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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

톨라리의 마탑이 있는 귀네스 지역까지는 비행마법으로 네 시간이 소요됐다.

전에는 한 번도 저택에서 이곳까지 다이렉트로 날아온 적이 없었다. 왜냐고? 그야 마력 소모가 엄청나니까.

막상 여기까지 왔는데 톨라리를 암살하는데 사용할 마력이 부족하면?

하지만 이번에는 다르다.

리치의 마력결정을 흡수한 덕분에 여유 마력이 엄청나게 생겼으니까.

"일단 그놈이 집에 있어야 할 텐데...."

저 멀리 까만 탑이 흐릿하게 보인다. 나는 비행을 멈추고 은신을 풀며 천천히 탑을 살폈다.

귀네스는 제국령의 북부에 위치한 평야로, 사실상 인구라는 게 존재하지 않는 버려진 황무지다.

이곳이 그렇게 된 이유는 예전에 제국이 점령전쟁을 하면서 어떤 사건이 생겼기 때문인데....

뭐 이제 와서 중요한 이야기는 아니다. 핵심은 여기서는 마음껏 날뛰어도 누군가에게 들킬 일이 전혀 없다는 사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톨라리를 제거하는 데 있어 가장 조용하고 깔끔한 방법을 선택했다.

"일단 있는지 없는지 부터 확인하고...."

먼저 생명감지 마법을 발동시킨 다음, 마법의 범위에 마탑이 닿도록 조심스럽게 탑으로 비행했다.

마탑은 그 자체로 외부의 공격을 막는 방어마법이 걸려 있다. 수준급 마법사 여러 명이 동시에 마법을 퍼부어도 잠시 동안은 막아낼 정도로.

여기에 일정 범위로 사람이 다가오면 경보를 알려주는 능력까지.

그러니 최대한 신중해야 한다.

상대가 톨라리라면 아무리 수고를 기울여도 아깝지 않다. 정면 승부보다는 이쪽이 훨씬 편하니까.

그렇게 생명감지 마법이 탑 안에 있는 누군가를 발견한 순간....

"...있다."

나는 비행을 멈추며 눈을 가늘게 떴다.

아직 거리가 멀긴 하지만, 탑의 최상층에 있는 방에 창문이 열려 있는 게 보인다.

그리고 창문 바로 안쪽으로 흐릿한 실루엣의 여자가 서 있는 것까지도 보였다. 뭐지? 내 눈이 이 정도로 좋았었나?

이것도 다 코어 덕분인가?

어쩌면 숨어있던 독까지 말끔하게 제거했더니 시력까지 좋아졌을지도?

뭐, 아무렴 어때.

덕분에 '저격' 확률이 대폭 오르게 됐다. 감지마법 하나에 의존하는 것보다는, 당연히 눈으로 대상을 확인하고 쏘는 게 명중률이 높아지니까.

"후우...."

깊이 심호흡을 한 다음, 평소에는 거의 쓸 일이 없는 특별한 마법을 떠올렸다.

이름하야 스펠 브레이커.

기존에 없던 마법이라 내가 직접 이름을 붙였다. 속성 자체가 존재하지 않는다는 걸 생각하면 '퓨어 매직'이라 불러도 좋을 테고.

이계 황자는 세상을 구하고 싶다 61화

20장 바람의 마도사

근데 이 마법, 준비할 것도 많고 완성까지 시간이 꽤 걸린다.

먼저 준비할 재료는 템페스트.

속성은 아무거나 상관없다. 어차피 속성이란 게 사라져 버리니까.

템페스트는 해당 속성을 최대 출력으로 방출함과 동시에 그것을 한계까지 압축하는 마법.

여기서 한계라는 것은 인간의 머리가 감당할 수 있는 한계를 말한다.

그런데 이 한계를 넘어 추가적인 압축을 진행하면, 어느 순간 마법의 속성 자체가 사라져 버린다.

물론 인간의 머리로는 이 과정이 불가능하다. 제아무리 아크 위저드라도 생물학적인 한계 때문에 연산도중 집중이 풀릴 수밖에 없으니까.

한계를 모르고 억지로 계속했다간 머리에 과부하가 걸려서 의식을 잃거나 쇼크로 죽을지도 모른다. 그래서 그런 짓을 못 하도록 본능적으로 리미트가 걸린다는 말씀.

그래서 여기서부터는 '신성마법'이라는 새로운 공정이 도입된다.

절대 방호마법.

그러니까 프로텍션 매직이 더해져야 한다. 결국 아크 위저드이면서 동시에 아크 프리스트여야 가능한 마법이라는 뜻.

"좋아 그럼...."

시작해볼까?

먼저 오른 손바닥 위에 압축되어 휘몰아치는 불꽃의 구체, 바로 템페스트를 만들었다.

화륵!

그렇게 작지만 큰 가능성을 품을 불꽃을, 이번엔 좀 더 크지만 평범하기 그지없는 화염 벽으로 둘러싼다.

화륵!

일종의 마트료시카 인형을 만드는 셈이다. 불꽃을 재료로 하는.

그렇게 만들어진 바깥쪽 화염 벽에 프로텍션 매직을 덮어씌운다.

우웅!

선명한 빛이 불꽃을 감싼 모습은 그 자체로 역설이었다. 방호마법으로 마법을 닿지 않게 감싸버리다니. 덕분에 컨트롤하는 거 진짜 까다롭다!

하지만 일단 성공만 하면 안쪽에 포위된 템페스트에 추가적인 압축이 가능해진다.

정확히는 템페스트를 압축하는 게 아니라 바깥을 둘러싼 화염 벽을 압축하는 거지만.

그리고 이 과정이 시작되면, 가뜩이나 작게 압축된 불꽃이 더 작게 오그라들며 괴상한 소음을 쏟아내기 시작한다.

끼기기기기긱....

바로 이렇게.

동시에 빨간 불꽃이 점점 투명하게 바뀌며.

우웅!

어느 순간 속성이 사라진 반투명한 구체로 변해 버린다.

이것이 바로 스펠 브레이커.

자신과 접촉하는 모든 마법 현상을 해체해 버리는, 말 그대로 대 마법 스페셜리트스.

지잉!

녀석은 탄생하자마자 자신을 압박하던 프로텍션 매직과 화염 벽을 흔적도 없이 소멸시켜 버렸다.

모든 마법을 완벽하게 막아내는 절대 방호마법을 반대로 소멸시켜 버린 것이다. 히익.... 뭐야, 무서워. 내가 만들긴 했지만 뭐 이런 게 다 있냐?

하지만 이거, 실전에선 의외로 쓸모가 없다.

일단 만드는 데 시간이 너무 오래 걸리고, 만들어 봤자 상대가 마법사나 마법생물이 아닌 이상 딱히 효과도 없다.

물리력인 파괴력은 기껏해야 갑옷을 안 입은 평범한 사람 하나 박살내는 정도다. 무려 템페스트 2개 분량 이상의 마력을 소모하면서 말이지.

결국 인류의 배신자면서, 동시에 아크 위저드인 놈들을 상대로 할 때만 제 위력을 발휘한다는 뜻.

바로 지금 이 순간처럼.

슉!

나는 멀리 보이는 마탑을 향해 스펠 브레이커를 쏘아 냈다.

얼핏 보면 투명한 유리구슬처럼 보이기도 하는데, 날아가는 속도가 어찌나 빠른지 눈으로 따라잡기 힘들다.

그렇게 마탑에 도착한 구슬이 활짝 열린 창문에 도달한 순간.

지이잉!

구슬은 마탑 전체를 감싸고 있던 방어마법을 아무 저항 없이 관통했다.

그런데 바로 그때.

"...."

안쪽 있던 톨라리가 창문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응?"

그토록 먼 거리임에도 불구하고, 나는 녀석의 순간적인 표정을 확인할 수 있었다.

놀람, 경악, 호기심, 공포....

어째 눈빛이 살아 있네?

내가 아는 톨라리는 항상 썩은 시체 같은 눈을 하고 있었는데?

"...."

날아오는 구체를 발견한 여자는, 순간적으로 자신의 주변에 격렬한 기류를 전개했다.

바람의 벽.

그것도 바람의 마도사라 불리는 톨라리만의 특제 벽마법.

강력한 기류를 마치 섬유처럼 촘촘하게 엮어 짜 만든 것으로, 어지간한 외부의 충격은 전부 튕기거나 흘려 버린다.

하지만 그 어떤 마법도 스펠 브레이커 앞에서는 무의미했다.

지잉!

투명한 구슬이 바람의 벽을 일직선으로 관통하며 톨라리의 명치에 꽂히려는 찰나.

"...!"

그녀는 스스로의 몸에 급가속을 걸며 옆으로 몸을 날렸다.

콰앙!

동시에 톨라리가 벽을 뚫고 마탑 밖으로 튀어 나왔다.

"앗...."

그걸 그 순간에 판단을 내리고 피했다고?

어떻게 사람이 그럴 수가 있어!

"망할!"

이렇게 되면 암살은 실패다.

톨라리는 일반적인 비행마법을 넘어선, 속칭 '급가속'이라는 특별한 마법을 쓸 수 있다.

그리고 바로 그 급가속 때문에, 암살에 실패한 순간 죽이는 게 몇 배로 까다로워진다!

그나저나 저 아가씨는 지금부터 어떻게 하려나?

이대로 도망치나? 급가속으로 도망치면 따라잡는 게 엄청 힘들 텐데.

아니면 반격?

마음 같아서는 반격해 주면 정말 고맙겠다. 정면승부라면 요리할 방법이 얼마든지 있으니까.

하지만 톨라리의 반응은, 그런 내 예상을 완전히 초월하는 무언가였다.

"퓨어 매직!"

"...응?"

"퓨어 매직! 퓨어 매직! 퓨어 매직! 퓨어 매직! 퓨어 매직!"

녀석은 고장 난 인형처럼 같은 말을 반복하며 내 쪽으로 날아왔다.

"너!"

"...나?"

"그래 너! 방금 그거 퓨어 매직이지? 내 눈 못 속여! 진짜 퓨어 매직이었다고! 제발 퓨어매직이었다고 말해줘! 제발!"

너무도 필사적으로 다그치는 바람에, 나는 추가적인 공격도 멈춘 채 얼떨결에 대답해 버렸다.

"어... 아마도?"

"말도 안 돼! 말도 안 된다고! 진짜야! 진짜였어!"

톨라리는 거의 발작하는 수준으로 허공에서 양팔을 휘젓기 시작했다.

"내 눈으로 봤어! 퓨어 매직이야! 현실에 구현되는 걸 내 눈으로 봤다고! 아하하하하! 역시 불가능한 게 아니었어!"

아니.... 얘 갑자기 왜 이러는 거지?

분명 톨라리는 기계처럼 아무 감정 없이 사람을 찢어 죽이는 사이코패스였는데?

그러고 보니 처음부터 뭔가 이상했다.

예전 회귀 때 봤던 톨라리는, 마치 안면근육이 마비된 것처럼 표정이 없는 여자였다.

그런데 지금은 표정도 풍부하고, 전체적으로 뭔가.... 평범한 인간처럼 보이잖아?

"뭐야 너. 이렇게 보니 완전 어린애잖아? 어떻게 그 나이에 퓨어 매직을? 애초에 퓨어 매직이란 게 존재하는 건 어떻게 알고? 아니, 그러고 보니 너 설마?"

"설마 뭐?"

"소름끼치게 작은 키, 금발, 여자애 같은 얼굴. 핏기 없이 창백한 피부. 그리고 눈 밑에 퀭한 다크서클까지!"

"야!"

갓 뎀!

순간 나도 모르게 쌍수로 템페스트를 날릴 뻔했다.

남 일이라고 이렇게 막말을 해도 되는 거야? 그리고 다크서클은 너도 만만치 않거든?

"너, 지금 뚫린 입이라고...."

"우왁, 얘 표정 봐. 진정해. 화내지 마. 방금 말한 건 내 생각 아니야. 넘겨받은 인상묘사에 적혀 있던 내용이 그랬어."

"뭐?"

"너 클로드 황자 맞지?"

톨라리는 마치 사진을 찍는 것처럼 양손가락으로 네모를 만들어 그 사이에 날 담았다.

"얼마 전에 너 죽이라고 암살 의뢰 받았어. 맞아. 그렇네. 내가 암살 의뢰를 받았다는 정보를 미리 입수했구나. 그래서 사전에 날 처리하러 여기까지 온 거?"

그렇게 혼자 결론까지 다 내버린 톨라리는, 마치 벌을 서는 것처럼 양손을 번쩍 치켜들며 소리쳤다.

"그럼 난 항복!"

"...응?"

"항복할게. 암살 취소야. 의뢰금 받은 거 다시 돌려줄게."

"...."

"그러니 싸우지 말자. 응? 내가 잘못했어. 요즘 나답지 않게 돈 욕심이 나서. 실수한 거 인정. 그러니 화 풀어."

...뭐라고?

얘가 진짜 갑자기 왜 이러는 거지?

이런 반응이 나올 거라곤 정말 상상조차 못 했다.

내 앞에 있는 게 진짜 그 톨라리가 맞긴 맞나?

무차별 학살자? 말없는 살인마? 인간을 포기한 악마?

"표정 보니 아직? 여전히 화났어? 어떻게 대화로 풀면 안 될까? 내가 진짜 사과할게. 그만 화 풀어. 그리고 나한테 그거 쓰는 법 좀 가르쳐 주면 안 돼?"

"...뭘?"

"퓨어 매직."

톨라리는 갑자기 기도하는 자세로 애걸하기 시작했다.

"내가 진짜 그거 한번 써보겠다고 평생을 걸었어. 근데 도무지 답이 안 나오더라. 그러니 이렇게 빌게. 원하는 거 뭐든지 말해. 혹시 돈 필요해? 그동안 모은 전부 줄 수 있어. 요즘 많이 써버려서 별로 많진 않지만."

"아니, 그게 아니라...."

"맞아. 혹시 마탑 안 필요해? 생긴 건 흉측해도 방어 하나는 끝내줘. 물론 방금 뚫리긴 했지만. 암튼 재료 사는 데만 금화가 400개나 들었어. 원하면 탑 통째로 넘겨줄게. 그러니 제발 나한테 퓨어 매직 쓰는 법 좀 가르쳐 줘!"

그리고는 고개를 푹 숙이며 양손을 싹싹 빌기 시작했다.

"...."

순간 무방비가 된 녀석의 정수리를 향해 템페스트를 날리려던 나는, 일단 마법을 거두며 한숨을 내쉬었다.

"대체 뭐가 뭔지...."

수다쟁이에 전투 대신 협상을 시도하는 톨라리라니.

혹시 내가 꿈을 꾸고 있는 걸까? 아니면 이번 10회 차는 기존의 다른 회귀들과 세계관이 달라진 걸까?

* * *

"...실망이야."

톨라리는 연한 빛의 차를 잔에 따르며 한숨을 쉬었다.

"결국 템페스트를 추가로 압축하려면 프로텍션 매직을 쓸 수 있어야 한단 소리잖아? 신성 마법 중에서도 최상급 신성마법?"

"맞아. 그런데...."

"응? 혹시 향 별로?"

내가 잔을 들지 않자, 톨라리는 자신의 잔에 코를 박고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하긴. 싸구려로 왕창 쟁여 놓은 게 황자님 입맛에 맞을 턱이 있나. 이럴 줄 알았으면 비싼 찻잎을 사다 놓는 건데."

아니, 찻잎은 아무래도 상관없습니다요. 물론 라니아가 저택에서 내오는 것과 비교하면 완전 형편없긴 하지만.

그보다 내가 당황한 것은, 지금 톨라리가 보여주는 너무도 격식 없는 태도 때문이었다.

이 녀석은 다짜고짜 날 자신의 탑으로 초대한 다음, 퓨어 매직에 대한 정보를 끌어내며 자연스럽게 대화를 이끌고 있었다.

과거에 매직길드에 있을 때도 다른 마법사들과 전혀 어울리지 않는 아웃사이더였다던데, 설마 그 정보까지 전부 가짜였나?

"음? 표정 보니 그것도 아니야? 그럼 혹시 내가 차에 독이라도 넣었을까 봐?"

"독?"

"하긴, 충분히 의심 살 만해. 암살 의뢰까지 받은 주제에, 입이 열 개라도 할 말이 없지. 좋아 그럼."

녀석은 갑자기 내 앞의 잔을 쑥 집어 들며 가볍게 한 모금을 들이켰다.

"자, 봤지? 독 같은 건 안 탔어. 걱정 말고 마셔."

"...."

"앗, 혹시 이것도 안 되나? 황자님이 마실 찻잔에 입을 대면 무례한 걸지도? 아, 당연히 무례했겠구나. 미안. 내가 이런 쪽으로 배운 게 너무 없어서."

그리고는 갑자기 고개를 꾸벅이며 사과하기 시작했다. 이것 참 대체 뭐라고 반응을 해야 할지....

"...됐어."

"정말? 그럼 용서해 주는 거야?"

"용서고 뭐고. 근데 내가 듣던 거랑 이미지가 많이 다르네."

"내 이미지?"

톨라리는 고개를 치켜들며 히히 웃었다.

"그야 뭐. 오랜만에 정상적인 손님이 왔으니 살짝 흥분한 거 같기도 하고."

"정상적이라니?"

"하필 바로 어제 비정상적인 손님이 왔거든."

톨라리는 눈살을 찌푸리며 우웩하는 시늉을 했다.

"볼 때마다 속이 뒤틀리는 녀석 있어. 거기 비하면 너는, 아니 우리 귀하신 황자님은 천사가 아닐까? 보고만 있어도 마음이 정화되는 기분인데."

"아부 떨지 말고. 아깐 그렇게 막말을 해 놓고. 근데 그 기분 나빠지는 녀석이 누군데?"

"붕대남자."

"뭐?"

"온몸을 붕대로 둘둘 말고 다니는 괴상한 인간. 자길 후원자라고 부르는데.... 뭐 이렇게 말해도 넌 모르겠지. 일종의 다른 세상의 스파이 같은 거야."

스파이!

나도 모르게 소리를 지를 뻔했다.

진짜? 방금 얘가 스파이라고 한 거 맞지? 내 말 맞지?

물론 당연한 이야기긴 하다. 톨라리는 인류의 배신자니까, 그동안 이계의 스파이와 접촉하면서 뭔가를 얻어내고 있었겠지.

"스파이? 후원자? 그게 뭔데?"

일단 모르는 척 시치미를 떼며 물었다. 톨라리는 징그럽다는 표정으로 차를 들이켰다.

"내 인생의 오점."

"무슨 일이 있었는데?"

"너 더블 매직 쓸 수 있지?"

갑자기 여기서 더블 매직?

양손으로 각기 다른 마법 쓰는 기술 말하는 건가?

물론 쓸 수 있다. 그것을 쓰기 위해 몇 번의 회귀에 걸쳐, 무려 수십 년간 훈련을 반복했으니까.

그러고 보니 더블 매직 자체가 톨라리의 전매특허 같은 기술이었다. 4회 차쯤에 이 녀석과의 전투에서 깨달음을 얻고 훈련을 시작했던 기억이 떠오르는구만.

이계 황자는 세상을 구하고 싶다 62화

20장 바람의 마도사

"응. 그런데?"

"나도 쓸 수 있어. 근데 이거 원래는 안 되던 거야. 내 느낌으론 적어도 될 때까지 10년 정도는 수련해야 할 것 같았고."

될 때까지 10년이라.

역시 천재는 다르구나. 나는 완성할 때까지 못 해도 네 번의 회귀, 그러니까 40년은 걸린 것 같은데.

"그래서 조바심이 났어. 일단 더블 매직을 쓸 수 있어야 퓨어 매직도 가능할 거 같은데, 정작 최종 목표도 아닌 더블 매직에만 10년이 걸리다니 너무하잖아? 근데 그때 바로 그 붕대남자가 찾아왔어."

"...후원자?"

"응. 자길 후원자라고 하면서 소원 들어주겠다고 하더라. 딱 봐도 엄청 의심스러웠어. 근데 안 넘어갈 수 없는 상황이라."

"그게 무슨 상황인데?"

"말했잖아. 조급했다고. 추가로 그때는 스트레스가 심해서 살짝 헤까닥 한 상태였고."

"헤까닥이라."

"아무튼 밑져야 본전이니까, 일단 더블 매직을 쓸 수 있는 힘을 달라고 했어. 그러니 정말 주더라. 그런데 지금 생각하면.... 으엑."

톨라리는 끔찍하다는 얼굴로 몸서리를 쳤다.

"결국 그래 봤자 내 힘으로 얻은 게 아니니까. 기분도 우울하고 자존감도 많이 떨어지더라. 그래서 오늘도 하루 종일 우울했고."

"갑자기 오늘로 넘어와?"

"응. 오늘. 어제 두 번째 소원 이야기한 게 자꾸 생각나서."

이야기가 순식간에 현재로 도약해 버렸구만. 아무튼 이계의 스파이, 그러니까 후원자라면 지난 9회 차 동안 한 번도 실체에 도달하지 못했는데, 어쩌면 이번 기회에 핵심 정보를 얻을 수 있지 않을까?

"두 번째 소원이라니, 그 후원자가 바로 어제 찾아와서 두 번째 소원을 들어줬다고?"

"아니. 들어준 건 아니라 손에 쥐여 주고 갔어."

"손에? 소원을?"

"응. 알아서 선택하라고 하더라. 그러니까 어디 보자...."

톨라리는 자리에서 일어나서는 뒤쪽에 있는 책상으로 걸음을 옮겼다.

덜컹.

그리고는 책상 서랍을 열고 묘하게 생긴 물건을 꺼내 돌아왔다.

"이거야. 이걸 주고 갔어."

이건.... 주사기?

그래. 이건 암만 봐도 주사기다. 디자인이 뭔가 미래적으로 생겼긴 하지만.

"주사기라고 부르는 물건인데, 이걸 팔에 꽂고 여길 꾹 누르면 내용물이 속으로 들어가."

"그럼 이걸 맞으면 퓨어 매직을 쓸 수 있게 되는 거야?"

"대충 그렇지 않을까? 템페스트를 추가로 압축할 수 있는 연산이 가능해진대. 머릿속이 개조되는 거야. 대신 마음을 잃고."

그리고 잠시 침묵이 찾아왔다.

마음을 잃는다고?

확실히 과거의 톨라리는 그런 것처럼 보였다.

적어도 인간의 마음을 가진 사람은, 아무 죄도 없는 사람들을 눈 하나 깜짝하지 않고 수백 조각으로 찢어버리는 짓 따윈 하지 못할 테니까.

나는 눈앞의 주사기를 노려보며 모르는 척 되물었다.

"마음을 잃는다는 게 무슨 소리야? 실성한다는 건가?"

"인간성을 잃고 주변 환경에 무감각한 인간이 된대. 물론 확실한 건 나도 몰라. 아직 해본 게 아니라서."

아직 해본 게 아니다.

꿀꺽.

그러니까 예전의 사이코패스 톨라리는 저 주사를 맞은 이후의 톨라리였다는 뜻이다. 이번엔 아직 주사 맞기 전이고.

"후원자 말로는 이걸 맞으면 마법에 전념하는 기계장치처럼 보일 거래. 기계장치 뭔지 알지? 태엽으로 만든 시계 같은 거."

"알지."

"처음엔 엄청 매력적으로 들리더라. 결국 마법에만 집중할 수 있는 인간이 된다는 소리잖아?"

"그럴지도?"

"그렇지? 주변 환경에 영향 안 받고 집중할 수 있으면 얼마나 좋을까? 내가 열 받으면 사람이 좀 까칠해지거든. 마법 훈련도 잘 안 풀리고."

톨라리는 한숨과 함께 테이블에 놓인 주사기를 빙글빙글 돌리기 시작했다.

"그 와중에 네가 갑자기 퓨어 매직을 날렸잖아? 나 완전 눈 돌아가는 줄 알았어. 아까 나 좀 미친 여자 같았지?"

"...이 주사기 말이야."

"응?"

"이 주사기 내용물, 왜 받자마자 바로 안 맞았어?"

당장 궁금한 건 그것뿐이었다. 톨라리는 마음에 안 드는 듯 입술을 삐죽거리며 말했다.

"너 같으면 고민 안 돼? 내가 물론 퓨어 매직 쓰고 싶어서 안달 난 여자긴 하지만. 그렇다고 사람 마음까지 버려가면서 쓰고 싶은 건 아니야."

아니, 너 이대로 시간 지나면 분명 마음 버리고 쓰게 된다?

그것은 역사가 증명하는 결과였다. 그런데 뭔가 이상한데?

과거의 톨라리가 물론 인간을 초월한 마법사긴 했다. 하지만 나랑 싸울 때 퓨어 매직을 쓰거나 하진 않았는데?

"근데 정작 답이 신성마법이었다니. 완전 실망이야. 이제 와서 신성마법을 배울 수도 없고. 소문에 넌 신의 축복 같은 걸 받았다며?"

"...맞아."

"진짜 부럽다. 나도 축복까진 아니어도 신성마법의 재능이 있으면 좋았을 텐데. 아그."

톨라리는 골치가 아픈 듯, 자신의 관자놀이를 손가락으로 누르기 시작했다.

물론 평범한 인간은 어지간해서는 원소마법과 신성마법을 동시에 사용하지 못한다. 다루는 힘의 결이 완전히 다르니까.

그런데 톨라리는 워낙에 마법의 천재니, 어쩌면 그쪽으로도 잠재력이 남아 있지 않을까?

종족 : 인간

현재 마법 : A+

잠재 마법 : S

아니, 없네.

감정안으로 확인한 톨라리의 능력은 오직 원소 마법 하나에 몰빵이었다.

물론 이 와중에 잠재적 마법능력이 S등급이란 건 놀랍다.

이미 날 제외하면 최고의 마법사인데도 불구하고, 앞으로 이보다 더 강해질 가능성이 있다는 소리잖아?

"에휴, 암튼 간만에 신났는데 갑자기 기분 처지네."

톨라리는 퀭한 눈으로 고개를 흔들었다.

"다시 눈앞이 깜깜해. 너 같은 천재도 원소마법 하나로는 퓨어 매직이 불가능했다는 소리니까."

"나 같은 천재?"

"그래. 세상에 마법에 관해서 너만 한 천재가 어디 있어?"

톨라리는 눈을 크게 뜨며 손가락으로 날 지명했다.

"매직 길드에 들어가서 누구한테 가르침을 받은 것도 아닌데 아크위저드가 됐지, 여기에 그 어린 나이에 더블 매직도 터득했지. 근데 너 몇 살이라고 했지? 열다섯이었나?"

"열여섯. 그리고 난 천재가 아니야."

진짜 천재는 바로 너야. 나는 그저 시간의 힘으로 쌓아 올린 회귀자일 뿐이고.

하지만 그렇게 말할 수는 없었기 때문에.... 나는 고개를 저으며 미리 만들어 놓은 변명을 늘어놓았다.

"난 정령에게 마력을 받았어. 타고난 게 아니라 후천적으로 고생 없이 얻은 거야. 그러니 너 같은 진짜 천재와 비교하면 안 돼."

"정령에게 마력이라."

톨라리는 눈살을 찌푸리며 이리저리 고개를 흔들었다.

"결국 그래 봤자 처음부터 네가 가지고 있던 걸 깨워 준 게 아닐까?"

"응?"

"마법은 결국 연결이잖아?"

톨라리는 손가락으로 자신의 머리를 두드렸다.

"이 속에 얼마나 빠른 길을 연결할지, 아니면 복잡한 길을 연결할지에 모든 게 달려 있어. 그러니 사람들이 마력이라 부르는 건 결국 집중력이야."

허, 이거 봐라?

나 말고도 이론적으로 마력의 본질에 도달한 사람이 여기 또 있었네?

물론 과거에는 기계처럼 사람을 죽이는 사이코패스라 이런 대화를 나눌 기회가 없었다. 그런데 정작 톨라리는 바로 그 집중력이 풀렸는지, 연신 피곤한 듯 눈을 비비기 시작했다.

"그러니 자신감을 가져. 대체 어떻게 하면 정령이 마력을 줄 수 있는지 감도 안 오지만. 어쨌든 그건 네 힘이야. 평범한 사람은 그런 힘을 받아 봤자 머리가 깨져 버릴걸? 절대 감당 못 해."

"그럴까?"

"당연하지. 암튼 퓨어매직이 문제네. 내가 배울 수 있는 게 아니라서 너무 아쉬워."

톨라리는 테이블의 주사기를 노려보며 어깨에 주사를 꽂는 시늉을 했다.

"한 시간 전만 해도 손에 잡힐 것 같았는데.... 에휴. 이러다 나도 모르게 이거 꽂아 버릴지도 모르겠다. 마음이고 뭐고."

"...!"

그 순간, 나는 주사기를 집어 들고는 창문 너머로 전력을 다해 집어 던졌다.

"아니!"

깜짝 놀란 톨라리가 자신의 주변에 바람을 일으키려는 순간, 나는 날아가는 주사기를 향해 압축된 불꽃을 집어 던졌다.

"템페스트!"

동시에 창문 밖에서 화려한 불꽃놀이가 시작되었다.

콰과과과과과과광!

위력을 최소한으로 했음에도 마탑 전체가 흔들렸다. 멍한 얼굴로 불꽃을 바라보던 톨라리는, 어느 순간 화를 내는 대신 몸을 들썩이며 괴상하게 웃기 시작했다.

"큭큭.... 끄윽. 끄윽. 히끅."

"...톨라리?"

"킥킥.... 와, 세상에. 너 진짜 화끈하구나."

물론 이런 일은 화끈하게 끝내버리는 게 제격이다. 톨라리는 어딘지 개운한 표정으로 날 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고마워 황자님."

"고마워? 내 멋대로 저걸 날려버렸는데?"

"결국 내가 할 일을 대신 해준 거잖아? 나 혼자선 절대 저거 못 버렸어."

"...결국 내가 안 했어도 네가 했을 거야."

"그랬을까? 그랬으면 좋겠네."

톨라리는 가만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나는 지금까지의 대화로 한 가지 사실을 확신했다.

지금의 톨라리는 그냥 평범한 인간이라는 걸.

내가 알던 과거의 살육머신이자, 인류의 배신자는 더 이상 세상에 존재하지 않는다.

어쩌면 하루만 늦게 왔어도 그런 일이 벌어졌을지도 모르지만.... 방금 불꽃놀이로 그런 미래는 완전히 사라져 버렸다.

그렇다면 지금 내 앞에 앉아 있는 것은, 반대로 세상을 지킬 가장 강력한 동료 중 하나인 셈.

그 전에 몇 가지 확인할 건 있지만.

"묻고 싶은 게 좀 있는데."

"뭔데?"

"내가 황자인 거 알지? 황제의 아들. 그런데 왜 이렇게 대하는 거야?"

"뭐가? 아, 내가 너무 격식이 없나? 이쪽 말을 완벽하게 못 배워서."

"이쪽 말?"

"그러니까.... 안녕하시옵니까 전하? 그간 기체 강녕하셨는지요? 이런 식으로 말해야 하나?"

"아니, 그렇다고 그건 너무 과하고."

"그래?"

톨라리는 부스스 내려온 앞머리를 넘기며 고개를 갸웃거렸다.

"잘 모르겠어. 아마도 내가 이 나라 사람이 아니라서 그런 걸까?"

"제국 출신이 아니야?"

"라그란이라고 알아?"

"라그란? 동대륙 말이야?"

이건 아예 처음 듣는 이야긴데? 톨라리가 라그란 대륙 출신이었다고?

"마법을 제대로 배우려면 동대륙보다는 여기 서대륙의 페이우드 제국이 좋다고 해서. 어렸을 때 친척 따라 넘어왔어."

"아...."

"그리고는 바로 매직 길드에 틀어박혔고, 그다음에는 여기 마탑을 세우고 또 틀어박혔고. 그래서 내가 아직 이쪽 풍습에 적응이 안 됐어. 미안. 그래도 황자님인데, 앞으로 적합한 존대어를 좀 배워놔야겠다."

"아니. 편할 대로 해."

그런 건 아무래도 상관없는 일이다. 난 고개를 저으며 다음 질문으로 넘어갔다.

"그보다 퓨어 매직에 집착하는 이유를 알려줄 수 있을까?"

"그건...."

"퓨어 매직은 마법과 관련된 것을 해체하는 스펠 브레이커일 뿐이야. 위력만 따지면 템페스트 발끝에도 못 따라가. 혹시 죽이고 싶은 아크 위저드라도 있어? 대 마법사 전용 스페셜리스트가 되고 싶은 거야?"

"으, 응?"

톨라리는 눈을 크게 뜨며 고개를 저었다.

"절대 아님. 우선 퓨어 매직이 어떤 효과를 가지고 있는지도 몰랐는걸."

하긴, 나도 일단 완성하고 나서야 퓨어 매직의 성능을 알게 됐다. 당시에 예상보다 활용도가 없어서 엄청 실망했던 기억이 나네.

"그런데?"

"하지만 퓨어매직이 마법의 다음 단계라는 건 직감했어. 모두가 템페스트가 마법의 최종 단계라 알고 있지만.... 이건 그 너머에 있는 무언가잖아?"

"그렇긴 하지."

"그러니 그걸 직접 완성하고 싶었을 뿐이야. 어떤 효과가 있는지, 어떤 위력이 나오는지는 관심 없어. 물론 더 화려하면 좋았겠지만."

"그럼 그냥 순수한 집착?"

"그렇지? 근데 내가 마법에 집착이 좀 강해. 이런 황무지에 탑을 세우고 혼자 틀어박힐 정도로."

그렇다면 이야기가 쉬워진다. 나는 오래전에 완성했으면서도, 굳이 할 이유가 없어 포기했던 특별한 방법을 떠올렸다.

"좋아. 그럼 지금부터 내가 제안을 하나 할게."

"제안?"

"이 제안을 받아들이면, 우선 날 죽이려 했던 암살 계획에 참가했던 죄를 사면해 줄게."

"그거 아직도 마음에 두고 있었어? 내가 그렇게 사과했잖아? 이렇게 차도 내줬는데?"

톨라리는 찻잔을 흔들며 시큰둥한 표정을 지었다. 아니 이게 차 한 잔 대접한다고 해결될 일이냐?

나는 헛웃음을 지으며 진짜 본론을 꺼냈다.

"그리고 신성마법 안 배우고도 퓨어 매직 쓸 수 있는 방법이 있어. 그것도 알려줄게."

"정말? 진짜?"

이번엔 반응이 완전히 달라졌다. 톨라리는 테이블의 절반까지 몸을 쭉 내밀며 소리쳤다.

"뭔데? 무슨 제안이야? 빨리 말해!"

"나한테 충성해."

"응?"

"내게 충성을 바치고, 내 밑에서 일을 한다고 약속하면 퓨어 매직을 쓸 수 있게 해줄게. 그러니까...."

"충성!"

쿵!

톨라리는 그 순간 테이블에 큰절하듯 엎드리며 충성을 맹세했다.

"충성합니다! 저는 이 자리에서 클로드 황자님께 영원한 충성을 맹세합니다!"

"...."

"...어때? 나 잘했어? 이렇게 하면 되지?"

고개를 든 톨라리가 활짝 웃으며 고개를 갸웃거렸다. 아니, 아무리 그래도 충성맹세를 이렇게 대충 해도 되는 건가?

"너.... 충성이 뭔지 알고는 있는 거야?"

"당연하지. 그쪽이 명령하면 그걸 따르는 거잖아?"

"그...렇긴 한데."

"혹시 한번 박은 걸론 부족해? 역시 진정성을 보여주기 위해서는 맨바닥에 머리를 박아야...."

"아니, 그만."

나는 손사래를 치며 자리에서 일어나려는 톨라리를 제지했다.

"방금 그거면 충분해. 어차피 충성맹세도 일종의 계약이니까. 그보다 앞으로 내 명령을 들어야 하는데 괜찮겠어?"

"아마 괜찮지 않을까? 혹시 뭔가 이상한 짓이라도 시킬 생각?"

"아니. 딱히 이상한 짓을 시킬 생각은 없지만...."

나는 비쩍 마른 톨라리의 몸을 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음, 맞아. 대신 이상한 걸 먹일 계획은 있어."

"이상한 거? 뭔데?"

톨라리가 퀭한 눈을 크게 뜨며 되물었다. 나는 떠올리는 것만으로도 PTSD가 생길 것 같은 특별한 영약 레시피를 떠올리며 쓴웃음을 지었다.

"응? 무섭게 왜 웃어? 대체 뭘 먹이려고?"

난 말 없이 고개를 저었다.

이 불쌍한 아가씨 같으니라고.

지금부터 진짜 각오 단단히 하는 게 좋을 거다. 이게 진짜 만만치 않은 영약이거든. 내가 지금까지 기억에서 지워 버리고 싶었을 정도로....

이계 황자는 세상을 구하고 싶다 63화

21장 좌절감이 사나이를 뒤트는 것이다

그게 언제였던가?

처음으로 템페스트를 쓸 수 있게 되었을 때, 나 또한 지금의 톨라리처럼 퓨어 매직의 경계를 엿보고 매료된 적이 있었다.

물론 톨라리처럼 순수한 호기심에서 나온 집착은 아니다.

기대한 것은 템페스트를 뛰어넘는 강력한 화력.

퓨어 매직으로 게이트에서 쏟아져 나오는 이계의 군대를 싹 쓸어버리는 장면을 상상하며 새로운 훈련에 돌입했는데....

결과는 물론 실패였다.

당시에는 신성마법을 아크 프리스트 수준으로 쓸 수 없었다. 그래서 순수한 두뇌의 힘으로 한계까지 쥐어짜 봤는데, 인간의 뇌라는 게 구조적으로 그걸 허용하지 않았다.

이제 와서 생각해 보면 당연한 일이다. 저 톨라리도 못한 걸 내가 성공할리 없잖아?

하지만 내겐 다른 능력이 있었다.

영약.

애초에 어머니의 가문인 루넨브레스가 영약에 몰빵한 집안이다. 유일하게 타고난 재능이기 때문에 가장 먼저 만렙을 찍은 능력이기도 하고.

그리고 영약의 달인이 되면, 기존에 존재하지 않던 새로운 영약의 제조가 가능해진다.

그래서 퓨어매직의 완성을 방해하는 두뇌의 리미트를 풀어버리는 건 물론이고, 만약 풀어버렸을 때 과부하에 의한 피해를 방지할 수 있는 특수한 영약개발에 나섰다.

일명 뇌가속의 영약.

처음엔 '오버 클럭의 영약'이라고 불렀는데 주변에 시녀들이 단어를 이해하지 못해서 폐기했다. 뭐 컴퓨터를 모르면 이해 못 하는 게 당연하겠지.

결과적으로 완성된 뇌가속의 영약은 완벽한 효과를 자랑했다.

다만 복용 과정에서 고통스러운 부작용이 생기긴 하는데.... 어쨌든 짧은 순간이나마 퓨어 매직을 쓸 수 있게 해주니 그 정도의 고통은 견뎌야 한다. 결과가 수단을 정당화하는 셈이지.

하지만.

정작 완성한 퓨어 매직은 이계의 침공을 막는 데 전혀 도움이 되지 않았다.

기대했던 화력은 이계의 군대를 상대로 제로에 가까웠으며, 녀석들은 마법을 쓰지도 않았기 때문에 써먹을 구석 자체가 거의 없었다.

그래서 이쪽 루트는 이후 기억에서 지워버렸다.

진행과정이 끔찍하게 고통스러운데 영약 재료비도 엄청 들고, 거기에 결과까지 의미가 없잖아?

이런 걸 대체 뭐 하러 기억하겠냐?

무엇보다 나중엔 신성마법을 활용해서 똑같은 퓨어 매직을 만드는 게 가능해졌으니....

"황자님께서 이곳에 직접 내려오신 건 처음이군요."

"으, 응?"

순간 정신이 번쩍 들었다. 앞장서 계단을 내려가던 라니아가 감개무량한 듯 말했다.

"황비께서는 생전에 뛰어난 영약사셨습니다. 분명 그 피를 이어받은 황자님도 영약에 대한 재능을 가지고 계실 겁니다."

"나도 그랬으면 좋겠어. 당장 뭔가를 만들어야 하거든."

바로 기억에서 지워버렸던 문제의 그 영약을.

지금 내려가는 곳은 저택의 지하에 있는 영약 제조시설이다.

예전 회귀 때는 그래도 자주 내려왔었는데, 이번 10회 차엔 영약의 직접제조를 아예 생략하는 바람에 일이 이렇게 됐다.

"처음 내려온다고?"

그때 옆에 있던 톨라리가 불안한 목소리로 물었다.

"황자님? 설마 생전 처음 만드는 영약을 나한테 먹이려는 건 아니지?"

"...."

나는 마탑에서 이곳까지 따라온 톨라리를 보며 조용히 말했다.

"만드는 과정이 복잡한 영약이 아니야. 이미 임상까지 다 끝냈고."

"임상?"

"테스트 끝났다고. 효과는 확실하니 걱정 마."

"내가 걱정하는 건 영약의 효과가 아니라 영약을 만드는 사람이야. 영약이란 원래 만드는 사람의 실력에 따라...."

그때 계단이 끝나며 지하에 있는 영약 제조시설의 전경이 드러났다.

"와."

톨라리는 놀란 얼굴로 주변을 두리번거리며 감탄했다.

"여기가 영약 제조시설? 뭐 이렇게 넓어? 저택 지하가 지상보다 더 넓은 거 같네?"

"저희 루넨브레스는 수백 년 전부터 영약을 만들던 가문입니다. 자, 그럼 이쪽으로 오시지요."

라니아가 손을 펼치며 우릴 안쪽으로 안내했다.

"여유가 생길 때마다 저택이 아니라 지하시설을 증축했습니다. 부디 아크 위저드의 마음에 드셨으면 좋겠군요."

"마음에 들어. 여기라면 뭐든지 만들 수 있을 것 같네."

톨라리는 빙긋 웃으며 화답했다. 걸음을 옮기는 와중에도 사방에서 영약 관련 일을 하던 시녀들이 내 쪽으로 허리를 숙이며 인사를 올렸다.

"황자님을 뵙습니다."

"황자님을 뵙습니다."

"방금 그 시녀들은 영약재료를 분류해서 덖는 과정을 진행하고 있습니다. 단순하지만 매우 중요한 일입니다."

라니아의 설명에, 톨라리는 신기한 듯 주변을 살피다 다시 환호성을 질렀다.

"와! 여긴 뭐지? 창고? 이게 다 영약재료?"

"그렇습니다. 영약은 재료가 전부니까요. 제조시설의 절반은 이렇게 창고로 이뤄져 있습니다."

사방에 배치된 철창 안에 세밀하게 분류된 온갖 영약 재료들이 산더미처럼 쌓여 있었다. 확실히 처음 보면 놀랄 만도 하지. 나도 옛날에 그랬는걸.

그렇게 계속 걸음을 옮기던 라니아는, 안쪽에 있는 커다란 화로와 테이블 앞에 걸음을 멈추며 뒤를 돌아보았다.

"여기게 제가 사용하는 제조실입니다. 이곳에서 황자님께 드릴 각종 영약을 직접 만들고 있습니다."

"그래. 안내하느라 수고했어."

나는 가만히 고개를 끄덕인 다음, 테이블 앞에 자리를 잡고 깊이 숨을 들이마셨다.

"후으...."

크, 이 냄새도 오랜만이구만.

수백 가지가 뒤섞인 영약 냄새가 콧속 깊은 곳까지 파고든다. 그러자 옆에 바짝 붙은 톨라리가 속삭이듯 말했다.

"여기가 정말 본격적이란 건 알겠어."

"응?"

"황자님네 가문이 영약에 진심이란 걸 알았다고. 물론 친가 쪽 말고 외가 쪽이겠지만."

"알았으면 좀 떨어져. 지금부터 뇌가속 영약을 만들어야 하니까."

"뇌가속영약이라."

그러자 조금 떨어진 곳에 서 있던 라니아가 헛기침을 하며 물었다.

"실례지만 처음 들어보는 영약이군요. 혹시 황자님께서 새롭게 떠올리신 영약입니까?"

"아니, 대신전에 숨겨진 비밀 도서관에서 찾아낸 레시피야."

물론 거짓말이다. 이렇게 말해야 효과를 의심하지 않을 테니까.

나는 품속에서 재료를 적어놓은 쪽지를 꺼내 라니아에게 넘겨주었다.

"여긴 어지간한 영약재료는 전부 다 있지? 그럼 이걸 좀 가져다줘."

"이것은...."

순간 라니아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나는 모르는 척 헛기침을 하며 물었다.

"왜 그래? 혹시 없는 재료라도 있어?"

"아니.... 아닙니다. 너무 전문적이라 서요."

"전문적이라니?"

"보통은 사용하지 않는 희귀한 재료라 놀랐습니다. 정말 이것들로 영약을 만드실 겁니까?"

"응. 레시피엔 그렇게 쓰여 있었어."

"그렇군요. 바로 가져오겠습니다."

라니아는 빠른 걸음으로 주변의 창고를 순회하기 시작했다. 그러자 지켜보던 톨라리가 불안한 표정으로 물었다.

"무슨 재료가 들어가는데 저래? 맛이 이상해? 아니면 비싸?"

"비싼 게 있긴 한데, 감당 못 할 정도는 아니야."

"그럼 맛이구나. 맛이 끔찍하지? 나 쓴 거 잘 못 먹는데. 눈 감고 꿀꺽 삼켜도 돼? 맛 안 보고?"

"어차피 입안에 들어가면 아무래도 상관없어."

사실이다. 완성된 영약이 입에 들어간 순간 모든 선택의 여지가 사라져 버린다는 점에서는.

"하긴 삼키면 그만이지. 뭐 영약 맛이 이상하면 얼마나 이상하다고."

톨라리는 팔짱을 낀 채 한쪽 발을 달달 떨기 시작했다. 그때 금방 돌아온 라니아가 테이블 위에 재료를 내려놓았다.

"가져왔습니다. 황자님."

"수고했어. 생각보다 금방 왔네?"

"특이한 재료일수록 제 주변에 배치해서 그렇습니다. 그럼 먼저...."

라니아는 가장 왼쪽에 놓은 한 줌의 검은 콩을 가리켰다.

"이것은 '독거미 살해자' 열매입니다."

"독거미 살해자!"

순간 톨라리가 펄쩍 뛰어올랐다. 확실히 소름 끼치는 이름이긴 하지. 먹고 싶은 기분이 절대 안들 정도로.

"저희는 줄여서 '독살열매'라 부릅니다. 맹독을 가진 거미가 오래 살면 갑자기 이 열매를 찾기 시작하는데, 그러다 죽음을 맞이하기 때문에 붙여진 이름입니다."

"으아...."

"자체적으로는 특별한 효과가 거의 없습니다. 대신 다른 재료의 숨은 효능을 증폭시키는 데 사용합니다. 구토 영약에 극소량이 들어가고, 의식 회복 영약에도 소량이 들어갑니다. 속독의 영약에도 쓰인다고 알려져 있지만. 요즘은 거의 만들지 않는 영약이군요."

"속독의 영약?"

"책을 빨리 읽을 수 있게 해주는 영약입니다. 대신 나중에 심한 두통이 생겨서 최근엔 거의 사용하지 않습니다. 그리고 이것은...."

라니아는 바로 옆에 놓인 갈색의 나무뿌리를 가리켰다.

"황금나무의 잔뿌리입니다. 큰 뿌리는 독성이 너무 강해 활용이 불가능하기 때문에, 이렇게 잔뿌리만 모아 사용합니다."

"끄악...."

"이것도 특수한 경우가 아니면 거의 사용되지 않는 재료입니다. 예를 들면 소리의 영약처럼 말이죠."

"소리의 영약? 그건 뭔데?"

"귀가 안 들리는 분들께 소리를 찾아주는 영약입니다. 무조건 효과가 있는 건 아니고, 한 달 정도 복용한 후에 반응을 보고 영약을 계속 쓸지 여부를 판단합니다."

"나 귀는 무지 잘 들리는데."

톨라리가 내 쪽을 보며 자신의 귀를 가리켰다. 나는 뭐 어쩌라는 표정으로 어깨를 으쓱였다.

"누가 뭐래?"

"그치만...."

"어차피 섞으면 다른 효능이 나니까, 하나하나 반응할 거 없어."

"황자님의 말씀대로입니다. 그리고 마지막 재료는 점박이 딱정벌레입니다."

"벌레!"

톨라리의 얼굴이 순간적으로 하얗게 질렸다. 라니아는 다리를 떼어내고 몸통만 남은 말린 벌레더미를 손가락으로 톡톡 건드렸다.

"딱정벌레는 어느 숲에서도 찾을 수 있는 흔한 재료입니다. 저희 루넨브레스 숲에서도 많이 잡히죠."

"근데 얘는 뭐가 달라?"

"이렇게 등에 여러 개의 점이 박힌 녀석은 매우 드뭅니다. 백 마리를 잡으면 한 마리 있을까 말까 합니다."

"그럼 종이 다른 거 아닌가?"

"종보다는 환경의 문제가 아닐까요? 그래도 이건 앞서 두 가지 재료보다는 흔하게 쓰이는 재료입니다. 최근에 대량으로 만든 탈취의 영약의 주재료이기도 합니다."

"탈취의 영약...."

톨라리는 자신의 소매를 코에 대고 킁킁거리기 시작했다. 재료 소개를 마친 라니아는 내 쪽으로 몸을 숙이며 당부하듯 말했다.

"황자님, 여기 있는 것들은 전부 취급이 어려운 고난이도의 재료입니다."

"그래. 레시피에도 그렇게 쓰여 있더라."

"그러니 가급적 제가 만드는 게 좋지 않을까요? 필요한 제조법을 말씀만 해주시면...."

"괜찮아. 만드는 건 별로 어렵지 않거든. 어디 보자, 이거 깨끗하지?"

나는 테이블에 놓인 절구를 가리키며 물었다. 라니아는 입술을 꽉 깨문 채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좋아. 그럼 시작해 볼까?"

나는 라니아가 챙겨온 모든 재료를 절구에 넣어 빻기 시작했다.

"그리고 뜨거운 물 좀 가져다줄래? 한번 펄펄 끓인 물을 살짝 식힌 걸로."

"제조실에는 항상 그런 물을 준비해 놓고 있습니다. 바로 가져오도록 하죠."

라니아는 곧바로 자리를 떠났다. 나는 곱게 갈아 잘 섞인 가루를 거름망에 담으며 웃었다.

"좋아. 이제 끝났다."

"엥? 이걸로 끝?"

"재료 준비는 끝났어. 다음 과정이 좀 귀찮긴 하지만."

"뜨거운 물 가져왔습니다. 황자님."

라니아가 곧바로 작은 주전자를 들고 돌아왔다. 나는 고정된 영약병에 거름망을 올리고, 그 위에 뜨거운 물을 붓기 시작했다.

천천히.

아주 천천히.

"...실례지만 황자님."

지켜보던 라니아가 헛기침을 하며 끼어들었다.

"옆에서 보고 있자니.... 아니, 아마 알고 계실 거라 생각합니다만."

"응? 뭐가?"

"같은 영약이라도 제조자의 경험에 따라 효과가 전혀 달라집니다. 재료를 곱게 가는 과정부터, 지금처럼 단순 침출만을 위해 물을 따르는 과정조차 말이죠."

"당연하지. 안 그러면 개나 소나 다 영약사 하게?"

나는 미세한 물 조절에 심혈을 기울이며 말했다.

"그래서 처음엔 내가 만드는 거야. 이거 제대로 만들면 더 위험하거든."

"그게 무슨 말씀이십니까? 제대로 만드는 게 위험하다니요?"

"너 같은 최고등급 영약사가 만들어서 효과가 강력하게 나오는 게 더 위험하다고. 처음엔 좀 약하게 우러나와야 해. 안 그러면 좀...."

"좀 뭐?"

톨라리가 냉큼 끼어들었다. 나는 마지막 한 방울까지 심혈을 기울인 다음 한숨을 내쉬었다.

"좀 괴로워져."

"괴로워진다고? 내가?"

"응. 네가."

"음...."

"자, 다 끝났다. 엇 뜨거."

나는 맨손으로 영약병을 집어 들고는 후후 불어 식혔다.

"하마터면 냉기마법 사용할 뻔했네. 그럼 말짱 헛일인데."

"다 끝났어? 그럼 이제 마시면 돼?"

영약병을 건네받은 톨라리가 불안한 얼굴로 물었다. 그런데 지켜보던 라니아가 갑자기 어딘가로 달려가 새로운 병을 들고는 부리나케 돌아왔다.

"후우, 실례했습니다."

"뭘 들고 온 거야? 영약?"

"구토의 영약과 해독의 영약입니다."

"구토? 해독?"

"그렇습니다. 저는 물론 황자님을 믿지만 혹시나 해서 말이죠."

"엄마, 이 사람들이 자꾸 나 무섭게 해...."

울상이 된 톨라리가 영약병을 보며 한숨을 내쉬었다. 나는 그런 톨라리의 손을 가볍게 붙잡으며 마지막 주의사항을 전달했다.

"톨라리. 지금부터 내가 하는 말 잘 들어."

"황자님? 더 무서워지니까 분위기 잡지 마."

"쓸데없는 소리 말고. 우선 염두에 둘 게 있어. 이 뇌가속 영약은 한번 마신다고 바로 효과가 발휘되는 건 아니야."

"그럼?"

"하루 두 번씩, 적어도 보름 이상 계속 마셔야 해."

"보름이나? 왜 그렇게 길어?"

"머릿속의 리미트를 해체하는 걸로 끝나는 게 아니거든. 그 상황에서 뇌에 손상이 오지 않도록 보호하는 과정이 필요해."

"아하."

"그렇게 마시다 보면 보름쯤 되었을 때 느낌이 올 거야. '그 영역'을 다룰 수 있게 됐다고. 대신 퓨어 매직을 한번 발동하면 다시 원래대로 돌아오니 연속으로 쓰면 안 돼. 코피를 쏟으며 기절할 거야."

"걱정 마. 한 번이면 충분해. 근데 황자님은 꼭 마셔본 것처럼 말한다?

그야 예전에 원 없이 마셔봤으니까?

이계 황자는 세상을 구하고 싶다 64화

21장 좌절감이 사나이를 뒤트는 것이다

"레시피에 그렇게 적혀 있더라고. 그리고 이거 좀 쓰대."

"쓰다고?"

"응. 엄청. 그러니 뭔가 잘못된 거 아닌가 하고 충격 받지 마. 원래 쓴 거니까."

"약이 쓴 거야 당연하지. 근데 자꾸 옆에서 그러니까 더 불안해. 에잇!"

톨라리는 고개를 젖히고 영약을 입에 들이부었다.

"후아, 어때? 목구멍 속으로 바로 들이부었어. 혀에 닿으면 쓸까 봐."

"잘했어. 그래봤자 차이는 없겠지만."

"차이가 없다고? 왜?"

그리고 바로 그 순간.

주륵.

톨라리의 벌어진 입에서 수도꼭지를 튼 것마냥 침이 흘러나왔다.

"으, 으어어...."

그리고는 제자리에 털썩 주저앉았고, 이내 양손으로 자신의 머리를 부여잡고 비틀기 시작했다.

"쓰... 쓰어.... 쓴맛이 속에서 계속 올라와...."

크, 부들거리는 저 표정이라니.

보고 있자니 잊어버렸던 PTSD가 다시 도질 지경이다. 저건 그냥 쓴 정도가 아니라 이 세상 쓴맛이 아니거든.

심지어 혀에 닿지 않게 삼켜봤자 아무 소용이 없다.

속에서 쓴맛이 계속 올라오면서 한 시간 정도는 미각을 움켜쥐고 안 놔준다. 톨라리는 이리저리 몸부림을 치며 내 쪽으로 삿대질을 시작했다.

"황자님.... 황자님 나한테 거짓말했지? 어차피 삼키면 아무래도 상관없다며!"

"맞아. 혀로 음미하든, 목구멍으로 직접 부어 넣든 아무 상관없다고."

"뭐, 뭐?"

"어떻게 먹든 쓴맛에는 차이가 없다는 소리였어. 앞으로 한 시간만 버티면 돼."

"한 시간...."

톨라리는 벌어진 입을 다물지도 못한 채 침을 줄줄 흘렸다. 그러자 라니아가 급하게 가져온 손수건을 입에 대 주며 안타까운 표정을 지었다.

"재료를 봤을 때부터 어느 정도 예상은 했습니다만, 제 걱정보다 효과가 더 강력했던 모양이군요."

"우, 우어어...."

"입이 잘 안 다물어지죠? 이것도 재료가 가진 부작용, 아니 효과입니다. 자, 이렇게 손수건을 좀 대고 계세요. 한 시간 안에 자연스럽게 회복될 겁니다."

맞아. 그러고 보니 손수건이나 양동이를 미리 준비해 뒀어야 했구나. 그걸 잊어버렸네.

솔직히 뭔가 효능이 있어서 뇌를 가속하는 게 아니라, 이 쓴맛 자체가 뇌를 자극하거나 고문해서 이런 효과가 나오는 게 아닌가 싶기도 하고.

"황자니이임... 나한테 이런 걸 먹이다니... 진짜 나중에 효과 없으면...."

"효과 있어. 절대로."

나는 톨라리의 앞에 쭈그려 앉은 다음, 품속에서 설탕바 하나를 꺼내 넘겨주었다.

"자, 이거라도 빨면서 버텨봐."

"어으... 이게 뭔데?"

"설탕바."

"단거!"

톨라리는 번개처럼 설탕바를 입에 집어넣었다. 그리고는 반쯤 눈을 감고는, 거의 느끼는 표정으로 숨을 몰아쉬기 시작했다.

"후, 후아..."

얼빠진 표정이 절묘하구만.

한때 세상을 뒤집어 놓았던 가면의 살육머신이 저런 표정을 짓고 있는걸 보고 있자니....

뭔가 기분이 묘하다.

이것도 격세지감이라고 해야 할까?

무엇보다 지금의 나는 톨라리를 죽이는 대신 오히려 더 강하게 만들어 주고 있다. 예전의 내가 들었으면 분명 미쳤다고 난리가 났겠지?

* * *

"숙부님. 일단 병력은 다 모였습니다."

란텔 남작은 한숨과 함께 탈리스만에게 보고를 올렸다.

"톨라리를 제외한 모두가 소집에 응했습니다. 당장 오늘 밤이라도 거사를 시작할 수 있습니다."

"...톨라리? 그 아크 위저드는 왜?"

멍한 얼굴로 바닥에 주저앉아 있던 탈리스만이 고개를 치켜들었다. 란텔은 심각한 얼굴로 고개를 저었다.

"현재 행방불명입니다."

"행방불명?"

"귀네스에 있는 마탑에 사람을 보냈지만 비어 있었습니다."

"그 망할 년이, 설마 계약금을 먹고 튀어버린 건가?"

"아직까진 알 수 없습니다. 다만 돈 문제가 나와서 말씀드립니다만."

란텔은 헛기침을 하고는 짐짓 심각한 표정을 지었다.

"거사가 끝나고 나면 잔금은 어떻게 하실 겁니까? 톨라리는 제외하더라도 금화 1만 8천 개가 필요합니다만...."

"내가 고작 그 돈 없을까 봐!"

탈리스만은 손에 들고 있던 술병을 벽난로에 집어 던졌다.

"나 아직 안 죽었어! 지하금고가 털렸지만 백작가는 여전하다고! 금화 1만 8천 개쯤은 올해 영지에서 거둬들이는 수익만 해도 충분해!"

"하지만 당장 현금이 부족한 듯해서.... 아니, 아닙니다."

란텔은 고개를 저으며 한 발 뒤로 물러났다.

"그럼 돈 문제는 신경 쓰지 않고 바로 거사를 실행하겠습니다."

"오늘 밤에?"

"제가 정한 날짜는 모래 새벽입니다."

"모래? 왜 그렇게 늦게?"

"백기사단에서 다비를 소집하는 문서가 어제쯤 도착했을 테니, 녀석이 황자의 저택을 떠난 이후에 공격을 시작하려 합니다. 북부까지 다녀오는데 적어도 일주일은 걸리겠죠."

"...돌아오면 눈이 뒤집히겠군."

마치 폐인처럼 풀려 있던 백작의 눈에 처음으로 광채가 번뜩였다. 란텔은 고개를 끄덕이며 인사와 함께 백작의 방을 나섰다.

"그럼 이만 돌아가 보겠습니다. 괴로우시겠지만 귀한 몸이시니 건강을 챙기시길 바랍니다."

"...흥."

란텔이 방을 나가자, 백작은 비대한 몸을 힘겹게 일으키며 테이블로 돌아갔다.

"내 몸은 내가 알아서 챙긴다. 쓸데없는 소리나 하긴...."

테이블에는 최근 동대륙에서 수입이 재개된 고급 증류주가 놓여 있었다. 백작은 투명한 크리스털 잔에 투명한 액체를 콸콸 쏟아붓고는 입에 털어 넣었다

"크으! 이놈이고 저놈이고! 다 꼴도 보기 싫다! 대대로 내려오는 금고 하나 못 지키고!"

며칠 전에 있던 지하금고의 도난 사건.

덕분에 가뜩이나 불안정했던 백작의 정신은 한층 더 궁지에 몰려 있었다.

금고에 있던 건 단순한 재산이 아니다.

그것은 백작가가 가진 힘 그 자체였다. 금화 10만 개에 달하는 현금을 폭탄처럼 터뜨릴 수 있다는 사실만으로도, 대부분의 귀족이나 상인들은 백작가에 적이 되는 걸 기피했으니까.

하지만 지금은 어떨까?

아직까지는 단단히 입단속을 시키고 있지만, 결국 금고가 털렸다는 소문이 제국 전체로 퍼지는 건 시간 문제에 불과했다.

그때가 되면 제국 최고의 명문가중 하나인 탈리스만 백작가의 위세도 옛날이야기가 될 것이다.

그것은 피할 수 없는 확정된 미래였고, 그 사실이 백작의 마음을 끝없이 황폐하게 만들고 있었다.

"대체... 대체 어떤 놈이 금고를...."

백작은 뿌득 소리를 내며 이를 갈았다.

지하금고에 뚫린 구멍은 하수도와 연결되어 있었다.

그리고 하수도의 규모는 제국의 수도인 엠퍼로드와 거의 동일할 정도로 방대했다. 누군가 이곳을 통해 금고를 털었다 해도 흔적을 찾아 범인을 발견하는 건 사실상 불가능한 일.

"망할 도둑놈.... 망할 클로드...."

술에 취한 백작의 머릿속에는, 어느새 그 둘의 이미지가 하나로 결합되어 있었다.

물론 클로드가 진짜 범인이란 걸 알아냈기 때문은 아니다.

당장 클로드를 죽이기 위해 용병들을 끌어모으지만 않았어도, 적어도 당분간은 금고가 털렸다는 것을 숨기고 새롭게 자금을 축적할 시간을 벌었을 것이다.

하지만 이젠 뒤가 없었다.

만약 클로드의 암살이 성공한다 해도, 이후에 치를 대금 문제로 백작가는 파탄이 날 테니까.

"이게 다 그 자식.... 그 빌어먹을 꼬맹이 때문이야. 망할 클로드! 네놈만 아니었어도 내가 이렇게까지.... 윽!"

백작은 순간 술잔을 떨어뜨리며 가슴을 부여잡았다.

심장이 옥죄는 듯 조이며 엄청난 통증을 일으킨다. 평생 절제 없이 살아온 방탕한 인생에, 최근의 극심한 스트레스로 주요한 혈관에 문제가 생기며 심근경색을 일으킨 것이다.

"누, 누가 영약을...."

바닥에 쓰러진 백작이 허공에 손을 뻗으며 맥없이 중얼거렸다.

심장과 관련된 질환은 사망에 이르는 심각한 병이지만, 그래도 '심장의 영약'을 제때 마셔주면 대부분은 정상적으로 회복된다.

하지만 당장 꼼짝도 할 수 없는 백작의 손에 영약을 쥐여줄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당장 복도에 수십 명의 시종과 시녀들이 돌아다니고 있건만.

"으으...."

통증이 얼마나 심한지 목소리조차 제대로 낼 수 없다.

"누가... 누가 좀 제발...."

바로 그때, 방 한쪽 구석에 있는 그림자에서 새하얀 뭔가가 쑥 솟아올랐다.

그것은 온몸을 하얀 붕대로 감고 있는 남자였다.

남자는 쓰러진 백작을 슥 훑어보더니, 그대로 벽에 있는 찬장에 다가가 투명한 영약병 하나를 꺼내 돌아왔다.

"혹시 이게 필요하십니까?"

"으.... 그래.... 심장의 영약...."

"그렇습니다. 페이우드의 귀족들은 집안에 꼭 이걸 상비하는 모양이더군요. 하지만 그전에."

남자는 영약병을 뒤로 감추며 미소를 지었다.

"우선 제 소개부터 해야겠군요."

"으.... 빨리...."

"저는 후원자입니다. 백작님을 만나 뵙기 위해 아주 먼 곳에서 여기까지 찾아왔습니다."

"으...."

"그곳은 이곳 사람들이 상상조차 할 수 없는 완전히 다른 차원입니다. 그리고 당신은 운이 좋게 저희들의 눈에 발견되었습니다만."

"으.... 으?"

"여기서는 솔직하게 이야기하는 게 좋겠군요."

후원자는 쓰러진 백작의 주변을 빙빙 돌며 이야기를 늘어놓기 시작했다.

"탈리스만 백작. 당신은 사실 저희가 점찍은 후보군 중 최하위에 불과했습니다."

"크.... 헛소리 말고 빨리 약을...."

"그만큼 당신은 기량이 부족했습니다. 육체적인 능력이 강한 것도 아니고, 마법을 다루는 것도 아니고, 누군가를 심하게 의식해서 질투와 원망을 쌓지도 않았습니다. 그저 좋은 가문에 태어나 권력을 누리는 것에만 집착하는, 한마디로 별 볼 일 없는 인물이었죠."

"네, 네놈! 당장 경비를 불러서 찢어 죽일...."

"방금 뭐라 하셨습니까? 목소리가 작아서 잘 들리지 않습니다만?"

후원자는 마치 놀리는 것처럼 백작을 향해 귀를 기울였다.

"그런데 말입니다. 요즘 이쪽 세상에 뭔가 극적인 변화들이 일어나기 시작했습니다."

"으윽...."

"클로드 황자, 아시죠?"

"크.... 클로드!"

"그자와 접촉한 인물들 중 저희가 원하는 극적인 변화가 일어난 분들이 하나둘 생기기 시작했습니다. 그래서 이렇게 관심 리스트에 젤 마지막에 있던 백작님에게도 소원을 이룰 기회가 찾아온 것이지요."

"클로드... 반드시 그 자식의 목을 베서...."

"그럴 줄 알았습니다."

후원자는 다 죽어가는 백작의 앞에 쪼그리고 앉아 미소를 지었다.

"그 황자가 사람 여럿 뒤틀리게 하는 모양이더군요. 어디 보자, 잠시 실례하겠습니다."

그리고는 붕대 사이로 혀를 내밀어 백작의 얼굴을 이리저리 핥아대기 시작했다.

"너, 너 이 자식 대체 뭐 하는...."

"세상에나."

후원자는 혀를 거두고는 고개를 가로저었다.

"이건 놀랍군요. 탈리스만 백작, 당신 이 정도였습니까?"

"으으...."

"당신이 이 정도로 뒤틀릴 수 있는 인재인 줄은 상상도 못 했습니다. 세상에 맙소사. 이렇게 끔찍하게 뒤틀린 좌절과 수치의 맛이라니.... 놀랍군요. 제가 이런 인재를 놓이고 못 알아봤을 줄이야."

"개소리... 집어치우고.... 빨리 영약을...."

"이건 기적에 가까운 일입니다. 이런 잠재력을 드러내게 해준 황자에게 감사해야겠군요. 대체 그 황자에게 무슨 짓을 당하신 겁니까?"

"으으...."

"이런, 죄송합니다. 흥분한 나머지 당신의 몸 상태를 제대로 확인하지 못했군요. 이러다 심장이 멈춰버리면 곤란하죠."

"으...."

"당신 같은 인재를 허무하게 잃을 수는 없습니다. 그랬다간 윗분들에게 엄청나게 혼이 날 테니까요. 자...."

후원자는 급히 영약병을 열고는 백작의 입으로 가져갔다.

그런데 정작 마지막 순간.

"...아니지."

갑자기 움찔 하고 영약병을 다시 거둬들였다.

"굳이 이럴 필요가 없겠군요. 바로 소원을 들어드리면 될 것을."

"...."

"걱정 마십시오. 굳이 말씀하시지 않아도 당신의 소원 정도는 이미 알고 있으니까요. 클로드 황자를 제거할 수 있는 힘을 바라시지 않습니까?"

그 순간, 다 죽어가던 백작이 놀랍게도 머리를 약간 끄덕였다.

"그것도 기왕이면 자신의 손으로 직접, 어떠십니까? 그 황자를 직접 죽일 힘을 손에 넣는다면, 얼마나 행복할까요?"

"으...."

"좋습니다. 아주 좋아요. 다 죽어가는 와중에도 클로드 이야기가 나오니 숨이 돌아오는군요. 이 엄청난 증오...."

후원자는 숨을 깊이 들이마시며 고개를 천천히 흔들었다.

"이건 굳이 혀를 댈 필요도 없을 정도입니다. 감정의 왜곡이 냄새로 퍼질 지경이군요. 제스 황자님도 마지막에 거의 이 정도였던가? 어쩌면 당신이 더 강할지도 모르겠군요."

"으으...."

"이정도 뒤틀림이라면 제 비장의 카드를 하나 꺼내도 될 거 같습니다."

그리고는 품속에서 주사를 하나 꺼내, 다짜고짜 백작의 어깨에 꽂아 넣었다.

"큭...."

"이건 어지간하면 놔 드리지 않는 특별한 물건입니다. 자신의 본질은 물론, 타인의 본질까지 오염시킬 수 있는 특별한 존재가 될 수 있지요."

그 순간, 꺼져가던 백작의 눈이 갑자기 하얗게 뒤집어졌다.

"컥!"

"통증은 잠시입니다. 얼마 지나지 않아 스스로 어떤 존재가 되는지 아실 수 있게 될 겁니다. 이건 그런 식으로 프로그램된 물건이거든요."

"으, 으으...."

"좋아. 보아하니 잘 스며드는 것 같군요."

후원자는 뻐근한 표정으로 천천히 몸을 일으키며 기지개를 폈다.

"끄응. 최근에 하나 실패해서 의기소침했는데 잘됐습니다. 이곳에 온 보람이 있군요."

"커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