉폭하더니, 평상시엔 또 이렇게 좀 어벙한 구석이 있다.

"그럼 족장 된지 50년 넘은 거야?"

"그렇다. 정확한 건 아니지만."

"코어는 300살 먹고 나서 10년마다 하나씩 만들어 진다며? 최대 다섯 개까지? 그럼 네 속에 아직 네 개 더 있어?"

"두 개 더 있다."

"왜 두 개 밖에 없어?"

"예전에 늑대들에게 하나 넘겼고, 또 하나는 어제 널 줬으니까. 처음부터 다섯 개가 아니라 네 개였다. 앞으로 1년쯤 더 지나면 하나 더 만들어 질 것 같다."

타이밍이 그렇게 됐구나. 나는 가만히 고개를 끄덕이며 물었다.

"그럼 혹시 남는 거 두 개 다 나한테 줄 수 있어?"

"코어 말이냐? 누굴 주려고 그러냐? 저기 있는 힘 센 인간?"

"다비? 응. 다비 줄 수도 있고. 내가 잘 모셔놨다가 꼭 필요한 사람에게 넘겨주려고."

당장 새로운 코어의 주인이 다비로 확정된 건 아니다. 밥달은 깊고 그윽한 눈으로 밤하늘을 잠시 바라보다 말했다.

"나쁜 인간에게 코어가 넘어가면 안 된다. 하지만 클로드 너라면 믿을 수 있다. 퀘엑!"

그리고는 동시에 두 개의 코어를 토해냈다.

"휴. 여기 있다. 이걸로 훌륭한 에이션트 베어 둘이 또 태어나길 기대하겠다."

좋아. 이걸로 여분의 코어 획득!

하지만 부탁은 여기서 끝이 아니다. 지금부터 훨씬 더 어려운 이야기를 해야 하니까.

"고마워. 근데 가기 전에 하나 더 부탁할게 있는데."

"뭐든지 부탁해라. 우린 친구고, 전우이며, 같은 동족이다."

"...여기 처음 왔을 때 월식 게이트 이야기 했었지?"

"그래. 이계의 괴물이 쏟아졌다고. 무슨 소린지 잘 모르지만, 땅벌레 같은 괴물이 막 나왔다고 생각하면 되나?"

"맞아. 그 놈들 1년 지나면 더 많이 쏟아 질 거야. 온 세상이 박살날 정도로."

정확히는 10개월하고 14일 정도다. 여기 1년은 11개월이거든.

"그때 나 좀 도와줄래? 에이션트 베어의 전사들과 함께...."

"알았다."

밥달이는 내 말이 끝나기도 전에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게 간단히 정해도 돼? 죽을지도 모르는데. 아니, 많은 에이션트 베어가 반드시 죽을 거야."

"상관없다."

"상관없다고?"

"네 말 대로라면, 어차피 그거 못 막으면 우리 다 죽는 거 아니냐?"

그건 맞지. 이럴 땐 또 의외로 머리가 빨리 돌아가네.

"물론 안 그래도 우린 널 돕는다. 네가 우릴 도왔으니까. 그리고 우린 다 같은 부족이니까."

"...고마워."

"고맙긴."

"앞으로 10개월, 아니 9개월 안에 돌아올게. 와서 다 같이 준비 하자. 세상을 구할 준비를."

"기다리고 있겠다. 가능하면 꿀을 많이 준비해 주면 좋겠다."

"꿀? 아, 너희 꿀 먹어야 제대로 힘쓴다고 했지?"

"오늘 그만큼 싸울 수 있던 것도 꿀을 잔뜩 먹었기 때문이다."

"알았어. 오늘 마신 거 몇배의 꿀을 준비 해 놓을게."

"정말이냐? 그렇게 많이?"

밥달이 눈을 휘둥그레 뜨며 되물었다. 나는 지금도 동대륙에서 돌아오고 있을 무역선을 떠올리며 고개를 끄덕였다.

"너희 주려고 엄청 구해놨어. 바다 건너온 수입 산이야."

"오.... 알겠다. 기대하겠다. 그럼 클로드. 넌 이제 어디로 가냐?"

밥달이 입맛을 다시며 물었다. 나는 멀리 서쪽 하늘을 보며 낮은 목소리로 대답했다.

"이번에 너희 같은 든든한 동료도 얻고 했으니.... 다음엔 반대로 배신자를 처단하러 가야지."

"배신자?"

그래. 인류의 배신자.

이 세상엔 아직도 인간을 배신한 인간 놈들이 많이 남아 있거든.

* * *

이곳은 알비어스 왕국 구석에 있는 작은 시골 마을.

나는 마을 구석에 있는, 정확히 절반만 불에 타 날아간 대형 창고 앞에 서 있었다.

아크 위저드 트롬본.

지난 여러 번의 회귀를 통해 그 술 좋아하는 아저씨에게 들은 정보를 통합하자면....

대충 이 시점에, 트롬본은 여기서 술을 빚고 있었을 것이다.

그런데 대체 무슨 일이 벌어진 걸까?

나야 알 도리가 없다. 확실한 건 일식 게이트 때 출몰한 화산마인에 트롬본의 얼굴이 달려 있었다는 것뿐.

결국 그 양반이 인류의 배신자로 돌아 섰다는 건데.

하지만 트롬본은 지난 9회 차 동안 한 번도 타락하지 않았다. 심지어 회귀 1년차를 겨우 넘은 이 시점에?

그건 말이 되지 않는다.

아마도 후원자가 여기서 그 양반을 기습한 게 아닐까?

그리고는 괴물로 변하는 주사를 강제로 놓았다든가?

"그래... 그거라면 말이 돼."

말은 되지만 가슴이 쓰리다. 실력도 실력이지만 인맥도 그렇고, 순수하게 인간적으로 참 좋은 사람이었는데.

하지만 없는 아크 위저드를 아쉬워 해 봤자 아무 일도 생기지 않는다.

대신 해가 될 아크 위저드를 하루라도 빨리 제거할 수밖에.

애초에 이 머나먼 알비어스 왕국까지 날아온 이유가 트롬본의 흔적을 찾기 위해서가 아니다. 여긴 그냥 가던 길에 잠시 들렸을 뿐이고.

젝트.

과거의 톨라리와 마찬가지로, 명명백백한 인류의 배신자였던 아크위저드 젝트가 바로 이 왕국의 어딘가에 숨어 있다.

이계 황자는 세상을 구하고 싶다 98화

29장 번개와 얼음과 생명

알비어스 왕국의 수도, 블레르하임의 외곽에 있는 저택.

겉으로는 이름 없는 귀족의 소유물로 되어 있지만, 실제로는 알비어스 출신의 마법사인 젝트의 본가였다.

"...그렇게 된 것입니다. 정말 놀랍지 않습니까? 1호의 희생은 모두의 귀감이 아닐 수 없습니다. 제가 평범한 생물이었다면 눈물을 쏟으며 감격했을 겁니다."

온몸을 하얀 붕대로 감은 남자가 과장된 몸짓으로 너스레를 떨었다. 지켜보던 귀족 차림의 마법사는 눈살을 찌푸리며 되물었다.

"그러니까, 넌 내가 알던 그 후원자가 아니라고?"

"아닙니다. 그분은 이제 전설이 되신 1호이며, 저는 그 분의 뒤를 이어 전권을 인수받은 2호입니다."

"확실히 다르긴 다르군. 일단 팔이 하나 없고, 머리도 찌그러졌어. 그러고도 살 수 있니? 대체 그 머리는 어떻게 된 거지?"

2호의 머리는 마치 바람 빠진 풍선처럼 찌그러져 있었다. 2호는 고개를 숙이며 머리통에 여분으로 남은 붕대를 천천히 매만졌다.

"이것은 희생의 증거입니다."

"희생?"

"한 번의 도약을 위해 팔 하나를 희생했고, 또 한 번번의 도약을 위해 머리의 절반을 희생했습니다. 괴롭지만 어쩔 수 없는 일이었지요."

"희생이라.... 희생은 중요하지. 아무튼 너도 후원자는 후원자라 이거지?"

"그렇습니다. 저 역시 후원자입니다.

"흠...."

30대의 젊은 마법사는 한참동안 후원자를 노려보며 생각에 잠겼다.

그가 바로 페이우드 제국의 4대 아크 위저드 중 하나인 젝트였다.

지금은 몇 년 전에 벌어진 불미스런 사건으로 인해 잠시 고향에 돌아온 상태. 하지만 당장이라도 제국에 돌아가 찜찜한 사건의 결판을 내고 싶었다.

"뭐 아무래도 좋아. 내 목표는 오직 바이아를 박살내는 것뿐이니까."

바이아 역시 제국의 4대 아크 위저드 중 한명이다.

바람의 톨라리.

불의 트롬본.

번개의 젝트.

그리고 얼음의 바이아.

일부러 속성을 맞춘 것도 아닌데, 그렇게 딱 네 명이 현 시점의 아크 위저드였다.

여기에 젝트와 바이아는 서로 원수라 할 만큼 사이가 나빴다. 젝트는 자리에서 일어나 후원자의 주위를 천천히 배회하며 말했다.

"전에 후원자는 내가 아직 여물지 않았다고 했다. 감정의 뒤틀림이 부족하다나? 그래서 두 번째 소원을 들어주기 어렵다 했는데?"

"그렇습니다. 그때도 어렵고 지금도 어렵습니다만.... 잠시 실례."

후원자는 젝트의 얼굴에 손가락을 훑고는 입에 넣고 음미하기 시작했다.

"흐음. 여전하군요. 뭐 어쩔 수 있겠습니까? 한시가 급한데."

"뭐가 그리 급하지?"

"1호가 벌려놓은 후원도 이제 남은 게 별로 없습니다. 그 유지를 이어받아 처리할 시간도 고작 1년 밖에 없고 말이죠. 그러니 이건... 폐업 전의 마지막 서비스라 생각하시면 됩니다."

"혹시 부작용이 있는 건 아니겠지? 몸에 뭘 집어넣는다는 게 꺼림칙하잖아?"

"걱정 마십시오. 이번엔 전처럼 주사기를 쓰지 않을 테니까요."

"그럼 다행이군. 두 번째 소원은 먹는 약 같은 거면 좋겠는데.... 아 그렇지."

젝트는 뭔가가 떠오른 듯, 후원자의 등 뒤에서 눈을 가늘게 뜨며 물었다.

"전부터 궁금한 게 있었어. 내 목표가 바이아를 이겨 먹는 거잖아? 첫 번째 소원도 그걸 위해 항마력을 달라 했던 거고."

"네. 1호가 남긴 기록에 따르면, 젝트 님의 소원은 강력한 냉기 내성이었습니다."

"맞아. 근데 2년 전 승부에서 바이아 그 녀석이 쌍수마법으로 템페스트를 썼지. 항마력이고 방어마법이고 뭐고 다 뚫리고 죽는 줄 알았어."

"네. 그래서 쪽팔림을 참지 못해... 실례. 부끄러움을 참지 못해 이곳으로 도망쳐 오셨다 들었습니다."

"1호가 그딴 소릴 했나?"

"네. 사실이 아닙니까?"

"...."

"사실인가 보군요. 다만 그런 것 치고는 감정의 뒤틀림이 크게 심해지지 않은 것 같아 아쉽습니다만."

"내가 그 바이아 놈을 끔찍이 싫어하긴 하다만."

젝트는 양 손을 좌우로 펼치며 이를 갈았다.

"그렇다고 쌍수마법을 완성한 놈에게 이길 수 있다는 생각은 안 해. 그 정도로 양심 없진 않지."

"질만해서 진거다. 그래서 깔끔하게 인정하신 겁니까?"

"난 아직 젊으니까. 다음번엔 내가 이길 거야."

"부디 그렇게 되길 희망합니다. 그런데 무엇이 궁금하십니까?"

"감정의 뒤틀림."

"네?"

"감정의 뒤틀림, 욕망. 너희 그런 뒤틀린 마음을 가진 인간의 소원을 들어주는 게 목표 아닌가?"

"정확합니다."

"여기에 나처럼 강함 힘을 가지고 있고."

"네. 강하면 강할수록 좋습니다. 어지간히 뒤틀리지 않고서야 본판 불변의 법칙을 깨긴 어려우니까요."

"그렇다면 바이아도 똑같은데."

"네?"

"난 바이아만큼 욕망덩어리에 뒤틀린 놈을 본 적이 없어. 거기에 본판도 아크 위저드지. 혹시 나처럼 바이아한테도 후원이 붙은 건 아닌가? 설마 양쪽에 붙어서 군비경쟁을 시키고 있는 건 아니겠지?"

후원자는 바로 대답하지 않았다.

대신 저택 응접실의 한쪽 벽을 향해 팔을 뻗으며 손가락을 튕겼다.

딱!

그러자 공간이 열리며 깊은 어둠이 모습을 드러냈다.

"이건...."

어둠속은 넓고 텅 빈 공간뿐이었다. 젝트는 공간 너머를 노려보며 눈살을 찌푸렸다.

"저쪽이 너의 차원인가? 왜 이런걸 보여주지?"

"저곳은 무기고입니다."

"무기고?"

"네. 정식 명칭은 7차 무기 보관소인데, 1호의 활약과 함께 잠시 동안 텅 비게 되었습니다."

"1호? 1호는 방금 죽었다고 하지 않았나? 뭐라고 했더라.... 너희 차원의 생존 가능성을 높이기 위해 희생했다며?"

"그렇습니다. 아무튼 제국에서 터진 사건이 여기까지 전해지기 않은 건 다행이군요. 저도 서두르느라 머리 반쪽을 날린 보람이 있고 말입니다."

"뭐?"

2호의 말은 앞뒤가 맞지 않고 지리멸렬했다. 물론 의도적으로 진실들을 감췄기 때문이었지만.

"사실 알드 차원에서 진실을 전부 파악한 인간은 없습니다. 그나마 엘프 군주가 유일했는데, 신호가 끊길 걸 보면 아마도 죽은 모양입니다."

"대체 무슨 소릴... 엘프 군주? 데자르 말인가? 그리고 알드 차원은 또 뭔데?"

"바로 이곳이 알드 차원입니다. 젝트 님 당신의 차원 말이죠. 정식 명칭은 '알-드-스라-겐'인데, 뭐 당장 중요한 건 그게 아니라...."

팟!

순간 어둑하던 이계의 무기고에 조명이 들어왔다.

물론 환해졌다고 달라진 건 없었다. 텅 빈 공간은 그대로 텅 빈 공간일 뿐.

다만 무기고 구석에 관이 하나 보였다. 젝트는 멀리 있는 관을 보며 눈살을 찌푸렸다.

"저건 뭐지?"

"빈 무기고를 다시 채울, 첫 번째 무기입니다."

"무기? 암만 봐도 관 같은데...."

"아직 모르시겠습니까? 저게 바로 바이아 님입니다."

그리고 한동안 침묵이 깔렸다. 머뭇거리던 젝트는 어느 순간 쓴웃음과 함께 고개를 저었다.

"이렇게 까지 해 줄지는 몰랐는데. 하지만 너무 많이 나갔어."

"그게 무슨 말씀입니까?"

"난 바이아 놈을 단순히 죽이고 싶던 게 아니야. 싸워서 이기고 싶었지. 내 앞에 무릎 꿇리고 잔뜩 조롱하는 게 꿈이었는데.... 이젠 불가능하게 됐군."

"아, 저걸 그렇게 받아들이셨군요."

후원자는 미소를 지으며 젝트에게 다가갔다.

"일이 쉽게 풀릴 것 같아 다행입니다. 그렇다고 절 원망하시는 건 아니겠죠?"

"원망까지야. 아쉽지만 별수 없지. 솔직히 죽어 마땅한 놈이었어."

"저도 그렇게 생각합니다. 그럼 지금부터는...."

푹!

후원자는 젝트의 목덜미에 손톱을 후벼 박았다.

"컥...."

마법사의 동체시력으로는 후원자의 움직임에 반응할 수 없었다. 물론 젝트가 방심하고 있던 것도 컸지만.

"진실 타임입니다."

"큭.... 모, 몸이...."

"단순한 마비독입니다. 하지만 눈과 귀는 열려 있게 만들죠."

철컹!

그러자 멀리 있던 관이 스스로 움직이며 가까운 곳으로 다가오기 시작했다. 무릎을 꿇은 젝트는 경련을 일으키며 관을 노려보았다.

"으… 으윽...."

"진실을 알려면 깨어 있어야 하니까요. 그런데 진실이 왜 필요 할까요? 당연히 융합 전에 젝트 님의 마음을 조금이라도 더 뒤틀어 버리기 위함입니다."

"유, 융합?"

"쉿. 그건 마지막 진실입니다."

후원자는 손가락으로 입을 가리며 웃었다.

"우선 말씀드려야 할 것은, 저희들은 이제 남은 시간 동안 새로운 피후원자를 만들 수 없게 되었습니다. 추가적인 간섭이 차단되었거든요."

"으...."

"그래서 이미 간섭된, 바로 당신 같은 피후원자의 존재가 무척 귀합니다. 그러니 단순하게 주사 좀 놓고, 생체 병기로 만들어 풀어 놓는 건 자원낭비에 불가합니다. 어차피 그 막내 황자에게 막힐 테니까요. 함정을 파려면 제대로 파는 게 좋겠죠."

"막내… 황자... 클로...드? 망나니 클로드?"

"네. 살점을 모조리 찢어 한점 씩 꼭꼭 씹어 먹어도 시원치 않을 그 클로드 말입니다. 그런데 망나니? 당신이 이쪽으로 도망치기 전엔 그런 평가를 받았나 보군요."

"으...."

"지금은 그 망나니가 사이크 차원 최대의 적이 되었습니다. 덕분에 땅벌레 여왕을 위해 제가 투자한 모든 자원이 낭비 될 뻔했죠. 그렇지, 아직 말씀 안 드렸군요. 사이크는 제가 사는 차원의 이름입니다."

"사이크...."

"아무튼 이번에는 남은 자원을 최대한 효과적으로 활용하기로 했습니다. 방금 추리하신대로, 바이아 님도 저희 후원을 받으셨거든요."

그러자 코앞까지 다가온 관에서 하얀 증기가 솟구쳤다.

치이이이익!

동시에 열린 관 뚜껑이 우뚝 서며, 그곳에 묶인 늙은 남자의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비...야...."

"네. 바로 바이아 님입니다. 여기 오기 전 먼저 바이아 님에게 들렸거든요."

"이게 대체 무슨...."

"궁금하십니까? 그럼 마지막 진실을 미리 밝히도록 하죠. 으쌰!"

후원자는 주저앉은 젝트의 몸을 가뿐히 안아 들었다.

그리고는 차원을 넘어, 열려 있는 관을 향해 가벼운 걸음을 옮기기 시작했다.

"저 것은 본래 땅벌레 여왕을 넣고 본격적인 병기로 바꾸기 위한 장치였습니다."

"으.... 대체 땅벌레 여왕이 뭔데...."

"모르는 게 당연합니다. 저도 궁금하군요. 클로드는 대체 어떻게 여왕의 존재를 알아냈을까요?"

"이, 이거 놔...."

"규정 때문에 간섭된 위치의 영상만 확인할 수 있다는 게 참 안타깝습니다. 그것만 아니었어도 아니라면 클로드의 주변을 24시간 감시 할 수 있을 텐데 말이죠. 아, 혹시 톨라리 님을 알고 계십니까?"

"톨라리... 바람의?"

"네. 당신과 같은 아크 위저드지요. 본래는 그분의 영상도 확인 가능했는데, 하필 클로드가 퓨어 매직을 사용하는 바람에 톨라리의 주변에 깔아 놓은 영상막(膜)이 소멸했습니다. 이 또한 정말 아쉬운 일이 아닐 수 없군요."

"대체.... 무슨 소리를...."

"자. 도착했습니다."

후원자는 거대한 관 앞에 멈춰선 채 미소를 지었다.

"그 전에 질문 하나. 번개와 얼음이 합쳐지면 어떻게 될 거라고 생각하십니까?"

"무... 뭐?"

"예시가 추상적이었나요? 그럼 직설적으로 말하죠. 속성이 다른 아크 위저드 둘을 하나로 융합시키면 어떻게 될까요?"

"설...마...."

"네. 바로 그 설마입니다. 서로를 못 죽여 안달인 아크 위저드 두 사람. 이 둘을 하나로 융합하면 과연 어떤 시너지가 발생할까요?"

첨벙!

후원자는 열린 관속에 젝트의 몸을 내던졌다.

"후후... 정말 기대되지 않을 수가 없습니다."

"컥, 쿨럭. 으윽...."

관속엔 투명한 액체가 가득 들어 있었다. 젝트는 불가항력으로 액체에 잠기고, 또 그 액체를 마실 수밖에 없었다.

"아! 말씀이 늦었군요. 그 안에 선물이 가득 들어 있으니 기대하셔도 됩니다. 전처럼 쪼잔하게 앰플 하나를 주사로 놓는 게 아닙니다. 아예 통으로 하나 가득 꽉 차 있죠! 하하! 하하하하하!"

불길한 웃음소리와 함께 의식이 흐려지는 가운데, 젝트의 머리 위로 관 뚜껑이 서서히 닫히기 시작했다.

바로 그 원수 같던 바이아가 묶여 있는 관 뚜껑이.

"하지만 이것만으론 부족합니다."

후원자는 관의 면에 부착해 놓은 조그만 장치를 가동했다.

지잉....

장치에서 검은 기류가 넘치며 관속으로 새어 들기 시작했다. 후원자는 두려운 기색으로 한발 물러나며 중얼거렸다.

"그림자 차원 장치.... 1호가 남긴 유산입니다. 정식으로 허가받진 않았지만 이 정도는 해 줘야겠죠. 그 빌어먹을 클로드를 제거하기 위해서는.... 클로드! 클로드으으으!"

후원자는 갑자기 맨 땅을 발로 두드리며 비명을 질렀다.

"으아아아아악! 클로드! 이번엔 반드시 죽인다! 개 같은 자식! 그걸 위해서 이정도 위험은 감수 할 수 있어! 널 죽이기 위해 나도 목숨 걸었다고!"

이계 황자는 세상을 구하고 싶다 99화

29장 번개와 얼음과 생명

없네?

없습니다. 네, 없다고요.

알비어스 왕국에서 젝트가 있을만한 모든 장소를 다 뒤졌는데도, 결국 젝트를 찾아내지 못했다.

"다른 데 다 없으니 최소한 여긴 있어야 하는데...."

이곳은 젝트의 은신처인 왕국 수도 귀퉁이의 저택.

은신까지 써가며 몰래 들어왔건만, 저택 내부는 고용인 하나 없이 텅 비어 있었다.

물론 밖에서 생명감지마법을 발동시켰을 때부터 예상은 했지만.

"젝트... 대체 어디 있는 거야...."

번개의 마도사 젝트.

제국의 4대 아크 위저드 중 하나로, 2년쯤 전에 또 다른 아크 위저드인 바이아와의 대결에서 패하고 알비어스 왕국으로 몸을 피한 상태...여야 정상인데.

어째서인지 은신처인 저택이 비어 있다. 최소 며칠간은 사람이 산 흔적도 없고.

그밖에도 왕국 수도인 블레르하임 내에 녀석이 있을 만한 장소는 모두 확인했다.

"만약 블레르하임이 아니라 다른 지역에 있다면...."

그렇다면 사실상 수색이 불가능하다. 알비어스 왕국이 무슨 손바닥만 한 나라도 아니고.

이럴 줄 알았으면 먼저 바이아부터 족쳐볼걸 그랬나?

70대의 노인이자, 동시에 또 다른 아크 위저드 중 한 명인 '얼음의 바이아'

하지만 녀석은 아직 인류의 배신자라 100% 확정되지 않았다.

가만 내버려 두면 회귀 5년차쯤부터 마수를 드러내는 톨라리나 젝트에 비해, 바이아는 자신의 마탑에 틀어박혀 세상이 멸망할 때까지 꼼짝도 하지 않는다.

다만 억지로 마탑에 진입하거나, 집요하게 이계와의 전쟁에 참여를 요구하면?

이번엔 반대로 눈이 뒤집혀서 반격을 시도한다. 광기에 사로잡힌 듯 말도 안통하고.

그래서 확실하진 않지만 인류의 배신자일 가능성도 염두에 뒀던 건데....

지금 그 할아버지가 문제가 아니다!

제국을 기준으로 어둠산은 국경너머 북동쪽에 있고, 알비어스 왕국은 서쪽의 자연 국경인 자이루트 산맥 너머에 있다.

그러니 여기까지 날아오는 데만 대륙의 절반을 횡단한 셈이다. 날자만 따져도 엿새나 걸렸고.

물론 오는 길에 마르 오우거의 마을에도 들렸고, 트롬본의 마지막 흔적을 찾아보기도 했지만....

아무튼 피 같은 시간을 엿새나 소비했는데 목표인 젝트를 제거하지 못했다.

휴.

세상만사가 그리 쉽게 풀리지는 않는구나.

어둠산에 갔을 때만 해도 호박이 넝쿨 채 들어와 기분이 좋았었는데.

아쉬워 해 봤자 소용이 없다. 기왕 알비어스 왕국에 넘어 왔으니, 이곳에 있는 다음 루트라도 진행하고 가는 수밖에.

* * *

완성된 기사단 본부는 루넨브레스 저택의 두 배 크기를 자랑했다.

다만 겉모습은 거대한 창고나 강당을 연상시켰다. 오직 튼튼한 건물을 빠르게 짓는 데 집중한 결과였다.

"그럼 회의를 진행하기에 앞서, 새롭게 기사단에 들어온 신입을 소개하겠다."

어둠산을 떠나 이제 막 복귀한 다비는, 우선 자신의 옆에 선 뾰족한 귀의 엘프 소년을 모두에게 소개했다.

"이쪽은 라니르다. 영원의 숲 출신의 엘프로, 얼마 전 황자님께 충성을 바치고 우리 기사단의 일원이 되었다."

"안녕하십니까. 이번에 클로드 황자님을 섬기게 된 라니르라 합니다."

라니르가 고개를 숙이며 인사를 올리자, 분위기 파악에 조금도 관심 없는 톨라리 혼자 환호성을 지르며 물개박수를 시전했다.

"와아! 짝짝짝! 환영해! 같이 잘해보자!"

"와아...."

옆에 앉은 루네가 조그맣게 따라했다. 물론 다른 단원은 한동안 반응하지 않고 라니르를 바라 볼 뿐이었다.

"엘프... 엘프는 제국의 적 아니었습니까? 그렇죠? 메르데스 아가씨?"

리넨이 겨우 말문을 열며 옆에 있던 메르데스에게 물었다. 메르데스는 무표정한 얼굴로 털북숭이 소년을 내려다보았다.

"그렇다고 들었습니다. 하지만 황자님이 하시는 일에 이견은 없습니다."

"물론 저도 그렇습니다만...."

"단장님."

카일이 손을 들며 대표로 질문했다.

"엘프는 며칠 전까지 제국의 주적이었습니다. 아무리 일식 게이트로 모든 상황이 변했다 해도, 제국 국법상 기사단에 엘프를 받는 게 가능합니까?"

"물론 나도 거부감이 있을 거란 생각은 했다."

"개인적인 거부감은 없습니다. 이곳에 황자님의 뜻을 거역할 사람 역시 아무도 없을 테고 말입니다."

"그렇다면?"

다비가 물었다. 카일은 지극히 사무적인 얼굴로 대답했다.

"단지 엘프에 대한 전반적인 인식을 말씀드리는 겁니다. 이곳에 엘프가 있다는 소문만 퍼져도 황자님의 평판에 손상이 갈지도 모릅니다. 그러니 엘프에 대한 인식이 개선되기 전까지는, 라니르의 존재를 감추는 편이 좋다 생각합니다."

"당분간은 어쩔 수 없겠지."

다비는 한숨을 내쉬며 고개를 끄덕였다.

"황자님이 따로 부르시지 않는 한, 라니르는 이곳 기사단 본부나 저택에 머물며 내 훈련을 받을 예정이다. 그리고 아크위저드의 훈련도."

"나?"

톨라리가 눈을 동그랗게 뜨며 자신을 가리켰다.

"난 또 갑자기 왜?"

"황자님께서 당신에게 라니르의 마법 훈련을 부탁했습니다. 비록 아크 위저드 수준의 잠재력은 아니지만, 라니르는 지금보다 더 강한 마법사가 될 자질이 있다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래?"

톨라는 눈을 깜빡이며 라니르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나야 좋지. 얼굴도 귀엽게 생겼네. 피부도 좋아 보이고. 몇 살이야 라니르?"

"93살입니다."

"헛."

"제 나이는 신경 쓰지 않으셔도 됩니다."

라니르는 의욕적인 얼굴로 모두에게 말했다.

"인간과 엘프는 서로 다르니까요. 중요한 건 제가 이 기사단의 막내라는 사실입니다. 부디 고민 없이 마음 것 부려먹어 주십시오. 앞으로 신세지겠습니다. 잘 부탁드립니다."

"엘프인데 싹싹하네? 맘에 들어. 그럼 나 목마른데 지금 당장 저택에 가서 물 한 잔만...."

"농담은 이쯤 하고."

다비가 헛기침을 하며 말을 끊었다. 톨라리는 입술을 삐죽이며 작은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농담 아닌데...."

"아무튼 황자님 말씀으로는 라니르는 기사의 재능과 마법사의 재능을 동시에 가졌다고 한다. 그럼 신입에 대한 소개는 이 정도로 끝내고. 리넨?"

"네. 단장님."

리넨이 기다렸다는 듯이 고개를 숙였다. 다비는 걸음을 옮겨 미리 쥐고 있던 투명한 구슬을 리넨의 앞에 내려놓았다.

"이번에 황자님께서 고생 끝에 확보하신 에이션트 베어의 코어다."

"으아, 드디어 나도...."

"방금 뭐라고 했나?"

"아무 것도 아닙니다!"

리넨이 허리를 바짝 세우며 고개를 저었다. 다비는 리넨의 어깨에 손을 얹으며 강하게 움켜쥐었다.

"황자님께서는 약속대로 새로 얻은 코어를 네게 내린다 말씀하셨다. 그러니 황자님의 은혜에 감사하며 먹어라. 어떻게 먹는지는 알고 있지?"

"물론입니다. 그동안 연습도 엄청 했는데요."

"연습?"

"네. 연습."

리넨은 투명 알사탕을 입안에 넣고 양 볼을 부풀리는 흉내를 냈다. 다비는 헛웃음을 지으며 지시했다.

"잘 됐군. 그럼 지금 바로 먹어라. 내가 보는 앞에서."

"네. 알겠습니다."

리넨은 냉큼 코어를 집어 들고는 입안에 넣었다. 다비는 고개를 끄덕이며 원래 자리로 돌아갔다.

"지금까지 밝혀진 에이션트 베어 코어의 효과는, 근력 증강과 내구력 증강, 그리고 냉기에 대한 강력한 저항이 있다."

"오, 오오...."

"그 밖에도 숨겨진 효과가 있을지 모른다. 혹시 새로운걸 알게 되면 바로 보고하도록."

"아, 알겠습니다."

리넨이 우물거리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자 멀리 앉은 톨라리가 손을 번쩍 들었다.

"저기. 혹시 코어 하나만 얻음?"

"아닙니다. 남는 게 하나 더 있는 걸로 알고 있습니다. 다만 황자님께서 아직 새로운 코어의 주인을 결정하시지 않은 듯합니다."

"정말? 그럼 나도 기회 있겠네. 나중에 돌아오면 달라고 해봐야지."

톨라리가 히히거리며 웃었다. 다비는 가볍게 눈살을 찌푸리며 물었다.

"어째서 마법사가 코어를 탐내십니까? 전에는 관심 없다 하더니?"

"너 없는 동안."

"네?"

"우리 단장님 없는 동안, 다른 애들 훈련하는 거 지켜봤어."

톨라리는 원탁 테이블에 앉은 단원들을 하나씩 둘러보며 미소를 지었다.

"다들 엄청났어. 실력이 늘어나는 게 눈으로 보이더라. 특히 코어 먹은 애들. 그래서 좀 탐나."

"그 실력이란 것도 결국 기사의 실력입니다. 마법사는 상관없지 않습니까?"

"이번 거는 냉기 저항력 높여준다며? 그럼 마법사한테도 좋지. 상대가 냉기마법 쓰면 따로 막을 필요 없으니까."

"당신은 마법으로 방어가 가능하지 않습니까? 기사들은 마갑이 없으면 마법에 무방비로 노출됩니다. 물론 코어의 다른 효과도 전투에 직접 도움이 되고 말입니다. 그러니 가급적 관심을 끊어주시면 좋겠습니다."

"쳇. 벌써부터 견제 들어오긴."

톨라리는 눈을 흘기며 투덜거렸다.

"나도 황자님한테 충성충성이야. 기회는 공평한 거고. 그치 루네야? 우리도 코어 먹을 자격 있지?"

"아니, 톨라리 님. 하지만...."

어쩌다 중간에 낀 루네가 눈치를 살피며 식은땀을 흘렀다. 톨라리는 픽 웃으며 그런 루네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됐어. 긴장하긴. 근데 그냥 언니라고 부르래도?"

"네? 네. 톨라리 언니."

"음, 루네양 이야기가 나와서 하는 말인데."

다비는 미리 챙겨와 바닥에 내려놓았던 커다란 덩어리를 집어 들었다.

"이건 얼음의 정수다. 황자님께서 에이션트 베어와 함께 깊은 땅굴에 들어가 괴물을 처치하고 얻은 전리품이지."

"얼음의 정수...."

"자세한 건 모르지만 마법사 중에서도 냉기가 주속성인 마법사에게 도움이 되는 물건이라고 한다. 황자님께서 네게 주라 하셨다."

얼음의 정수는 두꺼운 사슴가죽에 둘둘 말려 있었다. 루네는 놀란 눈을 깜빡이다 자리에서 일어나며 허리를 숙였다.

"감사합니다. 단장님. 정말 감사히 받겠습니다."

"감사의 인사는 내가 아니라 나중에 황자님께서 직접 하도록. 그럼...."

다비가 다시 자리에서 일어나려 하자, 이번엔 옆에 앉은 카일이 급히 일어나 대신 얼음의 정수를 빼 들었다.

"단장님, 제가 루네에게 전달하겠습니다."

"음. 그래."

"그럼.... 음? 이거 보기보다 꽤 무겁군요. 아니 잠깐."

정수를 안은 카일의 얼굴이 정수와 똑같은 파란 색으로 급변했다.

"헉...."

카일은 급하게 루네의 앞으로 달린 다음, 테이블 위에 정수를 다짜고짜 뚝 떨어뜨렸다.

텅!

"카일! 뭐 하는 거냐!"

"죄송...합니다. 단장님. 이게 너무 차가워서...."

카일은 덜덜 떨며 정수를 피해 뒷걸음 쳤다.

"저, 저도 에이션트 씰의 코어를 먹어서 항마력이 높아졌는데.... 세상에. 괜히 이름이 얼음의 정수가 아니군요. 제, 제가 추태를 보였습니다."

카일은 모두에게 고개를 숙인 다음 가까스로 제자리로 돌아왔다. 다비는 눈살을 찌푸리며 테이블에 남은 사슴 가죽을 집어 들었다.

"내가 항상 말했지. 기사는 자신의 실력을 과신해선 안 된다. 모름지기 매사에 주의해서 행동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그런데 그때, 루네가 얼음의 정수를 휙 끌어안으며 활짝 웃었다.

"와, 이거 좋아요."

"...루네 양? 그거 엄청 차가울 텐데?"

"차갑진 않고 살짝 서늘해요. 근데 엄청 포근한 느낌이에요. 껴안고 자도 될 정도로."

"껴안고 잔다고? 말도 안 돼. 그러다 얼어 죽지 않을까?"

카일이 경악하며 물었다. 루네는 행여 놓일 새라, 얼음의 정수를 품에 꼭 안으며 고개를 저었다.

"아니에요. 이렇게 좋은 걸."

"히야. 이거 재밌네."

톨라리가 옆에서 정수를 슥 훑고는 혀를 내둘렀다.

"닿자마자 속성에 반응해. 나랑은 안 맞지만. 냉기 속성 마법사라면 마력이 오르지 않을까? 가지고 있기만 해도."

"황자님도 비슷한 말씀을 하셨습니다. 일단 시간을 두고 지켜보는 게 좋겠군요. 그럼 전리품 수여식도 이걸로 끝났고...."

다비는 눈을 가늘게 뜨며 목소리를 무겁게 깔았다.

"모두 떠나기 전에 과제를 준 것을 기억할 거라 믿는다. 지난 20일 동안 쉬지 않고 수행했겠지?"

이계 황자는 세상을 구하고 싶다 100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