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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계 황자는 세상을 구하고 싶다 54화

18장 부흥의 루트

나 또한 2회 차 때 직접 매직 길드를 찾아가 이런 과정을 전부 경험했다. 그것도 처음엔 재능이 없어서 무려 5개월 동안 물속에 손을 담그고 쌩 고생을 했었지만.

"저... 황자님?"

"응?"

"그런데 얼음이 뭔가요?"

엥? 얼음을 몰라?

"얼핏 이야기를 듣긴 했는데 실제로 본 적은 없어서...."

루네는 말을 흐리며 고개를 푹 숙였다.

흠, 이것 봐라?

지금처럼 루네를 훈련시키고, 어엿한 마법사로 만들어 이계와의 전쟁에서 함께 싸운 것만 해도 벌써 세 번째.

그런데 그 모든 시간동안 루네가 '얼음을 모른다'는 이야기를 직접 꺼낸 건 이번이 처음이다.

물론 얼음을 모르는 것 자체는 딱히 이상한 일은 아니다. 엠퍼로드 인근은 겨울에도 기온이 영하로 떨어지지 않으니까.

아무튼 새로운 일이 생기는 건 언제나 환영이다. 회귀를 반복하는 사람의 정신건강에 이만한 보약이 또 없으니까.

"그래? 그럼 직접 한번 체험해 볼까?"

나는 손바닥 위에 작은 얼음을 만들며 생각했다.

어차피 내가 무슨 짓을 하더라도, 루네는 평균적으로 수중식을 열흘 정도 하면 마법을 쓸 수 있게 된다.

물론 이것도 엄청나게 빠른 것이다. 하급 마법사는 보통 6개월 정도 걸리고, 중급은 3개월 정도 걸리며, 아크 위저드의 재능을 가진 인간이라면 닷새 전후로 깨우치게 되니까.

그런데 내가 만든 얼음을 루네의 볼에 가볍게 댄 순간.

"으악!"

깜짝 놀란 르네가 몸서리를 치며 뒤로 넘어갔다.

쩌적!

동시에 양팔이 뭔가에 고정되어 뒤로 넘어가려는 몸을 잡아주었다.

"...응?"

얼음.

루네가 손을 담그고 있던 물통의 물이 모조리 꽁꽁 얼어붙었다!

"화, 황자님! 손에 느낌이 없어요!"

경직된 루네가 애처로운 얼굴로 날 바라보았다. 나는 즉시 불꽃을 일으키며 얼음을 녹이기 시작했다.

"가만있어. 내가 녹여 줄게."

으, 이거 빨리 녹여야겠는데? 이러다 동상 걸리는 거 아냐?

그렇다고 화력을 막무가내로 높였다간 화상을 입을지도 모른다. 물론 어찌됐든 회복마법으로 고쳐주면 그만이긴 하지만.

그런데 정작 얼음은 물론이고, 얼음 주변에 맺힌 냉기가 엄청나서 가벼운 불꽃으로는 잘 녹지도 않는다.

세상에.

뭐지 이 냉기는?

이건 동상이 문제가 아니다. 자칫 얼어붙은 손이 외부의 충격에 깨져버릴지도 모른다!

"라니아! 지금 당장 회복의 영약 챙겨와! 화상에 좋은 걸로!"

고개를 돌려 문 쪽으로 소리를 지른 다음, 지체 없이 화력을 높여 냉기와 얼음을 제압했다.

푸확!

순간적으로 수증기가 폭발하듯 솟구치며 방안을 꽉 채웠다.

"꺄, 꺄악!"

"미안! 조금만 참아!"

빨갛게 익은 루네의 손을 통에서 꺼낸 다음, 곧바로 회복 마법과 진통 마법을 퍼부었다.

"힐링! 페인 킬러!"

"으...."

눈을 꽉 감고 찡그리고 있던 루네의 얼굴이 그제야 살짝 펴진다.

휴 깜짝이야. 겨우 한숨 돌렸네.

"아, 아픈 게.... 아픈 게 사라졌어요. 감사합니다. 황자님."

루네가 눈물을 글썽이면서도 억지로 미소를 지었다. 나는 이마에 흐르는 진땀을 닦으며 고개를 저었다.

"아냐. 감사는 내가 해야지."

수중식 사흘째에 통 전체의 물을 꽁꽁 얼린 것도 모자라, 통 주변을 순식간에 냉골로 만들어 버렸다!

뭐지 이 재능은? 여태껏 이 정도는 아니었는데?

물론 루네는 대부분의 경우 강력한 마법사로 성장한다. 그렇다고 템페스트를 능숙하게 날리는 아크 위저드에 도달한 적은 한 번도 없었는데.

하지만 이번에는 그 마지막 한계를 돌파할지도 모르겠다. 그저 얼굴에 얼음 한번 가져가 댔다고 이런 변화가 생길 줄이야.

"황자님! 무슨 일입니까? 이 연기는 대체?"

라니아가 박차듯 문을 열며 방 안으로 들어왔다. 나는 한숨과 함께 간략히 설명했다.

"루네가 손에 화상을 입었어. 회복마법을 쓰긴 했는데 추가 치료가 필요해. 동상과 화상이 번갈아 왔거든."

"큰일이군요. 루네 양? 입 벌리세요. 우선 이걸 쭉 들이켜야 합니다."

라니아는 손을 못 쓰는 루네의 입에 직접 영약을 넣어 주었다. 그리고는 양쪽 겨드랑이에 끼고 온 또 다른 영약병을 열고 빈 통에 들이 붇기 시작했다.

"지금부터 30분 동안 영약에 손을 담그고 있어야 합니다. 아시겠습니까? 안 그러면 평생 손 전체에 끔찍한 흉터가 남게 될 겁니다."

"아, 알겠습니다."

루네는 즉시 통 안에 손을 담그며 눈을 질끈 감았다. 나는 다시 한번 루네에게 진통마법을 걸어주며 한걸음 뒤로 물러났다.

수중식 도중 얼음을 볼에 댔다고 이런 반응이 일어날 줄이야.

아니, 잠깐.

혹시 이걸로 다른 마법사 지망생들도 각성시킬 수 있는 걸까?

수중식 기간을 단축하는 것만으로도 마법사의 최종적인 잠재력에 차이가 생긴다. 정확히는 잠재력에 따라 수중식의 기간이 정해지는 거겠지만....

어쨌든 해 볼만 한 도전이다. 잘하면 이번 10회 차 에는 하늘에서 강력한 마법사가 비처럼 쏟아 내리는 아름다운 광경을 보게 될지도 모르잖아?

* * *

안타깝게도 그건 아니었다.

바로 다음날, 엠퍼로드의 중심가에 있는 매직 길드를 다짜고짜 찾아가 테스트 진행 했는데....

휴.

아쉽게도 루네와 같은 극적인 변화를 보인 지망생은 단 한명도 없었다.

흑흑.

이거 기대가 각별했던 만큼 실망도 크구만.

그저 루네 혼자 특별했다는 소리다. 이번에는 이계의 웨이브를 막는데 막강한 마법사 사단을 동원할 수 있을 줄만 알았는데....

"황자님, 말씀드릴 이야기가 있습니다."

기분 전환하러 훈련장에 구경 나갔더니 카일이 냅다 달려와서는 물었다.

"혹시 오전에 매직 길드에 가서 무언가 일을 벌이셨습니까?"

"응? 왜?"

"아까 점심까지 상점가에 있었습니다만, 갑자기 상점가에 황자님께서 매직길드를 한바탕 뒤집어 놓았다는 소문이 돌기 시작했습니다."

"그새? 몇 시간 지나지도 않았는데?"

"정확히 무슨 일을 하셨는지 까지는 아니지만, 이번에도 황자님이 뭔가 큰일을 저지르신 게 아닌가 하는 이야기가 퍼지고 있습니다."

"큰일이라니, 요즘 내가 얼마나 착하게 지냈는데."

"착한 일이던 나쁜 일이던 큰일은 큰일이니까요. 가장 최근에 베리트에서 하셨던 일을 떠올려 보십시오."

"영주를 지하 감옥에 쳐 넣고 7일 동안 굶겼지."

"정확히는 9일입니다."

"7일이나 9일이나. 아무튼 이번엔 별 일 아니야."

"정말입니까?"

어째 얼굴에 불신의 빛이 가득하구만. 하긴 내가 뭔가 움직일 때 마다 제국 전체가 뒤집어질 일이 생겼으니....

"정말이야. 오히려 매직 길드에 도움이 될 조언을 하고 왔다니까? 결과가 안 나와서 좀 아쉽게 됐지만. 대신 유망한 애들 몇 명을 받기로 했으니 뒷말은 안 나올 거야."

"뒷말이 이미 나오고 있는 게 문제 입니다. 그런데 유망한 아이를 가르친다는 게 무슨 말씀입니까?"

"루네처럼 내가 맡아서 몇 명 가르칠 거라고. 한달 쯤 뒤에 저택에 올거야. 아, 루네가 누군지 알지?"

"물론입니다. 그런데 마법이라니...."

카일은 심각한 얼굴로 잠시 고민하다 물었다.

"그럼 황자님께서 매직 길드를 괴롭히는 게 아니라, 오히려 도움을 주고 계신다는 내용의 소문을 퍼뜨려도 되겠습니까?"

"소문? 구스프 상회를 이용해서? 해주면 좋긴 한데 이게 그렇게까지 해야 할 일인가?"

"여론은 되도록 좋은 쪽으로 끌고 가는 편이 좋습니다. 물론 황자님이 세우신 여러 업적에 평판이 좋아졌고, 특히 최근에 황제 폐하와 황태자님을 치료하신 일로 더욱 명성이 자자합니다만...."

"합니다만?"

"개중에는 아직도 황자님의 과거 행적이나, 혹은 베리트를 뒤집어 놓고 탈리스만 백작을 무참히 짓밟은 행위에 불만을 가진 자들도 있습니다."

"그래봤자 대부분 문벌 귀족 아냐?"

"엠퍼로드에는 그 문벌귀족의 녹을 먹고 사는 이들이 많습니다. 이자들에게 쓸데없이 명분을 쥐어 주는 건 피해야 합니다."

틀린 말은 아니지. 나는 별다른 이견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좋아. 부탁할게. 혹시 정보 조작, 아니 여론 선동이라고 해야 하나? 아무튼 그거 하는데 돈 들어? 예산 좀 줄까?"

"따로 예산은 필요 없습니다."

카일은 쓴웃음을 지으며 고개를 저었다.

"상인들의 입을 통해 조용히 소문을 퍼뜨리면 그만입니다. 물론 더 심각한 일이 벌어지면 대응의 수위를 높여야겠지만요."

"알아서 잘 해줘. 그런데 따로 부탁할게 있는데...."

그때 멀리 훈련장에서 다비가 손을 치켜들며 소리쳤다.

"황자님! 마침 잘 오셨습니다! 이쪽으로 오십시오!"

"나 오늘 쉬는 날이야! 훈련 안 해!"

이 자식이 어딜 은근슬쩍 끌어들이려고?

오늘은 하루 종일 쉬면서 새 영지를 부흥시키는 계획이나 세울 생각이다. 겸사겸사 다른 애들 훈련하는 거 구경도 하고.

"황자님 훈련이 아닙니다! 잠시면 되니 마법으로 테스트를 도와주십시오!"

"내가 왜 테스트를.... 응? 마법?"

마법이라고 하니 살짝 구미가 당기는데? 하지만 이런 식으로 은근 슬쩍 끌어들여서 훈련을 진행 할 수도 있지 않을까?

"난 오늘 훈련 쉬는 날이야. 뭔진 몰라도 몸으로 하는 거면 절대 안 해."

훈련장에 도착하자마자 일단 경고부터 날렸다. 다비는 당연하다는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물론입니다. 말씀드렸다시피 마법으로 도와주시면 됩니다. 리넨!"

"네! 단장님!"

곧바로 구레나룻이 턱수염과 이어진, 실로 중후한 외모의 15살 소년이 헉헉대며 달려왔다.

"부르셨습니까? 단장님? 아, 안녕하십니까 황자님? 좋은 오후입니다!"

"그래 좋은 오후. 훈련 열심히 하고 있지? 그런데 벌써 하급 마갑이야?"

리넨은 이미 최하급을 넘어 하급 마갑을 착용하고 있었다. 녀석은 쑥스러운 듯 헤헤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단장님 말씀처럼 무거운 거 입고 버티는 덴 재주가 있는 모양입니다. 부디 황자님께 도움이 될 수 있도록 전력을 다 해 훈련하겠습니다!"

"좋아. 훌륭해."

나는 미소를 지으며 다비를 돌아보았다. 다비는 고개를 끄덕이며 리넨의 어깨를 두드렸다.

"그래. 마갑 적응 훈련은 잠시 멈추고, 지금부터는 아침에 말했던 그걸 해 보자."

그리고는 미리 손에 쥐고 있던 창 한 자루를 리넨의 손에 쥐어주었다.

"지금부터 할 것은 홀리 랜스의 위력 테스트입니다."

"홀리 랜스? 이 녀석이 쓴다는 그.... 폭발하는 빛의 창?"

"그동안 제가 몇 번 받아보긴 했습니다만, 아무래도 나이트 스킬보다는 마법에 가까운 기술이라 그쪽으로도 테스트를 진행하는 게 어떨까 싶습니다."

홀리 랜스라.

내가 아는 건 리넨이 그 기술로 베리트 성에 몰려온 탈리스만 백작의 군대를 물리쳤다는 사실 뿐.

그러고 보니 이야기만 들었지 직접 본 적은 한 번도 없었네?

"해보지 뭐. 나 보고 마법으로 막아보라는 거지? 원소 마법으로 막아볼까? 아니면 신성 마법으로?"

"가능하면 둘 다 부탁드립니다."

"아, 아니. 자, 잠시만 기다려주십시오!"

순간 리넨이 펄쩍 뛰며 소리쳤다.

"설마 저보고 지금 화, 황자님께 창을 집어 던지라는 말씀은 아니겠죠? 제가 어찌 감히!"

"아니, 정확히 바로 그 말이야. 물론 그냥 집어 던지지 말고 홀리 랜스로 만들어서 던져."

"히익!"

리넨은 기겁하며 뒤로 물러났다. 뭐지 이 타격감은? 뭔가 괴롭힐 맛이 나는 리액션인데?

"뭘 그렇게 놀래? 혹시 내가 못 막을까 겁나?"

"아닙니다. 그런 건 아니고...."

"혹시 나 무시하는 거야?"

"그, 그럴 리 있겠습니까!"

"그럼 걱정 말고 던져. 위력 최대로 해서. 안 그러면 진짜 나 무시하는 거다?"

"아흑.... 아, 알겠습니다! 전력을 다 하겠습니다!"

울상이 된 리넨은 몸을 돌리며 훈련장 한복판을 향해 달렸다. 나는 주변에 있던 카일과 다비를 옆으로 물리며 마법을 준비했다.

우선은 마법사가 흔하게 사용하는 벽마법으로.

쩌적!

한순간 얼음으로 만든 방벽이 정면에 솟구쳤다.

높이는 5미터, 너비는 4미터쯤 되는 직사각형의 얼음벽으로, 두께는 내 손으로 두 뼘쯤 된다.

일명 '아이스 월(ice wall)'

개인적으로는 기동성을 살린 전투를 추구하기 때문에 이런 방어 마법은 거의 사용하지 않는다.

하지만 대부분의 마법사들은 각종 벽마법을 순간적으로 발동시켜 자신의 몸을 보호한다. 나는 고개를 돌려 조금 떨어진 곳에 있는 카일에게 눈짓을 보냈다.

"카일?"

"네. 황자님."

그러자 카일이 멀리 있는 리넨을 향해 소리쳤다.

"리넨! 던져!"

"아으, 알겠습니다!"

그리고 3초쯤 시간이 지났을까.

콰직!

벽 너머로 날아든 창이 꽂히는 소리가 들렸다.

동시에 얼음벽 너머에 섬광이 번쩍였고, 조각 같은 빛의 일부가 벽을 통과해 내 쪽으로 쏟아졌다.

이거 봐라?

빛이 벽을 통과하네?

우웅!

하지만 이미 프로텍션 매직을 걸었기 때문에 상관없다. 몸에 닿은 빛은 아무 효과도 주지 못하고 하릴 없이 소멸했다.

"황자니이이임! 괜찮으십니까아아아!"

멀리서 리넨이 절규하는 소리가 들렸다. 동시에 내 쪽을 확인한 카일이 가볍게 헛기침을 하며 대신 대꾸해줬다.

"걱정 마! 황자님은 아무 문제없으시다!"

"오! 다행입니다!"

"그대로 잠시 기다려! 단장님이 확인중이시다!"

카일의 말대로 다비가 얼음벽으로 달려와 상황을 확인한 다음, 다시 내 쪽으로 고개를 내밀며 물었다.

"어떠셨습니까? 옆에서 볼 때는 빛의 파편 대부분이 얼음벽에 막히는 것처럼 보였습니다만."

"일부는 통과했어. 방호마법을 쓰고 있어서 위력은 잘 모르겠네."

"흠, 그렇군요. 확실한건 마법으로 만든 물질에는 위력이 반감되는 것 같습니다. 갑옷은 사이사이로 뚫고 들어오는데 말입니다."

"직접 맞아 봤어?"

"직격은 아니고, 날아오는 창을 검으로 쳐낸 순간 폭발하는 빛을 받아 봤습니다."

"소감은?"

"만만치 않습니다. 중급 마갑을 착용하고 있었는데도 강렬한 통증과 몸이 마비되는 느낌을 받았습니다."

"몸이 마비된다고? 나이트 마스터인 네가?"

"물론 움직이지 못할 정도는 아닙니다. 다만 어지간한 기사는 일격에 행동불능에 빠질 겁니다."

"무시무시하네. 대신 마법에는 좀 약한 것 같은데.... 다비?"

"네. 황자님."

"저 녀석한테 창을 왕창 가져다 줘."

"알겠습니다."

다비는 곧바로 창 무더기를 집어 들고 리넨을 향해 달렸다.

그사이 얼음벽을 피해 옆으로 위치를 옮긴 나는, 이번에는 속성을 바꾸어 바람의 벽을 발동시키며 손을 흔들었다.

"리넨! 다시 던져!"

"아.... 알겠습니다!"

새 창을 받아든 리넨이 다시 한번 홀리 랜스를 만들어 내 쪽을 향해 투척했다.

슈욱!

이번에는 날아오는 창이 정확히 보인다. 불투명한 얼음벽이 아닌, 완전 투명한 바람의 벽이었으니까.

파직!

창날이 바람벽에 막힌 순간, 번쩍이는 섬광이 사방으로 퍼졌다.

유리조각처럼 날카로운 빛의 파편.

확실한건 방금 전의 얼음벽에 비해 훨씬 많은 양의 파편이 바람벽을 뚫고 내 쪽으로 쏟아진다는 것.

와, 이거 봐라?

심지어 조그만 내 몸 하나 덮을 정도가 아닌, 꽤나 넓은 면적을 커버할 만큼 다수의 파편이 퍼진다.

물론 몸에 닿은 파편은 이번에도 딱히 힘을 못 쓰고 소멸했다. 프로텍션 매직을 뚫을 정도의 위력은 없으니까.

하지만 내가 선 자리에서 10미터 이상 떨어진 곳까지 파편이 튀어 나간 걸 보면....

이계 황자는 세상을 구하고 싶다 55화

18장 부흥의 루트

"훌륭하군요."

어느새 옆에 온 다비가 흥미로운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나는 바람벽을 거두며 맞장구를 쳤다.

"진짜 괜찮은데? 속성이 바람으로 바뀌니까 그냥 막 뚫고 들어왔어."

"마법도 종류에 따라 효과가 달라지는군요. 보통 마법이 다루는 속성은 네 종류 아닙니까?"

"얼음, 바람, 번개, 불. 근데 번개 속성은 방어마법이 없어. 불은 있긴 한데 물리적으로 날아오는 걸 잘 못 막고."

"그럼 굳이 테스트 할 필요는 없겠군요. 신성 마법 쪽은 어떻습니까?"

"절대 방호마법.... 그러니까 프로텍션 매직은 절대 못 뚫어. 직격을 맞아도 어림도 없을 거야. 대신 다른 걸 테스트 해보자."

우웅!

나는 빛으로 만든 정육각형의 방패를 정면에 띄웠다. 다비는 한쪽 눈을 살짝 찌푸리며 말했다.

"실드 오브 라이트. 그날 밤에 황자님이 파이렌을 상대로 사용하신 신성마법이군요."

"이건 물리적인 힘이던 마법이던 전부 다 막아. 리넨! 한 번 더 던져!"

"네! 황자님!"

동시에 다비가 지면을 박차며 옆으로 몸을 피했다. 나는 새롭게 날아오는 창날을 향해 '실드 오브 라이트'의 궤도를 수정했다.

과연 이번에도 빛의 파편은 빛으로 만든 방패를 뚫을 수 있을까?

결과적으론 뚫지 못했다.

하지만 그 이상의 무시무시한 장면이 연출됐다. 방패에 충돌한 창날이 빛의 파편을 흩뿌리는 순간.

팟!

모든 파편이 방패에 튕기며, 온 사방으로 산산 조각난 날카로운 조각을 흩뿌리기 시작했다.

으, 눈부셔.

마치 머리 위에서 커다란 불꽃놀이 가 터진 것 같다.

한번 튕겨난 파편이 얼마나 넓게 쏟아지는지, 방패 뒤에 있던 날 제외하고는 온 사방을 가득 뒤덮었다.

심지어 일부는 30미터 이상 떨어진 곳에 있던 카일에게까지 닿았다. 불시에 기습을 당한 녀석은 바로 주저앉으며 마치 레고라도 밟은 것처럼 몸부림치기 시작했다.

"으, 으극! 으그극! 으아악!"

"황자님! 괜찮으십니까!"

동시에 리넨이 다급히 내 쪽으로 달려왔다. 나는 혀를 내두르며 고개를 끄덕였다.

"난 괜찮아. 근데 방금 어떻게 된 거야?"

"네? 네?"

"쏟아지는 파편이 훨씬 많아졌잖아? 혹시 방금 것만 진심이었어?"

"아, 아닙니다. 모두 똑같이 전력이었습니다!"

리넨은 여전히 공중에 떠 있는 빛의 방패를 올려보며 침을 삼켰다.

"저 빛나는 방패...와 충돌한 순간 평소보다 파편이 더 많이 발생했습니다. 어떻게 된 걸까요?"

"그러게 말입니다."

마침 돌아온 다비도 고개를 끄덕이며 동조했다.

"제 눈에는 기존 보다 두 배, 아니 세 배 이상 많은 파편이 쏟아지는 걸로 보였습니다. 여기에 평소보다 훨씬 넓은 구역까지 퍼진 것 같고 말입니다."

"나도 그렇게 보였어. 덕분에 멀쩡하던 카일이 괜히 피봤네."

잠시 바닥을 뒹굴던 카일은 황급히 몸을 일으키고는 떨떠름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그런데 바로 그 순간.

"...."

눈앞에서 게이트가 열리고, 이계의 병사들이 쏟아져 나오는 환상이 떠올랐다.

두꺼운 갑옷을 입은 수백, 수천의 병사가 밀집한 채 끝없이 쏟아져 나오는 그 모습.

만약 그 놈들의 머리위로 이 홀리 랜스의 폭격을 퍼부어 줄 수만 있다면?

"...리넨?"

"네. 황자님."

"이 홀리 랜스, 쉬지 않고 하루에 몇 개까지 날릴 수 있어?"

"스무 개 까지는 가능합니다. 그 다음 부터는 머리가 어지럽고 눈이 풀려서 시험해 보지 않았습니다."

"증상만 보면 마법과 비슷하네. 마력 다 쓴 마법사가 딱 그렇게 되잖아?"

"그렇습니까? 제가 마법사가 아니라서 거기까지는 잘...."

"결국은 다 집중력 문제라는 거지. 다비?"

"네. 황자님. 테스트에 협력해 주셔서 감사드립니다."

다비가 고개를 숙이며 답했다. 나는 고개를 저으며 마갑을 입은 리넨의 가슴팍을 손등으로 두드렸다.

"아니 그거 말고. 지금 이 녀석 훈련 상황은 어때?"

"기사 훈련 말씀입니까? 순조롭게 진행 중입니다. 이미 최하급을 넘어 하급 마갑에 완벽히 적응했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황자님께 홀리 랜스의 테스트를 부탁 드렸던 겁니다."

"그런 의미? 단순한 위력 테스트 아니었어?"

"둘이 서로 연결됩니다."

"어떻게?"

"전에 말씀드렸듯, 리넨은 타고난 힘과 지구력을 가지고 있습니다."

다비는 리넨의 양 어깨를 손바닥으로 두드렸다.

"비록 기술은 뒤떨어지더라도, 금방 더 높은 등급의 마갑을 작용하게 될 것입니다. 특히 이번에는 고중량 마갑을 염두에 두고 있습니다."

"고중량이라니, 마갑은 원래 등급이 올라갈수록 무거워 지잖아?"

"어떻게든 무게를 줄이려고 경량화 작업을 하는데도 점점 더 무거워지죠. 그런데 이런 경량화 작업을 거치지 않으면, 같은 등급에 비해 훨씬 높은 내구력과 항마력을 가진 마갑을 만들 수 있습니다."

"그래봤자 무슨 소용인데?"

난 눈살을 찌푸리며 되물었다.

"어차피 무거워서 제대로 못 움직일 거 아냐?"

"말씀하신대로 입니다. 보통의 경우라면 의미가 없죠. 기사가 전장에서 기동력을 잃으면 쓸모가 사라지니까요. 하지만 리넨은 다릅니다."

"어떻게?"

"극한의 내구력을 지닌 마갑으로 적의 원거리 무기나 마법을 완전히 무시 한 채, 적진 한복판을 향해 홀리 랜스를 계속 투척하는 겁니다."

"...."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전술적으로 무척 유효한 카드가 될 것 같지 않습니까?"

그것 참 마음에 쏙 드는 이야기가 아닐 수 없다.

방금 떠올렸던 이계의 웨이브를 막는 것과 일맥상통하는 이야기기도하고 말이지. 나는 고개를 끄덕이며 다비에게 말했다.

"괜찮은 것 같네. 그럼 오늘부터 이 녀석 홀리랜스 훈련도 추가하는 게 어때?"

"투창 훈련 말씀이십니까? 이미 리넨은 그쪽으로도 엄청난 재능을 가지고 있습니다. 보셨다 시피 노린 곳으로 백발백중입니다."

"정확도 말고 횟수."

"횟수라 하심은?"

"지금은 스무 발 이상 힘들다잖아? 그걸 더 많이 끌어 올리는 훈련을 했으면 좋겠어."

그리고 잠시 침묵이 찾아왔다. 다비는 리넨과 나를 번갈아 보며 물었다.

"그게 그냥.... 많이 던진다고 늘어나겠습니까?"

"마법과 같은 원리라면 그것만으로도 어느 정도 늘어나. 물론 한계는 있지만."

나는 포켓에 넣어둔 설탕바를 꺼내 리넨에게 건네주며 웃었다.

"자 리넨, 우선 이거 하나 먹어."

"네? 가, 감사합니다!"

리넨은 황공하다는 얼굴로 설탕바를 입안에 넣었다. 나는 다비를 보며 간략한 계획을 설명했다.

"나중에 이거 박스로 챙겨다 줄게. 이 녀석 훈련할 때 한계가 오면 계속 먹여봐."

"사탕을 먹는 게 도움이 됩니까?"

"사탕이 아니라 설탕바야. 암튼 마법으로 소모된 집중력을 빠르게 회복시킬 수 있어. 그러니 계속 먹이면서 홀리 랜스를 최대 몇 개까지 쓸 수 있는지 확인해줘."

"과연.... 알겠습니다."

다비도 납득 한 듯 고개를 끄덕였다. 나는 그 와중에도 설탕바를 먹으며 헤벌쭉 웃고 있는 리넨을 보며 오전의 실패에 대한 아쉬움을 달랬다.

예정에 없던 마법사 군단?

있으면 좋지만 없어도 그만이다.

리넨 한명만 잘 키워 놓아도 나중에 게이트 하나를 혼자 맡길 수 있을 텐데 무슨 상관?

물론 여기에 실드 오브 라이트를 쓸 수 있는 신관 하나 정도는 붙여 놔야 할지도 모르지만.... 그것만으로도 기존에 계획했던 병력 배치에 엄청난 여유가 생긴다!

좋아. 상상만으로도 기분이 확 좋아지는구만. 나는 입맛을 다시고 있는 리넨에게 또 하나의 설탕바를 건네주며 웃었다.

흐흐. 이 귀여운 녀석. 완전 복덩이가 넝쿨 채 굴러왔구만. 생긴 건 물론 털복숭이지만.

"제 생각에도 홀리 랜스의 활용법은 엄청날 것 같습니다."

그때 옆으로 온 카일이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

"정말이지 다들 대단합니다. 저 같은 건 옆에 있는 것만으로도 비교가 되어 괴롭습니다."

"아, 아닙니다! 카일님은 제국 사관학교를 나오셔서 저 같은 것에 비해 아는 것도 많고 머리도 좋으시고...."

리넨이 손을 바둥거리며 급하게 카일을 치켜 세웠다. 그런데 카일 표정이 썩는 걸 보니 그게 더 역효과 같구만.

그런데 그 순간. 방금 까지는 훈련장에 보이지도 않았던 메르데스가 갑자기 나타나서는 고개를 숙였다.

"오셨습니까. 황자님."

"메르데스. 어디 있다가 갑자기 나타난 거야?"

"저쪽 숲에서 혼자 검을 휘두르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단장님, 느린 가속으로 휘두르기 500번. 빠른 가속으로 휘두르기 500번 전부 하고 돌아왔습니다."

"수고했다. 메르데스."

"훈련 도중에 이쪽에서 뭔가가 번쩍거리던데 무슨 일이 있었습니까?"

메르데스가 무표정한 얼굴로 물었다. 다비는 가볍게 혀를 차며 고개를 끄덕였다.

"음. 리넨의 홀리 랜스 테스트를 했지. 꽤나 요란했을 텐데 집중을 풀지 않은 것 같군. 역시 대단해."

"그저 시키신 대로 했을 뿐입니다."

당연하다는 대답에 카일의 표정이 한층 더 어두워졌다. 그러자 리넨이 분위기를 바꿔보려는 듯 메르데스를 보며 호들갑을 떨었다.

"그, 그렇습니다. 진짜 대단한건 제가 아니라 메르데스 아가씨죠. 어제 대련할 때 만 해도, 저는 하급 마갑까지 입었는데 메르데스 아가씨의 상대도 되지 않았습니다."

"저는 루넨브레스 가문의 시녀일 뿐입니다. 아가씨라는 호칭은 부담스럽습니다."

메르데스가 정색하며 고개를 저었다. 그러자 이번엔 다비가 바통을 넘겨받으며 칭찬 릴레이를 이어나갔다.

"메르데스는 이미 어지간한 중급 기사와 실전을 붙여도 될 수준입니다. 최하급 마갑만 입혀 놓아도 말이죠."

"대단하네. 훈련한지 며칠이나 지났다고.... 그런데 디디가 안보이네?"

"디디는 휴식시간입니다."

이번에는 메르데스가 나서서 대답했다.

"디디는 먼저 훈련을 마치고 휴식을 위해 숲으로 들어갔습니다."

"숲에? 왜?"

"그 늑대가 숲에 있기 때문이 아닐까 싶습니다."

"늑대? 아, 르갈 말이지."

"그렇습니다. 지금쯤 그 늑대의 품에 푹 빠져서 털을 쓰다듬고 있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어째 말하는 분위기에서 질투가 느껴지는데? 나는 웃음이 나오려는 걸 참으며 메르데스에게 물었다.

"혹시 르갈이 맘에 들어?"

"그렇게 커다란 동물은 처음 보았습니다. 무척 마음에 듭니다."

"그럼 너도 가서 좀 쓰다듬어 보지?"

"이미 시도했지만 거절당했습니다. 제 몸에서 풍기는 기운이 마음에 들지 않는다고 합니다."

그야 코어를 안 먹은 인간은 모두 마찬가지겠지. 아무래도 코어 하나 남는 걸 이 아가씨한테 줘야 하려나?

가뜩이나 쑥쑥 강해지고 있는데 가속도가 붙을지도 모를 일이고. 하지만 그렇게 되면 여기 카일이 더 소외감을 느낄 것 같은데....

"카일?"

"네. 황자님."

"넌 지금도 잘하고 있어."

난 카일을 돌아보며 한쪽 어깨를 으쓱였다.

"그냥 이 녀석들이 너무 괴물 같은 거야. 그러니 자기 페이스를 지키면서 천천히 실력을 키워. 그래도 충분하니까."

"저도 물론 그렇게 생각합니다. 하지만 사람이란 게 꼭 생각한 대로 마음이 따라 가는 건 아닌 것 같습니다."

하긴 뭐, 나 같아도 이런 놈들 옆에서 훈련하면 없던 자괴감이 생길 것 같구만.

하지만 카일의 진가는 단지 기사의 역량만이 아니다. 당장 지금 부터 이 녀석이 꼭 필요한 일이 있기도 하고.

"그럼 기분 전환 좀 하자. 다비?"

"네. 황자님."

"지금 카일이 꼭 필요한 일이 있어서 말이야. 훈련 도중인건 알겠는데 좀 빌려가도 될까?"

"뜻대로 하십시오. 다만 저녁 훈련 시간 전까지는 돌려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다비는 공손히 고개를 숙였다. 나는 카일을 향해 씩 웃으며 몸을 돌렸다.

"그럼 가자 카일. 너 없으면 진행이 안 될 일이 산더미야."

"네. 황자님."

카일은 기분 좋은 미소로 답했다. 그러다 문득 그런 자신이 한심했는지, 고개를 저으며 쓴웃음을 짓기 시작했다.

이계 황자는 세상을 구하고 싶다 56화

19장 금고털이

응접실에 앉은 카일은 쌓아놓은 서류를 훑으며 한숨을 내쉬었다.

"막상 기사인 주제에.... 이런 쪽으로 밖에 황자님께 도움이 되지 못 하는 게 안타깝습니다."

"자신감을 가져. 당장 내가 이런 걸 맡기고 상담할 사람이 너 밖에 없거든?"

"서류의 대부분이 베리트 영지의 부흥에 관한 내용이군요. 그쪽 관리 분들과 상담을 하시는 게 좋지 않겠습니까?"

"먼저 큰 그림을 그려줘야지. 그 녀석들은 내가 내린 지시를 정확히 따라주기만 하면 돼."

"하지만 이건 그림이 커도 너무 커서...."

서류를 보던 카일이 볼을 부풀리며 길게 한숨을 내쉬었다.

"도화지가 찢어져 버릴 것 같군요. 베리트 부흥 8개년 계획이라니, 근데 왜 하필이면 8년입니까? 기왕이면 딱 10년을 채우는 게 좋지 않겠습니까?"

"그건 안 돼."

왜냐하면 이계의 군대가 쳐들어오기 전에 부흥시킨 영지에서 성과를 거둬야 하거든.

"영지 부흥은 시간 싸움이야. 계속 읽다보면 뒤에 방법이 나오는데.... 맞아, 그러고 보니 구스프 상회는 해외 무역을 다시 시작했지?"

"동대륙, 그러니까 라그란 대륙과의 교역을 말씀하시는 거라면 이제 막 협상이 시작됐습니다."

"협상?"

"몇 년 동안 제대로 된 교역을 못했으니까요. 그동안 바뀐 환율이라던가, 서로의 교역품에 대한 시세의 조율이 필요합니다. 물론 제가 하는 게 아니라 아버지나 상회 분들이 고생하고 계십니다만."

"복잡한 문제는 맡길게. 그보다 보리와 꿀을 동대륙에서 수입해 왔으면 하는데."

"보리라면 기후 때문에 항상 생산량이 부족하죠. 알겠습니다. 그런데 꿀은 어째서입니까? 원하신다면 당장 시중에서도 얼마든지 구입하실 수 있습니다만?"

"좀 많이 필요해서 그래."

"정확히 어느 정도가 필요하십니까?"

"이 저택을 꽉 채울 만큼."

양팔을 펼치며 대답했다. 카일은 잠시 눈을 깜빡이다 되물었다.

"여기 방 하나가 아니라, 이곳 저택 전체를 말씀입니까?"

"응. 루넨브레스 저택을 통째로 채울 만큼."

"그만큼의 꿀을 시중에서 한 번에 쓸어버리면.... 제국의 꿀 시세가 급변하겠군요."

"시세가 문제가 아니라, 그 만큼의 물량이 있기는 해?"

"모으자면 모을 수는 있을 겁니다. 하지만...."

카일은 가만히 고개를 끄덕이며 말을 이었다.

"수입을 동반하는 쪽이 훨씬 수월하겠죠. 알겠습니다. 열흘 뒤에 무역선이 떠나는데 그쪽에 미리 꿀을 받아 오라고 언질을 넣어 놓겠습니다."

"그래. 최대한 많이 담아오라고 해."

"무역선 한 척을 꿀로 꽉 채워야겠군요. 그런데 그만큼의 꿀을 가지고 무엇을 하실 겁니까?"

"곰한테 줄 거야."

"네?"

"꿀을 잔뜩 주고 에이션트 베어의 환심을 사야 해. 그걸 조건으로 코어를 얻어 낼 거야."

"에이션트 울프면 몰라도 에이션트 베어는 처음 듣는군요. 흠.... 아무튼 알겠습니다."

카일은 서류 옆에 놓인 종이에 '대량의 꿀 매입. 곰이 좋아하는 걸로?'라는 메모를 남기며 말했다.

"자세한 내용은 나중에 알아도 되겠죠. 그럼 그런 걸로 넘어가고, 혹시 보리를 수입하는 이유도 알려주시겠습니까?"

"보리는 드워프 때문에 그래. 그 놈들 보리로 만든 술에 환장하거든."

"...네?"

카일은 뜬금없다는 표정으로 되물었다.

이것은 새로운 정령 마법인 '드라이어드'를 얻기 위한 테크트리의 과정이다.

하지만 상세한 설명은 더 큰 의문을 불러 올 수 있으니 당장은 생략하는 게 좋겠지?

"자세한건 나중에 말해줄게. 아무튼 보리도 왕창 부탁해. 내가 전부 구입할 테니까."

"알겠습니다. 그럼 또 다른 무역선 한척은 보리로 꽉 채워 오도록 지시하겠습니다."

"그래. 많으면 많을수록 좋아."

"다만 그전에 해결해야 할 문제가 있습니다."

카일은 헛기침과 함께 손가락으로 테이블을 두드렸다.

"구스프 상회는 모든 무역선을 가득 채워올 만큼의 대금을 치를 여력이 없습니다. 결국 돈이 문제입니다."

"무역선이 다 해서 몇 척인데?"

"대형 상선 세 척에 중형 상선 여섯 척입니다. 그러고 보니 이번에 제국 정부에서 공식적으로 금화 2만개에 달하는 어음을 보내왔습니다. 만약 이걸 전부 투입하면...."

카일은 테이블 가장자리에 놓인 금색 딱지가 붙은 서류를 집어 들었다. 나는 바로 고개를 저으며 반박했다.

"그건 베리트 지역 재건 비용이야. 베리트 부흥시키는데 쓸 돈을 무역에 쏟아 넣으면 안 되지."

"그건 물론 그렇습니다만...."

카일은 손으로 턱을 짚으며 잠시 고민했다.

"어차피 당장에 베리트 지방은 제대로 된 농사가 불가능합니다. 농지가 워낙 황폐화 되었고, 농업용수는 물론 식수까지 절대적으로 부족한 상황 입니다."

"그래서 그 돈으로 재건하겠다는 거잖아?"

"단순히 우물 몇 개 파서 해결될 일이 아닙니다. 베리트엔 제대로 된 강이 없습니다. 그러니 다른 지역과 관개수로를 연결해야 하고, 이것만으로도 공사에 긴 시간이 필요 합니다. 여기에 농지에 뿌릴 비료도 엄청난 양이 필요 할 겁니다. 그만큼 시간도 오래 걸리겠죠."

"그래서 말인데. 아까 말한 보리의 일부는 베리트의 농지에도 한번 심어보려고."

"아니...."

카일은 뜬금없다는 표정으로 눈을 깜빡였다.

"그게 그러니까.... 우선 보리는 제국령에서 키우기 까다로운 작물입니다. 그래서 여태껏 부족분을 외국에서 수입했고, 황자님도 그래서 술 빚을 보리를 수입해 오라고 말씀 하신 게 아닙니까?"

"응. 그래서 베리트의 농지엔 그냥 비료가 아니라 육성의 영약을 뿌릴 거야."

"육성의 영약이니...."

카일은 눈을 질끈 감고 한참을 주저하다 말을 이었다.

"일부 돈 많은 귀족들이 정원을 꾸밀 때 사용하는 그 영약 말씀입니까? 기후나 조건에 상관 없이 식물이라면 뭐든 키울 수 있게 만드는 영약?

"응. 심지어 효과가 지속되는 동안엔 물을 많이 줄 필요도 없어."

"저도 그런 게 있다는 이야기는 들었습니다만.... 그걸 베리트의 농지 전체에 뿌린다는 말씀입니까?"

"물론 원액 그대로 뿌리면 감당이 안 되지. 전부터 시녀장과 상의했는데, 밭에 뿌릴 거면 200배 정도로 희석해서 뿌려도 괜찮을 거라네."

이것이야말로 영지로 받은 베리트 부흥 루트의 핵심이다. 카일 녀석, 스케일에 압도되었는지 뭐라 말을 못 하는구만.

"아.... 아무리 그래도 베리트의 농지 전체에...."

"농지는 물론이고 야산에도 뿌릴 거야. 베리트는 산도 척박해졌으니까."

수년간의 흉작으로 인해, 베리트의 영민들은 먹을 수 있는 거라면 나무껍질 까지 죄다 벗겨 먹은 상황.

덕분에 대부분의 야산이 민둥산이 되 버린 형편이다. 카일은 어처구니없다는 얼굴로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

"베리트의 면적은 이곳 엠퍼로드보다도 넓습니다. 아무리 200배로 희석해도 도저히 감당이 안 될 것 같습니다만?"

"맨 뒤에 빨간 표시를 한 서류에 적어놨어. 대충 비용이 얼마나 드는지."

"그런.... 아, 여기 있군요."

카일은 문제의 서류를 먼저 뽑아내 읽었다.

"육성의 영약을 통한 베리트 지역의 단기 부흥 계획.... 영약에 의한 효과는 1년을 넘기지 않지만, 이를 통해 밑바닥까지 떨어진 영민들의 심리적 좌절을 극적으로 개선하는 효과를.... 잠깐, 이거 설마 황자님께서 직접 작성하신 겁니까?"

"응. 시녀장이랑 같이 상의해서."

"그렇군요. 그런데 이 서류에 산정된 비용만 해도.... 금화 8만개입니다만? 그것도 말씀하셨던 야산이나 중요도가 낮은 농지를 2차로 제외한 비용이?"

"역시 돈이 부족하지?"

"당장 재건비용으로 받은 돈을 전부 사용해도 6만 개나 모자랍니다!"

카일은 테이블 오른편에 놓인 루넨브레스 가문의 재정표를 집어 들고흔들기 시작했다.

"심지어 가문의 여유 자금을 전부 투입해도 안 됩니다! 그동안 마르 오우거가 보내온 은괴를 전부 돈으로 바꾼다 해도 턱도 없습니다!"

"금괴도 몇 개 보내줬잖아?"

"그거 다 해봐야 금화 500개 수준입니다. 혹시 황자님께서 매달 개인적으로 엘스톤 백작에게 보내시는 지원금이 얼마인지 알고 계십니까?"

"그게 얼마였더라?"

"금화 50개입니다. 이것만으로도 매년 600개의 금화가 사라질 형편인데, 여기에 무슨 돈으로 부족한 6만개의 금화를 채우실 생각입니까? 그리고 라그란 대륙에서 수입해올 보리와 꿀의 대금은 어떻게 하고요?"

이 녀석 이마에 힘줄 솟구친 거 봐라. 전문분야인 돈 문제가 나오니 본격적으로 흥분하는구만.

"돈 문제는 내가 알아서 할게. 너는 구스프 상회에 미리 연락해서 재료부터 몰래 확보해."

"재료라니, 육성의 영약 재료 말씀입니까?"

"뭐가 필요한지는 거기 다 적어놨어. 시녀장 말로는 대체할 수 있는 재료도 있다니 최대한 값이 싼 걸로 긁어모아야 해."

"영약의 재료를 다른 걸로 대체가 가능하단 말씀입니까? 어떻게?"

"나야 모르지. 시녀장이 영약의 달인이니 알아서 할 거야."

"시녀장이.... 알겠습니다. 하지만 장소와 인력은 어떻게 하실 겁니까?"

"장소와 인력?"

"금화 8만개 분량의 재료를 쌓아놓을 창고는 물론이고, 영약을 대량으로 제조할 시설도 새로 만들어야 하지 않겠습니까?"

"아, 그건...."

"그리고 영약사는 어떻게 합니까? 시녀장이 아무리 영약의 달인이라 해도, 혼자서 그 많은 영약을 전부 만들 수는 없지 않겠습니까?"

"너 아직 저택 지하에 못 들어가 봤구나?"

"물론입니다. 제가 왜 저택 지하에 들어가겠습니까?"

"루넨브레스는 대대로 영약을 만들어온 가문이야. 지하에 엄청난 크기의 영약 제조시설과 창고가 있어."

"아, 그렇습니까?"

"여기에 시녀 모두가 영약을 제조할 수 있고."

"모두라니, 설마 그 메르데스 양 까지 말입니까?"

"메르데스가 시녀장 다음으로 영약 달인이야. 아무튼 장소와 인력 걱정도 할 필요 없어. 추가로 베리트에 루넨브레스 가문의 시녀 모집 공고도 낼 거고."

"어째서 시녀를.... 아니, 루넨브레스 가문의 시녀는 모두가 영약사라 하셨으니, 이번에도 영약사 지망생을 모집하시려는 모양이군요."

"시녀장 말로는 전에도 베리트 지방에서 탈출하는 아가씨들을 몰래 데려왔다고 하더라고. 이젠 내 영지가 됐으니 대놓고 모집해도 되겠지."

당장에 농사도 안 되고, 마땅한 일거리도 없어 배급에 의존하는 베리트 영민들에게 이만한 일자리도 또 없을 것이다.

카일은 상황을 바로 이해했는지 주먹을 깨물며 고개를 끄덕였다.

"과연.... 그렇다면 추가로 저희 상회에 필요한 일꾼이나 선원을 베리트 지방에서 모집하는 것도 괜찮겠군요."

"그렇게 해주면 고맙지. 다들 고향에 돈 부칠 생각에 성실하게 일할 거야."

당장 저택의 시녀들 중 상당수가 받는 급료의 대부분을 고향인 베리트에 몰래 부치는 형편이니까. 카일은 갑자기 새로운 사업계획이 떠올랐는지, 눈을 위로 치켜뜨고는 뭔가를 중얼거리기 시작했다.

"베리트의 영민들은 원래 자신의 영지를 떠날 수 없었는데.... 상황이 바뀌었으니 이젠 저임금의 노동력을 확보해서.... 아니, 그렇다고 너무 등쳐먹지 않는 수준에서 적당히 타협만 해도...."

"뭐 해? 갑자기 뭐 재밌는 거라도 생각났어?"

"네, 아니, 아닙니다."

카일은 화들짝 놀라며 고개를 저었다.

"당장은 크게 중요한 일은 아닙니다. 그보다 제일 중요한 돈 문제는 어떻게 하실 겁니까? 혹시 황태자 전하께 자금을 요청하실 겁니까?"

"형님한테? 아니, 그건 아니야."

물론 황태자가 죽은 첫째 황비의 유산 대부분을 상속받았기 때문에 엄청난 부자긴 하다.

여기에 내가 목숨을 구해줬으니 부탁만 하면 간이고 쓸개고 전부 내어줄 테고.

하지만 이번에 필요한 자금은 다른 곳에서 '강탈'할 계획이다. 나는 사악한 미소와 함께, 영문을 모르겠다는 카일을 향해 새로운 자금 조달 계획을 차근차근 설명했다.

이계 황자는 세상을 구하고 싶다 57화

19장 금고털이

"...준비는 끝났나?"

다그치는 탈리스만 백작의 눈에 분노가 번득였다. 조카인 란텔 남작은 의미심장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모든 준비가 끝났습니다. 숙부님."

"어지간한 병력으로는 그 망할 꼬맹이를 못 죽여. 심지어 녀석은 이제 황제를 되살린 제국의 영웅이다."

빠득거리며 이를 가는 백작의 몸은 과거에 비해 두 배쯤 부풀어 있었다.

이는 최근 며칠 동안 잠도 제대로 안 자고 산해진미를 폭식한 결과.

하지만 제아무리 터질 것처럼 배가 부르다 해도, 지하 감옥에서 고통 받던 그 순간을 떠올리면 밥과 술이 끝도 없이 넘어가고 또 넘어갔다.

"그러니 압도적인 힘과 물량으로 순식간에 쓸어버려야 해. 시간이 끌리면 황궁에서 기사단이 출동할 테니.... 그 전에 시체는 물론이고 녀석의 저택까지 완전 소각해서 증거를 인멸한다."

"물론입니다, 숙부님. 먼저 나이트 길드에 계약금으로만 무려 금화 4천 개를 지급했습니다."

란텔 남작은 손가락 두 개를 들어 올리며 회심의 미소를 지었다.

"말 그대로 최고의 용병기사를 스무 명이나 선별했습니다. 저번 베리트 성의 전투처럼 일을 망치는 일은 결코 없을 겁니다."

"그렇게 말해도 믿을 수가 있어야지. 기사의 등급이 정확히 어떻게 되지?"

"나이트 커맨더가 셋, 그리고 나이트 익스퍼트가 열일곱입니다."

"흠.... 나이트 마스터는 구할 수 없었나?"

"숙부님. 제국 전체를 통틀어도 나이트 마스터는 세 명뿐입니다. 심지어 그중 한 명은 최근에 죽어버렸고 말이지요."

"나도 알아! 그런데 그 남은 두 놈 중 하나가 그 쳐죽일 클로드 녀석의 옆에 바짝 붙어 있지 않나!"

백작은 허공에 주먹을 휘두르며 소리쳤다.

"망할 놈의 다비! 상대가 나이트 마스터면 아래 등급 기사 수십 명을 동원해도 안심할 수 없어!"

"물론입니다. 그래서 제가 인맥을 좀 동원했습니다."

"인맥?"

"아시다시피 다비의 원 소속은 백기사단입니다. 그리고 백기사단은 현재 북부에서 이종족연합과 대치 중이죠."

"그런데?"

"백기사단에 연통을 넣었습니다. 다비를 잠시 불러오도록 말이죠. 물론 기사단에서는 제명되었지만, 적어도 후임자에게 인수인계는 해주고 나가는 게 도리가 아니겠습니까?"

"오.... 그거 명분이 좋군."

일그러졌던 백작의 입가에 미소가 번졌다. 란텔 남작은 마치 파리처럼 양손을 비비며 말했다.

"그러니 걱정 마십시오. 다비가 북부로 돌아갔을 때를 노려 거사를 벌이면 됩니다. 하지만 설사 행여 일이 잘못되더라도 아무 문제가 없습니다."

"다비가 여기 남아도 거사를 성공시킬 수 있다는 소리냐?"

"물론입니다. 고용한 자들은 기사뿐이 아니니까요. 마법사 중에서도 막강한 실력자를 끌어들였습니다. 대신 이쪽에도 계약금으로 금화 6천 개를 사용했지만 말이죠."

"6천 개? 어째서 기사고용보다 돈이 더 들었지?"

"고용한 인물이 톨라리입니다."

"톨라리?"

순간 백작의 얼굴에 당황이 스쳤다.

"톨라리라면, 설마 아크 위저드 톨라리 말이냐? 바람의 마도사라 불리는?"

"물론입니다. 그런 특이한 이름을 가진 마법사가 또 있겠습니까?"

톨라리는 젊은 나이에 아크 위저드에 오른 천재 마법사이자, 동시에 괴팍한 성격으로 사람을 기피하는 걸로 유명한 기인이다.

"...믿을 수가 없군."

백작은 놀랐다는 얼굴로 천천히 고개를 저었다.

"그런 여자와 잘도 계약했군. 소문에는 어디에도 소속되지 않고, 누구의 명령도 듣지 않는 괴짜라고 하던데."

"저도 그렇게 알고 있었습니다만, 바로 어제 겨우 힘들게 연락이 닿았습니다. 어째서인지 클로드 황자의 암살이야기를 꺼내니 눈을 반짝이며 승낙하더군요."

"어째서? 그 꼬맹이에 뭔가 원한이라도 있나?"

"아무래도 최근에 클로드가 벌인 짓이 원인이 아닌가 싶습니다. 사흘 전에 매직 길드를 찾아가서 되도 안 되는 짓을 벌였다고 하더군요. 뭐더라, 얼음을 몸에 직접 대면 마법 수련생들을 각성시킬 수 있다고 하면서 길드를 발칵 뒤집어 놓았다고 합니다."

"그 무슨 되도 않는 이야기를... 아니, 크흐흐."

백작은 썩는 웃음과 함께 고개를 끄덕였다.

"그 꼬맹이는 예전부터 정신병자로 유명했지. 날 지하 감옥에 쳐넣고 굶긴 것도 모자라서, 다시 그 미친 짓이 부활한 건가?"

"아무래도 그런 것 같습니다. 물론 톨라리는 길드를 박차고 나간 기인입니다만, 그렇다고 고향 같은 매직 길드를 들쑤신 녀석의 횡포를 그냥 넘길 수 없던 게 아니겠습니까?"

"그거 아주 잘됐어. 아크 위저드라 흐흐. 마음이 아주 든든하구만."

"여기에 규모를 채워줄 일반 용병기사 200기에, 추가로 클러스터 암살단에 요청한 정예요원 50명이 추가되었습니다."

클러스터 암살단은 제국 서북쪽 국경에서 활동하는 조직으로, 거창한 이름과 달리 그 실체는 행상이나 마을을 터는 도적단에 불과했다.

하지만 이들이 보유한 무력이 어지간한 소규모 기사단보다 강력하다는 것은 사실이었다. 백작은 묘한 표정으로 눈을 가늘게 뜨며 물었다.

"그런 놈들까지 끌어들였나? 여러모로 악명이 자자하던데."

"지금은 찬물 더운물 가릴 때가 아니지 않습니까? 실력도 실력이지만 잔인하기로 유명한 녀석들이라 마음에 드실 겁니다."

"잔인하다라. 그건 아주 마음에 드는군."

"그런데 숙부님, 이들 모두를 끌어들이는데 사용한 계약금이 총 금화 1만 2천 개입니다."

"그런데?"

"여기에 거사가 성공하면 지급할 대금이 계약금의 3배입니다. 3만 6천 개의 금화를 추가로 지불해야 하죠. 당장 계약금이야 저희 남작가의 재력을 총동원해서 지불했습니다만...."

"하, 지금 그런 걸 걱정하고 있었나?"

백작은 코웃음과 함께 손사래를 쳤다.

"금화 1만2천 개? 그까짓 거 당장 내가 갚아주지. 힘든 일 하느라 수고했으니 수고비도 왕창 얹어서."

"감사합니다. 숙부님."

"그런데 고작 그 정도로 재력을 총동원했다니, 남작가의 재정 상황이 요즘 좋지 않나 보군."

"실은 자금줄인 상회의 수익이 최근 들어 급감하고 있습니다. 남쪽 촌놈들이 다시 힘을 키워가면서 움직이는 모양이더군요."

"남쪽이라면 요튼 말인가? 흠, 그렇지 않아도 거기 놈들이 요즘 설치고 다닌다는 이야기를 들었지. 배경에 그 꼬맹이가 있다는 소문도 있고."

"거사가 끝나면 한번 제대로 손을 봐줘야 할 것 같습니다."

"물론이지. 자, 그럼 따라와라."

백작은 앞장서서 방을 빠져나왔다. 그리고는 나선형 계단을 타고 저택의 지하를 향해 걸음을 옮기기 시작했다.

"끙, 전에 부러진 다리가 쑤시는군. 집이 넓은 것도 이럴 땐 귀찮은 일이야."

"혹시 지하 금고로 내려가시는 겁니까?"

"돈을 갚아준다고 하지 않았나?"

백작은 고개를 돌려 란텔을 바라보며 미소를 지었다.

"기왕 말이 나온 김에, 수고해 준 우리 조카님에게 탈리스만 가문의 진정한 힘을 보여주는 것도 의미가 있을 테고."

"영광입니다, 숙부님. 본가의 금고라니.... 이야기만 들었지 실제로 보는 건 처음입니다."

그렇게 한참을 내려간 두 사람의 앞에, 횃불이 밝혀진 컴컴한 통로가 모습을 드러냈다.

척!

통로를 따라 늘어선 여섯 명의 기사가 검을 치켜들며 경례를 올렸다. 백작은 손사래를 치며 기사들 사이를 천천히 빠져나갔다.

"저택을 지키는 녀석들 중 쓸 만한 놈들이 많은데, 이번 거사에 동원할 수 없다는 게 좀 아쉽군."

"이번 일에는 가문의 사병을 동원할 수 없으니까요. 오, 저것이 바로...."

란텔은 눈앞에 보이는 거대한 철문에 압도당했다. 백작은 주먹으로 철문을 두드리며 환한 미소를 지었다.

"이게 바로 탈리스만의 지하 금고다. 우리 가문이 지난 수백 년간 쌓아온 재산이 이곳에 잠들어 있지."

"엄청난 양이라는 이야기만 들었습니다. 이걸 지키기 위해 본가 저택은 항상 수십 명의 마법사와 강력한 기사들이 경호를 서고 있다 하더군요."

"거기에 이 지하금고 자체가 철벽의 방호를 자랑하지. 무려 드워프가 직접 제작한 특수합금으로 만든 철문이다."

"드워프 말씀입니까? 하지만 그들은 제국과 적대하는...."

"200년 전에는 사이가 나쁘지 않았던 모양이더군. 그리고 이 가주의 반지가 없으면 절대 열리지 않지."

백작은 오른손 중지에 끼고 있던 투박한 생김새의 반지를 치켜들었다.

그리고 철문의 한가운데 있는 작은 홈에 반지를 끼워 맞춘 순간.

쿠궁!

거대한 철문이 요란한 굉음을 내며 천천히 열리기 시작했다.

"계약금이 아니라 나중에 지불할 성공 보수까지 몽땅 넘겨주마. 합쳐서 금화 4만 8천 개인가? 수고비까지 5만 개를 채워주도록 하지."

"감사합니다. 숙부님. 하지만 금화 5만 개라니, 같이 온 호위 기사 네 명을 전부 동원해도 옮기는 게 쉽지 않을 것 같습니다."

"걱정 마라. 맞춤 제작한 마차가 있으니까. 인부들을 시켜서 마차에 돈을 넣어 둘 테니 함께 돌아가면 그만이다."

그 순간에도 거대한 철문은 초당 1cm 정도의 속도로 열리고 있었다. 란텔은 한시라도 금고 안을 보고 싶은지 몸을 위아래로 들썩이며 말했다.

"금화 전용 수송 마차라니, 과연 본가는 달라도 다르군요. 그런데 금화 5만 개를 한 번에 내주실 수 있습니까? 대체 이 금고 안에 얼마나 많은 금화가 들어 있는 겁니까?"

"정확한 건 세보지 않아서 몰라. 대충 10만 개쯤 있지 않을까?"

"오오...."

"그 밖에도 급할 때 쓰려고 쟁여둔 은화도 5만 개쯤 있지. 사업을 하다 보면 거스름돈이 필요할 때도 있으니까 말이야."

"거스름돈이라니, 과연 역시 숙부님이십니다."

"여기에 따로 보관해놓은 금괴와 몇 가지 보물을 더하면 제국 1년 예산의 2할이 넘는 돈이 이곳에.... 응?"

그 순간, 백작의 눈이 튀어나올 것처럼 휘둥그레졌다.

겨우 열린 금고 안은 깨끗하게 비어 있었다.

정확히는 은화를 넣어둔 다섯 개의 거대한 궤짝만 남아 있었는데, 그것을 제외한 다른 모든 것은 완벽하게 텅 빈 상태였다.

10만 개에 달하는 금화가 쌓여있던 공간도.

금괴와 각종 보석들을 보관하던 금속 진열대도.

여기에 돈으로는 값을 따질 수 없는 특별한 마갑과 무기까지.

"으! 아니! 전부 다 어디 갔어! 으아아아악!"

백작은 비명을 지르며 뒤에 있는 경비 기사들을 향해 소리쳤다.

"네놈들은 뭐 하고 있나! 빨리 경호대를 불러와! 그리고 횃불을! 금고 안으로 횃불을 가져와! 대체 어떻게.... 윽! 대체 이 끔찍한 냄새는 뭐지? 왜 금고 속에서 하수도 시궁창 같은 악취가 나지? 대체 뭐가 썩고 있는 거야!"

* * *

커다란 늑대가 정원에 쌓아둔 고기를 뜯으며 툴툴거렸다.

"너무하는군. 내가 퍼 나른 돈이 대체 얼마인데, 고작 요만큼의 고기로 때울 생각이냐?"

"그게 특별한 거라 양이 좀 적어. 어때? 옛날 고향 맛이 좀 나?"

르갈에겐 요만큼일지도 모르지만, 당장 내 키보다 높게 쌓인 고기의 정체는 다름 아닌 '영원의 숲에서 사냥한 사슴 고기'였다.

고기의 신선도를 유지하며 저택까지 공수하느라 쓴 돈만 자그마치 금화 50개.

물론 탈리스만 백작의 저택에서 쓸어온 돈을 생각하면 이 정도야 푼 돈이라 할 수 있겠지?

"...그럭저럭."

르갈은 한참 동안 고기를 흡입하다 콧김을 짧게 뿜었다.

"하지만 완벽하진 않다. 이것들은 대부분 외곽 녀석들의 고기다."

"외곽?"

"숲의 외곽. 영원의 숲은 내곽과 외곽으로 나뉜다. 외곽에 사는 사슴들은 내곽에 비해 맛이 떨어져."

진짜? 그게 구분이 돼?

"이거 미식가 납셨구만. 근데 숲의 내곽은 너희 에이션트 울프의 구역 아냐?"

"그렇지."

"그럼 사냥꾼들이 미쳤다고 거기까지 들어가겠냐? 이거라도 잡아온 걸 다행으로 여겨."

"그래. 나쁘진 않다."

르갈은 고개를 끄덕이며 식사를 재개했다. 나는 200kg도 넘는 고기가 순식간에 사라지는 걸 보며 탄식했다.

하지만 말했다시피, 이 정도는 아무 것도 아니다.

탈리스만 백작가의 지하 금고 털기 루트.

보통은 굶어 죽을 뻔한 탈리스만 백작이 보낸 암살자를(규모는 거의 군대 수준이다)깔끔하게 막아낸 다음, 그것을 빌미로 녀석을 반역자로 만드는 게 수순이다.

그렇게 합법적으로 저택에 쳐들어가 싹 잡아 족친 다음, 지하금고에 잠들어 있던 막대한 자금을 회수한다.

여기서 회수한 돈의 70%는 제국 국고로 넘어가는데, 그래도 나머지 30%는 포상금으로 지급받는다는 말씀.

평소라면 이 30%를 알뜰살뜰 활용해 베리트 영지를 부흥시켰을 테지만....

이번엔 경우가 좀 달라졌다.

우선 베리트 영지를 너무 빨리 받아 버렸다!

남에 거라면 내버려 둬도 상관없다. 하지만 일단 내 것이 된 이상 제대로 관리해야지.

덕분에 탈리스만 백작이 저택으로 쳐들어오기만을 한 없이 기다릴 여유가 사라졌다. 당장 일분일초가 시급한 상황이니까.

여기에 엠퍼로드의 지하 사정을 완벽하게 꿰고 있는 에이션트 울프, 바로 르갈의 존재가 빛을 발했다.