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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계 황자는 세상을 구하고 싶다 84화

25장 세상이 뒤집히던 날

푸확!

불꽃에 휩싸인 거대한 여성이 악마 형상을 한 괴물을 불로 태워 죽인 그 순간까지, 카일은 경직된 몸을 손 끝 하나 까딱하지 못했다.

'황자님 대단하십니다! 이게 바로 새롭게 얻은 황자님의 정령....'

하지만 목소리가 나오지 않았다. 마구 소리를 지르고 또 지르고 싶었는데도.

그런데 바로 그때.

푸확!

바로 옆의 지면이 흔들리며 거대한 괴물이 솟구쳐 날아들었다.

'데스웜....'

황자가 전에 설명해준 모습 그대로의 괴물.

하지만 더 생각할 겨를이 없었다. 카일은 녀석의 톱니 같은 이빨 속에 자신의 머리가 쑥 들어가는 것을 보며 가만히 눈을 감았다.

'이제 죽는구나.'

하지만 그 순간, 누군가 엄청난 속도로 카일을 덮치며 옆으로 몸을 날렸다.

쾅!

"카일!"

아슬아슬하게 몸을 날린 것은 다비였다.

"쿨럭! 단장님!"

"정신 차려! 여긴 전장이다!"

카일을 죽음으로부터 꺼내온 다비는 헛물을 켠 데스웜을 향해 역동작으로 검을 휘둘렀다.

촤악!

한순간 쏟아진 풍압이 괴물의 목덜미를 절반쯤 자르며 파고든다.

"헉...."

카일은 전율이 돋는 것을 느끼며 급하게 몸을 일으켰다.

'평범한 풍압검이 아니야. 저런 거대한 괴물을 단숨에 자르다니.'

"흠, 마지막에 가속이 부족했나?"

정작 다비는 적을 완전히 절단 내지 못한 게 아쉬운 듯했다. 물론 치명상을 입은 데스웜은 대량의 피를 쏟으며 축 늘어져 버렸지만.

"정신 바짝 차려라 카일! 저기 황자님이 싸우시는 모습이 보이지 않나?"

"...."

다비가 가리킨 곳으로 고개를 돌리자, 이번엔 거대한 공처럼 생긴 괴물을 상대로 전투를 시작한 황자의 모습이 보였다.

"감염 군주...."

며칠 전 저택을 공격한 문제의 그 괴물.

직접 본 적은 없지만 설명은 충분히 들었다. 나중에 황자가 카일을 따로 불러 직접 개인 강의까지 해 줬고.

-지금까지가 감염 군주의 기본 스펙이야. 설명 잘 들었지? 이해했어?

-이해는 했습니다만....

-자, 지금부터는 평범한 기사들만 가지고 이 감염 군주를 상대하는 법을 가르쳐 줄 거야. 미리미리 준비해 둬야지.

-그게 가능합니까? 황자님 같은, 적어도 톨라리 님 같은 아크 위저드의 도움 없이?

-이론적으로는.

-이론적으로는....

-우선 적당한 신관 대여섯 명만 있으면 돼. 먼저 하급 이상의 마갑으로 빈틈없이 무장한 기사들이 타락 군주의 주변을 포위하고....

하지만 당장 이곳에 신관은 없다.

원래는 있긴 했는데, 오는 길목에 있던 톨라리의 탑에 대기시켜 놓았다. 안전한 곳에 있다가 전투가 끝나면 곧바로 달려와 부상자를 치료할 목적으로.

"우리가 나서서 황자님의 부담을 줄여드려야 한다! 난 저쪽에 있는 괴물들을 상대하러 가겠다! 청기사단이 순식간에 무너지고 있어! 너는 이곳에서 기사단을 이끌고 땅속의 거대 지렁이를 상대해라!"

"...데스웜입니다!"

"뭐?"

"그 지렁이, 데스웜이라고 합니다. 황자님께 상대법을 들었으니 싸울 수 있습니다."

"좋아! 부탁하마!"

다비는 카일의 눈을 한번 노려본 다음 멀리 청기사단이 배치된 방향으로 달리기 시작했다.

-하수도에 들끓던 괴물의 이름은 데스웜이야. 물론 내가 마법으로 죄다 쓸어버리긴 했지만....

-어쩌면 내가 없을 때 싸움이 벌어질지도 모르잖아? 그때를 대비해서 미리 작전을 세워 놓는 거야. 그러니까 일반 기사를 가지고 어떻게 상대를 해야 하냐 하면....

"수호기사단 전군! 내 주위로 집결하라!"

카일의 외침은 압도적이었다.

경직되어 있던 기사들이 그제야 정신을 차리며 카일의 주위로 우르르 몰려들었다. 카일은 황자의 개인교습을 떠올리며 곧바로 지시를 내렸다.

"지금부터 방진을 짜고 자세를 낮춘다! 복잡하게 생각 하지 마! 그냥 밀집해서 방패를 내미는 거다! 그리고 사선으로 방패를 기울여! 좋아 그렇게! 명심해! 날 기준으로 왼편이 좌군, 오른편이 우군이다! 자신의 위치를 확인해! 괴물이 지면을 뚫고 돌진해오면 몸을 낮추고 위로 흘려보내는 거다!"

바로 그 순간, 마침 정면 쪽에서 데스웜이 지면을 뚫고 밀집된 기사들을 향해 돌진했다.

문제는 하필 동시에 두 마리였다는 것.

"...좌군! 몸을 완전 숙여! 우군! 몸을 완전 눕혀!"

명령이 단순했기 때문일까?

집결한 기사들의 반응이 기적처럼 맞아 떨어졌다. 덕분에 돌진한 데스웜 두 마리가 마치 서핑보드처럼 기사단의 방패 위를 흘렀고, 어느 순간 중간 지점에서 만나며 격렬한 충돌을 일으켰다.

마치 프렌치 키스처럼.

두 괴물의 거대한 주둥이가 서로 맞물리며, 드릴처럼 갈리는 이빨이 서로를 갈아 으깨기 시작했다.

콰드드드드드드드득!

"지금이다! 칼로 배를 찔러! 바닥을 기던 부분이 배다!"

카일은 머리 위에서 쏟아지는 피를 온몸에 뒤집어쓰며 소리쳤다. 그러자 기사들이 웅크린 몸을 펴며 데스웜의 몸통을 향해 미친 듯이 칼질을 하기 시작했다.

"우와아아아아악!"

"죽어! 죽어! 뒈져!"

"망할! 칼이 안 들어가!"

"배! 복부를 노리라고 이 멍청이들아! 옆구리나 등 말고! 거기 아니면 칼이 안 박혀!"

"지휘관님! 복부에도 칼이 안 박힙니다!"

"네놈들이 약해 빠져서 그런 거야! 죽을힘을 다해 쑤셔!"

카일 역시 뽑아든 칼로 데스웜의 턱밑을 쑤시며 소리쳤다.

미리 계산한 건 아니지만, 서로 다른 기울기 덕분에 두 괴물의 충돌지점은 정확히 카일의 눈앞에서 이뤄졌다.

그것이 기사들의 눈에는 마치 카일이 일으킨 기적처럼 보였다.

"지휘관님 명령만 따라! 어서!"

"좋아! 칼이 박힌다!"

"여기 갈라졌어! 여기다! 여길 쑤셔!"

덕분에 카일의 명령을 철석같이 믿고 따르기 시작했다. 카일 역시 기사단이 자신의 손발처럼 움직이는 것을 직감하며 주먹을 움켜쥐었다.

'이거 봐라? 기분 완전 좋은데?'

그것이야말로 지휘의 참맛이었다.

이미 자신의 재능에 눈을 떠버린 카일은, 곧바로 단순하면서도 핵심적인 지시를 내리며 기사단을 능수능란하게 컨트롤하기 시작했다.

"좌군! 간격을 넓힌다! 명심해! 데스웜은 땅속에 굴을 파서 우릴 추락시키는 작전을 사용한다! 모두 지면을 경계 한다! 울림을 미리 감지하면 미리 회피할 수 있어! 침착해! 우군! 방패가 깨진 기사가 많다! 뒤로 빠져 있다가 기회가 나면 공세로 전환해! 좋아! 침착하게 대응하면 충분히 이길 수 있어! 자! 저기 한 마리 다시 온다! 지시에 맞춰 몸을 숙여!"

* * *

다비가 도착했을 무렵, 청기사단은 이미 반쯤 괴멸한 상태였다.

"이 무슨 말도 안 되는...."

모든 것은 문어를 연상시키는 네 마리의 괴물에 의해 벌어진 참사.

그나마 한 마리는 죽었고, 또 한 마리는 죽기 직전인 듯했지만 나머지 두 마리는 멀쩡했다.

"...나이트 다비!"

그때 버티고 있던 한 기사가 공포에 질린 얼굴로 소리쳤다.

"이 녀석이오! 다른 괴물보다 이 녀석을 상대해 주시오!"

"나이트 하이네!"

하이네는 청기사단의 단장이었다. 하지만 다비에게 시선이 팔린 순간, 자신이 가리킨 괴물에 의해 몸이 반으로 토막 나 버렸다.

'상급 마갑을 입은 기사를 단칼에?'

다른 녀석들과 달리, 혼자 사람 키보다 더 큰 대검을 꼬나 쥐고 있는 괴물.

공포 군주.

물론 다비는 그 명칭을 모른다.

하지만 덩치가 4미터가 넘는 연체동물을 보는 순간 본능적인 공포가 밀려들었다.

시각적으로, 청각적으로, 그리고 후각까지.

녀석은 다비를 발견하고는 즉시 몸을 돌렸다. 둥그런 구체 속에 담긴 직사각형의 동공이 소름끼칠 만큼 텅 비어 있었다.

"다비.... 오랜만이군."

그렇게 말해 봤자 평생 처음 보는 괴물이다. 다비는 십여 개의 촉수를 번갈아 움직이는 괴물의 움직임에 계속 집중했다.

"왜 대꾸가 없지? 내가 너무 많이 변해 못 알아보는 건가?"

"...."

"섭섭하군. 그래도 같은 나이트 마스터끼리도 몰라볼 줄이야."

"...파이렌? 죽지 않았나?"

"그래. 한번 죽었지. 바로 네놈에게. 덕분에 새로운 몸으로 다시 태어났다."

하지만 괴물의 몸에 과거 파이렌의 모습은 조금도 남아 있지 않았다. 물론 애당초 인간의 흔적 자체가 전혀 보이지 않았지만.

"할 말이 없군. 어쩌다 그 꼴이 되었지?"

"글쎄. 나도 모르겠다. 내가 바라는 건 그저...."

그 순간, 괴물의 무수한 다리가 스프링처럼 일제히 지면을 튕겼다.

"네 얼굴."

콰아아아아앙!

동시에 거대한 대검이 지면을 쪼갤 듯 내리찍었다. 가까스로 몸을 피한 다비는 거리 감각이 완전히 사라지는 것을 느끼며 경악했다.

'엄청난 속도! 도약 직후에는 거의 눈에 보이지도 않았다.'

"일그러진."

부우우웅!

동시에 네 개의 다리가 온 사방에서 채찍처럼 날아들었다. 다비는 회피의 사각을 한계까지 파고들며 아슬아슬하게 모든 공격을 피해냈다.

"얼굴이."

부웅!

부웅!

"보고 싶다."

푸확!

순간 다리 사이에 있던 분출구에서 뿌연 연기가 솟구쳤다. 다비는 급히 호흡을 참으며 뒤로 몸을 날렸지만, 파이렌은 상관없다는 듯 느긋하게 접근했다.

"그래봤자 이미 마셨어. 네 안에 담긴 공포가 느껴진다."

"...!"

다비는 급하게 날숨을 내뱉으며 다시 숨을 멈췄다.

'뭐지? 독? 공포를 일으키는 독인가? 방금 죽기 전에 겁에 질려 있던 단장의 얼굴이....'

부웅!

순간 파이렌의 숨겨 놨던 긴 촉수가 멀리서 포물선을 그리며 뒤통수를 향해 날아들었다.

"큭!"

제때 반응했지만 격한 움직임에 숨을 참기가 힘들었다. 그 와중에 적의 연타가 계속 쏟아졌고, 회피를 반복하는 와중에 도저히 피할 수 없는 짧은 다리의 찌르기가 허를 찌르며 날아들었다.

하지만 다비의 눈은 그 모든 것을 포착하고 있었다.

검을 쥔 손이 미끄러지듯 회전하며, 날아오는 촉수를 둥글게 잘라냈다.

우웅!

동시에 손목의 회전과 함께 몸 전체로 작은 반월을 그리며, 멀리 위쪽에 있는 적의 머리를 향해 검을 휘둘렀다.

'저게 머린지 몸통인지 모르겠지만....'

그저 눈알이 달려 있는 부근이 약점일 거라 믿고, 완벽한 타이밍에 완벽한 풍압검을 쏟아냈다.

하지만 상대 역시 다비가 그랬던 것처럼, 그 모든 걸 주시하고 있었다.

부웅!

거대한 풍압이 몸에 닿기 직전, 파이렌의 몸통이 휘청거리더니 뒤로 꺾였다.

"...!"

인간에겐 불가능한 각도의 움직임.

당연히 상대는 인간이 아니었다. 녀석은 회피와 동시에 높이 치켜들고 있던 거대한 칼을 단두대처럼 내리찍었다.

콰아아아앙!

가까스로 피하긴 했지만, 사방으로 터지는 충격파에 몸이 튕겨 날아간다.

"큭!"

직격도 아닌데 갑옷 곳곳이 찌그러졌다. 무엇보다 충격을 받은 순간 참았던 숨을 크게 들이 마신 게 문제였다.

"역시 기술의 다비."

파이렌은 둥글게 잘려나간 자신의 짧은 다리를 보며 감탄했다.

"그 간격에 이토록 정교하게.... 마지막은 풍압검이었지? 가장 기본적인 기술을 거기까지 끌어올릴 줄이야. 대체 그 짧은 순간에 몇 번이나 가속을 먹였나?"

"...."

"대단해. 그리고 하찮아. 인간의 기술 따위."

그리고는 다시 한번 대검을 바닥에 내리찍었다.

콰아아아아아아아앙!

"큭!"

거리가 있는데도 쏟아지는 충격파가 막강하다. 다비는 계속 뒷걸음치며 회피에 전념했다.

"봤지? 그냥 가볍게 휘둘렀을 뿐이다. 그런데도 네놈은 막지 못하고 피하기만 하고 있어."

"...."

"너도 막을 만하면 막았겠지. 저번에 중량검을 막았던 것처럼. 결국 이게 과거의 내 중량검을 능가하는 위력이라는 뜻이다."

주절거리는 파이렌의 이야기는 대부분 사실이었다.

지금의 녀석은 반 괴물, 반 인간으로 어중간했던 저번 파이렌에 비할 바가 아니다.

그저 괴물 그 자체.

인간의 기술을 완전 배제한 힘과 속도가 경이로울 지경이다. 게다가 연체동물 특유의 유연함에서 나오는 공수일체의 움직임까지.

하지만 녀석이 모르는 게 하나 있었다.

"헉...."

숨을 들이마신 다비의 표정이 공포에 물들었다. 그러자 파이렌 역시 다시 슬금슬금 거리를 좁히기 시작했다.

"좋아. 바로 그 표정을 원했다. 새로운 내가 공포 군주라 불리는 이유가 있지."

"으...."

"어때. 무섭지 않나? 두려움에 몸서리 쳐지지? 응?"

"빌어먹을...."

다비는 신음하며 한 발씩 뒤로 물러났다. 파이렌은 흡족한 듯 웃으며 또다시 대검을 치켜들었다.

그런데 바로 그 순간.

겁에 질린 듯 웅크렸던 다비가 한순간 몸을 튕기며 겁 없이 뛰어들었다.

"음?"

간격이 한순간 좁혀진 바람에 대검을 휘두를 수 없었다. 물론 그렇다고 다른 촉수들이 가만 있는 건 아니지만.

촤륵!

정면에서 찔러오는 촉수.

포물선을 그리며 날아오는 촉수.

마치 조인트를 까듯, 아래서 위로 솟구치는 촉수.

이토록 무수한 촉수들이, 달려오는 다비의 몸을 조금의 빈틈도 없이 옭죄며 사방에서 쏟아졌다.

하지만 그것은 파이렌의 착각이었다.

촤악!

다비는 먼저 정면에 찔러오는 두 개의 촉수를 동시에 세로로 잘랐다.

"엇?"

그 뒤로 몸을 기묘한 각도로 꺾으며, 사선으로 떨어지는 두 개의 촉수를 아슬아슬하게 피해냈다.

"이걸?"

그리고는 검을 쥔 팔을 거의 한계까지 뒤로 꺾어 배후를 노리던 촉수를 자르고, 같은 순간 허리를 부러지기 직전까지 뒤로 젖히며 마지막으로 찔러오던 두 개의 촉수를 완벽하게 피해냈다.

"말도...."

그 모두를 한 동작으로 미끄러지듯 파고들며, 마지막 순간 가볍게 뛰어올라 적의 미간을 향해 검을 찔렀다.

푹!

"안...."

순간 거무튀튀하던 파이렌의 피부가 하얗게 변색됐다.

너무 갑작스런 변화라 검을 찌른 다비가 더 놀랄 정도였다. 하얗게 질린 파이렌은 쥐고 있던 대검을 땅에 떨어뜨리며 서서히 무너지기 시작했다.

"어... 어떻게.... 어떻게 거기가...."

"약점인 줄 알았냐고?"

다비는 찌른 검을 확 뒤틀며 단숨에 뽑아냈다.

이계 황자는 세상을 구하고 싶다 85화

25장 세상이 뒤집히던 날

푸확!

"나도 모르겠다. 그냥 냄새가 나서."

"냄새라니...."

요동치던 파이렌의 안구가 한순간 경직되며 축 늘어졌다. 다비는 검에 묻어나온 누런 점액질을 바닥에 뿌리며 한숨을 내쉬었다.

"그래. 이 냄새."

냄새.

황자는 딱히 언급하지 않았지만, 에이션트 울프의 코어를 흡수한 이후로 놀랄 만큼 후각이 좋아졌다.

바로 그 후각에 자신이 그동안 쌓은 경험과 통찰력이 더해진 순간, 지금까지는 상상도 하지 못했던 새로운 경지가 펼쳐졌다.

전부 보였다.

공간과 감각에 시간까지 더해진, 3차원 구조의 움직임이 입체적인 흐름으로 예상됐다.

덕분에 마지막에 쏟아진 수십 개의 촉수를 전부 피하고 자르며 적의 품에 파고들 수 있었다. 각각의 시간차와 간격을 전부 읽을 수 있었으니까.

물론 여기에는 적의 방심도 컸다. 파이렌은 마지막 순간까지 다비가 공포 독에 중독되었다고 생각했으니까.

하지만 다비는 처음부터 아무 문제도 없었다.

그저 적을 속이기 위해 연기를 했을 뿐.

-에이션트 울프의 코어를 먹으면 대부분의 독에 면역이 돼.

이것도 클로드 황자의 선견지명일까? 당연히 공포 군주의 독도 통하지 않았다.

덩달아 코어의 효과로 관절의 가동범위가 넓어진 것도 크게 작용했다. 다비는 전에 불가능했던 각도로 어깨를 뒤로 꺾으며 한숨을 내쉬었다.

"몸이 조금 변한 것만으로도...."

강해졌다.

그것도 믿을 수 없을 만큼.

처음 코어를 먹었을 때는 딱히 체감이 되질 않았다. 하지만 이런 극한의 적과 싸워 보니, 스스로가 얼마나 강해졌는지 새삼 느낄 수 있었다.

'심지어 마지막엔 나이트 스킬조차 쓰지 않았는데.'

그 누구보다 기술을 강조한 주제에 이래도 되는 걸까?

기쁨과 동시에 씁쓸함이 느껴졌다. 다비는 쓴웃음을 지으며 아직 전투가 벌어지고 있는 반대편을 향해 걸음을 옮겼다.

기술은 이미 한계다.

역시 더 위로 올라가려면 피지컬이 정답일까? 이 말도 안 되는 괴물들이 판치는 전장에서 살아남으려면?

* * *

폭탄 마인, 키메라, 타락 군주.

가장 강력한 이 세 녀석을 잡았다고 상황이 종료된 건 아니다. 다른 괴물도 여전히 많으니까.

"뒈져!"

과재생 상태로 몰아 살덩이를 폭발시킨 감염 군주의 앙상한 본체를, 리버스 그래비티로 하늘 높이 떠올려 다시 바닥에 내리꽂는다.

지면엔 미리 냉기 마법을 깔아 놨다. 룩카르를 날려먹지 않았으면 이런 복잡한 과정을 거칠 필요가 없었을 텐데.

콰직!

타락 군주의 앙상한 몸이 솟구치는 얼음 덩어리와 충돌, 산산조각으로 박살 나며 사방에 파편을 튀긴다.

후. 좋아. 한 마리 더 해치웠고.

그러고 보니 처음에 쏟아졌던 데스웜은 어떻게 됐지? 대응법을 모르면 제아무리 1티어 기사단이라도 피해가 엄청날 텐데.

그런데 막상 뒤를 돌아보니, 집결한 수호기사단 주위로 겹겹이 쌓인 데스웜의 시체가 보였다.

수호기사단이 저걸 잡았다고?

촤륵!

마침 새로운 데스웜 한 마리가 기사단의 머리 위를 미끄러지듯 흘러가는 게 보였다. 그런데 방패? 기사단이 방패를 가지고 데스웜에게 파도타기를 시전하고 있네?

동시에 웅크리고 있던 기사들이 치켜든 방패의 틈으로 마구 칼질을 해대는 게 보였다!

와!

이거 진짜냐? 저 허접한 수호기사단 애들이 어떻게 저런 일사분란함을?

심지어 대응법이 9회 차 때 최종 게이트 열렸을 때랑 다름없잖아? 미리 모아놓고 1년 전부터 집중 훈련을 시켰을 때랑?

"좋아! 한 녀석 더 잡았다! 긴장 풀지 말고 위치를 이동한다! 오른쪽으로! 주변에 시체가 너무 쌓여서 간격을 만들어야 해! 잠깐! 여기서 멈춘다! 주변 바닥에 구멍이 너무 많아!"

"카일!"

목소리만 들어도 카일이란 걸 알 수 있었다. 이 녀석, 내가 며칠 전에 해준 속성 강의를 120% 발휘하고 있구만.

그런데 이건 단순히 데스웜 공략법을 뛰어넘어....

"진동 느낀 기사부터 손들어! 좋아! 좌군 뒤로 30보 이동! 서두르지 말고 대열을 맞춰서!"

"지면이 곧 무너진다! 지금은 서둘러! 달려라!"

"우군 포복! 완전 바닥에 누워! 방패로 머리를 가린다! 데스웜 출현! 이 악물어!"

...뭔데 이건.

물론 카일이 지휘하는 모습을 하루이틀 본 게 아니긴 하다만.

이런 급박한 전장에서, 심지어 나조차도 당황한 예상 밖의 상황에서 저렇게까지 잘해줄 줄이야.

심지어 저 반푼이 오합지졸 기사단으로 벌써 열 마리에 달하는 데스웜을 저세상으로 돌려보냈다.

와 짜릿해. 이번 회귀는 늘 새롭구나. 역시 좋은 부하가 최고야.

그렇다면 나도 지지 않고 기세를 높여야지?

카일이 데스웜 무리를 상대하는 동안, 미리 다른 괴물을 싹 정리해놔야겠다.

공포 군주, 그리고 광전사.

그런데 공포 군주...는 청기사단 쪽으로 갔나?

녀석도 무시무시한 마물임엔 틀림없다. 하지만 미리 정해놓은 위험순위로는 광전사보다 아래.

콰과과과과과광!

그때 철퇴기사단 쪽으로 몰려간 광전사들이 생체 포탄을 쏟아내는 게 보였다. 좋아. 그럼 저기 먼저 해결해 볼까?

즉시 비행마법으로 날아가 광전사와 기사단 사이에 착지, 수십 개의 얼음벽으로 차단막을 설치했다.

콰지지지지지지지지지지직!

솟구치는 무수한 얼음벽이 쏟아지는 생체포탄을 든든하게 막아준다. 그래봤자 저것도 결국 뚫리긴 하겠지만.

"크, 클로드 황자님!"

철퇴기사단 단장이 기겁하며 소리쳤다. 나는 숨도 쉬지 않고 곧장 대꾸했다.

"지금까지 잘 버텼어! 당장 기사단 이끌고 뒤로 빠져! 최대한 멀리! 콜록! 으, 뭐 한 것도 없는데 목이 다 쉬었냐?"

"그럴 수 없습니다! 제국 기사는 적을 상대로 물러서지 않습니다! 심지어 황자님을 전장에 혼자 남겨두고...."

나는 양손에 불덩이를 만들어 보이며 부드럽게 경고했다.

"헛소리 말고 빨리 튀어! 콜록! 콜록! 이거 템페스트야! 휘말리면 너희도 죽어!"

"아, 앗! 네! 전군! 퇴각한다! 조금이라도 빨리 여기서 벗어나!"

좋아. 말귀를 알아듣는구만.

쾅!

쾅!

콰광!

등 뒤로 얼음벽이 박살나는 소리가 울린다. 총 40개의 얼음벽을 설치했는데 순식간에 30개가 넘는 얼음벽이 소멸한 게 느껴졌다.

광전사 놈들, 생체포탄이 잘 안 먹히니 직접 돌진해서 깨고 있구만.

생체포탄은 자신이 공격받은 속성을 흡수한 다음에야 제 위력을 발휘한다.

덕분에 시간을 번 나는 리치의 마력결정을 활용, 세 개의 템페스트를 추가로 만들었다.

더블 매직 더하기 트리플 매직.

이번엔 순수한 화력으로 몰아붙일 생각이다. 정석은 아니지만 내 예상대로라면....

콰광!

마침 적들이 마지막 얼음벽 라인을 박살내며, 몸에 돋은 가시 같은 촉수를 일제히 방출했다.

촤륵!

동시에 나는 총 다섯 발의 템페스트를 적에게 쏘아냈다.

극한으로 압축된, 다섯 개의 휘몰아치는 불꽃.

그 불꽃이 일제히 날개를 펼치며 쏟아지는 촉수들을 한순간 잿더미로 산화시킨다.

화륵!

그리고 적의 본체를 덮쳐 휘감으며, 녀석들의 피부를 한순간 새까맣게 불태운다.

그러자 불에 대한 내성을 발동하며 새롭게 부풀어 오르는 생체 장갑.

하지만 다섯 발의 템페스트는 그 내성조차 넘어, 생체 장급 그 자체를 불꽃으로 지워 버리기 시작했다.

화력.

모든 걸 뛰어넘는 압도적인 화력.

"푸하!"

잠깐! 이러다 나도 죽겠다!

미리 발동시켜 놓은 프로텍션 매직이 언제 이렇게 소멸했어! 망할! 이건 내 예상을 뛰어넘잖....

그때 폭발이 일어났다.

새로운 프로텍션 매직을 1초만 늦게 발동시켰으면 나도 사라졌을 것이다.

"...아."

한참을 뒤로 튕겨 바닥을 구르고 나서야 몸을 일으킬 수 있었다. 이런 세상에, 이게 화염으로 쓴 퀸터플 매직의 위력이야? 난 또 어디서 화산이라도 폭발한 줄 알았네.

전에 불의 여왕을 상대했을 때와는 위력이 천지차이다. 어째서 이렇게 강해졌지? 단순히 불과 얼음의 차이인가?

물론 뭐가 어쨌든 간에... 통했으니 장땡이다.

저 멀리 까맣게 쪼그라든 광전사들에겐 생명이 느껴지지 않았다. 좋아, 한 큐에 세 마리를 동시에 보내버렸구만.

물론 템페스트 다섯 발에 소모되는 마력도 엄청난 수준이긴 하지만.

그래봤자 하나하나 정석대로 잡는 거보단 훨씬 경제적이다. 특히 룩카르도 없는 상황이라 정석에 필요한 마력 소모가 훨씬 컸을 테니까.

그런데 놀랍게도, 오른쪽에 쓰러진 광전사 한 마리가 검은 재를 휘날리며 몸을 일으켰다.

...아니 잠깐.

너 어떻게 살았냐? 아니지. 생명이 안 느껴지는데 어떻게 움직이냐?

생명감지 마법으로는 분명 죽어있는데.

그런데도 비척대며 달려오는 그 모습은 불길함 그 자체였다. 물론 그래봤자 이미 온몸이 아작 난 상태니까....

나는 녀석의 진행방향에 타이밍을 맞춰 얼음벽을 만들었다.

콰직!

날카로운 얼음벽이 녀석의 복부를 관통, 한순간에 머리끝까지 뚫고 튀어 나왔다.

생체 장갑이 없다면 이 정도는 일도 아니지. 나는 꼬치가 된 광전사를 살피며 천천히 걸음을 옮겼다.

"죽었는데도 움직이다니.... 뭔가 신종인가?"

겉으로 볼 때는 별반 다를 것도 없었는데.

그런데 움직임이 멈춘 광전사의 그림자와 내 그림자가 겹쳐진 순간, 무언가 허연 것이 지상으로 쑥 튀어 올라왔다.

후원자.

녀석은 손에 쥔 동물의 송곳니 같은 것을 순식간에 쑤셔 박았다.

푹!

내 옆구리에.

아, 망할.

이건 예상 못했네.

"이 칼에는 광전사조차 한 번에 죽일만한 극독이 배여 있습니다."

"...."

"정확히는 칼이 아니라 카메이라의 송곳니지만 말이죠. 녀석의 수많은 머리 중에 뱀 머리도 하나 달려 있는데...."

녀석은 이빨을 뽑아냈고, 나는 그 자리에 주저 않으며 몸을 웅크렸다.

"아무튼 이쪽 세계의 기술로는 해독이 불가능합니다. 영약이든 신성마법이든, 적어도 단기간엔 말이죠."

"...."

"말이 안 나오시죠? 그게 다 죽기 전에 몸이 마비되는 과정입니다. 고통스럽겠지만 조금만 참아주시죠. 30초 안에 중추신경이 마비되며 호흡이 멈출 겁니다."

"...."

나는 녀석의 얼굴을 올려다보며 감정안을 발동시켰다.

종족 : 마법생물.

현재 힘 : A

현재 그림자 : B

현재 차원능력 : A

마법생물? 이건 뭐지? 그림자? 차원능력?

아니 잠깐, 종족 타입에 마법이 있다는 건....

"클로드 황자님. 당신과는 좀 더 차분히 대화를 나누고 싶었습니다. 개인적으로 참 인상 깊은 분이라서 말이죠."

"...."

"아, 그 와중에 뭔가 반격을 노리시는 겁니까? 마법? 꿈틀거리는 모습이 안쓰럽군요. 하지만 제겐 마법이 통하지 않습니다. 근원을 따지고 보면 제 존재 자체가 마법이나 다름없거든요."

"...그래?"

"그렇습니다만...."

"그거 잘 됐네."

나는 미소와 함께 녀석의 몸통에 완성된 마법을 날려주었다.

스펠 브레이커.

다른 말로 퓨어 매직.

투명한 유리구슬처럼 생긴 마력의 결정체가 녀석의 몸에 커다란 구멍을 뚫어 주었다.

"이건 퓨어 매직이라고 해."

"기기기이이이갸갸갸갹!"

녀석은 괴상한 소리를 내며 그 자리에 허물어졌다.

사실상 상체와 하체가 분리된 상태인데.... 그 와중에도 몸통의 소멸 지점을 향해 분리된 상하체가 계속 말려들며 끊임없이 오그라들었다.

"그리고 난 만독불침이야. 모든 독에 면역이라고. 그 키메라 이빨인지 뭔지도."

"기기기기갸갸갸갸갹...."

"그래도 찔렸을 땐 아팠지만."

나는 옆구리의 상처에 회복 마법을 사용하며 한숨을 내쉬었다.

"기왕 찌를 거면 배를 뚫어버릴 정도로 푹 찔렀어야지. 힘도 엄청 좋은 주제에. 그 잘난 독 자랑이라도 하고 싶었냐? 덕분에 목숨을 건지긴 했다만."

"갸갹.... 퓨어 매직...."

"그래. 퓨어 매직. 모든 마법을 해체해 버리는 거. 그리고 넌 존재 자체가 마법이고."

"인간이... 어떻게 퓨어 매직을 쓸 수 있어...."

이미 후원자의 하반신은 전부 소멸했고, 상반신 역시 머리와 목 정도만 남겨진 채 거의 사라진 상태였다.

덕분에 붕대 너머로도 공포에 질린 녀석의 표정을 읽을 수 있었다.

그런데 그때.

"...라고 놀랄 줄 알았습니까?"

붕대 너머의 얼굴에 표정이 사라졌다.

"...응?"

"후, 그놈의 퓨어 매직. 혹시 안 쓰면 어쩌나 했습니다. 갸, 갸갹."

"뭐? 뭐라고?"

"키, 컥, 갸갹. 세상에, 그거 한방에 제 존재가 절반 이상 사라졌군요. 남은 것도 사라지고 있고. 일부러 맞, 맞은 보람이 있습니다."

"일부러?"

"네. 갸갹. 힌트를 많이 드린 보람이 이, 있군요. 당신이 퓨어 매직을 쓸 수 있는 건 이미 확인했으니까요."

순간 오싹해졌다. 얘가 지금 무슨 이야기를 하는 거지? 나는 녀석의 멱살을.... 아니 멱살이 이제 없구나. 머리통을 양손으로 움켜쥐며 물었다.

"설마 날 감시하고 있었어?"

"아닙니다. 제가 감시할 수 있는 건 후원과 관련된 분들 뿐입니다."

"그렇다면...."

내가 톨라리를 암살하려던 그 순간.

아마도 그때일 것이다. 물론 이번 10회 차 때 퓨어 매직을 발동시켰던 게 그때뿐이기도 하고.

"자, 그럼.... 소멸하기 전에... 얼른 고지하겠습니다."

"고지?"

"해, 해, 해당 차원, 알-드-스라-겐. 줄어서 알드 차원에 고지한다. 최종 테스트 이전, 알드 차원에 간섭 허가를 받은 후원자 01이 소멸될 예정이다."

"뭐?"

"이것은 알드 차원이 후원자를 제거할 만큼의 잠재력을 이미 발휘했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에, 앞으로 해당 차원 기준으로 총 9년이 남은 유예기간을 1년으로 좁히는 것을 고지한다."

순간 머리가 망치로 맞은 것처럼 울렸다.

"...뭐라고? 뭐가 어째? 9년? 아니 1년?"

"휴.... 고, 고지가 끝났습니다. 들으셨죠?"

"대체 무슨 소리야! 방금 그게 뭔 소리냐고!"

나는 녀석의 머리를 마구 흔들었다. 후원자는 후련하다는 얼굴로 미소를 지었다.

"원래대로라면 9년 뒤, 방금처럼 차원문을 열고 저희 쪽에서 대대적으로 그쪽 차원을 침공할 예정이었습니다만...."

"...습니다만?"

"그, 그게. 갸갸갸갹! 으, 실례. 이제 시간이 거의 없군요."

"야! 하던 말 계속 해! 이게 다 무슨 일이야!"

"그, 그게 만만치 않아 보였습니다. 제 독단이긴 하지만. 당신과 같은 가능성이 있는 존재에게, 그, 그것도 이토록 잠재력이 풍부한 차원에서.... 9년의 시간을 더, 더, 더 주는 건 위험하다 판단했습니다."

순간 말문이 막혔다. 그 와중에 후원자의 남은 머리마저 점점 사라지고 있었다.

"그래서 이런.... 이런 계획을 세웠습니다. 설마 맛보기를, 이토록 완벽하게 제압...하실 줄은.... 물론 제압했을 경우를 대비.... 이렇게 저를 희생.... 당신에게 주어진 시간을 줄여.... 저희 차원에 최종적인 승리를 위해.... 이런 내가 쓸데없이 너무 많은 말을...."

거기까지였다.

손에 남은 것은 텅 빈 붕대조각뿐.

그리고 그 순간, 어딘가 먼 곳에서 카일의 환호성이 울려 퍼졌다.

"잡았다! 데스웜을 전부 다 잡았다! 더는 지면에 진동이 느껴지지 않는다! 우리의 승리다!"

"우오오오오오오!"

"남은 괴물도 황자님과 나이트 마스터께서 모두 해치우셨다! 모두 환호성을 질러! 우리가 이겼다! 우리가 이겼다고!"

아니.

아무래도 이번엔 우리가 진 것 같다.

이겼지만 졌다니.

대체 어떻게 하면 이런 엿 같은 상황이 벌어질 수 있는 걸까?

이계 황자는 세상을 구하고 싶다 86화

26장 타임 어택

수천, 수만의 인파가 몰려 있는 원형 경기장.

그들 모두가 경기장의 중심부에 선 거대한 스크린을 보며 환호성을 지르고 있었다.

"죽여! 전부 죽여라!"

"모조리 파괴해! 그거지! 하하하하!"

"왜 우리 편이 밀리지? 하하! 그래도 좋아! 죽어라! 다 뭉개져버려!"

영생을 위해 인간의 육체를 버리고, 복잡한 마력과 에너지로 자신을 변환한 사이크인.

육체를 버렸기에 육체가 주는 모든 자극과 쾌락을 포기했건만, 여전히 인간이었던 시절의 즐거움을 잊을 수는 없었다.

물론 음식을 먹을 수도 없고, 성의 즐거움도 누릴 수 없으며, 스스로의 노력을 통해 육체를 성장시키는 보람도 느낄 수 없다.

덕분에 수십 년마다 찾아오는 이 '침공'의 시간은, 실로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자극의 극치였다.

그런 그들의 모습을, 경기장에 따로 마련된 특별 VIP실에서 내려다 보는 사람이 있었다.

"후원자.... 1호 요원이 죽었군."

클로드의 퓨어 매직에 후원자가 소멸하는 순간, 모든 관중이 자리에서 일어나 격한 반응을 쏟아냈다.

"그리고 모두가 즐거워하는군. 그래. 사이크인의 소멸은 자극적이겠지. 그것이 종족을 위해 자신을 희생한 위대한 인물인데도."

남자는 검은 붕대로 자신의 몸을 감고 있었다. 그러자 옆에 서있던 하얀 붕대의 남자가 스크린으로부터 시선을 떼며 무었다.

"기분이 언짢아 보이십니다. 주재자님."

"얻은 것 이상으로 많은 것을 잃어버린 느낌이다. 우린 영생을 얻었지만 품위를 잃었어."

"붕대를 받지 못한 자들은 어쩔 수 없습니다."

"그래. 어쩔 수 없겠지."

붕대는 사이크 차원의 엘리트만 누릴 수 있는 특권이었다.

붕대로 몸을 감싸지 못한 대부분의 시민들은, 저렇게 말초적인 자극에 모든 열정을 쏟으며 문명을 떠받히는 발전기의 역할에 힘을 소모 할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이로써 우리들은 너무도 치명적인 위험에 직면하게 되었다."

검은 붕대로 몸을 감은 주재자가 말했다. 하얀 붕대의 요원은 의아한 기색을 보이며 되물었다.

"1호가 자신을 희생해 저들의 남은 시간을 날려버렸습니다. 당연히 잘된 것 아닙니까"

"정말 그렇게 생각하나?"

순간 요원의 몸 전체가 살짝 오그라들었다.

콰득!

요원은 그 자리에 무릎을 꿇으며 신음했다.

"으.... 주재자님...."

"1호는 왜 자신을 희생했다고 생각하느냐?"

"그, 그것은. 저들이, 알드 차원의 존재들이 위험하다 판단했기 때문에...."

"그렇다. 특히 저 인간."

주재자는 화면에 잡힌 클로드의 망연자실한 얼굴을 주시했다.

"저 녀석의 존재가 위험이 되고 있다. 알드 차원의 잠재력은 지금 얼마나 발현되었지?"

"혀, 현재...."

요원은 작은 시계 같은 물건을 꺼내들고 내용을 확인했다.

"현재.... 14%입니다."

"1년 전에는?"

"1년 전에는... 4퍼센트였습니다."

"고작 1년 만에 10퍼센트가 올랐다. 분명 저 클로드라는 녀석 때문이겠지."

동시에 찌그러진 요원의 붕대가 원상 복구되었다. 요원은 급하게 몸을 일으키며 정자세를 갖췄다.

"9년 남았던 유예기간이 1년으로 당겨졌다는 걸 알게 되었다. 그렇다면 녀석에 오히려 더 큰 동기를 부여해 준 것이 아닌가?"

"그것은...."

"분명 클로드는 그 1년 동안 기를 쓰고 차원의 잠재력을 깨우기 위해 발악하겠지. 발에 땀이 나도록."

"하지만 고작 1년 남았습니다."

요원은 갈라진 목소리로 대답했다.

"만약 남은 1년 동안 또다시 10%를 높인다 해도, 침공을 막아낼 확률은 여전히 극히 드뭅니다."

"극히 드물다는 건, 반대로 있긴 있다는 이야기지."

주재자는 고개를 숙이며 목소리를 깔았다.

"알드 차원의 차원 잠재력 총량은 대단히 높다. 지금껏 우리가 소멸시킨 다른 어떤 차원보다 높아."

"그것은 그렇습니다만."

"잠재력 발현이 4퍼센트였을 때 우리 침공이 실패할 확률은 얼마였지?"

"없었습니다. 소수점에서도 까마득하게 아래였습니다."

"그럼 지금은?"

"아직 1퍼센트가 안 됩니다. 0.97 정도."

"그 정도면 거의 1퍼센트지. 너는 1퍼센트가 낮다고 생각하나?"

"높은 수치는 아닙니다만..."

"역시 너도 경솔하군. 붕대를 받은 지 얼마 되지 않은 자의 경솔함이야."

주재자는 요원을 노려보며 말했다.

"그 1퍼센트의 확률로 우리 사이크가 멸망할 수 있다는 걸 명심해라."

"...."

"녀석들이 만약 침공을 막아내면, 그때부터는 알드 차원에 자격이 생긴다. 그리고 자리 뺏기 싸움이 시작되지. 거기서 지면 우린 어떻게 되지?"

"...소멸합니다."

요원은 무거운 목소리로 항변했다.

"하지만 주재자님, 저희가 이 '위대한 게임'에 동참하게 된 이후, 여태껏 단 한 번도 하위차원에게 패한 적은 없습니다."

"그야 당연하지. 패했으면 소멸했을 테니까."

"...."

"지금 우리 사이크 전체가 소멸할 가능성이 생기고 말았다. 저 하위차원의 인간 하나 때문에. 이것은 치명적인 상황이다. 이해했나? 붕대를 수여받은 지 고작 179년밖에 안 지난 젊은 요원이여?"

주재자는 요원의 어깨에 손을 얹었다. 그러자 요원의 몸이 감전된 듯 크게 요동치며 뒤틀렸다.

"커, 키, 으극, 아가각."

"느껴지나? 내가 실감하고 있는 이 고통이?"

"...네. 주재자님. 저 역시 주재자님의 고통을 느꼈습니다."

요원은 온몸으로 하얀 김을 뿜으며 몸서리쳤다.

"송구할 따름입니다. 위대한 주재자님께서 이토록 끔찍한 괴로움에 고통 받고 계셨다니."

"저 조그만 인간이 나를 이렇게 만들었다. 오늘부터 네가 후원자 2호다."

그리고 침묵이 찾아왔다. 요원은 즉시 제자리에 한쪽 무릎을 꿇으며 답했다.

"영광입니다. 주재자님. 진실로 영광입니다."

"남은 시간은 1년이다. 그리고 우리들은 알드 차원에 추가 간섭이 불가능해졌지. 하지만 아직 남은 피후원자가 존재하겠지?"

"네. 아직 일곱이 남아 있고, 그중 여섯은 활용이 가능합니다."

"하나는 왜?"

"하나는 클로드의 퓨어 매직으로 영상막이 소멸했습니다. 때문에 접근이 까다롭습니다."

"그렇군. 그들을 최대한 활용해라. 가능한 모든 자원을 지원하겠다. 그것으로 침공이 시작되기 전에 클로드를 제거하거나, 혹은 클로드 혼자서는 감당할 수 없는 피해를 알드 차원에 입혀야 한다."

"명심하겠습니다. 주재자님."

"그럼 너는 가장 먼저 무엇을 할 생각인가?"

"저는 가장 먼저...."

이제는 새로운 후원자가 된 요원이 잠시 고민하다 대답했다.

"엘프 군주, 데자르를 확보하겠습니다."

"어째서?"

"데자르는 그 존재만으로도 알드 차원 잠재력을 2퍼센트나 좌우합니다. 변수가 생기기 전에 이쪽으로 데려와 우리가 활용해야 합니다."

"그렇게 해라."

주재자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후원자 2호의 양 어깨를 움켜쥐며 말했다.

"현재 발현된 알드 차원의 잠재력이 14퍼센트라 했지."

"그, 그렇습니다. 주재자님."

"클로드를 제거하면 다시 4퍼센트로 떨어질 테고."

"아마도.... 그렇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나는 침공 전에 발현된 잠재력이 다시 한자리 수로 돌아오길 기원한다. '위원회'의 규정을 정면으로 위배하지 않는다면, 그 어떤 수단을 동원해서라도 반드시 그렇게 만들어라. 알겠나?"

"알겠습니다. 주재자님."

2호는 다시금 온몸이 우그러드는 것을 느끼며 맹세했다.

"제 목숨을 바쳐서라도, 제 존재가 소멸할지라도 반드시...."

* * *

정신이 날아갈 것 같다.

여긴 어디? 나는 누구? 난 왜 손에 붕대를 쥐고 바닥에 주저앉아 있는 걸까?

글쎄, 그 붕대감은 변태 같은 놈이 그러지 뭐예요? 이제 이계의 침공이 1년 담았다네?

세상에, 세상에. 그게 정말이야? 큰일 났네. 어쩜 좋아? 이제 우리 다 난리 난거 아니야?

"황자님! 우리가 승리했습니다!"

순간 다비의 외침이 고막을 관통했다.

덕분에 저승으로 탈출했던 정신이 다시 이승으로 돌아왔다. 나는 옆에 선 다비를 물끄러미 올려다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응. 이겼네."

"이겼는데 왜 그리 표정이 안 좋으십니까? 혹시 어디 부상이라도.... 아니, 옆구리에 피가 나고 있습니다! 황자님!"

"아, 이건. 이미 고쳤어."

나는 후원자에 찔린 상처를 손으로 만지며 고개를 저었다.

"다친데 없으니 걱정 마. 대신 마음이 다쳤지만."

"저도 충격을 받긴 했습니다. 갑자기 이런 말도 안 되는 괴물들이 쏟아진 바람에, 물론 다른 기사나 병사들도 큰 충격을 받았을 겁니다."

그야 받았겠지. 이런 무시무시한 광경을 목격했으니.

하지만 내가 받은 마음의 상처는 좀 다른 영역이다. 후원자의 말이 사실이라면, 이제 본격적인 침공이 1년 밖에 남지 않았다는 거니까.

"대체 나보고 뭘 어쩌라는 거냐...."

"황자님?"

"다비, 내가 생각할게 있어서 그런데 잠시만 내버려 둘래? 아주 잠시만."

지금은 혼자 생각할 시간이 필요하다. 다비는 고개를 끄덕이며 부동자세로 내 앞을 지켰다.

...1년 남았다.

약간 의외인 것은, 그렇다고 절망의 구렁텅이에 빠진 기분은 아니라는 것.

지금 당장 침공이 시작되면 또 모를까, 아직 1년이란 시간이 남긴 남은 거잖아?

물론 시간이 팍 줄어들었다는 게 억울하긴 하다만. 덕분에 위기감이 팍팍 생기게 머리가 더 빠르게 돌아가는 기분이다.

그래. 생각해라 클로드. 지금은 생각해야 해.

아무리 몸이 피곤에 절어 죽을 것 같은 상황이라 해도, 지금 이 순간에 뭔가를 생각해 내야 한다.

어째서?

후원자가 죽었으니까.

그렇다면 일단 잘된 일 아닌가? 그 자식 함정에 빠져 남은 시간이 줄어들었지만, 적어도 그동안 후원자가 다시 깽판칠 일은 없을 테니까?

음....

그럴 리가.

그런 말랑말랑한 생각 따위에 세상의 운명을 맡겨선 안 된다.

설마 이계에 후원자 같은 게 한 놈뿐이겠어?

당연히 새로운 후원자가 있을 거라 가정해야 한다. 분명 겨우 남은 1년 까지 망쳐 놓으려고 발악할 거야. 안 그래? 나 같으면 그렇게 한다. 반드시.

아니지, 나 같으면 아예 타깃을 나 하나로 잡고, 날 죽이기 위해 가능한 모든 수단을 동원할 것이다.

나, 나, 나, 나, 나....

그래 나.

근데 무엇으로?

결국 이계 놈들이 벌인 대부분의 짓들은 인류의 배신자와 연결되어 있다.

그렇다면 이쪽이 할 일은?

미리 제거한다. 인류의 배신자를.

그럼 누구 먼저?

누구긴 누구야. 당장 벌어진 이 사달의 원인부터 족쳐야지.

"으, 삭신이야.... 나 좀 일으켜 줄래?"

"네. 황자님."

다비는 내 손을 잡자마자 무를 뽑듯 쑥 일으켰다. 어휴, 얘는 아직 힘이 넘치는구나. 나는 완전 녹아버릴 것 같은 기분인데.

"일단 넌 여기 남아서 수습 좀 해줘. 톨라리 마탑에 남겨 놓은 신관들 싹 데려와서 부상자들 치료하고. 그동안 난 좀 급하게 가볼 데가 있어서."

"지금 당장 말씀입니까?"

다비가 눈을 부릅뜨며 고개를 저었다.

"안 됩니다. 황자님께 필요한 건 휴식입니다. 아무리 급한 일이 있어도 며칠 정도는 휴식과 함께 마음의 안정을 취하시는 게...."

"마음의 안정을 위해서 가는 거야."

"네?"

"지금 상태로는 내가 두 발 뻗고 못 자. 당장 죽일 놈들을 죽여야 해. 최소한 그중에 한 명이라도."

나는 품속에서 설탕바를 하나 꺼내 입안에 넣으며 눈을 감았다.

"으, 녹는다.... 암튼 별거 아니니까 걱정 마. 금방 다녀올게."

"별거 아니라니, 대체 누굴 죽이러 가는데 그러십니까?"

다비가 물었다. 나는 굳이 대답하지 않고 새로운 설탕바를 하나 더 꺼내 입안에 집어넣었다.

그게 그렇잖아?

지금 내가 '엘프 군주'를 죽이기 위해 영원의 숲에 날아갈 거라 말하면, 분명 다비가 내 뒷목을 내리쳐 기절시켜서라도 막으려 할걸?

이계 황자는 세상을 구하고 싶다 87화

26장 타임 어택

데자르.

찬란한 미모를 자랑하는 엘프 군주. 그 아름다움에 대한 소문은 페이우드 제국을 넘어 대륙 구석구석까지 가득 퍼져 있을 지경인데....

하지만 남자다.

"마음에 안 들어.... 전부 마음에 안 들어...."

데자르는 심통 맞은 얼굴로 거울을 노려보았다. 그러다 고개를 기울이며 비스듬히 입을 열었다.

"나와라. 거기 있는 도둑 녀석."

내가 보인다고?

나 지금 은신상태인데? 어떻게 들켰지? 혹시 넘겨 짚고 있는 건가?

"무례한 도둑이군. 군주의 방에 들어왔으면 먼저 신분을 밝혀라. 키가 작은 걸 보니 드워프인가? 드워프 치고는 체격이 너무 작은 것 같다만."

쳇. 들킨 거 맞구만.

"미안하지만 인간이거든?"

은신을 풀고 녀석을 향해 손을 겨눴다. 그리고 정면으로 얼굴을 마주보는데....

후.

그래. 인정할 건 인정하자.

이런 게 바로 눈이 호강하는 미모구나. 피부에 무슨 물광 냈냐? 여기에 저 고혹적이면서도 선명한 눈매.... 심지어 오른쪽은 녹색이고 왼쪽은 금색이네?

그래봤자 후원자에게 넘어간 인류의 배신자지만.

아니. 인류가 아니고 엘프의 배신자라고 해야 하나? 세계의 배신자? 차원의 배신자?

어쨌든 데자르는 영원의 숲 깊은 곳에 있는 군주의 성에서 절대 나오지 않는 존재다.

외부인을 절대 만나주지 않기 때문에 회귀를 반복하면서도 얼굴을 보는 건 이번이 처음이다.

군주의 성은 모든 출입구, 심지어 창문까지 나무 정령인 드라이어드의 보호를 받아 물리적으로 뚫고 들어가면 바로 발각되는 곳.

여기에 성 주변에 24시간 교대로 백 명이 넘는 막강한 엘프 호위대를 뿌려 놓고 있다.

그래서 그동안 몰래 잠입이 불가능했는데.

하지만 지금은 성 주변에 호위가 한 명도 없고, 어째서인지 평소에 나무뿌리로 가려 있던 창문이 활짝 열려 있었다. 그래서 내가 들어 올 수 있던 거고.

"창문이 열려 있던 게 다행인줄 알아. 아니면 밖에서 그냥 성 째로 날려버리려고 했으니까."

"이름은?"

"뭐?"

"이름이 뭐냐. 인간."

이 와중에 내 이름이 그렇게 궁금하냐? 여차하면 네 목이 달아날 판국인데?

"...클로드."

"그저 몰래 숨어들어온 도둑은 아닌가 보군. 제국의 막내 황자라. 이런 저런 소문을 들었는데...."

녀석은 눈을 가늘게 뜨며 도발하듯 웃었다.

"소문만큼 실력이 대단한지 궁금하군. 날 죽이러 왔나? 그럼 어디 죽여보든가?"

이놈 봐라?

내가 너 죽이라면 못 죽일 줄 알고?

물론 지난 9회 차 때까지는 내 손으로 이 엘프 군주를 죽인 적이 한 번도 없었다.

시도를 안 한 건 아니다. 하지만 성 주변에 접근하기만 해도 무슨 재주인지 흔적도 없이 도망쳤고, 멀리서 마법으로 성까지 통째로 날려버리면 나중에 잔해에서 시체가 나오질 않았다.

한 마디로 말하자면 도망의 귀재. 그것이 바로 엘프 군주 데자르다.

"죽이는 건 언제든지 할 수 있어. 아무튼 이번엔 도망치지 않고 잘도 남았네."

"도망? 내가 왜 도망쳐야 하지?"

데자르는 어이없다는 얼굴로 되물었다. 아니, 너 지금까지 항상 도망쳐서 흔적도 안 남겼었거든? 대체 그때랑 지금이랑 뭐가 달라서 이렇게 당당한 거냐?

그나저나 처음 계획을 떠올리자면....

지금 시점에서 엘프 군주를 죽일 생각 따위는 단 1도 없었다.

대 놓고 군주의 성을 날려버리면 그 뒤로 나무 정령과의 계약이 불가능해지니까.

그러니 먼저 말은 통하는 드워프를 구워삶아 인연을 맺고, 드워프 군주인 겔리에게 추천을 받아 함께 엘프의 본거지로 들어온다.

다음으로는 '나는 다른 종족과 싸우기 싫다. 그 증거로 여기 있는 드워프와도 좋은 관계를 만들었다. 정 못 믿겠으면 여기 있는 나무의 정령인 드라이어드에게 인정을 받겠다'라고 소리친다.

거기까지 오면 저 엘프 군주가 경비병을 통해 '넌 또 뭐냐 죽기 싫으면 꺼저라!'라는 전언을 보내는데, 동시에 나무 정령이 직접 나서 '계약을 원하는 자를 막을 수 없습니다'라며 계약 테스트가 시작된다.

이것이 바로 정상적인 '이종족연합'루트의 진행방식.

그런데 왜 그대로 안 하냐고?

그야 두 시간 전에 벌어진 일식이 정상과 비정상의 경계를 박살 내 버렸으니까.

"도망칠 이유? 너 엘프들에게 독을 먹였잖아? 자기가 군주인 주제에. 네놈이 여기 처박혀 소꿉장난 하는 동안 대체 몇 명의 엘프가 죽은 줄 알아?"

"모른다. 알고 싶지도 않고."

"뭐?"

"모두 부질없다. 엘프의 흥망성쇠 따위. 너야말로 뭔가 급한 모양이군. 혹시 내게 정보를 얻어내고 싶은 거냐?"

"...."

음. 정답.

돌아가는 꼴을 보아하니, 월식 게이트 직전에 마지막으로 후원자를 만난 게 바로 이 엘프 군주임이 확실하다.

이미 군주의 명령으로 물을 마시고 타락 독에 중독되었다는 증언도 들었고.

그러니 정보를 뽑아내고 싶은 마음이 간절하다.

그놈의 후원자랑 대체 무슨 이야기를 했지?

대체 무슨 조건으로 백성들을 사지로 몰아넣은 거야?

혹시 월식 게이트가 열리는 것도 미리 알고 있었냐?

너 진짜 미쳤냐? 미치지 않고서 왜 이런 짓을 해?

기타 등등.

아니면 적어도 이 녀석이 사태를 악화시키기 전에 숨통을 끊어놔야 한다. 그래서 악착같이 기운을 내 여기까지 날아 왔는데....

종족 : 엘프

현재 힘 : A

현재 마법 : S

현재 부여마법 : S

현재 정령 마법 : C

잠재 정령 마법 : S

거 스펙 한번 야무지십니다. 그려.

힘 등급 A는 나이트 마스터인 다비와 동일.

여기에 마법 등급이 S라는 건 당장 S+인 나와 비교해도 큰 차이가 없는 수준.

부여마법이나 정령마법은 딱히 언급 할 필요도 없다. 이런 막강한 능력을 가진 주제에 왜 지금까지 싸우려고만 하면 냅다 도망치거나 실종됐던 걸까? 이 정도면 자신감 뿜뿜해도 되지 않나?

후, 막상 싸우려니 불안하네.

물론 평소의 나라면 까짓 거 그냥들이 받았을 것이다. 이놈이 강해 봤자 이계의 웨이브 러시만큼 강하겠어? 상대가 마법사라면 퓨어 매직을 활용하는 방법도 있고.

하지만 두 시간 전의 전투에서 마력 소모가 너무 컸다.

정령까지 전부 사용해 가용 전력도 뚝 떨어졌고. 이럴 줄 알았으면 설탕바나 몇 개 더 먹고 올걸 그랬네.

여기에 만약 이 녀석도 후원자에게 소원을 빌었다면?

그래서 내가 공격하려는 순간 갑자기 괴물로 변한다면?

"...하나만 물을게."

당장은 시간이 필요하다. 속으로는 없는 살림에 최대한 쥐어짜는 전투 플랜을 구상하며 겉으로는 질문을 던졌다.

"너 말이야. 후원자한테 대체 무슨 소원을 빌었어?"

"소원?"

"그래. 소원."

"재미있군. 후원자와의 관계가 어떻게 돌아가는지 정확히 알고 있을 줄이야."

데자르는 입꼬리를 올리며 흥미롭다는 표정을 지었다.

"너도 후원자에게 소원을 빌었나? 그 작은 몸으로 이곳저곳을 날아다니는 게 그 대가인가? 세계를 파멸시키기 위해?"

그럴 리 있겠냐?

그보다 제발 작다는 말 좀 강조하지 마! 그러는 네놈은 키가 무슨 오우거만큼 큰 줄 아냐?

후....

근데 분위기를 보니 내가 구라를 좀 섞어주면 정보를 더 빼낼 수 있을 것 같기도 하네. 지금은 흥분하지 말고 조용히 떠 봐야지.

"그렇게 보여? 내가 후원자에게 무슨 소원을 빌었을 것 같아?"

"키가 크게 해 달라고?"

됐고, 넌 그냥 죽어라. 리버스 그래비티.

우웅!

동시에 데자르의 몸이 공중으로 떠올랐다.

물론 리버스 그래비티로 아크 위저드 급의 마법사를 죽이는 건 불가능.

대신 어떤 식으로 반응하는지를 확인하고 거기에 맞춰서 결정타를 날리려고 했는데....

촤륵!

갑자기 원목으로 된 바닥 전체가 나무뿌리로 변하며 떠올랐다.

동시에 공중으로 솟구치던 데자르의 양 다리를 움켜쥐며 고정시켰다. 쳇, 정령마법인가? 저런 식으로 방어할 줄은 몰랐는데.

그런데 그 순간.

촤륵!

촤륵!

온 사방에서 새로운 나무뿌리가 날아들며 데자르의 양 팔을 옭아맸다.

음.... 이건 뭘까?

리버스 그래비티에 대한 대처? 아무리 그래도 저렇게까지 꽁꽁 묶을 필요는 없을 것 같은데.

그렇다고 방어용으로 마법을 전개했다고 보기도 힘들다. 휘감은 부위가 팔다리뿐이잖아? 여보세요? 거기 몸통이 텅 비었는데요?

"음...."

혹시나 하는 마음에 녀석의 배를 향해 바람의 칼날을 뿌렸다.

평범한 방패로 막아도 가볍게 막힐 수준의, 그야말로 맛보기에 불과한 마법.

그런데 그 마법이 아무 저항도 받지 않고 적의 몸을 정확히 반으로 갈라버렸다!

촥!

"컥...."

데자르의 입에서 신음이 터졌다.

동시에 팔다리를 옭아맨 나무뿌리가 풀리며 바닥에 떨어졌다.

엑? 정말 이걸로 끝?

데자르 씨 뭐 하세요? 그 엄청난 스펙은 어따 팔아먹었어?

"드라이어드... 하필, 하필 그 순간에 가호를 풀고 날 묶다니...."

허리가 잘린 데자르는 숨을 헐떡이며 높은 천장을 향해 손을 뻗었다.

"한 번 더.... 한 번 더 그 도시를.... 보고 싶었는데...."

그리고는 뻗었던 손을 힘없이 떨어뜨렸다.

뭘까. 이 허망한 결말은.

어떻게든 남은 마력으로 승부를 보기 위해 필사적으로 머리를 굴렸는데 전부 쓸모가 없게 됐다. 뭐 나야 편하고 좋긴 한데.

아무튼 뭐가 어떻게 된 거래? 방금 드라이어드 어쩌고 그랬지?

설마 밖에 있는 나무 정령이 뭔가 손을 쓴 건가?

"이 주변 전체가 나무 정령의 성소긴 한데...."

그때 부릅뜨고 죽은 녀석의 눈에서 녹색의 둥그런 구슬이 떠올랐다.

생긴 것만 보면 영락없이 사람 눈알.

그렇다고 진짜 눈알이 빠진 건 아니다. 대신 녹색이었던 오른쪽 눈이 왼쪽과 똑같이 금색으로 변했네?

"이거 설마...."

문제의 구슬을 손으로 움켜쥐자 녹색의 연기로 산화하며 흩어졌다.

"응?"

그리고 확산된 연기가 다시 내 몸을 감싸며 흡수된다.

마치 과거에 사령군주의 감정안이 그랬던 것처럼.

"눈이...."

갑자기 오른쪽 눈이 쑤시며 얼굴에 열이 확 오른다. 으, 맞아. 전에도 이랬는데.

동시에 누군가의 시선이 강하게 느껴졌다.

"누구냐!"

고개를 휙 돌리자, 방금 내가 날아 들어왔던 창문 밖으로 녹색과 갈색으로 된 여자가 서 있는 게 보였다.

"...."

여자는 슬픈 얼굴로 죽은 데자르의 시체를 바라보고 있었다.

그러고 보니 여긴 3층인데. 아가씨, 키가 대충 10미터쯤 되시나 보죠?

물론 농담이다. 나는 저 여자를, 아니 저 정령을 이미 알고 있다.

"처음 뵙겠습니다."

정령은 내 쪽으로 고개를 돌리며 천천히 입을 열었다.

"저는 엘프의 수호신이며, 숲과 나무의 정령인 드라이어드입니다. 그만 밖을 나오시지요. 클로드 님. 당신과는 나눠야 할 이야기가 무척 많을 것 같군요."

* * *

"정말 힘든 하루였죠?"

드라이어드는 자신의 가지에 열린 분홍빛 열매를 직접 따서 내게 건네주었다.

"고단하실 텐데 우선 이거라도 하나 드세요. 피로 회복에 좋은 열매랍니다."

"어.... 고마워."

별 의심 없이 열매를 받아 들었다. 그래. 이거 완전 꿀맛이지. 전에도 자주 먹었고.

한편 내가 군주의 성 밖으로 나오자 주변에 있던 소수의 엘프들이 기겁을 하며 달려오기 시작했다.

"인간! 어째서 인간이 이곳에...."

"잡아! 성역에 인간을 들여 놓으면 안 된다!"

"조용히."

그러자 드라이어드가 긴 나뭇가지를 뻗으며 엘프들을 제지했다.

"모두 조용히 해 주세요. 이 분은 저의 손님이자 엘프의 은인입니다."

"저, 정령님!"

뒤늦게 드라이어드의 존재를 발견한 엘프들이 그 자리에 무릎을 꿇었다.

근데 이놈들은 또 왜 이런데? 드라이어드는 처음부터 군주의 성 옆에 나무의 형태로 존재하고 있었잖아? 왜 인지를 못 하고 있어?

"놀랄 일은 아닙니다. 제가 엘프에게 건 가호를 방금 잠시 풀었었거든요."

이계 황자는 세상을 구하고 싶다 88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