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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계 황자는 세상을 구하고 싶다 80화

25장 세상이 뒤집히던 날

투명한 피부에 눈부신 금발, 긴 귀와 아름다운 얼굴을 가진 엘프가 거울을 보며 중얼거렸다.

"마음에 안 들어...."

엘프는 자신의 얼굴에 손톱을 그으며 상처를 남겼다.

하지만 아무런 느낌도 들지 않았다. 거울속의 자신이 피를 흘리기 시작했지만 엘프의 눈은 마치 다른 세상을 보듯 공허할 뿐이었다.

"왜 또 왔지?"

그러던 와중에 고개를 돌리며 목소리를 높였다.

"시킨 일은 다 했다. 확실히 즉효더군. 식수에 풀었더니 다들 흥분해서 인간들을 향해 돌진하는 꼴이라니."

그 순간, 넓은 방 한쪽 구석에서 붕대를 두른 남자가 천천히 솟아올랐다.

"이쪽도 세심하게 준비한 독이니까요. 잘 하셨습니다, 군주님. 그런데 백성들이 걱정되지 않으십니까?"

"엘프가 걱정?"

엘프는 코웃음으로 답했다.

"걱정은 단명종들이나 하는 거다. 난 걱정 같은 거 하고 살기엔 너무 늙었어. 백성들이 다 죽든 말든. 나완 상관없는 일이다."

세상에 흩어져 있는 모든 엘프를 통틀어 가장 오래된 부족인 영원의 숲 엘프.

바로 그 영원의 숲 엘프 군주의 입에서 소름끼치는 이야기가 흘러나왔다. 후원자는 놀란 기색으로 어깨를 으쓱였다.

"그러고도 군주입니까? 당신 밑에 있는 엘프들의 처지도 기구하군요. 물론 그렇기에 더욱 마음에 듭니다만."

"이 기회에 엘프가 절멸해 버리는 것도 나쁘지 않겠지. 아니면 그 인간 제국을 박살 내고 대륙의 패권을 잡아도 좋을 테고."

"극과 극이군요. 역시 군주님과 저는 마음이 잘 맞는 것 같습니다."

"그래 봤자 몇 년 남지도 않았는걸. 뭐가 어찌 됐든 난 변화가 필요해."

엘프는 몸을 빙글 돌리며 자신의 양 어깨를 감싸 쥐었다.

"3천년이 지났는데도 내 몸은 아무 변화가 없다. 내가 사는 세상도 아무 변화가 없고."

"수많은 차원에서 수많은 종족들을 경험했습니다만, 엘프처럼 변함없이 장수하는 종족은 처음 봤습니다."

"신기한가?"

"그보다는 저희 종족도 영생에 관해서 일가견이 있거든요. 덕분에 여러모로 동질감이 느껴집니다."

"그런가? 그럼 이것도 못할 짓이란 걸 알겠군. 아무튼 약속은 지키겠지?"

"물론입니다. 말 나온 김에 한번 구경이라도 해 보시겠습니까?"

후원자가 손가락을 튕기자, 뒤편의 공간이 열리며 깊은 어둠이 모습을 드러냈다.

"...음?"

순간 어둠을 바라보던 엘프의 눈이 일그러졌다.

"안쪽에 괴상한 것들이 한가득인데?"

"네? 앗, 실수입니다. 무기고를 열다니. 이걸 보여드리려는 게 아니었는데 말이죠."

후원자는 다시 한번 손가락을 튕겼다.

탁!

그러자 새롭게 공간이 열리며, 이번엔 눈부신 도시의 풍경이 모습을 드러냈다.

"호오...."

덕분에 죽어 있던 엘프의 눈에도 생기가 돌았다.

끝없이 펼쳐진 까마득한 높이의 건물.

그 건물 사이를 빠르게 돌아다니는, 가히 에이션트 울프만큼이나 빠른 정체불명의 금속 마차.

그리고 수천, 수만의 인파가 몰려 있는 원형 경기장.

그 와중에 더욱 놀라운 건, 경기장의 중심부에 세워진 기둥에서 영상이 출력되고 있는 것이었다.

바로 지금 이곳에서 벌어지는 일들.

엘프와 인간의 전쟁.

정확히는 광기에 날뛰는 영원의 숲 엘프와, 예상 못한 기습에 붕괴되고 있는 페이우드 제국 백기사단의 처참한 전투.

"이미 전투가 시작했나."

엘프 군주 역시 그 모습을 보며 미소를 지었다.

"누군가의 비극은 누군가의 희극이 되게 마련이지. 보아하니 너희들은 다른 세계의 촌극을 즐기나보군."

"많이들 즐기는 취미 중 하나입니다. 다만 최근 들어 윗분들의 불만이 커졌습니다. 저희가 하는 후원의 성과가 제대로 나오지 않는 것 같다고 말이죠."

"윗분들이라. 전에 말한 위원회를 말하는 건가?"

"위원회는 그보다 더 위에 있는 개념이죠. 물론 이 짓을 계속 하다보면 저희도 그 개념에 편입될 가능성이 있지만, 아직은 한참 멀었습니다."

"하늘 위에 또 하늘이라. 하긴, 하찮은 벌레 밑에도 그보다 더 작은 벌레가 있기 마련이지."

"역시 군주님은 현명하시군요."

후원자는 손가락으로 입을 가리며 웃었다.

"방금 보여드린 건 모두 비밀입니다. 당신이 특별한 존재이기 때문에 특혜를 드렸을 뿐, 다른 분들에겐 전부 비밀을 지키고 있습니다."

"아주 인상적이야. 전에 제국 수도인 엠퍼로드에 몰래 가본 적이 있는데.... 그곳도 꽤 번화하다고 생각했지. 하지만 그대들의 도시에 비할 바는 아니군."

엘프는 이계의 도시를 바라보며 황홀한 표정을 지었다.

"그런데 말이야."

"네. 군주님."

"방금 잠시 보여준 무기고."

"아, 실수로 보여드렸던 곳 말이죠?"

"그 안에 있는 괴물들로 공격하는 건가? 9년 후에 시작한다는 침공?"

"그 어둠속의 것들이 보였습니까? 굉장한 눈을 가지고 계시는군요?"

후원자는 놀랍다는 듯 되물었다. 엘프는 그새 얼굴에 말라붙은 피를 닦으며 눈살을 찌푸렸다.

"별 볼일 없는 재주지. 그보다 너희 목표는 우리 세계의 파멸이라 하지 않았나?"

"그렇습니다만?"

"그런데 굳이 이렇게 밑 작업을 할 필요가 있나? 방금 본 것의 일부만 넘어와도.... 이쪽 세계는 제국이고 뭐고 삽시간에 초토화될 텐데?"

"그것을 아시겠습니까?"

"그래. 이거야말로 오래 살다보니 생긴 의미 있는 재주지."

엘프는 손가락으로 자신의 눈가를 두드렸다. 후원자는 손뼉을 치며 고개를 끄덕였다.

"놀라운 능력입니다. 다만 군주님은 자신의 세계를 너무 과소평가하고 계시군요. 여러분들의 세계는 생각보다 아주 높은 잠재력을 가지고 있습니다."

"잠재력?"

"새로 발견되는 대부분의 차원은 '시험'을 통과하지 못하고 사라집니다. 하지만 여러분의 차원은 그것을 이겨내고 신세계에 합류할 가성이 무척 높게 평가됩니다."

"어째서?"

엘프는 이해할 수 없다는 얼굴로 반문했다.

"기껏 100년도 못 사는 단명종이 지배하는 형편없는 차원인데? 혹시 그 인간 놈들이 내 생각보다 더 강한가?"

"그보다는 좀 더 본질적인 문제입니다."

"본질이라. 뭘 말하는지 모르겠군."

"이곳에는 본질적으로 특별한 존재들이 있습니다. 그저 이곳의 주민인 여러분들이 그것을 활용하지 못할 뿐이죠."

"흠. 정령 같은걸 말하는 건가?"

엘프는 그제야 이해가 됐는지 고개를 끄덕였다.

"마침 우리도 하나 가지고 있지. 나무 정령. 하지만 엘프의 수호신이라 함부로 계약해서 다루거나 하진 않아."

"그것도 하나의 예가 될 수 있겠죠. 전부는 아닙니다만."

"다른 요인이 또 있나? 혹시 인간들이 섬기는 다섯 신이라던가?"

"그것도 계산하기 어려운 변수입니다. 강력한 잠재력이죠. 그래서 저희들도 이렇게 룰이 허용하는 한계 안에서, 혹은 룰의 사각지대를 이용해 최선을 다하는 것입니다. 여러분들의 차원을 침공하는 그날까지 말입니다."

"그래서 무슨 이득이 있는데?"

엘프는 아직 열려 있는 후원자의 차원을 손가락으로 가리켰다.

"너희가 우리 차원을 멸망시키면, 그래서 우리가 그쪽 세계에 편입되는 걸 막으면 대체 어떤 이득이 있지?"

"이곳 차원 자체가 이득이자 포상입니다."

후원자는 손가락을 감은 붕대를 천천히 풀기 시작했다.

"보시다시피, 저희는 여러분들과 다른 구성을 가진 존재입니다."

붕대 안의 맨살은 놀랍게도 형태가 존재하지 않는 검뿌연 그림자였다. 엘프는 놀란 눈으로 그것을 노려보며 중얼거렸다.

"에너지.... 마법? 마력의 흐름 그 자체가 생명으로.... 이런 생명도 존재할 수 있나?"

"역시 눈이 좋으시군요. 물론 처음부터 이러진 않았습니다. 제 조상들은 여러분들처럼 피와 살로 이뤄진 생명이었죠. 하지만 영생을 추구하는 과정에서 이런 몸이 되고 말았습니다."

"영생이라. 그래서 엘프와 동질감을 느낀다고 했군."

"덕분에 조건만 맞으면 영생합니다만, 반대로 정상적인 방법으로는 생을 유지할 수 없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차원의 힘을 빨아들여 에너지를 얻어야 하죠."

"에너지가 빨린 차원은?"

"다 빨리면 소멸합니다."

"차원 포식이군. 대체 어떻게.... 흐음. 뭐 아무래도 좋아."

엘프는 나른한 표정으로 한쪽 어깨를 으쓱였다.

"이딴 세계, 설사 망해 버린다 해도 아무 감흥도 없다. 저 추한 인간들이 주도권을 잡은 세상 따위. 물론 인간이 아니라 우리가 잡는다 해도 딱히 뭐 달라질 것 같지도 않고."

"저런, 자신의 종족에 대한 평가에 무척 박하시군요."

"수천 년을 지켜봤으니까. 그러니 뭐든 협력하지. 그쪽은 약속만 지켜주면 된다."

"물론입니다. 이쪽 세계를 파멸시키는 순간, 군주님 한분만은 특별 케이스로 저희 세계의 일원으로 받아들이겠습니다."

"하지만 앞으로 9년 남았지."

엘프는 길게 한숨을 내쉬었다.

"그토록 짧은 시간이 이토록 길게 느껴지긴 처음이야."

"아니, 어쩌면 얼마 남지 않았을지도 모릅니다."

후원자는 미소와 함께 텅 빈 손가락을 흔들었다.

"이번에 위원회에 특별 의례를 통과시켰습니다. 덕분에 맛보기로 군대의 일부를 보내는 게 가능해졌습니다."

"위원회라는 게 엄청 깐깐하다고 하지 않았나? 잘도 그런 걸 허락해줬군."

"고맙게도 이쪽 세상에 일식이 찾아오거든요."

"일식?"

"달이 태양을 가리는 현상입니다."

후원자는 고개를 들어 천장을 가리켰다.

"거기에 따라오는 거대한 그림자가 이쪽 세상을 덮어버리죠. 그럼 일시적이나마 잠시 동안 유지되는 게이트를 열 수 있습니다."

"바로 그 게이트로 아까 봤던 괴물들을 투입한다?"

"전부가 아니라 일부지만요."

"그 일부만으로도 세상이 뒤집힐 거다. 도박을 한다면 나는 못 버티고 망한다에 걸도록 하지."

"저도 그렇게 되길 희망합니다. 저희 입장에서 위험부담이 이만저만 큰 게 아니라서요."

"위험부담? 어째서?"

"적은 병력으로 쳐들어왔다가 여러분들이 방어에 성공하면, 나중에 진짜 본게임 시작될 때 저희들이 더 힘들어지지 않겠습니까?"

그리고 잠시 동안 침묵이 이어졌다. 엘프는 눈을 가늘게 뜨며 고개를 끄덕이기 시작했다.

"맞는 말이다. 외부의 적을 깨달은 순간 서로 뭉칠 테니까. 분명 필사적으로 준비하고 대처하겠지."

"맞습니다. 저희들 입장에서 실패하면 진짜 위험해질 가능성이 생기죠. 어쩌면 제가 책임을 지고 목숨을 걸어야 할지도 모릅니다."

"그럼 반대로 묻지. 너희는 왜 그런 위험을 감수하지? 어차피 9년 뒤면 안전하게 끝장 낼 수 있을 텐데?"

"거기엔 어려가지 이유가 있습니다만.... 변수가 생겼기 때문입니다."

"변수?"

"특정 변수의 성장 속도가 너무 빠릅니다. 이대로 9년이 지나면 저희들의 무조건적인 승리를 장담할 수 없을 정도로 말이죠."

"그거 재미있군. 하지만 맛보기가 실패하면 더 위험해 질 텐데?"

"물론 준비를 많이 했습니다."

탁!

후원자가 다시 손가락을 튕기자 뒤쪽의 차원이 다시 캄캄한 어둠으로 돌변했다.

"이번 맛보기는 여러분이 상상하시는 그 이상일 겁니다."

"음, 다시 봐도 무시무시하군."

"본래는 제3파, 아니 제4파에 동원될 정도로 강력한 생체병기를 긁어모았습니다. 정말 위원회가 태클을 걸어도 할 말이 없을 정도지요. 심지어 규정에 정해진 제한병력 이상을 동원하기 위해, 여러분 세계의 인재들을 몰래 끌어들여 추가하기까지 했습니다."

"이쪽 세계의 인재? 잘도 포섭했군. 나처럼 절망한 녀석들이 또 있던가?"

"설명하자면 복잡합니다. 여하튼 한 번의 원정으로 페이우드 제국을 무너뜨릴 겁니다. 그러면 변수가 차단되고, 나머지도 버티지 못하고 소멸하겠죠."

"마침 엘프가 제국을 공격한 찰나이기도 하고. 모든 게 너의 계획대로 흘러가는 건가?"

"엘프들이 활약하는 만큼 세계의 종말이 더 빨리 다가올 겁니다. 앞으로 9년을 더 기다릴 것도 없이 말이죠."

이계 황자는 세상을 구하고 싶다 81화

25장 세상이 뒤집히던 날

"기대되는군. 정말 기대 돼."

엘프는 텅 빈 눈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후원자는 순간 박수를 치며 엘프의 앞으로 한걸음 다가왔다.

"맞다, 그 전에 혹시 검을 한 자루 얻을 수 있을까요?"

"검?"

"엘프가 검 하나는 기가 막히게 잘 만든다는 이야기를 들었습니다만."

"사실이지. 음.... 거기 한번 열어 보게."

엘프는 자신의 방 한쪽 벽을 가리켰다. 걸음을 옮긴 후원자가 벽에 달린 손잡이를 끌자, 숨겨진 벽장이 드러났다.

드르르르륵!

그곳에는 눈부신 보검들이 수두룩하게 놓여 있었다.

"오.... 이것은...."

"어때. 좀 봐줄 만하나?"

"봐줄 만한 정도가 아니라 놀랍습니다. 금속의 결합과 만듦새가 경이로운 수준이군요."

후원자는 세워진 칼들을 하나씩 둘러보며 감탄을 거듭했다.

"대체 이런 명품을, 이런 뒤떨어진 기술을 가진 차원에서 어떻게 만들 수 있는 겁니까?"

"시간이지."

"네?"

"엘프는 남는 게 시간이다. 특히 나 같은 군주는 더 그렇고. 시간을 갈아 넣고 또 넣고 하다보면 가끔 그런 게 나온다."

"정 안 되면 위원회의 눈을 속여서라도 저희 쪽의 무기를 쥐여드리려 했습니다만.... 이 정도면 완전 만족입니다. 오, 여기 이 거대한 게 딱 어울리겠군요."

후원자는 가장 안쪽에 세워진 2미터가 넘는 크기의 대검을 한 손으로 집어 들었다. 엘프는 후원자의 괴력에 잠시 감탄하다 입을 열었다.

"1500년쯤 전에 심심해서 만든 검이다. 당시에 에이션트 베어 족장과 이야기하다가 부탁을 받았지."

"에이션트 베어라면 곰 아닙니까?"

"그냥 곰은 아니고 고대종이지. 인간들은 마수라고 부르지만. 아무튼 지능이 높아서 도구를 활용할 줄 안다."

"검을 다루는 곰이라니, 상상이 안 가는군요. 그런 앞발의 구조로 검을 쥐는 게 가능합니까?"

"낸들 아나. 암튼 정성을 들여 녀석의 덩치에 걸맞은 검을 만들었다. 그런데 막상 완성된 검을 가져가 보니 그 족장이 죽어있더라고."

"네?"

"만드는 데 500년 걸렸거든."

"...."

"그 녀석들 수명이 아무리 길어도 700살을 못 넘기더라고. 나한테 의뢰를 맡긴 게 400살쯤이었고. 그래서 그냥 내가 가지고 돌아왔지. 어차피 다룰 사람도 없고 해서."

"비극적인 이야기군요. 대신 이쪽에서 가져가 사용해도 되겠습니까?"

후원자는 거대한 검을 가볍게 휘두르며 물었다. 엘프는 아무래도 상관없다는 듯 손목을 까닥거렸다.

"맘대로 해. 어차피 세계가 소멸하면 아무 의미도 없는 물건이니까."

"감사합니다. 그럼 이제 곧...."

후원자는 자신이 열어 놓은 어둠 속으로 발을 밀어 넣으며 웃었다.

"세계가 뒤집힐 시간이군요. 결과가 궁금합니다. 과연 여러분들이 사라질지, 아니면 제가 사라질지.... 물론 어찌 되었든 결말은 똑같겠지만."

* * *

황무지에 모래먼지를 일으키며 엘프 떼가 몰려온다.

자기들이 무슨 소떼인 줄 아나? 왜 저렇게 미친놈들처럼 입에 거품까지 물고 내달리는 걸까?

엘프는 원래 저렇게 움직이는 종족이 절대 아니다.

특히 싸움에 있어 더더욱 그렇다. 본거지인 영원의 숲으로 적들을 끌어들인 다음, 날다람쥐 같은 재빠른 움직임으로 나무 사이를 뛰어다니며 상대를 교란시킨다.

다음으로 정글의 게릴라처럼 소리 없이 접근해 단검으로 목을 그어버린다던가, 혹은 마법을 곁들인 정교한 활솜씨로 투구 틈을 꿰뚫어 저격하는 것이 주요 패턴.

그런데 지금은....

"크오! 죽여! 인간 놈들! 다 죽여 버려!"

"어제 내가 다섯 놈 죽였다! 백기사단 다섯을 죽였다고! 앞으로 열 놈은 더 죽여야 해!"

"그아아아악! 피! 죽음! 다 뭉개!"

대체 뭘까. 저 야만전사들은.

물론 엘프는 힘이 강하다.

저 호리호리한 체격만 봐서는 믿겨지지 않지만, 기본 근력만 따져도 최하급 마갑을 착용한 기사에 버금갈 정도.

하지만 내리찍은 맨주먹으로 기사의 투구를 으깨버릴 정도의 괴력을 가진 건 결코 아니다. 자기들이 무슨 오우거인 줄 아나? 그리고 저놈은 또 뭔데? 왜 박살난 머리통을 들고 자랑스럽게 흔들고 있어?

"저것들이 미쳤나...."

영문을 모르겠다.

지난 회귀 때 이런 적은 단 한 번도 없었다. 심지어 이곳은 영원의 숲 근방이 아닌, 거기서 한참 아래로 내려온 귀네스 지방.

첫 전투에서 백기사단을 박살낸 엘프 군대는, 이후 쉬지도 않고 장장 하루가 넘게 내달리며 남하하고 있다.

이건 아무리 엘프라 해도 정상 수준을 벗어난 체력이다.

뭔가 좋은걸 잘 먹었다던가, 혹은 나쁜 걸 잘못 먹었다던가 하지 않는 이상 납득할 수 없는 상황.

"...어떻습니까?"

수호기사단 단장인 듀론이 불안한 얼굴로 물었다. 비행정찰을 마치고 돌아온 나는 한마디로 모든 것을 설명했다.

"엘프들이 미친 것 같아."

"저런...."

"역시 후퇴한 백기사단의 증언이...."

함께 기다리고 있던 청기사단의 단장 하이네와, 철퇴기사단 단장인 렉세르의 표정이 함께 일그러졌다. 나는 두 기사단장의 얼굴을 번갈아보며 말했다.

"엘프라고 철인은 아니니까. 정면 승부를 피하고 계속 시간을 끌면 결국 지쳐서 제풀에 무너질 거야."

"황자님 말씀이 맞습니다. 백기사단과 전투를 치르고도 휴식 없이 계속 내려오고 있으니까요."

"피해가 커질 거 같으면 내가 나설게. 그 전까지는 계획대로 엘프들을 끌어들여서 포위망에 가둬줘"

"알겠습니다. 그럼 무운을 빌겠습니다."

"무운을 빕니다! 황자님!"

두 기사단장이 경례를 하며 자신들의 위치로 돌아갔다. 나는 혼자 남은 듀론을 보며 넌지시 물었다.

"사령군과 전투를 치른 게 엊그제 같은데, 벌써 또 전쟁이라니 세상 참 힘들지?"

"말씀하신 대로입니다만, 정작 사령군과의 전투에서 제국 수호 기사단은 손끝 하나 까딱하지 않았습니다."

노인은 쓴웃음을 지으며 고개를 저었다.

"그때는 황자님께서 혼자 결판을 내셨죠. 이번 전투도 그때처럼 되면 얼마나 좋겠습니다만...."

"그렇겐 안 될 거야."

그렇게 되서도 안 되고 말이지. 나는 고개를 저으며 미리 준비한 변명을 늘어놓았다.

"당연한 소리지만 엘프에게 턴 언데드는 안 통해. 물론 원소마법을 쓸 수 있지만 엘프들은 기본적으로 항마력이 월등한 종족이라."

"저도 그렇게 들었습니다. 물론 그럼에도 이 늙은이는 황자님께서 활약해 주실 것을 믿어 의심치 않고 있습니다."

"내가 나서는 건 좀 나중이 될 거야. 그 전까지는 기사단을 중심으로 버텨 줘."

백기사단이 깨졌다는 소식에 급히 날 소환한 황제는, 곧바로 3개 기사단을 동원하며 내게 토벌군의 전권을 맡겨주었다.

다만 급하게 동원하느라 기존의 정원을 채우지 못했다는 것.

그리고 전장으로 빠르게 이동하기 위해 일반 병사들은 아예 전장에 도착하지도 못했다는 게 문제긴 한데....

아니지.

진짜 문제는 그런 게 아니다.

몰려오는 적 엘프군대의 숫자는 대략 1,500 정도.

사실상 영원의 숲 엘프들 중에 전투가 가능한 전 병력이 내려왔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하지만 엘프들이 숲을 나와 전투를 치러 준다는 것 자체가 상대의 입장에선 완전 땡큐 그 자체.

그리고 이쪽에서 동원한 청기사단과 철퇴기사단은 제국의 명백한 주력 기사단이다.

비록 이미 박살난 백기사단에 비해 한수 아래라고 평가되지만, 둘이 합쳐 2천 기의 기사가 활약해 주면 지친 적들을 충분히 포위해서 전멸시킬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바로 그것이 문제의 본질이다. 안 돼! 여기서 엘프를 다 죽여 버리면 안 된다고!

"왜 그러십니까 황자님? 표정이 좋지 않으십니다."

노인네 눈치도 빠르긴. 나는 한숨을 내쉬며 새로운 핑계거리를 늘어놓았다.

"수호기사단에 너무 큰 짐을 지운 것 같아서. 가뜩이나 부족한데 적의 선공을 받아내는 역할이잖아? 분명 피해가 많이 나올 거야."

"안타깝지만 어쩔 수 없습니다. 저번 전투 이후에 어떻게든 기사단의 역량을 높이려 노력했습니다만...."

"단장 혼자 어떻게 할 수 있는 문제가 아니야. 그래도 이번엔 지원군을 데려왔으니 너무 절망하진 말고."

"물론 나이트 마스터의 합류는 천군만마나 다름없습니다. 그에 비해...."

듀론은 고개를 돌려, 뒤쪽에 서 있는 기사 중 한 명을 곁눈질했다.

"카일이라고 했던가요? 나이트 다비의 옆에 있는 젊은이 말입니다."

"맞아. 카일."

"저 청년에게 전투 지휘를 맡긴다니, 저로선 도무지 이해가 가질 않습니다."

"왜, 직접 지휘하고 싶어?"

"제 역량이 부족하다는 건 제가 가장 잘 알고 있습니다. 다만 기왕 맡길 거라면, 이제 막 임관한 기사보다는 나이트 다비에게 일임하는 것이 좋지 않겠습니까?"

당연한 의문이긴 한데, 너도 막상 카일이 지휘하는 거 보면 깜짝 놀랄걸?

"각자 잘하는 분야가 있으니까. 그럼 단장은 예비대를 이끌고 뒤로 빠져. 카일의 지시대로만 움직이면 별일 없을 거야."

"황자님께서 그렇게까지 말씀하신다면.... 알겠습니다."

듀론은 군말 없이 대열의 뒤로 물러났다. 나는 뒤쪽에 있던 다비와 카일을 불러 다시 한번 작전을 설명했다.

"저기 먼지구름 보이지? 금방 전투가 시작될 거야. 예정대로 수호기사단이 여기서 적의 공세를 받아내면, 그동안 청기사단과 철퇴기사단이 좌우로 우회해서 적들을 포위망 안에 가둘 테고. 다비?"

"네. 황자님."

"적을 죽이는 거보단 아군을 살리는 데 신경 써 줘."

"여부가 있겠습니까? 엘프들이 완전히 지쳐 쓰러질 때 까지 시간을 끄는데 전념하겠습니다."

다비는 차분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반면 옆에 있는 카일은 반쯤 썩은 얼굴로 안절부절 못하고 있었다.

"황자님. 지금이라도 생각을 바꾸시는 게 어떻습니까?"

"응?"

"저 같은 평기사 나부랭이가 어찌 정규 기사단을 지휘하겠습니까? 이런 일은 단장님, 그러니까 나이트 다비가 제격입니다. 그러니 지금이라도...."

"다비는 전투에 전념해야 해."

나는 딱 잘라 말하며 고개를 저었다.

"저기 뒤에 있는 수호기사단이야말로 기사 축에도 못 끼는 허접 나부랭이들의 집합체야. 다비가 최전방에서 활약해 주지 않으면 순식간에 다 쓸려나가고 말걸?"

"그건 그렇습니다만...."

"그리고 카일?"

나는 까치발을 들고 카일의 한쪽 어깨를 두드렸다.

"너한테 뭔가 엄청난 걸 기대하는 게 아니야. 신출귀몰한 전술? 그딴 거 필요 없어. 그냥 사관학교에서 배운 대로만 해. 적의 선공을 받아내는 모루 역할. 어떻게 해야 하는지 다 알잖아?"

"...."

"자신을 믿어. 너 정도 역량이면 이딴 반 푼이 기사 500기쯤 지휘하는 건 일도 아니니까."

"정말 그렇게 생각하십니까?"

흙빛이었던 카일의 안색이 조금은 밝아졌다. 나는 시원하게 고개를 끄덕이며 웃었다.

"당연히 그렇게 생각하지. 최고의 전투 지휘관에게 반드시 필요한 게 뭔지 알아?"

"그게 무엇입니까?"

나는 대답 대신 카일의 목울대를 손끝으로 꾹 눌렀다.

"이거야."

"황자님...."

"그럼 잘 해봐. 난 위에서 지켜보고 있을게."

그리고는 곧장 비행마법을 발동시켜 하늘로 날아올랐다.

카일 녀석, 지금은 저렇게 불안불안 해도 막상 전쟁이 시작되면 딴사람으로 확 돌변한다.

그러니 지금처럼 기회 있을 때 미리미리 경험을 쌓아 두는 게 좋겠지?

높이 올라가자 몰려오는 엘프 떼의 모습은 물론이고, 좌우로 넓게 퍼지는 청기사단과 철퇴기사단의 모습도 한눈에 들어왔다.

마치 그림으로 그린 듯한 그럴듯한 전장의 모습.

물론 따지고 보면 이런 거 다 필요 없긴 하다.

내가 적진 한가운데 템페스트를 뿌려대기만 해도 전황은 순식간에 이쪽으로 기울 테니까.

"맘만 먹으면 나 혼자서도 처리 가능할 것 같은데...."

물론 정상적인 엘프라면 마법으로 저항할 것이다.

엘프 중에는 아크 위저드 급은 아니라도 강력한 마법사가 꽤 있고, 일반 병사도 저마다 기본적인 마법 정도는 쓸 줄 아니까.

하지만 저 나무 몽둥이를 꼬나 쥐고, 머리에 피를 철철 흘리는 야만전사들에게 마법 같은 섬세한 컨트롤을 기대할 수 있을까?

그러니까 나 혼자 싹 쓸어버릴 수 있는 상황임에도 불구하고, 반대로 그렇게 하면 곤란하기 때문에 동원한 기사단의 힘을 빌리기로 했다.

왜 곤란하냐고?

여기서 내 손으로 엘프를 대량 학살했다간, 계획한 핵심 테크트리 하나가 완전히 박살 나 버리니까.

* * *

나무 정령 드라이어드.

엘프를 죽이면 바로 그 드라이어드를 얻을 수 없다.

이미 불의 정령왕씩이나 얻은 주제에, 고작 나무 정령 따위에 왜 그리 연연하냐고?

그게 다 이유가 있다. 드라이어드를 얻으면 목숨이 대량으로 늘어나거든.

이게 무슨 소리냐 하면....

라이프 링크(life link)라는 신성 마법이 있다.

턴 언데드와 같은 극대 신성마법이며, 생명을 가진 우호적인 상대에게만(상대가 허락을 해야 걸린다) 걸 수 있는 마법.

일단 걸기만 하면 내가 입은 피해를 상대에게 나눠 줄 수 있다.

결국 내가 죽을 만큼의 충격을 받는다 해도, 링크를 건 대상과 피해를 반씩 나눠 가지며 반죽음 정도로 끝낼 수 있다는 말씀.

하지만 평범한 인간에게 이걸 걸어 봤자 큰 의미는 없다.

반죽음이라는 것은, 사실상 거의 죽어가는 상태로 전투불능이 된다는 것과 크게 다르지 않으니까.

바로 그렇기에, 내가 계약할 수 있는 모든 정령 중 유일하게 생명을 가진 것으로 취급되는 드라이어드가 엄청난 가치를 지니게 되는 것이다.

드라이어드의 생명력?

인간 따위는 비교조차 할 수 없을 만큼 거대하다.

그러니 드라이어드에게 링크를 걸고, 피해 배분율을 반반이 아니라 최대치인 9 대 1까지 올려 버려도 상관없다.

설사 내가 즉사할 만큼의 충격이라 해도, 드라이어드에겐 그저 잔가지 몇 개가 꺾일 만큼의 피해일 뿐이니까.

이계 황자는 세상을 구하고 싶다 82화

25장 세상이 뒤집히던 날

"근데 엘프를 마구 죽여 버리면 그 기회가 날아간다고...."

바위 정령 룩카르가 오우거의 수호신이듯, 나무 정령 드라이어드는 엘프의 수호신.

그것이 바로 저 미친 듯이 달려오는 엘프들에게 템페스트를 퍼붓지 못하는 이유다.

애당초 라이프 링크 자체가 드라이어드와 계약을 한 다음에야 얻을 수 있는 신성마법이기도 하고.

바로 그때, 저 멀리 아래서 카일의 목소리가 우렁차게 울려 퍼졌다.

"전군! 쐐기 대형으로!"

오오, 역시 카일.

이 높은 하늘에서도 또렷하게 들릴 정도로 압도적인 성량이다.

동시에 어설프게 집결해 있던 수호기사단이 좌우로 진형을 펼쳐, 옆으로 길게 퍼진 쐐기 대형을 만들었다.

그나마 중심부에 툭 튀어나온 쐐기에 자리 잡은 것은 다비를 포함한 소수의 정상적인 기사들.

수호기사단 전체를 갈무리했는데도 고작 30명 정도만 제대로 된 기사였다.

나머지는 최하급 마갑조차 제대로 버텨내지 못하는 폐급전사들이고.

이딴 기사단.... 그냥 이번 기회에 싹 해체해 버리는 게 좋지 않을까?

"모두 충격에 대비하라! 반격하지 말고 받아넘겨! 방어가 우선이다!"

바로 그 순간, 엘프군의 선봉이 수호기사단의 돌출된 쐐기를 들이받았다.

우직!

그리고 박살 났다.

미친 듯이 들이받는 엘프의 진형이 중심부를 간격으로 쭉쭉 갈라지며 균열을 일으킨다.

균열의 중심부엔 물론 다비가 있었고.

다만 높은 곳에서 내려다보니 무슨 개미떼와 개미떼가 충돌한 것처럼 보인다. 확실한 건 우리 편에 있는 대장 개미가, 마치 종이 다른 괴물처럼 압도적인 존재감을 과시하고 있다는 것.

좋아. 잘 하고 있구만.

그런데 정작 돌출된 쐐기가 굳건히 버티는 동안, 주변의 다른 방어진이 빠른 속도로 뒤로 물러나는 게 보였다.

"야! 이 가짜 기사 놈들아! 뭐 하는 거야! 이러다 다비 혼자 적진에 갇히겠다!"

물론 이 빈약한 목소리가 저 아래까지 닿을 리 만무하다. 대신 상황을 파악한 카일이 신속하게 지시를 내렸다.

"멈춰! 모두 제자리를 사수해! 몸으로 버텨라!"

"물러나지 말라는 게 아니다! 최대한 버티면서 천천히 물러나!"

"우군! 물러나는 속도가 너무 빠르다! 겁먹지 말고 방패를 들어올려!"

"좌군! 간격이 너무 벌어졌다! 좌우로 좁혀! 적들이 뒤로 빠져나가게 하면 안 돼!"

"나이트 듀론! 우군이 빠르게 무너지고 있습니다! 당장 예비대를 이끌고 우군에 합류를!"

"나이트 다비! 뒤로 물러나십시오! 본대와 간격이 너무 벌어졌습니다!"

좋아. 아주 잘하고 있구만.

물론 나라고 여기서 구경만 하겠다는 건 아니다. 아마도 지금이 타이밍이겠지?

"후우...."

차분히 호흡을 가다듬으며, 내가 쓸 수 있는 또 하나의 극대 신성마법을 준비했다.

와이드 에리어(wide area).

일명 광역화 마법.

자체적으론 아무 효과도 없다. 추가로 섞은 마법을 넓은 범위에 뿌리는 효과를 더해줄 뿐.

우웅!

양손을 하나로 모으자, 투명한 별사탕 같은 빛의 조각들이 모은 손 주변으로 가득 모이기 시작한다.

동시에 목표의 근력을 높이는 신성마법인 스트렝스를 발동시킨 순간.

지이이이잉!

스트렝스가 코팅된 무수한 별사탕들이 힘겹게 밀리고 있는 수호기사단의 머리 위로 쏟아져 내렸다.

효과는 즉각적이었다.

"틀렸어! 이젠 더 못 버틴.... 으응?"

"모, 몸에 힘이!"

"으아! 몸에 힘이 난다! 싸워! 어떻게든 버텨!"

"이게 무슨 일이야! 내 몸이 이상해!"

"황자님께서 내려주신 신성마법이다! 모두 경거망동 말고 전투에 집중해!"

미리 설명을 들었던 카일이 타이밍 좋게 소리쳤다. 그러자 위축되었던 수많은 기사들이 반대로 기세를 높이기 시작했다.

"클로드 황자님의 기적이다!"

"우린 강해졌다! 싸워! 이길 수 있다!"

"내 힘이 이렇게 강해지다니! 엄청난 힘이다!"

잘 안 들리긴 하지만, 대충 뭐라고 소리를 지르는지는 알겠는데....

미안. 니들 실제로는 별로 안 강해졌어. 그냥 기분 상 그렇게 느낄 뿐이야.

신성마법을 광역화로 만들어 뿌리면, 정작 개개인에게 들어가는 효과는 기하급수적으로 뚝 떨어진다.

광역화된 스트렝스로 인해 올라가는 근력을 수치로 표현하자면... 대략 5% 정도?

물론 수백 명의 기사들이 동시에 5%씩 강해지기만 해도 엄청난 효과이긴 하지만.

그보다는 강해졌다는 사실 그 자체로 자신감을 얻었다는 게 중요했다. 이것도 일종의 플라시보 효과라고 할 수 있겠지.

"으아아아! 난 강해졌다! 두 배, 아니 세 배 더 강해졌어!"

"클로드 황자님 만세! 엘프를 죽여라!"

"죽여! 더 죽여! 아니 다 죽여!"

"도망가지 마! 맞서 싸워!"

"나는! 나는! 싸움을 했다!"

으음.

어째 플라시보 효과가 예상보다 더 강한 거 같기도 하고.

애들이 갑자기 미친 듯이 잘 싸우기 시작한다. 저러다 수호기사단이 엘프 다 죽이는 거 아냐?

혹시 이렇게 되면 버프를 걸어준 나한테도 책임이 생기나?

물론 그건 일시적인 기우였다.

"캬아아아아악!"

"어디서 인간 따위가!"

"죽여! 죽! 여! 다 죽여!"

잠시 기세에 밀리던 엘프는, 마치 언제 그랬냐는 듯 입에 거품을 물며 더욱 흉포한 기세로 몰아붙이기 시작했다.

어떻게 저게 가능하지?

체력적으로 말이 안 되잖아? 무슨 각성제에 중독된 약쟁이도 아니고.

...잠깐.

중독?

그래. 중독이다.

이계의 괴물들 중, 저런 효과를 내는 독을 자신의 주변에 뿌리는 괴물이 있다.

바로 타락 군주.

마지막 5차 웨이브에 등장, 제국군을 괴멸로 이끌고 날 로아의 성역으로 도망치게 만들었던 주범 중 하나.

"...진짜 타락 군주야?"

그 자체만으로도 미칠 듯한 힘을 자랑하는 괴물.

하지만 흡입하는 모든 것들을 미쳐 날뛰는 광기 상태로 만드는 연기를 방출하기도 한다.

일단 광기 상태가 되면 힘이 월등하게 강해지고, 아무리 싸워도 지치지 않는다.

그리고 지금.

저 엘프들은 그때처럼 타락 군주의 독에 중독된 것처럼 보인다.

내가 왜 이걸 몰랐지? 아니, 지금이라도 깨달은 게 다행일까?

마침 좌우로 우회한 기사단이 엘프의 배후로 들이닥치려는 찰나, 나는 엘프들의 머리 위로 위치를 옮기며 새로운 광역화 마법을 시전했다.

이번엔 해독마법인 안티 포이즌으로.

"황자님이 또 마법을!"

"하늘을 봐! 황자님께서 또다시 우릴 위해 신성 마법을 시전하신다!"

"아니, 잠깐. 그런데 위치가...."

"빛이 엘프들을 향해 떨어지는데?"

"화, 황자님?"

"황자님이 미치셨다! 왜 엘프들에게 신성마법을.... 응?"

당황하던 수호기사단의 표정이 이내 더 큰 당황으로 일그러졌다.

머리가 깨지고, 팔이 잘려도 여전히 광기에 젖어 날뛰던 엘프들의 눈에.

"아니...."

"난 대체...."

"왜 우리가 이런 곳에서...."

이성의 빛이 돌아오기 시작했다.

좋아. 딱 봐도 효과가 있는 것 같구만.

비록 광역으로 뿌려서 해독 효과 자체는 떨어지겠지만.

하지만 독성이 조금이라도 풀린 엘프들은, 금방 이성을 되찾으며 어리둥절한 표정을 지었다.

여긴 어디?

나는 누구?

나는 왜 이런 황무지에서 칼을 몽둥이처럼 휘두르며 싸우는 걸까? 옆에 저 친구는 아예 진짜 나무 몽둥이를 쥐고 있네?

엘프들은 자신들의 현재 상황을 전혀 이해하지 못하고 있었다. 나는 그 와중에 방향을 선회해, 목이 쉬어라 지휘에 열중인 카일의 배후로 날아들었다.

"적의 기세가 약해졌다! 위치 사수! 좌군! 성급하게 나서지 마! 곧 우회한 다른 기사단이 적의 배후를 포위할 거다! 그러니 지금은 위치를 사수하는데 전념을.... 으윽?"

"카일! 나야!"

녀석의 양쪽 겨드랑이에 팔을 끼워 넣고는 쑥 뽑아 날아올랐다. 한순간 버둥거리던 녀석은 고개를 돌리며 소리를 질렀다.

"황자님!"

"으악! 귀 아파! 얼굴에다 대고 소리 지르지 마!"

"윽, 죄송합니다. 그런데 갑자기.... 무슨 일입니까? 제가 뭔가 실수라도?"

카일은 높아진 목소리 톤을 필사적으로 가라앉혔다 으, 귀청 떨어지는 줄 알았네. 이 녀석 지휘에 너무 심취했구만.

"너 실수한 거 하나도 없어. 지금부터 엘프들 머리 위로 날아갈 거니까, 내가 하는 말을 그대로 따라해. 최대한 목청 높여서. 알았지?"

"네? 네?"

"영원의 숲의 엘프는 들어라! 너희들은 광기의 독에 중독되어 이성을 잃고 발작을 일으켰다! 그러니 항복해라! 무기를 내려놓고 저항하지 않으면 목숨을 살려주겠다! 시간 없어! 어서 빨리!"

"아.... 영원의 숲의 엘프는 들어라! 너희는 광기의 독에 중독되어 이성을 잃고 발작을 일으켰다! 그러니 항복해! 무기를 내려놓고 저항하지 않으면 목숨을 살려주겠다! 시간 없어! 어서 빨리!"

음, 마지막 두 문장까지 따라할 필요는 없었는데.

아무튼 간에 맘먹고 내지르는 카일의 외침은 가히 폭발적이었다.

가뜩이나 성량이 엄청난 녀석이었는데 오늘따라 목청이 더욱 강렬하게 울리는구만. 에이션트 씰의 코어를 먹어서 폐활량이 올라간 덕분일까?

"으.... 뭐라고?"

"광기의 독? 그게 뭐지?"

"아니 잠깐, 기억 안 나? 우리 모두 광장에 집결해서...."

"맞아! 군주님의 명령으로 모두 모여 물을 한 모금씩 나눠 마셨잖아?"

"설마 군주님이?"

"지금 그게 문제가 아니야. 너무 지쳐서 꼼짝도 못 하겠어...."

독기가 풀리자 망각했던 피로가 한 번에 몰려오는 듯했다. 엘프들은 하나둘씩 손에 쥔 무기를 던지며 그 자리에 무릎을 꿇기 시작했다.

"황자님! 엘프들이 무기를 버립니다! 투항하기 시작했습니다!"

카일이 놀란 목소리로 소리쳤다. 으, 근데 너 마갑까지 입어서 그런지 너무 무거워!

"...여기서 손을 놔 버리면 큰일 나겠지?"

"네? 방금 뭐라고 하셨습니까?"

"아니, 한 번 더 소리쳐줘. 이번엔 우리 편 들으라고 하는 소리야."

나는 팔이 빠질 것 같은 통증을 참으며 녀석을 계속 스피커로 활용했다.

"제국의 모든 기사단은 들어라! 전투는 승리했다! 투항하는 적은 공격하지 마라!"

"네. 황자님. 모든 기사단을 들어라! 전투는 우리의 승리다! 투항한 적을 죽이지 마라! 다시 한번 말한다! 전투는 우리의 승리다!"

그래. 우리의 승리다.

적의 배후를 막 포위한 청기사단과 철퇴기사단 입장에선 김이 새는 일이 아닐 수 없겠지만.

그래도 피해 없이 전투를 끝내는 것만큼 좋은 일은 없겠지?

저 엘프들도 일이 잘 풀리면 다 같이 이계의 침공에 맞서 싸우는 동료가 되니까.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미 죽어버린 엘프의 숫자만 수백.

하늘에서 내려다본 느낌으로는.... 대충 300명쯤 죽은 것 같다. 그중 절반은 다비 근처에서 벌어진 것 같고.

"황자님! 대승입니다! 적들이 항복했습니다!"

온몸에 피 칠갑을 한 다비가 하늘을 향해 손을 흔들었다. 나는 카일과 함께 녀석의 근처에 착지하며 한숨을 내쉬었다.

"으악 내 팔...."

"황자님?"

"아니, 수고했어 다비. 너 아니었으면 수호기사단도 순식간에 전멸했을 거야."

"일이 이렇게 풀릴 줄은 저도 몰랐습니다. 그런데 광기의 독이라니, 엘프들이 뭔가에 중독되었던 겁니까?"

"그러니까 해독 마법에 반응을 보였겠지? 일단 저놈들 대표를 만나서 무슨 일이 있었는지 설명을 들어야겠는데...."

나는 처참히 찢진 엘프들의 시체를 넘어, 바닥에 무릎을 꿇고 있는 투항자들을 향해 걸음을 옮겼다.

그런데 바로 그때였다.

어둠.

아직 대낮인데도 어둠이 몰려오며 온 세상이 캄캄해졌다.

그리고 빛.

캄캄한 하늘에 핀 달그림자 주변으로, 마치 태양의 코로나 같은 이글거리는 빛이 작열한다.

하지만 그 빛은 세상을 꽉 채운 어둠을 돋보이게 하는 들러리일 뿐이었다.

일식?

그러고 보니 이때쯤 일식이 한 번 있었던 거 같기도 하고.

하지만 일식은 그저 일식일 뿐이다. 달리 특별한 일은 없었기 때문에 인상에 별로 남지 않았다.

"휴...."

이거 절로 한숨이 다 나오네.

만약 전투가 한창 벌어지는 도중에 일식이 시작됐다면?

상상만 해도 끔찍하다. 양측 사망자가 못해도 두 배는 늘어났겠지.

그런데.

일식이 끝나질 않는다.

눈치를 챘을 때는 이미 달그림자보다 더욱 거대한 어둠이 하늘을 뒤덮은 뒤였다.

바로 그 어둠으로부터 하얀 미라 같은 차림의 남자가 모습을 드러냈다.

"...이런. 딱 마주쳤군요."

남자는 내 앞에 착지하며 인사를 올렸다.

이계 황자는 세상을 구하고 싶다 83화

25장 세상이 뒤집히던 날

"처음 뵙겠습니다. 클로드 황자님. 그리고 역시 이번에도 당신이군요. 저 엘프를 모조리 무릎 꿇리다니.... 어쩜 이렇게 후원의 핵심을 모조리, 그것도 말도 안 되게 격파해 무너뜨리시는지."

아마도 이 녀석은 후원자일 것이다. 톨라리가 말해준 모습과 똑같으니까.

후원자. 이계의 스파이.

감격적이라고 해야 할까?

회귀를 아홉 번이나 반복했지만 실제로 본 건 처음이다. 다만 겉모습만 보면 비리비리한 게 별로 강해보이진 않는데....

"네가 후원자야?"

"초면인데 바로 알아보시는군요. 제가 바로 후원자입니다. 원칙대로라면 당신은 리스트에 없기 때문에 대화를 나누면 안 되는데 말이지요."

"리스트?"

"그런 게 있습니다. 어쨌든 당신 덕분에 제가 너무 곤란해져서 말입니다. 이번 일식을 틈타 특별 예외 규정을 허락 받았습니다."

예외? 무슨 예외를 말하는 거지? 전쟁은 이미 끝났는데?

그보다 당장이라도 이 녀석을 죽이거나 사로잡고 싶은데.... 왜 이러지? 뭔가 몸이 삐걱거리며 제대로 안 움직이는데?

"이번은 그저 맛보기일 뿐이다. 미리 하는 경고다. 그러니 당신들에게 이득이다. 당신들은 앞으로 9년 뒤에 있을 진짜 침공을 대비할 수 있는 기회를 얻게 되었다. 축하한다."

"뭐?"

"실례했습니다. 말투가 너무 뻣뻣했죠? 이것도 다 규정대로 해야 하는 일이라서."

국어책 읽듯이 뭔가를 늘어놓은 녀석은, 이내 우아한 자세로 몸을 낮추며 다시 어둠 속으로 모습을 감췄다.

"보아하니 이미 눈치를 채신 것 같군요. 그럼 충분히 즐겨 주시길. 소인은 이만 물러가겠습니다."

그리고 어둠 너머가 열렸다.

내가 본능적으로 얼어붙었던 바로 그 이유.

지금 시점에는 존재해선 안 될 멸망의 징조.

게이트.

그 칠흑 같은 거대한 공간의 문이 열리고, 두껍고 밀폐된 갑옷으로 무장한 이계의 병사들이 쏟아져 나온다.

"...응?"

아니, 병사들은 쏟아져 나오지 않았다.

대신 드릴 같은 이빨을 자랑하는 거대한 괴물, 바로 데스웜 수십 마리가 폭풍처럼 솟구쳤다.

드드드드드드드득!

아아.

얼마 전에 봤는데 또 보는구나. 우리 너무 자주 보는 거 아니니?

녀석들은 방출과 동시에 지면을 파고들며 땅속으로 사라졌고.

쿠오오오오오오!

다음으로는 거미 같은 하반신에 선인장 같은 기다란 상체가 달린 소름끼치는 괴물이 모습을 드러냈다.

광전사.

얼마 전에 제스가 변했던 광전사가 아닌, 내가 알던 오리지널 광전사다.

그것도 모두 세 마리.

하지만 이것도 끝이 아니었다.

이번엔 불과 며칠 전에 해치웠던 감염 군주와 똑같이 생긴 녀석이, 비대하게 부푼 몸을 출렁대며 움직이기 시작했다.

이것도 오리지널이다. 머리 따윈 달려 있지 않다.

다음은 문어.

감염 군주의 좌우로 높이가 5미터쯤 되는, 마치 문어나 해파리를 연상시키는 괴물이 몸을 꼿꼿이 세우고 서 있다.

이 괴물의 이름은 공포 군주.

내가 붙인 이름이 아니라 이계 쪽에서 그렇게 부르는 걸 들었다.

이름처럼 주변에 공포를 일으키는 연기를 뿜어내며, 굵은 촉수를 한번 휘두르면 십여 명의 기사가 썩은 나무토막처럼 단번에 꺾여 날아간다.

그런 공포 군주가 모두 네 마리.

심지어 그중 한 녀석은 내가 상대했던 여타 공포 군주와 뭔가 다르다. 촉수 하나로 커다란 검을 감아쥐고 있네? 공포 군주가 무기도 사용했나? 처음 보는데?

뭐가 어쨌든... 내가 막아야 한다.

어째서 지금 게이트가 열렸는지는 모르지만.... 일단 내가 막아야 한다.

하지만 난 꼼짝도 할 수 없었다.

미리 말하지만, 겁먹어서 굳은 건 아니다.

녀석들이 게이트를 벗어나 이쪽 세계로 넘어오는 동안, 나는 마지막까지 뒤에 남은 세 마리의 괴물로부터 시선을 뗄 수 없었다.

한 마리는 키메라.

수십 개의 짐승 머리가 덕지덕지 돋아난, 바로 직전 9회 차 때 다비의 숨통을 끊어 버린 흉악한 괴물. 전장은 약 8미터.

또 하나는 폭탄 마인.

온몸이 새까맣게 물든 인간형의 괴물로, 주변에 폭발하는 돌덩이를 마구 집어 던지는 끔찍하게 골치 아픈 상대다.

사이즈는 대략 오우거 정도. 내버려 두면 혼자서 기사단 하나를 통째로 괴멸시킬 정도로 무지막지한 화력을 자랑한다.

그리고 마지막은....

"하, 하하. 하하하...."

탄식보다 헛웃음이 먼저 나온다.

타락 군주.

아직까지 한 번도 죽여 본 적 없는 괴물.

덩치는 셋 중에 가장 작다. 덩치 큰 성인 남자 정도.

외견은 새까만 피부에 박쥐같은 날개를 가진 전형적인 악마의 형상으로, 상황에 따라 자신의 모습을 다양하게 변화시킨다.

이 세 마리의 괴물이 밖으로 나온 순간, 온 세상이 침묵했다.

제국군도, 엘프도, 그리고 나도.

바로 그때, 먼저 지상에 나온 키메라가 앞에 웅크리고 있던 엘프 하나를 덥석 물고 씹어 먹기 시작했다.

으득! 으드드득!

너무도 자연스럽게.

그리고 비명이 폭발했다.

으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악!

하필 게이트가 열린 곳이 항복한 엘프들의 바로 위였다.

이계 괴물들의 공격 겸 포식에 100명이 넘는 엘프가 순식간에 사라졌고, 나머지는 지친 몸에도 아랑곳없이 비명을 지르며 사방으로 도망치기 시작했다.

아비규환!

하지만 학살이 시작된 그 순간조차, 주변을 둘러싼 제국의 기사들은 아무 행동도 하지 않았다.

"...."

"...."

"...."

모두가 눈앞에서 벌어지는 일을 받아들이지 못했다.

이게 꿈인가?

대체 지금 무슨 일이 벌어지는 거지?

눈앞에 보이는 게 정말 현실인가?

"이게 현실이야."

아무도 듣지 못할 말을 혼자 중얼거리며, 나는 사실상 자동으로 몸을 움직였다.

게이트만 보면 스위치가 들어가거든.

먼저 온몸에 뚫린 분화구를 움찔거리기 시작한 폭탄 마인에게 아이스 오브 템페스트를 트리플 매직으로.

꽈드드드드드드드드드드득!

꽝꽝 얼어붙은 새까만 마인이 경직된 눈으로 날 노려본다.

폭탄 마인.

전장에서 제거 대상 1순위. 약점은 냉기. 더블 매직으로 아이스 오브 템페스트를 먹이면 격퇴 가능.

하지만 트리플 매직을 사용한 이유는?

녀석은 기존의 폭탄 마인과 다르다.

원래 얼굴이 없어야 하는데 일그러진 얼굴이 하나 돋아 있다. 원인은 모르지만 스텟이 더 높을 가능성 있음.

"룩카르!"

콰광!

소환된 바위 정령의 일격으로 얼어붙은 폭탄 마인 격파.

그런데 조각조각 흩어지는 얼굴이 어쩐지 낯이 익다.

트롬본? 아크 위저드 트롬본?

"고맙...."

바스러지는 얼굴이 뭔가를 중얼거리는데 당장 중요한 일은 아니다. 지금은 마음에 휘둘리면 안 돼. 빨리 다음 타깃을 제거해야 한다. 쓸데없는데 신경 쓰지 말자.

다음은 키메라.

제거 대상 1순위 마물. 주변에 챙겨야 할 아군이 적다면 2순위로 내릴 수 있다.

특별한 약점은 없음. 마법에 반응해 소리방벽을 펼쳐서 템페스트가 안 통함.

최선은 바람의 정령 사일런스와 혼돈의 영약 조합.

하지만 둘 다 없음. 안 됨.

차선은 적의 등에 번개의 창을 꽂고 라이트닝 오브 템페스트를 하늘 방향에서 떨어뜨리는 것.

하지만 번개의 창이 없다. 안 됨.

마지막 방법은 적의 소리방벽을 넘어서는 압도적인 화력으로 격파하는 것인데....

"이그니스!"

화륵!

소환된 불의 여왕이 양손에 맺힌 불덩어리를 마구 집어 던진다.

"내게 맡겨라!"

쿠오오오오오오오오!

동시에 키메라의 수많은 대가리가 소리를 공명시키며 불덩어리를 막아낸다.

이것이 바로 소리 방벽.

하지만 불의 여왕은 멈추지 않는다. 마치 눈싸움을 하듯, 계속해서 템페스트급의 불덩어리를 끝도 없이 집어 던진다.

던지고, 던지고 또 던지고.

마치 눈싸움을 하듯.

결국 소리 방벽이 뚫리고, 작열하는 불꽃에 키메라가 비명과 함께 녹아내린다.

하지만 같은 순간, 나 역시 뭔가에 튕기며 날아갔다.

"큭!"

새까만 날개를 가진 악마의 몸통박치기.

미리 실드 오브 라이트를 두 개나 펼쳐 놓았는데.... 녀석은 그 두 개를 일격에 박살 냈고, 그 뒤로 깔아 놓은 바람의 벽까지 관통하며 날 들이받았다.

뭐 이런 괴물이 다 있지?

덕분에 날 자동으로 움직이게 하던 스위치가 내려가며 정신이 번쩍 들었다.

와! 방금 진짜 죽을 뻔했어!

마지막 순간에 반대 방향으로 미리 가속을 안 걸었으면 어쩔 뻔했냐?

이 녀석은 타락 군주.

9회 차 때는 결국 한 마리도 못 잡고 끝났다. 하지만 그때는 마지막에 마지막이라 남은 힘이 거의 없어서 그랬던 거다, 라고 스스로를 위안했는데....

정말일까?

지금부터 증명해보는 수밖에.

"...!"

먼저 추격해 날아오는 녀석의 몸에 리버스 그래비티를 걸고.

우웅!

하늘 높이 솟구친 녀석을 자연 추락이 아닌(날개가 달려 있으니까), 다시 한번 역으로 리버스 그래비티를 걸어 지면으로 내리찍은 다음.

"룩카르!"

어찌나 튼튼한지, 그냥 내리꽂아봐야 흠집도 안 나는 녀석을 위해 추락 지점에 미리 바위 정령을 대기시켜 놓고.

콰득!

충돌 직전 긴 손톱을 휘둘러 바위 정령을 박살낸 녀석을 향해, 윈드 오브 템페스트를 더블로 먹여주고.

위이이이이이이이잉!

압축에서 해방된 바람이 바위 정령의 날카로운 파편과 함께 바람의 결계를 만들어 일시적으로 적을 가둔 순간.

"여왕! 남은 거 저 안에 몽땅 쏟아 부어!"

"몽땅? 그거 좋구나."

방금 키메라를 통구이로 만든 불의 여왕이, 마치 춤을 추듯 몸을 회전하며 바람의 결계를 향해 템페스트급의 불덩어리를 마구 쏟아내기 시작했다.

불, 그리고 바람의 지옥.

작열하는 불길이 바람의 결을 따라 파도처럼 흐르며 타락 군주의 몸을 휘감는다.

여기에 박살 난 룩카르의 파편에 이그니스가 날린 화염이 더해, 불붙은 돌칼이 되어 타락 군주의 몸을 난도질하기 시작했다.

좋아. 증명 완료.

내구력이고 항마력이고 어찌나 강했던지, 9회 차 때의 타락 군주는 정말 악몽 그 자체였다.

하지만 이번엔 어떠냐? 너만을 위해 준비한 특제 회오리 칵테일 맛이?

"아주 그냥 짜릿하지?"

캬아아아아악!

순간 외마디 비명과 함께, 결계 속에서 갈려나가던 타락군주의 형상이 연기처럼 흩어졌다.

형상 변환.

녀석은 저런 식으로 위급한 순간을 회피한다.

저것만 아니었어도 9회 차 때 킬 스코어를 한 번은 찍었을 텐데.

그런데 어디지?

저 꼴로 오래 버티진 못한다. 금방 근처에 다시 나타나긴 하는데....

문제는 형상 변환을 하면 생명감지 마법에도 안 잡혀서 오직 눈으로 판단해야 한다는 것.

"...."

그 순간, 무언가 흐릿한 기운이 회오리의 왼편으로 새어나오는 게 보였다.

"거기냐!"

기운이 모이는 곳을 향해 화염의 템페스트를 한 방.

푸화아아아아아아악!

하지만 작열하는 불꽃은 허공을 감싸며 휘몰아칠 뿐이었다.

페이크?

그 와중에도 내 눈을 속이기 위해 연기의 일부를 반대 방향으로 보냈다고? 이게 사람이냐? 아니, 물론 당연히 사람은 아니지만.

같은 순간, 허를 찌르며 회오리의 오른쪽 방향에 모습을 드러낸 녀석이 몸을 웅크리며 돌진하려는 찰나.

"...잡았다."

마치 미리 알고 있었다는 듯.

미리 그 자리에 대기하고 있던 불의 여왕이 타락 군주의 목덜미를 맨손으로 낚아챘다.

"처음 보는 생물이구나. 이토록 가련한 모습이라니."

가련? 저 괴물이?

물론 온몸이 찢기고 불에 탄 처참한 모습이긴 한데.... 여왕은 미소와 함께 발버둥치는 타락 군주의 몸을 그대로 품안에 끌어안았다.

그리고 스스로 불기둥이 되었다.

푸화아아아아아아아아아악!

온몸에 화염을 뿜으며 불기둥이 된 여왕은, 발작하는 타락 군주를 끝까지 품에서 놓아주지 않았다.

와, 세상에. 이게 바로 불처럼 뜨거운 포옹이구나.

격렬한 포옹은 딱 5초면 충분했다. 여왕은 숯 더미가 된 타락 군주의 시체를 바닥에 던지며 내 쪽을 향해 시선을 돌렸다.

"왜 그런 눈으로 보느냐. 계약자여. 부러운가? 너도 내게 한번 안겨 보고 싶은 것이냐?"

"...사양할게. 그냥 그런 기술을 처음 보는 것 같아서."

"우리가 만난 지 얼마나 됐다고 그런 소릴 하느냐? 내 안에는 아직 네가 모르는 것들이 무궁무진하게 남아 있다."

그리고는 골반을 강조하는 포즈와 함께 자신의 몸을 쭉 훑었다. 엇 뜨거. 타락 군주를 보내버린 열기가 여기까지 막 뻗쳐 오는구만.

"그러니 앞으로도 자주 교감의 시간을 가지는 편이 좋겠지. 그럼 다음에 또 보자꾸나."

그리고는 순간적으로 모습을 흐리며 작은 불꽃이 되어 사라졌다.

"역시 달라."

불의 여왕이 하는 짓이 전과는 많이 다르다.

이것도 계약 방식에 따라 차이가 나는 걸까?

전에는 그냥 힘 다할 때까지 불덩어리만 던지고 끝이었다. 물론 그것만으로도 엄청난 도움이 되었지만.... 이번엔 내가 모르는 기술을, 그것도 특별한 지시 없이 알아서 자동으로 사용해 주잖아?

이계 황자는 세상을 구하고 싶다 84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