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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계 황자는 세상을 구하고 싶다 69화

22장 감염 군주

"하, 설마 독약인가? 능욕당하기 전에 자결하려고? 웃기지도 않는군. 너처럼 무식하게 키 큰 여자를 대체 누가...."

바로 그때, 메르데스를 포위하고 있던 기사들이 하나둘씩 비틀거리기 시작했다.

"으...."

"컥...."

"대, 대장, 아니 부대장님...."

"머리가... 머리가 이상해...."

이윽고 대부분의 기사가 순식간에 의식을 잃으며 쓰러졌다. 그나마 나이트 커맨더인 부대장과 다른 기사 한 명이 좀 더 오래 버티다 무릎을 꿇으며 고꾸라졌을 뿐.

"독.... 대체 언제 독을...."

눈치채지 못하는 사이, 주변 공기가 희미한 뿌연 색으로 물들어 있었다.

만약 대낮이었다면 이렇게 쉽게 당하지 않았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지금은 동트기 전의 새벽. 그 와중에 웅크리고 숨을 참고 있던 메르데스는 영약 기운이 몸에 도는 걸 느끼며 떨어뜨린 검을 다시 주워들었다.

"...."

그리고는 쓰러진 기사들의 심장에 차례대로 칼을 찔러 넣기 시작했다.

콰직!

콰직!

콰직!

역시 이번에도 갑옷이 부드럽게 뚫린다.

자신의 감각이 이상한 게 아니라 마갑의 재질이 뭔가 다른 듯했다. 그렇게 마지막 적의 심장에 칼을 꽂아 넣고 비튼 순간.

"...메르데스?"

멀리서 나무상자를 안아든 시녀가 부리나케 달려오는 게 보였다.

"역시 당신이었군요. 무사해서 다행입니다."

"시녀장님."

메르데스는 라니아를 향해 고개를 숙였다. 라니아는 주변에 널브러진 수십 구의 시체를 보며 길게 한숨을 내쉬었다.

"늦지 않아 다행입니다. 방독의 영약은 마셨겠지요?"

"네. 냄새를 맡자마자 마셨습니다."

루넨브레스 저택의 시녀는 무슨 일이 있어도 몇 병의 영약을 반드시 소지하게끔 되어 있다. 라니아는 빈 상자를 바닥에 내려놓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잘했습니다. 실전에 사용한 적이 없어서 내심 불안했는데.... 그래도 결과가 좋아서 다행이군요."

상자 안에 들어 있던 건 루넨브레스 가문이 특별 제작한 마비가루.

라니아는 저택에 비축되어 있던 마비가루 수십 상자를 전부 꺼낸 다음, 다른 시녀들과 함께 남쪽 숲 일대를 일종의 생화학 지역으로 바꿔 버린 것이다.

"적들도 이런 방법이 있는 줄은 몰랐을 겁니다."

메르데스는 매년 두 번씩 있는 시녀들의 정기 훈련을 떠올렸다. 라니아는 메르데스의 얼굴에 묻은 피를 닦아주며 무거운 표정으로 말했다.

"메르데스. 황자님을 노리는 적들이 저택을 노리고 사방에서 몰려오고 있습니다. 하필 황자님이 저택을 비우신 지금 말이죠. 황자님께서 그렇게 티를 내고 돌아다니셨는데도.... 바보 같은 일입니다."

"적이 사방에서 몰려온다면, 다른 쪽은 어떻게 되었습니까?"

"기사단이 나섰습니다. 얼마 전 저택에 들어온 톨라리 님도 수고해 주고 계시고요."

톨라리라는 말이 나온 순간 메르데스의 눈썹이 꿈틀거렸다. 라니아는 내려놓은 상자를 다시 집어 들며 저택 방향으로 몸을 돌렸다.

"하지만 저희도 이대로 가만있을 수는 없습니다. 다시 돌아가서 해야 할 일을 해야죠. 저택엔 다양한 영약이 비축되어 있으니까요."

"물론입니다 시녀장님. 그런데...."

메르데스는 순간 휘청하며 바닥에 쓰러졌다. 라니아는 깜짝 놀라며 쓰러진 메르데스를 급히 살폈다.

"메르데스! 메르데스! 정신 차리세요! 무슨 일입니까! 방독의 영약을 마셨다고 하지 않았습니까!"

"이건 마비가루 때문이 아니라.... 윽...."

갑자기 쏟아지는 통증에, 메르데스는 말 그대로 숨조차 쉴 수 없었다.

"이게.... 이게 정령빙의의 부작용...."

"메르데스! 그게 무슨 말인가요? 부작용? 정령빙의는 또 무엇입니까? 빨리 이것을 마시세요!"

라니아가 몇 병의 영약을 입안에 부어 줬지만 소용이 없었다. 메르데스는 빙의했던 정령이 몸에서 사라지는 것을 느끼며, 동시에 수만 개의 날카로운 돌조각이 몸 위로 쏟아지는 환각을 체험했다.

"아... 악…. 으...."

그것은 한도를 벗어난 통증이었다. 메르데스는 눈을 까뒤집으며 기절했고, 라니아는 심장이 덜컹 내려앉는 것을 느끼며 소리쳤다.

"메르데스! 정신 차리세요! 이게 대체 무슨 일입니까! 메르데스! 메르데스!"

* * *

같은 시간, 숲의 동쪽 길에는 200명의 용병 기사가 여유로운 분위기로 진격을 시작했다.

"흐흐, 벌써부터 보수가 기대되는구만. 이거야 말로 누워서 떡먹기지."

"누가 아니래? 어차피 힘든 일은 남쪽 부대가 다 할 게 뻔한데. 거기 아저씨들 중에 나이트 커맨더도 있다더라?"

"내 말이. 저택에 도착해도 괜히 나서지 말고 뒤처리만 하자고. 그보다 이번에 돈 받으면 뭐 할 거야? 꽤 목돈인데."

"당연히 망가진 갑옷부터 수리해야지. 겉모습만 마갑이지 실제로는 깡통이나 다름없다니까?"

용병기사 하나가 자신의 갑옷을 두드리며 웃었다. 실제로 이번 암살에 동원된 200기의 용병 기사 중, 절반에 가까운 숫자가 작동하지 않는 고장 난 마갑을 입고 머릿수만 채운 상태였다.

"거기 입조심 좀 하지? 괜히 소문나면 나중에 의뢰 못 받는 수가 있어."

"뭔 헛소리야? 여기 우리 말고 또 누가 있다고?"

"평소에 조심하라 이거지. 그리고 지침 받은 거 벌써 잊었어?"

"지침? 무슨 지침?"

"상부에서 지침 떨어졌잖아. 대금 받아도 몇 달간은 함부로 막 쓰지 말라고. 그러다 괜히 꼬투리 잡힐지도 모르니까."

"쳇. 대금이 많아봐야 우리 기준으로 많은 거지, 그게 어디 귀족들 기준으로 많은 건가?"

"아무튼 흉한 일이니까 다들 조심하자고. 아무리 우리가 이번 일에 하는 일이 없어도.... 응?"

그런 기사들의 머리 위로, 갑자기 어둠을 가르며 눈부신 광채가 날아들었다.

실드 오브 라이트.

신관 바리스가 만들어 날린 빛의 방패.

"오...."

어둠속에서 반짝이는 방패의 형상에, 모두들 한순간이나마 넋을 잃고 그것을 바라보았다.

하지만 방패로 끝이 아니었다.

우웅!

약간의 시간차를 두고, 섬광에 휩싸인 창 한 자루가 빠른 속도로 날아들었다.

그리고는 미리 날아와 기사들의 머리 위에 멈춰 있던 빛의 방패에 스치듯 내리꽂힌 순간.

번쩍!

바야흐로 빛의 세례가 쏟아졌다.

창날에 깃든 빛이 유리 파편처럼 산산 조각나며, 온 사방으로 날카로운 조각을 흩뿌렸다.

"어.... 으아아아악!

"으, 으악!"

"으갸갸갹! 뭐, 뭐야 이거!"

파편을 뒤집어쓴 기사들이 비명을 지르며 바닥을 뒹굴었고, 동시에 멀리서 대기하고 있던 두 명의 젊은 기사가 쏜살같이 달려오기 시작했다.

"가자 디디!"

"네. 카일 님."

바로 카일과 디디.

두 사람은 평소에 다루던 긴 장검 대신, 팔뚝 정도 길이의 날카로운 꼬챙이를 역수로 쥐고 있었다.

어째서?

답은 간단했다. 그게 더 편하니까.

"어, 어어...."

맨 앞에 쓰러져 있던 기사가 손을 뻗으며 뭔가를 말하려 했지만, 몸이 마비된 탓에 제대로 된 의사를 표현하지 못했다.

물론 표현에 성공했다고 달라지는 일은 없겠지만.

푹!

카일은 적의 투구에 뚫린 눈구멍에 다짜고짜 꼬챙이를 찔러 박았다.

"크악!"

그리고는 터지는 비명과 함께 꼬챙이 끝을 강하게 한번 비튼 다음.

"끄억...."

단숨에 꼬챙이를 뽑아내고, 다음 목표를 향해 고개를 돌렸다.

"오, 오, 오지 마. 으...."

눈이 마주친 기사는 필사적으로 바동대며 바닥을 기었다. 하지만 마비된 몸으로는 원래 자리에서 한 치도 벗어날 수 없었다.

그렇게, 일방적인 학살이 시작되었다.

"비, 빌어먹을.... 크악!"

"크어억!"

"제, 젠장! 몸이 안 움직.... 커헉!"

그들의 눈에는 두 사람의 모습이 마치 사신처럼 느껴졌다.

한 청년은 이를 악문 채 괴로운 얼굴로 꼬챙이를 내리찍었고, 또 한 소년은 무표정한 얼굴로 살육을 반복했다.

그렇게 카일과 디디가 순식간에 50명 정도를 학살한 순간.

"으, 으아아아아악!"

정작 홀리랜스의 범위 밖에 있던, 그래서 뒤쪽에서 멍하니 살육을 목격한 후속부대의 용병들이 비명을 지르며 도망치기 시작했다.

"저것들 뭐야! 미쳤어!"

"튀, 튀어! 개죽음 당하기 싫으면!"

"사람 살려! 여긴 지옥이야!"

"후우...."

힘겨운 추수를 마친 카일이 도망치는 용병들을 보며 한숨을 내쉬었다. 그러자 옆에 있던 디디가 얼굴에 튄 피를 닦으며 말했다.

"반도 안 죽었는데 벌써 도망치는군요. 카일 님이 말씀하신 대로 되었습니다."

"...그러게."

남은 적들이 필사적으로 덤벼들었다면 일이 복잡해졌을 것이다.

하지만 카일은 적들이 도망칠 것을 예상했다. 그것은 특별한 예지가 아닌, 평범한 군사적 상식이었다.

-정신무장이 잘된 정규군조차, 병력의 2할 이상이 사망하면 전투 수행력을 상실하고 퇴각하게 마련이다.

"...라고 수업시간에 배우긴 했는데...."

실제로 눈앞에서 벌어지는 일을 보니 그게 정말 사실이었던 모양이다. 하물며 돈으로 고용된 용병 따위는 말해 무엇 하겠는가?

심지어 웬 미친놈 둘이 꼬챙이를 내리찍으며 눈앞에서 사람들을 학살하는 모습을 직접 보았으니....

"덕분에 꼴이 말이 아니네."

카일은 피투성이가 된 자신을 보며 참담한 기분을 느꼈다.

물론 그중 단 한 방울도 자신의 피는 아니었다. 그에 비해 옆에 선 디디는 얼굴에만 살짝 피가 튀어 있을 뿐이었다.

"넌 대체 어떻게.... 아니다. 아무려면 어때. 여긴 끝났으니 빨리 돌아가자. 저택에 다시 합류해서 톨라리 님을 도우러 가야지."

"네. 카일 님. 저도 그쪽이 걱정입니다."

그 와중에 자신을 보는 디디의 눈에 전에 없던 존경심이 느껴졌다. 아무래도 상황이 미리 예측했던 대로 진행된 것에 감탄한 듯했다.

"다시 말하지만, 이런 거 사관학교에서 다 배운 거야."

"...."

디디는 대꾸 없이 가만히 고개를 끄덕였다.

하지만 디디가 정말로 감탄한 건 다른 이유 때문이었다.

작전을 달성하기 위해 스스로의 손을 주저 없이 더럽히던 모습.

그것이 가장 인상적이었다. 자신처럼 세상의 밑바닥에서 온갖 더러운 것을 지켜보면서 자란 것도 아닐 텐데도.

"왜 그래? 빨리 가자니까?"

"...아무것도 아닙니다."

디디는 고개를 저으며 카일의 뒤를 쫓았다.

비록 클로드 황자 정도는 아니지만, 카일 정도라면 충분히 믿음을 가지고 명령에 따를 수 있을 듯했다.

* * *

덜컹! 덜컹!

우웁.

밤길이 어두워서 그런지 마차가 심하게 흔들린다. 어윽. 잠을 몇 시간 못 자서 그런가? 고작 이 정도로 멀미가 다 나려고 그러네.

"괜찮으십니까? 마부에게 속도를 좀 늦추라 지시할까요?"

마주보고 앉은 다비가 물었다. 나는 손사래를 치며 좌석에 몸을 깊이 파묻었다.

"괜찮아. 가뜩이나 느린데 여기서 더 느리면 어떻게 하려고. 이러다 도착할 때까지 한 달은 걸리겠다."

지금 여긴 북부에 있는 백기사단 주둔지를 향해 달리는 마차 안이다.

출발은 어제 했지만 뒤따라오는 짐마차와 속도를 맞춰야 했고, 중간에 멈춰 휴식도 하느라 이제 겨우 제도권을 벗어난 상황.

그렇다고 한 달씩이나 걸리는 건 과장이긴 한데.... 본래 예상했던 사흘 안에 도착하는 건 턱도 없을 것 같다.

하늘로 날아갔으면 이미 도착하고도 남았을 텐데.

"그러고 보니 황자님께서는 비행마법을 쓸 수 있으신데, 이런 마차 안에 갇혀서 움직이시려니 답답하시겠군요."

응?

이 녀석 독심술이라도 가지고 있나? 아니면 표정에 생각이 너무 드러났나?

"가끔은 땅에 붙어서 움직이기도 해야지. 비행마법으로 장거리를 날면 마력 소모가 커서 부담스럽기도 하고."

"그렇습니까? 이제 곧 동이 틀 테니 그때부터는 안전하게 속도를 높일 수 있을 겁니다."

말이란 동물은 잠을 오래 자지 않기 때문에 이런 캄캄한 새벽부터 마차 운행이 가능하다고 한다.

기특한 것들 같으니라고. 아무튼 속도를 낼 수 없다면 이렇게 새벽부터 시간이라도 많이 갈아 넣는 수밖에.

"그보다는 기사단 본부, 아니 저택이 걱정입니다. 저택을 떠나기 전까지 불온한 소식을 들었습니다."

"탈리스만 백작이 나 암살하려고 병력 모은 거?"

"역시 파악하고 계셨군요. 저도 나이트 길드의 친구들에게 몇 가지 정보를 들었습니다. 자세한 이야기는 어렵지만, 아무래도 때가 임박한 것 같다고 하더군요."

"그래서 대놓고 상점가를 휘저으며 술을 쓸어 담은 거야. 나 북부로 같이 떠난다고 어필하려고. 물론 백기사단 주려고 샀던 술은 아니지만. 어쩌면 지금도 우리 뒤를 쫒아오고 있지 않을까?"

안 그래도 그걸 대비해 지금 이 순간에도 생명 감지 마법을 발동시켜 놓고 있단 말이지. 하지만 다비의 예상은 나와 조금 다른 듯했다.

"차라리 그랬으면 좋을 것 같습니다. 이곳엔 제가 있으니까요."

"그래. 너도 있고 나도 있고."

"바로 그것이 문제입니다."

"응?"

"황자님과 제가 동시에 저택을 비웠다는 게 문제입니다. 만약 이번 적들이 어쨌든 저택을 노리고 있다면, 그곳에 암살 목표가 없다 해서 순순히 물러날 것 같진 않으니까요."

"백작이 아무리 멍청해도 그 정도로 멍청하진 않을 것 같은데.... 근데 그러면 또 어때? 남아있는 부하들이 못 미더워?"

이계 황자는 세상을 구하고 싶다 70화

22장 감염 군주

"우선 숫자가 너무 적습니다. 물론 단원들의 잠재력은 대단한 수준입니다만, 당장의 실력은 기대하기 어렵다는 것, 그리고 실전 경험이 전무하다는 것도 마음에 걸립니다."

"그 녀석들 보기보다 강단 있어. 숫자가 적은 건 사실이지만. 중요한 건 내가 미리 귀띔을 해주고 왔다는 거고."

"귀띔이라 하심은?"

"카일한테 미리 말해 놨어. 내가 없는 동안 적들이 몰려오면 어떻게 대응할지 미리 작전을 세워 놓으라고."

"작전을 세워주신 게 아니라, 직접 작전을 세워 스스로 행동하라 말씀하신 겁니까?"

"그래야 경험이 쌓이겠지?"

"물론 그렇긴 합니다만.... 황자님께서 카일에게 어떤 역할을 기대하는지 알 것 같군요."

다비는 고개를 끄덕였다.

하지만 표정을 보니 여전히 마음이 놓이진 않는 모양이다.

물론 나도 이해는 간다. 이제 막 성장하는 제자들의 싹이 피어나기도 전에 꺾여 버릴지 모른다는 불안감.

하지만 우리에겐 톨라리가 있다.

지난 회귀를 통틀어 볼 때, 탈리스만 백작이 암살하러 동원하는 병력엔 한계가 명백하다.

아무리 많아도 300명 이하의 평기사 용병에, 최대한으로 긁어모아 봐야 나이트 익스퍼트 급은 30기 이하.

여기에 나이트 커맨더도 가장 많이 왔을 때가 3명.

중요한 건 이들 모두가 맥시멈으로 온다 해도, 저택에 남겨 놓은 톨라리 혼자서 다 방어할 수 있는 수준이라는 것.

"걱정할 거 없어. 여차하면 톨라리가 싹 다 해결해 줄 테니까."

"실은 그것도 걱정입니다. 황자님은 톨라리를 어느 정도까지 신뢰하고 계십니까?"

"너처럼 신뢰하는 건 아니지. 하지만 적어도 배신할 인물은 아니야."

"그렇습니까? 물론 황자님의 안목을 믿지 못하는 건 아닙니다만...."

"톨라리가 자기 목숨보다 중요하게 생각하는 건 마법뿐이야. 정확히는 퓨어 매직."

"퓨어 매직이 무엇입니까?"

"정상적인 인간의 몸으로는 구현이 불가능한 마법. 그리고 그걸 가능하게 해 줄 수 있는 사람은 오직 나뿐이고. 그리고 무엇보다...."

나는 지난 며칠 간 함께 지냈던 톨라리의 모습들을 떠올렸다.

"걔는 평범해."

"네?"

"평범하다고. 평범한 인간이야."

"지금 아크 위저드를 평범하다고 말씀하신 겁니까?"

"능력 말고 성격."

"...성격이라. 제가 볼 땐 성격도 무언가 이상했습니다. 어째 나사가 좀 빠진 것 같기도 하고."

"실제로 빠져있어. 명색이 아크 위저드인데, 그 정도 성과를 거둔 사람들은 으레 바라는 게 있잖아? 야심이나 명성, 아니면 권력이나 돈에 대한 욕심 같은 거."

"톨라리에겐 그런 게 없다는 말씀입니까?"

"전혀."

나는 고개를 흔들었다.

"마법을 제외한 모든 분야에 아예 관심이 없어. 매직 길드에 있을 때 인간관계가 파탄 난 것도 그런 쪽에 너무 신경을 안 써서 그래."

"인간관계라. 확실히 황자님께 대하는 모습이 너무 격식 없어 보이긴 했습니다만."

"걔는 상대가 아버님이라 해도 특별히 신경 쓰지 않을 거야. 심지어 이쪽 출신도 아니라 어깨도 가볍고."

"그건 무서운 이야기군요. 황제폐하를 함부로 대했다간 자신은 물론이고 일족 전체가 성치 못할 텐데요. 출생한 마을 전체가 사라져 버릴 수도 있습니다."

"너처럼 등에 무거운 짐을 짊어진 게 아니니까. 그만큼 행동에 자유가 있는 거지."

"그건 약간 부럽군요. 그래도 제 짐은 황자님께서 대신 짊어 주시지 않았습니까?"

다비가 미소를 지으며 되물었다. 나는 당연하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이젠 내 거니까. 베리트 영지는 몇 년 안에 적어도 다른 지역만큼은 올려놓을 거야. 괴상한 관습법도 없앴으니 이제 자유로운 통행도 가능해졌고."

"제가 평생 해도 못 할 일을 이미 해주셨으니, 저 역시 평생 동안 황자님께 충성을 바치도록 하겠습니다."

"평생 말고, 앞으로 딱 10년만 열심히 해 줘."

"어째서 10년입니까?"

그야 9년 뒤에 이계의 침공이 시작되니까. 10년이면 모든 게 결판 나 있겠지.

만약 이번 생에 이계의 웨이브를 전부 막아낸다면, 나는 황자고 뭐고 이 세상의 모든 신분과 속박을 벗어 던지고 내 행복을 찾아 떠날 거다!

"...그런 게 있어. 암튼 톨라리한테도 미리 말해 놨어. 나 없는 동안 저택에 있는 사람들을 지켜달라고 ."

"직접 그렇게 부탁하셨단 말입니까?"

"응. 그리고 디디한테도. 내가 없는 동안 르갈이랑 같이 밤 산책 좀 나가달라고 했지."

"밤 산책이라. 정찰과 경계 말씀이군요."

"르갈의 코라면 적들이 숲에 발을 들여놓기도 전에 미리 눈치챌 거야. 거기에 우리 시녀들도 그냥 앉아서 당할 사람들이 아니고."

"시녀라면, 저택의 시녀 분들 말씀입니까?"

"그 애들도 한 방이 있어. 그것도 아주 강력한 걸로."

바로 지난 번 회귀 때만 해도, 저택의 시녀들이 마비가루를 풀어 숲에 침투해온 암살단 하나를 순식간에 괴멸시킨 역사가 있다.

"암튼 대비할 건 다 대비하고 나왔나 이 말이지. 근데 그 전에 적들이 멍청이가 아니고서야, 내가 저택에 없다는 걸 아직도 눈치채지 못했겠어? 당연히 노린다면 이쪽 아닐까?"

"물론 그렇습니다. 저희 마차가 제도권을 벗어나, 지금처럼 한적한 외곽 길을 이동하고 있을 때 기습적으로 덮쳐올 가능성이 가장 높습니다."

"내 생각도 그래. 계속 신경 쓰는 것도 귀찮으니 최대한 빨리 공격해 주면 좋겠는데...."

그런데 바로 그 순간.

"...응?"

생명 감지 마법의 범위 안쪽으로, 뭔가 커다란 것이 순식간에 뛰어들어 빠르게 접근하기 시작했다.

뭐지 이건?

말에 탄 기사? 아니, 그거보다 훨씬 큰데?

"잠깐, 설마...."

나는 창밖으로 얼굴을 내밀며 소리쳤다.

"르갈!"

엥?

근데 정작 거대한 늑대의 모습이 눈에 안 들어오네?

"...여기다."

순간 바로 옆에서 달리던 르갈이 은신을 풀며 모습을 드러냈다.

"역시 너구나! 어떻게 여기까지...."

"냄새를 따라 달려왔다. 은신으로 몸을 숨기고. 어차피 새벽이라 인간들이 거의 없어서 의미는 없겠지만."

"아니, 그게 문제가 아니라. 네가 왜 여기 있는 거야? 저택은 어쩌고?"

"약 30분 전, 널 암살하려는 자들이 숲을 포위하고 저택으로 몰려오기 시작했다."

"진짜?"

아이고 머리야.

내가 그놈들을 너무 과대평가했구나. 내가 저택을 비운 걸 진짜 몰랐단 말이야? 아무리 그래도 이렇게까지 멍청할 줄은 몰랐는데.

"이럴 줄 알았으면 그냥 나 북부로 떠난다고 벽보를 붙여서 써 붙일 걸.... 아니, 근데 숲에서 여기까지 오는데 30분밖에 안 걸렸어?"

"내가 가진 모든 힘을 써서 전력으로 달렸다."

"왜?"

"이 사실을 너에게 알려야 하니까. 지금 당장 저택으로 돌아가라 황자. 문제가 심각하다. 하수도 기억하지?"

"하수도?"

"그래. 내가 살던 엠퍼로드의 하수도. 그곳을 점령했던 괴물들 말이다. 네가 데스웜이나 슬라임이라 불렀던 괴물들."

"그게 왜?"

"그때와 근본이 같은 냄새를 풍기는 것들이 몰려오고 있다. 그리고 내 느낌엔 그때보다 지금이 훨씬 위험하다."

"뭐?"

순간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다.

저택으로 몰려오는 탈리스만의 암살부대 속에 이계의 괴물들이 섞여 있다고?

"다비!"

나는 고개를 돌려 마차 안의 다비에게 명령했다.

"나 먼저 저택에 돌아갈게! 너도 바로 따라와!"

"네! 황자님!"

동시에 창문 밖으로 몸을 던졌고, 지면에 추락하기 직전에 다시 비행 마법으로 떠올랐다.

"르갈! 따라올 수 있겠어?"

저택이 있는 방향으로 속도를 높이며 물었다. 이미 아래로 따라붙은 르갈이 숨을 헐떡이며 대꾸했다.

"지금은 지쳤다. 여기서 더 빨라지면 못 따라가."

"속도 더 높일 거야! 그 전에 적의 정체를 자세히 설명해!"

"끔찍한 냄새가 풍기는 괴물이다. 몸에서 수십 가닥의 긴 촉수를 뻗어 주변의 인간들을 감염시킨다. 그렇게 같은 냄새를 풍기는 괴물을 생산하고, 수십 배로 부풀어 오른 몸을 공처럼 굴리며 움직인다."

"...뭐?"

간단한 설명인데도 순식간에 그림이 그려졌다.

빌어먹을.

나는 눈을 질끈 감았다 뜨며 속으로 소리쳤다.

그거 감염 군주잖아!

왜 감염 군주가 여기서 나오는데? 어째서? 설마 벌써 게이트가 열리고 이계의 웨이브가 시작된 거냐?

심지어 감염 군주는 웨이브 중에서도 3차 웨이브부터 나오는 골치 아픈 녀석이라고....

상대법을 모르면 그 무지막지한 광전사보다도 더 까다로운 게 바로 감염 군주다. 그런데 지금 저택엔 내가 없고.

"...큰일 났다."

또다시 등줄기에 소름이 돋았다. 적의 정체를 파악한 순간, 앞으로 펼쳐질 미래가 자연스럽게 뇌리를 스쳤다.

감염 군주와 톨라리의 전투.

하지만 톨라리는 안 된다!

차라리 다른 아크 위저드라면 또 모를까, 주 속성이 바람인 톨라리로는 감염 군주를 막는 게 불가능 하다고!

* * *

"우우...."

"우어어...."

앞에는 흐느적거리며 움직이는 백여 명의 병사들.

쿠구구....

뒤쪽으로는 육중한 소리를 내며 바닥을 구르고 있는 집채만한 크기의 둥그런 덩어리.

저것들은 뭘까?

톨라리의 상식으로는 눈앞에 보이는 집단을 이해할 수 없었다.

병사들은 얼핏 보면 좀비 같기도 한데, 핏줄이 선 걸 보면 아직 숨은 붙어있는 듯했다. 그리고 뒤에서 굴러다니는 거대한 괴물은 뭐가 그렇게 즐거운지 기괴한 웃음소리를 끊임없이 흘리고 있었다.

"흐흐, 흐, 흐흐흐흐...."

불쾌하다.

그저 보는 것만으로도 기분이 참담해졌다. 공중에 떠 있던 톨라리는 손바닥에 작은 바람의 구슬을 압축하며 중얼거렸다.

"우선 병사들부터."

그렇게 아크 위저드만 사용할 수 있는, 가장 강력한 마법을 지상으로 투척했다.

템페스트.

낙하와 동시에, 압축에서 해방된 바람이 온 사방으로 날카로운 칼날을 흩뿌린다.

위이이이이이이이이잉!

칼날에 휘말린 병사들은 물론이고 근처에 있던 나무들 까지 다진 고기처럼 갈려나가기 시작한다.

하지만 그것뿐이 아니었다.

중심부에서 가장 먼 곳으로 뻗어 나온 바람의 날개가, 안쪽의 내용물이 흩어지지 않도록 소용돌이를 일으키며 내부로 끌어 모은다.

그것은 직경이 수십 미터에 달하는 바람의 감옥이었다.

그리고 감옥 속에는 백 명이 넘는 인간들이 다진 고기처럼 갈리며 분해되고 있었다.

"웁...."

톨라리는 순간 속에서 신물이 올라오는 것을 느끼며 새우처럼 몸을 구부렸다.

아직 새벽이라 먹은 게 없어 다행이라고 해야 할까.

사람을 죽인 건 이번이 처음이다. 그나마 위안이 되는 것은, 잘려나가는 적들이 도저히 정상적인 인간이라고 할 수 없다는 것.

'저게 뭐지?'

잘린 토막 사이로 거미줄처럼 선들이 어지럽게 엉겨 있다.

덕분에 이런 절단 지옥 속에도 쏟아지는 피가 거의 없었다. 톨라리는 애써 마음의 안정을 찾으며 중얼거렸다.

"인간이 아니라 다행이구나. 허나 어리석은 자들이다. 마법사의 존재를 예상하지 못한 겐가? 어찌 저리 뭉쳐서 이동한단 말인가?"

오랜만에 옛 모국어가 튀어 나왔다. 톨라리는 숨도 못 쉴 만큼 갑갑했던 어린 시절을 떠올리며 고개를 휘휘 저었다.

그 순간, 뒤에서 굴러오던 괴물이 몸을 멈추며 고개를 치켜들었다.

"감히 내 부하를.... 거기구나! 망할 놈의 클로드! 이번엔 반드시 내 손으로 네놈을 찢어 죽일.... 음? 넌 뭐지? 클로드가 아니잖아!"

다짜고짜 마법이 날아와서 클로드 황자라 착각한 모양이다. 톨라리는 녀석에게 선사할 새 마법을 준비하며 괴물에게 물었다.

"그러는 넌 뭔데? 어쩌다 그렇게 망가졌어?"

"뭣이라?"

괴물은 더는 목이라 부를 수조차 없는 희미한 경계선을 마구 흔들며 발작을 일으켰다.

"망가지다니! 내가 바로 탈리스만 가문의 주인인 탈리스만 백작이다! 지금의 나는 더없이 아름다우며 완벽한 존재다!"

"그거 농담이지?"

"뭐라?"

"농담 아니야? 그럼 더 심각한데. 아무튼 난 톨라리야."

"톨라리? 네놈! 실종되었다더니 배신했구나! 감히 날 버리고 황자에게 붙다니!"

괴물의 거대한 몸이 한순간 새빨갛게 달아올랐다. 불길함을 느낀 톨라리는 녀석이 뭔가를 하기 전 다짜고짜 템페스트를 투척했다.

"당연하지. 난 귀여운 게 좋거든."

그리고 바람의 폭발이 일어났다.

백 명이 넘는 병사를 다진 고기 더미로 승화시킨 마법이, 이번엔 단 한 명의 괴물을 상대로 모든 화력을 집중한다.

위이이이이이이잉!

소용돌이치는 바람의 칼날이 괴물의 살점을 과일 껍질처럼 도려냈다. 백작은 고통 속에 몸서리를 치며 비명을 지르기 시작했다.

"크아아아아악!"

하지만 그것뿐이었다.

템페스트가 사라진 후에도, 백작은 여전히 그 자리에 멀쩡히 서 있었다.

"무슨 저런 괴물이...."

물론 엄청난 살점이 갈려 나가긴 했지만.

그럼에도 여전히 많은 살덩이가 여전히 몸에 붙어 있었다. 백작은 마치 거북처럼 몸속에 집어넣었던 머리를 다시 뽑아내며 소리쳤다.

"고작 이 정도냐! 아크 위저드도 별거 아니군! 후원자 녀석, 알고 보니 최고의 선물을 준 거였어!"

"후원자?"

동시에 온몸이 부글거리며 끓어올랐고, 그 기묘한 거품 사이로 갈려나간 살덩이가 다시 재생되기 시작했다.

"우읍...."

톨라리는 다시 한 번 신물을 쏟아냈다. 하지만 괴물은 그녀에게 맘 편히 구토할 시간을 주지 않았다.

"너도 내 것이 되라!"

촥!

괴물의 몸에서 수십 개의 촉수가 엄청난 속도로 뿜어졌다.

'바늘!'

톨라리의 시선이 촉수 끝에 달린 날카로운 바늘에 집중됐다. 그것은 후원자가 자신에게 남기고 간 주사기를 연상시켰다.

만약 저 바늘에 찔리면, 나도 저 녀석처럼 끔찍한 괴물로 변해 버리는 걸까?

"미친!"

발작적인 외침과 동시에, 톨라리의 몸이 원래 있던 자리에서 사라졌다.

급가속.

기존의 비행마법에 더해, 추가적으로 바람의 기류를 만들어 특정 방향으로 엄청난 가속도를 일으킨다.

그 속도가 어찌나 빠른지, 한순간 존재 자체가 사라지는 것처럼 보일 지경이었다.

"음?"

괴물은 허공을 관통한 촉수를 보며 눈살을 찌푸렸다.

반면 한순간에 괴물의 뒤쪽으로 백 미터 이상을 날아간 톨라리는, 미리 만들어놓은 바람의 쿠션으로 브레이크를 걸며 가쁜 숨을 몰아쉬었다.

'죽으면 죽었지 저런 꼴은 안 돼.'

톨라리는 온몸에 소름이 돋는 것을 느끼며 새로운 마법을 준비했다.

템페스트.

하나가 안 된다면, 더블 매직으로 동시에 두 개를.

'아니, 두 개로도 안 돼.'

처음 템페스트를 날렸을 때 괴물의 신체를 2할 정도밖에 깎아 내지 못했다.

그렇다면 두 개를 동시에 날려도 4할이라는 뜻.

물론 두 마법이 동시에 발동하며 추가되는 시너지가 존재하지만, 그것을 감안해도 저 괴물을 완전히 갈아버리기엔 부족할 듯했다.

그리고 한 번에 죽이지 못하면, 적은 다시 원래 모습으로 재생한다.

그렇다면 어떻게 해야 할까?

"...."

톨라리는 곧장 품속으로 손을 집어넣었다.

-이거 잘 챙겨 둬.

-나 없는 동안에도 지금처럼 정해진 시간에 마셔. 일정은 사흘이지만 더 늦을 수도 있으니, 닷새 치를 미리 주고 갈게.

톨라리는 손에 쥔 네 병의 영약병을 노려보았다. 원래 다섯 병이었지만 한 병은 어제 마셔 버렸다.

뇌가속 영약.

이것은 퓨어 매직을 쓰기 위한 중요한 도구다.

하지만 그 퓨어 매직. 실은 이미 쓰려면 쓸 수 있었다.

클로드가 예상하지 못한 것은, 톨라리가 자신의 예측보다 더 뛰어난 천재 마법사였다는 것.

처음 한 병을 마시고 침을 줄줄 흘리며 해롱거렸을 때부터, 그녀는 이미 자신의 뇌를 다루는 새로운 방식을 깨우친 상태였다.

'미안해 황자님. 일부러 숨기려던 건 아닌데.'

다만 이후에 생길 부작용을 알 수 없기에 잠자코 황자의 말을 따랐을 뿐이다.

하지만 지금은 주저할 때가 아니었다. 그녀는 영약병들의 뚜껑을 잽싸게 뽑아 던지며 내용물을 몽땅 입 안에 부어 넣었다.

"...!"

그것은 세상에 없는 지독한 쓴맛이었다.

한 병만으로도 끔찍한데, 네 병을 동시에 마시자 순간 정신이 마비되는 듯했다.

'아니야, 이건 마비가 아니라....'

가속.

마법사의 두뇌가 엄청난 속도로 연산을 시작한다.

이계 황자는 세상을 구하고 싶다 71화

22장 감염 군주

그렇다고 퓨어 매직을 쓰려는 건 아니다. 저런 끔찍한 괴물덩어리와 고상하고 아름다운 퓨어 매직은 접점이 없을 테니까.

그녀가 노리는 건 극단적인 뇌가속을 통해, 더블 매직을 넘어선 트리플 매직을 구현하는 것이었다.

'그래. 이거 여러 병 동시에 마시면 할 수 있을 줄 알았어. 새로운 영역을 만드는 거야. 지금까지는 두 개가 한계였지만....'

사람의 몸이 좌우로 나눠져 있듯, 두뇌 역시 좌우로 나뉘어져 있다.

일반인은 모르지만 마법사는 그것을 인식할 수 있었다. 그리고 모든 마법사를 초월하는 톨라리는, 좌우의 뇌를 극단적으로 가속하는 것으로 제3의 영역이 열리는 것을 예상했다.

하지만 예상한 것과 실제로 하는 것 차이엔 큰 차이가 있었다.

주륵.

연산이 한계를 넘자 코피가 흐르기 시작했다.

하지만 코피는 물론이고 입에서 새는 침조차 닦을 수 없었다. 이미 그녀의 양손엔 각기 두 개의 템페스트가 압축되고 있었으니까.

우우우웅....

그리고 펼친 두 손의 사이.

그 가운데 펼쳐진 텅 빈 공간에, 누구의 손길도 닿지 않은 세 번째 템페스트가 압축되기 시작했다.

하지만 존재하지 않던 영역을 유지하는 건 쉬운 일이 아니었다.

"어, 어으...."

눈이 위로 돌아가기 시작한다.

찰나의 순간만 집중이 풀려도 두뇌의 스위치가 꺼질 것 같다.

아니, 꺼질 것 같은 게 아니라 당장 끄지 않으면 큰일 날 느낌이다. 이대로 두면 두뇌에 영구적인 장애가 남을지도 모른다.

아니면 죽을지도.

하지만 그녀는 멈추지 않았다.

'나도 미쳤지....'

고통스럽지만 즐겁다.

트리플 매직이라는, 지금껏 존재하지 않았던 새로운 마법의 형태에 대한 호기심.

그리고 눈앞에 있는 적에 대한 호승심.

첫 번째는 익숙했다. 하지만 두 번째는 지금껏 느껴보지 못한 새로운 욕망이었다.

자신의 마법이, 저런 말도 안 되는 괴물의 숨통을 끊어 버리고 승리를 가져다줄 수 있을까?

만약 가져다준다면, 그 순간 얼마나 기쁠 것인가?

'모르겠네. 아직 해본 적이 없어서.'

그래서 해보고 싶었다.

"...거기구나!"

그 순간, 백작이 톨라리의 위치를 발견하고는 맹렬한 기세로 촉수를 방출했다.

촤륵!

하지만 촉수가 톨라리의 몸에 닿기 전, 먼저 날린 세 발의 템페스트가 백작의 몸에 작열했다.

* * *

루넨브레스 서쪽 숲에 국지적인 재난 상황이 발생했다.

거대한 소용돌이.

그 휘몰아치는 폭풍이 숲을 뚫고 하늘 높은 곳까지 치솟으며 주변의 모든 것을 집어삼켰다.

폭풍 안쪽엔 중심점이 세 개인 바람의 칼날이 초고속으로 회전하며, 안에 갇힌 모든 것을 면도날처럼 갈아버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백작은 버텨내고 있었다.

까드드드드득!

단단한 껍질이 갈려나가는 소리.

어느새 백작의 표피에 붙은 단단한 덩어리들이 먼저 갈려나가며 백작의 몸을 보호했다.

그것은 톨라리가 새로운 경지에 빠져 정신이 나가있던 잠깐 사이의 일이었다.

백작은 자신이 감염시킨 부하들, 이미 처참히 찢겼지만 여전히 정신적으로 연결된 모두를 한순간 당겨와 자신의 몸을 덮어버렸다.

마치 갑옷처럼.

"단단해져라, 내 노예들아! 너의 주인을 위해 한없이 단단해지라고!"

감염된 살덩어리들은 백작의 명령에 충실히 따르며 자신의 살점을 끝없이 경화시켰다.

그 살점갑옷이 트리플 템페스트의 첫 충격을 대신 받아냈고, 그 이후로도 억지로 버티며 시간을 계속 끌어주었다.

"으으! 버텨! 버텨야 해! 크윽!"

백작은 갈려나가는 자신의 살 더미를 보며 몸부림쳤다.

겨우 버티던 살점갑옷이 소멸한 순간, 상대적으로 부드러운 진짜 육체가 빠르게 찢겨 날아간다.

마치 과육이 서걱서걱 잘려나가고 중심부의 심지만 남는 것처럼.

그렇게 앙상한 가지만 남은 백작은, 어느 순간 폭풍이 사라진 것을 느끼며 포효하기 시작했다.

"오오, 오오오! 버텼다! 이겼어! 내가 아크 위저드를 이겼다고!"

아크 위저드는 하나의 상징이었다.

단일 개체로는 인간 중에 최강의 존재라는 상징.

그것을 초월했다는 쾌감이 백작의 마음을 황홀하게 만들었다.

물론 엄청난 피해를 입긴 했지만.

그래도 중심부에 남은 이 앙상한 가지 하나면 충분했다. 잘려나간 살점은 다시 재생시키면 그만이니까.

"오, 조, 좋아. 바로 재생한다!"

자신이 뭔가를 할 필요도 없이, 중심부로부터 또다시 살점이 끓으며 풍선처럼 부풀어 오르기 시작했다.

"멋지군. 이런 완벽한 육체가 존재하다니. 그래도 혹시 모르니 부하들을 새로 보충해야겠어. 클로드 녀석의 저택엔 사람이 몇 명이나 있으려나...."

그 와중에 멀리 흔들거리다 지상으로 추락하는 톨라리가 보였다. 백작은 입맛을 다시며 녀석을 향해 긴 촉수를 뿌렸다.

"네 녀석이 내 새로운 부하 1호다!"

그렇게 날린 촉수가 톨라리의 목덜미에 꽂히려는 순간.

촥!

뭔가가 추락하는 톨라리의 몸을 번개처럼 낚아채 달아났다.

"큭!"

백작은 허공을 관통한 촉수를 거두며, 또다시 온몸을 새빨갛게 부풀리기 시작했다.

"클로드! 이 망할 자식! 드디어 왔구나!"

* * *

나이스 캐치!

추락하는 톨라리를 양팔로 받아낸 다음, 동시에 날아오는 촉수를 피해 어둑한 하늘로 급상승했다.

휴. 아슬아슬했네.

1분만 늦었어도 큰일 날 뻔했다. 소식을 듣자마자 전 속력으로 날아온 보람이 있구만.

"...!"

저 멀리 지상에는 고기완자를 연상시키는 덩어리가 정신없이 꿈틀대며 뭔가를 소리치고 있었다.

아오. 입에서 욕 나오네. 정말 할 말을 잃었습니다.

진짜 감염 군주잖아!

이계의 침공, 그것도 3차 웨이브부터 등장하기 시작하는 이계의 무지막지한 괴물.

골치 아프기로만 따지면 그 광전사보다도 훨씬 더한 존재다. 데스웜 따위는 댈 것도 아니고.

"제발 아니길 바랐는데...."

저놈이 무서운 이유는, 주변 생물을 촉수로 감염시켜 자신의 방패로 사용하기 때문이다.

여기에 방패를 제외하더라도 자체적인 내구력과 재생력이 말도 안 될 정도다. 기사를 포함해, 물리적인 힘을 위해 조직된 군대는 애초에 저 괴물을 상대조차 할 수 없을 정도.

그렇다고 마법이 잘 통하냐 하면 그것도 아니고.

저 넘치는 살덩이가 그나마 불에 잘 타긴 하는데.... 결국 중심부의 가느다란 심지가 파괴되지 않는 이상 끝없이 재생을 반복한다.

무한 재생.

아직 저 괴물의 공략법을 모르던 시절, 파이어 오브 템페스트를 더블 매직으로 쏟아 부었음에도 순간 화력이 모자랐을 정도다.

그러니 바람이 전공인 톨라리에겐 최악의 상성이겠지? 윈드 오브 템페스트로는 살점만 조금 도려내고 끝일 테니까.

그런데 저건 뭘까?

감염 군주 주변에 엄청난 크기의 땜빵이 뚫려있다. 무슨 경기장만한 사이즈로 숲이 사라졌잖아? 대체 무슨 일이 있었던 거지?

"으...."

그때 품안의 톨라리가 한쪽 눈을 뜨며 신음했다.

"톨라리! 정신이 들어?"

"으.... 저 괴물이...."

"뒷일은 나한테 맡겨. 엥? 근데 너 얼굴 근육이 왜 이래? 뭔가 좌우 균형이 안 맞게 꿈틀거리는데?"

"화, 황자님.... 미안. 그렇게 당부했는데...."

"뭐?"

"그 영약, 한 번에 다 마셨어."

"영약? 혹시 뇌가속 영약?"

"근데도 안 됐어. 저 괴물... 계속 재생하는데...."

그러다가 다시 눈을 감으며 축 늘어졌다.

아니 잠깐.

방금 얘가 뭐라고 했지? 뇌가속 영약 다섯 병을 한 번에 다 마셨다고?

왜?

설마 퓨어 매직을 쓰려고?

"너 바보냐? 퓨어 매직은 마법에만 통한다고 했잖아?"

하지만 기절한 톨라리는 아무 대답도 할 수 없었다. 에휴, 나중에 정신 차리면 제대로 물어봐야지.

"내려와라 클로드! 이 땅에 붙은 난쟁이 같은 꼬맹이! 그 왜소한 몸을 드러내는 게 부끄럽나? 당장 내려와서 나와 싸우자!"

그 와중에 감염 군주는 길게 늘어난 하반신에 거미처럼 여덟 개의 다리가 돋아나 몸 전체를 떠받치고 있다.

반면 두꺼운 상반신은 가시가 듬성듬성 난 뭉툭한 선인장을 연상시켰다.

도저히 정상적인 생물이라고는 믿겨지지 않는 모습이다. 심지어 저 가시 하나하나가 자유자재로 늘어나 움직인다는 것도 알고 있다. 군주는 온 숲이 떠나가라 소리를 질러대고 있었다. 세상에, 이렇게 높이 떠 있는데도 저놈 목소리가 다 들리네.

근데 이 썩을 놈이 뭐라고?

내가 최근에 무려 7cm나 키가 자랐다는 걸 모르나?

"후...."

물론 그래봤자 아직 150이 조금 넘는 수준이다만.

아무튼 빨리 조용히 만들어야겠다. 듣고 있자니 귀가 썩는 것 같네.

나는 곧장 녀석의 머리 위로 위치를 이동했다.

촥! 촤륵!

감염 군주는 곧장 수직으로 촉수를 날려대기 시작했지만 의미 없는 짓이다.

저놈 촉수의 최대 사거리는 약 150미터고, 나는 지상에서 최소 300미터는 공중에 떠 있으니까.

"클로드! 이 비겁한 놈! 어서 내려와! 그때의 지하 감옥을 잊은 건 아니겠지? 네놈에게 당한 치욕을 당장 갚아 주겠다! 내 손으로 온몸을 갈기갈기 찢어주마!"

어머 무서워라. 근데 말하는 꼴을 보니 어째 탈리스만 백작 같은데? 저놈도 제스처럼 인간의 몸으로 이계의 괴물이 되어 버린 건가?

"왜 자꾸 이런 없던 일이 벌어지는 거냐고...."

"클로드으으으!"

"알았어! 시끄러우니까 입 좀 닥쳐!"

하지만 내 목소리는 작아서 녀석의 귀에 닿지 않았을 것이다. 나는 가볍게 심호흡을 한 다음, 지상과의 간격을 재며 시간을 계산했다.

"300미터쯤 되니... 땅에 닿을 때까지 10초쯤 걸리려나?"

그 정도면 충분하다. 나는 먼저 바위 정령인 룩카르를 소환, 아무 제어도 없이 녀석을 지면으로 자유낙하 시켰다.

부웅!

동시에 품에 안고 있던 톨라리도 품에서 놓아버린 다음, 그 둘보다 더 빠르게 지상을 향해 속도를 높였다.

"오는구나!"

촤륵!

시야를 막으며 어지럽게 날아드는 수십 개의 촉수들.

하지만 상관없다.

감염 군주의 촉수는 평기사 정도의 반응속도만 있어도 눈으로 보고 피할 수 있으니까.

촥!

촥!

아슬아슬하게 방향을 틀며 날아오는 촉수를 전부 비껴낸 다음, 더는 인간이라 볼 수 없는 백작의 얼굴 정면에 손바닥을 내리찍었다.

"어딜!"

녀석이 순간적으로 머리통을 몸속으로 쑥 집어넣는다.

근데 꼭 머리가 아니라도 상관없다. 나는 녀석의 살점 아무 곳에나 손바닥을 후려치며 신성마법을 사용했다.

힐링.

상처를 회복하고 재생시키는 신성마법.

그것도 내가 가진 마력을 단숨에 폭발시키듯 마구잡이로 쏟아냈다.

힐링.

힐링.

그리고 또 힐링.

그렇게 눈부신 광채가 감염 군주의 몸 전체를 뒤덮은 순간.

"이 자식! 뭐 하는 거냐!"

백작이 새롭게 뽑아낸 촉수가 빠른 포물선을 그리며 사방에서 쏟아졌다. 나는 비행마법을 통해 백덤블링 하듯 그 자리를 빠져나왔고.

푹!

덕분에 촉수들이 내가 붙어있던 살점을 빠르게 파고드는 사이, 나는 녀석의 몸 주변을 빠르게 회전하며 계속해서 회복 마법을 퍼부었다.

"큭! 이건 힐링? 이 꼬맹이가 대체 뭐 하는 수작이야!"

"우선 죽기 전에 한 대 맞아."

"뭐?"

그 순간. 하늘에서 미리 소환했던 바위 정령이 백작의 머리 위로 떨어졌다.

"음?"

동시에 자유낙하로 가속도가 더해진 거대한 주먹이 백작의 몸을 강타했다.

콰앙!

소리는 별로 크지 않았다.

대신 지진이 나면 지면이 물결치는 것처럼, 백작의 모든 살덩이가 파도처럼 크게 출렁이기 시작했다.

"어으으으으응? 하! 역시 이게 내 몸이지! 이따위 공격은 나한테 안 통해!"

그 사이, 나는 연속으로 낙하한 톨라리의 몸을 바람의 쿠션으로 받아내며 즉시 그곳에서 먼 곳으로 몸을 날렸다.

"클로드! 감히 도망 따위를.... 응?"

백작의 여유는 1초를 넘기지 못했다.

룩카르의 일격으로 크게 출렁이던 녀석은, 어느 순간 몸 전체에 균열이 터지며 한순간 대 폭발을 일으켰다.

동시에 뒤를 이어 쏟아지는 철퍽거리는 끔찍한 소음.

으아! 이거 듣기 싫어! 내 귀!

귀를 막아 버리고 싶다. 아니면 고막을 뽑아버리거나.

그 뒤로 남은 풍경은, 차마 형용하기 어려운 주지육림이었다.

아니지, 술은 없으니까 그냥 육림이라고 해야 하나? 그렇게 따지면 주변에 숲도 사라졌으니 그냥 육?

육.

살점, 고깃덩이.

대충 그런 것들이 운동장만한 넓이의 공터에 가득 쏟아져 있었다.

"...."

그 와중에 폭발한 고깃덩이를 정면으로 뒤집어쓴 바위정령이 무표정한 얼굴로 날 바라보고 있네? 음.... 미안해 룩카르. 내가 급한 마음에 평생 갈 트라우마를 남기고 말았구나.

하지만 내 입에서 나온 건 사과가 아니라 공격명령이었다.

"지금!"

-알았다.

명령을 받은 룩카르는 근처에 서 있는 기둥 같은 것을 향해 냅다 주먹을 휘둘렀다.

빠각!

한순간 부러진 기둥이 휘청거리다 바닥에 쓰러졌다.

저것이 바로 감염 군주의 실체였다. 끝없이 살덩어리를 재생시키는 나무토막 같은 기둥.

"으, 으으...."

기둥의 꼭대기에 달린 백작의 머리에서 고통스런 신음이 흘러나왔다. 잠시 후, 나는 녀석의 얼굴에 손바닥을 겨누며 마지막 화염 마법을 준비했다.

"으…. 1분.... 아니 30초만 더 줘.... 난 다시 재생할 수 있을...."

"아니, 감염 군주는 심지가 부러지면 재생 못 해."

"가... 감염 군주? 그게 대체...."

백작은 뿌옇게 흐려진 눈으로 잠시 헐떡이다 숨을 거뒀다. 나는 한숨을 내쉬며 수많은 시행착오를 반복, 겨우 찾아낸 감염 군주 공략법을 다시 한번 떠올렸다.

감염 군주의 몸에는 항상 엄청난 위력의 재생이 걸려 있다.

여기에 추가로 힐링 같은 회복마법을 더 퍼부어 주면?

퍼엉!

어느 순간 한계를 넘어 초 재생상태에 돌입, 스스로의 재생속도를 감당하지 못하고 폭발해 버린다!

그러면 내부의 말라비틀어진 심지만 남게 되고, 그 심지가 다시 재생을 시작하기 전에 부러뜨려 버리면 끝.

-이것은 무엇이냐?

이미 죽어버린 감염 군주를 보며 룩카르가 물었다.

이게 뭐냐고?

하고 싶은 말이 많긴 한데, 지금은 짧게 한마디로 끝낼 수밖에.

"이건 적이야."

-적?

"그래. 적."

-전에 싸웠던 적도 그렇고, 이번의 적도 문제가 많은 것 같군.

"맞아. 문제가 많지."

바로 그때, 하늘에서 어둠이 걷히며 새벽 동이 천천히 떠오르기 시작했다.

"후우...."

그 사이 백작의 시체는 다시 인간의 몸으로 돌아와 있었다. 나는 이마에 흐르는 땀을 닦으며 백작의 시체를 불로 태우기 시작했다.

-세상이 이상해지고 있군. 또다시 적이 나타나면 언제든지 불러라. 힘을 더해 줄 테니.

"그래 언제든지 부를게. 하지만...."

-하지만?

나는 뭔가를 말하려다 그냥 입을 다물었다.

상황이 너무 달라졌다.

앞으로 9년 뒤, 이계의 침공이 시작되면 그때 나와야 할 괴물들.

하지만 회귀 1년차를 겨우 벗어나려는 지금부터 벌써 쏟아져 나오기 시작했다.

광전사, 데스웜, 슬라임.

그리고 감염 군주까지.

어째서?

이유야 나도 모르지.

확실한 건 이런 일이 반복된다면 바위 정령 하나로는 커버가 안 될 거라는 사실.

물론 감염 군주는 쉽게 처리가 가능하다. 효율적인 공략법을 이미 찾아냈으니까.

하지만 아직 약점을 찾아내지 못한 괴물이 튀어 나온다면?

애당초 괴물이 아닌 이계의 정규군대가 쏟아져 나온다면?

...에휴.

상상만으로도 눈앞이 아찔해진다.

이걸 어쩌지?

회귀한 지 아직 1년도 채 지나지 않았는데.... 이러면 계획표의 시계바늘을 대체 얼마나 빠르게 돌려야 하는 거야?

이계 황자는 세상을 구하고 싶다 72화

23장 선택과 집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