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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계 황자는 세상을 구하고 싶다 58화

19장 금고털이

-탈리스만 백작의 저택? 물론 알고 있지.

또다시 하수도를 역류해 들어간 르갈은, 탈리스만 백작의 저택 바로 아래 지점을 단번에 찾아냈다.

-여기가 그 저택의 지하다. 가끔 재밌는 이야기가 들려서 귀를 기울이곤 했지.

-갑옷 입은 녀석들이 쿵쿵거리며 뭔가를 옮기던 곳이 지하금고일 거다. 지상으로부터는 꽤 멀지만, 이곳 하수도에서부터는 나름 가깝다.

그리고는 긴 몸을 쭉 세워 들고는 하수도 천장을 앞발로 두드리기 시작했다.

-여기서 위쪽으로 파고 들어가면 빈공간이 있다. 그곳이 아마도 지하금고겠지.

-우선 돌을 몇 개 빼내고, 다음으로 어디 보자....

-그래, 거기서부터 네 키만큼의 지반을 뚫으면 된다. 그다음부터 통로를 만드는 건 어렵지 않을 거다.

-하지만 너무 급하게 뚫으면 안 된다. 지반이 무너질 위험이 있다.

그래서 르갈과 나, 그리고 바위 정령인 룩카르의 힘까지 더해 장장 네 시간에 걸친 공사가 시작됐다.

냄새나고 후덥지근한 하수도에서 땀을 뻘뻘 흘리며 하는 중노동은.... 에휴, 말해 뭐해. 빨리 기억에서 지워버려야지.

하지만 고생이 심한 만큼 결실은 달콤했다.

탈리스만 백작의 지하 금고에는, 금화가 약 천 개씩 들어 있는 포대가 무려 110개 넘게 쌓여 있었다.

그러니까 대충 따져도 금화 11만 개란 소리.

아무리 금화의 크기가 은화에 비해 5분의 1 정도로 작다 해도, 무려 11만 개가 한 장소에 쌓여 있으니 위압감이 장난 아니었다.

이것은 지난 수백 년간 탈리스만 가문이 각종 부정한 방법으로 긁어모은 더러운 재산.

결과적으로 내가 좋은 데 써줄 테니 감사하십시오. 탈리스만 백작.

아, 그리고 금고엔 금화만 있는 게 아니었다.

우선 표준 사이즈 금괴 80개.

그리고 은괴 400여 개가 선반에 쌓여 있었다.

여기에 가공 안 된 각종 보석 원석이 작은 주머니로 20개. 이것들은 급이 높은 마갑의 재료 들어가기 때문에 가격이 꽤 나간다.

그리고 전에는 이런 게 없던 걸로 기억하는데, 어째서인지 나이트 마스터가 아니면 착용이 불가능한 최상급 마갑 두 벌, 그리고 딱 봐도 명품으로 보이는 다섯 자루의 장검까지 있었다.

추가로 커다란 궤짝에 수만 개쯤 되어 보이는 은화가 가득 채워져 있었다. 이건 뭐 가져갈 엄두가 나질 않아서 그냥 포기했고.

아무튼 이 모든 재물을 옮기기 위해, 르갈은 하수도 출구까지 무려 여덟 번을 반복해서 뛰어다녔다.

그나마 저택의 시녀들을 총동원해서 만든 르갈 전용 백팩이 있었기에 망정이지.

그거 아니었으면 금화를 입에 잔뜩 머금고 하수도를 100번쯤 왕복해야 했을지도?

일단 하수도 출구로 나온 재물은 미리 강변에 대기해 놓은 마차를 통해 저택으로 옮겼고.

그 모든 게 바로 어제 있었던 일이다. 지금은 마음 편히 늑대에게 먹이를 주며 정원에서 휴식을 취하는 중이고.

"암튼 진짜 고생했어. 내 생각보다 금화가 더 쌓여 있더라."

"처음엔 얼마가 있을 거라 예상했나?"

"어제 가져온 거에 절반쯤? 아직 암살자 고용에 돈을 안 써서 그런 가봐."

"암살자?"

"나 죽이려고 보낼 암살자. 탈리스만 백작이 나한테 원한이 아주 많거든."

덕분에 미래에 벌어질 일을 사전 차단한 셈인데, 과연 탈리스만이 돈이 없다고 복수를 포기하려나?

"흠, 잘은 모르겠다만 돈은 쌓아두는 것 보다 흐르게 놔두는 편이 좋겠지."

르갈은 마치 현자처럼 말하며 마지막 고깃덩어리를 씹지도 않고 꿀떡 삼켰다.

"그러니 날 위해 최대한 많은 고기를 구입해라. 오늘처럼 외곽이라도 상관없으니, 영원의 숲 사슴 고기를 매 끼니마다 내주면 좋겠다."

매 끼니라니, 그러다 숲에 사슴 거덜나겠구만.

"그건 참아. 좋은 건 가끔씩 먹어야 만족도가 높다는 거 몰라?"

"모르겠다. 예전엔 항상 그것만 먹고 살아서."

"...암튼 고기라면 원 없이 먹여 줄 테니 걱정 마. 아예 축산업을 시작할 생각도 있고."

"축산업?"

"기왕 영지를 받았는데 농사만 짓는 건 별로잖아?"

나는 더없이 척박한 베리트의 땅을 떠올렸다. 지금까지 끔찍하게 고생했으니, 앞으로는 좀 팍팍 잘 살게 해줘야지.

"산업을 다양하게 키워야 여유가 생길 거야. 나중에 고기 소비도 엄청 늘어날 테고."

"그렇긴 하지. 내가 엄청 먹을 예정이니까."

이 늑대 녀석 말하는 거 봐라. 아무리 그래도 너무 당당하게 선언하는 거 아냐?

물론 그만한 일을 해줬으니 상관없긴 한데.... 그렇다고 이 녀석 하나 먹이려고 축산을 하겠다는 소린 아니다.

이후에 진행할 몇 가지 루트에 대량의 고기가 필수적으로 소비되거든. 그때를 위해 미리미리 준비해 둬야지.

이것은 한참 나중에 있을 이계와의 전쟁을 대비하는 일이기도 하다. 염장 처리한 대량의 고기를 쟁여놓아야 하니까.

그런데 그때.

"황자님! 저희 돌아왔습니다!"

멀리 정문이 열리며, 얼굴이 까맣게 탄 두 명의 신관이 정원으로 들어왔다.

"요튼만의 시 서펜트를 모조리 사냥하고 이제 돌아왔습니다! 그런데...."

봉인 신관의 리더였던 트리멈이 걸음을 멈추며 경직되었다. 나는 옆에 웅크리고 있던 르갈의 목덜미를 가볍게 쓰다듬으며 웃었다.

"괜찮아. 얘도 우리 편이야."

"...간 떨어지는 줄 알았습니다."

트리멈은 가까스로 한숨을 내쉬며 내 쪽으로 다가왔다.

"엄청난 늑대군요. 처음엔 저택 정원에 늑대 동상이라도 세워 놓은 줄 알았습니다."

"에이션트 울프 르갈이야. 사람을 별로 안 좋아하니까 신경 쓰지 말고."

"그래. 사람 싫어하는 늑대는 빨리 자리를 비켜주는 게 좋겠군."

르갈이 몸을 일으키고는 반대편 담장을 훌쩍 넘으며 밖으로 사라졌다. 트리멈은 가슴을 쓸어내리며 내 앞에서 무릎을 꿇었다.

"그럼 정식으로 보고 드리겠습니다. 호위 신관 트리멈, 그리고 호위 신관 바리스. 이렇게 두 사람은 요튼만에 남아 있는 모든 시 서펜트를 소탕하고 돌아왔습니다."

동시에 뒤에 있던 신관 바리스도 무릎을 꿇으며 인사를 올렸다. 나는 미소와 함께 고개를 끄덕였다.

"둘 다 수고 많았어. 잡은 시 서펜트는 몽땅 오우거에게 보냈지?"

"물론입니다. 덕분에 지금은 요튼에서 자이루트 산맥까지 정기 무역편이 생겼을 정도입니다. 마차를 이용한 대량 수송으로 말이죠."

"그래? 아무튼 잘했어. 그러고 보니 며칠 전부터 오우거들이 금괴를 보내기 시작했던데. 그게 시 서펜트 고기의 대금이었구나."

"오, 금괴 말씀입니까? 그거 대단하군요."

혀를 내두르던 트리멈이 내 표정을 살피다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런데 말씀하시는 황자님께서는.... 그다지 기뻐하시는 느낌이 아니십니다만?"

"응? 아냐. 충분히 기뻐하고 있어. 충분히."

급하게 손사래를 치며 억지로 미소를 지었다. 그저 어제 강탈한 재물에 비하면 푼돈 수준이라 임팩트가 부족했을 뿐이라고.

아무튼 한 번 털면 끝장인 지하금고와는 달리, 오우거와의 거래는 계속 끊이지 않고 이어질 캐시카우란 말씀. 앞으로도 신경 써서 좋은 고기를 계속 보내줘야지.

"제가 없는 동안 많은 일이 있었다 들었습니다. 특히 황제폐하와 황태자 전하를 부활시킨 사건은 멀리 요튼까지 명성이 자자합니다. 정말 큰일을 하셨습니다. 황자님. 이 자리를 빌려 경축 드립니다."

"경축 드립니다. 황자님."

"고마워 트리멈. 그리고 바리스. 둘 다 수고 많았어."

멀리서 고생한 대가로 금일봉이라도 찔러 줘야 겠구만. 휴가도 좀 주고.

하지만 당장은 인력의 재배치와 적응이 더 중요했다. 나는 무릎 꿇은 두 사람을 보며 곧장 명령을 내렸다.

"실은 그동안 저택의 경비가 더 중요하게 됐어. 중요한 물건도 많아졌고 중요한 사람도 많아졌거든. 혹시 도둑이나 암살자가 침투하면 위험해. 그러니 너희 둘 다 경호를 맡아줘."

"여부가 있겠습니까? 저택은 물론이고, 저기 옆에 올라오고 있는 새로운 건물까지 24시간 내내 감시하겠습니다."

신관들은 생명 감지를 쓸 수 있기 때문에 경호나 감시역으로는 따를 사람이 없다. 나는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부탁할게. 베리트에 있던 다른 두 명은 이미 돌아와서 교대로 근무 중이야."

"오스트와 자말 말씀이군요. 저희 봉인 신관 넷이, 아니 경호 신관 넷이 다시 뭉쳤으니 그 어떤 도적도 저택 주변에 얼씬거리지 못할 겁니다."

"나중에 용병기사를 추가로 고용해서 경호대도 만들 거야. 아예 그것도 맡아서 운용해 줘. 아, 그리고 한 명이 따로 필요한데...."

나는 뒤에 있는 젊은 신관을 향해 손짓했다.

"바리스. 너한테는 따로 부탁할 게 있어."

"네. 황자님. 무엇이든 말씀하십시오."

"너 '실드 오브 라이트' 쓸 수 있지?"

신성마법만 치면 여기 이 녀석이 네 명의 경호 신관들 중 가장 우위에 있다. 젊은 신관인 바리스는 고개를 들어 내 얼굴을 마주보며 대답했다.

"네. 쓸 수 있습니다. 물론 저 말고 다른 분들도 쓰실 수 있지만 말입니다."

"됐어. 네가 가장 강하니까. 기사단에 너랑 호흡을 맞춰야 할 녀석이 하나 있거든."

"기사단, 말씀이십니까?"

"아직 단원도 적고 본부도 없지만.... 암튼 거기 리넨이란 녀석이 있어. 매일 조금씩 시간을 내서 녀석과 호흡을 맞추는 훈련을 해줘."

"명령에 따르겠습니다."

리넨은 묻지도 따지지도 않고 고개를 끄덕였다. 오히려 옆에서 듣고 있던 트리멈이 궁금하다는 얼굴로 물었다.

"그런데 황자님, 실드 오브 라이트는 어째서 언급하신 겁니까?"

"리넨이 홀리 랜스를 쓰거든. 혹시 홀리 랜스가 뭔지 알아?"

"홀리 랜스라.... 전에 대신관님께서 언급하신 걸 들은 적이 있습니다."

"그럼 대충 알겠네? 암튼 그거랑 실드 오브 라이트를 합치면 엄청난 시너지가 생기거든. 자세한 건 훈련을 맡고 있는 다비에게 물어봐."

"오, 알겠습니다. 그런데 방금 말씀하신 다비라는 분이 바로...."

그런데 바로 그때.

"황자님!"

언급되었던 다비가 저택담장을 훌쩍 넘어 안으로 들어오며 소리쳤다.

"황자님! 오늘은 훈련하는 날입니다! 어서 훈련장으로 넘어오시지 않고 뭐 하십니까!"

"잠깐! 나 어제 하루종일 쉬지 않고 일했어! 그러니 오늘은 그냥 쉴 거야!"

"안됩니다!"

다비는 바로 코앞에서 팔짱을 끼고 버티며 고개를 저었다.

"분명 하루 간격으로 훈련한다고 약속하시지 않았습니까? 어제는 훈련을 하지 않는 날이었으니, 오늘은 반드시 훈련을 진행하셔야 합니다."

"아니, 말은 그렇긴 한데 내가 진짜 어제...."

하수도에 기어들어가서 하루종일 땅 파고 금화를 날랐다고!

너도 알잖아! 물론 최소한의 사람들만 알아야 하는 비밀이라 함부로 말을 꺼낼 순 없지만!

"중요한 건 어제가 아니라 오늘입니다."

"아흑...."

"오늘 황자님이 이곳에 계시다는 게 중요합니다. 앞으로 황자님께서 중요한 일로 멀리 떠나실 날이 생기지 않겠습니까?"

"그야... 생기겠지?"

"그럴 때는 어쩔 수 없지 며칠 동안 계속해서 훈련을 빼먹게 되겠지요?"

"그것도 어쩔 수 없지?"

"바로 그런 경우를 대비해서, 최소한 오늘처럼 저택에 계신 날에는 결코 훈련을 빠지면 안 됩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아니, 그렇긴 한데....

으으.

이건 너무 정론이라 뭐라 반박할 말도 안 나오는구만.

"자, 그러니 가시죠. 제가 책임지고 최대한 짧은 시간 안에 필요한 모든 분량의 훈련을 꽉꽉 채워드리겠습니다."

그 말은 짧은 시간에 압축해서 더 빡세게 굴리겠다는 소리 아닌가?

다비는 미소를 지으며 저택의 정문으로 손을 펼쳤다. 나는 도살장에 끌려가는 송아지가 된 기분으로 발을 질질 끌었다.

그냥 좀 넘어가나 싶었더니, 어째 오늘도 하드코어한 하루가 되겠구나. 나 어제 진짜 힘들게 일했는데. 흑흑.

이계 황자는 세상을 구하고 싶다 59화

20장 바람의 마도사

그곳은 황량한 벌판 한가운데 세워진 검은 탑의 옥상이었다.

"...또 실패."

여자는 치켜든 손을 내리며 이를 갈았다.

하늘엔 그녀가 만든 바람의 소용돌이가 어지럽게 일렁이고 있었다. 하지만 그녀가 원하는 마법은 바람의 속성이 아닌, 순수한 형태의 마력 그 자체였다.

바람의 마도사라 불리는 주제에.

정작 그녀가 원하는 건 바람이 아니다.

반복되는 실패에 마음이 짓눌릴 것 같았다. 그녀는 이미 최고의 경지에 오른 마법사였지만, 그 경지라는 게 고작 시작점에 불과하다는 것을 아는 사람은 극히 드물었다.

아크 위저드 톨라리.

어쩌면 그녀 혼자일지도 모른다.

최고의 마법인 '템페스트'조차, 다음을 위한 준비 단계에 불과하다는 것을 알아차린 사람은.

"이걸론 턱도 없어."

톨라리는 자신의 머리카락을 마구 헝클었다.

템페스트는 해당 속성을 압축, 한순간에 소용돌이 형태로 폭발시키듯 방출하는 마법이다.

그런데 압축하면 할수록, 마법의 속성이 점점 흐려지는 게 느껴진다.

물론 해방되는 순간 다시 원래 속성을 돌려받지만, 그녀는 해방 전의 그 순수한 형태야말로 진정한 다음 단계의 마법이라는 사실을 직감했다.

"퓨어 매직(pure magic).... 차라리 몰랐으면 좋았을 텐데."

그랬으면 이토록 괴로워할 필요도, 악착같이 고생할 필요도 없었을 것을.

매직 길드에서도 역대급 재능이라 칭송받던 그녀조차, 퓨어 매직에 한해서는 고작 문틈으로 곁눈질을 하는 게 전부였다.

하지만 포기는 불가능했다.

진리의 문을 엿본 대가는 잔혹했다. 기어이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가거나, 아니면 문 앞에 주저앉아 자신의 부족함을 한탄하며 망령이 될 수밖에.

"이런 곳에 계셨군요."

톨라리는 소리가 난 곳으로 고개를 돌렸다. 그곳엔 온몸을 붕대로 감은 남자가 태연한 모습으로 서 있었다.

"마탑 안에 계신 줄 알았는데 없어 놀랐습니다. 옥상에서 훈련하고 계셨군요. 그동안 안녕하셨습니까?"

"보면 몰라?"

톨라리는 후원자를 보며 코웃음을 쳤다.

"당장 저 아래로 뛰어내리고 싶어. 기분 최악."

"여기서 떨어지면 죽습니다. 물론 톨라리 님이라면 비행 마법으로 날아 가시겠지만요."

"여긴 왜 왔어?"

톨라리가 퀭한 눈으로 쏘아댔다. 후원자는 양 어깨를 으쓱이며 대꾸했다.

"왜 왔겠습니까? 후원하는 사람이 후원받는 사람을 만나러 온 게 이상합니까?"

"넌 존재 자체가 이상해. 용건 있으면 빨리 말해."

"물론 용건도 있습니다만, 오랜만에 안부라도 물을 겸 왔습니다. 요즘은 어떻게 지내십니까?"

"나? 항상 이 모양이지."

톨라리는 고개를 뒤로 젖히며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머리가 녹아버릴 것 같아. 퓨어 매직을 성공하는 게 먼저일까? 아니면 내가 돌아버리는 게 먼저?"

"퓨어 매직이라. 저희 세계에서도 그 정도의 경지에 도달한 분은 많지 않지요."

"많지 않다는 건, 적어도 있긴 있다는 소리?"

"그건 비밀입니다."

후원자는 손가락으로 입술을 가렸다. 톨라리는 퀭한 눈으로 후원자를 노려보며 중얼거렸다.

"이런 썩어 말라붙은 붕대투성이 시체 같은 재수 없는 놈이...."

"네? 방금 뭐라고 하셨습니까?"

"너 욕했어. 볼일 없으면 그만 꺼져 줄래? 집중해야 하는데 정신 사나워서."

"간만에 왔는데 너무 야박하시군요. 그러고 보니 방에 돈주머니가 쌓여 있던데, 그건 무엇입니까?"

"돈 주머니? 아."

톨라리는 그제야 생각났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그거 의뢰 대금."

"어떤 의뢰 말씀입니까?"

"누굴 좀 암살하려는데 힘을 보태달라더라. 근데 암살은 무슨. 규모가 전쟁이라도 벌일 기세던데."

"전쟁이라, 그거 재밌겠군요. 저는 전쟁을 아주 좋아합니다."

"안 물어봤고 안 궁금해. 암튼 기분 전환 될 거 같아 허락했는데, 근데 정작 그 뒤로 연락이 안와. 혹시 취소된 건가? 그렇다고 계약금을 돌려줄 생각은 없는데."

"뭔가 이유가 있겠지요. 그런데 돈이 필요하십니까? 전에는 돈에 딱히 관심이 없어 보이셨습니다만."

"있어서 나쁠 거 없지. 돈으로 마력을 높일 방법도 알아냈고. 확실한건 아니지만.... 아무튼 실험해볼 가치는 있어."

"과연, 예나 지금이나 머릿속에 마법 밖에 들어있지 않군요."

후원자는 톨라리의 깡마른 뒷모습을 보며 웃었다.

"하지만 그 전에 식사를 좀 하셔야 할 것 같습니다. 뭘 제대로 먹긴 하시는 겁니까?"

"신경 꺼. 내가 뭘 먹든 말든. 암튼 집중 좀 하게 빨리 꺼져 줄래?"

"실은 마법에 푹 빠진 톨라리 님을 위해, 제가 최근에 입수한 정보가 있습니다."

후원자는 거듭된 핀잔에도 물러서지 않고 자신의 페이스를 유지했다.

"혹시 클로드 황자에 대한 이야기를 들어 보셨습니까?"

"클로드?"

"그렇습니다. 페이우드 제국의 막내 황자죠."

"왜? 혹시 너도 암살 의뢰하게?"

톨라리는 그제야 흥미가 생겼는지 고개를 돌렸다. 후원자는 놀란 기색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과연, 그 돈주머니는 그렇게 된 것이었군요."

"그래. 그렇게 된 것이었으니 용건이나 말해."

"제가 후원하는 분이 그 클로드 황자와 전투를 벌였습니다."

후원자는 손가락 하나를 펼쳐 보였다.

"그분의 이야기에 따르면, 황자는 템페스트 마법을 연속으로 사용했다고 하더군요."

"그래? 그거 놀라운데?"

톨라리는 귀를 후비며 건성으로 대답했다.

물론 연속으로 템페스트를 쓰는 건 아크 위저드에게도 쉬운 일이 아니다.

하지만 그녀 입장에선 이미 10년 전에 도달한 경지였다. 후원자는 손가락 하나를 더 펼치며 말했다.

"그것도 서로 다른 속성의 템페스트를 뒤섞어서 연속으로 사용했다고 하더군요. 처음이 화염이면 그다음은 번개, 그다음은 얼음. 이런 식으로 말이지요."

"재주가 대단하네? 보통 자기 속성 하나만 전념하는 것도 힘든데."

그제야 톨라리도 흥미를 보였다. 마법사는 일반적으로 자신과 적성에 맞는 속성을 가지게 마련이니까.

그것을 속성 친화력이라 하며, 보통은 친화력이 높은 한 가지의 속성에 한해서 최고의 효율과 위력을 발휘하게 된다.

하지만 이것도 그리 크게 놀랄 일은 아니었다.

"예전에 스승님도 3속성 마법을 같은 위력으로 사용하셨어. 특이하긴 하지만 드문 건 아니야."

"스승님이라면, 지금은 타계하신 라프로익 님 말씀이군요. 하긴, 마법으로 톨라리 님을 놀라게 할 만한 일은 세상에 그리 많지 않겠죠. 그렇다면 이건 어떨까요?"

후원자는 연속해서 세 번째 손가락을 펼쳤다.

"심지어 그 황자는 템페스트 마법 두 개를 양손으로 각각 동시에 발동시켰다고 하더군요."

"...뭐?"

심드렁하던 톨라리의 눈에 한순간 날이 섰다.

그것만큼은 쉽게 넘길 수 없는 이야기였다. 왜냐하면 지금으로부터 4년 전, 자신이 후원자에게 빈 첫 번째 소원이 바로 그것이기 때문이다.

-지금 나한테 필요한 건, 두 개의 템페스트 마법을 동시에 발동할 수 있는 힘이야.

일명 더블 매직.

말처럼 쉬운 이야기가 아니다.

머릿속을 둘로 나누어 극한의 집중력을 통해 각기 다른 마법을 연산, 같은 타이밍에 서로 다른 손에 배분해야 한다.

그것도 평범한 마법이 아닌 템페스트를.

그녀는 본능적으로 알고 있었다. 이것을 위해 어떤 훈련을 해야 하는지, 또 얼마나 오랫동안 훈련을 해야 그 경지에 도달할 수 있는지를.

약 10년.

그것도 그녀가 불세출의 천재이기에 가능한 숫자였다.

문제는 퓨어 매직을 달성하기 위한 첫 번째 단계가 바로 더블 매직이라는 것.

그런데 첫 단계를 밟는 데만 10년이 걸린다?

그렇다면 최종 단계에 도달하는 데 대체 몇 년이 걸린다는 걸까?

그런 와중에 후원자가 찾아와 그녀에게 소원을 물었고, 놀랍게도 정체불명의 주사 한 방에 필요한 집중력을 손에 넣게 되었다.

이것으로 목표까지 10년의 시간이 단축됐다.

하지만 이후 4년 동안 훈련에 매진했으면서도, 여전히 퓨어 매직에 필요한 다음 단계를 넘어설 수 없었다.

다중 압축.

양손에 만들어낸 각기 다른 템페스트 마법을 하나로 모아, 거기서 또다시 압축해 순수한 형태로 변환시킨다.

보통의 마법사라면 존재조차 모르는 기술이지만, 톨라리는 이것을 통해 퓨어 매직의 본질에 다다를 수 있다고 확신했다.

마법에 있어 타고난 천재인 그녀라서 알 수 있었다.

엿볼 수도 있고, 존재할 수 있다는 확신도 있다.

그런데 정작 실현은 불가능하다.

그것이 그녀를 미치게 만들었다. 톨라리는 눈에 불을 켜고는 후원자의 앞에 바짝 다가갔다.

"더블 매직을 쓴다고? 그 녀석도 너한테 후원받았어? 나랑 똑같은 소원을 빈 거야?"

"그렇지 않습니다. 오직 자신의 힘으로 그 경지에 도달한 겁니다."

"그건 불가능해."

"그런데 그것이 실제로 일어나 버렸지 뭡니까? 클로드 황자는 고작 16살이라 하던데, 당신은 벌써 24살이나 되어 버렸군요."

"뭐?"

"이대로라면 퓨어 매직을 가장 먼저 달성하는 건 그 황자가 될 것 같다는 소리입니다. 그렇다면 지금까지 당신의 노력이 물거품으로 돌아가는 게 아닙니까?"

후원자는 도발하듯 물었다. 반면 톨라리는 하찮다는 듯 웃음을 터뜨렸다.

"하! 뭔데 그거."

"뭔데 그거라니요. 톨라리 님이 원하는 게 바로 그것 아니었습니까?"

"가장 먼저 달성? 그런 거 관심 없어. 그냥 언젠가 내가 쓸 수 있게 되면 그만이야."

순서 따윈 상관없다.

중요한건 단지 성공하는 것뿐.

오직 그 목표를 달성하기 위해, 그녀는 자신이 가질 수 있던 모든 것을 포기했다.

지위나 명예, 여기에 인간관계까지 전부.

그렇게 자신이 세운 마탑에 잠적해 퓨어 매직에 파고든 지도 4년이 지났다. 그런데 잠시 고개를 갸웃거리던 후원자가, 갑자기 혀를 쑥 내밀며 고개를 들이밀었다.

"끄악!"

톨라리는 비명을 지르며 후원자를 뒤로 밀쳤다.

"뭐야 너! 확 죽여 버린다? 전에도 그러더니 말 좀 하고 들이대!"

"이거 실례. 마음이 급해서 그만 혀가 먼저 움직였군요."

후원자는 고개를 숙이며 혀끝에 남은 맛을 음미했다.

"이것도 다 필요한 과정이니 양해해 주시길 바랍니다. 흠, 그런데 아직은 확실히 약하군요."

"약해? 뭐가?"

"감정의 뒤틀림 말입니다. 다른 분들은 그 황자의 등장으로 극적으로 변한 감이 있어서 좋았는데.... 정말 톨라리 님은 황자의 존재를 크게 신경 쓰지 않나 보군요. 암살 의뢰까지 받으셨으면서."

"꼭 그런 건 아니야."

톨라리는 한손으로 허리를 짚으며 눈살을 찌푸렸다.

"그 녀석 요즘 소문이 자자하잖아? 가뜩이나 요즘 꽉 막혔는데, 한번 싸워 보는 것도 자극이 되겠다 싶어서."

"고작 그 정도 관심에서 끝나는 게 문제입니다. 톨라리 님에겐 좀 더 깊은 광기가 필요합니다."

"여기서 더?"

톨라리는 어이없다는 얼굴로 양 팔을 펼쳤다.

"아무도 안 사는 황무지에 마탑을 세우고 처박힌 지 4년이 지났어. 나보고 뭘 더 어쩌라는 건데? 내가 진짜 돌아버리기라도 했으면 좋겠어?"

"제가 말하는 건 질투나 분노입니다."

"응?"

"물론 열등감이나 자괴감도 나쁘지 않겠죠. 톨라리 님의 감정이 제가 바라는 것과 결이 다르다는 게 문제입니다. 하지만 뭐...."

후원자는 입맛을 다시며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집착 하나는 끝내주는군요. 뒤틀리지 않은 순수한 집착이라는 게 마음에 걸립니다만, 그래도 이 정도면 두 번째 소원을 들어드리는 게 가능합니다."

"두 번째?"

톨라리는 눈을 크게 뜬 채 경직되었다.

"소원이 두 번째가 있었어? 한 번으로 끝 아냐?"

"제가 처음에 자세히 설명하지 않은 모양이군요. 물론 두 번째도 있습니다. 최종적으로는 세 번째도 가능하고 말이지요."

"그럼 설마...."

"네. 그렇습니다. 당신의 소원은 무엇입니까?"

"퓨어 매직! 퓨어 매직! 퓨어 매직!"

톨라리는 후원자의 몸을 마구 흔들며 고장 난 장난감처럼 소리쳤다.

"퓨어 매직을 쓸 수 있게 해줘! 아니, 평생 쓸 수 있는 게 아니라 지금 딱 한 번만이라도 상관없어. 부탁이니 제발 한 발만 쏘게 해줘!"

"그렇겐 안 됩니다."

후원자는 마구 흔들리는 와중에도 매몰차게 고개를 저었다.

"퓨어 매직은 마법의 최종 영역입니다. 중간에 밟아야 할 단계가 여럿 있지요. 그렇지 않습니까?"

"그건...."

"아마 지금쯤 느끼고 계실 것 같습니다. 퓨어 매직을 위해서는 템페스트급 마법에 그 이상의 강한 압축을 가해야 하는데, 인간의 머리로는 그 정도의 연산이 불가능하다는 걸 말입니다."

"불가능하지 않아!"

톨라리는 마치 지금까지의 인생이 부정한 것처럼 발끈했다.

"충분히 가능해! 이미 더블 매직을 응용해서 두 배의 압축이 가능해졌어."

"물론 더블 매직은 기본적으로 필요한 단계겠죠. 하지만 두 배 가지고 되겠습니까? 훨씬 강력한 고도의 압축이 필요할 텐데요?"

"그건...."

"결국 인간의 두뇌로는 한계가 있습니다. 신경망의 가속에 리미트가 걸려 있으니까요."

"리미트?"

"과부하를 막기 위한 제어장치입니다. 의지만 가지고는 절대 풀 수 없습니다. 그래서 중요한 건...."

후원자는 품속에서 바늘이 달린 가느다란 통을 꺼내며 말했다.

"마음을 버리는 겁니다."

이계 황자는 세상을 구하고 싶다 60화

20장 바람의 마도사

"뭐?"

"마법을 초월한 마법을 쓰기 위해서는, 당연히 인간을 초월한 무언가가 되어야 합니다. 여기에 사람의 마음이 설 자리는 없습니다."

"...."

"이걸 맞으면 지금까지 불가능했던 것들이 가능해집니다. 극한의 압축, 다중 연산, 한계를 넘어선 출력. 마법사에게 있어 말 그대로 꿈의 영역이 펼쳐지게 됩니다."

"그런데 마음을 잃는다고? 마음을 잃는다는 게 정확히 무슨 소린데?"

"정확히는 인간성을 잃는다고 할까요? 말로 하면 거창하지만.... 실제로는 그냥 무감각한 인간이 될 뿐입니다. 옆에서 보면 그저 마법에 전념하는 기계장치처럼 보이겠죠."

후원자는 바늘 달린 통을 앞으로 내밀며 미소를 지었다.

마법에 전념하는 기계장치.

톨라리의 얼굴이 순간적으로 경직되었다.

무시무시한 단어지만, 지금의 그녀에겐 놀랄 만큼 매력적으로 들렸다.

하지만 그렇게 되면 지금까지의 자신은 사라진다.

다른 어떤 것에도 의미나 기쁨을 느끼지 못한 채, 매일같이 마법만 사용하는 무언가로 변해 버리는 것이다.

"잠깐, 그게 지금 사는 거랑 뭐가 다르지?"

"방금 뭔가 말씀하셨습니까?"

"응? 아니. 아무것도."

"어쨌든 그렇게 된다 해도 무조건 퓨어 매직을 쓸 수 있게 되는 건 아닙니다. 다만 가능성은 매우 높아지겠죠. 필요한 중간단계를 모두 돌파할 수 있을 테니까요. 자,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후원자는 유혹이라도 하듯 바늘 달린 통을 천천히 흔들었다. 톨라리는 흔들리는 통을 따라 시선을 움직이며 입에 고인 침을 삼켰다.

"으으...."

"지금 소원을 이루시겠습니까? 지금 바로?"

"...잠시만."

톨라리는 눈을 질끈 감았다 뜨며 숨을 헐떡였다.

"그 전에 며칠만 시간을 줘. 후욱, 이런 빌어먹을. 심장은 또 갑자기 왜 이런대?"

"인간은 원래 그렇습니다. 진정 원하는 것을 앞에 두면 심장이 빠르게 뛰는 법이죠. 그런데 시간이요? 그야 얼마든지 드리겠습니다."

후원자는 톨라리의 손에 직접 통을 쥐어주었다.

"아예 주사기를 드리도록 하지요."

"이걸 주사기라 불러?"

"그렇습니다. 전에 한번 맞아보셨으니 어떻게 사용하는지는 알고 계시겠죠? 마음을 정하셨으면 직접 바늘을 몸에 꽂고 놓으시면 됩니다."

"만약에 원하지 않게 되면?"

"나중에 제가 회수하러 올 테니 잘 보관해 주시면 됩니다. 아니면 그냥 불로 태워버려도 상관없습니다."

후원자는 양손으로 불꽃이 퍼지는 모양을 흉내 냈다.

"모든 것은 톨라리 님의 선택에 달려 있습니다. 마음을 버리고 자신의 소망을 이룰지, 아니면 이룰 수 없는 소망에 영원히 고통받을지."

그리고는 옥상과 연결된 계단을 통해 아래로 내려가기 시작했다. 톨라리는 급하게 후원자를 따라 내려왔지만, 이미 아래층은 언제나처럼 텅 비어 있을 뿐이었다.

"영원한 고통...."

톨라리는 주사기를 노려보며 중얼거렸다.

결국 고통의 근원은 마음에 있는데, 이 주사를 맞으면 그 마음 자체가 사라져 버린다고 한다.

그렇다면 결국 두 배로 행복해지는 게 아닐까?

퓨어 매직도 완성하고, 고통의 근원인 마음도 사라지고?

"...그럴 리가 없잖아?"

톨라리는 주사기를 내려놓으며 한숨을 내쉬었다.

마음이 없다면 행복도 없다. 영원히 돌아가는 태엽 기계장치 스스로가 대체 무슨 즐거움을 느낄 수 있을까?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저 주사를 단숨에 어깨에 꽂고 싶어지는 이 마음은 또 뭐란 말인가?

* * *

"저는 추운 것보다는 따뜻한 게 좋은데...."

루네는 시무룩한 얼굴로 작은 손바닥 위에 조그만 얼음을 만들었다.

"정작 마법은 이쪽이 더 잘 맞는 거 같아요. 그래서 안타까워요."

"속성 친화력은 타고난 거라 어쩔 수 없어. 그냥 받아들이는 수밖에."

"하지만 황자님은 모든 속성을 사용하시잖아요? 저도 그렇게 될 수는 없나요?"

루네가 억울한 듯 하소연했다. 여보세요 아가씨? 나도 처음부터 전 속성을 자유자재로 쓸 수 있던 건 아닌데? 여기까지 오는 데 대충 80년 정도 걸렸다고.

"음.... 난 좀 예외로 두고. 암튼 적성을 바꾸는 건 안 좋아. 냉기 하나만 파고들어도 앞으로 9년 안에 템페스트를 쓸 수 있을지 없을지 모르고."

"앞으로 9년이요? 아, 적어도 9년은 훈련을 해야 한다는 뜻이군요."

루네는 이해했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정확히는 이 세계에 남은 시간이 앞으로 9년이라는 뜻이지만.... 뭐 어때. 결과만 통하면 그만이지.

"그런데 템페스트는 뭔가요?"

"최고 등급 마법. 각 속성마다 똑같이 적용되는. 해당 속성을 극한으로 압축시켜서 소용돌이를 만든 다음에 적에게 던져서 폭발시키는 강력한 마법이야."

"와, 그런 걸 제가 쓸 수 있게 된다고요?"

루네는 믿을 수 없다는 얼굴로 자신의 얼음조각을 응시했다. 정원 벤치에 앉아 있던 나는 곧장 하늘을 향해 손을 뻗으며 시범을 보였다.

"루네야. 좀 뒤로 물러서."

"네? 앗, 네."

그리고는 하늘을 향해 윈드 오브 템페스트 (wine of tempest)를 시전했다.

우웅!

조그맣게 압축된 기류의 덩어리가 높은 하늘로 날아간다.

동시에 하늘 한복판에서 거대한 바람의 날개가 펼치며, 광범위한 공간을 폭풍 속으로 집어삼켰다.

위이이이이이이이이이잉!

만약 이것을 저택에 집어 던졌으면, 한순간 저택 전체가 믹서에 갈린 것처럼 산산 조각나며 흩어졌을 것이다.

"으아.... 대단해요."

템페스트의 폭풍이 사라진 후에도, 루네는 여전히 경악한 얼굴로 한참 동안 하늘을 바라보았다.

"이게 템페스트.... 정말 최고의 마법이네요. 이걸 얼음으로 쓰면 어떻게 되는 건가요?"

"정확히는 얼음이 아니라 냉기로 쓰는 거야. 초대형 냉기 폭풍이 목표를 한순간에 얼음덩어리로 만들어."

"힉...."

루네는 몸서리를 치며 고개를 숙였다. 당장은 연약하고 뭐가 없어 보이는 아이지만, 이 조그만 소녀가 훗날 이계의 침략자들을 상대로 하는 전쟁에서 당당히 한 축을 담당하게 된다.

"아직 먼 미래의 일이야. 그 전에 출력부터 착실히 키워야지."

"출력이요?"

"마법의 출력. 모든 마법은 결국 출력만 다르고 다 똑같거든."

이것도 시범이 필요하겠구만. 나는 왼손에 작은 불꽃을, 오른손에는 그보다 큰 불꽃을 만들어 보였다.

화륵!

"봤지? 모든 마법은 다 똑같아."

"제 눈에는 오른쪽이 크게 보이는데요?"

"본질이 똑같고 출력만 다르다고. 이걸 화살처럼 길게 뽑으면 애로우(arrow)가 되는 거고, 공처럼 둥글게 말면 볼(ball)이 되는 거야. 결국 얼마만큼의 출력을 어떤 구조로 전개하느냐에 모양이 바뀔 뿐이라는 것만 알면 돼."

"그게... 죄, 죄송합니다."

루네는 어쩔 줄 몰라 하며 고개를 꾸벅였다.

"황자님께서 무슨 말씀을 하시는지 잘 모르겠어요. 제가 배운 게 없이 머리가 나빠서...."

"당장은 몰라도 돼. 이제 막 시작했는걸. 세상에 태어났을 때부터 아크 위저드인 사람이 어디 있겠어?"

"아크 위저드라는 건 가장 강력한 마법사를 말하는 거죠?"

"맞아. 템페스트 마법을 하루에 여러 번 쓸 수 있으면 매직 길드에서 칭호를 줘."

"그렇다면...."

루네는 고개를 치켜들고 내 얼굴을 빼꼼이 바라보았다.

응?

나?

태어났을 때부터 아크 위저드인 사람?

"아니아니, 난 좀 특별한 경우라서 달라. 정령과 계약을 맺은 거라서."

정확히는 정령에게 힘을 받은 거라고 뻥을 쳐서 내 마력을 정당화 시켰지.

반면 그 실체는, 지난 아홉 번의 회귀를 통해 반복된 세월의 집합체일 뿐.

모든 속성을 자유자재로 부릴 수 있는 것도 마찬가지로 시간의 힘일 뿐이다.

어차피 마법으로 도달할 수 있는 한계는 정해져 있다. 때문에 템페스트를 쓸 수 있게 된 이후로는 부족한 속성을 끌어올리는 쪽으로 명상과 훈련을 반복했다.

그런데 문득 누군가의 얼굴이 머릿속에 떠올랐다.

"...있긴 있구나."

"네?"

"태어났을 때부터 아크 위저드에 가까운 사람이 있긴 있어. 이름은 톨라리고."

"톨라리요?"

"물론 정말로 태어났을 때부터 아크 위저드였다는 건 아니고.... 기억이 맞다면 아마 14살에 아크 위저드 칭호를 받았을 거야."

"14살? 저랑 같은 나이예요?"

"그 여자는 진짜 천재거든."

반복되는 회귀와 긴 시간을 통해 가까스로 쌓아 올린 이쪽과 달리, 톨라리는 말 그대로 타고난 천재였다.

문제는 그 톨라리라는 아크 위저드의 실체가 인류의 배신자라는 것.

하지만 이를 알 턱이 없는 루네는 동경의 눈을 반짝이며 물었다.

"그분도 여자셨군요. 지금은 어디서 뭐 하고 계시나요? 나이는 몇 살이고요?"

"그 녀석 사람을 싫어하는 괴짜라.... 지금은 혼자 황무지에 마탑을 세워 놓고 살고 있을 거야."

"사람을 싫어하다니 안타깝네요. 그런데 마탑이 뭔가요?"

"마력에 반응하는 소재를 섞어 만든 탑. 일종의 마법 요새라고 생각하면 돼. 적의 침입을 자동으로 막아주는."

"와."

"그것도 아크 위저드는 되어야 만들 수 있어. 돈도 많이 들고. 암튼 말이 나와서 하는 말인데 톨라리는 글렀어. 인간이 아니거든."

그리고 잠시 침묵이 찾아왔다. 루네는 이해할 수 없다는 표정으로 몇 번이나 눈을 깜빡였다.

"인간이 아니라고요? 그럼 뭔가요? 혹시 소문에 듣던 엘프라는 종족?"

"그런 뜻이 아니야. 그냥 인간성이 글러먹었다고."

정확히 표현하자면, 톨라리는 감정이 없는 기계 같은 살육머신이다.

인형 탈을 쓴 것처럼 무표정한 얼굴로, 눈썹 하나 까딱하지 않고 사람을 학살한다.

다만 그렇다고 당장의 위협은 아니다.

가만 내버려 뒀을 때 톨라리가 본격적인 살육을 시작하는 건 제국력 518년부터다. 앞으로 4년쯤 남았네.

그러니 '톨라리 제거 루트'를 진행하는 건 최소 2년에서 3년 후에 시작해도 늦지 않다는 말씀.

하지만 실제로 지금은 어떨까?

이미 여러 사건이 기존의 역사적 법칙에서 어긋나기 시작했다.

애초에 제스가 광전사로 변해서 날 공격하는 일 따위는 한 번도 없었다. 애초에 이계의 침략 전에 이 땅에 광전사가 나타난 것 자체가 처음이지만.

여기에 나이트 마스터인 파이렌이 온몸에 촉수를 뿜어내는 촉수괴물로 변한 적도 없었고, 추가로 엠퍼로드의 하수도 사건 같은 경악할만한 일 역시 처음이다.

굳이 공통점을 찾자면.... 이것들 모두가 인류의 배신자와 연관이 있다는 것 정도인가?

그렇다면 다른 배신자 역시, 내가 예측하지 못한 단계로 빠르게 넘어갈 가능성이 있다.

그렇다면 결론은 간단하지.

위험분자는 최대한 빠르게, 원래 계획했던 것보다도 더 빠르게 제거해야 한다.

그렇다면 가장 먼저 톨라리부터 제거해야 한다. 상대하기 가장 까다로운 배신자니까.

"...황자님?"

퍼뜩 정신을 차리니 루네가 불안한 얼굴로 보고 있었다. 나는 가볍게 웃으며 마법 수업을 종료했다.

"오늘 공부는 이걸로 끝내자. 갑자기 할 일이 생겨서."

"네? 앗, 네. 가르쳐 주셔서 감사합니다. 황자님."

루네는 허리를 꾸벅 숙이며 인사를 올렸다. 나는 곧바로 라니아를 부른 다음, 오후에 있을 모든 스케줄을 즉석에서 취소해 버렸다.

쇠뿔도 단김에 빼라 했으니까.

여기서 톨라리의 검은 마탑까지 날아가면 시간이 얼마나 걸릴까?

가능한 잠잘 시간 전에 돌아오면 좋을 것 같은데.... 혹시 힘들게 갔는데 마탑에 톨라리가 없으면 어떻게 하지? 돌아올 때까지 주변에서 잠복하고 있어야 하나?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